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움길 외전2
1. 첫 데이트
“형, 저랑 데이트해요.”
“…응?”
갓 전자레인지에서 꺼내 뜨끈뜨끈한 팝콘을 집어 입 안 가득 밀어 넣던 선유가 갑작스러운 한주의 말에 멍하니 되물었다.
“데이트요.”
선유가 올라앉은 소파 앞에 반쯤 무릎을 꿇은 한주의 뒤로 커다란 황금색 영화 제작사 로고가 떴다. 김이 폴폴 오르는 뜨거운 팝콘 안에 집어넣고 있던 손을 황급히 빼내 허공에 털어 내고 선유는 리모컨을 들어 정지 버튼을 눌렀다.
“제가 데이트하자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어,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까지 왜 생각을 못 했지? 둘이 각인으로 이어진 게 지난 2월, 그리고 지금이 4월 초이니 거의 2달간 ‘데이트’라고 명명된 행위를 할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한 게 선유로선 충격적이었다.
변명을 하자면, 선유는 한주와 생활을 공유하는 게 너무나 익숙했고 –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겨우 일 년도 안 됐으므로 - 같이 외식을 한다든가, 외출해서 쇼핑을 한다든가 하는, 일반적인 데이트가 그들에겐 생활의 일부분이었으니까. 그래서 데이트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선유는 스스로가 조금 무심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무리 익숙하다고 해도 이래선 안 됐는데. 그 ‘생활’에서 특별함을 느꼈던 적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그것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에, 그리고 한주가 조금 서운해했을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언제 할까?”
“형 시간 될 때요.”
“나야 언제든 되지. 사장이잖아.”
워커홀릭이란 단어를 사람으로 빚으면 저럴까 싶을 정도인 선유의 당당한 말에 한주가 피식 웃었다. 저렇게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제 순위가 일에 뒤진다고 생각하지 않게끔 하는 게 그의 능력이긴 했다.
영화는 볼 생각도 없는지 TV를 등지고 앉은 채인 한주의 팔을 끌어다 옆에 앉히고, 선유가 단단한 허벅지 위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님 지금 나갈까?”
“지금은 영화 보구요.”
“이것도 데이트긴 하잖아.”
“제가 열 살 때부터 매주 일요일에 하던 걸 데이트라고 부르는 건 좀 그렇잖아요.”
그것도 그렇네, 한주의 말에 동의하며 선유는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둘의 취미 생활과 한주의 영어 능력 향상을 위해 매주 해외 영화 한 편씩을 봐 왔는데, 그걸 데이트로 에끼는 건 좀 양심이 없긴 했다.
팝콘 그릇을 안은 선유가 계속 불편하게 앉아 있는 걸 본 한주가 그릇을 받아 와 제 다리 위에 얹었다. 곧 포슬포슬한 옥수수튀김을 집어 선유의 입에 넣어 주기 시작했고, 새끼 새처럼 얌전히 받아먹던 선유는 머릿속으로 일정 정리를 끝냈다.
“나 다음 주말부터 출장 가니까 이번 주에 하자.”
“언제요?”
선유는 다음 주 토요일부터 출장이 잡혀 있었다. 페로몬이 안정되자마자 미뤄 뒀던 모든 해외 스케줄이 쏟아지는 터에 한국에 있는 날이 외국에 있는 날보다 더 적을 정도로 바빴으나 한주가 먼저 말을 꺼낸 데이트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목요일쯤?”
“평일인데.”
“휴가 내야지.”
“저랑 데이트하려고 휴가를 내요?”
“응.”
대수롭잖은,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한주의 눈이 가늣해졌다. 피부 위로 스미는 감정에 선유는 살짝 목이 메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한주의 무릎만 매만졌다.
“저 목요일에 오전 수업밖에 없으니까 오후에 해요.”
“응, 그래서 목요일에 하자는 거야.”
한주의 시간표 정도는 항상 머릿속에 박아 둔 터였다. 이젠 살짝 배부른 고양이 같아진 얼굴이 귀여워서 선유는 쓱쓱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선유에게 귀여움 받는 게 좋으면서도 아주 조금 싫은 것도 같은 양가감정에 한주는 조금 갈팡질팡하다 눈을 한 번 내리감는 것으로 갈등을 잠재웠다. 아무리 그래도 좋은 감정이 더 컸다.
생각지도 않았던 데이트 약속을 잡고, 선유는 그제야 영화를 재생했다. 소파 한자리에 몰아 앉아서 툭 어깨를 맞대고 영화를 보는 것 또한 데이트에 무척이나 가깝다는 생각이 일순 들었으나 사실 뭐든 괜찮았다. 일상이라면 둘이 있는 게 익숙하다는 것이라 괜찮았고, 특별하다면 특별한 만큼 좋을 터였다.
어두컴컴한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 선유는 등골로 오르는 소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직 영화 내용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고 한기가 들었다.
“…한주야.”
“예.”
“이거 영화 뭐야?”
“이거….”
“…공포 영화야?”
“음….”
바르르 어깨를 떤 선유가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듯 벌떡 일어나 리모컨을 집어 들려고 했으나 팔 길이와 자리 선정에서 우위를 점한 한주가 유리했다. 리모컨을 집어 쑥 먼 곳으로 밀어 버린 한주가 허리를 잡아 품에 거의 가두듯 안자 선유는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최한주.”
“저 이거 보고 싶어요.”
“그럼 너 혼자 봐.”
“형이 있는데 왜 혼자 봐요. 같이 영화 보는 시간이잖아요.”
“야, 너….”
“같이 봐요, 예?”
선유가 평소 쓰지 않던 ‘야’라는 호칭까지 사용했으나 한주는 개의치 않았다. 힘이 너무 세서 아무리 밀어내도 움직일 여지조차 보이지 않아 축 늘어진 순간, 으스스한 배경 음악이 깔리기 시작했다.
“한주야.”
다급한 선유의 부름에도 한주는 그저 팔에 조금 더 힘을 줄 뿐이었다. 잔뜩 힘이 들어가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에 턱을 대고 훅 귀에 바람을 불어 넣자 마치 탱탱볼처럼 몸이 팍 튀었다.
별로 무서운 게 나오지도 않는데 선유는 귀에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심장병이 올 것 같이 굴었다. 눈을 조금 떠서 화면을 보다가 기겁하며 돌리고 또 보다가 돌리고. 조작된 공포 따위에 관심조차 없는 한주는 영화를 볼 생각도 없이 선유를 안고 있는 것에 오롯이 집중했다.
