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시 씻고 나온 정우진에게 억지로 속옷과 바지를 입혔다. 이성을 되찾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뒤늦게 미성년자를 건드렸다는 죄책감과 후회가 밀려왔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도 도와줄게.”
“그딴 소리 좀 하지 마.”
아까부터 뭘 자꾸 자기도 도와준대, 미친놈이. 착잡한 마음에 마른세수를 하다가 다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내가 올바르게 살았다고는 말 못 해. 고등학교 다닐 때 사고도 많이 치고 그러긴 했는데…….”
“…….”
“그래도 난 처음 만난 사람 집에 가서 반나체로 자고 가도 되냐고 물어본 적은 없어.”
내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안 듣고 있는 건지 심드렁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속이 타들어 갔다.
“처음 만난 거 아니잖아.”
“거의 처음 만난 거 맞지, 이 정도면. 그리고 도대체 아까……. 야, 너 혼자 자위해 본 적 없어?”
“없어.”
“지랄하지 마. 너 중학교 다닐 때…….”
분명 들은 적이 있었다. 자기는 내가 줬던 종이를 붙잡고 자위한 게 처음이었다고. 그럼 분명 얘도 그랬을 텐데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해 댔다.
“너 친구 집에 가서도 바지 안 입고 자?”
“아니.”
“그럼 바지는 입고 속옷은 안 입어?”
“안 그래.”
“아, 그럼 친구한테 손에 힘 안 들어간다고 자위하는 것 좀 도와 달라고 하나 보지?”
내 말에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리고 날 쳐다봤다. 불만스러운 듯한 얼굴을 보면서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만약에, 혹시라도 정우진이 다른 곳에 가서도 이런 비슷한 짓거리를 조금이라도 할까 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울기만 하든가 싸기만 하든가 위아래로 질질 짜면서 치대고 안겨 오던 걸 생각하며 단호하게 말해야겠다 싶어 눈에 잔뜩 힘을 줬다.
“너 한 번만 더…….”
“…….”
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불만스럽게 치켜뜬 눈에 점점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건드리면 물이 툭 떨어질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을 보며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내가 화를 내는 게 정말 최선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정우진이 먼저 그러긴 했지만 나는 성인이었다. 정말 성인이라면 미성년자를 상대로 그런 짓거리를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먼저 하자고 지랄지랄 개지랄을 떨어도 내가 정말 심신이 건강한 성인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기에 응하면 안 됐다.
“내가…….”
“…….”
“내가 잘못했다. 말이 심했어. 내가 죄인이야, 내가 미친놈이지…….”
씨발, 등신 머저리 새끼……. 바닥에 얼굴이라도 박고 싶은 마음이었다. 정신도 온전치 못한 애가 알면 뭘 얼마나 안다고 그걸 제대로 말도 못 하고 하자는 대로 이끌려 간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래.”
그때 정우진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다른 사람 집에서 잔 적도 없어.”
“그럼 다행인데……. 혹시 친구 집에서 자게 되더라도 옷은 다 입고 자. 그런 개인적인 것도 도와 달라고 하지 말고.”
며칠 자지도 못하고 밤새도록 노가다를 뛰어도 이것보단 덜 피곤할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웅얼거렸다.
“그럼 형도 하지 마.”
“뭘?”
“자고 있는데 누가 집에 오면 쫓아내.”
이불 위로 후드득 물방울이 떨어졌다.
“뭐든 도와 달라고 해도 도와주지도 마.”
덜 잠긴 수도꼭지처럼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평생 할 당황을 지금 다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누가 자고 가도 되냐고 물어봐도 재워 주지 말라고.”
“…….”
“울어도 그렇게 달래 주지 말란 말이야.”
서럽게 어그러지고 있는 목소리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너 아까부터 왜 자꾸 울어?”
“그 사람 누구냐고.”
“무슨 그 사람? 그 사람이 누군데?”
갑자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정우진을 보며 결국 손을 뻗어 어깨를 안았다. 안겨 오는 작은 몸을 마주 안고 등을 두드리자 정우진이 더욱 서럽게 울었다.
“찾아와서 우는 사람 누구냐고.”
“뭔 소리……. 아니, 아. 아, 진짜. 그거 그냥…….”
억울하고 황당한데 이걸 어떻게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게 사실 너라고 말해 봤자 나만 이상한 사람 되는 건데. 나도 답답해 죽겠는데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진이 내 허리를 안은 팔에 점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새벽에 찾아와서 울면 안아 주고 달래 줄 거잖아.”
“아니…….”
“그거 하지 말라고.”
“아니, 그러니까……. 야, 내 말 좀 들어 봐. 네가 지금 진짜 오해하고 있는 거야. 내가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 사람이 누군지 너한테 말해 주긴 좀 그런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상한 건 진짜 아니, 윽!”
최선을 다해 열심히 변명을 하고 있는데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이 꽉 조여졌다. 숨을 쉬기도 힘들 만큼 꽉 안겨서 결국 쓸어 주고 있던 등을 팍팍 소리가 나게 때릴 수밖에 없었다.
“팔에 힘! 힘 좀 풀어!”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말해도 어차피 넌 모르잖아!”
덩달아 버럭 고함을 지르자 정우진이 허리를 세게 조이고 있던 팔을 풀곤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젖어서 엉망이 된 얼굴로 날 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럼 씨발, 나도 아무한테나 가서 바지 벗을 거야!”
“무슨 개소리야!”
갑자기 성큼성큼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는 정우진을 보며 얼른 일어나 그의 손목을 잡았다.
“놔!”
“너 미쳤어? 그러고 어딜 가, 비도 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형은 나한테 말도 안 해 주잖아. 어차피 다른 사람이 와서 재워 달라고 해도 재워 주고 울면 다 달래 줄 거잖아! 근데 내가 그러는 건 왜 안 돼?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난 왜 하면 안 돼!”
이 새끼가 갑자기 정신 줄을 놨나. 고막으로 쏟아지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에 황당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형은 어차피 내가 어디서 어떻게 살든 관심도 없잖아. 내 생각도 안 했잖아. 내가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도 몰랐잖아. 이제 와서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내일부터 안 온다고 해도, 유학 간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잖아!”
“그게 네가 바지 벗고 다닌다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지금 새벽이니까 소리 그만 지르고 일단…….”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당겼지만 정우진은 팔을 비틀어 빼려고 하면서 그 자리에 서서 끝까지 버텼다. 결국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정우진!”
큰 소리가 나자 정우진이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크게 뜬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 내일부터 진짜 안 올 거야.”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그만 울고 이리 와 봐.”
“싫어. 형 진짜 싫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서럽게 우는 소리에 다시 마음이 약해졌다. 안아 주려고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자 이번엔 반대로 정우진이 내 손목을 잡았다.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깐 그렇게 팔을 비틀고 힘주고 버티더니.
“난 너 안 싫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거짓말 치지 마.”
“진짜 안 싫어해.”
양손으로 뺨을 잡고 숙이고 있는 얼굴을 들어 올리자 눈물로 젖은 얼굴이 보였다. 엉망이 된 얼굴을 소매로 닦아 주고 이마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자 정우진이 코맹맹이 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 사람 누군지 말해 줘.”
“도대체 그게 왜 그렇게 궁금한데?”
“사귀는 사람이야?”
“…….”
“그 사람 좋아해? 사귀어? 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맞다고 할 수도 없고. 정말 미칠 것 같았다. 그냥 미친 척하고 사실 그건 미래의 너라고 말해 버릴까?
“그 사람이 와서 왜 울어? 왜 우는 거야?”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럼 정우진도 이렇게 울진 않을 텐데.
“왜 우는 건데? 씨발, 형이랑 사귀면서 왜 울어? 자기가 뭐가 그렇게 서럽고 힘들다고 울어? 왜 우는데? 나 같으면, 씨발. 매일 웃기만 할 텐데, 자기가 뭔데 울어. 씨발, 왜 우냐고…….”
기껏 닦아 준 눈가가 다시 젖기 시작했다. 양 뺨을 잡고 있는 내 손가락 위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내가 싫다고 하고 내일부터 안 올 거라고 노래를 불렀으면서 하는 말이나 행동은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울고 있는 정우진을 착잡한 얼굴로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도 많이 울걸.”
“난 안 그래.”
“그럴 텐데…….”
울어도 보통 우는 게 아닐 텐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손바닥에 자기 뺨을 비비며 물었다.
“사귄 지 얼마나 됐어? 오래됐어? 그 사람 많이 좋아해? 어떤 사람인데? 학교 친구야? 아니면 형보다 나이 많아? 어려? 그 사람이 잘해 줘? 형은 그 사람 얼마나 좋아하는데? 계속 좋아할 거야? 그 사람 없으면 죽겠어? 결혼할 거야?”
“그 사람 지금 없어.”
사실 정우진이 묻는 말에 하나하나 전부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뭐라고 대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없다고? 왜? 어디 갔는데? 없다는 게 무슨 소리야? 서울에 없는 거야? 한국에 없어? 무슨 뜻인데?”
“대답해 줄 테니까 숨 좀 쉬면서 물어봐. 천천히.”
“없다는 게 무슨 소린데?”
“그냥 없어. 이제 못 만날 거 같아.”
말하고 보니까 갑자기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이제 못 만나는 건가. 그냥 계속 이러고 살아야 하나. 그럼 도대체 내가 좋아하는 정우진은 어디로 간 거지.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
잠깐 멍하게 있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이제 못 만날 것 같다는 내 말을 헤어지거나 나 혼자 짝사랑 중이라고 해석한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잘해 줬어?”
“…….”
“얼마나 잘해 줬는데? 그 사람이 형 많이 좋아해 줬어? 얼마나? 매일 사랑한다고 해 줬어? 하루 종일 같이 있었어?”
다시 울기 시작하는 정우진을 보며 가슴께가 무거워졌다. 정우진이 우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이런 오해 때문에 우는 걸 보는 건 힘들었다.
“그 사람 많이 좋아했어?”
끊임없이 토해 내는 말들은 질문이 아니라 사랑 고백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이제 다신 오지 않을 거라던 말도, 형이 싫다는 말도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질문도 전부 다 사랑한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너 내일부터 안 올 거야?”
“…….”
