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평소에 스케줄을 조정하기는 하는데 가끔 잠을 잘 시간도 없이 바쁠 때가 있었다. 정말 가뭄에 콩 나듯 아주 가끔씩 그러는데 요즘이 그런 날이었다.
[선배, 저 오늘 좀 늦을 거 같아요ㅠㅠ]
액정 위에 뜬 글자를 보고 있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
[아홉 시 전에는 들어갈게요. 저녁 먹고 있어요. 미안해요ㅠㅠ]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제시간에 집에 오지 않았다. 슬슬 터질 때가 된 것 같기도 한데 생각했던 것보다 잘 다니고 트러블도 없는 것 같아 다행이기는 했다. 정말 바쁠 땐 일분일초가 멀다 하고 오는 문자도 거의 오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오전 내내 연락이 없다가 오후 늦게야 전화가 온 적도 있었다.
직장을 다니는 것이니 이게 정상이기는 했는데.
“…….”
어째서인지 좀 착잡해서 액정을 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어딘데?]
그리고 답장이 온 건 30분이 훨씬 지나서였다.
[회사 근처에 있어요. 아까 나오다 잡혀서ㅠㅠ]
잡는다고 잡히는 것도 참 장족의 발전이었다.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가만히 보다가 나갈 준비를 했다.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나중에 만나서 같이 저녁이라도 먹고 들어올까 생각해서였다.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타고 회사 근처로 가는데 날씨가 꽤 추웠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안개처럼 퍼져 나갔다. 어차피 계속 기다려야 할 거 무작정 가는 것보다 어디 들어가서 기다리는 게 나을 듯했다.
얼마 전에 회사 근처에 갔다가 둘이 갔던 카페가 있었다. 거기로 가 따뜻한 커피를 시키고 자리에 앉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잘못 본 줄 알고 눈에 잔뜩 힘을 줘도 정우진이었다. 회사 근처에 있다더니 여기에 있었나?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밖에서 만난 게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다가가려다가 말았다.
지금 정우진을 부르면 어떻게 나올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일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냥 커피나 마시면서 기다리려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변의 소음도 있고 거리가 멀어서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표정을 보면 뭔가 심각한 얘기를 하는 중인 듯했다.
핸드폰으로 인터넷 검색도 하고 정우진이 보냈던 문자들을 다시 보기도 하면서 시간을 죽였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가지 않았다.
결국 다시 시선을 올려 창가에 앉아 있는 정우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잠자코 듣고 있다가 핸드폰을 확인하기도 했고, 창밖을 쳐다보기도 했다. 테이블 위의 커피는 조금도 마시지 않은 것 같았다. 요즘 계속 바빠서 그런지 얼굴엔 피곤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원래 저렇게 볼에 살이 없었나? 아닌 것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워 보여서 인상을 찌푸리다가 정우진이 움직이는 게 보여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꼭 몰래 숨어서 훔쳐보는 것 같았다.
아니, 몰래 보는 건 맞기는 한데.
기다란 손가락으로 셔츠의 목깃을 당기는 걸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시선은 금방 제자리로 돌아갔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입술을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멀쩡했다. 집에서는 얘가 혹시 밖에서도 이러면 어쩌나 걱정하기도 했었는데 괜한 기우였나 보다.
밖에 나올 땐 대부분 같이 나와서 나 없이 혼자 있는 정우진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밖에선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정우진이 일하는 곳에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 그래도 게이라고 온 사방에 소문이 다 났는데, 거길 가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간다고 해도 정우진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었다.
그래도 1년,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왜 저렇게 유난스러운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젠 그런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그냥 원래 저러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만 들었다. 익숙해질 게 없어서 다른 사람이랑 눈만 마주쳐도 죽이니 마니 지랄하는 데에 익숙해지나. 생각해 보니까 어이가 없었다.
이제는 뭐가 정상이고 뭐가 비정상인 건지도 잘 모르겠다. 애초에 정상, 비정상의 기준이 뭘까? 하루에 문자를 오십 통만 보내야 정상이라는 법도 없는데. 전화 좀 자주 하고 문자 좀 자주 보내는 게 비정상은 아니지 않나?
말을 하고 있는 정우진을 멍하게 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지, 정상이고 비정상이고 기준을 내리기 전에 정우진이 과한 건 사실이었다. 그걸 잊으면 안 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기준이 모호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 한숨이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땐 어쩌면 나도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랐다. 애초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도 요즘 정우진이 계속 바빠서였다. 일할 땐 일만 해야 하는 게 맞는데 정우진은 여태 그렇게 하지 않아서 거기에 익숙해졌나 보다. 그래서 이렇게 바쁠 땐…….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어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까 문자 답장을 안 보냈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록 재촉하는 연락이 없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상황인데, 내게는 비정상적인 것처럼 보였다.
아니, 비정상적인 거 맞지 않나? 맞는 건 아닌가?
갑자기 인지 부조화가 와서 잔뜩 미간을 구기고 있는데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는데 정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왜? 왜 여길 보고 있지? 멍청하게 정우진을 보고 있다가 뒤늦게 들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라서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기도 전에 먼저 정우진이 벌떡 일어섰다.
조금 전, 앉아 있을 때보다 더 심각한 표정이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거리가 좁혀졌다.
“선배, 여기 왜 있어요?”
“네가 여기, 야. 잠깐만, 돌아서…….”
정우진이 날 보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바로 앞에 장애물이 있는데도 시선을 떼지 않고 앞으로 걷기만 해서 의자며 테이블이 다 밀리기 시작했다.
“돌아서 오라고, 돌아서!”
“일 때문에 만났어요.”
“돌아!”
간절히 외쳤지만 밀리던 테이블 위에 있던 빈 컵이 결국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쨍그랑, 하고 커다란 소리가 들리자 카페 안의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분명 바로 앞에서 컵이 깨졌는데도 정우진은 바닥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내 쪽으로 계속 걸어왔다. 구둣발로 깨진 유리 조각을 밟고 와 내 앞에 선 정우진이 다급히 말했다.
“일 때문에 만난 거예요.”
“…….”
“같이 일하는 사람이에요.”
“…….”
정상, 비정상의 기준이 뚜렷하게 없는 건 사실이지만 정우진이 정상이 아닌 건 확실했다. 조금 전에 그런 말도 안 되는 걸로 고민하던 내가 바보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괜찮으세요?”
직원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괜찮아요.”
아니, 내가 말하기 전에 먼저 정우진이 나와 직원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지갑을 꺼내더니 오만 원짜리 지폐를 되는대로 잡아 건넸다. 얼떨결에 돈을 받아 든 직원이 지폐를 보더니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아, 배상 안 하셔도 되고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 거…….”
친절한 직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우진이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데,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할 기운이 없었다. 빠르게 끌려가면서 당황한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는 직원에게 속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묵례했다.
건물 밖으로 나온 정우진이 날 어디로 끌고 가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잡히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만 있었다. 진짜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지?
“어머니 아는 분이에요.”
드디어 걸음을 멈춘 정우진이 내게 말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자 정우진이 불안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 때문에 만난 거예요.”
“…….”
내가 그걸 모르겠냐, 씨발. 일 때문에 만났든 아니든 씨발, 그게…… 그게, 아니……. 속이 터져서 숨만 거칠게 내쉬다가 겨우 진정하고 물었다.
“야, 너 탱크냐?”
“네?”
“네가 탱크냐고, 씨발. 내가 돌아서 오라고 했잖아!”
아니, 무슨 직진만 할 줄 아는 탱크도 아니고 몇 발자국만 움직이면 될 걸 그걸 못해서 컵을 깨고 지랄이야. 테이블이며 의자가 옆으로 밀려서 넘어지던 걸 떠올리니 다시 머리가 아파 왔다.
“뭘 돌아요?”
“거기서…….”
“네?”
“……의자랑 테이블이 있으면……. 돌아서 와야지. 옆으로 돌아서!”
차분하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다시 언성을 높였다. 내가 고함을 지르자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놀라서 그랬어요.”
“왜 놀라?”
“선배가 거기에 왜 있어요? 집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그 말에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아까 정우진이 말했던 그 어머니 아는 분이라는 사람이 떠올라 물었다.
“너, 거기에 같이 있던 사람…….”
“같이 일하는 사람이에요.”
“알았어, 알겠으니까 그 말 좀 그만해.”
이 잠깐 사이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는 말만 몇 번을 하는지 모르겠다.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아서 손으로 입을 탁탁 치자 정우진이 내 손목을 잡았다.
“여긴 왜 왔어요?”
“아니, 너 같이 일한다는 사람 두고 왔잖아.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오늘 약속 있었어요?”
“…….”
진짜 씨발, 왜 이렇게 말이 안 통하지? 말이 안 통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애를 비정상은 아니지 않느냐고 고민한 거지?
“정우진.”
“화났어요?”
이를 갈면서 이름을 부르자 정우진이 울상을 짓고 물었다. 한 대만 때릴까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화 안 났고, 오늘 약속 없고요. 집에 있다가 저녁 밖에서 먹으려고 나왔어.”
“혼자요?”
“…….”
그 말에 다시 한번 화가 끓었다. 내가 저녁을 먹으러 나와 거기에 있으면 당연히 자길 기다리고 같이 저녁을 먹을 거라는 생각을 왜 못 하는 거지?
“너랑 같이 먹으려고 거기서 기다린 거잖아.”
“저랑요? 근데 왜 연락 안 했어요?”
“했으면 네가 거기 얌전히 있었겠냐?”
“그래도 말해 줬으면 데리러 갔을 텐데.”
“그러니까 데리러 올까 봐 말을 안 했…….”
그때 정우진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 끌어안았다. 순간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자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여긴 또 어디야? 건물 안인 것 같은데 승강기가 보이는 걸 보니 언제 사람이 나올지 몰랐다.
“보고 싶었어요.”
“일단 너 다시 가서 마저 일 끝내고 와.”
“오늘 진짜 빨리 집에 가려고 했는데.”
“알았어, 일단 가서……. 아니, 전화부터 해. 전화해서 지금 간다고.”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안겨서 손으로 등을 팍팍 치면서 말하자 정우진이 그제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달라붙은 채 떨어지지 않아서 결국 어깨를 밀어냈다.
