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첫사랑
한유일은 여름이 싫었다.
정확히는 여름이면 피할 수 없는 땀 냄새와 타인의 진득한 살성, 꿉꿉한 옷감을 기피했다. 물론 그 모든 항목을 합쳐도 생일만큼 싫지는 않았지만.
“내가 다 사 준다니까? 골라, 골라!”
억지로 끌려온 매점은 비어 있던 창고를 개조해 만들었다고 했다. 생긴 지 3년도 되지 않아 모든 시설은 신식이었지만, 에어컨만큼은 따로 없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유일이 싫어하는 모든 것의 집합체였다.
북적대는 사람, 고성과 욕설, 땀 냄새, 눅눅한 습기와 찐득찐득한 촉감. 눈앞에 벌어진 상황 속 모든 분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유일의 걸음은 멈추었다. 입구 옆쪽으로 겨우 찾은 빈 공간에 서서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 정말 괜찮아.”
나름에는 이를 악물고 뱉은 말이었지만, 부반장은 쾌활하게 웃으며 먼저 앞서 나갔다. 싫다는데도 부득불 생일 선물을 주겠다며 끌고 온 것도 모자라 그는 바글바글한 인파 속을 뚫고 나가며 손짓했다. 어서 이 전쟁 통에 합류하라는 듯, 부추기는 손짓이 유일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천장에 달린 옛날 선풍기에서 탈탈탈 소리가 난다. 그야말로 전쟁터에 쏟아지는 폭격 소음 같았다. 그 틈을 뚫고 앞까지 나아간 부반장은 한 번 더 ‘한유일!’ 하고 재촉했다. 유일이 결국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한 걸음을 떼어 냈을 때.
“야, 야, 비켜.”
입구로부터 훨씬 짙은 땀 냄새가 몰려왔다. 굵직한 목소리와 함께였는데, 애들은 돌아보지 않고도 주인공을 아는 양 살살 피하기 시작했다. 유일도 덩달아 인파에 휩쓸려 조금 더 모서리로 몰려났다.
갈라진 틈을 익숙하게 차지한 것은 태권도부 무리 서너 명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교복이 아닌 트레이닝복이나 도복을 입고 다녔는데, 언제나 짙은 땀 냄새가 났다. 고된 훈련 탓이겠지만 유일은 늘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태 차례를 기다리던 애들을 아무렇지 않게 밀치며 지나가는 모양새만 봐도,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래서 여태 소극적이던 발에 힘이 붙었다. 유일은 부반장이 그랬던 것처럼 인파 속을 파고들었다. 다만 짜증스러운 눈길과 마주칠 때마다 ‘미안, 미안.’ 하고 웃으며 사과했다. 그러면 상대는 대부분 조용히 넘어가 주었다. 그렇게 오기로 파고든 덕분에 결국에는 부반장과 가까운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이제 금방 살 수 있어. 불벅 먹을래?”
부반장은 제가 길을 뚫어 준 것처럼 뿌듯한 얼굴로 물었다. 유일은 얕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사양했다. 정말 괜찮다고,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어깨 위에 낯선 손길이 닿았다.
“친구야. 우리 먼저 좀 살게?”
두텁고 큰 손이 어깨를 꾸욱 눌러 쥐는 순간, 유일의 낯도 차갑게 굳었다. 잘 하지 않는 욕설이 입 안에 담기려 했다.
“야, 등신 새끼들아. 뭐 하냐? 줄을 서야지.”
그런데 욕설은 별안간 남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속이 읽힌 것만 같아 깜짝 놀란 유일은 뒤를 휙 돌아보았다.
“강한 뭐 하다가 이제 옴? 지금 우리 차례야. 여기로 와라.”
“지랄 말고 나와.”
입구에 기대어 선 남자는 키가 꽤 컸다. 매점의 낮은 천장에 머리가 곧 닿을 것만 같은 덩치로, 그는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다른 애들은 바보라서 줄 서냐? 나와라, 줄 서서 처먹자.”
한눈에 봐도 잘생긴 그는 특히 눈썹 뼈가 매력적이었다. 툭 불거진 뼈 위로 짙은 눈썹이 넘실대며 경고를 보냈다. 그런 표정에서는 서열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만의 여유가 보였다.
“아, 선비 새끼, 진짜…….”
새치기를 감행했던 무리는 낮게 욕설을 지껄였지만, 대놓고 반항하지는 않았다. 잔뜩 투덜거리며 돌아가 놓고 오히려 그 ‘강한’이라는 사람에게 장난을 칠 뿐이었다. 유일은 그들의 태도 변화를 비웃었지만, 그들보다는 강한의 얼굴 위에 조금 더 오래 시선을 두었다.
그 첫 만남 이후, 유일은 심심치 않게 그 남자를 마주쳤다. 기회가 되면 체육관 근처를 배회하고 태권도부가 멀리 보이면 다가가 보기도 했으니, 어쩌면 발견이라고 해야 옳은 표현일 수도 있었다.
감정의 시작은 그저 호기심이었다. 그의 평소 성격이 궁금했고, 그날의 행동이 단편적이었던 건지 알고 싶었다. 짧은 의문에 그칠 수도 있었지만 쉽게 접지는 않았다. 타인에게 먼저 호기심을 품어 본 적이 너무도 드물기 때문에.
“강한 이 새끼 또 늦네.”
“걍 두고 가자?”
“아, 그럴까.”
남자는 자주 늦는 듯했다.
덕분에 순서는 항상 이런 식이다. 유일이 그의 태권도부 친구들을 먼저 알아보고 가까이 자리 잡는다. 매점이나 체육관 근처 벤치, 혹은 오늘처럼 운동장을 바라보고 세워진 계단식 관중석 어디든. 그렇게 자리를 잡고 나면 남자를 기다리던 친구들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대부분은 적대심과 열등감이 드러나는 말들이었다. 듣기 고통스러운 그 언어들을 몇 분쯤 참아 주면,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오늘은 독서를 핑계 삼았다. 시멘트로 투박하게 만들어진 관중석의 가장 윗자리에 앉아, 유일은 교과서를 펼쳤다. 한창 축구 경기가 벌어지는 운동장을 앞에 두고 교과서를 읽는 놈이라니. 무척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갑자기 마주친 바람에 핑계 삼을 구실이 부족했다.
“근데 그 새끼 상비군 뽑힐지도 모른다던데.”
“하겠지. 존나 잘하기는 하잖아.”
“아, 개 부럽다. …세상 존나 불공평하지 않냐? 다 가졌네, 시이벌.”
카아악.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무리 중 한 놈이 가래침을 뱉어 냈다. 딱! 하고 쓸데없이 경쾌한 소리가 나, 비위가 상했다.
유일은 눈을 흐리며 입 속에서 혀를 꾹 씹었다. 저 무리를 지켜볼 때마다 욕설이 나가지 않게 참으려면 이 방법뿐이었다.
“그 새끼가 다 가지긴 뭘 다 가지냐.”
“왜 열폭이냐? 저번에 샤워실에서 보니까 시발……. 존나 크던데.”
“미친놈아, 누가 그거 말함?”
얼굴과 체격만 잘난 게 아니라 태권도 실력도 좋구나. 새로운 정보를 조심스레 저장해 넣던 유일은 멈칫 굳었다. 사람 없는 자리에서 듣기에는 영 찜찜한 정보였다.
“그럼?”
“아니, 그 새끼 아부지.”
무리 중에서 가장 입이 걸걸한 놈이었다. 목소리를 내리깐 그를 향해 나머지 두 놈이 머리를 기울였다. ‘뭔데, 뭔데.’ 바쁘게 속닥거리는 얼굴들에 희열이 반질거렸다.
“없다고, 붕신들아.”
순간 유일은 아주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세 머리가 유일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한숨이 자신들과 상관이 있는지 계산해 보는 표정으로. 한유일은 별다른 변명이나 설명 없이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기를 한참, 무슨 용건이 있냐는 듯 고개를 꺾었을 때.
“아, 오늘 너무 덥다.”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타다닥,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먼저였고 묵직한 음성이 따라왔다. 그 뒤로는 의아하게도 비누 향기가 물씬 풍겼다. 누군가 뒤에서부터 향기로운 액체를 퍼부어 버린 것처럼, 공기를 타고 비누 향이 쏟아져 흘렀다.
“치사하게 또 혼자만 씻고 나왔냐?”
“그러니까 니들도 좀 샤워를 하고 다녀.”
순식간에 유일을 스쳐 지나간 남자는 젖은 머리를 털며 웃었다. 방금 씻고 나온 듯, 널따란 등판에 붙은 하얀 티셔츠가 약간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유일은 근육을 따라 울룩불룩 솟아난 윤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목이 타는 것만 같다.
“뭐 하고 있었냐?”
커다란 손으로 앞머리를 무신경하게 털어 낸 남자가 물었다. 조금 전까지 그의 가정사를 왈가왈부하고 있던 놈들은 잠시 침묵했다. 은근히 유일의 눈치를 살피는 자식도 있었다.
쭉 찢어진 눈과 시선을 마주친 순간 유일은 소리 없이 웃었다. 비웃음이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부류의 생존 방식이란 언제나 실소를 부르기 때문에.
“아, 걍……. 맞다! 이 새끼 데이트 간대, 오늘.”
“데이트 아니라고오.”
“뭐 하는데?”
분명 꺼림칙한 분위기를 느꼈을 텐데, 남자는 따져 묻지 않고 대화를 흐르게 두었다. 지금 그가 진심으로 신경 쓰는 것은 제 반쯤 젖은 머리뿐인 듯했다. 뒤통수를 바쁘게 문지르는 손을 따라 옷자락이 자꾸 펄럭거렸다.
“그냥 떡볶이 먹고 영화 볼 거야.”
“그게 데이트지.”
심드렁하게 듣고 있던 남자가 웃었다.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영화 보면 그게 데이트 아니냐며, 남들이 했다면 구시대적 발언으로 들렸을 말이 퍽이나 중요하게 들렸다. 그래서 유일은 그 말을 꼼꼼하게 기억에 눌렀다. 눈동자를 교과서 위에 두는 시늉조차 하지 못한 채로.
“그거 앎? 이 새끼 연상 만나잖아.”
“완전 잘나가지 않냐?”
방금까지 그를 씹고 있던 것에 대한 반작용인지, 무리는 한층 시끄러워졌다. 과장되게 떠드는 그들을 지켜보며 비식 웃던 남자가 두리번거렸다. 제 가방을 찾는 새까만 눈동자가 잠시 유일을 스쳤다.
“맞다, 강한 너도 최근에 고백받지 않았냐?”
“그냥 편지 같은 거.”
“그게 고백이거든요, 미친놈아. 걔 1학년 아니었어? 도둑놈 새끼.”
“거절했는데 왜 도둑이냐.”
심드렁하게 대답한 그가 구석 자리로 향했다. 시멘트 계단의 끝에 놓여 있던 파란 더플백을 바투 쥐고 금세 돌아온다. 흙먼지가 묻었을 밑판을 털지 않은 채, 그는 넓고 각이 진 어깨에 파란 끈을 쉽게 안착시켰다.
“왜 안 만나? 예쁘던데.”
“도둑놈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에이, 농담이지. 진짜 안 만나게? 연하 별로임?”
“그냥 뭐…….”
햇빛을 바로 마주한 탓에 남자는 인상을 가득 찌푸렸다. 꾸불꾸불 곡선을 그린 짙은 눈썹의 양쪽 높이가 서로 달랐다. 유일은 그 얼굴이 마치 80년대 중국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느꼈다.
“나보다 어리면 별로 그런 마음 안 들어. 동생 같기만 하고.”
“오, 너도 연상이 좋다 이거냐?”
“딱히 막……. 다 떠나서, 그날 처음 봤는데 뭘 사귀냐?”
조금 전까지는 무심하기만 했던 음성에 불쾌가 섞이기 시작했다. 그의 잔뜩 찡그린 얼굴에도 남은 인내가 얼마 없음이 여실히 드러나, 유일은 은근히 웃었다. 이런 화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근데 도대체 언제 갈 거?”
삐딱하게 선 그가 물었다. 아주 약간 낮아진 목소리에도 화들짝 놀란 무리 애들이 우르르 제 가방을 챙겼다. ‘가자, 가자.’ 바쁘게 뱉어 내는 말들이 다소 비굴해 유일은 조용히 웃었다.
“아니, 근데 저 새끼 좀 이상하지 않음? 아까부터 우리 존나 꼬나보는데.”
남자를 필두로 성큼성큼 멀어지던 무리 속에서 들으라는 듯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뒷담화에 가장 열성적이던 사람이다.
그가 마치 고자질하듯 중얼거리며 뒤를 흘낏대자, 남자도 역시 고개를 돌렸다. 유일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 보았다.
대충 열 걸음 정도. 마음만 먹으면 몇 초 안에 뛰어와 멱살을 잡아도 될 거리였다. 그럼에도 고자질을 감행한 남자는 바닥에 침을 뱉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을지언정,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유일은 더 웃음이 났다. 뜻하지 않았을 기회 덕분에 조용한 미소만 깊어졌다.
“누구?”
“저 새끼.”
한유일은 대놓고 아니꼬운 표정을 짓는 놈 대신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찰나에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오롯이 유일만을 담았다.
그 순간이 너무도 짜릿해서, 유일은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가만히 있는 애한테 왜 시비야. 세상에 불만 있냐?”
눈이 두어 번 깜빡할 정도로 짧은 편각. 머물렀던 남자의 시선이 금세 떠나고, 장난스럽게 웃은 그가 몸을 돌렸다. 여전히 유일을 바라보며 시비질하려는 동행의 뒤통수를 퍽 치고서.
“아!”
“밥이나 먹자.”
매섭게 뒤통수를 내리친 손이 제 젖은 머리를 털어 냈다. 그렇게 쉬운 갈무리 뒤, 킬킬 웃는 얼굴이 무척 시원했다. 맞은 놈은 씩씩거리며 뒤를 몇 번 더 돌아보았지만, 유일은 멀어지는 남자만을 바라보았다.
그의 반투명해진 하얀 반팔 티셔츠가, 젖은 머리가, 파란 더플백이 여름을 조금 덜 싫어지게 했다.
***
유일의 조모 ‘이삼남’ 여사는 형제만 일곱인 집에서 자란 장녀였다.
그녀의 부모는 아들 셋을 바라며 첫딸 이름을 지었고, 끝내 일곱 아이를 낳을 때까지 아들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해서 삼남은 훗날 딸을 낳으면 애지중지 키워 주리라 이를 갈며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 슬하에는 아들 하나가 전부였다.
삼남의 주름진 눈은 이야기가 이쯤 되었을 적에 늘 먼 창가를 바라보며 추억에 빠졌다. 먹먹한 습기를 쓴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으며 회상은 서서히 멎었다.
유일의 부모가 어쩌다가 결혼을 했는지, 왜 아이를 낳았는지, 낳자마자 버린 이유는 무엇인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어떻게 살았는지.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풀린 적이 없었다. 유일이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들려온 아버지의 사망 소식만이 전부였다. 그저 제사 때마다 턱이 불거지도록 이를 무는 삼남의 표정과 주먹 쥔 손을 통해, 좋은 내막은 아니리라 유추할 뿐이었다.
아이만 두고 사라져 버린 두 사람 때문에 삼남은 쉰 넘은 나이로 장사를 시작했다. 빚을 내고 세를 겨우 얻어 차린 것은 자그마한 감자탕 가게였는데, 커다란 솥단지 하나를 두고 직접 끓여 팔았다. 젖먹이 아기를 업고서 새벽 네 시부터 나와 장사하던 것이 점점 덩치를 불리더니, 유일이 중학생 될 무렵에는 세 들어 살던 건물을 통으로 살 정도가 되었다.
흥행을 따라 골목 하나가 아예 감자탕 거리라 불리며 이곳저곳에서 다들 저들이 원조라고 떠들어 댔다. 그래도 전국 단위로 체인점을 가지게 될 만큼 대성한 것은 삼남의 가게가 유일했다. 이제는 정원시에 살지 않는 사람도 모두 그녀의 얼굴을 내건 감자탕 집을 알았다.
남들은 삼남이 운이 좋았거나 손맛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유일만큼은 조모가 잘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름의 복수를 하는 중이었다.
-유일이 너 꼭 큰사람 되어라. 세상 사람 다 아는 그런 유명인이 되어 가지고, 다 후회하게 만들자꾸나.
후회하게 만들 대상이 누구인지 유일은 구태여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과 굽은 허리를 보고 있으면,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배우라는 꿈에는 어느 정도 삼남의 지분이 있다. 꽤나 컸다. 세상 사람 모두가 알 만한 유명인이 되려면 그처럼 효과적인 직업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한유일은 어려서부터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편이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가진 패를 낭비하지 않아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특히 남들이 흉내로 좇을 수 없을 만큼 타고난 패라면 반드시 활용했다. 이를테면 얼굴이라든가, 목소리 같은 것들.
덕분에 배우가 되려는 이유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유일이 말하기도 전에 그의 꿈을 짐작했고, 배우라고 말한 뒤에는 그저 수긍하는 반응이 전부였다. 외양 하나로 납득한다는 듯. 혹은 쉬운 길을 선택할 수 있어 좋겠다는 듯.
손주의 꿈을 위해서는 못해 줄 것이 없는 삼남이 마음대로 붙여 준 연기 선생들도 모두 그랬다. 고급 주택에 개인 스케줄과 보수. 그것과 유일의 겉모습만으로도 이미 모든 설명이 된 것처럼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매주 두어 번씩 집으로 찾아왔다.
네 번째로 교체된 선생은 앞머리가 없는 검은 단발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삼십 대 여자였다. 그녀는 보통 사적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으므로, 질문은 무척 예상을 벗어난 때에 던져졌다.
“유일 학생은 왜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그녀가 준비해 온 대본을 이제 막 손에 쥔 순간이었다. 생각지 못한 물음에 유일은 잠시 멈추어 섰다. 여자의 까만 눈동자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타인에게 쉽게 미움받아서는 안 되는 꿈을 가진 후로 유일은 조금 덜 솔직했다. 비굴하게 굴지는 않았지만 투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왜인지, 이 사람에게는 솔직해도 될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지나치게 어둡기 때문인지, 아니면 서로 간에 쌓인 관계랄 게 없어 도리어 쉬워진 건지는 알지 못했다.
“일단 그냥 유명해지고 싶었어요.”
묵직한 일인용 소파를 당겨 앉으며 말하자, 여자는 웃었다. 그녀 역시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듯했다.
“일종의 복수심 비슷한. 이제는 별로 시들하기는 한데…….”
작게 중얼거리며 유일은 손안에 쥔 종이를 읽었다. 하얀 A4 용지에는 여자가 준비해 온 짧은 대본들이 줄지어 나열되어 있었다. 행동 지문과 대사 위주의 짤막한 장면 여럿의 큰 타이틀은 일곱 글자였다.
‘사랑에 빠진 남자.’
유일은 커다랗게 쓰인 오늘의 주제를 몇 번 되뇌었다. 자연스럽게 키가 크고 다부진 어떤 인영이 떠오르며, 집중도 흐트러진다. 이어지는 답은 다소 혼잣말 같았다.
“하다 보니까 재미도 있고 잘하기도 하고.”
“이야, 겸손한 편은 아니네?”
“그런 척은 잘해요.”
“유일 학생 이런 캐릭터구나.”
자주 무표정이던 여자가 밝게 웃었다. 유일은 따라서 희미하게 웃고 대본을 한 번 더 내려다보았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남한테 건네주면 안 되는 감정. 보여 주기 싫은 기분. 그런 거 다 가상으로 만들어진 곳에서는 얼마든지 표현해도 되니까.”
