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첫사랑?
강한의 첫사랑은 특이한 취미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첫사랑의 여자 친구에게 특이한 취미가 있었다.
“솔직히 주말마다 뭔 낭비인가 싶다. 플래시몹이라니. 왜 혜주는 평범한 취미가 없을까?”
넓지 않은 편의점 가판대 안. 담뱃진열대에 기대어 선 남자가 우는 시늉을 했다. 커다랗고 진한 눈이 질끈 감기고, 두툼한 입술이 아래로 내려갔다. 강한은 그를 보며 ‘플래시몹에 큰 관심이 없으면 왜 같이 해요?’ 하는 질문을 떠올렸다가 꾹 눌러 삼켰다. 묻기도 전에 답을 알 것 같아서였다.
강한의 첫사랑은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의 점장 아들이었다. 동시에 함께 일하거나 교대하는 직원이기도 했다. 그 덕에 운이 좋으면 하루 두 번도 마주칠 수 있었다.
물론 자주 마주치는 것이 항상 경사는 아니었다. 그는 이따금 여자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며 편의점을 급하게 나가기도 했고,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동기들과 우르르 몰려와 술을 사기도 했다.
가장 표정 관리를 하기 어려울 때는 콘돔을 사 갈 때였다. 한이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면 그는 삿대질과 함께 웃었다. 아, 우리 한이 참 귀엽네. 그렇게 낄낄 웃으면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기도 했다.
“그래도 플래시몹, 재밌어 보이던데요.”
한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대꾸하며 편의점 직원용 조끼를 입었다. 첫사랑이 벗어 건네준 그대로 입었기에 ‘조민우’라는 명찰이 달린 채였다. 알면서도 바꾸지 않고 두었다.
“재밌어 보이면 한이 너도 갈래? 응? 안 그래도 그것도 운영진이 있거든. 근데 조만간 공석 하나 생긴다고, 혜주가 나더러 같이하자는 거야. 나 그렇게까지 발 담그긴 싫거든.”
시재를 맞춰 보려 지폐를 세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냥 같이 가자는 것도 아니고 운영진 자리를 대신하게 할 생각이라면……. 적어도 몇 번은 그와 사석에서 만날 수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재밌어 보인다는 건 그저 말뿐이었다. 플래시몹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한 소리인데 난감했다.
“솔직히 플래시몹 카페 운영자라니. 그럴 시간이 어디 있냐? 과제하고 시험 보고 자소서 쓰기도 바쁜데.”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강한에게는 과제와 자소서라는 말이 퍽 어른의 용어처럼 보였다.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폐를 처음부터 다시 세면서 어렵게 대답하기도 했다.
“그…럴까요. 같이 가도 돼요?”
어중된 대답에도 민우는 환하게 웃었다. 한의 어깨를 퍽 치면서 ‘당연하지, 짜샤!’ 하고 소리쳤다. 그 바람에 쥐고 있던 지폐를 잠시 놓쳤지만, 강한도 덩달아 웃었다. 지어낸 웃음 밑으로 아까 삼킨 질문이 목울대에 탁 걸려 있었다.
‘플래시몹에 큰 관심 없으면 왜 같이 해요?’
내뱉지 못한 물음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꽂혔다. 민우 대신, 강한의 심장이 멋대로 답을 하려 했다.
“이번 주말에도 하거든? 대학로. 한 시에 하는데 운영진은 열한 시에 모여. 같이 밥 먹고, 열두 시부터 지령 전달.”
“네, 형.”
“시재 맞냐?”
“네.”
“그럼 나 간다?”
“예, 들어가세요.”
“새끼, 귀엽기는.”
요란한 심장을 억누르느라 답은 점점 짧아졌다. 그러나 무뚝뚝한 태도에도 민우는 항상 귀엽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한의 머리를 비비적거리고 비식비식 웃는 얼굴은 습관 같기도 했다. 여자 친구에게 하던 버릇이라면 차라리 나은데, 그의 한참 어린 동생에게 하던 버릇이라면 조금 싫을 것 같았다.
“아, 하지 마요.”
그래서 몸을 뒤로 무르면 민우는 더 짙게 웃었다. 유리문까지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팔을 휘저었다. ‘야, 진짜 간다!’ 목소리만큼 크게 휘적휘적 인사를 마친 그는 항상 문 하나를 활짝 열어 놓고 나갔다. 점장 말에 따르면 꼬리가 길어서 그랬다.
강한은 매일 그 긴 꼬리를 따라 나갔다. 딸랑딸랑, 바람에 흔들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멀어지는 그를 보았다. 유리문은 그가 빌라 몇 개를 지나 대형 마트를 끼고 돌아갈 쯤에야 닫혔다. 민우의 꼬리는 그만큼이나 길었다.
***
한의 첫사랑은 스물에 찾아왔다. 그 무렵 그는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지만, 나이는 스물이었다.
그래서인지 강한이 교실 문을 여는 순간에는 항상 정적이 찾아왔다. 아무리 조심하며 조용히 열어도 그랬다. 남고생이 득시글한 교실은 대부분 소란했는데, 그가 문을 여는 순간만큼은 늘 짧은 적막이 흘렀다. 모두가 유독 커다란 그를 쳐다보며 입을 닫았다가 스윽 고개를 돌렸다. 편의점에서 강한은 ‘귀여운 새끼’일 때가 많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아니었다.
이곳, 그러니까 정원고등학교 3학년 8반 안에서 한의 위치는 언제나 열외였다. 물론 타고난 체격과 어마어마한 소문 덕을 봐서인지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다. 다만 외면당했을 뿐. 아주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제외된 그는 보고도 모르는 척 고개 돌려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사실 한은 자신을 피하는 놈들이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과 저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조보다는 객관적인 사실에 가까웠고, 섞이려고 노력할 이유도 없었다. 학원에 가기 싫다고 우는소리를 하는 애들과 모든 메뉴를 편의점 시급으로 계산해 보는 자신이 대단히 잘 통할 리도 만무했으므로.
객관적으로 따져 보면 강한은 같은 반 친구들보다 한 살 많은, 즉 스물의 나이로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 앉아 있는 덩치 큰 형이었고, 수업 시간마다 잠만 자는데도 교사들마저 건들지 않는 모난 돌이었다. 섞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저뿐 아니라 피차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래서 한은 자리에 앉으면 곧장 엎드려 잤다. 편리하게도, 전교에 ‘태권도하다가 사고로 선수 못 하게 된 복학생’으로 소문이 난 바람에 아무도 그를 깨우지 않았다. 언제인가 새벽 타임 아르바이트를 대타 뛰어 준 날에는, 점심시간까지 건너뛰고 연장 6시간을 잔 적도 있었다.
“한아.”
그날, 딱 이 목소리가 깨워 주지 않았다면 종례를 마치고도 홀로 교실에 남아 자고 있었을지 모른다.
“한아, 강한.”
민우를 제외하면 그를 ‘한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강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느리게 고개 들었다.
책상 바로 앞에는 반장이 서 있었다. 작고 하얀 얼굴이 한을 내려다보며 맑게 웃었다. 이름 한유일보다 ‘반장’이나 ‘한루나’ 같은 별명으로 훨씬 많이 불리는 애였다.
강한은 부스스한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며 느리게 상황을 파악했다. 예쁘게 웃는 반장 뒤로, 범철과 몇몇이 모여 수군덕대는 모습이 보였다. 어떤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 반장의 안위를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누가 잡아먹나.
한은 우스운 생각을 하며 고개를 틀었다. 무슨 용건이냐는 삐딱한 눈빛에도 유일은 친절하게 눈을 휘었다. 듣기로는 데뷔를 준비한다더니, 확실히 가까이서 보면 눈빛부터가 달랐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흡사 눈이 시린 착각마저 들어 강한은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가정 통신문 가져왔어?”
“…무슨 통신문?”
“우리 체육복 바꾼대. 보호자 동의 받아 오라는 통신문 있었어.”
반장 한유일은 얼굴처럼 말투도 나긋했다. 보기 좋을 만큼만 도톰하게 오른 입술이 느리면서도 야무지게 움직이며 시선을 끌었다. 강한은 맹한 눈으로 그 애를 올려다보다가 가방을 뒤적였다. 구석에 구겨져 있던 회색 갱지를 책상에 박박 펴 놓고 펜을 누른다.
3학년, 8반, 2번, 강한. 비동의.
체육복을 바꾸면 또 사야 하니까 비동의였다. 순서대로 대충 휘갈겨 쓰고 종이를 내밀었다. 반장의 곱고 하얀 손가락이 갱지를 거둬 갔다. 그러고도 유일은 가만히 서 있었다. 한을 빤히 보는 눈이 지나치게 맑았다. 눈앞에서 마음대로 서명했다고 꼽을 주나 싶어 강한은 쏘아붙였다.
“보통 그냥 내가 사인해. 아빠는 안 계시고 엄마는 바빠서.”
꼭 이 말을 들어야만 속이 시원하겠느냐고 찌르듯이.
“응, 고마워.”
그러나 반장은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웃었다. 예쁜 눈을 접어 웃으며, 갱지를 아주 소중히 받아 들고 가볍게 뒤돌아섰다. 자리로 돌아가는 그에게서 꽃 가루라도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만.
한유일이 자리에 돌아가 앉자 숙덕대던 놈들은 흥분해 지껄였다. 특히 일전에 강한을 ‘깡패’라고 표현한 바 있는 우범철이 가장 격분해 있었다.
“야, 한루나. 너 저 형한테 자꾸 반말하지 말랬지, 붕신아. 그러다 한 대 맞아. 저 형 17 대 1로 싸우다가 징계 먹고 꿇은 거라니까? 태권도도 그거 때문에 못 하는 거래.”
범철이 워낙 흥분한 탓에 숙덕거리는 의미가 없었다. 잔뜩 낮춰 말하고는 있었지만 도리어 내용이 더 잘 들어오도록 강조하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한이가 형 소리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 같은 학년이면 친구라고.”
그에 대고 한유일은 쓸데없이 명랑하게 대답하며 숨길 의도조차 없어 보였다.
“미친놈아, 그걸 곧이곧대로. 아… 존나 순진한 새끼.”
강한은 못 들은 척 긴 숨을 내쉬며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존나 유치한 새끼들이라고 한 번 속으로 씹어 주면서.
“야, 그리고.”
그때 범철이 목소리를 훅 낮췄다. 확실히 소리가 작아졌건만 더 낮아진 음성은 쉽게 귀를 파고들었다.
“부모님 동의 받아 오라는 통신문은 걍 알아서 좀, 어? 대충 네 선에서 처리해. 사정 빤한데 매번, 새끼, 눈치 없이…….”
반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왜, 왜, 뭔데? 저 형 고아야?”
“미친아, 입! 입!”
그 틈으로 범철 옆에 있던 ‘그 외 몇몇’이 말을 얹었다. 고아냐고 수군거리는 말에 강한은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구태여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을 패서 유급하게 되었다는 오해도 그대로 둔 마당이다. 지금 와서 잘잘못 따지고 오해를 풀 사이도 아니었고, 잘 보일 이유도 없었다. 마음대로 말하라고 해.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한은 그냥 숨만 고르게 내쉬었다.
“너한테 한이가 말해 준 거야?”
“그랬겠냐? 내가 주워들었지.”
“본인한테 들은 소리 아니라는 거네?”
“…어엉.”
“그럼 아닐 수도 있고?”
반장은 목소리가 맑았다. 아니, 맑다고 생각했다. 얼굴이 너무 하얗고 곱게 생겨서인지 강한은 늘 그렇게 느꼈다.
그런데 눈을 감고 듣는 반장의 목소리는 조금 달랐다. 은근히 끝이 갈라지는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낮거나 거칠지도 않았다. 따지자면 분명 예쁜 축에 속하는 음성인데, 그런데…….
“범철아.”
그렇게 이름을 부를 때는 등골이 서늘했다. 강한은 감았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이름이 불린 것처럼, 눈을 깜빡이며 어두운 책상을 담았다. 싸구려 나무 냄새가 큼큼하게 올라왔다.
“나랑 매점 다녀올래?”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아니, 한이 엎드려 만든 조그마한 공간만 싸하게 가라앉았다. 정작 반장 주변을 둘러싼 애들은 조금 전과 똑같이 웅성거리며 놀고 있는데, 상황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강한만이 껄끄러운 기분을 느꼈다.
정말 이상하게도 반장의 목소리가 무섭게 들렸다. 맑고 예쁜,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던 중저음 음성이 한의 책상에만 메아리를 쳤다.
“엉? 지금?”
“응. 피자빵 사 줄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못 느낀 모양인지 범철은 단박에 튀어 올랐다. 드르륵, 의자 밀리는 요란한 소리 사이에 반장의 웃음소리가 섞였다. ‘곧 수업 시작이니까 얼른 다녀오자.’ 평소처럼 친절한 말 뒤에 문이 닫혔다. 남은 애들이 ‘야! 우리는!’ 하고 소리치며 따라가려다가 마는 듯했다. 그 소란스러운 틈에서 강한은 연달아 눈을 깜빡거렸다.
‘방금 뭔가 이상했는데…….’
기묘한 찜찜함이 자꾸만 들러붙어, 한은 수업이 시작하고도 한참을 잠들지 못했다.
***
강한이 한유일을 처음 본 것은 학기가 시작되기 전 겨울 한복판에서였다.
그날, 방학이 한창인 1월의 학교는 잠들어 있었다. 고요한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한은 해야 할 목록을 떠올렸다. 일단 새로 담임이 된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유급 과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새 교과서와 소집일 공지도 받고……. 그렇게 부지런히 생각하다가 문득 멈추어 섰다. 오래된 학교 건물 옆에 새로 지은 체육관 안에서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정원고등학교 태권도부는 나름대로 입지가 있었다.
소년 체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태권도 꿈나무들이 으레 후보에 넣는 학교 중 하나였으며, 전국 체전이 끝난 때에는 항상 교문 위에 현수막이 걸렸다. 물론 늘 일인자로 불릴 만큼 상을 휩쓰는 수준은 아니었다.
전 세계에 메달리스트 선수가 포진한 태권도는 국내에도 워낙 난다 긴다 하는 선수가 수두룩한 종목이었다. 전국 체전에 출전할 자격을 얻는 일만 해도 쉽지 않았고, 도 대회에서 상위권에 들 정도가 아니면 전국 체전은 참가할 수조차 없었다. 어느 누가 독식할 수 있는 체계는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멀대, 인마, 너는 타고난 메리트가 있는 거야! 엉? 열심히 하자고. 너 정도면 상비군은 그냥 가!
코치는 항상 강한을 ‘멀대’라고 불렀다. 184센티미터로 듣기에는 영 과장된 별명이었지만, 당시의 태권도부 틈에서 흔한 신장은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타고난 메리트이기는 했다.
확률적으로 따져 봐도 보통 체급에 뛰어난 선수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특히 한국 태권도 선수들 사이에서는 웰터급 이상으로만 가도 경쟁 상대가 훅 줄어들었다. 그게 바로 코치가 말하던 타고난 메리트였다.
‘이제는 있어도 써먹을 수 없는 이점이지만.’
강한은 긴 숨을 내쉬며 고개 돌렸다. 귓가에는 아직도 ‘어이! 어이!’ 외치는 기합 소리가 희미하게 남았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방학이라 그런지 교무실은 한산했다. 더운 히터 바람이 한의 얼굴 위로 한 꺼풀 내려앉았다. 강한은 목을 가다듬으며 파티션 위에 쓰인 글자를 천천히 읽어 갔다. 더듬더듬 걸음을 떼면서 미리 알아 놓은 담임의 이름을 계속 되뇌었다. 그러기를 한참, 교무실 가장 안쪽 자리에 가서야 담임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을 3학년 8반 담임이라고 소개한 강동구는 마르고 수척한 남자였다. 또한 인상만큼이나 성격도 무척 건조한 듯했다. 교과서를 책상에 척척 올려놓고 여러 가정 통신문을 겹쳐 놓은 그는 과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코를 긁적거리며 심드렁한 얼굴로 물을 뿐이었다.
“들고 갈 수 있지?”
유급하게 된 사정에 대해 대충 얼버무렸기에, 강한은 그가 조금 더 자세히 물어볼 것을 예상했다. 그런데 남자는 어엉, 응, 같은 말만 대충 뱉으며 하품까지 하더니 개학하고 보자는 인사를 남겼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둥의 훈계도 없었다. 한은 차라리 그 무관심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꾸벅,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나왔다. 묵직한 교과서가 아령 같았다.
중앙 현관을 나서면서는 또 힐긋 체육관을 보았다. 이제 아까 그 기합 소리는 사라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 거라면 이 기회에 체육관 짐도 챙겨 오고 싶다고 아득히 생각했지만, 한의 걸음은 반대로 향했다. 어차피 들고 갈 손이 없었다. 지금도 높게 쌓은 교과서 위에 턱을 얹고 가는 판국이었다. 가장 위에 얹은 가정 통신문이 그의 턱에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아.”
묵직한 무게 때문에 손을 고쳐 잡으려던 때였다. 바람이 휙 불며 턱을 할퀴었다. 아차 하는 사이 회색 갱지 서너 장이 운동장 위로 춤을 추었다.
한은 죽상으로 멀뚱히 서 있었다. 종이를 잡아야 하는데, 턱 밑에 나머지 통신문을 꾹 눌러 놓는 것이 전부였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눈동자만 도르르 굴렸다.
일단 주변에 잠시 놓아둘 장소라도 찾아보아야…….
“내가 주워 줄게.”
하는데.
화단에 놓을 틈이 되는가 고민하던 찰나였다. 옆으로 휙 스쳐 간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어?”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학교에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교복을 입은 학생이.
강한은 발만 주춤하다 말고 멈춰 섰다. 남은 종이나 더 날아가지 않게 턱을 아래로 꾹 내리누르며, 이리저리 달려 종이 줍는 애를 지켜보았다. 그 애의 교복 위에 걸친 코트 자락이 이따금 땅에 끌렸다.
“자. 세 장 맞아?”
흙 묻은 코트 자락은 금방 성큼성큼 다가왔다. 강한처럼 드문 키에, 훨씬 비현실적인 얼굴을 가진 애였다. 한은 순간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니라 촬영 중인가?’ 싶어,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하지만 몇 분 전과 마찬가지로 방학 중인 학교는 고요하기만 했다.
“아마……. 고마워.”
떨떠름하고 느린 말에도 그 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묘하게 웃으며 한의 턱을 톡톡 쳤다.
“어?”
너무 가깝기도 했지만, 초면에 턱을 만지는 행위가 이해될 리 없었다. 한이 인상을 찌푸리자 상대는 웃었다. 소리 내어 하하 맑게 웃더니 턱을 조금 치켜들었다. 따라 해 보라는 듯이.
“들어 달라고, 이거 다시 끼워야 하잖아.”
그렇게 말한 그가 허공에 종이 세 장을 펄럭거렸다. 붙은 흙먼지를 털어 내는 손이 고왔다. 강한은 머쓱하게 턱을 조금 들었다. 살짝 생긴 틈으로 얼른 종이를 끼워 넣은 그 애가 웃었다.
“안 무거워? 그냥 같이 들어 줄까?”
말간 눈가가 접히면서 입가로 포옥 보조개가 파였다.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착각일 게 분명했으므로 한은 아니라고 간결하게 답했다. 이렇게 전형적인 ‘부잣집 도련님’을 이미 알았다면, 잊을 리가 없었다.
“갈게.”
고맙다는 인사는 이미 해서, 마칠 말이 이것뿐이었다. 그런데 뱉고 보니 뉘앙스가 오묘했다. 강한이나 처음 보는 하얀 얼굴이나 서로 민망쩍은 얼굴이 되었다.
‘갈게.’라니……. 무슨 아는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또 만날 것처럼.
이거 참 이상한 말이었구나. 강한은 민망한 얼굴 그대로 정문을 향해 걸었다.
교과서 때문에 팔이 뻐근했고 찬 바람을 맞은 손등도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도 잠시 멈춰 서지 않았다. 뒤에서 그 애가 계속 보고 있으면 어쩌나 하고, 이상한 의식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교문 밖을 나서는 즈음부터 그 생각은 금세 잊혀졌다. 한겨울에 맨손으로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마당이었다. 아무리 예쁘장한 놈이래도, 두세 번 곱씹어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강한은 그를 완전히 잊었고 다시는 생각할 일도 없을 것이라 치부했다.
물론 예상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개학을 하루 앞둔 날, 민우가 고집스럽게 밥을 사 주겠다고 했다. 편의점 바깥에서는 만나 본 적이 없어 한은 긴장한 얼굴로 역전에 서 있었다. 번화한 거리에는 인파가 득시글했고, 그 때문인지 숨이 가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건강 하나는 뒤처져 본 적 없는 한에게는 몹시 생소한 기분이었다.
「한아, 미안;; 일단 어디 좀 들어가 있어.」
괜찮다는 사람을 부득불 설득시켰던 민우는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보이지 않았다. 재촉도 없이 기다리던 한은 문자를 받고서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만만한 영화관에 들어갔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번쩍대는 건물 안에는 바깥만큼이나 사람이 많았다. 얼핏 본 번호표 대기인 수가 서른이 넘을 정도로.
대부분 사람들이 혼자가 아닌 탓에 한은 운 좋게 자리를 얻었다. 영화관 통로에 놓인 1인용 스툴 하나가 빈 덕분이었다. 거기 냉큼 앉아 답장부터 썼다.
「괜찮아요ㅋㅋ」
천천히 오라는 말까지 덧붙이면 너무 구차한 것 같아서 지웠다.
그런 후에는 할 일이 없어 커다란 전광판을 구경했다. 새로 생긴 영화관이라 그런지 광고판도 아주 크고 화려했는데, 몇 분마다 화면이 휙 넘어가며 각기 다른 영화를 홍보해 주었다. 별생각 없이 끔벅거리던 한의 시야에 한 애니메이션 광고가 들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쪽에는 관심조차 없는 강한조차도 구면일 만큼 유명한 애니메이션이었다.
짙은 남색 배경을 한 화면 안에는 <루나 더 퀸 Ⅱ>라는 글자가 선명히 빛났다. 처음 강한은 ‘이게 후편이 나왔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데 계속 보면 볼수록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피부가 유독 하얀 여자 캐릭터는 그에게 익숙할 리 만무했는데도 자꾸 시선을 끌었다.
하기야 OST가 오만 버전으로 리메이크 될 만큼 전국을 강타한 애니메이션이니, 익숙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할지 몰랐다. 담담하게 생각하던 한이 문득 고개를 틀었다. 입술을 늘여 시원스레 웃고 있는 주인공의 얼굴이 어쩐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아, 그 갈게!”
눈을 가늘게 뜨고 고심하던 강한이 숨을 헉 삼켰다.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그를 흘겨보았다. 한은 조용히 입을 꾹 다물고 ‘루나’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보았다.
확실히 살펴볼수록 더 닮았다. 눈처럼 하얀 피부도 그렇고, 쌍꺼풀이 옅어 끝으로만 슬쩍 엿보이는 눈매나 색소 옅은 갈색 눈동자도 그랬다. 심지어 보조개까지! 한은 무척이나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운동장에서의 그 애와 루나를 비교해 보았다.
‘어떻게 애니메이션 캐릭터랑 그렇게 똑같이 생겼지. 역시 배우나 아이돌이었나. 촬영 중이었을까.’
마땅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강한은 그 애 생각을 꽤 오래 했다. 정확하게는 ‘그런’ 성격을 가질 수 있는 이의 인생을 짐작해 보는 시간이었다.
그 애는 처음 보는 사람을 몹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매사 도움만 받고 살았을 것 같은 얼굴로, 친밀한 반말까지 아주 쉽게 내뱉으면서. 차가운 겨울 땅에 흩날린 종이를 직접 주워 가져다주는 낯이 루나처럼 반짝거렸다. 누구라도 쉽게 마음을 내줄 사람이었다.
그렇게 후한 평가를 내놓고도 정작 한은 묘한 거부감을 느꼈다.
세상에는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드물다. 대부분은 필요에 의해 친절을 베풀고, 돌아오는 것이 없으면 멀어지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연락조차 하지 않는 태권도부 친구들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애는 정말로 아무런 바람 없이 친절을 베푸는 부류로 보였다. 한 번도 부족해 본 적 없고, 조바심 내 본 적 없는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분위기가 있었다.
강한은 그렇게 넘치는 삶을 타고난 사람들이 부러웠다. 너무도 부러워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을 만큼이나.
“근데 진짜 닮았네…….”
맞은편 포스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한의 입술에서 또 혼잣말이 툭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영화관 행사 홍보를 위해 쿠폰을 나눠 주고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흠칫 놀랐다. 지나는 사람마다 억지로 붙잡고 광고를 하던 이였는데, 유일하게 한에게만큼은 말조차 걸지 않고 멀어졌다.
그쯤에야 한은 상념 속에서 빠져나왔다. 다시는 못 볼 사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별생각을 다 했다 싶어 머쓱했다. 그러고도 기분이 아직 들떠 있어, 묘한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 ㅜㅜ ㅅㅂ 어쩌지;; 한아, 미안한데 ㅠㅠ 형 오늘 힘들 거 같다. 밥은 담에 꼭 사 줄게.」
그러나 속이 울렁거릴 만큼 설렜던 감정은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눈물과 땀이 가득한 문자를 가만 내려다보며, 한은 느리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안 사 줘도 된다니까요.」
애초 개학을 축하한다는 이상한 구실로 억지 약속을 잡은 것은 민우였다. 이런 자리, 강한은 바란 적도 없었다.
「진짜 미안해 ㅠㅠㅠ 여친이 갑자기 찾아와서 ㅠㅠ」
필요 이상으로 상세한 변명 역시 마찬가지. 강한은 한숨을 집어삼키며 정면을 응시했다.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아무것도 없었다. 입이 벌어진 만큼만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그냥 눈을 깜빡였다.
강한 나름대로는 이 약속이 위로였다. 축하 기념으로 생전 처음 밥까지 사 주겠다던 민우가 들으면 기함하겠지만 그에게 개학은 축하보다는 위로가 필요한 일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고 꿇릴 것은 더더욱 없는데도, 외톨이 일지의 첫 장을 넘기게 될 것이 염려되었다.
‘그래도 형이 축하해 준다면 좋은 날로 삼으려 했는데…….’
이렇게 초라할 필요까지 있나.
낯을 단단히 굳힌 채, 한은 몇몇 광고를 또 지켜보았다. 그러는 동안 마음을 울적하게 적시던 파도는 점차 잠잠해졌다. 파고가 낮아지자 한은 아주 천천히 일어섰다.
영화를 볼 생각이었다.
‘세상에 혼자만 남은 기분이 들 때.’
방금 화면을 스쳐 간 <루나 더 퀸 Ⅱ>의 광고 문구가 심장을 뻐근하게 울렸으므로.
영화관에 자주 오지 않는 덕에 값이 이렇게 비싼 줄 몰랐다. 금액을 확인한 강한은 순간 당황했으나, 아르바이트생의 순진무구한 눈빛에 무르지도 못하고 표를 끊었다. 치기 어린 선택에 귀한 돈을 날리는 것 같아 기분은 더욱 가라앉았다.
그러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한은 모든 후회를 날려 버렸다.
“엄마, 저 오빠 울어……. 콧물 흘려!”
좌석 열이 L까지 있을 만큼 커다란 영화관은 사람이 가득했다. 그중 반은 어린아이와 보호자였고, 나머지 반은 커플 혹은 여성이었다. 혼자 온 남자는 오로지 강한뿐이었다.
“쉿. 민지야,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가자.”
발권도 늦게 한 덕분에 한은 앞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아 영화를 보았다. 목이 뻐근했고, 우는 내내 힘주어 버틴 목구멍도 아팠다. 그러나 맨 앞 출구로 나가며 저를 힐끗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훨씬 더 홧홧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창피했다.
“어윽…….”
그러나 쉽게 눈물이 멈추지 않아, 한은 아예 양쪽 팔걸이를 꽉 쥐고 고개 숙였다. 고문받는 사람처럼 참담하게 버티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대놓고 수군댔다. 그 틈에서 강한은 몹시 억울했다. 전편을 보지 않은 저조차 이렇게 눈물이 솟구치는데 어떻게 사람들은 저렇게 화기애애하단 말인가.
‘아니, 시발, 어떻게 아무도 안 우는 거지…….’
루나가 숲에서 홀로 외롭게 살아왔던 날을 회상하는 장면 단 3분만으로도 한은 눈물이 고였다. 그뿐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고 희생을 선택하며 해맑게 웃는 표정에도, 마을에서 매도당한 채 해명 없이 감내하던 그 성숙한 태도에도, 기억조차 희미한 가족을 그리워하는 애틋함만으로도! 한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슬펐고 그만큼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너무도 기특해 이제야 그녀를 알게 된 것이 한탄스럽기까지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앉아 <루나 더 퀸> 시리즈 첫 편을 보고 싶었다.
“저……, 고객님. 괜찮으세요?”
그러나 어느 남자 직원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빨리 나가세요.’에 가까운 속뜻이 담긴 질문이었다. 한은 부리나케 일어서며 붉어진 눈을 비비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최속, 큽….”
죄송하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잠긴 목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결국 반 잘린 인사만 내놓은 채, 한은 도망이라도 치듯 영화관을 빠져나와야 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꺼 놓았던 핸드폰에는 민우의 부재중 전화와 사과 문자 서너 개가 더 와 있었다. 여운에 푹 절여져 잊고 있던 불행이 뒤통수를 둔하게 쳤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아.’ 하고 맹하게 문자를 읽던 한은 코를 킁 먹었다.
「담에 더 맛있는 거 사 주세요. 전화는 영화 보느라 꺼 놨어요.」
이번에는 괜찮은 척이 아니라 정말 괜찮아서 답이 쉬웠다. 한바탕 눈물을 빼고 보니 이상하게 기분이 가벼웠다. 덩달아 발걸음도 날개를 달아, 한은 달리듯이 집으로 향했다. 어서 <루나 더 퀸> 첫 편을 볼 생각이었다.
***
한유일은 ‘정원고 루나’라고 불렸다.
2년 전 루나 열풍이 처음 불었던 때부터 굳어진 별명이라는데, 사실 이제는 거의 이름이 된 수준이었다. 그는 제 이름보다도 ‘한루나’, ‘루나’ 하고 불릴 때가 훨씬 더 많았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강한은 역시 사람 생각은 다 똑같다고 생각하며 조금 머쓱해했다. 한유일과 루나가 닮았다는 사실이 무척 대단한 발견인 것처럼 혼잣말까지 했던 순간이 민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민망스러운 마음보다는 반발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영화관에서 대성통곡을 했던 그날 이후, 한은 <루나 더 퀸> 시리즈 두 편을 서른 번도 넘게 다시 보았다. 전 국민이 따라 부르던 OST도 뒤늦게 다 외웠고, 짤막한 명대사는 눈 감고도 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루나 그림이 그려진 과자를 편의점 진열대에 유독 잘 보이는 곳에 두기도 했다.
그냥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녀를 보면 기분이 좋았고, 원론적인 대사조차 대단하게 큰 힘이 되어서 그랬다. 특히 한의 심장을 울린 것은 그녀의 강인함이었다.
