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늦은 오전이었나?
텔레비전을 켰는데 초능력자가 나왔다. 몇 년 전에 했던 방송인 거 같은데 웬 할아버지가 가슴팍이 훤히 벌어진 빨간 도복을 입고 무대 가운데에 섰다. 그러더니 곧 숟가락을 이마에 붙이고 배에도 붙이고 팔에도 붙이고 그랬다. 자기 몸에 자기장이 흘러서 쇠붙이가 붙는다나 뭐라나.
1분쯤 보다가 채널을 돌렸는데 이번엔 어떤 남자애가 숟가락을 구부리고 있었다. 진짠지 가짠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노려보기만 했는데 숟가락이 엿가락처럼 휘어 버렸다. 요즘에도 저런 걸 믿는 사람이 있나? 멍하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텔레비전을 꺼 버렸다.
그리고 그 뒤에 어떻게 됐더라.
소파에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나? 아니, 핸드폰을 보다가 잠이 들었던 거 같다. 소파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다가…….
보다가…….
“…….”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하얀 천장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작은 냉장고가 보였다. 덜그럭덜그럭하면서 시끄럽게 돌아가는 냉장고 옆에는 작은 싱크대와 빌트인 드럼 세탁기가 있었다.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옷가지와 구석에 내팽개쳐져 있는 작은 무선 청소기, 모서리가 까진 선반 위의 텔레비전.
분명 낯이 익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풍경이었다. 열 평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작은 방 안을 둘러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아래를 보자 이불 밑에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일어서려던 것을 멈추고 도로 이불 위에 앉아 핸드폰을 들었다. 이건 내 핸드폰이 아니었다. 기종도, 색깔도, 무엇 하나 닮은 구석이 없었다.
[씹새끼]
액정 위에 뜬 이름을 빤히 보고 있는데 시끄럽게 울리던 핸드폰이 조용해졌다. 부재중 전화가 뜬 걸 보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씹새끼]
“…….”
도대체 이게 누구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아까부터 계속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러는 사이 다시 전화가 끊겼다. 하지만 금세 다시 울리는 걸 보며 결국 나는 ‘씹새끼’의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보세…….”
-야! 너 어디야!
“…….”
-전화는 왜 이렇게 안 받아? 오늘 단체 있다고 일찍 오라고 했냐, 안 했냐! 씨발, 못 올 거 같으면 미리 말을 하든가!
머리가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지르는 통에 핸드폰을 귀에서 뗄 수밖에 없었다. 액정 위에 뜬 씹새끼라는 글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잔뜩 화가 나 있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미리 말했으면 다른 사람을 구하든가 했을 거 아니야! 너 지금 어디야? 올 수는 있어? 왜 대답을 안 해, 새끼야!
“여보세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핸드폰을 귀에서 뗀 채 입을 열었다.
-들리니까 말해! 와, 안 와?!
“너 누군데?”
-무슨 개소리야, 이거 강서주 핸드폰 아닙니까?
“…….”
-아니에요?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누그러진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 내가 강서주인 건 맞는데 이 핸드폰은 내 것이 아니었다.
-여보세요? 야, 이 새끼 폰 번호 바뀌었냐? 다른 사람이 받는데?
핸드폰 너머로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이 번호 맞는데? 이거 번호 바꾸고 잠수 탄 거 아니야? 아,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이 새끼, 진짜…….
“여보세요.”
-아, 예. 죄송합니다, 전화를 잘못 건 거 같네요.
“아니, 내가 강서주가 맞긴 한데…….”
-뭐라고?
“그러니까 내가 강서주가 맞긴 맞거든? 근데 이 핸드폰이…….”
-이 새끼가 지금 나랑 장난하나…….
열심히 설명을 하려고 해 봤지만 말하는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짜증과 황당함이 섞인 목소리에 한숨을 쉬며 물었다.
“넌 누군데?”
-너 돌았냐?
“안 돌았는데, 너 누구냐고. 이름이 뭔데?”
-술 덜 깼냐? 죽을래? 아, 나 씨발……. 바빠 죽겠는데 진짜 별 병신 같은 새낄 다 보네.
“아니, 씨발……. 근데 아까부터 왜 자꾸 욕을 하고 지랄이세요? 너 누구냐고 물어본 게 그렇게 욕 처먹을 일이냐?”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도 없고 혼란스럽긴 하지만 가만히 있는데 계속 욕을 들으니 성질이 나기 시작했다. 누군지 물어본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야?
“내 폰에 너 씹새끼라고 저장돼 있던데 누군지 까먹어서 그런다, 씹새끼야. 너 누구야?”
-하…….
핸드폰 너머로 숨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이름 듣기가 왜 이렇게 힘든 건지, 안 그래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여기가 어딘지, 정신 사나워 죽겠는데……. 그냥 전화 끊을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씹새끼가 말했다.
-네가 아르바이트 시켜 달라고 했던 술집 사장이고요. 지금까지 일한 거 입금해 줄 테니까 앞으로 가게 나오지 마라, 이 씹새끼야.
아르바이트? 술집 사장?
이게 도대체 다 무슨 소리야? 난 아르바이트 시켜 달라고 한 적 없는데? 애초에 내가 술집 아르바이트를 어떻게 해? 정우진이 알면 울고불고 얼마나 개지랄을 할 텐데, 내가 대가리에 총 맞았냐?
“…….”
-늦었어, 이 새끼야. 넌 해고야. 문자로 계좌 번호나 보내고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
“아, 음……. 그래.”
아르바이트고 나발이고 우선 여기가 어딘지, 내가 왜 여기에서 일어난 건지부터 알아내는 게 중요했다. 대충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다시 사나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으래? 이 새끼 존나 막가네? 아까부터 어디서 반말 짓거리야?
어이없다는 듯 웃는 소리가 들리자 다시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나 잘렸다며. 그럼 댁이랑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반말 짓거리 좀 하면 안 되냐? 그러는 넌 뭔데 나한테 아까부터 자꾸 반말 짓거리에 욕지거리야?”
-와, 이 새끼 봐라. 너 돈 받기 싫냐?
“됐으니까 그거 처먹고 떨어져, 씹새끼야.”
이거 도대체 뭐 하는 새끼야? 핸드폰을 던지듯 이불 위에 내팽개치자 다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얼핏 액정을 보니 씹새끼였다.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다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데 입가가 따끔했다.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몸이 많이 무거웠다. 근육통인가? 입술이 왜 이렇게 욱신거리지? 고개를 갸웃하다가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봤다. 어디서 맞기라도 했는지 입가가 터져서 피딱지가 굳어 있는 게 보였다.
“얼굴이…….”
거울에 바짝 붙어서 눈을 깜빡거렸다. 왜 이렇게 어린 거 같지? 아니, 그것보다 난 여기에 화장실이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왜 이렇게 익숙하지?
“…….”
잠깐만.
씹새끼? 씹새끼? 술집 사장?
“제시아?”
설마 술집이라는 게 제시아였나? 거긴 학교 다닐 때 잠깐 알바 했던 술집인데? 사장이 툭하면 장난이랍시고 때리고 욕해서 한 달도 안 다니고 때려치웠던 곳이었다. 하도 좆같았던 곳이라 아직도 기억이 났다.
근데 거기 사장이 나한테 전화를 왜 해? 거기 그만둔 게 몇 년 전인데? 아니, 잠깐만. 거기 없어지지 않았나?
“…….”
거울 속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한참 내 얼굴을 보다가 눈알을 굴려 화장실 바닥의 파란 타일을 내려다봤다.
“여기…….”
아니, 여기……. 설마, 여기…….
여긴 내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노가다 해서 받은 돈으로 구한 집이었다.
비록 원룸에 월세였지만 처음으로 생겼던 내 집.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왜냐고? 여기 집주인 새끼가 내 보증금을 들고 날랐으니까. 그때 그건 내 전 재산이었다. 근데 그걸 들고 튀었다.
“이 개 같은 새끼…….”
나는 화장실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 * *
집주인은 같은 건물 꼭대기 층에서 살고 있었다. 1층에서 5층까지 올라가 한참 문을 두드렸지만 집에 없는 건지, 없는 척을 하는 건지 끝끝내 아무도 나오질 않았다. 씩씩거리면서 철제문을 발로 차자 쾅 하고 큰 소리가 났다.
조금씩 화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그제야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
근데 내가 왜 여기 있지?
“…….”
제시아는 없어진 지 오래된 술집이었고, 집주인도 보증금 들고 튀어서 건물은 경매로 넘어갔다고 했는데.
“……오늘 며칠이야?”
더듬더듬 몸을 만지며 핸드폰을 찾다가 조금 전에 이불 위에 던져 놨던 게 생각났다. 다시 1층까지 내려가 문을 열려고 했지만 열릴 턱이 없었다.
“하…….”
씨발……. 비밀번호…….
뭐였더라. 뭐였지.
“아니, 근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도무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1111, 1234, 0000, 그동안 내가 써 왔던 비밀번호들을 차례차례 눌렀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환장하겠네.”
마지막으로 통장 비밀번호까지 눌렀지만 틀렸는지 삐용삐용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계속 틀려서 그런 건지, 그치질 않고 한참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에 결국 옆집 문이 열렸다.
“저기요. 조용히 좀 해 주세요. 지금 시간이 여덟 시가 넘었는데…….”
안경을 쓴 사람이 문을 열고 얼굴만 내민 채 잔뜩 인상을 쓰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집 비밀번호를 까먹어서……. 저기, 근데 오늘 며칠인지 혹시 아세요?”
“네?”
“오늘이 며칠인지 기억이 안 나서…….”
“……24일이요.”
“몇 월인지도…….”
어색하게 웃으며 작게 묻자 상대방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이해한다. 내가 봐도 지금 난 너무 수상하고 이상했다.
“11월이요.”
“아, 예……. 감사합니다.”
“아무튼 조용히 좀 해 주세요.”
“네, 죄송합니다.”
문이 닫히자 시끄러운 경보음도 멎었다. 다시 번호를 이것저것 눌렀다간 또 경보음이 울릴 게 뻔했다.
그보다 오늘이 11월 24일이라니. 분명 여름이었는데. 난 소파에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다. 정우진이 오늘 저녁에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정우진. 정우진은?”
퍼뜩 고개를 들어 무작정 밖으로 뛰어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집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지? 일단 큰길로 나가서 택시를 잡고…….
“…….”
뛰다시피 골목을 걷다가 조금씩 속도를 늦췄다. 완전히 멈춰 서고 나서야 의문이 들었다. 지금 가면 정우진이 거기에 있나? 아니, 애초에 거긴 우리 집이 맞는 건가? 지금 내 집은 저기 저 원룸인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머리를 감싸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11월 24일이라니. 고개를 숙이자 슬리퍼를 신고 있는 맨발이 보였다. 반바지에 얇은 티셔츠만 입고 뛰어나와서 그런지 살갗에 소름이 돋을 만큼 추웠다. 하지만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시아에서 일했던 건 내가 스무 살 때였다. 그리고 집주인이 내 돈을 들고 튄 건 내가 스물한 살 때. 오늘은 11월 24일.
“……내가 지금 스무 살이라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손을 내려 손바닥을 바라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내가 지금 스무 살이라고? 뭐 타임 워프라도 한 건가? 아니면 꿈이라도 꿨나?
