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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8/13)

Chapter 4.

반쯤 열린 운전석 차창 위로 바람이 불었다. 목덜미에 닿는 공기가 어느새 선선해졌다. 늦은 여름이 드디어 지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온몸이 나른해진 채 조수석에 늘어져 있던 태오는 가까스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운전석에서 상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좀 더 자요, 형. 촬영장 도착하려면 아직 좀 걸려요.”

“어…….”

곁눈으로 운전 중인 유채를 흘끗거렸다. 시선을 느낀 유채가 정면을 바라본 채로 눈꼬리를 휘었다. 차창 밖에서 밀려든 햇볕이 그의 뺨에 닿아 하얗게 빛났다. 태오는 괜히 귀 끝이 달아올랐다.

차체는 조용히 도로 위를 미끄러졌다. 태오는 잠시 눈을 굴리다가 문득 떠오른 일을 물었다.

“차는 언제 샀어?”

“음……. 삼 년 전에요. 혼자 다니고 싶어서.”

“아.”

삼 년 전이라면 태오가 예전 생을 마쳤을 때였다. 그제야 졸음이 가시면서 정신이 들었다. 줄곧 로드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만 탔던 유채가 굳이 혼자 다니고 싶었던 이유는 하나밖에 없을 터였다. 태오는 금세 안쓰러운 표정이 되었다.

슬쩍 바라본 유채의 입가에는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삼 년 전의 그 무렵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태오는 미간을 잠시 좁혔다가, 유채를 향해 한 손을 뻗었다. 검지 끝에 하얗고 말랑한 뺨이 닿는 순간 쿡 찔렀다.

유채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태오는 부러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 다른 생각 해. 날 앞에 두고.”

“……안 해요, 다른 생각.”

유채는 고개를 저었다. 눈썹을 덮은 갈색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서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앞머리를 살살 쓸어 올려 주었더니 유채가 간지러운 듯 웃었다. 가라앉았던 눈빛에 그새 생기가 돌아온 채였다.

유채가 핸들을 왼쪽으로 꺾으면서 입을 열었다.

“형, 많이 피곤해요? 촬영할 수 있겠어요?”

“나야 뭐……. 계속 쉬면서 대기하다가 오후 늦게 찍을 테니까 괜찮아. 네가 피곤하지.”

어젯밤, 그들은 창밖에서 동이 틀 때까지 침대 위에 마주 보고 누워 있었다.

태오는 자신이 없었던 삼 년간 유채가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유채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눈앞에서 달싹거렸다.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오는 유채가 함께 일했던 감독이나 작가, 배우들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자신이 보지 못했던 유채의 일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궁금해했다. 우주로 지내는 동안 유채를 눈앞에 두고도 마음껏 물을 수 없었던 게 한이 맺혔다. 그렇게 온갖 사소하고 잡다한 일들을 묻다가, 말이 끊기면 물끄러미 유채를 바라보았다.

유채는 다정한 눈으로 시선을 맞추어 왔다. 숱 많은 속눈썹이 물기에 젖어 가닥가닥 갈라진 채였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느라 지난밤에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저도 괜찮아요. 하나도 안 피곤해요.”

귓가에 부드럽게 닿은 목소리가 태오의 상념을 깨웠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가,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태오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낀 것을 그제야 알았다. 맞닿은 살갗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렇게 촬영장에 도착할 때까지 손이 잡혀 있었다.

***

오늘따라 대기가 유독 길었다. 태오는 졸음을 쫓으려고 크게 기지개를 켰지만, 보람도 없이 간이 의자 위에 축 늘어져 버렸다. 제 장면을 이제 막 마친 홍두가 쥬니퍼를 달고 나타나 태오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오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너희…… 사귀니?”

“예에? 형님, 제 혼삿길 막으시려고 그럽니까?”

“선배님, 쥬니퍼 아이돌입니다! 아이돌은 팬들하고만 사귀는 겁니다!”

홍두와 쥬니퍼가 양쪽에서 팔짝거렸다. 아이돌인 유채가 연습생일 때부터 끼고 키웠던 태오는 괜히 머쓱해졌다.

“아니, 뭐. 맨날 둘이 붙어 다니니까 그랬지.”

쥬니퍼의 순한 얼굴이 금세 발끈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매몰찬 목소리로 태오에게 쏘아붙였다.

“아닌데! 쟤 말고 선배님 따라다니는 건데요!”

“응?”

슬그머니 따라붙은 홍두도 수줍은 얼굴로 삐죽삐죽 말했다.

“저도 쟤보다는 좀 더 형님 같은…… 단정하고 우아한 얼굴이 좋습니다.”

“나?”

생각해 보니 둘이서 세트로 다니는 게 아니라 둘이서 같이 태오에게 달라붙어 다니는 거였다. 태오는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어떡하냐, 나는 이미 품절인데.”

쥬니퍼와 홍두의 눈이 똑같이 동그래졌다. 키 차이가 머리 하나보다 더 컸는데도 쌍둥이 같았다. 태오는 웃음을 삼키면서 대본을 뒤적거렸다. 홍두가 딴청을 부리는 태오의 오른팔에 착 붙었다.

“아, 형니임. 누굽니까? 누군데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저한테만 말해 주십셔.”

“말해 주면 뭐 하게?”

“몰래 암살을…… 아아니, 형님 애인이시면 제가 잘해 드려야죠. 맞지, 쥬니야?”

쥬니퍼가 양쪽 주먹을 꼭 쥔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개를 세차게 젓느라 긴 머리카락이 태오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싫다! 선배님 아무도 만나지 말아요! 고고한 얼음 여왕처럼 혼자 살아요!”

“뭐? 나는 빨리 돈 벌고 건물주 돼서 애인이랑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야.”

유채가 갖은 고생 끝에 건물을 사수한 덕분에 이미 반쯤은 건물주였다. 그래도 건물은 많을수록 좋았다. 태오는 ‘타이 브레이크’가 대박을 터뜨려서 빌딩 하나를 더 올리는 상상을 하며 즐겁게 웃었다. 예전 생에서는 특별히 부에 대한 집착이 없었는데, 가진 걸 모두 잃고 빚더미에 앉아 보니 세상에서 유채 다음으로 소중한 게 부동산이었다.

홍두가 기웃거리면서 궁금한 듯 물었다.

“아이이이, 그래서 애인이 누굽니까? 진지하게 만나는 겁니까?”

“응? 아니, 당연히 농담이지. 아이돌은 팬들하고만 사귀는 거야.”

일 분 전에 쥬니퍼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면서 모른 체했다. 홍두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태오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농담 아닌 거 같은데! 형님 오늘따라 수상쩍어 보입니다!”

“수상쩍 합니다!”

아니라는데도 커다란 덩치를 불쌍하게 구기면서 징징대는 홍두와 쥬니퍼에게 질색하는 표정을 했다. 날도 더운데 양쪽에서 치대는 바람에 온몸이 끈적거렸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지만 낮은 여전히 한여름처럼 덥다. 목이 타면서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갑자기 당겼다. 커피 차에 다녀와야겠다, 생각하면서 홍두와 쥬니퍼를 털어 내려고 했을 때였다.

등 뒤에서 불쑥 커피 잔이 나타났다. 얼음이 가득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태오는 눈을 크게 떴다. 유채가 태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덥죠. 이거 마셔요.”

“어? 어어…….”

상쾌한 체 향이 코끝에 스쳤다. 태오의 아파트에서 함께 나왔으니 같은 제품의 보디 워시를 사용했을 텐데도 유채에게서만 유독 청량한 향이 났다.

태오는 커피를 받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해를 등지고 선 유채가 눈을 길게 접으면서 웃었다. 긴 속눈썹에 내려앉은 햇볕 조각에 눈이 부셨다.

태오는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됐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면서 파르르 떨렸다.

“촬영 끝났어?”

“이번 파트는요. 이따가 형하고…….”

밝은 얼굴로 대답하던 유채가 잠시 멈칫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채 유채를 바라보고 있는 홍두와 쥬니퍼의 시선을 눈치챈 탓이다. 반듯한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저희들을 바라보는 흉흉한 눈길에 홍두와 쥬니퍼가 흠칫거렸다.

그러나 태오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린 유채의 눈빛은 다정하기만 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이따가 너하고 같이 찍을 때까지 점심 휴식 시간.”

“아아, 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태오인 티를 낼 수는 없었는지 유채가 말을 바꿨다. 태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유채를 올려다보았다. 그간 줄곧 반말로 대화했는데도 이런 말투는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우주로 지내는 동안 유채는 줄곧 시비만 걸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상냥하게 말을 걸어오는 유채가 낯설었다. 한참 어린 것 같았던 유채가 문득 연상으로 보였다.

아침까지 함께 있다가 촬영하는 동안 잠시 떨어졌을 뿐인데도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 안쪽의 어딘가가 간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어쩐지 목덜미가 달아올라서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태오가 머뭇머뭇 물었다.

“그럼 점심 같이 먹을까? 도시락 받아 놨는데.”

촬영을 시작한 이후 태오는 항상 도시락을 두 개씩 챙겼다. 현장에는 도시락이 언제나 넉넉하게 남았고, 유채는 늘 시간에 쫓겨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유채에게 도시락을 전해 주지 못했다. 말 한번 붙이지 못하고 하루가 저무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별것 아닌 말인데도 목소리가 슬쩍 떨렸다. 단둘이 있을 때는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는데, 막상 촬영장에서 만난 유채와 제대로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태오는 조금 초조해져서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러자 유채가 쌕 웃었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 태오의 머리카락을 슥슥 헤집어 놓았다. 공들여 드라이한 머리가 순식간에 유채의 손길 아래 흐트러졌다. 유채가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리면서 태오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연갈색 눈동자와 도톰한 입술이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그럴까?”

“…….”

아무래도 심장병이 도진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자꾸 가슴이 뻐근할 리 없었다. 당황해서인지 자꾸 뺨에 열이 올랐다. 태오는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를 부쳤다. 유채가 눈을 느릿하게 깜박거리더니 조곤조곤 물었다.

“더워? 열나네.”

커다란 손이 불쑥 다가와 태오의 뺨을 쥐었다.

조금 전까지 차가운 커피 잔을 들고 있어서인지 서늘한 손의 온도가 기분 좋았다. 그러나 열이 내리기는커녕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태오는 제 볼을 가볍게 만지는 유채의 손을 움켜쥐었다. 시원한 감촉이 사라지고 나서야 숨이 트였다. 입술을 간신히 달싹거려서 유채를 불렀다.

“유채…….”

“우와, 한유채 선배님. 우리 형님이랑 언제부터 이렇게 친했습니까?”

“왜 친했습니까!”

물결처럼 찰팍이던 간지러운 기분이 갑자기 깨졌다. 태오는 퍼뜩 정신이 든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홍두와 쥬니퍼가 얼떨떨하고 신기해하는 얼굴로 유채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유채는 또다시 눈썹을 구겼다가 태오와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얼굴을 폈다.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생긋 웃는데 눈빛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몸을 빙글 돌려 홍두에게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태…… 얘가 왜 김홍두 씨의 ‘우리 형님’이죠?”

홍두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유채는 평소 촬영장에서 또래 배우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유채는 태오로 인해 줄곧 힘들어했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도 혼자서 밴에 틀어박혔다. 다른 배우들도 워낙 인지도 차이가 나는 유채를 어려워했고, 말수가 적은 유채에게 아무도 먼저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게 연예인의 연예인 같은 느낌이었던 유채가 갑자기 나타나서 시비를 털었으니 홍두가 의아할 만했다. 이러다가 유채의 인성 논란이라도 나면 곤란했다. 태오는 황급히 유채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눈에 힘을 주면서 말렸는데,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유채는 금세 눈을 곱게 휘면서 생글거렸다.

“미안, 배고프지. 점심 먹자. 도시락 어디 뒀어?”

“어? 어어……. 여기.”

한쪽 구석에 내려 둔 도시락을 가리켰더니 유채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평소에는 도시락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적당히 먹곤 했는데, 유채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간이 테이블을 눈앞에 펼쳐 놓고 태오의 손에 수저를 쥐여 주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태오는 유채가 입에 대 주는 생수를 마시고 있었다. 주변에 정적이 흘렀다.

“저기…… 진짜 저희랑 같이 드십니까?”

쥬니퍼와 서로 옆구리를 쿡쿡 찔러 대면서 싸우다가, 가위바위보에서 진 홍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채의 서늘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고개를 까딱하면서 단답형으로 대꾸했다.

“예.”

그리고 태오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홍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홍두가 눈을 끔뻑거리면서 유채를 마주 바라보았다. 팽팽한 대치가 잠시 이어졌다. 정확히는 유채의 눈빛만 팽팽했고, 홍두는 잔뜩 당황한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저, 저기. 여기 앉으시겠습니까, 선배님……?”

마침내 유채가 원하는 바를 눈치챈 홍두가 허둥지둥 일어나 자리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유채는 상큼한 얼굴로, 사양 한번 하지 않고 냉큼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기요, 선배님.”

