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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10/13)

외전 2.

12월 31일.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렸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창밖을 내려다보던 유채가 환호성을 질렀다. 침대에 뛰어들어서, 태오의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제 뺨을 바르작댔다. 눈도 못 뜬 태오는 유채의 품 안에서 덜컹거리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허리 울려, 유채야. 아파.”

“형, 아파요? 많이 아파요? 어디 봐 봐요.”

“보긴 뭘 봐…….”

이마를 밀어냈더니 금세 뺨이 부루퉁해지면서 찐빵이 되었다. 태오는 부어오른 눈꺼풀을 제대로 밀어 올리지도 못한 채로 작게 웃었다.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따뜻하게 온몸을 감쌌다. 무거운 팔을 들어서 유채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일찍 아닌데. 열두 시 다 됐어요.”

“열두 시면 뭐…… 아직 시간 있네.”

“아니에요. 밥 먹고 숍 들렀다가 시상식 가려면 빠듯하다고요. 빨리 일어나요, 형. 응?”

늦게까지 잠도 못 자게 괴롭힌 게 누구인데 양심도 없이 채근해 댄다. 그러나 유채가 이렇게까지 급한 기색으로 조르는 것은 드문 일이라, 태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끙, 신음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유채와 시선이 마주쳤다.

옅은 갈색 속눈썹이 햇볕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긴 눈매가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채였다. 날렵하게 이어진 콧날 아래로 반쯤 벌어진 도톰한 입술이 보였다. 태오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유채를 향해 손짓했다. 유채가 씩 웃으면서 고개를 내렸다.

약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결을 불어 넣었다. 통통한 입술을 한껏 빨고 놓아주었다가 이내 또다시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 익숙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이 길게 이어졌다.

이러다가 정말 늦겠다 싶을 때쯤, 태오가 먼저 눈을 떴다. 몽롱한 눈으로 태오를 바라보는 유채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볼의 곡선이 귀여워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스물여섯 살의 유채. 여전히 처음 만났던 열여섯 무렵처럼 사랑스럽고 예뻤지만, 유채는 이제 곧 스물일곱이 될 터였다. 지나간 시간이 새삼스러웠다.

“우리 유채. 진짜 다 컸네.”

“뭐예요, 다 큰 지 좀 됐는데.”

“아, 그래? 좀 됐어?”

“당연하죠. 형은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알아.”

귀여움받고 싶어서 온갖 수작을 다 부릴 땐 언제고, 막상 예뻐해 주면 애 취급하지 말라고 투덜거린다. 태오는 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어린애 아니야?”

“아, 진짜. 아니라고요.”

“그럼 아기새도 아니야?”

“…….”

“아니야?”

“……맞아.”

어쩔 수 없이 웃음이 터졌다. 태오는 여전히 부루퉁한 유채를 제 품에 꽉 끌어안고, 유채가 놓아 달라고 바둥거릴 때까지 키스를 퍼부어 댔다.

***

포토존은 오랜만이었다. 태오는 자신을 향해 연신 터지는 카메라 셔터의 불빛에 눈을 감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란히 선 유채가 무덤덤한 얼굴로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집에서 나설 때까지만 해도 들뜬 얼굴로 활짝 웃으면서 태오의 손을 잡아끌더니, 막상 연말 시상식장에 도착한 유채는 늘 그랬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타이 브레이크’가 시상식을 휩쓸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인데요. 함께 촬영하신 신우주 씨와 나란히 수상 명단에 오르셨는데, 저희는 두 분 모두 수상하실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유채 씨 생각은 어떠신가요?”

예전과 달리 기자들과 함께하는 자리도 요즘에는 줄곧 화기애애했다. 질문을 던진 기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유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기자석에서 작게 환호성이 터졌다.

“다른 후보분들도 모두 훌륭하시지만 저는 태…… 우주가 수상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럼 유채 씨는요?”

“저야 뭐, 수상하면 좋겠지만 못 해도…….”

유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말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입을 다물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 눈을 굴리더니,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저도 상 타고 싶습니다. 같이 타면 좋을 것 같아요. 기념사진도 찍고.”

흥미로운 눈으로 유채를 지켜보던 기자들 몇 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질문했던 기자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수상하고 싶으신 이유가 우주 씨와 사진 찍고 싶어서인가요?”

“공식 석상에서 같이 찍은 사진 없거든요. 기자님께서 예쁘게 찍어 주세요.”

“하하, 그럼요. 수상하시면 동영상 뉴스로 올려 드릴게요.”

“나중에 딴말하시면 안 돼요.”