대본 위에 가장 크게 적힌 타이틀을 응시하는 눈동자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여자는 한동안 가만히 유일을 응시했다. 얼굴만 반반한 철딱서니 없는 고등학생이리라고 여겼던 날들이 제법 머쓱해졌다.
“선생님도 공감되는 말이네요. 이제 수업 시작할까요?”
아주 너그럽게 웃은 그녀가 기대어 서 있던 테이블에서 떨어져 섰다. 그래서 유일도 소파에서 일어나 대본을 두 손으로 쥐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
주제를 한 번 더 곱씹자, 머릿속에는 다시 어떤 키 큰 남자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
감정이 모두 함이라면 좋겠다. 별도의 공간에 간직하되 오롯이 자기 것으로 존재하는, 쉽게 흘러 나가지 않는 것이었으면. 한유일은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감정을 건넨다. 상대가 원하지 않았던 호감이나 미움, 질투, 관심, 분노, 희망을 함부로 던지고 또 돌아오기를 원했다. 알게 모르게 강제되는 그 교류가 세뇌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다음 호명하는 학생들은 올라오세요. 3학년 2반, 이공명 학생. 2학년 7반 강한 학생, 2학년 9반…….”
최근 리모델링을 마친 체육관은 과도한 왁스칠로 사방이 번쩍거렸다. 한 단 높은 무대 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알 뒤편이 뻐근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유일은 고집스럽게 눈에 힘을 주었다. 담임의 부탁으로 정리하고 있던 마이크 선조차 놓은 채.
“대표로 2학년 7반 강한 학생.”
학생부장 선생이 호명하자, 커다란 남자가 성큼 나섰다. 일렬로 서 있을 때에도 유별나게 눈길을 끌었던 그가 교장 앞에 서자 지켜보던 이들 사이에서 얕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유일은 사람들이 가십처럼 떠드는 말들을 담지 않으려 노력하며 두꺼운 줄을 천천히 감았다. 하얗고 날렵한 손등에 검은 마이크 선이 느리게 말려 올랐다.
“위 학생은 문화 체육 관광부기, 제21회 전국 중·고등학교 태권도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기에…….”
고장 난 마이크를 정돈해 달라는 담임의 부탁 덕분에 유일은 무대와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각도마저 비스듬히 대각선. 남자의 두툼한 상체와 높은 콧대가 부각되는 자리였다.
유일은 서두르지 않고 그의 각진 선들을 마음껏 감상했다. 느릿해진 예쁜 손에 검은 마이크 줄이 뱀처럼 감겨 올랐다.
근래 유독 강한과 마주치는 일이 더욱 늘었다. 기막힌 우연의 덕일 수도 있겠지만, 유일은 아마 제 감정 탓이리라고 생각했다.
명확한 사유도 없이 같은 사람을 반복해 찾는다. 시야에 그 사람이 드는 순간부터 모든 신경은 그쪽으로만 향하고, 그를 보고 있을 때에는 숨이 지나치게 무겁고 느렸다. 가끔은 아예 박동이 멈춘 것 같다가 심각하게 빠른 속도로 뛰기도 했다. 말이 안 되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말이지 우스울 만큼 그가 아름다웠다. 비단 그뿐 아니라 온 세상 미사여구가 다 어울렸다. 덩치 큰 그 남자가 제 눈에는 예쁘고, 귀엽고, 잘생긴 데다가 멋지고 섹시하기까지 했다.
참 쉬운 첫사랑이다. 한유일은 부정 한 번 없이 그렇게 결론 내렸다.
누군가는 사랑을 솜사탕에 비유하고, 새털이나 나비의 날갯짓처럼 간지러운 묘사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유일은 공감하지 않았다. 그의 짝사랑은 달콤하고 두근거리는 설렘보다는 갈증에 가까웠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멋대로 미화하고 포장하는 것은 차라리 귀여운 수준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신분조차 묘연한 사람에게 사랑을 돌려받고 싶은 갈망이 일었다.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 섣부른 육욕이 매초마다 피를 들끓게 했다. 상대의 의중을 상관하지 않고 함부로 몰아붙이고 싶었다. 놀라 굳은 이의 입술을 막무가내로 훔치고 싶은, 무진 생경한 날것의 감정이었다.
유일이 제 입술을 느리게 훑었다. 기막힌 때에 박수 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뒷덜미가 훅 드러났다 사라졌다.
순간 유일은 쥐고 있던 마이크를 놓았다. 의도적인 추락이었다. 쿵! 묵직한 소음에 곳곳에서 깜짝 놀란 비명까지 터졌다. 체육관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를 향했고, 무대를 내려가려 반대편으로 돌아섰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강한은 무척 놀란 듯 숨을 집어삼키고 커다란 눈에 유일을 담았다. 불시에 입술이 삼켜진다면 저런 얼굴일까 싶은 표정이다.
“아, 죄송합니다.”
유일은 박수를 치려고 그랬다는 듯, 허공에 애매하게 모은 두 손을 내보인 채 웃었다. 난처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어 보이자 날카로운 시선들이 누그러졌다.
그래도 속내에 숨긴 욕망은 아니었다. 전혀 수그러들 기미가 없었다.
***
“유일아, 배드민턴 채 세트 몇 개인지 좀 세어 볼래?”
“네.”
“그나저나 유일이 네가 체육부장을 다 자처하고, 의외다. 체육 싫어하게 생겨서는.”
체육 선생은 삼십 대 초반의 비교적 젊은 남선생이었다. 그는 끝이 뾰족하게 올라간 선글라스를 자주 착용했는데, 정성 들여 관리하는지 언제나 번쩍번쩍 광이 났다.
그 검은 안경이 거울처럼 분명하게 상을 비치는 바람에 유일은 ‘체육 싫어하게 생긴’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외양만으로 얻은 편견이 하나 늘었다.
“비슷한 말 많이 들어요.”
웃으며 대답하고 체육관 귀퉁이로 갔다. 거대한 검은 망 안에 모여 있던 집기들을 하나씩 꺼내어 풀며 유일의 눈은 먼 곳을 향했다. 체육관 안이 울릴 만큼 쩌렁쩌렁한 기합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체육관 천장이 무척 높은 탓에 귀퉁이에 놓인 계단은 심히 가팔랐다. 2층 관객석으로 이어지는 무척 길고 경사가 심한 계단을, 태권도부 수십 명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한쪽 발을 들고서 소위 깽깽이 자세로.
오늘 그들의 훈련은 기합에 더 가까워 보였다. 실제로 구실이 있었는지, 매섭게 불호령 내리는 감독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가 ‘발 내리는 새끼 뭐야!’ 하고 악을 지를 때마다, 부원들은 서로를 독려하듯 ‘파이팅!’ 하고 이를 물었다. 결국 무너져 내린 몇몇이 감독 옆에 가서 얼차려를 받기도 했다.
“하기 싫어? 하기 싫으면 때려치워, 새끼들아!”
풍채 좋은 감독이 사자후를 내지르자 계속 선두를 유지하고 있던 남자가 즉각 답했다.
“아닙니다!”
헐떡이는 숨과 땀에 푹 절어 있는 얼굴이 고통스러워 보이는데도, 그는 망설임 하나 없었다.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훈련 내내 선두에 있었고 휘청거리는 누군가를 붙잡아 주기도 했다. ‘파이팅!’ 하는 기합을 가장 많이 내지른 사람도 그였다.
도통 정 뗄 구석이 없는 남자였다.
“열두 개 되냐, 유일아?”
공 개수를 다 센 체육 선생은 금세 유일에게 다가왔다. 한유일은 방금까지 지극히 사적인 욕망에 젖어 있던 시선을 거두고, 망 안에서 꺼내 두었던 도구들을 가리켰다.
“그 정도는 없어요.”
바닥에 널브러진 물품 중 배드민턴 채는 척 봐도 예닐곱에 그쳤다. 옆에 선 체육 선생이 ‘하아.’ 짙은 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더 찾아봐야겠는데. 어디 있는지 도통 모르겠네. 유일아, 너 안 가 봐도 돼?”
“저는 괜찮아요. 이거 정리하고 있을게요.”
“어, 그래, 선생님 금방 올게.”
“네.”
유일은 무척 순종적인 미소로 대응하며 얼른 체육 선생을 떠나보냈다. 그러고는 선글라스까지 벗어제끼며 달려가는 뒷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계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체육 선생의 오해와는 달리 한유일은 운동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 애들 중 가장 체육과 친밀한 삶을 살기도 했다. 시작은 삼남의 그 유명세 타령 때문이었다.
그녀는 국가 대표만큼 전 국민이 알게 되는 사람이 또 없다며 유일의 흥미를 찾기 위해 노력했는데, 온갖 구기 종목을 다 시큰둥하게 지난 유일이 복싱에서 눈을 빛내자 당장 키를 틀었다. 부모에게 받은 거라고는 오로지 그 잘난 상판뿐인데 곤죽이 되기는 아깝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못 해 본 운동을 찾기가 어려운 수준이지만, 체육 관련한 곳에서 유일은 문외한인 척 굴었다. 여름을 싫어하는 것과 비슷한 연유였다. 한유일은 타인의 땀 냄새와 끈적이는 살성, 귓가에 거칠게 꽂히는 욕설과 아무렇게나 타액을 뱉는 인간 군상을 기피했으므로.
그럼에도 체육부장을 자처한 것은 순전히 저 남자 때문이었다.
가만 웃은 유일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그를 지켜보았다. 한 시간 가까이 고문에 가까운 훈련을 버틴 증거로 남자의 전신은 젖어 있었다. 살결이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고 습한 옷이 들러붙었다. 산맥처럼 울퉁불퉁한 근육들이 성을 내고 있었다. 눈으로만 보아도 열기가 느껴지는 광경이다.
평소였다면 인상을 찌푸리며 피했을 사람이다. 분명 땀 냄새가 진동을 할 터였다.
그러나 한유일은 그와 더 가까이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 그에게 제 이름과 얼굴을 기억시키고, 말을 나누고, 가능하다면 더한 것들을 하고 싶었다. 땀 냄새 따위는 하등 상관없이.
“유일아, 아이, 참. 똥개 훈련도 아니고 미안하다. 최 쌤이 쓰고 있었대.”
태권도부의 오랜 기합이 끝을 맺는 때, 체육 선생이 급한 걸음으로 돌아왔다. 숨까지 허덕거리며 미안해하는 그에게 유일은 맑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여태 방치하던 도구들을 다시 검은 망 안에 밀어 넣으며 웃자, 선생은 역시 유일이 네가 착하다며 주절주절 한탄을 했다. 몇 반 누가 어제 뭐라고 대드는데 머리가 하얘졌다는 그의 말에 유일은 대충 끄덕였다. 하지만 내용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눈은 샤워실로 향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좇았고, 손은 정리하는 시늉만 했다. 레슨 시간까지 바꾸어 가며 심부름꾼을 자처한 보람이 저 멀리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스토커를 자처하기를 며칠, 유일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다른 대본은 곧잘 클리어 했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열일곱 살에게 사랑이 좀 어려운 주제기는 하죠?”
선생이 웃으며 대본을 넘겼다. 처음으로 한 번에 패스 사인을 받지 못한 종이였다.
“네.”
얕잡아 보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일은 좀처럼 짓지 않는 심각한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대본을 쥔 손등에 한숨이 푹 내렸다. 처음 겪는 난항이었다.
유일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떠드는 말처럼 인생이 쉬웠다. 하고자 하는 일을 못한 적 없었고, 손을 대면 끝낼 수 있었으며, 노력하면 그만큼 결과를 얻었다. 때문에 시기 가득한 말을 들어도 반박하지 않았다.
홍역에 걸리고도 병원비가 두려워 숨겼던 어린 시절 따위를 들먹이며 저도 충분히 역경을 지나왔다고 남들을 설득할 필요 또한 없었다. 어쨌거나 지금 그에게는 삶이 무척 쉬웠으므로.
특히 타인의 호감을 사는 일은 더더욱 그랬다. 한유일에게 애정은 언제나 노력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것이었다. 대본 속 남자처럼 얻어지지 않는 애정에 아파해 본 바 없었다.
“선생님, 짝사랑해 본 적 있으세요?”
까만 글씨를 막막하게 내려다보던 유일이 물었다. 검은 단발을 귀 뒤로 넘기며, 선생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있죠?”
“보통, 그러니까 사람들은……. 짝사랑을 하면 어떻게 해요?”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안 좋아하면…. 그런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 해결해요?”
여자의 눈은 고양이처럼 크고 반질거렸다. 그녀의 커다란 눈이 속을 꿰뚫듯 유일을 바라보다가 일순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만화처럼 웃은 그녀가 콧잔등을 찡긋 올렸다.
“원래 쌍방으로 시작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대부분 한쪽에서 먼저 시작하지. 그건 솔직히 문제도 아니에요. 보통 사람들한테는, 아, 너무 웃기다. 보통 사람이라는 말…. 아무튼 크게는 세 가지 타입으로 나뉘지 않나 싶어요.”
무엇이 그렇게 웃긴지 그녀는 말하는 내내 피식피식 웃음을 섞었다.
“포기하려고 노력하거나, 그냥 흐르는 대로 두거나, 적극적으로 노력하거나?”
그래도 유일의 눈이 내내 진지한 덕분에 그녀 역시 금세 평정을 찾았다. 다만 아직도 벌름거리며 늘어난 코 평수가 돌아오지 않아, 웃음을 꾹 참는 얼굴이다.
“유일 학생은 어떤 쪽인데요?”
“노력은 어떻게 해요.”
유일이 답 대신 질문을 선택하자 여자의 입술은 또 벌어졌다. 으학, 우스꽝스러운 웃음소리를 짧게 갈무리한 그녀가 헛기침했다.
“뭐……. 일단 친해지려고 애쓰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취향에 맞추려고 하고. 잘해 주려고 하고?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요.”
유일은 심각한 얼굴로 끄덕이며 다시 대본을 읽었다.
지문 속 남자는 술을 가득 마시고 친구에게 하소연 중이었다.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애인이 있다는 말을 들은 날이었다. 그는 울먹거리다가 웃기를 반복하며 청승을 부리다 결국에는 ‘다 괜찮아. 난 그냥 걔 보기만 해도 돼.’ 하고 중얼거렸다. 그 마음이, 유일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되지 않았다.
“근데 유일 학생. 이런 말 해도 되나…….”
“왜요?”
“좋아하는 사람 생겼구나 싶어서.”
“아….”
“연기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죠, 그런 게.”
아주 궁금한 것이 많은 얼굴로 그녀가 슬쩍 물었다.
“누군데요? 같은 반 학생?”
선생의 콧구멍이 또 커졌다. 다소 음흉하게까지 보이는 얼굴에 유일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아뇨. 잘 모르는 사람이요.”
별게 다 궁금하다 싶은 얼굴로 그는 담담하게 고했다. 정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답이었다.
***
연기 선생의 말에 따르면 유일의 앞에는 세 갈래 길이 있었다. 이 감정을 없애기 위해 애쓰거나, 그냥 방치하거나, 아니면 그 남자와 가까워지려 노력하거나.
그 말을 듣고서야 유일은 그동안 자신이 이미 노력 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정에 명확히 이름을 붙이지 않은 때부터 본능적으로 그를 계속 좇았고, 만날 기회를 더 자주 만들었으며, 정보를 기억하려 했다. 이제 와서 뒤돌아 걷기에는 꽤 먼 길이었다.
그렇게 남자와 가까워지기를 원하는 본심을 알아챈 후에도 한유일은 급하지 않았다.
그에게 성급한 편지를 건네거나 번호를 묻는 식으로 가까워질 생각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당장은 그를 조금 더 자주 마주치고, 지켜볼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유일의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결국에는 그를 가지게 되리라는 오만 때문이었다. 그는 편애하는 음식을 끝까지 아꼈다가 먹는 사람처럼, 더해지는 갈증을 방치했다.
하지만 지난 며칠, 유일은 오만의 값을 치러야 했다. 체육관이나 매점 근처를 아무리 배회해도 도통 남자를 마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체육 선생이 ‘태권도부 합숙 훈련 가서 조용하네.’ 하고 말해 주지 않았다면, 짤막한 짝사랑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아, 하필 존나 그날 그럴 게 뭐냐?”
거의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흐르고서야 한유일은 익숙한 얼굴들을 마주쳤다. 평소 자주 볼 수 있던 매점이나 체육관 근처가 아닌 교무실 앞 복도에서였다.
오늘 역시 남자 없이 셋만 쪼르르 선 세 사람은 조금 침울해 보였다. 평소와는 달리 어둑한 얼굴을 슬쩍 숙인 그들이 목소리를 낮춰 쑥덕거렸다. 그들은 복도 한구석에 주르륵 벌을 서는 듯한 모양새로 서 있었다.
“그니까 말이야. 괜히 존나 찝찝해. 끝까지 일관성 있는 새끼다.”
하도 자주 마주치는 탓에 유일은 속으로 그들을 해삼과 말미잘, 감자라고 이름 붙여 놓았다. 셋 중 가장 입이 더럽고 강한의 뒷이야기를 퍼트리는 열등감 덩어리가 말미잘, 유난히 눈치가 없고 키가 큰 놈이 해삼, 둘만 졸졸 쫓아다니는 놈은 감자였다. 오늘도 가운데 선 말미잘이 가장 험한 투로 불평하는 중이었다.
“유일아, 거기서 잠깐만 기다려라.”
“네.”
시험 기간이 코앞이라 교무실은 출입 금지 상태였다. 덕분에 문 앞에 가만히 선 유일은 오늘따라 심상치 않은 대화를 더 엿들을 수 있었다.
“괜히 우리 때문에 사고 났다고 하는 거 아니야?”
“야, 그냥 만나기로 했던 날이지. 같이 있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뭔 잘못이냐?”
“그건 그런데……. 기분 구리다, 진짜. 식물인간 됐다며.”
“진짜? 에이, 아냐. 대가리만 찢어졌다던데?”
“누가 의식 없다고 하던데…. 아님?”
그들이 숙덕거리는 소리가 점점 형체를 지니는 것 같았다.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말소리에 삼켜지듯이, 유일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이성보다 더 빠른 감이 핏기를 앗아 가고 있었다.
설마.
“유일아, 일단 이거 먼저 받고.”
“네.”
힘이 바싹 들어간 목구멍에서 나가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유일은 반쯤 멍한 표정으로 담임이 건네는 유인물 뭉치를 받았다.
“반장 오늘 몸 안 좋니? 낯빛이 파리한데?”
남은 심부름을 위해 교무실로 다시 돌아가려던 담임이 멈칫 섰다. 동그랗게 커진 눈이 유일을 보며 깜빡였다. 유일은 아주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정말, 설마…….
합숙 훈련이 끝나고도 그 남자만 보이지 않는 이유가.
아니다, 원래도 남자는 늘 무리와 따로 다녔다. 언제나 가장 늦게 등장해 먼저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역시 조금만 있으면 비누 향기를 맡을 수 있을 터였다.
“정말 괜찮니?”
담임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머뭇머뭇 이마에 닿고, 유일은 그 감각조차 남의 것처럼 방치하며 멀뚱히 서 있었다.
그 순간 뒤편에서 감자가 울 것처럼 중얼거렸다.
“강한 이제 운동 못 한다는데 어떡하냐…….”
순간 숨이 탁 터졌다. 허, 토해진 숨을 따라 묵직한 유인물 뭉치가 추락했다.
“야, 시발. 운동은커녕 불구나 안 되면 다행이라고.”
“어머, 유일아! 얘, 저기, 어, 상수구나! 상수야. 얘 좀 양호실로 데려가 줄래?”
