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rologue(1권) (1/12)

Prologue

남빛 어둠에 물든 방은 아주 고요했다. 너무도 적요해 느릿하게 개폐를 반복하는 눈꺼풀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강한은 그 푸른 침묵 안에 누워 벌겋게 익은 눈을 끔벅거렸다. 시야가 가물가물 흐려졌다가 맑아지기를 반복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막끼리 끈끈하게 맞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눈에 힘주어 인상을 찌푸리자 한결 나아졌지만, 그러자니 이번에는 색색대는 호흡이 문제였다. 어디서 자꾸만 술에 취한 깊은 숨소리가 흘렀다.

그게 자기 것인 줄도 모르고 불쾌해하던 그는 무거운 손을 들어 제 코를 막았다. 막았더니 검은 방이 온통 조용해져 그제야 범인을 알았다. 실실 웃느라 잠시 깨어난 눈동자가 오래가지 못하고 금세 혼몽해졌다. 옆으로 누워 핸드폰을 무슨 구명줄 잡듯 쥐고 있던 강한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술도 진탕 마셨겠다, 내일은 일도 없겠다. 시각도 마침 딱 좋은 새벽 두 시. 이대로 푹 자 버려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 없는 어둠 속.

“어으….”

그런데도 그는 잠이 들면 혼나기라도 할 듯이 번뜩 눈을 떴다. 그나마도 눈동자가 재차 탁해졌지만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대항했다. 한쪽 눈썹이 부자연스럽게 솟구쳐 올라갔다.

“한유일이…… 여자 얘기, 너무 해서 애들도 다 듣기 싫어했…기는 무슨.”

긴 투쟁 끝에 남자는 마침내 핸드폰 화면을 시야에 담았다. 그러고는 이렇게까지 사투를 벌여 가며 봐야만 했던 글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곧 잠들까 걱정되는 양.

“언제 한번은 이런 적도 있음. 우리 반에 어떤 애가 옆 학교 여자애 좋아했는데, 하도 얘기 많이 해서 반 애들 다 알았단 말임. 근데 일부러 걔 뺏고 고백 편지 받았다고 자랑한 적도 있음? 이건 뭔…… 소설을 쓰고 있네, 새끼가.”

휴대폰 글씨 크기가 작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오늘은 유독 작았다. 그래서 강한은 거의 코앞까지 액정을 바싹 놓고 떠듬떠듬 읽으며 반박했다. 읽다 보니까 열이 슬슬 올라 잠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때도 배우 한다고 나대기는 했는데, 동창회에서 들어 보니까 주로 연극만 한대서 주제 파악한 줄. 이렇게 뻔뻔하게 방송에 나올 줄은 몰랐는데….”

게슴츠레한 눈 그대로 벌떡 일어나 앉은 강한은 방금 읽은 글을 다시 속독했다. 내용이 머릿속에 흘러들어 오는 동안 혼탁했던 눈에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단순히 헛손질로 액정 밝기를 확 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새끼 지금 방송 이미지 다 구라임ㅋㅋ

지금 나이가 몇인데;; 얼마 전에 모태 솔로라고 인터뷰했다는 거 듣고 토 나옴

고딩 때 내가 들은 것만 해도……. 솔직히 아는 애들 사이에선 걸레라고 유명했을 정도.

그리고 그때부터 이미 노는 물 달라서 뭐 대학생들이랑 어울리면서 누나들 사귀고 그럼.

여자 존나 좋아하는 새끼가 요즘 호모 드라마 찍는 거 보면 말도 안 나옴.

그 새끼 호모포비아인데 ㅋㅋ」

링크를 클릭할 때까지만 해도 분명 뜬구름 잡는 소리이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이번 것은 달랐다. 길고 추잡한 글 사이사이에는 아주 분명한 악의와 추잡한 욕망이 묻어 있었다.

「솔까 내 기준 한유일 정도면 창놈임 ㅇㅇ」

그 더러운 문장들 속에서 강한을 유난히 화나게 한 것은 이 말이었다. 술 때문에 안 그래도 빠르게 뛰고 있던 맥박이 요란해졌다.

“누구더러 창놈이라고…….”