유채가 홍두를 찍은 덕분에 태오의 다른 쪽 옆자리를 무사히 지켜 낸 쥬니퍼가 태오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유채 선배님 오늘 왜 저래…… 왜 저러시나요?”

태오는 도시락에 들었던 오징어튀김을 태오의 밥 위에 얹어 주면서 마냥 즐거워 보이는 유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몰라. 그냥 유채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주자.”

***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두었더니 유채는 갈수록 가관이었다.

쥬니퍼는 아예 살림을 차릴 기세로 우주의 곁에 자리 잡고 앉아서 사과를 깎고 있는 유채를 바라보며 혀를 쯧 찼다. 끌끌거리는 소리를 들은 홍두가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야, 쥬니야. 저분 오늘 대체 왜 저러시냐?”

홍두는 유채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소곤거렸지만 어차피 유채는 그들에게 관심도 없어 보였다. 얼마나 투명 인간 취급을 하는지 태오 곁에 앉았던 쥬니퍼도 무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홍두와 함께 몇 걸음 떨어진 곳으로 옮겨 온 뒤였다. 그 후로는 아예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쥬니퍼와 홍두가 근처에 존재한다는 것도 잊은 듯했다.

“응, 진짜 이상해. 내가 더 선배님이랑 친한데!”

“야, 네가 형님이랑 뭐가 친해? 형님은 나랑 제일 친하시지.”

홍두가 뻐기면서 대꾸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쥬니퍼는 얼마 전 나갔던 예능의 퀴즈 코너에서 배운 속담을 떠올리면서 홍두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능글거리는 홍두보다 우주 옆에 찰싹 붙어서 가증을 부리고 있는 유채가 더 얄미웠다.

그렇다. 쥬니퍼의 눈에는 유채가 하는 짓이 모두 다 가증으로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유채는 우주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같은 그룹 멤버인데도 스타 배우인 한유채가 듣보 조역이라고 우주를 무시하는 게 뻔했다. 우주가 성격이 좋다 보니 저렇게 오만 방자한 유채를 늘 신경 쓰며 챙기는 듯해서 더 안타까웠다.

그런데 오늘 아침, 우주를 직접 제 차에 태워서 촬영장에 등장한 유채의 태도가 갑작스레 변했다.

언제나 찬바람이 쌩 돌았던 유채는 갑자기 우주가 전생에 헤어졌던 옛사랑인 것처럼 굴었다. 그러면서 우주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는 다른 배우들에게는 뜬금도 이유도 없이 날을 세웠다. 유채가 한류 대스타인지는 몰라도 이 촬영장에서만큼은 우주가 모두의 슈퍼스타였다. 특히 테니스 부원으로 출연하는 배우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유채에게 우주를 뺏겨 버려서 분에 가득 차고 말았다.

우주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온종일 촬영장에는 유채와 우주에 대해 수군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 같이 빙 둘러앉아서 의논한 끝에, 유채가 우주에게 약점이 잡혔거나 유채가 뭘 잘못 먹었거나 둘 중 하나인 게 분명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매사에 거침없는 주형은 유채를 심지어 ‘여우 새끼’라고 불렀다. 화민과 홍두가 낄낄거리면서 물개 박수를 쳤다.

“아야.”

그때 맞은편에서 여우 새…… 유채가 아픈 척을 했다. 사과를 깎겠다면서 과도를 들고 어설프게 굴더니 결국 손을 벤 모양이었다. 과도를 잡은 자세만 봐도 사과는커녕 귤 한번 제 손으로 까 보지 않은 것 같았는데 우주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뻔한 수작을 부리더니 쌤통이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선홍색 피가 퐁퐁 솟아나는 손가락이 제법 아파 보였다.

“유채야. 아파? 아, 어떡해. 그러게 왜 안 하던 짓을 해!”

그러나 우주가 벌떡 일어나면서 손이 부러진 것처럼 구는 것은 의외였다.

우주를 늘 무시했던 유채와는 달리 우주는 줄곧 유채를 챙겼지만 일정한 거리 이내로 다가간 적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 벽이 훅 사라졌다. 갑자기 붕괴된 베를린 장벽 위에서 우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발을 굴렀다.

“병원 가야겠다, 유채야. 꿰매야 하는 거 아냐? 많이 아파?”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뾰족한 눈으로 유채와 우주 근처를 맴돌던 배우들이 와르르 몰려들었다. 화민과 주형과 홍두가 유채의 어깨 너머에서 갸웃거리며 한 마디씩 늘어놓았다.

“뭐래요. 그냥 데일밴드 붙이면 되겠구만.”

“내일 되면 낫겠네요, 형. 아니다, 오늘 오후면 깨끗해진다.”

“무슨 병원을 가요. 후시딘 드려요?”

다들 유채에게 쌓였던 불만을 이참에 털어놓았다. 그러나 복수치고는 소심했다. 멀찌감치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쥬니퍼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여우 새…… 유채가 우주의 어깨 위로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눈을 내리깐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파…….”

우주는 그 자리에서 30센티쯤 뛰어올랐다. 커다란 눈에 걱정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차로 가자, 유채야. 구급상자 있을 거야. 너희들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피가 이렇게 나는데!”

“아니, 별로 많이도 안 나는데…….”

홍두가 커다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구시렁거렸다. 그래도 하얀 살갗에서 피가 퐁퐁 솟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마뜩잖은 얼굴로 유채를 노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주형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한유채 선배님, 이런 분인 줄 몰랐네요. 우주 형이랑 진짜 안 친했잖아요?”

그러자 유채가 큰 눈을 가만히 깜빡거렸다. 눈꺼풀이 움직일 때마다 빽빽한 속눈썹이 부드럽게 오르내렸다. 새하얀 피부와 갈색 눈동자가 자아내는 분위기가 청순하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했다. 조금 전까지 여우 새…… 유채를 속으로 욕하고 있었던 쥬니퍼조차 깜빡 속아 넘어갈 표정이었다.

“제가 언제요……?”

목소리마저 파르르 떨렸다.

연기가 대단했다. 쥬니퍼는 아무나 톱스타가 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러나 주형도 만만치 않았다. 쥬니퍼와 홍두는 오전 나절에라도 우주 곁에 붙어 있었지만 유채와 같은 신을 찍어야 했던 주형은 이제 겨우 우주와 얘기해 보는 거였다. 모처럼 생긴 기회를 갑자기 나타난 유채에게 방해받아서 몹시 불만스러웠다. 주형은 옆에서 화민이 옷자락을 잡고 살살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쏘아붙였다.

“뭐가 언제예요? 우주 형한테 욕하는 거 제가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

“…….”

유채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 같아 쥬니퍼도 슬슬 걱정이 됐다.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우주가 눈에 들어왔다. 우주는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매에 웃음이 가득했다. 쥬니퍼는 놀란 얼굴로 멈추어 섰다.

“막, 쳐다보기만 해도 눈 깔라고 하고, 재수 없으니까 눈앞에 보이지 말라고 했던 거 다 들었는데요!”

주형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유채의 안색은 점점 더 하얗게 질렸고, 우주는 급기야 끅끅 소리를 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우주가 제 편을 들어 준다고 생각한 주형은 기세가 등등해졌다.

“우리 다 안다고요! 그러면서 왜 하루 종일 우주 형 차지하고! 우리도 우주 형이랑 놀고 싶은데!”

이번에는 쥬니퍼도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우주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주연급 조연이었지만 그래도 대기 시간이 적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급한 스케줄이 있는 배우들에게 순서를 양보해 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촬영장에는 우주에게 도움받은 출연진이 많았다.

덕분에 대기하는 게 일상인 테니스 부원 역의 배우들은 거의 온종일 우주 곁에 붙어 있을 수 있었다. 마냥 노는 것은 아니었다. 우주는 누군가 미안한 듯 연기에 관해 물어보거나 대사 연습을 부탁할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요청을 들어주었다. 둘 혹은 셋이서 대사를 주고받고 있으면 같은 신을 촬영할 배우가 끼어들었다. 그러다 보면 제법 거창한 연습이 되었다.

받아 주는 사람이 워낙 출중하다 보니 아무리 연기가 부족한 배우라도 눈에 띄게 실력이 늘었다. 심지어 우주는 자신이 등장하는 신이 아닐 때도 누가 부탁하든 상대역을 기꺼이 맡아 주었다. 대본 책을 통으로 외울 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성격이나 감정선도 모두 꿰고 있는 것 같았다. 지루한 대기 시간도 우주와 함께하면 금세 끝났다. 유채가 천만 배우든 슈퍼스타이든 아무도 관심 없었다. 어쨌든 우주를 뺏어 가는 사람은 싫었다.

주형의 눈빛이 이글이글 끓었다. 종일 꾹꾹 눌러 참은 듯했다. 지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는지, 유채는 창백한 얼굴로 눈을 내리깐 채 말이 없었다. 곁에서 숨죽여 웃고 있던 우주가 드디어 진정하고 유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게, 주형아. 유채는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오해했어요.”

중재하려는 우주의 말을 유채가 불쑥 끊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말간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애처로웠다. 쥬니퍼는 짧은 신음을 삼켰다. 주형이든 홍두든 저 여우 새…… 유채를 이기는 일은 요원해 보였다…….

유채가 흔들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태…… 우주…… 얘를 오해해서, 그래서 그랬어요.”

“아니, 저기 그게요.”

“나도 너무 미안해서…… 잘하고 싶어요. 많이 늦었지만…….”

이번에는 주형이 당황했다. 주형은 대놓고 안쓰럽게 나오는 상대에게 언성을 높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얼굴이 벌게진 채 어쩔 줄 모르는 주형을 앞에 두고 유채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긴 속눈썹에 물기가 비쳤다. 주형은 기절할 듯 놀랐다.

“아, 아니에요.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시비 걸어서 죄송합니다!”

주형이 허둥허둥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을 구경하면서 쥬니퍼는 결론을 내렸다. 유채는 우주 앞에서만큼은 청순가련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우주가 이 자리를 떠나는 순간 주형 앞에서도 표정이 돌변할 게 뻔했다.

다행히 슬쩍 살펴본 우주는 그다지 속는 표정이 아니었다. 재밌다는 듯이 싱글거리면서 유채를 바라볼 뿐이었다. 우주 앞에서 유채가 본성을 보인 게 벌써 몇 주나 되었는데 이제 와서 속을 리도 없었다. 오히려 무익한 시도를 하고 있는 유채가 어이없었다. 얼굴로 공격하면 이미지 세탁이 쉬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쥬니퍼는 콧김을 훅 불었다.

다만 줄곧 반짝거리는 우주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유채의 연기에 넘어가지 않은 게 분명한데도 우주는 연신 유채의 탄탄한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유채가 주형을 관객으로 세우고 혼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찍고 있는 동안(심지어 줄리엣 역이었다), 우주는 재롱 잔치 무대에 오른 아기를 보는 눈으로 유채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웃기만 했다. 쥬니퍼는 약이 올랐다.

‘뭐가 귀여워요, 선배님? 저 여우 새…… 여우 아기가?’

쥬니퍼는 혼자 생각하다 말고 씩씩거렸다.

***

주형이 시무룩한 얼굴로 유채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소동이 일단락되었다. 유채는 상냥하게 웃으면서 사과를 받아 주었지만 눈빛이 아주 거만했다. 쥬니퍼도 주형도, 홍두와 화민까지도 그 눈빛을 눈치채고 발끈했지만 우주가 나서서 유채의 손목을 잡아끄는 바람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우주와 함께 밴 안으로 사라진 유채는 이내 손가락에 붕대를 칭칭 감고 나타났다.

“왜 아주 손가락 깁스를 하시지 그러십니까?”

홍두가 빈정거렸다가 우주의 눈빛을 받고 입을 합 다물었다. 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주는 그 짧은 사이에 유채에게 홀랑 넘어가 버린 듯했다. 쥬니퍼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 FD가 다가와 우주와 유채를 불렀다.

“두 분 대기해 주세요!”

스타일리스트 둘이 달려와 각자 우주와 유채를 붙잡고 섰다. 우주의 뺨에 쿠션을 톡톡 두드리던 스타일리스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입술이 왜 이렇게 부었어? 아침에는 멀쩡하더니.”

유채의 스타일리스트도 미간을 좁혔다.

“좀 전에 수정했는데 메이크업이 그새 다 지워졌네.”

우주는 난처한 듯 웃었고, 유채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보았다.

“슛 들어갑니다!”

이내 이준희와 성해인의 신이 시작되었다. 줄곧 태평하게만 굴던 이준희가 처음으로 성해인과의 갈등을 진지하게 마주하는 장면이었다. 카메라 앞에 선 우주가 부드러운 표정을 걷어 내고 얼굴을 굳히는 모습이 보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쥬니퍼 곁에 홍두와 주형이 슬금슬금 다가와 섰다. 모두들 우주의 연기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좋은 연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우주가 사라지고 성해인이 무대에 등장했다. 성해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이준희를 응시했다. 촬영이 시작되었다.

