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병원의 복도는 텅 비어 있어 삭막했다. 전신에 수술복을 두르고 마스크와 모자를 뒤집어쓴 채 눈만 내놓은 의사와 간호사들만 이따금 오갔다. 유채는 눈을 들어 붉은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수술 중」
몇 시간째였는지는 유채도 몰랐다. 몇 번째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태오가 깨어나지 못한 채 수술실과 중환자실을 오가는 동안 그의 부모님은 추모 공원에 묻혔다. 태오에게는 부모님 외에 다른 친지가 없었기 때문에 절차는 모두 소속사의 손을 거쳤다.
태오는 여전히 의식 불명 상태였다. 그래서 더더욱 유채는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줄곧 병원에서 지내느라 추모 공원에도 아직 가 보지 못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촬영은 중단되었고, 몇몇 투자자들이 영화에서 손을 뗐다고 들었다. 영화나 성 감독보다는 태오의 티켓 파워를 바라고 투자했던 사람들이 주로 그랬다. 가끔 성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답하지 않은 메시지가 몇 건 연달아 쌓였을 때 유채는 핸드폰 전원을 껐다.
네 번째인지 다섯 번째인지 모를 대수술이 끝난 뒤 유채는 태오의 소속사 대표와 함께 담당의를 만났다. 그는 지친 얼굴로 안경을 벗어 눈가를 문질렀다.
“이제는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목소리는 건조하고 사무적이어서 차갑게까지 들렸다.
듣는 이가 태오의 가족이었다면 의사의 반응도 조금 달랐을 터였다. 억지로라도 피로를 누르고 상대의 감정을 배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채는 태오의 가족이 아니었다. 같은 영화를 촬영 중이었던 동료 배우일 뿐이다.
“다만, 의식이 돌아오더라도 척수가 크게 손상된 것으로 보여서…….”
“살 수 있나요?”
이어지는 설명을 끊고 유채가 불쑥 물었다. 대표가 당황한 얼굴로 유채를 돌아보았다. 유채와 시선이 마주친 담당의는 그제야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표정을 고쳤다. 제 얼굴이 엉망이었나 보다, 유채는 그제야 그런 생각을 했다.
의사는 조금 전보다는 자못 위로가 섞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
그는 대표와 몇 마디를 더 나눈 후 이내 자리를 떴다. 유채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려 달라고 울면서 매달리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눈가는 줄곧 건조했다. 서울의 대학 병원으로 이송된 태오를 찾아 이곳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주 가까이 지났지만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중환자실에 들어갈 수 없어서, 유채는 늘 병원 복도에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또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모두가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여기기 시작했을 때, 마침내 태오가 눈을 떴다.
그때는 이미 일반 병실로 옮긴 뒤였다. 유채는 태오의 머리맡에 있었고, 그의 손을 잡으며 왈칵 울었다. 태오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유채를 바라보았다.
태오는 언제나 솔직했다. 웃고 싶을 때 웃지 않고, 울고 싶을 때 울지 않는 태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태오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유채는 그가 웃고 싶은지, 울고 싶은지조차 알지 못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
깨어난 뒤, 태오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부모님의 안부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돌아가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사고 당시 즉사하셨다고 들었으니, 그때 태오에게 아직 의식이 있었다면 이미 눈앞에서 확인했을지도 몰랐다.
태오는 까만 눈동자로 물끄러미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가, 손을 들어 한쪽 얼굴을 칭칭 감은 붕대를 더듬어 보았다.
반응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유채는 아직 태오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태오는 하반신이 마비되었고, 사고 당시에 났던 화재로 얼굴 절반이 불에 타서 녹아내렸다. 의사는 이렇게 살아난 것만으로도 기적이라며 성형 수술을 몇 번 거듭하면 어느 정도 나아질 거라고 설명했지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에 대해서도 말을 아꼈다.
병원에서도 더는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태오는 휠체어에 탄 채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퇴원했다. 기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유채는 그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미리 아파트에서 기다리는 동안 소속사 대표와 매니저가 그를 데리고 왔다. 유채가 나주에서 데려온 강아지가 꼬리를 붕붕 흔들고 폴짝폴짝 뛰면서 태오를 반겼다.
그제야 태오가 희미하게 웃었다.
촬영은 무기한 중단되었고 성 감독은 연락이 없었다. 투자처를 찾기 위해 애쓰는 것 같다고 매니저인 김명태 실장이 전해 왔다.
[투자자보다는 주인공을 먼저 정해야겠지…….]
핸드폰 너머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씁쓸하게 들렸다.
[주인공 티켓 파워 보고 투자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근데 누가 되어도 투자 유치가 쉽진 않을 거야. 부정 탔다고 소문이 나서.]
“네.”
[너도 몸 잘 추슬러. 감독님이 네 걱정 많이 하신다더라.]
“네.”
[이렇게 스케줄 없이 지내면 어떡하냐고 회사에서는 난리인데 이런 상황에서 컴백 일정을 잡을 수도 없고……. 영화 어떻게 될지 결정되기 전엔 큰 스케줄은 없을 거야. 그래도 화보나 광고 같은 건 가끔 해야 할 것 같아. 괜찮겠어?]
“네.”
인사도 없이 전화를 툭 끊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영화나 스케줄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간절히 원했던 모든 것이 색을 잃었다.
유채가 바라보는 미래에는 언제나 태오가 있었다. 그 곁에서 나란히 함께하고 싶어서 몇 년 동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그래서 갑작스레 태오가 그의 그림자 뒤로 가려졌을 때 유채는 갈 길을 몰랐다.
그들의 앞날은 언제나 한 방향일 줄 알았다. 갈림길이 나타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날, 거실 한 면을 차지한 통유리 창 너머로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먹구름 틈에서 번개가 번쩍거리자 절반만 남은 태오의 얼굴에 공포가 스쳤다. 유채는 황급히 일어나 커튼을 쳤다. 집 안은 금세 어두워졌지만, 빗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태오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미간을 찌푸린 채 숨을 죽였다. 앓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유채는 태오에게 다가가 그를 뒤에서 끌어안고 제 무릎 위에 앉혔다. 태오의 품에는 강아지를 안겨 주었다. 유채가 손대는 것이 싫었는지 꼬마가 아르릉댔다. 태오가 귀 뒤를 쓰다듬어 주었더니 그제야 조용해졌다.
“나 간병인 좀 구해 줘.”
“응?”
태오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며칠 만에 듣는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그마저도 반가워서 유채는 태오의 허리를 끌어안고 팔에 힘을 주었다. 붕대로 가리지 않은 뺨에 입술을 붙이면서 우물우물 물었다.
“간병인은 갑자기 왜요? 내가 계속 있을 건데.”
“너도 이제 스케줄 나가야지.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
“당분간은 안 가도 돼요.”
“영화가 중단됐으면 짧게 예능이라도 해. 한참 일할 땐데 계속 쉬는 거 안 좋아.”
“괜찮아요.”
“잘하고 싶어 했잖아. 열심히 해야 시상식도 가고 상도 타지.”
태오의 목소리는 덤덤했고, 부드럽기까지 했다. 사고가 나기 전처럼 여상한 표정에 목이 멘 쪽은 오히려 유채였다. 태오가 없는 시상식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유채는 혼자 남고 싶지 않았다. 홀로 선 곳이 그늘 속이건, 햇볕이 비쳐 드는 높은 곳이건 마찬가지였다.
