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지운의 결혼 준비는 순조로웠다. 선유는 개인적으로는 TV와 냉장고를 사 주었고, 회사 돈으로는 신혼집 내부 인테리어를 새로 해 주었다. 눈을 글썽거리며 좋아하는 지운을 징그럽다는 한마디로 퇴치한 선유는 그의 신혼여행 휴가로 인한 업무 정리까지 말끔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결혼식에 참가만 하면 끝나는 줄 알았던 결혼식 전날, 미국에서 비행기까지 타고 온 동창들과 술을 마신다고 하던 지운이 밤 열 시가 넘어서 선유의 집에 들이닥쳤다.
이게 미쳤나… 선유는 지운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며 재한에게 전화 했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두라는 재한의 상냥하고도 냉정한 말에 그를 집에 들였다.
“너 술 많이 마셨어?”
“아니, 별로… 그냥 너 생각나서 왔지.”
“내가 뭘.”
“그냥 좀….”
우물쭈물하는 지운을 보다 선유는 그가 걱정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언제나 눈치가 너무 빨라서 문제였다.
“왜. 너 결혼하는데 난 계속 혼자일 거라서?”
“음. 역시 넌 좀… 너무 눈치가 빨라.”
요새 일이 없어서 쓸데없는 생각만 한다고, 지운에게 뭐라고 하려다 말았다. 선유는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얼음물을 지운의 앞에 내려놓고 저는 위스키를 한 병 땄다. 얼음물을 반쯤 비운 지운이 저도 한 잔 달라고 하곤 선유가 따라 놓은 술을 스트레이트로 마셨다.
“내일 결혼식 와서 내 배우자 쪽 하객 잘 봐봐. 알파 많이 올 거거든.”
“알파는 좀 그래.”
“베타에서 구하긴 더 어렵잖아? 너, 거의 십 년 동안 애인 없었던 거 같은데.”
“야, 십 년은 아냐.”
아무래도 선유는 베타보다는 알파 쪽에서 상대를 구하는 게 편하긴 했다. 알파는 대부분 베타 남녀, 오메가 남녀를 전부 연애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동성애자인 베타를 찾는 것은, 그리고 그중에서도 믿을 만한 사람을 찾는 건 무척 어려웠다.
하지만 선유는 알파와의 관계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도 잘 알았다. 아무리 좋은 사이였다 하더라도, 오메가를 베타가 이길 순 없었으니까.
알파와 오메가는 페로몬에 영향 받는 걸 어떻게든 피하려 했지만, 그럼에도 페로몬을 이길 순 없었다. 알파는 오메가 페로몬에 끌리게, 오메가는 알파 페로몬에 끌리는 게 숙명이었다.
선유는 잔을 하나 더 가져와 지운의 앞에 아예 놓아주었다. 얼음도 없이 양주를 마시며 둘은 목소리를 낮춰 대화했다.
“이제 한주도 컸고 하니까 다시 연애해도 되지 않겠어?”
“뭐 그렇긴 하지만….”
최근에는 페로몬에 의한 관계가 너무 육욕적이라 하여 오히려 베타를 선호하는 알파나 오메가가 있다고 듣기는 했으나, 그것도 좀 이상했다. 섹스가 없는 연애 관계는 허상이나 다름없고, 어차피 할 거라면 더 기분 좋은 쪽이 낫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베타는 알파와 오메가에겐 가끔 먹는 특식에 불과할 터였다. 심지어 특식인데 별맛도 없는.
“아, 오늘 술 맛있네.”
또 한 잔을 그대로 들이킨 선유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금 무거워진 머리를 테이블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나도 오메가였으면 좋았을걸.”
“음, 호르몬이나 페로몬에 자극받지 않는 베타가 훨씬 좋을 거 같은데.”
“역시… 사람은 자기와 다른 걸 동경하기 마련이구나. 하긴 몇 달마다 약 먹고 주사 놓는 게 힘들긴 할 거 같아.”
