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리움
구두를 신고 캐리어를 당기는 선유의 뺨으로 조금 뜨거운 느낌의 보드라운 손바닥이 닿았다. 말랑말랑한 손을 잡아 입술로 물고 입을 맞추자 한주에게 안겨 있던 도하가 까르르 웃으며 뒤로 넘어갔다.
“도하, 큰 아빠한테 안길래?”
“응!”
허우적대는 아이의 팔 안쪽으로 손을 넣어 가볍게 들어 안았지만, 한주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제야 두 자릿수 몸무게가 간신히 넘은 도하를 안는 건 그다지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고 선유가 몇 번을 말해도, 그의 염려는 끝이 없었다.
선유는 임신한 중에 온몸 관절의 통증을 호소했기도 했고, 실제로도 손목 발목 같이 작은 관절 부위의 간헐적인 시큰거림에 시달렸다. 그 때문에 한주는 선유가 힘을 들여 도하를 품에 안지 않도록 했다.
“형, 손목 아파요.”
“아빠, 아파?”
“안 아파.”
작은 아빠는 아프다고 하고, 큰 아빠는 안 아프다고 하고, 대체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었던 도하는 우선 본인의 욕심을 채우기로 했다. 오랜만에 폭 안겨 선유의 품을 만끽하는 것이었다.
“도하야.”
“우응….”
한주가 제 품에 안기라고 손을 뻗었지만, 도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선유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 모양이 한도 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선유는 보드라운 도하의 곱슬머리에 코를 문지르고 아직도 우유 냄새가 나는 뽀얀 뺨에는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그 보드라운 입맞춤에 감화된 듯 도하는 선유에게 제 애정을 드러냈다.
“아빠, 조아해요.”
“아빠도 도하 좋아해.”
눈도 제대로 못 뜨던 아기 때도 한주 판박이였던 도하는, 자라면서 더더욱 한주와 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똑같아졌다. 꼭 한 가지를 꼽아 보자면 도하의 머리가 무척 귀여운, 선유를 닮은 고수머리라는 점일까… 여전히 한주는 귓바퀴가 선유를 닮았다고 우기고 있었지만.
도하는 애교가 많고 낯도 안 가려서 성격은 한주와 좀 다른 듯했지만, 이 나이대의 한주를 모르기에 단언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선유의 눈에는 둘 다 사랑스러운 이들이어서.
“아빠, 언제 와…?”
선유가 저 가방을 들고 가면 몇 번 해가 뜨고 지기를 반복해야만 돌아온다는 걸 학습한 도하가 한껏 불쌍한 목소리로 물었다. 첫돌도 되기 전에 입이 트이고 나서 말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말이 느는 게 신기했다. 선유는 말랑한 뺨을 몇 번 쥐었다 놓고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폈다.
“도하가 다섯 밤 자고 나면 올게.”
“다섯 밤?”
“응. 코- 자는 거. 하나, 둘, 셋, 넷, 다섯.”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우리 도하 이제 숫자도 셀 수 있네.”
칭찬 한마디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한 번에 도하는 하늘을 날 것 같아졌다. 솜사탕을 밟는 듯, 사랑받는 감각에 취해 퐁퐁 기쁨이 쏟아지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는 일시적인 헤어짐에 슬퍼졌다.
이번 연말에도 갑작스럽게 잡힌 해외 출장 때문에 선유는 종무일 직전에 출국해서 크리스마스이브에나 돌아올 예정이었다. 히잉, 선유의 코트 칼라를 붙잡고 도하는 떼를 썼다. 가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그런 어려운 말까지는 아직 못하는지 옹알거림이 섞인 투정이었다.
“형, 비행기 시간에 늦겠어요.”
“도하, 아빠한테 뽀뽀.”
한주가 자칫하다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도하를 선유의 품에서 앗아 왔다. 커다란 눈망울 위로 얇은 막이 울렁울렁 생기고 있었다.
“…다녀오세요.”
꼬박꼬박 가르친 덕분인지, 매일 한주가 선유에게 하는 인사 덕분인지 도하는 인사는 참 잘했다. 다녀오세요, 하고 뺨에 뽀뽀 한 번. 아직 혀 짧은 소리가 나서 ‘다녀오떼여’처럼 들리긴 했지만.
“형, 조심히 다녀와요.”
“응, 한주도 뽀뽀.”
원조는 입술 소리부터 다르다. 선유는 두 아이들에게서 인사를 받고 돌려준 후 캐리어를 다시 쥐었다.
“내일까지는 회사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면 되고, 그 이후부터는 여사님 부르면 돼.”
“예. 걱정 마세요. 저 강의 하나 빼곤 다 종강해서 도하 제가 보면 돼요.”
“…힘들까 봐 그러지.”
“힘들긴요. 형, 올 때 부모님이랑 같이 오실 거죠?”
“응. 같은 비행기로 맞췄어.”
“입국 날 마중 나갈까요?”
“아냐. 도하랑 기다리고 있어. 다녀올게.”
도하를 가볍게 들어 안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을 나온 한주를 한껏 귀여워해 준 선유가 마지막으로 도하의 손을 쥐고 조물조물 만져 준 후에야 좁은 쇠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선유가 사라진 커다란 철문 앞에 도하와 한주는 한참을 서 있었다.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겪는 짧은 이별에 여전히 둘 다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목덜미가 서늘해지고 나서야 한주는 도하를 안은 채 집으로 들어왔다.
“도하, 밥 먹을까?”
“우응….”
“제대로 대답해야지.”
“먹을래.”
“뭐 먹고 싶어?”
“아빠, 나 콩나물.”
콩나물 많이 먹어야 키 큰다고 해 놨더니 맨날 먹고 싶은 게 콩나물이다. 한주는 아침에 갈아 놓은 당근사과주스를 빨대 컵에 담아 도하의 손에 쥐여 주고 앞치마를 입었다.
제 돌떡을 스스로 돌렸던 도하인 만큼 이미 뛰기 시작한 지는 오래였다. 도도도, 도도도, 바닥에 깔아 놓은 매트와 아직 몰랑한 발바닥이 차지게 부딪치는 소리에 피식 웃으며 한주는 다듬은 콩나물을 찬물에 넣고 제 다리에 쿵 부딪치는 도하를 안아 들었다.
“도하야. 넘어지면 아파.”
“아파?”
“무릎 아프잖아. 주스 다 마셨어?”
“마셨어!”
“대답을 하는 거야, 아니면 따라 하는 거야?”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헤 만면에 웃음을 띠는 도하를 따라 저도 모르게 웃으며 한주는 아이를 쑥 들어 안았다. 도하는 훌쩍 눈높이가 높아지는 것에 지금보다 더 아기였던 때처럼 까르르 웃었다. 이제 걷고 뛸 수도 있지만, 여전히 이렇게 안기고 안는 게 좋았다.
“그렇게 좋아?”
“아빠, 밥―”
“조금만 기다려.”
“배고파.”
“배 빵빵한데?”
“빵빵?”
“빵빵.”
한주가 통통한 배를 두드리며 빵빵하다는 말을 반복해 주자 도하도 같이 제 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물론 빵빵이라는 말을 마치 노래처럼 하면서.
“콩나물이랑 또 뭐 먹고 싶어?”
“고기!”
“불고기 먹을까?”
“불고기!”
