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니까, 우주에게 잘해 줘. 괜히 왕따 논란 나면 곤란해진다.”
“명태 형,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냐? 우리 우주 왕따, 그거 안 했다!”
“알지, 알지. 그래도 어떡해. 우주는 한 명이고 너희는 여럿이잖아.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이겠어. 불화설 날 수도 있고.”
“케빈 억울하다! 케빈도 우주 못 깰까 봐 걱정 많이 했는데!”
“케빈아. 명태 형은 그런 얘기가 아니라 외부 활동 할 때 조심하라고 하시는 거야. 기사 나가고 의혹 생기면 우리도 흔들리는 거 순식간이니까.”
“우웅. 케빈도 안다…….”
“그래. 이신아, 네가 당분간 우주 좀 챙겨 줘. 별 이상 없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워낙 큰일이잖냐. 후유증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야지. 어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네, 형. 걱정 마세요. 그래도 무사하다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래. 우주가 많이 힘들었나 보다. 자살 시도를 할 생각까지 하다니……. 너희들도 앞으로 잘해 줘.”
“형, 형! 정말 저희가 괴롭힌 거 아닙니다!”
“그래그래, 안다니까……. 그리고 이 얘기는 밖으로도 그렇지만 내부에서도 극비니까 회사에서도 말조심해야 해. 대표님이랑 우리끼리만 아는 거다. 알겠지?”
흐릿한 목소리들이 한데 뒤섞여 웅웅거렸다. 태오는 무거운 눈꺼풀을 꿈틀거리다가 간신히 밀어 올렸다. 눈동자 위로 직접 닿는 형광등 빛이 눈부셔서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태오가 깨어난 것을 눈치챈 듯, 그의 침대맡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단번에 부산해졌다.
“우주야, 신우주. 깼어? 아이고, 왜 그랬어. 큰일 날 뻔했잖아.”
어딘지 귀에 익은 이 목소리는 줄곧 ‘우주’를 변호하던 남자의 것이다.
“형, 괜찮으십니까? 정신이 드십니까? 말 좀 해 보세요.”
익숙한 느낌이 드는 어린 음성 하나가 남자의 목소리를 따랐다.
다른 세 사람은 묵묵히 선 채 여전히 말이 없었다. 시야에 초점이 잡히지 않아서 태오는 한동안 느릿하게 눈만 깜빡거렸다.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던 날 이후로 얼마 만에 깨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뻐근하게 아파져 오다가 멈추는 느낌이 그렇게 생생했는데, 누군가 그를 기어코 살려 놓은 모양이었다.
“우주 형……. 깬 거 맞습니까? 왜 이렇게 조용하죠……?”
“우주야, 형 알아보겠어? 어디가 안 좋아?”
“명태 형. 우주 이상하다! 아직도 아픈 거 아니냐? 유채, 우주한테 말 걸어 봐 봐라, 응? 우주 원래 너한테는 말 잘한다!”
“……응.”
그때, 불퉁한 목소리에 짤막하게 대꾸하는 나지막한 음성이 태오의 주의를 끌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멍했던 머릿속이 벼락을 맞은 듯 단숨에 또렷해졌다. 그러나 시력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태오는 윤곽이 불분명한 인영들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으려고 애썼다.
“좀 괜찮냐.”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기다릴 거예요.
언젠가 그 자신이 말했듯, 줄곧 태오가 눈뜨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그는 이번에도 제가 먼저 다가와 태오의 앞에 섰다.
“신우주.”
고작 한 발짝 앞으로 나섰을 뿐인데 부옇게 흐린 시야의 한가운데에 홀로 빛났다.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 모를 그 모습에 정신없이 시선을 빼앗겨, 태오는 그가 부른 이름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유채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훌쩍 큰 모습이었다.
조각을 빚은 듯 유려한 이목구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앞머리를 넘겨 시원한 이마가 반쯤 드러나 있었다. 짙은 눈썹 아래의 연하게 쌍꺼풀진 눈매는 끝이 길었고, 곧게 뻗은 높은 콧날과 옅은 붉은색의 도톰한 입술 곡선이 예뻤다.
깨끗하고 흰 피부는 여전했지만, 결 좋은 머리카락은 예전과 같은 백금발이 아니라 옅은 갈색이었다.
투명한 연갈색 눈동자가 태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동요 없이 정돈된 표정이었다.
“괜찮은 거냐고.”
귓가에 닿는 음성은 태오가 기억하는 목소리보다 조금 더 낮았고, 서늘한 한기가 돌았다. 그를 부를 때면 당연한 듯 담겨 있던 다정함이 조금도 배어나지 않았음에도 태오는 목 안쪽이 꽉 잠긴 듯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태오는 덜덜 떨리는 손을 간신히 들어 올려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유채야.”
주변의 소란이 커졌지만 태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흠칫 들썩인 누군가의 어깨도, 놀란 듯한 얼굴로 다가와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남자도 보이지 않았다. 태오는 고개를 들어, 제가 없는 곳에서 어른이 되어 버린 유채를 눈에 담았다.
창백하게 식은 그의 뺨에는 핏기가 없었다. 까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유채를 향해, 태오는 이미 오래전에 전해야 했던 이야기를 했다.
“미안해.”
시간이 없는 것은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숨을 할딱이면서 남긴 말을 들어 줄 사람이 있었다.
“케빈아. 지금 신우주가 유채한테 미안하다고 한 거야?”
“어……. 어떡하냐, 이신이 형아! 우주 어디 잘못됐나 보다. 큰일 났다!”
“우주 형, 검사 다시 해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혹시 머리에 이상이…….”
웅성거리는 소음과 함께 유채의 눈이 경악으로 커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앞이 까맣게 어두워졌다.
심장이 완전히 멈춘 이후, 삼 년 만에 눈을 뜬 태오는 불이 꺼지듯 잠이 들었다.
***
태오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시험 삼아 손끝을 까닥여 보았더니 움직여지기는 했다. 태오는 고개를 돌려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흰색 천장과 벽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병실 특유의 싸늘한 느낌이 났고, 태오가 누워 있는 침대 외에는 별다른 가구가 없는 것으로 봐서 일인실인 듯했다. 간병인이 구급차를 불렀던 걸까. 태오는 자신이 입원하게 된 경위를 짐작해 보았다. 그러나 두통이 심해져서 오래 생각하지는 못했다.
아파트에서 눈을 감은 것이 끝인 줄 알았는데 여전히 살아 있었다. 다만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았다. 얼마 만에 깨어났는지 알 수 없어도 느낌이 그랬다. 잠깐 눈떴을 때 보았던 유채의 모습이 상당히 변해 있었으니, 어쩌면 몇 년쯤 지났을지도 몰랐다.
생각이 유채에게 미친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유채가 왔었는데.’
호흡이 멈췄던 순간 떠올렸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줄곧 태오의 편에 섰다가 언젠가부터 등을 돌렸던 행운의 여신이 그나마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었던 셈이다.
그러나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간절히 빌었던 게 살려 달라는 뜻은 아니었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와 절반만 남은 얼굴을 갖고 유채를 그리워하기만 하면서 시간을 죽일 자신이 이제는 없었다.
태오는 유채를 행복하게 해 줄 다른 기회를 원했다. 그게 자신이 살아남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갑자기 주어진 여분의 시간에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으.”
상념이 길어지자 또다시 어지럽고 머리가 아팠다. 몸이 생각하길 거부하는 것 같았다. 정신을 못 차리고 앉아 있는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네…….”
무심코 대답해 놓고 태오는 흠칫 놀랐다. 입 밖으로 튀어나온 목소리가 귀에 익숙한 제 음성과 퍽 달랐던 탓이다. 오랫동안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꽉 잠겨서 가라앉았다기에는 지나치게 미성이었다. 그러나 의아해할 겨를도 없이, 태오가 당황하는 사이에 병실 문이 열렸고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간호사와 함께 다가와 섰다.
“일어나셨네요? 기분은 좀 어떠세요.”
“예, 뭐…….”
얼떨떨하게 대답하는 동안 간호사가 다가와 체온과 혈압을 쟀다. 간단한 숫자와 함께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전하는 말을 들으면서 태오는 또다시 제 목소리를 떠올렸다. 태오의 목소리는 나지막한 중저음으로, 나른하고 부드러웠다. 그런데 지금은…….
“후유증도 없으신 것 같고, 바로 퇴원하셔도 될 정도로 상태가 좋으시네요. 그래도 워낙 드문 사례이니 혹시 어디 불편하시면 바로 내원해 주세요.”
“상태가 좋다고요?”
평소보다 한 톤 높아진 데다 소년처럼 깔끔한 미성의 목소리가 신경 쓰였지만 의사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질문부터 나왔다. 태오는 줄곧 심장에 문제가 있었고 숨이 완전히 멎었다가 이제야 깨어났다. 추가 조치가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심장에 아무 문제가 없나요?”
“심장……이요?”
그러나 의사는 도리어 어리둥절해 보였다. 간호사와 짧게 눈짓을 주고받은 후, 그가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심장 쪽이 아프십니까? 뻐근하다거나, 불편하세요?”
심장 마비로 실려 온 환자에게 할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태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동안,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태오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또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남자는 태오를 보자마자 반가운 듯 빠르게 다가오면서 그를 불렀다.
“정신 들어? 불편한 데는 없고? 아이고, 대체 왜 그랬어. 그대로 눈 못 떴으면 어쩔 뻔했냐. 나는 꼼짝없이 너 잘못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선생님, 이제 괜찮은 건가요?”
“이상은 없는데…… 심장 쪽이 불편하다고 하시네요.”
“네? 심장이요? 너 왜 그래. 갑자기 심장이 왜 불편해, 응?”
“…….”
태오는 대답할 말을 잃고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그는 걱정스럽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남자를 잘 알았다. 남자는 유채를 데려다주거나 데려가기 위해 태오의 아파트에 수시로 들렀고, 태오와도 제법 친하게 지냈다. 유채와 헤어진 후에도 얼마간은 유채 소식을 전해 주거나 스케줄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태오가 줄곧 피했기 때문에 연락은 서서히 뜸해졌다. 심장 마비가 오기 전에는 완전히 교류가 끊겼던 사이다.
래디언스의 매니저인 김명태 실장. 태오는 그가 제 병실에 나타난 이유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말을 편하게 하는 사이였던가? 심지어 명태는 태오보다 한두 살 어렸다. 그런데 ‘너’라니?
“‘너’라니요? 지금 저 부르신 거예요?”
생각만 한다는 게 입 밖으로 뱉어 내 버렸다. 그래도 병원까지 와 주었는데 너무 예민하게 대꾸했나 싶어서 말해 놓고 움찔했는데, 뜻밖에도 명태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태오를 덥석 끌어안았다.
“아이고 우주야, 너 그래도 정신이 좀 났구나. 그래그래, 형이 다 잘못했어. 너라고 안 할게. 우주가 부르라는 대로 부를 테니까 말만 해. 아프지만 마라. 응?”
“…….”
명태의 품에 안겨 흔들리면서 태오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왜 여기서 우주의 이름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괜찮아진 듯했던 두통이 다시 시작되었다. 태오의 안색이 나빠진 것을 눈치챘는지, 요란하게 굴던 명태가 금세 조용해지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선생님. 얘가 또 왜 이러죠? 아참, 아까 심장 얘기하셨죠? 우주 심장이 안 좋은가요?”
“그게, 검사했을 때는 이상 없었어요. 수면제를 과다 복용했으니 위 문제면 몰라도. 위세척도 잘 끝났고요.”
“그래도 어딘가 문제가 있긴 있지 않을까요? 우주가 바로 깬 것도 아니고 그때 분명히 사망 선고를 하셨…….”
두서없이 말을 이어 나가던 명태가 태오를 흘긋거리며 곁눈질했다. 태오는 멍한 눈으로 그와 담당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가는 대화 내용을 따라갈 수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심장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도 이상했을뿐더러, 태오는 수면제를 과다 복용한 적도 없었다. 사망 선고를 했다는 것 같은데 자신이 왜 살아 있는 건지도 의문이었다.
게다가…….
“우주라니요?”
명태와 담당의가 동시에 태오를 돌아보았다. 당혹스러운 듯한 시선이 제게 달라붙는 것을 느끼며 태오는 미간을 좁혔다. 바늘로 머리를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끊이지 않았다.
무언가 기억이 나려고 했다. 기억은 금세 눈앞에서 유채의 모습이 되었다.
태오를 내려다보는 차가운 시선과 표정 없이 굳은 서늘한 얼굴.
-신우주.
유채는 분명 태오를 그렇게 불렀다.
목소리가 떠오르자 숨이 가빴다. 태오는 할딱거리면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아무 이상이 없다니 말도 안 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심장 어딘가가 저릿하고 아팠다.
“왜 자꾸 우주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저한테.”
잠시 깨어났을 때의 기억이 점점 더 또렷해졌다. 몇 시간 전, 혹은 며칠 전인 것 같았다. 래디언스의 다른 멤버들이 태오를 둘러싸고 있었다. 래디언스의 매니저인 명태는 그때도, 지금도 병실에 머물렀다. 그들 중에 우주만 없었다.
“신우주가 왜요. 걔도 이 병원에 입원했어요? 자살 시도 했대요? 무사하면 됐지, 그 얘길 왜 저한테 해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두통이 점점 심해져서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거칠어졌다. 그래서 명태가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의사와 눈짓을 주고받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주야?”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태오를 향해 고개를 숙인 명태가 그를 불렀다.
“우주야. 너 왜 그래, 무섭게. 네가 누군지 모르겠어?”
“신우주 환자분, 여기가 어딘지는 아시겠어요?”
‘우주’라고 불렀다.
머리가 지독하게 아팠다. 태오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숨이 점점 더 가빠서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명태가 당황한 목소리로 ‘우주’를 다시 부르고, 담당의가 간호사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또다시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가슴 안쪽이 뻐근했던 익숙한 감각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손끝에 얼굴이 닿는 느낌이 생생해졌다. 태오는 숨을 할딱거리면서 제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뭉그러진 얼굴 반쪽을 가려 놓았던 붕대는 사라지고 없었다. 화상을 입어 거칠어진 살갗도 느껴지지 않았다.
반듯한 이마와 말랑한 피부. 높은 콧날, 부드러운 입술. 손가락에 걸리는 이목구비는 무엇 하나 어색한 것 없이 자연스러웠다.
“거울……. 거울 좀 주세요.”
“거울? 거울은 왜…….”
“빨리요!”
“아, 알았어. 여기, 이거 봐.”
명태가 허둥대면서 손거울을 꺼내 주었다. 태오는 거울을 받아 들고 그 안에 비친 자신을 가만히 쏘아보았다.
태오가 평생 보아 온 모습과 몹시 닮은, 익숙한 얼굴이 거울 속에 있었다.
창백할 정도로 흰 얼굴 안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반듯하게 자리 잡았다. 옅게 쌍꺼풀진 눈매는 동그랗고 컸다. 새카만 눈동자가 거울 너머의 자신을 비춰 내고 있었다. 높은 콧날도, 도톰하고 불그스름한 입술도, 사고 전 태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거울 속의 얼굴은 태오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조금 더 어른스러웠고, 그래서 예전보다 더 태오와 닮아 보였다.
“신우주…….”
태오는 신음하듯 그 애의 이름을 내뱉었다. 손안에 움켜쥐고 있던 거울이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심장 마비가 왔던 날, 태오는 숨이 멎었다.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는 누군가 자신을 살려 놓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윤태오는 그날 죽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태오는 신우주가 되어 있었다.
***
바로 퇴원해도 된다는 말은 취소되었고, 태오는 며칠 더 병실에 머무르면서 몇 가지 검사를 받았다. 그동안 명태는 태오의 상태가 걱정되었는지 줄곧 병실에서 지냈다.
그러나 다른 멤버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에 깨어났을 때 모두 다 모였던 것이 오히려 예외적인 일이었던 듯했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전에는 어떤 내색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태오의 눈길은 어쩔 수 없이 유채를 찾았다. 수시로 병실 문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지켜보던 명태가 안쓰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주야. 섭섭한 거 아니지? 다른 애들도 다 너 걱정해. 그냥 다들 스케줄이 바빠서 그래.”
“안 섭섭해요.”
“어어, 그치? 괜찮지?”
“뭐…… 네.”
그즈음에는 잠깐 깨어났을 때의 기억이 대부분 되살아난 뒤였다. 태오는 제 침대 곁에 나란히 섰던 래디언스 멤버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렸다. 다들 불안한 얼굴로 우주를 걱정했지만 친근하거나 다정하지는 않았다. 스케줄이 바빠서 오지 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가까이 지내지 않아서 어색한 사이로 보였다.
싸늘한 얼굴로 괜찮냐고 묻던 유채의 모습이 특히 그랬다.
그러나 명태의 빤한 거짓말을 굳이 들춰낼 필요는 없었다. 태오는 몇 번이나 확인하듯 묻는 명태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며칠간 명태와 함께 지내면서 태오는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을 수 있었다. 수십 번이나 거울을 들여다보아도 눈앞에 비친 얼굴은 윤태오가 아닌 신우주였으니, 일단은 분위기에 맞춰 보기로 했다. 사실은 내가 윤태오라고 아무리 외쳐도 믿어 줄 사람이 있을까. 이대로 정신과로 옮겨져 진료를 받게 될 것 같았다.
장단을 맞추자니 어떻게든 이 모습에 적응해야 하는데 우주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싸가지가 없다. 윤태오를 닮았다. 유채를 좋아한다. 정보라고는 세 가지 정도가 다인데, 아직 유채를 좋아하는지는 불투명했으니 확실한 사실은 두 개뿐이다. 그런 면에서 래디언스가 데뷔한 이래 줄곧 매니저를 맡았던 명태는 좋은 정보 제공자였다.
“저기, 명태…… 형.”
“응? 어, 우주야. 뭐 필요해?”
“아뇨, 그건 아니고.”
명태 ‘형’ 소리가 나오지 않아 머뭇거리면서 불렀다. 반색하며 돌아보는 얼굴이 조금 상한 것 같아서 고마우면서 미안했다. 직접 겪어 본 바가 있어서 태오도 우주의 성격이라면 잘 알았다. 아무리 명태가 사람이 좋아도 우주를 좋게 봐 주기는 어려웠을 텐데, 뭐가 예쁘다고 병실에 상주하면서 수발을 드나 싶었다.