루나는 어두운 밤, 숲에서 처음 눈을 떴다. 소녀는 버려진 기억도 없이 혼자였으며 돌봐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달빛을 사랑하고, 쫓아가고, 본인의 숨겨진 힘을 발전시키며 친구를 만들어 가는 루나는 행복해 보였다. 깊은 상처를 감춘 채 웃는 얼굴이 너무도 마음을 아프게 했다.
반면 정원고 루나, 한유일은 유명 인사였다. 혼자는커녕 주변에 사람이 넘쳐흘렀다.
학기 초부터 경쟁 후보도 없이 만장일치로 반장이 되었는데, 강한 빼고 모든 애들이 당연히 그가 되리라고 예상한 분위기였다. 확실히 매 학년마다 반장이며 각 과목 부장 역할을 도맡아 했을 이미지이기는 했다. 항상 친절했고, 누가 하는 부탁이든 잘 들어주는 편이었으며, 웃지 않는 날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 겉모습이 그를 루나라고 불리도록 한 듯했다.
하지만 언제나 유일에게서는 여유가 보였다. 그늘이 드리워 본 적 없는, 햇볕 냄새가 났다. 루나라고 불리기에는 너무도 평탄한 인생을 살았을 듯했다.
강한은 처음부터 그가 자신과 아주 다른 세상에서 사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 감상은 단발적인 만남에서는 딱히 문제 될 일이 없었다. 그러나 매일 보게 되는 경우라면 달랐다.
유일이 쉽게 웃으며 유독 자신을 챙길 때마다, 부러움과 열등감 사이의 애매한 감정이 자주 올랐다. 저렇게 유복하고 따뜻한 집안에서 자랐다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다 어머니께 죄스럽게 느껴져 그만둔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렇게 추한 자신을 자주 마주치게 하는 탓에, 한유일은 달갑지 않은 애였다. 강한은 때마다 그런 자신이 너무도 낯설었다. 열등은 너무도 설어 다루기 힘든 감정이었다.
덕분에 한유일이 내보이는 호의에 비례하게끔 거리감은 자꾸만 늘어났다. 그는 확실히 다정하고 친절한 껍질을 가졌지만, 별명인 루나처럼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놈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윤리적으로 옳은 행동을 했을 때, 그 의도가 본인의 이득만을 위한 것이라면 위선이고.”
3학년 8반의 담임 강동구는 윤리 선생이었다. 매사 무관심한 태도로 비쩍 마른 팔을 긁적거리던 그는 신기하게도 수업마다 ‘너희 생각이 가장 중요한 거야.’ 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를 했다. 오늘도 그놈의 생각을 물은 모양인지, 한유일은 제 답안을 또박또박 읽고 있었다.
“또 결과적으로는 옳지 않은 행동이라 보이는 일도 그 의도가 윤리적 가치에 닿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나운서처럼 발음이 명확하고 꽉 찬 소리였다. 애들이 ‘오올.’ 하고 이상한 환호를 했다. 그 틈에서 강한은 조용히 대답을 곱씹었다. 왜인지 악당의 합리화와 가까운 뜻 같았다.
“자, 다음 페이지. 누가 읽어 볼래?”
“…….”
담임의 말에 애들이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방금 잠에서 깨 저릿한 팔을 주무르던 강한 역시 은근히 시선을 돌렸다.
“내 눈만 피하면 다냐? 야, 반장. 네가 골라 봐.”
이제 막 자리에 앉은 한유일은 담임을 보며 웃었다. ‘제가요?’ 나긋하게 되물어 본 그가 고개를 틀었다. 어쩐지 방향이 불길했다.
“저는 한이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 정확하게 강한을 향했다. 한은 습관처럼 이를 갈았다가, 순순하게 일어섰다.
“이야, 강한 웬일로 안 자냐?”
강동구는 관심이 없는 듯하면서도 기억력이 좋았다. 뒤끝 있는 말로 운을 뗀 그가 귀를 후비적거리며 교과서 페이지를 넘겼다.
“강한이 읽어 봐라, 67페이지.”
“네.”
새 학기가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태권도를 할 때도 수업 듣는 일은 거의 없었다. 참여해 봤자 오전 수업이 전부인지라 잠만 자기 일쑤였으며 마지막으로 일어나 책을 읽어 본 적이 언제인지는 기억조차 까마득했다. 덕분에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은 강한은 교과서를 책상에 내려놓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변하는 일 없이 선한 것. 절대선을 정의하자면…….”
그래도 기합을 내지른 경력이 있어 목소리는 작지 않았다.
문단은 겨우 다섯 줄짜리였다. 그런데 그것 하나를 읽는 데 평생이 걸린 것 같았다. 한유일처럼 제 생각을 발표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있는 글자를 읽을 뿐인데, 목에 긴장이 몰려들었다.
“야, 강한 목소리 좋다? 나중에 성우 해도 되겠네.”
영원 같던 시간을 끝내고 의자를 끌어 앉자, 담임이 비식 웃었다. 그가 농담처럼 뱉은 말에 애들이 한을 힐끗 돌아보다가 ‘오우.’ 하고 또 이상한 환호를 했다.
그때 강한은 조금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어딘가에서 보이지 않는 균열이 일어나는 듯, 근질거리고 묘했다.
그는 이 반에서 ‘예외’로 분류된 자신이 싫지 않았다. 소외감은 느꼈으나 오히려 귀찮은 일이 없어 편했다. 어차피 졸업하면 취업 전선에 바로 뛰어들 테니, 가까워져 봤자 몇 달이었다. 그렇게 유통 기한이 짧은 관계를 위해 노력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이대로 조용히 지내다가 졸업, 그 뒤에는 취업. 그것만이 그의 목표였다.
그런데 한유일이 자신을 챙기려 들면서 귀찮은 일은 자꾸 생겨나기 시작했다.
유일은 늘 웃는 낯에 친절한 성격이었지만, 굳이 반에서 서열을 따지자면 최상위에 속했다. 그가 딱히 권력을 휘두르는 스타일은 아님에도 자연스레 힘이 몰렸다. 범철과 매점을 다녀온 이후 데면데면해진 사이를 보고, 애들이 은근히 범철과 서먹해진 것만 봐도 그랬다.
하기야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한유일은 마른 편이기는 해도 키가 컸고, 체격도 좋았으며, 성적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심심치 않게 지갑을 열어 보이는 재력 또한 다른 애들로 하여금 묘한 위화감을 주었다. 사실 그 모든 것들이 강한에게는 ‘꽃밭에 사는 놈’이라는 인식을 심었지만, 다른 애들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알게 모르게 선망받는 존재였다.
그런 그의 친절은 누구든 반길 만한 것이었으나, 한은 까놓고 말해 거북했다. 감히 루나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저의를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타고난 기질이 베푸는 편이래도, 친구가 많다 못해 넘쳐 매분마다 바쁜 주제에. 굳이 거절을 감내하며 자신을 챙기고 끊임없이 말을 거는 의도가 불투명했다.
그게 반장으로서의 사명감이거나 동정심이라면 정말이지 받고 싶지 않았고, 혹여 이용하기 위함이라면 더더욱 싫었다.
이용이라는 말 자체가 유치하기야 하지만, 가끔 한의 체격과 태권도부라는 타이틀을 이용해 서열 놀이 하려는 놈들이 있었다. 말 몇 마디만 섞고 나면 어느 학교 누구와 친하냐는 둥, 요즘 어떤 새끼가 너무 나댄다는 둥, 자꾸 시비 터는 놈이 있는데 같이 만나 보지 않겠냐는 둥. 속이 훤히 보이는 질문들을 해 대는 족속들이었다. 물론 유일은 그렇게 노골적이고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꺼림칙할지언정.
“자, 그럼 다음 학습 목표 보자.”
담임의 말에 대부분 아이들 머리가 일제히 교과서를 향했으나, 유일은 한을 돌아보았다. 평소처럼 인위적이게 느껴질 만큼 맑은 미소를 띠지는 않았다. 도리어 처음 보는 듯한 고요한 얼굴로 유일은 한을 응시했다.
깜빡, 깜빡. 멀리서도 보일 만큼 기다란 속눈썹이 날갯짓을 하다가 아주 약하게 곡선을 그렸다. 그렇게 눈만 간신히 휘어 웃은 채 한유일은 다시 돌아섰다. 도통 속뜻을 알 수 없는 낯이었다.
‘뭐야?’
뒤늦게야 인상을 찌푸린 강한은 얼른 엎드렸다. 담임이 다시 한유일을 다음 질문의 희생양으로 골라서였다. 그가 다음 타자로 자신을 또 지목하기라도 할까 봐, 한은 복잡한 생각을 모두 넣어 두고 냉큼 자는 척했다.
“한아, 우리 이동 수업인데.”
기어코 재차 잠들게 만든 장본인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으레 엎드려 있던 강한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예쁘장한 반장을 올려다보고, 습관처럼 그의 뒤를 확인해 보았다. 어느덧 교실은 사람 하나 없이 적막했다.
“……어디?”
“정보실.”
“어, 갈게.”
아, 씨. ‘갈게.’라는 말 이제 안 쓰려고 했는데.
인상을 찌푸린 한은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덩달아 책상 아래 서랍에서 책을 꺼내는 손이 느릿해진다. 반장이 나간 후에 일어나려는 계획이었다.
“먼저 가.”
“같이 가자.”
교실은 이미 텅 비었고 당연히 반장의 친구들도 모두 없었다. 그래서 한은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거절할 명분이 부족하다.
“왜 친구들이 버리고 갔냐?”
민망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책을 들었다. 정보실이 무슨 과목인지 생각하느라 교과서 고르는 데도 한참이었다. 그 시간을 답답해하지 않고 기다려 주던 유일은 방긋 웃었다.
“그러게. 사람 버리고 가는 거 아닌데.”
저릿한 허벅지를 꾹 누르며 일어서던 한이 움칠했다. 이번 목소리 역시 그 묘하게 싸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고개를 느리게 돌리자, 유일은 시선을 느낀 것처럼 돌아보았다.
“갈까?”
나긋하게 묻는 얼굴은 평소처럼 친절한 미소를 걸었다. 그럼에도 한은 묘하게 찜찜한 구석을 지울 수 없었다. 어쩌면 한유일이 생각보다 많은 비밀을 가진 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최근 들어 유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범철이 떠올랐다.
“싸웠냐?”
이런 대화를 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라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다. 그냥 하는 말이라는 것처럼 툭 던져 놓고 먼저 걸었다. 뒤를 따라 나온 반장이 앞문을 걸어 잠그며 ‘응?’ 하고 되물었다.
“누구랑?”
그때 네가 존나 꼽 줬던 범철이…라고 답하려다가 괜히 주제넘는 것 같아 참았다.
“아아.”
그런데 유일은 마치 답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의 옆으로 나란히 선 그가 습관처럼 웃었다.
강한은 말간 옆얼굴을 흘깃거렸다. 매번 앉아서 올려다보느라 몰랐는데 의외로 키가 컸다. 눈높이가 맞는 사람은 오랜만이라, 어색하게 한 발자국 옆으로 떨어져 걸었다. 얼굴끼리 지나치게 가까운 기분이 들었다.
“역시 다 들렸구나.”
넓힌 거리만큼 다시 성큼 가까워진 유일은 그렇게 말하고는 조용해졌다. 두 번 멀어지기는 좀 재수 없을 것 같아서 한은 그대로 걸었다. 안 그래도 어색한데, 정보실까지 가는 길이 더럽게 멀었다. 수업 종도 이미 친 모양인지 복도마저 지나치게 고요해 한은 침까지 조심하며 삼켰다.
“안 싸웠어. 그냥 좀…….”
반장은 말끝을 흐렸다. 짐짓 수줍은 것처럼 웃는 얼굴에 한은 멍하게 입술을 벌렸다. 싸우지는 않았지만 그냥 조금… 가진 재력을 보여 주며 간접 협박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드디어 정보실 팻말이 보였다. 저절로 안도의 숨이 툭 놓였다.
“의견 차이가 있었어.”
의견 차이?
도대체 어느 나라 고등학생이 이딴 말을 쓴다는 말인가. 한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뭐?’ 하고 되물었다. 속뜻을 가늠하느라 혼란한 눈동자 속에서 한유일은 느긋했다. 정보실의 후문으로 바싹 굳은 한을 끌어다 세우고, 고운 손이 노크 준비를 했다.
“음, 누가 입 놀릴 때는 대가리를 좀 굴리고 열어야 된다고 그랬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안도로 놓였던 숨이 가파른 궤도를 타고 올랐다. 유일의 입에서 나왔으리라 생각되지 않는 과격한 말이었다. 그러나 워낙 평온한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유독 나른한 어투 때문인지, 말은 상스럽게 들리지가 않았다.
“대가리…….”
너무도 생각지 못한 대답이라, 강한은 멍하게 읊조렸다. 그러자 유일은 그 말이 맞다고 확인시켜 주듯 고개를 한 번 끄덕하고는 웃었다.
“문 열게?”
“어어.”
순식간에 너무 많은 의문이 들어 어느 질문 하나 못 한 채로 상황이 흘렀다. 한은 눈만 끔벅이며 유일을 따라 정보실로 들어섰다.
“선생님. 한이 보건실에 있어서요, 제가 데려왔어요.”
“그래.”
아무도 믿지 않을 거짓말이었지만 그의 미소에는 반박을 할 수 없는 힘이 들어 있었다. 해맑게 웃은 반장이 제 번호가 적힌 컴퓨터 자리에 앉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치 멀리 헤어질 사람에게 그러하듯이.
한은 허탈하게 웃었다. 확실히 그와 한의 자리는 성씨 탓에 꽤 거리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작별 인사를 나눌 만큼은 아니었다. 하여튼 기막힌 새끼…….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맨 앞으로 가 앉았다. 손을 마주 흔들어 주지는 않은 채였다.
***
토요일 오전 열한 시가 조금 안 된 시각. 강한은 대학로 길 한복판에 서 있었다. 민우가 그의 여자 친구에게 그러하듯, 관심도 없는 플래시몹을 위해서.
한이 처음 와 보는 대학로에는 사람이 많았고 커다란 나무와 벽돌 건물들이 있었다. 외국에는 가 본 적도 없었지만 조금 이국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주 편하고 익숙해 보였다. 길을 지나는 수많은 인파 속에 그처럼 두리번대며 눈을 휘둥그레 뜨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한도 곧 얼굴을 굳히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민우는 약속 시간이 십 분쯤 지났을 때서야 나타났다. 같은 대학생 친구들을 몇몇 대동한 채였다. 강한은 무리 속에서 민우의 여자 친구를 살펴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뻣뻣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목석같은 태도에 민우와 그 친구들이 웃었다. 밥부터 먹자며 끌어가는 그들은 무척 어른스럽고 또 화기애애했다. 한은 어색하지 않은 척 애쓰는 낯으로 움직여야 했다.
자리를 옮긴 곳은 몇 년 전부터 우후죽순 생겨난 체인 파스타 가게였다. 아이보리 바탕에 초록색 영문 필기체로 쓰인 가게의 이름을 강한도 몇 번은 본 적 있었다. 사람들이 데이트하러 가는 곳이라고만 생각했기에 드라마나 영화에서 접하던 어둑한 레스토랑을 생각했지만, 의외로 반대되는 분위기였다.
내부는 무척 밝고 편안한 색감에 꽃무늬가 이곳저곳 널려 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화사해서 문제라면 문제였다. 강한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불편한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름이 뭐야?”
“강한. 외자야.”
한이 입술을 벙긋하기도 전에 민우가 선수를 쳤다. 씩 웃은 그가 메뉴판을 밀어 주었다. 한은 주뼛거리며 두꺼운 책자를 펼쳤다.
“아, 진짜? 한이는 그럼 몇 살?”
“고3이요.”
이번 문제는 답하기 애매했는지 민우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한이 냉큼 대답했다. 그에 테이블 내로 이상한 환호가 흘렀다. 좋을 때라며,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형과 누나들이 깔깔 웃었다. 한은 무척 희한한 기분이 들어 메뉴판을 향해 고개만 푹 숙였다.
아무래도 방금 나이를 물은 여자가 민우의 여자 친구 같았다. 일행 모두가 아주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있도록 배려했고, 그녀는 한이 별로 낯설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민우에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 온 듯했다.
“내 이름은 혜주야, 유혜주. 나이는 민우랑 동갑.”
“아, 네.”
역시 예상대로 그녀의 이름은 혜주였다. 민우가 늘 입에 달고 사는 ‘우리 혜주’라는 말 때문에 그 이름은 한에게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한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다 제 이름을 내놓았다. 요란스럽게 손까지 번쩍 들고 ‘나는 철원이!’ 하고 말한 형 때문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지만, 강한은 그다지 웃지 않고 메뉴판만 읽었다.
“얘가 지령 전달하면 딱이겠다. 키도 커서 바로 알아보겠는데?”
“태권도 했다면서? 그래서 키가 컸나?”
“그거랑은 상관없지! 농구도 아닌데.”
“아, 그런가?”
말도 없이 조용한 그를 두고 이야기가 흘렀다. 못 들은 척하며 정독한 메뉴판에는 리소토, 파스타, 샐러드 같은 글자들 옆에 편의점 시급 세 시간 치가 적혀 있었다. 한은 속으로만 뜨악했다.
“나는 알리오올리오!”
“빠네 먹자, 빠네.”
“느끼해. 에이드도 시켜.”
메뉴를 보지 않고도 다들 익숙하게 골라내는 틈에서 한이 멀뚱히 그림을 보았다. 하얗고 빨간 여러 파스타 사진은 딱히 입맛을 당기지 않았다. 맛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익숙한 피자 앞에 멈추기는 했지만, 가격이 문제였다. 이건 네 시간 치 시급이었다.
“한이는 뭐 먹을래?”
맞은편에서 불쑥 상체를 숙인 민우가 가까워졌다.
“피자 먹고 싶어? 시켜. 고르곤졸라 먹을래? 맛있어.”
“…아, 그.”
고르곤졸라. 그게 뭔지는 몰라도 선뜻 시키기 좋은 가격은 아니었다. 굳은 한이 눈을 깜빡이자 민우가 고개를 틀었다. ‘왜?’ 묻는 얼굴에 옆에 앉은 혜주가 웃었다.
“비싸서 그래? 한아, 당연히 너는 돈 안 내지. 고등학생이 돈이 어디 있어? 우리가 사는 거야. 먹고 싶은 걸로 골라.”
그녀는 민우처럼 ‘한이’라고 불렀다. 아주 다정하고 친절한 음성도 민우와 무척 비슷했다.
“아, 그래서 고민했어? 귀여운 자식.”
버릇처럼 손을 뻗은 민우가 한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새까만 고개가 푹, 메뉴판을 향했다가 돌아왔다.
돌아온 시야에는 비슷한 두 사람이 밝게 웃고 있었다. 약간 그을린 피부색마저 닮아 있어, 같은 작가가 그린 그림처럼 결이 같은 커플이었다. 더없이 잘 어울리는, 아주 완벽한…….
“얘 좀 봐. 감동받았나 봐.”
“왜 울려고 그러냐, 인마.”
무척 닮은 그 두 사람이 한을 삿대질하며 웃었다. 강한은 그제야 일그러졌던 표정을 갈무리하고, 어색하게 꾸벅 인사했다. 평소라면 빚을 지지 않으려 버텼겠지만 오늘은 그래도 되는 날이었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유일한 고등학생이라서 얻어먹어도 괜찮았고, 너무도 예쁘고 친절한 여자 친구와 똑 닮은 민우가 야속해서 조금쯤 복수해도 좋은 자리였다. 그래서 무뚝뚝한 인사와 함께 메뉴를 골랐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 그거요……. 고르곤졸라.”
민우가 맛있다고 한 피자였다.
그렇게 밥을 얻어먹고서는 대가로 지령을 전달했다. 지령을 적은 종이는 카페에 오순도순 모여 앉아 직접 잘랐다. A4 용지 한 장에 네모 상자로 구분한 지령이 여섯 개씩 인쇄돼 있었다. 그걸 여섯 장 모두 잘라 쪽지로 접고 상자에 담았다.
지령 내용은 「장소: 마로니에 공원 한가운데 공터. 시간: 오후 1시 정각. 지령: 당신은 오늘의 ‘준비물’을 들고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 1시 정각, 알람 소리가 들리면 같은 ‘준비물’을 가진 친구들과 놀아 주세요! 5분 후. 다시 알람이 울리면 낮잠 시간입니다. 1분간 달콤한 잠을 자고 일어나세요. 헤어질 때에는 소리 소문 없이!」였다.
준비물은 미리 인터넷 플래시몹 카페에 공지되어 있다고 했다. ‘오후 12시부터 12시 30분까지, 대학로 2번 출구 앞에서 벽시계를 든 남자에게 와서 가위바위보를 하세요. 이기시면 지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는 말과 함께.
“그런데 문자나, 카페 쪽지 같은 걸로는 안 되는 거예요?”
길거리 한복판에서 벽시계를 들고 서 있는 기분이 평범하지는 않았다. 한의 물음에 함께 서 있던 민우가 픽 웃었다.
“이거 하는 사람들은 그냥 잠깐 미친 짓을 하고 싶은 거야. 비밀스럽게.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고.”
“……음.”
“뭔 소린지 모르겠지? 솔직히 나도 그래.”
민우는 멀리 편의점에 다녀오는 혜주를 의식한 것처럼 아주 작게 말했다. 그래서 한은 별다른 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얕게 끄덕거렸다. 그사이 혜주가 성큼성큼 다가와 있었다.
키가 큰 그녀가 긴 생머리를 쓸어 넘기며 쇼핑백을 내밀었다.
“오늘 한이 온대서 하나 더 챙겼거든.”
“네?”
“준비물.”
지령에 나온 말이었다. 한은 벽시계를 한 팔로 안고 쇼핑백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하얗고 커다란 뭔가가 보였으나 머리에 바로 입력되지는 않았다.
“뭐예요?”
맹한 물음에 혜주와 민우가 또 웃었다. 파스타 가게에서처럼 귀엽다는 듯 웃은 그들이 동시에 속삭였다.
“베개.”
길거리 한복판에서 들고 서 있기에는 벽시계만큼이나 유별난 사물이었다. 강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지령을 곱씹어 보았다. ‘준비물’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재밌게 놀라고 했으니, 아마 베개 싸움을 의미하는 듯했다.
이 번화한 길거리 한복판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베개 싸움이라니. 다소 미친 소리처럼 들려 반문하려던 찰나.
“저, 지령 받으러….”
“아.”
모르는 여자가 주뼛거리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어색한 얼굴로 주먹을 아래위로 흔들었다. 한은 맥 빠진 소리를 내며 덩달아 박자를 맞추었다.
“가위, 바위, 보.”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을 옆에 선 민우가 풀어 주었다. 한은 그의 구호에 맞춰 초면인 여자와 승부를 겨뤘다.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한 번에 이겼기 때문에 금세 지령 쪽지를 전달해 줄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령을 받아 갔다. 다소 미친 소리라고 생각한 한과는 달리 지령을 받은 사람들은 들떠 보였다. 그들은 저마다 커다란 가방이나 쇼핑백에 숨겨진 베개를 꼭 끌어안고, 공원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모르는 사람 눈에는 곧 길거리에서 베개 싸움이 벌어질 전조는 보이지 않을 듯했다.
“형, 저도 꼭 같이 해야 돼요?”
“왜, 와서 보니까 쪽팔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쪽이 팔리기보다는 그냥 이해가 좀 안 돼서 그랬다. 어중된 대답에 민우가 웃었다.
“안 돼, 인마. 혼자 살려고?”
한의 목덜미를 훅 낚아챈 그가 품에 머리통을 끌어당기며 장난을 걸었다. 속수무책 허리가 꺾인 한이 아아, 형, 그렇게 행복한 애원을 하며 항복했다.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마흔 개 가까이 준비해 놓았던 지령 쪽지가 열 개도 남지 않았다. 그 말은 서른 명 넘는 사람들이 도심 한가운데서 베개 싸움을 하게 되리라는 소리였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강한은 제법 초조해졌지만, 함께 밥을 먹었던 형 누나들은 평온했다. 이제 그만 흩어져 있자며 서로에게 손을 흔드는 얼굴은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강한 역시 민우와도 떨어져 혼자 벤치에 앉고 말았다. 거대한 쇼핑백을 앞에 내려놓은 채, 핸드폰을 만졌다. 구식 기계 안에는 시간을 보낼 만한 것이 많지 않았다.
한 시가 되자 커다란 멜로디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아무래도 운영진들이 각자 알람 설정을 해 놓은 듯했다. 그 소리에 흠칫하는 틈에, 사방에서 커다란 베개들이 나왔다. 가방이나 쇼핑백에 숨겨져 있던 베개를 꺼낸 사람들은 즐겁게 웃었다.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공원 한복판에서 베개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멍하니 베개만 꺼내 들고 서 있던 한은 쉽사리 휩쓸렸다. 누군가에게 등을 얻어맞았고, 반격하려 휘두른 베개가 타인을 쳤다. 사방에서 으하하 웃는 소리, 누군가 동영상 찍는 소리, 사진을 찍고 ‘뭐야?’ 하며 떠드는 소리가 섞였다. 현실감이 없었다.
“자, 여러분. 낮잠 시간이에요!”
알람이 한 번 더 울렸다. 혜주의 친절한 목소리를 지령 삼아, 사람들은 가지고 온 베개를 베고 누웠다. 공원 바닥 위였다.
“잘 시간이라니까, 한아.”
민우가 망설이는 한을 끌어다 눕혔다. 그가 능청스럽게 베개를 베고 강한을 끌어당기며 다리를 올렸다. 배 위에 묵직한 다리가 턱 놓이고 귓가에 ‘으음.’ 하는 음성이 남았다.
누운 얼굴 위에서는 수많은 찰칵 소리가 들렸다. 대낮의 도심, 공원 바닥에 베개를 베고 드러누운 서른 명 넘는 인파가 구경거리일 만했다. 미쳤나 봐, 웃기다, 재밌어 보인다, 그런 말들이 귓가를 왕왕 맴돌았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진심으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고 있었다. 민우의 팔이 가로지른 가슴이 미치도록 간질거렸다.
“형, 이것 좀.”
이러다가 정말 숨이 탁 넘어갈 것만 같아서 강한은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민우는 더 꽉 안으며 웃었다.
“형아 잔다.”
귀여운 대답이, 정말이지 하나도 귀엽지 않았다.
***
남자만 득시글한 학교에서 모두에게 ‘루나’라는 간지러운 별명으로 불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만큼 한유일이 흔치 않은 인간이기 때문이겠지만.
“한루나! 한 입마안!”
교실 맨 앞, 교탁 주변의 빈자리에서 유일은 창현에게 붙잡혀 있었다. 고작 천 원짜리 음료수를 인질로 잡힌 채였다.
“한 입 맞아?”
“어!”
유일은 믿지 않는 듯하면서도 분홍색 음료를 내밀었다. 목청 좋은 음료수 도둑 창현은 피크닉을 단숨에 비웠다. 그러고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빈 팩을 돌려주기까지 했다. 한은 제 음료가 빼앗긴 것처럼 눈썹을 꿈틀 들어 올렸으나, 오히려 당사자인 유일은 하하 웃었다.
“어떻게 한 입에 다 마시지?”
노여움도 타지 않고 그렇게 웃는 얼굴이 바보처럼 보일 정도였다.
“잘 먹었다.”
창현은 짐짓 윙크까지 해 보이며 뻔뻔하게 웃었다. 보는 사람이 다 약 오를 태도였다. 그럼에도 유일은 속없이 웃고만 말았다.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새끼다. 언제는 생각보다 까칠한 날을 숨긴 듯하다가, 또 어떨 때는 그냥 바보같이 물러 보였다.
“역시 우리 루나는 천사야.”
지나치게 친밀한 척 목소리를 키운 창현은 금세 교실을 빠져나갔다. 복도를 지나는 다른 반 친구에게 ‘야! 개새끼야!’ 하고 느닷없는 욕설을 하면서였다.
누군가를 부득불 별명으로 지칭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단순히 그 별명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었고, 습관일 수도, 그저 친밀함의 표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창현 같은 놈들의 의도는 뻔했다.
타인에게 친분을 과시하기 위해서. 혹은 장난인 척 얕잡아 보기 위해.
똑똑한 놈이 그런 의도 하나 파악하지 못했을까. 강한은 턱을 괸 채로 유일을 가만 바라보았다. 돌아서 자리로 향하는 그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짜증 난 기색이라도 비치길 기다리면서. 그러나 유일은 전혀 유감 하나 없는 산뜻한 표정으로 걸었다. 도리어 중간에 마주친 친구와 해맑게 웃으며 이야기도 나눴다. 정말 창현의 말대로 ‘천사’ 흉내라도 내는 듯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강한은 유일에게 완전히 냉담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묻는 말에는 순한 대답이 나왔다. 다른 놈들에게 저런 취급을 받고도 하하 웃는 낯에다 모진 말을 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웠다.
‘능구렁이인지, 귀신인지, 아니면 그냥 진짜 바보 천치인지…….’
속내로 흉을 보는 틈에 눈이 딱 마주쳤다. 한은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고 바쁘게 무언가 하는 척했다. 마침 고맙게도 문자가 쌓여 있었다.
「한~」
발신자는 가장 반가우면서도 반갑지 않은 민우였다.
「두 번째 경험은 어땠음? ㅋㅋ」
플래시몹을 하고 나면 민우는 꼭 이런 식으로 소감을 물었다. 질 낮은 농담 같았는데, 한은 그런 식으로 받아치지 못해서 답이 어려웠다.
금세 유일은 잊힌 강한은 책상 위에 핸드폰을 올려놓은 채 한숨만 쉬었다. 의미심장한 ‘경험’이라는 단어가 플래시몹을 의미하는 줄은 알지만 이상하게 답장이 쉽지 않았다.
플래시몹은 대단히 인상적인 행위였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특이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런 일을 벌이고도 아무 짓 하지 않았다는 듯 3초 만에 인파에 섞여 사라지는 점도 신기했다. 무엇보다도 첫날 너무도 가깝게 닿았던 민우의 숨결이나 체온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생각보다 재밌어요.」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을 납작하게 눌러 건넸다. 지극히 평범해진 대답에 민우는 금세 답을 보냈다. 그는 수업 중일 때 더 답장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럼 다음에도 또 오는 거 맞지? 아예 운영진 하자니까ㅜㅜ」
정작 강한이야말로 쉬는 시간이었지만 빠르게 답하지 못했다. 문자를 몇 번이나 곱씹다가 다시 ‘경험’ 운운하던 문자로 돌아갔다. 그리고 느리게 엎드려 눈을 감았다.
차가운 공원에서 베개 싸움을 했던 첫 플래시몹 이후로도 한 번 더. 강한은 민우를 보기 위해 그 행사에 참여했다. 민우와 사적으로 밥을 먹고 그의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확실히 여태까지처럼 편의점에서만 만났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스킨십도 그랬고, 보지 못했던 표정과 말투를 많이 알아 갈 수 있었다. 게다가 플래시몹 자체도 생각보다 재밌었다. 아주 잠깐 동안 어떤 속박을 벗어던진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묘한 공허함을 느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머나먼 세계에 다녀온 듯이. 알지 못했다면 차라리 좋았을 법한 맛이 오랫동안 혀를 감돌았다. 매번 기쁘지가 않았다.
씁쓸한 숨을 내쉬며 한이 눈을 떴다. 눈앞에 놓인 구형 슬라이드 핸드폰은 옆면이 다 까진 채였다. 아, 좀 바꿔야 하는데……. 중얼거릴 때쯤 시야가 조금 어둑해졌다.
