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움길 외전
도서관 그룹 스터디룸에 몇몇 동기와 모여 작업을 하고 있던 한주는 책상 위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무심한 눈으로 보다 위에 뜨는 이름을 확인하고 벌떡 일어나 스터디룸을 나왔다. 선유의 전화였다.
“형.”
- 응, 수업 끝났어?
“하나 남았어요.”
- 아, 그렇네. 네 시 반 되면 끝나지?
“예.”
- 내가 지금 여의도거든? 경영대학 쪽에 있을 테니까 끝나면 연락할래?
“그럴게요.”
- 응. 이따 봐.
전화를 끊고 한주는 한참 새까매진 핸드폰 화면을 문질렀다. 벌써 몇 달이나 되었는데도 여전히 익숙해지질 않는 선유의 연락이었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선유는 언제나 살갑게 연락을 해 왔고, 제가 받지 않았던 것이긴 하지만.
“최한주.”
“…선배?”
“너 하루 종일 안 보이더니 스터디룸에 있었어?”
“과제 제출이 코앞이라서요. 김 교수님 케이스 스터디요.”
“일부러 숨어 있었던 거 아니고?”
“설마요.”
눈을 흘기는 선배의 억측-이라기엔 한없이 사실에 가까운-을 흘러 넘기고 한주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너한테 꽃 주겠다고 벼르던 애들 아직도 꽃다발 들고 다니더라.”
“저런.”
“…자. 나도 후배들 다 나눠 주고 네 것만 남았어.”
귀 끝을 새빨갛게 붉힌 오메가 선배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듯 장미꽃을 하나 내밀었다. 그저 성년식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라면 받아 주었겠지만, 그의 본의를 숨기기 위해 다른 후배들 것까지 모두 준비했음에도 저의 장미꽃에만 다른 의미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미 지난 3월에 잔뜩 술에 취해 고백하지 않았던가.
“선배. 이미 거절의 말은 다 한 거 같은데요.”
“…그냥 성년식이라서 주는 거라고.”
“죄송하지만, 안 받겠습니다.”
“내가 언제 사귀자고 했어? 아님, 지금 뭐 고백하는 건 줄 알아?”
공기에 점도가 섞이는 것 같은 느낌, 냄새는 맡을 수 없지만, 한주는 지금 제 앞에 있는 이가 페로몬을 고의적이든 비고의적이든 뿌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각인을 하고 나서 남의 페로몬을 맡지 못하게 된 것에 익숙해졌고, 다른 알파, 오메가들이 페로몬으로 타인의 기분을 체크하는 데 반해 저는 사람의 표정과 말, 그리고 행동으로 파악하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페로몬에 영향을 받는 게 짐승같이 느껴지던 한주는 그런 자신이 훨씬 사람답게 느껴져서 만족스러웠다. 강박적으로 페로몬을 숨기는 제 형의 감정을 그 누구보다 잘 읽어낼 수 있으므로.
“선배. 페로몬은 저한테 소용없어요.”
“아, 그래. 너 고자라느니 승려라느니 하는 소문이….”
“저 이미 각인한 상대가 있어서.”
“…결혼했어? 아님, 임신한 상대가 있다고? 애는?”
“꼭 각인이 그쪽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뭐?”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던 그가 천천히 표정을 정돈했다. 한주는 가까이 있는 자판기에 가서 캔커피만 하나 뽑았다.
“그 각인 확률이 얼마나 낮은데.”
“그래도 사실이에요. 지금도 선배 페로몬을 전혀 맡지 못하거든요.”
알파라면 오메가 페로몬에 이렇게까지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상대라고 해도 페로몬을 맡으면 기본적으로 호감을 느끼기 마련이고, 아예 마음에 없는 상대라고 해도 조금이나마 호르몬 항진이 일어나긴 했다. 얼굴이 붉어지거나, 동공이 조금 열리거나, 땀이 조금 나거나. 하지만 한주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정말로 각인한 상대가 있다고?”
“예.”
“뭐, 그래… 알았어. 어쨌든 이건 받아. 진짜 너네 2학년 다 준 거니까.”
한주의 가슴에 꽃을 던지고 돌아선 그가 도서관 복도를 뛰듯 걸어 나갔고, 한주는 땅에 떨어진 장미꽃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은 후 다섯 걸음 앞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안 받아 주는 게 차라리 나을 터였다.
각인한 상대가 있다는 게 얼른 전 학교에 다 퍼졌으면 좋겠다. 한주가 일부러 저 선배에게 각인 얘기를 한 건 이유가 있었다. 과 내의 거의 모든 술자리에 참석하고, 학내에 아는 사람도 워낙 많은지라 아마 일주일 내에 학교 곳곳에 소문이 싹 다 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역시 너 또 고백받고 있더라?”
“고백은 무슨. 담배 피우러 나왔었냐? 냄새는 빼고 들어왔어야지.”
“아, 냄새나?”
“엄청 난다.”
스터디룸에 돌아오자마자 언제 나와서 본 건지 동기가 입을 털었다. 동기, 후배, 선배 막론하고 호시탐탐 저를 노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한주는 초연했다. 오메가 페로몬은 제게 통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외양도 제겐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수업 들어갈 생각 없지?”
“오늘은 패스.”
“대출해 줘?”
“그래 주면 고맙고.”
영어로 쓰인 애널리포트와 리서치 자료 몇 개를 요약하는 것이지만, 품이 안 들어가는 건 아니어서 제출 기한까지는 시간이 빠듯했다. 게다가 오늘은 저녁 시간을 쓸 수 없을 테니 더욱.
“오늘 최한주 찾느라 애들 엄청 바쁘더라.”
“그런데 막상 얘는 여기서 나가질 않잖아. 가끔 전화 오면 나가서 받고.”
“너 애인 있지? 요새 이번 학기부터 술자리에도 안 오고. 저녁마다 애인 만나냐? 우리 학교 애야?”
갑자기 저를 휙 돌아보며 묻는 말에 한주는 그저 한 번 웃고 말았다. 그랬더니 애인이 있음을 확신하고 더더욱 질문이 많아졌다. 이젠 미소조차도 지우고 한주는 그대로 과제 속도를 높였다. 선유가 오기 전에 조교실에 제출하려면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대꾸도 시선도 주지 않는 한주에게 흥미가 떨어지자 다른 주제로 수다를 떨던 동기들이 다시 과제를 시작했을 때, 한주는 리포트를 인쇄까지 마쳐 제출할 준비를 끝냈다.
“저, 이 배신자!”
“쟤 가끔 미친 집중력 발휘할 때 보면 진짜 인간 같지 않다니까.”
“끝내고 가라.”
그들보다 훨씬 큰 키를 자랑하며 한주는 귀엽다는 듯 머리를 두드려 주곤 스터디룸을 나왔다. 앞뒤 양옆을 가리지 않고 쳐다보는 시선들이 꽤 대단했다. 한주는 앞만 보고 걸으며 저를 붙잡으려는 시선과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디서 제가 이런 걸 받지 않는다는 소문을 다 돌았는지, 달려와 꽃과 선물상자를 안긴 이들이 뭐라 얘기하기도 전에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건 또 무슨 짓이야.”
경영대 앞에 도착한 한주에겐 다섯 개의 꽃다발과 쇼핑백 일곱 개가 들려 있었다. 그것들을 버리기 위해 쓰레기통을 찾아 둘러보던 찰나 차에서 내리는 선유가 시야에 들어왔다.
“한주야.”
“…형. 일찍 도착했네요?”
“어, 조금… 너 아직 수업 시간 아냐?”
“오늘 휴강했어요.”
“손에 그건 다 뭐야.”
“아, 이거… 선배들이 준 거예요. 우정의 의미로….”
괜히 말을 흐린 한주가 선유를 잠시 외면했다. 너무 티 나는 거짓말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저 조교실에 리포트 좀 내고 올게요.”
“아, 그거 여기 두고 놓고 가.”
어딘가의 쓰레기통에 버리고 올 생각이었던 한주는 조용히 웃으며 뒷문을 열어 주는 선유의 호의를 거부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그걸 차 뒷좌석에 싣고자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차 뒷좌석을 채운 커다란 꽃다발을 보고 훅 숨을 들이켰다.
“…형.”
“왜.”
“저 꽃다발은 뭐예요.”
“뭐긴. 성년의 날 축하 꽃다발이지.”
“형 거랑 이거 섞이는 거 싫어요.”
“섞일 정도로 비슷하지 않을 텐데?”
선유의 자신 있는 말과 같이 꽃다발의 질적 차이가 컸다. 한주는 제가 받은 선물과 꽃을 대충 좌석 밑에 던져 놓고, 얼른 조교실에 다녀오겠다며 뛰었다.
그런 한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선유는 시선을 슥 한 번 둘러보았다. 동경, 시기,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하는 호기심. 한주는 정말로 인기가 많구나. 거의 학교 내 아이돌 수준인 거 아냐?
저와 있는 걸 보면 혹시 돈 많은 오메가랑 사귀는 알파라고 생각하려나? 여의도 금융 회사와의 미팅 때문에 오늘 선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을 들인 상태였다. 하지만 선유는 한주의 옷차림이나 물건에도 꽤 신경을 많이 썼고, 고급품들로 채워 놓았다. 그리고 한주의 행동엔 언제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어디 돈 많은 집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듯했다. 그럼 역시 형제로 보려나.
“형!”
조교실을 다녀오는 길에 있는 과방이란 트랩까지 잘 통과한 한주가 건물을 뛰쳐나왔다. 선유는 그 건물 2층 창문으로 내다보는 면면들을 바라보며 제게 쇄도해 온 한주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형인가 보구나, 주변에서 안도의 기색이 느껴졌다.
“형, 키스해도 괜찮아요?”
“…지금?”
“예. 괜찮아요?”
“응… 괜찮아. 너는?”
입술을 휘며 웃은 한주가 곧 선유의 뺨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혀까지 섞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으나 인내심을 발휘해 입술을 떼어냈고, 한주는 선유의 뺨에 베이비 키스까지 남기고 나서야 한발 물러났다.
“어서 와요, 형.”
“…이 시선 어쩔 거야.”
선유는 바늘로 찌르는 듯한 적대감을 간신히 흘리며 차에 올랐다. 급히 안전벨트를 매고 학교를 빠져나오자 두근거림이 가라앉았다. 조금 눈치를 보던 한주가 차가 신호등에 걸려 서자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싫었어요?”
“나야 상관없는데… 네가 문제지.”
“전 좋은데요.”
그래 뭐 네가 좋다니 됐다. 선유는 그 키스의 감촉을 떨쳐내고 예약해 놓은 식당을 향해 운전했다. 한주는 잠시 제 케이스 스터디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뒷좌석에 곱게 놓인 꽃다발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 선물 봐도 돼요?”
“응.”
“장미꽃 엄청 커요.”
“예쁘지?”
일주일 전부터 크고 싱싱하고 예쁜 거로 해 달라고 꽃집에 예약까지 한 보람이 있었다. 붉은 꽃잎이 어디 하나 진하게 변한 부분조차 없을 정도로 싱싱하고 상처도 없어서 화려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이건 뭐예요?”
“향수.”
한주가 리본을 풀고 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투명한 액체가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뚜껑을 열고 몇 번 펌프를 누르자 치익, 소리와 함께 허공에 향수가 뿌려졌다.
코끝에 닿는 향수 냄새에 선유가 살짝 문을 열어 환기했다. 그리고 조금 후회했다. 아예 다른 향으로 사줄걸, 하고.
“한주야, 차 안에서는 좀….”
“아, 죄송해요. 향이 좋네요. 무슨 향이에요?”
“…샌들 우드 향이랑 머스크가 베이스일 거야.”
“나무 냄새가 좀 나는 거 같아요.”
“…….”
“좀 익숙한데.”
환기를 했음에도 향수 냄새는 차 안에 은은하게 남았다. 한주는 후각이 예민한 강아지처럼 몇 번 냄새를 들이켰다.
“…네 페로몬이랑 비슷해.”
“저한테서 이런 냄새 나요?”
한껏 기분 좋은 얼굴로 되묻는 걸 보니 제가 맡기에도 향수 냄새가 꽤 좋았던 듯했다. 판매원을 귀찮게 굴면서 이것저것 다 시향한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향수라곤 어머니가 뿌리던 샤넬 제품밖에 몰랐던 터라 꽤 헤맸지만.
“응, 비슷하긴 한데… 그것보단 좀 더 민트에 가까운 거 같기도 하고.”
“민트요?”
“근데 요새 제대로 맡아 본 적이 없잖아. 너 워낙 페로몬 관리 잘 하니까.”
“형도 그렇잖아요. 주기 안정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아예… 어?”
“…왜 그래?”
신호등에 잠시 차가 선 사이 한주가 강아지처럼 코를 울리며 선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높은 코끝이 혈관을 꾹 짓눌렀다가 떨어져 나가고 뜨거운 입술이 자리를 대신했다.
“…한주야, 운전하잖아.”
“형, 히트 온 거 같아요.”
“어? 이틀 정도 남았는데.”
“하루 이틀은 유동적이잖아요. 집에 가요, 형.”
“약 먹으면….”
선유는 항상 약을 상비해 두는 콘솔 박스를 열려 했으나, 한주가 그 위를 눌러 닫았다. 히트라는 말을 듣자 열이 확 오르는 듯했고, 배 안쪽이 달아오르는 감각이 조금 느껴졌다. 지금 약을 먹지 않으면 주사를 써야 하는데.
“한주야.”
“형, 약… 안 먹으면 안 돼요?”
“…….”
“저는 오늘 형이랑 하고 싶은데… 형은 싫어요?”
살짝 말라오는 입술을 축이며 선유는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표지판을 확인했다. 집까지는 약 3km, 예약해둔 식당은 5km가 남은 시점이었다. 그런 건 둘째 치고 선유는 아직 조금… 조금 거부감이 있었다.
“…한주야.”
“저 아직 형한테 동생이에요?”
선유의 각인은 특별했다. 보호자로서, 양육자로서 가지고 있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무한한 애정의 대상을 알파로 인식하면서 각인하게 된 케이스로, 아직 완전히 한주를 동생으로 여기는 마음을 떨쳐내진 못했다.
학내에서 한주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걸 보고도 느끼는 감정도 두 가지였다. 제 손으로 키워 낸 동생이 이렇게까지 인기가 많다니 한주가 잘생기긴 했지, 라는 감탄과 제 알파를 향한 시선에 질투가 일었다. 계속 이렇게 두 감정이 부딪쳐서 한주와 몸을 겹치는 시기를 조금 미루고 싶었다.
지난번 히트는 한주가 학교에 있을 때, 그리고 선유는 회사에 있을 때 터졌고, 그 때문에 약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약으로 가라앉은 선유의 페로몬은 한주의 러트를 이끌어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때는 그렇게 흐지부지하게 넘어갔다.
우선 이 분위기에서 저녁을 밖에서 먹긴 무리라고 생각된 선유가 집으로 핸들을 틀었고, 곧 차는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열이 오르기 시작하여 선유는 넥타이를 살짝 당겨 풀고 숨을 한 번 내뱉었다. 얼른 약을 먹어 버리고 싶은 마음과 조금은 그대로 두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아직 조금은… 그래. 네가 알파이고, 나를 좋아하고, 그리고 나도 너를 좋아하지만….”
“형이 저를 알파로 인식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제 알파인 부분을 보진 못했잖아요.”
그랬다. 발현 전에 한주가 러트에 휩싸였던 적을 본 적은 있었으나, 그 이후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제 히트는 전부 약과 주사제로 처리했고, 한주는 러트를 스스로 해결했으니까.
“저는 형이 저를 동생으로 생각해도 상관없고, 저는 여전히 형이 저를 밀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나갔으면 좋겠어요.”
“…….”
비겁하다. 한주는 제가 그의 체념하는 말에 약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겠지.
“형 히트에 맞춰 제 러트가 올 거예요. 지금까지 제 손만으로도 충분히 기분 좋았을 테지만, 더 좋을 건데….”
“…….”
“시험해 봐요. 중간에 싫다고 하면 저 바로 주사 맞고, 형도 약 먹여줄게요. 옆에 두고 해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은근한 종용. 하지만 명백한 유혹이라 선유는 입천장이 다 말라붙는 느낌을 받았다. 선유의 안전벨트까지 풀어낸 한주의 손이 셔츠 한 장으로 감싸인 허리춤을 살살 매만졌다. 훅 얼굴로 열이 오르고 바지 안에서 성기가 발기하는 느낌이 선연했다.
“형이 대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해요.”
“…한주야.”
“예.”
“나 못 걷겠어. …안고 올라가 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주는 문을 열고 내려 본네트를 돌아 운전석의 선유를 그대로 안아 들었다. 단단한 팔이 선유의 등과 허벅지 아래를 감쌌고, 전혀 무거운 기색 없이 주차장 바닥을 밟아 걸었다.
“안 무거워?”
“전혀요.”
“…예전엔 내가 안고 다녔는데.”
“옛날 얘기잖아요.”
“너무 커서 못 안아 주면 어쩌냐고 했더니 밥도 안 먹었었는데.”
선유는 한주의 목을 끌어안고 기민하게 몸을 떨었다. 폭주하기 시작한 페로몬이 몸속에 넘실거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주기가 안정되긴 했지만, 후기 발현의 경우 일반적인 오메가보다 히트 때 발하는 페로몬의 양이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선유는 매우 빠르게 흥분했고, 그때마다 한주의 페로몬도 같이 치솟았다.
거의 문을 발로 차듯 열며 한주는 다급히 신발을 벗고 선유의 것도 벗긴 후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듯 선유의 몸에서 페로몬이 폭발했고, 한주는 밀려드는 단 과일 냄새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머릿속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형 냄새… 너무 달아요.”
“…달아?”
“침이 다 고이는데.”
선유는 이미 제 페로몬과 한주의 것에 취해 온몸이 녹아내린 지 오래였다. 팔다리를 제대로 들지도 못했으나, 한주는 요령 좋게도 선유의 몸에서 셔츠와 속옷을 제외한 모든 걸 벗겨냈다.
그동안 선유의 손가락이 한주의 단추를 풀기 위해 그의 가슴팍 위에서 움직였으나 겨우 두 개를 풀어냈을 뿐이었다. 아직 러트가 완전히 오지 않은 한주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선유는 침대 위에 팔을 툭 늘어뜨렸다. 그리고 쏟아내는 페로몬을 마시고 싶은 듯 입을 열었다.
“네 것도….”
“제 것도 달아요?”
“네 건 달지는 않고 너무… 머리가 이상해지게 만들어.”
“형 건 저를 미치게 하는데.”
“…미쳐?”
“히트 때가 아니라도 집에 있으면 가끔 이 과일 향기가 나요. 그럴 때마다 미쳐 버릴 거 같아.”
한주는 선유의 셔츠를 대충 당겨 단추를 몇 개 뜯어내고 그 안에 얼굴을 묻었다. 뜨겁고 살짝 땀이 밴 피부가 뺨에 달라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했고, 따끈한 숨이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다. 가슴팍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었던 선유는 한주의 뺨을 감싸고 위로 당겨 올렸다.
“…키스할까?”
교정에서 한주가 입술만 닿는 입맞춤을 해왔을 때부터 혀를 얽고 싶었다. 입을 맞출 때면 그가 알파라는 게 너무나 강렬하게 와 닿았다. 불안정한 히트 때 한주가 페로몬을 덮어씌우며 저를 달래 주었음에도, 그것이 훨씬 성적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키스가 더 성감을 부추겼다.
도톰하게 부푼, 부드러운 입술이 뭉개지고, 곧 온전히 축축해진 입 안이 섞였다. 타액이 마치 설탕물 같아서 선유는 그것을 무척 달게 삼켰다. 입 안이 다 간지러워서 선유는 한주의 뒷머리를 감싸고 혀를 더 내밀었다. 혀의 가장자리가 문질러지고, 오돌토돌 돋은 미뢰가 뇌를 녹였다.
“…너무 달아.”
입가로 흐른 타액까지 핥으며 한주는 그 맛에 감탄했다.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아요, 붉어진 얼굴로 선유를 내려다보던 그에게서 파도처럼 나무 냄새가 흘러나왔다. 순간 숲에 들어온 것 같은 환각이 눈앞에 펼쳐져서 선유는 몸을 떨었다. 배 속에서 삽입을 돕는 액체가 생성되는 게 느껴졌다.
“절 알파로… 느끼고 있어요?”
“응, 응….”
“형, 내일 휴가 낸다고 연락할까요?”
선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주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었다. 다리를 모으고 비비다가 힘없이 무릎 사이를 또 벌렸다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는 손을 한주의 다리 사이에 가져갔다.
선유의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려 하던 한주는 제 속옷 안으로 쑥 들어온 손 때문에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형, 문자….”
“…조금 이따가 보내. 응?”
부드러운 손바닥이 이미 끝이 젖기 시작한 성기를 조심스럽게 만지기 시작했다. 맑은 액체가 나오는 작은 구멍 위를 사랑스럽게 문지르고 단단하게 올라붙은 고환까지도 손안에서 굴렸다. 속옷 위로 톡 튀어나온 귀두 빛깔에 입 안에 침이 다 고였다. 빨고 싶었다.
