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art. 3 우리는 서로의(2권) (4/12)

Part. 3 우리는 서로의

서로를 향한 감정이 같은 빛깔임을 알아챘을 때, 비로소 연애는 시작된다. 경험이 없는 강한조차도 그 정도 기본적인 공식쯤이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 상황은 여러모로 예외에 속했다. 유일의 고백은 한이 잠든 틈을 타 이루어졌고, 강한은 그의 마음을 몰라야 했다. 이제 와서 몰래 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민망했다. 설사 선수를 뺏어 먼저 고백을 한다 해도 그다음이 또 문제였다. 데뷔한다면 단박에 유명해질 것이 뻔한 저 한유일에게 과연 남자와 사귄 전적을 만들어 주어도 되는가. 그렇게 심란한 물음을 떠올리면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렸다. 서너 번씩 꼬아 만든 응용문제 앞에, 기본 공식 하나만을 달랑 들고 선 기분이다.

“아이, 형님. 듣고 있으신 거예요?”

고심 가득 담긴 얼굴 앞으로 상수가 손을 휘휘 저었다. 까치발까지 들고 낑낑거리는 그를 한은 아주 느리게 내려다보았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더라.’

방학식이 끝난 오후, 교무실에 볼일이 있다는 한유일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금방 나올 줄 알았던 그가 이십 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자 학교는 점점 더 조용해졌고 상수는 수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가끔 이래요. 저번에는 한 시간 걸린 적도 있다니까요?’로 물꼬를 텄던 것은 기억하는데, 그 뒤가 흐릿하다. 기억을 더듬어 가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오늘 빙수 먹자니까요.”

예전이었다면 기분 안 좋으시냐며 눈치를 살폈을 상수가 많이 달라지기는 했다. 한은 비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빙수 생각에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상수는 창턱에 손을 짚고 몸을 들썩거렸다.

“삼십 분 넘게 안 나오면 한유일한테 사라고 해야지!”

“상수야.”

“……아니, 기다린 시간이 있, 넵, 알겠습니다.”

기둥에 느슨하게 기대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상수의 입이 다물렸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약효가 다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강한은 숨죽여 웃으며 교무실 창문 너머를 힐긋거렸다. 촌스러운 전통 문양의 시트지 사이로 드문드문 한유일의 하얀 얼굴이 보인다.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그의 낯은 외면하기 어려운 생김을 하고 있었다.

“야, 상수야.”

“네?”

“한유일. 데뷔하면 온갖 놈들이 다 친했었다고 하겠지?”

“아하학, 아마도요?”

조용히 살아도 묻히지 않을 얼굴로 매년 반장에 각종 과목 부장까지. 아마 한유일과 단 하루라도 함께 학교를 다닌 학생이라면 모두 그를 기억할 것이다. 지난번 생일만 해도 그와 같은 반을 지냈던 애들이 수십 번이나 귀찮게 굴지 않았던가.

“이상한 말 하는 애들도 있겠지?”

“잘난 사람들이 그래서 괴로운 거라잖아요.”

상수는 율동 비슷한 춤을 추며 답했다. 고개를 과장되게 끄덕거리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한은 웃지 못했다. 마음에 비가 올 모양인지 가슴 언저리가 눅눅했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습도를 높인 주범은 홀로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나왔다. 교무실 문을 드르륵 닫고 나오는 몸짓조차 단정해, 한은 혀를 쯧 찼다.

“방학식인데도 뭘 시켜?”

워낙 거절을 잘 하지 않는 놈이다 보니 늘 심부름을 독차지하는 것 같다. 한은 못마땅하게 물으며 먼저 계단으로 향했다. 성큼성큼 내려가는 그의 뒤를 상수와 유일이 따라 걸었다.

“아니, 내가 드릴 말씀 있어서.”

“뭔데?”

“계약했거든.”

한유일은 시답지 않은 이야기라는 듯 가볍게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딱 그만큼 가뿐한 걸음을 이어 갔다. 남은 두 사람의 걸음을 꽁꽁 묶어 놓고도 유유한 움직임이었다.

“아직 촬영 들어가는 건 없지만 혹시 출석 관련해서….”

“계약?”

하도 침착한 말투 탓에 반응은 두 박자나 느리게 터졌다. 그나마도 상수뿐, 한은 여전히 꽁꽁 언 채로 입만 벌렸다.

“응, 소속사. 유명한 데는 아니야.”

겸연쩍게 덧붙이는 말투는 겸손했지만 돌아보는 그의 낯은 제법 여유로웠다. 본래 제 물건이었어야 할 것을 마땅히 쥐고 있는 자의 표정이었다.

그제야 모든 이해를 마친 상수는 날뛰기 시작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자기 일처럼 기뻐하던 그가 강한을 붙들었다. ‘아, 형님, 대박이지 않아요?’ 그런 말들이 커다랗게 한의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확실히 상수 말대로 경사는 경사였다. 소식이 전해진다면 전교가 떠들썩해질 만큼이나.

“어……. 축하해.”

그러니까 반드시 웃어야 했다. 한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입술을 늘였다. 제법 시원스럽게 연기한 웃음으로 축하를 건네고, 바닥은 내려다보지 않았다.

아까부터 유일과 저 사이에 있는 계단이 자꾸만 많아지는 것 같았다. 더 많고, 크고, 깊은 계단이 쑥쑥 아래로 꺼져 만들어졌다. 깎아지른 새까만 낭떠러지가 눈앞을 아뜩하게 했다.

“고마워. 그런데 정말 별일 아니야. 평생 TV에 나와 보지 못할 수도 있어.”

“에이, 야, 거울 안 보고 사냐? 데뷔만 했다 하면 너어는!”

“아무튼 나가자. 뭐 먹자고 했지?”

상수는 그 시커먼 공백을 잘도 뛰어넘었다. 멀게만 느껴지는 유일과의 거리를 단숨에 좁혀 내려간 그가 손을 흔들었다.

“형님, 뭐 하세요! 갑시다!”

외치는 상수의 목소리가 몹시 낭랑했다. 그럼에도 발이 쉽게 움직이지 않아, 한은 긴 숨을 내쉬었다.

‘태권도 훈련 때는 한 발로도 수십 번을 왕복하던 계단인데…….’

한심하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만들어 낸 환상 같은 것은 보지 않고 내려가면 그만이었다.

“한아, 어디 안 좋아?”

그러나 한 발을 다 떼기도 전에 몸이 붙들렸다. 내려갈 때만큼이나 가벼운 걸음으로 쉽게 올라온 유일이 어느덧 코앞에 서 있었다.

한 칸 아래에 선 그의 눈은 평소보다 낮았다. 내려가려던 몸을 막아 내느라 거리는 지나치게 가깝고, 새까만 우주를 성큼 건너온 얼굴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아니, 잠깐 발을 좀…….”

뇌를 거치지 않고 변명하며 몸을 내렸다. 유일을 밀어내듯이 틈을 파고들어 내리자, 계단은 금세 평범한 모양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은 그 지극히 보편적이고 심심한 돌계단을 화풀이하듯 힘주어 밟았다.

“정말 괜찮아? 몸 안 좋으면 쉬어도 되는데.”

아침만 해도 ‘방학에 자주 볼 수 없어 슬프다.’며 미인계를 쓰던 놈이 말을 바꿨다. 이제 아쉽지도 않은가. 심기가 잔뜩 불편해진 강한은 삽시간에 계단을 내려가, 괜히 상수를 끌었다. 묵직한 팔을 툭 얹어 어깨동무하며 잡아끌자 상수가 ‘어억!’ 소리를 냈다.

“상수가 빙수 먹고 싶대.”

“아, 형님, 감동임다.”

핑계가 된 줄도 모르고 감동한 상수가 품에 고개를 비비적거렸다. 그에 유일은 말이 없었다. 아직 홀로 계단에 남은 채 우두커니 선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상수 과외 안 해?”

한참 조용하던 유일은 계단을 내려오며 그렇게 물었다. 느닷없는 질문에 상수가 킥킥 웃었다. 아직 한의 팔을 얹고 있느라 낑낑거리는 채로.

“뭔 소리야. 방학식에 누가 과외를 받냐! 오늘은 제대로 놀아야지. 형이 내 빙수까지 챙겨 주셨는데.”

상수는 제 쇄골 근처에 놓인 한의 손목을 두 손으로 꾹 잡아 내렸다. 덕분에 어깨동무가 조금 더 깊어져, 강한은 중심이 기운 채로 걸어야 했다. ‘유치하게 질투 유발 작전을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난감하게 생각하며 슬쩍 손을 빼냈다.

효과가 있었는지 유일은 더 이상 심술을 부리지 않았다. 학교 건물을 나서 정문으로 향하는 뒷모습이 평소처럼 조용하고 단정했다. 그러나 정문 바로 앞에 위치한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 그는 어떤 선언처럼 말했다.

“나는 빙수 먹기 싫은데.”

장난감을 양보하기 싫은 어린애같이.

***

상수가 원하던 빙수 전문점은 정원시의 가장 오래된 번화가, 역전에 있었다. 하지만 유일은 역전과는 버스로 이십 분이나 떨어진 신시가지를 가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늘 역전에서만 놀지 않았느냐는 설득이 제법 타당했으므로, 강한 역시 빙수 핑계도 잊은 채 그러자 답했다.

빙수를 포기한 명목으로 상수가 점심 메뉴를 골랐다. 고르기보다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가게를 가리켰을 뿐이지만, 다행히 맛도 괜찮은 곳이었다. 음료수를 콜라로 통일한 똑같은 일본식 돈가스 세트를 먹은 후에는 거리를 조금 걸었다. 유일의 아는 형이 한다는 카페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조성된 지 오래지 않은 신시가지는 인도가 넓고 깨끗했다. 펼쳐진 상가의 연한 회색 석재 기둥과 살구색 지붕은 이국적이었고, 지나는 사람들은 역전보다 연령대가 있어 차분했다. 어쩐지 말조차 크게 뱉어 내서는 안 될 분위기라 상수는 작게 투덜거렸다.

“아, 진짜 다음엔 꼭 빙수 먹는 거예요. 방학이라고 연락 씹으심 안 돼요.”

밥 먹는 동안에는 함박웃음이더니, 아직 빙수 뒤끝이 남아 있었다. 강한은 비식 웃으며 ‘어.’ 짧게 대꾸하고 유일을 힐긋 보았다. 이 유치한 대결의 승리조차 원래 자기 소유였던 것처럼 또 느긋한 낯이다. 확실히 연예인을 하지 않으면 억울할 얼굴…,

문득 생각을 멈춘 강한은 불쾌한 숨을 들이켰다.

‘눈깔 왜 이러지.’

틈만 나면 유일을 훔쳐보는 눈알이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았다.

“그런데 한이는 정말 방학에 연락 안 될 것 같아.”

“왜.”

“음, 별로 아쉽지 않아서?”

“맞아요, 매일 우리만 매달리고!”

눈치 없는 상수가 또 맞장구를 치는 바람에 유일의 말은 반쯤 농담처럼 변질되었다. 그러나 한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말이 농담 하나 섞이지 않은 진심이라는 것을.

짝사랑을 하면 쉽게 을이 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자세를 취하고, 아주 당연하게 손해 보는 자리에 서 있고 만다. 강한 역시 지겨울 만큼 경험해 본 순리였다.

그러나 지금 한유일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그는 더 이상 만년 을이 아니었다. ‘누구를 나쁜 놈 만들려고?’ 눈썹을 비딱하게 들어 올리며, 한은 물었다.

“누가 그래.”

단순한 대답에도 상수는 펄쩍 뛰며 난리였다. 아으악! 이상한 비명을 내지르며 달려 나간 상수가 ‘아, 형, 존나 설레요!’ 하고 꺅꺅거렸다. 떡 주려던 놈은 따로 있는데 애먼 놈이 기승이었다.

“그럼 아니야?”

두 손에 손수 답을 놓아 주었음에도 유일은 되물었다. 줘도 못 먹는 새끼, 강한은 험담하며 혀를 찼다.

“어, 방학 때도 연락 할 건데.”

아예 확답을 먹여 주면서 낯선 입간판을 턱짓했다.

“여기야?”

손수 떠먹여 준 말이 목에 걸렸는지 유일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끄덕거렸다. 그를 지나쳐 먼저 카페 문으로 다가서는 한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떴다. 왠지 이겨 먹은 기분이다.

“한아, 그럼 이제 내 이름 뒤에 하트 붙여 주는 거야?”

“아, 뭐래…….”

승리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따라붙은 유일이 물었다. 그 나긋한 물음에 화르르 불이 붙어, 강한은 지나치게 센 힘으로 문을 열었다. 덜커덩대는 커다란 소음 뒤에 저 멀리서 달려온 상수가 헉헉거렸다.

“아니, 하, 아무도, 안 잡고!”

어디까지 뛰고 온 건지 잔뜩 거칠어진 목소리가 우스웠다. 그 핑계로 한은 씰룩거리던 얼굴을 풀어냈다. 마음껏 웃음을 터트리며 ‘상수 저 새끼는 진짜…….’ 하고 이번에도 상수를 팔아넘겼다.

“아, 이 카페 빙수 없나?”

죄 없고 눈치마저 없는 상수는 그저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카페는 어느 별장을 옮겨 놓은 것처럼 포근하고 따뜻했다. 다만 격자무늬 창문과 하늘하늘한 커튼, 벽난로 장식이 가 본 적도 없는 외국 별장을 연상케 했다. 특히 카운터 위에 매달린 커다란 원목 메뉴판은 강한을 순식간에 낯선 나라에 데려다 놓았다. 빼곡히 적힌 메뉴가 온통 영어뿐이었다.

학교에 다니기 전부터 태권도를 배우고 그것이 전부인 삶을 살았다. 한마디로 공부와는 거리가 먼 날들이었다. 제대로 영어 수업을 들어 본 것은 중학교 1학년 때가 마지막이었으며, 이렇게 메뉴가 많은 카페에 친구들과 방문해 본 적도 없었다. 훈련이 없는 날에는 동기들 성화에 못 이겨 PC방 혹은 노래방에 갔고, 디저트는 이야기조차 나오지 않았다. 기껏해야 햄버거를 먹고 그 자리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음료를 더 시키는 정도가 전부였다.

“형님, 뭐 드실래요? 빙수는 없네요.”

그래서 한은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한참 걸려 읽은 메뉴가 어떤 음료인지는커녕 맞게 읽었는지조차 확신하기 어려웠다.

멍청하니 선 그의 앞에서 유일은 아주 능숙했다. 카운터 안에 있는 마르고 훤칠한 남자와 웃으며 인사하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카페 주인은 새로운 머신이 들어왔다며 자랑하고 손수 유일을 끌어다 보여 주기도 했다. 새로 받아 본 원두가 어떻고, 샷이 어떻고 하는 그들의 대화가 한에게는 어떤 암호처럼 들렸다.

“한루나! 여기 뭐가 맛있어?”

아득해지던 머릿속을 일깨운 것은 상수였다. 아주 쉽게, 한이 겪고 있던 충격을 부수어 준 상수는 여전히 해맑았다.

“여기 애프리콧 에이드가 유명해. 청을 직접 만들어서.”

“오, 살구? 그럼 나 그거.”

애프리콧이 살구였구나. 강한은 머쓱하게 생각하며 한 걸음 물러나 섰다.

“한이는?”

“나도 그거로 할게.”

살구로 만든 음료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일단은 계산을 마쳤다. 결제되는 금액을 확인하면서는 ‘얼른 아르바이트 다시 구해야겠다.’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카페 주인의 시선이 한의 얼굴 위로 오래 머물렀다.

“친구도 연예인이 꿈이야?”

“예? 아뇨.”

“그럼?”