“여기 밖이야.”
“알아요.”
“전화부터 하라니까?”
“좀 이따가요. 진짜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누가 보면 며칠 못 만난 줄 알겠다. 오늘 아침에도 보고 싶으면 어쩌냐고 현관문 앞에서 삼십 분이나 징징거리다가 갔는데.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켠 정우진이 살갗에 입술을 비비기 시작했다. 크게 한숨을 내쉬는 순간 승강기에서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굳은 목을 움직여 고개를 돌리자 안에서 누군가 나오다가 우리를 발견하더니 깜짝 놀라는 게 보였다.
잠깐 눈이 마주쳤는데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고 빠른 걸음으로 건물에서 나가는 게 보였다. 힐끗 돌아봐서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땐 결국 내가 눈을 감아 버렸다.
“……야.”
“…….”
“야, 정우진.”
“왜 우진이라고 안 불러 줘요?”
“…….”
우진이고 나발이고…….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물었다.
“근데 여긴 어디야?”
“몰라요.”
“왜 들어왔는데?”
“그냥 안고 싶은데 길거리에서 그러면 선배가 뭐라고 하니까 아무 데나 들어온 거예요.”
그래……. 그냥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길거리에서 안 이런 게 어디야.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다가 손을 올려 등을 안아 주자 정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죽는다.”
“…….”
나지막한 목소리에 정우진이 고개를 숙이다 말고 울상을 지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입술이 닿을 거리였다.
“이제 빨리 전화 좀 해.”
“왜 자꾸 전화하라 그래요?”
“사람을 거기에 두고 왔으면 간다, 안 간다, 말은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알아서 갔겠죠.”
“처맞고 할래, 그냥 할래?”
내 말에 정우진이 그제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쓰는 걸 보며 말했다.
“전화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번호 몰라요.”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며?”
“오늘 처음 만났어요.”
“…….”
그 말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인데 거기에 두고 혼자 나와?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는 내 눈빛을 읽은 건지 정우진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다른 사람도 오기로 했어요. 지금쯤 왔을 거예요.”
“사람들이 너 안 싫어하냐?”
같이 일하는 사람이 정우진 같으면 난 정말 싫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우진은 자기 평판 따위는 어떻게 되든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저 할 말 있어요.”
“잠깐만.”
문자를 다 보냈는지 고개를 들고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 사고 친 건 아니지?”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질색하며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너 또 이상한 거 샀어?”
“봤어요?”
“뭐?”
그런 것이 아니라고 계속 고개만 젓던 정우진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 말에 기가 막혀서 눈만 깜빡거렸다. 그래도 사고 안 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또 뭐 하러 샀냐고 화를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뭐 샀는데?”
“…….”
그제야 자기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걸 보며 설마설마하고 물었다.
“너 또 수갑 샀어?”
“…….”
“자물쇠 같은 거 샀지?”
“…….”
대답은 없었지만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수갑 몇 개랑 성인용품이 보여서 싹 다 갖다 버렸더니 어떻게 자기한테 말도 안 하고 버릴 수가 있냐고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쇠사슬이 달린 족쇄도 본 것 같은데, 그건 어디다 숨겨 놨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쓰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때 정우진이 변명하듯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기가 막혔다.
“쓰지도 않는 걸 왜 사?”
“그냥 비상용품이에요.”
“비상은 씨발, 얼어 죽을. 그냥 벙커를 만들어!”
답답해서 고함을 빽 지르자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뭐?”
“그래도 돼요?”
“…….”
진지하게 묻는 말에 대꾸할 힘도 없어서 빤히 보다가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러자 정우진이 내 뒤를 쫓아오며 웃기 시작했다.
“선배, 장난이에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우진이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다.
“너 앞으로 돈 쓸 때마다 나한테 허락받고 써.”
“저 올해 가기 전에 오지에 땅 하나 살 건데 그래도 돼요?”
“네 용돈 한 달에 5만 원이니까 그거 모아서 사든가.”
“얼마요? 5만 원이요?”
뒤에서 정우진이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 * *
저녁을 먹고 집으로 들어오니 열한 시가 넘어 있었다. 웬일로 내일은 쉰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대충 씻고 나왔는데 정우진이 안 보여서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도 없고 주방에도 없어서 서재로 가자 정우진이 책상 서랍을 열고 있었다.
인기척에 놀란 건지 움찔 몸을 떠는 걸 보며 물었다.
“거기서 뭐 해?”
“언제 왔어요?”
“방금.”
놀란 얼굴로 얼른 서랍을 닫는 걸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비상용품이라는데 봐줘야지. 버려 봤자 어차피 또 살 것.
애써 모른 척해 주며 물었다.
“아까 할 말 있다는 건 뭐야?”
다가온 정우진이 팔을 뻗어 젖어 있는 내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저 일 관두려고요.”
“무슨 일? 지금 일하는 거?”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언제?”
“다음 달쯤이요.”
“그렇게 갑자기 관둬도 돼? 어머니한테는 말했어?”
“네, 그래서 계속 바빴던 거예요.”
일이 계속 바빠서 드디어 터질 게 터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언제부터 관두려고 했던 거지? 그럴 기미는 없어 보였는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그러겠다고 마음먹은 거라면 말려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말라고 하면 듣기야 하겠지만…….
“그거 그만두면 뭐 할 건데?”
“꼭 일을 해야 할까요?”
“뭐?”
목덜미를 비비고 있던 입술이 귀 뒤쪽으로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귓불을 아프지 않게 이로 물었다가 놓더니 고개를 든 정우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돈 벌려고 일하는 거잖아요.”
“…….”
“근데 저는 돈이 많잖아요.”
그건 그랬다. 딱히 반박할 말이 생각이 안 나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말을 이었다.
“근데 굳이 일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럼 계속 놀고먹게?”
“그럼 안 돼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같이 있지도 못하고 계속 일만 하려니까 시간이 아까워 죽겠어요.”
그동안 잘 참았던 게 아니라 이미 나 몰래 일찍이 터졌던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일을 그만둔다고 할 줄은 몰랐다.
이래도 되나 싶기는 했다. 하지만 정우진이 하는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가서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일이야 돈을 벌려고 하는 거니까 돈이 많으면 굳이 안 해도 되는 것 아닌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꿈이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억지로 하고 있는 건데.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얼굴이 들렸다. 정우진이 내 양 뺨을 잡고 입술을 핥았다.
“아니면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볼게요.”
“…….”
내가 당연히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코앞에서 보이는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시선을 돌리자 이번엔 눈가에 입술이 닿았다. 혀를 내밀어 속눈썹을 건드리다가 입술로 눈꼬리 끝을 비비고 관자놀이를 핥았다. 그러는 와중에 몸이 밀려서 자꾸 뒤로 가다 보니 어느새 벽에 등이 닿았다.
“네 마음대로 해.”
내 말에 귓바퀴를 물고 있던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일하기 싫으면 그냥 하지 마.”
“그래도 돼요?”
“네 인생인데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하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말을 할수록 눈앞에서 보이는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왜 그렇게 남인 것처럼 말해요?”
“뭐가?”
“네 인생 네가 알아서 살라 그러면 남인 거 같잖아요.”
이상한 논리에 할 말을 잃었다. 어이가 없어서 눈만 깜빡이자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정우진이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탁 소리 나게 박았다. 코앞에서 불만 가득한 눈이 보였다.
“네 인생은 네 건데 알아서 하는 게 맞지.”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가운 사이로 손이 들어와 맨살에 닿았다. 그러더니 등허리를 쓸기만 하고 말이 없어서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네 인생이 내 거야?”
“그걸 지금 알았어요?”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터지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기가 막혀 웃었다.
“선배가 하라는 대로 할 거예요.”
“그럼 벙커 만들지 마.”
“그거 진짜 장난이었어요.”
“수갑도 좀 그만 사고. 문에 자물쇠도 그만 달아.”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애교 부리는 강아지처럼 행동하면서 하는 말은 그게 아니었다.
“선배는 결혼도 안 해 주면서 사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사게 하고.”
“넌 그 결혼 얘기, 진짜 지치지도 않냐?”
“그럼 죽을 때까지 아무도 없는 데서 나하고만 살아 주세요.”
“말을 말자, 씨발.”
결국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자 정우진이 내 어깨를 물었다. 이를 세우고 제법 아프게 물어서 손을 들어 등을 때렸다.
“일 그만두면 하루 종일 이러고 있어도 돼요?”
“언젠 안 그랬냐?”
“세상에는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을까요?”
말을 하는 사이에 가운이 벗겨져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방에 좀 들어가자고 말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젖은 혀가 입 안을 비집고 들어와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핥았다. 몇 번 밀어내다가 결국 포기하고 힘을 빼자 정우진이 입술을 뗐다. 어느새 붉어진 눈가로 가만히 날 보던 정우진이 눈을 감았다.
“이대로 붙어서 녹았으면 좋겠어요.”
“엿이냐?”
내 말에 그제야 정우진이 웃었다.
* * *
손을 뻗어 눈가를 문지르다가 뒷목을 당겨 아랫입술을 핥자 입이 벌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이 얽혔다. 들러붙어서 녹고 싶다더니 정말 그러기라도 할 것처럼 빈틈없이 붙어서 닿는 곳은 모조리 비비고 살을 맞댔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서 헐떡거릴 때마다 눈이 마주쳤다. 점성이 있던 젤이 물처럼 변해서 젖은 소리를 낼 때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커다란 게 안쪽까지 박혀서 느리게 빠지는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선배, 힘 좀 빼 보세요.”
아까부터 몇 번이나 들었지만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한 번 사정을 했는데도 안쪽을 치댈 때마다 아랫배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무릎이 가슴에 닿을 정도로 다리가 들려서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잠시, 아윽!”
끝까지 빠졌던 성기가 내벽을 헤치고 깊게 박혔다.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깊게 박혀서 눈앞이 흐려졌다. 숨도 쉬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데 몸이 움츠러들었다. 정우진이 손을 내려 내 성기를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또 쌌어요?”
“흐윽……. 이, 씨…….”
