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잃어버린 소년을 위하여 3(완결)-Chapter 3. (7/13)

Chapter 3.

그날 이후, 유채와 대화가 끊겼다.

유채는 늘 바빴고, 활동 시즌도 아니었기 때문에 얼굴도 볼 수 없는 날이 더 많았다. 어쩌다 마주칠 때조차 태오와 눈도 마주치려 들지 않았다. 그게 속상했지만 태오도 유채에게 선뜻 다가갈 수는 없었다. 유채를 또다시 자극할까 봐 겁났다.

태오가 할 수 있는 일은, 한발 물러나서 유채의 눈에 띄지 않는 것뿐이었다.

유채만 마주치면 시작되던 시비가 뚝 끊겨 버린 탓에 숙소는 늘 조용했다.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다가 숙소에 돌아온 케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 숙소 왜 이렇게 썰렁하냐? 케빈 섭섭해!”

“그거야…… 다들 바쁘니까 그렇지.”

“응? 우주는 안 바쁘다!”

“……어 그래. 나만 안 바쁘다.”

여느 때처럼 소파에 길게 누워서, 꼬마를 옆구리에 낀 채 대본을 읽다가 케빈에게 갑자기 말로 두들겨 맞았다.

태오는 한숨을 쉬면서 다시 대본으로 눈을 돌렸다. 유채가 얼마 전에 계약한 새 드라마 1화 대본을 보는 중이었다. 예전에 태오와 함께 일했던 손 작가가 집필한 신작이라서 더 눈길이 갔다. 태오는 그 드라마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유채가 스무 살이 되던 날이었다. 그리고 연습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유채와 처음으로…….

“응? 그건 왜 보냐? 유채가 대본 빌려줬냐?”

상념에 빠지려던 차에 케빈이 또다시 말을 걸었다. 태오는 퍼뜩 놀랐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명태 형이 보라고 줘서 시놉이랑 1화 받았어.”

“명태 형이? 유채 드라마를 왜?”

“아……. 그러게?”

유채가 출연할 드라마가 궁금해서 생각 없이 받았는데 그러고 보니 의아했다. 시놉시스와 1화 대본은 함부로 유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섭외 대상일 경우 외에는.

순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케빈이 눈을 크게 떴다.

“어, 혹시 섭외 들어온 거 아니냐?”

“섭외? 나한테?”

리얼리티에서 이미지가 호전된 덕분에, 태오에게도 예능 출연 요청은 간간이 들어왔다. 그러나 드라마나 영화 쪽 섭외는 줄곧 전멸이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슬쩍 기대감이 차올랐다. 케빈은 더 신난 기색이었다.

“명태 형 뭐라고 하면서 대본 줬는데?”

“아, 형이 아까 바빠서 얘기는 아직 못 했어. 일단 보고 있으라고 줘서 받기만 했고.”

“우와아! 어떡하냐! 맞을 거 같다! 우주도 이제 백수 아니다!”

“나 원래 백수 아니거든……. 아이돌이거든. 래디언스라고 들어 봤냐?”

“어어, 들어 봤다! 근데 걔네 활동 일 년에 한 번만 하니까 백수 맞다!”

“그런 건 백수라고 안 해.”

“그럼 뭐라 하냐?”

“……반백수.”

“응! 우주 반백수다!”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 현관 쪽에서 기척이 났다. 유채를 데리고 들어온 명태가 태오를 보고 반색했다.

“우주야. 대본 봤어? 어때, 괜찮지!”

“네. 근데 이거 저 왜 주신 거예요?”

“응? 이유도 모르고 받았어?”

유채가 출연할 드라마라서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반갑기만 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태오는 명태 뒤에서 따라 들어오는 유채를 흘긋 곁눈질했다. 흰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명태가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긴 왜야. 너한테 섭외 들어왔으니까 줬지. 거기 성해인 역이야. 3화나 4화쯤에 죽을 거긴 한데…… 그래도 역할이 좋아.”

그러니 그게 어디냐는 거였다.

맞는 말이다. 태오는 내심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제로 시놉시스를 훑어보았을 때 성해인 역이 눈에 띄었다.

드라마 ‘타이 브레이크’는 유채가 맡은 남자 주인공 이준희가 테니스 선수로서 성장하고, 여주 김소현과 로맨스를 만들어 가는 내용이다. 성해인은 이준희의 오랜 친구이자 천재 테니스 선수로, 어린 나이에 사망한 탓에 이준희가 영원히 넘어서지 못하게 된 라이벌이었다.

초반부에 하차하긴 해도, 연기력도 필요하고 임팩트도 큰 역할이다. 이런 역이 우주에게 들어왔다는 게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태오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 이게 저한테 왔어요?”

“아, 그게 사실……. 완전히 온 건 아니고.”

“아…… 오디션 요청 들어온 거예요?”

그제야 명태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하면서 태오는 다소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예전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가끔 떠오를 때가 있었다. 신우주가 아닌 윤태오였다면 이런 대화가 오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명태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예상과 조금 달랐다.

“오디션은 아냐. 근데 상황이 조금 복잡해. 손 작가는 꼭 너 쓰고 싶다고 하는데, 서 PD가 죽어도 싫다고 하고 있거든.”

“손 작가님이요?”

태오가 알기로, 우주와 손 작가는 접점이 없었다. 우주가 주목받을 만한 필모그래피를 쌓은 것도 아니었다. 손 작가가 직접 우주를 지목했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응. 그래도 일단 손 작가 입김이 크니까 네가 오케이하면 진행하기로 했어. 근데 혹시나, 촬영장에서 카메라 테스트 해 보고 서 PD가 절대 안 되겠다고 하면 교체할 가능성도 있긴 있어……. 그래도 괜찮겠어?”

그 가능성이 꽤 큰 눈치였다.

태오로서는 당연히 좋았다. 카메라 테스트가 아니라 정식 오디션이었어도 역을 따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유채가 마음에 걸렸다.

“유채야, 너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유채에게 말을 걸었다. 대화하는 것은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손끝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괜찮아? 나랑 같이 촬영해도.”

“아이, 뭘 그런 걸 물어보냐. 당연히 괜찮지! 그치, 유채야?”

“어어 그래, 유채야. 우주한테 좋은 기회니까 너도 조금 양보하면 좋겠다.”

케빈과 명태가 양쪽에서 거들었다. 고맙긴 했지만 걱정스러웠다. 태오는 유채를 압박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나 이거 안 해도 돼. 진짜로 괜찮으니까 그냥 솔직하게…….”

“상관없어.”

“어?”

돌아온 목소리는 무심했다.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듯, 서늘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태오의 귓가에 닿았다.

“네가 무슨 짓 하든 이제 신경 안 써. 마음대로 해.”

“유채야…….”

유채는 이내 걸음을 옮겼다. 넓은 등 뒤에서 침실 문이 닫혔다.

“아이, 또 왜 저러냐. 신경 쓰지 말아라, 응? 유채 요즘 잠 못 자서 예민해서 그런가 보다!”

“그래, 우주야. 유채가 요새 힘든가 보다.”

케빈과 명태가 할 말을 찾으려고 애쓰면서 태오의 눈치를 봤다. 태오는 씁쓸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유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길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


★ Radiance TALK

BEST! [퍼옴] [단독] 한유채, 테니스 드라마 ‘타이 브레이크’ 캐스팅 확정… 화사한 비주얼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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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ww.hankookstar.com/news/read/1324678?ref=maver

[한국연예닷컴 왕해나 기자] 아이돌 그룹 래디언스 출신 배우 한유채가 tvM드라마 ‘타이 브레이크’ 출연을 확정했다.

‘타이 브레이크’는 ‘천생연분을 만들어 드립니다’로 유명한 스타 작가 손태옥 작가가 새롭게 선보이는 청춘 스포츠 드라마다. 한유채는 대학생 테니스 선수 이준희役을 맡아 활약을 예고했다. 손태옥 작가와는 드라마 ‘천생연분을 만들어 드립니다’에 단역으로 데뷔했던 인연이 있다.

한유채는 영화 ‘제왕’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판타지물인 ‘No more omega’에서 자살하기 전의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꿔 나가는 배우를, 시대물인 ‘검은 숲의 흰 새’, ‘한낮의 밤’에서 각각 지고지순한 사이코패스와 병약한 천재 저널리스트를, 로코물인 ‘연애적 거리 두기’에서 연하의 순정남을 열연해 연달아 성공시키면서, 인기 아이돌 출신이라는 편견을 깨고 흥행 보증 수표로 자리 잡았다.

완벽한 비주얼과 탄탄한 연기력, 화제성을 모두 갖춘 배우인 한유채가 이번 신작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고조된다.

한편 ‘타이 브레이크’는 드라마 ‘사제지간’ 서진영 PD가 연출을 맡았다. 여자 주인공 김소현役에는 그룹 트리니티 멤버 쥬니퍼가 캐스팅됐고, 한유채가 맡은 ‘이준희’와 쥬니퍼를 두고 다투지만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비운의 테니스 천재 성해인役에는 그룹 래디언스의 신우주가 물망에 올랐다.

‘타이 브레이크’는 이달 말까지 캐스팅을 확정 짓고 올 하반기 방송을 목표로 촬영에 돌입할 예정이다. 왕해나 기자 [email protected]

사진 | 한국연예닷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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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 손태옥 드라마 합류!!!!! 미쳤다!!!!!!

[댓글(599)]

▶ 새삼 유채 필모 진짜 쩐다ㅠㅠㅠㅠㅠ 소화 못하는 역할이 머임ㅠㅠㅠㅠㅠㅠ

↳ 어어어 노오메에서 존나 말랑콩떡이 민제였는데 ㅠㅠㅠㅠ 바아로 검숲새 찍으면서 싸이코 가스라이터 됐잖아;;; 연기폭 진짜넓음 ㅠㅠㅠㅠ

▶ 유채 새들마ㅠㅠㅠㅠㅠㅠ 빨리 보고싶다ㅠㅠㅠㅠㅠㅠ

▶ 유채 데뷔 천생연분에서 함???? 나 왜 기억안나지??? 윤태오가 주연 아니었음????

↳ 그때 단역이었어,, 탕비실 상탈남

↳↳ 진짜 탕비실 상탈남이었던게 어제가튼데 손작가 드라마에 주연댐ㅠㅠㅠㅠ

▶ 아 근데 주연이 죄다 아이돌인건 좀;;; 그렇지않나;;; 스타작가 스타피디 작품인데 캐스팅 왜이러지…

↳ 이 방에서 왜 이런 얘기 함?

↳ 머지;;; 유채를 그냥 아이돌이라고 할 순 없지 흥행작이 몇 개고 상탄게 몇 갠데;;

↳↳ 아니 유채는 그렇다 쳐도 쥬니퍼에 우주는 좀…

↳↳↳ 그러게 쥬니퍼 한국말은 제대로 하냐? 발음 진짜 어색하든데

↳↳↳ 아니 뭐??? 우주??? 우주라고 했ㄷ어???? 아시바 이거뭔데??????????

↳↳↳↳ 헐 끄트머리에 슬쩍 껴놔서 쓰루할뻔했자나;;;; 우주도 여기 나옴????

▶ 머머머ㅓ머머머머머머임 지금 우유즈 대형떡밥 터진거임??????

↳ 아직 안 터짐;; 물망에 올랐다는 말 의미를 모르냐?

↳↳ 그래도 기사까지 날 정도면 젤 유력하단거 아님?

↳↳↳ 유채가 주연이니까 우주도 끼워 판듯…

↳↳↳↳ 울 삼촌이 피딘데 그분 드라마판에서 기피 대상 1호야… 손태옥 드라마 출연은 어림없어

↳↳↳↳↳ 그러게 게다가 서브남주 롤인거같은데 저렇게 큰 역에 우주는 말도 안댐;; 기레기 설레발인 듯…

↳↳↳↳↳↳ ㄴㄴ아는 언니가 저 들마 보조 작가인데 우주 역할 완전 엑스트라래,, 걍 초반 2화나 3화만에 죽는다구…

↳↳↳↳↳↳↳ 머… 그럼 우주 캐스팅은 확실한거임????? 씨바 존나시러 알괘스충들 난리나겠네ㅠㅠㅠㅠㅠ

↳↳↳↳↳↳↳↳ 그러잔아도 지금 짹창 터져나간다… 우유즈 우유커플 실검 장악임

▶ 아니 왜 하필이면 우주야ㅠㅠㅠㅠㅠㅠ 인성논란 태도논란 연기논란 그림이 안 그려지냐?? 제작진 제정신이냐고ㅠㅠㅠㅠㅠ

↳ 유채 갓벽필모에 신우주묻히게 생겼음ㅠㅠㅠㅠ 제발 아니길 ㅠㅠㅠㅠ

↳↳ 걍 물망이니까 ㅠㅠㅠㅠ 아닐거임ㅠㅠㅠㅠㅠ 유채가 반대할거임ㅠㅠㅠㅠㅠㅠ

↳↳↳ 래디언스 카테에서 멤버 한명 몰아서 배척하는거 보기 별로다;; 요즘 우주 엄청 열심히하고 논란도 많이 없어졌는데…

↳↳↳ 이번 활동에서 우주 무대 겁나 잘했어,, 팬들한테도 엄청 스윗하고…

↳↳↳↳ 무대 잘하고 팬한테 스윗한게 드라마랑 머선상관?? 존나 발연기하고 멋대로 굴다가 짤려서 중도하차한 게 몇 번인데?

↳↳↳↳↳ 요즘 우주 감싸는 댓이 왤케 많지;;

↳↳↳↳↳↳ 그니까… 유채한테 민폐나 안 끼쳤으면ㅠ

▶ 우유즈 공동캐스팅 실화냐ㅠㅠㅠㅠㅠㅠㅠㅠ 존나한줌단 존버4년만에 떡상 실화냐ㅠㅠㅠㅠㅠㅠㅠ 나지금 대성통곡하다 내눈물에 빠져죽을뻔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야너두?? 야나두ㅠㅠㅠ 기억나? 우유러 모임하면 찐우유러 세명에 찐우유러 구경하러온 관객 다섯명 모였엇자나…

↳↳ 존나 서러웠던시절ㅠㅠㅠㅠ 그딴거 왜 빠냐고… 손가락질 받던 시절ㅠㅠㅠㅠㅠㅠㅠㅠ

↳↳↳ 뭐임;; 우유러가 세명이나 있었다고?

↳↳↳↳ 내말이… 우유러 그런말 처음들어봐;;;

↳↳↳↳ 세명 위에 있자나 첫댓 2댓 3댓 저기 세명 모였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다중이아님?

↳↳↳↳↳↳ 시밬ㅋㅋㅋㅋㅋㅋㅋㅋ 다중이맞넼ㅋㅋㅋㅋㅋㅋㅋㅋ

▶ 댓글 분위기 왜이럼; 누가보면 캐스팅 확정난줄 알겠네;;

↳ 222 물망에 뜻을 모르냐; 상식적으로 우주가 유채주연 드라마에 서브롤이란게 말이 됨? 걔들은 급이 다름;;;

↳↳ 전에도 했었잖아; 제왕에서도 우주가 서브였다,, 다들 유채만 기억하지 시바.. ㅠㅠㅠㅠㅠㅠ 존나 기대했던 우유러 그때도 피눈물 흘렸다

↳↳↳ 야 울지마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둘이 한화면에는 잡혔었잖아…

↳↳↳↳ 그거 원래 윤태오주연이었을 때는 섭남비중 존나높았대… 거의 브로맨스였대든데 캐슷바뀌면서 케미 안 살아서 감독이 우주 파트 다빼버리고 케미 폭망했다 함;;;

↳↳↳↳↳ 헐진짜? 제왕 완전 유채 원탑 영화였는데 원랜 섭남도 비중 높았구나ㅠ

↳↳↳↳↳ 시밬ㅋㅋㅋ 이제 별 개소리 다듣넼ㅋㅋㅋㅋㅋㅋㅋ 야 누가 그럼? 니가 그럼?

↳↳↳↳↳↳ 친구네 삼촌이 관계자임ㅡㅡ

↳↳↳↳↳↳↳ 여기 욀케 관계자가 만냐…

↳↳↳↳↳ 아 원래 윤태오 주연이었어? 윤태오 왜 하차함?

↳↳↳↳↳↳ 씨바일부러 이러냐;;

▶ 유채 진짜 열일하네 활동 마친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자주 봐서 난 좋지만 쉬어가며 했으면ㅠㅠㅠ

↳ 유채 스케줄 넘 살인적이야… 소속사샛기들 애를 얼마나 굴리는거야ㅠ

↳↳ 오늘도 탈AMJ… 소취ㅠㅠㅠㅠㅠㅠ

↳↳↳ 광고도 진짜 많이 하고 스케줄도 존나많든데ㅠㅠㅠㅠ 왤케 죽도록 뛰지 유채 돈없나ㅠㅠㅠㅠ

↳↳↳↳ 무슨;;; 하다하다 유채 돈없냐는 소리까지 나오냐 그럴 리가 있냐;;;

↳↳↳↳↳ 유채 빌딩만 해도 몇채나 있다든데??? 몇 년전에 찌라시 크게 터졌잖아

▶ 윗댓 찌라시 얘기 뭐임??

↳ 그거 아님? 옛날에 윤태오 죽었을 때 유채가 유산 상속받았다고 찌라시 돌았던 거

↳↳ 이거 기자들 사이에서 겁나 유명한 얘기라든데…

↳↳↳ 야 이얘기 함부로 하면 안돼… 에엠제이가 강경대응해서 다 고소하고 합의 안해줬었음…

▶ 엥 이상한 얘기 나오네;; 무슨 유채가 윤태오 유산을 상속받냐;;; 유채가 윤태오랑 무슨 사이라고…

↳ 사랑하는 사이

↳↳ 이건 또 신박하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시바 피뎁딴다ㅗ

↳↳ 뭔데 이건;; 고인모독 쩐다,, 그만좀 해;;

↳↳ 아ㅅㅂ 크오충들 래디언스 카테까지 쳐들어와서 지랄;; 다 죽었으면

↳↳ 유채는 우주랑 사랑하는 사이거든요;

↳↳↳ 아니 이신이랑 사랑하거든요;;;

↳↳↳↳ 아니 케빈이랑 사랑하거든요;;;;;

↳↳↳↳↳ 홈충들 다 죽었으면


***

태오는 성해인 역을 거절하기로 했다. 초반부에 하차하는 작은 역할이라서 내켜 하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명태는 아쉬운 얼굴로 다시 생각해 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태오는 고민 끝에 다시 고개를 저었다.

성해인 역은 태오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출연 횟수가 적지만 캐릭터가 매력적이었고, 태오는 시청자의 눈길을 끌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유채를 괴롭히면서까지 드라마를 욕심내고 싶지는 않았다.

유채는 상관없다고 했지만, 정말로 상관없었으면 그런 얼굴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태오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출연을 고사한 지 하루 만에 태오는 AMJ 엔터 신우필 대표에게 불려 갔다. 신 대표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씨근거리면서 태오를 다그쳤다.

“네가 아주 배가 불러 터졌지? 뭘 믿고 이래?”

예전에는 태오도 AMJ 소속이었다. 입대할 무렵 계약이 완료되었고, 한동안 에이전시 없이 지내다가 다른 회사와 계약했으니 신 대표와도 안면이 있었다. 그러나 우주를 앞에 세운 신 대표의 태도는 윤태오를 대할 때와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예전의 신 대표는 언제나 태오의 눈치를 보면서 비위를 맞추기에 바빴다.

태오는 눈썹을 구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섭외가 확정된 게 아니었잖아요. 서 PD님이 반대하신다고 들었는데요.”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 당장 가서 납작 엎드려! 네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려 받을 때야?”

“가려 받겠다는 게 아니라.”

유채가 상처받을까 봐 겁나서 물러나야겠다는 걸 설명할 길이 없었다. 태오가 말문이 막힌 채 대꾸하지 못하자, 신 대표가 더 기세등등해졌다.

“내년에 컴백할 때까지 놀고먹을 셈이야? 너 미리 정산 받아 간 건 어쩔 건데. 요즘 좀 고분고분해졌다고 해서 마음 놓았더니만. 근본은 어쩔 수가 없는 거냐? 누가 그 여자 자식 아니랄까 봐.”

“근본이 여기서 왜 나와요? 그게 동생한테 할 말이에요?”

신 대표가 화내는 이유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어서 묵묵히 듣기만 하려고 했다. 제 발로 이런 기회를 차 버리겠다고 했으니 소속사 대표로서 한마디 할 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신공격으로 넘어가면 얘기가 달랐다. 애초에 태오는 신 대표의 이런 성격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에도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 유채도 계약 기간이 끝나면, 태오가 직접 기획사를 설립해서 래디언스를 모두 데려올 생각도 진지하게 했다.

게다가 우주는 신 대표의 이복동생이다.

