Part. 4 실패작
남들은 날씨가 더워지면 담배 생각이 떨어진다는데, 강한은 반대였다. 오히려 이렇게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흡연 욕구가 생겼다. 평소 기피하던 근무 중 흡연까지 감행할 정도였다.
“어, 이게 누구야. 점장 아니야!”
미풍이 은은하게 맴도는 골목에 서서 이제 막 불을 붙인 참이었다. 멀리서 긴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다가온 여자가 팔뚝을 툭 쳤다. 덕분에 연기를 잘못 삼킨 한이 잔기침을 뱉어 냈다.
“사장님, 이렇게 은근슬쩍 점장 떠넘기지 마세요.”
강한은 얼얼한 목을 매만지며 한 걸음 물러나 섰다. 그가 내어 준 틈으로 쏙 들어온 여자는 씨익 웃었다.
“불 좀 빌려용.”
애교 있게 웃은 그녀가 한의 셔츠 주머니에서 멋대로 라이터를 뽑아 갔다. 가슴에 달린 아주 작은 틈이었다.
“오, 갑바. 앗! 성희롱이네. 미안!”
담배를 빨아 당기며, 여자는 길고 예쁜 손가락 하나를 허공에 내보였다. 쫙 펴진 손바닥이 두어 번 앞뒤로 흔들렸다. 작은 손가락 인간이 까닥까닥 인사하는 모양이었다. ‘쏘리, 쏘리.’ 덧붙여 놓고도 라이터를 돌려주는 손이 또 셔츠 주머니를 향했다. 아주 살짝 비어 있는 틈을 라이터 귀퉁이로 힘주어 파고드는 감각이 아까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강한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아, 사장님 좀…….’ 하고 앓았다.
“아이, 미안해. 그나저나 점장을 내가 떠넘겨? 떠넘기다니, 난 정당하게 페이도 주고 협의도 했다?”
“제가 뭘 안다고 이렇게 막 주세요. 아니, 사장님이 저를 얼마나 안다고 이렇게까지 믿고…….”
“지금 선 긋는 거야? 나 서운해, 강한 씨?”
여자는 보기에 아주 단정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하얀 피부와 무채색 옷차림, 높게 하나로 올려 묶은 흑발이 딱 깔끔하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능글맞게 대꾸하며 담배를 뻑뻑 빨아내는 모습은 강한에게 이병 시절을 회상하게 만들었다.
‘그때 담배 가르쳐 줬던 병장님이 딱 저랬는데…….’
애먼 생각을 하얀 연기로 뱉어 낸 한은 꽁초를 내던졌다.
“아무튼 저 부담스러워요. 재고 부탁드려요.”
부탁보다는 애원에 가까운 모양으로 중얼거리고 먼저 골목을 나서려는데, 여자가 금세 따라붙었다.
“재고? 왜, 뭐가 재고가 없어?”
이럴 때는 병장보다도 더하다. 강한은 대놓고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좀, 진짜. 담배 다 폈어요?”
“응.”
“사장님 세 모금이면 한 대 펴요?”
“으하학, 아, 나 강한 너무 웃겨서 좋아하잖아.”
카페로 다시 돌아가는 그 짧은 길 사이에 강한은 팔뚝을 7대나 얻어맞았다. 아릿한 살결을 쓸어내리며 한이 문을 열었다. 문에 적힌 라는 글자가 미는 힘을 따라 카페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카페는 외부에서부터 내부까지 온통 새하얀 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조명이 사방을 따뜻한 온도로 비추고 있어 부담스러울 만큼은 아니었다. 위치도 주택과 대로변 그 사이, 너무 번화하지는 않되 그다지 숨어 있지도 않은 곳. 가격대와 인테리어 역시 딱 적당한 카페였다. 적당하다는 말이 무척 주관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강한에게 이곳은 언제나 그런 서술을 가졌다.
“치언이는 어디 갔대?”
사장은 비어 있는 카운터를 턱짓으로 가리키고 빈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게요…….”
돌이켜 보면 처음 사장 공은수를 만났던 날도 이렇게 카운터가 비어 있었다. 그때 강한은 무척이나 순진해서 아무 말도 없이 계산대 앞에 서 있기만 했다. 꼬박 15분 내내 멀뚱멀뚱. 그날이 공은수에게도 무척 강렬했는지, 그녀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늘 이야기를 꺼냈다.
“야, 너 나 처음 만난 날 기억하냐? 그때도 카운터 비어 있다고 너 ‘계세요?’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서 한 시간….”
“한 시간은 무슨. 왜 점점 늘어나요.”
이런 점마저 너무나 김 병장님 같다고. 강한이 속으로 흉을 보던 때, 카운터 너머 창고 문이 벌컥 열렸다.
“점, 장님…….”
열린 문 너머에는 얼굴이 새빨개진 치언이 플라스틱 상자를 들고 있었다. 우유가 1리터짜리로 스무 개 들어가 있는 박스였다. 그가 곧 놓칠 것처럼 끙끙거리는 탓에 강한은 점장 호칭을 한사코 고사하던 것도 잊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치언 혼자 들고 있을 때에는 쌀 포대보다 무거워 보이던 상자가 가뿐히 옮겨졌다.
“점장님밖에 없어요, 진짜.”
치언은 한을 구세주 보듯 하며 울먹거렸다. 고작 우유 박스 하나로 들을 만한 인사는 아니었다. 강한이 바람 빠지듯 웃고, 뺏어 온 우유 박스를 바닥에 다시 내려놓았다. 내친김에 그 위로 하나 더 얹었다. 두 박스를 겹쳐 들어 올리자 치언은 아예 박수를 쳤다.
“아, 점장님. 닉값 오져요.”
“니 깝? 나쁜 말 아니냐?”
요즘 애들 언어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깝’이라면 강한도 써 본 적 있는 말이다. 음료 쇼케이스를 열어젖히며 묻자 치언이 끅끅 웃었다.
“아니……. 으흑, 닉네임 값, 그니까, 이름값 하신다고요.”
눈물 몇 방울까지 닦아 내며 대답한 치언은 간신히 포스 앞에 섰다. 이름값이라……. 우유를 두 통씩 집어넣던 강한이 멈칫했다.
항상 제 이름이 옛날 사람들의 호 같다며 웃던 상수가 생각났다. 그런 때에 곁에는 항상 유일이 있었다. ‘완전 간지예요, 형님 이름.’ 놀림인지 찬양인지 모를 말이 나오면, 유일은 늘 가만히 웃었다. 언제인가는 ‘나도 처음부터 한이랑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어.’ 하며 짐짓 대단한 고백을 하듯 속삭이기도 했다.
어떤 기억은 가끔 습격 같았다. 간직한 줄도 몰랐던 것이 부지불식간에 심장을 쾅 때리고 부서지는 그 감각을 강한은 좋아하지 않았다.
미리 잘 접어 둔 기억은 먼저 펼치지만 않으면 되었다. 혹시 어쩌다 열려 버리는 날에도 너무 많이 접어 본 것들이라 괜찮았다. 이제는 접힌 방향을 따라 길이 들어서, 쉽게 다시 접고 감출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불시에 떠오른 기억은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부서졌다. 꼭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점장님, 우리 회식 때 뭐 먹어요?”
치언이 그렇게 물었지만, 강한은 쇼케이스의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수없이 많은 기억 파편을 주워섬기는 중이었다.
“점장님?”
멀찍이 서 있던 치언은 이제 두어 발자국 다가가 섰다. 그래도 강한은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 안에서 이상한 생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굳어 있었다. 이제 조금 무서워진 치언은 저만 한 쇼케이스와 눈싸움 중인 점장을 톡 건드렸다.
“뭐 있어요……?”
“아…. 아니.”
당연하게도 쇼케이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냉기뿐이었다. 뒤늦게 현실로 돌아온 강한이 남은 우유를 더 집어넣었다. 그 뒤에서 고개를 갸웃 틀던 치언은 저 멀리 앉은 사장에게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사장의 눈동자도 ‘쟤 왜 저래?’ 하고 묻는 모양새라.
“닭갈비 먹으러 가면 안 돼요? 현경 누나가 좋아한댔는데.”
생각에서 빠져나온 이후 우유를 더 전투적으로 쿵쿵 집어넣는 강한의 뒤에서, 치언은 우물쭈물 물었다. 부끄러운 기색이 잔뜩 묻은 목소리에 사장이 깔깔 웃는다. ‘야, 너 현경이랑 뭐 있어?’ 묻는데 치언이 발끈하며 ‘아뇨?’ 하고 뛰었다. 뭐 있다는 말을 반대로 한다. 사장 공은수가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굴렀다.
“닭갈비……. 그래.”
하지만 음식 이름 하나에 또 습격을 맞은 강한은 웃을 수 없었다. 입가가 바싹 굳고, 싸한 감각이 올랐다. 어쩐지 오늘 유독……. 그 이름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 너무 많았다.
회식의 명분은 ‘2호점이 첫 달 영업을 무사히 마친 기념’이었다.
2호점은 여러모로 보편적 특성이 하나도 없는 가게였다. 일단 공은수가 피도 안 섞인 한에게 대뜸 1호점을 넘겨 버리더니 정작 사장인 자신은 2호점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가장 그랬고, 1호점보다도 훨씬 더 구석진 주택가에 숨어들었다는 점도 그랬다. 게다가 분점이라는 이득이 없게끔 디자인도 딴판이었다. 하얗고 심플한 1호점과는 달리, 2호점은 주거지 구석에 숨은 보람 없이 화려했다. 주택을 개조해 만든 2층 건물이 파스텔 무지개색으로 휘황찬란했다. 그런데도 첫 달 매출이 1호점과 비슷한 수준이니, 확실히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제법 거창한 명목이었으나 아쉽게도 자리는 조촐했다. 메뉴도 고작 닭갈비에 인원까지 네 명. 새로 뽑은 직원들은 쉬는 날에 불러내기가 난감했고, 나머지는 시험 기간을 이유로 불참했다. 결국 참여한 사람들은 회식 운운하지 않아도 쉽게 볼 수 있는 얼굴뿐이었다.
“아, 싸장님. 왜 이렇게 핸드폰만 보세요!”
치언은 현경 앞에만 있으면 텐션이 유독 올랐다. 한 옥타브가량 높아진 목소리에 깜짝 놀란 은수가 인상을 찌푸린다.
“야, 야. 조용히 해. 나 지금 바빠.”
“아, 사장님! 티켓팅 하시는구나?”
“어어. 뮤지컬.”
액정만 힐끗 본 현경은 어떻게 알았는지 씨익 웃었다. 정작 대화 주제에 불을 지펴 놓은 치언은 그 웃음에 정신이 홀려 조용해진다. 강한은 불길하게 흐르는 기류를 막아 보려, 답지 않은 농담을 건넸다.
“회식 때문에 일찍 마감하는 줄 알았는데, 목적 따로 있으셨네요.”
서둘러 빈 잔에 술을 채우자 은수는 보지도 않고 소주를 털어 넣었다. 크윽, 비명처럼 내지르더니 발을 동동 구른다.
“나 첫공 꼭 보고 싶단 말이야. 진짜, 제발!”
“아아. 그 누구지? 사장님이 좋아하는 그, 그 배우 보러 가시는 거죠?”
강한의 바람과는 달리 대화 주제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이쯤 되니 반쯤 포기한 그는 은수처럼 소주를 꿀꺽 마셨다. 그러고서 연달아 한 번 더 채워 마셔도,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현경의 관심은 ‘그 배우’에 있었고 치언의 관심은 현경에게 있었으며 공은수의 관심은…….
“아, 한… 뭐더라, 한유일?”
강한을 몹시 괴롭게 만드는 이름에 있었다.
‘그래, 오늘은 이럴 것 같았다.’
보통 한이 하루에 마주치는 ‘한유일’은 최대 두어 번에 그쳤다. 드라마나 영화 홍보 포스터 속에 자그마하게 보이는 얼굴이나, 혹은 뮤지컬 분장으로 알아보기도 어려운 수준의 영상 홍보물. 그것도 아니면 정말 가끔 동창 상수의 프로필 사진 속에서 꽃을 들고 있는 모습쯤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스코어가 자그마치 ‘7’이었다. 7이라니. 살면서 이런 스코어는 처음이다. 아침 일찍부터 어쩐지 불길하더라니. 이를 꽉 깨문 강한은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술잔만 기울였다. 그냥 마시고 죽자 싶었다.
“근데 진짜 모솔이래요? 구라겠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치언이 꺼내 놓은 주제까지 속을 뒤집어 놓았다. 담배 생각이 절실해진 한은 도망이라도 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취기 가득 실린 걸음에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난다. 테이블에서 일순 ‘히익!’ 하는 비명이 터졌다.
“아, 미안.”
아무리 그래도 숨넘어가는 소리까지 낼 일인가? 강한은 우습게 생각하면서도 일단 사과를 뱉었다. 가타부타 덧붙이기보다는 담배를 먼저 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사색이 된 직원들의 얼굴은 그를 향해 있지 않았다. 한은 묘하게 틀어진 여러 쌍의 눈을 따라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의 커다란 몸이 비로소 완전히 돌아선 순간.
“힉.”
강한은 자신이 비웃었던 것보다 훨씬 더 우스꽝스러운 숨을 삼키고 말았다.
“오랜만이다, 한아.”
눈앞에 한유일이 있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여덟 번째 마주치는, 그 한유일이.
사고처럼 일어난 대면이었다. 차에 치이던 순간의 그 기묘한 감각이 강한을 칭칭 휘둘러 감았다. 그러나 눈 한 번 깜빡일 수 없이 굳은 그와는 달리, 인파 속 반응은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 유일이 뱉은 말 끝자락이 비명 소리 한가운데로 먹혀들었다.
“아, 깜짝이야! 현경 누나! 완전 놀랐잖아요.”
치언이 뜨악하며 덩달아 소리를 치는 아주 짧은 틈이었다. 그사이 유일은 말끔히 뒤를 돌았다. ‘아, 여긴 없는데요.’ 하고 아쉽게 웃는 얼굴이 제 뒤로 바로 따라 들어온 카메라에 향했다. 촬영 중인 모양이었다.
“아, 대박이다. 별로 팬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 어머, 사장님. 빨리 따라가서 사인이라도 받으세요!”
“야, 야, 밀지 마! 비켜! 조용히 해. 표 잡고 있잖아!”
점장 은수가 오히려 목소리를 낮추고 숨었다.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떠미는 현경과 이 난리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치언의 불평이 온통 시끄러웠다. 가게 전체가 조금 전의 소동으로 흥분한 와중, 홀로 우뚝 서 있는 강한만이 고요했다.
재회를 상상해 본 적 있었다.
손수 끊어 놓은 연을 염치도 없이 붙일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언젠가, 어쩌다가 마주치는 날이 온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본 적 있었다. 그럴 때마다 강한은 유일의 표정을 그릴 수 없었다. 그가 어떤 반응을 할지. 자신을 알아볼 수는 있을지. 화를 낼지 아니면 무시할지.
도저히 상상조차 되지 않아 가정은 늘 한정적이었다. 그저 강한은 어떻게 하면 천만 원이 들어 있는 체크 카드를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했고, 어색한 대사를 준비했었다.
‘오랜만이다.’
몇 년간 벼르고 벼르던 대사를 빼앗겼다. 그것도 마이크를 의식한 듯, 묵음에 가깝도록 작고 희미한 목소리였다.
“점장님도 한유일 실물 보고 입덕하셨나 봐.”
“근데 누나. 한유일이 점장님한테 말 걸지 않았어요? 오랜만 어쩌고 한 것 같은데?”
귓가를 먹먹하게 맴돌던 소음이 유일의 이름을 달고서야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동상처럼 굳어 있던 한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아니, 껍데기만 깨어난 척 굴었다.
“이 가게가 오랜만이란 거겠지. 내가 저 사람을 어떻게 아냐. 알았으면 어? 알았으면, 점장님, 아니, 사장님이 팬인데, 어, 내가 만나게 해 주고 그랬겠지.”