사정을 한 줄도 몰랐다. 정우진이 손바닥으로 성기를 배에 눌러 슬슬 문지르자 다시 발기하기 시작했다. 정액으로 엉망이 된 귀두를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다시 몸에 힘이 들어갔다.
“선배.”
“아, 아읏!”
정우진이 허리를 숙여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잔뜩 잠긴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귓가로 뜨거운 숨이 느껴져 어깨를 움츠리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왜 이렇게 잘 느껴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계속 바르작거리면서 몸을 뒤틀자 정우진이 끝까지 성기를 빼냈다. 부르르 몸을 떨고 있는데 몸이 뒤집혔다.
“힘들면 엎드려서 할래요?”
“끝까지, 넣, 아니, 아흑!”
엎드려서 하든 똑바로 하든 너무 깊게 넣지만 않으면 좀 살 것 같은데 처넣을 때마다 끝까지 박혀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조금 전 그 자세보다 엎드려서 하는 게 더 깊게 들어와서 눈앞이 흐려졌다.
“끝까지 넣어 달라고요?”
저게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건가.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끝까지 넣었다가 느리게 뺐다가 다시 넣기를 반복하더니 점점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살이 부딪쳐서 몸이 흔들릴 정도였다. 손으로 몸을 지탱하지도 못하고 침대에 얼굴을 박고 쓰러지자 정우진이 내 골반을 세게 잡고 퍽 소리가 나게 안쪽을 쑤셨다.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입을 벌리는데 눈앞이 흐려졌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기도 했다. 몸을 벌벌 떨면서 헐떡거리자 정우진이 뒷목에 입술을 붙이고 숨을 쉬었다. 배 속으로 정액이 들어오고 있었다.
“윽……. 흐, 응…….”
침대에 얼굴을 묻고 입술을 깨물어도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정을 끝마친 정우진이 다시 추삽질을 하기 시작했을 땐 정말 숨이 넘어갈 뻔했다.
“자, 잠깐만, 우진아, 정우, 아, 흑! 좀, 쉬었, 쉬, 아……!”
입을 벌려도 나오는 건 신음밖에 없었다. 문장 하나를 제대로 완성할 수가 없었다. 박힐 때마다 몸이 밀려 올라가서 침대에 머리가 부딪쳤다. 두어 번 부딪치자 정우진이 내 몸을 잡아 밑으로 끌어 내렸다.
이불을 쥐어뜯던 손을 내려 이미 물처럼 줄줄 정액을 흘리고 있는 성기를 쥐었다. 하지만 몇 번 흔들기도 전에 손목이 잡혔다. 억지로 손이 위로 끌어 올려졌다. 등 뒤에 바짝 붙은 정우진이 잡은 손을 놔주지 않아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손 좀, 손……! 흑, 아, 아으!”
결국 원치 않는 눈물이 터졌다. 골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박힐 때마다 힘들어 죽을 것 같다는 생각과 눈앞이 흐려질 만큼 좋아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뭐가 어떻게 됐든 그냥 죽을 것 같았다.
“울어요?”
“흑, 아, 아앗, 흐으, 아!”
“그렇게 좋아요?”
귓가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젖은 물소리와 살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정우진이 말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잠시만, 좀, 윽, 잠깐, 흑, 흐아, 읏! 으, 나 싸, 쌀 거 같……!”
정신없이 흔들리다가 뒷목이 세게 물리는 순간 눈앞에서 뭔가가 터졌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절정이 지나치게 길어서 가슴을 들썩거리면서 헐떡거리고 있는데 몸이 뒤집혔다.
정우진이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양손이 잡혀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 벌벌 떨고 있는데 안쪽 깊게 박혀 있던 성기가 느리게 빠졌다.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이젠 우는 소리가 나오든 말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직, 아……!”
끝까지 빠졌던 성기가 다시 느리게 안쪽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벽이 벌어지는 느낌이 생생하게 났다. 정우진이 잡고 있던 손목을 제 목에 둘러 주며 젖은 눈가를 핥았다. 겨우 눈을 뜨자 다시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가고 있는 건지 아닌지, 그것도 알 수가 없었다. 내벽이 쓸리고 문질러질 때마다 온몸의 신경 줄이 타들어 갔다.
나오는 건 없는데 끝나지 않는 절정에 고개를 쳐들고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 *
귓가로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씩 정신이 들기 시작하자 그게 정우진의 목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몸을 뒤척이자 뭔가가 머리를 쓸었다.
“그럼 오전에만 하면 되는 거예요?”
완전히 돌아누우려고 했는데 윽 소리가 나올 정도로 몸이 아파서 저절로 눈이 떠졌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머리맡에 앉아서 전화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럼 오늘까지만 하는 걸로 해 주세요.”
“씨발…….”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파서 욕지거리를 내뱉자 정우진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
목은 또 왜 이렇게 아픈지, 마치 모래알을 삼킨 것처럼 까끌까끌했다. 베개에 얼굴을 비비다가 다시 눈을 감자 정우진이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누구야?”
“어머니요. 나중에 잠시 나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쉰다며?”
“그러니까요.”
짜증이 묻은 목소리에 눈을 뜨자 정우진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까지만 하면 될 것 같아요.”
“일 그만두는 거?”
“네, 몸은 괜찮아요? 어제 너무 심했죠?”
“…….”
씨발, 그걸 말이라고……. 잠깐 잊고 있던 게 떠오르자 욕지거리가 나왔다. 아니, 오랜만에 하는데 그런 식으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씨발, 이게 사람이냐? 잔뜩 얼굴을 구기고 노려보자 정우진이 불쌍한 척을 했다.
“그러게 왜 그렇게 귀엽게 굴어요.”
“죽을래?”
소름 끼치는 소리에 윽 소리를 내자 정우진이 웃었다. 평소에는 그냥 평범하게, 끝나고 씻기도 하고 얘기도 하다가 잠들 정도로만 하는데 가끔 이렇게 당장 죽을 사람처럼 달려들 때가 있었다. 기진맥진해서 기절하다시피 잠들면 몇 날 며칠을 아픈데도 옆에 누워서 웃고 있는 걸 보면 화도 나지 않았다.
“언제 나가?”
“이따가요. 아침 뭐 먹을래요?”
“더 잘 거야.”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일어날 힘이 없었다. 좀 더 자고 일어나서 씻든 먹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점심 먹기 전에는 올 거예요.”
“…….”
머리를 만져 주는 손길에 다시 잠이 오기 시작했다. 잠이 들 것 같을 때 눈가로 뭔가 닿았다. 힘겹게 눈을 뜨자 눈앞에 정우진이 있었다.
“점심 뭐 먹을지 생각해 놔요.”
느리게 눈을 깜빡이자 정우진이 다시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러더니 이불 속에 있는 손을 가져와 내 손가락 끝에 입술을 눌렀다.
“갔다 와서 마사지도 해 줄게요.”
마사지하다가 또 흥분해서 하자고 난리나 안 치려나 모르겠다. 잠결에 피식 웃자 정우진이 또 뭐라고 했다. 너무 잠이 와서 제대로 듣지는 못했는데 아마 사랑한다는 소리일 것이다.
* * *
다시 잠이 들고 얼마나 시간이 지난 줄 모르겠다. 멀리서 징징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듣고 있다가 눈을 뜨자 진동이 멎었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려고 하는데 또 핸드폰이 울렸다.
이불 속에서 바르작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시해도 몇 번이나 끊어졌다가 다시 울렸다. 정우진인가. 그냥 집에 오지 왜 이렇게 전화를 해 대는지 모르겠다.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켜 팔을 뻗었다. 협탁 위를 더듬거려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찾았다.
“그냥 와. 집에 있으니까.”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핸드폰 너머로 정우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건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시끄러운 소음뿐이었다.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떼어 액정을 확인했다. 정우진이 맞았다.
-여보세요!
그때 핸드폰에서 익숙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대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누구세요?”
-아, 저 매니지먼트 직원인데요. 정우진 씨랑 같이 일하는 사람이요.
“네.”
-저기, 그게……. 지금 병원에 좀 와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병원?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직 잠이 덜 깼나?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방이었다. 내가 잠들었던 방.
-여보세요?
“병원이라고요?”
-일하다가 사고가 좀 있어서…….
일하다가 장비가 넘어져서 정우진이 깔렸다는 말을 길게 하는 동안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정우진이 입원했다는 병원까지 무슨 정신으로 갔는지 모르겠다. 병실에 도착하자 몇 번 봤던 얼굴들이 보였다. 인사를 하고 상황을 설명해 주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장비가 넘어져서 정우진이 깔렸다. 잠깐 정신을 잃은 사이, 병원에 왔는데 다행히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그게 세 시간 전이라 지금은 정밀 검사를 받고 있다는 말을 해서 그제야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세 시 사십 분이었다. 계속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다는 말을 듣는데 귀가 먹먹했다. 정신을 차렸고 겉으로 봤을 땐 전혀 문제가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다.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못이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는데 병실 문이 열렸다.
정우진이 들어오자 주변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갔다. 정말 괜찮은 것 맞느냐고, 검사 결과는 언제 나오는 거냐고, 그런 말들을 하는 걸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려고 하는데 눈이 마주쳤다.
창백하게 질려서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날 보던 정우진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묻는 질문에 대답하고 괜찮다는 말을 하더니 간호사와 병실을 나갔다.
그게 끝이었다.
* * *
외부 충격 때문에 일시적으로 기억에 혼란이 온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입원하고 경과를 지켜본다는 말과 면회는 금지라는 말에 병원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멍청하게 집까지 와서도 한참을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기억에 혼란이 왔다는 게 무슨 소리지? 날 기억 못 한다는 건가? 눈이 마주쳤는데도 정우진은 날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이게 무슨 일이지?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겠지?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눈앞이 어지럽고 정신이 멍했다. 식은땀이 나다가도 오한이 들어서 몸이 떨렸다. 정신을 차리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인다고 해도 뭐부터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저 우진이 매니전데요. 아까 보셨죠?
“네.”
-우진이가 계속 집에 가겠다고 해서 지금 퇴원하고 가는 길이거든요?