“형. 손잡아 줄까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유가 다급히 한주의 손등을 막무가내로 쥐었다. 소리 죽여 웃으며 손을 꼭 잡았다가 아예 깍지를 끼우자 벌벌대는 떨림이 전달되었다. 손금 사이로 차가운 땀이 조금이지만 스미는 것도.
지금까지 영화 타이틀을 고르는 건 선유의 몫이었다. 그는 애초에 장르를 가리지 않았고, 처음 시작이 한주의 영어 공부 때문이었기에 다양한 주제의 영화를 보여 주었다. 단 한 가지, 공포 영화를 제외하곤.
지난주에는 로맨스, 지지난주에는 코미디, 그전에는 액션, 또 그전에는 판타지… 열 살 때까지의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공포 영화는 리스트에 올라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한주는 아주 약간의 추론을 통해 선유가 공포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냈다.
“으악!”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무서워서 죽어 버리고 싶다는 쪽에 가까운 듯했지만.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내용이 궁금하긴 한지 가느스름하게 눈을 떴던 선유가 비명 소리를 내며 또 질끈 눈을 감았다. 겹쳐진 가슴팍으로부터 도저히 진정되지 않는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방치된 그릇에서 팝콘을 몇 개 꺼내 선유에게 먹여 줄까 했지만, 그는 손이 닿을 때마다 기겁을 했고 특히 입술에 손가락이 닿자마자 고개를 미친 듯이 저으며 한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형.”
“으으….”
“많이 무서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면에서 귀신이 얼굴을 내밀었다. 뻣뻣하게 굳어진 선유가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대체 왜 보고 있을까? 팔을 뻗어 팝콘만 집어 먹으며 한주는 선유를 관찰하기만 했다. 어차피 이 시간에 영화를 보지 않게 된 건 꽤 오래되었다.
조금 영화에 익숙해졌는지 비명을 질러 대진 않게 되었으나, 기괴한 것들이 화면에 떠오를 때마다 선유는 크게 몸을 움찔대며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그리고 끝내 엔딩 롤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한주가 어둡고 푸르스름한 화면 빛이 반사된 흰 뺨에 손을 대는 순간, 선유는 지금까지 중 제일 큰 비명을 지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았다.
“…한주야.”
“형, 괜찮아요?”
한주는 바닥에 털썩 앉은 채인 선유의 배 위로 팔을 교차해 다시 소파로 끌어 올려 꼭 끌어안았다. 소름이 다 돋은 선유의 팔을 슥슥 문질러 주고 그의 긴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완전히 몸이 겹쳐지자 조금 안도한 것인지 선유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배어 나온 눈가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아니.”
선유의 등은 식은땀이 다 배어서 조금 축축한 감이 들 정도였다. 이젠 한주도 괜찮지 않아질 것만 같았다.
“너… 나한테 뭐 섭섭한 거 있어?”
“…아뇨?”
“근데 왜….”
“그냥… 무서운 영화가 보고 싶었어요.”
원망스러운 눈을 한 채 한주의 품을 빠져나온 선유가 저 멀리 방치된 리모컨을 가져와 신경질적으로 전원 버튼을 눌렀다. 손가락 끝에서 묻어나는 여실한 화의 기색에 한주는 순간 움찔했다.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사람이 싫다는데 그렇게 강요하면 안 되지.”
“…….”
“네가 싫어하는 거, 내가 억지로 하라고 하면 좋겠어?”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던 선유는 아직도 제 손에 떨림이 남은 것을 보고 크게 숨을 뱉었다. 공포 영화는 질색이었다. 아주 어릴 때 지운의 강요로 고전적인 스릴러 영화 하나를 보고 나서 무서운 영화는 어떻게든 피해 다녔을 정도로.
“…죄송해요, 형.”
“죄송할 짓을 왜 해.”
그렇다고 해서 아예 공포 영화 자체가 싫은 건 아니라서, 선유는 자의로는 절대 보지 않을 것을 보게 해 준 한주에게 심하게 화가 나진 않았다. 무섭다고 매달리니까 손도 잡아 주고, 안아 주고, 몸에 돋은 소름까지 문질러 주고, 식은땀까지 닦아 주는 게 사실… 그리 싫지 않았다는 게 본심이었다.
“형, 죄송해요.”
하지만 화난 기색을 보여 버린 이상 쉽게 풀어 버려선 안 됐다. 한주한테 한 시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마치 껌딱지처럼 매달려 있었던 게 부끄럽기도 했고, 그래서 얼굴을 바로 보기도 힘들었다.
“나 저녁 못 먹을 거 같으니까 너 혼자 먹어.”
“형.”
“잘 거야.”
한껏 삐친 척을 한 채 선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덮어썼다. 어제 꺼낸 봄 이불에서 민들레 홀씨 같은 향기가 났다. 얕게 코를 울리며 베개와 이불에 얼굴을 문지르던 선유는 으으, 신음을 뱉으며 몸을 웅크렸다.
다시 생각해도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귀신 무서워하는 거 안 들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짓인지. 제 또래와 같이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어릴 때부터 한주를 맡아 키우면서 선유는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래서 본인의 호불호에 대해 강력하게 표현하거나 드러내는 걸 저어했고, 그걸 보이면 마치 약점이라도 잡힌 것처럼 불쾌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도… 한주한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딱히 화낼 일도 아닌데. 한주는 그저 장난을 조금 치고 싶었을 뿐일 거고. 오히려 이러고 있는 게 더 아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한 선유는 조금만 더 있다가… 그러니까 이틀 정도 있다가 한주를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틀 정도는 좀 뚱해 있어도 될 것 같았다.
한껏 긴장했다 풀린 몸은 불판 위의 버터처럼 녹아내렸다. 눈을 천천히 깜박이던 선유는 곧 푹신한 베개에 뺨을 묻은 채 잠들어 버렸고, 그가 눈을 다시 뜬 건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밖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창밖에서 생활 소음조차도 넘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아까 본 공포 영화가 떠올라서 선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소름이 달렸다. 급작스레 무섬증이 밀려와 벌컥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방에 들어올 때 그 모습 그대로 한주는 소파에 앉은 채였다. 시커멓고 커다란 인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그게 한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선유는 가슴을 다 쓸어내렸다.