“응, 불고기.”
“맛있어!”
아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놓은 불고기를 데우고, 갓 끓인 콩나물국과 콩나물무침, 잘 씻어서 참기름과 깨를 넣어 무친 김치를 차린 밥상은 꽤 실했다.
“잘 먹게씁니다아.”
“맛있게 먹어.”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 주고, 한주는 때때로 도하의 국그릇 위에 불고기 조각과 김치나물을 올려주었다. 아직 숟가락질이 좀 서투른 터라 가끔 음식물이 여기저기 튀고 바닥에 떨어지긴 했지만, 굳이 먹여 주거나 그걸로 뭐라 하진 않았다. 아직 어려서 못 하는 걸로 타박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맛있어?”
“마시써.”
“콩나물 많이 먹으면 쑥쑥 클 거야.”
헤헷, 제가 원하던 말이었는지 도하는 잘게 잘린 콩나물을 열심히 먹었다. 잘 먹고 잘 노는데도 또래보다 아주 조금 작긴 했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한주는 매우 큰 편이고, 선유도 평균보다 크니 도하의 미래는 창창할 터였다.
“밥 먹고 책 읽어 줄까?”
도하가 생긴 이후, 거실의 TV는 거의 무용지물이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영화를 보는 시간 외에는 전원 자체가 들어와 있는 일이 없었다. 대신 놀이방이 된 거실 가득 책이 빈자리를 채웠다. 물론 오만 가지 장난감도 같이.
“시러, 잘래.”
“…잔다고?”
“잘래.”
도하는 아주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아이였다. 7시에 일어나서 선유를 깨우고, 한주가 준비한 아침을 먹고, 평일에서는 선유를 따라 회사 어린이집에 가고, 오전 중에는 보통 책을 읽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어린이집 선생님을 따라 단어 공부를 했다.
점심을 먹으면 선유가 와서 잠시 놀아 준 후 돌아가고, 낮잠을 딱 한 시간 반을 자고 일어나서 블록과 세발자전거를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선유와 함께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아빠들과 몸으로 한껏 논 후 열 시가 되면 죽은 듯이 잠들었다.
그런 도하가 지금 잠을 자겠다고? 한주는 도하의 뜬금없는 ‘잘래!’라는 외침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선유는 습관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도하가 규칙적인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길 바랐다. 그가 한주에게 교육한 것도 언제나 비슷한 논지의 것이었기에 한주 또한 같은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다. 강요한 건 아니었지만 도하도 잘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도하야, 책 읽자. 사과주스 더 줄까?”
실은 당근이 더 많이 들어간 주스지만… 도하는 확실하게 싫다는 의지를, 머리카락이 팔랑팔랑 날릴 정도로 고개를 휙휙 저어 드러냈다.
“도하 지금 자는 시간 아니잖아. 점심 먹고 자야지.”
“아빠, 도하 잘래요.”
“지금 자면 밤에 잠 못 자.”
“힝, 잘래애….”
아이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한주는 이유 모를 도하의 투정에 당황한 티를 간신히 숨기며 아이를 안았다. 품에 안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자 도하는 마치 백일 된 아기 때처럼 칭얼거렸다.
“왜 그래. 졸려서 그래?”
하지만 졸릴 리가 없다. 어젯밤에 한 번도 안 깨고 잘만 잤는걸.
“도하야, 아빠랑 산책 갈까? 멍멍이 보러 갈까?”
집 앞 공원에 가면 이 시간대에 산책하는 개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유난한 친화력으로 동네 개들과 전부 친구가 된 도하는 아빠들이 집에 있는 날이면 언제나 산책을 나가자고 했다.
“싫어?”
한주의 목을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은 도하가 조용해졌다.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본인이 꺼낸 잔다는 말과 한주의 유혹 사이에서.
“산책 갔다 와서, 아빠랑 점심 먹고 자자. 응? 지금 나가면 보리 있을 텐데.”
보리는 도하가 제일 좋아하고 제일 친한 웰시코기였다.
“보리 간식도 가져다줘야지.”
보리 소리가 날 때마다 목에 감긴 팔이 꼭꼭 죄어들었다. 도하가 거의 다 넘어왔다는 증거였다.
한주에게 코알라처럼 매달려 있던 도하가 내려 달라는 의미로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리고 한주가 바닥에 내려주자마자 포르르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빵빵한 펭귄처럼 변하는 하얀 패딩을 가져와 한주에게 내밀었다. 말없이 볼만 부풀린 뚱한 표정으로. 패딩을 받아 들며 한주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빠랑 산책 가자.”
보리의 유혹에 빠진 도하는 자기가 왜 자고 싶어 했는지를 잊은 듯했다. 그 형언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에 한주는 쪽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뽀뽀에 아이를 꼭 안고야 말았다.
***
이틀간 도하와 함께 산책과 장보기 외엔 외출을 전혀 하지 않던 한주가 아침부터 나갈 준비 중이었다. 기말시험이 딱 하나 남았는데, 그게 바로 오늘인 탓이었다.
“아빠, 전화.”
“전화가 안 오네.”
“전화….”
“조금만 기다릴까?”
아침을 먹고 나서 도하는 한주의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둘이 아침을 먹고 난 시간에 맞추어 선유가 전화를 걸어온다는 걸 익힌 참이었다. 물론 새까만 화면을 켤 줄은 모르고, 버튼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서 그냥 여기저기 돌려 대고 있을 뿐이었지만.
“아빠!”
갑자기 확 켜진 화면에 놀란 도하가 손바닥으로 마구 눌러 댔고, 운 좋게 통화 버튼이 눌렸다.
- 응? 도하야?
“아빠!”
- 작은 아빠는 어디 갔어?
설거지를 하던 한주가 황급히 도하 옆으로 다가왔다. 선유가 걸어온 영상 통화를 도하가 받은 것까지는 좋은데, 선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세상 서럽게 울어 젖히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빠, 흐어엉, 왜, 왜… 아, 와여….”
- 응? 도하야, 울어? …한주야.
“형. 잠시만요.”
- 도하 왜 울어?
“저도 잘… 잠깐 달랠게요.”
아이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서 뺨과 턱이 순식간에 다 젖어 버렸다. 개어 놓은 수건을 가져와 닦아 주면서 한주는 아이를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도하야.”
“허엉, 아빠, 아, 빠….”
선유는 해외 출장을 횟수도 기간도 최소화하려 매우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가야만 하는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도하는 선유를 매우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했지만 이렇게까지 우는 건 처음이었다.
- 도하야, 왜 울어.
“흐읍, 다섯 밤… 자써요….”
- 응?
“다섯 밤….”
계속 다섯 밤을 웅얼거리는 도하의 말을 한주와 선유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엉엉 우는 아이의 얼굴을 살살 닦아 주고 등을 문질러 주었다. 한참 울던 도하가 딸꾹질까지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 한주야, 무슨 일 있었어?
“…아뇨, 딱히 일은 없었어요.”
- 다섯 밤이라고 하는 거 맞지?
“예.”
- 다섯 밤 자면 온다고 하긴 했는데… 도하가 숫자를 아직 잘 세지는 못하잖아.
“잘 세요. 열까지는 세던데요.”
- …도하 천재인 건가.
“형 닮았으면 천재긴 하겠죠.”