귓가로 번잡한 소음이 마구 뒤섞여 웅웅거렸다. 유일은 누군가 떠미는 대로 휘청거릴 뿐,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탈색되어 그 어떤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이 오만한 죄로 받은 진짜 처벌이었다는 생각밖에는.
***
남자는 방학이 지나고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찾겠다고 마음먹으면 찾지 못할 연유가 없었으나, 유일은 그만두었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아는 바 없다. 그래서 그 사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평생의 꿈이 좌절되는 순간은 그 누구에게라도 고난이었다. 그에게 지금이 얼마나 어두운 밤일지 생각해 보면, 제 감정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무너져 엎드린 사람에게 심장을 꺼내어 보여 준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름 방학이 끝난 후에도 나타나지 않는 그를 인정해야 했을 때는 크게 앓았다. 홍역에 걸렸던 어린 날처럼, 유일은 이불을 둘둘 말고 이틀 내내 잠을 잤다. 꿈에서는 하얀 반팔과 파란 더플백 같은 것들이 나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짧은 풋사랑은 후유증이 길어서, 한유일은 그가 자주 보고 싶었다. 말 한번 제대로 섞지 못한 사람이 그리울 때면 흉통이 일었다. 그래서 가끔은 체육관이나 매점 근처를 이유 없이 배회했다. 학교 바깥 거리에서 태권도부를 마주치면 은근히 따라 걸어 보기도 했다. 혹여 병문안 가는 길이 아닐까 싶어서.
그러나 해가 달라지고 바람이 차게 변해도 유일은 병원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남자와 자주 다니던 무리 놈들은 그의 부재를 기다렸다는 듯이 살았고 그와의 추억을 곱씹는 일조차 없었다.
그렇게 헛걸음과 의미 없는 귀동냥을 반복하는 사이, 한유일은 열아홉이 되었다.
전교 회장 출마를 한사코 거절한 죄로 그는 모델이 되었다. 학교 홍보 영상과 팸플릿에 쓰일 얼굴이 필요하면 언제나 호출이 왔다. 처음에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하루만 찍으면 된다고 하더니 이제는 방학에도 스스럼없이 불러내는 것이다. 종류도 얼마나 다양한지, 온갖 동아리 사진부터 행사 사진까지 상황에 맞춰 옷도 갈아입어 가며 찍어야 했다.
“사진만 보면 우리 학교에는 유일이 너만 다니는 것 같겠다, 야.”
나중에 유명해지면 비싼 값을 주고 팔 거라며 농담을 덧붙인 교무부장이 어깨를 쳤다. 거친 손길에 떠밀린 유일은 억지로 웃지 않고 고개 숙였다.
“선생님, 저 이제 가 볼게요.”
“그래, 수고했다. 사진 나오면 보내 줄까?”
“아뇨.”
단박에 거절하는 순간에야 눈을 휘었다. 상냥한 미소에 짤막한 대답은 모두 잊어버린 부장이 허허 웃었다. 조심해서 가라는 인사를 끝으로 유일은 텅 빈 학교를 나왔다.
한겨울 운동장에는 바람이 쌩쌩 불었다. 촬영 때문에 입은 교복과 코트 사이로 냉기가 스며들었다. 유일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저도 모르게 스탠드 자리로 향했다. 남자가 파란 더플백을 놓았던 그곳이다.
앉자마자 냉기가 옷감 속을 파고들었다. 머리가 찡 울리는 추위였지만, 유일은 가만히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잊힐 만도 한 커다란 남자가 보고 싶다. 별스럽지도 않게.
그를 집요하게 관찰하고 좇았던 날은 모두 여름이었다. 그래서 겨울 안에 있는 남자를 상상하는 일은 무척 어려웠다. 이렇게 추운 날에도 유일이 떠올리는 강한은 땀에 젖은 반팔 차림이었다.
이럴 때면 후회는 한층 짙어졌다.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말이라도 걸어 봤다면, 손이라도 한번 잡아 봤다면 회상할 것들이 더 많았을 텐데. 사계절의 그를, 다양한 높낮이를 지닌 목소리를, 찰나의 촉감을 되새길 수 있었을 텐데.
꽁꽁 얼어 있는 운동장 위, 멋대로 불러낸 그가 너무도 추울 것 같아 유일은 그냥 일어섰다. 코트 자락을 털며 일어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얀 얼굴 앞에 그만큼 하얀 입김이 피어오른다. 시야를 가린 안개가 걷히는 찰나, 유일은 미간을 좁혔다.
아주 익숙한 인영이 멀리서부터 걸어오고 있었다.
키가 크고 다부진 남자는 사복 차림이었다. 회색 후드와 검은 코트를 입은 그는 전보다 약간 마른 팔로 교과서를 안고 있었다. 남자가 체육관을 흘깃 돌아보며 망설이더니 곧 앞으로 나아간다. 유일이 상상으로는 만들 수 없는 모습이었다.
몇 걸음 떼지도 못한 그가 우뚝 멈추어 섰다. 턱 끝으로 누르고 있던 유인물이 날아가며 허공에 회색 갱지가 펄럭거렸다.
“아.”
남자는 탄식과도 같은 짧은 음성을 토했다. 내내 굳어 있던 유일은 그것이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달려 나갔다.
“내가 주워 줄게.”
근사하게 보이고 싶은데, 목소리 끝이 형편없이 떨린 것 같았다.
***
밤사이, 케케묵은 기억을 모두 헤집고 다닌 듯이 피로했다. 유일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공간이 먼저 눈에 들고, 찌뿌드드한 몸 상태는 한 박자 늦게 인지했다.
“아…….”
그날의 한이 그랬던 것처럼 유일은 짤막한 탄식을 뱉어 냈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널브러진 과자와 술병을 그대로 둔 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강한은 그 지저분한 술상 앞, 바닥에 누워 있었다. 거대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누운 그가 이따금 끙끙거렸다.
소파가 비명을 지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여 다가갔다. 한의 얼굴을 바로 위에서 지켜볼 수 있는 곳까지 포복 자세로 다가간 유일은 숨죽여 웃었다. 고작 잠든 얼굴 좀 훔쳐보자고 이렇게까지 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으음…….”
끙끙 앓던 강한이 갑작스레 돌아누웠다. 티셔츠를 훅 끌어 올려 배를 긁적이고, 낮게 침음을 내는 얼굴이…….
“곤란하네.”
끓어오르는 음심을 누르듯 유일은 작게 속삭였다. 미간 사이를 문지르고 허탈하게 웃던 그가 일어나 소파를 벗어났다. 당장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는 사람을 상대로 몹쓸 상상을 할 듯해서.
짧게 세수를 마치고서는 냄비에 물을 올렸다. 식탁 위에 가지런하게 정리된 라면이 보였고, 지끈대는 머리와 거북한 속이 해장을 원하고 있었다. 할머니 성화로 가끔 술잔을 맞댄 다음 날이면 유일은 늘 라면을 먹었다.
라면 두 개에 고춧가루와 파까지 넣어 끓였다. 조심스레 연 냉장고 안에서 계란도 꺼내 풀고, 물병과 컵을 준비한 후에야 유일은 거실로 나갔다. 아직도 배를 훤히 드러낸 한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한아.”
자상하게 부르며 유일은 탄탄한 복근을 훑어보았다. 거실까지 진동하는 라면 냄새 탓인지 군침이 돌았다.
“한아, 일어나. 라면 끓였어.”
어깨를 조심스레 잡아 흔들자 한의 눈이 느리게 뜨였다. 제 입술을 혀로 느리게 훑고 있던 유일은 금세 표정을 바꿔 웃었다. ‘잘 잤어?’ 묻자, 졸음 가득한 눈을 찌푸리던 한은 입술을 벙긋거렸다.
“……아, 어어.”
상황 파악이 덜 된 얼굴로 어버버거리는 그가 귀여워 하마터면 키스할 뻔했다. 유일은 가까스로 주먹을 꾹 쥐고 일어났다. 그러고도 한참 멍하게 있던 한이 비척비척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가 짧은 세수와 양치를 마치는 사이, 유일은 냄비에 팔팔 끓인 라면을 그릇에 나누어 담고 널브러진 상을 대충 치웠다. 그 위에 그릇과 수저, 물까지 모두 옮기고서야 한이 젖은 얼굴을 쓸어 내며 다가왔다.
“속은 괜찮아?”
“……어엉. 너…는.”
“나도 괜찮아.”
머리가 지끈대는데도 화사하게 웃자 강한은 어물쩍 ‘어어.’ 하고 면을 빨아 들였다. 그야말로 빨아 들인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접시에 코를 박고 라면을 흡입했다. 끈질긴 시선을 피하고 싶어 죽겠다는 듯. 그에 유일은 즐거운 웃음을 소리 없이 삼켰다.
“맛 괜찮아?”
“어…….”
힐긋, 눈을 치뜬 한은 짧은 대답과 함께 다시 눈길을 내렸다. 볼 위가 불그스름한 것도 같았다. 그 귀여운 색상을 감상하며 유일은 한의 머릿속을 상상해 보았다. 지금쯤 아마 어젯밤의 고백을 회상하고 있지 않을까.
“왜 안 먹냐. 반찬 줘?”
물끄러미 보고만 있으니 한이 또 눈을 치떴다. 눈동자가 어색한 티를 내며 흔들거렸다. 건네는 말이 제법 상냥한 걸로 보아 당장 밀어낼 생각은 아닌 듯했다.
“아니. 그냥……. 한아, 나 혹시 어제 실수 안 했어?”
유일은 대수롭지 않게 물으며 면을 건져 올렸다. 이번에는 반대로 한이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딱딱하게 굳은 그가 삐걱거리듯이 어색하게 답했다.
“왜, 기억 안 나냐?”
마치 그러기를 무척 바라는 목소리였다. 유일은 비식 웃으며 장단을 맞춰 주기로 한다.
“응.”
“아…….”
살았다는 듯 한숨을 내쉰 강한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유일은 고요한 사투를 방치한 채 식사에 집중하는 척했다. 하지만 온 신경이 그에게로 향했다. 한의 마음에 일부러 심어 놓은 씨앗이 원하는 방향으로 싹을 터 줄지 초조했다.
“실수 안 했어.”
한참 조용하던 한은 그렇게 툭 내뱉고 다시 라면을 먹었다. 젓가락질 몇 번에 식사를 마친 그는 물을 반 통이나 마셨다. 속이 무척 타는 듯 찡그린 눈썹이 보기 좋았다.
“정말 나 실수 안 했어?”
“어.”
“다행이다. 걱정했는데…….”
씁쓸한 감정을 숨기듯이, 부러 사연 있는 미소를 지으며 유일은 그릇을 슬쩍 밀었다. 한참 남은 라면을 넘겨다본 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다 먹은 거?”
“입맛이 없네.”
먼저 일어나 있던 강한은 유일을 아주 복잡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답답함과 짜증, 거기에 묘한 죄책감과 동정, 심지어는 동질감마저 섞인 시선이었다. 유일은 제법 만족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그릇을 들고 일어섰다.
“한아, 나 조금 더 있다가 가도 돼?”
강한은 대다수 부탁을 들어주면서도 꼭 말은 무뚝뚝하게 했다. 이번 역시 보통 때라면 ‘가라.’ 하고 귀찮은 티를 내거나 ‘주말인데 할 일 없냐?’ 하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는 조금 달랐다. 지난밤 예상치 못한 고백에 얻어맞은 후유증으로, 한의 마음은 무척 연약해진 듯했다.
“……그러든가. 나 여기 좀 치울 테니까 가서 자든지.”
한숨을 내쉬듯 답하며 강한은 제 방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러는 내내 그의 낯은 찜찜함이 가득했지만, 유일은 첫술에 배부르지 않기로 했다. 부채감과 동정심으로 시작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럼 나 먼저 누워 있을게. 다 하면 한이도 와. 어제 바닥에서 잤잖아.”
일부러 더 맑게 웃으며 건넨 말에 강한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입술이 반박할 말을 여럿 찾다가 달싹이기만 하고 닫혔다. 꾸욱 다물린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아, 귀여워.’ 유일은 속으로만 웃으며 방문을 열었다. 사각 공간 안에서 한의 체향이 훅 끼쳤다. 벌써 발끝이 저릿저릿하다.
“한아, 왜 대답 안 해?”
방에 들어갔다가 다시 빼꼼 나와, 문틀에 매달린 모양새로 물었다. 한은 못마땅한 얼굴 그대로 ‘뭐가.’ 하고 대꾸했다.
“나랑 같이 눕는 거 싫구나.”
유일이 나지막이 속삭이자 강한은 ‘아, 진짜.’ 하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러고는 머리를 헝클이다가 또 한 번 턱을 까딱했다. 잔말 말고 문이나 닫으라는 듯.
“일단 들어가 있어.”
그러나 살벌한 인상으로 내뱉는 말은 결국 또 이 정도에 그친다. 유일은 소리 없이 웃으며 순종적으로 굴었다. 얼른 방 안에 들어간 하얀 몸이 강한을 닮은 남색 침구 위에 누웠다. 비누 향이 물씬 풍기는 방이었다.
***
한유일은 정말 이상한 놈이다.
수십 번은 했던 생각을 재차 반복하며, 강한은 아주 조심스럽게 숨을 삼켰다. 뒤에 붙어 누운 타인의 숨결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바라보는 방향에는 오래된 모니터가 빛을 내고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영화는 루나였다. 테이프였다면 다 늘어져 더 이상 재생이 불가했을 만큼 반복해서 본 애니메이션. 그것은 강한에게 한때의 위로였고, 그의 뒤에 누운 유일에게는 몇 년째 달고 사는 별명이었다.
그런데 한유일은 <루나 더 퀸> 영화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 사실 루나 제대로 본 적 없다?’ 남색 이불 위에 누워 해맑게 웃는 얼굴이 충격 그 자체라, 한은 당장 의욕에 차올랐다. 집주인이면서도 침대 끝만 어슬렁대던 게 누구냐는 듯 재빠르게 컴퓨터를 부팅시키고 파일을 눌렀다.
어떻게 별명도 루나인 새끼가 루나를 안 볼 수가 있느냐며 투덜거리고 침대에 앉았을 때만 해도, 한은 이렇게 난감한 자세를 상상하지 않았다.
“어떻게 1편도 안 봤냐.”
“으음.”
숨 막히는 공기를 풀어내려 일부러 던진 말에는 침음이 돌아왔다. 목 안쪽을 울리는 소리가 무척이나 낯설게 들렸다.
“이상하게 별로 기회가 없었어. 하도 들어서 대충 내용도 알고.”
바스락, 소리를 내며 자세를 고친 유일의 팔이 돌연 침범해 왔다. 허리 근처를 감은 팔을 당겨 더 거리를 좁힌 그가 목 바로 뒤에 대고 속삭였다.
“가려져서 잘 안 보여.”
귓등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났다. 당장 하얀 팔을 떨쳐 내며 ‘개 돌았냐?’ 하고 묻고 싶었다. 잘 안 보인다는 변명 따위에 넘어가 주기엔 지나치게 연인 같은 자세다.
그러나 강한은 입술을 꾹 물며 머뭇댔다. 어젯밤 들어 버린 고백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강한의 짝사랑은 한 번도 뱉어진 적 없었다.
민우를 좋아하는 내내, 한에게 고백은 상상에서나 존재하는 일이었다. 거절이 두렵다거나 관계를 망치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아주 당연하게 욕심을 낸 적이 없었다. 그와 사귀고 싶다거나 스킨십을 하고 싶다는 욕망은 물론이고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갈망조차 느끼지 못했다. 한에게 짝사랑은 혼자 태우고 조용히 사라지는 그런 감정이었다.
그런데 한유일은 애초부터 고백하기로 결심했던 사람처럼 망설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수수께끼 같은 고백을 말 한번 절지 않고 쏟아 냈다. 답을 바라지도 않는 듯이 시원스럽게.
그런 짝사랑은 어떤 감정일까. 어떻게 대해야 할까. 들켜 버린 짝사랑을 처리하는 방법이 따로 있나.
의문은 수없이 피어올랐지만 한은 어느 것 하나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짝사랑이 들켜 버리는 가정 자체가 그에게는 존재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여 민우에게 마음을 들켰더라면, 그가 어떤 반응을 해 주었으면 좋을지 상상해 보려 해도…….
“사실 루나라는 별명, 별로 안 좋아하거든.”
한유일이 틈을 주지 않았다. 솜털이 주뼛 설 만큼 가까운 음성에 강한은 귀를 벅벅 문댔다.
“왜.”
무뚝뚝하게 되묻고 조금 앞으로 몸을 당겼다. 한유일은 떨어진 틈을 따라붙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작게 답했다.
“루나도 고아잖아.”
고요한 목소리에는 유감이 없었다. 오히려 산뜻하고 단정해 듣기 좋다 여겨질 정도였다. 그래서 한은 더더욱 말을 잃었다. 거리를 조금 더 벌려 떨어지려던 몸도 멈춘 채로, 눈알만 굴렸다.
‘시발, 괜히 보자고 했나.’
아득히 생각하는 때, 유일이 바람을 뱉듯 낮게 웃었다.
“그런데 있잖아. 한이는 나한테 루나라고 절대 안 부르니까.”
몸과 몸 사이, 떨어진 공간에 서로의 체온이 고여 침대가 뜨끈해졌다. 그 온화한 공백을 가만둔 채로 유일이 고개를 숙였다. 어깻죽지 근처로 톡 동그란 이마가 닿았다.
“그것도 좋아.”
강한은 들이켠 숨을 내쉬지 못하고 굳었다. 부풀어진 갈비뼈 안쪽이 온통 뻐근했다. 심장이 그만큼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 튀어나오려 굴었다. 정작 의미심장한 말을 뱉어 놓은 범인은 평온하기만 한데.
“쟤는 누구야?”
다행히 유일은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마치 지난밤 고백처럼, 대답 같은 것을 바란 적 없다는 듯 말을 돌린 그가 자세를 바꿨다. 침대 헤드 방향으로 몸을 추슬러 올린 유일이 제 팔을 괴고 있는 듯, 목소리는 조금 더 위쪽으로 들렸다. 강한은 지나치게 많이 삼켰던 숨을 아주 천천히 내쉬며 답했다. 등 뒤, 유일의 이마가 닿았던 곳만 뜨끈하다.
“……루나 좋아하는 애.”
간신히 눈을 돌린 화면 속에는 남색 밤하늘을 외로이 바라보고 있는 루나가 있었다. 그 옆으로는 가장 처음으로 루나와 친구가 된 조력자이자, 루나를 짝사랑하는 사슴 캐릭터가 서 있다. 영화 끝까지 제 마음을 한 톨도 고백하지 않는 그 꽃사슴은 속눈썹이 무척 길고 예쁜 인상을 지녔다.
“그렇구나. 한이 닮았어.”
“지랄 좀 하지 마, 진짜.”
결국 욕이 나간다. 친절하게 대해 주고 싶었는데.
“진짠데?”
“진짜면 더 문제 있어. 눈이 삐었냐, 병원 좀 가 봐.”
얼굴에 괜히 열이 올라, 한은 이불을 걷어 내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가 들었을까 겁이 날 정도로 황당한 말이다.
“진짜 한이 닮았는데…….”
제법 살벌하게 노려봤음에도 무방비하게 누운 유일은 겁먹지 않았다. 명백을 증명하듯 깜빡이는 눈이 화면과 한을 번갈아 보았다. 볼수록 더 닮았다며 웃은 그의 눈이 마지막에는 화면에 고정되었다.
[루나, 내가 항상 너와 함께할게.]