잘못하면 강간을 하거나, 강간을 당하는 위험성까지 존재했다. 억제제가 공공장소에 아무리 많이 비치되어 있다고 해도 사고가 아예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얼마 전에만 해도 갑자기 발정기에 들어선 오메가가 사고를 당할 뻔했다는 기사가 떴을 정도.
“뭐, 네가 오메가였으면 난 너랑 결혼했을걸.”
“…미쳤어? 내가 너랑 결혼을 왜 해?”
“역시 네 그런 점이 좋다. 거침없는 점.”
“재한 씨는 네가 그러는 거 알아?”
“그럼. 우리가 몇 번을 사귀고 헤어지고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사 준 술이 수백 잔이야.”
“너밖에 없다.”
아예 한 대 쥐어박으려고 일어나던 선유가 비틀거렸다. 침잠하던 술기운이 몸을 움직이는 순간 배 속부터 휘몰아쳤다. 그 순간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선유를 부축했다.
“두 분 다 너무 취했어요. 형은 내일 결혼한다는 사람이 이렇게 술 마셔도 돼요?”
“…으, 진짜 귀염성 없는 자식.”
“한주… 우리 한주 언제 왔어?”
“방금요.”
“응… 늦었네… 데리러 오라고, 전화하지 그랬어….”
“학원 바로 집 앞인데요. 형 들어가서 잘 거예요?”
“응….”
주정뱅이의 술주정에도 한주는 진지하게 대답해 주고 선유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아직 조금 작았지만 선유를 부축하기엔 충분했다.
좀 헝클어진 선유의 머리카락을 몇 번 쓰다듬은 한주가 선유를 부축해 방으로 향하다 뒤에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는 지운이 생각난 듯 말을 걸었다.
“형은 얼른 집에 가세요. 택시 불러 드려요?”
“야, 됐어. 알아서 갈 거야!”
“안녕히 가세요.”
일말의 여지없이 지운을 털어낸 한주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늘어지는 선유를 부축해 방으로 향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방을 따로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한주가 선유의 방에 들어오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한주… 초콜릿 엄청 받았네?”
한주가 눕혀준 대로 가만히 있던 선유가 벌떡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집에 들어서던 한주의 양손 가득 초콜릿이 담긴 봉투가 들려 있었던 게 떠오른 탓이었다.
“형 초콜릿 먹을래요?”
“…그럴까? 하나만 먹자.”
선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 밖으로 나간 한주가 고급스러운 종이로 포장된 박스 하나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다 부엌으로 가 지운을 일으켜 세워 집 밖으로 쫓아냈다. 흥분한 지운과 차분한 한주가 하는 대화를 들으며 선유는 좀 웃었다.
“형?”
“…응.”
다시 돌아온 한주가 구김살 하나 없이 웃는 선유를 잠시 아연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북북 포장지를 뜯어 내 뚜껑을 열고 선유에게 내밀었다. 작은 초콜릿을 하나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선유가 입에 쏙 그것을 넣었다. 잠깐 사이에 녹아 엄지와 검지에 검은색 흔적이 남았다.
“이거 직접 만든 거 아냐?”
“…그래요?”
“어, 그런 거 같은데… 애들 되게 정성스럽다. 고맙다고 인사는 잘 했어?”
“화이트데이 때 답례하면 되죠. 근데 누가 줬는지 잘 모르겠어요.”
“인기 많아서 좋네. 빼빼로데이 때도 산더미처럼 가져오더니. 근데 이거 엄청 맛있다. 생초콜릿인가?”
손가락 끝을 쪽 빨아먹은 선유가 하나 더 집어 입에 넣었다. 무척 달고 부드러운 데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게 한 통을 다 먹어 치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 한주는 먹지도 않고 그저 제게 통을 들이밀고만 있다는 걸 깨닫고 하나를 집어 한주의 입에도 넣어 주었다.
“생크림 넣어서 만든… 거 같아요.”
“응. 그러네. 달다. 한주도 더 먹어.”
“전 많이 먹었어요.”