밀도가 높아진 공기를 들이마시며 선유는 제 남은 셔츠를 벗어 던지고 속옷 밴드에 손가락을 걸어 아래로 끌어내렸다. 스스로 옷을 다 벗어내는 치태를 검은 눈으로 내려다보던 한주는 그대로 선유의 어깨를 내리 누르며 제 몸을 가리던 마지막 천마저 방구석 어딘가로 던져 버렸다.
“우리 한주는… 어깨도 넓고 가슴도 두껍고… 허벅지도….”
그리곤 선유는 자기도 모르게 드러난 한주의 아래를 바라보았다. 맑은 물을 흘리며 꺼떡거리는 성기가 가지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생소한 감상이 들었다.
“한주야… 언제 이렇게 컸어….”
“…형, 진짜!”
“왜, …부끄러워? 먼저 좆 운운할 때는 언제고, 내가 좀 쳐다봤다고 뭐라 그러네.”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한주는 선유의 입 안을 다시 헤집었다. 아무리 거칠어도 선유는 밀어내는 법이 없었다. 그저 한주의 머리와 등을 끌어안고 다정하게 매만져 주었다. 그 안에는 부추김과 진정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천천히 해, 시간 많아.”
선유는 이젠 부어서 통통해진 한주의 입술을 깨물며 그를 달랬다. 아예 완전히 히트와 러트 상태에 이르면 성감은 최대치가 되지만, 정신은 조금 돌아왔다. 이 이후엔 어떻게 될지 미지의 세계였지만.
“…형, 저는 이게 처음이에요.”
“응?”
“히트에 맞춰 러트가 오는 것도… 섹스도요.”
시험해 보자고, 지금까지보다 더 좋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것과는 달리 한주의 눈에 아주 조금 겁이 들어서는 게 보였다.
“형을 아프게 할지도… 몰라요.”
“…안 아플 거야.”
“…형.”
선유는 한주를 꽉 안고 부풀어 오른 그의 등 근육 위를 쓸어 주었다. 따끈하게 달아오른 몸에 또 페로몬이 넘실댔다. 미쳐 버릴 지경일 텐데, 한주는 어떻게든 참고 있었다. 하지만 선유는 이제 더는 못 참을 것 같았고, 아마도 한주가 저를 아프게 할 일은 없을 듯했다. 그리고 좀 아파도… 상관없기도 했고.
“한주야. 난 괜찮을 거야.”
한주의 눈앞에 손등까지 젖은 선유의 손이 들이밀어 졌다. 그리고 선유는 한 번 더 제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두 개 쑥 밀어 넣었다 빼냈다. 아직 채 풀리지 않아 약한 통증이 있긴 했지만, 미끈미끈한 체액은 손가락을 끝까지 쉽게 받아들이게 했다.
“…형.”
“안에서 계속… 나오니까… 아, 으흣….”
한 번 자극을 알아 버린 내벽이 탐욕적으로 손가락을 삼켰다. 자기도 모르게 안을 누르던 선유는 짙어진 한주의 시선을 자각하고 천천히 손을 멈췄다. 그는 푹 젖은 다리 사이와 그 안에 박힌 선유의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만져질 듯한 소유욕에 선유는 움칠하며 손가락을 빼냈고, 조금 열린 구멍은 또 한 번 체액을 뱉어냈다.
“형, 저 형 손가락에 질투하면… 미친 거겠죠?”
선유의 입가와 뺨에 연거푸 입을 맞추며 한주는 뜨겁고 촉촉해진 선유의 몸을 매만졌다. 보드랍고 탄력 있는 피부 아래의 근육이 손바닥으로 누를 때마다 예민하게 떨렸다.
페로몬이 뒤섞이는 게 느껴졌다. 이것보다 더 달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선유의 체액은 더 달아졌다. 오감이 마비되었다가 다시 풀리길 반복하면서 눈이 멀고, 귀가 먹는 것 같았다.
“한주야, 여기… 여기 만져 줘….”
선유는 근육이 잘게 잡힌 가슴을 내밀었다. 그의 목덜미에 집착하듯 흔적을 남기고 있던 한주는 그대로 입술을 미끄러뜨려 톡 솟은 유두를 빨아들였다. 아직 씹고 빨기엔 작아서 아쉬웠지만, 유두 주변의 부드러운 피부를 같이 물자 선유는 더 해 달라는 듯 또 가슴을 내밀었다.
귀여워, 한주는 그 감상을 간신히 삼켰다. 선유는 푹 꺼지는 베개에 뒷머리를 마구 문지르고 손은 등을 감쌌다가 시트를 쥐었다가 난리였다.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에 좀 더 고조된 한주는 유두가 새빨갛게 될 때까지 빨아댄 다음에야 입을 떼어냈다.
“흐, 응… 아, 너무….”
땀이 고인 등골을 만지고 아랫배까지 입술이 내려왔을 때, 선유는 한주의 어깨를 밀어 눕히고 그의 배 위에 털썩 앉았다.
“…형?”
“…처음이라며.”
“처음인데요?”
“근데 어떻게 그렇게… 잘해?”
“어….”
“그때도… 나 갑자기 히트 왔을 때 만져 줬을 때도 그렇고….”
선유의 손바닥이 단단한 어깨와 가슴팍을 짚었다. 간질이는 듯 부드러운 손길이었으나, 그렇다고 소극적이진 않았다. 한주의 성기가 제 등을 두드리는 걸 느낀 선유가 뒤를 한 번 돌아보고 손을 뻗어 그것을 쥐었다.
“하… 형, 그렇게 만지면….”
“…금방 나와?”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미소에 한주는 잠시 말을 잃었다. 선유의 손은 섬세하게 성기를 문질렀고, 귀두 아랫부분을 눌러가며 쓸어 줄 때마다 한주가 허리를 움직이지 못해 안달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 부분을 더욱 세게, 그리고 자극적으로 매만졌다.
“흐읏, 아, 형… 너무, 좋, 좋아서….”
연신 좋다는 말을 내뱉는 입술이 물을 먹은 듯 부풀어 있었다. 선유는 그 입술을 쓸고 매만지다 새빨갛게 붉어진 입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도톰하고 축축한 혀가 손가락 사이를 쓸고 빨았다. 입천장을 문질러주자 한주의 눈이 일그러지기까지 했다.
성기를 만지는 손은 이미 프리컴과 체액으로 다 젖었고, 손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맥동과 커지는 부피감은 한주가 쏟아낼 시점이 멀지 않음을 알게 해 주었다. 제 허리와 허벅지를 쥔 손에 꽉 힘이 들어가는 것만 봐도.
“아, 흐, 형….”
“한주 너무….”
한주의 입 안에서 손가락을 빼내고 딱딱하게 돌덩이처럼 부푼 가슴팍을 짚은 선유가 빠르게 성기를 문질렀다. 끊어지는 듯한 신음 소리와 함께 점도 있는 액체가 선유의 손과 허리, 둔부까지 다 적셨고, 얼마간은 견갑골과 머리카락까지 묻을 정도로 튀어 올랐다.
선유는 한주가 사정하는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항상 창백한 느낌의 흰 피부를 연한 붉은 빛으로 물들인 채 제 아래에 누워 있는 한주는 묘한 정복감과 가슴 깊은 곳에서 애정을 피어오르게 했다.
“응… 처음이긴 한 거 같네….”
“형, 정말….”
그대로 넣어도 되지 않을까? 살짝 부피가 줄었음에도 여전히 손안에 꽉 차는 성기를 돌아보며 잠시 선유가 고민하는 사이, 다시 자세가 전복되었다.
“후… 머릿속으로 제가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나 했는지 알아요?”
“그랬어?”
“형, 지금 저 귀여워하고 있죠?”
“…귀여운 걸 어떡해.”
토라져 시선을 피하고 있는 한주의 뺨을 감싸며 선유는 그 눈가와 뺨에 입을 맞췄다. 사정의 여운으로 크게 부풀어 있는 흉통을 안고 가슴을 맞닿게 하자 다시 한주의 시선이 돌아왔다.
“…형, 좋아해요.”
“응.”
“좋아서 미칠 거 같아….”
선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좋아한다는 말을 숨 쉴 때마다 내뱉으며 한참 숨을 고르던 한주가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붉게 변한 가슴 위를 손끝으로 긁고 누르며 일부러인 듯 선유의 다리 사이는 무시했다.
“한주야….”
“…….”
“…아래도 만져 줘, 응?”
“…나중에요.”
“그럼 내가 만지게… 만지게 해 달라니까.”
한주는 만져 주지도 않으면서 선유가 스스로 만지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한주의 위에 올라타 있을 때 그의 배가 다 젖도록 체액을 뱉어낸 구멍은 부드럽게 풀려 선유가 움직일 때마다 입을 벌렸고, 올라붙은 성기는 제 아랫배를 적시고 있었다.
“형, 여기저기서 다 물이 흘러요.”
“으응, 아냐, 안… 그래.”
“…이렇게 손이 다 젖는데요?”
타액으로 젖은 입가를 한 번 쓸고, 한주는 드디어 선유의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이제야 만져 주려나 싶었지만, 한주는 단호하게도 구멍에 한 번 손을 넣었다가 성기를 슥슥 쓸어 주고 또 손을 떼었다. 그리곤 번들하게 젖은 손을 선유에게 보여 주고 핥았다.
“그걸 왜… 먹어….”
“…형 체액이 얼마나 단지 알아요?”
페로몬이 섞인 체액은 머리를 돌아 버리게 했다. 한주는 치켜 올라간 눈매로 선유의 아래를 쳐다보다 그대로 입을 가져다 댔다. 먹지 않고선 참을 수가 없는 맛이었다.
한주는 선유의 허벅지를 어깨 위에 올리고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목구멍까지 성기를 밀어 넣고 빨면 땀이 배어 나온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종아리와 발꿈치가 등을 가끔 찼지만,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아, 한주, 한주야, 으응, 하, 어, 어떻게….”
머릿속으로 수백, 수천 번 생각했던 것과 실제 선유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었다. 피상적으로 그림을 보는 것 같았던 때에도 흥분을 참을 수가 없었는데 오감으로 다 그를 느낄 수 있는 지금은 어떻겠는가.
쾌락을 이기지 못해 견딜 수 없어 토해내는 소리와 온 공간을 채운 향내, 혀가 녹을 정도로 단맛, 손바닥에 달라붙는 피부 감촉, 시선을 들어 올리면 발갛게 변한 자그만 얼굴이 있었다. 사랑스러워서 아플 정도로.
쏟아내기 일보 직전인 성기를 입에서 빼내고 한주는 페로몬 냄새가 가장 강하게 나는 곳으로 입술을 옮겼다. 시트가 푹 젖을 정도로 체액이 흘러나오고 있는 구멍은 여전히 다 열리지 않은 채였으나, 혀가 닿는 순간 부드럽게 늘어나며 그 안으로 혀를 밀어 넣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 으, 안 돼, 거기, 하으, 안 돼, 응? 안 된다니까.”
선유는 한주의 머리카락을 쥐었지만 밀어내지 못했다. 내벽을 누르는 혀의 감촉, 그리고 곧고 높은 코가 회음부를 누르는 감각은 온몸을 녹아내리게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잡아 쥐는 것뿐, 그 외에는 한주가 저를 다루는 대로 두었다.
“…방수시트를 사야겠어요.”
“흐, 응….”
“원래 이렇게 많이 나와요?”
“나도, 몰라… 아, 한주야, 이제, 으, 넣어, 응, 흐,”
선유는 시트 위를 더듬다 제 아랫배를 감싸 누르고 있는 한주의 손을 잡아 쥐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들어 올려 깍지를 끼워 당겼다.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아예 구멍이 녹아 버릴 정도로 빨아 주려 했던 한주는 선유의 재촉에 입술을 떼고 상체를 일으켰다. 선유는 한주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며 다시 입을 맞추었다.
“…달죠?”
“응… 아니, 달진 않은데….”
“저는… 달아서 미칠 거 같아요.”
한주는 선유의 귀에 속삭이고 콘돔 포장을 찢어 꺼냈다. 하지만 콘돔을 처음 만져 보는 한주는 헛손질만 하고 잘 씌우지 못했고, 콘돔은 선유의 손에 들어갔다. 선유는 잠시 그것을 쥐고 생각에 잠긴 듯했으나, 완전히 힘을 받은 성기에 얇은 고무를 한 번에 끼우고 거대하게 부푼 것을 몇 번 쓸어 주었다.
“형.”
“응?”
“질투하는 게 아무 소용없는 거 아는데요….”
회음부와 구멍 위를 찌르는 성기는 뜨거웠고, 선유는 한주를 달래듯 어깨와 등을 두드리고 가만히 매만져 주었다.
“형이 그 알파와 잤을 거라는 생각만 해도 돌아 버릴 거 같아요.”
“…알파?”
“그 이상한… 냄새나던 알파요.”
“…….”
“그 이후로 형이 집에 늦게 들어온다고 연락만 와도 미쳐 버릴 뻔했어요.”
“어… 한주야.”
“제가 그럴 자격 없다는 거 알면서도 질투가 나서….”
“한주야.”
“좋아해요, 형.”
선유는 쿡쿡 아래를 찌르는 성기를 잡아 제 위치에 가져다 대고 한주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당겼다. 정말 괜찮은 건가, 한주와 이걸 해도 괜찮은 건지 잠시 망설이게 한 고민은 질투를 운운하는 그의 말에 휘발되어 버렸다.
“…한주야. 나 너 데려오고 나서… 아무하고도 한 적 없어.”
“예?”
“그 알파…하고도 아무 일 없었고… 그 이후론 그렇게 사람 만난 적도 없어.”
“형, 저는….”
“한주야. 나는 너… 좋아해.”
한 번 더 다짐하듯이 말했다. 그러면 한주는 더 많이 좋아한다고 얘기해 줄 것이었다.
“사랑하고, 좋아해.”
“저도, 저도 좋아해요. 사랑해요, 형.”
다급하게 저를 안으며 좋아한다고, 질투가 난다고, 애타게 사랑을 고백하는 한주는 사랑스러웠다. 그가 거대한 덩치로 제 위에 있다는 것도 절절 끓는 알파 페로몬을 뿜고 있다는 것도 영향이 있긴 했지만, 제가 가르친 대로 솔직하게 고백하는 모습은 더더욱 사랑스러웠다.
무게추가 탁, 하고 한쪽으로 넘어갔다. 알파인 한주가 더 크게 느껴지고, 동생으로 느끼는 감정이 옅어졌다. 이게 페로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유는 한주와의 관계가 더 나아가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아, 으….”
거대하다 칭할 수 있을 만한 성기가 안으로 파고드는 건 예상보단 더한 통증을 자아냈다. 하지만 온몸을 감쌀 듯 쏟아지는 페로몬이 곧 근육을 말랑하게 만들었고, 한주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끔 도왔다.
“형, 아, 너무 좋아요….”
같이 좋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선유는 제대로 된 단어를 구사할 만한 정신조차 없었다. 한주의 성기가 완전히 안으로 들어오고 그의 체모가 연하디연한 구멍에 문질러졌을 때 눈앞에 불길이 일었다. 진하게 가라앉은, 습기 어린 한주의 숨이 귀를 간질이고, 땀에 젖은 손바닥이 몸을 매만질 때마다 선유는 몸을 떨었다.
더 깊이, 더 안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내장을 헤치고 들어온 것이 자궁구를 누르고 짓이기는 게 느껴졌다. 제 내벽이 한주의 성기 모양대로 움직이고 선유는 한주의 등을 안은 채 어서, 어서 움직여 달라고 허리에 감은 다리를 꽉 조였다.
“한주야, 아, 읏, 하, 한주야….”
“형, 혀 내밀어, 봐요, 응? 좀 더 빨게, 혀….”
한주의 요청에 선유는 야한 빛깔의 혀를 내밀었다. 그것을 당겨 물고 가장자리를 쓸고 앞니로 씹으며 한주는 허리를 아래로 찧듯 내렸다. 침대가 들썩거리는 기세에 선유는 한 팔로는 한주의 등을 끌어안고 남은 손으로 땀이 배어 나온 목덜미를 감쌌다. 짧게 자른 뒷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젖어서 더 진해진 머리카락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당기자 입술이 붙었다.
정말 맛있다는 듯 한주가 제 타액을 다 쓸어갔다. 거친 허리 아래 움직임에도 입술은 그대로 맞붙은 채였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고, 그게 다 제 아래에서 나온 물 때문임을 깨달은 선유가 손바닥으로 한주의 귀를 꽉 눌렀다.
“…왜 그래요.”
“소리, 가, 너무….”
약간 울 것 같이 말하자 한주가 가볍게 제 귀를 막은 선유의 손을 떼어내고 아래로 꽉 짓눌렀다. 그리고 지금까지 꽉 맞붙이고 있던 상체를 일으키고 이번엔 각도를 달리해 찔러 올리기 시작했다.
“한주, 아, 안 돼, 너무, 으흐, 미쳐, 나, 너무….”
한주는 줄줄 물을 흘리는 선유의 성기와 그보다 더한 구멍을 내려다보며 정말 배 속을 찢어내고 싶은 것처럼 안으로 밀어 처넣었다. 브레이크가 사라져 버린 듯한 그를 달래려 손을 뻗다 툭 떨어뜨리길 서너 번, 한주는 선유의 팔을 잡아 제 어깨에 걸쳐 주고 등을 감싸 안아 일으켰다.
“…깊어.”
“어디까지… 들어간 거 같아요?”
“여기쯤…?”
깊게 팬 배꼽 바로 아래를 누르며 선유가 대답했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고개를 갸웃했다. 더 들어온 거 같기도 했다. 배꼽 위까지.
“…여기정도?”
한주가 위로 툭 몸을 쳐올렸다. 선유는 놀라 딸꾹질 비슷한 소리를 냈고, 그 모습이 귀엽다며 한주는 선유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반쯤 넋이 나간 선유의 고개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형… 아기집 열렸어요….”
“응, 응….”
“느껴져요? 거기까지 들어가 있는 거?”
끈질기게 안으로 쳐댄 결과, 그리고 히트와 러트의 페로몬에 선유의 자궁구는 열려 한주의 귀두 끝을 꼭 죄어 눌렀다.
“…너무 좋아.”
“좋아요?”
“응, 안에 있는 거… 너무, 읏, 흐….”
선유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움찔거리다 무릎으로 침대를 누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내리길 반복했다. 젖은 진갈색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려 이마에 들러붙었다가 떨어지는 것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한주가 선유의 유두를 누르며 목덜미에 남은 순흔을 좀 더 진하게 만들었다.
가끔 아랫배를 만지며 선유는 신기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 커다란 게 다 제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한주를 내려다보며 설핏 웃었다.
전부 선유의 페로몬으로 젖는 게 느껴졌다. 한주는 제 고환을 따라 흐르는 체액을 문질러 닦고 얇게 펴진 구멍을 따라 손끝을 굴렸다. 어깨까지 움츠리며 떠는 선유의 배가 홀쭉해졌다가 다시 돌아오길 반복했다.
“형… 안이 조여요.”
“응….”
“엄청 떨리고, 따뜻해.”
다시 침대에 그대로 눕게 된 선유가 팔을 뻗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목을 내어 주고 한주는 침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안으로 치받기 시작했다.
선유는 공기 중을 채운 향기에 숨이 다 막히는 기분이었다. 입을 벌리고 크게 공기를 들이마셔야만 폐가 부풀어 올랐다. 가슴을 내미는 듯한 모습에 한주는 예민하게 달아오른 유두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가 놓고 선유의 입술을 물었다.
혀를 얽기보단 입을 맞추는 행위, 아랫입술을 비비고 입가와 뺨에 키스하자 선유는 잘게 경련하며 다리와 팔을 오므렸다. 한주는 허공에서 오므라드는 발가락을 끌어다 끝 마디를 깨물었다. 열 개 전부 다 빨아 주고 싶었으나 하지 말라는 듯 툭툭 발을 차서 놓아주었다.
뚝뚝 끊기는 신음 소리 끝에 가슴까지 튀어 오른 정액을 훑어낸 손가락을 한주가 입에 넣었다. 그리고 안으로 성기를 찔러 넣을 때마다 주르륵 또 물을 흘리는 귀두 구멍에 손가락을 살짝 넣고 빙글빙글 돌렸다.
“하지, 마, 한주야, 아읏, 안 돼, 아, 으으….”
선유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을 떨기만 했다. 손발,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방금 사정해서 극한까지 예민해진 성기는 건드릴 때마다 기민하게 반응했고, 체액을 조금씩 뱉었다. 한주는 조금 상체를 숙이며, 선유가 울기 직전까지 갔던 부분을 짓누르기 위해 허리를 움직였다.
“이상, 아, 이거 안, 안 돼, 안 된다고 내가….”
“…하아, 참지 마요, 형.”
양손으로 얼굴을 다 가리고 선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집요하게 성기 구멍을 헤집던 손가락을 타고 맑은 물이 튀었다.
“어떻, 어떡해, 한주, 나, 이상, 머리 이상해, 으, 응….”