쉬지 않고 쏟아 내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 나 안 볼 거라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도 뻥긋하지 않고 날 노려보듯 쳐다보기만 했다. 자기가 그렇게 말했으면서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나한테 두 번 다시 오지 말란 말을 들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학 갈 거야?”
“…….”
오지 않는다고 해도 정말 안 올까. 정우진이 그럴 리가 없었다. 아마 온갖 핑계를 대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겠지. 오늘처럼 자고 가는 날도 많을 거다. 만약, 아주 만약에 정말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앞으로 계속 볼 텐데, 어차피 그럴 거라면 정우진이 이렇게 오해하게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덜 울 수 있도록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너 만약 유학 안 가고 계속 한국에 있을 거면 나랑 같이 살래?”
“뭐?”
“지금 당장 말고 나중에 너 졸업하면.”
커다랗게 맺혀 있던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얼마나 놀란 건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숨을 쉬지도 않았다. 뺨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자 하도 울어서 붉게 부어 있는 입술이 오리처럼 튀어나왔다. 사실 거기에 입을 맞추려고 한 건데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이마를 맞댔다.
“나하고 같이 살자.”
“시…….”
코앞에서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뭔가 이상해서 맞대고 있던 이마를 떼고 허리를 펴자 정우진이 이상할 정도로 덜덜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싫어.”
“왜?”
“싫어…….”
내가 혹시 무섭게 말했나? 뭐 잘못 말했나? 아니면 너무 빨랐나? 좀 이따가 말할 걸 그랬나. 별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소리를 왜 해?”
같이 살자는 소리에 저렇게 무서워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알아채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계속 울고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떨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하고 영원히 같이 살 거야?”
“영원히?”
“그럴 것도 아니잖아. 근데 왜 그런 소리를 해?”
이 말까지 들으니 정우진이 왜 이렇게 무서워하고 있는지 대강 알 것도 같았다. 같이 살다가 헤어지거나 뭐 그런 걸 걱정하는 건가? 정확한 건 알 수 없었지만 정우진이 가지고 있는 불안함의 크기가 얼마나 크고 견고한지 잘 알고 있기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영원히 같이 살면 돼?”
“뭐?”
“영원히 같이 산다고 말하면 같이 살아 줄 거냐고.”
영원히 같이 있는 게 조건이라면 기존의 조건보다 훨씬 난이도가 낮았다. 만약 이 정우진이 내가 아는 그 정우진이었다면 저기에 조건이 20개쯤은 더 붙었을 거다. 다른 사람이랑 말하지 말고 눈도 마주치지 말고 등등의 말도 안 되는 조건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내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정우진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모르지?”
“알아.”
“계속 나하고만 있어야 되는 거야. 다른 사람 말고 나하고 계속 죽을 때까지 둘이서 살아야 돼. 같이 자고 같이 먹고 울어도 같이 울고 화내도 같이 화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거야. 알겠어? 알겠냐고. 그렇게 할 수 있어?”
“…….”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쉬지도 않고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좀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쟨 저런 말을 어디에 써 놓고 외우고 다니나? 어떻게 저런 말만 저렇게 잘하지? 황당해하고 있는 날 보며 정우진은 아까보다 더욱 짜증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못 할 거면 나한테 같이 살자는 말 하지 마. 알았어?”
그냥 황당해서 잠깐 말을 잊었을 뿐인데 정우진은 그 잠깐을 못 참고 그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내가 언제 못 한다고 그랬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아까보다 더욱 다급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이랑 나랑 둘이서만 계속 같이 있어야 된다고. 다른 사람 말고 날 제일 좋아해야 돼. 만약 다른 사람이 형한테 좋아한다고 해도…….”
그러다가 점점 말을 흐리더니 이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좋아한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겠지.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정우진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어쩔 건데? 또 나 두고 갈래? 그럴 거지? 그럼 나랑 뭐 하러 같이 살아? 그럴 거면 애초에 같이 살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씨발, 나하고 같이 사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말할 틈도 주질 않고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하고 혼자 결론까지 내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우진의 머릿속에서 나는 이미 날 좋다고 말한 놈이랑 떠나 버린 천하의 몹쓸 놈이 돼 있었다. 특히 저 ‘또’라는 말이 너무 마음에 걸렸다.
“안 그럴게. 너 두고 안 가.”
정말 진심을 담아 말했지만 정우진은 단칼에 내 말을 잘랐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지금 안 그런다고 하고 나중에 그럴지 내가 어떻게 알아? 지금은 나하고 같이 있고 싶어도 나중에는 마음이 변할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 형을 어떻게 믿어, 씨발. 관둬. 안 할 거야. 때려치워. 안 해!”
씩씩거리면서 그렇게 말한 정우진이 갑자기 등을 돌렸다.
“나 이제 진짜, 정말로 여기 안 올 거야.”
현관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잡는 걸 보니 나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안 와. 형 만나러 오지도 않을 거고 이젠 찾지도 않을 거야.”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근데 만약…….”
문고리를 잡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화가 난 것처럼 쏘아붙이던 목소리는 점점 힘이 빠졌고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만약에…….”
“…….”
“만약에 그래도 정말 안 그런다고 약속해 주면 형이 하자는 대로 할게.”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때려치우라고 안 한다고 소리치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난 어차피 안 믿어. 안 믿을 건데 그래도 형이 그렇게 말해 주면 믿어 보려고 노력은 해 볼게. 안 괜찮은데 계속 괜찮다고 생각하다 보면 가끔 정말 괜찮을 거 같을 때가 있어. 그러니까 형이 약속만 해 주면 나도 괜찮아질 수도 있어.”
혼자 서 있는 모습이 어쩐지 너무 추워 보였다. 정우진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 말이 내게 어떻게 들릴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가만히 정우진이 필사적으로 쏟아 내는 말들을 들었다.
“안 그러겠다고, 계속 나랑 같이 있어 주겠다고 지금 맹세해. 앞으로 죽을 때까지 나하고 둘이서만 살겠다고 다른 사람 말고 나하고, 나하고만 살겠다고 맹세하면 같이 살게. 그렇게 할 수 있어? 할 거야?”
물어봐 놓고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거라고는 생각하질 못했는지 내 말은 기다려 주지도 않았다.
“같이 살자며. 근데 그것도 못 해? 거봐, 그냥 해 본 말이었잖아. 그냥 나오는 대로 뱉은 거잖아. 나랑 그런 약속도 못 해 주고 나중에 또 다른 사람한테도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같이 살자고 할 거지? 왜? 왜 그러는데? 내가…….”
“…….”
“내가 뭐가 부족해? 나한테 문제가 있으면 나한테 씨발, 말을 해야지. 말해 주면 되잖아. 왜 말을 안 해 줘?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어떻게 하면 형이 나만 좋아해 줘? 어떻게 하면 계속 나랑 같이 있어 줄 건데? 왜 말을 안 해 줘. 말해 봐. 말해. 내가 뭘 잘못했냐고.”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안아서 그런 게 아니라고 달래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게 처음 하는 말이었다.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담아 뒀을 말들이었다.
“제발, 나한테 그러지 마……. 그러면 안 되잖아. 같이 살자는 소리를 왜 해? 약속도 안 해 줄 거면서……. 거짓말이라도 해 봐. 지금은 맹세한다고 말해도 되잖아. 나중에 어떻게 되든 알 게 뭐야? 지금은 나한테 너하고 둘이서만 살 거라고 말해 줘도 되잖아.”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딴 거 하나도 못 해 줄 거면서 나한테 왜 같이 살자고 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더니 다시 몸을 돌려 날 쳐다봤다. 누구 하나 죽이고 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사납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정우진은 내 목을 졸라 죽일 것같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날 빤히 쳐다보면서 한 발자국씩 내게 다가왔다.
“진짜 싫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죽었으면 좋겠어. 내 눈앞에서 사라져. 다신 나타나지 마. 보이지도 말고 목소리도 들리게 하지 마. 다시는 나한테…….”
바로 앞까지 다가온 정우진이 눈을 치켜뜨고 입술을 깨물며 벌벌 떨리는 손을 겨우 올려 내 옷깃을 쥐었다.
“나한테 그딴 소리 하지 마.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런 소식도 나한테 들리게 하지 마. 제발 내 인생에서 사라져. 제발 좀 그만해. 힘들어, 죽고 싶어……. 제발 부탁이니까 다시는 그딴 소리 하지 마.”
저주처럼 퍼붓던 소리가 조금씩 작아지더니 이내 흐느끼는 소리로 변했다.
“정말……. 제발, 그러지 마…….”
“…….”
“같이…….”
우는 소리에 묻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입술을 달싹거리던 정우진이 눈을 감았다.
“같이 살면…….”
무언가를 상상하듯, 꿈을 꾸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감고 있는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너무 좋아서 밤마다 죽고 싶을 거 같아.”
“…….”
“이게 혹시 꿈이면,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다 없어질까 봐 어떻게 잠들지?”
안겨 오는 정우진을 마주 안았다. 이마를 내 어깨에 대고 옷깃을 잡은 양손이 떨릴 만큼 잔뜩 힘을 줬다. 보지 않아도 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만약에 정말 우리가 같이 살면, 그러면 어떡하지. 너무 좋아서 어떡하지. 이렇게 좋은데 어떻게 살지. 당장 내일 죽어도 같이 살고 싶어. 하루만이라도 좋으니까 형이랑 같이 살고 싶어.”
정우진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으며 손을 들어 뒷목을 만지자 식은땀을 흘렸는지 축축했다. 젖은 목덜미를 만져 주다가 등을 도닥이자 우는 소리가 더 커졌다.
“그래, 같이 살자.”
“나중에 마음 바뀌면 어떡해.”
“안 그럴 거야.”
조금의 틈도 없이 달라붙어서 불안해하는 정우진을 달랬다.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한지 계속 칭얼거리면서 젖은 뺨을 내 목덜미에 비볐다.
“만약에 내가 또 싫어지면 그땐 기다리라고 하지 말고 그냥 죽으라고 해 줘. 싫어졌다고 말해 주면 내가 나갈 테니까, 말도 없이 사라지거나 나 두고 어디 가지 마.”
“알았어. 절대 안 그럴게. 맹세해.”
내 말에 정우진이 울면서 뭐라고 말을 했지만 너무 울어서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싫어지, 윽……. 흑, 지겨워서 그러면…….”
“어?”
“아씨…….”
