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에움길의 끝 (13/13)

3. 에움길의 끝

“이게 무슨….”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하게 보낸 크리스마스이브 다음 날, 즉 크리스마스 아침에 선유와 한주는 집에서 쫓겨났다. 아침 겸 점심 겸 먹을 것을 좀 사 오라고 해서 마트에 다녀왔더니 어머니가 문을 잠근 채 열어 주지 않았다. 제집에 못 들어가는 게 웃기긴 하지만, 전자 잠금장치 말고 수동 걸쇠까지 다 걸어 놔서 어쩔 수가 없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 너희 놀다 오라고.

“놀고 있잖아요.”

- 둘이 놀다 오라고. 도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랑 있으면 되니까. 괜찮지?

괜찬치이- 뭘 알지도 못하면서 괜찮다고 따라 하는 도하 때문에 피식 웃음이 샜다.

- 도하 키우느라 둘이 시간도 못 보냈을 테니 나가서 좀 있다가 와.

“엄마.”

- 얘는. 네가 엄마라고 부르면 무서워.

“…….”

- 내일까지는 들어오지 마라.

“…괜찮으시겠어요?”

- 그럼 괜찮지. 손자 하루 보는 게 무슨 힘든 일이라고. 그렇지?

그치이- 남 말 따라 하는 게 습관이 된 도하가 변죽을 울렸다. 제 부모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걱정병이 돋은 선유가 뭐라 더 하려고 하는 찰나 한주가 품에 안고 있던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럼 장 봐 온 건 두고 갈게요.”

- 그래, 한주야. 가서 선유랑 시간 좀 보내고 와. 아기 있어서 지금까지 계속 긴장 상태로 있었을 텐데.

“내일은 일찍 올게요.”

- 일찍 안 와도 돼. 늦게 와라. 오늘은 도하랑 전화하는 것도 안 돼. 알았지?

그리고 뚝, 인터폰이 끊어졌다. 절대 어머니를 이길 수 없는 선유로선 한숨 한 번 쉬고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집안에서 가장 센 사람은 어머니였으니까.

“어쩌지?”

“우선… 추우니까 따뜻한 데로 갈까요?”

아파트 복도는 창문이 다 닫혀 있어도 서늘하게 추웠다. 몸을 부르르 한 번 떨고, 선유는 한주의 의견에 동의해 고개를 끄덕였다.

“요 앞에 카페 가자.”

“예.”

“혹시 차 키 가지고 나왔어?”

한주는 대답 없이 선유의 손을 잡아 쑥 제 주머니에 넣었다. 달그락거리는 금속이 손끝에 닿아 시린 기운을 뿜었다.

“준비성이 철저하네. 너 혹시 어머니랑 얘기 미리 한 거 아니지?”

“…….”

“했어?”

“…그런 건 아니었는데, 어젯밤에 운을 띄우시긴 했죠.”

“운?”

“크리스마스인데 둘이 시간 안 보내냐고 하셔서….”

“그래서?”

한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어제의 기억을 끌어내 말했다.

“도하가 있으니까 같이 있어야죠, 라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엄청 좋아하셨지?”

“음… 그랬던 거 같기도 하네요.”

“우리 엄마는 확신범이야. 미국에서부터 이미 계획 다 세우고 와서 너한테 그냥 한번 떠본 거라니까.”

선유는 순수한 사랑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한참 웃었지만, 한주는 그저 주머니 속의 손을 깍지를 끼워 꼭 잡을 뿐이었다.

“한주는 아메리카노지?”

“예.”

“아메리카노랑 카푸치노 주세요. 한주야 케이크 먹을래?”

“아녜요, 어제 너무 많이 먹어서 아직도 배불러요.”

크리스마스이브 파티는 정말 성대했다. 공항에서 돌아오자마자 부엌을 장악한 아버지와 한주가 로스트치킨과 스테이크, 스튜, 과일 샐러드를 만들었고, 선유와 어머니는 빵집에 예약해 둔 케이크와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나는 디저트를 몇 개 더 사서 돌아와 그리 크지 않은 식탁 위를 가득 채웠다. 평소엔 어머니가 요리를 하는 편이지만, 고기류는 꼭 아버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곤 했다.

어른 네 명에 아이 하나가 먹기엔 양이 정말 많았으나 한주의 선전으로 요리 그릇이 대부분 비었고, 초콜릿 크림을 잔뜩 바른 부쉬드노엘도 절반 이상 사라졌다. 한주는 아마도 음식의 절반 이상을 제가 먹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밤에 조용히 거실에 나와 소화제를 먹은 건… 아무도 모르겠지만.

“하긴, 나도 배가 다 안 꺼졌어.”

휴일 오전이라 카페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여전히 손을 잡은 채로 둘은 잠시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이렇게 조용한 분위기에서, 또 커피 향 가득한 공간에서 둘이 시간을 보내는 건 오랜만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둘이 있는 거 정말 오랜만이네.”

“…그렇네요.”

조금은 강박 관념에 휩싸여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서, 둘이서 어떻게든 다 해내려고 동동거리며 발버둥 치던 때를 떠올리니 좋기도 하고 조금 숨 막히기도 하고 그랬다. 물론 좋은 게 훨씬 더 컸지만.

“우리 부모님은 나 되게 어렸을 때부터 둘만 외출하거나 둘만 여행가거나 하는 일이 꽤 잦았어.”

“그랬어요?”

“응, 바로 옆에 지운이네가 있었으니까. 나를 거기 맡기고 가곤 하셨지. 반대로 지운이 부모님도 그러셨고.”

천천히 잔을 비우며 선유는 정신이 없어서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던 예전 제 부모의 생활과 자신들의 생활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아이를 가지고, 낳고, 키우고… 분명히 많은 고민과 생각 끝에 행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왕좌왕하며 닥치는 대로 지내 왔다는 느낌이 든 탓이었다.

“아마도 두 분 사이가 좋아야 자식한테도 좋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셨던 거 아닐까요?”

“너도 그렇게 생각해?”

“여기 실례가 있으니까… 형을 보면 알 수 있잖아요.”

한주에게 모든 좋은 기준은 선유였다. 그의 우상이었고, 자기도 선유처럼 자라서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항상 생각해 왔으니까.

“네가 그렇게 나를… 보는 게….”

알지만 그럼에도 쑥스러울 때가 있었다. 한주가 그 동경으로 저를 압박한 적은 없어서 부담스럽진 않고, 만약 생각해 왔던 그 기준에 제가 못 미친다 한들 한주는 실망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선유는 따뜻한 우유에 섞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그 겸연쩍음을 같이 삼켰다.

“너랑 둘이 있고 싶단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왠지 도하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더라.”

“…….”

도하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고, 둘의 좋은 부분만 섞어 곱게 빚어 놓은 아이라 뭘 해도 귀여웠다. 그리고 워낙 순한 아이라 밤에 재워 놓으면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그리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한주는 가끔 조금 더 오래 선유와 단둘이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부모님이 두 분만 외출하거나 여행 다녀오셔도 전혀 섭섭하지 않았었는데, 도하는 왜 그럴 거라고 지레 생각했나 몰라.”