“형, 나는…….”
“내가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
유채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 태오는 유채를 원망했을까?
유채가 부모님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더라면. 유채가 명절에 혼자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더라면. 유채가 사고를 당해 나주의 병원에 입원해야 하지 않았더라면.
태오는 부모님을 차에 태운 채, 빗길에 서울에서 나주까지 운전하다가 사고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유채는 그 후 오랫동안 그때의 태오를 떠올리면서 스스로 되묻곤 했다.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태오에게는 한 번도 묻지 못했다.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유채는 그 무렵의 모든 순간을 후회했다.
***
몇 주 뒤, 소속사의 신 대표가 래디언스 전원을 호출했다. 유채는 오랜만에 회사에 나가 멤버들을 만났다. 대표 이사실로 올라가기 전, 로비에서 마주친 케빈이 쭈뼛거리면서 손을 흔들었다.
“유채야…….”
“응.”
“케빈 안아 줘도 돼?”
한국에서 몇 년이나 살았는데 케빈은 여전히 조사를 제대로 쓸 줄 몰랐다. 이 정도면 그냥 머리가 나쁜 거라고 이신이 종종 구박하곤 했다. 이번에도 안아 달라는 소리인지, 안아 주겠다는 말인지 알 수 없어서 유채는 그를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케빈이 와다다 달려와서 유채를 와락 끌어안았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고 있는데?”
라윤을 달고 나타난 이신이 뚱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유채의 머리를 헤집어 댔다. 높이가 조금 부족했기 때문에 굳이 까치발을 뜨고 서야 했다.
“유채 형, 손목은 이제 괜찮습니까?”
“어, 가끔 물리 치료만 하면 돼.”
깁스는 벌써 한참 전에 풀었다. 유채는 움직임이 제법 자유로워진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윤이 ‘다행입니다.’ 하면서 대꾸했지만 표정은 걱정스러워 보였다.
대표 이사실에 올라갔더니 우주가 미리 와 있었다. 유채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눈길을 눈치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신우필 대표가 유채를 보자마자 인상을 썼다.
“한유채. 오냐오냐해 줬더니 어디까지 기어올라? 정신 못 차리지?”
“대표님, 왜 그러세요!”
“대표님! 그러는 거 아니다! 요!”
이신과 케빈의 목소리가 양쪽에서 튀어나왔다. 우주가 입매를 일그러뜨리면서 고개를 팩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줄곧 우주를 외면했던 유채가 눈을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너, 왜 ‘제왕’ 안 하겠다는 거야?”
“…….”
“좀 떴다고 눈에 뵈는 게 없어? 찬밥 더운밥 아주 가려서 받지? 그것도 회사에 말도 안 하고 네 멋대로 중간에서 컷해? 이게 어디서 배워 온 버르장머리야. 왜 대답을 못 해. 입 꿰맸어?”
우주를 제외한 멤버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케빈이 대표의 눈치를 보면서 ‘‘제왕’ 촬영 끝났다 아니야?’ 했다가 다급히 ‘요?’ 덧붙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 전 ‘제왕’ 제작사 측에서 매니저인 명태를 통해 유채에게 새로운 제안이 들어왔다. 명태는 그 일을 신 대표에게 알리지 않았고, 멤버들에게도 말을 아꼈다. 대신 오늘 오전에 유채를 숙소로 불렀다.
***
“태오 형 집에서는 연락받기 불편할 내용일 거 같아서 오라고 했어.”
“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명태는 한참 난처한 얼굴로 뜸을 들였다. 결국 길게 한숨을 쉰 끝에 고개를 든 표정이 난처해 보였다.
“너도 알다시피 지금 ‘제왕’ 투자가 다 취소되게 생겼거든. 그래서 성 감독이 지금까지 찍은 필름 보여 주면서 프레젠테이션 했는데, 투자자 몇 명이…… 너를 원했나 봐.”
“저요? 전 이미 출연하잖아요.”
“아니…… 이세현 역에.”
“…….”
“네가 싫으면 하지 마. 대표님 아시면 억지로 하게 하실 테니까 비밀로 해 둘게.”
자신을 붙잡고 명태가 하는 얘기를 유채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안 해요.”
“응, 역시 조금 그렇지…….”
“그리고 가능하면 진연음 역도 하차할게요.”
“뭐? 유채야, 그건…… 제작이 취소되면 몰라도 지금은 어려울 텐데.”
“위약금 제가 물게요.”
“유채야. 위약금 엄청나. 아니, 그리고 위약금이 문제가 아니라 대표님 성격에 가만 안 계실 텐데…….”
명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잇는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숙소에 있는 줄도 몰랐던 우주가 자다 깬 얼굴로 나와 유채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명태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우, 우주야. 방에 있었어?”
“왜 안 해? 좋은 기회인데.”
우주는 명태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시한 채 유채 앞으로 다가와 섰다. 유채는 눈썹을 구겼다.
지난 몇 년간 유채는 꼭 필요할 때가 아니고서는 우주와 대화하지 않았다.
우주는 몇 번이나 유채에게 고백했고, 느닷없이 껴안아 오면서 치댔다. 아무리 거절해도 제멋대로 자란 도련님은 이해를 못 했다. 오히려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유채에게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악다구니를 퍼붓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케빈은 ‘쟤는 몸에 막장의 피가 흐르나 봐. 분노조절장애가 있나?’ 하고 유채를 붙잡고 소곤거렸다.
유채는 눈이 뒤집힌 것처럼 악을 쓰는 우주보다는 이럴 때만 능숙해지는 케빈의 한국어가 더 놀라웠다. 심지어 조사까지 틀린 데 없이 완벽하게 썼다.
평소에는 우주를 참고 넘겼지만 우주가 던진 접시에 맞아 눈썹 부근에 상처가 났을 때는 태오의 눈에 띄고 말았다. 인상을 쓰는 태오에게 유채는 안무 연습을 하다가 넘어져서 다쳤다고 둘러댔다. 도저히 안무 연습 중에 생길 만한 상처가 아니었지만, 음치일 뿐만 아니라 몸치이기까지 해서 안무 연습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모르는 태오는 대충 수긍하는 눈치였다.
유채가 우주를 생각해서 참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주와 문제가 생기면 둘 중 하나가 팀에서 나가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대상은 당연히 유채가 될 거라고 생각했고, 유채는 소속사에 물어 줄 어마어마한 위약금이 없었다.
태오가 알았다면 제가 내겠다면서 펄펄 뛰었을 것이다. 그건 더 말이 안 됐다. 유채는 태오의 지랄 비용 리스트를 업데이트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사실 우주가 부리는 횡포는 근처에서 왱왱대며 귀찮게 구는 모기에게 따끔하게 한 번씩 물리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유채는 대체로 우주를 무시하면서 넘겼다. 그러다가 언젠가, 모기가 지나치게 물어 댄다 싶어서 더 참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후려친 적이 있었다. 눈썹에 상처가 생겼다고 태오가 속상해했을 때였다.