뭔가 만족한 듯한 얼굴로 빙긋 웃는 한주의 종용에 정말로 한 통을 다 먹어 치운 선유가 스르륵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고, 다음 날 한주가 깨우지 않았다면 결혼식에 참석조차도 못할 뻔했다. 하지만 그 긴급한 와중에도 선유는 어떤 때보다 반짝반짝 빛나게 한주와 저를 단장했고, 결혼식장에서 의도치 않게 시선을 모은 것은 물론, 지운에게서 빈축을 샀다.
“누가 결혼하는 건지 모르겠네.”
“…음, 미안.”
“야, 거기선 아니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니냐?”
“너도 잘생겼어.”
“너도? 참 넌 자기 객관화가 참 잘 되어 있단 말이지.”
“뭐, 잘생긴 건 사실이니까.”
선유는 은근하게 웃으며 지운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털어 주었다. 새신랑이라고 빼입은 턱시도가 잘 어울리긴 했다.
“부모님은?”
“아, 잠깐 나가셨어. 이런 분위기가 좀 적응이 안 된다고 하시더라.”
“그렇긴 하겠네. 나중에 인사드릴게.”
지운의 배우자가 될 재한과도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선유는 한주와 함께 잠시 식장 밖에 서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연예인이냐고 묻는 말에는 식은땀을 흘렸고, 같이 사진 찍자는 요청에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동안 한주의 표정은 점점 더 나빠져 갔다.
“그냥 식장 들어가 있을까?”
“…예.”
평소에 넥타이 잘 매고 다니면서 오늘따라 답답한지 한주는 넥타이 매듭에 연신 손가락을 끼워 잡아당겼다. 아예 좀 더 편하게 해 주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선유는 한주의 넥타이를 조금 헐겁게 다시 매 주었다.
“이제 좀 낫지?”
“예. 형, 그냥 들어가요.”
“그러자.”
둘은 좀 어둑한, 성당 같은 느낌의 식장 중간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지운의 부모님이 오는 걸 보고 반갑게 일어난 선유가 인사 하는 모습을 한주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여자에게 붙잡히는 걸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혼자 오셨나 봐요?”
“아, 아뇨, 일행 있습니다.”
“어머, 그러세요? 그럼 일행분도 같이 결혼식 끝나고 밥 한 끼 먹어요.”
엄청 직설적이고 거칠 것 없는 데이트 신청에 잠시 선유가 말을 잃은 찰나, 한주가 뒤에서 선유의 팔을 잡았다.
“한주야.”
“일행분이세요? 동생?”
“예, 사….”
“아들이에요.”
사촌 동생이라고 답하려던 선유의 말을 끊고, 한주는 생전 꺼내지도 않던 ‘아들’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여자는 선유에게 부정을 해 달라는 듯 되물으며 계속 쳐다보았지만 선유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들이요?”
선유가 부정의 말을 하지 않자 그걸 사실이라고 받아들인 여자가 이상한 생물을 보는 듯 눈을 흘기며 수고하세요, 하곤 황급히 사라졌다. 음, 실제 나이어도 열넷에 아이를 낳은 격인데 지금은 겉보기 등급마저 오류가 난 상태니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그리고 어차피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던 참이라 한주의 끼어듦이 반갑기도 했다.
“갑자기 웬 아들이야.”
“아들 맞잖아요.”
지금까지 선유와 한주는 둘의 사이를 항상 사촌으로 소개하곤 했다. 사실은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남이지만, 잠시간은 사촌이기도 했고 남들이 보기에 사촌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맞긴 하지만….”
“아빠라고 부를까요?”
“뭐?”
“싫으면 말고요.”
왠지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한 한주가 선유의 팔을 끌고 다시 안쪽으로 들어갔다. 선유는 팔을 꽉 잡은 손아귀 힘이 심상찮음에 놀라고, 뒤에서 본 등과 어깨가 쭉쭉 뻗어 있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곧 시작할 거 같아요.”
“응, 그러네.”
“형은….”