지이잉 소리를 내며 영수증이 빠져나왔음에도, 호리호리한 남자는 카드를 돌려주지 않았다. 몸을 조금 더 가까이 숙이며 눈동자를 반짝이는 표정에 한은 당황했다. 영어 메뉴판에 이어 두 번째 곤혹이었다. 갑자기 꿈을 묻다니….

‘없는데요.’

다른 애들처럼 간단하게 대답할 수야 있었다. 강한은 원래 수줍음을 잘 타는 성격은 아니었다.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했고, 구태여 숨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답이 이렇게 어렵지 않아야 하는데.

너무도 낯선 기분이다.

강한은 어린 시절부터, 꿈 같은 것 없다며 귀를 후비적거리는 애들 옆에서 단박에 ‘태권도 국가 대표 선수요.’ 하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따금 더 대단한 꿈을 말하는 친구가 있어도 아무런 열등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면 으레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가짜 걱정이 돌아왔다. 국가 대표는 되기 어렵다는 둥, 선수 생활이 끝나면 어떻게 살 거냐는 둥, 봉급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둥, 위계질서가 심각하고 생태계가 더럽다는 둥. 그러나 흡사 공격과 같은 걱정들 또한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강한의 꿈은 쉽게 흠집 나지 않는 구슬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텅 비어 버린 자리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일찌감치 꿈이 정해진, 그것도 얼마 전 계약까지 마쳐 실질적인 걸음을 내디딘 한유일 옆에서.

“아저씨처럼 왜 그래?”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칠 쯤, 쿠키를 고르던 유일이 무심히 말했다. 학교에서 자주 듣던 것보다는 꽤 함부로 뱉는 투였다. 한은 이상하게 그 목소리가 제법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아이, 아저씨라니. 형은 혹시 생각 있으면 카페 아르바이트 어떠냐고 물어보려고.”

“안 돼.”

“뭐야, 네가 왜 난리야?”

“아무튼 안 돼. 한아, 먼저 가 있어. 이거 계산하고 갈게.”

꿈 이야기에 민망해진 분위기를 알았는지 한유일은 거의 쫓아내듯 굴었다. ‘아르바이트……. 관심 있는데.’ 한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내 유일의 말을 따랐다. 메뉴판도 읽지 못하는 곳에서 어떻게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한유일이 아는 형이라면, 무식하다는 소리가 다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아무래도 편의점을 너무 쉽게 그만둔 것 같다. 그때는 민우를 무작정 끊어 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민우는 언제나 그랬듯 여자 친구가 우선이었고, 저는 동경인지 첫사랑인지 구분도 못 한 감정을 꽁꽁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 지난 몇 달과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끊어 내고 싶었는지. 혼자 생각을 키우고 키우다가 극단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제 나쁜 버릇임을 알면서도 반복하고 만다.

‘연락해 볼까?’

편의점을 그만둔 후 도리어 더 많은 연락을 해 오던 민우는 근래 잠잠했다. ‘여자 친구랑 또 싸웠어ㅜㅜ…….’라는 문자를 더불어 총 세 건의 연락을 강한이 모조리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한은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문자 메시지 내역을 몇 번 다시 읽었다.

“뭐예요, 형님. 썸이라도 생기셨습니까?”

덩달아 흘깃거리던 상수가 음흉하게 물었다. 하필이면 유일이 테이블에 막 도착한 쯤이었다.

“썸?”

한은 무척 민망하게 느껴지는 단어를 되물어 보며 인상을 썼다. 그러면서 은근히 유일을 쳐다본 줄도 모르고.

“누가?”

“아니, 형님이 문자를 계속.”

“상수가 개소리하는 거야.”

이런 문제는 애초에 싹을 잘라야 했다. 눈치 좀 챙기라는 듯 눈썹을 꿈틀 들어 올리며, 강한은 유일이 가져온 쿠키를 스윽 밀었다. 그제야 눈을 깜박거리던 상수가 조용히 쿠키 껍질을 벗겼다. 울퉁불퉁한 쿠키 조각이 수다스러운 입술을 막아 주었다.

“아, 그 편의점 형.”

하지만 이미 화면을 훔쳐본 유일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가져온 음료를 하나씩 놓아 주는 손에도 어쩐지 힘이 들어간 듯하다.

“어, 아르바이트 물어볼까 했는데. 편의점은 돈 안 되니까 그냥 다른 거 찾으려고.”

어째서 기분이 전전긍긍 불안해지는지, 강한은 답도 모른 채 일단 변명을 하고 봤다. 그사이 쿠키 하나를 벌써 박살 낸 상수가 제 음료를 가져가 쪼오옥 빨아 먹었다. 먹고 마시느라 오물오물 바쁜 입술이 천진하게 물었다.

“근데 형님 진짜 핸드폰 언제 바꾸시게요?”

“곧 바꿔야지…….”

어물쩍 대답하며 강한은 고개를 틀었다. 아직도 핸드폰이나 내려다보고 있는 유일을 툭 치고 ‘뭐 하냐.’ 물었다.

“얼른 앉아.”

“아, 응. 트레이 두고 올게.”

다시 부팅한 컴퓨터처럼 잠시 멈춰 있던 유일은 남은 음료도 테이블에 옮겨 두었다. 그러더니 문득 들고 있던 쟁반을 홱 휘둘렀다. 정확히는, 쟁반을 든 채로 몸을 너무 크게 회전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그답지 않게 조심성 없는 몸짓에 방금 나온 음료가 직격을 맞았다. 텅! 소리와 함께 쏟아진 음료 두 잔이 왈칵 테이블을 물들인다. 동시에 온갖 집기가 와장창 떨어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히엑!”

깜짝 놀란 상수는 제 쿠키와 음료수를 양손에 들고 벌써 저 멀리로 떨어져 섰다.

한은 얼음 상태였다. 차가운 음료가 제 바지를 푹 적시고 있었고, 컵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 핸드폰은 탄산과 커피에 절여지는 중이었다. 둘 중 어느 것 하나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법이 없어 뇌는 하얗게 탈색되었다.

“아, 미안. 한이 괜찮아?”

쟁반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유일은 눈높이를 맞추며 물었다. 하얀 손가락이 냅킨을 뽑아 상체에 튄 얼룩 주변을 두드리다가 점점 내려갔다. 허벅지에 축축하게 달라붙은 천 위로 손이 닿는 순간, 한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아, 미…친, 됐어.”

백색 머릿속이 단숨에 빨갛게 익어, 벌떡 일어났다. 바지 속에서 차가운 액체가 살을 타고 흐르는 기분을 인내하며 핸드폰을 주웠다. 기기는 쇠 냄새에 달콤한 향이 섞인 역겨운 절임이 되어 있었다.

“미안해. 핸드폰은 내가 변상할게. 아, 옷도 갈아입고 가. 우리 집 근처야.”

“에-에-에, 한루나, 사고 쳤대요, 사고 쳤대요.”

“유일아, 대걸레 여기 있다.”

상수는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사장이라던 남자는 대걸레를 놓아 주었다. 유일은 연신 미안하다며 상황을 처리하느라 바빴고 푹 젖은 바지에서는 자꾸 단 냄새가 올라왔다.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주변 손님들이 숙덕거리는 소리, 집기 치우는 소리, 참견하던 상수가 유일에게 한마디 듣고 투덜대는 소리. 그런 것들 사이에서 강한은 혼비백산한 채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다. 뭐든 알았으니, 아무튼 빨리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

상수의 ‘혼자 해결’ 솔루션을 받은 후, 강한은 그 방법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다. 어딘가를 만져서 어떤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지를 몰라서는 아니었다. 그저 말처럼 쉽지 않았을 뿐이다.

강한에게는 조금 더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어디를 어떻게, 얼마간, 어느 세기로 만져야 하는지 혹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하고 웃어 댔지만 한은 정말이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애매한 열이 오르다가 말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 열은 달랐다. 제발 가라앉아 주기를 바라고 또 바라 봐도 은근히 배 안쪽을 맴돌며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한은 쪽팔림을 무릅쓰고 재도전 해 볼 생각이었다. 하필 한유일의 집 화장실에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 무척 싫었지만, 어렵게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애초 한유일이 그 해소되지 않는 욕망의 원흉 아니던가.

“헐, 한루나 집 개 쩐다.”

그러나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정확히는 상수 입에서 너무나 고등학생다운 감탄사가 떨어진 그때, 열기는 애매한 온도로 식어 버렸다. 강한은 허탈하게 웃으며 세트장처럼 생긴 널따란 집 안을 둘러보았다.

유일은 가타부타 답하지 않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거실과 단 차이를 두고 쭉 뻗은 길 위, 가장 안쪽까지 걸어간 그가 어떤 문을 열어 주었다.

“한아, 욕실은 여기. 갈아입을 옷도 줄게.”

열린 틈새로 보이는 공간은 욕실보다는 방에 가까웠다. 커다란 창문과 원목 침대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강한은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그러자 유일은 아예 문이 벽에 닿도록 활짝 열어 주고서는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반 토막 났던 창문과 침대가 훤히 드러났다.

방 하나가 강한의 집 거실과 맞먹는 크기였다. 그럼에도 가구는 침대와 책상뿐. 시원스럽고 깔끔한 방이 꼭 한유일의 단정함을 닮아 있었다. 강한은 문틀 앞에 서서, 끈적거리는 양말을 벗어 들었다. 발이 틀 너머를 밟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래도 내 방 욕실 쓰는 게 편할 것 같아서.”

쉽사리 들어서지 못하는 한의 부담감을 덜어 주듯, 유일은 맑게 웃었다. 그러고는 가장 안쪽 벽면에 달린 문 아래에 옷을 놓아 주었다. 곱게 갠 수건과 포개진 옷들에서 잘 다려진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어, 고마워.”

일부러 무뚝뚝하게 답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한 낯으로 걷는 내내 발바닥이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마룻바닥 위로 질척하고 끈끈한 감정을 찍어 내며, 한은 그렇게 욕실에 들어섰다. 사라졌던 열기를 다시 품에 안은 채.

유일의 티셔츠는 생각보다 작지 않았다. 겉보기에 늘씬하다고 느껴지는 탓에 터무니없이 작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 무색했다. 어깨와 뼈대가 있는 편이라 그런지 팔뚝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고 길이감도 딱 맞았다. 그러나 흉곽 부분은 조금 작은 감이 있었다. 흰색 티셔츠가 딱 달라붙은 가슴이 민망해서, 한은 그날 내내 명치 근처 옷자락을 잡아떼어 내느라 바빴다.

예상치 못하게 벌어진 사고 때문에 상수는 빙수뿐 아니라 노래방과 오락실도 포기해야 했다. 대신 세 사람은 넓은 거실에 드러누워 TV를 보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상수가 원하던 빙수는 아니었지만 집 앞 마트에 가서 팥빙수를 따라 만든 아이스크림도 사 먹었다.

배경이 으리으리한 저택인 것만 제외하면 아주 평범한 날이었다. 날이 저물 즈음 상수가 가방을 멨고, 강한 역시 쇼핑백에 담긴 제 교복을 챙겼다.

그러나 번쩍이는 대리석 현관 위에서 뒷덜미를 잡혔다. 먼저 현관을 열고 나가던 상수마저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볼 만큼 거센 힘이었다. 헉, 하고 순간 강한의 입에서 이상한 호흡이 새어 나갔지만 곧장 몸을 홱 돌렸다. 대련을 할 때처럼 하얀 손목을 잡아채 제압하자, 유일은 엄살을 부렸다.

“아야, 아파.”

“갑자기 뭐야.”

힘도 제대로 주지 않았으니 엄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은 쉽게 속박을 풀었다. 그럼에도 유일이 매만지는 손목에 불그스름한 자국이 보였다. 워낙 하얀 탓에 그새 자국이 남는 모양이다.

“와, 형님 개 짱 멋있어요.”

순식간에 심각해진 강한은 다시 팔을 잡아채 붉은 피부를 살폈다. 상수가 뭐라고 추켜세우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고운 살에 자국을 남긴 기분만 심란해질 뿐.

“원래 금방 남아. 괜찮아.”

“그러니까 갑자기 왜 잡아서.”

“한이는 벌써 가면 안 되잖아.”

“뭐? 더 있으라고? 나만?”

아직 상수도 옆에 있는데 이 새끼가 뭐라고……. 강한은 기함하며 저도 모르게 유일을 툭 쳤다. ‘뭔 소리야?’ 눈썹으로 용을 쓰자 한유일은 푸시시 웃었다.

“핸드폰 사야 하잖아.”

“…아. 됐다니까, 어차피 바꿀 거였고.”

순식간에 김이 새는 동시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한은 괜히 더 툴툴거리며 유일의 손을 털어 냈다.

“내가 미안해서 그래.”

“아, 그런 거면 내가 또 빠져 줘야겠다. 형님! 원래 이런 건 냉큼 받아야 되는 거예요!”

이런 쪽으로만 눈치가 발달한 상수는 서둘러 신발을 구겨 신었다. 다 신지도 못한 신을 직직 끌고 나가 검은 현관문을 쾅 닫고, 닫히기 직전 윙크까지 남기는 모습이 과연 신상수 그 자체였다.

“다시 켜 볼게. 말렸으니까 될지도 몰라.”

크나큰 집에 유일과 단둘만 남았다. 한은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거실로 향했다. 곱게 접힌 수건 위에 찐득한 핸드폰이 누워 있었다.

유일은 말리지도 않고 맞은편에 앉아 고군분투하는 강한을 구경했다. 기대에 부응하듯 5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한은 여러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배터리를 분리해서 물티슈로 닦았다가 아차 싶어 휴지로 물기를 흡수했고, 그러다 끈끈한 테두리에 온통 휴지 조각을 붙이고 말았다. 그 모든 과정 내내 전원 버튼을 열 번씩 눌렀지만 핸드폰은 켜지는 기미조차 없었다.

“한아, 그만하고 새로 사자. 내가 고장 나게 했으니까 당연히 변상해야지. 번호나 사진도 다 지워졌을 텐데.”

입장 바꿔 한유일의 핸드폰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강한 역시 당장 변상해 주었을 것이다. 물론 유일과 달리 자신은 몇 달 치 아르바이트 봉급을 모아야 했겠지만.

그 차이점 때문에 자꾸만 뻗대게 되는 걸까. 강한은 끈적거리는 휴지 조각을 떼어 내며 골몰했다. 상수처럼 쉽게 굴 수 없는 이유가 열등감에서 기인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속을 복잡하게 했다. 민우의 여자 친구 앞에서 주급 봉투를 받았던 날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그냥 공짜폰 하자.”

그때처럼 극단적인 결정을 하기 전에, 강한은 얼른 일어나 섰다. 사망 선고가 내려진 지 오래인 핸드폰을 꾹 쥐고 현관으로 향하자 유일은 아하하 웃으며 따랐다. ‘그거 팔게?’ 하고 묻는 목소리가 은근히 놀리는 듯해서 눈이 뾰족해진다. 그러나 두 시간 뒤, 핸드폰 대리점을 나서는 한의 눈만큼은 아니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매서운 눈을 뜨고 있는 강한의 손에는 커다랗고 반짝이는 새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출시된 지 일주일도 안 된 최신형 모델이었으며, 가격은 거짓말 같았다. 직원이 계산기를 마구 두드려 보여 준 숫자에 한은 곧장 ‘야, 너 핸드폰보다 좋은 거잖아.’ 하고 기함했지만, 유일은 ‘그렇네?’ 하고 수긍하면서도 취소하지 않았다. 도리어 자기 핸드폰까지 같은 기종으로 바꾸었을 뿐.

결국 똑같은 핸드폰을 색상만 다르게 사서 들고 나왔다. 한유일은 저처럼 새하얀 핸드폰은 쇼핑백에 툭 넣어 버리고, 한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 기기를 가져갔다. 처음 세팅을 도와주겠다며 이런저런 버튼을 누르던 유일이 연락처 화면을 켜 보여 준다.