태오를 달래 놓고 숙소로 돌아온 유채는, 우주가 또다시 의자를 집어 던져 오자 허공에서 날아오는 의자를 주먹으로 맞받아쳤다. 평소에는 그대로 맞았기 때문에 우주는 순간적으로 놀란 눈치였다. 힘을 실어서 받아친 의자는 정확히 우주의 가슴팍을 때리면서 뚝 부서졌다. 우주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신 대표가 계약 해지를 운운할까 봐 잠깐 걱정했지만 의외로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즈음 유채는 신 대표와 우주의 사이가 겉보기만큼 좋지는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 후로는 유채도 우주를 참아 주지 않았고, 회사는 그들의 사이를 방임했다.
그런 사이였으니 우주가 ‘제왕’ 제작사 측의 제안에 대해 알아서 좋을 게 없었다. 어떻게 입을 막을지 고민 중이었는데, 몇 시간도 지나기 전에 신 대표에게 쪼르르 달려갔던 모양이다.
우주와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얼굴을 한 신 대표가 얼굴을 벌겋게 붉힌 채 유채를 윽박질렀다.
“왜 굴러온 복을 걷어차. 성 감독 영화 주연을 왜 안 하겠다고 버텨? 영화는 찍어야 하고, 누가 됐든 들어와서 그 자리 꿰찰 텐데 굴러들어 온 걸 왜 걷어차냐고! 어디, 이유나 들어 보자. 입이 터졌으면 말을 해 봐!”
상황을 눈치챈 이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케빈은 한참 눈을 굴리다가, 뒤늦게 신 대표의 말뜻을 깨닫고 입을 뻐끔거렸다. 대꾸는 의외로 라윤에게서 나왔다.
“태오 형이 그렇게 다쳤는데 그 자리에 어떻게 유채 형이 들어갑니까?”
“뭐야?”
신 대표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라윤이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아한 듯 물었다.
“대표님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우리는 다 너무 슬픈데…….”
“야, 윤태오가 뭔데? 윤태오한테 빚졌어?”
“설마 빚져서 이러겠습니까? 대표님은 너무 정이 없습니다. 태오 형이랑 그렇게 오래 일했으면서……. 태오 형이 재계약 안 해 줘서 그러십니까?”
“맞아! 대표님 벌 받는다! 요!”
“너희들 안 닥쳐? 누가 윤태오 저주라도 했어? 지가 재수 없어서 얼굴 갈리고 다리 잘린 거지, 어차피 빈자리에 유채가 들어가는 게 무슨 상관이야!”
“히익? 대표님 왜 그러나요? 말 그렇게 하는 거 아니시다!”
케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채를 와락 끌어안았고 라윤이 후다닥 유채의 입을 막았다. 두 명이 덤볐지만 유채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해서 결국 이신까지 유채의 팔을 잡고 늘어져야 했다. 신 대표를 노려보는 유채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던 신 대표가 버럭 고함을 쳤다.
“한유채 눈 곱게 안 떠? 아주 치겠다!”
“형, 그만해.”
우주가 눈살을 찌푸리고 끼어들었다. 발끝으로 대표의 책상을 툭툭 치면서 말하는 얼굴이 불만스러워 보였다.
“누가 이렇게까지 하랬어? 그냥 그 역할 맡으라고 좋게 타이르라니까 일을 왜 이렇게 크게 만들어!”
“허허……. 이게 진짜.”
신 대표가 담배를 툭 뱉어 내면서 혀를 찼다. 가늘게 뜬 눈매가 뱀처럼 날카로웠다.
워낙 다혈질인 신 대표는 멤버들에게 불을 뿜듯 화내면서도 그들이 받아치는 것을 적당히 받아 주곤 했다. 그러나 우주를 대할 때는 달랐다. 고개를 반쯤 기울여 우주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전과 달리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신 대표가 이죽거렸다.
“우주야. 작작해라. 뇌에 든 게 없어서 이러냐? 내가 지금 네 투정 들어주려고 애들 잡는 거로 보여? 제 발로 돈주머니를 걷어차려고 드니까 부른 거야. 이 쥐새끼 같은 게 어딜 끼어들어?”
“유채 형한테 함부로 굴지 마.”
“아이고야……. 여기서 유채한테 제일 함부로 구는 게 너냐, 나냐?”
“지금 형이 유채 형 괴롭히고 있잖아. 이러면 나도 가만 안 있어!”
“가만 안 있으면, 또 쪼르르 회장님한테 달려가시려고? 회장님 병원에서 오늘내일하시는 거 모르냐? 돌아가시는 날이 네 엄마랑 네가 우리 집안에서 맨손으로 쫓겨나는 날인 줄 알아!”
“아버지랑 무슨 상관이라고 여기서 그런 얘기를 해?”
“상관이 왜 없어. 회장님이 네 엄마를 끼고돌지만 않았어도 너 같은 쓰레기가 이 업계에서 여태 버틸 수 있었을 거 같아? 내가 너 이뻐서 가는 데마다 깽판 치는 거 다 막아 주고 여기저기 꽂아 준 줄 아냐고!”
“그게 뭐 형이 꽂아 준 거야? 다 아버지 돈이지. 어차피 아버지 돈으로 사업하는 주제에!”
“뭐야? 이 새끼가!”
신 대표가 우주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우주는 지지 않고 바락거리면서 악을 썼다.
순식간에 대표 이사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다행히 신 대표의 분노가 우주에게로 옮겨 가서, 나머지 멤버들은 말릴 생각도 없이 멀뚱하게 그들을 바라보다가 이신이 눈짓하자 슬금슬금 문가를 향해 뒷걸음쳤다.
유채만이 꼼짝도 하지 않고 묵묵히 바닥을 노려보다가 케빈에게 뒷덜미가 잡혔다. 나이 차가 많은 두 이복형제가 서로 핏대를 세우면서 싸우는 동안, 멤버들은 잽싸게 유채를 데리고 후다닥 도망쳐 나왔다.
“막장 집안 가족사에 왜 매번 우리 등만 터집니까?”
무사히 대표 이사실을 탈출한 후, 터벅터벅 숙소로 돌아가면서 라윤이 투덜거렸다.
***
태오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이렇게 달라지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팔다리가 묶인 채 추락하고 나서야 이제까지의 삶이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알았다.
사고가 나던 날은 장대비가 내렸다. 부모님은 출발 전부터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씨가 심상치 않으니 하룻밤 자고 내일 내려가자고 하셨지만 태오가 고집을 부렸다. 몇 시간 못 봤다고, 유채가 보고 싶어서 그랬다.
운전하는 도중에도 번개가 먼 하늘에서 번쩍거렸다. 이따금 눈이 부셨다. 뒷좌석의 부모님은 차에 오르자마자 벌써 잠이 들었고 차창으로 쏟아지는 빗소리만 들렸다. 아침 일찍부터 병원에서 출발해 서울로 왔다가 다시 내려가는 길이라서 체력이 좋은 태오도 어쩔 수 없이 피곤했다. 그래도 한 시간 뒤면 도착 예정이라고 내비게이션이 낭랑하게 외쳐 주는 게 힘이 되었다.
사고가 난 순간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없다.
