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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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수능이 끝난 이후 한주는 아예 집에 들어올 생각도 없는 듯했다. 야간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오후에 나가서 아침에 들어오게 되었고, 선유와는 아예 생활이 반전되었다. 가끔 주말에 마주치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그 와중에 선유는 연말에 장기 출장을 가게 되었다. 입고한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해외의 고객사에서 연말 연초 연휴에도 불구하고 긴급하게 처리를 요청해온 탓이었다. 그 때문에 12월 중순에 출국하여 1월 1일 저녁에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도 연말도 같이 보내지 못함에 미안하여 산 한주의 선물을 잔뜩 들고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온 선유의 눈에 가방 몇 개가 꺼내져 있는 게 들어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한주의 방 안에서 들려왔다.

“…한주야.”

“…….”

“이게 뭐야?”

“이삿짐이요.”

“무슨 이삿짐?”

“왜 그래요, 형. 다 알면서 눈치 없는 것처럼.”

한주의 말처럼 문 앞에 꺼내진 보스턴백을 보고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한주가, 이 집을 나가려고 한다는 것을. 그것도 제게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혼자 결정하여 나간다는 것을.

“상의도 없이….”

“이제 미성년자도 아닌데요.”

현관에 들고 있던 쇼핑백과 슈트케이스를 그대로 던져두고 들어온 선유가 한주의 앞에 바투 섰다. 조금 마른 뺨에 이제 완연히 성인 남성의 기색을 띠운 한주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화를 내려다가도 그 어두운 표정을 보니 안쓰러움이 먼저 올라왔다. 아무리 한주가 제게 차갑게 대했다 한들 그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한주야. 나는… 내가 정말로 이해가 안 되어서 그래. 네가 뭐에 그렇게 화가 나 있는지… 집을 나가겠다고 할 정도면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다는 거잖아.”

“…….”

“어릴 때부터 너랑 나는 항상 대화를 해 왔는데,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서로 풀고 고쳐 달라고 요구했었잖아. 그런데 왜 그걸 거부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선유는 한주를 달랬다. 성인이 되면 집을 나가는 게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나가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까지 있었던 거잖아요.”

“…….”

“원래는 어제 나가려고 했어요. 그래도 아무 말도 없이 나가는 건 아닌 거 같아서 하루는 더 있었던 거예요.”

“한주야. 어째서.”

“…형을 더는 못 견디겠어요.”

나를 더는 견딜 수가 없다고. 선유는 그 말을 되씹으며 다시 한주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다가가기 무섭게 한주는 불쾌한 듯 뒤로 물러났다.

“내가 너무 간섭을 했어? 하지만 나는… 네가 아직 내 보호 아래에 있으니 걱정이 되어서….”

“그래서 싫다고요. 그게 싫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선유는 제 부모가 그리했듯이 한주에게 간섭하지 않으려 애썼다. 가끔 학교에 가서 다른 보호자들과 얘기를 할 때면 제가 너무 무심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나만의 착각이었다면, 한주가 저런 얼굴을 할 정도로 목 졸리는 듯한 갑갑함을 느꼈다고 한다면… 지금의 저는 그를 잡을 자격이 있는가.

“나가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 너 무슨 돈으로….”

“아르바이트 했어요. 주식도 했고.”

“주식….”

“집은 이미 12월에 구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주식 거래가 가능한 통장을 만들어 달라고 했던 적이 있었지. 그리고 수능이 끝나고 두어 달 동안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으니 월세 보증금 정도는 마련했을 터였다. 선유는 더는 한주를 붙잡을 만한 유인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 미성년자이기에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은 없어졌다. 돈으로 한주를 붙잡을 수조차 없었다. 그럼 무엇으로 붙잡아야 하지? 이대로 보내는 수밖에 없나?

“한주야.”

선유가 팔을 붙잡는 순간 한주는 그대로 그걸 떨치듯 털어냈다. 커다란 손, 넓은 어깨와 등. 순간 선유는 역광에 비친 한주가 이미 완연한 성인임을 깨달아 버렸다. 그리고 더는, 정말로 붙잡을 수 없다는 것도.

한주는 다시 짐 정리를 마무리하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선유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 한주의 말을 곱씹다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열어 통장 두 개와 주식 관련된 서류 파일을 꺼내왔다.

“한주야.”

“말리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

“…이미 그렇게까지 준비했다면 말리지 않을게. 다만 어디로 가는 건지는 알려줘.”

한주는 검은 눈으로 한참 선유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선유는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아이의 한숨이 이렇게까지 가슴이 들이박힐 줄은 몰랐다. 정말로 제가 그렇게 한주를 힘들게 한 걸까. 견디기 힘들다고 할 정도로.

“알았어요.”

“이거… 너희 부모님 보험금이랑 집 매매한 돈이야. 삼촌한테서 받아와서 보관해 놓고 있었어.”

“…….”

“그리고 이건 내가 양도한 우리 회사 주식인데….”

“…아예 끝내자는 거예요?”

“어?”

“그것까지 주고, 형하고 내 관계 아예 끊자는 소리 아니냐고요.”

선유는 당황스러워 입만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지금까지 연 끊고 싶다는 듯 굴었던 게 누군데, 한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유는 한 번 숨을 고르고 파일첩을 다시 건넸다.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내가 너와 관계를 끊고 싶을 리가 없잖아.”

“…….”

“도장이랑 명의 다 네 거니까 쓰도록 해.”

“형은 진짜….”

한주는 입 안에서 무슨 말을 질겅질겅 씹으며 선유를 한참 노려보다 빼앗듯 그것을 채갔다. 화가 잔뜩 난 손길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방으로 돌아가더니 종이에 주르륵 무언가를 적어 선유에게 건넸다.

“마음대로 찾아오지 마세요.”

“…그래.”

선유는 정말로 나가려는 듯 짐을 드는 한주의 뒤에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고, 실감도 나지 않았다. 눈가가 어릿해지며 시야가 이지러지는 게 느껴졌다. 신발을 신는 그의 뒤에서 선유는 할 수 있는 말이 하나밖에 없었다.

“…미안해.”

그렇게 답답하고 견딜 수 없게 했다니,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현관문을 열던 한주가 뚝 멈춰선 채 뒤를 돌아보았다. 노란 현관 조명 아래의 한주는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 아주 조금 선유가 익숙한 얼굴로 웃었다.

“형이… 미안할 건 없어요.”

“…….”

“갈게요.”

그렇게 한주는 정말로 집을 나가 버렸다.

***

선유의 삶은 생각보다 많이 바뀌지 않았다. 지난 일 년간 한주가 없는 생활에 많이 익숙해진 덕이었다. 한주는 이걸 예상했던 걸까? 그래서 그렇게 일 년간 모질게 정을 떼어냈던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한주의 입장을 너무 배려해 주는 생각이었다.

그저 조금 디테일한 생활력이 부족해진 것뿐이었다. 소파에 겉옷이 쌓이기 시작했고, 찬장의 그릇이 얼기설기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놓이고, 욕실에 아주 조금 물때가 생기고 하는 정도였다.

대부분은 선유가 조금 더 신경을 쓰면 해결될 문제였으나, 지금까지 한주가 그런 세세한 걸 아무렇지 않게 해 주었다는 걸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겉보기일 뿐이었다. 달라지지 않은 건 겉뿐.

선유는 다시 회사 일에만 집중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의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지운이 참견을 한 것은 두 달여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야.”

“…어?”

회사에선 보통 농담으로라도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지운의 거친 부름에 선유는 한발 늦게 고개를 들었다.

“여덟 시야.”

“그래? 얼른 퇴근해.”

“너는.”

“어, 나는 이거만 마무리하고….”

“마무리하는 게 언젠데.”

“곧.”

“곧이 언제냐고.”

“곧이 곧이지 뭐야.”

더 가까이 다가온 지운이 선유가 들여다보고 있는 노트북을 탁 눌러 덮었다. 불만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자 그는 아예 배터리 선까지 뽑아 버렸다. 그런다고 해서 노트북이 꺼질 리는 없지만, 지운의 함의를 받아들인 선유가 어쩔 수 없이 퇴근 준비를 했다.

“노트북 두고 가.”

“어? 안 돼. 입고 얼마 안 남았어.”

“너 말고 일할 사람 많잖아.”

“그래도 아직….”

“우리 집 가서 밥이나 먹자. 너 요새 뭐 좀 챙겨 먹긴 해?”

“밥이야 먹지. 새로 생긴 반찬 가게가 괜찮더라고.”

지운이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잠가 버린 노트북을 여전히 아쉬운 눈으로 쳐다보던 선유가 달력을 한 번 쳐다보았다. 내일… 입학식이지 않을까? 매년 학기 초가 되면 한주의 학교 스케줄을 인쇄해서 냉장고에 붙여 놓곤 했었다. 처음엔 그걸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하곤 했지만, 곧 학교 스케줄을 보는 것도, 챙겨 주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한주는 그런 게 답답했을지도 몰라, 워낙 혼자서도 잘 하는 애였으니까 챙겨 주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지 않는 때에는 이런 생각만 했다. 그래서 선유는 더욱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세형이가 아저씨 보고 싶대.”

“세형이 나한테는 오빠라고 부르던데.”

“양심 좀 챙겨라.”

“네가 딱히 오빠라고 부르라고 한 적 없는데?”

“내가 잘못 가르쳤지 뭐. 재한이 조카한테 오빠라고 부르면 된다고 했더니 자기보다 나이 많은 남자는 전부 오빠가 되었으니.”

처음부터 오빠로 굳어진 부름은 아무리 지운이 옆에서 아저씨라고 고쳐 줘도 그대로였다. 지운의 집에 도착해 문을 열자마자 안쪽에서 작은 아이가 튀어나왔다. 아빠, 하며 지운에게 안기는 아이는 여전히 예쁘게 빚어 놓은 사기 인형처럼 고왔다.

“안녕, 세형아.”

“…오빠, 안아 주세요.”

팔을 벌리며 안겨드는 아이는 따뜻했다. 목에 감기는 가느다란 팔이 꼭 힘을 주어 선유를 안았다.

“선유야, 어서 와.”

“안녕.”

가벼운 옷차림을 한 재한이 부엌에서 나오며 선유를 맞았다. 어색하게 존댓말을 쓰던 둘 사이는 최근 많이 가까워졌다. 지운과 부부싸움을 한 재한이 한탄을 할 상대는 선유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와서 미안.”

“뭘. 지운이가 오자고 했을 거 아냐.”

“그렇긴 해.”

“아주 요새 둘이 짝짜꿍이 잘 맞는다?”

선유는 아이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아이가 놓아주질 않아서 옷도 벗지 못하고 있는 걸 본 재한이 뭐라 한마디 했지만, 세형이는 더 꼭 선유의 품에 안겨왔다. 제 딸이 남의 품에 더 편안히 안겨 있는 걸 본 지운이 떨어뜨려 놓으려 했지만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아도 옷은 벗게 해 줘야지.”

“싫어… 오빠랑 있을 거야.”

“세형아. 얘 오빠 아니야. 아빠랑 나이 똑같아.”

“웅… 아냐, 오빠야.”

선유는 아이가 저를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었기에 둘이 하는 걸 보며 피식 웃기만 했다. 조금 더 지나서 호칭의 차이를 알게 되면 어련히 교정되겠거니 했다.

간신히 아이를 달래 잠시 내려놓고 선유는 코트만 벗었다. 그 잠시를 못 참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세형이는 선유가 코트를 내려놓기 무섭게 다시 폭 품에 들어왔다.

“세형이는 내가 좋아?”

“응, 좋아요.”

킁킁 뭔가 맛있는 냄새를 맡은 것처럼 아이는 선유의 품에서 코를 울렸다. 어깨와 목덜미에 문질러지는 머리카락이 무척 부드러웠다. 가볍게 뒤통수와 등을 쓰다듬어 주자 위를 올려다보며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오빠….”

“응?”

“울어?”

“어, 아냐.”

부정하기 무섭게 아이의 이마로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정말 왕방울하게 뜨고 세형이는 선유의 뺨을 매만졌다.

“왜 그래?”

“아, 눈에 뭐가 좀 들어간 거 같아.”

세형이의 이마를 훔쳐내고 선유는 애써 웃었다.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사회적 방벽이 무너지는 걸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선유의 품에서 빠져나간 아이가 상을 차리고 있는 제 아빠한테 뛰어가서 고자질을 했다.

“툭 했어, 툭.”

“어?”

“오빠 눈에서 툭 했어!”

지운이 미묘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유는 한숨을 쉬며 붉어진 눈가만 문질렀다. 아무래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기기엔 무리인 것 같았다.

“우선… 밥 먹고 얘기해.”

어색한 표정으로 한 번 웃자 지운이 식탁을 가리키며 얼른 오라고 했다. 선유의 맞은 편 아기 의자에 앉은 아이가 포크를 쥐고 재한을 재촉했다. 그리 시지 않게 만든 토마토 파스타를 먹는 아이의 입가가 잔뜩 엉망이 되었다. 이미 그럴 걸 예상한 지운이 만들어 놓은 물수건으로 이따금 더러워진 입가를 닦아 주었다.

따뜻해라, 선유는 가만히 그 광경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런 선유에게 아이가 포크로 쿡 쇼트 파스타를 찍어 내밀었다.

“맛있어?”

“응. 세형이가 줘서 더 맛있네.”

도란도란 식탁 위를 오가는 대화는 일상적이었다.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재한은 그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재치 있게 얽어냈고, 지운도 거래처에서 있었던 일과 함께 한탄을 가볍게 섞여 얘기했다. 제 욕을 하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허락을 해 주었더니 지운은 한번 망설이지도 않았다.

“내 욕해도 돼.”

“아, 그러니까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요새 얘 때문에 속이 아파서 회사를 못 다니겠다니까.”

“너 너무하는 거 아냐? 아무리 욕해도 된다고 했지만….”

“죽상으로 다니니까 그러지. 회사 직원들이 요새 네 눈치 보느라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아?”

“…내가 그러고 다녔어?”

“어. 오죽하면 내가 너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겠냐.”

“그러게…. 무슨 일 있어?”

단호한 지운의 대답과 걱정스러운 재한의 질문에 선유는 잠시 말을 잃었다. 심각한 얼굴로 포크를 쥐고 그릇만 몇 번 긁는 선유에게 지운이 물었다.

“한주 때문이야?”

“한주가 왜? 나 그렇게 착한 남자애 처음 봤을 정도였는데.”

“작년에 되게 반항기였거든.”

“한주가? 믿기지 않네. 몇 번 안 봤지만 너무 얌전해서 신기했거든.”