선유가 놀러 간 게 아니라 일을 하러 간 것이어서 먼저 전화를 걸 수 없는 한주도 기다리는 시간은 고역이었고, 이 영상 통화는 가뭄에 내리는 단비나 다름없었다. 갓 씻고 나온 듯 가운 차림에 자연스러운 머리스타일이 무척 짙은 그리움을 자아냈다.
“…형, 보고 싶어요.”
아이를 달래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 본심에 한주가 입을 딱 다물었지만, 이미 그 소리는 선유의 귀로 들어가 버렸다. 환해진 얼굴이 조금 흐릿한 영상으로도 똑똑히 보였다.
“나두! 보구 시퍼여….”
조금 울음이 가라앉은 도하가 한주의 핸드폰에 얼굴을 들이밀며 그리움을 표했다. 빨갛고 탱글탱글하게 부은 아이의 얼굴을 본 선유가 애써 더 웃으며 말했다.
- 나도 보고 싶어.
“웅.”
- 도하야, 아빠 많이 보고 싶어?
“보구 시픈데… 왜 안 와요….”
도하가 또 훌쩍이기 시작했다. 선유가 말로 달래고, 한주는 토닥거려 달래고, 그렇게 한참 후에야 다시 아이가 진정되었다. 그동안 잠시 골똘해져 있던 선유는 도하가 말한 다섯 밤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아졌다.
- 한주야.
“예, 형.”
- 나 가고 나서 도하 낮잠 몇 번 잤어?
“낮잠이요?”
- 응.
“어제 고집부려서 두 번 잤고, 그제는 한 번이요.”
- …그래서 다섯 밤 잤다고 하는 거네.
“다섯… 아, 그래서…?”
낮잠 세 번, 밤잠 두 번, 합쳐서 다섯 번 이미 자기는 잤다는 거다. 근데 왜 선유는 안 오는 거냐고 서러워서 엉엉 운 거고.
- 도하야.
“아빠아….”
- 아빠가 다섯 밤 자면 간다고 했잖아.
“자써요!”
- 밤에 다섯 번 자야 해.
“…밤에?”
- 응, 밤에 다섯 번. 해가 지고 뜨는 거 다섯 번이란 의미야.
엄청난 충격으로 도하는 말을 다 잃었다. 억지로 낮잠 자고, 밤에 자고 하면 아빠가 일찍 올 줄 알았던 순진함의 말로였다.
“형.”
- 도하 잘 달래 줘.
“…저는 누가 달래 줘요.”
- 한주는 내가 달래 줘야 하는데… 이리 와, 뽀뽀해 줄게.
쪽쪽 입술 맞부딪치는 소리에 한주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확연히 밝아진 목소리로 선유에게 익숙한 고백을 했다.
“형, 좋아해요.”
- 응, 사랑해.
“아빠, 좋아해요.”
- 응, 사랑해.
쌍둥이 같은 고백에 성의 있는 대답이 이어진 후, 선유와의 전화는 끝났다. 까매진 화면에 대고 아빠를 부르던 도하가 한참 절망에 빠져 있었다. 아마도 아이 인생 최초의 좌절이 아니었을까.
도하가 오늘 올 줄 알았던 아빠가 며칠 더 지나야 온다는 것을 받아들이느라 애쓰는 동안, 한주는 외출 준비를 끝냈다. 어차피 시험만 끝내고 바로 올 거라 간단히 입었다.
여사님이 오실 때가 됐는데, 시계를 확인하고 한주는 도하를 안아 눈앞에서 손을 몇 번이나 흔들었고, 그제야 아이는 조금 충격에서 벗어난 듯했다.
“도하야. 아빠 시험만 보고 바로 올 거야.”
“셤?”
“시험.”
“셔엄.”
시험이라고 바로잡아 줘도 아이의 귀에는 크게 달리 들리지 않는 듯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꼭 저렇게 따라 하는 게 귀여워서 매번 틀린 걸 바로잡아 주지만 아직 거기까지 도달하기엔 너무 먼일이었다.
“여사님하고 조금만 있어. 도하 점심 먹고 낮잠 자고 일어나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에 화면을 보니 양반은 못 될 여사님의 전화였다.
“예, 여사님.”
- 한주 학생, 이걸 어째. 내가 지금 병원에 왔어.
“병원이요?”
- 빙판길에 넘어져서 오른팔이 부러졌지 뭐야.
“괜찮으세요?”
- 똑 부러져서 뼈만 붙으면 된다고 해서 괜찮아. 근데 어떡하지? 도하 봐주러 갈 수가 없겠는데….
“그래도 그 정도라 다행이시네요.”
- 미안해서 어째. 내가 다른 사람 구해서 보내 줄까?
잠시 고민하던 한주가 거절의 말을 내었다.
“아닙니다. 네 시간 정도니까… 어떻게든 해 봐야죠.”
- 정말 미안해서.
“괜찮습니다. 쉬세요. 몸조리 잘하시구요.”
전화를 끊고 한주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선유에게 전화를 해서 혹 다른 사람을 구해도 되는지 물어볼까 했으나 그건 안 될 것 같았다. 아이에 한해서만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촉각을 세우는 그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란 나라는 베이비시터가 생활화되어 있었던 만큼, 그로 인한 사건 사고가 많아서 그런 것이라 한주는 이미 예전에 이해를 했다.
이 여사님을 한 명 구하기 위해 선유는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면담을 했다. 그때만큼 까탈스럽게 구는 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회사 사람을 뽑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신경을 썼다.
“어떡하지.”
문제는 한주의 졸업이 이 시험에 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4학년 2학기, 마지막 전공 필수 과목의 기말고사… 빠지게 되면 F는 따 놓은 당상이고 졸업도 물 건너가는 것이다.
선유의 회사 어린이집은 종무일 이후엔 당연히 운영을 하지 않았다. 그럼 도하를 맡길 만한 곳이 대체 어디에… 고민하던 한주는 지운에게 연락을 하려 했으나, 곧 그들 가족도 종무일이 되자마자 장기 여행을 떠났다는 걸 깨달았다. 복지가 너무 좋아도 문제네. 연말연시에 거의 2주간 휴가를 줘 버리는 선유의 회사를 애꿎게 욕하며 한주는 몇 군데 더 연락을 취해 봤으나 소득이 없었다.
“…데려갈까?”
교수님한테 미리 말해 놓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도하는 자기가 좋아하는 게 있으면 삼십 분 정도는 조용히 있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시험을 따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정도의 호의를 바랄 수도 있을 터였다. 한 학기 동안 교수는 한주를 해당 강의의 도우미로 매우 잘 부려 먹었으니까.
도하를 학교에 데려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한주는 바로 교수에게 연락을 했다.
- 오, 한주 학생이 나한테 먼저 전화하는 건 처음이구만.
“안녕하세요, 교수님.”
- 시험 날 교수에게 전화하면 못 써.
“그 시험 때문에 한 가지 문의… 요청드리려고 합니다.”
- 뭔가?
“제가 아이가 있는데, 맡길 곳이 없어서… 아이를 데리고 시험을 쳐야 할 것 같습니다.”
- …아이가 있어?
“예.”
- 몇 살인데?
“19개월 됐습니다.”
- 아이구, 애기네. 결혼은 언제 했어?
더 사생활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기 전에 교수의 잡담을 끊고 한주는 본론을 꺼냈다.