다만 멍한 눈을 하고 기계적으로 액셀을 밟는데, 어딘가에서 갑작스러운 굉음이 들렸다. 나중에 듣기로는 빗길에 미끄러진 화물차가 태오의 차를 뒤에서 들이박았다고 했지만 그 당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 차체가 허공으로 붕 떴고, 눈앞이 360도로 돌았다. 뒷좌석에서 부모님의 비명이 들렸다. 아버지가 태오를 불렀다. 어머니는 태오에게 어서 차 밖으로 나가라고 악을 썼다. 그러다가 소리가 뚝 끊겼다.
태오는 감히 뒤돌아보지 못했다.
몇 바퀴를 뒤집히며 굴렀는지 알 수 없었다. 안전벨트에 묶인 채로 태오의 고개가 이리저리 꺾였다. 그러다가 발치가 뜨거워졌다. 불이 났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알았다. 벨트를 푼 후 문을 열려고 했는데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불길이 치솟으면서 얼굴을 덮쳐 왔다. 기억이 끊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유채가 곁에 있었다.
유채는 한참 울었다. 그런데 이상할 만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채가 울면 태오는 어쩔 줄 모르고 물길에 젖어 가닥가닥 갈라진 긴 속눈썹에 입을 맞추곤 했는데. 그런 기억들이 지난 생의 일처럼 멀었다.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소속사 사람들이 다녀갔고 래디언스 멤버들도 찾아왔다. 누구도 부모님 얘기를 하지 않았다. 태오는 덤덤한 눈으로 병실 창밖을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그때 뒤를 돌아보았어야 했다고.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해 눈에 밟혔다.
유채는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원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아서 태오는 입을 열지 않았다.
죽었던 감정은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되살아났다.
그때마다 태오는 원망하고 미워할 사람이 필요했다.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우지 않는다면 미칠 것 같았다. 눈앞에 떠오르는 몇몇 얼굴 중 가장 쉽고 편한 표적은 유채였다.
그래서 간병인을 구해 달라고 했다. 혼자 있고 싶다고 유채를 내보냈다.
그 무렵 태오는 늘 외로웠고,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제가 유채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두려웠다. 밀어내는 것밖에는 다른 답을 몰랐다.
그즈음, 태오의 아파트로 우주가 찾아왔다. 간병인이 문을 열어 주었다.
“동생이라고 하시길래……. 너무 닮아서 정말 동생인 줄 알고요.”
이 사람을 왜 들여보냈냐고 묻는 말에 간병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대답했다. 대놓고 불청객 소리를 들으면서도, 우주는 거실의 중문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휠체어에 탄 태오의 다리와 절반쯤 붕대로 가려진 얼굴을 감흥 없는 눈길로 훑어보았다.
“잠깐 자리 좀 비켜요.”
우주가 간병인에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안절부절 태오의 눈치를 보던 간병인은 일순 기가 막힌 기색이었다. 결국 태오가 먼저 피식 웃었다.
“죄송해요. 카페에서 삼십 분만 쉬다가 와 주세요.”
태오가 비상용으로 올려 둔 테이블 위의 카드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간병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데?”
태오가 고개를 기울이면서 물었다. 우주가 딱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유채 형 발목 좀 안 잡으면 안 돼요?”
“응? 내가?”
태오는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면서 놀란 얼굴을 했다. 우주가 인상을 썼다.
“이렇게 된 이상 유채 형이 언제까지 윤태오 씨 옆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사사건건 앞길 막지 말고 좀 놔줘요.”
“와……. 너 연기 못한다더니, 악역 서브 남주, 이런 거 잘하겠다.”
“대충 장난으로 넘기지 말아요. 농담 아니거든요?”
“나도 농담 아닌데.”
우주의 대꾸를 받아치는 입술이 어쩔 수 없이 비틀렸다. 태오는 한쪽밖에 보이지 않는 눈으로, 저를 쏘아보는 우주를 가만히 뜯어보았다. 새삼 자신의 예전 모습과 정말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오는 조금 감탄한 듯 말했다.
“너 이렇게 보니 진짜 나랑 닮았다.”
“얼굴 절반이 갈렸으면서 어디가 닮아요? 거울이나 보고 말해요.”
“너 진짜 하고 싶은 말 마음대로 잘한다. 네 팬들은 고구마 먹고 체할 일은 없겠어. 근데 팬은 있어?”
“쿨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이제까지 나 볼 때마다 이런 얘기 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어요?”
“나는 어른이고 너는 어린애니까 참았지. 근데 이젠 네가 어른이고 내가 약자잖아. 그러니까 나도 너에게 하고 싶은 말 정도는 해도 되지.”
“말장난하려고 온 거 아니에요.”
“아 그래? 계속 장난만 치길래 그런 줄 알았는데.”
우주는 태오를 긁으려고 찾아온 모양이었지만 무뎌진 감정에 생채기가 날 일은 없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우주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을 때, 태오의 얼굴에서도 표정이 사라졌다.
“유채 형이 이세현 역 하게 해 줘요. 그럼 우리 아버지가 ‘제왕’에 투자할 거예요.”
“……뭐?”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못 하게 해요? 내가 진연음으로 들어가서 그래요?”
“…….”
“재수 털린 영화라고 투자자 다 빠진 거 알죠?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돈을 얼마나 붓는데 내가 조연 하나 못 맡냐고요.”
우주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진심으로 억울한 얼굴이었다. 태오는 무감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휠체어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눈높이가 높았다.
늘 내려다봤는데, 이제는 너무 높은 곳을 올려다봐야 했다.
“……유채가 이세현 맡고 네가 진연음이야?”
“뻔히 알면서 모른 척하지 마요. 처음으로 유채 형이랑 같이 찍는 거니까 나도 잘해 보고 싶어요. 이번에는 진짜 열심히 할 거예요.”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우주가 입 안으로 투덜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래, 알았어.”
태오는 순순하게 웃었다. 우주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흘긋거렸다.
“발목 안 잡을게.”
“정말이죠?”
“그럼. 내가 거짓말을 왜 해.”
“유채 형이 이세현 하는 거죠?”
“그렇게 될 거야.”
그제야 우주는 안심한 얼굴로 몇 마디 더 늘어놓다가 아파트를 떠났다.
태오가 틀렸다. 감정은 조금도 죽지 않았다.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서, 태오를 좀먹고 목을 졸랐다.
그래서 유채가 돌아왔을 때, 태오는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면서 삐뚜름히 웃었다.
“너는 내가 그렇게 불쌍해?”
지난 몇 년간 그들은 대체로 사이가 좋았지만 간간이 다투기도 했다. 유채가 투덜거리면 태오가 받아 주다가 막판에는 못 참고 화를 내 버렸고 그 반대일 때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그들은 큰 소리를 내면서 투닥거렸다. 그래도 한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침대에 파묻혀 화해했다. 유채의 팔에 갇힌 채 태오는 처음부터 유채 버릇을 나쁘게 들였다고 툴툴거렸지만 나른하게 뜬 눈매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사고 이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유채는 태오와 싸우려 들지 않았다.
“누가 다녀갔어요?”
시비를 걸듯 물었는데도 돌아온 대꾸가 차분했다. 어렸던 눈동자가 조금의 틈도 없이 어른이 되어 있었다. 태오가 무슨 짓을 해도 입을 다문 채 꽉 끌어안을 것 같았다.