“한아.”
엎드려 있던 한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강한은 아주 천천히, 누구일지 분명한 인영을 올려다보았다. 역광을 받은 상대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소풍, 어디로 갔으면 좋겠어?”
“……어?”
혹시 잠깐 엎드린 틈에 잠이 들었나 싶었다. 굳이 지금 소풍 장소를, 그것도 개인적으로 묻는 태도도 이상했지만 조금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특히 더 희한했다. 이상하게도 한유일이 화를 내는 것만 같았다. 음료수를 다 빼앗기고도 속 좋게 웃던 놈이 그럴 리 없겠지만.
“후보가 어디인데?”
표정을 살피고 싶어져서 한은 약간 더 상체를 세웠다.
마침내 그림자가 사라진 한유일의 얼굴은 하얗게 빛이 났다. 여전히 아주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묘하게 차가운 기색이 느껴져 한은 고개를 틀었다.
“너 무슨 일 있냐? 음료수 삥 뜯겨서 그래?”
한은 유일에게, 아니, 이 반 누구에게도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입이 먼저 움직여 버렸다.
워낙 웃는 상이던 애가 굳어 있으니 괜히 덜컥 걱정이 들어서였다. 조금 더 솔직히는 한유일이 창현을 끌고 매점으로 나가 대가리를 운운할까 봐 걱정이 됐다. 그러면 척 봐도 질 나쁜 창현이 저 조막만 한 얼굴에 무슨 짓을 할지……. 솔직히 상관은 없지만, 루나를 몹시 닮은 얼굴에 생채기가 나는 것은 별로였다.
“아니. 근데 한아, 너 내 번호 있어?”
유일의 무표정한 낯은 급격히 해동되었다. 조금 누그러져 평소처럼 부드러워진 그가 정작 소풍 후보지가 무엇인지는 말해 주지 않은 채 물었다. 갑작스러운 화제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강한은 ‘머?’ 하고 애매한 소리를 냈다.
유일은 한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어둡게 잠들었던 화면을 일깨우고 키패드를 누르는 손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그쯤에야 한은 경험이 어땠는지 묻던 민우의 문자를 떠올렸다. 일순 눈앞이 캄캄해져, 손을 확 뻗었다.
“뭐야, 갑자기. 부르면 되지.”
봤나. 봤으면 이상하게 볼 텐데.
그런 걱정을 하느라 한유일 번호를 왜 저장해야 하는지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괜히 심장이 쿵쿵 뛰어, 강한은 더 무뚝뚝하게 쏘아붙였다. 유일은 놀란 얼굴로 비어 버린 두 손을 내려다보다가, 평소처럼 맑게 웃었다. 눈을 접어 예쁘게 웃으며 ‘미안.’ 사과한 그가 턱짓을 했다.
“내 번호야.”
핸드폰 액정에는 유일이 입력한 열한 자리 숫자가 가득 차 있었다. ‘못 봤나…….’ 한은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저장 버튼을 눌렀다. 글자가 다 닳아 하얗게 번진 키패드를 꾹꾹 눌러 ‘한유일’이라고 썼다.
“소풍 그거 뭔데.”
“아니야. 선생님이 우리 해피월드 간대. 중간고사 끝나고.”
정해졌으면 왜 물어봐?
김이 새서, 한은 눈을 치켜떴다가 핸드폰을 숨겼다. 이미 번호를 누르며 봤을 테지만, 애들이 대부분 터치 핸드폰으로 바꾼 시점에 낡은 키패드를 더 보여 주기는 싫었다.
‘핸드폰 곧 바꿀 건데. 그리고 그 경험 얘기 이상한 거 아닌데.’
못 뱉은 변명이 입 안을 구질구질하게 맴돌았다.
“한아, 내 이름 뭐라고 저장했어?”
“한유일.”
오늘따라 한유일이 참 이상했다. 강한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너 이상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답했다. 그럼에도 유일은 기죽지 않고 웃었다.
“아아. 근데 나도 옆에 하트 붙여 주면 안 돼?”
‘민우 형♥’이라는 저장명을 다 본 모양이었다. 강한은 피가 싹 뽑혀 나가는 기분으로, 입술만 떠듬거렸다. 말이 나가지 않았다.
“안 돼? 나도 붙일게.”
“……개소리야, 왜.”
한은 황당한 투로 대꾸하며 가득 차오른 당혹감을 숨기려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벌떡 일어섰다.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언제나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습관처럼 도망치는 그를 잡지 않고, 한유일은 친절하게 몸을 틀어 공간을 내어 주었다.
아하하 웃은 그가 ‘아, 아직 안 되는구나.’ 그런 이상한 말을 했다. 한은 뒷문을 열고 나가며 고개를 갸웃 틀었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유일은 오지랖이 넓었다.
학기 시작 전 운동장에서 마주쳤던 그날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 프린트를 주워 줬고, 애들이 대놓고 피하는 한에게 꼬박꼬박 말도 걸었다.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대답에도 늘 웃었고, 불편한 기색을 보여도 모르는 척 다가왔으며, 교실에 혼자 남은 한을 챙긴 일도 몇 번 되었다.
“한아, 오늘 점심 닭갈비래.”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강한은 턱 끝까지 올라온 ‘어쩌라고…….’를 삼키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보통 강한은 반 아이들이 모두 나간 후에야 느지막이 급식실로 향하고는 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고 고요해진 복도에는 대부분 그 혼자뿐이었다. 혹은 오늘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매점을 가려는 애들 몇이나 심부름을 온 다른 학년 몇쯤. 그러니까 이렇게 누군가 옆에 찰싹 붙어 메뉴를 읊는 일은 없었다.
“상수 너는 제육이 좋아, 닭갈비가 좋아?”
“아. 한루나 존나 어려운 질문, 기달…….”
신상수는 반에서 가장 시끄러운 애였다. 유일과는 풍기는 분위기가 정반대인 놈이었으나, 왜인지 둘은 유독 가까웠다. 한유일은 늘 주변에 사람이 많았지만, 정작 매일 붙어 있는 친구는 거의 상수가 유일했다.
“제육이냐, 닭갈비냐, 존나 희대의 난제다.”
자칭 ‘분위기 메이커’라는 명성을 잃지 않기 위해, 상수는 초조한 표정을 연기하며 손톱을 물었다. 닥닥닥, 이 부딪히는 소리에 한유일은 가만히 웃었다.
“한이 너는?”
요란하던 소음이 잠시 멎었다. 제 눈치를 스윽 살피며 조용해진 상수가 웃겨서 한은 더 무뚝뚝하게 답했다.
“닭갈비.”
“한이는 닭갈비가 좋구나.”
“어.”
설마 진짜 같이 먹을 생각은 아니겠지. 한은 불길한 생각을 꾹꾹 누르며 걸었다.
“근데 운동 같은 거 하면 원래, 밥, 막……. 두 그릇씩 먹고 그러는 거, 아니냐…요?”
옆에서 주뼛대며 눈치를 살피던 신상수가 어렵게 물었다. 누가 보면 잡아먹나 싶을 정도로 동공이 흔들거렸다.
“…그럴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안 그래.”
말까지 더듬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강한은 최대한 친절한 투를 사용했다. 그러고는 스스로 닭살이 돋아 얼른 급식실 문을 열었다. 따라붙은 상수는 ‘아, 진짜요?’ 하고 어색하게 답했다. 팔뚝에 돋은 소름이 가라앉지 않을 만큼 민망한 분위기였다.
그때부터 배식을 받을 때까지 한유일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빙긋빙긋 웃으며, 상수나 지나가며 말 거는 애들에게 응해 줄 뿐이었다. 한은 이 성가신 동행을 원한 적 없었으므로 배식을 받자마자 최대한 먼 구석 자리를 찾았다.
“한이는 매번 먼 데에서 먹더라. 자리 많은데.”
끈질기게 따라와 앉은 유일은 그동안 지켜보았다는 듯 말했다. 해맑게 웃으며 한의 건너편에 식판을 놓은 그가 상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 하고 외치는 얼굴이 제법 즐거워 보였다. 이러다가 꼼짝없이 한 무리가 되어 버릴 분위기였다.
“이렇게까지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응?”
한에게 유일은 속을 알 수 없는 모호한 놈이었다. 정확히는 이상하고 희한한, 거부감이 느껴지는 타입이다.
하지만 반에서 그는 착하고 친절한 반장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돈도 많고,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 데다가 훗날 연예인이 될지도 모르는 그런 선망의 대상. 그뿐인가. 소외되는 반 친구들 챙기려 밥까지 같이 먹는 대단한 반장 타이틀도 추가됐으리라.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굳이 적대감을 드러내서는 좋을 것이 없었다. 알면서도 한은 부득불 입술을 열었다.
“네가 반장이라서 이러는 거면 나는 혼자 다니는 게 편해. 아니, 오히려 존나 좋아해.”
지금까지는 반장이라 베푼 호의로 포장이 가능했다. 더 이상 엮이기 전에 그 정도로 정돈하는 편이 서로 깔끔하겠다고, 생각을 정리한 강한은 정 없이 말을 건넸다.
가식이든 진심이든 친절하게 대해 주던 놈에게 굳이 모난 말을 하는 기분이 껄끄러워, 모래가 목구멍에 걸린 듯했다.
“신경 써 주는 건 고마운데. 난 솔직히 친구 필요 없….”
그러나 한유일은 말허리를 툭 자르며 닭갈비 두 조각을 들었다. 제법 커다란 조각을 어렵게 쥔 그가 그대로 한의 식판 위에 올렸다. 붉은 닭갈비 산이 봉긋하게 올랐다.
“닭갈비 좋아한다며.”
유일의 시원한 입매가 벌어지며 양옆으로 동굴이 생겼다. 무척이나 해맑은 웃음이었다.
“허.”
이 새끼는 어떻게 매번 예상을 벗어나지…….
한이 헛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상수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는 길에 말을 조금 텄다고 그래도 바로 옆에 앉은 상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묵직하게 목소리를 내린 그 애가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맛있게 드세요, 형.”
반 애들은 고작 1년, 아니, 몇 개월 차이밖에 나지 않는 한을 큰 형님 대하듯 했다. 깍듯한 인사에 눈앞이 흐려진 한은 입술을 짓씹었다. 한숨을 밀어 넣으려 억지로 밥을 떴다.
사실 조금 더 모질 수 있었다. 정말 귀찮기 싫다면 확실히 끊어 내도 됐다. 그런데 그러기가 어려웠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시발…….’
큰 한숨과 함께 쌀알을 씹는 내내 한의 목구멍에서는 욕이 맴돌았다. 왠지 골치 아픈 짐을 떠안게 된 것 같았다.
***
강한의 불길한 예상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없는 사람 취급하던 반 애들이 이따금 한에게 ‘형, 혹시 반장 보셨어요?’ 같은 질문을 했고, 청소 당번이나 주번 따위의 얘기도 꺼냈다. 특히 주번은 번호 순으로 두 명씩 묶어 돌고 있었다는데 강한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그동안은 무서워서 저를 빼놓고 한 듯했다.
머쓱하고 미안해진 한이 ‘그럼 내가 혼자서 이틀 할게.’ 했더니 애들은 손사래를 쳤다. ‘아, 형, 아니에요.’ 하고 기겁하는 목소리들이 또 지나치게 낮고 엄숙했다. 솔직히 조금 귀엽기도 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한유일과 엮이는 일은 무척 귀찮았다. 해야 할 일이 많이 생겼고, 미리 숙제를 알려 주는 짝꿍도 생겼다. 해야 한다는 걸 알아 버리니 무시할 수도 없어서 숙제도 베껴야 했고, 그러다 보면 수업도 들어야 됐다. 존나게 악순…… 아니, 선순환이었다.
아무튼 귀찮지만 은근히 재미있는 날들이었다. 등하교 때마다 눈에 걸리는 체육관만 빼면, 학교생활은 제법 할 만했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졸업하고 연락 안 하는 놈들이 되겠지만 일단 잘 지내는 편이 나았다. 한은 대체로 단념이 빠른 사내였다.
“형, 근데요. 태권도 왜 그만두셨어요?”
종례가 끝난 후 한유일이 교무실로 간 날이었다. 한은 말이 많은 상수와 함께 교실을 나와 걸었다. 야간자율학습 대신 학원을 택한 애들로 바글바글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며, 한은 대답을 조금 끌었다.
“그냥 뭐 그렇게 됐어.”
아직은 벌어진 상처가 다 무뎌지지 않아서 쉽게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냥 대충 얼버무리자 상수는 ‘아, 넵.’ 하고 좀 민망한 투로 갈무리했다.
“형님. 그러면요. 언제부터 했었어요? 그거 하면 키 커요? 저도 존나 크고 싶은데…….”
그래도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 다시 떠드는 상수 때문에 금방 분위기가 나아졌다. 질문 하나하나가 웃기고 귀여워서 강한은 비식 웃으며 답했다. ‘아버지가 태권도 관장님이셔서 어려서부터…….’ 하고 이어지던 말이 일순 뚝 멎었다.
“아, 니 한루나 따까리잖아!”
“아니라고, 씨바!”
이제 교문이 코앞에 다가온 쯤이었다. 앞에 나란히 걷는 두 놈이 왁왁 싸우는 소리 안에서 익숙한 이름이 꽂혀 들었다.
강한은 순간 눈을 좁혀 얼굴을 살폈다. 나머지 한 놈은 모르는 애였고, 하나는 범철이었다.
“응, 반사.”
“초딩이냐, 씹새야.”
“어, 무지개반사. 너 한루나 따까리.”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한유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뉘앙스가 풍겼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한은 잠시 멈추어 섰다.
“헐, 형.”
덩달아 굳어 서 있던 상수는 한의 표정을 살피다 말고 문득 손목을 쥐었다. 꼬옥 쥐는 손길이 무언의 만류를 하고 있었다.
“왜?”
한은 의아하게 되묻고 얌전히 걸었다. 당장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봐 노심초사하던 상수가 손을 풀어냈다.
민망한 얼굴로 제 손을 얽어 대며 주뼛거리는 그를 두고, 강한은 앞 놈들과 조금 더 거리를 좁혀 걸었다. 혹시 한유일이 범철을 매점으로 데려갔던 날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상수가 걱정하는 대로 유일 대신 복수해 주려거나 한마디 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유일과는 그렇게 대단한 사이가 아니니까.
“아, 그래서 왜 또 지랄인데.”
“시바, 그 새끼가 존나 예민하게 굴잖아.”
“그날이었나?”
“그런 듯.”
이런 수준의 대화를 더 들어야 하나……. 강한은 눈썹을 찌그러트리며 고심했다.
“기껏 지 생각해서 말해 줬더니 암튼 그 새끼 존나 건방져.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선비 새끼. 나대다가 언제 한번 뒤지게 맞지.”
확실히 그날 매점에 데려가 한바탕한 모양이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 상스러운 어투를 참아 가며 한 걸음 내딛는데,
“어! 혀, 형! 집에 가는 길이면 같이 가십시다!”
문득 뒤처졌던 상수가 소리를 쳤다. 무척 이상한 말투에 지나치게 큰 목소리였다. 한이 뭔가 싶은 얼굴로 돌아보는 순간, 범철과 그 옆에 있는 놈도 휙 뒤를 돌았다. 이 학교에서 형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강한밖에 없었다.
역시나 마주친 범철의 얼굴은 아차 싶은 표정이었다.
“어어.”
다가오는 상수는 로봇처럼 팔다리를 휘젓는 중이었다. 웃긴 놈이라고 생각하며 한은 대충 장단을 맞췄다. 앞에서 바싹 굳은 범철이 개미 목소리로 인사했다.
“형, 안녕하세요.”
하루 종일 같은 반에 있다가 이제 하교하는 길이었다. 안녕하냐는 물음은 때에 어울리는 인사도 아닐뿐더러, 범철에게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구태여 지금 그런 인사를 내뱉는 심정이 짐작되어 한은 웃어 주었다. 유일을 흉내 내며 눈을 접고 입술을 끌었다.
“엉. 앞에 있었네?”
일부러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러자 ‘예에.’ 하고 어중된 대답을 내놓은 범철이 친구를 확 끌었다. 빨리 가자며 속닥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렇게 서둘러 사라지는 그만큼이나 신속하게 다가온 상수가 한의 옆에서 헉헉거렸다.
“아, 형이……. 범철이 얼굴 갈아 버릴까 봐 존나 무서웠어요.”
“별로 그렇게까지 유일이 편들고 싶지 않은데.”
입 밖으로 나가는 ‘유일이’라는 말이 몹시 생소했다. 그제야 강한은 제대로 그의 이름을 불러 본 일조차 희박하다고 자각했다.
“헐, 루나 들으면 울 듯.”
확실히 남들이 보기에 한유일은 서운해할 자격이 있었다. 반박하지 않고 끄덕거리며 걷는 한의 옆에서 상수가 계속 중얼거렸다. ‘근데 범철이 쟤가 저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는데.’부터 시작해서 ‘둘이 무슨 일이 있었나?’까지 다양하기도 했다. 한참 그 생각을 듣고 있던 강한은 교문 너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건 모르겠고, 범철이 얼굴은 이미 갈려 있던데.”
무심한 대답에 상수는 잠깐 멈추어 섰다. 속뜻을 해석하느라 길게 째진 눈이 바쁘게 깜빡였다.
“아, 헐, 미칰!”
의미를 뒤늦게 알아챈 상수가 입을 확 틀어막았다. 팍 터져 나온 웃음이 그의 손바닥에 막혔다.
“형 존나 잔인해요……. 제 얼굴 보고도 그런 생각 하시는 건 아니죠?”
“상수는 좀 귀여운 편이지.”
“아, 진짜요?”
또 수줍게 목소리를 내리깐 상수가 몸을 배배 꼬았다.
“형……. 떡볶이 사 드릴까요?”
조금만 더 친했으면 지랄 말라고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 없어서 강한은 웃기만 했다. 나중에 먹자고 답하며 교문을 딱 벗어난 순간이었다.
“강한.”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중후한 눈과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한은 발이 굳은 것처럼 멈추었다.
“너 이 새끼.”
남자는 흡사 이를 갈았다. 턱이 툭 불거진 딱딱한 표정이 태권도부에 있을 때 기억을 불러낸다.
강한은 기합을 받기 전 자주 보았던 그 익숙한 표정에 대고 한숨을 쉬었다. 졸업하기 전까지 만나지 않았으면 했는데, 이렇게 교문 앞에서 덜미를 잡힐 줄은 몰랐다.
“혀, 형.”
재차 놀란 상수는 다시금 한의 손목을 쥐었다. 남자의 풍채와 험악한 인상 때문에 오해를 하는 듯했다. 운동으로 다진 몸과 가만히 있으면 입술 끝이 아래로 떨어지는 하관, 날카로운 눈매 같은 것들은 확실히 그를 만만치 않은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실제로도 그는 엄격하고 칼 같은 성격이었다.
“나 태권도 했을 때……. 감독님이셔.”
“아앗, 안, 안녕하세요.”
“그래, 야. 강한 너는 나 좀 보자.”
감독은 상수처럼 손목을 잡아끌지 않았다. 그대로 한을 지나쳐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몸짓에 망설임이 없다. 강한은 그 단단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도망을 생각했지만, 언제까지나 피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복학 사실을 알아챈 이상 그가 반에 찾아오는 일도 쉬운 일이었다.
“상수 너 먼저 가야겠다.”
“형, 그, 괜찮으신 거예요?”
상수는 무거운 분위기에 겁을 집어먹고 떨었다. 그래서 한은 또 유일을 흉내 내며 웃었다. 입술을 실컷 벌리고 괜찮으니 가라며 달래자, 상수의 낯은 어쩐지 조금 더 파리해지는 것 같았다.
***
강한은 스스로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태권도장을 밥 먹듯 드나들었다.
그에게 태권도는 걷고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같이 아주 당연한 성장의 단계였다. 동시에 전직 국가 대표 선수였던 아버지의 꿈이기도 했다. 아들을 자신의 도장에서 직접 가르치고 또 선수 생활까지 하도록 만드는 것. 그 꿈은 자신과는 합의되지 않은 희망 사항이었지만, 강한은 미리 정해진 미래와 꿈을 제법 잘 받아들였다. 도장에서는 친구도 많이 만들 수 있었고 아버지와도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나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아버지는 자주 자리를 비웠다. 그때부터 도장에는 불행의 향이 피어올랐다. 생전 처음 보는 삼촌들이 도장을 찾아오기도 했고, 오후반 사범님이었던 사람은 ‘밀린 월급 안 주면 신고하겠다.’며 노발대발 악을 쓰기도 했다.
어렸던 강한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버지를 괴롭히는 것 같아 속상했고, 그럴수록 더 열심히 태권도를 연습했다. 자신이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대로 강해지면 그를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아버지가 도박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생각이지만.
마 감독은 아버지의 친구였다.
도장에 심심치 않게 놀러 오던 그에게 어릴 적 강한은 용돈도 자주 받았다. 독특한 그의 성씨를 따 ‘마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잘 따랐다. 하지만 도장이 망하고, 초등학교 고학년에서부터 중학생이 될 때까지는 서로 본 적도 없었다. 홀연히 사라져 버린 아버지 덕분에 접점도 소멸된 터였다.
“얘기 들었다, 인마. ……너도 힘들었을 건 아는데, 그런 때일수록 주변 도움도 받고 그래야지.”
정원고 태권도부에 와서 그를 처음 봤을 때는 얼마나 뜨끔했는지. 혹여 그도 아버지에게 떼먹힌 돈이 있을까 봐, 강한은 지레 겁을 먹었었다. 하지만 그는 눈을 잠깐 키웠을 뿐 지난 세월이나 아버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밥은 먹고 왔냐고 한번 묻더니, ‘어머니는 잘 지내시고?’ 그 말이 전부였다.
“혼자 뭐 어쩌려고 그냥 잠수를 타? 너 내가 너 운동 못 한다고 그냥 쌩 까 버릴 감독으로 보였냐? 엉? 그래? 아니지. 너랑 내가 그냥 감독이랑 선수였어? 인마, 내가 너 병문안 한번 못 가 보고.”
“…죄송합니다.”
그는 화가 나면 목소리가 계속해서 커지는 버릇이 있었다. 차분하게 스스로를 달래며 중얼거리던 그의 음성이 점차 커지다가 다시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혹시 새어 나갈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체육관에는 창고 바로 옆에 교직원실이 있었다. 본관 교무실에 비하면 제법 춥고 웃풍이 많이 드는 곳이라, 문 이곳저곳에 너덜너덜한 테이프 자국이 남았다. 강한은 감독을 따라 문 너머를 힐긋대다가 그냥 제 무릎으로 시선을 내렸다.
화를 삭이려는지 불쑥 일어난 감독은 교직원실 안쪽을 서성이며 돌았다. 한참 그러던 그가 음료수 한 병을 가져왔다. 함께 병실 쓰는 사람들이 지겹도록 나눠 주었던 토마토 주스였다.
테이블 위에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그가 ‘먹어.’ 하고 씩씩거렸다. 괴상한 다정이라고 생각하며 강한은 병을 매만졌다.
“내가 너 몇 반인지도 다 알고 있었어. 찾아갈까 말까 수십 번 고민했는데. 그래도 때 되면 와서 얘기하겠지, 어? 그렇게 참고 참았더니. 이 새끼가, 도둑놈처럼 피해 다니고. 너 애들이랑도 다 연락 끊었다며?”
“……죄송합니다.”
강한이 재차 같은 답을 하는 동안, 감독은 혼자 사투를 벌였다. 스스로도 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숨을 푹푹 내쉬었다가 하늘을 보고, 그러고도 부족해 자기 머리칼을 쥐어뜯기도 했다. 그렇게 난리를 치던 그가 교직원실을 다섯 바퀴나 더 돌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낡은 검정 소파가 푸욱 가라앉았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
누그러진 목소리에 강한은 숨을 크게 삼켰다. 바라지 않는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건강하시고?”
“…예.”
“맘고생 많이 하셨겠네. 병원비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예.”
화기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걱정이 스몄다. 지어낸 친절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한을 걱정하고 있었고, 무엇이든 도울 생각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한은 목울대가 자꾸만 치밀었다.
‘이래서 감독님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한은 애꿎은 음료수 병을 꾹꾹 누르며 입술을 씹었다.
지난 일 년 내내, 큰일이 아니라고 자기 암시를 걸며 버텼다. 하필 상비군 되겠다는 소식을 들은 날에 일어났던 교통사고도, 오래 쉬어 유급해야만 했던 학교도, 병원비 때문에 결국 기숙사형 공장에 들어가신 어머니도.
모두 다 최악은 아니라고 위안했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도 아니었고, 학교는 다시 다니면 그만이었다. 어머니께는 지금도 아르바이트로 도움을 드리고 있고, 이제 조금만 지나면 함께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정말로 괜찮았다. 진짜 힘든 사람들에 비하면, 이런 건 큰일도 아니었다.
“입원은……. 얼마나 했었는데? 몸은 그래도 괜찮아 보이는데. 운동은 정말 못 한다냐?”
제 무릎에 팔꿈치를 걸쳐 놓은 감독이 손깍지를 꼈다. 두툼하고 단단한 손가락들이 손등을 움켜쥐며, 무언가 망설이고 있었다. 금전적인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하라는 얘기일까. 아니면 운동을 다시 시작하도록 도와주겠다는 말일까.
강한은 함부로 예상하다가 먼저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어서 자리를 뜨고 싶었다.
“너 인마.”
“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말을 하고 일어서면 적당히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선수를 빼앗겼다. 목멘 대답을 내놓으며 강한은 숨을 크게 삼켰다. 한마디만 더 참고 들으면 돼, 한마디만.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감쳐물면서 수없이 되뇌었다.
“괜찮은 거야?”
아, 이 질문은 반칙이었다. 눈앞이 순식간에 아뜩해져, 강한은 허벅지를 감싼 바지 원단을 꾹 쥐었다. 코 안쪽이 찡하게 아파 왔다.
“너는 애가 옛날부터, 어디가 아프면 아프다 말을 안 하니까 참….”
한탄하듯 중얼거리는 말에 기어코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막을 새도 없이 툭툭 흘러내리는 눈물을 가리기 위해 강한은 고개 숙였다. 토마토 주스 병을 감싼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쪽팔려서 서러움은 더 짙어졌다.
“재활도 안 한다며.”
“…….”
“운동 다시 안 한대도 재활은 해야지. 몸뚱이가 하루 이틀 쓰고 버릴 거는 아니잖아, 인마. 돈 아껴서 뭐 할래? 돈 아무리 많아도 건강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거야. 혹시 돈 때문에 그러는 거면 감독님이 도와줄게.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일단 몸부터 잘 추스르고. 또 모르잖아, 회복 빨라서 태권도 다시 해도 될지. 너 사람 일 모르는 거다.”
사실 몸은 운동을 그만둔 이유가 되지 못했다. 퇴원하던 날에도 의사로부터 재활을 꾸준히 받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운동을 다시 할 수 있으리라는 답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고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했다. 몸 상태를 이유로 해야만 누구도 말리지 못할 테니까.
“너 이제 곧 졸업이잖아. 대학은 가야지. 이제 와서 수능 공부 시작하게? 특기 살려서….”
“…취업, 할 거예요.”
고집스럽게 이를 악다문 강한은 진짜 이유를 떠올리지 않고 고개 들었다. 붉게 달아오른 눈을 마주한 감독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래, 감독님이 아는 체육관 많아. 거기서 강사 일이라도 좀 배우고 하다 보면은.”
“감독님.”
강한은 교복 바지 위로 툭툭 떨어진 눈물 자국을 눌러 냈다. 바쁘게 말을 잇던 감독이 인상을 찌푸리며 두툼한 손으로 휴지를 건넸다.
“저요. 태권도……. 다시 안 해요.”
강한은 그의 선의와 휴지 모두 받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려 답하며 생각했다.
‘내가 뱉은 말이 나를 상처 줄 수도 있는 걸까.’
고작 태권도를 다시 안 하리라는 한마디 문장에 목구멍 안쪽이 다 할퀴어진 듯 아팠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한은 이제야 준비했던 말을 하면서 일어섰다. 허리를 꾸벅 숙이자 감독이 한의 이름을 탄식처럼 내뱉었다. 그는 그것도 답하지 않았다.
“안 하기로 했어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곱씹어 내뱉은 한은 도망쳐 교직원실을 빠져나왔다. 미적지근한 5월 바람이 울긋불긋한 얼굴에 한 겹 씌워졌다. 아직 하복 입을 때도 아닌데, 숨이 딱 막힐 정도로 더웠다.
***
“간 김에 짐도 빼 올걸.”
또 짐은 그대로 두고 왔다. 맹맹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강한은 아쉬운 대로 화장실만 들렀다. 눈물이 말라 따끔거리는 얼굴에 찬물을 대차게 퍼붓고 나왔다. 그사이에 널따란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한은 지친 걸음을 직직 끌었다. 울음을 한바탕 쏟아 내고 보니 기가 싹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이것도 버릇이 되는 건지……. <루나 더 퀸> 영화를 보고 엉엉 운 게 생애 첫 경험이었는데, 몇 달 되지도 않아 또 남 앞에서 통곡을 하고 말았다.
‘몇 달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태권도를 그만두기로 했을 때도 이렇게 눈물을 쏟아 본 적 없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좀 민망했다. 괜히 애먼 사람에게 감정만 풀어놓고 나온 기분도 들고, 커다란 덩치로 훌쩍대며 걷는 게 대단히 쪽팔리기도 했다. 반쯤은 후련했고 또 반쯤은 멍해서, 강한은 그냥 앞만 보고 터덜터덜 걸었다. 이대로 엎어져 그냥 잤으면 싶었다.
“한아.”
운동장 존나 넓네. 한탄하며 걷던 한이 흠칫 놀랐다. 유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수가 체육관 갔다고 해서 기다려 봤는데. 진짜 마주쳤네.”
하여튼 한유일은 오지랖이 넓어서 문제다. 얼굴 보면 또 무슨 일 있었느냐고 캐묻고, 미주알고주알 다 참견하려 들 텐데. 혹시 정말 음흉한 놈이라면 약점을 삼으려 들지도 모르겠다.
강한은 피로한 얼굴을 슥 쓸어내리며 뒤를 돌았다. 멀리서부터 하하 웃으며 달려온 유일이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같이 가면 되겠다.”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살피던 그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늘 곱게 웃던 얼굴이 미간을 좁히자 다른 사람 같았다. 그래서 강한은 맥없이 보기만 하다가, 뒤늦게 다시 돌아섰다.
“어.”
무뚝뚝한 대거리에 조용히 서 있던 유일이 나란히 보폭을 맞췄다.
“상수가 내일 떡볶이 먹자더라. 끝나고 뭐 해?”
“못 먹어. 알바 있어.”
“아르바이트하는구나. 어디서?”
“편의점.”
“그러니까 어디 편의점. 가까워?”
유일은 예상대로 귀찮은 질문을 던져 댔지만, 왜 울었는지에 대해서 묻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운 게 맞는지조차 확인하지 않아서 강한은 의아해졌다. 화장실에서만 해도 운 티가 역력했던 얼굴이 그사이 가라앉았나 싶었다.
“왜.”
“놀러 가려고.”
“무슨, 편의점에서 뭐 하고 놀게.”