울면서 욕지거리를 내뱉는데 그것마저도 제대로 들리질 않았다.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고르던 정우진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시작했다.
“싫어질 거 같을 때 조금이라도 지겨워졌거나 짜증 날 거 같을 때 미리 말해 주면 내가 고칠게.”
“천천히 말해도 되니까 진정 좀 해.”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급한 목소리에 진정하라고 한 말이었지만 정우진은 조금도 진정하질 않았다.
“형이 하라는 대로 할게. 그러니까 다시 돌이킬 수 없기 전에 미리 말해 주면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게.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어떻게든 다시 돌이켜 볼 테니까 미리 말만 해 줘.”
“그래, 조금이라도 그럴 거 같으면 꼭 미리 말해 줄게. 말 안 하면 그런 생각 안 하고 있는 거니까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미리 걱정하거나 그러지 마.”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 서러운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달래고 좋게 말을 해 줘도 정우진은 우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러다가 탈수라도 오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꿈이면 어떡해. 이거 꿈이면 어떡하지. 형이 나한테 같이 살자고 해 줬는데 꿈이면 앞으로 어떻게 살지. 너무 좋아서 이게 정말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모르겠어.”
그 뒤로도 정우진은 뭐라고 하면서 계속 울었다.
“나 어렸을 때부터 형 많이 좋아했어.”
계속 뭐라고 하기는 하는데 울음에 묻혀 제대로 알아들은 말은 몇 개 없었다.
“몰랐지? 지금도 많이 좋아해.”
언제 이렇게 울어 봤을까 싶어서 그냥 정우진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기로 했다.
“지금도 형 많이 좋아해.”
“…….”
“좋아해.”
세차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 * *
정우진이 울음을 그친 건 그 뒤로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겨우 멎었나 싶어서 얼굴을 보면 눈이 마주쳤다고 다시 울고, 이름을 부르면 이름을 불러 줬다고 다시 서럽게 울었다. 또 정우진이 울까 봐 말도 걸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고 병풍처럼 서 있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너 근데 학교 가야 되는 거 아니야?”
“흑…….”
“…….”
훌쩍거리는 소리에 차마 씻고 학교 가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계속 울기만 해서 얼굴도 엉망이고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해서 이대로 학교에 보내긴 좀 찝찝하긴 했다. 만약 안 갈 거면 학교에 연락은 해 줘야 하는 거 아닐까.
부모님은 외국 나가셨다고 했으니까 그럼 집엔 아무도 없는 건가? 일단 학교를 가든 안 가든 계속 정우진을 이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울긴 울더라도 좀 뭘 먹이든가 재우든가 그럴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움직였다. 우선 창문이라도 좀 열려고 등을 돌리는데 정우진이 내 등에 달라붙었다. 허리에 팔을 감고 내가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등에 붙어서 따라왔다. 움직이기 불편했지만 떼어 낼 수가 없어서 그냥 내버려 두고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집 안에 들어오자 정신이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이불을 드럼 세탁기 안에 넣고 작은 냉장고를 열었다. 먹을 거라고는 물밖에 보이질 않아서 수납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른 김과 즉석밥, 레토르트 음식 몇 개와 라면 몇 봉지가 전부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내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라면 먹을래?”
“…….”
“배 안 고파?”
“고파.”
작게 들리는 코맹맹이 소리에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웃기라도 하면 혹시 또 울까 싶어서 최대한 침착함을 가장한 채 다시 물었다.
“라면 먹을까, 아니면 나가서 뭐 사 먹을까?”
“나가기 싫어.”
“그럼 라면 먹을래?”
등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좁은 원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뒤에 사람을 달고 다니는 게 불편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라면을 끓이려면 불도 써야 하는데 계속 이러고 있을 생각인가.
“…….”
“…….”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잠시 가만히 있어 봤지만 정우진은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제 흐느끼는 소리도, 훌쩍이는 소리도 안 나는 걸 보면 눈물은 그쳤다는 건데 잠깐 놓으라고 하면 또 울 것이 분명했다.
결국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질 못하고 최대한 조심조심 천천히 라면을 끓일 수밖에 없었다.
라면을 다 끓이고 나서야 정우진이 매운 걸 잘 못 먹는다는 게 떠올랐다. 라면 자체가 그렇게 매운 라면은 아니라 괜찮을 것 같기는 했지만 얜 고등학생 정우진이니까 어쩌면 내가 아는 정우진보다 매운 걸 더 못 먹을지도 몰랐다.
뜨거운 물이라도 더 넣어야 하나. 물에 씻어 먹으라고 해야 하나. 뭐 치즈나 그런 거라도 있으면 좀 넣어 줄 텐데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다 끓였어.”
“…….”
“…….”
“…….”
뒤에 붙어서 잠이라도 들었나. 아무런 말이 없어서 나도 잠깐 가만히 있는데 문득 비슷한 상황이 떠올랐다. 정우진도 가끔 이랬다. 내가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할 때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꼭 내 뒤에 붙어서 시위하듯 울었다. 그 정우진은 이 정우진보다 키가 훨씬 커서 내 허리가 아니라 목을 안고 따라다녔다.
“형.”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날 불렀다. 아깐 코맹맹이 소리더니 지금은 목소리도 훨씬 나았다.
“나 오늘 학교 안 갈래.”
“라면 먹고 학교에 전화해서 하루만 쉰다고 해.”
나도 이대로 정우진을 보내면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 할 거 같았다. 하루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말했는데 정우진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내일도 안 갈래.”
“뭐?”
“계속 안 갈래.”
무슨 소리야? 인상을 찌푸리며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을 잡아 억지로 정우진을 떼어 냈다. 처음엔 좀 버티더니 이내 떨어진 정우진이 벌게진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학교 안 다닐 거야?”
“응.”
“갑자기 왜? 학교를 왜 안 가?”
내 물음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그사이에 얼굴이 수척해진 것 같았다. 너무 안쓰러워 보여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가면…….”
“뭐?”
“……학교 가면…….”
“가면?”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질 않았다. 고개를 숙여 우물쭈물하고 있는 입에 귀를 가까이 대자 웅얼거리는 소리가 정확히 들렸다.
“학교 가면 형이랑 떨어져 있어야 되잖아.”
“…….”
“기껏 같이 살자고 해 줬는데.”
다시 울 것처럼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놀라서 허리를 펴고 얼른 말을 돌렸다.
“일단 먹고 다시 얘기하자.”
그사이 벌써 라면이 조금 불었다. 그릇에 덜어 아일랜드 식탁 위에 놓고 정우진을 앉혔다. 젓가락까지 쥐여 주자 뒤늦게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같이 살자고 한 것도 지금 당장 같이 살자고 한 게 아니라 학교 졸업하면 같이 살자고 한 건데.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하지 않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또 울까 봐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라면이라도 다 먹이고 해야 하나, 아니면 오늘은 그냥 더 이상 얘길 하지 말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젓가락으로 라면을 한 가닥씩 건져 먹고 있는 게 보였다. 아, 역시 이럴 줄 알았다. 차라리 라면이 아니라 맨밥에 김이나 싸 먹을걸.
“매워?”
“아니.”
“다른 거 먹을래?”
“괜찮아.”
정우진은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도저히 목구멍으로 뭐가 넘어가질 않아서 나도 결국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조용히 있던 정우진이 날 불렀다.
“형.”
“어? 매워?”
“아니. 형은 이상형이 뭐야?”
갑자기 이상형은 무슨 이상형이야.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하려다가 갑자기 든 생각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학벌 좋은 사람.”
“뭐?”
“난 학벌 좋은 사람이 좋아.”
“…….”
내 말에 정우진이 멀뚱멀뚱 날 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아닌데? 나 진짜 학벌 좋은 사람이 이상형이야. 학벌 좋고 번듯한 직장 있는 사람.”
“…….”
“자기 일 책임감 있고 성실하게 열심히 하는 사람.”
불만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날 보던 정우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 가닥씩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 웃긴 모습을 보다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었다.
“넌 꿈이 뭐야?”
“무슨 꿈?”
여전히 퉁명스러운 얼굴이었다.
“학교 졸업하면 무슨 일 하고 싶어?”
내 물음에 정우진이 눈을 크게 떴다. 졸업하면 뭐 하고 싶냐 물어보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나…….”
얼른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이는 정우진을 보니 괜히 불안해졌다. 대체 뭘 하고 싶어서 저러는 거지. 불안한 얼굴로 뒷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숨을 한 번 삼키더니 수줍어하며 입을 열었다.
“결혼하고 싶어.”
“…….”
아, 누가 정우진 아니랄까 봐. 놀랍지도 않은 그 말에 착잡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뭐가 되고 싶냐고.”
내 말에 정우진이 다시 뜸을 들였다. 저 입에서 또 무슨 정우진다운 말이 나올까 싶어 내심 기대가 되기도 했다.
“좋은…….”
“좋은?”
“좋은 남편.”
정말 기가 막힌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그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자,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던 정우진이 날 따라 웃었다. 계속 우느라 부어서 붉어진 눈가가 사르르 접혔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소리 없이 활짝 웃는 얼굴이 쐐기처럼 심장에 박혔다.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가 있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홀린 것처럼 웃는 얼굴을 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형, 아까 내가 말했던 거 있잖아.”
말했던 게 뭔지도 모르겠고 그냥 지금은 심장을 때린 충격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그거 사실 거짓말이야.”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거짓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살면서 거짓말 같은 거 좀 할 수도 있잖아. 게다가 거짓말했다고 스스로 말하기까지 했는데 그럼 됐어.
“형이 다른 사람 좋다고 하면 나 그 사람 죽일지도 몰라.”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나 싫어졌다고 하면 아무도 없는 곳에 가둬 두고 아무 데도 못 가게 할 거야.”
“…….”
“그러니까 다른 사람 좋아하지도 말고 나 싫어하지도 말아 줬으면 좋겠어.”
권유 아닌 권유를 하는 정우진을 황당한 얼굴로 보다가 말했다.
“그런 건 좀 속으로만 생각하면 안 되냐?”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으면 형이 모르잖아.”
“그래도 그런 건 좀 그냥 너 혼자만 알고 있어. 네가 모르는 거 같아서 해 주는 말인데 그런 게 정상적인 건 아니거든?”
아까 사랑스럽게 웃던 얼굴을 보며 받았던 감동이 산산조각 났다. 갑자기 피곤해져서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자 정우진이 조금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알아. 그래도 불안하단 말이야.”