복잡한 가정사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부모 세대의 잘잘못을 아이에게 따지는 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유채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서한준 같은 스토커와 만나 볼 생각까지 했던 것을 보면 우주는 애정 결핍 성향이 있었다. 태오가 이 몸에서 눈을 떴기 때문에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우주는 결국 자살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신 대표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헛웃음을 쳤다.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회장님한테 내쳐져서 자살 시도까지 했다길래 불쌍해서 내버려 두었더니만 이게 아주……. 이 새끼야, 네가 내 동생인지 그 여자가 아무 데서나 만들어 온 씨인지 어떻게 알아?”

태오는 결국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제가 알고 있던 막장 가족사보다 더한 막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여자가 밖으로 눈 돌리다가 회장님한테 걸려드는 바람에 한 푼도 못 받고 쫓겨났으니 다행이지. 회장님이 너도 당신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유언장 고치신 거 아니겠냐? 자칫했으면 너랑 유산까지 갈라 먹었을 뻔했다. 그 생각만 하면 내가 아주 치가 떨려.”

“아…….”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아무리 신 회장이 사망했다고 하지만, 그의 금지옥엽인 우주가 빚더미에 앉았다는 게 줄곧 이상했다. 알고 보니 우주의 어머니가 외도를 하다가 발각되었고, 그녀와 우주 모두 상속을 전혀 받지 못했나 보다.

우주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가 단지 돈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주는 이복형제들은 물론, 친어머니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했다. 태오가 병실에서 깨어났을 때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던 것을 보면 뻔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애정을 주었던 신 회장의 친자가 아니라는 의심을 받고, 그에게서 버림받기까지 했으니 충격이 컸을 터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태오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러나 윤태오였던 시절과는 상황이 달랐다. 우주는 이제 신 회장의 사랑받는 막내아들도 아니었고, AMJ에는 계약으로 묶여 있는 데다, 갚아야 할 정산금이 쌓여 있었다.

“잔말 말고 당장 드라마 합류해! 어떻게든 서 PD한테 비벼서 계약 따내란 말이다. 그게 싫으면 당장 정산금 토해 내고 계약 해지하든가. 알아들어?”

“……예.”

결국 마지못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유채는 태오가 드라마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반응이 없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말없이 스케줄을 소화할 뿐이었다. 그러나 불면증은 나날이 심해지는 것 같아서, 어느 날 밤에는 유채의 침실 문을 소리 나지 않게 열고 꼬마를 몰래 들여보냈다.

태오가 돌아온 뒤에는 줄곧 태오 품에서 잠들고 싶어 했던 꼬마가 낑낑거리면서 그를 돌아보았다. 태오는 검지를 제 입술을 앞에 대면서 쉿 소리를 냈다.

“꼬마야. 유채 형이 잠을 못 자. 네가 옆에서 돌봐 줘.”

“낑…….”

꼬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쫑쫑거리면서 침실 안으로 사라졌다. 안쪽에서 유채가 꼬마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꼬마 테라피는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다음 날에는 유채의 안색이 제법 좋아졌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태오가 처음으로 꼬마를 다시 만났던 날, 유채의 상태가 갑자기 호전되었던 기억이 났다. 그 무렵에도 한동안 불면증에 시달리던 유채가, 동물 병원에 입원해 있던 꼬마를 데려오면서 간신히 눈을 붙였으리라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진작 이럴걸.’

우주의 몸에서 눈을 뜬 후, 태오는 제 앞가림에 급급해서 유채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시비를 걸어 댄다고 얄미워하기만 했다. 태오 앞에서는 언제나 생기 있어 보여서 괜찮은 줄 알았다. 예전의 태오를 잊어 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씁쓸했지만, 그게 맞는 길이라는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유채는 삼 년 전 태오가 죽은 순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애처롭고 안쓰러웠다.

유채와의 대화가 뚝 끊긴 채로 시간이 지났다.

반강제로 참여하게 된 ‘타이 브레이크’의 대본 리딩 날이 다가왔다. 유채는 다른 일정을 마친 뒤 리딩 장소로 바로 가기로 했고, 별다른 스케줄이 없었던 태오는 명태와 함께 숍에 들렀다가 제작사 사무실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총연출인 서진영 PD와 스태프들, 몇몇 조연 배우들이 미리 와 있었다. 태오가 먼저 다가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다들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캐스팅을 끝까지 반대했다던 서 PD는 줄곧 냉담해 보였다.

우주로 살아온 지도 이제 몇 달이나 되었다. 미움받는 상황에는 이미 익숙해졌고, 그런 만큼 얼어붙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넘기는 법도 익혔다. 태오는 입꼬리를 당기면서 싱긋 웃었다. 서 PD가 흠칫 놀라면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우주 씨, 오랜만이네요.”

서 PD가 내키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인사를 받아 주었다.

서진영 PD는 입봉작인 ‘사제지간’이 대대적으로 히트하면서 순식간에 스타 PD로 자리매김한 젊은 감독이었다. 우주는 그녀의 다른 작품에 잠시 합류했다가, 조건이 맞지 않는다고 금세 하차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서 PD의 표정을 보니 단순히 조건 문제로 캐스팅이 무산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우주가 또 사고를 친 게 분명했다.

태오는 제 짐작이 맞을지 반신반의하면서 운을 떼 보았다.

“요전에는 죄송했습니다.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서 PD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미간을 슬쩍 찌푸리더니, 이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기회를 준 건 아니에요. 카메라 테스트까지만 오케이한 거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태오는 눈을 접으면서 쌕 웃었다. 서 PD는 이제 얼떨떨하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자리로 돌아와 앉았더니, 한 바퀴 돌면서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고 온 명태가 다가와 소곤거렸다.

“우주야, 잘했어. 서 PD님이 조금 무섭긴 해도 뒤끝은 없으셔. 좋은 분이야.”

“응, 알아요.”

태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주뿐만 아니라 태오도 서 PD와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성격에 대해서는 잘 알았다. 태오가 ‘천생연분을 만들어 드립니다’에 출연했을 때, 입봉 전이었던 서 PD가 조연출을 맡았다.

서 PD는 차갑고 엄격했지만, 공정한 성격이었고 실력을 중시했다. 촬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데면데면했던 태오와는 이내 사이가 좋아졌다. 나중에는 자신이 작품을 맡게 되면 태오가 꼭 주연을 맡아 달라고 여러 번 신신당부했을 정도였다.

태오도 서 PD를 신뢰했기 때문에 꽤 구체적인 얘기까지 오갔다. 태오가 사고를 당하면서 무산되었지만, ‘사제지간’의 주연은 원래 태오가 맡기로 되어 있었다.

구면인 사람은 서 PD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캐스팅에 우주를 적극적으로 밀었던 손 작가도 생전의 태오와 친한 사이였다. 왜 그렇게 우주를 원했는지 의아했는데, 며칠 전에 손 작가가 우주의 팬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요전에 방송된 글램핑 리얼리티를 우연히 보고 반했다는 거였다.

돌고 돌아서 다시 닿은 인연들이 신기했다. 게다가 태오가 이 몸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여전히 우주가 우주로 지냈더라면 만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영혼이 바뀌면서 운명과 미래도 달라진 것일지도 몰랐다. 태오가 우주의 몸에서 눈뜬 이후, 외모가 조금씩 변하고 갑작스레 키가 큰 것처럼.

“어, 한유채다.”

그때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리딩실 출입문으로 쏠렸다. 키가 훌쩍 큰 인영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들 앞에 섰다. 단정하고 반듯한 얼굴이 차가운 대리석을 깎아 만든 조각 같았다. 조연 배우 몇 명이 저희끼리 소곤거리면서 감탄했다. 유채는 고개를 숙이면서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가벼운 박수 소리와 함께 함성이 터졌다.

문득, ‘제왕’ 리딩 날이 떠올랐다.

유채는 그 당시에도 이미 톱 아이돌이었지만 영화 출연은 처음이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눈을 얌전히 내리깐 모습이 예쁘고 안쓰러워서, 주인공이었던 태오가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의 유채는 언제나 절박할 정도로 간절해 보였다.

이제는 입장이 정반대였다. 태오는 변변한 작품 하나 없는 조연이었다. 우주의 필모에서 유일한 성공작이었던 ‘제왕’에서도, 우주가 맡은 배역의 비중이 대폭 축소된 탓에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고 들었다. 유채는 그동안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쌓았고,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배우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원하던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도 유채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제왕’ 당시의 태오처럼, 이제는 유채가 이 자리의 주인공이었다. 유채와 태오의 입장이 바뀌었을 뿐 모든 상황이 같았는데도 모든 것이 달랐다.

그때의 유채는 아무것도 갖지 못했지만 행복했었다.

배우들이 모두 도착한 뒤에는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가장 먼저 서 PD가 마이크를 잡았고 다음으로 유채가 일어나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좋았던 분위기가, 여주인공인 쥬니퍼가 자기소개 할 때부터 조금씩 가라앉았다. 인기 그룹 ‘트리니티’ 멤버인 쥬니퍼는 같은 아이돌이라고는 해도 유채와 비교할 수 없이 경력이 짧았고, 교포 출신인 탓에 한국어 발음이 다소 어눌하게 들렸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쥬니퍼는 뾰족한 눈길을 의식한 듯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얼굴이 새빨개진 채 주저앉았다. 실력에 비해 과한 역을 받은 배우 뒤에서 말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린 신인에게 텃세 부리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유채가 무명 아이돌이었던 시절이 떠오른 태오는 무심코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제 차례가 돌아왔기 때문에 황급히 얼굴을 폈다. 지금은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이 리딩실에서 가장 미운털이 박힌 사람은 쥬니퍼가 아니라 태오였다.

일어서서 마이크를 잡는 순간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들으라는 듯 누군가 혀를 찼다.

“연기는 제대로 하려나.”

“캐스팅은 어쩌다가…….”

“손 작가님이 팬이라나 봐요.”

“서 PD님은 무슨 죄야…….”

그렇다고 대놓고 험담이 쏟아질 줄은 몰랐다. 태오는 난처한 얼굴로 눈을 굴리다가 유채를 바라보았다. 유채는 여전히 별다른 표정 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다만 미간이 슬쩍 좁혀진 모습이, 기분이 조금 언짢은 듯 보였다.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가웠다.

태오 편을 들어 주는 것은 아닐 게 뻔했다. 아마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유채는 요즘 들어 얼굴이 밝았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괜히 기운이 났다. 태오는 눈을 접으면서 싱긋 웃었다. 뺨에 길게 보조개가 팼다.

“안녕하세요, 성해인 역을 맡은 유…… 신우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잠시 주변이 조용했다. 예의상 쳐 주는 박수조차 없었다. 아무리 태오가 태연한 성격이어도 이렇게까지 반응이 없는 것은 조금 머쓱했다. 생각보다 더 힘든 촬영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가만있을 땐 몰랐는데 웃으니까 진짜 윤태오 닮았다.”

“전에는 저렇게까지 똑같진 않았어요.”

“좀 변한 거 같은데 수술한 거 아니에요?”

“보나 마나 연기는 엉망일 텐데…… 저 얼굴로 배역 따냈나 보네.”

태오는 말문이 막혔다. 연기에 대해 험담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넘겼는데, 제 이름이 오르내리니 할 말이 없었다. 차마 유채 쪽은 돌아보지도 못했다.

유채가 눈앞에서 울어 버린 이후, 태오는 어떻게든 유채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윤태오의 이름이 꼬리표처럼 따라붙고, 그래서 제 존재 자체가 유채에게 상처가 된다면 가능한 그의 앞에 나타나지 말아야 했다.

역시 어떻게든 이 역을 맡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서 PD는 카메라 테스트를 해 본 뒤 확정하겠다고 했으니, 눈에 띄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연기하고 테스트에서 자연스럽게 탈락하면 그만이었다.

태오는 다소 가라앉은 기분으로 자리에 앉았다. 귓가에는 여전히 웅성거리는 음성들과 함께 윤태오의 이름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 서 PD가 입을 열었다.

“다 들리게 수군거리지들 말고 할 말 있으면 마이크 잡고 하세요.”

리딩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들 침묵한 채 서 PD의 눈치를 보았다.

시작부터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

그날은 세 시간에 걸쳐서 대본 두 화를 리딩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태오는 의기소침해진 데다, 유채가 줄곧 마음에 걸려서 리딩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도 태오 차례가 왔을 때 서 PD가 별다른 말없이 진행시켰던 것을 보면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며칠 뒤에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태오와 유채는 로드 매니저와 함께 숍에 들렀다가 드라마 주 촬영지인 일산 세트장으로 향했다.

드라마 ‘타이 브레이크’는 주인공 ‘이준희’가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홍보 자료에서는 태오가 맡은 ‘성해인’과의 라이벌 구도나 ‘김소현’과의 로맨스가 주요 내용인 것처럼 보도되었지만 실제로는 이준희의 성장 드라마에 가까웠다. 성해인의 역할은 초반 화 차에 사고로 사망하면서 이준희가 각성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고, 김소현과의 로맨스는 드라마 후반부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때문이었다.

드라마는 태평하고 여유로운 성격인 이준희가 타고난 실력만 믿고 테니스에 그다지 의욕을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시작한다. 이준희의 가장 친한 친구인 성해인은 이미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테니스 선수였는데, 천재 플레이어로 알려진 것과 달리 끊임없이 노력하는 성실한 타입이었다. 성해인은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해내기 힘든 플레이를 손쉽게 선보이면서도 경기나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 이준희에게 내심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그러나 성해인의 자격지심에도 불구하고 순탄했던 사이에, 그들의 어린 시절 친구인 김소현이 등장하면서 틈새가 벌어진다. 성해인은 예전부터 김소현을 짝사랑해 왔지만 김소현은 오랜만에 다시 만난 이준희에게 끌리게 되기 때문이었다.

기왕 같은 숙소에 살고 있으니 유채와 함께 연습하고 미리 호흡을 맞춰 보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태오는 유채를 대하기가 여전히 어색했고, 유채도 태오와 말을 섞으려고 들지 않았다. 결국 어영부영 시간이 흐르다가 촬영 첫날이 되었다.

첫날에는 성해인이 이준희에게 자신의 자격지심을 고백하면서 김소현에게서 물러나 달라고 부탁하는 신을 가장 먼저 찍기로 했다. 보통은 우주 같은 조연이 등장하는 신이 뒤로 밀려서 하염없이 대기하기 마련인데, 유채와 함께하는 장면이라서 맨 앞 순서를 받은 듯했다.

메이크업을 받은 후 현장에 도착했더니 주변이 어수선했다. 서 PD나 촬영 스태프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세트장 한쪽에서 비중 있는 조연인 김홍두가 벌겋게 열 오른 얼굴로 씨근덕거렸다.

“이게 말이 돼? 언제까지 대기하라는 거야? 내가 신우주인지 뭔지 하는 듣보한테 밀려야겠어?”

“홍두야, 피디님도 계신데……. 목소리 낮추자. 우주 씨 촬영 신은 길지 않으니까 오래 안 걸리겠지.”

“형, 사람들 하는 얘기 못 들었어? 걔 발연기인 거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 얼마나 걸릴지 알아? 오늘 안에만 끝나면 다행이야.”

“그래도 어떡해. 이미 결정된걸. 홍두야, 그러지 말고…….”

“씨발, 밤에 예능 촬영 가야 하잖아. 여기서 내내 대기하다가 쉬지도 못하고 이동하라고? 아냐, 갈 수는 있는 거야? 그때까지 쟤 촬영 안 끝날 거 같은데? 아 씨, 어떻게 좀 해 봐, 형. 한유채랑 같이 잡히는 신인 건 나도 똑같은데 왜 걔를 먼저 찍어?”

“홍두야…….”

애꿎은 김홍두의 매니저만 시달리고 있었다.

언뜻 둘러보았더니 김홍두만 불평 중인 게 아니었다. 대학 테니스부가 배경이었기 때문에 현장에는 선수 역할을 맡은 젊은 배우들이 많았다. 대본 리딩날 대놓고 태오의 험담을 하다가 서 PD에게 한 소리 들은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주연급은 아니었지만, 인지도도 높은 편이었고 기본기도 탄탄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경력이나 연기 면에서 한참 밀리는 태오가 캐스팅된 것이 가뜩이나 못마땅하던 차에 촬영 순서가 트집거리가 된 듯했다. 쥬니퍼만 한구석에 시무룩한 얼굴로 혼자 앉아서 눈치 보는 모습이 보였다. 리딩실에서 우려했던 일들이 첫날부터 다짜고짜 터져 나온 셈이다.

태오는 한숨을 쉬면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머리가 아파서 눈가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는데, FD가 난처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머뭇거렸다.

“저기, 우주 씨. 미안한데 혹시 이후에 스케줄 있어요?”

말을 걸어오는 FD의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 우주의 성격에 대한 소문이 워낙 나빠서 겁을 먹은 듯했다. 태오도 이런 상황이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 FD를 괴롭힐 마음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배우들의 불만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태오는 씩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 아무 일정도 없어요. 제일 마지막에 찍어도 되니까 편하게 진행해 주세요.”

FD가 어깨를 움찔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란 얼굴이었다. 되묻는 목소리가 더듬거렸다.

“저, 정말이요? 진짜 괜찮으세요……? 많이 밀릴 수도 있는데.”

“그럼요. 여기서 제가 제일 한가할걸요?”

“네…… 네?”

틀린 말도 아니었다. 태오는 래디언스 그룹 활동이 끝난 이후로 줄곧 놀랄 만큼 한가했다. 윤태오였던 시절에도 한가했던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때는 유채의 애인이라는 중요한 직업이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바빴다. 지금은 정말 아무런 일도 없다. 길지 않은 성해인 신만 찍고 나면 남은 오후 내내 심심할 예정이었다.

그럴 바에는 현장에서 다른 배우들 연기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른 배우들이라고 쓰고 유채라고 읽으면서, 태오는 다시 한번 싱긋 웃었다.

“밤까지 있어도 돼요. 저 굶기지만 말아 주세요.”

“앗, 네……. 그럼요!”

화들짝 놀란 채 대답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는 FD의 귀 끝이 눈에 띄게 붉었다.

***

태오는 오후 늦게까지 대기했다. 점심 무렵에는 도시락이 나왔다. 유채와 같이 먹으려고 두 개를 받았는데, 챙겨 두면서도 과연 유채가 자신과 함께 먹으려고 들까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도 없이, 유채는 식사할 시간도 없이 줄곧 촬영만 했다. 남은 도시락 하나는 결국 밴 안에 방치되었다.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이 저마다 모여서 점심을 먹었지만 태오 곁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명태는 회사에서 실장급 회의가 있었고, 오늘 태오와 동행했던 로드 매니저도 급한 볼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 어차피 대기가 길어질 예정이라서, 태오가 촬영할 시간에 맞춰 돌아오기로 했다.

태오는 유채가 연기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제왕’ 촬영 당시에도 유채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타고나게 감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늘 성실했고 꾸준히 늘었다. 그리고 요 몇 년이 지나는 동안 더 좋아진 듯했다.

“……컷! 유채 씨, 방금 표정 너무 좋았어. 오 분 쉽시다.”

“감사합니다.”

스타일리스트가 유채에게 다가가 메이크업을 고쳐 주었다.

드라마 초반부의 이준희는 프로 선수라기보다는 쾌활하고 서글서글한 대학생이었다. 유채의 스타일링도 이미지에 맞춰서 가볍고 밝게 꾸몄다. 원래도 갈색인 머리카락에 조금 더 환한 색상의 스프레이를 뿌렸고, 귀에는 작은 피어싱을 달았다. 연기하는 내내 나긋하게 웃고 있어서 평소보다 어려 보였다.

태오와 함께일 때의 유채 같았다.

“우주 씨, 오래 기다렸죠. 이제 다음 신이니까 준비해 주세요.”

FD가 잠시 예전 생각에 빠진 태오에게 다가와 언질을 주었다. 아까보다 한결 친절해진 말투다. 촬영 중이거나 대기하던 배우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태오에게 쏠렸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촬영할 신은 자존심을 내려놓은 성해인이 제 자격지심을 인정하면서 이준희에게 매달리는 부분이었다. 감정이 고조되는 장면이기 때문에 태오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성해인이 된 태오가 이준희로 분한 유채를 똑바로 마주 보고 섰다.

AD가 조명과 마이크를 체크했고, 여러 대의 카메라가 태오와 유채를 향했다.

“슛 들어갑니다. 액션!”

신호와 함께 태오가 입을 열었다.

“넌 다 가졌잖아, 준희야.”

평소보다 한 톤 낮아진 태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유채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른거렸다.

태오는 눈을 내리깔았다. 뺨에 닿는 유채의 시선을 느꼈다.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어. 내가 평생 네 그늘에 가려질 거라는 것도 알아. 그게 싫어서 그렇게 발버둥 쳤어.”

“야, 무슨 소리야. 남들이 들으면 웃겠다. 네 랭킹이 나보다 훨씬 높은데.”

유채가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태오는 고개를 들었고, 차분한 시선이 유채의 눈길과 만났다. 천천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준희야. 사실은 너도 알잖아.”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냐.”

