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0> (2/13)

<9>

“…선유.”

“…….”

“야, 최선유.”

“…시끄러.”

“너 왜 또 여기서 자고 있냐? 어제 프로젝트 끝났잖아.”

얼굴까지 가리고 있던 담요가 끌어 당겨지면서 햇빛이 감긴 눈꺼풀 사이로 파고들었다. 선유는 눈살을 찌푸리며 소파 팔걸이에 얼굴을 묻었지만, 아예 팔을 끌어당기는 친우의 힘이 너무 셌다.

“…몇 시야?”

“일곱 시 반. 몇 시에 잤어?”

“네 시쯤…?”

선유를 일으켜 세운 신지운이 거친 손길로 새집 지은 머리카락을 벅벅 빗어 내렸다. 그리고 갈색 종이봉투를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아까부터 핸드폰 계속 울리더라. 아침 사 왔어.”

“아, 그래? 고마워.”

이 아침부터 연락 올 게 없을 텐데. 선유는 종이봉투 안에서 크림치즈가 발린 베이글과 커피를 꺼냈다. 그리고 양파 냄새가 나는 베이글을 한 입 깨물며 엉덩이 밑에 깔려 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계속 진동이 울렸을 텐데 깨지도 않고 잔 걸 보면 피곤이 극에 달하긴 한 것 같았다.

“오늘 직원들도 오후 출근이라며. 아침 먹고 들어가서 자고 나오든가, 하루 쉬든가 해. 사장이 계속 그렇게 일하니까 직원들이 민망해하잖아.”

“응… 근데 마지막엔 내가 손 안 대면 좀 불안해서.”

핸드폰 화면을 켜는 순간 선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 부재중 통화가 몇 개나 들어온 탓이었다.

“뭐야?”

“모르겠어. 핸드폰 번호도 아니고….”

“지역번호가 뭔데?”

“031이면 인천인가?”

“경기도네.”

다섯 통이나 똑같은 번호로 걸려 온 걸 한참 내려다보다 선유는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 통화연결음이 들렸지만 연결되지는 않았다.

“찝찝하네. 며칠 전부터 몇 번 왔는데 받으면 아무 말도 안 하고 되걸면 받지를 않아.”

“우리 경기도에 거래처 몇 개나 있지?”

“많지…. 공장 지대가 대부분 경기도니까.”

“급하면 다시 전화 오겠지, 뭐.”

베이글을 물고 꾸벅꾸벅 조는 선유의 머리통을 다시 밀어 올려 주며 지운이 옆자리에 앉았다. 툭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높이를 맞춰 주겠다는 듯 한쪽 어깨가 밑으로 내려왔다. 우물우물 기계적으로 입만 움직이던 선유의 눈에 달력이 들어왔다. 회사를 차린 지 벌써 일 년째였다.

“와, 일 년 진짜 빠르다.”

“정신없었지.”

“그래도 일 년 만에 자리 잘 잡았네. 안 그래?”

“내가 정말 처음에 영업 다닐 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난다, 진짜.”

선유와 지운은 거의 태어났을 때부터 친구였다. 애초에 한국인은커녕 동양인조차 거의 없는 동네에 한국인 가족이 둘 있었으니 친구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유의 계속된 월반으로 학교를 같이 다닌 기억은 거의 없지만, 둘은 언제나 친구였다.

한국에 가서 회사를 차리자고 먼저 손을 뻗은 건 선유였다. 선유는 대학을 다니며 얻게 된 인맥으로 기업 시스템 컨설팅을 10대 때부터 시작했고, 한국 중견 기업들의 의뢰를 받기 시작했다.

한국 내 시스템 컨설팅은 대부분이 대기업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고, 의뢰 비용이 상당히 비쌌다. 해외 업체는 조금 더 저렴했지만, 언어의 장벽이 있어 기업 대부분이 이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선유는 시장을 잘 파고들었다. 영어와 한국어가 가능하고 합리적인 금액을 제시하자 일이 계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는 온라인으로 업무를 전부 진행했기 때문에 일을 하는 데 나이가 문제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국에서 창업을 하면 어떨까, 생각하자마자 한국행 비행기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개발 업무만으로도 일이 차고 넘치는 선유가 영업까지 하기엔 무리였다. 그때 생각난 것이 지운이었다. 지운은 선유와 같은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선유는 대학원에, 지운은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졸업반이었던 데다가, 유들유들한 성격에 호감 가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선유의 제안에 지운은 긴 고민 없이 바로 그러겠노라 했고,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국으로 날아왔다.

사업은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이미 선유가 컨설팅 업을 시작한 지는 5년이 지났고, 한두 군데만 끝맺음을 잘해 주고 나면 입소문은 금방 퍼지기 마련이다. 문제는 둘이 너무 어렸고, 아직도 어린 취급을 받는다는 거였다. 그나마 지운은 겉보기에 나이가 많아 보이고 알파라는 형질 때문에 거래처 사람들이 우습게 보지 않았지만, 선유는 그렇지 못했다.

평소 인간관계에서는 장점이 될 섬세한 외모와 어린 얼굴은 사업에선 걸림돌이 되었다. 몇 번은 그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었으나 타고난 얼굴도 체형도 바꾸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므로 최대한 영업은 지운에게 맡기고 개발 쪽에 집중하기로 했다.

또 외부 사람을 만날 때는 무시당하지 않게끔 옷차림이나 액세서리를 고급스럽고 단정하게 갖추어 시선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내근이니 커다란 맨투맨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너 오늘 어머니 오신다고 하지 않았어?”

“아, 맞다.”

지운에게 거의 온몸을 기대고 있던 선유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 년 만에 어머니를 뵈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장소를 떠올리니 선유는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한주의 부모 장례식장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그 기분도 오래 가지 못했다.

“아직도 너희 아버지 나한테 화나셨지?”

“말해 뭐해?”

“와, 진짜 딱 한 번이었는데.”

“우리 아버지한테 넌 사탄이야.”

“술 먹고 착각한 거라고 말씀 안 드렸어? 완전 사고였잖아.”

“드렸지. 술 처먹고 애인이랑 친구를 착각할 놈이라면 사탄보다 더하다고 하셨지.”

“으….”

다이어리를 꺼내 오늘 일정을 재확인한 선유가 포스트잇에 전달이 필요한 업무리스트를 쭉 적어 지운에게 건넸다.

“오늘 잘 좀 부탁합니다, 전무님.”

“…예, 대표님.”

어울리지 않는 존댓말에 떨떠름해진 지운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은 선유가 다시 평소 말투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건 오늘 오성화학에 보여 줄 포트폴리오. 의뢰가 재고관리시스템 구축이었지?”

“어. 이건 또 언제 준비한 거야?”

“어젯밤에… PT는 내가 할 건데 준비는 네가 좀 해 놔.”

“그래.”

“그리고 이건 임 실장님 쪽 업무지시인데 전달 좀 해 줘.”

지운의 팔에 파일 첩 몇 개를 착착 쌓아 올리고 제일 위에 포스트잇을 쫙 붙인 선유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태워 주겠다는 지운의 말을 간단히 무시하고 집으로 걸어온 선유는-집이 사무실에서 걸어서 3분 거리인데 태워 주겠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도 없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옷을 챙겨 입다 잠시 스쳐 가는 기억에 손을 멈췄다. 허리를 끌어안던 자그마한 아이가 생각난 탓이었다. 평소 크게 반응하지 않는 감정이 꽤나 요동쳤던 그때를 떠올리자 약간의 한숨이 밀려 올라왔다.

아이들은 눈 깜박할 때마다 큰다고 하니 지금은 또 많이 변했겠지.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귀여웠던 얼굴을 떠올리며 선유는 빠르게 옷을 챙겨 입었다. 어머니 도착 시간에 맞춰서 공항까지 가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

일 년 만에 본 어머니는 여전히 우아하고 평안했다. 제 외아들을 꼭 한 번 끌어안아 주고 뺨에 입 맞춰 준 그녀의 손에서 짐을 받아 들고 선유는 먼저 앞장서서 걸었다.

“머리를 왜 그렇게 하고 있니?”

“아, 습관이 되어서요.”

왠지 회사 바깥을 나갈 때면 사업용 머리스타일을 하게 되었다. 머리를 뒤로 넘겨 고정하지 않으면 여전히 학생처럼 보이는 터라 습관이 된 것이었다.

“안 어울린다.”

“무시 안 당하려면 어쩔 수 없더라구요.”

“일은 괜찮고?”

“예. 이제 좀 정리가 됐어요.”

“지운이는.”

“저 때문에 바쁘죠.”

선유는 20살에 커밍아웃을 하면서 부모와 반쯤 연을 끊은 상태였다. 모친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부친은 극렬히 거부감을 나타냈고, 손자를 데려와야 유산을 주겠다고 선포했다. 아버지의 유산 따위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선유는 그 구시대적 제안을 무시하고, 바로 사업 준비에 착수했다.

그리고 가끔 모친과만 연락을 취하고 아버지와는 집안 행사가 없는 한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물론 선유가 하지 않았다는 거지, 부친이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최근에는 부친이 현재의 관계에 좀 아쉬움을 느끼는 것 같아서 그가 저를 받아들이는 데에 먼 시일이 걸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들이 게이라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천성이 모질지는 못한 사람이었다.

“네 아버지도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사고가 터져서 못 왔어.”

“아버지가요?”

“꽤 기대했다니까. 그제부터는 밤에 잠도 잘 못 자더라고.”

“저 보는 것 때문에요?”

“솔직하지 못하지.”

“하긴. 당장 나가라고 하시곤 일주일 뒤에 전화하셨죠.”

“한 달 뒤에 나 몰래 찾아가기까지 했고.”

그러다 못 볼 꼴 보고 도망가셨지. 그때 지운에게 날아가는 주먹을 막느라 정말 힘겨웠었다.

“한국은 엄청 춥구나.”

“오렌지카운티는 겨울이 없잖아요.”

선유는 한국의 계절이 힘들었다. 온도 변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체질이라 환절기 때마다 감기에 안 걸리기 위해 온갖 애를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선유는 공항 바깥에 나오자마자 급격한 온도 변화에 재채기를 몇 번 하고, 캐리어를 끌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 히터를 켜고 핸드폰을 꺼냈다. 코트를 벗으며 화면을 켜자 또 031로 시작되는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아침에 온 것과 거의 비슷한 전화번호를 보다 통화를 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연결되지 않았다.

“왜 그러니?”

“며칠 전부터 계속 전화가 오는데 받으면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부재중 있어서 되걸면 받지를 않네요.”

“장난 전화인가?”

“일을 하다 보니 전화를 무시할 수가 없어서 계속 신경 쓰여요.”

선유는 전화를 한 번 더 걸어 본 후 핸드폰을 아예 잘 보이는 곳에 두었고, 공항을 빠져나가 영종대교를 중간쯤 건넜을 때 다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젠 조금 익숙해 보이기까지 하는 전화번호를 보고 선유는 전화를 받았다.

“예, 여보세요.”

- …….

“여보세요?”

핸드폰을 흘긋 바라보니 분명히 연결된 상태였다. 또 아무 소리 없이 끊기려나, 다시 한 번 묻자 꺼질 듯 작은 목소리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아예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 …선유 형.

누구지? 잠깐 의아해하던 선유는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이름을 붙들었다. 오늘 아침에 떠올리지 않았다면 생각해내지 못했을 이름이었다.

“…한주야?”

- 형….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용건이 없으면 전화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았다.

- 형, 저….

“응.”

한참 시간이 지나도 한주는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숨 삼키는 소리, 엉긴 물기를 애써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 …죄송해요.

“아냐, 무슨 일 있어?”

이번에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유는 소름 끼치게 불길한 감각이 치솟아서 핸들을 꽉 붙잡았다. 혹 며칠 동안 걸려 온 전화가 한주로부터였다면, 일 년 전에 쥐여 준 전화번호로 몇 번이나 걸 만한 일이 대체 무엇일까? 차마 말도 하지 못하고 끊어 버린 것이었다면, 십수 번의 전화 끝에야 입을 열 만한 일은 대체?

“한주야, 오늘 형이랑 놀까? 어디 있어?”

- 아, 아녜요, 저….

“삼촌네 집이야?”

- …아니에요.

“어딘지 말해 주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

아홉 살인 아이가 과연 지리를 설명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선유는 끈질기게 물었다. 발목부터 뱀 한 마리가 기어오르는 것처럼 불안했다.

- 저….

뚝, 입을 여는가 했는데 전화가 끊어져 버렸다. 선유는 다급히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연결되지 않았다. 공중전화인건가, 입술을 짓씹으며 몇 번이나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누르던 선유는 조수석의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도 적잖게 놀란 얼굴이었다.

“어머니, 혹시 한주 데려간 셋째 삼촌 어디 사는지 아세요?”

“안산 어디라고 들었는데, 잠깐만.”

어머니가 다른 친척에게 주소를 묻는 동안 선유는 안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삼 일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걸려온 전화, 만약 그게 전부 한주였다면? 혹시 아이가 무슨 일이 있어서 계속 제게 그렇게 전화를 한 거라면? 입술에 피가 나도록 씹던 선유는 혹시 다시 전화가 올까 봐 신호에 걸릴 때마다 핸드폰을 바라보았지만, 조용하기만 했다.

“그럼 계속 전화 왔다는 게 한주인거니?”

“그런 거 같아요.”

“원래 연락을 했었어?”

“아뇨. 전화번호를 주긴 했지만… 장례식장에서 헤어진 이후론 연락 온 적 없었어요.”

“좀 불안하구나.”

“…저도요.”

“주소 받았다.”

“거기 갔다가 저희 집에 가도 괜찮으시겠죠?”

“당연하지. 갑자기 애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무시하면 안 되지.”

드디어 온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 선유는 조금 더 다급하게 페달을 밟았다. 차 안은 고요했다.

안산의 아파트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선유는 주변을 살피며 차를 몰았다. 집에서 건 전화일 수도 있었지만, 소리로 판단하기에 한주는 밖에 있는 게 분명했다. 바람소리, 차 소리, 소란스러움이 배경으로 가득했으니까.

큰길에서 아파트 입구 쪽으로 트는 순간 맞은 편 공중전화 박스 안에 자그만 형체가 뭉쳐져 있는 게 보였다. 선유는 다급히 차를 세우고 문을 벌컥 열었다. 차에서 내려 길을 건너가자 예상은 확신이 되었다. 검은 털 뭉치처럼 보이는 것은 분명히 한주였다.

전화 박스 앞에 서서 가만 내려다보고 있었더니 얇은 니트 한 장 차림의 아이가 벌벌 떨다 위를 휙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반쯤 벌리고 그대로 굳었다.

“…한주야.”

“…형?”

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 다시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선유의 부축과 공중전화 받침대를 쥐고 간신히 일어났지만,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쭈뼛거리며 뒤로 좀 더 물러났다. 그 좁은 공중전화 박스 구석에 서서 비틀거렸다.

아직도… 많이 작네. 선유는 입 안에 쓴맛이 도는 것을 느꼈다. 한주는 여덟 살이었을 때보다 키는 아주 조금 자랐지만, 다른 알파보다, 심지어는 베타보다도 훨씬 작은 것 같았고, 젖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마른 상태였다.

“한주야.”

“…형.”

한주는 여전히 선유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일부러 얼굴을 아래부터 들이대 쳐다보자 그제야 살짝 시선이 스쳤다. 일단 시선이 닿고 나자 한주는 가만히 선유를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응? 뭐가.”

“죄송해요, 제가….”

말을 채 끝내지 못한 한주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벌벌 떠는 작은 몸이 너무 추워 보여서 뭘 입혀 주고 싶었으나 차에 코트를 두고 온 터라 아무것도 없었다.

선유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한주를 훌쩍 안아 들었다. 생각보다 너무 가벼워서 놀랐지만 애써 그 기색을 숨겼다.

아이는 선유가 몸에 손을 댈 때마다 예민하게 떨며 소스라치게 놀라고 무서워했다. 왜 그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선유는 최대한 빨리 걸음을 옮겨 한주와 함께 차 뒷좌석에 같이 탔다.

“한주야.”

“…예.”

“괜찮은 거야?”

그때도 울지 못하고 있다가 제가 국에 말아 준 밥을 먹으면서 뚝뚝 눈물을 흘리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건 대체.

“한주야. 무슨 일 있으면 얘기해.”

선유의 물음에도 한주는 입술을 꼭 다문 채로 일관했다. 선유가 살짝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뺨을 만져 주자 간신히 고개를 들었지만, 그게 다였다.

한주의 외견을 면밀히 살피던 선유는 아이의 뺨과 목덜미가 얼룩덜룩한 것을 발견했다. 설마. 휙 어머니를 돌아보자 그녀도 같은 것을 본 것인지 하얗게 얼굴이 질려 있었다. 어떻게 하지, 선유는 한주의 작은 손을 쥐고 고민에 빠져 있다가 우선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 사이 아이는 울음을 그쳤다.

“한주는 지금도 레고 좋아해?”

미국에 있을 때 같이 만들던 레고를 떠올리며 묻자 아이는 입술 끝에 가느다란 웃음을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주는 겨우 다섯 살일 때도 레고 하나를 다 맞출 때까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었다.

“집에 레고 있어?”

“…작은 거 있어요.”

아이는 거짓말을 잘 하지 못했다. 작은 것은커녕 레고 조각 하나 없는 게 분명했다.

“요즘에 스타워즈 시리즈가 또 새로 나왔더라.”

“…….”

“형이랑 레고 하나 사러 갈까?”

“…정말요?”

자기도 모르게 기쁜 얼굴로 되물었다가 한주는 다시 시무룩해졌다. 그리고 입 안쪽으로 우물우물 말을 씹었다. 이제 겨우 아홉 살인 애가 왜 말을 하려다 말고 저럴까, 선유는 한주의 손등을 쥐고 말하라는 의미로 살살 흔들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한주의 입이 열렸다.

“…레고는 너무 비싸요, 형.”

“내가 사 줄 건데?”

“삼촌한테… 혼날 거예요.”

거의 속삭이듯 나온 말에 선유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레고 사 주는 게 왜 삼촌한테 혼날 일이지?

“그럼 삼촌한테 허락받고 다녀올까?”

그 말에 한주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갑자기 폐를 크게 부풀렸다가 가쁘게 숨을 내뱉더니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지경이라 놀란 선유는 그대로 운전석에 올랐고, 둘을 보고 있던 어머니가 뒷좌석으로 넘어가 한주를 살피기 시작했다.

급히 가까운 병원으로 차를 몰면서 선유는 한주의 삼촌이라던 작자를 떠올렸다. 만약 그 사람이 한주의 몸에 손을 댔다면, 그 가족들이 한주에게 폭력을 저질렀다면 절대로 그들이 한주를 데리고 있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

병원에서는 한주의 증상이 심인성 과호흡 증후군이라고 했다. 폐와 심장을 검사했지만 이상이 없었고, 혈액검사도 과호흡 증후군을 일으킬 만한 문제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유는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평소에도 이랬느냐는 의사의 물음에 아는 바가 없어 고개를 저었고, 아이의 몸을 진찰한 의사가 폭력범을 보듯 하여 절대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다. 의심받았다는 억울함보다는 화가 치솟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항상 담담한 색을 유지하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손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이산화탄소를 조금 흡입한 뒤 한주의 과호흡 증상은 곧 사라졌고, 거의 영양실조나 다름없다는 말에 영양제도 하나 맞혔다. 지쳐 잠든 아이를 눕혀 두고, 선유는 어머니를 제 집으로 모셔다 놓고 다시 오려 했다. 하지만 그녀도 적잖이 아이가 걱정되었는지 깨어날 때까지는 옆에 있고 싶다고 했다.

삼촌이란 작자에게 전화를 해 줘야 하는 건가, 선유는 핸드폰을 손안에서 굴리며 잠시 고민 했지만 연락을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과연 그들이 아이를 찾기나 할까? 이 추운 겨울에 제대로 된 겉옷도 없이 공중전화 박스에 틀어 박혀 있던 것을 생각하니 다시 화가 치솟았다. 게다가 그 옷 아래는 더 엉망진창이었다.

“…형.”

얼마 자지도 않은 아이가 금세 눈을 뜨고 선유를 불렀다. 작아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것만 같은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환희와 기쁨이 흘러서, 선유는 왠지 모르게 숨이 꽉 막혔다.

심각한 선유의 얼굴을 본 한주는 한참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기듯이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선유는 제 앞에 선 작은 아이를 가만 바라보다 말없이 아이의 스웨터를 걷어 올렸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상흔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형!”

