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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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한주의 방학에 맞추어 선유는 장기휴가를 냈다. 미국에 같이 가기 위함이었다. 한주는 미국의 어학원에 등록했고, 선유는 부모에게 제 상황에 대해 고백할 말을 떠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한 달이 넘는 휴가를 가기 위해선 당연히 회사 일을 정리하는 시간이 매우 많이 필요했다.

“금성 화학 프로젝트는 어떻게 할까요?”

“그건 지운이 쪽으로 넘기시죠. 그리 급한 건 아니니까 시간 벌어 줄 수 있을 거예요.”

“예, 그럼 이 건은 개발 막바지인데….”

임 이사와 머리를 맞대고 수십 개의 번호가 붙은 일거리를 배분하고 정지시키고 정리하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해가 지고도 모자라 거의 밤이 깊어 갈 때까지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 인수인계 작업이 대충 정리가 된 건 핸드폰 시계가 여덟 시를 넘긴 후였다.

“저 미국 가 있을 때 연락하셔도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이 안 될 수가 있습니까.”

“메일 보내 놓으시면 확인할 테니까요.”

생긋 웃으며 대응하자 임 이사는 한숨을 내뱉었다. 이 일이 재택근무도 가능할 정도라는 건 알지만 선유가 없는 건 왠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최선유.”

“어?”

“오늘 술 좀 마시자.”

“나 들어가서 짐 싸야 하는데.”

“내일 오후 비행기잖아. 무슨 짐을 벌써 싸.”

“술은 좀 그래서.”

“그럼 넌 안주만 먹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지운이 대충 파장된 분위기를 읽고 술을 마시러 가자며 졸라댔다. 아무래도 임신한 오메가 앞에서 술을 마실 순 없으니 욕구가 터지는 모양이었다.

“이사님도 같이?”

“저는 됐습니다.”

혹시나 잡혀갈까 봐 임 이사는 번개처럼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재한 씨 수발들어야지.”

“요새 안정기라 괜찮아.”

“첫째도 있는데 임신해 있으면 얼마나 힘들겠어.”

“너 이제 오메가 됐다고 너무 편들어 주는 거 아냐?”

“오메가 안 됐어도 재한 씨 편들었을 거야.”

지운의 투정에 피식 웃으며 선유는 그 오해를 바로잡아 주었다. 오메가라고 오메가 편을 드는 줄 아나.

“요새 내 편은 하나도 없네.”

“세형이 있잖아.”

“걔도 재한이 편이야.”

핸드폰 화면을 켜자 한주에게서 전화 한 통, 메시지 한 통이 들어 와 있었다. 친구들과 술자리가 있다고, 좀 늦을 것 같지만 최대한 빨리 들어가겠다는 문자였다. 선유는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한주야.”

- 형. 왜 전화 안 받았어요.

“응, 회의 중이었어. 미안.”

수화기 너머로 시끌시끌 소음이 넘어왔다. 한주가 뭐라 하는데 잘 들리지 않아서 몇 번 되물었더니 곧 사위가 조용해졌다.

- 시끄러웠죠.

“응, 조금.”

- 형도 아직 회사예요?

“인수인계하느라. 너는?”

- 미국 간다고 했더니 소문이 이상하게 와전되어서 그거 좀 종식하러 왔어요.

“소문?”

- 아예 유학 간다고 얘기가 돌아서요.

“아, 그래서 친구들이 송별회 해 주고 있는 거야?”

- 방학 때만 갔다 온다고 했는데 믿지를 않네요.

그럴 만도 하지. 선유도 왜 한주가 계속 한국에 있으려고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지금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완전히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과거에 알쏭달쏭하던 한주의 행동들이 하나씩 이해되고 있었다.

- 지금 누굴 두고 제가 미국엘 가겠어요.

“나도 아깝긴 한데.”

-…그런 소리 하지 마요, 형. 고민하게 되잖아요.

“그럼 언제 들어올 거야?”

- 최대한 빨리요. 형 또 히트 오면 안 되니까.

“오늘은 괜찮을 거 같은데.”

- 언제는 예고하고 오나요. 금방 갈게요.

전화를 끊자 지운이 괴상한 표정을 한 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지금 전화… 한주야?”

“어.”

“다시 집에 들어왔어?”

“응. 좀 됐는데… 너한테 얘기 안 했나?”

“안 했어!”

“지난 11월부터 다시 들어왔어.”