***

“컷—!”

몇 번째일지 모를 NG가 났다. 태오는 신음을 삼켰고, 서 PD는 대놓고 한숨을 뱉었다. 유채만 난처한 얼굴로 눈을 곱게 내리깔았다. 애처로운 얼굴로 예쁘게 있으면 다 해결되는 줄 아나 보다. 태오는 인상을 팍 썼다.

그러나 태오가 입을 여는 것보다 서 PD가 빨랐다. 서 PD는 카메라 화면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 유채를 바라보았다. 서늘한 눈길에 태오가 식은땀이 다 났다.

“유채야. 잘하던 애가 오늘 왜 안 하던 짓을 하지?”

유채가 안 하던 짓을 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유채는 오늘 안 하던 짓만 종일 했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캐러멜 마키아토를 양손에 들고 찾아와 태오 곁에 붙어 있더니 도시락을 함께 먹은 후에는 먹지도 않던 사과를 깎았다. 피를 본 탓에 붕대를 칭칭 감은 유채의 긴 손가락을 바라보면서 태오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촬영에 집중하지 않는 유채에게 화가 났지만, 다친 손을 보면 안쓰러워서 화낼 수가 없었다. 유채가 애처로운 얼굴로 예쁘게 있기만 하면 다 해결되는 게 태오에 한해서는 결국 사실이었다.

“죄송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유채가 서 PD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서 PD는 주름이 간 미간을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이마에 핏대가 서는 모습이 다 보여서 태오는 흠칫 놀랐다. 정작 가만히 선 유채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유채, 오늘 무슨 좋은 일 있니?”

서 PD가 뜬금없이 물었다.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니라 비꼬는 어투인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유채는 태오를 흘끔 곁눈질하더니 수줍은 표정으로 뺨을 붉혔다. 태오는 어이가 없어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유채는 멍한 얼굴로 태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좋다고 따라 웃었다.

정말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날 만큼 귀여웠다.

그러나 서 PD 표정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 태오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예……. 죄송합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유채가 고개를 푹 숙였다. 굳게 드러난 목뒤가 열이 오른 듯 발긋한 색이었다. 귓불도, 뺨도 온통 달아올랐다. 태오는 또다시 웃고 싶었지만 서 PD가 무서워서 간신히 참았다.

“왜 자꾸 성해인을 보고 웃어 대지? 안면 근육에 힘이 안 들어가?”

서 PD가 몸을 앞으로 빼면서 조용히 물었다. 감정 없이 차분한 목소리라서 더 무서웠다. 유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잘근 씹었다. 이준희와 성해인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성해인을 바라볼 때마다 이준희의 눈빛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손 작가가 브로맨스 코드를 넣긴 했어도 갈등이 절정에 이르는 장면에서까지 해사하게 웃고만 있으라는 얘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피디님. 유채가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가 봐요. 제가 잠깐 얘기 좀 하고 와도 될까요?”

유채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태오가 끼어들었다. 서 PD는 마뜩잖은 표정이었지만, 유채가 이렇게 촬영을 망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서 그런지 결국 손을 휘휘 저었다. 곁에 있던 AD가 큰 소리로 외쳤다.

“30분 휴식합니다!”

***

태오는 유채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매니저 없이 둘이서 왔기 때문에 래디언스 밴 대신 유채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유채의 손목을 움켜쥐고 뒷좌석에 올랐다. 문을 닫자마자 유채가 온몸으로 태오를 덮쳤다. 태오는 놀란 얼굴로 유채의 어깨를 밀어내려고 바둥거렸다.

“유채야, 촬영장이잖아.”

“으응, 밖에서 안 보여요.”

“아니, 그래도…….”

짙은 선팅으로 가려진 차창 밖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촬영 도중이었고, 삼십 분 휴식 시간을 받아서 유채를 타이르려고 온 참이었다. 그 틈에 달려드는 게 기가 막혔다. 태오는 어이가 없어서 픽 웃으며 유채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너 혼내려고 온 건데 누가 덤비래.”

“나 혼나요?”

유채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눈꺼풀의 움직임을 따라 긴 속눈썹이 팔락거렸다. 말간 뺨에 부드러운 홍조가 떠올랐다. 유채가 부끄러운 듯 속삭였다.

“그러면…… 내가 다 잘못했어요.”

“어? 아냐, 유채 잘못한 거 없어.”

태오는 저도 모르게 녹아내려서 유채의 편을 들어 주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유채가 아무리 예뻐도 일은 일이다. 주연 배우가 제대로 역할을 해내지 못하면 촬영장에 대기하는 모든 사람이 힘들어졌다.

이런 문제로 유채를 혼내는 것은 처음이라서 태오도 당황스러웠다. 예전 생에서는 촬영에 들어갈 때마다 유채가 더 칼같이 굴었다. 매번 각이 바짝 든 모습이 안쓰러워서, 태오가 오히려 힘 빼고 하라고 달랠 정도였다. 갑자기 왜 이렇게 헤실헤실 풀어져 버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태오는 자신을 푹 감싸 안은 유채의 등에 팔을 둘렀다. 살살 토닥거리면서 타이르듯 말했다.

“너 그렇게 집중 못 하면 어떡해.”

“응, 잘못했어요.”

유채는 앵무새처럼 잘못했어요, 만 반복하면서 태오의 뺨에 입술을 꾹 눌렀다. 발음이 웅얼웅얼 뭉그러졌다. 태오를 껴안은 단단한 팔에 힘이 들어갔다. 태오는 이제 윤태오였던 자신과 거의 비슷할 만큼 키가 자랐고 누구에게든 밀릴 몸은 아니었는데, 한참 더 큰 유채에게 깔려 버린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숨이 차오른 태오가 버둥거렸다.

“아니, 잠깐만. 놓고 얘기해. 유채야?”

“내가 다 잘못했어…….”

그래도 유채의 손이 태오의 셔츠를 걷어 올리고 맨허리를 쓸어내리기 시작했을 때는 저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유채.”

가까스로 유채의 손목을 움켜쥐고 나직하게 부르자 줄곧 감고 있었던 눈이 열렸다. 옅은 색 눈동자가 몽롱하고 멍해 보였다.

“응?”

“여기서 이러면 안 돼. 정신 차리고 일하러 가야지. 촬영할 때 집중하고. 내 말 듣고 있어?”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아서 조금 더 목소리를 낮췄다. 그제야 유채의 눈에 조금씩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연갈색 눈동자에 퓨즈가 돌아온 듯 빛이 번졌다. 태오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유채야. 무슨 일이 있든 촬영은 제대로 해야지.”

목소리가 조금 더 단호해졌다. 일부러 표정을 굳히자 유채의 눈이 놀란 듯 동그랗게 커졌다.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금세 서러운 얼굴이 되었다.

“너무 좋아서……. 형은 안 좋아요?”

눈동자가 금세 울먹해졌다.

태오는 속절없이 마음이 아파져 버렸다. 풀 죽은 표정으로 눈을 가만히 내리깐 얼굴이 애처로워서 가슴이 뻐근했다. 그러나 이대로 현장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NG를 잔뜩 낼 것이다. 태오는 심호흡을 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며칠 전까지의 지옥의 조동아리였던 유채를 떠올려 보았다. 쳐다보기만 해도 트집 잡으면서 인상 쓰던 유채 때문에 하루에도 열 번씩 열이 올랐던 지난 몇 달을 회상했다. 눈앞의 유채와 너무 달랐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유채는 여우 짓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과연 효과가 있었다.

심장 박동이 정상화된 것을 확인한 태오가 신중한 얼굴로 눈에 힘을 주었다. 유채는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였다.

그때 문득, 붉게 물든 그의 귓바퀴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하얗고 투명했던 유채의 뺨도 목덜미도 온통 울긋불긋했다. 태오에게 잡힌 손목 아래로 긴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태오는 불현듯 깨달았다.

유채는 태오의 앞에서 내숭을 떠는 게 아니었다.

지난 생에서도, 다시 만난 지금도 계산하고 행동하지 않았다. 유채는 태오에게 잘 보이고 싶었을 뿐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더 사랑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몰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욕으로 도배한 말만 뱉어 내는 유채도, 사사건건 시비 걸면서 속을 뒤집어 놓는 유채도, 가여울 만큼 떨면서 수줍은 얼굴로 뺨을 붉히는 유채도 모두 그였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카메라 앞에서조차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해사한 얼굴로 태오만 바라보았던 유채가 떠올랐다.

사랑에 흠뻑 젖은 얼굴이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태오는 유채의 뺨을 두 손으로 잡았다. 유채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태오의 표정이 풀린 것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말랑한 뺨을 태오의 손안에 바르작댔다. 손안에 따끈한 체온이 닿아 가슴 안쪽까지 나른한 온기가 번졌다. 태오는 유채의 통통한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상쾌한 민트 향과 함께 쪽 소리가 났다.

“당연히 나도 좋지.”

유채가 긴 눈매를 둥글게 휘었다. 가슴이 찌르르 아플 만큼 예뻤다.

그러나 이대로 마냥 봐줄 수는 없는 일이다. 당근을 먼저 먹여 준 태오는 미안한 얼굴로 채찍을 꺼내 들었다.

“근데 난 연기 못하는 사람은 싫은데. 계속 이런 식이면 나랑 다시 사귈 수 있겠어?”

“에?”

유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썹을 팍 구기면서 표정을 굳혔다가 흠칫 놀라더니 한껏 울먹이는 얼굴을 했다. 태오는 느긋한 얼굴로 유채의 다채로운 표정 변화를 구경하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이내 유채가 눈을 굴리면서 삐죽삐죽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시 사귄다니. 그럼 지금은 안 사귀는 거예요?”

언제 헤어졌었냐는 말투였다. 태오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헤어진 상태잖아. 잊었어?”

“아……?”

여러모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이전 생에서 유채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헤어지기로 했으니 여전히 헤어진 상태이긴 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있었던 유채는 말문이 막힌 채 입술만 뻐끔거렸다.

태오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또다시 유채의 뺨을 꼭 쥐고 그의 눈가와 뺨과 입술에 입을 맞췄다. 당황한 아기새 같은 표정이 귀여워서 어쩔 수 없었다.

마침내 만족할 만큼 키스를 퍼부은 뒤, 태오는 여전히 유채에게 입술을 맞댄 채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이제 잘할 거지?”

당연히 유채에게는 거부권이 없었다.

***

유채는 다시 기합이 바짝 들었다. 이후로는 촬영이 순조롭게 이어졌다.

서 PD는 삼십 분 동안 태오가 무슨 소리를 했길래 유채가 금세 회복되었는지 의아한 눈치였지만 묻지는 않았다. 서 PD는 드라마만 잘 나오면 다른 일은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었고, 남의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촬영이 끝난 뒤에는 유채와 함께 아파트로 향했다. 명태에게는 당분간 유채의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면서 출퇴근할 테니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두었다. 명태는 유채가 무려 ‘우주’와 합숙을 하기로 했다는 것에 기겁할 듯 놀랐다.

그 후 며칠간은 아무래도 수상했는지, 태오가 줄곧 괜찮다고 안심시켰는데도 명태는 부득불 촬영 현장에 따라 나왔다. 팔짱을 끼고 선 채 눈에 불을 켜고 유채와 태오를 지켜보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아리송한 얼굴이 되었다. 유채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돌변해 버린 탓이다.

“야, 우주야……. 유채가 요즘 어디 아프냐? 병원에 데려가 봐야 하나.”

유채가 촬영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명태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홍두와 화민을 양옆에 끼고 연습을 봐주던 태오가 고개를 들었다. 쥬니퍼는 유채와 함께 촬영해야 했기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 모처럼 신난 얼굴로 태오를 온전히 차지한 홍두와 화민이 태오 대신 끼어들었다.

“말도 마세요, 김 실장님. 한유채 선배 요즘 완전 우주 형 껌딱지라니까요.”

“진짜 뭘 잘못 먹고 저러는…… 뭘 잘못 드시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흠…….”

명태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태오를 바라보았지만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명태나 래디언스 멤버들이 유채와 태오의 과거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삼 년 전에 죽은 태오가 우주의 몸에서 눈을 떴다는 것은 선뜻 믿어 주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태오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명태는 혼자서 납득해 보려고 애썼다.

“뭐……. 사람이 변할 수도 있지. 우주도 갑자기 변했으니까. 유채가 우주한테 마음 풀기로 했나 보다.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지…….”

“예, 뭐.”

크게 틀린 얘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태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명태가 한숨 돌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희 계약 기간도 끝나 가서 걱정했는데, 이래저래 다행이다. 유채가 너 빼놓고 옮기자고 우길까 봐 내가 다 조마조마했어.”

갑작스러운 말에 태오는 눈을 깜빡거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유채는 래디언스로 데뷔하면서 AMJ 엔터와 7년 계약을 했으니 종료 시점이 다가오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회사를 옮길 생각인 줄은 몰랐다. 당연히 재계약을 하리라고 어렴풋이 짐작했던 태오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계약 기간이요? 옮기다니요?”

