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진공 포장이 된 새하얀 양파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양파 껍질은 벗기기 힘들던데 그냥 이걸 살까? 포장만 벗겨서 한 번 씻은 다음에 잘라서 쓰면 훨씬 편하긴 할 거 같은데.
하얀 양파 두 알을 보며 한참 고민하고 있자 옆에서 날 가만히 보던 정우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
“양파 그거 살 거예요?”
“…….”
까지 않은 양파보다 가격이 좀 비싸긴 했지만 노동력 값이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정우진은 내게 뭔가 만들어 줄 때 하나부터 열까지 정성을 다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한다.
그런데 내가 양파 까기 귀찮다고 이런 걸 사도 되는 걸까.
“선배.”
내가 계속 말이 없자 정우진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정우진이 내 눈을 보며 물었다.
“양파가 뭐 잘못했어요?”
“아니, 아무것도……. 야, 밖에서 붙지 마.”
놀라서 어깨를 밀어내자 정우진이 가볍게 밀려났다.
“선배가 계속 아무 말도 안 했잖아요.”
양파를 다시 제자리에 두고 쇼핑 카트를 밀자 정우진이 내 뒤를 쫓아오며 물었다.
“양파는 안 살 거예요?”
“살 거야.”
깐 양파가 아닌 껍질이 그대로 붙어 있는 양파 한 망을 카트에 넣고 감자를 찾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세상이…… 좋아졌네.”
“네?”
조금 전 깐 양파와 마찬가지로 껍질이 홀랑 벗겨진 감자 한 알이 반으로 잘려 진공 포장되어 있었다. 마트에 올 일이 거의 없기도 했고, 온 것도 정말 오랜만이라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마트에 온 게 정말 얼마 만이지. 가만히 있어도 거의 대부분 모든 게 해결되니 딱히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어졌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분명 있었지만 그게 의식주에 관련된 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언제부턴가 사는 것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다. 최근 들어 한 걱정이라고는 전부 정우진에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정우진을 만나기 전에는 하루하루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당장 한 달 뒤, 1년 뒤, 10년 뒤의 계획을 세우면서 살았다. 돈을 모으면서 한 푼이라도 지출을 줄이기 위해 관련된 지식을 찾고 뉴스도 더 자주 봤던 것 같다.
은행에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였더라. 내가 제대로 일을 했던 게 언제더라. 알람에 맞춰 일어났던 건?
새삼스럽게 드는 생각에 눈만 깜박거리며 멍하게 있는데,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목덜미를 잡았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걱정스러워하는 낯빛으로 내게 물었다.
“혹시 어디 아파요?”
“아니, 그냥 너무 오랜만인 거 같아서.”
마치 열이라도 재듯 한참 내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던 정우진이 슬금슬금 옷 안으로 손을 넣기 시작했다. 발로 찰까 하다가 그냥 벌레 쫓듯 손을 휘둘렀다.
“열나는 거 아니에요?”
“열은 무슨 열이야, 갑자기.”
“술을 그렇게 마시고 비까지 맞았는데 감기 안 걸리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니에요?”
“…….”
아니, 씨발. 그 얘긴 또 왜 하는 건데.
순간 튀어나오려는 욕을 애써 삼키고 입술을 깨물었다. 정우진은 잠깐 불만스러운 얼굴로 날 보다가 손을 뻗어 내 양 볼을 잡았다. 양쪽 볼이 세게 눌려서 붕어 입술이 된 채 눈을 치켜뜨자 정우진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내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대며 말했다.
“잠깐 맞은 것도 아니고 속옷까지 다 젖었었잖아요.”
“…….”
한숨을 내쉬며 말한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잘못한 게 있어서 뭐라고 말도 못 하고 그냥 눈을 치켜뜬 채 인상만 잔뜩 쓰고 있는데 가만히 날 보던 정우진이 뜬금없이 개소리를 했다.
“선배, 지금 뽀뽀하면 때릴 거죠?”
양 볼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말하는 정우진을 보다가 조금 전 카트에 담아 뒀던 양파 망 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양파로 처맞고 싶지는 않았던 건지 정우진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어차피 아무도 안 보는데 뭐 어때요.”
“눈깔 삐었냐?”
한참 타임 세일을 하고 있는 마트 한복판에서 이딴 소릴 하는 건 세상에 정우진밖에 없을 거다. 아까부터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한 채 카트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감자 안 사요?”
“양파만 처먹어.”
“양파만 넣어도 맛있긴 해요.”
정우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내 뒤를 쫓았다. 결국 오랜만에 마트 와서 더 구경도 못 하고 고형 카레 하나와 양파 한 망만 사고 집으로 왔다.
“양파 오래 볶다가 하면 맛있어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그냥 가만히 있어.”
“카레 해 봤어요?”
“혼자 살 때 몇 번 해 봤어.”
몇 번은 거짓말이고 사실 딱 한 번 해 봤다. 밥에 비벼 먹은 게 아니라 말아 먹어야 할 만큼 묽은 카레 국이었지만 먹을 만하긴 했었다.
옷을 갈아입고 손도 깨끗이 씻은 뒤 양파 망에서 양파를 꺼내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내 뒤에 바짝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야,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요리를 해?”
“왜 못 해요? 손을 잡고 있는 것도 아닌데.”
“불편하니까 좀 비켜. 영화라도 한 편 보고 있던가.”
“영화를 왜 봐요, 갑자기.”
“영화 보기 싫으면 청소라도 해.”
“청소할 거 없어요.”
“그럼 창문이라도 닦든가, 세차라도 하든가!”
내 허리에 고무줄처럼 둘러진 팔을 떼어 내려고 몸을 뒤틀었지만 정우진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창문 어제 닦았고, 세차는 다음 주에 할 거예요.”
진이 빠져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정우진이 어리광을 부리듯 내 귓가에 제 얼굴을 비볐다.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반쯤 포기한 채 가만히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같았으면 욕을 해도 진작 했을 텐데 내가 잘못한 게 있어서 차마 욕까진 할 수가 없었다.
어제 편의점에서 정말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밖에서 뭘 살 일이 별로 없다 보니 몰랐는데 문을 연 지 벌써 반년이 넘었다고 했었다.
계산도 하지 않고 카운터에 서서 안부를 묻고 있는데 때마침 아르바이트생이 왔다. 혹시 시간 있으면 밥이나 같이 먹자는 말에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하는 중에 급하게 정우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보통 한 번 약속이 잡히면 늦어도 일주일 전에 말을 해 주는데, 이렇게 문자로 당일 통보를 한 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밥만 먹고 간다는 말과 함께 전화하지 말라는 문장까지 보내고 나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멀리 나가지 않고 근처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주문하면서 자연스럽게 술을 시켰다. 근데 이건 정말 내 잘못이 아니었다. 친구끼리 고깃집 와서 고기만 먹어? 그것도 저녁에? 안 마셔도 보통 한 병쯤은 그냥 시키지 않냐고. 차를 가지고 온 것도 아닌데.
진짜 취한 건 아니었다. 아니, 취하긴 했는데 막 그렇게 인사불성이 될 만큼 많이 마신 건 아니었다. 그렇게 될 뻔했는데 술을 마시다가 애인 있다는 소릴 하는 바람에 술이 확 깼다.
그냥 애인 있다는 소리로 끝났으면 그럴 일도 없었을 텐데, 친구가 그럼 그 애인분도 불러서 같이 마시자고 하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로 정우진을 부르자고? 친구랑 술 마시고 있는데 너도 와서 같이 먹자고? 상상만 해도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끔찍한 생각을 해서 그런지 입맛까지 떨어졌다. 그 뒤로 어영부영 급하게 자리를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한두 방울씩 비가 떨어져 짧게 인사를 하고 친구는 택시를 탔다. 나는 차를 타고 가기엔 너무 가깝고 걷기엔 조금 먼 거리라 잠시 고민하다가 느긋하게 걸었다.
비는 거의 이슬비 수준이라 조금만 지나면 그대로 그칠 것 같았고, 취한 건 아니었지만 걸으며 술도 깰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리는 것 같지도 않던 이슬비는 어느 순간 갑자기 폭우로 변했다. 갑자기 쏟아진 게 아니라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아주 서서히 빗방울이 굵어진 것이었다.
나는 가마솥 안의 개구리처럼 내가 젖는 줄도 모르고 비를 맞으며 걸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빗물이 이마를 타고 줄줄 흐르는 걸 닦다가 깨달았다.
지금 비가 존나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나는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어서 물에 빠진 생쥐 같은 꼴이었다. 그때라도 얼른 뛰어서 비를 피했으면 됐을 텐데, 지금 내 꼴을 본 정우진이 또 얼마나 개지랄을 할지 생각하느라 이미 비라고도 할 수 없는 물 폭탄을 그대로 맞아 버렸다.
눈도 제대로 떠지지 않는 폭우 속에서 한숨만 쉬다가 걸음을 옮기려는데 주머니 속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아주 짧은 사이에 어디 옷가게라도 가서 옷이라도 한 벌 사 입어야 할까 고민했다. 그 고민을 하느라 또 그 자리에서 비를 계속 맞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취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무거운 발을 옮겼다. 어차피 다 젖은 거 뛰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어 그냥 조금 빨리 걷기만 했다.
그러다가 집에 다 와 갈 때쯤, 집 앞에 서 있는 정우진을 발견했다. 우산을 쓴 정우진이 정승처럼 문 앞에 서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잠깐 보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손을 들어 부르려는 그때 정우진이 고개를 퍼뜩 들어 날 쳐다봤다.
내리는 비를 다 처맞고 있는 술 취한 머저리가 나라는 걸 알아본 정우진이 들고 있던 우산까지 내팽개치고 내게 달려왔다. 커다란 손이 물이 줄줄 흐르는 내 얼굴을 쓸었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뭐라고, 정우진이 내게 뭐라고 했다.
좆 됐다.
그 생각만 들어서 사실 정우진이 뭐라고 하는지 듣지도 못했다. 집에 들어가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반사적으로 젖어서 질척거리는 신발을 벗으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뭘 어떻게 하기도 전에 정우진이 날 어깨에 메다시피 들어 올렸다. 갑자기 시야가 높아져 어어 소리를 내는데 정우진이 신발은 벗지도 않고 그대로 거실을 가로질러 걸었다.
욕실에 도착해 욕조 안에 날 내려놓은 정우진이 젖은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옷 벗어요.”
“야, 내가 비를 맞으려고…….”
맞으려고 맞은 게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분명 난 안 취했는데 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왜 발음이 꼬이는 거 같지? 잘못 들었나?
좀 당황해서 굳어 있다가 그냥 시키는 대로 얌전히 옷을 벗었다. 젖어서 그런지 옷이 살에 달라붙어서 잘 벗겨지지 않았다. 옷을 쥐어뜯으며 한참 몸을 뒤틀고 있는데, 뜨거운 물이 몸 위로 쏟아졌다. 고개를 들자 샤워기를 든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게 보였다.
“안 추워요?”
안 춥다고 말하려다가 또 발음이 꼬여서 나올까 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오면 택시를 타든가 우산을 사든가 저한테 전화를 하지, 왜 그걸 다 맞고 와요?”
“아니, 내가 개구리…….”
“개구리요?”
“…….”
솥 안의 개구리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또 혀가 꼬여서 입을 다물었다. 진짜, 씨발. 이렇게 좆같을 수가 있나. 정말 안 취했는데 도대체 왜 자꾸 혀가 꼬이는지 모르겠다.
“무슨 개구리요? 개구리 봤어요?”
“아니. 내가 개구리를 본 게 아니라 가마솥에 차가운 물 안에 개구리가 그거를 뜨거워지게…….”
“…….”
“아니, 뜨거운 물이 서서히 뜨거워지면 개구리가 자기가 죽는지 모르잖아. 익혀지는데 찬물이 천천히 뜨거운 물이 되니까…….”
이러다가 정우진이 내가 비 맞으면서 개구리를 쫓아간 거라고 오해라도 할까 봐 혀가 꼬이든 말든 열심히 설명했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이상해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우진이 미간을 구기며 내게 물었다.
“그 개구리가 왜요?”
“아니, 내가 개구리를 만난 게 아니라!”
“알아요, 그 개구리 얘기.”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그제야 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보였다. 답답했던 가슴이 그제야 뚫리는 것 같아 다시 한번 숨을 내쉬었다. 내 목과 어깨를 만져 주며 더운물을 뿌려 주던 정우진이 내게 말했다.
“그래서요?”
“어?”
“그 개구리가 왜요?”
“왜기는, 그냥 그렇다는 거지…….”
의아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데 정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보며 덩달아 고개를 옆으로 젖히다가 아, 하고 말했다.
“내가 비를 맞으려고 맞은 게 아니라 개구리처럼 그런 거라고.”
“팔 좀 들어 보세요.”
“비가 처음엔 안 왔어, 이렇게.”
“선배, 몸에 힘주지 마세요.”
욕조에 어느 정도 물이 차자 정우진이 샤워기를 내려 두고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몸에 달라붙어 있는 옷을 힘겹게 벗으며 말했다.
“차 타고 오긴 너무 멀어서 그냥 술도 깰 겸 걸어서 오는데…….”