“지금이 1월인데 인제 와서!”

“요새 너 얼굴 보기 힘드니까.”

선유는 아무래도 술은 안 되겠다며 다시 한번 지운의 제안을 거절했다. 한껏 미안한 얼굴을 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지운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단념했다.

“너 걔랑 있어도 괜찮아? 알파인데.”

“응, 뭐… 의사 선생님께 대충 설명했고, 괜찮다고 해 주셨어.”

한주가 제 히트 사정을 책임지고 있다는 건, 아무리 절친한 친우인 지운이라고 해도 말하기 힘들었다. 나중에 좀 더 결심이 단단해지면 말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안 그래도 너 얼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잘 됐네.”

“응, 뭐….”

“그럼 미국도 걔랑 같이 가는 거야?”

“한주는 어학원 다니고, 나는 좀 쉬고.”

“그래, 어머니가 해 주시는 밥 좀 먹으면서 쉬고 와라.”

“우리 엄마 나이가 몇 살인데 내가 가서 밥을 얻어 먹냐.”

물론 아침부터 저녁까지 뭐든 해 주고 싶어 할게 뻔하지만. 선유는 불한당을 보듯 지운을 흘겨보았다. 그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며 지운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식이 육십이 되어도 밥 해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야.”

“…….”

“야, 나도 부모라서 잘 안다고. 세형이가 아무리 나이 들어도 나한테는 소중할 테니까.”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한주가 아무리 커도,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저는 언제나 그의 건강을 걱정할 것이고, 조금만 뺨이 말라도 맛있는 것을 먹이지 못해 안달할 테니까.

“그만 나가자, 사무실 춥다.”

“그래.”

책상 밑에 켜 놓은 온열기를 끄고 선유는 지운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각인에 대해 궁금했던 걸 지운에게 묻기로 했다.

“나 하나 물어볼 거 있는데.”

“어.”

“너는 재한 씨랑 각인했을 거 아냐.”

“했지.”

“지금도 각인된 상태야?”

“당연하지. 각인은 사실 임신한 오메가를 보호하기 위한 작용이나 다름없는데.”

처음 듣는 말에 선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지운의 설명에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각인 절차에 대해선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냐? 사전, 사후 피임약을 먹지 않는 한 거의 임신으로 이어지는데, 알파는 타 오메가의 냄새를 맡지도 못하고 정신적으로 오메가에게 묶이게 되지. 오메가도 각인을 하긴 하지만, 알파의 각인이 훨씬 강해.”

“그럼 혹시 노팅 없는 각인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어?”

“아주 가끔 있긴 하지. 진짜로 열렬히 연애하다 어느 날 자기가 상대방 페로몬 외에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바로 결혼하는 애들 있었어. 정말 드물긴 하지만.”

“…음, 그래.”

“근데 그건 갑자기 왜?”

“아니, 그냥. …너 페로몬 조금만 풀어 볼래?”

“왜?”

“의사 선생님이 가끔 알파 페로몬에 노출되어 보라고 했거든.”

“뭐, 그래.”

주차장까지 따라 내려온 선유가 요구하는 것이 조금 간절해 보여서 지운은 아주 조금, 향만 살짝 나게끔 페로몬을 풀었다. 각인된 알파와 오메가에게 향을 풀어 보라고 하는 건 꽤 실례였으나, 선유는 그런 걸 잘 모르기도 할 터였고 의사의 조언이라고 하니 못할 것도 없었다.

“…음, 너는 이런 향이 나는구나.”

“안 그래도 페로몬 단속 단단히 하고 있어, 너 발현하고 나선 아주 꼭꼭 숨겨 다니고 있지.”

절망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선유는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그 얼굴이 꽤 차갑게 얼어 있어서 지운은 조금 걱정이 되었으나, 이젠 그전보다 좀 더 조심해야 했다.

“태워다 줄까? 날이 꽤 추운데.”

“됐어. 코앞인데.”

“그래, 미국 잘 다녀오고.”

“다녀와서 보자. 들어가.”

지운을 보내고 선유는 천천히 주차장 계단을 밟아 올라왔다. 문을 열고 나오자 시린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사무실에 목도리를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지만, 다시 가는 게 귀찮아서 목을 자라처럼 움츠리고 빠르게 걸음을 걸었다.