꿈이라고? 정우진이랑 같이 살았던 게, 그게 꿈이라고? 아니, 이게 꿈일지도 모른다.
“아, 그래. 이게 꿈일 수도 있잖아.”
힘없이 손바닥을 보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이야. 이게 꿈인 거야.”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하다가 손을 들어 양 뺨을 세게 쳤다. 찰싹 소리가 나면서 살이 아려 오기 시작했다.
찰싹. 찰싹. 찰싹.
몇 번이나 쳤는데도 꿈에서 깨질 않았다. 입술이 뜨거운 거 같아서 혀를 내밀어 핥자 피 맛이 났다. 그러고 보니 아까 피딱지가 굳어 있던데 그게 다시 터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왜 안 깨?”
손바닥도 아프고 뺨도 아파서 더 이상 때리진 않고 애꿎은 머리만 벅벅 긁었다.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자 찬 바람이 불었다.
“아니, 씨발……. 아니, 하…….”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혼자 중얼거리자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혼자 미친놈처럼 웃고 있는데 다시 바람이 불었다. 휘이잉 소리가 나면서 세차게 불던 바람이 멎자 부르르 몸이 떨렸다.
“…….”
그러니까 지금 나는 스무 살이다. 오늘은 11월 24일.
“…….”
아무리 때려도 안 깨는데 그럼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건가.
“…….”
이게 현실이면 그동안 내가…….
“…….”
내가……. 겪었던 일이 꿈이었나?
“…….”
내가 타임 워프를 했거나, 그게 꿈이었거나, 이게 꿈이거나.
지금 이 세 가지 말고 다른 가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저기…….”
그때 머리 위로 어둡게 그림자가 졌다. 이 날씨에 반바지 입고 길바닥에 앉아 있으니 수상해 보일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혹시 어디 아프세요?”
“괜찮으니까 그냥 가세요.”
“괜찮아요?”
“됐으니까…….”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나는 지금 내가 허용할 수 있는 한계치를 훨씬 넘어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눈앞이 가물가물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목소리도 아니고 이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눈을 크게 뜨고 느릿느릿 고개를 들자 앳된 얼굴의 정우진이 보였다.
“…….”
“…….”
새까만 눈동자가 날 살피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백해 보일 만큼 새하얀 피부에 이마를 덮은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이 불 때마다 사락사락 움직였다.
“……지나가다가…….”
“…….”
내가 계속 아무런 말이 없자 정우진이 곤란해 보이는 얼굴로 변명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지나가다가 혹시 어디 아픈 건가 싶어서……. 계속 바닥에 앉아 있었고, 옷도 너무 얇게 입어서……. 혹시 아픈 건가 싶어서…….”
말이 정리가 되질 않는지 횡설수설하는 게 우리가 만난 이 상황이 우연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정우진은 고등학생일 때부터 날 스토킹 했다고 했었다. 설마 지금 계속 집 앞에 있었던 건가? 이렇게 추운데?
외투도 없이 회색 교복 하나만 입고 있는 정우진을 빤히 보며 미간을 구기자 그가 입을 다물고 숨을 삼켰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무슨 일 있어요?”
“…….”
우리 지금 초면 아닌가. 물론 나야 정우진을 알고 있긴 하지만……. 지금 내가 스무 살이면 정우진은 열여덟 살이었다. 그때 우린 만난 적이 없었다. 아마 지금 이 나이의 나였다면 웬 고삐리가 오지랖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정우진을 알고 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내가 왜 스무 살이 됐는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눈앞의 정우진을 오지랖 넓은 고삐리로 대할 수는 없었다.
“정우진.”
“…….”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이름을 말하자 걱정스럽게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풀렸다. 눈은 점점 커지고 입술도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놀랐다는 걸 온 얼굴로 표현 중인 정우진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다시 말했다.
“너 정우진이지?”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던 정우진이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날 보던 정우진이 잔뜩 경직돼 있던 몸에 힘을 풀고 뭔가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꿈인가?”
“아니야.”
“꿈인가 봐.”
“아니라고.”
한숨을 내쉬며 아니라고 말했지만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지 정우진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고 있었다. 다시 한숨을 쉬며 무릎을 짚고 일어서자 정우진이 다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나 몰라?”
“…….”
“어렸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우진이 내게 달려왔다. 놀라서 뒤로 물러서기도 전에 내 허리에 팔을 감고 날 끌어안았다. 휘청거리면서 윽 소리를 내자 앳된 얼굴의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
“…….”
그러고 보니 정우진은 지금 나보다 작았다. 시선을 이렇게 밑으로 내려 본 적이 처음이라 이 와중에도 기분이 묘해졌다. 뭐라고 하려는데 정우진이 숨을 들이켜며 날 밀어냈다. 얼마나 세게 밀어냈는지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뭐 하는 거야?”
“왜 안 깨?”
“뭐?”
“왜 안 깨냐고. 너 뭐야?”
“…….”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예나 지금이나 얜 알 수가 없다.
“이거 꿈 아니라고. 네가 먼저 나한테 말 걸었잖아.”
“꿈이 아니라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말하려는데 정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형 나 기억 못 하잖아.”
아무런 준비도 없이 들은 형 소리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자 정우진이 대답을 재촉하듯 다시 말했다.
“기억 못 하잖아.”
“…….”
“저번에 말 걸었을 땐 기억 못 했잖아.”
……저번에? 저번 언제? 언제지? 그러고 보니 정우진이 날 찾았을 때 나한테 말을 걸었다고 한 걸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이후인가? 잠시 생각하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기억났어.”
“…….”
“기억났다고. 그땐……. 그냥 좀 너무…….”
“…….”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이 안 났나 보지.”
불신에 가득 찬 얼굴로 날 경계하던 정우진의 얼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경악에 가깝게 변했다.
“날 기억한다고?”
“몇 번을 말해. 너 안다고, 정우진.”
“……내가 정우진인 걸 어떻게 알아?”
“뭐?”
“김우진이 아니라 정우진이라고?”
그제야 정우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스무 살의 내가 아는 건 김우진밖에 없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정우진이 별안간 눈을 감았다. 주먹을 꽉 쥐고 크게 숨을 들켰다가 입술을 깨물고 떨리는 숨을 뱉었다.
“알고 있었지?”
“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어……. 뭘?”
다시 눈을 뜬 정우진은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누구한테 들었어?”
“…….”
“처음 만났을 때도 사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거잖아. 모른 척하다가 왜 이제야 아는 척하는 건데?”
도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난 사실 미래에서 왔다고 해야 하나? 정우진이라면 그런 헛소리라도 믿어 줄 것 같긴 했지만 지금 이 정우진은 내가 아는 그 정우진이 아니었다.
“다 알고 있었지?”
그때 정우진이 다시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똑같이 했다. 도대체 아까부터 뭘 그렇게 알고 있었냐고 그러는 거야?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형 쫓아다니는 거 다 알고 그러는 거지?”
“…….”
“알고 나한테 말 건 거잖아! 누가 말했어? 설마 우리 부모님 만났어? 아니면 원장님이 그랬어? 누구야? 누가 말했어? 뭐라고 했는데? 무슨 말 들었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물음표 공격에 정신이 사나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다.
“일단 진정 좀 해 봐.”
“언제부터 알았어?”
“야, 나 지금 너무 추운데 너 혹시 우리 집 비밀번호 아냐?”
“뭐?”
이 칼바람에 아까부터 맨발, 반바지 차림으로 있으려니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쌩쌩 부는 바람에 부르르 몸을 떨면서 묻자 정우진이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더니 당황한 듯 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
달싹이던 입술이 닫혔다. 한참 고민하는 것 같던 정우진이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소리로 작게 말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
“…….”
저건 분명 아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정우진이 날 보며 물었다.
“형 집 비밀번호를 왜 나한테 물어봐?”
“까먹었어.”
“그걸!”
내 말에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끝까지 말하지 않고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던 정우진이 갑자기 입고 있던 교복 재킷을 벗기 시작했다.
“너 지금 뭐 하냐?”
“일단 이거라도 입고 있어.”
“벗지 마.”
“춥다며.”
“그거 작아서 나한테 맞지도 않아.”
내 말에도 정우진은 결국 재킷을 벗었다. 그리고 내게 주지도 못하고 자기가 도로 입지도 않고 그냥 들고만 있었다.
“집 비밀번호 까먹어서 계속 여기서 이러고 있었던 거야?”
“어.”
“……1234 해 봤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들고 있던 재킷을 만지작만지작하면서 다시 물었다.
“0000은?”
“그것도 아니야.”
“……그럼 123400은?”
“…….”
재킷을 보고 있던 시선을 슬쩍 들어 날 보며 정우진이 말했다. 123400이라니. 듣고 보니 번개가 치듯 머릿속이 번뜩였다.
“123400도 해 봤어?”
“아니, 그건 안 해 봤는데……. 그거 맞아.”
황당하다는 내 얼굴을 보며 정우진이 미간을 구겼다.
“그렇게 쉬운 걸 왜 까먹어?”
“그럴 수도 있지. 넌 어떻게 세 번 만에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안 건데?”
“그냥 찍은 거야. 쉬운 거잖아.”
어련하시겠어.
직접 눈앞에서 보니까 기가 막혔다. 고등학생일 때부터 스토킹 했다더니 진짜 알고 있잖아.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집 비밀번호 말고 또 뭘 알고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정우진이라면 다 알고 있지 않을까. 그게 뭐든 전부 다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얼른 들어가. 춥다며.”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날 보며 정우진이 말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우리는 그 사건 이후로 헤어진 뒤 처음으로 이렇게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우진은 내 생각보다 침착하고 멀쩡했다. 그냥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아는 것 외에 또래 아이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없었다. 아니, 또래 애들보다 더 하얗고 훨씬 예쁘다는 것도 다르긴 했지만 아무튼 내 생각보다 너무 멀쩡했다.
이런 애가 몇 년 뒤에 날 섬으로 납치한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아니면 잘 숨기고 있는 것뿐일까. 조금 전에 꿈이니 뭐니 한 것도 좀 마음에 걸리긴 했다.
“들어왔다 갈래?”
“어?”
“안 추워? 잠깐 들어와서 따뜻한 거라도 마시고 가.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도 인연인데. 혹시 어디 가는 중이었으면 어쩔 수 없지만.”
이 상황이 우연이 아니라는 건 정우진도 나도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서로에게 숨겨야만 했다.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의 말인데. 그냥 들어왔다 가라는 말이 그렇게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나. 마치 하늘을 보며 저건 땅이라고 말한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들어와서 뭐라도 마시고 가라고.”
“왜?”
“아니, 그러니까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도……. 싫으면 말고.”
사실 별말 없이 따라 들어올 줄 알았는데 내 생각보다 고등학생 정우진은 훨씬 멀쩡한 사람이었다. 좀 씁쓸하기도 한데 사실 이게 맞는 일이었다. 아무리 예전에 알던 사이라고 해도 대뜸 자기 집에 들어오라는 사람의 말을 듣고 알았다고 하는 게 이상한 거지. 그것도 지금 정우진은 미성년자고 나는 성인인데.
“지금 나보고 집에 오라고 한 거야?”