“붙였어, 하트.”

까만 화면 안에 「유일♥」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내내 고요하던 한은 그제야 인상을 확 찌푸렸다.

“너 진짜 돌았냐?”

진지하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래도 유일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통화 버튼을 눌러 자신에게 연결하고, 제 새로운 핸드폰에도 강한의 번호를 가장 먼저 저장했다. 「한이♥」라는 낯간지러운 저장명을 자랑하듯 액정을 불쑥 내밀어 흔든다.

“나도 한이 제일 먼저 저장했어.”

오히려 자신이 값비싼 선물을 받은 것처럼, 유일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흐드러진 꽃처럼 하얗게 번지는 웃음에 강한은 말을 잃었다. 황당하면서도 고맙고, 짜증이 나면서도 설레는 요상한 기분에 휩싸여 그 어떤 말도 고를 수가 없었다. 굳게 다문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수십 번. 결국 얕은 숨만 폭 내쉰 강한은 걸음만 먼저 떼어 냈다.

“고맙다. ……갚을게.”

“내가 잘못해서 산 건데 왜 갚……. 아, 그러면 앞으로 우리 집 자주 놀러 와. 그거면 될 것 같아.”

“또 지랄이다.”

사위가 암청색으로 물든 여름밤. 줄지어 늘어선 상가의 불빛을 따라, 강한과 유일은 한참을 걸었다. 같은 통신사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을 손목에 달랑달랑 건 채였다.

***

그렇게 여름 방학 내내, 유일의 집은 일종의 아지트 노릇을 했다.

처음에는 빌린 옷을 돌려준다는 명목으로 한 번. 그다음에는 기어코 빙수를 한 사발 마신 상수가 배탈이 나는 바람에 한 번. 그렇게 서너 번 무더운 여름을 피하고 보니 이제 약속 장소는 자연스럽게 그 집이 되었다.

넓은 집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시간을 죽이고 있자면 가끔은 위기감이 들었다. 상수는 과외와 학원에 치이고 유일은 연기 수업과 연습으로 바쁜 와중,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청히 보내는 기분이었다. 그럴 때면 어서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었다가도 막상 공고를 살피고 있으면 선뜻 연락할 수가 없었다. 하루 여덟 시간이나 일을 하게 되면, 이처럼 자주 유일을 만나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하루 더, 하루만 더. 아르바이트를 차일피일 미루어 대는 중에도 유일은 연기 수업을 받았다. 계약 후 본격적인 오디션 준비 때문에 수업 횟수를 갑자기 늘리게 되었다며 미소 짓는 얼굴이 정말 어른 같았다.

수업을 받을 때 유일은 2층으로 이어진 다른 방으로 갔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어떤 여자 선생님과 함께 사라진 그는 짧으면 50분, 길면 한 시간 반쯤 뒤에 돌아오고는 했다. 그렇게 유일이 자리를 비우면 강한은 상수와 게임을 하거나, 드러누워 핸드폰을 만졌다. 장소는 늘 거실이었다. 상수는 유일의 침대에도 편하게 넙죽넙죽 잘 누워 댔지만, 한은 웬만하면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꿈의 소재를 늘려 줄 것만 같아서.

“여기 이 잘생긴 밤톨은 뉘셔.”

그렇게 오늘도 소파에 누워 유일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상수가 가져온 만화책을 조금 읽다가 눈이 묵직해졌고, 몽롱한 눈동자로 화려한 천장 그림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어, 헉, 아, 안녕하세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 화려한 천장을 가리고 선 인물의 주름진 눈매에 한은 심장이 쿵 떨어졌다. 헐레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히고, 상수가 있어야 마땅할 건너편 소파를 보았으나 비어 있었다. 동그랗게 커진 눈이 허리 굽은 할머니와 빈 소파를 요란하게 두리번거렸다.

“한이예요. 강한.”

한참 먼 주방에서 유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식탁에 상을 차리는지 탁, 탁, 집기 놓는 소리도 함께였다. 곧 이 자리로 걸어와 침묵을 깨 주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주방 안에서는 냄비 뚜껑 여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 안녕하세요. 유일이 친…구 강한입니다.”

숨 막히는 어색함 속에서 강한은 재차 인사하며 불안에 떨었다. 어려서부터 조부모와 교류가 없어 어르신을 대하는 데에는 영 능숙하지 못한 탓이다.

“잘생겼네.”

매서운 눈으로 한의 기다란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삼남이 웃었다. 합격점을 주듯 한의 등을 탁 쳐 낸 그녀는 주방을 가리켰다.

“가서 먹어.”

등이 굽고 온 얼굴과 손에 주름이 자글자글 모였지만, 그녀의 말씨와 차림새는 세련되게 느껴졌다. 백발을 짧게 잘라 볼륨감 있게 말아 넣은 머리 스타일도 그랬다. 특히 웃을 때는 유일과 비슷한 분위기가 흘러, 강한은 홀린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신상수 이 새끼는 어디 갔지. 한유일은 왜 나와 보지도 않아, 어색하게…….’

아직도 졸린 눈을 비비며 걷던 한은 복도 중간에 우뚝 멈추어 섰다. 아무리 그래도 어르신을 빼놓고 식사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저, 할머님.”

무척 어색한 투로 부르자, 거실 소파에 앉으려던 삼남이 뒤를 돌았다.

“식사 같이 하세요.”

괜히 두 손까지 모아 가며 목을 가다듬자 삼남은 무뚝뚝한 얼굴을 무너트렸다. 단박에 깔깔 소녀처럼 웃은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다. ‘늙은이가 껴서 먹으면 재미가 없을 텐데?’ 하고 묻는 말에 강한은 단박에 고개를 흔들었지만, 상에 놓인 라면 그릇을 보았을 때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아, 라면인 줄 모르고….”

변명처럼 중얼거리자 물을 꺼내 오던 유일이 웃는다. 삼남처럼 맑게 웃은 그가 수저 한 벌을 더 준비하며 덧붙였다.

“할머니도 라면 좋아해.”

“참 다행이네…….”

작게 중얼거리며 한은 눈을 부라렸다. ‘왜 안 깨웠냐?’ 하는 마음을 담아 눈썹을 꿈틀거리자 유일은 모르는 척 자리에 앉았다. 난데없는 소주병과 함께였다.

“시간도 늦었는데 친구도 잔 받고, 자고 가.”

“예?”

“할머니, 한이는 나이도 스물이라 괜찮아.”

“거 잘됐네.”

집에서 술 한 잔 제대로 마셔 본 적 없다더니, 한유일은 소주잔 넣어 둔 위치마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익숙하게 삼남의 잔을 채우고 남은 두 잔까지 채워 넣은 그가 부끄럽다는 듯 웃는다.

“이렇게 들키네.”

곤란을 연기하는 얼굴이 뻔뻔하기도 했다. 한은 이를 갈았지만, 삼남의 앞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수는 없었으므로 조용히 잔을 들었다. 삼남은 제대로 각이 잡힌 한의 자세를 보며 또 깔깔 웃었다. 그러면서 덧붙인 ‘이 친구 참 마음에 든다.’는 그녀의 말이 한에게는 조금 묘하게 들렸다. 허락이라도 받은 기분에 들떠 목구멍을 넘어가는 술이 참 달았다.

강한은 단 한 번도 만취 상태를 경험한 적 없었다. 기껏해야 어머니의 술 상대가 되어 주는 정도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원래라면 친구의 집에서, 그것도 할머니와 함께 반주를 곁들인 오늘도 제정신이어야 마땅한 날이었다.

그런데 아주 잠시, 찰나만 눈을 감았던 듯한데 기억이 뚝 끊겨 버렸다. 묵직한 어둠 속, 사방에서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숨을 내쉬고 뱉을 때마다 푸우, 푸후,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먹먹한 귓가에 낯선 신음이 끓었다. 처음 들어 보는 음성이 귀에 거슬리는 침음을 반복해 뱉고 있었다.

“으, 음…….”

범인이 저라는 사실을 강한은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다. 끙끙 앓는 소리에 짜증이 치솟아 눈을 번쩍 뜬 순간에야 알아챘다. ‘으음.’ 하고 흘러 나가던 목소리를 꾹 삼키며 그는 호흡을 멈추었다.

상황 파악을 위해 눈을 굴려 봐도 깜깜한 방 안에는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몸은 어딘가 푹신한 곳에 대자로 뻗어 누워 있었고, 손을 내려 만져 보자 품이 큰 운동복 반바지와 티셔츠는 그대로였다. 술기운에 푹 절인 눈동자는 어둠에 익숙해지는 데에 한참이 걸렸다.

대신 강한은 어떤 물소리를 들었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와 빗소리 중간 즈음에 있는 익숙한 음이었다. 소리는 어떤 막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 조금 아득했는데, 확실히 창문 바깥은 아니었다.

“아, 시발, 설마 이거 한유일 침대인가?”

일순 번개처럼 강렬한 깨달음이 지났다. 벌떡, 일어나 앉은 강한은 눈앞이 팽팽 도는 감각에 결국 다시 드러누웠다. 녹다운 펀치를 맞은 사람처럼 형편없는 몸짓이었다.

잔뜩 풀썩이며 누운 탓에 침구에 스며든 향기가 나부꼈다. 늘 유일에게서 나던 향긋한 냄새가 섬유 특유의 향과 섞여 미미하게 공기 중을 맴돌았다. 한은 저도 모르게 큰 숨을 들이켜며 쿵쾅거리는 가슴을 꾹꾹 눌렀다.

‘그렇게 눕지 않으려고 애쓰던 침대인데.’

좆 됐다는 상스러운 생각이 수도 없이 머릿속을 수놓았다. 분명 머지않아 이곳을 배경으로 한 꿈을 꾸게 될 것이었다. 울적한 예상을 하던 강한은 얼른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연신 이어지던 물소리가 끊겼으므로.

막 씻고 나온 한유일의 모습을 눈에 담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방금 물기를 닦아 낸 한유일이라니……. 그런 영상은 지금 코를 잠식한 그의 옅은 체향이나 이 침대의 촉감 같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자극적일 터였다.

끼익 열리는 문소리가 당장 한에게는 호러 영화 효과음 같았다. 곧이어 터벅터벅 걷는 조금 젖은 발걸음과 머리를 털어 내는 소리가 났다. 한동안 수건과 머리칼의 마찰음이 울리다가 문득 침대 매트 한쪽이 기울었다. 유일의 체중과 함께 향은 조금 더 짙어졌다.

강한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더 옹송그렸다. 제 등 뒤쯤에 손바닥을 짚은 채 한동안 고요한 유일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상하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말고 자자, 제발 빨리 자자. 주문처럼 외우며 이를 꾹 물었다.

“잘 자네.”

노력이 무색하게끔 머리 위에서 간지러운 말이 떨어졌다. 삽시간에 얼굴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둑한 방에서도 붉어진 얼굴이 티가 날 것 같아, 강한은 조금 더 고개를 틀었다. 제 팔뚝 안으로 숨다시피 부스럭거리자 유일은 낮게 웃었다. 목 안쪽을 울려 조용히 웃은 그가 이내 자리에 눕는다. 아주 자연스럽게 한의 허리를 감아 안으며.

찬물로 씻었는지 서늘한 기가 감도는 몸이 등을 덮쳐 왔다. 그러더니 바싹 굳은 한을 얼러 주듯 손등을 살살 쓸어 주기까지 한다. 몹시 능숙한 태도로 도둑 포옹을 감행한 유일은 숨처럼 웃으며 속삭였다.

“예뻐라.”

목뒤에 닿는 그의 숨결이 지나치게 간질거렸다.

‘이 새끼 존나 미친 거 아냐…….’

강한은 거의 헐떡거리고 있었다. 입을 벌리면 기다렸다는 듯 심장이 튀어 나가 저 멀리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으로.

그러나 자는 척을 선택한 탓에 소리를 죽이고 연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목에 잔뜩 힘을 주어 호흡을 누르며, 한은 인위적인 심호흡을 했다. 스으읍, 푸우우, 내뱉는 숨을 따라 부풀었다가 꺼지는 몸이 자꾸만 유일의 존재감을 노골적으로 알렸다. 특히 엉덩이 밑으로 닿는 양감을 무시하려 애쓰며 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이 시간 자체가 악랄한 몽정의 한 장면이 아닐까 싶은 밤이었다.

***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운 탓에 강한은 일찍부터 침대를 벗어났다. 신종 고문 기구나 다름없던 공간을 벗어나 찬물로 샤워를 하고, 어젯밤 한유일이 그랬던 것처럼 몰래 잠든 그를 구경했다. 그만큼 애틋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복수 때문이었다. 원수를 보는 것처럼 매서운 눈길로 지켜보던 한은 ‘지야말로 예쁜데.’ 하는 마음이 들었을 쯤 도망치듯 방을 나왔다.

어젯밤 열 시가 넘도록 술잔을 기울였던 주방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라면으로 시작했다가 결국 온갖 야식을 다 시켜 먹었으니 적잖이 지저분했을 텐데. 한은 죄스럽게 생각하며 다음번에는 할머님이 좋아하시는 안주를 사다 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한유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면서는 김치볶음밥을 만들었다. 해장은 라면으로 하는 편이 간단했지만, 어제 먹은 라면이 아직도 속에 얹혀 있는 것만 같아 어쩔 수 없었다.

김치를 꺼내느라 잠시 열어 본 냉장고 안은 마트의 냉장 코너 같았다. 상표조차 익숙하지 않은 외국 음료들이나 잘 정돈된 채소와 과일, 크기별로 정돈된 반찬 통 같은 것들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오십이 넘어 갓난아기를 홀로 키우게 된 여자가 이토록 큰 집과 사업을 보유하기까지. 어젯밤 강한은 그녀의 위인전을 써도 될 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 그만 좀 해.’ 하고 유일이 몇 번을 말려도 소용없었다. 삼남은 갑작스레 유일을 맡게 되었던 날부터 지금까지를 사진처럼 선명히 들려주었다.

말을 듣는 내내 강한은 그 길이 얼마나 고되었을지 경외심이 들다가도 조금쯤 울적했다. 왜 그런 기회가 제 모친에게는 오지 않았는지. 비슷한 고난에서 벗어나 이렇게 잘살게 되는 사람도 있는데 왜 우리는 그럴 수 없는지. 특별히 다를 것이 있는지.

원초적이고 그래서 더 부끄러운 생각은 열등감과 무척 닮았다. 그래서 한은 자꾸 채워지는 술잔을 거부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 그에게 열등감이란 내면의 일이기보다는 외적인 일이었다. 보통은 그가 아닌 타인이 열등을 드러내거나 화풀이를 했고 한은 그저 목격하는 입장에 지나지 않았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의 그런 적대감을 경험할 때마다 그는 적잖이 당황했으나 또 금세 잊어버리고는 했다. 자기 살에 새긴 상처가 아니었으므로 그 이상 기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교통사고를 겪고 태권도까지 아주 그만둔 이후부터. 혹은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연락을 끊어 버린 태권도 동기들을 알아챈 순간부터. 그것도 아니라면, 생전 처음 누군가를 홀로 좋아해 본 날부터. 열등이라는 감정은 한의 마음속 깊이부터 낯설게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니고 있지 않았던 탓에 그 기분이 불쑥 고개를 들 때마다 무척 설었다. 열등은 늘 사랑니처럼 불편한 감각을 남겼고, 강한은 그게 썩어 문드러지지만은 않기를 바라며 때마다 모르는 척 침을 삼켰다.

“와, 나 꿈꾸는 거 아니지?”

침울한 생각이 순식간에 증발되었다. 평소보다 끝이 조금 갈라진 유일의 낯선 목소리가 과도할 만큼 가까이서 들렸다. 귀 바로 옆이었다.

“아, 시발! 깜짝이야.”