농담으로 던진 말을 진담으로 받는다. 태오는 어이가 없어서 유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유채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왜요, 하는 동안 다른 기자가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두 분께 러브콜이 쏟아진다고 들었는데요, 아직 아무런 발표가 없어서 모두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차기작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음.”

이번에는 유채도 태오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타이 브레이크’ 촬영을 마친 지 벌써 한 달 가까이 되었지만 둘 다 차기작을 정하지 못했다. 예전 생에서의 태오였다면 놀라울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태오는 일 년, 길게는 이 년에 한 작품만 들어가곤 했으니 앞으로 반년 이상은 휴식기를 가져야 했다.

그러나 새로 얻은 삶에서는 달랐다. 잃었던 과거를 되찾은 태오는 조금 더 앞으로 나가고 싶었다. 무대에 올라서,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캐릭터에 도전하고, 빠져들어 연기하고 싶었다. 자꾸만 예전 생에서는 느껴 보지 못한 욕심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AMJ 엔터와의 계약이 종료된 이후 래디언스는 아직 회사를 확정하지 않았다. 어디로 움직이든 함께 가기로 한 명태가 개인적으로 모두를 돌봐 주고 있었다. 혼자서 톱스타 다섯 명을 신경 쓰는 게 버거울 터라 명태의 일을 덜어 주고 싶어서, 태오는 그를 통하지 않고 시나리오를 모두 직접 받았다.

‘타이 브레이크’가 성공하고 태오의 연기력이 입증되면서 시나리오는 넘치도록 들어왔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 쪽에서도 주연 제안이 제법 되었다. 그러나 신중하게 검토할수록 한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없었다.

태오는 한동안 숙고한 끝에, 주연도 아니고 조연 역으로 오디션 제안이 들어온 영화를 골랐다. 국제 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수상할 만큼 예술성으로 인정받은 노장 감독의 시나리오였다. 태오는 예전 생에서도 이 감독의 영화에는 한 번도 캐스팅되지 못했다. 오디션 제안은 몇 번 받았지만, 전에는 굳이 오디션까지 치러 가며 찍을 만큼 욕심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오가 그 시나리오를 건넸을 때, 명태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우주야. 이거 캐스팅 제안 아니고 오디션이야. 저 오디션 보려고? 주연급 러브콜도 쏟아지는데.

-추여정 감독님 작품인데 당연히 오디션 거쳐야죠.

태오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명태가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추 감독님은 워낙 경륜도 있으시고 약간 꼬장꼬장하신 면이 있어서…… 오디션 힘들 수도 있어. 괜찮아?

-그럼요. 열심히 할게요. 안 되면 할 수 없고.

말은 그렇게 했어도 꼭 합격하고 싶었다. 수많은 시나리오 중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다. 아니, 이 시나리오 때문에 다른 좋은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명태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태오의 결정에 동의했고, 태오는 이제 곧 오디션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캐스팅 확정은커녕 오디션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결과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니 기자들 앞에서 섣불리 언급할 수는 없었다.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자, 기자들이 조금씩 웅성거렸다. 태오가 난처한 얼굴로 우물거리는 것을 눈치챈 유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직 없습니다. 당분간 할 일도 있고요.”

“네? 혹시 래디언스가 컴백을 앞두고 있나요? 아직 소속사가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유채가 할 일이 있다는 말은 태오도 들어 보지 못했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더니, 눈길을 마주한 유채가 다정하게 웃었다.

“전 요리 배우려고요.”

그 말에는 모두가 당황해서 굳어 버렸다.

태오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유채가 차기작을 모두 거절하고 아파트에 칩거해 버리긴 했지만, 요리를 배우겠다는 것은 너무 뜬금없었다.

“갑자기 웬 요리? 무슨 말이야?”

기자석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작게 속닥거렸다. 유채가 긴 눈매를 상냥하게 휘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형이랑 놀러 가고 싶은데. 또 한우 태워 버리면 안 되잖아요.”

태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태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유채는 기자를 향해 대답을 이었다.

“제가 요리를 정말 못하거든요. 이제는 조금 쉬면서, 이번 기회에 제대로 배워 보고 싶어요.”

“아……. 하긴, 유채 씨는 요 몇 년간 정말 쉴 틈 없이 달리셨죠. 작품 활동에, 래디언스 활동에.”

“유채 씨가 쉬신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봐서 저희가 잠깐 당황했습니다. 처음으로 휴식기를 갖게 되셨는데, 이참에 푹 쉬시고 좋은 모습으로 또 뵙고 싶어요.”