촉촉한 사슴의 눈동자에 루나가 담긴다. 별이 잔뜩 수놓아진 남색 밤하늘을 배경으로, 루나는 고맙다며 웃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외로운 얼굴이다. 공허하고 쓸쓸한 눈이 웃음을 흉내 낼 뿐이었다.
“내가 정말 루나고, 한이가 정말 쟤였으면 좋겠다.”
유일은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밤하늘 같은 남색 이불에 누운 그는 오늘따라 유독 더 루나를 닮았다. 장난으로 둔갑한 고백을 쏟는 얼굴이 지독하게도 공허하고 쓸쓸해 보여, 한은 입술을 벙긋거리다 일어섰다. 아까부터 도대체 왜 개소리냐고. 장난을 맞받아쳐 주려다가, 그냥 물 핑계를 댔다.
만약 민우에게 농담을 빙자해 고백했었다면, 최소한 개소리라는 답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을 듯해서.
***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먼저 눈을 떴다. 밤새 선잠을 잔 기분이었다. 하아, 크게 숨을 내쉰 강한은 꺼끌꺼끌한 눈을 비볐다. 바로 마주한 벽이 한유일처럼 희멀건 색이었다.
한유일이 하룻밤 더 자겠다며 버티다가 못해 자는 척까지 하는 바람에, 밤 열 시가 넘어서야 보냈다. 거의 내쫓듯 했으면서도 어둑한 밤 속으로 떠나는 뒷모습은 이상하게 쓸쓸해 보였고, 그래서 한은 신발을 신었다. 욕을 잔뜩 씹는 동시에.
슬리퍼를 직직 끌고 버스 정류장까지 동행을 해 준 후에야 들어온 침대는 유난히 어두웠다. 차갑고 어둑한 그 밤하늘에 누워, 강한은 유일을 곱씹고 또 곱씹어야만 했다. 생각이 자꾸만 제자리를 맴돌았다.
원래도 한유일에게는 모질지 못했지만 고백을 들은 후부터는 정도가 심했다. 사소한 것도 거절하기가 어렵고 모난 말을 뱉으면 신경이 쓰인다. 쉽게 하던 거절도 왜인지 대단한 악행처럼 느껴졌다. 그뿐 아니라 유일이 쉽게 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손이라도 닿으면 숨이 막혔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울 때면 마치 자신이 유일을 짝사랑하는 것처럼 심장이 떨리고 손발이 차게 변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민우를 짝사랑하던 중에도 그의 생각에 밤잠을 설친 적은 없었는데……. 알기 어려운 한유일보다도 제 속내가 더더욱 아리송했다.
남자라는 생물은 단순하기 짝이 없어서 누가 호감을 표하면 관심 없던 사람에게도 마음이 간다고 들었다. 하지만 강한은 수없이 많은 편지와 문자를 받고도 그런 경험을 한 적 없었다. 도리어 생판 모르는 남에게 고백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사귈 거야?’ 묻는 놈들이 유치하다고만 생각했다. 연애라는 건, 사랑이라는 건, 그보다는 조금 더 대단하고 괜찮은 시작이 있어야 하지 않나. 이제 막 스물이 된 강한은 단 한 번도 가슴이 끓어오를 만큼 절절한 연애나 사랑을 해 본 적 없었지만, 학교를 통틀어 그 누구도 저만큼은 사랑을 모르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 흔한 사람들처럼 저도 그저 그런 인간이었던 걸까. 고작 고백 하나에 한유일 생각으로 밤잠을 못 이룰 만큼?
시답잖은 사람이고 싶지 않아서 생각은 자꾸만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짝사랑이 얼마나 쓸쓸한지 알기 때문이리라고. 한유일에게 놓인 길이 안쓰러워서, 안타까워서. 그것도 연예인을 꿈꾸는 놈이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생각은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얄팍한 수면 중에는 ‘천만 배우 한유일, 동성애자로 밝혀져……’ 같은 타이틀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형! 주말에 뭐 하셨는지 참 피곤해 보이시네요?!”
티가 많이 난 모양인지 학교에서 마주친 상수가 도끼눈을 뜨고 물었다. 앞문 턱을 넘자마자 빽 내지르는 소리에 애들 시선이 죄다 모였다. 그 작은 몸에 무슨 열이 그렇게 담겼는지, 상수는 콧김을 쉭쉭 뿜어내며 따지고 있었다. 강한은 저게 미쳤나 싶은 얼굴로 고개를 틀었다. 그러고서야 몰렸던 시선이 뿔뿔이 흩어졌다.
“저는 안 데려가시고!”
쿵쾅거리며 아주 전투적으로 다가온 상수는 책상 위에 핸드폰을 쾅 내려놓았다. 책상이 진동할 정도의 세기라, 강한은 허탈하게 웃었다.
“오, 제법인데.”
“아, 아니, 이렇게 세게 하려던 건 아닌데…….”
기세 좋게 달려온 것치고는 금세 주눅이 들었다. 의자에 느슨히 기대어 팔짱을 낀 강한의 얼굴이 경고처럼 보인 탓이다.
“암튼…. 진짜 서운해요, 저만 빼고.”
“한유일이 또 자랑했냐?”
“아뇨, 이거요.”
우물쭈물하던 상수는 제 핸드폰을 가리켰다. 책상을 부술 기세로 내려놓았던 기기를 강한은 느리게 들었다. 터치형 핸드폰은 언제 만져도 낯설어 손길이 조심스러워졌다.
“또 사진 떴던데요. 이번에는 한유일이 더 난리기는 한데…….”
상수의 하얗고 큰 핸드폰 안에는 익숙한 창이 떠 있다. 지난번 민우가 보여 줬던 것처럼 댓글이 구천 개를 웃도는 글이었다.
이제 내용은 플래시몹을 소개하는 흉내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아예 강한과 유일의 얼굴을 중점으로 삼아 각자의 독사진부터 끌어안은 사진까지, 다양한 각도로 찍힌 것들이 주르륵 줄을 섰다. 강한은 인상을 구긴 채 입을 다물었다.
“형, 괜찮아요. 솔직히 제 눈에는 형이 더 잘생김.”
눈치를 보고 서 있던 상수가 위로하듯 토닥였다. 그제야 한에게서는 한숨이 터졌다.
“너 여기 아이디 있는 거야?”
“네, 뭐…….”
“그럼 지워 달라고 좀 해 줘.”
“앗, 어….”
지난번과는 달리 딱딱한 태도에 상수는 겁을 먹은 듯했다. 실수했나 싶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과민 반응을 보인 모양이다. 알면서도 한은 분홍색 하트와 의미심장한 이모티콘들이 신경 쓰였다. 민우와 함께 올라간 글보다도 더.
그래도 상수를 위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한유일은 나랑 다르지. 배우 한다는데.”
“아, 아아, 넵.”
상수는 미처 생각 못 했다는 듯 허겁지겁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바쁘게 화면을 누르는 그의 너머로, 귀신처럼 유일이 다가왔다. 늘 그랬지만 오늘 유독 맑아 보이는 얼굴이 제 자리도 건너뛰고 가까워졌다.
“안녕.”
“한루나 정말 실망이다. 어떻게 나만 빼고 가냐?”
상수는 화면을 두드리면서도 바쁘게 고개를 들었다. 맵찬 눈길이 초마다 유일을 쏘아보았다가 액정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야, 내가 말한 거 아니다.”
“알아.”
강한의 다급한 말에 유일은 가만히 웃었다. 아주 즐거운 얼굴로 웃은 그가 상수의 핸드폰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글 봤어?”
“어! 존나 난리도 아니야. 암튼 방금 지워 달라 했어.”
“왜?”
“엉?”
“그걸 왜 지워.”
범철을 데리고 매점으로 나갔던 날처럼, 유일의 목소리 한구석에 냉기가 스몄다. 드물게 가지런한 눈썹 한쪽이 올라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상수는 아까보다 더 굳어 되묻지도 못했다. ‘에응?’ 하고 괴상한 소리를 낼 뿐.
“내가 지우라고 했어.”
늘 가면처럼 침착하던 얼굴에 잠시 서운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찰나에 지워 낸 유일은 입술을 당겨 웃었다. 소리 없이 쓸쓸하게.
“그랬구나.”
아, 진짜 존나 신경 쓰이게 하네……. 강한은 속으로만 이를 갈았다.
“너는 연예인 한다는 새끼가 얼굴 막 올라와 있는데 아무 경각심이 없냐? 좀 조심해.”
어쩐지 변명을 하듯 말이 길어졌다. 미간을 잔뜩 좁히고 투덜거리자 그제야 유일은 맑게 웃었다.
“그런 거였구나. 난 또.”
“또 뭐.”
“나랑 사진 찍혀서 싫은 줄 알고.”
사르르 녹는 눈웃음을 보고서야 상수도 긴장을 풀었다. 아침부터 양쪽으로 수난을 겪은 조그마한 얼굴이 축 늘어지며 울상이 되었다. ‘괜히 쫄았네.’ 혼자 중얼거리는 얼굴이 제법 못나게 보여 강한은 픽 웃었다.
“내가 상수냐? 오징어 될 거 걱정하게.”
“와, 형! 진짜! 와아. 근데 이제 오징어 뜻 아시네요? 검색해 보셨어요? 헐, 좀 귀여운 듯?”
“상수는 좀 쉽게 겁을 상실하는 타입인가 봐.”
“예에, 제가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자중하겠슴다.”
펄쩍 뛴 상수가 장난스럽게 고개 숙였다. 두 손을 배꼽 위에 모으고 꾸벅꾸벅, 반복해 굽히는 몸짓이 우습다. 금세 기가 살아 촐싹대는 상수 덕에 분위기가 밝아지고 유일도 이제 아무런 유감없이 웃고 있었다.
“한이 원래 귀여운데.”
그러나 의미심장하게 덧붙인 혼잣말이 정적을 불러왔다. 엑, 또 이상한 소리를 뱉은 상수가 멈추었고 강한 역시 숨을 헉 들이마셨다. 경악한 눈동자로 뻔뻔한 낯을 담았다.
“야, 너 좀……”
조심 좀 하라고, 시발, 조금 전에 말했는데!
안 그래도 당사자는 하지도 않는 걱정을 밤을 지새워 하고 온 입장이라, 강한은 적잖이 억울하고 짜증이 났다. 그러나 울분 섞인 잔소리는 반도 나오지 못한 채 꿀떡 삼켜야만 했다. 담임이 평소보다 빠르게 교실로 들어왔기 때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왜?”
고개를 갸웃 틀며 가까워지는 하얀 얼굴이 말문을 틀어막았다. 껍질 두꺼운 낯짝은 반박을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 듯 보였다. ‘아닌데, 한이 정말 귀엽다니까.’ 같은 대답을 어제처럼 잘도 할 듯했다.
“그래. 그런 소리 많이 들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한유일에는 한유일이다. 강한은 그의 답을 표절하며 뻔뻔하게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옆에서 맹하니 서 있던 상수가 아학학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유일은 1mm의 미동도 없었다. 그저 굳은 얼굴로 한을 가만 바라볼 뿐.
“야, 뭐 하는데…….”
제법 머쓱해진 한이 중얼거리고서야 유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하고 얼핏 한숨을 뱉는 것도 같았다.
“반장 뭐 하냐, 인사해라.”
웃느라 정신이 없는 상수도 제 자리로 돌아가는데, 한유일만 우두커니 선 채였다. 결국 담임의 잔소리를 듣고서야 귀신같이 섰던 몸이 스르르 움직였다. 제 자리로 돌아가는 그의 눈에 날이 서 있어서 강한은 또 뒷담을 했다. 이 새끼는 알고 보면 성격 참 까탈스러운 놈이라고.
***
중간고사 끝난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기말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체육 수업은 모두 이론으로 대체되었고 대부분 수업 시간에는 자습이 주어졌다. 그럴 때면 반 아이들은 내신이나 수능과 밀접한 과목의 유인물을 바쁘게 넘기며 소란을 떨었다. 펄럭대는 종이가 그들의 생명줄 같았다. 한 번은 앞에 앉은 애가 옆 분단에 끙끙대며 유인물을 넘기기에 한이 직접 전달해 준 적도 있었다. 이상하게 힉 소리를 내며 굳은 앞에 놈은 ‘감사합니다.’ 하고 웅얼거리며 인사했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어수선한 틈에서 소외된 감각이 퍽 나쁘지 않았다. 한은 예상 문제를 질문하며 서로를 시험하는 애들을 구경하고 또 늘 그랬듯이 조용한 유일을 감상했다. 이 난리 속에서 그 애만큼은 평소와 같았다.
유일은 교탁과 마주 보는 정중앙 자리에 있었다. 3분단 세 번째 줄 오른쪽. 1분단 끝에 앉은 강한에게는 옆얼굴이 훤히 보이는 곳. 관찰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위치 덕에 강한은 턱을 괴고 조그마한 얼굴을 마음껏 뜯어보았다.
그는 집중력이 좋아 기본적으로 움직임이 적은 편이었지만, 눈을 찡긋거리거나 입술을 오물거리는 때가 잦아 보는 맛이 있었다. 다른 이유는 없이 오로지 그것 때문에.
대다수 자습으로 이어진 수업 덕분에 강한은 종일 잠과 한유일로 시간을 때웠다. 팔이 저리게 자다가 상수와 유일이 깨우면 밥을 먹고, 한유일을 좀 구경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면 매점 가자는 성화에 일어나기를 몇 번.
6월이 벌써 열흘 남짓 남아 있었다.
“내가, 헉, 보기에는……. 이 도서관은! 위치부터가 문제 있어! 이렇게 힘 다 빼고, 올라가니까 공부가 안 되고, 허억, 숙면을 하지!”
거리가 한참 벌어져 저 멀리에 선 상수가 울분을 토했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 서서 숨을 고르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얗게 웃는 유일과 나란히 서 있으니 그 대비가 더욱 심했다.
“나랑 같이 온 것부터가 문제 아닌가 싶다.”
가파른 오르막 끝에 한참 전부터 서 있던 강한은 귀를 후볐다. 제발 같이 가자는 성화에 따라오기야 했지만, 도서관이라니. 저와는 연이 없어도 너무 없는 곳이다.
“형님이, 어으, 와 주셨으니까, 한루나도… 와 줬죠. 아, 개 힘들어. 씨.”
“한유일은 도서관에서 살 것처럼 생겼는데.”
“저 얘랑 첨 와 보는데요.”
정상에 오른 상수는 벌써 지친 듯이 벤치에 벌러덩 누웠다. 그러더니 떨리는 팔을 번쩍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헉헉대며 어렵게 가리킨 곳에는 아직도 말간 낯의 유일이 서 있다.
그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아주 조금 배어 나온 땀을 닦고 나른히 웃었다.
“맞아. 한이 온대서 왔어.”
“쓸데없이 솔직해, 우리 한루나 씨…….”
뭐라고 답하기가 곤란해 강한은 그저 자리를 피했다. 괜히 목을 꺾고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어슬렁대자, 상수가 시답잖은 이야기로 유일의 이목을 끌었다. 가만 보면 제법 도움이 되는 놈이었다.
“형, 창가 자리 끊을게요!”
“어.”
어차피 몇 분 앉아 있다가 엎드려 자기나 할 텐데 자리야 어딘들. 속으로만 덧붙이며 한은 둥근 건물의 외곽을 돌았다. 그 흔한 산책길조차 없는 흙바닥과 나무, 으슥한 그늘이 우범 지대의 냄새를 풍겼다.
아니나 다를까. 몇 걸음 들어가지도 않아서 저편 어둑한 구석에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보였다. 구조물을 받치고 있는 두꺼운 사선의 기둥 너머였다. 그쪽은 별 신경 쓰지 않은 채 마저 걸음을 옮겼다.
정문 방향과는 달리 음습한 뒷길은 통로가 따로 없어, 그대로 바로 낭떠러지였다. 워낙 독특한 지형 탓에 강한은 홀린 것처럼 걸었다. 한 번쯤 아래를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애들이 많이 다니는 도서관인데 이런 곳에 있어도 되는 건가.’
한은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둡고 스산한 기운이 매혹적으로 시선을 붙잡았다.
“아니, 근데 그 형 폰 아직 슬라이드 쓰지 않음? 거지 같던데 뭔 돈이 나서 그러겠냐?”
하지만 못 이기는 척 유혹에 이끌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제 이야기가 분명한 말소리에 강한은 꿈에서 깬 사람처럼 휙 고개를 돌렸다.
“이해 못 했네, 이 새끼…. 그러니까 돈은 그 형이 받는 거라고. 한유일 박아 주고서.”
건물 구조물에 가려진 구석.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곳에서 웬 더러운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한유일 박아 주고서.’
단번에 이해하기는 어려운 말이 귓등을 할퀴었다. 어떤 사고를 하기 전에 몸이 불쑥 움직였다.
강한은 눅눅한 나뭇잎만 골라 밟아 가며 발소리를 죽이고 사냥하듯 그 앞까지 다가갔다. 짙어진 담배 냄새를 따라 목소리도 커져 가고 있었다.
“진짜 한유일이 그런다고? 존나 깬다.”
“그렇다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감독을 마주쳤던 날이 떠올랐다. 음성뿐 아니라 유일을 향한 조롱과 낄낄대는 투까지 판박이였다. 절로 인상을 쓴 한은 이제 아예 현장을 습격하는 형사처럼 성큼성큼 걸었다.
“근데 너 그때 장도 형님 드릴 담배도 한유일이 구해 줬다 하지 않음? 새끼, 혹시 너도 그런 짓 하고 받은 거? 우우, 존나 더럽다.”
담배도 이 새끼 작품이었어? 기가 막혀 헛웃음이 터진 강한은 허리를 숙였다. 두 놈이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는 곳은 무척 낮고 음습했다.
“아니, 담배는 내가 구해 달라 한 거 아니거든? 그 새끼가 괜히 오지랖, 아악! 깜짝이야! 으앗, 악, 뜨거!”
“아, 씨바!”
낮은 입구에 팔을 걸친 채, 강한은 안에 널브러진 두 녀석을 응시했다. 예상대로 그날 한유일을 씹던 두 놈이었다.
“범철아, 자주 마주치네.”
“아, 에, 어, 안녕하세요….”
담뱃불에 덴 손을 파드닥 털어 대며 범철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폼을 잡아야 할지 고개를 조아려야 할지 모르는 고개가 어색하게 움직였다. 닭처럼 산만한 모양새에 한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렇게 긴장해. 담배 다 태웠어?”
“아, 예에…….”
“그럼 나와야지.”
강한의 단단한 몸은 입구를 틈 없이 막고 있었다. 친절한 웃음과 달리 그는 한 걸음도 물러나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제야 불운을 감지한 범철이 울상을 지었다. 옆에 있던 친구 놈이 그의 옆구리를 쑤셔 대며 뭐라 탓을 했다.
“왜 안 나와, 범철아. 공부하러 온 거 아니야?”
“마, 맞아요.”
“근데 여기서 담배나 태우고 개소리 지껄이고. 할 짓 없어?”
제발 못 들었기를 바라며 흔들리던 눈동자에 낭패가 스몄다. 더듬더듬, 떨리는 입술이 ‘아, 그게요. 형.’ 하고 다급한 변명을 쏟았다. 한은 듣지 않고 몸을 물렀다.
“친구는 집에 가야 되지?”
“넵, 네!”
벗의 안녕은 고려조차 하지 않은 친구 놈이 잠시 내어 준 틈을 부리나케 비집고 나왔다. 뭐가 그렇게 감사한지 인사까지 꾸벅꾸벅하며 멀어진 그가 코너를 돌 때까지 한은 가만히 서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한참 멀어지고서야 강한은 중얼거렸다.