“도하가 워낙 형을 좋아하니까 그렇죠.”

“…한주 질투해?”

담담한 말투에 섞인 그 조그만 질시를 선유를 놓치지 않았다. 장난 섞인 물음에 대답 없이 한주는 커피만 마셨지만, 이미 선유는 답을 얻었다. 사실 묻는 게 새삼스러운 질문이기도 했다.

“그럼 우리 뭐 할까?”

“…크리스마스라 어디든 사람이 많을 거 같은데요.”

“그렇겠지? 음… 우선 쇼핑을 좀 하러 갈까. 오랜만에.”

“그래요.”

“어머니가 호텔 예약까지 해 놓으셨어.”

“호텔이요?”

“오늘 들어오지 말랬잖아. 그래서 내가 그럼 어디서 자고 오라는 거냐고, 크리스마스에 호텔을 어떻게 당일 예약하냐고 그랬더니 컨펌 메일 전달해 주셨어.”

대체 언제부터 계획을 해서 오신 건지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연말 시즌에 특급 호텔 예약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철두철미하시네요.”

“역시 엄마가 제일 세.”

“아무래도 형은 어머니를 닮은 거 같아요.”

“그거 욕이야?”

“설마요.”

싱긋 웃는 얼굴을 보아하니 아주 약간 욕같이 느껴지긴 했지만, 선유는 그저 한주를 귀여워할 뿐이었다. 줄 수 있는 감정에는 한계가 있었고, 도하와 같이 있을 때는 아무래도 나눠 줄 수밖에 없었으니 한주는 부족함을 느꼈을 터였다. 오늘만큼은 그에게 완전히 충실하기로 마음먹고 선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주 옷 사러 가자.”

“저 옷 많아요.”

“졸업하잖아. 정장 예쁘게 맞춰 줄게.”

한주는 유명 컨설팅 펌에 입사가 확정된 상태였다. 그는 선유의 회사로 들어가고 싶어 했으나 선유는 조금 더 다른 걸 해 보다가 입사하는 걸 권했고, 달콤한 와인을 앞에 두고 긴 밤을 지새우며 한 토론 끝에 한주는 선유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의 말이 충분히 설득력 있었고, 그 경험이 더 선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장도 많은데….”

“형한테서 한주 옷 사 주는 기쁨을 빼앗아 갈 거야?”

급작스레 불퉁해진 선유를 보며 한주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게만 보여 주는 투정이 나올 때마다 귀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긴, 형이 혼자 사 오면 옷 매번 작게 사 오니까.”

“…이젠 안 그러잖아.”

“이젠 안 그러는 게 아니라 저랑 매번 가서 사잖아요.”

“한마디를 안 져.”

툭 튀어나온 아랫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부드럽지만 탄력 있게 닿을 입술을 쏙 빨아들여 조심스럽게 씹어 먹고 싶었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만 쳐다보게 되어서 한주는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선유가 부모님과 같이 돌아온 탓에 가벼운 입맞춤이 집안에서 할 수 있는 한계였고, 키스라고 불릴 만한 건 거의 일주일간 못한 탓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축이며 한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손을 잡은 채라서 쑥 선유의 팔이 끌려 올라왔다.

“차 가져올까요?”

“같이 가자.”

남은 우유 거품을 홀짝 마시고, 선유도 일어났다. 한주의 생각은 읽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와 조수석에 앉은 선유는 금세 차가워진 손을 맞잡아 문질렀다. 운전석에 오른 한주가 잠시 그 모양을 보다 선유의 손등을 감싸 쥐고 만져 주기 시작했고, 글로브 박스에서 핸드크림을 꺼내 저와 선유의 손에 발랐다.

미끌미끌해진 피부가 서로 맞비벼지는 감촉에 선유는 살짝 소름이 돋는 듯했다. 손가락 사이의 얇은 피부가 완전히 겹쳐졌을 때, 그리고 한주의 긴 손가락이 손등 위를 의도적인 듯 아닌 듯 스치자 웃을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꽉 손을 마주 잡아당기자 한주가 위를 덮어 왔고, 입술이 닿자 절로 웃음기가 번졌다. 목 안으로 웃자 섬세하게 혀끝이 아랫입술을 더듬으며 한참을 간지럽게 했다.

“…조금 더 할까요?”

물기 어린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정중한 물음에 선유는 피식 웃으며 한주의 뒷머리를 잡아당겼다. 달게 입술을 나누다 조금 떨어지면 눈을 맞추고 웃고, 그러다 다시 입을 맞췄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던 키스가 멈춘 건 지하 주차장에 쾅, 차 문 닫히는 소리가 울린 때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뭔지 잊고 키스하고 있던 게 당황스러워서 입술만 떼어 낸 채 숨만 몰아쉬던 둘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백화점 가자.”

한주의 입술을 닦아 주고 뺨을 토닥인 후, 떨어져 나간 선유가 행선지를 정했다. 핸드크림 향이 남은 입술을 쓸며 한주는 차를 출발시켰다. 귀중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

하룻밤 자고 들어가야 하니 바로 필요한 속옷과 양말을 가장 먼저 사고, 선유는 한주와 함께 남성복 매장으로 향했다. 최근에는 도하 것을 사러 와서 곁다리로 제 옷들을 몇 개 급하게 집어 가곤 했으니, 이렇게 둘이 쇼핑을 하러 온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기성복으로 한 세트 사고, 하나는 맞출까?”

다 수선한다고 해도 기성복은 한계가 있었고, 한주는 키나 어깨너비가 조금 규격 외라 맞추는 게 훨씬 잘 어울리긴 했다.

“저는 기성복도 다 괜찮아요.”

선유가 주는 것이라면 뭐든 괜찮았다. 그가 제게 과하게 준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런 걸로 열등감을 느끼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고, 선유가 저를 정말로 하나의 공동체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이해하게 된 덕이었다.

“형은 뭐 안 사요?”

“나는 워낙 많아서. 사이즈 안 변하는 한 평생 옷 안 사도 될걸.”

임신했을 때 오히려 살이 빠진 편이라, 선유는 도하를 낳고 나서 살을 찌우느라 고생을 했다. 휴직 기간 동안 한주는 부지런히 먹을 걸 사서 날랐고, 선유는 열 달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한을 풀 듯 남기지도 않고 잘 먹어 주었다. 임신 기간 중에 더 봉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한주의 한도 같이 풀어 주었다.

여전히 손을 꼭 잡은 채로 6층까지 올라온 둘은 선유의 단골 매장으로 들어갔다. 둘의 체형과 스타일에 맞춰서 원단 추천부터 라인까지 잘 잡아 주는 곳이라 1년에 적어도 서너 번은 들르는 곳이었다. 도하의 겉옷도 대부분 여기서 샀다.

“어머,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두 분이 오셨네요.”

도하가 생긴 후론 항상 셋이 오곤 했으니 저렇게 묻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선유는 따로 대답 없이 싱긋 웃고, 반 발자국 뒤에 있는 한주를 끌어다 제 옆에 세웠다.

“오늘은 이쪽이에요.”