잠시 당황했던 기자들이 그럴 만하다는 듯 하나둘 말을 보탰다. 그제야 기자석으로 고개를 돌린 유채가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하, 네. 감사합니다.”

그때, 구석진 곳에서 줄곧 듣기만 하던 기자 한 명이 궁금하다는 듯 불쑥 질문을 던졌다.

“어떤 요리를 가장 먼저 배우고 싶으세요?”

그 말에 유채의 말간 뺨이 붉게 물들었다.

“오징어튀김이요.”

긴 속눈썹을 나비 날개처럼 파드득 떨면서, 수줍은 듯 대답하는 목소리가 나지막했다.

***

“신인상 수상자는…….”

신인상 대상자를 발표하는 자리. 정작 태오는 침착했는데 곁에 앉은 유채의 손끝이 떨렸다. 태오는 슬쩍 웃으면서 유채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무인 카메라가 징- 소리를 내며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타이 브레이크’ 신우주! 축하합니다.”

“와.”

태오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유채가 숨을 몰아쉬면서 감탄을 뱉었다. 시상식보다 유채 반응을 구경하는 게 더 재밌었지만 상 받는 것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라, 태오는 웃음을 삼키면서 일어나 무대 위로 향했다. 박수갈채와 함께, 홍두와 쥬니퍼가 돌고래 비명처럼 환호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막상 상패를 손에 쥐었더니 정말로 눈앞이 막막해졌다.

태오는 이전 생에서도 신인상을 받았다. 시상식마다 수상하지 않은 적이 오히려 드물었기 때문에, 신인상 정도는 태오의 장식장에서도 가장 구석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은 남우주연상이나 최우수상보다 더 가슴이 떨렸다. 태오에게 이 상은 단순히 신인상 하나가 아니었다.

“믿고 맡겨 주신 서 PD님과 손 작가님, 촬영 팀, 동료 배우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촬영하는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태오는 눈을 들어 객석을 바라보았다. 유채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언젠가 태오의 귓가에 속삭이던 다정한 목소리가 물결처럼 귓가에 밀려들었다.

-형, 우리 이번에는 같이 시상식에 가요.

언젠가 유채와 함께 나란히 서서 시상식에 가고 싶었을 때.

‘제왕’ 캐스팅이 확정되었던 날, 유채는 태오의 품에 뛰어들면서 들뜬 희망을 늘어놓았다.

-……같이 레드 카펫 밟고 들어가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요. 형이 남우주연상 타고 내가 남우조연상 타면 상패 들고 같이 사진 찍어서 SNS에 올리고. 나만 올리면 짝사랑 같으니까 꼭 형도 올려야 해요. 아냐, 상 못 타도 상관없어요. 대신 형이 남우주연상 타면 내가 꽃다발 줄 테니까 그거 들고 사진 찍어요. 유채꽃다발로 주면 너무 티 날까요? 내년 연말에는 꼭 옆에 앉아서 1월 1일 되는 순간에 같이 있어요…….

그러나 태오는 결국 그 시상식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시상식이 진행되던 날, 텅 빈 아파트에서 혼자 가슴팍을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모두 지나간 일이 되었고…… 다시 연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자 박수가 쏟아졌다. 다시 허리를 폈을 때, 꽃다발을 손에 들고 무대로 올라온 유채와 시선이 마주쳤다.

태오는 노란색 꽃이 흐드러지게 핀 꽃다발을 품에 안고 활짝 웃는 유채의 해사한 얼굴을 눈에 새길 듯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축하해요.”

태오 형.

입 모양으로 작게 부르는 목소리에 가슴이 간지러웠다. 노란 꽃잎 하나가 바닥으로 팔랑 떨어져 내렸다.

“드디어 같이 왔네요.”

“응. 그러게.”

그리고 내년에도, 후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유채는 태오와 함께 레드 카펫을 밟고 사진을 찍고 꽃다발을 안겨 줄 것이다. 그들 앞에 남은 날들은 수없이 많았다.

“다음은 최우수상 시상입니다. 후보는…….”

시상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최우수상 차례가 되었을 때, 태오는 고개를 기울여 유채의 귓가에 속삭거렸다.

“너 정말 당분간 작품 안 하고 요리 배울 거야?”

“응, 그럼요. 왜요?”

“그냥.”

좋아서.

유채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것처럼 힘겹게 달리지 않는 게 좋았다. 이제는 보폭을 맞추어 함께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할 거였다.

“최우수상 수상자는…… ‘타이 브레이크’ 한유채!”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게 행복해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잃어버린 소년을 위하여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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