“어? 아, 그 일도 잊었나? 네가 삼 년간 일 기억 못 한다는 걸 내가 자꾸 깜빡깜빡한다.”

명태가 머쓱한 듯 웃으면서 주변을 살폈다. 홍두와 화민은 진작 명태에게 흥미를 잃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저희들끼리 대본 연습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태오가 한쪽 눈썹을 치켜뜨자, 명태가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고 소곤거렸다.

“유채가 그동안 계속 신 대표랑 갈라서고 싶어 했거든. 다른 애들이야 뭐, 당연히 유채 따라 나갈 테고, 나도 같이 옮기기로 했어.”

AMJ 엔터에서 데뷔했던 태오도 계약 기간이 끝나면서 신 대표와 결별했었다. 신 대표와 길게 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특별히 안 좋은 기억은 없었다. AMJ 엔터는 대형 기획사였고, 신 대표의 운영 방식은 좋지도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래디언스라는 이름으로 묶인 아이돌인 이상, 유채가 소속사를 옮기는 일은 배우였던 태오가 혼자서 옮기는 것보다 훨씬 복잡할 터였다. 태오는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러자 명태가 난처한 얼굴로 뺨을 긁적거렸다.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이내 우물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우주 너, 진짜 기억 못 하는구나. 왜 예전에 윤태오 씨…… 일 있고 나서 유채가 신 대표하고 완전히 감정 상했잖아. 유채가 ‘제왕’ 하차하고 싶어 했는데 억지로 밀어붙이고 태오 씨에 대해서 막말하고 그래서……. AMJ에서 여태 버틴 게 용하지.”

뜻밖에 제 이름이 튀어나왔다. 유채와 다시 함께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이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밤마다 회포를 푸느라 바빠서 신 대표 얘기까지 할 시간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태오는 내심 놀랐다.

명태가 태오를 곁눈으로 흘끔거렸다. ‘제왕’ 캐스팅 건에는 우주도 얽혀 있었으니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태오는 애써 웃으면서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하기로 했었는데요?”

“어? 그야, 우주 너도 신 대표랑 좋을 일 없으니 같이 나가기로 하긴 했지. 어떻게 너만 쏙 빼놓겠냐.”

“그래요? 저도 같이요?”

알고는 있었지만 래디언스 멤버들은 정말 순한 모양이었다. 우주가 우주였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그래도 우주를 데리고 가 주겠다는 멤버들이 감탄스러웠다.

명태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눈썹을 모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네가 예전에 좀 심하게 굴긴 했지만…… 그래도 너 혼자 신 대표한테 남아서 무슨 꼴을 당하라고. 신 회장님 돌아가시고 네 상황이 워낙 안 좋았잖냐.”

태오는 우주의 막장 가족사를 떠올렸다. 유일하게 우주를 아껴 주었던 신 회장은 친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해 우주를 내쳤고, 신 대표는 처음부터 우주를 무시했다. 친어머니는 우주를 돈줄로 알았다. 얼핏 듣기로, 우주의 어머니가 줄곧 불륜 관계를 맺어 오다가 신 회장 사후 재혼한 새아버지 또한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우주는 제게 접근하는 팬에게 마음을 열려고 해 보았지만 결국 스토커였다. 그런 우주를 혼자 내버려 두는 것은 멤버들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말이 없어진 태오를 보고 명태만 괜한 얘기를 했다고 생각한 듯했다. 안절부절못하더니, 태오를 달래려고 애썼다.

“회사 옮기는 건 걱정하지 마, 우주야. 네가 워낙 많이 변했잖냐. 그렇잖아도 얼마 전에 애들이랑 얘기해 보니 다들 찬성이더라고. 유채하고만 아직 말을 못 해 봤어. 쟤가 좀 바빠야 말이지. 근데 요 며칠 보니까 유채도 반대하진 않을 것 같네.”

“아, 네.”

태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히 유채가 반대할 리는 없었다. 다만 신 대표가 래디언스를 순순히 놓아줄지가 문제였다. 최정상 그룹인 래디언스는 물론, 천만 배우로 자리 잡은 유채는 AMJ 엔터에게 황금알을 낳아 주는 거위였다. 계약이 만료된다고 해도 회사를 옮기는 일이 쉬울 리는 없었다. 태오도 신 대표와 잡음 없이 헤어지느라 도피하듯 입대를 했었다.

그때 명태의 휴대폰 벨이 울렸고, 전화를 받기 위해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혼자 남은 태오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다 같이 군대라도 가는 게 가장 수월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태오는 정말로 군대에 또 가고 싶지 않았다. 우주의 몸으로 지내는 이상 언젠가는 가야겠지만…….

“무슨 생각 해?”

눈앞에 유채가 불쑥 나타났다. 못 보고 지나치기에는 지나치게 눈에 띄는 얼굴인 탓에, 대본에 몰두하던 홍두와 화민도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래서인지 태오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묻는 유채의 말끝이 짧았다. 청량한 체 향이 훅 다가왔다.

이럴 때마다 자신을 어린애 대하듯 하는 유채가 여전히 낯설어서 귀 끝이 달아올랐다. 태오는 목을 가다듬으면서 헛기침을 했다.

“그냥 있었어. 촬영 끝났어?”

“응. 배고프지. 점심 먹자.”

태오의 손목을 잡은 유채가 그를 가볍게 일으켰다. 갑자기 당겨진 탓에 몸이 휘청이다가 유채의 가슴팍으로 쏟아졌다. 말캉한 입술이 귓불이 슬쩍 닿았다. 유채가 소곤거렸다.

“보고 싶었어요. 얼굴 보니까 좋다.”

촬영하느라 잠시 떨어진 지 두 시간도 안 되었다. 태오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휘었다. 귓가에 유채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홍두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아, 진짜! 또 뭐 하십니까!”

“그러니까요!”

얌전하던 화민도 괜한 짜증을 부렸다. 요즘 다들 촬영 스트레스가 심해 보였다.

***

유채는 태오와 둘이서 식사하고 싶은 듯했지만, 홍두를 비롯한 배우들이 유채의 눈칫밥에도 굴하지 않고 끼어들었다. 유채의 눈꼬리가 뾰족해졌다. 태오는 가볍게 웃으면서 유채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누군가 화려한 밥 차를 보내왔다. 요리사가 직접 떠 주는 유산슬과 깐풍기와 해물 누룽지탕를 받은 태오는 신이 났다. 활동 기간에는 줄곧 식단을 조절했고, 드라마에 투입된 뒤로는 기본 도시락으로 때웠기 때문에 이렇게 제대로 된 식사는 오랜만이었다.

“와, 맛있어.”

태오는 유산슬을 한입 가득 우물거리다가 삼킨 뒤 감탄을 뱉었다. 유채는 생글거리면서 태오에게 깐풍기 한 조각을 물려 주려다가, 흠칫 놀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시무룩하게 팔을 내렸다.

“다음엔 나랑 둘이 먹어.”

태오가 고개를 기울이면서 작게 속삭였다. 유채는 눈을 내리깐 채 말없이 웃었다.

“아씨, 오징어가 왜 이렇게 많아.”

곁에서 젓가락으로 유산슬을 뒤적거리던 주형이 투덜거렸다. 태오는 그런가, 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잘게 썰린 채 들어가 있어서 잘 몰랐는데, 입 안에 씹히는 오징어 맛이 제법 강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요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징어를 싫어하는 주형은 연신 불만이었다.

“누룽지탕도 죄다 오징어투성이네. 싼 재료만 잔뜩 넣었나 봐요.”

“무슨 소리야, 너. 오징어 비싸.”

오징어는 사 본 적도 없지만 오징어 애호가인 태오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태오 곁에 얌전히 앉아 있던 유채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주형은 당신들이 뭘 아느냐는 눈빛으로 그들을 부루퉁하게 노려보았다.

“근데 웬 밥 차지? 누구 앞으로 온 거야?”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인사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도 알아보지 않았다. 태오가 묻자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정확히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홍두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뭐, 쥬니 아니면 유채 선배님한테 온 거 아니겠습니까? 비싸 보이니까 유채 선배님 쪽인 거 같습니다.”

“뭐? 쥬니 팬도 좋은 거 보낸다!”

잘 먹다 말고 말로 얻어맞은 쥬니퍼가 홍두의 멱살을 잡으려 들었다. 화민이 나서서 둘을 진정시키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명태가 그들 사이로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우주야, 우주야.”

태오가 의아한 얼굴로 식판을 내려놓았다. 명태의 표정이 다급해 보였다. 태오가 받은 음식을 빠르게 훑어보더니, 갑자기 양손으로 태오의 뺨을 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유채의 눈빛에 날이 섰다. 명태를 노려보는 표정에 한기가 돌았다.

“뭐예요? 왜 만져요?”

유채가 따지듯 물었다. 목소리가 바닥을 긁는 것처럼 낮았다.

“아니, 가만 좀 있어 봐, 유채야. 우주 괜찮니? 아픈 데 없어?”

태오는 유채의 눈치를 보면서 명태를 슬금슬금 떼어 냈다. 갑자기 달려들어서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형,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게……. 우주 너, 오징어 알레르기 없어진 거 맞지?”

“네? 아, 네. 저 괜찮아요. 지난번에 튀김 먹었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고.”

음식에 오징어가 많이 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서 달려왔나 보다. 태오가 우주의 몸으로 지내게 되면서 몸이 영혼에 영향을 많이 받는지, 키나 외모는 물론 알레르기 같은 체질까지도 예전의 태오처럼 변하고 있었다. 태오는 풀어진 얼굴로 싱긋 웃었다. 유채가 홀린 듯한 눈으로 태오의 뺨에 팬 보조개를 바라보았다.

“걱정돼서 오셨어요? 저 진짜 괜찮아요. 오징어 많이 들어서 맛있고 좋아요.”

“어, 그래. 다행이다. 다행이긴 한데…….”

명태는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주춤거렸다. 의아해진 태오가 명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때, 식사를 마친 FD가 다가와 태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우주 씨, 잘 먹었어요. 덕분에 오늘 식사 정말 맛있게 했네요.”

“네? 저요?”

태오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태오의 반응에 당황한 FD가 명태를 돌아보았다.

“어? 김 실장님. 오늘 밥 차 우주 씨 팬클럽에서 온 거 아니에요? 전 그렇게 들었는데.”

“음, 맞아요. 맞긴 한데……. 예, 맞습니다.”

FD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명태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유채도 갑자기 심각해졌다. 묵묵히 음식을 내려다보더니, 명태를 휙 돌아보고 물었다.

“우주 팬한테서 오는 건 오징어 금지시키지 않았어요? 알레르기 있는 거 다들 알잖아요.”

명태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 그렇지. 게다가 오징어인지 언뜻 봐서는 모를 정도로 이렇게 작게 잘라 넣는 건 절대 안 하지, 우주 팬이면.”

“회사에서 검수하잖아요. 메뉴가 뭔지 모르고 오케이하신 거예요?”

“그게…… 우리 쪽으로 들어온 게 아니야. 우주한테 왔다는 건 나도 지금 막 스태프한테 들었어. 제작사 스태프한테 바로 들어갔나 봐.”

“제작사로요? 여기서 촬영하는지 어떻게 알고요?”

유채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태오는 무릎 위에 놓인 식판을 내려다보았다.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밥 차나 커피 차를 절차도 없이 이렇게 허술하게 받는 경우는 드물다. 촬영지는 대부분의 경우 비공개였고, 팬들은 언제나 회사에 먼저 컨택해서 음식을 보냈다. 특히 우주는 알레르기가 많은 체질이었기 때문에 음식을 받을 때는 회사의 꼼꼼한 검수를 거쳤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우주 앞으로 밥 차가 오는 것을 명태가 모를 리도 없었고 메뉴에 오징어가 포함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 비공개 촬영지를 알아내고 스태프의 연락처를 따낸 후, 알레르기가 있는 우주에게 일부러 오징어가 든 메뉴를 포함한 밥 차를 보낸 것이다.

“아니, 누가 비싼 돈 들여서 그런 짓을 합니까? 우주 형 알레르기 없어져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큰일 났을 거 아니에요?”

홍두가 눈을 끔뻑거렸다. 주형도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그러게, 일부러 엿 먹이려고 한 거 같은데. 우주 형한테 웬 미친 스토커가 붙었나.”

유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분위기가 금세 싸늘해졌다.

스토커라는 말을 들으니 짐작 가는 데가 있었다. 태오는 고개를 들었고, 유채와 시선이 마주쳤다. 유채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순간, 태오의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이 끊이지 않고 몇 번이나 지속되었다. 태오는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지금 막 도착한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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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태는 태오에게 경호원 둘을 붙였다. 태오는 이제 로드 매니저와 경호원 둘을 대동하고 항상 함께 다녔다. 그들뿐만 아니라 유채도 좀처럼 태오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이제야 간신히 함께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행복할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유채가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태오와 함께 지내는 동안 사라진 듯했던 유채의 불면증도 다시 도졌다. 유채는 태오가 밤마다 다독이면서 안심시킨 뒤에야 간신히 잠에 들었다.