앞만 보고 있던 한주가 고개를 돌려 선유와 눈을 마주쳤다. 앉은키마저 비슷해졌나, 조금 센티멘털한 기분이 되어 선유는 괜히 재킷 카라만 몇 번 만지작댔다.
“형도 결혼하고 싶어요?”
“어?”
“오늘 왠지 좀….”
“아니, 딱히 결혼하고 싶다곤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애초에 선유는 결혼하곤 거리가 먼 신세였다. 한주를 데리고 오기로 결정했을 때 이것도 하나의 선택 이유가 되기도 했다. 제 생활은 여기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아이에게도 안정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 때문인가요?”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사실 지운이 형도 하는 결혼을 형이 생각하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요.”
“너, 지운이 무시해?”
“말이 그렇다는 거죠.”
한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결혼식이 시작됐다. 결혼이라, 선유는 저보단 한주의 결혼을 더 많이 생각했었다. 옆에 여자가 있어도 좋을 테고, 남자가 있어도 좋을 터였다. 그 배우자의 얼굴은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아이의 얼굴은 사진처럼 그려낼 수 있었다. 아이를 낳았는데 만약 한주와 그의 배우자가 바쁘면 제가 키워 줄 용의도 있었다.
한주의 미래는 총천연색으로 그릴 수 있으면서 제 미래는 그저 흑백으로밖에는 상상되지 않았다. 한주가 다 커서 나중에 독립하게 되면 저는 어떻게 살게 될까. 조용한 집에서 홀로 지내게 되는 걸까? 기계적으로 박수만 치며 선유의 기분은 조금 가라앉았다.
개라도 키워야 하나, 개리처럼 큰 레트리버도 괜찮고 작은 포메라니안도 괜찮을 것 같다. 먼 미래를 그리던 선유는 결혼식이 다 끝났다며 일어나는 한주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진을 찍을 시간이었다.
뒤쪽에 서려던 선유는 지운이 직접 자리를 그 옆으로 잡아 주어 한주와 함께 제일 앞줄에 섰다. 그러자 사진을 찍으려던 사진사가 타박을 놓았다.
“거기 알파 배우자분 옆에… 위로 올라가시는 게 좋겠는데요.”
“…저요?”
“예, 거기 옆에 있는 학생도 같이. 얼굴이 너무 튀어요.”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얼굴에 들이박히는 게 느껴졌고, 선유는 민망함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수군거림에 부정적인 기색은 없었으나 시간을 끌기보다는 빨리 자리를 옮기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이대로 찍어 주세요.”
“…….”
“제일 친한 친구인데 잘생겼다고 멀리 가라는 건 좀 아닌 거 같거든요.”
지운이 선유의 팔을 잡고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냥 뒤로 가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선유는 지운뿐 아니라 재한의 눈치도 봐야 했다. 하지만 그는 즐겁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몇 년간 별별 부침을 다 겪은 연인다웠다.
“뭐, 그럼 그냥 찍겠습니다.”
남의 결혼식 참석이 이렇게나 힘들 줄이야, 식장 밖으로 나오자 가슴을 누르던 답답함이 조금 덜해졌다. 한숨을 깊게 내뱉는 선유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한주가 말을 걸었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그래.”
무거운 머리를 세우고 정말 많이 변한 한주의 뒷모습을 다시 신기하게 바라보던 선유는 어깨에 툭 올려진 손에 뒤를 돌아보았다.
“엑세스 시스템에 최선유 사장님 아니십니까.”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이민준 팀장님.”
“여기 오면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은 했는데… 정말로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네요.”
악수를 하는데 안쪽으로 접은 손가락이 부드럽게 손바닥을 매만졌다. 너무나 적나라한 의사 표현에 선유는 흠, 하고 목소리를 한 번 골라냈다.
“이제 일로 만나는 것도 아닌데 사장님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예. 그러시죠. 저도 팀장님은 좀 어색하네요.”
“그럼, 최선유 씨…. 어감이 괜찮네요.”
“그렇습니까?”