뛰듯 걸어 집에 도착하자 어둠이 가득한 방 안은 고요했다. 요새는 매일 저녁때면 한주가 와 있었기에 항상 온기가 가득했는데 이렇게 조용하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한주가 각인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서 선유는 의사에게도 노팅과 내부 사정 없는 각인에 대해서 물어 보았고, 인터넷에서도 여러 사례를 뒤져 보았다. 집착에 가까운 감정을 기반으로 한 각인이기 때문에 거의 풀리지 않고, 알파의 경우 일방적으로 각인을 했을 경우 상대에게 거부를 당하면 중증 우울증으로 분화하거나 자살을 하는 일도 있다고 했다. 그걸 보자 선유는 한주가 걱정되어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최근의 한주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선유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였다. 대체 어느 정도의 애정을 가져야만 각인을 할 수 있는 걸까. 병원에 갈 때마다 일부러 알파 페로몬 자극 검사를 추가해서 하고, 오늘 지운의 페로몬을 조금 풀어 달라고 한 것도 혹여나 저도 한주에게 각인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주 작은 희망을 품은 행동이었다. 물론 그건 전부 절망으로 끝나곤 했지만.

가슴이 좀 답답해진 선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코트를 챙겨 입었다. 벌써 열한 시가 넘어 가고 있는 시계를 보자 덜컥 한주가 걱정이 되었다. 다시 함께 살게 된 후 이렇게 늦게 들어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 앞 벤치에 앉아 큰 길 쪽만 바라보다 한주에게 전화를 했다. 한주의 각인에 대한 걱정과 불안함, 그리고 아직 한주의 마음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저에 대한 한심함이 뒤를 이었다. 발상을 전환하면 될 텐데, 한주를 보는 눈을 조금만 바꾸면 될 텐데.

그렇게 십여 분 정도 더 기다렸을까, 아파트 앞에 택시가 한 대 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지금까지 선유가 기다렸던 이가 내렸다. 하지만 한주 혼자가 아니었다.

“야, 최한주. 정신 좀 차려 봐.”

한주를 부축한 남자의 손이 어깨와 등을 왠지 모르게 친근하게 쓸었다. 그게 아무리 봐도 보통 친구 관계처럼 보이지 않아서 선유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너희 집 다 왔다고.”

“…넌 가.”

“야, 선배한테 ‘너’가 뭐야? 내가 형이라고 부르랬지?”

오메가구나. 선유는 한주의 선배라는 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에 더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제가 알파 냄새를 묻히고 왔을 때 한주가 구역질을 해댔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남의 페로몬, 그것도 제 알파를 흥분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명확하게 가진 그 오메가 페로몬은 선유에게 굉장히 공격적으로 느껴졌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선유는 무언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한주가 제 알파는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렇게 하고 싶고, 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니지, 이미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한주를 제 알파라고 여기고 있는 게 아닌가? 선유는 복잡한 머리를 흔들며 여전히 길에서 씨름하고 있는 둘에게 다가갔다.

“한주야.”

“…누구세요?”

“한주 형이에요.”

선유의 목소리가 들리자 거의 잠들어 있던 한주가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를 부축하고 있던 이를 밀어내고 선유에게 와 안겼다. 선유는 그 묵직한 무게를 받으며 완전히 구겨지려는 얼굴을 간신히 정돈했다. 한주에게서 제 것이 아닌 오메가 페로몬이 진동하고 있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고, 선유는 한주의 선배에게 여기까지 데려 와줘서 고맙다는 한마디를 남긴 채 집으로 들어왔다.

“…형.”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 …안 그래도 귀엽긴 하지만. 한주는 선유의 뺨과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문지르며 형이라고 부르길 반복했다. 그 사이사이에 뭔가 좋다는 말도 섞여 있어서 무슨 의미인가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페로몬을 흘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어떻게든 페로몬 단속을 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한주야.”

“형.”

“우선 샤워 좀 할래?”

“…냄새나요?”

“응.”

잔뜩 충격 받은 얼굴로 한주가 그 자리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애가 왜 이래. 이런 건 가르쳐 준 적도 없기에 선유가 황급히 말리기 시작했지만, 한주는 속옷까지 다 벗고서야 손을 멈췄다.

한주는 발기해 있었다. 그리고 은은하게 숲을 닮은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선유는 순간 벼락 맞은 듯 그 자리에 서서 아무 행동도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발기한 것도 봤고 만져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건 선유의 눈에 너무나 다르게만 보였다.

