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3/13)

Chapter 3.


★ K-POP TALK

BEST! [퍼옴] [단독] 윤태오X김아현X한유채, 영화 ‘제왕’ 캐스팅 확정… 8월 크랭크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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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ww.hankookstar.com/news/read/2735109?ref=maver

[한국연예닷컴 왕해나 기자] 배우 윤태오, 김아현, 한유채가 새롭게 제작되는 영화 ‘제왕’에 나란히 캐스팅되었다.

‘제왕’은 20XX년 개봉한 영화 ‘로맨스 스캠’(감독 정윤리)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작품 활동이 뜸했던 배우 윤태오(27)가 오랜만에 스크린에 복귀하는 작품. 타이틀 롤인 제왕 ‘이세현’ 역을 맡은 윤태오는 더욱 깊어진 눈빛과 함께, 역할에 맞추어 몸을 탄탄하게 다진 비주얼을 공개해 연기 변신에 대한 기대감을 더했다.

드라마에 비해 영화 흥행 성적이 다소 부진했던 김아현(29) 또한 ‘나의 일요일’(20XX) 이후 5년 만에 스크린 나들이에 나섰다. 김아현이 맡은 ‘소기영’은 정복 군주인 이세현이 멸망시킨 속국 공주 출신의 왕비로 이세현에 대한 애증을 가진 역할이다.

그룹 ‘래디언스’로 데뷔, 그간 여러 편의 드라마와 예능에서 활약한 한유채(22)는 ‘제왕’을 통해 첫 스크린 도전에 나선다. 그는 제왕 이세현의 유일한 친우이자 책사인 ‘진연음’ 역을 맡으며 영화계의 독보적 흥행 보증 수표로 통하는 윤태오, 드라마퀸 김아현과의 연기 시너지를 예고했다.

‘제왕’은 오슬로국제영화제, 문댄스국제영화제 등 여러 저명한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성우현 감독이 직접 각본 및 연출을 맡은 신작. 유모의 자식으로 자란 제왕 이세현과 왕의 아들로 자란 유모의 친자 진연음의 뒤바뀐 운명, 적국의 공주 소기영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그들의 치열한 애증을 그린 가상 시대극이다. 한편 주요 캐스팅을 확정한 ‘제왕’은 오는 8월 크랭크 인을 앞두고 있다. 왕해나 기자 [email protected]

사진 | 한국연예닷컴DB

미친ㅋㅋㅋㅋㅋ 유채 윤태오랑 영화출연ㅋㅋㅋ 소원성취했네 성덕이다

[댓글(209)]

▶ 왜? 유채가 윤태오 좋아함?

↳ 백만년전에 예능에서 윤태오얘기 딱한번 함ㅋ

↳↳ 그러니까;;; 그만 좀 엮어라 유채가 아직까지 윤태오한테 관심있겠냐;;

↳↳↳ 윗댓 뭐임? 망돌일 때는 태오버스 타려고 어떻게든 엮으면서 그 난리치더니 좀 떴다고 안면몰수하는거 대체ㅋㅋㅋㅋ

↳↳↳↳ 윤태오도 유채한테 관심 없어 걔들 그냥 천년전에 거래처에서 한번 만난 타사직원이야 그만들 싸워

↳↳↳↳↳ 이제부터 사귀면 되겠네ㅋㅋ

↳↳↳↳↳↳ ㅅㅂ피뎁딴다

↳↳↳↳↳↳↳ 내가 무슨얘기함? 주어도 없구만…

▶ 윤태오 주연에 성우현 감독인데 아이돌 끼얹기… 좀… ㅎㅎ…

↳ 나는 김아현도 좀… ㅋㅋ… 드라마에서나 퀸이지 하는 영화마다 말아먹지 않았냐

↳ ? 케팝카테와서 아이돌 까는건 무슨 일?

↳↳ 윤빠는 윤태오카테로 가라 좀

↳↳↳ 엥 나 윤빠 아닌데;; 왜 뭐 아이돌 까면 안됌?

↳↳↳↳ 아이돌 까도 되는데 유채 까는 건 안댐ㅋㅋㅋ 더샤인 지랄남ㅋㅋㅋ

↳↳↳↳↳ 더샤인이 뭐임?

↳↳↳↳↳↳ 래디언스 팬클 이름…

▶ 근데 유채 무섭게 치고 올라오네 벌써 윤태오급임?

↳ 대체 어디에 윤태오급이라고 써있음? 눈깔 어디둠?

↳↳ ㅅㅂ 말을 왜 이렇게 해;;; 주연급 조연인 거처럼 써있자나 기사에;;;

↳↳ 김아현 사이에두고 라이벌이고 뒤바뀐 운명이면 공동주연인거지 모…

↳↳↳ 아닠ㅋㅋㅋ 타이틀롤이 윤태오인데 웬 공동주연ㅋㅋㅋㅋㅋ ㅅㅂ 한유채 빠순이들은 왜 죄다 머리가 꽃밭이냨ㅋㅋㅋ

↳↳↳↳ 윤빠는 윤태오카테로 좀 꺼지라니까;;;

↳↳↳↳↳ 뭐래 나 윤빠 아니거든;;;

↳↳↳↳↳↳ 신우주 악개지 너

↳↳↳↳↳↳↳ 이거다

↳↳↳↳↳↳↳↳ ㅅㅂ 신우주 악개들 돌아다니면서 분탕질 좀 그만 해

↳↳↳↳↳↳↳↳↳ 그 돌에 그 빠라 그럼

↳↳↳↳↳↳↳ 신우주가 누구임?

↳↳↳↳↳↳↳↳ 유채네 그룹에 걔 있잔아… 짭태오…

↳↳↳↳↳↳↳↳↳ 짭태오ㅋㅋㅋㅋㅋㅋ 아련한 이름이다

↳↳↳↳↳↳↳↳↳↳ 언제쩍 짭태오ㅋㅋ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우주 살아있음? 요즘 어디서 머함?

↳↳↳↳↳↳↳↳↳↳↳↳ ㅆㅂ 죽었겠냐?

↳↳↳↳↳↳↳↳↳↳↳↳↳ ㅆㅂ그래서 어디서 뭐하냐고ㅎㅎ

↳↳↳↳↳↳↳↳↳↳↳↳↳↳ 모르니까 저렇게 화났지… 그만해 윗댓아…


***

두 달 전, 태오는 성우현 감독으로부터 직접 ‘제왕’의 시나리오를 받았다. 성 감독은 처음부터 태오를 염두에 두고 각본을 썼다며 출연을 졸랐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뭐예요, 그럼. 이거 청탁이에요?”

한정식이 한가득 차려진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더니 성 감독은 도리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사는 거 아니었어?”

“아 청탁하면서 밥도 얻어드시는 거예요?”

“나는 윤태오가 돈이 너무 많아서 힘들까 봐 좀 쓰게 해 주려고 그랬지.”

“안 힘들어요. 돈 들어가는 취미 생활 있어요.”

“뭐, 연애하니?”

“네.”

“아이, 애인을 취미 생활이라고 하면 어떡해. 서운해하겠다.”

“애인이 취미인 게 아니라 걔가 연예인이라서 굿즈 좀 사느라고요.”

눈을 내리깔고 오징어튀김을 집으면서 대꾸했더니 성 감독이 껄껄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래, 좋을 때다. 그래도 영화 내릴 때까지는 공개하지 마.’ 하고 야심차게 덧붙이는 게 어이없었다.

“제가 언제 출연한댔어요?”

“왜 또 그래. 집에서 그렇게 놀면 안 심심해? 직업이 배우가 아니라 백수인 줄 알겠어.”

“직업 건물주예요. 명함 드려요?”

“건물주로 명함도 팠니?”

“그냥 할 일이 좀 없길래 심심해서…….”

“백수 맞잖아.”

머쓱한 얼굴로 젓가락을 놀리다 보니 시간이 금세 지났다. 성 감독은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라며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태오는 줄곧 시큰둥했다. 언뜻 훑어본 시나리오는 충분히 좋았다. 하지만 지금 보내고 있는 따뜻하고 안락한 생활을 박차고 밖으로 나갈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제 곧 날도 추워질 테고…….

“야, 8월에 크랭크 인 할 건데 무슨 추위 걱정이야.”

“어우, 금방 가을 오고 겨울 돼요. 저 연약해서 추위에 약해요.”

“연약…… 누가 그래…….”

“우리 애인이.”

“시벌, 네 애인도 캐스팅할까? 그러면 돼?”

“그건 청탁이잖아요. 싫어요.”

그렇게 꽂히는 경우라면 유채가 먼저 거절할 것이다. 태오는 아쉬운 마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성 감독이 눈썹을 모았다.

“하긴, 어차피 소기영 역할은 이미 정해졌어. 메인 롤 중에 오디션으로 뽑는 건 진연음밖에 없다.”

성 감독이 덧붙인 말에 이번에는 귀가 솔깃해졌다. 태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어떻게 하면 수상쩍게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고심하면서 성 감독의 앞으로 오징어튀김 접시를 슬쩍 밀었다.

“드시면서 말씀하세요.”

“윤태오가 오튀를 양보해? 뭐지 이건? 청탁일까?”

“무슨…… 아니에요.”

귀신같기는. 태오는 투덜거리면서 진연음에 대해 조금 더 말해 보라고 성 감독을 채근했다. 성 감독은 오징어튀김을 세 개나 연달아 집어 먹더니 뜸을 들이면서 입을 열었다. 그동안 태오는 인상을 쓰면서 담당 매니저를 불러 오징어튀김을 추가 주문 했다.

“좀 신선한 뉴페이스로 찾고 싶은데 마땅한 친구가 없네. 연기야 가르치면서 하면 된다지만 그래도 너무 초보는 좀 그렇고.”

“그렇죠, 그렇죠.”

“너 눈여겨본 신인 없어? 추천 좀 해 봐. 나보다야 네가 어린 친구들을 많이 알겠지.”

“음…….”

주연은 톱 배우를 기용하더라도 주요 조역에는 주로 신선한 마스크를 캐스팅하는 성향 덕분에 성 감독의 영화는 신인 등용문으로도 유명했다. 태오는 성 감독의 눈치를 슬쩍 보면서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얼마 전에 봤던 드라마에 괜찮은 친구 있던데. 한번 살펴보시고 마음에 들면 오디션 보게 하면 어때요?”

“응? 어디에 누구?”

“한유채라고……. 아이돌이에요. 아이돌은 좀 그래요?”

“아냐, 회사에서 트레이닝 빡세게 시켜서 내보내는지 요샌 아이돌들이 더 잘할 때도 많더라. 최원오도 아이돌 출신이잖아. 연기 엄청나던데?”

최원오보다 우리 유채가 낫잖아요? 태오는 속으로만 성 감독에게 핀잔을 주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물었다.

“왜, 그……. 얼마 전에 끝난 ‘인간의 시대’인가? 그 드라마 보셨어요?”

“어어. 봤지, 봤지. 재밌더라.”

“거기서 막 화에서 죽는 애요.”

“아! 잘생긴 애! 알지, 알지.”

성 감독이 박수 치면서 환호하는 것을 보니 예감이 좋았다. 태오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찻잔을 들어 입매를 가렸다. 입꼬리가 부들거리면서 자꾸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아세요? 어떻게 보셨어요?”

“그 친구 연기 괜찮더라. 너처럼 타고난 느낌은 아닌데 매번 다르더라고. ‘예뻐해 주세요’인가? 거기서도 봤는데 그때만 해도 별로였거든. 열심히 하나 봐?”

“몸도 좋아요. 제가 이세현 분장하고 그 친구랑 나란히 서면 둘이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응? 이세현이랑 잘 어울려서 뭐 하게?”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꾸하면서도 성 감독은 구미가 당기는 표정이었다. 확답은 주지 않았지만, 검토해 보겠다고 말하는 표정이 전에 없이 밝았다.

***

며칠 뒤, 유채는 소속사로부터 성 감독이 오디션을 제안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신난 얼굴로 아침부터 아파트에 들이닥친 유채가, 침대에 파묻힌 채 눈도 제대로 못 뜬 태오를 온몸으로 덮치면서 대뜸 물었다.

“형, 얼마 전에 성우현 감독님한테 시나리오 받았다고 했죠?”

“으응.”

“그거 하기로 했어요?”

“아니, 아직…….”

정신이 반쯤 꿈에 걸쳐져 있는 터라 대답이 늦게 나갔다. 유채가 태오의 부어오른 눈꺼풀에 입술을 쪽쪽 맞추면서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오디션 제안 왔어요. 경쟁률이 좀 세긴 한데, 진짜 열심히 준비하려고요.”

“정말?”

눈이 번쩍 뜨였다. 허공으로 팔을 뻗은 태오를 유채가 안아서 일으켜 주더니 혼자 웃었다.

“형, 뒷머리 뻗쳤다.”

“어…… 오디션 언젠데? 진연음 역 맞지?”

혹시 다른 단역일까 봐 조바심이 났다. 영화 경험이 없는 유채로서는 성 감독의 영화라면 단역이더라도 좋은 기회였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진연음 역이었으면 했다. 함께 촬영하는 신이 많아서 흑심이 생긴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비중이 적은 역할보다는 많은 편이 유채의 커리어에 좋으니까…….

다행히 유채는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후로 얼마간은 태오도 오랜만에 바빴다. 유채가 한동안 아파트에서 지내면서 연기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마침 오디션용으로 받은 각본도 이세현과 독대하는 장면이었다. 리딩을 함께 하고 있으면, 벌써 합격해서 같이 촬영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

“데이트하는 거 같네.”

“형한테는 데이트지만 저는 심각하거든요.”

진지하게 대해 주지 않는다면서 유채가 눈썹을 구겼다. 그 표정까지 귀여워서, 태오는 유채의 무릎 위로 올라가 마주 보고 겹쳐 앉으면서 눈을 접고 웃었다. 유채가 불퉁한 얼굴로 태오의 뺨에 제 통통해진 볼을 기대고 바르작거렸다.

“아우, 우리 찐빵.”

“그거 하지 말랬죠.”

“응. 피자 찐빵.”

“아, 씨……. 형 아직도 내 이름 피자 찐빵으로 저장해 뒀어요?”

“아냐, 바꿨어.”

“뭘로?”

“아기새.”

“하트도 붙여서?”

“하트도 붙여서.”

“속 빈 하트 말고 안에 꽉 찬 하트야?”

“그럼, 당연하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이 된 유채가 태오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채 진연음의 대사를 웅얼거렸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시작되는 각본 연습이었다.

“세현. 신분이 바뀌었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그대가 어떤 모습이건, 나는 그대의 사람이야.”

이세현과 진연음이 아직 왕궁에 입성하지 못한 채 반란군에 불과했을 때, 자신이 5왕자가 아니라 유모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진연음이 이세현에게 왕위를 내주면서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이다. 태오는 처량한 표정을 했다.

“우리 연음이……. 평생 왕자인 줄 알고 살았는데 이세현한테 정체성도 뺏기고 왕위도 뺏기고 가진 거 다 털렸으면서 그래도 이세현이 좋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을이라서 어쩔 수 없어요.”

“아, 사랑인 거야?”

“사랑이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잖아요, 이걸.”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연습하다 보면 시간이 금세 지났다.

그렇게 오디션 당일이 다가왔다. 태오는 오디션장에 들러 보고 싶었지만 계약서도 쓰지 않은 입장에서 핑곗거리가 없었다. 미리 계약했다면 진연음의 대사를 받아 준다는 명목으로 참석할 수 있었겠지만, 유채가 떨어진다면 태오도 조금 더 쉴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확답하지 않은 상태였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오디션이 끝났을 시간이 되었다. 시원시원한 성격답게 성 감독은 당일 오디션장에서 바로 답을 준다고 했다.