집에 온다고? 정우진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알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현관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문을 열고 나갔다. 텅 빈 거리에서 정우진이 올 방향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 차가 한 대 들어왔다.
먼저 내린 건 조금 전에 봤던 매니저라는 사람이었다.
“아, 병원에 있어야 하는데 자꾸 집에 가겠다고 해서…….”
남자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걱정스럽다는 듯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병원에 있어야 하는데 자꾸 집에 가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퇴원했다고 했다. 혹시 조금이라도 아픈 곳이 있거나 이상한 점이 있으면 꼭 연락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뒤늦게 정우진이 차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남자가 정우진에게 내가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말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똑같은 말을 할 동안 정우진은 가만히 서서 듣고 있기만 했다.
매니저가 걱정된다는 얼굴로 집 현관문까지 들어왔다. 신발을 벗고 집 안까지 오려고 해서 정우진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뒤집어져도 벌써 뒤집어졌어야 했는데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저기요.”
“네?”
“이제 그만 가 보셔도 괜찮습니다.”
“아, 네. 그리고 꼭! 제가 한 말 꼭 기억하시고 밤늦게나 새벽이라도 괜찮으니까 이상이 있으면 연락해 주세요.”
다시 한번 신신당부를 한 매니저가 내게 약봉지를 건네주고 정우진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다가 집에서 나갔다. 쉬지 않고 말하던 사람이 나가자 순식간에 집 안이 적막해졌다. 기억을 잃었다는 정우진은 집 안을 한번 쭉 훑더니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한가운데까지 걸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신발을 벗지도 못하고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손목을 잡자 정우진이 몸을 돌려 날 쳐다봤다.
“너 괜찮아?”
“괜찮아요.”
“왜……. 아니, 어디 다쳤는데?”
분명 병원에서 자세히 들었는데도 머릿속이 백지였다. 자꾸만 손이 떨려서 몸에 잔뜩 힘을 주다가 손을 뻗었다. 머리를 부딪쳤다고 했었나? 손가락 끝이 하얀 이마에 닿으려고 할 때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우리 사귀는 사이라면서요.”
“뭐?”
“제가 지금 그쪽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많이 피곤하거든요. 병원에서도 너무 성가시게 해서 쉬질 못했어요.”
이마에 닿으려고 했던 손이 허공에 멈춰 있다가 천천히 밑으로 떨어졌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서서히 돌아온다고 하니까 일단 제 집에서 좀 나가 주세요.”
“…….”
“기억이 돌아오면 그때 연락드릴게요.”
단호하게 하는 말에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정우진은 지금 환자였다. 믿을 수 없지만 날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정우진 입장에서는 내가 낯선 사람인 게 당연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우진이었다.
“뭐라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집에서 좀 나가 달라고 했는데.”
정우진이 나한테.
“나가라고?”
“네, 제가 기억이 안 나서요.”
나한테 나가라고.
나가라고 했다.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나가라고.
다시 들어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장 난 로봇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나가라고. 나한테, 정우진이 나한테 나가라고. 기억이 안 나니까 나가라고.
귀찮은 듯한 얼굴이 꼭 시정잡배를 대하는 듯한 말투였다. 이젠 내게 시선조차 주고 있지 않았다.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정말, 진짜로 이 상황이 귀찮은 것처럼 보였다.
“저기요.”
다른 곳을 보던 정우진이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눈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 머리가 아파서 그런데 빨리 좀 나가 주세요.”
“…….”
“내 집에서 나가라고.”
“…….”
이게 꿈이라면 나는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다.
* * *
제대로 된 대꾸 한번 못 해 보고 내 집에서 쫓겨났다. 닫힌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어도 다시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정우진은 지금 정상이 아니었다. 많이 아픈 상태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우진이 날 쫓아냈다.
나더러 나가라고 했다. 나가라고. 이 집에서 나가라고. 우리 집에서.
“나가?”
떨어뜨리고 있던 고개를 쳐들고 닫힌 문을 노려봤다. 아무리 아픈 상태라고 해도 내가 이런 것까지 이해해 줘야 해? 지금 기억이 없는 상황이니까 다시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나가 있어야 해? 정우진이 다시 날 알아봐 줄 때까지?
높은 도수의 술을 마신 것처럼 속이 쓰렸다. 온몸에서 홧홧하게 열이 올라 눈앞이 어지러웠다. 마치 한여름 대낮의 길거리처럼 아스팔트 도로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세상이 빙글거리고 속이 울렁거려서 한참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문을 쳐다봤다.
저긴 내 집이었다. 들어가려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었다.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서 그 재수 없는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다. 환자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 나가라는 말을 어떻게 하지?
나가? 나가라고? 네가 뭔데 나한테 나가라 마라 명령질이야.
고함을 지르면 정우진이 날 쳐다볼 거다.
아까 그 얼굴로.
“…….”
칼날처럼 부는 바람이 온몸을 할퀴었다. 살갗을 베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에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시 그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결국 패잔병처럼 등을 돌렸다.
* * *
주말에 몇 번 같이 갔던 호텔로 가서 혹시나 싶어 핸드폰만 노려보고 있었지만 결국 끝까지 연락은 오지 않았다.
정우진이 날 잊어버렸다.
분명 다시 기억은 돌아오겠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었다. 기억이 돌아오고 돌아오지 않는 건 개인차가 있어 확답을 줄 수가 없다고 했었다. 그렇다는 건 정우진이 이대로 영영 날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등 뒤로 한기가 끼쳤다. 한 번도 이럴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우진이 날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내가 내 발로 나간 것도 아니고 정우진이 날 쫓아내는 날이 올 거라고는 조금도, 정말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찾아가 봐야겠다.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언제까지고 여기에서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화내지 말고 차근차근 얘기하다 보면 기억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안 되면…….
“…….”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냥 패 버릴까? 맞다 보면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다시 머리에 충격을 받으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아니면 결혼하자고 해 볼까? 헤어지자고 할까? 충격 요법을 쓰면 기억이 돌아올까?
다치긴 얼마나 다쳤지?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을 못 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약을 챙겨 먹으라는 소리도 못 했는데. 외상은 크게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듣긴 했지만 걱정돼서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혹시 혼자 있다가 아프기라도 하면 누가 병원에 데리고 가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가야 하는데 정우진이 자기가 이상한 걸 알까?
별별 생각을 다 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해가 뜨자마자 호텔에서 나와 성큼성큼 걸었다. 빨리 가서 정우진을 봐야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날 기억하든 하지 못하든, 일단 얼굴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걸었지만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정우진이 날 쳐다보던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모르는 사람을 보는 눈으로 날 쳐다보면서 귀찮아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고 입 안이 말라서 편의점으로 갔다. 생수와 진통제를 하나씩 사서 밖으로 나왔다. 편의점 앞을 계속 서성거리다가 나는 결국 다시 호텔로 갔다.
진통제를 세 개나 먹어도 두통이 멎지 않았다. 체크아웃을 하고 나간 호텔에 다시 들어와서 침대 위에 엎어져 있는 게 그렇게 바보 같을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머리는 지끈거렸고 속이 쓰렸다.
잠을 못 잤는데 먹은 것도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나는 지금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뭐라도 좀 먹으려고 했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배가 고픈지도 모르겠고 잠을 자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어떡해야 하지?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뭘 먹으려고 해도, 잠을 자고 쉬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하냐는 생각만 자꾸 들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놀라서 얼른 액정을 확인했지만 정우진이 아니었다. 한참 액정을 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심호흡을 한 후 느리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서주니?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어, 별일 없어. 우진이 다쳤다며.
“…….”
정우진의 어머니였다. 실제로 만난 건 고작 두어 번뿐이지만 가끔 통화는 하곤 했다.
-일이 바빠서 연락을 일찍 못 받았어. 기억을 못 한다고 하던데 이게 무슨 말이니? 진짜야?
“네, 기억 상실이래요.”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해?
“네.”
-너도?
그 말에 똑같이 대답해야 하는데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눈앞이 다시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니요.”
말을 해 놓고도 놀라 어깨를 떨었다.
왜 거짓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당황해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떨리는 숨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릴까 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하긴, 걔가 널 잊어버렸을 리가 없지.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소리에도 안도가 되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뛰어서 뭐라고 대꾸할 수 없었다.
-새벽 비행기 타고 갈 테니까 내일 우진이 데리고 나오렴. 걔 퇴원했다며.
“……내일이요?”
-내가 그냥 너희 집으로 갈까?
“…….”
-그래,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냥 해 본 말이야. 공항에 도착하면 연락할 테니까 우진이 데리고 본가로 와. 저녁은 먹지 말고.
핸드폰 너머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알겠다고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내가 왜 거짓말을 한 거지?
‘하긴, 걔가 널 잊어버렸을 리가 없지.’
귓가에 웅웅 맴도는 말에 눈가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네.”
-목소리가 왜 그래? 너도 아파?
“네, 잠을 좀 못 자서요.”
떨리는 내 목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어머니는 다급히 말을 끝마쳤다. 내일 도착하면 연락하겠다는 말을 다시 한번 하곤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 액정을 멍하게 보다가 눈을 감았다.
‘하긴, 걔가 널 잊어버렸을 리가 없지.’
그 말이 맞았다. 정우진은 날 잊어버리면 안 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정우진이 날 잊어버릴 수가 있지?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몰아쉬며 겉옷을 챙겨 입었다. 지갑과 핸드폰을 들고 나오려는데 손이 떨려서 몇 번이나 놓쳤다. 지갑을 주머니에 넣고 핸드폰은 손에 쥔 채 밖으로 나왔다.
하룻밤 사이에 더 추워진 건지, 아니면 몸이 좋지 않아서 오한이 드는 건지 온몸이 덜덜 떨렸다. 날은 또 언제 어두워진 건지 모르겠다. 하루 사이에 시간 개념이 엉망이 됐다. 아니, 하루가 지난 게 맞긴 한가? 마지막으로 뭘 먹은 게 언제지? 약을 먹은 건 언제였지?
호텔에서 나와 별로 걷지도 못했는데 속이 이상했다. 빠르게 걷던 걸음이 점점 느려지다가 결국엔 제자리에 멈춰 섰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걸 몇 번이나 참았다.
