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4/13)

<14>

맨날 퇴근 시간만 하면 쌩하고 사라지던 지운이 사장실에서 미적댔다. 뭔 일인가 싶어 선유는 몇 번이나 왜 퇴근하지 않느냐고 물었으나 지운은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아 눈으로 선유의 퇴근을 종용했다.

“뭐.”

“아니, 그냥.”

“신경 쓰이니까 빨리 퇴근해.”

“한주는?”

“한주는 오늘 검도 갔다가 수학 학원.”

“걔도 진짜 열심히 산다.”

아무래도 비서를 하나 뽑아야겠어. 선유는 며칠 전부터 한 생각을 다시 다짐했다. 회사가 커지면서 점점 관리업무는 늘어나는데, 남한테 맡기질 못하는 성격이라 모두 혼자 짊어지고 일했더니 슬슬 야근이 늘기 시작했다. 물론 한주가 중학교에 가면서 학교와 학원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 탓도 있긴 했지만.

“오늘 니네 집 가서 밥 좀 먹자.”

“…왜?”

“친구 밥 좀 사 줘.”

“뭐래.”

“야.”

“알았어. 좀 기다려. 이것만 끝내고.”

그래, 인사 팀도 만들자. 사원 평가까지 내가 취합할 순 없어. 결심한 선유가 내일 할 일에 ‘인사 팀 사람 뽑기’라고 적은 후 컴퓨터를 끄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그래? 밥 못 먹어 죽은 귀신도 아니고.”

“그냥.”

실없게 웃는 지운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선유가 가방을 정리해 들었다. 프로젝트가 두 개나 연달아 끝난 터라 비교적 시간 여유가 있는 편이었지만, 언제나 일은 병렬로 움직이기 때문에 또 다른 프로젝트가 두어 개는 더 진행 중이었다. 아무래도 선유가 바쁘지 않은 날은 오지 않을 것만 같다.

“한주는 언제부터 검도 배운 거야?”

“세 달 됐어.”

“그 전엔 뭐 배웠지?”

“합기도.”

“걔 이제 사람 치면 가중 처벌 받는 거냐.”

“그런가?”

“요새는 회사 오지도 않고.”

“가끔 저녁에 와.”

저녁밥 사 들고. 학원 끝나는 시간까지 선유가 일을 다 끝맺지 못하면, 한주는 가까운 음식점에 가서 저녁밥을 사 들고 회사에 오곤 했다. 섬세한 성격이라 남아 있는 인원수까지 물어 그에 맞춰 사 오는 덕분에 직원들에게 인기를 잔뜩 얻었다. 어렸을 때부터 알던 직원들은 여전히 한주를 예뻐했고, 최근에 충원된 직원들도 어른스러운 아이를 잘 대해 주었다.

“그런 거 안 해도 예뻐해 주는데….”

아니, 요새는 너무 예쁨 받아서 문제 아냐? 지난 빼빼로데이 때 한주가 쇼핑백을 몇 개나 들고 왔는지 떠올리며 선유는 조금 초조한 태도로 손끝을 몇 번 물었다 놓았다. 제가 귀애하는 아이가 남들에게도 귀하게 여겨진다는 건 물론 좋은 기분이었지만, 그게 너무 과한 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한주한테 여자 친구든 남자 친구든 생기면… 진짜 기분 이상할 것 같았다.

“치킨?”

“그래.”

“음… 여기 어디 전단지가 있을 텐데.”

집에 도착해 종이를 모아 둔 뭉치를 뒤지자 컬러풀한 치킨집 전단지가 하나 툭 튀어나왔다. 바로 전화를 걸어 두 마리를 시키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지운에게 하나 던졌다.

“냉장고 꽉 찬 거 봐라. 역시 남자애 키우면 냉장고 저렇게 채워 놔야 하는구나.”

“별거 없어. 식빵하고 밑반찬 몇 개인데 뭘.”

“네가 우리 집 와 보면 놀랄걸.”

“놀랄 게 뭐 있어. 한주 오기 전엔 나도 그렇게 살았는데. 물하고 술밖에 없을 거 아냐.”

치킨이 오기 전까지 둘은 몇몇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이야기했고, 그동안 맥주를 한 캔 비워 냈다. 코트와 재켓을 벗고 편안한 차림이 된 지운이 맥주를 하나 더 꺼내올 때 배달이 온 듯 초인종이 울렸다.

김이 뜨끈뜨끈하게 오르는 치킨을 앞에 펼치고, 둘은 다시 맥주캔을 한 번 더 부딪쳤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이렇게 저녁을 먹곤 했는데 최근 몇 달간은 이런 기회가 없어서 오랜만이었다.

“그래. 할 말이 뭔데.”

“눈치 빠르긴.”