속으로 혼자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 말에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시간도 너무 늦었고 하니까 그럼 그냥 내일…….”
“아니야, 내일은 시간 없어.”
“그럼 모레 와도 되는데.”
“그날 과외 있어.”
“그냥 주말…….”
“주말에는 봉사 활동 해야 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급히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웬 뜬금없는 봉사 활동? 얘가 이런 데 관심이 있었나? 아니면 뭐 학교에서 시켜서 하는 건가? 더 말하면 왠지 울 것 같은 얼굴이라 그냥 정우진이 원하는 말을 해 주기로 했다.
“그럼 지금 들어왔다 가.”
“응.”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걸 보며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손을 뻗어서 머리라도 쓰다듬을 뻔했다.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고 정우진이 가르쳐 준 대로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었다. 띠리리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리자 한눈에 방 전체가 다 들어왔다.
“원룸이라 많이 좁아.”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벗으며 말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현관문 밖에서 움직이질 않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왜?”
내 물음에 정우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한참 오물거리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면서 숨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
“…….”
아, 뭔가……. 이거랑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거 같은데. 각서 쓰면서 지랄하던 시기에 정우진이 처음 내가 살던 집에 왔을 때 쭈뼛거렸던 게 생각났다. 혹시 그때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나까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미간을 구기는데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얼굴은 왜 그래?”
“얼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내 얼굴을 만졌다. 손가락 끝으로 뺨을 쓸다가 턱 끝을 만지자 잊고 있던 고통이 느껴졌다.
“왜 다쳤어? 아까 뺨 때린 걸로 그렇게 된 것 같진 않은데.”
얜 날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숨길 생각이 없는 건가. 좀 어이가 없어서 이상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하게.”
“약국 갔다 올게.”
“됐으니까 그냥…….”
“뭐 마실 거라도 같이 사 올까? 밥은 먹었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됐으니까 그냥 들어오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나도 이불이나 좀 개고 있을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건 됐고 반창고나 좀 사 와. 약국 어디 있는지 알아?”
“마실 거나 먹을 건? 다른 거 더 필요한 건 없어?”
“……아니……. 음. 기다려 봐, 내가 돈 줄게.”
안으로 들어가 지갑을 찾으려고 하는데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날 턱이 없었다. 분명 주머니 아니면 침대 위에 있을 텐데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형, 나 돈 있어.”
그때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려 현관문 쪽을 보자 정우진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빨리 갔다 올게.”
“아니, 있어 봐. 지갑이…….”
“갔다 올게.”
“기다려 보라니까.”
“정말 괜찮…….”
이제 아예 현관문 밖으로 나간 정우진이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굴다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다시 주춤주춤 안으로 들어와 손에 들고 있던 재킷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빨리 갔다 올게.”
그리고 다시 멈칫하더니 이번엔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냈다. 천천히 허리를 굽혀 바닥에 핸드폰을 내려 둔 정우진이 시선을 올려 날 보며 입을 열었다.
“십 분 안에 올게. 아니, 오 분 정도밖에 안 걸릴 거야.”
“약국 어디 있는지 알아?”
“뛰어갔다 오면 오 분도 안 걸려.”
“뛰어가게? 왜? 거기 문 닫을 때 됐나?”
굳이 뛰어갈 필요가 있나? 근처에 약국이 있다는 게 떠오르긴 했지만 옛날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거기 몇 시까지 하더라.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정우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추운데 옷 입고 가.”
“안 추워.”
“핸드폰은 왜 두고 가?”
“어차피 연락 올 데도 없어.”
그러더니 기어이 손에 들고 있던 지갑까지 바닥에 내려 둔 재킷 위에 슬며시 내려놨다. 정말 맨몸이 된 정우진이 몇 번이나 했던 말을 다시 했다.
“갔다 올게. 오 분밖에 안 걸려.”
알 수 없는 행동에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등을 돌렸다. 정말 가기 싫은 사람처럼 몇 번이나 힐끗힐끗 뒤를 돌아보던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그를 불러 세웠다.
“너 돈 있어?”
“있어. 진짜 있으니까 안 줘도 돼.”
“돈 있다고?”
조금 전 겉옷 위에 내려 둔 지갑을 들고 다시 묻자 정우진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내게 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낸 정우진이 내 손에 자기 지갑을 쥐여 주며 말했다.
“빨리 갔다 올게.”
“……빨리 안 갔다 와도 되니까 뛰지 마.”
“빨리 안 뛸 거야.”
“빨리 안 뛰면 뭐 어쩔 건데? 천천히 뛸 거냐?”
“어, 응. 천천히…….”
현관에서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몇 번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멈칫거리던 정우진이 갑자기 신고 있던 신발을 벗었다. 그러더니 조금 전까지 내가 신고 있었던 슬리퍼를 신더니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갔다 올게.”
“…….”
그 뒤로도 정우진은 몇 번이나 날 돌아보며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 한참이나 걸렸다. 정우진은 원래도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들을 자주 한다. 그 행동에는 별다른 뜻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 의미도 없이 내 이름을 부른다거나 갑자기 손을 잡거나 안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입으로 읊으며 내 시선을 잡으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우진이 하는 말에는 맥락이 없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이 이상한 행동들에도 별다른 뜻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평소처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정우진이 사라진 곳을 한참 보고 있자니 가슴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문을 안 열어 줄까 봐 그러나? 그래서 자기 물건들을 몇 개씩이나 두고 가야 안심이 되는 건가? 아니, 그런데도 안심한 표정이 아니었다. 등을 돌려 계단을 내려갈 때까지도 정우진은 안절부절못했다.
혼자 보내도 되는 건가? 오 분 안에 오겠다고 했으니 정우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안에 올 것이다. 오 분이면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밤도 늦었고 무엇보다 불안해하던 얼굴이 잊히질 않아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바닥에 있는 교복 재킷과 그의 핸드폰,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어쩌면 정우진은 벌써 약국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뛴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나가자마자 온 힘을 다해 뛰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슬리퍼 신고 나갔는데 넘어지기라도 하진 않았을까 걱정이 돼서 조금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건물에서 나와 약국이 어디에 있었는지 잠시 생각하려고 걸음을 멈췄다. 정말 뛰어가기라도 했는지 정우진은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혹시 보일까 싶어 두리번거렸지만 골목엔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이쪽인가, 저쪽인가. 근데 근처에 약국이 두 군데 있지 않았나? 엄청 오래된 약국 하나랑 새로 생긴 약국이 하나 있었던 거 같은데. 아직 안 생겼나? 만약 생겼으면 새로 생긴 약국으로 갔을까?
그러고 보니 오래된 약국은 문도 일찍 닫았던 것 같았다. 그럼 이쪽으로 가야 하나.
짧은 생각을 마친 뒤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이라 보이는 건 없었다. 평소라면 길고양이이겠거니 생각했겠지만 뭔가 이상했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말없이 한참 바라보고 있자 또다시 인기척이 들렸다. 눈에 잔뜩 힘을 주는 순간 점점 무언가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
“…….”
정말 놀랍게도 그 어둠 속에서 모습을 나타낸 건 정우진이었다. 얘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순간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멀뚱멀뚱 정우진을 보다가 입을 열려는 순간 어둡게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저게 어떤 표정인지, 왜 저런 얼굴을 하고 날 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굳게 다물린 입매와 조금의 빛 한 점도 비추질 않는 까만 눈은 한 번의 깜빡임도 없이 못에 박힌 듯 날 쳐다보고 있었다. 불과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너무 분위기가 달랐다.
정우진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아니라 저게 정말 사람이 맞는지 잠깐 의심이 들 정도였다.
“……여기서 뭐 해?”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내자 그제야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추워서 소름이 돋은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좋은 상황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잠깐 대답을 기다렸지만 다문 입술이 열리질 않았다. 마치 전원이 나간 로봇 같았다. 구멍이 뚫린 것처럼 까만 눈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드디어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형은?”
“어?”
“형은 여기서 뭐 해?”
찬 바람이 아니라 눈보라라도 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왠지 혼나고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런 것보다는 좀 더 심각한 분위기였다.
“네 옷이랑……. 핸드폰이랑 지갑 다 두고 가서…….”
“내가 두고 간 거잖아.”
“어?”
“갔다 온다고 했잖아.”
어떤 표정인지 감이 안 잡히던 그 귀신같던 얼굴에 조금씩 감정이 물들기 시작했다. 화가 난 것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얼굴을 보며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정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온다고 했잖아, 내가.”
하지만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던 감정은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터질 것 같던 풍선이 바람이 빠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서서 내 손에 들린 제 옷가지를 가만히 보고 있던 정우진이 내겐 시선을 주지도 않고 등을 돌렸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그냥 갈게.”
“뭐라고?”
간다니? 어딜? 설마 이대로 집에 간다고? 설마 저 입에서 가겠다는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던 터라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정말 갈 생각이었는지 벌써 멀리 걸어가는 정우진의 등을 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달려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야, 그러고 가면…….”
손목을 잡자마자 정우진이 발작하듯 내 손을 뿌리치며 날 돌아봤다. 크게 소리가 날 정도로 뿌리쳐진 손이 갈 길을 잃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 당황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천천히 들고 있던 재킷을 내밀었다.
“옷 안 가지고 가? 핸드폰이랑 지갑도…….”
“필요 없어.”
“뭐가 필요 없어? 내일 학교 갈 때 뭐 입고 갈 건데?”
“필요 없으니까 버리든가 말든가 알아서 해.”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는 얼굴이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정우진이 갑자기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변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나는 지금 너 때문에 상처 받아서 지갑이고 핸드폰이고 옷이고 그딴 걸 챙길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너 신발도 내 거 신었잖아.”
내 말에 정우진이 살짝 고개를 숙여 제 발을 내려다봤다. 슬리퍼를 신고 있는 제 발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똑같은 거 한 박스 사다 줄게.”
“한 박스까지는 필요 없어.”
“그럼 내일 열 개 사 줄게.”
“열 개도 필요 없어.”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날 올려다봤다. 지금도 낯빛이 많이 안 좋기는 했지만 조금 전에 봤던 그 귀신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안 사 줘도 되니까 들어왔다 가.”
조금 전 세차게 내쳐졌던 손을 다시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살이 닿자 몸의 떨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싫어.”
누그러진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하는 소리에 고개를 젖혔다.
“왜? 늦어서?”
“…….”
내 물음에 정우진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이유도 모르겠고 정우진은 자기 나름대로 엄청나게 심각해 보였지만 나는 손가락 끝이 간지러워서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사실 싫다고 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정우진이 내 말에 싫다거나 아니라거나 그런 부정적인 대답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정우진이 내가 아는 그 정우진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싫다고 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날 쳐다보지도 못하고 파르르 떨면서 건드리면 울 것 같은 얼굴로 웅얼거릴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너 몇 살이지?”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정우진이 시선을 올려 날 쳐다봤다. 얼핏 의아함이 스치는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잠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평소에도 정우진은 삐치는 게 일이었지만 애 같은 정우진이 아니라 정말 아이인 정우진이 이러는 건 달랐다. 고등학생인 정우진이 교복을 입고 날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고 아무런 상상도 한 적이 없는데 왠지 기분 나쁜 변태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그건 왜?”
“아무것도 아니야.”
얼른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자 정우진이 인상을 구겼다.