한유일의 말간 얼굴을 떠올린 순간, 펌프질을 한 것처럼 피가 솟았다. 이를 악다문 강한은 둔한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성이 결단을 내리기도 전에 손은 먼저 댓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도 한유일이랑 같은 반이었는데 너 존나 기억 조작이 심하다? 혹시 열등감 때문에 돌아 버린…….」

잔뜩 흥분해 글을 쓰던 강한은 일순 멈추었다. 등록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후회가 몰려들었다.

그동안 그렇게 잘 참았으면서 이게 무슨.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아무한테도 한유일과 동창이라고 말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모르는 척하면서 지냈고, 그의 연극 무대 한 번 몰래 보지 않았다. 동창회는 당연히 갈 이유도 없었고 유일의 이름을 인터넷에 굳이 검색해 찾은 적도 전무했다.

오늘 역시 사고와도 같은 대면에 의연한 척하지 않았던가. 물론 아주 성숙하고 어른스럽게 대처하는 한유일 앞에서 멍청하게 굳어 있던 것이 전부였지만.

“아, 이건 기억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호통치듯 버럭 내지른 강한은 술 냄새 가득한 숨을 푸우우 내쉬었다. 떠올리지 말자, 회상하지 말자, 어른스럽게 행동하자. 무슨 표어처럼 다짐한 말들이 머릿속을 꾸물꾸물 기어 다녔다.

그래, 그때는 정말 어렸다. 스스로 어린 줄도 몰랐을 정도로. 스물이면 이제 다 큰 어른인 줄 알았을 만큼이나 어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강한은 이제 스스로를 잘 도닥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벌인 일에 책임을 지는 어른이었고, 감정에 휘둘려 이상한 모험을 할 여유도 희박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그럴 염치가 없었다.

‘먼저 도망친 사람으로서 양심은 지키자.’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꽉 감았다 떴다. 두두두, 전투기처럼 눌러 썼던 말을 지우면서는 조금 웃기도 했다. ‘존나’라니. 나이를 먹으면 알아서 떨어질 줄 알았던 말투가 아직도 들러붙어 있었다.

기억처럼, 다만 자주 숨겨 놓을 뿐.

어릴 적 강한은 어른이라는 자격이 대단히 다른 알맹이를 만들어 주는 줄 알았다. 곤충이 변태 과정을 겪듯이. 어떤 추한 껍데기를 벗겨 내면 그 안에 멋지고 대단한 ‘진짜 나’라는 게 생겨나리라고 막연히 믿었다. 그러니까 이 지난한 과정은 모두 다 추억으로 남겨지는 줄로만, 아주 굳게 여겼다. 세월을 따라가며 추억을 두고 오면 과거는 서서히 벗겨지리라 간주했다. 허물처럼 툭 내려놓은 과거는 사진 같은 기억만 남긴 채 폐기될 것이며, 완전히 새로운 나만이 다시 미래를 살아갈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 착각의 괴리가 이제는 혼란스럽지도 않다. 어른이 되는 일은 생각보다 싱겁고 재미없으며 평범한 것이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강한은 그때와 별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다. 엄청난 변태 과정을 겪지도 않았고, 대단히 사상이 바뀌지도, 옛날보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수십 배 더 꿰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똑같은 속을 감추려 여러 가지 가면만 생겼을 뿐. 지금처럼 이미 졸업했다고 생각한 말투나 행동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한유일은 존나 다 컸던데. 아, 시발, 쪽팔려…….”

왜 거기서 그렇게 바보처럼 굳어 있었을까. 강한은 떠올리지 않기로 오늘 밤만 삼백 번쯤 다짐했던 기억을 재차 불러오며 흐느꼈다. 핸드폰 위로 이마를 쿵쿵 박다가 그제야 또 ‘존나’를 사용했음을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존나가 뭐냐, 존나가…….”

사회생활 다 헛짓으로 했다. 자조적인 숨을 내쉬며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다. 급격한 현실 자각 덕분에 분노로 끓던 눈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속도를 따라 묵직한 피로가 밀려왔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유독 정신력 소모가 심한 하루였다.