“…한주야.”
“…형.”
“왜 그러고 있어?”
“…….”
“저녁도 안 먹었어?”
선유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 소리에 한주의 어깨가 움칠 튀어 올랐다.
“한주야.”
여전히 숙이고 있던 고개를 한주가 천천히 들어 올렸다. 커튼 틈으로 달빛만 조금 새어 들어오는 어두컴컴한 상황에도 한주의 눈가가 어슴푸레 붉은 게 보였다.
한주가 얼마나 제게 맹목적인지 뻔히 알면서, 그의 흔치 않은 장난에 삐쳐 있던 제가 더 부끄러웠다. 각인한 알파가 각인된 오메가에게서 거부당하고 얼마나 상심했을지도 생각했어야 했고.
“울었어?”
“…아녜요.”
아직 화를 풀 생각은 없는데… 이렇게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앉아 있는 한주를 이대로 둘 수도 없었다. 선유는 소심한 복수를 다짐하며 우선은 그를 달래기로 했고, 한주 옆으로 다가가 커다란 손을 잡았다.
“내가 언제 벌서고 있으라고 했어?”
꼭 손을 마주 잡으며 한주가 고개를 저었다. 혼난 적도 벌선 적도 거의 없으니 그런 감각은 크게 없었을 터다. 선유의 시선을 피한 한주가 입을 몇 번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냥….”
“…그냥?”
“형의 다른 모습이 보고 싶었어요.”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잠시 이해하지 못하던 선유는 한주의 말이 몇 시간 전의 제 물음에 대한 답임을 깨달았다. 죄송할 짓을 왜 하냐는. 선유의 손에 깍지를 껴 꽉 잡으며 한주가 말을 이었다.
“형은 항상… 태연하니까, 평생이 가도 형이 저한테 온전히 기대고 의지하진 않을 거잖아요. 제가 아무리 커도 형은 이미 거의 완성되어 있으니까, 심지어 너무 잘나서… 열등감조차도 느낄 수가 없어요.”
“…….”
“…그래서 잠시라도 그런 기분을 느껴 보고 싶었어요.”
“…….”
“죄송해요.”
“…내가 너한테 의지했으면 좋겠어?”
“예.”
틈 하나 없이 떨어지는 대답에 선유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선유를 외면하고 있던 한주가 똑바로 눈을 마주쳐 왔다. 푸른 기가 도는 동공에 반사된 제 인영이 보였다. 조금 어안이 벙벙하고, 또 한편으론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페로몬 문제 있을 때… 많이 의지했잖아.”
“음, 그건….”
“그건?”
“…그건 좀 다른 것 같아요.”
한주는 선유의 손등을 엄지로 문지르며 말을 한참 골랐다.
“그건 제가 구애하는 거였으니까, 좀 달라요.”
그 시간들을 한주는 구애라고 칭했다. 선유가 페로몬에 시달려 스스로를 잃고 매달리던 것을, 그는 기댄 것이 아니라 구애라고.
선유는 새삼스럽게 한주가 사랑스러웠다. 잡히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조심스럽게 끌어당기자 한주는 폭 선유의 어깨에 뺨을 대며 기대 왔다. 커다란 아이가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작은 동물처럼 구는 움직임이 귀여워 팔을 둘러 안고 등을 도닥였다.
“들어가서 자자.”
“…예.”
달램에 일어나서 자기 방으로 향하는 한주의 손을 선유가 덥석 잡아끌었다.
“거기 말고.”
둘은 아직 각방을 쓰는 사이였다. 이렇게 같이 산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리고 그 시간들에 너무 익숙해서, 그 시간을 다 깨부수기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무서워서 혼자 못 자겠어.”
잠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던 한주가 선유의 손을 덥석 잡아당겼다. 거실보다 더 어두운 방에 들어오자 선유는 제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았으나 부끄러움보다 입술의 부딪침이 먼저였다.
잠깐, 하고 말리기도 전에 입술 안쪽을 혀가 핥아 왔다. 신사적이라기엔 조금 난잡하고, 천박하다기엔 너무 정중한 입맞춤. 한참 입술과 그 안쪽을 탐하던 혀가 빠져나가고 모자랐던 숨을 할딱대며 들이마시자 한주가 한 번 더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떼어 냈다. 그리고 그에 대응해 선유도 한주의 이마와 뺨에 버드 키스를 남겼다. 그런 선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주가 한숨을 한 번 폭 쉬더니 익숙한 밤 인사를 했다.
“좋은 꿈 꾸세요.”
“…응, 너도.”
그래, 좋은 꿈 꾸라고 매일 밤 입맞춤을 하자고 했었지. 그때에 비하면 너무나 단계가 올라간 입맞춤이긴 하지만, 어쨌든 귀신 무서워하는 형에게 입맞춤으로 좋은 밤을 빌어 주는 한주는 참으로 변함이 없었다.
***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한주를 따라 시선만 돌리며 선유가 토스트를 씹었다. 한주가 황금 비율로 버터와 잼을 발라 놓은 토스트는 달고 짭짤하고 고소했다.
한주는 옷을 벗었다 다시 입고, 또 가방 내용물을 바닥에 와르르 쏟아서 다른 가방에 옮겨 담고, 양말까지 세 번을 갈아 신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신 거울 앞에 선 한주가 정신없이 머리에 스프레이를 뿌려 자연스러운 듯 만진 듯 안 만진 듯한 머리 모양을 만들어 내고 구두를 신었다.
아침부터 쟤가 왜 저러나 이 난장판을 보고 있던 선유는 졸린 눈을 비비며 핸드폰 화면을 켰다. 오늘은 목요일이었다. 그제야 조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된 선유에게서 숨죽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형, 저 나가 살까 봐요.”
하지만 그 웃음도 잠시, 선유는 한주의 뜬금없는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뭐?”
일말의 감정조차 없이 창백해진 얼굴에 제 말실수를 깨달은 한주가 황급히 뒷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 아녜요. 그… 데이트하려고 준비하는 거 형이 다 보니까….”
“…….”
“서프라이즈도 안 되고… 그래서 그런 거예요. 정말이에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선유와 한주는 정서적 각인을 한 상태였다. 따라서 서로 마음이 멀어지지 않는다면, 그 각인이 스러지지 않는 한, 살 붙이고 살 상대인데 따로 사는 게 말이나 되는가 – 물론 아직 노팅도 하지 않았지만… - .