그러나 유채는 결과 발표가 나고도 남았을 시간이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떨어졌나 봐. 태오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을 때였다.

현관문 밖에서 키패드를 누르는 소리가 삑삑 울렸다. 20xx0101. 유채와 공식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던 날짜로 설정된 이 아파트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유채밖에 없었다.

“형!”

문이 벌컥 열리면서 유채가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놀란 얼굴로 일어선 태오의 허리를 대뜸 끌어안더니 번쩍 들어 올렸다.

“제가 됐어요. 계약서 쓰고 왔어요! 이제 우리 내년 영화제에는 같이 참석할 수 있겠다, 그쵸!”

함께 출연하게 된 첫 영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태오는 이 영화에 내심 크게 기대를 걸고 있었나 보다. 느리게 뛰고 있었던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져 숨이 가빴다. 귓가와 뺨이 따끈하게 달아올랐다.

“……같이 레드 카펫 밟고 들어가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요. 형이 남우주연상 타고 내가 남우조연상 타면 상패 들고 같이 사진 찍어서 SNS에 올리고. 나만 올리면 짝사랑 같으니까 꼭 형도 올려야 해요. 아냐, 상 못 타도 상관없어요. 대신 형이 남우주연상 타면 내가 꽃다발 줄 테니까 그거 들고 사진 찍어요. 유채꽃다발로 주면 너무 티 날까요? 내년 연말에는 꼭 옆에 앉아서 1월 1일 되는 순간에 같이 있어요…….”

들뜬 목소리로 태오의 귓가에 속닥거리는 유채의 모든 이야기가 다 좋았다.

이른 여름의 햇살이 유채의 말간 뺨에 부딪혀 미끄러졌다. 잘생긴 얼굴이 눈부실 만큼 해사하게 빛났다. 그래서 그 순간 태오는, 너무 신나 버린 마음을 감추려고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 내년 연말의 일을 어떻게 장담해?’ 하면서 농담하려던 것도 잠시 잊었다. 덕분에 유채는 태오에게 방해받지 않고 스무 살이 되었던 날부터 제가 줄곧 꿈꾸었던 미래를 마음껏 늘어놓을 수 있었다.

연신 떠들어 대는 입가에 맺힌 미소가 단정해서 어쩐지 마음이 젖어 드는 것 같았다.

유채의 목소리가 잦아들 때쯤 태오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유채의 눈가와, 뺨과, 턱 끝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입술에 맞닿는 살갗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말캉해서 가슴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유채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연하지.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자.”

***

‘제왕’ 촬영은 유채의 인생에서 여러모로 큰 획을 그었던 사건이었다.

유채가 영화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태오가 드라마보다는 영화를 선호했으니까. 스무 살이 되던 해의 첫날,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었던 기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태오의 곁에 나란히 서려면 가능한 기회를 많이 확보해야 했고, 일 년에 한 작품 할까 말까 한 태오가 영화를 고를 확률이 높았으니 유채는 무조건 영화계로 나서야 했다.

인기 있는 아이돌인 덕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드라마 바닥과 영화계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일찌감치 스크린에 진출했던 우주의 경우만 봐도 그랬다. 소속사의 신우필 대표는 우주가 전혀 준비되지 않았을 때부터 투자자들을 통해 감독을 압박했고, 몇 편의 영화에 출연시켰다. 대형 기획사를 운영하는 대표인 만큼 감각이 나쁘지 않았던 덕분에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했지만, 유일한 연기 구멍이었던 우주의 평가는 바닥을 쳤다. 게다가 현장에서 우주가 보인 태도에 대한 소문이 퍼진 뒤에는 어떤 감독도 우주를 쓰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촬영 현장에서 감독과 대거리를 하다가 쫓겨나도 다른 영화에, 안 되면 드라마에 투입되는 우주와는 달리 유채에게는 실패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신 대표가 밀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유채 자신의 마음이 조급했다.

태오의 아파트를 떠나 본격적으로 숙소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후에는 잠을 줄였다. 춤을 췄고, 노래를 불렀고, 토할 때까지 연기 연습을 하다가 코피가 났다. 어느 날은 며칠이나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았다가 군무 연습 중에 갑자기 쓰러져 입원실에서 눈을 뜨기도 했다. 링거를 다 맞을 때까지 옆을 지켜 준 이신이 안쓰러운 얼굴로 유채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태오 형 의식돼서 그래? 열심히 하고 있잖아.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마.”

“아냐, 그런 거. 태오 형이랑은 상관없어.”

“뭐가 아니야. 너 이러는 거 태오 형도 알아?”

“…….”

리더인 이신은 래디언스에서 유일하게 태오와 유채의 관계를 알고 있는 멤버였다. 그는 데뷔 조에 합류하기 훨씬 전, 유채가 처음 연습생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회사에 있었다. 처음부터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익숙해졌고, 그 후에 친해졌다. 그리고 유채가 그나마 마음을 터놓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왜 그렇게 태오 형한테 숨겨. 이런 거 알면 형이 속상해할 텐데.”

“태오 형이 알 필요는 없어…….”

태오는 래디언스가 정상급 아이돌로 자리 잡으면서 유채의 일정에도 여유가 생긴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과는 조금 달랐다. 유채는 스케줄을 줄이는 대신 연습 시간을 늘렸다. 일주일에 하루, 태오를 만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남은 여섯 날의 스물네 시간을 48시간처럼 보냈다. 아이돌로서의 유채는 시작부터 남들보다 앞서갔지만 연기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었다. 남들보다 다섯 배, 열 배 이상 노력해야 가까스로 촬영장에 민폐를 끼치지 않는 수준을 면했다.

그러나 태오가 이런 일들을 알 필요는 없었다.

태오와 함께 보내지 못한 날들이 늘었고, 언젠가는 그 시간들을 후회했을지언정 그 무렵의 유채는 절박했다. 죽을힘을 다해 달려도 태오는 늘 멀었다. 따라잡고 싶었다. 앞서고 싶었던 게 아니라, 같은 자리에 있고 싶었다.

‘제왕’에 태오와 나란히 캐스팅되었던 일은 그 첫걸음 같았다.

첫 대본 리딩을 하던 날, 유채는 잠을 설쳤다. 눈꺼풀과 뺨이 퉁퉁 부어서 캡을 꾹 눌러쓴 채 태오의 차에 후다닥 올라탔더니 핸들을 잡고 있던 태오가 그를 돌아보면서 웃었다.

“우리 아기새가 왜 또 찐빵이 됐지?”

“핸드폰에 내 이름 다시 찐빵으로 바꿀 거예요?”

“응, 너무 찐빵이라 어쩔 수 없다.”

“아, 안 돼.”

투덜거리면서 삐진 척을 했더니 태오가 유채의 가슴팍 위로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가까이 다가온 태오의 목덜미에서 풋풋한 비누 향이 화사하게 났다.

“대본 잘 챙겼어?”

“당연하죠.”

“너무 긴장하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하면 돼.”

“그래도 영화는 드라마랑 좀 다를 거 같아서 불안해요.”

“안 그래. 감독님도 좋은 분이고, 다들 너 좋아하실 거야.”

“응……. 형도?”

머뭇거리면서 슬쩍 묻는 동안 태오가 차를 출발시켰다. 핸들을 반바퀴 돌려 차를 빼면서 태오가 여상하게 대꾸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데. 몰랐어?”

유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식으로 사귄 지 몇 년이나 되었어도 여전히 면역이 없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 같았다.

붉어진 귓불을 만지작거리면서 창밖만 바라보았더니, 옆에서 태오가 입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래디언스의 수많은 히트곡 중에서 태오가 가장 좋아하는 ‘Hush, hush’였다. 태오는 늘 그 곡을 유채가 붙여 준 가사대로 불렀다. 원곡의 가사는 아예 모르는 것 같았다.

그즈음에서는 유채도 제가 쓴 가사의 심각성을 파악한 지 오래였기 때문에 태오가 이럴 때마다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도 태오가 부르는 노래를 원곡 가사대로 고쳐 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만, 언젠가는 태오를 가르쳐서 제대로 된 음정으로 부르게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은 했다.

***

리딩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삼십 대 후반, 혹은 사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성우현 감독은 사람 좋게 웃고 있었지만 눈매가 날카로웠다. 성 감독이 먼저 인사를 건넨 후 몇몇 스태프들이 자신을 소개했고, 이어서 배우들 차례가 되었다.

주인공인 태오가 먼저 일어섰다. 또렷하게 잘생긴 얼굴이 배우들 사이에서도 한눈에 띄었다.

“이세현 역을 맡은 윤태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산발적인 박수와 함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가장 열정적으로 물개 박수를 치고 있는 사람이 성 감독이었다. 그는 손바닥이 빨갛게 부을 때까지 손뼉을 쳐 대다가 급기야 태오를 덥석 끌어안았다.

“윤 배우야, 너 진짜 중간에 하차하거나 도망가면 안 된다. 내가 지구 끝까지 쫓아갈 거야. 나한테 오징어튀김도 받아먹었으니까 먹튀 하면 아주 나쁜 사람이야.”

“아, 내가 어딜 도망가요. 그리고 오징어튀김은 내가 샀거든요?”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다음은 여주인공인 김아현 차례였다. 유채의 옆자리에서 줄곧 대본만 들여다보고 있던 김아현이 일어섰다. TV에서 자주 보아서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쌀쌀한 기색이 감돌았다. 짤막하게 이름과 역할만 언급한 후 자리에 앉은 그녀가, 맞은편의 태오를 향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오랜만이네.”

“뭐…… 그렇네.”

태오가 눈썹 끝을 늘어뜨리면서 다소 난처한 듯 웃었다. 그리고 이내 눈을 내리깔았지만, 유채는 그가 자신의 눈치를 슬쩍 살핀 것을 알아차렸다.

“……진연음 역을 맡은 한유채입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폐 끼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태오가 신경 쓰여서 한 박자 놓쳤지만 무사히 순서에 맞춰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출연진과 스태프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유채에게 쏠렸다. 진연음은 주인공인 이세현과 소기영에 이어서 가장 비중 있는 조역인데도, 영화 경험이 없는 데다 아이돌 출신인 유채가 캐스팅된 것에 대해 말이 많을 것 같아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모두 유채에게 관심이 많아 보였다.

“래디언스, 맞죠?”

테이블 끄트머리에 앉은 누군가가 유채에게 불쑥 물었다. 유채가 긴장한 얼굴로 ‘예.’ 하고 대답하자, 사람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말아 쥔 주먹에 옅게 땀이 배었다.

그때, 테이블 아래에서 누군가 유채의 운동화를 툭 쳤다. 그리고 구두 끝으로 유채의 다리를 느릿하게 훑었다.

고개를 들었더니 맞은편에서 태오가 짧게 웃었다. 유채는 저도 모르게 입가의 긴장이 풀려서 그를 따라 웃고 말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앓는 소리가 들렸다.

“와, 진짜 잘생겼네요…….”

“‘인간의 시대’ 진짜 잘 봤어요. 연기 엄청 잘하시던데!”

“성 감독님 안목 있으시다고 우리 감탄했습니다. 어떻게 유채 씨를 데려오셨지?”

“제가 추천했어요. ‘인간의 시대’도 좋고 그 전작도 좋아요. ‘예뻐해 주세……’”

“유채 씨, 유채 씨! 우리 딸이 래디언스 팬인데 혹시 이따가 사인해 줄 수 있어요? 저 앨범 가져왔는데.”

“형님네 딸 초등학생 아닙니까? 벌써 아이돌 좋아할 나이가 됐나?”

“야, 요즘 래디언스가 초통령이야…….”

주변이 단번에 시끄러워졌다. 유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연신 ‘네, 네.’ 하면서 대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산발적으로 들려오는 음성들 가운데 유채의 필모를 늘어놓는 태오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나중에는 유채도 조금 민망해져서, 운동화 코로 태오의 구두를 툭툭 치고 말았다. 이쪽을 돌아본 태오가 뭐 어떻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대본 리딩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끝났다.

촬영장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대본 리딩에서 출연진 대부분이 호평을 받았을 만큼 연기 구멍이 드물었기 때문에 촬영 속도도 빨랐고, 특별히 무례하게 굴거나 엇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모두 유채에게 호의적이었다. 첫인상이 차가워서 다소 걱정했던 김아현마저도 유채만 마주치면 생글거리면서 상냥하게 굴었다.

“유채 씨, 더운데 이거 한 잔 마시고 해요. 유채 씨 앞으로 온 커피 차인데 우리만 마셔서 미안하네.”

이를테면 이렇게 유채가 차례를 기다리면서 대본을 보고 있을 때, 유채 곁의 간이 의자에 털썩 앉으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미는 식이었다. 당황한 유채가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커피를 받아 들면 어딘가에서 태오가 불쑥 나타났다.

“커피 차는 유채 팬이 보낸 건데 왜 김아현 씨가 생색을 낼까?”

“얘 말하는 거 좀 봐. 누가 보면 윤태오가 보낸 커피 차인 줄 알겠어.”

“유채는 아메리카노 안 좋아해. 이거로 마셔. 그건 나 주고.”

태오가 유채의 손에서 아메리카노를 뺏어 들고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로 바꿔 주었다. 유채는 반가운 얼굴로 캐러멜 마키아토를 쭉쭉 빨았다. 달콤하고 향긋한 액체가 시원하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맛있지?”

“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김아현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투덜거리면서 자리를 떴다. 비어 버린 간이 의자는 태오가 대신 차지했다.

“형, 그런데요.”

“응?”

유채는 빨대로 커피를 쪽 빨아 올린 후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대본 리딩 첫날부터 의심 갔던 일이 방금 확신으로 바뀌었던 탓이다.

그리고 남자 친구의 과거사를 추궁하는 질투쟁이 애인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 김아현 씨랑 전에 사귀었어요?”

“…….”

“아무래도 그래 보이던데……. 지금도 김아현 씨가 형한테 관심 있어 보이고요.”

“뭐, 나한테?”

“나랑 형이랑 친한 거 알고 일부러 저한테 말 거는 거만 봐도 그렇고.”

“……그래서 말 건 건 아닐 텐데.”

태오는 잠깐 허공을 응시했다가, 입꼬리를 당기면서 씩 웃었다. 양 뺨에 보조개가 깊게 팼다.

“예전에 잠깐 만나긴 했어. 거의 전생의 일 같네. 나도 잊고 있었는데…….”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에, 유채의 미간에 세로로 주름이 졌다.

“나는 엄청 신경 쓰이는데 형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 김아현 씨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마요.”

“하하……. 그래, 그래.”

태오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연신 웃으면서 촬영 순서라며 자리를 떠났다. 유채는 여전히 눈썹을 구긴 채,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를 쭉 빨면서 그의 뒷모습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이세현과 소기영의 독대 신을 촬영할 차례였기 때문에 김아현이 카메라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준비를 마무리하는 동안, 태오는 뒤통수에 따갑게 꽂히는 유채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작게 웃었다.

“왜 또 혼자 웃어? 불길하게?”

공주 분장을 한 김아현이 소리도 없이 다가와 태오의 팔을 툭툭 쳤다. 먼발치에서 이쪽을 노려보는 유채의 눈초리가 뾰족했다.

“사람은 참 똑같은 장면을 봐도 생각이 다 달라.”

“뭐래.”

김아현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가, 태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뺨이 부루퉁했던 유채가 움찔 놀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아참, 너 왜 자꾸 방해해? 나 유채 씨한테 점수 좀 따고 싶은데.”