재한은 결혼 전에만 몇 번 한주를 봤고, 그때는 그의 말대로 한주는 얌전하고 정말 착하기만 했다.

“한주 독립해서 집에 없어. 그러니까 한주 때문은 아냐.”

“…걔 집 나갔어?”

“어. 이제 성인이니까. 대학교도 갔고.”

“독립한 거랑 걔 때문이 아닌 거랑 무슨 관계야. 너도 말하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집에 없는데 한주 때문일 리가 없잖아.”

“걔가 없으니까 문제인 거지. 너 지금 혼자 있다는 거잖아.”

“혼자 지내는 건… 익숙해.”

“…….”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지 마. 세형이가 눈치 보잖아.”

선유는 보드라운 다갈색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 주고 세형이에게 얼른 맛있는 거 먹으라고 달랬다. 조금 가라앉은 식사 시간이 어색하게 목구멍을 막아왔다. 선유는 재한이 해 준 요리를 남길 수 없어 억지로 먹어 치웠으나 속이 더부룩하게 얹히는 느낌이었다.

술 한잔하고 가라는 지운의 말에 선유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더는 매달리는 아이를 안고 있는 게 힘들어지고 있었다. 세형이는 무척 예쁘고 귀여웠지만, 선유에겐 한주를 떠올리게 하는 트리거와 같았고 재한과 지운을 보고 있으면 제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이 타올랐기 때문이었다. 제 스스로가 너무 못나서 여기 있다가는 말도 안 되는 열등감을 내비칠 것 같았다.

“선유야. 데려다줄게.”

“택시 타면 금방이야.”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지운은 부득불 배웅을 나왔다. 또 잔소리가 시작될 거 같아 선유는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으나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너 나한테 너무 숨긴다.”

“안 숨겨.”

“한주 나간 지 꽤 된 거 같은데 왜 말을 안 했어?”

“…굳이 할 필요 없는 거 같아서.”

“연락은 해?”

아니, 한주는 제 연락에 단 한 번도 답장을 되돌려 주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서 신경 쇠약에 걸릴 지경이 된 선유가 한 달이 지난 시점에 한주가 적어 주었던 주소로 찾아갔었고, 거기서 아무렇지 않게 지내고 있는 그를 보고 나서야 조금 괜찮아졌다. 나름대로 놓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와, 그 새끼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냐.”

“…견딜 수가 없었대.”

“뭐?”

“나랑 있는 게 견딜 수가 없었대.”

“…….”

“지금은 좀 허전한데 괜찮아지겠지.”

“…선유야.”

“우리 부모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 막 기숙사 학교 간다고 하고, 대학 때 집에 잘 가지도 않고 그랬잖아.”

선유는 간신히 잡은 택시 문을 열며 말했다.

“고마워, 지운아.”

“너 우리 집 와서 살래?”

“미쳤어? 오버하지 마.”

“…….”

“말은 고맙다. 갈게.”

선유는 택시에 올라 지운과의 대화 중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을까 봐 무의식적으로 눈가를 몇 번 쓸었다. 다행히 손에 물기가 묻어나진 않았다.

핸드폰을 켜 대답 없는 한주와의 메시지 창을 바라보았다. 전부 제가 보낸 흔적밖에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한주가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입학식이니까 한 번쯤 찾아가 봐도 괜찮지 않을까? 선유는 천천히 손을 놀려 메시지를 보냈다.

「한주야, 잘 지내? 내일 입학식이지? 오후에 너희 집에 한 번 가려고 하는데… 안 되면 연락 줘.」

연락이 없으면 가겠다는 얘기였다. 눈을 꾹 감고 메시지를 보낸 선유가 더부룩한 배를 문지르며 택시 좌석에 기댔다. 혹시나 오지 말라는 답이 올까 봐 긴장한 손바닥이 촉촉해져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다행히 다음 날 오전까지 부정의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

올해 첫 휴가를 내고, 선유는 오랜만에 활기차게 집 안 청소부터 시작했다. 크게 더럽진 않아도 정리가 안 된 것 같아 여기저기 걸쳐져 있는 옷을 걷어 세탁기를 돌리고 바닥을 물걸레로 닦아냈다. 그리고 찬장과 냉장고 정리까지 싹 다 끝내자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나 있었다.

젖은 세탁물을 옷걸이에 걸던 선유는 한주가 채 다 가져가지 못한 옷 몇 벌을 발견했다. 그중에 한 벌을 바닥에 펼쳐 보니 크기가 실감 되었다. 제 것보다 두 사이즈, 아니 가끔은 세 사이즈를 크게 입으니 이 정도 차이가 나는 게 당연하지 싶으면서도 다시 한번 한주가 다 커 버렸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어제 사 놓은 크루아상을 먹고, 아침부터 만든 반찬을 꺼내 가방에 넣었다. 제대로 밥은 먹고 다니는지 걱정되어 한주에게 가져 줄 생각이었다.

한주가 나간 이후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방문을 열었다. 정말로 당장 필요한 것만 가지고 갔는지 여전히 사람이 사는 것 같은 느낌의 방이었다. 잠깐 발을 들였다가 금세 다시 돌아 나왔다.

선유는 한주가 혹 이상한 곳에 집을 얻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 학교 근처의 신축 원룸에 자리를 잘 잡았다. 이것저것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차 트렁크가 가득 찼다.

한주의 학교는 선유의 집에서 차로 30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통학을 하려면 충분한 거리임에도 성인이 되자마자 나가 버린 한주를 생각하니 또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애써 그 생각을 지워 버리려 애썼다.

선유는 짐을 들고 원룸 건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한주의 집은 7층으로 최상층이었다.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한 번 누르고, 한참 대답을 기다렸다. 아직 집에 오지 않은 건가, 하긴 오늘 입학식이니 선배들과 같이 식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전화만 한 번 더 해 보고 대답이 없으면 돌아가자. 선유는 핸드폰을 꺼내 켰다. 몇 달 만에 한주에게 전화하는 게 어색했다.

문 안쪽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안에 있는 건가? 선유는 다시 초인종을 누르고 끝내는 문을 두드리기에 이르렀다. 수도 없이 건 전화벨이 계속 울리고, 안에서는 기척이 느껴지는데 전화를 받지도 문을 열지도 않는 게 불안했다.

선유는 짐을 그대로 내려놓고 급히 1층으로 내려가 집주인을 찾아 같이 올라왔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사람을 끌고 와 문을 열어 달라고 하자 난색을 표했다.

“아, 그렇게 마음대로 문 못 열어드린다니까요.”

“안에 있는데 문을 안 열잖아요. 이것 보세요. 전화도 안 받는다니까요?”

“당신이 누군지 알고….”

“한주 형이에요! 애한테 무슨 일 생기면 책임지실 거예요?”

“그걸 어떻게 믿어요?”

“그럼 경찰에 신고하면 되잖습니까! 얼른 열어 주세요.”

그 잠깐 사이에 선유의 머릿속으로 최악의 상황이 흘러갔다. 혹시 열이라도 끓고 있는 거면? 넘어져서 머리라도 부딪친 거라면? 걱정스러워서 온몸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선유와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 짐을 가만 보던 집주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문을 열었다.

“한주야!”

휑한 집 안을 둘러 볼 새도 없이 선유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요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고, 여전히 전화는 거실 한복판에서 울리고 있었다.

“한주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에 주저앉아 있는 한주가 보였다. 선유는 얼른 샤워기를 끄고 돌처럼 차갑게 식은 한주의 상반을 안았다. 피부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다 돋을 정도로 차가웠고, 또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혹시나 하여 하반신을 확인하자 뚜렷하게 발기한 기색이 보였다.

러트구나, 러트. 옆에 약통도 하나 떨어져 있는 걸 보니 약도 먹은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뜨겁지? 선유는 다시 한주의 몸을 매만져 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사제를 찾아야했다.

“무슨 일입니까? 병원에 가야 해요?”

“아뇨, 병원에 갈 필요까진….”

선유는 무의식중에 저를 끌어안는 한주의 손을 간신히 떼어 내고 나와 서랍장을 열어젖혔다. 두 번째 서랍 안에 주사제가 들어 있었다. 다 젖은 채로 거실과 욕실을 오가 바닥에 전부 물이 흥건해졌지만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선유는 주사제를 바로 한주의 허벅지에 꽂아 넣었다.

“발정기인가 보네.”

“…예, 제가 좀 달래 놓겠습니다.”

“뭐, 그래요.”

선유가 한주의 형이라는 걸 확신한 듯 집주인이 문을 닫고 가 버렸고, 선유는 제게 기댄 한주의 등을 쓸어 주며 그가 안정되길 기다렸다. 주사제를 스스로 놓지 못할 정도로 갑자기 러트가 온 건가, 한주는 같이 지낼 때 처음을 제외하고는 러트가 온 티를 거의 내지 않았다. 그래서 잘 방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 봐, 나와서 사니까 자기 몸 관리도 잘 못하는 거 아냐. 선유는 괜히 삐뚠 생각을 했다.

숨은 좀 가라앉았는데 아직 발기는 풀리지 않았다. 좀 더 있으면 괜찮아지려나, 선유는 아이 달래듯 한주의 등을 도닥였다. 그 순간 허리를 휘어잡은 팔이 선유의 몸을 아래쪽으로 잡아당겼고, 선유는 그대로 욕실 천장을 본 채 눕게 되었다.

“…한주야?”

아직 빛이 돌아오지 않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거칠게 바지 버클을 풀어낸 한주가 제 성기를 스스로 쥐고 훑기 시작했다. 어린아이 주먹 만 한 귀두가 큰 손아귀 속에서 비벼지고 둥글게 말린 그 안에서 튀어나왔다 다시 들어가길 반복했다.

선유는 숨도 못 쉬고 아래에 깔린 채 한주의 자위가 끝나길 기다렸다. 색이 있다면 새빨갈 게 분명한 숨이 목덜미를 간지럽혔고, 거대하게 선 성기가 젖은 니트 위를 두드렸다. 쩍쩍 물기 어린 피부가 부딪치는 소리가 젖은 욕실 타일에 부딪쳐 울렸다.

“…하.”

“…….”

“흐… 읏….”

한주의 입에서 숨죽인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성기 구멍에서 묽은 액체가 흘러나와 니트를 적시고, 씨올 사이로 스몄다. 선유는 그 점도 다른 액체가 배를 적심에 눈살을 찌푸렸다.

코끝에 진한 머스크 향기가 흘렀다. 바디 샤워나 로션 냄새인가, 민트가 섞인 머스크 향은 무척 생소한 것이었다. 선유는 급작스레 쏟아지는 향기에 의아해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허리만 꽉 끌어안고 있던 한주의 손이 야만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탓이었다.

커다란 손이 푹 젖은 코트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와 맨살을 문질렀다. 아예 가슴까지 올라오는 손을 황급히 잡아 내리자 한주는 이번엔 엉덩이를 쥐고 당겨 서로의 샅이 맞닿게 했다. 예상치 못했던 접촉에 선유는 한주의 어깨를 붙잡아 밀었으나, 도저히 그 힘을 이길 수가 없었고 단단한 어깨는 한 손에 잡히지도 않을 정도로 두터웠다.

“한주야, 그만….”

“흐, 하아….”

“최한주!”

바지 속으로 들어온 손이 둔부를 벌리고 그사이까지 들어오려는 찰나 선유는 비명처럼 한주를 불렀다. 그 순간 한주의 성기가 진한 유백색의 액체를 쏟아냈고, 흑색으로 비어 있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선유 형?”

경악한 얼굴로 제 밑에 깔린 선유와 제가 쥐고 있는 성기를 번갈아 보던 한주가 경기라도 들린 듯 뒤로 물러났다. 선유는 제 배와 가슴을 적시고 턱까지 튀어 오른 것을 아연한 눈으로 한참 쳐다보았고, 성기를 내놓은 채 아예 넋을 놓은 듯한 한주에게 젖은 코트를 벗어 던져 주었다.

“…러트가 왔던 거 같아.”

“형이… 왜 여기 있어요?”

“약도 먹은 거 같은데 잘 안 들었나 봐. 내가 주사 맞혔어.”

“…왜 여기 있냐고요.”

“한주야.”

“나….”

한주가 붉어진 얼굴을 들고 욕실 문밖을 가리켰다.

“어?”

“나가요.”

“뭐?”

“나가라고요.”

선유의 코트로 대충 하반신을 가리고 일어난 한주가 선유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뚝뚝 흐르는 물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선유를 현관까지 내몰았다.

“나 옷 좀… 한주야, 너 정말… 최한주!”

선유는 간신히 한주의 팔을 떨쳐냈다. 그 잠깐 사이에 붙잡힌 팔뚝이 뻐근해질 정도의 힘이었다.

“적어도 네 정액은 닦고 나가야 하지 않겠어?”

그제야 선유의 상태가 보였는지 한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쿵쿵 발소리까지 내며 안으로 들어가 커다란 타월을 꺼내왔다. 그리고 그대로 선유의 머리부터 둘러 버렸다.

“…닦으면 가세요.”

한주는 제게 완전히 모질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아내고 한주가 들어가 버린 방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일부러 발소리를 낸 거였는데 오지 말라는 말이 없으니 조금 더 가도 될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벗어낸 젖은 청바지를 바닥에 한주가 패대기쳤다. 그리고 뒤를 흘긋 돌아보고 속옷도 벗어 던지더니 옷을 꿰어 입었다. 선유를 없는 셈 치려는 것 같았다.

“한주야, 나도 옷 좀.”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선유는 왠지 한주가 지금은 제 말을 들어 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서랍장으로 다가간 한주가 거대한 후드티와 고무줄 바지를 선유에게 건네고 다시 문을 쾅 닫았다.

옷을 갈아입은 선유가 젖은 옷을 접어 욕실 앞에 놔두고 밖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짐들은 정리해 안으로 들여놓았다. 반찬통이 몇 개 뒤집히긴 했지만, 새어 나온 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건 또 뭐예요.”

“아, 반찬 몇 개랑 네 옷이랑….”

“필요 없어요.”

“밥은 잘 먹어?”

선유는 한주가 제대로 대답하지 않아도 미뤄 두었던 질문을 아무렇게나 쏟아냈다. 아이의 얼굴은 여전히 사랑스러워서 섭섭함 보단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그런 선유를 어두운 눈길로 내려다보던 한주가 선유를 불렀다.

“형.”

“어?

“나가요.”

“…….”

“제 정액 닦으면 간다고 했잖아요.”