태오는 갑자기 어른스러워진 유채의 눈빛이 싫었다.
“우주.”
내뱉는 목소리가 까끌까끌했다. 문득, 어금니를 까득 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들어 보니 유채의 미간이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아무나 들이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간병인 교체할게요.”
“그러지 마. 동생이라고 얼굴 들이미는데 간병인도 당연히 깜빡 넘어가지.”
“……미친 새끼가.”
“이세현 역 해.”
목소리가 겹쳤다. 유채의 얼굴이 굳었다. 핸드폰을 움켜쥔 커다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당장 뛰쳐나갈 듯 현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눈빛이 사라진 자리에 넓고 단단한 등이 보였다. 태오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속에서 울컥하는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숨이 막혔다.
이제는 유채와 다툴 수도 없었다. 화가 나면 유채는 다른 곳을 찾아 풀었다.
“이세현 하라고. 사람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그제야 유채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는 것 같았다. 눈앞이 까맣게 흐려져서, 사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귓가에서 뭔가가 삐이익— 하고 울렸다. 눈앞이 핑핑 돌면서 어지러웠다.
“너는, 시발. 밖에서 어쩌고 돌아다니길래 걔가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들어.”
“형…….”
“누가 못 하게 했어? 왜 나를 네 발목 잡고 늘어지는 벌레 같은 새끼로 만들어!”
“형, 왜 그래요. 진정해요, 응? 형…….”
태오는 고개를 앞으로 숙이며 헛구역질을 했다. 몸이 경련하듯 크게 요동치다가 앞으로 고꾸라져 버리고 말았다. 휠체어 아래로 굴러떨어지면서 쿵, 소리가 났다. 어깨와 팔이 아팠지만 허리 아래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형!”
저녁 식사 대신 욱여넣은 떡볶이의 매운맛이 식도를 타고 거꾸로 밀려 올라왔다.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묻는 간병인에게 무심코 떡볶이 얘기를 했더니 만들어 준 것이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유채는 회사에 가 있었고, 애초에 태오는 떡볶이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형, 아파요? 정신 차려요! 제발, 형!”
얼굴에 피가 몰려 뺨의 모세 혈관이 모두 터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귓가에서 유채의 비명이 들려오다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가 섞였다.
-태오야, 날이 너무 궂은데. 오늘은 쉬고 내일 일찍 내려가자. 응?
-안 피곤해요. 빗길 운전 처음인가 뭐.
뒤엉킨 목소리들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태오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을 꺽꺽거렸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곳에서 커다란 손이 불쑥 다가와 태오를 끌어안았다.
-그래, 너도 피곤하잖아. 유채한테는 엄마가 전화할게.
-하지 마세요. 당연히 내일 오라고 하겠지.
-그러니까 그냥 내일…….
-오늘 갈래요. 안 피곤하다니까요.
안겨 있고 싶지 않아서 태오는 안간힘을 다해 팔을 휘저었다. 그럴수록 태오를 붙잡은 힘이 세졌다. 눈가와 뺨이 축축하게 젖은 것 같았다.
태오는 숨을 할딱거리면서 기어코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을 토했다.
“너 때문에…… 너만 아니었어도!”
“형, 제발…….”
누군가에게 원망을 뒤집어씌우더라도 그게 유채가 되어서는 안 됐다. 그 애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태오를 만났고 사랑했을 뿐이다.
그런데 정말 유채는 아무 잘못이 없을까?
그럼 누구 탓이지?
“하란 말이야. 토 나오게 하지 말고, 이세현 하겠다고 하라고. 너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어디까지 날 우습게 만들 거야!”
“형……. 미안해요. 진정해요, 형.”
“대답해. 한다고 해. 당장 말하라고!”
“이세현 할게요. 내가 할 테니까 울지 말아요.”
-하지만 이세현이 원해서 진연음 자리를 빼앗은 건 아니잖아요.
-그래.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냥 그렇게 됐을 뿐이지.
언젠가 유채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았다.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 것은 태오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나 혼자 이렇게 고통받아야 해?
눈앞이 멀어졌다. 귓가에서 웅웅거리던 이명과 부모님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끊겼다. 덜덜 떨면서 버둥거리던 팔에 힘이 갑작스레 풀어져서 손등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유채가 태오를 부르면서 울었다.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대답해 주지 못했다.
미안해.
그런 말을 하면 안 됐는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태오는 정신을 잃었다.
***
유채는 이세현 역을 맡았다. 촬영이 곧 재개되었다.
태오는 촬영장 근처에 사 둔 이층집을 떠올렸다. 그곳에 머물라고 말해 두었지만 유채는 촬영 팀과 함께 숙소에서 생활하는 듯했다. 우주도 같은 호텔을 쓸까. 태오는 무심코 생각했다가 제 생각이 어이없어서 웃고 말았다.
사고가 나기 전, 모두가 태오에게 늘 여유롭고 다정하다고 했다. 가진 것이 많아서 그럴 수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알았다. 태오는 제 손에 남은 것마저 잃어버릴까 봐 모든 일이 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한 번씩 정신을 차리면 손톱이 다 뜯어져 너덜너덜했다.
유채는 자주 전화를 걸어 왔다.
[형, 점심은 먹었어요?]
“먹었지. 너는?”
[저는 아직요. 두세 시간 뒤에 먹을 거 같아요.]
“아직도? 벌써 한 시인데.”
[아, 촬영이 밀려…….]
말을 하다 말고 유채가 멈칫했다.
유채는 영화나 촬영장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틈을 내서 서울로 올라와 태오와 함께 지낼 때도 연습은 하지 않았다. 태오는 유채가 잘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번호를 바꾼 후에는 성 감독이나 김아현과 연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채가 입을 다물면 현장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하루, 혹은 이틀짜리 짤막한 휴가를 받아 집으로 돌아올 때면 유채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촬영하느라 많이 힘들었지. 그 한 마디를 못 해서 태오는 입을 다물었다. 쉬는 날마다 올라오지 말고 숙소에서 쉬라고 말하려고 매번 생각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바쁘고 지칠 것을 알면서도 태오는 유채가 기다려져서 오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보고 싶고 그리워서 그랬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궁했다.
태오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유채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로 나온 유채는 침대에 모로 누워 태오를 품에 안고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태오는 팔을 뻗어서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유채가 머물고 가는 밤이면 태오는 꿈을 꾸었다. 시간이 몇 달 전으로 돌아가, 태오는 제 다리로 선 채 말끔한 얼굴로 유채의 허리를 끌어안고 웃었다. 그러나 꿈속에서도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태오는 조금만 더 길게 꿈을 꾸길 바랐지만 매번 밤이 깊을 무렵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다시 잠들지 못했다.
그런 밤이면 지나가는 시간이 길게 흘러가는 바람 같았다.
그런데도 좋았던 날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태오의 곁에서 죽은 듯이 잠들었던 유채가 부스스 눈을 뜰 때 그랬다.
“형……. 잠이 안 와요?”
“잠깐 깼어. 더 자.”
유채의 뺨을 토닥거려 주면 그는 눈꺼풀도 뺨도 통통하게 부어올라서 익은 찐빵 같은 얼굴로,
“내가 자장가 불러 줄게요…….”