출근길에는 한유일이 ‘존나’ 좋아서 문제라며 통화하는 여학생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고, 처음으로 그의 생일 광고를 보았다. 그것도 새로 생긴 버스 정류장 하나를 가득 채운 영상 광고였다. 요즘 들어 그의 인지도가 무척 높아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에야 실질적인 체감이 들었다. 광고를 멍하니 바라보다 한유일의 생일이 있는 6월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닫자 흡연 욕구가 솟았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고, 유달리 속이 날뛰었다.

그런 아침을 서막 삼은 듯, 강한에게 오늘은 ‘세상이 작정하고 골탕 먹이려 하는 날’이었다. 질 나쁜 실험을 당하는 것처럼, 주변 어디를 가도 한유일 이야기가 나왔다. 물론 그의 팬인 사장을 둔 덕분에 한유일 이름이 들리는 것 자체는 유별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치기까지 한 것도 모자라, 한유일 홀로 의연한 재회였다. 주려고 벼르고 살던 체크 카드는커녕 준비했던 인사까지 빼앗긴 채로 강한은 멍청하게 굳어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만남을 그렇게 허무하게 끝내고 말았다.

한유일의 실물을 본 이후 더 이상한 말을 떠들기 시작한 직원 때문에 술자리 분위기는 영 좋지 않았다. 오히려 팬인 사장이 킬킬 웃으며 부추기고 다른 직원 혼자 수습하느라 애를 썼다. 그 직원은 이따금 강한을 쿡쿡 찌르며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제 코가 석 자였다. 강한은 그저 쉬지 않고 술을 마셨다. 알코올성 기억 상실이라는 병을 만들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버텨 낸 하루의 끝. 결국 결정타가 된 것은 방금 누른 사이트였다. 사이트 주소는 회식 내내 한유일을 험담하다 막판에는 결국 궁지에 몰렸던 직원 치언이 보내 주었다. 그는 새벽 시간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이 ‘이거 읽어 보세요! 제 말 맞죠?’ 하고 떵떵거리며 직원 단체 메신저에 링크를 보내왔다.

「나 한유일이랑 고등학교 동창인데…….」라는 제목은 커다란 하얀색 문서 아이콘 옆에 잘려 보였다. 그 굵게 처리된 제목 폰트 아래 나열된 내용은 더욱 처지가 궁했다. 미리 보기로 제공된 것은 단 네 글자. 「그 새끼가…….」뿐이었다. 누구든 한번 눌러 볼 수밖에 없는 조합 덕분에 조회 수도 폭발하고 있었다.

‘그래도 눌러 보지 말걸.’

열지 말아야 할 상자를 열었다. 그것도 술까지 거나하게 마신 새벽에.

여태 살아온 세월처럼 모르는 척했어야 맞는 일이다. 오늘 한유일이 보여 준 태도만 해도 분명한 뜻을 내보이지 않았던가. 다 알면서, 정말 다 알고 있으면서…….

창밖에서 길게 들어선 가로등 빗금이 방을 가로질렀다. 대각선 빛은 마치 무언가를 금지하듯 불길한 징조를 경고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한은 깊게 숨만 내쉰 채 짙은 회색 이불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갔다. 욱해서 작성하던 댓글도 잘 참았으니 이대로 잠들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런데도! 손가락은 자꾸 아래로 향했다. 그냥 닫아야 하는데. 더 보면 안 되는데. 정답을 알면서도 본능은 수천 개씩 달린 댓글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이런 글은 처음이 아니었다. 여느 연예인이 다 그렇듯, 한유일에게도 가끔 이런 헛소리가 따라붙곤 했다. 하지만 그 글들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사라지기 일쑤였다. 악담이라는 것도 결국은 논란이 일어야 떠돌게 되는 법. 아무리 자극적인 이야기라도 대상자가 지닌 화제성이 없다면, 사람들은 금세 고개를 돌리기 마련이었다.