“너무 멀어서 걸어왔다고요?”
“너 거기 편의점 알아? 신호등 옆에 병원 있잖아. 거기 맞은편. 거기 언제 생겼냐? 내 친구 거기서 일한 지 반년 넘었대.”
“가게 하나 내줄 테니까 지방으로 내려가 보는 건 어떠냐고 한 번 물어보세요.”
“걔가 거기 사장이야…….”
어느새 다 벗긴 건지 알몸이 돼 있었다. 차가워진 몸이 녹기 시작하자 몸에 힘이 풀렸다. 그 느낌이 좋아서 몸을 웅크리자 정우진이 내 등허리를 만지며 물었다.
“추워요?”
“아니…….”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감자 코끝에 물이 닿았다. 정우진이 내 얼굴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물 먹어요.”
“목 안 말라.”
“고개 너무 숙이면 물 먹는다고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떠 정우진을 바라봤다. 아까 밖에서 봤던 얼굴이랑은 딴판이었다. 아직 화가 다 안 풀린 것 같기는 했지만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졌다.
“나 안 취했어.”
이때다 싶어서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선배가 언제 취했던 적 있어요?”
“진짜 안 취했다고. 오늘 있었던 일 내일 다 기억할 거야.”
“알았어요.”
“아니……. 그냥 혀만 꼬이는 거라고. 고기 먹을 땐 진짜 멀쩡했어. 비 맞고 나서부터 그런 거야.”
이건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고기를 먹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멀쩡했다. 혀가 꼬이지도 않았고 아까 걸어올 때도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았다. 어지럽거나 사람이 두 개로 보이지도 않았고, 그냥 단지 혀만 꼬일 뿐이었다.
“비를 맞고 내가 갑자기 이렇게 됐다니까?”
“그럼 비가 문제예요?”
“근데 왜 갑자기 비가 오냐? 오늘 비 온다고 했어?”
비 온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 심각한 얼굴로 갑자기 왜 비가 온 건지 고민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전화는 왜 안 받았어요?”
“어?”
“전화요. 핸드폰 잃어버렸어요?”
“아…….”
아니, 분명 주머니에 있을 텐데.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욕실에 정적이 흘렀다. 뿌연 수증기를 한참 보다가 시선을 돌려 정우진을 바라봤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핸드폰 주머니에 있어. 아까 집에 올 때 주머니에서 진동 오는 거 알았거든?”
“근데 왜 안 받았어요?”
“비가 갑자기 와 가지고……. 내가 아까 개구리 얘기 했잖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내가 개구리가 된 거야. 비가 천천히 오다가 조금씩 양 많아지는데 나는 그걸 개구리처럼 몰라서 그래서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너한테 전화가 온 거거든.”
“…….”
“그래서 옷을 갈아입고 가려고 그 생각을 하는데 너무 젖어 가지고……. 어차피 다 젖었는데 옷을 갈아입으면 뭐 하나 싶어서 그냥 집에 빨리 가려고 왔어.”
최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는데 내 말을 다 들은 정우진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괜히 찔려서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오다가 너 만난 건데.”
“전화 왜 안 받았냐고요.”
“그러니까 옷 갈아입으려고…….”
아, 씨발. 전화 왜 안 받았지.
속으로 쌍욕을 하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정우진이 비 맞은 날 보면 걱정할 거 같아서 옷이라도 하나 사 입고 갈까 거기까지 생각했었다. 그 뒤로 주머니에서 계속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먹어 버렸다.
도대체 그걸 왜 까먹었지?
나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혼자 속으로 황당해하다가 허 하고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전화 받아야 된다는 걸 까먹었어.”
“…….”
말을 하면서도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여전히 정우진은 별말이 없어서 다시 변명하듯 말했다.
“그때 내가 개구리 생각하다가 비가 엄청 와 가지고 너한테 전화가 온 거야. 그때 내가 옷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을 했거든? 왜냐면 이대로 가면 네가 뭐라고 하니까 옷 살까 말까 그 생각을 하는데 어차피 다 젖었고……. 하필 딱 그때 너한테 전화가 와 가지고 그냥 어차피 젖어서 옷 안 갈아입고 빨리 집에 가려고 가고 있는데 너랑 마주친 거야. 너 우산 쓰고 있는 거 보니까 내가 아, 좆 됐다…….”
주절주절 말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손끝을 만지다가 손등 위로, 손목, 팔뚝까지 쓸듯 만지던 손이 아래로 내려와 내 다리를 쓸었다. 허벅지부터 종아리, 발목, 발끝까지 꼼꼼히 만지던 정우진이 내게 물었다.
“이제 몸 좀 녹은 거 같은데 씻고 얼른 자요.”
그 말에 그제야 정우진도 비를 맞았다는 게 떠올랐다. 놀라서 얼른 손을 뻗어 정우진을 잡았다.
“넌 안 추워?”
아직 여름이긴 해도 끝물이라 저녁에는 바람이 차가웠다. 게다가 비까지 맞았으니 춥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정우진은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말을 돌렸다.
“설 수 있겠어요?”
“나 집까지 내 발로 걸어왔거든?”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려고 했는데 손이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이건 정말 맹세코 취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그냥 미끄러져서 그런 거였다. 하지만 정우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내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그냥 앉아 있어요.”
“미끄러진 거야.”
“눈 감아요.”
정우진이 샴푸를 덜어 거품을 내며 말했다. 그걸 보다가 눈을 질끈 감자 정우진이 내 머리카락에 샴푸질을 하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이 두피에 닿자 뼈가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며 축 늘어져 꾸벅꾸벅 졸다가 퍼뜩 눈을 떴다.
“…….”
눈앞에 보여야 할 물이나 수증기가 보이지 않았다. 슬쩍 팔을 움직이자 물이 아니라 이불이 만져졌다. 멀뚱멀뚱 천장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하얀 이불이 보였다.
“…….”
뭐지? 내가 꿈을 꿨나?
멍하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에는 항상 머리가 아팠는데 지금은 멀쩡했다. 속이 쓰리지도 않았고 몸이 찌뿌듯한 거 같지도 않았다.
진짜 술 마신 게 꿈이었나? 얼빠진 얼굴로 항상 정우진이 자던 자리를 더듬다가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주변이 너무 조용했다. 거실에도 주방에도 정우진이 없어서 서재로 갔다.
기억을 잃었다 다시 찾은 뒤로 정우진은 매일 일기를 썼다. 거실에도 주방에도 없다면 서재에 있을 게 틀림없었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서재 쪽으로 가자 열린 문틈으로 정우진이 보였다.
책상에 앉아 펜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역시 일기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근데 지금 몇 시지? 보통 자기 전에 쓰던데 오늘은 왜 아침에 써? 근데 아침 맞나? 시간을 확인하려고 문안으로 몸을 디밀었다.
시계를 보려고 쭉 몸을 뻗는데, 인기척을 느낀 건지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몰래 훔쳐보고 있는 걸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괜히 뻘쭘해져 헛기침을 하며 똑바로 섰다.
“속은 괜찮아요?”
그 말에 내가 술을 마셨던 게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럼 씻다가 잠들었나? 아니, 무슨 미용실도 아니고 머리 감겨지다가 잠이 들어? 누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물속에 앉아 있었는데.
“나 어제 욕실에서 잠들었냐?”
“기억 안 나요?”
“…….”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는 걸 본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혹시 주정이라도 부렸나? 어제는 정말 많이 안 마셔서 기억이 안 나거나 주정뱅이 같은 짓은 안 한 거 같은데?
하지만 평소에 전적이 있어서 내가 날 신뢰할 수가 없었다. 아, 씨발. 또 무슨 미친 짓거리라도 했나 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발을 질질 끌며 정우진에게 다가갔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별로 뭐라고 하지도 않고 조용한 걸 보니 화가 난 게 틀림없었다. 정우진은 슬퍼도 울고, 화가 나도 울고, 좋아도 울지만, 오랫동안 지켜본 바로 감정이 격해지면 오히려 말이 없어졌다.
차라리 울면 어느 정도 수습이 가능하고 말이 통하는 단계였다. 그래도 방문이 열린 거 보면 그렇게 막 엄청나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제…….”
어제 전화 안 받아서 미안하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니 화가 난 것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듯한 눈치였다.
이런 표정으로 우물쭈물하고 있는 정우진이 좋은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선배.”
“잠깐만.”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줄 몰라서 손을 들자 정우진이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그걸 보며 숨을 삼키고 물었다.
“너 설마 승우 죽였냐?”
“네?”
“때렸어?”
“그 새끼 이름이 승우예요?”
“…….”
죽였냐, 때렸냐, 이런 질문을 하긴 했지만 사실 반쯤은 농담이었다. 에이,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정우진이 미간을 구기며 한 말에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얗게 질려서 굳은 날 보며 정우진이 말했다.
“선배, 사실…….”
“뭐.”
“네?”
“사실, 뭐!”
책상 위에 손을 올려 정우진 쪽으로 상체를 들이밀며 말했다. 날 가만히 보며 잠시 눈을 깜박이던 정우진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저 누구 죽인 적 없어요.”
“당연히 없어야지!”
“그냥 친구랑 같이 고기 먹은 거밖에 없는데 왜 죽여요.”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 자신이 불쌍해졌다. 씨발, 그래. 사람만 안 죽이면 되지.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서려다가 멈칫했다.
“내가 고기 먹었다고 말했나?”
“네.”
“…….”
안 했는데. 한 적 없는데?
분명 욕조에서 잠이 들기는 했지만 어제 있었던 일이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내가 어제 욕조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의 공백 없이 모든 게 다 떠올랐다.
하지만 고기를 먹었단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안 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정우진이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긴가민가한 얼굴로 날 보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했는데.”
“…….”
잠깐 침묵이 흘렀다. 눈을 한 번 깜박일 정도로 아주 짧은 침묵을 깨고 정우진이 이실직고했다.
“저 사실 어제 거기 갔었어요.”
“어딜? 나 고기 먹은 데?”
“네…….”
자기가 잘못한 걸 알긴 아는지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어디에서 먹는다고 말도 안 했는데 거길 어떻게 알고 와?
“갑자기 말도 안 하고 집에 안 왔잖아요.”
“말을 안 하긴 뭘 안 해, 문자 보냈잖아.”
“갑자기 그러는 게 어디 있어요? 편의점 간다고 하고 나갔잖아요. 아, 그때 같이 갔어야 됐는데.”
후회하듯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황당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친구를 갑자기 만났는데 갑자기 말하지 내가 점쟁이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 넌 밖에 나갈 때 아, 오늘은 왠지 친구를 만나서 밥을 먹을 거 같군! 이러고 나가냐?”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변명하듯 말했다.
“그냥 밖에서 보기만 했어요.”
“얼마나?”
“그냥 잠깐…….”
“거길 어떻게 알고 왔는데?”
핸드폰에 또 뭔 짓거리를 한 건 아닌가 싶어 험악한 얼굴로 묻자 정우진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걷다가…….”
“뭐?”
“선배는 집에 혼자 있는 제 생각은 안 해요?”
“야! 씨발, 누가 보면 내가 3박 4일 외박이라도 한 줄 알겠다!”
자기도 할 말이 있다는 듯 억울한 얼굴로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고함을 빽 질렀다. 그러자 정우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였다.
“밖에 나가 있을 때 저 보고 싶었던 적 없죠? 선배는 한 번이라도 내가 보고 싶어서 울고 싶었던 적 있어요?”
“…….”
아니……. 씨발, 진짜 어이가 없었다. 우리가 떨어져 있어 봤자 뭐 얼마나 떨어져 있다고 울고 싶기까지 해? 길어 봤자 대여섯 시간인데. 게다가 어제는 세 시간 정도가 전부였다.
“있어.”
황당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눈을 크게 떴다.
“언제요?”
“고등학생 걔 만났을 때.”
“아, 그 새끼 얘긴 또 왜 꺼내요! 그리고 그거 꿈이었잖아요!”
한 번만 더 말하면 욕이라도 할 기세라 고개를 저으며 말을 돌렸다.
“그래서 거긴 어떻게 알고 왔는데? 너 또 내 핸드폰에 무슨 짓거리 한 거 아니야?”
내 물음에 정우진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 했어요.”
“그럼 내가 거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는데?”
“그냥 걷다가 찾은 거예요.”
“뭘 걷다가 찾아? 네가 개야? 냄새 맡고 찾아왔냐?”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걸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말하자 정우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걸 보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찾아왔어?”
“진짜 그냥 걷다가 찾은 거예요.”
기가 팍 죽은 목소리로 작게 말하는 걸 보니 내가 너무 말을 심하게 했나 싶어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입을 열었다.
“화 안 낼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
“정말이에요.”
“…….”
정우진이 상식 밖의 행동을 밥 먹듯이 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아니, 거짓말을 해도 한두 번 물으면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기는 했다. 이렇게까지 물었는데 말을 안 하는 걸 보면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진짜 그냥 걷다가 찾은 거라고? 우연히?”
“네.”
“누구 만나기로 했었어? 거긴 왜 나갔는데?”