태오는 또다시 핸드폰을 바꿨다.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스토커에게 이미 번호가 알려졌으니 계속 사용할 수는 없었다. 경호 인력을 늘리고 핸드폰까지 바꾸고 나니 한동안은 조용했다. 이후 몇 주간은 촬영에 조용히 집중할 수 있었다.

살얼음판처럼 이어지던 평화가 깨진 것은 ‘타이 브레이크’ 첫 방송을 얼마 남겨 두지 않았을 때였다.

모처럼 촬영이 일찍 끝난 날이었다. 아파트로 돌아온 태오는 유채와 함께 소파에서 쉬고 있었다. 번호를 아는 사람이 래디언스와 명태밖에 없는 태오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태오의 무릎을 베고 소파에 길게 누웠던 유채가 벌떡 일어났다. 짙은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받지 말아요.”

깊게 가라앉은 저음의 목소리였지만 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태오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울려 대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불안하게 지내는 것도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게 고민하다가, 스피커 폰 모드로 전화를 받았다. 유채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만류하지는 않았다.

“네.”

[우주야.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엄마가 아들한테 연락하려고 온 동네를 쑤셔야겠어?]

“……어머니?”

발신인은 우주의 어머니인 이주혜였다.

맥이 탁 풀렸다. 불안해했던 유채도 긴장이 풀렸는지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러나 완전히 안심할 상대는 아니었다. 태오는 우주의 빚 대부분이 그의 어머니 때문에 생겼다는 것을 떠올렸다. 명태는 이주혜에게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조언했고, 태오의 번호가 그녀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신경 써 주었다.

전해 듣기로는 이주혜는 AMJ 엔터에 나타나 신 대표와 다투는 일도 잦은 듯했다. 태오는 지난 몇 주간 줄곧 유채와 함께 지냈기 때문에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얼마 전에는 래디언스 숙소로 찾아왔다가 경비실에서 제지받아 소득 없이 돌아가기도 했다고 들었다.

여러모로 스토커인 서한준 못지않게 끈질긴 상대였다. 우주에게는 그래도 친어머니였기 때문에 모질게 내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태오로서는 생판 남인 사람이 돈을 요구하려고 쫓아다니는 셈이니 스토커와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태오가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신 대표에게 받았다. 걔는 주려면 곱게 줄 일이지 왜 그리 버릇이 없어? 내가 그래도 제 새어머니인데…….]

태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표정했던 유채의 얼굴에도 날카로운 기색이 스쳤다. ‘신 대표가.’ 유채가 입 안으로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떤 상황이었을지 짐작이 갔다. 우주와 연락이 되지 않은 이주혜는 귀찮을 정도로 AMJ 엔터에 찾아갔을 테고, 우주와 더 이상 가족으로 묶일 이유도 남지 않은 신 대표는 그녀를 떼 버리는 게 우선이었을 것이다. 우주의 어머니가 태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명태가 애썼던 일도 헛수고였다.

“무슨 일입니까?”

태오는 감정을 누르면서 차분히 물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이주혜가 목소리를 높였다.

[너야말로 무슨 일이야? 왜 엄마 전화를 피해?]

“용건부터 말씀하시죠.”

[대출 만기일 다가온다고 전부터 얘기했잖니. 김 실장에게도 전달하라고 했는데 안 했어? 신 대표에게 너희 실장 좀 바꾸라고 해야겠다. 부모 자식 간을 제가 뭔데 끊어 놓으려고 들어?]

명태에게서는 들은 얘기가 없었다. 이주혜의 태도로 봐서는 어지간히 시달렸을 게 분명한데 명태는 내색하지 않았다. 고마운 마음과 함께 피로가 밀려들었다.

“대출 만기일이 다가와서 제게 뭘 어쩌라는 겁니까?”

[너 지금 무슨 말버릇이야? 엄마한테 할 말이니? 큰돈도 아니고, 오천이야. 너 드라마 다시 시작했다는 얘기 들었다. 금세 벌 텐데 겨우 오천 못 갚아 줘?]

태오는 우주의 몸에서 처음으로 정신 차렸을 때를 떠올렸다. 우주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후 태오가 눈을 떴다. 신 대표나 이주혜에게 이미 사망 선고가 전달된 뒤였다. 우주가 동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신 대표는 그렇다 쳐도, 친어머니인 이주혜 또한 장례에 참석할 마음이 없다고 통보했다고 들었다. 우주의 장례는 명태와 래디언스 멤버들이 진행할 예정이었다.

우주가 가여웠다. 태오는 굳은 얼굴로 대꾸했다.

“장례식에 안 오신다고 하셨다길래 그때 연 끊으신 줄 알았습니다.”

[아니, 그거는…….]

이주혜가 말을 흐렸다. 태오가 연달아 몰아붙였다.

“죽은 아들은 필요 없고, 살아 있는 아들은 돈줄입니까? 저도 은행이 되어 드릴 생각은 없으니 대출은 직접 갚으세요. 그리고…….”

태오는 우주의 통장에서 확인했던 기록을 떠올리며 덧붙였다.

“이제까지 빌려 간 돈도 갚으세요. 거래 기록 있으니 안 갚으시면 소송 들어갈 겁니다.”

우주의 몸에 들어왔으니 우주의 빚은 직접 갚을 생각이었다. 그런 게 우주에 대한 보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주혜의 태도에 마음이 바뀌었다. 그녀에게 잡혀 평생 캐시 카우로 살았던 우주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이주혜에게 돈을 받아 내 우주 이름으로 기부를 하는 게 나았다.

[뭐…… 뭐야?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미쳤니? 키워 놓았더니 이게 무슨 짓이야?]

이주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주가 들었다면 상처받았을 말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러나 태오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오히려 유채의 뺨이 창백해졌다. 태오는 유채의 볼을 토닥이다가 살짝 입술을 댔다. 괜찮아. 뺨에 눌린 입술을 우물거리자, 유채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이 정도는 네가 해야지! 너 때문에 내가 신 회장한테 유산 한 푼 못 받아 냈는데!]

“그게 왜 우주 탓…… 아니, 내가 신 회장 친자가 맞긴 합니까?”

이주혜가 신 회장에게 버림받은 것은 내연 관계인 남자를 들켰기 때문이었다. 우주 탓으로 돌리는 행태가 어이없었다. 이주혜가 계속해서 길길이 날뛰었다.

[네가 그 늙은이 씨였으면 쫓겨났겠니? 네가 배 속에 생기는 바람에 나는 인생이 꼬였어.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신 회장에게 이혼당할 일도 없었다고!]

“제가 없었어도 신 회장이 다른 남자와 살림까지 차리신 분에게 유산을 남기진 않았을 텐데요?”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신기한 마음에 대꾸하다 보니 통화가 길어졌다. 줄곧 언짢은 표정이었던 유채가 한 손으로 휴대폰을 가렸다. 그만 상대하고 끊으라는 표시였다. 태오는 유채에게 눈으로 웃어 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전 더 할 말 없습니다. 대출은 알아서 갚으시고, 그동안 빌려 가신 것도 내역 정리해서 변호사 통해 전달할 테니 준비해 주세요. 연락은 변호사 통해서만 받겠습니다. 끊습니다.”

[신우주……!]

더 이상 말을 듣지 않고 통화를 종료시켰다. 유채가 눈살을 찌푸린 채 태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알고는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진상이네요.”

“우주가 안됐어……. 번호 바꾸고, 변호사 선임부터 해야겠다.”

“번호 바꿔도 신우필이 입 털면 소용없잖아요.”

“그러게. 래디언스 번호는 신 대표가 직접 관리하는데 번호를 안 알려 줄 수도 없고. 뭐, 번호 두세 개 만들어서 하나만 알려 주든가 해야지.”

“신우필 쪽은 그렇게 해결한다고 쳐도, 신우주 이름으로 개통하면 스토커한테는 대응이 안 돼요. 어떻게든 알아내는 것 같아요.”

“아, 맞네…… 그럼 어쩌지.”

유채가 잠시 고민하더니 태오에게 제 휴대폰을 내밀었다. 태오가 고개를 기우뚱했다.

“이건 왜?”

“저 휴대폰 여러 개거든요. 신우필은 번호 하나밖에 몰라요. 스토커도 형이 제 번호 쓸 거라고 생각하진 못하겠죠. 당분간은 임시로 이거 써요.”

“아. 그게 낫겠다.”

태오는 유채의 휴대폰을 받아 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유채가 알려 준 대로 패턴을 그리고 잠금을 풀었는데, 화면 한쪽에 메신저가 눈에 띄었다. 태오의 입가에 장난기가 스쳤다.

“이렇게 다 보여 줘도 돼? 나 없는 동안 너 누구 만났는지 다 털어 본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채가 그간 다른 사람을 만났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역시나 유채의 눈썹이 꿈틀했다.

“나 의심받아요, 지금?”

“이렇게 예쁜데 남들이 가만히 뒀다고? 솔직히 말해도 괜찮아. 이해해, 이해해.”

전혀 이해하지 않았지만 괜히 떠봤다. 유채는 그제야 태오가 장난치려는 것을 눈치챈 듯, 표정을 풀더니 씩 웃었다.

“나는 윤태오밖에 모르는데. 그러니까 형이 한평생 책임져야 돼요.”

태오도 눈을 길게 접으면서 따라 웃었다.

“당연하지. 나만 믿어.”

한평생이 아니라 두 평생에 걸쳐서 책임지는 중이다.

***

태오는 유채와 호흡을 맞추는 장면을 찍은 후 쉬고 있었다. 성해인을 뺀 나머지 테니스 부원들이 이준희와 함께하는 신이었기 때문에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태오는 모처럼 조용하다고 생각하면서 다리를 길게 뻗었다. 성해인 장면이 예상보다 더 많이 늘어난 데다, 우주의 스토커나 어머니 일로 신경 쓸 일이 많았던 탓에 부쩍 피곤했다.

간이 의자에서 잠깐 잠들었을 때였다. 태오는 누군가 제 어깨를 잡고 살살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가끔 마주쳤던 막내 스태프가 태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요? 눈짓으로 물으니 주차장을 가리켰다.

“우주 씨, 손님 오셨어요. 그게, 급한 일 같아요.”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로드 매니저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고 태오 대신 물었다. 막내 스태프의 어린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부모님께서 오셨어요. 우주 씨 오실 때까지 안 가시겠다고. 그대로 두면 촬영에 지장이 생길 것 같아서요…….”

“아.”

이주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떻게 알아낸 건지 결국 여기까지 쫓아왔구나 싶었다. 신우필이 또 불었나. 태오는 얼핏 생각했지만, 아무리 신 대표라도 촬영에 지장이 갈 게 뻔한 일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비공개 촬영장을 어떻게 알았지?’

태오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막내 스태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을 구르고 있었다. 제 일로 괜한 피해를 주게 된 셈이다. 미안한 마음에 그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달랬다.

“제가 지금 갈게요. 시끄러운 일 없게 할 테니까 걱정 마요.”

“아니, 그게…….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스태프가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태오는 미안한 얼굴로 웃었다.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로드 매니저가 따라붙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우주야. 괜찮겠어? 경호원들 지금 잠깐 식사하러 가셨으니까 좀 있다가 오시면 같이 가.”

“괜찮아요. 어머니 만나는데 경호원이 왜 필요해요. 그리고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해결해야죠. 그때까지 기다리면 난리 날 것 같은데.”

태오는 그의 염려를 가볍게 물렸다.

이주혜를 상대하려면 아무리 태오라도 각오가 필요했다. 큰소리가 오갈 것이다. 무례한 쪽은 분명 이주혜였지만 한국 사회는 보수적이다. 연예인이 어머니에게 언성을 높이는 모습을 보는 눈은 적을수록 좋았다. 명태나 멤버들이 아닌 이상, 로드 매니저든 경호원이든 이주혜를 만날 때는 동행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래도 네 어머니가 순순히 물러나진 않으실 텐데.”

“일 복잡해지면 연락드릴게요.”

태오는 손에 쥔 유채의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로드 매니저는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근처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하자 검은색 고급 세단이 보였다. 화려한 외모의 중년 여성이 차에 기대서 있다가 태오를 발견하고 조금 놀란 표정을 보였다. 태오는 그녀에게 다가가 섰다.

“그새 이렇게 키가 컸니? 얼굴도 많이 변한 것 같고. 잘했네, 전보다 훨씬 잘생겼다. 어디서 고쳤어?”

“…….”

죽었다 살아난 아들을 처음 만났으면 안부부터 묻는 게 우선이 아닌가 싶었다. 뭘 바라냐고 생각하면서 태오는 한숨을 쉬었다.

우주는 이런 어머니에게서도 애정을 받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달라는 대로 빚을 내서까지 돈을 보냈을 것이다. 우주에게 애정 결핍 증세가 있을 것이라던 짐작에 확신이 섰다. 우주는 누구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했다.