“그건 그런데……. 점장님 좀 취했나 봐요. 말이 많아지셨네.”
“아, 아무튼.”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은 후에는 일어난 보람 없이 털썩 앉았다. ‘담배 안 하세요?’ 묻는 현경에게는 손을 내젓고, 술잔을 가득 채운다. 지금 나갔다가 혹여 앞에서 또 마주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이따 나랑 같이 나가자. 지금은 나가면 배우님 아직 있을지 몰라.”
“예? 그, 어, 그 사람 있는 게 저랑 뭐가요?”
“……뭔 소리야. 내가 싫다고. 나 회전문 돌아서 배우님이 내 얼굴 다 안단 말이야. 사석에서는 마주치기 싫어! 짜증 나! 티켓팅도 망했고!”
은수는 여전히 도망자처럼 벽에 바싹 붙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분노와 설움이 가득한 채 속사포로 쏟아지는 말들이 강한에게는 잘 해석되지 않았지만, 그저 알겠노라 답하고 말았다. 덕분에 흡연을 미룬 핑계가 제대로 생겼으니 다행이었다. 이대로 저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자리를 지키다 돌아가면 그걸로 끝이다. 그러면 평범하고 희한한 회식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오랜만이다, 한아.
그런데 빼앗긴 대사가 연신 사고를 뒤집고 휘저었다.
소리보다 입 모양으로 더 기억될 만큼 희미한 인사였다. 그런 말을 하는 유일의 얼굴은 화가 나거나 굳어 있지 않았다. 너무나 평온하고 또 자연스러웠다. 저처럼 바보 같은 숨을 삼키며 놀라지도 않고 아주 의연했다. 강한이 언제나 상상하고 또 바랐던 ‘어른스러운 대처 방식’이었다.
이제 그에게 과거 일은 말끔히 지워진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나 보다. 정말 다행이다. 오랜 죄책감을 씻을 수 있을 만큼 기쁜 일이었다.
“실물 별로인데요, 난리더니?”
“헐, 뭐래……. 아니! 점장님 왜 혼자 달려요?”
그런데 속이 탔다. 이상하게 목이 바싹 마르고 숨이 가빠서, 한은 연거푸 잔을 꺾었다. 취하고 싶었다. 술을 진탕 마시면 필름이 끊긴다는 사람들처럼 고주망태가 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알코올의 힘을 빌려서라도 기억을 지웠으면 했다. 한유일처럼. 아주 괜찮게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그처럼. 강한 역시 이제 그를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타인과 똑같이 대하고 싶었다.
***
그렇게 다짐해 놓고 결국 이상한 댓글을 써서 벌을 받는 걸까. 묻어 두었던 기억을 ‘인증’한 죄를 이렇게 돌려받는 게 아닐까?
「한아. 왜 거짓말을 썼어?」
「알고 있었잖아. 나도 너 좋아하는 거.」
「네가 내 첫사랑인 것도.」
강한은 핸드폰을 신줏단지처럼 쥐고 눈을 감았다. 벌써 일주일째. 수백 번을 읽은 문자 내용이 이제는 감은 눈 안쪽으로도 선명히 지나갔다.
도저히 답할 말이 없는 물음이었다.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유일은 그 충격적인 질문을 문자로 보냈다.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지 않은 덕분에 읽음 표시가 뜨지 않았고, 덕분에 강한은 내킬 때마다 그 화면을 볼 수 있었다. 들킬 걱정 없이 수시로 들어가 읽었다. 이따금 ‘누구세요?’라든가, ‘문자 잘못 보내셨습니다.’ 같은 구차한 문장을 썼다가 지우기도 했다.
하고 싶은 말은 무척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강한은 그저 유일이 원하는 답장을 보내고 싶었다. 미안하다는 말이 듣고 싶어서 보낸 문자라면 사과하고 싶었고, 다시는 옛날 일을 들먹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듣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주일을 고민해 보아도 그의 의중을 알기가 어려웠다. 아무렇지 않게 슥 돌아섰던 뒷모습과 이 문자 사이의 괴리가 강한을 무척 헷갈리게 했다.
“저번 회식 때 닭갈비 먹었다면서요? 뭔 회식으로 닭갈비를 먹어. 완전 짠돌이 점장님이네요, 형.”
눈앞에 상수를 두고 있으니 상념이 더더욱 멀어지지 않았다. 강한은 희미한 숨을 내쉬면서 느리게 등을 기대었다. 턱이 들리고, 느슨해진 시선이 상수에게 꽂혔다.
“상수야.”
“네.”
“너 혹시…….”
번호를 준 적 있는지 물어보려 불러낸 자리였다. 그런데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를 않아서, 강한은 그냥 고개를 저었다. ‘됐다.’ 작게 속삭이며 턱짓을 했다.
“더 먹어.”
혼자서 커다란 스테이크 하나를 비운 상수는 손을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옆에 으깨진 감자를 한가득 떠먹는다. 볼이 빵빵하게 가득 차오른 채로 그가 고개를 갸웃 틀었다.
“뭔데요?”
“아니야.”
혹여 상수가 번호를 준 거라고 해도 따질 권리가 없었다. 만약 한유일이 화가 나서 당장 내놓으라 닦달했다면 더더욱. 죄는커녕 고마운 일만 가득한 상수에게 방패막이 역할까지 바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접은 강한은 그저 샐러드를 뒤적거렸다. 입맛은 없었지만, 저를 빤히 바라보는 상수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유일이 얘기 하려고 부른 거 아니에요?”
“……어? 뭐, 누, 누구?”
그런데 금지어 같던 이름 때문에 포크를 떨어트렸다.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강한은 다시 줍지 않았다. 그저 놀란 눈으로 상수를 바라보았다.
“한루나 얘기하려고 부른 거죠?”
상수는 웬일로 진지한 낯이었다. 고등학생 때와 똑같게만 느껴지던 얼굴이 갑작스레 10년쯤 늙어 보였다.
후, 숨을 짧게 뱉어 낸 상수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스테이크 접시까지 멀리 치워 공간을 만든 그는 테이블 위로 팔을 올리고, 두 손을 깍지 껴서 모았다.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뜸 들이는 상수를 강한은 차마 재촉하지 못했다. 오히려 어떤 말이든 듣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어 발이 움찔거렸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형.”
상수에게서 흘러나오기에는 너무나 의미심장한 어투였다. 설마 한유일이 그때 이야기를 다 고백한 걸까. 강한은 펄떡대는 심장 박동을 꾹꾹 누르며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한유일도 많이 반성하고 있어요.”
“…엉?”
“걔가 엄청 잘못했던 거라면서요. 미안하대요.”
그런데 목까지 가다듬은 상수가 뱉어 놓는 말들이 너무 이상했다. 반성과 잘못이라니. 한유일에게서 절대 나올 필요 없는 단어였다.
“이제 시간도 많이 흘렀고 하니까. 용서해 주면, 잘 지내 보면 안 되겠냐고 그래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형이 그렇게까지 했던 걸 보면 큰 잘못 같아서 나도 이런 얘기 전하기가 좀 껄끄럽기는 한데.”
“……아.”
“최근에 뭐 옛날 얘기도 많이 나오고 했다 보니까, 그때 그립고 그런가 봐요. 저한테 자리 좀 만들어 달라는데 형 싫으면 그냥 거절해도 돼요.”
수년째 잊고 있던 감정이 자꾸 고개를 들이밀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치미는 듯 참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강한이 생각하기에 용서라는 말은 자신이 꺼내야 맞았다. 아무리 관계를 정의한 적 없는 사이라고 해도, 그런 끝은 예의가 아니었다. 게다가 수백 번 읽었던 문자 내용처럼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과 유일 사이의 감정을. 표면상 친구인 저들 사이의 진짜 이름을.
그 시절을 배신한 것은 강한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한유일 입에서 반성과 용서라는 말이 나온다는 말인가.
“맞다! 형, 걔 고딩 때 누구 좋아했는지 알아요? 최근에 인터뷰 보고 나 존, 아니, 완전 배신감 느꼈잖아요. 우리까지 속이냐, 진심.”
굳어진 분위기를 풀어내려 과장되게 중얼거린 상수가 손을 들었다. 후식을 가져다 달라는 그의 말에 따라 종업원이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타인의 팔뚝으로 눈앞이 가려지는 틈을 타, 강한은 뜨거운 눈을 아프게 눌렀다. 그러고는 결심한 듯 말했다.
“그래.”
“네?”
“한번 보자고 해.”
잘못을 고하고 반성하며, 용서를 구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오랜만이라는 인사마저 빼앗긴 마당에 이것까지 유일에게 떠넘길 수는 없다.
“정말요? 형 저 때문에 억지로 만나는 거면 안 그래도 돼요.”
“아니야.”
어쩌면 한유일은 구질구질한 과거를 청산하고 말끔히 나아가기를 원하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강한은 누구보다 그에게 협조적이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물론 자신에게는 아주 어렵고 고통스러운 만남이 되겠지만 괜찮다. 자그마치 11년이 지난 일이다. 강한은 성숙해진 자신을 믿었다. 그날은 너무 당황해서 어색하게 넘어갔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만나면 다를 것이다. 사회화된 껍데기만 내놓고 속을 꽁꽁 숨기면 되니까.
“근데 그 글 올린 새끼 범철이겠죠? 고소미 먹어 봐야 정신 차려요, 그런 새끼는.”
“그 씨ㅂ……, 미친 자식이겠지.”
방금 스친 생각이 무색하게도 입술 새로 쌍욕이 불쑥 튀어나왔다. 전혀 괜찮아지지 못한 분노가 금세 끓어오른다. 그러자 상수는 으하학 웃어 댔다.
“형이 욕하니까 진짜 옛날로 돌아간 것 같네요.”
끅끅 내뱉은 웃음과 섞인 말이 어쩐지 한에게는 조금 슬프게 들렸다.
***
강한의 자각은 매번 늦게 일어났다. 사랑은 언제나 한 박자가 느렸고, 슬픔은 그보다도 두 배 느렸다.
한유일과의 모든 것도 마찬가지였다. 한은 이곳 지방으로 내려온 지 일 년이 다 지난 때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더는 한유일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유일과는 평생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것을. 한겨울에 개봉한 <루나 더 퀸>의 마지막 시리즈를 보는 순간에야 체감했다.
마지막 시리즈 속에서 루나는 꽃사슴이 아닌 소년과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푸른 들판 위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고, 그 곁에 사슴은 없었다. 아주 멀리에 몰래 숨어 루나의 행복을 비는 장면이 스치듯 짧게 나왔을 뿐이었다. 언제인가 힘주어 말했던 ‘루나, 내가 항상 너와 함께할게.’라는 약속처럼.
-내가 정말 루나고, 한이가 정말 쟤였으면 좋겠다.
꽃사슴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보며 한유일은 그렇게 말했었다.
결국은 그의 바람대로 되었다는 생각이 울컥 치밀었다. 자신은 이제 유일의 해피엔딩에서 영원히 사라져야만 하는 존재 같았다. 뒤늦은 깨달음에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길 잃은 아이처럼 거리를 방황했다. 걷는 내내, 한 집 건너 한 집 마주치는 카페들이 죄 송곳처럼 마음을 찔렀다.
그래도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물론 아주 가끔 상수의 프로필 사진을 눌러 보며 찔끔 고인 눈물을 눌러 닦은 적은 있지만, 소리까지 내어 엉엉 울었던 날만 세어 보자면 그랬다.
해서 강한은 그날을 기점으로 자신이 이별에 조금 의연해졌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예기치 않게 한유일의 사진을 보아도 칼에 찔린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일찍 왔네.”
그러니까 오늘도 괜찮을 줄만 알았는데…….
유일을 보자마자 굳어 버린 한은 긴장한 눈을 깜빡이며 ‘어.’ 하고 작게 답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갔는지도 모른 채 삐걱거리며 의자를 빼냈다.
상수가 일러 준 가게는 잘 꾸민 중식 레스토랑이었다. 주변 시선을 차단할 수 있도록 룸이 예약되어 있었고, 고급스러운 내부에는 잔잔한 선율이 흘렀다. 대낮임에도 은은한 조명 덕에 분위기가 묘한 식당이었다. 어딘가에 소개팅이나 상견례 자리 추천 장소로 올라와 있을 법한 기류가 느껴졌다.
“어. 내가 서울로 가도 됐는데.”
강한은 차마 유일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자리에 앉았다. 공백을 메우느라 괜히 헛기침까지 하자, 유일은 빙긋 웃었다.
“나 요즘은 여기 살아.”
“뭐?”
“아, 상수는 늦는대. 십 분쯤.”
한유일은 어제까지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처럼 말했다. 여상한 어투에 비해 근래 이곳에 살고 있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지만, 한은 캐묻지 못했다. 알 필요 없는 일이다. 더 많은 정보는 사양이었다.
“오랜만이야.”
“어.”
빼앗긴 대사를 한 번 더 들었다. 한은 목을 축이며 부러 더 무뚝뚝하게 답했다. 고등학생 때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목소리가 비현실적으로 가까웠다.
“왜, 오늘 나 이상해? 신경 썼는데.”
얼굴을 힐끔대기만 하는 꼴에 지적이 날아왔다. 강한은 어물쩍 ‘아니, 괜찮은데.’ 대답하며 묵직한 의자를 당겼다. 카펫 바닥을 씹은 의자가 좀처럼 당겨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안 봐 줘.”
이렇게 집요한 새끼라는 걸 잊고 있었다. 강한은 울고 싶은 기분을 눌러 내며 아주 어렵게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줄곧 저만 바라보는 한유일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와 똑같은 이목구비를 지녔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의 남자였다.
괜찮을 줄 알았다. 화보, 영상, 상수의 프로필 사진, 최근 들어 ‘입덕’했다는 현경의 지나친 중계까지. 강한의 인생에서 한유일은 단 한 번도 사라진 적 없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런데 유일의 물음 하나가 이토록 힘겨울 줄이야. 한은 애꿎은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비식 웃었다.
“그냥 뭐. 별다를 거 없지. 너는?”
“나는 잘 못 지냈어.”
“……어?”
방금까지는 아주 형식적인 대화였다. 오랜만에 마주친 사이라면 으레 늘어놓는 말들이었고, 강한 역시 쿵쾅거리는 심장을 무시하고 답할 만한 상용구가 있었다. 그러나 흐름은 순식간에 궤도를 벗어났다.
“한이가 없었잖아.”
“…….”
“어디로 갔는지 소식도 없고, 동창회도 안 나오고.”
이번 역시 한의 반응은 두 박자 느렸다. 문장이 몇 개 붙고서야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기다리라고 해 놓고…….”
무척 서운하다는 듯한 낯을 마주한 후에는 한의 얼굴색이 아예 바뀌었다. 하얗게 질린 그는 본능적으로 의자를 밀었다. 화장실을 핑계 삼아 시간을 벌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번 역시 카펫에 씹힌 의자가 문제였다. 작게 덜컹이기만 할 뿐 꼼짝도 않는 의자 덕분에 강한은 난감했다. 힘으로 해결하자면 당장 부숴 버릴 수도 있겠지만, 부자연스럽게 이탈하고 싶지는 않았다. 입술이 초조하게 말라 갔다.
“설마 또 도망이야?”
테이블을 잡고 조금 더 밀어 보려던 시도마저 불발되었다. 유일의 나긋한 물음 하나에 온몸에 힘이 빠진다. 강한은 허망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반쯤 포기하는 마음이 들고서야 제대로 유일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열아홉처럼 어려 보였다. 하얗고 깨끗한 피부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짓는 표정에서 색다른 분위기가 흘렀다. 풋풋하던 미소가 어느덧 어른의 것이 되어 있었다. 키도 조금 큰 것 같았고, 어깨도 더 벌어져 보였다. 현경의 말에 따르면 최근 상체 노출 화보를 찍었다더니 근육이 조금 붙은 것도…….
“미안.”
사과는 무의식중에 튀어 나갔다. 바쁘게 굴리던 눈동자를 얼른 갈무리하고, 강한은 유일과 시선을 맞췄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비장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때 내가 많이 어렸던 것 같다.”