“내가 아까 봤는데 여기 낭떠러지가 되게 높더라. 떨어지면 뒤지겠던데.”
낮은 목소리가 멎고도 또 한참 정적이 흘렀다. 먼저 터져 나온 것은 울음소리였다.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
엉엉 우는 소리에 한은 다시 허리를 숙였다. 어둑한 아지트 안의 범철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었다. 그것도 바지 가운데가 축축하게 젖은 채로.
“범철이 너 변태야? 왜 싸고 그래.”
“허엉, 흑, 그게 아니라… 이제 안 그럴게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긴 뭘 살려 줘. 누가 죽인대.”
겁을 좀 줄 생각이기는 했지만 바지까지 적실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더 지질한 모양새에 한은 혀를 찼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범철을 몇 분 더 지켜보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상수가 저를 찾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더 할애할 시간이 없었다.
“그냥 여기 되게 높으니까.”
“흑, 으흑…….”
“조심하라고. 알아듣지?”
“…네, 흡, 네…….”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릎까지 꿇은 범철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절하고 축축한 눈에 대고 씩 웃어 준 강한은 올 때보다 더 빠르게 현장을 벗어났다. 담배 냄새가 배었을까 봐 셔츠를 펄럭대면서.
혀엉! 애절한 상수의 목소리를 따라간 곳은 정문이었다. 저를 찾아 한 바퀴를 돌았는지 땀을 뻘뻘 흘리는 얼굴은 아까보다 더 붉었다.
“형 어디 갔다 왔어요? 화장실 가신 줄 알고 한참 찾았….”
제법 억울하게 토로하던 상수가 흠칫 멈추었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코를 막았다. 흘긴 눈이 한을 째려보며 파르르 떨었다.
“설마 형 담배 피우셨어요?”
당장 실망이라며 팩 토라질 것 같은 표정이다. 한은 황당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아니라는 말을 꺼내기 전에 말문이 막혔다. 건물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유일의 낯이 너무도 심각해서였다.
“한아, 어디 갔었어. 놀랐잖아.”
“둘 다 왜 오버야.”
“여기 이상한 애들도 많이 온대. 걱정했잖아.”
도대체 누구를…….
강한은 방금 저기서 내 얼굴만 보고도 지린 놈이 있다는 말을 하려다 참았다. 한숨을 푹 내쉰 한이 ‘그래, 그래. 들어나 가자.’ 하고 피곤하다는 듯 속삭이자 유일은 깊은 숨을 파리하게 뱉었다.
“한이는 정말 손 많이 가.”
“지랄, 진짜…….”
세 살배기 어린애 대하는 꼴에 또 욕이 튀어 나갔다. 상수는 벌건 얼굴로 낄낄 웃었고, 유일은 아까보다 더 땀이 송골송골 맺힌 낯으로도 홀로 심각했다. 그게 제법 진심처럼 보여서 한은 재차 속이 복잡해졌다. 이게 다 비밀이 너무 많은 한유일 탓이었다.
담배부터 난데없는 주먹질까지, 한유일을 오해하는 데 일조했던 모든 일들이 다 허상이다. 뒤통수가 얼얼한 감각에 강한은 이를 갈았다. 몇 번씩이나 쉽게 사람을 오해한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고, 그 모든 오해를 그저 내버려 두는 한유일의 나태와 여유가 싫었다. 불편한 심기를 따라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야.”
“응?”
유일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슥 넘기며 돌아보았다. 이마와 눈썹이 훤히 드러나 낯선 분위기를 풍기는 얼굴에 대고 한은 쏴붙였다.
“너야말로.”
“나?”
“어, 되게 성가셔.”
못마땅한 마음을 가득 담아 툭 내뱉은 시비에도 유일은 아하하 웃었다. 아주 대단한 칭찬을 들은 것처럼 가슴팍을 들썩이며. 역시나 유별난 반응에 한은 고개를 저었다. 몇몇 오해가 있었을지언정 한유일이 이상한 놈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을 듯했다.
놀랍게도 바로 다음 날, 한유일은 그 생각에 쐐기를 박아 주었다. 비 소식을 앞두고 유독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은 아침이었다. 어제처럼 제 자리에 가방도 놓지 않고 곧장 한에게로 온 그는 대뜸 하교 후 영화를 제안했다.
“영화? 오늘?”
“응.”
끄덕이는 고개를 따라 유일의 부드러운 흑갈색 머리칼이 춤을 추었다. 말문이 딱 막혀, 강한은 얕은 숨을 아주 길게 내쉬었다.
“다음 주 시험 아니냐?”
“맞아.”
“어제는 공부하자고 도서관 끌고 갔으면서. 오늘은 갑자기 영화를 보자고?”
진짜 이상한 놈. 한은 그의 뻔뻔한 낯과 칠판에 적힌 ‘D-6’이라는 글자를 번갈아 보았다.
“응.”
“상수 과외 있다던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둘이 데이트할 수 있잖아.”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입이 쩍 벌어졌다. 누가 들었을까 사색이 된 한의 얼굴이 교실을 휙휙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직 이른 시간이라 빈자리가 대다수였다.
“너 진짜 친구 없지?”
“응.”
아무리 타격을 주려고 해도 순순한 대답만이 돌아와 강한은 전투력을 모두 상실했다. 지친 얼굴을 쓸어내리고 손을 내젓는다. 너랑 얘기하면 피로가 쌓인다고, 어서 가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유일은 따스하게 웃었다.
“그럼 조금 생각해 봐.”
정말 데이트 신청을 하는 사람처럼 고민할 기회까지 쥐여 주고 느긋하게 멀어졌다.
강한은 하, 짧은 숨을 토하며 의자에 비딱하게 기대앉았다. 길고 늘씬한 유일의 뒷모습을 ‘뭐 저런 게 다 있지?’ 하는 눈으로 훑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너무 받아만 준 모양이다. 버릇이 잘못 들어도 단단히 잘못 들었다.
“야, 한루나!”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절하고 만다. 다짐하던 한의 눈동자가 앞문을 향했다. 익숙한 상수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등교와 동시에 우렁찬 호명을 감행한 신상수는 앞문에 걸려 낑낑거리고 있었다. 평균에 약간 못 미치는 몸이 아주 큰 하트 모양의 무언가를 들고 고군분투 중이다.
자세히 보니 덕지덕지 붙은 빼빼로 과자였다. 제 몸통보다 커다란 과자를 통과시키느라 그는 문틀 사이를 게처럼 옆으로 걸었다.
“미친, 신상수 왜 저럼.”
우스꽝스러운 꼴에 주변 놈들이 킥킥거렸다. 강한 역시 헛웃음이 터졌다.
“야, 작년에 너 이거 받고 싶다 했잖아!”
빼빼로 데이에나 볼 법한 상품을 이 여름에 어떻게 구했는지, 상수는 크나큰 하트 뭉치를 유일의 책상에 올렸다. 드디어 정면으로 향한 빨간 빼빼로 가운데에는 ‘생일 축하해’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생일?’
그제야 웃음기가 멎은 강한은 눈을 깜빡거렸다.
“생일 축하해, 한루나!”
제법 뿌듯한지 선물을 내려놓은 상수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춤까지 췄다. 요란하게 외치는 소리에 몇몇 뭉쳐 있던 반 애들도 환호를 질러 주었다. 한루나 생일이었냐며, 축하한다고 외치는 애들 틈에서 강한은 홀로 조용했다.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상수 너한테 받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아무튼 고마워.”
“아, 진짜 싸가지.”
“잘 먹을게.”
나긋하게 웃은 유일이 빼빼로를 들고 일어섰다. 책상을 다 잡아먹는 선물을 그대로 둘 수는 없을 터였다. 잠시 교실을 둘러보던 그는 교실 맨 뒤 사물함 쪽으로 향했다. 한은 점점 가까워지는 그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이 새끼는 도통 뭘 먼저 말하는 일이 없네.’
이가 저절로 으득 갈려 표정은 더욱 살벌해졌다.
“아, 거기 놓으면 애들이 훔쳐 가지.”
“이걸 누가 훔쳐 가.”
한은 굳은 얼굴 그대로 유일과 상수의 만담 같은 합의 과정을 들었다. 아하하 소리까지 내어 웃은 유일이 무어라 항변하면 상수가 서운하다고 발을 구르는 식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하트 덩어리를 놓을 곳이 없었으므로 결국 합의점은 사물함 위로 끝났다.
그 난리를 고요하게 듣고 있던 한은 저벅저벅 느리게 이어지는 유일 특유의 걸음 소리를 알아챘다.
“야.”
그 느릿한 걸음이 제 옆을 스치는 순간. 강한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뼈가 도드라져 단단한, 그러나 한의 큰 손에는 얇게 느껴지는 손목이 잡혔다.
우뚝 멈추어 선 한유일은 답이 없었다. 평소처럼 ‘응?’ 하고 빙긋 웃지도 않았다. 불시에 물에 빠진 사람처럼 동그란 눈을 하고 한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영화 봐, 오늘.”
충동을 뭉쳐 던진 저음이 툭 떨어졌다. 못 들을 수가 없을 만큼 분명하게.
그러나 평소보다 더 하얗게 질린 유일은 조용했다. 한은 민망함을 숨기려 눈썹을 틀었다. 꿈틀 들어 올려 무서운 척을 하며, 쥔 손목을 조금 흔들어 보았다.
“보자고, 영화.”
“아……. 응.”
“반응 존나 싱겁네.”
조를 때는 언제고? 기가 차서 손목을 툭 내던지듯 놓아주었다. 그러자 유일은 그 둘레를 아주 조심스레 감싸 올리며 둥글게 문질렀다. 꿈결을 헤매는 듯한 얼굴이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아니야, 너무 좋아서 그래.”
그렇게 말하는 유일의 볼 위에 분홍기가 돌았다. 옮는 열인지, 강한도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어라 대꾸도 못 하게끔. 제 얼굴도 물에 빠진 사람처럼 보일까 싶어 한은 얼른 엎드려 누웠다. 알았으면 얼른 가라고, 무뚝뚝하게 던진 말은 잘 전달되지 않은 듯했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유일만의 발걸음 소리가 났다. 그사이의 공백이 열을 더 옮겨, 한은 조회 시간에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담임이 열이라도 나냐고 물을 것만 같아서.
***
어두침침한 영화관 로비에는 사방으로 작은 핀 조명이 쏟아져 내렸다. 천장에 점점이 박힌 둥근 다운라이트 조명 탓이었다. 강한은 그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 무리가 별을 흉내 낸다고 느꼈다. 어쩌면 이 공간을 만들어 낸 사람의 의도 자체가 그러할지도 몰랐다.
‘신비와 미지에 이끌리는 마음은 인간의 본능인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강한은 차가운 기둥에 비딱하게 섰다. 눈앞에는 그야말로 신비롭게 느껴질 만큼 흰 목덜미가 있다. 한은 저항 없이 훤히 드러난 목뒤를 가만히 감상했다.
“하아…….”
마치 시선을 느낀 것처럼 기다란 목이 움직였다. 강한은 얼른 눈을 거두고, 일부러 그의 시야에 담기지 않도록 한유일과 나란히 섰다.
“여기도 마음에 드는 게 없냐?”
대수롭지 않은 듯이 묻고 그가 내내 바라보고 있던 모니터를 응시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화면 속 현재 상영작 목록은 방금 다녀온 영화관과 별다를 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언제나 예스맨이던 한유일이 웬일로 끌리는 영화가 없다고 하는 바람에 장소를 옮겼다. 이곳에서도 영화를 고르지 못한다면 정원시 역전에 있는 영화관은 모두 탈락이었다.
“응.”
화면을 노려본다고 새로운 영화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한유일은 눈동자로 빔을 쏘아 댔다. 간단한 답 한 글자에 시무룩한 기운이 잔뜩 묻어 있다.
“인간적으로 영화를 보자고 했으면 뭐 볼 건지는 정해져 있었어야 맞지 않나 싶다.”
강한은 허탈하게 웃으며 이미 한번 거절되었던 영화 포스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유일처럼 하얗고 예쁜 여자가 눈물을 흘리는 그림이었다.
“저거는?”
“…로맨스는 아닌 것 같아.”
“아니겠지.”
“그럼 싫은데.”
예매도 하지 않고 영화 약속을 잡은 주제에 유일은 제법 뻔뻔했다. 일전 영화관에서는 공포 영화라서 세 개가 탈락했고 하나는 코미디라서 또 두 개는 액션이라 문제였다. 이쯤 되면 트집 잡는 수준이라, 한은 일순 울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오늘은 한유일의 생일이었다. 강한은 울컥 치민 감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연기 숙제라도 받은 모양이라며 스스로를 잠재웠다.
“없으면 일단 나가자.”
갑갑한 숨을 삼키며 유일을 끌었다. 장골 둘이 한참이나 로비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꼴이 민폐처럼 느껴졌다.
단숨에 손목을 잡아 나오는 중에도 한은 힐긋대며 그의 낯을 살폈다. 평소와 다르게 조금 침전된 얼굴이 건물 바깥으로 나서자 거짓말처럼 감정을 지웠다. 다른 애들 앞에서처럼 방긋 웃음을 지어낸 한유일은 능숙했다. 건너편 건물을 가리키는 얼굴이 제법 기분 좋아 보이기도 했다.
“한아, 미안. 그냥 밥 먹자.”
그러나 밝은 미소 안에도 아쉬움이 느껴져, 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답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손이 손차양을 만들어 내리쬐는 햇빛을 막았다. 당장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시비라도 걸 듯한 인상으로 거리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노래방, 술집, 파스타, 떡볶이, 또 노래방, 또 술집…….
“야.”
“응?”
“저기 가자.”
미간을 가득 좁힌 채 주변 상가를 훑던 한이 턱짓을 했다. 건너편 상가 중 유독 낡은 건물의 4층. 촌스러운 노란색 간판에 파랗고 빨간 글자들이 ‘명작 DVD’라는 글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셔츠 안에 반팔 있지?”
“어? 어.”
“그럼 됐네.”
흔쾌히 결론을 내린 강한은 유일의 손목을 이끌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일은 그 자리에 며칠이고 서 있을 사람처럼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개의치 않고 신호등도 없는 횡단보도를 재빠르게 건너 금세 상가 건물로 들어섰다.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 속, 낡은 건물의 계단은 아직 냉기를 품고 있어 제법 숨통이 트였다. 그때까지도 한유일은 손목이 잡힌 채로 제때 발만 맞춰 걸었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왜 넋을 빼고 있어.”
성큼성큼 낡은 계단을 오르면서 뒤를 흘깃대던 한이 비식 웃었다.
“근데 로맨스에 왜 집착질이냐? 너답지 않게. 숙제 받았어?”
뒤이어 물으면서 하복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메고 있던 가방을 한쪽 손목에 걸리도록 훅 떨어트린 채, 팔을 쑥 빼냈다. 보통 반팔 티셔츠 위에 셔츠를 걸치기만 하고 다녔기에 탈의는 순식간에 벌어졌다. 난데없는 탈복에 초점이 없던 유일의 눈동자가 커졌다.
“너도 벗어. 아마도 고딩 못 들어갈걸.”
유독 커진 눈동자를 보고서야 조금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다. 이상하게 보였을 것 같았다. 강한은 변명처럼 중얼대며 손을 내밀었다. 유일의 가방도 받아 주겠다는 신호였다.
그제야 크게 숨을 들이마신 유일이 셔츠를 벗었다. 가방은 건네주지 않았다. 그는 고운 손가락으로 벗은 셔츠를 접어 제 가방 안에 넣고, 한을 바라보았다.
“한이는 많이 와 봤어?”
“아니, 처음인데. 빠꾸 당한다고 듣기만 했어.”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린 한은 저도 가방 안에 셔츠를 구겨 넣고 계단을 마저 밟았다. 긴 다리가 성큼성큼 올라가다 4층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너 영화 안 고르면 내가 루나2 골라 버린다. 그것도 엄밀히 따지면 로맨스 있어.”
“응, 나는 좋아.”
어쩐지 조금 기운이 돌아온 유일이 웃었다. 이상하게도 한은 그 해맑은 웃음을 본 후에야 일이 제대로 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문을 열자마자 쿰쿰한 냄새가 났다. 영화관보다 더 어두컴컴한 입구 한쪽, 오십 대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곡선 형태의 카운터 안에 앉은 그는 이 시간에 손님이 왔다는 사실 자체가 몹시 새로운 일인 것처럼 눈을 키웠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인사한 그가 엉거주춤 일어나기도 전에 강한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교복 바지를 들키면 안 됐다. 다행히 카운터 바로 옆 신작 코너에 익숙한 그림이 보였다.
“이거요.”
신작이라고 하기에는 때가 한참 지난 영화지만 꼬집지 않았다. 그저 유일에게 경고한 그대로 <루나 더 퀸>의 두 번째 시리즈를 골라 내밀자 주인은 ‘예에…….’ 길게 대답하며 한을 훑어보았다. 기골이 장대한 두 남자를 미심쩍게 보던 그가 웅얼거렸다.
“만이천 원이요.”
주름진 눈은 의심을 가득 담고 있었다. 맞춰 입은 듯한 반팔 티셔츠 밑의 짙은 군청색 바지를 기어코 훑어볼 때는 거의 확신을 보였다. 하지만 괜히 더 딱딱한 표정으로 카드를 내미는 한에게 사장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나이가 몇인지 묻는 대신 찜찜하고 피로한 얼굴로 카운터 밖에 걸어 나왔다. 그동안 유일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기다리며 서 있었다. 역전으로 나오는 길부터 강한에게 ‘생일에도 계산하겠다고 나서면 혼난다.’고 잔뜩 경고받은 탓이었다.
사장의 낡은 슬리퍼가 딱딱 소리를 내며 비좁은 복도로 향했다. 한과 유일은 그를 따라 얌전히 걸었다. 적막한 DVD방에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흐른다.
“이리로 오시고……. 거, 영화만 보고 나갈 거죠?”
“네? 네.”
카운터와 가까운 3번 방의 문을 열어 준 그가 아주 당연한 질문을 했다. 뒤통수를 긁적이며 자꾸만 무언가 찝찝하다는 듯이.
“에휴…. 한 번만이야, 학생들?”
기기 앞에서 무언가를 한참 만지던 사장은 영상을 재생시킴과 동시에 경고를 남겼다. 그러고는 입을 합 다물고 있는 유일과 한을 지나쳐 방을 나섰다. 테이블 위에 기본으로 구비되어 있던 재떨이마저 수거해 가는 모습에 강한은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작은 목소리에 얼떨떨하게 서 있던 유일도 얼른 허리를 숙였다.
“그 뭐 이상한 거 있음 부르고…….”
문을 닫기 직전, 사장은 그렇게 어물거리더니 스위치를 눌렀다. 달칵 소리와 함께 조명이 훅 어두워졌다. 그가 실행시키고 나간 화면에서는 샤라랑 소리가 울리며 <루나 더 퀸>의 제조사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냥 내 민증이라도 보여 줄걸.”
머쓱해져 쓸데없는 말까지 하며 한은 먼저 자리를 잡았다. 화면을 바라보며 나란히 누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검은 가죽 소파는 무척 길었다. 쌓인 쿠션에 자연스럽게 등을 기대어 앉고서야 강한은 옅은 후회를 느꼈다.
깜깜한 내부 어딘가에서 스며들어 오는 은은한 색상 조명이 분위기를 야릇하게 조성하고 있었다. 틀어 놓은 영화는 순수하기 짝이 없는데, 이 공간만큼은 무척 은밀하고 농염한 분위기였다. 금단의 무언가가 사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하지 말라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건데…….’
한유일에게 기필코 영화를 보여 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판단력을 흐렸다. 어쩌면 숙제가 아닌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에. 다른 날도 아니고, 생일날에 이런 까탈을 피우는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아서.