나간다는 소리 한 적 없었는데? 의아한 얼굴로 묻자 정우진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혹시 나한테 말 못 할 일이라도 있었나, 잠깐 그런 생각을 하다가 불현듯 머리에 스치는 생각에 설마설마하며 물었다.
“그냥 무작정 나와서 나 찾은 건 아니지?”
“…….”
“진짜야?”
끝까지 말이 없는 걸 보니 정말인가 보다. 돌았나?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도 아니고 내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무작정 나와서 걸어? 정우진이랑 같이 살면서 이젠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또 놀랄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건 정우진은 진짜 서울에서 김 서방을 찾았다는 거다.
“진짜 내 핸드폰에 뭐 아무 짓도 안 했어? 너 또 내 옷이나 주머니에 이상한 거 넣어 둔 거 아니야?”
“진짜 아니에요.”
“그럼 정말 그냥 찾았다고? 아무 장치나 뭐 그런 것도 없이?”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계속 묻자 정우진이 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편의점 간다고 했었잖아요. 그래서 그냥 그 근처 돌아다닌 거예요.”
“그러다 못 찾았으면 어쩌려고?”
“못 찾으면…….”
“……?”
“못 찾는 거죠, 뭐.”
내가 집을 나간 것도 아니고, 말도 없이 안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냥 밥 먹고 온다고 했는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날 찾으려고 돌아다녔다고?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혹시나 하고 물었다.
“이게 처음이지?”
“…….”
“와……. 진짜 널 어쩌면 좋냐…….”
말이 없는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위치 추적을 못 하게 하니까 집 나간 개처럼 길바닥을 싸돌아다닐 줄은 몰랐다.
“화났어요?”
“안 났어. 그냥 어이가 없어서 그래.”
“몰래 쫓아가거나 그런 적은 없어요.”
결백을 주장하듯 순진무구한 얼굴로 말하는 정우진을 착잡한 눈으로 보다가 물었다.
“언제부터 그랬는데? 못 찾았던 적도 있었어?”
“얼마 안 됐어요, 그냥 몇 달……. 그리고 못 찾았던 적이 더 많았어요. 찾은 건 정말 몇 번 안 되고…….”
몇 달이 짧냐, 씨발…….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을 애써 삼키고 숨만 내뱉었다.
“못 찾으면 돌아다니다가 그냥 집에 갔어?”
“네.”
아니, 그 짓거리를 도대체 왜 하는데? 왜? 무슨 의미가 있냐고. 내가 집을 나간 것도 아니고, 집에 안 오는 것도 아니고, 몰래 나간 것도 아닌데.
“아무한테도 안 들켰어요. 선배랑 만나는 사람들한테 말 건 적도 없고 그냥 정말 보기만 했어요.”
“…….”
정우진은 정말 내가 하지 말라는 거 빼고는 전부 다 했다. 이걸 잘했다고 칭찬을 해 줘야 할지 욕을 해야 할지 구분이 안 됐다. 지금도 나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정우진의 속을 이해할 수가 없어 당황스러운 것뿐이었다.
그리고 날 찾아 수많은 길을 혼자 걸었을 정우진이 안쓰러웠다.
“내가 어디 간다고 말했을 때는? 그땐 그럼 그냥 집에 있었어?”
“그냥 잠깐 가서 얼굴만 봤어요.”
“…….”
내가 인상을 쓰고 고개를 옆으로 젖히자 정우진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진짜 잠깐……. 조금만…….”
“…….”
“선배, 화났어요?”
불안한 얼굴로 묻는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생각이 많아졌다. 정리되지 않는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였다.
“그럼 그냥 잠깐 보고 집에 가는 거야?”
“네…….”
내가 화가 난 거라고 확신을 했는지 정우진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집에 가서 그럼 뭐 하는데?”
“그냥 시계 보고, 핸드폰 보고…….”
“그리고?”
“선배 생각하고…….”
“또?”
정우진이 많이 불안해한다는 건 안다. 그냥 불안해하는 게 아니라 병적인 증세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집에 없을 때 자주 연락하고 내 연락을 기다린다는 것도 알았다.
“문자 보내고…….”
“누구한테?”
“선배요.”
“또?”
“……전화……. 선배한테요.”
“…….”
그런데 정말 진짜 딱 그것만 할 줄은 몰랐다. 나는 그래도 정우진이 뭔가 하나쯤은 다른 걸 할 줄 알았다. 따라오지 말라고 하면 그냥 그럴 줄만 알았지, 따라오지 않고 나중에 찾아다닐 줄은 정말 몰랐다.
불현듯 정우진이 날 믿지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랬던 건가 싶기도 했다. 내가 어디 가기라도 할까 봐? 집에 오지 않을까 봐? 정우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불안증은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별개였다. 사랑한다는 게 떠나지 않을 거라는 증거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입맛이 썼다. 정우진이 혼자 길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집에서 핸드폰만 부여잡고 있을 모습이 상상이 돼서 더 그럴지도 몰랐다.
“선배.”
정우진이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불안해 보이는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화 안 났다니까.”
“그럼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욕도 안 하고.”
“넌 내가 욕하는 게 좋냐?”
“그게 아니라……. 그냥 차라리 욕하면 안 돼요? 아무 말도 안 하니까 더 불안하잖아요. 혹시 나한테 정떨어졌어요?”
뜬금없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울상을 지었다.
“스토커처럼 굴어서 소름 끼쳐요?”
“네 스토커 짓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소름 끼칠 게 뭐 있어.”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내 표정이 어떤지 나도 모르겠다. 정우진한테 화가 나거나 정이 떨어졌다거나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정우진이 날 믿지 않는다는 건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은 건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까…….”
“네?”
“네가 잘못한 건 없네.”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말 그대로 정우진이 잘못한 건 없었다. 내가 하지 말라는 건 아무것도 안 했고, 그냥 나와서 날 찾고, 찾아서 보고 집에 간 것뿐이었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잘못한 건 정우진이 아니라 나였다.
갑자기 약속이 생긴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연락이 안 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걸 아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은 건 분명 내 잘못이었다.
“너 밥 먹었어?”
“배고파요? 속은요?”
“아니, 너 먹었냐고.”
“선배 자는데 저 혼자 밥을 왜 먹어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카레 먹을래?”
너무 갑작스러웠는지 정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라면이랑 볶음밥 빼고 그나마 요리라고 할 수 있는 건 카레뿐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같이 마트에 가게 된 것이었다. 이것저것 구경도 좀 하고 다른 것도 사려고 했는데 정우진이 계속 달라붙는 바람에 고형 카레랑 양파밖에 사지 못했다는 게 다시 떠오르자 속이 끓었다.
아니, 밖에서는 좀 적당히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성별이고 뭐고 그런 걸 떠나서 왜 공공장소에서 자꾸 달라붙고 지랄이냐고.
이를 득득 갈고 있는데 내 뒤에 붙어 있던 정우진이 날 돌려세웠다.
“선배, 아까 마트에서도 그렇고 왜 자꾸 멍하게 있어요? 진짜 어디 아파요?”
“안 아파. 생각할 게 많아서 그래.”
“무슨 생각이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카레 다 할 때까지 앉아서 얌전히 기다리면 말해 줄게.”
“아픈 거 아니죠?”
“아니야.”
“뭐 심각한 거 아니죠? 아니면 나한테 뭐 화났다거나.”
“그런 거 아니라니까.”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참 날 보다가 발을 질질 끌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냥 나가서 텔레비전이라도 보고 있으면 안 돼?”
“싫어요.”
“꼭 그렇게 감시하듯 보고 있어야 되냐?”
“감시가 아니라 관찰이에요.”
카레 만드는 걸 관찰해서 뭐 할 건데……. 인상을 찌푸리고 정우진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더 말해도 들어먹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까 집에 오면서 핸드폰으로 카레 만드는 방법에 대해 검색을 해 봤다. 다행히 적은 재료로도 카레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많았다. 특히 양파는 많이 넣으면 넣을수록 맛있다고 했으니까 그냥 하는 김에 한 망을 다 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먹다 남으면 놔뒀다가 내일 또 먹으면 되니까.
야심차게 그런 생각을 했지만 양파 껍질을 까고 자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도와주겠다는 정우진을 몇 번이나 물리고 양파 껍질 하나를 까서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갈색이 날 때까지 볶으라고 했으니 큰 것보다 작게 자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얇고 작게 양파를 썰었다. 눈이 조금 따갑긴 했지만 하나는 괜찮았다.
문제는 두 번째 양파부터였다.
“껍질만 제가 깔까요?”
“…….”
“선배?”
세월아 네월아 양파 껍질을 까서 썰고 있는데 눈이 미친 듯 시려 오기 시작했다. 시린 건지 따가운 건지 뜨거운 건지, 어떤 감각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냥 미친 듯이 아프고 눈물이 나서 눈을 꾹 감고 있는데 이상함을 느낀 정우진이 내 등 뒤로 다가왔다.
“괜찮아요?”
“…….”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꾹 감았다. 정우진이 내 어깨를 잡아 돌린 순간 꾹 감고 있던 눈가를 비집고 눈물이 흘렀다.
“울어요?”
“씨발…….”
“선배, 칼 놔 보세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뜨자 정우진이 내 손에 들린 칼을 가져가며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보였다. 싱크대 쪽으로 가서 물을 틀어 눈을 씻으려고 했는데 손을 제대로 씻지 않고 눈을 만져서 그런지 다시 눈이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느꼈던 건 고통도 아니었다. 진짜 쌍욕이 나오는 걸 막을 수 없을 만큼 눈이 따가워서 잠깐 싱크대에 팔을 짚고 있자 정우진이 애처럼 내 얼굴을 씻겨 줬다.
그 뒤로도 눈이 계속 따가워서 줄줄 눈물을 흘리다가 결국 양파는 두 개만 쓰기로 했다.
냉장고에 닭 안심이 있어서 그걸 좀 넣기로 하고 당근도 조금 있어서 같이 썰었다. 물에 넣고 같이 끓이다가 고형 카레를 넣자 금방 카레가 완성됐다.
이번엔 물 조절도 잘됐는지 국처럼 되진 않았다. 넓은 그릇에 밥과 카레를 같이 담고 식탁 위에 놓자 정우진이 내게 물었다.
“선배, 혹시 미안해서 카레 해 주는 거예요?”
맞는 말이긴 한데 설마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다. 의자에 앉으려다가 잠깐 멈칫하자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전화 안 받은 거 미안해서?”
“그것도 그렇고…….”
전화도 전화지만 어쩐지 날 찾아 돌아다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 그런 것도 있었다. 내가 말끝을 흐리자 정우진이 애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양손으로 턱을 괴고 날 쳐다봤다.
뒷말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습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정우진은 분명 변했다. 아니, 변했다기보다는 여유가 생겼다는 표현이 맞았다.
여유가 없었다면 내가 갑자기 약속이 생겼다는 말을 그냥 듣고 넘겼을 리가 없었다. 술을 마시고 내리는 비를 다 맞고 집에 온 걸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도 않았을 거다.
정우진은 변한 게 없지만 아주 조금의 인내심과 여유가 생겼고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나도 예전보다는 좀 더 편하게 외출할 수 있었다.
이것도 만약 며칠 연달아 그러면 아주 조금 생긴 인내심과 여유가 도로 사라질 게 뻔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나는 정우진이 참을 수 있게 나름대로 고심해서 일정을 짜고 한 번 나갔다 오면 그만큼 닳았을 인내심과 여유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웬만해선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끝까지 몰린 정우진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도 있지만, 그 조금의 여유가 분명 영향을 끼칠 거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내가 집에 없어도 정우진은 전원이 꺼진 로봇처럼 굴진 않을 거라는 그런 믿음 같은 거였다.
“어플이나 뭐 그런 거 그냥…….”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의자에 앉으며 말하는데 정우진이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내 이마를 덮었다.
“안 아프다니까. 화난 것도 아니고.”
“밥 먹고 검사라도 받으러 가 봐요. 선배가 의사도 아니고 아픈지 안 아픈지 어떻게 알아요? 자꾸 멍해지고 표정도 안 좋고…….”
조금 전엔 그렇게 반짝거리면서 웃고 있더니 하얀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아까 웃은 것도 진짜 좋아서 웃은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속 멍하게 있어서 일부러 그랬나 싶기도 했다.
“아픈 것도 아니고 화난 것도 아니면 왜 그래요? 나한테 실망했어요?”
실망은 갑자기 무슨 실망?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했다.
“매번 그랬던 건 정말 아니고 못 찾았던 적도 많았어요. 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정말 얼굴만 보고…….”
얼굴을 보든 말든 그런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계속 괜찮다고 하기도 그렇고,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라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화난 거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고 실망도 안 했어. 근데 기분이 안 좋아.”
“…….”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숙였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숙인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게 뻔했다.
손가락 끝으로 식탁을 두드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정리가 되질 않아서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사실 내가 기분이 안 좋은 이유도 정확히 몰랐다.
“야, 그냥 뭐……. 위치 추적 되는 어플이나 그런 거 깔래?”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빨갛게 변한 눈가를 보면서 급하게 말을 이었다.
“굳이 어플이 아니라도 그냥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뭐, 그런 거…….”
“잘못했어요. 이제 안 그럴게요. 맹세할 수 있어요.”