“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제가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어? 아, 그게……. 내가 너 발견하고 바로 앰뷸런스 불러다 응급실로 데려왔는데, 선생님이 사망 선고를 하셨거든, 분명히.”
“네.”
“그래서 대표님한테도 알렸고 너희 어머니께도 알렸는데 두 분 다 안 오신다고 하셔서…… 아이고,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미안.”
“아니에요, 신경 안 써요. 계속 말씀하세요.”
“으응?”
명태가 수다쟁이라는 것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었다. 부추기려는 의도에 입꼬리를 당겨서 웃어 보였더니, 명태가 놀란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태오는 한껏 상냥한 목소리로 조곤조곤했다.
“그래서요? 장례를 치르려고 하셨어요?”
“어? 어어. 우주야, 너 근데 진짜 괜찮냐……? 목소리가 왜 그래?”
“……대답이나 해 주세요.”
아무래도 상냥했던 게 문제였던 것 같다. 태오가 불퉁하게 대꾸하자, 명태는 바로 안심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바로 장례 절차를 시작하려고 했지. 애들도 다 병원으로 오고, 이제 곧 기사도 내려고 했던 참이었는데…… 네가 갑자기 숨을 쉬는 거야.”
“아…….”
우주의 몸을 일방적으로 빼앗은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이미 우주는 죽었고, 몇 시간이 지났을 때 태오가 비어 있는 우주의 몸에 들어오게 된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쯤 우주는 어디로 갔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해졌다. 태오가 이 몸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주는 제대로 추모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 애가 정말로 죽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알지 못했다.
씁쓸한 기분에 입맛이 썼다. 명태가 초조한 얼굴로 곁눈질을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태오는 눈을 내리깐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우…… 아니, 제가 왜 자살 시도를 했어요?”
“어어?”
태오는 마지막으로 만났던 우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유채의 발목을 잡지 말라고 소리 지르면서 이번에는 제가 유채와 잘해 보겠다고 선언했던 스무 살짜리의 표정은 당당했다. 제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우주는 래디언스 데뷔 때부터 그랬다. 몇 년이나 함께 연습해 온 연습생들 틈에 갑자기 나타나 유채의 센터 자리를 빼앗고도 당연한 듯 굴었다. 회사는 언제나 우주의 편에 섰다. 유채는 그에 대해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지만, 신우주와 신우필 대표의 비슷한 이름으로 볼 때 그 애가 AMJ 그룹 일가이리라고 태오는 짐작하고 있었다.
우주가 줄곧 좋아했던 유채나 래디언스 멤버들, 심지어 래디언스 팬들까지도 우주를 싫어했다. 그러나 우주가 그런 일을 신경 쓸 성격 같지도 않았다. 신경을 썼다면 태오의 아파트에 쳐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때 태오는 순간적으로 유채와 우주가 연인이고, 자신이 그들 사이에 끼어든 제삼자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우주가 자살이라니. 태오가 잠든 사이에—사실은 죽은 사이에, 였지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되었던 걸까.
아무래도 민감한 화제였는지 명태의 표정이 금세 흐려졌다.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태오의 안색을 이리저리 살폈다.
“우주야. 너 정말 기억이 안 나? 이제 네가 누구인지는 알겠어?”
“음, 네. 신우주요. 래디언스 멤버고.”
그리고 싸가지가 아주 없고 유채를 좋아하죠. 태오는 뾰족하게 튀어나오려는 뒷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네가 그, 요즘 계속 상황이 안 좋았잖아. 그건 기억나?”
“상황이요?”
태오는 눈썹을 찌푸렸다. 우주의 상황이 안 좋아질 만한 일이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보았지만 짚이는 게 없었다.
“상황이 안 좋을 게 뭐가 있어요? 대표님도 우주…… 내 편이고, ‘제왕’도 잘 터졌고, 유채…….”
유채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 입 안이 까끌거렸다. 태오는 애써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유채 상대역으로 영화도 찍었고…….”
몇 달이나 딱 붙어서 촬영을 했으니 사이도 예전보다는 나아지지 않았을까. 태오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TV 속의 시상식장에서 그들은 제법 친밀해 보였다.
그러나 명태는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더니, 탐색하듯 태오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부분 기억 상실증 같다고 하시더니 정말인가 보다. 그건 삼 년 전 일이잖아, 우주야.”
“아…….”
시간이 많이 지났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정말로 삼 년이나 흘렀나 보다. 흠칫 놀라자, 명태가 걱정스럽게 다시 물었다.
“너 그때 이후로 기억이 없어? 회장님 일은 기억나?”
“회장님, 누구요?”
어느 회장님을 말하는 건지 영문을 몰랐다. 태오는 명태가 하는 말을 따라서 중얼거렸다. 그러자 명태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며 울상이 되었다.
“AMJ 그룹 회장님. 네 아버지 말이야. 너 ‘제왕’ 찍고 얼마 안 돼서 돌아가셨잖아. 그 일도 잊었어?”
“……아.”
그제야 회사가 우주를 지나치게 편애했던 일이 이해가 갔다. AMJ 엔터를 운영하는 신우필 대표가 신 회장의 둘째, 혹은 셋째 아들이라고 들었다. 우주는 그의 동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미심쩍은 점이 있었다.
동생이라기에 신우필 대표와 우주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게다가 신우필 대표의 어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별세하셨고, 이후 신 회장은 재혼하지 않았다. 하지만 명태는 분명 우주의 장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 애의 어머니를 언급했었다.
“……아.”
생각을 이어 가다가 어떤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십여 년 전, AMJ 신 회장의 내연녀에 대해 떠들었던 지라시였다. 당시에는 태오도 AMJ 엔터 소속이었기 때문에 관심이 갔었다. 신우필 대표의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실 때였지만, 신 회장이 내연녀가 낳은 아이를 무척 아꼈던 탓에 호적에까지 올렸다고 들었다.
그 아이가 우주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신 대표가 제 장례식에 안 오겠다고 했나 보네요.”
“응? 어…… 그렇지.”
명태가 어색한 얼굴로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버지의 내연녀가 낳은 자식이었으니 신 대표 입장에서는 우주가 예뻐 보일 리 없을 터였다. 그동안 회사가 우주를 그토록 편애하고 밀어주었던 것은 신 대표가 아니라 신 회장의 입김이었나 보다.
우주가 아무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았어도 부모님에게는 사랑받았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태오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가, 우주의 어머니도 장례식에 오기를 거부했다는 말이 떠올라 또다시 불쑥 물었다.
“어머니는요? 어디 계세요?”
“뭐? 우주야, 어머니를 왜 찾아?”
“네?”
어머니를 왜 찾냐니. 태오가 말문이 막혀 입만 뻐끔거리자, 명태가 다급한 얼굴로 태오의 팔꿈치를 덥석 잡았다.
“네 어머니나 새아버지가 찾아오셔도 또 돈 내놓으면 안 돼. 우주야, 너 이제 회사에서 빌리지도 못해. 대표님이 절대 안 해 준다고 하셨잖아. 지금까지 빌린 거 갚으려면 앞으로 몇 년은 정산도 못 받을 텐데 어머니한테 또 뜯기면…… 아니, 그, 또 드리면 절대 안 돼. 너 유산도 한 푼도 못 받았다며. 형 말 알아들어?”
“예……?”
태오는 어느 쪽에 더 충격을 받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신 회장과 세기의 불륜…… 사랑……을 했던 우주의 어머니가 그새 재혼을 하셨다는 점? 신 회장 사후에 우주의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우주를 뜯어먹…… 우주에게 기대 살았다는 점? 그런데도 우주의 장례식도 팽개치는 분이라는 점? (아마 우주는 어머니를 닮았나 보다.) 우주에게는 이제 백도 없고 유산도 없고 정산받을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
“괜찮아, 우주야. 개인 활동은 못 해도 일 년에 한 번은 다 같이 컴백할 테니까 그때 바짝 벌어서 갚으면 돼. 그냥 앞으로 더 드리지만 마. 응?”
태오가 패닉에 빠진 이유를 다르게 짐작한 명태가 그의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달랬다. 그러나 그다지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태오는 더듬더듬 물었다.
“개인 활동은 왜…… 왜 못 해요? 영화나 드라마는요? ‘제왕’에서 연기 괜찮았던 것 같던데…….”
‘제왕’을 보지는 않았지만 우주의 연기에 대한 악평이 들려오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개인 활동을 할 만한 발판은 충분히 되었을 텐데.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우주야. 영화나 드라마나 감독님들이 아무도 너 안 쓰겠다고 그러셨잖아…….”
“아…….”
“예능도 그렇고…….”
“…….”
“CF도 안 들어온 지 꽤 됐는데. 회장님 돌아가신 뒤에는 대표님도 너 안 도와주시고. 그러니까 성질 좀 작작 부리지…… 아, 아니다. 미안. 근데 너 정말 다 잊어버렸어?”
“……”
태오는 이마를 짚었다. 도련님은 끈이 끊겨서 낙하산에서 굴러떨어진 지 오래인 모양이었다. 갑작스레 정보가 쏟아져 버린 탓에 어느 소식이 가장 충격적인지 정말로 가늠이 안 됐다. 우주가 영화판에서도 드라마판에서도 예능판에서도 쫓겨날 정도로 성질을 부려 댔다는 것? 그런 주제에 갚아야 할 빚이 산더미라는 것?
아니면…… 그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신우주가 아니라 윤태오라는 것?
***
그 후로 며칠간, 태오는 검사를 받기 위해 이리저리 불려 다니면서 틈틈이 우주의 재정 상태 파악에 나섰다. 휴대폰 잠금을 지문으로 푼 뒤 은행과 증권사 계좌를 모두 뒤져서 확인했더니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중 한 계좌에서는 잔뜩 매입해 놓은 주식 중 한 종목이 연일 하한가를 찍고 있었다. 태오는 기겁할 듯 놀라서 남은 주식을 모두 매도해 버렸다.
명태에게 부탁해서 회사에 갚아야 할 금액과 그동안 몇 년 치의 정산서를 받아 보았더니 더 가관이었다. 래디언스는 몇 년간 줄곧 톱 티어 아이돌이었고, 해외 투어도 자주 다녔기 때문에 정산금이 적지 않았는데도 빚이 산더미였다. 은행 계좌 기록으로 확인해 보았더니 어머니에게 보낸 금액도 만만치 않았지만 카드값이 어마어마했다. 도대체 뭘 어떻게 써 대면 이 지경이 될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빚이 이렇게 많은데 개인 활동도 못 하면 대체 이걸 언제 다 갚아.’
아무래도 우주가 자살까지 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 극단적인 재정 상태가 한몫한 것 같았다. 평생 도련님으로 살아온 우주가 이런 상황을 견뎌 낼 수 있었을 것 같지 않았다. 태오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줄곧 눈 빠지게 들여다보았던 휴대폰을 내려놓고 결론을 내렸다.
신우주가 태오에게 똥을 주었다.
“우주야, 퇴원 수속 끝났어. 숙소로 가자. 근데 걸을 수 있겠어? 휠체어 빌려 올까?”
“아니에요. 걸을 수 있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주에게 멀쩡한 얼굴과 두 다리가 남아 있다는 거였다. 태오는 제 다리로 걷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처음 얼마간은 걸을 때마다 비틀거렸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는 동안 동작은 금세 자연스러워졌다.
태오는 침대에서 내려와 두 다리로 버티고 똑바로 섰다. 병실 가운데 걸린 거울 너머에서 신우주의 단정한 얼굴이 태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음……. 똥이라고 해서 미안하다, 우주야.’
이 병실을 나서는 순간부터 태오는 우주의 인생을 대신 살게 될 것이었다. 멀쩡한 얼굴과 두 다리, 그리고 남은 인생을 통째로 받았으면서 똥을 주었다고 불평해 댄 게 역시 마음에 걸렸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서는 행복해라. 성질도 좀 죽이고.’
거울 너머의 자신, 혹은 우주를 향해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은 빚을 갚느라 고군분투하겠지만, 그래도 살 수 있다는 게 기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
제 몸에 태오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우주는 아마 영혼 상태로도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자신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생전의 우주를 떠올리면서 태오는 씁쓸한 마음으로 그에게 사과를 전했다.
태오는 명태와 함께 병원 밖으로 나섰다. 죽어 있었던 기간이 삼 년, 그리고 교통사고 이후 아파트에서만 지냈던 기간이 일 년 남짓. 무려 사 년 만에 두 발로 밟는 땅이 단단해서 조금 울컥해졌다.
바깥세상은 그대로였다. 태오가 사고 나기 전, 한창 ‘제왕’을 촬영하면서 나주 근방에서 지낼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한창 여름이라서,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볍고 뺨에 닿는 뜨거운 공기에 습기가 가득하다는 점만 달랐다.
‘진짜 돌아왔네.’
지난 삼 년간의 일은 기억에 없다. 태오는 죽었다가 깨어났다기보다는 아주 오래 잠들었다가 눈을 뜬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도 제 아파트로 돌아가면 유채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웃어 줄 것 같았다.
‘유채…….’
그러나 상관없었다. 지금도 래디언스 숙소에 가면 유채가 있을 터였다. 말끔한 얼굴과 두 다리가 있고 유채와 함께할 수 있었다. 태오는 더 바랄 게 없었다. 우주가 남겨 놓은 막대한 빚도, 처음의 충격이 지나가고 나니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소처럼 일해서 갚으면 되지 뭐.’
소처럼 일할 만한 기회가 주어지느냐는 조금 다른 문제였지만 태오는 태평하게 생각했다.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하면 된다. 우선 유채를 만나서 자신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리는 게 첫 번째였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유채가 태오를 믿어 주지 않을 리는 없었다. 울먹거리면서 자신을 끌어안을 유채를 떠올리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숙소로 향하는 걸음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
유채가 태오를 믿어 주지 않을 리 없지만, 우주를 믿어 줄 리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래디언스는 그사이 숙소를 옮겼다. 태오가 알던 곳은 방 세 개에 화장실이 하나 있는 오래된 아파트였는데, 명태를 따라서 도착한 숙소는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주상 복합으로 예전 숙소보다 훨씬 넓었다.
유채가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새로웠다. 태오는 신기한 듯 숙소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사했나 보네요. 전에는 그렇게 지저분하더니, 청소도 잘돼 있고.”
“응? 이사한 게 언젠데. 네가 기억하는 게 삼 년 전까지라고 했나? 그동안 두 번이나 했어.”
“두 번이나? 왜요?”
“야, 네가 물으면 어떡해? 너 때문이잖아……. 하긴, 기억도 없는 애한테 내가 무슨 소리를 하냐.”
“제가 또 미안할 짓 했어요?”
“너 왜 그렇게 얌전하게 물어봐? 우주야, 요즘 나 너무 겁나. 네가 너무 착해져서 이상해. 소름 돋은 거 보이지?”
“…….”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는데 명태는 해쓱하게 질린 얼굴로 팔뚝을 보여 주었다. 태오가 보기에는 그냥 원래 피부가 안 좋은 것 같았다.
태오가 멀뚱하게 그를 바라보자, 명태가 답답한 듯 두툼한 입술을 달싹거렸다.
“지지난번 숙소 뺄 때 네가 혼자 나가 살겠다며. 그래서 네 명 살기에 적당한 아파트로 구했는데 네가 갑자기 다시 들어오겠다고 했잖아.”
“그걸 또 들어줬어요? 제 발로 나간 거 그냥 혼자 살게 두지.”
“내 말이 그 말…… 아니, 너 근데 말하는 게 진짜 좀 이상하다?”
기억이 없다고 해서 사람이 성격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삼 년간의 기억이 사라졌다지만 우주는 삼 년 전에도 싹수가 없었다. 갑자기 자기 객관화가 잘될 리는 없는 거였다.
태오는 조금 더 건방져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신중하게 입을 뗐다.
“아니, 제 말은…… 누가 뭐 매달렸어요? 받아 줘 놓고 왜 불만이에요?”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한다. 당장 아파트 전세 빼 줘야 해서 갈 데가 없다는데 그럼 어떡하냐, 그럼?”
“갈 데가 왜 없어요. 벌어 놓은 돈이 얼마…… 없겠구나.”
“으응. 그때쯤 네 어머니 재혼하시면서 신혼집 해 드리느라 전세 뺐을 거야, 아마.”
“호…… 효자네.”
호구네. 하려던 말을 삼키고 둘러댔다. 어머니한테 한 것의 반만큼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했으면 일감이 모두 끊기지는 않았을 텐데.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가끔 어이가 없을 때가 있었다. 태오는 한숨을 쉬면서 말을 돌렸다.
“그렇다고 이사를 왜 또 해요? 어차피 두세 명이 방 하나 쓸 텐데, 그냥 살던 아파트에서 살면 되지.”
“우주야…… 네가 좁아터진 닭장 같은 쓰레기통에서 못 산다고 당장 이사하라고 했잖아. 대표님이 지원 안 해 주신다는 거 설득하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아휴, 됐다. 어차피 너도 잊어버렸는데 이 얘기는 그만하자.”
“좁아터진 닭장 같은 쓰레기통…….”
제 발로 나간 숙소에 다시 들어오면서 저런 소리를 하다니 우주는 정말 꿋꿋하게 일관성이 있었다.
새 숙소에는 방이 네 개 있었다. 하나는 멤버들이 다 함께 쓰는 드레스 룸이었고, 방 세 개를 두 명씩 나누어 사용한다고 했다. 유채와 케빈, 우주와 라윤이 각각 룸메이트였고, 이신은 혼자 지냈지만 명태나 다른 로드 매니저들이 자고 갈 때가 많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태오는 집 구경을 하듯 아파트를 살펴보았다. 우주가 독방을 쓰지 않고 라윤과 함께 생활했다는 게 뜻밖이었다. 태오는 라윤의 군대식 말투와 자신을 향한 동경 어린 눈빛을 떠올리면서 잠시 그를 가엾어했다.
“여기가 유채랑 케빈 방. 유채가 싫어하니까 애들 없을 때 또 들어가지 마. 유채 침대에서 자다가 걸려서 얻어맞지 좀 말고.”
“…….”