그래서 유채에게 집착했는지도 몰랐다. 태오를 향한, 온몸을 푹 잠기게 할 정도의 순수하고 맹목적인 사랑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만약 유채가 정말로 우주에게 마음을 주었더라면 그때는 도리어 우주가 식어 버렸을 수도 있었다.

우주는 유채를 사랑한 게 아니었다. 태오를 사랑하는 유채가 좋았을 것이다.

“일단 타라. 나도 너 일하는 데서 구경거리 되고 싶진 않으니.”

이주혜가 턱짓으로 차를 가리켰다. 태오는 잠시 눈썹을 구겼다. 주차장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소란이 커지면 촬영장 쪽에서 누군가 나타날 수도 있었다. 구경거리가 된다면 손해가 큰 쪽은 태오였다.

이주혜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태오는 어쩔 수 없이 차에 올라탔다.

그 순간, 뒤통수에서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폭력에 의한 충격은 천천히 찾아왔다. 머리가 깨진 것처럼 아팠고 숨이 막혔다. 태오는 경악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단단한 물체를 든 남자가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우리 우주, 더 예뻐졌네. 형 안 보고 싶었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징그러웠다.

남자는 태오의 목을 덥석 움켜쥐고 더듬어 댔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끔찍했다. 태오가 그의 손길을 뿌리치려 하는 순간 남자가 또다시 방망이를 휘둘렀다. 눈앞이 까맣게 꺼지면서, 태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

“으…….”

태오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뻑뻑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온몸이 화끈거리고 아팠다. 특히 둔탁한 물체로 얻어맞은 뒤통수에 통증이 심했다. 찢어져서 피가 났는지 뒤통수부터 목덜미까지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손을 뻗어서 만져 보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제야 제 팔이 머리 위로 올려진 채, 겹친 손목에 두꺼운 끈이 단단히 묶인 것을 알았다. 어딘가에 고정한 것인지, 올라간 팔을 내릴 수도 없었다.

태오는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잡동사니가 지저분하게 쌓여 있는 낡은 창고 같은 곳이었다. 근처에 설치된 삼각대와 카메라가 눈에 띄었다. 카메라 렌즈는 정확히 태오가 누워 있는 더러운 매트리스 쪽을 향하고 있었다. 태오는 숨을 헉 들이켰다. 불길한 예감이 목뒤에 차갑게 달라붙었다.

이주혜가 불러서 주차장을 찾은 것까지 기억이 났다. 안에서 얘기하자길래 차에 탄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고 기절했다.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입을 길게 찢으면서 웃던 인상이 진한 남자였다. 말투가 태오에게 종종 연락해 오던 스토커와 비슷했다. 서한준 본인인 것 같았다.

태오는 조심성이 없는 성격이 아니었다. 찾아온 사람이 이주혜가 아니었다면, 하다못해 우주의 양부였다면 혼자서 만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어쨌든 우주의 친어머니다. 그녀가 우주의 스토커와 손잡고 이런 짓까지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런 미친…….”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태오를 눕혀 놓고 카메라를 설치한 것으로 봐서는 단순히 겁을 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이주혜와 서한준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몸부림치려고 해 보았지만 묶이지 않은 다리도 꼼짝할 수 없었다. 약이라도 쓴 모양이었다. 태오는 몸에 힘을 풀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높고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와 남자의 굵은 저음이 함께 들렸다. 태오는 정신을 차려 보려고 애쓰면서 문가를 향해 꿈틀꿈틀 기었다. 그래도 매트리스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지만, 마침 그들도 언성을 높였기 때문에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겁만 줄 거라고 했잖아. 다치게 하지 않는다며!”

이주혜의 목소리였다. 이어서 남자가 말을 받았다.

“누가 다쳤다고 이래. 그냥 뒤통수 좀 찢어진 거야. 죽었다는 소리 들었을 때도 장례식은 안 간다더니 왜 이렇게 흥분해? 누가 보면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들인 줄 알겠어.”

“그건…… 그때는 또 관심 끌려고 하는 주작인 줄 알았어. 쟤가 죽겠다고 난동 부린 게 한두 번이냐고.”

“거 뭐, 이번에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겠구만. 뭘 이리 소란이야.”

“애가 다쳤잖아. 그 카메라는 뭔데? 무슨 짓 하려고 이러는데!”

“한준이가 알아서 잘 돌봐 줄 거야. 당신 역할은 끝났으니 이제 구경이나 하고 돈이나 챙기면 돼. 이 정도 안전장치는 있어야 쟤가 반항을 못 하지.”

“뭘 돌봐 줘…… 그게 무슨 뜻인데. 여보!”

태오는 짧게 한숨을 토했다.

다행히 이주혜가 이런 상황을 의도한 것은 아닌 듯했다. 이주혜와 단둘이 남을 수만 있다면, 그녀를 설득해서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서한준이었다. 매트리스 앞에 다가오더니, 쪼그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태오의 뺨을 톡톡 쳤다. 태오는 눈썹을 와락 구겼다.

“서한준?”

혹시나 싶어 물었다. 서한준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빙긋 웃었다. 이목구비가 짙은 호남형의 얼굴인데도 섬뜩해 보였다.

“형을 왜 그렇게 서먹하게 불러, 우주야. 섭섭하게.”

미친놈인가. 태오는 미간을 펴지 않은 채 생각했다.

멤버들은 우주가 서한준과 사귀는 게 아닌지 의심했지만, 진작에 서한준을 차단했던 걸로 봐서는 우주 또한 불안했던 게 분명했다. 애정 결핍 증세가 심한 우주가 스스로 나서서 발 뺄 정도면 보통 위험한 놈이 아닐 터였다.

“우리 우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오랜만에 만났는데 형이 반갑지도 않아?”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태오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제정신이라면 이런 짓을 벌일 리도 없었다. 태오도 입꼬리를 당기며 마주 웃었다. 조용히 숨죽여야 할 때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납치범이 반가운 피해자도 있나?”

“허. 우주야. 왜 그런 무서운 말을 해? 어머님 아버님 모시고 오붓하게 시간 좀 보내자는 건데.”

“밖에 저 사람들은 내 부모님이 아닌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주혜는 우주의 어머니일 뿐 태오와는 관련 없는 사람이었고, 양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여상하게 대꾸했더니 서한준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러나 이내 웃음을 터뜨리면서 태오의 뺨을 꽉 쥐었다.

“어머님이 지금 우주 걱정을 얼마나 하고 계신데 이렇게 서운하게 굴어.”

“정말 걱정을 했으면 아들 스토커와 손잡진 않았겠지.”

태오는 무심한 얼굴로 말을 툭 뱉었다.

예상과 달리, 이주혜가 작정하고 우주를 납치하는 데 협력한 것은 아니었다. 서한준이 우주의 스토커라는 것도 몰랐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그녀가 우주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겁을 주려 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태오가 보기엔 모두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다만 의아한 점은 있었다. 태오는 고개를 기웃하면서 미간을 좁혔다.

“대체 저 사람들하고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당신은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나한테 접근한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있나. 형은 항상 우주한테 진심이었는데.”

서한준이 히죽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느긋한 설명이 이어졌다.

“우주가 형 연락을 계속 피하니 그리워서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어머님 아버님께 인사라도 드리려고 연락처 알아내서 찾아뵀는데, 마침 그분들도 우주에게 볼일이 많으셨지 뭐야. 그래서 뭐, 서로 윈윈하기로 한거지. 네 소식은 아무것도 모르시길래 나는 그분들 촬영장에 데려다드리고. 나는 우주 갖기로 하고.”

역시 미친놈이 맞았다. 아무래도 잘못 걸렸다. 조용히 생각하다가, 청바지 주머니 위로 삐죽 나온 휴대폰에 시선이 닿았다. 유채가 쓰라고 주었던 휴대폰이었다. 유채가 보고 싶었다.

서한준은 눈을 번뜩거리면서 연신 떠들었다. 제 기분에 취한 것 같았다.

“어머님은 좀 오락가락하시는데, 아버님하고는 말이 잘 통하더라. 이 창고와 카메라도 아버님이 준비해 주셨어. 우주가 요즘 부모님한테도 쌀쌀맞게 군다며? 그래서 아버님이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야. 그러면 되나. 생활이 어려우시면 아들이 마땅히 도와드려야지.”

“별 오지랖을 다 떠네. 그쪽이나 부모님께 잘하지 그래? 아들이 범죄자인 거 알면 상심이 크실 텐데.”

“……우리 우주. 못 본 사이에 성격이 많이 변했네?”

가만히 있을 걸 그랬나. 태오가 잠시 멈칫한 사이, 서한준이 태오의 눈앞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뱀 같은 눈초리로 태오를 끈적하게 훑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못 알아보게 변했어. 화면으로 볼 땐 설마 했는데 실물을 보니까……. 그 누구냐, 윤태오였나? 언뜻 보면 아주 똑같은데? 얼굴 고쳤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희한하네.”

태오는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기 때문에 도망치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창고 밖에는 이주혜와 양부가 있다. 방법을 생각해 보려 했지만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태오는 힘겹게 숨을 뱉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얘기는 이쯤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우주야.”

서한준의 눈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벌떡 일어서서 카메라로 향하더니 상태를 확인했다. 익숙한 빨간 불빛이 아까부터 기기에 들어와 있었다. 태오의 뺨이 차갑게 식었다. 묶인 손끝이 저릿했다.

서한준이 성큼 다가왔다. 밖에서는 여전히 이주혜와 양부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서한준에게 멱살이 잡힌 채 상체가 일으켜졌다. 날름거리는 혓바닥이 태오의 뺨을 길게 쓸었다.

“맛있네, 우주야.”

“우욱…….”

토기가 일었다. 그저 느낌이 아니었다. 약 기운이 올라오는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앞이 빙글 돌았다. 서한준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이러지? 마취제를 너무 많이 썼나. 우주야, 그래도 형이랑 보내는 첫날밤인데 제정신으로 있어야지. 응?”

태오는 흐릿한 시야를 똑바로 바라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눈앞이 자꾸만 가물거렸다. 속이 울렁거리고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는지 서한준이 두 손으로 태오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정신 차리라면서 흔들어 댈 때마다 구역질이 났다. 그래서인지 창고 밖에서 소란이 커지는데도, 현실인지 환청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요란하게 뛰는 발걸음 소리와,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매끈한 서한준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태오는 바닥으로 툭 팽개쳐졌다. 손목이 묶인 팔과 긴 다리가 아무렇게나 구겨졌다. 출입문이 거친 파열음과 함께 벌컥 열렸다. 경찰이 쏟아져 들어왔다.

서한준은 태오를 내버려 둔 채 황급히 일어섰다. 그러나 경찰 쪽이 빨랐다. 서한준이 제압되는 동안 키가 불쑥 큰 인영이 창고로 뛰어들었다. 눈앞이 점점 꺼멓게 푹 꺼지는데도 태오는 흐릿하게 웃었다.

“형.”

눈이 감기고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태오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와 제 몸을 일으키는 다정한 손길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귓가에 또다시 목소리가 울렸다.

“태오야.”

유채가 와 주길 기다렸지만 정말로 기대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생각지 않았다. 어떻게 찾았을까. 태오는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려고 애쓰면서 생각했다. 그때, 청바지의 주머니에 든 물건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유채의 휴대폰이었다.

“이제 괜찮아. 푹 쉬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입술 틈에서 무심결에 웃음이 샜다. 언제나 제가 유채를 지켜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보호를 받았다. 지난 생에서 사고를 당한 이후, 태오는 오랫동안 마음을 놓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로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이제는 언제나 곁에 유채가 있다. 생각이 떠오른 순간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

그대로 암전이었다.

***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병실 특유의 흰 천장이 보였다. 알싸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푹 자고 일어난 듯 상쾌하기까지 했다. 태오는 눈을 몇 번 깜박였다가 고개를 돌렸다. 유채가 침대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숨결을 따라 오르내리는 유채의 흰 목덜미가 눈에 띄었다.

태오는 유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말간 뺨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긴 속눈썹이 희미하게 떨렸다. 느릿하게 눈을 뜨더니 몇 번이나 깜빡거렸다. 간신히 허리를 편 뒤에는 멍한 얼굴이었다. 침대에 눌렸던 옆머리가 삐죽 솟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이 귀여워서 태오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형?”

웃음소리를 들은 유채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다급하게 두 손으로 태오의 뺨을 쥐더니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연갈색 눈동자가 파드득 흔들거렸다. 겁먹은 듯한 눈빛이 가여워서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다.

“나 멀쩡해. 다친 데도 없고.”

뒤통수에는 여전히 통증이 남아 있었다. 의식을 잃은 사이에 꿰맸는지 머리에 붕대가 감긴 느낌이 났다. 그래도 태오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부러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했다.

“괜찮다니까. 네가 금방 왔잖아.”