“…….”
“나이는 내가 더 형인데 확실히 그때부터 철은 네가 먼저 들었나 봐. 이렇게 자리 마련하는 거 어려운 일도 아닌데. 조금 더 빨리 연락해서 먼저 사과할 걸 그랬다.”
약속을 잡은 날부터 틈이 날 때마다 대본처럼 외운 대사였다. 강한은 부러 어색한 미소를 숨기지 않고, 가벼운 공기를 깨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 만남은 ‘해묵은 감정을 털어 내고 나아가기 위한 도약’에 그쳐야 했다.
“그때는 어려서 그런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좀… 비겁했어. 핸드폰도 사 주고 친구 없는 놈이랑 놀아도 줬는데, 내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네가 잘나가니까 질투했나 봐.”
그때 벌어진 모든 일은 비틀리고 서툴렀던 우정으로 포장되어야 한다.
“놀아 줬다고?”
“상수한테는 연락해 놓고 너한테 못 한 건……. 그거 때문이야. 알다시피 그때 우리 집 상황이 좀 안 좋았잖아. 너희 집은 부자고. 그래서 내가 좀생이처럼 그랬어.”
상수가 옆에 있어야 조금 더 자연스러울 만한 대사인데 상황이 생각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한은 부지런히 연기를 했다. 민망한 듯이 웃고 턱을 쓸었다. 한유일이 그때 감정을 우정 이상의 것으로 도장 찍기 전에 마무리해야만 했다.
“그 왜……. 범철이 새끼처럼, 내가 추하게 그런 거지.”
일부러 더 과장하며 웃을수록 유일의 얼굴은 차게 식어만 갔다. 이제 친절을 흉내 내지도 않은 채, 한유일은 헛웃음을 쳤다.
“지금 어디에 비교했어?”
냉랭한 음성이 강한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한유일이 건드려서는 안 될 폭탄을 불붙일 듯했다. 침이 꼴깍, 느리게 넘어갔다.
“아, 내가 너무 늦었지, 미친! 존나, 정말 미안합니다, 여러분. 주최자가 이렇게 늦어 가지고…….”
다행스럽게도 숨 막히는 정적을 깨트린 것은 폭발음이 아니었다. 폭발에 준하는 소음을 내며 문을 벌컥 열어 낸 상수가 헉헉거렸다.
“김 부장 개새, 아니, 저희 상사 분이 참…….”
숨이 곧 넘어갈 것처럼 꼴딱거리며 들어선 상수는 유일의 옆자리에 앉았다. 털썩 주저앉은 그가 넥타이를 끌어 내리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강한은 구세주라도 만난 사람처럼 얼른 물을 더 건네줬고 상수는 장난스럽게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제야 숨이 트였다. 여전히 시리도록 차가운 시선이 낯에 끈질기게 따라붙었지만, 강한은 모르는 척했다. 그나마 상수가 왔으니 이제 다행이었다.
상수는 그로부터 장장 한 시간동안 지각의 이유를 늘어놓았다. 일장 연설 덕분에 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채워졌고, 반차까지 사용했음에도 일을 밀어 주었다는 김 부장이 한에게만큼은 은인이 되었다. 그래서 강한은 상수의 이야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성심성의껏 반응했다. 아무리 지루한 이야기라도 식사를 마칠 때까지 쭉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한유일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고요하게 앉아 있던 그는 종업원을 향해 아주 나긋하게 웃으며 ‘이것도 한 병 주세요.’ 하고 말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에 쉽게 균열이 일었다. 그도 그럴 게, 곧고 예쁜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고량주 파트였다. 이름부터 왠지 무시무시한 ‘금문고량주’라는 이름 아래에는 도수가 58도에 육박한다는 설명이 작게 적혀 있었다.
약속 시간을 대낮으로 잡고 구태여 상수까지 반차를 사용하게 만든 이유는 분명했다. 오늘 이 자리는 무척 가볍고 담백해야 했으며, 한낮의 꿈처럼 사라져야 했다. 과거를 깔끔하게 매듭짓는 것 외에 다른 역할은 필요치 않았다.
그런데 술이라니. 강한은 무척 기함했으나 말리지 않았다. 유일은 차가운 침묵으로 시위하는 중이었고, 시위의 대상이 저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은 수를 쓸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는 쓸 만한 수가 존재하지 않았다.
상수는 그 둘 사이의 줄다리기를 중재해 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럼에도 대화는 겉만 돌기를 반복했다. ‘예전에 우리 유일이 집에 가서 맨날 게임했잖아요.’ 같은 이야기가 나오면 강한은 로봇처럼 웃었고 유일은 조용히 술잔만을 꺾었다. 결국 제일 먼저 분통이 터진 사람은 상수였다.
“아유, 진짜. 둘이 얘기를 하면서 풀어야 할 거 아니냐고!”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온 순간 강한은 직감했다. 모두 틀려먹었다. 벌써 방 안 가득 술 냄새가 진동했으며, 눈이 다 풀린 상수는 허공을 삿대질하고 있었다. 극도로 조심하며 소량만 홀짝거렸던 강한 역시 콧김이 후끈하게 취기가 올랐다.
“야, 한유일! 너 왜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어엉? 잘 풀어 보겠다고 부탁할 때는 어은제고오오, 이 자슥아아.”
늘어난 테이프처럼 울분을 토해 낸 상수가 테이블 위로 고개를 박았다. 웅얼웅얼, 무어라 계속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해석할 수 없었다.
“……술 많이 독한데, 그만 먹고 일어나는 게 어때.”
한은 일부러 말을 꼭꼭 씹어 뱉었다. 조금이라도 취한 기색을 보이기 싫었다.
“이제 나랑 술도 안 마셔 주는 거야?”
한유일은 느리게 턱을 괴었다. 얇고 기다란 손가락들이 자그마한 얼굴의 옆선을 감싸고, 느슨해진 시선은 한을 담았다. 곧 잠들 것처럼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그게 아니라.”
“그때 한이네 집에서 같이 술 마셨던 날 생각난다.”
바스스 흩어지는 웃음을 뱉어 내며 유일이 잔을 채워 준다. 추억을 읊는 목소리에 강한은 곧장 술을 삼켰다. 하마터면 그날의 유일을 회상할 뻔했다. 제가 잠든 줄 알고 고백을 뱉어 내던 목소리가 아직도 너무나 선명했다.
술은 불길이 목구멍을 훑고 지나는 맛이었다. 강한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목덜미를 쥐었으나, 유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물처럼 삼켰다. 그러고는 재차 빈 잔을 채워 주었다.
“아, 우리 집에서 할머니랑 같이 마셨던 적도 있었다. 기억해?”
홧홧한 감각을 다 물리기도 전에 새로운 안주가 놓인다. 강한은 무어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이번에도 빠르게 술잔을 꺾었다. 그렇게 나열되는 추억마다 죄다 술통 행이었다.
***
어떠한 자각보다도 통각이 먼저 정신을 일깨웠다. 온몸을 두드려 맞은 듯이 찌뿌드드하고 머리가 아팠다. 그다음은 눈꺼풀 안쪽으로 파고드는 강렬한 빛. 본능적인 불쾌감을 피하려 강한은 몸을 옹송그렸다. 속이 화끈거렸고 관자놀이가 쿵쿵 울렸다. 침음이 저절로 목 안쪽을 거칠게 긁고 나온다. 고통이 멎을 만큼만 더 자고 싶었다.
그런데 볼에 닿은 시트가 이상했다.
부드럽고 보송한 감촉은 마음에 들었으나, 제 것이 아니었다. 열이 많은 그는 조금 더 까칠한 여름용 이불을 사용하고 있었다.
깨달음과 동시에 눈을 번뜩 떴다. 설상가상, 코끝을 감도는 향기조차 어디선가 맡아 본 적 있는 것이었다. 쿵, 쿵, 쿵, 불길한 예감을 따라 맥박이 커다랗게 울려 댔다. 설마, 설마, 설마…….
“일어났어?”
강한의 등 뒤에서 누군가 물었다. 요란하게 뛰어 대던 심장이 뚝 멎는 기분이었다. 한은 답하지 않은 채 천천히 이불을 들추었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처럼 살색 나체가 보이지 않기를 아주 간절히 바라며.
“……어어.”
다행스럽게도 티셔츠와 바지를 모두 챙겨 입은 채였다. 원래 입고 있던 것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옷이라는 점이 찝찝하기는 했으나, 나체보다는 백배 나았다. 옷쯤이야. 지난밤 기억까지 끊길 만큼 만취했었으니 토를 했다거나 아무 데나 나뒹굴어 흙투성이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한유일 앞에서 그런 꼴을 보였다면 그 역시 무척 창피한 일이지만, 만취한 채 관계를 맺은 것보다야 천배 나았다.
그렇게 위로하며 강한은 유일을 돌아보았다. ‘옷은 내가 세탁해서 상수 통해 전해 줄게.’ 하고 깔끔한 마무리 멘트까지 준비했다. 그러나 서두를 다 꺼내지도 못한 채, 한은 떡하니 굳었다.
“미안하다. 내가 어제 많이…….”
눈앞에 헐벗은 등이 있었다. 그것도 곳곳에 울긋불긋한 자국이 남은 등판이었다.
“실……례를.”
무어라고 하는지도 모르는 채 강한은 웅얼거렸다. 모든 사고가 유일의 하얗고 붉은 등에 꽂혀 있었다. 그에 화답하듯, 예전보다 두터워진 등 근육이 그가 머리를 털어 내기 위해 움직일 때마다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놀랐어? 걱정 마. 여기는 내가 잠깐 사는 곳. 어쩌면 오래 살 수도 있고.”
“……어어.”
놀란 눈은 낯선 장소 때문이 아니었다. 집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강한은 그저 입만 벌려 기계적인 대꾸를 했다. 날카로운 눈매 속 텅 빈 눈동자는 유일의 맨살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제 뭐?”
한유일은 여상하게 물으며 젖은 수건을 갈무리했다. 이내 헐벗은 등이 가슴팍으로 뒤바뀐다. 돌아선 그를 마주한 강한은 아예 혼이 빠져 버렸다. 가슴팍은 더 노골적인 상흔을 달고 있었다. 심지어는 손톱자국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붉은 길까지! 쌍소리가 절로 입 안을 채웠다.
“어제 나도 좋았어.”
그러나 속을 알 길 없는 유일은 예쁘게도 웃어 보였다. 한순간에 상대를 쓰레기로 전락시키고 마는 그런 웃음이었다.
어제 좋았다니.
하얗게 비어 버린 머릿속에 경악이라는 두 글자가 가득 찼다. 무언가 반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은 유일을 따라 웃지 못했다. 충격에 굳은 눈동자만이 뻣뻣하게 움직인다. 갈아입혀진 옷, 낯선 침대, 반나체의 한유일. 바쁘게 움직이던 눈에 다시금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담겼다.
“…그거, 어제 내가…… 내가…, 그런 거야?”
담담하게 묻고 싶었건만 충격이 숨겨지지를 않았다. 목이 졸린 사람처럼 억눌려 나간 질문에 유일은 잠시 고개를 갸웃 틀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한 번, 두 번, 느리게 깜빡이다가 휘어졌다.
“기억 못 하는구나.”
아주 옅은 눈웃음을 친 그가 허점을 찔렀다.
“정말 하나도 기억 안 나?”
유일은 전혀 탓하지 않았다. 아무런 유감도 없이 말끔하게 묻고는 셔츠를 걸쳤다. 강한은 하얀 셔츠 속으로 사라지는 얼룩진 피부에 끝까지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게 노려보면 어떤 기억이라도 되살아날 것처럼.
그러나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금문고량주가 앗아 간 기억은 너무도 깔끔해서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 기억할 수 있는 장면이라고는 그저 먼저 널브러졌던 상수와 중식 레스토랑의 테이블보뿐이었다.
“……아, 존나, 아니…. 진짜 쓰레기 같은 대답인 거 아는데.”
강한은 아주 참담해졌다. 무릎이 저절로 꿇리고, 두 손이 모였다.
“미안하다. 정말 기억이 안 나.”
“응.”
“……진짜 미안.”
사과를 뱉는 순간에서야 과하게 조용했던 머릿속이 시끌벅적 법석을 떨었다.
정말 했다고? 한유일이랑? 어떻게? 이론이야 대충 알지만 실제로 할 줄은 모르는데, 진짜 했다는 말인가? 아니, 그럼 누가 넣…….
“괜찮아.”
제 생각을 따라 점점 더 하얗게 질려 가던 한의 얼굴이 삐걱삐걱 유일을 향했다. 그는 잘못 들었나 싶을 만큼 자상하게 얼러 주며, 셔츠 단추를 채워 올렸다.
“상수가 그러는데, 한이는 여자 친구도 몇 번 있었다며.”
몇 번이라고 말하기에는 구차할 정도의 횟수였다. 딱 두 번. 그것도 둘 모두 3개월 미만에, 제대로 된 진도는 나가 보지도 못했다. 남들에게 구태여 말할 만한 경험도 되지 않았다. ‘상수 이 새끼가.’ 이가 갈렸지만 당장은 해명 욕구보다 의문이 더 강했다. 갑작스레 이런 이야기를 등장시킨 유일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우리 나이도 적지 않고. 이런 일, 한이한테는 큰일이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어?”
가볍게 웃은 유일은 이제 시계를 찼다. 말뜻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한 강한은 번쩍이는 은색 시계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도 나는 한이가 처음인데.”
시계보다 더 빛나는 눈동자에 슬픈 기색이 담긴다. 여전히 웃는 모양을 흉내 내는 채로, 유일은 씁쓸해하고 있었다.
일순 강한은 얼어붙었다. 말 그대로, 모든 사고가 멈춰 되묻지도 못했다. ‘뭐? 어? 뭐라고?’ 같은 쓸데없는 글자들만이 회로를 꽉꽉 막고 굴러다녔다.
“나는 촬영이 있어서. 쉬다 가.”
한유일은 여전히 담담했다. 얼굴에 감도는 친절한 미소도 그대로였고, 사근사근한 말투 역시 침울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을 유유히 떠나는 뒷모습은 쓸쓸했다. 저벅이는 소리조차 없이 고요한 걸음이었다.
***
“그건 개쓰레기죠.”
현경은 두말할 것도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도 몇 년이나 안 본 사이에?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네요.”
그녀가 식사 대용으로 만든 녹색 스무디는 어느덧 마이크 역할을 했다. 열변을 토하느라 마시지도 못한 채 두 손으로 꽉 쥔 현경은 눈을 매섭게 떴다.
“왜요. 점장님 설마 동창한테 당했어요?”
그녀는 한을 아주 숙맥으로 보고 있었다. 그 어떤 손님이 연락처를 물어도 ‘죄송합니다.’로 일관하는 그를 수십 번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언제인가는 ‘왜, 그 너무 잘생긴 사람들은 외양만 보고 달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소극적으로 변한다던데 그런 이유예요?’ 하고 괴상한 질문을 한 적도 있었다. 덕분인지 그녀의 의심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설마하니 그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가 점장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한은 그저 침울한 숨만 내쉬며 행주를 들었다. 하얀 헝겊이 벌써 수십 번 닦아 놓은 머신 위를 또 올라간다.
사실 구태여 현경에게 묻지 않아도 충분했다. 강한 역시 평소 ‘이런’ 남자들을 쓰레기라고 생각해 왔으니까.
술에 취해 기억도 하지 못할 관계를 맺다니. 한은 늘 그게 파렴치한 바람둥이의 핑계라고 여겼다. 아무리 전후 사정이 있다고 해도, ‘술에 취해 어젯밤 우리가 한 짓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그저 비겁한 변명이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하룻밤을 즐기고, 책임은 회피하고 싶은 얼간이들이나 하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이지, 강한의 기억 속에 지난밤은 존재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벽에 이마를 부딪쳐 보아도. 상수에게 어제 어떻게 들어갔느냐며 추궁해 보아도. 누군가 고의로 잘라 내 버린 것처럼 깨끗하게 지워진 기억은 하루 종일 ‘정말 했다고?’라는 문장만을 불러냈다.