“다른 학생들과 같이 시험을 보면 방해가 될 거 같으니… 조교실에서 보면 안 되겠습니까?”
- 음… 뭐, 사실 한주 학생은 기말시험 없어도 A 줄 수 있긴 한데, 또 형평성 문제가 있으니 그건 안 되겠고. 한 학기 동안 해 준 게 있으니까.
“시험은 봐야죠.”
- 그럼 어차피 옆에 502호 강의실도 비어 있으니까 거기서 봐. 애기가 노사 관련해서 경력 있는 애는 아니지?
“…19개월입니다, 교수님.”
- 그럼 됐네. 신 조교 보고 감독하라고 할게.
“감사합니다.”
- 와서 애기 얼굴은 보여 주고 들어가고. 진짜 애기인지 확인은 해야지.
“…마음대로 하세요.”
됐다. 교수가 젊고, 학생들의 다양한 상황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게다가 알파와 오메가는 결혼이 빨라 학생 때도 아이가 있는 경우가 많다 보니 약간 참작이 되었다.
“준비하자, 준비.”
스펀지로 만들어진 블록을 이리 저리 쌓고 부수고 있는 도하를 달랑 들어 올린 한주가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도하와 함께 나가려면 준비할 게 정말로 많았고, 시간은 없었다.
***€졸린냥
시험 시간 5분 전에야 간신히 경영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주는 도하를 안고 달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이 없어서 계단을 마구 뛰어 올라간 덕분에 시험 시작 시간 1분 전, 502호 문을 벌컥 열 수 있었다.
“시간 딱 맞춰 왔네.”
“…죄송합니다.”
숨을 몰아쉬며 말하자 시험지를 정리하고 있던 조교가 한주에게 다가왔다.
“진짜 애기가 있었어?”
한주의 품에서 덜컹덜컹 흔들린 도하는 한껏 흥분해 재미있어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빠, 아빠, 부르면서 한 번 더 해 달라며 조르기까지 할 정도로.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무척 예뻐 한 번 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한주는 시험을 봐야 했다.
“그럼 진짜죠.”
“교수님이 농담하시는 줄 알았는데.”
“물론 그런 농담하실 만한 분이긴 하죠.”
“100미터 밖에서 봐도 네 애인 줄 알겠다. 딸이야?”
“아들이에요.”
“어머, 너무 예뻐서 딸인 줄 알았어.”
새하얀 패딩에 연한 회색 패딩 부츠, 그리고 곰돌이 귀가 달린 복슬복슬한 아이보리색 양털 후드를 입은 도하는 새끼 북극곰 같았다. 낯선 공간을 여기저기 둘러보던 도하가 조교와 눈이 마주치자 헤실헤실 웃으며 ‘안냐세여’ 하고 인사를 했다. 어머, 낯가리지 않는 아이의 예쁜 짓에 조교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도하야, 아빠 시험 봐야 되니까 여기 잠깐만 앉아 있자.”
“내가 봐 줄게.”
“아녜요. 괜찮습니다.”
“그럼 너 시험 보는 동안 사고만 안 나게 보고 있을게.”
“…예, 부탁드려요.”
이미 아이 둘을 키우고 늦게 대학원에 온 선배라 아이 보는 데에는 이력이 나 있을 테지만… 여사님이 소개시켜 준다는 사람도 못 믿고 도하를 학교에 데려온 상황에서 턱 하니 조교한테 맡길 순 없는 노릇이다.
한주는 조교의 제안에 긍정하긴 했으나, 제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곳에 도하를 앉혀 놓고 준비해 온 동화책을 안겨 주었다. 이런 날을 위해 도하에게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신상 동화책이었다. 그림이 아주 많고, 매우 화려하고 세세하게 그려져 있는 터라 도하의 집중력을 길게 유지시켜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더운지 살짝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 가며 패딩을 벗기고 양털 후드 지퍼를 내려 주자, 도하는 그제야 헤헤 웃으며 동화책을 보기 시작했다. 몇 번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한주는 드디어 시험지를 펼쳤다. 악취미에 가까운 문제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한 번 쉬고, 펜을 들어 빠르게 종이 위를 채워 가기 시작했다. 도하가 집중력을 잃기 전에 얼른 끝낼 참이었다.
“아빠.”
“…….”
“아빠.”
“…응?”
“이거 뭐야?”
한주의 패착은 최근의 도하가 매우 호기심이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것을 보면 그게 뭔지 알기 전까지는 절대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도.
“그건 신발이야.”
“…신발?”
“응, 여기 봐 봐. 요정 발이 맨발이잖아.”
“웅… 아닌데….”
아예 도하의 앞에 앉은 조교가 대답을 해 주며 한주에게 휙휙 손을 저었다. 신경 쓰지 말고 시험이나 보라는 의미인 듯했다.
“도하 거는….”
그림에 그려진 신발은 앞코가 쑥 올라온 빨간색 부츠여서 아이가 신발로 여기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조교는 육아 경력자답게 도하에게 이것이 신발이라는 것을 설득해 주고 다음 장으로 책을 넘겨 주었다.
도하는 꽤 조용하게 책을 보았다. 마치 미로처럼 그려진 화사한 색감의 그림책은 겨우 19개월밖에 살지 않은 아기의 정신을 쏙 빼앗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가끔 ‘이거 뭐야?’라는 질문이 나오긴 했지만, 조교는 적절하게 아이에게 대답해 주며 한주가 시험을 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역시나 동화책만으론 부족했다. 도하는 끝으로 갈수록 그림에 질린 듯 휙휙 책을 넘기고, 두꺼운 하드커버를 탁 닫았다. 그리고 지그시 한주를 바라보았다. 손은 열심히 움직이면서 한주는 도하에게 말을 걸었다.
“도하, 책 다 읽었어?”
“응!”
“한 번 더 읽을래?”
“시러.”
단호하다 싶은 대답에 한주는 조교에게 잠시 딴짓을 해도 괜찮겠냐고 묻는 눈짓을 보내며 가방을 뒤졌다. 한주와 선유가 항상 외출 시 들고 다니는 것, 도하가 제일 좋아하는 게 그 안에 있었다.
“도하야. 색칠 놀이 하자.”
색연필과 색칠 놀이 책, 그리고 준비해 놓은 돗자리를 펼쳤으나 도하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왜 이게 안 통하지, 어딜 가든 돗자리 펼쳐서 바닥에 엎드려 색연필로 이리저리 색칠하면서 노는 게 도하의 가장 큰 취미인데.
“도하야.”
“아빠, 안아 줘어….”
도하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조르기 시작했다. 떼 한 번 쓰지 않는 아이의 조름은 언제나 한주와 선유에게 가장 약한 부분이었다.
“지금은 안 돼.”
“왜에….”
“아빠 시험 보잖아.”
“…셤?”
“그래. 시험.”
“왜 안 돼?”
큰일 났다. 도하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하게 변했다. 금세 울음이 터질 것 같이 뺨도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아침에 한바탕 울었는데 오늘 또 울면 열이 오를 수도 있었다.