그래도 유채의 표정은 여전히 흐렸다. 걱정스러운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다. 태오는 제가 모르는 일이 있었나 싶어서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나 어디 안 좋대? 불치병이야?”

“아, 형! 그런 말을 왜 해요!”

그제야 유채가 펄펄 살아나면서 소리를 팩 질렀다.

오랜만에 우주가 태오인지 모르던 시절의 앵그리버드 아기새를 만난 것 같아서 반가웠다. 태오는 눈을 접고 소리 내 웃었다. 눈썹을 구긴 채 화내고 있던 유채가 갑자기 입술을 꾹 물었다. 표정이 풀어지면서 흰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태오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다정하게 빛났다. 그리고 검지를 뻗더니 태오의 뺨을 쿡 찔렀다.

“응, 왜?”

“보조개요. 예뻐서.”

“아…….”

예전 생에서, 유채는 한 번도 태오의 보조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태오가 웃을 때마다 빤히 바라보다가 뺨을 붉히면서 눈을 내리깔긴 했지만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다. 우주의 몸에서 눈뜨고 나서야 유채가 제 보조개를 유난히 좋아했다는 걸 알았다.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태오가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다.

“언제는 보조개 파 버린다며.”

싱긋 웃고 있던 유채가 흠칫 놀랐다. 눈을 도르르 굴리더니 더듬더듬 말했다.

“아, 형……. 내가 언제요.”

래디언스 멤버만 해도 증인이 몇인데 발뺌이었다. 태오는 심각한 척 미간을 좁히면서 떠오르는 추억들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재수 없으니까 웃지 말라고 했잖아. 보조개 패는 거 싫다고.”

“아니 그건…….”

“짝퉁 새끼라고도 했지. 또 뭐랬더라?”

“그땐 형인 줄 몰랐으니까 그랬죠…….”

“우리 유채, 욕도 잘하더라. 진짜 귀여웠는데 다시 해 봐, 응?”

“아, 씨…….”

“지금 씨발이라고 그랬어?”

“네? 아니요?”

“네, 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아, 형. 그만하라고요…….”

유채가 신음을 삼키면서 끙끙거렸다.

말랑한 뺨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굴리는 유채를 좀 더 놀리려다 그만두었다. 가볍게 손짓을 했더니, 유채가 시무룩한 얼굴로 이쪽을 흘끔거렸다. 태오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이리 와.”

유채를 향해서 손끝을 까딱했다.

유채는 못 이기는 척 냉큼 침대로 올라오더니 태오에게 찰싹 붙었다. 커다란 덩치에 갑자기 가슴이 짓눌려 숨이 턱 막혔다. 태오는 재채기하듯 웃음을 토해 냈다. 유채가 멋쩍은 얼굴로 살짝 거리를 벌렸다.

“왜? 괜찮아. 더 가까이 와.”

“불편하잖아요. 환자인데……. 편하게 있어요.”

“너랑 붙어 있는 게 편해.”

“음…… 그럼 나한테 기대요.”

유채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번에는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태오를 살살 끌어다가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모처럼 유채의 서늘하면서 청량한 체 향이 훅 느껴졌다. 태오는 기분 좋은 얼굴로 유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 얼마 만에 깬 거야?”

“하루요. 수면 마취 하고 머리 꿰매긴 했는데 그런 거치고도 늦게 일어났어요.”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가 깊고 낮았다. 태오는 미안한 얼굴로 유채를 올려다보았다. 하루 만에 뺨이 해쓱해진 것 같았다.

“기다리느라 너 힘들었겠네.”

“아니에요. 형이 아팠죠.”

“나는 괜찮아.”

“그럼 나도 괜찮아요. 그래도…….”

태오의 어깨를 감싸 쥔 커다란 손에 잠시 힘이 들어갔다. 유채의 짙은 눈썹이 잠시 모였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유채는 태오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태오의 뺨에 입술을 꾹 누르면서 웅얼웅얼 말했다.

“이제는 혼자 다니지 말아요. 누가 불러도 함부로 만나지 말고요. 어디 가든 나랑 같이 가요.”

“응, 그래. 그럴게.”

태오가 서한준에게 끌려갔을 때 유채는 촬영 중이었다. 물론 시간이 되었더라도 우주의 어머니가 부르는데 유채를 데려갈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도 태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채는 이미 한 번 태오를 잃었다. 이번 일로 유채가 어떤 공포를 느꼈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태오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유채를 안아 주고 안심시켜 주는 거였다.

지난 생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제 상처를 끌어안기 바빠서 유채를 팽개쳤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형…….”

“그래, 유채야. 내가 미안해.”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다시는 유채를 혼자 두지 않을 것이다. 유채가 어디로든 태오를 찾아왔던 것처럼.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 ISSUE TALK

BEST! [잡담] 와 시발 이것이 알고싶다 연예인 스토커 사건 봤어?

한시운이나 천민제 스토커 협박 사건은 전에 몇 번 방송 타서 알던 얘기라 걍 켜놓고 보고 있었는데

와 래디언스 우주? 걔는 얼마 전에 납치까지 당했었다며

숙소 경비원 인터뷰 나왔는데, 못 들어가게 하니까 맨날 찾아오고 그랬대.. 뭐 여기까지는 나도 걍 스토커들 다 그렇지 하고 있었어

근데 촬영팀 스태프 얘기하는거 보니까;; 부모님이 촬영장 찾아와서 만나러 갔는데 그 길로 납치된거래

부모님이 스토커랑 짜고 친거임… 진심 소름이다

휴대폰은 전원 꺼져있었는데 다행히 위치추적되는 스마트태그 붙여놔서 금방 검거됐고 부모님이랑 스토커 다 구속됐다는데

완전 빨대 부모였더라고... 난 우주 걔는 모르는데 래디언스는 알거든 걔네 탑돌 아님? 번 돈 꽤 많을텐데 몇 년간 엄마한테 죄다 털렸고,, 빚도 수억대인데 다 부모가 가져다 도박한거래;; 모자이크 처리는 했지만 통장 기록도 보여줌…

그리고 소속사는 이거 다 알면서 방치했다함,, 소속사 전 직원도 나왔는데 엄마가 찾아오면 우주 연락처 다 퍼다줬대.. 스토커도 계속 협박했는데 암것도 안해줘서 매니저가 난리쳐서 겨우겨우 경호 붙였고..

근데 아들이 이제 돈 못준다 하고 절연하니까 부모가 스토커랑 짜고 납치한거임..

찐으로 무서운게 뭐냐면

앞으로도 평생 빨대 꽂으려고 아들한테 마취제 놓고 스토커랑 ㅅㅅ영상 뜨려고 했대;;;;; 납치했을 때 현장에 카메라 돌아가고 있었다 함.. 미친…

근데 진짜 다행히 촬영하기 전에 경찰 들이닥쳐서 스토커랑 우주 대화만 녹화됨.. 녹화본도 오늘 일부 공개됐는데 거기에 증거 빼박 다 박제돼있어서 스토커랑 부모 다 ㅈ댐;; 휴;;;

소속사 직원들 인터뷰 보니까 우주가 애정결핍증세에 우울증 심해서 몇 년동안 계속 병원다녔다는데 저런 부모 밑에 있으면 정병이 안오고 베기냐

애정결핍때매 저런 부모도 부모라고 계속 퍼다줬나봄ㅠㅠㅠ

요즘 찍고있는 들마 촬영팀 나와서 하는 얘기보면 요즘 증세가 많이 좋아졌는지 디게 밝아지고 확 변했고 연기도 잘하고 그래서 다들 엄청 좋아했다든데

애 좀 살만해지니까 부모가 납치ㅠㅠㅠㅠ 쟤 불쌍해서 어떡하냐ㅠㅠ

[댓글(429)]

▶ 나 봄… 보다가 개빡칠뻔ㅠㅠㅠㅠ 부모 맞냐고ㅠㅠ 악마아님?

↳ 근데 얘 얘기 전에 어디서 본거같은데.. 부모가 친부모 아니라고

↳↳ 뭐래 친부모 아니면 스토커랑 짜고 납치해도 됨?;;

↳↳↳ 그런얘기 하는거 아니자늠 웬 급발진;; 그냥 그렇다고

↳↳ 나 샤샤인데 우주 엄마는 친엄마 맞고 아빠는 새아빠야… 근데 이렇게 막장집안인지 몰랐어ㅠㅠㅠ 애가 학대당하는 것도 모르고 우주만 욕했다 그동안ㅠㅠㅠㅠㅠㅠ 미안해 우주야ㅠㅠㅠㅠㅠㅠ

↳↳↳ 샤샤가 뭐임?

↳↳↳↳ 래디언스 팬클… 구호가 렛어스 샤인! 이라서 샤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뭐얔ㅋㅋㅋ 팬클이름 존나 막지었넼ㅋㅋㅋㅋㅋ

↳↳↳↳↳↳ 웃지마 우리도 부끄러우니까ㅠㅠㅠㅠㅠㅠ

▶ 우주 진짜 너무불쌍해서 이알 보는내내 눈물만쏟음ㅠㅠㅠㅠ

↳ 나도 보는데 계속 눈물났어ㅠㅠㅠㅠ

↳↳ 애가 저렇게 힘든것도 모르고 남들이 욕한다고 따라 욕하기만했는데ㅠㅠㅠㅠㅠㅠ

↳↳↳ 그동안 논란이 좀 많긴했지만… 저번 활동기때도 그렇고 글램핑 예능때도 우주 진짜 열심히 잘했어… 본문말대로 애가 이제 좀 증세 나져서 살아났던거 같은데,,, 어케 이런일이 있냐ㅠㅠㅠㅠ

▶ 그래도 우주가 그동안 욕먹을짓만 한건 사실이지 않나;; 납치 한번에 이미지 세탁 오지네

↳ 존나 싸패네… 애가 친엄마한테 평생 빨대 빨리다가 엄마랑 짠 스토커한테 납치당해서 영상까지 따일뻔했다는데 한다는 소리가…

▶ 열불나ㅠㅠㅠㅠ 천벌받아야돼 스토커도 스토커인데 부모도 제대로 응징받았으면ㅠㅠㅠㅠ

↳ 현장검거라 실형은 빼박이라함,, 몇 년인지가 문제…

▶ 부모 도박빚은 어케대는거임?ㅠㅠ 우주가 갚아야댐????

↳ ㄴㄴ 우주가 빌려준 정황 확실하고 증거도있어서 아닐 듯

↳↳ 근데 부모가 한푼도 없으면 우주한테 못 주는거지 별수 없지않나? 실형도 살아야한다며 언제갚음

↳↳↳ 부모가 갚을 수 있음.. 존나어이없게도 부모가 사는집이 초호화아파트였다함^^;;; ㅎㅏ …압류들어갈 듯

↳↳↳↳ 돈 안준다고 애를 납치해놓고 지들은 초호화아파트??? 어이x…

↳↳↳↳↳ 돈은 돌려받을 수 있겠네 휴;; 그나마 다행

▶ 씨바 스토커에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ㅠㅠㅠㅠ 소속사 방치 뭐냐진짜 속터져ㅠㅠㅠㅠㅠㅠ

↳ 얘네 계약 끝나가지 않아?ㅠㅠㅠㅠ 제발 탈AMJ 오늘도 소취다ㅠㅠㅠㅠㅠ

↳↳ AMJ가 순순히 놔줄까?

↳↳↳ 이정도 방송 나갔으면 에엠제이도 타격있을걸… 계약연장으로 행패는 못부릴거임

↳↳↳↳ 우필아 양심있으면 우리애들 곱게 놔줘라잉

↳↳↳↳↳ 아제발,, 래디언스 다같이 탈에엠제이하자…

▶ 유채야 빨리 우주 위로해줘ㅠㅠㅠㅠㅠ

↳ ㅅㅂ 유채가 왜나옴 이런 글에서까지 이러고싶나;;;

↳↳ ? 멤버니까

↳↳↳ ? 우유즈니까

↳↳↳↳ 유채가 우주 그냥 직장동료랫는데;ㅎ


***

태오가 무사히 구출될 수 있었던 것은 유채가 준 휴대폰 덕분이었다.

유채는 사생팬에게 휴대폰을 도난당한 적이 몇 번 있었다. 휴대폰에 중요한 정보를 저장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잠금 패턴을 걸어 두었기 때문에 곤욕을 치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갖고 있는 여러 대의 휴대폰 커버 안쪽에 눈에 띄지 않게 스마트 태그를 부착해 두었다. 그래서 전원이 꺼졌는데도 경찰이 쉽게 위치를 추적할 수 있었다.

서한준과 이주혜, 우주의 양부는 모두 현장에서 검거되었다. 무거운 형을 받게 될 거라고 태오의 변호사가 알려 주었다. 이주혜의 경우에는 납치 의도가 없었으니 서한준이나 양부보다는 형량이 적을 수 있지만, 사기와 횡령 혐의가 여럿 걸려 있었다.