만약 정말 했다면…….
“아, 씨, 미쳤나.”
머릿속을 점령한 살색 향연을 지우기 위해, 강한은 제 머리를 퍽 쳐 냈다. 자비 없는 힘으로 가격한 탓에 제법 큰 소리가 울렸다. 이제야 스무디를 좀 마시고 있던 현경이 덩달아 놀라 캑캑거린다.
“아우, 진짜, 깜짝이야. 점장님 요즘 정말 이상하게 왜 그러세요.”
“……어, 미안하다.”
강한은 얌전히 사과하며 한 번 더 제 머리통을 가격했다. 이번에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불순한 상상 몫이 아니었다. 마지막을 준비해 놓고 대형 사고를 쳐 버린 자신에 대한 벌이었다.
원래라면 지난밤은 유일과 저의 마지막이어야 했다. 깔끔하고 성숙한 마무리 후 이대로 서로의 기억 속에 묻혀야 맞았다. 얼굴만 보아도 심장이 떨리고 당장에 11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그런 감각은 필요 없었다. 술에 취해 감행한 원나잇이라면 더더욱.
한은 깊은 숨을 내쉬며 얼얼한 머리통 대신 핸드폰을 쥐었다. 그러고는 마지막이기를 바랐던 문자 메시지를 눌렀다.
「어제 일은 내가 정말 미안하다.」
구차하고도 비겁한 말이었다. 스스로 작성한 문장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아, 강한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머리통에 주먹을 가격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점장님, 샷 하나만 내려 주세요!”
“어어, 알았어.”
고민하던 강한은 일단 글자를 모두 지웠다. 새로 쓴 문자는 아주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작성되었다.
「시간 돼? 내가 찾아갈게.」
이번에야말로 정말 마지막이다. 무릎을 꿇든 맞아 뒤지든 해결을 봐야 했다. 그러나 굳은 다짐이 무색하게도 곧장 가벼운 답장이 돌아왔다.
「데이트 신청이야?」
달갑지 않은 희망이 덕지덕지 묻은 채로.
얼굴이 바싹 굳은 강한은 핸드폰을 멀리 던져 방치해 놓고 일에 몰입했다. 한가하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갑작스레 손님이 몰려들었다. 현경은 질린다며 도리질했지만, 강한에게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주문에 집중하다 보면 유일의 생각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있었다.
유독 스무디 주문이 많은 날이었다. 현경은 스무디를 먹고 있던 제 탓인 것 같다며 울상을 지었고, 그녀의 업보는 마감 시간까지도 이어졌다. 그렇게 쌓인 주문을 처리하느라 기계 씻을 시간은 만들지도 못했다. 강한은 어느덧 열 시를 꽉 채운 시간을 확인하고 현경을 먼저 돌려보냈다. 핸드폰 잡을 여유를 최대한 없애고 싶은 밤이었다.
‘데이트 신청이라니.’
그런 달콤한 말을 한유일은 아주 쉽게 했다. 그뿐인가. 아침에는 원나잇이 한에게 유별난 일은 아닐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은 자꾸 가득 쌓인 컵과 분해한 기기를 벅벅 닦았다. 곧 부러트릴 것처럼 힘을 주어 문질렀다.
전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애써 냉담하게 굴어도 봤고, 다 끝난 과거라고 세뇌처럼 수천 번을 되뇌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사랑을 만날 수가 없었다고 답하고 싶다. 그런 밤이, 너와 보내는 시간이 결단코 쉬워질 리가 없다고.
절대 전해져서는 안 될 대답이었다.
그를 떠올리면 강한은 언제나 좁은 고시원과 천만 원의 목줄을 생각하게 되었다. 삽시간에 모든 것이 어머니의 숨통을 조였던 불효자 시절로 돌아갔다. 만회할 방법을 찾느라 온갖 일터를 전전하던 배고픈 청춘이 되었다. 태권도 학원 차를 몰았고 공사판을 전전했으며 택배 아르바이트를 뛰었던 때로, 그렇게 땀을 흘리고도 밤이 되면 엄청난 무기력에 짓눌려야 했던 밤으로. 조금만 방심해도 유일의 이름은 그런 어둠과 얽혔다. 그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못 잊었는지와 하등 상관없이.
우리는 서로의 실패다. 함께한 추억에는 죄다 좌절의 향기가 배었다. 강한은 유일에게 실패작을 재연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직 주문되나요?”
울적한 생각을 뚫고 도어 벨 소리가 울렸다. 한은 뜨거워진 눈을 손등으로 누르고 얼른 카운터 앞으로 나갔다.
“죄송합니다, 마감했습…,”
허공에 가볍게 물기를 털어 내던 손이 멈추었다. 한은 어정쩡한 자세로, 당장 오늘 아침에 같은 침대에서 기상했던 사내를 응시했다.
“아, 그럼 데이트로 할게요.”
남자는 아주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농담을 던졌다. 언제나 그랬듯이 농담과 진담을 구별하기 어려운, 11년 전과 아주 똑같은 표정으로.
“……여기까지 왜 왔어. 내가 간다니까.”
“이제 기다리는 건 그만하려고.”
불이 다 꺼진 카페 한가운데. 조명도 없이 어두운 틈에서도 유일의 얼굴은 하얗게 빛이 났다. 그 맑은 얼굴이 제법 단호하게 말하며 빈 의자를 꺼내어 앉았다.
“이렇게 내가 오면 그만이잖아.”
그렇게 말하며 웃는 한유일은 이제 막 시작한 연극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그의 뒤로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커튼이 차르르 벌어지는 듯했다.
실패작의 재연을 막기 위해, 강한은 아주 오랜 시간을 버텼다. 더 이상 닦을 만한 집기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주방을 정돈하며 마음을 다졌다. 그럼에도 한유일은 노여운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어두운 매장에 홀로 방치된 처지가 그다지 나쁘지 않은 듯했다.
“많이 기다렸지. 미안하다.”
“응.”
그래도 사과는 곧장 받아먹는다. 모난 데 없이 뻔뻔한 태도가 예전과 똑같아 한은 비식 웃었다.
핀 조명을 받으며 홀로 방백 하는 배우처럼, 유일은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었다. 강한은 덩달아 무대에 오르는 비장한 심정이 되어 맞은편 의자를 빼냈다. 웃음기가 금세 휘발된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서. 너 그, 데이트 운운하는 말. 진심이야?”
“응.”
이번에도 유일은 직진이었다. 배배 꼬는 법 없이 투명한 그가 한은 무척 부럽기도 하고 또 가끔은 얄밉기도 했다.
“11년 전이야. 그래도 진심이라고?”
“그러게. 내가 그렇게 오래 기다렸네, 한이를.”
유일은 가볍게 웃으며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의자를 조금 더 가까이 당긴 유일이 테이블 위로 턱을 괴었다. 집요한 시선이 얼굴 곳곳을 관찰한다.
“한이는 11년 전이랑 똑같다. 음, 더 잘생겨졌나?”
온 얼굴에 눈길이 족적을 남겼다. 샅샅이 살펴보는 그 때문에 호흡이 곤란해져, 한은 저도 모르게 의자를 조금 물렀다. 그러고는 아주 깊고 느린 숨을 내뱉었다.
“……내가 예전에 마음대로 연락 끊었던 거.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해.”
“사과는 다 한 거 아니었어?”
“…아니. 너 아직 화 안 풀렸잖아.”
그 특별할 것도 없이 짧았던 첫사랑을 11년이나 간직하다니. 저는 몰라도 한유일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이게 네 복수라면, 그럴 만해. 아니지. 이보다 더 심해도 상관없어. 아예 주먹질을 해도 다 받아 줄게. 묵사발로 만들고 싶다면 그렇게 해.”
“복수?”
유일이 느리게 되물었다. 꿈결과 비슷하도록 몽롱한 목소리였다.
“그래. 내가 너였어도 화 안 풀려. 그렇게 잘해 줬는데, 핸드폰도 사 줬고. 근데 내가 날름 먹고 날랐으니까 화날 만해. 그래서….”
“그딴 핸드폰 소리는 언제까지 할 거야.”
어두운 가게에 한참을 방치해 놓아도 친절하던 낯에 빗금이 갔다. 차갑게 얼기 시작하는 낯을 강한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가 안 났다면 거짓말이지. 났었어. 눈이 돌 만큼. 왜였을 것 같아?”
푸른 불꽃을 닮은 목소리였다. 무서울 만큼 침착한 분노가 강한을 한숨 쉬게 했다. 예상한 것보다 더 악랄한 시나리오다.
“……한유일.”
“사 준 핸드폰 들고튀어서 열 받았을 것 같아, 내가? 한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강한은 다부진 허벅지 위에 주먹을 꾹 쥐었다. 입술 안쪽을 아프도록 깨물고, 눈에 날을 세웠다. 그래도 유일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이를 갈듯이 토로했다.
“진짜 이유가 뭔지 알잖아. 나는 너…,”
“야.”
강한은 열이 돌아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를 매섭게 떴다.
“11년 전이야.”
“…….”
“유일아, 11년 전 일이다. 알았어?”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한은 아주 간절하게 말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 발음하는 턱이 불거질 정도로 힘을 주었다. 그것은 나름의 경고였다.
처음 순간, 유일은 굳어 있었다. 얕게 벌어진 입술을 달싹이며 잠시 미간을 좁히기도 했다. 그러나 예민하게 날을 세웠던 얼굴은 쉽게 원래의 온도를 찾았다. 인상이 서서히 풀어지고, 서슬 퍼렇던 표정도 온기를 담았다. 아주 느긋하게 빛을 바꾼 얼굴로 그는 헛웃음을 쏟았다. 입이 벌어지지 않는 고요한 미소였다.
“아직 아닌가 보네.”
뜻 모를 이야기를 중얼거린 그가 이번에는 아예 눈을 접어 웃었다.
“그러면 어젯밤 이야기는 해도 돼?”
“……아.”
“묵사발로 만들어도 괜찮다고?”
아주 상냥한 웃음 위로 11년 전 기억이 겹쳐졌다. 교실 한가운데에서 주먹을 휘둘렀던 유일과 피투성이 창현의 얼굴. 그 선명한 장면이 뇌리를 스치며 잠시 긴장도 되었으나, 강한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 맞아 주는 일이야 어렵지도 않았다.
“아직도 어젯밤은 기억 안 나는 것 같고.”
유일은 다시 느리게 다리를 꼬아 올렸다. 그의 무릎 위로 깍지 낀 손이 올라간다. 그 느른한 과정이 모두 광고 같다고 생각하며, 한은 재차 고개를 끄덕거렸다. 죄책감이 넘실넘실 밀려온다.
“와, 상처네…. 주먹으로 무마하는 밤이라.”
내내 한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유일의 시선이 툭 꺼졌다. 무릎 위에 올린 제 손을 가만히 바라보는 눈이 바싹 마른 것 같아, 강한은 조바심을 느꼈다. 현경에게 들은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점점 커지는 듯했다.
“다시 하느니 맞고 만다는 소린가…….”
유일은 아주 심각한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다만 불이 다 꺼진 카페 안에서 듣기에는 무척 큰 목소리였다.
“이건 뭐, 먹고 버리는 것도 아니고 맞고 버린다는 소리네.”
“…야.”
“처음이 이렇게 기념될 줄은 몰랐는데….”
그가 뱉는 말이 모두 송곳으로 변해 죄책감을 찔러 댔다. 하아아, 머리통을 부여잡고 깊은 숨을 내쉰 한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아주 어릴 때, 태권도장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아버지는 늘 대련을 시켰다. 자고로 사나이란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앙금이 남지 않는다는 구시대적 명분이었다.
“야, 억울하면…. 너도 해.”
“…응?”
“너도, 그, 처음……. 내, 그.”
“뭘 하라는 건데, 한아.”
미친, 시발, 존나 싫다. 강한은 속으로 절규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후회할 말이란 것은 알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 너도 한 번 넣으라고!”
그나마 재활용되는 쓰레기라도 되어 보고자, 한은 악에 받쳐 내지르고 말았다.
가게 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유일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구슬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한 번.”
그 어느 날, 지하철 차창을 바라보며 ‘미성년자…….’ 하고 중얼거렸던 때처럼 유일은 미약하게 읊조렸다.
“그걸로 될 것 같으면, 그렇게 끝내자고.”
한은 창피함을 뒤집어쓴 채로 괜히 벌컥 화를 냈다. 그러자 유일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감은 눈 위를 예쁜 손으로 덮어 가리며, 하하 웃은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되지. 그런 식으로는 안 돼.”
“뭐?”
“대신 부탁이 있는데, 한아.”
“……뭔데.”
과연 엉덩이를 내어 주는 것과 교환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한은 무척 긴장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이제 한유일은 다시 여유가 스민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무도 근사해 위험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소로, 그가 말했다.
“나 커피 좀 가르쳐 줘.”
지나치게 건전한 부탁이었다. 그리고 강한으로서는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말이었다.
모두가 한유일을 보면 ‘데뷔하자마자 스타가 될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작은 배역이라 해도 반드시 이목이 집중될 것이며, 그러기 이전에 누구나 주인공으로 쓰고 싶어 안달을 내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유일의 데뷔는 무척이나 조용했다.
예정보다 4년이 늦은 데뷔였다. 원래라면 열아홉 나이로 공중파 드라마에 출연했어야 할 그는 스물넷이 되어서야 영화 하나를 찍었다. 1시간 10분짜리의 아주 고요한 퀴어 무비. 심지어는 조연으로, 상수 말에 의하면 정확히 7분 2초가량만 출연하는 작은 배역이었다.
물론 쉽게 잊히지 않는 얼굴은 작품마다 파장을 일으켰다. 마니아층 사이에서는 제법 소문이 났으며 대학로 연극을 직접 보러 오는 팬들도 생겼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유일은 마치 어떤 구역을 지켜 가는 것처럼, 이목이 집중되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물이 들어올 때마다 노를 내팽개치는 행보였다.
그가 무슨 의도를 지녔는지, 어떤 사정으로 데뷔가 밀렸는지, 왜 제법 크다는 그 소속사와 계약이 파기되었는지. 강한은 무척 궁금했으나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상수에게 묻는다면 곧장 대답해 줄 것을 알면서도 피했다. 어차피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채로도 강한은 짙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유일의 배우 인생은 더욱 수월했을 것이다. 고시원에 찾아왔던 남자의 말처럼, 데뷔만 하면 뜨는 건 문제도 아닐 놈이었다.
“……얼마나?”
“촬영이 가능할 정도면 돼.”
강한은 입술을 말아 물고 가만히 생각했다. 촬영이 가능한 정도라면, 커피 머신을 사용할 수 있을 수준이면 충분한 것 같았다.
“그래.”
길어진다면 3회쯤. 뒤를 내어 주는 것보다야 만남의 횟수가 늘어나겠지만, 유의미한 차이는 아니었다. ‘두세 번만 더 견디면 돼.’ 강한은 스스로를 달래며 일어섰다.
“시간은 언제가 편한데.”
딱딱하게 물으며 테이블과 의자를 정돈했다. 이제 그만 나가라는 의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이었지만, 유일은 느긋한 자세 그대로 발을 까딱거렸다.
“요즘은 한가해. 아무 때나 괜찮아.”
“……그럼 웬만하면, 지금처럼 마감 이후였으면 좋겠는데. 너랑 아는 사이인 거 들키고 싶지 않고.”
“왜?”
은수와 현경이 유일의 팬이라는 것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사인을 받는다거나 사진을 찍는 정도의 귀찮음이 추가될 뿐. 선을 그어 놓으면 그 이상을 넘어 민폐 부리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치언이라면 괜한 꼬투리를 잡아 이상한 소리를 할 위험성이 컸다. 몰래 사진을 찍어다 인증이니 나발이니 해 가며 신빙성 있는 루머를 만들어 내면 큰일이다.
“어차피 우리, 계속 볼 사이도 아니잖아. 연예인이랑 안다고 얘기 돌면 뒷감당 피곤해.”