훤칠한 키의 남자는 아마도 알파일 터였다. 지운의 말대로 알파는 베타 남녀, 오메가 남녀를 아우르는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가끔은 알파 남녀까지도- 선유로선 훨씬 상대를 구하기가 쉬웠다.
이 남자와는 일로 만났지만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갑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항시 매너를 잃지 않았고, 배려 있는 타입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외모도 나쁘지 않았고. 과시하는 듯한 값비싼 시계는 취향이 아니었지만.
“따로 연락드려도 될까요?”
알겠다는 답은 하지 않고 선유는 한 번 웃기만 했다. 뭐, 하지 말라고 해도 할 사람인 거 같기도 하고.
“형!”
“어, 한주야.”
평소답지 않은 한주의 우렁찬 외침에 선유는 그럼…, 하고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민준의 앞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하루 종일 한주의 이유 없는 툴툴거림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선유로선 그런 한주의 행동도 귀엽고 새로워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 주었고, 전혀 제 투정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한주는 다시 평소대로 돌아왔다.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불만 서린 얼굴을 하면서도 더 해 달라는 듯 손바닥 밑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쌓였던 피곤이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
뭘 하고 싶은 건지 너무 티 나는 약속 장소 아닌가, 선유는 호텔 앞에 서서 잠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섹스는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전조 없이 바로 그쪽으로 돌입하는 건 취향이 아니다.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10대, 20대 초반과는 다르긴 하겠지만.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선유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내렸더니 좀 더 어려 보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 사람에게 그다지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섹스로 바로 돌입하는 게 싫다고 말은 하면서도 연애를 할 마음도 없었다. 이래서야 몇 년 후에 한주가 독립하면 정말 어떡하나 싶다. …역시 개를 키워야하나.
“안 오는 줄 알았습니다.”
“아, 오늘 연락을 안 드렸죠.”
“약속을 마음대로 파기하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저도 따로 연락은 안 드렸습니다.”
이십만 원짜리 코스 요리만 파는 프렌치 레스토랑, 푹신하고 고급스러운 의자에 보드라운 테이블보가 깔린 테이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던 선유는 코트를 서버에게 맡기고 자리에 앉았다. 가죽 질감의 메뉴판이 앞에 펼쳐졌다.
“일이 여전히 바쁘신가 봅니다.”
“일이 끊이지 않네요.”
“저희 쪽 일이 꽤 컸었죠.”
“예. 덕분에 정부 사업도 몇 개 하고 있고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메뉴는 정하셨습니까?”
“A코스로 할게요.”
“저도 그걸로.”
대화는 생각보다 부드럽게 이어졌다. 민준은 사회성이 좋았고, 아는 것도 많은 편으로 일 얘기뿐 아니라 다른 소재가 끊이질 않고 나왔다. 그러면서도 선유가 조금만 꺼리는 듯하면 바로 대화의 방향을 선회하는 등 사람의 기분을 읽는 데에도 능했다. 너무 능수능란해서 사람 다루는 데 익숙한 선유마저 말리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최근엔 부문장 라인에 30대도 올리려고 꽤 노력하고 있는 터라 내년에는 아마 물망에 오를 것 같네요.”
“서른다섯이라고 하셨죠? 그 나이에 부문장이면 대단하시네요.”
“스물아홉에 이미 몇백억 매출하는 회사 사장인 게 더 대단하죠.”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 것도 뭐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선유는 몇 잔의 와인과 맛있는 요리에 아무래도 경계선이 흐려지는 감각을 느꼈다. 음, 이대로면… 호텔방에 가자고 해도 그냥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디저트를 먹다 포크를 내려놓자 민준은 슬쩍 선유의 손등을 감싸고 쓰다듬었다.
“2차는 좀 더 조용한 곳에서 할까요?”
서버를 불러 남은 와인을 아래 방으로 내려 보내 달라는 민준의 요청을 들으며 선유는 역시 제 예상이 맞았음을 알았다. 하지만 거부할 만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선유는 한주에게 오늘 늦을 것 같다는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준이 예약한 방은 식당 몇 층 아래였다.
