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3> (3/13)

<11>

“엇, 옷이 작네.”

“괜찮은 거 같은데요.”

“아냐, 좀 작다. 음… 분명히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년간 콩나물처럼 큰 한주는 열한 살이 되면서 반 내에서 두 번째로 큰 학생이 되었다. 그 덕에 매 계절마다 새로 옷을 사야 했는데, 오늘 한주 없이 선유 혼자 가서 옷을 사 왔더니 전부 다 한 사이즈씩 작게 사와 버렸다.

“역시 같이 가서 사자. 내 눈이 이상한가… 가게에 가서 보면 옷이 죄다 커 보여서.”

하긴 작년까지만 해도 다람쥐라느니 토끼라느니 작은 동물에 비유할 수 있었던 아이는 이제 삵 이하로는 보기가 어려워졌다. 이렇게 쑥쑥 크는 게 실감이 안 되어서인지 여전히 선유의 눈에는 누구보다 귀여운 한주였지만.

“내일 퇴근하고 같이 갈까?”

“예.”

부쩍 어른스러워진 한주가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을 모아 접어 다시 쇼핑백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그 손길이 꽤 야물었다.

선유는 뭐든 잘했지만, 정리에 한해서는 예외였다. 깔끔하게는 해 두고 살지만 조금 귀찮아하고 대충인 부분이 있는데 한주는 그 부분을 잘 메워 주었다. 저녁을 먹고 난 선유가 싱크대에 그릇을 대충 쌓아두면 차곡차곡 정리해서 식기세척기를 돌려 놓았고, 주말에 선유가 늦잠을 자는 동안 밀린 빨래를 하고 너는 것도 한주의 몫이었다.

그게 설마 아직도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나오는 건가 선유는 걱정했지만, 굳이 말을 꺼내진 않았다. 혼자 하지 말고 같이 하자고는 몇 번이나 말해도 한주는 꿋꿋했다. ‘형 일하느라 힘드니까 제가 할래요. 근데 저 받침대 하나만 사 주세요. 세탁기에서 옷 꺼낼 때 바닥까지 손이 잘 안 닿아요.’ 라며 웃었다. 뭐라 더 말을 붙일 수가 없을 정도로.

“아, 형. 그… 선생님이 여쭤보라고 하셨는데요.”

“응, 뭐를?”

“혹시 일일 교사 같은 거 해 주실 수 있는지….”

“그런 것도 있어?”

“봄 방학 전이라 따로 진도 나갈 게 없나 봐요. 선생님도 땡땡이치고 싶은 거 같고.”

선생님이 땡땡이라니. 한주의 표현에 소리 낮춰 웃던 선유가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해 보고 물었다.

“언제 해야 하는지는 정해져 있는 거야?”

“다음 주 내면 언제든 괜찮다고 하셨어요.”

“그럼 화요일에는 괜찮다고 전해드려.”

“예.”

한주는 소파에 앉고 선유가 바닥에 앉은 터라 평소와는 달리 선유가 한주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눈이 마주치자 한주가 슬쩍 눈을 피했다. 왠지 쑥스러워하는 거 같아서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굳이 아이를 괴롭히고 싶진 않았다.

“근데 일일 교사면 뭐 하는 거야? 직업 교육 같은 건가?”

“그런 거 같아요. 오늘은 서윤이네 어머니가 오셨는데, 의사시래요. 의사는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지, 뭐가 필요한지, 힘든 점, 좋은 점 그런 거 알려 주셨어요.”

“음… 나는 좀 설명하기 힘들겠네.”

거실 테이블에 반쯤 엎드린 채 선유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차라리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해 줄 말이 많겠지만, 초등학생 아이들한테 뭘 설명해 줘야 할까. 남들과 좀 다른 삶을 살아온 터라 이야기 구성을 잘못하면 전부 자기 자랑으로 보일 수 있었다.

“형은 이제 스물다섯이잖아요.”

“응.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벌써 사장이에요?”