“으, 아파…….”

어젯밤처럼 자연스럽게 허리로 감겨들려는 팔을 쳐 내고, 한은 기겁하며 돌아보았다. 뻔뻔하게도 아픈 척을 하는 말간 얼굴이 황당해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뻥긋거리기만 하던 입술 새로 어렵게 따지는 말이 나왔다.

“뭐, 틈만 나면, 너 진짜, 손버릇이 존나…….”

헛숨과 함께 떠듬떠듬 울분을 터트리자 유일은 멋쩍게 웃었다. 물을 가득 따른 컵을 옮기고 익숙하게 의자를 빼내 앉은 그가 턱을 괴었다. 양쪽 손을 다 사용해 꽃받침처럼 모양을 만들고, 노림수를 쓰듯 고개를 갸웃 틀어 보였다.

“방금 우리 신혼부부 같았지.”

“조금만 더 놀랐으면 팔꿈치로 네 갈비뼈 부러트렸을걸. 상황 파악 덜 되지?”

“그렇게 놀랐어? 귀여워.”

아예 발까지 달랑거리며 신이 난 유일은 천진하기만 했다. 누구는 아직도 심장이 펄떡펄떡 뛰는데 늘 홀로 여유 가득한 얼굴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이를 부득 갈며 강한은 말없이 볶음밥을 덜어 내는 데 집중했다. 복수를 다짐하듯 비장한 얼굴이었다.

커다란 그릇에 나누어 담은 김치볶음밥은 금세 비워졌다. 처음으로 한이가 해 준 음식이라며 기념사진까지 찍느라 늦어진 유일도 십 분 만에 숟가락을 놓았다. 밥알 하나 없이 싹 비운 그릇을 보며 한은 비식 웃었다.

“술 그렇게 마시고 밥도 잘 먹네. 그동안 자주 마셨나 봐?”

약간의 가시를 숨긴 말이었다. 공격성을 바로 알아챈 유일은 배시시 웃었다.

“조금?”

“어쭈, 이제 숨기는 척도 안 하고. 야, 너 그때 불쌍한 척은 왜 했어. 죽을래?”

“한이랑 술 마시고 싶어서 그랬지. 친해지고 싶었으니까.”

드디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으나 유일은 아예 싸움 붙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느긋하고 솔직하게 모든 말을 털어놓는 그가 너무 편안해 보여, 한은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저라고 상대가 호감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백하지 못하는 바보 천치는 아니었다. 그동안에는 마음 가는 사람이 없었고, 민우는 임자가 있었으므로 하지 못했을 뿐. 강한 역시 소유욕이 있었고 노력하면 충분히 쟁취해 내리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갑갑하고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순전히 한유일 탓이었다. 그의 꿈이 너무도 특수해서. 혹여 소문이라도 날까 봐. 어쩌면 같은 이유로 유일 역시 교제까지는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왜 나한테 그렇게 집착하냐? 너 나 좋아하지.”

비뚤은 마음을 농담처럼 포장해 던졌다.

“응.”

욱해서 던진 화풀이를 유일은 쉽게 받아들였다. 부끄러움도 타지 않고 곱게 웃은 그가 나긋하게 말했다.

“나 한이 완전 예전부터 좋아했는데. 옛날부터 가까워지고 싶었어. 알고 싶고. 매일 말도 걸었잖아.”

장난처럼 가볍게 말하는 문장이 강한의 맥박을 무겁게 했다. ‘이렇게 되면, 그러니까 이 대화가 농담이 아니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불안한 생각이 박동을 따라 전신에 퍼졌다. 위험한 놀이 기구를 탄 것처럼 불안하고도 설레는 감각이 머리털을 주뼛 서게 만들었다.

그 좋아한다는 감정이 정확히 어떤 갈래인지, 강한은 따져 물을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자신의 욕망 가득한 꿈들을 내뱉어 볼 수도, 아니면 아예 저 흰 티셔츠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겨 몸부터 부딪혀 볼 수도 있었다.

“뭐야, 미친.”

그러나 한은 건조하게 웃으며 농담으로 치부했다. 뻣뻣한 얼굴을 애써 늘렸고, 빈 그릇을 들고 개수대로 향했다. 무뚝뚝한 뒷모습으로 방어막을 세운 채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면 그저 동경일 수도 있었다. 자신이 민우에게 가졌던 마음과 너무도 비슷한 설명이었으므로.

그 사람이 눈앞에 있으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잘 보이고 싶어 괜한 짓을 하게 되고, 그의 소중한 울타리 안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어떤 사소한 실망감을 느낀 순간. 감정은 지나치게 객관적으로 변했고, 강한은 몇 달이나 이어 온 마음이 고작 며칠 만에 시드는 것을 경험했다.

만약 한유일이 자신에게 토로했던 ‘좋아해.’가 그런 의미였다면, 조금 더 시간을 주는 편이 나았다. 그에게는 중요한 미래가 있었고 고작 한순간 스쳐 가는 감정으로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됐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억울하고 화가 나는지. 언제나 느긋하고 온화한 한유일 앞에서 저만 홀로 안달을 내는 것 같아 강한은 속이 끓었다.

“야, 한유일.”

쏴아아, 쏟아지던 물을 툭 끊어 낸 그가 뒤를 돌았다. 여전히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유일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평소처럼 여유 가득한 미소가 만연했다. 그 낯을 보자 한의 호승심은 한껏 기승을 부렸다.

“설거지는 여보가 해라.”

싱크대에 한껏 거만하게 기대어 선 강한은 씨익 웃음 지었다. ‘신혼부부’ 공격에 대한 유치한 복수였다.

“……어?”

“나 씻는다.”

한유일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어 굳었다. 언제나처럼 금방 풀려나 ‘한아.’ 하고 반격도 하지 못한 채로 꽁꽁 얼었다.

그 반응에 마음이 풀려, 주방을 벗어나는 한의 입술은 자꾸 벌어졌다. 흡족한 웃음이 얼굴을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

평생 TV에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던 겸손한 말과는 다르게 한유일은 금세 캐스팅 물망에 올랐다. 여기저기서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빗발쳤고, 그가 부재하는 날이 많아지자 세 사람은 이전처럼 자주 모일 수 없어졌다.

최근 성적이 자꾸 떨어져 눈총을 받는다는 상수 또한 바쁘기는 매한가지라, 강한은 결국 미루고 미루던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당장 돈을 많이 주는 호프집과 어쩌면 졸업 후 직장으로 삼아도 될 만한 패밀리 레스토랑 중에 고민하기를 한참.

엉뚱하게도 그가 마지막에 고른 선택지는 카페였다.

면접을 보러 갔던 패밀리 레스토랑이 하필이면 유일의 동네와 가까운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햇볕은 얼마나 뜨겁던지. 당장 더위를 피할 그늘과 목 축일 음료가 필요해서, 한은 어쩔 수 없이 그 카페에 방문했다. 지난번 시켜 놓고 한 입도 제대로 먹지 못한 살구 에이드 맛이 궁금하기도 했으므로.

혹여 기억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무색하게끔, 카페 주인은 한눈에 강한을 알아보았다. 주문을 하기 전부터 눈을 두 배로 키우고서는 ‘어! 혹시 알바 생각 있어서 왔어?’ 하고 반갑게 물어 준 덕분에 한 역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네, 한마디로 면접은 간단히 마무리되었다.

그때부터 약 열흘쯤 한은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레시피와 각종 용어들을 외우느라 바빴고, 기계 사용 방법을 익히는 것도 쉽지 않았다. 워낙 기본 상식이 없던 탓에 매일매일 머릿속에 쥐가 날 것 같은 날들이었다. 스팀에 화상을 입고, 믹서 날을 세척하다 베이기도 몇 번.

그래도 한은 자책하거나 작아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만 더, 어느 정도 능숙한 지점이 오기 전까지만 아르바이트 사실을 숨길 생각이었다. 허둥지둥 어색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으니까.

어차피 요즘 유일은 메시지 답장도 몇 시간에 한 번 몰아서 할 만큼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한은 조금 안이해졌다. 이곳이 아무리 그의 집과 가깝고 또 아는 형이 하는 가게라고 해도, 최소한 개학까지는 비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언제부터 한 거야?”

그러나 사장까지 합세해 어렵게 지켜 준 비밀은 금세 깨지고 말았다. 이제 막 혼자 주문을 받게 된 첫날이었다. ‘어서 오…….’까지만 내뱉어진 인사를 더 듣지 않고 유일은 당장 추궁했다. 서운한 듯한 눈동자와 낮은 목소리가 죄책감을 불렀다. 하필 퇴근을 딱 한 시간 앞둔 이 시간에. 조금만 더 있었으면 엇갈렸을 텐데. 강한은 한탄처럼 생각하며 천천히 답했다.

“한 일주일……, 됐어.”

은근슬쩍 일한 기간을 줄여 답했다. 크음, 괜한 헛기침까지 섞어 낸 대답이 무척 변명 같았다.

그렇지만 아르바이트 사실을 숨겼다고 해서 유일에게 변명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는 한의 보호자가 아니었고, 만약 그렇다고 해도 카페 일은 무척 건전하고 번듯한 자리다. 이렇게 내연을 벌이다 들킨 사람처럼 눈알을 굴릴 이유가 하등 전무했다.

“오디션 보고 왔냐?”

미세하게 굽었던 어깨를 쫙 펴 내며 한이 물었다. 그러자 유일은 손질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응.’ 순종적인 대답과 다르게 약간 짜증이 묻은 눈길이 카운터 뒤편을 향했다.

“살구 에이드 두 잔 테이크아웃으로 할게.”

“…두 잔?”

“응.”

여전히 한의 뒤쪽을 노려보는 채로 한유일이 카드를 내밀었다. 뾰족한 시선에 맞은 사장이 소리 없이 두 손을 모아 비비는 흉내를 냈다.

그 소란 가운데 위치한 강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밖에 누구 기다리나.’ 하는 찜찜한 생각을 했다.

“음료 준비되면 불러 드릴, 아, 불러 줄게.”

“응. 형,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한유일은 사장을 향해 과도하게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모순적인 손가락이 까딱, 건방진 움직임을 했다. 그보다 예닐곱 살 많은 사장은 자존심도 없이 후다닥 달려 나가 먼저 문을 열어 주었다.

강한은 그저 ‘일정이 바쁜 중에도 카페에 올 만큼 중요한 할 말이 있었나.’ 싶었다. 그러고는 금세 더 중요한 문제에 빠져들었다. 두 잔이라……. 밖에 누가 있는 걸까. 여덟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집 주변 카페에 들러서 같은 음료수를 나눠 먹고 싶은 사람이?

팽팽 도는 생각을 따라 한의 손도 더 빠르게 음료를 휘저었다. 끝이 동그란 머들러가 탄산과 살구 원액을 끊임없이 휘저었다. 작고 동그란 거품이 한가득 생길 만큼 전투적이던 손은 가게 문이 다시 열릴 쯤에야 멈추었다.

강한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침을 뚝 떼고 잔을 내밀었다. 유일은 너무 저어 더 이상 저을 필요도 없을 만큼 색깔이 진한 에이드를 의심하지 않았다. 잔 안을 둥둥 떠다니는 살구 덩어리를 흡족하게 보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형 그럼 갈게요.”

카페 문을 계속 보고 있으면 한유일과 함께 온 사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느라 강한은 유일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해석하지 못했다. 다만 멍한 눈으로 보고만 있으니, 낮게 웃은 그가 문을 가리켰다.

콕콕, 예쁜 손가락이 출입구를 가리키더니 두 손을 바투 쥐고 걷는 시늉을 했다. 한은 어디로 보나 ‘같이 가자.’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그의 행동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나?”

“퇴근 얼마 안 남았다며. 형이 같이 가래.”

“어응, 그래, 얼른 가라!”

한유일이 무슨 부탁이라도 들어줬는지 사장은 당장 가 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강한은 무척 얼떨떨했지만, 입술 끝이 슬며시 상승 곡선을 그렸다. 퇴근이 기뻐서보다는 유일의 동행이 자신이라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카페를 나서면 바로 앞에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화단도 정성 들인 티가 났고, 무엇보다 반짝거리는 가로등 조명이 참 예뻤다. 검고 얇은 몸체 끝에 매달린 빛은 여름밤의 산책로를 조금 더 낭만적으로 만들어 주는 요소였다.

그래서 한은 퇴근 때마다 그 길을 택했다. 훨씬 돌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별처럼 빛나는 가로등 아래를 걷는 기분이 좋았다. <루나 더 퀸>에 나오는 은하수 길 같았다. 또 이 미적지근한 바람을 언젠가 한유일과 함께 맞는 날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 가슴팍을 벅벅 긁고 싶어졌다.

“이 길로 가는 게 습관이 돼서.”

“응, 좋다.”

마침내 상상에 그쳤던 산책을 함께 하고 있었다. 똑같은 음료를 마시며, 둘은 나란히 푸르스름한 어둠을 뚫고 걸었다. 한유일이 깊은 한숨을 내쉬지만 않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동화 같은 밤이었다.

“왜. 오디션 잘 안 됐어?”

강한의 놀란 눈 안에 들어온 유일은 기운이 빠져 보였다. 늘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던 얼굴에 먹구름이 가득 몰린 채.

“아니야.”

침울한 낯이 밤중에도 선명한데 유일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예쁘장한 입매가 파르르 떨리는 애달픈 웃음이었다.

한순간에 여름밤 낭만에서 벗어난 강한은 심각해졌다. 당장 유일을 잡아다가 근처 벤치에 앉히고 다시 따져 묻자 이번에 그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제 앞에 위협적으로 서 있는 한을 피하듯 옆으로 고개를 슬 돌려놓고, 눈만 깜빡거렸다.

“뭔데. 누가 뭐라 해? 괴롭혀?”

한유일이 이토록 그늘진 얼굴을 보인 적 없었으므로 강한은 덜컥 겁이 났다. 제 선에서 해결해 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일이 벌어졌다면 어쩌나 하고 속이 갑갑해진다. 잘은 몰라도 방송국 일을 하다 보면 그렇게 더러운 꼴을 본다던데, 고작 열아홉 살에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한유일은 얼마나 쉬운 먹잇감일까 싶어서.

“그냥……. 내가 되게 많이 부족한가 봐.”

정말 모진 취급이라도 받았는지, 유일은 재차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촉촉한 눈동자가 스르륵 떨어져 바닥을 담았다.

“대본 리딩 정말 많이 했는데. 선생님 말씀대로 연애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뭐 경험이 있어야 연기하냐? 너 잘한다며.”

“혼자서 연습만 한 게 티가 많이 나나 봐. 엄청 비웃더라. 나도 그냥 학원에 가서 애들이랑 부딪혀 봤어야 하나….”

기운 떨어지는 말이라고는 반 마디도 하지 못하던 유일은 내내 침울했다. 의기소침하게 땅을 톡톡 쳐 대는 모습이 너무 낯설어, 한은 제가 곤경에 빠진 것처럼 심란했다. 오랜만에 보는 한유일이 이런 상태라니 속상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내가 도와줄까?”

그래서 한은 대뜸 던져 보았다. 명색이 한 살 많은 형 아니던가. 항상 유일에게 무언가 받기만 했는데, 이럴 때라도 도움이 되지 못하면 큰일이었다.

“한이가?”

“…어, 내가 뭐. 그쪽으로는 아는 건 없지만. 내가 보고 이상하면 말해 주고, 그런 거라도…….”

말을 이어 갈수록 그다지 영양가 없는 도움이라는 생각이 들어 끝이 흐려졌다. 그러나 땅만 바라보고 있던 유일의 얼굴이 불쑥 들렸다. 가로등 불빛에 혼자만 흠뻑 젖은 낯이 해사하게 웃었다.

“정말?”

