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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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법인을 하나 더 세울까. 점점 덩치가 커진 회사가 좀 버겁게 느껴져서 선유는 퇴근도 하지 않고 사무실에 앉아 계속 고민 중이었다. 기존에는 있던 시스템을 컨설팅하는 데에 그쳤다면, 지금은 아예 새로 ERP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비즈니스를 혼자 관리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러면 시스템 컨설팅 쪽은 거의 십 년간 발맞춰온 임 이사-임 실장에서 개발 이사로 승진했다-를 대표이사로 하고 저는 아예 ERP 시스템 개발 쪽 법인만 맡는 건 어떨까. 아니면 영업과 개발을 분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이면지에 슥슥 조직도를 그리며 선유는 고민을 구체화했다.

이제 곧 지운이 육아 휴직에서 돌아올 테니 영업 쪽도 숨통이 트일 거고, 관리 인원은 좀 더 충원하고… 러프한 그림이 완성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현재 부족한 인원수를 분석하여 내일 인사 팀에 전달하기로 하고, 임 이사와의 면담 시간을 정한 선유가 슬슬 퇴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집에 가도 사람이 없어서 크게 퇴근 시간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한주는 외국어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벌써 고등학교 3학년 진학 직전이었으며 집에는 거의 밤 열 시 이후에나 들어왔다. 같이 저녁을 먹는 것도 주말뿐일 정도로 바빴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사실 선유는 한주가 그렇게까지 하길 바라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적당히 해도 충분하다는 말을 절대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한주가 얼마나 열심히 저를 따라잡고 싶어 하고 얼른 크고 싶어 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눈물 섞인 그 고백이 너무 애처로워서 여전히 가슴에 박혀 있는 기분이었다.

고등학교 진학으로 한주와 선유는 정말로 오래 고민을 했다. 선유가 너무 많은 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어고, 과학고, 국제고부터 아예 미국에 가는 것까지. 평소에는 학교에 오가거나 교사와 상담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던 선유였는데, 고등학교 입시 때문에 한주의 중3 담임과는 둘이 머리 맞대고 정말 입시를 열심히 공부했다.

한주는 거의 모든 분야에 능했으나, 그중에서도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잘했다. 어렸을 때부터 선유와 영어를 써 왔고, 스스로도 외국어를 익히는 데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수학과 과학도 잘해서 과학고도 선택지에서 빼버리긴 아까웠다. 경시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도 많아서 과학고 진학도 충분히 가능했다.

거기에 미국에 선유의 부모가 있었으므로 아예 그쪽으로 가는 것도 고려해 볼 만 했다. 그러다 끝내 결정된 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어 고등학교 진학이었다. 선유는 조금 아쉬워했지만, 한주의 결정을 존중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벌써 고등학교 3학년이라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렇게 한주가 자라는 만큼 선유는 한 해 한 해 나이가 드는 걸 몸소 느꼈다. 이제 아이를 돌봐야 할 필요가 거의 없어져서 자기 관리를 시작했지만, 서른이 넘으면 하루하루 달라진다더니 정말 그랬다.

“어깨 아파라.”

도수 치료를 좀 받으러 갈까. 아니면 한주한테 좀 주물러 달라고 해 볼까. 항상 오래 앉아서 일하는 터라 선유는 어깨와 등이 자주 아픈 편이었고, 눈치가 빠른 한주는 그럴 때마다 먼저 나서서 등을 주물러 주겠다고 하곤 했다. 요새는 조금… 뜸해지긴 했지만.

가방을 내려놓고 가벼운 카디건을 벗어 소파에 걸쳐 놓았다. 나중에 저 옷을 옷걸이에 거는 건 세세한 정리에 능한 한주의 몫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는 찰나 집에 온 한주와 마주쳤다. 평소 같으면 ‘저 왔어요.’하고 먼저 말하는 한주가 시선을 피한 채 현관에 우뚝 서 있었다. 그래서 젖은 머리를 툭툭 털며 선유가 먼저 인사를 했다.

“어서 와.”

“…저 왔어요.”

속옷 위에 큰 티셔츠 한 장만 입은 차림으로 선유는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냈다.

“물 마실래?”

“아뇨. 저 먼저 들어갈게요.”

“…어, 그래.”

요새 들어서 한주가 조금 냉랭하다. 아니… 이미 냉랭해질 만큼 냉랭해졌다. 왜일까. 안 그래도 서로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었는데, 눈을 마주쳐본, 서로 간에 살갑게 대화해 본 기억이 희미할 정도가 되었다. 사춘기인가, 다 비운 병을 구겨서 재활용 봉투에 넣어 두고 선유는 가만히 한숨을 내뱉었다.

“형.”

“어?”

“저 잠깐 뛰고 올게요.”

“지금 열한 시인데 어딜….”