한주는 선유의 성기를 쥐고 짜내듯 문질렀다. 배는 물론 가슴까지 체액으로 다 적신 채 바들바들 떠는 선유가 예뻐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 어떤 것보다 더 달콤한 향이 나는 액체를 주욱 핥아 내며 한주는 선유의 구멍이 더 벌어질 수 없을 만큼 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궁구가 귀두를 누르고, 구멍이 밑동을 죄었다.
콘돔… 하지 말 걸 그랬나, 잠시 후회하다 한주는 고개를 저었다. 선유에게 사후피임약을 먹게 할 생각도 없었고, 임신은… 조금 더 생각해 볼 문제였다. 잠깐의 고민은 선유의 안에서, 사정하는 순간 증발했다.
한주는 선유를 다급히 안으며 진저리를 쳤다. 사정을 처음 하는 것만 같았다. 이 쾌감과 희락은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단 숨을 뱉어내고 선유의 귀와 목덜미를 깨물어대던 한주는 제 성기의 밑동이 엄청난 기세로 부풀어 오름을 느끼고 한껏 당황했다. 그의 상상 속에서도 노팅은 미지의 영역이었던 탓이었다.
“한주야, 이거….”
“…어쩌죠, 형?”
“내 뒤로 와. 뒤에서 안아 줘.”
떨리는 손으로 한주의 팔을 만지며 선유는 작게 속삭였다. 마주 본 채 최대로 커지면 아예 움직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알파의 노팅은 보통 이십 분 정도 지속되니 차라리 뒤에서 넣고 있는 게 나을 터였다.
한주는 바로 선유 위에서 내려가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여운에 휩싸여 간헐적으로 떨리는 어깨를 품 안에 넣자 퍼즐이 꼭 들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아, 아파….”
“형, 미안해요.”
통증에 힘이 들어가는 선유의 몸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한주가 몇 번이나 반복해 사과했다. 자기가 봐도 너무 커져서 버거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노팅이야?”
“그런 거 같아요.”
“너무 커져서… 좀 무서워.”
선유는 팔을 휘젓다 한주와 제가 이어진 부분을 한 번 만져 보고 깜짝 놀라며 손을 떼어냈다. 제 구멍이 너무 늘어나서, 한주의 것이 손에 반도 채 쥐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아직도… 사정하고 있어?”
“…예.”
“응… 안에서 움직여.”
제 마음대로 몸이 안정되지 않는지 선유는 한주의 성기가 움찔할 때마다 어깨를 움츠렸다. 팔에 사르르 소름이 돋는 것 보고 한주는 온몸으로 선유를 감싸 안았다.
“…조금 허전해.”
“허전해요?”
“응….”
“제가 이렇게 틀어막고 있는데?”
“으읏… 움직이지 마….”
한주가 몸을 조금 뒤틀자 내장이 다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선유는 한주의 용적을 상상하며 제 아랫배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너 사정하는 거… 전부 콘돔 안에 쌓일 거 아냐.”
“…그게 허전해요?”
“응, 조금….”
다정하게 선유의 배를 문지르던 한주가 귓불을 살살 깨물다 물었다. 목소리가 꿀처럼 달아서 선유는 귓속이 다 간지러웠다.
“아직도… 동생이에요?”
“…응?”
“저 아직도 형한테 동생이에요? 아니면… 알파로 느껴져요?”
“…둘 다 하면 안 돼? 동생하고 알파.”
둘 다 백 퍼센트로. 50대 50도 아니고, 49대 51도 아니고, 둘 다 100인 걸로. 선유는 한주의 손등 위를 달래듯 토닥였다.
“근데 형, 저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뭔데?”
마주 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선유는 겹치고 있던 손으로 깍지를 끼고 한주의 손등을 쥐었다.
“형 히트 올 때 주사제 안 맞으려고 하면서, 그때 임신 얘기했던 거 기억해요?”
“어? 어… 기억이야 하지.”
“…임신하고 싶어요?”
사실 선유는 오늘도 콘돔을 끼지 않았으면 했다. 오메가의 히트, 알파의 러트 때 내부 사정이면 임신 확률은 매우 높았고, 그는 아이를 원했으니까. 하지만 먼저 콘돔을 꺼내는 한주를 보니 하지 말자고 할 수가 없었다.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고, 너무 급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너는? 너는 아기 있으면 좋겠어?”
“…….”
“나는… 아이 가지고 싶긴 해.”
선유는 오메가를 부러워했었다. 저는 남자를 좋아했고, 남자에게 박히는 것도 좋아했다. 그래서 저와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결실을 가질 수 있는 그들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너는 아직 어리고… 아이 때문에 발 묶이는 거 싫을 거 같아서….”
“그럴 리가 없잖아요.”
“혹시나 각인이 풀리거나….”
“형, 그렇게 얘기하면 제가 뭐가 돼요. 제 마음을 무시하는 거잖아요.”
“…그렇네. 미안.”
선유는 제가 한주의 마음을 무시했다는 것을 깨닫고 빠르게 사과했다. 벌써 몇 년을 유지해 온, 노팅 없이 각인까지 한 마음이었다. 그건 쉽게 볼만한 것은 절대 아님을 선유는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근데 전 형이 임신하는 건… 좀 그래요.”
“어?”
“임신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은 예상하지 못해서, 설마 한주가 임신하는 게 싫다고 할 줄은 몰라서 선유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일까, 고민하는 의미도 없었다. 사실 임신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많았지만, 해야 할 이유는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아기는 있었으면 좋겠는데. 선유는 노팅이 풀리며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 페로몬에 정신을 반쯤 놓으면서도 생각했다. 한주 닮은 아기가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
선유는 지운에게 저와 한주의 관계를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굳이 숨긴 건 아니었지만 드러낼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히트를 같이 보내고 침대까지 같이 쓰게 되었으니 숨기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한주와의 관계는 장기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가까운 이들한테는 알려 두는 게 좋을 듯도 했다. 물론 그로 인해 제가 경멸 어린 시선을 받을지도 몰랐지만, 선유는 체면에 그리 신경 쓰는 편이 아니었다.
월중 정기 회의를 끝내고 선유는 지운을 불러 세웠다.
“지운아. 너 오늘 시간 돼?”
“오늘? 어, 되긴 되는데… 저녁 먹을 거면 우리 집 가서 먹자. 재한이가 좀 불안해해서.”
“재한이 임신 몇 달 됐어?”
“이제 8개월. 얼마 안 남았어.”
“8개월이면 정말 얼마 안 남았네. 가도 괜찮아? 신경 쓰일 거 같은데.”
“완전 좋아하지. 요새 사람 못 만나서 심심해해. 세형이도 너 보고 싶어 하고.”
한주는 선유가 저들의 관계를 다른 이들에게 얘기할 때 꼭 자기도 같이 가게 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꼭 둘의 관계가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말하게 해 달라고도 했다. 아마도 선유가 받을 비난을 막기 위해서일 터였다.
“한주도 같이 가도 돼?”
“그놈 이제 속 안 썩여?”
“뭐, 언제 속 썩인 적 있다고.”
“어이구, 그놈 너한테 말 함부로 하고 수능 끝나자마자 집 나갔다고 너 울었던 거 기억 안 나냐?”
“내가 언제 울었어.”
“세형이가 툭 했다고 난리를 쳤잖아.”
선유는 더는 지운에게 대답해 주지 않고 자료를 챙겨 회의실을 나왔다. 그리고 한주에게 연락해서 6시까지 사무실로 오라고 했고, 지운에게 얘기할 거라는 것도 알려 주었다. 약속이 좀 급하게 잡히긴 했지만, 이전부터 말해 두었던 것이기 때문에 한주는 많이 놀라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고, 선유와 지운은 회사 앞에 서 있는 한주를 차에 태우고 지운의 집으로 향했다.
“최한주, 너 니네 형 속 썩이더니 요새는 괜찮냐?”
“예.”
“형 좀 울리지 마라. 너 키우느라 연애도 못 했는데.”
“야, 둘 다 조용히 해.”
피식 웃는 한주와 지운을 번갈아 바라보며 선유가 한마디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차장에 차가 섰고, 조용한 가운데 셋은 지운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빠!”
문을 열고 나오는 세형이는 양 갈래로 머리를 묶고 예쁘게 원피스까지 차려 입은 모양새였다. 무릎을 끌어안으며 부리는 애교에 선유는 아이를 안아 위로 쑥 들어 올렸다.
“세형이 안녕.”
“안녕… 누구세요?”
선유의 뺨에 입을 맞추며 인사를 하던 세형이가 한주를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더니 입을 막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지운이 입을 떡 벌리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소리를 쳤다.
“…와, 우리 딸은 진짜 얼굴을 밝혀. 재한아! 우리 딸 최한주한테 반했다!”
“무슨 소리야.”
“세형이 얼굴 빨개진 거 봐. 최선유한테는 오빠, 오빠 거리긴 해도 저러진 않았는데 한주 보더니 얼굴 새빨개졌어.”
부끄러운지 한주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세형이는 선유의 목을 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아주 조금 고개를 들어 한주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가 다시 모래에 고개 숨기는 타조처럼 굴었다.
한주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아이를 내려다보다 선유의 어깨를 잡은 작은 손을 쥐었다. 흠칫 놀라며 세형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나는 최한주야.”
“…저는 신세형이에요.”
“이름 예쁘네.”
뒤에서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는 지운을 보며 도저히 선유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한주는 진지한 태도로 아이와 악수를 하고 각자 소개를 했다. 이제 조금 낯이 익었는지 세형이는 한주에게도 안기고 싶어 했고, 선유는 훌쩍 아이를 들어 한주에게 안겨 주었다. 지운과 재한이 한껏 사랑해 주는 터라 언제나 사랑받는 데에 익숙한 아이였다.
“오빠는 몇 살이에요?”
“나는 스물한 살.”
“저는 네 살이에요!”
손가락 네 개를 쫙 펴면서 세형이가 자랑했다.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고 있던 한주가 장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세형이는 꺄르르 웃으며 한주에게 더 폭 안겨들었다. 예쁜 아이 둘이 그러고 있는 걸 보니 배가 다 부른 느낌이어서 계속 보고 싶었으나 선유는 저녁 차리는 걸 도와주러 부엌으로 향했다.
“형, 뭐 도와드려요?”
“아냐, 너는 세형이 보고 있어.”
한주에게 세형이를 맡겨놓고 선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재한에게도 거실로 가 있으라고 했으나, 그는 움직이는 게 더 편하다며 부엌에서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선유는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몸 정말 괜찮은 거야?”
“배 엄청 나왔지? 이번에 애가 좀 크대.”
“거실 안 가려면 여기에라도 앉아 있어. 불안해.”
“정말 괜찮은데….”
선유는 아예 식탁 의자를 빼어 재한을 앉혔고, 등을 누르며 서 있던 그는 못 이긴 척 앉았다. 안쪽에서 불고기를 데워 접시에 담아 나온 지운도 재한에게 앉아서 쉬라며 한마디 했다. 그리고 선유도 어찌 되었든 손님이니 쉬고 있으라고 어깨를 눌러 억지로 앉혔다.
“한주는 중학생일 때 보고 처음 보는데 정말 잘 컸네.”
“…그래?”
“주변에 사람들 몰고 다니겠다. 학교도 좋은 데 갔지?”
“응. 워낙 혼자 잘 해서.”
세형이는 두 손을 모으고 한주의 귓가에 댄 채 소곤거리고 있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같이 웃었다가 또 얘기하고, 한주가 세형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길 반복했다. 애를 싫어하는 거 같진 않은데… 선유는 애써 기억 저편으로 밀어 두었던 고민이 다시 떠올랐다.
“저기… 재한아.”
“응.”
“임신하면 어때? 많이 힘들어?”
“음… 좀 그렇지. 입덧 오면 아무것도 못 먹지, 관절들 다 벌어지고 아프지, 배는 부풀어 올라서 살이 다 트지, 내가 내 발도 못 만지고 신발 끈도 못 묶는다니까. 발등 부어서 구두는 신지도 못해. 심지어 고혈압이나 당뇨 올까 봐 먹는 것도 조심해야 하고….”
“많이 힘들겠네.”
“그래도 애가 예쁘니까. …그래도 둘째는 안 낳으려고 했는데 쟤랑 나랑 둘 다 술에 취해서.”
헐렁한 니트 아래로도 부푼 배가 훤히 보였다. 선유는 그런 재한과 거실에 있는 한주를 번갈아 바라보다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런 선유의 태도에 재한이 뭔가 느낀 듯 물어왔다.
“…왜, 임신할 생각 있어?”
“응, 뭐….”
“내가 듣기론 후기 발현 오메가는 조금 더 힘들다곤 하더라.”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얘기하긴 했어. 관절이 굳어 있어서 아마 많이 아플 거라고. 그런데 후기 발현이라고 해서 아이를 못 낳거나, 출산 후 큰 이상이 있진 않다고 하더라고.”
“이번에 마사지 받으러 간 곳에서 후기 발현한 임산부 만났는데, 그렇게 나빠 보이진 않았어. 뼈마디가 많이 아프다곤 했는데, 애도 잘 낳았고 나중엔 다 괜찮아진다고 하더라. 알파 페로몬으로 매일매일 덮어 주면 고통이 거의 사라진대.”
이것저것 얘기해 주던 재한이 몸을 좀 더 앞으로 숙이면서 속삭였다.
“그럼 지금 만나는 알파가 있어?”
“…어.”
“잘됐네. 괜찮은 사람이면 빨리 잡아. 계속 히트로 시달리는 것도 싫잖아.”
“응.”
왠지 민망해져서 뺨이 붉어지려는 찰나, 쟁반 가득 밥그릇과 접시를 챙겨온 지운이 턱턱 식탁 위를 채우기 시작했다. 지운이 가져다 준 수저를 정리해 놓은 선유가 물통에 정수기 물을 채워놓았다.
“하니 아빠!”
“응, 우리 세형이.”
하니 아빠라니. 귀여운 애칭에 선유는 재한에게 안긴 아이의 보송한 뺨을 살살 쓸어 주었다.
“아빠, 나 나중에….”
“응.”
새빨개진 뺨을 감싸고 발장난을 치던 아이가 다짐한 듯 크게 외쳤다.
“한주 오빠랑 결혼할래!”
“…어?”
“오빠 좋아, 오빠랑 결혼하고 싶어!”
무슨 짓을 했느냐고 묻는 듯 지운, 선유, 재한의 시선이 전부 한주를 향했다. 조금 억울하다는 얼굴로 한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저였다.
“전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 짧은 시간에 한주가 뭘 했겠는가. 저 말끔한 얼굴에 반한 아이가 그냥 하는 소리겠지.
“세형아. 무슨 벌써 결혼이야.”
“왜, 오빠랑 결혼하면 안 돼?”
재한이 달랬지만, 세형이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요새 어린이집에서 결혼이니 이런 거에 대해 배워 와서 이렇다며 재한이 이해를 바랐고, 선유는 당연히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한주는 그렇지 못했다.
“세형아. 나랑은 결혼 못 해.”
“왜요? 저 오빠랑 결혼하고 싶어요.”
재한의 무릎에서 내려와 다시 한주에게로 쪼르르 뛰어온 아이가 무릎을 감싸 안고 매달렸다. 한주는 전혀 고민도 없이 아이에게 한 방을 날렸다.
“결혼할 사람 있어.”
“…어?”
“선유 형이랑 결혼할 거야.”
아이의 기대와 상상과 함께 뒤에서 유리컵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으로 컵을 가져오던 지운이 떨어뜨린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들었다는 듯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지운이 황급히 다가오지 말라고 하고 바닥을 치워냈다. 그리고 식탁에 남은 유리컵을 내려놓고 물었다.
“저놈이 장난치는 거지?”
“음… 우선 밥부터 먹고 얘기하면 안 될까?”
“…설마 진짜 뭐 있어?”
“밥 먹고 얘기하자잖아. 먹어, 선유야.”
“어, 어… 잘 먹을게.”
난감해하는 선유를 본 재한이 지운을 달래며 우선 식탁에 앉혔다. 한주도 충격받은 아이를 안고 와 아기 의자에 앉히고 자기도 의자를 빼 앉았다.
“야, 최한주. 네가 얘기 꺼낸 거니까, 네가 설명해 봐. 무슨 뜻인지.”
말해도 되는 거냐는 듯 한주가 선유를 잠시 쳐다보았다. 음, 정말 밥은 좀 먹고 하면 안 될까. 왠지 체할 거 같은데.
“형이 좀 이따 얘기하라는데요.”
선유의 눈빛을 잘 읽은 한주가 대화를 뒤로 미뤘다. 하지만 지운은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입에 가득 넣은 불고기와 밥을 삼키고 선유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떼었다.
“한주랑 나랑… 음….”
“각인했어요.”
한주가 선유의 말을 이었다. 재한과 지운에게서 경악 어린 되물음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각인?”
“예.”
“각인이라니?”
아무렇지 않게 불고기와 밥을 먹으며 한주가 말했다. 그러기 전에 맛있다고 요리를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게 말하자면 좀 긴데… 제가 먼저 좋아했고, 형이 오메가로 발현하면서 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됐어요, 로 요약하는 건 좀 아니잖아.”
선유는 한숨을 쉬고 조금 더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 봤자 한주가 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숟가락도 들지 못한 채 듣고만 있던 지운이 한참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너 오메가로 발현하고 주기 안 잡혀서 한창 고생할 때, 저놈이 와서 너한테 페로몬 덮어 씌워 가면서 길들였다는 거 아냐.”
“무슨 말이 그래.”
“맞아요. 형이 저한테 익숙해지고, 제 페로몬에 중독되고, 좋아한다는 제 말을 받아들이길 바랐죠. 그리고 그렇게 되었고요.”
“한주야.”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선유는 식탁 아래에서 한주의 왼손을 잡아 쥐었다. 그런 선유를 보며 생긋 웃은 한주가 다시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너 나랑 얘기 좀 해.”
지운이 선유를 일으켜 방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한주가 다시 손을 잡아 앉혔다. 그리고 태연한 태도로 우물거리며 입 안에 든 걸 삼키고 말했다.
“여기서 하세요.”
“한주야.”
“어떤 알파가 자기 오메가가 다른 알파랑 밀폐된 공간에 가는 걸 그냥 놔둬요? 아니면 저도 같이 가요.”
선유는 재한에게 도와 달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이 상황을 재미있다는 듯 관조할 뿐이었다. 결혼식 전날 떡이 되도록 취한 지운이 제 집에 찾아왔을 때도 그는 이런 태도였다. 지운과 한주의 기 싸움에 얼어 버린 분위기를 새같이 고운 목소리가 깼다.
“아빠, 알파가 뭐야?”
천진한 질문에 심각한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선유는 지운을 다시 자리에 앉히고 최대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동안 재한은 아이에게 알파 오메가 개념을 설명해 주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각인은 서로 좋아하게 되어서 한 거야.”
“어쨌든 먼저 한 건 얘라는 거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최선유.”
지운의 저 낮은 목소리는 지금 정말 화가 났는데 최대한 참고 있다는 의미였다. 사실 선유는 지운이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의 화를 받을 생각도 없었다.
“지운아. 난 너한테 축하받고 싶어서 제일 먼저 얘기한 거야. 너 내가 오메가 됐을 때 걱정 많이 했고, 빨리 알파 만나서 자리 잡기를 바랐었잖아.”
“…그래도 이건 아니지.”
“네가 나를 도둑놈이라고 생각해서 화를 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도둑놈인 게 아니라, 호시탐탐 널 노리던 저놈이 진짜로… 나는 네가 한주를 동생 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걸 아니까 알파여도 그냥 뒀던 건데.”
“호시탐탐?”
“그래, 쟤 고등학생일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너 대하는 게 심상찮다고 생각했었다고. 그래도 워낙 너한테 잘하고, 너도 쟤를 동생으로만 생각하니까 별일이야 있겠나 싶었지.”
“…….”
“선우야, 나는 네가… 받는 연애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었잖아. 계속 주기만 했으니까.”
이어지는 지운의 말에 한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듣자 듣자 하니 무슨 전 애인처럼 하는 소리가 어이가 없었다. 그런 한주의 기색을 눈치챈 선유가 진정하라고 한주의 허벅지를 도닥였다.
“그렇게 하고 있어.”
“선유야.”
“한주한테서 많이 받고 있어. 그리고 나는 주는 게 좋아.”
“…….”
“많이 주고 그걸로 좋아해 주면 족해.”
어휴, 작위적인 한숨 소리를 내며 지운이 푹 고개를 숙였다. 그런 지운을 재미있다는 듯이 보던 재한이 선유에게 좋아 보인다고 그제야 듣고 싶었던 소리를 한마디 해 주었다. 그게 또 지운의 기분을 들끓게 한 것 같았으나, 그는 조금 어른스럽게-지금까지 충분히 애같이 굴었으므로- 감정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그가 할 수 있는 건 잔소리뿐이었고, 그 잔소리도 대부분 통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유가 아이를 데려왔을 때도, 그 아이를 입양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지운은 별 말을 할 수 없었다. 선유가 일단 마음먹으면 실패하거나 중간에 포기하는 일은 없다는 걸 아니까.
“내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지?”
“…그렇지.”
“그럼 밥이나 먹자. 배고프다.”