부러 냉담하게 답하며 키를 챙겼다. 열어 낸 문을 다부진 어깨로 받쳐 놓은 그가 유일을 본다. 무심을 가장한 시선을 유지하며, 한은 턱을 까딱 움직였다.
“안 가?”
바깥의 가로등 조명이 안으로 스며들었다. 유일은 어딘가 놀란 사람처럼 눈을 키웠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의자까지 깔끔하게 정리해 넣어 둔 그가 문을 향해 걷는다. 강한은 가까워지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길고 날카로운 눈매가 담담하게 첫사랑을 응시했다.
“또 혼자 결정하는 거야?”
그만큼 무덤덤한 표정으로 응수하며 한유일이 물었다. 조금 웃는 듯한 목소리였다.
“와, 이건 좀 상처인데.”
덧붙인 말은 약간 더 온도가 낮았다. 한은 일순 쿵 떨어져 내린 심장을 내색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정정할 생각 없다는 태도를 유일은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속을 알기 어려운 미소를 띤 채 스쳐 지났다.
그를 닮은 향수 향기가 희미해지고서야 한은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초여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뜨겁고 무거운 숨이었다.
***
첫 수업은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하필 억수가 퍼붓는 밤. 강한은 궂은 날씨를 핑계로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가게 문을 걸어 잠갔다. 현경을 직접 택시까지 태워 보내고 돌아오는 길, 강한은 멋쩍게 웃었다. 공은수에게 점장 직함을 물러 달라고 몇 달째 졸라 놓고 기다렸다는 듯이 권력을 사용한 제 꼴이 다소 우스웠다.
파라솔처럼 커다란 우산 안으로도 비가 다 들이치는 궂은 날씨다. ‘하필 날을 골라도 이런 때를….’ 아득히 생각하며 한은 가게 앞에 섰다. 검은 장우산을 접어 구석에 세워 놓고, 어닝 아래에 서서 담배를 물었다.
아직 유일을 마주하지도 않았는데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장대비를 피하려 실내를 찾아온 손님들 덕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현경 탓이었다.
그동안 강한은 사장 공은수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어 왔다. 한유일이 어떤 연극을 하고, 무슨 역할을 맡았고, 어떤 장면에서 이런 대사를 치는 게 멋있었다는 둥의 지나치게 자세한 중계였다. 이따금 ‘레전드 무대’라며 프레스콜 영상을 보여 주려 한 적도 있었다. 때마다 한은 식겁했지만 나름대로 잘 넘겨 왔다. 한유일이 유명해지리라는 것은 언제나 각오한 일이었으므로.
그러니까 주변에 그의 팬이 한 명쯤 더 늘었다고 해서 문제가 될 리 없었다.
-아, 점장님. 대박이지 않아요? 얼굴은 완전 성스러운데 몸이 미쳤다니까요?
그런데 오산이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짧은 생각이었다.
-봐요. 개 쩔죠. 이게 청글이거든요, 청순 글래머.
제 눈앞에 액정을 들이미는 현경을 피하느라, 강한은 거의 대련하던 때처럼 움직여야 했다. 마음속에서 버럭 ‘너 그거 성희롱이다.’ 하는 화풀이가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어차피 아주 잠깐의 한가한 시간만 견뎌 내면 그만이었다.
-점장님, 우리 딸기 메뉴 좀 더 만들어요. 유일 오빠 딸기 좋아한대요.
하지만 현경은 무언가에 홀린 상태였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러하듯, 그녀는 모든 사물과 상황에 한유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 오늘 손님 너무 많네요. 하지만 유일 오빠가 그러는데 힘든 때를 견뎌야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대요. 아자!
-점장님, 그거 아세요? 유일 오빠 집 되게 부자래요. 근데도 아르바이트 되게 많이 했대요.
-저번에 우리 닭갈빗집에서 봤던 거요. 그날 그 예능 아시죠? 러너러너! 그거 찍은 거래요. 원래 정식 캐스팅 아니었고, 그냥 이 지역으로 온 김에. 아, 유일 오빠가 정우수랑 친하거든요? 정우수가 전화해서…….
공은수와 달리 현경은 유일의 사생활과 말 한마디를 모두 기억하고, 좋아하고, 또 응원하는 팬이었다. 한유일에게 이런 팬들이 많이 생긴다는 것은 축하할 일이겠지만 강한은 달갑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는 무척 싫었다. 원하지도 않는 정보들이 자꾸만 한유일의 시간들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지, 정우수라는 놈은 어떤 사람인지. 그런 것들을 자꾸 알고 싶게 했다.
“댓글을 쓴 것부터가 존나 등신이었어, 시발……. 아니다. 상수 말대로 회식 날 닭갈비 처먹은 것부터가 문제네.”
이제 정말 이민을 고려해야 하는 때인지도 몰랐다. 강한은 쓰디쓴 담배를 뻑뻑 피우며 인상 썼다. 습기에 눅눅해진 필터를 빨아내는 감각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당장은 응급 처치였다. 수많은 궁금증과 착잡한 유추로 가득한 머릿속을 비워 내기 위해서.
“한이 담배 하는구나.”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몽롱해지던 눈에 번뜩 빛이 들었다. 어느덧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유일이 옆에서 우산을 접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한은 담배를 처음 입에 댄 사람처럼 쿨럭거렸다.
“그냥 가끔.”
강한은 반쯤 거짓에 가까운 답을 기침처럼 토해 냈다. 동시에 얼른 담배를 버리고 가게 문을 열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급하게 구는 그의 뒤에서 유일은 낮게 웃었다.
“왜 급하게 꺼.”
“다 폈어.”
무뚝뚝한 답을 하고 카운터 안쪽 조명만을 켰다. 본론만 간단히, 최대한 빠르게, 사담은 절대 하지 말기. 어떤 법칙을 되뇌며 한은 고갯짓을 했다.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한유일은 끝이 둥근 카운터를 매만지며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편하게 펴도 되는데. 아니면 나도 하나 주고.”
“뭐? 너 담배 펴?”
“그냥 가끔.”
수업 시작도 전에 ‘사담은 절대 하지 말기’ 조항을 어긴 강한은 얼른 토끼 눈을 갈무리했다. 한유일이 담배를 태우든 말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상상하지 말자. 굳게 다짐한 그는 커피 머신 앞에 섰다.
“너는 머리가 좋으니까 하루면 될 거야.”
좋은 원두를 고르는 법이나 그라인더 사용법, 템퍼 같은 것들은 유일에게 필요 없는 항목이었다. 어차피 촬영 때에는 샷을 내리거나 혹은 스팀기를 사용하는 장면이 주를 이룰 테니까. 그나마도 현경이 말한 ‘영상 화보집’ 노릇을 하느라 몇 컷 나올 뿐, 많지도 않을 터였다.
“샷 내리는 법이랑 기계 작동법. 스팀기 쓸 때 자세 정도. 충분하지? 더 필요한 부분 있으면 말해.”
오늘 유일은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지난번과 달리 무척 캐주얼한 옷차림이 자꾸만 예전의 그를 떠올리게 해서, 한은 의도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괜히 기계를 만지작거리고 이것저것 준비물인 척 가져다 놓기를 한참. 조용하던 유일은 카운터 안쪽의 간이 의자를 꺼냈다.
“나는 그렇게 연기할 생각이 없는데, 한아.”
“그럼 뭐.”
“메소드 알지? 아메리칸 메소드 기법.”
고작 바리스타 역할에 무슨 메소드 연기. 강한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마침내 그를 마주했다. 유일은 그제야 빙긋 웃어 보이며 남은 의자를 하나 더 펼쳐 보였다.
“작은 독립 영화라 대역 안 쓰고 다 직접 할 거야. 대충 만드는 척만 할 생각 없어.”
“……그래서? 직원만큼 배우겠다고?”
“그래야지. 원래 메소드라는 게, 직접 반복된 경험을 축적해서 감정을 얻는 편이 가장 좋거든.”
강한은 그가 펼쳐 놓은 의자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앉는 대신 주먹을 꽉 쥐는 용도로 사용된 의자가 바르르 떨렸다. 유일은 진동하는 의자를 재미있다는 듯 보더니 일어섰다.
“앞으로 잘 부탁할게, 한아.”
매일 일하는 일터 속에 한유일이 서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강한은 앞으로 견뎌 내야 할 시간들이 막막했다. 이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무뎌져야 할까 생각하면 숨통이 딱 막힐 정도였다. 그런데 남의 속도 모르고 한유일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하얀 손을 내밀어 보이는 얼굴이 함박웃음을 담는다.
짜증스럽게 손을 맞잡은 강한은 거의 스쳤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신속히 놓았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그라인더 사용법을 먼저 설명하기 시작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속도와 비례해 말은 점점 더 빨라지기만 했다.
***
예상대로 유일은 아주 빠르게 배우는 학생이었다. 고작 세 번의 수업 만에 그는 웬만한 메뉴 레시피를 다 외웠다. 집중력과 기억력이 특히 좋고 타고난 머리가 무척 영민한 덕분도 있었다. 얼마나 영리한지, 조금만 방심하면 선생을 조종할 정도였다.
“그럼 손님이 너무 쓰다고 하면 어떻게 처리해?”
“죄송하다고 하고, 뭐, 음료 바꿔 드릴지 아니면 환불해 드릴지 물어보는 거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연락처 좀 알고 싶다고 하면?”
“죄송하다고 하고……, 야.”
무심코 대답하려던 강한이 미간을 좁혔다. 매섭게 치켜뜬 눈에 유일은 배시시 웃는다. 방금 내린 커피를 양손으로 쥔 채 눈을 휘는 낯이 지나치게…….
귀여웠다.
시발. 속에서 쌍소리가 바로 치솟는다. 한유일을 다시 만난 이후로는 언어 체계가 모조리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가, 씨발, 가면서 마셔.”
“와, 욕했어.”
“어, 욕했다. 왜. 나가라고.”
애초 본인이 내린 커피를 반드시 맛봐야 한다며 음미하던 것마저 개수작이었던 듯싶다. 강한은 몸서리치며 유일을 떠밀어 몰았다. 문밖으로 쫓아내듯 내보내고 문을 잠그는 동안, 유일은 옆에 서서 제가 내린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아주 뻔뻔하고 기분 좋은 표정으로.
“그럼 한아,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마음에 든다고 할 때는 어떻게 해?”
“그만 안 하냐? 너 지금 나 가지고 놀지.”
가게 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하는 손길에 분노가 실렸다. 덜컹덜컹, 멀쩡한 문을 뜯어낼 기세로 당겨 본 한이 매섭게 뒤를 돌았다. 순진한 표정으로 무장한 유일이 저 자신을 가리켰다.
“나?”
“그럼 여기 누가 또 있는데?”
동그랗게 커진 눈이 또 귀엽게 보이려 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덕분에 말이 흡사 쌍욕처럼 거칠게 나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유일이 협박이라도 당하는 모양새였다.
“내가 한이를 가지고 논다니. 억울하네.”
그러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유일은 무서워하지 않았다. 두렵기는커녕 도리어 좋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 눈동자가 빛을 냈다.
“보통 그런 말은, 음……. 같은 침대에서 밤을 보낸 후에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한테 할 말 아닐까?”
깜빡, 깜빡. 똑바로 한을 바라보는 눈에는 무고함이 가득했다. 그래서 한은 허탈하게 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골이 다 울리는 기분이다.
“나는 피부가 하얀 편이라 자국이 참 잘 남거든. 며칠이 지나도 안 지워지더라. 그런데 한이는 몇 시간 만에 다 잊어버리고…….”
강한은 죄책감이 사방에서 포위해 오는 기분을 느꼈다. ‘으윽.’ 목 안쪽으로 괴롭게 신음하던 그가 고개를 불쑥 들었다.
“그래, 내가 개새끼다. 미안하다.”
고함 비슷한 사과가 튀어 나갔다.
멍!
그런데 기가 막힌 타이밍에 강아지 소리가 들렸다. 순간 유일이 비아냥거리나 싶어 기함했던 눈동자가 똑같이 놀란 한유일을 보고서야 아래로 향했다. 발밑에는 꼬질꼬질한 털 뭉치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무이야!”
너무 반가운 강아지였다. 마치 오래 떨어져 있던 가족을 만난 것처럼, 강한은 얼른 자리에 주저앉아 강아지를 쓸어 주었다.
무이는 카페 주변에 자주 출몰하는 수컷 강아지였다. 원래는 주변 상권에서 이따금 밥을 얻어먹는 떠돌이 개였는데, 사장 공은수가 발견한 이후로는 카페 바깥에 밥그릇을 따로 놓아 주었다. 그 때문에 무이는 대부분 시간을 카페 주변에서 보냈다. 어디인가 멀리 갔다가도 밤에는 카페로 돌아와 눈도장을 찍었다. 그러던 녀석이 돌연 사라진 지가 몇 주째였다.
“인마, 어디 갔었어. 얼마나 걱정했는데.”
못 본 사이 털이 더 자란 무이가 헉헉거렸다. 더워서 그런지 기운이 무척 없어 보였다.
“무이야, 어디 아픈 거야? 엉?”
신발 끝에 고개를 비비던 털 뭉치가 한을 올려다본다. 시무룩하고 힘없는 얼굴로 끼잉, 끙, 소리를 내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아는 강아지야?”
지켜만 보고 섰던 유일이 바싹 다가와 물었다. 덩달아 한의 옆에 쪼그려 앉은 그가 손을 내밀자, 무이는 기운 없이 바라만 보았다. 워낙 호기심이 많고 사람을 좋아해 금세 냄새를 맡고 배까지 뒤집는 녀석인데. 강한은 심각한 얼굴로 끄덕거렸다.
“어. 근데 상태가 좀 이상한데. 병원에 데려가 봐야 하나.”
“이름이 무이?”
“엉. 뭐지, 배탈이라도 났…….”
무이에게 집중한 채 중얼거리던 한이 멈칫했다. 아는 강아지인지를 물을 때부터 어쩐지 묘하게 놀리는 듯하다고 느꼈는데, 정말 유일의 물음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설마 싶은 얼굴이 휙 한유일을 향해 돌아갔다.
“우리 팬들 이름도 무이인데.”
“……알아. 아니, 시발, 알아서 그렇게 지은 게 아니고. 아니지. 애초에 내가 지은 게 아니다? 어? 우리 사장님이 너 팬인데, 그래서, 아무튼 그냥 유일무이라는 말에서 따온 거거든?”
“응, 우리 팬들도 거기서 따온 이름이야.”
유일은 아주 나긋나긋 일러 주며 웃었다. ‘세상에 천사가 내려온대도 저렇게 웃지는 않을 거다. 악마 같은 새끼!’ 강한은 모순적으로 질색하며 고개를 털었다.
“병원 갈래? 집 근처에서 24시간 동물 병원 봤는데.”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유일은 아주 천사같이 물었다. 한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물었다. 더 이상 엮이는 건 좋지 않았다.
“아니, 됐어. 내가 안고 뛰면 돼.”
갈등 끝에 단호한 답이 나왔다. 유일은 그러느냐고 한번 되묻고는 따로 설득하지 않았다. 그저 낑낑거리는 무이를 함께 지켜볼 뿐이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이제 가.”
한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무이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나 커다란 손에 쉽게 들썩인 무이는 금세 도망을 쳤다. 싫다는 듯 얕게 짖으며 벗어나더니 유일에게 향했다. 강한에게 그랬듯, 하얀 신발 주변을 맴돌던 무이는 일순 무언가를 뱉어 냈다. 캑캑, 불길한 소리와 함께 하얀 신발 위에 토사물이 토해졌다.
“어…….”
양은 많지 않았으나 연분홍 빛깔에 점점이 붉은색이 보였다. 가만 굳어 있던 한이 얼른 무이를 감싸 안고 일어섰다.
“야, 뭐 해. 시동 걸어.”
일 분도 되지 않아 말을 번복하는 그의 얼굴도 이제 유일만큼이나 뻔뻔했다.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거친 후에야 무이는 장염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정도가 꽤 심하므로 하루 이상의 입원 치료는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갈 곳이 따로 없는 떠돌이 개 무이로서는 차라리 나은 선택지였다.