한주는 이번엔 팔을 잡지 않고 선유의 등을 밀었다. 별로 힘을 들이지도 않는 거 같은데 선유는 현관까지 질질 밀려갔다.

“한주야. 반찬 냉장고에 넣어 두고 먹고, 봄옷 좀 사 왔어. 이번에는 원래 네 옷 가져가서 사 왔으니까 잘 맞을 거야.”

“…….”

“…또 올게.”

한주는 신발도 신지 않은 선유를 문 밖으로 내몰고 구두를 내놓은 후 대답 없이 쾅, 현관문을 닫았다. 그리고 핸드폰도 지갑도 없이 쫓겨난 선유가 문을 두드리며 소지품을 달라고 하자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그것들만 툭 튀어나왔다.

선유의 몸집보다 훨씬 커 누가 봐도 빌려 입은 티가 나는 옷을 질질 끌며 집에 돌아온 선유가 벗어 놓고 온 옷을 가지러 가겠다고 연락을 했으나, 한주에겐 답이 없었고 며칠 뒤 깨끗하게 세탁된 옷이 택배로 도착했다.

선유는 왠지 모르게 한주가 저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로 싫었다면 끝내 타월을 내주지 않았을 거고, 옷도 빌려주지 않았을 것이며, 두고 간 소지품을 돌려주지도 않았을 터였다. 정말로 완전히 끊어낸 것처럼 아는 척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그날 이후 선유는 시간이 날때마다 한주의 집에 드나들었다.

“형은 정말 지겹지도 않아요? 제가 이렇게까지 하면 싫어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 아녜요?”

“…네가 있으니까 안 지겨운데.”

“그냥 좀 가세요. 맨날 문 앞에서 문전박대당하면서….”

“그러는 너는 왜… 문을 열어 줘?”

“…….”

“아예 안 열어 주면 되잖아.”

“이웃에 민폐예요.”

“나 초인종 두 번밖에 안 누르는데.”

“거기 앞에 앉아서 몇 시간이고 있잖아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냐고요.”

“오지 말라고 하면 안 올게.”

“제가 오지 말라고 벌써 몇 번을 얘기했는데 모르는 척하는 거예요?”

한주는 이마를 짚고 현관에 기대선 채였다. 낮잠이라도 자다 일어난 건지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날리고 있었고, 편안하게 입은 티셔츠 아래로 단단하게 여문 상체가 드러날 듯 감춰져 있었다. 또 코끝에 묵직하게 닿는 머스크 향에 콧속이 다 간지러웠다.

“그런데 한주야, 혹시 향수 뿌려?”

“…향수요?”

“응, 향기가 좋긴 한데 좀 진해서….”

“그런 거 안 뿌려요.”

“아, 그럼 혹시 애인 생겼….”

“시끄러우니까 그만 좀 가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한주가 정색하며 선유의 말을 끊었다. 애인 생겼냐고 묻는 게 그렇게나 기분 나빴나, 정말 애인이 있어서 그러나. 어깨를 툭 미는 손을 잡아끌자 한주는 정말로 기분이 나쁜 듯 이마를 왕창 구겼지만, 그걸 떨치진 않았다.

“그럼 집에는 안 들어갈 테니까 나가서 밥 먹자. 응?”

“…….”

“한주 좋아하는 소고기 먹자.”

“…밥 먹으면 가는 거죠?”

“어, 갈게.”

또 알 수 없는 눈으로 선유를 내려다보던 한주가 입 안으로 무언가 중얼대더니 여전히 제 손을 잡고 있는 선유의 손을 밀어내고 집으로 들어갔다가 금세 나왔다. 위에 집업 후드만 하나 더 걸친 차림이었다.

“오랜만에 한주랑 밥 먹네.”

“…….”

“등심 먹을까?”

“아무거나 먹어요.”

불편한 고깃집 의자에 앉아 선유는 여전한 한주의 거절을 그저 견디고 있었다. 그런 한주의 태도에 속절없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걸 기민하게 알아챈 한주가 매정을 가장한 다정한 말을 툭 던져 주었고, 그 말을 들은 선유는 바보 같게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아이 앞에서 울 순 없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선유가 젓가락을 고쳐 쥐고 잘 익은 고기를 집어 한주의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혼자 지내면 이런 거 잘 못 먹지? 많이 먹어.”

“…형은요.”

“어?”

“형도 혼자 지내잖아요.”

“아, 나는….”

선유는 바람 빠지는 듯 한 번 웃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잘 먹어. 요새 회사 직원들이 자주 회식 하자고 해서….”

“형도 많이 먹어요.”

한주의 젓가락이 불판과 선유의 앞 접시 위를 몇 번 오갔다. 그리고 빈 쌈 채소 접시를 보고 서버를 불러 채워 달라 요청했다. 선유는 다시 채워진 쌈 채소를 집어 고기를 싸 입에 넣었다. 소고기를 상추와 같이 먹는 이는 둘 중 선유 하나뿐이었다.

“공부는 어때?”

“그냥 그래요.”

“곧 기말고사 기간이지?”

“예.”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고 이젠 좀 오지 마시죠, 란 얼굴로 한주가 고기를 씹었다. 선유는 그런 한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어미 새처럼 부지런히 한주의 접시로 고기를 옮겨 놓으며 오랜만에 둘 사이에 흐르는 부드러운 공기를 즐겼다.

“1학년이면 교양과목 많이 듣지?”

“…형은 한국에서 학교 다니지도 않았으면서 잘 아네요.”

“아, 뭐….”

“이건 상식도 아닌 거 같은데.”

한주가 어느 과에 입학했는지 알자마자 교과과정을 쭉 한 번 훑어보았기에 아는 것이었다. 1학년 때는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이 세 개밖에 없었고, 그럼 교양과목을 많이 들을 거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방학 때 나랑 미국 갈래?”

“…예?”

“예전에도 갔었잖아.”

“그건 예전이죠.”

조금 돌아왔다 싶으면 다시 멀어지고 만다. 선유는 파무침을 끌어다 입에 넣으며 그 감상까지 같이 씹어 삼켰다. 냉면까지 시켜 한주를 살뜰하게 챙겨 먹이고 나자 둘 앞의 접시는 전부 다 비었다.

“들어가.”

“이제 그만 좀 와요.”

“그럼 다음엔 네가 올래?”

“…그만 가세요.”

“그래.”

금세라도 뒤돌아 가 버릴 것 같았던 한주가 가만 선유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허리를 숙여 선유의 귀와 목덜미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가 의아하단 얼굴로 물러났다.

“왜 그래?”

“아뇨, 좀 이상해서. 그럴 리가 없는데….”

“뭐가?”

조금 장난스럽게 말을 이으려던 선유가 아랫배를 붙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늘로 내장을 찌르는 듯, 그리고 안쪽에서 무언가 부풀어 오르는 듯한 팽만감이 느껴졌다. 주저앉아 바닥을 까드득 긁으며 이를 악물자 놀란 한주가 그 앞에 같이 주저앉았다.

“형, 괜찮아요? 병원에….”

“아, 아냐… 조금 있으면 괜찮아져….”

몇 달 전부터 간헐적으로 배 속에 통증이 일었다. 엄청나게 아팠지만 지속성은 없어서 이번에도 조금 있으면 괜찮아 질 거다.

“병원 가 봤어요?”

“아니, 조금만 아프고 곧 안 아파져서….”

“아픈데 왜 병원을 안 가요?”

분에 찬 듯 버럭 한주가 큰 소리를 냈다. 하지만 정말 지속 시간이 잠깐이라서…라고 변명하려던 선유는 한주의 얼굴을 보고 말을 삼켰다.

“이제 괜찮아.”

“…….”

“정말인데….”

식은땀이 등과 이마에 배어 나올 정도로 아프지만 바로 괜찮아지니 병원을 가기도 뭐 했다.

“병원 가요. 얼른.”

허리를 세워 일어나자 한주는 아예 선유의 얼굴을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저를 뒤에 남겨둔 채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듯 사라졌고, 선유는 한참 거기에 붙박인 듯 선 채였다. 잠시 후 손을 들어 식은땀을 닦아냈다.

“…아직 걱정은 하는구나.”

그런데 왜 그렇게 매정하게 굴려고 해? 이렇게 떨어져 있으니 선유는 한주가 일부러 저런다는 걸 알 것 같았다. 일부러 더 정떨어지게, 일부러 더 관심 없는 척, 일부러 미운 척. 그걸 안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예전의 저처럼 무기력한 상태로 관계를 방치하진 않게 되었다. 선유는 여전히 한주가 예뻤고, 귀여웠고, 사랑스러웠으니까.

“병원 갈게.”

빈자리에 대고 늦은 답변을 한 후 선유는 천천히 발을 옮겼다. 한주가 떠난 자리에 폭발하듯 사향 향기가 남아 있었다. 역시 향수인가, 한주에게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렸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정말 잘 맞을 것 같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네.

며칠 후 병원에 들러 복부 초음파를 한 선유는 대장에 양성종양이 있는 것 같다는 소견을 받았다. 순간 겁을 집어먹었으나 아직 크기가 크지 않으니 조금 더 두고 보자는 말에 안도하고 그 통증은 다시 잊어버렸다.

***

선유는 오랜만에 직접 사업 설명 및 PT를 하기 위해 나섰다. 이번엔 고객사가 아니라 대학생들 앞에서였다. 왜냐면 올해 엑세스 시스템이 처음으로 공개채용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여름 방학 내내 학교를 돌아다니며 직원들이 학내 리쿠르팅에 참여했고, 주요 학교의 경우엔 선유가 직접 설명회를 하기로 했다. 잘생긴 사장님이 직접 해야 효과가 좋다고 임 이사와 지운이 밀어 붙인 탓이었다.

“애들한테 우습게 보이면 안 돼. 오늘은 더더욱 전투 모드여야지.”

“이제 머리 안 올려도 나이 들어 보여.”

“여전히 안 들어 보이는 게 문제라고.”

지운은 부득불 스프레이를 가져와 선유의 머리를 뒤로 쫙쫙 넘겼다. 다갈색에 곱슬머리인 선유는 머리를 세팅하지 않으면 어리고 귀여워 보였다.

“됐다.”

“…이게 된 거야?”

“사장님 잘생겼다.”

지운의 아부 아닌 아부에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선 선유는 또 찾아온 아랫배 통증에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디 아파?”

“음….”

“또 배야? 병원 한 번 더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6개월 뒤에 추적 관찰하자고 했는데… 한 번 더 가 봐야 할까 봐.”

“그래. 요새 너무 자주 그러는 거 같더라.”

최근 통증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2주에 한 번 정도였다면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거의 2배 가까이 횟수가 늘어났다.

“다섯 시에 끝나지?”

“어.”

“그럼 생각난 김에 이거 끝나고 병원 가야겠다.”

마음먹었을 때 가지 않으면 또 미룰 만큼 미룰 게 뻔했다. 선유는 병원에 전화해 예약을 잡고 왠지 묵직한 느낌이 드는 아랫배를 문질렀다. 내장이 이상하게 밀리는 것 같은, 그래서 장이 꼬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취소하고 지금 병원 갈래? 임 이사님 오라고 해서 대신 하라고 할게.”

“아냐. 괜찮아. 통증은 금방 없어져.”

“지금도 아픈 거잖아.”

“아픈 건 아니고 느낌이 좀 이상해서. 시간 다 됐다. 금방 하고 올게.”

4시가 다 된 시계를 확인하고 선유는 옷차림을 정리한 후 단상에 올랐다.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모여 있었다. 관련 학과뿐 아니라 지원 부서에 들어오고 싶은 학생들까지 죄다 모여서 강당이 가득 찼다. 반짝반짝 눈동자가 빛나는 게 보였다. 선유는 그 열기에 감화됨을 느꼈다.

선유의 회사인 엑세스 시스템은 업계에서 유명하다 못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그 성공신화는 타 회사에 모범이 되었다. 고객사의 문제를 전부 풀어 주는 해결사로 불리며 기존 시스템의 확장과 변형뿐 아니라 아예 신규 시스템을 개발하여 업스트림부터 다운스트림까지 전부 체계적으로 하나의 시스템을 이용, 관리를 유용하게 해 주는 솔루션은 그들만의 것이었다. 게다가 빠르고 정확한 AS로 고객사의 신뢰를 절대 잃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게다가 사장은 10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을 시작, 20대에 대학원 졸업과 함께 사업을 거대하게 확장하여 지금은 2천 억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었고, 곧 회사는 주식시장에 상장될 예정이라 했다. 게다가 회사 복지가 좋고 연봉 수준이 동종업계 평균 대비 매우 높다는 것도 지원자들에게는 굉장한 메리트였다.

간단한 회사 소개와 지원 분야, 뽑는 인원 수, 그리고 채용 과정은 어떻게 되는지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질문할 시간을 많이 주려고 설명회를 압축해서 진행했으나, 그럼에도 질문 시간은 매우 모자랐다.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던 선유의 배 속을 갈라내는 듯한 통증이 파고들었다. 등허리가 척척하게 젖어 들고 마이크를 든 손이 덜덜 떨리는데도 티를 낼 수가 없어서 선유는 간신히 단상을 짚고 몸을 세웠다.

몇 분 남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더… 하지만 눈앞이 흐려졌다 선명해지길 반복하여 선유는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그 전에 미안하지만 시간상 끝내야겠다는 마무리는 놓치지 않았다.

“최선유!”

“아, 배… 배 아파….”

“거 봐, 내가 병원 가라니까!”

“으, 아….”

“업는다.”

간신히 무대 뒤로 내려온 선유가 그 자리에서 무너졌고, 지운은 선유를 바로 등에 업어 일어났다. 그 순간 선유를 중심으로 꽃이 피듯 향이 확 퍼져 나갔다.

“…설마.”

지운은 각인한 오메가가 있는 알파였다. 그렇기에 각인 이후에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은 단 한 번도 맡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희미하게나마 향이 느껴진다면 대체 얼마나 강한 페로몬이란 말인가.

황급히 선유를 내려놓고 가방에서 상비하고 다니는 주사제를 꺼내어 그대로 선유의 허벅지에 꽂았다. 선유가 원래 베타였다는 것도, 그리고 오메가일 리가 없다는 생각은 주사를 꽂은 후에야 떠올랐다. 강한 페로몬을 퍼트리며 쓰러진 선유를 빨리 진정시켜야 했기 때문에 다른 건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주사제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선유는 여전히 식은땀을 흘렸고 몸엔 열이 치솟았다. 대기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켜 놓고, 지운은 선유의 머리 위부터 재킷을 씌워 다시 업었다. 병원에 데려가는 게 급선무였다.