지운은 한주를 한 번 더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으나 진정이 된 상태였다. 이제야 조금 밥을 먹을 만한 분위기가 되어서 선유는 숟가락을 다시 쥐었다. 괜히 중간에 끼어서 고생한 재한과 세형이한테 미안하다고 눈인사를 하고 반쯤 식은 불고기를 입에 넣었다.
가라앉은 공기 아래에서 식사를 마치고, 선유는 지운을 도와 식탁을 치웠다. 한주는 아이를 데리고 거실에 가 있으라고 했더니 한껏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렸다가, 이제 결혼하자는 얘기는 안 하는 세형이를 안고 거실로 가서 재한의 옆에 앉았다.
싱크대 앞에 나란히 서서 지운은 그릇을 씻고 선유는 찬장에 넣었다. 반쯤 치웠을까, 지운이 툭 내뱉듯 말했다.
“네가 도둑놈이 맞긴 하네.”
“그렇지?”
“뭐가 그렇지야. 네가 백만 배는 더 아까워.”
“남들이 보면 한주가 다 아깝다고 할 걸.”
“그게 무슨 상관이야. 둘이 좋다는데.”
“너부터가 뭐라고 하잖아.”
“근데… 너 그럼 임신한 거야?”
제가 지금까지 임신한 애한테 일을 시키고 있었던 건가 싶어 충격에 빠진 지운에게 선유가 손까지 내저으며 부정했다.
“어? 아냐. …각인은 감정적으로 한 거야.”
“…진짜 좋아하는 건 맞나 보네.”
“좋아하는 건 원래 그랬고… 한주를 알파로 인식하는 것만 필요했지.”
정리를 끝내고 젖은 손을 톡톡 털고 있자, 지운이 흰 수건을 건넸다. 손을 닦으며 거실로 눈을 돌렸더니 한주가 언제부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 모를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또 생글 예쁘게 웃었다.
“너 뒷덜미 잡힌 거야.”
“어?”
“쟤 무서운 애라고. 어쨌든 몇 년간의 짝사랑을 쟁취한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좋아.”
“그래. 솔직히 좋아 보여서 뭐라 더 말 못 하겠다. 너희 부모님한테는 말했어?”
“네가 처음이라니까.”
“너희 아버지 또 난리 나겠는데?”
“음… 손자 데리고 가면 뭐라 안 하지 않으실까? 아, 그럼 유산도 받을 수 있겠다.”
으이구, 못 말린다는 듯 선유의 머리를 밀어내던 지운과 한주의 눈이 마주쳤다. 조금 사늘한 감촉이 느껴질 정도라 지운은 손을 떼어냈다. 이젠 선유가 오메가라는 것뿐 아니라, 각인한 알파가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만 했다.
“고마워.”
“뭐가.”
“욕할 줄 알았거든.”
“하고 싶어!”
“…미안.”
“됐어. 가서 과일이나 먹자.”
쟁반에 사과와 접시를 올려 가져가는 지운의 뒤통수에 대고 선유는 지금까지 제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하지만 간신히 잊으려 노력하던 질문을 던졌다.
“너는 내가 징그럽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네가?”
“지금까지 내가 키워 온 애랑….”
“네 상황이 바뀌기도 했고… 네가 이미 그걸로 아주 오래 고민했을 걸 아니까. 너를 아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 거야.”
“…….”
“그리고 네가 그런 생각 하고 있으면 저기서 눈 부릅뜨고 있는 애한테도 못 할 짓이고.”
선유는 지운의 뒤를 따라가 기다리다 못해 아예 일어날 준비를 하는 한주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허공으로 솟구칠 것처럼 뻗어 있던 눈매가 조금 가라앉았고, 한주는 선유의 손을 쥐고 잠시 깊게 한숨을 쉬었다.
“지운이 형하고 너무… 그렇게 있지 마요, 형.”
“응. …질투해?”
“당연하죠.”
놀고 있네, 라는 표정의 지운이 살벌하게 사과를 깎았다. 탁탁 접시와 과도가 부딪치는,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렸지만 선유는 한주의 손을 잡은 채로 예쁘게 깎인 사과를 먹을 뿐이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졸린냥
“날씨도 좋은데 좀 걸을까?”
“예.”
그저 나란히 걷다가 살짝 손등이 스쳤다. 선유를 내려다보던 한주가 한 번 더 손등이 닿자 그대로 손을 휘어잡았다. 꽉 잡았다가 그리고 손가락 사이가 하나하나 닿도록 깍지를 꼈다.
“한주야.”
“형.”
동시에 튀어나온 부름에 서로 마주 보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꽤 인적이 없는 골목길에 소리가 꽤 크게 울려서 각자 입을 막고 잠시 참았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도 웃음기를 물고 있는 선유를 내려다보다 한주는 그 입가에 입을 한 번 맞췄다.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야 입술이 닿는 것이 꽤 생소한 감각이었다.
“지운이한테 너무 그러지마.”
“제가 뭘요.”
“지운이가 알파긴 하지만 정말 나랑은….”
“지운 형이랑 예전에 잔 적 있죠.”
“…어?”
“그냥 묻는 거예요.”
“그거… 중요해?”
“음… 아뇨 별로 중요하진 않아요.”
“…근데 왜 그렇게 물어봐?”
한주는 선유를 슬슬 밀어 담벼락에 기대놓고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어둠이 져서 윤곽이 짙게 드러난 한주의 얼굴이 평소와 너무 다르게 느껴져서 선유는 마른침만 삼켰다. 제 귀여운 아이… 라는 생각이 지금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저는 형한테 동생이고 싶기도 하고… 벗어나고 싶기도 해요. 요즘은 좀 형이 날 동생으로 안 봤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 커요.”
“한주야, 너는….”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선유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만 하면 한주는 촉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가 떼어내고 또 맞대길 반복했다.
“그런데도… 어린애 같이 굴어서 미안해요, 형.”
“…응?”
“오늘 먼저 결혼하겠다느니 각인했다느니 얘기해서.”
“괜찮아. 내가 말 꺼내기 어려웠는데, 차라리 고맙지.”
한주가 선유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입 안이 조금 달아져 한 번 침을 모아 삼키자 지금까지의 입맞춤이 전초전이었던 듯 한주가 달려들었다. 조금 깨물리고 예민한 부분이 거칠게 빨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살짝 부푼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장난치듯 몇 번 누르고 한주가 다시 허리를 세웠다.
“형, 이제 좀 마음이 편해요?”
“응?”
“형… 저랑 자고 나서 조금 불편해 보였어요.”
삼 일 전 한주와 같이 히트와 러트를 보낸 선유는, 그때 이후로 아주 조금, 정말 조금 평소와 달랐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없었을 테지만, 한주만은 알 수 있었다. 선유가 무언가 석연찮은 게 있다는 것을.
“지운 형한테서 그래도 괜찮다는 얘기 들었으니까….”
“아냐. 그건… 그런 이유는 아니었어.”
“아니에요?”
“응. 나는 내가 한번 결정한 거에 대해서는 철회하지 않아. 너랑 같이 히트를 보내기로 했고, 밀어낼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내가 다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이야.”
“…알아요. 그래서 저는 형이… 무서울 때가 있었으니까.”
“그래?”
“형한테 절대로 고백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때의 얘기예요.”
고백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선유가 저를 밀어내고 더는 보지 않겠다 마음을 먹기라도 한다면… 그는 정말로 그럴 사람이니까. 한주는 선유의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지금 이 시간이 정말로 꿈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주야.”
“예, 형.”
“우리 예전에… 그러니까 너 정말 어렸을 때부터 했던 얘기 기억나?”
“어떤 거요?”
“많이 말하고, 많이 얘기하고… 서로 속에 있는 얘기도 다 하자고 했었던 거.”
한주는 잠깐 기억을 더듬다 선유가 말한 때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저 준호랑 싸웠을 때 말이죠.”
“기억하네.”
“당연하죠.”
선유는 뿌듯한 표정의 한주의 뺨을 감싸고 한참 동안 까만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끊임없는 시선에 한주는 조금 어색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가 다시 선유를 보고 이번엔 얼굴을 붉혔다.
“…왜 그렇게 봐요, 형.”
“한주야.”
어서 말하라는 듯 한주가 눈짓을 했다. 선유는 말라가는 아랫입술을 축이고 속에 담고 있던 말을 꺼냈다. 물어보기 두렵지만, 그럼에도 답을 듣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대화하지 않으면 절대 풀 수 없는 것.
“왜 내가 임신하는 게 싫어?”
“예?”
“내가 임신하는 건 좀… 그렇다고 했잖아.”
“…형.”
“이유를 듣고 싶어.”
제 뺨을 감싼 선유의 손을 잡아 내리고 한주는 한참 제 입술을 씹었다. 그리고 선유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조금 파삭한 느낌이던 손바닥이 촉촉해지는 게 느껴져서 괜히 물었나 싶었지만, 선유는 이 주제를 절대 묻어 두고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다음 히트 전까지는 정리를 해야만 했다.
“…좀 더 걷다가 얘기해도 돼요?”
“응.”
이러다 집까지 걸어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몇 시간이고 선유는 한주의 옆에서 걸어 줄 생각이었다.
“형은… 아이를 낳고 싶어요?”
“…응.”
“왜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 어디서 배웠는지, 선유는 그런 한주의 태도를 지적하기보단 답해 주기로 했다. 저도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만 했지 이유를 말한 적은 없으니까.
“나는 스무 살 때 부모님께 게이라고 고백했어. 나는 베타였고, 내 평생 배우자도 아이도 없을 거로만 생각했었지.”
“…예.”
“오메가를 부러워하기도 했었어. 오메가는… 남자를 좋아해도 되고, 심지어 아이도 낳을 수 있으니까. 내 성 정체성은 인생의 그리 큰 부분은 아니었지만, 가장 나를 좌절시키는 것이기도 했어.”
한주가 깍지 낀 손에 꽉 힘을 주었다가 다시 조금 풀었다. 손등 위에 손가락 모양으로 붉은 자욱이 남았다.
“그런데 내가 오메가가 되었잖아. 그리고… 너를 좋아하고, 너와 계속 있고 싶고… 아이가 있고 없고에 따라 감정이 달라지리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너와 나를 닮은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구구절절 말했지만 이유는 하나였다. 한주가 좋으니까, 그와 저를 닮은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어서. 선유는 무척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냈다. 한주를 압박하거나, 그를 막무가내로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한주가 무슨 이유에서든 정말로 아이가 싫고, 제가 임신하는 게 싫다고 한다면 선유는 그것도 이해할 생각이었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가 한주보다 소중하진 않았다.
“…형.”
“응.”
“저는 친부모가 누구인지 몰라요. 백일 정도 되었을 때 버려졌고 고아원에서 다섯 살까지 있었죠.”
“…….”
“양부모님도 형도… 저를 정말로 많이 사랑해 주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형, 저는….”
둘이 같이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가, 선유를 보고 웃었다가 또 울 것 같아졌다가, 목울대가 몇 번이나 오르내리는 것이 한주가 얼마나 말을 고르고 있는지 짐작하게 해 주었다.
가로등 아래에 선 아이가 그 어느 때보다 약해 보여서 선유는 가만히 그의 팔을 잡고 조용히 뒷말을 기다렸다. 얼마가 걸리든 기다릴 수 있었다.
“제가 아이를 제대로 사랑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한주야.”
“…겁이 나요. 아이를 사랑하는데, 사랑할 건 확실한데 혹시나 제가 무언가 잘못되어 있어서 상처 입히면 어떡하죠?”
“…….”
“사랑받은 기억은 너무나 또렷하지만, 저는 형처럼… 제 양부모님처럼 아이를 사랑해 주진 못할 거 같아요.”
한주는 선유가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할 정도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미 저보다 커버린 지 오래된 아이가 그 순간 다섯 살처럼 보여서 선유는 가만히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떨리는 등을 가만히 쓸어 주고, 한주의 어깨에 턱을 얹으며 꼭 품 안으로 그를 당겼다.
“한주야. 내가 너 키웠잖아.”
“…예.”
“나를 믿어 보면 안 돼?”
“형을…요?”
“솔직히… 네가 아이한테 상처를 입히거나, 사랑하지 못할 거란 생각은 안 들어. 내가 어떻게 널 키웠는데.”
자신 있는 선유의 태도에 한주가 피식 웃었다. 늘어져 있던 팔이 허리를 마주 안아 와서 선유는 안도했다. 한주가 그 걱정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걸 걱정한다는 거 자체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말로 아이를 상처 입히고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그런 걸 걱정도 하지 않아.”
고개를 완전히 든 한주가 선유를 바라보다 다시 꽉 안고 뺨을 맞붙였다. 등 뒤로 사람이,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선유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안에 들어찬 따뜻한 체온에만 집중하기에도 모자랐다.
“…후기 발현 오메가는 임신하면 정말 아프대요.”
“응… 들었어.”
“초기엔 괜찮지만, 아이가 크기 시작하면 계속 자리보전해야 할 정도로 아프다는데… 제가 대신 아플 수도 없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잖아.”
“…사실 제가 임신할 수 있었다면 바로 하자고 했을 거예요. 저는 형이 아픈 거 못 보겠어요.”
“아프다고 해도 그게 평생 가는 것도 아닌데.”
“거의 반년을 넘게 고생해야 해요.”
“반년이잖아.”
“형.”
“그럼 다음 히트 때까지 고민해 줘. 2달 남았다.”
눈앞에 손가락 두 개를 펼쳐 주자 한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너무 밀어붙이는 모양새가 된 것 같아서 선유는 부담가지지 말라고 물러났다. 정말로 네가 원하지 않으면 나는 널 강요해가며 아이를 가지고 싶진 않다고, 덧붙이면서.
“네가 제일 소중해.”
“…저한테도 형이 제일 소중해요.”
“응.”
다시 손을 잡고 걸었다. 그러다 어깨를 툭 하고 부딪치고, 손을 꼭 쥐었다 살짝 힘을 풀기를 반복했다.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멀다고 생각했던 길이 확 줄어든 것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집에 가도 같이 있을 건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바로 집 앞 골목에 도착하자 걸음마저 느려졌다. 그런 선유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한주가 물었다.
“다리 아파요?”
“어? 아냐.”
겨우 한 시간 걸은 거 가지고 다리가 아플 리가 없지 않은가. 손을 내젓는 선유의 앞에 한주가 등을 쑥 내밀고 무릎을 굽혀 앉았고, 선유의 무릎 뒤를 잡아채 제 위로 엎어지게 했다.
“다리 아픈 거 아니라니까.”
“위험해요, 형.”
위에서 몸부림을 치는 선유의 엉덩이를 짝 소리가 나게 한 대 치고 한주는 훌쩍 몸을 일으켰다. 황당함에 휩싸인 선유는 한주의 목을 끌어안고 높아진 시야에 눈을 질끈 한 번 감았다 떴다.
“한 바퀴 더 돌고 들어갈까요?”
“…그럴까?”
한주는 선유를 업고도 숨소리 하나 흩트리지 않고 걸었다. 선유는 편하게 한주의 등에 몸을 기대고 힘을 뺐다. 한주는 그 기댐에 더 기꺼워했다.
“집에 가면 키스해요, 형.”
“응.”
여기서 해도 상관없지만, 집에서 하는 키스는 특별하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서로만 생각하면 충분한 입맞춤. 매일 밤 소파에서 나누는 진한 키스를 떠올리며 선유는 한주의 뺨에 제 뺨을 대었다. 따뜻했다.
<1+1=3>
그 다음 히트와 러트의 시기, 한주는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유가 불안한 표정으로 사용을 권했지만, 콘돔 뭉치를 쓸어 쓰레기통으로 집어넣었을 뿐이었다.
“…괜찮아?”
“아직 그런 말 할 정신이 있어요?”
“한주야.”
“전 형을 믿어요.”
선유의 입술을 부드럽게 삼키며 한주는 마치 진리를 말하는 듯했다. 사탕처럼 아랫입술을 빨다 놓아주고 또 한 번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형이 키운 저를 믿고 싶고요.”
“응….”
“…형이 원하지 않는 건 아니죠?”
“나는… 원해.”
너도, 네 성기도, 정액도, 아기도. 선유는 탐욕스럽게 모든 걸 삼켜버리고 싶어 하는 구멍을 애써 조이며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안에 넣고 싶어서, 삼키고 빨고 싶어서 혀가 다 말라붙었다. 안달하는 선유를 검은 눈으로 내려다보던 한주가 욕구에 사나워진 얼굴로 웃으며 속삭였다.
“제 정액이 형의 배 속에서 아기가 된다는 생각을 하면 좀 돌아 버릴 거 같은데… 이거 정상이에요?”
“나도….”
“형도 그래요?”
“네 정액 담을 생각하면 안에서 막… 물이 나와.”
“…그러네요.”
“응….”
“먹고 싶어 죽겠단 얼굴이에요.”
단단하게 심지를 세운 성기로 아래를 쿡쿡 장난치듯 찔러 주기만 할 뿐, 한주는 넣어 주지 않았다. 어떻게 이 페로몬의 폭풍 속에서 저렇게 의연할 수가 있지? 제 페로몬이 제대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한주가 페로몬에 면역이라도 생긴 건가,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던 선유는 한주를 밀어 눕히고 그대로 위에 앉아 성기를 제 몸속으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아, 읏, 안에, 아, 하으….”
두 번이나 사정할 때까지 빨아 준 구멍은 한주의 성기를 그대로 삼켰다. 벌써 양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많이 겹쳤는데도 한주는 매번 선유의 뒤를 푸는데 공들였다. 히트가 아니어서 체액이 적게 나오면 적게 나오는 대로, 히트일 때는 달아서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며 부들부들하게 녹아내릴 때까지.
새빨갛게 늘어난 곳이 성기를 간신히 씹어 무는 걸 보며 한주는 아예 숨을 멈췄다. 절반쯤 품고 너무 깊다며 선유는 빼지도 더 넣지도,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허리가 무너질 것 같아 한주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짚고 간신히 몸을 지탱하는 그를 한주는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내벽이 멋대로 움직이며 성기를 잘근잘근 씹었다.
애써 선유가 하는 대로 있으려던 인내는 곧 사라졌다. 선유는 한주의 유두를 손끝으로 긁었고, 부푼 가슴 근육을 공들여 애무하듯 만졌기 때문이었다. 하, 한주는 크게 숨을 내뱉으며 그대로 선유의 허리를 잡아 아래로 당겼다.
“아! 한주야, 나 벌써, 하, 읏, 으흣….”
순식간에 입구가 열리고 안까지 성기가 들이쳤다. 선유는 젖은 머리카락이 다 흔들리도록 도리질을 치며 제 허리를 쥔 한주의 팔을 쥐어뜯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주와 제 배에 반복적으로 부딪치는 성기에선 물이 줄줄 흘렀고, 구멍도 마찬가지였다. 신음 소리보다 철퍽대는 물소리가 더 컸다.
“형, 하으… 형 안이, 얼마나, 아, 좋은지 알아요?”
“몰라, 아, 으읏, 흐읍….”
“밀어 넣으면, 아기집이 귀두를 조여요.”
음란한 묘사와 아기집이란 단어 사이의 괴리감이 굉장했다.
“으, 응….”
“그리고, 흐, 구멍이 밑동을 조여요.”
선유가 경련할 때까지 안으로 쑤셔 넣은 한주가 제 위로 쓰러진 선유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천천히 성기를 빼내며 그 감상을 그대로 말했다.
“빼면 내벽이, 귀두를 긁어요. 하아… 나가지 말라고, 붙잡아요.”
“하지, 마, 읏, 그런, 그런 말, 하지,”
“흐읏, 형은요? 어때요?”
선유의 입가에 흥건해진 타액을 핥아 마시며 되물었다. 살짝 풀려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선유의 혀가 귀엽고 야해서 한주는 답변을 기다리지도 못하고 혀를 끌어내 씹었다. 한참 그렇게 깨물고 핥다 놓아주자 선유는 반쯤 풀어진 눈으로 한주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뭐에 홀린 듯 입을 열었다.
“네 거… 너무 커서, 으응, 안에 꽉 차… 버튼이, 막, 읏, 눌려, 으, 흐으, 또, 또 나와.”
딱딱하게 굳는 등을 쓸어 주며 한주는 잠시 허리를 멈췄다. 그리고 선유의 성기를 잡아 쥐고 위를 꼭 막은 채 마구 쳐올리기 시작했다. 눈가를 다 적신 채 선유는 놔달라고 애원했지만, 한주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한주야, 한주, 한주야,”
선유가 다급히 저를 부를 때마다 장난처럼 입을 맞추던 한주는 미간을 확 찌푸리며 선유를 들고 그대로 침대에 바로 눕혔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허리를 찧어 내렸다. 소리를 내는 것조차 잊은 선유는 그저 한주의 어깨를 안고, 다리를 허리에 감은 채로 쏟아지는 쾌감을 견딜 뿐이었다.
안에서 성기가 또 한 번 부풀었다. 선유는 조금 겁에 질려 다급히 한주의 등에 손톱자국까지 내고 그의 어깨와 가슴을 깨물어댔다. 선유의 등과 뒷머리를 감싼 커다란 손이 더 죄여 들면서 한주가 최후까지 허리를 밀었다.
이미 토해낼 것도 남지 않은 선유의 성기에선 거의 투명해진 점액이 또 한 번 나왔고, 한주의 성기는 이제야 사정을 시작했다. 숲을 닮은 향기가 터져 나왔고, 그에 감응해 선유는 마치 솜사탕 같은 향을 냈다.