황급히 선유의 손을 밀어내며 한주가 다시 옷을 끌어 내렸다. 하지만 이미 배와 옆구리에 든 멍이 다 드러나고 말았다. 죽은 피가 찬,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시뻘건 멍. 그리고 간신히 아물기 시작한 노란빛 멍까지. 다시 봐도 열이 차서 폭발할 것만 같았다.

선유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한주의 스웨터 팔 부분을 걷어 보았고, 팔꿈치에도 사람 손 모양으로 남은 멍을 발견했다. 한주는 어떻게든 피하고 거부하려 했으나, 선유의 손은 유례없이 단호했고 한주는 힘을 쓰다 지쳐 숨까지 쌕쌕거리며 늘어졌다.

“…한주야.”

아이는 온몸에 멍을 달고 있었다. 선유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문 채 한주의 몸을 뒤덮은 멍을 노려보았다. 이미 진찰한 의사의 말로 폭력의 잔해를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감정이 또 요동쳤다. 숨기려 애쓰는 아이의 행동에서 공포가 느껴져서 더더욱. 그 고요 속에서 한주의 헐떡거림도 차츰 잦아들었다. 노랗고 보라색으로 번진 멍의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누르자 아이는 움칠 몸을 떨었다.

“…네 삼촌이야?”

한주는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몸에 입력된 것처럼 나오는 행동에 더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가며 통증을 자아냈지만, 신경조차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선유야, 어머….”

잠시 먹을 것을 사 오겠다고 나갔던 모친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놀란 소리를 내뱉었다. 한주는 당황함을 숨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선유는 그 모양을 보며 한참 깊게 숨을 내뱉었다.

이 아이를 데려가서 잘 키울 수 있을까.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하고, 자리를 잡을 때까지 약 15년, 늦으면 20년까지도 책임을 져야 했다. 다른 형제도 없이 단 둘이서 지내야 할 텐데, 그에게 제가 줄 수 있는 게 너무 없지 않을까. 애정도 관심도 많이 필요할 텐데.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마르게 두진 않을 터였다. 이렇게 상처를 만들지도 않을 것이었다. 안아 주고 체온을 나눠 줄 수는 있을 터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선유는 한주의 옷을 정리해 주고 작은 손을 잡았다.

“어머니.”

“한주 몸이….”

“저 한주 데리고 갈 거예요.”

“뭐?”

“이대로 둘 수 없어요. 어차피 전… 아시잖아요.”

결혼도 아이도 제 인생에 없을 거라는 거. 선유가 생략한 말을 이해한 모친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어차피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개체인 선유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선유가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나서고 싶을 정도였으니.

“괜찮겠니?”

“…….”

“아이 키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갑자기 그렇게 결정할 것도 아니다.”

“…작년에도 고려했었어요. 한주만 괜찮다면 제가 데리고 가고 싶어요.”

선유는 한주를 훌쩍 안아 들었다. 아홉 살이나 된 아이가 무척 가볍게 들려서 깜짝 놀랐지만, 애써 그 기색을 숨겼다. 품에 답삭 안기게 된 한주는 가느다란 팔로 선유의 목을 끌어안았다. 따끈따끈한 뺨이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선유야.”

“엄마. 저 얘 이렇게 못 놔둬요.”

“…….”

“한주 알파랬어요. 엄마도 알잖아요. 신지운이 이 나이 때에 얼마나 컸는지. 그런데 한주는 이렇게 작아요. 이렇게 마르고….”

화가 나서 말을 채 다 끝맺을 수가 없었다. 선유는 이를 악물었다 놓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선유가 미국에 있을 때, 그때 저는 한창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몇 번의 월반, 열아홉에 석·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나이 차이가 나는 백인들에게는 무시당했고, 심지어 교수조차도 저를 뒷전으로 생각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논문도 잘 써지지 않았고, 창업 준비도 지지부진했다.

그런 상황에서 제게 꾸밈 하나 없이 쏟아 주던 한주의 애정을 선유는 기억했다. 누군가 아무런 조건 없이 그렇게 저를 좋아해 주는 건 정말이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을 쉴 새 없이 달려오다 지쳐 넘어지기 직전에 다시 등을 밀어 주는 듯했다.

한 달간 한주와 지낸 후 선유는 슬럼프를 딛고 일어났고, 늘어져 있던 모든 일을 처리해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금 사장 명함을 달고 안정된 사업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작년에는 외면했지만,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을 거였다. 자기 사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발휘하는 동정이라 욕해도 상관없었다.

아이를 데려가 키우겠다는 결심에 꼭 큰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입양하는 부모들의 이유가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것이라면 선유는 ‘한주를 아프게 하진 않겠다’는 이유였다.

생각을 완전히 정리한 선유는 반쯤 울상인 얼굴로 쳐다보는 한주에게 애써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젓고 입을 열었다.

“한주야.”

“…예?”

“형하고 살래?”

“…….”

“형하고 살자.”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랗게 뜨여진 눈동자 위로 새파랗게 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툭 터지며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선유는 손바닥으로 슥슥 닦아 주었다.

“…그래도 돼요?”

“응. 네가 그러고 싶다고 말만 하면 내가 어떻게든 할게.”

선유에게 안긴 채로 한주는 까만 재킷만 몇 번이나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두려움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을 했다가, 뒤를 돌아보며 눈치를 보다가 한참을 그렇게 갈팡질팡하던 한주가 맑게 눈을 떴다. 그리고 작지만 똑똑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이랑 같이 살고 싶어요.”

“그래, 알았어.”

뒤에서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지만 선유는 이미 마음을 굳힌 채였다. 집안을 한바탕 뒤집을 준비도 되었다.

긴장되어 굳어진 어깨 위로 아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기대왔다. 걱정도 불안도 씻은 듯 사라졌다. 괜찮을 것 같았다.

***

삼촌네가 온 것은 거의 밤 열 시가 다 된 시점이었다. 선유가 한주를 찾아낸 것이 오후 세 시, 전화를 한 것이 아홉 시 반 경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까지도 한주의 행방을 궁금해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아이가 없어졌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듯했다. 그 행태를 본 선유는 더더욱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절대로 이들 옆에는 한주를 둘 수 없다고.

“이 자식이!”

선유는 한주를 보자마자 노성을 내는 남자를 차갑게 바라보다 한주의 손을 잡아 제 뒤로 숨겼다. 벌벌 떨리는 아이의 가느다란 어깨가 안쓰러웠다.

“아이에게 손대지 마세요.”

“뭐?”

“손대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저 쥐새끼 같은 놈을 내가 그냥!”

선유의 뒤에 반쯤 몸을 숨기고 있는 한주에게 또 한 번 버럭 화를 내며 남자가 우악스럽게 손을 뻗었지만, 선유는 아이를 완전히 가리고 그 앞을 막아섰다.

선유는 제 편으로 할아버지를 불러 놓았다. 그에게 미리 한주의 몸을 보여 주고, 삼촌이 한 짓에 대해 폭로한 후 제가 데려가겠다며 미리 얘기도 해 놓았다. 등이 굽은 노인은 선유에게 죄스러워했으나 그 또한 아이를 부양할 만한 여력은 없었기에 선유에게 맡기는 일 외에는 할 것이 없었다.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남이나 다름없는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선유에겐 고맙다는 말만 했다.

“뭘 잘했다고 큰소리를 내!”

조부가 호통을 쳤지만, 남자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삼촌이란 작자는 아이가 말을 안 들어서 훈육을 했을 뿐이라며 변명했고, 가족들도 그를 두둔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족 전부가 한패였다. 그들 중 누가 말을 하든 바들바들 떨어대는 한주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그러셨던 모양이죠?”

“뭐?”

“쥐새끼 운운하며 아이를 때렸냔 말입니다.”

“너 이 새끼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서는….”

“아이가 얼마나 견딜 수 없었으면 저한테 전화를 했겠어요. 그것도 몇 번이나.”

선유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부는 분노에 차서 제 아들을 지팡이로 후려쳤고, 장내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얼어붙을 듯한 침묵에 한주는 선유의 손만 꽉 붙잡은 채 버티고 있었다. 이 상황이 길어져 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선유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아이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뭐?”

“할아버지와는 이야기 다 했습니다. 어차피 아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도 없으신 거잖아요?”

“안 돼!”

“왜요?”

우물쭈물하는 남자의 입에서 보험금 얘기가 나왔다. 지금까지 애를 때려놓고는 돈을 운운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선유는 뒷골이 당길 지경이었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 그건 변호사와 협의하겠다고 말을 끊어냈다.

“아이 몸에 난 상처, 사진 다 찍어 놨습니다.”

“…….”

“형사 고소, 민사 소송 생각보다 어렵지 않거든요. 그리고 저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서요.”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선유는 한주를 들어 안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어머니는 어설픈 선유의 폼을 보고는 한쪽 팔로 아이 엉덩이를 감싸 안으라며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화가 풀리지 않아서 딱딱하게 굳은 얼굴 위로 자그만 손이 닿았다. 선유는 한숨을 내뱉고 한주를 고쳐 안으며 빠르게 걸었다. 주차장까지 가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차 뒷문을 열어 아이를 태우고 안전벨트까지 해 준 선유가 간신히 한 번 웃었다. 제 얼굴을 살피며 눈치를 보는 한주 때문에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뒷문을 닫으려던 선유는 제 눈앞에 들이밀어지는 어머니의 핸드폰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버지 전화.”

“…벌써 말씀하셨어요?”

“아들이 결혼도 하기 전에 손자부터 생겼다는 건 빨리 말해 줘야 하지 않겠니?”

핸드폰이 곧 폭발할 폭탄이라도 되는 듯 쳐다보던 선유가 느릿느릿 그것을 받아들었다.

- 최선유.

“…아버지.”

묵직한 목소리에 선유는 자세를 고쳐 섰다. 오랜만에 듣는 아버지 목소리에는 얼음이 끼어 있었다.

- 너는 정말…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어떻게라뇨.”

- 어차피 내가 네 고집 꺾을 수 없다는 건 안다만… 정말 그 아이 데려가서 키울 거냐.

“예. 아버지도 손자 생겼다고 생각해 주세요. 손자보다는 아들에 가깝겠지만요.”

한주에게 선유의 아버지는 큰아버지니까, 그리 먼 사이도 아니었다.

- 선유야.

“아버지.”

아버지가 할 말이 예상된 선유가 말을 끊었다.

“아버지 생각은 알아요. 언젠가는 제가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하실 테지만… 저는 바뀌지 못할 거예요.”

- …그럴 거라 생각은 했다.

“그래서 한주를 데려가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저는 제가 적임자라 생각해요.”

수화기 너머로 한참 침묵이 흘렀다. 이미 부모한테 한 번 제대로 실망을 줬던 선유였다. 보수적인 지역에서 더더욱 보수적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동양인 가족, 몇 번이나 월반을 거듭하여 스무 살에 이미 대학원을 다니고 자기 회사를 차려 낸 건실한 아들이 일반에서 벗어난다는 것에 아버지는 공포에 가까운 거부감을 느꼈을 터였다. 거기에다가 갑자기 아이를 데려다 키우겠다니.

- 그래. 네 말은 알았다.

“…감사합니다.”

- 이제 종종 연락해라. 한주 안부도 전해 주고.”

“예. 한주야, 할아버지한테 인사해.”

할아버지란 단어에 찡그려질 게 분명한 부친의 얼굴을 생각하며 선유는 간신히 가라앉는 기분을 끌어 올려 빙긋이 웃었다. 그러자 한주가 눈이 부신 듯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 할아버지라니.

“아, 저 손자 데려왔는데 유산 주시나요?”

- 이놈이….

황당하다는 목소리에 피식 한 번 웃은 선유는 나중에 전화 드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조용했다. 한주는 차가 출발하자마자 끈 떨어진 인형처럼 잠들었고, 어머니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문 채였다.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선유는 잠든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젖은 수건처럼 축 늘어지는 아이가 아까보다는 조금 무게가 있었지만, 여전히 가벼웠다.

잠든 아이를 눕힐 곳은 제 침대밖에 없었다. 손님방을 어머니에게 내어 주고, 아이의 잠자리를 봐준 선유가 지친 숨을 내뱉으며 거실로 나왔다. 왠지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냉장고에서 맥주를 하나 꺼내 들고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폼이 아주 매일 마시는 거 같네?”

“오늘은 좀 봐주세요.”

“냉장고에 술 하고 물밖에 없고.”

“밖에서 잘 사 먹어요.”

잔소리가 이어질 기미가 보여서 선유는 성실한 아들을 연기하려 했다. 하지만 완전히 실패했다. 그녀가 시리얼과 식빵밖에 없는 찬장과, 물과 술밖에 없는 냉장고를 열어젖힐 때마다 황급히 닫기를 반복했지만 이미 다 보이고야 말았다.

대접으로 내놓을 것도 없었다. 그나마 어디에선가 얻어서 넣어 놓은 오렌지 주스가 한 병 있어서 다행이었다. 몇 개 없는 유리컵 가득 주황색 액체를 따라 어머니에게 내어 주고 다시 거실 소파로 돌아왔다. 그런 선유를 보던 모친이 한숨과 함께 고민하고 있던 말을 내었다.

“…쉽지 않을 거야.”

“예?”

“우선은 임시로 데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잠시 따라가지 못하던 선유가 허리를 세워 앉았다.

“어머니.”

“내가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이 나라가 편부가정에, 아니 형제들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가정에 녹록하지 않다는 건 안단다.”

그녀는 현실적인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선유의 결정이 지속적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주가 미국 잠깐 와 있을 때 네가 잘 봐주긴 했지. 그리고 네가 저 아이 몸에 난 상처를 보고도 그걸 외면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

“고모도 있고, 아니면 한주 외가 친척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잠시 데리고 있으면서 같이 얘기해 보자.”

선유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한주를 데려오겠다고 한 결정이 충동적일지언정, 한번 확정한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 저는 마음먹은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적, 못한 적이 없으며, 철회한 적도 없었다.

말없이 앉아 있던 선유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반쯤 열린 제 방문을 닫고 왔다. 목소리에 아이가 깰까 걱정되었다.

“어머니. 저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선유야.”

“제가 언제 제 입으로 지키지 못할 약속하는 거 보셨어요?”

“…….”

“심지어 한주한테 같이 살고 싶다는 말까지 들었는데, 그걸 제가 무를 수 있을 거 같아요?”

“적어도 십 년은 키워야 해.”

십 년, 한주는 이제 아홉 살이었다. 십 년이 지나도 열아홉, 성인이 되기까지는 11년이 남았다. 길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못 견딜 정도로 길 것 같지도 같았다.

“십 년을 책임질 수 있다는 거니? 그보다 더 길 수도 있어.”

“개리도 십오 년을 키웠는데요.”

“개하고 사람이 같니.”

“책임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죠.”

어머니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선유는 그녀의 마른 손을 끌어와 두 손으로 감쌌다.

“어머니는 저 키울 때 그렇게 힘드셨어요?”

“…원래 아이는 태어나서 일 년간 효도 다 하는 거야.”

“…….”

“그때 엄마 보고 웃어 준 걸로 효도 다 한 거야. 그거 생각하면 무슨 사고를 쳐도 안 미워져서 키우는 거지.”

모친의 설명에 선유는 가만히 웃었다. 그 말을 듣자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던 탓이다. 무엇을 해도 웃고 따르기 바빴던 지금보다 더 작았던 한주.

“저한테 한주도 비슷해요.”

“…….”

“한주가 다섯 살 때 저한테 준 거 생각하면 무슨 사고를 쳐도 괜찮을 거 같아요.”

“한주 알파라며.”

“뭐 어때요. 제가 오메가도 아닌데. 게다가 신지운이랑 친구여서 대충 알아요. 모르는 건 공부하면 되고, 공부는 제 특기고요.”

“말은 잘 한다.”

반쯤 포기한 듯한 어머니의 말에 선유는 남은 맥주를 마시고 캔을 구겨 재활용 통에 넣었다. 밤이 늦었다는 말로 어머니를 손님방에 들여보내고 소파에 더 앉아 있다 일어났다.

간단히 씻고 방에 들어가자 침대 위가 불룩하게 올라와 있었다. 마치 공처럼 몸을 말고 자고 있는 한주를 내려다보다 침대를 빙 둘러 옆으로 돌아가 위에 누웠다. 침대가 꽤 넓어서 작은 아이와 누우면 서로 전혀 닿지 않고 잘 수 있을 정도였다.

선유는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얗고 마른, 아직 젖살이 통통해야 할 아이의 마른 뺨 위에 손바닥에 살짝 얹어 보았다. 차가울 거라 생각했는데 따뜻해서 놀랐다.

아예 몸을 옆으로 돌리고, 선유는 한참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대체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이렇게 작은 애를 때릴 수가 있지? 다시금 화가 치솟아서 눈살을 찌푸렸다가 고운 얼굴을 보며 다시 표정을 풀었다.

이마를 살짝 만졌다가 말랑말랑한 귓불과 뺨도 쥐었다 놓고 팔을 뻗어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순간 가슴을 스치던 한기가 사라지는 듯했다. 항상 활동하기 좋은 온도를 맞춰 두어 추울 리 없건만, 이상하게 남아 있던 서늘함이 순간 일소되었다.

사람 체온이 따뜻하긴 하구나, 아이라서 더 따뜻한 걸까. 다른 사람과 함께 잔 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선유는 부드러운 아이의 머리카락에 코끝을 비비며 작은 등을 도닥이다 선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아마도… 제 평생 아이의 체온을 느껴 볼 거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아이란 제 인생에 아예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이리 생소한 것일 터였다.

***

선유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오전 반차를 냈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냐며 의아해하는 지운에게 나중에 얘기하자며 전화를 끊고,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아이에게 내주었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들려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에 먹을 거라곤 정말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요리 잘하면서 왜 안 해 먹어.”

“설거지가 귀찮아서….”

선유는 요리는 곧잘 했지만, 그 준비 과정과 뒤처리를 귀찮아했다. 어머니는 이번 기회에 선유의 생활력을 다 살펴보고 가겠다는 듯이 아침부터 여기저기 뒤적거렸다.

“세탁기는 쓰는 거니?”

“그럼요.”

속옷과 양말까지 세탁소에 맡긴다는 걸 알면 아마 등짝을 얻어맞을지도 몰랐다. 선유는 식은땀을 흘리며 빠르게 시리얼을 먹어 치웠다. 한주는 선유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 속도에 맞춰서 허겁지겁 숟가락을 놀렸다. 그러다 크게 사레가 들려 기침을 몇 번이나 하는 바람에 선유가 천천히 먹으라며 아이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오늘 이모네 가실 거죠?”

“그래.”

“저 한주랑 쇼핑하러 갈 거니까 태워다 드릴게요.”

“회사 안 가고?”

“휴가 하루 더 냈어요.”

갑자기 아이가 생긴 탓에 준비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었고, 아이 혼자 두고 회사를 갈 수도 없었다. 선유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면서 한주는 주눅이 들었다. 선유는 눈꼬리까지 축 처진 아이를 보며 한 번 숨을 삼키고 가볍게 웃어 주었다. 하지만 사사건건 분위기를 살피며 눈치를 보는 게 안쓰러워서 쉽지는 않았다.

아침으로 겨우 시리얼을 먹인 게 미안하여 한주에게 빨리 맛있는 걸 먹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선유는 바로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목욕부터 해야 할 것 같아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더니 한주는 기겁하며 혼자 씻을 수 있다고 욕실로 도망쳤다. 그 모양을 보고 있던 모친이 한마디 했다.

“넌 다섯 살 때부터 혼자 씻었어.”

“…….”

“너무 아기 취급하면 애도 싫어한다.”

한주가 미국 왔을 때는 씻겨 줬던 거 같은데, 같이 목욕했던 기억을 떠올리던 선유는 아이가 나오길 기다려 옷을 챙겨 주었다. 다른 옷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어제 입고 온 그대로 줄 수밖에 없었다. 바스 타월을 덮어쓰고 꼬물대며 옷을 챙겨 입는 모습이 귀여웠지만, 드러나는 멍과 손자국에 쓴 침이 돌았다.

“한주야, 집에서 그냥 쉴까?”

“…아뇨?”

아이는 선유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저런 상처쯤은 익숙해 보여서 마음이 좋지 않았으나, 외출에 들뜬 한주를 위해 계획대로 하기로 하였다.