“나이는 왜?”
“아니야.”
“뭐가 아닌데?”
그냥 물어본 건데 내가 뭐 엄청난 걸 숨기고 있기라도 한 듯 집요하게 묻는 정우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새삼 네가 너무 어려 보여서.”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무슨 소리야.”
“그건 그런데…….”
내가 정말 스무 살이었으면 그랬을 거 같기는 한데……. 아니, 두 살 차이라고 해도 미성년자랑 성인은 다르지 않나.
“왜?”
“어?”
내 대답에 만족을 못 했는지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저 물음표 공격은 날 만나고 생긴 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이미 가지고 있었나 보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해?”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왜냐고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그래?”
“어려 보여서 좋아?”
“뭐?”
“아니면 싫어?”
분명 서로 눈을 마주 보며 대화를 하고 있는데도 정우진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려 보여서 좋냐고? 딱히 좋고 싫을 게 뭐 있어, 그냥 어려 보이면 어려 보이는 거지.”
“…….”
“계속 여기 서서 얘기할 거야?”
아까 약국 갔다 왔으면 벌써 갔다 와서 방 안에서 커피도 한 잔 마셨겠다. 내 물음에 다시 입을 다문 정우진을 보며 물었다.
“왜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는데?”
“…….”
“나갈 때까진 안 그랬잖아. 약국 갔다 온다면서? 5분 만에 뛰어갔다 온다고 해 놓고 거기서…….”
거기서 도대체 뭐 하고 있었냐고 물어보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말하다 보니까 정우진이 왜 그러고 있었는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설마, 진짜? 진짜로?
나는 황당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설마설마하고 물었다.
“너 설마 네가 약국 간 사이에 내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거기에서 그러고 있었던 건 아니지?”
“…….”
“……아니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어 주길 바랐는데 정우진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설마가 정말 진짜였다. 정우진은 진짜로 내가 도망가는 줄 알았던 거다. 그래서 거기에서 귀신같은 얼굴로 서 있었던 거다.
“내가 도망을 왜 가?”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어이가 없어서 묻자 정우진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몇 번이나 그러다가 겨우 입을 벌려 목소리를 냈다.
“형은 날 싫어하잖아.”
“…….”
싫어한 적 없는데.
이미 정우진에게 몇 번이나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이 어린 고등학생 정우진은 내게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상태였다. 그 사건에 있은 뒤로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오늘이 처음이겠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정우진이 덧붙였다.
“나도 형 싫어해.”
“…….”
“그냥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와 본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누그러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정우진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건데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금방 화를 냈다가 또 금방 우울해하고 화를 냈다. 그러다가도 말을 걸어 주거나 손을 잡아 주면 겁먹은 것처럼 떨기도 했다.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날 죽일 뻔한 사람을 왜 찾아? 찾는다고 해도 좋은 이유는 아니겠지.”
한 번도 날 왜 찾아왔냐고 물어본 적이 없는데 스스로 변명하듯 하는 말에 미간을 구겼다.
“내가 형 찾은 건 맞아. 사람들한테 물어봐서 찾은 건 맞는데…….”
“…….”
“그냥,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자기도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자꾸만 입술을 달싹이면서 입을 열어도 문장을 채 만들기도 전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문장이 되지도 못한 단어 몇 개를 웅얼거리듯 말하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그래서 들어올 거야, 말 거야.”
“…….”
“할 말 더 있으면 계속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제발 좀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하려는데 갑자기 정우진이 등을 돌렸다. 그러더니 그대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미처 반응하질 못했다. 좁은 골목길 끝으로 점점 사라지는 정우진의 등을 가만히 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함을 질렀다.
“야! 너 어디 가!”
도망가듯 달려 나간 정우진을 쫓아가려고 했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다.
* * *
교복 재킷, 핸드폰, 지갑, 가방, 신발.
정우진이 두고 간 것들을 찬찬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몇 번째 한숨인지 셀 수도 없었다.
나는 고등학생인 정우진을 알지 못한다. 지금 내가 왜 스무 살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스무 살 땐 정우진을 만난 적이 없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정우진이 대학생이 된 후였다. 정우진이 대학생이 되고도 한참이나 우리는 대화 한 번도 제대로 하질 못했다.
나는 그 정우진이 김우진이라는 것도 결국엔 납치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내가 스무 살이 되고 우리는 대학생이 아니라 정우진이 고등학생일 때 만나 버렸다. 내가 살아왔던 그 시간대와는 달라져 버렸다. 그래서 이게 내 과거임에도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애초에 이게 내 과거가 맞긴 한 걸까. 그냥 우리 모두의 시간이 뒤로 돌아와 버린 걸까. 그렇다면 왜 나만 기억을 하고 있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평행 세계 같은 걸까? 우리가 함께 살았던 그 세계와는 별개로 평행 세계의 지금으로 내가 이동이라도 한 걸까? 그럼 그곳에 남아 있을 정우진은 어떻게 된 건지, 원래 이곳에 살았던 나는 어떻게 된 건지.
“…….”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머리가 아파 왔다.
깊게 숨을 내쉬고 정우진이 두고 간 핸드폰 쪽으로 손을 뻗었다. 우선 도망간 정우진을 어떻게 다시 만나야 하나부터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정우진이 어디에 사는지 알지 못한다. 핸드폰을 두고 가서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가방을 뒤져 봐도 학교에 관한 정보는 알 수가 없었다. 정우진이 다시 날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집 앞에서 또 쓰러지기라도 해야 하나. 그럼 나타날 것 같긴 한데.
비밀번호가 걸린 핸드폰을 가만히 보다가 혹시나 싶어 1208을 눌러 봤다.
“정말 놀랍지도 않다…….”
잠금이 풀린 핸드폰을 보며 허망하게 웃었다. 언제부터 비밀번호를 내 생일로 했을까? 그냥 내 생일을 알고 난 뒤로는 계속 그것만 쓴 건가? 예전엔 딱히 의문이 들지 않았는데 열여덟 살 정우진의 핸드폰 비밀번호가 내 생일인 걸 알고 나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 생일은 언제부터 안 거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나? 하긴 고아원에서 생일 때마다 파티를 해 주긴 했으니까 그때부터 알기야 했겠지.
꾸민 것도 편집한 것도 딱히 없어 보이는 처음 샀던 모습 그대로의 핸드폰 화면을 잠시 보다가 이것저것 뒤지기 시작했다.
만약 스무 살의 나라면 다른 사람의 핸드폰을 뒤지는 짓은 못 했을 거다. 누가 보라고 해도 안 봤을 텐데 이제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됐다. 그렇다고 우리가 같이 살 때 내가 핸드폰을 매일 뒤진 건 아니었다. 그냥 정우진의 핸드폰을 보는 데 거리낌이 없어진 거다.
전화번호부나 문자, 최근 통화 내역 같은 걸 보면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정우진이 핸드폰으로 하는 거라고는 내게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는 게 전부였으니까. 물론 고등학생 정우진은 내게 연락을 할 일이 없으니 그냥 새것처럼 깨끗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정우진은 다른 사람과 문자를 했다. 같은 반 친구처럼 보이는 애와 문자도 하고 통화도 하고 전화전호부에 등록된 사람도 백 명이 넘었다.
나는 정우진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떤지 알고 있다. 사실 고등학생 정우진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렸나 보다.
어렸을 땐 사회성이 좀 있었나? 전화번호부에 등록된 사람도 많고 이 사람 저 사람이랑 평범하게 문자도 주고받는 걸 보니 어쩐지 마음이 술렁거렸다. 얘가 이렇게 멀쩡하던 때도 있었구나.
고등학생이니까 학교 끝나면 친구랑 놀기도 하겠지? 피시방 같은 데도 가려나? 아무리 상상을 해 보려고 해도 잘 상상이 되질 않았다. 또래 친구들이랑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노는 정우진이라니.
답장을 잘 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랑 대화다운 대화를 하기도 하는구나. 어쩐지 감격스러워서 대충 문자를 훑고 있는데 어머니와 한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우진아, 문자 확인하면 전화해.]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
[정말 진짜 괜찮아요.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어제 한 문자였다.
[괜찮아?]
[네.]
이건 엊그제.
[우진아.]
[저 괜찮아요.]
[그게 아니라 오늘 아버지 한국 오셨어. 같이 저녁 먹게 일찍 들어와.]
[네.]
[괜찮지?]
[네, 괜찮아요.]
분명 다 다른 날에 한 문잔데 패턴은 똑같았다. 거의 매일 문자를 주고받았지만 내용은 괜찮으냐고 물어보고 괜찮다고 대답하는 것뿐이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괜찮다는 거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서 계속 같은 질문과 같은 대답을 보며 문자를 올렸다. 이 이상한 질문과 대답은 하루 이틀 전에 시작한 게 아니었다. 달이 바뀌어도 계속됐다. 그렇게 한참을 올리다가 드디어 다른 내용을 발견했다.
[저 정말 괜찮아요. 이제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꿈을 꿨는데 그때 안 잤으면 괜찮지 않았을까 생각했거든요. 근데 이제 정말 괜찮아요. 근데 만약 정말 만약에 안 자고 계속 거기에 있었으면 뭐가 달라지긴 했을 거 같아요.]
[우진아, 전화 받아.]
[저 괜찮아요.]
[전화 받아.]
[괜찮아요. 이제 잘 기억도 안 나요.]
[우진아, 지금 엄마 얘기하고 있는 거 맞니?]
[무슨 엄마요?]
이 날의 문자는 여기가 끝이었다.
[실명이래.]
[괜찮아요.]
[네가 눈 찌른 애 실명됐다고.]
[저 괜찮아요.]
과거로 가면 갈수록 문자 내용은 점점 이상해졌다. 서로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정우진은 끊임없이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고 아주 가끔 이상한 헛소리를 했다.
[너 혼자 두고 간 거 너무 후회된다. 아무리 일 때문이라도 널 혼자 두고 가면 안 됐는데 괜히 엄마 때문에 네가 그렇게 된 거 같아서 마음이 많이 안 좋아. 아버지는 계속 여기 있고 엄마는 내일모레 한국 갈 거야.]
[저 괜찮아요.]
[괜찮다는 소리 좀 그만하면 안 되겠니.]
[네, 죄송해요.]
[한국 가서 다른 병원 같이 가 보자.]
[네, 근데 저 정말 괜찮아요.]
이건 1년도 더 된 문자였다.
[빗소리 때문에 전화 오는 소리를 못 들었어요.]
[지금 비 안 와.]
[빗소리 말고 천둥이요.]
[지금 어디니?]
[비 그쳤네요.]
[오늘 비 안 왔어. 어디야?]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대답과 뜬금없는 질문들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다시 빈도가 줄었다. 대략 1년 4개월 전쯤의 문자들은 또 엄청 평범했다. 학교 끝나고 친구랑 저녁 먹고 들어갈게요. 오늘 늦게 들어오세요? 같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평범한 대화들.
그리고 지금처럼 이렇게 자주 문자를 하지도 않았다. 매일 괜찮으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 전에는 그냥 평범했다.
“이게 도대체 뭐야…….”
완전히 위쪽까지 올리자 가장 오래된 문자가 보였다.
[이제 우리 아들도 고등학생이네.]
“…….”