그래도 선유는 놀라지 않을 순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한주의 그 일방적인 독립이 제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미안해요, 형.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괜찮아. 늦었으니까 얼른 가.”
“형….”
제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이에게 다급히 다가간 한주가 잔뜩 무릎을 굽혀 식탁에 앉은 선유와 눈을 맞췄다. 아주 조금이지만 상처받은 게 여실히 드러난 눈동자가 가슴을 찔러 왔다.
“형.”
“괜찮다니까.”
둘은 암묵적으로 한주가 집을 나갔을 때의 일을 꺼내지 않는 것에 동의했다. 둘 다 좋았던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던 시기였고, 구태여 또 상처를 헤집는 것은 사양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과연 옳은 일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선유는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한주와 아예 제대로 된 연락조차 되지 않았던 그 몇 달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건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다. 씨앗을 땅에 묻듯 토닥토닥 덮어 두고 낫길 기다리는 수밖에는.
커다란 강아지처럼 한주가 선유의 발치에 앉았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두드려 줬으면 좋겠다는 듯이 머리와 뺨을 무릎께에 문지르며 무척이나 순종적으로 굴었다.
“이제 그렇게 안 나갈 거잖아.”
“…예.”
“그럼 됐어.”
선유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잘 보여 주지 않는 지어낸 미소, 그것이 가짜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한주가 목울대를 거칠게 움직였으나 할 말이 없었다. 저 살겠다고 선유에게 칼을 들이민 것은 본인이었으니까.
“…형, 그럼 제가 오후에 회사로 갈까요?”
“응, 그래.”
다정한 쓰다듬음, 절대로 스러지지 않을 그 다정함에 한주는 또다시 기대었다. 죄책감이 선연한 얼굴빛을 가다듬어 준 선유가 깔끔하고 매끈하게 차려입은 한주의 옷매무새를 잡아 주었다.
“잘생겼다.”
차가운 색깔의 피부 아래로 붉은 기운이 발했다. 제 뺨을 토닥이는 선유의 손을 잡아 내리고 한주는 예고도 없이 도둑 키스를 했다. 그리곤 좀 이따 보자고 속삭이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귀엽기는.”
남은 토스트를 해치우고 선유는 한참 식탁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조금 뻐근한 느낌이 드는 가슴을 꾹 눌러 보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한주가 제게 매달리고 저 없으면 죽을 것처럼 굴지만, 그건 사실 선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조금 어른이라는 이유로 티를 덜 내고, 덜 표현할 뿐. 바닥에 조금 남은 커피를 홀짝 다 마시고 일어나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했다. 나가 살아야겠다는 한주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등과 어깨가 다 뻐근했다.
“그럼 잠시 출근했다가….”
한주 학교로 갈까. 냉장고에 붙여 놓은 강의 시간표를 쭉 훑어보며 한주는 못 하는 서프라이즈를 계획했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고 외출용 옷장을 뒤지며 선유는 한참을 그 앞에서 서성거렸다.
…뭘 입지? 아침부터 제 방을 전부 헤집어 놓은 한주가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선유는 이것저것 옷을 꺼내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좀 어리게 입어야 하나, 후드 티에 청바지를 슬쩍 걸쳤다가 다시 그대로 벗어 놓고, 평소 입던 대로 차곡차곡 몸을 꿰어 넣었다. 니트에 슬랙스, 그리고 트렌치코트.
아쉬움이 남은 눈으로 후드 티를 바라보던 선유는 다시 또 꾸역꾸역 옷을 갈아입었다. 서프라이즈 하러 한주 학교에 갈 거니까 좀 애들하고 섞이는 옷을 입어야지, 그리고 평소 안 입는 걸 걸쳐야 한주가 잘 못 알아볼 거고. 혹시 몰라서 커다란 쇼핑백에 옷과 구두를 챙긴 후에야 선유는 차 키를 들고 집을 나섰다.
“너 오늘 휴가 아냐?”
“어, 휴가.”
“어딜 가는데 고등학생처럼 입었어.”
회사에 도착해 사무실로 들어가기도 전에 마주친 지운이 한 소리 했다.
“놀이공원 가려고.”
“누구랑?”
“한주랑.”
“웬 놀이공원이야.”
데이트를 하기로 했을 때 선유는 날도 좋고 봄이라 꽃도 많이 피었을 테니 교외로 나가서 바람이나 좀 쐬고 올까 했다, 공포 영화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하지만 그 일 이후 선유는 소심한 복수를 계획하고 데이트 장소를 놀이공원으로 정했다. 아직 한주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냥 뭐… 날씨도 좋고.”
아직 지운에게 둘의 관계를 말하지 않은 터라 말조심을 해야 했다. 다 커서 웬 놀이공원이냐고 더 타박할 것 같았던 지운은 둘의 사이가 워낙에 막역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별말 없이 넘어갔다.
“1분기 영업 실적 정리한 거 봤어?”
“굳이 나한테 결재 안 올려도 된다니까 그러네.”
“확인 좀 해 주십쇼, 대표님.”
지운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싱긋 웃었다. 안 그래도 결재 몇 개만 확인하고 갈 생각이던 선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하고 있던 직원들이 평소답지 않은 옷차림에 살짝 놀라면서도 눈인사를 해 왔다. 조금 민망함을 참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게 그 인사들을 받아 준 후에야 선유는 안쪽의 제 사무실로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휴가신데 나오셨어요?”
노크 소리와 함께 들어온 임 이사가 두꺼운 종이 뭉치를 커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출장 갈 거 정리도 좀 해야 해서요.”
“안 그래도 정리해 왔습니다.”
“저게 전부 다…?”
“아시겠지만….”
“…미국 애들의 프로세스 사랑 말이죠.”
“예, 법무 검토는 완료했는데, 그것도 아시겠지만….”
“어차피 결정은 우리 보고 하라고 하니까요. 제가 볼게요.”
선유와 지운은 미국 출신이었지만, 회사 자체는 한국 로컬부터 시작했기에 아직 글로벌하게 움직이기엔 둘이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계속 해외 출신을 영입하려 노력해도 IT 분야의 관리자는 많지 않아서 사람 구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인사 관련된 건 제가 처리할까요?”
“예. 인사 팀장님하고 같이 봐 주세요.”