하고 눈도 못 뜬 채 웅얼웅얼 노래를 불렀다. 래디언스 곡 중에 태오가 가장 좋아하는 ‘Hush, hush’였다.
작사가가 붙어서 제대로 만든 가사는 따로 있었지만 태오는 유채가 자신을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어설픈 가사로 부르는 게 좋았다. 이제는 유채도 작곡이나 작사 공부를 제법 했기 때문에 그때 같은 유치한 가사는 쓰지 않았다. 그게 태오는 내심 섭섭했다.
언젠가는 유채가 오징어튀김을 만들어 준다고 주방을 기름 범벅으로 만들어 놓았다. 기껏 접시에 내온 오징어튀김은 밀가루 맛과 계란 맛만 나고 오징어 맛이 하나도 안 났다.
“되게 맛없네요…….”
기가 죽어 버린 유채가 눈썹을 팔자로 내렸다. 튀김옷을 벗기고 찬물에 헹궈서 꼬마에게 내밀었지만 꼬마는 유채를 쳐다도 안 보고 고개를 팩 돌렸다.
“아 맞다. 강아지한테 오징어 주면 안 될 거 같아요, 그쵸. 꼬마가 똑똑하네.”
강아지도 먹기 싫을 이상한 맛이라고 하기는 싫었는지 유채가 눈을 굴리면서 더듬더듬 변명했다. 태오는 오랜만에 소리 내 웃었다.
그렇게 천천히 모든 일이 괜찮아질 줄 알았다.
어느 날, 폭우가 쏟아졌다. 간병인은 퇴근한 뒤였고, 촬영지에 내려가 있었던 유채가 휴일이 생겨 올라오기로 했던 날이었다.
창밖에서 번개가 쳤다. 연달아 천둥소리가 쾅쾅 울렸다. 태오의 베개 맡에서 옆으로 길게 누워 잠들었던 강아지가 놀라서 벌떡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태오는 꼬마를 끌어안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괜찮아, 꼬마야.”
태오는 어금니를 악물었지만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춥지도 않은데 이가 딱딱 부딪혔다. 너무 힘을 주었는지 품에 갇혔던 꼬마가 낑낑대며 울었다.
“미안…… 아팠어?”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면서 꼬마를 놓아주었다. 강아지는 태오의 왼팔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다시 눈을 감았다. 이내 고롱고롱한 숨소리가 들렸다. 귀 뒤쪽을 쓰다듬어 주는 손끝이 덜덜 떨렸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형, 잤어요?]
“아니.”
[목소리가 왜 그래요.]
“목소리가 왜.”
[……아니에요……. 지금 명태 형이랑 같이 올라가는 중이에요. 조금만 기다려요.]
“뭐?”
한쪽만 드러난 뺨에 핏기가 식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유채의 목소리가 갑자기 멀어졌다. 침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통유리 창은 커튼도 드리워지지 않았다.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눈이 부셨다.
커튼을 치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태오는 이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오지 마.”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핸드폰 건너편이 잠시 조용했다. 태오는 초조하고 불안해진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검지 끝에서 피 맛이 났다.
[형……. 왜 그래요. 오늘 간다고 했잖아요. 거의 다 왔어요. 응?]
“오지 말라고.”
[컨디션이 안 좋아요? 간병인 퇴근했죠? 다시 가 달라고 부탁할까요?]
“한유채.”
목소리가 일그러졌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한동안 사라졌던 이명이 다시 시작됐다. 유채의 목소리보다 삐— 하고 들리는 이상한 잡음이 더 컸다.
그 이명을 천둥 번개와 함께 창을 무섭게 두드리던 빗소리가 덮었다.
[형, 내가 가서 옆에 있을게요. 조금만 기다리면…….]
“왜 이렇게 내 말을 안 들어. 오지 말라면 좀 오지 말라고, 씨발!”
그렇게 소리 지르면 안 되었다.
[형…….]
빗길이 위험하니 내일 날씨가 좋아지면 오라고 간단히 말하면 될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호텔 아무 데나 들어가서 비가 그칠 때까지만 움직이지 말라고 하면 유채는 말을 들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제대로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씨발, 제발, 좀.”
[…….]
“내 말 좀 들어…….”
전화가 툭 끊겼다. 누가 끊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마 태오였을 것이다. 유채가 태오의 전화를 끊어 버릴 리 없었다.
유채는 태오의 앞에서 화난 티도 내지 못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토기가 치밀었다. 제 모습에 구역질이 났다.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간신히 참고 있는데 또다시 번개가 번쩍거렸다. 침대 한쪽에 팽개쳐 두었던 핸드폰 액정에 메시지 알람이 뜨면서 밝게 빛났다.
“우욱…….”
토사물이 입 밖으로 울컥 흘렀다. 태오는 이불 위에 종일 먹은 것을 모두 게워 냈다. 시큼한 위액 냄새가 났다. 눈앞이 흐려져서, 그대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때까지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현관 쪽에서 소리가 났고, 발걸음 소리가 이어지다가 침실 문이 열렸다. 잠들었다가 벌떡 일어난 꼬마가 캉캉 짖었다.
“형.”
유채의 옷깃에서 비 냄새가 났다. 태오의 뺨을 쓸어내리는 손가락이 차가웠다.
“이게 무슨 냄새…… 형? 토했어요?”
유채가 조심스럽게 태오의 몸을 돌려 제 품에 안았다. 부어오른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더니 비를 맞고 왔는지 앞머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뛰어와서 열이 올랐는지 말간 뺨에 홍조가 돌았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어둑한 그늘 속에서도 투명했다. 태오를 내려다보면서 눈을 깜박일 때마다 길고 빽빽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발그스름하고 통통한 입술이 촉촉하게 반짝거렸다. 태오는 손을 들어서 제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토사물이 묻은 붕대가 만져졌다.
“형, 붕대 갈아 줄게요. 잠깐만요, 저 손 씻고 올게요.”
“하지 마.”
“네?”
“내가 너 오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형…….”
태오는 붕대 아래 가려진 얼굴을 알았다. 보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눈에 띌 때가 있었다.
“형, 붕대 갈아야 해요. 다 묻어서…….”
번개가 치고 천둥이 쾅쾅 울릴 때마다 정신이 좀먹혔다.
“내 말은 들을 가치도 없어? 네가 뭔데 무시해. 내가 죽어야 말 들을 거야? 오지 말라고 했지! 건드리지 마. 좀 꺼지라고!”
놀란 강아지가 유채의 허벅지를 물었다. 유채는 신음 소리도 안 내고 꼬마를 내버려 둔 채 태오를 끌어안았다.
“나 좀 내버려 둬…….”
온몸이 물에 흠뻑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웠다.
“형 말 들을게요. 형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제발 울지 말아요…….”
“나가. 지금 나가, 당장.”
머릿속이 먹먹하고 추위가 밀려들어서 태오는 눈을 꾹 감은 채 떨었다.
유채는 태오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도망치듯 아파트에서 나왔다. 간병인에게 연락해 지금 와 달라고 부탁하면서 눈물이 줄줄 났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일이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괜찮을 리가 없었다. 산산이 조각난 접시를 다시 붙일 수는 없는 거였다. 그걸 태오도, 유채도 알면서 모른 척했다.