“내 눈치가 빠른 게 아니라 네가 너무 빤한 거야. 그래서 영업은 어떻게 해?”

“나는 솔직한 게 매력이거든. 되는 건 된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똑똑하게 얘기해 주지.”

“영업 이력 쌓였다고 말은 잘 한다.”

가슴살만 골라 먹으며 선유가 맥주 한 캔을 또 비워 낼 때쯤 지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건 선유가 예상했던 말이기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나 결혼해.”

“어?”

“결혼한다고.”

“이번엔 진짜로?”

“그래, 진짜.”

“그렇게 몇 년 동안 헤어지고 다시 사귀고 하더니 드디어.”

“그래, 드디어.”

들고 있던 치킨 조각을 내려놓고 선유는 물티슈로 손을 한 번 닦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자 지운이 꽉 악수를 했다.

“축하한다, 진짜로. 그렇게나 싸우더니 또 결혼은 하네?”

“결혼을 한다고 하면 얘밖에 없을 거 같더라.”

지운의 애인은 해상폴리머 대표 아들로 사업 초기부터 선유의 회사 고객이었다. 그때 만난 인연으로 지운과 그는 몇 년을 사귀었는데, 서로 죽고 못 살 정도로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개와 고양이처럼 미친 듯이 싸워서 몇 번을 헤어졌다 만나길 반복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거의 2년을 헤어졌다가 작년부터 다시 만나서 사귀었다.

절대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혼까지 생각하는 거 보면 확실히 연인 관계는 옆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것 같았다.

선유는 다시 치킨 조각을 들면서 그 신기한 감상을 곱씹었다. 지운과 그의 애인, 재한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외모도 그랬고, 밝고 긍정적인 부분이 똑 닮았다. 그동안 너무 싸운 건 서로 너무 닮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럼 너 데릴사위 되는 거야?”

“아냐. 재한이 누나 있어. 회사는 그분이 물려받을 거야.”

“아, 그랬지.”

“재한이는 피아노 학원 차릴 거고.”

“좋네.”

억제제가 발달하면서 알파와 오메가는 거의 베타와 다름없이 러트, 히트 때도 일을 하거나 생활을 영위할 수는 있었으나, 빨리 각인을 해서 각자 각인한 상대의 페로몬만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지운은 스물다섯부터 결혼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막상 결혼은 서른이 다 되어서야 하게 되었다.

“냉장고 사 줄까?”

“와, 역시 사장님. 통이 크셔.”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집 빼곤 다 사 줄게.”

“집은 못 사 줘?”

“사택 제공은 가능한데… 사택 말고 집은 줘 봐야 양도 소득세만 잔뜩 나오잖아. 차라리 내년에 상여로 주식을 좀 더 줄게.”

“난 진짜 네가 내 친구라서 너무 좋다.”

선유는 정말로 친구의 결혼을 축하했다. 언제든 곁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친우가 결혼으로 떨어져 나간다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기쁜 마음이 훨씬 컸다. 정말로 집도 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을 한다고 해도 지운은 저와 함께 일할 거고, 지금처럼 둘이서 술 한 잔 기울이거나 노는 시간은 줄겠지만, 친구 관계가 흐려지는 건 아니니 괜찮았다.

“그래서 결혼식은 언제야?”

“2월 15일.”

“밸런타인데이 다음 날이라니, 로맨틱하네.”

“언제부터 챙겼다고.”

“한주가 초콜릿을 산더미처럼 받아오잖아. 그래서 모를 수가 없어.”

작년에는 초등학교 졸업식과 밸런타인데이가 겹쳐서 더 심했다. 여자애들과 몇몇 남자애들까지 울면서 한주에게 초콜릿을 잔뜩 안겼고, 버릴 교과서와 공책도 전부 누군가 훔쳐 가서 없었다고 했다. 사물함과 책상 서랍은 초콜릿으로 가득 차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고, 책상 주변까지 그득하게 쌓일 정도. 한주는 그에게 직접 준 것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주변에 다 나눠 줘 버렸는데도 쇼핑백 두 개를 넘게 채워서 가져왔다.

“너한테도 엄청 오잖아. 택배로도 오고, 퀵으로도 오고.”

“다 돌려보내는데 뭐. 다음에는 재한 씨랑 같이 밥 먹자.”

“그래.”

“그리고 너는 결혼식 한다면서 나한테 밥을 사 달라고 해? 원래 사 주는 거 아냐?”

“돈 많으면서 왜 그래.”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수학 학원이 끝난 한주에게서 문자가 왔다.

「형 집에 있어요?」

그렇다고 답을 보내자마자 또 핸드폰이 울렸다.

「저녁은요?」

“요새는 한주가 나를 키우는 거 같아.”

“음, 좀 그래.”