한유일은 데뷔부터 화제를 불러온 스타는 아니었다. 대학로 연극과 뮤지컬 무대 쪽이라면 모를까, 방송 쪽에서 그의 이름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다. 이따금 흥행작의 조연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도 있었지만 딱 그뿐이었다. 다른 출연진들이 홍보를 위해 예능에 출연할 때도 그는 소식이 없었고, 카메라에 얼굴을 비치지 않는 연기자는 그만큼 금세 잊혔다. 연극과 뮤지컬, 일명 연뮤계 팬들 사이가 아니라면 그는 한유일이라는 이름 석 자보다 ‘그 왜 정우수 나왔던 <서울>에서 맨 처음에 죽은 사람 있잖아. 얼굴 하얗고 예쁜.’ 정도의 설명으로 통했다.

하지만 오늘 글은 달랐다. 최근 퀴어 드라마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한유일은 충분히 화제성이 있었다. 게다가 글을 작성한 놈도 대충 아무 유명인이나 골라 헛소문 내기를 즐기는 어중이떠중이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명백한 의도가 있어 보였다. 짚이는 구석이 있어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강한은 어금니를 꾹 문 채로 스크롤을 더 내려 보았다. 지난 몇몇 헛소문과는 달리 이번 글은 벌써 기사화가 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충격이라는 둥 떠들어 댔다. 가끔 ‘사실이라고 해도 연애 많이 한 게 뭐가 문제?’ 같은 반응도 있었지만 금세 묻혔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댓글에만 반응하며 상황을 더욱 극단적으로 몰아갔다.

하필 한유일이 케이블 드라마 주연으로 한창 주가를 달리고 있는 요즘. 착하게 웃는 얼굴로 똑 부러지게 ‘카메라 앞의 자신과 실제 자신은 다른 사람’이라며 선을 긋는 것조차 그만의 신비로운 매력으로 통하는 이때. 지독히 악랄한 타이밍이었고, 고의성이 다분한 태클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거다.

세상이, 이 빌어먹을 세상이 한유일한테 이래서는 안 됐다.

한참 더 댓글을 내려 보던 강한은 결국 시뻘건 얼굴로 침대를 내려섰다. 「한유일 배우, 뮤지컬 알렉산더 때부터 좋아했는데……. 그 얼굴로 연애는 숙맥이라며,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 말하는 표정이 참 순수해 보여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글 내용 정말인가요. 너무 실망스러워서 잠이 안 오네요.」 하는 댓글을 본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벌떡 일어선 기다란 몸이 향한 곳은 책상 아래였다. 깊숙이 숨겨 놓았던 거대한 상자를 쭉 끌고 나온 강한은 곧바로 뚜껑을 열었다. 그득 쌓인 먼지가 폴폴 날려, 벌써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11년 전 기억을 그대로 삼켜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

늦봄의 따가운 햇살이 창가를 덥혔다. 거대한 침대 한구석에 웅크린 채 자고 있던 강한은 감은 눈을 찡긋거렸다. 분명 암막 커튼을 달아 두었는데 햇빛이 왜 이렇게 들어오는지. 투덜거리던 그의 기억에 어젯밤이 스친다.

바깥 골목의 가로등 불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던 풍경. 방 안을 빗금으로 내지른 노란 선은 무언가를 경고하고 있었다. 마치 저지하듯.

“허억!”

악몽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강한은 침대에서 튕겨져 나왔다. 곧장 발밑으로 불길한 징조를 뒷받침하는 감촉이 느껴졌다.

“……아, 시발.”

어제는 ‘존나’ 때문에 사회생활에 회의감을 느꼈는데, 오늘 아침은 눈을 뜨자마자 ‘시발’이었다. 그러나 고작 비속어 하나를 신경 쓰기에는 그의 머릿속이 너무 바빴다. 아니, 팽팽 돌다 못해 하얗게 번져 아무 사고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사진 위에 서 있었다. 발밑이 묘하게 까끌까끌할 만큼 먼지가 쌓인 예전 사진들이었다. 크기도 제각각에 색상도 제멋대로인 여러 사진들 너머로는 설상가상 교복까지 꺼내져 있다.

어려서부터 태권도를 한 데다가 밖에서 뛰어놀기 좋아했던 강한은 농담으로라도 ‘하얗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유일만큼이나 하얗게 변한 것 같았다. 온몸에 핏기가 빠져나갔다.