스토커도 아니고 왜 유채 침대에서 자……. 태오도 유채의 침대를 보는 순간 뛰어들어서 눕고 싶었지만, 남자 친구인 자신과 우주의 입장은 확연히 다른 거였다.
헤어진 지 사 년이나 되었으니 이제는 남자 친구도 아니긴 했지만.
“유채가 때리기도 해요?”
잠시 씁쓸한 생각을 했다가, 명태가 한 말이 문득 마음에 걸려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명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유채가 천사야? 네가 그렇게 유채만 보면 주먹질부터 하는데 맞고만 있게? 너 진짜 그러지 마. 그러다 유채가 맘잡고 때리면 너 실려 가.”
“…….”
유채와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긴 한 걸까?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가 갑자기 걱정되기 시작했다.
“제가 유채를 왜 때려요…….”
심란해진 태오가 시무룩하게 대꾸하는데, 현관 쪽에서 키패드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무심코 돌아본 태오의 시야가 순간 흐릿해졌다.
밝은 여름의 한낮이었다. 반투명한 흰색 커튼을 쳐 놓았는데도 전면 유리창으로 비쳐 드는 햇살이 여전히 강렬해 실내가 온통 환했다. 그 한여름의 햇볕 가운데 유채가 불쑥 나타났다.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꿈속인 것 같았던 며칠 전의 만남을 제외한다면 사 년 만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만남에 놀라서, 태오는 눈을 크게 뜬 채 멍한 얼굴로 굳어 버렸다.
스물두 살이었던 유채는 스물여섯이 되었다.
그사이 그는 예전보다 키가 조금 더 컸다. 우주의 신체는 태오보다 몇 센티 작았기 때문에 눈높이를 맞추려면 한참 올려다보아야 했다.
여름 햇빛이 유채의 흰 얼굴에 미끄러진 채 선명해서 눈이 부셨다.
트레이닝팬츠와 흰색 반팔 티셔츠 하나만 걸친 유채의 목덜미와 뺨은 열기에 달아오른 듯 발긋했다. 날렵한 턱에 맺혔던 땀이 후드득 떨어져 가슴팍을 적셨다. 이 더운 날씨에, 밖에서 뛰고 온 듯했는데도 유채에게서는 상쾌한 향이 났다. 예전과 다름없이 청순하고 단정한 얼굴이 태오를 표정 없이 내려다보았다.
“유채야.”
신음하듯 유채를 불렀다. 얼마 만에 불러 보는 이름인지 몰랐다. 태오는 꿈에서도 제 손으로 상처 입혀 내쫓은 유채를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생애는 다를 것이었다.
유채는 더 이상 예전의 소년이 아니었고, 태오는 그를 영영 잃어버렸지만, 그를 위해 다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태오는 유채를 행복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유채야, 나야.”
태연한 척하려고 해도 손끝이 떨렸다. 식은땀이 배어난 손바닥이 축축해서 바지에 땀을 닦았다. 그래도 태오는 제 목소리가 나지막하고 여유롭길 바랐다. 유채가 사랑했던, 예전의 윤태오처럼.
“뭐?”
그러나 자신을 부르는 태오의 목소리에 유채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태오에게 닿는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야, 우주야. 너 또 왜 그래. 유채 괴롭히지 말고 이리 와. 유채야, 우주 이제 막 퇴원했으니까 너도 좀 참고…… 응?”
뒤에서 명태가 초조한 듯 태오를 불렀다. 그럴수록 태오의 가슴은 답답해졌다. 누군가 제 목을 조르는 기분이었다. 태오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고 유채에게 한 걸음 다가가 섰다.
“나 모르겠어? 유채야, 나 돌아왔어.”
“무슨 수작이야.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데?”
차가운 목소리가 허공에 툭 뱉어졌다. 태오가 다가간 만큼 유채도 그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와 바투 붙었다. 내려다보는 눈빛이 형형하고 날카로웠다.
“살았으면 됐지, 축하라도 해 줘?”
“유채야.”
“너는, 씨발. 명도 질기다.”
“…….”
“네가 난도질해 놓은 사람은 말도 안 되게 금방 죽어 버렸는데 너는 왜 숨이 멈춰서도 살아서 돌아와?”
“야, 유채야. 그만해.”
명태가 다급히 다가와 유채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금세 팽개쳐졌다.
태오를 노려보는 유채의 눈동자가 까맣게 가라앉았다. 햇볕에 비쳐 들 때면 투명해져서 금색으로까지 보이던, 옅은 갈색 눈동자가 자취를 감췄다.
“죽으라고 안 할 테니까 눈앞에 나타나지 마. 죽은 듯이 살라고 했잖아. 내 말이 어려워?”
“…….”
“미친 새끼…….”
짓씹어 내듯 욕설을 내뱉은 유채가 태오를 지나쳐 걸었다. 실수로라도 그에게 닿기 싫다는 듯, 태오와는 어깨 끝조차 스치지 않은 채였다.
태오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얇은 티셔츠 아래로 불쑥 튀어나온 날개뼈와 단단한 등 근육이 도드라졌다. 늘씬한 허리 한가운데가 등줄기를 따라 움푹 패어 있었다. 예전보다 조금 더 단단해지고 어른스러웠다. 태오는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끝은 유채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췄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우울과 무기력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
태오는 인정했다. 제가 성급했었다.
태오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연말 시상식에서 우주와 유채는 제법 다정해 보였다. 그러나 보는 눈을 의식한 비즈니스였을 뿐이었나 보다. 사이가 회복되었기는커녕, 오히려 태오가 기억하는 것보다 상황이 더 나빴다.
그러니 우주의 얼굴을 한 태오가 아무리 유채를 설득한다 한들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이 정도일 줄 몰랐는데.’
태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누르면서 한숨을 쉬었다. 우주가 생전에 저질러 놓은 일들을 뒷수습하기만도 벅찬데, 당연히 자신을 믿어 주리라 생각했던 유채까지 예상에서 어긋나 버렸다.
‘하긴 누가 믿겠어. 우주가 또 수작 부린다고 생각하겠지.’
태오는 벽에 걸린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이제 와서 내가 윤태오라고 외쳐 봤자 유채에게 멱살 잡힌 채 정신 병원에 가게 될 것 같았다.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졌다.
“유채야, 그래도 그러는 거 아니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날 알아봐야지.”
그러나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태오는 거울을 노려보면서 중얼거렸다. 거울 속의 우주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우주 형, 퇴원하셨다고…… 거기서 뭐 합니까?”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라윤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거울 앞에서 혼잣말하고 있는 태오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머쓱해진 태오는 거울에서 후다닥 물러나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어, 그냥. 안 들어오고 뭐 해?”
“어……. 들어가도 됩니까?”
“뭐? 네 방이잖아. 뭘 물어봐?”
“아…… 네…….”
그제야 라윤이 주춤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제 방에 들어와 놓고도 불안한 얼굴이었다.
“저기, 이렇게 일찍 퇴원하실 줄 몰라서 제가 방을 못 치워 놨습니다.”
자신의 침대에 엉거주춤하게 앉은 라윤이 더듬더듬 변명하듯 말했다. 태오는 의아한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양쪽 끝에 하나씩 놓인 라윤과 태오의 침대에도, 창가를 차지한 책상 두 개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방 깨끗한데?”
“네?”
라윤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끔뻑거렸다. 태오의 시선을 따라서 방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뇨, 그거 말고 말입니다……. 제가 어제까지 여기서 잤습니다. 그래서 아직 베개랑 이불을 못 치웠는데…….”
“응? 여기 네 방이잖아. 여기서 안 자고 어디서 자려고?”
“네?”
라윤은 이번에야말로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한동안 입술만 뻐끔거렸다. 이번에는 태오가 불안해졌다. 신우주가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형이…… 저랑 같이 자는 거 싫어하셔서 매일 거실 소파에서 잤는데요. 그것도 기억 안 나십니까?”
“…….”
태오는 입 안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쩐지 우주가 룸메이트를 두었다는 게 신기했는데, 역시 제대로 된 룸메이트 사이가 아닌 듯했다. 순한 라윤을 매번 쫓아내고 개인실처럼 방을 써 온 모양이었다.
“그냥 앞으로는 침대에서 자. 안 쫓아낼 테니까.”
“저, 정말입니까?”
“그래. 멀쩡한 침대 두고 왜 소파에서…… 아니, 아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지내. 불편하게 자면 다음 날 컨디션도 나빠. 체력 관리 해야지.”
“네……? 네…….”
우주 입에서 나온 소리가 맞는지 수상하게 여기고 있을 게 뻔했다. 하지만 우주인 척하기 위해서 라윤을 밖에서 자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설마 이 정도 일로 정신과에 끌려가지는 않겠지. 태오는 짧게 혀를 차면서, 제대로 대꾸도 못 하고 얼어붙은 라윤을 뒤로하고 침실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유채가 아일랜드 식탁 앞에서 생수를 마시고 있었다. 아침에 운동하고 오는 것 같더니, 낮잠을 자다가 일어났는지 머리가 까치집이었다. 그러나 말캉한 뺨은 붓기도 없이 푸석했고, 눈 밑에는 거뭇하게 그늘이 졌다. 푹 자고 일어났을 때의 유채는 언제나 갓 쪄 낸 찐빵처럼 통통했는데.
당분간은 유채에게 거리를 두었다가 천천히 접근해야겠다고 생각한 지 십 분도 되지 않았다. 태오는 제 결심을 순식간에 잊어버린 채 유채에게 다가가 섰다.
“유채야. 잠 못 잤어? 얼굴이 왜 그래.”
“뭐?”
“오늘 스케줄 있어? 들어가서 조금 더 자면 안 돼? 너무 피곤해 보이는데.”
저도 모르게 안쓰러운 얼굴이 된 태오가 유채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기려고 했을 때였다. 탁, 소리와 함께 손등에 통증이 일었다.
“아…….”
“손대지 마.”
“아, 미안.”
“입 다물어.”
“…….”
어느새 표정이 사라진 유채의 흰 얼굴이 가면 같았다. 어제 보여 주었던 격한 감정마저도 자취를 감춘 채였다. 짤막하게 돌아온 목소리는 무감하고 서늘하기만 했다. 물끄러미 태오를 내려다보는 연갈색 눈동자가 투명한 유리알처럼 빛났다. 그 모습이 빚어낸 자기 인형처럼 차가워 보였다.
태오는 또다시 입을 다문 채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너희 또 거기서 뭐 해.”
현관문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귓가에 닿은 차분한 음성은 이신의 것이었다. 그보다 한 톤 높은, 발랄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아이, 우주 살아났냐? 또 유채 괴롭히는 거 보니까 팔팔해졌나 보다!”
괴롭히다니. 오히려 유채가 자신을 괴롭힌 게 아닌가? 태오는 유채의 일이라면 뭐든지 편을 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누명을 쓰는 건 억울했다. 눈썹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아니, 아닌데…… 요. 유채 안 괴롭혔어요.”
우주가 케빈과 이신에게 존댓말을 썼던가?
딱 한 번 래디언스 멤버들을 다 함께 만났을 때를 떠올리면서 우주의 말투를 어색하게 흉내 내 보았다. 그러나 케빈과 이신의 표정에 갑작스레 금이 쩍 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틀린 것 같았다. 케빈이 이신의 옷자락을 움켜쥐면서 호들갑스럽게 굴었다.
“형아, 우주 진짜 이상하다. 유령인가?”
“무슨 말이에요. 유령 아니에요…… 아니야.”
아니, 유령 맞나? 태오는 지금 제 상태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태오의 순순한 대꾸에 케빈은 더 경악한 얼굴이었다.
“히익! 진짜 왜 저러냐? 막 존댓말 하고 징그럽게 군다! 진짜 귀신 들린 거 아니냐?”
“…….”
삼 년간 죽은 상태였다가 우주의 몸에 들어왔으니 정확히는 귀신 들린 게 맞기는 했다. 케빈이 은근히 예리한 데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태오는 앞으로 그냥 보는 사람마다 반말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우주의 성격에 그게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깨끗해진 얼굴이나 멀쩡한 두 다리를 갖게 된 것은 감사할 일이었지만, 대본도 없이 우주의 성격에 맞춰 연기하는 게 쉽지 않았다.
“저기, 시끄러우니까…… 좀 닥……쳐.”
“휴! 우주 맞다!”
세 번째 시도에 드디어 맞췄다. 케빈이 눈에 띄게 안심하는 모습에 태오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신도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오히려 이신은 이제 막 퇴원한 우주보다 유채를 더 신경 쓰는 듯했다. 유채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안색을 살피는 표정이 걱정스러워 보였다. 하긴, 태오가 이신이라도 당연히 우주보다는 유채를 챙길 것이었다.
“유채야. 모처럼 스케줄 없는데 푹 자지 않고 왜 일어났어. 또 그 꿈 꿨어?”
“아냐.”
“뭐가 아냐. 계속 잠을 못 자서 어떡하냐. 눈 좀 더 붙여. 내일부터 또 바쁘잖아.”
“응.”
‘손대지 마. 입 다물어.’ 같은 말을 건넸던 태오에게 돌아왔던 대답과는 말투도, 내용도 전혀 달랐다. 순한 아이처럼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유채가 제 손목을 잡은 이신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넓은 어깨와 탄탄한 등이 시야에서 이내 사라지고, 이신과 유채가 함께 쓰는 방의 문이 닫혔다. 태오는 굳게 닫힌 옅은 베이지색 문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혀 주는 사람은 태오 자신이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붙일 수 없었다.
그 순간 태오는 강렬하게 느꼈다. 유채를 되찾고 싶었다.
***
그러나 유채를 되찾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래디언스의 컴백 일정이 잡힌 것이다. 정확히는, 일정이 잡힌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그사이에 우주의 자살 시도가 있었다.
다음 날, 태오는 자신을 붙잡고 컴백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 명태를 난처한 얼굴로 응시했다. 안무 연습, 녹음, 뮤직비디오 촬영, 화보 촬영…….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몇 가지 없었다.
“대충 일정은 이렇고, 그래서 일단 내일 안무 연습부터 들어가자. 안무 기억하지? 한 달 반밖에 안 남아서 시간이 빠듯해.”
“안무 연습이요? 내일이요? 저 어제 퇴원했는데요?”
“아, 그게……. 미안하다, 우주야. 그렇잖아도 대표님께 컴백을 좀 늦추자고 말씀드려 봤는데 어렵다고 하시네. 아니, 대표님도 너 걱정 많이 하셔. 하시긴 하는데 그래도 예정대로 해야 한다고…….”
명태가 난처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태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표정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오래전이긴 하지만 태오도 AMJ 엔터 소속이었고 신 대표의 성격을 잘 알았다. 신 대표가 자살 소동을 일으킨 밉상 이복동생에게 전하라고 했을 말은 아마도……
-안 뒈졌으면 됐지, 그 새끼 사정까지 봐주면서 오냐오냐해야 해? 컴백에 걸린 돈이 얼만데. 컴백 못 하겠으면 뱉어 내라고 해!
우주 한 명 때문에 여러 사람이 걸린 컴백 일정을 조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은 태오도 이해했다. 그러나 다른 문제도 아니고 목숨이 오갈 정도로 큰일을 겪었다가 겨우 살았는데도 취급이 이렇다니. 태오는 우주가 안쓰러웠다.
어쨌든 우주의 몸에 들어온 이상 래디언스 멤버로서 할 일은 해야 했다. 태오가 제대로 못 해내면 유채에게 피해가 간다. 화보나 뮤직비디오 촬영은 자신 있었지만 안무에 녹음이라니. 나중에 무대에도 설 텐데, 그 생방송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까마득했다.
어쨌든 우주는 개인 일정도 전혀 없다고 하니, 그룹 일정이 생겼다는 건 좋은 일이다. 컴백 한 번에 갚을 수 있는 빚이 상당했다. 태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태오는 체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죠. 그래서 내일은 안무 연습을 하라고요?”
“응. 전에 다 배웠으니까 어렵지 않게 맞출 수 있을 거야……. 아니지, 참. 너 기억하고 있어? 안무도 다 까먹은 거 아냐?”
“음……. 아마 그럴걸요.”
혹시 몸이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들지 않았다. 우주 성격에, 몸이 기억할 정도로 연습에 매진했을 리 없었다. 난처해져서 눈을 굴리자 명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혼자 중얼거리는 얘기가 가관이었다.
“하긴, 기억하나 못 하나 무대 망치는 건 똑같으니까 상관없지, 뭐…….”
“…….”
태어나서 한 번도 무대를 망쳐 본 적이 없었던 태오는 정말 억울해졌다. 언제까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
“유채야, 잘했어. 완벽하네. 너희들 다 봤지? 이렇게만 하면 돼.”
“아이, 유채처럼 어떻게 하냐? 쌤은 농담도 잘한다.”
“케빈이 너, 한국 온 지 대체 몇 년이야. 존댓말 엄청 잘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똑바로 말 안 하면 혼난다.”
“선생님 농담 잘하십니다?”
“시끄러워. 빨리 연습이나 해.”
“쌤이 먼저 존댓말 써 보랬으면서!”
안무 선생님과 케빈이 투닥거리는 동안 태오는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태오는 유채가 춤추는 모습을 셀 수도 없이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새삼스레 그의 실력이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채의 안무를 보면서 박수 쳐 주는 것과, 저걸 제가 그대로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로 다른 문제였다.
태오는 분명히 태어나서 한 번도 무대를 망쳐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무대’가 연기를 하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저런 곡예 같은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무대라면 올라갈 때마다 망쳐 버릴 게 뻔했다.
‘미치겠네……. 무대에서 삐걱대면 유채가 또 살벌하게 굴 텐데.’
유채에게 잘 보여도 부족할 판에 점수만 계속 깎이게 생겼다. 태오는 유채가 무대에 얼마나 진심인지 잘 알았다. 지금도 태오와는 눈도 안 마주치려고 드는데, 자신 때문에 래디언스 컴백 무대가 엉망이 되면 유채에게 천천히 다가가겠다는 계획은 영영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누구 때문에 다시 살아 돌아왔는데.’
태오는 유채가 추었던 안무를 따라 추기 시작한 케빈의 동작을 주의 깊게 눈에 담으면서 투덜거렸다. 유채를 다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긴 했지만, 우주의 몸으로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쌤! 케빈이 어떠나요? 아, 너무 잘했다!”