“선유 씨는 좀 아쉽겠어요.”
“아쉽다뇨?”
“만약 오메가였다면 알파들이 가만 안 놔뒀을 텐데 말이죠.”
“…가만히 놔두는 편이 좋을 거 같은데요.”
재킷을 벗은 편한 차림으로 마주 보고 앉아 타인과 와인 잔을 기울이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페로몬 한 번이면 넘어오는 오메가보다는 베타가 연애하는 맛이 있죠.”
“…연애요.”
연애를 할 생각이긴 한가? 아니면 연애와 섹스를 동일시하는 타입인 건가. 선유는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민준에 대한 인상을 한 번 더 업데이트했다.
“그리고 오메가와 하면 좀 스스로도 짐승 같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서요.”
“많이 다른가 보죠?”
“아무래도 페로몬이 워낙… 영향을 많이 미치니까. 특히 각인한 상대와는 좀 특별하죠.”
각인? 그럼 결혼을 했다는 건가? 선유는 황당함에 잠시 말을 잃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대부분 결혼을 하면서 각인을 하게 되는데, 각인은 노팅과 장내 사정으로 인해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둘은 임신으로 직결되었다.
그래서 연인 관계에선 사고가 아닌 한 각인이 흔하게 발견되지 않는다. 사전, 사후 피임약을 쓰면 각인을 하면서 임신을 피할 수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며 각인을 하는 이들은 없었다.
오메가의 자궁에 노팅한 알파의 정액이 들어가는 것으로 각인이 완료되고, 이 각인은 최소 3년 정도 유지된다. 그 이후에 풀리느냐 풀리지 않느냐는 서로의 마음에 달려 있다. 각인이 되면 오메가와 알파는 각인된 상대 이외의 페로몬은 맡지 못하게 되고, 발정기도 각인한 상대와 보낼 경우 하루 정도면 쉬이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노팅을 통한 각인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정말로 상대를 사랑하면 섹스 한 번 없이 각인 할 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건 흔한 일이 아니었고, 또한 이 남자가 그렇게 로맨티시스트로는 보이지 않았으니 합리적인 추론에 의하여 민준은 유부남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음… 혹시 결혼하신 건가요?”
어색하게 웃으며 꺼낸 선유의 물음에 민준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받았다.
“아, 그런 거 중시하는 타입입니까? 뭐 결혼을 하긴 했는데 쇼윈도 부부나 다름없어요. 각인도 풀렸고.”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걸 중시하는 타입이라서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진 선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취기가 오르긴 했지만 아예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빠른 속도로 재킷과 코트를 챙겨 방을 나서려 했으나 문 바로 앞에서 막혔다.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그대로 문을 쾅 치고, 두 팔이 선유를 가두듯 했다.
“음, 베타한테는 페로몬이 안 통하잖아요?”
페로몬을 머리부터 쏟아붓고 있는 것 같았다. 통하지도 않을 것을 습관처럼. 선유는 그저 공기 중에 섞여 있을 그 진득한 페로몬을 생각하며 고개를 한 번 휘저었다.
“페로몬은 안 통해도 다른 건 다 통하죠.”
“…힘을 쓰시겠다?”
“쓰고 싶진 않지만.”
벽을 누르고 있던 손이 선유의 턱을 쥐었다. 자그마한 턱은 한 손에 잡히고도 공간이 남았다. 어울리지 않게 입부터 맞추려고 하자 선유는 휙, 하고 고개를 돌려 피하곤 피식 한 번 웃었다.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민준은 급하게 선유의 손목까지 쥐어 벽에 들이 박았다.
“근데 저 격투기는 많이 배워서 말이죠…. 그쪽보다 배는 큰 놈들 뼈 나가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손목을 뒤틀어 손아귀에서 빼내고 선유는 그대로 민준의 팔을 잡고 품 안으로 들어가 엎어치기를 했다. 쾅 소리와 함께 그대로 천장을 보고 누운 민준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방을 나왔다. 그리고 툭툭 털어 내듯 조금 구겨진 셔츠를 편 뒤 위에 옷을 걸쳐 입은 후 호텔을 나와 택시를 탔다.