***
유채가 찾아오는 시간이 줄었다. 간혹 휴일이 생겨도 촬영지 부근에서 지낼 뿐 서울에는 오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는 종종 전화가 왔다. 그날의 일은 기억에서 지워 버린 것처럼, 유채도 태오도 아무렇지 않게 그날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통화 시간이 늘 짧았다. 태오는 꼬마 얘기를 했고, 유채는 식사 메뉴를 늘어놓고 나면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따금, 깊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침실 문이 열릴 때가 있었다. 태오는 자는 척하고 눈을 뜨지 않았다. 시선은 한참 태오의 뺨에 머물다가 조용히 사라지곤 했다.
흘러가는 시간이 하염없었다. 어느 날은 너무 길었다가 다른 날은 갑자기 짧았다. 태오는 간병인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휠체어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저녁 식사까지 마친 후 침대에 멍하게 누워 있으면 창밖으로 하늘 한쪽에 노을이 졌다.
그 너머 어둠이 밀려왔다. 그대로 하루가 갔다.
겨울이 끝날 즈음 유채는 ‘제왕’ 촬영을 마쳤다.
서울로 돌아온 뒤 유채는 거의 숙소에서 생활했다. 이제는 태오와 지내는 시간보다 우주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었다. 아니, ‘제왕’ 촬영 때부터 그랬을 것이다.
-처음으로 유채 형이랑 같이 찍는 거니까 나도 잘해 보고 싶어요.
또렷하게 태오를 내려다보면서 선언하듯 말했던 우주의 얼굴이 종종 떠올랐다. 그 연기 실력으로 정말 잘했을까? 영화를 망치지 말았어야 할 텐데. 그러나 우주가 ‘제왕’을 망쳤든 그렇지 않든 이제는 그가 유채와 같은 세계에 속한 것은 사실이었다. 태오만 이 아파트에 혼자 남았다.
그때쯤 한두 번씩 가슴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앞으로 고꾸라져 거실 바닥에 쓰러진 태오를 그때 마침 출근한 간병인이 발견해 급히 병원으로 데려갔다.
심장 마비 전조 증상이라면서 담당의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교통사고가 났을 당시 혈관이 터지면서 혈액 공급이 잠시 멎었다가 돌아왔는데, 그 여파로 심장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서서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발견이 늦었다. 유채와 함께 있을 때 몇 번 숨을 제대로 못 쉬고 구토하면서 기절했던 것도 모두 같은 이유로 생긴 증상이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발작이 일어나면 빠른 조처를 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의사는 누군가 태오를 지켜볼 수 있도록 입주 간병인을 두라고 권했다. 태오는 당연하게 권고를 무시했다. 제 모습을 이십사 시간 지켜보는 누군가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머지않아 래디언스가 컴백했다. 컴백 당일부터 시작해 음방에 참석할 때마다 매번 1위에 오르면서 활동을 화려하게 마무리한 뒤, 유채는 스타 작가가 집필하는 미니 시리즈에 서브 남주로 캐스팅됐다. 서브 롤은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5월에 ‘제왕’이 개봉하고 나면 단번에 원 톱 배우로 도약하지 않을까, 태오는 예상했다.
유채는 태오가 심장 문제로 병원에 드나드는 것을 알지 못했다. 태오가 여러 번 거절했기 때문에, 혹은 그 자신도 지나치게 바빴기 때문에 이제 유채는 태오의 아파트에 거의 오지 않았다. 전화가 올 때마다 통화 내용은 늘 같았다.
-형, 잠은 잘 잤어요? 밥은 먹었어요?
-응. 나는 잘 지내.
균열이 간 얼음판 위를 딛고 선 듯한 시간을 견디는 동안 태오는 종종 과거를 돌이켰다.
유채와 그의 사이에는 오랜 추억과 함께 만들었던 시간이 있었다. 어떤 기억은 지나치게 생생했고 다른 기억은 흐릿했지만 어느 순간이든 행복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기억들을 마주해도 마음에 파문이 일지 않았다.
태오는 천천히 유채를 떠나보낼 준비를 했다. 그게 옳았다.
벚꽃이 피어날 무렵에는 ‘제왕’의 트레일러가 공개되었다.
간병인이 틀어 놓은 TV 화면으로 생각 없이 눈을 돌렸다가 트레일러를 보았다. 이세현이 된 유채의 갸름하고 반듯한 얼굴이 정면에서 잡혔다가 점점 멀어져서 전신을 비췄다.
그의 곁에 진연음이 있었다. 함께 울고 웃는 모습이 모두 빛났다. 태오는 자신의 과거를 닮은 우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언젠가의 기억이 불쑥 튀어나왔다.
-형은 나한테 전 세계란 말이에요. 그것도 알아요?
그때 유채가 열여섯, 혹은 열일곱이었던가?
-전 세계만으로 되겠어? 기왕이면 꿈이 커야지. 우주쯤은 되어 달라고 해.
훌쩍훌쩍 울던 유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태오를 올려다보았다. 눈가에 물기가 가득 고여 있었다.
-진짜야.
정말로 그랬다.
-내가 네 우주 해 줄게.
태오는 유채의 우주가 되고 싶었다.
***
유채가 오랜만에 왔던 날, 창밖에 벚꽃이 가득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허공에 눈송이처럼 나풀거렸다.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채는 바닥에 깔린 러그 위에 앉아서 태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유채야, 우리 점심 먹자. 유채야, 영화 보러 가자. 하고 말하듯, 태오는 여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채야, 우리 헤어지자.”
머리칼에 닿던 손길이 뚝 멈췄다.
유채의 뒤에 숨은 얼룩진 그림자로 남아 그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고 싶지 않았던 마음과 유채를 가까이서 마주하는 게 고통스러웠을 정도로 그 애의 빛나는 인생을 질투했던 마음. 삼 년 가까이 이어진 연인 관계를 끝내야 했던 이유가 어느 쪽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유채에게는 상관없었을 것이다. 태오의 결정은 그에게 긴 상흔만 남겼을 뿐이었으므로.
많은 시간이 지난 뒤, 심지어 다른 모습으로 살게 된 후에도, 유채가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소리도 없이 울던 그 순간을 돌이키며 태오는 생각했다. 그때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그게 그들 사이의 최선이었다.
“이제 그만 숙소로 돌아가. 다시는 오지 마.”
“안 헤어지면 안 돼요?”
말간 뺨이 흠뻑 젖을 때까지 눈물만 뚝뚝 흘리던 유채는 축객령을 받고서야 겨우 입술을 달싹거렸다.
태오는 유채가 자신을 흔적도 없이 잊길 바랐다.
그때 유채는 겨우 스물셋이었다. 이런 일들을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렸고, 그 애의 앞날에는 눈부시게 빛날 일만 남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형편없이 떨리는 젖은 목소리를 듣고도 태오는 그를 외면한 채 소파 위에서 돌아누웠다.
“넌 내가 불쌍하니? 그래서 이래?”
그래도 그렇게까지 상처를 줄 필요는 없었는데.
심상한 대꾸를 듣고도 유채가 그 순간을 버텨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얼마간의 정적이 흐른 뒤 천천히 멀어져 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걸로 됐어. 태오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면서 생각했을 때, 현관을 나서는 듯했던 유채가 문득 멈추어 섰다.