“왜 혼자 채점해? 누가 잘했대?”
“아이, 잘한 거 다 안다!”
“입 좀 다물어. 시끄러워 죽겠어.”
안무 선생님은 케빈을 구박하면서도 만족한 기색이었다. 그것을 기민하게 눈치챈 케빈은 깔깔거리면서 자화자찬하기 바빴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귓가에 매달린 드롭 이어링이 달랑거렸다. 이신이 그에게 다가가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케빈의 입이 더 찢어지는 것을 보니 칭찬해 주는 듯했다.
“그동안 다들 바빠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연습 많이 해 왔네. 그럼 이번에는…….”
안무 선생님의 시선이 태오에게 닿았다. 어깨가 저절로 움찔 떨렸다. 유채가 추기 전에 이신과 라윤의 순서가 지나갔으니 마지막으로 태오가 일어날 차례였다. 그러나 태오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태오는 유치원 재롱 잔치에서도 춤을 추지 않았다. 연습을 할 때, 어린 태오가 춤추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선생님이 태오에게 지휘자 역할을 시켰다. 네 살이었던 태오는 당연히 지휘 같은 것은 할 줄 몰라서, 친구들이 예쁜 옷을 입고 이리저리 몸을 실룩거리는 동안 그들 앞에 서서 신나게 요술봉을 휘둘러 대기만 했다. 태오는 타고난 몸치였다. 아주 늦게서야 깨달았지만, 사실은 음치이기도 했다.
“우주가 해 볼까?”
“음…….”
그러나 언제까지 피해 다닐 수는 없었다. 당장 컴백이 한 달 남짓 뒤였다. 태오는 유채를 흘긋 곁눈질했다. 넓지 않은 연습실에서도 태오에게서 한껏 멀리 떨어져 앉은 유채는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태오는 조금 풀이 죽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차라리 제가 춤추는 모습을 아예 보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네. 그런데 제가 기억이 잘 안 나서요. 잘 못할 것 같아요.”
“으응, 그래.”
뭔들 제대로 기억하겠냐는 얼굴로 안무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뜩잖은 기색이 그녀의 표정을 스쳤다.
태오는 기억력이 좋았고, 한번 눈에 담은 것은 잊지 않았다. 그래서 대본도 쉽게 외웠고 어떤 연기든 수월하게 해냈다. 안무를 외우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안무 전체도 아니고 초반 일부만 추었기 때문에, 태오는 다른 멤버들의 춤을 보면서 손과 다리 동작, 스텝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다만 눈으로 외운 것을 동작으로 해낼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였다.
연습실 가운데 선 태오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래디언스의 새 타이틀곡이 울려 퍼졌다.
이번 타이틀곡은 부드럽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격한 군무를 맞출 필요는 없는 게 다행이었다. 태오는 음악을 주의 깊게 들으면서 몸을 움직였다. 유채의 긴 팔다리가 만들어 냈던 유려한 춤 선이 눈앞에 떠올랐다.
같은 동작을 따라 하기는 쉬웠다. 남들이 보기에도 같은 동작으로 보이는가가 문제일 뿐이었다.
짧은 춤이었는데도 음악이 멈추었을 때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보기보다 쉽지 않구나. 태오는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음악이 끊긴 연습실에 태오의 거친 숨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손등으로 턱에 맺힌 땀을 닦아 내면서 흘긋거렸더니, 멤버들과 안무 선생님이 모두 굳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유채의 시선마저 태오를 향한 채였다.
태오는 작게 혀를 찼다. 틀린 동작도 없고 박자도 놓치지 않았는데 무대에서 쫓겨나 요술봉을 잡아야 했던 유치원 시절이 떠올랐다. 동작이 맞고 틀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몸치가 만드는 춤 선이 제대로 된 춤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누가 무슨 얘기든 해 주길 바랐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정적이 사라지지 않았다. 태오는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제가 먼저 머뭇머뭇 입술을 뗐다.
“저기…… 연습 열심히 할게요.”
“으응?”
“며칠만 시간 더 주시면…… 적어도 발목은 안 잡을 수 있게 해 올게요.”
말하면서도 자신이 없었다. 최소한 잘하는지 못하는지 파악할 능력은 되어야 개선할 점을 찾을 텐데, 몸치의 눈에는 누가 어떻게 추어도 대충 비슷하게만 보였다. 유일하게 유채가 추는 춤만이 태오의 시선을 사로잡곤 했다. 그러나 유채가 춤을 추는 게 아니라 뒤 구르기를 해도 태오의 눈에는 빛이 나는 것처럼 보일 테니, 태오가 안목이 없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었다.
그래서 태오는 낙담했다. 시간을 번다고 해도, 어떻게 연습해야 할지 막연하기만 했다.
난감한 얼굴로 고민에 빠진 태오의 상념을 깨트린 것은 뜻밖에도 케빈의 박수 소리였다. 흥분한 얼굴로 벌떡 일어난 케빈이, 보이지 않는 꼬리를 흔들어 대면서 요란하게 발을 굴렀다.
“와, 이거 뭐냐? 우주 왜 안무 다 외웠냐? 역시 죽었을 때 머리 다쳤나?”
“케빈아.”
이신이 눈썹을 찡그리면서 주의를 주었다. 우주가 병원에 입원했던 일은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오는 안무 선생님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다행히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태오를 정신없이 바라보느라 케빈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듯했다.
“우주야. 안무를 다…… 외워 왔네?”
“네? 네.”
태오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주가 무대에서 설렁거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안무도 제대로 숙지하지 않고 다녔을 줄은 몰랐다. 드라마 현장에도 가끔 그런 배우들이 있었다. 대본을 외워 오지 않아서, 급하게 입으로 몇 번 중얼거린 뒤 짤막한 대사 몇 줄만 치고 빠지는 사람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는데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외운 게 문제 아니다, 쌤! 우주 열심히 한다. 땀이 뻘뻘 났다!”
“그러게. 땀이 다 났네.”
이신이 작은 목소리로 감탄하는 게 들렸다. 태오는 더더욱 난처해졌다. 우주 흉내를 내려고 작정했는데 벌써부터 삐걱거린다. 다들 태오를 수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태오는 팔을 길게 뻗어서 반팔 소매로 뺨을 닦는 척하며 유채를 훔쳐보았다. 아까는 분명 태오를 바라보았는데, 벌써 흥미가 사라졌는지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동그란 뒤통수 아래로 하얗고 긴 목덜미만 보였다.
‘우주인 척하겠다고 유채 무대를 망칠 수는 없잖아.’
정확히는 유채가 아니라 래디언스의 무대였지만.
그보다 태오가 궁금한 것은 자신이 제대로 된 춤을 춰 냈느냐는 거였다. 전면 거울에 비친 모습은 제법 그럴듯했지만, 태오는 제 안목을 전혀 믿을 수 없었다. 태오는 긴장한 얼굴로 안무 선생님의 평을 기다렸다. 그녀는 한동안 당황한 듯하다가, 점점 마뜩잖은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렇게 금방 외워 올 거면서 왜 매번 그 난리를 친 거야?”
“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지는 모르겠는데 또 예전처럼 뻗대면 이제 안 봐줘. 아예 대형에서 빼 버릴 거야.”
5인조 그룹에서 한 명만 빼 버릴 수도 있나? 태오가 멀뚱한 얼굴로 안무 선생님을 가만히 내려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휙 돌리면서 다른 멤버들을 향해 팔을 저었다.
“얘들아, 대형 맞춰 서 봐. 여기까지 다 함께 맞춰 보자.”
“네에—.”
“넵!”
케빈과 라윤이 대답과 함께 벌떡 일어나더니 태오를 향해 뛰어왔다. 제 춤이 어땠는지에 대한 대답은 결국 끝까지 듣지 못했다.
***
몇 시간에 걸친 안무 연습이 끝난 뒤에 태오는 깨달았다. 우주는 아이돌로서의 자질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재능이 차고 넘쳤다.
“우주! 이거 봐라? 우리 이렇게 동작 딱딱 맞은 거 처음 아니냐?”
“그래요?”
“이신이 형! 우주 또 고장 났다! 존댓말 한다!”
“……그래?”
“어! 쌤이 다 찍어 놨다. 이거 봐 봐라?”
그렇게 케빈이 내민 핸드폰 속 영상을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태오는 우주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단체로 추는 군무 속에서 우주의 동작이 나쁘지 않았다. 팔다리의 움직임도, 스텝도, 시선 처리까지도 센터에 서서 추는 유채와 제법 비슷해 보였다. 태오는 눈으로 외운 대로 추었을 뿐인데, 몸치인 제 몸이 아니라 우주의 몸으로 추었더니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춤 선이 완성되었다.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잘하면서 왜 맨날 설렁댄 거야?’
태오는 정말로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우주를 나무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한숨이 나왔다. 평소에 얼마나 제멋대로였으면, 전체 안무도 아니고 고작 이 분 정도 대형에 맞추어 따라 추었다고 이렇게 칭찬을 받을까.
어쨌든 기대치가 낮은 것은 좋은 일이다. 목표는 래디언스의 발목을 잡지 않을 정도로 군무를 맞추는 거였다. 유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수 있을 만큼만 된다면 다른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다들 개인 활동 많지? 풀안무 영상 보냈으니까 틈틈이 각자 연습해. 다음 모일 때엔 끝까지 다 맞춰 보자.”
안무 선생님이 손뼉을 치면서 말한 뒤 태오를 곁눈질했다. 거울에 등을 기대고 반쯤 누웠던 태오는 금세 허리를 곧추세웠다.
“다 외워 올게요.”
한껏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못마땅한 눈길만 받았을 뿐이다. 우주는 도무지 신뢰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렇게까지 불신을 샀던 적이 있던가? 뭘 하든 박수만 받아 왔던 태오는 이 상황이 정말 어이없었다. 그러나 우주의 재능이 생각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나서 마음에 여유가 생긴 탓인지 신선한 기분도 들었다.
“정말 다 외워 올게요.”
그래서 다시 한번 엄숙하게 말했다. 안무 선생님은 떨떠름한 듯 ‘뭐, 그래.’ 하고 대꾸했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태오 주위를 빙 둘러싸고 앉아 있던 멤버들이 저희들끼리 수군거렸다.
“역시 머리에 이상이 생긴 거 아닙니까? 정밀 검사를 해 봐야…….”
“아무 이상 없다, 라윤아.”
“네, 네? 아, 다행입니다…….”
툭 끼어들어서 대꾸해 줬더니 라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이내 이신에게 달라붙어서,
“아니 글쎄, 어제는 우주 형이 저한테 방에서 자라고 하지 뭡니까?”
하고 일러바쳤다. 케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들 곁으로 바투 다가가 앉았다.
“진짜냐? 같이 잤냐? 우주랑?”
“잘 자라고 인사까지 받았습니다…….”
“진짜 이상하다, 그치? 죽을 때 되면 사람이 이상한 짓 한댔다!”
“케빈아. 그런 말 하면 안 돼. 그러잖아도 이제 막 퇴원한 애한테.”
태오에게 들리든지 말든지 떠들어 대는 목소리들이 점점 더 커졌다. 그동안 태오는 연습실 한구석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유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주의 몸에서 깨어난 이후, 태오는 유채의 목소리를 오래 들어 보지 못했다. 단지 우주를 싫어해서 태오와 대화하지 않으려 드는 줄 알았는데, 온종일 지켜본 바로는 입을 여는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 지금처럼 다 같이 모여서 떠들고 있을 때도 허공만 응시하고 있을 뿐 끼지 않았다.
태오가 아는 유채는 이렇지 않았다. 정식으로 사귀기도 전부터 멤버들에게 태오를 소개해 주고 싶다면서 식사 자리를 마련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오늘은 케빈이 이런 사고를 쳤다, 라윤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이신이 형이 수습해 줬다……. 유채가 잠자리에서 소곤대는 목소리에는 언제나 생기가 넘쳤다. 그러나 지금의 유채는 감정이 모두 사라진 인형 같았다.
-유채야. 또 그 꿈 꿨어?
유채가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걱정하면서 이신은 그렇게 물었다.
유채는 어떤 꿈을 꿨을까.
태오는 적어도 과거의 자신이 유채에게 고통으로 남은 것은 아니었으면 했다. 그래서 유채를 괴롭히는 꿈속에 자신이 나타난 것만은 아니길 바랐다.
간밤에도 푹 자지 못한 듯, 유채의 뺨은 해쓱했고 창백해 보였다.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제 어깨에 고개를 기대게 하고 안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 애가 어떤 악몽을 꾸는지 물어볼 수 있을 리 없었다.
***
한고비는 넘겼지만 남은 일정이 많았다. 명태가 알려 준 스케줄에 따르면 녹음과 뮤직비디오 촬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춤에 이어서 노래까지 할 생각을 하니 태오는 머리가 아팠다.
“우주야.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의사 선생님이 혹시 모르니까 며칠은 지켜보라고 했는데.”
케빈과 이신을 데리고 숙소를 나서면서 명태는 줄곧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태오는 시큰둥하게 손을 내저었다. 며칠간은 곡 연습에 집중할 생각이라서 사람들이 없는 편이 나았다.
당장 다음 날이 될 줄 알았던 녹음이 며칠 뒤로 밀려난 상태였다. 다른 멤버들이 개인 활동 때문에 시간 내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주에게는 아무런 일정이 없었다. 정말로 단 하나도.
연습할 틈이 난 것은 좋지만 이런 상황에서 우주의 빚을 어떻게 다 갚나 싶어서 태오는 아득해졌다.
“괜찮아요. 계속 멀쩡했는데요. 어차피 연습해야 돼서 혼자 있는 게 편해요.”
“어, 그래…… 뭐? 무, 무슨 연습?”
“곧 녹음한다면서요. 곡 연습해야죠.”
“어…….”
명태가 또다시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명태 뒤에 쪼르르 선 케빈과 이신도 멍한 얼굴이었다. 케빈이 왈칵 울상을 하면서 소리 질렀다.
“형아, 케빈이가 우주 이상하다 했다! 병원 데려가서 뇌 검사 해 보자, 어?”
“그러게.”
이신까지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바람에 태오는 조금 초조해졌다. 우주인 척하려면 연습 같은 것은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우주의 몸에 들어온 지도 벌써 일주일 가까이 지났다. 아무래도 이 몸에서 평생 살게 될 것 같은데, 언제까지 래디언스의 구멍으로 지낼 수는 없는 일이다. 유채에게 더는 밉보이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태오의 성미에도 맞지 않았다.
‘MRI 찍는다고 우주의 몸에 든 게 나라고 뜨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사실 신우주가 아니라 윤태오라는 주장만 하지 않는다면, 우주가 사람 됐다고 해서 정신 병원에 끌고 갈 사람은 없을 터였다. 죽다 살았더니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대충 둘러대면 되지 않을까?
“할 일도 없는데 연습이나 하지 그럼 뭐 해?”
노선을 정한 태오가 태연한 척 대꾸했더니 세 사람의 시선이 단번에 그에게 쏠렸다. 셋이서 눈짓을 주고받으며 잠시 침묵한 끝에 이신이 대표로 물었다.
“너, 연습할 시간이 있어?”
“네? 무슨 소리예요?”
쟤 왜 또 이신이 형한테 존댓말 하냐. 케빈이 다 들리게 소곤거렸다. 우주 나이를 신경 쓰느라 존댓말에 반말에 헷갈렸지만, 생각해 보면 래디언스에서 가장 연장자인 이신조차 태오보다는 몇 살 어렸다. 태오는 말할 때마다 어색하게 구느니 역시 그냥 반말이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번에는 말을 놓았다.
“활동도 없는데 시간이 왜 없어?”
그러자 이신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는 한참 태오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내키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서한준은 이제 안 만나? 정리한 거야?”
“서한준? 그게 누군데?”
낯선 이름이 튀어나왔다. 우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연습 시간을 빼서 만나야 할 정도로 중요한 친구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태오는 의아한 얼굴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이 놀라웠다.
“네 스토…… 아니, 너랑 썸 타던 그 남자분 말야.”
“뭐? 남자랑 썸?”
태오는 말문이 막혔다. 알아야 할 것은 우주의 막장 가족사와 빚더미가 다인 줄 알았는데 놀랄 일이 더 남아 있었다. 한창 활동 중인 아이돌이 모든 멤버들이 다 알 정도로 당당하게 남자를 만났다니.
그러나 생각해 보면 연애는 유채도 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아서 조금 머쓱해졌다.
‘만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면 유채에게는 미련 버린 건가.’
그 와중에도 유채 생각이 났다. 우주가 태오의 아파트에 쳐들어와서 유채와 잘해 보겠다고 묻지도 않은 선언을 했던 게 떠올라 태오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긴 그게 벌써 삼 년 전이네.’
삼 년이면 강산이 삼분의 일 정도는 변할 시간이었다. 유채가 저렇게 냉랭한데 우주가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리고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긴 했다.
그때, 태오의 안색을 살피던 명태가 끼어들었다.
“우주 너, 그 친구도 기억 못 하는구나? 하긴 삼 년 전까지만 기억한다고 했으니까.”
“아. 그런가 보네요.”
이신이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케빈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초리로 태오를 흘끔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서한준을 까먹냐! 우주, 기억하는 게 하나도 없다!”
“……그러게…….”
우주는 정말 가지가지 했었나 보다.
우주는 래디언스 멤버들이나 명태와 터놓고 대화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도 우주가 상대와 어느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는지 몰랐다. 그러나 우주가 서한준과 사귀는 사이였든 사귀어 가는 과정이었든 그를 계속 만날 수는 없는 일이다. 태오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남자 친구가 되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저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태오는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그 서한준이라는 분은 어떤 사람이에요?”
그러자 명태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서한준 씨는…… 네 팬이야.”
“팬하고 사귀었다고요?”
아이돌인 우주가 팬과 사귀다가 헤어지기까지 하면 끝이 좋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해결해야 할 일이 쌓여 있는 태오에게 또 다른 난관이 생긴 듯했다.
게다가 서한준은 아무래도 단순한 팬이 아닌 모양이었다. 명태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널 쫓아다녔어. 사실 그 정도면 위협만 안 했을 뿐이지 스토커가 맞지. 위험해 보여서 우리도 말렸고. 그런데 네가 싫지 않은 눈치라서…….”