검은 눈동자가 조금씩 젖어 가고 있었다.
“아니, 네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면 너도 그렇게 돌아다닐 필요 없잖아.”
풀이 죽어 있던 정우진이 젖은 눈으로 날 쳐다봤다. 가만히 날 보기만 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무슨 상관이냐니? 내가 뭐 말을 잘못했나? 아니면 위치 추적만으로는 믿을 수가 없다는 소린가? 멀뚱멀뚱 정우진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면 너도 굳이 와서 확인 안 해도 좀 덜 불안할 거 아니야.”
“불안이요?”
“……불안해서 나 찾아 싸돌아다닌 거 아니야?”
정우진은 여전히 발갛게 젖어 있는 눈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닌데요.”
“그럼 왜 그랬는데?”
황당한 얼굴로 묻자 정우진이 예상치도 못한 대답을 했다.
“보고 싶어서요.”
“뭐?”
“왜 그렇게 놀라요? 보고 싶으니까 그랬죠.”
“…….”
보고 싶어서 그랬다니? 정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대답이었다. 나는 당연히 정우진이 불안해서 그런 줄 알았다. 평소에도 내가 나가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걸 싫어하니까 당연히 그 불안의 연장선일 줄 알았는데 설마 보고 싶어서 그랬다는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제가 선배 보고 싶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오히려 내가 놀란 게 놀랍다는 듯 정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걸 보며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외박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집에 오면 보잖아.”
“네.”
“근데 뭐 하러 그래? 그러다 못 만나면 헛수고잖아.”
정우진 말이 사실이라면 날 찾은 것보다 못 찾은 날이 훨씬 더 많다고 했었다. 그런 헛수고를 도대체 왜 하는지 몰라서 묻자 정우진이 또 엉뚱한 말을 했다.
“그건 괜찮아요. 어차피 집에 오면 볼 수 있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조금 전에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하는 정우진을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 우리가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정우진도 나도 서로 말을 하면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그러냐고. 집에 오면 볼 수 있는데.”
“보고 싶으니까요.”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하는 정우진을 보며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
“…….”
갑자기 가슴께가 조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까보단 덜했지만 정우진은 여전히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심장이 멈춘 것 같기도 했고, 미친 것처럼 날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멀거니 정우진을 보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왜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건지.
나는 정우진의 좁은 세상을 억지로 넓히고 싶은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세상의 상식이라면 그래야 할 것들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불안해해도 좋고 날 믿지 못해도 좋았다. 정우진 안의 세상이 좁든 넓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다만 그 작고 협소한 세상이 삭막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보고 싶어서 그런 거면…….”
“…….”
“어쩔 수 없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깜짝 놀라는 정우진을 보며 뒤늦게 정신 차렸다. 아니,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내 말에 정우진이 조금 들뜬 눈으로 내게 물었다.
“그럼 계속 그렇게 해도 돼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보고 싶어서 그랬든 아니든 그런 거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던 게 아니라…….”
내가 왜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건지 어렴풋하게라도 알게 된 건 좋은 일이었지만, 이걸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있는 그대로 말을 하자니 왠지 낯이 뜨거워질 것 같았고,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려니 정우진이 혼자 무슨 오해를 할지 몰라서 그것도 싫었다.
“나 찾아다니지 말고 다른 거 하면 안 되냐, 그냥?”
“다른 거요?”
“진짜 보고 싶어서 죽을 거 같고 그러면 그냥 보러 와. 그건 네 마음대로 해도 되는데 그러고 넌 또 집에 갈 거 아니야. 그럼 그때 다른 걸 하라고.”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두서없이 내뱉었더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주절주절 떠들고 있는데 정우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뭘 해요?”
“그냥……. 네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거나 그런 거 있잖아. 그냥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지 말고.”
“평소에 하고 싶었던 거 하려면 선배가 있어야 돼요.”
굳이 그게 뭔지 말하려는 정우진의 입을 막고 되는대로 내뱉었다.
“책 읽거나 그런 거.”
“책을 갑자기 왜 봐요? 뭐 하러?”
그러니까……. 나도 안 보는 책을 정우진한테 보라고 할 수는 없는 건데. 그래도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어서 숟가락을 들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보고 나한테 말해 주면 되잖아.”
“보고 싶은 책이라도 있어요?”
“아니……. 네가 뭐 하러 보냐고 하니까 하는 말 아니야. 그냥 핸드폰만 보고 있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사이 조금 식은 카레를 대충 비비다가 갑자기 든 생각에 퍼뜩 고개를 들어 물었다.
“너 어제 나 나갔을 때 저녁 먹었어?”
“아니요.”
“그럼 그 전에 나갔을 때는?”
“미숫가루?”
“그게 밥이냐?”
황당한 얼굴로 묻자 정우진이 갑자기 딴소리를 했다.
“근데 선배, 카레 한 번밖에 안 끓여 봤다면서 왜 이렇게 잘했어요?”
“그게 밥이냐고.”
“식사 대용이긴 하잖아요…….”
헛소리하는 걸 보며 인상을 쓰자 정우진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었다.
“너 평소에 나 나갔을 때 뭐 먹었는지 말해 봐.”
“아까 말했잖아요.”
“미숫가루만 먹었어? 맨날?”
“아니요, 밥도 먹었어요. 그냥 안 먹은 날도 있고…….”
“무슨 밥?”
그래도 밥도 먹었다는 말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잠시 망설이던 정우진이 작게 말했다.
“그냥 밥이요.”
“그러니까 밥 뭐 먹었냐고.”
“밥…….”
“뭐?”
말꼬리를 흐리는 걸 멀뚱멀뚱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냥 쌩 밥만 퍼먹었다고?”
“물도 먹었어요.”
“미친놈인가, 진짜.”
그게 무슨 밥이야, 씨발…….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서 식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짚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진이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내게 물었다.
“그럼 계속 해도 돼요?”
“뭘?”
“선배 보러 가는 거요.”
“…….”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걸 다른 사람이 본다면 우리가 당연히 따로 사는 줄 알겠지? 이러고 있는데 누가 같이 사는 줄 알까. 몇 날 며칠 외박을 하거나 한 명은 서울에 있고, 한 명은 부산에 있는 줄 알 거다.
한숨을 내쉬고 똑바로 앉으며 말했다.
“네가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대신 나 어디에 있는지 보고 찾아와. 혼자 무작정 싸돌아다니지 말고.”
“진짜 어플 깔아도 돼요?”
“그래…….”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제야 알게 돼서 다행이었다.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훨씬 좋았겠지만.
“오늘 내 생일인가? 갑자기 왜 그래요?”
좋아하며 묻는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착잡해졌다. 정우진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그냥 진즉에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이젠 뭐가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거고 상식 밖의 행동인지 잘 구분이 안 됐다.
“사실 오늘 한숨도 못 잤어요.”
“왜?”
“몰래 보고 온 거 들킬까 봐요.”
“…….”
사실 이것도 나는 정우진이 내가 나가는 게 싫어서 그런 건 줄 알았다. 잔뜩 스트레스 받아서 잘 못 잤던 건 줄 알았는데. 이래서 사람은 대화를 해야 하나 보다.
“그렇게 못 잘 정도로 싫었으면 그냥 말하지 말지, 뭐 하러 말했어.”
나야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자지도 못할 정도로 불안했으면서 그렇게 쉽게 실토한 것도 특이했다.
“거짓말하다가 나중에 들키면 어떡해요.”
“어차피 나한테 말 안 하고 있었잖아. 몇 달 동안.”
“그건 그냥 말 안 한 거지, 거짓말은 아니잖아요.”
“…….”
정우진은 이렇게 자기만의 특이한 기준이 있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하니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밥 먹고 좀 자.”
“선배는 뭐 할 거예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딱히 할 건 없었다. 매일 그랬다. 그냥 대부분의 시간을 정우진이랑 같이 생활하다 보니 하는 일도 거기서 거기였다. 그게 생산적인 활동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까놓고 말해서 우리는 그냥 돈 많은 백수들이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서 느긋하게 밥을 먹고 바람이나 쐬고 햇빛도 보고 가끔 문화 활동을 하고……. 그냥 그러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정우진이 일을 할 땐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일을 관두고 둘 다 집에만 있게 된 뒤로 더욱 심해졌다. 믿을 수 없는 건 거의 한 해를 이러고 살았는데도 딱히 지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집에만 있어서 좀이 쑤시거나 일을 안 해서 불안하다거나, 매일 반복되는 평안한 삶이 지루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사는 게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오늘 깨달은 게 있었다. 둘이 있을 땐 괜찮았지만 둘 중 한 명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 그게 문제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닫고 시선을 올렸다. 정우진이 들고 있던 숟가락까지 내려놓은 채 턱을 괴고 빤히 날 쳐다보고 있었다.
“선배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나 있는 거 까먹은 거 아니에요?”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로 투덜거리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야, 너는 어렸을 때 꿈이 뭐였냐?”
“요즘 그거 진짜 자주 물어보는 거 알아요?”
그러고 보니 처음이 아니긴 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물어볼 때마다 이상한 소리만 하고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준 적이 없어서 정작 대답을 들은 적은 없었다.
“네가 똑바로 대답한 적이 없으니까 그렇지.”
“대답을 안 했다니요? 물어볼 때마다 얼마나 성실하게 대답했는데.”
“좋은 남편이 네 꿈이었냐?”
황당하다는 얼굴로 묻자 정우진이 그게 뭐 문제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니……. 그런 거 말고 좀…….”
한숨을 내쉬며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진지한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그게 꿈이었다고?”
“네, 진짜 꿈이었어요. 장래 희망. 커서 되고 싶은 거. 인생의 최종 목표.”
“…….”
“정확하게는 좋은 남편이 아니라 선배랑 같이 사는 거였어요.”
진짜 그런 게 꿈이었다고? 어렸을 때부터? 황당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넌 그럼 지금 네 인생의 최종 목표를 이룬 거야?”
“네.”
“…….”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오는 대답에 다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황당했지만 한편으로는 정우진이 아무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인생의 최종 목표를 이뤘으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나도 인생의 최종 목표를 이룬 셈이었다.
나는 안정된 삶을 원했다. 그게 나에겐 집과 가족이었다.
“그건 근데 왜 자꾸 물어봐요?”
“우린 좀 새로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때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번뜩였다.
“새로운 목표가 필요해.”
“네?”
갑작스러운 내 말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든 말든 나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말은 목표라고 했지만, 굳이 거창하게 목표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 * *
나는 싱크대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설거지를 하는 정우진을 보며 말했다.
“하고 싶은 거나 해 보고 싶었던 거나, 뭐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거 없어?”
분명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우진은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다. 옆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혹시 나랑 같이 있는 거 싫어요?”
설거지를 다 한 정우진이 개소리를 하며 나를 쳐다봤다. 욕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핸드 타월로 젖은 손을 닦아 주며 말했다.
“너 혼자 뭐 하라는 거 아니고, 나 혼자 뭐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보는 거야. 당장 뭐 하러 나가라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걸 왜 물어봐요? 저 일 그만둔 지 1년도 안 됐어요. 이제 좀 같이 있…….”
“있어, 없어!”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구구절절 헛소리만 늘어놓는 정우진을 보며 결국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정우진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없어요.”
“그냥 그거 물어본 거잖아. 있냐, 없냐. 어?”
“…….”
“누가 너보고 일하러 나가래? 너랑 같이 있기 싫대? 넌 제발 내가 뭘 물어보면 혼자 이상한 상상 좀 하지 마.”
하마터면 들고 있던 핸드 타월을 던질 뻔했다. 심호흡을 하며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물기 없이 잘 닦인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나도 없어.”
“네?”
“나도 그런 거 없다고.”
거실을 가로질러 방에 도착했다. 침대 앞에 서서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야, 내가 어렸을 때 돈 엄청 많이 벌어서 집 사는 게 꿈이었다는 소리 한 적 있지?”
“네.”
“그게 집을 사는 게 꿈이 아니라 안정적인 삶? 최종적으로 바랐던 건 그거였어. 근데 어렸을 때 생각해 보니까 일단 집이 있어야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거 같은 거야. 그래서 집을 사는 게 꿈이었어.”
밤새도록 한숨도 못 잔 정우진을 침대에 눕히고 나도 그 옆에 따라 누우며 말했다.
“근데 지금 나한테 집이 생겼잖아. 너도 나랑 같이 살고 있고.”
“네.”
“그럼 우린 서로 목표를 이룬 거니까 새로운 게 필요할 거 아니야.”
내 말에 잠시 생각하던 정우진이 날 보며 말했다.
“새로운 목표 생겼어요.”
“뭐?”
벌써? 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술 끊는 거요.”
“…….”
그 말에 맥이 빠져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말했다.
“술 끊는 사람은 난데, 그게 왜 네 목표야?”
“제 인생의 목표예요.”
“아니, 그걸 왜 네 목표로 정하냐고. 잡아도 내가 잡아야지, 술 끊는 건 난데!”
“술 끊을 거예요?”
나도 모르게 끊을 거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영영 이루지 못할 목표를 세울 뻔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질 않자 정우진이 불퉁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도대체 술을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거예요?”
