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통>
떡볶이 6인분과 순대 3인분, 그리고 김밥 세 줄을 들고 한주는 선유의 사무실을 향했다. 제가 커갈수록 다시 일에 열중하기 시작한 선유는 보통 저녁을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혹은 한주와 단 둘이 먹게 되었고 그때마다 식량을 조달하는 건 한주의 몫이었다.
“안녕하세요.”
“한주 오랜만이네.”
“예.”
IT업계의 고질적인 병폐인 과다 업무와 야근을 줄이겠다는 명목 하에 선유의 회사는 야근을 최대한 줄여나가고 있었고, 그 때문에 다른 직원들과 한주가 만나는 횟수는 예전보다 좀 줄어들었다.
“떡볶이 사 왔어요. 순대랑 김밥도.”
“어우, 고맙다. 대표님이 저녁 먹으러 가지 말고 기다리라더니 네가 사 와서 그랬구나.”
“여기 둘게요.”
“그래, 고맙다.”
선유는 자비로운 상사였고, 웬만해선 아래 직원들과 굳이 식사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다. 아무리 친근하게 대한다고 해도 불편할 게 뻔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형.”
“어, 한주 왔어?”
“저녁 사 왔어요.”
“응, 고마워. 갑자기 떡볶이가 엄청 먹고 싶더라.”
모니터를 보던 차가운 인상이 저를 보는 순간 그대로 녹아내리는 듯했다. 자그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다정한 목소리에는 춘풍이 불었다. 한주는 애써 그것을 외면하고 소파 앞 테이블 위에 포장해온 음식들을 차리기 시작했다.
“밖에 계신 분들한테도 나눠드렸어요.”
“응. 잘했어.”
“…형, 배 안 고파요?”
“이것만 좀 마무리하고. 먼저 먹고 있을래?”
약간 신경질적인 마우스 소리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나무젓가락을 갈라 작은 앞접시 위에 놔주고 한주는 잠시 그대로 앉아 기다렸다. ‘기다려’를 명령받은 강아지 같은 태도라는 걸 알고 있지만 굳이 선유가 일하고 있는데 먼저 먹고 싶지도 않았다.
“먹고 있으라니까.”
눈은 여전히 모니터에 박혀 있었지만, 선유의 귀는 이쪽을 향해 열려 있는 게 분명했다. 한주는 괜히 젓가락을 들고 국물이 많은 떡볶이를 휘저었다.
“말 안 듣지.”
마침내 선유가 한주의 앞에 털썩 앉았다. 도톰하고 보드라운 연회색 니트에 연한 색의 청바지를 걸쳐 입은 선유는 여전히 학생 같아 보였고, 한주가 그를 본 이후로도 거의 변한 게 없었다. 하지만 속은 다른지 가끔 그는 나이가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며 어깨나 등을 두드리기도 했고, 한주는 그런 선유에게 안마를 해 주곤 했다. 그때마다 느낀 건 제 손은 점점 커지고 그는 조금씩 작아진다는 점이었다.
“오랜만에 먹으니 맛있다.”
“그러네요.”
“떡볶이 집 어디에 있어?”
“초등학교 앞에요.”
“아, 거기 떡볶이야? 아직도 장사 하시는구나.”
“떡볶이에 국물이 좀 많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맛있어요.”
“여기, 김밥도 먹어.”
선유는 한주의 접시 위에 언제나처럼 음식을 옮겨다 주었다. 제가 젓가락질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 이미 습관이 된 것 같았다.
“형, 요새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거 같아요.”
“응, 좀 일이 많아지기도 했고… 이거 해외 의뢰 건이 입고 직전이라 그래. 너는, 학원 다니는 건 안 힘들고?”
“예, 뭐 그런 건….”
“새벽엔 왜 그렇게 뛰러 나가?”
“이제 고3이니까 운동할 시간이 없잖아요. 몸 안 움직이면 답답하기도 하고요.”
“응, 벌써 고3이네.”