“소현이까지 뺏어 가지 마.”

“…….”

태오는 그때, 제 감정이 다소 과하게 드러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준희로 분장한 유채의 모습에서 지난 일들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본에서 원했던 것보다 표정과 목소리가 조금 더 흐트러지고 말았다.

아마 유채도 그것을 느꼈던 것 같다.

여유롭게 웃고 있던 유채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유채가 성해인의 대사를 농담으로 넘기려는 시도를 다시 한번 해야 할 차례다. 그러나 대신 침묵이 흘렀다.

색소가 옅은 유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거렸다. 하얗고 말간 얼굴에 평정이 깨진 채 금이 갔다. 이준희 대신 유채가 드러났다. 텅 빈 표정으로 가려 두었던, 상처받고 지친 맨얼굴이 태오를 향했다.

그 순간, 태오가 대본을 외우고, 연습하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한꺼번에 흘러넘쳤다.

혼자서 연습하는 동안 줄곧 외면해 왔다. 그러나 이준희에게 매달리는 성해인의 감정은 태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것은 사 년 전, 아파트에 혼자 남은 태오가 유채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다.

수백 번 곱씹고 되새겼지만 끝내 내뱉지 못했던 말들이 대사가 되어 흘러나왔다.

“내 곁에 있게 해 줘.”

가지 마, 유채야. 내 곁에 있어 줘.

진심 대신 몰아치듯 대사를 마친 태오가 간신히 숨을 토했다.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다. 십오 년 가까이 연기를 했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윤태오였던 시절, 태오는 어떤 역을 맡겨도 옷을 갈아입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해냈다. 작품을 할 때마다 찬사가 쏟아지는 스타였다. 달리 말하면, 역할에 몰입하는 메소드 배우라기보다는 영리한 연기자였다. 캐릭터는 ‘옷’일 뿐 태오 자신이 되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캐릭터의 감정에 취해 버린 것은 처음이었다.

“소현이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태오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얼굴도 다리도 잃고, 휠체어에 앉아 온종일 유채만 기다렸던 기억.

마지막으로 남은 소중한 것이었기에 그 애가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유채를 밀어내고, 헤어지는 순간에조차 그에게 매달리고 싶어서 절박했다.

“……뭐야, 성해인. 너답지 않게 왜 이러냐.”

사실은 어떻게든 유채를 잡고 싶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지도 않았다.

“준희야. 부탁이야.”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유채와 헤어지던 날에도 그랬다. 태오는 제 숨이 멎었을 때보다 유채를 잃어버린 순간이 더 슬펐다.

“부탁이야…….”

뺨을 타고 내린 눈물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유채의 모습이 물기에 흐렸다. 태오는 손등으로 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유채를 제대로 보고 싶었다.

이런 순간이 아니라면 이제 유채는 얼굴도 보여 주지 않았다. 유채와의 거리가 그렇게 멀었다.

유채는 창백하게 질린 채 태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을 잊은 듯한 표정이 낯설지 않았다. 지난밤, 술에 취한 채 찾아와 태오 흉내를 내지 말아 달라고 울먹였을 때 보였던 얼굴이었다. 태오는 불현듯 깨달았다.

또다시 유채를 괴롭게 했다.

그때, 쥐 죽은 듯 조용했던 현장에 서 PD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컷!”

***

“우주야, 정말……. 진짜 내가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어?”

태오는 조금 멍한 상태였다.

잔뜩 흥분한 명태의 목소리도 배경 음악처럼 멀게 느껴졌다. 카메라 앞에서 맞춤옷을 입은 게 아니라 분장이 모두 벗겨진 채 진심을 뱉어 내 버렸다. 평생 유능하고 머리 좋은 배우라는 평가를 받아 왔던 태오로서는 자존심까지 상할 일이다. 그러나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흐릿하기만 했다.

“우주 씨. 연기 정말 좋았어요. PD님도 엄청 마음에 드신 것 같아요!”

“와, 정말입니까? 서 PD님이요?”

“그럼요, 실장님. 다들 놀랐잖아요. 중요한 장면인데 NG 한 번 없이 이렇게 끝내 버리시다니, 진짜 대단해요! 원래 이렇게 연기를 잘하셨어요?”

“그게 진짜 아니었거든요? 원래 존모…… 아니, 제 말은, 저도 몰랐잖아요. 야, 우주야. 너 웬일이냐. 언제 이렇게 연습했어?”

FD가 다가와 놀랄 만한 메소드 연기였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주변에서도 태오를 흘긋거리는 시선이 끊이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연기해 버렸지만 결과물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 생에서의 어떤 촬영보다 반응이 더 뜨거웠다. 연기가 아니었다는 걸 잊어버릴 수도 없는 태오만 기분이 가라앉았다. 프로답지 못했다거나,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얗게 질렸던 유채의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채는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 순간의 태오는 성해인도, 신우주도 아니라 윤태오였다는 것을.

‘또 따라 했다고 생각했으려나.’

역시 유채와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오늘 남아 있는 촬영에서는 유채와 함께하는 신이 더 이상 없다. 유채가 눈앞에 있는 것만 아니라면 태오도 감정이 흔들릴 일은 없을 터였다. 태오는 다음 신부터는 적당히 몸을 사려서, 정식 계약을 하자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쥬니퍼와 함께 촬영할 때만 해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쥬니퍼는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충만했지만 역시 발음이 문제였다. 발음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몰입이 깨지는 게 눈에 보였다. 태오도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이 정도 연기라면 서 PD가 굳이 태오를 욕심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음 신부터 찍읍시다. 쥬니퍼 씨는 잠깐 쉬어요.”

“네……. 죄송합니다.”

결국 마음에 드는 장면을 뽑아내지 못한 서 PD는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쥬니퍼가 주눅 든 얼굴로 터덜터덜 뒤로 물러나 대기 의자에 앉았다. 다음은 테니스 팀 코치와 성해인의 대화 신을 찍을 차례다.

코치 역을 맡은 조경희는 실력이 탄탄한 중견 탤런트였다. 그녀는 태오의 연기 실력이나 촬영 순서를 두고 남자 배우들이 소란스럽게 굴 때도 마뜩잖은 얼굴을 했을 뿐 끼어들지 않았다. 태오가 아니라 다른 배우들을 못마땅해하는 듯했다.

카메라 앞에 앉은 서 PD가 큐 사인을 보냈다.

이전까지는 테니스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이준희가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면서, 처음으로 전국 대회 예선전의 출전권을 따낸 직후다. 불안감을 느낀 성해인이 코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었다.

조경희가 안쓰러운 눈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 해인아.”

“코치님도 아시잖아요. 다들 저한테 천재라고 하지만…… 제가 아무것도 아닌 거.”

“네가 왜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말이 어딨어.”

“이 자리에 올 때까지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여기서 버티려면 죽을힘을 다해야 해요. 그런데 준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어요. 걘 이걸 원했던 것도 아니에요. 그냥 재미로 하는 거죠.”

“해인아. 누구나 다 가진 게 달라. 너는 네 길을 가면 돼.”

“그래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유채 앞에 섰을 때나, 연기가 불안정한 쥬니퍼를 신경 쓰면서 조마조마하게 호흡을 맞춰야 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이쪽에서 대사를 치면 능숙하게 받아 주는 상대방이 있다는 것에 흥분이 일었다. 그들을 비추는 카메라와 환하게 내리쪼이는 조명, 숨죽이고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태오는 무대 위에 있었다. 현장의 긴장감을 온몸으로 느꼈다. 손가락 끝까지 저릿했다.

윤태오로 살던 시절, 태오는 연기에 큰 미련이 없었다.

그 당시의 소원은 언제나 일찌감치 은퇴해서 유채와 함께 세계 일주나 다니며 인생을 즐기는 거였다. 태오가 일이 년에 한 작품이라도 출연했던 것은 커리어 욕심 때문이 아니라, 어차피 유채가 늘 바빴기 때문에 세계 일주는 할 수 없었던 탓에 심심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의 태오에게는 모든 게 풍족했다.

수많은 팬에게 넘칠 만큼 사랑받았다. 커리어는 완벽했고, 평생 일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벌어 두었다. 태오의 삶은 언제나 달콤했다. 한 가지 불만이라면, 어린 애인이 항상 바빠서 태오와 놀아 줄 수 없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모든 걸 잃고 나서 알았다.

태오는 제가 가진 그 모든 것들에 미련이 아주 많았다. 이미 가졌기 때문에 몰랐던 것뿐이다. 태오는 팬들이 좋았고, 연기가 즐거웠다. 배우로 살고 싶었다. 예전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휠체어에 앉아서 보냈던 긴 시간 동안, 태오는 아주 단역이라도 다시 한번 맡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코치님. 저는 준희가 무서워요. 모든 걸 다 뺏길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어요…….”

연기하는 이 순간이 좋았다.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컷!”

서 PD가 컷을 외쳤다. 태오는 그 순간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사실은 그리웠다. 드디어 돌아와서 기뻤다.

***

서 PD가 정식 계약서를 내밀었다. 희게 질린 유채의 얼굴이 눈에 밟혔지만, 거부할 권리가 없었던 태오는 침통한 표정으로 사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명태가 펄쩍 뛰면서 환호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는 얼굴로 서 PD에게 연신 허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피디님. 저희 대표님이 걱정 많이 하셨는데 피디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산금 못 갚을까 봐 걱정했나 보다. 태오는 신 대표의 두툼한 얼굴을 떠올리면서 삐딱하게 생각했다. 다른 캐스팅 기회를 기다려 주지 않고 유채와 같은 드라마에 기어코 밀어 넣은 게 못마땅했다. 하지만 태오도 내심으로는 알고 있었다. 우주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좋은 역을 따낼 다른 기회는 아마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피디님.”

어쨌든 손 작가와 서 PD가 좋게 봐 준 덕분에 우주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좋은 역을 따냈다. 불평할 처지도 아니었고, 서 PD에게도 감사할 일이다. 태오는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서 PD는 흠칫 놀라는 듯했다가,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테스트 촬영만 마음에 들면 진행하기로 했던 거니까 감사할 필요 없어요. 우주 씨 연기가 좋았던 거죠.”

“아이고, 피디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더 감사한데요. 우리 우주 연기가 봐 줄 만은 했죠? 앞으로 더 열심히 할 테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명태가 서 PD에게 따라붙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촬영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예전과 달리 악의적인 기세도 한풀 꺾였다. 간혹 뒤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면, 첫날에 촬영 순서 문제로 시비를 걸었던 김홍두나 그 주변의 또래 배우들이 시무룩한 얼굴로 태오를 흘끔거렸다.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먼저 다가오지는 않았다. 태오도 굳이 먼저 알은체할 필요성은 못 느꼈기 때문에, 어색한 대치 상태가 며칠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 엄청 덥네요. 선배님, 이거 한 잔 드세요. 유채 선배님 커피 차가 왔더라고요.”

태오가 순서를 기다리면서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태오 곁에 털썩 주저앉더니 아이스 카페모카를 내밀었다. ‘선배님’이라는 호칭이 의아해서 돌아보았더니, 드라마에서 테니스부 친구로 등장하는 신인이었다. 이름이 뭐더라. 태오는 리딩하던 날 들었던 그의 자기소개를 떠올리려고 애쓰면서 커피 잔을 받았다. 이렇게 달달한 커피는 좋아하지 않지만, 마침 목이 마르던 차였던 터라 반가움이 앞섰다.

“감사합니다.”

“전 이화민이에요.”

제 이름을 당연히 모르리라고 생각하는 듯해서 미안했다. 자주 마주치는 출연진들은 검색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태오는 멋쩍은 얼굴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아, 네. 저는…….”

“알아요. 요즘 촬영장에서 제일 핫한 분이신데 당연히 알죠.”

“네…… 네?”

아무 생각 없이 대꾸하다가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십 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이 눈을 빛내면서 태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까 아침 촬영하실 때 연기 너무 좋았어요. 전 첫 촬영 날에는 다른 일정 가느라 못 왔거든요. 근데 소문이 너무 엄청나게 나서 계속 궁금했어요.”

“무슨 소문이요?”

“아이, 모르세요? 그날 연기 진짜 장난 아니었다고 다들 난리 났었는데요.”

“다들이요?”

‘다들’이 누구지, 생각하는 사이에 화민이 시원하게 웃으면서 누군가를 향해 손짓했다. 무심코 돌아보았더니, 낯익은 얼굴들이 쭈뼛거리면서 다가와 태오에게 저마다 하나씩 커피 잔을 내밀었다. 빈손이 하나밖에 없어서 태오는 난처해졌다.

게다가 그중에 한 명은 김홍두였다.

태오는 의아한 얼굴로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김홍두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화민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 뭐 해, 형. 빨리 연습한 거 얘기해.”

“아, 씨. 그런 얘길 하면 어떡하냐…….”

“징징댈 때는 언제고 입만 뻥긋거리냐? 빨리 말해. 선배님 당황하시겠다.”

“어…….”

김홍두가 머뭇거리면서 태오의 빈손에 커피 잔을 쥐여 주었다. 하필이면 또 캐러멜 마키아토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없나. 아쉬운 눈길이 저절로 먼발치에 있는 커피 차를 향했다. 환하게 웃는 유채의 얼굴로 장식된 커피 차가 보였다.

‘이런 커피는 우리 유채가 좋아하는데.’

그래도 가져다준 커피를 거절할 수는 없어서, 김홍두가 건네준 커피 잔의 빨대를 쪽 빨았다. 혀끝이 얼얼할 만큼 단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태오가 누그러졌다고 생각했는지, 안절부절못하는 듯했던 김홍두의 표정도 슬쩍 펴졌다.

“저기…… 요전에는 미…….”

“네? 뭐라고요?”

덩치답지 않게 웅얼거리는 바람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태오가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김홍두는 뒷머리를 탁탁 털어 내더니 소리를 팩 질렀다.

“아, 저번에는 미안했다고!”

“네?”

“……요. 미안했습니다.”

“어…….”

김홍두는 민망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면서 태오의 눈치를 보았다. 주변을 에워쌌던 배우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태면서 거들었다.

“저도 미안해요. 리딩날 기분 상하셨죠.”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연기도 진짜 좋았어요. 어제도 좋았지만…….”

“그저께도…… 그그저께도…….”

“형, 그만해요. 사과나 제대로 하라고요.”

“하고 있잖냐, 사과…… 아니 근데, 진짜 대단하세요.”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떠들어 대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태오는 잠시 당황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결국 웃어 버렸다.

김홍두나 다른 배우들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촬영에 합류할 때마다 소란을 일으키고, 연기도 줄곧 혹평받아 왔던 우주가 인상 깊은 역을 맡아서 들어왔으니 불쾌했을 것이다. 대놓고 시비를 걸어왔을 때는 태오도 언짢았지만, 눈치 보면서 사과하는 태도가 귀엽기도 했다.

어쨌든 모두들 실제 태오보다는 한참 어린 후배들일 터였다. 굳이 계속 화내고 싶지는 않았다. 태오는 씩 웃으면서 양손에 든 커피 잔을 들어 보였다.

“고마워요. 근데 가져다주신 거 다 마시려면 배 터지겠어요. 다 같이 마셔요.”

“오……. 형님, 그렇게 웃지 마세요. 존나 잘…… 너무 잘생기셔서 반하겠습니다.”

이준희의 친구 역할을 맡은 배우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화민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언제 봤다고 형님인데? 친한 척하냐?”

“이제부터 친해지면 되지. 그쵸, 형님?”

“네? 아, 네. 그렇죠.”

“근데 주형이가 동생이냐? 형님보다 열 살은 늙어 보이는데.”

“아 씨, 홍두 형도 마찬가지거든요?”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김홍두가 끼어들자 주형이라고 불린 배우가 투덜거렸다.

보기보다 다들 나이가 어렸다. 예상보다 더 까마득한 동생들인 것 같아서, 태오는 마음이 완전히 풀려 버렸다. 입꼬리가 무심코 밀려 올라갔다.

“다들 말 편하게 하세요. 앞으로 한참 볼 텐데요.”

“진짜요? 그럼 봐주시는 겁니까?”

“봐주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아이, 그래도요.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늙어 보이긴 해도 철이 없거든요.”

김홍두가 반색하면서 태오의 옆자리에 냉큼 앉았다. 가끔 욱하긴 해도, 생각보다 서글서글하고 밝은 성격인 것 같았다. 게다가 보기보다 수다쟁이였다.

주인공인 유채나 쥬니퍼, 비중 있는 조역인 태오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배우는 대기 시간이 길었다. 한창 더운 여름이었고, 드라마 특성상 테니스장을 비롯한 야외 촬영이 많았기 때문에 다들 견디기가 힘들 터였다. 촬영 순서에 예민해질 만하다고 생각하면서 태오는 그들의 수다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엇비슷한 또래여서 그런지 다들 벌써 친하게 지내는 듯했다.

김홍두가 신나게 떠들어 댔다.

“사실 제가 성해인 역 하고 싶어서 피디님, 작가님이랑 미팅도 하고, 결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 된 거였거든요.”

“아, 그랬어요?”

태오는 적당히 대꾸해 주면서 캐러멜 마키아토를 다시 한번 쭉 빨았다. 너무 달아서 그런지 마실수록 갈증만 더 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밀렸다는 얘기 듣고 엄청 열받았어요. 근데 연기하시는 거 보고 완전 놀라 가지고, 밀릴 만하네, 했다니까요? 실력으로 밀린 거더라고요. 그러면 할 수 없는 거지 뭐.”

“아, 형. 무슨 소리야. 이미 얼굴에서부터 밀렸지. 실력까진 갈 것도 없어.”

화민이 끼어들어서 혀를 찼다. 김홍두는 화민을 향해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오전에 있었던 태오의 촬영으로 화제가 넘어갔다.

첫날 진행했던 조경희와의 신을 손 작가가 조금 손보았다고 추가로 찍은 것이었다. 기존 대본보다 분량이 서너 배 가까이 늘어나 버린 탓에 태오도 약간 고전했었다. 주형이 감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본 어젯밤에 받고 오늘 새벽에 나오신 거 아니에요? 저는 대사 다 외우지도 못했을 거 같아요. 진짜 길던데.”

“근데도 어떻게 형님은 NG를 한 번도 안 냅니까? 질투 나게.”

“맞아요, 선배님 진짜 대단했어요. 서 PD님한테 한 번에 오케이 받는 분 처음 봤잖아요. 지난번에도 서 PD님이랑 작업했거든요. 그때 정말, 와, 죽을 뻔했는데.”

“아까도 서 PD님이 형님 칭찬하셨습니다. 그러시는 것도 첨 봤다니까요?”

“피디님이 칭찬하셨어요? 언제?”

이 얘기는 태오도 조금 궁금했다. 현장으로 돌아온 이후로, 촬영은 줄곧 순조롭고 즐거웠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3화나 4화에서 하차하는 조연으로 알고 들어왔는데, 무슨 일인지 요즘 들어 촬영 분량이 자꾸 늘어나서 모니터링할 시간도 제대로 없었다. 오늘 저녁에도 예정에 없던 촬영이 생겨나서 아침에 받은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던 차였다.

줄곧 말없이 웃고만 있던 태오가 모처럼 관심을 보이자, 김홍두의 목소리가 한참 더 커졌다.

“못 들으셨습니까? 아까 우주 씨 찍고 나서 카메라 모니터링하시면서, ‘좀 하네.’ 그러시던데?”

“아……. 그게 칭찬이에요?”

“아니 형님, 엄청난 칭찬이죠. 저는 서 PD님한테 제대로 눈길 한 번 못 받아 봤습니다.”

“맞아요, 선배님. 피디님 진짜 무서워요.”

“피디님이 이렇게 눈 치켜뜨면서, 주형 씨, 언제까지 기다려야 제대로 할 건가요? 하면 오싹하다니까요.”

“난 저번에 열심히 하겠습니다, 했더니 열심히 하지 말고 잘하세요, 이러셨어요. 완전 무서워.”

“형님은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연기를 그렇게 합니까?”

“하하…….”

서 PD는 무뚝뚝한 편이었지만 태오에게는 줄곧 친절했고, 예전 생에서도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태오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태오는 난처한 듯 웃으면서 촬영장을 바라보았다. 유채와 쥬니퍼가 한창 촬영 중이었다. 쥬니퍼가 NG를 여러 번 낸 탓에 장면이 제대로 넘어가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유채는 짜증 난 기색도 없이, 카메라가 켜질 때마다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어 나갔다.

‘정말 많이 늘었네…….’

여름 햇볕 아래 환하게 웃는 유채의 얼굴이 그림처럼 예뻐서 눈이 부셨다. 눈앞에서 바라보는데도 그 웃음이 그리워졌다. 태오는 조금 울적해져서, 손에 든 캐러멜 마키아토를 단번에 마셔 버렸다.