한주는 도하를 품에 폭 안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었다. 울기 직전 그 특유의 숨소리가 아이의 가슴팍을 부풀렸다 푹 꺼지길 반복했다. 아무래도 낯선 곳이라 긴장해 있었던 것인지 도하는 한주의 가슴팍에 뺨을 대고 축 늘어졌다. 한 손으로 아이를 감싸 안고 한주는 마지막 문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강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빙글빙글 웃는 모양의 교수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진짜 애기네?”
교수에게 눈으로 인사하고 한주는 움직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한주의 앞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교수가 도하 뒤통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
“…아뇨. 잠깐 달래느라.”
또 다른 낯선 이의 목소리에 아이가 꼬물꼬물 품에서 움직였다. 그대로 있어도 된다는 의미로 등을 살살 쓸어 주고 또 몇 번 두드려 주자 도하는 코알라처럼 편안하게 품에 안겼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아이는 계속 자라는데 마치 맞춘 것처럼 이렇게 편안하게 안고 안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주먹 두 개 합쳐 놓은 크기일 때도, 이젠 거의 제 절반만큼 컸는데도. …선유도 이런 걸 신기해하지 않았을까. 그는 지금 제 나이와 비슷한 시기에 저를 데려와 키웠으니까.
“…아빠.”
“응?”
그냥 한번 불러 봤다는 듯 도하는 그 뒤 아무 말이 없었다. 처음 입이 트이면서 하루에 백 번도 넘게 아빠만 불러 대던 도하를 떠올리자 왠지 웃음이 났다. 그때도 선유는 출장 중이었는데, 처음으로 도하가 제대로 말하는 걸 듣지 못했다는 것에 얼마나 상심했었는지 모른다. 영상 통화로 아빠란 말을 서른 번쯤 듣고 나서야 그 아쉬움을 충족했을 정도로.
평소라면 조금 더 답안지를 다듬었겠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한 번 훑듯 읽은 후 거의 초안에 가까운 답안지를 제출하고 한주는 도하를 안고 일어났다.
“도하야.”
“웅.”
한주의 품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도하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안냐세여.”
한참 안아 줬더니 다시 괜찮아진 도하의 얼굴이 말갰다. 아직 조그만 손을 들어 팔랑팔랑 흔들어 주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교수를 쳐다보았다.
“몇 개월?”
“19개월이요.”
“딸이야?”
“아들이에요.”
교수는 머리가 빠지는 것을 숨기기 위해 요란하게 펌을 한 곱슬머리였는데 그게 굉장히 신기했는지 도하는 꼬불꼬불한 새치 섞인 머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만지려고 손까지 쑥 뻗는 터에 탁 팔을 잡아당겨 막고, 한주는 도하를 바닥에 내려놓은 후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배우자는?”
“잠시 해외에 나갔어요.”
“놀러?”
“…일하러요.”
패딩을 다시 입히자 도하는 불편한지 발을 구르고 팔을 이리저리 뻗어 댔지만, 툭툭 털어 몇 번 옷을 정돈해 주자 배시시 웃으며 다시 한주에게 안겼다.
“4년 동안 감사했습니다. 교수님.”
“졸업식엔 올 거지?”
“아마도요.”
미국에 안 간다면 오겠지만, 겨울엔 보통 선유의 부모 집에서 지내곤 했으니 확답할 수 없었다.
“한 학기 동안 수고 많았어.”
“아닙니다.”
“근데….”
“예?”
“애기 한번 안아 보면 안 돼? 왜 그렇게 예쁘게 생겼냐.”
도하가 저와 똑같이 생겼다는 걸 인정한 한주로선 그 예쁘다는 말이 좋다가도 싫었다. 게다가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없는 교수에게 어떻게 도하를 맡기겠는가. 선유 욕할 것 없이 한주도 끝 모르는 과잉 보호자였다.
“애가 낯을 가려서요.”
“낯을 가려? 방금 나한테 인사했잖아.”
“그런 건 하는데 덥석덥석 안기고는 안 합니다.”
오히려 아무한테나 답삭 안기는 게 문제였으나,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한 한주가 예의 바르게 교수와 조교에게 인사를 하고 강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하… 시험 끝나기 전에 나오려고 했는데.”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대강의실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한주는 바로 뒤를 돌아 계단으로 향했으나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큰 그를 다른 이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야, 최한주.”
“…….”
“헉, 뭐야.”
한주의 어깨를 잡았던 김성현이 놀라 손을 떼어 냈다. 한주가 안은 새하얀 솜뭉치 안에서 빼꼼 자그만 얼굴이 튀어나온 탓이었다.
“…누구 애기야?”
“…….”
“너? 대박.”
“…우선 좀 내려가자.”
하지만 한주는 거기서 몇 발 옮기지도 못했다. 경영대 강의는 항상 사람이 많았고, 그 사람들이 다 한 번에 쏟아져 나온 터라 5층 로비가 가득 찰 정도였다.
한주는 주변을 몇 겹으로 빙 둘러싼 사람들을 슥 한 번 바라보았다. 그들은 전혀 물러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성별 가리지 않고 인기가 터지는 이가 저랑 똑같이 생긴 아기를 안고 있는 것은 거의 폭탄을 학교 정중앙에 떨어뜨리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야, 가긴 어딜 가. 지금 상황에서 널 보내 줄 거 같냐?”
“집에 가야 돼.”
“시험 치러 안 와서 뭔가 했더니 애기 때문이었어?”
“…봐줄 사람이 없어서 데려온 거야. 시험에 방해될까 봐 교수님한테 따로 시험 보게 해 달라고 했고.”
도하가 자그만 손으로 코트 칼라를 꼭 쥐고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보다가 한주 품에 숨기를 반복했다. 그 모양이 굴 찾는 자그만 겨울 토끼 같았던 탓에 주변에서 앓는 신음 소리 같은 게 들렸으나 한주는 애써 무시했다.
“도하야, 왜 그래?”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파고드는 아이를 고쳐 안으며 한주가 속삭였다.
“왜, 무서워?”
“…우응.”
“낯도 안 가리면서… 사람 많아서 그래?”
나지막하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자 도하는 또 고개만 저었다. 무슨 말인지 아는 건지, 습관인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이 자리가 불편한 것만은 확실했다. 만날 모르는 사람, 동물한테 아무렇지 않게 말 걸고 치대는 걸 봐 와서인지 이런 아이가 신기하기도 했다.
“낯가리는 것도 귀엽네.”
높은 체온 때문에 살짝 땀이 밴 머리 밑을 쓰다듬듯 쓱쓱 머리카락을 빗겨 준 한주가 이 자리를 벗어날 궁리를 시작했다. …그냥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나.
“아가. 삼촌 봐 봐.”
“…….”
“여기 봐 보라니까.”
김성현이 귀찮게 굴자 도하는 한주의 목을 끌어안고 아예 얼굴을 숨겨 버렸다. 코트 칼라 뒤를 꼭 잡고 힘을 주는 아이가 조금 안쓰러워서 한주는 빨리 이 자리를 뜨기로 했다.
“귀찮게 하지 마. 싫다잖아.”
“형님은 어디 갔어?”
거의 유일하게 한주와 선유의 관계를 아는 성현이 괜히 아는 체를 해 왔다. 대답하기 싫다는 의미로 입술을 꾹 다물고 한주는 가방을 챙겨 멨다. 그리고 계단 쪽으로 걸어가자 그들을 둘러싼 원이 슬금슬금 옆으로 이동했다.