“하아… 흣, 안에… 느껴져요?”
“으응, 응, 배 속에….”
성기의 밑동이 주먹만 하게 부풀어 오르기 전에 자세를 바꿔야 했지만 입술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조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아랫배를 감싸는 선유의 행동이 한주는 사랑스럽다 못해 미칠 지경이었고, 드디어 진짜 제 오메가가 된 것만 같아서 울어 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한주야.”
따뜻한 손바닥이 뺨에 닿았다. 울어 버릴 것 같은 게 아니라 이미 울고 있는 것이었나, 선유의 손이 척척하게 젖어 드는 것을 보며 한주는 애교부리는 것처럼 뺨을 조금 더 만져 달라는 듯 그의 손에 문질렀다.
이미 완전히 부푼 성기가 구멍을 틈 하나 없이 틀어막았다. 고통 어린 신음을 뱉는 선유를 달래가며 한주는 간신히 뒤에서 안는 자세로 바꾸었다. 그리고 선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의 아랫배를 양손을 깍지 껴 감쌌다.
선유는 한주의 손등을 쓸어 주다가, 제 어깨를 적시며 몸을 떠는 한주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안에 쏟아지는 정액에 대한 감상을 조곤조곤 말해 주었다.
“배 속이 따뜻해, 한주야.”
“…예.”
“가득 차는 거… 같아.”
“어디가요?”
“배가….”
“배?”
“…아기집?”
진짜 제 배 속에 아기집이 있는 걸까. 아직 그것도 믿기지 않는데 이제 아기가 생길 거란 생각을 하자 선유는 정말 기묘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좋은 쪽에 가까웠다.
선유의 어깨에 눈가를 문지르고 그의 곧은 어깨를 잘근잘근 깨물던 한주가 살살 선유의 아랫배를 문질렀다. 배 속에 찬 미끈한 액체와 성기가 부딪치며 쿨쩍대는 소리가 났다.
“아기 생길까요?”
“아마도? …결혼도 안 했는데 애부터 생기겠네.”
“결혼….”
“노팅하면 거의 90% 확률이라고 하니까.”
순간 한주의 목소리가 가라앉아서 선유는 다시 화제를 바꿨다. 결혼을 하려면 먼저 정리해야 하는 게 많았고, 한주와 같이 깊게 얘기하며 해결해 가야 했다. 선유는 결혼과 출산을 직렬로 놓지 않았고, 둘은 독립적이라고 생각했기에 선후 관계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 더 하면 좀 더 확률이 높아지겠죠?”
“…두 번 하면 더 높아지겠지?”
“그럼… 세 번 더 할까요?”
선유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뒤로 휙 돌렸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주가 입을 맞췄고, 천천히 풀어지는 노팅에 맞춰 마주 보고 누웠다. 하지만 둘은 그대로 연결된 채였다. 한참 보드랍게 혀를 얽다 떼어내고 선유가 조용히 물었다.
“근데… 세 번이나 할 수 있어?”
“…형은요?”
한주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선유는 조금 의아했다. 세 번이나 노팅하는 건 힘들까 봐 그러는 건데… 그리고 이대로 세 번을 더 한다면 밤을 새우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해야 할 터였다.
“나는 너 힘들까 봐….”
“형, 저… 한 번도 제가 원하는 만큼, 그리고 힘들 때까지 해 본 적 없어요.”
“…거짓말 하지 마.”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한주야.”
“제 체력이 얼마나 좋은지는 형이 더 잘 알잖아요.”
한주는 삼일 밤낮을 새워가며 시험공부와 과제를 해도 괜찮았다. 그뿐 아니라 섹스를 하고 스르륵 잠들어 버리는 선유를 목욕시키고 청소에 환기까지 다 한 후 안아 재우는 것은 이제 정형화된 루틴이었다. 그러고 아침에 일어나 아프다고 하면 몸을 주물러 주고 아침밥을 챙겨 먹이는 것까지도.
“그럼 너… 얼마나 할 수 있는데?”
“…저도 잘 모르겠는데, 한번 해 볼까요?”
“어? …응, 그럴까?”
“형, 진짜죠?”
“응, 뭐… ”
애매한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한주는 선유의 위로 올라왔다. 입가에 문 은근한 미소가 왠지 모르게 소름을 돋게 해 선유가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그대로 입술이 닿았다.
다시금 섞이는 페로몬에 몸이 노글노글 풀리고, 다시 단단해지는 성기가 눅진하게 녹은 안을 천천히 문질러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유는 무척 좋았다. 섹스는 기분이 좋다 못해 머릿속이 녹는 것만 같았고, 한주는 늘 그렇듯 부드럽게 선유를 안아왔다. 히트가 아닐 때도 좋지만 히트 때는 정말 그 전의 섹스가 다 거짓이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노팅이 두 번 세 번 반복되고, 횟수가 한 손으로 셀 수 있는 숫자를 넘어가기 시작했을 때, 선유는 한주에게 애원했다. 거짓말이라고 했던 거, 한번 해 보겠다는 말에 긍정한 거 철회하겠다고 후배위로 박히며 빌다가, 그의 몸 위에 얹혀져 어깨를 잔뜩 적셨다.
몸속에 더는 쏟아낼 눈물조차 없다고 한주의 입술에 수도 없이 키스하자, 한주는 세상에서 그보다 더 다정할 수 없는 손길로 허리를 쓰다듬다 콱 틀어쥐고 안을 쑤셨다. 정액이… 입으로 나올 거 같아, 다시 한번 더 성기가 안에서 부풀어 올랐다.
이제 물밖에 나오지 않는 성기를 한주가 쥐려 해서, 선유는 기겁하며 손을 못 대게 했다. 반복된 마찰과 사정으로 예민해진 성기는 손만 닿아도 허벅지 안쪽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살짝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한주는 가볍게 허리를 몇 번 더 쳐올리고 선유를 일으켜 안았다. 그 모양이 도저히 ‘아이’라고 부를 수가 없을 정도였고, 선유는 등골이 다 오싹해져서 젖은 가슴에 뺨을 문지를 수밖에 없었다.
한주는 노팅한 채로 욕실로 가 욕조에 앉아 따뜻한 물을 틀었다. 한주의 가슴에 등을 대고 앉은 채 그의 심장 소리를 듣던 선유는 곧 잠에 빠져 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반쯤 지고 있을 때였다.
잠깐 눈만 뜬 채로 멍하게 침대에 누워 있다가 선유는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혹시 안에서 무언가 흐르거나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진 않았다. 손가락과 발가락부터 움직여 보고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다 아무래도 제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을 받았다. 어쩔까 고민하는 사이 문이 열리고 한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형.”
“…다음부터는 그런 말 안 할 거야.”
“저는 상관없어요.”
침대에 걸터앉은 선유를 엎드리고 하고 한주가 그 위로 올라왔다.
“형, 몸 좀 만져 줄게요.”
“응….”
목덜미부터 어깨, 등과 허리까지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누르고 문질렀다. 하지만 평화로운 한주의 움직임과는 달리, 아래에 깔린 선유에게선 억눌린 신음 소리만 계속 흘러나왔다.
“좀 더 할까요?”
“…괜찮아.”
“형, 배고프죠. 점심시간도 지났어요.”
“배는 별로 안 고프네.”
그렇게나 들이부은 탓일까. 하지만 배는 평소와 다름없이 홀쭉했다. 티셔츠 위로 아랫배를 문지르며 선유는 한주에게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내오게 했다.
“이리 와봐, 한주야.”
“뭐예요?”
“여기 앉아 봐.”
선유는 제 옆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일 관련된 것일 거라 생각한 한주의 얼굴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선유가 내미는 서류를 본 순간 한주의 눈이 마치 접시처럼 커졌고, 손에 쥐인 종이 끝이 파르르 떨렸다.
“…형.”
선유가 준비한 건 파양신고서였다. 둘의 관계를 완전히 재정립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 한주는 선유의 양자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개체가 될 것이고, 둘은 또 다른 관계를 맺게 될 터였다.
“그리고 결혼하자.”
“…제가 먼저 말하려고 했어요.”
“준비성이 없네, 한주는.”
“형이 죄다 먼저 해 버리면 저는 뭘 해요.”
“잘 따라오면 되지.”
억울한 눈매로 선유를 바라보던 한주가 푹 한숨을 내뱉었다. 언제나 먼저 몇 발짝을 앞서 가 버리는 선유를 뒤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급급하다. 조금이지만 자기비하에 빠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선유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이거 같이 작성해서 내일 제출하자.”
“…예.”
“그리고 아기 생겼다고 하면… 미국 같이 가 줄 거지?”
“형도 부모님은 무서워요?”
“무섭긴. 내 나이가 몇인데.”
“…무서운 거죠?”
똑 떨어지는 대답이 오히려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선유는 난감하다는 듯 살짝 웃고 한주의 품에 들어가 등을 대고 앉았다. 폭 기대자 온몸이 감싸졌다.
“무섭다기보다는 말하기 어려운 거지.”
커다란 한주의 손이 아랫배를 덮었다. 그리고 왠지 예전을 떠올리게 하는 움직임으로 배를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술병에 걸린 제게 약손을 해 주겠다며 매달리던 아이, 사랑스러워서 선유는 한주의 뺨과 목덜미에 입술을 부딪쳤다.
“…아기 생겼겠죠?”
“안 생기는 게 이상하지. 네가 얼마나… 정말 얼마나 들이부었는데.”
등허리까지 질퍽한 액체가 흘러내릴 정도로 안을 가득 채우다 못해 넘칠 정도로 들이부었으면서. 선유는 그 감각을 되새기자 소름이 다 돋았다. 한주는 등을 떨며 웃다 선유가 손등을 신경질적으로 탁 내리치자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선 선유의 목덜미에 오소소 돋은 솜털을 살살 손끝으로 긁어내렸다.
여전히 그는 러트 중이었고, 제 품 안에는 제 향기를 뒤집어쓴 오메가가 있고, 언제든 더 안에 부어 넣어 줄 수 있었지만 선유의 뺨과 제 뺨을 겹치는 것에서 멈췄다. 잠깐 사이에 체력이 고갈된 선유가 잠들어 버린 덕분이었다.
제 몸에서는 선유의 향이 날까. 사정을 할 때마다, 노팅을 할 때마다 날개처럼 피어오르던 그 페로몬. 물에 싹 씻겨 내려가는 게 아쉬워서, 더 맡고 싶어서 코를 울리게 하던 것을 떠올리며 한주는 축 늘어진 선유를 침대에 제대로 눕혔다.
파양신고서, 그리고 다음 단계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결혼하자고 하던 그 담담한 목소리. 아직 비어 있는 칸 위를 손끝으로 더듬다 한주는 눈 안에 물기로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아 황급히 눈을 감았다.
열등감 따윈 느낄 수도 없을 정도로 선유가 좋았다. 앞서 걷는 그가 좋았고, 가끔 되돌아 봐주는 그가 좋았고, 손을 뻗어 주어서 고마웠고, 그를 따라가는 저도 좋았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좋아하는 것뿐이지만 괜찮았다.
아직은 납작한 배를 문지르며 한주는 가깝고 먼 미래를 그렸다. 도톰하게 부푼 선유의 아랫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같이 눈을 감았다. 깨어나면 결혼하자는 말에 다시 한번 대답해 주고 싶었다.
***€졸린냥
선유는 인사 팀장과 함께 사규를 펼쳐 놓고 얘기 중이었다. 매월 진행되는 팀별 인원수 조정 및 충원에 대해서 확정하고, 혹 사규에서 수정이나 추가 할 사항은 없는지 살피는 절차였다. 그중에서 선유는 임신 중 휴가 및 업무 환경에 대해서, 그리고 출산 휴가 및 육아 휴직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았다. 이것저것 캐어 묻자 인사팀장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대표님. 현재 저희 회사는 고용부 법령에 따른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을 정확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알아요.”
“게다가 다들 잘 이행하고 계시고요.”
깐깐한 태도의 인사팀장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선유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고, 때때로 실적 보고도 받는 것이었다.
“최근에 육아기 단축 근무도 시행했습니다.”
“그것도 그런데… 임산부에 대한 배려가 좀 적은 거 같아요.”
“출산 전후에 90일 유급 휴가가 있는데요?”
“그건 최소한 필요한 거고요. 재택근무를 할 수 있게 해 준다든가… 90일로 모자란 직원이 있을 수 있잖습니까. 아무래도 임신 초기에는 많이 힘들 텐데.”
“유급 휴가를 다 사용하고 나면 무급 병가 사용이 가능합니다. 게다가 저희는 병가 기준이 많이 낮아요.”
선유의 회사는 IT업계에서, 아니 IT업계가 아니더라도 최고 수준의 복지를 자랑했고, 시행도 굉장히 잘 되는 편이었다. 백업할 수 있게 여유롭게 인력을 운용했고, 평소 업무가 최대 수준의 약 80% 정도를 유지하기 때문에 휴가, 병가, 휴직도 자유로웠다. 원한다면 1년 무급 휴직도 가능했다.
그렇기에 인사팀장은 선유가 왜 굳이 자기를 불러 놓고 임신 중 재택근무며, 출산 휴가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여기서 복지 수준을 더 올리고 싶다는 건가. 이미 이정도만으로도 사람들이 물밀 듯 밀려와서 신규채용 담당의 메일함이 매일매일 터져 나가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 인사팀장은 순간 깨달았다. 선유가 오메가가 되었다는 것, 그건 이 사람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의미라는 것을.
“대표님 혹시… 임신하셨습니까?”
“…예?”
“유난히 신경 쓰시는 거 같아서요.”
“음… 아예 상관없는 얘기가 아니니까요.”
역시 눈치 빠른 인간 같으니. 선유는 이 인사팀장을 뽑은 이유가 이 눈치 때문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떠올렸다. 안경알 뒤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지만, 애써 무시했다.
선유는 임신을 확정받았고, 오늘로 5주 차였다. 오전 중에 한주와 함께 방문한 병원에서는 잔뜩 주의 사항을 전달받았고, 후기 발현의 경우 자주 병원에 방문해야 한다며 2주 뒤에 또 오라는 명을 받은 상태였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한주는 선유를 안으며 정말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수없이 고백했다. 정말 배 속에 아이가 생긴 거냐며 신기해했고, 겁 많은 제 등을 당겨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울었다. 울었다기보다는 눈시울이 붉어진 정도였으나 선유는 장난스럽게 그 눈가에 입을 맞춰 주었다.
선유는 혹여 한주가 자유롭게 지내고 싶어 하진 않을까 고민했던 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주는 각인한 알파였고, 제 옆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해했으니까. 아이를 가진 저를 숭배하고 사랑하며 저와 제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대할 준비도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미국에 갈 시간을 내지 못했기 때문에 선유는 전화로 임신 사실을 전해야 했다. 어머니는 한참 말이 없다 우선 생각을 좀 해 보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는데, 한주가 전화기를 빼앗아 가서는 삼십 분이나 다른 곳에서 통화를 하고 왔다. 심지어 아버지와도 대화를 한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묻는 선유에게 한주는 그저 있는 그대로 다 털어놓았고, 곧 결혼할 거란 소식도 전했다고 말했다. 그걸로 부모님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고 생각한 선유가 다시 부모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들도 한주와 똑같이 얘기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다 설명해 주었고, 그렇다면 그들은 이해를 해 보겠다고.
사실 선유는 만약 제 부모가 이해해 주지 못한다면 연을 끊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기에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믿기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얘기를 했기에 제 부모가 저리 유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 묻는 선유에게, 한주는 진심을 표하기만 했다고 말하며 입술을 맞대왔다.
“육아 중인 부모는 재택근무가 가능하지 않나요?”
“주당 근무 시간을 줄이는 거죠. 그래서 15시간 근무를 한다면 이틀만 회사에 나오고 3일은 쉬는 겁니다. 재택근무를 하면 집에 있는 시간도 근무 시간에 포함되기 때문에 급여가 훨씬 많아지겠죠.”
“임산부나 육아 중인 부모는 재택 근무할 수 있게 사규에 추가하면 안 되나요? 회사 자체 프로그램으로 업무 시간 측정이 가능하잖아요.”
“그러면 다른 사원들에게 역차별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또 그렇네요.”
“음… 임산부는 출산 휴가 90일을 다 쓰고도 만약 필요한 경우 병원의 소견서 등을 받아 와서 제출하면 재택근무가 가능하게끔 방향을 잡아 볼까요? 무급 병가는 가계에 악영향을 줄 테니까요.”
“그 정도면 좋을 거 같네요.”
“예. 그리고 어차피 대표님은 고용인이라서 사규랑 상관없다는 거 알고 계시죠?”
“아, 뭐… 그렇죠.”
“역시 임신하신….”
인사 팀장을 외면하고 선유는 다 식은 녹차 잔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던지듯 그것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풀 비린내에 속이 완전히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예, 으….”
이거… 설마 입덧이야? 선유는 뱃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느라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한 번 뒤집힌 배 속은 그대로였고, 점심으로 먹은 칼국수가 그대로 다 올라올 것만 같았다.
“아이고, 고생 많이 하시겠네.”
이미 아이를 둘이나 낳은 인사 팀장이 선유의 등을 두드려 주며 혀를 찼다. 그도 지독한 입덧에 시달렸던 터라 선유의 미래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최 대표님… 무슨 일이에요?”
문을 열고 들어서던 임 이사가 급히 다가와 물었다.
“…괜찮아요.”
선유는 손을 내저으며 일어났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두 사람에게 괜찮다며 한 번 더 강조하며 말했다.
“속이 안 좋으시면 일찍 퇴근하시는 게 좋겠는데요.”
“예, 아무래도….”
사무실 안쪽에 들여놓은 공기청정기를 작동시키며 선유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인사팀장을 돌려보내고 임 이사와 같이 마주 앉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이사님.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입덧은 둘째 치고 후기 발현 오메가인 선유에겐 더 중요한 게 있었다. 4개월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배가 부르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후기 발현 오메가는 거동이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래서 선유는 미리 회사에 얘기해서 제 업무 공백을 예방해야 했다.
가능하면 출근하고 재택근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의사는 쉽지 않을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일반적인 임산부가 겪는 일에 더하여, 관절이 늘어나고 아예 여유가 없는 공간을 만들어 내야 하기에 그가 진찰한 후기 발현 오메가는 전부 자리보전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선유는 간단히 임 이사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한주와의 관계도 최대한 건조하게 서술하자, 조금 놀란 듯 눈을 떴던 그는 어련히 선유도 고민이 많았을 거라 생각하고 공적인 일에 대해서만 집중했다.
“그럼 서너 달 뒤부터는 회사에 나오긴 힘드시겠군요.”
“예, 아무래도… 보통 4개월 차부터 통증이 온다고 하니까 한 3개월 남았어요.”
“입덧이나 그런 건 없으시고요?”
“지금까지는 괜찮았는데… 조금 전에 녹차에서 풀 비린내가 나서 좀.”
“…왠지 엄청 심하게 입덧하실 거 같은데요.”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저 멀리 밀어둔 녹차를 바라보며 선유는 한숨 쉬었다. 설마 물만 마셔도 토한다는 사례가 되는 건 아니겠지? 점심 칼국수는 잘만 먹었는데, 여전히 울렁거리는 윗배를 문지르자 임 이사가 빙긋 웃었다.
“그럼 대표님 스케줄은 3개월 뒤부터 전부 비우는 거로 하겠습니다.”
“전부 비울 필요까지는….”
“혹시 모르니까요. 일단 비워 놓고 괜찮으시면 업무 들어오시는 게 낫죠.”
“이사님만 매번 고생하시네요.”
“고생은요. 다만 대표님 빠지시면 인력 손실이 커서 몇 명 충원 요청하겠습니다.”
“다섯까지는 해드릴게요.”
“열 명은 필요할 거 같은데요.”
“제가 십 인분까지는 못하는데.”
“열 명도 모자라죠. 적시적기에 내려 주시는 결정과 단호함이 얼마나 큰데요.”
아부 아닌 아부에 기분이 좀 좋아졌다. 선유는 몇 주 전부터 이상한 우울함이 덮쳐 옴을 느끼곤 했는데 그것도 임신 때문이었던 것 같아서 기분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배 속의 아기 때문이라면 뭐든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인사팀장과 얘기를 좀 하겠다고 임 이사가 나갔고, 선유는 잠시 소파에 늘어져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제 어깨 위엔 보들보들한 담요가 덮여 있었고, 단단한 허벅지가 머리를 받쳐 주고 있었다.
“…한주야?”
“아, 형, 깼어요?”
“응… 몇 시야?”
“일곱 시요.”
“일곱 시?”
“너무 잘 자고 있어서 안 깨웠어요.”
임 이사가 나간 게 네 시쯤이었는데 낮잠을 세 시간이나 자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 앉자 한주가 선유의 뺨을 감싸고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이 초기에 더 조심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응, 조심해야지.”
“형, 감자떡 사 왔어요.”
“감자떡?”
“그저께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
같이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반투명한 떡을 보고 먹고 싶다고 한 걸 기억한 모양이었다. 검은색 비닐봉지에서 트레이를 꺼내 랩을 찢자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이것도 냄새 맡으면 혹시 속이 이상하려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괜찮았다.