기분이 묘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정우진이 이상해진 건지, 아니면 계속 이상했는데 지금까지는 티가 나지 않았던 건지 모른다. 하지만 문자만 놓고 봤을 땐 어느 순간부터 너무 갑작스럽게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듯 대화의 요점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혹시 그때부턴가? 정우진이 날 찾고 보러 온 적이 있다고 했었다. 말을 잘 해 주려고 하질 않아서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정우진은 분명 내가 고등학생일 때 날 찾아왔다고 했었다. 아니, 내가 고등학생이 아니라 정우진이 고등학생일 때였나? 그것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다른 대화 도중에 흘러가듯 들었던 말이었다.
정우진은 우리가 대학교에서 만나기 전에 이미 날 한 번 찾아와서 내게 말까지 걸었지만 나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로 정우진은 한 번도 내게 다시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고 했었다.
그럼 정우진이 날 아는 척했던 그땐 이미 지나간 일인가?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지 두통이 생기기 시작했다.
스무 살 무렵의 나는 돈도 없고 여유도 없어서 주변을 살피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딱히 기억에 남을 만한 추억도 없었고, 그때를 떠올려도 기억날 만한 거라고는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일만 했던 것뿐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봐도 정우진이 언제 날 찾아왔고, 우리가 마주친 적은 있는 건지,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혼자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자리에 드러누웠다. 바닥에 누워 어두운 천장을 가만히 보고 있자 잠시 잊고 있던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정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왜 스무 살이 된 건지도 모르겠고 그럼 원래 나랑 같이 살았던 그 정우진은 어떻게 된 건지…….
혹시 아주 만약에 내가 그 세상에서 없어지기라도 한 거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같이 과거로 돌아온 게 아니라 그냥 나 혼자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이곳으로 오게 된 거라면 거기에 정우진은 혼자 남게 되는 거잖아.
아니면 원래 여기에 살던 스무 살의 내가 거기로 간 건가? 우리가 서로 바뀌기라도 한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내가 정말 꿈을 꾼 건가.
“…….”
뭐가 어떻게 됐든 좆같은 상황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점점 두통이 심해져서 눈을 질끈 감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을 뜨면 집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아는 그 사람과 함께 사는 그 집에서 눈을 떴으면 좋겠다고 정말 간절히 생각했다.
정우진이 보고 싶었다.
* * *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잠시 정신이 깜빡이듯 깨어났지만 금방 다시 가라앉아 갔다. 어떤 소리인지 의문도 들지 못할 만큼 급속도로 꺼져 가는 정신에 다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뺨 위로 뭔가가 떨어졌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인상을 썼지만 눈이 떠지지는 않았다. 떠 보려고 해도 너무 무거워서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다시 자려고 하는데 이번엔 후드득하고 떨어졌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얼굴 위로 자꾸 떨어지는 무언가에 결국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건지 눈앞은 어두웠다. 눈을 뜨고 있는 건지 감고 있는 건지 잠깐 헷갈릴 정도였다. 눈이 시려서 몇 번 깜빡이다가 손으로 비비자 조금씩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숨을 깊게 내쉬고 눈을 한참이나 깜빡거렸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조금씩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머리맡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앉아서 고개를 숙인 채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순간 가위라도 눌렸나 싶을 정도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귀신같은 자세였다. 하지만 그게 누군지 얼굴을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자는 내 얼굴을 이렇게 들여다보고 있을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었다.
손을 올려 더듬더듬 내 얼굴을 만졌다. 아까 자는데 얼굴 위로 자꾸만 뭐가 떨어지는 것 같더니 역시나 축축했다. 가끔 정우진이 악몽을 꾸는 날이면 자는 내 얼굴을 보면서 울고는 했었다. 최근 들어 이런 적은 없었는데 오랜만에 악몽이라도 꿨나 싶어 팔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축축한 뺨에 닿자 움찔 떨리는 게 느껴졌다.
“왜 그러고 있어?”
목소리를 냈지만 잔뜩 가라앉아서 잘 나오질 않았다. 뺨을 만져 주다가 뒷목을 당기자 힘없이 끌려왔다. 가슴 위로 기분 좋은 무게감을 느끼며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쓰다듬고는 말했다.
“잠들 때까지 만져 줄 테니까 울지 말고 자.”
목소리가 잘 나오질 않아 속삭이듯 말했지만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질 않았다. 다시 급격히 쏟아지는 졸음에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뭔가 지나치게 축축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어두운 허공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머리를 만지고 있는 손이 차갑다. 가슴 위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가만 보니까 씻고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설마 이게 다 땀인가? 얼마나 운 거야? 내 가슴에 얼굴이 닿은 정도로 이렇게 축축해질 수가 있나? 눈에서 물이라도 쏟지 않은 이상 이렇게까지 축축해질 수는 없었다.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자 누워 있는 곳이 지나치게 딱딱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순간 여기가 침대 위가 아니라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뭐야?”
“…….”
눈에 잔뜩 힘을 주자 젖어서 축 늘어져 있는 정우진이 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그 정우진이 아니라 작고 어린 정우진이.
“너 여기……. 아니, 잠깐만. 아, 씨발.”
순간 온갖 복합적인 생각들이 동시에 들었다. 역시 이건 꿈이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 눈을 떴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간절하게 빌었는데.
“하…….”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잠시 눈을 꾹 감았다. 몇 초쯤 그러고 있다가 손을 내리고 정우진을 바라봤다. 무릎을 꿇은 채 앉아서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도자기처럼 창백한 얼굴 위에 달라붙어 섬뜩해 보였다.
“…….”
“…….”
얘가 여기에 왜 있는 거지? 설마 이게 꿈은 아니겠지? 분명 나 혼자 잠든 거 같은데. 근데 얜 왜 이렇게 젖어 있지? 오다가 물에 빠졌나? 근데 정우진이 맞긴 한 거지? 귀신은 아니겠지? 왜 아무런 말도 안 하지?
별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귓가로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워서 밖에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빗소리가 꽤 큰 걸 보니 비가 많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너 여기서 뭐 해?”
“…….”
“언제 왔어?”
“…….”
물어도 정우진은 대답이 없었다. 도망갈 땐 언제고 이 새벽에 왜 다시 온 건지 모르겠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젖어 있는 걸 보면 우산도 안 쓰고 온 거 같은데. 근데 정말 정우진 맞긴 한 거지?
너무 말도 없고 창백한 게 마치 밀랍 인형 같아서 점점 등 뒤가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고 날 빤히 쳐다보는 눈을 한참 보다가 벌떡 일어나 벽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불이 켜지자 정말 이 비를 다 맞고 온 건지 홀딱 젖어 있는 정우진이 보였다.
“왜 대답을 안 해? 너 설마 몽유병 이런 거 아니지?”
얘가 그런 것도 있었나? 나랑 같이 살 때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어렸을 땐 몽유병도 있었나?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한참 바라봤지만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눈이 저렇게 또랑또랑한 걸 보면 몽유병 같은 건 아닌 거 같은데.
“정우진.”
“왜.”
다시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대답했다. 한숨을 내쉬며 다가가 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언제 왔어?”
“아까.”
“왜 그러고 있어? 귀신인 줄 알고 놀랐잖아.”
마음 같아서는 너 자는데 누가 네 얼굴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안 놀라겠냐고 턱주가리 안 처맞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두울 때 봤을 땐 귀신같더니 밝은 곳에서 보니까 축 늘어져 있는 꼴이 비 맞은 거지새끼가 따로 없었다.
“아까 만난 게 꿈인지 아닌지 헷갈려서.”
“아까 만난 거?”
내 물음에 정우진이 시선을 내렸다. 길게 뻗어 있는 속눈썹 때문에 눈가에 그늘이 진 게 보였다. 지금 모습이 이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말 너무 불쌍해 보였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어? 이 밤에? 비 오는데 우산도 안 쓰고?”
얇은 잠옷 하나만 덜렁 입은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어 물었지만 정우진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손을 뻗어 숙이고 있는 얼굴을 들자 시선이 마주쳤다.
울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운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꿈 아닌 거 알았지?”
“…….”
“알았냐고.”
“응.”
대답하는 정우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야.”
“왜.”
“눈 좀 깜빡거려. 안 따가워?”
“…….”
아까부터 한 번을 깜빡이질 않는 눈을 보며 어이가 없어서 말하자 그제야 정우진이 한 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너 고등학생이 이렇게 늦었고 비도 오는데……. 아니, 잠깐만. 일단 옷 좀 벗어 봐. 씻을래? 안 추워?”
안 그래도 추운데 계속 젖은 옷을 입고 있게 할 수는 없었다. 옷장을 열어 옷을 뒤적거리다가 보일러를 온수로 돌렸다. 여긴 욕조도 없고 샤워 부스도 없는데 혼자 잘 씻을 수 있을까 잠깐 고민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옷깃을 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형.”
“왜? 추워?”
“밤에 누가 자주 와?”
“어?”
“누가 자주 와?”
오긴 누가 와? 가끔 친구가 와서 자고 가거나 밤새도록 술을 마신 적은 있었다. 근데 이걸 갑자기 왜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다. 의아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그의 팔목을 잡았다.
“오긴 오지. 근데 자주는 아니고 가끔. 일단 뜨거운 물로 좀 씻어.”
“누가?”
“이게 샤워 타월이고 이게……. 잠깐만. 이게 뭐야? 샴푼가?”
사실 나도 이 집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몰랐다. 세면대 구석에 줄지어 서 있는 통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누가 오는데?”
“이게 샴푸고 이게 보디 워시인가 보다. 세수는 비누로 하면 되고……. 칫솔이, 잠깐만. 새 칫솔 어디 있을 텐데.”
세면대 위에 수납장을 열자 비누 몇 개랑 새 칫솔 몇 개가 보였다. 아니, 근데 칫솔까지는 필요 없나? 자고 갈 것도 아닌데 그냥 몸이나 좀 녹이게 하고 다시 집에 보내야 하잖아.
“너 부모님한테 말도 안 하고 왔지?”
“누가 오는데?”
“오긴 누가 와, 친구가 오겠지. 학교 교수가 우리 집에 오겠냐?”
끈질기게 묻는 질문에 인상을 쓰며 대답하자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새벽에 와?”
“새벽에 올 때도 있지.”
“와서 울어?”
“뭐라고?”
도대체 무슨 소리야? 울긴 갑자기 뭘 울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또 아까처럼 빤히 날 쳐다보는데 너무 추워 보여서 더 이상 다른 대화는 하고 싶지가 않았다.
“일단 좀 씻어. 대충 씻지 말고 몸 녹을 때까지 뜨거운 물 한참 뿌리고 있어. 그리고 아까 들었어? 이게 샴푸고 이거는…….”
“나도 눈 있어.”
“뭐가 뭔지 다 알겠어?”
“보면 알겠지.”
눈을 치켜뜨고 말하는 걸 보며 황당해지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짜증을 부리는 건지는 모르겠다. 정우진 말대로 보면 다 아는 건데 너무 애 취급해서 그런가?
“그럼 씻고 나와. 수건은 수납장 열면 있어.”
“…….”
뭐라고 더 말하려고 했는데 아무 대답도 안 하고 빤히 쳐다보는 게 꼭 꺼지라는 거 같아서 그냥 문을 닫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물소리는 들리질 않았지만 다시 문을 열기는 좀 그랬다.