캐러멜 마키아토는 너무 달았다. 우울한 기분에 한 잔을 비워 버렸더니 입 안에서 단맛이 가시지 않았다. 태오는 한창 열 올리며 떠들고 있는 다른 배우들을 뒤로하고 커피 차로 향했다. 아메리카노로 입가심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뭐로 드릴까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태오는 제 커피를 주문하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슬쩍 돌아보았더니 유채도 슬슬 촬영이 끝나 가는 분위기였다. 예정보다 촬영이 길어진 탓인지 유채의 안색이 창백한 게 마음에 걸렸다. 태오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캐러멜 마키아토도 주세요. 시럽 많이 넣어 주시고요.”

가져다준다고 해도 받기나 할지 모르겠다. 유채에게 챙겨 주려다가 고스란히 남아 버린 도시락들을 떠올리면서, 태오는 조금 씁쓸해졌다.

커피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돌아설 때쯤 유채와 쥬니퍼의 촬영분이 끝났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유채를 찾았다. 다른 배우들보다 불쑥 큰 키가 눈에 안 띌 리도 없는데 그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통 보이지 않았다.

휴식 시간이었기 때문에 촬영장은 조용했다. 김홍두와 다른 배우들도 각자 밴으로 쉬러 간 듯했다. 유채도 밴에 있을 것 같아 방향을 바꾸는데 어디선가 작게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무심코 두리번거렸다가, 촬영장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쥬니퍼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태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우는 애라니. 태오는 예전부터 어린애들에게 약했고,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쥬니퍼는 태오가 보기에 글램핑에서 만났던 은형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참 어린 배우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커피 잔을 쥔 손안에 저절로 땀이 배었다.

쥬니퍼도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쳐 주는 걸 원할 것 같았다. 결론을 내린 태오가 자연스러운 척 등을 돌리려고 했을 때였다.

“저기, 서, 선배님!”

“…….”

쥬니퍼의 선배님이 누굴까?

태오는 간절한 기분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텅 빈 촬영장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쥬니퍼의 ‘선배님’이 보이지 않았다. 태오는 쭈뼛거리면서 쥬니퍼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억지로 당겨진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누구…… 혹시 저요?”

“네에, 우쥬, 선배님.”

쥬니퍼가 훌쩍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태오는 어쩔 수 없이 쥬니퍼를 향해 삐걱삐걱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빠르게 생각하느라 머리에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았다.

다행히 쥬니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침에, 흑, 촬영하신 거, 봤어요. 너무 멋있, 흑, 고, 연기 넘 잘하셔서, 부러워요.”

“네? 아, 네…….”

쥬니퍼와 사적으로 대화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태오는 조금 놀랐다. 정해진 대사를 외워서 말할 때보다, 훌쩍거리면서 뱉어 내는 발음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연기할 때만 해도 한국어 실력이 케빈과 비슷하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이었다.

“어떠케, 글케 잘, 하세요? 저도 잘하고, 흐흑, 싶은데……. 너무 모, 못해서, 흑……. 그래서 전 원래 이거, 거, 거절하고 싶었는데, 발음 교정, 더 하고, 연기 수업도 더, 흑, 듣고 싶었는데…… 대표님이, 흐윽, 화냈, 어요.”

“아…….”

사정은 달랐지만 대표가 밀어붙여서 온 처지는 똑같아서 공감이 됐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도 그래요. 회사가 진행하는 일을 마음대로 거절할 입장은 아니라서.”

“그, 근데 우주 선배님은, 존잘이잖아요. 이렇게 잘하시는지 모, 흐흑, 몰랐어요.”

“하하…….”

적당히 해서 자연스럽게 잘릴 계획이었다가 엉겁결에 계약이 확정되어 버린 태오가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저는, 흑,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 모르겠어요…….”

눈이 빨개져서 훌쩍훌쩍 우는 쥬니퍼가 안쓰러웠다. 처음 연기를 시작할 무렵, 혼자서 힘들어하곤 했던 유채가 떠올라서 더 그랬다.

쥬니퍼는 쉬는 시간이면 언제나 구석진 의자에 앉아서 대본을 봤다. 함께 촬영하는 신을 준비할 때도, 너덜너덜해진 대본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쥬니퍼가 성실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았다.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한국어 실력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도 카메라만 앞에 두면 발음이 어색해지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을 터였다.

“제가 이런 말 하는 건 조금 주제넘은 것 같긴 하지만…….”

태오는 연기 수업을 오래 듣지도 않았고, 연기를 가르쳐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제가 하는 말이 적절한 피드백일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모른 척하기에는 쥬니퍼의 눈빛이 너무 간절했다. 이대로 도망치면 태오의 뒤통수를 때려서라도 조언을 얻어 낼 기세였다. 태오는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엔 긴장하시는 게 문제인 것 같거든요. 평소에는 발음 괜찮으신데, 너무 긴장해서 원래 습관이 더 잘 나와 버리는 것 같아요.”

“흐, 흑, 네에…….”

당연한 얘기다. 쥬니퍼에게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연기하라고 조언해 준 사람도 한둘이 아닐 것이다. 뻔한 얘기를 늘어놓는 것 같아서 태오는 조금 머쓱해졌다. 그래도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불쑥 말을 꺼냈다.

“수학도 암기 과목인 거 알아요?”

“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한 대꾸가 돌아왔다. 태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해가 안 가면 수학도 풀이를 통째로 외우면 되거든요.”

물론 태오는 수학 문제 풀이를 외워 보기는커녕 수학 문제를 제대로 풀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이전 생에서 공부 잘하는 자녀를 둔 중견 배우가 자랑하면서 늘어놓았던 얘기가 인상 깊어서 기억해 두었다. 유채는 그때 한창 연기 연습을 하고 있었고, 감정 표현이 잘되지 않아 힘들어했다. 태오는 감정을 외워 보라고 얘기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채는 태오에게 한 번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결국 없었다.

“세상에 외워서 못 할 거 하나도 없다고 그러더라고요. 발음도 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딕션 신경 써서 녹음하고 다시 들으면서 발음이나 억양을 그대로 외운다고 생각하면, 카메라 앞에서 긴장해도 몸이 외운 건 저절로 나오지 않을까요?”

실제로 태오는 한국계 2세 연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토종 한국인답게 태오도 영어에 울렁증이 있었는데, 미국인 친구에게 대사를 읽어 달라고 부탁해서 녹음해 온 음성 파일을 그대로 베껴 내듯 외웠다. 여전히 영어는 입도 뻥긋 못 했지만, 대사만큼은 발음을 트집 잡히지 않았고 연기도 호평을 받았다.

“저, 정말요? 그러면 돼요?”

쥬니퍼는 눈물을 뚝 그친 채 솔깃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돼요’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태오는 말문이 막혔다. 쥬니퍼는 발음뿐만이 아니라 감정이나 표정 연기도 아직 어색한 편이다. 그래도 늘 열정이 넘치고 성실해 보였다.

태오는 잠시 말을 고른 끝에 부드럽게 대꾸했다.

“연기도 발음에 자신감만 붙으면 훨씬 수월할 거예요.”

“네…… 네! 감사합니다!”

쥬니퍼는 허리를 꾸벅 숙이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아이돌답게 기합이 바짝 든 모습이었다. 태오는 저도 아이돌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고, 마주 인사를 해야 하나 싶어서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새 고개를 든 쥬니퍼가 큰 소리로 웃었다.

“아이, 그러지 마세요, 선배님! 오늘 진짜 감사합니다!”

“어, 지금 한국어 완전 잘하네요.”

“아 진짜요? 감사합니다!”

혼자서 오래 울었는지 쥬니퍼는 뺨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래도 기운차게 구는 게 반가워서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주었다. 커피를 받아 드는 쥬니퍼의 표정이 벌써 씩씩했다. 회복이 빠른 모양이었다.

밴으로 향하려고 돌아서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유채가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옅은 색 머리카락이 단정한 이마 위에서 자연스럽게 흐트러졌다.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가 햇볕을 받아 부드럽게 빛났다.

도톰한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달싹거렸다.

“이제 스캔들까지 내려고 그러냐?”

“응?”

“가지가지 하네.”

가시가 잔뜩 돋친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태오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유채가 시비를 걸어오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태오는 너무 반가워서 무심코 활짝 웃어 버렸다.

“유채, 이제 좀 괜찮아?”

“뭐?”

“살아난 거 보니까 좋다.”

“……돌았냐?”

급기야 유채의 눈빛이 형형하게 번쩍거렸다. 그새 생기가 도는 것 같아서 태오는 기분 좋은 얼굴로 유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유채의 얼굴이 서서히 경악하는 표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줄곧 유채 때문에 초조했던 태오는 한결 느긋해진 채, 그의 손에 캐러멜 마키아토를 쥐여 주었다.

“계속 촬영하느라 피곤했지? 이거 마시고 해.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

커피를 팽개치거나 버럭거리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고 전처럼 인형 같은 얼굴로 굳어 버린 것도 아니었다. 유채는 가만히 태오가 준 커피를 노려보았다. 어쩔 줄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태오는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들뜬 기분으로 유채를 지나치느라, 어떻게 알았냐고 혼잣말하듯 작게 묻는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

촬영이 진행될수록 쥬니퍼의 발음 문제는 부쩍 나아지는 듯했다. 태오와 나누었던 대화가 얼마나 도움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태오는 내심, 쥬니퍼가 서 PD와 가까워지면서 카메라 앞에서 더 이상 얼어붙지 않게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마음에 담아 두는 기색 없이 진지하게 듣는 쥬니퍼가 기꺼웠는지, 촬영을 마치고 나면 서 PD가 쥬니퍼와 함께 촬영분을 모니터링하면서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자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정신 차려 보니 태오도 그 무리 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3화를 촬영할 무렵이었다.

“성해인 표정이 진짜 좋아요!”

“애틋한 감정을 잘 살렸지?”

“네, 네! 김소현 보는 눈빛이요, 꿀 떨어져요!”

“쥬니퍼,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그럼요, 저 한국말 잘해요! 그쵸, 우주 선배님!”

“네? 어, 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쥬니퍼는 태오를 꽤 친근하게 여기는 듯했다. 편하게 구는 것은 서 PD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면 윤태오였던 시절에도 그랬다. 정신 차려 보니 당시 조연출이었던 서 PD와 절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서 PD가 어딜 가든 태오를 끼고 다니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촬영장 한쪽 구석에 모여 앉은 김홍두와 그 무리들이 아까부터 서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태오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했지만, 커다란 덩치들을 모른 척하기가 쉽지 않았다.

-형님이랑 먼저 친한 건 우리인데 왜 서 PD님이랑 쥬니퍼가 뺏어 갑니까?

오늘 아침, 며칠간 줄곧 뚱했던 홍두가 기어코 태오에게 쫓아와서 따지고 들었다. 주형과 화민이 양옆에서 말리는 시늉을 했지만, 서운한 표정인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태오는 제 앞에 나란히 선 세 사람의 커다란 덩치를 어이가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누가 누굴 뺏어 가? 내가 물건이야?

-아이, 그런 게 아니잖아요. 우리랑은 안 놀아 주시니까 그렇죠!

-너희가 애기들이야? 내가 놀아 줘야 돼?

-애기는 아니지만 놀아 주시면 좋은데.

헤실헤실하고 웃는 얼굴들이 투박했지만 귀여웠다. 태오는 괜히 몰려와서 떼쓰던 홍두와 몇몇을 떠올리면서 픽 웃었다. 성해인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서 PD와 쥬니퍼가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얼마 전부터 줄곧 마음에 걸렸던 일이다. 태오는 설마 하면서 조심스럽게 서 PD를 불렀다.

“저기, 피디님.”

“응. 왜?”

서 PD가 친절하게 말을 받았다. 촬영 초기였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태오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래도 알아 두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안 죽나요? 벌써 3화인데요.”

“음…….”

서 PD가 찜찜한 목소리를 내면서 시선을 피했다.

시놉시스상 성해인은 초반부에 죽는 역할이었다.

전국 대회 예선전 첫날, 함께 경기장으로 향하는 성해인과 이준희를 음주 운전 차량이 덮친다. 성해인은 무심코 이준희를 밀어내지만 자신은 미처 차체를 피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이후 이준희에게 있어서 삶의 무게는 더 이상 가볍지 않게 된다. 얼마지 않아 김소현은 이준희에게 마음을 고백하지만, 김소현을 향한 성해인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준희는 그녀에게 다가서지 못한 채 운동에 매진한다. 드라마 중반부는 테니스부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이준희가 국내 대회에서 활약하면서, 성해인에 대한 죄책감을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다룬다.

그리고 국내 대회에서 우승한 이준희가 그랑프리 출전권을 따내면서, 김소현에게 함께 가 달라고 손을 내미는 모습이 엔딩 장면이 될 예정이었다.

내용이 그렇게 전개되려면 3화, 늦어도 4화에서는 성해인이 사망해야 한다. 그런데 태오가 받아 본 4화 대본에서는 성해인이 여전히 팔팔하게 살아 있었다. 마지막 장면까지 훑어보았지만, 5화에서 사망할 것이라는 암시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태오는 수상쩍은 기분이 들었다.

“5화에서도 안 죽을 분위기던데요?”

“……그렇지?”

“그럼 6화에서 죽나요?”

“글쎄?”

“……피디님?”

수상한 점은 또 있었다. 쥬니퍼가 요즘 생기발랄해졌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쥬니퍼와 유채가 함께하는 신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 3화, 4화에서는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쥬니퍼의 분량도 함께 줄었다.

보통은 싫어하기 마련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연습량이 부족한 것을 부담스러워했던 쥬니퍼는 남는 시간을 연습에 투자할 수 있게 되어 반가운 눈치였다. 쥬니퍼의 공백을 채운 등장인물은 성해인이었다. 정확히는 성해인과 이준희가 단둘이 등장하는 장면이 늘었다.

태오는 찜찜한 기분으로 서 PD를 바라보았다. 손 작가에게 들은 이야기가 분명히 있을 터였다. 서 PD는 늘 그렇듯 무심하고 서늘한 얼굴로 태오를 바라보다가, 그냥 넘어가기는 껄끄러웠는지 갑작스러운 말을 꺼냈다.

“나도 뒤 대본은 못 받아 봐서 확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네?”

“코드 하나가 추가되었다는 얘기는 들었어.”

“뭐가요?”

태오가 어리둥절해져서 되물었다. 목을 가다듬는 서 PD 옆에서 쥬니퍼가 생글거렸다.

그리고 서 PD가 툭, 말했다.

“브로맨스.”

“…….”

아무래도 성해인은 5화에서도 안 죽을 모양이었다.

***

유일하게 지적을 많이 받았던 쥬니퍼의 연기가 나아지면서 촬영은 한동안 순조로웠다. 그러나 얼마 후 문제가 생겼다. 예상외로 엉뚱한 일이었기 때문에 배우들은 물론 서 PD까지 당황했다. 줄곧 안정적이었던 유채의 연기가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컷.”

서 PD가 피곤한 얼굴로 컷을 외친 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리허설하는 게 벌써 여러 번이었다. 이러다가 오늘 중에 본 촬영에 들어갈 수는 있을지 우려될 정도다. 첫 영화 촬영이었던 ‘제왕’ 시절에도 유채는 이렇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태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채를 응시했다.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묵묵히 바닥을 내려다보는 인형 같은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우주, 유채랑 싸웠니?”

미간을 찌푸린 채 카메라 모니터링을 하던 서 PD가 태오를 향해 불쑥 물었다. 가만히 있다가 끌려 나온 태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가리켰다.

“예? 저요?”

싸우기는커녕 지난 몇 주간 유채와는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다. 쥬니퍼와 잠깐 얘기하는 모습을 보았던 유채가 스캔들을 낼 생각이냐고 시비를 걸어왔던 게 마지막이다. 그 후로는 같은 밴을 타고 촬영장과 숙소를 오가면서도 대화 한번 없었다. 유채는 표정 없는 얼굴로 태오를 피하기만 했다. 그리고 이제는 연기까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태오의 하차가 미뤄진 이후 이준희와 성해인이 함께하는 신이 부쩍 늘었다. 언제 사이가 악화되고 성해인이 사망하려고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성해인의 사망 시점에 대해서 서 PD는 도무지 뚜렷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이대로 안 죽고 부활해 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까지 들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유채도 태오의 하차가 늦어진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태오는 유채의 상태가 불안정해진 이유가 그것일까 봐 불안했다.

태오는 조금 시무룩해져서 우물거리며 대꾸했다.

“안 싸웠는데요……. 저희가 싸울 일이 어딨겠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렇지?”

“분위기요?”

서 PD는 유채의 연기나 감정선을 지적하는 대신 분위기를 언급했다.

유채가 연기하는 이준희는 누구에게나 다정했지만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벽이 있는 캐릭터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온 성해인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성해인을 대하는 이준희의 태도가 조금씩 변한다. 첫 계기는 성해인이 이준희에 대한 자격지심을 인정하면서 그에게 매달렸을 때였다.

상대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같은 눈으로 그 상대를 볼 수 없다. 더는 여유롭게 장난치듯 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태오는 그것을 열여섯 살의 유채가 딸꾹질 같은 고백을 토해 냈을 때 알았다.

다만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다. 지금 리허설 중인 성해인의 교통사고 장면이다.

정확히는, 이준희의 눈앞에서 성해인이 교통사고를 당할 뻔했지만 기적적으로 전혀 다치지 않고 살아남는 신이었다. 태오는 성해인이 사망하는 교통사고가 설마 이것으로 대체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는데, 서 PD에게 물어도 대본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면서 말을 아꼈다. 그러나 태오가 자연스럽게 퇴장할 수 있는 신을 없애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얼마 전, 제작진 측에서 명태를 통해 4, 5회 정도 계약 연장을 제안해 왔다. 그러나 태오는 연장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결정을 번복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태오라도 아쉽지 않을 리 없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자리였다. 카메라 앞에 설 때면 정말로 ‘윤태오’가 된 것 같았다. 아니, 윤태오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남들이 태오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건, 무대 위에서 태오는 배역 그 자체이자 자기 자신이었다. 가까스로 되찾은 자리를 놓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이유였다면 태오도 이 무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채가 이유가 된다면, 태오는 어떤 무대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태오는 다른 기회를 찾으면 되었다. 반드시 이 배역, 이 순간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조금 천천히 돌아갈 뿐이다. 지난 생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유채보다 자신이 앞섰고, 사고가 난 일에 대해 유채를 원망했고, 날을 세워서 몰아붙였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손 작가나 서 PD가 성해인을 하차시키지 않을 생각이라면 태오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고민 중일 테니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명태도 태오가 연장을 거절했을 때 크게 아쉬워했다. 벌써 서 PD 편으로 홀랑 넘어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태오가 하차를 원하는 이유는 오로지 유채 때문이었으니, 하차를 고집하는 것은 명태나 서 PD가 보기에 괜한 심통일 것이다. 그들이 모두 한편이 되어 태오를 살살 달래기 위해 틈을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뭐야. 설마 결정 이미 다 났고 나한테 말만 안 해 주는 거 아냐?’

태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서 PD를 흘끗거렸다. 그러나 그 냉담한 얼굴에서 표정을 읽어 내기는 쉽지 않았다. 서 PD는 태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카메라를 다시 돌려 보면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점심시간 다 되었으니 식사하고 합시다. 그리고 유채와 우주는 잠깐 나 좀 봐요.”

교통사고 신은 장비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충분한 리허설을 거친 후 본 촬영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리허설부터 잡음이 심하다면, 지지부진하게 촬영을 이어 가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서 PD의 신호에 따라 촬영 팀은 이내 뿔뿔이 흩어졌다. 태오는 벌받는 학생 같은 표정으로, 유채와 함께 서 PD 앞에 나란히 섰다.

서 PD가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이만 퇴근해. 일정이 급하지는 않으니 이 신은 오늘 안 찍어도 돼. 장비 예약도 미루면 되니까.”

“예?”

“지금 말씀이십니까?”

반문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태오는 몰라도, 유채까지 촬영에서 뺄 정도면 서 PD의 심사가 단단히 틀어졌다는 뜻이다. 주인공 촬영을 멈춘 채 진행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조연들끼리의 신을 몰아서 찍는다고 해도, 오늘 촬영은 예정보다 훨씬 일찍 끝날 것이다.

태오는 슬쩍 유채를 곁눈질했다. 눈을 커다랗게 뜬 유채의 뺨이 창백하게 질렸다. 객관적으로 봐도 태오의 연기는 트집 잡을 여지가 없었고, 촬영이 지연된 것은 유채 탓인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채는 태연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 보고 싶었지만 태오도 할 말이 없었다.

“저, 피디님. 조금만 시간 주시면…….”

그래도 머뭇머뭇 말을 꺼냈을 때, 서 PD가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연기가 나쁘다는 게 아니야. 기술적으로는 그 정도면 충분해. 상대역이 우주가 아니었다면 나도 이쯤에서 오케이했을 거야. 하지만 우주 쪽에서 이 정도로 받아 주면 너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유채야.”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서 PD는 말을 고르는 듯 눈썹을 좁혔다. 미간에 세로금이 갔다. 유채는 새하얗게 질린 해쓱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태오는 심장이 조여들다 못해 쩍 갈라질 것 같았다.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라시냐는, 버릇도 예의도 없는 대꾸가 목 끝까지 차올라서 꾹 눌러야 했다. 사실 태오가 보기에도 서 PD의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었다.