그래도 수액을 매달고 바닥에 힘없이 누워 있는 무이는 아주 안쓰럽게 보였다. 강한은 이게 다 무이를 만나게 될 줄도 모르고 애완동물 일체 금지 오피스텔을 계약한 제 탓 같았다.
한은 케이지 앞에 쪼그려 앉아 백 번도 넘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해야 제 팔뚝쯤 되는 이 작은 강아지가 견뎌야 할 미래가 걱정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제가 발견해 바로 병원에 왔다지만 다음은 어떨까. 심란한 질문이 끝을 모르고 떠다니는 바람에, 병원을 나선 시각은 새벽 두 시가 다 되어 있었다.
잠시 편의점에 다녀오겠다던 한유일은 병원 앞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한적하고 어두운 도로를 배경으로, 비닐봉지와 동석한 그는 캔 커피를 꾹 쥔 채 자는 중이었다. 오늘 새벽부터 일정이 있었다더니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한은 조각상처럼 잠든 그를 깨우지 않고 그대로 기대어 섰다. 속 뒤집는 말 없이 조용히 잠든 한유일은 이제야 진짜 천사 같았다. 바람 빠지듯 웃으며 건물 기둥에 비딱하니 등을 기대어 본다. 오직 미적지근한 바람만이 둘 사이를 가르는, 거짓말 같은 새벽이 참 좋았다.
이 순간만큼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하건 문제 되지 않을 듯한 기분이었다. 한유일과 제가 무슨 사이인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그런 문제들을 아무에게도 설명할 필요 없는 적막이었다. 저절로 아주 흡족한 기분이 되어, 강한은 너그럽게 유일을 바라보았다. 이 침묵이 영원히 이어졌으면 싶었다.
하지만 일순 소음이 일었다. 고요한 도로 위, 난데없이 속력을 높여 지나간 차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귀를 울리는 굉음에 유일이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몽롱한 눈은 방황 없이 곧장 강한을 바라보았다. 한은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얼굴을 얼른 굳히며 똑바로 섰다.
“아, 잠깐만 앉아 있으려고 했는데….”
나른하게 중얼거린 유일은 눈을 문질렀다. 항상 순하게만 보이던 눈에 피로한 기색이 쌓여 예민한 기색을 드러낸다.
“한아, 커피 마셔.”
피곤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도 그는 한을 먼저 챙겼다. 제 옆에 두었던 비닐봉지를 불쑥 내미는 손이 미웠다. 한은 곧장 사양하며 그가 들고 있던 캔 커피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너나 좀 마셔라.”
“한이 주려고 샀는데.”
고집은. 속으로만 꿍얼거리며 한은 결국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옆은 바라보지 않고 동물 병원만 응시하며 캔 커피를 따서 마신다. 간판의 LED 불빛이 눈을 아프게 했지만 괜스레 더욱 힘을 주어 버텼다.
“나는 아까도 마셨는데…. 한아, 큰일 났어.”
“왜.”
여전히 커피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유일은 성큼 거리를 좁혔다. 허벅지끼리 닿을 만큼이나 가까이 앉은 그가 불쑥 고개를 기댔다. 딱딱한 한의 어깨 위에 부드러운 머리칼이 닿았다.
“너무 졸려서 어쩌지. 운전해야 하는데…….”
유일의 체향에 미약하게 섞인 향수 냄새가 폴폴 올라가 한의 코끝을 맴돌았다. 소리 없이 욕지거리를 씹어 삼킨 한은 벌떡 일어섰다. 그나마도 한유일의 머리통이 어디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였다.
“차 키 내놔.”
“한이가 데려다주게?”
“어, 내가 운전할 테니까 내놔.”
한유일이 몰고 온 차처럼 비싼 것은 몰아 본 적 없지만, 그래도 왕년에 기사 아르바이트까지 해 본 마당이었다. 기껏 텅 빈 도로에서 유일의 집을 데려다주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새벽 공기가 묘한 거리에서 단둘이 벤치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유일은 언제 졸았냐는 듯 쌩쌩해졌다. 눈이 초롱초롱해져서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창문을 열었다. 달리는 내내 습한 여름 온풍과 에어컨 냉기가 싸우는 듯한 바람이 불었다.
“사장님께서 이름 붙이신 거면 혹시 조만간 키울 예정이야?”
“마음은 가득하신데 못 해. 가족들이 알레르기가 심해서.”
“으음…, 그러면 내가 당분간 돌봐 줄까?”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던 유일이 조심스레 묻는다.
“어? 그래도 돼?”
순간 강한은 저도 모르게 유일을 돌아보았다. 목소리까지 두 배는 커져서 지나치게 반가운 기색을 내보이고 말았다. 민망해진 한은 얼른 정면을 응시하며 헛기침을 쏟았다.
“어차피 오피스텔 계약 얼마 안 남아서 새로 알아보려고 했었어. 그, 새집 구할 때까지만…….”
“응, 나도 무이가 좋으니까 우리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첫인상이 강렬하기는 했지만.”
자그마치 흰 신발에 토악질로 시작한 인연이었다. 차마 닦아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이 비싼 차에 그대로 올랐던 유일을 떠올리자, 한의 입술 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튼 가끔 보면 참 이상한 놈이다.
“그래, 고맙다. 음……. 무이가 좋아하는 사료나 간식은 내가 사다 놓을게. 기본적인 준비물도 챙겨서.”
“와, 우리 집으로 온다는 거야?”
“……현관 앞에만 놓고 갈 거야. 이상한 착각 좀 하지 마.”
“아하하, 알아.”
좌석에 뒤통수를 깊게 기댄 유일은 눈을 감았다. 아직 웃음이 묻은 그대로 고요해졌던 그가 탓하는 듯이 중얼거린다.
“원래 짝사랑의 묘미가 그런 건데.”
“뭐?”
“아무것도 아닌 말 확대 해석 하고, 상상하고, 혼자 이상하게 알아듣는 그런 거 말이야. 그게 짝사랑하는 사람의 소소한 행복인데 너무 야박하다고.”
짝사랑? 충격적인 단어 선택이었다. 그에 이번에야말로 한의 고개는 유일에게 고정되고 말았다. 실로 위험한 행동이었으나 유일은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빙긋 웃으며 제가 팔을 뻗었다. 쑤욱 다가와 핸들을 잡는 몸에서 미약한 향수 냄새가 끼쳤다.
“아, 비켜.”
유일의 체 향을 인식할 때면 항상 스물의 그 방 침대가 떠올랐다. 비를 진탕 맞고 그의 침대에 누웠던 날. 촉촉하고 차갑게 젖었던 머리칼과 열 오른 한유일. 서로의 얽힌 손 때문에 타들어 가던 심장. 그런 것들은 아무리 자주 들여다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추억이었다. 설상가상 이제는 울긋불긋한 한유일의 반나체 영상까지 추가되고 말았으니, 귀까지 붉게 차오른 열기가 쉽게 빠지지를 못했다.
한유일은 너무하다며 투덜거리다가도 금세 조용해졌다. 아주 가만히 바람결에 얼굴을 내맡기고 있는 그는 편안해 보였다. 이대로 수십 시간을 달려도 좋을 만큼.
그 몽롱한 침묵을 일깨운 것은 뜻밖에도 유일의 핸드폰이었다. 미약한 진동에 한유일은 못마땅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통화를 수락하는 손길이 조금 짜증스러웠다. 그래도 언제나 그랬듯이 ‘응.’ 하고 답하는 목소리는 순종적이었다. 같은 답을 몇 번씩 반복하며 성의 없이 통화하던 그는 일순 목소리를 낮추었다. 잠시 한을 힐긋 살피고 부러 데시벨을 낮추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그러나 지방의 새벽 도로는 너무도 조용했으며 차 안에는 그 흔한 라디오조차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그가 아무리 목소리를 낮추고 볼륨 키를 내려도, 강한은 통화 내용을 모두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합의할까? 직접 만나서 왜 그랬는지 이유나 들어 보게.”
[야, 야, 아서라.]
“벌금 제일 높은 사람이 삼백만 원…….”
[그것도 그냥 예상이라 확실하지도 않대. 평균적으로 백만 원에 끝난다더라. 반성문 수십 장 써서 내고 그러니까 말이야. 지금도 너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고 사무실로 만날 전화질이야.]
여태 갈피를 잡을 수 없던 내용이 이제야 윤곽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지난번 난리를 일으켰던 글의 법적 처벌에 대한 이야기 같았다.
“……음, 알았어. 고마워요.”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던 유일은 아주 작고 얌전하게 인사를 했다. 통화를 끊어 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까처럼 능글거리며 짝사랑이니 뭐니 사람 속을 뒤집지도 않고, 입을 다문 채 밖을 쳐다보기만 했다. 강한이 무척이나 바라던 태도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연신 힐긋거리느라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엉뚱한 길목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한이 지금 나랑 헤어지기 싫어서 일부러 틀린 거야?”
“존나 아니거든.”
가라앉았던 적이 없다는 듯 유일은 아주 자연스럽게 웃었다. 강한은 아하하 소리까지 내어 웃는 그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동안 연예계 쪽이라면 일부러라도 관심을 끊고 살았다. 전 국민이 아는 배우도 이름이 가물가물했고 20년, 30년씩 경력이 된 사람이어야만 단박에 알아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런 한조차도 악플과 루머 때문에 고통받고 병들어 가는 연예인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방금 한유일마저도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지나치게 고요한 통화를 하지 않았던가.
분명 그래 놓고 이토록 순식간에 낯을 바꾸다니.
“뭐가 좋다고 웃냐. 하여튼 속도 없어.”
넓은 주차장 안을 미끄러지듯 진입하며 강한은 중얼거렸다. 한유일만큼이나 제 속도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어, 지금 한이 내 걱정 하는 거야?”
“하…….”
지금 이 일은 오로지 한유일과 관련된 일이다. 그가 웃을 수 있다면 저도 상관할 일이 아니다. 강한은 수십 번 되뇌며 입을 다물었다. 입 안쪽을 꾹 물어 놓은 채로 빈자리에 차를 욱여넣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허튼소리라도 뱉을 것만 같아서.
“나 오늘 기분 되게 좋은데. 한이가 운전하는 차도 타 보고, 우리 집 온다는 말도 해 줬고. 무이도 만났으니까.”
“…….”
“옛날로 돌아간 것 같고 좋다.”
덜컥, 급하게 바꾼 기어 탓에 차체가 흔들린다. 강한은 아주 천천히 조수석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기울여 강한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유일의 부드러운 생머리가 눈가를 아른거리고 있었다. 덕분에 눈동자의 진실성은 잘 파악할 수 없었지만, 머리칼 아래로도 눈매가 휘어져 있음이 보였다. 그는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화내지 말자. 화낼 권리 없어.’
강한은 그렇게 한 번 더 다짐하며 차 문을 열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떠나고 싶었다. 단서를 주고 싶지 않다.
“한아, 시간 늦어서 택시도 안 잡힐 텐데. 자고 가.”
그런데 뒤따라 내린 유일이 아주 친절한 제안을 했을 때, 강한은 어쩔 수 없었다.
“너는 참 뭐가 그렇게 다 쉽냐….”
허탈한 웃음이 타박처럼 터져 나갔다.
무엇이 그렇게 쉽느냐는 질문에 한유일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잠시 동안 표정을 잃었고, 금세 되돌아왔다. 소리 없이 웃은 그는 강한을 두 번 붙잡지 않았다. 그래서 한은 묘한 후회를 안은 채로 어두운 거리를 걸어 돌아와야 했다. 가슴 언저리가 연신 따끔거리며 불편한 새벽이었다.
***
다음 날 한은 그 불쾌한 감각을 안은 채로 어머니를 만났다. 지난 어버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자리가 미뤄지고 미뤄지다 이제야 날짜를 찾은 탓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기숙사형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이 일하는 곳과는 차로 달리면 이십 분, 버스로는 삼십 분 거리였다. 그렇게나 가까운데도 모자는 일 년에 두어 번만 얼굴을 봤다.
식사 메뉴는 언제나 한정식이었다. 늘 같은 메뉴를 주문하고 서로의 건강과 안부를 물은 뒤에는 상이 쉽게 조용해졌다. 짧고 고요한 식사는 늘 모친이 계산을 했다. 처음에야 몇 번 고집을 부리기도 했지만 요즘 강한은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인사만 한다. 어차피 매달 송금하는 용돈에 얹으면 그만이었다. 예전처럼 봉투도 아니니 그녀 또한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이제 단출한 가족에게 비극은 먼 이야기가 되었다. 갚기 어려운 빚도, 미래가 걱정되는 자식도 남의 이야기다. 만 원을 쓰면서도 시급의 몇 배인지를 셈하던 강한은 요즘 달마다 십만 원씩 기부를 하고, 모친은 작은 중고차를 뽑았다. 서로를 대하는 태도 역시 나쁘지 않았다. 가끔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옛날이야기를 가볍게 웃으며 꺼내기도 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가까워질 수는 없었다. 서로가 말과 행동으로 남긴 흉터가 너무 짙었다. 상대를 볼 때마다 과거의 죄를 떠올리게 하는 낙인이었다.
오늘 역시 그 낙인을 오래 바라보지 못하고 일찍 돌아오는 길. 출근 시간까지 한참 남은 강한은 먼 길을 오래도록 걸었다. 그러는 내내 말 한마디를 곱씹었다.
‘너는 참 뭐가 그렇게 다 쉽냐.’
그 말이 또 다른 낙인이 된 것만 같아, 강한은 연신 한숨을 쉬었다. 터벅터벅 걷는 걸음마다 심장이 까칠까칠하게 배겨 왔다.
그 후로도 묘하게 갑갑한 통증에 내리 시달린 탓에 강한은 조금 예민해졌다. 그래, 뭐, 말을 조금 밉게 하기는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싶은 억하심정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확실히 한유일은 쉬운 구석이 있었다. 분명 가볍고 경솔한 놈은 아니지만, 여하튼 쉬운 놈이었다. 특히 강한은 차마 상상 속에서도 할 수 없는 말들을 그는 너무도 쉽게 하고는 했다.
교육 중 손이 스치기만 해도 ‘한이는 경험이 많아서 그런가, 스킨십이 자연스럽네.’ 따위의 말로 사람 성질을 건드려 대고 ‘나는 한이밖에 없어서.’ 같은 말을 덧붙여 열을 올렸다. 그럴 때면 강한은 붉으락푸르락 난리가 난 얼굴을 굳힌 채 침묵했다. 입술을 일자로 다물어 고집스럽게 버텼다.
아무렇지 않아야만 했다. 그의 도발에 반응하는 것 자체가 어떤 가능성을 증명하는 행위였다.
“이제 무이가 나 싫어하나 봐. 다 주사 때문이야…. 요즘은 산책 가도 시큰둥해.”
하지만 한유일은 쉽게 빈틈을 파고들었다.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도록 했고, 질문을 덧붙이고 싶어 안달이 나게끔 만들었다. 이번 역시 강한은 ‘시큰둥? 왜? 또 기운 없어?’ 같은 말을 곧장 뱉어 내고 싶었다.
“이사할 집 계약했어. 무이는 열흘만 더 부탁할게. 그리고 교육도 그쯤이면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더 필요한 거 없지?”
사적인 질문을 모두 혀 밑에 숨겨 놓았다. 깔끔하게 정돈한 본론만을 전달하며, 강한은 스틸 피쳐 안에 세정제를 넣었다. 따라 해 보라는 듯 슬쩍 턱을 들자 유일은 아주 천천히 하얀 가루를 떠냈다.
“그때도 말했지만 기술보다는 현장 이야기가 더 필요한데.”
“다 대답해 줬잖아, 뭐가 더 필요해.”
“한이는 어떤 메뉴 만드는 게 제일 좋아?”
또 쓸데없는 소리. 강한은 미간을 좁히며 유일의 피쳐를 낚아챘다. 거칠게 빼앗아 온수를 붓고, 아주 무표정한 얼굴로 돌려주었다.
“아메리카노.”