길 한복판이라 뭘 잡을 것도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최대한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가 벽을 등지고 섰다.
크게 숨을 들이켜자 차가운 공기가 가득 들어왔다. 크게 숨을 마셨다가 내뱉기를 반복하자 조금씩 떨림이 멎기 시작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가락 끝을 주무르고 있는데 귓가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으로 어렴풋이 뭔가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었다. 다투는 소리 같은데 뭐라고 하는지 자세히 들리지는 않았다. 좀 더 보다가 신경을 끄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떨림이 많이 멎어서 몇 번 더 숨을 내쉬고 걸음을 돌리려고 하는 순간, 울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맞았다.
“여기까지 따라온 거면 그쪽도 아예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닐 거 아니에요.”
“비키세요, 좀.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내가 뭘 했다고 경찰에 신고를 해? 이게 사람을 범죄자 취급하네.”
남자가 낄낄거리며 웃자 다시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상황인지 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몸도 안 좋고 정신도 없는데 별 거지 같은 새끼가, 씨발.
무시하고 갈 수가 없어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가갔다. 일부러 발소리를 내자 등을 보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지척까지 다가가자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저기요.”
한숨을 내쉬며 말을 걸자 구석에 갇혀 있다시피 한 여자가 퍼뜩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도와 달라는 듯 간절한 눈빛에 다시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뭐야, 이건.”
잠시 놀란 듯 날 보던 남자가 여자의 행동에 불쾌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술 냄새도 심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걸 보니 많이 취한 것 같았다. 한심하다는 얼굴로 보다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남자의 어깨 너머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어…….”
조금 전에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입에서 어눌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나온 소리였다. 설마 헛것이 보이는 건가 싶어 양손으로 눈을 비벼 보기까지 했다.
“너 뭐 하는 새끼야?”
“…….”
“뭐 하는 새끼냐고. 어?”
“저기요, 경찰에 신고 좀 해 주세요.”
“넌 또 뭐라는 거야, 씨발! 내가 뭘 했다고 아까부터 자꾸 경찰을 찾고 지랄인데!”
울먹거리는 여자를 보며 남자는 금방이라도 손을 올릴 듯 크게 역정을 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고도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 정우진이 핸드폰 액정을 보고 걷다가 고개를 들어 우리 쪽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귀가 먹먹해지고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서 눈을 질끈 감자 어깨가 밀렸다.
“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를 거냐고!”
어깨가 밀리는 순간, 중심을 잃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자 여자가 놀라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아주 가까운 거리인데도 모든 게 멀게만 들렸다.
남자는 발끝으로 내 다리를 툭툭 치면서 아까부터 계속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정신이 없어서 그대로 맞고만 있다가 번개에 맞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자 남자가 놀란 듯 주춤거렸다. 반사적으로 남자를 등지고 서서 정우진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이쯤 되면 무슨 행동이라도 할 법한데 웬일로 정우진이 얌전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못 박힌 듯 서 있기만 했다.
너무 생각을 많이 해서 헛것이 보이는 건가? 왜 저러고 서 있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경우는 없어서 당황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씨발.”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정우진의 대가리를 깨부수면 기억이 돌아올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얼굴을 보는 순간 기억이 리셋 되듯 잠시 잊었다. 정우진은 지금 날 모른다. 내 이름 석 자도 기억 못 하는데 내가 길바닥에 나자빠지는 게 무슨 대수이겠나 싶었다.
도대체 여기에 왜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길바닥에 나자빠지든 술 취한 사람이랑 시비가 붙든 정우진은 눈도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저러는 것처럼.
갑자기 울화통이 터져서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며 물었다.
“저 사람, 남자 친구 아니죠?”
“아까 술집에서 처음 만났어요.”
“핸드폰 번호 같은 거 가르쳐 줬어요?”
“아니요.”
“야, 니네 뭐 하냐? 존나 어이없네?”
밤이 늦기도 했고 길이 워낙 구석지고 으슥해서 그냥 보내기도 찝찝했다. 원숭이처럼 화내고 있는 남자를 무시하고 여자에게 손짓했다.
“친구들은 어디 있어요? 연락하면 데리러 올 사람 있어요?”
“아니요. 저 그냥 집에 갈래요.”
“택시 잡아 줄 테니까 따라오세요.”
그러다가 문득 여자가 빈손이라는 걸 깨달았다. 핸드폰도 없고 지갑도 없고, 가방이 안 보여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여자가 내 손목을 잡았다.
“저기…….”
고개를 돌리자 울먹거리면서 뭔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정우진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발치에 검은색 가방이 있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나도, 여자도 아니었다. 아까부터 계속 중얼중얼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그러더니 정우진에게 달려들었다. 정확하게는 정우진이 아니라 그의 발치에 있는 검은색 가방이었다. 동상처럼 서 있던 정우진이 날 보고 있다가 빠르게 다가오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뛰어나가는 기세가 워낙 성난 황소 같아서 그런지 정우진이 슬쩍 옆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남자가 가방을 주우려고 허리를 굽히는 순간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남자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바닥에 엎어져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남자가 뒤늦게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악 소리가 들리는 순간 정우진이 다시 다리를 움직여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곳을 축구공처럼 발로 차 버렸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머리통이 뒤로 꺾이는 걸 볼 때까지 아무런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정우진이 허리를 굽혀 바닥에 쓰러진 채 버둥거리는 남자의 머리채를 잡았다. 남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양손을 들어 제 머리채를 잡고 있는 정우진의 손을 잡으려고 사지를 버둥거렸다.
“씨발, 너 이거, 악! 어윽!”
남자의 머리채를 잡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정우진을 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사색이 된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야!”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듣고도 무시하는 건지, 구석으로 간 정우진이 머리채를 잡고 있는 반대쪽 손으로 붉은색 벽돌을 집어 드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내 손목을 동아줄처럼 잡고 있는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정우진!”
벽돌을 쥔 손을 높이 들고 있던 정우진이 멈칫했다.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는 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사이 죽을힘을 다해 버둥거리던 남자가 정우진의 손에서 벗어났다. 몸을 뒤집어엎어진 남자가 바르작거리는 걸 보다가 벽돌을 쥐고 있는 정우진의 손목을 붙잡고 물었다.
“너 뭐 하는 거야?”
“놀라서요.”
“뭐?”
놀라서? 놀라서 사람을 축구공처럼 차고 머리채를 질질 끌고 가서 벽돌로 대가리를 박살 내려고 했다고?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안 나왔다. 내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입만 뻐끔거리자 정우진이 내게 잡힌 손을 뿌리쳤다.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정우진이 들고 있던 벽돌을 쓰레기처럼 바닥에 내팽개쳤다. 조금 전, 남자의 머리통이 축구공처럼 날아가는 걸 볼 때보다 더 놀랐다. 뿌리쳐진 손을 멍청하게 보고 있는데 조심스럽게 다가온 여자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가방을 줍는 게 보였다.
“저 사람은 죽는 거 아니에요?”
“끄으…….”
앓는 소리를 내면서 꿈틀거리는 남자를 힐끗 보던 여자가 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가방을 품에 안고 남자를 살피던 여자가 술이 좀 깼는지 아까보다 제대로 된 발음으로 내게 말했다.
“저기, 고맙습니다.”
“아, 네…….”
“그리고 저 새끼가 신고하면 저한테 연락하세요.”
“네…….”
여자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명함 하나를 내게 건넸다. 완전 넋이 나가서 명함을 받아 들자 여자가 연신 고맙다고 하더니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품에 안고 있던 가방으로 엎어져 있는 남자의 가슴과 배 쪽을 두어 번 퍽퍽 때리고 도망치듯 달아났다.
여자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남자는 여전히 끅끅거리고 있었고, 정우진은 짜증이 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벽돌을 발로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다가 한숨을 내쉬며 부르자 정우진이 날 쳐다봤다.
“사람을…….”
“…….”
“사람을 그렇게 개 패듯 패면…….”
이 상황이 너무 현실 같지 않아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말리는 게 조금만 늦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럼 달려드는데 어떡해요?”
“뭐?”
“발정 난 개처럼 달려드는데 어쩌냐고요.”
“…….”
당당하게 말하는 정우진을 멀뚱멀뚱 보다가 말했다.
“그냥 피하면 되잖아.”
“다음부턴 그렇게 해 볼게요.”
그 말에 다시 당황하고 있는데 남자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씨발씨발, 하는 걸 보며 저런 새끼는 처맞아도 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래도 정우진이 너무 과했다.
“저기요, 병원…….”
“으아악, 씨발!”
재수 없는 놈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말을 걸자 제대로 일어선 남자가 양팔을 휘적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더니 여자가 갔던 반대쪽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비틀거려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결국 금방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
아니, 씨발…….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까부터 알 수가 없었다.
“너 여긴 왜 왔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해 죽을 것 같았다. 급격하게 몰려드는 피로감에 생각이라는 걸 할 수가 없었다.
“핸드폰에 나오던데요.”
“뭐?”
정우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그 말에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액정 위로 지도가 보였다.
“이거 위치 추적 아니야?”
“맞아요.”
“이걸 왜…….”
뚫어져라 액정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득 검은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와 말끝을 흐렸다. 생각을 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씻고 나오기라도 했는지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씻어도 되나? 다친 건 괜찮나?
손을 뻗어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자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끝이 조금 얼어 있는 게 느껴졌다. 손가락 끝으로 만져지는 두피까지 차가워서 뭐라고 하려는데 정우진이 손을 들어 내 손을 쳐 냈다.
눈에 보이는 불쾌하다는 얼굴에 말문이 막혔다. 짜증이 난 얼굴로 미간을 구기고 있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입을 열면 욕이 나올 것 같아서 속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자꾸 만져요, 짜증 나게.”
“…….”
발밑으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속에 벌레라도 있는 것처럼 온갖 감정이 우글우글 들끓었다. 욕을 하든 뻔뻔하게 내 마음이라고 말하든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당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는데 카드 문자가 계속 와서 왔어요.”
“…….”
“할 말도 있고…….”
“무슨 말?”
끓어오르는 감정을 누르고 묻자 정우진이 뭔가 생각하듯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정리도…….”