간다는 거야, 선유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한주는 집을 나서고 없었다. 아무리 운동을 좋아한다지만 이 밤에 뛰러 간다는 게 말이나 돼? 또 한숨을 쉬고는 방에서 옷을 챙겨 입고 나와 거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는 다른 일을 해야 했다. 그러면 풀리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하지만 몇 번 키보드를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선유는 급격히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미간을 문지르며 노트북을 탁 덮었다.

정말 최근의 한주는 사춘기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도 모자랄 정도로 이상했다. 등교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집을 나가서 밤이 깊어서야 들어왔고, 최근에는 학원도 그만 다니겠다고 했다. 그럼 하교 후에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으나 알아서 공부하고 있다는 동문서답으로 선유의 질문을 막았다.

한주와 나 사이에 거대한 벽이 세워진 느낌, 처음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어졌던 하루 일과를 공유하는 시간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대화는커녕 눈을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수능이 코앞이라 불안해서 그런 걸까.

요새 들어 매일매일 선유는 과거를 되짚어 보았다. 혹시 제가 뭔가 한주의 마음을 상하게 한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너무 애 취급을 했나, 아니면 또 한주를 불안하게 만들었나. 혹시 작년에 사생 대회 간다고 할 때 부득불 직접 도시락을 싸 준 게 싫었나. 한 번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나니 별 게 다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한주는 여전히 주말마다 꼬박꼬박 빨래를 하고, 선유가 멋대로 벗어 놓은 옷가지도 정리해 주고, 이틀에 한 번씩 집 청소도 해 주고 있다. 한주의 생활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저에 대한 태도만 변한 거라는 걸 깨달은 선유는 좀 더 가라앉았다. 하지만 더 이상한 건 전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는 것이었다. 매일 매일 이렇게 침잠하게 되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한주가 돌아왔다. 모자부터 트레이닝 복까지 검은색으로 뒤덮인 모습으로 들어오는 한주는 이제 거의 완성된 존재처럼 보였다. 키는 이미 선유를 초월한지 오래였고 거의 190cm 가까이 성장했다. 그리고 꾸준히 한 운동으로 온몸이 단단했다. 그나마 얼굴에 소년 같은 느낌이 남아 있었다.

“한주야.”

“예?”

“운동도 좋지만 쉬엄쉬엄해.”

“…왜요? 공부 안 할까 봐요?”

“아냐, 그런 건….”

공부는 신경도 쓰지 않는데, 선유의 말을 끊으며 한주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형보단 못하겠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런 말이 아니라… 날이 아직 추우니까 그러지.”

한주는 모자를 벗고 땀이 난 머리카락을 툭툭 털어 내며 선유의 말을 듣지도 않은 사람 마냥 딴소리를 했다.

“형이 보기엔 한심할 정도로 머리가 나쁘겠지만 이해해 줘요.”

그러고는 욕실로 들어가 버리는 한주를 보며 단 한 번도 그를 한심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선유가 당황스러워 말을 잃었다. 한주는 선유에게 항상 새로운 감정만을 주는 존재였다. 아이가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해 주었고, 아이가 그렇게 강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그저 하는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기쁘고 슬픈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한심이라니, 대단하다고 느꼈으면 느꼈지 한심이라니.

“…왜 이렇게 됐을까.”

중얼거리며 선유는 머리를 팔 안쪽에 묻고 한숨을 쉬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면 고칠 수 있을 텐데, 답 없는 버그 픽스를 할 때처럼 막막했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선유는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정체되어 있던 공기가 한주의 움직임에 다시 흐르기 시작했고, 곧 맨발과 바닥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까 하다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그대로 있었더니 어깨 위에 담요가 내려앉았다.

변한 건지, 변하지 않은 건지 헷갈리게 만드는 건 한주의 이런 태도였다. 어깨와 머리카락에 손이 조심스럽게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형, 들어가서 자요.”

어깨를 잡고 흔드는 손에 선유는 천천히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한주는 선유가 일어나자마자 바로 자리를 떴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 날 오후 회의 중 한주의 담임 교사로부터 전화를 받은 선유는 황당함에 말도 잇지 못했다. 입시 상담을 한다고 일정을 알려드렸는데 왜 오지 않았느냐는 타박 섞인 말에 처음 듣는다는 듯 반응했더니 이번에는 상대방이 더 당황했다.

- 처음 들으세요?

“예. 한주한테서 들은 적 없습니다.”

- 한주가 그럴 애가 아닌데… 게다가 입시 상담한다고 해도 한주가 혼날 일도 없고요.

“그렇겠죠….”

고등학교 입학한 이래로 전교 일등을 놓친 적이 없고, 모의고사도 기복 없이 잘 쳤다. 과목 중에 떨어지는 것도 없었고. 굳이 한주가 입시 상담을 숨길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 굳이 오시지 않으셔도 되긴 합니다.

“그래요?”

- 예, 워낙 잘하고 있어서요. 본인이 아직 어느 과를 갈지를 정하지 못해서 문제긴 하지만…. 보호자 분께서 대화를 좀 해 주시겠어요?