정우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맛은 무슨 맛이야, 그냥 먹는 거지.”
“맛도 없는데 왜 마셔요?”
“그냥……. 오랜만에 친구 만나면 마시는 거지. 얘기하면서.”
“술 없으면 얘기도 못 해요?”
“…….”
너무 맞는 말이라 말문이 막혔다. 대꾸할 말이 떠오르질 않아서 그냥 되는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술 마시면 평소 못 했던 말 같은 것도 할 수 있잖아.”
“무슨 말이요?”
“그냥……. 만약 뭐 고마운 일 있거나, 축하할 일이나…….”
할 말이 없어서 눈치를 보며 말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야, 너도 술 마시고 한번 다 말해 봐.”
내 말에 정우진이 미간을 구겼다.
“갑자기 뭘 말해요?”
“그냥 평소에 못 했던 말이나……. 하고 싶었던 말이나 그런 거 있잖아. 말하기 힘들었던 거나.”
“…….”
내 말에 정우진은 입을 다물었다. 마치 그걸 그냥 말하면 되지, 왜 굳이 술을 마시고 하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잠깐 날 보던 정우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랑해요.”
“아니, 그건 평소에도 잘 하는 거잖아.”
“그럼 무슨 말을 해요?”
처음에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막 내지른 말이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꽤 좋은 생각 같았다.
정우진도 사람인데 하루 24시간 내도록 내가 좋을 수만은 없을 거다. 평소에 서운했던 거나 고쳐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라든가 그런 게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런 거 말고 평소에 못 했던 말들 있잖아.”
“그런 거 없어요.”
생각도 해 보지 않고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말했다.
“뭐 엄청 대단한 얘기 같은 거 아니라도…….”
말을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정우진이 말이 많은 것 같지만 하는 말에 비해 알맹이는 별로 없었다. 항상 신경을 쓴다고 하긴 하지만 내가 독심술사도 아니고 매번 정우진의 마음을 예측하고 읽을 수는 없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싫은 일이 있어도 정우진은 그냥 참고 넘겼다. 그러다가 혼자 걷잡을 수 없이 터져서 폭발하면 했지, 절대 그 과정을 내게 얘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굳이 그런 심각한 일이 아니라도 좋았다. 예를 들면,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다든가, 먹고 싶은 게 있다든가, 그런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항상 궁금했다.
“야, 술 마시고 안 마시고를 떠나서 넌 아예 나한테 말을 안 하잖아.”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엄청 대단한 게 아니라……. 그냥 뭐 먹고 싶다든가 그런 거.”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면 나한테 맨날 선배가 먹고 싶은 거 먹자 그러고, 감기라도 걸리는 날엔 누가 봐도 아픈 사람인데 괜찮다는 소리만 했다.
생각하다 보니까 속이 갑갑했다. 뭐 먹자고 하면 내가 감히 그딴 걸 먹냐고 면박을 준 적이 있냐, 아프다고 하면 근성이 없다고 욕을 퍼부은 적이 있냐?
가끔 보면 정우진은 나랑 사귀고 있는 게 아니라 날 모시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뭔가 생각하는 것 같던 정우진이 이상한 헛소리를 했다.
“그럼 만약 뭐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선배는 그거 먹기 싫으면 어떡해요?”
그 말에 헛숨을 내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짜 먹기 싫으면 안 먹겠다고 말하겠지. 그리고 뭐 먹을지 서로 다시 얘기해 보면 되잖아. 그리고 막말로 내가 진짜 엄청 먹기 싫어도 그거 한 번 먹는다고 죽겠냐?”
“…….”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대화다운 대화를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무슨 말을 하거나 결정을 하면 정우진이 거기에 토를 다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항상 내 결정을 기다리고 내 말을 듣는 건 정우진이었다.
“선배, 근데 성격 차이로 헤어지는 사람들이 많대요.”
그래서 아예 성격 차이는 날 수도 없게 자기가 다 맞추겠다는 소리인가 싶어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몇 번이나 헛숨을 쉬면서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야, 네가 진짜 성격 차이를 걱정했으면…….”
“……?”
씨발……. 성격 차이 걱정한 사람이 사랑한다는 소리를 납치하고 감금해서 하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차분히 말했다.
“우리는 이미 그런……. 성격 차이를 뛰어넘었어.”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난 이미 네 성격에 대한……. 그런 병적인 것들을 초월했다고…….”
말을 하면서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진짜 올해 들어 제일 황당한 말이었다. 다른 사람이랑 눈 마주치는 것도 싫어서 개지랄을 하는 주제에 뭐? 성격 차이 때문에 혹시 헤어지기라도 할까 봐 네가 오늘 뭘 먹고 싶은지 말을 안 하는 거라고?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넌 진짜 그런 게 걱정이 됐으면 날 밖에 못 나가게 하는 것부터 좀 고쳐야 되지 않겠니?”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자 정우진이 정색을 했다.
“그거랑 이건 다르죠. 그리고 제가 언제 못 나가게 했어요?”
“거의 못 나가게 하는 거나 다름없지. 내가 만약 걷다가 모르는 사람이랑 웃으면서 떠들었다고 생각해 봐. 한 한 달은 문에 자물쇠 달고 살아야 되지 않을까, 우진아?”
그냥 예를 들었을 뿐인데도 정우진은 마치 내가 내일 당장 다른 사람이랑 웃고 떠들 것이라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모르는 사람이랑 웃고 떠들 이유가 어디에 있어요?”
“…….”
“선배가 싫어해서 아는 사람이랑 친구들한테 그러는 건 그냥 참는데, 모르는 사람이랑 그러면 진짜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
정우진은 선전 포고라도 하듯 눈을 치켜뜨고 사납게 말했다. 정말 지랄도 이런 지랄이 없었다. 말문이 막혀서 멀뚱멀뚱 정우진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네가 나한테 내일 탕수육 먹고 싶으니까 다른 거 먹을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말하는 게 내 기분을 더 상하게 할 거라 이 소리지? 모르는 사람 만나서 웃고 떠들면 집에 가둘 거라고 말하는 거보다?”
“가둔다고는 안 했잖아요…….”
자기도 좀 이상하다는 걸 느끼긴 했는지 정우진이 작은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렸다.
“야, 솔직히 말해서…….”
욕을 백 바가지쯤 퍼붓고 싶었지만 또 언제 이런 대화를 할 날이 올까 싶어 마음을 추슬렀다.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 봐. 그냥 걷다가 모르는 사람이랑 눈 좀 마주쳤다고 3박 4일을 울면서 지랄하고 학교 후배 만나서 얘기 좀 했다고 칼 들고 나왔잖아. 그런 짓까지 해 놓고 뭘 새삼스럽게 성격 차이 같은 소릴 하냐고.”
씨발,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나오려는 욕을 삼키고 있는데 정우진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근데 그건 선배가 잘못한 거잖아요…….”
“…….”
“왜 다른 사람이랑 그렇게 다정하게…….”
“진짜 우리 성격이 너무 안 맞는 거 같다.”
불퉁한 표정으로 말하던 정우진이 내 말에 숨을 삼켰다. 놀란 얼굴로 날 보던 표정이 당장에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걸 보니까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진짜……. 존나 안 맞아. 씨발…….”
마음 같아서는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다. 그럼 답답한 속이 좀 뚫리지 않을까? 높은 산에서 빽빽 소리 지르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다른 건 괜찮아요. 싫은데 억지로 하는 거 정말 하나도 없어요. 다 좋아서 하는 거란 말이에요.”
“…….”
“근데 선배가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건 진짜 못 참겠어요. 상상만 해도 너무 힘들어요. 다 죽여 버리고 싶어요.”
“…….”
죽인다는 소리는 갑자기 왜 하는데…….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물기에 젖었다. 눈을 꾹 감았다 뜰 때마다 속눈썹이 아래쪽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발갛게 젖은 눈가를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울렸네, 또 울렸어, 씨발…….
“진짜 싫어요. 사실 선배가 친구 만나는 것도 싫어요.”
“…….”
묻지도 않은, 밑도 끝도 없는 고백에 황당한 표정을 짓자 정우진은 이때다 싶었는지 줄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선배는 왜 그렇게 친구가 많아요? 그리고 왜 친구 만나면 술만 마셔요? 선배 친구들은 왜 결혼도 안 해요? 일은 안 해요? 취업난이라는데 왜 굳이 한국에 붙어 있어요, 외국 나가서 일자리 좀 구해 보지…….”
정우진이 우는 소리를 내며 헛소리를 했다. 가만히 뒀다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끝도 없이 할 게 뻔해서 등을 토닥거려 주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난 그냥 꼭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이사 갈까요?”
“아니……. 야, 씨발. 진짜 좀 정우진아,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생각을 좀 해 봐.”
내 말에 정우진이 젖은 눈을 깜빡이며 날 보다가 말했다.
“뭐 먹고 싶다거나 그런 적이 별로 없어서 그냥 선배가 맛있게 잘 먹는 거 보는 게 더 좋아요.”
“꼭 먹는 게 아니라도……. 그냥 나한테 너무 안 맞춰 줘도 괜찮다는 소리였어. 그리고 컨디션 안 좋을 때도 있을 거 아니야. 근데 넌 나한테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무슨 말을 하려던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뭔가 생각하듯 잠시 고민하더니 내게 말했다.
“그냥……. 당장 죽을 것처럼 아프거나 그런 것도 아니니까 그냥 말 안 했던 거예요.”
“그럼 넌 죽을 것처럼 아파야 나 아프다고 말할 거야?”
황당하다는 얼굴로 묻자 정우진이 눈알을 굴렸다. 자기가 또 뭘 잘못 말했나 싶은 표정이었다. 황당하다는 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 하는 정우진을 보다가 물었다.
“너 누구한테 아프단 소리 해 본 적 없어?”
“네.”
“뭐? 아니, 한 번은 있을 거 아니야.”
“…….”
내 말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뭔가 생각이 나기라도 했는지, 아니면 말하기가 싫은 건지 기다려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왜 갑자기 입을 다문 건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쉽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는 정우진을 보며 말했다.
“이럴 때 술을 마시는 거야.”
정우진이 의아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만약 네가 진짜 말을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거면 그냥 안 하면 되는데, 말하기 싫은 건 아닌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있잖아.”
“…….”
“그럴 때 술을 마시면 좀 쉽게 말할 수 있다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정우진이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걸 보며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저었다.
“네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
“그거 그냥 술주정뱅이들이 하는 소리 아니에요?”
“죽을래? 씨발, 내가 술주정뱅이라는 거야?”
“…….”
아니라는 소리는 또 안 하는 정우진을 보며 황당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매일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 한 번씩 취해서 들어오는 걸 술주정뱅이 취급해?
“술 마시면 왜 말하는 게 더 쉬워져요?”
내 시선을 피하며 묻는 정우진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몰라, 나도 말로 설명은 못 하겠는데 술을 마시면……. 약간 좀 뭐라고 해야 되지? 뇌가 풀리는 느낌이 나거든?”
“……그 정도면 말하는 게 쉬워지는 게 아니라 그냥 할 말 못 할 말 구분을 못 하는 거 아니에요?”
아까부터 자꾸 맞는 말만 해서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더 대꾸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아예 말을 돌려 버렸다.
“아무튼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워. 나도 처음엔 안 그랬는데 한 번 하니까 그다음부터는…….”
아무 생각 없이 말하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내용도 그렇고 뭔가 착한 애를 나쁜 길로 이끄는 양아치 같은 말투였다.
“아니……. 그러니까 술 안 마시는 게 좋아. 마실 거면 적당히 마시는 게 좋고……. 너는 원래 안 마시니까 그냥 아예 안 먹는 게 낫겠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서 말하자 정우진이 알 수 없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마치 관찰하는 듯한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물었다.
“처음이 언제였는데요?”
“무슨 처음?”
“선배가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웠다면서요. 술 마시고 누구한테 그렇게 못 할 말을 했는데요?”
그 말에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한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친구한테 그랬어요?”
“아니, 친구는 아니고…….”
“그럼 누구요? 남자였어요, 여자였어요?”
“……?”
갑자기 여기서 남자 여자가 왜 나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는 정우진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 어렸을 때 같이 일하던 사장한테 술 먹고 욕 엄청 했거든.”
“사장이요?”
“아르바이트할 때.”
내 말에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요? 그 새끼가 막 구박했어요?”
차라리 일 못한다고 구박당한 거면 다행이지. 그랬으면 내가 술 마시고 지랄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잠깐 예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퇴근 시간 지났는데 퇴근을 안 시켜 주잖아. 한두 번도 아니고 10, 20분도 아니고 막 한 시간씩은 더 시켰어. 자기 뭐, 집안일 있다 그러고 갑자기 아프다 그러고……. 그러면서 추가 수당도 안 주고. 완전 개새끼 아니냐?”
아, 지금 같았으면 그 새끼 그거 노동청에 신고하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뜬금없이 엉뚱한 걸 물었다.
“거기가 어딘데요?”
“갑자기 그건 왜? 엄청 오래됐어, 나 스물한두 살 때였으니까.”
“이름 기억나요?”
“무슨 이름? 가게 이름?”