나름 야무진 손으로 열심히 입었건만, 한주는 니트를 뒤집어 입었다. 가만히 그걸 보고 있던 선유가 니트 아랫자락을 잡아 휙 벗겨내고 다시 제대로 옷을 돌려 입혔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한주는 선유만 올려다보았다. 작은 얼굴 가득 들어찬 당황이 더 귀여웠다.

코트도 패딩도 입힐 만한 게 없어서 선유는 옷장 안쪽에서 잘 입지 않던 커다란 숄을 꺼내 둘둘 한주의 어깨부터 감아 주었다. 그러다 아이에게 제대로 된 겉옷 하나 입히지 않았던 그 삼촌이란 작자를 떠올리며 이를 으득 갈았다. 그 소리에 놀라 굳는 아이의 뺨을 매만져 주고 다정스레 물었다.

“한주야, 안 추워?”

아이는 입술을 꼭 다문 채 고개만 저었다. 선유가 살짝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뺨을 만져 주자 간신히 빙긋 웃었지만, 가느다란 미소는 곧 사그라졌다.

한주는 아침부터 조마조마해 보였다. 불안한 얼굴을 했다가 선유가 말을 걸면 간신히 웃었지만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숨을 꾹 삼켰다. 무언가 무척 힘겨워 보여서 선유는 애써 묻지 않았다.

한주에게 숄을 둘러줘도 목이 훤히 드러나서 목도리도 하나 가져와 가느다란 목에 꼭꼭 감아 주었다. 그러자 뺨이 살포시 풀어졌다. 말랑해지는 얼굴이 귀여워서 뺨을 한 번 꼭 쥐었다가 놓자 한주는 순간 무척 예쁘게도 웃었다. 그 미소는 한주가 1년 동안 완전히 잊고 있던 것이었으나 선유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다섯 살이었던 한주는 항상 이렇게 웃었으니까.

평소처럼 머리를 세팅하려던 선유는 사업용 머리 스타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가볍게 스프레이를 뿌려 앞머리 정리만 했다. 평소에도 그렇게 다니라며, 머리 다 올리는 거 안 어울린다는 모친의 말에 애매모호하게 웃고 코트만 챙겨 입었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모의 집에 어머니를 내려 주고, 선유는 한주를 조수석으로 오게 했다. 안전벨트를 꼼꼼하게 매 주고 불편해 보이는 목도리를 풀어 뒷좌석으로 던져 놓았다. 어차피 밖에 걸어 다닐 일도 별로 없는데 과잉보호를 하는 건가 싶었지만, 어제 숨넘어갈 듯 기침을 해대던 걸 생각하면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한주는 조수석에 앉아서 몇 번이나 선유 쪽으로 곁눈질을 했다. 그러다 빨간불에 차를 정지시키고 아예 고개를 돌려 바라보고 있던 선유와 눈이 마주치자 경기 들린 듯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

“…아, 아니에요.”

“할 말 있어?”

한주는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젓더니 다시 앞을 보았다. 이제 아홉 살인데 벌써부터말을 삼키는 법을 배우면 어떡해, 선유는 혀를 차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러는 사이 백화점에 도착했다.

손을 잡으라고 내밀자 한주는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망설이고 망설이다 눈을 꾹 감고 선유의 손을 잡았다. 꼭 손잡고 다닐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아이를 잃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형이… 이제 제 아빠가 되는 거예요?”

조용히 따라오던 한주가 물었다. 망설이는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에 한주가 그 상황을 꺼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아빠가 되기엔 좀 그렇지… 호적은 그렇게 정리되겠지만 호칭마저 아빠라고 부를 필요는 없을 듯했다.

“한주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저는….”

“응?”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우물대는 한주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대고 선유가 물었다. 허리를 잔뜩 숙이고 다정스레 되묻는 것에 한주는 입가에 손을 말아 쥐고 비밀 얘기라도 하는 양 소곤소곤 속삭였다.

“…형이 좋아요.”

“그럼 형이라고 하자. 아빠는 나도 좀 그래.”

그 대답에 한주는 흐릿하게 웃었다. 선유는 모든 걸 포기한 아이의 행동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왠지 눈가도 발갛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머리를 가만가만 쓸어 주고 달래듯 두드렸다. 아예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자 한주가 갑자기 목을 끌어안아 왔다. 선유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자그마한 등을 안고 도닥일 수밖에 없었다.

한주는 한참 후에야 선유를 놓아주었다. 괜찮으냐 묻는 질문에는 고개만 끄덕였다. 떼를 쓰고 투정도 부릴 만한데 아이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게 삼촌한테서 학대당한 증거 같아서 선유는 입이 썼다.

백화점은 익숙한 곳이었지만, 아이 옷은 어디서 사는지 몰랐다. 자그마한 한주 손을 잡고 서서 선유는 한참 층별 안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꽤 높은 층에 위치한 ‘유아동’이란 글씨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단 한 번도 유심하게 본 적 없었던 코너에 들어서서 옷을 들자마자 직원이 옆에 붙어서 선유의 차림새부터 훑었다. 그러고선 영업하려는 듯 한껏 웃으며 나름대로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 아이가 엄청 예쁘게 생겼네. 오빠예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나 보다. 이거 코트 예쁘죠? 이제 봄옷 나올 때라 할인해요.”

한주가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여자아이처럼 보이진 않는데. 하지만 아직 어리고 워낙 올망졸망하게 생겨서인지 얼핏 봐서는 착각할 만도 했다. 게다가 옷도 전부 같이 지내던 여자 사촌들 것을 물려 입은 터라 더더욱.

“오랜만에 만나서 형 노릇 좀 하려구요.”

굳이 직접적으로 말을 고쳐 주지 않고 형이란 걸 어필하고서 선유는 알아서 보겠다고 영업사원을 밀어냈다. 하지만 아이 옷 사이즈를 잘 알지 못해서 한참 이것저것 들었다 놓았다가 하나씩 한주 어깨에 대어 보고 몇 개를 집어 같이 탈의실로 들어왔다. 엉성하게 입혀 둔 숄을 벗겨 옆에 걸어 놓고 니트 밑자락을 붙들자 다급히 한주가 선유의 손을 막았다.

“저, 저 혼자 입을 수 있어요.”

너무 애 취급을 했나. 아홉 살일 때의 자신을 다시금 떠올려 본 선유는 가볍게 웃으며 한주에게 옷을 건네주었다. 그때 저는 운전 외에는 혼자서 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사이즈만 맞는지 보자. 입고 나와.”

한주가 옷을 입는 동안, 선유는 탈의실 앞에 서서 변호사와 통화했다. 그와 거래하는 변호사는 회사 차원에서 계약을 맺은 터라 가족 관련 법에 대해서는 전문이 아니었다. 다른 변호사를 연결해 주겠다는 말에 긍정하고, 지운에게 연락해 오후에도 회사에 나가지 못할 것 같다며 오후 미팅 참석을 요청했다.

- 드디어 네가 일을 좀 떼는구나.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그래. 임 실장님하고 잘 좀 부탁한다.”

- 걱정 마.

“포트폴리오 설명만 잘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니까 그렇게… 어, 한주 벌써 나왔어?”

- 뭐? 한주? 그게 누구야?

“끊는다. 미팅 끝나면 연락해.”

지운의 외침을 완전히 무시한 선유는 핸드폰을 코트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한주는 새 옷을 입은 게 어색한지 몇 번이나 후드티 밑자락을 조물조물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아홉 살인데 여섯 살, 일곱 살 아이들이 입을 만한 옷이 맞는구나. 선유는 사이즈 표를 확인하고 한주의 어깨를 살살 밀어 거울 앞에 세웠다. 거울 옆에 줄자가 붙어 있어서 키를 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주의 머리끝이 닿은 곳은 120cm가 채 안 되었다.

“예쁘다. 노란색이 잘 어울리네.”

“병아리 같은데….”

병아리 같다니, 삐약삐약대며 돌아다니는 작은 동물은 지금의 한주를 무엇보다 잘 설명해 주는 단어였지만 장본인은 그 수식어가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선유는 새파란 색의 트렌치코트도 하나 찾아와서 그 위에 입혔다. 노란 병아리가 파란 우비를 입은 거 같아서 더욱 귀여웠다.

“파란 거 위에 입으니까 괜찮지?”

한결 좋아진 얼굴을 보며 선유는 팔을 걷어붙였다. 장바구니를 열심히 채울 시간이었다.

***

아침을 시리얼 따위로 허술하게 먹인 걸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선유는 점심을 아주 푸짐하게 시켰다. 볶음밥, 함박스테이크, 파스타 등등 아이가 좋아할 만한 음식이란 음식은 다 사서 먹였다.

생각보다 잘 먹는 한주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입가에 묻은 소스만 가끔 닦아 주었다. 그러면 아이는 묻히고 먹은 게 부끄러운지 조금 얼굴을 붉혔다. 선유는 남이 먹는 거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맛있다고 한주가 말할 때마다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면서 뿌듯하기까지 했다.

잔뜩 쇼핑한 옷을 차에 가져다 두고 선유는 신발과 가방을 사기 위해 다시 백화점으로 돌아왔다. 원래 한주가 쓰던 물건을 챙겨서 보내 달라고 얘기는 해 놨고, 내일 가져다주겠다는 답은 들었지만 어차피 그 삼촌이란 놈이 제대로 된 걸 사 줬을 리가 없으니 웬만한 건 다 버릴 생각이었다.

“신발 엄청 작다.”

신발 매장 직원이 한주 발 크기를 잰 후 운동화 몇 개를 꺼내 주었다. 손바닥 위에 두 켤레가 다 올라올 정도로 신발이 작아서 선유는 속으로 앓는 소리를 삼켰다. 중년 여성 직원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응했다.

“애들 발 워낙 쑥쑥 커서요. 그렇게 작은 건 몇 년 안 가요.”

혼자서 뭐든 할 수 있다고 했지만, 한주는 아직 운동화 끈은 잘 못 묶었다. 자그만 손으로 한참 씨름하다가 끝내 잘 묶지 못했는지 신발 속으로 끈의 끝부분을 밀어 넣고는 아닌 척, 원래 끈이 없었던 척했다.

“한주야.”

“예?”

부름에 올려다보는 얼굴에는 선망과 두려움, 기쁨과 불안함이 공존했다. 그 복잡스러운 표정을 바라보다, 선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애써 꾹꾹 숨긴 끈을 신발 안에서 꺼내 리본 모양으로 곱게 묶어 주었다.

“잘 못 하겠으면 해 달라고 하면 돼.”

“…예.”

“한주는 아직 아홉 살이고, 모든 걸 다 잘 할 수는 없으니까. 모르면 배우면 되고.”

선유는 아예 한주를 매장 의자에 앉히고 리본 끈 묶는 법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각자 운동화를 하나씩 쥐고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 정도 시범을 보여 주자 한주도 어설프게나마 리본 모양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가만히 그 모양을 보고 있다 선유는 잘했다는 의미로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한주가 끈을 묶을 수 있게 되었지만, 혹여나 끈이 풀려 밟아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선유는 벨크로 타입의 운동화 두 켤레와 학교에서 신을 실내화를 샀다. 신발 쇼핑을 마친 다음은 가방 쇼핑이었다. 깔끔하게 사각형으로 모양 잡힌 책가방도 빠르게 하나 샀다.

가구 코너까지 들러 책상은 배달을 시키고, 폭신폭신한 거위 털 이불을 사고, 지하 식품 코너에서 장까지 본 후에야 쇼핑은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자동차 트렁크를 꽉꽉 채워 선유는 백화점을 나섰다. 그때까지 지친 기색도 잘 보이지 않던 작은 아이가 조수석에 앉자마자 곯아떨어지는 것을 보며 너무 힘든 스케줄이었나 조금 후회했다.

집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애가 깰까 봐 황급히 전화를 받자 예상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할아버지였다.

- 선유야, 애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정말 미안하다.

“아니에요.”

- 힘들면 언제든 얘기하렴. 한주 이모도 있고, 안 되면 내가 키워도 되니까.

제가 데려간다고 했을 때 본인이 얼마나 안도한 얼굴을 했는지 알면 차마 저런 말은 못 할 텐데… 어쨌든 입에 발린 말이라도 듣는 게 기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서 선유는 조용히 전화를 듣고 있다가 알겠다고 하고 끊었다.

아이를 안고 올라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 사이 한주가 눈을 떴다. 잠기가 별로 묻어나지 않는 눈가를 괜히 슥슥 문지르며 선유의 종용에 차에서 내렸다.

“두 번 왔다 갔다 하면 되려나.”

트렁크를 열어 본 선유는 잠시 한숨 쉬었다. 아무리 봐도 절대 한 번에 옮길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우선 식료품과 옷을 꺼내 드는 순간, 작은 손이 매달리듯 짐을 가져가려 했다.

“무거워, 한주야.”

“들 수… 있어요.”

“무겁다니까.”

아이가 답지 않게 고집을 부렸다. 부득불 선유의 손에서 옷 쇼핑백을 빼앗아 가더니 이번엔 이불까지 들려고 했다. 제 키보다 더 높은 이불 뭉치 앞에서 그러는 걸 보니 어이가 없어서 선유는 아예 팔로 그 앞을 막았다.

“왜 그래.”

“들 수 있는데….”

“들 수 있는 건 알겠는데, 안 들어도 돼.”

“들고 싶어요, 제가 들고 싶어요….”

들 거라고 고집에 고집을 부리는데도 선유가 봉지를 주지 않자 한주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커다랗게 뜨인 눈에서 꼭지 열린 듯 뚝뚝 눈물이 쏟아지는 게 서러워서 죽을 것처럼 보였다.

“…한주야?”

선유는 들고 있던 봉지를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무릎을 굽혀 앉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떻게든 터져 버린 눈물샘을 막아 보려 애를 쓰는 한주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또 그때처럼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그저 삼키기만 하는 아이를 끌어안고 선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주야, 왜 울어, 응?”

아무리 말을 걸어도 아이는 대답없이 그저 뚝뚝 눈물을 떨구며 한 번씩 숨넘어갈 듯 가슴을 부풀렸다. 그냥 이렇게 두면 되나? 어떻게 달래 줘야 하지? 아니 애초에 왜 갑자기 우는 거지? 이유를 모르니 달래 줄 방법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저 기계처럼 한주의 등을 두드리던 선유의 눈에 익숙한 구두가 보였다. 천천히 시선을 올리자 신지운이 턱이 빠진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최선유, 너… 언제 애 낳았어?”

“…헛소리 하지 마.”

눈이 마주치자마자 헛소리를 지껄이는 지운에게 짐이나 좀 들라고 눈짓을 했다. 지하 주차장은 싸늘해서 계속 이대로 있다가는 한주가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익숙한 심부름에 지운은 가뿐하게 이불, 식재료, 옷 봉투를 다 들었다. 선유는 아직도 우느라 정신이 없는 한주를 훌쩍 들어 안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지운이 대체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물었지만, 선유는 우선 무시하기로 했다. 애부터 달래 놓고 봐야 했다.

보일러를 따뜻하게 틀고 선유는 한주를 소파에 앉혔다. 슬쩍 눈치를 보던 지운은 봉투를 열어 냉장고 안에 대충 정리해 넣고, 그 안에서 자기가 먹을 것-맥주-도 꺼내 식탁에 앉아 둘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한주야. 형 봐봐, 응?”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푹 숙였다. 선유는 한주를 살살 달래 코트를 벗겨 내려놓고 티슈를 뽑아 잔뜩 물러 버린 얼굴을 닦아 주었다.

“왜 그렇게 울어.”

“…….”

“한주야.”

“형….”

“응.”

갑자기 와락 아이가 품에 안겼다. 목에 감긴 팔이 겁이라도 먹은 듯 덜덜 떨리고 눈가가 닿은 어깨가 빠르게 젖어 들었다. 두터운 니트 씨올 사이로 스며드는 뜨거운 물기가 심상치 않았다. 선유는 이러다 애 넘어갈라 걱정되어-이미 어제 과호흡증후군으로 넘어간 전적이 있는 터라- 더는 이대로 놔둘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한주야. 말 안 하면 몰라.”

“…….”

“말을 해야 들어주지.”

“…제가, 저, 저 잘할게요.”

“…응?”

한주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간신히 말을 이었다. 선유는 거친 숨소리가 섞인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형, 힘들게… 안 할게요. 혼자 밥도 먹을 수 있고, 집에 혼자 있어도 돼요. 학교도 혼자 갈 수 있어요. 청소도 할 수 있….”

“한주야.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차마 숨기지 못한 원망과 서러움을 드러내며 한주는 주먹 쥔 손으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두덩을 문질렀다.

“…형이랑 같이 살자고 했잖아요.”

더더욱 알 수 없는 소리에 선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골똘히 생각할 때 짓는 표정이었지만, 한주는 그걸 보자 겁먹은 듯 선유에게 매달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팔을 거뒀다. 벌 받는 것처럼 오그라든 어깨를 보며 선유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고, 한주는 더더욱 움츠러들었다.

잠깐의 시간 동안 선유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있었던 일과 한주의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아침부터 잘 웃지도 못하던 아이, 풀 죽은 채 얼어붙은 풀잎처럼 버석한 태도만 보였다. 지금의 아이가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제 삼촌에게 돌아가는 것이겠지. 그리고 저와 같이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설마… 선유가 짚이는 건 두 가지였다. 어젯밤 방문을 닫기 전 모친과 나누던 제 대화를 들었다면 아침의 그 허망한 태도가 이해가 되었고, 그와 연계하여 할아버지와의 통화 또한 심상치 않게 들렸을 터였다.

한주는 또 버려질 거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형….”

선유의 침묵에 한주의 목소리는 금세라도 바스러질 것 같이 말라 버렸다. 갑자기 눈물마저 메마른 듯 버석해졌다. 체념의 빛이 가득한 아이의 뺨을 가만히 매만지던 선유가 한숨을 쉬려다 간신히 참았다. 말 한마디, 숨소리 하나 조심해야 했다.

아이는 눈치가 빨랐다. 듣지 않아도 일 년간의 생활이 예상될 정도로 하나하나 눈치를 봤다. 사람의 표정, 말투, 대화에서 저를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을 누구보다 기민하게 읽었다. 조금이라도 덜 혼나고, 덜 맞으려고 그런 것이겠지.

“한주야. 너 안 보낼 거라고 얘기했어.”

“…형.”

“혼자 밥 못 먹고, 집에 혼자 못 있어도 돼. 학교도 내가 데려다줄 거고, 너한테 청소하라 마라 소리도 안 할 거야.”

“…….”

“네가 하고 싶으면 하는데, 내가 너 다른 곳 보낼까 봐 그러는 거면 안 해도 돼.”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랗게 눈을 뜨고 있던 한주는 선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라서, 선유도 아는 의미라서 잠시 울게 두었다.

“이렇게 잘 울어서 어째.”

“죄송… 죄송해요…. 흐읍….”

끅끅거리며 안도의 눈물을 한참 토해 내던 한주가 그대로 쓰러져 잠든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제 목을 끌어안고 매달려 잠든 아이를 쳐다보다 선유는 그대로 안아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내내 눈높이를 맞추느라 굽히고 있던 무릎은 이미 굳어 경련이 일기 직전이었고, 선유는 그대로 넘어질 뻔 했다.

“조심 좀 해라.”

“너 아직도 있었어?”

“완전히 잊혀 있었지.”

맥주 한 캔을 다 마시며 촌극을 구경하고 있던 지운이 선유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선유는 절뚝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아이를 침대에 눕혔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 주고 나서야 한숨을 뱉을 수 있었다. 문가에 기대선 지운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갑자기 웬 애야. 쟤 때문에 휴가 낸 거야?”

“…얘기하려면 좀 길어.”

문을 완전히 닫고 나온 선유가 이 겨울에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툭툭 손등으로 닦아냈다. 이래서 애 앞에서 물 한 잔 마시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는 거구나, 아이의 말이 이해되는 순간 피가 다 식는 느낌이었다. 모친이 말한 쉽지 않을 거란 이야기가 다른 의미로 와 닿았다.

설마하니 그 몇 마디 말과 통화 하나로 그 정도까지 생각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눈물은 나는데 그렇다고 제멋대로 울지도 못하고, 다급하게 매달렸다가 두려워하며 손을 거두던 것을 생각하니 폐가 죄이는 느낌까지 들었다.

지운이 냉장고에서 꺼내 준 맥주를 따며 선유는 저릿한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리고 작년 장례식부터 시작해서 오늘까지 있었던 일을 대충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쟤 네가 키운다고?”

“그래.”

“음….”

“너까지 잔소리할 거면 그만 둬.”