아, 이런 얘기 별로 한 적 없었구나. 저는 한주에 대해 죄다 알았지만, 한주는 저에 대해 크게 아는 바가 없을 터였다.

“나는 조금 빠르게 학교를 다녔거든.”

“빠르게?”

“응. 월반이라고 해서 학년을 뛰어넘는 거야. 그래서 대학도 남들보다 5년 더 빨리 갔고, 대학원도 일찍 졸업했지. 사업은 대학 때부터 시작해서 완전히 몰입하기 시작한 건 스물둘이었고.”

“…어떻게 그렇게 빨리 대학을 갈 수가 있어요?”

“어, 음….”

한주는 약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얘기를 들은 것 같이 신기하단 감정과 조금 분한 듯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왜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선유는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진 않았다.

“그냥 좀 머리가 좋았을 뿐이야. 공부에 취미도 있었고.”

“저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글쎄….”

한국에도 월반 제도가 있나? 선유의 케이스는 미국 학교에서도 흔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단숨에 할 수 있다, 없다를 말하기는 힘들었다.

“언제든 열심히 하고, 준비가 되어 있으면 기회는 오겠지?”

“…열심히 할게요.”

“아니, 꼭 그렇게 열심히 하라는 건 아니고….”

주먹까지 꼭 쥐어가며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한 한주가 학습지를 꺼내 와서 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선 영어 책을 가져와 소리 내어 읽으며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선유에게 물었다. 그렇게 한 챕터를 다 읽어 낸 한주가 이젠 혼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꽤 듣기 좋았지만 하루 종일 신경 쓸 일이 많았던 선유는 테이블에 엎어져 눈을 감아 버렸다.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선유의 어깨 위에 보드라운 담요가 내려앉았다. 눈을 뜰까 했지만, 보살핌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한주가 너무 어른스러워져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반, 그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열한 살에 저는 이미 기숙사제 미들 스쿨을 다녔고,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던 때니까.

하지만 역시 너무 어른스러워지는 건 감정적으로 조금 싫다. 손안에 있던 아이가 갑자기 커서 벗어나려 하는 건… 이제야 선유는 제 월반과 기숙사제 학교 진학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식이 빠르게 당신의 품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었을 터였다.

며칠 뒤 한주의 학교에 가기 위해 선유는 대기업과의 미팅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옷을 차려입었다. 아이들 앞에서 강의하는 것은 생전 처음이라 살짝 손끝이 차가워질 정도로 긴장했다. 늘 자기보다 나이 많은 이들과 함께했던 선유에겐 이쪽이 더 어색했다.

질 좋은 캐시미어 코트에서 부드러운 광택이 흘렀고, 사이즈를 맞춘 디자이너 슈트 또한 물 흐르듯 몸에 감겼다. 제가 봐도 힘이 팍 들어간 행색이라 조금 우습기도 했지만, 한주의 학교에 갈 때는 최대한 멋져 보이고 싶었다. 현관에 서서 머리를 몇 번 더 매만지고 평소 잘 신지 않는 고급스러운 구두까지 꺼내 신었다.

학교에 도착하자 몇 번 얼굴을 본 담임 교사가 선유를 반갑게 맞았고, 진심에서 우러난 듯한 칭찬의 말에 그저 영업 미소를 한 번 지었다.

“어떤 건지는 한주한테서 전해 들으셨죠?”

“예. 직업 교육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다양한 직업에 대해서 들어보는 게 유용할 거 같아서 보호자님들께 부탁을 드렸어요.”

“직업적으로는 딱히 특별한 게 없지만,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회사 운영하신다고 들었는데요.”

“예.”

“나이도 많지 않으신데 대단하시네요.”

회사 운영은 정말로 나이와 관계가 없으니까요, 라고 말하려다 선유는 말을 삼켰다. 부드러운 관계를 위한 대화를 굳이 날선 말로 끊어낼 필요는 없었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예.”

선유가 빙긋 웃고는 교사를 따라 반에 들어섰다. 여기저기 모여 떠들고 있던 아이들이 후다닥 뛰어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창가에 서서 친구들과 얘기하고 있던 한주의 눈이 확 커졌고, 아이들의 파도에 휩쓸려 자리에 앉았다. 한주의 자리는 제일 뒤였다.