생각난 듯 덧붙이는 김아현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태연해서 태오는 인상을 썼다. 남의 애인에게 관심 있다고 선언하면서 뭐가 이렇게 당당해? 태오는 다소 짜증 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너 이런 얘기를 나한테 하고 싶어?”

말하고 나서야 유채와의 관계를 김아현이 짐작할 리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뜻밖의 날카로운 반응에 김아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깔깔 웃으면서 태오의 어깨를 연신 때렸다.

“나랑 만났던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윤태오 그때 진짜 귀여웠는데……. 스무 살 때였나? 정말 추억이다. 우리 많이 늙었어, 그치?”

“……나 스물일곱 살밖에 안 됐거든.”

“알았어, 알았어. 그런데 너, 유채 씨랑 친한 것 같던데 그럼 내 얘기 좀 잘 해 줘. 애가 진짜 너무 예쁘게 생겼더라.”

“양심이 있어? 스물두 살짜리 어린애를 연애 상대로 봐?”

“스물만 넘으면 다 어른이지, 뭘 발끈하고 그래. 찔리니?”

“내가 왜 찔려…….”

“아니면 뭐, 나한테 아직도 마음 있나? 걔가 네 자리 뺏을 거 같아서 겁나? 그러지 마, 윤태오도 이제 슬슬 후배한테 자리도 내주고 그래야지. 안 그래?”

“뭐라는 거야. 재밌어?”

아무래도 유채 단속을 단단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태오는 혼자서 신난 김아현에게 한 마디 쏘아 주고 등을 홱 돌렸다.

“그리고 유채 애인 있어. 너보다 훨씬 예쁘고 엄청나게 돈 많은 애인.”

김아현이 웃음을 뚝 그쳤다.

***

‘제왕’은 삼국 시대 이전 시기를 모델로 한 가상 시대극이다. 왕국 ‘당경’의 왕자로 태어나자마자 암투에 휘말려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유모의 품에 안긴 채 궁 밖으로 도망쳐 본인이 유모의 아들인 줄 알고 자랐으나 결국 제위를 차지하는 5왕자 이세현의 일대기를 그린다.

이세현을 대신해 눈속임용 가짜 왕자가 되어 궁에 남은 진연음은 열 살 무렵 왕후에 의해 독약을 먹고 궁 밖으로 내쳐진다. 다행히 목숨을 부지한 그를 친모인 유모가 데려왔으나 그녀는 왕후가 보낸 추격자들에 의해 사망하고, 이세현과 진연음은 그들의 뒤바뀐 신분을 모른 채 서로에게 의지하며 함께 자라 성년이 된다.

그 무렵 왕후의 적자인 1왕자가 왕위에 오르고 폭정이 시작된다. ‘당경’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선왕의 핏줄인 5왕자가 새 왕으로 추대되어 폭군과 전쟁을 벌인다. 그러나 5왕자군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 폭군에 의해 궁에 억압되었던 5왕자의 모후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해 5왕자군과 합류하고, 그녀는 진연음과 이세현에게 그들의 뒤바뀐 운명에 대해 털어놓는다.

이세현은 진연음의 자리를 빼앗길 원하지 않지만 진연음은 결국 고민 끝에 5왕자군 전체에게 이세현의 진정한 신분을 알린다. 이후 진연음은 이세현의 그늘로 물러나 그의 오른팔이자 책사가 되고, 이세현은 폭군과의 치열한 전쟁 끝에 최종 승리자가 되어 왕위에 오른다. 여기까지가 전반부의 내용이다.

“신 27-5, 슛 들어갈게요!”

큐 사인이 들어왔다. 유채가 연기하는 진연음이, 자신이 왕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5왕군의 수장에서 물러나는 장면을 촬영할 차례였다.

진연음이 된 유채가 이세현으로 분장한 태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세현. 신분이 바뀌었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그대가 어떤 모습이건, 나는 그대의 사람이야.”

진연음이 이세현의 손등에 입을 맞춘다. 이세현은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달라지는 게 없지? 내가 네 모든 걸 빼앗았는데.”

진연음은 평생 5왕자로서 살아왔다.

5왕자였기 때문에 그는 열 살까지 궁에서 지내는 동안 수없이 여러 번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그리고 가까스로 탈출해 성장한 후에는 5왕자군을 이끌며 수많은 승리를 이끌었다.

이제 마지막 전투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이제 곧 궁에 입성할 수 있을 터였고, 진연음은 왕위에 오를 예정이었다. 그런데 5왕자는 진연음이 아니라 이세현이었다는 것이 이제 와서 밝혀졌다.

진연음은 가장 사랑하는 친우인 이세현에게, 그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이세현이 이런 결과를 원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이해가 안 돼. 어떻게 네가 그렇게 순순히 물러날 수 있는지.”

이세현이 허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난 이런 걸 바란 적이 없어. 네가 왕위에 오르고, 네 곁에서 평생 함께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렇게 되었다면 그들은 모두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세현은 친우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끝에 끝내 진연음을 불신하게 되지 않았을 테고, 진연음은 그가 평생 걸어온 길을 포기하지 않은 채 제왕의 위치에서 자신의 뜻을 펼쳤을 것이다.

‘제왕’ 후반부의 암울한 전개 대신, 평화롭고 아름다운 삶이 이어질 수 있었을 터였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나 때문에 네가 남은 평생을 그늘에서 살아야 한다니…….”

“세현.”

진연음이 이세현의 자책을 끊어 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젓고, 눈을 들어 이세현을 바라보면서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대의 탓이 아니야. 이건 그저…… 이렇게 되어 버린 거야. 우리는 이제 바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면 돼.”

“하지만, 그럼 너는?”

넌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세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이대로 좋아. 그대가 왕이 되든, 내가 되든. 그게 뭐가 중요해? 어차피 우린 함께 있을 건데.”

이세현을 향해 활짝 웃는 진연음의 표정이 순순하고 밝았다. 그리고 이세현의 뺨을 꽉 쥐면서 다짐하듯, 혹은 타이르듯 말했다.

“세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그대를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이세현의 속눈썹에 맺혔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진연음이 엄지를 움직여, 이세현의 젖은 뺨을 닦아 주었다.

“컷!”

성 감독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컷을 외쳤다. 유채는 눈가에 물기가 가득 고인 태오의 표정에 놀라 안절부절못하며 당황해했지만, 태오는 금세 눈을 접으면서 쌕 웃었다. 눈물을 툭툭 흘리면서도 활짝 웃는 얼굴이 상쾌해 보였다.

“얘들아, 이리 와 봐. 화면 진짜 괜찮다. 유채 감정 연기가 대단한데?”

성 감독이 모니터를 응시하면서 그들을 손짓해 불렀다.

“정말요……? 괜찮았어요?”

유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성 감독에게 다가가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성 감독 대신 태오가 말을 받았다.

“정말 좋았어. 나도 유채 감정선 따라가다가 울어 버렸네.”

“그러게. 나도 놀랐다, 윤태오. 눈물 연기 애드리브까지 들어가니까 훨씬 더 좋더라. 너희 둘이 그냥 다 해! 감독도 필요 없겠어!”

“진정해요, 감독님. 뭘 또 그렇게까지요.”

태오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예정에 없었던 눈물을 쏟아 낸 눈가가 발긋해진 채 부어 있었다. 스타일리스트가 허둥지둥 다가와 태오의 메이크업을 수정해 주었다.

성 감독은 화면을 이리저리 돌려 보면서 연신 감탄을 늘어놓았다.

“태오야 워낙 믿고 가지만 유채는 영화가 처음이래서 걱정했는데, 거참. 이렇게 연기를 잘해 버리면 내가 무안하잖아, 어? 유채야.”

“아……. 감사합니다.”

“진연음 감정선 표현이 너무 좋다. 어? 아니, 어떻게 이렇게 내가 원하는 걸 찰떡같이 맞춰 왔지? 무슨 생각 하면서 연기한 거야?”

“별생각 안 해요. 특별한 건 없고, 그냥…….”

유채가 뺨을 붉히면서 태오를 슬쩍 곁눈질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이스팩으로 눈가를 식히고 있던 태오가 싱긋 웃었다.

“……이세현이 진짜 태오 형이라고 생각하고 했어요. 그게 감정 잡기가 더 편해서.”

“와하하하하하! 아이, 그랬어? 유채가 태오를 진짜 좋아하나 보네! 이러다 스캔들 나면 어쩌지? 영화 내릴 때까지는 들키지 않게 조심해!”

“뭐, 영화 내리고 나면 들켜도 돼요?”

태오가 태연한 얼굴로 슥 끼어들었다. 유채만 혼자서 사색이 되었다.

“응. 영화 내린 다음에야 뭐, 팝콘 각이지. 내가 응원할게. 예쁜 사랑 하세요!”

“파파라치한테 사진 넘기지나 마세요.”

태오는 피식 웃으면서 자리를 떴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성 감독의 눈치를 보던 유채도 그의 뒤로 쪼르르 따라붙었다.

“야, 이거 아무래도 유채 신을 좀 더 늘려야겠는데…….”

그들의 등 뒤에서 성 감독이 연신 중얼거렸다.

“형, 근데요.”

다음 신을 촬영할 때까지는 대기 시간이 상당히 길었다. 유채는 태오와 함께 태오의 밴에 올라타 쉬고 있었다. 가을이 다 되었는데도 여전히 날이 더웠다.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떠먹고 있던 태오가 ‘왜?’ 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먹고 싶어? 안 먹는다며.”

“그게 아니라…….”

“아, 해.”

“…….”

저도 모르게 벌어진 유채의 입 안으로 딸기 맛 아이스크림을 담은 작은 스푼이 쏙 들어왔다. 입 안 가득 번지는 딸기 향이 달달하고 상큼하긴 했지만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서 그를 부른 것은 아니었다. 유채는 아이스크림을 담고 우물거리느라 볼록해진 자신의 뺨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느라 몹시 바쁜 태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말랑 콩떡처럼 쏙 들어가지? 찐빵이라고 저장하는 거 싫으면 콩떡은 안 돼?”

“……안 돼요.”

아이스크림을 꿀꺽 삼킨 유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찐빵에서 아기새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콩떡 같은 게 될 수는 없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요, 형. 이거 진짜 소기영이 여주인공 맞아요?”

“응? 왜, 아닌 거 같아?”

“전반부까지 소기영은 등장도 안 해요.”

“후반부에 임팩트 있게 나오잖아.”

“그래도 뭐랄까, 각본을 아무리 다시 읽어 봐도 브로맨스 같아서……. 그래서 아까 진연음이 이세현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식으로 연기한 거였거든요.”

“그랬어?”

“네. 그래서 좀 걱정했어요. 감독님이 싫어하실까 봐. 근데 오히려 좋아하셨잖아요. 브로맨스가 맞는 거 같아요…….”

“하하…….”

유채가 다시 각본으로 시선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태오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감독님이 절대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시던데.”

‘응? 브로맨스? 아닌데? 어딜 봐서 이게 브로맨스야? 우정이지.’ 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박하던 성 감독의 둥근 얼굴을 떠올린 태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유채의 입에 다시 딸기 아이스크림을 물려 주면서, 싱긋 웃는 얼굴로 덧붙였다.

“원래 아저씨들이 작정하고 만든 우정 영화가 항상 그렇게 로맨틱하더라고.”

***

성 감독은 서글서글하고 장난스러운 평소의 성격과 달리 카메라 앞에서는 입이 걸어질 때가 있었다. 한참 칭찬을 하다가도 틈새마다 불평을 늘어놓는 식이었다. 그래서 촬영장에는 늘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그는 정신을 바짝 곤두세운 배우들에게서 언제나 좋은 연기를 이끌어 냈다.

촬영이 주로 나주 세트장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촬영 팀은 근처의 호텔을 장기로 임대해서 지냈다. 김아현처럼 광고나 화보 촬영이 잦은 배우들은 다른 일정을 함께 소화하느라 서울을 자주 오갔다. 그러나 태오는 크랭크 인을 했을 때부터 줄곧 나주 밖으로 한 걸음도 나서지 않았다. 촬영 기간 내내 다른 스케줄을 전혀 잡지 않다니, 톱스타인데도 작품에 쏟는 열정이 대단하다고 스태프들이 감탄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태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태연한 얼굴로, ‘집중하고 싶어서요.’ 하고 대답해 박수를 받곤 했지만 사실은 그렇게까지 일을 많이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유채는 알고 있었다. 몇 년이나 지켜본 바로는, 태오는 아무래도 일하는 걸 별로 즐기지 않는 것 같았다.

“형, 근데…… 이 년에 한 작품만 하면 조금 심심하지 않아요?”

“응? 아냐, 나 그래도 일 년에 하나는 해.”

“주기가 점점 길어지는 거 같던데…….”

“그랬나?”

촬영을 마치면 늦은 밤이었다. 세트장에서 숙소까지는 멀지 않았고, 유채는 종종 태오와 함께 그 길을 걸어서 돌아가곤 했다. 그날도 인적이 드문 길가를 타박타박 걷다가 유채가 불쑥 물었다. 태오는 잠깐 고민하는 얼굴이더니, 한숨을 작게 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나는 노는 게 제일 좋아. 다들 그런 거 아닌가?”

“그런가요?”

“너처럼 열심히 살고 싶어 하는 게 특이한 거지. 그런 점이 좋지만.”

“으응…….”

유채는 뺨을 붉히면서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굴렸다. 태오가 작게 웃으면서 두 팔을 뻗어 유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형, 촬영 팀에서 누가 보면…….”

“이세현이랑 진연음도 우정이라는데 우리도 우정이라고 하지, 뭐.”

여름이 거의 막바지였다. 새벽이 가까운 시간은 덥기보다 이제 제법 선선했고 목덜미에 닿는 공기가 맑았다. 즐거운 얼굴로 웃다가도 너무 피곤하다고 미간을 좁힌 채 투덜거리는 태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채가 불쑥 입을 열었다.

“형, 일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응? 같이 시상식 가고 싶다고 노래 부를 땐 언제고.”

“그거야, 저는 형이 작품 하는 거 좋으니까……. 그래도 형이 싫은 거면 하지 말아요.”

“안 돼. 나 돈 많이 드는 취미 생활 해야 하거든.”

농담하듯 대꾸하는 태오의 뺨에는 보조개가 움푹 패어 있었다. 홀린 듯 그 보조개를 바라보던 유채가 입 안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게요……. 형은 하고 싶은 거 해요.”

“…….”

태오가 다소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푸시시 웃었다. 길게 접히는 눈매 끄트머리가 반달처럼 휘었다.

“오. 유채가 나 먹여 살리려고?”

“어, 네…….”

“나 돈 많이 드는 취미 생활 있다니까? 네가 벌어 오는 돈 내가 다 써도 돼?”

“응, 다 써도 돼요.”

“에이, 진짜? 안 아까워?”

제법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꺼낸 말인데 태오가 믿어 주지 않는 것 같아서 유채는 조금 억울해졌다. 뾰족해진 눈으로 태오를 흘긋거렸더니 그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까, 그럼?”

“저도 이제 영화 시작했으니까 앞으로 일도 더 많이 할 수 있을 거고…….”

“그래, 그래.”

“영화제에서 상도 타고 그러면, 몸값도 더 오를 거고요…….”

“그럼, 당연하지. 유채가 돈 많이 벌어 와.”

“형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줄 수 있어요. 돈 많이 드는 취미가 뭔데요?”

“있어, 그런 거.”