졸지에 아이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선유의 얼굴은 민망함에 빨갛게 달아올랐고, 아예 무릎 사이에 고개를 박고 싶은 사람처럼 허리를 숙였다.

“경영학과 쪽을 얘기하던데요….”

- 예, 물론 경영학과가 1순위이긴 하죠. 그런데 본인이 무엇을 하고 싶다고 정확하게 얘기한 적은 없어서요. 제가 벌써 15년째 교사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한주만큼 기복 없이 잘하는 애도 없거든요. 그래서 사실 유학도 권유 했는데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이더라고요.

“예, 유학….”

- 만약 유학을 간다면 내년에 입학이 가능할 거예요. 올해는 일정이 대부분 끝나서요.

“그렇겠죠.”

- 한주가 워낙 영어도 잘하고 하니 아쉬워서요.

“예,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전화를 끊고도 선유는 한참 그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못했다. 붉어진 얼굴이 제 색으로 돌아오려면 생각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한주는 대체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걸까. 언제나 많은 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아이였기에 선유는 그와 항상 진로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중학교 진학도, 고등학교 진학도, 유학을 고려했던 적도 있었다. 끝내는 일반적인 학생들과 동일한 루트를 밟긴 했지만,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많은 대화를 통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대화도 조율도 없다. 한주는 의견을 구하지 않았고, 선유는 그의 거절과 벽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선유가 아이에게 화를 낸 건 거의 십 년 전이 마지막이었고, 그 이후론 모든 일을 대화로 풀어왔기 때문이었다.

우선… 대화를 좀 더 해 보자, 오늘 한주가 집에 오면 한동안 없었던 대화를 다시 해 보자.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거부하는 관계를 개선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는 건 너무 잘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이렇게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장님?”

“아, 예… 죄송합니다.”

조심스러운 노크와 함께 열린 사장실 문 사이로 임 이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제야 자기가 회의 시간에 빠져나와 이러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선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러고도 잠시 망연자실하게 앉은 선유에게 임 이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한주가 좀… 요새 반항기 같아서요.”

“한주가요? 전혀 안 그럴 거 같은데.”

“…그러게요.”

“저희 딸은 작년부터 난리인데 한주는 늦게 왔네요.”

“임 이사님 딸도 반항기예요?”

“어마어마합니다.”

“어떤데요?”

주변에 아이의 성장에 대해 물을 만한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 임 이사의 조언은 꽤 귀중했다. 그의 아이가 한주보다 어리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말 걸어도 대답도 잘 안 하고, 맨날 방에 혼자 들어가 있으려고 하고 그렇죠.”

“음… 비슷하긴 하네요.”

하지만 한주는 어딘가 근원부터 뒤틀린 느낌이 있었다. 그저 호르몬 변화로 인한 반항이 아니라-만약 호르몬 변화 때문이라면 러트가 왔을 시기에 사춘기가 왔어야 맞았다-.

“그래도 한주는 여전히 공부 잘 하죠?”

“예, 뭐….”

“사장님을 많이 닮긴 한 거 같아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닮았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선유는 자기도 모르게 스미어 나온 미소를 조금 쓰게 삼키며 다시 회의를 진행했다. 법인 분리라는 게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얘기가 아니지만, 대충이라도 정리를 해 두는 게 좋을 거로 생각한 선유는회의를 조금 더 연장 해 일곱 시 정도에 마무리를 지었다. 지금부터 진행을 시작해도 일 년은 넘게 걸릴 일이었다.

“아무리 한주가 집에 늦게 온다고 해도 사장님은 좀 일찍 들어가세요. 요새 얼굴 안 좋으세요.”

“예, 그럴게요.”

“신 전무님 오시면 또 난리를 치시겠는데요.”

“애 보기 바빠서 이제 친구 얼굴은 본 척도 안 할걸요.”

“설마요.”

굳이 집에 일찍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집에 아무도 없는데 가서 뭘 한단 말인가. 밥도 혼자 먹어야 하는데. 선유는 오늘도 회사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한주가 올 시간 즈음 맞춰서 가기로 했다.

주변 빵집에서 사 온 샌드위치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업무 정리를 하던 선유는 열 시가 넘은 시계를 확인하고서야 노트북을 덮었다. 정말 지운이 보면 잔소리를 해댈 게 뻔한 섭식 생활에 야근은 일상이었다.

오늘은 노트북 들고 가지 말자, 선유는 서랍을 열어 노트북을 쑥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쯤 가면 한주가 올 시간과 거의 맞을 거 같았다.

무슨 얘기를 하지, 선유는 한주의 진로와 최근에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는지 학교생활에 문제점은 없는지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이 전에는 정말 쓸데없는 대화도 많이 했었는데, 시답잖은 소재를 가지고도 서로 할 이야기가 넘쳐났던 때를 떠올리자 기분이 더 내려 앉았다.

이것저것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금세 집에 도착했다. 맞은편 골목에서 한주가 걸어오는 걸 보고 그를 부르려던 선유는 갑자기 한주 앞을 가로 막으며 나타난 남자아이 때문에 자리에 멈춰 섰다.