한참 더 고민하던 서 PD가 눈을 들었다. 유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러나 불안한 눈빛으로도 서 PD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채 없이 촬영을 계속할 수는 없으니 오늘까지만 시간 줄게. 너희 둘이 개인 시간을 좀 갖는 게 좋겠다. 연습 안 하고 그냥 시간만 같이 보내도 상관없으니까 오늘까지는 딱 붙어 있어. 내일 아침 일찍 리허설하고 오전에 촬영 들어가자.”

이번에는 유채의 눈썹이 팍 구겨졌다. 처연하게 흔들리던 눈빛이 순식간에 불량해졌다. 이번에 태오는 다른 방향으로 불안해졌다.

삐뚜름한 목소리가 통통한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얘랑…… 저랑요?”

“그래.”

“딱 붙어서요?”

“응.”

“오늘 하루 종일요?”

“그렇다니까.”

조금 전까지 톡 건드리면 눈물이라도 툭 흘릴 것 같았던 청순한 얼굴이 와락 찌푸려지면서 뺨이 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찐빵이 반가워서 태오는 저도 모르게 유채의 볼을 향해 손을 뻗다가 겨우 멈췄다.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유채를 바라보고 있던 서 PD의 눈빛에 흥미로운 기색이 스쳤다. 서 PD가 고개를 기울이며 한쪽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아까보다는 좀 사람 같네, 유채야. 차라리 그런 얼굴로 찍어. 그렇게 눈에 불 켜고 보면 이준희가 성해인한테 애증이라도 있는 줄 알겠지.”

“…….”

유채는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핏발이 선 눈가가 불그스름했다. 서 PD가 차분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덧붙였다

“이준희는 같이 자라 온 성해인에게도 벽이 높았어. 그런데 성해인이 진심으로 부딪혀 오면서 틈이 생겼지. 처음으로 곁을 내준 상대가 눈앞에서 죽을 뻔한 거야. 버스가 성해인을 덮쳐서 지나간 순간에는 정말로 죽은 줄 알았어.”

“……네.”

유채가 볼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심통 난 어린애 같은 느낌에 태오는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서 PD의 입가에도 슬쩍 웃음기가 맺혔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괜히 태오를 노려보아서, 태오는 머쓱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이준희가 그렇게 죽은 줄 알았던 성해인이 멀쩡히 살아난 걸 마주 보는데 그런 얼굴이면 어떡해. 너 연기 잘하는 거? 알지. 지금도 연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 그런데.”

서 PD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침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말하다 보니 슬슬 열이 오르는 표정이었다. 태오는 거들 수도 없고 말릴 수도 없어서 가만히 선 채 눈만 굴렸다. 창백하게 질렸던 유채의 뺨이 이번에는 붉게 달아올랐다. 서 PD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차라리 아무 감정 없으면 발연기구나 하고 말겠어. 그런데 이건 뭐,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우주 볼 때마다 그렇게 눈알이 텅 비어서 귀신 들린 사람처럼 동태눈깔을 하면 어떡해? 전설의 고향 현장이야, 여기가? 여름 시즌 다 끝났는데 우리 호러 드라마 찍어?”

“…….”

유채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할 말을 잃은 동그란 뒤통수가 가여워서 태오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렇게 심하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눈빛으로 항의했더니 서 PD가 눈을 부릅떴다. 치켜뜬 눈매가 너무 무서워서 태오도 유채를 따라 고개를 푹 숙였다. 서 PD가 짧게 혀를 찼다.

“가 봐. 무슨 일이 있었든 오늘 내로 풀고 와.”

“피디님, 저희 진짜로 안 싸웠는…….”

“신우주. 얼른 안 가?”

“넵.”

반항할 틈도 없이 바로 꼬리를 내린 태오가 유채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대로 유채를 끌고 촬영장 밖으로 후다닥 빠져나왔다.

***

태오와 유채를 실은 밴은 AMJ 엔터 건물 앞에 닿았다. 서 PD는 연습할 필요 없이 시간만 함께 보내고 오라고 했지만, 연습이 아니라면 유채와 둘이서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지금의 태오와 유채 사이는 고작 그 정도였다.

“점심부터 먹고 하자. 카페테리아에서 먹을래? 아니면 아까 도시락 받아 놓은 것도 있는데.”

밴에서 내리는 유채의 뒤통수에 대고 붙임성 있게 굴었더니 돌아온 눈길이 싸늘했다. 유채는 날 선 눈초리로 태오를 흘긋 노려보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여전히 만두처럼 퉁퉁 부어오른 뺨이 볼록하게 곡선을 그렸다.

“너나 많이 처먹어.”

조금 살아났나 싶으면 바로 말버릇에서 티 났다. 최근에는 줄곧 풀 죽어 있더니, 서 PD에게 지적받은 충격이 심했나 보다. 유채는 전부터 승부욕이 강해서 지는 걸 싫어했다. 더구나 그렇게 싫어하는 ‘우주’의 발목을 잡았다는 평을 들었으니 어떤 기분일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인지 유채가 어떻게 반응하든 전처럼 발끈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갓 쪄 낸 찐빵처럼 동그랗게 부은 뺨이 귀여워서 다른 생각이 안 들기도 했다. 태오는 씩 웃으면서 부드럽게 대꾸했다.

“또 그런다. 말 예쁘게 해야지, 유채야.”

“내가? 너한테? 왜? 돌았냐?”

“싫으면 피디님한테 이거 못 하겠다고 말씀드릴까?”

“…….”

“그냥 적당히 촬영하자고 하자. 아까 연기도 나쁘진 않았어. 그 정도면 됐지 뭐, 잘할 때가 있으면 못할 때도 있는 거고.”

슬슬 건드리면 유채는 넘어올 수밖에 없다. 유채 자존심에, 도저히 못 하겠다고 서 PD 앞에서 포기 선언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태오는 입을 다물고 유채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눈썹을 잔뜩 구긴 채 말없이 바닥만 노려보던 유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다고. 해. 붙어 있어. 같이 있으면 되잖아. 어차피 오늘만 버티면 되니까, 씨…….”

“말도 예쁘게 할 거야?”

……발. 하고 나오려던 욕설이 통통한 입술 안으로 쏙 들어갔다. 유채는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태오는 나지막하게 웃으면서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채가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났다. 연신 투덜거리면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밥은 너랑 같이 안 먹어. 체할 일 있어?”

“그래, 그래. 그럼 밥 따로 먹고 연습실에서 만나. 도시락 두 개 챙겨 놨는데 하나 줘?”

“굶고 다니냐? 돼지야? 왜 도시락을 두 개나 받아?”

“…….”

말 예쁘게 하겠다고 대답한 지 10초도 안 되었다. 태오는 너 주려고 그런 거잖아, 하는 대꾸를 입 안으로 삼키면서 한숨을 쉬었다. 일부러 챙겼다고 하면 더 안 받으려고 들 게 뻔했다.

“아깐 배고팠어. 이거 먹든지, 카페테리아 가서 먹든지 하고 좀 이따가 연습실에서 봐. 나 간다.”

뒤따르던 걸음 소리가 뚝 끊겼다. 태오는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유채가 미간을 찡그린 채 제 손에 든 도시락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주간 보았던 인형 같은 얼굴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

태오는 연습실에 도착해 도시락을 열었다.

그새 차게 식은 데다 오늘따라 반찬도 별로였던 탓에 맛이 별로였다. 그러나 연기에 몰입하는 것은 체력 소모가 크다. 먹어 두지 않으면 오후를 버텨 내기 힘들 것이다. 저녁에는 유채를 적당히 달래서 고기라도 먹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태오는 천천히 도시락을 비웠다. 다만 유채가 순순히 따라올 거라는 기대는 들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시무룩해졌다.

소화시킬 겸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푼 뒤에도 유채는 오지 않았다. 이미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외운 대본을 몇 번 더 뒤적이는 동안 지루하게 시간이 갔다. 어디 도망간 건 아닌지 그제야 의심이 들었다. 시계를 노려보면서 조금 더 고민한 끝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유채를 찾으러 나섰다.

회사 건물을 천천히 돌면서 카페테리아와 다른 연습실을 기웃거렸다. 마주친 직원들에게 물어도 유채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태오는 기막힌 심정으로 복도 한가운데 우뚝 서 버렸다. 유채의 호승심에 기대를 걸었는데, 우주가 싫은 마음이 더 컸던 모양이다. 유채는 아무래도 정말 도망간 것 같았다.

태오도 자신과 함께 있기 싫어하는 유채를 억지로 잡아다 제 곁에 두고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게 싫어서 계약 연장도 거부하고 하차를 원한 거였다. 그러나 이대로 하루를 허투루 보내고 소득 없이 촬영장으로 돌아간다면 서 PD에게 할 말이 없었다. 유채만 또 힘들어질 것이다. 서 PD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열지 못하던 갸름한 옆얼굴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또 보고 싶지는 않았다. 가슴 안쪽이 지끈거렸다.

“어디로 간 거야, 유채야…….”

혼잣말을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가, 퍼뜩 떠오른 장소가 있었다.

우주의 몸에서 깨어나 래디언스로서 활동하기 전에도 태오는 오랫동안 AMJ 엔터 소속이었다. 그 기간 중 얼마간은 유채와 함께였다. 유채가 갈 만한 곳은 태오도 잘 알았다.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태오는 걸음을 서둘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위층에서 내린 후 비상계단을 통해 한 층 더 올라가자 옥상 입구가 나왔다. 래디언스 소속이 되어서 AMJ 건물에 다시 들락거리기 시작한 뒤에도 여기까지 와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 몇 년 만인지 몰랐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는 순간 출입문 너머에서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의 조악한 스피커로 틀어 놓은 듯 시끄러운 음악이었다. 엇박자로 울리는 선율이 태오를 오래전의 어느 오후로 이끌었다. 회사에 드물게 나오곤 했던 태오가 한 달 만에 옥상을 찾았던 날.

옥상의 휑한 공터가 요란한 케이팝과 사뿐히 스텝을 밟는 소리, 유채의 가쁜 호흡으로 가득 찼었다. 그날 태오는 유채를 두 번째로 만났다.

몇 년 전이었을까. 아직 태오가 아직 태오였을 때. 언젠가 유채가 지나가듯 말했다. 태오를 처음 보았던 날 이후로 꼬박 한 달간 그 옥상에서 매일 연습했다고. 침대에 파묻혀 이미 반쯤 잠든 채였던 태오는 피식 웃으면서, 연습실이 훨씬 편한데 왜 그 추운 날 굳이 옥상에 올라갔냐고 무심하게 대꾸했었다. 유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사고가 나고 유채와 헤어진 후, 태오는 휠체어에 앉아 매일의 시간을 죽여야 했다. 그 무렵에는 지난 일들을 수없이 곱씹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대꾸 없이 시선을 떨구었던 유채의 말간 옆얼굴이 떠오른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날, 유채의 긴 속눈썹이 파드득 떨렸다. 투명한 나비 날개처럼 가지런하고 마음 아프게. 그리고 태오는 문득 깨달았다. 그해 겨울, 열여섯의 유채는 태오를 기다린 거였다.

같은 자리에서,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태오를 한 달 동안 매일.

유채는 태오가 돌아오리라고 믿었을까?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다릴 수 있었을까?

태오가 조금만 일찍 깨달았다면 유채에게 직접 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쑥 묻고 싶었을 때는 이미 유채가 떠난 뒤였다. 태오가 제 손으로 그를 내쫓았다.

그러나 아파트를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조차 유채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렇게 태오는 유채를 또다시 기다리게 했다. 언제나 그랬다.

출입문 너머에서 음악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유채가 저 옥상에서 춤추고 있을 것이다. 열여섯 살 소년이 태오를 기다렸을 때처럼.

태오는 옥상의 출입문에 이마를 기댔다. 차가운 감촉이 살갗에 닿았다. 때로는 기다리는 모든 것이 제시간에 오지 않는다. 태오도 이미 너무 늦었다. 유채에게 제시간에 가지 못했다. 후회스러운 일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철문이 열렸다.

그래도 태오는 유채에게 가고 싶었다.

유채는 옥상 한가운데의 공터에 태오를 등지고 서 있었다. 고개를 반쯤 기울였다가 다시 뒤로 젖혔다. 낭창한 뒷모습 아래로 긴 그림자가 졌다. 박자에 맞추어 유채는 천천히 움직였다. 사뿐히 스텝을 밟으면서 빙글 도는 남자는 열여섯의 소년보다 키가 한 뼘쯤 컸고, 벌어진 어깨는 넓었고, 곧게 편 등은 단단했지만 그 무렵의 유채만큼 외로워 보였고 그보다 더 위태로웠다.

단정한 이마가 투명한 땀으로 흠뻑 젖었다. 티셔츠는 살갗에 달라붙었다. 가쁘게 내쉬는 숨이 하얗게 흩어졌다. 말갛던 뺨이 창백할 만큼 희었다. 그리고 음악이 멈출 무렵, 유채는 제자리에 쓰러지듯 풀썩 앉아 버렸다.

“유채야!”

태오는 놀라서 유채를 향해 뛰었다. 유채를 향해 쏟아지는 햇볕을 등지고 허리를 숙였다. 유채가 멍한 얼굴로 태오를 올려다보았다. 투명한 눈동자가 어렸다. 길고 곧은 팔다리와 탄탄한 어깨는 이미 어른이 된 지 오래였는데도.

숱 많은 속눈썹에 느지막한 여름 햇볕이 닿았다. 습하고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홀린 듯 팔을 뻗어 유채의 뺨을 감싸 쥐었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뺨이 손안에 닿았다. 태오는 제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태오는 이 옥상에서 어린 유채를 마주쳤던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겨울의 문턱이었던 그때와는 모든 것이 달랐는데도 그랬다. 늦여름 오후의 햇살도, 공기의 냄새도.

덜 아문 턱선을 한 유채가 속삭이듯 물었다.

형.

왜 이제 왔어요?

늦었잖아요.

소년은 고개를 들고 활짝 웃었다. 조각을 빚어 만든 것처럼 서늘하고 예쁜 얼굴에 풀잎처럼 부드러운 웃음이 번져 사랑스러웠다. 태오가 대꾸할 틈도 없이 소년은 태오를 향해 와락 팔을 뻗었다.

그 무렵의 유채는 아직 태오보다 한참 작아서, 태오에게 안긴 꼴이 되었는데도 태오는 제가 소년의 품에 안긴 기분이었다. 단단한 팔이 태오의 등을 힘주어 꽉 끌어안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채는 태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어린 품이 따뜻해서 기분 좋았다. 그러나 그 시간은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얇고 나른한 꿈은 이내 깨져 버렸다.

“……이거 놔.”

유채가 태오의 손을 뿌리쳤다. 긴 눈매에 혼란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가 이내 시선을 피했다.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왈칵 솟았다. 태오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

유채는 도시락을 먹지 않았다. 태오와 헤어진 후 곧장 옥상으로 올라와 줄곧 안무 연습만 한 것 같았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고 숨도 거칠었다. 예쁜 얼굴이 엉망이었다. 태오는 가슴이 지끈거렸는데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렸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겨우 꺼낸 말이 또 밥 얘기였다. 유채는 밥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들었냐는 눈으로 태오를 노려보았다. 태오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어서 혼잣말하듯 웅얼거렸다.

“요즘 잠도 못 자잖아. 밥도 안 먹으면 어떡해. 너 그러다 쓰러져.”

“무슨 상관인데.”

“어떻게 상관을 안 해.”

“관심 꺼. 좀 꺼지라고.”

걱정해 준 보람도 없이 돌아오는 대꾸가 야멸찼다. 태오는 한숨을 쉬었다. 기운을 좀 차린 것 같다고 안심해야 할지, 기운을 차리자마자 심통 부리는 걸 얄미워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그러나 머리가 판단하기 전에 입이 먼저 움직여 버렸다.

“애냐? 애야? 왜 심통이야. 너 오늘은 얌전히 지내기로 했지.”

“…….”

“오늘은 같이 있어야 하잖아. 아니면, 내일 피디님한테 뭐라고 하려고?”

유채가 눈썹을 퍼뜩 구겼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뺨이 통통해졌다. 태오가 제일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동그래진 뺨을 찹쌀떡처럼 조물거리다가 쭉 늘려 보고 싶은데 손을 대지 못해서 태오는 마음속으로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는 동안 유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

“여기?”

“옥상. 너 한 번도 온 적 없잖아, 여기.”

“어…….”

가끔 태오는 불쑥불쑥 충동이 들었다.

사실은 내가 윤태오라고. 그래서 안다고. 네가 아는 것을 나도 다 알고 있다고.

그렇게 말한다면 유채도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태오는 이미 유채에게 한 번 사실을 말했고, 유채는 믿지 않았다. 상처받은 눈으로 제발 그만하라고 울었다.

그러니 태오가 다시 그 얘기를 꺼낼 일은 없을 것이다. 유채를 두고 도박을 할 수 없었다. 확실하지 않은 모든 일을 다 피하고 싶었다.

“아무 데도 없길래. 밖으로 나갔을 것 같진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적당히 우물거렸다. 그러자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태오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길이 마주쳤다. 뜻밖에도, 유채는 고개를 돌리거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태오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툭, 유채가 고개를 떨구었다. 흰 옆얼굴에 씁쓸한 외로움이 묻어났다.

“뭐, 그렇겠지.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있겠냐.”

그러더니 뒤로 벌렁 누워 버렸다. 이번에는 태오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채가 태오—유채 눈에는, 우주—앞에서 이렇게 경계 없이 풀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유채는 눈을 꾹 감았다. 더운 바람이 스칠 때마다 속눈썹이 희미하게 떨렸다.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유채야?”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태오는 설마 싶어서 다시 한번 유채를 조심조심 불렀다.

“유채야…….”

손까지 휘휘 내저었지만 유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태오는 기가 막혔다. 설마가 아니라 정말 잠든 거였다. 불면증이라더니, 태오 앞에서는 잘만 잤다.

“자는 건 좋은데, 밥은 먹고 자라니까.”

그 짧은 틈에 깊게도 잠든 모양이다. 여전히 돌아오는 대꾸가 없었다. 태오는 유채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 꾸물꾸물 몸을 뉘었다. 나란히 누워서 올려다보는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고 높았다.

그렇게 허공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연습해야 하는데. 유채 밥도 먹여야 하고. 그러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속으로 생각만 했다. 그런데 저 도시락은 맛이 없어. 배달이라도 시킬걸…….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다음 생각을 채 마무리하기 전에 태오도 까무룩 잠이 들었다. 사방이 뻥 뚫린 건물 옥상에서, 시멘트 바닥에 그대로 등을 붙인 채.

***

태오는 퍼뜩 눈을 떴다.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눈앞의 하늘이 절반은 보라색, 나머지 반은 붉은색이었다. 오후와 함께 여름이 물러가는 듯, 뺨에 닿는 공기가 서늘해졌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더니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예 여기서 자고 가려고 그러냐.”

“……누가 먼저 잤는데 나한테 그래.”

태오는 투덜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유채는 일찌감치 깨어 있었던 듯했다. 버리고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곁을 지켰다. 손에는 너덜너덜한 대본을 쥔 채였다. 연습을 하고 있었나 보다.

대본에 닿은 태오의 시선을 눈치챈 유채가 또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했다.

“나 연기 연습하기 싫어. 너랑 같이 찍는 그런 애절한 신이라니 끔찍해.”

“야, 나도 감정이 있어. 사람 앞에 두고 끔찍하다니.”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태오가 항의했다. 꿀맛 같은 낮잠에서 깨자마자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채는 계속 툴툴거렸다.

“성해인이랑 같이 하는 신 늘어난 건 참겠어. 브로맨스 코드? 기분 더럽긴 한데 대본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냐. 어차피 너 곧 하차할 거고, 조금만 버티면 돼. 그런데…….”

문득 유채의 눈가에 물기가 스친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보았을 때, 옅은 색 눈동자는 여전히 건조한 채였다. 바싹 말라 바스락거리기까지 하는 메마른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시발……. 왜 하필이면 교통사고야.”

“…….”

잠이 단번에 가셨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오늘 취소된 촬영분은 성해인이 교통사고를 당할 뻔한 신이다. 버스가 성해인을 덮칠 듯 지나가지만 그는 다행히 다치지 않았고, 놀라서 주저앉은 이준희에게 다가와 그를 일으키는 장면이었다.