한주는 계속 선유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었다. 한계여서, 최근엔 눈을 마주치면 아직 주기가 한참이나 남은 러트가 끓어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보고 싶어서, 고요한 찻물 같은 그의 눈동자가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면 잔인한 정도로 다감한 얼굴이 있을 것이었다. 제 상상 속의 쾌락과 음욕에 젖어 우는 선유가 아닌, 저를 사랑하는 보호자이자 어른으로서의 선유가 있을 것이다.
“이거 끝나고 나면 시간이 좀 생길 텐데, 방학 끝나기 전에 잠깐 따뜻한 곳 다녀올까?”
“…어디요?”
“음… 하와이?”
“웬 하와이예요.”
“최근에 직원이 신혼여행을 다녀왔다던데 엄청 좋아 보이더라고.”
“겨울에도 수영할 수 있어요?”
“한낮에는 가능하다고 하더라.”
선유는 꽤 즐겁게 얘기하고 있었으나, 한주는 그 여행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같이 있는 시간을 줄이려고 하는데 여행이라니, 말도 안 되었다.
“거기 가는 건 좀 힘들 거 같아요. 고3이잖아요.”
“음… 그런가? 그럼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오자. 너무 공부만 해도 답답해서 못해.”
선유는 공부를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야 하는지도,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한주가 하는 말이면 어떻게든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래서 한주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는 데에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기에 기대하게 되었다. 선유는 제가 무슨 말을 해도 그걸 단숨에 거부하거나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기대를. 게다가 그가 제게 보여 주는 애정의 깊이를 고려하면 어디 가서 범죄를 저지르고 온다 해도 받아들여 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경주 가 볼까?”
“…경주요?”
“응. 너 중학교 때 수학여행 거기 다녀왔었잖아. 나도 가 보고 싶어서. 불국사랑 석굴암 한 번도 못 봤거든.”
“예, 뭐….”
“한주는 또 가는 거라 별로려나? 다른 데 가도 되고.”
“전 상관없어요.”
하지만 한주는 확신 없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 판단이 틀렸다면, 만약 제 고백에 선유가 경멸의 얼굴을 한다면, 혹시 저를 더는 보고 싶지도 않다고 한다면… 그러면 저는 미쳐 버릴 테니까. 당장이라도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거나 달리는 차에 뛰어들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한주는 다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점점 더 견디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 사랑을 자각했을 때 앞으로 얼마나 힘들 것인지 대체 저는 얼마나 견딜 수 있을 것인지 가늠해 보았지만, 생각보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너무나 많았다. 그건 선유의 냉대도 외면도 아닌 상냥함 때문이었고, 이대로라면 그가 제게 상냥하지 않을 일은 없을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움받고 싶진 않아. 선유의 상냥함을 조금만 줄일 순 없을까, 그러면 저도 마음을 조금 접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제 이중적인 바람에 조소하며 한주는 억지로 차가워진 김밥을 씹어 삼켰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생글 예쁘게 휘어지는 선유의 눈과 마주쳤다. 한쪽 볼을 부풀리고 한참 무언가를 꼭꼭 씹어 삼키는 선유가 마치 꿀통 같아서 한주는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그 꿀통 속에 손을 넣어 잔뜩 휘젓고 싶었다.
“드디어 한주 얼굴 제대로 보는 거 같네.”
…이래서 보면 안 되었다. 저를 완전히 신뢰하고, 저를 사랑하는 선유를 보면 숨이 막히고 폐가 다 죄여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어 울어 버릴 것만 같아서 한주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형을 너무 좋아하는데, 좋아하면 너무 아파요. 형이 저한테 웃어 주면 미칠 것 같아서, 돌아 버릴 것 같아서. …제 마음을 접을 수 있게 조금만 덜 다정해지면 안 될까요. 제가 어떻게 하면 형이 조금은 저한테 다정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한주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 선유가 저에게서 조금은 정을 떼게 만들어야 했다. 못되게 굴고, 그를 무시하고… 그가 저를 진심으로 싫어하지 않을 정도로만.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실은 좋아서 항상 그의 발밑에 주저앉아 뺨을 비비고 싶어 하는 강아지 같은 제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더 해 달라고 조르고 싶어 하는 제가.