“잘됐다. 안 그래도 그제 신상품 들어왔는데, 고객님 생각나서 아직 전시 안 해 놨거든요. 키 크고 어깨 넓으신 분들한테 딱이에요.”

선유는 한주의 손을 놓아 주고, 얼른 가서 입어 보라며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숍 직원이 내주는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그의 변신을 기다렸다.

이 매장은 영국 브랜드라서 확실히 좀 습기 있고 도톰한 원단의 옷들이 대부분이었다. 광택보다는 감촉으로 승부 하는 게 마음에 들긴 하지만, 여름에 입기엔 좀 부담스러운 감도 없잖아 있었다. 요새는 여름에 슈트를 입을 일이 없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차 한 잔 더 드릴까요?”

“괜찮아요.”

“고객님은 필요하신 거 없으세요?”

“어, 저는….”

이미 필요한 만큼 다 사 놨고, 옷에 대한 욕심이 많이 사라진 터라 선유는 제 것까지 살 생각은 없었다. 한주와 도하만 챙겨 입혀도 보람이 생기는데 굳이.

“코트가 너무 예쁜 게 나왔거든요.”

“코트는 워낙 많아서 괜찮아요.”

“안에 구스 들어간 건데 겉으론 티 하나도 안 나게, 깔끔하게 마감된 것도 있어요.”

어차피 차를 타고 다녀서 두꺼운 옷은 그리 필요가 없었던 터라 선유는 싱긋 웃으며 직원의 영업을 무시하고, 탈의실 커튼 젖혀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너무 잘 어울리시죠.”

탈의실에서 나온 한주를 끌고 매니저가 자랑스럽게 외쳤다. 머쓱한 태도로 매니저 뒤에 선 한주는 여전히 이런 게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예전에도 잔뜩 옷 안겨 주고 입고 나오라고 하면 꼭 저렇게 볼을 부풀리곤 했었다.

“재킷은 팔부터 허리까지는 다 수선을 해야 할 거 같아요. 어깨가 넓으셔서 그쪽에 맞추니 품이 좀 크네요.”

“…그렇네요.”

“하의는 라인이 워낙 슬림하게 나와서 단만 내리면 될 거 같구요. 제가 이 패턴 보자마자 고객님 생각나서 숨겨 놨다니까요. 정말 잘 어울리세요.”

새삼스럽게 한주의 외모에 놀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선유는 저도 모르게 벌어지려는 입술을 간신히 물어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트랑….”

“벨트랑 넥타이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

가죽에 압인만 살짝 들어간 벨트와 조금 화려한 넥타이까지 하자 구경하고 있던 주변의 다른 매장의 직원들까지도 감탄을 했다. 넋이 반쯤 나간 채로 선유가 중얼거렸다.

“코트도….”

“코트! 물론 준비해 놨죠.”

이미 한주를 보자마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아이템을 세팅해 놓은 매니저가 희희낙락 코트를 세 개나 꺼내 왔다. 캐시미어 코트, 울 코트, 그리고 트렌치코트까지.

“이렇게 캐시미어 코트하고 세팅하면 지금부터 2월까지 입으시면 되고, 트렌치랑 세팅하면 4월 초까지는 입으실 거예요. 안에 재킷 벗고 트렌치코트 입으시면 4월 말까지도 괜찮고요. 이 트렌치 진짜 예뻐요. 시그니처 패턴이 안에만 들어가 있어서 오픈해서 입으면 또 다른 느낌이 나거든요. 고객님 피부가 희어서 네이비색이 정말 잘 어울리세요.”

한주에게 트렌치코트를 입히고 단추를 잠갔다가 열었다가 하는 매니저의 열렬한 설명에 선유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고 몇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이 코트, 캐시미어 100프로라서 정말 가볍고 광택이 너무 예쁘죠. 쿨한 검은색이라 답답해 보이지 않아요.”

트렌치코트를 쑥 벗겨 내고, 자연스럽게 캐시미어 코트를 입힌 매니저가 더 뿌듯한 얼굴로 자랑을 했다. 아니 이 사람이 내 배우자 가지고 왜 자기가 자랑을 하는 거야, 라고 잠시 당황했지만 다른 코트를 입은 한주의 모습에 고개만 끄덕였다. 매니저는 충분히 자랑할 자격이 있었다.

“…한주야.”

“예?”

주변의 시선도 부담스러운데 선유까지 왜 이러는 건지, 한주는 제 옆모습을 비추고 있는 거울로 시선을 휙 한 번 던졌다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선유를 내려다보았다.

“…너 진짜 잘생겼어.”

“…예?”

“웬일이야.”

새삼스럽게 한주의 외모에 감탄하게 될 줄이야. 선유는 자기도 모르게 바싹 그 앞에 다가가 한주의 얼굴을 한 번 매만져 보고 부드러운 감촉의 코트 위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당장 입이라도 맞출 것 같은 분위기에 한주가 선유의 어깨를 턱 잡아 만류했다.

“형.”

“…와, 홀리는 줄 알았어.”

평소에도 워낙 깔끔하게 잘 차려입고 다니는데, 작정하고 맞춰 입히니 얼굴 자체가 환해져서 빛이 다 났다. 선유는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 신기하게 바라봤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고 손부채질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재킷만 수선하면 되는 거죠?”

“예, 고객님.”

“그럼 캐시미어 코트랑 나머지는 지금 입고 갈게요. 재킷만 따로 해서 보내 주시고, 트렌치코트는 포장해 주세요.”

“선물 포장 예쁘게 해 드릴게요!”

‘여기 있는 거 전부 다 주세요’를 시전하는 선유의 통 큰 소비에 직원들은 한껏 미소를 지었지만 한주는 조금 당황했다. 슈트에 넥타이, 벨트, 게다가 코트 두 벌까지 하면 그가 생각했던 금액을 훨씬 초과하기 때문이었다.

“형, 이거 너무….”

“지금 한주가 셔츠 위에 입고 갈 카디건도 하나 골라주세요. 그리고 저도 옷 좀 볼게요. 한주가 저렇게 입고 다니는데 제가 이렇게 다닐 순 없어요.”

“형.”

“한주야. 사게 해 줘.”

“…….”

“너 그렇게 입고 다니는 거 내가 봐야겠으니까.”

평소답지 않은 단호함에 한주는 더 거부할 수 없었다. 선유는 적극적인 태도로 일어나 직원들이 골라 주는 옷을 걸쳐 보고 헤링본 무늬가 들어간 재킷과 밝은 베이지색의 캐시미어 코트를 하나 골랐다. 운동화를 신고 온 터라 그에 맞게끔 옷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전에 아기 걸로 하얀색 패딩 사 갔는데, 아무래도 애가 입다 보니까 때가 너무 잘 타요.”

도하가 입고 다니는 하얀색 패딩은 정말 귀엽고, 귀엽고, 귀엽기 그지없지만, 여기저기 구르고 넘어지는 게 일상이라 쉽게 더러워졌다. 매번 닦아 주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선유는 도하의 옷도 하나 골랐다.

“아, 그럼 이건 어떠세요? 이것도 그제 새로 들어왔는데, 자잘한 패턴이 들어가서 흔하지 않고 뭐가 묻어도 티가 잘 안 나거든요.”