교통사고는 태오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그러나 태오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사고 그 자체보다 쏟아지던 빗줄기와 천둥, 눈앞에서 불빛처럼 번뜩이던 번개 같은 것들이었다. 윤태오로서 이미 한 번 눈을 감았고, 신우주가 되어 다시 살아난 이후에도 트라우마를 지우지 못했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오는 성해인의 교통사고 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태양처럼 밝은 여름 오후에 발생한 사고였다. 성해인은 심지어 다치지조차 않았다. 버스가 지나간 뒤 이준희에게 다가가 그를 달래 주는 게 다였다. 태오의 사고를 떠올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 장면이 유채를 자극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태오는 가만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벌린 채 미간을 찡그렸다. 바보 같은 표정이었는지 유채가 눈썹을 구겼다. 이쪽을 흘긋거리는 긴 눈매가 붉었다. 그러나 물기는 보이지 않았다.

불면증에 시달려도, 먹지 못하고 영양제 수액으로 몸을 회복할 때도 유채는 울지 않았다. 딱 한 번, 태오에게 매달려 윤태오를 흉내 내지 말아 달라며 무너졌을 때 울음을 터뜨렸던 게 다였다.

“그래도 살았잖아…….”

한참 머뭇거린 끝에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사실이 그랬다. 성해인은 태오와 달리 다치지 않았고, 심지어 정말로 사고가 난 것도 아니었다. 유채가 그 일을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유채는 고개를 돌렸다. 눈을 내리깐 채 바닥을 향해 담담히 시선을 두었다. 더운 바람을 타고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유채의 입술이 나긋하게 움직였다.

“아는 척하지 말고 닥쳐.”

불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태오는 픽 웃어 버렸다. 유채가 화를 낼 때는 그래도 마음이 나아졌다는 뜻이다. 이제는 그걸 깨달을 정도로 유채를 알았다. 지난 생에서, 태오는 유채를 사랑했지만 그를 알지는 못했다.

태오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여름 하늘은 이제 반쯤 검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았어.”

“뭐?”

그때,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눈이 커졌다. 태오는 놀란 얼굴로 유채를 돌아보았다. 유채는 여전히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감정 없는 목소리가 나지막이 이어졌다.

“짜증 나. 성해인이 살아 돌아와서.”

성해인이 죽을 뻔한 장면에 감정을 빼앗겼기 때문에 유채가 힘들어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채의 말은 뜻밖이었다.

“언제는 죽었어? 살아 돌아와서 짜증 난다니, 무슨 말이 그래.”

“모르는 척하지 마. 이 장면은 원래 성해인이 죽어야 하는 장면이었어. 뻔하잖아.”

“그런가…….”

태오도 반신반의하고 있던 일이다. 대본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태오의 정확한 하차 시점을 몰랐지만, 시놉시스상 성해인은 교통사고로 사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같은 이벤트가 또다시 등장할 것 같진 않았다. 성해인이 정말로 사망한다고 해도 다른 방식일 것이다. 어쩌면, 정말 이대로 성해인이 사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태오와의 계약은 조금 복잡해지겠지만 정황이 그랬다.

태오는 유채의 표정을 살펴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때문에 그래? 나랑 촬영 계속하기 싫어서?”

그러자 유채가 눈을 치켜떴다. 노려보는 눈길이 살벌해서 태오는 움찔했다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유채가 딱딱한 목소리를 툭 뱉어 냈다.

“신경 안 써. 네가 무슨 짓 하든 이제 나랑 상관없다고 했잖아.”

“어…….”

그렇게 상관있는 표정으로 말하면 신뢰가 갈 리 없었다. 그래도 태오는 말을 얹는 대신 눈치껏 눈만 굴렸다. 유채는 화난 얼굴이었다가, 뾰족해졌던 눈매가 차츰 가라앉았다. 이내 불그스름한 눈매로 바닥만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유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성해인이 무사했으니, 이준희는 안심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목소리는 물기 없이 바싹 말랐다. 태오는 어쩐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해가 저물어 이제 뜨거운 공기는 제법 물러갔는데도 그랬다.

“몰입할 수가 없어.”

“뭘……?”

“이런 걸 찍게 될 줄은 몰랐어. 시놉에도 없었잖아. 성해인은 그대로 죽는 거였어. 왜 살아서 돌아온 거야?”

“…….”

“연기하고 싶지 않아. 나 때문에 촬영 지연되고, 다들 화났고, 내가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래도 나는 너무…….”

유채의 손끝이 눈에 띌 만큼 덜덜 떨렸다. 늘어뜨린 팔이 가여워서 가슴이 아팠다. 태오는 유채를 향해 손을 뻗고 싶었다. 유채를 품 안에 당겨 안고 등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위로하고 싶은 마음은 상처를 줄 뿐이다. 지켜보는 것밖에 다른 길은 없었다.

“……이준희가 부러워서.”

유채가 울 수 있도록 어깨를 내주고 싶었다. 유채를 품에 껴안고 달래 줄 수 있다면 좋았을 거였다.

“연기가 끝나면 죽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랬어.”

왜 윤태오만 죽어야 했어?

성해인은 이렇게 살아 있는데.

말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태오는 대답하지 못했다.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이 가슴을 채웠다.

“형이 보고 싶어.”

유채의 반듯한 입매가 기어코 일그러졌다. 건조한 뺨이 물기에 흠뻑 젖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끝까지 눈물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울어야 할 때가 있는데도 그랬다.

태오는 흘려보내지 못한 눈물이 가슴에 고여 심장을 삼킨다는 것을 안다. 태오도 그렇게 조금씩 물에 잠겨 죽어 갔었다. 심장이 완전히 멎어 버릴 때까지.

“……네가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마.”

그러나 시간 앞에 무력하지 않은 것은 없다. 언젠가는 피가 멎고 새살이 돋아날 것이다. 태오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때까지 유채가 힘들어하지 않도록 물러나는 거였다.

그래서 태오는 말을 골랐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내가 못 한다고 할게. 어차피 계약한 회차는 지났어. 자연스럽게 하차할 때까지 기다린 거였는데……. 그냥 엎어 버리자. 넌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뭐?”

유채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노려보는 눈빛이 형형했다.

“엎겠다고? 어쩌려고 그래? 촬영이 장난이야?”

“뭐……. 욕밖에 더 먹겠어? 나 원래 비호감이잖아. 내가 엎으면 쟤 또 저런다, 이러고 말 텐데 네가 엎으면 진짜로 난리 나.”

“미쳤어? 왜 그렇게까지 해? 좋은 기회잖아. 이렇게 날린다고? 아무렇지 않아?”

태오는 부러 입꼬리를 당기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다른 기회가 있겠지.”

다른 기회는 없을 것이다. 태오도 알았다.

누구도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리면서 하차한 배우를 다시 쓰지 않을 거였다. 촬영장에서 잡음을 일으켰다가 몇 년이나 복귀하지 못한 배우들이 수두룩했다. 태오의 경우에는 계약이 이미 끝났고 연장 의사가 없다고 밝혔는데도 촬영이 지속되었던 탓에 양해의 여지는 있었지만, 간신히 얻은 좋은 이미지는 이것으로 끝난다고 봐야 했다.

태오는 카메라 앞에 돌아온 순간의 아찔했던 감각을 떠올렸다.

지난 몇 주간 성해인이 되어 촬영하면서 잊고 있던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무대를 사랑했고, 연기할 수 있어서 행복했던 윤태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연기도, 배우로서의 삶도 모두 다 간절했다. 간신히 되찾은 자신을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태오가 그리워했던 어떤 것도 유채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채가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어떤 대가가 따른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드라마에 목숨 걸었다고 그래. 나는 괜찮아.”

그러니 태오는 정말로 괜찮았다.

그러자 유채가 태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투명한 시선이 서늘하게 빛났다. 태오는 문득 유채가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우주의 몸이 아니라 태오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

“너…….”

유채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눈앞 우주의 얼굴에 태오가 겹쳐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우주는 태오와 같은 사람이라 해도 믿을 만큼 비슷한 얼굴이 되었다. 심지어 키도, 체형도 태오처럼 변했다. 스물넷 무렵의 태오가 살아 돌아온다면 지금의 우주와 똑같은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신우주는 윤태오가 아니다. 누구도 태오일 수는 없었다. 아무리 닮은 얼굴로 비슷하게 굴어도 마찬가지였다.

태오는 유채를 위해 뭐든지 다 해 주었다. 그토록 다정하게 유채를 흠뻑 적셔 놓고 아무 말 없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나 버렸다.

그리고 유채의 눈앞에 우주가 나타났다. 예전의 신우주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다른 모습이었다. 연기하지 못하겠다고 무너진 유채 대신 우주가 역할을 포기할 리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누구도 유채에게 이렇게 해 주지 않았다. 스물여섯 해를 살아오면서 한 사람밖에 없었다.

유채는 그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이렇게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떨렸다. 유채는 덜덜 떨리는 주먹을 꾹 쥐면서 등 뒤로 감췄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처럼.

“……신우주 맞아?”

지나치게 태오와 닮은 얼굴로 우주가 씩 웃었다. 유채가 좋아했던 보조개가 양 뺨에 길게 패어 도드라졌다. 그는 고개를 반쯤 기울이며 눈을 쌕 접었다.

“그럼 내가 누구겠어.”

눈앞에서 꿈이 겹쳤다. 글램핑 예능을 촬영하던 밤, 우주와 함께 묵었던 캠핑카에서 유채는 꿈을 꾸었다. 그날 유채는 상대에게 물었다.

넌 누구야?

그러자 그가 씩 웃었다.

내가 누구냐면…….

***

다음 날, 태오는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서 PD를 찾아서 하차 의사를 밝히려고 했다. 그러나 밴에서 내리기도 전에 함께 타고 있던 유채에게 손목을 턱 잡혔다. 유채가 먼저 스킨십 비슷한 것을 해 온 일은 처음이었다. 태오는 너무 놀라서 입을 반쯤 벌린 채 눈만 깜빡거렸다. 하지만 사실은 스킨십이라기보다 범인을 검거하는 형사 같은 손놀림이었다. 유채는 눈을 부릅뜬 채 태오는 돌아보지도 않고 허공을 향해 웅얼웅얼했다.

“그럴 필요…… ……촬영 제대로…… 거야.”

“어? 뭐라고?”

“그럴 필요 없다고!”

“아, 깜짝이야.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그러잖아도 놀란 태오는 심장이 덜컹 뛰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제야 유채가 태오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분한 것도, 짜증 난 것도 같은 눈빛이 태오를 노려보았다. 어딘지 슬픈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태오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촬영 제대로 할 거니까 하차할 필요 없어.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도.”

“어……?”

“어제는 좀 갑작스러워서 놀라서 그랬어. 그런 식으로 민폐 안 끼쳐. 네 도움도 안 받아. 내가 미쳤어?”

“그게, 유채야.”

태오는 난처한 얼굴로 차창 너머를 흘긋 바라보았다. 촬영 장비들이 이미 도착한 상태였다. 시간제한이 빠듯할 테니 아마 리허설할 틈도 없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태오가 촬영 거부를 선언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긴 했다.

“……무리할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태오도 어젯밤 늦게까지 고민했다. 한동안, 어쩌면 몇 년은 드라마 판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연기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태오는 데뷔했을 때부터 주인공만 도맡았고 정식으로 연기를 배우는 대신 주로 재능에만 의존해 왔다. 단역이나 조연을 해 본 적 없으니, 분량은 적지만 연기력이 필요한 역을 맡아 기본기를 다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태오는 배우의 평판이나 인지도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영화감독도 몇몇 알고 있었다. 캐스팅이 들어오지는 않겠지만 공개 오디션을 보러 다닌다면 승산이 있을 터였다.

그렇게 마음 정리를 간신히 끝냈는데, 막상 촬영장에 와 보니 유채 생각은 다른 듯했다. ‘우주’에게 그 정도로 신세를 지고 싶지 않을 것이다. 태오는 눈을 굴리면서 유채를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느라 유채가 서늘한 얼굴로 밴에서 내리는 것도 잡지 못했다.

“어, 유채야?”

태오도 허둥허둥 유채를 따라 내렸다. 유채는 벌써 촬영장을 향해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FD가 이쪽을 바라보고 크게 손을 흔들었다. 유채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태오가 빠른 걸음으로 도착했을 때는 이미 차렷 자세로 선 유채가 서 PD와 스태프들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컨디션 회복했습니다.”

서 PD가 유채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시간 없어서 바로 촬영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

“네. 준비하겠습니다.”

태오가 끼어들 틈도 없었다. 당황한 사이에 코디들에게 이끌려 메이크업을 받고 의상을 입은 후 카메라 앞에 섰다. 유채는 줄곧 서늘한 얼굴로 바닥을 응시할 뿐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태오가 슬쩍 다가가서 소곤거렸다.

“유채야.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너 힘든데…….”

“내가 하고 싶어졌어.”

“뭐?”

유채가 눈을 들었다. 태오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눈동자가 투명했다. 도톰한 입술이 천천히 달싹거렸다.

“부딪쳐 보고 싶어.”

“뭘……?”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뭐? 야! 한유채!”

유채는 무슨 말인지 모를 소리만 늘어놓더니 휙 몸을 돌려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태오도 더 이상은 사적인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서 PD가 고개를 끄덕이자 FD가 큰 소리로 시작을 알리면서 슬레이트를 쳤다. 촬영이 재개되었다.

***

장면은 이준희가 대회가 열리는 테니스장 근처에서 성해인을 기다리면서 시작된다.

이준희가 된 유채는 횡단보도 건너편에 선 성해인을 발견한다.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리던 성해인—우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불과 얼마 전에 이준희에게 제 자격지심을 털어놓으면서 속내를 보였던 성해인은 어색한 얼굴로 길 건너의 이준희를 바라본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둘 사이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았던 이준희가 성해인 앞에서는 마음을 풀어 버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게 미안해서 성해인도 이준희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준다. 이준희는 눈을 길게 접으면서 활짝 웃었다. 입꼬리를 당겨 올리면서 흰 이를 가지런히 드러낸 표정은 이준희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얼굴이다. 성해인이 피식 웃는 모습이 보인다. 마침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었고, 성해인은 걸음을 옮기면서 이준희를 향해 뛸 듯이 걸었다.

그러나 성해인도, 이준희도 차도 저편에서 횡단보도를 덮쳐 오는 버스를 보지 못했다.

“해인아!”

이준희가 부른 이름은 사방의 비명 소리에 묻혔다. 성해인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치다가 뒤로 주저앉으면서 넘어졌다. 버스가 쓰러진 성해인의 몸 위로 빠르게 지나간다. 몇 대의 승용차에 부딪혀 옆구리가 찌그러진 버스는 가로수를 받고 근처의 빌딩 벽으로 돌진한 끝에 간신히 멈췄다.

그리고 횡단보도 위에 성해인이 움직임 없이 누워 있었다. 유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오래전의 기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에 도착해 수술실 문 앞에서 몇 시간이나 태오를 기다렸던 기억. 수술을 마친 태오가 눈을 뜰 때까지 고통스러웠던 시간. 휠체어에 앉아 움직이지 못했던 태오. 그림자 같은 얼굴로 유채에게 이별을 통보하던 모습.

변호사가 가져온 사망 서류에 기재된 태오의 이름. 그게 마지막이었다. 유채는 태오가 눈감은 모습도 직접 보지 못했다.

“……희야. 이준희!”

유채는 촬영 중이라는 것도 잊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촬영장에 젖은 숨소리만 울렸다.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유채는 멍한 얼굴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난처한 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보였다. 햇볕 아래 또렷한 눈매가 다정하고 깊었다. 유채는 그를 부를 뻔했다.

태오 형.

그러나 입술을 달싹이기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준희야. 나 괜찮아. 하나도 안 다쳤어. 발 걸려서 넘어졌는데, 내 위로 버스가 지나간 거야. 버스 바닥이 높아서 내 몸은 건드리지도 않았어. 진짜 신기하지. ……준희야?”

유채는 천천히 기억해 냈다. 그들은 촬영 중이었고, 유채는 이준희였다. 그를 내려다보며 신기한 듯 말을 건네는 사람은 성해인이다. 어디에도 태오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유채는 성해인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면서 그를 끌어안아야 했다. 이 신을 위해 유채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똑같은 표정과 목소리를 반복해서 연습하며 머릿속에 새겼다. 우주가 쥬니퍼에게 조언했던 것을 얼핏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우주가 그랬다.

-통째로 외우면 돼요. 카메라 앞에서 긴장해도 몸이 외운 건 저절로 나올 거예요.

후배 연기자에게 설명해 주는 목소리는 단정하고 부드러웠다. 예전의 태오처럼 다정한 음성이었다.

그래서 유채도 그대로 따랐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무렇지 않게 이준희가 되어서, 손끝도 다치지 않은 성해인을 반겨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을 내려다보는 까만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깨달았다. 유채가 이준희일 수 없듯, 태오는 성해인이 아니었다. 그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

심장이 절반만 남은 것 같았다.

나머지 반은 태오가 채워 주어야 했다. 태오를 닮은 그 눈빛이 태오 자신이기를 유채는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태오는 오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설움이 들었다. 가슴 안쪽이 찔린 것처럼 아팠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젖은 시야가 앞을 가리고 눈물이 후드득 쏟아져 흘렀다. 이 장면에서 이준희가 눈물을 보일 예정은 없었다. 상대는 당황한 얼굴로 유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유채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젖은 볼을 닦았다.

“나 괜찮아……. 정말이야.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 아무 데도 안 다쳤어…….”

유채는 태오가 죽었을 때 울지 못했다. 그가 심장병을 앓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서류상 연결된 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그래서 울 자격이 없었다. 그때도 흐르지 못한 눈물이 왜 이제 와서 쏟아지는지 몰랐다. 마음속에 찰팍하게 고였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웅덩이가 되었다.

“많이 놀랐어? 미안, 미안해…….”

이미 대본에서는 벗어난 지 오래였지만 아무도 컷을 외치지 않았다. 눈앞의 상대는 끊임없이 유채를 달랬다.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애달팠다. 그런데도 울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유채를 끌어안고 등을 쓸어 주기만 했다.

유채는 숨을 토해 내듯 울었다. 내뱉는 호흡마다 온통 축축했다.

신우주는 태오가 아니었는데.

품의 온기가 태오 같았다. 젖은 뺨을 닦아 주는 손길도 그랬다. 그래서 울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컷.”

신이 끝났다. NG는 없었다. 등 뒤에서 서 PD와 스태프들이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유채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스태프들이 다가와 웃으면서 유채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애드립 쪽이 훨씬 좋은데요? 피디님 좋아하셨어요.”

“이대로 갈 거 같아요. 유채 씨 계속 울어서 어떡해. 너무 몰입했나 보다.”

그러자 익숙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괜찮을 거예요. 제가 데려가서 달랠게요.”

신우주의 목소리가 이렇게 낮았나?

이렇게 다정하고 상냥했었나?

태오에게서는 언제나 좋은 향이 났다. 유채와 같은 보디 제품을 써도 태오는 달랐다. 유채는 태오의 살갗 내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그 향이 났다. 믿을 수 없게도 그랬다. 그래서 더 왈칵 서러웠다. 태오가 보고 싶었다. 유채는 울먹이며 속으로 물었다.

형.

어디에 있어?

***

6화 대본이 나오던 날 제작 발표회가 열렸다. 명태가 아침부터 유채와 태오를 채근하면서 서두른 탓에, 태오는 대본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정신없이 숍에 들렀다가 행사장으로 향했다.

제작 발표회 무대에서 오랜만에 손 작가를 만났다. 내심 반가워진 태오는 저도 모르게 눈을 길게 접으면서 활짝 웃었다. 줄곧 날카로운 얼굴이었던 손 작가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우주 씨……. 오늘도 잘 잤어요? 좋은 꿈 꿨어요?”

“네? 아, 네. 작가님, 안녕하세요……?”

윤태오였던 시절의 지인인 손 작가가 태오를 알아볼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손 작가는 어쩐지 친숙한 말투로, 어젯밤에 헤어진 친구를 반기듯 말을 걸어왔다. 어리둥절해진 태오의 옆에서 명태가 소곤거렸다.

“지난번에 글램핑 보셨다는 얘기 들었지? 손 작가님이 네 팬이시라고 했잖아.”

“아…….”

유채와 싸우기만 했던 글램핑 예능이 떠올라서 조금 민망해졌다. 가뜩이나 안 좋은 이미지가 더 나빠졌을까 봐 걱정했는데, 방송 이후에 태오의 팬이 되었다는 입덕 후기가 제법 많았다. 손 작가도 그중 한 명이었다. 태오로서는 운이 상당히 좋았던 셈이다.

그러고 보면 손 작가는 예전에도 태오의 팬이었고, 그래서 ‘천생연분’에 태오를 캐스팅해 달라고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고 들었다. 그때는 태오가 워낙 인지도 있는 배우였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는데, 밉상으로 소문난 우주까지 캐스팅해 낸 것을 보면 손 작가도 항상 뚝심이 있었다.