질린 얼굴로 천천히 허리를 숙인 강한은 하얀 종이를 들었다. 그건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교복 재킷 위에 놓여 있었다. 정확히는 동그란 ‘정원고’ 마크 옆에.

「20xx. 5. 12 닉네임」

삐뚤빼뚤 적은 제 글씨를 마주하는 순간, 강한은 키보드 워리어에 빙의해 작성자에게 수없이 많은 공격을 퍼부었던 자신을 기억해 냈다. 생전 해 본 적도 없는 ‘인증’이라는 것을 행한 순간까지도.

포스트잇은 구경꾼들이 요구한 증거였다. 한이 주장의 신빙성을 위해 앨범 사진을 올려 대자, 사람들은 오늘 날짜와 닉네임을 적어 인증하라고 했다. 남의 사진을 도용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물음이 제법 타당해서 그대로 행했더니, ‘ㅋ’이 가득한 답글을 한 무더기 받았었다.

「아니ㅋㅋ ㅅㅂㅋㅋㅋ 님 닉네임을 적으라고요. 걍 닉네임이라고 받아 적으면 어떡함ㅋㅋㅋ 근데 오히려 존나 진정성 있게 느껴짐;;」

영문을 모르고 술 취한 눈동자만 끔벅거리던 강한은 중간에서야 이유를 알아챘다. 아, 그런 거였구나. 깨닫고 눈을 느리게 들어 보니, 제 닉네임은 「무이」였다.

무이는 카페 주변에 자주 출몰하는 강아지 이름이었다. 한이 일하고 있는 카페의 사장 공은수가 지은 이름인데, 그것조차 한유일 때문이었다. 그녀 말에 따르면 한유일의 팬들을 일컫는 애칭이 무이라고 했다.

그쯤 생각하니 문득 우스운 것이다. 저는 11년 전 기억을 꽁꽁 숨긴 채 말도 못 하고 사는데, 하필 직장 사장이 한유일의 팬이고 그 때문에 강아지 이름도 ‘유일무이’의 ‘무이’로 지어서는 매일 밥을 줄 때마다 무이야, 무이야 하고…….

거기까지가 뚝 끊긴 기억의 마무리였다. 허탈하게 실실 웃던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린 그의 기억은 그쯤에서 까맣게 암전되어 있었다.

뜨악한 강한은 마른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며, 아주 조심스레 핸드폰을 들었다. 무슨 폭탄을 쥔 듯이 손이 벌벌 떨렸다.

「치언 씨, 어제 그 글 지워졌던데요? 진짜 동창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오히려 더 난리 났어요. 한유일 너무 멋있다고.」

가장 먼저 눌러 본 직원 단체 방에는 현경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 밑으로 치언은 머쓱하게 ‘아, 그래요?’만 반복하다가 사라졌다. 그게 벌써 오전 열한 시였다. 때꾼한 눈알이 도르르 굴러가 시간을 확인한다.

“……네 시?”

어릴 때부터 강한은 스트레스를 수면으로 도피하는 버릇이 있었다. 게다가 서른 넘기며 떨어진 체력과 과음도 한몫을 한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네 시라니. 자신이 잠든 동안 벌어졌을 사건들이 너무도 두려워지는 시각이다.

“보지 말자, 그냥, 지워졌다는데 뭐.”

수면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도피가 답이었다. 브라우저를 다시 열어 보지 않은 채로, 강한은 일단 자리에 주저앉았다. 널브러진 사진들을 먼저 치워야 했다.

***

강한은 살면서 한유일 이야기를 부득불 꺼내 놓는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만났다. 최소한 수백 번. 충분히 경험했고, 이미 어느 정도 훈련도 되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하고 또 연기할 수 있었다. 11년이나 묻어 둔 기억을 파헤치는 사람들에게 악감정도 가지지 않았다. 그저 ‘나 혼자 없앤다고 사라지는 기억은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만 얻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인간은 한번 인지한 사실을 잊기도 하는 걸까. 정말 잊고 싶은 것은 못 잊으면서.

“솔직히 저 사장님 연극 티켓팅도 자주 도와드렸는데, 그동안 관심은 없었거든요. 근데 어제 완전 입덕 각 섰잖아요. 절대 실물 봐서 아님!”