아깐 그냥 빨리 얘가 이 젖은 몸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는데 나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질문들이 너무 이상했다.
내가 아까 자다가 뭐라고 했더라? 너무 잠결이라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자다 깨서 누가 쳐다보고 있기에 당연히 정우진인 줄 알고 막 만졌는데……. 울지 말고 자라고 했었나? 얘는 내가 자길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기라도 한 줄 알고 그랬던 건가?
그래서 그렇게 짜증을 부렸나 싶은데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야 그렇다 쳐도 지금 쟤는 날 다시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뭘 그런 것 때문에 짜증을 부리고 지랄이야, 존나 귀엽게.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어이가 없네.”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숨을 내쉬다가 순간 멈칫했다. 나 방금 속으로 뭐 이상한 말 한 거 같은데.
“…….”
갑자기 등 뒤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혼자 심각해져서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문 너머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껏 씻고 나왔는데 다시 젖은 옷을 입게 할 수는 없었다. 옷장에서 제일 작아 보이는 옷들을 찾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다 씻었어?”
얼른 손에 잡히는 아무 옷이나 집어 건넸다. 틈 사이로 뿌연 수증기와 함께 달달한 냄새가 훅 끼쳤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는데 문이 열리면서 젖은 정우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어깨가 젖고 있었다. 아무런 모양도 글자도 없는 회색 티셔츠를 입은 정우진이 한 손에는 수건을, 한 손에는 검은색 바지를 들고 있었다.
“…….”
“…….”
밖으로 나와서 입으려는 건가 생각했는데 들고 있던 바지를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더니 수건으로 머리를 몇 번 닦다가 내게 물었다.
“나 오늘 자고 가도 돼?”
“……되긴 되는데 부모님한테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내 머리를 닦는 것도 귀찮아졌는지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내버려 두고 수건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지는 수건을 따라 시선을 내려 하얗게 뻗은 다리를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바지는 왜 안 입어?”
“커.”
“아……. 다른 거 줄까?”
얼른 등을 돌려 다시 옷장을 뒤졌지만 입을 만한 옷이 없었다. 다 세탁기 안에 있나? 잘 때 입기엔 불편해 보이는 바지밖에 보이질 않았다. 어쩐지 옷장 안에 처박고 있는 얼굴을 들기가 힘들어서 괜한 옷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입고 있던 옷이 당겨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내 옷깃을 잡고 있었다.
“형.”
“…….”
소매가 내려와 손가락을 반이나 덮고 있는 걸 보다가 시선을 올리자 정우진이 말했다.
“새벽에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기계적인 내 대답에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무는 게 보였다. 그걸 보며 숨을 삼키는 순간 내가 너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지금 이럴 상황이 아니었다. 새벽에 비를 쫄딱 맞고 왔는데 씻는 게 당연한 거고 옷이 커서 바지를 좀 못 입을 수도 있는 건데. 나도 친구랑 술 퍼먹고 잘 때 거의 반나체로 잔 적이 많았다. 다른 친구도 팬티 바람으로 깨서……. 아니, 잠깐만.
“내가 팬티 줬나?”
화들짝 놀라 묻는 순간 내 시선은 다시 하체 쪽으로 갔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젖은 거 다시……. 입었어?”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젖은 머리카락이 움직이는 걸 보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아니, 씨발……. 진짜 씨발, 아니. 이게 그렇게 꼭 이상한 상황만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상한 건…… 이상한 거 아니야?
“너 속옷 안 입었어?”
“어.”
“왜?”
“젖은 걸 다시 입을 수는 없잖아.”
“그럼 내 거 줄 테니까 입어.”
황당한 얼굴로 말하는 날 보며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 다른 사람 거 안 입어.”
“그럼 내 옷은 왜 입는데?”
“그럼 벌거벗고 자?”
무슨 개소리야, 도대체……. 그래서 팬티도 안 입고 바지도 안 입고 반나체로 그러고 자겠다고? 나랑?
도저히 내 상식으론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게 정말 이상한 일이 맞는 건지 끊임없이 의심했다.
나야 당연히 정우진이랑 사귀는 사이였으니까 이게 이상한 상황이 맞긴 한데……. 그냥 우리가 동성의 친구였을 때, 남자끼리 그냥 같이 잠을 자는 상황에서 이게 정말 이상한 상황이 맞는 건지 그게 너무 헷갈렸다.
이상한 거 맞지? 맞는 거 아닌가? 정우진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걸 보면 내가 너무 이상하게만 생각하는 거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래도 이게 이상한……. 아니, 씨발.
그러니까 이성애자인 남자 둘이서 바지랑 속옷을 안 입고 같이 잠을 자는 게 이상한 일인지, 아니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인 건지.
“…….”
“…….”
아니, 근데 생각해 보니까 정우진이 날 지금 안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평범한 친구 사이라고 생각할 게 아닌데. 근데 씨발, 그래도 얜 고등학생이잖아. 따지고 보면 우린 지금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됐고.
정우진은 어렸을 때 알던 형을 거의 십몇 년 만에 다시 만난 건데 만난 지 하루 만에 반나체로 같이 자는 거고.
“그래…….”
“…….”
“음, 그래. 일단 자자.”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여기서 더 고민해 봤자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만약 대답이 나온다고 해도 내가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베개를 하나 더 꺼내 주자 이불 안으로 들어가 있는 정우진이 날 올려다보며 베개를 받았다. 이불이 하필이면 또 하나밖에 없어서 잠깐 눈앞이 아득해졌다.
“너 근데 집에 전화 안 해도 돼?”
잠깐 잊고 있던 게 떠올라 아, 하고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아무도 없어.”
“왜?”
“일 때문에 외국에 계셔.”
“부모님이랑 같이 안 살아?”
어제 문자 봤을 땐 같이 사는 거 같던데. 어머니만 귀국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같이 살아. 일 때문에 그냥 며칠 가신 거야.”
“아……. 그럼 집에 아무도 없어?”
“그런 거 왜 자꾸 물어봐?”
불을 끄고 이불 위에 앉는데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눈으로 정우진이 있을 자리를 한참 바라봤다.
“너 평소에도 자주 이래?”
“내가 뭘.”
“새벽에 나와서 친구 집에서 잔다거나…….”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십몇 년 전에 아주 어렸을 때 잠깐 고아원에 같이 있었던 사람이랑 어제 만났는데 오늘 반나체로 같이 잔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물론 정우진이 날 좋아하고 나도 정우진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얜 내가 자길 좋아하는지 모르잖아.
정우진 입장에서 나는 쓰레기 중에 개쓰레기였고 자길 죽일 뻔한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조금의 경계도 하질 않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새벽에 자주 나오냐고?”
“그런 것도 그렇고……. 너 친구랑 잘 때도 바지랑 팬티 안 입고 자?”
나는 정우진이랑 볼 거 못 볼 거 이미 다 본 사이였다. 할 짓 못 할 짓도 이미 다 한 사이였지만 지금 이 정우진은 내가 아는 그 정우진이 아니었다. 게다가 얘는 고등학생인 미성년자다. 내가 이렇게 당황하는 건 고등학생인 미성년자한테 성애적인 감정을 느껴서가 아니라 속옷도 안 입고 티셔츠만 입은 채 자고 가도 되냐고 물어보는 그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니.”
만약 지금 이런 행동을 아무 데서나, 아무한테나 한다고 했으면 눈앞이 캄캄해졌을 텐데 다행인지 정우진은 내가 간절히 기다렸던 대답을 해 줬다.
“그치? 오늘은 너무 갑자기 와서 그런 거지?”
“형.”
“어?”
“집에 와서 누가 자주 울어?”
슬슬 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정우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깐 분명 이불을 덮고 있었던 거 같은데 이불 위로 맨다리를 빼 놓고 앉아 날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나랑 다른 사람이랑 착각했지?”
“…….”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착각을 한 건 맞는데……. 근데 착각한 사람도 정우진이긴 한데. 그래도 이 정우진이랑 내가 착각한 정우진은 다른 사람이니까 맞긴 한 건가.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질 않자 정우진이 앵무새처럼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이 와서 자주 울어?”
“음…….”
“매일 새벽에 와서 울어? 비밀번호도 알고 있어? 밤에 이렇게 자고 있는데 들어와도 놀라지도 않을 만큼 자주 있는 일이야?”
폭격처럼 터지는 질문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네 말이 맞다고, 걔가 내 애인이라고 사실대로 말해도 되는 건가 잠깐 생각했지만 금방 마음을 접었다.
“형.”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대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고개까지 돌린 채 곤란해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나 유학 갈 거야.”
“유학?”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크게 뜨자 정우진이 꼼지락거리며 이불 안으로 몸을 넣었다. 등을 돌리고 누워서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몸이 너무 작아 보였다.
“가서 안 올 거야.”
“갑자기?”
“갑자기 아니야. 예전부터 계속 가려고 했었어.”
갑자기 유학이라니. 얘가 유학도 갔다 왔었나? 고등학생 시절의 정우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서 쉽게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가서 안 온다고 하기는 했지만 대학교는 나랑 같이 다닌 걸로 봐서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 어디로 가는데?”
“알아서 뭐 하게. 찾아올 거야?”
“나 여권도 없어. 돈도 없고.”
“…….”
덕지덕지 짜증이 붙어 있는 목소리를 듣고 있어도 화가 나질 않았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웅크리고 있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손을 뻗었다. 이불 위의 머리에 손을 갖다 대자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언제 가는데?”
“…….”
“내일 당장 가진 않을 거 아니야.”
정말 가는 거 맞나? 진짜 가면 어떡하지? 안 그래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정우진까지 없으면 내가 제정신으로 살 수나 있을까 걱정이 됐다. 아니면 정우진이 그랬던 것처럼 몰래 찾아가서 우연히 만난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부터 안 올 거야.”
“안 온다고? 어딜?”
“여기 안 올 거라고.”
유학 얘기도 그렇고 이 얘기도 그렇고 너무 갑작스러웠다. 아깐 꿈인지 아닌지 헷갈려서 왔다고 하더니 사실 이 얘기 하려고 온 건가. 이 말이 정말인지 그냥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만약 진짜라면 좀 곤란한데. 내가 가지 말라고 한다고 내 말을 들을까. 듣지 않을까? 설마 내가 가지 말라고 하는데 갈까?
사실 내가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다. 얜 내가 아는 그 정우진이 아니지만 그래도 어쨌든 정우진은 정우진이니까 날 두고 갈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얜 지금 날 좋아하고 있는 거 아닌가. 아니, 싫어한다고 했었나.
싫어하려고 하는 중인가.
예전에 정우진이 울면서 했던 말을 떠올리니 왜냐고 쉽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몇 년이 지난 그때도 당장 어제 일처럼 힘들어 했는데 지금 정우진은 어떤 마음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앞으로 나랑 같이 살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모른다. 계속 여기에서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다시 눈을 감았다 뜨면 내가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건지.
이게 내 꿈이면 그냥 깨어나면 끝이겠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나 잘 있는지 안 궁금했어?”
한없이 가라앉고 있는 와중에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공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는 정우진이 보였다.