프리랜서 아나운서가 MC를 맡은 제작 발표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타이 브레이크’는 스타 작가와 스타 PD가 만드는 데다 주연이 유채였기 때문에 기사가 났을 때부터 주목받았던 드라마였다. 또 다른 주연인 쥬니퍼도 기자들 사이에서 매너 좋은 아이돌로 유명하다고 들었다. 분위기가 줄곧 화기애애했다.

분위기가 다소 경직된 것은 마이크가 태오에게 넘어왔을 때였다.

“신우주 씨는 ‘제왕’에 이어서 두 번째로 주연을 맡으셨는데요, ‘제왕’ 캐스팅 당시에도 다소 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성해인 역할도 원래 김홍두 씨가 유력했는데 갑자기 바뀐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순간 할 말이 없었다. 태오는 우주가 ‘제왕’에 편법으로 캐스팅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일로 오랫동안 힘들어했다. 어떻게 생각하냐면, 당연히 원한이 아주 깊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의아한 점도 있었다. 성해인은 사망이 예정된 캐릭터로, 당연히 주연급이 아니다. 중후반부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논의가 오가고 있긴 하지만 확정된 것은 없었으니 잘 봐주어도 조연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태오는 말문이 막혔다.

그때, 오른쪽에 앉아 있던 김홍두가 마이크를 잡으면서 불쑥 끼어들었다.

“예? 기자님, 잘못 알고 계십니다. 저 전혀 유력하지 않았는데요? 손 작가님이 저 아무렇게나 생겼다고 싫어하셨거든요.”

“홍두 씨, 내가 언제 싫어했어요? 지금 역에 더 어울린다고 한 거지.”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생긴 건 맞잖습니까?”

“아니, 그게…….”

“저거 보십쇼, 기자님. 하여간 손 작가님이 저 되게 구박하신다니까요? 완전 틀린 정보 들으신 거 같은데요.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성해인 꼭 할 거라고 친구들에게 뻥치고 다녔는데 그 헛소문 들으셨습니까? 아, 죄송해서 어떡하죠…….”

하나도 안 죄송한 표정으로 홍두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기자석에서 웃음이 터졌고, 질문한 기자는 언짢은 표정으로 얼굴이 불쾌해졌다. 그러나 마이크를 내려놓지는 않았다.

“그럼 원래 조연이었고, 초반부 하차하는 역할이었던 성해인이 주연급으로 바뀌고, 마지막 화까지 퇴장 없는 것으로 플롯 자체가 바뀐 일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들은 얘기가 없었기 때문에 태오는 생각이 없었다. 기자라서 그런지 태오보다 정보가 더 빨랐다.

태오가 당황하는 동안, 이번에는 서 PD가 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대답은 제가 해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성해인의 역할이나 하차가 처음부터 확정인 것은 아니었고, 시놉시스 단계부터 작가님께서 고민이 많으셨습니다. 다만 우주 씨가 아직 연기 경험이 많지 않아 소화하는 부분에 있어서 제가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촬영 중에 우주 씨 연기가 물이 올랐다고 판단해서 작가님께 의견 말씀드렸고, 손 작가님도 모니터링해 보신 후 동의하셔서 성해인 역할에 다소 변화를 주기로 했습니다. 다만…….”

곁에 앉은 손 작가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 PD는 잠시 말을 고른 뒤,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우주 씨에게는 아직 연장 출연 승낙을 받지 못한 건이거든요. 내부적으로도 결정이 나지 않은 일을 알고 오시다니, 기자님 정보력에 감탄했습니다.”

“네?”

이번에 당황한 것은 기자 쪽이었다. 태오도 덩달아 줄곧 놀라고 있었다. 홍두가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형님, 잘됐습니다! 우리 오래오래 함께해요!”

“어……?”

어느 정도 연장 출연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태오는 난처한 얼굴로 유채의 눈치를 살폈다. 유채는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앞만 보고 있었다.

다행히 유채의 상태는 얼마 전, 성해인의 교통사고 신을 촬영한 후부터 부쩍 나아졌다. 태오에게 먼저 다가오거나 말을 걸진 않았지만 무덤덤해 보였다. 그날 촬영하기 전에도, 앞으로도 계속 하차할 필요 없다고 먼저 얘기해 왔었다.

그래도 가능하면 하차하는 쪽이 나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연장 출연이 알려졌으니 거절하기도 애매하게 되었다. 서 PD나 손 작가의 체면까지 걸리게 된 것이다. 태오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삼켰다.

태오는 자신에게 공격적인 질문을 던졌던 기자를 향해 입꼬리를 당기면서 쌕 웃었다. 기자가 흠칫 놀란 얼굴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너무 영광스러운 제안을 받아서 당황스러운데요. 오늘 행사에서는 얌전히 앉아서 박수만 치다가 퇴장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주목도 받고, 출연까지 연장해 주셔서 지금 굉장히 얼떨떨해요. 기자님 덕분에 저 출세한 기분입니다. 그래도 제게 먼저 해 주신 질문이니까 답변드리자면, ‘제왕’에서 진연음도 성해인도 모두 제게 과분한 역이라 생각하고 믿어 주신 분들께 폐 끼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자님께서도 지켜봐 주세요.”

기자석에서 자연스럽게 박수가 나왔다. 질문을 했던 기자는 여전히 언짢은 표정이었지만, 더 말을 거들기도 무안했는지 ‘예, 예. 기대하겠습니다.’ 하고 옆 좌석으로 마이크를 넘겼다.

그러자 분위기도 제법 풀렸다. 이후에는 유채에게 질문이 쏟아졌고, 무난한 응답이 이어지다가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태오는 그제야 긴장을 풀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꼼짝없이 유채와 마지막 촬영까지 함께하게 생겼다.

***

제작 발표회가 끝난 후 태오는 6화 대본을 읽고 확신했다. 손 작가는 진작부터 성해인을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이준희가 각성하는 계기가 되는 중요한 사건이 빠져 버린 대신, 성해인과 이준희의 라이벌 구도(와 브로맨스 관계)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성해인의 사망이 아니라 성해인 자체가 이준희를 눈뜨게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서 PD가 농담처럼 브로맨스 코드가 추가되었다고 한 것이 결국 사실이었다.

초반에 하차하는 조연이 아니라 주연급으로 바뀐 것이 기쁘지 않을 리는 없었다. 서 PD는 실력 있는 감독이었고, 태오는 배우들과 호흡이 잘 맞았다. ‘제왕’ 이후로 처음으로 유채의 연기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도 좋았다. 유채는 그 시절보다 훨씬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다만 유채의 상태가 마음에 걸렸는데, 요즘은 유채도 말수가 적을 뿐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단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을 눈으로 태오를 뚫어져라 바라볼 때가 있었다. 예전처럼 적의에 가득 찬 눈빛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의아했다.

며칠 뒤, ‘타이 브레이크’ 첫 회식이 잡혔다. 촬영 일정이 다소 급하게 잡히면서 그동안 모두 바빴기 때문에, 촬영 팀이 처음으로 전원 참석하기로 한 자리다. 태오는 유채와 함께하는 술자리가 걱정되었지만, 주인공인 유채나 이제 주연급 출연자가 되어 버린 태오가 빠지기는 곤란할 듯했다.

태오는 그래도 틈을 보아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 틈에 홍두와 쥬니퍼가 태오의 양옆으로 따라붙었다.

“형님! 어딜 도망갑니까. 오늘은 저랑 죽을 때까지 마셔야 합니다!”

“마셔야 합니다!”

“난 죽기 싫은데.”

태오가 진심으로 말했다. 하지만 홍두와 쥬니퍼는 쿵짝이 잘 맞았다. 태오의 팔을 양쪽에서 하나씩 잡고 늘어져 버린 것이다. 분명히 쥬니퍼가 따돌려지는 분위기였고 둘은 어색한 사이였는데 대체 언제 친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대망의 첫 회식인데! 홍두랑 끝까지 달리십시다!”

“쥬니랑도 그러싯시다!”

“……너희 벌써 취했어?”

“달빛에 취했습니다! 너무 기분 좋은 밤 아닙니까, 형님?”

“취했슴미다! 쏘맥쭈 마셨슴미다!”

“…….”

촬영을 먼저 끝낸 배우들이 한구석에 모여 있더니, 저희들끼리 술자리를 시작해 버린 모양이었다. 홍두는 그래도 숨기려고 했는지 당황한 듯 쥬니퍼에게 눈짓했지만, 쥬니퍼는 발긋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태오는 한숨을 푹 쉬면서 그들의 머리통을 손끝으로 밀어 버렸다.

“알았어. 갈 테니까 떨어져. 어디로 간대?”

“‘경희궁’ 아십니까? 서 PD님 단골이라고 거기로 가신답니다. 대형 룸이 있대요.”

“아…….”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반가웠다. ‘천생연분’을 촬영하던 시절, 당시 총연출이었던 임 감독과 서 PD, 태오 셋이서 ‘경희궁’을 자주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태오는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기 가는 거면 진작 말하지. 나 거기 오징어튀김 되게 좋아해.”

“아이, 형님은 경희궁까지 가서 오튀만 드십니까? 더 맛있는 거 드시죠.”

“김홍두 오튀 무시해? 세상에서 경희궁 오튀가 제일 맛있어.”

“알았다고요. 빨리 가시기나 하십셔.”

실랑이를 벌이면서 홍두의 밴에 다 같이 올랐다. 어차피 목적지가 같으니, 굳이 유채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이쪽 밴을 타고 갈 생각이었다.

‘유채도 거기 좋아하는데.’

창가에 이마를 기댄 채 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잊고 있었던 기억이 났다. 유채는 데이트가 맞다고 했고 태오는 끝까지 아니라고 우겼던, 그들의 첫 데이트를 했던 곳이 경희궁이었다.

***

“근데 ‘타이 브레이크’가 뭡니까?”

다 같이 술이 한껏 올랐을 무렵, 홍두가 물었다. 오징어 다리튀김을 물고 있던 화민이 홍두의 뒤통수를 팍 쳤다.

“형은 여태 그것도 모르고 촬영했냐?”

“아, 씨. 모를 수도 있지! 너는 아냐?”

“어! 그거 그, 뭐냐. 테니스 용어야.”

“무슨 뜻인데?”

“테니스 용어라니까?”

“아니 그러니까 테니스에서 무슨 뜻으로 쓰냐고?”

“어…….”

야무진 줄 알았던 화민까지 술에 취하고 나니 바보가 되었다. 태오는 혼자서 혀를 차다가, 오징어튀김으로 또다시 젓가락을 뻗는 화민의 손등을 툭 때렸다.

“왜 자꾸 뺏어 먹어? 내가 시킨 건데.”

“아니, 형. 오튀 갖고 이러시기예요?”

“나 이거 먹으러 왔어. 타이 브레이크 뜻 맞추면 너도 줄게.”

“아이……. 그게 그러니까…….”

“저 압니다! 테니스에서 6대 6으로 비겼을 때, 먼저 7점 따는 쪽이 이기는 걸로 하는 겁니다! 골든골 같은 거네요! 저 먹어도 됩니까?”

“검색은 안 쳐줘. 둘 다 못 먹어.”

태오가 마지막 남은 오징어튀김 하나를 냉큼 집어 들었다. 화민과 홍두가 야유를 퍼부었다.

한창 술자리가 시끄럽게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다른 테이블에서 명함을 돌리고 온 명태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옆구리에는 유채를 낀 채였다.

“다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요? 우리 유채도 끼워 주세요.”

“아, 명태 형…….”

유채가 뺨이 퉁퉁 부은 얼굴로 태오의 옆에 앉았다. 억지로 손목이 잡혀서 끌려온 듯했다. 홍두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와르르 큰 소리로 웃었다.

“아니, 유채 선배님이 워낙 슈퍼스타니까 저희가 조심스러워서 말이죠. 사람이 여기 우주 형님처럼 좀 평범하고 적당하셔야 가까이 가기도 편하고 그렇잖습니까?”

“김홍두. 내가 평범하고 적당해? 나 그런 얘기 처음 들어.”

반쯤 취한 상태로 들어도 어이가 없었다. 열다섯 살부터 슈퍼스타였던 태오는 하도 기가 막혀서, 먹다 만 오징어 다리를 홍두에게 집어 던졌다. 홍두가 얄밉게 피하면서 약을 올렸다.

“그거 마지막 오튀 아닙니까? 아, 어떡합니까. 평범하고 적당한 형님 이제 오튀마저 못 드셔서.”

“야, 한 접시 더 시켰거든? 그건 너 한 개도 안 줘.”

“진짜 치사합니다. 제가 배달해 드린 커피가 몇 잔인데…….”

“그 커피 차 전부 유채한테 온 건데 왜 네가 생색이야. 그리고 몇 번 말해? 나 단 커피 싫어한다니까. 아메리카노로 가져와라, 좀.”

홍두와 투닥거리고 있는데 명태가 곁에서 의아한 표정을 했다. 잠시 눈을 굴리더니, 이내 태오의 어깨를 검지로 톡톡 쳤다.

“우주야, 너 아메리카노 싫어하잖아? 맨날 캐러멜 마키아토 사 오라고 온갖 행패를…… 아니, 그, 떼썼으면서?”

“제가요?”

홍두와 화민이 따라 주는 대로 정신없이 마셨더니 취기가 급격히 오르는지 자꾸만 눈앞이 흐렸다. 달아오른 뺨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태오는 손부채를 부치면서 생긋 웃었다.

“아닌데. 전 아메리카노만 마셔요. 캐러멜은 유채가 좋아하죠. 얘는 팝콘도 캐러멜 팝콘만 먹잖아요. 영화관에서 파는 큰 거.”

“어? 유채가? 유채가 팝콘 먹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안 먹긴요. 영화관에 일부러 가서 캐러멜 팝콘 사 오는 앤데.”

“뭐? 유채가 언제?”

“뭐가 언제예요. 같이 모니터링할 때마다 그랬는데.”

“유채가 언제 너랑 같이 모니터링을 해?”

“뭘 언제 해요, 맨날 하지…….”

한껏 기분이 좋아진 태오의 눈앞에 오징어튀김이 가득 담긴 접시가 나타났다. 태오는 반가운 얼굴로 튀김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때, 줄곧 당황한 얼굴이었던 명태가 태오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우주야. 오튀라는 게 오징어튀김 말하는 거였어? 야, 너 오징어 알레르기 있잖아. 큰일 나려고 그래!”

“제가요?”

태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명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 너 오징어 한 조각만 먹어도 오 분도 안 돼서 식도 부었어. 이거 먹은 거 아니지? 설마 먹었어? 우주야, 목 괜찮아?”

“어? 그럴 리가요? 형님 이거 오튀 지금 세 접시쨉니다. 여기 와서 이거만 드시던데요?”

“아주 혼자 오튀를 다 거덜 내시더라고요. 나도 먹고 싶었는데.”

홍두와 화민이 옆에서 투덜거렸다. 그제야 명태가 어리둥절하게 튀김 접시를 바라보았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너 진짜 괜찮아?”

“완전 멀쩡한데요?”

아까부터 명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태오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손사래를 치면서 푸시시 웃어 버렸다.

“경희궁 오징어튀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몇 년이나 못 먹어서 여기 진짜 오고 싶었다고요.”

“형님, 경희궁에 한 맺혔습니까? 진짜 좋아하시네요.”

“그러게, 우주야. 진작 말하지. 자주 데려올 걸 그랬다.”

명태가 의아한 기색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을 보탰다.

태오는 아까부터 자꾸만 화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생각보다 술기운이 많이 오른 것 같았다. 시야가 가물거렸고, 자꾸만 웃음이 났다.

“저 여기 진짜 좋아해요. 경희궁…….”

그리고 예전 생각이 났다.

마지막으로 경희궁에 온 게 언제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마 유채와 함께 왔을 것이다. 태오가 떠올린 것은 그보다 더 예전의 일이다. 눈앞에서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 과거, 그보다 더 과거에…….

유채와 함께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선명했다.

열여섯의 유채를 데리고 이곳에 왔었다. 궁중 떡볶이를 시켜 주었더니 유채는 시무룩한 눈으로 풀이 죽었다.

그 무렵을 떠올리면 입매가 저절로 당겨졌다. 태오는 눈을 길게 접으면서 그리운 듯 웃었다.

“당연히 좋아하지. 우리 애인이랑 첫 데이트도 여기서 했는데.”

그래서 오랫동안 담아 두었던 기억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뭐라고요! 형님, 애인 있습니까?”

“헉. 형, 누군데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알려 줘요!”

홍두와 화민이 법석을 떨었다.

시야뿐만 아니라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들도 멀어지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때 누군가 잔을 떨어뜨렸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음성이 주변에서 웅성거렸다. 그러나 태오에게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 나 진짜 취했나 봐.”

태오가 느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을 깜빡거리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러자 유채의 반듯한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유채의 뺨은 창백하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주변이 깨진 유리 조각들로 어수선했다. 긴 손가락 끝에서 선홍색 피가 묻어났다. 어디선가 짧게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채 기억이 그대로 끊겼다.

***

가을로 접어들었는데도 날씨는 여전히 한여름 같았다.

더운 바람이 불었다. 뺨에 닿는 공기에 물기가 가득해 습했다. 태오는 차창 밖으로 흐리게 보이는 늦은 오후의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모처럼 촬영 없는 날인데 숙소에서 쉬지. 어제 많이 마셨잖아.”

룸 미러를 통해 보이는 명태의 눈빛이 걱정스러웠다.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필름이 끊어질 때까지 술을 마신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전 생에서, 교통사고가 난 후로는 술을 입에 대지 못했던 탓에 태오는 제 술버릇을 그만 잊고 있었다.

태오는 술에 취하면 솔직해졌다. 원래도 솔직하지 않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작정하고 솔직해진 태오는 정말 아무 말이나 다 했다. 유채 앞에서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올렸을 때도 술에 취해 있었다. 사실은 열여섯 살짜리를 보고 첫눈에 반했는데, 잡혀갈까 봐 유채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허벅지 찔러 가며 참았다는 얘기도 필름이 끊겼을 때 모두 토해 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기다렸는데 정작 깔려 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면서 억울해 죽겠다고 통곡도 했다. 그때 유채는 피가 비칠 만큼 아랫입술을 꾹 깨물면서 웃음을 참았다.

태오는 필름이 끊긴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잊지 않았다. 어깨를 떨면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웃는 유채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태오는 자다 말고 이불을 찼다.

어젯밤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오징어튀김을 잘 먹다 말고 홍두와 화민 앞에서 술주정을 늘어놓는 제 모습이 기억 속에 생생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실수와 유리잔을 깨 버린 채 하얗게 굳었던 유채의 표정까지 모든 것이 뚜렷했다. 그대로 눈앞이 꺼지면서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는 숙소에 있는 자신의 침대 위였다.

유채는 아침 일찍 촬영장으로 향했다고 들었다. 저녁 늦게나 되어야 끝날 것이다. 숙취로 인한 두통으로 고생하던 태오는 유채가 돌아올 시간이 되어서야 비척비척 일어나 씻고 준비한 후 회사로 향했다. 유채가 잠들 때까지 연습실에 혼자 틀어박혀 있을 작정이었다.

“안무도 아니고 연기 연습인데 그냥 숙소에서 편하게 하지.”

“연습실에서 조용히 집중하고 싶어서요.”

“열심히 하는 거야 좋지만…… 그래도 너무 늦게까지 연습하지 마. 쉬어 가면서 해, 우주야. 컨디션 조절해야지.”

“그럴게요.”

“돌아올 때 전화하고. 데리러 올게.”

걱정 같은 잔소리를 늘어놓은 명태가 회사의 지하 주차장에 태오를 내려 주었다. 누구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태오는 비상계단을 통해 회사 2층에 있는 래디언스 전용 연습실로 향했다. 그곳이라면 밤이 늦을 때까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다른 멤버들은 모두 개인 일정으로 바빴고, 그룹 활동이 끝난 후 연습실은 줄곧 비어 있었다.

***

연기 연습을 할까 했는데 하필 이준희와 함께하는 장면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에 연기보다는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태오는 지난 앨범의 타이틀곡을 틀었다.

정신없이 스텝을 밟다 보니 이마에 땀이 맺혔다. 제자리에 주저앉아서 숨을 몰아쉬다가 그대로 털썩 누웠다. 두통이 가시지 않은 채로 무리했더니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몸 상태가 줄곧 좋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종일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숙소에 있으면 언제 유채가 돌아올지 몰랐다. 태오는 오늘 유채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어젯밤, 술에 취한 입이 아무 말이나 내뱉어 냈다. 태오의 실수였다. 유채는 또다시 우주에게서 태오의 흔적을 느꼈을 것이다. 유리잔을 깨뜨려 버린 유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겁이 났다.

-제발 태오 형인 척하지 마.

-내가 미친 것 같아. 네가 자꾸 태오 형으로 보여.

캠핑장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유채를 마주했던 날. 젖은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하던 그의 눈빛에는 초점이 없었다. 시선은 배회하듯 태오 너머의 어딘가를 향했다. 멍한 눈동자 안에 태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는데도 그랬다.