“…탱글탱글하네.”
“처음 먹어 봐요?”
“응.”
다른 떡은 직원들이 결혼이나 상을 치르고 답례로 돌릴 때 먹어봤지만 감자떡은 처음이었다. 식감이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처음 입에 넣었을 때는 좀 거북했지만, 계속 씹다 보니 은은하게 단맛이 나서 맛있었다.
“너도 먹어, 한주야.”
“전 괜찮아요. 맛있어요?”
“응.”
없던 식탐을 다 부리며 선유는 양손에 떡을 쥐었다. 자기가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의식도 못 하고 한주에게도 하나 먹으라고 권했지만, 한입이라도 빼앗아 먹었다가는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더 사 올 걸 그랬나 봐요.”
여섯 개씩 두 팩, 총 열두 개의 감자떡을 단숨에 먹어 치우는 걸 보며 한주는 흐뭇하게 웃었다. 입술에 묻은 기름기를 닦아 주고 하는 말에 선유는 그제야 제가 정신을 못 차리고 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녁은 뭐 먹을까요?”
“한주가 먹고 싶은 거 먹어야지.”
“…고기 먹을까요?”
“응, 그래. 일 조금만 정리하고 가자. 낮잠을 그렇게 자 버려서.”
“예.”
선유는 자리로 돌아와 잔뜩 올라온 결재와 메일만 확인하기 시작했다. 열 개나 올라와 있는 전자 결재를 꼼꼼히 살피며 재가하고 메일함을 다시 열다 속이 쥐어짜이는 느낌에 헉, 신음을 뱉으며 허리를 숙였다. 또 아까처럼 뱃멀미가 나는 것만 같았다.
“형, 괜찮아요? 어디 안 좋아요?”
입을 틀어막은 채 선유는 한주를 밀치며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를 부여잡는 순간 위가 완전히 뒤집혔다. 뒤이어 들어온 한주가 떨리는 선유의 등을 두드리고 쓸어 주며 페로몬을 그 위에 천천히 부어 주었다. 코 끝에 조금 상쾌한 민트 향이 돌기 시작하자 아주 서서히 울렁거림이 가라앉았다.
“으….”
“형, 어디 더 만져 줄까요?”
“…아냐, 이제 괜찮아.”
“입덧인 거죠?”
“그렇… 겠지?”
식은땀에 젖은 선유의 이마를 닦아 주며 한주가 한껏 걱정스러운 눈으로 창백해진 얼굴을 살폈다. 괜찮다고 저를 반쯤 안은 팔을 토닥여 주었음에도 얼굴이 풀리지 않았다. 선유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얼른 고기 먹으러 가자고 한주를 종용했고, 고깃집에 가서도 갑자기 왕성해진 식욕을 자랑했다. 하지만 가게를 나와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부 다 토해내 버렸다. 지독한 입덧의 시작이었다.
***
문 열리는 소리에 선유는 반짝 눈을 떴다. 벌써 한주가 돌아올 시간이 되었나 싶어 시계를 봤더니 정말 그 시간이었다. 잠이 많아지고 몸이 축축 늘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진 게 벌써 몇 달째, 게다가 산발적인 고통이 시작된 건 지난주부터였다.
소리죽인 사람 기척이 방을 오갔고,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냄새에 과도하게 예민해진 선유는 모든 음식과 한주를 제외한 사람 냄새에 반응했기에, 한주는 밖에 나갔다 오면 항상 샤워를 하고 옷을 다 갈아입은 후 방에 들어오곤 했다. 초기에는 바디 워시 냄새에도 헛구역질을 하곤 했지만, 다행히 목욕용품 중에서 괜찮은 걸 찾아냈다. 식사도 과일만 입덧을 일으키지 않아서 간신히 그걸로 연명 중이었다.
“형.”
“왔어?”
“점심 먹었어요?”
“응.”
물 냄새나 목욕용품 냄새는 괜찮다고 해도, 한주는 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제 페로몬을 한껏 내뿜었다. 한주의 페로몬을 들이마시면 선유가 눈에 띄게 괜찮아지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나가기 전에는 방 안 가득히 페로몬을 채우고, 담요와 이불에도 잔뜩 흡수시켜 놓곤 했다.
“여름이한테 인사해.”
“…작은 아빠 왔어.”
쑥스러워하면서도 한주는 시키면 꼬박꼬박 잘했다. 태명은 단순하게 여름에 생겼다고 여름이가 되었지만, 둘이 그 이름을 짓기 위해 쓴 시간과 고민은 적지 않았다. 그 여름이 다 갈 때까지 아가라고 부르다 그제야 정했으니까.
둘을 부르는 호칭도 많이 고민해야만 했다. 오메가는 스스로를 엄마로 칭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선유는 그에 익숙하지 않았고 또 지운과 재한의 사례를 봐도 둘 다 아빠로 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어떻게 구분해서 부르느냐가 문제였는데, 둘이 나이 차이가 좀 있으니 큰 아빠랑 작은 아빠로 하기로 했다.
“과일은 다 먹었네요?”
“응. 근데 과일 다 깎아 놓고 갈 필요 없다니까.”
“그거라도 해야죠.”
방에 들여놓은 작은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온 한주가 얇게 껍질을 벗겨내고 조금씩 잘라 선유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것을 입만 벌려 받아먹으며 선유가 한주의 허리를 안았다.
“한주 냄새… 좋다.”
“형 냄새가 더 좋아요.”
임신 후의 페로몬은 좀 더 보송보송한 감촉이 났다. 한주는 즙이 잔뜩 묻은 선유의 입술을 닦아주고 또 사과를 먹였다. 꼭꼭 씹어 삼키는 선유의 몸에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향기가 났지만, 한주는 간신히 정말 간신히 참아냈다. 초식동물처럼 과일밖에 못 먹고, 쏟아지는 잠에 고개도 잘 못 가누고, 매일 온몸이 강제로 벌어지는 고통에 시달리는 제 오메가를 보며 성욕을 느끼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이었으므로.
다 먹은 접시를 밖에 내다 놓고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자 선유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가볍게 한주의 뺨과 입가에 키스했다. 한주는 단단하게 선유를 받쳐 안고 침대 위로 쑥 들어가 앉은 후 그의 앞에 앉혔다. 마치 전용 소파처럼 그렇게 폭 감싸 안아주는 게 선유는 너무 좋았고,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을 받았다.
“…저 휴학할까요?”
“응? 왜?”
“형이 너무 힘든 거 같아서요. 같이 있어 주고 싶은데.”
“아냐. 어차피 낮엔 잠만 자는데.”
“좀 안아 주면 괜찮잖아요.”
안아 주면 괜찮고, 안 안아 주면 아픈 건 사실이었다. 관절이 늘어나며 오는 고통이라고 해서 선유는 골반과 허리의 통증을 예상했었는데, 실은 손가락 끝마디뼈, 발가락까지도 아팠다. 신경이 다 연계되어 있어 어쩔 수 없다며 의사는 진통제를 처방해 주었지만, 선유는 먹지 않았다. 임신 중에 약물은 최대한 먹고 싶지 않았다.
“한주야, 저녁은 먹었어?”
“…….”
“먹고 와. 내가 밥 해 주면 좋을 텐데.”
냄새 때문에 음식을 하기는커녕 먹지도 못하면서 선유는 말만 잘했다.
“형한테 제가 어떻게 밥을 해 달라고 해요.”
“집에서 노는데.”
“노는 게 아니라 아기 키우고 있는 거잖아요.”
한주의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선유의 아랫배를 감쌌다. 아주 조금 도톰하게 배가 융기된 것이 느껴졌다. 한 달 전만 해도 임신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 지금은 만져 보면 분명히 안에 무언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달이 지나가면서 선유의 피부에선 은은하게 단맛이 났다. 임신한 이후론 더 달콤해져서 한주는 시간만 나면 목덜미나 어깨에 입을 대었다. 조심스럽게 핥고 강아지처럼 깨물면 선유는 작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아기 잘 크는 걸까? 내가 너무 못 먹어서.”
배를 조심스럽게 쓸어 주는 한주의 손등을 감싸 쥐고, 선유는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뭐든 먹으려고 애를 썼지만 5주 차부터 시작된 입덧은 그칠 줄 몰랐다. 과일 외에는 먹을 수 있는 게 없어서 병원에 가서 포도당 주사를 맞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잘 크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심장도 잘 뛰고.”
“그러긴 했지만….”
처음으로 같이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 둘은 서로의 얼굴만 마주 본 채 말 한마디를 못했다. 그리고 매번 받는 초음파 사진은 앨범에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었고. 선유는 병원에 갈 때마다 아이가 잘 크고 있다는 말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걱정을 완전히 놓지 못했다.
“제가 과일 더 깎아 줄게요.”
“내가 깎아 먹으면 돼. 한주야, 저녁 먹고 들어 와.”
“괜찮아요.”
“너라도 잘 먹어야지.”
“형이 무슨 토끼처럼 과일밖에 못 먹는데 제가 밥이 넘어가겠어요?”
“그러니까 더 잘 먹어야지.”
뺨을 토닥이며 선유는 한주를 달랬다. 한주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함에 떨며 선유를 꼭 안고 한 번 더 페로몬을 방안에 가득 채웠다. 어차피 선유가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터라 더 말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빨리 먹고 올게요.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해요.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도 연락하고요.”
“응.”
“사탕 사 올까요?”
“음… 청포도 맛.”
“청포도 맛 접수. 다녀올게요.”
한주는 선유의 입술에 키스를 남긴 후 잘 떨어지지 않은 걸음을 애써 옮겼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방에 들어와 선유의 입술을 집어삼켜 한껏 입 안에서 굴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가 또 앉아서 입을 맞추고 선유를 꽉 안았다.
“얼른 다녀와. 갔다 와서 몸 만져 줘.”
매일 밤 해 주는 안마를 떠올리며 선유는 얼른 다녀오라며 한주의 등을 밀었지만, 한주는 한참 후에야 저녁을 먹으러 나갔고, 선유는 그사이 잠깐 잠에 빠져들었다.
“…형?”
“응….”
잠이 많아진 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무료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니까. 귀찮을 텐데 밖에 나갔다 오면 꼬박꼬박 샤워를 하고 방에 들어오는 한주가 조심스럽게 선유의 몸을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아픈 곳 있으면 말해요.”
“응… 시원해.”
발가락도 하나하나 손바닥으로 눌러 접어 주고, 손도 한참 체온이 옮겨갈 정도로 오래 문지르고 만져 주었다. 그러면서 관절 마디마다 입 맞춰 주고 꼭꼭 씹어 주는 한주의 머리카락을 선유는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졸려요?”
“응… 아니.”
“형 방금도 졸았어요.”
“잠이 너무 많아져서 죽겠어.”
“많이 자고 많이 먹고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제 많이 먹을 수만 있으면 되겠네요.”
“입덧 이제 가라앉을 때 된 거 같은데.”
한주는 선유의 팔다리를 다 풀어 주고, 몸통을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손길로 만지기 시작했다. 어깨의 뭉친 근육을 주무르고 윗배는 가볍게 누르며 장기를 풀었다. 안에서 슬슬 장기가 밀리는 시기라 선유는 가끔 배가 꼬이는 것처럼 아파했기 때문이었다. 한주는 마지막으로 선유의 아랫배는 체온이 옮겨갈 정도로 오래 문질러주었다.
“일찍 자요, 형.”
“응, 그래.”
한주는 선유의 몸을 뒤에서부터 감싸 안았다. 몸의 어느 부분도 품 밖으로 나가는 곳이 없게끔 마치 맞춤 이불처럼. 선유는 뒷머리를 한주의 가슴과 어깨 부근에 문지르며 애교 아닌 애교를 부렸다. 보드라운 고수머리가 턱밑을 간질여서 한주는 낮게 웃으며 선유의 몸을 좀 더 제 품 안으로 들였다.
“한주야.”
“예.”
“너 조금… 섰는데.”
“…불가항력이에요.”
“음… 괜찮아? 사실 넉 달째 거의….”
“괜찮아요. 러트도 안 오고.”
각인한 오메가가 임신 중인데 러트가 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러트와 상관없이, 아무리 한주가 현자처럼 굴어도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선유를 안고 세우지 않을 순 없었다.
“입으로 해 줄까?”
“…아녜요.”
“내가 해 주고 싶은데.”
“형.”
“응?”
“오늘은 말구요.”
“…싫어?”
“형 지금 열나요. 걱정되어서 그래요.”
“열 나?”
“그러니까 얼른 자요.”
제 아래를 더듬는 손을 잡아 꼭 쥔 한주가 선유의 아랫배만 아주 살살 도닥였다. 정말로 몸이 따끈해서 걱정스러웠다.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던 선유가 곧 완전히 잠들었고, 한주는 선유의 페로몬을 들이마시며 제 페로몬을 뱉어 주었다. 그리고 그도 선유의 곤한 숨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새벽 세 시쯤, 한주는 선유가 제 품을 빠져나가는 감각에 눈을 번쩍 떴고,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침대 아래에 널브러진 그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
“아, 안 깨우려고… 했는데…. 으, 읏….”
선유는 고통스러운 듯 몸을 말며 신음 소리를 냈다. 덜덜 어깨를 떨다 또 한 번 땀을 쏟는 선유를 그대로 안아 들고 한주는 침대에 앉았다. 등을 감싸자 옷이 척척하게 느껴질 정도로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아기처럼 품에 안고 다시 손가락 끝부터 만져 주기 시작하자 선유는 작게 비명까지 질렀다.
이 정도로 페로몬을 부어 주면 통증이 꽤 경감될 텐데 이렇게까지 아파하다니, 한주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선유의 몸을 매만져 주고 입을 맞춰 주었다. 그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주의 목덜미에 묻고 있던 얼굴을 간신히 들고 선유가 중얼거렸다.
“미안….”
“…형이 왜 미안해해요.”
“너 내일 학교도 가야 하는데….”
“제가 대신 아파해 줄 수도 없는데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한주는 선유의 골반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주며 이를 으득 갈았다. 말리려는 듯 저를 부르는 선유의 목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제 오메가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대신 아파주지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게 견딜 수가 없었다. 배 속에 있을 아기가 미울 정도였고, 이렇게까지 아플 줄 알았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 아무리 선유가 원해도 임신을 반대하고 싶었다.
“한주야.”
“…예.”
“형 봐봐.”
“저 형 아픈 거 못 보겠어요.”
“그래도… 잠깐만. 응?”
다정하게 뺨을 감싸는 손이 뜨거웠다. 외면하고 있던 시선을 조금 내리자 눈이 마주쳤고, 선유는 한주를 보며 짧게 미소 지었다.
“여름이 미워하지 마.”
“…형.”
“아기 때문 아니잖아.”
“아기 때문이죠. 아니면 형이 이렇게 아플 일도 없는데.”
“다 나 때문이지. 내가 아이 갖자고 했고, 너는 그때도 내가 아픈 거 싫다고 했는데 내가 우겼잖아.”
“…형, 너무 치사한 거 알아요? 그렇게 말한다고 제가 형을 원망할 수 없다는 거 알면서.”
“몇 달만 고생하면 돼. 조금만… 응?”
선유는 정말 치사했다. 한주는 제 입술에 와 닿는 물기 어린 감촉에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부드럽고 다감한 목소리로 저를 달래고 조련하는 게 너무나 익숙한데, 저는 거기서 벗어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배 속을 차지한 아기가 사랑스럽기도 하고, 또 반대로 너무 밉기도 했다. 그 이중적인 감정을 애써 삼키며 한주는 제 요구사항을 드러냈다.
“아픈 거 숨기지 말아요.”
“하지만….”
“밤에 아프면 저 꼭 깨우고, 낮에 저 없을 때 아프면 꼭 전화해야 해요.”
“…알았어.”
“만약 안 그러면 저 화낼 거예요. 여름이한테도 화낼 거야.”
“알았다니까.”
쉬지 않고 몸을 주물러준 덕분에 통증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서서히 페로몬의 진통 효과도 발휘되고 있었다. 선유는 한주의 가슴팍에 뺨을 대고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등을 쓸어 주는 커다란 손에 그 숨소리도 천천히 작아졌다.
이불을 다시 덮어 꼭꼭 감싸 준 후 한주는 이제 좀 평온해진 선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아직 제 말을 듣지 못할 배 속의 아가한테 부탁했다. 제발 큰 아빠 덜 아프게 해 주고, 빨리 커서 나오라고.
***€졸린냥
새벽만 되면 아기가 배를 쿵쿵 찼다. 그러다 깜짝 놀란 선유와 그리고 배에 손을 얹고 있던 한주도 같이 눈을 떴고, 곧 기지개를 켜는 듯 아기가 배 속에서 부르르 떨었다. 그 느낌이 너무 생소하고 신기해서 한주는 시도 때도 없이 선유의 배 위에 귀를 대고 아이가 또 움직이길 기다렸고, 말을 걸었다. 목소리를 알아듣는 건지 다른 이들은 아무리 얘기해도 움직이지 않는 아기가 선유와 한주의 목소리를 들으면 툭툭 배를 쳤다.
“형, 배 안 아파요?”
“가끔 아주 조금 아프게 할 때도 있는데, 아빠 아프다고 하면 곧 얌전해져. 애가 순한 거 같아.”
둥글게 부풀어 오른 선유의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한주가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갑자기 배가 커지기 시작할 때는 만지면 터질까 봐 무섭다고 하더니 금세 적응해서 만지고 쓰다듬는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형, 침대 아래로 다리 내려 봐요.”
“응.”
선유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한주가 매일 빠짐없이 해 주는 마사지 시간이었다. 처음엔 어떻게든 혼자 만져 보려고 했는데 한계가 있었다. 종아리부터 발등까지 다 붓는데, 허벅지 위에 다리를 얹고 만져도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서 시원찮았고 그 자세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샤워를 해도 발을 제대로 닦지 못한다고 했더니, 밤마다 발을 씻겨 주는 것도 한주의 일이 되었다. 어디서 대야를 하나 구해 와서 따뜻한 온수로 씻겨 주고, 발가락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 꼭꼭 주물러 주기도 했다. 그 덕에 아침에 다리가 붓는 정도도 많이 줄었다.
“발등 귀여워요.”
한주가 선유의 발등에 쪽,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리고 선유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졸려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선유가 그에 맞추어 같이 웃었다.
그리 티는 내지 않았지만, 선유는 제 외견에 자신감이 있는 편이었고, 좋은 옷을 입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임신하면서 몸이 붓고 배가 나오고 팔다리 근육이 빠지기 시작하자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자신감이 많이 줄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챘는지 한주는 선유의 어디가 귀엽고 예쁘고 하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알고 하는 건지 모르고 하는 건지, 선유는 제 발과 종아리를 만져 주느라 정신이 없는 한주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형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응… 괜찮아.”
“이제 입덧 거의 끝났으니 잘 먹어야 하는데.”
입덧할 때 선유가 더 미쳐 버릴 것 같았던 이유는, 먹을 수 없는데 먹고 싶은 음식이 계속 생각난다는 것이었다. 냄새만 맡아도 위액까지 토하면서, 식탐이란 식탐을 다 부리고 토하다 혼절까지 했을 정도로. 그렇게 몇 달을 고생하다 지난주부터 딱 입덧이 없어졌는데, 그와 함께 식욕도 사라졌다.
“의사 선생님이 몸무게 더 안 늘면 입원해야 한다고 했어요.”
“응. 알아. 안 먹는 건 아니잖아.”
“더 많이 먹어야죠. 지금쯤이면 5kg은 몸무게가 늘어야 한다는데, 그대로잖아요.”
한주는 한껏 걱정을 실어 말했다. 삼시 세끼를 다 먹긴 하지만, 깨작대는 선유가 마음에 안 드는 게 분명했다.
“너 몇 달 동안 그렇게 고생했으면서… 내가 이제 고생 안 시키려고 하는데 왜 그래.”
“더 시켜주세요. 아직도 과일만 많이 먹잖아요.”
한주는 성인이 되자마자 운전면허를 따놓은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운전할 수 없었다면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을 거고, 선유에게 빠르게 음식을 조달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밤에 자다가 아파서 깨면 선유는 매번 뭔가 먹고 싶단 얘기를 했고, 한주는 선유를 달래 잠시 재워놓고 나가서 음식을 사 와야만 했다.
“우선… 아침 먹자.”
선유는 물장구를 치듯 발을 앞뒤로 움직였다. 무료함에 생긴 장난이었다. 한주는 조금 붓기가 줄어든 발을 몇 번 더 만져 주고 그를 부축해 침대에서 내려오게 해 주었다. 그리고 선유가 팔을 벌렸다. 안아서 데려가 달라는 의미였다.
한주는 방학을 하면서 모든 시간과 관심을 전부 선유에게 쏟기 시작했다. 학기 중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정말, 완전히, 온 힘을 다해서. 선유는 그런 그가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몰랐고, 해 줄 수 있는 게 애정 표현밖에 없어서 생전 없었던 어리광까지 부리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한주가 좋아서 미치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안아 달라고 하고, 뺨을 맞대고 키스를 조르고, 같이 목욕을 하자고 하고, 매일 같이 이어지는 어리광에 한주는 정신을 못 차렸다. 지금처럼, 겨우 몇 발 걷지도 않는 거리를 안아 달라고 하는 게 사랑스러웠다.