납치 사건은 경찰 발표를 통해 대중에게도 알려졌다. 발표 당시에는 우주의 이름이 이니셜로 나갔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는데, 방송에서 대대적으로 사건을 다루면서 일파만파 퍼졌다. 다른 연예인들의 스토커 사건들을 알리면서 한 사례로 소개된 것이었지만 반응은 가장 뜨거웠다. 일반적인 스토커 사건과 달리 부모가 연관되었다는 점에 대중이 경악했다.

얼마지 않아 다른 시사 방송에서 어린 연예인에 대한 부모와 소속사의 정신적 학대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우주의 사례가 메인 이슈로 전파를 탔다.

시사 방송들이 한차례 여론을 휩쓴 뒤에는 태오에게 연예 프로그램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태오가 아직 입원해 있을 때였다. 명태는 인터뷰를 모두 거절했고, 환자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서 언짢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병원 주차장에 가득 찬 기자들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병실에 매일 드나들던 유채가 태오 대신 몇 차례 붙잡혔다. 덕분에 한동안은 무덤덤한 얼굴로 리포터의 질문에 대답하는 유채를 연예 프로그램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우주 씨가 정신적인 문제가 심했다고 들었는데요. 그래서 그룹 멤버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아닙니다. 좋아합니다.]

[예?]

[사이요. 사이좋습니다.]

[아, 예……. 그럼 우주 씨는 지금 안정된 상태라고 봐도 괜찮을까요? 많이 나아지셨는지?]

[뭐 귀엽고 예쁩니다.]

[예?]

[네.]

[아, 네……. 저, 그, 바쁘실 텐데 제가 너무 붙잡았네요. 유채 씨도 팬분들께 한 말씀 해 주시죠.]

[태…… 우주 많이 사랑해 주세요. 저도 많이 사랑합니다.]

[예?]

[감사합니다.]

[예…….]

리포터 대신 인터뷰를 종료해 버린 유채가 화면에서 휙 사라졌다. 태오와 함께 TV를 보고 있던 명태가 손에 들었던 바나나를 툭 떨어뜨렸다.

마침 래디언스 멤버들도 모두 병실에 와 있었다. 케빈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유채를 가리켰다.

“이거 누구냐? 유채 맞냐? 유채가 이상하다! 갑자기 눈에서 꿀 나온다! 악령 씌었냐?”

“꿀 떨어진다고 하는 거야, 케빈아.”

이신은 케빈에게 부드럽게 퉁을 주면서도 삐걱삐걱 유채를 돌아보았다. 유채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바나나 껍질을 까서 태오에게 물려 주었다. 얌전히 입을 벌려서 받아먹었더니 갑자기 저 혼자 귀 끝이 새빨개진다.

“왜 그래?”

바나나를 입에 문 채 우물우물 물었다. 말없이 태오를 내려다보던 유채가 뺨을 붉혔다. 그리고 멤버들을 흘긋 바라보더니, 눈썹을 와락 구겼다.

“그만 먹어.”

“응?”

유채는 제가 먼저 물려 주었던 바나나를 먹지 말라면서 빼앗아 갔다. 변덕을 부린다고 태오가 투덜거렸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이신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라윤도 놀란 표정으로 태오와 유채를 번갈아 두리번거렸다. 케빈은 혼자 씩씩거리다가, 소리를 지르면서 갑자기 태오의 침대에 뛰어들었다.

“왁!”

“아, 케빈아…… 케빈이 형. 뭐 하는 거야?”

태오는 자신을 꽉 끌어안는 케빈을 밀어내려고 바둥거렸다. 케빈을 노려보는 유채의 눈빛이 형형해서 손안에 땀이 배었다. 너, 가만있어. 입 모양으로 벙긋거리면서 말리지 않았으면 유채까지 달려들었을 것이다.

태오를 품에 안은 케빈이 잉잉 울었다.

“케빈이 먼저 새 우주 알아봤다! 유채는 새 우주 구박만 했으면서 왜 이제 와서 독차지하냐? 불공평해! 치사한 유채!”

“아, 그러네. 유채는 날 알아보지도 못했으면서.”

뭘 알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묘하게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태오는 끄덕끄덕 동조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새 우주—태오를 알아보았던 유채가 표정을 풀면서 헛기침했다. 뒤늦게 정신 차린 이신이 다가와 케빈을 떼어 내고 수거해 갔다.

“케빈아. 우주 아직 환자인데 그렇게 달라붙는 거 아니야.”

“왜? 유채는 더 붙어 있던데! 케빈 다 봤어! 왜 케빈만 못 하게 해? 케빈도 새 우주 좋아!”

“……그랬어? 유채가?”

이러다가 멤버들이나 명태가 그들 사이를 눈치채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니 알려지면 안 될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으면서 갑자기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었다는 게 태오는 조금 겸연쩍었다.

래디언스뿐만 아니라 드라마 촬영 팀, 화보나 예능을 촬영할 때 함께 일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몇 번씩 드나들었다. 다들 걱정스러운 얼굴로 찾아왔다가, 태오 곁에 딱 붙어서 움직이지 않는 유채를 보고 경악한 채 돌아갔다. 그때마다 태오는 이마를 짚었다.

얼마간 더 휴식하는 동안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그러나 바깥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사건이 워낙 자극적인 데다 래디언스의 유명세가 더해져, 연예 프로그램마다 우주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따기 바빴다. 태오는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민망했는데, 병실로 찾아온 사람들에게 사과할 때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몸이나 회복하라는 면박을 받았다. 몸은 회복된 지 오래였지만 유채가 난리를 쳐서 억지로 입원 기간을 늘렸던 태오는 더 민망해졌다.

그동안 태오가 보여 주었던 모습에 대해서, 그리고 서한준과 이주혜, 심지어 소속사의 행동에 관해 태오의 지인들이 입을 열었다. 드라마 촬영 팀에서는 홍두와 FD, 회사에서는 명태, 래디언스에서는 케빈의 목소리가 컸다. 모두 태오를 옹호했고, 연이은 방송의 파급 효과로 밉상 이미지가 강했던 우주에 대한 인식도 급속도로 바뀌었다. 유채도 몇 번이나 더 나서려고 했는데 무슨 소리를 할지 몰라서 태오가 말렸다. 요즘 유채는 입만 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사건이 잠잠해질 무렵 태오도 퇴원을 했다. 머지않아 ‘타이 브레이크’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고, 며칠 뒤 드디어 첫 방송일이 되었다. 태오의 회복을 축하할 겸, 촬영 팀이 다 함께 회식하면서 방송을 보기로 했다.

“한다, 한다.”

홍두가 손뼉을 쳤다. 제1화. 글자가 깜빡인 뒤, 유채의 얼굴이 화면 가득 잡혔다. 헉, 씨. 홍두가 뒤로 넘어지면서 놀란 신음을 뱉었다.

“뭡니까? 갑자기 이렇게 잘생기고.”

“와, 그러게. 화면 진짜 이쁘게 빠졌다.”

“한유채 선배님, 화면발 진짜 장난 아니네.”

홍두에 이어서 화민과 주형이 한 마디씩 거들어 댔다. 태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지만 내심 불만스러웠다. 화면이 이쁘게 빠진 게 아니라 화면에 비친 유채가 예뻤다. 유채가 화면발을 받은 게 아니라 화면이 유채발을 받았다. 유채의 실물은 TV 속 유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을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 태오는 묵묵히 홍두가 말아 준 소맥이나 마셨다.

“아직 컨디션 안 좋아. 많이 마시지 마.”

커다란 손이 불쑥 나타나 태오의 잔을 빼앗아 갔다. 순간적으로 촬영 팀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유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조금 전까지 태오가 마시던 잔에 입을 대고 소맥을 쭉 들이켰다. 시키지도 않은 흑기사를 혼자 하고 있었다.

“……우주 형 나왔어요.”

화민이 큼큼거리며 목소리를 내자 모였던 시선이 어색하게 흩어졌다. 화면에 성해인으로 분한 태오가 비쳤다.

이준희와 성해인 사이에 아직 아무런 갈등이 없던 고등학교 시절. 이 나이에 교복을 입는다는 게 어색해서 촬영할 때도 멋쩍었던 장면이다. 스물네 살인 우주의 몸으로 찍어서인지 화면에 비친 성해인은 다행히 위화감 없이 자연스러웠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한 기분이 들어서, 태오는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채를 흘긋거렸다.

[해인아.]

고등학생인 성해인이 자신을 부르는 이준희를 돌아보았다.

유채는 태오의 눈길을 눈치채지 못했다. 홀린 듯한 시선을 화면에 단단히 고정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늦여름의 햇살이 화면 속 태오의 얼굴 위로 자연스레 비껴들었다. 말간 뺨에 미끄러지는 햇볕 조각을 따라 하얀 피부가 부드럽게 빛났다. 이준희가 된 유채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나랑 같이 가, 해인아.]

그러자 무심했던 태오의 얼굴에 물결처럼 미소가 번졌다.

긴 눈매 끝이 부드럽게 휘어져 반달 모양을 그렸다. 까만 눈동자가 투명했고, 모양 좋은 입매에 맺힌 웃음은 다정하고 달콤했다. 불현듯, 오랜 과거에 유채를 향했던 시선이 눈앞에 떠올랐다.

-너…… 괜찮아?

회사 건물 옥상에서 태오를 처음 만났다. 열여섯 살의 유채에게 손을 내밀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유채는 저도 모르게 제 곁의 바닥에 놓인 태오의 손을 꾹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악력에 놀란 태오가 유채를 돌아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길게 접으며 푸시시 웃었다.

“고등학생은 좀 심했나? 걱정된다.”

“예뻐.”

“응?”

“하나도 안 변했어.”

유채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눈앞에서 시간이 한꺼번에 거꾸로 흘렀다.

십 년 전, 누구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던 유채에게 처음으로 햇살 같은 온기가 다가왔었다.

차가운 겨울비가 안개처럼 부슬거렸던 날, 유채를 일으키며 청량한 얼굴로 웃었던 스물한 살의 윤태오. 기억 속에서도 시간에 밀려 사라지고 있었던 유채의 첫사랑.

유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제 곁에 앉은 태오를 바라보았다. 스물네 살에도, 스물여덟 살에도 언제까지나 소년 같았던 말간 얼굴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과거에도 지금도 태오는 그대로였다.

태오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왜 그래? 눈짓으로 물었다.

그리운 살갗의 내음이 났다. 유채야. 그를 부르는 상냥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스쳤다.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태오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놓지 못해 꿈에서라도 만나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더 이상 태오는 꿈도 환영도 아니었다.

한순간에 유채를 사로잡았던 첫사랑의 소년이 돌아와 유채의 곁에서 살아 숨 쉬며 소리 내 웃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유채야? 왜 그래.”

태오가 또다시 그를 불렀다.

유채는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었다.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말들이 수없이 많았다. 태오가 살아서 돌아온 후, 매일 밤 조금씩 풀어놓았지만 여전히 가슴 가득 벅차게 쌓였다. 참지 못한 재채기처럼 고백이 튀어나왔다.

사랑해요.

또다시 한 마디를 가까스로 골랐다.

태오야.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태오는 유채의 입 모양만으로도 그 딸꾹질 같은 고백을 알아들었다. 열여섯 살의 유채가 엉엉 울면서 태오에게 고백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어, 나도.”

태오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뭐가요. 뭐가 나도입니까? 홍두도 알려 줘!”

“쥬니도 알려 줘라!”

벌써 취기가 올랐는지, 홍두와 쥬니퍼가 난동을 부렸다. 화면에 비친 태오의 모습에 넋이 나갔던 사람들도 정신을 차렸다. 술자리가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시끄러운 술꾼들 틈에 껴서, 태오가 유채의 귓가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나도 사랑해, 유채야.”

그리고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는 모습이 어린 소년처럼 예뻤다.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이렇게 유채는 잃어버린 소년을 찾았다.

***


[연예] ‘타이 브레이크’ 첫 방송에 순간 시청률 19%… tvM 드라마 사상 ‘최고 시청률’

신인 배우 신우주, 새로운 ‘국민 첫사랑’ 탄생 예고

[한국연예닷컴 왕해나 기자] tvM 새 드라마 ‘타이 브레이크’(극본 손태옥 연출 서진영)가 수도권 시청률 17.2%, 전국 시청률 16.3%, 순간 최고 시청률 19%를 기록하며 첫 방송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는 tvM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일 뿐 아니라, 첫 방송 기준으로는 종편 드라마 사상 최고 시청률이다.

이날 방송에서는 천재 테니스 선수인 이준희(한유채)와 노력형 범재인 성해인(신우주)의 고교 시절 우정이 그려졌다. 천만 배우인 한유채의 청량한 매력이 시청률을 견인한 가운데, 신인 신우주의 출중한 연기가 안방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특히 신우주는 삼 년 전 사망한 비운의 스타 윤태오와 꼭 닮은 청순한 비주얼로 눈길을 끌면서, 국민 첫사랑의 부활을 알리며 화제를 모았다. 왕해나 기자 [email protected]


<잃어버린 소년을 위하여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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