“한주야!”

“…뭐야?”

선유는 한주가 그렇게 냉랭한 얼굴로 말하는 걸 처음 보았다. 눈과 입매에 표정이라곤 하나도 담지 않은 채 목소리에서 얼음마저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게다가 합기도 검도 태권도를 도합 6단까지 익힌 유단자답게 떡 벌어진 어깨가 가로등 불빛에 비춰 져서 더욱 크게 보였다. 그런 한주 앞에 선 아이는 선유보다도 작았고,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너 괜찮아? 아까 보니까 러트 온 거 같던데.”

한주는 여전히 소년 같은 매끈한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경멸의 기색을 띄웠다. 그러곤 헛소리 말고 용건만 말하라고 종용했다.

“왜 왔어.”

“학교에서 말하긴 너무 부끄러워서….”

“뭐가 부끄러운데?”

“그게….”

“부끄럽다면서 집까지 쫓아와서 뭘 얘기하고 싶은데?”

선유의 시야에서 다른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쑥스러움과 망설임을 보았을 때 아마도 한주를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선유는 제가 보면 안 될 걸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파트 화단에 조금 비켜서서 몸을 피했다. 그 순간 한주의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적나라한 말이 뒤를 이었다.

“좆 박아 달라고 하는 게 그렇게 부끄러워? 그러면서 남의 주사제는 숨겨 놓고 러트로 돌아 버리길 기대하고?”

“아, 아냐….”

“그래서 내가 강간이라도 하면 그걸로 약점 잡으려고?”

“그런 거 아냐.”

“그런 게 아니면 뭔데?”

죄를 지은 듯 푹 숙여져 있던 고개가 번쩍 들렸고, 아이는 삿대질을 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행동이 지킬 앤 하이드처럼 완전히 변했을 뿐 아니라, 쏟아지는 적나라한 말에 선유는 기겁했다.

“너 고자 새끼지? 알파면서 오메가 페로몬에 반응도 안 하잖아! 존나 비싸게 굴길래 그 귀한 좆 한 번 먹어 보려고 했다, 뭐!”

“네가 발정 나서 달려들어도 너한텐 세워 줄 좆도 없어.”

“…….”

“차라리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든가. 그럼 조금쯤은 고려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분에 차서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던 아이가 뒤를 돌더니 맹렬하게 뛰어가 버렸고, 선유는 이 어이없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니까 저 오메가는 한주를 좋아… 좋아하긴 하는 건가? 아님 그냥 좆… 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다 두통이 몰려와서 잠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주의 주사제를 숨겨 놓고 러트가 온 걸 틈타 강간을 유도하려 했다는 건가? 요즘 애들 너무 무서운데… 선유는 만약 한주가 여기에 말려들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다 새파랗게 얼굴이 질렸다. 피가 다 식는 기분이었다. 소름이 돋는 팔을 문지르며 일어나 비틀거리며 선유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급격히 지치는 기분이었다.

“…한주야.”

집에 들어서자 한주가 팔에 주사제를 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에 식은땀이 맺혀 있는 걸 보니 지금까지 몸속의 불쾌함을 참고 있었던 듯했다.

“억제제 안 먹었어?”

“…먹었어요.”

“그런데 왜 그래? 늦게 먹었어?”

“예, 좀….”

한주는 선유가 다가갈 때마다 뒤로 물러났다. 마치 알파 페로몬 때문에 구역질했던 때처럼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그런 한주의 태도에 선유는 오늘 하기로 했던 대화는 뒤로 미뤄야겠다 생각했다.

“오늘 얘기 좀 하려고 했는데, 몸이 안 좋아 보이니까 내일 하자.”

“…무슨 얘기요?”

“이것저것… 요새 너랑 대화한 지 너무 오래된 거 같아서.”

“그냥 지금 해요. 주사 놨으니까 괜찮아요.”

방금까지만 해도 슬금슬금 피했으면서. 선유는 혹시 제게서 또 무슨 냄새가 나는 건가 싶어 신경 쓰였으나 지금 한주의 미간은 깨끗하게 펴진 상태였다.

“음, 그럼… 우선 오늘 담임 선생님한테서 전화 왔었어.”

“…담임이 전화했어요?”

“그래. 입시 상담 얘기 왜 안 했어?”

“굳이… 형이 와서 할 필요 없을 거 같아서요. 성적은 잘 나오고 있고, 수시든 정시든 대학가는 데에는 문제없으니까요.”

“그래도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해 봐야지. 한국 학교에 진학할 수도 있고, 아니면 유학이란 방법도 있는데.”

“…형은 절 미국에 정말 보내고 싶은가 봐요. 중학교 입학 때부터 유학 얘긴 빠지지 않고 나오네요.”

“한주야. 우리 부모님 계셔서 남들보단 훨씬 편하게 갈 수 있으니까 그러지. 네가 워낙 영어도 잘하니까….”