“생각하긴 했어?”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널 많이 생각했고 계속 보고 싶어 했다고 말하는 건 쉬웠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나는 정우진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단 한 번도 기억하지 못했고 정우진을 보고도 그가 누군지 알지도 못했었다.
“안 한 거 알아.”
“…….”
“내가 어딜 가도 찾지도 않겠지.”
“그건…….”
그건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우진이 선수 치듯 말했다.
“나도 형 생각 별로 안 했어.”
정우진이 하는 말은 전부 거짓말투성이였다.
“어렸을 때 형이 나한테 잘해 준 건 사실이잖아. 그래서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생각이 나서 찾았던 거야. 혹시 만나면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냥 그게 다야.”
“…….”
“형 잘 지내는 거 알았으니까 이제 됐어. 우리가 만나서 웃으면서 밥 같이 먹을 사이도 아니고 그냥 어렸을 때 잠깐 알고 지냈던 거밖에 없는데…….”
혹시 정우진은 자기가 지금 얼마나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을까. 그동안 정우진이 어떻게 살았는지 몰랐다면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었을 거다.
“근데 진짜 한 번도 안 했어?”
혼자 주절주절 묻지도 않은 걸 변명하듯 말하던 정우진이 슬쩍 몸을 틀며 말했다. 이불 안에서 얼굴만 살짝 빼고 날 쳐다보는 하얀 얼굴을 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안 했어.”
“…….”
안 한 게 사실이니까 안 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거짓말을 시작하면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우진에게만은 죽어도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별로 안 했어.”
정우진이 다시 등을 돌려 얼굴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반박하듯 하는 말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돈 벌고 일하느라…….”
“됐어. 나도 안 했다고.”
“아니, 그래서 그랬던 것도 있는데…….”
“됐다고. 어차피 그럴 줄 알았어.”
한마디만 더 하면 박차고 일어설 것처럼 사나운 목소리였다.
말했다시피 먹고사느라 바빠서 그런 것도 있지만 나는 정우진에 대한 걸 의도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었다. 혹시 생각이라도 나려고 하면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거나 힘들게 몸을 움직이고는 했었다.
따지고 보면 그랬던 거다. 나는 정우진을 잊은 게 아니라 잊고 싶어서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던 거다.
근데 이렇게 생각해 보니까 그럼 어쨌든 가끔 생각하긴 했던 거 아닌가? 생각나려고 하면 얼른 다른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다가 뒤늦게 말을 정정했다.
“사실 몇 번 하긴 했어.”
“됐다고.”
“진짜야. 잠깐이긴 하지만.”
동그랗게 말려 있는 이불 공이 부스럭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불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보면서 만질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어떤 거 생각했어?”
“어?”
“내 생각 했다며. 어떤 생각 했는데?”
그냥 잠깐 얼굴이 떠올랐다가 공기 중에 연기처럼 사라지고는 했었다. 시간이 지나서 어떻게 생겼는지 잊었을 땐 날 불렀던 목소리를 떠올렸고, 목소리마저 생각나지 않을 땐 내 손을 붙잡던 온기를 떠올렸다.
“너 개구리 먹기 싫다고 울었던 거.”
“…….”
“너 그때 엄청 울었잖아. 막 비명 지르면서.”
웃으면서 말했지만 정우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질 않았다. 얼굴이 보이질 않으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너 아직도 개구리 무서워해?”
“안 무서워. 그때도 무서워서 울었던 거 아니야.”
“그럼 왜 울었는데?”
“…….”
아까보다 조금 높아진 목소리에 다시 웃으면서 물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게 너무 웃겨서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질 않았다. 또 어떤 일이 있었더라. 속으로 웃으면서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정우진이 매미를 밟아 죽였던 게 떠올랐다.
그때 매미 죽이면서 뭐라고 했었지. 아, 지금 생각해 보니까 얜 정말 어렸을 때부터 좀 범상치 않기는 했구나. 날 멀거니 보면서 매미 왜 죽이면 안 되냐고 묻던 까만 눈이 떠오르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나도 형 생각 가끔 했어.”
“아깐 안 했다며.”
“그냥 잠깐 한 거야.”
조금 전에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걸 보고 있자니 매미고 나발이고 어렸을 때 그랬던 게 무슨 상관이냐 싶어졌다.
“형이 나한테 웃어 줬잖아.”
“내가? 언제?”
“나한테 오라고 했을 때.”
오라고? 그게 언제지? 기억은 안 나지만 오라고 한 적은 많았을 텐데 내가 그때마다 웃지는 않았을 거다. 기억이 나질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을 이었다.
“모래로 두꺼비 집 만들었을 때.”
“두꺼비 집?”
“밥 먹을 때 내가 숟가락 떨어뜨렸는데 형 거 나한테 줬잖아.”
“아…….”
그랬나? 기억하기엔 너무나도 사소한 것들이라 정우진이 말하는 어느 것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냥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데 아직도 말할 게 있는지 쉴 새 없이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나 흔들어 깨울 때 안아 줬어. 그네 타는 거 무서워했는데 그럼 타지 말라고 했잖아. 이름 불러 주면서 웃어 줬을 때도, 밤에 잘 자라고 말해 줄 때도, 우리 몰래 복도에서 같이 자고 있는데 형이 춥다고 식탁보 벗겨서 나한테 덮어 줬을 때도, 넘어져서 울고 있을 때도, 엄마 보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리고 김치 먹기 싫은데 먹으라고……. 아, 이때는 웃어 준 게 아니라 골고루 먹으라고 내 머리 때렸어.”
“…….”
아니, 이건 잠깐 생각한 게 아닌 거 같은데.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끝도 없이 줄줄 나오는 말에 당황하고 있을 때 정우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땐 형이 나 많이 좋아해 줬는데.”
“뭐?”
“…….”
작게 웅얼거리는 말을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되물었지만 정우진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에 천둥 번개 엄청 칠 때 하늘만 보고 있었잖아. 큰 소리 나는 거 싫어서 못 자고 있으면 형이랑 같이 이불 안에 들어가서 손잡고 잤는데.”
아, 그건 기억이 난다. 천둥소리를 무서워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큰 소리에 유독 민감해서 깜짝깜짝 놀라고는 했었다. 그게 불쌍해서 이불 안에서 같이 잤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여름에 엄청 더웠을 때 물장난 치다가 혼났잖아. 이불 빨래 해 놓은 거 다 젖게 해서. 겨울에 군고구마 먹다가 나중에 먹으려고 눈 속에 파묻어 놨는데 다음 날 그거 먹다가 형 이 빠졌잖아.”
아, 그때 안 그래도 빠지려고 흔들리고 있었는데 딱딱한 거 깨물어서 빠졌던 거 같기는 하다. 완전히 잊고 살았는데 듣다 보니 하나둘씩 떠오르고 있었다. 그 뒤로도 정우진은 한참이나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들을 쉬지도 않고 말했다.
걷다가 낙엽을 밟아서 소리가 나 웃었다는 정말, 정말로 사소한 날들의 이야기였다.
“원장님이 오라고 했는데 형이 가지 말라고 했잖아. 그때 안 갔으면 괜찮았을까.”
그런 평범한 날들의 이야기는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조금씩 후회로 물들기 시작했다.
“골고루 먹으라고 했을 때 잘 먹고, 형이 하지 말라고 하는 거 하지 말고 그랬으면 괜찮지 않았을까. 그것도 그럴 게 뭐 대단한 일이 없었잖아. 내가 엄청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싸웠던 것도 아닌데.”
“…….”
“그럼 그냥 매일 하루하루 조금씩 그런 것들이 쌓여서 결국 형이 못 참게 됐다는 거잖아. 형은 계속 참고 있었고 나는 그걸 몰랐고 그러다가 형은 폭발한 거고.”
정우진은 어렸을 때 갑자기 내 행동이 변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다. 예전에 이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정우진은 지금과 비슷하게 말했다. 정우진은 정말 단 한 톨도 잘못한 게 없는데 모든 게 자기 탓인 것처럼 말했었다.
그때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어떻게 했더라면. 그때 내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끊임없이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수만 가지의 가정을 대입하고 그 안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네가 뭘 잘못해서 그랬던 거 아니야.”
내 말에 정우진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다 지난 일인데 잘잘못 따지자고 꺼낸 말 아니야.”
“…….”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말한 거야.”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잠겨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얼굴을 보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억지로 어깨를 붙잡아 내 쪽으로 돌리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 애는 내가 아는 그 정우진보다 좀 더 어리고 약하고 작은 애였다. 날 싫어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있으면서 자기가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애였다. 내가 조금만 실수를 해도 처참하게 찢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여서 평소에 정우진을 대하듯 행동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속으로 계속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만들어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떠올렸다.
“그때 네가 나한테 뭘 잘못했거나 그래서 그랬던 거 정말 아니야.”
“그럼 형은 그냥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이 싫어져?”
또 그만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날카로운 말이 들려왔다. 그 말에 결국 나는 손을 뻗어 이불을 걷어 냈다.
“너 싫어해서…….”
싫어해서 그랬던 게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들리는 거라고는 희미한 빗소리가 전부였던 고요한 공간에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리가 들리자 놀라서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씨발, 깜짝이야. 미친 것처럼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고 핸드폰을 찾았다. 이 새벽에 도대체 누구야? 액정 위에 뜬 ‘사장님’이라는 글자에 미간을 구겼다. 이름이 사장님인 걸 보면 분명 아르바이트하던 곳인 거 같은데, 이 새벽에 왜 전화를 했지? 설마 나 새벽에 어디 일하러 갈 데 있었나?
내가 계속 전화를 받질 않자 정우진이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전화 안 받아?”
“어? 아, 받아야지.”
“누군데?”
“음…….”
그걸 나도 모르겠다. 사장님이긴 사장님인데…….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올 리가 없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서주니?
“네.”
뭐라고 해야 하지? 누구냐고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서 짧게 대답하고 상대방이 말을 하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목소리가 들리질 않아 잠시 액정을 확인했다. 끊어진 것도 아니고 시간은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할 말 없어?
“네?”
뭔가 체념한 것 같은 소리에 눈을 크게 뜨며 되묻자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너 알바 많이 하는 거 알고 그래서 사정도 많이 봐줬는데 말도 안 하고 일을 안 나오면 어떡해? 이런 얘기 해 봤자 너나 나나 서로 감정만 상할 테니까 길게 얘기 안 할게.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되고 그동안 일했던 건 이번 달 말까지 입금해 줄게.
“아……. 아, 예……. 죄송합니다.”
-또 다른 일 할 텐데 그땐 지금처럼 그러지 마. 알겠니?
“네, 죄송합니다.”
-그래, 수고해라.
“네…….”
끊어진 전화를 멍하게 보다가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바라봤다. 정우진도 나만큼 당황한 건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혹시 나 때문에 못 간 거야?”
“어?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무슨 일이었지? 새벽 알바였나? 나 지금 알바를 얼마나 하고 있는 거지? 스무 살이면 분명 한두 개 하는 게 아닐 텐데. 주말 알바도 따로 있을 거 같고. 일단 다 관둔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 액정을 보며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가 슬쩍 시선을 돌려 정우진을 쳐다봤다. 내 표정이 심각해서 그런지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었다.
“너 혹시…….”
정우진이 숨을 삼키는 게 보였다.
“나 알바 몇 개 하는 줄 알아?”