알파, 남자. 순간 그 단어들이 머릿속에 들이박혔다. 피상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것들이 실체화되며 선유는 무언가 자신 안에서 변화함을 느꼈다. 히트와 비슷했지만, 같지 않았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하고, 손바닥이 촉촉해졌다. 아랫배가 조이는 듯한 기묘한 감각에 잠시 신음하는 사이 한주는 욕실로 들어갔다.

“대체….”

이게 대체 무슨 감각이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소파 위에 주저앉은 채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으로 달아오른 열기를 느껴졌다. 한주가 알파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전부 다 제 착각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선유는 지금까지 한주를 제 알파라고 여긴 적이 없었다. 그가 아무리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제 히트 사정을 돌봐 주고 있다고 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선유가 아직 베타의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이대로 두면 한주는 지쳐 버릴 터였다. 아무리 한주가 괜찮다고 해도 아무도 받아 주지 않는 사랑은 견디기 어려울 테니까. 그럼 종래엔 각인은 풀릴 거고, 한주는 다른 이를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될 것이다. …다른 이와.

임신을 한다면… 그건 한주의 아이였으면 좋겠다. 주사제를 거부하고 약과 알파 페로몬만으로 버티는 이유는 한주의 아이를 가지고 싶기 때문이었으니까. 한주라는 알파의.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선유는 다시 한번 아랫배가 뒤틀리는 느낌에 신음했다. 둔통은 곧 사라졌으나 무언가 뇌 속에 글자를 적어 넣는 것만 같은, 끌과 정으로 새기는 것만 같은 감각이 뒤를 이었다.

“…형?”

이제 정신을 좀 차렸는지 한주는 면목 없다는 얼굴로 욕실 옆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털며 다가오는 그를 보자 또 배 속이 지끈했다.

“형은 괜찮아요? 어디 아파요? 호르몬 변화나….”

“나는 괜찮아. 너는 술을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안 마시면 안 보내준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아직도 술 냄새난다.”

“…씻었는데도 나요?”

킁킁거리며 제 몸의 냄새를 맡던 한주가 앞으로 풀썩 엎어지려 했다. 간신히 한주가 넘어지기 전에 그를 붙잡은 선유가 끙끙대며 부축해 와서 소파에 눕혔다.

“너 이제 무거워서 내가 못 들어.”

“많이… 무거워요?”

“무겁지. 온몸이 다 근육이라.”

“살 뺄까요?”

“네가 뺄 살이 어디 있어.”

잔뜩 풀어진 눈을 하고도 한주는 천장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조금 고개를 돌려 선유를 보고선 아이처럼 웃었다.

“예쁘게도 웃네.”

“…형.”

“응?”

“형한테서는 항상 좋은 냄새가 나요.”

“…어떤?”

“과일향 같은… 형이 오메가 되기 전에도 좋아했어요.”

“너 나한테 냄새난다고 구역질한 적도 있었잖아.”

선유가 하는 말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한주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게 트라우마가 되어 사람 만나는 걸, 특히 알파 만나는 걸 완전히 거부하게 되었는데, 그 트라우마의 장본인이 저렇게 웃어 버리니 얄밉게 느껴졌다. 코를 잡아 비틀어 당기자 한주가 아프다고 어리광을 부렸다.

“각인한 오메가한테… 남의 알파 냄새가 묻었는데 안 그러고 배기겠어요?”

“…그때 자각했어?”

“…첫사랑, 첫 러트에 각인까지.”

나도 이젠 너에게 남의 오메가 냄새가 묻으면 화가 나고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아. 선유는 속으로 호응하며 한주의 가슴 위를 도닥여 주었다.

술에 취한 한주에게선 약간의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게 해 주는, 안도가 되는 것 같은 향이었다. 바닥에 앉아 한주가 누운 소파에 이마를 대고 잠시 머리를 식히던 선유는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에 눈이 절로 감기는 것을 느꼈다.

“형, 좋아해요.”

“…응.”

되돌려 주고 싶다고, 한주가 고백할 때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확신 없이 말할 수는 없었다. 선유는 한주의 눈물을 더는 볼 수가 없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 주었으면.

“…또 미안해요.”

“…어?”

“미안해요, 형.”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한주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우는 걸 못 보겠다고 생각한 게 바로 직전이었는데 그 사이 한주의 얼굴이 젖어 있었다.