그런데 교문을 지나 걸어가는 길. 은근슬쩍 주차된 차창에 비춰 본 얼굴은 여전히 불어 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흰자도 그대로라서 강한은 어금니를 강하게 물었다. 아무튼 여러모로 쪽팔린 날이었다.
“그냥 뭐. 한이 보러 가는 거지.”
“너 친구도 많으면서 왜 이렇게.”
질척대냐, 나한테?
하마터면 필터도 없이 그렇게 말할 뻔했다. 가까스로 참아 낸 강한은 볼을 긁적거렸다. 괜한 놈에게 분풀이할 필요 없다.
“네 친구들이랑 놀아.”
“너도 내 친구잖아.”
겨우 한 살 차이로 유세 떠는 게 민망스러워서 말을 까라고는 했지만, 한유일은 정도 이상으로 자연스럽게 굴었다. ‘친구 아니고 한 살 많거든.’ 그렇게 덧붙이려던 강한은 유치한 것 같아서 참았다.
할 말이 똑 떨어져 더운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여간 공부 잘하는 새끼들은 말을 너무 잘해서 문제다. 등신같이 음료수 뺏겼을 때나 좀 그렇게 대들지.
“한아. 그런데 편의점 아르바이트 하면, 사람들이 번호 많이 안 물어봐?”
집 방향이 같지 않은 듯한데 유일은 자연스럽게 동행했다. 익숙한 골목을 전혀 익숙하지 않은 놈과 함께 걷는 게 생소해서 한은 괜히 속도를 붙였다.
“물어봐.”
“아, 역시.”
“뭐가 역시야. 그냥 물어보는 거야. 다 그래.”
“다? 아닐걸.”
“알바 하면 다들 겪는 거라니까.”
아닌데……. 한유일은 빙긋 웃으며 말끝을 늘이다가, 어느 골목 어귀에서 멈추어 섰다.
“준 적 있어?”
여전히 웃는 얼굴인 채로 묻는 목소리는 언젠가 들어 봄 직한 투였다. 강한은 눈물이 말라 따끔해지기 시작한 눈가를 긁적거리며 답했다.
“아니?”
그야 민우가 있으니 줄 이유도 없었다. 한은 희망 고문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퉁명스러운 대답에 유일이 어딘가 흡족한 얼굴로 끄덕이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강한 역시 여전히 눈 한쪽을 벅벅 비비는 채로 걸었다.
“그러면 상처 나.”
바쁘게 살갗을 긁던 손이 일순 붙잡혔다. 깜짝 놀란 한과는 달리 유일은 아주 느긋한 얼굴이었다. 예의 자상한 미소를 지은 그가 붙잡은 손을 내려 그대로 흔들었다. 마치 연인들끼리 손장난을 치는 듯한 모양새다.
“……뭐 하냐?”
기겁하고 빼내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아 강한은 그냥 그렇게 물었다.
“손잡는데?”
문제 있느냐는 듯 대답한 유일은 조금 더 손을 크게 흔들었다. 아예 손바닥끼리 꽉 맞물리도록 고쳐 잡고 흔드는 모양새에 강한은 허망한 눈만 깜빡거렸다. 아니, 이런, 짓을, 왜……. 사람이 너무 황당하니까 말도 나오지 않았다. 뒤늦게야 ‘이런 건 네 여자 친구랑 해.’ 하고 말을 준비했는데, 한유일이 한발 빨랐다.
“울고서 자꾸 만지면 덧나.”
여상한 투로 말한 그가 포스터 속의 루나처럼 웃었다. 그래서 강한은 말문이 탁 막히고 말았다.
***
다음 날 학교에서 만난 한유일은 평소와 같았다. 그래서 강한 역시 아무 티를 내지 않았다. 울었다는 사실을 들킨 것도, 별스럽게 손을 잡았던 것도 다 잊어버린 척 굴었다. 그렇게 무덤덤한 척 행동하느라 또 왜 밥을 같이 먹는지는 따져 묻지도 못했다.
“한루나, 그래서 우리 이따 끝나고 떡볶이 먹는 거야?”
상수는 밥을 먹는 중에도 음식 얘기를 했다. 그래서 강한은 짧게 웃었고, 유일은 어깨를 으쓱 올렸다.
“한이 안 된대.”
“왜? …요?”
눈이 번쩍 커진 상수가 한을 돌아보며 높임말을 덧붙였다.
“알바 가.”
사실 아르바이트가 문제이기 전에, 셋이 함께 떡볶이를 먹으러 갈 이유 자체가 없었다. 언제 이렇게 자연스럽게 무리가 된 건지. 강한은 황당한 숨을 삼키면서도 따져 묻지 않았다. 어제 울음기 묻은 얼굴을 들킨 것이 마치 약점처럼 신경에 거슬렸다.
“아…… 넵.”
군더더기 하나 없는 대답에 시무룩해진 상수는 아욱국을 마구 떠먹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팍 들고, ‘무슨 알바요?’ 하고 물었다.
“편의점.”
“헐, 형 알바하시는 줄도 몰랐음요.”
“말 안 했으니까.”
“아… 맞네요.”
또 할 말이 떨어진 상수가 고개를 숙였다. 호로록, 연달아 국물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근데 내가 왜 너네랑 떡볶이를 먹….”
뒤늦게라도 의견을 피력해 보려 했지만, 중간에 말이 멈췄다. 상수가 지구 멸망을 앞둔 사람처럼 너무 허망하게 쳐다봐서이기도 했고 갑작스레 전화가 온 탓도 있었다. 일단 서운해하는 상수를 달랠 방법이 없어 강한은 얼른 핸드폰을 들었다.
액정에는 민우 이름이 떠 있었다.
“네, 형.”
혹여 하트 모양을 상수에게까지 들킬까 싶어 부리나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민우가 커다랗게 ‘한아아아….’ 하고 외쳤다. 순간 한은 급식실 정중앙에 커다랗게 자리한 전자시계를 확인해야 했다.
“형, 혹시 취했…어요?”
낮 한 시도 안 된 시각에 그럴 만한 사람은 아니라,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러자 애절하게 절규하던 민우가 하하 웃었다.
[아니, 아니, 술주정은 아니고. 형이……. 맞다, 한이 너 지금 학교지? 통화돼?]
“네.”
[미안, 갑자기. 그게 아니라…. 형 내일 알바 대타 좀 해 주면 안 될까?]
“내일요?”
대낮에 술을 들이마신 줄 알고 심장이 덜컹했는데, 싱거운 용건이었다. 얕은 숨을 길게 내쉰 한은 가만히 끄덕이며 답했다.
“네, 괜찮아요. 낮에요?”
[응, 진짜 미안해. 정말 괜찮아?]
“저 할 것도 없어요.”
[아, 진짜 한이 너밖에 없다. 형이 사랑하는 거 알지, 어?]
관용구나 다름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은 조금 고개를 숙였다. 저절로 벌어지는 입술을 애써 내리다물며, 쑥스러운 웃음을 작게 삭였다.
“뭘요. 끊을게요.”
마음을 숨기는 데에는 짧은 대답이 최고였다. 일부러 무뚝뚝하게 답하며 통화를 끊고도, 한은 잠깐 아래를 보고 있었다.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들고 싶지는 않아서.
“형 있으세요?”
표정을 갈무리하는 사이 궁금증을 참지 못한 상수가 물었다. 강한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아니라고 답했다.
“같이 알바 하는 형.”
짝사랑이나 첫사랑 같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렇게 줄였다. 상수는 금방 ‘아.’ 하고 흥미 뚝 떨어진 얼굴로 식사를 했다. 하지만 한유일은 달랐다.
“몇 살인데?”
“대학생이야.”
“아아.”
난데없는 질문을 하더니 그는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유별난 반응에 강한은 의아해했다가, 신경 쓰지 않고 잔반을 긁어모았다. 더는 퍼먹을 게 없는 상수도 자리를 정돈하는 중이었다.
“군대도 갔다 왔대?”
“어? 아니?”
“그럼 곧 가시겠네.”
“…뭐, 그렇겠지?”
유일의 말대로 민우의 입대는 멀지 않은 이야기였다. 최근 들어 민우 스스로 ‘군대 존나 가기 싫다.’ 하고 직접 말한 적도 여러 번이라, 강한도 어렴풋이 그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도 생판 모르는 남이 궁금해할 이야기는 아닌데. 나란히 일어서 잔반을 버리러 가는 동안, 강한은 역시 한유일이 참 특이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럼 한이 힘들겠네.”
“엉?”
그가 얼마나 특이하고 속을 알기 어려운지. 여러 순간들을 회상하며 생각에 빠져 있던 한은 반 박자 느린 대답을 했다. ‘뭐가 힘들어?’ 되물어 보려는 때에 회로가 돌았다.
‘민우 형이 군대에 가면…… 내가 힘들겠다고?’
질문의 뜻을 깨닫는 순간 온 신경이 파드닥 뛰었다.
“내, 내가 왜?”
설마 이 새끼 눈치챘나?
강한은 깜짝 놀라 말까지 더듬었다. 그러나 정수기 앞에 서서 컵을 꺼낸 한유일은 아주 느긋했다. 상수와 한에게도 컵을 하나씩 나눠 준 그가 웃었다.
“그 사람 일까지 해야 할 거 아니야.”
왜 그렇게 놀라. 하고 덧붙이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청명했다.
“……아, 뭐. 그때까지 알바 하겠냐.”
펄떡거리는 심장을 숨기기 위해 강한은 농담조로 덧붙였다. 하지만 물을 받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은 감출 수가 없었다. 식은땀이 주룩,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
아르바이트는 고정 시간이 따로 없었다.
보통은 오전, 오후, 야간 파트타임을 따로 구하지만 사장이 직접 아들과 운영하는 편의점인지라 사정이 달랐다. 그 둘이 시간이 안 되는 때에만 아르바이트가 필요했고, 그러자니 아무렴 돈만 벌면 되는 강한이 적격이었다.
한은 평일과 주말 가리지 않고 부르는 날마다 출근했다. 학교를 다니기 전에는 새벽부터 오전 타임까지 연달아 해낸 적도 있었다.
그러니 겨우 주말 오후 대타가 힘들 리 없는데…….
「한아 ㅜㅜ 덕분에 살았다. ㄱㅅㄱㅅ」
「여친 생일 까먹고 있다가 어제 생각나 가지고;;」
근무 시작 때 도착한 메시지 덕분에 김이 샜다. 짝사랑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는 작은 뿌듯함이 순식간에 초라한 심정으로 바뀐 탓이다.
담배를 정리하고 한 번, 김밥 유통 기한을 챙기고 또 한 번, 비어 있는 음료 자리를 채우고 또 한 번. 메시지 답장을 쓰다 말고 지우기를 반복하던 한은 괜히 저장명 설정 창으로 들어갔다. 그의 이름 뒤에 붙은 하트를 노려보며 지웠다가, 다시 붙였다가. 구질구질하게 굴던 손가락이 끝내 핸드폰을 던지지도 못하고 멋없게 내려놓았다.
남자를 좋아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민우를 좋아하기 전까지는 강한 역시 한 여자와 결혼한 미래를 쉽게 상상하고는 했었다. 남자를 좋아할 수 있으리라는 경우의 수 자체가 없던 인생이었다.
예외로 등장한 민우는 썩 특별한 사람도 아니었다. 가을의 편의점,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갔던 날 처음 만났고, 후드 티셔츠를 즐겨 입는 대학생 형이었으며, 웃을 때는 아픈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가 하는 농담은 자주 웃겼고 가끔 경솔했는데, 그마저 밉지 않다고 느꼈을 때 강한은 처음으로 감정의 격통을 만났다.
갑작스러운 깨달음 이후 일주일 동안은 별생각을 다 했다. 오죽하면 생전 방문해 본 적 없는 사이트에 들어가 질문 글을 올리기도 했었다. 어떤 사람은 ‘님이 지금 힘들어서 아무나 의지하고 싶은 거임 ㅇㅇ’이라고 달았고, 어떤 사람은 ‘동경 아닐까요?’ 하고 말했다. 강한 역시 그들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발작하듯 뛰는 심장은 좀처럼 다스려지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격통은 짝사랑의 필수 요건까지는 아니었다. 단념을 정한 후로는 요란한 파도도 잠잠해졌다. 어차피 이룰 의지도, 가능성도, 생각도 없는 마음이었다. 홀로 간직하다가 서서히 꺼트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어떤 것도 너무 아프거나 유별나지 않았다.
「너무하네.」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무뚝뚝한 얼굴로 탓하는 말을 써 넣었던 한이 그래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은 전송 버튼 근처조차 가지 않았다.
‘한유일이 괜히 헛소리를 처해서.’
괜히 중얼거리며, 그 자식은 아마 돌려받지 못하는 마음에 대해 잘 모르리라고 생각했다. 남 탓을 하고도 편치 않은 마음으로 일하는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한아!”
내내 답장하지 않아서일까. 퇴근을 코앞에 둔 저녁때. 기껏 대타를 부탁한 보람이 없게도, 민우는 편의점에 들렀다. 평소와 다르게 셔츠를 입은 멀끔한 모양새였다.
“…안녕하세요.”
놀라 커졌던 한의 눈이 슬그머니 제자리를 찾았다. 그를 따라 들어서는 혜주를 본 직후였다.
“와, 한이가 거기 있으니까 담배 진열대가 작아 보인다.”
반갑게 손을 흔든 혜주는 그렇게 말하며 웃고, 음료수 냉장고 방향으로 떠났다. 그녀 역시 플래시몹을 하며 보았던 날들에 비해 꾸민 차림새였다. 생일 기념 데이트가 꽤 근사했던 모양이다.
“한이 너 오늘 주급 받아야 하는 날이잖아. 아빠도 야간에 알바 불렀대서, 내가 챙겨 주러 왔지.”
“……그거 때문에 일부러 온 거예요?”
“그래, 데이트 중간에 친히 형님이 행차해 주셨다.”
끅끅 웃은 민우는 백룸에 들어가 노란 봉투를 가지고 나왔다. 늘 현금으로 받아 가는 한을 위해 점장이 특별히 사 놓은 것이었다.
민우는 노랗고 얇은 봉투 안에 바람을 훅훅 불어 넣었다. 한 손으로는 봉투의 각을 잡아 놓고, 한 손으로는 포스 아래 돈 통을 열어 지폐를 꺼냈다. 그쯤 혜주는 음료 세 병을 들고 돌아왔다.
“이만큼 맞지? 세어 봐.”
열 장이 겨우 될까 말까 싶은 지폐 뭉치였다. 얄팍한 노란 봉투를 받아 들며, 강한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일을 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뿐인데 왜인지 초라한 마음이 짙어진다.
“…됐어요. 얼른 다시 데이트하세요.”
“야아, 한아, 갑자기 대타 부탁해서 화났어? 응?”
민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가오는 바람에 한은 성큼 물러나 섰다. 발밑으로 초록색 플라스틱 상자가 지익 끌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자, 혜주가 민우 뒷덜미를 잡았다.
“일하는 사람 그만 괴롭혀! 가자.”
모순적이게도 이 순간 한은 그녀가 무척 고마웠다. 노란 봉투를 뒷주머니에 욱여넣고, ‘가세요.’ 낮게 웅얼거렸다. 민우는 거의 끌려 나가는 중에도 몇 번씩 돌아보았다. 그에게만큼은 표정 굳히는 법이 별로 없는 강한이 낯설어 그런 듯했다.
꼬리 긴 그가 유별나게 문을 잘 닫고 나간 저녁. 한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그대로 교대자를 맞이했다. 처음 보는 삼촌뻘 아저씨였고,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 나오는 길에는 벌써 길가가 어둑했다.
「한아ㅜㅜ 진짜 화났어? 무슨 일 있어?」
민우의 문자에 답장은 하지 않았다. 다만 뒷주머니에 넣어 둔 노란 봉투를 꺼내 앞으로 옮겼다. 두툼한 주머니가 걸을 때마다 거슬렸다.
한은 아르바이트 급여를 주급으로 받았다. 강한을 제 둘째 아들처럼 생각하는 사장은 돈을 모으려면 월급으로 받는 편이 더 좋다고 몇 번이나 충고해 주었지만 그것만큼은 꼭 고집했다. 한두 달에 한 번, 불규칙적으로 집에 찾아오는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녀가 올 때마다 한은 그 노란 봉투를 그대로 건넸다.
하필 오늘이 두어 달에 한 번 있는 그날이었다. 정말이지, 하필이면. 짝사랑의 데이트를 위해 대타까지 뛰어 준 오늘 말이다.
그 때문에 주급을 다음에 받겠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초라한 액수에 비해 봉투는 이상하리만치 무거워서, 걸음이 자꾸 느렸다.
강한이 혼자 사는 집은 원래 모친과 함께 살던 곳이었다. 학교와는 걸어서 딱 십오 분 거리. 정원시의 번화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외지지는 않은 주택가. 골목 양쪽으로 불법 주차 차량이 늘어서 있는 곳의 자그마한 빌라였다. 그 옅은 갈색 벽돌 빌라의 2층에서는 한이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 불빛이 보였다.
모친은 정원시와 네 시간가량 떨어진 지방에서 일을 했다. 원래는 같은 회사의 수도권 지부에 있었지만, 한이 갑작스레 장기 입원을 하게 되면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해졌으므로 이동은 불가피했다.
지방의 기숙사형 공장은 지원자가 많지 않아 급여가 훨씬 높았고 숙식도 해결할 수 있었다. 대우도 좋은 편이라 자녀의 학비를 지원해 주고 시설까지 최신식이라는데, 그럼에도 강한의 마음은 도통 가벼워지지 않았다. 자신이 그녀를 사지로 모는 것만 같았다.
문을 열기 전, 한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우중충하게 몰고 온 먹구름을 모두 털어 내기 위함이었다.
“늦었네. 너 저기서 걸어오는 거 보이더라.”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는 오히려 전보다 더 젊어 보였다. 지난번 공장에 젊은 애들이 많아 더 어려지는 기분이라며 농담하던 것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손부터 씻고 나와, 밥 먹게.”
탱글탱글한 파마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그녀가 거실 상 위로 냄비를 올렸다. 강한은 어색하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주머니를 재차 더듬거렸다.
“네.”
한 박자 늦은 대답을 하면서 강한은 슬쩍 노란 봉투를 상 위에 밀어 올렸다. 즉시 홱 째려보는 눈빛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화장실로 도망을 쳤다.
사실 그녀와 강한은 가깝고 친밀한 사이는 되지 못했다. 특히 부친이 집문서와 통장을 들고 나갔던 쯤에는 관계가 급격히 나빠졌다.
그 시절 그녀는 대뜸 대낮에 술을 마시거나 오밤중에 들어와 소리를 치는 식으로 강한에게 화풀이를 했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음에도.
그러나 한은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남긴 빚의 정확한 숫자를 이해하게 된 나이부터, 그가 가지고 떠난 집문서가 사채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어마어마한 숫자들이 삶에 주는 무게가 얼마나 묵직한지를 체감한 순간부터. 강한은 절대 그녀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
서로의 편이 서로뿐인 삶이었다. 그럼에도 마주 앉아 수저질 몇 번 하는 시간이 어색하다.
돈을 벌기 위해 집을 자주 비우는 엄마와 태권도부 합숙 생활이 훨씬 길었던 아들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두어 달에 한 번, 의무처럼 이루어지는 자리조차도 민망한 기운이 맴돌기 마련이었다. 모자는 서로를 마주할 때마다 케케묵은 죄책감을 누르느라 바빴다.
“간 맞아?”
“네.”
오늘 역시 메뉴는 불고기였다. 강한은 일부러 큼지막한 고기를 입 안에 넣으며 끄덕거렸다.
어릴 때에도 대회에 나가는 날에는 항상 불고기가 식탁에 올랐다. 그보다 더 특별한 생일이나 명절에는 갈비찜이었다. 그것이 그녀만의 어떤 표현 방법이라는 것을, 강한은 병원 냉장고에 꼬박꼬박 채워지는 불고기를 보고서야 알았다.
“몸은?”
“좋아요.”
“아르바이트는 언제까지 하게? 고삼이. 그만두지?”
“어차피 대학 갈 성적도 안 되는데요, 일하는 게 좋죠.”
“꼴통들도 다 가던데 뭐. 학비 걱정 말고 어디든 가 봐.”
“돈 때문이 아니라… 아무튼요.”
무뚝뚝한 그녀가 비식 웃으며 잔을 건넸다. 아무리 그래도 고등학생인데 술을 권하는 손이 자연스러워 강한은 웃었다. 씁쓸한 속내를 투명한 술에 털어 넘기고 모친의 잔을 다시 채웠다.
“방학 되면 편의점 말고 다른 데 알아보려고요. 기술 배워서, 취직 빨리 해야죠.”
자신이 얼른 밥값을 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모친은 몇 년이나 더 힘든 일을 해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한의 속은 끝 간 데 없이 컴컴해졌다.
“공부는 못해도요. 돈 많이 벌어서, 쉬게 해 드릴게요.”
“무슨. 엄마가 동안인 이유가 다 사회생활을 해서 그런 거다, 너.”
그녀가 스스로 ‘엄마’라고 칭할 때마다 강한은 미안해졌다. 그 말이 그녀에게 지기 어려운 짐을 자꾸 얹어 주고만 있는 것 같아서 싫었다.
침울해진 얼굴을 바라본 모친이 한숨을 쉬었다. 동그랗고 보기 좋은 이마 위에 뾰족한 손가락이 꿀밤을 놓았다.
“아!”
“짜식이 엄마 말도 안 듣고.”
눈앞에 별이 잠깐 번쩍할 정도로 매운 손맛이었다. 수저까지 내팽개친 한이 이마를 부여잡자, 그녀는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하고 싶은 것부터 하고 살아. 돈 걱정 좀 그만하고. 우리 그렇게 가난하지 않아.”
“그래도요.”
고집스럽게 대답하며 강한은 또 한 번 불고기를 집어넣었다. 그녀의 말이 별로 믿기지 않았다. 입 안으로는 지겹도록 익숙한 양념 맛이 달큼하게 고였고, 이마는 여전히 아릿했다. 달콤하고 매운 이상한 저녁이었다.
***
끝의 향기에 민감한 사람이 있다.
어떤 관계나 상황의 끝자락에서만 나는 씁쓸한 냄새. 눈에 보이는 상황이나 물적인 증거보다도 더 분명한 공기의 색깔 같은 것. 떠나는 사람의 발끝에 묻은 체취 같은, 그런 냄새를 기민하게 알아채는 사람이 분명 따로 존재한다고 강한은 생각했다.
-한아, 집에 엄마 계시니?
강한이 처음 끝자락 냄새를 맡은 날은 봄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불안한 음성이 무척이나 기묘하게 들렸던 날.
어머니의 부재를 알아낸 부친은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집에 왔다. 무려 석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반가워하는 한을 밀어내고, 무언가를 찾기 바빴다. 이따금 쌍소리까지 씹어 가며 세간을 뒤엎던 그는 마침내 원하는 것을 얻어 낸 듯했다. 가방에 네모난 통장과 도장, 어떤 문서 같은 것들을 쑤셔 넣고 현관에 섰다. 그때 한이 올려다본 아버지는 아주 다른 사람 같았다.
-한아, 엄마 잘 챙겨 드리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수척해진 얼굴에서 강한은 처음으로 이별의 냄새를 맡았다. 이대로 아버지를 보내면, 평생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아버지 금방 올게. 응?
그러나 부친이 상냥하게 얼러 주는 바람에 믿는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가 떼어 내는 손길을 따라 바짓단을 놓아주었다. 이상하고 불길한 예감은 그저 기분이니까. 금방 오겠다고 장담했으니까.
그렇게 스스로 달래며 참아 낸 보람이 없게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친에게는 무척 미안한 일이지만, 오랫동안 강한은 아버지가 밉지 않았다. 오히려 은연중에 기다리며 그가 돌아오기를 바랐다. 보고 싶었다. 다시 돌아와 상비군에 거론될 정도로 좋아진 태권도 실력을 봐 주기를 원했다. 예전처럼 호탕하게, 도장 위 매트에 저를 눕혀 놓고 장난쳐 줬으면 싶었다. 그러면 가족은 금세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끝을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버티고 마는 성격은 왜일까.
강한은 무엇이든 끈질기게 끌고 가는 힘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끈기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미련이라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그저 나약함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린 일도, 태권도를 놓지 않은 일도, 민우에게 보답받을 리 없는 마음을 쭉 이어 온 것도 모두 다 그랬다. 아직 진짜 끝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아서 비겁하게 미뤘을 뿐이다.
***
“또 싸웠어. 솔직히 오기 싫었는데…….”
민우는 멀리 선 혜주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췄다. 어쩐지 그녀도 오늘따라 냉담하고 울적한 얼굴이다. 이전에 편의점에서 보았던 다정하고 행복한 커플 같지 않았다.
한은 어색한 표정으로 민우와 혜주를 살피다가 그냥 시선을 돌렸다. 끝자락에서 나는 차가운 냄새가 어디에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싸웠다고 안 나온 거냐고 할까 봐 왔거든. 한이 너라도 있어서 살았다.”
한숨을 푹 내쉬는 민우 뒤편으로는 술집들이 즐비했다. 대낮이라 대부분 닫힌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화려하고 지나치게 복잡한 상가였다. 의미 없이 건물을 감상하던 한은 아래로 고개를 내렸다. 보도블록 위에는 담배꽁초와 타액 자국이 눈살을 찌푸릴 만큼 가득했다.
‘오늘도 바닥에 누워서 뭐 하는 건 아니겠지…….’
강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민우의 팔뚝을 툭 쳤다. 묻고 싶지 않은 질문이라 나오는 데까지 이토록 오랜 뜸이 필요했다.
“왜 싸웠는데요?”
죽상을 쓰고 있던 민우가 그제야 조금 화색이 돌아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혜주가 워낙 짜증이 많은데 그날따라 심했고, 비가 왔고, 그녀의 생리통 투정을 더는 봐줄 수 없었고……. 무신경하게 쏟아져 나오는 단어들이 한을 찜찜하게 만들었다.
“친구들도 다 혜주 편이라, 나 지금 완전 왕따야.”
방금 들은 말에서 그가 외톨이가 된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강한은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짝사랑의 수집 품목은 아주 섬세하고 다양하다. 고작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자그마한 순간들도 모두가 정보이자 수집품이 되었다. 그렇게 강한이 차곡차곡 모아 놓은 증거에 의하면, 원래 민우라는 사람이 그랬다. 사람을 좋아하고 정이 많은 동시에 조금 가벼운 면이 있고, 타인의 사랑을 바라는 동시에 철저히 이기적인 성격이었다.
민우는 대부분 다정하고, 착하고, 투박하지만 그만큼 정이 많은 남자였다. 물론 ‘너 게이냐?’ 하는 말을 농담으로 쓸 만큼은 무신경하고, 여자 친구의 속상한 마음을 유난으로 취급할 만큼은 경솔하다. 강한 역시 그의 농담이 마음에 뾰족하게 걸려,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날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당장에 싫어질 만큼은 아니었다. 어느 누구나 단점은 가지고 있으니까, 잘 모르니까, 그냥 하는 말이니까. 그런 이유로 강한은 언제나 민우의 말에 웃어 주었다. 그런데 왜인지 오늘만큼은 혜주의 냉담한 시선 앞에 부끄러워졌다.
“그래도 형, 먼저 사과하는 편이 좋겠는데요.”
한은 은근하게 그녀를 뒤돌아서며, 민우를 설득했다. 민우가 입술을 쭉 내민 채 ‘너까지 이러기냐.’ 하고 투덜거렸다.
“늦기 전에 해요.”
사과도, 이별도 다 적당한 때가 있는 법이다. 강한은 괜히 머쓱한 얼굴을 숙여 감추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날도 따뜻한데 이상하게 손끝이 차고 한기가 느껴졌다. 정작 본론은 꺼내지도 못한 입술이 더듬더듬 느리게 열렸다.
이제 그만둘 때가 됐다. 편의점도, 구질구질한 짝사랑도. 어차피 처음부터 끝은 예견되어 있었다. 편의점도 임시였고, 짝사랑은 애초 생명력이 없었다. 코끝을 감도는 안녕의 냄새를 더는 모른 척하기도 어렵다. 민우의 여자 친구 앞에서 노란 봉투를 받던 순간부터 그 향은 더욱 짙어졌다.
이번만큼은 더 지지부진하지 않기로 했다. 강한은 긴장한 숨을 삼키며 ‘저.’ 하고 서두를 떼어 냈다.
“응. 한이 너 요즘 무슨 일 있어? 오늘도 쭉 표정 안 좋더라.”
그런데 고작 이만한 걱정이 마음을 흔들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에 강한은 의미 없이 입술만 더듬거렸다.
“아, 그게…. 그러니까.”
이제 편의점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준비했었다. 그런데 짐짓 애틋한 민우의 낯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강한이 어물쩍 말을 흐리는 사이,
“조민우! 시간 다 됐어.”
멀리 혜주가 손을 흔들며 말허리를 잘라 냈다. 어서 오라고 부르는 표정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마음이 풀려서인지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굳이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기 싫어서인지는 몰랐다. 한이 머뭇거리는 때, 민우는 벌써 얼굴이 활짝 펴 있었다.
“아, 기분 좀 풀렸나 보다. 어! 지금 가!”
종일 울적하게 투덜거리기만 하던 민우의 얼굴에 빛이 파다했다. 그와 비례해 한의 긴장한 입술은 천천히 다물어지고 있었다. 끊긴 말을 채근하지 않은 채, 민우는 급하게 앞서 걸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혜주가 떠나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그래도 우리 혜주가 마음이 약해.”
벌써 들뜬 목소리에 킬킬거리는 웃음이 섞였다. 강한은 함께 웃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랐다. 민우가 해 준 걱정에 자존심도 없이 기쁘던 마음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느린 걸음마다 상실감이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맞다, 한아, 뭐라고?”
한참을 걸어, 마침내 혜주가 코앞에 있을 때에서야 민우는 돌아보았다. 천진한 얼굴에는 이미 걱정 같은 것은 모두 사라진 채였다.
편의점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려 했다. 형을 좋아하는 일을 그만하겠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으니까. 아르바이트를 먼저 그만두면 눈에서 멀어질 테고, 애초 희망도 없었던 짝사랑 역시 쉬이 접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회피는 언제나 한의 도피처였다.
그러나 입술을 떼려고 할 때마다 상상 속에서 민우의 아쉬운 얼굴이 발목 잡았다. ‘왜? 갑자기? 언제?’ 같은 질문을 하면서, 조금 전처럼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을 그가 눈앞에 선했다. 민우가 그렇게 물으면 냉정하게 쳐 낼 자신이 없어서, 한은 자꾸 말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어쩌면 그런 상상마저 도망을 버릇으로 하는 성격 때문일지 모른다고 자조하던 마음에 불이 붙었다. 울컥, 상처받은 마음이 객기를 부렸다.
“……저, 다음 플래시몹은 못 나갈 것 같아요.”
그나마 뱉은 용기가 겨우 ‘다음 플래시몹’이었다.
“아, 어응, 그래!”
민우는 이유조차 묻지 않고 애매하게 대답했다. 함께 플래시몹을 하자며 조르던 때는 다 잊은 듯이.
너무 쉬운 대답에 한은 헛웃음을 삼켰다. 코끝으로 자꾸만 차갑고 서늘한 냄새가 맴돌았다. 누군가의 뒷모습에서 나는 그런 향이었다.