워낙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날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라 미간을 구겼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멀리서 밤거리의 소음이 들려왔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정우진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뭔가 짜증이 나는지 계속 미간을 구기고 있었는데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잠을 못 잔 건지, 밥을 먹지 못한 건지, 자세히 보니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제야 나는 정우진이 할 말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 깨달았다. 미칠 것처럼 우글거리던 속이 조금씩 잠잠해지기 시작하자 숨통이 트였다.
“그래서 카드 문자가 계속 와서 못 잤다고?”
내 말에 정우진이 날 쳐다봤다. 정말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고 있던 게 맞는지 덥석 물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핸드폰을 끄면 되잖아.”
“그 문자가 왜 저한테 와요?”
“네 카드니까.”
“제 카드를 왜 마음대로 써요?”
“좀 쓰면 안 되냐?”
다시 말문이 막힌 듯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내가 집을 샀어, 차를 샀어?”
“…….”
“고작 그거 몇십 만 원 쓴 게 아까워서 잠도 못 잤냐? 그리고 거기 내 집이야. 나가려면 네가 나가야지 왜 나한테 나가라 마라야.”
말하다 보니까 잠깐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 집에서 나가라던 그 얼굴이 생각나서 깊게 숨을 내뱉자 정우진이 미간을 구겼다.
“그 집이 왜 당신 집이에요?”
“누가 네 당신이야, 씨발. 그리고 내 집이니까 내 집이지, 왜 당신 집이냐 그러면 내가 뭐라고 말하냐? 네가 나한테 줬잖아.”
내 말에 정우진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집을 줬다고요?”
“집도, 지하에 있는 차도 다 내 거야.”
“그걸 왜 다 줘요?”
정말 모르겠다는 듯 다시 묻는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 한밤중에 더러운 골목길에서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게, 왜 줬을까.”
그런 거 안 줘도 되는데.
집이든 차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선물이라고 덜컥 타지도 않는 차를 주거나 집을 줄 땐 황당하기도 했지만 그냥 정우진이 좋아하니까 그걸로 됐겠지 싶었다. 하루든 이틀이든 준비하는 내내 내 반응을 기대하고 행복해했을 게 분명해서, 그냥…….
그냥 나는 그런 것들이 좋았다.
“…….”
“…….”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생길지는 몰랐다. 정우진도 몰랐겠지. 하루아침에 기억을 잃고 우리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가로등도 없이 어두운 골목길에서 가만히 바닥을 보고 있으니 불현듯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정우진이 정말 영원히 이대로라면.
“그럼 제가 나갈까요?”
그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날 보던 정우진이 물었다.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너 못 잤지?”
“네?”
“밥은 먹었어?”
뜬금없는 내 물음에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한참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흔드는 걸 보며 말했다.
“나도 못 먹었어. 잠도 못 잤고.”
“호텔에서 뭐 했어요?”
“뭐 했겠냐?”
“…….”
피곤해서 그런지 자꾸만 눈이 뻑뻑해졌다. 계속 나오는 한숨을 참을 수도 없어서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일단 집에 가자. 가서 뭐라도 좀 먹고 얘기를 하든 정리를 하든 해.”
“무슨 정리요?”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하자며.”
“뭘요?”
“네가 정리할 게 있다며.”
“…….”
잠깐 당황한 것 같던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날 보며 석연치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요.”
“그리고 나간다고 했지?”
“당신 집이라면서요.”
내가 나가라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먼저 나가겠다고 한 주제에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목소리가 불퉁했다.
“너 아까부터 왜 자꾸 당신이라 그러냐? 존나 소름 끼치네.”
내가 인상을 구기며 말하자 정우진이 물었다.
“뭐라고 불렀는데요?”
“뭐?”
“원래는 뭐라고 불렀냐고요.”
“…….”
그 말에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냥 별것도 아니고 선배라고 불렀다고 말하면 되는데,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동네 시정잡배를 보듯 귀찮은 얼굴로 내 집에서 나가라고 할 땐 언제고.
심정이 복잡해지자 다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냥 네 마음대로 불러.”
“그래도 돼요?”
“네가 언제 내 말을 듣기나 했냐? 그리고 내 집에서 나간다며. 나가면 또 볼 거야?”
“…….”
내 물음에 입을 다문 정우진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짜증이 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어째서인지 나는 내가 한 말에 내가 상처를 받아서 계속 정우진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현기증이 일었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얼른 걸음을 옮겼다.
똑바로 걷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밥도 안 먹고 잠을 못 자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계속 긴장하고 있다가 정우진을 만나서 힘이 풀린 걸지도 모른다. 멀쩡한 척하면서 한참 걷다가 문득 아차 싶어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왜 그렇게 비틀거려요?”
눈이 마주치자 정우진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그 말에 뭐라고 할까 하다가 그냥 짧게 대답했다.
“피곤해서.”
“호텔에서 뭐 했냐고요.”
“넌 집에서 뭐 했는데.”
“잤어요.”
“문자 계속 와서 못 잤다며.”
걸음을 늦추고 천천히 걸어도 정우진은 계속 내 뒤에서만 걸었다.
“세 개밖에 안 왔어요.”
“그 세 번 때문에 날 찾으러 거기까지 왔냐?”
“찾으러 간 거 아닌데요.”
“그러시겠지. GPS까지 켜서 핸드폰 액정에 얼굴 처박고 걷던 건 내가 잘못 본 거겠지.”
“…….”
“할 말도 있고 정리할 것도 있어서 왔다고 말한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그것도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내가 비아냥거리면서 말하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도 한참 말이 없어서 웃기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정우진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안다. 지금 정우진이 하는 말은 진심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나중에 다시 기억이 돌아오면 늘 그랬던 것처럼 울면서 미안하다고 할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지금 정우진이 했던 모든 말이 진심이 된다. 그게 진짜가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자 내 뒤를 따라오던 정우진이 걸음을 멈췄다. 한참을 그러고 서 있어도 정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표정으로 내 등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나? 내 이름도 모르고 우리가 같이 살았던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러겠지. 기억을 못 하니까 나더러 나가라 하고 짜증이 나니까 만지지도 말라고 하는 거겠지.
죽을힘을 다해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집까지 가는 길이 멀었다. 별로 먼 거리는 아닌데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정우진을 만나면 패서라도 기억을 되찾게 하려고 했다. 재수 없는 얼굴을 날려 버리고 욕하고 잃어버린 기억을 억지로라도 찾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얼굴을 보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때리는 건 고사하고 욕도 나오지 않았다.
정우진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고, 그래서 그런 거라고 계속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정우진은 지극히 제정신이다. 기억을 잃었든 잃지 않았든 정우진은 정우진이고 지금 하는 행동이나 말은 진심이었다.
알고 있는데도 자꾸만, 자꾸만.
정우진이 죽은 것 같았다.
“어디까지 가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낭떠러지 샛길을 걷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놀라서 잡힌 손목을 뿌리치고 돌아보자 어둡기만 하던 주변이 조금씩 형체를 찾아가기 시작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제 손을 내려다보는 정우진이 보였다.
“잠깐 다른 생각 하느라 못 들었어.”
“…….”
“뭐라고?”
“……어디까지 가냐고요.”
제 손을 멀거니 보고 있던 정우진이 시선을 올려 날 쳐다봤다. 짐승처럼 시퍼렇게 안광이 빛나는 것 같았다. 당황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어느새 여기까지 온 건지 집을 한참이나 지나쳐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왔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냥 피곤하기도 하고……. 정신이 없네.”
언제 이렇게 식은땀이 난 건지 이마가 다 젖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뒷목을 만지며 왔던 길을 돌아가자 정우진이 다시 내 뒤를 따라 걸었다.
“왜 그렇게 피곤해요?”
“넌 아까부터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한숨을 내쉬며 돌아보자 정우진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기억나는 게 없으니까 그렇겠죠.”
“기억나는 게 없어서 내가 왜 피곤한지 궁금해한다고? 그런 것보다 내 이름이나 좀 궁금해해 봐.”
“그래서 물어봤는데 네가 안 가르쳐 줬잖아.”
“네가?”
“그럼 다시 당신이라고 할까?”
“…….”
화가 난 듯한 목소리에 황당한 얼굴로 정우진을 쳐다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게 갑자기 왜 이렇게 짐승처럼 사나워진 건지 모르겠다.
“이게 뭘 잘못 처먹었나. 왜 갑자기 지랄이야?”
“당신이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걸어.”
“뭐?”
“병든 닭처럼 비틀거리지 말고 똑바로 걸으라고.”
“…….”
저 새끼가 미쳤나. 얼마나 황당한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제자리에서 서서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자 이젠 숨길 생각도 없는지 정우진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걸어요.”
“뭐?”
“움직이라고. 집에 안 갈 거예요?”
“…….”
이쯤 되니 새롭기까지 했다. 짜증 내면서 울지도 않고 반말하는 정우진이라니. 지금이라면 내 이름 좀 불러 보라고 해도 멀쩡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아까 여자한테 명함을 받았는데도 가만히 있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이젠 분간이 안 됐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정우진도 날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해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벗으려다가 멈칫했다.
“…….”
“왜요?”
“……집에 누구 왔었어?”
“아니요.”
“…….”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집 꼴이 엉망이었다. 옷 정리라도 했는지 거실 바닥에 옷가지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컵이며 약 봉지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테이블 위에 있던 화병은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산산조각으로 깨져 있었다.
“집 꼬라지가 이게 뭐야?”
“뭐가요?”
“왜 이렇게 개판이냐고.”
“내가 어떻게 알아요.”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집에 아무도 안 왔다며. 그럼 다 네가 한 거 아니야?”
내 말에 정우진이 대꾸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리고 주방 쪽으로 갔다. 그걸 멍청하게 보다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떨어진 코트를 주워 정우진을 따라갔다.
“야, 내가 중학교 다닐 때도 안 하던 짓을 왜 나이 처먹고 하고 있어?”
“뭐가요?”
“뭐가요는 아까부터 뭐가 자꾸 뭐가요야?”
“사귀던 사이가 아니라 우리 집 가정부였어요?”
“뭐?”