그럼 그것도 주세요, 망설임 하나 없이 사이즈만 골라 결정하고 선유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할부는 없다. 언제나 일시불.

“한주야, 네 배우자 생각보다 돈이 더 많아.”

“…알고 있어요.”

선유는 써야 할 때 아끼지 않는 타입이었고, 특히 한주와 도하에 한해서는 가장 좋은 걸로만 먹이고 입히고 싶어 했다. 어릴 때는 잘 모른 채 사다 주는 대로 입었던 그 옷을 나중에 꺼내 봤던 한주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룻밤 지나면 쑥쑥 클 때라 한 계절밖에 못 입은 옷들도 대부분이 한 벌에 수십만 원은 하는 것들이었다.

갈아입은 옷을 싹 정리해 쇼핑백에 예쁘게 담은 매니저가 한껏 미소를 지었다. 그림체는 조금 다르지만 훤하고 번듯한 남자 둘이 제가 담당한 브랜드, 그것도 신상으로 쫙 빼입고 걸어 다니는 것은 광고판이나 다름없었다. 십 년 전과 얼굴은 물론 치수 하나 달라지지 않은 선유와, 올 때마다 쑥쑥 자라 있어서 신기할 정도였던 한주를 뿌듯하게 바라보며 주변 매장 매니저들의 질시 어린 시선을 즐겼다.

몇 년 사이에 둘의 사이가 굉장히 많이 변한 듯했으나 – 이전에는 매우 사이가 좋은 형 동생 사이 정도로 보였다 – 그런 내밀한 사정까지 매니저가 신경 쓸 필요는 전혀 없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족 단위로 와서 매장을 털어 가 주는 것만이 가장 중요했다.

“항상 감사합니다.”

커다란 쇼핑백을 둘이 나눠 드는가 했더니 곧 한주가 가져가 굳이 한 손에 다 들고 선유의 손을 잡았다. 달라고 실랑이를 잠시 했지만, 한주의 고집은 쉬이 꺾이지 않았고 선유는 그저 잡은 손에 힘만 더 주었을 뿐이었다.

“주변에서 너 엄청 쳐다봐.”

“…형이 더 해요.”

“아닌데.”

“맞아요.”

“누구 남편이 이렇게 잘생겼을까.”

“형 남편이요.”

“잘생긴 건 아네?”

“저도 눈이 있거든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느라 잠시 멈춘 사이 선유가 살짝 발돋움을 하면서 한주와 눈을 맞추고 싱긋 웃었다. 당장이라도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가라앉히며, 한주는 선유의 허리만 슬쩍 감아 당겼다.

단단하게 허리를 감은 팔에 기대며 선유가 소리를 낮춰 웃었다. 몇 번 해 보지도 않았던 베타일 때의 연애는 언제나 숨기기 바빴다. 다수일 때는 소수를 배척하거나 아예 없는 취급하기 마련이라…. 그때는 알파와 오메가는 존재조차 생각하지 않고 지냈기에 겉보기 성별이 같다는 이유로 숨고 또 숨기고.

그때와 겉으론 달라진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유는 군중 속에서도 애정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손을 잡고, 안고, 과하지 않은 선에서 다정스럽게 제 배우자를 매만지기도 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닿아도 거리낌 없었고, 그러면 타인의 시선도 그들을 당연하게 여기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선유는 제가 오메가로 발현한 것에 대하여 조금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먹지 않았던 약을 챙겨야 하고, 배 속에 장기가 하나 더 생기긴 했지만 제 삶이 나쁘게 변한 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반대로 얻은 건 하루에도 손가락을 다 접고 또 펴야 할 정도로 많았다. 매일매일 새롭게, 생겨나기만 했다.

“한주야.”

“예, 형.”

“나 엄청 행복해.”

“…….”

“…쇼핑해서 그런 거 아냐.”

가만히 내려다보는 시선에 괜히 민망해져 말을 덧붙였더니, 한주가 피식 웃었다. 본인은 항상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선유는 쇼핑을 꽤 좋아했다. 물론 지금은 그래서 행복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건 한주도 잘 알았다.

“…저도 행복해요.”

“…쇼핑해서?”

“쇼핑해서 그런 거 아녜요.”

“알아.”

한주는 선유의 고수머리를 보드랍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들어와 사람이 좀 없어졌다 싶어서 가벼이 매끈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입 맞출 수 있어서 행복해요.”

“응.”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어서.”

벅차게 구애하던 아이를 떠올리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머리를 꼭 품에 안아서 뒷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겠지만, 그러기엔 한주가 이미 너무 많이 커 버렸다. 대신에 선유는 한주의 허리를 한 팔로 감아 안으며 그의 어깨와 목덜미에 뺨을 문질렀다. 안아 주고 안길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었다.

***

호텔 레스토랑에서 가볍게 점심을 먹고 나자 체크인 시간이 되어 방으로 올라왔다. 어머니가 예약해 준 호텔은 서울 시내 중앙에 있는 특급 호텔로 크리스마스라 그런지 사람이 굉장히 많았고, 조금 정신이 없어서 로비든 라운지든 앉아 있기가 거북할 정도였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선유는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도하와 영상 통화를 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전화도 안 된다던 그녀는 역시나 도하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어머니, 도하 좀 바꿔 주세요.”

- 도하 바빠.

“도하가 바쁠 일이 뭐가 있어요.”

- 네 아버지랑 노느라 바쁘지.

“…잘 놀고 있는 거 같긴 하네요.”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하는 건지 주변 소리가 너무 잘 들렸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가장 뒤 단어를 따라 하며 까르르 웃어대는 도하의 목소리가, 평소의 진중함 따위 갖다 버린 아버지의 애교가 배경으로 깔린 채. 선유는 더는 어머니에게 요청하지 않고 크게 도하를 불렀다.

“도하야!”

- 아빠?

“응, 아빠야.”

- 아빠, 어디써?

“아빠, 여기 있지. 도하 뭐 해?”

- 내일 점심까지 먹고 와라, 알았지?

황급히 선유의 말을 끊으며 어머니가 전화도 같이 끊어 버렸다. 선유는 낮게 한숨을 뱉으면 끊어져 버린 전화를 잠시 내려다보다 툭 테이블에 내려놓고 소파에 모로 누워 눈을 감았다.

세수를 하고 나온 한주가 소파 팔걸이에 툭 걸터앉아 선유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에 닿는 간질간질한 시선을 무시하고 눈을 계속 감고 있었더니, 얼굴 위로 무언가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 났다. 이대로 있을지 아니면 눈을 뜰지 잠시 고민하던 찰나, 무릎과 등 아래로 들어온 팔이 그대로 몸을 쑥 들어 올렸다.

임신 때의 경험 때문인지 한주는 선유를 들고 안고 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제 몸무게가 가벼운 것도 아닌데, 힘도 잘 들어가지 않은 팔로 쑥 들어 올려지는 건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형, 자는 척하는 거죠.”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몸이 닿아 있는데 움찔하는 기색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한주가 낮게 웃으며 선유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았다.

“…잘래.”

“도하 닮아 가나 봐요.”