***
첫사랑을 짝사랑으로 시작했지만, 힘들고 괴롭다 여기지는 않았다. 종일 그를 떠올리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에 눈물 흘린 적 없었고, 드라마나 영화 속 이야기에 자신을 대입해 보지도 않았다.
한의 짝사랑은 담백했다. 남들보다 민우를 볼 때 조금 더 오래 시선이 머무르는 정도에 그쳤다. 그래서 끝이 다가와도 딱 그만큼만 따끔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었다.
강한은 틈이 날 때마다 민우의 이름을 떠올렸다. 짝사랑을 할 때보다, 그만두려고 하는 지금 떠올린 횟수가 더욱 많았다. 그의 이름은 떠올리는 순간 머릿속을 하얗게 물들이는 폭죽이었다. 저절로 이목구비가 굳었고,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사고마저 멍하게 돌아가, 오늘 역시 자연스럽게 함께 앉은 상수와 유일을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식판에 받은 메뉴가 무엇인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형, 그……. 지난번에요.”
유독 조용한 식사 한중간. 맞은편에 앉은 상수가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주눅이 잔뜩 들어 있는 얼굴을 보고서야 한은 억지로 얼굴을 이완시켰다. 더 말해 보라는 눈빛에 상수는 더듬더듬 덧붙였다.
“감독…님? 따라가서, 혼나셨어요?”
질문은 아주 느리게 이해되었다. 한은 고개를 느리게 틀고 ‘어?’ 하고 물었다가, 상수의 빠르게 깜빡이는 눈과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유일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기를 한참 후에야 탄식이 흘렀다.
“아, 그때 봤지.”
맥없는 답을 하고, 또 멀뚱멀뚱. 강한은 오래된 기계처럼 느리게 답을 끌어 올렸다.
“안 혼났어.”
천천히 답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한의 눈에 미역국이 들어왔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말을 피하기 위해 수저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입 안에 넣고, 씹고, 삼키는 과정을 반복하면서는 속으로만 민망해했다.
처음부터 희망조차 가지지 않았던, 매일 끝을 준비하며 보내온 감정을 이제 막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뿐인데. 상수마저 표정을 살피고 눈치를 볼 정도로 티를 냈나 싶어 머쓱했다.
“감독님?”
조용하던 유일이 그렇게 물으며 한의 식판 위에 닭튀김을 올렸다. ‘뭐냐?’ 물어보려던 한의 입술이 뚝 멎었다. 상수가 뒤이어 뱉는 말이 수수께끼 같았다.
“그날 못 봤어? 형 기다렸다며. 집에 같이 갔다고 자랑하더니.”
눈을 가늘게 뜬 한이 유일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자랑할 일 따위를 만들어 준 기억이 없었다. 둔하게 기억을 더듬어 가던 강한은 문득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모두 이어지는 얘기였다. 상수가 감독을 마주쳤던 날. 청승맞게 울어 제낀 후 한유일을 마주쳤던 귀갓길. 소금기 가득한 얼굴을 들키고, 무척 이상하게도 손까지 잡았던 그날.
순식간에 수치를 닮은 열기가 얼굴을 확 찌그러트렸다.
“아……. 나랑 마주쳤을 때는 한이 혼자였어.”
유일 역시 조금 떨떠름한 말투였다. 느릿한 대답 안에 망설임이 가득해, 한은 코웃음을 쳤다. 이제 와서 손까지 잡은 것은 이상했다는 자각이라도 들었는지, 발 빼는 모양새다. 아무래도 그 요상했던 스킨십은 충동적인 위로였던 듯싶다.
“그렇구나. 나 솔직히 첨에 형이 무슨…. 어디 파 같은 데. 조폭, 그런 거, 들어가신 줄……. 감독님 인상이 막 으음청 살벌하셔서.”
“그런 오해 많이 받으셔.”
“그렇죠? 제가 이상한 거 아니죠? 아니, 그 막 조폭 역할 자주 하는 배우 있잖아요. 갑바 쩔고, 키는 쫌 작지만 근육 개 쩌는 형. 아시죠? 그 형님은 어깨가 문틀에 걸린대요. 암튼 감독님 첨 보고 그 사람인 줄…….”
“좀 닮았지.”
“네! 네! 진짜 닮았어요! 아, 형도 그렇게 생각하셨구나.”
한껏 신난 상수는 입에 모터를 단 것처럼 떠들었다. 이상하게도 그게 그렇게 밉지 않아서, 한은 비식 웃으며 대꾸하고 마저 식사를 이었다. 민우를 떠올리느라 우중충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환기되는 듯했다.
“근데 형, 뭔 일 있으세요? 오늘 좀 무서우셔서……. 저는 감독님이랑 그렇게 가시고, 뭐 일 있으셨나 했는데요. 그거 아니면요, 뭐 다른 일이라도….”
본론은 이 말이었던 듯, 상수는 높아졌던 목소리를 슬그머니 낮추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라고 어깨까지 잔뜩 긴장해 추켜세운 채,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 그가 신기해서 한은 낮게 웃었다.
“없어. 상수가 재롱떨어서 좀 나아.”
모순적인 대답에 상수가 펄쩍 뛴다.
“아, 혀엉!”
“밥 먹어.”
“저 지금 솔직히 좀 설렘……. 형 완전, 햐, 진짜.”
정말로 얼굴이 새빨개진 상수는 두 손으로 덥석 입을 막았다가 부채질까지 하며 유난을 떨었다. 그에 한은 조금 웃고, 다시 식판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넵!”
자신만만하던 상수는 대답과 동시에 숟가락을 날렸다. 급식실 바닥을 시끄럽게 울리는 소음에 뜨악한 상수가 ‘아이고, 아이고.’ 괴상한 추임새를 넣으며 달려 나갔다. 새 숟가락을 가져와 앉은 그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두 배 더 붉어져 있었다.
하여간 웃기는 놈.
강한은 소리 없이 웃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원하던 친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혼자이던 때보다는 조금 나은 것도 같았다.
“나 한이랑 예전에 만난 적 있어.”
그때 문득, 내도록 고요하던 한유일이 대뜸 선언했다. 식사에 집중하던 상수와 한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같은 반 된 거 알기 전에.”
“어, 진짜? 어디서?”
“있어.”
유일은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뚱하게 대답했다. 비장하게 말을 꺼내 놓고 갑작스레 화제를 마무리하는 태도가 황당해, 상수가 눈을 크게 떴다.
“……뭐임?”
“한이는 알 거야.”
한겨울 운동장. 휘날리던 갱지. 촬영 중인가 싶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던 남자애.
기억이 안 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왜 꺼낸단 말인가? 그것도 저렇게 떼쓰는 어린애처럼.
“…아, 교과서 받으러 왔다가 마주쳤어.”
결국 설명은 한의 입에서 나왔다. 궁금해 죽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는 상수에게 설명하는 동안, 유일은 고개를 숙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를 이어 가는 얼굴이 반질거렸다. 묘하게 승리감이 맴도는 것도 같은 표정이다.
설마 이 새끼 지 모르는 얘기 했다고 이러는 건가…….
꽤 합리적인 의심에 강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튼 세상만사 자기 뜻대로 되던 놈의 생각이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3학년 첫 중간고사.
시험 때문에 학교 분위기가 온통 붕 떠 있었다. 한은 나름대로 챙겨 온 유인물을 몇 번 훑어보다가 이내 평소처럼 책상 위에 엎드렸다. 민우와 관련된 생각이 자꾸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어 심란했고 동시에 시험이라는 행사 자체가 피로했다.
기실 평생 시험은 그에게 남의 일이나 다름없었다. 시험 범위도 모르는 채로 답을 찍고 자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고, 오답 노트나 벌 같은 것도 예외로 빠지기 일쑤였다. ‘대회 준비 중이니까.’ 그런 변명을 선생님들이나 같은 반 애들이 대신 해 줬다. 남들이 학생의 본분이라고 말하는 공부를 태권도가 대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의 강한 또한 그때와 다를 바 없다. 수업 시간에는 잠을 자고, 시험은 대충 찍고 엎드려 잤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대신 변명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고작 태권도 하나가 빠졌을 뿐인데, 열심히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학생에서 문제아로 뒤바뀐 기분이었다.
노력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열아홉까지 태권도만 보고 살아온 그에게 입시 공부는 쉽지 않은 산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손을 놓고 살던 공부가 몇 주 벼락치기로 대뜸 잘될 리도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뜻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온통 머리를 헤집었고, 새벽까지 붙들고 있어 봤자 나아지는 점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라고, 강한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매사 껄렁거리는 창현조차도 ‘아! 3번 답 그거라고?’ 외치고 있는데, 저만이 이 분위기에서 쏙 빠진 듯했다.
반면 한유일은 시험 기간에 유독 더 부각되는 인물이었다. 종례 시간이 되면 반 애들은 한유일을 닦달했다. 종이 치는 즉시 ‘한루나!’, ‘반장!’ 외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그러면 그는 으레 그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교무실을 향해 달렸다. 답안지를 받으러 가는 것이었다.
한유일이 교실로 돌아오면 애들이 환호를 질렀다. ‘야, 마지막 문제 답 뭐야?’ 하고 격앙된 목소리로 새치기를 하려는 애들도 있었다. 그러면 한유일은 말없이 웃으며 뒤를 돌았다. 먼저 답해 주지 않고, 자기 얼굴만큼 하얀 분필을 쥐어 칠판에 답을 써 내려갔다.
그는 운동도 곧잘 하고 성적도 무척 좋았지만, 글씨만큼은 그다지 잘 쓰지 못했다. 큼직하고 분명하되 조금은 초등학생 같은 숫자들이 나열되었다. 그래도 그가 적는 숫자 하나에 탄식과 환호가 동시에 흘렀다.
그 틈에서 강한은 할 일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모두 찍고 잤으니 답을 채점할 필요도 없었고, 반장처럼 감투를 쓴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시험지 중간마다 ‘민우 형’, ‘슬슬 그만할 때가 됐지.’, ‘알바 그만둔다고 언제 말할까.’ 같은 낙서를 수십 개씩 해 놨기 때문에 증거를 바로 인멸해야 했다.
그래서 시험지도 없는 빈 책상에 앉아 멍하게 있으면 유일은 가끔 힐긋 돌아보았다. 의미 모를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 이상한 표정으로 실실거리던 한유일은 마지막 날, 기어코 한에게 다가왔다. 그가 칠판 위로 답을 쓰기만을 기다리던 반 애들 시선이 모조리 꽂혔다.
“한아. 내 시험지 채점 부탁해도 돼?”
깔끔하게 비어 있던 책상 위로 커다란 시험지가 놓였다. 아주 적당한 세기로 사뿐히 종이를 내려놓은 유일이 씩 웃었다. 강한은 눈썹을 꿈틀 들어 올렸다.
‘지는 손이 없나?’
괴팍한 생각이 솟았다가, 며칠 내내 애들 답을 칠판에 써 주느라 정작 자기 것은 종례 후에나 채점하던 그가 떠올라 입술을 꾹 물었다.
“펜 줘.”
“아, 여기.”
펜이 없을 것도 예상한 것처럼, 그는 한의 손바닥 위에 곧장 빨간색 볼펜을 올려 두었다.
“고마워.”
그러고서는 또 입술이 시원하게 벌어지는 웃음을 지었다. 인상 가득 찌푸린 얼굴에 대고 웃는 낯이 비위도 좋았다. 칠판을 향해 돌아가는 그를 따라서, 다시 반 애들의 시선도 방향을 바꾸었다.
“그럼 쓸게.”
오늘따라 생전 하지도 않던 말을 덧붙이며 한유일이 방긋 웃었다. 빨리 쓰기나 하라며 성화가 빗발쳐도 웃기만 하며, 그는 천천히 하얀 글자를 써 내려갔다. 정말이지 재수 없게도 그 숫자들은 한이 쥔 시험지와 정확히 맞아 들어갔다. 마지막 문항까지도, 오답 개수는 하나도 없었다.
강한은 괜히 심술이 나서 100점이라는 숫자는 써 주지 않았다. 맨 앞 장에 ‘-0’이라는 표기를 조그마하게 쓰고 끝냈다.
“한아, 고마워.”
답을 모두 쓰고 돌아온 유일은 이미 아는 듯이 점수를 묻지 않았다. 손에 묻은 하얀 분필 가루를 털어 내고, 시험지를 아주 소중히 받아 갔다. 하기야 소중하게 여길 점수이기는 했다.
“자랑하려고 채점 시켰냐?”
“응? 자랑? 어떤 거?”
한유일은 늘 이런 식이었다. 해맑게 되묻는 얼굴에 할 말이 똑 떨어진 강한이 고개를 저었다. ‘됐다.’ 작게 속삭이며 손을 무성의하게 휘저었다. 가라는 의미였는데, 한유일은 도리어 조금 더 가깝게 서서 웃었다.
“그냥 나는 한이 심심해 보여서.”
“그래, 존나 고맙다.”
“오늘도 알바 해? 상수가 떡볶이 먹자고 했는데.”
그놈의 떡볶이. 강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유일의 입에서 아르바이트 얘기가 나오니 자연스럽게 민우가 떠오른 탓이다.
“어.”
“그러면 주말에는?”
“…토요일?”
“응, 토요일에.”
학교에서 매번 점심을 같이 먹는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주말에 약속을 잡잔다. 지금도 애들이 유일의 행방을 제게 물을 때나, 범철이 무리에서 쫓겨난 패배자처럼 흘깃거릴 때마다 도통 적응되지 않는데.
“꼭 나까지 껴서 먹어야겠어?”
“음…….”
나름대로 순화해 묻자 한유일은 답을 끌었다. 도톰하게 오른 입술이 양옆으로 길어지며 반듯해졌다가, 씁쓸한 미소를 담았다.
“싫구나?”
혼잣말을 닮은 질문은 무척 쓰게 들렸다. 얼굴에 머금은 미소 때문에 더더욱.
“아, 뭐, 싫다는 게 아니라.”
싫은 게 아니면 뭔데. 한은 당황해 얼버무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든지. 저녁에는 편의점 나가야 돼.”
“그럼 한 시에 만날까?”
이제 거절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강한은 느리게 고개를 주억였다. 표정은 신발 속에 불편한 이물감이 느껴지는 사람처럼 찜찜했지만.
“응, 좋다.”
한유일은 무엇에 당첨이라도 된 것처럼 웃었다. 언제 쓸쓸한 표정이었냐는 듯, 하얀 얼굴이 흐트러지는 모양새가 보기 썩 나쁘지 않았다.
토요일 한 시, 한유일과 상수를 만나 떡볶이를 먹기로 약속했다.
현실과 몹시 동떨어진, 지나치게 건전하고 무척이나 재미없을 듯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강한은 왜인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유일이 너무나 루나를 닮아서인지, 아니면 그래도 겉으로나마 가장 친절했던 놈이라 그런지, 매번 남들에게 퍼 주기만 하는 모습이 바보 같아 그런지……. 여러 이유를 추측해 보던 강한은 그냥 고개를 저었다.
“나 먼저 간다.”
서둘러 일어나 자리를 벗어났다. 한유일은 붙잡지 않고 ‘한아, 잘 가.’ 하고 인사했다. 명랑하기 짝이 없는 투였다.
***
“한루나 평균 99점이래요. 재수 없어.”
상수가 노래를 부르던 떡볶이는 집에서 먹던 불고기보다 두 배 더 달았다. 강한은 설탕 씹어 먹는 기분으로, 느리게 턱을 움직였다.
“열심히 했으니까 그렇지, 상수야.”
먹기 싫은 기색을 알아챘는지 한유일은 슬쩍 음료수 잔을 밀어 주었다. 그러면서 싱긋 웃어 보이는 얼굴이 과연 상수 말대로 재수가 없었다. 강한은 바람 빠지듯 웃으며 ‘은근히 할 말 다 하면서 사네.’ 하고 생각했다.
“나도 열심히 했거든?”
“그럼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하자.”
“……아, 존나.”
해사하게 웃는 얼굴에 전투력이 푹 꺾인 상수는 애꿎은 떡볶이에 화풀이했다. 포크 하나로 떡을 네 개나 집어내서는 한 번에 욱여넣는다. 입과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채, 그는 유일을 째려보았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만사 쉬운 줄 아냐. 그럴 수 없는 사람도 있….”
토라진 듯 웅얼대던 상수가 슬며시 말을 늦추었다. 동그란 눈동자에 아차 하는 감정이 스몄다.
“…아니, 뭐, 네가 노력했으니까 된 거겠지만…….”
이어 덧붙인 말은 타인이 듣기에도 구차했다. 도란도란 나름대로 잘 굴러가던 테이블 위 기류도 삐걱거릴 만큼이었다. 결국 한숨을 폭 내쉰 강한이 떡볶이를 두어 개 집었다.
“한유일 너 생긴 게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지며 턱짓으로 유일을 가리켰다. 눈만 깜빡이는 조각상처럼 고요하던 유일이 고개를 틀었다. ‘나?’ 하고 묻는 낯에 조금이나마 온기가 차올랐다.
“어어. 너 얼굴 때문에 그런 오해 많이 받겠다고.”
“만사 쉽다는 오해?”
한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유일은 느긋하게 웃음을 담았다. 기다란 몸이 의자에 등을 더 기대앉았다.
“그런가?”
마치 왕좌에 앉은 듯 느른한 말투와 표정, 거만한 자세가 방금 뱉은 말에 근거를 더했다.
강한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유일이 밀어 주었던 음료를 마셨다. 그 사이에서 바싹 굳어 있던 상수가 땀을 뻘뻘 흘렸다.
“아이, 야아. 미안하다. 내가 말 잘못했다. 부러워서 그래. 괜히 내가! 이 주둥이가!”
쭉 내밀어 놓은 제 입술을 연타한 상수는 울상을 지었다. 이목구비가 모조리 아래로 축 늘어진 채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꽤나 당황스러워 보였다. 모르기는 해도 스스로 가지고 있는 줄 몰랐던 생각이리라고, 강한은 짐작했다.
유일에게는 ‘오해’라고 표현했지만, 기실 강한 역시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한유일이 남들보다 유리한 출발선에서 나아가고 있으며 인생이 훨씬 수월하리라는 생각은 오해보다는 기정사실에 가깝도록 취급되었다. 하지만 구태여 당사자 앞에 드러낼 필요 없는 생각이었다. 한유일의 잘못도 아닐뿐더러, 세상 누구도 타인의 열등감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인간은 언제나 편을 나눈다. 꼭 겉으로 드러나는 싸움을 하지 않더라도, 속내에서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승패를 가르기 때문이었다. 강한은 유일을 처음 만났던 날부터 당사자는 알지도 못할 승패를 겨뤘다. 그건 본능이었다. 처음 겪을 때는 낯설기만 했던 열등의 기분은 어느덧 횟수를 늘렸다.
친절하고 느긋한 성격이나 재력, 한눈에 봐도 호감을 사는 인상, 걱정 없이 늘 여유 있는 태도, 성적, 분위기, 지위, 꿈……. 수없이 많은 항목들이 모조리 패배를 기록했다. 이따금 크게 차이도 나지 않는 체급이나 힘 따위를 들어 억지 승리를 취해 보기도 했지만, 더 비참한 기분만 들 뿐이었다.
패배를 조금 덜 쓰리게 만드는 방법은 합리화였다. 그가 더 가진 것들, 자신은 선택할 수 없었던 것들. 그런 항목들을 나열해 벽을 치고 다른 세상을 만들었다. 한유일은 언제나 그곳의 사람이었고 지금처럼 서서히 가까워진들, 영원히 같아질 수는 없었다.
“괜찮아.”
유일은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무엇을 바르지 않아도 붉은 입술이 보기 좋게 벌어졌다.
“아냐……. 나 완전 별로였어. 범철이 같았어. 나가 죽어야 돼.”
범철이 유일에게 갖는 열등감은 너무도 투명해서 상수조차 알아챈 모양이다. 한은 고개 숙이며 목 안쪽으로만 웃었다.
“그렇게 미안하면 이거 상수 네가 사.”
“그래! 또 뭐 더 시켜라.”
“그럼……. 김말이, 군만두, 야채튀김이랑. 치즈 추가도 할까?”
떡 몇 개만 둥둥 떠다니는 떡볶이에는 이제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유일은 복수처럼 많은 메뉴를 읊었다.
“진심이니?”
메뉴판을 노려보며, 상수가 속닥거렸다. 그에 유일이 진지한 낯을 풀고 웃었다.
“응.”
“구라지? 어?”
“아닌데.”
“어차피 못 먹을 거잖아!”
“더 시키라며?”
“아니, 그건 그런데, 배부르면서…….”
“그럼 빈말이었어? 상수야, 실망이다.”
“아이 씨, 그냥 시켜!”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딱 애들 같아서 한은 숨죽여 웃었다. 떡볶이를 앞에 두고 다투는 고등학생이라니. 그 틈에 섞여 앉아 있는 자신이 무척이나 이질적이라 웃음은 점점 더 깊어졌다.
“아니야, 됐어. 그냥 팝콘이나 사.”
“팝콘? 영화도 보게?”
영화라니. 남자 셋이 모여 떡볶이에 영화? 그건 좀……. 조용하던 강한이 끼어들었다.
“응. 예매했어, 내가.”
이미 예매까지 마쳤다는 유일의 얼굴은 제법 설레 보였다. 미소 지은 그의 얼굴과 아무렇지 않은 듯한 상수의 반응에 강한은 입술만 벙긋거렸다. 이들에게는 별로 유별나지 않은 코스인 듯했다.
“나 알바 시간 애매할 것 같은데. 그냥 둘이 봐.”
“아, 형. 얘랑 둘이서 영화 보면 이상하잖아요.”
아니구나. 펄쩍 뛰는 상수 반응에 강한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가 이상해. 남자끼리는 영화도 못 봐?”
유일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더니 시계를 확인했다. 삼십 분 뒤 상영이니 알바 시간까지는 넉넉하다며, 답지 않게 고집을 부린 그가 먼저 일어섰다.
“요즘 세상에 발을 좀 맞추자, 상수야.”
화사하게 웃으며 한 마디 한 유일이 카운터로 향했다. 상수에게 으름장을 놓았던 것과는 달리 먼저 지갑을 꺼내 들면서. 멍하게 있던 상수는 뒤늦게 쫓아가 ‘야! 내가 산다니까!’ 하고 소리쳤다. 그럼에도 한유일은 카드를 내밀며 웃을 뿐이었다. 불순물이 하나 들어 있지 않은 깨끗한 웃음이다.
요즘 세상에 발을 좀 맞추자고…….
아직 테이블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강한은 유일의 말을 한참 곱씹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내지 못했던 문장이었다. 짝사랑하는 민우가 장난처럼 ‘게이냐?’ 같은 말을 해도, 남자 둘의 조합을 언제나 징그럽다고 여겨도. 농담으로라도 한은 그의 탓을 하지 못했다. 남자를 좋아해 버린 탓에 겪는 당연한 곤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일은 별로 대단치도 않은 듯이 쉽게 그런 말을 했다. 분위기를 깨지도 않고, 관계를 경직시키지도 않은 채.
“한아, 나가자.”
계산을 마친 유일이 손을 흔들었다. 실랑이를 끝냈는지 상수와 어깨동무를 하고 서 있었다. 한은 아주 작게 ‘어.’ 하고 대답하면서, 또 한 번 유일이 모르는 패배를 기록했다.
***
그날 두 녀석은 기어코 한을 편의점까지 데려다주었다. 이해할 수가 없을 만큼 간지러운 행동이었는데, 형이 일하는 편의점이 궁금하다는 상수의 말도 안 되는 투정에 말렸다. 그렇게 민우와 인사까지 나눈 둘은 한참 편의점을 둘러보더니 이것저것 사 가기도 했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매출을 올려 주겠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아르바이트생에게는 하등 도움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강한은 굳이 꼬집지 않았다. 그저 유일과 상수가 올려놓은 음료수와 과자들을 계산하고, 봉지에 담아 줄 뿐이었다. 이미 교대를 마친 민우는 처음 만나는 한의 친구들이 궁금한지 자꾸 옆을 맴돌았다. 그 때문에 한의 낯은 자꾸 굳어졌다.
상수와 유일도 초면의 대학생이 편치 않아 보였다. 민우가 쓸데없이 어디 사냐는 둥, 축구는 좋아하냐는 둥 질문할 때마다 애들은 주뼛거렸다. 특히 한유일은 자꾸 굳은 얼굴로 민우를 흘깃거리더니, 계산을 마친 봉투 안에서 과자와 음료수를 하나씩 꺼내 가판대 위에 두고 나갔다. 일하면서 먹으라며 그가 두고 간 과자에는 루나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지 별명이라고 샀나…….’
평일 밤, 편의점이 유독 고요한 날이다. 강한은 그날부터 쭉 포스기 옆에 놓여 있는 과자 상자를 툭툭 건드렸다. 어쩐지 선뜻 먹고 싶지 않아 며칠째 이대로였다.
그때 문득 유리문이 벌컥 열렸다. 활짝 열린 틈 사이, 요란스럽게 떨리는 종 밑으로 고등학생 남자애들 여럿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정원고 교복이었다.
강한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낮게 인사하며, 방금까지 의자 노릇을 하던 초록색 플라스틱 상자를 지익 발로 밀어냈다.
“헐, 존나 무양심!”
“설마 두 개 골랐냐, 양심 없는 새끼야?”
한바탕 축구를 하다 왔을 게 분명한 땀 냄새가 멀리서도 느껴졌다. 강한은 좋을 때라며 나이답지 않은 생각을 하고 왁자지껄한 무리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그 틈에, 비죽 솟아 있는 커다란 애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아, 왜. 한루나가 다 먹어도 된다 했거든?”
한유일이다. 이 편의점은 학교와도 멀고, 이 동네에서는 여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데. 일부러 찾아온 게 분명해 강한은 피곤한 얼굴로 미간을 쓸었다. 귓가를 울리는 시끄러운 소음들이 두통을 일으키는 듯했다.
“너 잘났다, 거지새끼야.”
“뒤질래?”
“싸우는 사람은 안 사 줘.”
다행스럽게도 한유일의 단정한 경고 하나로 무리는 고요해졌다. 가라앉은 놈들이 숙덕거리는 채 너 때문이네, 나 때문이네 하며 카운터로 다가왔다. 한은 여전히 피로한 눈 그대로 매대 위에 올라오는 음료만 찍었다.
“어엇.”
두어 명이 알아본 듯 이상한 추임새를 넣었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 한아.”
하지만 이렇게까지 반갑게 이름을 부르면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강한은 내키지 않는 얼굴을 슬쩍 들어 ‘어.’ 대답하고 마저 바코드만 찍었다.
“오늘도 아르바이트였구나. 몰랐어.”
“……어엉.”
“형, 안녕하세요…….”
머뭇거리던 애들도 그제야 인사를 했다. 안 그래도 우중충한 목소리 끝이 잔뜩 내려가며 바닥을 찍는다.
“와, 정말 몰랐네.”
무척이나 어색한 분위기 속, 한유일만이 홀로 밝았다.
“…13,600원.”
“여기.”
“봉투 줘?”
“응.”
한이 봉투를 꺼내 들자 유일이 다가와 도왔다. 몇 되지도 않는 음료를 나눠 담으니 금방이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은 봉투를 슥 밀었다. 그쯤에야 민망하게 서 있던 애들이 우르르 몰려와 봉투를 앗아 갔다.
그러고는 또다시 ‘형, 안녕히 계세요…….’ 하고 침울한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래도 강한이 ‘응.’ 하고 곧장 대답해 준 것은 이제 나가겠구나 싶은 안도감 때문이었다.
“먼저 나가, 나 잠깐 할 말이 있어서.”
불청객까지 물러 놓은 한유일과의 독대를 바라서는 절대 아니었다. 한은 필사적으로 ‘네가? 나랑? 여기서, 굳이?’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애들은 그저 끄덕이며 나갔다. 반에서 유독 친한 사이처럼 치대 온 유일의 노력 덕분인 듯했다.
“한아, 나 부탁 있는데.”
“……부탁?”
한유일이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모습은 본 적 없었다. 그는 언제나 모두에게 부탁이나 요청을 받는 해결사에 가까웠다. 그런데 부탁이라니.
‘그것도 나한테?’
친구도 많은 놈이 굳이. 강한은 저만이 들어줄 수 있을 법한 부탁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하며 헛웃음을 쏟았다.
“뭔데?”
들어나 보자 싶은 표정으로 그는 비딱하게 섰다. ‘상수한테 부탁하지, 왜.’ 같은 말을 미리 준비해 놓은 채였다.
“나 담배 한 갑만 사 줄 수 있어?”
그런데 있었다.
강한만이 들어줄 수 있을 법한 부탁이.
“……어?”
“법을 어기는 건 좀 싫어서.”
대신 사 주면 그게 달라지나?
한은 하도 황당해서 비딱하니 섰던 자세까지 다잡고 유일을 응시했다. 멀거니 선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런데 유일은 민망해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눈을 딱 키우고 ‘아!’ 하며 웃었다.
“당연히 돈은 내가 내. 한이는 성인이니까 살 수 있지?”
그야 물론 가능했다. 구매뿐인가, 당장 편의점 밖에 나가 뻑뻑 피워 대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한유일은 다르다.
이놈은, 그러니까 이 자식은……. 반…장이니까?
눈썹을 꿈틀, 움직인 강한이 미간을 쓸었다. 이유가 너무 빈약했다.
사실 평소 강한은 미성년자의 흡연 여부에 그다지 관심 없었다. 교복 입고 길거리에서 보란 듯 피워 대거나, 신분증을 위조해 가게에 피해를 주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조용히 숨어서 몰래 피우는 것까지는 누가 상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상수가 절절매며 부탁했다면 ‘새끼. 그러니까 키가 안 컸지.’ 하고 사다 줬을 것이다.
하지만 한유일은…….
그렇게 모범적인 새끼가, 저렇게 착한 눈동자로, 굳이? 왜?
“왜 한 갑인데?”
흡연과 생김새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 게다가 반장인 건 또 무슨 문제고.
강한은 스스로 느끼는 충격에 논리가 없음을 인지하며 개소리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구할 수 있을 때 많이 구해 놓으면 좋을 텐데, 한유일은 특이하게도 딱 한 갑만을 말했다.
“한 번이면 될 것 같아.”
한 번만 펴 보고 싶다는 말인가?
강한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바로 뒤에서 하나 꺼내 계산해 주면 그만인데, 참 손이 쉽게 나가지를 않았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렇게 생겨서 왜, 아니, 반장이라는 놈이, 모범생 짓은 다 하더니…….’ 같은 정돈되지 않은 논리들만 둥둥 떠다녔다.
“야, 근데 너 데뷔 준비한다고 안 했어?”
그러다가 불현듯 머릿속에 불이 탁 켜졌다. 적절한 이유가 있었다.
“어, 한이도 알고 있었구나.”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데? 강한은 속으로만 헛웃음을 쳤다.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아주 큰 잘못이라도 하는 것처럼 숨죽이며 인상을 쓰자, 유일은 잠시 고개를 갸웃 틀었다. 그러다가 곧 ‘아아.’ 하며 시원한 입매를 늘인다. 고요하게 웃은 그가 덧붙였다.
“내가 피우려는 건 아니야.”