“입시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또 뭐 있어요?”

한주는 선유의 말을 끊으며 바로 말을 돌렸지만, 선유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네가 알아서 하는 게 어디 있어. 나는 아직 한주 네 보호자고, 네가 최선의 선택을 하게 할 의무가 있어.”

“제가 원하지 않아도요?”

“…….”

“형의 의무를 제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요?”

한주는 정말로 원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저 이 시간조차도 짐처럼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무언가가 어깨 위에 잔뜩 얹어져서 그것을 견디는 것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굴었다.

“한주야.”

“…예.”

“뭐가 그렇게 힘들어?”

“힘들다뇨.”

“너 힘들어하는 거 뻔히 보이는데, 내가 언제까지 모른 척해야 해?”

“…형.”

한주의 입에서 나온 형이란 단어는 여전히 다디달았다. 울먹대며 언제나 유일한 것을 부르는 듯 애처롭던 그 울림이 확연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잘 알면 그냥 모른 척해 주면 안 돼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나 얘기하라고 했었잖아. 기억해?”

“…기억하죠. 처음으로 혼난 날이었는데.”

“혼낸 건 아니었어.”

“그럼 나무랐던 거로 할게요.”

한참 침묵을 지키던 한주가 고개를 옆으로 꼬고 선유을 외면한 채 중얼거리듯 물었다.

“형은… 형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와서 고백하면 어떻게 해요?”

“어?”

“요새 그런 일이 많아서요.”

“그런 일….”

방금 있었던 그런 일을 말하는 건가.

“한주야. 아까….”

“알아요. 형 보고 있었던 거.”

“…알고 있었어?”

“좀 티 나게 보고 있었어야 모르죠.”

선유는 민망함에 볼을 살짝 붉혔다. 뭐 굳이 숨으려고 애를 쓰진 않았으니 한주가 봤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고 한주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까 같은 상황에선 좋은 말을 해 줄 필요가 없을 것 같지만, 선유는 일반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말했다.

“아까 네가 한 질문에 대해서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남이 나를 좋아해 주는 건 고마운 거니까 좋게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해.”

“좋게라면 어떻게요? 좋게 얘기하면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여지를 두지 않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꼭 나쁘게 하지 않아도 단호하게는 얘기 할 수 있으니까.”

“…….”

“잘 달래서 보내지 그랬어. 그런 거 잘하면서.”

“그럴 여유 없어요.”

그 어떤 때보다 단호하게 대답한 한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더 할 말 없으면 들어가 보겠다고 하곤 선유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방으로 가 버렸다. 문이 닫히며 쾅, 소리를 냈고 선유는 그 적응되지 않는 소음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한 번 떨었다.

***

둘의 관계가 어떻든 시간은 잘도 흘렀다. 선유는 공부하느라 바쁜 한주 대신에 옷을 사 왔을 때 또 작은 사이즈를 사 와서 한소리를 들었고-‘이제 형은 제 옷 사 오지 마세요. 어차피 매번 작게 사 오니까’- 한주는 여름 방학 때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독서실에 갔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건강이 걱정되어 선유가 한마디 했으나 한주는 알아서 하겠다고 하곤 방에 들어가 버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틀어졌는지 과거를 다시 헤집던 선유는 올해 초 있었던 사고 아닌 사고를 기억해 냈다. 정말 뇌리에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깨달음이었다. 그날은 첫 해외 기업 수주 후 입고까지 마치고 회식을 했던 날이었다. 정말 추웠고 눈까지 와서 난리였는데도 불구하고 직원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부득불 고깃집에서 회식을 했다.

선유는 그날 정말 오랜만에 술을 많이 마셨다. 지운이 결혼한 후론 서로 선을 지키기 위해 그에게 기댈 수 없었고, 또 한주가 여전히 어린 축에 들다 보니 술 마시는 거 자체를 최대한 지양해 왔는데, 그날은 왠지 모르게 고삐가 풀려서 정말로 많이 마셨다.

3차까지 간 기억은 나는데 집에 온 건 생각조차 나지 않았고, 눈을 떠보니 집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기억을 한참 더듬은 선유는 한주가 저를 업고 온 것 같다는 추측에 이르렀다. 아주 잠깐 그 너른 등에 업혀 있었던 찰나의 파편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사에 출근해 같이 3차까지 갔던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한주에게 전화를 걸어 저를 데리고 가라고 했고, 한주는 전화를 끊고 20분 만에 고깃집에 나타나 그대로 저를 둘러업고 사라졌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 그다음 날부터 한주는 굉장히 냉랭해졌다. 혹시 제가 추태를 부린 건가 싶어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했지만, 한주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괜찮다는 말만 했다.

정말 그 이후였다. 그 전까지는 상냥하고 귀염성 있던 아이가 남처럼 저를 대하기 시작한 것은. 선유는 조금 초조하게 손끝을 씹었으나 그뿐이었다. 이미 9달 전의 일이고, 인제 와서 뭘 묻기엔 너무 늦었다.