“무화과 잼 맛있어요.”
한주는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 위에 선유의 모친이 직접 만들어 보내준 무화과 잼을 잔뜩 발라 선유의 손에 쥐여 주었다. 식탁 아래에서 발과 다리를 얽어 가며 장난을 치고 선유는 제 몫의 빵을 천천히 다 먹어 치웠다.
“형, 이거 더 먹어요.”
깨끗하게 씻은 체리가 선유의 입에 들어왔다. 새콤달콤한 과육을 우물우물 씹자 입 앞에 손바닥이 내밀어졌다.
“씨.”
한, 두 살짜리 애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선유는 한주의 손바닥에 체리 씨를 아무렇지 않게 뱉고 아주 연하게 내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에 지운이랑 임 이사님 올 거야.”
“…왜요?”
“일 때문에.”
2월은 항상 가장 정신없는 시기였다. 전년도 결산부터, 올해 계획 확정, 주주 총회 준비… 그 외에도 내부적으로 정비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선유는 임 이사를 대결자로 지정해 두었고, 이미 십 년을 넘는 시간 동안 이 회사에서 일해 온 그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선유의 결정이 필요하긴 했다.
“예민해지지 마.”
“…제 마음대로 안 돼요.”
제 아이를 밴 오메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알파는 다른 알파를 적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선유는 한주와 같이 병원에 가면 좀 웃겼다. 모든 알파들이 자기 오메가만 생각하고 있는 게 눈에 빤히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서로를 엄청나게 경계하는 아이러니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소파로 돌아온 선유는 노트북을 켠 후 간신히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다 아무래도 불편해서 노트북은 옆에 치워놓고 태블릿을 켰다.
“형, 좀 누워 볼래요?”
“응?”
“크림 바르게요.”
한주의 요청에 선유는 모로 누워 태블릿으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원피스 형태의 잠옷을 위로 슥 끌어 올리고 한주는 손바닥에 크림을 덜어 데운 후 선유의 배에 발라 주었다. 어느 특정 위치에 손이 닿을 때마다 콩콩 두드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여름이가 너 되게 좋아하는 거 같아.”
“그래요?”
“응. 내가 만지면 그렇게까지 반가워하진 않는데.”
배 위를 손끝으로 살살 긁어 주자 간지럽다며 선유가 웃었고, 배 속의 아기도 그에 감응하듯 부르르 떨었다. 신기하고 기쁜 마음에 한주는 손을 떼어내지 못했다.
오전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12시가 넘자마자 초인종이 울렸다. 벌떡 일어난 한주가 문을 열어 주었고, 양손 가득 뭔가를 든 지운과 임 이사가 반가운 얼굴로 들어섰다.
“어서 와.”
“와, 얼굴 진짜 오랜만에 본다, 너.”
“어서 오세요, 이사님.”
“고생이십니다.”
허리를 누르며 선유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둘 다 황급히 그냥 있으라며 손을 다 내저었다. 한주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둘에게서 짐을 받아들었다.
“저게 다 뭐야?”
“선물하고 점심.”
“직원들이 준비한 거예요.”
입덧이 시작되고 선유는 아예 몇 달간 집 밖에 나가지 못했고, 냄새에 민감해져서 사람을 만나지도 못했다. 그러니 의사와 한주 외의 사람을 보는 건 그 이후로 처음이었다.
“고마워요.”
“서로 선물 안 겹치게끔 샀어요.”
쇼핑백 하나를 열어 보니 알록달록하게 포장된 선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또 다른 하나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품들이 채워져 있었고.
“재한이가 챙겨 줬어.”
“응, 고맙다고 연락해야겠다.”
지운이 사 온 설렁탕을 데워 넷이 둘러앉아 점심을 먹은 후, 선유는 그들에게서 일거리를 받아들었다. 서류를 펼쳐 들자마자 한주가 담요를 가져와 선유의 어깨에 둘러 주었고,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옆에 앉아 뭐 수발들 일 없나 살폈다.
“일하셔도 되는 겁니까?”
“예?”
“좀 마르신 거 같은데.”
“괜찮아요.”
괜찮다는 선유의 말에 한주의 눈이 조금 사나워졌다. 지운이 그런 한주를 보며 좀 웃었고, 그는 더 뾰족해진 눈길을 받아야만 했다.
“저 없으니 더 잘되는 거 같네요.”
“설마요.”
“지난 반기 때 예상했던 것보다 실적이 엄청 올랐는데요.”
“그건 여기 신 대표님이 워낙 잘해 주신 덕분이죠. 대형 수주를 세 개나 더 따오셨거든요. 그 덕에 저희는 개고생했지만.”
인사이동 계획과 조직 개편 얘기를 끝내고 성과급 및 예산 배정까지 확정하자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그러는 동안 한주는 선유의 옆에 앉아서 손끝이 노랗게 될 정도로 귤을 한 박스 다 까주었고, 선유는 익숙하게 그가 까준 귤을 입을 벌려 받아먹기만 했다. 둘의 모습을 보며 이따금 임 이사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고, 지운은 입을 떡 벌렸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럼 임 이사님 사안은 다 끝난 거죠?”
“예.”
“너무 늦게까지 했네요.”
“괜찮습니다. 신 대표님이 문제죠. 아직 시작도 못 했으니….”
“그쪽은 제가 할 게 별로 없을 거라서요. 저녁 드시고 가실래요?”
“어우, 아닙니다. 쉬셔야죠. 대표님은 계속 휴직하실 건가요?”
“이제 입덧 가라앉았으니 좀 봐서요.”
“알겠습니다. 쉬세요.”
임 이사를 돌려보내고 선유는 잠시 소파에 누웠고, 한주가 바로 따라와 선유의 머리를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괜찮냐.”
“허리가 좀 아파서.”
“재한이도 허리 아파하더라.”
“네 거는 보고 메일로 답 줘도 되지?”
“그래.”
한주는 선유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주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떼어냈다. 입을 맞추고 싶어서 안달하는 게 눈이 보이는데 지운이 있어서 그러지 못하고 참는 게 대견했다. 선유는 한주의 허벅지를 토닥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많이 힘들었냐.”
“지난주까지는 좀… 지금은 괜찮아.”
“그래도 한주가 많이 도와주는 거 같네.”
“없으면 못 버텼어.”
“집안에 페로몬 정말 잔뜩 뿌려 놓고….”
선유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이는 걸 보던 한주가 조용히 지운에게 그만 가 달라고 부탁했다. 체력이 급격하게 줄어든 터라 온종일 앉아서 서류를 보고 머리를 쓴 게 꽤 힘든 일이었던 게 분명했다. 선유가 계속 졸다 깨는 걸 본 지운이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일어나지 말고 있어. 그냥 가면 되니까.”
“저녁이라도 같이….”
“졸려서 말도 잘 못 하면서 무슨 소리야. 너도 그냥 앉아 있어. 베개 역할 잘 해 줘야지.”
지운의 뒤에 대고 인사를 하려고 팔을 슥 들어 올렸다가 선유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한주는 순식간에 잠드는 그를 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내려다보다 얕은 한숨을 쉬었다. 저녁도 안 먹고 자다니, 밤에 일어나서 뭔가 먹을 만한 걸 준비해 둬야 했지만 방금 잠들어 버린 선유를 위해 조금 더 이렇게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선유는 일할 때 아주 생기 있고 행복해 보였다. 아마도 다음 주부터는 다시 일을 나가겠다고 할 텐데, 한주는 그때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유가 집밖에 나가지도 못했을 때, 한주는 그의 고통에 감응하고 안타까워했지만 그러는 동안 가끔 마음 깊은 곳에서 기묘한 만족감이 피어오르곤 했다. 마치 아기처럼 안고 달래주면 그는 저밖에 없다는 듯 매달려 왔고, 제 페로몬과 쓰다듬음에 통증이 가라앉는 걸 보면 그의 세상에 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것만 같았다.
나만 알고, 나만 느끼고, 나만 생각했으면 좋겠다. 한주는 그런 이기적인 욕심을 꾹꾹 씹어 삼키며 선유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아무리 소파가 편하다고 해도 침대보다는 못할 터였다.
“한주…?”
“예.”
선유는 잠꼬대를 하며 한주의 목에 팔을 감아왔다. 배가 이렇게나 많이 나왔는데 무게가 하나도 늘지 않은 게 정말로 걱정스러웠다. 끙끙대며 자리를 잡은 선유가 다시 고른 숨을 뱉으며 자기 시작했고, 한주는 그 옆에 앉아 차가운 손을 잡아 주었다.
***
여전히 한주는 밤에 잘 때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선유가 매일 밤 앓으면서 잠 깨우는 게 싫다고 멋대로 침실을 빠져나가 거실 소파에서 자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둘은 몇 번 말다툼을 했고, 더 감정이 나빠지기 전에 선유의 통증이 사라져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오늘 한주는 제 품 안이 텅 빈 느낌에 눈을 떴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새벽 네 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옷장 앞에서 화들짝 누군가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형.”
“깜짝이야.”
“제가 더 놀랐어요. 배고파요?”
“으, 응….”
두꺼운 카디건을 챙겨 입은 선유가 쑥스러운 듯 웃으며 좀 조급한 얼굴로 차키를 챙겨들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한지 손까지 덜덜 떨었고, 다리도 그냥 놔두질 못했다.
“어디 가려고요. 제가 사 올게요.”
“잘 없을 거 같아서. …너 고생하잖아.”
“형은 운전하면 안 돼요. 키 주세요.”
한주는 선유를 데려다 다시 침대 위에 앉히고 차키를 빼앗았다. 선유는 한주가 갈아입혀 놓은 잠옷 위에 카디건만 하나 걸쳤고, 머리는 새집을 지은 채였다. 정말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었다.
“뭐 먹고 싶어요?”
“나 복숭아.”
“…복숭아요?”
“…응.”
복숭아라니, 한주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겨울에 복숭아를 대체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제가 말해놓고도 민망했는지 선유가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한주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하나 더 있는데….”
급히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는 한주를 따라 나온 선유가 오물오물 입술을 깨물었다. 재촉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선유는 목을 끌어안고 언제나 목마른 애교를 부렸다.
“냉면도 먹고 싶어.”
“…냉면.”
“응.”
“여름이가 이름값을 하네요.”
“…겨울이라고 지을 걸 그랬나?”
낮게 웃으며 한주는 선유에게 입을 맞추고 신발을 눌러 신었다. 오랜만에 제 오메가가 먹고 싶다고 한 거니까 어떻게든 구해 봐야했다.
“없으면 안 사와도 돼.”
“…비슷한 거라도 사 올게요. 귤 먹고 있어요, 형.”
한주가 급하게 뛰쳐나갔고, 한참 현관에 서 있던 선유는 천천히 걸어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항상 가득 과일이 담겨 있는 바구니에서 귤을 꺼내 까기 시작했다. 이 귀찮은 걸 한주는 쉬지 않고 까주는 데다가 실처럼 붙어 있는 흰 속껍질까지 떼어 주곤 했다.
귤을 세 개쯤 까먹었을까, 왠지 더 허기가 심해졌다. 신경질적으로 손끝을 깨물어대던 선유는 냉장고를 열어 그 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먹고 싶은 게 없었다. 배는 고프고 맹렬하게 무언가 먹고는 싶은데 먹고 싶은 건 없다니.
역시 복숭아랑 냉면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건가. 이 밤에 먹을 걸 사 오라고 하는 게 너무 미안했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시키지 않으면 한주는 더 풀이 죽었다. 선유는 통통 배를 장난치듯 두드리는 아이한테 말을 걸었다.
“여름이라고 부르니까 냉면이랑 복숭아 먹고 싶어 하는 거야? 작은 아빠 고생시키면 안 돼.”
귤을 하나 더 까서 먹으며 선유는 배 속에서 난리가 난 아이를 달랬다.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이었다. 조금 불안해져서 한주의 향이 배인 담요를 가져다 덮고 허공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예전의 한주가 떠올랐다.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때의 한주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 가만히 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는 기분. 선유는 가끔 밖에서 차 소리가 나고 헤드라이트 불빛이 스쳐 들어올 때마다 베란다로 시선만 돌렸다.
창문으로부터 연한 주황색 햇빛이 들기 시작했을 때, 선유는 아무것도 못 구했어도 괜찮으니 어서 한주에게 돌아오라고 연락을 했다. 그리고 몇 분 후, 한주는 양손 가득 뭔가를 잔뜩 든 채로 들어섰다.
“…이게 다 뭐야?”
“냉면은 구했는데, 복숭아가… 없어요. 대신에 복숭아 들어간 거 다 사왔어요.”
한주가 급하게 설렁탕집 로고가 박힌 비닐봉투를 열어 따로 포장된 면과 육수를 꺼냈다. 선유는 한주의 뒤에 붙어서 구경을 했다.
“진짜 냉면이네? 인스턴트도 괜찮은데.”
“원래 새벽엔 안 해 준다는데 형이 엄청나게 먹고 싶어 했다고 졸라서 사 왔어요.”
그러니까 뽀뽀해 달라고, 톡톡 뺨을 두드리기 무섭게 선유가 까치발을 들어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한주는 부르르 끓는 물에 면을 삶아내고 아직 얼음이 어린 육수를 부어 냉면을 한 그릇 뚝딱 만들었다. 선유는 차가운 그릇을 받기 무섭게 식초를 주르륵 과하게 붓고 허겁지겁 면을 입에 넣었다.
“맛있어요?”
“…응, 너는?”
입 안 가득 담은 면을 간신히 삼키고 선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배가 많이 고팠는지 선유의 젓가락질은 급했고, 한주는 저는 괜찮으니 천천히 먹으라며 선유의 등을 쓱쓱 쓸어 주었다. 그러면서 제가 사 온 오만가지 복숭아 관련 음식을 식탁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통조림, 병조림, 잼, 파이, 쿠키, 음료수, 사탕, 케이크, 푸딩, 가향 홍차, 요거트, 아이스크림까지. 식탁을 가득 채운 것을 보며 선유가 마지막 냉면 면발을 삼켰고, 시큼한 냄새가 나는 국물까지 전부 다 마셨다.
“뭘 얼마나 사 온 거야.”
“생과가 없어서요.”
“나 파이 먹을래.”
한주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파이를 한 입 거리로 잘라서 선유의 입에 넣어 주었다. 파이 반절을 순식간에 해치우고는 선유가 병조림을 가리켰다.
“병조림도요?”
“응.”
그렇게 병조림도 반 이상 먹어 치우고, 푸딩 하나와 음료수까지 다 먹고 나서야 선유는 죽을 것 같았던 허기가 조금 가라앉는 걸 느꼈다. 하지만 먹고 싶었던 건 생물 복숭아였고, 그 충족되지 않은 욕구에 왠지 눈물까지 날 것 같았다.
“형, 괜찮아요?”
“…응.”
“복숭아 먹고 싶어요?”
“아냐, 괜찮아.”
한주가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선유는 애써 괜찮다고 스스로와 아기를 달랬다. 이 한겨울에 복숭아를 대체 어디서 구하겠는가, 하필이면 먹고 싶은 게 복숭아라니. 배를 문지르며 아직 불만스러운 듯 통통거리는 아기를 설득시키려 애썼다.
“여름아,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없어? 작은 아빠가 사다 줄게.”
조용한 목소리로 한주가 속삭이자 배 속이 조용해졌다. 몇 번 더 말을 붙여도 고요해서 이제 괜찮아진 건가 싶었다. 벌써부터 아이가 한주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여름이는 이제 괜찮은가 봐.”
“형은요?”
“나는 원래도 괜찮았어.”
이를 닦고 소파로 옮겨 앉아 한주는 선유의 배 위에 손바닥을 대고 잠시 기다렸다. 그러자 또 쿠룩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긁는 듯한 감촉이 들었다. 확실히 아까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아까는 배고프다고 막 엄청 두드렸거든.”
“안 아팠어요?”
“여름이는 아프게 안 해.”
배가 부르니 이젠 다른 게 문제였다. 선유는 복숭아 맛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며 슬쩍 한주에게 기댔다. 아래가 간지러웠고,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리게 되었다. 페로몬이 슬슬 흘러나오는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곧 한주도 느낄 게 뻔했다. 하지만 애써 선유는 그 기분을 참아냈다. 배 속에 아기가 있는데 섹스를 하는 건, 아직은 좀 쑥스러웠다.
“선물 같이 볼까?”
임 이사와 지운이 들고 온 쇼핑백은 한주가 소파 옆에 차곡차곡 정리해 두었다. 하나를 끌어와 품에 안고 열자 궁금증이 인 한주가 선유의 어깨에 턱을 대고 쳐다보았다. 포장지를 찢고 작은 박스를 연 순간 손바닥만 한, 사람 옷이라곤 믿을 수 없는 크기의 배냇저고리가 나왔다.
“…아기 옷인가 봐.”
“너무 작지 않아요?”
“작으니까 아기 옷이겠지?”
“아기가 이렇게 작아요?”
연한 노란색과 흰색이 섞인 옷은 정말 보드라운 감촉이었다. 선유는 신기한 얼굴로 그걸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접어놓고 또 다른 선물을 꺼냈다.
“이거… 신발이에요?”
“그런가 봐.”
“이것도 너무 작은데… 아기가 정말 이렇게 작은 거예요?”
계속 아기가 이렇게 작은 거냐고 묻는 말에 선유가 어깨를 떨며 웃었지만, 그에 신경도 쓰지 않고 한주는 제 손가락에 신발을 끼웠다. 손가락에 꼭 맞는 신발은 너무 작아서 정말 이상한 기분을 들게 했다.
“너 처음 데리고 와서 옷이랑 신발 사러 갔을 때도 되게 신기했는데.”
“작아서요?”
“응. 등은 내 한 뼘 밖에 안 되고, 신발도 내 손 위에 다 올라갈 정도로 작아서 옷 펼쳐 놓고도 신기해서 한참 봤다니까.”
조그만 신발도 정리해 두고 한주와 선유는 머리를 마주 대고 앉아 한참 쇼핑백 안의 선물을 열었다. 젖병, 젖병 씻는 도구, 양말, 모자, 그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천이 있어서 검색까지 했더니 속싸개라는 걸 알았다.
“따로 쇼핑 안 해도 되겠어요.”
“그러게. 이렇게 다 사줄 필요 없는데.”
선물마다 들어 있던 축하 카드를 모아서 커피 테이블 밑에 넣어 두고, 선유는 마지막으로 지운이 가져온 쇼핑백을 열었다. 뭔가 이쪽 물품은 방향이 좀 달라 보였다. 지금까지는 아기를 위한 것이었다면, 이 물건들은 대부분 선유를 위한 것들.
“손목보호대?”
“이건 압박스타킹인 거 같은데요.”
“이건 뭐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닐 팩을 뜯자 또 낱개로 포장된 무언가가 안에서 떨어졌다. 이리저리 그걸 돌려 보던 선유는 그제야 비닐봉지에 적혀 있는 글자를 발견했다. 한주도 그걸 확인하고 소리 내어 읽기까지 했다.
“…수유패드?”
“…….”
“…….”
“오메가도 조금은 나온다고 하니까….”
아마도 벌써 아이를 둘이나 낳은 재한이 챙겨 준 게 분명한 물품을 쇼핑백에 아무렇게나 집어넣으면서 선유는 왠지 붉어진 듯한 얼굴을 문질렀다. 이미 갈 데까지 갔으면서 이런 게 왜 부끄러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제 몸에 일어날 리 없을 거라 생각했던 변화들이라서 적응이 덜 된 거겠지, 라고 자기합리화하며 화끈거리는 얼굴에 손 부채질을 하다 한주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어쩐지 형 요새 조금… 가슴이 부드러워졌어요.”
“…어?”
“마사지해 주면서 만지면 좀 말랑하던데.”
달아오른 뺨을 제 어깨와 가슴팍에 문지르는 제 오메가를 가만 내려다보다 한주는 조금 마른 듯한 선유의 턱을 살짝 잡아 올렸다. 그리고 물기가 어려 반짝이는 눈동자와 한참 눈을 맞추고 있다가 입을 맞추었다. 건조한 입술을 가볍게 빨아주자 곧 팔이 목을 감아왔고, 선유는 아예 한주의 위로 올라와 앉았다.
“…확인해 볼래?”
한주는 건조하게 제 몸의 변화를 말해 주었을 뿐인데, 별 것도 아닌 거에 달아올라서 선유는 단 숨을 다 내뱉었다. 아까만 해도 아기 때문에 섹스는 좀 그렇다고 생각했던 게 휘발되고 완전히 소실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커다란 버튼 몇 개를 풀어내자 조금 도톰해진 가슴이 드러났다. 그 주변을 손끝으로 살살 누르다 한주는 한입에 유두를 삼켰다. 주변 살집까지 같이 쪽 빨아 당기자 다급한 손길로 선유가 머리를 안아왔다.
몇 달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성적인 접촉, 히트만큼은 아니지만 꽤 풍부하게 흘러나오는 페로몬에 한주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것만 같았다. 머리 위에서 앓는 듯한 소리를 내는 선유가 사랑스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형, 너무 예뻐요.”