“내가 너한테 잔소리를 왜 해. 그냥 좋은 시절 다 갔다 싶은 거지.”

선유는 월반을 한 터라 미성년자의 나이로 대학을 다녔다. 스무 살이 넘었을 때는 이미 사업 기틀을 잡고, 대학원을 다니던 시기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도 스테디한 관계를 가지던 사람은 시기별로 몇 있었지만, 지운처럼 제대로 놀아 본 적은 없었다. 신지운은 학교 내에서 알아주는 방탕아였기에 비교 대상으로 삼기엔 좀 글러 먹었지만.

“됐어. 애초에 노는 데 관심도 없었는데.”

“근데… 괜찮겠냐? 너 완전 워커홀릭이잖아. 애 데리고 살 수 있겠어? 개나 고양이도 같이 놀아 주고 시간 보내야 하는데.”

“여기 초등학교 우리 집이랑 회사에서 가까우니까, 학교 끝나고 회사 와 있으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머리 아프게 하지 마.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으니까.”

이마를 꾹꾹 누르던 선유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지운에게 손바닥을 내밀며 요구했다.

“미팅 결과 내놔.”

“잊어 먹질 않는구나.”

“주러 온 거잖아.”

“예예. 계약서 도장 찍고 왔습니다.”

“회의록은.”

“메일로 보내 놨어.”

갈색 종이봉투를 열어 계약서를 확인한 선유가 다시 지운에게 그것을 건네주고, 비척대며 일어났다. 저녁을 먹을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잠이 고팠다.

“전무님 오늘도 수고하셨고, 문 닫고 집에 가라.”

“무슨 말투냐, 그건.”

“친구 겸 사장 말투.”

빨리 한주의 따끈한 몸을 끌어안고 자고 싶었다. 목덜미에 닿는 그 뜨거운 숨이 그리웠다. 얼른 집에 가라는 의미로 지운에게 손을 내젓고, 선유는 간단하게 씻은 후 방으로 들어갔다. 퉁퉁 부어오른 얼굴에 잠시 웃음이 나왔지만, 그것도 곧 사그라졌다.

다시 한번 생각을 해야 했다. 책임질 수 있는가, 체온이 낮은 손바닥으로 뺨과 눈두덩을 몇 번 매만져 주며 선유는 한참 어두운 방 안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가 살짝 땀에 젖어 촉촉해진 이마와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다시 생각해도 결론은 같았다.

***

선유는 어머니가 한국에 계신 동안에는 한주를 이모네에 잠시 맡겼다. 하지만 아침에 두고 갈 때마다 불안에 떨고, 저녁에 데리러 가면 반가워하다 못해 새끼동물처럼 매달려 떨어질 생각을 않는 아이를 보니 그냥 회사에 데리고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는 눈물까지 뚝뚝 흘리는 걸 보고나니 더더욱 그러는 게 낫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선유는 이리저리 시행착오를 겪으며 호적도 정리하고, 한주를 전학도 시켰다. 삼촌과 관련된 서류 정리를 위해서 변호사에게 두둑한 수임료도 줘야 했지만, 한주의 유산을 가져오기 위함이므로 그리 아깝지 않았다.

한주의 개학에 맞추어 선유의 어머니도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제 정말 아이를 혼자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선유는 좀 더 단단히 마음을 먹었으나, 한주는 무척 생활력이 강한 아이여서 그 다짐을 무색하게 했다.

선유의 생활은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세탁소에 맡겼던 옷을 입고 아이의 몸에 발진이 나는 것을 발견하고선 순한 세제를 골라 사서 집에서 세탁하기 시작했다. 불 한 번 붙은 적이 없이 자리만 차지하던 가스레인지는 매일 같이 불타올랐고, 식기세척기도 들여놓았다. 물걸레 청소포가 찬장에 들어찼고, 청소기도 항시 대기 상태였다.

선유가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그것을 시행하는 건 한주였다. 아주 올된 아이였던 선유를 키워 낸 어머니가 놀랄 정도로 한주는 똘똘했고, 한 번 가르쳐 준 건 잊지 않았다. 선유는 아이가 혹시 또 돌려보내지는 게 겁나서 그러는 것 같아 안쓰러워했지만, 그걸 굳이 말리진 않았고 그런 내색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안 해도 된다고, 하고 싶으면 하라고 던지듯 얘기했을 뿐이었다.

개학식 날, 선유는 한주에게 제일 예쁜 옷을 골라 입혔다. 진한 녹색 니트 위에 새파란 색의 패딩을 입히고 회색 목도리를 둘둘 감아 주었다. 찬 느낌의 피부색과 잘 맞아서 무척 귀여웠다. 열흘 동안 잘 먹인 덕분인지 솜털이 보송하게 난 뺨이 이전과는 달리 말라 있지 않았다. 정말 잘 빚어 놓은 인형처럼 예뻐서 선유는 자기도 모르게 한주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형?”

“예뻐서.”

“…….”

“예쁜 거 싫어?”

아이는 진퇴양난에 빠진 얼굴이었다. 싫다고 하기도, 좋다고 하기도 애매모호한 모양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한주는 한마디 말을 내놓았다.

“…싫지 않아요.”

선유의 목을 끌어안고 이렇게까지 귀여울 수 있나 싶은 말을 했다.

“형한테 예쁜 건 좋아요.”

그러고는 그림자 하나 없이 순간 밝게 웃는 얼굴에 선유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아이는 웃는 게 효도라더니, 제가 태어나고 일 년간 웃은 거로 효도 다 했다는 모친의 말이 다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선유는 꼬박꼬박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수업이 끝나면 회사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아이 때문에라도 식사를 챙겼고, 늦더라도 집에는 꼭 들어갔다. 더는 사무실 소파에서 자지 않는 선유를 본 지운이 애 때문에 드디어 사람다운 생활을 한다며 가짜로 눈시울을 붉혔다.

전학을 한 탓에 적응이 힘들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선유는 한주에게 매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미있었던 것은 뭔지 묻고 같이 알림장을 읽었다. 개학 후 이 주 정도 지났을까, 한주의 알림장에 선유가 걱정하던 내용과 함께 가정통신문이 배달되었다.

“수업 참관이랑 학부모 회의인가….”

개학할 때만 해도 꼭 가야지 생각했었는데, 막상 실제로 눈앞에 닥치고 보니 조금 머리가 아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 선유는 스케줄러를 펴 일정을 확인했다. 눈치를 보던 한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부모님이 바쁘면 안 오셔도 된다고 하셨어요.”

“바빠도 가야지.”

“형 많이 바쁘잖아요.”

“괜찮아. 지운이 보내면 돼.”

지운의 이름이 나오자 한주는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풀었다. 짓궂은 성격의 지운은 한주가 회사에 와 있으면 항상 괴롭히곤 했기 때문이었다. 뺨을 꼬집거나 사사건건 말꼬리를 잡거나 아기 취급을 하니 한주가 그를 좋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선유는 지운과 한참의 통화 끝에 간신히 스케줄을 조정했다.

“고맙다.”

- 점심도 거르고 가야 해.

“술 사 줄게.”

- 됐다. 꼬맹이는?

“그러니까 한주가 싫어하지.”

- 재밌잖아.

전화를 끊은 선유가 스케줄러를 정리한 후 덮어서 가방에 넣었다. 한주는 자리에 앉아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왜 그래. 내가 가는 거 싫어?”

“…아뇨.”

조금 꺼리는 기색이 보여서 선유는 의아했다. 한주는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선유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항상 긍정적이었는데 이런 반응은 의외였다.

“딸기 먹을래?”

선유는 바구니에 한가득 딸기를 씻어와 과도로 꼭지를 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주에게 두 개를 먹일 동안, 저는 하나를 톡 입에 넣어 씹었다. 새끼 새처럼 음식 받아먹는 게 익숙하지 않은 한주는 이 상황에 거부감을 느끼는 듯 했으나, 선유가 흐뭇하게 웃어 주자 곧 적응하려 노력했다.

“맛있어?”

“…예.”

“딸기 좋아하는구나. 잘 먹네.”

빨간 과육을 꼭꼭 씹어 삼키고 간신히 대답한 한주는 선유가 또 먹여 주는 딸기에 입이 막혔다. 그러다 선유가 먹는 양 보다 먹여 주는 게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곤 바구니에서 딸기를 가져와 조그만 손으로 조물조물 딸기 꼭지를 하나 땄다. 그리고 조금 물러진 딸기를 선유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나 먹으라고?”

입 안 가득 딸기가 들어 있어 말은 하지 못하고 한주는 고개만 끄덕였다. 선유는 잠시 한주를 바라보다가 입을 벌려 딸기를 받아먹었다. 손을 타서 좀 물렁물렁한 딸기를 꼭꼭 씹어 삼키자 자그만 얼굴이 환희로 가득 찼다.

“맛있네.”

“…딸기 맛있어요.”

둘이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아 딸기 한 바구니를 다 비워 냈다. 선유는 한주를 욕실로 데리고 들어가 같이 이를 닦고 세수도 한 다음에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예전에 혼자 지낼 때는 속옷 한 장만 입고 자곤 했는데, 이젠 잠옷도 다 챙겨 입었다. 아이가 있으니 마음대로 지낼 수는 없었다.

손님방에 침대도 있고, 이불도 새로 사 두었지만 선유와 한주는 아직 같이 자고 있었다. 처음 시작이 그래서인지 한주는 그 자리가 제 자리라고 생각하는 듯했고, 선유도 침대를 데우는 아이 특유의 따끈함에 중독되는 듯하여 굳이 잠자리를 변경하지 않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침대로 기어 올라온 아이가 이불을 덮으며 소곤거렸다. 예의 바른 인사가 귀여웠다. 답례로 보송한 이마에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떼어 내고 잘 자란 인사를 하자 한주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다 선유에게 물었다.

“형은… 뽀뽀를 좋아해요?”

“응?”

“밤에도 아침에도 저한테 뽀뽀하니까….”

‘뽀뽀’를 발음하는 입술 모양에 선유는 육성으로 헉 소리를 낼 뻔했다. 귀엽다고, 예쁘다고 하면 또 조금 난감해할까? 또 형한테 예쁜 건 좋다고 하려나. 한주의 눈을 둘러싼 속눈썹이 팔랑팔랑 소리를 내는 듯했다.

어떻게 이렇게 예쁜 아이를 때릴 수가 있을까. 이제야 거의 사라진 몸의 멍을 생각하자 화가 치솟았지만, 이 온화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은 절대 다시는 발생하지 않을 거고, 몸의 상처에 대해서는 한주도 저도 암묵적으로 말 한 번 꺼낸 적 없었다. 선유는 이런저런 감정을 담아 다시금 한주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아침에는 오늘 하루도 좋은 일 있으라고 하고. 밤에는 좋은 꿈 꾸라는 의미로 하고.”

“…….”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하는 거야.”

“…그런 거예요?”

“그런 거예요.”

이불로 얼굴을 반만 감춘 채로 눈을 굴리던 한주가 휙 이불을 걷어 내고 일어나더니 선유의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다시 이불로 발개진 얼굴을 가리고 웅얼웅얼 인사말을 입 안에서 굴렸다.

“형도… 좋은 꿈 꾸세요.”

쑥스러워하는 걸 보니 심장이 다 아팠다. 꽉 끌어안고 머리카락을 마구 문지르고 쓰다듬어 주었더니 한주가 드물게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그렇게 서로의 뺨에 입을 맞춰 주는 건 매일 매일 두사람 사이의 인사가 되었다.

***

출근을 했다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다시 집에 돌아온 선유는 오랜만에 정장을 챙겨 입었다. 최근에는 고객사 미팅을 잘 나가지 않은 터라 학생처럼 입고 다녔는데, 한주 학교에 처음 가면서 그렇게 갈 수는 없었다.

베스트까지 입었다가 이건 좀 너무 전투복 느낌인가 싶어 벗어 두고, 셔츠 위에 베이지색 니트를 겹쳐 입었다. 그랬더니 또 넥타이 색이 튀어서 다른 걸 찾아 옷장을 뒤졌으나, 전부 차가운 느낌의 푸른색 은색 계열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넥타이는 벗고 조금 캐주얼하게 마무리를 했다.

“이놈의 얼굴 좀 어떻게 안 되나.”

신발장 옆에 놓아둔 거울 앞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다 선유는 짧게 한숨 쉬었다. 일을 한 지는 이미 한 손 다 접을 정도고, 사회생활은 더 오래되었지만, 경력에 걸맞지 않게 액면가가 너무 낮은 게 문제였다.

가끔은 남들과 같은 속도로 성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거라 생각은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절대 한주를 데려올 수 없었을 테니 후회하면 안 되었다. 고개를 몇 번 젓고는, 머리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절충안으로 대충 반만 쓸어 올려놓고 구두를 찾아 신었다.

오후 늦게 잡아 놓은 내부 회의는 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가방에 자료와 노트북을 다 챙겨 넣고, 한주의 학교를 향해 걸었다. 학교는 걸어서 십 분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교실로 들어서자 벌써 꽤 많은 보호자가 교실 뒤편에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여성 비율이 조금 높긴 했으나 남자가 아예 없는 건 아니어서 다행… 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선유는 어딜 가든 주목을 받는 입장이었으므로.

하지만 음흉한 뱀 같은 중년 사장님들과 일한 게 벌써 몇 년, 심지어 알파 사장들은 제 얼굴을 핥고 싶은 듯 쳐다보거나, 추파부터 성추행에 가까운 짓도 몇 번이나 해댔던 터라-베타라고 해도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저런 신기하다는 듯한 눈길은 흘러 넘길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의자에 앉으면서 옆자리 사람에게 인사를 하기 무섭게 제일 앞에 앉아 있던 한주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금방이라도 뛰어오고 싶은 것처럼 자리에서 몸을 들썩였다. 노란 후드티를 입고 그러는 걸 보니 마치 보송보송 털 난 병아리 같아 귀여웠지만, 선유는 그저 담담하게 웃으며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듯 눈짓을 했다.

“아버지세요?”

호적은 부자 관계로 되어 있긴 하지만… 갑작스런 질문에 고민하는 사이 수업이 시작되었고, 선유는 답할 시기를 놓쳤다. 그리고 숨죽인 채로 들려오는 속삭임에 무릎 위에 두었던 주먹을 말아 쥐었다.

‘형인가? 형이라기엔 좀 나이가 있어 보이네요.’

‘아빠라기엔 너무 어려 보이지 않아요? 학생 같아 보이는데….’

‘대답 바로 못하는 거 보면 미혼부일 수도 있고.’

미혼부면 어떻고 형이면 어떻고 학생이면 뭐가 어떻다고…. 선유는 무엇 하나 거리낄 것 없었으나, 그 수군거림이 짜증 날 뿐이었다. 모친이 말했던 힘듦에 이런 게 다 포함되어 있었겠지, 나중에야 익숙해질 거고 처음엔 거슬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선유는 다시 한주에게로 집중했다. 아이는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하라는 건 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았다. 대답하려고 손을 들었다가 교사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선유 눈치를 보곤 했고, 시간이 흐르자 후드티 조임 끈을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 또 선유 눈치를 보곤 애써 허리를 세워 바른 자세로 앉으려 노력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면 원래 저 정도인 거겠지? 제 눈에는 좀 산만한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아이들도 노트에 낙서를 하거나 종이를 구겨서 던지기도 하고 서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이 전부 부모에게 뛰어와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한주는 오려다 사람들에게 막혀 교실 중간쯤에 섰고, 후드티 밑자락을 잡고 쭈뼛쭈뼛 거렸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키도 덩치도 작아서 뚫고 들어올 엄두가 나지 않는 듯했다.

“한주야.”

주변에 몰려든 아이들을 헤치고 나선 선유가 한주를 불렀다. 작은 부름에 확 밝아진 얼굴로 다가와 선유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애타게 형을 부르는 소리에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자 한주는 휙 고개를 들어 올리고 개구지게 웃었다.

“수업 잘 들었어?”

“예.”

“선생님 질문에 대답도 잘 하고.”

쑥스러워하는 아이에게 칭찬을 몇 번 더 해 주고, 선유는 한주를 방과 후 영어 수업에 보냈다. 그런 저와 한주를 보며 몇몇 부모와 아이들이 귓속말하며 곁눈질을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부모들과 함께 교실 의자와 책상을 옮겨 회의를 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고 선유는 자리를 잡아 앉았다. 아무리 해도 이 분위기는 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한동안은 매년 해야 할 터였다.

“안녕하세요. 2학년 7반 담임인 이성현입니다.”

한주의 담임 교사가 인사를 하고, 연간 계획과 알림 사항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학부모 회의라고 해도 대부분은 교사가 말하는 시간이었다. 크게 선유가 신경 쓸 건 없어 보였고, 큰 행사만 잘 챙기면 될 듯했다.

“그럼 간단하게 부모님들 각자 소개하는 시간 가지고 마치기로 할까요?”

생긋 웃은 교사가 옆자리의 사람에게 발언권을 넘기려는 순간 교실 뒷문이 벌컥 열렸다. 머리를 양쪽으로 묶은 여자아이가 뛰어 들어오더니 담임 교사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선생님! 애들 싸워요!”

“싸워?”

“한주랑 준호 둘이 싸워요!”

한주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선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기세에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 긁히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한발 늦게 맞은편에서 여자 한 명이 더 일어났고, 선유는 그게 준호의 보호자일 거라 짐작했다.

“죄송하지만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담임 교사는 울기 직전인 아이를 달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선유와 다른 보호자에게도 여기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가 나가고 나서 침묵이 흐르던 사이로 웅성거림이 섞이기 시작했다.

‘부모 없는 애가 있다더니….’

‘우리 애도 부모 없이 형이 키운다는 애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한주라는 애가….’

‘형이라기엔 나이 많아 보이는데….’

‘혹시 미혼부 아녜요? 형이라고 거짓말 한 거일 수도 있죠.’

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한주가 받았을 상처가 눈에 선했다. 전학을 왔으니 주변 아이들에게서 분명히 질문이 쏟아졌을 텐데, 왜 답변을 같이 생각해 주지 못했을까. 한주가 대답을 했든, 대답하지 않았든 아이들은 제 질문의 답을 알아서 얻어 갔을 것이고 그것은 그들의 부모에게도 퍼졌을 거였다.

버티다 못한 선유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담임 교사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준호 어머니, 한주 보호자 분 잠시 뵐까요. 다른 분들은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선유는 이를 악물며 코트와 가방을 챙겨 들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임 교사의 안내에 따라 준비실에 들어가자 머리가 산발이 되고 얼굴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난 한주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옆자리 아이를 노려보다가 선유를 보고는 놀라 스프링처럼 튀어 일어났다.

“한주야. 이게 무슨 일이야.”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주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것 같은 아이는 제 엄마가 들어오자마자 소리까지 내며 울어 젖혔다. 아니, 어디 맞은 것 같지도 않고 상처도 없는데 왜 저래. 선유는 한주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선유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던 한주는 뚝뚝 눈물만 흘렸다.

“형… 쟤가….”

말을 하려다 말고 한주는 꾹 입술을 말아 물었다. 다시 한 번 물으려는 순간 뒤에서 째지는 듯한 외침이 들렸다.

“아빠 없잖아! 너 엄마도 없지? 없는 거 없다고 하는데 왜 때려!”

“준호야.”

“아빠 엄마 없잖아! 왜 가족 소개하라는데 있는 척해?”

“얘가 왜 이래. 엄마가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랬지.”

“거짓말은 나쁜 거잖아요. 엄마도 선생님도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머리가 욱신거렸다. 선유가 엄지 검지로 미간을 누르고 문지르자 한주는 더 서럽게 울었다. 애써 편두통을 밀어내고 선유는 한주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죄송하다 말하던 아이가 거칠게 숨소리를 냈다.

“죄송해요. 우리 애가 하나를 배우면 하나만 할 줄 알아서. 최근에 거짓말이 나쁜 거라고 가르쳐놨더니.”

“애니까요.”

선유는 한주의 뺨을 닦아 주고 허리를 세웠다. 난감한 얼굴을 한 준호의 보호자는 상식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제 아들이 한 짓이 정말 그렇게까지 잘못된 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한주야.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어?”

“…형, 저는 몇 번이나 하지 말라고 했어요.”

“응.”

“영어 수업할 때 가족 소개하라고 해서, 엄마랑 아빠랑 형이랑 소개했어요. 근데 쟤가 왜 거짓말 하냐구… 엄마 아빠 없으면서 거짓말한다고….”

“그래서 때렸어?”

“때린 거 아니에요! 옆에 오지 말라고 밀기만 했어요….”