“오늘 직업 교육은 한주 형께서 와 주셨어. 바쁜 시간 내어서 와 주셨으니까 조용히 잘 듣고. 일일 교사시니까 선생님이라고 해야 해. 알았지?”

한주 형이라고 소개를 하자 아이들이 휙 뒤를 돌아 한주를 쳐다보았다. 한주 옆에 앉아 있던 남자애가 귓속말로 무언가를 묻기도 했다. 뭐랄까, 아이들이라서 그런지 태도에 거침이 없다. 음, 좋은 이미지였으면 좋겠는데. 선유는 난감함을 숨기며 코트를 벗어 작은 의자에 걸쳐 놓았다.

“안녕하세요. 최선유입니다.”

은은하게 미소를 띠운 얼굴로 입을 열자 여자아이들 몇몇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왜 저러지? 잘 이해가 안 되었지만 지적하는 것도 이상해서 선유는 말을 이었다.

“시스템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컨설팅이란….”

“형은 몇 살이에요?”

선유의 말을 끊고 누군가 물었다. 담임 교사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가뿐히 무시한 형, 이라는 부름이었다. 질문은 좋지만 적어도 말이 끝나고 나서 했으면 좋겠는데, 바람은 속으로 생각하고 선유는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스물다섯이에요.”

“와, 저희 형은 스물세 살인데 아직 대학생이에요! 지금은 방학이라고 방에서 뒹굴뒹굴해요.”

“저는 학교를 일찍 졸업했습니다.”

잘못하면 학교 월반한 얘기부터 이것저것 다 하게 될 것 같아서 선유는 다시 준비해 둔 스크립트로 돌아왔다. 하지만 몇 마디 하기 무섭게 또 들어온 질문 공격에 말이 끊겼다. 대체 누가 한국 아이들이 질문을 안 한다고 했던가,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드는 애들인데.

“질문은 나중에 한 번에 받을게요. 괜찮죠?”

“예!”

아쉬워하는 기색이 보였지만, 대답은 또 잘 했다.

“회사에서 편하게 일을 하려면 컴퓨터를 쓰겠죠? 그런데 컴퓨터만으로는 부족하고 자료를 응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전문적으로 그 시스템을 만들어 주는 회사예요.”

회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주고, 선유는 어떻게 자기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회사를 차리고 키워왔는지 얘기하기 시작했다. 워낙 PT에는 이골이 난 터라 수업은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공적인 이야기를 끝내고 조금은 사적인 부분으로 들어왔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일의 시작은 간단한 아르바이트에서부터였습니다. 단순히 아르바이트에서 끝날 일을 이렇게 사업으로 끌고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

“최한주 학생.”

다른 아이들은 이름을 모르니 한주를 시킬 수밖에 없었다. 저를 시킬 줄은 몰랐는지 화들짝 놀란 한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열심히 하고… 준비가 되어 있으면 기회가 오니까요.”

한주는 며칠 전에 선유가 했던 말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 놀라 잠시 멈췄던 선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한주 옆에 앉은 아이가 ‘너 답 외워서 왔지?’라고 묻는 것 같아 보였다.

“맞아요. 준비가 되어 있으면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죠.”

선유는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오히려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서 갈피를 못 잡고 방황했을 정도였다. SNS 플랫폼을 만들 수도 있었고, 새로운 쇼핑 플랫폼을 제안할 수도 있었고, 아예 연구 쪽으로 방향을 틀 수도 있었다. 조금 고리타분한 컨설팅을 하게 된 건 기회가 가장 먼저 왔기 때문, 만약 다른 기회가 왔다면 아예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질문 있으면 하세요.”