“한주야?”
“…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눈 올 거 같으니 얼른 가자. 일은 내일 와서 해야겠어.”
한주가 먹은 것을 정리하고 돌아올 때쯤 선유는 코트를 챙겨 입고, 빵빵하게 서류를 챙겨 넣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한주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고선 조금 좌절했다. 정을 떼기는 무슨.
“괜찮아.”
“주세요.”
빼앗듯 선유의 가방을 든 한주가 저벅저벅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 그 뒤를 빠른 걸음으로 따라잡은 선유가 귀엽다는 듯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제 머리카락을 만지기 위해 쭉 뻗어진 팔을 보며 한주는 머리를 조금 숙여 주었다. 그리고 또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을 떼기는 무슨.
***€졸린냥
몸이 묵직하게 가라앉는 느낌에 한주는 자다 깨어 잠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이미 익숙해진 러트의 초기 증상이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가라앉혀야겠다고 생각하며 바로 제 방 서랍을 열어 주사제를 꺼냈다. 그리고 안에 굴러다니는 알약통을 잠시 바라보다 서랍을 닫았다.
얼마 전 다녀온 병원에서 의사는 주사제를 그만 쓰는 게 좋겠다고 했으나, 다른 방도는 없었다. 러트를 가라앉히고 당장이라도 옆방에 잠들어 있을 선유에게 가 그를 덮치지 않기 위해서는 주사제를 쓸 수밖에.
팔뚝에 주사를 놓고 잠시 바닥에 주저앉아 천천히 혈관에 약이 도는 걸 느꼈다. 부글부글 끓던 뇌가 식고, 빨라졌던 맥박도 간신히 제 속도를 되찾았다. 빈 주사를 가방에 던져 넣고 욕을 씹어 뱉었다.
아무리 주사제를 맞아도 호르몬의 장난을 바로 이겨낼 순 없었다. 게다가 주사제의 효과가 약해진 터라 더욱. 한주는 발기한 성기를 어쩔 수 없이 꺼내 들고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러트 때마다 이어진 자위는 거대한 자괴감을 불러일으켰으나 그렇다고 자위 없이 이 시기를 넘길 수도 없었다. 몇 번 정액을 뽑아내고 나면 제가 선유를 강간하리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하….”
끝없이 발기한 성기의 귀두가 말아 쥔 손 위로 튀어나왔다 들어가길 반복했다. 그 아래를 꽉 누르며 자극하던 한주가 자극을 견디지 못해 앞으로 엎드리듯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프리컴으로 젖은 손 안에 진득한 정액이 쏟아지기까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형.”
선유 형. 혹시나 들릴까 봐 속삭이며 부른 이름 때문에 다시 몸에 불이 붙었다. 성기를 쥐고 흔들며 한주는 선유를 부르지 않기 위해 죽어라 애썼다.
자위는 첫 러트 때를 떠오르게 해서 싫었다. 선유의 몸을 뒤덮은 다른 알파의 페로몬으로 인해 촉발된 첫 러트는 한주의 인생에 있어 너무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벼락이 쳐 천지가 뒤집힌 것처럼 모든 게 다 변해 버렸다.
발기한 성기를 쥐지도 못하고 그저 다리를 모아 비비며 견디던 그때, 선유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한주는 바지 안을 다 적시며 토정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풍기던 은은한 샴푸 냄새와 드러난 팔다리 속살에 속절없이 반응했다.
약을 먹고 나서도 저를 앉혀 놓고 설명하는 선유의 분홍색 입술과, 연한 붉은색을 띠는 관절부위에 시선을 빼앗겼다. 만져 보고 싶었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뺨이 아니라 다른 곳이면 더 좋을 지도 모르겠다고, 멍해진 머릿속에 그 생각이 지나갔을 때, 그리고 제가 형과 섹스하는 꿈을 꾸고 몽정을 했을 때 한주는 인정해야 했다. 이건 친애의 정이 아니라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저를 아들처럼 키워 주고 있는, 인생의 구원자인 형을 자위의 대상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제 밑에서 울고 쾌락에 젖어 더 해 달라 팔을 뻗는 선유는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저를 미치게 하는 장본인이었으며, 어떤 오메가의 페로몬보다 자극적인 트리거였다.