선유의 등을 도닥이며 한주가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도하도 며칠 동안 잘래, 잘래, 소리를 입에 달고 지냈거든요.”

“…다섯 밤 자면 온다고 해서?”

“낮잠도 계속 자려고 하고.”

“…귀여워.”

엉엉 울어 대던 목소리와 얼굴이 눈에 훤했다. 큭큭 웃으며 선유는 같이 누우라는 의미로 한주의 앞섶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쪽 뺨에 입을 맞춰 주고 품에 안았더니 깊게 숨을 뱉으며 한주는 몸의 힘을 풀었다.

“어머니가 둘이 지내고 오라고 쫓아내기까지 했으니 도하 얘기는 그만해야겠다….”

문장 끝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졸린 듯 느리게 깜박거리는 눈을 바라보며 한주는 제가 선유를 안는 자세로 바꾸었다.

“형 좀 잘래요?”

“…응, 아직 시차 적응이 좀 안 돼서.”

눈을 반짝 떴다가 다시 감으며 선유가 고르게 숨을 내뱉었다. 순식간에 잠든 그가 혹 불편할까 다시 한번 자세를 바로잡고 한주는 한참 그 말끔한 얼굴만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도 혹여 밤에 자다 깨면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를 보기만 했었다. 나중에는 보는 게 괴로워져서 외면하고 또 거부하다 어쩌다 마주치는 순간엔 또 홀린 듯, 그렇게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고 또 불행해서, 또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간.

한주는 여전히 뜨겁고도 차가웠던 빈소에서 저를 안아 재워 주던 선유의 품을 기억했다.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덜덜 떨며 그에게 전화하던 순간을 기억했다. 끄트머리가 닳고 접힌 부분이 헤질 정도로 셀 수 없이 매만지고 펼쳤다 접었던, 그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 이미 외웠지만 버릴 수 없어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렇게나 애썼었다.

코트조차 잊은 채로 뛰어와 저를 안아 주던 그 팔을, 저를 감싸고 저를 위해 싸워 주던 그 등을, 매일 아침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던 손을, 뺨에 입 맞춰 주던 입술을, 모두 다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때와 그리 많이 변하지 않은 얼굴선을 조심스럽게 시선으로 더듬다 한주도 같이 눈을 감았다. 어젯밤에도 이렇게 그를 보느라 밤을 완전히 새운 탓에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리고 곧 숨소리가 마치 하나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

똑, 똑, 어딘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에 한주는 반짝 눈을 떴다. 옆자리는 빈 지 시간이 좀 되었는지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고, 어둡게 가라앉은 룸 내부에 덜 닫힌 욕실 문 사이로 빛이 새어 들고 있었다.

조르륵, 또 물소리가 들렸다. 한주는 눈만 가만히 깜박이다 몸을 일으켰고, 욕실 문을 조금 밀어 열었다. 거품이 채워진 욕조에 거의 완전히 누운 채 선유는 또 반쯤 잠든 듯했다. 위험하게, 왜 저러고 있지. 한 발 그 안으로 발을 들이던 한주는 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달달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형.”

“응….”

잠꼬대로 대답한 선유가 천천히 눈을 떴고, 한주는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선유의 출장, 부모의 방문, 크리스마스 이벤트 등으로 잊고 있었던 선유의 히트였다. 보통 둘은 약을 먹어 히트와 러트를 최대한 억누르고 일상생활을 하는 편이었고, 열렬한 하룻밤으로 넘기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형, 약 있어요?”

“…약 없지.”

페로몬은 물에 씻겨 내려가기 때문에 샤워나 목욕을 하면 조금 나아지는 편이었다. 그래 봐야 몸에서 계속 뿜어져 나오는 걸 막기엔 역부족이지만.

“저 있는데 왜 혼자 이러고 있어요.”

“히트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목욕하러 들어왔는데 갑자기 온 거야.”

한주는 옷을 벗고 선유가 들어앉아 있는 욕조에 같이 들어갔다. 쑥 물이 넘쳐 욕실 바닥에 깔아 놓은 수건이 젖어 들어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따끈따끈한 몸을 끌어안고 한주는 젖은 선유의 머리를 제 어깨에 걸쳐 놓았다.

“어머니가 날을 제대로 잡으셨네요.”

지금까지 계속 감고 있던 눈을 선유가 천천히 떴다. 페로몬에 취해 평소의 명징함이 사라진 눈동자는 한주의 성감을 그대로 직격했다. 그는 그리 티 내지 않았지만, 페로몬의 폭풍에 휩싸인 선유가 자아를 잃어버린 때를 무척 좋아했다.

“하….”

한숨을 쉬며 선유는 한주의 벌어진 가슴과 단단한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물에 불어 몰랑해진 입술이 촉촉하게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을 즐기며 한주는 선유의 허리에 팔을 감아 당기고 거품을 떠 제 몸과 선유의 몸에 천천히 문질렀다.

“몸이 말랑말랑해요.”

“…살쪘다고 하는 거야?”

“물에 오래 있어서 그런가 봐요.”

살이 찌긴, 도하 임신했을 때 빠진 살이 아직도 다 안 쪄서 걱정인데. 한주는 젖은 선유의 머리카락에 코끝을 문지르며 넘치는 목욕물처럼 흘러나오는 페로몬을 달게 마셨다. 이미 완전히 기립한 성기가 선유의 허리를 쿡쿡 찔러 댔다.

귀찮다 싶을 정도로 말랑한 유륜을 계속 만지작대자 선유가 몸을 비틀어 손을 피했다. 한주는 그리 한 곳에 집착하지 않았다. 어차피… 만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까.

“…가슴 너무 만지지 마.”

“왜요.”

“좀 아파.”

“아파요?”

아프다는 말에 한주는 선유의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조금 붉게 달아오른 선유의 유두는 겉보기엔 문제점을 찾을 수 없었다. 수유를 하지 않았음에도 임신을 거치며 유륜이 조금 커지고 색이 좀 더 붉어진 것만 새삼스럽게 느꼈을 뿐이었다.

“…그렇게 걱정할 건 아니고.”

한껏 염려가 가득한 한주의 뺨을 감싸고 선유는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점막이 맞닿는 건 물론, 그대로 혀를 입술 사이로 밀어 넣어 입천장을 핥았다. 아프다는 말은 농담으로도 해선 안 되었다.

“응….”

혀를 감아 당기며 선유는 한주의 위에 앉아 그의 어깨를 쥐고 조금 더 고개를 밀어붙였다. 사탕을 빠는 것 같은 소리가 욕실 안을 가득 채웠지만, 그 안을 채운 페로몬 때문인지 낯이 간지럽지도 않았다.

선유는 몸을 흔들어 제 둔부와 그 사이를 지르고 미끄러지는 한주의 성기를 문지르며 혀도 같이 문질렀다. 오돌토돌한 혀 가장자리가 닿을 때마다 몸이 절로 움찔대며 더 몸을 붙이기 위해 애를 썼다. 가슴이 서로 맞붙어 유두끼리 부딪칠 때마다 선유는 한주의 혀를 깨물었다.

“…형.”

“하아… 응?”