계단 앞을 막은 이들이 잠시 한주의 눈빛에 저항했으나 곧 옆으로 비켜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주는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도하야.”
“…응.”
“덜컹덜컹해?”
계단 내려갈 때마다 아이를 위로 조금 툭 던졌다 받아 주길 반복하자 재미있다고 웃기 시작했다. 위험하니까 잘 잡고 있으라고 한주는 제 목에 다시 팔을 감아 안아 주었다.
“야, 너 아기 있다고는 얘기 안 해 줬잖아.”
다른 이들은 따라오지 못해도 김성현만은 아무렇지 않게 쫓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얘기 안 했었나.”
“안 했어! 형님하고 각인했다는 얘기만 했지.”
성현은 단단히 화가 난 듯했다. 그래도 4년간 가장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한 친구에게 애가 있다는 걸 몇 년 만에 알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한주는 이해했다.
“늦게 말한 건 미안.”
“애기 얼굴이나 보여 줘.”
“잠깐만.”
1층 로비까지 내려오자 조금 숨통이 트였고, 성현은 바로 주차장으로 향하려는 한주를 끌고 로비 구석의 소파로 이끌었다. 지금까지 숨긴 죄가 있으니 이대로는 보낼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도하야.”
한주는 가방에서 주스를 꺼내 도하에게 건넸다. 빨대를 쪽쪽 빨며 아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성현을 보았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싼 가운데 있었던 탓인지, 그리고 지금도 가까이 다가오진 않아도 주변에 사람들이 수군대고 있어서인지 평소와 다르게 긴장이 서려 있었다.
“안녕.”
“…안냐세여.”
“우와, 너무 귀여워. 이름이 도하야?”
“웅.”
“삼촌이라고 불러 봐 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듯 도하는 고개를 갸우뚱하곤 다 마신 주스 컵을 한주에게 건넸다. 한주가 피식 웃자 성현은 왠지 더 오기를 부리고 싶어졌다. 어떻게든 저 아가 입에서 삼촌 소리를 듣고야 말겠다고. 하지만 도하는 쉽게 곁을 내어 주지 않았다. 계속 삼촌 소리를 했더니, 한주에게 안기며 삼촌이 뭐냐고 묻기만 할 뿐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와서 시험을 보고 사람들의 입방아질에 시달린 터라 한주는 좀 지친 상태였다. 허리에서 힘을 좀 풀고 늘어져 앉아 창밖을 보는 순간 오늘 집에 일찍 들어가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눈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도하는 하룻강아지처럼 눈만 보면 좋아 죽는 애였고.
“김성현. 그만 가야겠다.”
“그래. 애기 데리고 술집을 갈 수도 없고.”
“도하 없어도 안 가.”
주변의 수군거림은 조금 질렸다. 저와 도하에 대해 엄청난 소문이 만들어지고 있을 거라는 건 보고 듣지 않아도 뻔했다.
“미안한데, 오늘 뒤풀이 가서 소문 종식 좀 해 줘.”
“…하긴.”
“어디까지 어떻게 소문이 났을지 상상도 안 된다.”
“지금 어디까지 소문이 나 있냐면….”
핸드폰을 꺼낸 성현이 단체 메신저 창을 열고 위에서부터 읽기 시작했다.
“우선 네 애냐, 아니냐에서 의견이 갈리고 있는데… 애기 얼굴 본 사람이 네 애가 아닐 리가 없다고 해서 그 분쟁은 네 애인 걸로 결정.”
“…그리고?”
“그래서 애는 대체 누가 낳았는가, 최한주는 알파니까 오메가가 있는 것인가? 몇 년 전에 경영관 앞에서 키스한 그 오메가인가? 몇 년 전에 양아치들이 건드렸던 그 오메가인가? 그 양아치들 줄줄이 휴학하고 자퇴하게 만들었던 게 진짜 네가 괴롭혀서인가?”
“…….”
“아님 아예 다른 오메가인가? 아냐, 근데 해선 선배가 최한주는 각인 상대가 있다고 했는데? 각인이 그렇게 쉽게 안 풀리잖아? 풀릴 때도 됐지. 해선 선배가 말해 준 게 거의 3년 전인데?”
“…….”
“근데 애기 너무 귀엽던데, 최한주랑 똑같이 생겼어! 딸인가? 딸 아냐? 아들이라기엔 너무 예쁘던데. 어우 뺨 발간 게 진짜 사과 같은 얼굴이 뭔지 알겠더라. 하긴 최한주는 사과라기엔 너무 차갑지. 저런 애 있으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를 듯… 무엇보다 아기가 너무 예쁘다는 얘기가 많네.”
난리가 난 메신저 창을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요약한 성현이 줄줄줄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왠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서 한주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푹 고개를 숙였다.
“너네 무슨 내 소문 기록 같은 거 저장해 놓냐?”
“너 워낙 유명 인사라. 경영관 앞에서 키스한 거 사진도 돌았어.”
“…뭐?”
“그러게 누가 거기서 키스하래?”
그 이후로 추파를 던지거나 작업 거는 사람이 없어져서 좋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간다.”
한주는 답삭 아이를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졸고 있던 도하가 깜짝 놀라 깼다가 다시 배시시 웃으며 한주에게 안겨 반쯤 잠들었다.
“종강 뒤풀이는 올 거지?”
“크리스마스 이후엔 안 돼. 형 부모님 오셔.”
선유는 한주가 대학 생활을 충분히 영위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뒤풀이든 MT든 웬만해선 안 빠지고 참석했으면 했다. 각인한 오메가와 그의 자식이 더 중한 한주에겐 크게 의미 없는 일이었지만.
“야, 그럼 내일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안 되지.”
“졸업식 때나 보겠구나.”
천천히 걸어 밖으로 나오자 꽤 큰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온 지 꽤 된 모양으로 바닥에 조금이지만 쌓이기까지 했다. 차가운 게 뺨에 떨어져 잠이 깬 도하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흥분한 목소리로 한주를 부르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아빠! 눈, 눈!”
“응, 눈이네.”
진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평온하게 대답해 주었지만 의미가 없었다. 이미 들뜰 대로 들뜬 아이가 내려 달라고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내릴래!”
“안 돼.”
“내릴래!”
그래, 태어나서 눈 몇 번 보지도 않았으니 좋을 만도 하지. 한주는 더는 도하를 말릴 생각은 접어 두고 아이를 내려놓을 공간을 찾기 시작했다. 경영관 뒤로 돌아 들어와 주차장 입구 즈음에는 인적도 없고 차도 다니지 않아 괜찮을 듯했다.
“도하야, 뛰면 안 돼.”
“웅!”
대답은 잘하지. 내려놓자마자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아이를 막고 한주는 같이 쪼그려 앉아 바닥의 눈을 만지도록 했다.
“여기도 있잖아.”
벙어리장갑을 낀 손으로 눈을 만지고 포닥포닥 두드리던 아이가 헤헤 웃으며 여기저기 눈을 쓸어 모아 산처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귀찮았는지 손을 털고 당겨 장갑을 쑥 벗어 냈다.
“차가워. 감기 걸린다.”
하지만 한주가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우응… 시른데….”
“아빠가 눈도 만지게 해 주는데, 장갑은 껴야지.”