으, 뭔가 기분 나빠. 민준이 쏟아 부었을 게 뻔한 페로몬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 냄새는 맡지 못하더라도 기분은 지독하게 나빠서, 얼른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싶었다.
“형, 오늘 늦는다더니 빨리 왔네요?”
현관문을 열자 방금 들어온 듯 머리에 수건을 덮고 식탁에 앉아 아이스크림 통을 열고 있던 한주가 반갑게 선유를 맞았다.
“어, 자리가 금방 파했어.”
“술 마셨어요?”
“조금.”
아이스크림 통을 끌어안고 다가오던 한주가 자리에 뚝 멈춰 섰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왜 그래?”
“…형, 냄새나요.”
“어?”
“이상한 냄새….”
한주는 아이스크림 통을 그대로 떨어뜨리더니 구역질까지 했다. 당황한 선유가 다가가려 했더니 황급히 손을 들어 막기까지 했다.
한참 엎드린 채 숨막힌 소릴르 내던 한주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그대로 방에 들어가 버렸고, 선유는 멍하니 서 있다가 바닥에 널브러진 아이스크림 통과 녹은 아이스크림을 대충 걸레로 훔쳐냈다.
냄새라니,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데. 설마 그놈 페로몬 때문인가? 알파는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불쾌해하고, 공격적으로 느낀다고 들은 적은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선유는 황급히 옷을 벗어 쓰레기봉투에 밀봉하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 나와 재채기를 하며 창문을 닫았다. 이쯤 했으면 냄새가 빠졌으려나, 아무리 킁킁대며 맡아 보려 해도 선유의 코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한주야.”
문을 두드리며 불렀지만, 한주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그냥 들어가서 자려다 다시 한 번 한주를 불렀다. 알파 페로몬이 묻은 게 내 잘못도 아니고… 아니 내 잘못도 좀 있긴 하지만, 구역질에 외면이라니 너무하잖아. 한주와 다른 방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의 허락 없이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선유는 대답 없는 방문을 열었다.
“한주야?”
침대 위에 둥그렇게 사람의 형체가 있었다. 선유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주를 감싸듯 몸 위에 팔을 하나 얹었다. 스스럼없는 접촉이었다.
“이제 냄새 안 나지?”
“…형.”
“너 왜 이렇게 얼굴이… 열도 나네?”
“나가 주면….”
“너 설마… 러트야?”
감기인가 의심했던 선유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한주의 얼굴과 어쩔 줄 모르며 하체를 가리는 행동으로 그에게 러트가 왔음을 알았다. 처음으로 겪는 러트, 아무리 교육을 받아도 당혹스러움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잠깐만.”
이때를 위해 열심히 성교육을 받아왔다. 알파, 오메가 입양자를 위한 정부 교육부터 학교에서 시행하는 학부모 교육, 게다가 인터넷으로 강의까지 들었을 정도였으나… 그럼에도 순간 당황했다.
준비해 두었던 억제제 알약과 주사제를 꺼내어 선유는 다시 한주의 방에 들어갔다. 한주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도 여러 번 교육을 받아왔겠지만, 처음이다 보니 이게 러트라는 자각도 잘 없었던 게 분명했다.
“우선 약 먹자.”
“…예.”
“잠시 나가 있을까?”
선유가 건넨 약을 다급히 삼키며 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정되면 불러.”
선유는 한주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 방을 나왔다. 저 방에도 페로몬이 지금 가득했을까, 전혀 맡을 수가 없으니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러트가 오면 몸 안에서부터 불씨가 타오르고 성욕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다고 했다. 성기가 제멋대로 부풀어 오르고 문지르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는. 주변에 히트가 일어난 오메가가 있다면 서로 미친 듯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누구 하나 억제 주사를 맞지 않는 한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의 보호자는 그들을 열심히 교육했고, 공공장소에는 언제나 억제 주사가 비치되어 있었다.