그 말에 한은 자신이 무척 과잉 반응을 한 것 같은 이상한 수치를 느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뒤로 돌아 아무 담배를 꺼내 찍었다.
“야, 아무리 그래도 교복 입고 있는데 주기는 그렇다. 내가 따로 줄게.”
“그래 줄래? 고마워.”
그냥 처음부터 학생이 무슨 담배냐고 발광을 하고 말았으면 되는데. 논리 따지다가 말려들고 말았다. 강한은 한숨을 내쉬며 찍었던 담배를 멀리로 슥 밀었다.
“계산은 먼저 해 둘게.”
친구들 음료수를 계산했던 그 카드가 다시 내밀어졌다. 한은 카드를 쥔 하얀 손가락과 단정한 얼굴, 그리고 매대에 내려놓은 담배를 번갈아 보았다. 부질없는 짓이었으며, 이토록 충격받을 일도 아니었다. 한은 스스로의 과민 반응에 피로감을 느끼며 계산을 완료했다. 그러고도 유일은 나가지 않았다.
“어려운 부탁이었을 텐데 들어줘서 고마워. 꼭 보답할게.”
“……너 친구들이 기다리는 것 같은데.”
교복을 입고 담배 하나 사 달라고 부탁하는 학생.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한유일은 지금 아주 불량한 놈이었다. 고작 몇 달 어린 그에게 훈계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끓어, 강한은 유리문 너머를 턱짓했다. 창에 붙은 촌스러운 시트지 건너에 우르르 서 있는 놈들이 안을 흘낏대며 눈치를 주고 있었다.
“응, 아르바이트 수고해.”
유일은 담배 같은 것은 부탁한 적도 없는 얼굴로 맑게 웃었다. 고집스럽게 ‘알바’가 아닌 ‘아르바이트’를 선택하는 어휘마저 무척 그다웠다.
그래서 한은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혹시……. 저 새끼 누구한테 괴롭힘당하나? 담배 사 오라고.’ 같은 유추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 같아서.
***
사람은 다면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어떤 사람도 늘 똑같은 성격만을 지니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은 평생 자기 자신의 성격을 다 모르는 채로 사는지도 몰랐다.
“아, 한루나 이 새끼 때문에 존나 망했다고.”
교탁 바로 앞은 담임이 정한 한유일의 지정석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쉬는 시간마다 애들이 몰려드는 곳이기도 했다.
한유일은 웬만해서는 선을 긋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를 아는 누구나 그와 연관이 있다는,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친하다는 착각을 하기 마련이었다. 덕분에 교탁 바로 앞자리는 늘 시끌벅적했다.
몰려드는 애들은 다양했는데, 대부분 서너 명에서 많을 때는 열댓 명이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범상치 않은 대화 주제가 함께였다. 이를테면 옆에 있는 여고의 누가 한유일에게 고백했다든가, 그가 또 길거리 캐스팅을 받았다든가 하는.
“다 된 밥이었는데. 야, 존나 솔직하게 내가 이 새끼보다 못한 게 뭐냐.”
오늘은 창현이 고백하려던 여자애가 한유일에게 편지를 줬다는 것이 화제였다. 자극적인 주제 덕분에 반 애들 거의 대부분이 거기 몰려 있었다.
“솔직히 여자들은 한루나 같은 기생오라비 스타일보다 나 같은 타입 더 좋아하지 않음?”
창현은 유일을 은근히 깔보며 우월감을 느끼는 놈이었다. 척 봐도 반에 하나씩 괴롭힐 놈을 잡아 놓고 서열 놀이를 하던 버릇이 드러났다. 하지만 체격이나 반의 위치상으로 한유일이 아주 만만한 상대는 아니기에 선을 지키는 듯했다. 대신 꼬박꼬박 별명을 쓰고 친근함을 방패 삼아 은근한 조롱을 하기 일쑤였다.
‘혹시 저 새끼한테 담배 바치나?’
창가 맨 뒷자리. 구석에 앉은 한은 턱을 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야, 편지 뜯어봐. 뭐라 썼냐?”
창현의 웃음에 섞인 열등감을 반 애들은 모두 읽은 듯했다. 그 전까지 환호하며 법석을 떨던 애들이 슬슬 조용해졌다. 괜한 매점 핑계를 대며 몇몇이 빠져나가고, 유일이 일어섰다. 아직도 웃는 얼굴이었다.
‘지 먹이는 줄도 모르고 좋다고 웃는다.’
강한은 혀를 차는 대신 소리 없이 한숨 쉬었다.
“얘들아, 곧 선생님 오셔.”
“그러니까 빨리 뜯어보라고. 보자, 좀.”
“그래도 남이 쓴 편지인데 어떻게 그래. 창현아, 수업 종 쳤어.”
도덕책이 살아서 말을 한다면 저런 느낌일까. 강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반장이 창현의 성격을 살살 긁고 있었다.
“아, 새끼. 선비 납셨네. 누가 한루나 아니랄까 봐, 계집애처럼.”
아니나 다를까. 웃음기가 반 지워진 창현은 곧 주먹이라도 올릴 기세였다. 그 싸하게 가라앉은 기색에 주변 아이들이 눈치를 보며 흩어졌다.
“그런 말 자주 들어.”
일촉즉발의 상황. 팽팽하던 긴장의 끈을 탁 잘라 버린 것은 한유일이었다. 눈을 접어 웃은 그의 대답에 창현은 전의를 상실한 얼굴이었다. ‘이 새끼 뭐지?’ 하는 표정에 강한은 몹시 공감했다. 유일은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었다.
“야, 창현이 뭐 하냐. 앉아라.”
때마침 들어온 담임이 아니었다면 큰일이 났을지도 모르는데, 유일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채였다. 심지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가는 창현에게 ‘그치, 선생님 금방 오실 것 같았어.’ 하고 웃어 주기까지 했다.
‘저 눈치도 없고 자존심도 없는 새끼…….’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한은 유일을 그렇게 결론 내렸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한유일은 밟은 놈 발을 닦아 줄 새끼였다. 갑갑한 숨을 크게 삼킨 한은 ‘아무래도 반장이 담배 심부름을 하는 것 같다.’는 추론에 무게를 실었다.
***
한유일은 자기가 피우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고 했지만, 차라리 거짓말인 편이 나았다. 담배 심부름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만약 정말 담배를 사다 바치고 있는 거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한유일은 약점 잡힐 것이 많은 애였고, 창현은 그를 뭉개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놈이었다. 요구 사항이 담배까지 왔다면 이미 더 큰 괴롭힘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아, 나 매점 갈 건데 뭐 먹을래?”
혹은 괴롭혀지는 줄도 모르고 있다거나.
강한은 멀거니 서 있는 유일을 올려다보았다. 깜빡이는 눈이 무척이나 순종적이라, 무엇을 사다 달래도 다 줄 것만 같았다.
“왜?”
아무리 주머니 사정이 여유롭다고 해도 한으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행위였다. 왜 이렇게 나서서 을이 되려고 한단 말인가. 누구보다 갑의 위치에 있을 수 있는 놈이.
“…사 주고 싶으니까?”
유일은 특이한 질문을 받은 듯이 웃었다. ‘안 돼?’ 하고 덧붙여 묻기도 했다. 한은 제 짙은 눈썹을 긁적거리며 한숨 삼켰다.
“어. 너 먹고 싶은 거나 사 먹어.”
나서서 호구 짓은 하지 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참았다. 인상을 굳히고 한 말에 유일은 잠시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유감도 없이 ‘응.’ 하고 뒷문으로 향했다.
“한루나, 어디 가!”
담임의 심부름을 마치고 앞문으로 들어오던 상수가 그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유일은 웃으며 ‘매점.’ 하고 답했다. 그에 불쑥 가까워진 창현이 유일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한루나 매점 가? 그럼 나 불벅 하나만.”
한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특별히 유일의 편을 들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명백히 창현이 나쁜 쪽이었기 때문이다.
“알았어. 하나만?”
“어, 부탁할게. 우리 루나!”
나름대로 할 말은 하는 놈 같았는데, 만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창현은 킬킬 웃으며 유일의 어깨를 주물렀다가 놓았다. 질 나쁜 사장이 아랫사람 희롱하듯. 유일은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오히려 입술 끝을 당겨 웃으며 복도 바깥으로 나갔다.
한은 어쩐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 창현을 노려보았다.
“아, 내가 괜히 불러서 또….”
앞문에서부터 슬금슬금 다가온 상수가 한의 책상 앞에 섰다. 중얼거리는 음성 안에 죄책감과 익숙함이 들어 있었다.
“자주 저랬나 봐?”
“아, 네. 창현이 다른 애들한테도 그러기는 하는데……. 루나한테는 더 심해요.”
“작년에도 같은 반이었어?”
“네. 솔직히…….”
목소리를 낮추며 상수는 쪼그려 앉았다. 책상에 매달리듯 낮게 내려간 그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애들도 창현이 다 싫어해요.”
특별할 것도 없는 비밀을 아주 작게 속삭인다. 강한은 턱 끝을 문지르며 덩달아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혹시 쟤 담배도 해?”
“네? 음, 어……. 본 적은 없는데 아마 필걸요.”
“아아.”
“왜…요?”
“아니, 그냥.”
담배 심부름 쪽에 더 큰 무게가 실리자, 한은 무척 찜찜했다. 정말 괴롭힘을 당하고 있나 싶은 걱정과 죄책감에 의문들이 떠밀려 내려왔다. 인생 쉽게 사는 놈이라고 여기게 만들었던 해맑은 미소와 행동이 모두 연기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수는 알고 있었을까? 모른다면 알려야 하나?
“창현아, 불벅 여기.”
그러나 얼마 후 교실로 돌아온 유일은 전혀 침울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의무처럼 쾌활하게 웃으며 햄버거를 건네었다. 창현은 뻔뻔하게도 단번에 받아 들었고, 유일은 초코우유 세 개를 들고 돌아왔다.
“마셔.”
책상에 툭툭 놓이는 우유를 보며 한은 맥이 탁 풀렸다. 상수마저 익숙하게 우유를 받아 들고 마시는 모습에 모난 말이 나갔다.
“이런 걸 셔틀이라고 하지 않냐?”
“응?”
“왜 돈도 안 받고 다 사다 줘.”
속내처럼 목소리가 끓었다. 유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였고, 옆에 서서 우유를 마시던 상수는 캑캑 기침했다. 그 모습을 보니 또 마음이 좋지 않아 한은 그냥 길게 숨을 내쉬었다.
“됐다, 그냥……. 잘 먹을게.”
애초 이렇게만 말하고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하면서, 강한은 이번 것 역시 바로 뜯어 마시지 않았다. 책상 귀퉁이로 초코우유 하나가 덩그러니 놓였다.
***
그러나 정말……. 얼마나 의미 없는 걱정이었는지. 강한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헛웃음을 치며 반성했다.
“…야, 한루나. 너 뭐라고 했냐?”
반 한가운데, 창현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며 유일에게 되물었다. 그의 거친 웃음이 반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 하지만 유일의 것만큼은 아니었다.
“그게 웃기냐고 물어봤어.”
냉담하게 답하는 한유일의 얼굴이 너무나 설어서, 강한은 충격으로 얼어붙은 채 눈만 깜빡였다.
“…와, 너 지금 나한테 시비 터는 거냐?”
조금 굳어져 있던 창현은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위협적으로 목을 꺾어 대며 유일에게 다가갔다. 곧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냥 진짜 웃기냐고 물었는데. 왜, 이게 시비 같아?”
유일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물었다. 하나도 긴장하지 않은 평온한 목소리였다.
분위기가 이렇게 얼기 전까지 교실에는 창현의 커다란 목소리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궁금하지도 않은 누군가의 뒷소문을 모두 들으라는 듯 떠들어 댔는데, 대부분은 지어낸 게 분명했다.
그년이 어느 학교 누구 형이랑 잤다느니, 몇 살에 처음 섹스를 해 봤다느니. 아무도 궁금하지 않고 근거조차 충분하지 않은 유치한 매도를 해 댔다.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예전에 그의 고백을 거절했다던 여자애였다.
듣기 싫은 목소리가 기어코 ‘걸레’ 같은 단어를 담았을 때는 강한 역시 참기가 어려웠다. 귀찮은 일에는 정말 휘말리고 싶지 않지만, 조용히 좀 하자는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딱 그 정도 말만 하자고 결심한 그가 목을 가다듬었을 때.
한유일이 일어섰다.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와 표정으로, 그는 ‘야. 그런 얘기가 진짜 웃겨?’ 하고 물었다. 늘 간질거릴 정도로 다정하던 유일이 말하자 고작 ‘야.’ 따위의 말도 쌍욕처럼 거칠게 들렸다.
“아, 시발, 이 새끼 존나 골 때리네? 왜? 너도 그년이랑 잤어? 그래서 편드나 봐?”
창현은 요란스럽게 머리를 쓸고 교실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창현아.”
유일은 제 바로 앞까지 위협적으로 다가온 창현을 가만히 응시했다. 하얗게 굳어 있는 얼굴이 평소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자존심도 없는 새끼라거나, 어디서 담배 심부름을 하겠다거나. 그런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왜, 씨발아.”
창현도 그렇게 느꼈는지 목소리가 조금 줄어들었으나, 욕을 붙여 과대 포장 된 말이 튀어나왔다. 과연 상수 말대로 반 아이들도 모두 창현을 싫어해서인지 흐르는 분위기가 묘했다. 숨을 삼키고 지켜보는 애들의 표정에서 창현을 향한 혐오감이 드러났다.
그 틈에서 강한은 범철과 눈이 마주쳤다.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창현의 뒤에서, 그 혼자만 은근히 창현을 응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열받았으면 때려, 아가리 그만 털고.”
하지만 유일이 이렇게 말하며 웃은 순간, 범철의 얼굴에 묘한 패배감이 스쳤다. 직접 도발을 당한 창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와, 씨바, 좆같은 새끼가!”
반 애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이렇게까지 도발을 당했음에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허세가 전부인 놈이었으니까.
예상대로 잔뜩 흥분한 창현이 먼저 주먹을 날렸다. 유일은 마치 작정한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버텼다. 본능적으로 피하려는 몸조차 굳건하게 내린 채, 일부러 얼굴을 대 주었다. 그럼에도 창현의 주먹은 정통으로 맞지 않았다. 삐끗한 손이 애매한 소음을 내고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유일은 맞받아쳤다. 때린다고 표현하기에는 과한 주먹질이었다. 그야말로 창현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고 표현해야 맞았다.
뻑!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어어!”
그제야 숨죽여 보고 있던 애들이 우르르 일어섰다.
“야, 야! 한루나!”
“반장! 미친, 야, 말려, 말려!”
“야, 유일! 정신 차리라고!”
마치 어느 큰 사건에 휘말린 사람처럼, 애들은 특유의 사명감으로 뭉쳐 심각했다. 커다란 외침들 사이로도 뻐억, 퍽, 하는 주먹질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아, 형, 도와주세요. 쟤 미쳤나 봐요.”
한데 뭉친 교복 무리 틈에서 상수는 쪼르르 빠져나왔다. 방금까지 그 사투를 말리다 왔는지, 옷과 얼굴이 엉망인 채로 그 애는 울먹거렸다. 마치 눈앞에서 한유일이 지옥 불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참담해 보였다.
그래서 강한은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귀찮은 일에 휩쓸리는 것은 정말 싫지만, 오로지 상수가 곧 울 것만 같아서.
“야. 그만해.”
태풍의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한은 정말 내키지 않는 얼굴로 질퍽한 주먹질 소리 한가운데에 향했다. 몰려 있던 애들이 알아서 길을 터 줬다.
이따금 대련을 하다 보면 그게 정말 싸움으로 이어질 때가 있었다. 물론 운동을 진지한 태도로 하는 놈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 언제나 창현처럼 입을 잘못 놀리는 새끼들이 문제였다.
강한은 어려서부터 늘 또래보다 큰 편이었으므로 싸움을 말리는 데는 제격이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소속감이 있어서, 같은 공간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하면 언제나 나섰다. 씩씩거리는 두 놈을 떼어 놓고 화해를 시키는 것까지도 한의 몫이었다.
“미친…….”
그래도 이렇게까지 피로 물든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느긋하게 다가갔던 한은 창현의 꼴을 보고서야 심각성을 깨달았다.
“야, 한유일!”
다른 생각을 할 필요도 없이 손이 먼저 나갔다. 교복 뒷덜미를 확 잡아끌자, 창현의 위에서 주먹만 내리꽂던 그가 우뚝 멈췄다. 바투 쥔 주먹에서 빨간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뭐 얼마나 더 하려고.”
그렇게 묻자 유일은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창현의 얼굴에서부터 튄 핏물이 하얀 얼굴에 점점이 붙어 있었다. 고요한 틈을 타, 애들이 엉엉 울고 있는 창현을 끌어갔다. 발음이 다 뭉그러진 창현은 목을 놓아 울었다. 저 씨발 새끼를 가만 안 두겠다면서 처절한 울부짖음을 쏟았다.
그 ‘씨발 새끼’는 한참 조용하더니,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 냈다. 땀과 핏방울 때문에 따끔한지 인상을 쓰며 몇 번 더 벅벅 문질렀다. 강한은 그런 유일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붉은 주먹을.
피로 물든 그 주먹은, 절대 싸우는 법을 모르는 손이 아니었다.
“심했다.”
자기 행동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듯 유일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한을 보고 아주 미약하게 웃었다. 작은 실수 하나에 지을 만한 겸연쩍은 미소였다.
“어, 존나 심했어. 돌았냐?”
강한은 단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볼에 겨우 생채기 몇을 얻어 붉어졌을 뿐인 유일이 하하 웃었다. 그 직후, 사색이 된 담임이 뛰어 들어왔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담임이 싸움을 말리러 들어왔을 때,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는 이유로 한은 함께 불려 가야 했다. 수척한 담임은 일단 엉엉 울고 있는 창현을 병원으로 보냈고, 볼을 얻어맞은 한유일 역시 치과에 보냈다.
그러고서는 남은 강한을 붙들고 사건의 전말을 물었다. ‘저는 말리기만 했는데요.’ 하고 무뚝뚝하게 답할 수도 있었지만, 한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중얼거렸다.
“창현이가 말을 좀 심하게 해서요. 걸레라고도 하고.”
“뭐?”
“어느 학교 무슨 형이랑 잤다고.”
“뭐어……?”
“몇 살에 처음 섹스했냐고도…….”
대상을 확실히 하지 않았을 뿐, 사실은 사실이었다. 일부러 선생 앞에서 말하기 곤란한 단어도 직설적으로 내뱉은 한은 턱 끝을 긁적거렸다.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는 담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반장이 좀 듣기 싫다고 하니까 창현이가 먼저 때렸어요.”
이 정도 각색이야 대단한 의리도 아니었다. 어차피 창현이 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던 것은 강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 일단 알겠어. 가 봐.”
담임은 파리해진 안색으로 중얼거리더니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오는 길에 강한은 그래도 이 사건이 아주 간단히 끝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애들 다 보는 앞에서 피투성이가 된 창현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사건은 간단히 종결되었다. 수업 중에 몇 번 불려 나갔다 온 두 놈은 고작 ‘교내 자원봉사 4시간’ 처벌을 받았다. 그것도 둘이 같이. 담임의 지나치게 무신경한 처벌에 강한은 입을 쩍 벌렸고, 저 멀리 앉은 범철은 헛웃음처럼 속삭였다.
“한유일 집 존나 부자잖아.”
제 짝꿍에게만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지만 지나치게 조용한 탓에 반 애들 모두가 들었다. 종례 인사를 위해 일어나 있던 한유일마저도.
간단한 한 문장은 따지자면 칭찬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지만 명백한 공격 의사가 어절마다 묻어 있었다. 이제 범철은 유일을 더 이상 ‘루나’라고 친근하게 부르지도 않았다.
“경례.”
모두 느꼈을 텐데도 한유일은 평소처럼 단정한 목소리로 선창할 뿐이었다. 유일의 눈치를 살피던 애들이 어영부영 고개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하고 마무리 인사를 했다. 범철은 유독 빠르게 반을 빠져나갔다.
“한아, 고마워.”
그러나 한유일은 애초 그를 붙잡고 이야기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애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틈에 곧장 한에게 다가온 그가 웃었다.
“덕분에 잘 해결된 것 같아.”
“…야,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냐?”
“응.”
“너 혹시 쟤 담배 심부름 하고 있었어?”
한은 느릿느릿 걸어가는 창현의 등을 눈짓으로만 가리켰다. ‘응?’ 하고 갸웃거리던 유일이 애들을 한참 돌아보고서 다시 물었다.
“누구?”
“네가 죽 쑨 놈.”
“아…. 아니?”
“그럼 누구 심부름?”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유일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심부름 아니었어.”
“그럼 네가 폈어?”
이번에는 미간이 조금 더 깊게 파였다. 그에 아예 소리까지 내어 웃은 유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쓸데가 있었어.”
그 말은 한을 안심시키는 동시에 불안하게 했다. 어쩌면 반장이 제 생각보다 더 무서운 놈일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런데 한아. 나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
“뭐.”
“토요일에 창현이랑 나와서 자원봉사 해야 하는데. 한이 너도 같이 나와 주면 안 돼?”
강한은 ‘정말 속 모를 놈이다.’ 생각하며 한숨 쉬었다. 얌전한 모범생 얼굴로 담배를 사 가더니, 이제는 제 손으로 핏물을 줄줄 뽑게 만든 놈 이름을 잘도 성까지 떼어 부른다.
“내가 왜.”
한 번 들어줬더니 염치없는 부탁을 연달아 하기까지. 어쩌면 한유일은 그냥 뻔뻔한 새끼일지도 모르겠다.
“창현이랑 둘이 있다가 또 싸울지도 모르잖아.”
“안 싸우면 되잖아.”
“그날도 싸우고 싶어서 싸운 건 아니었어.”
“……그게 싸운 거냐?”
네가 줘 팬 거지.
속으로만 꿍얼거린 강한이 하아, 한숨처럼 짜증을 뱉어 냈다. 한유일 말을 듣고 보니 신경이 쓰인 탓이다. 원래라면 창현이 유일에게 보복을 할까 봐 걱정됐겠지만, 그날 피로 물든 주먹을 본 이후 강한의 생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혹시 한유일이 또 눈이 돌았을 때 말릴 사람 하나 없다면 그게 더 큰 문제였다.
“상수는 뭐 하는데.”
“상수 주말에도 매일 과외야. 하루 종일.”
“……아, 나도 아르바이트 있는데.”
아르바이트 날을 잊다니. 워낙 예상치 못한 큰 사건 덕분에 정신이 날아간 모양이었다. 깜짝 놀란 강한은 눈을 크게 깜빡거렸다. 스스로가 황당해 헛웃음까지 치자, 유일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응, 알았어. 집 가자.”
입술만 길게 늘여 웃은 그가 먼저 교실을 나섰다. 그 시무룩한 뒷모습을 따라 나가며, 강한은 무척 찝찝해졌다.
제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게다가 이번 주 토요일은 노는 토요일인데. 아르바이트가 더 중요한 건 당연하고, 이번에는 편의점에 가서 꼭 민우에게 그만두겠다는 말도 해야 하는데…….
“야.”
“응?”
“토요일 몇 시.”
“어, 선생님이 아홉 시까지 오래! 한이 올 거야?”
“봐서.”
도대체 내가 왜 가야 하는데…….
강한은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면서도 시간을 곱씹어 기억했다. ‘토요일 아홉 시. 한유일 감시하러 학교 와야 하는 날.’ 하고서.
***
노는 토요일에 아르바이트까지 미룬 채로, 강한은 아홉 시에 맞춰 학교에 왔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조금 일찍 온 두 놈이 멀리 운동장에서 거대한 봉투를 들고 있었다. 걱정과 달리 그 둘은 서로와 멀찍이 떨어져 쓰레기를 주워 넣다가, 이따금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하기도 했다.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냐…….’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강한은 깊은 호흡을 토했다. 팔자에도 없는 보호자 신분이다.
쓰레기봉투를 가득 채운 두 녀석이 담임에게 도장을 받은 후에는 햄버거를 먹었다. 치고받고 싸운 자식들을 앞에 두고 햄버거까지 먹이고 있으려니, 강한은 정말이지 보호자가 된 기분을 느꼈다. 생전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사고뭉치 새끼가 생겼다.
“그렇게 처싸워 놓고 나란히 햄버거가 넘어가냐?”
가만히 보고 있으니 정말 순수한 궁금증이 들어 물었다. 그러자 유일은 빙긋 웃었고, 창현은 어허허 허탈하게 숨을 토했다.
“원래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라고 하잖아요, 행임.”
창현은 햄버거를 크게 한 입 물면서 대답했다. 그러다 찢어진 입가가 아프다며 ‘아아.’ 하고 엄살도 피웠다. 그럴 때면 유일은 제가 남긴 상처를 흘깃 넘겨보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제 몫의 물티슈를 쥐여 주는 흰 손가락이 황당할 만치 고왔다.
“아, 진짜 나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강한은 붙박이 의자에 등을 탁 기대앉으며 중얼거렸다. 그 앞으로 감자튀김 한 봉지가 스으윽 밀려왔다.
“한아, 이거라도 좀 먹어. 정말 안 먹게?”
“입맛 뚝 떨어졌어.”
“왜?”
순진무구하게 묻는 유일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거기에 대고 차마 ‘너 때문에.’라고 답할 수는 없어서 강한은 가만히 얼굴을 관찰했다. 광대뼈 근처에 생겼던 옅은 멍이 이제 슬슬 사라지려 하는지 도리어 짙은 색을 띠고 있다.
‘잘난 얼굴에 잘하는 짓이다.’
강한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속이 안 좋아?”
“어어.”
대충 그런 걸로 치면서 주억거리자 유일은 벌떡 일어났다.
“그럼 탄산이라도 좀 사 올게.”
먹다 만 햄버거를 곧장 내려놓은 유일이 말릴 새도 없이 카운터로 향했다. 고작 탄산음료 하나를 사자고 길게 늘어진 줄 끝에 선 그는 마음이 급해 보였다. ‘야, 왜 오버야.’ 강한은 작게 만류했지만, 유일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저, 행님.”
“어…….”
그냥 내가 사 온다고 할걸. 숨 막히게 어색한 분위기에 강한은 유일의 감자튀김을 하나 훔쳐 먹었다. 우물우물 씹는 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던 창현은 느리게 사과를 건넸다.
“잘못, 아니, 죄송함다.”
처음에는 보호자 노릇을 시켜서 그런 줄로 알았다. 그래서 강한은 아주 머쓱하고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담임에게 창현만 쓰레기가 되도록 증언한 죄가 있는데, 사과를 받기는 양심이 아팠다.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그때……. 화장실에서 범철이 새끼가 뭔 얘기를 해 가지고. 좀 장단 맞췄는데요.”
“어?”
“그거를, 쟤가 들어 가지고. 그래서 더 화가 났다고….”
“……아.”
창현은 이미 강한이 모든 이야기를 아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은 그 사건을 교실에서 대뜸 벌어진 난투극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전말이 더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그 이유 때문에 고작 봉사 활동 정도로 마무리된 걸까. 강한은 궁금했지만 질문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주뼛거리며 죄를 고하는 창현을 보니 알아서 의문을 풀어 줄 것만 같아서 단서를 던지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저는 아무 말 안 했거든요. 아, 진짜? 어쩐지. 하고, 아, 그것도 잘못이긴 한데요.”
“범철이가 그랬구나.”
“예에. 그 새끼가 막 헛소리를 해 가지고.”
끝내 범철이 어떤 말을 했는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구태여 자신에게 사과하는 것을 보면 관련된 이야기가 분명한데, 당사자 앞에서 또 읊기는 미안한지 창현은 대충 얼버무리기만 했다. 한은 조금 갑갑한 기분이 들었지만 더 물을 수가 없었다. 금세 탄산음료를 받아 온 유일이 헤헤 웃으며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여기.”
방금까지는 전혀 생각도 없던 음료가 고파졌다. 아예 뚜껑을 열고 빨대도 없이 벌컥벌컥 삼키자, 유일이 눈을 크게 떴다.
“한아, 그렇게 마시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그 동그란 눈이 지나치게 순진해 보여, 강한은 조금 더 속이 탔다.
주먹질의 사유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알았다고 해도 잘했다 칭찬하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일말의 책임감은 느꼈을 것이다. 왜 말하지 않았을까. 겉으로는 참 쉽고 명료하게 생긴 놈이 뭘 그렇게 많이 감추고 있는지.
한은 그의 속이 궁금했고, 알고 싶었고, 또 이런 기분이 무척 싫었다. 너무 싫어서 으득으득, 얼음을 대신 씹었다.
“한아?”
햄버거를 다시 들어 먹으려던 유일이 멈칫했다. 저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는 눈에 대고 갸웃 고개를 튼다. ‘괜찮아?’ 소리 없이 모양만 내는 입술에 기름이 묻어 번들거렸다.
한은 저도 모르게 그 붉은 입술을 바라보다가 컵을 퍽 내려놓았다. 이유 모를 짜증이 혈관을 간질거리고 있었다.
***
일요일 오전 타임은 보통 한의 몫이었다. 점장을 포함해 민우까지 교회에 다녔기 때문이다. 신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민우는 장난기 가득한 생김새와는 달리 신앙심도 꽤 깊은 편이었다. 한은 신앙에 대해 제대로 접해 본 기억조차 없지만, 어쩐지 그런 점마저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야, 한아! 이거 봐.”
민우는 항상 오후에 있는 청년부 예배까지 드린 후에야 편의점으로 왔다. 그가 오면 보통 네 시쯤이 됐는데, 오늘은 삼십 분이나 빨랐다.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숨을 헉헉 삼키며 들어온 그는 대뜸 면전에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눈앞이 뿌옇게 흐렸다.
“안 보이는데요.”
“자, 자.”
민우는 멀뚱히 선 한의 손을 아예 끌어다 핸드폰을 쥐여 주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화들짝 놀란 한이 핸드폰을 꽉 쥐면서 화면이 바뀌었다.
“에이, 잠시만. 이거 봐.”
민우가 옆 장으로 넘어갔던 사진을 다시 돌려 주었다. 그제야 한은 액정 안에 가득한 어떤 게시물을 확인했다. 너덧 개 되는 사진 속에는 익숙한 전경이 보였다.
“어, 이거….”
“그래, 우리 대학로에서 플래시몹 했던 거.”
굳은 채 서 있는 한을 훅 넘어가 카운터 안쪽으로 깊이 들어간 민우가 플라스틱 상자 위에 털썩 앉았다. 허억, 헉, 아직도 거친 숨을 푹푹 몰아쉬며 그가 손을 휘저었다. 더 아래로 내려 보라는 듯이.
“너 잘생겼다고 난리야. 우리 한이가 잘생기긴 했지.”
킥킥 웃은 그가 손가락 총알을 쏘아 대며 윙크까지 했다. 한은 인상을 찌푸리고, 익숙하지 않은 터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어렵게 밑으로 내리자 어마어마한 댓글 숫자가 보였다.
“구천? 댓글이 구천 개 달린 거예요?”
“어. 우리 훈남 커플이래, 으악. 징그러워!”
뾰족한 말을 담아 두지 않으려 노력하며, 한은 사진을 조금 더 들여다보았다. 대부분 사진은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공원 한복판에서 하얀 베개를 들고 싸우고 있는 인파들이나 얼굴을 가리고 누운 몇몇 사람들. 그 틈에 낯을 가릴 생각도 없이 누워 있는 사람은 민우와 저뿐인 듯했다.