“스토커라고요?”
“아니, 뭐. 스토커까지는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냥 너 가는 데는 어떻게 알았는지 비공개 녹화까지 다 따라다니고, 몰래 사진 찍어서 너한테 보내고.”
“전 밴에 도청 장치 설치한 거 아닌가 의심했다니까요.”
이신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끼어들었다. 명태가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밴이나 숙소에 그런 건 없더라. 아참, 이신아. 서한준이가 이번 팬싸에도 또 오려나?”
“당연히 오겠죠. 얌전히 팬싸만 들렀다가 가면 다행인데…….”
저마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 주고받는 대화 내용이 심각했다. 케빈마저도 입을 꾹 다물고 눈만 굴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우주가 또 어디 가서 똥차를 만나고 온 걸까? 태오는 아연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게 스토커 아니에요?”
아무리 들어 봐도 서한준은 우주의 남자 친구가 아니라 스토커가 맞았다.
스토커와 만나 볼 생각을 했다니, 아무리 우주라도 이 정도면 심각한 수준의 애정 결핍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태오는 유채에게 막무가내로 애정을 퍼붓던 우주를 떠올렸다. 짝사랑이었다지만 일반적인 감정이라고 보기에는 집착적인 느낌이 있었다.
어쩌면 우주가 바랐던 것은 유채가 아니라, 자신에게 집요한 사랑을 퍼부어 주는 누군가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태오를 돌아보았다.
“너 진짜 기억 안 나, 우주야?”
“기억 안 나요.”
기억은커녕 등줄기가 오싹해져서 식은땀이 났다. 고개를 젓는 태오를 보고 명태의 표정이 다소 펴졌다.
“그래? 그럼 차라리 다행이다, 우주야. 팬하고 사귀는 것도 문제지만, 서한준은 여러모로 좀 위험한 느낌이야. 이참에 거리를 두는 쪽으로 생각해 보면 좋겠다.”
“그래, 명태 형 말이 맞아. 다른 팬들도 서한준만 나타나면 슬슬 피하더라.”
이신이 거들었다.
다들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다, 유채를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태오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정리할게요. 걱정 마세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그러니까 잘 고민해 봐…… 뭐?”
태오를 설득하려는 듯 이어지던 명태의 말이 뚝 끊겼다. 다 같이 태오를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벌써 몇 번째인지, 앞으로는 또 얼마나 여러 번 되풀이될지 모를 일이다. 이제 슬슬 이 분위기에도 익숙해지는 듯했다. 태오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기억도 안 나는데 계속 만날 수는 없잖아요. 연락 오면 잘 얘기하고, 위험하다 싶으면 형한테 바로 말씀드릴게요.”
“어, 어. 정말?”
“네. 그렇다니까요.”
“와, 우주 죽었다 살아나더니 진짜 이상하지 않냐? 케빈은 새 우주가 훨씬 더 좋다!”
“케빈아. 그런 말 하지 말랬잖아…….”
“이신이 형도 새 우주가 더 좋으면서?”
“얘들아, 현관에서 떠들지 말고 이제 나가자. 이러다 늦겠다…….”
이신과 케빈을 재촉해서 내보내면서도 명태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김에 싱긋 웃어 주었더니, 이번에는 기겁한 듯 놀랐다가 후다닥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제야 숙소가 조용해졌다.
태오는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서 우주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슥슥 넘겨 보았지만 저장된 연락처는 몇 개 없었다. 래디언스 최이신, 래디언스 고케빈, 래디언스 홍라윤, 매니저 김명태, AMJ 신우필 대표. 아무리 어머니가 다르다지만 그래도 형도 형인데 저장된 이름이 무척 사무적이었다.
그리고 엄마, 유채 형. 이름 앞에 소속이 붙지 않은 것은 그들뿐이었다. 심지어 썸인지 애인인지 스토커인지 모를 서한준은 저장도 안 되어 있었다.
‘뭐야. 만나는 사이인 건 맞아?’
의심쩍은 기분이 들어서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메신저 대화 기록에도 서한준의 흔적은 없었다. 태오는 조금 더 생각해 본 끝에 메신저에 들어가 차단 목록을 열었다.
차단된 이름은 하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서한준이었다.
‘사귀지는 않았던 건가.’
차단까지 한 것을 보면 우주도 서한준이 껄끄러워졌던 모양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처했는데 굳이 연락하거나 만나서 해결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태오는 한결 마음이 편해져서, 핸드폰을 넣어 두고 연습을 하러 방에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메신저 대화 기록을 열었을 때 분명히 유채의 이름이 있었다.
태오는 잠깐 고민했다. 남의 사적인 대화를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 태오가 우주의 몸에 들어왔으니 완전히 ‘남’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태오는 한참 망설이다가 그렇게 변명거리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유채의 이름이 붙은 메신저 창을 열었다.
얘는 뭐 하는 애지, 진짜. 태오는 한숨을 쉬면서 핸드폰을 소파 위에 던져 놓았다.
대화는 지난 5월 초를 마지막으로 끊겼다. 대화라고는 해도 우주의 일방적인 메시지가 이어지다가 기어코 차단을 당한 듯했다.
제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보는 기분이 달갑지 않았다. 메시지 내용이 이 정도였으니, 실제로 마주칠 때마다 우주가 유채를 얼마나 들볶았을지 상상이 되어서 마음이 더 가라앉았다.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길래 유채에 대한 마음은 접은 줄 알았더니, 여전히 유채에게 미련이 남아 있었나 보다. 서한준은 차단했으면서 유채와의 대화 기록은 소중하게 남겨 둔 것을 보면 답이 뻔했다.
그러나 태오는 우주에게 짜증이 나면서도 그가 안쓰러웠다.
사 년 전, 우주는 태오의 아파트에 찾아와 ‘제왕’의 이세현 역할 제의를 유채가 거절했다고 알렸다. 그 일로 인해 태오와 유채는 크게 다퉜다. 정확히는 태오의 일방적인 히스테리였다. 유채는 이세현 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그 일을 두고 유채는 두고두고 우주를 원망했던 것 같다. 그러나 태오는 유채와 헤어졌던 것이 우주의 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주는 단지 핑계였을 뿐이다. 태오는 그 당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그중에서 유채를 마주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그때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태오가 아무리 유채와의 이별을 두고두고 후회했어도, 극단으로 몰렸던 그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결국 태오의 탓이었다. 유채와 헤어졌던 일도, 태오가 결국 혼자서 죽어 갔던 것도.
“왜 우주한테 화풀이를 해.”
태오는 핸드폰 화면에 뜬 유채의 이름을 노려보면서 타박하듯 말했다. 단지 화풀이일 뿐이라고 하기에는 우주가 보낸 메시지들의 상태가 상당히 안 좋았지만.
아랫입술을 짓씹으면서 한참 앉아 있다가 가까스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연습이나 하자.’
어차피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열심히 살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태오는 이전 생에서 사고가 나기 전에 늘 그래 왔듯이, 태평하게 생각하면서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제 방으로 들어와서 가이드곡을 듣는 순간만큼은 태평할 수 없었다. 태오는 제가 불러야 하는 구절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은 끝에 결국 겁이 덜컥 났다.
태오가 맡은 부분은 많지 않았다. 우주의 아버지인 신 회장이 별세한 뒤에는 회사도 우주를 밀어주지 않았다. 게다가 어차피 제대로 하지 않을 게 뻔했으니, 아예 분량을 줄여 버린 모양이었다.
다만 그 짧은 구절이 힘 있게 음을 뿜어내야 하는 고음 파트라는 게 문제였다. 대체 뭘 믿고 우주에게 이런 파트를 준 걸까.
태오는 문득, 예전에 스밍을 하느라 수없이 들었던 래디언스의 히트곡들을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우주가 센터였고 맡은 파트도 많았다. 정규 1집 타이틀곡이었던 ‘Hush, hush’에서도 우주가 고음으로 치닫는 싸비 부분을 불렀다. 다만 그 당시에는 그 부분을 우주가 맡았는지 몰랐다. 신경이 온통 유채에게만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태오는 인정했다. 우주는 정말로 아이돌로서의 재능이 넘쳤다. 몸도 유연하고 날랜 데다 박자 감각이 좋아서 어떤 춤을 추어도 태가 예뻤다. 게다가 보기 드문 미성이고 고음 처리까지 뛰어났다. 이런 자질을 갖고도 래디언스의 구멍이 되다니, 우주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어쨌든 프로듀서도 우주가 가진 재능을 알기 때문에 이런 파트를 주었을 것이다. 우주는 이제 없고, 이 고음을 불러야 하는 사람은 태오라는 것을 짐작도 하지 못한 채.
태오는 줄곧 반복해서 재생되던 가이드곡을 멈췄다. 이걸 내가 부를 수 있으려나. 걱정이 몰려들었다. 노래는 태오가 춤 다음으로 자신이 없는 분야였다. 차라리 무명 배우의 몸에 들어왔다면 당장이라도 제대로 된 연기를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아이돌이라니. 왜 우주 몸으로 들어온 거야?
‘그래도 덕분에 유채를 매일 보니까…….’
유채에게 생각이 미치자 날뛰던 기분이 간신히 진정되었다. 아이돌 일을 해야 하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유채와 같은 숙소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해야지, 뭐.’
태오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악보를 들여다보면서 방금 들었던 곡을 불러 보았다.
“음.”
그리고 다시 불렀다. 여러 번 불렀다.
“제대로 한 거야?”
결국 악보를 탁 내려놓으면서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제가 부른 노래가 제대로 된 것인지 태오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태오는 음치였다. 그것도 아주 상태가 심각했다.
***
한때는 태오도 자신이 음치인지 몰랐던 시절이 있었다. 좋을 때였다.
담배가 간절해지는 기억이었기 때문에 태오는 우주의 방을 뒤져 보았다. 하지만 온갖 사고는 다 치고 다녔던 우주도 나름대로 가수라고 담배는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리 찾아도 담배는커녕 라이터도 눈에 띄지 않았다.
케빈은 흡연자일 것 같은데, 가서 찾아볼까. 태오는 잠시 옆방 방향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저었다. 케빈이 쓰는 방은 유채의 침실이기도 했다. 담배를 찾는다고 들어갔다가 유채가 갑자기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떤 상황이 될지 알 수 없었다. 태오는 담배 대신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열다섯 살에 데뷔한 태오는 학교에 제대로 출석하지 않았다. 음악 시간에 참여했던 기억은 당연히 거의 없었다. 몸치라는 것은 그나마 유치원 재롱 잔치에서 일찌감치 파악했지만, 음치라는 걸 깨달을 기회는 상당히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덕분에 태오는 유채가 자신을 위해 가사를 써 주었던 ‘Hush, hush’를 꽤 오랫동안, 아주 여러 번, 제 입으로 불렀다. 이게 다 태오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손뼉 쳐 주기 바빴던 유채 탓이었다.
그전까지 태오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유채 덕분에 자신감이 붙어 버렸고, 그즈음 촬영했던 드라마 종방연에서 반주도 없이 그 곡을 불렀다. 태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이유가 당연히 유채가 붙인 가사 때문인 줄 알았다.
***
“아. 가사 이거 아니죠, 참. 이거 제 남…… 친구가 쓴 가사인데 친구들끼리 놀린다고 바꿔 부르다가 입에 붙었네요.”
얌전히 자리에 앉았으면 좋았을 텐데, 얼어붙은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했던 변명이 화근이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촬영 팀 중 누군가 진실의 입을 열었다.
“뭐야, 태오 씨. 가사가 문제가 아니잖아! 음정이 왜 그래?”
“음정이 왜요? 어디가 어때서요?”
“태오 씨 음치구나……?”
“와, 진짜 심하다. 뭐가 문제인지 정말 몰라?”
“가사는 들리지도 않았어. 지금 노래한 거야? 랩 한 거 아니야?”
“요새 랩은 저렇게 불러?”
“현대 음악이라 그런가? 너무 난해하네.”
“무슨 현대 음악이야. 저거 ‘Hush, hush’잖아. 래디언스 히트곡.”
“뭐? 음……. 뭐?”
“아, 뻥치지 마.”
“맞아. 아까 태오 씨가 막 허쉬 허쉬…… 이랬어.”
“나 래디언스 팬이란 말이야. 우리 애들 모욕하지 마!”
“태오 씨, 대체 ‘Hush, hush’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태오는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제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유채의 말간 얼굴에 떠올랐던 묘한 표정이 기억났다. 최선을 다해 박수 친 뒤에 언제나 한숨처럼 따라붙던, ‘형, 내가 형 진짜 사랑해요.’ 하는 덧붙임도. 태오는 그게 ‘매번 이렇게 노래를 불러 주어서’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뜻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
문제는, 태오 본인은 어느 부분이 틀렸는지 전혀 모른다는 거였다.
“비슷한 거 같긴 한데.”
태오는 자신이 부른 노래를 녹음해서 틀어 보았다. 우주의 미성이 입혀진 곡이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러나 과연 다른 사람들 귀에도 그렇게 들릴까?
“뭐 하는 거야?”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고개를 돌렸더니 유채가 문가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연습하는 거야, 지금?”
유채가 말을 걸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태오는 눈을 크게 뜨고 유채의 안색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며칠간 눈 밑에 가득했던 다크서클도 사라졌고 푸석했던 피부는 투명하고 매끄러웠다. 기분 좋은 일이 있었나 보다. 그렇지 않았다면 태오에게 말 걸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대답이 냉큼 나왔다.
“응. 이제 곧 녹음하잖아. 민폐 끼칠까 봐.”
“민폐? 그래서 연습을 한다고? 네가?”
“어차피 난 일정도 없으니까…… 놀면 뭐 하겠어.”
한때는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았던 태오가 과거를 싹 잊은 얼굴로 싱긋 웃었다. 말투는 불퉁했지만 유채가 먼저 관심을 보여 준 게 좋아서 저도 모르게 표정이 들떴다. 그러나 돌아온 대꾸가 만만치 않았다.
“가지가지 하네.”
“……응?”
“민폐가 걱정되면 숙소에서 나가.”
“…….”
“아예 탈퇴를 하든가, 씨발. 시한폭탄 주제에 무슨 민폐 타령이야.”
태오는 멍한 눈으로 유채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눈썹을 팍 구겼다. 화사한 얼굴로 퍼붓는 악담에는 아무리 태오라도 가슴이 살짝 따끔거렸다. 태오는 이렇게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미움받는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얌전히 당해 주는 것은 더 못 견뎠다.
게다가 그 누군가가 하필이면 유채라니. 태오로서는 정말 오래 참았다.
“한유채. 무슨 말이 그래? 예의 있게 얘기해.”
“뭐?”
태오는 유채가 열여섯 살이었을 때부터 그를 보았다.
유채의 말투는 언제나 상냥하고 다정했다. 욕은커녕 거친 말 한마디도 못 했다. 그런데 삼 년 동안 뭘 했길래 저런 말버릇을 배워 왔는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우주가 아무리 싫어도 가만있는 사람 뒤통수를 갑자기 퍽 때릴 필요는 없는 거였다.
“내가 너한테 시비 걸었어? 방해했어? 왜 갑자기 나타나서 후려쳐?”
한번 울컥했더니 서운했던 마음이 줄줄이 쏟아져 버렸다. 태오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가던 길 가라고. 너한테 말 걸어 달라고 내가 구걸이라도 했어?”
“……너?”
유채가 문득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유채는 우주보다 두 살 위였다. 태오가 우주를 직접 만났을 때도 그랬고, 조금 전에 읽었던 메신저 대화에서도 우주는 줄곧 유채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래도 ‘유채 형’ 소리는 혀끝에서 죽어도 나오지 않았다. 될 대로 되어라는 심정으로, 태오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지나가다 말고 시비야. 내가 싫으면 그냥 투명 인간 취급하라고.”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태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모든 일이 수월하게 잘 풀리리라는 기대는 태오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뜻밖에 발견한 우주의 재능 덕분에 아이돌로서의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나았다. 타고난 자질이 이 정도라면 노력으로 충분히 이제까지 우주의 만행을 만회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유채였다.
유채가 눈앞에 보이면 태오도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태연하다가도 가슴이 울컥거렸다. 기분이 까마득하게 가라앉았다가 가까스로 나아지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겪어야 했다.
이제 겨우 일주일 지났을 뿐인데. 제게 함부로 구는 유채를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유채를 되찾기는커녕 매일 미움만 받고 있었다. 태오는 조금 울적해졌다.
“그래. 투명 인간, 좋네. 진작 그럴 일이지.”
그러나 울적해하고 있을 틈도 없었다.
시비조로 내뱉어진 유채의 말에 아차 싶었다. 욱한 마음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 유채가 시비를 걸든, 후려치든 교류가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제 발로 기회를 걷어차다니. 하여간 이 성질머리가 문제였다.
지금이라도 취소하면 너무 없어 보일까. 태오가 풀 죽은 눈으로 유채를 올려다보았을 때였다.
“왕!”
유채의 품 안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인형 같은 유채의 흰 얼굴에 실금이 갔다.
“……가만있어.”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유채가 제 가슴팍을 살살 누르면서 소곤거렸다. 태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채가 걸친 품이 큰 재킷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퍼가 내려가면서 하얗고 조그만 솜뭉치 같은 것이 고개를 쏙 내밀고 태오를 바라보았다. 솜뭉치와 태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왕! 왕!”
“……꼬마야?”
목소리가 저절로 떨렸다. 유채의 품에서 나타난 것은, 삼 년 만에 보는 태오의 강아지였다.
***
“꼬마가 우주 싫어하지 않았냐?”
흰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리면서 우주의 주위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꼬마를 바라보면서 케빈이 입을 열었다. 케빈뿐만 아니라 라윤과 이신도, 심지어 유채까지도 우주와 꼬마를 지켜보고 있었다.
“극혐했습니다. 우주 형만 보면 이빨 다 드러내면서 물려고 했는데.”
“어, 진짜 귀여웠다!”
“이상하네……. 둘이 언제 저렇게 친해졌지? 우주 입원하기 전날에도 꼬마한테 물렸다고 때렸었잖아.”
“아주 나쁜 새끼다, 우주! 어떻게 꼬마를 때릴 수가 있냐?”
“우주는 그렇다 쳐도, 꼬마가 왜 우주를 좋아하지?”