척 봐도 맞고 손톱에 긁힌 건 한주였다. 준호라는 아이에겐 상처를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덩치 차이가 저렇게 많이 나는데 대체 한주가 어떻게 때린단 말인가. 상황을 보고 있던 담임 교사가 정리를 시작했다.

“아이들끼리 싸운 일인데 여기서 마무리 지으시죠. 준호는 친구가 싫어하는 말 하지 말고. 한주도 친구를 밀면 안 되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결론이었지만 한주가 먼저 준호를 밀었다고 하니 여기서 더 뭐라고 할 순 없었다. 다만 선유는 저와 한주를 가지고 사람들이 설왕설래하던 것을 생각하며 그 뒷담을 종식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준호 어머니. 한주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저는 한주 사촌 형입니다.”

“아, 예….”

“아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건 좋지만, 남이 싫어할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죠.”

막 소리 지르다가 이제야 경직된 분위기를 느꼈는지 제 엄마의 뒤에 숨어 있는 아이를 보며 선유가 한마디 했다.

“세상에 부모가 없는 아이는 없단다.”

선유는 아이를 안아 들려다가 작은 손만 찾아 쥐고, 방과 후 교실로 가 한주의 짐을 찾아 들었다. 교실 밖으로 나오자 그저 선유에게 내주고만 있던 한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학교 정문을 나서자마자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 내부 회의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선유는 잠시 아이의 손을 놓고 전화를 받았다.

- 너 어디야?

“학부모 회의 이제 끝났어.”

- 그럼 지금 회의 올 수 있는 건가?

푹 숙인 아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선유가 한주와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안 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냥 좀….”

- 목소리 별로네. 뭐, 알았어.

“미안하다.”

- 미안할 건 없고. 회의 참석 안 하면 임 실장님 원하는 방향대로 되는 거지 뭐.

“그건 안 되는데.”

- 차라리 육아 휴직해라. 네가 우리 회사 육아 휴직 1호 하면 되겠네.

“애를 낳은 건 아니라 육아 휴직은 안 될 듯.”

- 그건 출산 휴가겠지. 늦게라도 올 수 있으면 와라.

전화가 끊기자 침묵이 맴돌았다. 그리고 한참 말없이 걷기만 하던 둘 사이에 훌쩍거림이 섞였다. 한주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무척이나 애썼지만, 서러움 섞인 울음을 참을 수 없는 듯했다.

“…형, 저 혼자 집에 갈 수 있어요.”

“아냐.”

선유의 거절에 입술을 잘근 뭉개던 한주가 잘못을 토로했다.

“잘못했어요, 형….”

선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이 막히는 경험이 생소해서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한국어든, 영어든, 스페인어든 전달하고 싶은 생각은 언제나 언어화하는데 막힘없던 그였다. 하지만 한주를 만나고 나서, 아이의 앞에서는 말문이 막히는 일이 몇 번이나 일어났다.

“무슨 잘못을 했는데.”

“…친구랑 싸운 거요.”

“…….”

“잘못했어요….”

선유가 말도 없고, 제게 눈을 맞춰 주지도 않자 한주는 더더욱 겁에 질렸다. 주먹 쥔 손으로 눈가가 아프도록 닦아내고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오히려 끅끅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혼을 내거나 화를 내려는 건 아니었지만, 잘못의 초점을 잘 맞추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웠다. 선유는 한주의 양손을 모아 쥐었다.

“친구랑 싸운 게 잘못한 거야?”

그리고 한주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드디어 눈을 맞춰 주자 한주는 한결 안도한 듯했지만, 여전히 겁을 먹은 채였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치를 보는 한주의 뺨을 선유가 살짝 쓸었다. 말랑한 뺨이 축축하게 젖고 찬바람을 맞아서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싸울 수도 있어. 나도 맨날 싸웠는데 뭘. 나보고 원숭이라고 하는 놈들 전부 패 줬거든.”

“…….”

“나한테 얘기를 했어야지.”

“하지만….”

“오늘이 처음 아니지?”

“…예.”

“매일 무슨 일 있는지, 오늘 학교는 재미있었는지 물어봤었잖아. 왜 말을 안 했어?”

“…….”

“우선 집에 가자. 너무 춥다.”

선유가 몸을 일으켜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한주는 뒤에 남겨진 채 거리에 서 있었다. 열 걸음쯤 걷다 아이가 오지 않는 걸 깨달은 선유가 뒤를 돌아보았다. 넋을 잃고 멍하니 있던 한주가 갑자기 뛰어와 선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잘못했어요, 형, 잘못… 잘못했어요….”

“…한주야.”

“형이 저, 귀찮, 귀찮아 할까 봐… 그래서….”

선유는 한주가 하는 말을 그대로 듣고만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한주는 두려워하지 않게 될까, 그동안 저는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한주 귀찮게 생각 안 해. 한주는 형이 회사에서 힘들었다고 하면 귀찮아?”

“아뇨, 안 귀찮…, 절대 안 귀찮아요!”

“근데 왜 나는 귀찮아할 거라고 생각해?”

“…….”

“한주야.”

한주는 선유를 안고 있다가도 저를 귀찮아할까 두려워 다시 놓았다가, 또 견디지 못해 다시 다급히 끌어안았다. 아이 뺨이 파랗게 얼어가는 게 뻔히 보여서 선유는 우선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절박하게 매달리는 한주 때문에 발을 옮길 수가 없었다.

몇 번을 숨을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숙였다 반복하던 한주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삼촌이, 삼촌은 제가… 말하는 거 싫어했어요….”

“…….”

“말하면… 때렸어요. 목소리가 듣기 싫다고 했어요.”

“…….”

“형은 삼촌이 아닌데… 아닌 거 아는데….”

아직 무서워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엔 숨기지 못하는 공포가 스며있었다. 말할 때마다 망설이고, 말을 내놓고도 가끔은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던 이유를 알게 된 선유는 한 번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다시 숙였다. 눈가가 뜨끈했다.

“천천히… 시간이 걸리더라도 괜찮아. 천천히 하자.”

“죄송해요, 형….”

“죄송한 거 아니야. 응?”

“…….”

“나는 한주가 많이 말하고, 많이 얘기해 줬으면 좋겠어. 한주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힘들면, 하지 않아도 돼.”

“힘들어도… 할 거예요.”

“고마워. 나도 처음이라 많이 부족해. 같이 노력하자.”

무섭지만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아이는 강했다. 벌벌 어깨를 떨면서도 어떻게든 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는 입술이 떨렸다.

“가족이잖아. 한주 아빠도, 엄마도, 형제도 내가 되어 줄게.”

가족. 스스로 그 단어를 꺼내 본 건 처음이었다. 같은 집에서 먹고 자면서도 떠올리지 못했던 것, 서로가 하나로 묶이고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좀 더 소중하게 느껴져서 선유는 가만히 아이의 뺨을 감쌌다.

“엄마 아빠 없다고 뭐라 하는 애들 있으면 형이 다 해 준다고 했다고 해. 그래도 뭐라고 하면 내가 혼내줄게.”

고개를 끄덕이는 한주의 손을 잡고 선유는 조금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방향을 틀어 회사로 향했다.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한주와 함께 지내는 건 장거리 달리기와 다름없었다. 마라톤보다 더 길 인생을 같이 지내야 하는데 서로 너무 양보만 하다가 지칠 수는 없었다. 길게 보고 서로 맞춰가는 게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한주가 제게 너무 매달리는 것도, 저도 한주에게 모든 걸 맞춰서도 안 됐다. 서로에게 독이 되어서는 안 됐다.

“형은 회의 가야 되는데, 한주도 회사 같이 갈래?”

“…그래도 돼요?”

“그럼. 학교 끝나고도 매번 오잖아. 나는 일해야 하니까 한주는 가서 숙제하자.”

한주를 데리고 회사에 들어서자마자, 지운은 한바탕 웃어 젖혔다. 빨갛게 부은 눈두덩과 불어터진 뺨을 누르며 놀리는 말에 한주는 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는 울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한주가 우는 걸 보면 숨이 다 턱턱 막히는 것만 같았으니.

선유는 물티슈로 얼굴을 깨끗하게 닦아 주고, 한주에게 잠시 숙제하고 있으라고 했다. 자리는 회의실 유리창을 통해 바로 볼 수 있는 곳에 앉혔다. 순하게 고개를 끄덕인 아이가 가방에서 수학책과 익힘책을 꺼내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모르는 문제 있으면 별표 쳐 놓고.”

“예.”

선유가 회의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한주 주변에 직원들이 몰려들었다. 과자와 초콜릿을 꺼내 잔뜩 쥐여 주며 예뻐해 주는 걸 보고 있자니 괜히 저한테 와서 더 많이 우는 게 아닌가 씁쓸했다.

하지만 사탕을 하나 물고 이리저리 둘러보다 선유와 눈이 마주치곤 퉁퉁 부은 얼굴로도 웃는 걸 보니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

“나 오늘 오후 반차.”

“왜?”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선유는 지운에게 오후 반차를 통보했다.

“한주 부모님한테 다녀오려고.”

어버이날이었다. 미국은 5월 둘째 주 일요일인데 한국은 5월 8일로 고정되어 있다는 걸 아침에야 깨달았다. 가위와 색종이 같은 건 왜 챙겨 오라고 했나 했더니 학교에서 카네이션을 만든단다.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아침에 뉴스를 보다가 어버이날이란 걸 알았다.

“너 오늘은 오후에 나갈 일 없지?”

“어.”

“회사 차 좀 쓸게.”

“그래라.”

노트북을 켜고 선유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부모를 잃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한주는 벌써 두 번이나 부모를 잃었다. 친부모에게서는 버려졌고, 입양된 가족은 저를 두고 다 죽었고. 한주를 위해서라도 선유는 오래오래 살아야 했다. 더는 버려지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건강 검진 받아야겠다.”

“웬 노인네 같은 소리야.”

“오래 살아야지.”

한주도 몇 달 전까지 몸이 그리 좋지 않았으니까 같이 데려가서 검진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가까운 주말에 둘의 검진 예약을 잡았다.

“어린이날에는 뭐 사 줬어?”

“레고.”

“그건 왠지 너 닮았네.”

“미국에 있을 때도 나랑 같이 레고 했거든.”

둘이 다락방에 앉아서 하루 종일 레고를 맞추고 있으면 저녁을 먹으라고 어머니가 부르곤 했었다. 부드러운 기억을 떠올리며 선유는 마우스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얼른 일을 끝내고 한주를 데리러 가고 싶었다.

“한주도 꽤 똑똑한 거 같더라.”

“어, 수학도 잘하고 영어도 잘해. 금방금방 따라오더라고. 체육하는 거 보면 운동 신경도 있는 거 같고.”

“팔불출 같으니.”

“원래 부모 마음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어?”

“부모는 무슨.”

“그런 마음으로 키우고 있다는 거지.”

나중에 한주가 뭘 하면 좋을지, 뭘 하게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느낌이 들곤 했다. 이렇게 계속 회사가 커지면 여기서 일하는 것도 좋을 것 같지만, 딱히 뭘 하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오전 시간을 일로 보내고 선유는 점심을 먹자마자 회사를 나섰다. 교문에 서서 기다리고 있자니 곧 한주의 머리꼭지가 보였다. 아이보리색 카디건과 청바지를 입은 아이가 통통 튀듯 달려왔다.

“형!”

쿵, 하고 배에 부딪쳐오는 무게에 선유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힘이 새끼 멧돼지 같았다.

“수업 잘 들었어?”

“오늘 수학 시험 봤어요. 백 점 맞았어요!”

한주가 씩 웃으며 가방에서 시험지를 꺼냈다. 빨간 동그라미가 가득한 종이를 잠시 보고,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자 더 해 달라는 듯 눈을 감고 머리를 선유의 손에 비볐다.

“근데 형 웬일이에요? 지금 형네 회사 가려고 했는데….”

“응. 한주랑 같이 가고 싶은 데가 있어서.”

“어디요?”

순간 아이가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선유는 한주가 몇 년간 키워 준 부모를 잊지 않기를 바랐다. 모든 인연을 소중히 하기를 바랐다.

“한주 엄마랑 아빠 보러 갈까?”

“엄마랑 아빠… 요?”

“응.”

“…엄마랑 아빠?”

한참 자리에 서서 입술을 질겅질겅 씹던 한주가 가방을 열어 종이 카네이션을 꺼냈다. 서툰 손길로 만든 카네이션은 조금 구겨졌지만, 정성이 들어간 태가 났다.

“…보러 가고 싶었어요.”

“…….”

“고마워요, 형.”

한주는 울지 않았다. 선유는 미미하게 미소가 떠오른 그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다 왠지 제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가만히 아이를 끌어안자 한주는 조금 어리둥절한 듯 늘어뜨리고 있던 팔을 들어 선유의 목에 감았다.

“그럼 갈까?”

가까운 곳에 세워 두었던 차에 아이를 태우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원래도 운전 습관이 나쁘지 않았지만, 한주가 오고 나선 더더욱 조심하게 되었다. 칼치기 하는 차를 봐도 욕조차 할 수 없게 되었으니.

“형.”

“응?”

“저 그때 이후로 처음 가 봐요.”

“…처음이야?”

설마 그 이후라는 게 발인하던 날을 말하는 건가? 아무리 명절을 챙기지 않는 가풍이라 해도…, 그래도 기일에는 아이를 데리고 가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망할 삼촌을 생각하며 선유는 으득 이를 갈았다. 그러다 얼어붙는 아이를 느끼고선 다시 얼굴을 풀었다.

“한주야. 혹시 언제든 가고 싶으면 얘기해.”

“언제든… 이요?”

“응. 꼭 무슨 일이 있지 않아도 엄마 아빠 보고 싶을 때 있잖아.”

“형도 엄마 아빠 보고 싶을 때 있어요?”

“뭐, 가끔….”

선유는 가족에 대해 그립다는 감정을 느끼기엔 독립된 존재가 된 지 너무 오래되었다. 하지만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가끔 아버지와 하던 캐치볼이 그립기도 했고, 어머니의 칠면조 구이가 먹고 싶을 때도 있었다.

“나도 보고 싶을 때 있지.”

“…….”

“한주는… 어떨 때 부모님이 보고 싶어?”

아직은 이런 얘길 하는 게 조금 이른가 싶었지만, 아예 없던 일처럼 치부하는 것도 좋지 않았다.

“저는… 형이 안아 줄 때 아빠가 생각나요.”

“…….”

“그리고 딸기 먹여 줄 때 엄마가 생각나요.”

“…그럼 하지 말까?”

안전 벨트를 두 손으로 꼭 쥔 채 앞만 보고 있던 한주가 선유를 돌아보았다. 신호에 걸려 잠깐 차가 선 동안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다 선유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기가 무거웠다. 하지만 시야 끝에 발장난을 치고 있는 한주가 걸렸다. 아이는 괜찮아 보였다.

“계속 생각나서 좋아요.”

“…그래?”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요.”

죽음이라는 개념조차 받아들이기 힘들 나이에 아이는 죽은 이를 기억하는 방법마저 배우고 말았다. 그것이 안타까우면서도 대단하게 느껴져서 선유는 그저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조용해졌던 차 안은 곧 한주의 재잘거림으로 가득 찼다. 한 명 한 명 한주의 입에서 나오는 친구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선유의 얼굴에도 웃음이 퍼졌다. 그 이후로 생각보다 더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다 왔다.”

어버이날이지만 평일 낮이라서인지 추모 공원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텅텅 빈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한주는 가방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선유를 따라 내렸다.

선유는 안내 데스크에서 판매하는 카네이션 생화 두 개를 사서 한주에게 안겨 주고 한주가 가지고 있던 가방을 받아와 들었다. 한주는 발인 이후 1년이 훌쩍 넘어서야 온 추모 공원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지하 1층으로 가는 계단을 밟았다. 마치 익숙한 장소 마냥 지리를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어디 계시는지 기억해?”

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와 본 것처럼, 몇 번이나… 와 보고 싶었던 것처럼. 선유는 한주의 뒤를 따랐다. 한 번 헤매지도 않고 한주는 제 부모의 자리를 찾아 그 앞에 섰다. 그리고 납골함 앞에 설치된 받침대 위에 카네이션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제 눈높이보다 조금 높게 위치한 작은 칸에 살짝 손을 대었다 떼어냈다. 납골함 두 개가 들어가 있는 데도 안치단 사이즈는 크지 않았다.

안에 넣어 둔 사진에는 한주도 있었다. 한주는 한참 그 사진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가 눈을 오래 감았다 떴다. 선유는 아이를 소리 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작은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이 가득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러다 한주는 뚝뚝 눈물만 몇 방울 떨어뜨렸다. 서러운 기색보다는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온 듯 연신 손등으로 얼굴을 훑어냈다. 선유는 재킷 안쪽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한주의 얼굴을 살살 닦아 주었다. 그리고 곧 한주의 눈에서는 물기가 가셨다.

“형, 가방….”

“아, 응.”

가방에서 카네이션을 꺼낸 한주가 어디에 카네이션을 둬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유는 직원을 불러 유리창을 열어 달라고 하고 종이 카네이션을 안에 넣었다.

“이렇게 둘까?”

“예.”

아이 얼굴에 더는 울음의 기색은 없었다. 유리창을 닫기 전에 한주는 다시 카네이션을 꺼내 구겨진 곳을 눌러 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설픈 모양새의 카네이션이었지만 사랑스러웠다.

약간 추운 지하에서 올라와 선유와 한주는 추모 공원 내 카페에 잠시 앉았다. 한주가 먹을 게 있나 잠시 메뉴를 보다 고구마라테와 카페라테를 한 잔씩 시켰다. 따끈한 컵을 쥐고 있었더니 좀 차가워진 손가락에 체온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납골당은 차가운 기운이 들었다.

커피가 들어가지 않은, 달달한 맛의 고구마라테를 마시던 한주가 다시 가방을 열어 무언가를 찾는 듯 뒤적댔다. 그리고 귀를 발갛게 붉힌 채 선유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진한 핑크색의 종이 카네이션이었다. 삐죽삐죽 핑킹가위로 잘라 놓은 꽃잎이 인상적인.

“나 주는 거야?”

“형이… 아빠도 엄마도 형도 다 해 준다고 했으니까요.”

한참 그 작은 종이꽃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선유가 다시 한주의 손에 돌려주고 가슴 위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 달아 줘.”

옷핀을 풀어 주자 한주는 선유의 가슴 위에서 꼬물꼬물 서툴게 손을 움직였다. 혹시 한주가 손을 찔릴까 봐 긴장하고 있던 선유는 옷핀이 고정되고 나서야 크게 숨을 내뱉었다.

“…카네이션 못생겼어요.”

“예쁘기만 한데.”

“다음에는 더 예쁘게 만들어 올게요.”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한주의 보송보송한 뺨을 매만지다 선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주야. 괜찮아?”

그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는지 한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괜찮은 듯했다. 한주는 부모의 죽음을 어떻게든 잘 받아들인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그저 복슬복슬한 머리카락만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간지러운 듯 한쪽 눈을 연신 감았다 뜨던 한주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꽃망울 터지듯 울리는 소리에 선유는 그저 따라 웃었다. 아이가 강해서 다행이었고, 안타까웠다.

***

선유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아이가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회사 일과 병행하기 큰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같이 시간을 보내야 했고, 아이의 생활을 관찰해야 했으며, 필요한 것을 해 주어야 하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은 적지 않았다.

회사의 직원들은 그런 선유를 신기해했다. 원래도 신기한 사람이었는데 아이를 키우는 걸 보니 더 보통사람 같지 않게 느껴진 탓이었다. 하지만 선유는 제가 하는 행동이 전혀 신기할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제 어머니도, 아버지도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업가인 아버지는 아무리 바빠도 저녁은 가족과 함께 먹자는 주의였고, 변호사인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소중한 아들과 마주 보고 하루에 한 시간 이상 대화를 나누는 건 정해진 일과였다. 말이 한 시간이지 그게 두 시간, 세 시간이 될 때도 있었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선유는 지금도 한국어를 잘 구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말이면 어디든 나갔다. 근처 마트를 가도 같이 움직이는 게 생활화되어 있었다. 동네 공원에 가서 개리와 함께 산책하고 뛰어 노는 것도 세 가족이 함께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선유는 한주와 그 생활을 똑같이 하려 했고-본인이 겪은 가족의 행태가 그것뿐이었으므로- 그로 인해 들어가는 에너지는 매우 컸다.