잠시 입술을 떼어 내고 선유는 한주의 성기를 잡아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억누르기 위해 애썼던 페로몬이 터져 나오면서 몸 안쪽에서 질척한 무언가가 스미어 나오고, 내벽이 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주야, 손가락….”

“…….”

“…넣어 줘, 응?”

한주는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제 위에서 몸을 들썩거리고 입술과 혀를 빨다 손가락을 넣어 달라 하는 선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천천히 구멍 위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빨아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지금 이 상황에서 위로 올라오라고 해 봐야 선유가 움직일 리 없었다.

“…안에.”

“아직….”

“안에 넣어 줘.”

선유의 그 노골적인 요청에 한주는 천천히 손가락을 돌려 가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얼마간 하지 않은 탓인지 꽉 틀어막힌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지만, 이미 축축한 물기가 가득해 손가락 두 개까지는 편하게 삼켰다. 하지만 한주는 조용히 선유의 귓가에 속삭였다.

“안이 너무 좁아요.”

“응… 조금 더….”

천천히 하나를 더 넣고 배 쪽으로 밀어 올리듯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주의 어깨를 쥔 채 선유는 속절없이 소리만 내뱉었다.

“으응, 아, 흐읏….”

“…….”

“한주야, 넣… 으응… 넣어.”

“…넣고 있잖아요.”

“그거… 말고, 읏,”

뺨에 애달프게 입을 맞추고 목덜미에 뺨을 문지르며 선유가 성기를 애원했다. 안을 가득 채우고 마구 박아 줄 그 무언가를 애타게. 물속으로 손을 넣어 한주의 손을 억지로 빼내고 선유는 손으로 채 다 잡히지도 않는 성기를 쥐고 귀두를 구멍에 문질렀다. 그러다 쑥 안으로 조금 들어오면 진저리를 치며 다시 빼내기를 반복했다.

“형은 진짜….”

“얼른, 응?”

“…나가서요.”

“우선 넣고, 으응… 넣어 줘.”

선유는 히트 상태고, 그럼 제 러트는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었다. 이 상태로 삽입을 했다가 노팅까지 하면 굉장히 높은 확률로 임신인데 절대 그럴 순 없었다. 선유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다 잊었는지 둘째가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인 듯했지만, 한주는 매일 밤 앓던 선유를 하나도 잊지 못했다.

“…임신할까 봐 그래?”

“…형.”

도하가 생겼을 그날, 그리고 선유가 임신했을 때를 제외하고 한주는 항상 콘돔을 사용했다. 콘돔이 없다면 삽입을 하지 않았고, 러트로 눈이 돌아갈 지경이 되어도 콘돔은 잊지 않았다.

“한주야, 그… 약 있어.”

“…무슨 약이요?”

“피임약 있어.”

“…….”

“내가 그거 먹는 거 싫어하는 건 알지만….”

내가 당장 급해, 선유는 한주에게 속삭이며 성기를 누르며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 제 몸과 건강에 한해서만큼은 항상 무한대의 인내심을 발휘하는 한주 덕에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사태였으나 – 가지고 다니던 사후 피임약의 존재를 알리며. 입을 맞추고 혀를 얽으며 선유는 한주를 부추겼다.

“엄청 단 냄새.”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급하게 쪽, 입술을 한 번 더 빨아내며 한주가 중얼거렸다. 물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한주는 선유의 허리를 잡아 고정시키고, 천천히 성기를 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손가락 세 개로 꽤 벌려 놓았다고 생각했던 내벽은 한주의 귀두를 힘겹게 삼켜 냈다. 가장 두꺼운 부분이 들어갈 때 바르르 등이 떨려 잠시 멈췄다가, 이마를 어깨에 비비며 선유가 끙끙 앓는 숨을 뱉어서 더 안으로 욱여넣었다.

“흐윽, 아, 너, 너무….”

“하아… 너무, 좁아요.”

오랜만에 배 속을 채운 성기가 익숙하고 또 익숙하지 않아서 선유는 한주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다급히 어깨를 잡아챘다.

“자, 잠깐만, 하으, 한주야, 아, 읏,”

아무리 페로몬의 힘이 있더라도 처음은 항상 힘겨웠다. 선유는 떨리는 손으로 제 아랫배를 감싸고 문지르다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한주와 눈이 마주치고 움찔 놀랐다. 항상 이랬다. 제 페로몬은 전희까지 넘치다 삽입하기 시작하면 조금 줄어드는데, 제 페로몬에 자극받은 한주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오소소 소름이 오르는 팔을 문지르던 선유는 제 둔부와 허벅지를 감싸 훅 들어 올리는 힘에 깜짝 놀라 코알라처럼 매달렸다.

“형, 잠깐 그러고 있어요.”

“으, 으응… 내가 어떻게 이러고, 으읏, 있어?”

한 팔로 선유를 지탱하고 한주는 커다란 타월을 꺼내 그대로 선유의 어깨와 제 몸을 감쌌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조금 작은 수건으로 선유의 머리카락을 닦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응, 아, 흐읍….”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선유는 한주의 등과 어깨를 손톱으로 긁어 대며 앓았다. 그러다 한주가 의도적으로 훅 들어 올렸다 내려놓으며, 성기가 거의 다 빠져나갔다가 쑤셔 박히는 감각에 날개 뼈 부근에 긴 상처를 남겼다.

수건째로 침대에 선유를 내려놓은 한주가 그의 허리를 잡아 아래를 당겼다. 아랫배에 구멍이 닿을 것 같이, 완전히 안으로 틀어박자 선유는 울기 시작했다. 어중간하게 달아오른 채로 삽입까지 시간이 꽤 걸린 터라 찰랑찰랑 넘칠 정도로 차 있던 성감이 폭발해서 눈물샘까지 망가져 버린 듯했다.

내장에 굽은 부분까지 성기가 들어온 것 같았다. 잘못 움직이면 배 속이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아서 선유는 얼굴을 가린 채 옴짝달싹도 못 했다.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물기, 온몸을 무방비 상태로 드러낸 채 허벅지를 바들바들 떠는 선유를 내려다보던 한주가 허리를 더 들이밀며 좀 더 몸을 밀착시켰다.

“으, 읏…!”

“하아….”

“하, 한주야, 잠, 잠깐….”

“형, 흐….”

전희까지는 언제나 선유의 상태를 0순위로 여기던 한주는 삽입이 시작되면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어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정신이 나가 버려도 선유의 쾌락을 최우선으로 여긴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읏, 응… 아, 흐읏….”

한주가 허리를 조금 뒤로 뺐다가 다시 안으로 치받아 오면 선유는 그제야 팔다리의 존재를 깨달은 사람처럼 휘젓다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허리를 꽉 잡은 손을 말리듯 잡았지만, 이미 한주는 눈이 반쯤 돌아간 지 오래였다.

“한주야, 으읏, 너무, 깊….”

잠깐, 너무, 깊어, 소리만 반복하는 얄미운 입술을 먹어 치우며 한주는 폭발적으로 페로몬을 뿜어냈다. 꽉 조여들던 안이 페로몬 향기에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오물오물 잡아 무는 느낌은 여전했다.