단추를 몇 개 더 풀자 둥글게 솟은 배가 드러났다. 선유는 매일매일 변하는 본인의 몸에 익숙해지지 못한 듯했지만, 한주에겐 매일매일 더 예쁘게만 보였다. 찬탄하는 말을 내뱉지 않고선 못 버텼고, 솔직하게 쏟아 내면 선유의 얼굴에 안도가 들어찼다.
한주는 선유의 다리 사이를 눅진하게 빨아내며 터져 나오는 과일 향 체액을 마셨다. 잔뜩 젖어 떨리는 손으로 선유가 한주의 팔과 어깨를 잡아채며 제발 넣어 달라고 채근할 때까지, 손으로 아래를 벌리며 애원할 때까지.
“…여름이 다치면 어떡해요.”
“괜찮, 응…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 어.”
아무리 해도 한주가 망설이자 선유는 그 어깨를 밀어 눕히고 이미 설만큼 선 것을 천천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예 녹아 버린 안은 들어오는 대로 벌어졌고, 약간의 둔통은 페로몬이 해결해 주었다.
무릎으로 소파를 짚고 앉아 더 깊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 선유는 한주의 성기가 자극점을 긁고 지나가자 그대로 무너졌고, 남아 있던 것이 완전히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꽉 닫힌 곳을 찌르는 감각에 등을 새우처럼 굽히며 경련했고, 이미 한주가 몇 번이나 빨아 사정시킨 성기에선 물이 한 번 더 튀었다.
뭔가 불만스럽다는 듯 배 속에서 통통통 소리가 났다. 놀란 선유의 입에서 딸꾹질이 나오기 시작했고, 어깨까지 들썩였다.
그럴 때마다 성기가 쥐어짜지는 감각에 신음하던 한주는 선유의 등과 허리를 받치고 상체를 세워 일어났다. 그리고 놀란 아이를 달래듯 선유의 배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고, 곧 신경질적인 태동은 멈췄다.
“…전 정말 참고 있었다고요.”
“응, 응….”
선유가 자신의 뺨을 애타게 쓰다듬으며 대답하자 한주의 몸에서 페로몬이 말 그대로 터져 나왔다. 참고 있었다는 말에 걸맞게. 치솟은 성감에 허덕이며 선유가 또 한 번 애원하듯 매달렸고, 한주는 선유를 조금 들어 올려 휙 몸을 돌리고, 등과 가슴이 맞닿도록 안았다.
그리고 바르르 떨리는 손등 위를 감싸 쥐고 아주 천천히 허리를 밀었다. 도리질까지 하며 진저리치는 선유의 어깨와 목덜미를 깨물며 도저히 충족되지 않는 허기를 아주 조금 달랬다.
***
서류를 넘겨보던 선유는 제 뺨을 찌르는 듯한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지운이 눈도 잘 깜박이지 않은 채 저를 보고 있었다.
“왜.”
“너… 애 나오는 거 아냐?”
“아직 괜찮은데?”
“아니, 음….”
“요새 살쪄서 그래.”
한주의 열렬한 수발로 인해 선유는 만삭이 되어서야 살이 좀 붙었다. 거기에 더하여 얼굴이 갓 쪄낸 떡처럼 뽀얗게 변했고, 심지어 은은하게 빛까지 돌아서 다들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아마도 한주가 쉬지 않고 페로몬을 부어 주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보습크림을 챙겨 준 덕분이리라 선유는 짐작했다.
“부모님 언제 오신댔어?”
“오늘. 한주가 마중 나갔어.”
“…괜찮겠냐?”
“응, 뭐… 우리 이렇게 된 거 한주가 부모님한테 말씀드렸고, 이해도 받았으니까. 우리 부모님은 한주 워낙 좋아해서 괜찮을 거야.”
그전부터 선유는 종종 한주를 미국에 데려갔고, 이미 제 부모님은 한주를 막내아들처럼 여기고 있었다. 음… 그게 더 충격적이었겠네, 부모님 입장에선 아들 둘이 붙어먹은 게 되었으니. 그래도 한주를 워낙 예뻐하셨으니까 두 분도 생각보다 쉽게 이해를 하신 거로 생각했다. 그 이후로도 이어진 부모님과의 전화 통화에서 선유는 크게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왜 그래?”
“아침부터 여름이가….”
지금까지 얌전하던 아기가 배 안쪽을 쥐어뜯는 것 같아서 선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보고 있던 지운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선유의 팔을 잡았다.
“거 봐, 애 나오는 거라니까!”
“호들갑 좀 떨지 마. 한주 때문에 가진통으로 병원 벌써 두 번이나 갔어.”
“야, 나 벌써 애가 둘이거든?”
“네가 낳은 거 아니잖아.”
“애 둘 낳은 재한이 옆에서 다 봤다고.”
“…이제 괜찮아.”
통증은 곧 가라앉았다. 지난 일주일간 선유는 이거 때문에 응급실을 두 번이나 끌려갔고, 유난 떤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은 사양이었다.
아직 수술날짜는 3일이나 남았고, 오히려 9개월이 넘으면서 허리 통증을 제외하곤 운신하기 편해진 선유는 매일 출근 중이었다. 물론 이것도 쉽지 않았다. 한주는 선유가 출근하면 불안해서 미치려고 했고, 심지어 저를 집에 감금까지 하려 했으니까.
하지만 그가 없는 낮 동안은 차라리 회사에 있으면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든 대처를 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선유가 열심히 설득했고, 한주는 선유를 감금에서 풀어 주었다.
그리고 선유는 회사에 나오면서 몸 상태가 좋아져서 오히려 살이 올랐고-그 전까지는 의사가 주의를 시키고 걱정할 정도였다- 간헐적으로 오던 통증도 사라졌다. 한주는 선유가 어쩔 수 없는 일 중독자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선유는 해외 거래처와의 계약서에 만년필로 휘갈겨 사인하고 정리해 지운에게 넘겼다. 그리고 하나 더 남은 계약서를 펼치다 진동하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응, 한주야.”
- 형, 지금 인천공항에서 출발해요.
“아, 부모님 나오셨어?”
- 예.
“아버지한테 맞진 않았지?”
소리를 낮춰 묻자 한주가 전혀 그런 일 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잠시 목소리가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 어머니가 바꿔 달라고 하세요.
“응.”
대답하기 무섭게 모친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넘어왔다.
- 몸은 괜찮니?
“예. 괜찮아요.”
- 진통은 없고?
“조금 있긴 한데….”
- 너 닮았으면 성질 급하게 먼저 나오려고 할 텐데.
“설마 삼 일도 못 참을까요.”
- 네가 못 참아서 나왔잖아. 게다가 나도 아픈 거 잘 참아서 진짜 진통인 줄도 모르고 있다가 양수 터지고 나서야…
이어지는 어머니의 말을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을까 고심하던 선유가 온몸을 굳히며 진저리쳤다.
“엄마.”
- 선유야?
선유는 철이 들면서 제 모친을 ‘엄마’라고 부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호칭에 한껏 불안해하며 선유를 불렀다. 하얗게 질린 손으로 핸드폰을 꽉 쥐고 있던 선유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병원으로 바로 오셔야 할 거 같아요.”
- 너 설마…
“한주 좀 바꿔 주세요.”
소파 팔걸이를 짚으며 일어난 선유가 밖에 나가 있던 지운에게 손짓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본 그가 황급히 사장실로 들어와 선유의 상태를 확인하곤 바로 핸드폰을 꺼내 구급차를 불렀다.
- 형?
“한주야, 지금 바로 병원으로 와.”
- …형, 괜찮아요?
“응, 나 괜찮으니까 천천히 와. 알았지? 절대 급하게 운전하지 말고.”
- 제가…
“너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야 해. 너무 빨리 도착하면 혼낼 거야.”
벌써 뛰는 듯 수화기 너머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선유는 최대한 느릿느릿하게 말하며 한주를 달랬고, 전혀 아프지 않은 것처럼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셀 수 없이 괜찮은 거냐고 묻던 한주가 안정될 때까지, 정말 하나도 긴급한 상황이 아닌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지운에겐 말 한마디 하지 말라고 고개를 젓고 최대한 주변 공기를 안정시켰다.
선유는 병원에 실려 와 바로 수술에 들어가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수술방 앞에 누워 무슨 동의서를 써야 한다느니 하며 서류를 받았지만 그대로 둔 채로 여전히 연결된 전화에 이따금 아무 말이나 했다. 수화기 반대편은 고요했고 한껏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주야?”
- 형. …아파요?
“아냐, 안 아파.”
안 아플 리가 있는가. 옆에 선 의사와 간호사가 질린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선유는 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악문 이가 흔들려도, 불안함에 떠는 제 알파를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재촉하는 의사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선유는 한주에게 천천히 서두르지 말라는 말만 반복해서 전했다. 얼굴을 보지 않고 들어가서는 안 됐다. 수술은 그리 길지 않겠지만, 그 시간 동안 아이가 미치지 않으려면. 그리고 여름이도 충분히 견뎌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병원 복도에 어느 때보다 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기다리고 있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왔고, 선유는 그제야 쥐고 있던 핸드폰을 놓았다. 그리고 애써 웃었다.
“왔어?”
거의 통곡을 하며 구명줄처럼 저를 끌어안는 한주의 어깨를 같이 안아 몇 번 도닥여 준 선유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고, 참고 있던 통증이 밀려와 눈앞이 흐려졌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한껏 젖은 얼굴을 간신히 손바닥으로 닦아 주던 선유는 귀를 먹먹하게 울리는 목소리들을 잘 듣지도 못했고, 그대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암전이었다.
***
몽롱한 가운데 반쯤 눈을 뜬 선유는 금붕어처럼 부은 눈가를 새빨갛게 붉힌 한주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웃으면서 눈을 완전히 떴다. 얼굴만 봐도 제가 수술하는 동안 계속 운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꼴이었다.
“…형?”
한주가 간신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저를 불렀고, 선유는 툭툭 손가락으로 대답했다. 왠지 목이 아파서 입이 잘 열리지 않았다. 덥석 손을 잡아 온 한주가 다시 어깨를 떨기 시작하자 선유는 다른 팔을 들어 어깨를 토닥였다. 링거가 꽂혀서 움직이기 어려웠지만, 아이를 달래주지 않고선 못 배겼다. 서서히 몸에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한주야.”
“형.”
“여름이… 여기 있어?”
“데려오라고 할게요.”
“…너는? 너는 여름이 봤어?”
“봤어요. 탯줄도 제가 뗐어요.”
장하다는 의미를 담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한주는 조금씩 울음을 그쳤다. 아직 애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써 괜찮은 척하는 한주가 귀여워서 선유는 몇 번 더 머리를 만져 주었다. 시야가 조금 더 트이면서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제게 매달려 있는 한주 때문에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부모님도 보였다.
“…오셨어요?”
“걱정 좀 끼치지 마라. 아니 어떻게 그러고 있으면서 전화는 그렇게 태연하게 했어?”
“사랑의 힘?”
침대 헤드를 세워 등을 기댄 후 선유는 한주를 꼭 안아 주고, 제 부모에게도 팔을 벌렸다. 애교 없는 아들이지만, 저 때문에 수명이 다 깎였을 두 분을 안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도요.”
먼저 어머니를 안고, 선유는 데면데면한 제 아버지에게도 팔을 벌렸다. 꽉 생각보다 세게 안아 와서 몸이 아플 지경이었지만, 무의식중에 한주가 뿌리고 있는 페로몬이 진통 효과를 냈다.
“고생했다.”
무뚝뚝하지만 정 섞인 목소리에 선유는 생긋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주를 안았다. 저보다 배로 덩치가 더 크면서도 작은 강아지처럼 떨면서 안기는 아이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무섭고, 두렵고, 저를 잃을까 겁냈을 게 뻔한 한주.
“형, 정말 너무… 좋아해요.”
수고 했다, 고생했다도 아닌 좋아한다는 말이 제일 좋았다. 수도 없이 쏟아지는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며 선유는 한주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품에 안긴 어깨의 떨림이 거의 가라앉았을 때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아기를 데리고 들어왔다.
꼭꼭 싸매어 놓은 아기는 얼굴만 쏙 내놓은 모양새였다. 선유는 저릿한 관절을 풀며 생각보다 더 작은 아기를 안았다. 한주와 아기 옷과 신발을 보면서 신기해했던 감정은 그대로 이어졌다.
태어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으면서 벌써 머리카락이 새까맣게 난 아이는 이목구비가 정말 또렷했다. 보통 신생아는 새빨간 고구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아기가 과연 예쁘게 보일까 걱정했는데 여름이는 콩깍지를 떼고 봐도 너무 예뻤다.
“형이랑 똑같이 생겼어요.”
“…응?”
선유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여름이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한주의 판박이였기 때문이었다. 직모인 새카만 머리카락부터 곱게 난 속눈썹, 길고 시원하게 빠진 눈매에 콧대와 도톰한 아랫입술까지. 선유의 부모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주를 바라보았다.
“귓불이 형이랑 똑같아요.”
“으, 응….”
“여기 콧대도요.”
선유는 어떻게든 저와 닮은 곳을 집어내는 한주를 보며 보드랍게 웃었다. 까만 눈동자에 드러난 신기함과 놀람, 하지만 그 어떤 것과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애정이 가득 차 있었다. 한주는 아이를 제대로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던 건 다 잊은 것처럼 그렇게 애정 어린 눈으로 아이를 보았다.
여기저기 누가 어디를 닮았는지 서로 우기다가 선유는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제 아버지를 보며 장난기 어린 얼굴로 화사하게 웃었다.
“아버지, 저 손자 데려왔는데 유산 주시나요?”
“저놈이….”
“예전에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너 하는 거 봐서.”
인생이 어떻게 풀릴지는 정말 모를 일이다. 선유는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제 인생을 잠시 돌아보다 또 한 번 눈을 휘며 웃었다. 마취가 풀리면서 온몸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지만,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충만했다.
곤히 잘 자고 있던 아이가 눈을 반짝 떴다. 혹시나 울까 봐 한껏 긴장했지만, 걱정한 게 무색하게 아이는 방긋 웃었다. 예쁘게 휘어지는 눈매 사이로 드러난 그 작은 우주가 황홀하여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선유는 한주와 같이 아기와 눈을 맞추고 준비했던 인사를 했다.
“어서 와.”
라고.
***
베이비 모니터에서 도하가 칭얼대는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한주가 벌떡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기세에 선유도 끙끙대며 잠투정을 했고, 한주는 어깨를 조심스럽게 도닥여 다시 재운 후 옆방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선유가 임신한 내내 복숭아를 찾았던 터라 복숭아를 뜻하는 ‘도’자에 다른 한자를 붙이고, 태명이 여름이였던 터라 여름을 뜻하는 ‘하’자에 또 다른 한자를 써서 아기 이름은 ‘도하’가 되었다. 도하는 정말 순했고 이제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도 거의 다섯 시간을 깨지 않고 잘 정도로 아빠들을 고생시키지 않는 아이였지만, 그래도 가끔 새벽에 깨어 칭얼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 상태를 체크하고 다시 재우는 건 한주의 몫이었다.
“도하야, 왜 칭얼거렸어?”
다정하게 물으며 보드라운 뺨을 매만지자 아기는 지금까지 찡찡댔던 게 거짓말처럼 까르르 웃었다. 팔다리를 쭉쭉 만져 주고 기저귀를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배가 고픈가 해서 우유까지 먹였지만, 아기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한주는 그저 아이를 안고 잠시 방을 돌아다녔다.
“도하야, 큰 아빠 보러 갈까?”
꺄하, 좋다는 건지 안 좋다는 건지. 한주는 아기를 안아 들고 안방으로 향했다. 도하는 한주도 좋아하고 선유도 좋아했지만, 그래도 선유를 조금 더 좋아했다. 하지만 한주는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왜냐면 누구든 선유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아기 방이 따로 있긴 하지만, 안방에도 요람을 침대에 연결해 두었다. 가끔 둘 다 아기와 함께 자고 싶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해야 해. 선유 형 자니까.”
그 말을 들으면 아기가 아니지. 도하는 요람에 눕히자마자 배시시 웃으며 또 꺄아 소리를 냈다. 그 순간 선유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음… 도하야?”
“더 자요, 형.”
“…응, 도하 왔어?”
엎드린 채로 눈만 반쯤 뜬 선유가 요람에 누운 아기를 보고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를 재우려던 한주의 노력이 무색하게 잠에서 깨 일어났다.
“형 재우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도하 데리고 왔는데 내가 어떻게 자.”
선유는 침대를 탁탁 두드렸다. 그가 임신 중일 때부터 이런 식으로 침대를 두드리면 한주는 그의 전용 소파로 변신했다. 한주가 침대 헤드에 등을 대고 앉고, 선유가 그 앞에 앉고, 그리고 도하는 선유의 품에 안겼다.
“이게 제일 편해. …한주는 힘들어?”
“안 힘들어요. 형 어깨에 턱 기대고 있으면 좋아요.”
임신한 선유가 밤에 앓으면서 아기처럼 안아 재웠더니 이렇게 겹쳐 앉는 게 습관이 되었다.
“도하 너무 잘 웃어요.”
“응. 누구 아들인지 너무 예쁘지.”
“어머니가 미국 가기 전에 그러셨잖아요. 자식은 말 못 할 때 웃는 거로 효도 다 하는 거라고.”
“응.”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웃는 거 보면 너무 예뻐서 말도 안 나와요.”
한주는 반쯤 잠든 도하의 뺨을 조심스럽게 만져 주고 싸개에 싸인 손도 살살 주물렀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팔다리를 만져 줘서인지 도하는 그 흔한 경기도 한 번 일으키지 않고 몸도 많이 아파하지 않았다.
“전 아무리 봐도 형이랑 너무 많이 닮은 거 같은데.”
“내가 보기엔 너랑 똑같이 생겼어.”
“귓불도 형 닮고, 콧대도… 새로 나는 머리카락도 살짝 곱슬곱슬하잖아요.”
태어날 때만 해도 쭉쭉 뻗은 직모던 머리카락이 한 번 삭 빠지고 다시 나면서 살짝 곱슬기가 있었다. 물론 그래 봐야 이목구비가 전부 한주랑 똑같았다. 도하를 본 모든 사람이 전부 씨도둑질은 못 한다더니, 라며 한주와 똑같다며 입을 모아 말했고, 대체 선유의 유전자는 어디로 간 거냐며 혼란스러워했다.
“밤에 잠 잘 자고, 잘 웃는 건 나 닮았대.”
“어머니가요?”
“응. 근데 한주도 그랬을 거 같아. 잠도 잘 자고 잘 웃었을 거야.”
“…….”
“한주 아기 때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
도하를 안아 재우며 선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친부모에게 버림받고 아파했을 어린 한주를 생각하면 가슴 안쪽이 저린 느낌마저 들었다. 단단한 무릎 위를 매만져 주며 선유는 한주의 과거를 달랬다. 하지만 한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도 형 아기 때 모르는데.”
“응?”
“어머니 질투하면 안 되겠죠?”
“질투할 걸 해야지. 그럼 다음 생에는 먼저 태어나든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한주는 한참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했다. 그리고 선유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조용히 제 심경을 토로했다.
“그럼 다음 생에는 형의 아빠로 태어나고 싶어요.”
“아빠?”
“엄마도 괜찮고요.”
“…왜?”
“그럼 한정 없이, 조건 없이, 죽지 않는 한 헤어짐도 없이 사랑해 줄 수 있잖아요.”
“…….”
“아, 그럼 섹스는 못 하겠구나. 음….”
한주는 장난을 섞어 말했지만, 선유는 그의 말이 끝도 없는 진심임을 알았다.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관계의 단절을 원하고, 또 원하지 않아서 제 마음을 접으려던 한주에게는 사랑하는 게 당연한 관계는 매혹적일 테니까.
“그래도 형한테… 당연한 사랑을 주고 싶어요.”
선유는 곤하게 잠든 도하를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요람에 옮겨두고, 한주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섬세하게 떨어지는 뺨을 따라 손끝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한주야, 다음 생 아니어도 돼.”
“…예?”
“다음 생 아니라도 한정 없이, 조건 없이, 죽지 않는 한 헤어짐도 없이 사랑해도 돼.”
조금 젖은 입맞춤을 예상하며 선유는 눈을 감았다. 아니나 다를까 속눈썹이 내려앉기 무섭게 입술이 닿았고, 한주는 다급하게 더 안까지 닿으려 애썼다. 얼굴이 젖지는 않아서 선유는 마음 속 깊이 안도했다. 아이가 우는 건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해도 되나요?”
“…응.”
나지막한 대답에 또 벅차게 안아오는 한주를 보듬으며 선유는 끊임없이 미래를 얘기했다. 도하 백 일 지나면 미뤄 두었던 결혼식을 하고, 신혼여행은 어떻게 할지, 도하의 돌잔치는 어떻게 할 건지, 한주의 대학 졸업 이후의 계획, 도하를 어린이집에 보낼지 말지, 초등학교는 어떻게…
언제나 멀리 보는 선유는 흑백으로 밖에 그리지 못했던 제 미래를 총천연색으로 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엔 골든 레트리버도 포메라니안도 아니라 한주와 도하가 함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