태오는 색이 옅은 그 눈동자에 언젠가 선명한 감정이 실렸던 것을 기억했다. 열여섯 살의 유채를 처음 만나고 한 달 뒤, 옥상에서 춤추고 있었던 그 애를 다시 만났을 때였다.

유채의 어깨 너머로 금빛 그늘이 졌다. 쏟아지는 햇볕이 닿은 커다란 눈이 환희를 담고 빛났다. 소년은 바랜 청바지에 목둘레가 물 빠진 흰 티셔츠를 입은 채 태오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었다. 태오는 자신의 무엇이 그 애를 그토록 기쁘게 했는지 알 수 없어서 얼떨떨했다.

-왜 이제 왔어요? 늦었잖아요.

-형, 기다렸어요.

책망하듯 말하는 나지막한 목소리에서 애틋한 웃음기가 배어났다. 그 후 수많은 계절을 함께한 그 미소가 여전히 눈앞에 선연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순간이 왔을 때, 태오는 이겨 내지 못하고 그 애의 가슴에 상처를 냈다. 날 선 말로 밀어내고 거부한 끝에 혼자서 죽어 버렸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채의 상처는 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길게 자리 잡혀 피가 흐르는데도 유채는 제가 아픈 줄 몰랐다.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잠도 자지 않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다시 눈뜨고 나서야 태오는 뒤늦은 후회를 수도 없이 했다. 그렇게 헤어지지 말았어야 했다. 적어도 유채에게 자신의 곁을 지킬 기회를 주었어야 했다. 심장 마비가 오는 순간, TV 화면이 아니라 유채를 향해서 마지막 말을 해 주었어야 했다.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는 상처 주지 않겠다고. 어떻게든 널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그랬다면 유채는 이렇게까지 태오를 믿지 못하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머릿속을 털어 내러 나왔는데 자꾸만 유채가 떠올랐다.

유채를 피하고자 혼자서 연습실을 찾은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유채를 위해서 만들어 주었던 그 애의 개인 연습실이 이곳에 겹쳐 보였다. 태오가 죽은 지도 삼 년이나 지났고 예전과 달리 래디언스에게는 전용 연습실이 생겼으니, 그 연습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일 것이다.

유채는 그 연습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태오도 종종 유채를 데리러 그곳으로 향했다. 유채가 스무 살이 되던 날에도 그랬다.

그날 시상식에서 태오는 최우수상을 받았다. 유채가 태오와 함께 시상식에 참석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시상식 무대에 섰지만, 언젠가는 함께일 수 있으리라고 그때는 믿었다. 그래서 유채에게 상패를 안겨 주기 위해 연습실을 찾았다.

그리고 유채와 연인이 되었다. 유채가 스무 살이 된 지 세 시간만의 일이었다.

자꾸만 유채가 떠올랐다. 넘쳐 나는 상념을 감당할 수 없었다. 기억을 움켜쥔 채 태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쩔 수 없이 그리웠다. 그 시간 속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그 무렵 유채의 눈빛은 언제나 다정했다. 상냥한 갈색 눈이 태오를 내려다보면서 행복한 듯 웃었다. 태오에게 바치겠다며 신난 얼굴로 앨범 타이틀곡인 ‘Hush, hush’에 가사를 붙였다. 차마 눈 뜨고는 못 들어 주겠다고 생각했던 그 가사가 나중에는 마냥 좋았다. 객관적인 판단이 안 섰다.

‘Hush, hush’ 가사를 떠올리면서, 태오는 두 눈을 감은 채 픽 웃었다.

아니다.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니고, 지금 생각해도 그 가사는 좀 웃겼다.

“Hush, my baby…….”

태오는 곡에 영어가 자꾸 섞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유채가 쓴 가사는 정도가 조금 심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베이비와 허니와 달링이 번갈아 튀어나오면서 한국어와 영어로 연인을 찬양하고 사랑을 고백해 댔다. 게다가 문법도 거의 다 틀렸다.

“그다음에 뭐더라. 아. Don’t say a word…….”

그래도 즐겨 불렀다. 그때도 그랬고 요즘도 마찬가지다. 태오는 습관처럼 ‘Hush, hush’를 흥얼거렸다. 우주의 몸으로 불러 보니 확실히 알겠다. 윤태오였던 시절 이 곡을 불렀을 때는, 가사보다 음정이 더 문제였던 것 같다.

이 곡을 불러 줄 때마다 할 말 많은 눈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채가 생각났다.

그래도 제대로 된 음으로 부를 수 있게 된 게 기분 좋아서, 연습실 바닥에 누워서 청승 떨다 말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자꾸 웃음이 나왔다. 실제 가사를 써 준 작사가나 래디언스 다른 멤버들이 들었으면 거품을 물었을 것이다.

그렇게 혼자 ‘Hush, hush’를 부르느라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마지막 구절까지 부르고 나서야 바닥에 거칠게 부딪히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태오를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이 다급했다. 그래서 돌아볼 틈이 없었다.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한달음에 달려든 인영이 태오를 덮쳤다. 얼떨결에 뒤로 쓰러져 바닥에 등을 대고 눕고 말았다. 태오 위에 올라탄 남자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유채였다.

태오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길고 숱 많은 속눈썹이 파드득 떨었다. 태오의 티셔츠 옷깃을 틀어쥔 손등에 푸릇하게 힘줄이 돋았다.

유채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지만 소리를 내지 못했다. 도톰한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는 온몸에 경련이 일 정도로 떨고 있었다. 두려워하듯 떨면서 흔들리는 모습이 왈칵 안쓰러웠다. 태오는 어쩔 줄 모르고 그를 불렀다.

“유, 유채야? 왜 그래?”

간신히 손을 뻗어 유채의 뺨을 쥐었다.

그의 부드러운 살갗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빽빽한 속눈썹에 물기가 맺혔다. 가쁘게 내뱉던 숨결에 흐느낌이 묻어났다.

유채가 다그치듯 물었다.

“너, 누구야?”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네가 왜 그 가사를 알아?”

그제야 퍼뜩 떠올랐다.

‘Hush, hush’를 원 가사가 아닌 유채의 가사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태오밖에 없었다. 심지어 유채조차도 활동기를 거치면서 원 가사가 훨씬 입에 익었다고 했다. 그러나 태오에게 이 곡은 유채의 노래였다.

비명이 나올 것 같아서, 태오는 남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숨이 막혔다.

“아무도 모르는데. 세상에서 우리 둘만…… 둘만 아는데. 그 가사도.”

한쪽 벽면의 창 너머에서 석양이 졌다.

“우리 첫 데이트 했던 곳도.”

눈물에 젖은 유채의 뺨 위로 금색 그림자가 졌다.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턱 끝에 맺혔다가 툭 떨어져 내렸다.

“형하고 나만 알잖아요. 세상에서 우리 둘만 아는 거잖아요…….”

가슴 안쪽이 뻐근할 정도로 아팠다.

“태오 형이에요……?”

절박한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태오는 그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유채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물기가 가득 고인 탓에 연갈색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몸을 반쯤 일으켜, 유채를 꽉 끌어안았다. 커다란 어깨가 구깃한 모양으로 태오에게 안겼다. 판판하고 넓은 등을 쓰다듬었다. 손끝에 툭 튀어나온 날개 뼈와 단단한 근육이 걸렸다.

“나라고 했잖아.”

맞닿은 가슴에서 서로의 심장 박동이 엇박자로 들렸다. 언젠가 그 심장이 느슨히 멎었던 기억이 선연했다. 왈칵 목이 메었다.

“윤태오…….”

유채가 태오의 이름을 입 안에서 가만히 굴렸다. 나지막한 음성이 형편없이 떨렸다. 그래도 그 발음이 사무치게 좋았다. 태오는 자신을 부르는 그의 발음을 언제나 좋아했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뿐인데도 어쩐지 설렜을 때 알았다. 내가 이 꼬마를 좋아했구나.

덕분에 태오는 유채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만 사 년을 꼬박 기다리며 참았다. 소년은 정말 늦게도 컸다.

그렇다고 유채를 똑같이 사 년이나 기다리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 유채야. 내가 너무 늦었지.”

소곤거리듯 대답했다.

유채의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아 주려 했다. 그러나 유채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어깨를 떨면서 봇물을 터뜨리듯 끅끅거리고 울었다. 훌쩍거리면서도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목 안쪽에 꽉 찬 물기를 삼키면서 간신히 말했다.

“내가 기다린다고 했잖아요.”

헤어지던 날, 유채는 기다려도 되냐고 물었다. 태오는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래도 유채가 기다릴 것을 알았다.

그래서 찾아왔다. 제 손으로 잃어버렸던 소년을 위해서.

“형, 나는, 기다리는 거 잘해요.”

유채의 커다란 손이 태오의 뒤통수에 닿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그는 태오를 제 쪽으로 당겼다. 입술에 촉촉하고 폭신한 살갗이 닿았다. 말캉한 혀끝이 벌어진 입 안쪽을 파고들었다. 젖은 속눈썹이 뺨에 닿아 간지러웠다. 깊은 입맞춤 끝에 태오는 눈을 떴다. 숨결이 닿는 곳에 유채가 있었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

그러자 마주한 눈이 느릿하게 깜박거렸다.

유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가 천천히 물결처럼 번졌다. 태오를 향해 갸름하게 접히는 눈매가 선명하고 다정했다.

긴 속눈썹에 여전히 눈물이 맺힌 채로 유채는 눈부시게 웃었다.

***

어둠이 내린 거리에는 인적이 없었다.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그들의 발걸음 소리만 이따금 울렸다.

태오는 제 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눈앞에 비친 유채의 모습은 여름밤이 만들어 낸 환각 같았다.

“유채야.”

그래서 작게 불러 보았다. 목소리가 까슬하게 갈라진 채였다.

유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부드럽고 선명한 이목구비와 짙은 속눈썹 위로 그물 같은 그림자가 졌다. 태오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앳되고 다정했다.

“네, 형.”

유채가 얌전히 대답하면서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았다. 뺨을 발긋하게 붉힌 채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 청순한 얼굴 위로, 눈썹을 구기면서 욕을 내뱉던 유채의 표정이 문득 겹쳐 보였다. 태오는 무심결에 웃고 말았다. 유채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조곤조곤 물었다.

“왜 그래요, 형?”

“아니……. 아무것도 아냐.”

이미 다 들켰는데도 유채는 여전히 아기새이고 싶었나 보다. 나긋하게 구는 게 귀여웠지만 빤히 보이는 내숭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태오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수줍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 안쪽이 간지러웠다.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헛기침하면서 말을 돌렸더니 유채가 눈을 깜빡거렸다. 태오의 질문에 당황한 눈치였다. 유채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집에요……. 형 혹시 가기 싫어요?”

“집? 집에 가는데 왜 걸어가?”

래디언스 숙소까지 걸어가기에는 다소 멀었다. 태오는 명태가 태워다 주었지만 유채는 혼자 왔을 테니 주차를 외부에 해 두었나 싶었다. 의아한 얼굴로 두리번거리자,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유채가 머뭇머뭇 말했다.

“숙소 말고 형 집이요.”

“아, 그래? 내 집?”

내가 집이 어딨지?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 팔아서 우주의 빚부터 갚았을 터였다. 그러나 유채는 태오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쌕 웃었다. 긴 눈매가 반달처럼 귀엽게 접혔다.

“싫은 건 아닌 거죠?”

“응? 어…….”

유채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어리둥절했지만, 태오도 유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걷는 걸음마다 손가락 끝이 유채의 손등에 닿았다. 그때마다 스치듯 온기를 느꼈다. 그러니 어딜 가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익숙한 아파트 단지로 접어들었을 때, 태오는 걸음을 멈췄다. 반걸음쯤 앞섰던 유채가 태오를 돌아보았다.

“……이 집을 그대로 뒀어?”

태오가 살았던 아파트였다. 태오가 아직 윤태오였던 시절, 태오는 이곳에서 보낸 시간 대부분을 유채와 함께했었다.

***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마주 보고 선 현관문 두 개가 눈앞에 나타났다. 제가 살았던 집으로 향하다가 잠시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앞집에 살던 초등학생은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예리 아직도 저기 살려나?”

“누구요?”

이름을 알아듣지 못한 유채가 눈썹을 구겼다. 순하고 예쁘게만 굴다가 모처럼 심통이 난 표정이 반가웠는데, 태오의 시선을 눈치챈 유채가 후다닥 얼굴을 폈다. 금세 청순한 얼굴이 되었다. 태오는 어이가 없었다.

“너 왜 아직도…….”

내숭 떠냐고 구박할 틈도 없이, 유채가 초조한 얼굴로 채근해 댔다.

“예리가 누군데요? 앞집 살아요? 형 좋아하던 애예요? 왜 그렇게 아련한 눈으로 저 집을 봐요?”

“아련한 눈이 뭔데?”

쳐다보기만 해도 재수 없다는 말만 유채에게 몇 달이나 들어 왔던 태오는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그래도 일단 차분히 유채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예리는 앞집 살던 애 맞고, 나 좋아하진 않았어. 걔는…….”

초딩이 보기에 이십 대 후반의 영화배우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태오는 무턱대고 래디언스 앨범 천 장을 샀다가 둘 데가 없어서 복도에 쌓아 두었던 일을 떠올렸다. 소장용으로 몇 장만 빼놓고 남는 앨범은 모두 예리네 초등학교에 기부했었다. 그때만 해도 예리는 왜 듣보 앨범을 주냐고 삐죽거렸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래디언스는 초통령이 되었고, 예리는 제가 먼저 찾아와 유채의 포토카드를 요구했다. 태오는 괜히 발끈해서 유채만 뺀 나머지 멤버들의 포토 카드를 안겨 주었다가 예리를 울렸다.

부끄러운 과거를 떠올리면서 태오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나 말고 너를 좋아했지.”

“저요?”

유채는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픽 웃었다. 태오의 집에 드나들면서 만났던 앞집 꼬마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아, 그 초딩. 이사 갔을걸요. 저만 보면 도망가더니 저 좋아한 거였어요?”

“그랬어? 너 좋아하는데 왜 도망갔지. 너 또 인상 쓰면서 욕했어?”

“제가 언제요……?”

몇 년간 연기가 일취월장한 유채가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달간 지켜본 게 얼마인데 새삼스러운 내숭 시도인가 몰랐다. 제 눈만 가리면 남들에게 자신도 안 보이는 줄 아는 어린애 같아서, 태오는 푸시시 웃어 버렸다.

“됐어. 집에 들어가자.”

태오는 돌아서면서 터치패드를 툭 쳤다. 20xx0101. 무심코 번호를 누르자마자 찰칵,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열린 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실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지난 삼 년이 조금도 흐르지 않은 듯, 그곳에는 태오가 유채와 함께 보낸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등 뒤에서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형 맞네요.”

유채는 태오와 처음 사귀기로 했던 날로 설정된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다. 눈가가 조금씩 뜨거워졌다. 목 안쪽에서 왈칵 물기가 차올랐다. 태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꾸했다.

“내가 네 우주 해 준다고 했잖아.”

목뒤에 말캉한 감촉이 닿았다. 목덜미 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는 입술이 뜨거웠다. 유채의 가슴팍에 등을 겹쳤다. 단단한 팔이 태오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

유채는 태오가 남긴 건물들을 아무것도 팔지 않았다고 했다. 당연히 몇 개는 이미 사라졌으리라고 생각했던 태오는 당황한 나머지 더듬거리면서 물었다.

“그걸 왜 안 팔았어? 그럼 세금은 어떻게 냈는데?”

“정산 당겨 받고 대출 받고.”

우주도 정산을 한참 당겨 받았다더니 멤버들마다 빚쟁이였다. 게다가 태오가 남긴 유산 규모를 생각했을 때, 유채가 빌린 금액은 우주의 빚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컸을 것이다. 태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걸 어떻게 갚았는데?”

유채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상큼하게 대꾸했다.

“아직 못 갚았는데요?”

“…….”

태오는 지난 몇 달간 지켜보았던 유채의 생활을 떠올렸다. 유채는 늘 새벽부터 숙소를 나서곤 했고, 스케줄이 밀릴 땐 들어오지 못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그런 날은 밴에서 대충 눈을 붙인다고 들었다. 언젠가는 태오가 잠이라도 제대로 자야 하지 않겠냐고 걱정했다가, 꿈에 너 튀어나올까 봐 재수 없어서 잠도 안 오니까 네 걱정이나 하라는 말을 들었다…….

불과 어제까지의 유채를 떠올린 태오가 헛기침을 했다.

유채가 왜 그렇게까지 일하나 했더니 갚을 빚이 많은 거였다. 삼 년간 유채가 어떻게 살았을지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이런 생활을 시키려고 유산을 남긴 게 아니었다.

“언제 다 갚으려고 그래. 그냥 건물 하나 팔지.”

그러자 유채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가 금세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급히 웃느라 입 끝이 파드득 떨렸다.

“형한테 돌려줘야죠.”

“그래서 안 팔고 버틴 거야? 나한테 돌려주려고?”

“……네…….”

유채가 고개를 푹 숙였다. 동그란 정수리가 눈앞에 드러났다. 곧게 뻗은 흰 목덜미가 애처로웠다.

“미친 소리라는 거 아는데…… 그래도 형이 돌아올 거 같아서.”

어떤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태오는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던 유채의 텅 빈 눈빛을 떠올렸다. 지난 삼 년간 그런 눈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심장이 조여들었다.

유채가 눈을 내리깐 채 말을 이었다.

“형이 왔는데 집이 없으면 안 되니까.”

태오는 이미 한 번 죽었다. 돌아올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유채는 태오의 흔적을 모두 남겨 두었다. 간절한 심정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유채 덕분이었는지도 몰랐다.

태오는 안쓰러운 눈으로 팔을 뻗었다. 손안에 유채의 뺨을 쥐었다.

“그랬어?”

다정하게 대꾸했다. 유채가 고개를 숙인 채로 끄덕끄덕했다. 태오의 손끝에 닿은 뺨이 촉촉하게 젖었다.

“그럼 다른 건물이라도 팔지.”

그러자 유채가 울먹울먹 말했다.

“형 일하는 거 싫어하잖아요. 월세로 생활하고 싶어 할 거 같아서…….”

“어어…….”

애틋한 순간에 갑자기 머쓱해진 태오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윤태오였던 시절, 자신이 어떻게 지냈었는지 태오조차 잊고 있었다. 유채가 보기에도 예전의 태오는 반백수였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우주의 몸에서 눈뜬 이후로는 줄곧 최선을 다해 살았다. 태오는 조금 억울했지만 이 와중에 따져 묻기도 무안했다.

그래도 유채가 굳이 이렇게 바쁘게 살 필요는 없었다. 태오는 엄지로 그의 뺨을 슥슥 닦아 주었다.

“그거 없어도 되니까 팔자. 앞으론 편하게 지내.”

그 김에 우주 빚도 좀 갚고…… 라는 생각도 슬며시 끼워 넣었다. 그러나 유채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휙휙 저었다.

“형이 남긴 건데 어떻게 팔아요.”

어이가 없어진 태오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유채가 홀린 듯한 눈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눈물이 멎어 있었다.

멍한 얼굴이었지만 옅은 색 눈동자에 투명한 빛이 비쳐 들었다. 그에게 시선을 맞추면서 태오는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남긴 게 왜 필요해?”

“아…… 그런가.”

유채는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했다. 말간 얼굴에 그제야 해사한 웃음이 번졌다. 태오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더니 제 품 안에 답삭 당겨 안았다. 태오의 뺨에 입술을 꾹 누르더니 우물우물 불렀다.

“태오 형.”

말캉한 감촉이 간지러웠다. 태오는 어깨를 움츠리면서 웃었다. 명란젓처럼 도톰한 입술이 끈질기게 태오를 좇았다. 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진 채였다.

“응.”

“윤태오.”

“그래.”

“태오야?”

“까분다.”

한번 봐줬더니 맞먹으려고 들었다. 몇 달간 반말을 들어 온 덕분에 익숙했지만 그래도 이마를 맞대고 쿵 찍었다. 유채가 아야, 아야 하면서 아픈 척을 했다.

태오는 몸을 일으켜서 유채와 마주 본 채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맞닿은 시선이 반짝거린다. 얼마 만에 보는 화사한 얼굴인지 몰랐다. 이제는 영영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영원히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유채의 입술에, 흰 뺨에, 긴 눈매에,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소나기처럼 퍼붓는 키스를 유채는 가만히 받고만 있었다. 할짝거리는 젖은 마찰음만 조용한 거실에 울렸다. 이내 부드러운 입술이 태오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유채는 태오에게 가슴팍을 밀착해 오면서 입 안의 여린 점막을 살살 훑었다. 그 느낌이 발끝이 곱아들도록 기분 좋았다. 태오는 무심결에 눈을 감았다. 유채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커다란 두 손이 태오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태오는 고개를 살짝 틀었다. 조금 더 키스를 받기에 편안한 자세가 되자, 찰팍거리는 소리와 함께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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