“형한테 못되게 군 게 생각이 나서, 미안해서….”

“못되게 군 건 알아?”

“형이 상처받은 얼굴로 볼 때마다, 빌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요.”

선유는 한주의 옆에 앉아 그저 무릎 위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새까만 눈동자로 바닥만 보고 있던 한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형이 저한테 말을 걸려다 마는 걸 볼 때마다, 죽을 것 같았어요.”

“…….”

“하지만 형이 상냥한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상냥하게 굴면 더 좋아하게 되어서, 좋아하다 못해 미친 짓을 저질러 버릴 것 같아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고백을 지껄이고 거부당할까 무서워서.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선유는 핏줄이 다 튀어나올 정도로 세게 쥔 한주의 주먹을 살포시 감쌌다.

“지금 와서는 그 시간이 아까워서 견딜 수 없지만…. 미안해요, 형.”

“…미안해하지 말라니까.”

이미 선유가 다 이해하고 받아들인 시간을 한주는 여전히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회마저도 꽤 기껍게 받아들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주의 머리를 가슴팍으로 밀어 넣듯 안은 선유가 아이 달래듯 등을 두드려 주었다. 숨소리 한 번에 미안하다는 말 한 번을 반복하던 한주가 천천히 잠들었고, 점점 그 무게에 아예 뒤로 넘어가게 된 선유가 한주의 아래에 깔려버렸다. 숨이 막혔지만, 푹 잠든 아이를 깨울 수 없어 선유는 꽤 오랜 시간 불편한 자세를 유지했다.

***€졸린냥

들쑥날쑥 난리였던 선유의 호르몬이 안정된 건 발현 후 6개월이 지난 시점부터였다. 혈액 검사상 호르몬 수치가 정상 범위에 들어왔고, 제 마음대로 오던 히트가 거의 한 달간 오지 않게 되었다. 의사의 말로는 이제 히트가 온다고 해도 그렇게 급격하지 않을 것이고, 구강 억제제를 투여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관리될 것이라 했다.

혹시 알파의 도움을 받았냐는 물음에 선유는 살짝 웃고 말았다. 제 발정 때마다 한주가 끌어안고 달래 주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자궁도 튼튼해 보이네요. 주사제를 거의 안 쓰셨다고 하셨죠?”

“예.”

“벽이 적당히 두께가 있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임신하실 수 있을 거 같네요.”

복부 초음파가 끝나고 이어진 검사는 페로몬 자극 검사였다. 여러 가지 알파 페로몬에 급작스런 히트가 일어나는 것인지 검사하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수월하게 끝났다. 진료를 마치고 나가자 대기실에 앉아 있던 한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어, 기다렸지.”

“아녜요. 검사 결과는 어때요?”

“이제 호르몬 정상수치래. 안정됐대.”

“…다행이에요. 초음파는요?”

“초음파도 좋대. 그런데… 전혀 다행이란 얼굴이 아닌데?”

한주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제 호르몬 수치가 괜찮아졌다는 것에 기쁘면서도 이제 제가 그렇게 정신을 놓고 달려들 일이 없을 거라는 것에 아쉬움을 감추지도 못했다.

“…솔직히 아쉽긴 하네요. 이제 형을 그렇게 만질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러려나.”

“그래도 좋아해요, 형.”

근 3개월간 한주는 시시때때로 사랑을 고백했다. 좋아해요, 일 때도 있었고, 사랑해요, 일 때도 있었지만 토로하는 감정은 전혀 다르지 않았다. 한주가 흔들어 주면 선유는 갈대처럼 흔들려 주었고, 그가 기대고 싶어 할 때는 단단한 땅에 뿌리박은 나무처럼 견뎌주었다.

선유는 지난 1월, 부모한테 형질 변화에 대해 고백을 했다. 선유의 부모는 처음에는 경악했으나, 후기 발현이 아주 드문 일은 아니고, 외가 쪽에 오메가가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하자 이해하기 시작했다.

선유의 부친은 베타에 게이였던 아들이 오메가가 되어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하는 건지 헷갈려 했고, 모친은 형질이 뭐든 자기 아들인 건 변함없다며 생각보다 빠르게 받아들였다.