태오는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

그런 하루하루가 일상처럼 흘렀다. 유채도 제법 영화판의 촬영 스타일에 익숙해지고, 성 감독에게서 연일 극찬을 듣게 되었을 무렵 가을장마가 왔다. 마침 수중 촬영을 해야 할 장면이 많은 시기였다. 몰아서 수중 신을 찍느라 배우들은 물론 촬영 팀까지 고생이었는데, 성 감독은 살수차를 부르지 않아도 되어서 돈이 굳었다면서 장대비를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혼자서 신이 났다.

조역인 유채보다는 태오가 비를 많이 맞았다. 이러다 태오가 몸살이 나서 크게 앓으면 어떡하냐고, 유채가 성 감독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놓는 볼멘소리가 슬슬 커지기 시작했을 무렵 수중 촬영이 끝났다.

“어휴, 알았어. 알았어! 이건 무슨 낑낑대는 강아지도 아니고.”

성 감독은 유채의 손을 털어 내는 시늉을 하며 껄껄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유채를 가리키면서, 홀딱 젖은 채 핫팩을 끌어안고 앉아 있는 태오를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윤태오, 강아지 키워? 보기에만 예쁘지 덩치가 이렇게 커서야 원, 돈 많이 들겠어!”

오전 내내 비를 맞아서 입술이 파랗게 질린 태오가 성 감독을 흘긋 바라보더니 툭, 대꾸했다.

“키우는 거 아니고 사귀는 건데요.”

“와하하하하! 네가 유채랑 사귀면 나는 뭐, 어? 한시운이랑 사귀게?”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사는 한시운 머리채는 왜 잡아요. 한시운이 경기 일으키겠어요.”

성 감독이 전작을 함께했던 배우를 들먹이는 동안, 그의 등 뒤에서 유채만 혼자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가 빨갛게 달아오르기를 반복하면서 펄쩍 뛰었다.

다행히 오후에는 날이 맑게 갰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친 태오가 밴에 들어가서 쉬는 동안 유채는 다른 조연들과 함께하는 몇몇 장면을 더 촬영했고, 늦은 저녁 무렵에는 태오와 함께하는 신이 있었다. 일정을 모두 마무리하고 나니 또다시 새벽이었다.

“피곤하니까 오늘은 그냥 차 타고 가요.”

나란히 걷는 퇴근길은 유채의 즐거움 중 하나였지만 오늘은 태오가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태오는 걱정스럽게 말을 붙여 오는 유채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모처럼 비도 안 오는데 그냥 걸어가자. 비 때문에 벌써 한참 못 걸었잖아.”

“아프면 어떡해요……. 형 몸도 약한데…….”

“내가 무슨 갓 태어난 사슴인 줄 알아. 나 완전 건강해.”

태어나서 한 번도 크게 앓아 본 적 없는데도 유채는 태오가 안쓰러워서 어쩔 줄 몰랐다. 태오는 유채를 타박하는 척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아끌고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그늘진 촬영지 한구석에서 유채의 통통한 입술을 몇 번이나 쪽쪽 빨고 나서야 흠흠 헛기침하더니, ‘이제 숙소로 가자.’ 하고 등을 홱 돌렸다. 유채는 뺨도, 귓불도, 목덜미도 붉게 달아오른 채 태오의 뒤를 졸졸 쫓았다.

“어? 비 와요, 형.”

숙소를 향해 걷고 있는데, 조금 전까지도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꼈다. 사위가 금세 어두워지면서 빗방울이 뺨에 스치더니 금세 굵은 빗줄기가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이리 와 봐. 이거 써.”

다행히 혹시나 해서 챙겨 온 작은 삼단 우산이 있었다. 태오는 재킷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우산을 꺼내서 유채의 머리 위쪽으로 활짝 폈다.

“형이 써요. 계속 비 맞았잖아요.”

손바닥만 한 우산 하나로는 둘 모두는커녕 한 사람의 머리만 겨우 가려졌다. 유채에게 씌워 주려 했더니 그는 냉큼 우산을 뺏어 들고 태오의 머리 위에 씌웠다. 몇 번 더 실랑이를 벌이다가 어쩔 수 없이 애매하게 가운데에 두었다. 그렇게 둘 다 어깨 절반을 고스란히 적시면서 걷고 있을 때였다.

어둑한 허공 너머에서 낑낑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 안 들려요?”

“그러게? 잠깐만 조용히 해 봐.”

소리는 빗소리에 섞여서 끊어질 듯 희미했다. 그러나 조금 더 기다린 후에는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쓰레기장 근처에 버려진 구두 박스 안에, 손바닥보다 조금 클까 싶은 작은 강아지가 끙끙거리면서 떨고 있었다.

“누가 버렸나 본데.”

“누가!”

유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얼굴이 귀여워서 태오는 슬쩍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모르지, 그건.”

“진짜 못됐다.”

“그러게.”

유채는 못마땅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면서 태오에게 우산을 건넸다. 강아지를 안아 드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강아지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유채의 품에서 파르르 떨었다. 원래는 흰색이었을 듯한 누런 털에서 시커먼 물기가 툭툭 떨어져 흘렀다.

“불쌍해요……. 데려가면 안 돼요?”

“음…….”

서울 집이었다면 태오도 고민 없이 데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호텔에 강아지를 데리고 투숙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서 망설여졌다. 태오가 머뭇거리는 동안, 유채는 한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어 핸드폰을 꺼냈다. 손가락으로 액정을 톡톡 눌러 이리저리 검색해 보더니 이내 얼굴이 밝아졌다.

“우리 숙소 애견 동반 되는 호텔이래요. 데려가도 되겠다!”

“아, 그래?”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유채의 말랑한 뺨도 벌써 차갑게 식었다. 빨리 호텔로 돌아가서 뜨거운 물로 샤워시켜야겠다. 태오는 강아지를 향한 것인지 유채를 향한 것인지 모를 생각을 했다.

“그러자, 그럼.”

비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유채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면서 대꾸했더니 유채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그들은 다시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눈을 들어서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비가 가로등 불빛에 부딪혀 희게 빛났다. 태오는 한 손에 우산을 들고 다른 손으로 유채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맞닿은 그의 재킷에서 서늘한 비 냄새가 났다. 길가에 만들어진 물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빗물이 튀었다.

***

“이 층 화장실에 욕조 있으니까 따뜻한 물 받고 들어가 있어. 내가 강아지 씻길게.”

태오가 묵고 있는 스위트룸에 도착하자마자 유채를 욕실로 밀어 넣으려고 했더니 그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형 먼저 들어가요. 강아지는 내가 씻길 거예요.”

“왜? 너 비 많이 맞았어. 감기 걸려.”

“형은 하루 종일 비 맞았잖아요…….”

“아까 다 샤워하고 쉬었잖아. 지금은 네가 훨씬 많이 젖었는데.”

“이러고 있는 동안 벌써 다 씻었겠다!”

“…….”

유채는 대체로 태오의 말이라면 얌전히 잘 듣는 편이었지만 가끔 이렇게 고집스러운 똥강아지처럼 굴었다.

태오가 눈썹을 팍 구겼다. 그러나 유채가 한번 버티기 시작하면 절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유채의 품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강아지가 낑낑거렸다. 사람 다툼에 강아지만 고생 중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면서 손사래를 쳤다.

“알았어. 먼저 들어갈 테니까 일 층 화장실에서 강아지 씻기고 너도 빨리 몸 녹여.”

“응, 응.”

유채가 생글거리면서 태오의 등을 밀어 이 층으로 올려 보냈다.

태오는 천천히 계단을 오르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유채가 왼쪽 옆구리에 강아지를 낀 채 일 층 욕실로 향하고 있었다. 진회색 반팔 티셔츠를 걸친 어깨가 단단하고 넓었다. 얇은 티 너머로 조밀하게 자리 잡은 등 근육이 언뜻 비쳐 보였다.

‘…….’

어쩐지 입 안이 마르는 것 같아서, 몸을 홱 돌리고 걸음을 서둘렀다.

이 층 화장실의 욕조는 태오가 들어가서 다리를 쭉 뻗고 누워도 공간이 넉넉할 만큼 컸다. 온수 안에 들어가 몸을 푹 담갔더니 식었던 몸이 금세 노곤하게 풀렸다. 눈꺼풀이 무거워져서, 태오는 잠깐 꾸벅거리고 졸았다.

달칵—.

그러다 문 열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놀라서 고개를 휙 돌린 곳에 유채가 뺨이 달아오른 채 아랫입술을 깨물고 서 있었다. 아래로 내리깐 눈매가 유난히 청순해 보였다. 그러나 반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에는 파릇한 힘줄이 도드라졌다.

유채의 옆구리에 지저분한 털 뭉치 같은 강아지가 대롱대롱 매달린 채 낑낑거렸다.

“왜? 강아지 여기서 씻기려고?”

“네에…….”

느릿하게 대답하느라 긴 목에서 목울대가 일렁였다. 태오는 자신의 눈을 피하면서 시선을 돌리는 유채를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제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벗은 몸을 이미 한두 번 본 사이가 아니다. 새삼스럽게 볼을 붉힐 일이 뭐가 있나 싶어서 무심코 웃어 버렸다. 그러자 유채가 귓바퀴까지 붉게 물들이면서 변명하듯 말했다.

“그게, 아래층 욕실에…… 물이 안 나와서…….”

“물이 안 나온다고?”

그럴 리가 있나. 가정집도 아니고, 특일급 호텔의 스위트룸이었다.

“아, 아니, 찬물은 나오는데…… 온수가…….”

유채가 이리저리 말을 바꾸면서 더듬거렸다.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던 태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슬쩍 갸웃하면서 물었다.

“강아지 얼른 목욕시키고 나서 우리도 같이 씻을까?”

“……진짜요?”

유채가 반색하면서 고개를 반짝 들었다.

“빨리 씻길게요!”

“천천히 해도 되는데.”

느긋하게 대꾸했는데도 유채는 벌써 허둥거렸다.

넓은 화장실은 분리형 구조였고, 욕조를 둘러싸고 유리 벽이 세워져 있었다. 세면대가 욕조 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채는 태오를 마주 보고 섰다.

태오는 욕조에 가득한 온수에 몸을 푹 담그고 있었고, 보이는 것은 기껏해야 어깨와 가슴팍 정도였다. 그런데도 유채는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아예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귀 끝이 붉어진 채 서두르는 모습이 귀여워서 태오는 아예 욕조에 팔을 올려서 턱을 괴고 모로 누웠다. 본격적으로 구경하기 시작했더니 유채는 더 안절부절못하면서 강아지를 세면대에 받은 물속에 푹 담갔다.

강아지가 작게 낑낑거렸다. 그러나 추위에 떨다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것이 기분 좋았는지, 몇 번 가르릉거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욕조의 따뜻한 물을 하릴없이 튕기면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유채와의 거리는 가깝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풋풋한 살갗 내가 코끝에서 부드럽게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뻗은 팔 근육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유채의 긴 손가락 끝에서 물이 찰팍거리는 소리가 났다.

세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기 때문에 유채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날카로운 턱선과 아래로 내리깐 눈매만 간신히 보였다. 집중하고 있는 듯, 그의 긴 속눈썹이 느리게 깜박거렸다.

유채는 목이 예뻤다. 곧고 긴 목이 발긋하게 달아올라 붉은색이었다. 고개를 숙인 탓에 헐렁한 티셔츠 안으로 빗장뼈와 탄탄한 가슴팍 위쪽의 근육이 들여다보였다. 매끈하고 흰 피부와 달리 도톰한 입술은 색이 짙었다. 뺨도, 귓불도, 목덜미도 온통 울긋불긋했다.

유채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가슴팍의 조밀한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 가슴에 뺨을 기댔던 언젠가의 기억이 떠올라서 입 안에 침이 말랐다.

단단하고 두툼한 근육과 달리 유채의 흰 피부는 살갗이 여렸다. 이를 세우고 가볍게 씹을 때마다 점점이 붉은 잇자국이 남았다. 태오의 몸에서는 땀이 나서 끈적거릴 때조차 유채의 매끈한 살갗은 청량하기만 했다. 태오는 서늘한 감촉을 찾아서 그의 가슴 위로 몸을 겹치곤 했다.

그럴 때면 맞닿은 가슴팍에서 전해지는 심장 소리가 컸다. 간지러운 기분이 온몸에 천천히 퍼졌다. 태오는 종종 엇박자로 뛰는 심장 박동을 자장가 삼아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면, 기다렸다는 듯 유채가 입술을 맞물려 왔다.

-잘 잤어요?

-응…….

맞닿은 입술이 간지럽게 움직였다. 막 깨어나서 몽롱한 기분으로 깊은 입맞춤을 받으면, 상큼한 민트 향이 유채의 숨결을 타고 전해져 왔다. 말캉한 입술이 태오의 입술에 닿아 바르작거리다가 혀끝이 기어코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혀가 엉키면서 닿는 따뜻하고 촉촉한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숨이 가빠서 할딱거리면, 유채는 입술을 떼고 엄지로 태오의 입술을 쓸었다.

-숨 쉬어요.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눈빛은 축축하고 깊었다.

그런 시선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박에 훑고 지나가면서 등줄기가 짜릿해졌다. 통째로 삼켜질 것 같았다. 유채의 긴 눈매에는 종종 붉은빛이 감돌았다. 길고 빽빽한 속눈썹이 물기에 젖은 채 비 맞은 나비처럼 파르르 떨었다.

부어오른 입술이 선정적이었다. 타액으로 젖어 반질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다 됐다.”

다정한 목소리로 강아지에게 건네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넋을 놓았던 태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제 밖에 나가서 드라이어로 말리자.”

강아지가 작은 소리로 낑낑 울었다. 조그만 털 뭉치는 누렇고 시커먼 느낌이 사라지고 새하얀 색이 되었지만 물에 흠뻑 젖은 탓에 여전히 볼품없었다. 유채는 강아지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반듯한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눈을 접으면서 웃는 얼굴이 예뻤다.

“형, 졸려요? 얼른 말려 주고 올게요. 잠들면 안 돼요?”

“으응…….”

뜸을 들이면서 대답하자 유채는 냉큼 고개를 끄덕인 후 강아지를 안고 욕실 문을 열었다. 넓고 단단한 등 아래로 늘씬한 허리가 이어진 뒷모습이 금세 문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쓸데없이 예뻐 가지고.

태오는 속으로 괜히 유채를 타박하면서, 욕조 안으로 몸을 미끄러트려 달아오른 뺨을 물 아래로 숨겼다.

***

태오는 결국 강아지를 직접 키우기로 했다. 유채가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촬영장에 데려갔더니 성 감독이 반색하면서 강아지를 냉큼 뺏어 들고 제 뺨에 바르작댔다. 강아지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성 감독을 노려보면서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째려보는 거 봐, 너무 귀엽다! 이름이 뭐야?”

“아직 안 정했어요. 괜찮은 이름으로 찾아보고 있는데 마땅한 게 안 떠올라서.”

“뭐, 작명소라도 가서 짓게?”

“그럴까…….”

임시로 꼬마라고 부르고 있지만 튼튼하고 씩씩하게 자라라는 뜻을 담아서 정식 이름을 붙여 주고 싶었다.

“작명소도 괜찮은 생각이네요.”

웬일로 성 감독이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성 감독은 어처구니없어하면서 혀를 찼다.

“근데 호텔에서 강아지 키워도 돼?”

“애견 동반 가능한 호텔이긴 한데 며칠도 아니고 계속 데리고 있기는 좀 힘들죠.”

“그럼 어떡하려고?”

“흠.”