산더미같이 서류를 쌓아 두고 개발자들과 함께 머리를 싸매고 있던 선유는 테이블 위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뒤집어 보았다. 학교가 끝났고 회사로 가겠다는 한주의 메시지였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세 시가 조금 안 된 시계를 확인하고 선유는 조심해서 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하교를 같이 했었는데, 워낙 학교에서 회사가 가깝고 큰 길이라 위험하지 않은 것 같아서 지금은 혼자 하도록 두고 있었다. 같이 다니는 친구도 생겼고.

“한주 온대요?”

“예.”

“요새 한주 살이 올라서 그런지 너무 귀여워요.”

비슷한 또래의 아들이 있는 직원이 또 주섬주섬 과자를 준비하며 말했다. 과자는 안 줬으면 좋겠는데… 다행히 한주는 단 걸 많이 좋아하지 않는지 카라멜이고 초콜릿이고 꼭 하나만 먹었지만, 선유는 충치가 생길까 걱정했다.

그래도 자기 보호에 있는 아이가 귀엽다는 얘기를 듣는 건 싫지 않아서 선유는 생긋 웃었다. 내일 미팅 때 PT할 자료를 정리하고 작업물을 전부 저장했다. 아이가 있어서 또 좋은 점은 한 번씩 작업을 정리할 시간을 준다는 거였다.

예전 같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손을 대지 않고선 견디지 못했을 선유였기에 누군가 중간에 끊어 주지 않으면 밤이고 새벽이고 쉴 새 없이 작업을 이어갔을 터였다. 지금은 한주 덕에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했고, 방해 아닌 방해로 업무가 한 번씩 끊겨 정리할 틈이 났다.

“형, 저 왔어요.”

“어서 와.”

날이 많이 따뜻해져서, 한주는 카키색 블루종 차림이었다. 문을 반쯤 열고 인사하는 아이보고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학교 재미있었어?”

“예.”

“오늘은 뭐 했어? 체육 시간에 줄넘기 했어?”

오늘은 이단 뛰기를 배웠다며 재잘대기 시작하는 한주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쓸어 준 선유가 한주의 책가방을 벗겨 내고 겉옷도 벗도록 했다. 최근의 아이는 하루 일과를 말하는 데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대화에선 친구들 이름도 꽤 많이 나왔고, 싸웠던 준호란 아이와는 화해하고 오히려 제일 친해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한주야, 초콜릿 먹을래?”

직원이 개별 포장된 초콜릿을 손 안 가득 담아 들이밀었다. 한주는 잠시 선유를 보다가 하나만 집어 들었다. 포장을 까 입에 넣자 왼쪽 볼이 한껏 부풀었다.

선유는 한주의 알림장을 꺼내 펼쳤다. 그러자 안에서 툭 두 번 접힌 종이가 떨어졌다. 펼쳐 보자 현장학습, 즉 소풍에 대한 알림이었다.

“내일 소풍이네?”

연간 계획표를 집 냉장고에도, 회사 책상 위에도 붙여 놓았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무래도 계획표를 보는 게 습관이 되지 않아서 그런 듯했다.

“도시락 싸야겠다.”

“김밥 사서 가도 되는데….”

“김밥 싸 줄까? 보통 애들 도시락으로 뭐 싸 주죠?”

핸드폰을 검색해 보다가 선유는 흐뭇한 얼굴의 직원에게 물었다.

“저는 김밥은 귀찮아서 유부초밥 싸 줘요.”

“유부초밥이 뭐예요? 초밥 종류예요? 생선 들어가는?”

초밥인데 도시락?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직원은 그제야 선유가 미국에서 이십 년을 넘게 살고 한국에 왔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아, 사장님도 못 드셔 보셨어요? 유부라고 튀긴 두부를 달게 조린 건데 거기에 초밥을 뭉쳐서 넣는 거예요. 마트에 재료 팔거든요. 김밥보단 훨씬 간단하죠.”

“주먹밥하고 비슷하겠네요.”

“만드는 건 비슷해요.”

“한주는 뭐가 좋아?”

귀찮고 손이 많이 가는 건 상관없었기에 선유는 한주가 좋아하는 걸 싸 주기로 했다. 한주는 한참 고민하다가 못 고르겠다는 듯 고개를 젓고 애교 부리듯 선유의 목을 끌어안았다. 시간 날 때마다 안아 줬더니 이제 답삭답삭 잘도 안겼다. 몇 달 만에 좀 묵직해진 게 뿌듯했다.

“…전 다 좋아요.”

“당근 넣어도?”

당근과 오이같이 아삭거리는 식감을 싫어하는 아이는 또 고민을 했지만, 선유가 당근을 이겼다.

“형이 해 주는 거는… 다 좋아요.”

“그럼 둘 다 해 줄게.”

“사서 가도 되는데… 예전에도 사서 갔는데요.”

“내가 해 주는 음식 맛없어?”

“아뇨! 맛있어요.”

항상 주는 만큼 남기지 않고 다 먹는 걸 보면 맛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물론… 맛이 없다고 해서 한주가 그걸 남길 수 있을 리도 만무했지만. 싫어하는 당근도 어떻게든 먹으려고 애쓰지 않던가. 그래서 선유는 요새 밥공기 구석에 당근이나 오이를 남겨 뭉쳐 놓은 것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다 먹으려다 끝내 못 먹는 것이라서.

“그럼 오늘 퇴근하고 같이 장 보러 가자. 형 사무실에서 숙제하고 있을래?”

“예… 저기, 형….”

“응.”

우물쭈물하던 한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태권도 배우고 싶은데요….”

“태권도?”

“준호가 다니는데 재미있어 보여서요.”

“그래? 준호 어디 다니는지 알아?”

“예.”

“여기 써 주면 내가 연락해 볼게.”

한주 앞에 이면지를 내밀었더니 아이가 열심히 학원 이름을 적어 주었다. 나름 네모반듯한 글씨를 보며 선유는 학원 이름을 검색해 주소와 전화번호를 찾았다. 위치는 학교에서 멀지 않아서 걸어 다니는 데에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숙제하겠다며 가방을 들고 나가는 한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선유가 바로 태권도 학원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상담 예약을 잡은 후 전화를 끊으며 중얼거렸다.

“…감개무량하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게 있다는 얘기를 하다니. 욕심 같아서는 피아노나 미술학원도 보내고 싶었지만, 한주가 하고 싶다고 할 때까지 굳이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자리를 비웠던 임 실장이 돌아온 후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지만, 선유는 중간 중간 유부초밥과 김밥 레시피를 찾아보는 걸 잊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선유는 새벽 다섯 시부터 일어나 한주의 도시락을 쌌다. 부엌에서 계속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일찍 잠이 깬 한주가 선유가 요리하는 아일랜드 카운터 맞은편에 앉았고, 도와주려 했다. 하지만 김밥 재료가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었던 터라 선유는 그냥 가만히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사 먹을 때는 몰랐는데 김밥은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속 재료를 하나하나 볶고 간을 한 다음 말아야 하는 거라, 시작하고 한 시간 반이 넘은 시점부터 선유는 김밥을 말 수 있었다. 몇 개는 옆구리가 터지고, 몇 개는 제대로 말리질 않아 다시 그대로 풀어지는 실패를 겪고 나서야 제대로 된 김밥이 한 줄 나왔다.

“먹어 볼래?”

김밥 꽁다리를 입가에 대주자 한주는 꾸벅꾸벅 졸다가도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아기 새처럼 입만 벌리는 게 귀여워서 몇 개나 먹여 주고, 선유는 도시락 통에 김밥과 금방 만든 유부초밥을 담으며 위에 깨를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통 하나를 더 꺼내 방울토마토와 딸기를 씻어 담았다.

제가 봐도 꽤 예쁘게 만들어진 도시락을 사진까지 찍어 저장해 놓고, 카운터에 엎어져 자는 한주를 깨웠다. 도시락을 본 한주가 놀라서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벌리는 걸 보니 더 뿌듯한 마음이 커졌다.

“형이 다 만든 거예요?”

“그럼. 아까 김밥 먹여 줬잖아. 맛있었어?”

“예, 엄청 맛있었어요.”

“다행이다. 처음 만들어 본 거였는데. 유부초밥도 먹어 볼래?”

몇 개 남은 것을 반 잘라 입에 넣어 주자 한주는 유부초밥을 꼭꼭 씹으며 맛있다는 듯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소풍 다녀와서 태권도 학원 같이 가자. 전화 해 놨어.”

“…예.”

입에 든 것을 삼키고 대답하는 한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선유는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식탁 위에 남은 재료를 대충 정리해 냉장고에 넣고 싱크대에 빈 그릇을 쓸어 넣었다. 요리는 그럭저럭하는 편인데, 대충 씻어서 식기세척기에 넣기만 하면 되는 뒤처리가 왜 이렇게 귀찮은지 모르겠다.

수세미로 냄비와 팬을 닦아 쌓아 두고, 접시와 그릇을 대충 닦으며 식기세척기를 열었다. 어느새 준비를 다 한 한주가 옆에 와서 쳐다보다가 선유가 쌓아 놓은 접시를 세척기 안에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선유가 하는 걸 보면서 금세 배운 모양이었다.

“고마워.”

잘했다고, 고맙다고 하면 무척 쑥스러워하며 웃는 게 예뻤다. 도시락과 몇몇 준비물을 챙겨 넣은 가방을 메어 주고 같이 걸어 학교까지 데려다주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주는 주변을 한 번 살피고 선유의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이젠 익숙해진 아침 인사를 선유도 되돌려 주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와. 끝나면 연락하고.”

교문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건 한주의 습관이었다. 그래서 선유는 한주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여전히 주위 애들에 비해서 작은 덩치가 입 안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

“저기요. 한주 형님. 이제 아는 척해 주는 게 낫지 않겠어?”

“좀만 더 있다가.”

지운과 소리 낮춰 얘기하며 선유는 풀죽은 채로 괜히 제 눈앞을 왔다 갔다 하는 한주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러자 또 제게 시선이 닿는 게 좋았는지 확 밝아지는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도저히 장난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태권도 학원에 다녀오면 세상 조용하게 사무실 구석에 앉아 숙제나 학습지를 하던 한주는 오늘따라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선유의 눈앞을 오갔다. 처음에는 쟤가 왜 저러지 싶어 잠깐 의아해하던 선유는 곧 변화를 알게 되었다. 흰 띠가 노란 띠로 바뀌어 있었다.

선유는 이미 지난주에 띠 값으로 추정되는 돈을 아이 손에 들려 보냈던 터라, 새로운 띠를 딸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나 아마 한주는 제가 모를 거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알아 달라고 시위를 하는 거겠지.

“으, 저런 애라면 낳아도 될 거 같아.”

“낳아 줄 사람은 있고?”

“결혼하자는 오메가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연애할 시간도 없으면서.”

“너보다는 시간 많거든. 난 적어도 애는 없으니까.”

“…….”

“이번에 컨설팅 끝난 해상폴리머 있잖아. 거기 사장 아들이 오메가더라고.”

“…그래서?”

“진지하게 만나보자고 연락이 왔거든.”

벌써? 라고 선유는 잠시 의아해했으나, 곧 그와 저의 다름을 이해했다. 베타에 비해 알파와 오메가의 결혼 시기는 꽤 이른 편이었으므로 지운은 딱 적령기에 있었다. 결혼을 하면서 각인절차를 거치는데, 그러고 나면 타인의 페로몬을 거의 맡지 못하게 되어 급작스런 히트나 러트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긱인은 자신의 페로몬 분출을 막는 건 아니라서 불륜을 완전히 막아 주는 수단이 되지는 않았고, 평생 유지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안정감이 생기긴 해서 알파와 오메가는 이른 결혼을 선호했다.

“한주 너무 귀엽다. 요새 애들 되게 발랑 까졌다는데 쟤는 왜 저렇게 귀엽지?”

어찌 되었든 한주 칭찬을 듣는 건 기분이 좋다. 그러는 와중에 한주는 정말로 풀이 죽어서 사무실 파티션 안쪽에 틀어박혔다. 이러다간 정말로 마음이 상할 거 같아서 선유는 아는 척을 해 주기로 했다.

“한주야.”

머리에 토끼 귀가 달려 있다면 아마 지금 쫑긋 솟지 않았을까. 드르륵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파티션 뒤쪽에서 한주가 톡 튀어나왔다.

“이리 와 봐.”

진지한 얼굴로 불렀더니 자기가 뭘 잘못했나 하는 표정으로 쭈뼛대며 다가왔다.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것을 참고 선유는 한주가 맨 띠를 쥐었다.

“노란 띠 땄어?”

“예!”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당당하게 노란 띠를 맨 배를 내밀었다. 흰색 도복을 입고 배운 품새도 열심히 보여 주었다.

“준호보다 더 빨리 딴 거 아냐?”

“준호는 시험에서 잘 못했어요. 엄청 쉬운 건데 틀렸어요.”

“친구 놀리면 안 돼.”

“다음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응원해 줬어요.”

참 애들은 알 수가 없다니까. 학기 초에 그렇게 싸우더니 둘은 누구보다 친한 친구가 되었다. 반에서 제일 큰 애랑 제일 작은 애 둘이 친한 게 신기했다. 가끔 한주와 준호가 같이 사무실에 와서 놀 때가 있는데, 보고 있으면 한주가 준호를 아주 꽉 잡고 있는 듯했다.

“다른 거 뭐 더 배우고 싶은 거 있어?”

선유는 남들과 다른 속도로 살아왔기 때문에, 또 너무 빠르게 진로를 정해 버려서 헤맬 시간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한주에게는 최대한 많은 기회를 주고 싶었다.

지금 한주는 방과 후 교실로 영어를 배우고, 태권도 학원을 다니며, 수학 학습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서 시간이 나면 선유가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가르친다기보다는 영어로 대화를 하게 했다. 그 덕분인지 한주의 영어 실력은 쑥쑥 늘고 있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그래. 더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바이올린이나 피아노가 괜찮을까? 아니면 미술학원을 보내도 좋을 것이다. 혹 운동에 더 관심이 있다면 검도나 유도, 합기도도 괜찮고…. 상상해 보니 뭘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근처 백반집에서 저녁밥을 시켜 먹고, 선유는 한주를 사장실로 들여보냈다. 오늘은 꼼짝없이 야근이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집에 있는 게 낫겠지 싶어 야근할 때면 한주를 꼭꼭 집에 데려다주곤 했는데, 아무도 없는 집에서 아이가 멍하니 허공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곤 회사에 두었다. TV를 보거나, 핸드폰으로 놀거나 하면 마음이 편할 텐데 아이는 현관문 쪽을 향해 앉아 기다리기만 했다.

“빨리 끝내자.”

“나 한주가 와서 너무 좋다.”

“뭐?”

“너 철야 안 해서 좋다고.”

“그게 왜 너한테 좋을 일이야.”

“임 실장님 우는 소리 안 들어도 되잖아.”

“야, 누가 들으면 내가 억지로… 임 실장님 제가 시켜서 억지로 했던 거예요?”

“어우,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임 실장은 지운을 보며 눈으로 욕했다. 그러곤 선유에겐 상냥하고 부드러운 표정과 말투를 유지했다.

“그죠?”

“그럼요. 회사 더 잘 돼야 저도 좋고 사장님도 좋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철야가 없는 건 좋지만… 뒤이은 말에 선유는 이제 회사도 좀 정돈됐고 웬만해서 철야는 하지 말자며 웃었다. 어차피 아이가 있어서 할 수도 없었다.

“이번 거는 사장님이 PT해야겠던데요.”

“예. 들었어요.”

“대기업이라서 그런지 되게 깐깐하더라고요.”

“그래도 그렇지, 영업 전무랑 개발 실장이 갔는데 사장 오라고 하는 게 좀… 갑질 같기도 하고. 게다가 실장님 이 바닥에서 유명하신 분인데 말이죠.”

선유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중얼대며 대기업에서 요청한 내용을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의뢰는 자체 연구소 시스템과 ERP를 연계시키는 것이었는데, 이것저것 누덕누덕 기워 만든 자체 시스템이 너무 무겁고 이상해서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아무리 뜯어 봐도 새로 만드는 게 나을 정도였다.

“차라리 새로 만들어 준다고 할까요?”

“그럼 시간이 두 배는 더 들 텐데요.”

“이거 뜯어고치는 것보다 새로 만드는 게 빠를 수도 있어요.”

“별 내용 들어가는 것도 없는데 참 복잡하게도 만들어 놔서….”

“우선 정리한 대로 PT는 하는데, 정 안 되면 새로 만들자고 할게요. 솔직히 저는 이런 거 저희 이력에 남기고 싶지도 않아요.”

돈과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저딴 게 포트폴리오에 남는 게 문제였다. 그건 선유에게도 직원들에게도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하시죠.”

“고생시켜서 미안해요, 실장님.”

“고생은요. 수당도 다 챙겨 주시는데.”

“딸 얼굴 안 잊어버리셨죠?”

“한주 얼굴이 더 익숙해지곤 있습니다만….”

“죄송해요. 내일은 좀 늦게 출근하세요.”

벌써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을 확인하고 선유는 자리 정리를 시작했다. 옆에서 하는 일 없이 시간을 죽이던 지운도 서류를 차곡차곡 쌓아 캐비닛에 넣었다.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사장실로 들어갔다. 문 쪽으로 등을 향하고 있는 소파 안쪽에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오는지 가는지도 모른 채 한주는 잠들어 있었다. 우릿한 편두통과 어깨의 통증이 금세 사라지는 기분에 선유는 잠시 소파 앞에 쪼그려 앉아 그 얼굴을 관찰했다.

말라서 젖살조차 없어 보였던 얼굴은 뽀얗게 살이 올랐다. 만지면 분이 묻어나올 것 같은 뺨과 조그만 분홍색 입술이 귀여웠다. 작은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다 들어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밤에 잘 때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아이 얼굴을 관찰하는 게 일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쳐다보다가 하루는 둘 다 지각을 할 뻔한 적도 있었다.

벌컥 열린 문 바깥에 안 가고 뭐 하냐는 듯 찡그린 지운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미 사무실 불도 다 끈 듯 사위가 어두컴컴했다. 선유는 한주가 깰까 봐 조심조심 안아 들었다. 그리고 지운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등에 업었다.

“잘 자네.”

“요새 태권도해서 그런지 밤 되면 죽은 듯이 자더라고.”

“그런데 아직 키가 안 크네?”

“이제야 살 좀 붙기 시작했으니까. 너도 열 살 되어서야 컸잖아.”

“그래도 보통보단 더 컸지. 알파는 기본적으로 골격이 큰데.”

“크겠지. 요새 밥 두 그릇씩 먹어.”

아무래도 여기저기 뛰고 노는 게 많아서인지 한주는 선유가 먹는 양의 거의 두 배를 먹어 치웠다. 아침에도 토스트 세 장에 계란 두 개를 먹곤 했고, 시리얼은 국그릇에 두 그릇을 가득 채워 먹었다.

태워다 주겠다는 지운의 제안을 거절하고 선유는 천천히 집으로 걸었다. 밤인데도 바람이 차갑지 않았다. 완연한 봄임을 느끼며 선유는 이번 주말에 한주와 같이 야외로 좀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느릿느릿 평소의 2배 정도 걸려서 집에 도착해 선유는 한주를 침대 위에 눕혔다. 자랑스럽게 두르고 있던 노란 띠와 흰 도복을 벗겨 냈다. 혹시 괴롭힘 당하는 게 아닐까 싶어 가끔 몸에 상처가 있는지 확인하곤 했는데, 태권도 하면서 부딪친 것 같은 아주 옅은 멍 외에는 다른 게 발견되진 않았다.

한참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자니, 한주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뜨였다. 깨웠나 싶어 손을 멈추자 다시 눈이 스륵 감겼다. 그리곤 기분 좋은 듯 은은하게 웃는 얼굴이 되었다. 배부른 고양이 같았다.

곤히 자는 아이를 옆에 두고 노트북을 켰다. 완전히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마음에 걸렸다. 무언가를 찾는 듯 침대 위를 더듬거리는 손에 손가락을 쥐여 주고 남은 한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다 노란 띠를 알아주길 바라며 배회하던 토끼 같은 모습을 생각하며 조금 웃었다. 아이가 온 뒤로 안타까움도 기쁨도 커졌다. 모든 게 다 풍부해진 느낌이었다.

***

손을 가져다대면 베일 것 같이 각 잡힌 정장을 챙겨 입고 머리를 매만지느라 선유는 아침부터 바빴다. 한주에겐 토스트와 스크램블드에그까지 해 줬지만, 정작 본인은 입도 대지 못했다.