“뭐가?”
“형이 학벌 좋은 사람이 이상형이라며.”
“뭔 소리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디 한번 계속 말해 보라고 팔짱을 끼고 허리를 펴자 정우진이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형이 학벌 좋은 사람이 이상형이면 내가 계속 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그럼 그동안 같이 못 있잖아. 고등학교도 다녀야 하고 대학교도 다녀야 하고 대학원도 가야 하는데. 한두 시간 있다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마음 바뀌면 어떡해. 형은 당연히 안 바뀐다고 하겠지. 근데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게 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마음은 그냥 바뀌면 끝인 건데 나는 그럼 매일 불안해하면서 학교 다녀야 하고……. 학교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학교 졸업하면 또 직장도 성실하게 열심히 다녀야 하고…….”
학교 다니기 싫다는 소리를 길게도 하는 정우진을 보며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 정우진이나 대학생 정우진이나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정우진은 그냥 정우진이었다.
“그럼 뭐 계약서 같은 거라도 써 줘.”
한숨을 내쉬는 날 보며 정우진이 웬일로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냥 마구 떼를 쓰거나 안 갈 거라고 버티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솔직히 계약서 같은 건 백 장이라도 써 줄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내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혼인 신고서나 그런 거…….”
“…….”
“…….”
자기가 말하고도 좀 무리수였나 싶었는지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게다가 내가 아무 말도 하질 않자 안절부절못하던 정우진이 결국 제 발이 저린지 말을 바꿨다.
“그럼 매일 하루도 안 빠지고 만나 준다고 약속해.”
정우진 성격을 생각하면 많이 물러선 제안이었다. 이것마저 싫다고 하면 또 가두니 뭐니 그런 소리를 할 게 뻔했다. 그리고 어차피 정우진이 말하지 않아도 매일 만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알았어. 학교 끝나면 와. 매일.”
내 말에 시무룩했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문자 보내면 답장도 바로 보내 줘야 돼.”
“확인하면 바로 보내 줄게.”
“전화도 바로 받아야 돼.”
“알았어.”
“무조건 잠도 나랑 같이 자야 돼.”
점점 늘어나는 요구에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지막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왜!”
안 된다고 말하는 순간 정우진이 울상을 짓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랑 같이 산다며? 그럼 잠도 같이 자야지!”
“너 졸업하고 같이 살자고 한 거잖아.”
“아, 진짜 그놈의 학교!”
정우진도 일하기 싫다고 매일 징징거렸는데, 고등학생 정우진은 학교 가기 싫다고 징징거리고 있었다. 투덜거리던 정우진이 날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주말만이라도 같이 자.”
매 주말마다 같이 잘 순 없지 않을까. 성인도 아니고 미성년자인 아들이 주말마다 다른 사람 집에서 자고 온다고 하면 부모님도 걱정할 테고. 하지만 이것도 싫다고 하면 울어 버릴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중에 뭐 어떻게든 되겠지. 조금 안일하게 생각하며 대답하자 정우진이 쉬지도 않고 말했다.
“가끔 데이트도 해 줘.”
“그래.”
“매일 좋아한다고 말해 줘.”
“알았어.”
“웃어 줘.”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대답하다가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치자 정우진이 간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웃으면서 내 이름 불러 줘.”
“…….”
“내가 없어도 내 생각해 줘.”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가만히 날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도 가만히 정우진을 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겹쳤다.
“네가 없어도 네 생각 할게.”
“…….”
“길을 걷다가 네가 보이면 웃으면서 네 이름 불러 줄게.”
“…….”
“만약 새벽에 나쁜 꿈 꿔서 일어나거나 잠 안 오면 등도 만져 줄게.”
내가 웃으며 말하자 하얀 얼굴에 조금씩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 천둥 번개 쳐서 큰 소리 나면 이불 속에서 손잡고 같이 자자.”
“…….”
빤히 날 보고 있던 눈동자가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시선이 다시 내게 닿았을 때 쭉 해 주고 싶었던 말을 했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많이 좋아했어.”
“…….”
“너도 몰랐지? 지금도 너 좋아해.”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밖에서 계속 들려오던 작은 소음도 시계 초침이 움직이던 소리도 전부 멎었다. 들리는 건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뿐이었다.
“나 그쪽으로 가도 돼?”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내 앞에 섰다. 고개를 들고 가만히 정우진을 쳐다봤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가가 젖어 갔다. 그 자리에 서서 멀거니 쳐다보기만 하는 정우진을 보다가 팔을 벌리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안겨 왔다.
“나 학교 열심히 다닐게.”
“그래.”
“좋은 학교 졸업하고 좋은 직장도 들어갈게.”
웃느라 대답을 못 하자 정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 젖은 눈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웃음기를 거두고 상체를 뒤로 빼자 정우진이 울상을 지었다.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이런 건 네가 졸업할 때까지 좀 안 했으면 좋겠어.”
“또 졸업하면이야?”
어쩔 수가 없었다. 뽀뽀가 뭐 그렇게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래 이런 건 처음이 중요했다. 처음 한 번 시작하면 두 번은 더 쉬웠고 세 번은 더더욱 쉬워진다. 여기서 뽀뽀했다가 내일 정우진이 울면서 또 해 달라고 징징거리면 안 해 줄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뽀뽀가 키스가 되고 그러다가 또 세우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럼 이제 도와주지도 않을 거야?”
아니나 다를까, 정우진이 우려했던 말을 꺼냈다. 주어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무슨 말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또 손에 힘 안 들어가면 어쩌지?”
“그럼 그냥 가라앉혀.”
“안 가라앉으면 어떡해.”
“찬물로 씻어.”
“그럼 형도 안 할 거야?”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튀는 질문에 인상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난 왜?”
“나는 못 하게 하면서 형은 하면 불공평하잖아.”
“내가 언제 못 하게 했어? 그냥 너 혼자 하라 그랬지.”
“그럼 나도 형 할 때 도와줄게.”
“…….”
정말 말이 안 통한다. 대화를 하고 있는데도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거대한 벽 앞에 서서 소리를 질러도 이것보단 안 답답할 것 같았다.
“형 할 때도 내가 도와주면 되잖아.”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갑자기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럼 혼자 하기만 하면 되는 거면 형 무릎 위에 앉아서 해도 돼?”
“…….”
“그건 되지? 어?”
“…….”
“어? 어?”
얠 진짜 어떻게 하면 좋지.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지쳐서 정우진을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먹은 라면 그릇을 싱크대에 넣으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뒤에서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근데 자고 일어났을 때나 아니면 자기 전에 갑자기 설 때도 있잖아. 그럼 그럴 때는…….”
“안 된다고 했지.”
“그런 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서지 마, 서지 마, 이런다고 안 서는 것도 아니고.”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렸다. 내 등을 안고 있던 정우진이 팔을 놓고 내 앞에 서서 날 올려다봤다. 진지하게 너는 아직 미성년자고 나는 성인이라고 말하려는데 정우진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입을 열었다.
“근데 아까 형은 안 섰어?”
“뭐?”
“내 거 만져 줄 때.”
“섰겠냐, 고삐리 새끼야.”
진지고 나발이고 황당해서 인상을 쓰며 말하자 정우진이 애처럼 힝 소리를 냈다. 그래 봤자 안 통했다.
“귀여운 척하지 마.”
절대 안 된다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듣기라도 한 건지 정우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 * *
정우진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집 안을 뒤져 포장을 뜯지도 않은 새 이불을 찾아냈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있는데 설거지를 다 한 정우진이 뒤에서 내 허리를 안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결혼한 거 같다.”
뺨을 등에 대고 얼마나 비비는지 옷단이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이제야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얜 너무 낯가림이 없는 것 같았다. 나야 미래에서 왔으니까 그렇다 쳐도 이 고등학생 정우진은 날 언제 봤다고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치대는 건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말을 튼 게 어젠데 스킨십을 하거나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형.”
신기해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날 불렀다.
“무슨 생각 해?”
“네 생각.”
“내 생각 어떤 거?”
이불을 다 펴고 널브러져 있는 베개를 주워 정우진에게 건넸다.
“너 뭐 좋아해?”
“형.”
“아니, 먹을 거.”
“형이 좋아하는 거.”
생각은 하지도 않는지 대답하는 속도가 거의 찌르면 튀어나오는 해적 룰렛 수준이었다.
“나중에 일어나서 먹게.”
“난 형이 좋아하는 거 먹을래.”
세 번이나 같은 걸 물어봤는데도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내가 아는 정우진은 군고구마를 제일 좋아하는데 얘는 다를지도 몰라서 물어본 건데. 누운 정우진에게 이불을 덮어 주며 물었다.
“너 혹시 고구마 좋아해?”
“어떻게 알았어?”
“그냥 그럴 거 같아서.”
혹시나가 역시였다. 다른 건 몰라도 고구마는 자주 삶거나 구워 봐서 그럭저럭 만질 수 있는 요리 재료였다.
“근데 그걸로 끼니 때우기는 좀 그렇지 않나? 간식으로 먹으면 몰라도.”
정우진 옆에 머리를 괴고 모로 누웠다. 똑바로 누워 있던 정우진이 고개를 돌려 가만히 날 보다가 내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잘 거야?”
“거의 못 잤잖아. 안 피곤해?”
“형도 자?”
“나도 자야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그사이에 신경을 너무 썼더니 눕자마자 눈이 가물가물해졌다.
“나 잘 때 어디 안 갈 거지?”
불안한 얼굴로 정우진이 물었다.
“안 가.”
“만약 어디 가면 나 깨워.”
“알았어.”
“화장실 가는 거라도 깨워야 돼.”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걸 보며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웃으면서 알았다고 다시 말해 줬지만 정우진은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얼른 자.”
“굿나잇 키스 같은 건 안 해 줘?”
이쯤 되니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정우진도 자기가 말해 놓고 별로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냥 일단 되든 말든 지르고 보는 것 같았다.
“응.”
“그럼 내가 해 줘도 돼?”
“우진아.”
한숨을 내쉬며 이름을 부르자 정우진이 눈을 크게 뜨고 토끼 같은 얼굴로 날 쳐다봤다.
“빨리 자. 나 피곤해.”
“형은 너무 냉정한 거 같아. 나 좋아한다는 거 진짜야?”