태오는 먼발치에서 김아현과 대사를 맞춰 보고 있는 유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앞으로 며칠간은 김아현이 맡은 역할인 소기영의 등장 신을 몰아서 촬영하기로 되어 있었다. 찍어야 하는 전반부 내용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지만, 서울을 오갈 일이 많은 김아현의 스케줄에 맞춰 조정한 것이다. 태오는 그녀가 주로 등장하는 영화 후반부의 내용과, 유채와 김아현이 합을 맞추는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더듬어 보았다.

이세현과 진연음이 승승장구하고, 진연음이 권력보다 우정을 택함으로써 이세현이 무사히 ‘당경’의 왕이 되는 전반부와 달리 ‘제왕’ 후반부는 상당히 어둡게 그려진다.

이세현은 함께 자라던 시절부터 자신보다 자질이 뛰어난 진연음에게 내심 열등감을 가져왔다. 그런데도 진연음의 자리를 자신이 빼앗았다는 죄책감이 그를 크게 짓눌렀고, 열등감과 섞이면서 뒤틀린 감정을 갖게 된 것이다. 마침내 이세현의 마음속에 진연음에 대한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대규모의 사병을 보유한 공신이 된 진연음의 세력을 분산시키고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이세현은 끊임없이 정복 전쟁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멸망시킨 왕국 ‘련’의 공주 소기영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세현은 진연음 대신 소기영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평생을 함께해 왔던 진연음에게 더 이상 기댈 수 없어진 상황에서, 갈 길을 잃은 애정이 비틀린 채 소기영을 향했다.

그렇게 소기영은 이세현의 왕후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세현의 손에 멸망한 망국의 공주다. 때문에 그녀는 이세현을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증오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소기영은 이세현에게 복수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를 독살할 기회가 수차례 있었음에도 끝내 죽이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이세현의 정신을 망가뜨리기로 작정한다. 복수를 위해 그녀가 파고든 틈은 이세현과 진연음의 사이였다.

소기영은 의도적으로 진연음에게 접근해 그를 유혹하고, 거부하는 그에게 약을 먹여 하룻밤을 보낸 후 이를 이세현에게 알린다. 자신이 가장 사랑한다고 믿었던 두 사람에게 배신당한 이세현이 좌절하고 울부짖는 장면이 영화의 절정 파트였다.

며칠 후면 김아현이 맡은 소기영과 유채가 연기하는 진연음의 베드 신을 촬영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세현을 상처 입히기 위해 소기영이 진연음에게 최음제를 먹인 후 동침하는 장면이다. 유채는 김아현과 함께 그 장면의 대사를 맞춰 보고 있는 듯했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태오가 눈썹을 찡그리면서 입을 열었다.

“감독님, 그…… 소기영이랑 진연음 베드 신 말이에요.”

“응? 갑자기? 강아지 얘기하다 말고?”

꼬마를 꼭 끌어안은 성 감독이 어리둥절해져서 대꾸했다. 꼬마가 네 다리를 바둥거리면서 성 감독을 향해 으르렁댔다.

“그 신을 꼭 촬영까지 해야 할까? 그냥 다음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하고 넘어가면 안 될까요?”

“야, 태오야. 이게 무슨, 술 취해서 원나잇했는데 다음 날 아침으로 바로 넘어가는 소리야?”

“영화가 예술성을 추구해야지…….”

“베드 신이 예술성에 어긋난다고 누가 그러냐?”

“심의에 안 걸리나…….”

“19세 영화에서 베드 신이 심의에 왜 걸리지?”

“그래서 기어코 벗기겠다는 거예요!”

“김아현도 괜찮댔는데 왜 네가 난리야, 어? 너 아직도 김아현한테 미련 있냐? 스무 살 때 한 달 만에 걷어차여 놓고 울더니. 와하하하하하!”

“…….”

유채가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흑역사가 끌려 나오는 바람에 그때 태오는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성 감독이 어지간히 귀찮았는지, 꼬마가 아릉대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김아현과의 대화에 열중하고 있던 유채가 이쪽을 돌아보면서 갸웃거렸다. 태오는 한 손을 들어서 그에게 흔들면서 눈 끝으로 웃어 주었다.

태오를 향해 마주 손을 흔들면서 생글거리는 유채의 어깨를 김아현이 톡톡 건드렸다. 둘은 이내 다시 머리를 모으고 각본을 들여다보았다. 태오의 미간에 또다시 세로금이 갔다.

“태오야? 그래서 강아지는 어떡할 거냐니까?”

“……아아.”

태오는 어쩐지 화기애애해 보이는 김아현과 유채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이글거리는 눈빛에 놀란 성 감독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근처에 적당한 아파트 하나 사서, 거기서 키우면 돼요. 편하게 놀 수 있게 하려면 마당 있는 주택도 좋고.”

“엉? 뭐 너는 강아지 키우려고 강아지 집도 아니고 사람 집을 사냐?”

“좋아하는 걸 잔뜩 안겨 줘야 딴생각 안 하고 다른 데로 눈도 안 돌리죠.”

“아파트 안 사 주면 강아지가 딴생각한대?”

어리둥절해진 성 감독을 뒤로하고 태오는 촬영장에서 빠져나왔다. 제 차례가 되려면 몇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할 테니, 그사이에 근방의 부동산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

태오가 작은 마당이 딸린 이 층 주택을 매입해서 이사하고, 유채가 촬영 팀의 눈치를 보면서 호텔 대신 태오의 집으로 슬금슬금 퇴근하는 일이 일상화될 무렵 ‘제왕’의 각본에 다소의 변화가 있었다. 유채를 크게 마음에 들어 한 성 감독이 유채의 역할인 진연음의 비중을 상당히 키운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세현과 진연음이 함께하는 장면은 대대적으로 늘어난 반면, 소기영의 등장 신은 줄어들었다.

유채로서는 좋은 일이었지만, 역할이 대폭 줄어든 김아현은 언짢은 내색을 보였다. 그녀는 드라마퀸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배우였지만 주로 TV 시리즈에서 활약해 왔을 뿐 영화판에서는 입지가 좁았다. 그래서 더더욱 ‘제왕’에 기대하는 바가 컸을 텐데, 신인인 유채에게 밀려난 셈이니 자존심이 크게 상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성 감독은 별반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태평해 보였다.

“응? 김아현 씨 연기가 생각보다 별로라서 그런 건데? 진연음 신이 늘어나는 게 때깔이 더 좋은 걸 어떡해?”

“감독님,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저 여기서 듣고 있거든요?”

그것도 김아현의 코앞에서 말했다. 그녀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따지자, 성 감독은 손사래를 치면서 껄껄 웃었다.

“아이참, 김아현 씨가 먼저 소기영 비중 왜 줄었냐고 물어봤잖아. 대답한 건데 왜 그래.”

“그래도 너무해요, 진짜…….”

“아이, 너무 마음에 담아 둘 거 없어. 김아현 씨는 워낙 현대극 쪽으로 더 핏이 잘 맞는 배우라 그래. 배우마다 몸에 딱 맞는 옷이 다들 다른 법이야.”

성 감독이 김아현을 달래는 동안 유채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눈치를 봤다. 나중에는 김아현도 기분이 많이 나아진 듯했지만, 그래도 유채와 마주칠 때는 살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덕분에 유채는 한동안 겁먹은 얼굴이었다.

김아현이 유채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기분 나빴지만 유채를 불편하게 하는 건 더 싫었다. 결국 태오가 나서서, 대기 시간에 세트장 밖의 공터에서 쉬고 있던 김아현 곁으로 다가가 나란히 섰다. 담배에 불을 붙이던 김아현이 그에게 시선을 흘긋 주었다. 태오가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나도 불 좀.”

“왜 라이터도 안 갖고 다녀?”

김아현은 툴툴거리면서도 라이터를 건네주었다. 태오가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담배도 한 대만.”

“뭐야, 이거. 깡패야? 삥 뜯어?”

김아현에게서 담배와 불을 모두 빌린 태오가 오랜만의 흡연을 즐기는 동안, 그를 찬찬히 뜯어보던 김아현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담배 끊은 줄 알았더니?”

“끊었지.”

“그러고 보니 신기하네. 왜 끊었던 거였어?”

“애인하고 뽀뽀할 때 냄새날까 봐.”

“어이구. 근데 왜 다시 피워?”

“누나랑 얘기 좀 하려고.”

“무슨 얘길 하려고 또 누나래?”

김아현은 잠시 투덜거렸지만 태오가 하려는 말을 짐작하는 표정이었다. 짧게 한숨을 뱉어 내는 그녀를 향해 태오가 입을 열었다.

“유채 잘못 아닌 거 뻔히 알면서 왜 그렇게 살벌하게 굴어. 애 울잖아.”

“울긴 누가 울어? 어이없다, 진짜.”

“유채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었어? 사랑하는 사람이 잘되면 기뻐해 줘야지.”

“사랑 같은 소리 한다. 윤태오 대낮부터 취했니?”

툭툭 받아치면서도 김아현의 표정에는 미안해하는 듯한 기색이 감돌았다. 태오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유채가 워낙 열심히 해. 영화 호흡에도 금방 적응했고. 드라마 경험 자체도 적었으니 영화 분위기로 전환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했겠지. 누나는 워낙 드라마 쪽으로 길이 오래 들었잖아. 사극도 처음이고.”

“…….”

“어려운 것도 당연하잖아. 감독님 눈에도 그게 보이신 거고. 자책할 필요 없어. 같은 영화여도 현대극 쪽이면 훨씬 편했을 거야.”

“……나도 알아. 그걸 모를까 봐.”

유채의 연기가 좋아서 비중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성 감독이 김아현에게 만족했다면 소기영의 분량을 줄여 가면서 각본을 바꾸지는 않았을 테다. 결국은 김아현이 자신의 한계에 부딪힌 것이 근본 원인이었다.

연기를 길게 뱉어 내면서, 김아현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씁쓸한 표정이었다.

“알아. 내가 유채 씨한테 화풀이한 거.”

“애가 겁먹었잖아.”

“애는 무슨……. 너 가만 보면 유채 씨만 엄청 싸고돌더라? 네가 무슨 애 괴롭힘당한다고 학교 쫓아온 학부모야?”

“쫓아왔으니까 이제 안 괴롭힐 거지?”

“알았어……. 창피하니까 그만 얘기해. 나도 좀 힘들어서 그랬어.”

“언제는 유채 좋다고 따라다니더니. 그렇게 기분 상했어?”

“야, 윤태오.”

김아현이 담배를 휴지통 위에 얹힌 간이 재떨이에 눌러서 껐다. 날카로웠던 목소리가 허탈한 듯 한풀 꺾인 채였다.

“아무리 좋아도 내 자리를 자꾸 뺏는데 어떻게 좋아해? 넌 뭘 해도 천재 소리 듣고 뭐 하나 뺏겨 본 적 없잖아. 너처럼 타고나길 다르게 태어난 애들은 이런 기분 몰라. 누구라도 태연하기 힘들걸.”

“음.”

“내가 이번에 이세현한테 자리 뺏긴 진연음 심정 완전히 공감했어. 진연음 역을 여자로 바꿔서 내가 맡으면 진짜 잘할 수 있을 거 같아.”

“하하……. 그건 안 될걸? 이거 이제 완전히 브로맨스 영화 됐잖아.”

그러자 김아현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 맞아!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지?”

“촬영 팀 전원이 다 그렇게 생각할걸.”

“이젠 뭐 진연음이 진 히로인 같던데? 감독님 아직도 브로맨스 아니라고 우기셔?”

“우정이라고 굳게 믿으시던데.”

“이게 우정이면 난 친구가 한 명도 없어.”

“나도…….”

그제야 기분이 풀린 듯한 김아현이 소리 내 웃었다.

***

김아현과 유채의 사이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난 후, 성 감독이 모처럼의 휴가 일정을 발표했다. 이제 곧 다가올 추석 연휴 동안 촬영을 잠시 쉬기로 한 것이다. 갑작스레 주어진 휴식에 유채가 가장 신났다.

“전부터 어머니가 다 같이 여행 가자고 하셨잖아요. 기억나죠, 형?”

“어, 뭐. 그랬지.”

꼬마와 놀아 주고 있던 태오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했다.

푸들의 피가 팔분의 일 정도 섞였을 것처럼 생긴 몰티즈인 꼬마는 평소에 무척 성격이 사나웠는데, 태오의 품에만 안기면 세상에서 제일 순한 강아지인 척 굴었다. 유채는 가끔 간식을 주려다가도 꼬마에게 물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억울한 얼굴로 꼬마를 노려보았다. 꼬마가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팩 돌렸다.

“……얘는 진짜 형만 좋아하네요.”

“괜히 튕기느라 그래. 사실은 널 더 좋아할걸?”

“에이…….”

꼬마를 쓰다듬어 보려다가 또다시 물릴 뻔한 유채가 입술을 삐죽이면서 투덜거렸다.

“근데 여행은 왜. 여행 가고 싶어?”

“아. 스케줄이 안 맞아서 계속 못 갔잖아요. 추석 때 다녀오면 좋을 거 같아서요.”

그동안 스케줄이 맞지 않았던 것은 유채가 줄곧 바빴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모처럼 유채와 태오의 일정이 비슷한 데다 며칠간의 휴가까지 주어졌으니, 유채는 열여섯 살 때부터 자신을 예뻐했던 태오의 부모님과 함께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고 싶어 했다.

다만 태오는 부모님보다는 유채와 둘이서 풀빌라나 가고 싶었다. 그래서 내심 시큰둥했지만, 유채도, 부모님도 다 함께 가까운 국내 여행지라도 다녀오자는 얘기를 오래전부터 몇 번이나 해 왔던 터라 이번에도 거부하면 양쪽에서 시끄러워질 것 같았다. 태오는 제 얼굴에 떠오른 싫은 표정을 유채가 알아봐 주길 바라면서 우물우물 대꾸했다.

“그래, 뭐……. 그럼 가자…….”

“정말요? 와, 어디 갈까요? 형은 어디가 좋아요?”

“…….”

유채는 알아봐 주지 않았다.

“촬영 중이라 너무 멀면 형이 힘드니까 해외는 좀 그렇고……. 서울 올라가서 부모님 모시고 같이 출발해요. 강원도 어때요? 아니다, 길 막힐 테니까 아예 비행기 타고 제주도 가서 렌트카 빌려서 다녀요. 제가 운전할게요!”

“음, 뭐. 그래. 너 가고 싶은 데로 가자.”

태오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과 함께 마지막으로 여행을 다녀온 게 몇 년 전인지도 모를 정도로 오래되었다.

“뭐……. 모처럼 다 같이 여행지에서 쉬다 오는 것도 나쁘지 않긴 하지…….”

“그럼 저 예약 알아볼게요!”

유채가 컴퓨터를 향해 후다닥 뛰어갔다. 태오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꼬마를 꼭 끌어안고 뺨을 비볐다.

“꼬마야. 너는 형이랑 단둘이 지내는 게 더 좋지? 형한테는 꼬마밖에 없어…….”

***

그 무렵, 유채의 첫 와이어 촬영 일정이 잡혔다.

무장인 이세현과 달리 진연음은 5왕군에서 책략을 담당한다. 당연히 와이어 신은 물론 액션 연기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유채를 세워 놓고 이리 저리 훑어본 성 감독이 만족스럽게 웃더니 몸 선이 예쁘다는 둥 수상한 칭찬을 잔뜩 늘어놓은 것이다. 태오는 그때부터 바짝 긴장했다.

며칠 뒤 새로 나온 수정 대본에는 진연음의 액션 연기가 추가되어 있었다.