생각보다 많은 아이가 손을 들어 질문했고, 그건 선유에게도 꽤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그럼 오빠는 지금 사장님인데 어리다고 무시당하지 않나요?’, ‘열심히라는 게 얼마나 해야 하는 건가요? 준비가 되어 있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머리가 좋지 않으면 못 하는 거 아닌가요?’, ‘사장이 되면 직원들한테 막 일 시킬 수 있어요?’ 쏟아지는 질문에 답을 해 주고 나니 끝날 시간이었다.

“자자, 그만. 수업시간 끝났다.”

“에이….”

“오늘 수고해 주신 최선유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인사하자.”

“감사합니다!”

귀여워라, 아이들은 꽤 귀여웠다. 물론 한주가 제일 귀엽지만. 고생 많으셨다며 꾸벅 인사하는 담임 교사와 맞인사를 하고 허리를 들자 한주가 옆에 다가와 있었다.

“형….”

“질문해서 놀랐어?”

“형은…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응?”

한주의 얼굴이 어두웠다. 뭔가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에 선유가 재차 부르자 그제야 눈을 마주쳐왔다.

“한주야.”

“…….”

“최한주.”

선유는 대답을 하지 않는 아이가 걱정되어 담임 교사에게 한주는 점심을 먹지 않고 하교해도 되겠느냐고 묻고 짐을 챙겨 오게 했다. 이대로 두고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선유는 한주를 데리고 가까운 패밀리 레스토랑을 향했다. 아이는 조용했다. 자리를 잡고 메뉴를 고를 때까지도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갑자기 매일 밤 영어책을 두 챕터씩 읽고, 수학 학습지를 다 풀고 양을 늘려 달라고 하질 않나- 오늘이 제일이었다.

한주가 좋아하는 토마토 파스타에 우스터소스 베이스의 립요리가 다 나올 때까지 둘은 침묵을 지켰다. 한주와 같이 산 지 2년, 선유는 한주에겐 재촉하기보다 기다리는 게 낫다는 걸 알게 되었다.

“립 잘라 줄게.”

무슨 말을 하려다 한주의 입술이 꾹 닫혔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낸 듯 한주가 입을 열었다.

“저도 할 수 있어요.”

“어?”

“형이 해 주지 않아도 할 수 있어요.”

나이프를 쥔 선유의 손에서 잠시 힘이 빠진 사이 한주가 나이프를 빼앗듯 가져가 립을 썰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유의 접시와 제 접시에 곱게 자른 요리를 옮겨 놓았다.

“네가 할 수 있는 거 알아.”

“…….”

“해 주고 싶으니까 하는 거고.”

이번엔 선유도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혼자서 모든 일을 하게 된 한주가 품을 떠나려 하는 게 너무 아쉽고 안타까웠지만, 제 마음대로 아이를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물론 제 행동이 그런 결과를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그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아무리 한주가 저를 신처럼 바라보는 게 기분 좋은 일이라 해도, 이 세상에 저밖에 없다는 듯 매달리는 게 가슴을 뿌듯하게 만든다 해도.

몸에 밴 태도로 접시에 파스타를 덜어 주자 한주는 또 잠시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러고선 왠지 물기 어린 눈을 한 채 입 안으로 음식만 끌어넣었다.

“천천히 먹어.”

아이를 혼내는 건 선유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2년 간 화를 낸 건 단 한 번, 한주가 크기 싫다고 밥 먹기를 거부했던 때뿐이었다. 언젠가부터 한주는 좋고 싫음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대부분은 대화로 풀어낼 수 있었기에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

“최한주.”

“형은 그럼 제 나이 때 이미 중학생이었어요?”

선유의 부름을 중간에서 끊으며 한주가 따지듯 물었다. 말문이 막혀서 잠시 말을 잃자 한주는 어울리지 않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먹기만 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

“말 잘 하더니 왜 그래.”

“저 아기 아니에요.”

“응?”

“아기 아니라구요.”

아니, 뭐… 아기는 아니지만 아니라고 하기도 뭐한데. 선유는 그 말에 또 그렇구나, 하고 아기 다루듯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제가 여전히 다섯 살 아이 다루듯 할 때가 있긴 했다. 여전히 선유의 눈에 한주는 작기만 해서.