글 내용은 독특한 취미 생활을 소개하는 듯했지만, 유독 민우와 한의 사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분홍색 글씨로 덧붙여진 ‘ㅎㅎㅎㅎ’라는 의미심장한 초성 나열이 묘했다. 한은 괜히 자기가 올린 글처럼 뜨끔했다.
“난 괜찮은데, 너 얼굴 나온 거 싫으면 지워 달라고 해.”
좋다 싫다 가늠하기에는 충격이 먼저였다. 한은 눈을 감은 채 웃고 있는 민우와 그에게 속박된 채 눈을 질끈 감은 자신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만천하에 펄떡대는 심장을 전시한 것만 같다.
사진을 잠깐 보았을 뿐인데 한에게는 그날의 기억이 선명했다. 옷을 다 챙겨 입고 누웠던 공원 바닥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무슨 냄새가 났는지, 가슴팍을 가로지른 민우의 팔이 어떤 각도였는지, 그가 자신을 끌어안았던 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심장이 얼마나 세차게 뛰었는지까지 전부.
다시금 그 자리에 돌아간 것처럼, 강한은 펄떡거리는 심장 박동을 삼키느라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도 내가 한이랑 엮였으니까 훈남 소리 들어 보지. 어디서 들어 보겠냐? 다른 놈이랑 커플 소리 들었으면 완전……. 어우, 나 방금 철원이 새끼랑 이런 거 뜨는 상상했, 우욱!”
민우가 바닥을 동동 구르는 소리에 맞춰 심장은 점점 더 크게 부풀었다. 갈비뼈가 뻐근하게 아파 오는 착각이 들 만큼.
“형.”
사진을 조금 더 눈에 담고, 한은 천천히 편의점 조끼를 벗었다. 민우의 최신형 핸드폰은 매대 위에 올려놓은 채였다.
“저 할 말 있어요.”
“어엉? 뭐…?”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던 민우는 단박에 불안한 눈동자가 되었다. 방금까지 하던 이야기가 있다 보니, 이어지는 고백이 나올까 봐 혹여 두려운 듯했다. 강한은 자조하듯 웃으며 조끼에 붙어 있던 제 명찰을 떼어 냈다.
“이제 그만두려고요.”
“뭐? 알바?”
“네.”
지이익, 플라스틱 상자를 끌며 일어선 민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술을 벙긋벙긋하며 할 말을 찾던 그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갑자기?”
얼마나 놀랐으면 목소리 끝이 애먼 음을 띠며 꺾였다. 강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포스 밑에 연결된 돈 통을 열었다. 챙! 가득 담긴 동전이 경쾌한 소음을 냈다.
“오늘 공고 올려 주실 수 있어요?”
그렇게 물으며 한은 마지막 시재를 세어 보기 시작했다.
“야, 아니, 한아……. 너 진짜 요즘 무슨 일 있냐? 아니면 형이 갑자기 대타 부탁했던 거 때문에 그래? 이렇게 갑자기 그만둘 애가 아니잖아.”
태권도를 그만하겠다고 했을 때, 모두가 민우처럼 말했다. 네가 그럴 애가 아닌데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어떻게 갑자기 이러느냐고.
하지만 한에게는 ‘갑자기’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꾹꾹 눌러 미뤄 왔던 끝을 그때서야 마주할 준비가 되었을 뿐이었다.
“돈 더 벌어야죠. 이제 곧 졸업인데.”
이번에는 교통사고처럼 허울 좋은 구실이 없어 한은 조금 얼버무렸다. 그래도 곧 비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고작 아르바이트 하나 그만두는 건데 왜 유난이냐는 듯.
“자주 놀러 올게요, 형.”
전혀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웃자 민우는 ‘어엉…….’ 하고 애매한 대답을 했다. 한참 고요하던 그는 한이 시재를 다 맞추고서야 일어서며 투덜거렸다. 정도 없는 새끼라고, 뒤늦은 욕설에 강한은 웃었다.
‘정 더 붙였다가는 역겹다면서 도망쳤을 거면서.’
내심 비웃는 웃음이 끌끌 길게 이어졌다.
***
태권도를 그만둘 때 그랬듯이, 막상 끝을 마주하자 모든 것이 평범해졌다. 그다지 아프지도 힘들지도 음울하지도 않았다. 세상은 평소처럼 깨어났다가 잠들기를 반복했고, 한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학교에 다녀오고 또 집안일을 몇 했다. 다만 가끔 술에 취한 기분이 궁금했고 담배를 태워 보고 싶었다.
「저번에 나오기로 한 플래시몹은 올 거지?ㅠ」
민우는 이상하게도 연락이 잦아졌다.
말을 고르지 못해 답이 느려지자 민우는 아예 플래시몹은 계속 같이해도 되지 않느냐며 설득했다. 새로 구하는 아르바이트 시간을 말해 주면 최대한 반영해서 일정을 짜겠다고. 플래시몹 핑계로 얼굴도 보고 앞으로도 그렇게 지내자며 매달리는 그가 한은 조금 이해되지 않았다.
「운영진 해 준다고 했었잖아 ㅠㅠㅠㅠ」
책상 한가운데 올려놓은 핸드폰이 끊임없이 반짝거렸다. 한은 맛없는 음식을 삼킨 얼굴로 작은 글자들을 읽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두어 번 곱씹지는 않았다. 그를 향한 마음을 접기로 한 것은 둘째 치고, 다른 문자들 때문이었다.
「그거 너 맞지?」
「잘 살아? ㅎㅎ」
민우가 보여 줬던 그 글 영향인지, 연락 없던 태권도부 동기들에게서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답장을 이어 간다고 해도 인연은 되지 않을 연락들이었다.
“형, 난리던데요! 그거 뭐예요? 재밌어요? 저도 해 보면 안 돼요? 자격 있어야 돼요?”
시큰둥하게 핸드폰을 집어넣던 자세 그대로 한은 멈췄다. 덜컹, 소리를 내며 앞자리 의자를 끌어다 앉은 상수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 사진이 상수에게까지 닿은 모양이었다.
“플래시몹.”
강한은 수많은 질문 중 하나만 대답하고 핸드폰을 마저 집어넣었다.
“언제부터 하셨어요? 완전 의외, 진짜.”
“……나도 그날 처음이었어.”
“형 무슨 집 가서 샌드백만 칠 것처럼 생겨 가지고, 그런 취미를…….”
취미라고 하기에는 그저 민우를 따라갔던 것뿐이었고 집에서 샌드백만 칠 것처럼 생긴 얼굴은…….
“칭찬이냐?”
어떤 의미인지 애매했다. 눈썹을 찡긋 들어 올리자, 상수는 에헤헤 웃었다. 욕이었던 모양이다.
“아이, 칭찬이죠. 형 완전 포스 쩔어 준다는 그런 말.”
“말이 길다.”
“으헤, 형, 근데 진짜 같이 가면 안 돼요? 재밌을 것 같은데. 다음에 언제 해요?”
상수는 애교라도 부리는 것처럼 고개를 까딱까딱 좌우로 움직였다. 끔벅끔벅, 과장된 눈짓이 심각하게 느리다.
영 징그러운 태도에 인상을 찌푸릴 쯤 한유일도 합세했다. 그는 여태 무슨 대화가 이어졌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쪼그려 앉아 책상에 턱 끝을 댔다. 상수를 따라 눈을 키우고 깜빡, 깜빡. 기다란 속눈썹을 팔락이며 그는 좌우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 나도.”
“한루나 뭔데 너. 줄 똑바로 서라?”
“일단 나부터 서면 안 돼?”
한유일은 저조차 모르는 요구 사항을 잘도 졸랐다. 헤실헤실, 일부러 무방비하게 웃은 그가 ‘응? 안 돼?’ 하고 덧붙였다.
“헐, 존나 뻔뻔해.”
상수는 기겁했지만 이미 넘어간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같이 가자. 아까 내가 보여 준 거 있잖아. 그거 다음에 또 하면 형님이 데려가 주신대.”
“내가 언제.”
눈 뜨고 코 베인 강한이 발끈했으나, 상수는 이제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 형님. 안 데려가실 거예요? 그 뭐지. 편의점 형도 데려가셨으면서 우리는요! 우리는!”
그의 말은 억지이자 오류 덩어리였다. 그러나 이런저런 해명을 하는 편이 더 구차하게 느껴져, 강한은 그저 얕게 앓았다. 설상가상으로 상수의 따발총 내내 옆에서 고개만 까닥거리던 유일까지 가세했다.
“그 사람이랑 꼭 안고 있던데.”
“맞아!”
“길거리에서. 사람 많은 데서.”
“맞아!”
구슬처럼 반질한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덧붙인 말들은 논지가 없었다. 강한은 팔짱을 낀 채로 상체를 훅 가까이 숙였다. 바싹 가까워진 두 놈에게 참고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야, 너네 친구 없어?”
한 놈은 전교생이 다 아는 한유일이고, 한 놈은 시끄럽기로 소문난 놈이니 그럴 리는 없었다. 알면서도 강한은 일부러 물었다.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벽을 인지하자며.
“형, 어떻게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지만 상수에게는 그 벽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진심으로 상처받았다는 표정에 한은 잠시 말을 잃었다. 굳은 눈동자가 도움을 청하듯 유일에게 향했다.
“그러게. 아직도 한이는 우리가 귀찮은가 봐.”
도움은커녕 도리어 짙은 한숨을 폭 끼얹은 유일은 책상에 볼을 기대었다. 시무룩하게 내리깐 눈이 책상을 바라보며, 짙은 속눈썹 그늘이 생겼다. 죄책감을 부르는 얼굴이었다.
‘하, 괜히 그딴 말을 해서.’
쌍소리를 씹어 삼키며 한은 후회했다.
사실 그동안 강한은 이 두 녀석과 꼬박꼬박 점심도 같이 먹었고, 하굣길도 정문까지는 대부분 함께 걸었다. 심지어 노는 토요일에 나와 한유일의 자원봉사를 지켜봐 준 적도 있었다. 베푼 호의와 친절이 적지 않은데, 말 한마디에 혼자만 파렴치한이 된 것 같다.
“……그래라, 그래.”
자포자기 심정으로 투덜거리자, 유일은 부드럽게 웃었다. 편안하고 따뜻한 미소를 함빡 담은 그가 선언했다.
“그럼 소풍 때도 같이 다니는 거다?”
초등학생 때나 들어 봤음직한 말이 퍽 하고 한의 뒤통수를 쳤다.
***
해피월드는 학교 소풍 장소로 반드시 꼽히는 곳이었지만, 강한은 이 테마파크와 왜인지 연이 없었다. 초등학생 때는 큰 태풍 때문에 소풍이 아예 취소되었고, 중학생 때는 소풍 없이 극기 훈련을, 고등학생 때는 황당하게도 남들 다 초등학교 때 다녀온다는 경주에 수련회를 갔었다. 소풍은 인근에 있는 도심 공원 딱 한 번이 전부였다.
때문에 한의 머릿속에 있는 해피월드 이미지는 오롯이 미디어를 통한 것이었다. 밝고, 쾌활하고, 빛이 나는 파스텔 세상. 그 행복한 세계 속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사람들 모두가 화목한 가족이나 행복한 커플일 듯했다.
하지만 실제로 한이 목격한 해피월드는 조금 괴상했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리는 데다가 인파도 어마어마했고, 사람들이 자꾸만 힐긋거려 불편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아주 큰 리본이나 동물 귀가 달린 머리띠를 하지 않으면 도리어 튀는 모양이었다.
“한아, 저기 서 봐. 사진 찍어 줄게.”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온 소풍 장소가 생각보다 실망스러워, 한은 다소 심기가 불편했다. 하지만 유일은 홀로 이 테마파크와 잘 어우러지는 웃음을 지으며 동상을 가리켰다. 귀여운 동물 캐릭터 커플이 분홍색 하트를 나누어 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너나 찍어.”
놀리는 말인 것 같아 무뚝뚝하게 대꾸하자 유일은 사양하지 않았다.
“그럴까? 여기.”
유일이 제 핸드폰을 아주 쉽게 넘겨주고는 동상 앞으로 섰다. 분홍색 하트 옆에 비스듬히 선 그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웃었다. 콕콕, 분홍 하트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길고 얇았다.
한유일은 정말 남의 공격성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걸까. 시비처럼 되돌려 주려 했던 말을 기어코 웃음으로 갚는 그가 새삼 대단해 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야, 이거 어떻게. …아, 여기 있네. 찍는다.”
귀여운 동상 앞에 선 그를 카메라에 담고, 어렵게 찾은 버튼을 눌렀다. 찰칵! 소리가 나자 유일은 고개를 조금 더 틀었다. 한 장 더 찍어 달라는 듯한 표정이 자연스러웠다. 카메라 앞에만 서면 굳는 강한은 그가 조금 신기했다.
“한아, 같이 찍자.”
“너나 찍으라니까? 아, 상수 온다. 둘이 찍어라. 내가 찍어 줄게.”
뻣뻣하게 굳는 모습을 들키기 싫어 거절하는 틈에 상수가 다가왔다. 양쪽 손에 추로스와 옥수수를 든 채였다. ‘어어, 뭐야, 나도 찍을래! 형, 저도요!’ 다급하게 외치며 달려오는 폼이 우스웠다. 장난기가 발동한 강한은 상수가 자세를 잡기도 전부터 촬영 버튼을 마구 눌러 댔다.
“아, 형, 잠깐, 와! 잠깐만요!”
“하나, 둘, 셋.”
“아니! 아! 얘랑 찍으려면 준비를 쫌 해야 된다고요!”
상수는 아우성과 함께 두 손을 어쩔 줄 몰랐다. 입 안에 가득 물고 있는 추로스도 문제고 바람에 날린 머리도 문제인데, 손은 모자랐고 음식물은 그득했다. 두 손과 발이 야단법석인 그를 두고 유일은 유유하게 포즈를 잡고, 한은 버튼만 누르다 핸드폰을 건넸다.
“사진 찍는데 무슨 준비야. 그냥 찍으면 되지.”
비식 웃으며 건넨 핸드폰을 받아 가는 유일은 어쩐지 조금 아쉬운 얼굴이었으나, 금세 웃으며 상수에게서 추로스를 받아 갔다.
“형은 모르겠죠. 오징어로 살아 보셔야 ‘아~ 상수가 참 서글펐겠구나.’ 생각하실 텐데.”
“오징어?”
“하……. 뭔 뜻인 줄도 모르, 와, 하하….”
고작 한 살 차이인데도 상수가 하는 말은 가끔 어려웠다. 한은 눈썹을 추켜들었다가, 그가 대충 건네는 추로스를 받았다.
“얼만데?”
“됐어요…….”
“사도 내가 사야지.”
그래도 한 살 더 먹었는데. 그렇게 덧붙이자 시무룩하던 상수 낯이 조금 밝아졌다. 하하 웃은 그가 그래도 괜찮다며 턱 끝으로 유일을 가리켰다.
“쟤가 산 거예요, 어차피.”
모르는 사이 돈이라도 건네준 모양이다. 하아, 한은 헛웃음 비슷한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집이 부유하다고 하더라도 같은 학년의 친구 사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 계산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것이 열등감에서 기인하는 불쾌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더.
강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뒤처져 있던 유일을 바라보았다. 어느 틈에 모르는 사람에게 붙잡힌 그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무언가를 거절하고 있었다.
“또 누가 번호 물어보나.”
옆에 선 상수가 중얼거렸다.
곧이어 유일은 저와 더없이 잘 어우러지는 놀이동산의 풍경을 배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가는 사람들은 돌아서는 순간 잊힌 얼굴로. 그 여유 가득한 승자의 낯이 한은 아직도 불편했다.
커다란 손이 황급히 주머니를 뒤져 얇은 지갑을 꺼냈다.
“야.”
“응?”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찔러 넣는 짓 좀 하지 마.”
딱딱하게 일갈하며, 강한은 제 지갑에서 꺼낸 오천 원짜리 지폐를 유일의 주머니 속에 찔러 넣었다. 교복 바지 주머니는 그다지 넉넉하지 않아, 한의 손이 쉽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한은 배려 없이 거칠게 지폐를 쑤셔 넣었다. 결국 주황색 지폐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봐, 너도 기분 더럽지.”
마구 찔러 넣은 지폐를 턱짓으로 가리킨 한이 먼저 돌아섰다.
상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둘을 번갈아 보았다. 강한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마저 무심하게 지나쳐 걸었다. 어차피 유일은 기분이 상했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 ‘응.’ 하고 말 테니까.
“앞으로 그럴게.”
예상대로 가만히 서 있던 유일이 금세 따라붙었다. 다만 상상했던 것보다 더 밝은 얼굴로.
“근데 이상하다.”
한유일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시선을 맞춰 왔다. 옆에 선 한에게 고개를 슬쩍 들이밀며 그는 무척이나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나는 왜 기분이 좋지.”
끝만 갈라진 미성이 민들레 홀씨처럼 허공을 날았다. 맑은 웃음을 덧붙여 속삭인 그가 성큼 강한을 앞서 걸었다. 개운하고 기분이 좋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한 걸음으로.
“……저 새끼 진짜 또라이 아니냐.”
꿈에도 예상치 못한 반응에 강한은 결국 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상수는 정적이나 냉기를 견디지 못하는 놈이었다.
아주 잠깐의 신경전, 아니, 한유일의 반응으로 보아서는 도리어 친목 도모와도 같았던 대화 이후로 상수는 괜히 더 목소리를 키웠다. 잘 타지도 못하는 놀이 기구를 타러 가자고 강한을 마구 끌고 뛰는가 하면, 구슬 아이스크림이며 슬러시 같은 것을 지날 때마다 모두 먹자고 성화를 부렸다. 심지어 조금이라도 커다란 조형물이 있으면 꼭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는데, 덕분에 유일과 한은 번갈아 가며 상수 핸드폰을 쥐고 버튼을 눌러야 했다.
“애 데리고 나온 부부 같다, 존나…….”
서른 번째 사진을 찍을 때, 강한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옆에서 상수의 엽기적인 포즈를 구경하고 있던 유일이 답지 않게 굳었다.
“…부부?”
꿈결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유난스러웠다. 고작 이 정도 농담도 못 받아들이면서 무슨 세상에 발을 맞추자고……. 한은 내심 비웃으며 버튼을 눌렀다.
“……그, 한이 너 정말 안 찍어도 돼? 찍어 줄게.”
평소에는 뻔뻔하기 짝이 없던 유일이 은근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에게서 처음 느끼는 어색한 투에 강한은 비식 웃었다.
“갑자기 왜 그러냐?”
“어? 아니, 그냥. 남는 건 사진밖에 없잖아. 사진은 많이 남겨 둘수록 좋고……. 나는 어렸을 때 사진이 거의 없어서, 좀 아쉽더라.”
유일이 답지 않게 말을 늘이는 와중, 벤치 위에서 드러누워 자세를 잡고 있던 상수가 이제는 옆 가로등에 붙었다. 찰싹 달라붙어 다리 한쪽을 들어 보이는 그를 화면에 담고 강한은 조금 머쓱하니 중얼거렸다.
“의외네.”
“왜?”
“너희 집은 왠지……. 네 사진 한 달 단위로 남겨 두셨을 것 같았거든.”
찰칵, 촬영 효과음과 동시에 유일의 하하 웃는 소리가 섞였다. 어딘지 속이 빈 것 같은 웃음을 지으며 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 어렸을 때는 찍어 줄 사람이 없었을 거야.”
연극배우가 비밀 이야기를 해 주듯이, 그는 다소 연기된 즐거움을 묻혀 속삭였다.
“사실 부모님 안 계시거든. 할머니 손에 자랐어.”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좋은 반응은 ‘평범’이다. 아버지의 부재를 숱한 사람에게 말해 오며 강한 역시 뼈저리게 느낀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생각 외의 말이라, 저도 모르게 입술이 굳고 눈이 커졌다. 멀리서 상수가 ‘형, 안 찍어요?’ 아우성치는 소리조차 왕왕 멀어졌다.
“우리 할머니가 고생 많이 했지.”
유일은 눈을 찡긋 들어 올려 웃고는 멍하게 굳은 한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어 갔다. 한을 대신해 상수를 찍어 주는 그는 다시 즐거운 테마파크의 구성 요소가 되어 있었다.
지금 당장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말해 줘서 고맙다는 간지러운 말은 하지 못하더라도, 멋없이 ‘그랬구나.’ 정도의 반응이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물론 평소 강한이었다면, 그러니까 아마 다른 누가 이런 고백을 했더라면 아무 감흥도 없이 바로 평범한 말을 건네줄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한유일은……. 한유일만큼은 달랐다.
강한은 그가 자신과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놈이라고 수백, 수천 번 생각했다. 저는 가져 본 적 없었던 기회를 배 속에서부터 쥐고 태어난, 복에 겨운 사람이라고.
그것이 유일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강한은 이따금 열등감을 느꼈고, 질투했고, 선을 그었다. 홀로 따진 승패를 합리화하기 위해 은근히 그를 우습게 만들거나, 선의를 곡해하거나, 장점을 이상하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니. 아니다. 이 정도면 착각보다는 각본이라고 봐야 했다. 한유일은 한 번도 명확한 증거를 보인 적 없는데, 그저 보이는 모습으로 소설을 써 내려간 것은 자신이었다.
충격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죄책감과 수치심이 짙게 남았다.
“한아, 정말 안 찍을래?”
강한의 속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을 알지 못하는 유일은 여전히 천진했다. 맑은 물음에 한은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하나 찍…을까.”
아, 시발, 쪽팔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은 제 핸드폰을 내밀었다. 남에게 보여 주기 민망한 기종이라 더듬댔지만 유일은 기다렸다는 듯 낚아챘다.
“저기 가로등 옆에 설래?”
자리로 돌아오던 상수가 형도 사진 찍는 거냐며, 같이 찍자고 성화를 부렸지만 유일은 조용히 묵살했다. 이 순간만큼은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싶어진 한은 가만히 가로등 옆에 가 섰다.
분홍색과 보라색 젤리가 엇갈려 감싸 놓은 듯한 귀여운 모양새의 가로등은 한과 몹시 언밸런스했다. 그럼에도 유일은 핸드폰 안에 담긴 모습이 아주 흡족한 듯이 웃었다. 한의 핸드폰으로 한 장 찍어 낸 그가 ‘잠시만.’ 하더니 아주 당연하게 자기 핸드폰으로도 한 장을 찍었다.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었지만, 강한은 따지지 않았다. 여태껏 멋대로 한 오해가 얼마인데 사진 하나쯤이야…….
“아, 뭐예요. 그럼 셀카도 같이 찍어요!”
“그건 싫어.”
그래도 아직 셀카는 싫었다.
전보다 누그러진 한과 유일 사이의 분위기 때문인지 상수는 평소와 비슷하게 돌아왔다. 그제야 세 사람은 벤치에 앉아 쉴 수 있었다.
“근데 형, 핸드폰 얼마나 쓰셨어요?”
“기억 안 나.”
“바꿀 때 됐죠?”
“어, 곧 바꿔야지.”
“빨리 바꾸시면 안 돼요? 단체방 없으니까 이렇게 사진 많이 보내야 될 때 불편해요!”
터치 핸드폰으로 바꾼 대부분의 애들 사이에서는 어떤 채팅 프로그램이 유행이었다. 문자와는 다르게 한 메시지당 요금이 부과되지 않아 사진도 많이 보낸다는데, 한에게는 사실 그동안 필요도 없는 기능이었다.
“네 사진을 왜 보내. 돌았어?”
“아이, 형, 돌았다뇨. 귀여운 상수 저장하셔야죠.”
그러나 말이 많고 쓸데없는 사진도 자주 보내는 상수에게는 무척 필요한 기능인 듯했다. 닦달하는 그를 향해 강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당장 핸드폰을 바꾼다고 해도 상수 사진을 수십 장씩 저장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아무튼 너도 정상은 아니야.”
쯔쯔, 혀를 차며 강한은 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유일에게서 총 네 통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사진 세 장과 문장 하나를 순서대로 눌러 본다.
한 장은 강한이 직접 찍어 주었던 유일의 독사진이었다. 분홍색 하트를 가리키며 씩 웃는 얼굴이 제법 잘났다.
그다음 사진은 같은 배경에서 유일과 상수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난리를 부리느라 상수는 전신이 흔들린 채로 귀신처럼 나왔다. 결국은 그것마저 유일의 독사진이나 다름이 없었다.
마지막 사진은 죄책감에 군말 없이 찍었던 제 사진이다. 유일의 핸드폰으로 찍은 것인지, 거리가 먼데도 화질이 꽤 좋고 얼굴이 가까웠다. 온통 밝은 세상 속에 덩그러니 선 자신이 이상해, 강한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아래 놓인 문자 내용에 웃음기가 쉽게 탈색되었다.
「실물이 훨씬 예쁜데 그래도 잘 나왔어.」
예쁘……?
“그치.”
메시지를 읽고 뜨악한 강한을 향해, 유일은 뻔뻔하게 물었다. 사르르 녹는 눈웃음을 지으며 그가 고개를 갸웃 틀었다.
“왜 안 담기지?”
나긋한 물음에 한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저 새끼는 진짜로 정상이 아니라고 씹어 대면서.
***
강한은 간지러운 말에 면역이 없었다.
함께 운동하던 친구들도 대다수 입버릇이 걸걸했고, 모친 또한 제 자식을 어화둥둥 싸고도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듣는 칭찬이라면 자세가 좋다든지, 체격이 우수하다든지, 든든하다거나 철이 빨리 들었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가끔 민우처럼 면전에 대고 잘생겼다는 둥 귀엽다는 둥 하는 사람도 있기야 했지만…….
“예쁘다니.”
거울 안에 가득 찬 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디 가서 못났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지만, 예쁘다는 말은 생전 처음이다. 의문 가득한 눈동자가 제 얼굴을 찬찬히 훑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한유일은 웬만한 사람들이 다 예쁘게 보이는 모양이다.
“한아, 가자!”
상념을 뚫고 밖에서 민우가 외쳤다. 편의점 창고 안에서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던 한은 부리나케 조끼를 벗었다.
“네, 가요.”
오늘이 마지막 근무였다. 한은 조끼에 붙은 명찰을 떼어 내고, 문에 붙어 있던 거울을 한 번 더 흘깃 살핀 후 밖으로 나섰다. 이제 일터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눈에 들어오는 편의점 정경이 갑작스레 새롭게 느껴졌다.
“방학 전까지는 더 하지.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고, 형은 참 섭섭하다.”
제 근무 날도 아니면서 기어코 편의점까지 찾아온 민우가 투덜거렸다. 서운함 가득, 힘이 없는 표정임에도 제법 강하게 한의 팔뚝을 쥐어 당겼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하필 마지막 근무일이 토요일이라, 저녁에 있는 플래시몹에 끌려가게 되었다. 상수와 유일에게도 대충 얼버무리며 없는 셈으로 쳤던 일정인데……. 한은 조금 난감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기억이 편의점이 아닌 다른 곳인 편이 나을지 모르겠다고 여겼다.
“이번에는 뭐 하는데요?”
애써 말머리를 돌리며 한은 힐긋 편의점을 돌아보았다.
민우와 함께 퇴근하지 않았다면, 술과 담배를 하나씩 사 볼 생각이었다. 혼자 시작하고 홀로 끝내는 감정이 너무도 애매해서. 그러니까 이게 정말 다 끝인 건지, 아니면 어떤 고비가 더 남아 있는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고 또 스스로도 알 수가 없어서. 한은 드라마나 영화로 접했던 주인공들의 기행을 따라가 볼 생각이었다. 조금 유치한 방법이지만.
“저번에 우리 사진 뜬 이후로 완전 유명세 타서 사람 엄청 많이 올 것 같거든. 그래서 약간 캠페인 같은 걸로?”
민우는 잘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동안 한은 아주 슬프거나 또 지나치게 떨리지 않았다. 너무 괜찮아서 오히려 이상한 기분으로, 마지막 동행을 했다.
이번 플래시몹 장소는 정원시와 두 시간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민우 말로는 차를 이용하면 40분 거리라는데, 지하철은 세 번이나 갈아타야만 했다. 덕분에 강한은 가는 내내 ‘우리 혜주’ 얘기를 들으며 이 끝맺음 방식에 대한 짙은 후회를 거쳤다.
“어, 강한이 이놈 왔구나!”
“이제 안 나온다면서? 왜? 엉? 단물만 빨고 뱉기야?”
“맞아, 너 완전 유명인 됐더만!”
오늘 역시 운영진들이 먼저 모여 종이를 자르고 있었다. 한적한 카페 하나를 통으로 차지한 그들은 문이 열린 순간부터 시끄럽게 일어나 소리쳤다. 한은 또다시 후회를 거쳐야 했다.
“애 좀 괴롭히지 마! 한아, 여기 앉아.”
민우처럼 저를 꼭 한이라고 부르는 혜주가 구세주였다. 그녀가 빼어 준 구석 자리 의자에 앉으며, 한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아니지? 계속할 거지? 재밌잖아, 그치? 너 덕분에 완전 유명해져서 사람도 많아. 우리 더 다양한 것도 할 수 있고. 외국처럼 대형 쇼핑몰에서 단체 춤도 출 수 있다고, 이제!”
“어우, 춤은 진짜 너나 춰라.”
“뭐래. 지가 제일 하고 싶어 했으면서.”
조용한 한을 두고 대학생 둘이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민우가 끼어들어 뭐라고 농담을 했고, 혜주는 한에게 종이를 밀어 주었다. 지난번처럼 오늘의 지령이 적혀 있는 인쇄지였다.
“선대로 잘라 주기만 하면 돼.”
그녀가 친절하게 웃으며 건네는 가위를 받아 들고, 한은 꾸벅 고개만 숙였다. 그러고는 말도 없이 가위질에 열중했다. 그러고 있으면 주변 소음이 사라져 차라리 나았다.
용지를 오리며 읽어 본 지령은 확실히 민우의 말대로 캠페인 요소가 있었다. 오늘 참가자들이 할 일은 운영진이 미리 바닥에 표시해 둔 자리에 서서 머리 위로 하얀 원판을 드는 것뿐이었지만, 그들이 모여서 만드는 마크는 평화를 뜻하는 피스 심볼이었다. 지령의 끝에는 얼마 전 종전이 선언된 낯선 나라의 소식이 붙어 있었다.
하필 마지막 만남에 이렇게 숙연하고 진지한 플래시몹이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울적한 와중, ‘원판을 들고 서 있다가,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면 양옆에 있는 서로를 꼭 안아 주세요!’라는 따뜻한 문구가 한을 더 심란하게 했다. 베개 싸움 때 그랬듯이 제 옆에는 높은 확률로 민우가 있을 것이다. 안지 않으려고 해도 꼭 부여잡고 장난칠 그가 훤했다.
벌써부터 그 시간을 억겁처럼 느낄 자신이 훤해 가위질은 점점 느려졌다. 느릿한 손길마다 뚝뚝, 짙은 후회가 흘러내린다.
“한이가 오늘도 지령 배부해 줄래?”
“…네, 뭐.”
지령 용지는 작은 상자 안에 담겼다. 확실히 지난번보다 수가 배로 늘어, 양이 많았다. 바스락대는 종이 모음을 정리해 넣을 때부터 어쩐지 지령 상자는 한의 손에 들려 있었다.