“그리고 영업 법인에서 1분기 실적하고, 3분기 계획 같이 보냈던데요.”
“딱히 저희 쪽에서 입댈 건 없어 보이긴 하는데… 해외 영업 관련해서 코멘트할게요.”
계약서를 펼쳐 들고 빠르게 읽어 내려가면서도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선유를 임 이사는 조금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멀티태스킹에 능하다는 건 이미 알 만큼 알았지만, 그럼에도 볼 때마다 새로운 탓이었다.
“여기, 분쟁 시 조율할 법원 소재를 홍콩이나 싱가포르로 변경하죠. 지난번에도 똑같이 변경 요청했는데… 기억을 못 하나. 변호사 바꿔야겠어요.”
“좀 기계적으로 일하더군요.”
“또 수정 요청 기한과 횟수가 너무 길고 많아요. 수정 요청 기한은 6개월, 횟수는 2회로 줄이는 걸로 협의해 올게요. 또 프로세스 맵에서….”
빨간 펜을 들고 검토된 계약서를 다시 처음부터 뜯어고치기 시작하는 선유의 단호함에 임 이사는 고개만 끄덕였다. 후드 티에 청바지를 입어도 최선유는 최선유다.
“이렇게 최종 협의해 올 테니까 변호사한테 내용 정리해서 미리 보내 놔 주세요. 딱히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알겠습니다.”
“엇, 벌써 열 시가 넘었네. 저 가 볼게요. 문제 있으면 전화 주세요.”
“예, 쉬고 오세요.”
후다닥 해야 할 일을 끝내고 선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지금 출발하면 한주가 공부하는 캠퍼스 구경도 조금 할 수 있을 만한 여유 시간이 나올 듯했다.
한주의 학교는 차로 30여 분 걸리는 거리로, 그리 멀지 않았다. 꽤 긴 언덕길을 올라가자 늦게 핀 흐드러진 벚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울리지 않게 마음이 갑자기 들떠서 애써 가라앉히려 노력해야 할 정도였다.
근데 한주는 데이트랍시고 뭘 하고 싶었던 걸까. 아무 계획도 말해 주지 않아서 제 맘대로 놀이공원에 가자고 혼자 결정하긴 했는데… 먼저 데이트하고 싶다고 얘기한 게 한주니까 그의 의견도 들어 보긴 해야겠다고, 선유는 생각만 했다. 왜냐면 이미 본인은 마음을 다 정한 상태였으니까.
경영대 가까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봄 캠퍼스의 감흥이 훅 밀려들었다. 햇빛은 따뜻하고, 바람은 아주 조금 차갑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얼굴도 다들 밝고. 선유는 캠퍼스의 낭만 따위 느껴 보지 못하고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기 때문에 이런 느낌은 상당히 생소했다.
“…한주랑 같이 학교 다녀도 재밌겠다.”
나잇값 못하는 건가 싶긴 해도, 상상하는 것까지는 뭐라 할 수 없는 법이니. 선유는 한주의 수업이 한창일 경영관 앞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따뜻한 라테 한 잔도 사서 손에 쥐고 있으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도 즐거웠다.
수업이 끝났는지 경영관에서 학생들이 잔뜩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한주의 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아직 30분이 남았으니 다른 강의를 듣는 아이들인 것 같았다. 잠시 그들을 보다가 선유는 한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수업 시간이니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참지를 못했다.
「한주야,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형은요?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응, 나는 놀이공원 가고 싶은데. 그 목적이 불순해서 차마 바로 얘기하지 못하고 선유는 계속해서 한주의 결정을 재촉했다.
「저는 형이 하자고 하면 다 좋은데.」
네가 그런 거 내가 알긴 아는데… 무어라 또 메시지를 보내려던 선유는 다급하게 몰려오는 메시지 몇 통에 숨죽여 웃었다.
「뭘 보러 가는 건 의미가 없어요.」
「어차피 전 형밖에 안 보는데.」
「그러니까 형 하고 싶은 거 해요.」
말을 이렇게 해도 한주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선유의 의견이 있다면 그것을 무조건 먼저 따르겠다는 의지 표명일 뿐.
“귀여워.”
차마 숨기지 못한 마음의 소리를 내뱉고 선유는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몇 명의 남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알파 무리인 데다가… 약간의 수군거림도 같이 들렸다. ‘못 보던 얼굴인데’, ‘경영대가 사람이 몇인데 얼굴을 다 아냐?’, ‘밥 같이 먹자고 할까?’, ‘오메가인데’, ‘어, 그러네’, ‘네가 가서 말 걸어 봐’, ‘그럴까’.
도망가야겠다. 그들은 약간의 오지랖과 호기심으로 저러는 거겠지만, 선유는 굳이 곤란해질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후천적으로 오메가로 발현한 터라 알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아직 남아 있어서 제가 믿을 수 있는 알파 외에는 굳이 얽히고 싶지도 않았고. 페로몬 조절이 안 될 때, 알파의 페로몬에 스스로가 얼마나 변화할 수 있는지를 뼛속 깊이 깨달아 버린 탓이었다.
괜히 그들 때문에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느릿하게 일어나는 선유보다 학생들이 좀 더 빨랐다.
“저기요.”
“…….”
모르는 척 자리를 벗어나려 했으나, 실패였다. 선유는 제 팔을 잡은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며 짧게 한숨 쉬었다.
“경영대생이세요?”
“…아뇨.”
“아, 그럼 복전 하시는 거?”
대답하고 싶지 않아 한 번 더 한숨을 쉬자, 제 말을 거절할 리 없다는 듯한 오만한 태도로 학생이 말을 이었다. 팔을 쥔 손에 힘까지 써서 아플 지경이었다.
“같이 밥 먹어요.”
그러면서 알파 페로몬까지 쓰는 터에 선유는 매우 불쾌한 느낌에 휩싸였다. 각인 후 타 알파의 페로몬을 맡지는 못하게 되었으나, 그 눅진한 감각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더 더러운 기분이었다.
“페로몬 아니면 사람 설득할 줄도 모르나 보죠?”
“뭐?”
“겨우 밥 먹자는 제안조차도 페로몬 없으면 거절당한 경험이라도 있으신지.”