진하디 진한 페로몬 향기에 대부분의 알파와 오메가들이 지운과 품에 안긴 선유를 돌아보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 쓸 여력도 없이 지운은 그대로 선유를 차에 태워 가까운 병원으로 향했다. 알파와 오메가를 전문으로 보는 병원이었다.

음압 병실 베드 위에 눕혀진 순간 선유가 눈을 떴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허공을 허우적대자 누군가 제 팔을 잡아 정맥 주사를 놓았다. 열이 치솟고 배 속이 간지럽고 다리 사이가 진창이 된 것 같았다.

“환자분, 지금 히트예요. 같이 오신 분이 주사제 맞혔다는 데도 안정이 안 되어서 정맥 주사 넣어드릴 거니까 잠시 그대로 계세요.”

“…히트요?”

“예. 엄청 심하게 왔어요.”

“그럴 리가요. 히트가 올 리가….”

히트라니? 선유는 제가 아는 히트라는 단어에 다른 뜻이 있는 건지 머릿속을 뒤져 보았으나 지금 이 상황에 맞는 건 오메가의 발정기인 히트밖에 없는 듯했다.

정맥 주사가 들어가면서 몸의 열은 조금 안정되었으나 여전히 다리 사이와 배 속은 난리였다. 미친 듯이 성기를 문지르고 안에 무언가를 넣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아서 선유는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그럴 때마다 구멍에서 울컥 점도가 낮은 체액이 흐르는 게 느껴졌고, 또 등허리를 따라 소름이 돋아 올랐다.

스스로가 전혀 모르는 자신이 되는 느낌은 너무나 폭력적이었고, 괴로울 뿐이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 새로 작은 동물 들이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손을 아래로 뻗었다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꽉 맞잡았다가 다시 아래로 뻗기를 수십 번, 선유는 베개에 머리를 문지르며 흐느꼈다.

“최선유 님.”

“…예.”

쌕쌕거리는 숨에 섞어 간신히 대답하자 상냥한 목소리의 의사가 정맥 주사를 떼어 내고 다른 주사를 하나 더 놓았다.

“잘 버티고 계세요. 자위하셔도 됩니다.”

“…예?”

“갑자기 발현해서 히트가 조절이 안 되는 거예요. 제일 좋은 건 알파와 성관계를 가지는 건데 그럴 순 없으니까….”

“저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우선 히트 가라앉고 나서 설명해 드릴게요.”

제 모습이 너무 추할 게 뻔한데, 의사는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부끄러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즉효성의 주사를 하나 더 맞고 나자 울컥대며 액체를 뱉어 내던 배 속도 조금 진정이 되었다. 아까는 구멍에 뭔가 넣고 싶어서 까무러칠 정도였다면 지금은 넣으면 좋겠다 정도로.

속옷과 바지는 물론 침대의 시트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식은땀 때문에 셔츠도 몸에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선유는 간신히 가라앉은 몸을 추슬러 침대에서 내려왔고 병실에 붙은 욕실로 들어가 몸을 대강 씻어냈다.

욕실을 나오자 과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단 향이 머리가 아플 정도로 가득했고, 곧 선유는 그게 제 몸이 뿜어낸 페로몬임을 깨달았다. 맨발로 병실에 멍하니 서서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설명회를 하던 도중 배 속이 뒤틀리는 통증이 일었고, 대기실로 내려와 지운이 저를 업다 놀라며 주사제를 맞힌 것도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이후엔 소거되지 않는 쾌락에 몸을 덜덜 떨기만 했고.

몸이 뭔가 달라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죽을 것 같은 쾌락은 없었던 일처럼 느껴졌다. 제 몸에 히트가 올 리가 없다, 저는 베타니까. 여덟 살 때 한 형질 테스트 때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베타임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최선유 님? 이제 괜찮으시죠?”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자 아까 정신없던 와중에 본 얼굴의 의사가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그럼 설명해 드릴게요.”

안경을 쓴 고운 인상의 여자가 선유를 침대에 앉히고, 저는 보호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리고 선유의 차트를 읽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환자분이 보유하고 있던 오메가 유전자가 발현되었습니다.”

“…예?”

“최선유 님과 함께 내원한 남자분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까지 베타였다고 들어서 유전자 검사와 복부 초음파를 했어요. 그 결과 환자분 유전자에서 오메가 유전자를 발견했고, 복부 초음파에선 자궁을 확인했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거 같은데요….”

“늦은 발현, 즉 후기 발현이 그리 흔하진 않지만, 없지도 않아요. 현재 알파, 오메가 인구의 약 2%는 이런 후기 발현으로 인해 발현한 케이스예요.”

선유는 담담하게 이어지는 의사의 설명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상상조차도 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혹시 최근 알파나 오메가의 발정기를 같이 지내신 적이 있나요?”

“동생이 알파인데… 러트 때 잘 가라앉지 않아서 주사를 맞히고 잠시 같이 있었던 적은 있어요.”

“그럼 그때인가 보네요. 언제였죠?”

“3월이요.”

“시기적으로 맞아요. 보통 자극을 받은 이후 반년간 자궁이 성장하고, 그 이후 히트가 옵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요? 정말로….”

“어떤 질환들은 가족력으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가 나이가 들면 남들에 비해 작은 원인으로도 발병하기도 하잖아요?”

“알파이거나 오메가인 게 병은 아니잖아요.”

“매커니즘이 비슷하다는 거죠. 좀 당황스러우시겠지만… 가족 중 한 분이 알파라고 하시니 따로 교육은 안 받으셔도 되겠네요.”

“예….”

생각에 빠져 있던 선유는 의사가 침대를 툭 두드리고 나서야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니 제대로 들으라며 의사는 선유에게 단호하게 한소리 했다.

“억제제는 구강용과 주사제 둘 다 드릴 테니 꼭 상비하세요. 그리고 이렇게 늦게 발현하는 경우 히트 주기나 강도가 안정되려면 시간이 걸려요. 혹시 주변에 동생 외의 알파가 있나요?”

사실 지금까지 누가 알파고 오메가인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경을 쓴다면 알파, 오메가 직원들의 휴가 일정을 예상할 때 정도. …그럼 이제는 주변에 누가 오메가고 알파고 이런 걸 신경 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항상 약을 상비하고 다니며 몸을 사려야 하고?

선유는 제 삶이 완전히 전복되는 것에 공포마저 느꼈다. 그 와중에도 선유의 머릿속은 직원의 인사기록을 죽 훑었다. 그리고 몇 명의 알파가 누군지 기억해 냈다.

“있기는 한데….”

“안정되기 전까지는 알파와의 접촉을 피하세요. 불안정한 상태에서 알파 페로몬에 노출되면 히트가 또 올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 동생 분하고도 최대한 공간을 분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예.”

“그리고 만약 히트가 오면 차라리 주사제로 바로 처치하는 게 편할 거예요. 하지만 주사제는 즉효인 대신에 워낙 강한 약이라 계속 쓰면 알약이 잘 안 들어요. 가장 좋은 건 알파와 성관계를 맺는 거예요.”

“…예?”

“오메가의 히트는, 그리고 알파의 러트는 서로 성관계를 맺으면 아주 빠르고 자연적으로 가라앉아요. 물론 가라앉기 전까진 아주 강하게 끓어오르겠지만요.”

“…….”

“그러니 만약 성관계를 맺을 수 있거나 페로몬 샤워를 통해 안정시켜 줄 수 있는 관계의 알파가 있다면 옆에 있어도 무방합니다. 오히려 그건 권장 사항이에요.”

그건 선유도 아는 바였다. 약을 먹는 것보다는 가능하다면 관계를 맺는 게 좋다는 것쯤은. 그리고 발정기의 지속시간도 24시간이면 끝난다는 것도. 그 24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성교육 시간에 제대로 설명해 주진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베타였다. 알파와의 성관계라면 오메가인 제가 그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쪽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저는….”

“베타셨죠. 지금까지 인식하던 성과 젠더가 완전히 바뀌니 혼란스러우시긴 할 거예요.”

의사는 환자의 세계가 변하는 걸 머리로는 인식하고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공감하지 못하는 말투였다. 하긴 이 일이 생기기 전의 선유에게 누군가 이 기현상을 설명해 준다 한들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우선 히트는 지금 잘 가라앉았어요. 그러니 앞으로 3일 정도 하루에 한 번씩 억제제를 드시면 되고요.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후기 발현의 경우 히트가 얼마나 지속되고 발발할지 잘 알 수 없어요. 안정되는데 시간도 걸리고요. 그러니 본인의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웬만해선 계속 억제제를 드시도록 하세요.”

“…예.”

“오늘 하루는 이 병실에서 지내시고요. 본인의 페로몬에 익숙해지셔야 하니까 공조 장치를 평소 절반 수준으로 가동하겠습니다.”

의사가 병실을 떠나고 선유는 그가 건넨 알약통과 주사제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 오메가라는 글자만이 둥둥 떠다녔다. 오메가, 지금까지 간혹 동성애자인 자신을 자학할 때를 제외하곤 몇 번 떠올려 보지도 않았던 단어였다.

내가… 오메가라고? …오메가? 선유는 입술을 짓씹으며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어 보았다. 어색하여 혀끝에서 잘 떨어지지도 않았다. 믿어지지 않아 아랫배를 만져 보고 몸을 여기저기 쓸어 보았으나 어디 하나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꿈은 아닐까, 가끔 오메가가 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로 인한 꿈.

하지만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향내는 선유의 감각을 그대로 현실로 끌고 와 바닥에 내팽개쳤다. 처음 맡아봄에도 불구하고 오메가 페로몬이란 걸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본능이란 부분이 알려 주는 듯했다.

침대에 쓰러져 천장만 보고 있던 선유는 툭툭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쪽으로 다가갔다. 지운이 창문 밖에 서서 아래에 있는 전화기를 들라고 손짓을 했다. 이 병실은 의사 외에는 들어올 수 없는 모양이었다.

- 너 괜찮아?

“어. 몸은… 괜찮은 거 같아.”

-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게.”

- 그럼… 너 오메가 된 거야?

“그렇대.”

지운에게도 추태란 추태는 다 보인 것 같지만, 그건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다. 아파서 그런 거니까, 그리고 지운도 그걸 괜히 들춰낼 생각은 없을 것이었다 선유는 자기도 모르게 아래로 떨어지는 고개를 간신히 들어 올렸다.

- 나도 어디서 후기 발현에 대해 듣기만 했는데… 주의사항 엄청 많은 거 같더라.

“응. 약도 엄청 주고 가셨어.”

- 한동안 고생하겠다. 내일은 퇴원할 수 있대?

“어.”

- 한주한테 연락할까?

“…아니, 하지 마. 괜히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 그래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한주 알파니까 좀 조심해야 할 것도 있고.

“내가 알아서 할게.”

- 후… 그래, 알았어. 내일 퇴원할 때 데리러 올까?

“택시 타고 갈게. 의사선생님이 히트 거의 가라앉았다고 하셨으니까 괜찮을 거야.”

- 주사제 꼭 들고 다니고.

“알았어.”

지운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선유는 괜찮다고 지운이 안도할 수 있게끔 환히 웃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인데 이제 와서 그걸 믿을 수 있고 없고 운운해 봐야 시간 낭비였다. 그저 어떻게 하면 잘 적응하고 뒤바뀐 삶을 잘 영위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생산적일 터였다. 선유는 그런 성격이었다.

지운을 보내고 선유는 다시 유리창에 커튼을 친 후 침대에 누웠다. 다행이라면 알파인 한주를 키우느라 알파와 오메가의 생태에 대해 배워 놓은 게 있다는 점이었다. 약만 잘 챙기면 베타와 다름없는 생활이 가능하단 것도, 하지만 사람의 몸이 항상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사고가 터지기도 한다는 것도.

선유는 핸드폰 화면을 몇 번 켰다 끄길 반복하고 한주에게 간단히 잘 지내냐는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제가 오메가가 되었다 한들 아이가 걱정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방학이라 잘 놀고 있을 텐데 괜한 생각을 하도록 두고 싶지도 않았고.

답장이 오면 더 기쁘겠지만, 답이 없더라도 한주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그렇기에 선유는 이 외로운 밤을 기쁘게 보냈다.

***

선유는 보통 금요일 저녁에 가서 같이 한주와 저녁을 먹곤 했는데, 의사의 계속된 경고에 약 두 달간 한주의 집에 가지 못했다. 그 경고가 괜히 겁주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로 판단했다. 왜냐면 한 달 동안 선유는 히트가 세 번이나 더 왔고, 또 유사 히트라고 발정은 없고 몸에 열이 나는 일도 겪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주기가 대중없어서 주사제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그동안 선유는 꼬박꼬박 한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잘 지내는지, 개강하고 많이 바쁘진 않은지, 공부가 힘들진 않은지… 한주는 거의 답을 하지 않았지만, 가끔 의아한 기색을 보이는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이제 안 오냐고, 이제야 좀 질린 거냐고, 이상하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문자들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제가 가도 되냐고 묻기도 했다. 선유는 그때마다 부자연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거절했다. 오늘은 다른 약속이 있어서, 회식이 있어서, 출장이라서… 한주가 그게 거짓말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오늘은 심지어 생일인데 같이 있어 주지 못할 것 같아서 선유는 미안하다는 연락을 보냈다. 대신에 친구들이랑 저녁이라도 맛있는 거 먹으라고 용돈을 좀 보냈고, 생일 축하한다는 말로 메시지를 마무리했다. 한주는 답하지 않았다.

의사 말로는 약 육 개월 정도는 몸이 계속 왔다 갔다 할 거라고 했다. 그래도 자궁이 잘 자리를 잡았고, 후기 발현치고는 성숙도가 높아 생각보다 빨리 주기가 자리를 잡을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선유도 그 말을 믿고 최대한 정상 생활을 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문제는 후기 발현의 경우 히트가 워낙 세게 와서 약이 잘 듣지 않는다는 거였다.

“빨리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또 열이 오르는 기운이 돌자 선유는 이마를 짚고 거실 테이블에 머리를 기댔다. 평소에 체감하지 못하던 형질이 이렇게 드러날 때면 제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두려움이 일었다.

혹시 또 히트가 오는 걸까, 선유는 주사제를 꺼내 놓고 의자에 앉아 한참 숨을 몰아쉬었다. 이 상황은 확실히 좋지 않았다. 일에도 영향을 미쳤고 제가 짐승처럼 느껴져서 싫었다.

“으….”