몇 번 더 정액을 뽑아내고 나서야 조금 진정되었다. 이 정도면 며칠간 알약으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휴지 뭉치와 젖은 속옷을 정리하고 한주는 아예 선유를 피해 다녔다.
선유에게서 빨리 독립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한주는 주식 거래와 번역 일을 시작했다. 피시방에서 친구들이 게임을 하는 동안 조금 하는 것뿐이었지만, 그래도 종일 아르바이트 수준으로 수익이 났고 꾸준히 하면 연말이 되었을 때 웬만큼 독립 자금이 모일 것 같았다.
의뢰받은 이력서 번역본을 메일로 회신하고, 한주는 지금까지 뒤집어 놓은 핸드폰을 바로 놓았다. 회식이 있어 늦어진다는 선유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한숨을 한 번 쉬는 찰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선유의 전화였다.
“예, 형.”
- 아, 한주니?
순간 들려온 목소리는 선유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를 아는 사람… 조금 머릿속을 뒤지던 한주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왜 전화를 했는지도 조금은 예상 할 수 있었다.
“예, 그런데요. …임 이사님이세요?”
- 응, 목소리만 듣고 잘 아네? 여기 대표님이 술에 취해서 잠드셨는데… 신 전무님이 안 계셔서 대표님 집이 어디인지 아무도 몰라.
“제가 갈게요. 어디죠?”
- 어, 여기 회사 근처 고깃집이야. 주소 문자로 넣어 줄게.
한주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요금을 결제하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옆에서 게임하느라 정신없던 친구 두 놈이 한주를 놀렸다.
“최한주 브라콤.”
“그럼 형이 취했다는데 동생이 마중도 안 나가는 게 정상이냐?”
“정상이지, 나는 우리 형 취해서 들어올 때 문도 안 열어 주는데.”
“시끄러.”
“근데 나도 우리 형이 쟤네 형만큼 해 주면 업고 다닐 수 있을 듯. 시시때때로 미국 데리고 가주지, 용돈 두둑하게 주지, 노는지 공부하는지 간섭도 많이 안 하지, 도시락도 직접 싸 주잖아.”
“적당히 하고 가라. 이제 너희 부모님한테 거짓말 안 해 줄 거니까.”
피시방을 빠져나온 한주는 임 이사에게서 들어온 주소와 상호를 보고 금세 방향을 잡아 뛰듯 걸었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잔뜩 길이 얼어붙어 있었지만, 속도를 늦추진 않았다.
고깃집 문을 여는 순간 왁자지껄한 소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저 안쪽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고, 한주는 그쪽으로 바로 걸어갔다. 전화를 걸었던 임 이사가 제일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엄청 빨리 왔네?”
“바로 근처에 있었어요.”
“공부하고 있었을 텐데 미안하다. 그런데 대표님 집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예.”
선유는 기름진 테이블 위에 이마만 기댄 채로 잠들어 있었다. 그 불편한 자세로도 잘도 자고 있어서 한주는 가벼이 한숨을 내뱉고 선유의 팔을 당겨 부축했다. 그리고 쑥 등을 밀어 넣고 그를 업었다.
“너도 고기 좀 먹고 가지. 어차피 대표님 술 먹고 잠들면 깨질 않던데.”
“아녜요. 먼저 가겠습니다.”
“그래, 수고해라.”
등 뒤로 팔을 교차해 엉덩이를 받치고 완전히 무릎을 펴 일어나자 선유의 팔이 천천히 목에 올라와 감겼다. 그 덕분에 허리도 펼 수 있어서 안정감 있게 걸을 수 있었다.