“아니, 그 사장이요.”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닌데 어째서인지 가게 이름도, 사장 이름 석 자도 또렷하게 기억났다. 하지만 말해 봤자 왠지 좋을 건 없을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정우진이 가만히 날 보다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뭐가?”
“욕하고 그 뒤에 어떻게 됐어요?”
아, 그러고 보니까 이 얘기 중이었지. 근데 그 뒷얘기는 안 들어도 뻔한 거 아닌가?
“잘렸지.”
“네?”
“잘렸지, 당연히.”
“…….”
내 말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분명 들었을 텐데 뭔가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는데 정우진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근데 저보고 그런 말을 하라고요?”
“어?”
“선배는 말하고 잘렸다면서요. 근데 나보고 술 마시고 선배한테 평소에 못 했던 말을 해서 헤어지잔 소리라도 들으라는 거예요?”
“…….”
아, 말이 그렇게 되나. 뒤늦게 잘못된 예시를 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원래도 잘 말을 안 하는데 이러다가 더 말을 안 할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야, 넌 도대체 날 얼마나 개쓰레기 같은 새끼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그런 말을 해? 내가 헤어지자고 하겠냐? 어?”
“선배는 그래서 잘렸다면서요.”
“그건 그런데……. 그때 난 직원이었고 그 사람은 사장이었잖아. 근데 우린 서로 동등한 관계니까, 그런 건 아니겠지…….”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나도 내가 지금 이상한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헛소리하는 정우진의 심정이 이랬을까 싶었다.
“야, 그러게 무슨 목표를 내가 술 끊는 걸로 정해. 네가 술 얘길 하니까 내가 이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
“그리고 어제는 진짜 별로 안 마셨어.”
“선배가 언제 많이 마신 적 있어요?”
웃으며 묻는 정우진을 보니 갑자기 억울해졌다. 어제는 진짜! 진짜 별로 안 마셨는데.
갑자기 손을 뻗어 날 안으려는 정우진을 밀어내고 말했다.
“야, 너 어제는 네가 언제 취한 적은 있냐고 그러질 않나, 오늘은 술 많이 마신 적이 있기는 하냐고? 왜, 아주 그냥 네가 언제는 사람 새끼였냐고 물어보지.”
“제가 언제 너라고 그랬어요?”
정우진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아까 울어서 그런지 아직도 눈가가 붉었다. 그걸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야, 내 이름 불러 봐.”
“네? 갑자기요?”
뜬금없는 내 말에 정우진이 눈을 크게 떴다. 또 술 얘기를 꺼낼까 봐 나는 그냥 미친 척을 하고 계속 우겼다.
“너라고도 하는데 이름은 왜 못 불러?”
“그런 적 없다니까요?”
“불러 봐.”
“싫어요.”
아예 몸까지 뒤로 빼는 정우진을 보며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름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한결같은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야, 너는 싫다는 소리밖에 못 하냐? 이래도 싫어요, 저래도 싫어, 도대체 네가 좋은 게 뭔데?”
“선배요.”
뻔뻔하게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정색했다.
“그럼 내가 얼마나 좋은지 이름 불러서 증명해 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빨리.”
“…….”
정우진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야.”
“…….”
“야, 정우진.”
입을 다물고 묵언 시위를 하던 정우진이 별안간 딴소리를 했다.
“선배는 그래서 목표가 뭔데요?”
“너 왜 갑자기 말을 돌려?”
“선배도 목표 이뤘다면서요. 이제 목표가 뭐예요?”
“네가 내 이름 부르는 거.”
내 말에 정우진이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그런 목표가 어디 있어요?”
“넌 내가 술 끊는 게 네 인생 목표라며. 난 네가 내 이름 부르는 게 내 인생 목표야.”
“…….”
불만스러운 눈으로 가만히 날 보던 정우진이 꼬물거리면서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갑자기 귀여운 척을 하는 걸 보며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이름 불러 주면 말해 줄게.”
“…….”
그래도 정우진은 말을 안 했다. 조용한 이불 덩어리를 보며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 씨발……. 이래서 내가 술을 못 끊어…….”
“이거랑 술이 무슨 상관이에요?”
내 말에 정우진이 머리끝까지 쓰고 있던 이불을 내리며 물었다.
“너 때문에 내가 술을 못 끊는 거야.”
“언제 끊은 적은 있었어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되묻는 정우진을 보며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야, 너는 말을 이렇게 따박따박 잘하면서 왜 이름 좀 불러 보라고 하면 입을 다무냐?”
“…….”
“또 봐, 또.”
다시 입을 다물고 이불을 덮어쓸 줄 알았는데 잠시 날 보던 정우진이 물었다.
“먼저 말해 주세요.”
“뭘?”
“선배 목표요.”
그놈의 이름이 뭐라고……. 빤히 날 쳐다보고 있는 정우진을 보며 한숨을 쉬다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딱 이거라고 정해 둔 건 없었다. 하지만 또 대충 말하면 정우진이 이불을 뒤집어쓸 것 같아서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말했다.
“인생 목표는 아니고 그냥 올해 목표는 있어.”
“뭔데요?”
“그 섬에 가는 거.”
“…….”
내 말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음기가 섞여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당황한 것처럼 눈을 굴리던 정우진이 날 보지도 않고 다른 곳을 보며 물었다.
“거긴 왜요?”
딱히 큰 이유는 없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다시 가 보고 싶었는데 목표를 정하라고 하니까 그냥 올해 안에 가기로 방금 결정한 거다.
“가서 뭐 하려고요?”
못 할 말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가서 생각해 봐야지.”
“…….”
“그래서 이름 언제 부를 건데?
내 말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정우진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내 눈을 빤히 보다가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선배.”
“…….”
날 부른 정우진이 숨을 삼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개구리 얘기 했던 거 생각나요?”
“뭐?”
“개구리 얘기랑 옷 갈아입는다는 소리 열 번도 더 했어요.”
근데 뭐 어쩌라고. 갑자기 개구리는 무슨 개구리야? 황당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갑자기 든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열 번이야, 또. 열 번은 안 했어.”
“선배는 왜 술 마시면 했던 말을 계속해요?”
“그걸 알면 내가 그러겠냐?”
나도 알고 싶었다. 도대체 술을 마시면 왜 그렇게 했던 말만 계속하는 건지. 정우진은 내 말에 잠깐 웃다가 금방 표정이 굳었다. 이제 준비가 끝나기라도 한 건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정우진이 날 보며 말했다.
“서주야.”
“…….”
잔뜩 긴장해서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특이한 새끼였다. 도대체 이름 부르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매번 이러는지 모르겠다.
할 거 못 할 거 다 하고,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에 그까짓 이름 부르는 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다시 한번 더 부르려는 듯 시도하던 정우진은 결국 두 번째는 뱉지 못하고 슬금슬금 내 눈을 피하더니 이불을 뒤집어썼다.
씨발, 또 귀여운 척이야.
* * *
백수 생활 중인 우리가 딱히 일정을 짜고 시간을 맞춰서 떠날 이유는 없었다. 짤 일정도 없었고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 당장 내일이라도 출발할 수 있었지만 그건 정우진이 반대를 해서 가을이 다 되어서야 갈 수 있었다.
“그럼 거긴 계속 빈집이었던 거야?”
“네.”
“그냥 나오기 전 그대로?”
그 뒤로 벌써 시간이 꽤 지났는데 집 상태는 괜찮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정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관리해 주시는 분들 계시긴 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아직도 팔지 않고 가지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내가 먼저 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영영 빈집이지 않았을까.
며칠이나 있을지 정하지도 않고 그냥 대충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그냥 아무 배나 타고 가면 되는데, 정우진이 요트까지 사는 바람에 일이 너무 커진 것 같았다.
처음에 당장 내일 가자는 걸 반대한 것도 이거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앞으로 자주 왔다 갔다 하려면 사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한데, 이런 걸 그냥 동네 슈퍼에서 과자 사듯 막 사도 되나? 있으면 물론 편하기야 하겠지만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과소비였다.
요트를 사긴 했지만 운전을 하는 건 또 따로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해서 섬까지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태워 줬다.
어릴 때 배를 탔을 때 멀미를 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따로 멀미는 하지 않았다. 정우진은 약간 멀미를 하는 건지 표정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너 나 데리고 올 때도 그랬어?”
“뭐가요? 멀미요?”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땐 멀미가 아니라 누가 칼로 찔러도 몰랐을걸요.”
정우진은 이상한 소리를 태평하게도 했다.
“그땐 어떻게 왔는데? 그때도 배 타고 왔어?”
“네.”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배를 탄 기억은 전혀 없었다. 차 안에서 뭘 마시고 난 뒤로 잠들었던 거 같은데. 안아서 옮겼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작게 말했다.
“배에 차 싣고 왔어요.”
“배에? 무슨 배?”
“그냥 배…….”
“배도 샀냐, 너?”
내가 놀라서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뭐 전세라도 내고 왔나? 이 주제가 불편한지, 아니면 정말 멀미 때문인지 계속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아서 더 물을 수가 없었다.
난 이제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우진은 아닐 수도 있으니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근데 다시 생각해 보면 그때 정우진은 진짜 아주 작정을 했었던 거구나 싶었다. 보통 그냥 집을 구해도 외진 곳에 하지 않나? 어떻게 섬을 살 생각을 했지? 심각한 얼굴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도착했다.
오며 가며 집을 돌봐 주시던 분이 계셨던 터라 크게 챙길 짐은 없었다. 요트를 정박하고 내리자 낯익은 풍경이 보였다.
잠시 자리에서 멈춰 서서 주변을 살피는데 문득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내 뒤에서 마치 벌을 받고 있는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걸 가만히 보다가 손을 뻗자 정우진이 쪼르르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집에 먹을 거 있어?”
“네, 뭐 먹고 싶어요?”
“뭐가 있는데?”
“그냥 웬만한 건 다 있어요.”
별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이 계단을 밟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그땐 도망 다니느라 산길로만 다녀서 잘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꽤 정비가 잘되어 있었다.
오기 전에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우선 밥부터 먹기로 했다. 뭘 먹을까 하다가 대충 있는 반찬으로 먹기로 하고 계란말이만 하기로 했다. 달걀 세 개를 까서 휘젓고 프라이팬에 부었다.
젓가락으로 하려다가 실패한 적이 많아서 숟가락 두 개를 들고 적당히 익은 계란을 조금씩 접으려고 했지만 찢어지고 터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냥 대충 말아도 돼요.”
고전하는 내가 불쌍했던 건지 정우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게 계란말이냐? 계란 부침개지?”
“아니에요, 대충 말기만 하고 마지막에 모양만 잡으면 돼요.”
“마지막에?”
의심스러운 눈으로 정우진을 보다가 일단 시키는 대로 해 보기로 했다. 터지고 찢어지고 난리가 난 계란을 말면서 속으로는 조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정우진이 했던 말처럼 마지막에 프라이팬 끄트머리에 세워 두니 얼추 모양이 잡히기 시작했다.
“너도 이렇게 만들어?”
완벽하게 네모난 계란말이를 완성한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정우진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이렇게 한다고? 처음에 찢어지고 다 터져?”
“네.”
내 안의 정우진은 호텔 주방장급 요리사라 찢어진 계란말이 모양을 잡고 있는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정우진은 뭔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래도 다른 건 잘해요.”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변명하듯 하는 말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멀쩡한 소파와 침대는 버려둔 채 마룻바닥에 널브러졌다. 나는 귤껍질을 까고 있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너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어?”
과외도 했던 것 같은데 학원은 따로 안 다녔나? 의아한 얼굴로 묻자 정우진이 껍질을 다 깐 귤의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갑자기 그건 왜요?”
“학교 다닐 때 부활동은 뭐 했어?”
“안 했어요.”
“왜?”
“귀찮아서.”
공부는 분명 잘했던 거 같은데. 잠시 생각하다가 아, 하고 물었다.
“너 봉사 활동 같은 거 했지?”
내 말에 정우진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했어요.”
“안 했다고?”
“네, 근데 그런 건 왜 물어봐요?”
분명 꿈인지 뭔지 고등학생 정우진을 만났을 때 주말에 봉사 활동 해야 된다고 했던 거 같은데.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면 진짜 꿈이라 그냥 그랬던 건가.
“왜요?”
내가 아무 말도 하질 않자 정우진이 대답을 재촉했다. 그걸 보며 나는 다시 물었다.
“너 뭐 배우고 싶거나 그런 거 없어?”
“없어요. 왜 그러는데요?”
뭔가 불안했던 건지 아예 들고 있던 귤도 내려놓고 묻는 걸 보며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냥 뭐라도 해 보고 싶어서.”
더 정확히 말하면 정우진이 내가 없는 시간 동안 집에서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 이런 말을 하면 정우진은 ‘뭔가 할 수 있는 것’에 의문을 가지는 게 아니라 오로지 ‘내가 없는 시간 동안’이라는 말에 꽂혀서 난장을 피울 게 분명했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새로운 목표 같은 게 없잖아. 그러니까 뭐라도 정하는 게 낫지 않냐?”
“…….”
내 말에 정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낫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나도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다.