“지난번에도 한이랑 누워서 봤는데, 루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유일이 빈자리를 채워 앉았다. 침대에 가까운 모양새 덕분에 그 역시 등을 뒤로 잔뜩 기댄 자세가 되었다. 한은 상박에 닿는 살결을 무시하려고 애쓰며 화면을 노려보았다.
정작 계단 중간에서 넋을 빼던 유일은 이제 침착한 모습이었다. 낯선 가죽 소파에 누워 자세를 잡고 영화를 바라보는 몸짓 하나하나가 단정했다.
반쯤은 유일을 놀리려고 선택했지만, 확실히 <루나 더 퀸Ⅱ>는 이전 편보다 로맨스적인 요소가 늘었다. 모험과 우정 중심이었던 이야기 속에 루나의 첫사랑이 가미되면서 그녀는 여러 방면으로 더욱 성숙해진다. 숲에서 자라 사람과 가까워지는 법에 서툴렀던 그녀가 왕자를 구하고, 마음을 고백하고, 또 키스까지 했을 때. 강한은 늘 제 자식의 성장처럼 뿌듯하고 기뻐했다. 맹세코 그녀와 왕자 사이에 흐르는 기류에 긴장하거나 심장이 뛰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아름답고 온화한 화풍의 연속을 바라보며, 강한은 자꾸 마른침을 삼켰다. 체온이 올랐고 맥박이 뛰었다. 상박에 맞닿은 살결이 몹시 신경 쓰였으며 호흡은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마음대로 이리저리 튀려는 숨을 꾹꾹 눌러야만 평범한 호흡을 따라 할 수 있었다. 고작 애니메이션 영화 속의 스킨십을 지켜보며 보이기에는 과민한 반응이었다.
“야, 에어컨 틀어도 되지?”
안 되겠다. 작게 읊조린 강한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벌떡 일어나 에어컨을 켰다. 이미 건물의 냉기를 머금고 있던 방은 쉽게 차가워졌다. 덕분에 이유 없이 후끈대던 살결도 조금은 온도를 내렸다.
“여름 감기가 더 무서운데.”
그러나 부작용이 있었다. 한동안 가만히 영화에 집중하던 유일이 담요를 꺼내 왔다. 이불에 가깝도록 도톰하고 넓은 천을 탁탁 털어 낸 그가 도로 누우며 덮었다. 야무지게 한의 몸까지 챙겨 주는 손길마저 단정했다.
한 담요를 같이 덮고 있자 안 그래도 가깝던 거리가 더욱 좁혀졌다. 이제 팔뚝이 단순히 닿을 뿐 아니라 살성을 느낄 만큼 진득하게 붙어 있었다. 서늘한 유일의 살갗이 지나치게 부드럽고, 맞닿은 손등이 간질거렸다. 어쩐지 손가락 끝이 자꾸 움찔거리며 튀었다.
“한이는 정말 몸에 열이 많나 봐. 담요 속이 벌써 뜨거워.”
한유일이 웃는 듯이 속닥거리는 순간, 영화 속에서는 키스 신이 펼쳐졌다. 루나가 왕자를 끌어당겨 용감히 입을 맞추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강한은 평소와 몹시 다른 감상으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거세게 변모한 맥박이 담요를 타고 유일에게 전해질 것만 같았다.
“나 화장실 좀.”
마른침을 꿀떡 삼키며 일어섰다. 눈을 끔벅거리는 유일을 겅중 뛰어넘고, 한은 도망자처럼 움직였다. 복도를 빠르게 걷는 내내 속으로는 사방에서 은밀하게 펼쳐진 조명 탓을 했다. 하필 이런 조명 아래 단둘이 누워 있어서. 누군가와 맨살을 맞대고 누운 일이 많지 않아서. 한유일이 괜히 간지럽게 성을 떼고 불러서. 잊은 척하려고 해도 그의 고백이 자꾸 마음 한구석을 갉작거려서.
그래서, 신경이 쓰여서.
“좆 됐다…….”
쫓기듯 들어온 화장실. 거대하지만 낡아 귀퉁이가 다 닳아 버린 거울 안에 하얗게 질린 남자가 있었다. 그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에 대고 강한은 공포 영화의 예고 글귀처럼 속삭였다. 오싹한 예고였다.
으슥한 경고를 무시하고 가장 먼저 참변을 당하는 영화 속 인물이 된 것처럼, 강한은 다시금 그 방에 들어갔다. 방이 그새 냉골이 되어 있었다. 한유일은 추위를 무기로 더더욱 붙어 이따금 어깨나 팔뚝을 만지작거리고 제 얼굴을 비비기도 했다. 그러다가 입술이 스치듯 티셔츠 위를 누르며 지났을 때는, 강한이야말로 냉골이 되었다. 온몸이 쩌저적 갈라지는 듯했다.
천만다행으로 애니메이션 영화는 상영 시간이 길지 않았다. 고문처럼 견뎌 낸 한은 처음으로 엔딩의 여운을 즐기지 않고 방을 튀어 나갔다. 깜짝 놀란 주인아저씨에게 허리 숙여 인사만 열댓 번씩 하고 나오는 길. 계단을 내려와 지상을 딛자마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몰려왔다. 타다닥,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금세 따라붙더니 바싹 선 한유일이 웃었다.
“한아, 고마워. 받아 본 생일 선물 중에 제일 좋았어.”
습하고 뜨거운 바람이 냉랭한 살결을 녹이듯, 유일의 미소 또한 그런 속성이 있었다. 강한은 괜히 시선을 피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보다 더 비싸고 좋은 선물을 한유일은 수없이 많이 받아 왔을 터였다. 오늘 하루만 해도 그는 매점에 몇 번씩 끌려다니고 온갖 선물을 끌어모았다. 그럼에도 강한은 그의 말이 영 거짓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선물이라는 게 그렇다. 품목도 중요하기야 하지만 누가 주었느냐를 무시할 수 없는 법이었다.
“구라 치네.”
괜히 고개를 슥 돌리며 한은 무심히 답했다. 우스운 우월감이 자꾸 입술을 씰룩이게 했다.
“진짜야. 생일 선물 받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그러나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입가가 서서히 굳었다. 어쩐지 가슴을 쿡쿡 찌르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강한은 말을 돌렸다. 밥이나 먹자는 멋없는 말에도 유일은 한여름 더위를 물리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이 한을 재차 뜨끔하게 했다. 정말 이상하게도.
***
강한은 미디어 속 사랑을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평생 실수하지 않는 부모나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공 곁에 서는 영화 속 친구들처럼. 실재하지 않아서 아름답고, 소유할 수 없어 말해지는 것이라고 여겼다.
특히 짝사랑이란 얼마나 부풀려졌는지.
그는 미디어에 나오는 짝사랑의 특징을 대부분 공감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앞에 서면 평소보다 더 긴장하고, 살이 닿으면 몸이 굳고, 말을 조심스레 고르게 되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한은 그를 가질 수 없어 심장이 뜯겨 나가지도 않았고 밤잠 못 이루며 눈물을 찍어 낸 적도 없었다. 특히 혈기 왕성한 청년들의 첫사랑을 그린 여느 영화들처럼, 야한 생각을 하거나 몽정에 젖은 속옷을 빨아 본 적은 더더욱 전무했다.
아마도 한의 첫사랑을 영화로 만든다면 무척 심심하고 조용한 독립 영화가 될 것이었다. ‘열아홉에서 스물로 이어지는 첫사랑’이라는 대단한 광고 문구를 붙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한에게 민우는 그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고 자주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의 비밀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특별한 사람 무리에 끼고 싶었다. 그가 하는 것이라면 대부분이 멋있어 보였으며 일부는 따라 하고 싶었다. 물론 사소한 말 한마디를 기억하거나 그가 준 사탕의 껍데기를 서랍 속에 넣어 둔 적도 있었다. 그와 관련된 정보라면 어느 것 하나 쉽게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딱 그만큼이었다. 강한에게 첫사랑이자 짝사랑은 가끔 보이는 결점조차 눈감고 넘어갈 정도의, 꼭 그 수준의 애틋함이었다.
‘아, 시발, 진짜…….’
그러니까 이런 혼돈은 그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다.
욕을 짓씹으며 강한은 복도 한복판에 멈추어 섰다. 주변으로 바쁘게 지나던 애들이 알아서 그를 피해 가는 와중, 한참 장애물 노릇을 하던 몸이 천천히 창문 방향으로 돌아섰다.
이내 네모난 돌기둥 위로 잘생긴 이마가 쿵, 쿵, 부딪히기 시작했다.
“왜 저래?”
“야, 쳐다보지 마. 저 형 존나 무서운 형임.”
“레알? 왜?”
“너 모름? 범철이가 그러는데 저 형이….”
숙덕대는 말소리가 타격음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은 하얗게 빈 머리를 쪼개고 싶은 것처럼 이마만 박아 댔다. 그놈의 범철이 새끼를 어떻게 손봐 줘야 할지도 지금은 생각하기 싫었다. 아니, 생각할 용량이 부족했다. 지금 머릿속에는 이 나이 먹고 처음 경험한 몽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몽정 내용은 미디어를 통해 보았던 것처럼 그렇게 색정적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평범한 학교 배경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이어졌고, 대뜸 한유일이 나왔다. 교실 한가운데 이불을 펼쳐 놓고 누운 한유일이.
하얀 반팔에 교복 바지를 챙겨 입은 그는 별다른 행동도 없이 웃었다. 앞문을 드르륵 열고 폭탄을 마주한 것처럼 뜨악한 강한에게 그저 ‘한아, 왔어?’ 하고 물으며 웃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몽정이었다.
이른 아침 허망한 얼굴로 젖은 속옷을 빨면서 한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머리를 물들인 혼란은 그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충격과 황당, 경악, 그리고 조금의 분노와 슬픔까지 모아 놓은 감정의 격렬한 충동 그 자체였다.
“아.”
쿵, 소리가 울려야 할 때에 누군가의 짤막한 신음성이 들렸다. 강한은 자학하듯 찧어 대던 머리를 멈추고 슬며시 눈을 떴다. 이마에 딱딱한 벽 대신 누군가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 따뜻한 살결의 주인공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한아, 왜 이러고 있어?”
벽과 강한의 이마 사이에 넣었던 손을 흔들며, 유일은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꽤 아픈 표정이었으므로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것은 강한 역시 잘 알았다.
하지만 ‘아.’ 하던 짧은 호흡이, 살짝 찌푸린 인상이 조금…….
“아, 미친, 존나 미친 것 같다….”
“무슨 일 있었어?”
이럴 리가 없는데. 민우 형에게도 이런 적 없었는데! 겨우 고백 한 번 때문에, 정말 그거 때문에?
강한은 뒤늦게 솟구치는 의문들을 애써 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고장 난 로봇처럼 느리게 삐걱대며 교실 뒷문을 열자, 따라붙은 유일이 금세 돌려 세웠다.
“이마 빨개졌어. 봐, 누르면 아프지?”
걱정 가득한 눈동자가 성큼 가까워졌다. 이마를 꾸욱 누르는 그의 체향이 어떤 형체를 가지고 있는 것만 같다.
“뭔, 그 정도 아니야.”
강한은 퍼뜩 멀어지며 중얼거렸다. 진짜 이유는 절대 설명할 수 없었다. 유일의 휘둥그레 커진 눈동자를 모르는 척, 애써 자리에 앉은 한이 엎드렸다. 철옹성처럼 단단하게 세운 팔뚝 울타리 안에서 뜨거운 숨결이 훅훅 밀려 나왔다.
“형, 어… …요?”
이 나이에 첫 몽정을 해도 되는지, 몽정이 무의식의 반증인 건지, 아니라면 친구를 상대로 이러고도 다들 잘 지낼 수 있는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 사이로 메아리처럼 어떤 목소리가 울렸다. 깊은 바다 속에서 듣는 듯이 먹먹하고 왱왱 울리는 소리였다.
“형! 점심시간인데. 어디 아프세요?”
수없이 반복되던 음성이 명확해지는 순간, 강한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식은땀으로 흥건해진 뒷목이 서늘하다.
“허억, 한유일 말대로 형 얼굴 완전 하얗게 질렸어요.”
상수가 유일처럼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며 쪼그려 앉았다. 늘 그랬듯이 책상을 쥐고 앉는 모습을 내려다보다, 한은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양 뺨을 거세게 짝, 짝 쳐 냈다.
“아이고, 형님. 자기 얼굴로 격파를 하심 어떡해요.”
“상수가 까부는 걸 보니까 이건 꿈이 아니구나.”
“네엡. 밥 먹으러 가시죠. 몸 안 좋을 땐 더 잘 챙겨 먹어야 돼요.”
“……한, 유일은?”
“걔 뭐 홍보 불려 갔어요. 안 그래도 형님 상태 안 좋은 것 같다고 좀 보라 했었는데 진짜네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당장은 유일을 대면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은 길게 숨을 내쉬며 조금 나아진 얼굴로 일어섰다. 기다렸다는 듯 뒷문을 여는 상수를 따라 급식실로 향했다.
“상수야.”
종이 친 지 꽤 지나 한적해진 복도를 걸으며, 강한은 조금 머뭇대며 상수를 불렀다. 앞서 걷던 상수는 ‘예?’ 하고 크게 답하면서도 걸음을 빨리했다.
“존나 이상한 질문 같기는 한데. 내가 물어볼 데가….”
“네? 뭐라고요, 형?”
“터치 핸드폰은 그 뭐냐, 인터넷 검색하기도 좋다던데 나는 그…. 인터넷 접속하면 요금 폭탄이라.”
“아, 뭐 검색하시게요?”
답지 않게 빙빙 둘러 중얼거리자, 상수 역시 드문 표정을 지었다. 제법 답답한 얼굴로 다가온 상수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편하게 쓰셔도 된다며 두어 번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강한은 여전히 머뭇대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주뼛거리다 못해 심지어는 한의 볼 근처가 붉어졌다.
“형님, 왜 이러시는…. 설마 저를 좋아하세요? 죄송하지만 저는 여자가 좋은데.”
기함한 상수가 제 가슴팍에 팔을 교차해 엑스 자를 그렸다. 새침한 표정을 연기하는 과장된 태도에 한은 허탈하게 웃었다. 하, 숨을 토하고 한 발자국 가까이 섰다. 좁혀진 거리에 이번에는 진짜 긴장한 상수의 눈이 끔벅끔벅 느리게 움직였다.
“너도 그, …그거 해 봤냐?”
“…네?”
“그, 그거.”
“……그거라 하심은.”
천천히 움직이던 눈꺼풀이 급속도로 빨라졌다. 깜빡인다기보다는 파들거린다고 표현해야 맞을 움직임으로, 상수의 짧은 속눈썹이 흔들거렸다.
“형, 진짜 저에게 흑심이….”
“아, 그거 말고. 그… 몽, 몽….”
상수의 눈꺼풀만큼이나 이번에는 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괜히 시선을 피하며 입가를 가리고 큼큼 헛기침을 했다.
“몽?”
“몽……저.”
“몽저요?”
끝을 어물거리자 상수는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까이 들이댔다.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에 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래도 괜한 이야기를 꺼낸 듯했다. 됐다, 가자, 낙심한 투로 건네려는 때.
“몽저. 아! 몽정이요? 아아!”
상수의 해맑은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쯤 한은 차라리 요금제 폭탄을 선택할 것을 후회해야만 했다.
“상수야, 입 좀 제발.”
“앗, 죄송함다.”
제 가슴팍을 수호하던 팔이 이번에는 조금 더 올라왔다. 두 손을 겹쳐 꾹 막아 놓은 입술 위로 보이는 광대가 봉긋했다. 기다란 눈도 한껏 접혀 있는 걸로 보아 상수는 무척 즐거운 듯했다.
“웃긴 질문이었어?”
강한은 한숨처럼 물으며 마저 걸었다. 그나마 급식실 줄 앞에서 몽정을 외치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는 위로를 심심치 않게 하면서.
“아뇨, 그게 아니라. 좀 좋아서요.”
“뭐가. 말이 존나 이상하게 들린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요. 저 형이랑 친해지고 싶었거든요.”
쓸데없이 영화도 보고 떡볶이도 먹고 가끔 매점도 함께 가고 이렇게 점심마다 급식도 같이 먹는데, 어떻게 더?
강한은 딱 그런 얼굴로 상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배시시 웃은 상수가 조금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급식실이 코앞에 오고서야 그는 멋쩍게 중얼거렸다.
“그냥, 왜 속 얘기 좀 털어놓고 그래야 더 진짜 친구 같잖아요? 형이 뭔가 그런 얘기 저한테 하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가지고….”
식판을 든 행색과 맞지 않게 상수는 짐짓 수줍게 중얼거렸다.
“존나 이상하게 들릴 건 알지만, 그런 거 있잖아요. 형 그냥 보면 사람들 막 개 멋있다 하고 차갑다 무섭다 그래! 근데, 막, 우리랑 있을 때는 형이 편한 거예요. 인간적인 얘기 다 해 주고. 언젠가는 형의 비밀을 막 저만 알고. 크으, 막! 아, 나 강한 형이랑 친해. 픽, 이런 거! 뭔지 알죠.”
“아이고, 학생. 가만히 좀 있어! 반찬 다 흘리겠네.”
“죄송함다.”
손짓 발짓 섞어 가며 이어진 1인극에 강한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상수가 묘사한 감정은 지나치게 익숙한 면이 있었다.
그 사람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특별한 군에 속했으면 좋겠고, 그와 친해지고 싶고, 가까워지고 싶고, 그의 이면을 아는 정도면 딱 좋았던 마음. 꼭 그만큼만 애틋하고 그 정도로만 떨리던 감정.
“뭐, 제가 형을 약간 존경하는 거죠. 존경… 좀 나이 든 사람한테 쓰는 말인가. 동경? 이건 좀 오버인가요?”
우헤헤, 만화처럼 소리 내어 웃은 상수가 먼저 자리를 잡을 때까지도 강한은 멀뚱히 서 있었다. 서늘한 인상 탓에 감자조림을 받다 말고 굳은 그를 아무도 질책하지 않았으므로, 꽤 오랜 시간을.
상수가 손을 흔들며 크게 재촉하고서야 강한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전히 수줍게 웃는 상수의 ‘감동받으셨구나?’ 하는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식사를 했다. 눈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점심이었다.
한동안 언제는 형이 이래서 내심 기뻤고 또 어떤 날에는 무서웠다며 제 속 이야기를 털어놓던 상수는 잠시 조용해졌다. 식판에 고개를 처박고 섭취에만 집중하던 그가 말문을 연 것은 급식실을 다시 나오는 길부터였다.
“암튼, 그래서 형님. 그거 하셨다고요?”
“꼭 해서 물어보는 건 아닌데.”
어물쩍 대답하면서도 한은 제 대답이 우습다는 것을 알았다.
“예, 예, 그러시겠죠.”
상수 또한 같은 생각인지 비식비식 웃는 꼴이 제법 얄미웠다.
강한은 말을 줄이고 인상을 찌푸린 채 걸었다. 대화 주제 탓에 걸음은 자연스레 교실이 아닌 운동장으로 향했다. 얼핏 시계를 확인해 보니 점심시간은 이십 분이 남아 있었고, 기왕이면 한은 이 궁금증을 유일이 없을 때 해결하고 싶었다.
“아무튼 너는 해 봤냐고.”
“아, 당연하죠.”
“…좋아하던 애였어?”