성 감독의 주장으로는, 왕자로서 자라 온 진연음이 무예를 못할 리 없으니 액션이 들어가는 쪽이 훨씬 자연스럽다는 거였다. 유채는 그런가 보다, 하는 얼굴로 성 감독이 주워섬기는 변명을 얌전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바뀐 각본을 받아 든 태오가 성 감독을 붙잡고 거품을 물었다.

“진연음은 책사잖아요. 왜 와이어 촬영이 있어요? 몸 쓰는 역할이 아니잖아요!”

“아이, 얘가 또 왜 발작이야……. 유채야, 와이어랑 액션 연기 괜찮지?”

“네? 네…….”

“그럼 추석 전에 거기까지 찍어 놓고 마무리하자. 태오 좀 데려가라. 시끄러워 죽겠네.”

성 감독은 귀찮아하는 얼굴로 손짓만 할 뿐 태오를 제대로 상대해 주지도 않았다. 유채는 가운데 낀 채 눈치만 보다가, 여전히 흥분한 얼굴로 펄펄 뛰는 태오의 손목을 잡고 급하게 자리를 옮겼다.

기존 내용에서 진연음이 검을 잡는 장면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성 감독은 진연음이 궁에서 자랄 때, 이세현의 친모인 모후의 지시로 무장으로서 훈련받았다는 설정을 추가했다. 그리고 5왕자군에 잠입한 자객과 진연음의 대결 장면을 넣었다.

와이어 신은 진연음이 자객을 뒤쫓을 때 등장한다. 높은 지붕에서 뛰어내린 진연음은 착지하는 도중 자객의 칼을 맞아 정신을 잃고, 5왕자군이 자객을 뒤쫓는 사이 이세현이 다가와 진연음을 품에 안고 피로 물든 그의 장포를 벗긴다.

이 장면에서 성 감독은 서비스 컷을 넣으려는 의도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태오를 진정시켜서 밴에 데려다 놓고 온 유채가 각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어느 틈에 성 감독이 따라붙었다. 유채가 상반신 노출 신—아마도 더 아래까지 노출되는 것 같았다—까지 페이지를 넘기자 성 감독이 눈을 빛내면서 끝내주지 않냐고 물었다.

유채는 잠시 침묵하다가,

“노리셨네요.”

하고 대답한 후,

“근데 굉장히 브로맨스네요.”

덧붙였다. 성 감독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디가?”

유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유채의 심심한 반응에 실망했는지, 성 감독은 유채의 몸매를 예찬하면서 좋은 신이라고 대답하라고 강요했다. 좋은 서비스 컷이긴 했다. 태오는 감독들마다 유채를 벗기려고 든다고 기분이 상해 버렸지만, 유채는 노출 신에서 접촉하는 상대가 김아현이 아니라 태오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유채도 불만은 없었다. 다만, 뒷모습만 나오기로 되어 있었던 베드 신과는 달리 전면이 노출되는 장면이라서 당분간 식단을 조절해야 할 것 같아 기분이 조금 안 좋아졌다.

***

유채는 몸으로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대체로 잘했다.

그러나 와이어 촬영은 처음이었다. 몸놀림보다도, 허공에 둥둥 뜬 채로 자연스러운 표정 연기가 가능할지 걱정되어서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쏠렸다.

태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와이어 신 촬영이 진행되었던 날, 스태프 셋이 유채에게 달라붙어 보디 메이크업을 입혔다. 상체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뒤, 스타일리스트가 한 발짝 떨어져서 유채의 몸을 꼼꼼하게 뜯어보았다.

“메이크업해야 해서…… 바지 살짝 내릴게요, 유채 씨?”

“네…….”

스타일리스트가 장골 아랫부분까지 드러나도록 유채의 바지를 끌어 내리면서 태오의 눈치를 봤다. 태오의 짙은 눈썹이 와락 구겨지면서 꿈틀거렸지만, 꾹 다문 입술에서는 의외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성 감독이 손뼉을 쳤다.

“우와, 유채 역시 몸 되게 좋다. 군살 하나도 없고 완전 탄탄하네. 베드 신 뒷모습으로 끝내기는 정말 아깝다, 그치?”

“영화가 예술을 해야지…….”

“야, 유채야. 윤태오는 왜 전부터 자꾸 예술 타령이냐? 유채 몸이 예술이잖아. 여기서 무슨 예술을 더 해?”

“태오 형도 몸 좋아요, 감독님.”

“그래? 그럼 태오도 벗을까?”

“태오 형이요? 아뇨, 그건 안 되고요, 감독님…….”

“엥. 너희 왜 서로 안 된대? 질투해? 아이고, 너희 둘 다 몸 좋으니까 시기하지들 마라. 젊은 애들이 속이 이렇게 좁아서 어쩌냐.”

“…….”

태오가 말을 말아야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유채는 어쨌거나 태오는 안 벗는다니 만족한 표정이었다.

잡담을 주고받는 사이에 와이어 줄이 매달릴 크레인이 촬영장으로 천천히 진입했다.

막상 육중한 규모의 크레인을 보자 유채는 다소 긴장이 됐다. 와이어를 착용하고 리허설이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태오도 줄곧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유채야, 조심하고……. 바닥에 매트리스 두껍게 깔았으니까 여차하면 그냥 굴러.”

“응.”

“못 하겠으면 그냥 빼 달라고 다시 말해 볼까? 아니, 책사가 무슨 액션 신이야. 하여간 감독님 이상한 데서 고집부리셔.”

“아냐, 할 수 있어요. 조금만 적응하면 괜찮을 거 같아요.”

“노출은 둘째 치고 위험해 보이는데. 이 장면 갑자기 추가돼서 연습도 별로 못 했잖아……. 무슨 와이어 촬영을 이렇게 날림으로 해…….”

“형, 진짜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태오가 더 스트레스받는 것 같아서 유채는 긴장한 내색도 하지 못했다. 카메라 앞에 앉은 성 감독이 귀찮아하는 얼굴로 태오를 향해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야, 태오야. 이제 시작할 거니까 밖으로 빠져. 너 자꾸 방해하면 주인공 바꿔 버린다?”

“그럼 진연음이 주인공이에요? 지금이랑 뭐가 다르지?”

이미 이세현과 진연음 공동 주연인 격정 멜로 아닌가. 태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용케 알아들은 성 감독이 인상을 팍 썼다. 그때, AD가 크게 외쳤다.

“리허설 시작합니다!”

“레디…… 액션!”

크레인이 움직이면서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유채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혀서 버둥댔지만,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는 동안 조금씩 제 호흡을 찾았다.

균형점을 찾고 나니 그다음은 쉬웠다. 유채는 자객 역을 맡은 스턴트 배우를 쫓아 지붕에서 뛰어내렸고, 허공에서 그의 공격을 받은 뒤 바닥으로 추락해 매트리스 위에서 굴렀다.

“오, 화면 괜찮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성 감독은 유채의 연기에 대체로 만족스러워했다. 다만 초반의 동작이 다소 부자연스러웠다는 지적이 있었다.

유채는 동작과 표정을 가다듬으면서 리허설을 몇 번 반복했다. 오래지 않아 무사히 오케이를 받았는데, 리허설 몇 번 만에 액션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성 감독의 칭찬에 태오가 으쓱해했다.

“신 59-1 슛 들어갑니다!”

스타일리스트가 달려와 유채의 메이크업을 잠시 손봐 준 뒤, 바로 본 촬영이 시작되었다. 성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졌다. 유채는 리허설대로 수월하게 연기를 마쳤고, 다른 각도에서의 촬영도 몇 차례 더 했다. 그즈음에는 와이어에도 제법 익숙해져서 별다른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찍자는 성 감독의 신호와 함께, 크레인이 움직였다.

“……액션!”

유채는 자객을 따라 삼 층 높이의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 이미 리허설과 다른 각도의 본 촬영에서 수없이 반복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유채는 허공으로 뛰어내린 순간 알았다.

줄곧 되풀이되었던 느낌과 무엇인가 확연하게 달랐다. 크레인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매트리스로 안전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곳이었다.

“유채야!”

태오의 비명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 순간, 거친 압력에 의해 유채의 몸이 허공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시간이 문득 느릿하게 흐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유채는 매트리스가 깔리지 않은 맨바닥 위로 빠르게 추락했고, 그대로 암전이었다.

***

유채는 몇 번이나 눈을 떴지만 눈꺼풀이 금세 무거워졌다. 자는 동안에도 온몸이 아팠고, 깨어날 때마다 잠이 쏟아져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잠시 정신이 들 때마다 해쓱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태오가 보였다.

가까스로 완전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눈앞이 흐렸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서야 조금씩 시야가 또렷해졌다. 흰 천장과 흰 벽으로 이루어진 넓은 공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채는 일어나서 앉으려고 했지만, 몸이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손등이 불편해서 내려다보니 링거가 연결되어 있었다.

“유채야? 정신이 들었어? 아이고, 유채야. 어떡하냐. 괜히 내가 고집부려서 이렇게 다치고…….”

줄곧 곁에 있었는지, 성 감독이 후다닥 다가와 유채를 부축해 침대 등받이에 기대 앉혔다. 유채는 자신을 이리저리 살피는 성 감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감독님…….”

“어? 어, 왜. 어디 불편해? 간호사 호출할까?”

성 감독이 안절부절못하면서 유채의 침대 주변을 맴돌았다. 유채가 약 기운에 취해 멍한 얼굴로 물었다.

“태오 형은요?”

“응?”

“태오 형은 왜 없어요?”

“응? 태오가 왜 있어야 돼?”

“그럼 없어요……?”

“있지만…….”

어리둥절해진 성 감독이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사이에 다시 문이 열렸다. 유채가 깬 것을 본 태오가 놀란 얼굴로 뛰어왔다.

“유채야. 괜찮아? 좀 어때. 많이 아파?”

“혀엉.”

유채가 울먹이면서 태오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태오는 자연스럽게 유채를 안아 주려다가, 흠칫해서 성 감독의 눈치를 봤다. 성 감독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형 어디 갔다 왔어요…….”

“미안. 담당의랑 얘기 좀 하고 왔어. 기분 괜찮아? 진통제 많이 맞아서 멍하겠다.”

“응……. 보고 싶었어…….”

태오는 성 감독을 흘긋거리면서 침상 곁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러나 진통제로 인해 줄곧 몽롱했던 유채가 태오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뺨을 비비자, 어쩔 수 없이 그를 마주 안아 주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성 감독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어어어어?”

성 감독이 검지로 태오와 유채를 번갈아 가리키면서 소리를 질렀다. 유채가 여전히 태오의 배에 얼굴을 묻은 채 ‘시끄러워…….’ 하며 웅얼거렸고, 태오는 성 감독을 향해 인상을 썼다.

“뭐야, 너희 설마? 어? 아니 그래서 자꾸 멀쩡한 ‘제왕’ 보고 브로맨스라고 한 거였어? 와, 나 진짜 억울하게 머리채 잡혔네!”

“……‘제왕’이 멀쩡하다고요?”

“괜히 너희가, 어? 브로맨스 하고 싶으니까 그랬구만? 어쩐지 멀쩡한 우정을 자꾸 브로맨스라고 우기더니!”

“네, 뭐……. 그렇다고 쳐요.”

태오가 피식 웃으면서 유채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색이 옅은 머리카락이 태오의 긴 손가락에 성기게 감겼다.

성 감독은 어느 정도 진정한 뒤 유채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유채는 줄곧 태오에게 머리를 기댄 채, 멍한 얼굴로 간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크레인이 오작동해서 사고 난 거였어. 안전장치 해 놓은 쪽으로 가야 하는데 기계가 다른 방향으로 휘청거려서.”

“으응, 네.”

“그 제작사는 무슨 일 처리를 그따위로 하는지 모르겠어. 아무리 갑자기 들어간 신이어도 사전 점검을 제대로 해야 했는데. 이게 뭔지 모르겠다, 진짜.”

“미안하다…….”

“감독님 잘못도 아닌데요. 자꾸 사과하시지 마세요.”

“어, 근데 네가 너무 무서워서 자꾸 고개가 수그러지네…….”

말로는 아니라면서 고개를 휙 돌려 성 감독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태오의 눈동자가 유난히 까맸다. 형형한 눈빛에 어쩐지 분노가 차 있는 것 같아 성 감독은 또다시 움찔하고 말았다. 유채가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에도 줄곧 이런 식이었는데, 자신이 태오에게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어서 성 감독은 줄곧 좌불안석이었다.

“아무튼 이번 일은 산재니까 비용은 제작사에서 다 대기로 했어. 필요한 만큼 충분히 입원해. 갑자기 와이어 신을 넣어서 준비가 좀 부족했나 보더라. 미안하다, 유채야.”

성 감독이 태오의 눈치를 보면서 주춤주춤 덧붙였다.

“네……. 근데 저 많이 다친 거예요?”

유채가 묻자, 태오가 유채의 뺨을 만지작거리면서 담당의에게 들었던 설명을 간단히 전했다.

“손목뼈가 골절됐어. 방금 담당의랑 얘기하고 왔는데 아무래도 수술해야 한다나 봐……. 그래도 떨어진 높이가 상당했는데 그만해서 다행이라고 하셨어.”

“어, 그러니까 말이다. 머리부터 떨어졌으면 진짜로 큰일 날 뻔…….”

툭 끼어든 성 감독의 말에 태오가 눈썹을 팍 구겼다. 성 감독을 타박하는 목소리에 찬기가 돌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내가 언제 쓸데없는 소리 했어?”

“지금 하고 있잖아요. 머리부터 떨어지고 그런 얘기 하지 말라고요. 겁먹잖아요.”

태오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성 감독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성 감독은 질색하는 얼굴로 태오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무슨 말을 못 해……. 유채가 뭘 겁먹어? 졸고 있구먼. 그치? 유채야.”

“아니에요……. 겁먹었어요…….”

유채가 반쯤 졸면서 대꾸했다. 링거를 통해 줄곧 맞고 있던 진통제에 수면 유도 성분이 섞여 있는 듯했다. 분명히 눈을 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꺼풀이 자꾸 내려와 앞을 가렸다.

“와, 이거 뭐지? 이렇게 티 낼 거면서 그동안 왜 숨겼어?”

“숨겨요? 제가요?”

“아니야? 설마 계속 이런 분위기였는데 나만 몰랐나?”

“그럴걸요?”

유채의 옷을 벗기면서 연신 태오의 눈치를 보던 스타일리스트를 떠올리면서 태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 감독이 발끈했다.

“왜 나만 안 알려 줬어?”

***

검사 결과, 다행히 손목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한동안 깨어나지 못했던 것은 추락 당시의 충격이 심해서 그런 것 같다고 얘기하면서, 담당의는 유채가 이 주 정도 입원해야 하고 퇴원 후에도 깁스를 이삼 주는 더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걱정했던 손목뼈 수술도 예상보다 간단하게 끝날 거라는 말에, 태오가 눈에 띄게 안심하면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나 의사의 설명을 듣는 동안 유채의 표정이 흐려졌다. 촬영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 봐 걱정한 것이다. 이 주 동안은 꼼짝없이 펑크를 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의사가 병실을 나선 후, 유채를 흘긋 바라본 태오가 침상 위로 올라와 유채의 곁에 바투 붙어 앉았다. 유채는 풀 죽은 얼굴을 하고도 몸을 슬슬 옆으로 움직여 태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네 탓도 아니잖아.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래도…….”

“어차피 이제 곧 추석인데 뭐. 그땐 촬영 없으니까, 실제로 빠지는 건 일주일 정도야. 퇴원하고 나면 깁스 부분 안 보이게 가려서 찍으면 돼. 소매도 길잖아.”