최근 한주의 태도는 정을 떼어 내려는 것 같았다. 그저 동거인, 같은 공간을 쓰는 동거인 취급이었다. 살가운 태도도 말도 행동도 없었고, 선유가 친근하게 대하려 노력해도 받아 주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지?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미 술로 지워진 기억이 되살아날 리 없었고, 누구에게 물어봐야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없을 터였다. 그럼 한주에게 물어봐야 하나. 잠시 생각하던 선유는 그건 우선 뒤로 밀어두기로 했다. 최근 한주의 태도는 선유의 가슴팍을 너덜너덜하게 했다.

무슨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게 비아냥과 냉대로 돌아오는 건 견디기 힘들었다. 그것도 언제나 지켜 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제 자식처럼 키워 온 아이가 그러는 건 더더욱. 그래서 선유는 점점 한주에게 말 걸기를 포기하고 있었다.

“최선유.”

“…어?”

“몇 번을 불러도 못 듣냐.”

“아, 미안… 잠깐 딴 생각했어.”

“괜찮냐? 아까부터 정신 빼고 있던데.”

“어, 뭐… 괜찮아.”

“너 안색이 너무 안 좋다. 이마도 뜨겁네.”

이마를 꾹 짚어온 손을 떨쳐내며 선유가 간신히 한 번 웃었다.

“환절기라서.”

“감기 걸렸어?”

“좀.”

“또 쓰러지지 말고 들어가서 쉬어.”

“괜찮아. 아직 쓰러질 거 같진 않고.”

“그게 네 맘대로 되냐. 한주한테 또 민폐 끼치지 말고.”

지운아, 이제 한주는… 내가 쓰러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지도 몰라. 감기에 걸리면 옆에 붙어 앉아 아프지 말라고 안아 주던 아이는 이제 없어. 조그만 손으로 젖은 수건을 짜내겠다고 애를 쓰던 아이는 이제 없어. 밤에 열이 나면 등에 업고 뛰어 줄 아이는 없어. 내가 하는 것을 똑같이 배워서 해 주려고 하던 아이는… 이제 없어. 선유는 머릿속에 흐르는 그 부정적인 포기를 떨쳐내기 위해 애썼으나 이미 잠식된 지 오래였다.

“너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넌 퇴근 안 하고 뭐 해?”

“너 이상하다고 임 이사님이 잠깐 봐 달라고 하셨어.”

“섬세하셔라.”

“정말 이상하다, 너. 웃지도 않고.”

“아까도 웃었는데?”

“누굴 속이려고 들어. 내가 너랑 30년 넘게 친구하고 있는데 네 웃는 얼굴도 구분 못 할 줄 알아?”

어차피 억지로 웃어 봐야 소용없겠구나. 지운의 말대로 그는 제 가짜 웃음과 진짜 웃음을 누구보다 잘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운아. 너 오늘 시간 좀 낼 수 있어?”

“너 몸도 안 좋은데….”

“우리 집 가서 간단하게 마시자. 감기 걸렸을 때 소주에 고춧가루 타 마시면 금방 낫는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윤 실장님이 특효약이라고 알려 주고 갔는데.”

선유는 코를 훌쩍이며 카디건을 다시 챙겨 입었다. 한주가 어릴 때는 아이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서 아프면 안 되었고, 이젠 아무도 돌봐 줄 사람이 없으니 아프면 안 되었다.

옛날로, 한주가 없었던 때로 돌아가는 거구나, 하고 이미 반쯤 체념한 지 오래였지만, 사람과 같이 산 게 십 년이 넘은 탓에 그 전에는 대체 어떻게 지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한주는 늦게 와?”

“응, 고3이잖아.”

“학원 다녀?”

“학원은… 요새는 안 다니고, 지금은 독서실 다니는 거 같아.”

“…같아?”

“어, 한주가 자기 얘기 잘… 안 해 주거든. 용돈도 안 받아가. 어디서 돈이 나는 건지 모르겠네.”

지운과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한주 얘기를 하니 더 물에 잠기는 기분이었다. 선유는 애써 목소리를 높여 지운의 아기 얘기를 시작했다. 지운의 아이는 이제 곧 두 돌이 되는, 자그맣고 예쁜 딸이었다.

“세형이 보고 싶은데, 다음에 한 번 데리고 와라.”

“회사에? 아서라.”

“아니면 네가 너희 집 한 번 가도 되고.”

“그러든가. 근데 세형이가 널 너무 좋아해서 아빠는 슬퍼. 어린 게 벌써 얼굴을 밝혀가지고 어쩌려나 몰라.”

“나중에 잘생긴 애랑 결혼하려고 그러나 보지.”

“세형이는 결혼 안 해. 나랑 평생 살 건데?”

“애 앞길을 막아라, 막아.”