몸 안이 달아오르는 느낌, 자궁이 제 존재를 드러내는 듯 뜨거워지고 있었다. 선유는 히트가 정말로 임신을 위한 발정임을 느끼곤 했다. 평소엔 있는 줄도 모르던 장기에 열이 나고 삽입을 갈구하는 것은 정말이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선유는 책상을 더듬어 주사제를 손에 쥐었으나 맞지 않고 약통을 찾았다. 혼자 있을 때는 웬만해선 약으로 견뎌 보라던 의사의 조언이 떠오른 탓이었다.

알약을 삼키고 차가운 유리에 뜨거운 뺨을 비볐다. 울컥, 내부에서 체액에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성기가 완전히 발기하고 구멍이 간지러웠다. 선유는 바지 안쪽에 손을 넣어 회음부와 그 주위를 매만졌다.

“미치겠네….”

축축했다. 남자와 섹스를 해 봤고, 심지어 받아들이는 쪽이었기에 선유는 이 액체가 섹스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눈에 선했다. 젤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적당한 점도를 지닌 액체라니. 게다가 제 코에도 단 냄새가 나니 알파한테는 어떤 식으로 느껴질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안을 쑤시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고 손을 빼낸 후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세수까지 했다. 찬물을 덮어 써도 몸의 열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동안 선유의 핸드폰은 거실 바닥에서 몇 번 울며 빙빙 돌았다. 차갑게 수건을 적셔 얼굴과 목덜미를 닦으며 나오던 선유는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연속으로 문자가 몇 개나 들어와 있었다. 발신인은 전부 한주였다.

「형, 이제 정말 안 올 거예요?」

「지운 형이 오늘 형 일찍 퇴근했다는데요.」

「형, 전화 받아요.」

부재중 통화가 세 개나 찍혀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황급히 전화를 걸려던 선유는 요란하게 진동하는 전화를 급히 받았다.

“한주야. 미안, 화장실에 있었어.”

- …형.

“무슨 일 있어?”

- 애인 생겼어요?

“어? 아니, 애인은 무슨.”

- …그럼 저 집에 가도 돼요?

“집?”

- 예, 우리 집이요.

우리 집이라니. 아직 한주가 말하는 ‘우리 집’이 선유와 한주가 같이 살았던 이곳을 뜻함에 선유는 왠지 감격스러운 기분이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한주는 절대 지금 여기 와서는 안 되었다. 약밖에 먹지 않은 선유의 발정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으며, 만약 가라앉았다고 해도 이 페로몬을 다 빼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한주야, 손님이 와 계셔서….”

- 지금 열 한시인데요?

“그러니까 안 되지, 너무 밤이잖아.”

- 손님은 없다는 거잖아요.

한주의 목소리가 낮게 내려앉았다.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화기에만 주의를 모은 선유는 밖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곧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와 함께 한주의 속삭임이 동시에 들렸다.

- 지금 집 앞이에요. 들어갈게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선유와 안으로 들어서던 한주의 시선이 그대로 맞닿았다. 선유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순간 한주가, 한주가 아니라 알파로 인식되었다.

“읏….”

배 안이 진탕되는 감각에 다리가 다 풀렸다. 저벅저벅 걸어 들어온 한주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선유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양팔을 붙잡아 당겼다.

“말도 안 돼. 이럴 순, 이럴 순 없는데….”

한주는 동공까지 다 연 채로 따지듯 물었다. 창백한 피부밑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배신감은 두 가지 종류였다. 하나는 선유를 향한, 그리고 또 하나는 한주 자신을 향한.

“…오메가 사귀어요?”

“아, 아냐….”

“그럼 이 냄새 뭔데요. 오메가 페로몬이 진동하잖아!”

“한주야, 팔 좀… 팔 좀 놔.”

“섹파는 알파더니 이젠 오메가까지 사귀어요? 대체 얼마나 뒹굴어야 이렇게 냄새가 배요?”

“최한주!”

코를 자극하는 향에 그에게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선유는 간신히 한주를 밀어냈다. 그 기세에 뒤로 밀려 거실 소파에 쓰러졌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사향 냄새, 향수라고 착각한 게 우스울 정도로 강렬한 머스크 향기가 뇌를 주물렀다. 방금 주워 먹은 억제 알약 따위는 간단히 뭉개 버릴 정도로 강한 페로몬에 노글노글 녹았다.

“형, 설마… 히트예요?”

한주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뜨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꿈과 현실을 구분하느라 동공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선유는 열에 차오른 눈으로 그걸 바라보다 질끈 감아 버렸다. 그 와중에도 열을 내기 시작한 배 속에서 삽입을 돕고 알파를 흥분시킬 액체를 내보내고 있었다.

“흐윽….”

“형 오메가였어요?”

“아냐, 갑자기… 갑자기 그렇게….”

“갑자기 오메가가 됐다고요?”

“유전자가… 후기 발현되어서….”

소파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선유를 내려다보던 한주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주사제를 집었다. 그리고 잘 들리지 않지만 씨발, 하고 욕을 뱉은 것 같았다.

“형, 여기 봐요.”

“한주야, 한주….”

“저 한주예요.”

“너 여기 있으면 안 돼, 러트… 올 수도….”

선유는 다가오는 한주의 어깨를 온 힘을 다해 밀어내려 했으나 손아귀의 힘이 미약하여 공기조차도 거부하지 못할 듯했다. 당겼으면 당겼지 히트 상태의 오메가가 알파를 밀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냄새….”

한주는 자각도 없이 선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 접촉에 자지러질 듯 몸을 굳힌 선유가 다리 사이의 간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맞붙여 비볐다. 알약으로 어중간하게 진정되었던 히트가 한주의 등장에 기름을 부은 듯 불타기 시작했다.

“한주야, 제발… 주사… 주사 놔줘, 주사….”

“하, 형이… 오메가라니.”

“…한주야, 제발 주사.”

“놔줄 테니까 그만 매달려요.”

한주는 쥐고 있던 주사제를 선유의 허벅지에 놓았지만, 이 정도로 심하게 히트가 오면 주사제를 놔도 제대로 가라앉지 않는다. 선유는 눈을 크게 뜬 채 한주의 두터운 어깨를 쥐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한주가 자신의 바지와 속옷을 헤집어 성기를 쥔 탓이었다.

“미칠 거 같죠?”

“아, 하으, 아파, 흐읏….”

“너무 예민해서 아픈 거예요.”

“한주야, 흐… 한주야… 만지면 아파, 아프… 으, 읏….”

한주는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숨기지도 못하고 선유의 얼굴과 발기한 성기를 번갈아 바라보며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그대로 빨아 삼키고 싶은 듯한 욕구가 순간순간 한주의 얼굴에 드리워지자 선유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리만 뒤로 젖혔다. 성기가 문제가 아니라 몸 안이 문제였다. 울컥대며 애액을 내뱉는 구멍이 문제였다.

“형, 안에 넣어요?”

목덜미를 강아지처럼 깨물며 묻는 한주에게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못하고, 선유는 눈만 몇 번 깜박였다. 눈물이 눈가와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귓가까지 흘렀다.

“제 좆 넣을까요?”

눈가가 찢어질 듯 크게 눈을 떴다. 선유는 기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가늘게 떨리는 선유의 뺨을 쓰다듬으며 한주가 무언가 중얼거렸다.

“…할까 봐 집까지 나갔는데 이제 와서 그럴 수야 없지.”

중요한 말인 것 같았는데 낮은 목소리 탓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응? 한주야, 뭐라고 했어…?”

“손가락 넣어 줄게요.”

“어?”

“손가락.”

“손가락….”

“빨리 가라앉지 않으면 저도 러트 올 거 같은데.”

“…넣어 줘, 손, 가락 넣어 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쯤 녹은 구멍으로 긴 손가락이 파고 들어왔다. 단숨에 두 마디 길이까지 파고 들어온 손가락이 내벽을 짓눌렀다. 뭔가가 들어오자마자 그걸 열렬히 반기듯 수축하는 내장이 느껴졌다. 선유는 기민하게 느껴지는 감각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더 안으로 넣어 달라고 움직이는 허리는 이미 미쳐 버린 것 같았다.

아들처럼 키운 아이인데, 그 아이의 손가락을 담고 기뻐서 미쳐 버리는 형이라니. 녹아 버린 머릿속에 드는 죄악감에 또 주르륵 귓가로 물기가 흘러내렸다.

“…형, 울지 마요. 왜 그렇게 울어요.”

“한주야… 미안, 미안해… 넌 내 동생인데….”

“하…, 정말 미치겠네… 형이 뭐가 미안한데요.”

“흐, 으응, 그냥, 미안, 해서…. 너 오늘 생일인데… 이런 거….”

뜬금없는 생일 타령에 한주가 피식 웃었다.

“이거 내 생일 선물인 거 같은데?”

한주는 선유의 몸 안에서 배를 밀어 올리듯 손을 움직였다. 두 마디 박혔던 손가락이 곧 끝까지 밀려 들어왔고, 연한 구멍과 손가락 사이의 살이 닿을 정도로 깊게 들이박혔다.

“으, 흐윽, 아, 아, 안 돼, 나와, 나올 거 같….”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선유는 그대로 사정했다. 한주의 얼굴까지 정액이 튀어 올랐다. 반쯤 넋을 놓고 있던 선유는 한주의 매끈한 턱을 타고 흐르는 액체를 보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아직 아래에 박힌 손가락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아직 안 끝났어요.”

“으, 응?”

“…오메가가 사정한다고 끝날 리가 없잖아요.”

“주사 맞아서 괜찮…, 한주야, 아, 아으, 안 돼, 그만, 제발 그만….”

한주의 손이 더 야만스레 움직였다. 선유의 정신을 흩뿌려 버릴 듯이 느끼는 곳만 집요하게 문지르고 비볐다. 집 안이 제 페로몬으로 가득 찬 게 느껴졌다. 거기에 한주의 페로몬마저 섞이자 최음제와 같은 효과를 냈다. 선유는 혀가 풀려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한주의 팔과 어깨를 잡았다 놓고 쓰다듬기만을 반복했다.

한주의 얼굴이 눈앞에 와 있었다. 키스, 키스하고 싶어, 하지만 안 돼, 그건 안 돼, 한주는 내 동생인데, 내가 사랑하는 동생인데, 아들처럼 키운 아이인데. 선유는 고개를 미친 듯이 저으며 한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혀 가장자리가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군가 문질러 줬으면 했다. 절로 입이 벌어지고 묽어진 침이 흘러내리려 하자 간신히 입을 닫았다.

땀으로 촉촉하게 젖은 몸이 경련하며 또 한 번 애액을 울컥 토해 냈다. 맑은 물로 다 젖은 손을 천천히 빼낸 한주가 그것을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미, 미안,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선유는 아까 수건을 하나 적셔 나온 걸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주의 손을 바로 닦아냈다. 덜덜 손이 떨렸다. 오메가가 된 걸 들킨 것도 모자라 발정이 나서 미쳐 버린 꼴까지 보여 버렸다. 수치심에 한주 쪽으로 시선을 두지도 못하고 엉망이 된 바지를 그대로 입었지만, 곧 수건을 하나 더 적셔 나온 한주가 늘어진 선유를 끌어다 밑을 닦아 내고 새 옷을 입혀 주기까지 했다.

깨끗하게 닦인 선유를 내려다보던 한주가 소파에 늘어진 선유의 머리맡에 앉았다. 시선을 조금 돌리자 잔뜩 들어 올려진 바지춤이 보였다. 거기에 시선이 닿는 걸 알았는지 한주는 다리를 꼬아 가리고 툭 던지듯 물었다.

“언제부터예요?”

“…8월 말부터.”

“두 달 됐네요. …언제까지 얘기 안 하려고 했어요?”

“되도록이면… 늦게 알았으면 했어. 아직 나도 적응이 안 되어서….”

한주는 무언가 고민에 빠진 얼굴을 했다. 간신히 열기가 사라지고 조금 괜찮아진 선유가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제야 주사제 약효가 좀 도는 듯했고 머리도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을 정도로 진정되어 마음속에 찝찝하게 남아 있는 질문을 했다.

“한주야, 아까… 무슨 말을 한 거야?”

“…아까 언제요?”

“그… 넣어 준다고 했을 때. 뭐라고 중얼거렸잖아.”

가만히 쳐다보는 눈빛이 검었다. 선유는 소름이 돋아서 뒤로 살짝 물러났으나 한주가 또 그만큼 쫓아와 앉았다.

“알고 싶어요?”

“알려 준다면.”

“…….”

“뭔데 그래.”

“…형을 강간할까 봐 집을 나갔는데, 이제 와서 그럴 순 없다고 했어요.”

“…뭐라고?”

“제가 형 강간할까 봐 집을 나갔다고요.”

선유는 자기도 모르게 또 엉덩이를 뒤로 뺐다. 소파 등받이가 옆구리에 구겨질 정도로 몸을 빼자 한주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변했다. 한주가 우는 것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도망가지 마요, 형.”

“…….”

“그렇게 도망갈 게 뻔하니까, 제가….”

“…한주야.”

한주의 희다 못해 푸른 빛이 도는 뺨 위로 절망과 고통이 가득 채워졌다. 저렇게나 한주가 자기 감정을 전부 내보인 적이 있었던가. 아이일 때는 솔직하게 기쁨과 슬픔을 표현했지만, 조금 머리가 크더니 표정을 그다지 드러내지 않게 되었었다. 그런데 지금, 한주는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해져 있었다. 그런 아이를 두고 제가 뒷걸음질 칠 수는 없었다.

“말해 봐.”

“…형.”

“들을게, 뭐든.”

한주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선유는 가만히 한주를 보고 있다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습관이라서, 몸에 밸대로 밴 습관이었다. 선유의 손길에 한주는 돌처럼 굳었다가 고개를 돌려 손길을 피했다.

“…형.”

“응.”

“형이… 저한테 잘해 주면 잘해 줄수록, 저한테 웃어 줄 때마다 미칠 것 같았어요.”

“…….”

“이젠 억제제도 제대로 듣지 않는데! 미쳐 버려서 형을 강간이라도 해 버리면? 내가 형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면… 형은 저를 미워했겠죠. 아예 보지도 않을 테니까.”

“억제제가 왜 안 들어?”

억제제가 제대로 듣질 않는다고? 선유는 러트로 인해 완전히 정신을 놓았던 그때의 한주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저는 한주가 그런 상황임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저 약을 먹는 게 늦었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주사제를 너무 많이 썼어요.”

“어째서 주사제를 많이….”

“말했잖아요. …형을 강간할까 봐. 그리고 형은 베타니까, 러트가 온 제가 징그러울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 없잖아.”