그렇게 물으며 한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일생일대의 질문이라는 듯 진지한 얼굴에 상수가 깔깔 웃었다. 그러고는 한이 태권도부에 있던 시절에 자주 앉던 스탠딩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뇨. 무슨…, TV 광고에서 봤던 사람인데 진짜 얼굴만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내용도 대박 이상했음. 갑자기 막 날아다니고요.”
“아, 그래?”
엉덩이가 뜨거워 들썩거리는 상수 옆에 앉을 때까지만 해도 강한은 무척 머쓱했다. 저보다 어린, 그것도 철딱서니 없어 보이는 상수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민망했다. 하지만 의외로 상수는 꽤 괜찮은 상담가였다.
“네, 그거 별거 아니래요. 그냥 정자는 생겼는데 해소할 데가 없으니까 나오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병 걸린 줄 알고 검색 개 많이 해 봤거든요.”
“아아…….”
“혼자서 좀 해 주면 돼요.”
주변을 두리번대던 상수가 목소리를 슬쩍 낮추며 속삭였다.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강한은 눈썹을 꿈틀 들어 올렸지만, 지금은 불쾌보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그러니까 확대 해석 할 필요 없다 이거네.”
“그럼요. 누구한테 말하기 이상한 몽정도 개 많다니까요?”
“…상수 너 되게 자주 하나 보다.”
“아이, 아니거든요!”
제법 여유롭게 조언하던 상수 얼굴이 대번에 익었다. 빨갛게 달아올라 꽤액 소리를 내지르는 모습에 이제야 한에게서도 웃음이 터졌다. 하하, 소리 내어 웃은 한은 조금 속 편한 얼굴로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이 더운 날에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축구하는 애들이 득시글거린다. 멀리서도 땀 냄새가 나는 듯했고, 탈 것처럼 내리쬐는 햇볕이 뜨거웠다.
그럼에도 한은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마음에 기분 나쁘게 들러붙어 있던 뭉근한 점액질을 모두 떼어 낸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강한은 또래 애들이 미치던 음란물에 관심이 없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손수 찾아 본 적 없었고, 가끔 짓궂은 놈들이 장난을 칠 때면 불편하기만 했다. 모르는 타인끼리 살을 섞고 있는 영상은 그에게 징그럽거나 역겨울 뿐 흥분을 주지 않았다.
게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에게는 태권도가 있었다. 합숙 훈련이나 기숙사행이 무척 빈번했으며, 집은 어머니와 단둘이 쓰는 공간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다고 해도 어쩐지 불순하게 느껴져 한 번도 그런 욕망을 가져 본 바 없었다.
그러니까 이 난데없는 몽정은 다 운동을 그만둔 이후부터 쌓여 왔던 신체적 반응일 뿐이다. 한유일의 고백 때문이 아니었다. 그와 닿았던 살 때문도, 그를 쉽게 좋아해 버리고 싶은 안이함도 아니다.
애초에 섞일 수도 없지 않은가. 비슷한 상처를 안고 있더라도, 유일과 저는 물과 기름이었다. 타고난 성격부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까지도. 무척이나 달라 스쳐 지나가게 될 그런 사이였다.
“상수야. 근데 너 한유일이랑은 어쩌다 친해졌냐?”
강한은 서서히 눈을 떴다. 햇볕에 달구어진 눈꺼풀이 뜨끈하게 눈알을 달구어, 왜인지 눈이 촉촉하게 느껴졌다.
“저요? 제가 또 마성의 매력으로……. 앗, 죄송함다.”
“이러니까 신기해서. 한유일은 깝죽거리는 애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아, 형님. 너무하신 거 아녜요?”
상수가 셔츠를 펄럭거리며 더위를 식히다 말고 발끈했다. 그에 한은 비식 웃으며 농담인 척했지만 생각을 고쳐먹지는 않았다.
한유일은 이 학교 학생 대부분이 알고 있는 유명인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대인 관계 자체는 좁았다. 같은 반이었던 놈들이 모두 그의 생일을 기억하고 챙겨 주려 혈안이어도 마찬가지다. 한이 보기에 그가 진정으로 친구라고 말할 만한 놈은 신상수가 유일했다. 나머지는 그의 타고난 처세술이 만들어 준 가짜 인연에 불과했으므로.
“저는 루나 워낙 유명하니까 원래 알고 있었는데, 다른 반이었거든요. 근데 우연히 한번 도와준 적 있어서 말 텄고….”
“그래?”
“네, 그때는 루나 좀 다른 사람 같았어요. 한동안, 성격이 지금이랑 달라 보였다고 해야 하나? 좀…… 까칠했어요.”
태어났을 때부터 ‘제 이름이 무엇인가요?’ 하고 빙긋 웃었을 것 같은 유일에게 까칠한 시기가 있었다니. 호기심이 동해 한은 제법 크게 되물었다.
“언제?”
“나 1학년 때.”
답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왔다. 어느덧 성큼 뒤까지 와 있던 유일이 평소처럼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햇빛이 눈부신지 이마 근처로 올라온 반듯한 손이 차양을 만들었다. 흡사 광고 속 한 장면 같은 움직임을 한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는 인생이 좀 힘들었지.”
씨익 웃으며 유일은 손을 내렸다. 성큼, 커다란 돌계단을 내려온 그는 앉지 않고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운동장 어느 한구석. 마치 아는 사람을 보는 듯 몽롱한 시선을 따라 강한 역시 눈동자를 옮겼다.
“한이 너도 그때랑 지금, 달라졌어.”
“…뭐? 언제. 나 1학년 때? 그건 당연하지.”
수수께끼 같은 말에 인상을 찌푸리자 유일은 오히려 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하하, 시원하게 웃은 그가 고개를 슬쩍 틀어 보였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앉은 강한을 훑어보던 유일이 중얼거렸다.
“그때보다 조금 말랐나?”
예전부터 자신을 알았다는 듯이.
그제야 한의 뇌리 속으로 어떠한 문장이 섬광처럼 스쳤다.
-내가 너 좋아해, 한아. 오래전부터.
이렇게 사람 많은 운동장에서 회상하기에는 아주 적합하지 않은 장면이다. 저절로 목구멍이 조이고, 흉곽이 뻐근하게 부풀었다. 이상하게 보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목구비가 얼어붙어 표정을 지어 낼 수 없었다. 간신히 만들어 냈던 평정이 쉽사리 깨지려고 했다.
“형, 화나셨어요…? 표정이 너무 살벌하신데.”
잠자코 지켜보던 상수가 전혀 다른 곳을 짚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며 우뚝 서 있는 한유일과 꼼짝도 하지 않는 강한 사이에서 엉거주춤하는 모양새가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다.
덕분에 허허실실 웃음이 터져, 강한은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아무래도 한유일은 상수의 눈치 없음을 좋아하는 것 같다.
“됐다. 야, 가자. 덥다.”
후욱, 뜨끈한 숨을 뱉어 내며 한이 먼저 일어섰다. 하지만 걸음은 요란스럽게 엉덩이를 털어 낸 상수가 먼저였고 그 탓에 강한은 또 낮게 웃었다. 아직도 운동장에 시선이 뺏긴 채 조용하던 유일이 가장 나중이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중앙 현관의 낮은 턱까지 올라가고서야 따라붙은 유일에게서는 드물게 볕 냄새가 났다. 따스하게 익은 살결 향을 맡으니 또 기분이 묘해, 강한은 한 발자국 떨어져 걸었다.
“그냥. 겨울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
한유일은 대수롭지 않은 말을 의미심장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싱긋 웃는 얼굴에 왠지 모를 속뜻이 있을 것만 같아 한은 주춤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유일과 관련된 궁금증은 오래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생각을 이어 갈수록 마음은 더더욱 복잡하게 꼬여만 가니까.
“더위 많이 타나 보네.”
부러 간단히 결론을 내린 한은 계단을 두어 개씩 겅중 올랐다. 그렇게 해도 유일의 살냄새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지만.
***
상수는 괜찮은 상담가였지만 좋은 조언가는 되지 못했다. 말의 효력이 단 하루에 그쳤으므로.
그의 말대로 몽정은 대체로 황당무계했다. 야릇함과 연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장면의 연속이었으며 어떤 길로 가도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늘 한유일이었다. 그 꿈에서 유일하게 말이 되는, 현실과 별반 차이 없는 비현실적 얼굴이 늘 대미를 장식했다. 어떤 스킨십이나 노출조차 없이. 기괴할 만큼 담백한 몽정이었다.
그럼에도 한은 매번 속옷을 적셨다. 꿈에서 한유일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숨을 힉 들이켜며 곧장 암전이었다. 빛을 마주했을 때 그에게 남는 것은 축축한 속옷뿐이었다.
두 번까지는 상수의 조언을 되새길 수 있었다. 타인에게 말하지 못할 만큼 희한하고 이상한 몽정은 원래 숱하다니까. 괜찮다고 세뇌하면서도 은근히 불안해서, 한은 생전 본 적도 없는 음란물을 다운받기도 했다. 그쪽으로는 영 문외한인 제 뇌에 새로운 정보라도 넣어 주면 꿈이 혹시 바뀔까 해서.
그러나 유일이 피날레를 장식하는 몽정 횟수가 네 번을 넘어가자, 이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조언했던 상수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아, 체육 수업한대요. 우우, 영화나 보여 주시지.”
남의 속도 모르는 상수는 입술을 죽 내밀며 귀여운 척을 했다. 한은 이걸 핑계 삼아 주둥이라도 잡고 흔들며 복수해 볼까 하다가 금방 그만두었다. 앞문으로 유일이 들어서고 있었다.
평소처럼 느긋하게 등장한 한유일이 칠판 위에 ‘체육관’이라는 글자를 적자마자 사방에서 불평이 터졌다. 상수와 비슷한 투로 우는소리를 내는 애들에게 유일은 웃어 보였다. 꿈속에서처럼, 눈 아래 살이 도톰하게 오를 만큼 예쁘게.
일순 목구멍에서 쌍욕이 끓었다. 부글부글, 뜨거운 명치를 문지르며 한은 부리나케 체육복을 챙겼다.
“야, 나 화장실 들렀다 갈 테니까 알아서 와라.”
통보를 남긴 커다란 몸이 얼른 뒷문을 빠져나갔다. 유일이 ‘한아, 어디 가?’ 하고 묻기도 전이었다.
도망이라는 올림픽 종목이 있다면, 강한은 금메달감이었다.
단번에 답이 나오지 않는 벽에 부딪히면 습관적으로 뒤돌아섰다. 해결되지 않을 문제 앞에서 무진 머리를 쓰며 수를 찾고, 억지로 돌파구를 뚫어 내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회피가 편한 답이었다. 아무리 큰 문제라도 최대한 제 눈에 보이지 않도록 오랫동안 잘 숨겨 두다 보면 언제인가는 무뎌지는 날이 왔다.
아버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사무칠 때도, 강제로 고된 일상을 영위해야 하는 어머니에게 도움 하나 되지 못한다고 느낄 때도, 돌연 혼자 남은 집이 무척 커다랗게 느껴질 때에도 한은 도피를 택했다. 잠을 자거나 운동을 했고 생각을 끊어 놓은 채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차피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벽에는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묵히고 묵히다가, 너무 극적이지 않은 때가 오면 잘라 내는 것이다. 치열하게 싸우고 맨몸을 부딪혀 가는 일은 한에게 태권도 경기만으로 족했다. 그는 경기를 이기는 법은 잘 알았지만, 현실을 이기는 법은 배운 적 없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안다고, 경기도 똑같거든. 이겨 본 놈이 이기는 법을 귀신같이 알아.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한 번도 제힘으로 현실을 이겨 본 적 없는 놈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너는 열 바퀴 더 돌고 와라, 체중 맞춰야지.”
체육관 안에서 기억 속 목소리와 같은 음성이 메아리를 치고 있었다. 묵직한 유리문을 쥐고 선 강한은 잠시 멈칫했다가, 한숨과 함께 체중을 실었다. 그나마 이번 벽은 이미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바 있었다.
즈으윽, 무거운 문을 따라 바닥 긁히는 소음이 울렸다. 이례적으로 가장 먼저 도착한 덕분에 용의자는 대번에 줄여졌고 훈련 중이던 태권도부 몇몇의 시선이 몰렸다. 감독의 복잡한 낯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은 멀리서도 다 읽히는 표정을 모르는 척 꾸벅 고개만 숙여 보였다.
“야, 인마, 발 더 올려!”
다행스럽게도 시선은 금세 흩어졌다. 그럼에도 한은 무슨 벌을 받는 학생처럼 벽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반 애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귓가로는 이미 회피한 바 있는 것들이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바닥을 미끄러지는 운동화 소리, 기합, 거친 숨, 물통 구겨 던지는 소음, 불호령과 서로를 향한 파이팅 구호. 평생 아주 익숙했던 것들이 지금은 무척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한아, 왜 혼자 갔어?”
모든 소리가 부옇게 번져 간다고 착각할 때쯤, 귓가가 화르르 달아올랐다.
“아, 씨, 깜짝이야.”
“혼자 안 심심했어?”
“내가 무슨 애냐. 상수는 어디 떼어 놓고 왔어.”
한이 멍하게 보고 있던 벽 앞을 차지하고 선 유일은 방긋 웃었다. 고르고 하얀 이가 시선을 빼앗을 만큼 활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알아서 오지 않을까. 걔가 무슨 애도 아니고.”
‘와, 존나 정 없는 새끼.’ 하고 뱉어 내려던 입술은 벙긋거리기만 했다. 한유일의 얼굴이 너무도 꿈과 비슷한 모양이라 말문이 막혔다.
“훈련 구경하려고 먼저 간 거야?”
말 없는 한에게 서운한 기색도 없이, 유일은 저 멀리서 훈련 중인 무리를 바라보았다. 한은 돌아보지 않고 그냥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저들끼리 달라붙은 목구멍을 틔우듯 간신히 말했다.
“뭐 좋은 기억이라고 구경까지 해.”
농담하듯 픽 웃어 보였으나, 뱉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급격히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강한은 즉시 후회를 집어삼켰고 만회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상수가 ‘아, 한루나! 치사하게 혼자 가냐!’ 하고 외침과 동시에 체육 선생 또한 들어오고 있었다.
정해진 열을 맞춰 자리를 이동하면서, 한은 자꾸만 유일을 힐긋거렸다. 마지막 나눈 대화를 고치고 싶어 안달이 났다. 맹세코 분위기를 망치려던 건 아니었는데. 강한은 아까보다 더 짙은 숨을 푹 내쉬며 초조하게 손톱 끝을 뜯었다.
체육 선생은 체력이 곧 국력이라는 말을 말버릇처럼 달고 사는 이였다. 그는 항상 입시 교육에서 밀려난 체육 교육의 처지를 비판하고, 하루 종일 의자에만 붙어 있으니 너희가 그 모양이라며 투덜대다가 야유를 받았다. 그래도 지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늘처럼 여름 방학을 일주일 남짓 앞둔 때조차도 굴하지 않고 체육관행을 명할 만큼.
“아, 쌤. 자유 시간 안 줘요?”
“그면 뭐 이론 수업 할까? 어?”
“아니요!”
삽시간에 불평 소리가 뚝 끊기며 우렁찬 답이 터져 나왔다. 심지어 선생이 배드민턴 채를 들고 오는 순간에는 환호가 터지기도 했다. 확실히 애들은 애들이라고, 강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꾸만 돌아가려는 고개를 푹 눌렀다. 고작 말 한마디를 수정하고 싶어 안달 내는 것은 과민한 반응이었다.
‘한유일 좀 그만 쳐다봐.’
스스로에게 욕처럼 짓씹는 때, 체육 선생이 채가 가득 담긴 상자를 내려놓았다.
“자, 앞뒤로 선 놈들끼리 짝지어서 해라.”
본능적으로 한유일을 찾게 되는 눈동자를 단속하려, 강한은 고집스럽게 바닥을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 안으로 주뼛대는 신발 코가 들어섰다. 그제야 슬쩍 고개를 들자, 범철이 보였다. 주춤주춤, 회색으로 변한 하얀 운동화가 뒷걸음질을 치다 앞으로 조금 다가오기를 반복했다.
“…그, 저……. 선생님이…….”
목소리까지 달달 떨며 범철은 긴장해 있었다.
두려움과 회피는 닿아 있는 법이다. 도서관 뒷길 음습한 그늘에서 나누었던 짧은 대화 이후, 범철은 그 명제를 증명하듯 행동했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우연히 스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죄, 죄송합….’ 같은 요상한 사과를 놓고 도망쳤다. 심지어는 한이 그의 주변에 서 있기만 해도, 범철은 눈에 보이게 발발 떨어 댔다. 과감하게 입을 놀리던 행실에 비하면 무척 우스운 꼴이다.
그럼에도 한은 어느 정도 동질감을 느꼈다. 두려움과 회피를 떼어 놓지 못하는, 비겁한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도 보였다. 어쭙잖은 동정심이 일었다.
“죄…, 그, 제가 짝 바꿀까요?”
눈을 맞추지도 못하고 힐긋거리며 묻는 모습에 한은 코로 긴 숨을 쉬었다.
“선생님이 이렇게 하라고 했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먼저 배드민턴 채를 가져왔다. 진동하는 손에 채를 쥐여 주고, 셔틀콕을 쥔 강한이 저 먼 구석으로 앞장섰다. 범철은 주뼛거리면서도 부지런히 뒤를 따랐다.
“지, 지지, 진짜 괜찮으세요? 저랑 짝하셔도…….”
“안 괜찮을 건 또 뭔데.”
네트도 없이 하얀 선만으로 구분된 구석. 자리를 잡고 서자마자 강한은 셔틀콕을 공중으로 휙 던져 올렸다. 피식 웃으며 툭 쳐 낸 셔틀콕이 높은 궤도를 그리며 안정적으로 비행했다.
“저, 저는, 형님이 저 싫어, 싫어하시는 줄 알았어서…요.”
탁- 타악- 탁. 허공을 왕복하는 셔틀콕 소리가 제법 명쾌했다. 범철의 더듬거리는 음성과는 정반대인 효과음을 즐기며, 한은 조금 더 강하게 채를 휘둘렀다.
“왜?”
모양새야 물음이었지만 ‘네 죄를 네가 알렷다!’ 하는 투였다. 흡사 공격하듯 딱 소리를 내며 넘어간 셔틀콕이 가까스로 범철의 채에 닿았다. 허둥지둥하는 몸짓에 비해 제법 세게 받아친 셔틀콕은 금세 한에게로 돌아왔다. 강한은 예정된 자백을 기다리는 형사의 표정으로 느긋하게 대응했다.
“제가, 그, 한유일, 싫어하니까…….”
그러나 다음 공격은 예상치 못한 곳을 찔렀다.
“제가 한유일, 싫어해서……. 저 시, 싫어하시잖아요.”
갑작스레 멈춰 선 커다란 몸 옆으로 셔틀콕이 낙하하고 말았다.
맥없이 점수를 내어 준 강한은 아주 천천히 셔틀콕을 주워 올렸다. 그러고는 곧장 허공으로 휙 던져 올려 거세게 후려쳤다. 맹렬한 소음에 깜짝 놀란 범철은 채를 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몸을 뒤틀었다. 그 조그마한 공을 피하려 한껏 움츠러든 그가 ‘으악!’ 비명을 질렀다.
“누가 한유일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이번에는 한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냉랭한 헛웃음을 담은 말에 범철이 어쩐지 또 사과를 하며 굽신거렸다.
“아아, 네, 마, 맞죠……. 형님, 그, 셔틀콕 새로 받아 올게요.”
바닥에 나동그라진 셔틀콕 귀퉁이가 꺾여 있었다. 마치 한유일처럼 하얗고 곧은 뼈대 끝 부분이.
“시발 진짜, 논다, 놀아.”