단호하게 다시 장갑을 끼우자 도하는 한껏 불퉁한 얼굴을 했으나 다시 벗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의미 없이 눈을 만지고 노는 도하를 바라보던 한주가 얼마 안 되는 눈을 모아 꼭꼭 뭉치기 시작했다.
“아빠, 그게 모야?”
“눈사람.”
“눈사….”
“눈사람.”
“눈사람!”
“눈으로 만든 사람이라는 거야.”
“눈… 만둔…?”
한주는 잘 모르겠다는 아이의 손을 끌어다 같이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아직 눈이 많이 오지 않아서 크게 만들 순 없겠지만, 주먹 두 개를 붙여 놓은 정도론 가능할 듯했다.
“토닥토닥해 줘.”
“토닥토닥.”
한주와 선유 둘 다 도하에게 워낙 말을 많이 거는 터라, 아이는 정말로 말을 빨리 배웠다. 뭐라고 얘기해 주면 꼭 따라 해 보는 버릇 때문인 듯도 했다.
한참 자리를 옮겨 가며 아이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던 한주가 인기척에 옆을 돌아보았다. 이미 간 줄 알았던 성현이 아직도 거기 있었다.
“너 안 갔어?”
“와… 너….”
“왜.”
“…아니다. 자각이 없는 건지 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성현을 뒤에 두고, 한주는 도하가 덕지덕지 붙여 놓은 눈 뭉치를 매끈하게 다듬는 작업에 들어갔다. 주먹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의 눈 뭉치 위에 조금 작은 사이즈의 눈 뭉치를 올리고, 주변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쪼개 눈과 입을 만들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앙증맞은 사이즈의 눈사람이었지만, 도하에겐 처음 제 손으로 만들어 본 무엇이었다.
“아빠, 눈사람!”
“응, 눈사람이야.”
한주는 도하가 잘 볼 수 있게끔 눈사람을 손바닥으로 들어 올렸다. 별이 박힌 듯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눈사람과 한주를 번갈아 바라보던 아이가 꽃망울 터지듯 웃었다. 그 사랑스러움을 감당하지 못해 따라 웃으며 한주는 아이의 후드와 모자만 고쳐 씌워 주었다.
찰칵, 핸드폰으로 사진 찍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경악한 얼굴로 성현이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야.”
“대박.”
“김성현.”
눈사람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주는 성현을 손가락질로 불렀다. 도망가려던 성현은 패딩 모자가 붙잡혀 질질 끌려왔다.
“내놔.”
“야, 사진 진짜 잘 나왔어.”
“핸드폰 내놓으라고.”
패딩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자 성현은 어디에 손을 집어넣는 거냐며 비명을 질렀지만, 한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핸드폰을 찾아냈다. 그 와중에 쪼그려 앉은 채 눈사람과 눈을 맞추고 있던 도하가 발랄하게 외쳤다.
“아빠! 눈사람 기여어!”
“응, 귀엽네.”
화가 난 상태에서도 평온하게 도하에게 반응해 주고 한주는 성현에게 빨리 핸드폰 잠금을 풀라고 들이밀었다.
“안 찍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
“근데 왜 도망가.”
“쫓아오니까 도망가지. 야, 근데 진짜 내가 작품 하나 찍었다.”
잠금이 풀린 화면에는 눈사람을 사이에 둔 채 웃고 있는 도하와 한주가 찍혀 있었다. 정말 자랑스럽게 작품 하나 찍었다고 하는 성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모든 게 충만해 보이는 사진이었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 아래에서, 새끼 북극곰 같은 아기에게 눈사람을 만들어 주고 눈 맞춘 채 웃어 주는 제가 이렇게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줄은 몰라서, 한주는 순간 눈가가 시큰했다.
“사진 지웠다.”
성현이 찍은 사진을 제게 전송하고, 한주는 사진을 지운 후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아빠, 추어.”
“추워?”
무릎을 끌어안아 오는 도하를 쑥 들어 안고, 한주는 도하의 팔을 잡고 휙휙 흔들었다.
“아저씨한테 안녕, 해.”
“…안녀엉?”
“응. 아저씨, 안녕.”
“안녀엉-.”
한주가 시키는 대로 성현에게 인사한 도하가 마치 새처럼 웃으며 한주의 목을 끌어안았다. 절로 웃음이 나는 몸짓에 도하에게 답인사를 해 준 성현이 좀 더 다가왔다.
“뒤풀이 못 오면 졸업식 때나 보나?”
“연락할게.”
“그래. 도하야, 잘 가.”
이번엔 한주가 시키지 않아도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이제 놀 만큼 놀았으니 집에 가도 되겠지? 점심과 낮잠 시간이 같이 다가오고 있으니 얼른 돌아가서 먹고 자야 했다.
“아빠, 눈사람!”
“응, 눈사람 만들었지.”
“같이이!”
“응?”
“같이 가!”
뒤에 덩그러니 남겨진 눈사람을 보며 도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팔을 휘저으며 같이 가야 된다고 우기는 도하를 둥개둥개 어르며 한주는 조금 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도하야. 눈사람은 같이 가면 안 돼.”
“왜에!”
“같이 가면 없어져.”
“…업써?”
“응. 눈사람은 여기서 살아야 해.”
끝없이 이어지는 왜라는 질문의 폭풍에 정성껏 대답해 주며 드디어 한주는 차에 탈 수 있었다. 길고 긴 선유의 출장이 이제야 분계선을 지나가고 있었다.
***€졸린냥
선유의 귀국 날, 마중 나오지 말라고 했던 말을 무시하고 한주는 낮잠 자는 도하를 그대로 데리고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그리워서,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서울을 빠져나갈 즈음 뒷좌석 카시트에 앉아 있던 도하가 잠투정을 하며 깨기 시작했고, 혹여 갑자기 바뀐 잠자리에 아이가 놀랄까 싶어 한주는 일부러 조용조용하게 말을 걸었다. 순한 아이답게 도하는 몇 번 고개를 휙휙 돌려보곤 애착담요를 꼭 끌어안으며 다시 카시트에 푹 기대앉았다.
“도하야, 큰 아빠 보러 갈 거야.”
“큰 아빠?”
“응. 오늘 큰 아빠 돌아오는 날이야.”
불편한 카시트에 묶인 채로도 도하는 열심히 손뼉을 쳤다. 그렇게나 좋을까, 저와 단둘이 있던 5일간 보여 주지 않았던 세상에서 제일 기쁜 표정이었다.
선유의 배 속에 있을 때는 한주의 목소리와 손짓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던 도하는, 세상 밖으로 나오자마자 선유에게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낳아 준 사람이라서 더 애착이 가는 건가 생각했으나, 곧 이유를 찾기를 그만두었다. 제가 선유를 좋아하는 만큼 아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이유는 없으니까.
한주는 선유와 도하의 사이를 질투하기보다는 도하와 제가 더 가까워지는 방향을 택했다. 아이가 저를 더 좋아하게 되어서, 선유보다 제게 치대고 의지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길 원한다면 선유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분산될 테니까. 지금까지 그 계책은 꽤 성공을 거두었으나, 여전히 도하는 선유를 제일 좋아하긴 했다.
“도하, 큰 아빠 와서 좋아?”
“조아!”
“아빠 보면 좋아한다고 할까?”
“응!”