“자아, 오늘은 이거 쓰고 있어야 돼.”
대답하기 무섭게 팔이 쑥 끌렸다. 혜주였다. 키가 한참 작은 탓에 한은 자기도 모르게 허리와 무릎을 굽혀 높이를 맞춘다. ‘고마워.’ 싱글벙글 웃은 혜주가 한의 머리 위에 무언가를 씌웠다.
“……예? 머리띠요?”
“응. 공지에 그렇게 나갔어.”
양쪽 귀 뒤쪽을 갑갑하게 조인 머리띠는 푹신했다. 한은 황당한 얼굴로 그 테두리를 더듬어 점차 정수리 근처의 장식을 향했다. 그의 손이 서로 가까워질수록,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웃음이 짙어졌다.
“이게……. 뭐예요?”
강한의 커다란 손안에 자그마한 솜털 뭉치 같은 것이 만져졌다. 동그랗고 푹신한 솜뭉치에 깃털이 붙은 듯한 모양새였다.
“뱁새. 원래 평화의 상징 비둘기 하려다가, 없더라고. 그거밖에.”
“야, 귀엽다. 잘 어울리는데?”
뱁새……. 한은 아득하게 따라 읊으며, 아무 상가 앞에 섰다. 출입문 옆으로 조그마하게 비치는 제 모습은 조금 우스워 보였다.
“아, 좀…. 징그러운 것 같은데.”
“아니야, 잘 어울려.”
혜주는 그렇게 말했지만, 민우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큭큭 웃고 있었다. 놀리는 게 빤해서 한은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머리 위에 파들파들 떨고 있는 뱁새 장식이 인질처럼 보인다.
“……그냥 빨리할게요.”
어차피 오늘까지만 참으면 되니까. 한은 그렇게 읊조리며 얼른 정해진 지하철역 출구 앞에 섰다. 그를 혼자 두고 대여섯 걸음 떨어져 있는 나머지 운영진들은 구경하며 사진 찍기 바빴다. 한은 멋쩍은 얼굴을 슬쩍 숙였다.
놀이동산에서도 유일과 상수가 그렇게 하자고 조르던 걸 안 해 줬는데……. 서울 한복판의 길거리에서 이런 걸 쓰고 있다니.
한숨을 푹 내쉬는 순간, 시야에 누군가의 발끝이 섰다.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지령 받으러 왔는데요.’ 하고 말했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한이 너무해.”
고개를 들자 내용과는 달리 산뜻하게 웃는 유일이 있었다.
“내가 써 달라고 할 때는 안 써 주고.”
어렵지 않게 손을 뻗어 머리 위의 뱁새를 톡, 건드린 유일은 눈을 흘겼다. 흘겨보는 중에도 웃음이 담겨 있어 하나도 무섭지는 않았다. 다만 한은 아주 쪽팔렸다. 평소였다면 네가 왜 여기에 오느냐며 꺼지라고 으름장을 놓았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혼자만의 오해와 착각이 풀린 뒤부터, 강한은 유일을 대하는 것이 조금 어려워졌다. 괜히 빚을 진 기분이라 말을 한 번 걸러 하게 된다.
이번 역시 숨을 한 번 고르고서야 입을 열었다.
“수신호…….”
“아.”
작게 읊조리자 유일이 손을 들어 보였다. 암호로 정해진 브이 자를 그리며 웃는 얼굴은 필요 이상으로 근사했고, 강한은 괜히 더듬거리며 상자 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여기. 그…, 찾아본 거야? 카페?”
“응, 한이가 말 안 해 줘서 내가 검색했어.”
“아. 나도 원래 이제 안 하려고 했는데 형이 끌고…. 아무튼, 그, 시간 될 때까지 근처에 있어.”
“한이 옆에 있으면 안 돼?”
그래도 되나. 처음에는 그런 의문을 먼저 떠올렸다가, ‘안 된다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한 눈동자가 멀리 떨어져 서 있던 민우를 향했다.
“어, 왜? 친구야?”
“네. 학교….”
“아, 그때 편의점 왔던 애네? 대박, 오늘도 사진 찍히면 다음 참여자 세 배로 늘겠다.”
그래도 되나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운영진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민우가 한 마디 하는 순간부터 가까이 다가온 운영진들은 한 마디씩 얹기 시작했다. 어디 사는지, 몇 살인지, 연습생인지. 갑작스레 쏟아지는 질문 폭탄에 유일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종래는 그를 가운데 놓고 아예 품평이라도 하는 분위기라, 강한은 헛기침을 했다.
한유일은 바보같이 착한 구석이 있어서 이럴 때 빼내 줘야 한다.
“저 오늘은 지령 배부 안 할게요.”
일부러 다부지게 말하며 머리띠를 벗어 냈다. 동그랗게 모여 서 있던 운영진들이 ‘어, 어엇, 응!’ 하고 각자 어색한 대답을 하며 상자와 머리띠를 받았다.
“시간 될 때까지 저기 가 있자.”
유일의 하얀 팔목을 잡아끌었다. 인파 속을 뚫고, 그를 당겨 나온 한이 성큼성큼 벤치로 향해 걷는다.
“와, 한아.”
뒤따라 걷던 유일이 돌연 탄성을 쏟았다. 강한은 그가 신기한 광경이라도 목격했나 싶어 우뚝 멈추어 섰다. 그러나 ‘뭐.’ 대꾸하며 주변을 돌아보아도, 특별한 풍경은 없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해사하게 웃고 있는 유일뿐이다.
“나 방금 완전 반했어.”
더불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속삭임.
“오길 잘했다.”
이번에는 우뚝 멈춰 서 있는 한을 유일이 당겼다. 어어, 맹한 소리를 내며 강한은 벤치 위에 털썩 앉았다. 거의 끌려가다시피 앉은 나무 벤치가 뜨끈했다. 초여름 열기를 가득 먹어 뜨거운 열기 때문인지, 강한 역시 더위를 느꼈다. 사방이 갑작스레 후끈거리는 듯했다.
***
플래시몹이 시작되는 순간, 강한은 지난번보다 두 배나 늘어난 참가자 수에 희망을 품었다. 어쩌면 민우와 떨어져 서 있을 수도 있겠다는 낙관적 희망을.
그러나 짝사랑이란 불운을 모으는 자석 같아서, 바라지 않는 일은 귀신같이 벌어지고는 했다.
하얀 원판을 들고 선 강한은 어느덧 민우 옆에 섰다. 심지어 민우의 다른 쪽 옆에는 혜주가 서 있었는데, 강한은 행사가 벌어지는 그 짧은 틈 속에서 민우가 여자 친구와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장면을 상상했다. 서로를 꽉 안고 있는 민우와 혜주 옆에서 차례를 기다리지도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못한 채 어영부영 서 있는 자신을 생각하니,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한이 속으로 어떤 비극을 상상하든, 시간은 야속하게 흘렀다. 하얀 원판을 들고 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면 양옆에 있는 서로를 꼭 안아 주세요!’라는 문장이 아득히 머릿속을 스쳤다.
강한은 일단 민우 방향을 먼저 보았다. 그가 혜주와 안고 있다면 눈치껏 다른 사람을 안고, 재빨리 무리에서 멀어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고개가 왼쪽으로 다 돌아가기도 전에 몸이 휘청, 한쪽으로 쏠렸다.
“한아.”
넘어진다고 생각했던 시야가 바로잡히고, 어깨와 가슴에 단단한 몸이 닿았다. 한은 저도 모르게 상대의 팔뚝을 꾹 쥐었다.
“서로를 꼭 안아 주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강한은 왜인지 긴장이 풀렸다. 바싹 굳었던 몸에서 긴장을 한 숨 뱉어 내자 딱딱한 어깨 근처에 턱이 얹혔다. 밀어내듯 쥐었던 팔뚝도 놓아 버리고 ‘그래.’ 대답하자 유일의 체 향이 훅 끼쳤다. 뜨거운 여름과 닮지 않은 산뜻한 냄새였다.
“야, 근데 양쪽…….”
“너무 좋다.”
제 옆은 여자 친구와 붙은 민우가 있으니 상관없다지만, 유일의 옆 사람은 꽤 당황스러울 텐데. 뒤늦게 상황 파악을 끝낸 한이 등을 두드렸지만, 유일은 말을 자르며 웃었다. 바람을 뱉듯 푸시시 웃은 그가 고개를 숙여 파고들 듯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간지러운 머리칼이 귓가와 목덜미를 스치며 소름이 돋는다.
“야, 야.”
서로의 볼이 너무 가까웠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한이 고개를 바싹 들었다. 한을 밀어내며 팔을 툭툭 치는 틈에 호루라기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해산을 알리는 소리다.
“응?”
여태 모르는 척하던 유일은 그때 고개를 떼어 냈다. 순진하고 말간 얼굴이 아직도 품 안에 지나치게 가까이 있었다.
“좀 떨어져, 인마.”
반듯하고 하얀 이마를 손바닥으로 꾸욱 밀어내며, 한은 도망치듯 돌아섰다.
플래시몹은 원래 모이는 순간과 해산이 가장 중요한 법이었다.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아무 징조도 없이 순식간에 모이고, 또 돌발 행동을 벌인 후에도 눈 깜빡할 새 사라져야 했다. 그러므로 지인끼리 왔다고 해도 장소를 벗어날 때까지는 대화를 하지 않는다. 그저 최대한 빨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인파 속에 섞여 들어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발을 재게 놀려야 했다. 다른 이유 하나 없이, 오로지 플래시몹 때문에.
그래도 돌아가는 길은 유일과 함께였다. 강한이 저도 모르게 향한 지하철역에 유일이 잘도 쫓아왔으므로.
‘이 새끼 조금 스토커 기질이 있네.’
강한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말도 해 주지 않은 플래시몹을 오죽 같이 해 보고 싶으면 검색까지 해서 왔을까 싶어서 말았다.
나란히 탄 지하철은 자리가 텅텅 비어 있었다. 이 지하철역이 종점과 가까운 곳이라 그런 듯했다. 한은 유일에게 가서 앉으라고 턱짓을 한 뒤 문 앞에 섰다. 정원시와 두 시간이나 떨어진 곳이니 서서 가면 불편할 터였다. 정작 자신은 자리가 있어도 잘 앉지 않았지만.
“지하철은 앉아서 가면 더 불편해.”
그런데 고개를 저은 유일이 옆으로 서며 똑같은 의중을 표했다. 보통 ‘자리도 많은데 왜 서서 가?’ 하고 질문이 돌아오고는 하는 타이밍에.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유일은 웃었다.
“몸 웅크려서 가야 하잖아.”
잘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유일은 몸을 한껏 옹송그렸다. 널따란 어깨뼈가 우스울 만큼 안으로 접히고, 도톰한 입술이 비죽 나왔다. 무방비한 틈을 찌른 생각지 못한 모습에 강한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유일이 놀란 눈을 떴다.
“하긴. 너도 그렇겠구나.”
예상치 못하게 터진 웃음이 워낙 컸는지 시선이 모였다. 민망해진 한은 겸연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마침 핑계가 되어 줄 전화가 울렸다. 덜컹, 출발하는 열차 탓을 하며 한은 은근슬쩍 몸을 돌려 섰다. 하지만 액정 위에 뜬 이름 또한 피하고 싶기는 매한가지였다.
“네, 형.”
올 때도 함께 온 마당에 인사도 없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전화가 올 만도 한데, 한은 어쩐지 피로를 느꼈다. 감정을 정리해 없앤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드는 듯하다.
“친…구랑 갈게요. 네, 다음에 또 보면 되죠. …아니에요. 술은 무슨 술이에요, 고등학생인데.”
장황하게 이어진 민우의 투정은 대다수 ‘송별회’로 귀결되었다. 이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플래시몹도 더는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파티를 해 주려고 했다고. 민우는 지금이라도 와서 같이 맥주 마시자며 성화를 부렸다. 벌써 취한 사람처럼 데시벨이 높아져, 한은 자그마한 핸드폰을 꾹 감싸 쥐었다.
[고등학생인 게 뭔 상관이야! 너 어차피 성인이잖아. 지하철 벌써 탔어? 우리가 그냥 거기로 갈까? 같이 마시자, 야, 한아. 형이랑 술 마셔 본 적 없잖아아.]
“아, 됐어요.”
다소 짜증스럽게 답하는 순간 지하철 문이 열렸다. 치이익, 커다란 소음과 함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선다. 빈자리를 향한 전쟁에 휩쓸려 한은 유일과 조금 더 가까이 서야 했다.
[형들이 사 올 테니까 공원에서 같이 마시자, 어?]
“됐다니까요. 미성년자도 있고.”
계속되는 고집에 결국 강한은 필살기를 꺼냈다. 흘깃, 유일을 바라보며 툭 내뱉은 말에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그래도 열아홉이면…….’ 웅얼거리던 민우가 결국 입맛만 다시며 통화를 끊었다. 요즘 냉담해진 너에게 서운하다는 요지의 투정과 함께였다. 한은 달래 주지 않은 채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미성년자.”
수화기 너머를 무시하자, 이번에는 면전에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어?”
“……미성년자.”
눈동자 안이 묘하게 텅 빈 채로, 한유일은 지하철 문 너머를 응시했다. 허탈한 듯 중얼대는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한데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다. 강한은 고개를 틀며 문에 조금 더 가까이 섰다.
‘밖에 뭐라도 있나?’
눈을 좁혀 바깥을 보자, 지상을 달리는 지하철 차창에는 전깃줄과 낯선 건물들뿐이다.
“맞네, 미성년자….”
속도를 따라 뒤로 움직이는 풍경에 대고 한유일은 그렇게 덧붙였다. ‘진짜 존나 또라이 같아…….’ 강한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아, 뭐. 왜?”
“술 먹자고 하셔?”
“…그러기는 했는데, 무슨 술이야.”
“응.”
순하게 대답해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 유일의 얼굴은 심란했다. 도통 어디서 핀트가 나간 건지, 강한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그를 향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설마 아쉽냐?”
지난번 담배도 그렇고. 알고 보면 한유일은 양아치일지도 몰랐다. 한이 눈을 흘기며 묻자, 유일은 망설이는 듯하다 슬쩍 시선을 내렸다. 처연하게 내리깐 속눈썹이 길게 그늘을 만들었다.
“그냥 좀 궁금해서…….”
“궁금?”
“응, 나 한 모금도 안 마셔 봤거든.”
미성년자가 술을 마셔 본 적 없다는 게 놀랄 일은 아니지만, 한유일이 유독 강조해 말한 ‘한 모금’에서 한은 묘한 차이를 느꼈다.
“한 번도? 한 방울도?”
“으응. 다른 애들은 어렸을 때도 어른들이 장난으로 먹이거나 친구들끼리도 마셔 본다는데…….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한다고 아예 집에서 미리 가르치는 부모님도 계시다며.”
하기야 강한 역시 초등학생 때 첫 술을 마셨다. 모친이 장난으로 사이다라고 속여 마시게 했는데, 한 모금도 채 삼키지 못하고 뱉었던 기억이 있다. 그 뒤에는 중학생 때 합숙 훈련에 허세 짙은 동기가 가져온 막걸리와 소주. 호기심에 맛만 봤을 때 감독에게 걸려 죽도록 맞았고, 그다음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수학여행에서 같은 방 자식이 교관에게 걸려 얼차려를 받았다.
“나는 없었거든, 그런 적.”
아니, 무슨 고등학생이 술 못 마셔 본 걸로 불쌍한 척을 하냐고…….
강한은 잇새로 쌍소리를 씹으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여태까지 온 거리와 다시 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 민우네 무리와 유일이 잘 어울릴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 법을 어긴다는 찜찜함. 그런 것들이 막 뒤섞이며 초조함을 불렀다.
“나중에 배우 할 거라면서 너무 조심성 없지 않냐?”
결국 이번에도 마지막 장애물은 ‘미래’다. 툭 내뱉은 말이 일종의 허락처럼 느껴졌는지, 시무룩하던 유일은 조금 환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한아, 너희 집 가서 마셔 보면 안 돼? 딱 한 잔만.”
마치 각본을 준비해 뒀던 것처럼 술술 나오는 대사가 해맑기까지 했다. 낚인 기분이 들어, 강한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지만 이제 와서 거절하기도 뭐했다. 그나마 여태 왔던 길을 돌아가 민우네와 함께 노는 것보다야 훨씬 위험 부담도 없었다.
“딱 한 잔이다.”
“응!”
“밖에 십 분만 서 있어.”
“응?”
“……집 더러우니까.”
쪽팔려서 작아진 목소리에 유일은 아하하 웃었다.
“한이 너 너무 귀여워.”
예쁘다는 말을 했을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낯간지러운 말을 하면서.
“너 존나 진심이야?”
이번에는 그때보다 두 배는 더 황당해서 강한은 두서도 없이 따져 물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근거를 대신하자, 유일이 의아하다는 듯 되받아쳤다.
“응. 그런 생각 안 해 봤어?”
“…뭐, 너 귀엽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왜 해야…,”
“아니, 한이 너 귀엽다는 생각.”
“내가 나 귀엽…, 아, 됐다. 그냥 조용히 가자.”
‘이 새끼 진짜 또라이인가.’ 강한은 몇 번째 떠오른 생각을 되새기며, 아예 그를 등지고 섰다. 노약자석에 가까워진 그가 부담스러운지 자리에 앉은 할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그에 어쩔 수 없이 뒷걸음질하자 등 뒤로 유일이 붙었다. 부쩍 가까워진 그가 낮게 웃었다.
“한이는 자기가 귀여운 줄 몰랐구나. 신기해.”
재차 또라이 같은 소리를 하면서.
“닥치고 가자고, 좀…….”
결국 강한은 비는 듯이 속삭였다. 제대로 마셔 본 적도 없는 술이 미치도록 당기는 날이었다.
***
현관 앞에 유일을 세워 놓은 보람도 없이 청소는 금세 끝났다. 강한은 오히려 지나치게 휑해 보이는 거실을 슥 둘러보고, 식탁 의자에 걸쳐져 있던 수건을 빼냈다. 그러고는 베란다 앞에 놓인 빨래 통 위를 덮었다. 오늘 아침 샤워하고 갈아입은 속옷이 제일 위에 있었다.
“야, 들어와.”
아주 짧은 청소를 끝낸 한은 곧장 현관을 열었다. 무뚝뚝하게 문만 열어젖히고, 따로 잡아 주지 않은 채 바닥에 놓았던 봉투를 챙겼다. 검은 봉투 안에서 유리병끼리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실례하겠습니다.”
닫히는 문틈을 비집고 들어선 유일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남의 집 문 앞에서 보초 서는 듯이 멀뚱히 있어 놓고도.
“한아, 집 되게 깨끗하다.”
“…그냥. 집에서 뭐 안 하니까.”
초등학생 이후로 집에 친구를 데려와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친구라고 불러도 될 만큼 가까운 사이인지 애매한 놈이라면 더더욱. 덕분에 기분이 영 어색하고 민망해, 한은 상을 차리는 데에만 몰두했다.
소주 세 병과 맥주 두 병. 도수조차 알지 못하고 산 술병들 옆으로 과자와 마른안주가 놓였다. 딱 한 잔이라는 엄포가 무색하게 제법 양이 많았다. 이왕 마셔 보는 김에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도 궁금하다는 유일의 고집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벌써 상차림이 끝나, 커다란 손은 어색하게 테이블 위를 방황했다. 제대로 술자리를 가져 본 적이 없으니 뭐가 부족한지, 어떤 때에 잔을 채워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컵 꺼내 올게.”
“아, 어.”
오히려 한 모금도 마셔 본 적 없다던 한유일이 더 능숙했다. 집주인보다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향한 그가 컵과 물통을 가져왔다.
“술 마실 때 물 많이 마시면 좋대.”
해사하게 웃은 그는 물은 테이블 아래로 내려놓고, 빈 잔에 소주를 먼저 따랐다. 컵에 반이나 채워진 투명한 액체 위로 곧이어 맥주가 섞였다. 능숙하게 술을 제조하는 모습이 황당해 바라보자 유일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이거 궁금했거든.”
연한 레몬색 액체가 넘실거렸다. 한은 그가 건네주는 잔을 받아 내며 한숨을 삼켰다.
“야, 너.”
‘소주 이렇게 따르면 큰일 나.’ 하고 겁 없는 초심자에게 일러 주려던 입술이 멈추었다. 무엇이든 직접 경험해 봐야 가장 빠른 법. 어차피 맛없다며 뱉어 낼 얼굴이 훤해서, 강한은 고개를 저었다.
“됐다. 마셔 봐.”
“건배도 하자.”
“…너 되게 본 게 많네.”
“응, 이런 것도 하잖아.”
씨익 웃은 유일이 목을 가다듬고 무릎을 꿇었다. 하얀색 반팔 티셔츠 한가운데, 가상의 넥타이를 넘기는 시늉을 하며 그가 잔을 내밀었다. 두 손으로 받쳐 깍듯하게 내밀어진 잔이 한의 잔에 부딪혔다.
“위하여!”
그야말로 아저씨들 입에서나 들어 본 소리였다. 기가 탁 막힌 강한이 헛웃음을 치자, 유일은 눈을 더 휘어 웃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미소가 ‘위하여’ 따위의 건배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자주 생각하는 건데.”
강한은 느리게 운을 떼며, 손에 쥔 유리컵을 작게 한 바퀴 돌렸다. 잔의 원형 궤도를 따라 액체가 출렁인다. 떨떠름한 눈길로 그 곡선을 바라보다 결심한 듯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먹기 싫은 약을 해치우듯 단번에.
“응.”
유일 역시 대답과 동시에 술을 삼켰다. 한의 예상과 다르게, 바로 뱉어 내지 않은 채.
“너 좀…….”
하얀 목선이 꿀꺽, 꿀꺽 소리에 맞춰 움직였다. 마른 데에 비해 그다지 도드라지지 않는 목울대 덕분에 유일의 목덜미는 꽤 매끈하다.
그 모습이 무척 신기해서 말끝이 흐려지고 시선이 멎었다. 안주를 다급히 밀어 넣던 손가락마저 느리게 변할 쯤, 유일은 빈 잔을 내려놓았다. 처음 술을 먹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유일도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입술의 물기를 닦는 그 찰나에 표정 또한 지워졌다. 금세 산뜻한 얼굴로 돌아온 그가 웃으며 물었다.
“나 좀?”
그제야 누군가 옆구리를 찌른 것처럼, 한은 퍼뜩 튀며 과자를 집어 먹었다.
“그냥 너 좀…, 가끔 존나 또라이 같다고.”
남의 목덜미를 훔쳐보고 있던 게 민망해서 괜히 어투도 거칠어졌다. 유일은 조금도 노여워하지 않고 웃었다.
“아, 정말?”
그렇게 물으며 다시 빈 잔 두 개를 채우는 손길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심지어 한쪽 팔을 받치며 예의까지 차리는 게, 암만 봐도 처음 마시는 놈 같지는 않았다.
“야, 너 솔직히 말해 봐. 마셔 본 적 있지?”
반쯤 찌푸린 눈이 예리하게 유일을 훑었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조금 전 말도 안 되는 건배사를 흉내 내느라 꿇은 무릎을 그대로 유지한 한유일은 술병 든 쪽의 손목을 반듯하게 감싸고 있었다. 게다가 잔이 빈 직후 바로 채워 버리기까지. 적어도 집에서 한두 번은 술잔을 받아 본 솜씨였다.
“너 그냥 술 마시고 싶어서 구라 쳤지.”
이거 진짜 은근히 양아치 기가 있네.
강한은 그렇게 씹어 대며 이 기회에 한 소리 따끔하게 해 줄 각오를 세웠다. 한 살 더 먹었다고 인생 선배 노릇을 할 생각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유일이 양아치가 되는 건 싫었다.
“아……. 음, 그게.”
잔에 술을 채우던 유일은 천천히 술병을 떼어 냈다. 제 자세를 훑듯이 고개를 숙여 살피는 낯에 낭패가 스몄다. 한은 증거를 잡아낸 형사처럼 의기양양하게 턱 끝을 들었다.
어디 한번 말이나 해 보라는 듯 쳐다보자, 유일이 제 눈 끝을 살살 매만졌다. 고개를 슬쩍 틀고 난처하다는 듯 웃는 얼굴은 꼬리를 밟힌 여우 같았다.
“뭐.”
한은 부러 목소리를 낮추며 채근했다. 얼굴도 할 수 있는 한 차갑게 굳혔다. 지금부터 분위기를 잡아야 충고의 효력이 더 커질 것이었다.
“제사 때, 내가 따르거든.”
하지만 유일이 나긋하게 꺼낸 답은 단숨에 낯을 녹였다. 힘 풀린 눈, 코, 입이 맥없이 벌어졌다.
“틀렸어?”
의심을 받고도 여태 순진한 유일은 착하게도 물었다. 그에 강한은 제 무릎을 꿇고 싶은 기분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냐, 존나……. 아니야. 아무튼.”
횡설수설 답한 강한은 그가 따르던 술을 이어 따르고, 먼저 벌컥 들이켰다. 이번에도 혼자 거하게 친 설레발이 한 사발의 죄책감을 맞고 수그러들었다.
***
눈앞이 지나치게 간단명료했다. 하얗고 밋밋한 평판 군데군데 희미한 얼룩이 진, 무척 설고도 익숙한 면.
강한은 흡사 최면을 걸기 위한 영상처럼 울렁이는 장면을 노려보며 입술이 움직이는 대로 지껄였다.
“태권도 왜 그만뒀냐고?”
이미 여러 번 한유일의 질문을 반복해 물었다는 사실이 뇌 뒤편을 희미하게 지났다.
“응.”
유일의 목소리는 그쪽에서부터 돌아왔다. 뒤통수 너머, 희미하고도 몽롱한 틈에서.
열에 달뜬 눈을 느리게 끔벅이면서 강한은 바닥을 짚었다. 반쯤 누웠던 몸을 추슬러 앉자, 등 뒤로 소파가 닿았다. 뭉툭한 끝에 등뼈를 눌러 대자 누군가의 숨결이 느껴졌다. 새액, 색. 얼굴만큼이나 고운 소리가 나는 걸 보니 한유일의 것이다.
“태권도를 왜 그만뒀냐고…….”
“응.”
답 대신 되풀이만 하는 상대가 짜증 날 법도 한데, 한유일은 오히려 웃었다. 허공에 흩어진 웃음이 한의 목뒤에 닿았다. 그게 무척이나 간지러워서 한은 커다란 손으로 목뒤를 덮었다. 아이, 씨……. 조금 짜증을 내기도 했다.
“사실.”
그렇게 운을 떼고도 한은 말을 하지 못했다. 몽롱한 눈을 감고 망설이기를 한참. 고개를 푹 숙인 한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술에 취한 기분은 참 이상했다.
전신이 따뜻한 물에 푹 잠긴 듯이 혼몽하고, 열이 오르고, 그러다가 또 서늘하고 차가웠다. 사지가 따끈하다가도 금방 이가 떨릴 것처럼 추웠다. 기분이 좋다고도 할 수 없고 나쁘다고도 하기 힘든 감각이었다.
그런데 마음은 원래 그 혼란스러운 온도에서만 녹는 건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입술이 움직이고, 굳게 잠겨 있던 빗장도 흔들거렸다. 진실을 털어놓게 된다는 마법의 약을 마신 것처럼.
고개를 아래로 푹 꺾고 입술만 달싹거리는 동안 한의 이성은 무던히 노력했다. 굳이 진실을 얘기할 필요가 있느냐고, 더 귀찮아지지 말자고. 끊임없이 악을 질렀으나 문득 ‘아!’ 탄성을 내지르는 한의 낯에는 이미 이성이 희미했다.
“너도 비밀 말해 줬으니까 나도 해 줄게.”
고개를 뒤로 훅 꺾은 한이 씨익 웃었다. 제대로 부딪힐 뻔했던 유일은 가까스로 피해 옮겨 누웠다. 소파 모양대로 길게 드러누운 그가 강한의 옆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비밀? 나는 한이한테 비밀 얘기 한 적 없는데.”
“사실은.”
천장을 향했던 얼굴이 느리게 돌아섰다.
“나 아파서 그만둔 거 아냐.”
유일과 혼탁한 시선을 마주한 강한은 픽픽 웃음을 터트렸다. 본인이 하는 말이 우스워 죽겠다는 듯, 가슴팍까지 들썩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엄마가 싫어해. 태권도. 나는…… 존나 몰랐거든? 근데 싫어했대.”
웃기지 않냐는 듯 강한의 눈썹 한쪽이 솟구쳤다. 유일은 대답 없이 느리게 눈만 깜빡거렸다.
“병원에서…. 깼는데, 엄마가 누구한테 전화해서 울면서…… 화를 막 내는데. 아버지더라고. 나는, 그, 연락처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아무튼……. 얘는 너 때문에 태권도 아직도 하는데, 병원비 하나 못 내주냐고 그러더라. 아버지가 안 도와줬나 봐. 존나 나쁘지. 하여간 엄마가 막, 자기는. 태권도 도복도 보기 싫대.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고. 전화는 이미 끊긴 것 같은데 거기다가 대고서 계속……. 나는 그때, 엄마가 입원할까 봐 더 걱정되더라. 피 토하시는 줄 알았어.”
허허실실 이어진 웃음은 말미에도 붙었다. 일부러 장난기를 묻혀 마무리한 말끝에는 답이 오지 않았다. 유일은 가라앉은 눈으로 한을 물끄러미 보다가 돌연 가까워졌다.
스윽, 소파를 미끄러지듯 순식간에 한에게 다가간 그가 손을 내밀었다. 한은 얼굴로 다가오는 하얀 손가락이 신화 속에 나오는 성스러운 나뭇가지 같다고 생각하며 또 비식비식 웃었다.
“웃든가, 울든가. 하나만 해.”
그가 이렇게 타박하는 투로 말하는 것은 처음 듣는다. 그래서 한은 무척 놀랐으나, 눈을 키우지는 못했다. 누군가에게 처음 털어놓은 비밀 덕분에 마음이 심히 가벼워졌고 탈력감이 몰려왔다. 잠이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근데, 한아. 나 부모님 안 계시는 건 비밀 아니야.”
유일의 손가락이 눈가와 볼을 쓰다듬었다. 무척 소중한 것을 만지듯 간지러운 손길이었다.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당장 미쳤느냐고 물었을 텐데, 지금 이 순간에는 강한마저도 그 감촉이 아주 반가웠다. 도리어 조금 더 해 주기를 바라며 눈을 스르륵 감았다.
“그런 얘기쯤이야 교탁 앞에 나가서도 할 수 있어.”
술기운이 도는 한유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조금 더 몽환적이었다. 덕분에 잠기운은 점점 더 묵직해졌다. 한의 귓가에 스스로 뱉는 커다란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대신 진짜 비밀을 말해 줄까.”
유일의 나긋한 속삭임이 허공을 부유했다. 강한은 입술만 달싹이다 수마에게 몸을 내맡겼다. 그의 진짜 비밀은 듣고 싶었지만, 남은 이성이 너무도 희미했다. 아쉽고 궁금한 마음이 묵직한 수면욕에 질질 끌려갔다. 한유일의 물음이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희미해져 간다.
“좋아해.”
그러나 한순간.
“내가 너 좋아해, 한아. 오래전부터.”
강한은 몽상보다도 더 비현실적인 현실 속에 끌려 나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