선유는 휑한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보일러부터 올리고 찬장을 뒤져 도수 높은 술을 찾아냈다. 누군가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서 사 온 거였는데, 뒤를 돌려 보니 40도가 넘는 독주였다.

“너 진짜 이거 먹어도 괜찮겠어?”

“집이잖아. 내 주사라고 해 봐야 욕하다가 자는 건데 뭐.”

“그 욕이 문제지.”

“요새는 욕할 일도 별로 없어. 재한 씨한테는 연락했어?”

“어.”

“좀 그렇네.”

“괜찮아. 재한이는 나 믿으니까.”

병을 따고 스트레이트 잔 끝까지 호박색 액체를 따라냈다. 진한 오크 냄새가 풍겼지만, 반쯤 막힌 선유의 코는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가 없었다.

“음, 근데 너희 집엔 한주 페로몬이 엄청 나는구나.”

“그래?”

“어. 아무래도 네가 베타여서 그런가 집에서도 편하게 지내나 보네. 집에 다른 알파가 있으면 서로 배려해서 페로몬을 최대한 숨기거든. 배우자가 아닌 오메가가 있으면 말할 것도 없고.”

“나는… 그런 거 모르니까… 열심히 공부한다고 하는데 실은 끝까지 이해하지 못할 거 같아.”

“완전히 이해하는 건 힘들지. 하지만 넌 정말로 노력 많이 했잖아.”

선유는 알파 오메가에 관련된 교육이나 강의에 정말 열심히 참여했었다. 그들의 존재 방식에 대해 알아가려 최선을 다했고, 저와 달리 알파인 한주를 잘 키워 내기 위해 베타인 자신이 직접 느낄 수 없는 부분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그런 선유의 노력을 한주가 알아줬을지는 미지수였다.

“예전에 교수님이 했던 말이 생각나.”

“어떤 거?”

“노력하는 것과 잘하는 건 별개라고 했던 거.”

“야. 넌 보통 노력하면 잘하잖아.”

“…그랬나? 그것도 잘 모르겠어.”

술을 목구멍에 털어 넣으며 선유는 중얼거렸다.

“너 왜 이렇게 자신감이 떨어졌냐.”

“삼십 년 넘게 자신감 있게 살았으니 이제는 좀 떨어질 때도 되었나 싶고.”

“내 생각엔 확실히 넌 연애를 좀 해야 해.”

“…연애?”

“지금까지 보듬기만 했으니까, 누군가에게 보듬어지고 떠받들어지는 연애.”

“말이야 쉽지.”

“넌 네가 동성애자라는 거에 너무 매몰되어 있는 거야. 너는 잘생겼고, 능력 있고, 심지어 성격도 좋지. 나는 네가 화내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을 정도니까.”

“…….”

“그런데 동성애자라는, 너를 이루는 그 작은 정체성에 왜 매몰되냐는 거야.”

“지운아.”

저를 사랑하는 친우의 말은 무척이나 위로가 되었으나, 그것처럼 저를 괴롭게 하는 것도 없었다.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 저는 엄청난 노력을 하였으나, 그 작은 정체성만은 절대로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으니까. 버리고 싶고, 어떻게든 바꾸고 싶었던,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었기에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

“넌 참 좋은 친구다.”

“…뭐야, 갑자기.”

“아마 너만큼 날 생각해 주는 사람도 없을 거야.”

빈 잔에 술을 채워 주고 선유는 쨍, 잔을 같이 부딪쳤다. 얇은 유리잔에서 영롱한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와 함께 문에서 비밀번호가 풀리는 소리가 났고, 지친 행색의 한주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한주는 현관에 잠시 선 채 날카로운 눈매로 선유와 지운을 한 번 훑었고 마지못해 인사말을 내뱉었다.

“…다녀왔습니다.”

“오, 한주. 오랜만이다.”

“예.”

“넌 어째 볼 때마다 크냐. 나무도 아니고.”

한주는 지운의 말에 대답 없이 반쯤 취해 테이블에 기대 있는 선유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잠시 한주를 외면하고 있던 선유가 크게 숨을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술기운이 올라 발개진 얼굴에 습관처럼 미미한 미소가 올라 있었다.

“한주 왔어?”

“…예.”

“저녁은 먹었고?”

“예.”

평소 같으면 제대로 대답도 하지 않고 들어갈 한주가 오늘은 꽤 성실하게 대답을 했다. 하지만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는 눈 안에서 무언가 새빨갛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선유가 마른침을 한 번 삼키는 찰나, 빈 잔을 채운 지운이 그것을 테이블 바깥으로 내밀었다.

“너도 술 한잔할래?”

“술이요?”

“그래, 너도 이게 곧 스물인데. 원래 술은 어른한테서 배우는 거야.”

“아뇨, 됐어요. 술 마셨다가 무슨 짓을….”

지운의 제안을 뒤로하고 방에 들어갔다 나온 한주는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그리고 바로 현관으로 가 운동화를 신었다.

“저 좀 뛰고 올게요.”

“이 밤에?”

“예.”