집에 먹을 거 있으니까 얼른 오라고 해 놓고 선유는 다리와 날개를 모아 한쪽에 놔두었다. 한주의 몫이었다.

“이 치사한 놈.”

“넌 이미 다리 하나 먹었잖아.”

“한주한테 다리 세 개나 먹일 거야?”

“걔는 지금 쑥쑥 클 때잖냐. 너 보면 놀랄걸. 거의 두 달 만에 보는 거지?”

문 잠금 풀리는 소리와 함께 한주가 안으로 들어섰다. 말끔한 회색 블레이저 교복에 목 끝까지 넥타이를 성실하게 올려 맨 아이가 들어오면서 잠깐 놀라 자리에 섰다가 반갑게 지운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주 오랜만이네.”

“예. 형도요.”

“와, 진짜 너 엄청 컸네. 이제 선유랑 거의 키 비슷한 거 아냐?”

맥주를 마시다 지운의 말에 사레가 들린 선유가 기침을 요란하게 몇 번 했다. 괜찮냐며 다가온 한주가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야, 아직은 아냐.”

“예, 아직은.”

선유의 항변에 한주는 피식 웃으며 ‘아직은’을 강조해 말했다. 선유는 성인 남자의 평균 키보다 컸고, 어디 가서 전혀 꿀리지 않았지만 알파 경향성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열심히 운동까지 하는 한주는 중학생이 되면서 반에서 제일 큰 학생이 되었고, 아마도 내년쯤엔 선유를 넘어설 것 같았다.

“저녁 먹어야지. 밥 먹을래? 아니면 치킨 먹을래.”

“치킨 먹을래요. 씻고 올게요.”

길쭉길쭉하게 커진 한주가 욕실에 들어갔다 나왔고, 선유의 옆에 앉아서 일부러 골라 놓은 닭 다리와 날개를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선유에게 권하기도 했지만, 그가 정말로 닭가슴살 외에는 먹지 않는다는 걸 알곤 오히려 더 열심히 먹어 치웠다.

“한주가 더 어릴 때 결혼했으면 화동 해 달라고 했을 텐데.”

“지금 해도 되지 않을까? 한주 예쁜데….”

살짝 긴 한주의 앞머리를 넘기며 선유가 말하자 한주는 무슨 뜻인지 몰라 커다란 눈만 몇 번 깜박였다.

“화동이라기엔 키가 너무 크잖아.”

“아직 귀엽잖아.”

“네 눈에만 귀여워.”

“아냐. 너도 이제 애 낳아 봐라, 자기 애한테는 나보다 더 팔불출일 거면서.”

옥신각신하는 둘을 좀 아연한 눈으로 쳐다보던 한주가 닭 다리를 내려놓고 물었다.

“지운이형 결혼해요?”

“어.”

“축하드려요. 분명히 얼마 전에만 해도 싸웠다고 들었는데….”

“야, 너 그건 어디서 들었… 범인은 하나밖에 없지.”

선유는 노려보는 지운을 애써 외면하며 맥주만 마셨다. 이미 빈 맥주캔을 입에 대고 있는 게 뻔히 보였으나 좋은 날이니 넘어가기로 했다.

“이제 한주가 정말 안 귀엽네…. 예전에 울면서 매달릴 때는 귀여웠는데.”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때는 너 같은 애라면 낳고 싶을 정도였다고.”

“한주가 뭐! 지금도 귀엽고 예쁜데!”

“어우 팔불출.”

한주는 오히려 선유의 말에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귀엽고 예쁘다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으나 선유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여전히 형한테 예쁜 건 좋다던 말이 귀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뭐 어쨌든. 너도 올 거지?”

“토요일이니까 같이 가자.”

“예, 뭐… 언제인데요?”

“2월 15일.”

“아직 멀었네요.”

한주는 왠지 모르게 아주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얼굴로 한 번 웃어 보이고는 남은 치킨을 싹 먹어 치웠다. 그 식욕에 지운은 한껏 감탄했고, 선유는 냉동실에서 꺼내온 아이스크림을 또 한주에게 안겨 주었다.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농구하고, 매일 하교 후 운동까지 하고 오는 터라 한주는 먹어도 먹어도 배고파했다. 그리고 그렇게 먹은 만큼 위로 쑥쑥 크니 안 줄 이유도 없고.

“형도 먹을래요?”

“응, 한 입만.”

한주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푹 떠서 선유의 입가에 대주었다. 한 입에 삼키기엔 조금 많은 양이었으나 욕심껏 입을 벌리면 못 넣을 정도도 아니었다. 깔끔하게 먹은 숟가락을 잠시 바라보던 한주가 그대로 또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이번엔 제 입에 넣었다. 그런 한주를 배부른 고양이처럼 바라보는 선유를, 지운은 못 말린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운은 저게 제 미래의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좀 돋았고,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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