“한주야. 네가 하는 게 아기 짓이잖아.”

“…….”

“불합리한 걸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서 기분 나쁜 티만 내는 게 아기들이나 하는 짓이지.”

“아니, 아니에요. 저는….”

“그럼 형은 안 섭섭한가? 아무리 어른이라도 섭섭해.”

씹고 있던 걸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고 멈춘 채 한주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제야 제가 하고 있는 게 투정이란 걸 조금 깨달은 얼굴이었다. 선유는 한주가 부리는 투정에는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그런 게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반가울 정도였다. 하지만 한주가 하는 생각엔 조금 섭섭했다. 빨리 크고, 빨리 자라서,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천천히 포크를 내려 놓고 한주는 한참 식탁 위만 보고 있었다. 혹시 우는 건가 했지만, 이제 몇 살 더 먹었다고 한주는 잘 울지 않았다.

“…빨리 크고 싶어요.”

역시. 한주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크는 것에 집착했다. 몸도 지식도 정신도. 본인이 어려서 그런 버려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그래서 선유는 섭섭한 거였다. 저도 그를 그렇게 버릴 거라 단정 짓는 것 같아서.

“왜 그렇게 빨리 크고 싶어?”

“…….”

“그래서 요새 영어책도 많이 읽고, 수학 문제지도 두 배로 푸는 거야?”

“…형은… 저 보면 한심하지 않아요?”

“한심?”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선유는 한주의 머릿속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웬만해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잘 읽는 편이었는데, 한주는 언제나 의외의 말을 하곤 했다.

“저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형처럼은 못 될 거 같아요.”

“나처럼….”

“저는 아직 분수 덧셈 뺄셈도 잘 못하는데….”

분한 듯 주먹까지 쥐고 부르르 떠는 한주를 보다 선유는 입을 틀어막았다. 한주는 한없이 진지한데, 여기서 웃었다간 끝이었다. 어떡해, 분수 덧셈 뺄셈도 잘 못 해서 울먹이는 최한주, 정말 미치겠다.

“…형 웃는 거죠.”

“흠, 아냐.”

한번 헛기침을 하고 선유는 얼굴을 정돈했다. 하지만 한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선유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

버려질까 봐 그러는 게 아니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선유는 왠지 안도감이 들어서 제 눈시울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제 예상이 맞지 않아서 이렇게 다행이라 생각한 적은 처음이었다.

“내가 너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은 데 따라잡히면 어떡해.”

“그래도….”

“나는 나고, 한주는 한주고. 잘할 수 있는 거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돼.”

“…….”

“욕심부리는 건 좋아. 하고 싶은 건 뭐든 다 하게 해 줄게. 잘 안 되어서 투정 부리고 화내도 돼. 하지만 내가 항상 얘기하는 거 뭐지?”

“얘기를 해야 한다고….”

“그래. 얘기를 해야 알지.”

다시 평소처럼 돌아온 한주의 접시를 다시 채워 준 선유가 조그만 코끝을 톡 튕겼다. 한주는 아프다고 코를 쥐고도 포크질을 시작했다.

“한주가 나보다 잘하는 것도 많잖아.”

“…없어요.”

“왜? 산도 더 잘 타고 줄넘기도 많이 하는데. 공 갖고 하는 것도 잘하고.”

아버지와의 캐치볼에서 공 주고받는 것도 제대로 못하던 저를 떠올리며 선유는 좀 우울해졌다. 처음에는 야구 배트를 들고 나가기도 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친 적이 없다 보니 나중에는 글러브만 가지고 나가게 되었다. 차라리 달리기면 모를까, 공 다루는 건 능력 밖이었다.

한껏 잘하는 걸 열 손가락 꼽아가며 얘기해 주었더니 한주는 그제야 조금 웃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선유와 저를 비교하며 우울해하거나 투정 부리지 않았다. 승부욕이 무척이나 커져서 제 또래 가운데에선 일등을 하지 않으면 못 버틸 정도가 되어 버린 게 문제였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