딱딱한 대답에도 유일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역시 한이도 일하기 싫은 건 똑같구나.’ 당연한 말을 하며 웃는 낯이 지나치게 해사했다. 강한은 괜히 주방 등을 조금 더 어둡게 만들며 머들러를 쥐었다.
“그럼 먹는 입장에서 좋아하는 음료는?”
달그락거리며 세정제를 섞던 손이 멈췄다. 유일에게만큼은 대답할 수 없는 음료의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깊숙이 사그라졌다.
“이거 닦는 데나 집중해. 봐, 온수에 잘 섞고. 포터 필터를 빼서….”
집중을 운운했지만 기실 한유일은 어떤 설명도 되묻는 일이 없었다. 한 번 이야기하면 바로 이해하고 제 것으로 만드는 놈이었다. 그래서 쓸데없는 질문을 계속 이어 가도 더 타박할 길이 없었다.
물 흐르듯 유려하게, 그는 커다란 커피 머신 세척을 제대로 따라오며 연신 물었다. 가장 짜증 났던 손님, 웃겼던 일, 제일 오래 일했던 날 따위의, 연기에는 필요도 없을 만한 질문들이었다.
“이사는 어디로 가는 거야? 집들이하면, 나 초대해 주려나.”
점차 사적인 영역으로 기울어 가던 질문이 아예 노골적인 방향으로 틀어졌다. 한은 머들러를 짜증스럽게 내려놓았다.
“그게 다 영화랑 무슨 상관인데.”
“음……. 글쎄, 내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도움 될 것 같은데.”
말끝을 내려놓으며 유일은 그만큼 깔끔한 몸짓으로 벽에 기대어 섰다. 이어지는 음성은 말로 듣는 영화였다.
“내가 맡은 역할은 대인 기피증이 있는 바리스타야. 사람을 대하기가 어려워서 얼굴이 보이지 않게끔 가려진 카페를 만들었지. ‘드링크 유어 럭’이라는 이름의 작은 가게는 매표소처럼 낮은 틈으로 서로의 손과 음료만 오고 갈 수 있어. 그런데 어느 날 특이한 손님이 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게 손이 예쁘고 커다란 사람.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고 종이에 적어서 주문을 하는 그런 사람.”
영업이 끝난 카페의 주방은 농담으로라도 따뜻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텅 빈 공간을 얼린 에어컨 바람과 차가운 타일 바닥, 도처에 널린 스틸 집기로 인해 어둑한 내부는 더 서늘하고 음산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한유일이 서 있는 곳만큼은 달랐다. 냉랭한 에어컨 바람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어떤 훈기가 솟아 나오는 것만 같다.
강한은 그가 무대에 선 모습은 본 적 없었다. 그러나 이 짧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어떤 직감을 했다. 무대 위의 한유일은 분명 빛날 것이다. 그에게는 시선을 뗄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바로 알게 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한유일은 방금 그 사랑에 발을 담근 사람처럼 달콤하게 웃었다. 쿵, 쿵, 쿵. 한의 심장이 제어를 벗어나 뛰기 시작한다.
“그래서 매일 사심 가득한 덤을 얹어 줘. 행운이 담긴 네잎클로버 모양 쿠키인데, 그 사람 손가락에 클로버 모양 타투가 있어서 선택한 거였어. 싫지 않았는지…. 그 사람도 언젠가부터 주문 종이와 함께 샌드위치나 초콜릿 같은 걸 넣어 주는 거야. 서로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통한 것만 같아. 어쩌면 얼굴을 마주하고 고백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갑자기, 정말 날벼락처럼. 그 사람이 사라져. 더 이상 가게에 오지도 않고 소식을 들을 곳도 없어.”
이성을 벗어나 쿵쿵 달려 나가던 맥박이 어느 순간 뚝 멎은 기분이 들었다. 강한은 어느덧 달콤함이 사라진 유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텅 빈 시선이 허공에 맞닿았다.
“그렇게 나는 사귄 적도 없는 사람과 이별을 먼저 한 거야.”
한유일은 일그러진 제 첫사랑을 바라보며 여전히 근사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처럼.”
나긋한 고백이 한을 사지로 몰았다. 이제 더는 뒷걸음질할 구석이 없었다. 강한은 체념하듯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상상해 보았던 수많은 재회 중 어느 날은, 한유일이 다 잊었기를 바랐다. 혹은 아예 창피해하기를 원하기도 했다. 그 모든 날들이 한순간 치기였던 것처럼, 그때 우리가 어렸다며 잘 지냈느냐 묻기를 바랐다. 만나는 사람이 있노라고 소개시키고 아예 결혼이나 아이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 주면 더욱 좋을 것 같았다.
그래 준다면 두 번 이별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때 내가 갑자기 연락 끊었던 이유, 너 알면 후회될 거야. 지금 이런 짓들.”
강한에게는 단번에 정을 뗄 수 있는 무기가 있었다. 여태 쓰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욕심이었다. 죄책감을 변명 삼아서, 이렇게라도 한유일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제법 귀했던 모양이다. 또 다른 이별을 뱉어 내면서야 한은 제 본심을 알았다.
“그러니까… 내가 사고를 쳤는데, 너희 소속사에서….”
천만 원이 들어 있는 체크 카드를 늘 지갑에 넣어 다녔으면서 말은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니. 강한은 두서없이 튀어나오는 말을 잠시 멈춘 채 갑갑한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에 반해 유일은 아주 침착해 보였다. 문득 뒤바뀐 분위기를 낯설어하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선 그는 오래 기다려 온 무언가를 목도한 사람 같았다.
“지금 소속사가 아니라, 그때 그. 아무튼 거기서 천…,”
철컥, 철컥!
문득 불길한 소음이 울렸다. 축축하고 애절하던 분위기를 한 번에 박살 내는 소리였다.
눈이 동그랗게 커진 한은 얼른 유일을 잡아챘다. 저도 모르게 한유일이라도 숨겨 놔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하얀 손목을 잡아끄는 순간.
“허, 뭐야, 왜 문 안 잠겨 있지? 점장님이 까먹으셨나?”
일순 어둡게 잠들어 있던 홀의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서로의 팔목을 붙든 채 멈춰 서 있던 한과 유일은 눈을 찌푸렸다.
“아, 개 추워. 에어컨도 켜 놓고 가셨나 봐, 미쳤어.”
애절한 이별의 순간을 박살 낸 현경은 성큼성큼 홀을 가로질렀다. 점차 가까워지는 걸음 소리에 한은 눈을 감았다. 동시에 유일을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륵 풀렸다. 앞으로 닥쳐올 무언가를 잘 알고 있다는 듯, 그는 천천히 제 귀를 막았다.
“아니, 근데 요즘 점장님 왜 정신을 빼놓고 사시는 거즈악, 으악! 아악!”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조우였다.
현경은 카운터와 이어져 있는 작은 바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자주 원목이었으면 더 예뻤을 것이라고 말한 테이블 위로 긴 손가락이 끊임없이 피아노를 쳤다. 타다다닥, 다닥, 닥, 초조한 음계가 불안한 심정을 대변한다.
“아니, 어떻게 그동안 말 한마디를……. 어쩜…….”
혼이 빠져서인지 현경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았다. 원한을 늘어놓는 귀신처럼 오싹한 모습에 한은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현경아, 너 뭐 놓고 갔다고 했지?”
일부러 무심히 물으며, 따뜻한 차 한 잔을 현경의 앞에 놓아 주었다. 현경은 하얗고 뜨거운 머그컵을 흉물 보듯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확 들었다. ‘장난해요?’ 입술만 달싹인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강한과 유일, 그리고 머그컵을 번갈아 오갔다. 지금 이 상황에 차나 마시라는 게 가당키는 하냐는 눈빛이었다.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은 강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어쩌면 배신감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이마저 한 살 어린 한유일과의 오랜 인연을 어떻게 설명한다는 말인가. 지나치게 각별해 보인다면? 그래서 더 이상 저와 한유일을 따로 떨어트려 구분할 수 없다면? 혹은 그의 첫사랑과 저의 연관을 찾아내기라도 한다면…….
“저, 현경 씨라고 했나요?”
한의 으름장 때문에 내내 물러나 서 있던 유일이 성큼 카운터 코너로 다가갔다. 불쑥 가까워진 거리에 현경은 ‘히익!’ 소리를 내더니 돌연 스툴을 돌려 앉는다. 회전식 스툴이 빙그르르 돌아가는 소리가 적막한 카페를 울렸다.
“……저, 저는, 절대 배우님과 이렇게 사적으로! 만날! 생각이 없었어요!”
“네, 죄송합니다.”
“아아아아니, 배우님이 잘못하신 건 전혀 아니고요! 그러니까! 그, 사생활이, 확실히 구분, 있으신데, 쫓아왔다고 오해하실까 봐……. 정말 저는 일부러 온 게 아니고요. 흑…… 근데, 너무 잘생기셨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등을 돌리고 앉은 현경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허공에 팔과 다리가 모두 팔딱거리며, 방금까지 눈이 죽어 있던 여자의 행방을 물었다. 강한은 한숨으로 대신 답하며 위험 지대에 놓인 머그잔을 치웠다.
“한… 아, 우리 한이 형이랑은 고등학생 때 잠깐 알았어요.”
쿠당탕.
물로 컵을 헹구던 한의 손이 미끄러졌다. 머그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개수대를 나뒹군다.
“플래시몹이라고 요즘도 그런 말 아나요? 아하하, 모르시는구나. 아무튼 그걸 하다가 좀 가까워졌는데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어요. 형이 저를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에엑, 왜요? 미친 거 아니에요? 아, 죄송…….”
형이라니. 생각지 못한 호칭에 강한은 유일을 휙 돌아보았다. 경악한 눈동자로 현경처럼 ‘미친 거 아니야?’ 하고 물어도, 유일은 빙긋 웃어 보였다.
“지금은 작품 때문에 커피를 배워야 하는데 아무 데서나 배우기는 좀 그랬어요. 작품 보안 문제도 있으니까. 그래도 동창이 다리를 놔 준 덕분에 형한테 잠깐 배우는 거예요. 제가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고.”
“아아……. 헐, 그래서 러너러너 촬영 때도 여기서 지내고 계셨구나.”
“네.”
한유일은 대놓고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한을 바라보았다. 현경이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어 천만다행인 일이다. 저 능구렁이 같은 얼굴을 보면 누구나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형이 고등학생 때 얘기를 안 한 이유는 아마……. 아무 사이 아니라서?”
유일은 여전히 느긋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끝을 늘였다.
“별로 특별했던 사이도 아닌데 잘 알았던 것처럼 말 퍼트리는 성격은 아니니까.”
“하긴, 점장님이 그런 타입은 아니죠….”
나긋나긋한 설명에 현경은 금세 침착해졌다. 내내 흉포하게 사방으로 뻗던 팔다리가 얌전해져선, 목소리 옥타브까지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어쩐지 한의 기분만큼은 더더욱 심해로 가라앉았다. 일이 생각보다 쉽게 정돈되고 있는데도 심상이 검게 물들었다.
“그, 그럼 저는 이제 제 충전기만 찾아서 집에 갈게요. 점장님 거기 카운터 안쪽에요….”
현경은 이제 아주 부끄러운 듯 고개까지 푹 숙이고 웅얼거렸다. 그간 본 적 없는 모습에 강한은 희귀한 꼴 본다는 듯 혀를 차며 콘센트 주변을 살폈다. 까만 기분은 그저 피로 탓으로 넘겼다. 지나치게 피곤한 날이었다. 얼른 이 상황이 끝났으면 싶다.
“사생이라고 오해 안 하니까 그냥 보셔도 되는데.”
“아뇨, 아뇨? 저는 배우님을! 떳떳하게! 돈을 내고! 볼 겁니다!”
“아하하,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강한의 바람과는 달리 두 사람은 아주 화기애애했다.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기이한 상태에서도.
제대로 눈도 못 맞추면서 이 알콩달콩한 분위기는 뭐람. 강한은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얼른 충전기를 내밀었다. 등 뒤에서부터 어깨를 넘겨 건네주자 현경은 더듬더듬 받아 들고 그대로 게걸음을 걸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오…. 배우님, 건강하시고요, 밥 잘 드시고, 살 빼지 마시고, 몸 만드느라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홍알홍알 흩날리는 목소리가 영 불안했다. 재차 혀를 찬 한이 유일의 어깨를 툭 쳤다.
“여기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올게.”
저러다 넘어지지. 덧붙이며 강한은 얼른 카운터를 벗어났다. 어두운 데님 앞치마를 아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문 근처에서 더듬대고 있던 현경을 이끄는 몸짓이 자연스러웠다.
홀로 남은 유일은 현경이 앉았던 자리를 정돈하기 위해 카운터 바깥으로 걸었다. 둥글게 마무리된 카운터 라인을 따라 느긋하게 걷던 걸음이 우뚝 멈추어 선다. 줄지어 늘어진 스툴 중 오직 하나만이 반대편을 보고 있었다. 마치 카페 출입구를 바라보듯 틀어진 그 의자가 제 처지 같았다.
한유일은 정리하려던 손을 거둔 채 그 옆에 기대어 섰다. 비딱하게 테이블에 기대어 서서, 숨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 한이 형은 참 죄도 많아.”
누구나 좋아할 만한 사람이 다정하기까지 해서 큰일이었다. 그러니까 저 같은 놈도 꼬여서 팔자가 사나워지는 거다.
한유일이 그렇게 자조하는 동안, 강한은 현경의 주먹을 받아 내고 있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로맨스는 단 일 퍼센트도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아, 현경아, 너 주먹이 날로 강해진다. 지금이라도 권투를 해 보자.”
“점장님 지금 봐드리고 있는 거거든요. 진심 담았으면 못 일어나심.”
“네, 봐주셔서 감사하고……. 이왕 봐주는 김에 비밀로 해 줘.”
“아, 당연하죠. 우리 배우님 사생활 터치 진짜 싫어하거든요? 소문나면 제가 범인인 거 바로 아실 텐데. 얼마나 미움받으려고요……. 솔직히 저 얼굴에 진작 떴어야 맞는데, 배우님 가치관이 너무 시대를 앞서가서 그동안 팬이 많이 안 모인 거라고요. 그래서 더 열등감 오지는 새끼들도 꼬이는 거겠지만. 아, 또 생각하니까 열받네?”
카페에서부터 대로변의 택시 승강장까지 가는 길은 기껏해야 300미터 남짓이었다. 따라서 랩처럼 터져 나오는 현경의 열변은 빼곡히 서 있는 택시 앞에서도 계속되었다.
“악플 지어내서 쓸 땐 언제고 배우님이 봉사 활동으로 하자니까 다 수락했대요. 아니, 봉사 활동이 뭐야. 진짜? 합의금 몇 천씩 뜯어야 되는데!”
내내 ‘그래, 알겠고, 현경아, 점장님 피곤하다. 얼른 들어가라…….’ 하고 힘없이 중얼거리던 강한도 이쯤에서는 표정이 굳었다.
늘 여우처럼 제 잇속만 따지는 것 같다가도 이상한 데서 무른 놈이다. 한유일은 고등학생 때도 그랬다. 할 말 다 하고 제 좋을 대로 사람들을 굴리는 듯하다가도 정작 범철이 같은 새끼를 가만 놔두고는 했다. 뱀인 척은 다 하고 정작 요령 없이 손해만 보는 것이다.
저에게 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11년이나……. 기다리라는 말 하나 믿고 정말 기다리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연기를 하면서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수없이 많이 만났을 텐데도 정말 미련스럽게.
“점장님……, 화나셨어요? 제가 말이 좀 세게 나갔죠. 죄송….”
“아…. 아니야, 들어가라. 저기 택시 아저씨가 노려보시네.”
“넵.”
밀랍처럼 굳었던 얼굴을 억지로 펴면서 강한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고서는 금세 딱딱해진 얼굴로 뒤를 돌았다. 오늘은 기필코 한유일과 마침표를 찍어야겠다.
그렇게 강력한 다짐을 하면서 돌아오자마자 선수를 빼앗겼다. 한유일은 이미 매장을 다 정리해 놓은 채 문 앞에 서서 차 키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는 것이다.