뭐가 서……? 강한은 입술을 맹하게 벌리며 현경을 돌아보았다. 커피 머신 앞에서 샷을 내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아니, 봐 봐요. 한유일 유명해진 게 지금 그 드라마 때문이잖아요. 퀴어 드라마. 뭐 키스도 안 나오는 게 뭔 퀴어 드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는 그거 괜히 코인 탄 것 같아서 별로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코인을 타……?

한은 현경의 말이 자주 어려웠다.

“근데 이거 보셨어요? 이거! 그 진짜 동창이 인증한 거. 그 사람이 한유일 걸레 아니었다면서. 아니, 솔직히 뭐 남의 연애사까지 알 필요 있나? 연예인이라고 과거 연애 이력도 공개해야 되나.”

순간 강한의 머릿속에 서류 봉투 하나가 떠올랐다. 좁아터진 고시원 침대 위에 흩뿌려졌던 종이와 사진들, 그리고 양복을 입은 남자.

숙취에 시달리는 속을 더욱 울렁이게 만드는 기억이었다. 한은 크게 흉곽을 부풀리고, 괜히 손을 움직였다. 이미 정돈되어 있던 집기들을 만지작대고 냅킨을 꺼내는 내내 현경은 뒤를 따라오며 말했다.

“암튼 그래도 한유일이 모솔인 점이 셀링 포인트이긴 했으니까, 뭐……. 사람들 난리 난 것도 이해는 해요. 맞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거 보세요! 이 사람이 댓글 쓴 거. 졸업한 후에는 잘 모르지만 고등학생 때까지는 진짜 연애도 안 했다, 내가 걔 좋아했으니까 잘 안다! 아악!”

아, 시발. 그런 말을 썼다니. 평온을 가장하던 얼굴이 금세 백지장이 되었다. 강한은 억지로 입술을 끌어 올리며 어색하게 물었다.

“그 글 지워졌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남아 있는 거야?”

현경이 불쑥 눈앞에 들이민 글자가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정말로 그런 문장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에이, 사람들이 다 캡처해 놨죠. 기사만 해도 수백 개 떴는데.”

“……수백 개?”

“네, 네, 아무튼 이거 봐 봐요. 한유일이 얼마나 착했냐면 자기가 좋아하는데도 불쾌해하지 않았다……래. 대박이죠. 미친 거 아니에요? 드라마 아님? 점장님, 정원고등학교 남고잖아요, 악!”

현경이 팔뚝을 퍽 쳐 냈음에도 강한은 꿈쩍하지 않았다. 돌처럼 굳은 몸이 평소보다 더 단단해진 기분이었다.

“지금 난리예요, 사람들. 한유일 쪽에서는 해명도 안 하고 반박도 안 하고. 그냥 없던 일인 것처럼 하고! 곧 그 드라마, 루루 라이브 한다는데 저 보려고요. 작게 틀어 놓으면 안 돼요? 네? 점장님.”

“어, 어어…….”

“아싸. 역시 점장님이 최고예요! 근데 사장님 별말씀 없으세요? 어제 치언 님 때문에 기분 많이 상하셨을 텐데.”

“점장, 아니, 사장님은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는 사람이라…….”

“에이, 그래도 면전에서 누가 좋아하는 사람 욕하는데 참아요? 사장님 성격이 진짜 좋은 거죠.”

누가 좋아하는 사람 욕하는데 참아요. 그 말이 메아리처럼 골을 울렸다.

하아아, 복잡한 속 대신 더운 숨을 토해 내며 강한은 일단 자리부터 피하고 보았다. 재고 확인을 빌미로 스태프 룸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쾅 닫은 그는 구석에 털썩 앉았다. 널브러진 사진들 위에 주저앉았던 그때보다도 더 큰 탈력감이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내가 걔 좋아했으니까 잘 알아.

-호모포비아라고 적혀 있던데 그건 확실히 아니야. 내가 걔 좋아한다고 불쾌해한 적도 없고. 오해 있을까 봐 얘기하지만……. 한유일은 그런 성향 아니고.