금기나 다름없으나, 대부분의 알파와 오메가들은 페로몬으로 상대의 행동을 강제했다. 성적 욕구를 호감으로 느끼게 해서 원하는 바를 취하는 것이었다. 선유는 오메가로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경험 자체가 적은 데다가, 가까운 알파들이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더더욱 불쾌해서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점심시간 즈음이라 주변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상황, 그 와중에 고작 밥 한 끼 먹자고 페로몬 쓰는 무능력자가 된 남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팔에 멍이 들 정도로 세게 쥐어 오는 터에 선유도 힘을 써서 빼내려고 했으나, 미친놈의 힘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오기가 생긴 남자가 아예 질질 끌고 가려는 찰나, 선유는 손목을 꺾어 남자의 팔을 잡고 그 품으로 파고들면서 엎어치기를 시전 했다. 저보다 머리 하나 큰 덩치들도 엎어 치던 실력이 어디 갈 리가 없었다. 퍼억, 가죽 포대가 바닥으로 패대기쳐지는 소리가 들렸고 추행범은 하늘을 보고 누운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린놈이.”
그 순간 어깨를 누군가 툭 쥐어 왔고, 선유의 손과, 선유가 잡은 남자의 팔을 잡아 툭 떼어냈다. 그 힘이 얼마나 세었는지 남자는 뼈가 부러진 것처럼 비명을 질러 댔다.
“형.”
“…한주야.”
남자의 팔을 던져 버리듯 밀어낸 한주가 선유의 허리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언제 왔어요?”
“얼마 안 됐어.”
“저건 뭐예요?”
“나도 잘 몰라.”
한주가 잔뜩 사나워진 눈으로 남자 무리를 훑어보더니 다시 그대로 선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팔 아파요?”
“…괜찮아.”
“안 괜찮아 보여요.”
사근사근한 목소리와는 달리 흘깃 남자들을 보는 눈은 새파랗게 얼어 있었다. 저 잘난 줄 아는 신입생 알파 무리, 입학하고서 베타 오메가 가리지 않고 추파를 던지고 다녀서 다들 더러워서 피하는 놈들이었다.
“서, 선배님.”
“제 분수 모르고 여기저기 찌르고 다니는 줄은 이전부터 알았지만….”
페로몬 따위 한 줌 흘리지 않아도, 싱긋 웃는 얼굴이어도 한주의 눈빛이 스칠 때마다 그들은 잔뜩 긴장했다. 선유는 그러지 말라는 의미로 한주의 재킷을 툭툭 잡아당겼다.
잠깐 멈칫하는 사이 불붙은 망아지처럼 그들이 도망치는 꼴을 보고 있던 한주가 혀를 찼다.
“형, 팔 보여 줘요.”
“괜찮다니까.”
“얼른.”
절대 고집을 꺾을 것 같지 않아서, 선유는 할 수 없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가락 모양 그대로 빨갛게 부푼 손목이 드러났다.
“…하.”
“너도 똑같이 했잖아.”
“전혀 같지 않아요.”
뚫어져라 쳐다보는 한주의 시선을 선유는 헐렁한 소매를 내려 감추었다. 마뜩잖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드러내는 터에 또 그저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야, 최한주. 왜 갑자기 먼저 그렇게 가는데?”
주위를 빙 두르고 있던 사람들이 천천히 사라지면서 한주의 친구들이 그를 뚫고 나타났다.
“형이 와서.”
“아, 그 쓰레기들이 찌르고 있던 게 너네 형…?”
와, 저 친구라는 놈이 또 불을 지르네. 간신히 달래 놨는데. 선유는 또 사나워지는 한주를 진정시키기 위해 아무 문제 없고, 나 괜찮고, 그놈들 페로몬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놈들이라고 한 것도 나고, 심지어 엎어치기까지 했으니 그냥 넘어가자는 얘기를 또 길게 해야 했다.
그 모양을 빙글빙글 웃으며 보고 있던 한주 친구라는 학생이 선유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김성현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최선유입니다.”
“형도 우리 학교 다니세요?”
“아뇨, 저는….”
“넌 그만 가.”
“아, 왜.”
“형, 가요.”
낯도 안 가리고 친한 척하는 게 신지운을 많이 닮았네. 한주에게 질질 끌려가는 선유에게 김성현은 아무렇지 않게 손까지 흔들어 가며 인사를 했다.
“한주야.”
“…….
“최한주. 차 그쪽에 없어.”
정 없게 부르고 나서야 한주의 발걸음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어디 세웠어요?”
“경영대 뒤쪽.”
그대로 방향을 틀어 경영대 뒤로 돌아 들어간 한주는 선유의 차를 발견하고 손을 내밀었다.
“네가 운전하려고?”
“예.”
주머니를 뒤져 키를 꺼내 주자 한주는 익숙한 태도로 조수석 문을 열어 준 후, 운전석에 앉았다.
“제가 사무실로 간다고 했잖아요.”
“일이 좀 일찍 끝났어.”
“후….”
“왜 그래.”
“…기분이 좀.”
한주는 두 손을 마치 기도하듯 모아 코와 입술을 가리고 한주는 한참 숨을 몰아쉬었다. 선유는 그런 한주의 흐트러진 앞머리만 살살 매만져 주었다. 그 보드라운 달램에 다시 진정한 한주가 흘깃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그 모양에 선유는 빙긋 웃어 주었다.
“팔 다시 보여 주세요.”
“…괜찮다니까.”
지그시 쳐다보는 종용은 이길 수가 없다. 선유는 어쩔 수 없이 팔을 내밀어야만 했다.
“…왜 말렸어요.”
“애들이잖아. 너보고 선배라고 부르는 거 보면 스무 살이라는 건데.”
“…….”
“애기들인데 뭘….”
“저도 애기예요?”
“음… 나이로 보면… 내가 애기 꼬여 낸 도둑놈이지 않을까.”
뜨거워진 손자국 위로 한주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입술의 차가운 감각은 상당히 기묘했다.
한주의 페로몬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아마도 선유는 맡지 못하는 그 알파의 냄새를 덮어 버리기 위함인 것 같았다. 거부감 없이 민트 향 섞인 페로몬을 받아들이며 선유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형 잠시 여기 있어요.”
“어?”
“약 사 올게요.”
말릴 틈도 없이 한주가 차를 빠져나갔다. 급히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선유는 피식 웃었다.
“정말 괜찮은데.”