초롱초롱한 검은색 눈을 가만히 보다가 손을 들어 눈가를 덮었다. 정우진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손바닥에 속눈썹이 스쳤다.
“많이 좋아해.”
“진짜?”
“좋아 죽겠어.”
내 말에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아까보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 지금 귀찮지?”
“응. 자, 빨리.”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온 내 대답에 정우진이 결국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걸 보며 문득 내가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부터 웃고 있었지. 눈가를 덮고 있는 손을 위아래로 살살 움직이자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움직였다. 그대로 손을 위로 올려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자 정우진이 실눈을 뜨고 날 쳐다봤다.
“잘 자.”
정우진이 다시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위로 눈알을 굴리는 게 보였다. 속눈썹이 떨리기도 했고 몸을 뒤척이기도 했지만 피곤하기는 했는지 십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
“…….”
자는 얼굴이 너무 아이 같았다. 고등학생이면 아직 어린 게 맞긴 했지만 내가 아는 정우진은 이런 얼굴이 아니니까 더 어려 보이는 것 같았다.
골격도, 키도 훨씬 작았고 상처가 난 자리에 울퉁불퉁하게 새살이 돋아 흉터가 남은 정우진의 손과 달리 이 작은 정우진의 손은 섬섬옥수처럼 깨끗했다. 툭하면 우는 건 비슷한 것 같고, 날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조금씩 눈가가 붉어지는 것도 비슷하긴 했다.
얘도 대학교에 가면 날 형이 아니라 선배라고 부를까. 정우진은 형이라고 절대 안 불러 주던데. 아, 얘도 내 이름 못 부르려나. 아까 이름 불러 보라고 시켜 볼걸. 도대체 이름 부르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몇 년을 만났는데 그거 하나를 제대로 못 하는지.
나도 정우진이 그랬던 것처럼 서주라고 불러 달라고 앵무새처럼 말하다 보면 언젠가는 불러 주지 않을까. 아니, 근데 뭐. 호칭 같은 건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선배라고 부르든 형이라고 부르든 이름으로 부르든 그런 건 그냥 아무래도 좋다.
뭐라고 부르든 정우진이 나를 부르고 있다는 건 변함이 없었고, 어떤 식으로 불러도 정우진이 날 쳐다보는 눈은 항상 같았으니까.
하지만.
“…….”
하지만 이 정우진이 부르는 형은 정말 나일까. 이 정우진이 알고 있는 강서주는 많이 좋아한다는 말 같은 건 안 해 줄 텐데. 그럼 강서주는 어디로 간 거지. 고등학생 정우진이 울면서 많이 좋아한다고 했던 그 강서주는 어디로 간 걸까.
내가 사랑하는 정우진은?
만약 이게 꿈이 아니라 정말 현실이라면, 내가 정말 평행 세계의 내가 된 거라면 원래 내가 살던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냥 그대로 사라져 버린 걸까. 아니면 여기에 살던 내가 그 세상으로 간 걸까.
정우진은 스무 살의 나와 함께 있을까.
“…….”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우린 서로 바뀐 건가? 왜지? 갑자기 왜 바뀌었을까.
스무 살의 내가 그쪽 세계의 정우진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하루 만에 상황이 정리되진 않겠지. 아, 또 얼마나 울까. 분명 넌 뭐 하는 새끼냐고 할 텐데 그거 듣고 정우진이 졸도하진 않을지 걱정이 됐다.
그래도 결국엔 어떻게든 되겠지.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하루에 수십 번씩 말해 주고 안아 주고 눈을 맞추고 함께 시간을 보내겠지.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하거나 어쩌면 나처럼 평행 세계에서 온 다른 세상의 나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좋아하지 않을까.
어쨌든 스무 살의 나랑은 뭘 해 본 적도 없고 좋은 추억도 없으니 이것저것 해 보고 싶었던 걸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까. 그렇겠지?
“…….”
아마 그렇지 않을까.
“…….”
그러면 어떡하지.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아서 눈을 감았다.
나를 나라고 결정하는 건 겉모습이 아니다. 한 사람을 그 사람이라고 결정하는 건 그 사람이 살아왔던 기억과 추억이다. 하물며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는 강서주는 기억도 추억도 아닌 거기에 존재하는 내 모습의 다른 사람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다. 그냥 겉모습이 같을 뿐인, 다른 사람.
“…….”
여기에 있는 정우진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정우진은 가엾고 사랑스러웠지만 내가 아는 정우진이 아니다. 내가 원래 있던 세상의 시간만큼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낸다 한들 이 애가 내 기억 속의 정우진이 될까.
나는 지금 외딴섬에 홀로 떨어진 거다.
아주 먼 곳에서 길을 잃었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영영 소식을 듣지도, 만나지 못한다는 거다. 영원히, 죽을 때까지.
내가 정말로, 정말 다시 내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내 정우진이 있는 곳으로 갈 수가 없게 된다면.
그건 정우진이 죽었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아.”
뒤늦게 깨달은 단 하나의 사실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게 결론이었다. 이것만이 내가 인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이었다.
어떤 단어로도 이 기분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꿈에서도 감히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숨을 쉬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처럼 정우진은 내 옆에 있었다. 내 미래에, 내 꿈에, 내가 생각하는 모든 곳에 항상 있었다.
나는 정우진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
내가 처한 현실을 자각하자 숨을 쉬는 게 힘들어졌다. 다급하게 상체를 일으켜 가슴을 부여잡는데 앞이 보이질 않았다. 초점이 제대로 맞질 않고 부옇게 흐리기만 해서 눈을 질끈 감는데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형, 뭐 해?”
정우진이었다.
“왜 그래?”
눈꺼풀이 무거워서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누가 가슴 위에 올라서 있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가슴을 부여잡고 상체를 숙이자 정우진이 내 어깨를 잡았다. 눈을 떠야 하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다.
“형!”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고.
“윽…….”
악다문 잇새로 울음이 터지려는 순간 정우진이 내 어깨를 잡고 날 일으켰다. 구부리고 있던 상체가 갑자기 확 들리자 반사적으로 눈이 떠졌다.
“선배.”
관자놀이 쪽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서 귀까지 축축했다. 부옇게 흐렸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자 코앞에서 정우진이 보였다.
“왜 울어요? 어디 아파요? 나쁜 꿈 꿨어요?”
“…….”
“왜 그래요? 혹시 어디 아파요?”
커다란 손이 내 눈가와 이마를 연신 쓸었다. 멍하게 정우진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텔레비전이 보였다. 얼마 전에 보다가 재미가 없어 안 본 주말 드라마를 하고 있었다. 여긴 우리 집이잖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머리를 쓸어 넘긴 손이 목가에 닿았다. 시선을 돌리자 정우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상황 파악이 안 돼서 느리게 눈을 감자 정우진이 내 눈꼬리 끝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열나는 거 같은데.”
“…….”
“병원 갈래요? 아파서 울었어요?”
“…….”
“선배, 아파요?”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질 않자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조금씩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일그러지고 있는 하얀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정우진이다.
“흑…….”
“선배?”
내 세상이다.
* * *
목을 졸라 죽일 것처럼 세게 끌어안아도 힘 좀 빼라든지, 좀 놔 보라든지 그런 말은 한 번도 하질 않았다. 팔이 아파서 결국 내가 힘을 풀 때까지 내 뒷머리와 땀에 젖은 목덜미를 끊임없이 만져 주던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계속 우느라 부어서 제대로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눈가에 열이 올라서 눈을 계속 깜빡거리는 날 가만히 보기만 하던 정우진이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괜찮아요?”
“…….”
“악몽이라도 꿨어요?”
“…….”
“열이 좀 나는데 혹시 아파서 울었어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뒤늦게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눈물이 안 멈췄던 거지. 아니, 애초에 그렇게까지 울 필요가 있었을까. 자다 깬 거 보면 그냥 꿈이었던 거 같은데.
원래 꿈을 꿔도 자고 일어나면 잘 기억을 못 했다. 하지만 이 꿈인지 뭔지는 아직도 너무 생생해서 마치 정말 내가 겪었던 일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 나 혼자 물에 떠 있는 것 같던 그 지독하고 끔찍했던 감정이 다시금 떠오르자 눈가가 뜨거워졌다.
다시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정우진이 양손으로 내 뺨을 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정우진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빤히 날 쳐다봤다.
“선배.”
아까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왜 울어요?”
“…….”
그 말에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관자놀이 쪽으로 눈물이 흘렀다. 정우진이 내 눈가에 입을 맞추자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 내 눈에 가만히 입술을 대고 있던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이 움직여서 눈이 간지러웠다. 나지막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불안하게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씩 안정이 되는 게 느껴졌다. 숨을 쉬는 게 한결 편안해져서 손을 뻗어 어깨를 밀어냈다.
“지금 몇 시야?”
“다섯 시요.”
내가 얼마나 잔 건지도 모르겠다. 자기 전에 소파에 기대서 텔레비전을 봤던 거 같은데. 멍하게 있자 날 내려다보던 정우진이 다시 내 눈가에 입을 맞췄다. 눈가를 누르고 있던 입술이 젖은 관자놀이 쪽을 지나 귓가에 닿았다.
“왜 울어요?”
“…….”
“제가 뭐 잘못했어요?”
불안한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흔들자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그럼 뭐 섭섭한 거 있어요?”
“없어.”
“아파요?”
“아니.”
“무서운 꿈 꿨어요?”
“…….”
그 말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게 정말 악몽이었나. 꿈인가. 꿈이었던 건가. 꿈인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게 정말 꿈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선배.”
다시 멍해지자 정우진이 날 불렀다.
“너 혹시 누구 안 만났어?”
“부모님이랑 친척들 만나고 오다가 모르는 사람 만났는데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도 정우진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누가 길 물어봤는데 대답 안 했어요.”
“누가?”
“몰라요. 진짜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혹시 내가 뭐라고 하는 거 같나? 그냥 물어본 건데 취조라도 당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에 잠깐 당황하는데 정우진이 울상을 지었다.
“정말이에요. 아, 소리도 안 냈어요.”
“아니……. 그럼 그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은 안 만났어? 가족이랑 친척들 빼고.”
정우진은 오늘 거의 5년 만에 하는 가족 모임에 다녀왔다. 친척들까지 다 모이는 자리라 가지 않겠다는 걸 억지로 보냈던 게 생각났다. 저녁은 먹지 않고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저녁엔 같이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었는데.