뭘 하든 처음 한두 달이야 그럭저럭 버티고 넘기겠지만, 실낱같은 인내심이 끊어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이후로는 우리가 지지고 볶고 개지랄을 떨었던 지난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끊임없이 괜찮다고 말하고 달래 줘도 근본적인 불안감은 항상 속에 불씨처럼 남아 있었다. 다만 수그러들었을 뿐이지 바람이 불면 금방 다시 불타오를 게 뻔했다.
나는 정우진의 그 고질적인 병이 고쳐질 거란 기대를 이미 버렸다. 물론 고쳐지면 좋기야 하겠지만 영영 이러고 살아야 한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냥 로또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맞으면 땡잡은 거고 안 맞으면 그냥 안 맞은 거고. 그렇다고 내가 로또 안 맞길 바라는 건 아니지 않은가? 당연히 안 맞는 것보다 맞는 게 훨씬 좋지만 안 맞는다고 해도 사는 데 크게 지장은 없었다.
정우진이 가진 병도 내겐 그랬다.
스트레스 받아 가며 서로 얼굴 붉히고 언성을 높여 가면서까지 그걸 고치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면 되는 거니까.
그리고 같이 몇 년 살다 보니까 나도 적응을 했는지 막 엄청나게 못 살 정도로 불편하고 짜증 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조금 불편하고 조금 짜증 나서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몇 년 더 살다 보면 아예 괜찮아지는 수준까지 오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오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정우진이 시체처럼 지내는 건 별개의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에게도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같이 생각해 보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마음에 드는 게 하나쯤은 있겠지.
“그리고요?”
“그리고?”
“그러고 나서 어떡해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의아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몰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나중에 네가 엄청 하고 싶은 거나 재미있는 거 생기면 말해. 나도 같이해 줄 테니까.”
혹시 혼자 하라고 할까 봐 이러는 건가 싶어 덧붙이자 정우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선배는 그게 재미없을 수도 있잖아요.”
분명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럼 그냥 혼자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뭐 그걸 직업 삼아서 혼자 멀리 출장 가서 해야 할 것도 아닌데. 누가 정우진 아니랄까 봐 별걸 다 걱정하고 있었다.
“그럼 하다가 때려치우고 너 하는 거 구경하면 되잖아.”
“그럼 제가 그걸 하는 의미가 있어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정우진이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혼자 뭐 다른 걸 한다는 생각을 아예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잠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말문이 막혔다.
나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또 다른 거 하면 되잖아. 뭐 하나 재미있으면 그거 좀 하다가 재미없어지면 또 다른 거 찾아보고…….”
“그러다 지치면 어떡해요?”
뭐가 지친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이런 대화를 해 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나랑 정우진이 서로 생각하는 게 많이 달라서 그런지 자꾸만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가 문득 정우진은 지금 현재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도, 도전하는 것도 무서운 건지 몰랐다.
정우진 입장에서는 계속 지속되고 있는 이 평범한 오늘을 얻기까지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것들을 시작하면 분명 좋은 일도 있겠지만 그만큼 충돌하는 날도 있을 거다. 평소에도 걱정이 많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불안해하는 성격으로 봤을 때 확실했다.
정우진은 그 알 수 없는 두려움을 겪느니 새로운 모든 걸 포기해 버린 거다.
나는 지금의 정우진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정우진 자체가 좋은 건데, 오늘이 아니라 내일의 정우진도 분명 내게는 사랑스러운 사람일 텐데.
“지치면 쉬면 되지.”
어쩌면 정우진이 이렇게 된 건 내 탓일지 몰랐다.
정우진은 어렸을 때 내가 말도 없이 갑자기 변해 버렸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들이 분명 있었는데 말도 하지 않고 그걸 차곡차곡 쌓아 놓다가 결국 터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에도 종종 내게 말했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거나 화가 나는 게 있으면 꼭 말해 달라고 아직도 그런 소릴 한다. 그럴 때마다 알겠다고 하지만 정우진은 그래도 혹시나 하고 항상 내 눈치를 살피고 내 행동과 말투를 주시했다.
“지치면 집에서 쉬거나 아니면 여기 와서 좀 쉬다가 괜찮아지면 또 다른 거 해 보고…….”
정우진이 지금의 자신과 평범한 오늘을 최대한 유지시키고 싶어 한다는 걸 불현듯 깨닫게 되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뭔가 새로운 걸 배우거나, 그로 인해 달라진다고 해도 내가 아는 정우진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닌데.
몇 년을 만났는데 이제야 이걸 알았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 덧붙였다.
“정말 싫으면 그냥 안 해도 돼.”
우리의 일상에서 최대한 벗어나지 않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다른 일도 찾아보면 분명 있을 거다. 우선 그런 것부터 천천히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한 말인데 정우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선배가 싫잖아요.”
“안 싫어.”
불안해 보이는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요즘 계속 혼자 멍하게 있었던 게 이거 때문이에요?”
“…….”
내가 계속 멍했다고? 그랬나? 별로 안 그랬던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평소에 정신을 차리면 정우진이 빤히 날 쳐다보고 있던 날이 많았던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물었던 적도 꽤 됐다. 내가 비를 맞고 집에 온 날부터 그랬으니까 꽤 오래 그랬던 건 확실했다.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뭘 하든 선배가 그렇게 하자고 하면 그렇게 할 거예요.”
분명 하겠다는 대답이었지만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나는 너한테 물어보는 거야.”
“하고 싶으면 그냥 하자고 하세요. 저는 그게 엄청 싫은 일이라도 선배가 하자고 하면 할 거예요.”
“…….”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서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한참 생각했다.
“그게 정말 싫은 일이라도 어쩔 수가 없어요, 저는. 너무 싫어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그러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것밖에 없다고요. 그런 것밖에 못 해요, 아무리 싫어도.”
“야, 너 왜 그래?”
“그러니까…….”
나는 반쯤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바닥에 앉으며 정우진을 살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고 어쩐지 굉장히 상처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어렵게 말하지 마세요. 정말 하기 싫어서 죽을 거 같은 걸 같이하자는 것보다, 선배가 말도 안 해 주고 혼자 생각하는 게 더 싫단 말이에요.”
“…….”
정우진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날 쳐다봤다. 나는 그제야 내 실수를 깨달았다.
“아니……. 생각이 정리가 안 돼서…….”
“그럼 나랑 같이 말하면서 정리해도 되잖아요.”
“맞네, 진짜 그러면 됐는데……. 울어?”
고개를 숙인 정우진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어 얼굴을 들어 올리자 눈가가 빨개진 정우진이 눈을 치켜뜨고 날 노려봤다.
“난 네가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고……. 그러니까 싫어해도 되는데, 내 말은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네 생각이 궁금해서……. 아니, 이걸 뭐 어떻게 말해야 될지 정리가 안 되니까…….”
원래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긴 했지만, 당황해서 그런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한 문장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주절주절 떠들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말도 안 하고 갑자기 여기 오자고 그러고…….”
“야, 너 울어? 미안, 내가 잘못했어. 야, 미안하다니까.”
“도대체 내가 싫은 게 무슨 상관이에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서럽게 말하는 정우진을 달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고. 나는 네가 그러는 게 싫으니까!”
“그냥 하고 싶으면 하자고 하면 되잖아요!”
“네가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할까 봐 그러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결국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륵 흘렀다. 빽빽 고함을 지르던 나는 우는 정우진을 보며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말주변이 없어서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는지 모르겠다.
“전 진짜 헤어지자거나 집 나가겠단 소리만 아니면 선배가 하자는 거 다 할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이상한 고민 좀 그렇게 오랫동안 하지 마세요. 할 거면 나한테 말을 하든가!”
그동안 쌓인 게 꽤 많았는지 한 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평소랑 다르게 언성까지 높여 가며 하는 말에 나는 잘못한 게 있어 일단 가만히 듣기만 했다.
“선배.”
그 말에 시선을 올려 정우진을 쳐다봤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진짜예요.”
“…….”
“선배가 만약 내가 싫다고 해도 이제 예전처럼 그렇게는 못 해요.”
예전처럼?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고 있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우진을 날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선배가 다른 사람이랑 말하면 못 참는다고 말은 그렇게 해도 제가 뭐 어떻게 하겠어요.”
“…….”
“그냥 화내다가 울면서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고 비는 거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집에 가두고 묶어도 선배가 정말 못 나가서 그러고 있는 게 아니라 나한테 장단 맞춰 주려고 가만히 있는 거라는 것도 알아요.”
어쩌다가 얘기가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난 정말 장난이나 홧김에라도 헤어지잔 소리는 한 적이 없는데. 어쩌면 내가 혼자 고민하던 시간 동안 정우진은 그런 상상을 했던 걸지도 몰랐다.
씨발, 어쩐지 뭔가 좀 평소랑 다르다 싶었다. 그래도 나랑 대화하거나 함께 있을 땐 평소처럼 웃기도 하고 삐치기도 하고 치대고 징징거리기도 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긴 건데.
그게 어쩌면 정우진이 필사적으로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조였다.
게다가 내가 갑자기 여길 오자고 해서 더 극단적으로 생각했던 걸지도 몰랐다.
“정말 나가고 싶으면…….”
“안 나가. 진짜 안 나갈 거야. 절대 안 나가.”
“그럼 어떡해요? 전 진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내 말을 듣기는 한 건지 정우진이 겁에 질려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너무 급한 나머지 나는 나오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네가 할 수 있는 게 왜 없어? 운다며? 막 울어, 그럼. 계속 울어.”
“울어도 안 되면 어떡해요?”
“그럼 다시 가두기라도 해. 묶어 놓든가.”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못 해요.”
“왜?”
“예전에 선배가 화내고 싫어했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죽을 거 같아요. 자다가도 생각나면 숨을 못 쉬겠어요.”
마룻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제야 나는 정우진이 말했던 ‘예전처럼’이 언제인지 깨달았다.
“그러면 안 됐는데.”
“…….”
“그렇게 함부로 대하면 안 됐던 건데.”
후회하듯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다시 와서 생각이라도 난 건지 평소라면 절대 먼저 꺼내지 않았을 말이었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우리는 계속 그렇게 지냈다.
가끔 아주 가끔 어쩌다 한 번씩 말이 나오더라도 그냥 그러고 지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우진에게도 나에게도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상처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정말 괜찮아졌고, 서로 말도 꺼내지 못할 만큼 이곳의 일이 금기가 되진 않았으면 했다.
때마침 우리에게도 새로운 목표가 필요했고, 그 새로운 것을 이곳에서 정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자고 했던 거고, 사실 나는 정우진이 이곳에 오면 적어도 한 번쯤은 울 거라고 예상했었다.
우리가 살아가게 될 오랜 날 중 언젠가 한 번쯤은 겪어야 할 일이었다. 계속 서로 눈치를 보며 말하지 않고, 없었던 일인 듯 넘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번쯤 뒈지게 울어 버리고 다음부터는 웃으며 이곳으로 휴가라도 오고 싶었다.
물론 정우진은 내 생각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랬다.
만약 다시 날 그렇게 대한다고 해도 나는 당황하긴 하겠지만 정우진이 싫어지진 않을 것 같았다. 너무 불안해서 미칠 것 같고 잠도 못 잘 만큼 괴로울 정도면 차라리 그냥 내가 갇혀 지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종종 했었다.
그렇게 해서 괜찮아진다는 확신만 있다면 평생 그러고 살아도 좋았다.
하지만 나는 정우진이 나와 함께 손을 잡고 걸을 때 웃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밖에서 나를 기다리며 설레던 모습과 함께 놀러 가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웃던 목소리를, 다음 날 함께 어딘가 갈 생각에 기대하며 잠드는 얼굴을 안다.
정우진은 그런 걸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싫어해서 날 집에 가두고 하루 종일 내 얼굴만 보는 게 아니었다.
혹시 생길지도 모를 알지 못하는 두려움들을 무서워할 뿐이었다.
“미안해요.”
“…….”
“잘못했어요.”
어느새 눈물이 바닥 가득 떨어져 있었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정우진을 가만히 보면서 괜찮다는 말이 아주 쉽게 나왔다.
정우진이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이제 그런 건 내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분명 나는 그때 죽을 만큼 힘들었고, 정말 진심으로 정우진을 싫어했지만 어차피 다 지난 일이었다.
그래서 정우진이 이제 더 이상 이 일로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내가 눈 오던 산속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을 정우진을 잊을 수 없듯 정우진도 그 일을 평생 잊지 못할지도 몰랐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주지 않아도 됐을 상처를 줬다는 걸 꿈속에서도 후회할 거다. 그건 내가 지금 행복한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나도 미안해.”
내 말에 드디어 정우진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뭐가요?”
“그때 너 거기서 기다리게 해서.”
젖어서 엉망이 된 얼굴을 보며 말하자 정우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꽉 깨문 잇새로 우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리는 평생 이러고 살지 않을까. 그리고 그게 모든 사람이 세상을 사는 방식이 아닐까 싶었다.
후회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울면서 태어난 걸 후회할 때도 있겠지만, 그러다가 어떤 날은 또 웃고 행복해하고 기뻐하면서 태어난 걸 감사하게 되는 날도 있을 거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는 정우진을 빤히 보기만 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그때를 떠올려도 울지 않을 날이 오지 않을까.