선유만 보면 ‘아빠, 좋아해요’를 달고 사는 아이니 시키지 않아도 잘할 테지만. 벌써부터 선유를 만날 게 기대가 되는지 도하는 카시트가 흔들거릴 정도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인천 공항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출국하는 사람, 귀국하는 사람들이 혼재된 공간을 간신히 뚫고 한주는 도하와 함께 선유가 나올 입국장 출구에 서서 기다렸다. 처음엔 아이를 세워 두었으나 갑자기 여기저기 튀어 나가려고 해서, 오늘도 북극곰처럼 챙겨 입힌 아이를 꼭 안은 채로.
“아빠아….”
마치 아빠란 말밖에 못 하던 몇 달 전처럼 도하는 아빠란 말만 옹알이하듯 되풀이했다. 왠지 더 기다리게 했다가는 여기서 울어 버릴 것 같아서 한주는 조금 초조한 눈으로 푸르게 빛나는 도착 알림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출국장 문이 몇 번 열리고 닫히고, 그러다 드디어 애타게 기다리던 선유가 카트를 밀며 나타났다. 울먹거리던 도하가 누구보다 빠르게 선유를 불렀다.
“아빠!”
설마 자기를 부른 게 맞는 건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선유와 한주의 눈이 마주쳤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혹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확 풀어지는 표정에 한주 또한 같이 마주 웃어 버렸다.
“오지 말라니까.”
“보고 싶어서요.”
당연한 명제를 말하듯 그리움을 표하고 한주는 선유의 부모에게도 인사했다. 제게도 부모보다 더 가깝고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피곤하시겠어요.”
“편하게 왔어. 한주도 잘 지냈지? 볼 때마다 잘생겨져서 놀랍네.”
선유의 손목과 팔꿈치를 생각하면 도하를 안겨 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나 보고 싶어 하던 선유의 품에 안긴 도하가 온몸으로 행복해하고, 둘 다 짧은 헤어짐의 시간을 밀어내듯 너무 좋아하는 걸 보니 오래 안고 있지 말라고 얘기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빠, 조아해요!”
“응, 아빠도 도하 좋아해.”
한주와 약속한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고 도하는 괜히 부끄러워했다. 매번 하는 말이면서 매번 그랬다.
“아빠, 사랑해!”
마치 ‘따랑해’처럼 들리는 발음으로 도하는 한주에게도 제 애정을 발산했다. 물오른 사랑스러움에 보들보들한 뺨을 살살 매만져 주자 아이는 선유에게 더 폭 안기며 예쁜 짓만 골라 했다.
선유는 조금 더 묵직해진 것도 같고, 조금 더 따뜻해진 것도 같은 아이를 안고 크게 숨을 한 번 내뱉었다. 아이들이 정말로 많이 보고 싶었다. 오히려 떨어져 있을 때는 잘 느끼지 못했던 그리움이 뒤늦게 밀려들어 괜히 몇 번 마른침을 삼켰다.
한주와 인사를 마친 선유의 부모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친근감을 표하는 도하에게도 인사를 했고, 도하는 ‘할무니, 하라부지, 안냐세여’하고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서로 간에 인사가 끝나고 한주가 카트를 끌며 앞장섰다. 도하를 안고 그 옆에 선 선유가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피곤하겠다.”
“차 가지고 왔죠.”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선유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한주를 챙겼다. 한주는 도하를 사랑하고 아끼지만, 그럼에도 제 애정을 나눠 가져야 한다는 것에 조금은 마음 상해 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차 안 막혔어?”
“애매한 오후 시간대라 괜찮았어요. 비행기 타고 온 형이 피곤하죠.”
“나야 뭐… 도하 혼자 보느라 안 힘들었어? 학교까지 데려가고.”
“그 덕에 도하 완전 저희 학교 스타 됐어요.”
저와 도하를 찍은 사진을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성현의 핸드폰은 사진이 찍히자마자 클라우드로 백업을 하게끔 설정이 되어 있어서 의미가 없는 짓이었다. 동기 단체 메신저 방에 올라간 사진은 단 이틀 만에 학내에 다 퍼져 버렸으니.
뭐, 사진이 워낙 잘 나오기도 했고, 제가 유부남에 애 아빠라는 걸 어떻게 하면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한주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여전히 도하를 낳은 이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으나, 그것 또한 졸업하고 나면 아무 상관없어질 터였다.
“사진 너무 예쁘더라.”
“김성현이 순간 포착엔 재주가 있거든요.”
“엠티 갔을 때도 걔가 다 사진 찍었댔지?”
둘이 소곤소곤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도하가 선유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왜 그러냐는 의미로 내려다보자 배시시 웃으며 또 한 번 ‘아빠, 좋아해요. 사랑해’ 소리를 했다. 안 그래도 퍼붓는 애정을 그대로 돌려주는 아이인데 오늘따라 더 좋아한다고 얘기하고 싶어서 난리였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모친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선유에게 말했다.
“너는 한주한테 사랑한다고 하지?”
“…예?”
“한주는 선유한테 좋아한다고 하고. 정확하게는 ‘좋아해요’이려나?”
“갑자기 그게….”
“도하가 똑같이 하잖아. 너한테는 좋아해요, 하고 한주한테는 사랑해, 하고.”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도하의 입버릇을, 그리고 그게 전부 자기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선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존댓말 개념이 없는 도하가 선유에게 가끔 존댓말 하는 건 한주를 보고 배운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저건 배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꼭 선유에게는 좋아해요, 한주에게는 사랑해, 라고 말하곤 했는데.
“얼마나 많이 얘기하면 애가 똑같이 보고 따라 할까.”
자식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부모의 눈엔 귀엽겠지만, 당하는 자식 입장에선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선유는 애써 제 모친의 장난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 애쓰며 제 품에서 손장난을 치고 있는 도하를 고쳐 안았다.
“…제가 형한테 사랑한다고 안 했어요?”
“…잘 안 하지.”
좋아한다곤 많이 하지만. 갑자기 침울해지는 한주의 안색에 선유가 황급히 덧붙였다.
“나는 좋아한다는 말 좋아해. 네가 하는 건 특히.”
뒤에서 숨죽여 웃는 제 부모를 한 번 흘겨보고, 선유는 말을 이었다.
“네 좋아한다는 사랑한다보다 더….”
더 네 감정이 전달되어서 좋은데. 이렇게 공개된 공간에서 뒷말을 잇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 선유가 말을 웅얼웅얼 씹어 먹자 한주가 얌전해진 도하를 받아 와 안으면서 짧게 웃었다.
“형, 사랑해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좋아한다가 익숙했을 뿐이었다. 그에게 구애할 때 한주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말이었기에.
담담하게 나온 사랑 고백에 선유는 자리에 멈춰 서고야 말았다. 쑥스러운 듯 입술을 깨무는 한주의 뒤통수를 잡아당겨 가볍게 입을 맞추고, 물끄러미 둘을 바라보고 있는 도하의 뺨에도 버드 키스를 남겼다. 선유를 따라 한주도 같이 도하에게 뽀뽀를 했다.
양 뺨에 아빠들의 뽀뽀를 받고 한껏 들뜬 도하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절로 웃음이 나오는 모습에 선유는 한참을 소리 내며 웃었고, 저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동그랗게 뜬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왜 제 아빠가 저렇게 웃는 건지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아이는 그저 따라 웃었다. 웃음만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