“형, 하… 아프진 않죠?”

“아프진, 읏, 않, 않은데….”

항상 얘기하지만 아픈 게 문제가 아니라고! 선유는 한주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배를 감싸 쥐었다. 장기가 굽은 곳을 찌르던 성기가 천천히 빠져나가며 전립선을 그대로 긁었다.

“으, 읏…!”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절로 굽어 들며 신경질적으로 발끝이 침대 위를 긁었다. 꽉 내벽이 조여들며 빠져나가지 못하게 성기를 잡았다. 선유는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헐떡거렸고,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감각에 온몸을 뒤틀었다. 뜨거운 땀이 배어 나오는 가슴 위에 잘게 입을 맞추며 한주는 조금 더 성기를 빼냈다가 얕게 쳐 올렸다.

“하으, 읏, 으응, 아, 안, 안 돼….”

“형, 하, 그만, 조여요, 읏….”

“그게, 아흐, 내 마음대로, 되는, 아, 게 아니… 으읏….”

조여드는 내벽을 후비듯 파내며 한주의 성기가 더 파고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깨를 잡아채자 한주는 다시 입술을 비비며 다디단 것을 먹는 듯 선유의 혀를 빨았다. 잠시 멈춘 허리의 움직임과 질척한 키스에 선유의 긴장이 풀어지기 무섭게 한주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젠 더는 선유의 상황을 이해해 줄 수 없게 된 한주가 둘의 쾌락만을 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을 꽉 잡아 침대에 누르고, 허공에 반쯤 뜬 선유의 허리가 침대에 콱콱 다시 박혀 들 정도로.

둘의 가슴이 맞닿게끔 상체를 완전히 숙인 터라, 아래에 깔린 선유의 존재는 한주의 허리를 감은 다리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입술까지 막혀서 읍, 읍하는 막힌 소리만이 울렸다.

“한주야, 나, 으읍, 손, 손 아파….”

한주의 손은 선유의 것보다 한 마디가 더 컸고, 흥분으로 인해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선유의 손가락 사이 얇은 피부는 마찰과 힘에 의해 헤지기도 했다. 그것까진 어떻게든 참아낸 선유는 손등에 새빨갛게 자국이 남고 난 후에야 아프다고 손을 간신히 당겨 뺐다.

숨이 모자라 입을 벌리면 혀가 들어왔고, 야하게 얽힌 그 사이로 숨을 뱉다 어깨를 밀면 아주 잠깐 입술이 떨어졌다. 그러다 선유는 한주의 턱을 타고 떨어진 땀이 제 뺨에 떨어지자마자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붙잡아 당겨 다시 입을 맞췄다.

아무리 안을 쑤시고 빼고 또 쑤셔도 익숙해지지 않는 크기와 그 정확한 위치 조준에 선유의 성기는 이미 몇 번이나 물을 뱉어 낸 지 오래였다. 하지만 아랫배를 질척하게 적신 그것들을 부끄러워할 수도 없었다. 이미 정신이 나가 버려서.

쉴 새 없이 토해지는 액체가 거의 묽어졌을 즈음, 순간 한주가 다급하게 선유를 끌어안았다가 몸을 뒤로 쭉 빼내려 했다.

“왜, 왜 빼….”

“읏, 형….”

빠져나가는 성기가 너무 아쉬워서 선유는 한주의 등과 허리를 팔다리로 칭칭 감아 당기며 다시 성기가 제 안을 완전히 가득 채우도록 했다. 불쑥 한 번 커진 것이 또 한 번 용적을 키우며 이미 늘어날 만큼 늘어난 구멍을 더 늘려 틈 하나 없이 채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형, 콘돔….”

“약 있다니까, 으읏….”

이 상황에서 사정 전에 뺄 생각을 한 한주가 대단하면서도 선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러트에 돌입한 몸에서 사향과 민트 향이 풍기고 진득한 감촉을 가진 페로몬이 몸 위로 쏟아졌다.

“흐으… 아, 흣….”

“하아….”

안쪽에 가득찬 물기가 단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을 정도로 성기가 꽉 틀어막자 선유는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삽입 자체가 오랜만이었던 데다가, 노팅을 하게 되면 마치 제 성감대에 맞춘 것처럼 한주의 성기가 부풀어 올라 온몸의 신경 줄이 좋아 날뛰었다.

“…형, 아프진 않아요?”

“응… 괜찮, 읏, 괜찮아….”

아프기보단 좋아서 미칠 지경이지, 젖은 목덜미를 쓰다듬는 입술에 파르르 피부가 떨렸다. 노팅 때는 뒤에서 안는 게 편하지만, 선유는 불편한 자세에도 한주를 마주 보고 있길 선택했다.

정액이 배 속을 다 채울 때까지 선유는 한주를 꽉 끌어안은 채 이따금씩 허리만 움찔거렸다. 분명 느껴질 리 없는 그 뜨거움이 환상처럼 스쳐 갔고,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선유는 제 어깨에 이마를 문지르고 장난스럽게 목덜미를 깨무는 한주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한주야.”

“…예, 형.”

처음 한주의 체력을 과소평가하고 한 번 덤빈 이후 선유는 항상 한주와 몇 번을 할 건지 정하곤 했다.

“몇 번 더… 할 거야?”

“…글쎄요.”

한주는 잠시 몸을 일으켜 새빨갛게 늘어난 구멍과 그를 틀어막은 제 성기를 내려다보았다. 뚫어져라 보는 시선에 선유는 늘어져 있던 팔을 들어 아래를 애써 가리려 했다. 아무리 못 볼 꼴 다 본 사이라고 해도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렇게 제정신으로 잠깐 돌아올 때는 더욱.

“왜 가려요.”

“…그럼 넌 왜 그렇게 봐.”

“제 건데.”

“그… 네 건 맞는데 그래도….”

자기가 한주 거라는 거엔 부정하지 못하고, 선유는 그의 성기와, 한주와 연결된 부분을 두 손으로 가까스로 가렸다. 정액이 나오면서 천천히 안을 채우고 있던 것이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으나 여전히 틀어 막힌 감각은 그대로였다. 그 익숙하지 않은 감촉에 선유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마셨고, 갑자기 등 밑으로 들어온 손이 그대로 그를 일으켰다.

“흐, 읏….”

“형, 너무… 조이지 마요.”

부피가 줄며 주르륵 흐르는 액체를 손으로 닦아 다시 문지르고 밀어 넣으며 한주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손끝이 닿고 안으로 밀려들어 올 때마다 한주의 어깨를 잡아채던 선유가 바르르 떨었다.

“형은… 얼마나 할 수 있겠어요?”

“나는….”

“…열 번?”

“야, 너….”

뭐라 하려는 선유의 입술을 막으며 한주는 그대로 밑을 다시 쳐 올리기 시작했다. 금세 힘을 되찾은 성기가 경도를 더해 갔고, 안을 채운 미끌미끌한 액체 덕에 움직임은 더 편해졌다.

“흣, 아, 한주, 야, 아, 흐읍….”

“형, 좋아, 너무 좋아해요….”