주인이 달려와 열어 준 문밖으로 나오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얼어 버린 길이 다 녹기도 전에 또 하얀 잔해가 위를 덮고 한주의 머리카락 위로도 떨어져 내렸다. 술이 취해 따끈해진 뺨이 목덜미에 문질러졌다. 괜히 선유를 한 번 고쳐 업으며 한주는 천천히 길을 걸었다. 올 때는 뛰었는데 갈 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완전히 신뢰하는 듯 등에 잔뜩 기댄 무게가 마음을 벅차게 했다. 때때로 닿는 피부 감촉이 달콤했다. 한주는 왠지 눈시울이 뻐근해져서 눈이 내리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가 내리길 반복했다.
이제 정말로 더는 안 될 것 같았다. 내일이라도 저는 선유의 발치에 엎드려 그의 애정을 갈구하게 될 것만 같았다.
더는, 정말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한주는 술에 취한 선유가 일단 잠들면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를 이용해 수백 수천 번 속으로만 내뱉던 말을 딱 한 번만 소리 내어 보기로 했다.
“…형, 저는 형을 좋아해요.”
“나도… 좋아해.”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는 답변은 잠꼬대였다. 술 취한 선유는 옆에서 누가 말을 하면 전부 대답을 해 주는 신기한 주사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 날 기억도 못하면서 잔인하게도.
“형이랑은… 좋아한다는 의미가 다를 거예요.”
“…그래?”
“예.”
“어떻게 다른데?”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선유가 물었다. 한주는 차마 그 질문에 답은 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켰다. 그리고 조금 더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했다.
“저는 이제부터 어떻게든 이 마음을 죽일 건데… 형한테 미움받는 건 죽어도 싫으니까요.”
“한주야, 나는… 너 안 미워해.”
“…알아요. 제가 웬만큼 나쁜 짓을 해도 형은 저 안 미워할 거라는 거… 그런데 저 자신이 없어요. 미움받지 않을 자신이.”
“…….”
“형한테 못되게 굴지도 몰라요. 형을 외면하고 형이 저를 더는 다정하게 보지 못하게 할 거예요.”
선유에게선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아예 잠이 든 걸까, 아니면 답할 말이 없어서 그러는 걸까.
“미안해요, 형. 저… 저 때문에 형이 상처받을 거라는 거 아는데도 어쩔 수가 없어요.”
“…….”
“형이 저한테 실망하고 화내고 그러면 저 조금은 쉽게 마음을 접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쁜 짓 조금만 할게요.”
조금 더 돌아가는 길이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형을 업고 더 오랜 시간을 걸을 수 있을 테니까. 한주는 이미 도착한 것을 아쉬워하며 제 목을 감은 선유의 팔에 뺨을 한 번 문질렀다. 맨살이 아니라 코트 위인 것이 안타까웠다.
한주는 선유의 옷을 갈아입힌 후 침대 위에 눕혔다. 그리고 그 옆에 잠시 걸터앉아 어두운 방의 벽만 보고 있었다. 숙취로 고생하는 선유의 배를 문지르면서 약손 노래를 부르던 제가 환영처럼 떠올랐다. 뽀뽀는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하는 거라고 알려 주던 선유의 말도 환청처럼 들려왔다.
한주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여 선유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조금 욕심을 내어 반은 입술에, 반은 뺨에. 그리고 선유가 잠결에 입맞춤한 위치를 문지르자 지레 겁먹어 변명을 했다.
“미안해요, 형. 위치를 잘못 잡았어요.”
귀엽다는 듯 선유가 눈을 감은 채로 한주의 머리를 감싸고 슥슥 문질렀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잠시 머리를 맡기고 있던 한주는 다시 선유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정말로 형은 제가 동생일 뿐이네요… 알고는 있었지만….”
“음….”
“나중에, 나중에 조금 이 마음이 죽으면, 제가 형을 똑바로 봐도 괜찮아지면 그때는 다시 형의 착한 동생으로 돌아올게요.”
제가 나쁘게 굴어도 용서해 주세요. 한주는 선유의 손을 잡고 그의 자비와 용서를 구했다. 가만히 제 손을 되잡아 오는 그 부드러운 손등에 입술을 한 번 더 문질렀다. 따뜻한 감촉에 기분이 좋았는지 선유는 조금 더 강하게 한주의 손을 잡았다. 그 손길이 너무 달아서 한주는 조금 울었다.