“아, 추석!”

안심시키려는 듯 다독이는 태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유채가 문득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당황한 기색이 말간 얼굴에 스쳤다. 태오가 의아한 듯 바라보자, 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떡해요? 항공권이랑 호텔 예약 다 해 놨는데!”

“뭐가?”

“제주도요. 추석에 제주도 가기로 했잖아요……. 렌트카도 빌려 놨는데.”

태오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제주도를 왜 걱정해. 취소하면 되지.”

“아, 안 돼요. 아버지가 진짜 기대하고 계시단 말이에요!”

“아빠랑 또 언제 통화했어? 신경 쓰지 마. 내가 취소하겠다고 말씀드릴게.”

“아, 진짜. 무슨 취소를 해요. 그냥 형이랑 부모님이랑 다녀와요.”

“뭐? 네가 입원했는데 내가 왜 여행을 가?”

“지금 환불 하나도 안 된단 말이에요.”

“괜찮아, 그런 건.”

“아니, 그리고…….”

유채는 머뭇거리면서 눈을 굴렸다. 태오는 보기보다 무심한 성격이었고—사실 보기에도 그렇다—누구에게도 큰 관심이 없었다. 태오의 부모님이 그런 점을 섭섭해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몇 년 만에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기쁘게 대답하셨던 게 마음에 걸렸다.

이번 여행을 기대했던 것은 유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여행 자체를 무산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유채는 조금 망설인 끝에 입을 달싹였다.

“추석 때 수술도 끝나고 쉬기만 하면 되니까 그냥 다녀와요. 병실도 좁은데 뭐 하러 여기 계속 같이 있어요.”

“이 병원이 VIP실도 좀 작더라. 병원 옮길까?”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유채가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당장 결론이 날 것 같진 않았다. 태오는 보기보다 고집이 셌다…… 사실 보기에도 그랬다.

유채는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훑어 냈다가 말을 이었다.

“형, 그럼 일단 집에 가서 좀 쉬어요. 저 이제 괜찮으니까.”

“유채야.”

그때, 온기가 도는 손이 다가와 유채의 눈가를 덮었다. 시야에서 태오가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았다. 태오가 유채의 귓가에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했다.

“왜 자꾸 괜찮다고 해. 나는 네 옆에 있고 싶은데. 그러면 안 돼?”

“형, 그게 아니라…….”

“입장 바꿔서, 너라면 그냥 가 버릴 수 있어? 내가 이렇게 다쳤는데.”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어딘지 딱딱하게 들렸다.

유채는 조금 당황해서, 태오의 손을 떼어 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태오는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유채의 시선이 문득 태오에게 닿았다. 소매를 둘둘 말아 걷어 올려서 드러난 팔에 푸릇한 힘줄이 솟았다. 늘 단정하게 입었던 셔츠는 여기저기 구겨진 채였다. 창백한 얼굴이 몹시 피곤해 보였다.

정신을 잃고 있었을 때, 간간이 눈을 뜰 때마다 보았던 태오의 희게 질린 얼굴이 떠올랐다. 그제야 태오가 줄곧 초조한 표정이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해쓱해진 탓에 예전보다 더 날카로워진 턱선이 만들어 내는 인상이 서늘했다. 그러나 느리게 깜빡이는 눈 부근이 붉었다. 팔락이는 긴 속눈썹이 물기에 젖어서 가닥가닥 갈라져 있었다.

“아뇨…….”

홀린 듯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조금 목이 메었다.

“안 갈 거예요. 형 혼자 안 둬요.”

“……응.”

“미안해요. 많이 놀랐죠, 형.”

“…………응.”

“가라고 안 할게요. 화났어요?”

머뭇머뭇 묻는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그러자 태오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면서 싱긋 웃었다.

“그러면, 돼?”

유채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치지 않은 손으로 태오의 뺨을 쥐고, 그의 입술에 제 입을 꾹 누르면서 유채가 말했다.

“완전 돼요. 내 옆에 딱 붙어 있어요.”

“진짜로?”

“손목 다쳐서 꼼짝도 못 하니까 밥도 다 먹여 줘야 돼요.”

“다친 거 왼손이면서.”

“오른손도 아파요…… 온몸이 다 아프니까 형이 돌봐 줘요.”

“그럼 그럴까?”

“응, 응.”

“나밖에 없어?”

“응, 형밖에 없어…….”

그제야 태오가 소리 내 웃었다.

***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유채의 상태도 안정되었을 무렵, 제작사 직원이 문병을 와서 허옇게 뜬 얼굴로 그랬다.

“어후, 유채 씨. 내가 더 일찍 오려고 했는데 태오 형 무서워서 눈치 보다가 이제 왔어…….”

“형이 또 화냈어요? 그러지 말라고 할게요.”

제작사 직원들만 마주치면 태오가 시한폭탄처럼 군다는 얘기는 유채도 여기저기서 들었다. 이번 직원은 유채가 처음 병원에 실려 왔을 때, 유채를 일반 병동의 일인실에 입원시키려고 수속을 밟다가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태오 때문에 혼비백산했다고 한다.

“제작사 잘못으로 다친 건데 지원을 그렇게 안 해 주냐고 막…… 나 진짜 영혼까지 털리는 줄 알았잖아. 아니, 일반 병동이어도 일인실 정도면 그냥 괜찮지 않아? 한참 난리 치더니 결국 태오 형이 VIP 병실로 바꾸더라고. 태오 형은 일도 없나 봐……. 맨날 병원에서 죽치는 거야?”

그때 직원의 등 뒤에서 태오가 불쑥 나타났다. 직원은 물론, 유채도 흠칫 놀랐다.

“촬영 중단됐는데 일 없는 게 당연하지. 왜 불만이야?”

“아이, 깜짝이야! 또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예요. 왜 자꾸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해요? 홍길동이에요?”

“뭘 놀라. 난 늘 여기 있어.”

유채 옆에. 하고 입 모양으로 벙긋거리면서 유채를 가리키는 얼굴이, 며칠 전 유채의 사고 당일보다는 많이 편해 보여서 유채도 조금 안심이 되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유채는 줄곧 VIP 병실에서 지냈다. 제작사 지원금은 필요 없다고 뿌리치면서 태오가 모두 사비로 냈다고 한다. 유채는 ‘그래도 지원금은 받고 차액만 형이 내지…….’ 하고 중얼거렸지만, 직원이 톡 끼어들면서 그런 비용이 ‘지랄 비용’이라고 말했다.

“지랄 비용이요?”

“태오 형이 제작사에 지랄한 비용 내는 거야.”

직원의 설명에 태오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민망한 듯 웃었다. 그냥 지랄을 안 하면 될 텐데……. 유채는 속으로만 중얼거리다가 덧붙였다.

“형, 제가 일 열심히 할게요.”

“응? 갑자기?”

“응. 걱정 마요.”

“무슨 걱정……?”

태오는 의아한 듯 대꾸하면서도 직원이 가져온 과일 바구니에서 꺼낸 사과를 깎느라 바빴다. 칼질이 손에 익지 않아서 서툴러 보였다. 그 모습을 유채와 함께 물끄러미 바라보던 직원이 입을 열었다.

“태오 형 맨날 일하기 싫어하잖아요. 유채가 돈 많이 벌어서 먹여 살리려고 그러나 보네.”

“또 그 얘기야?”

“형 돈 쓰는 거 봐요. 이렇게 아무 데나 써 대는데, 은퇴하더라도 갑자기 소비 수준을 줄이기는 어려울 거 아니에요. 유채가 소처럼 일해야겠네.”

“유채 병원비가 왜 아무 데나야.”

“병원비 말고 지랄 비용으로도 술술 새니까 그렇죠…….”

직원과 태오가 투닥거리는 동안 유채는 값어치가 떨어지지 않을 만한 위치에 땅을 사서 건물을 올리려면 얼마나 더 벌어야 할지 계산해 보았다. 태오는 언제나 제가 많이 벌어 놨으니 그런 걱정할 필요 없다는 식이었지만, 태오가 하는 말은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유채는 줄곧 VIP 병실에서 지냈다.

VIP 병실이었으니 식단도 당연히 뒷맛이 깔끔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 나왔다. 다만 유채는 달고 맵고 짠 음식을 좋아했기 때문에, 식단이 영 불만스러웠다. 속을 다친 것도 아니고 외상일 뿐인데 식사까지 이렇게 해야 하나 싶었지만, 태오가 데려온 병실에서 불평만 늘어놓고 싶지 않아서 줄곧 꾸역꾸역 먹었다.

줄곧 병실에 붙어 있던 태오가 갑자기 집에 돌아갔다가 세 시간 만에 다시 나타난 것은 그때쯤이었다. 대충 말린 앞머리가 왁스기 하나 없이 내려와 이마를 덮고 있었다.

언제나 깔끔하고 단정하게 다녔던 태오가 흰 맨투맨 티셔츠에 청바지뿐인 옷차림에, 끈이 풀린 운동화를 끌면서 나타난 탓에 유채는 조금 웃었다. 시간이 오래 걸린 것치고는 급하게 나온 태가 역력했다. 손에는 못 보던 보온 도시락 통이 들려 있었다.

“그게 뭐예요?”

“맛있는 거.”

태오가 보온 도시락 통을 들어 올리면서 싱긋 웃었다.

“집에 가는 길에 샀어.”

“맛있는 거를요?”

“아니. 도시락 통을.”

침상에 내린 간이 테이블 위에 금세 상이 차려졌다. 도시락 통을 열어 보기 전부터 유채가 짐작했던 대로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빨간색 떡볶이였다. 애초에 태오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음식이었다.

“먹어 봐. 건강한 스타일 아니고 유채 스타일이야.”

태오가 침대 위로 올라와 유채 곁에 바투 붙어 앉았다. 포크로 떡볶이 하나를 쿡 찍어 주는 것을 손으로 받으려다가 입을 아, 벌렸다. 태오가 소리 내 웃으면서 유채의 입 안에 떡을 넣어 주었다. 웃음소리가 청량해서 가슴이 간지러웠다.

입 안에 지나치게 맵고 자극적일 만큼 달달한 향이 확 번졌다. 다친 쪽은 왼손이면서, 유채는 양손에 모두 깁스를 한 사람처럼 가만히 팔을 늘어뜨리고 앉아서 줄곧 입만 벌렸다.

“유채야, 내일…….”

한참 먹고 있는데 태오가 무슨 일인지 잠시 머뭇거렸다. 유채는 고개를 들어서 그를 바라보다가 아, 하고 생각난 듯 말했다.

“내일 추석이죠. 형, 서울 다녀올 거예요?”

“어……. 집으로 가는 건 아니고, 아예 모른 척하기는 좀 그래서 부모님이랑 교외에서 식사나 하고 오려고.”

태오는 기어코 제주도 여행을 모두 취소했고, 늘 하던 대로 당일에 잠시 부모님을 뵙고 오려는 듯했다. 전에는 늘 함께 갔기 때문에 유채는 조금 아쉬워졌다.

유채를 가만히 살펴보던 태오가 급히 덧붙였다.

“그리고 엄마가 너 문병 오고 싶어 하셨거든. 근데 아빠가 이렇게 장거리 운전 하시는 건 내가 좀 불안해서, 내일 서울에서 점심 먹고 내 차로 모시고 내려오려고.”

“네? 안 그래도 되는데.”

고개를 저으면서도 유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태오가 작게 웃었다.

“입에 침이나 발라.”

“진짠데. 서울에서 여기까지는 너무 멀잖아요…….”

유채가 입원한 병원은 나주 촬영장 근처에 있었다. 서울로 올라갈 때는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갈 텐데, 태오 성격에 연휴 기간 중 부모님을 모시고 내려오면서까지 매니저를 불러서 운전시키지는 않을 테니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할 터였다.

“괜찮아. 엄마가 너 너무 보고 싶어 해.”

하여간 얼굴은 밝히셔서. 하고 덧붙이면서, 아빠도 말은 안 하는데 똑같다고 중얼거리는 태오의 표정이 부드러웠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유채는 그의 입매에 제 입술을 꾹 누르고 우물거렸다.

“운전 조심해요. 내일 비 많이 온댔어요.”

“별걱정을 다 해.”

“새벽에 출발할 거예요?”

“응.”

“오늘은 여기서 자고…….”

“응.”

“보호자 침대에서 잘 거예요?”

“아니. 이 침대에서 잘래.”

“일인용인데……. 침대 부서지면 어떡해?”

“물어 주지 뭐.”

유채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혀끝으로 태오의 아랫입술을 핥다가 톡톡 두드리면서,

“형은 진짜……. 그렇게 돈 막 쓰지 말랬죠.”

타박하는 목소리가 상냥했다. 태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입꼬리를 당겼다.

“이거보다 더 중요하게 쓸 일이 어딨어?”

그러면서 막상 유채가 입술을 열고 그의 입 안을 파고들었을 때는 고개를 피했다.

“이 닦고.”

가볍게 밀어내는 손짓에 막힌 유채가 금세 불만스러운 표정이 됐다. 태오가 그의 뺨을 꼬집어서 양쪽으로 죽 늘렸다.

“떡볶이 맛 나잖아. 나는 민트 맛이 더 좋아.”

유채는 후다닥 일어나 병실 한쪽에 있는 욕실로 뛰어들려고 했다. 그러나 태오에게 깁스를 두르지 않은 성한 쪽 손목이 잡혔다.

“내가 만든 떡볶이 다 안 먹을 거야?”

태오가 이렇게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면서 눈썹을 길게 늘어뜨리고 웃으면 유채는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해사한 뺨에 길게 패는 보조개를 홀린 듯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유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먹어요……. 다 먹을 거야.”

목적어가 불분명한 대답에 태오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유채는 언제나 참을성이 많은 편이었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모든 시간이 더디게 느껴졌다.

유채의 입맛대로 태오가 만들어 온 달고 매운 떡볶이도, 입가심용의 매실차도 모두 먹을 때까지 지나치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마침내 도시락 통이 바닥을 보였다. 태오가 느릿한 손놀림으로 상 위를 깨끗하게 치우는 동안, 유채는 그에게 등이 떠밀려서 욕실로 들어갔다. 깁스를 한 왼손을 위로 치켜든 채 샤워하느라 마음이 급했다.

그러고도 태오가 씻고 나올 때까지 또다시 기다려야 했다.

“형은 다 씻고 왔으면서.”

이제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태오에게 투정 부리듯 말하자, 태오가 눈매를 길게 접으면서 쌕 웃었다.

“그래도 촉촉한 게 좋잖아.”

유채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그렇게 묻는 태오의 뺨과 목덜미가 젖어 있어서 목 안이 타들어 갔다.

그날은 하늘이 흐렸다.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였다. 일기 예보에서는 다음 날부터 또다시 가을장마가 온다고 했는데, 벌써부터 공기가 젖어 들었다.

올해 가을은 비가 잦았다.

“비 올 것 같네.”

침상 위로 올라온 태오가 창밖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응, 그러게요.”

대답하면서 유채는 태오의 허리를 한 팔로 감아 바짝 끌어당겼다. VIP실이라고 해도 병실의 침상은 넓지 않았다. 남자 두 명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침대가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삐걱거렸다.

태오는 맨 살갗에 샤워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대충 여민 가운의 앞섶이 조금 벌어졌다. 짧은 머리카락에서 채 말리지 못한 물기가 툭툭 떨어져 침대 시트를 적셨다. 동시에, 창밖에서도 갑작스러운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불을 켜지 않은 병실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내일 같이 못 있어 줘서 미안.”

“하루인데요.”