“물론 형은 저를 웬만해선 징그러워하거나… 미워하지도 않겠죠. 하지만… 저는 겁이 났어요. 조금도 미움 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언제부터… 대체 언제부터?”

“그게… 중요해요?”

앞만 바라보고 있던 한주가 조금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감추고 있었던 건지 추측조차 할 수 없는 감정, 선유는 한주의 단편적이고 파편화된 말만으로도 지금까지 한주의 행동을 이해해 버렸다.

“첫 러트 때 형을 가지고 자위하고 몽정했어요. 하지만 자각이 그때인 것뿐, 감정은 그 전부터였겠죠. …전 형뿐이었으니까.”

한주에게 선유의 상냥함은 독이었다. 그래서 선유가 그에게 상냥하고 다정하게 굴지 못하도록 그렇게나 차갑고 매정하게 대했던 것이었다. 그것이 서로를 다 상처 입힌다고 해도, 너무 막다른 길이라서, 견딜 수가 없어서 그렇게.

그래 놓곤 가끔 저 스스로 못 견디겠다는 듯 선유의 눈을 피하곤 했었다. 그리고 선유가 물러나면 더 가라앉아서 울고 싶은 눈을 했다. 끝내 모질어지지 못하던 한주.

상냥하면 기대하게 되니까, 다정하면 더 파고들고 싶게 되니까 한주는 그렇게 되기 전에 차라리 선유가 저를 싫어하기를 바랐던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무서워서 그저 외면하는 것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알아요. 형은 저를 동생으로… 아니 아들처럼 생각한다는 거.”

선유는 한주의 말에 긍정했다. 저는 그를 아들처럼, 동생처럼 여겼다. 피를 나눈 혈육만큼, 아니 그보다 더 사랑하고 아낀다고 자부했고 지금까지도 그 마음엔 단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한주가 남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도 했다. 특히 그가 저를 밀어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며 독한 말을 내뱉었을 때 제가 알던 동생처럼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그 빈 공간을 남자인 한주가 채우곤 했다. 하지만 선유는 그 감각을 무시하고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정말로 많이.

한주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슴에 박혀 있던 가시가 빠져나온 것처럼 조금은 시원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선유는 무어라 답할 수가 없었다. 한주가 수년간 감춰온 그 감정을 쉽게 다룰 수는 없었다.

“형이 게이이고 오메가라고 해서 나를 좋아하리란 보장도 없는데 왜 그렇게 갑자기 기뻤는지 모르겠어요. 형에게 제가 연애대상으로 인식될 리가 없잖아요.”

한주는 그를 따라 나오는 선유를 조금은 예전과 같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차갑게 굴기 시작하면서 거의 본적이 없는.

“돌아갈게요.”

“한주야, 여기서….”

“미안해요, 형. 저를… 싫어해도 돼요.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

“쉬세요.”

그대로 신발을 신고 나가려는 한주의 팔을 선유가 잡았다. 한주는 힘도 들이지 않고 떨쳐낼 수 있는 손에 잡혀 주었다.

“한주야, 여기서 자고 가.”

“…….”

“…늦었잖아.”

“아뇨, 갈게요.”

한주는 선유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내고 이번엔 잡을 틈도 주지 않고 나가 버렸다. 선유는 현관에 그대로 한참 서 있다 천천히 뒤를 돌았다. 허공에 남은 머스크 잔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읏….”

간신히 꺼졌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선유는 몸을 말며 주저앉았다. 아들, 동생, 그리고… 남자? 저를 내려다보던 한주의 눈을 떠올리며 성기를 쥐었다. 눈가가 또 쉽게도 젖어 들었다.

***

주말 아침, 우유를 탄 연한 커피를 마시며 선유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제의 일이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는데, 빨래 바구니에 쌓인 세탁물을 보는 순간 그게 현실임을 깨달았다. 체액이 말라붙은 바지와 속옷, 그리고 거기서 나는 연한 페로몬 냄새. 그리고 공기 중에는 여전히 한주가 남기고 간 향기가 남아 있었으나 그 잔향은 풀 냄새에 가까웠다.

아주 옅은 빛깔의 커피에선 고소한 향기만이 났다. 따뜻한 컵을 감싸 쥐고 선유는 한숨만 내뱉었다. 한주의 변화, 그리고 떠남, 제 삶의 전복, 그리고 관계의 재정의.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일어난 모든 일이 머릿속을 갉아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한주는…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건가. 선유는 마른침을 삼켰다.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한주의 감정이 가족 사이의 친애 이상일 거라곤 단 한 번도. 그는 그런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단지 조금, 저에게 많이 기대고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지만, 그건 어릴 때부터 그랬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한주에겐 저밖에 없었고 애정을 갈구했으니.

그렇게나 오랜 시간을, 첫 러트 이후라면 5년을 넘게 묵혀 두고 있었다는 말이다. 심지어 자각이 그때였고 감정은 더 오래 품고 있었다니.

“…한주야.”

대체 얼마나 힘들었을까. 저를 피하고, 그렇게 외면하려 하는데 저는 눈치도 없이 한주가 원하지 않는 상냥함과 다정함을 그의 동의도 없이 부으려 했다. 선유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더는 사랑하지 않게 차라리 미움을, 하지만 진정한 미움을 받으면 죽어 버릴 것만 같아서, 한주는 그렇게 홀로 줄다리기를 했다. 밀어냈다가 다시 당기고 견딜 수 없어 다시 밀어내고. 집을 나가면서 한주가 말했던 ‘견딜 수 없다’의 의미를 선유는 이제야 이해했다.

조금 못 보고, 조금 멀어지는 건 견딜 수 있어도, 완전한 이별과 분리만은 피하고 싶었던 한주였다. 그래서 그는 아예 돌이킬 수 있는 일이 발생하기 전에 차라리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아직도 선유에겐 버림받는 걸 무서워하던 작은 한주가 심장 안쪽에 틀어 박혀 있었다. 혼자서 뭐든 할 수 있다고 제발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던 그 작은 아이.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고 달래 주었었는데, 한주는 모든 걸 다 홀로 감내하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이걸 누구한테 상담할 사람도 없고.”

부모님한테 말할 수도, 심지어 지운에게 얘기하기도 뭐했다. 아들처럼 키우던 사촌 동생이 사촌 형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을 대체 누구에게 말한단 말인가.

하나하나 따져 보면 한주와 선유의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선유와 한주가 합의 파양을 한다면 완전히 남으로 돌아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론적인 이야기이고, 그렇다고 선유가 한주의 마음을 당장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저는 아직 한주를 그런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몸은 이미 클 만큼 다 컸고, 저보다 더 여물었음을 알지만… 정말 온몸이 잘 크긴 했지만… 아주 가끔 아이가 남자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고, 어제 같은 경우엔 알파라는 걸 확연히 느꼈다. 하지만 선유에게 한주는 여전히 아이나 다름없었다.

선유는 반쯤 비운 컵을 내려놓고 한주가 살 때 그대로 놔둔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열심히 쓸고 닦아도 사람이 난 자리는 티가 났다.

책상에는 둘이 몇 주간 머리 맞대고 맞추었던 데드스타 레고가 놓여 있었다. 커다란 지구본 크기의 레고는 한주가 어디선가 보고 해 보고 싶다고 하자마자 선유가 중고 거래 카페를 뒤져 사온 것이었다. 끝내 어디 들어가는지 몰라 남겨진 레고 조각은 여전히 데드스타 옆에 둔 작은 그릇에 담겨 있었다.

나름 네모반듯하게 쓰려고 노력한 글씨가 가득한 초등학교 교과서부터 이것저것 책장에서 꺼내 보던 선유는 가장 아래쪽에 넣어 두었던 앨범 몇 개를 꺼냈다. 선유도 한주도 사진을 찍는 데 그리 열정적이지 않아서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채운 건 겨우 한 권뿐이었다.

“…조금 더 사진 많이 찍을걸.”

한 장 넘길 때마다 아이가 너무 쑥쑥 크는 게 보여서 아쉬웠다. 침대에 걸터앉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앨범 구경을 했다. 한주가 집에서 나가고 나선 왠지 모르게 겁이 나서 펼쳐보지 못했다. 방에 들어왔다가도 그대로 돌아나가기만 했으니까.

중학교 입학식, 수학여행, 체육대회, 졸업식, 고등학교 입학식의 한주를 되돌아보았다. 고등학교 졸업식엔 가지도 못했다. 또 거부 당할까 봐 겁이 나서. 언제인지 알면서도 가지 못했다.

끝까지 앨범을 넘긴 선유는 앞으로 돌아가 다시 고등학교 사진들을 보았다. 고등학교 입학식 때 이미 선유의 키를 훌쩍 넘어선 한주를 제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축하 꽃다발을 건네주는 장면이었는지, 제 손등 위를 한주의 손이 감싼 채였다.

비닐 아래의 얼굴을 살짝 문지르며 한참이나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저 서로만 바라보는, 서로밖에 없는 시선. 그 감정이 색은 달라도 서로뿐인 건 같았다.

선유는 동성애자였고, 이미 보통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메가가 되었으니 오히려 남자 알파와 자는 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다. 그럼 한주가 동생이라는 그 죄악감만 떨친다면,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젠 미성년자는 아니니까… 까지 생각하던 선유는 고개를 저었다. 열네 살 차이라니, 이 정도면 그냥 도둑놈이 아니라 대도大盜다.

아무래도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한주가 그 오랜 시간 감정을 죽여 왔듯이 선유 또한 섣불리 행동해선 안 되었다. 만약 동정심으로, 아이가 안타깝다는 이유만으로 그 감정을 받아들였다가 다시 거부하게 된다면? 한주에게 절대로 그런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앨범 가장 마지막에 넣어 둔 건 매년 한주가 만들어 왔던 카네이션이었다. 총 열 개, 다음에는 더 예쁘게 만들어 주겠다던 약속을 매년 지킨 한주의 꽃은 매해 조금 더 꽃 같은 모양이 되었고 점점 크고 풍성해졌다.

엄마도, 아빠도, 형도 다 되어 준다고 했었는데. 저는 정말 제대로 된 보호자이긴 했던 걸까. 아이가 저런 마음을 품고 홀로 침잠하고 있을 때 알지도 못하고 있었던 저는… 선유는 천천히 앨범을 닫아 다시 책장에 넣고 한참 그 방 안에 서 있었다.

그리고 제가 무의식중에 한주의 페로몬 향기를 좇고 있음을 깨닫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알파와의 접촉을 피하라던 의사의 경고가 어떤 의미인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성이 순식간에 사그라지며 그 빈 공간에 본능이 차오르는 건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

선유가 오메가로 후기 발현했다는 얘기로 회사가 잠깐 끓어올랐으나 곧 잠잠해졌고, 세 달이 지난 시점에는 누구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왜냐면 선유가 종종 휴가를 쓰는 것 외엔 변한 게 없었고, 이후로도 회사 운영엔 큰 변화가 없을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만 고객사 방문은 이전보다 훨씬 더 삼가게 되었다. 예전에는 체력적, 지적인 면에서 알파가 베타, 오메가보다 낫다는 편견이 있었기에 고객사의 고위직에는 알파 비율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괜히 남의 회사에 갔다가 페로몬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건 사양이었다.

이 기세를 몰아서 선유는 작년부터 그려온 법인 분리를 완성하려 애썼고, 법인 분리 과정에서 생겨 난 골 아픈 문제들을 간신히 해결하여 저는 완전 신규 개발을 전담하는 법인의 대표이사로, 그리고 지운은 기존 시스템의 추가 변경, 그리고 영업을 전담하는 법인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형태는 선유의 법인이 모회사이며, 그쪽에서 지운의 법인으로 영업 외주를 주는 식으로 업무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이 흥청망청 회식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회사 사람들은 왜 이렇게 회식을 좋아하는 걸까. 한주를 키울 땐 이런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는데-어디선가 상사가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 게 좋다고도 들었기에- 오늘은 빠질 수가 없었다. 지운이 십 몇 년 만에 전무에서 대표이사가 된 날이기도 했고, 회사가 하나의 큰 산을 넘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사장님, 대표님 부르면 헷갈리겠어요.”

임 이사가 선유와 지운의 잔을 채워 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조르륵 컵에 채워지는 투명한 액체에서 톡 쏘는 냄새가 났다. 기분이 좋은지 잔을 한 번에 비우고 내려놓은 지운이 시원스럽게 말했다.

“전무로 불려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회사 그냥 호칭 없앨까요?”

“너 내가 대표 되자마자 호칭 없애는 거야?”

“아니,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긴 한데….”

뭐 말뿐인 승진이라고 해도 좋긴 한가보네, 선유는 제 잔을 아예 지운에게 밀어 주고 콜라만 하나 시켜 마시기 시작했다. 몸이 변화한 이후로는 술도 조심하고 있었다. 이성이 흐려지면 본성이 나오게 되니까.

“최 대표님은 이제 몸은 좀 괜찮은 거죠?”

“예. 뭐 아팠던 건 아니니까요.”

많은 함의를 담은 질문에 선유는 가벼이 대답했다. 제가 휴가를 갈 때마다 고생하는 임 이사에게 고마워서 이번 연말에는 꼭 성과급을 더 얹어 주리라 다짐했다.

“한주는 잘 지내요? 요새는 아예 회사에 오질 않네.”

“대학 가서 바쁘죠.”

“진짜 시간이 빠르네요. 벌써 한주가 대학을 가고 제 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그래도 긴 시간이었어요. 임 이사님이 벌써 여기서 일하신 지 10년이 넘으신 거 아시죠?”

“어우, 여기만큼 좋은 회사가 있어야 말이죠.”

어린 애들 둘이 와서 회사를 차린답시고 온갖 시행착오를 다 겪고 있을 때, 한국의 기업 행태를 알려준 건 임 이사였다. 그가 없었다면 이 정도로 잘 되진 않았을 것이기에 선유는 항상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자, 분위기 좋은데 저 여기서 하나 발표할 게 있습니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지운이 숟가락으로 맥주병을 두드렸다. 뭔 일인가 싶어 올려다보자 술에 잔뜩 취한 지운이 큰 소리로 자랑을 시작했다.

“저 둘째 생겼습니다!”

아니 저걸 뭐 저렇게… 선유는 황당했지만 지운 만큼 취한 직원들은 환호하고 박수 치며 축하를 했다.

“하나만 낳으려고 했는데 또 생겨 버려서….”

쑥스러워하며 뒷목덜미를 문지르는 지운에게 직속 부하가 손을 들고 물었다.

“신 대표님, 또 육아 휴직 쓰시나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애는 내가 키워야지. 그리고 회사의 조직 문화 발전을 위해 쓸 수 있는 복지는 다 쓸 겁니다.”