“길 물어본 사람 말고 저한테 말 건 사람은 없었어요. 맹세할 수 있어요.”
“나 못 봤어?”
자꾸 이상한 헛소리를 하는 걸 무시하고 혹시나 싶어 물었다. 만약 그게 꿈이 아니라 정말 나랑 그곳의 내가 바뀐 거라면, 어쩌면 스무 살의 나와 정우진은 만났을지도 몰랐다.
“네? 거기 왔었어요? 언제요?”
“아니, 나 말고…….”
“왜 전화 안 했어요? 언제 나왔는데요? 그럼 거기 왔다가 다시 집에 온 거예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말하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어깨를 잡고 있는 손을 힘없이 밀어내자 정우진이 손을 놓으며 이번엔 내 손목을 잡았다.
“저한테 왜 전화 안 했어요? 갑자기 답장 안 와서 자는 줄 알았는데.”
“잤어. 안 나갔어.”
“아까 선배 못 봤냐면서요.”
“그건…….
말을 하다 말고 힘이 없어서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내 목덜미를 쓸었다. 눈을 감았다 뜨는데 몸이 위로 붕 떴다. 정우진이 날 들고 침실 쪽으로 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어깨에 몸을 기대자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야, 내가 꿈을 꿨는데…….”
가만히 눈을 감고 말하는데 귓가로 심장 소리가 들렸다.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잠시 고개를 들어 정우진을 쳐다봤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숙인 정우진이 조금은 불안해 보이는 눈으로 물었다.
“무슨 꿈이요?”
“…….”
말없이 정우진을 보다가 다시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두근두근 귓가로 들리는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니 머릿속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단어와 문장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네 꿈 꿨어.”
“근데 왜 울어요? 꿈에서 제가 뭐 잘못했어요?”
방으로 들어와 침대 앞에 선 정우진이 울상을 짓고 물었다. 그걸 보며 고개를 흔들자 정우진이 날 안은 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네가 고등학생이 된 거야.”
“고등학생이요?”
“너 고등학교 다닐 때 키 작았지? 나보다 작던데.”
“고등학생?”
어지간히도 뜬금없었는지 두 번이나 되묻는 걸 보며 작게 웃었다.
“근데 난 그게 꿈인 줄 몰랐어.”
“어디서 만났는데요?”
“스무 살 때 살던 원룸에서 만났는데……. 나는 스무 살이었어. 넌 고등학생이었고.”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해 줄 말이 별로 없었다. 꿈에서 고등학생 정우진이 나 좋다고 울면서 고백하더라. 근데 갑자기 좆이 서서 내가 만져 줬다. 이런 걸 말을 해도 되나.
어차피 꿈이었고 고등학생 정우진도 정우진이니까 상관없을 것 같기는 한데, 내가 이 정우진과 그 정우진은 다른 사람이라고 확실하게 인식을 해서 그런지 왠지 말하기가 찝찝했다.
“근데요?”
내가 아무 말도 하질 않자 정우진이 재촉하듯 물었다.
“음……. 그냥 그랬어.”
“뭐가 그래요? 왜 울었는데요?”
운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하지만 그중 어느 것 하나라도 말해 줄 수가 없었다. 다시 못 만나는 줄 알고 울었다는 말을 어떻게 하냐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한다.
“넌 만약 내가 스무 살이 되면 어떨 거 같아?”
“스무 살이요? 그냥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던 정우진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선배는 선배잖아요. 나이 어려진 것밖에 없는데 딱히 뭐가 어떨 거 같진 않은데.”
“내가 몸이 어려진 게 아니라 정신도 같이 스무 살 때가 되면?”
“…….”
이번 질문에는 쉽게 대답을 못 했다. 점점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니 듣지 않아도 어떤 대답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점점 상상이 구체적이 되어 가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낯빛이 창백해지는 걸 보며 말을 돌렸다.
“스무 살짜리 내가 막 너한테 안아 달라고 하면 어떡할 거야?”
“네?”
“너한테 좋다고 매달리고 그러면 어쩔래?”
웃으며 묻자 정우진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사색이 됐던 얼굴과는 좀 달랐지만 이번에도 딱히 좋은 낯빛은 아니었다.
“걔가 그랬어요?”
미간을 구기고 눈에 힘을 준 걸 보니 고등학생 정우진이 날 노려보던 얼굴이 떠올랐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둘이 닮았다. 나이만 다르지 똑같은 사람이니까 닮은 게 당연하겠지만.
“걔가 선배한테 막 안아 달라 그러고 좋다고 매달렸어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래서 선배는 뭐라고 했는데요?”
“나도 좋아한다고 했지.”
“뭐라고요?”
“그럼 싫다고 하냐? 네가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을 해 봐. 키도 작고 하얗고 눈도 반짝반짝 빛나는 내가 울면서 우진아, 나 좀 좋아해 줘. 이러는데 거기에 대고 너 같으면 입 닥치라고 할 수 있겠냐?”
“…….”
내 말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적지 않게 당황했는지 돌멩이처럼 굳어서 숨도 못 쉬고 있었다. 괜히 찔려서 좀 울컥한 것도 있긴 하지만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러니까 나도 잘못한 게 아니다. 좋다고 말한 건 그렇다 쳐도 미성년자 좆을 잡고 흔든 게 좀 마음에 걸렸지만 어차피 꿈이라고 생각하니 뭐 어떤가 싶었다.
아니, 그래도 사실 양심에 많이 찔렸다.
“거봐, 너도…….”
한숨을 내쉬며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지금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정우진 무릎 위에서 양다리를 옆으로 빼고 앉아 있었다. 머리를 어깨에 기대고 온몸에 힘을 뺀 채 눈만 깜빡이면서 말을 하는 중이었다. 내가 지금 이 얘기를 굳이 하는 이유가 뭐냐면 엉덩이 쪽에 단단한 게 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원망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요…….”
“그냥 예를 든 거잖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단단함에 차라리 여기에서 비키는 게 낫겠다 싶어 몸을 움직이자 정우진이 내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어디 가요?”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아니,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정우진을 보다가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을 툭툭 쳤다.
“놔 봐, 내가 해 줄게.”
내 말에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뭘 해 줘요?”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나 보이는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싫어?”
설마 싫다고 할 줄은 몰라서 당황한 얼굴로 묻자 정우진이 아까보다 더 화난 것 같은 얼굴로 이를 갈았다.
“입으로 빨아 주기라도 할 거예요?”
“……그럴 수도 있지, 왜?”
사실 그냥 손으로 해 주려고 했는데 원하면 입으로 해 줄 마음도 충분히 있었다. 입으로는 몇 번 안 해 봐서 정우진이 하는 것처럼 솜씨 좋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아니, 정우진이 이런 일로 짜증을 부릴 리가 없는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걔 좆도 빨아 줬어요?”
의아해하고 있는 순간 정우진이 한 말에 드디어 깨달았다. 정우진이 왜 갑자기 이렇게 짜증을 부리고 있는지.
“고등학생이었다고.”
어이가 없어서 웃으며 말했지만 구겨진 미간은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고등학생이 뭐요? 그게 무슨 상관인데.”
“미성년자잖아. 난 스무 살이었다고. 내가 걔 좆을 빨면 그거 원조 교제 아니냐?”
“그 새끼가 돈도 줬어요?”
그냥 웃자고 한 말인데 목소리가 높아졌다. 조금만 더 있으면 고함이라도 칠 것 같은데 나는 그게 왜 이렇게 웃긴지 모르겠다.
“그 새끼라니, 우진이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마.”
“우진이?”
“고등학생 우진이 진짜 귀엽더라. 내가 라면 끓여 줬는데 면을 한 가닥씩 먹는 거야. 매워서 그랬나 봐.”
화가 나서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점점 황망하게 변해 갔다.
“어떻게 다른 사람 귀엽다는 소리를 그렇게 쉽게 해요?”
“진짜 귀여웠으니까.”
“그래서 라면 한 가닥씩 먹는 어린 새끼랑 같이 있으니까 좋았어요?”
그 말에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서 웃어 버렸다. 웃느라 몸을 움직이자 잠시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어린 새끼 좆은 안 빨았는데 네 거 빨아 줄까?”
“됐어요.”
“진짜 걔 거는 안 빨았어.”
“그럼 뭐 했는데요?”
사실대로 말할까 말까, 정말 아주 잠깐 고민하는 사이 정우진은 뭘 하긴 했다는 걸 눈치챈 듯 황망한 얼굴로 헛숨을 내쉬었다.
“너였잖아.”
“저 여기 있잖아요. 그리고 그때 난 집에도 없었는데.”
그랬지, 넌 거기에 없었지. 장난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서운해하는 거 같아서 더는 놀릴 수가 없었다.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너도 귀여워.”
“됐어요. 어린놈이 더 귀엽겠지.”
“맞아, 귀엽기는 걔가 더 귀여웠어.”
흔들리는 눈을 가만히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벌리고 정우진 무릎 위에 앉아 목을 끌어안았다.
“그래도 걔보다는 네가 더 좋아.”
“…….”
“야.”
“그 새끼한테는 우진이라고 하면서 나는 왜 ‘야’예요?”
정우진이 내 허리를 꽉 안으며 아까보다는 덜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손가락 끝으로 뒷목을 만지다가 귓바퀴를 쓰다듬자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 만약에 더 어렸을 때 만났으면 어땠을 거 같냐?”
“어렸을 때요?”
“너랑 나랑 스무 살 되기 전에.”
그럼 어쩌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고개를 숙이자 바지 위가 가여울 정도로 부풀어 있는 게 보였다.
“진짜 괜찮아요.”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정우진이 말했다. 그 말에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아까부터 뭐가 자꾸 괜찮대. 나 진짜 안 빨았다니까?”
“그래서 그런 거 아니에요. 선배 열나잖아요.”
“뭐라고?”
열은 갑자기 무슨 열? 내 물음에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눈가가 젖어 있는 게 이미 평소 같았으면 알몸이 되어도 예전에 됐을 얼굴이었다.
“진짜 열나요.”
“안 나는데?”
“나요.”
정우진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는 걸 보니 진짜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아까부터 눈도 좀 뻑뻑하고 머리도 아픈 것 같고 으슬으슬 추운 것 같기도 한 걸 보면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근데 그게 왜? 혹시 아까 울어서 그런가?