멋대로 뻗은 생각에 기가 막혀 자조적인 헛웃음이 터졌다. 커다란 손이 이마를 쓸고, 어찔하다는 듯 눈 위를 덮었다. 그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으로 돌아왔다.
“예? 그, 그, 그만하실래요?”
이미 반쯤 달려가고 있던 범철이 우뚝 멈춰 물었다. 제법 큰 물음에 또다시 몇몇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언제나 뚫어질 듯 시선을 던지는 한유일 역시 빠지지 않았다. 셔틀콕 따위에 비유하기에는 황송한 얼굴이었다.
벌어진 손 틈 사이의 그를 가만 바라보며 한은 허탈하게 웃었다. 요 근래, 저놈 하나를 두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과연 이 모든 사달을 알고도 한유일은 ‘좋아해.’ 같은 말을 또 할 수 있을지. 만약 정말 한다면 저는 무슨 반응을 하고 싶은 건지.
“저어… 형님, 그만할까요?”
다리를 떨며 기다리던 범철이 재차 물었다. 한은 한숨처럼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갖고 와.”
언제나 그랬듯, 묻어 놓고 갈 때까지 가 보는 수밖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 후로도 범철은 계속해서 새로운 셔틀콕을 받아 와야 했다. 감정 잔뜩 실린 스윙을 받아 내느라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으나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한이 치면 치는 대로 여기저기 달려가며 고군분투하던 범철이 다섯 번째 셔틀콕을 받아 왔을 때. 체육 선생이 경고하듯 고함을 질렀다.
“야, 누가 셔틀콕 가지고 자꾸 장난이냐?”
다리 꺾인 셔틀콕을 흔들어 보이는 그가 제법 신경질적이었기에, 강한은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 그래도 여전히 채를 흔드는 폼은 맹렬하고도 신속했다. 범철은 거의 기합을 받는 기분으로 이리저리 발을 놀렸다. 숨이 턱까지 차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상대가 무서워 쉬겠다는 말도 감히 꺼내지 못했다.
“흐억, 허, 형, 형님, 이제, 정리하라시는데요…….”
범철의 눈앞이 노랗게 변할 즈음 다행히 수업이 끝났다. 휘청대던 다리로 풀썩 주저앉은 그가 헉헉거리자, 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넝마가 된 셔틀콕을 줍고 선생에게 가는 길. 난데없는 화풀이에 녹초가 된 범철이 조금 불쌍하기도 해서 그의 배드민턴 채를 대신 반납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얼굴이 확 밝아진 범철은 체육관 입구까지 한을 졸졸 따랐다.
“저, 형님, 진짜 저 안 싫어하시는 거면은…. 담에, 함 얘기……. 그…. 담배… 하시죠?”
안달복달 따라오며 늘어놓는 말소리가 무척 작게 흔들렸다. 머릿속을 여전히 가득 채우고 있는 한유일에 대한 잡생각을 뚫기에는 너무도 나약한 음성이었다.
“한아, 가자.”
대신 그보다 훨씬 짧은 문장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주 쉽게 시선을 앗아 간 한유일이 먼저 유리문을 열었다. 뒤를 돌아보는 그의 하얀 얼굴은 잠시 범철을 향했다. 또 속없이 웃어 줄 듯해서 한은 걸음을 떼었다. 특별히 한유일을 아주 신경 써서는 아니었고, 그냥 자존심도 없이 웃어 주는 꼴을 보기는 싫어서였다.
그러나 이제 막 한 걸음을 옮기는 순간 유일은 시선을 돌렸다. 범철에게로 향했던 눈동자는 아주 차갑게 얼어 있었고, 그 어떤 친절도 담지 않았다. 허공을 칼로 베어 내듯 무심한 눈길이 휙 궤도를 바꿨다.
“어어…….”
한은 제가 그 냉담한 시선을 받은 것처럼 어물쩍 대답하며 체육관을 나섰다. 뒤따라 붙은 상수는 방금 펼쳐졌던 배드민턴 경기에 대해 영웅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수업 시작 전에 생떼 부리던 사람이 있었냐는 듯 체육관을 나서는 얼굴들은 대다수 붉게 익어 있었다. 쉽게 들뜬 그 분위기 사이로 강한과 한유일은 고요했다. 그저 묵묵하게 뙤약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걸을 뿐. 상수가 저만의 흥에 취해 있지 않았더라면 눈알 굴려 가며 눈치를 살폈을 분위기였다.
“아, 그래 가지고 내가 딱 점프를 해서!”
“범철이랑 재밌었어?”
상수가 늘어놓는 과장된 일화 보따리를 뚝 끊고 유일이 물었다. 난데없는 질문이다.
“어?”
“범철이랑…. 되게 열심히 하던데.”
“아, 맞아요. 형님!”
말허리가 잘려 놓고도 유감 하나 느끼지 않은 상수가 맞장구를 쳤다. 강한은 당황한 얼굴로 유일을 마주 보았다. 끝이 툭 내려가는 억양과 그늘진 표정이 시무룩해 보였다.
그 기색을 깨닫자 잘못한 것도 없이 말이 떠듬떠듬 입 안을 굴러다녔다.
“어? 뭐, 왜? 별로, 아닌데.”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내뱉은 말이 퍽 구차하게 들렸다. 애인의 추궁에 아무 변명이나 내뱉는 지질한 남자가 된 것처럼. 그 생각이 곱절로 황당해서 한은 뒷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선생님이 하라는데 뭐 어떡하냐.”
“맞아. 한유일 뭐야, 질투해?”
제법 잘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상수가 기름을 부었다. 잘 꺼져 가던 불씨가 화르르 타오르며 눈앞을 물들였다.
“응.”
유일의 불꽃은 적색보다는 차가운 한색에 가까웠다. 간결하고 깔끔한 인정 속에 숨겨진 푸른 불씨가 살벌하다.
강한은 입을 꾹 다물고 다시 걸었다. 오늘따라 운동장이 무척 길고 크게 느껴졌다.
“어우, 뭐야. 하긴! 저도 형님이 범철이랑 친하게 지내시면 그건 좀 질투할 듯.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슬이 퍼런 눈동자를 홀로 읽지 못한 상수가 한술 더 떴다. 해맑기 짝이 없는 대답에 강한은 일전에 했던 생각을 완전히 굳혔다. 역시 한유일은 상수의 더럽게 눈치 없는 점을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친하기는 뭘 또. 배드민턴 좀 한 걸로.”
“그래도 상수 말이 맞아.”
웬일로 상수를 두둔하는 유일의 입술은 조금 부루퉁해 보였다. 슬며시 확인한 낯이 그야말로 침울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 없어, 강한은 사고가 멎고 말았다. 대놓고 강짜 놓는 한유일이 무척 생소했다.
질투라니. 이런 데에는 요령은커녕 면역조차 없다. 말을 잊은 사람처럼 입술을 더듬더듬, 애꿎은 뒤통수만 벅벅 문대던 한이 슬쩍 물었다.
“…야, 매점 갈래?”
“형, 이제 수업 시작할 텐데요.”
몇 걸음 남지 않은 학교 건물 안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피아노 음을 단조롭게 흉내 낸 싸구려 효과음에 상수는 발을 동동 굴렀다. 당장 계단을 뛰어 올라가려는 듯한 그의 옆에서 유일은 침착했다.
“매점?”
말간 얼굴이 어쩐지 조금 웃는 듯 보였다.
“어. 내가 사 줄 테니까.”
입술 근처를 머쓱하니 문지르며 한이 말했다. 한동안 고요한 시선 둘이 허공에 맞부딪힌다.
그 사이에서 홀로 채근하던 상수는 결국 먼저 계단을 밟았다. 흡사 날아가는 듯한 속도로 뛰며 ‘다음 시간 담임이라고!’ 외치는 그를 유일은 따라가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느긋한 걸음으로 되돌아왔을 뿐.
“응, 좋아.”
고작 매점 하나에 마음이 풀린 유일이 웃었다. 꿈에서 자주 보는 그 얼굴로, 여름 햇살을 받고도 청명하게.
강한은 그 얼굴을 힐긋 훔쳐만 보고 서둘러 걸었다. 매점을 향해 빠르게 걷는 내내 속에서는 온갖 합리화가 뭉쳤다. 친구를 싫어하는 놈과 잘 지내는 꼴을 굳이 보여 준 후에는 누구나 죄책감을 느낄 법했다.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유일의 고백을 듣지 못했더라도, 근래 이상한 꿈을 자꾸 꾸지 않았더라도. 그러니까 수업 시간까지 늦어 가며 매점에 가는 길도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한아, 같이 가.”
속에서 훅훅 올라오는 열기에 저절로 걸음이 빨라진 듯했다. 문득 손목을 감싸 오는 체온에 한은 불에 덴 듯 놀라 멈춰 섰다.
“어차피 늦었잖아, 천천히 가자.”
하얗고 곧은 손가락이 손목뼈를 감싸 쥐며 부드럽게 내려갔다.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은 유일은 또 꿈처럼 웃었다. 시원스럽게 벌어지는 입매와 빛을 매단 눈꼬리가 시선을 앗아 갔다.
숨조차 멈춘 채, 한은 눈을 느리게 끔벅거렸다. 온몸에 열이 고인 기분이었다.
“아, 존나, 더워서……. 아이스크림 먹어야겠다.”
저도 모르게 홱, 손목을 빼낸 한은 그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애석하게도 덜렁거리는 손끝에서부터 붙은 화염은 바람을 타고 더욱 커져만 갔다. 유일을 닮은 파란 불꽃이 전신을 삼키려 들었다.
“응, 아쉽다.”
“뭐가. 다른 거 먹고 싶으면 그거 먹어.”
“아니, 그냥 쭈쭈바 먹기에는 시간 모자라니까….”
“음?”
“하드 먹어야겠네 싶어서.”
뭐야, 쭈쭈바 좋아하나. 의외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조금은 우스웠다. ‘쭈쭈바’라는 발음 자체가 한유일과 몹시 어울리지 않았다. 반찬 투정 하는 도련님도 아니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비식 웃는 순간, 머릿속으로 ‘귀여워.’ 하는 생각이 지났다.
열기가 삽시간에 눈알까지 삼켜 냈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한은 조금 더 빠르게 걸었다. 푸른 화마에 휩싸인 몸이 더위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오늘따라 햇빛이 무척 강한 데다가 방금 체육 수업을 마쳤으니까. 그러니까 사지에 맥박이 뛰는 듯 열렬한 이 감각은 모두 더위 탓이었다.
“그러면 뭐 다른 거 먹지?”
지어낸 무심으로 말하며 한은 매점 안에 들어섰다. 평소와 다르게 텅 빈 매점은 창고 특유의 서늘함을 간직하고 있어 조금이나마 열기를 식힐 수 있었다.
강한은 과자와 빵이 가득 담긴 진열장을 가리켰다. 그러나 유일은 얌전히 웃으며 소다 맛 아이스크림을 두 개 들고 왔다.
“괜찮아.”
아쉽다고 하더니 변덕은. 한유일의 불평은 때때로 속을 알기가 어렵다.
매대에 잠자코 놓인 하드 아이스크림 두 개를 보며 한은 ‘이상한 놈이야, 하여튼.’ 중얼거렸고, 계산을 마친 즉시 하나를 물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모범생을 담임 선생님 수업에 늦게 만든 탓에 마음이 급했다.
“야, 너도 빨리 먹어.”
입술로 하드를 물어 놓은 채 웅얼웅얼 말했다. 하지만 금방 포장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돌아본 유일은 여전히 가만히 선 채였다.
“시간 없다고.”
여전히 발음이 다 뭉개진 채로 한은 인상을 썼다. 쓰읍, 입 안에 고인 단 침을 삼키며 얼른 다가갔다. 얌전하게 서 있는 유일의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뺏고 신속하게 포장을 벗겼다. 연한 하늘색 아이스크림의 끄트머리를 그의 입술 근처로 대고 흔들자 유일은 입맛을 다셨다.
“빨리 받아라.”
한 손에는 포장지, 한 손에는 유일의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탓에 손이 없었다. 그런 와중 입술 새로 물고 있는 아이스크림이 시시각각 녹는 바람에 강한은 마음이 급했다. ‘쁠르 븓으르.’에 가까운 발음으로 경고하고서야 유일은 나무 막대기를 잡았다.
“쓰으읍, 아, 끈적거려.”
입 안에 잔뜩 고인 소다 맛 액체를 삼키고 잡아 낸 막대가 축축했다. 한은 인상을 쓰며, 아이스크림 끝으로 다시 뚝뚝 흘러내리려는 액체를 핥아 올렸다. 조금만 늦었다면 손을 타고 주룩 흘러 버렸을지 몰랐다.
“하드도 괜찮네.”
가만 지켜보고 있던 유일은 고요한 웃음을 지었다. 눈을 살포시 휘며 말한 그는 모순적이게도 이제 막 첫입을 물고 있었다.
“아직 먹지도 않고서는.”
아무튼 희한한 놈이라며 웃은 강한은 두어 걸음 만에 아이스크림을 해치웠다. 크게 베어 물어 입 안에 가득 쌓인 냉기를 녹이자 후끈거리던 열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나 오히려 유일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상기되어 있었다.
“너 더워?”
“응, 나도 존나 더워.”
유일의 상스런 투는 투명한 얼굴을 불그스름 물들인 홍조만큼이나 생경했다. 평범한 고등학생에게는 표준어나 다름이 없는 말조차도 그가 뱉어 내는 순간에는 아주 대단한 쌍욕처럼 충격적이다.
“참 나…….”
허탈하게 웃으며 강한은 조금쯤 그와 가까워진 기분을 느꼈다.
“근데 너 의외다.”
이상하게 간지러운 가슴팍 근처를 긁어 대며 한이 웃었다.
“범철이가 별 지랄을 다 해도 상대 안 하길래 신경 안 쓰는 줄 알았는데.”
“음…….”
반쯤 남은 아이스크림을 먹느라 유일은 말이 없었다. 무슨 대단한 선물을 받은 양, 두 손으로 쥔 아이스크림을 오물오물 삼키는 입술이 붉었다. 그 순종적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한은 괜히 열이 뻗쳤다.
“그때 그 담배도 그 새끼 도와주려고 산 거였다며? 등신. 대놓고 싫어하는데 너는 자존심도 없냐. 착한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알았지.”
해사하게 웃은 유일은 마지막 한 입을 꿀떡 삼키고 웃었다. 나무 막대기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들고서 먼저 계단을 밟았다.
“그렇게 위해 줘도 저런 새끼들은 똑같아. 친구는 무슨, 나중에 헛소리나 안 하고 다니면 다행일 놈인데. 너는 뭐 그렇게 다 도와주고 숨기고 그러냐? 혼자 오해만 받게.”
그 곧은 몸을 따라 올라가며 한은 어쩐지 푸념 비슷한 말을 했다. 말을 잇다 보니 감정이 멋대로 뒤섞인 탓이다.
한탄을 토하듯 투덜거리던 한은 층계 하나를 모두 오르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괜한 소리를 한 듯했다.
“한이도 그런 친구들 많았나 봐.”
“없지는 않았지.”
“응. 알 것 같아.”
역시 듣기 싫은 말이었는지 유일은 대화 주제를 바꿨다. 아주 자연스럽게 키를 돌리는 그가 능숙해 보여, 한은 미간을 문질렀다. 겨우 한 살 더 먹은 마당에 잔소리나 늘어놓는 꼰대가 된 것 같았다.
“근데 나 착한 사람은 아닌데.”
하지만 다시금 대화의 흐름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은 유일이었다. 계단 끝, 힘든 기색도 없이 다 올라선 유일이 뒤를 돌았다. 층계 중간에서 떨어지는 빛을 받아 희디흰 얼굴로 멋쩍게 웃었다.
“알고 그런 거야. 내가 도와주면, 나를 더 싫어할 거 알았어. 다 알아서 그랬어.”
“…엉?”
“한이 말대로 범철이 같은 애들은 말이야. 별로 손쓸 필요도 없어. 자기 무덤은 알아서 파니까.”
무척 부끄러운 말을 하는 것처럼 수줍게 웃는 그의 모습은 언밸런스 그 자체였다. 귀여운 동화 속 주인공처럼, 조심스러운 미소를 지은 유일이 고개를 슬쩍 틀었다.
“사실은 신경 많이 쓰여.”
“…범철이?”
“응. 범철이가 한이랑 친해지는 거 싫어.”
그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만연했지만, 눈 속에는 여전히 푸른 불꽃이 있었다. 운동장에서보다 조금 더 짙고 분명한 열기가 불티를 날렸다.
“범철이랑 안 놀면 안 될까?”
열아홉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지나치게 순수했고 아이처럼 솔직했다. 거부감이 일어나기 좋은 상황이었으나 그럼에도 강한은 자신에게 거부할 여력이 없음을 느꼈다.
‘왜…… 마음에 들지?’
적잖이 당황하며 한은 헛기침을 했다. 무척 당황스러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시간을 끌며 몇 번씩 헛숨을 내뱉어 보아도. 강한은 지금 이 순간 그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범철에게서부터 시작되었을 그 더러운 말들을 끝까지 전하지 않는 신중함이. 꾸미지 않는 직구가. 꿇려 본 적 없어 도리어 아무렇지 않게 부탁할 수 있는 뻔뻔함이. 투명한 눈동자와 제법 애교를 담은 저 얼굴이. 정도 이상으로 마음에 들어 견딜 도리가 없었다.
재차 간지러운 가슴팍 근처를 문지르며, 한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러지 뭐.”
그 네 글자를 뱉는 순간 어떤 예감이 들었다. 이토록 쉽게 유일의 부탁을 수락하고 마는 일이 마지막은 아닐 것 같다는, 무척 불길하고도 반면 기대되는 그런 예감이.
“그럼 넌 나한테 뭐 해 줄 건데?”
주변에 흐르는 공기가 너무 의미심장해져, 강한은 농담처럼 물었다. 딱히 답을 원해서는 아니었고 교실까지 남은 복도를 조금이나마 자연스럽게 걷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질문을 받은 유일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아주 반가운 것을 마주친 사람처럼 얼굴을 밝혔다.
“나는 뭐든지.”
“뭐…?”
“한이가 원하면 뭐든지 해 줄게.”
그는 아이스크림을 선물 받았을 때보다 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얼음장도 사르르 녹일 듯한 미소였다.
‘한유일은 지금 저 말이 그 어떤 말보다도 더 고백 같다는 사실을 알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한에게는 멀미가 찾아왔다. 천지가 뒤집히듯 시야가 울렁거리고 중심이 흔들렸다. 살면서 처음 만나 보는 듯한 어떤 감정의 습격이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민우를 마음에 담았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는 마냥 간질거리고 따스한 감정이 아니었다. 하늘을 둥둥 떠오르게 하는 포근함도 아니었고 사람들 말처럼 달콤한 맛도 나지 않았다. 마치 공격을 받는 것 같았다. 가만히 선 몸의 세포가 하나하나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이게 무어냐고 아우성을 쳐 대는 뇌 속이 따끔거렸고 입 안은 차라리 알싸했다.
“한아, 괜찮아?”
생전 처음 마주한 감정의 격통으로, 한은 우뚝 멈추어 서 있었다. 그의 앞에 선 유일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큰 몸뚱이를 둘러메고 뛰어나갈 듯이 용감해 보이기도 했다. 그 얼굴과 반쯤 열린 교실 문을 번갈아 바라보던 강한은 성큼 발을 내질렀다.
“어, 괜찮아.”
대련을 앞두었을 때처럼 이를 악다물었다. 그렇게 비장한 얼굴로, 한은 유일이 열어 놓은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처음 만나는 세상 속으로.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