불길하게 느껴질 만큼이나 빠른 태도 변화였다. 그럼에도 한은 눈을 끔벅거리며 ‘어어.’ 하고 답했다. 애초 한유일이 직접 문을 열어 준 새로운 세상의 규칙이 그랬다. 첫 번째, 유일의 부탁은 웬만하면 들어줄 것.

“와, 정말 나 한이 없으면 어떻게 살지.”

“…오버야, 왜 또.”

강한은 괜히 무뚝뚝하게 인상을 긋고 먼저 벤치를 벗어났다. 씰룩거리는 입술을 잡아 누르며 빠르게 걷자, 금세 쫓아온 유일이 또 손을 잡아챘다. 한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을 만큼 느슨한 세기였다.

그러나 강한은 떨치거나 눈을 흘기지 않은 채 가만히 걸었다. 엉성하게 마주 얽힌 손끝을 이따금 움찔거리며, 새로운 세상의 두 번째 규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속절없이 빠져들 것.’

키 큰 청년 둘이 손을 맞잡고 걷는 광경은 시선을 모으기 충분했다. 때문에 얽혔던 손을 빨리 빼내야 했으며, 그때부터 유일의 하얀 얼굴은 아주 정직하게 서운함을 담았다. 이어지는 걸음 하나하나가 바닥을 푹푹 뚫고 들어가는 듯 무거웠다.

그러니까 밤 산책을 삼십 분이나 하고서도 유일의 집에 들어선 것은 일종의 객기였다. 속절없이 빠져든 마음과는 다르게 이 애매한 관계를 지켜야만 하는 이의 갈증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거를, 지금?”

“아무래도 어렵지? 그냥 대사만 해 주면 돼. 어색해도 괜찮아.”

그렇대도 이렇게 난관을 마주할 줄은……. 강한은 너무 세게 쥐어 구겨진 종이를 허벅지 위에 슥슥 펼쳐 내며 마른침을 삼켰다.

잔뜩 풀이 죽은 유일을 달래느라 ‘그 대본, 그거. 오늘 도와줄까?’ 하고 물었던 게 화근이었다. 마음이라도 고맙다며 사양할 것만 같은 천사의 얼굴을 하고, 유일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단박에 눈을 휘어 접은 그는 기다렸다는 듯 한을 초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한은 기분이 좋았다. 그도 이 좋은 여름밤을 쉽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막차가 끊기기 전까지 조금만 더 유일과 시간을 보냈으면 했다. 어차피 대본 연습이야 구실에 불과할 테니.

하지만 유일이 건네어 준 대본은 꽤 본격적이었다. 기껏해야 몇 마디 대화나, 곤란해 봐야 사랑싸움쯤일 것이라 예상했던 한은 무척 당황하고 말았다.

「이원: (한숨 쉬며) 남자랑 해 본 적은 있어요?

공명: (잠시 침묵) (헛웃음) 그게 중요합니까?

이원: (단박에) 중요하죠. 딱 보니 안 해 봤네. (가자미눈으로) 키스라도 안 해 봤어요?

공명: (화를 참는 듯) 그게 그렇게 중요하면. (이원의 멱살을 잡듯 거칠게 당겨) 지금 해 볼까?

이원: (잠시 놀란 눈) (이내 평정 찾고) 질문을 했더니 수작을 걸어요?

쥐고 있던 옷깃을 놓는 공명, 역시 아무 일 없겠구나 안심하는 이원.

이원: 아무튼 말 돌리는 데에는 선수… 읍!

놓았던 손으로 돌연 뒤통수 감싸 당기는 공명. 이내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는다.」

첫 대사부터 눈을 의심하게 만들던 글자들은 후반으로 갈수록 그 농도를 더했다. 한은 괜히 종이를 다시금 고쳐 잡으며, 미간을 좁혔다.

“남자랑…. 근데 야, 미성년자한테 이런 대본을 줘?”

“연기잖아. 그리고 입술만 부딪히는 수준인데?”

“……아니, 입술 문제가 아니라.”

남자랑 해 봤냐는 대사부터 문제라고.

그렇게 답하려고 보니 입술이 부딪히는 장면은 또 괜찮은가 싶어 말이 막혔다. 당장 기절할 것처럼 민망했다. 침대 매트리스가 들썩거릴 정도로 온몸을 가만둘 수 없었다. 그런데 한유일은 너무도 진지했다. 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가 엄한 선생님이라도 되는 듯 보였다. 장난스럽거나 어색한 기색이 보이면 실망했다며 냉정한 엄벌을 내릴 듯했다.

“걱정 마. 뽀뽀는 안 할게.”

그 말이 떨어지고서야 강한은 목을 가다듬었다. 기나긴 숨을 내쉬고, 마침내 어색한 투로 첫 대사를 읊었다.

“남자랑 해 본 적은 있어요?”

닭살이 오스스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차마 유일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한 채, 강한은 말만 더듬지 말자고 다짐했다.

딱딱한 한의 말투에도 불구하고 유일은 자연스럽게 다음 대사를 이어 갔다. 지문이 요구하는 행동과 표정을 그대로 반영하면서도 제 것처럼 전환하는 과정이 신속하고도 깔끔했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이 놀랍도록 근사해서, 한은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을 얼른 쳐 주는 데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느덧 민망함과 걱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게 그렇게 중요하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유일이 무게 중심을 옮기는 것이 오감으로 다 전달되었다. 저도 모르게 한은 벌써부터 눈을 키웠다. ‘잠시 놀란 눈’이라는 지문은 아직 차례가 오지 않았음에도.

“지금 해 볼까?”

나지막이 속삭인 유일은 그야말로 멱살을 잡듯 한을 끌어당겼다. 놀란 눈 그대로 끌려간 한이 티셔츠 네크라인 주변을 더듬었다. 조각처럼 고운 손은 금세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류하듯 떼어 내 보아도 유일은 물러나지 않았다.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이에서 작게 웃었을 뿐.

“다음 대사 해야지, 한아.”

간지러운 바람이 한의 콧잔등을 할퀴고 지났다. 주문이 걸린 듯한 입술은 곧장 벌어졌지만, 아무 대사도 뱉지 못했다. 그저 달싹거리다가 애처로운 단어를 툭 내어놓았다.

“서, 선수….”

두어 문장의 대사 중 지금 당장 강한의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그뿐이었다. 어떤 힐난처럼 쏟아진 단어에 유일의 얼굴에는 찰나에 균열이 일었다. 한은 빳빳하게 굳은 채, 철저히 연기되었던 낯에 스며드는 어떤 기색을 목격했다.

그것은 분노나 질투와 결을 같이하는 듯했으나 조금 더 성마르고 거친 욕망에 가까웠다.

‘설마.’

마른침이 꼴깍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잡혀 있던 티셔츠가 홱 당겨졌다. 그 바람에 충분히 가까웠던 유일의 낯이 그림자처럼 변해 한을 덮쳤다. 눈이 절로 질끈 감기는 충돌이었다.

“읏!”

입술에 말캉한 촉감이 닿았다는 충격과 동시에 통증이 일었다. 유일의 반듯하고 하얀 이가 복수처럼 아랫입술을 콱 깨문 탓이다. 한은 움찔 떨면서 두 주먹을 쥐었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한동안 두 입술은 맞물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뽀뽀보다는 짙고 더 오랜 입맞춤을 느끼며, 강한은 ‘첫 키스…….’ 하고 아득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슬쩍 실눈을 떠 보기도 했다. 어느 정도 후에 고개를 떼어 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 즈음 유일의 입술이 약간 멀어졌다. 여전히 숨결이 섞일 정도의 가까운 거리기는 했으나, 떨어지는 감촉은 분명했다. 말캉말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멀어지는 일은 한을 꽤나 아쉽게 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은 그저 아주 천천히 눈을 뜨며 아랫입술을 슬쩍 혀로 훑어 보았다. 유일이 아릿할 만큼 물었던 부위가 근질거렸다.

그때 눈이 마주쳤다. 지나치게 가까운 유일의 눈동자가 번들거리며 한을 담고 있었다.

두 번째 충돌은 조금 더 아팠다. 옷자락이 아니라 아예 뒤통수를 우악스럽게 당긴 유일은 입술을 잡아먹을 듯 덤볐다. 그가 힘주어 잡아챈 머리칼과 예상치 못한 습격의 조화로 한은 무방비하게 입을 벌렸다. 아, 하고 내뱉은 작은 신음이 금세 먹혀 들어갔다.

입맞춤은 어느새 단순히 입술을 핥고 빠는 수준을 지나 있었다. 미끈미끈한 혀가 치열을 훑고, 방황하는 제 혀를 문지르며 휘감았을 때. 강한은 어느덧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키스가 이런 것인 줄은 몰랐다. 강한이 생각하기에 키스는 기껏해야 서로의 입술을 포개고 코끝이 비벼질 정도로 고개를 돌려 대는 스킨십이었다. 드라마에서 짤막하게 본 키스 신이 다 그랬다. 물론 그 과정이 길어지다 보면 서로의 타액이 묻기도 하겠다 생각했지만……. 이렇게 질척하고 노골적일 줄이야! 조금만 더 했다가는 아래에서 반응이 올 것 같아 한은 얼른 고개를 물렀다. 다만 유일의 손에 가로막혔을 뿐.

“음…!”

항변처럼 목 안쪽을 울리자 유일은 코로 숨결을 내뱉었다. 웃음처럼 흘러나온 바람에 강한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나저나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잘해?’

아닌 말로 고작 열아홉짜리 혀 놀림이 너무 능숙했다. 게다가 남는 손으로 슬며시 옆구리를 쓸어 올리는 여유는 또 어떻고.

붉게 달아올랐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식어 갔다. 강한은 입천장을 문질러 대는 기분 좋은 감각을 애써 모르는 척하고, 유일을 밀어냈다. 조금 전보다 진지하고 거세게. 어깨를 꽉 쥐어 잡아떼듯 고집을 피우자 그때서야 뒷머리를 잡아챘던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그 한유일이 두피가 아릿할 만큼 머리채를 잡다니. 평소라면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거칠고 함부로 하는 태도였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그게 더 아랫배를 뜨겁게 만드는 요소였건만, 어느덧 차갑게 식은 한은 젖은 입술을 벅벅 닦아 냈다. 많이 해 봤으니 저렇게 과감하고 대담할 수 있는 거였다.

“씨발놈아, 안 한다며.”

‘잡아 잡수쇼.’ 하고 입까지 벌려 준 것이 무색하게끔 화가 났다. 왜인지 시야도 흐릿해, 뜨거운 눈도 꾹꾹 눌러 낸 한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단숨에 현관을 향해 뛰는 그를 유일 또한 뒤쫓았으나 집을 나선 것은 강한뿐이었다. 으리으리한 저택 문을 부서질 듯 거세게 닫고 나오며 그는 씩씩거렸다.

거친 호흡이 할퀴고 지나는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따라오면 뒤진다고 목이 뒤집어지도록 소리를 지른 탓이었다. 그러고도 한은 더더욱 속도를 높였다. 달려가듯 빠른 속도로 걷는 내내, 손에 꽉 쥔 핸드폰이 줄기차게 울어 댔다.

***

개학을 맞이한 학교는 북적거렸다. 방학이 너무 짧다는 투정 어린 말들과는 다르게, 은근히 상기된 기류가 학교 근방을 모조리 메우고 있었다. 그 덕에 아직 후덥지근한 공기가 더 뜨겁게 느껴졌다.

강한은 잔뜩 신난 아이들 틈새를 뚜벅뚜벅 가르고 지났다. 따로 비켜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애들은 알아서 공간을 만들었다. 삼류 영화의 보스처럼, 한은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길을 묵묵하게 걸었다. 평소에는 조금 머쓱해하며 피하거나 아니면 고맙다고 웃어 줄 때도 있었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첫 키스 후 일주일이 지났다. 한유일은 하루에 한 번씩 꼭 전화를 걸었고, 받지 않는 강한에게 화도 내지 않았다. 메시지로 ‘한아 나 계속 피할 거야?’ 하고 한 번 물었을 뿐, 별달리 첨언도 없었다.

처음에는 괜히 화가 나서 연락을 피했지만, 질투를 빙자한 분노가 식은 후에는 민망해서 그랬다. 자연스럽게 굴 타이밍을 한참 놓친 것이다. 이제 와서 답장을 하기도 뭐했고 전화를 받아서 할 말도 없었다. ‘나 화 안 났는데?’ 하기에는 씨발놈이라며 소리까지 버럭버럭 지르고 나온 마당이었고, ‘이제 풀렸어.’라기에는 그야말로 쪽이 팔렸다.

그래서 강한은 교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스물의 나이로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 처음 입성하던 날보다도 더 발이 무거웠다. 앞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거구를 피해, 반 애들이 눈치를 보며 뒷문으로 들어갔다. ‘형, 안녕하세요…….’ 끝이 우중충하게 떨어지는 인사들에 ‘어.’ 하고 대꾸하기를 다섯 번째.

“형, 안녕하세요…. 바, 방학 잘 지내셨어요?”

범철이 주뼛거리며 물었다. 한은 ‘어.’ 하고 무심히 대꾸하고도 사라지지 않는 그를 향해 결국 돌아섰다. 찰나의 정적에 마음이 조급해진 범철은 제 머리를 마구 만져 대고 있었다. 방학 동안 파마를 했던 모양인지 조금 고불하고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작은 손안에서 뭉쳤다 풀어지기를 반복한다.

“호, 혹시 한 대 드릴까요?”

고작 머리를 헝클이는 모습 하나만으로 첫 키스의 아릿한 통증이 되살아났다. 두피가 당겨지던 그 낯선 감각을 회상하며 강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범철은 짝다리까지 서서 한쪽을 달달 떨어 댔다. 미디어 속 불량배를 모티브 삼은 듯이 차마 넘어가 주기 어려울 정도로 조악한 설정이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저 계단 너머에서 한유일과 상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은 얼른 뒤돌아 중앙 계단 방향으로 걸었다.

“너 매점 뒤에서 하냐?”

“아, 예, 거기 체육관 쪽으로 좀 가면요! 컨테이너 있는데요. 거기 뒤에요, 막 사람 없고.”

순식간에 상기된 범철이 뭐라 떠들며 따랐다. 그새 숨이 차는지 헐떡대며 끊기는 답변을 한은 재촉하지 않았다. 애초에 답이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당장 숨을 곳이 필요했을 뿐.

강한의 도피는 언제나 대책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첫 키스 후 악다구니질을 하며 쳤던 도망이 그러했다. 들끓던 화는 이틀도 가지 못했고, 남는 것은 언제나 민망함과 막막함이었다. 대책 없는 도망이 뾰족한 수가 되어 상황을 말끔히 해결하고 긍정적으로 바꾸어 준 일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알고 보니까 그 형님들도 한유일 맘에 안 들어서 눈여겨보고 계셨다고 하더라고요.”

알 만큼 알고 있는데도 또 달려 나오고 말았다. 한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긴 채 매점에 들어섰다.

언제인가 유일과 먹었던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소다 맛 아이스크림의 포장을 벗겨 파라솔에 앉을 때까지, 범철은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요약하자면 한유일을 싫어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고 그를 어떻게든 밟아 보려는 이들이 줄을 서 있다는 말이었다.

“저, 형님, 피려면 저 뒤쪽에서 펴야 하는데.”

“나 담배 안 펴.”

성의 없이 대답하며, 한은 비어 있던 의자 위로 발을 얹었다. 기다란 다리를 죽 늘어트려 거만하게 앉자 범철은 얼른 맞은편에 앉아 무릎 위로 두 손을 모았다.

“아, 끊으셨구나…….”

작은 중얼거림을 한은 못 들은 척했다. 핀 적도 없노라 해명할 만큼 중요한 놈도 아니었다.