정말 애들이고, 거절당해 본 경험도 없을 테니 과민 반응 하는 것도 이해가 가고… 하지만 그럼에도 저렇게 예민하게 구는 한주를 강하게 말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제 속마음을 우습게 여기는 사이 돌아온 한주가 멍든 데 바르는 연고라며 선유의 손목을 오랫동안 매만졌다. 어찌나 귀하게 다루는지 등으로 소름이 다 오를 정도로.
***
놀이공원에 가자는 선유의 제안에 한주는 아무 반대 없이 차를 몰았다. 평일 낮이라 조금 한산한 도로를 편안하게 운전하던 한주가 툭 물었다.
“놀이공원 가려고 옷 그렇게 입고 온 거예요?”
“응?”
“형 그렇게 입는 거 거의 처음 봐요.”
“응, 뭐 그렇지.”
“잘 어울려요.”
“…….”
“같이 다니면 친구인 줄 알겠어요.”
그러면서 싱긋 웃는 표정이 얼마나 상쾌한지, 선유는 순간 얼굴을 당겨 입 맞추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뺨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손부채질을 하자, 한주는 조금 의아해했다.
“놀이공원 가는 거 진짜 괜찮아?”
“예.”
“생각해 놓은 게 있을 거 아냐.”
“…있긴 한데, 형이 가고 싶다고 한 거니까.”
“뭔데, 말해 줘.”
“별거 아녜요.”
“얼른.”
톡톡 운전대를 두드리며 말을 삼키던 한주가 계속된 선유의 캐물음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아직 가평 쪽에 벚꽃 축제 하는 곳이 있데요.”
“그래?”
“형 얼마 전에 여의도 벚꽃 축제 한 번도 못 가 봤다고 했잖아요.”
“아… 그랬나?”
“그랬어요. 그래서 벚꽃 축제 갔다가 카페랑 식당이랑 이것저것 찾아 놨으니 거기 가려고 했죠.”
“준비 열심히 했네.”
귀여워하는 기색을 가리지 않고 드러내자 한주의 속에서부터 찬찬히 기분이 풀어지는 게 보였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매우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한주는 아까의 횡액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으니까.
“근데 형은 갑자기 웬 놀이공원이에요?”
“보통… 데이트하면 그런 곳 가잖아. 날씨도 좋고.”
소심한 복수 때문이라곤 말할 수 없지. 선유의 둘러댐에 한주가 조금 미심쩍은 눈을 했다.
“그리고 제가 분명히 사무실로 간다고 했는데.”
“음, 그건… 원래는 너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나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연락은 하고 오지 그랬어요.”
“별일 있겠나 싶었지.”
이번 신입생들의 특징인지, 학교를 연애질하러 다니는지 의심될 정도로 남녀 가리지 않고 죄다 여기저기 수작질 중이었다. 한주는 알파인 데다가 첫인상이 워낙 차가워 보이는 탓에 못 먹는 감 찔러 본다는 식의 소심한 들이댐이 대부분이었으나, 오메가나 베타 여자들에게는 강제성을 띤 추행까지 있어서 학교 내 징계 처리가 진행 중이었다. 그게 아까 선유를 건드린 알파 무리 중 한 명이었다.
“나 없는 곳에서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었어.”
“…….”
“궁금하더라고.”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놀이공원 주차장에 차가 섰다. 한주는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선유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입 맞춰도 되냐고. 그 정중한 질문에 먼저 손을 뻗은 건 선유였고, 입술을 먼저 벌린 것도 그였다.
부드럽고 탄력 있는 한주의 입술이 촉촉하게 뭉개지듯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혀까지 얽진 않고 입술 안쪽 점막만 조심조심 문질렀다.
“한주… 립밤 발라?”
“…바르죠.”
“입술이 달다.”
“캐러멜 맛이라서. 형도 바를래요?”
가방을 뒤적거리는 한주의 손을 막고 선유는 그저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말았다.
“이러면 되지.”
소리까지 내며 웃는 선유를 따라 한주도 웃고 말았다. 그리고 언제 또 선유가 입 맞출지 모르니 립밤을 꺼내 바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평일이라 한산할 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봄의 놀이공원은 꽤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예상보다 많다는 거지 숨 막힐 정도로 바글거리는 건 아니어서 괜찮았다.
“한주야, 이거 써 볼래?”
“…농담이죠?”
“아닌데. 예전에 왔을 때는 썼잖아.”
“열 살 때잖아요.”
동물 귀 모양 머리띠를 가져다 대자 한주는 식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예전에 이런 거 쓰고 찍어 놓은 사진이 이미 있는데, 앨범 깊은 곳에 있을 그 사진을 떠올리며 선유는 머리띠를 다시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뭐 상관없지, 오늘 목표는 따로 있으니까. 선유는 저 멀리 보이는 목조 롤러코스터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공포 영화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부끄러움과 쪽팔림을 되갚아 줄 시간이었다.
“한주야, 그럼 저것부터 타러 갈까?”
간단하게 햄버거로 배를 채우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구경을 하던 한주의 시선이 선유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저거?”
“응, 롤러코스터.”
“음….”
난감한 얼굴로 한주가 빨아들이는 컵에서는 얼음만 남은 소리가 났다. 선유는 한주가 마치 구명줄처럼 잡고 있는 컵을 빼앗아 쟁반 위에 올려 휴지통에 정리해 넣고 얼른 가자고 재촉했다.
“형, 무서운 거 잘 타요?”
“글쎄?”
“전 기억이 잘 안 나요.”
“열 살 때 이후로 처음 오지?”
“예.”
점점 롤러코스터에 가까워질수록 비명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흘깃 위를 올려다보자 거의 90도에 가까운 각도로 떨어져 내리는 기차가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나 저거 탈 수 있을까? 놀이공원 방문이 한주가 열 살 이후 처음인 것처럼 선유도 마찬가지였다. 주말이면 한주를 데리고 항상 밖을 돌아다녔었는데, 왜 놀이공원은 안 갔었지? 그에 대한 의문을 풀기도 전에 이미 둘은 대기 줄에 서 있었다.
머리 위로 엄청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롤러코스터에 선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왜 저렇게 시끄럽고 요란하게 지나가는 거지? 다시 옛날에 놀이공원 왔던 기억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계속 목조 지지대가 부서질 것 같은 소리가 나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형, 괜찮아요?”
“응? 응….”
“못 타겠으면 나갈까요?”
“아냐, 탈 거야.”