“응, 으응,”

대답을 하는 건지 앓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뱉으며 선유가 한주의 어깨를 물었다. 벌써 고환이 다 비어 버린 듯 맑은 물이 툭 튀었고, 잠시 정신을 놓은 몸이 뒤로 넘어가려 했다.

따끈하게 달아오른 몸을 완전히 제게 기대게 하고 한주는 몇 번 더 허리를 추어올렸다. 두 번째 노팅은 금세였다. 처음보다는 조금 작게 부푼 것이 다시 구멍을 막았고, 정신을 잃은 채로도 선유는 끙끙 앓으며 한주의 품에 안겼다.

“…귀여워.”

지금 어울리지 않는 감상일지도 모르지만, 한주의 눈에 제게 안겨 드는 선유는 정말로 귀여웠다. 그 상황이 어떻든 간에.

“형.”

“…으응.”

이어지는 노팅에 약한 통증을 호소하는 선유에게 페로몬을 흠뻑 부어 적시며 한주는 그의 젖은 머리카락에 연거푸 입을 맞췄다. 아프다고 만지지 말라고 하던 가슴도 조심조심 만지작대며 그가 깨어 있을 때면 하지 못하게 할 짓을 조금은 대담하게 해 대다 천천히 성기를 빼냈다.

그리고 채 다물리지 않아 액체가 주르륵 흐르는 선유의 구멍을 자기도 모르게 한참 보다 침대에 널브러진 수건을 가져다 천천히 닦아 주고 곧 전화기를 들어 룸서비스를 시켰다. 선유에게 장난식으로 말한 열 번은 절대… 그에겐 농담이 아니었다.

과일과 집어 먹기 쉬운 메뉴 위주로 골라 시키고 여전히 연하게 흘러나오는 체향을 마시며 선유를 뒤에서부터 안았다. 손가락 끝까지 감싸고 다리를 얽자 또다시 울컥 스며 나온 액체가 허벅지를 적셨다.

확 피어오르는 단내에 다시금 성기가 아랫배를 칠 정도로 솟아올랐지만, 한주는 그저 선유를 한 번 더 고쳐 안았을 뿐이었다. 잠든 그를 데리고 제 욕구만 채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조금 재우고, 조금 체력을 회복하면… 아직 시간은 꽤 많으니까.

***

아직 채 눈이 녹지 않은 공원을 도도도 뛰어다니는 도하의 뒤를 꽤 커다란 웰시코기 한 마리가 쫓고 있었다. 저러다 넘어지겠다고 걱정했지만, 아이는 용케 넘어지지 않고 이리저리 뛰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갓 구운 식빵 같은 강아지가 그 위를 덮쳐 드러난 살 부위를 이리저리 핥아 댔다.

“꺄하, 간지러!”

덩치가 큰 강아지를 주인이 간신히 떼어 냈고, 도하는 할아버지의 손에 일으켜 세워졌다. 하지만 다시 강아지에게 다가가 목을 안았고, 어른들은 서로에게 미안해했다.

“도하야!”

“…아빠?”

멀리서 들리는, 저 부르는 소리에 도하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가며 제 아빠를 찾았다. 그리고 공원 입구에 차를 세우고 내리는 선유를 발견하고 발딱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아―!”

곰돌이 귀가 달린 후드까지 쓰고 달려오는 도하는 영락없는 아기 북극곰이었다. 넘어지니까 조심하라고 하기 무섭게 철퍽 눈밭에 넘어졌다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뛰어온 도하가 선유에게 달려들기 직전, 한주가 그대로 아이를 잡아채 품에 안아 들었다. 오늘 아침까지 시달린 선유가 저돌적인 아이의 부딪침을 당해 낼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아빠 와써!”

“응, 아빠 왔어.”

“헤헤, 보구 시퍼!”

“응, 도하 아빠 보고 싶었어?”

“마니!”

“많이 보고 싶었구나.”

이것저것 섞인 말을 잘도 이해해서 대답해 주며 한주는 차가워진 아이 뺨에 제 뺨을 비볐다.

“도하, 할아버지 할머니랑 잘 놀았지?”

“응, 놀아찌-.”

“보리 귀여워?”

“기여어, 보리 기여어!”

매번 산책 시간마다 마주치는 보리 주인과 빨간 니트 옷을 입은, 활기 넘치는 강아지한테 눈으로 인사하고, 한주는 다시 도하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도하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괜히 부끄러운 척하며 선유의 다리를 안고 뒤에 숨었다 다시 나오기를 반복했다.

“늦게 오라니까.”

“체크아웃 시간 되어서 나온 거예요.”

체크아웃 시간 직전까지 섹스 삼매경이었던 터라 괜히 민망함을 숨기기 위해 선유는 불퉁한 어투로 대답했다. 이제 정말 씻고 나가야 하는 시점에 같이 욕실에 들어갔다가 심지어 한 시간 연장까지 했는데.

“아이 키우는 것도 좋지만, 바람도 쐬고 해야 해.”

“예… 가끔은 괜찮은 거 같아요. 도하가 힘들게 하진 않았죠?”

“얼마나 순한지, 너네 찾는 거 말곤 혼자 밥도 잘 먹고 잘 자고.”

“누구 아들인지….”

뿌듯한 얼굴로 도하 자랑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선유를 보며 아버지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그의 다리에 매달리는 도하를 보곤 더 팔불출처럼 웃었다.

“보리랑 놀래.”

다시 강아지에게 다다다 뛰어가는 도하의 뒤를 따라 선유가 쫓아갔고, 한주와 선유의 아버지만 뒤에 남겨졌다.

“흠, 잘 쉬다 왔고?”

“예. 아이 봐주셔서 감사해요.”

“아예 미국에 몇 달 보내도 괜찮다. 우리 둘 다 할 일 없이 무료해서.”

제 피가 섞인 아들과,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아들처럼 여기던 아이를 너무나 잘 아는 아버지는 한주의 미소에 뒷말을 덧붙이고 말았다.

“너나 선유가 그러진 않겠지만.”

너무 똑똑한 탓에 부모의 손에서 일찍 빠져나가 버린 선유가 데려온 아이, 훌쩍 커서 이젠 눈높이조차 맞지 않게 된 아이는 제 형을 사랑한다 했다. 선유의 부모가 처음 느낀 감정은 배신감이었으나, 곧 그것은 스러지고 말았다.

“형.”

넘어진 아이를 훌쩍 들어 올리는 선유를 보자마자 다급히 달려가는 한주의 머리 위로 눈이 다시 날리기 시작했다. 코끝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겨울이지만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선유에게서 도하를 앗아 들지 않고 단지 아이의 엉덩이를 받쳐 주는 손을 보니 따뜻한 것도 같았다.

구구절절 이유 하나 붙이지 않고 선유를 사랑하고 둘의 관계를 설명하던 단호한 목소리를 떠올리면, 잔소리고 조언이고 이 둘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알파고 오메가고, 그런 성별과 본능을 다 떠나서 형이 없는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길고 긴 에움길을 걸어 다시 돌아온 그의 옆에 가장 오래도록 있고 싶다던 그 담담한 고백. 단단한 반석 같은 애정은 그 누구의 참견도 방해도 허용하지 않을 듯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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