“제가 유일이랑 원래 친했었잖아요. 형님도 요즘 가깝게 지내시던데……. 사실 걔 그렇게 괜찮은 애는 아니거든요.”

멍청해도 이렇게까지 멍청할 수가. 한은 소다 맛 아이스크림을 와작와작 씹어 먹으며 생각했다.

범철에게는 이미 도서관 뒤의 후미진 그늘 아래서 제대로 경고한 바 있었다. 손을 올리고 험악한 언행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장난처럼 지나갈 경고는 아니었다. 실제로 범철도 그 일 때문에 설설 기어 다니며 불쌍하게 굴지 않았던가.

고작 배드민턴 한 판과 흘러간 말 한마디에 이토록 딸랑거리다니. 보통 멍청한 새끼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서? 한유일 족치고 싶은 사람이 그렇게 많으면 네가 바라는 대로 되겠네.”

강한은 한 입 남은 아이스크림을 일부러 얄궂게 쪼옥 빨아 당겼다. 말 속에 들어 있는 뼈를 감추듯 씩 웃어 주자 범철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따라 올렸다.

“예에, 헤, 그렇긴 한데요……. 한유일 집이 워낙 잘사니까. 전에 창현이 일도 소문이 쫙 돌아서. 건드렸다가 인생 망할까 봐 좀 그런 분위기죠. 창현이도 존나 이 갈고 있어요.”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창현은 경솔하고 주먹이 앞서는 가벼운 놈이기는 했지만 범철만큼 음침한 구석은 없었다. 솔직하고 직선적인 놈이라 도리어 그 싸움이 관계의 촉진제가 되었다. 그는 자존심도 없이 제 얼굴이 뭉개졌던 날을 농담으로 하기도 하고, 지난날을 돌이켜 보니 잘못한 것 같다며 유일에게 상습적으로 뺏어 먹었던 매점 빵을 사다 주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싸움 이후가 더 돈독해진 셈이었다.

강한은 느슨하게 기대었던 몸을 추슬러 앉았다. 그러고는 새파란 파라솔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려 고심하는 척 손을 모았다. 자연스럽게 범철을 향해 가까워진 상체가 기울자, 범철은 얼른 고개를 대령했다. ‘네, 네.’ 명령한 적도 없는데 연신 끄덕거리며 속삭이는 낯에 기대감이 가득 보였다. 웃기는 놈이다.

요약하자면 한유일은 시한폭탄이고 제거해야 할 놈이다. 그런데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못 건드는 중이니, 어차피 이미 복학생인 데다가 잃을 것도 없고 미래도 없을 만한 형이 좀 도와 달라는 말이었다. 제 속내가 얼마나 투명한 줄도 모르고 범철은 아양을 잔뜩 떨었다. 남의 인생 망칠 생각에 신이 나서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우스워, 한은 킬킬 웃었다.

“범철아.”

“네?”

“이제 곧 가을인데 왜 우리 범철이 대가리에는 꽃이 폈을까?”

“…예?”

“들어가자.”

상대가 너무 멍청하니 화도 나지 않아 강한은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골 때리는 새끼……. 끌끌 웃으며 현관을 밟자 그때까지도 속뜻을 파악하지 못한 범철은 냉큼 뒤를 따랐다. ‘형님, 근데 담배 원래 뭐 피셨어요?’ 끝까지 눈치 없는 질문에 한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휙 내던졌다. 허공으로 높게 솟은 막대를 잡으려 어리바리 떠는 범철을 두고, 강한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교실로 돌아가는 길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아니나 다를까, 뒷문을 열자마자 쏘아보는 담임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강한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얼른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아닌 척 스르륵 굴러간 눈동자가 유일에게 향했다. 별다른 의도 없이 습관에 가까운 행위였다. 그저 ‘한유일은 뭐 하나.’ 살펴보고 평소처럼 금세 돌아올 시선이었다. 그런데 피곤한 도피를 감행하게 만든 그 범인 역시 한을 돌아보는 채였다. 범인보다는 도리어 형사처럼 날카로운 눈빛에 뜨끔해, 한의 눈은 얼른 책상에 놓인 유인물로 향했다.

내리깐 눈의 가장자리. 어둑한 인영으로서만 존재하던 한유일은 한참 후에야 정면을 향했다. 묵묵히 앉아 있던 그가 담임의 손짓에 따라 일어나 인사를 종용하고 허리를 굽혔다 펼 때까지, 강한은 흘끔거리기만 하다 얼른 책상에 엎드려 얼굴을 감췄다. 생각보다 남 시선에 의연한 한유일이라면 그날 키스 이후에 대해 지금 당장 따지러 올지도 몰랐다.

예상대로 곧 엎드린 머리 위에 그림자가 졌다. 커튼이 드리워지듯 어둑해진 사위에 한은 잠시 상수를 기다렸다. 단둘보다는 상수와 함께 있을 때 대면해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묻을 수 있을 것이었다.

“형, 벌써 주무시는 거예요?”

그런데 주변을 맴돌던 그림자의 음성이 유일과 달랐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상수의 목소리가 먼저 들리자, 놀란 한은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한유일보다는 훨씬 작은 덩치가 혼자만 빛을 가리고 서 있었다.

시선이 본능적으로 그 뒤를 향했다. 담임의 부재로 약간 소란스러운 교실 한복판, 으레 눈동자를 붙잡아 놓던 반질한 뒤통수가 없었다. 교실 구석에서 지직거리며 개학식 송출을 위해 고군분투 중인 TV 앞도, 담임의 중요 공지를 적어 두던 칠판 구석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아, 루나 오늘 또 오디션 있대요. 조회 끝나자마자 가야 된다 하더라고요.”

이리저리 튀는 눈길을 알아챈 상수가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그러더니 책상에 두 손바닥을 쾅! 아프게도 부딪힌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는 장난감을 마주한 어린아이 같았다.

“잘하면 이번 겨울부터 방송할 수도 있다는데요?”

“어, 그래…?”

“네. 막, 매니저 같은 것도 생기나 봐요. 전속은 아니라고 하는데. 그래도 존나 멋있죠. 그런 말 하니까 진짜 연예인 같고 막 소름이, 어우.”

한껏 상기된 상수는 금방이라도 콧김을 뿜어낼 것처럼 흥분해 있었다. 두두두, 요란하게 책상을 두들겨 대는 소리와 커다란 목소리 탓에 반 아이들 시선이 다 모일 정도였다. 덕분에 한은 오늘 아침 상수와 한유일이 계단을 올라오며 나누었을 대화를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상수야, 좀 조용….”

“야, 상수, 한루나 데뷔함?”

“어? 어어? 아, 당장은 아니고… 얼마 전에 계약해서….”

“헐, 대박.”

잠시 고요해졌던 반 분위기가 두 배로 시끄러워졌다. 화마처럼 쉽게 번져 나간 이야기가 삽시간에 교실을 물들이고, 웅성거리는 낮은 목소리들이 연기 대신 허공을 채웠다. ‘미리 사인 받아 놓자.’ 같은 말들이 웃음과 함께 번지는 틈. 강한은 가만히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어느 누구도 그 희소식을 두고 비꼬지 않았다. 범철처럼 못마땅한 얼굴로 침묵하는 놈은 있어도, 대다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어린애들처럼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야 맞았다. 거슬릴 게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한은 끝 간 데 없이 바닥으로 꽂히는 기분에 당혹했다. 굳은 얼굴을 풀 도리도 없이, 그는 내내 무뚝뚝한 얼굴로 빈 의자를 노려보았다. 늘 하얀 목뒤와 반듯한 자세가 시선을 끌던 한유일의 자리였다.

***

이제 한유일은 예전처럼 인파에 둘러싸였다. 그동안 강한 대하기가 무서워서 거리를 넓혔던 애들이 다시금 돌아와 치대고 웃으며 자리를 차지했다. 하필 때마침 강한이 유일과 멀어지면서 더욱 거리낄 것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대면하고 말을 섞을 기회를 놓친 죄로, 강한은 예전처럼 쉬는 시간마다 엎드려 잠을 잤다. 아침에는 일부러 수업이 시작할 쯤 느지막이 등교하고 점심에는 홀연히 학교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러면 유일은 오디션이나 대본 리딩, 혹은 촬영 같은 것을 이유로 오후 수업을 듣지 않았다. 하루에 서너 번만 마주칠 기회를 피해도 종일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오늘은 뭐래. 단역 들어간다더니, 찍는대?”

일부러 기를 쓰고 피해 놓고도 그의 빈자리만 확인하면 질문이 저절로 나왔다. 상수는 그런 한을 늘 이상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오늘도 입술을 잔뜩 내민 상수가 툴툴거렸다.

“아뇨, 오늘은 그냥 조퇴요.”

“그냥 조퇴?”

“네, 아침부터 얼굴 안 좋더라고요. 형님! 오늘은 점심에 어디 있으셨어요? 뒤늦게 사춘기 오셨나, 요즘 왜 그러시는….”

“어디가 아파서?”

“……몰라요, 감기인가. 열이 높대요.”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도 상수는 고분하게 답했다. 토라진 그의 심정을 헤아려 봤을 때 무척 친절한 태도였지만, 답을 들을수록 한의 얼굴은 더 구겨지기만 했다. 근래 항상 마음에 깔려 있던 짜증이 바글바글 끓는 기분이었다. 원인도 알 수 없이 변덕을 부리는 열기에 숨이 뜨끈해진다.

모든 것이 예전처럼 돌아갔던 며칠 동안. 한은 어쩌면 이것이 유일과 자신의 올바른 위치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순간 소동처럼 얽힌 날들이 있었지만 꼭 그 시간이 유지되리라는 법은 없다.

이제 유일은 더 이상 메시지나 전화를 하지 않았고, 강한은 그와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도 유일의 동네에 출근했다. 한동안 반 애들은 강한에게 꼬박꼬박 고개 숙여 인사하고 ‘형, 주번인데요.’ 같은 말을 건네기도 했지만 요즘은 다시 처음과 같아졌다. 데면데면한 눈동자들이 스윽 저를 스치며 지나고, 담임도 매번 아홉 시 언저리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그를 혼내지 않았다. 원래 그런 놈이라는 듯이. 요즘 왜 이러느냐는 질문은 오로지 상수만이 했다.

그러니까 저만 몰랐던 제 자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한유일이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있을 때 한층 더 빛이 나는 것처럼. 잠시 이탈했을 뿐인 자리를 이제는 서로가 돌아가야 할 때인지도 몰랐다.

“아프기는 왜 아프고 지랄이야…….”

그런데 고작 감기라는 단어가 이렇게 심장을 쑤셔 대면 문제가 있는 거다. 그것도 아주 커서 단념조차 어려운 문제가.

“예…? 형님, 왜 욕을 하고 그러세요. 요즘 뭔 일 있으시죠, 제가 들어 드릴게요. 다 털어놔 보세요.”

순순히 답만 해 주었을 뿐인데 욕을 얻어먹은 상수가 눈을 키웠다. 한껏 억울한 얼굴을 하고도 제 걱정을 하는 상수가 제법 귀여워, 한은 억지로 표정을 풀었다. 미간에 주름을 지게 하던 짙은 눈썹을 비틀며 ‘아니야.’ 하고 답하자 오히려 상수의 낯이 굳었다.

이내 돌처럼 하얗게 질린 상수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초등학생 시절 삥 뜯긴 일화였다. 강한은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나 의아해하면서도 가만히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머릿속으로는 ‘감기 걸리면 뭘 먹어야 되지?’ 같은 고민을 하면서.

***

단단한 손목에 걸린 하얀 비닐봉지가 부스럭거렸다. 커다란 저택 문 앞을 초조하게 왔다 갔다 반복하는 강한의 걸음을 따라, 봉지는 한껏 덜렁대기도 했다. 꽤 묵직한 무게 탓에 손목을 걸고 있는 하얀 구멍이 아래로 늘어난 채였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약국으로 뛰어가 사 온 물건들이었다. 종합 감기약과 몸살 약, 해열제, 쌍화탕까지. 약사에게 물어 가장 많이 나간다는 것만 구매했다. 그렇게 종류별로 단단히 준비해 놓고도 차마 벨을 누르지 못해서, 한은 삼십 분째 남의 집 앞을 서성대고 있었다.

설상가상 눅눅하던 공기를 뚫고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강한은 얼른 비닐봉지부터 품에 안고 봤다. 당황한 눈동자가 사방을 휙휙 둘러보다 결국 차고에 멎었다. 조촐할 만큼 작은 차양이 눈에 보였다.

커다란 몸을 그 좁은 곳에 바싹 붙어 선 채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한 시간 전쯤 상수가 보낸 ‘한루나 많이 아픔?’이라는 메시지에 유일은 여전히 답장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한유일이 답장만 한다면 대번에 마음을 놓고 돌아갈 텐데, 읽음 표시조차 없는 문장이 자꾸 심장을 찔렀다. 돌아가려 걸음을 뗐다가도 다시 커다란 문 앞에 돌아오기를 수십 번째 반복 중이었다.

속절없이 벌어지는 거리를 고의적으로 방치해 놓고, 이제 와서 약 봉투를 사 들고 온 것이 염치가 없어서.

강한은 점차 굵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아직 더운 9월인데도 빗줄기 덕에 공기가 서늘했다. 하복 셔츠 밑으로 드러난 팔뚝에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언제까지고 여기 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냥 문에 걸어 놓고 갈까.’

묘수를 생각해 낸 한이 슬쩍 고개를 뻗었다. 현관에 어딘가 걸어 놓을 만한 구석이 있나 살피는 사이에 금세 머리가 젖었다. 두피를 파고드는 냉기에 몸을 부르르 떨며, 강한은 얼른 차고에 몸을 딱 붙였다. 조금 오다가 끝날 비가 아니었다. 하늘을 향해 원망스러운 눈을 추켜들던 그가 순간 멈칫했다.

CCTV가 있었다. 동그랗고 까만 구체가 마치 사람의 눈처럼 한을 바라보는 채였다.

‘미친, 설마 한유일이 다 봤을까?’

이렇게 큰 집이라면 실시간으로 CCTV를 관찰하고 수상한 사람을 보고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흐르자 강한은 본능적으로 도망쳤다. 약 봉투를 품에 꽉 안은 채로 상체를 굽혀 보호하면서, 축축하게 젖은 땅을 마구 밟았다.

그러나 집을 서너 채 지나기도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 젖지 말라고 약 봉투에 같이 넣어 두었던 것이 덜그럭대며 요란을 떨었다.

‘한유일인가.’

강한은 젖은 손을 허벅다리에 벅벅 문대 닦고 아주 긴장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예상과 달리 핸드폰 액정에 뜬 번호는 한유일이 아니었다.

“여보세요.”

눈에 익지 않은, 아주 모르는 열한 자리 숫자를 상기하며 한은 덜컥 겁이 났다. 혹여 CCTV를 지켜보던 경호원이라든가, 그런 사람이 추궁하려 연락한 게 아닌가 싶었다.

[야! 한이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어떻게 형 연락을 이렇게 씹냐. 너 자주 놀러 온다더니 한번 와 보지를 않고!]

민우였다. 열한 자리 숫자와는 다르게 아주 익숙한 음성을 대번에 알아듣고, 한은 삽시간에 긴장을 풀었다. 하아, 한숨을 쏟아 내며 허탈하게 웃자 건너편에서 민우가 징징거린다.

[너 톡에도 뜨던데, 먼저 연락할 때까지 존심 상해서 안 했거든? 그랬더니 진짜 끝까지 안 하데? 형님 보고 싶지도 않았냐? 잘 지내?]

“…네, 잘 지내요.”

손으로 가리고야 있지만 쏟아지는 빗줄기가 핸드폰 속으로 침투할 것만 같았다. 한유일이 사 준 비싼 핸드폰이 그렇게 망가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강한은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민우의 이야기를 끊고 다시 전화하겠노라 그렇게 답할 생각이었다.