물을 마시려고 했는지 컵을 들고 있던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며 날 돌아봤다.
“집 꼴이 어떻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아니, 하루 만에……. 하…….”
말을 하다가 열불이 터져서 숨을 골랐다. 평소의 정우진이나 기억을 잃은 정우진이나 말이 안 통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하긴, 기억 좀 잃었다고 사람이 쉽게 바뀔 리가 없었다. 어차피 알맹이는 똑같은데.
더 말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들고 있던 코트를 그대로 떨어뜨렸다. 주방 바닥에 널브러진 코트를 발로 차 버리고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었다. 밤이 늦어서 배달도 안 될 것 같고 그냥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너 라면 먹을 거야?”
“라면 말고 다른 거 없어요?”
“…….”
물을 마시던 정우진이 날 보며 물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딱히 이상한 질문도 아니고 지금 상황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인데도 너무 놀라 버렸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웃음이 터져서 푸핫 하고 웃었다. 입술을 꾹 다물어도 봇물 터지듯 터져 버려서 입을 막고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고개를 들자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정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다시 웃음이 나와서 웃으려다가 어쩐지 표정이 좀 이상한 것 같아서 헛기침을 몇 번 하다가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
“라면 말고 뭐 먹고 싶은데?”
정우진이 좋아하는 게 뭐가 있나 생각하며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고 멍청하게 날 보던 정우진이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조금 전에 내가 웃음을 참으려고 할 때와 똑같은 자세였지만 웃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상태가 이상해서 점점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데 정우진이 입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희게 질려서 창백하기만 했던 얼굴에 혈색이 돌고 있었다. 아니, 혈색 정도가 아니라 열이라도 나는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너 왜 그래?”
“그냥 라면 먹을게요.”
“라면 말고 뭐 먹고 싶은데.”
“그냥 라면 먹을 거라고요.”
갑자기 짜증을 내는 걸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뭐 저렇게 비위 맞추기가 힘든지 모르겠다. 더 이상 묻지 않고 냄비에 물을 올리는데 정우진이 자꾸 뒤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뭐 다른 걸 하는 건가 싶었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고 자꾸 사부작거리는 게 신경 쓰여서 결국 한마디 했다.
“나가든가 좀 앉아 있어. 왜 자꾸 돌아다녀?”
“뭐가요?”
“넌 뭐가요라는 말밖에 못하냐? 도대체 거기서 뭐 하는데?”
“물 마시고 있어요.”
아까부터 들고 있던 컵을 내밀며 말하는데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이나 좀 따르고 말해라.”
“…….”
내 말에 그제야 자기가 들고 있던 컵이 처음부터 빈 컵이라는 걸 알아챘는지 정우진이 잠시 주춤했다. 그러더니 정수기로 가서 물을 따르는데 그 모습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웃겼다.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무는데 물을 가득 따른 컵을 들고 정우진이 내게 물었다.
“우리 같이 산 지 얼마나 됐어요?”
“3년 좀 넘었어.”
“사귄 지는 얼마나 됐어요?”
“…….”
그 말에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잠깐 고민하느라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정우진이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그것보단 좀 됐어.”
조금 더 고민하다가 결국 대충 말하자 정우진이 미간을 구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하고 끓는 물에 라면을 넣었다. 스프를 넣고 면까지 넣자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왜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넌 왜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귀찮아서요.”
“나도 귀찮아서 안 먹었어.”
그 뒤로 정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보였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짜증 내고 있을 게 눈에 훤했다. 기억을 잃었으면 좀 더 근본적인 걸 궁금해해야지, 당장 뭘 했고 뭘 먹었고 그딴 게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모르겠다.
라면을 다 끓여서 냄비째 식탁 위에 놨다. 덜어 먹을 그릇과 숟가락, 젓가락을 챙기는 와중에도 어미 뒤를 쫓는 병아리처럼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데 한마디 하려다가 또 그놈의 ‘뭐가요’ 소리를 할 게 뻔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굶은 시간이 오래돼서 그런지, 집에서 먹어서 그런 건지, 아무것도 안 넣고 끓인 라면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거의 씹지도 않고 먹고 있는데 정우진은 젓가락으로 면을 툭툭 건드리기만 했다.
“안 먹어?”
“…….”
“아무것도 안 먹었다며? 라면 먹기 싫어?”
“…….”
아까까지만 해도 세 살 먹은 애처럼 이거 뭐예요, 저거 뭐예요, 어쩌고저쩌고 잘도 말하더니 지금은 또 왜 이렇게 조용한지 모르겠다.
“야.”
“왜요.”
“뭐 하냐고. 안 먹어?”
“먹을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역시나 먹지는 않았다. 도대체 왜 저러고 있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길이 없었다.
“먹기 싫어?”
“…….”
“아니, 씨발. 입이 붙었냐? 왜 대답을 안 해?”
갑갑해서 한숨을 내쉬며 욕을 하자 그제야 정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왜 욕을 해요?”
“네가 답답하게 굴었잖아.”
“답답하면 욕해요?”
“넌 놀랐다고 사람을 벽돌로 쳐 팼으면서 난 그러면 안 되냐?”
내 말에 정우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벽돌로 안 때렸는데요.”
“벽돌로 때린 거나 대가리를 축구공처럼 찬 거나 그게 그거지. 넌 어떻게 기억을 잃어도 변한 게 없냐. 누굴 때리기 전에는 나한테 좀 물어보고 때리라고 몇 번을 말해?”
잠깐 잊고 있던 게 떠오르자 울화통이 터지기 시작했다. 아까는 너무 황당해서 어영부영 넘어갔는데, 이 새끼, 진짜 미친 새끼 아니야? 어떻게 사람을 벽돌로 때리려고 그러냐. 진짜 생각할수록 답이 없는 놈이었다.
“자꾸 짜증 나게 하잖아요.”
“누가? 아까 그 새끼? 그 새끼가 너한테 뭘 했는데? 그리고 아깐 놀라서 그랬다며.”
“사귀는 사이였다면서요.”
“뭐? 누가? 내가 그 새끼랑?”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묻자 정우진이 이를 갈았다.
“아니요, 씨발. 우리요.”
“…….”
“우리가 사귀는 사이였다면서요.”
“…….”
젓가락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뼈 마디마디가 도드라질 정도로 힘을 주고 있는 걸 어이없다는 얼굴로 보다가 물었다.
“근데? 그게 네가 사람을 개처럼 팬 거랑 무슨 상관인데?”
“좀 때리면 안 돼요?”
“뭐?”
“사귀는 사이였다면서 왜 내 편을 안 들고 그 개새끼 편을 들어요?”
“…….”
그 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까처럼 웃음을 참으려고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놀라서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조금 전에 들었던 씨발이라는 말도 그렇고, 개새끼라는 말도 그렇고, 안 그러던 애가 이러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씨발씨발 하는데 저걸 달래야 할지, 욕을 그렇게 잘하는 줄 몰랐다고 놀라야 하는지……. 아니, 욕이야 할 수는 있는데……. 정우진이 욕을 아예 안 한 것도 아니고 분명 몇 번 들은 적이 있는데도 너무 적응이 되지 않았다.
“사귀는 사이였던 거 맞아요?”
혼란스러워하는 날 가만히 보던 정우진이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물었다. 그 말에 두어 번 고개를 끄덕거리자 다시 그 입에서 비난이 나왔다.
“근데 기억을 잃은 애인을 두고 호텔에 가요?”
“뭐?”
너무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라 얼이 빠져서 되묻자 정우진이 말을 이었다.
“호텔에서 뭐 했어요? 왜 계속 물어봐도 대답 안 해 줘요?”
“…….”
그 말에 나는 정우진이 정말 기억을 잃은 게 맞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정우진은 아까보다 더 화가 나서 쏟아 내기 시작했다.
“두 번이나 갔죠? 왜 다시 나왔다가 또 들어갔어요? 왜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는데요? 그리고 씨발, 아까 거기서…….”
“잠깐만.”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손을 들며 말하자 주절주절 떠들던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화를 삭이긴 어려웠던 건지 툭 건드리면 당장에라도 터질 폭탄처럼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호텔이……. 정우진, 호텔은……. 하, 씨발. 진짜 별……. 호텔은 잠을 자는 곳이야.”
“안 잤다며.”
“아니, 그러니까 숙박을……. 하……. 아, 진짜 미치겠네.”
어이가 없어서 말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웃는 건 정말 웃겨서 웃는 것이다. 원래 이러는 게 정우진이기는 했지만 어떻게 기억을 잃었는데도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건지 모르겠다.
“네가 나가라며.”
“여기가 당신 집이라면서요. 근데 나가란다고 나가요?”
“그럼 대가리가 돌아 버린 널 쫓아내니?”
“그래서 대가리 돌아 버린 애인을 두고 호텔을 갔어요?”
“와, 진짜 너 존나…….”
3년이나 같이 살면서 볼 꼴 못 볼 꼴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나는 정우진이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 걸 입 밖으로 꺼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네 말은 지금 내가 널 두고 호텔 가서 뭐 다른 짓거리라도 했다는 거지?”
“진짜 그랬어요?”
“…….”
새까만 눈동자에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건드리면 울 것 같기도 했고 화를 낼 것 같기도 한 표정이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이 너무 익숙해서 놀랍기만 했다. 마치 정우진이 기억을 잃었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이렇게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이게 어떻게 내가 모르는 정우진이라는 거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우진이 죽은 것 같다고 두려워하던 내가 그저 병신 머저리 같았다.
“그래서 내가 호텔에서 헛짓거리 할까 봐 GPS 켜고 거기까지 찾아왔어?”
“그럼 안 돼요?”
“그럴 거면 왜 나가라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나는 걸 어떡해요.”
“기억도 안 난다면서 그럼 찾아오긴 왜 찾아와?”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화를 삭이려는 듯 두어 번 숨을 몰아쉬고 앵무새처럼 말했다.
“그래서 거기서 뭐 했냐고. 왜 자꾸 말을 돌려요?”
“그냥 뜬눈으로 밤을 새웠어. 혼자.”
내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하자 정우진은 눈에 띄게 차분해졌다. 그래 봤자 여전히 시한폭탄 같았지만 아까처럼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상태는 아니었다.