한주가 같이 간 건 영어 연수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 히트를 진정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다락방에서 발정이 나 들러붙었을 때 한주는 어쩔 수 없이 선유의 입을 틀어막고 서로 자위를 해 주었다. 그에 더 흥분한 선유가 안에 성기를 넣어 달라고 울면서 졸랐지만, 한주는 손가락 끝이 애액에 불어 조글조글해질 때까지 안을 쑤셔 줬으면 쑤셔 줬지 성기를 넣어 주진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자 얼굴이 또 달아오르는 것 같아 차가운 손등으로 뺨을 툭툭 두드렸다. 곧 3월임에도 겨울은 마지막 힘을 내는 듯 춥기만 했다.

“손이 너무 차가워요.”

“너는 엄청 뜨겁다.”

“형은 운동을 좀 더 해야 해요.”

“요새 너랑 하잖아. 넌 너무 많이 했고. 고등학교 때도 맨날 뛰러 나가고.”

선유의 손등을 감싸 문질러 주던 한주가 피식 웃었다. 그게 좀 시원섭섭해 보여서 선유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왜 그렇게 웃어?”

“제가 왜 그렇게 뛰어나갔을까요?”

“…나 때문이야?”

“형 앞에서 발기한 채로 다닐 순 없잖아요. 운동이라도 해야 힘이 좀 빠지니까 뛰었죠.”

“이렇게 예고도 없이 공격하기 있어?”

“언제든 받아 준다고 했으면서.”

투정을 부리며 온기가 조금 돌아온 손을 놓아주었다가 다시 잡고 싶은 것처럼 굴었다가 한주는 갈팡질팡했다. 잡으라는 듯 선유가 뻗어 주자 깊게 숨을 뱉으며 선유의 손을 잡아 코트 주머니에 쑥 밀어 넣었다.

“한주야.”

“예.”

“너는… 얼마나 더 기다릴 수 있어?”

“형, 그건 의미가 없는 질문이에요.”

“의미가 없어?”

“이렇게 마음껏 사랑하고 있는데, 심지어 형이 절 비난도 하지 않고 다 받아 주는데 못 기다릴 이유가 없으니까요.”

“…….”

“무한이 답인 질문은 의미가 없죠.”

한주는 당연한 명제를 말한다는 듯 단호했다. 따뜻한 코트 주머니 안에서 손가락이 얽히고설켰다. 손가락 사이가 맞붙어 문질러지는 감촉에 선유는 조금 몸을 움츠렸다. 히트는 줄어들었어도 개발 당한 온몸은 예민해져서 별거 아닌 접촉에도 신경 줄을 타고 올랐다.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선유의 말을 한주는 그대로 이행했다. 초반에는 성기와 구멍 안쪽만 매만져 사정시키고 열기를 가라앉혀 주었다면,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는 아예 처음에 다 벗겨 놓고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발가락을 하나하나 빨아 준 후 종아리의 연푸른색의 혈관을 따라 잇자국을 내기도 했고, 어느 날은 유두가 새빨개져서 어디 닿기만 해도 자지러질 정도로 빨아놓기도 했다. 선유는 내놓은 말이 있어서 그걸 막지도 못했다. 그래서 지금 이 지경이었다.

선유는 한주의 손을 꽉 잡아 쥐고 다른 걸 또 물었다.

“한주야, 그럼… 너는 나를 왜 좋아해?”

“왜 그런 당연한 걸 물어요?”

“…말해 줘.”

“…저는 그냥 형밖에 없어요.”

“…….”

“형이 그랬잖아요. 제가 형한테는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한주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선유가 견디지 못해 살짝 눈꼬리를 접었을 정도로 빛났다. 선유는 그제야 조금, 한주가 가끔 저를 볼 때 눈을 부신 듯 찡그리던 것을 이해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다만 저는 그 사랑이 친애에서 다른 것으로 좀 더 빨리 변했을 뿐이죠.”

“…….”

“형은 제 아빠고, 엄마고, 형이고… 저한테 사랑하는 사람은 형뿐이에요. 그 사랑이 무슨 의미이든.”

밤이면 뺨에 입을 맞추고 좋은 꿈 꾸라며 좋아한다고 하는 한주, 아침이면 또 뺨에 입을 맞추고 좋은 하루 되라며 좋아한다고 하는 한주, 고수머리인 탓에 아침마다 새집을 지은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사랑한다고 하는 한주… 하루에도 몇 번씩 쏟아지는 그 고백에 선유는 답을 해 주고 싶었다.