“그래도. 명절에 혼자 있는 거 싫어하잖아.”

태오가 유채의 목덜미에 뺨을 기댔다. 몸에 열기가 올랐는지 말간 뺨이 발긋한 색이었다. 찬물로 샤워했는데도 유채가 아까부터 온몸이 달았던 것처럼.

비에 축축하게 젖은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어둑한 병실 안으로 흘러들었다. 태오의 살갗에서 상쾌한 냄새가 났다. 향긋한 비누 냄새에 그의 체 향이 스며들어 부드럽고 풋풋해졌다. 유채는 태오의 눈가를 혀끝으로 길게 핥았다.

다치지 않은 오른손으로 태오의 가운을 걷어 올리자 맨허벅지가 손가락에 닿았다. 살갗을 간질이듯 손끝을 미끄러뜨렸다. 태오가 눈을 감았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는 모습에 아랫배에서 열기가 당겼다.

“안 싫어요. 기다리면 형 올 거잖아요.”

“빨리 다녀올게.”

“비 많이 온대요……. 과속하지 말고 천천히 와요.”

빗방울이 창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내일이 되면 폭우가 될지도 모른다. 유채는 문득 물웅덩이가 여기저기 고여 있을 고속 도로가 떠올라 걱정스러워졌다. 태오가 눈을 감은 채 입 끝으로 웃었다.

“싫어. 완전 과속해서 빨리 올 거…… 읏…….”

맨다리 사이로 파고든 커다란 손이 그대로 태오의 성기를 감쌌다. 말을 잇지 못하고 다물어 버린 입술에서 신음이 샜다. 아래위로 흔들어 대는 손길을 견뎌 내지 못한 살덩이가 점점 더 부풀어 올랐다. 박자가 빨라질 때마다 태오의 허리가 들썩거렸다. 어둡게 내려앉은 그림자 안에서 태오가 아랫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보였다.

유채는 고개를 숙여 태오의 턱을 당겼다. 태오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붉은 혀가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입술을 삼키자, 그의 입 안이 불에 델 것처럼 뜨겁고 달았다.

“아, 으읏……!”

아래위로 동시에 자극받은 태오가 몸을 떨었다. 그는 유채의 몸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움직여지지 않았다. 밭은 숨을 내뱉느라 태오는 힘겨워 보였다. 병실 안이 온통 조용했다. 창밖에서 비가 쏟아지는 소리와, 태오가 할딱이는 숨소리가 정적 속에 간간이 섞여 들었다. 그리고 이내 태오가 크게 몸서리쳤다. 반투명하고 끈적한 액체가 유채의 손안에서 엉켰다.

“여긴 젤이 없어서, 형.”

태오의 귀 끝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유채가 속삭였다. 뜨거운 숨이 닿자 태오가 몸을 흠칫 떨었다.

“……형 거로 할게요.”

“흣…….”

살결이 부드러운 엉덩이를 잡아 크게 벌렸다. 그리고 손바닥을 흠뻑 적신 백탁액으로 엉덩이 사이 입구를 뭉근히 눌렀다. 태오가 순간적으로 몸서리를 쳤다.

“형, 나 사고 났을 때요.”

태오의 다리 사이를 지분거리던 손가락이 이내 도톰한 입구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태오가 숨을 들이켰다.

가운이 반쯤 벗겨져 흰 어깨가 드러나 있었다. 유채는 그 살갗에 입술을 묻었다.

“눈앞이 까매지는데…… 그런 생각 했어요. 결혼 서약 할 때, 다들 그러잖아요.”

맨살결이 입술에 말캉하게 닿았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맞닿은 가슴팍에서 심장이 거칠게 뛰는 소리가 났다. 태오는 눈을 꽉 감은 채 유채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덮고 있었던 샤워 가운이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부드러운 시트 위에서 알몸이 되었다.

“여기서 죽으면 형이랑 헤어지는 거구나, 그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왜 해.”

태오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반듯한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근데 형이랑 못 헤어지겠더라고요.”

“유채야.”

“죽어도 안 돼요.”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래서 무서웠어요.”

“너 진짜.”

태오가 기어코 인상을 썼다.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유채가 흐릿한 얼굴로 웃었다.

“살아서 다행이에요.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연히 살아야지, 무슨…… 흐, 으읏…….”

예고도 없이, 구멍에서 손가락을 갑작스레 뺀 유채가 제 것을 태오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제대로 풀어 주지 않은 내벽이 빠듯하게 벌어지면서 태오가 온몸을 떨었다.

“흐으, 유채야, 아, 파.”

태오가 버둥거리면서 유채의 어깨를 때렸다. 평소라면 순순히 물러났을 유채가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태오를 꽉 껴안고 성기를 거칠게 밀어 넣었다. 말없이 입술을 물고 허리를 들썩거렸다.

유채의 등에 완전히 가려져 태오의 모습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태오가 작게 앓는 소리만 어둠 속에서 나지막하게 울렸다.

유채가 허리를 쳐올렸다. 그때마다 태오가 신음처럼 흐느꼈다. 벗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거친 유채의 움직임에 고통스러운 듯했다. 그런데도 아랫배와 허벅지 사이에서 맞닿은 성기가 빳빳하게 힘을 받았다. 이미 한 차례 사정한 물건이 또다시 투명한 액을 질금거렸다.

욱여넣어진 성기는 내벽을 아무렇게나 훑었고, 단단한 기둥이 빠져나갔다가 단번에 박혀 올 때마다 태오의 전신에 전율이 퍼졌다. 흥분이 통증을 수반한 채 동시에 왔다. 흐느낌이 섞였던 신음이 점점 열에 들떴다.

유채가 다시 하체를 크게 움직였다. 더 이상 깊숙이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았던 성기가 퍽, 소리를 내면서 안으로 파고들었다. 태오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경련했다. 여전히 맞물려 있는 아래에 자극이 가면서, 크기를 더 부풀린 성기가 내벽을 긁었다.

허공에서 버둥대던 두 다리가 어느새 유채의 어깨 위에 걸쳐졌다. 엉덩이가 들어 올려진 탓에 성기에 박힌 입구가 훤히 드러났다. 보기에도 안쓰러울 만큼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도 구멍은 유채의 것을 가득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구멍이 옴찔거릴 때마다, 입구 주변에 치덕치덕 묻었던 반투명한 액이 부서지면서 희끄무레한 거품 같은 것을 질금거렸다.

“하, 으흐으…….”

병실에서 들리는 것은 태오의 울음소리와 신음, 성기가 내벽을 퍽, 퍽 찧어 댈 때마다 나는 마찰음뿐이었다. 질척하게 끈적거리는 소음 사이로 빗소리가 울렸다.

“아……!”

마침내 태오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그 순간, 유채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내벽에 뜨거운 액을 쏟아 내면서 사정했다.

크게 벌어진 태오의 허벅지 안쪽을 타고, 정액이 끈적하게 흐르는 느낌이 났다.

유채가 태오의 몸 위로 풀썩 무너지면서 그를 꽉 끌어안았다. 땀과 정액이 얽힌 맨다리 사이에서 뒤엉켜 미끈거렸다.

그때 창밖에서 비가 쏟아지면서 번개가 쳤다.

빛이 번쩍거렸다. 태오의 흰 얼굴이 어둠 속에서 드러나 눈앞에 선명해졌다.

깨끗한 이마와 짙은 눈썹 아래로 눈매가 길었다. 감았던 눈을 뜰 때마다 유난히 새카만 눈동자가 도드라졌다. 그는 유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지친 듯 힘없이 눈꺼풀을 내렸다.

그날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이 축축했다.

빗줄기가 점점 거칠어지다가 폭우가 되었고, 병실의 공기는 습했다. 태오의 눈가도 붉게 젖어 들었다. 유채는 깁스를 한 왼손을 들어 맨손가락으로 그의 눈가를 쓸었다.

태오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간지럽다면서 웃었다. 잠긴 목에서 웃음소리가 간신히 새어 나왔다.

***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라고 했지만 태오는 차에서 자면 된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서울로 가는 길에는 매니저가 운전하기로 했다. 몇 번 더 권해도 잘 시간이 아깝다면서 듣지 않았다.

“아, 진짜 형. 고집이 왜 이렇게 세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지만 유채도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좋았다. 태오의 귓가에 뺨을 붙이면서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내일 서울 다녀오고 나면 나는 바로 촬영 들어가. 이렇게 있을 시간도 이제 끝이란 말야.”

태오가 유채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각본을 뒤적거리며 투덜거렸다. 유채가 당분간 합류할 수 없기 때문에, 유채의 역할인 진연음의 사망 이후부터 촬영하기로 했다고 들었다.

유채가 목을 길게 빼서 태오의 손에 들린 각본을 들여다보았다. 진연음이 죽은 이후 장면은 대충 훑어보기만 했을 뿐 제대로 읽지 않았다.

“엔딩은 어떻게 돼요?”

“감독님은 메리 배드라고 주장하시는데 그냥 새드야.”

“이세현이 제국 통일하고 제왕이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뭐 해. 다 죽고 혼자 살아남는데.”

“아…….”

“궁금해?”

“응. 얘기해 줘요.”

태오가 각본을 내려놓고, 유채에게 ‘제왕’의 결말 파트를 설명해 주었다.

소기영이 진연음과 동침한 사실을 알게 된 이세현은 진연음의 해명조차 듣지 않은 채 그를 숙청하기로 한다.

왕후와의 간음이었으니 사형으로도 부족했다. 그러나 이세현이 느꼈던 것은 단순한 배신감이 아니었다.

이세현이 왕위에 오른 이후, 진연음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다. 게다가 진연음은 단순한 공신이 아니었다. 그는 지나치게 오랫동안 5왕자로 살았다. 이세현은 자신이 진연음의 자리를 대신한 껍데기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진연음에 대한 불안감과 열등감, 배신감이 겹쳤다. 이세현은 결국 진연음을 가마솥의 끓는 물에 넣어 삶아 죽이고 소기영 또한 처형한다.

처형장에서 소기영은 웃는 얼굴로 목이 잘린다.

이세현이 평생 자신만을 위해 살아온 진연음을 토사구팽 하리라는 전조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도 진연음은 마지막까지 이세현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곁을 지키고자 했고, 결국 그의 손에 죽었다.

이세현은 정복 군주로서 대제국을 지배했고 가장 강력한 제왕이 되었으나, 자신을 가장 신뢰했던 친우를 제 손으로 죽게 함으로써 누구도 믿지 못한 채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간다. 소기영은 이세현을 그렇게 세상에서 완전히 고립시킴으로써 그녀의 복수를 완성했다.

영화는 소중한 이들을 모두 잃은 이세현이 홀로 왕좌에 앉아서, 형형한 눈으로 자신의 왕국을 내려다보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이세현은 진연음의 위치를 빼앗고 제왕이 됐지만…….”

태오가 유채의 품 안에서 몸을 늘어뜨렸다. 그리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남은 생애 동안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겠지. 평생 후회하면서 살았을 거야.”

“하지만 이세현이 원해서 진연음 자리를 빼앗은 건 아니잖아요.”

“그래.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냥 그렇게 됐을 뿐이지.”

“성 감독님 그렇게 안 봤는데요.”

“응?”

“진짜 악취미네요. 관객들이 괴로워하는 거 보면서 즐거워하겠죠?”

“어, 악취미고 보는 눈도 이상해.”

여전히 이게 브로맨스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태오가 웃었다.

동이 트기 시작할 때 태오는 병실 밖으로 나섰다. 얼른 다녀오겠다고 손을 흔들면서 웃는 얼굴이 해사했다. 반달처럼 접히는 눈매가 예뻐서 유채는 잠깐 넋을 놓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태오가 떠난 후, 유채는 창가에 기대서서 밖을 내려다보았다.

VIP 병실은 병원의 맨 위층인 7층에 있다.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가 몇 대 세워져 있지 않은 아스팔트 주차장이 내려다보였다. 풍경이 삭막했다.

그나마의 경치도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흐릿해졌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사위가 어두웠다. 유채는 바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침대로 돌아가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외로웠다.

조금 불안한 것 같기도 했다.

이불 속에서 끙끙거리다가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얼마 전 다운받았던 모바일 게임을 켜고, 작은 액정 속의 목장에서 양을 치는 데 집중했더니 평화로운 몇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태오’라고 이름 붙여 준 귀엽게 생긴 까만 양을 쓰다듬어 주고 있는데 액정 위로 메시지 팝업창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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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 시의 구남친 같은 메시지에 유채는 무심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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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는 까만 양의 이름을 태오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았지만 게임을 켤 때마다 양의 머리 위에 ‘태오’라는 이름이 말풍선처럼 둥둥 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들키고 말았다. 뺨이 붉어진 유채의 곁에서 태오는 한참 웃으면서 뒹굴뒹굴하더니 벌떡 일어나서 제 핸드폰에 같은 게임을 깔았다.

그래서 태오의 목장에도 ‘유채’ 양이 생겼다. 레벨 업도 하기 전에 기본으로 제공되는 하얀 양인 걸로 봐서는 게임을 자주 하지는 않는 듯했지만 유채는 그 일 덕분에 꽤 오랫동안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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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은 그쯤에서 끊겼다.

얼마간 더 양을 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 짧은 사이에, 유채는 꿈을 꾸었다.

고풍스러운 고대 건물로 가득한 옛 거리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제왕’을 촬영하고 있었던 사극 세트장이었다.

촬영 당시와 달랐던 것은 태오가 진연음의 분장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유채는 문득 제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유채는 이세현이 되어 있었다.

유채가 입을 열었다.

“난 이런 걸 바란 적이 없어. 네가 왕위에 오르고, 네 곁에서 평생 함께하고 싶었을 뿐인데.”

태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세현. 신분이 바뀌었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어째서 달라지는 게 없지? 내가 네 모든 걸 빼앗았는데.”

그러자 진연음의 옷을 입은 태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웃었다.

“그대가 어떤 모습이건, 나는 그대의 사람이야.”

여느 때처럼, 흰 뺨에 긴 보조개가 깊게 팼다.

“내가 어떤 모습이건 너도 내 사람이잖아. 넌 날 알아볼 거야.”

태오가 유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유채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유채는 퍼뜩 잠에서 깼다. 잠들기 전에 틀어 놓은 TV에서 기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창밖에서 또다시 번개가 쳤다. 밝은 빛이 번쩍거릴 때마다 뉴스 화면이 눈앞에서 또렷해졌다.

[……고속 도로 하행선에서 화물차가 빗길에 미끄러져 연쇄 추돌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앞서가던 승용차가 전복되어 타고 있던 두 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유채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시선이 TV 화면에 닿았다. 뉴스는 생방송인 듯, 화면이 조금씩 흔들리고 혼잡해 보였다.

리모컨을 들어 볼륨을 키웠는데도 기자의 목소리가 끊어질 듯 작았다. 귓가에서 이명 소리가 들렸다. 유채는 거칠게 버튼을 눌러 볼륨을 더 키우다가, 한계까지 커진 것을 깨닫고 리모컨을 집어 던졌다.

부옇게 흐린 화면 속에서 완전히 구겨진 승용차가 눈에 익었다. 같은 모델, 비슷한 색상의 차체는 얼마든지 있을 텐데도 어떤 예감이 유채를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유채는 눈을 부릅떴다. 제대로 화면을 바라보고, 똑바로 들으려고 애썼다. TV 너머에서 초췌한 안색의 기자가 지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고 차량의 운전자인 영화배우 윤태오 씨는 의식 불명 상태에 빠져 인근 병원으로 이송 중으로…….]

또다시 창밖에서 천둥이 쳤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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