비겁하게 변명처럼 덧붙였던 글들이 너무 구차했다. 지질구질에 치사하기까지 해서, 강한은 붉어진 눈을 손목 안에 감추었다. 입 안에 자꾸만 사회생활 기록을 소멸시키는 비속어가 남발했다. 시발, 시발, 시발, 시발…….

한유일이 봤을까. 아, 쓰지 말걸. 그냥 잘걸. 왜 하필 어제. 그렇게 돌아서는 뒷모습을 본 바로 그날에.

욕설 끝으로 참담한 후회가 붙었다. 설상가상으로 눈에 댄 손목이 뜨끈해진다. 살결에 축축한 감촉이 물들기 시작했다.

“악! 미친, 아악!”

청승도 이쯤 해야 덜 추하다고 생각했을 때. 돌연 바깥에서 비명 소리가 울렸다. 카운터를 혼자 보고 있는 현경의 목소리였다. 순간 눈물이 싹 말라 버린 한은 급히 문을 열었다. 저도 모르게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다가, 커다란 라즈베리 시럽 통을 한 손에 들고 달려 나갔다.

“무슨 일이야?”

“아, 점장님. 죄송해요. 놀라셨어요?”

카페 내부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강한은 손님 하나 없는 애매한 시간대의 영업장을 천천히 둘러보고, 다시 현경을 내려다보았다. 현경은 제 입을 두 손으로 막은 채, 웃음기 어린 눈동자를 움직였다. 급하게 뛰쳐나온 강한의 얼굴에서부터 무기 삼아 바투 쥔 라즈베리 시럽까지. 천진한 눈빛이 즐거워 보였다.

“많이 놀라셨구나……. 감동이긴 하네요.”

“그렇게 비명을 지르는데 당연히.”

욱해서 짓씹던 말을 멈추고, 강한은 일단 시럽 통을 먼저 넣어 두었다. 털레털레 지친 발걸음이 카운터 안에 돌아갔다. 그나마 이보다 더 추한 꼴까지는 가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니. 한유일 소속사에서 아직 무반응이잖아요. 이대로 덮어 버리려는 것 같은데.”

이쯤, 강한은 아무래도 이민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나라에서 더 살다가는 사달이 나도 날 듯했다.

“응.”

이를 꽉 깨물어 무감하게 대답하자, 현경은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솔직히 뭐 대응할 일도 아니긴 하잖아요?”

강한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나이 서른에 들어선 놈의 고등학생일 적 연애 이야기가 뭐 중요할까. 소속사 측에서는 불이 알아서 꺼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대중이라는 게 그렇다. 익명의 폭로나 가해 사실보다도 피해자의 반박을 더 크게 기억하고, 주목한다. 가장 큰 방어가 침묵인 셈이었다. 그 침묵의 도구로 이용되어 본 적 있는 한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근데요, 근데요. 그 와중에요!”

“어엉.”

소속사에서 묵묵부답을 선택했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강한은 길게 숨을 내쉬며, 플라스틱 컵 안에 얼음을 가득 담았다. ‘이제 상관 말자. 다 지나간 일이다.’ 되뇌면서 냉수를 들이켰다.

“한유일이 방금 루루 라이브에서 첫사랑 얘기 했다고요!”

그러나 한 모금도 제대로 들이켜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 쿨럭쿨럭, 강한은 허리를 잔뜩 굽혀 거의 물을 토해 내듯 기침했다. 깜짝 놀란 현경이 등을 퍽 내리친다.

“점장님! 괜찮아요?”

“어윽, 윽…….”

강한은 ‘현경아, 네가 때리는 게 더 아파…….’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숨이 목구멍을 빠져나오는 순간마다 턱턱 걸려 그럴 수 없었다.

“아니, 진짜 뭐 있는 거 아닐까요? 모솔이라고 한 번 말한 이후로는 연애 질문은 철벽만 치던 사람인데. 갑자기 하필 오늘 첫사랑이 19살 때라고 말했다니까요!”