“아까 아파서 운 거 아니야.”
얼마나 놀랐으면 애가 이러나 싶어서 필사적으로 말했지만 도무지 들어먹질 않았다.
“그럼 왜 울었는데요?”
“…….”
대답하지 못 하는 걸 정말 아파서 울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진짜 아닌데. 인상을 찌푸리고 정우진을 보다가 붉어진 눈가에 입을 맞췄다. 꾹 눌렀다가 입술 쪽으로 고개를 틀자 입술이 채 닿기도 전에 정우진이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아까 괜찮다고 한 게 누군데. 어이가 없어서 입술을 맞추고 웃자 정우진이 날 따라 웃는지 진동이 느껴졌다.
혀를 얽고 입 안을 핥았다. 몇 번이나 고개를 움직이고 방향을 틀면서 더 깊숙이 안쪽까지 들어온 혀가 입천장을 훑고 지나갔다. 손을 내려 버클을 풀자 정우진이 내 손목을 잡았다.
“선배.”
정우진이 눈을 감았다 뜨면서 말했다.
“진짜 뜨거워요.”
“네 좆이 더 뜨거워.”
“다 나으면 해요. 다 나으면 하루 종일 해 줄게요.”
“난 하루 종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지금 한 번만 하고 싶어.”
“한 번만 할 자신이 없어요.”
거의 울 거 같은 목소리였다. 누가 보면 언제는 한 번만 한 줄 알겠다. 한 번도 딱 한 번만 해 본 적이 없으면서 좀 울었다고 갑자기 이러는 게 어이없었다. 고등학생 정우진이 도와 달라고 보채던 기분이 뭔지 왠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손목이 잡히긴 했지만 못 움직일 정도로 세게 힘을 주고 있는 건 아니었다. 거의 억지로 벗기다시피 버클을 풀고 속옷 안으로 손을 넣자 정우진이 더운 숨을 뱉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바지 안으로 손을 뻗었다. 너무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막을 수도 없었다.
“야, 나 말고……!”
뒷목이 당겨져 허리를 굽히자 정우진이 내 입 안으로 혀를 넣었다. 이가 부딪칠 정도로 다급하게 입을 맞추면서 속옷 안에 있던 성기를 꺼내 제 것과 내 것을 같이 잡고 비비기 시작했다. 성기가 마찰될 때마다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과 박동이 너무 선명했다.
“하아.”
정우진이 입술을 떼지 않고 떨리는 숨을 뱉었다. 몇 번 문지르지도 않았는데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눈을 감고 있던 정우진이 눈을 떠 날 쳐다봤다. 붉게 젖은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래쪽으로 피가 몰리는 걸 느꼈다.
“윽…….”
너무 갑작스럽고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숨이 턱 막혔다. 물밀듯 쏠려오는 흥분에 떨리는 손을 내려 단단하게 발기해서 젖어 있는 성기의 기둥을 붙잡았다. 한 손으로 다 잡히질 않아 양손으로 두 개를 겹쳐 잡자 정우진이 나지막하게 욕지거릴 내뱉었다.
“선배.”
입술과 가까운 곳에서 더운 숨이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 뜨자 잡아먹히는 것처럼 입술이 맞물렸다. 젖은 혀가 입천장을 문지르고 내 혀를 가져가 일부러 소리를 내면서 빨았다. 입술이 부딪치고 가쁜 숨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질척거리는 물소리와 헐떡이는 숨소리뿐이었다.
“선배.”
귀두 끝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선액이 줄줄 흘러 손을 적셨다. 문지르다가 미끄러져 잠시 손을 떼자 정우진이 내 귓불을 물었다.
“못하겠어요?”
“귀, 귀에 대고 말하지 마.”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부르르 허리가 떨려서 말을 더듬자 정우진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손이 옷 안으로 들어와 소름이 돋은 등을 쓸어 만졌다.
“좆 다시 잡아 봐요.”
“씨발, 귀에……. 으읏!”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드럽고 질척거리는 게 귀를 핥았다. 놀라서 목을 움츠리면서 상체를 뒤로 빼자 발정 난 짐승처럼 잔뜩 흥분해서 건드리면 울 것 같은 얼굴이 보였다. 헐떡이느라 벌어진 입 안으로 피가 날 것처럼 빨개진 혀가 보였다. 홀린 것처럼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아까랑 똑같이 이가 부딪칠 정도로 급한 입맞춤이었다. 다를 것 없이 혀를 섞고 또 다를 것도 없이 입 안을 빨아도 질리지가 않았다. 빠듯하게 선 성기가 아파서 허리를 들썩이다가 손을 내려 기둥을 훑었다.
발기한 성기가 크게 박동하면서 귀두 끝에서 울컥 뜨거운 게 흘렀다. 사정한 건가 싶어 입술을 떼고 아래쪽을 보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내 뒷목을 세게 잡고 더욱 깊게 입을 맞춰 왔다. 숨이 부족해서 밀어내도 떨어지지가 않았다. 타액이 질질 흐르고 숨이 막혀서 입 안으로 우는 소리가 날 때까지 놔주질 않았다.
“헉……. 흑, 하아…….”
겨우 떨어져 크게 숨을 들이켜자 정우진이 덜덜 떨리고 있는 내 턱을 혀로 핥아 문질렀다. 코앞에서 숨이 부족해 우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손을 내려 겹쳐져 꺼덕이고 있는 성기를 한 손으로 꽉 잡았다.
위아래로 느리게 문지를 때마다 젖어서 찔꺽대는 소리가 커졌다. 점점 커지기만 하는 쾌감에 눈을 제대로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숨을 쉬어도 숨이 차서 개처럼 입을 벌리고 헐떡거렸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새까만 눈이 날 쫓았다.
“좋아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왜 이렇게 숨이 부족한 거 같지? 잠깐 의문이 들었지만 커다란 손이 귀두를 문지르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눈앞이 깜빡거릴 만큼 좋아서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무서울 만큼 예쁘게 웃었다.
“씨발, 진짜…….”
온몸이 덜덜 떨렸다. 눈앞에 보이는 얼굴에는 욕정이 들끓고 있었다.
“저도 너무 좋아요.”
“가, 갈 것 같…….”
숨이 모자라서 헐떡이느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가 않았다. 신음과 별다를 바 없는 말을 겨우 다 내뱉기도 전에 배 속에서 뭔가가 치밀었다.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쳐들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전부 짜내지자 온몸에 힘이 빠졌다. 목덜미에 이가 박히고 있는데도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단단한 어깨 위에 쓰러져 얼굴을 기대자 정우진이 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너무 좋은데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말 아팠던 게 맞는지 급격하게 몰려오는 피로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 씨발…….”
“선배?”
“존나 힘들어…….”
단말마 같은 말을 내뱉고 눈꺼풀을 닫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 * *
너무 조용했다.
감고 있는 눈을 뜨지도 않고 팔을 움직여 옆자리를 더듬거렸다. 아무리 더듬대도 만져지는 게 없어서 고개를 돌려 눈을 뜨자 빈자리만 보였다. 정우진은 잘 때 잘 뒤척여서 자고 일어났으면 베개나 이불이 구겨져 있을 텐데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암막 커튼이 쳐진 어두운 방 안엔 공기 청정기 불빛만 보였다. 멍하게 푸른색 불빛만 보고 있자 조금씩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어제 그대로 잠들었나. 옷을 갈아입히기라도 했는지 잠들기 전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살갗도 보송한 걸 보면 뒤처리까지 전부 다 한 것 같았다.
하지 말자는 걸 좆이 뜨겁니 뭐니 해서 일부러 하자고 했는데 먼저 잠든 게 좀 민망했다. 잠깐 이마를 짚고 있다가 침대에서 내려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한숨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잠들기 전보다는 훨씬 몸이 가벼웠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자 주방 쪽에서 소음이 들렸다.
소리가 난 곳으로 가자 정우진이 등을 지고 뭔가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워낙 소리에 민감해 뭔가를 하다가도 내가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만 들려도 아는데 오늘은 알아채는 게 늦었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가 등 뒤에서 끌어안자 놀랐는지 어깨가 크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선배?”
“뭐 해?”
“언제 일어났어요? 와, 진짜 놀랐어.”
숨을 몰아쉬며 하는 말에 손을 올려 가슴께를 더듬었다. 손바닥으로 두근두근 심장이 빨리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뭐 하고 있었는데?”
“죽 끓이고 있었어요.”
“아니, 뭔……. 그냥 열 좀 나는데 뭐 그렇게 유난스럽게 굴어.”
잠들기 전에 있었던 일까지 떠오르자 갑자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을 풀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내 팔을 잡고 놔주질 않았다.
“열 좀 나도 아픈 건 아픈 거잖아요.”
“이제 안 아파.”
“아직 좀 뜨거운 거 같은데.”
“네 손이 차가운 거야. 뭐 했기에 손이 이렇게 차가워?”
내 말에 정우진이 잡고 있는 팔을 풀고 몸을 돌려 날 쳐다봤다. 그러더니 허리를 굽혀 내 이마에 제 이마를 댔다.
“아니에요, 아직 좀 뜨거워요.”
“멀쩡한데.”
“내가 대신 아프고 싶다.”
“멀쩡하다고.”
어깨를 밀어내자 정우진이 날 의자에 앉혔다. 삐뚜름하게 앉아 머리를 괴고 정우진이 그릇에 죽을 담는 걸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야.”
“우진이요.”
“우진아, 넌 꿈이 뭐야?”
“꿈이요?”
죽이 담긴 오목한 그릇을 내 앞에 둔 정우진이 고민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듣지 않아도 정우진이 무슨 말을 할지 깨달았다.
“선배랑 결혼하는 거요.”
역시 예상했던 대로 대답하는 걸 보며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아니, 장래 희망 같은 거.”
누가 정우진 아니랄까 봐 둘이 하는 말도 똑같았다.
“음…….”
수저 받침대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으며 이번에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몇 초 지나지 않아 대답했다.
“선배랑 영원히 같이 사는 거요.”
“뭐가 되고 싶냐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죽을 보니 잊고 있던 식욕이 돌았다. 하얀 쌀죽에 간 소고기와 작게 자른 표고버섯이 보였다. 숟가락을 들어 죽을 몇 번 휘젓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선배가 좋아하는 사람이요.”