“우주 형을 왜 그렇다 칩니까? 우주 형이 꼬마 예뻐하는 게 더 이상합니다.”
“아이, 머리 다쳐서 그렇다니까? 새 우주 진짜 너무 좋다!”
“뭘 또 너무 좋을 것까지야…….”
이신은 떨떠름하게 대꾸하면서 유채를 흘긋거렸다. 유채는 여느 때처럼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눈길도 주지 않았던 우주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평소와는 상당히 달랐다.
삼 년 전, 유채가 숙소로 강아지를 데려왔다. 오랫동안 아무도 돌봐 주지 않은 듯 비쩍 마른 데다 오물이 온몸에 묻은 더러운 몰티즈였는데, 그 꼴을 해서도 성질이 아주 나빴다.
‘꼬마’라는 이름이 붙은 강아지는 누구에게든 이를 드러내면서 상대를 물려고 들었다. 심지어 자신을 데려온 유채에게까지 그랬다. 이신은 대체 어디서 이런 애를 데려왔냐고 유채를 나무랐다. 그러나 그 무렵 태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정신이 거의 나가 있었던 유채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꼬마는 아주 천천히 이 집과 사람들에게 적응해 나갔다. 이신이나 라윤, 케빈을 볼 때마다 으르렁대지 않을 때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 마침내 꼬마가 유채는 물론 다른 멤버들의 품에도 열 번에 한 번 정도는 순순하게 안겨 줄 때쯤 유채도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렸다. 유채는 태오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줄곧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꼬마가 곁에 있으면 그나마 잠을 잘 수 있다고 했다.
그즈음에는 이신도 강아지의 정체를 눈치챘다. 꼬마는 태오가 기르던 강아지였을 것이다.
유채는 꼬마를 애지중지했다. 정작 꼬마는 유채에게 시큰둥했지만, 그래도 이 집에서 그나마 유채를 가장 친근하게 여기는 듯했다. 문제는 우주였다. 유채와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싫어했던 우주는 강아지에게도 성질을 부렸다. 물론 성격은 강아지도 만만치 않았다. 꼬마는 지난 삼 년간 우주를 열다섯 번 물었다.
일주일쯤 전에는 드디어 사달이 났다. 꼬마가 또다시 우주를 물었고, 약이 바짝 오른 우주가 꼬마를 때린 것이다. 불쌍하게도 꼬마는 식탁 다리에 세게 부딪히는 바람에 크게 다쳤다. 유채가 숙소에 없었던 게 다행이었다. 유채가 알았다면 우주는 그길로 병원에 실려 갔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그다음 날 자살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바로 입원하긴 했지만.
우주가 병원에 있었던 기간 동안 꼬마도 동물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치료는 하루 만에 끝났지만 연달아 우주의 자살 시도가 터졌고 멤버들도, 명태도 정신없이 바빠서 꼬마를 돌봐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병원에 며칠 더 맡겼다. 그리고 이제 막 유채가 꼬마를 데려온 참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꼬마와 우주가 죽었던 가족이 살아 돌아온 듯한 얼굴로 서로를 맹렬하게 반긴 것이다.
“둘이 왜 저러냐? 꼬마도 새 우주 좋은가 보다. 그치?”
“음……. 진짜 우주 형이 좀 이상하긴 합니다. 죽었다 살아나면 원래 사람이 저렇게 변하는 겁니까?”
“케빈 안 죽어 봐서 모르겠어. 그런가?”
“조용히 좀 해 봐. 머리 아프니까.”
이신은 정말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우주는 자살 기도를 했다가 살아난 이후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일단은 긍정적인 변화였는데, 애인을 사귀면서 유채에 대한 집착을 덜어 내는 것 같더니 다시 관심을 보이는 게 신경 쓰였다.
유채는 여전히 태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말을 잃었고 밤마다 악몽을 꾸었다. 우주를 볼 때마다 태오가 고통받는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러니 두 사람은 가능한 멀어지는 편이 서로를 위해 나았다.
그런데…….
“꼬마야. 맘마 먹었어? 맛있는 거 줄까? 손 내밀면 줄게. 손!”
“캉!”
“옳지. 이쪽 손도 줘. 그럼 두 개 줄게. 손—.”
“캉캉!”
“우리 꼬마 진짜 천재다. 그치!”
두 눈이 완전히 접힐 정도로 활짝 웃으면서 강아지와 놀아 주는 우주가 너무 낯설고 서먹하다 못해 조금 무서울 정도였다. 볼록하게 솟아오른 발긋한 뺨에 긴 보조개가 팼다. 우주가 저렇게 웃는 모습을 이신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우주뿐만이 아니다. 이신은 꼬마가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도 처음 보았다. 지난 삼 년간 다들 제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데 난데없이 우주에게 찰싹 달라붙다니. 이신은 배신감까지 느꼈다.
“이신이 형.”
유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라윤과 케빈은 빙의 소설에 대해 한창 떠드느라 이쪽에는 관심도 없었다. 유채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자, 유채가 우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술만 달싹거렸다.
“신우주한테 보조개가 있었나?”
“응? 갑자기?”
무슨 일인가 했더니 뜬금없는 보조개 타령이었다. 이신은 난데없는 반응에 놀라면서 우주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우주의 뺨에서 보조개를 보았던 기억이 없기는 했다.
이신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우주가 저렇게 웃는 게 처음이니까 그렇지.”
“……그런가?”
“맨날 인상만 썼잖아. 보조개가 나타날 틈이 있나.”
“그렇겠지…….”
“갑자기 왜 우주한테 관심이야?”
“무슨 말이야?”
“지금 우주 신경 쓰고 있잖아.”
“그런 거 아니야.”
유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입 안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스치듯 들렸다.
“꼬마가…… 그럴 리가 없는데 좋아하니까 갑자기 생각나서.”
“뭐라고?”
소리를 높여서 되물었지만 유채는 입술을 꾹 물기만 했다. 갑자기 휙 일어나더니, 우주와 꼬마를 한 번씩 노려본 후 제 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우주도 꼬마도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감동적인 가족 상봉을 즐기느라 바빠 보였다.
***
태오는 기분이 한껏 들떴다.
꼬마가 태오를 알아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의욕이 솟구친 나머지 뭐든지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온종일 자신을 괴롭혔던 녹음에 대한 스트레스도 별것 아닌 듯 느껴졌다.
한참 태오의 주위를 맴돌면서 신나게 뛰어다닌 꼬마는 소파 한가운데 누워서 잠이 들었다. 태오는 러그에 주저앉아서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한 손으로 꼬마의 귀 뒤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유채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내팽개쳤던 악보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이어폰을 한쪽만 귀에 꽂고 가이드곡을 들으면서 따라 불렀다. 열심히 불렀다.
여전히 어디가 틀렸는지 모르겠다. 혹시 다 맞은 게 아닐까?
“시끄러워.”
불쑥 끼어든 목소리가 상념을 깨트렸다. 태오는 움찔 놀라서 눈을 들었다. 유채가 차게 식은 눈으로 태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오는 무심코 인상을 썼다. 우주의 몸으로 살게 된 지 일주일밖에 안 되었는데 유채와 몇 년이나 사귈 때도 보지 못했던 밉상 짓을 다 보는 것 같았다. 스물여섯 살에 갑자기 미운 일곱 살처럼 군다. 유채가 우주를 미워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대꾸 없이 쏘아보기만 했더니 묵묵히 이쪽을 마주 노려보던 유채의 입매가 비틀렸다. 까칠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왜 갑자기 음치 흉내야?”
“내가 언제 음치 흉내를 냈어…….”
우주가 워낙 음감이 좋은 것 같아서 대충 맞는 음정으로 부르지 않았을까 기대했는데 역시 안에 든 영혼이 태오라서 무리였나 보다. 흉내가 아니라 태오는 그냥 음치였다. 하지만 그 얘기를 유채에게 듣는 것은 타격이 컸다.
‘형이 노래 불러 주는 거 너무 좋아요.’ 하면서 눈이 휘어지게 웃던 우리 유채는 어디로 갔어?
태오는 예전의 유채를 떠올리면서 상심했지만 아직 낙담하기에는 일렀다. 유채는 계속해서 태오를 찔러 댔다.
“듣기 거슬리니까 좀 닥치라고. 왜 거실까지 기어 나와서 이래.”
“아, 진짜. 자꾸 시비 걸래?”
“뭐?”
태오는 스물여덟 살에 죽었고 삼 년이 지났으니 영혼의 나이는 벌써 서른하나였다. 이 나이에 ‘네가 거실 전세 냈냐.’ 같은 말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말도 안 되게 걸어오는 시비를 그대로 받아 주기에는 움켜쥔 주먹이 덜덜 떨렸다. 유채가 그리운 마음과는 별개였다.
“너 정말 말을 왜 그렇게 해?”
“뭐?”
“투명 인간 취급한다며. 얘기 끝난 거 아니었나?”
“나는…….”
유채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사랑스럽기만 했던 얼굴이 처음으로 못마땅하게 보여서 태오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태오가 상상했던 유채와의 재회는 이렇지 않았다. 자신을 당장 알아보지는 못하더라도,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매번 시비를 걸어올 줄은 몰랐다.
오히려 유채가 자신을 없는 사람처럼 무시할까 봐 걱정했다. 태오가 알고 있는 유채와 우주의 관계가 그랬고, 우주의 핸드폰에서 확인했던 느낌도 그쪽에 가까웠다. 태오를 대하던 유채의 태도 또한, 적어도 처음에는 분명히 무시에 가까웠다.
그런데 왜 갑자기 변해서, 보는 사람마다 물어 버리려고 드는 꼬마처럼 태오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정확히는 안무 연습을 했을 때부터 그랬다. 하루에 한마디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유채의 목소리가 이제는 틈만 나면 태오를 공격했다. 악플도 관심이라고 기뻐해야 할까?
“네가 거실에서…… 꼬마까지 데리고 시끄럽게 굴잖아, 짜증 나게.”
“짜증 난다고?”
그러나 마냥 좋아하기에는 태오의 성격이 순순하지 않았다. 태오는 어금니를 악물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어 버렸다.
“네가 강아지 전세 냈어?”
아……. 차라리 거실 전세 냈어, 가 나았다. 태오는 제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 없어서 현기증이 났다. 애초에 태오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화냈던 적이 없었다. 누구도 태오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일한 예외가 신우주였다.
화도 내 본 사람이 낼 줄 아는 법이다. 자신이 한심스러워져서, 태오는 유채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다. 방에 안 들리게 조용히 연습할 테니까 들어가.”
“어떻게 안 들려? 하려면 네 방에 처박혀서 하지 대체 왜 거실에서 난리야?”
“한유채. 네 귀만 뚫려 있고 라윤이 귀는 막혔어? 라윤이 방에서 쉬는데 고문할 일 있어? 네 방문 닫으면 별로 들리지도 않잖아.”
“라윤이 쉬라고 나왔다고? 네가? 그걸 믿으라고 떠드는 거야?”
“지금 떠드는 게 너야, 나야?”
어차피 제대로 부르는 것도 아니고 입 안에서 흥얼거리는 정도인데 왜 이 난리인지 모르겠다. 태오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유채를 되찾고 싶은 거였지, 이렇게 볼 때마다 싸우려고 살아 돌아온 게 아니다. 노력해서 되살아난 것도 아니었으면서 태오는 혼자 억울해했다.
“……됐어. 어차피 꼬마 데려가려고 나온 거야.”
“누가 물어봤어? 데려가, 그럼.”
“…….”
유채는 불쾌한 듯한 표정으로 인상을 썼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대신 태오 곁으로 성큼 다가와서 꼬마를 향해 팔을 뻗었다. 긴 손가락 끝이 태오의 어깨를 가볍게 스쳤다.
“꼬마야. 들어가서…….”
그르르르릉—!
“…….”
“…….”
한창 잘 자다가 방해받은 꼬마가 이를 드러내면서 유채를 향해 으르렁댔다. 유채는 충격받은 얼굴로 굳어 버렸다.
아무리 유채가 못되게 군다 해도 그에 대한 태오의 마음이 변하는 건 아니었지만…… 꼬마에게 거부당하고 상처받은 표정을 보니 조금 고소하긴 했다. 태오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면서 슬쩍 웃었다.
“꼬마가 나랑 있겠다는데? 너 싫대.”
“뭐? 말도 안 돼요. 꼬마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뭐가 말이 안 돼. 지금 싫다잖…….”
웃으면서 말을 이어 가다가 문득 멈췄다. 그러나 유채는 의식하지 못한 듯, 허리를 숙여서 꼬마를 살살 쓰다듬었다. 꼬마가 또다시 사나운 얼굴로 아르릉댔다.
“꼬마, 왜 그래?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이거 신우주인데.”
사람한테 ‘이거’라니.
“알았어……. 그럼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서 형이랑 방으로 가자.”
그러더니 태오의 곁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버렸다. 태오에게 꺼지라고 난리 칠 때는 언제고, 꼬마가 깰 때까지 기다리려는 모양이었다.
태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악보로 시선을 내렸다. 유채가 있든 없든 연습이나 할 생각이었다. 조금 전의 일이 자꾸 생각났지만 크게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말실수한 거겠지.’
꼬마에 대해 얘기할 때는 잠시 예전의 유채가 돌아온 것 같았다. 유채의 표정도 그랬고 말투도 그랬다.
한참 곡조를 흥얼거리다 보니 주위가 조용했다. 유채는 러그에 앉아서 소파 다리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꼬마가 깨기를 기다리다가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불면증 심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새 자네.’
유채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방비하게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은 우주의 몸에서 눈뜬 이후로 아예 처음인 듯했다. 태오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유채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평소에도 이렇게 입 좀 다물고 있어. 어떻게 자고 있을 때가 제일 귀엽니?”
예전에는 유채도 이렇지 않았다. 듣기 싫은 말은 한마디도 할 줄 몰랐고, 언제나 순한 얼굴로 예쁘게 웃기만 했다.
그래서 태오는 자신을 대하는 유채의 태도가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얼마나 상처받았으면 이럴까 싶다가도, 막상 유채가 날카롭게 굴 때마다 참아 주기 어려워서 자꾸만 받아치게 됐다.
“내가 참아야 하는데…… 잘 안 되네.”
중얼거리면서 유채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말캉하고 보드라운 피부가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졌다. 기척을 느낀 듯, 감은 눈꺼풀 끝에 빽빽하게 난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태오는 다시 악보에 집중했다. 아까 유채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역시 음정이 엉망인 것 같았다. 태오는 가이드곡을 다시 들어 본 후 제 파트를 작게 불러 보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삼십여 분이 지났다.
그러나 결국 악보를 내려놓고 말았다. 어디가 틀렸는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혼자서 연습하는 게 의미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보컬 트레이너에게 따로 부탁해 집중 과외라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저절로 한탄이 튀어나왔다.
“비슷한 거 같은데. 아닌가?”
“씨발 진짜. 장난하냐? 어디가 비슷해?”
“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서 날카로운 대꾸가 튀어나왔다. 유채가 퍼뜩 눈을 뜬 것이다. 단정한 미간에 세로금이 깊게 팬 채였다. 형형하게 쏟아지는 눈빛에 놀란 태오는 딸꾹질이 나오려는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태오와 시선이 마주치자, 유채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한참 잘 자고 일어나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얼굴 치워. 재수 없어.”
이게 진짜.
태오는 천사같이 사랑스러운 아기를 가진 친구들이 ‘잘 때만 예쁘지, 눈뜨면 악마야.’ 하고 한탄하는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금니에서 저절로 까득 소리가 났다. 태오는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유채를 사랑한다. 진짜다…….
“유채야. 피곤하면 소파에 편하게 누워서 자.”
다행히 자기 암시의 효과가 있어서 태오는 반쯤 웃는 얼굴로 대꾸할 수 있었다. 유채는 그런 태오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돌았냐? 그딴 소음을 들으면서 어떻게 자.”
나는 유채를 사랑……
“갑자기 웬 연습 타령인가 했더니 아주 쓰레기를 작곡하고 있네.”
사랑……해야 할까?
“노래를 왜 그따위로 불러? 이번엔 아주 신박하게 망치려고 작정했나 봐?”
그냥 각자의 길을 가고 행복하게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태오는 또다시 심호흡을 했다. 한숨이 아예 입에 붙어 버렸다. 평온한 척하느라 가까스로 끌어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런 거 아니야. 감이 잘 안 잡혀서 그래.”
“또 무슨 개소리야. 감이 안 잡힌다고? 네가?”
“……음치인가 보지.”
태오는 고통스럽게 인정했다. 사 년 전, 화사하게 웃으면서 ‘형이 노래 불러 주는 거 너무 좋아요.’ 하던 유채 앞에서. 너 이 자식 그때 거짓말한 거였구나…….
유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 쳤다. 태오가 짜증스럽게 덧붙였다.
“이 곡이 어려워서 그래.”
“몇 소절 되지도 않는데 뭐가 어려워?”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시비 털어? 도와줄 거야? 어?”
“내가 총 맞았어?”
“안 도와줄 거면 닥쳐.”
“…….”
그러자 유채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닥치란다고 정말 닥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조용해져서 다행이었다.
서로를 노려보면서 짧게 대치한 끝에 태오가 먼저 악보로 눈길을 돌렸다.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자신을 뜯어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유채와 몇 마디 더 하다가는 주먹이 나갈 것 같았다. 태오는 정말로 유채를 때리고 싶지 않았다. 유채를 사랑하니까……. 아마도…….
그때, 유채가 불쑥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정말 음치야?”
“그럼 가짜로 음치인 척하겠냐?”
“음치 아니었잖아.”
“눈 없어? 연습하는 거 안 보여? 해도 모르겠는데 어떡하라고.”
“별 진상을 다 떠네. 득음한다는 얘기는 들어 봤어도 갑자기 음치 됐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게 진짜.
“한유채.”
태오는 악보를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유채의 넓은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 떨렸다.
“불러 봐.”
의아한 시선이 태오를 향했다. 태오는 악보를 유채의 눈앞에 흔들면서 채근했다.