왠지 울상이 된 남자가 선유를 보며 외쳤다. 그 내용은 예상한 범위 내였다.

“최 대표님! 저 월급 두 배 주십쇼!”

“…이젠 법인이 분리 되어서, 신지운 대표님한테 요청하세요.”

이젠 그쪽 상사가 아니라서 더 주고 싶어도 줄 방법이 없다. 안쓰럽다는 듯 바라봐 주자 그는 충격받은 얼굴로 신지운의 바지춤을 잡아당겼다. 아마도 대표님 없으면 저 죽는다는 소리를 하고 있겠지. 물론 법인이 분리되긴 했지만, 선유의 영향력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니 인력 충원 정도는 인사 팀에 전달해 줄 수는 있을 터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축하의 말을 다 수집해 온 지운이 다시 자리에 앉았고, 선유도 그에게 따로 축하 인사를 했다.

“몇 개월 됐어?”

“어, 세 달.”

“아직 멀었네.”

“멀긴. 금방 커서 금방 나와.”

“재한 씨가 또 고생하겠다.”

“이번엔 그래도 입덧 없더라. 세형이 때는 한 5개월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어. 물도 제대로 못 마셨다니까.”

“…그래?”

“사실 너무 아파하고 고생하니까 절대 둘째는 안 낳으려고 했는데… 뭐, 사고나 다름없지.”

“아파?”

“뼈가 다 벌어지고 늘어나고, 장기가 다 움직이고… 옆에서 보고 있으면 내가 죽을 거 같더라. 남자 오메가는 여자 오메가보다 더 힘들다고 하더라고.”

나도 아이를 낳을 수 있겠구나, 선유는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임신이란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절대 제 인생에 존재할 거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제 피를 이은 아이. 임신, 노팅, 히트, 그리고… 선유는 콜라만 한 모금 더 마시다 한주까지 이어지는 생각을 간신히 잘라냈다.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하며 보낸 시간이 벌써 한 달이었다. 그동안 물론 한주에게서도 연락은 없었다. 내일쯤 불러서 좀 더 얘기해 봐야겠다. 선유는 애써 마음을 먹었다.

회식을 마치고 돌아온 집 앞에, 선유의 결심이 무색하게 한주가 먼저 찾아와 주저앉아 있었다. 검은 포대 같이 웅크려 있던 한주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밖에 있어? 추운데 들어가 있지.”

“그….”

“이제 와서 내외하는 거야?”

싱긋 웃은 선유가 문고리를 잡아 열고 얼른 들어가라고 했다. 커다란 덩치가 어울리지 않게 우물쭈물하던 한주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안 그래도 내일쯤 연락할까 했는데.”

“…왜요?”

“그냥. 보고 싶으니까.”

한주는 기습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왜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티가 나는 반응이라 선유는 조금 서글퍼졌다. 미리 알았다면 아이가 그렇게나 아프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저녁은 먹었어?”

“예.”

“뭐 먹었어?”

“그냥 학교에서 대충….”

“대충 먹으면 안 되지. 그래서 이렇게 말랐나?”

한주를 소파에 앉혀 놓고 선유는 냉장고에서 사과 몇 알을 꺼내 왔다. 껍질을 벗겨 토막토막 썰어 내 습관처럼 한주의 입가에 대어 주었다.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다 한주는 예전의 어느 때처럼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얼굴 많이 말랐어. 덩치도 크면서 밥 제대로 안 챙겨 먹고 다니면 건강 망친다.”

“형도….”

“나? 나는 요새 괜찮지 않아?”

선유는 한창 살이 빠졌을 때에 비하면 그래도 평소만큼 괜찮아진 편이었다. 자궁을 생성하느라 온갖 에너지가 다 그쪽으로 쏠려 첫 히트 때는 몸무게가 5키로 이상 급감했었기 때문이었다.

“회식하셨어요?”

“응. 법인 분리하고 이것저것 좋은 일이 있어서.”

“…술도 드셨어요?”

“아니. 술은 안 먹었어. 소주는 아무래도 싫어서.”

“하긴 집에서도 소주는 안 드셨죠.”

“너는 소주 괜찮아?”

“저도 소주는 별로예요.”

한주는 얌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그가 어색한 선유가 잠시 눈치를 보았으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한주는 원래 이런 아이였다. 선유를 밀어내고 외면하던 게 꾸며낸 가면이란 걸 자각하자 어색함도 차츰 줄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었다. 히트가 왔을 때 저를 만지던 손과 그 페로몬, 고백과 다름없던 말 때문이었다.

“후기 발현이란 거… 좀 알아봤어요.”

“…그래?”

“주기가 안정되기 전까지는 히트 때 억제제가 잘 듣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그렇긴 해.”

“그럼 지난주에 그랬던 것도… 억제제가 통하지 않아서 그랬던 거예요?”

“그때는 나 혼자 있으니까 그냥 견디려고 알약만 먹었던 거야, 물론… 약이 잘 안 통하긴 하지.”

“…억제제보다는 알파의 페로몬이 더 효과가 좋다고 했어요.”

“응, 그래서 의사 선생님이 알파와 성관계를….”

한주와 이런 주제로 대화하게 될 거라곤 발현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던 선유는 조금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서 마지막 남은 사과 조각을 괜히 몇 번이나 더 씹어 삼켰다.

“…그럼 저를 억제제로 쓰세요.”

“…어?”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게요. 형이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주기가 일정해질 때까지 저를 쓰세요.”

“…….”

“제가 무슨 짓을 할지 걱정되면, 저를 묶어도 좋아요. 저를… 노예처럼 부려도 상관없어요.”

“한주야.”

숨기지 못하는 절박감, 애원 섞인 목소리에 선유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쉬었다. 한주는 제 지독한 짝사랑에 매몰되어 이미 심각한 패배주의에 휩싸여 있었다. 절대로 제 사랑이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저 차악만을 택하는.

“왜 그렇게 다 포기한 것처럼 굴어.”

“…형.”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너를 싫어할 리 없다는 거. 그런데 왜 그래.”

“그건… 백 프로가 아니잖아요. 일말의 여지라도 있다면 저는….”

제 한숨과 표정 변화 하나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한주는 또 다시 절망에 젖었다. 선유는 가만히 한주의 손을 하나 끌어다 잡았다. 긴장으로 가득 찬 손은 가늘게 떨고 있었고, 손바닥은 촉촉했다. 그저 작은 단풍잎 같던 손이 이제는 제 손안에 들어차고도 한참 남을 정도로 커졌다. 한주는 작은 아이가 아니라 이제 남자였다.

“한주야. 나는 너를 그런… 대상으로 본 적은 거의 없어.”

“…알아요.”

“그럼….”

“…….”

“지금부터 그렇게 보도록 같이 노력해 보지 않을래?”

“…예?”

뭔가 잘못 들었다는 듯 한주가 되물었다. 선유는 제 손을 꽉 되잡아 오는 힘을 돌려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해.”

“…알아요.”

“하지만 너와는 달라.”

“그것도 알아요.”

환희에 젖었던 얼굴이 다시 절망으로 물들었다. 한주의 손등을 감싸고 있던 손을 들어 마른 뺨을 매만졌다. 한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그저 담담한 선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입에서 사형선고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피고인 같았다.

“아직은 다르다는 거야.”

“…아직이요?”

“그래. 나한테 너는 유일무이한 존재인데.”

“…….”

“이름을 바꿔 붙이는 게 그렇게나 어려운 일일까?”

“…형.”

“나는 너를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거기에 의미만 더 붙이면 되는 거잖아.”

“…….”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차악만을 택하지 마. 나는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

최선을 다하도록, 수십 가지 길을 열어 두고 끝도 없는 고민을 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끝내는 최선을 택하도록 그렇게 키웠다. 선유를 외면한 채 바닥만 보던 한주의 입에서 한숨 같은 물음이 흘러나왔다. 그 질문이 정말로 사랑스러워서 선유는 자기도 모르게 한주의 뺨에 입을 맞출 뻔했다.

“제가… 형을 사랑한다고 해도 될까요?”

“…응.”

“형에게 애정을 구해도 되나요?”

“그건 구할 필요가 없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잖아.”

조금 장난을 섞은 말에 한주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동공이 어른거렸다. 금세라도 도르르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눈으로 한주는 소곤거렸다.

“그럼 형을 만져도 돼요?”

“…그건 허락받고.”

“허락해 줄 거예요?”

“허락하게 만들어 봐. 조르는 건 네 특기잖아.”

“…….”

“다 큰 줄 알았더니, 우리 한주 아직 울보네.”

눈을 감는 순간, 끝내 수위를 넘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여전히 예쁘고 귀여운 아이, 젖어 드는 매끈한 뺨을 닦아 주며 선유는 가만히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좋은 꿈 꾸라고, 좋은 하루 되라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한다고 가르쳤던 입맞춤.

“최선을 다할게요.”

“응.”

“형이 저를… 다른 의미로도 사랑할 수 있게.”

한주의 말을 들어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선유는 아마도 한주가 정말로 ‘노력’을 한다면 제가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제한 없이 사랑할 사람은 아마도 제 인생에 한주 한 명뿐일 테니까. 친애의 정이든, 성애의 정이든 기반은 같았고 그것은 그 사람을 귀중히 여기는 것일 터였다.

선유는 한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보드랍게 웃었다. 그 미소에 시력을 빼앗긴 듯 멍해진 아이가 더듬거리며 선유의 뺨을 건드렸다. 따뜻하게 닿아오는 체온이 새삼스러워서 잠시 눈 안쪽이 욱신거렸지만, 그 느낌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기쁨이 조금 더 컸다.

***

한주는 자취방을 정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사라고 하기에도 뭐 했던 것이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들고 들어오는 짐이 간소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스턴 백 두 개와 캐리어 하나를 현관에 들이며 선유는 반갑고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혼자 있는 게 생각보다 더 외로웠던 거 같았다.

같이 옷과 책을 정리해 넣고 둘은 마주 앉아 치킨 한 마리를 시켜 먹었다. 매정한 가면을 벗어 던진 한주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다감하여 선유는 조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왠지 이상해서 뺨을 툭툭 두드렸더니, 몸만 커다란 강아지처럼 뺨을 문질러왔다.

“귀여워라.”

“…제가 귀여워요?”

“응. 언제나 예쁘고 귀엽지.”

“…….”

“아직도 나한테 예쁜 건 좋아?”

“그걸 꼭 듣고 싶으세요?”

선유가 대충 챙겨 싱크대 위에 올려놓은 치킨의 잔해를 능숙하게 치우며 한주가 물었다. 잔뜩 귀를 붉힌 얼굴이 여전히 소년 같았다. 언제는 완연한 남자의 모습을 했다가 가끔은 이렇게나 푸르렀다.

“듣고 싶지.”

“…형한테 예쁜 건 싫지 않아요.”

“와, 진짜 했어.”

과장된 태도로 입까지 막으며 선유가 감탄하자 한주가 원망을 섞어 불렀다.

“형!”

“아니, 너무 귀여워서 그러지.”

“…저는 지금 형한테 구애하고 있는 거라고요.”

“지금 건 좀 위험했어.”

“위험했어요?”

“응.”

“한 번 더 할까요?”

사랑을 고백하고 애정을 갈구해도 된다고 했더니 한주는 거침이 없어졌다. 선유의 눈에 예쁠 짓, 귀여운 짓이라면 무엇이든 하려 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저를 억제제로 쓰라고 할 때보다는 그게 훨씬 좋아서, 선유도 어떻게든 그에 부응해 주고만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조금, 아주 조금 남은 친애의 정이 죄악감을 버리지 못하게 했다.

“한주야.”

“예.”

“어떻게 그렇게 매정해질 수 있었어?”

“…뭐가요?”

“모르는 척 하지 말고.”

오랜만에 꺼낸 체스판을 앞에 두고 선유는 궁금했던 걸 다 물어보기로 했다. 다시 솔직함을 되찾은 한주는 고분고분하게 대답했고, 얽힌 질문을 풀어 주었다.

“형이 아니라 귀찮게 구는 인간이라고 수백 번쯤 생각하고 나면… 조금은 그렇게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얼굴 잘 안 봤구나.”

“형은… 눈치가 빠르잖아요.”

“하지만 네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어.”

“그것만은 들키지 않길 바랐으니까요.”

룩을 집어 옮기며 태연하게 얘기했으나 선유는 한주의 목소리에서 그때의 좌절을 읽을 수 있었다. 퀸을 옮기고 선유는 체크메이트를 외쳤다.

“어딜 봐서 체크메이트예요?”

“여섯 수 이후에.”

“여섯 수?”

“응, 봐봐.”

선유는 여섯 수 이전 혹은 여섯 수에 한주의 킹이 제 퀸에 잡힘을 증명했다. 날카로워진 눈매로 체스판을 위를 한참 훑던 한주는 제 패배를 인정했고 말들을 정리해 다시 놓았다.

“더 할 거야?”

“예.”

“모노폴리 할래?”

“…아뇨. 그런 운에 맡기는 게임은 별로예요.”

“그럼 바둑?”

“제가 바둑으로 형을 어떻게 이겨요. 한 번을 안 져 주는데.”

“져 주는 게 더 기분 나쁘지 않겠어?”

“그냥 체스 더 해요.”

한주는 한숨을 쉬며 다시 폰을 움직였다. 그의 말대로 선유는 한주에게 단 한 번도 져 주지 않았다.

“져 주는 거 바라지도 않으면서.”

“아마 전 평생 형을 못 이길 거예요.”

“어떤 면에서?”

“전부 다요.”

“음….”

“하지만 이젠 그걸로 투정 부리거나 하지 않아요. 형은 좀 규격 외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장하다는 의미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더니 한주는 애 취급하는 게 싫다는 눈초리로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길고 시원하게 빠진 눈매가 예전처럼 귀엽다기보다는 조금… 서늘하게 보여서 신기했다. 나이가 들면서 아이의 얼굴이 계속 바뀌는 걸 봐왔지만, 확실히 가끔씩 보아야 변화하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 형이 이겼으니까… 뭐 시키실 거예요?”

체스 게임은 선유가 한주에게 합리적으로 심부름을 시키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심부름이라고 해 봐야 차를 타 달라거나,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와 달라거나 하는 사소한 것뿐이었다. 평소에도 한주가 해 주는 일들을 일부러 소리 내서 시키는 정도.

하지만 오늘, 선유의 요구는 완전히 달랐다.

“좋아한다고 해 봐.”

“예?”

“노력한다고 했잖아.”