[형님은 못 지낸다. 나 이번엔 진짜 헤어졌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의 머릿속에는 ‘어쩐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는 헛웃음이 실실 나왔다. 은연중에 자신도 알고 있었던 것만 같다. 민우가 먼저 연락을 하거나 자신에게 기대어 오는 날은 늘 여자 친구와 싸우거나 헤어졌을 때라는 것을.

“형, 저 지금 바빠서요. 다음에 연락해요.”

할 수 있는 한 가장 무뚝뚝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곧장 전화를 끊었다. 얼른 약 봉투 안에 다시 핸드폰을 넣고, 고개를 숙였다. 제 머리통을 우산 삼아 봉투를 보호하면서 한은 재차 뛰었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이었다.

도망 나온 그 길을 다시 달려가면서 강한은 어떤 말도 정리하지 않았다. 그저 하얀 비닐 봉투를 꽉 안고 철벅철벅 바닥을 밟아 나갔다. 돌계단을 부술 듯이 올라서서 물에 젖은 손가락으로 몇 번씩 버튼을 눌렀다. 미끄러워 엇나가는 손을 다시 허벅다리에 문질러 닦고, 답이 올 때까지 연신 초인종을 눌러 댔다.

“야, 한유일!”

크게 외치는 순간 문이 열렸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초인종 너머의 한유일 역시 아무 질문이 없었다. 그저 달칵하고, 자물쇠 풀어지는 소리뿐이었다.

보통과 달리 유일은 현관까지 나와 보지 않았다. 적막하기만 한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던 강한은 ‘한유일.’ 하고 나지막이 불러 보며 신발을 벗었다. 체중이 실릴 때마다 푹푹 물을 뱉어 내는 운동화를 구석진 곳에 경사지도록 세워 놓고, 내친김에 양말도 벗어 그 옆에 놓았다. 축축한 발바닥을 교복 바짓단에 두어 번 문지르고서야 한은 슬며시 집 안에 들어섰다.

한유일은 언제인가 한이 세상모르고 잠들었던 소파에 누워 있었다. 문을 열어 주러 나왔다가 기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강한은 부리나케 그 앞으로 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푹신한 카펫 위에 약 봉투를 모조리 털어 놓고, 핸드폰은 성의 없이 옆으로 치웠다. 민우에게서 무어라 메시지가 계속 오고 있었다.

“너 밥은 먹었어? 약은?”

하얀 얼굴이 울긋불긋하고 숨도 색색거리는 게 아직 열이 높은 듯했다. 강한은 속이 타는 표정으로, 뜨끈한 이마 위에 잠시 손가락을 대 보았다. 수직으로 세운 두 손가락 끝을 이마 끝에 톡 올려놓기만 하는 우스꽝스러운 행위였다. 그런데도 손가락은 빠른 속도로 냉기를 잃었다.

불길한 생각에 그제야 아예 손바닥을 폈다. 이마를 모조리 덮어 내자 손 안쪽이 삽시간에 미지근해진다.

“야, 너 열 존나 높은 것 같은데. 병원 가 봤어?”

제법 심각하게 묻자 그제야 유일의 눈이 뜨였다. 하얀 눈두덩과 검고 긴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눈동자는 밤바다 같았다. 어둡게 일렁거리는 수면에 홀리듯, 강한은 연신 물어 대던 말을 뚝 멈췄다.

“……한이.”

몽롱하고 피곤한 눈을 아주 느리게 깜빡거리던 유일은 그렇게 첫마디를 뱉었다. 다 갈라져 호흡이 대다수인 목소리로 거칠게.

“꿈이야?”

“아닌데.”

“……응, 근데 왜 그렇게 젖었어?”

“밖에 비 와.”

그 대답에 혼몽하던 눈동자가 금세 커졌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숨을 들이마신 유일이 일어나려 애쓴다.

“감기 걸려, 비 맞으면….”

열에 잠식돼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채로, 유일은 남의 걱정을 했다. 그래서 강한은 제가 먼저 일어나 버렸다. 한유일이 꿈인지를 물을 때부터 간질거리던 가슴팍을 퍽퍽 때리듯 긁으면서.

“나 그럼 옷 좀 빌릴게. 물 너무 떨어져서……. 좀 자고 있어.”

유일은 ‘응.’ 하고 들릴 듯 말 듯 대답하더니 스르륵 눈을 감았다. 도저히 버틸 기운이 없는 것처럼 보여 방금까지 간질대던 가슴이 이제는 쓰라렸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물에 젖은 교복은 물기만 꽉 짜내 욕실에 널어놓았다. 샤워는 최대한 빠르게 끝마치고, 유일의 옷은 하얀 티셔츠와 회색 트레이닝복 바지를 꺼내 입었다. 여느 특수 부대의 루틴처럼 숨까지 헉헉대며 모든 일을 신속히 처리한 강한은 또 거실 소파 앞에 털썩 앉았다.

한유일은 아까처럼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다만 찌푸린 눈썹과 송골송골 맺힌 땀이 그다지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다. 한껏 옹송그린 몸도 불편해 보여, 강한은 일단 그를 둘러메고 방 안에 눕혔다.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 주고서는 흰죽을 끓였다. 남의 집 식재료를 마구 뒤질 수도 없었던 데다가 다른 죽은 자신이 없었다. 하얗고 끈끈한 죽을 묵묵히 저어 대는 동안, 한도 이따금 고개 돌려 재채기를 했다.

죽부터 약까지 손수 다 떠먹여 준 후에야 유일은 조금 편안해 보였다. 내내 주름져 있던 콧잔등이 펴졌고, 이마를 촉촉하게 만들던 땀도 멎었다. 다만 약 기운이 몰려오는지 그는 더 헤프게 웃고 쉽게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반쯤은 여전히 꿈인 줄 아는 양 싶었다.

“한이 어떻게 왔지. 나랑 이제 안 놀려는 줄 알았는데.”

“……조용히 하고 좀 자.”

“나한테 화났었어, 한이가.”

“야, 눈 감아. 자는 거 보고 가게.”

서로가 양보 없이 할 말만 내뱉고 있었다. 그럴 적에 강한은 제법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유일은 실실 웃는 채였다.

“그러면 옆에 잠깐만 누웠다 가.”

“내가 왜.”

“아프면 항상 혼자 있잖아. 오늘은 아니니까 기념하게.”

축 가라앉은 채 웃는 목소리가 폐부를 찔렀다. 하는 수 없이 푸욱 한숨을 내쉰 강한은 빈자리를 파고들었다. 유일의 열이 덥혀 놓은 덕분에 이불 속은 몹시 뜨거웠다.

비단 아플 때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그는 자주 혼자였을 것이다. 가게 일로 바쁜 할머니가 집을 비우면 따로 그를 돌봐 줄 사람이 없었다. 다만 유독 아플 적에는 혼자라는 사실이 잔인하기 마련이다. 괜찮고 익숙하던 사실이 갑작스레 오한처럼 전신을 짓누르는 감각을, 강한 역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근슬쩍 손을 잡아 오는 유일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저 그 뜨끈한 손을 마주 잡아 주며 눈을 스륵 감았다.

교통사고로 기나긴 결석을 하기 전까지, 강한은 만년 개근상에 빛나는 학생이었다. 웬만하면 지각조차 하지 않았다. 한겨울 사방이 깜깜하게 잠들어 있는 새벽에도 꽁꽁 얼어 있는 공기를 뚫고 나가 훈련했고, 불성실하다는 이유로 기합받아 본 일도 전무했다.

그래서인지 병원에서 처음 깨어난 날 역시 고통보다 불길함이 먼저였다. 반드시 무언가 잘못되고 말았다는 강렬한 예감이 머리를 직격했다. 늦은 것이 틀림없었다. 당장 일어나야만 했다.

마치 그날로 돌아간 것처럼 강한은 숨을 헉 들이켰다. 눈을 제대로 뜨기 전에 몸이 먼저 매트리스를 밀었다. 어서 일어나라고 전신이 외치고 있었다.

“한아, 괜찮아. 더 자도 돼.”

그러나 뛰어오른 가슴팍을 누군가 눌렀다. 넓고 단단한 손바닥이 펄떡대는 가슴을 짓누르고 도닥였다.

한은 순식간에 안정을 찾았다. 병원의 약 냄새나 낯선 기계음은 없었다. 몸을 휙 일으킬 적에 근육을 찢는 듯이 아팠던 고통도 다 지난 과거였다.

“…학교는?”

대신 목구멍이 칼칼하게 아파 왔다. 인상을 찌푸리자 저를 감싸 안은 유일이 나지막이 웃었다.

“한이가 내 감기 옮아서 우리 둘 다 못 가. 상수한테 얘기해 놨어. 그러니까 더 자도 돼.”

커다란 창에서 새벽의 냄새가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한유일의 음성을 닮은 푸르고 몽롱한 빛이었다. 그래서 한은 주문에 걸린 듯 눈을 감았다. 이 시간에 상수가 전화를 받았을 리 없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멀어져만 갔다.

“나한테 화도 났었는데, 우리 한이. 병문안 왔다가 감기까지 옮았네. 어떻게 갚지?”

가슴 위를 기분 좋게 도닥거리는 손길에 맞춰 한은 아주 느리게 호흡했다. 그러면서 반쯤 잠든 채로 중얼거렸다.

“뭘 갚…, 누가…….”

갚으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받아 온 무수히 많은 호의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야 맞았다. 그래서 한은 유일의 말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의식은 점점 가라앉는 중이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푸르스름한 새벽과 유일의 목소리가 너무도 편안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아, 저번에 말한 거 진짜야.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게. 꼭 생각해 보는 거야, 알았지?”

“으음….”

“나한테 바라는 거 있잖아. 꼭 생각해 와야 돼.”

마지막 말은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수마로 만든 접착제가 입술을 딱 붙여 놓은 탓이다.

한은 머릿속으로만 알았다고 대답하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잠기운에 진득하게 빠진 몸이 저절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며 유일을 마주 안았다. 서로의 콧김이 얽히는 감각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피하고 싶지 않은 새벽이었다.

***

화해 아닌 화해를 했다고 해서 유일의 유명세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쉬는 시간마다 반 애들이 몰려들어 질문 공세를 해 댔고, 그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대놓고 투덜거리며 눈치 주는 범철이 같은 놈도 여전히 있었다. 달라진 점은 이제 강한이 먼저 유일의 자리를 찾아갔으며, 상수와 셋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예 교실을 빠져나올 때도 많았다는 것이다.

아주 가끔은 한의 얼굴을 무기로 썼다. 애들은 범철이 ‘아, 존나 시끄럽네.’ 하고 투덜거리는 것은 무시했지만 강한의 눈썹이 조금이라도 솟구칠 때에는 눈치를 살폈다. 그러면 피곤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물면 끝이었다. 뒤늦게 각자 사정이 생긴 애들은 슬금슬금 유일에게서 멀어지고는 했다.

그런 식으로 자유를 만들어 함께 매점을 다녀오거나 스탠드 자리에 앉아 축구 구경을 했다. 키스나 열에 들뜬 채 손을 잡고 잔 밤은 구태여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계절만 가을이 되었을 뿐 달라진 점은 없었다. 강한은 어쩌면 이런 게 어른들의 연애 아닐까 싶었다. 딱히 관계를 정의하지 않았지만 서로에 대한 호감은 숨기지 않는, 그런 담백한 관계. 사귀자는 말 없이 마음을 주고, 헤어지자는 말 없이 이별하는 그런 사이.

“와, 그런 식으로 인맥 정리도 시키는구나. 이상한 친구랑 놀지 말래?”

“응. 그래서 상수 너랑 다니면 안 되나 고민 중이야.”

“미친, 너무한 거 아니니?”

코앞까지 날아왔던 축구공을 뻥 차고 돌아오자, 상수가 잔뜩 씩씩거리고 있었다. 코 평수가 잔뜩 넓어진 표정이 우습다. 강한은 대화 주제를 유추하려 애쓰지 않고 봉지 안에 들어 있던 쭈쭈바를 꺼내 물었다. 어차피 상수가 제 입으로 다 털어놓을 게 분명했다.

“아, 형님. 한루나가 저 이상한 친구라고 쌩 깐대요.”

역시나. 한은 비식 웃으며 쭈쭈바 꼭대기를 투 뱉어 냈다.

“왜 또.”

“아니, 매니저 형이 한유일한테요. 데뷔하기 전에 주변에 이상한 친구 있으면 정리하고요. 괜한 일 만들지 말고 또, 어, 소문 조심하라고 그랬대요. 완전 무섭죠?”

왜인지 강한을 뜨끔하게 만드는 이야기였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상수 옆에 앉았다.

“당연한 거지, 뭐.”

담담한 대답이 남의 목소리처럼 나갔다. 그러자 상수를 놀리느라 빙긋 웃고 있던 유일도 조금쯤 진지해졌다.

“소속사들 그냥 하는 말이야. 무서울 일 없어.”

한 톤 낮아진 목소리가 괜히 자신을 의식하는 것만 같아, 한은 큼큼 헛기침을 했다.

“이상한 친구 있으면 매니저가 처리해 주냐?”

“아하하, 그런 건 아닐걸. 그냥……. 처신 잘하라는 말 같아.”

“그래? 아쉽네. 범철이 좀 처리해 달라고 하지.”

“아, 대박, 형 천재 아녜요?”

상수가 깔깔 웃으며 팔뚝을 쳐 댄다. 흘깃 바라본 한유일 역시 웃고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 아쉬운 듯, 아니면 의중을 살피듯 조심스러운 눈동자가 강한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한은 서둘러 고개를 피하고 교실을 향해 걸었다. 담백한 관계니 어른의 연애 같은 것들을 운운한 사람치고는 무척이나 서툴고 어색한 태도였다.

여전히 한유일만 보면 입술만 보이고 마른침이 꼴딱꼴딱 넘어가서는 아니었다. 그저 가벼운 분위기가 편했다. 하루 종일 계약이며 매니저, 데뷔 작품 같은 묵직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다 보면 그냥 저절로 본능이 그런 방향을 원했다. 한유일이 데뷔하기 전까지는, 이렇게 가볍고 황당한 이야기만 해 대며 놀고 싶었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더 깊은 문제는 버려둔 채로.

상수는 한의 그런 변화를 무척 좋아했다. 강한이 처음으로 주말 약속을 먼저 제안했을 때는 거의 울기 직전까지 갈 정도였다. 덕분에 분위기는 항상 적정 수준을 유지했다. 상수가 ‘형도 드디어 저한테 마음을 여신 거예요.’ 같은 말을 해 주면, 카페 일을 마친 한밤중에 함께 유일의 집에 모여 노는 유난스러운 약속을 별것 아닌 것처럼 치부할 수 있었다.

토요일 오전 근무를 앞두고도 기어코 새벽까지 함께 놀고 난 아침. 강한은 아주 조심스럽게 신발을 신었다. 지난 새벽 내내 철 지난 공포 영화를 보아 댄 눈이 따끔거렸다.

“…사장 형이 괴롭히는 거야?”

소리 없이 일어나던 강한은 그대로 굳었다. 등 뒤에서 잠긴 한유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괴롭히기는. 잠깐 착각하신 거지.”

한은 어색하게 얼버무리며 얼른 문을 열었다. 당장 나갈 생각이었지만, 잠도 덜 깬 채 제 배웅을 하느라 우두커니 서 있는 유일이 귀엽게 보였다. 잠시 머뭇대던 걸음이 결심한 듯 멀어진다. 쿵! 닫힌 문 너머로 유일은 ‘이따 갈게.’ 하고 말했다. 카페에 왔다가는 당장 사장에게 따져 물을 기세였다.