“할 일 없고 심심한가 본데 네가 한번 불러 보라고. 넌 뭐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
정말로 유채가 부를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받아 주다 보니 끝이 없어서, 적당히 대꾸해 쫓아내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유채는 잠잠하기만 할 뿐 반응이 없었다. 색소가 옅은 갈색 눈동자가 차분하게 태오를 향한 채 그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그러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음정 간격이 너무 벌어져.”
“뭐?”
뜬금없는 소리였다. 태오는 유채가 하는 말을 언뜻 이해하지 못해서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자 유채가 답답한 듯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완전히 다른 음으로 부르고 있잖아. 너 절대 음감 아니었어? 귀 좋으면서 왜 그래. 한 음정씩 끊어서 다시 듣고 따라 해 봐.”
우주는 절대 음감이기까지 했나 보다. 음악 하는 모든 사람을 존경하는 태오는 내심 감탄하면서 가이드곡을 다시 재생했다가 빠르게 멈추고 따라 불러 보았다.
“음……. 모르겠는데.”
“네 귀에 들리는 목소리랑 실제 네 목소리가 달라서 그래.”
“응?”
“이거 들어 봐.”
줄곧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유채가 뭔가를 재생시켰다. 방금 한 소절을 끊어 부른 태오의 목소리—정확히는 우주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오는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가이드곡과는 음정이 달랐다.
“아, 진짜 약간 다르네?”
“개소리하네. 뭐가 약간이냐? 엄청나게 다르지.”
“……다시 해 볼게.”
우주의 청각이 뛰어나긴 했나 보다. 몸 안에 든 영혼이 태오인데도 우주의 귀로 주의 깊게 들으니 확연히 다르게 들렸다. 태오는 이 음정과 저 음정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경험을 처음 해 봤다.
다시 녹음해서 들어 보는데 유채가 그 위로 노래를 덧입히듯 따라 불렀다. 태오의 목소리와 유채의 음성 사이가 미세하게 벌어져 있었다. 태오는 신기한 듯 입을 열었다.
“와. 아까보다 훨씬 낫네.”
“어디가 나아? 이 소음 공해가?”
“…….”
태오는 유채를 노려보는 대신, 속으로 ‘나는 유채를 사랑한다.’를 주문처럼 외웠다.
몇 번 더 반복해서 연습하는 동안 음이 교정되는 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감이 오자 그 뒤는 쉬웠다. 우주는 타고난 발성이 좋았고, 음정 차이를 인지한 순간부터는 굳이 녹음하지 않아도 수월하게 정확한 음을 짚어 낼 수 있었다. 태오는 감탄한 눈으로 유채를 돌아보았다.
“너 되게 잘 가르친다. 많이 해 본 사람처럼.”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그때 유채는 조금 멍한 얼굴이었다. 시선은 태오를 향하고 있었지만 초점이 맞지 않았다.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유채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음치 가르쳐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응? 왜 그런 게 소원이야?”
유채는 대답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깔았을 뿐이다. 긴 눈매 아래로 어두운 그늘이 졌다.
“유채야?”
의아해진 태오가 그를 불렀을 때였다.
짧게 침묵하던 유채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인형 같은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죽거리면서도 줄곧 곡을 가르쳐 주던 순간이 갑자기 깨져 버린 것 같았다. 유채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느새 또다시 서늘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부르지 마.”
“뭐?”
“씨발, 그따위로 부르지 말라고. 못 알아들어?”
“……뭐야, 또. 갑자기.”
우주는 유채보다 두 살 아래였다. 그래도 열여섯 살일 때부터 키우다시피 했던 유채에게 ‘형’ 소리는 도저히 나오지 않아서, 두 살 차이인데 어떠냐는 마음으로 예전처럼 부르던 차였다. 유채도 줄곧 별말 없었다. 이렇게 갑자기 호칭을 걸고넘어질 줄은 몰랐다.
태오는 여느 때처럼 유채가 시비를 걸어온다고 생각하고 적당히 받아치려고 했다. 그러나 유채와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이 얼어붙은 듯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언제나 투명하게 빛났던 유채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가라앉았다. 그의 시선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영혼까지 사라진 듯 텅 빈 눈빛이었다.
조금 전까지 함께 연습하고 있었던 유채가 없어진 기분이었다. 안이 텅 비어 버린 채, 유채의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
며칠 후, 예정대로 타이틀곡 녹음이 진행되었다. 회사 스튜디오에는 프로듀서와 엔지니어가 대기하고 있었다. 순해 보이는 프로듀서가 불안한 얼굴로 태오에게 부탁하듯 말했다.
“우주야, 끝까지 부르기만 해 줘. 일단 부르면 내가 기계음 입혀서 적당히 만질 테니까…….”
“네? 당연히 끝까지 불러야죠.”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한쪽 눈썹을 치켜떴더니 프로듀서가 울상이 되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사정하는 어조였다.
“기분 나빠하지 말고. 나 오늘 결혼기념일이라 일찍 들어가야 해. 잘할 필요도 없으니까 네 파트만 제대로 끝내 줘. 응?”
“……뭐, 네.”
신우주가 음치 되었다는 게 여기까지 소문이 났나. 태오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케빈이 키득거리면서 라윤에게 소곤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케빈은 우주가 한 방에 끝까지 부르는 거에 오천 원 걸래.”
“아무리 죽었다 살았어도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합니까? 저는 중간에 부스 걷어차고 뛰쳐나오는 데 만 원 겁니다.”
“나는 피디 형 울리는 거에 이만 원.”
“이신이 형 세게 나온다! 그럼 케빈은 삼만 원!”
“아, 갑자기 판돈 올리는 게 어딨습니까?”
“그럼 나도 올릴게. 삼만 원으로 통일하자.”
“참나…… 알았습니다.”
케빈과 라윤의 내기에 이신까지 동참하는 게 어이없었다. 음치라고 소문난 게 아니라, 우주의 악명이 워낙 높았던 모양이었다. 태오는 고개를 흔들면서 녹음 부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출입문이 열리면서 유채가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개인 일정에 다녀오느라 조금 늦은 듯했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시선이 마주쳤지만 유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은 볼 때마다 못 잡아먹어 난리더니, 요 며칠간은 또다시 태오를 무시하기만 했다.
태오는 그 변화를 반길 수 없었다. 유채가 줄곧 다 죽어 가는 것처럼 창백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기세등등하게 시비를 걸 때가 나았다.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간다고 생각하면서 태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케빈이 유채를 제 옆에 끌어다 앉히면서 챙기는 모습이 보였다.
“유채 어디 걸 거야? 케빈은 새 우주 믿어 보기로 했어!”
“안 걸어.”
“아이, 왜! 이번에는 판돈도 커!”
“도박 불법이야. 다 신고해 버린다.”
“히익! 유채 나쁘다!”
챙기는 게 아니라 내기를 하자는 거였다.
“우주야. 문 닫고 헤드폰 껴. 시작하자.”
“네.”
그러나 유채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음치 출신인 태오가 처음으로 해 보는 녹음인 것이다. 태오는 헤드폰을 끼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유리창 밖에서 프로듀서가 짧게 신호를 보냈다. 외부의 모든 소리가 차단되고, 녹음이 시작되었다.
전주가 시작됐다. 태오는 며칠 동안 지겨울 정도로 반복해서 들었던 가이드곡의 음정을 떠올리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우주는 미성일뿐더러 성량도 좋았기 때문에, 태오가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깔끔한 고음을 내지를 수 있었다. 녹음 부스 밖에서 프로듀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잠깐, 잠깐만. 우주야. 그만!”
프로듀서가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곡이 뚝 끊겨 버린 탓에, 태오는 헤드셋을 벗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유리창 밖을 바라보았다. 프로듀서와 엔지니어는 물론, 래디언스 멤버들까지 입을 벌린 채 태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는 사람은 유채뿐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태오를 응시하기만 하던 유채도, 태오와 시선이 마주치자 입술을 비틀면서 헛웃음을 쳤다. 십 대였을 때도 안 겪고 지나갔던 질풍노도의 사춘기라도 찾아온 듯한 표정이라 태오는 약이 바짝 올랐다.
‘또 왜 저래?’
태오는 눈썹을 찌푸렸지만 유채를 신경 쓰고 있을 틈은 없었다. 프로듀서가 다급한 얼굴로 녹음 부스의 문을 벌컥 열더니 우는소리를 했다.
“우주야. 너 이건 또 무슨 장난이야?”
“장난이요?”
내가 무슨 장난을 했지. 태오가 당황하는 동안, 부스 밖에서는 케빈이 신난 목소리로 판돈을 키우고 있었다.
“케빈 오만 원 할래! 피디 형아 십 분 안에 우는 데 오만 원!”
“케빈 형은 우주 형이 제대로 녹음 마치는 데 걸었잖습니까? 이미 졌습니다.”
“피디 형 울리는 건 내가 걸었어. 다들 나한테 돈 내.”
“야! 나 아직 안 울었거든!”
프로듀서가 뒤를 돌아보면서 소리를 왈칵 질렀다. 상황 파악을 못 한 태오만 조심스러운 얼굴로 프로듀서의 눈치를 보았다.
“저, 제가 뭐 잘못했…….”
“우주야. 왜 갑자기 이상한 노래를 불러? 몽니 부리는 거야? 그냥 하기 싫으면 싫다고 해. 아, 아니야. 하기 싫으면 안 되는데…….”
“몽니 뭐야? 케빈 못 알아듣겠어.”
“일부러 못되게 구느라고 저런다는 겁니다.”
“아아! 맞아, 피디 형아! 우주 몽니야!”
“우주야. 근데 나 오늘 진짜 일찍 가야 해. 몇 소절 되지도 않는데 그냥 불러 주면 안 돼? 내가 이기면 내기 돈 너 다 줄게…….”
“피디님도 내기에 돈 거셨어요? 어디에 거셨는데요?”
정말로 궁금해져서 물었는데 프로듀서는 원망스러운 눈을 한 채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태오는 머쓱한 듯 중얼거렸다.
“아니, 왜 그러시는데요. 열심히 했는데 갑자기.”
“열심히? 완전히 다른 노래를 부르면서 열심히야? 너 지금 곡 별로라고 시위하는 거지? 파트 많이 안 줘서 그래? 언제는 똑같은 돈 받으면서 노동 많이 하는 거 귀찮고 싫다며? 아, 아니다. 우주야,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냥 좋게 넘어가자, 오늘은…….”
“…….”
이번에는 태오의 입이 딱 붙었다.
횡설수설하는 프로듀서의 낯빛이 노랗게 떠 있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빛에 마음이 흔들렸다. 사 분 남짓한 곡이라고 해서 사 분 안에 녹음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은 태오도 알고 있었다. 타이틀곡뿐만 아니라 수록곡 녹음까지 마쳐야 했으니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대충 문제가 뭔지는 알 것 같았다. 태오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유채를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 유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파트 좀 불러 봐 줄래?”
“내가 왜?”
“음을 못 잡겠어. 전에 네가 불러 주니까 훨씬 쉽게 잡혔던 거 같아서.”
“그러니까 내가 왜.”
‘나랑 무슨 상관인데?’ 하는 얼굴로 유채가 고개를 돌렸다. 태오의 눈썹이 팍 구겨졌다. 저 질풍노도의 청소년을 어떡하면 좋지……. 태오는 기세등등하게 시비를 걸 때가 나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취소했다. 창백한 얼굴로 인형처럼 앉아 있을 때는 예쁘기라도 했다. 다 죽어 갈 땐 언제고 왜 갑자기 기가 살았는지 모를 일이다. 태오, 아니, 우주만 보면 혈압이 올라서 갑자기 팔팔해지는 모양이었다.
심호흡을 하면서 참으려고 노력 중인 태오 뒤에서 프로듀서가 멤버들과 수군거렸다.
“왜 유채한테 불러 달래? 지가 더 잘 부르면서.”
“피디님 모르십니까? 우주 형 취미가 유채 형 괴롭히는 거잖아요.”
“새 우주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케빈 실망했다!”
“괴롭혀도 되게 신기하게 괴롭히네. 새 우주는 또 뭐야?”
“우주 죽었다 살아나서 새 우주 됐…….”
“케빈아.”
이신에게 말끝이 잘린 케빈이 눈을 굴리는 동안, 태오는 유채를 노려보면서 눈빛으로 재촉을 했다. 유채가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픽 웃었다.
“오늘 아침까지 가이드곡 듣고 있었잖아. 그새 까먹었다고? 물고기 뇌야?”
태오는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나는 유채를 사랑한다…….
“녹음된 걸 들으면 귀에 잘 안 들어와. 그냥 짧게 한 소절만 불러 줘.”
입꼬리를 끌어 올리면서 간신히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웃는 얼굴에는 침을 못 뱉는 법이다.
“내가 자판기야? 네 귀가 병신인데, 왜 내 목이 혹사당해야 해?”
유채는 잘만 뱉었다. 태오는 욕설을 내뱉으려는 혀를 콱 물고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러지 말고 한 번만 좀…….”
불러, 이 새끼야.
형형하게 서로를 노려보는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뒤에서는 케빈이 멤버들과 함께 또 다른 내기를 시작하려고 꿈틀거렸다. 날이 선 침묵이 내려앉았을 때, 정적을 깨뜨린 것은 울먹거리는 프로듀서의 목소리였다.
“유채야. 우주가 저러는데 그냥 네가 한 번만 불러 줘라. 오늘 녹음할 것도 많은데 이러다 날 새겠다…….”
“그래, 유채야. 우주 고집을 누가 꺾겠어.”
줄곧 조용했던 엔지니어까지 답답한 듯 말을 보탰다. 고집이 아니라 심술이겠지. 유채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와서 태오는 주먹을 콱 움켜쥐었지만, 그제야 마음을 돌린 듯 유채가 고개를 끄덕거려 준 덕분에 간신히 참았다.
“한 번만 부를 거니까 귓구멍 열고 제대로 들어.”
“알았어, 이 새끼야.”
“씨발, 나 안 한다?”
“씨발 그럼 나도 영원히 안 한다? 여기서 아예 다 같이 살까?”
“얘들아, 싸우지 마. 제발…….”
몇 번 더 말다툼이 오가며 대치한 끝에, 한발 물러선 유채가 목을 가다듬으면서 비싼 입을 열었다.
청량한 목소리가 쭉 뻗어 나갔다. 가이드곡을 들을 때와는 귀에 꽂히는 느낌이 달랐다. 어느 부분에서 음정이 어긋났는지 확실히 가늠할 수 있었다.
‘유채 목소리라서 더 집중되는 건가.’
이 와중에도 유채를 좋아하기 때문에 더 잘 들리는 것 같아서 태오는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
“이제 제대로 할 거야, 우주야?”
프로듀서가 태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간절하게 물었다. 유채를 귀찮게 굴려고 멋대로 굴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태오는 일부러 제대로 안 한 게 아니라고 변명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우주의 신뢰는 이 업계에서 완전히 바닥이다. 멀쩡한 음감을 가졌던 우주가 갑자기 음치가 됐다고 하면 믿어 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태오는 녹음 부스로 다시 들어가서 묵묵히 헤드셋을 꼈다. 프로듀서가 큐 사인을 보냈다.
조금 전에 들었던 유채의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프로듀서의 눈치를 보았지만 끊으려는 신호는 없었고, 태오는 다음 소절로 빠르게 넘어간 뒤 한 호흡으로 제 파트를 마쳤다. 애초에 분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음정을 잡은 뒤에는 어려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음악이 멈췄다. 스튜디오가 잠시 조용해졌다.
“어때요? 틀렸어요?”
맞은 거 같은데. 이번에는 느낌이 좋았다. 입술만 뻐끔거리는 프로듀서를 다시 채근했더니 그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너무 잘해 버렸나? 태오는 조금 뿌듯해졌다.
“아니, 뭐 노래는 그 정도면 됐어. 우리가 만지면 되니까……. 근데 웬일로 한 번에 끝내?”
“아, 우주 형이 피디님 안 울렸습니다.”
“……진짜로 그냥, 음을 못 잡아서 유채한테 불러 달라고 한 거였어?”
“거봐라! 케빈이 뭐랬냐? 새 우주 다르다고 했지? 케빈 이겼다!”
“아까는 십 분 안에 울리는 데 오만 원 건다고 했잖습니까?”
“응? 내가 언제 그랬냐?”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우주의 파트가 빠르게 정리되자 뒷일은 수월했다. 다음으로 유채가 들어갔고, 다른 멤버들이 파트 녹음을 마친 뒤에는 유채와 라윤이 함께 들어가 화음과 애드립을 땄다. 그동안 태오는 케빈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케빈이 펄쩍 뛰었다.
“아얏! 왜 때리냐?”
“간지럽힌 거지 때린 거야? 엄살떨지 마.”
“새 우주야, 이제 케빈 괴롭히기로 했냐?”
“너 뭐 볼 거 있다고 괴롭혀?”
“케빈이 세 살이나 형이다. ‘너’, 하지 마라!”
“……근데, 피디님은 어디에 거셨어?”
“응? 피디 형은 맨날 우주 녹음 잘 마치는 데 건다. 내기 거는 게 아니라 기도하는 거랬다!”
“그럼 이기셨겠네.”
“아, 그러게? 처음으로 피디 형이 이겼다.”
우주야. 내가 이기면 내기 돈 너 다 줄게. 자신을 붙잡고 간절하게 빌었던 프로듀서를 떠올리면서 태오는 씩 웃었다. 그러잖아도 빚이 산더미인데, 푼돈이라도 받아서 가계에 보태야겠다.
***
케빈의 입버릇인 ‘새 우주’는 래디언스의 유행어가 되었다. 죽었다가 살아난 우주의 행동거지가 예전과 지나치게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멤버들이 보기에 ‘새 우주’는 예전 우주보다 능력치는 떨어졌지만 성실했다. 수록곡 녹음을 예전보다 훨씬 빠르게 마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음을 못 잡겠다면서 이상한 곡을 만들어 내더니, 유채가 시범을 보여 준 뒤에는 차분하게 제 파트를 해냈다. 썩 잘 불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주가 녹음을 ‘성실하고’ ‘차분하게’ ‘끝까지’ 하다니.”
“으아, 이신이 형. 방금 그 문장은 모든 단어가 다 이상합니다.”
“그치? 정말 우주가 이상해지긴 했다. 기억 상실이라더니 싸가지 없게 구는 것도 잊어버린 건가?”
“우주는 삼 년 전에도 싸가지 없었다!”