등을 퉁, 퉁, 두드리는 작은 주먹이 이제 더는 아프지 않았다. 대신 머리통 위로 쏟아지는 목소리가 더 큰 충격을 주었다. 한은 셔츠를 콱 움켜쥔 채로 또 욕을 중얼거렸다. ‘미친 새끼, 돌았나 보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씨발.’ 대상이 불명확한 말이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하, 존나 설렌다. 누구지. 둘이 사귀었으면…….”

기침이 잦아졌음에도 현경은 여전히 등을 콩콩 때리고 있었다. 그녀의 설렘 가득한 주먹질을 강한은 그냥 가만히 받았다. 차라리 누군가에게 맞기라도 하는 편이 위로가 되었다.

“헐, 점장님. 왜 계속 맞고 계셨어요? 일어나세요, 얼른!”

한동안 주먹질을 멈추지 않던 현경이 뒤늦게 정신 차렸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억지로 일으키는 바람에, 강한은 아픈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지 눈앞이 노랗게 변한 것 같기도 했다.

“많이 놀라셨나 보다, 진짜. 죄송해요.”

사색이 된 얼굴을 다르게 해석한 현경은 슬쩍 눈치를 살피며 핸드폰을 잠재웠다. 한유일의 웃음소리가 섞여 있던 프로그램이 뚝 끊기고, 카페 내부에는 이제 피아노 선율만이 흐르고 있었다. 강한은 텅 빈 가게를 멍한 눈으로 보다가 가만히 물었다.

“현경아, 너라면……. 네가 이민을 간다면, 어느 나라를 가겠냐?”

허탈하게 묻자 현경은 잠시 웃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점장님 가끔 참 엉뚱하다고. 큭큭 웃던 그녀는 갑자기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날씨가 어떻고, 중국은 어때서 싫고……. 여러 이유를 들으며 강한은 가만히 핸드폰을 들었다. 예감이 좋지 않으니 상수에게 입단속을 시켜 놓을 작정이었다.

「상수야, 혹시 한유일이 내 연락처 물어봐도 절대 알려 주지 마.」

빠르게 움직이던 손은 전송 버튼 앞에서 머뭇거렸다. 이제 와서 상수에게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에게는 몇 년 전에도 똑같은 부탁을 했었다. 신상수는 이유를 무척 묻고 싶은 얼굴로도 ‘네.’ 하고 대답했고, 강한은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말을 붙이려고 해도 모두 거짓말밖에는 안 돼서.

키가 작고 까불거리는 탓에 학교에서도 내내 가벼운 캐릭터로 통했던 상수는 의외로 입이 무거웠다. 그래서 장장 11년을, 유일에게 들키지 않고 숨어 지낼 수 있었다. 저와는 달리 동창회도 자주 나가고 한유일과도 잦은 식사를 하는 놈이었다. 그 오랜 시간을 입 다물고 있어 주었는데, 난데없이 으름장을 놓으려니 머쓱해진다.

그냥 말자.

한숨으로 대신하려는 때, 쌓여 있는 문자를 발견했다. 광고 문자인가 생각하던 한은 꽤 심각한 기색을 풍기는 미리 보기 내용에 걱정이 들었다. 혹시 상수가 ‘형이 올린 글이에요?’ 하고 물어보는 거라면 어떡하지.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불쑥 튀어 올라, 조금 긴장한 얼굴로 메시지를 눌렀다.

「한아. 왜 거짓말을 썼어?」

액정에 차오른 글자가 당장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식은땀이 주룩,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점장님, 왜 그래요? 오늘 진짜 이상해. 지금까지 제 얘기 하나도 안 들었죠?”

현경이 차갑게 식어 내린 등 위를 찰싹 때렸다. 강한은 입술만 벙긋 움직였다가 때마침 열린 카페 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주문, 현경아.’ 귀신 본 듯 작게 속삭이고는 다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문자는 총 세 통이었다.

「한아. 왜 거짓말을 썼어?」

「알고 있었잖아. 나도 너 좋아하는 거.」

「네가 내 첫사랑인 것도.」

끝이 날카로운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이번에는 ‘시발’ 같은 말로는 상쇄되지 않는 낭패감이 짙게 몰려왔다. 전신을 삼켜 낼 것처럼 아주 맹렬한 기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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