그럼에도 마음을 다잡지 못해 피하기만 하던 선유를 마주한 건 그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였다. 제 건강을 걱정하는 온기 어린 말에 한주는 연습했던 대로 그를 거부했다. 내용뿐 아니라 가시 돋친 목소리까지 가장했다.
“형이 보기엔 한심할 정도로 머리가 나쁘겠지만 이해해 줘요.”
제 말이 끝나는 순간, 선유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아한 기색으로 커다랗게 뜨여졌던 눈동자에 처음엔 현실을 부정하는 빛이 돌았고, 곧 고통스럽게 변화했다. 그저 건강을 걱정한 말이 그리 매몰차게 돌아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했겠지.
한주는 그런 선유의 얼굴을 봐서는 안 되었다고 절절히 후회했으나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그가 제 형이 아니고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는 놈들이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 봐도 쓸모없었다.
선유의 입술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길 반복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그가 받은 상처가 손에 닿을 듯 선명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웃으려 애쓰는 선유의 입가가 경련했다.
입 안이 바싹바싹 타고 손바닥 안쪽이 간지러웠다. 진심이 아니라고, 전부 거짓이라 고백하고 싶은 충동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고 한주는 간신히 말을 참았다. 앞으로 계속 이렇게 해야 했다. 인제 와서 물릴 순 없었다.
한주는 선유를 피하고, 피하고, 피하다 마침내 마주치면 그 어느 때보다 독한 말로 그를 밀어냈다. 상처받은 그가 충격에 말 한마디 잇지 못함을 다행으로 여겼고, 시간이 지나 그가 저를 마주쳐도 먼저 말을 걸지 못함에 안도했다. 제 가슴이 어떻게 갈라져 피가 흐르고 있는지는 보지 않았다. 볼 수 없었다.
아무리 제가 매정하게 굴어도 여전히 선유는 안부와 근황을 물었다. 그것이 저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모르는 그의 다정함에 한주는 질식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답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답변을 보낼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핸드폰 속 메시지함은 보내지 못한 문자들로 가득해졌다.
수능이 끝나고 한주는 곧 입학하게 될 대학교 주변의 집을 계약했다.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보증금을 시세의 2배를 요구했고, 계약서는 성년이 된 뒤에 써야 한다는 것도 받아들였다. 선유의 곁을 떠나는 것이 현재 제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형을 견딜 수가 없어요.”
“간섭하는 거 더는 못 견디겠어요.”
“같이 있는 게 답답하고 싫어요.”
“저는 형을….”
좋아해서. 한주는 말의 칼날을 날카롭게 벼려놓으며 그 말에 제가 다 베이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연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대사를 허공에다 읊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한참 뜨거운 숨만 몰아쉬었다.
제 말을 들은 선유가 얼마나 상처받을지, 얼마나 아파할지 눈에 선했다. 미안함과 죄책감에 몸부림치면서도 한주는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살아야 해서, 거부당한 제가 죽어 버리면 선유는 더 고통스러워할 게 뻔해서 이런 연기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선유의 가슴을 다 갈라 놓고 짐을 들고 나온 한주는 정신없이 뛰어 그곳을 벗어났다. 멀리, 선유의 곁에서 최대한 멀리 떠나기 위해 뛰던 그가 멈춘 건 폐가 공기를 마시지 못할 정도로 숨이 차고 나서였다.
새하얀 입김을 거칠게 내뱉으며 한주는 한참 그 자리에 서 있다 천천히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진한 회색빛 하늘에서 함박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으면서 미안하다 하던 형, 배신감보다도 안쓰러움을 먼저 내보이던 선유 형, 그 고운 얼굴에 가득 찬 충격으로부터 한주는 도망쳤다.
시간이 좀 더 흘러, 혹여나 이 각인이 흐려져서, 제가 선유의 얼굴을 마주 보고 웃을 수 있는 날이 다시 오길 소망하며 한주는 그렇게 아홉 살 아이처럼 울며 얼굴을 적셨다.
<외전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