“그러게…….”
“아이, 재미없는 얘기 그만하고 내기나 하자. 케빈은 새 우주가 뮤비 제대로 찍는 거에 십만 원!”
“어엇, 저도 거기에 걸려고 했는데요!”
“나도 새 우주한테 걸 건데. 이러면 내기가 안 되잖아.”
“으음, 유채 형은 어디에 거십니까? 이쪽이 셋이니까 깽판 치는 데 거시면 판돈이 세 배입니다.”
“금액이 너무 커. 너희 다 도박으로 신고할 거야.”
“유채 왜 저번부터 혼자 심통 나서 신고한다고 난리냐?”
“유채 형, 요즘 사춘깁니까?”
유채는 제 곁에 달라붙어서 떠들어 대는 멤버들을 무시하고 우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에서 대기 중이었고, 단독 숏을 테스트해 보기로 한 우주가 촬영장 가운데 서서 메이크업 수정을 받고 있었다. 감독이 뭔가 재미있는 농담을 속닥거린 듯, 활짝 웃는 우주의 뺨에 긴 보조개가 팼다. 유채의 눈썹이 저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보조개…… 없었잖아.’
이신은 우주가 웃는 꼴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했지만 유채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사납게 굴었던 우주도 유채 앞에서만은 종종 생글거렸기 때문이었다. 유채는 태오와 조금도 닮지 않았던 그 웃는 얼굴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동그랗게 접히던 말간 뺨에 보조개가 팼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없던 보조개가 갑자기 생긴 것이 이상했다.
‘무슨 생각인 건지…….’
확실히 요즘의 우주는 예전과 달랐다. 멤버들도 그렇게 말했고, 유채도 느꼈다. 매니저인 명태는 드디어 우주가 철이 들었다면서 기뻐했지만, 철이 들었다기보다는 인격 자체가 바뀌어 버린 수준이었다. 촬영 팀 스태프들에게 사근사근하게 굴면서 감독과 친근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유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 우주’에게 태오가 겹쳐 보였다. 그 기시감이 섬찟할 정도였다.
‘미쳤지……. 어디 갖다 댈 데가 없어서 저 새끼를 태오 형한테 들이대.’
무심코 태오를 떠올렸다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짓씹힌 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그러나 아무리 입 안으로 욕설을 내뱉어도, 기시감이 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유채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
“우주 씨가 표정이 좋네. 연기 많이 해 봤다더니, 역시 능숙하네요.”
“네, 뭐……. 하하.”
“우주 씨 영화도 꽤 찍었지? 주말에 한번 봐야겠다. 대표작이 뭐예요? ‘제왕’인가?”
“네? 아닙니다, 보지 마세요…….”
“왜? 기대되는데? 고개 이쪽으로 돌려 봐요. 어, 눈빛 너무 좋아. 윤주야, 화면 한번 봐. 그림 좋지?”
“진짜 괜찮네요, 감독님.”
“오늘 촬영 진짜 편하겠어. 안 좋은 얘기가 많이 들려서 걱정했는데 역시 소문 믿을 게 못 되네요.”
“소문 믿으셔도 되는데…….”
뮤직비디오 촬영은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우주의 명성 탓에 조금 걱정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래디언스와 작업하는 감독이었기 때문인지 우주에 대한 편견이 없어 보였다. 덕분에 평화롭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
“그럼 다 같이 시작해 볼까요?”
조감독이 손뼉을 쳤다. 구석에 모여 앉아서 수군거리던 멤버들이 벌떡 일어섰다. 또 내기했겠지. 마뜩잖은 얼굴로 그들을 훑어보던 태오의 눈길이 유채에게 닿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도톰하고 말캉한 입술이 부드럽게 달싹거렸다.
“뭘 봐, 씨발.”
“…….”
그즈음에는 태오도 수상쩍은 기분이 들었다. 우주에게만 이러는 걸까, 아니면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 걸까? 태오가 4년간 키우고 3년간 사귀었던 유채는 누구지?
“우주야, 이번에 어렵게 모셔 온 감독님이니까 촬영 조금 힘들어도 너무 화내지 말고…… 이분까지 너랑 작업 안 한다고 하시면 우리 이제 뮤비 못 찍어……. 잘할 거지?”
카메라 앞으로 자리를 잡으러 가다가 명태에게 옷자락이 잡혔다. 태오는 천장을 한번 올려다보았다가,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대꾸했다.
“화 안 내요. 제가 애도 아니고, 이건 일인데.”
“응? 어, 일이긴 하지. 일 맞지……. 진짜 화 안 내기로 했다?”
“왜요. 형도 이번 내기는 저 얌전히 구는 데 돈 거셨어요?”
“못 걸었어. 이상하게 이번엔 다들 그쪽에 걸겠다고 해서 내기가 안 돼서…… 아니, 그게, 무슨 내기?”
“됐습니다. 저 촬영하러 가요.”
“으응, 우주야. 파, 파이팅!”
뭘 어떻게 했길래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마다 감독들에게 다시는 작업하지 않겠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태오는 명태를 안심시킨 후, 카메라 앞으로 다가가 멤버들 곁에 섰다.
“슛 들어갈게요!”
감독이 큐 신호를 보내고,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
음악 소리가 끊기자마자, 태오는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등에서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우주, 뭐 잘못 먹었어? 왜 이렇게 열심히 해. 진짜 이게 무슨 일이야.”
막간을 이용해서 메이크업 수정을 하러 뛰어온 스타일리스트가 놀란 얼굴로 연신 중얼거렸다. 케빈이 톡 끼어들었다.
“현경 누나 아직 모르냐? 우주 바뀐 거?”
바뀌었다니. 정말로 영혼이 바뀐 태오는 제 발이 저려서 흠칫 놀랐다. 케빈이 명랑한 얼굴로 떠들어 댔다.
“새 우주 됐다? 노래는 좀 못하는데 되게 되게 열심히 해!”
노래 그렇게 못해? 태오는 조금 억울해져서 투덜거렸다. 지난 생의 태오는 뭐든지 못해 본 적이 없어서, 열심히 연습했는데도 결과가 제대로 따라오지 않는 현실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우주 아팠다더니, 낫고 나서 철들었구나?”
“아이, 철이 아니다! 그냥 새 우주다!”
“그래, 그래. 케빈이도 화장 좀 고치자.”
“케빈이는 고칠 거 없다! 땀 하나도 안 났어!”
“그러게. 얼마나 대충 했으면 이렇게 뽀송뽀송하니?”
케빈에게 이 정도 안무는 수월했을 것이다. 안색까지 나빠진 채 숨을 가쁘게 내뱉고 있는 사람은 태오뿐이다. 다른 멤버들은 모두 태평한 얼굴로, 막간을 틈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주 씨, 괜찮아요? 촬영 계속해도 될까?”
멀리서 조감독이 소리쳐 물었다.
안무를 수십 번에 걸쳐 촬영해야 하는 뮤직비디오 작업은 연습 때보다 훨씬 체력 소모가 심했다. 이제 겨우 몇 번 반복했을 뿐인데 벌써 이렇게 힘들어서 큰일이었다. 뭘 하든 제대로 해내는 법 없이 성질만 부렸다더니, 기초적인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우주의 몸은 태오였을 때보다 체력이 훨씬 약했다. 태오는 턱 끝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슥 닦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죄송합니다. 저 괜찮아요. 계속할 수 있어요.”
“뭘 그렇게 대단히 했다고 벌써부터 지랄…….”
“안 닥치면 진짜로 지랄한다.”
시비 못 걸어서 안달 난 청소년처럼 구는 유채에게 눈을 한번 부라려 준 후 다시 자세를 잡았다. 힘겨운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잘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촬영이 편했어요.”
멤버들이 촬영 팀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감독이 슬그머니 태오에게 따라붙었다. 숨을 고르고 있던 태오가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우주 씨. 진짜 고생 많았어. 많이 힘들지?”
“아니에요. 제가 체력이 약한 탓이죠.”
우주의 몸에는 열 시간이 넘게 걸린 촬영이 너무 무리였는지 눈앞이 노랗고 줄곧 어지러웠다. 바쁜 시기가 지나가면 헬스장부터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태오는 한숨을 쉬었다. 몸놀림이 나쁘지는 않았어도 춤추는 것은 여전히 어색했는데, 카메라 앞에서 몇 시간이나 같은 동작을 반복하느라 진이 다 빠져서 이대로 기절하고 싶었다.
감독은 태오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촬영 내내 관심을 보이더니, 태오에게 자신의 명함을 내밀면서 싱글거렸다.
“우주 씨, 표정이나 눈빛이나 진짜 좋더라. 다음에 나랑 작업 한번 하자. 연락할게요. 꼭 받아 줘야 해?”
정작 태오는 주어진 대본이나 상대역도 없이 눈빛만으로 치명적인 척하느라 줄곧 목뒤가 서늘했다. 워낙 화보나 광고 촬영 경험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해내긴 했지만, 안무를 소화해 내면서 치명적이기까지 해야 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빚을 갚으라며 달려드는 사채업자가 밤마다 꿈에 나타나는 태오로서는 카메라 앞에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태오는 기합이 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야 영광이죠!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자다가도 받겠습니다.”
“아이, 잘 때는 전화 안 하지.”
감독은 손사래를 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태오도 반가운 얼굴로 따라 웃었다. 뮤직비디오 촬영이 고되긴 했지만 성과가 좋았다. 얼어붙은 개인 활동도 슬슬 재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컴백 준비는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태오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보컬도 댄스도 쉬지 않고 연습했지만 꿈에서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아이돌 생활은 쉽지 않았다. 조금만 방심하면 우주의 가볍고 우아한 몸놀림 대신 태오의 삐걱거리는 손발 짓이 튀어나왔다. 노래를 부르다가도 잠시 긴장을 놓는 순간 음정을 놓쳐서 혼자서만 엉뚱한 곡을 부르고 있었다.
그래도 다른 멤버들은 ‘우주’가 이토록 성실하게 연습에 참여한다는 것에 감격한 눈치였다. 특히 같은 방을 쓰는 라윤의 반응이 가장 열렬했다.
“형, 형. 맨날 침대에서 자니까 컨디션이 너무 좋습니다. 밤마다 꿀잠 잔다니까요?”
“……응, 미안. 앞으로는 괜히 소파에서 자고 그러지 마.”
“우주 형, 지금 저한테 미안하다고 했습니까? 한 번만 더 말해 주면 안 됩니까? 녹음할게요.”
“말해 주면 이 파트 한 번 더 불러 줄 거야?”
“아, 백 번 불러 드립니다. 지금 녹음 켭니다?”
그렇게 태오는 라윤과 나란히 앉아서 핸드폰 녹음 기능을 켰다. 태오가 먼저 라윤의 핸드폰을 들고 ‘그동안 미안했어. 앞으로는 안 쫓아낼게.’ 하고 녹음한 뒤에 라윤이 태오가 맡은 파트를 불러 주었다. 유채가 부를 때만큼 귀에 쏙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더럽고 치사해서 더는 유채에게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와, 근데 우주 형은 왜 이렇게 변한 겁니까? 죽었다 살아나니까 막 세상이 달라 보입니까?”
“어. 지옥에 한쪽 발 담갔다가 오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
“우주 형 지옥에 떨어졌었습니까? 그럴 줄 알았어…….”
“야. 뭐가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어디가 어때서?”
“몰라서 물으십니까…….”
“어, 몰라서 물어. 나 기억 상실증이잖아.”
“기억 상실증이 무슨 만능 핑계입니까? 모른 척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회개하십셔. 다시 지옥 불에 안 떨어지려면.”
“왜 자꾸 나보고 회개하래? 너 기독교야, 천주교야?”
“저 불교인데요.”
라윤은 투덜거리면서도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셀카 모드로 돌렸다. 뭐 하는 거냐고 태오는 질색했지만, 라윤은 신경도 쓰지 않고 태오 곁에 딱 붙어서 핸드폰을 치켜들었다.
“우리 화해한 날인데 기념 셀카 찍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언제 싸웠어?”
“우주 형은 원래 맨날 모두와 싸운 상태잖아요?”
“그래…….”
태오는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라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억지로 치켜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라윤은 핸드폰을 톡톡 건드리더니, 이내 사진을 업로드한 SNS 화면을 보여 주었다. 순식간에 좋아요 개수가 늘어나면서 댓글이 붙었다.
Ralala.hong @new_space #우주형이랑 #첫셀카기념 #마지막은_아니길
Liked by gogo.Kevin and others
gogo.Kevin 뭐냐뭐냐뭐냐뭐냐! 케빈만 빼놓고! 가치놀자!
↳deliciousdumpling @gogo.Kevin 아냐 그거 아닌거 같애 케빈아
↳yoyo0805 @gogo.Kevin 케빈아 숙소니? 빨리 라윤이 방에 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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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_Radiance help! help! Rayoon is in danger!
ethics_chung 라윤이 협박당했니? 우주가 뒤에서 칼 들고 있으면 당근 들고 사진 찍어서 올려!
↳gogo.Kevin @ethics_chung 당근 왜 들어? 케빈 집에 당근 없는데!
↳mint_hater @gogo.Kevin @ethics_chung 아니 댓글달 시간에 라윤이 방에 가보라니까 케빈아;;
---View 35 replies---
ejhuh326 라윤이 때려서 오지게 멍 만들어 놀땐 언제고 웃으면서 뭐하는 거야 ㅋㅋㅋ 싸패냐? #신우주_탈퇴해
↳zonzonzon @ejhuh326 마음은 알겠지만 여기서 이러는건 좀;; 이런건 짹에가서 달아주세요;;;
↳ejhuh326 @zonzonzon 짹에서도 총공 중이에요
↳sansahhh @zonzonzon 쉴드 무슨일인지;;; 우주 악개임?
↳zonzonzon @sansahhh 내가 무슨 쉴드를 쳤다고 그래요;;;
---View 4 replies---
태오는 금세 난장판이 되어 버린 댓글란을 읽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라윤과 셀카를 함께 찍었다는 것만으로도 탈퇴 요구를 받다니. 이전 생에서 태오는 인기가 많은 만큼 안티도 제법 겪어 보았지만 이렇게까지 미움받아 본 적은 없었다. 우주의 인기는 정말로 상상 이상이라서, 숨만 쉬어도 대기 오염 시키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반응 봐……. 괜히 올렸다.”
“팬들이 아직 새 우주를 몰라서 그럽니다. 이렇게 착하고 성실한데 왜 미워하겠습니까?”
“내가 착하고 성실해?”
성실하게 굴긴 했지만 착할 것까지는 없었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라윤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에서 자게 해 주시고.”
“야, 그건 그냥 당연한 거지.”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시고, 녹음까지 하게 해 주시고.”
“몇 달 동안 소파로 쫓아냈는데 사과 한마디로는 부족하지 않나?”
“셀카도 찍어 주시고!”
“굳이 안 찍을 이유도 없잖아.”
“전에는 지저분한 면상 치우라면서 때리셨잖습니까?”
“……미안하다.”
“우와! 저 녹음기 안 틀었는데 이러깁니까? 잠깐만요. 다시, 다시요!”
못되게 군다면서 유채를 나무랄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누구라도 우주에게 상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라윤의 도움으로 수록곡 연습을 이럭저럭 마칠 수 있었다.
***
그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서, 컴백일이 드디어 다가오고야 말았다.
사전 녹화 무대를 앞둔 시간. 태오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새벽부터 방송국으로 출근해 리허설을 세 번이나 했지만 무대에 오를 때마다 자신감이 하락하기만 했다. 지금 당장 래디언스에서 탈퇴하고 배우로 전향하고 싶었다. 팬들도 다들 우주가 탈퇴하기만 바라는 것 같은데 서로를 위해 그게 좋지 않을까?
태오는 사색이 되어서 무대를 올려다보았다가 객석을 향해 눈을 돌렸다. 오랜만에 컴백하는 래디언스를 기다리는 팬들이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우주의 이름을 부르는 팬은 한 명도 없는 듯했다.
“역시 지금이라도 탈퇴하는 게 윈윈인 거 같은…….”
“신우주 돈 많은가 봐? 빚은 다 갚았냐?”
무심코 중얼거린 한탄을 그새 들었는지 귀도 밝은 유채가 이죽거렸다. 빚을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태오는 고개를 휙 돌려 유채를 노려보았다. 눈가에 짙은 섀도우를 바르고 화려한 메이크업을 한 채, 긴 앞머리를 모두 뒤로 넘겨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낸 얼굴이 지나치게 예뻐서 짜증이 났다. 태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배우로 전향하면 되거든?”
“아 그래? 발연기로 버벅거리는 걸 누가 써 주는데?”
내가 너보다 연기는 천 배쯤 잘한다. 태오는 하고 싶었던 말은 입 안으로 겨우 삼킨 채 말을 돌렸다.
“넌 대체 말버릇이 왜 그래? 어디서 배워 온 거야? 안 그러던 애가.”
“내가 안 그랬다고 누가 그래?”
“……원래 말을 그따위로 했다고?”
“너랑 말을 안 섞었으니까 몰랐나 보지.”
“그럼 계속 안 섞을 일이지 왜 자꾸 섞는데?”
“씨발 네가 눈앞에서 짜증 나게 굴잖아. 식은땀은 왜 흘려 대? 언제부터 그렇게 무대에 진지했다고.”
“그럼 그냥 긴장 풀라고 좋게 말하면 되잖아. 입에 칼 물었어?”
“내가 총 맞았냐? 왜 네 긴장을 풀어 줘?”
“아이, 얘들아. 싸우지 마라! 유채 왜 자꾸 새 우주 괴롭히냐? 우주한테 관심 생겼냐?”
“씨발, 케빈 형. 돌았어?”
“유채야, 너 케빈 형한테까지 말버릇이 왜 그래?”
“그래! 케빈이한테 버릇 왜 그러냐!”
“신우주. 나는 너한테 형 아니냐? 내가 너보다 두 살 많거든?”
“아니, 됐다. 무대나 올라가자…….”
유채와 입씨름을 하느라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그때 마침 FD가 신호를 보냈다.
“래디언스 녹화 들어갑니다!”
이신이 다가와 눈짓을 했다. 태오는 멤버들과 함께 무대에 섰고, 팬들의 함성과 함께 음악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