자기도 모르게 한주의 팔을 매달리듯 붙잡고, 선유는 기차가 머리 위를 지나갈 때마다 움칠거렸다. 이젠 생각하는 것조차 버거운지 눈만 질끈 감아 댔다.
타기 직전이 되자 선유는 더 긴장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런 선유를 귀엽다는 듯 내려다보던 한주가 직원에게 물었다.
“어느 자리가 제일 무서워요?”
“앞자리가 가장 무서워요. 근데 괜찮으시겠어요?”
덜덜 어깨를 떨고 있는 선유를 보며 직원이 상냥한 목소리로 걱정을 해 주었다.
“예. 타고 싶다고 해서 왔거든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답해 주고 한주는 제대로 앞도 보지 못하는 선유를 끌어다 가장 앞자리 대기 줄로 갔다.
한주는 이런 놀이기구를 잘 탔었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았지만, 멀미도 안 하고 고소 공포증도 없으니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렸을 때는 무서워했었어도 지금은 또 좀 나아졌을 거 같았고.
하지만 선유는… 여전히 제 팔을 붙잡은 채 얼어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한주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선유는 이런 거 무서워하는 게 분명했다.
“형, 안쪽에 타요.”
“응? 응….”
“정말 괜찮은 거죠?”
어깨 레버를 내려 주고 안전벨트까지 매어 주자 그제야 현실감이 드는지 선유는 무언가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경악 어린 얼굴로 울상이 되었다.
“한주야.”
“예, 형.”
“…안 괜찮은 거 같아.”
덜컹, 소리와 함께 기차가 출발했다.
“이미 출발했는데.”
기차가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만큼 선유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고, 입으론 방언을 내뱉듯이 계속 뭔가를 중얼거렸다. 귀를 기울이자 들리는 건 전부 자책이었다. 내가 미쳤지, 벌 받는 거야, 내가 왜 여길, 진짜 미쳤나 봐… 그 소리에 숨죽여 웃던 한주가 손을 내밀었다.
“형, 손잡아 줄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유는 한주의 손이 생명 줄인 것처럼 붙들었고, 손이 아플 정도로 세게 쥐었다. 어쩐지 공포 영화 볼 때와 비슷한 상황의 재연에 한주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거의 정상에 올라 떨어지기 직전 터진 웃음에 선유가 미친놈 보듯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졸린냥
넋을 놓은 채로 늘어져 있던 선유의 뺨에 차가운 플라스틱 컵이 닿았다. 새파란 블루레모네이드가 무척 시원하고 상큼해 보였으나 속이 과연 받아들여 줄지 겁이 났다.
“형, 괜찮아요?”
“…아니.”
“속 많이 안 좋아요?”
“그 정도는 아니고… 좀 쉬면 괜찮을 거 같아.”
하… 크게 숨을 내뱉으며 선유는 제 옆에 앉는 한주에게 기대 늘어졌다. 다 실패였다. 십 년도 더 전의 기억을 가지고, 심지어 제대로 된 기억도 아닌 것을 믿고 짠 소심한 복수는 완전히 실패였다. 열 살이었던 한주는 스물한 살이 되었고, 그때는 어려서 무서워했던 것뿐이며 지금은 저딴 롤러코스터쯤 연속으로 세 번 타도 아무렇지 않을 듯했다.
“…너 저런 거 안 무서워하는구나?”
“그런가 봐요. 너무 오랜만이라 저도 잘 몰랐어요.”
선유는 가슴부터 윗배까지 쓱쓱 문지르며 뒤집어진 속을 가라앉히려 애썼으나 계속 욕지기가 올라왔다. 심지어 점심 먹고 바로 탔더니 더 심한 것 같았다.
“형, 좀 누울래요?”
“…아냐.”
“여기 누워요.”
거의 반강제로 허벅지를 벤 채 벤치에 눕게 된 선유의 위로 한주가 재킷을 벗어 덮어 주었다. 그리고 한껏 부드러운 손길로 가슴 위를 도닥여 주었다.
“잘 못 탈 거 같으면 얘기하지 그랬어요.”
“…나도 잘 몰랐지.”
“예전엔 괜찮았던 거 같은데.”
“그러니까… 그때는 괜찮았거든.”
무서운 것도 없고, 두려운 것도 없었던 때였으니까. 팔을 들어 이마에 얹고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선유는 거북스러운 숨을 내뱉다가 뜬금없이 잘못을 고백했다.
“미안해, 한주야.”
“…뭐가요?”
“놀이공원 오자고 한 거….”
“그게 왜요?”
“…난 너 놀이기구 무서워하는 줄 알았거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내려다보자 선유는 여전히 눈을 가린 채로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뺨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 무언가 부끄러운 듯했다.
“…복수하려고 했는데.”
“복수?”
“…응.”
“아, …설마. 형 공포 영화 보여 준 거 때문에 여기 온 거예요?”
부끄러워서 미칠 지경으로 차마 한주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선유는 끙끙 앓았다. 소심하게 되갚아 주겠다고 당당하게 놀이공원에 온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는데, 한주는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혼자 웩웩거리며 그로기 상태에 이른 게 딱 어디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떨어져 내리기 직전 잡으라고 내민 손을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한주의 엄지와 검지 사이엔 빨갛게 손자국이 났을 정도였다.
“아, 형… 너무 귀여워서….”
한참 웃던 한주가 허리를 잔뜩 굽혀 제 허벅지를 벤 선유의 입술에 꾹 입을 맞췄다. 그러고서도 계속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웃지 마.”
이제 좀 속이 가라앉은 선유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껏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웃지 말라고 몇 번을 반복해 말했지만, 한주는 도저히 자기 힘으론 웃는 걸 참을 수 없다는 듯 어깨까지 들썩였다.
반쯤 얼음이 녹은 레모네이드를 쪽 빨아 마시며, 선유는 한주가 스스로 웃음을 멈추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뭐가 그렇게 웃긴지 멈췄다 또 웃고, 간신히 가라앉았다가 다시 터지는 웃음이 누가 볼까 무서울 정도로 예뻐서, 또 웃지 말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형, 좋아해요.”
툭 튀어나온, 말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다는 듯, 너무 당연한 사랑 고백에 선유는 가만히 웃어 주었다. 네가 좋으면 됐다, 제게 잘 보이기 위해 세팅해 놓은 머리카락을 살살 매만지며 또 한 번 이어지는 고백을 달게 받아 주었다. 사랑스러운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