아직은 아니겠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언젠가.
“그만 울고 나가서 바다 구경이나 하자.”
“갑자기 바다는 무슨 바다예요.”
정우진이 코맹맹이 소리로 투덜거렸다. 서러운 얼굴로 훌쩍거리다가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안 건지 정우진이 퍼뜩 고개를 들어 내 손목을 잡았다.
“어디 가요?”
“티슈 뽑으러.”
내 말에도 한참 손목을 잡고 날 보고 있던 정우진이 천천히 잡은 손에 힘을 뺐다. 티슈를 뽑아 젖은 얼굴을 닦아 주며 말했다.
“뭐 하자는 것도 그냥 네가 싫으면 싫다고 말해.”
“선배는 집에만 있기 싫어서 말한 거잖아요.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말한 건데 어떻게 싫다고 해요. 그리고 잘못했어요.”
잘못했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들어 정우진의 입을 막고 말했다.
“집에만 있기 싫어서 한 말 아니야. 네가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나만 기다리면서 시체처럼 지내는 게 싫어서 그런 거야.”
내 말에 정우진이 빤히 날 보다가 눈을 감았다 떴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 내 손을 적셨다.
“그리고 넌 그동안 그렇게 힘들었으면 나한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고 물어보면 되잖아. 왜 툭 치면 울 정도로 참고 있어?”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정우진이 손을 들어 내 손을 잡아 내리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물어봤는데 선배가 대답 안 해 줬잖아요!”
“물어봤다고?”
“무슨 생각 하냐고 물어봤잖아요!”
“…….”
아니……. 그냥 지나가듯 물어보니까……. 아직 생각이 정리도 안 됐고 그래서 그냥 넘어간 거지……. 그러고 보니까 진짜 그랬던 것 같아서 잠깐 시선을 피하다가 말했다.
“그건 그런데……. 네가 지금 내가 말을 안 해 줘서 힘들다는 말은 안 했잖아.”
“…….”
“아니야, 내가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했어.”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 걸 보며 나는 툭 치면 말하는 기계처럼 잘못을 빌었다. 티슈를 몇 장 더 뽑아 눈가를 닦아 주다가 말했다.
“이건 내가 잘못한 게 맞는데 앞으로는 진짜 힘들면 나한테 말을 해. 정말 힘들다고.”
“…….”
“알았어?”
“……네.”
정말 그렇게 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답이라도 해서 다행이었다.
“꼭 죽을 만큼 아프거나 힘든 게 아니라도.”
“…….”
“그럭저럭 적당히 견딜 수 있을 만큼 힘들어도 말하라고.”
“…….”
이번엔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기만 했다. 좀 더 기다려도 대답을 안 해서 다시 말했다.
“넌 그냥 이 상황이면 싫어도 알겠다고 하면 안 되냐?”
“계속 그러다가 선배가 지치면 어떡해요.”
“…….”
“힘든 것도 한두 번이지…….”
울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황당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럭저럭 힘들 땐 말 안 해도 되니까, 진짜 못 견딜 거 같으면 그땐 꼭 말해.”
“네.”
계속 티슈로 눈가를 닦으니 안 그래도 붉어진 눈가가 피가 날 것처럼 빨개졌다. 결국 손등으로 눈가를 조금 더 닦아 주다가 물었다.
“너 근데 아까 내가 나간다 그러면 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그랬잖아. 진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의아한 얼굴로 묻자 정우진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냥…… 계속 따라다닐 거예요.”
그 말에 내가 푸핫 하고 웃자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웃어요?”
“따라다니면서 뭐 어쩔 건데?”
“쫓아다니면서 선배가 다른 사람 만나면 그 새끼 때릴 거예요.”
진지하게 말하는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는 생각을 했다. 안 죽이고 때리기만 한다고 하는 걸 보면 옛날보다는 좀 나아진 거 아닌가?
나름대로 만족하며 일어서자 정우진이 날 붙잡았다.
“선배.”
“다 울었으면 나가자.”
“우리 다음 세상에서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죽고 다시 태어났는데 못 만나면 어떡해요? 기억도 못 할 텐데 어떡하죠?”
이제 정우진은 하다 하다 다음 세상 걱정까지 미리 하고 있었다.
“다시 태어났는데 선배가 지나가도 못 알아보면 어떡해요?”
“다음 세상 걱정은 다음 세상에서 하면 안 될까?”
내 말을 듣긴 한 건지 정우진은 혼자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럴 때마다 무서워요. 이렇게 행복한데 나중에 헤어질 때 되면 어떡해요?”
“왜 헤어져?”
“언젠가는 죽을 거 아니에요. 다른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심각한 얼굴로 우울해하고 있던 정우진이 날 보며 울상을 지었다.
“저 진짜 선배 없으면 죽을 거예요.”
따라다니기만 한다더니 죽는다고 협박까지 하던 정우진이 뜬금없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가끔 제가 흡혈귀였으면 좋겠어요.”
“흡혈귀? 피 빨아 먹는 그거?”
“네, 그래서 선배 피 안 먹으면 죽었으면 좋겠어요.”
정우진은 또 혼자서만 아는 이상한 소리를 두서없이 했다. 그러더니 미간을 좁히고 있는 날 보며 덧붙였다.
“아니면 정액이나.”
“그게 흡혈귀냐?”
“아무튼 뭐든 간에 그런 걸 안 먹으면 죽는다든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신경 안 써 주면 죽는 식물이나 그런 것도 좋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좀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걸 보면 아직 내가 정우진을 이해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힘들긴 하지만 진짜 죽는 건 아니잖아요.”
“…….”
“정말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다. 내 보살핌이 없으면 죽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가?
옛날부터 느낀 건데 정우진은 정말 사랑한다는 소리를 별나게도 했다.
“아무튼 시간은 많으니까 뭐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거나, 아니면 해 보고 싶었던 거나 그런 거 있으면 말해. 나도 생각해 볼 테니까.”
젖은 티슈를 버리려고 등을 돌리는데 정우진이 뒤에서 날 안았다. 등 뒤에 정우진을 달고 쓰레기통에 티슈를 버리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선배 어렸을 때 그림 잘 그렸잖아요.”
“그림?”
그랬나? 잠깐 어렸을 때 일을 생각하다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거 완전 어렸을 때잖아.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로 몇 번 그린 게 다야. 그 뒤로는 한 번도 그려 본 적 없어.”
정우진이 내 목가에 얼굴을 비볐다. 젖은 느낌은 없는 걸 보니 드디어 눈물을 그친 것 같았다.
“다시 하면 재미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지도 몰랐다. 뭐 해 보고 아니면 다른 거 또 하면 되니까 일단 그림을 그려 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러다가 어렸을 때 정우진이 그림을 그려 1등을 했던 게 떠올랐다.
“나보다 네가 더 잘 그리지 않았냐? 예전에 고아원에서 네가 1등 해서 초코파이 한 박스 받았잖아. 내가 2등 하고.”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정우진이 1등을 했던 건 정확히 기억이 났다.
“한 박스가 아니라 하나였어요. 초코파이 하나랑 캔 콜라 하나. 그거 선배 줬는데 선배가 다른 사람한테 줬잖아요. 김혜원 기억나요?”
“몰라, 김혜원은 누군지 모르겠는데 그때 너 존나 재수 없었다는 건 기억나네.”
내가 웃으며 말하자 정우진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왜요? 그때 그거 선배 주려고 진짜 기를 쓰고 그린 건데.”
어쩐지 억울해 보이는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정우진이 내 어깨를 잡고 제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정우진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그때 그걸 알았어야 됐는데. 너무 어려서 내가 1등만 하다가 네가 1등 해서 재수 없었나 봐.”
내 말에 정우진이 울상을 지었다.
“어차피 1등이 초코파이 받는 거면 그냥 선배가 1등 하고, 내가 2등 했으면 그럴 일도 없었을 텐데.”
마치 자기가 잘못했다는 듯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2등 해도 재수 없었을걸?”
“아, 또 왜요.”
이번엔 울상이 아니라 진짜 울 것 같은 얼굴을 보며 웃었다.
“너 그때 진짜 또라이 같았잖아. 기억 안 나? 막 매미 죽이고 왜 죽이면 안 되냐고 그러고, 일부러 다쳐서 오질 않나, 귀신처럼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질 않나.”
정우진이 안쓰럽고 불쌍한 것과는 별개로 이건 사실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성격이 좀 그랬던 건가? 조그맣고 작았던 정우진이 매미를 밟아 죽였던 게 떠오르자 잠깐 소름이 끼쳤다.
진짜 어렸을 때부터 범상치 않기는 했다. 매미는 도대체 무슨 죄라고…….
“선배가 나한테 관심을 안 주니까 그랬잖아요. 귀엽다고 데리고 다닐 땐 언제고 갑자기 무시하고 다른 애들이랑만 놀고.”
정우진은 자기도 할 말이 많은 건지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따지고 보면 정우진이 한 말이 맞았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어른스러웠다면 절대 그러진 않았을 텐데.
점점 다른 사람들이 정우진을 좋아하고 같이 놀려고 했던 게 시작이었다. 나는 지레짐작해서 정우진이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랑 더 친하게 지낼 줄 알았다.
그런 날이 오게 되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정우진을 멀리하기로 한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제정신은 아니었던 거 같다. 정우진을 보고 범상치 않다고 할 군번이 안 됐다.
“그래, 그건 내가 잘못하긴 했지……. 근데 너 귀여워서 데리고 다닌 거 아닌데?”
처음엔 진짜 불쌍해서 데리고 다녔다. 아무랑 어울리지도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해서 옆에서 챙겨 주다가 친해진 것이었다.
아, 방금 생각났는데 난 그때 그게 꽤 좋았던 것 같았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정우진이 좋았다. 옆에서 그런 정우진을 챙겨 주면 내가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나중에 곧잘 웃게 되고 내가 없어도 다른 사람이랑 어울리는 정우진이 미워졌다. 그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또 무슨 생각 해요?”
정우진이 내 양 볼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코앞에서 보이는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너 정신병자 같다고 했잖아. 근데 생각해 보니까 나도 정신병자였던 거 같아.”
“네?”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는 게 정말 맞는 소린가 봐.”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앞으로 정우진이 정신 나간 짓을 하면 내가 했던 짓거리를 생각하며 조금쯤은 정상 참작을 해 줘도 괜찮을 거 같았다.
“아무튼 너 귀여워서 데리고 다닌 거 아니야.”
“그럼요?”
그럴 리 없다는 눈으로 되묻는 정우진을 보며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넌 네가 귀엽다고 생각하냐?”
“선배가 귀여워해 주잖아요, 매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걸 보며 헛숨을 내쉬었다. 나는 내 뺨을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내가 언제? 그런 적 없는데?”
“다 알아요.”
우느라 붉어진 눈꼬리를 접으며 정우진이 웃었다. 때마침 창틈으로 햇빛이 들어와 정우진을 비췄다. 그걸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고아원이 아니라 다 잊어버리고 사느라 바빴던 대학생 시절 우리가 만났던 그날에도 정우진은 내리쬐는 햇빛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말 한 번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한 후배가 밥을 사 주겠다고 했을 때 분명 반은 저 얼굴에 홀렸던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쪼르르 따라갔던 거겠지.
“가끔 빤히 쳐다보잖아요. 다 알아요.”
가만히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의기양양하게 하는 말에 놀라서 되물었다.
“안다고?”
“네.”
뒤통수에 눈이 달렸나. 안 볼 때 본 건데 그걸 어떻게 알아? 혹시 밖에서 만나기로 했을 때 가끔 내가 구경하고 있는 것도 다 아는데 일부러 모른 척한 거 아니야?
정우진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계속 웃고 있었다. 아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옷깃이 다 젖을 정도로 울었던 게 거짓말 같았다. 울기도 많이 울지만 정우진은 정말 웃기도 많이 웃었다.
나는 조금 전 정우진이 정신병자 같다는 말을 속으로 혼자 취소했다. 사람들 다 이렇게 사는 거 아니겠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다 그러고 사는 건데 정우진은 유독 감정 변화가 좀 빠를 뿐이었다.
나는 정우진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사랑하는 건?”
“네?”
“내가 너 사랑하는 것도 알아?”
“…….”
내 물음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실실 웃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놀란 건지 정색을 하고 날 쳐다보는 얼굴도 귀여웠다.
그리고 곧 내 말의 뜻을 이해한 건지 하얀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귀부터 시작해서 목덜미까지 붉어지고 있었다. 나는 사실 부끄러워하는 정우진도 귀여워서 좋아했다.
“알아요.”
한참 망설이던 정우진이 내 손을 마주 잡으며 작게 말했다. 알고 있다니 참 다행이었다.
“가자.”
“어디 가요?”
“바다 보러.”
정우진을 이끌고 현관문 쪽으로 갔다. 신발을 신으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작은 힘으로 내 팔을 당겼다.
“선배.”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날 보며 웃었다.
“사랑해요.”
“…….”
“제가 정말 많이 좋아해요.”
가슴이 아플 만큼 예쁘게 웃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나도 마주 웃었다.
“나도 알아.”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한 걸음, 문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