확신, 한주가 바라는 것은 확신이었다. 히트 때 혈액을 도는 호르몬에 의한 것이 아닌, 페로몬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사랑, 한주가 바라는 것은 그런 사랑이었다. 그렇기에 선유는 지금까지 한주에게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제 섣부른 판단으로 아이가 또 다른 상처를 입는 건 절대 사양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선유는 확신을 얻었다.

“한주야.”

“예?”

“나 오늘 알파 페로몬 자극 검사도 했거든.”

“히트 안 왔어요?”

“응.”

“이제 정말 잘 자리 잡았나 봐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선유는 한주를 올려다보았다. 마주 본 채 그대로 있자 한주의 얼굴에 조금 의아함이 섞였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말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한주가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무한이라고 말했어도, 저를 사랑하는 이유가 유일무이하기 때문이기에 그 사랑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도 너무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예 페로몬 냄새를 맡지 못했어.”

“…예?”

“알파 페로몬을 아예 맡지 못했어. 네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맡지 못해.”

페로몬 검사 키트는 선유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총 열 개의 표본에서 제가 맡을 수 있었던 것은 페로몬 채취를 위해 사용한 알코올 냄새뿐이었다. 그것이 각인이라는 걸 선유는 한순간에 깨달았다. 왜냐면 풀향 섞인 머스크 향을 내내 맡았으니까.

그 순간 선유는 오메가가 되어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주에게 확신을 줄 수 없었을 테니까, 제가 알파와 각인할 수 있는 오메가가 되어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삶이 전부 전복되고 혼란스러워져도 상관없었다.

“한주야.”

“…형.”

“울지 마. 응?”

“형, 저, 어떻게….”

다급하게 끌어안는 팔이 절박하게 죄어들었다. 선유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한주는 그 넓은 어깨를 덜덜 떨며 울었다.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제게 버리지 말아 달라 애원하던 그 모습으로 정말 서럽게도 울었다.

더는 울지 말라는 말은 말고, 선유는 한주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울지 말라고 하면 더 울었으니까, 그냥 두면 곧 그칠 거라는 걸 알았다. 습관 하나, 버릇 하나 다 알 정도로 둘이 공유한 시간은 길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조금 진정된 듯한 한주의 뺨을 선유가 살짝 쥐었다. 손등 위로 눈물이 길을 텄으나 줄줄 흐르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시원하게 뻗은 한주의 눈꼬리가 살짝 부어 귀여웠다.

선유는 발을 조금 들어 한주의 뺨에 입을 맞춰 주고, 손수건을 꺼내 뺨과 턱, 눈가까지 닦아 준 후 가만히 그 고운 얼굴을 쓸어 주었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이게 꿈은 아니냐는 듯 쳐다보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한주야, 사랑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떤 한주가 그 어느 때보다 굳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눈물에 젖어 더 짙어진 속눈썹이 내려앉았다 천천히 다시 들렸다.

“…알아요.”

“이전과는 다른 의미야.”

“그것도… 알 것 같아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한주는 알 것 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살짝 건조한 손끝이 선유의 턱을 감싸고 입술 위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던 선유가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한주의 입에서 나온 것은 선유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키스해도 될까요?”

“인제 와서 키스를 허락받는 거야?

“저 형과… 키스를 한 적은 없어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키스를 한 적은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선유가 한주의 귓가와 뒷머리를 감싸고 조금 아래로 잡아 내렸다. 그 순간 한주가 선유의 허리와 허벅지를 감싸 쑥 위로 들어 올렸고, 선유는 한주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올라가 있었다.

가볍게 웃으며 다시 얼굴을 감싸고 선유는 그 예쁜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마치 숨을 쉴 줄 모르는 사람처럼 한주는 입술을 닫은 채 얼어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벌리고 서로의 숨을 교환했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입술을 열어 고백했다.

“…사랑해요, 형.”

“응.”

“…….”

“나도 사랑해.”

선유는 다시금 한주에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내 인생에 와 주어서 고맙다고, 네가 있어서 기뻤고, 네가 있어서 슬펐고, 네가 있어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고.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속삭였다.

자기가 해야 할 말을 다 한다고 한주가 울상을 지었지만, 그건 곧 증발하듯 사라졌다. 환하게 들어찬 그 행복감을 바라보며 선유는 가만히 따뜻한 뺨을 매만졌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고백을 했다.

되돌려 줄 수 있어서, 이 길게 되돌아온 길 끝에 되돌려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또 고백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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