말릴 틈도 없이 한주는 밖으로 나가 버렸고, 지운은 놀란 얼굴로 선유를 바라보았다. 목 돌아가는 게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쟤 왜 저래?”

“…반항기? 사춘기일 수도 있고.”

“수능도 얼마 안 남지 않았어?”

“공부는… 워낙 잘 하니까 그런 건 걱정 안 해.”

못해도 잘해도 상관없지만, 아예 신경을 안 쓸 수는 없어 요즘은 담임 교사에게 바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한주가 말을 안 해 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담임 교사는 한주가 지금 서울대에 수시 원서를 넣은 상태이고, 떨어질 일은 만에 하나라도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쟤 벌써 술 마시고 돌아다니는 건 아니지?”

“술 냄새 난 적은 없는데.”

“너 혹시… 이렇게 우울해하는 거 쟤 때문이야?”

“뭐, 조금은.”

“저 새끼가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지금 당장이라도 한 대 패 주고 싶다는 얼굴로 지운이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선유는 지운의 팔을 붙잡아 다시 식탁에 앉히고 핏줄이 선 손등을 탁탁 쳤다.

“나도 한 대 못 때려봤는데 네가 왜 때리려고 해.”

무어라 이어지는 지운의 말이 길었으나 선유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테이블에 엎어진 채 뱉어 내는 숨이 뜨거웠다.

***

며칠을 앓고 일어나자 꽤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랜만에 혼자 앓았는데, 생각보다 할 만했다. 이런 얘기가 있었지, 성장통은 아이만 겪는 게 아니라 부모도 같이 겪는다고. 아이가 독립할 시기가 되면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건 오히려 부모라고도 했다. 선유는 어디선가 들었던 부모 교육 내용을 떠올리며 마음을 비우려 애썼다.

날이 점점 추워지자 또 한 번 한주의 옷을 사와 잔뜩 넣어 두었지만, 그 쇼핑백 안의 옷은 비닐 하나 벗겨지지 않았다. 선유는 퍽퍽해진 가슴팍을 몇 번 문지르며 도시락을 쌀 장을 봐왔다. 내일은 한주의 수능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대강의 밑 준비를 해 둔 선유는 식탁에 앉아 한주를 기다렸다. 그러지 않으면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려웠다. 매일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단 두 마디였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한주는 더 말을 하지 않았고, 선유는 말하는 것이 무서워졌다.

“…다녀왔습니다.”

매번 현관에 서서 한주는 한 번 숨을 삼키곤 했다. 굵어진 목울대가 거칠게 오르내리는 것을 보며 선유는 애써 환히 웃었다.

“어서 와.”

한주가 먼저 방에 들어가 버리고, 선유는 식탁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눈가가 뜨거웠다. 어쩌지, 의연해야 하는데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무릎에 눈두덩을 꾹 누르고 한참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되었다.

타박, 바닥을 밟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옷을 갈아입고 나온 한주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유는 왠지 붉게 변했을 것 같은 눈가를 간신히 가리며 몸을 일으켰다.

“내일 시험이지?”

“…예.”

“아침에 태워다 줄게. 몇 시에 나가면 돼?”

“버스타고 가면 돼요.”

“한주야.”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

한계였다. 선유는 한주에게 섭섭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어른으로서의 자존심이 큰소리를 내는 것만은 막았다.

“어차피 최저 등급만 맞추면 되는 거니까 크게 신경 쓰실 거 없다고요.”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그럼 무슨 의미인데요. 또 보호자 운운하실 거면 하지 마세요. 의미 없는 거 아시잖아요.”

“한주야.”

“피곤해서 들어가 볼게요.”

한주는 선유를 남겨둔 채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선유는 그대로 밤을 새웠다. 멍하니 식탁 의자에 앉아 있다가 새벽 다섯 시가 되었을 때 기계처럼 일어나 도시락을 쌌다. 불고기에 아몬드를 넣은 멸치조림, 그리고 볶음 김치와 계란국까지. 평소에 한주가 좋아하는 반찬들로만 가득 채운 보온도시락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아침을 차려 덮개로 덮어 놓은 후 선유는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걸 가져가라고 했다가 또 상처 받고 싶지 않았다. 한주와의 관계에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으면 상처 받을 일도 없을 텐데, 도무지 이 관계는 선유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었다.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는데도 잠이 오질 않았다. 선유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한주가 일어난 듯 생활 소음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냉장고를 잠깐 열었다 닫는 소리, 그리고 한동안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 식탁 의자 끌리는 소리, 젓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이십 여분의 시간이 흐른 후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집 안은 조용해졌다. 선유는 그렇게 침대에 누워 있다 해가 다 뜨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기대하고 또 실망하고, 아이가 제 애정에 보상하듯 커가는 것에 너무 기대했다. 선유는 정말로 마음을 비우겠다고 다시금 다짐했으나, 그건 곧 의미 없이 사그라졌다. 식탁 위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이렇게 또 기대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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