“형,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응, 일 때문에 다른 회사 가야 하거든.”

학부모 회의를 제외하곤 늘 캐주얼한 스타일의 옷을 입는 터라 아이의 눈에도 다른 게 보이는 듯했다. 한주를 데려오기 전에는 거의 이렇게 하고 다녔는데 몇 달 새에 선유 스스로도 어색해졌다.

적당히 비싼 시계를 차고, 적당히 값이 나가 보이는 구두를 신었다. 거래처를 만날 때는 하나하나 신경 써야 하는 게 많았다. 오죽하면 지운에겐 국산 차로 회사 차를 한 대 뽑아 주었을까. 지운은 미국에서 제가 타던 차를 가져왔는데 그게 한국에서는 당연히 수입차인 터라, 그걸 본 거래처 사장들이 계약을 취소하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옷차림, 말투, 표정, 머리 스타일까지 무엇하나 흠 잡히면 안 됐다.

한주는 신기한 듯 선유를 계속 바라보았다. 여전히 머리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대충 깔끔하게 마무리되어서 드디어 식탁에 앉았다.

“왜 그렇게 봐.”

“형….”

“많이 이상해?”

고개는 붕붕 저었지만, 여전히 한주는 선유에게서 눈을 떼어 내지 못했다. 그리고 제 이마를 푹 덮은 앞머리를 죽죽 잡아당겨 보았다.

“한주도 머리 넘겨 보고 싶어?”

“…예.”

“오늘 저녁에 해 줄게. 지금은 시간이 없네.”

버터도 잼도 바르지 못한 채 대충 빵만 씹어 넘기고 선유는 가방을 챙겨 들었다. 어제 채 마무리 하지 못한 걸 오전 중에 끝내고 오후에 거래처로 넘어가려면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한주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건 누구에게도 미루지 않았다. 선유는 한주가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바로 회사로 뛰듯 걸어와 최종 PT자료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임 실장에게 늦게 출근하라고 했으니, 그 밑의 직원, 지운과 함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운은 기술자가 아니라 영업이었으나, 제대로 된 영업을 하려면 기술도 다 알아야 한다고 선유가 고집을 했기에 항상 옆에 붙어 앉아 있어야 했다.

“오늘은 네가 가니까 나는 안 들어도 되지 않냐?”

“안 돼.”

“아, 좀….”

바빠 죽겠는데 옆에 앉아서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게 듣기 싫어 입을 다문 채 지운을 무시했다. 그는 말없이 얼굴을 굳히고 있으면 무척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라 곧 지운은 눈치를 보며 조용해졌다.

고요한 가운데 몇 번 스크립트를 입으로 중얼거리며 선유는 자료를 이리저리 수정했다. 당장 출발해야 늦지 않을 시간까지 거듭 고쳤지만, 그럼에도 만족스럽지 않은 얼굴로 노트북을 덮었다. 아무래도 일할 시간 자체가 줄어드는 게 문제는 문제였다.

조수석에 앉아 태블릿으로 또 한 번 PT자료를 보는 선유의 눈가와 흰자가 붉었다. 지운이 쯧 혀를 찼다.

“너 어제 안 잤지?”

“잤어.”

“눈 빨개.”

“피곤해서 그래.”

“안 잤으니까 피곤하지. 대충해도 잘 하면서 왜 그렇게 신경 써? 대기업이라고 뭐 다른가.”

눈가를 문지르며 선유는 태블릿을 껐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보고 있으니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다 왔어.”

“그래.”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인 탓인지 건물 로비에 사람이 많았다. 잘 차려입은 훤칠한 남자 둘이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닿았다 금세 사라지길 반복했다. 출입증을 받아 게이트를 통과하고, 10층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다가왔다.

“사장님은 더 젊으시네요.”

답은 하지 않고 빙긋 웃자 직원은 얼른 안으로 들어오라며 안내를 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더 무례한 질문은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회의실로 들어서자 꽤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엑세스 시스템의 최선유 대표입니다.”

첫인사가 힘들지 그 이후부터는 정해진 대로였다. 명함을 교환하고 시작한 PT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던 사람들도 선유의 담담한 목소리와 어디 하나 막힘없는 제안에 다들 좋은 얼굴이 되었다.

특히 결정권자일 연구소장 CTO와 정보화 부분의 부문장이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기에 계약은 따 놓은 당상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선유가 그들에게서 끌어내야 할 말은 아예 현재 시스템을 없애고 새롭게 개발하여 ERP와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추가금과 시간을 얻어 내야 했다.

“현재 귀사의 자체 시스템과 ERP시스템인 SAP을 연결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지만, 애초에 설계될 때 연결을 염두에 두지 않은 터라 시스템이 더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하는 게 그쪽의 능력 아닙니까?”

“물론 그게 제 능력이고,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예 처음부터 새로이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 더 유리할 거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선유는 지금까지 자체 시스템을 분석하여 발견한 문제를 가감 없이 보여 주었다. 잦은 런타임 오류, 데이터 이상이 없음에도 시스템이 인식하지 못하던 문제, 지운이 사원들로부터 받아 온 설문조사 결과까지.

“시스템을 처음부터 개발하면 시간이 얼마나 더 듭니까?”

“기존보다 6주 정도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6주밖에 안 걸린다고요?”

6주도 길게 본 것이었다. 이미 초기 설계가 끝난 터라 4주면 충분했지만, 일부러 두 주 더 부른 것이었는데,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그럼 새로 개발하는 게 낫겠는데요.”

“근데 그러면 지금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는 직원들이 또 불편해하지 않겠습니까?”

“인터페이스는 지금과 동일하게 구성하겠습니다.”

그럼 비용은… 받아 놓은 예산은 충분하긴 합니다만… 그러면 아예 처방 시스템을 신규 개발하는 방향으로 할까요… 선유가 돈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알아서 비용까지 정리했다. 다행히 예산에 여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신규 개발로 계약서를 다시 작성하기로 하시죠.”

“예,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이 고맙죠. 좋은 방향으로 결정 난 김에 오늘 저녁이라도 같이합시다.”

안 된다고 얘기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청업체에서 고객사가 제안한 식사를 거절한다는 건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 최 대표님은 뭘 좋아하시나?”

“저는 뭐든 괜찮습니다.”

지운에게 대응을 부탁하고 나온 선유가 화장실 칸에 들어가 한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한주는 전화를 받았다.

“한주야.”

- 형?

“응. 태권도 끝났어?”

- 예. 지금 회사 왔는데… 형 언제 와요?

“오늘 좀 늦을 거 같은데… 임 실장님 계셔?”

- 예, 계세요. 형 많이 늦어요?

“많이 안 늦어야지. 임 실장님이랑 같이 저녁 먹고,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해.”

- …예.

풀이 잔뜩 죽은 게 분명한 목소리였다. 귀가 완전 축 처져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토끼가 떠올랐다.

“임 실장님 바꿔 줄래?”

수화기의 감도가 멀어지더니 실장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곧 약간의 소음 뒤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예.

“실장님, 오늘 한주 좀 부탁드려요.”

- 저녁 먹이고 집에 데려다주면 되죠? 그럴 줄 알았어요. 거기 예전에도 저녁 먹자고 하더라고요.

“전 생각도 안 했는데 그러자고 하네요.”

- 그래도 자기 돈 쓰는 거 아니라서 그런지 맛있는 건 사 줍디다.

“뭐 넘어가기나 하려나 모르겠어요.”

-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십쇼. 아이는 잘 데려다 놓을게요.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선유가 한주에게 빨리 가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한참 답이 없던 아이에게서 괜찮다는 답이 온 건 삼십 여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빨리 오라고 조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물론 그러면 이런 어색한 저녁 식사 따위는 다 버리고 뛰쳐 가고 싶을 테니 그것도 문제이긴 했지만.

선유는 정보화 부문장과 CTO, 지운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맛이 잘 느껴지지도 않는 고기를 씹으며, 신변잡기, 아니 신변에 관련된 취조 비슷한 것을 당했다. 미국에서 학교는 어떻게 다녔는지, 월반을 했다고 하니 몇 번을 했고 학교는 어디를 나왔고 어떻게 이 일을 시작했는지, 가족관계를 어떻고 저떻고… 견디다 못한 선유의 눈초리가 매서워지려는 찰나 지운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유하게 만드는 일이 몇 번이나 일어났다.

절정은 선유에게 오메가가 아니냐며, 얼굴을 칭찬하며 이름 모를 팀장이 추파 아닌 추파를 던졌을 때였다. 그는 크게 잘난 것 없는 알파였는데-머리도, 신체도-, 형질 하나만 믿고 잘난 척하는 인간이었다.

선유는 미국에 있을 때 저런 말 하는 인간들 어디 하나 부러뜨려 병원에 실려 보낸 전적이 수도 없었다. 그 때문에 괜히 지운이 긴장 했지만, 선유는 그저 말 한마디와 눈빛 하나로 그 주제를 일축했다.

“설마요. 외모로 형질 판단하는 건 너무 안일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그 팀장을 한 번 슬쩍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넌 생긴 게 알파 경향성은 따라가지도 못하게 생겨 놓곤 나보고 오메가라니 별 헛소리를 다 듣겠다, 라는 의미를 담은 눈빛이었다.

사실 외모로 형질을 판단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경향성은 분명히 있었으니까. 하지만 알파임에도 신체적으로 우월하지 않은 인간도 많았고, 오메가임에도 건장한 사람 또한 충분히 많았다. 심지어 선유는 체격이 그리 작은 편이 아님에도 섬세한 생김새 때문에 오해를 받는 편이었다.

형질에 관한 얘기는 예민한 것이라서 다른 사람들도 그 주제는 무시하고 바로 넘어갔다. 좀 어색한 기류는 지운의 달변 덕에 다시 풀렸고, 식사도 파할 시간이 다 되었다.

짜증이 치솟아 선유는 술을 주는 대로 다 마셨으나, 얼굴은 그대로 희었고 혀 하나 꼬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운은 알고 있었다. 이미 선유는 취할 대로 취했고, 지금 바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을. 친하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든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최선유였다.

아니나 다를까, 주차장으로 내려오기 무섭게 선유는 반쯤 정신을 놓고 쓰러졌다. 어쩔 수 없이 그를 업은 지운이 대리운전 기사에게 차 키를 건넸다. 뒷좌석에 눕히는데 선유의 입에서 아주 유창한 영어 욕이 계속 흘러나왔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를 새끼가 추파를 던져? 그 새끼 분명히 실 좆일 거야. 난쟁이 같은 게 어디서….]

“야.”

[여긴 왜 다 이따위야? 우리 엄마 아빠 직업은 왜 물어? 촉새 같은 새끼들.]

다행히 대리기사가 저 빠른 영어를 알아듣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지운은 그냥 자라며 재킷을 벗어 선유의 얼굴 위에 던져 버렸다. 웅얼웅얼 몇 번 더 뭐라 욕을 하던 선유는 금세 잠들어 버렸고 지운은 그제야 조금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선유의 아파트에 도착해 지운이 선유를 부축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현관문 잠금 키를 하나 누르기 무섭게 문이 안에서 열렸다. 마치 문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 속도였다. 문이 열리고, 문고리를 잡은 한주가 의아한 눈으로 둘을 올려다보았다.

“형?”

“어, 한주… 우리 한주….”

완전히 기절해 있던 선유는 한주의 부름 한 번에 번쩍 눈을 뜨고 현관에서 한주를 끌어안았다. 당황한 안색으로 가만히 안겨 있던 한주가 낑낑대며 선유를 일으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다시 지운이 선유를 번쩍 들어 올렸다. 마지 쌀 포대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가 소파에 털썩 눕히자 선유는 다시 한주보고 오라며 팔을 벌렸다.

“형 술 마셨어요?”

“응….”

“많이 마셨어요?”

“응….”

한주는 불안한 눈으로 지운과 선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운을 보며 어떡하냐고 물었다.

“그냥 이대로 놔두고 너는 들어가서 자.”

“형 아픈 거 아녜요?”

“그냥 술 많이 마신 거야.”

가늘게 눈을 뜬 선유가 다시 한주를 잡아끌었다. 답삭 안겨 선유의 위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하게 된 한주가 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주야, 자자.”

“저게 미쳤나. 야, 방에 데려다줄 테니까 거기 가서 자. 애 불편하게 왜 이래?”

“아, 싫어, 너 가.”

선유와 소파 사이에 불편하게 누워 있던 한주가 다시 꾸물꾸물 선유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계속 한주를 찾는 선유를 열심히 달래 지운과 함께 그를 침대로 옮겼다.

“선유 형은 괜찮은 거예요?”

“어, 그냥 술 마시면 저런다니까.”

저게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걸 안 이후엔 잘 안 저러긴 하지만… 지운은 뒷말을 숨기고 주변을 정리했다. 구겨진 선유의 재킷을 소파에 대충 걸쳐 놓고 핸드폰 알람을 맞춰 협탁에 올려 놓았다. 그리곤 한주에게 빨리 자라고 하곤 가 버렸다.

한주는 멍하니 침대에 앉은 채 선유을 내려다보다가 구겨진 이불을 정리해서 그 위로 덮어 주었다. 그리고 가늘게 눈을 뜬 선유가 끌어당기는 힘에 다시 품에 안겼다. 살짝 뭔가 탄 듯한 냄새와 술 냄새, 그리고 향수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냄새가 났다. 그것이 불쾌했는지 눈을 살짝 찌푸렸다가 다시 품에 코를 박았다.

“한주야….”

잠꼬대처럼 한주를 부르던 선유는 다시 조금 눈을 뜨더니 자기 뺨을 톡톡 손끝으로 두드렸다. 그 뺨에 입을 맞추며 한주가 속삭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 말을 기점으로 완전히 잠든 선유는 더는 깨지 않았지만, 한주는 가만히 앉아 잠에 빠진 선유를 꽤 긴 시간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은 손을 펼쳐 선유의 손과 비교해 보고, 선유의 어깨를 손 뼘으로 재어 보기도 했다. 어울리지 않는 긴 한숨과 함께 선유의 품으로 파고들며, 한주는 팔을 넓게 벌려 선유의 허리를 안았다. 그리고 또 길게 한숨 쉬었다.

다음 날 아침, 선유는 극심한 숙취를 느끼며 잠에서 깼다. 그리고 한껏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주에게 웃어 주려 했지만, 곧 실패로 이어졌다.

“형, 아파요?”

“음… 아니.”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배도 목도 머리도 팔다리 근육도 전부 아팠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앉자 한주는 자그만 손으로 선유의 이마를 짚었다.

“형, 열나요.”

“그래?”

“뜨거워요.”

걱정 가득한 손을 끌어 만지다 선유는 왠지 통통한 손등을 깨물어 보고 싶어졌다. 싫어할까? 하지만 고민도 잠시 살짝 이를 세워 깨물깨물했다. 화들짝 놀라며 선유의 손아귀에서 제 손을 뺀 한주가 황당해하는 얼굴로 선유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형.”

“뭐가?”

“깨물었잖아요.”

“음… 왠지 맛있어 보여서.”

“배고파요?”

“아니.”

싱긋 웃었던 선유는 속이 울렁거려서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술이 위 속에서 찰랑거리고 있는 듯 숨에서 알코올 냄새까지 났다. 게다가 옷도 거의 그대로 입은 채였다. 으, 이 상태로 잠은 어떻게 잔 거지.

“형, 호- 해 줄까요?”

“응?”

“호- 해 주면 낫잖아요. 예전에 엄마가 해 줬어요.”

“그럴래?”

한주의 입에서 옛 부모가 나온 건 처음이었다. 상처가 조금씩 아물긴 하는 건가. 가끔 밤에 경기를 일으키는 듯 놀라며 엄마와 아빠를 찾는 횟수도 줄어들고는 있었다.

“형 어디 아파요?”

“음… 배가 아픈 거 같아.”

“그럼 약손 해 줄게요!”

약손? 자리에 잘 누워 보라면서 한주가 탁탁 침대 위를 두드렸다. 세웠던 상체를 다시 눕히자 한주는 선유의 배 위에 손바닥을 대고 살살 누르며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힘을 주어 콱 눌러 와서 속이 뒤집히는 듯했으나, 곧 편안해졌다.

“한주 손은 약손, 한주 손은 약손….”

무슨 멜로디인지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배를 문질러 주는 한주 때문에 선유는 웃음이 터지기 직전이었으나, 잔뜩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형 아직도 아파요?”

한참 배를 만져 준 한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안 아파.”

고맙다고 뺨에 쪽, 입을 맞춰 주자 한주도 생글생글 웃었다. 숙취로 아플 때 배 문질러 줄 사람도 있고, 하루하루가 충족되는 기분이었다.

***

더운 여름을 다 보내고 긴팔 긴바지를 찾아 입힌 순간, 선유는 한주가 정말 많이 컸다는 걸 깨달았다. 겨우 서너 달 전에 입었던 옷이 팔다리는 짧아지고, 가슴 부분은 조금 끼이는 부분이 있을 정도였다. 매일매일 보니까 감이 없었는데, 이렇게 옷이 작아지니 티가 확 났다.

“한주… 엄청 컸구나. 키 재 볼까?”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한주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벽에 붙여 놓은 줄자에 한주를 세워 놓고, 선유는 연필로 정수리 높이를 체크했다. 처음 왔을 때보다 10cm도 넘게 컸다. 이러니 바지가 짧아졌을 수밖에. 원래도 팔다리가 길쭉길쭉했는데, 지금도 다리만 쑥 길어진 것 같았다.

“우선 이거 입자. 지난번에 조금 컸었지?”

봄에는 커서 입지 못했던 청바지가 지금은 꼭 맞았다. 저녁엔 또 잔뜩 쇼핑할 생각을 하며 머릿속으로 일정이 괜찮은지 더듬어 보았다.

“엄청 쑥쑥 자라는구나.”

그렇게 열심히 먹더니 위로 쭉쭉 자라는 것이 콩나물 같기도 했다. 한주의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선유는 감탄을 했다.

“형보다 더 클 수 있어요?”

“응? 아마 더 크겠지….”

알파 형질을 따라간다면 분명히 한주는 저보다 클 확률이 높았다. 크는 게 좋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제 슬하에 있는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좋으면서도 항상 저보다 작아서 품에 끼고 있고 싶다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형, 제가 더 크면 싫어요?”

“응? 아냐.”

“근데 왜 그래요?”

한주의 손바닥이 뺨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선유는 그제야 제 얼굴 근육이 굳어 있었음을 알고 어색하게 한 번 웃었다.

“음… 한주가 더 크는 게 싫은 건 아니고, 지금까지는 안고 업고 다녔는데 더 크면 힘들 거 같아서.”

“…….”

“그전에 더 많이 안아 줄게.”

뭔가 충격을 받은 것 같은 한주에게 선유가 다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아이가 자라면 지금처럼 붙어 있을 순 없었다. 안는 일도, 업는 일도, 뺨에 하는 뽀뽀도 나중에는 다 사라지겠지. 하지만 선유는 그 시기가 조금 늦기를 바랐다. 만약 늦추지 못한다면 지금 더 많이 해 주고 싶었다.

“그럼 학교 갈까?”

“…예.”

“학교 끝나고 옷 사러 가자.”

선유의 말에 조금 울 듯한 얼굴로 벽에 붙은 줄자와 짧아진 옷을 번갈아 바라보던 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이 너무 많다’ 같은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어차피 선유가 그 작은 반항을 조심스럽게 무시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평소와 다른 한주의 태도는 며칠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밥 먹는 양이 굉장히 줄었다. 계속 늘어도 모자랄 판에 갑자기 평소의 절반도 먹지 않는 것에 선유가 한마디 하려고 할 때쯤, 학교에서도 전화가 왔다. 한주가 급식을 거의 먹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라 아직 식사 교육도 받고 있었는데, 거의 잔반을 남기지 않던 아이가 식판 가득 밥을 남겨 오니 담임 교사도 이상함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먹고 자는 일에 대해서는 속을 썩이지 않던 아이인 터라 선유는 좀 당황스러웠다. 식감이 느껴지지 않게 완전히 익혀 주면 당근도 가지도 이제 잘 먹고, 며칠 전만 해도 제 두 배를 먹지 않았던가?

선유는 담임 교사의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갑자기 아이가 왜 잘 먹지 않게 되었는지 이유를 파악할 수 없었다. 어디가 아픈가? 하지만 몇 달 전에 했던 건강 검진에서는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급격히 걱정이 치솟은 선유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왜 그래?”