“…형 저 놀리는 거죠.”

“아냐, 도와주는 거야. 내가 이런 거로 널 놀릴 리가 없잖아.”

“…….”

“해 봐, 한주야.”

선유를 외면한 채 입술만 씹고 있던 한주가 고개를 돌린 건 그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발가락이 시려 서로 비비길 반복하는 선유의 발을 본 탓이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한주가 슬리퍼를 가져와 선유의 발에 끼워 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안 할 거야?”

선유의 재촉에 한주는 또 오랜 시간을 보냈다. 한참 동안 말없이 체스판 위에서 말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선유가 다시 체크메이트를 외쳤을 때, 그에 반응하듯 한주가 고백했다.

“…좋아해요, 형.”

“…응.”

“형, 사랑해요.”

용기를 얻은 듯 한주는 단계를 더 올려 고백했다. 떨리는 목소리, 진한 눈동자, 호선을 그리는 예쁜 입술에 선유는 시선을 잠시 빼앗겼다.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말은 신기했다. 계속해서 들으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유는 일부러 한주를 종용했다. 한주가 말하는 그 다른 의미의 애정에 제가 익숙해지기 위해서.

눈을 반쯤 감고 그가 갈구하는 말의 깊이를 가늠하던 선유는 한주의 손등을 끌어다 잡았다. 가만히 잡혀 있던 한주는 한참 뒤에야 손을 조금 돌려 선유와 마주 잡았다.

“…형, 손이 너무 뜨거워요.”

“어?”

“열나는 거 아녜요?”

한주의 서늘하고도 커다란 손이 이마를 덮어오는 순간, 선유는 배 속이 삽시간에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히트였다. 한 달은 조용하더니 왜 이렇게 갑자기.

“형, 페로몬 나와요….”

“으, 응….”

“엄청 단 냄새.”

아직 불안한 선유의 히트는 페로몬을 거의 폭포수처럼 갑자기 뿜어냈다. 그건 한주마저도 휩쓸어 버릴 정도로 강렬하여 알파의 페로몬마저 똑같이 넘실대게 했다. 풀냄새 섞인 말도 안 되게 청량한 머스크 냄새-청량과 머스크는 공존할 수 없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선유는 이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가 뇌까지 직통으로 파고들었다.

식탁을 짚고 아래로 미끄러지는 선유를 그대로 안아 든 한주가 그대로 선유의 침실로 향했다. 서랍장을 뒤져 꺼낸 주사제를 가져가자 선유가 힘이 다 빠진 손으로 그것을 밀어냈다.

“안 맞는 게 좋다고….”

“버티기 힘들 거예요.”

“하지만 임신하려면 의사가 최대한 주사는 맞지 말라고 해서… 6개월은 주사제 쓰면 안 된다고 했는데….”

“…형, 임신할 거예요? 누구 애를?”

“…혹시 모르잖아.”

“그럼 어떻게 해요.”

다급히 묻는 한주를 보며 선유는 서랍장을 가리켰다.

“알약하고 페로몬… 알파 페로몬으로 안정시키면….”

선유는 최대한 밀어내려 하는 것이겠지만, 힘이 다 빠져 툭툭 고양이가 치는 정도밖에 안 되었다. 한주는 주사제와 이미 얼굴 근육마저 풀린 선유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주사제를 멀리 던져 버렸다. 그리고 급히 알약을 가져와 선유의 혀 위에 떨어트리고 물을 마시게 했다.

약을 먹였으니 섹스를 하지 않아도 알파 페로몬으로 완전히 덮어씌워 버리면 히트는 가라앉을 터였다. 한주는 침대 헤드에 등을 대고 앉아서 선유를 제 다리 사이에 앉혔다. 그리고 뒤에서부터 끌어안고 이미 젖은 바지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으, 응, 한주야… 아, 안쪽, 안쪽이….”

“형, 좆 만져도 돼요?”

귓가에 속삭이는 말에 선유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좆이라니, 한주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한마디 하려 했으나 제대로 된 사고를 할 만한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만져지고 박히는 것 외에는.

“응, 만져, 만져 줘.”

“…귀여워.”

선유는 거슬린다는 듯 바지를 발바닥으로 밀어 벗었다. 한주는 말없이 그저 선유의 성기를 쥐고 훑기 시작했다. 축축한 소리와 젖은 신음이 방 안을 울렸다. 성기만 만지는 한주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몇 번이나 넣어 달라 말하던 선유는 제가 손을 뻗어 구멍을 매만졌다. 하지만 손가락과 손목에 힘이 빠져 푹 젖은 안으로도 밀어 넣을 힘이 부족했다.

“안 들어, 가, 흐읏… 힘이, 힘이 없어서….”

“…….”

“한주야, 왜 아무 말도, 하, 아, 안 해…?”

“형 구멍도, 만져도 돼요?”

“응, 만지라니까….”

“안에도? 가슴도 만져도 돼요?”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지금 제 상황을 보면서도 저런 걸 물을 생각이 나나? 선유는 거의 반쯤 러트가 온 것 같이 달아오른 한주의 얼굴과 탁해진 눈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밀었다. 간지러워서, 혀 아래와 가장자리, 입천장을 누군가 긁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 미친 거 아녜요?”

“응, 미쳤어, 나 미친 거 같아, 아, 으응.”

“혀… 씹어도 돼요?”

순간 선유는 왜 한주가 감질나게 이러고 있는 건지 깨달았다. 설마 만지는 거 허락받으라고 했다고 이러는 건가? 침대에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간신히 들어 단단한 허벅지 위를 쓸어내렸다. 그리고 선유는 반쯤 풀린 혀를 간신히 놀렸다.

“싫으면, 싫다고 할 테니까, 묻지 말고 해!”

아마도 한주는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성기를 다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손이 그대로 회음부를 쓸고 안쪽으로 들어가 구멍을 벌렸다. 체액을 뱉어 내는 곳은 이미 젖을 대로 젖어서, 마치 젖은 수건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까지 났다.

“…형, 안에서 물 나와요.”

“으, 응….”

“그 물에서 엄청 단 냄새도 나요.”

예고 없이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 두 개가 이리저리 벌려지고 다시 모아졌다가 그대로 전립선을 밀어 올렸다. 선유는 한주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온몸을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그 귓가에 입술을 대고 한주가 속삭였다.

“자궁구는 안 만져져요, 엄청 깊게 있나 봐요.”

“한주 너 입 좀… 아, 하으, 너무, 너무 깊, 깊어.”

한주가 가슴 위를 누르던 손을 들어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리 혀로 문질러도 간지러움이 사라지지 않던 부위를 손가락을 세워 긁어 주기 시작했다. 입천장의 오돌토돌한 부분과 혀 가장자리, 그리고 어금니 안쪽의 잇몸까지. 선유는 솟는 타액을 억지로 삼키며 학학거리는 단 숨을 뱉었다. 위와 아래가 전부 배겨낼 수 없는 자극으로 가득 차 제 성기가 무엇을 뱉고 있는 줄도 몰랐다.

맑은 물까지 쏟아내는 성기를 죽죽 당겨 주며 한주는 소중히 선유의 뺨과 귓가에 입을 맞췄다. 계속 페로몬을 부은 게 효과가 있었는지 비정상적으로 터져 나오던 선유의 페로몬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거의 자아를 잃었던 홍차 빛깔의 눈동자에도 천천히 빛이 돌아왔다.

“이제 좀 진정이 돼요?”

“한주 너는….”

“다행히 러트까진 안 왔어요.”

“또 나만… 난리가 났네.”

선유는 정액뿐 아니라 다른 액체까지 뿜어낸 것을 보고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설마 매트리스까지 다 젖은 건 아니겠지? 아무리 히트가 오면 제정신이 아니라곤 하지만, 한주의 품에 안겨서 사정하고 그보다 더한 걸 해대는 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것도 전부 제가 그 ‘아들 같은 아이’라는 인식만 버리면 괜찮아질 거라는 걸 알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침대 아래쪽에 버려져 있는 바지를 끌어다 황급히 아래를 가리고 닦아 내는 선유를 본 한주가 벌떡 일어났다.

“물수건 가져올게요. 그냥 계세요.”

말릴 틈도 없이 나간 한주가 물수건과 마른 수건을 가져와 선유의 옷을 아예 벗기고 몸을 닦아 주려 했다. 하지만 약과 알파 페로몬으로 진정된 선유는 이제 완전히 괜찮아져서 굳이 한주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었다. 대충 수건으로 처리하고 커다란 한주의 티셔츠를 덮어 입었다. 한주가 집을 나가고 나서 잠옷으로 쓰던 것이었다.

“그냥 샤워를… 한주야, 너는…?”

“저는 괜찮아요.”

“…안 괜찮은 거 같아서.”

선유의 눈이 닿은 건 한주의 성기였다. 바지 위로도 뚜렷하게 윤곽이 드러나 있어서 발기한 게 분명한 성기. 저 때문인데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괜찮아요.”

“…손 빌려줄게.”

“그럴 필요는….”

“빌려준다니까.”

그대로 침대로 한주를 밀어 눕힌 선유가 그 위를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바지를 쑥 내리고 성기를 붙잡았다. 후끈거리고 크기까지 한데 색깔은 또 예뻐서 선유는 한참 그것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한주 다 컸네 싶어서.”

“으, 정말….”

벌떡 일어난 한주가 선유를 밀어 눕히고 완전히 자세를 전복시켰다. 그리고 성기를 쥐고 선유의 손바닥에 귀두를 문지르며 자위를 시작했다.

“…손바닥만 빌려주세요.”

진하게 배어 나오는 프리컴이 손바닥을 적시고 손가락 사이까지 스며들었다. 선유는 가끔 손을 모아 쥐어 한주의 귀두를 자극했다. 그럴 때마다 미간을 찌푸린 한주의 입에서 뜨거운 숨소리가 뱉어졌다.

평소엔 조금 창백한 흰빛의 얼굴이 복숭아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젖은 이마에 검은 머리카락이 붙어 가끔씩 작은 땀방울이 흩어졌다. 눈이 질끈 감길 때마다 눈꼬리가 진한 붉은색으로 물들고, 잘근잘근 깨물리는 입술도 평소보다 많이 붉었다. 선유는 한주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그만큼 예쁜 성기를 직접 쥐고 흔들어 주었다.

“형, 아, 선유 형, 흣….”

“응.”

“형, 좋아해요, 너무, 너무 좋아서, 아, 안 돼, 나올 것, 같, 흐.”

선유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한주는 신음 섞인 고백을 했다. 자기도 모르게 하는 것만 같은 고백에 선유는 제 귓가가 다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주는 등을 굽히며 몸을 한껏 굳혔고, 그대로 선유의 손바닥에 정액을 내놓았다.

손을 모아 정액을 그대로 받아내고 옆에 버려져 있던 수건에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선유는 붉어진 얼굴을 그나마 젖지 않은 손등으로 툭툭 두드리며 침대에 붙어 있던 상체를 세웠다. 거친 숨을 한동안 내뱉으며 가슴을 들썩이던 한주가 무척 시원하다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왜 형이 저한테 고백하라고 했는지 알 거 같아요.”

“어?”

“저를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좋아한다고 말할 때마다 형이 변하는 게 느껴져요. 형 눈 안에서 무언가… 반응이 일어나는 게 보여요.”

“…내가 너를 왜 놀려.”

“그러니까요. 그럴 리가 없는데.”

“…….”

“좋아해요, 형.”

“…….”

“고마워요.”

진심어린 감사를 내놓고 한주는 정중한 태도로 선유를 끌어안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이 다 끝나기도 전에 선유는 제가 먼저 한주를 안아 주었다. 너무 넓어진 한주의 어깨를 자신의 팔 안에 다 담지 못하자 목을 안아 당겼다.

“예전에는 네가 이렇게 안겼는데.”

“제가 너무 컸죠?”

“응. 내가 너무 많이 키웠네.”

“…항상 형보다 더 크고 싶었어요.”

“내가 안 안아 줄 거라 했다고 밥도 안 먹었던 건 어디의 누구더라?”

“그런 건 좀 잊어주세요.”

등을 감싸온 팔이 강하고 단단하게 선유를 끌어당겼고, 뜨거운 목덜미에 뺨을 대고 선유는 편안하게 기댔다. 그렇게나 고요하고 평온한 공간에 담담한 한주의 목소리가 울렸다.

“…형,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요.”

“응.”

“형이 저와 같은 의미로 사랑한다고 할 거라면….”

“할 거라면?”

“…히트가 오지 않았을 때 말해 주실 수 있을까요?”

“…….”

“부탁이에요.”

선유는 한주가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거짓된 감정을 토로하고, 그 감정의 변화로 인하여 상처받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한 발 내딛다가도 겁을 먹는 아이가 답답하면서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선유는 한주에게 관대했고, 언제나 마음을 활짝 연 이해자였다.

“히트 때의 감정은 일시적일 수 있으니까?”

“지금도 형은 저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것처럼 안아 주고 있잖아요.”

“내가 언제 너를 이렇게 안아 주지 않은 적이 있었어?”

한주가 선유를 외면하기 전에 그들 사이에서 안고 안기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가슴과 가슴이 다 맞닿을 정도로,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뇨.”

“그럼 왜 그렇게 말해.”

“제가 겁이 많아서요.”

한주는 선유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뒤로 넘겨 주고 드러난 이마에 꾹 입술을 찍었다.

“저는 페로몬이 없어도 형한테 각인할 정도였어요.”

“각인을… 했어?”

“제가 오메가 페로몬을 맡은 건 중학교 1학년 때가 마지막이었어요. 형을 좋아한다고 자각한 이후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을 인식해 본 적이 없어요, 형.”

“…….”

“아마도 각인일 거라고 생각해요.”

“한주야, 대체….”

“형이 저를 페로몬 때문에 필요로 한다고 해도 좋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바라고 싶어요.”

“…….”

“제가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형 눈이 반짝반짝 해져요. 그리고 사랑한다고 하면 눈 안쪽에 파도가 치는 것 같아요.”

보석을 만지는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만지는 것처럼 선유의 이마와 뺨을 매만지는 한주의 손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제가 조금 더 바라도 될까요?”

“…….”

“그럼 더는 바랄 게 없을 거예요.”

“…알았어. 그렇게 할게.”

“고마워요, 형.”

좋아해요, 한 번 더 속삭여지는 고백에 선유는 제 변화를 선명하게 느꼈다. 한주가 말한 대로 아마 제 눈동자는 반짝일 것이었다. 사랑해요, 지금은 파도가 치고 있을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며 선유는 이 사랑스러움이 바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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