“형, 저도 데려다주세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한은 아득히 눈을 감으며, 딱 삼십 분만 결별의 순간을 미루어 두었다.
난데없이 저도 데려다 달라는 억지를 피워 놓고 한유일은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그러면 함께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을 고지해 주어도 요지부동. 도리어 ‘형이 저번에 운전했잖아요.’ 하고 재차 공격만 얹어 줄 뿐이었다. 덕분에 강한은 조수석에 올라타며 씩씩거렸다.
“너 그 형 소리 또 하면 죽는다.”
안 그래도 이기기 어려운 보스 몬스터가 사기 스킬을 업데이트해 온 것 같았다. 한유일은 낮게 웃을 뿐 수락은 없이 핸들을 꺾었다. 가는 동안에는 또 시답잖은 질문이 수십 개 쌓였으나, 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 기필코 끝을 내고 말겠다는 장엄한 결심만 되뇌었다.
물론 다짐처럼 쉬운 말은 아니라, 우습게도 현관 앞까지 따라간 후에야 입이 열렸다.
“잘 들어가고 카페 이제 오지 마라.”
대뜸 벌어진 선전 포고에 유일은 영문을 모르는 낯이었다. 깨끗하고 널따란 오피스텔 복도를 걷던 걸음이 뚝 멎었다가 다시 제집으로 향했다.
“너 똑바로 듣고 있냐? 이제 진짜 오지 말라고.”
“왜?”
아무렇지 않게 현관문 앞까지 걸어간 한유일은 미운 일곱 살처럼 물었다. 강한은 두 배로 피로해진다.
“너 배울 거 다 배웠다니까. 그리고 현경이한테도 들킨 마당에 또 누가 알게 되면 어쩌냐?”
“알면 왜? 잘 지내면 좋잖아.”
“난 그럴 생각 없다고. 이제 우리 보지 말자니까.”
“왜?”
하, 시발……. 강한이 애꿎은 벽을 쿵 치고 그 위에 이마를 박았다. 그에 내내 초등학생처럼 굴던 유일은 손을 잡아끌었다.
“형, 그러다 다쳐요.”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형 소리를 뱉는 얼굴이 귀여웠다. 귀여워서, 더욱 화가 났다.
“야. 나 그때 너희 소속사에서 천만 원 받았어.”
그래서 종국에는 마지막 보루를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바글바글 끓어오른 열 때문인지 이번에는 고백이 조금 더 쉬웠다. 유일이 느끼기에 조금 더 야속하고 비열하도록 범철의 만행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런데도 한유일은 아주 여상했다. 그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는 태도가 강한을 한술 더 뜨게끔 만들었다.
“……너 데뷔 어그러졌잖아. 그거 소속사랑 문제 있었던 거지? 나 때문일 거야, 아마.”
아주 오랜 시간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스스로에게도 말로서 정의하지 못했던 생각이다. 그럼에도 입 밖으로 쏟아지는 언어는 무척 유려했다. 누군가 저 대신 말을 해 주고 있는 듯했다.
제집 현관문 앞에 선 채로 가만히 한을 바라보고 있던 유일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평소 모습 그대로 그는 조금쯤 웃으며 ‘그건 아니야.’ 하고 확답했다. 그러고는 덧붙여 물었다.
“그런데 그게 왜 나를 못 보는 이유가 돼?”
지나치게 순진한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강한은 말을 잃었고 한참이나 눈을 깜빡이던 유일은 ‘무이 보고 갈래?’ 하고 물었을 뿐 일의 진상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너 진짜 또라이냐? 인간적으로 네 앞길을 막은 새끼가 여기 있는데, 배신감도 느끼고 그래야 맞지 않아?”
“막은 적 없으니까.”
가장 꺼내고 싶지 않았던 최후의 보루를 한유일은 종잇조각처럼 대했다. 대수롭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린 그가 비밀번호를 누른다.
“계약은 내가 무른 거야. 나는 말이야, 한아. 내가 누구를 좋아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배우가 되기로 결정했어.”
한에게는 유일의 선언보다 번호 키가 뿜어내는 단조로운 기계음이 더 현실적으로 들렸다. 헛웃음이 숨처럼 쏟아져 나왔다.
***
다음 날부터 강한은 경고했던 대로 바리스타 수업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작별을 뜻하지는 않았다.
한유일은 반격하듯 아예 대낮에 카페를 찾았다. 평소보다 더 스포티한 운동복 차림에 검은 야구 모자를 눌러쓴 채로,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온 그는 어버버 굳은 현경에게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러더니 친절하게도 웃으며 쇼핑백을 내밀었다.
“초기 프로그램북 같은 건 없으실 것 같아서요.”
하필이면 주말 대낮,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각이었다. 남다른 발성과 발음, 얼굴을 반쯤 가려 놔도 시선을 끄는 외양 탓에 카페 안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한유일 아니야?’ 하는 수군거림과 찰칵거리는 셔터 음이 거품처럼 불어났다.
“뭐야…, 저 사람 왜 현경 누나한테 저래요?”
오늘 역시 낑낑거리며 우유 박스를 옮기던 치언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눈을 흘겼다. 달아오른 눈동자에는 한이 잘 아는 빛깔이 스며들어 우중충했다.
얼른 치언의 앞을 가로막아 선 강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발을 동동거리며 난리가 난 현경은 필사적으로 포스 기계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고, 유일은 고개를 갸웃 틀며 웃었다. 그동안은 봐주었다는 듯한 미소였다.
“헐, 끼 존나 부리네요.”
어느새 등 뒤로 바싹 선 치언이 토악질 흉내를 낸다. 멀리서도 뉘앙스가 다 느껴질 만한 행동이었다. 분명 유일에게도 전해졌으리라.
하지만 한유일은 언제나처럼 상대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느긋하게 웃으며 음료를 기다렸다가 카페를 빠져 나갔다. 현경뿐 아니라 치언에게도 예의 바르게 묵례를 한 뒤였다. 그 순간에야 웅성거리던 소음은 확연히 선명해졌다. ‘와, 맞지? 실물 개 쩐다.’ 그런 감탄사가 카페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다.
「한이네 커피는 역시 맛있어.」
가게를 나간 즉시, 유일은 커피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그야말로 얼얼한 반격이다.
강한은 물끄러미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면전에서 멸시에 가까운 취급을 받아 놓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하얀 얼굴이 거기 있었다. 너무도 의연해서, 보는 사람을 더 화나게 만드는 아주 무고한 낯이.
“치언아. 너 손님한테 그 싸가지 뭐냐?”
“…예?”
“개념 챙겨 가며 일하자.”
강한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처박았다. 같은 메뉴를 다섯 번이나 잘못 만들었을 때도 본 적 없는 냉랭한 태도에 치언은 곧바로 조용해졌다.
그 뒤로 종일 치언이 제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한은 평소처럼 농담 한마디 건네주지 않았다. 그런 자비를 베풀기에는 제 속이 너무 시끄러웠다.
‘하필 치언이가 있는 날 올 건 또 뭐야.’
안 그래도 현경 때문에 유일에게 적대심을 가지고 있는 치언이다. 그 적대감에는 열등감이 무척 짙게 뒤섞여 있어서, 강한은 여러 번 그의 낯 위로 범철이 드문드문 스치는 듯 느꼈다. 그래서 더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는데…….
샷을 내리다 말고 우두커니 서서 고민하던 강한은 내팽개쳤던 핸드폰을 들었다. 괜히 유일의 사진을 한 번 더 눌러 보고 급하게 방향을 튼 손가락이 상수 이름을 찾았다.
「상수야.」
호명 한마디에 숫자가 바로 사라졌다. 도리어 놀란 강한이 눈을 크게 뜨는 사이, 울음 가득한 답장이 돌아왔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형니뮤ㅠㅠㅠㅠㅠㅠㅠㅠ 저 진짜 한유일 땜에 못 살겠어요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어쩐지 한의 마음을 죄다 읽은 말이었다.
***
사람은 언제든 죗값을 받게 되어 있다. 단순히 소망에 그치는 말일지 모르지만, 강한은 적어도 인과응보를 굳게 믿고 살았다. 때문에 아무리 원망스러운 상대라도 그 끝까지 쫓아가 복수하려는 마음은 갖지 않았다. 살다 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이 스스로 지은 죄를 상쇄해야 할 날들이 오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대세, 한유일! 악성 댓글 작성자들과 훈훈한 봉사 활동」
하지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다. 상수가 들이민 화면 속의 기사가 강한을 핑글핑글 돌게 했다.
화병이 날 것 같아 안 되겠다며 급하게 휴가를 낸 상수는 아예 숙소를 잡았다. 역전에 위치한 호텔은 제법 크기도 크고 인테리어도 세련되었으나, 주변에 괜찮은 술집이 없었다. 때문에 술상은 상수의 숙소에 차려졌다.
강한은 줄지어 늘어선 사진들을 못 본 척하며 술을 따랐다. 안주로 사 온 치킨은 뒤적거리기만 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입맛도 없는 밤이다.
“최초 유포자는 범철이 그 새끼 맞대요. 우리 예상대로요. 봉사 활동도 나왔대요.”
“…진짜 할 짓도 없네.”
“한유일이 그 새끼 때문에 봉사 활동도 빵 나눔으로 정한 거라고 하면서 웃는데, 뭔 개소린지. 암튼 진짜 열도 안 받나. 나만 화나요? 아니죠? 형도 열받죠?”
분통을 터트린 상수는 아예 맥주병을 통째로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검은 유리 테이블 위에 핸드폰이 나동그라지며 소음을 낸다. 한은 번쩍거리는 액정을 잡아다가 제 앞에 끌어 놓았다. 애써 외면했던 사진 속 한가운데에 선 유일이 웃고 있었다.
쾌청한 여름날 푸르게 드리워진 나무 앞이었다. 그의 양옆으로는 얼굴이 모자이크로 뭉개진 댓글 작성자들이 빵을 들고 있었다. 소시지가 올라간 납작하고 울긋불긋한 빵은 남의 인생을 망치려고 들었던 죗값이라기에는 무척 가벼운 피자 빵이었다. 강한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재차 소주를 채웠다.
“시발, 그때 매점 얘기인가 보네…….”
얼굴이 가려진 사진 속에서도 범철을 구분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가 특이한 인상착의를 지녀서는 아니었다. 그저 너무도 자주 곱씹은 탓에 잊을 수가 없었다.
후회는 항상 피자빵을 미끼 삼아 범철을 불러내던 유일의 목소리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날, 유언비어를 퍼트리던 범철이를 제 손으로 혼내 주었다면 어땠을까. 운동장을 걸어가며 친구와 한유일을 욕하던 범철을 그냥 모르는 척했다면. 도서관 뒤에서 더러운 말을 하던 범철에게 협박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한유일을 끌어내리려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았을 텐데.
우리가……. 헤어질 필요 없었을 텐데.
“시발, 그때 매점 얘기인가 보네…….”
강한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재차 소주를 채웠다.
“매점이요? 아아니, 제가 매니저 형하고도 친하거든요? 이게 말이 되냐고 막 뭐라고 했는데 매니저 형도 뭐 본인이 그렇다고 하면 어쩔 수 없대잖아요.”
“……그렇겠지.”
“하, 그래도 형이 유일이랑 화해해서 좋아요……. 그동안은 이런 얘기 같이 할 데도 없었는데.”
아무래도 한유일이 이딴 식으로 속을 뒤집은 경험은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알 만하다고, 강한은 함부로 비난하며 침대에 등을 기댔다. 딱딱한 받침과 푹신한 매트에 근육이 배기는 느낌이 들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 언제인가, 이렇게 비슷한 열기가 솟구쳐 올랐던 때가 있었다. 왜 한유일은 혼자서 이상한 오해를 모두 껴안고 반격조차 하지 않는가. 화가 나서 따져 물었던 날이 있다.
그때 그는 모두 알고서 한 일이라고 답했다. 모르고 당한 게 아니라고, 범철이 같은 애들은 별로 손쓸 필요도 없다고. 그런 부류는 자기 무덤을 알아서 파니까. 그냥 놔두는 것이 오히려 방도라는 것처럼 담담하게도 이야기했다.
그런데 정말일까?
벌써 11년이 흘렀지만 범철은 제대로 된 벌을 받지 않았다. 한유일과 저는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동안 그는 또 아무런 이야기를 댓글로 쓸 수 있을 만큼 용감하게 살았다. 강한이 천만 원에 묶여 유일을 억지로 밀어내고 또 밀어내며 괴로워하는 동안, 그는 뻔뻔하게 소속사에 연락을 했고 봉사 활동에 나가 한유일을 만났다.
“형, 그래도 듣기 불편하면 말씀하세요.”
“뭐가.”
빌어먹을 세상이 한유일에게만 가혹한 것 같다. 강한은 한숨처럼 물으며 눈을 감았다.
“한유일이 잘못했던 거라면서요. 멀어진 거…. 그러니까 이런 얘기도 그렇게 공감 안 되실 수 있고…….”
어쩌면 그 가혹한 무리 선두에 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강한은 바람 빠지듯 웃으며 실토했다.
“아니야. 그것도 구라야.”
“예?”
“한유일 잘못 없어. 다 내가 잘못했지. 그것도 그 새끼가 지 혼자 갖고 간 거야.”
“……정말요?”
“그래, 등신같이 착해서. 착한 게 아니라고 하는데, 그런데, 착해서…….”
술이 가득 올라 말을 똑바로 마무리 짓는 일조차 어렵게 느껴졌다. 강한은 울적한 기분으로 대충 말을 마무리 지으며 기댔던 등을 세웠다. 똑바로 앉아 가부좌를 틀고, 불쑥 고개를 들어 본다. 마주한 상수의 얼굴은 얼떨떨해 보였다.
“그 자식은 손해 보고 사는 게 버릇이 됐어.”
“…예에.”
“안 되겠다.”
“네?”
“애먼 사람만 손해 보고 사는 게 이상하잖아. 안 그러냐?”
“예, 그렇기는 한데, 어어, 형님! 어디 가세요!”
하루 종일, 아니, 며칠, 몇 주 내내 지글지글 끓던 속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갔다. 강한은 애꿎은 상수의 핸드폰을 팍 밀어내고 일어섰다. 당황한 상수가 제 핸드폰의 안위와 강한 사이에서 갈등하는 동안, 단단한 몸은 술상을 지나쳐 걸었다. 비척비척, 보폭 큰 걸음이 방을 가로지른다.
“한유일을 만나야겠어.”
“악, 안 돼요, 형님. 지금 그렇게 취하셔 가지고!”
“아니. 잘 갈 수 있어.”
“아! 형님, 그럼 제가 부를게요! 한유일보고 오라고 하면 되죠!”
현관 앞까지 가서 바짓단을 붙잡힌 강한은 물끄러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호텔 카펫에 볼이 짓눌린 채 엎드린 상수는 애절하게도 그를 올려다보았다. 흠, 침음을 쏟은 한이 그대로 고개를 틀었다.
“그래, 그러면 되겠다.”
어차피 상수도 할 말이 많을 테니까. 둘이서 지랄하면 듣는 척이라도 하겠지. 강한은 힘없이 중얼거리며 천천히 주저앉았다. 현관 바로 앞 벽에 기대어 앉자, 얼른 다시 술상까지 기어간 상수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란스러운 통화 소리가 귓가를 왕왕 울리는 것만 같아 한은 다시 눈을 감았다. 유일이 오면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해 둘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일단은, 그렇게 사람들 좀 봐주고 살지 말라고 뾰족하게 일러두어야겠다. 그다음에는……. 정말로, 아직도, 내가 좋은지. 그러니까…. 누구를 좋아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배우라는 건 어떻게 될 수 있는지. 가능한 건지.
“아무튼 빨리 와라. 너 인마, 아주 호온날 줄 알아!”
상수가 외치는 말이 귓가를 쿵쿵 두드렸다. 강한은 실실 웃으며 ‘그래, 혼날 줄 알아.’ 하고 맞장구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