“한주가 갑자기 밥을 안 먹는대.”

“그래서 아까 전화 온 거야?”

“선생님도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안 먹는다니, 어디 아픈 거 아닐까? 집에서도 잘 안 먹어서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아파 보이진 않았는데.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선유는 한주가 태권도 학원을 마치고 오기만을 기다렸다. 끝날 시간이 아직 멀었다는 걸 알면서도 몇 번이나 시계를 쳐다보던 선유는 회사로 가겠다는 한주의 문자를 받고 나서 더 긴장했다.

“바로 병원을 가야 될까?”

주변 병원뿐 아니라 대학병원 위치도 검색해 보고 선유는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아픈 거면 어떡하지, 지금까지 병치레 한 번 없었던 터라 더 걱정되었다.

몇 분의 시간이 더 흐르고 이제 초록 띠를 맨 한주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주변에 있는 직원들에게 인사하고, 저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한주에게 선유가 벌컥 화 비슷한 걸 냈다. 긴장과 걱정이 섞여서 감정의 폭탄을 만들어 냈다.

“한주. 너 왜 밥을 안 먹어!”

갑자기 한 대 얻어맞은 듯 한주가 한껏 당황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온 큰 소리에 지레 놀란 선유가 제 입을 막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한주에게 사장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자리에서 한참 망설이던 한주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듯 선유의 뒤를 따랐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였다.

“형….”

“한주야. 너 지난주부터 집에서도 밥 잘 안 먹었잖아. 오늘 선생님한테도 전화 왔어. 요새 급식도 잘 안 먹는다며.”

한주는 말없이 초록 띠 끝부분을 잡고 시선을 피했다. 그런 행동이 뭔가 숨기고 있는 거 같아서 선유는 더 답답해졌다.

“어디 아파? 병원 갈까?”

“…아뇨.”

“나 화난 거 아냐. 걱정되어서 그래. 응? 어디 안 좋은 거면 병원 가자.”

“…….”

“한주야.”

계속 눈을 피하는 아이의 손을 덥석 잡아당기자, 한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선유를 보았다. 몇 달간 건조했던 눈동자 위에 울멍울멍 물기가 어리는 것을 보고 선유는 다급히 한주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한주야.”

한주는 여전히 조금 차가운 선유의 말투에 어깨를 움츠리고, 찡그려진 눈가를 보고 고개를 푹 숙였다.

“형… 화났어요?”

“안 났어.”

“…화난 거 같아요.”

선유는 긴장으로 인해 차가워진 한주의 손을 주무르며 한숨을 섞어 말했다.

“솔직히 좀 화나긴 했어. 갑자기 집에서도 밥을 안 먹지,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걱정하시지. 그런데 어디 아프냐고 물어봐도 한주는 아무 답도 안 해 주지.”

“…….”

“왜 그래, 응?”

한주가 눈을 질끈 감자 툭툭 아래로 눈물이 떨어졌다.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걸 너무 오랜만에 봐서 선유도 정말 당황했다. 친구와 싸운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왜 울어.”

“형이….”

“응.”

“형이… 저 더 크면 안 안아 준다고 했잖아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어서 선유가 의아해하자 한주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더 크면 싫어할 거라고… 안 안아 줄 거라고….”

“내가 언제 싫어한다고 했어. 안 안아 주는 게 아니라, 안고 다니기는 힘들 거 같다고 했지. 그 전에 많이 안아 주겠다고도 했잖아.”

그제야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선유가 아이의 비약적인 말을 정정했다. 하지만 한주는 떼를 썼다. 이렇게 고집을 부리고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한주가 기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것도… 싫어요.”

이미 안고 다닐 수 있는 시기는 다 지났는데… 처음에야 아이가 답삭답삭 안기는 게 좋아서 안고 다녔지, 요새는 안고 다닌 적도 별로 없었다. 야근 할 때 업고 집에 간 적은 있어도.

“그래서 갑자기 밥을 안 먹은 거야?”

“…….”

“크고 싶지 않아서?”

갑자기 쑥쑥 자라는 게 신기해서 한, 스치듯 지나간 한마디에 밥을 먹지 않을 정도로 충격을 받다니. 선유는 한주의 맹목적임이 조금 묵직하게 어깨를 눌러옴을 느꼈다. 아이를 키우는 건 이런 일도 감당해야 하는 거구나, 매일 매일 다짐하는데도 새롭게 놀라는 일이 생겼다.

선유는 한주의 뺨을 닦아 주면서 달래기 시작했다.

“한주가 얼마나 더 크든 매일 안아 줄게. 안아 들고 다니진 못해도.”

“…정말요?”

“그럼.”

그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한주는 울면서 웃었다. 축축하게 젖은 뺨을 살짝 쥐어흔들며 선유가 놀리듯 얘기했다.

“울다 웃으면 엉덩이에 뿔난다.”

화들짝 놀라며 제 엉덩이에 손을 가져가 만지던 한주는 여전히 그대로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마치 고양이처럼 선유의 손바닥에 뺨을 문지르며 쑥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형, 저 배고파요.”

“배고프겠지. 그렇게 콩나물처럼 자라면서, 밥도 제대로 안 먹고 태권도는 어떻게 했어?”

배를 문지르자 홀쭉한 느낌까지 들었다. 아직 퇴근 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아이에게 뭘 좀 먹여야 할 것 같아 선유는 조금 빠르게 일을 정리했다. 오늘은 고기를 잔뜩 먹어야겠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각각 10월과 12월에 자리 잡은 한주와 선유의 생일이 한 번씩 지났고, 한주는 쑥쑥 커서 2학기가 마무리될 시점에는 제일 앞자리에 앉지 않게 되었다. 하나, 둘 늘어난 친구와 함께 선유의 회사에 와서 놀기도 했으며, 태권도뿐 아니라 피아노도 배우고 싶다 하여 학원을 하나 더 신청했다.

선유의 회사는 순항하여 정부 사업을 두 개나 따냈고, 대기업의 의뢰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회사가 급격히 팽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유는 의뢰를 가려 받았고, 오히려 그게 더 시장 내에서 이름값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공사 균형을 잡기 위해 평균대 위에서 비틀비틀했다. 아이가 있으니 아플 수도 없어서 환절기에는 비타민 영양제를 몸에 들이부으면서 일을 했다. 문제는 그래 봐야 온도 변화에 예민한 몸이 견디지 못했지만.

그 때문에 지금도 캐시미어 숄을 어깨에 두르고 뜨거운 코코아를 물처럼 마시고 있었다. 분명히 겉도 속도 뜨끈뜨끈할 텐데 살짝 오한이 드는 게 불안했다. 그런 선유를 바라보던 지운이 툭 말을 꺼냈다.

“너 지금 감기 걸리기 직전이지.”

“…말하지 마. 정말 걸릴 거 같으니까.”

“왜 그렇게 몸이 약해? 평소에 운동 좀 하지 그랬냐.”

“내가 몸이 약하긴 뭘 약해. 환절기에 감기 좀 걸리는 거 가지고. 그리고 운동은 요새 사무실에서 해.”

“그래 봐야 아령 몇 번 들었다 놓는 정도잖아.”

“…주말에는 등산도 하고 공원도 가.”

“한주나 다람쥐처럼 뛰어다니겠지. 넌 구경이나 하고.”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미국에 있을 때는 러닝이나 수영을 꾸준히 했었는데, 한국에 와서는 거의 하지 못했다. 초반에는 사업이 자리 잡지 못해서 일주일에 삼 일 이상 야근 및 철야를 하고 주말 근무까지 했으니 그랬고, 이후에는 한주와 생활하면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느라 운동할 시간이 없고.

“아프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며칠 쉬면 되지.”

“이거 국방부 쪽은 내가 가야 하지 않을까?”

“거긴 내가 가도 돼. 정부 쪽은 오히려 대기업보다 덜 깐깐하더라.”

“아니면 윤 실장님 이번에 신규 프로젝트 단독으로 맡겨야겠다.”

“그래도 되고.”

임 실장 이후 신규 채용한 경력자인 윤 실장을 떠올리며 선유는 일을 새롭게 분배했다.

“…넌 무슨 대답이 그렇게 쉽냐?”

“너 믿으니까 그렇지.”

다른 컨설팅 회사의 오퍼를 거절하고 이 먼 한국까지 따라왔을 정도니 믿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이렇게 말로 직접 듣는 건 또 다른 기분이다. 뭐 좋다기보단 기분 나쁜 간질거림에 가까웠다. 지운과는 한 번 사고가 있긴 했지만, 그 이후론 완전히 친구 관계였으므로.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좀 쉬어야겠다.”

“그래라. 벌써 얼굴 벌개.”

마시멜로가 들어간 코코아를 한 잔 다 비워 낼 때쯤 사장실 문이 열렸다. 한주였다.

“형.”

“어, 왔어?”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한주가 회사에 도착하는 시간은 거의 퇴근 시간에 가까웠다.

“저녁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오늘 점심 뭐였지?”

“오늘 점심 제육볶음이었어요.”

“맛있었겠네.”

“형은요?”

“음… 나는 뭐 먹었지….”

속이 안 좋아서 컵 수프 하나로 때웠다. 정말 큰 일이네, 선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식욕도 없는 걸 보면 감기에 이미 걸린 게 틀림없었다.

선유는 감기에 걸리면 온몸에 힘이 빠져 한 번은 꼭 쓰러졌다. 그리고 기절한 채로 누워 있다가 몸에 체력이 조금 돌아오면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약 먹고 다시 자고 그걸 반복해야만 했다. 옆에 사람이 있으면 더 번거로웠다.

“형 아파요?”

“응? 아냐.”

“얼굴 뜨거워요.”

앞에 선 한주가 두 손으로 선유의 뺨을 감쌌다. 이젠 앉아 있는 상태에서는 눈이 쉽게 마주쳤다. 정말 몇 달 사이에 엄청나게 컸다는 걸 다시 깨달으며 선유는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까만 눈동자에 들어차 있는 걱정이 기껍게 느껴졌다.

“뜨거운데….”

“집에 가서 쉬면 괜찮을 거야.”

“그럼 빨리 가요.”

“저녁은 먹고 가자.”

으슬으슬 떨리는 어깨에 다시 숄을 두르고 선유는 자료를 정리했다. 내일부터 출근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인수인계를 해 놔야 할 것 같았다.

걱정스러운 듯 선유의 옆에서 동동거리며 돌아다니는 한주가 정신 사나웠다. 순간 가만히 있으라고 한마디 하려다 입까지 틀어막으며 선유는 간신히 예민한 성질을 참아냈다. 머릿속이 욱신거렸다.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업무 지시를 전부 영어로 쓴 걸 깨달았지만, 다시 쓸 정신은 없었다. 이 정도는 알아보겠지, 자료 위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메일을 발송한 후 선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형!”

책상을 짚고 주르륵 주저앉는 선유를 한주가 다급히 불렀다. 작은 몸이 저를 받쳐 보겠다고 품을 파고드는 터에 선유는 간신히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났다. 항상 뜨거울 정도로 따끈했던 한주의 몸이 서늘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지금 제 몸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 것 같았다.

“지운이 형 불러와요?”

“아냐…. 잠깐만, 형 약 좀 먹을게.”

지난번에 받아 준 해열제가 어디 있을 터였다. 선유는 서랍을 뒤져 약봉지를 찾아 물도 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잠깐 약기운이 돌기를 기다리며 다시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한주는 조용히 옆에 서 있다가 선유의 무릎에 손을 짚고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조금만 있다가 가자.”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한주는 몇 번 주먹을 꽉 쥐었다 놓길 반복했다.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선유가 아직 작은 주먹을 끌어와 손을 잡았다. 조금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아이가 있다는 건 짐이 생기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 짐을 덜어 내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좀 괜찮다. 그만 가자.”

이번에는 비틀거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집에 갈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선유는 근처 생선구이 집에서 저녁을 먹을 때까지는 약으로 어떻게든 버텼다. 돌아가는 길에는 주저앉고 싶을 만큼 몸에서 힘이 빠졌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집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신발을 벗는 순간 선유는 어지럼증을 이기지 못하고 풀썩 그 자리에 엎어지듯 쓰러졌다. 비명과 닮은 한주의 외침이 이명처럼 들려왔다. 울음이 섞인 것 같아서 어떻게든 달래주고 싶었으나, 손을 들어 올릴 힘도, 심지어는 눈을 뜰 힘도 없었다.

한주가 애타게 형을 부르며 어깨와 몸을 두드리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희미하게 느껴졌다. 아, 어떡하지, 차라리 혼자라면 이렇게 몇 시간 쓰러져 있다가 일어나서 몸을 추스르면 되는데… 선유는 정말로 간신히 눈을 떴다. 제 옆에 주저앉은 채 얼굴이 다 젖도록 울고 있는 한주가 보였다.

“…한주야.”

“형… 형 어떡해요, 아파요? 어떡해요….”

“형 핸드폰 좀….”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손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든 한주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소리까지 내며 우는 동안 선유는 지운의 전화번호를 찾아 눌렀다. 저는 그렇다 치고 한주를 안심시키고 돌봐 줄 사람이 필요했다.

- 어, 왜?

“잠깐… 우리 집에 좀 와 줄 수 있어?”

- 그럴 줄 알았다. 시간 좀 걸려.

“어, 오면… 한주 좀….”

- 야, 최선유. 야!

핸드폰을 간신히 한주에게 쥐여 주자 끅끅 울음 삼키는 소리를 내며 한주가 전화를 넘겨받았다.

“지운 형….”

지운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한주가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는 게 들렸다. 몸이 뜨거워요, 쓰러져서 일어나질 못해요, 많이 아픈 거 같아요, 펑펑 울면서도 묻는 말에는 잘도 대답했다.

“형….”

“한주야, 손 좀… 잡아 줄래.”

부축해 줄 정도의 힘은 없더라도 일어나는데 도와줄 수는 있을 터였다. 선유는 채 다 벗지 못한 신발을 대충 밀어 벗고 비척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몇 번이나 꺾였지만 방에 있는 침대에 눕는 것까지는 간신히 해냈다. 거기까지 가는데 한주가 끙끙대며 선유를 부축한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도도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누군가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 위에 철퍽 무언가 젖은 게 올라왔다. 귓가로 주르륵 물기가 그대로 흘러내리는 게 기분 나빴지만 선유는 눈을 뜨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힘들었다.

“…형, 많이 아파요?”

목이 삽시간에 부어올랐다. 목구멍이 따끔거려서 기침을 해대자 옆에서 더더욱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강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초인종이 울렸고 또 도도도 소리가 들렸다.

“한주 엄청나게 울었네.”

“지운 형….”

“그냥 감기야. 그만 좀 울어라.”

지운이 한주를 달래 주는 듯했다. 대체 얼마나 울고 있길래, 괜찮다고 해 줘야 하는데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서… 선유는 침대 위를 더듬었다. 손이라도 잡아 주고 싶었다.

“…형.”

뜨거운 선유의 손에 서늘한 피부 감촉이 느껴졌다. 작은 두 손으로 선유의 손을 꼭 쥐고 한주는 애원하듯 매달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

“그러게 오후에 그냥 들어가서 쉬지, 뭣하러 회사에 붙어 있다가 이렇게까지 돼?”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 외엔 할 수가 없었던 선유는 이어지는 지운의 잔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이거 한주가 했어?”

“…예. 할 수 있는 게… 흡, 그거밖에 없어서….”

“잘했어.”

물기가 척척하게 묻어나는 수건을 누군가 걷어갔다. 그리고 물소리가 한 번 들리고 이번에는 꽉 짜낸 물수건이 다시 이마에 올라왔다.

“그냥… 감기예요?”

“응. 원래 이래. 일 년에 한 번은 꼭 이렇게 아파. 쓰러져도 좀 누워 있으면 괜찮아져.”

“저도, 저도 할래요.”

옷을 벗기는 손이 네 개가 되었다. 아픈 와중에도 왠지 웃음이 나올 거 같아 입술을 깨물자 지운이 툭 이마를 두드렸다.

“웃음이 나오냐.”

“…미안.”

간신히 입을 열어 말하자 한주가 형, 이라고 연신 부르며 매달렸다. 선유는 가늘게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켜 지운이 건네는 파자마를 입었다. 몇십 분이라도 죽은 듯이 누워 있었더니 아주 약간 힘이 돌아왔다.

얼굴이 엉망이네. 선유는 퉁퉁 부은 호빵 같아진 한주의 얼굴을 보며 기침을 몇 번 했다. 또 눈동자 위가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괜찮다는 의미로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었지만, 전혀 안심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둘을 바라보던 지운이 물컵과 약봉지를 내밀었다.

“사무실에 있는 약 가져왔으니까 먹고 자.”

“어.”

“한주는 감기 옮으면 안 되니까 오늘은 옆방에서 자고.”

“여기서 잘래요.”

한주는 단호한 태도로 지운의 말을 거절했다. 선유가 살짝 눈 끝을 찌푸리며 한주를 불렀다.

“한주야.”

“형 밤에 또 아프면 어떡해요.”

“약 먹고 자면 괜찮아. 얼른 가서 씻어.”

“…형 아픈 거 싫어요.”

선유는 지운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어깨만 한 번 으쓱했을 뿐이었다. 그의 관망하는 태도에 뭐라 한마디 하려다 그저 한숨만 한 번 쉬었다.

“우선 씻자.”

선유의 옆에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던 한주는 씻고 오면 같이 자겠다는 선유의 말에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지운이 피식 웃었다.

“껌딱지네, 껌딱지.”

“나중에 한주 잠들면 좀 옮겨 주라.”

“알았어.”

“데이트 중이었어?”

말끔하게 차려입은 지운을 보여 선유가 물었다. 평소에도 잘 입고 다니긴 하지만, 오늘은 유독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음, 뭐. 차이면 네 탓이다.”

“미안.”

“아직까진 분위기 괜찮아.”

“잘 됐으면 좋겠네. 확실히 알파랑 오메가는 결혼을 일찍 생각하는구나.”

“아무래도. 페로몬이 안정되니까.”

결혼이라. 한주도 좀 일찍 결혼하게 되려나. 결혼은 오메가랑만 하나? 베타랑도 할 수 있나? 베타랑 결혼하면 아이도 낳을 수 있나? 한주 아기 귀엽겠다. 열 오른 머리로 뻗어 나가는 생각의 가지를 막지도 못한 채 그대로 두고 있는 선유의 이마에 해열 시트를 붙이며 지운이 툭 그 기세를 끊었다.

“너 벌써 한주 결혼까지 생각하지?”

“한주 아기까지도 생각했는데?”

“너무 빠르네.”

“그냥 다 멀리까지 생각하게 돼.”

원래도 그랬지만, 한주와 지내면서 든 버릇이었다. 좀 더 깊게, 좀 더 멀리 생각하게 되었다.

“형. 다 씻었어요.”

옷도 알아서 갈아입은 한주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걱정스레 선유의 얼굴을 만지작댔다. 약기운에 취해 이미 반쯤 잠든 상태였던 선유는 한주와 지운의 종용에 다시 침대에 누웠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잠결에 한주와 지운이 실랑이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잠에서 깰 정도는 아니었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고요한 와중에 한주가 선유의 옆에 누워 있었다. 손을 꼭 쥔 채로 잠든 아이는 사랑스러웠지만, 퉁퉁 눈두덩이 부어 있었다. 금붕어 같네. 가만히 그 얼굴을 감상하다 선유는 상체를 일으켰다.

조심스럽게 손을 빼자 한주는 기민하게 눈을 뜨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급히 선유의 얼굴을 더듬었고, 열이 좀 내린 것을 느꼈는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옆방에서 자라니까.”

“싫어요.”

고개까지 저으며 한주는 몇 번이나 싫다고 말했다. 또렷한 목소리로, 명확하게 의사를 담아.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래도 옆에 있고 싶어요.”

한마디는 울음 없이 끝냈지만 곧… 커다란 눈망울이 젖어 들었다. 뚝뚝 흐르는 것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으며 한주는 애원했다.

“제발 아프지 마요, 형….”

“…….”

“제가 할 수 있는 게… 흑, 흡, 없잖아요….”

목을 끌어안고 또 펑펑 우는 한주를 안아 주며 선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아파서도 안 되겠구나. 이렇게 우는 건 도저히 못 보겠다. 영양제 챙겨 먹고, 운동하고, 환절기에는 일도 좀 줄이고… 적어도 한주가 조금 더 클 때까지는 정말로 몸 관리 열심히 해야지. 선유는 다시 한번 얻은 교훈을 곱씹으며 한주의 등을 토닥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