“기다릴 거예요. 그래도 되죠?”
그때 유채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태오는 끝내 알지 못했다. 고집스레 돌아누운 채, 두 팔을 움켜쥔 손을 풀지 않고 소파 위의 쿠션에 얼굴을 묻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달려가서 그 애를 끌어안고 가지 말라고 매달려 버릴 것 같았다. 움직여지지 않는 태오의 다리로는 이제 뛰기는커녕 걸을 수조차 없었는데도 그랬다.
몇 년 전, 유채가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 텅 빈 연습실의 한구석에 쪼그려 앉은 채 태오에게 기습 키스를 했던 그날처럼 단호한 표정이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고집스럽게 뺨을 부풀린 말간 얼굴을 떠올린 순간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그 웃음은 먼발치에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깨졌다.
눈물로 범벅된 뺨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유채는 떠났고, 빈 공간에 태오는 홀로 남았다.
태오는 그 헤어짐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최선은 언제나 옳은 것이었을까?
최악을 택하더라도 끌어안고 함께 불행한 편이 유채는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무리 간절하다 해도 기필코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던 흐린 날 만났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봄에 헤어졌다.
창밖에 하얗게 벚꽃 잎이 쌓였다. 봄 햇살이 눈부시게 화사한 날이었다.
***
이별은 날마다 조금씩 가슴속에 고였다.
태오는 가끔 환영을 봤다. 이제는 기억과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유채가 태오를 마주했다. 도톰한 입술을 꾹 물고 쑥스럽게 웃는 웃음이 눈앞에 선명했다. 그럴 때면 짙은 속눈썹이 눈가에서 파르르 떨렸다. 가슴이 저리도록 예뻤다.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언젠가 태오는 자신의 손을 맞잡아 오는 체온을 바랐지만 이제는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환영이 스치고 난 후의 공허함만 남아 심장을 할퀴었다.
‘제왕’은 영화 시상식을 휩쓸었다. 관객을 천만 명 이상 동원했고 평론가들의 평도 좋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가장 큰 영화제가 열렸던 날엔 눈이 내렸다. 겨울의 첫눈이었다.
태오는 불이 꺼진 거실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커다란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축하 무대에 래디언스가 올랐다. 줄곧 TV를 피했던 탓에 유채를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히트곡이 많은데도 굳이 몇 년 전 곡인 ‘Hush, hush’가 나왔다. 태오가 알고 있는 가사와는 많이 달랐지만 그래도 반가워서 태오는 조금 웃었다.
대형 영화제의 오프닝이었기 때문인지 무대는 여느 때보다 훨씬 더 화려했다. 1집 발매 당시와는 달리 유채가 센터에 서 있었다. 못 보던 사이에 또다시 커 버린 유채는 눈부신 조명 아래서 웃고 있었다. 박수와 함성이 흘렀다. 태오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일 년 넘게 사용하지 않은 다리는 근육이 모두 빠져 앙상했다.
무대가 끝난 뒤, 유채는 잠시 보이지 않았다가 이내 ‘제왕’ 팀의 테이블에 합석했다. 우주가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화면에 유채의 얼굴이 잡혔다. 수상 후보로 이름이 불린 모양이었지만, 태오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가슴 안쪽에서 익숙한 압박감이 느껴진 탓이었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고 조여 내는 것 같았다. 태오는 입을 벌리고 숨을 할딱거렸다. 눈앞이 흐려졌다가 또렷해졌고, 이명이 찾아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쇼크가 있었지만 태오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이번 쇼크를 이겨 내지 못할 것이다.
그 마지막 순간이 아쉽지는 않았다.
지난 생애 곳곳에 도사렸던 행운의 넘침과 부족함을 합하여 가감해 보면 제로에 수렴하는, 딱 그만큼의 삶이었으니 여기에서 끝내는 것으로 좋았다. 자연스레 숨이 끊어지는 시기가 얼마간이라도 늦게 찾아왔더라면, 태오는 진작부터 거실 장식장 서랍을 빼곡히 채웠던 수면제를 다량 흡입한 후 스스로 그 시기를 앞당길 각오조차 얼마든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심장이 느릿하게 뛰다가 천천히 멈추면서 눈앞이 까맣게 저물어 갈 때, 각막에 새겨진 것처럼 또렷하게 떠오른 어린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태오는 제게도 남은 후회가 하나는 있었다는 걸 알았다.
“유채야.”
유채를 넘치게 사랑했지만 그보다 더 큰 상처를 주었다. 그래서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었다.
그런데도 그 기억은 태오가 마지막 숨을 내뱉는 순간 다시 찾아와 마지막 미련이 되었다.
그래도 한 번은 더 보고 싶었나 보다. 남은 미련을 끌어안고 눈감게 될 줄 알았다면, 그날 그렇게 돌아누워서 유채를 외면하지 말 걸 그랬다.
마지막 뒷모습이라도 시야에 넣어 두었어야 했다는 늦은 후회는 아무리 되새겨도 끝이 없었다.
창백하게 식은 채 벌써부터 딱딱하게 굳기 시작한 입술이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 정도일 것이다. 가슴 한쪽에 가득 쌓아 두고 일 년 넘게 외면했던 수많은 얘기 중 하나만을 골라야 했다.
“미안해.”
그래서 태오는 오랫동안 가장 마음에 남았던 단어를 내뱉었다. 보고 싶어. 좋아해. 사랑해.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이 미처 없었다.
함께 시상식에 서기로 했었다. 유채의 우주가 되어 주겠다고 했다. 약속을 아무것도 지키지 못해서 미안했다.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죽어 가는 순간의 후회가 덧없음을 태오도 알았다. 알면서도 간절하게 빌고 싶었다. 단 하나 남아 있던 미련이 그렇게 질겼다.
다시는 네게 상처 주지 않을게. 어떻게든 널 행복하게 해 줄게.
이미 입술이 굳어 버려서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을 때, TV 너머에서 유채가 신인남우상을 받고 축하받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진심으로 기뻐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그래도 괴물이 되지 않았다.
기억이 몰아쳐 한꺼번에 흘렀다. 거슬러 올라간 시간 끄트머리에 유채가 있었다.
유채는 태양의 계절 한가운데서 한여름의 햇살처럼 웃었다. 그 애와 함께였을 때 세상은 언제나 눈이 부셨다.
내가 다 잘못했어.
화사하게 빛나는 유채를 마주하고 태오가 미안한 듯 말했다.
그래도 유채야.
한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시간은 없었어.
그러니까 내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스물여덟 살의 겨울. 이루어질 리 없는 소원을 되뇌면서 태오는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발치에 바투 붙었던 강아지가 문득 고개를 들고 낑낑거렸지만 태오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텅 빈 넓은 아파트에서 홀로 맞이한 죽음은 다음 날, 매일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는 태오의 간병인에 의해 발견되었다. 싸늘하게 굳은 시신 곁에 수면제가 흩어져 있었고 유서도 발견되었지만 사인은 심장 마비로 판명되었다.
태오는 연고가 없었던 탓에 빈소는 차려지지 않았다. 대신 유언장 집행을 맡은 변호사에 의해서, 화장 절차를 거친 후 서울 외곽의 묘지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