“아니…….”
그 말에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냉장고에서 반찬 몇 개를 꺼내고 있었다. 죽 그릇과 똑같은 문양이 들어간 그릇에 반찬을 덜어 내 앞에 갖다 준 정우진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선배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내가 말을 말아야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선배는 꿈이 뭐예요?”
“내 꿈은 벌써 이뤄졌어.”
“뭐였는데요?”
죽을 떠먹으며 예전에는 이루지 못할 것 같았던, 정말 꿈같았던 꿈을 이야기했다.
“내 집 사는 거.”
“집이요?”
“마당 있는 집 사고 싶었어.”
그땐 내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도 집 사는 건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당은 왜요?”
“개 키우고 싶었어. 큰 개.”
“선배는 개가 좋아요, 내가 좋아요?”
뜬금없는 말에 죽을 먹다 말고 어이없는 얼굴로 정우진을 쳐다봤다. 정말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같이 살았고, 이런 어이없는 질문도 많이 들었지만 들을 때마다 어이가 없는 건 변함이 없었다.
“넌 제발 나한테 뭘 물어볼 때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물어보면 안 되냐?”
“정말 많이 생각하고 물어본 거예요.”
“무슨 생각을 했는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정우진이었다. 다른 사람이 물어봤다면 그냥 자길 말해 주길 바라서 그랬거나, 아니면 그냥 장난으로 물어봤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정우진은 정말 진심으로 물어보는 거다. 내가 개랑 정우진 둘 중에 정말 자기를 선택할지 자신이 없어서.
“어떤 날은 저보다 개가 더 좋을 수도 있잖아.”
“어떤 날?”
“그냥 앞으로 살 날 중에 어느 하루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눈만 깜빡이다가 물었다.
“그럼 너는? 너는 개가 좋아, 내가 좋아?”
자기가 한 말을 똑같이 읊었을 뿐인데 정우진은 아까 나보다 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진짜 몰라서 물어봐요?”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혀를 차며 정우진을 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스무 살 때 나랑 지금 나랑 둘 중에 누가 더 좋아?”
“네?”
“만약에 내가 두 명이 되면. 스무 살 때 나랑 지금의 나.”
이번에는 좀 생각을 하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조금 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당연히 선배가 더 좋죠.”
“스무 살인 내가 막 헐떡거리면서 울어도?”
“네, 근데 꿈에서 그 새끼가 헐떡거리면서 울었어요?”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다시 물었다.
“왜? 어차피 둘 다 나잖아.”
“뭐라고 하면서 울었는데요? 좋아해 달래요? 같이 살자 그래요?”
다급하게 묻는 걸 보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반쯤 남은 죽을 다시 먹으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걔가 그렇게 귀여웠어요?”
고등학생 정우진이 귀여운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같이 있고 싶은 정우진은 이 정우진이고 내가 사랑하는 정우진도 이 정우진이었다. 하지만 속마음을 그대로 말하긴 뭔가 낯간지러웠다.
얘는 근데 꼭 말을 해야 아나? 나도 예전에 비해서는 정말 표현도 많이 하고 좋다는 소리도 자주 하는 거 같은데. 그리고 아까도 분명 걔가 귀여운 건 맞지만 그래도 네가 더 좋다고까지 말했는데.
“나한테 선배는 둘일 수가 없어요.”
그 말에 고개를 들자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날 쳐다보고 있는 정우진이 보였다.
“스무 살 선배가 와도 열 살 선배가 와도 내가 사랑하는 강서주는 세상에 선배 한 사람밖에 없어요.”
“…….”
“스무 살짜리 선배가 막 울면서 헐떡거리고 좆 빨아 달라 그래도 안 해 줄 거예요.”
“좆 안 빨았다고.”
가슴속에 피어나던 감동이 와장창 무너졌다. 그놈의 좆 소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할 건지 모르겠다.
“정말이에요. 몇 살이 어리든 선배 조상님이 와도 나한테는 당신뿐이에요.”
“당신이라고 하지 마, 소름 끼치니까.”
당신이라는 소리에 정말 소름이 끼쳐서 어깨를 움츠렸다. 얼굴 위로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인상을 찌푸리자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정우진이 양손으로 꽃받침처럼 턱을 받치더니 빤히 날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 당신, 당신, 당신.”
“…….”
저 새끼가 미쳤나. 한 번만 더 말하면 입을 때릴 생각으로 숟가락을 쥔 손에 꽉 힘을 줬다.
“선배.”
자기가 맞을 거라는 걸 안 건지 다행히도 다시 당신이라는 소린 하지 않았다. 손에 힘을 풀자 정우진이 내게 물었다.
“혹시 요즘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그런 거 없어.”
“그럼 사랑한다는 소리를 많이 안 했나?”
“정말 진심인데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진짜 존나 심각하게 많이 하고 있으니까.”
정우진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선배고, 그다음이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사랑한다는 소리를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아무런 맥락도 없이 밥 먹듯 했다.
“근데 왜 모르는 거 같지?”
“뭐가?”
“내가 선배 많이 사랑하는 거요.”
조금 전 내 질문이 그렇게 충격이었는지 표정이 영 시무룩했다.
“저한테 뭐 불만 같은 거 있어요? 마음에 안 드는 거나, 뭐 해 줬으면 좋겠다는 거나.”
“그런 거 없어.”
“정말 사소해도 괜찮으니까 말해 주세요.”
“…….”
가만히 정우진을 보고 있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왜 이런 기분인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좋은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고 우울한 것도 아닌데 또 기쁜 것도 아니고.
혹시 아까 받은 충격이 덜 가셨나.
“사소한 것도 없어.”
내 말에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무는 게 보였다.
두 번 생각하고 세 번을 생각해도 정말 없었다. 아주 사소한 것도 불만족스러운 것도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지금 현재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어렸을 때로 돌아가 과거의 잘못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그러지 않을 만큼 나는 지금이 너무 좋다. 지금 우리가 너무 좋고 지금의 내가 지금의 정우진이, 우리가 함께 지냈던 시간들이 너무 행복하다.
“꿈에서 고등학생 정우진이 나 좋다고 막 우는 거야.”
“…….”
“그래서 내가 같이 살자고 했거든.”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는 정우진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근데 걔가 미성년자니까 바로 같이 살 수는 없잖아. 나중에 스무 살 되면 같이 살자고 하니까 알아들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알겠다고 하기는 하는 거야. 그래서 같이 라면 먹고 이불 깔아서 재웠거든.”
“…….”
“정말 너무 작더라. 막 엄청 작은 건 아니었는데 그냥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어. 너무 작고 가엾고 그래서 엄청 잘해 주고 싶었어. 좋아한다는 말도 많이 해 주고 워낙 잘 불안해하니까 그런 것도 많이 신경 써 주고 싶었어.”
어렸을 때 해 주지 못했던 걸 다시 해 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정우진이 너무 불안하고 힘들어서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전에 많이 좋아한다고 말해 주고, 많이 안아 주고 싶었다.
“근데 걔가 자는 걸 보고 있으니까 네가 보고 싶은 거야.”
“…….”
“근데 만날 수가 없잖아. 찾아갈 수도 없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못할 것 같던 말을 꺼냈다.
“그래서 울었어.”
“…….”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
언젠가 어딘가에서 봤던 말이 생각났다. 너무 사랑하면 너무 아프다는 말이.
그건 너무나도 쉽게 쓰이는 말이었다. 내가 아플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는 건 어느 로맨스 소설에나, 어느 드라마에나 흔하게 나왔다. 사랑을 하는 모든 연인이 그렇게 아플 만큼 사랑하고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도 흔해서 마치 당연한 줄 알았던 그 말의 무게가 심장을 짓눌렀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우는 정우진이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았다. 너무 가슴이 아팠다. 기껍게 할 수 있었던 말이 언제부터 이렇게 아파졌는지 모르겠다.
“내가 너 진짜 많이 좋아해.”
뭐라고 하려던 정우진이 입술만 달싹이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점점 붉어지는 눈가를 가만히 보다가 가슴 아픈 말을 꺼냈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돼. 매일 의심하고, 걔가 좋은지 내가 더 좋은지, 그런 똑같은 질문 하루에 열두 번씩 해도 괜찮아.”
“…….”
“그래도 난 네가 매일 보고 싶고 너무 아플 만큼 사랑하니까.”
나는 어쩌면 수많은 갈림길 중에 최악의 선택만을 했을지도 모른다. 고아원에 있을 때도, 고등학생 정우진이 스무 살의 나를 만나러 왔을 때도, 그리고 대학생이 된 정우진을 만났을 때도 나는 하나같이 최악의 선택만 했던 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 해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최악의 선택을 했기에 지금의 내가, 지금의 정우진이,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 진짜 걔 좆 안 빨았어. 그냥 손으로 만져 주기만 했어.”
내 말에 피가 날 것처럼 붉던 눈가에서 눈물이 흘렀다. 눈을 질끈 감은 정우진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럴 줄 알았어.”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가락 끝도, 검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도 전부 다 새빨갰다. 덜덜 떨면서 훌쩍거리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아까 한 말 취소할래.”
내 말에 정우진이 울어서 엉망이 된 얼굴을 하고 놀란 토끼 눈이 돼서 날 쳐다봤다.
“어떤 거요?”
가만히 있어도 잇새로 우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빨리 대답 안 해 주면 통곡이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라 얼른 입을 열었다.
“걔가 너보다 귀엽다고 한 거.”
“아, 진짜 짜증 나.”
내 말에 정우진이 이번엔 아예 식탁 위에 엎어져 울기 시작했다.
“자꾸 걔 얘기 하지 마세요.”
“걘 스무 살 강서주가 잘 챙겨 주겠지.”
“하지 말라고.”
만약 더 행복했을 결말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나는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도 라면 끓여 줘요.”
“너 매운 것도 못 먹잖아.”
어쩌면 조금 더 불행하고 조금 더 행복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의 우리를.
“그 새끼는 되고, 난 왜 안 되는데.”
지금 이 순간의 정우진을.
“알았어. 그럼 사랑한다고 말해 봐.”
지금의 너를.
“사랑해요. 너무 좋아서 죽고 싶을 만큼 사랑해요.”
너를.
“나도.”
너를.
“나도 사랑해.”
너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