“뭐?”
“아르바이트 어디서 하는지 아냐고.”
내 말에 정우진이 말없이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그냥 넌 왠지 알고 있을 거 같아서.”
“그게 무슨 뜻인데?”
“아니,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일하기가 좀 그런 상황이라…….”
일을 관둔다고 말해야 하는데 문제는 내가 어디서 어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거다. 핸드폰을 뒤지면 몇 개 알기는 하겠지만 어제 그 씹새끼처럼 사장님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저장이 돼 있을 수도 있었다.
“갑자기 한꺼번에 전부 다 그만둔다고?”
“그래야 할 거 같아서.”
“왜? 뭐 때문에? 혹시 어디 아파? 무슨 일인데?”
정우진이 손으로 바닥을 짚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픈 건 아니고 그냥……. 좀 쉬려고.”
“갑자기 왜?”
갑자기 하던 일을 다 그만둔다고 하면 나 같아도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그것도 가진 거라고는 쥐뿔도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 그런다고 하면 누구나 신변에 큰 문제라도 생긴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럴 일이 좀 생겼어.”
“무슨 일?”
“그냥……. 아니, 그래서 알아, 몰라? 나 어제 술집 알바 잘리고 지금 전화 온 곳도 잘렸는데 여기 말고 다른 데 더 있어?”
지금 나보다 날 더 잘 알고 있는 건 정우진이었다. 하지만 정우진은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도 몰라. 애초에 나한테 그런 걸 왜 물어봐, 내가 왜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너 우리 집 비밀번호도 알고 있었잖아.”
내 말에 정우진이 말은 하지 않고 한참 입만 뻐끔거리다가 겨우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냥 찍은 거야.”
“그럼 이것도 찍어 봐.”
“…….”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정우진이 결심했는지 내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XX동에 술집이랑 새벽에 큰길에 약국 옆에 있는 편의점이랑……. 주말에 XX동 경찰서 사거리 쪽에 고깃집…….”
숨기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끝까지 모른다고 하면 될 텐데 찍어 보라고 한다고 또 진짜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내가 물어보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대답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질 못해서 좀 당황스러웠다. 진짜 알고 있어서 놀랍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말해 줬으니까 뭐 때문에 그런 건지 형도 말해 줘.”
“…….”
“왜?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건데? 혹시 집에 찾아와서 자주 운다고 했던 그 사람 때문은 아니지? 친구야? 학교 선배나 후배 뭐 그런 거야? 아니면 애인이야?”
말을 하다 흥분하기라도 한 건지 무릎으로 서서 내 어깨를 잡고 취조하듯 흔들기 시작했다. 어깨를 꽉 쥐고 있는 손을 보다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마디도 없이 길게 뻗은 손가락 끝에 단정하게 정리된 손톱이 보였다.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하얀 손은 작은 몸집에 비해 유독 컸다. 몸은 이렇게 작은데 손은 미리 크기라도 했나. 내가 알던 손이랑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여서 잠깐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야.”
심각한 얼굴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제 손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노려봤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삐걱거리는 시선이 내게 향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자 정우진이 갑자기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질끈 감았는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너 내일부터 여기 안 온다며.”
“…….”
“유학 가서 이제 한국 안 온다고 했으면서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
떨리는 속눈썹을 건드려 보고 싶은 걸 참으며 입을 열었다.
“너 유학 가는 거 내일…….”
하지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점점 말끝을 흐리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눈에 잔뜩 힘을 줬다가 질끈 감았다. 그러곤 다시 눈을 뜨고 정우진을 바라봤다. 정우진은 아직도 눈을 감고 있었다. 내게 손목이 잡혀서 무릎으로 선 채 미동도 하질 않았다.
그리고 허벅지 위를 덮고 있는 옷자락이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게 뭔지, 왜 저렇게 된 건지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저건 좆이 선 거다. 그러니까 발기가 돼서 성기가 단단해졌기 때문에 옷 위로…….
“…….”
“…….”
멍청한 얼굴로 빤히 보며 그런 생각을 하다가 화들짝 놀라 잡고 있는 손을 내팽개쳤다. 그러자 정우진이 번쩍 눈을 떠 날 쳐다봤다.
“미…….”
“…….”
미친 거 아니냐, 진짜……. 갑자기 좆이 왜 서?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 속에서만 맴돌았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물기가 어려서 젖어 가는 눈을 보고 있자니 이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
“아니…….”
“…….”
“아니, 갑자기 왜…….”
도대체 왜? 그게 가장 큰 의문이었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도대체 왜? 어이가 없어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데 정우진은 도리어 날 탓했다.
“형이 이상하게 만졌잖아.”
“야, 너 말 똑바로 해.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성추행한 거 같잖아. 그리고 이상하게 만진 게 뭔데? 내가 뭘 이상하게 만져?”
“쓰다듬으면서 만졌잖아.”
“미친놈 아니야, 이거? 내가 언제 그랬어!”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정우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그것 좀 어떻게 해 봐. 화장실 갈래? 아니면 내가 집을 나가 줄까? 그게 낫겠지? 나 그럼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 테니까…….”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날 붙들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날 보며 내 옷깃을 겨우 잡고 있는 떨리는 손을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어디 가려고?”
“바람 쐬러…….”
“갔다 안 올 거잖아.”
“아니야, 금방 올게.”
“못 믿겠어.”
“10분만 있다가 올…….”
“안 믿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우진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환장할 것 같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여기 우리 집이잖아. 내가 안 오겠냐?”
“못 믿겠다고.”
“아니, 여기 우리 집…….”
옷깃을 쥔 손에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뼈마디가 도드라져 하얗게 변해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천하의 몹쓸 놈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야.”
“…….”
“정우진.”
내 부름에 정우진이 대답하듯 눈을 깜빡였다. 젖어서 길게 늘어져 있는 속눈썹이 잠깐 눈 밑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알았어. 안 나갈 테니까 그것 좀 어떻게 해 봐. 좀 가리든가……. 가라앉히든가…….”
내가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쥐어짜 내 겨우 말하는 내 심란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진은 아까부터 움직이질 않고 있었다.
“화장실 갈래?”
“가서 뭐 어쩌라고.”
“아니, 씨발……. 어쩌긴 뭘 어째…….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그건 네가 생각해야지.”
가라앉히든가 빼든가 찬물로 씻든가 자기가 알아서 결정해야지 그런 걸 왜 나한테 물어봐. 잠투정을 부리는 애처럼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얘가 혹시 잠을 못 자서 정말 잠투정을 부리고 있는 건가 진지하게 의심했다.
그때 정우진이 손을 밑으로 내렸다. 내 옷을 잡고 있는 반대쪽 손을 아래로 내려 안쪽으로 손을 넣자 겨우 가려져지고 있었던 게 툭 튀어나왔다.
정말 눈앞이 아득해진다는 게 이런 기분이라는 걸 깨달았다.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돌리자 작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움직이는 소리, 헐떡이는 소리, 숨을 삼키는 소리, 정우진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옷깃을 쥐고 있는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자꾸만 당겨서 몸이 그쪽으로 쏠렸다. 정우진이 내 앞에서 저런 짓거리를 한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상황이 달랐다. 쟤는 고등학생이었고 우리는 몇 시간 전에 처음 만난 사이였다. 아니, 그러니까 처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십몇 년 만에 만난 건데 이러면 그냥 거의 처음 만난 사이 아니야?
정우진이 바지랑 속옷을 안 입고 내 앞에 섰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야, 내가 진짜 황당해서 그러는데…….”
“형.”
울먹거리면서 날 부르는 소리에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힘이 안 들어가.”
그 말에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살이 문질러지고 있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왜 여기서 이러고…….”
“손에 힘이 안 들어가.”
“어쩌라는 거야, 씨발……. 그래도 힘 좀 내 봐.”
나는 거의 모든 걸 체념한 채 몸에 힘을 뺐다. 입 밖으로 영혼이 빠져나오고 있는 기분이었다.
“못하겠어.”
칭얼거리는 소리가 아까보자 조금 더 커졌다.
“그럼 하지 말고 그냥 애국가나 불러.”
“형.”
“우진아, 뭘 하든 좋으니까 제발 입 좀 다물고 하면 안 될까…….”
“도와줘.”
씨발,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믿을 수 없는 말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쳐다봤다. 제발 작작 좀 하라고 말하려는데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는 걸 보니 숨이 턱 막혔다.
창백했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 뺨이 불그스름했다. 서글픈 얼굴로 날 쳐다보는 눈은 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축축했고 세상의 온갖 서러움이란 서러움은 다 그러모아 박은 것처럼 가엾어 보였다.
“도와줘.”
눈을 질끈 감으며 말하자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하라고 말해야 하는 게 당연한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걸 진짜 도와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내가 그걸 어떻게 도와줘.”
“왜 못 도와주는데…….”
정우진이 울음기 섞인 목소리의 끝을 늘어뜨리며 옷깃을 잡고 있는 팔을 두어 번 흔들었다. 그 믿을 수 없는 행동에 이게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정말 이게 꿈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더 이상 싫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쉽게 해 달라는 대로 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니……. 너 미성년자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 경찰서 잡혀가.”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말끝에 제발이라는 단어가 자동으로 붙어서 들렸다. 애원하는 눈으로 날 쳐다보는 정우진을 설득하기엔 더 이상 무리 같았다.
“나도 나중에 형 힘들 때 도와주면 되잖아.”
“뭘 도와줘, 끔찍한 소리 좀 하지 마.”
내 말에 정우진이 다시 내 옷깃을 잡은 팔을 흔들었다. 혀엉, 하고 늘어지는 목소리가 심장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속으로 온갖 쌍욕을 하며 이성을 잡으려 애썼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저렇게 울면서 징징거리는 정우진을 무시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겠다.
“손 놓고 이리 와 봐.”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기다렸다는 듯 무릎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옷 잡고 있는 거 좀 놔 봐.”
“싫어.”
“아니, 이렇게까지 가까이 올 필요는 없고. 잠깐만, 좀 뒤로 가.”
“싫다고.”
“너는, 씨발. 싫다는 소리밖에 못 하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인상을 쓰자 정우진이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내게 달라붙었다. 이렇게 붙어 있으면 아래쪽은 보이질 않으니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몰랐다.
내가 설마 미성년자랑 이런 짓거리를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양심이 아파서 착잡한 기분을 버릴 수가 없었다. 차라리 빨리 끝내 버리는 게 낫겠다 싶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아래로 손을 내렸다.
발기해서 단단해져 있는 성기를 잡자 몸이 놀라는 게 느껴졌다. 한 것도 없고 그냥 잡았을 뿐인데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이 부들부들 떨리다가 순간 축 늘어졌다.
“흑…….”
귓가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정우진은 아까부터 동아줄처럼 잡고 있던 옷깃을 놓고 내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소리도 거의 내지 않고 내 목덜미에 눈가를 비볐다. 살갗이 축축하게 젖어 가기 시작했다.
설마 사정한 건가? 그냥 잡았는데? 잡은 거밖에 없는데? 하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경도는 아까와 별다를 게 없었다. 정우진은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여기서 비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과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까?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했지만 결국 나는 정우진이 내 손에 세 번이나 더 쌀 때까지 비키라는 말에 ‘비’ 자도 꺼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