전전긍긍하던 한은 그 자리에 멈춰서 골몰했다. 어떻게 하면 ‘사실 원래부터 토요일 오전 근무 정해져 있었는데, 두 시간도 안 자고 출근할 생각으로 놀러 온다고 하면 너무 특별하게 생각할까 봐 사장님이 갑자기 스케줄 바꾼 거라고 구라 쳤어.’라는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싶었다.

한참 고민한 끝에 메시지는 「내가 착각했나 봐. 지금 보니까 저번 주에 메시지 보내셨네.」 하고 썼다. 이 정도면 제법 합리적이고 또 있을 법한 일이었다. 스스로 흡족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대문 밖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강한은 본능적으로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검은 철문 너머에서 어떤 남자 둘의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 집 CCTV 있는 거 아니냐?”

“내가 가려 놨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강한은 이 불길하고 음침한 목소리를 어떤 날에는 운동장에서, 또 어떤 날에는 도서관 뒤편에서 들었다.

“이거 보면 소속사에서 바로 계약 취소할걸? 이미 팩스로도 보냄.”

취이익, 하고 스프레이 쏘는 소리가 거세게 울렸다. 그에 한은 헛웃음을 삼켰다. 이 또라이가 이번에는 한유일 대문에다가 낙서를 해 놓을 모양이었다.

“미친 새끼, 초음파 사진은 어떻게 구함? 개또라이야, 하여간.”

그러나 초음파 사진이라는 말은 강한을 잠시 굳게 만들었다. 멍하게 서 있던 한은 아주 느리게 대문 위로 손을 올렸다.

“이 범느님이 구하지 못할 것은 없느니. 야, 다 썼어?”

“좀만 더. 야, 진짜 전설템 준다 했다, 네가?”

“아, 앱솔루트죠. 다 했음 빨 튀자.”

범철은 고작 게임 아이템을 빌미로 이 더러운 짓에 친구를 끌어들인 듯했다. 그의 비상식이 너무도 황당해, 한은 이해하는 데에 한참이 걸렸다. 여전히 초음파 부분은 해결도 맺지 못한 채로 고개를 틀었다. ‘이 새끼를 어떻게 족치지?’ 하는 생각이 목뒤를 서늘하게 타고 올랐다.

그런 중에도 강한은 그다지 진지하지 않았다. 그저 범철을 너무 자주 봐주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끝도 없이 등신짓을 할 줄 알았다면 초장에 잡았어야 했는데……. 늦은 후회를 하면서, 한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일단 유일의 잠을 깨우고 싶지 않으니 근처 골목으로 끌고 가 딱 한 대만 때려 줄 심산이었다.

“암튼 이것도 안 먹히면 노 애비 호모 털어야죠. 지난번에 사진 보내긴 했는데 씹더라.”

“또 그 소리냐? 미친놈아, 더럽다고!”

“아, 진짜 둘이 뭐 있다니까. 강한 그 새끼랑? 안 그럼 왜 그렇게까지 감싸겠냐. 시발, 애비 없는 것들끼리 존나 통해 가지고 우웅, 자기양!”

그러나 이쯤부터는 느긋하던 맥박이 거세게 뛰어 댔다. 발끝이 차게 식고, 대문을 쥔 손이 빳빳하게 굳었다.

“두고 봐라, 내가 씨발. 제대로 된 증거 잡아 가지고 소속사에 보내 버릴 거임. 아님 걍 기다렸다가 한유일 데뷔하면 뿌릴까?”

냉동 인간처럼 굳었던 감각이 일순간 깨어났다. 갑작스레 들어온 발차기를 막아 내듯이, 강한은 묵직한 문을 밀어젖혔다.

쾅, 쳐 낸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골목 안으로 두 쌍의 뜀박질 소리가 가득 울렸다. ‘야, 시발, 빨리 뛰어!’ 악다구니 쓰는 범철을 강한은 미친 것처럼 쫓았다. 그가 대문 앞에 놓았던 웬 서류 봉투만 낚아챈 채, 대문에 쓰인 글자가 무엇인지, 데리고 온 똘마니가 누구인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저 새까만 뒤통수를 잡아채 뭉개고 말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코가 뭉개지고 이빨이 두 개 부러진 범철은 곧바로 병원으로 갔다. 강한이 직접 피 묻은 손가락으로 전화를 걸어 준 덕분에 조치는 빨랐다. 그의 부모님이 경찰에 신고한 것은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였다.

일요일 오후, 강한은 지방에서 급하게 올라온 어머니와 함께 경찰서에 가야 했다. 경멸 가득한 시선과 냉담한 시간을 견뎌서 나온 결론은 합의금 천만 원이었다. 뜨악하는 모친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속이 싸하게 내려앉았지만, 한은 무릎을 꿇지 못했다. 아직도 머릿속에 범철이 지껄이던 말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고개 숙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지 애비랑 똑같아.”

하지만 어머니의 말만큼은 강한을 무릎 꿇고 싶게 했다.

아직 경찰서를 다 나가지도 못한 주차장이었다. 아스팔트 바닥과 어울리지 않는 화단이 곳곳에 있었고 ‘정의’ 같은 글자가 돌덩이에 새겨져 있었다. 이곳저곳 구석에서 담배를 피던 남자들이 이쪽을 힐긋거리기도 했다. 강한은 그 모든 것을 모르는 척하며 바닥에 주저앉은 어머니를 부축했다. 그녀는 단숨에 뿌리치고는 속이 꽉 막히는 듯 가슴을 쳤다. 아픈 얼굴이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살 만하면, 사람이 좀 살 만하면. 이렇게 모가지를 잡고 흔드는 게, 진절머리 나게 똑같아. 일부러 그러니? 응? 일부러 그래?”

범철의 얼굴을 사정없이 뭉갤 때만 해도 강한은 모든 것을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학교에서 퇴학을 명한다면 그만둘 생각이었으며, 교내에 더 흉악한 소문이 난대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한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떠는 어머니를 보자 후회가 일었다. 범철에게 한 짓은 후회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한 일은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그 얇고 작은 손이 쥐어 낸 멱살이 정말로 숨통을 조이는 기분이었다.

한은 그녀가 흔드는 대로 가만히 받아 내며 끊임없이 죄송하다고 읊조렸다. 하지만 입술 새로 아주 작게 흩어진 사과는 한 번도 용인되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을 헐떡이다가 또 그만큼 가만히 앉아 있었다. 멍하고 탁한 눈으로 허공을 보던 여자가 한 시간쯤이 지날 때서야 일어났다. ‘일어나. 가자.’ 하는 음성이 이상할 만큼 평범했다.

***

그녀가 한을 데리고 간 곳은 정원시와 네 시간쯤 떨어진 지방이었다.

정신없는 사이 배터리가 1%밖에 남지 않은 핸드폰은 금세 꺼졌다. 한은 숱하게 남은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를 제대로 확인조차 못 한 채 사장에게만 문자를 남겼다. 정말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모친은 기숙사형 공장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한과 함께 들어갈 수 없었다. 처음 며칠, 강한은 찜질방을 전전했고 그다음에는 작은 고시원에 들어갔다. 침대와 책상 하나가 들어가면 가득 차는 공간이 달에 오십씩이나 했다.

“학교도 여기로 옮길 테니까 조용히 졸업만 해. 그다음에는 너 알아서 살아. 나도 이제 모르겠다.”

그녀 앞에서 강한은 죄인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이제야 진짜 현실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한에게는 상대를 피 칠갑으로 만들어도 쉽게 합의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의 모친 역시 세 들어 살던 건물을 통째로 사고 전국에 체인점을 낼 만큼의 행운과 재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강한은 그저 아주 평범하고도 약간은 불행한 집안의 스물 먹은 아들이었다. 천만 원짜리 합의금은커녕, 홀로 몸 누일 공간의 다달이 비용조차 제대로 낼 수 없는.

그 좁은 방 안에 누워 있으면 한유일과 상수와 함께 지냈던 날들이 모조리 다 꿈인 것 같았다. 허무맹랑한 다른 세계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자책과 후회는 반복할 때마다 더욱 짙고 깊어져서, 나중에는 괜히 모든 것이 미웠다. 특히 지나치게 맑은 낯으로 모든 것이 괜찮게만 느끼도록 했던 한유일이 그랬다. 그 미소를 떠올리면 너무 밉고 또 아파서, 강한은 전원도 켜지 않은 핸드폰을 아예 상자 속에 처박아 놓았다.

“어떻게 알고 오셨는데요?”

그러니까 유일의 소속사에서 사람을 보냈을 때는 잔뜩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한유일조차 행방을 모르는 와중, 어떻게 알고 고시원 문을 두드린다는 말인가.

“일단 명함부터 받아요. 들어가도 될까요?”

남자가 내민 하얀 종이에는 상수가 호들갑을 떨며 ‘거기 유명하잖아!’ 하고 외쳤던 소속사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실장 직함을 달고 있는 사람의 이름은 김명철. 범철과 묘하게 닮아 기분이 나쁜 글자였다.

“안 된다고 해도 들어오실 거잖아요.”

양복을 차려입고 머리까지 젤로 넘긴 남자의 첫인상은 무척 좋지 않았으나, 강한은 발을 물러 공간을 내주었다. 혹여 범철이 보냈다는 그 팩스 때문에 찾아온 것이라면 유일을 위해 해명은 해 주어야 했다.

고시원은 책상과 침대를 제외하면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다닐 공간밖에 남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손님을 의자에 앉히고, 강한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남자는 조금 어색하게 웃었지만 한은 턱을 굳힌 채 그를 노려보았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요. 나쁜 사람 아닌데.”

“하실 말씀이 뭔데요?”

“자, 이게 우리가 익명 제보로 받은 사진이고…….”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납작한 가방 안에서 종이 뭉치와 사진을 꺼냈다. 곧장 떨어질 듯한 것들을 한의 허벅지 옆에 놓아 준 그가 싱긋 웃었다.

“물론 거기 있는 거, 우린 다 안 믿지만.”

강한은 아주 긴장한 채로 종이들을 살폈다.

가장 먼저 읽은 것은 초음파 사진 아래 쓰인 문장이었다. 왼손으로 쓴 듯 꾸불꾸불한 글자들이 ‘한유일 애 맞고요, 지금 1개월 됐습니다.’ 하고 엉성하게 조합되었다. 그 아래로는 협박조로 작성한 이메일들과 각종 첨부 파일이 보고서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범철의 조악한 범죄를 소속사 측에서 한 차례 정돈해 회의를 거친 모양이었다.

“특히 이 부분.”

숱하게 이어지는 종이를 바쁘게 넘기던 손을 붙잡고, 남자는 종이 한가운데 어느 문장을 가리켰다.

「……사측 물음에 우범철 군은 ‘한유일이 게이인데 데뷔시키면 소속사도 곤란해질 것 같아 그랬다. 맹세코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같은 반에 강한이라는 형이 있는데, 둘이 손잡고 다니는 것도 여러 번 봤다. 정말이다. 사진도 보낸 적 있지 않느냐.’라고 변명하였음. 허나 자택 입구에 ‘창놈, 개새끼, 사이코패스.’ 같은 무작위식 욕설을 작성한 바, 단순 모욕의 의도가 큼.」

익숙하지 않은 형식의 문장들을 살펴보는 동안 강한의 머릿속에서 범철이 웃어 댔다. 음침하고 불길한 목소리가 ‘이거 보면 소속사에서 바로 계약 취소할걸.’ 하고 읊조리며 킬킬거렸다.

“당연히 헛소리죠. 그래서 우리 강한 친구도 주먹이 나갔던 거겠고, 그렇죠? 이런 더러운 말 듣고 참을 사람 많지 않잖아.”

남자의 말은 질문처럼 보였지만 강요에 가까웠다. 강한은 뻐근한 눈꺼풀을 간신히 움직이며, 아주 느리게 끄덕였다. 턱 끝만 까딱일 만큼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친구도 알죠? 유일이, 데뷔만 하면 뜨는 건 문제도 아닐 텐데. 사실이 아니라 해도 이런 말들 돌면 좋을 게 없고.”

“……네.”

“어떻게, 우리가 정리 도와줄까요? 합의금으로 천만 원 불렀다고 들었는데. 맞죠?”

이따금 스치는 드라마 장면에 강한 역시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한유일의 할머니나 기획사 대표 같은 사람이 자신에게 새하얀 돈 봉투를 던져 주는 유치한 장면을 말이다.

상상 속에서 강한은 그 봉투를 받기도 했고 또 거절하기도 했지만, 확실한 것은 매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상상을 하는 자신이 웃기고 기가 막히는 데다가 돈 봉투라니,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생각인지. 혹여 나중에 한유일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다면 이 이야기를 꼭 해 주어야겠다는 다짐에 웃음이 실실 흘렀었다.

“…그럼 전 뭘 해 드려야 하는데요?”

그 수많은 상상 중에서 이런 경우는 없었다. 이토록 참담하고 두려운 기분으로 마른 입술을 축여야만 하는, 그런 상황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

“해 주긴요. 어차피 해야 할 청소, 조금 더 깔끔히 하겠다는 건데. 우리가 무슨 조폭인가!”

무척이나 날건달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남자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정말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는 듯이 일어섰다. 조금 구겨진 옷자락을 탁탁 펼쳐 정돈한 그가 조금 더 눈을 휘었다. 주름이 짙게 질 만큼 눈웃음이 버릇이 된 사람이었다.

“강한 씨는 그냥 친구를 위해서 좋은 일 했을 뿐이고.”

“…….”

“앞으로도 그만큼만 친구를 위하면 되죠, 뭐.”

강한은 지어낸 웃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먼저 현관 앞에 서는 남자를 따라가 조용히 문을 열어 줬을 뿐.

돌아선 남자는 이미 확답이 필요 없는 듯 시원스럽게 인사했다. 영영 볼 일 없는 사람처럼.

“그럼 잘 살아요?”

그는 듣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 강한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한은 가만히 문을 닫았다. 으깨진 자존심을 구태여 소리 내고 싶지 않았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꾹꾹 누르며, 강한은 상자를 뒤적거렸다. 어머니가 대충 쑤셔 담아 온 옷가지 사이에 처박힌 핸드폰은 먹통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충전기를 꽂고 전원 버튼만 수십 번을 눌러 댔다. 핸드폰은 꺼지고 켜지기를 반복하다가, 한참 후에야 쌓인 전화와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강한은 잔뜩 쌓인 알림을 무시하며 곧장 유일과의 메시지 창을 켰다. ‘한아, 어디야. 내가 갈게.’ 하는 문장을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나머지는 읽지도 않았다. 그저 키패드만 바라보며 손가락을 놀렸다.

「내가 다시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마.」

「아무것도 묻지 말고 알아보지 말고.」

「그냥 잘 살고 있어. 내가 연락할게.」

마음이 급한 만큼 손가락이 떨려 문장은 볼품없이 쪼개졌다. 그 파편에 목이 긁힌 사람처럼, 강한은 핏대가 선 목덜미를 꾹꾹 눌러 대며 심호흡했다. 해야 할 말을 다 못 한 것 같은데 벌써 읽음 표시가 뜨고 있었다.

한유일은 지체 없이 전화를 걸었다. 단숨에 화면을 크게 채운 이름 옆에 붙은 하트가 유독 쓰려서, 강한은 헐떡거리며 거절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얼른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내 부탁 들어준다며 개새끼야.」

뿌옇게 흐린 눈 때문에 오타가 두어 개 섞인 것 같았다. 그러나 고칠 겨를이 없었다. 아직 메시지를 읽지 않은 유일에게서 전화가 한 번 더 왔고, 강한은 재차 거절 버튼을 눌렀다.

「나중에 보자.」

기약 없는 약속이 마지막이었다. 강한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전원을 꾹 누르고, 잠든 핸드폰을 상자 속에 처박은 뒤에는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다. 그저 자기 자신을 구석에 버려둔 것처럼 긴 잠을 잤다. 아주 기나긴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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