그 상황에서 다리만 비비적대며 버티고 있던 한주였다. 어떤 감각일지 선유는 알지 못했지만 지운의 첫 러트엔 좀 충격 받았던 터라 의연하게 참은 한주가 대견했다.
“…형.”
“이제 좀 괜찮아?”
“예. 저 세수 좀 하고 올게요.”
잠깐의 물소리가 들린 후 다시 새하얀 얼굴색을 한 한주가 욕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조금 기분이 나빠진 얼굴로 선유에게 다가와 소파 옆자리에 앉았다.
“아직… 그 냄새 나요.”
“어?”
“욕실에.”
“어, 냄새가 안 빠졌나 보네….”
평소처럼 한주에게 접촉하려던 선유는 그가 몸을 슥 피하는 것을 보고 손을 거뒀다. 아직 몸이 예민한 것 같았다. 보통은 러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억제제를 먹으면 십여 분 내로 발정이 절반 수준으로 가라앉지만 그 여파는 두어 시간 더 지속된다고 들었다. 그러니 한주도 아직 완전히 몸이 괜찮은 건 아닐 터였다.
주사제는 대부분 자아가 사라졌을 때, 주변에 히트상태의 오메가가 있을 때, 혹은 평소보다 러트가 강할 경우 사용하였고 즉효성으로 바로 발정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계속 사용할 경우 내성이 생기는 부작용이 있어 권장되지는 않았다.
“네가 더 잘 알겠지만, 이제 주기적으로 러트가 올 거야. 아직 안정되지 않아서 주기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항상 약과 주사를 가지고 다니도록 해. 집에도 저기 TV 테이블 서랍에 둘게.”
“…예.”
“히트 상태인 오메가가 옆에 있으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을 거야. 오메가 쪽에서 조심하기 마련이니까. 학교에는 양호실에 따로 페로몬이 새어 나가지 않게끔 해 둔 방이 있으니 갑자기 러트가 올 경우 그쪽으로 가면 되고.”
이미 알고 있을 내용을 한 번 더 짚어 주고 나자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눈을 길게 감았다 뜬 한주가 킁 하고 한 번 더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 알파 페로몬인가 봐요.”
“어?”
“오늘 형한테서 나던 거요.”
“…그랬나 보네.”
“지운이 형은 괜찮았는데….”
“응…. 뭐 지운이가 알파 페로몬을 흘릴 일은 없으니까.”
“그럼 오늘 그건….”
뭐라 말하려던 한주가 딱 입을 닫았다. 그리고 뭔가 불쾌한 것이 생각난 듯 매끈한 이마를 구겼다.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선유가 다급히 말을 걸었다.
“축하해.”
“…축하요?”
“응. 2차 성징이잖아. 어른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갔다고 해야 할까.”
제 러트보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던 한주가 그제야 그 의미를 알아챈 듯했다. 이제 선유의 접촉이 괜찮은지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자 한주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뜨기만 반복했다.
“내일 케이크 먹을까?”
“…됐어요. 케이크라니.”
“아님 고기?”
“차라리 고기 먹어요.”
“그래. 그래야 더 크지.”
대체 얼마나 크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선유는 꽤 단단해진 정강이를 바라보며 토닥토닥 한주의 무릎 위를 두드렸다. 그런 저를 가만히 바라보던 한주가 선유의 손을 끌어다 코끝에 대었다. 의도는 알 수 없었으나 언제나 한주에게 너그러운 선유는 하고 싶은 대로 두었다. 그리고 한참 그렇게 있더니 조금 만족스러워진 얼굴로 천천히 손을 놓아주었다.
“뭐 한 거야?”
“…그냥요.”
쑥스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분홍색으로 물들인 아이가 여전히 예뻐서 선유는 애정을 담아 슥슥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선유는 옷을 담아 둔 봉투를 찾았으나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나중에 한주가 쓰레기인 줄 알고 버렸다고 퉁명스레 말했다. 아끼던 코트인데… 조금 아깝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선유는 애써 납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