“왜요?”
“너 같으면 기억 잃은 애인이 내 집에서 나가라고 개지랄을 하는데 잠이 오겠냐?”
“개지랄은 안 했어요. 그냥 나가라고 한마디 했는데 나간 거잖아요.”
“네가 언제 한마디만 했는데?”
“두 번째로 간 건 왜 간 건데요?”
그 말에 다시 차근차근 설명하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모든 걸 내려놓은 채 말했다.
“나가서 뭘 했는지 일기라도 써 줄까?”
“편의점에서는 뭐 샀어요?”
“호텔에서 나와서 집에 가려다가 머리가 아파서 편의점에서 약이랑 생수를 샀고, 너무 힘들어서 다시 호텔에 갔어. 가서 약 세 알 먹고 좀 괜찮아질 때까지 누워 있다가 나온 거야. 됐어?”
“…….”
내 말에도 정우진은 여전히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날 쳐다봤지만 좀 전의 미친개처럼 달려들지는 않았다. 피곤해서 한숨을 내쉬다가 잠깐 잊고 있던 라면을 바라봤다. 이미 불어 터져서 국물이 다 졸아 있었다. 입맛이 떨어져 자리에서 일어서자 정우진이 날 따라 일어났다.
“피곤하니까 일단 한숨 자고 얘기해.”
“무슨 얘기요?”
“무슨 얘기든.”
“정리해요?”
“네가 하자며.”
“그래서 할 거예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방으로 가는데 가는 내내 정우진이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말을 시켰다. 아까 정우진이 그랬던 것처럼 옷을 한 겹, 두 겹 벗어 던지고 방에 들어가자 침대 위에 늘 가지런히 있던 이불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방도 거실과 별다를 게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이불과 베개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협탁 위에 있던 스탠드도 머리가 깨져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대단하다, 진짜. 속으로 중얼거리며 방을 쭉 훑다가 고개를 저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자 온몸이 녹는 듯했다. 좀 전에 넘어질 때 긁히기라도 했는지 손바닥이 까진 것도 지금 알았다.
다 씻고 대충 가운만 걸친 채 밖으로 나오려고 문을 여는데 뭐가 걸려서 보니까 정우진이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평소와 똑같았다.
“거기서 뭐 해?”
“물어볼 게 있어서요.”
“물어볼 거 뭐?”
내 말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눈알을 굴리는 걸 보니 뭘 물어볼지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잠시 기다려 주자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저 원래 이래요?”
“뭐?”
또 쓸데라곤 개뿔도 없는 헛소리나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처음으로 뭔가 생산적인 것 같은 질문이었지만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뭐가?”
“원래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에요?”
“…….”
자기가 말을 해 놓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근데 내가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이랬어요?”
“지금 너처럼 그랬냐고 묻는 거면 지금보다 더 심하긴 했는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정상이에요?”
“……정상은 아니지.”
“정신병 수준인데.”
“…….”
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자기 객관화에 순간 감격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본인의 행동이 정신병 수준이라는 걸 기억을 잃고 나서야 깨닫다니.
“도대체 왜 이래요?”
감격스러운 눈으로 정우진을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다가 멈칫했다. 또 건드렸다가 짜증 나게 만지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뻗었던 손을 도로 내리며 말했다.
“괜찮아. 살다 보면 정신병 한두 개쯤은 있을 수도 있지.”
“의처증이에요?”
“의처증이기만 하면 다행인데…….”
웬만하면 아니라고 말해 주려고 했는데 의처증이라는 단어에는 차마 양심이 찔려서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누군지 기억도 안 나는데 다른 사람이랑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속이 뒤틀려서 못 참겠어요.”
“그래서 찾아왔어?”
“아까 왜 손 뿌리쳤어요?”
“네가?”
“아니, 아까 집에 올 때 그랬잖아요. 왜 그랬어요? 그때 다시 손목 잡고 싶은 거 참느라 이를 너무 악물어서 아직도 턱이 아픈데 이게 정상은 아니잖아요. 집을 지나치고도 계속 걷길래 안 가는 줄 알고 놀랐단 말이에요. 집에 안 간다고 했으면 못 참았을지도 몰라요.”
본인이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지 심각하게 말을 하는데도 내 눈에는 별로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원래 정우진은 이런 사람인데 놀랍다는 듯 말하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런 것보다 자기가 한 행동은 생각하지 못하고 탓하듯 말하는 게 더 웃겼다.
“넌 네가 한 짓은 생각 안 하냐?”
“제가 뭘 했는데요?”
“네가 먼저 내 손을 뿌리쳤잖아.”
“저 원래 누가 만지는 거 싫어해요.”
“기억이 안 난다면서 그건 어떻게 기억해?”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묻자 잠시 생각하던 정우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태연한 꼴에 순간 화가 났지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네가 먼저 그랬어.”
물론 나는 거기에 앙심을 품고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다른 생각 중이라 놀라서 그런 것이지만, 그런 것까지 말해 줄 이유는 없었다. 내 말에 정우진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기억이 안 나는데 어떡해요? 모르는 사람이 만지는데 가만히 있어요?”
“아니, 잘했어. 계속 그렇게 해.”
차라리 다행인지도 몰랐다. 기억도 없는 애가 등신 팔푼이처럼 구는 것보다야 이게 낫겠지 싶어 한 말인데 정우진은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계속 그렇게 해요?”
“그래, 계속……. 근데 일단 좀 자고 얘기하면 안 되냐? 나 진짜 한숨도 못 잤어.”
내 말에 뭐라고 하려던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보여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정우진을 붙잡고 발을 질질 끌면서 침대에 앉았다. 떨어져 있는 이불과 베개를 주워서 제자리에 두고 정우진을 눕혔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침대에 누운 정우진이 뻣뻣하게 굳어서 날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불을 끄려고 등을 돌려 다시 발을 질질 끌었다.
씻고 나와서 그런지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불을 끄고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몸을 돌리는데 어느새 정우진이 바로 내 뒤에 와 있었다.
“뭐 해?”
“어디 가요?”
“불……. 아, 제발 좀 자자.”
애원하다시피 말하며 다시 정우진을 붙잡고 침대에 눕혔다. 나도 그 옆에 누워 이불을 덮자 미친 듯이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 처음에 어떻게 만났어요?”
처음 만난 건 고아원에서인데. 그걸 말하면 또 정우진이 우리가 고아였냐고 물어볼 게 뻔했다. 말이 꼬리를 물고 또 꼬리를 물 게 뻔해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숨길 건 아닌데 제발 좀 자고 내일 얘기했으면 좋겠다.
“우진아.”
뭔가 좀 입 다물고 자게 할 방법이 없나 고민하다가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자 정우진이 다시 뻣뻣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이불을 같이 덮고 있어서 그런지 조그만 움직임도 바로 알 수가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새카만 천장이 보였다.
“너 나한테 강간이라도 당해 볼래?”
“……네?”
“약 먹고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잠을 자는 건지 깨어 있는 건지도 모르고, 밥 먹으면서도 강간당하고. 일주일 내내 그렇게 해 볼래? 그럼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도 정우진이 경악하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숨도 쉬지 않고 놀란 얼굴로 날 보던 정우진이 여전히 경악하며 대답했다.
“네.”
“뭐?”
“그렇게 해 볼게요.”
“그럴 땐 싫다고 해야지, 미친놈아.”
뭐 이런 등신 새끼가 다 있지? 웃기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자 정우진이 물었다.
“제가 강간했어요?”
“감금도 했어.”
“그럼 저도 감금당할까요?”
“그래, 좀 자고 내일 그렇게 해 보자.”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도 없어서 뒤척거리며 말하자 정우진이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잠이 들 것 같을 때 문득 떠오른 생각에 물었다.
“근데 네가 알겠다고 하면 그건 강간이 아니잖아.”
“싫다고 해도 할 거예요? 그럼 싫어해 볼게요.”
“그러니까 그러면 애초에…….”
내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웅얼거리면서 말하다가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러자 정우진이 물었다.
“제가 왜 그랬어요?”
“…….”
“왜 그랬어요?”
“몰라, 내가 싫었나 보지…….”
“어떻게 그래요?”
정우진이 뭐라고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젠 말을 거는 게 아니라 정우진이 날 패도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았다.
“어떻게 싫어해?”
깊은 구렁텅이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 * *
만약 선배를 못 찾았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뭐가?
고아원에서 나오고 선배를 못 찾았으면요.
알아서 잘 살았겠지.
맞아요. 그랬을지도 몰라요.
…….
살다 보면 언젠가는 잊어버렸을지도 몰라요. 사람의 일이라는 건 모르니까. 그냥 가끔 생각나면 생각하고, 보고 싶으면 그리워하고 힘들어하다가, 그 사람은 날 기억도 못 할 거라고 달래다가 미워지면 목을 졸라 죽이는 꿈도 꾸고, 다시 보고 싶어지면 그리워하고 그러면서 살았을 거 같아요.
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해?
그냥 그러는 게 나았을까요?
너 또 뭐 좆같은 꿈 꿨어?
선배는 나랑 계속 모르는 사이였으면 어떻게 됐을 거 같아요? 학교 졸업하고 취업하고 다른 사람 만나서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싫으면 그런 가정을 안 하면 되잖아.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면서 혼자 부들부들 떨고 있어?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으면 그때 나 안 따라올 거죠?
뭐, 언제? 네가 밥 사 준다고 그랬을 때?
네.
그때로 왜 돌리냐? 돌릴 거면 어렸을 때로 돌려야지.
저는 어렸을 때로 돌아가면 선배한테 더 잘할 거예요.
뭘 잘해?
화나게 안 하고 싫어하는 짓도 안 하고 선배가 하는 말만 들을 거예요. 그러면 선배도 날 싫어하진 않을 거 아니에요.
* * *
숨을 들이켜며 퍼뜩 눈을 떴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려도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귓가로 아직도 정우진이 웃으며 하던 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언제 했던 얘기더라. 꽤 오래전에 했던 대화였다. 같이 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했던 얘기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저 뒤에 내가 뭐라고 했었지?
숨을 내뱉고 다시 눈을 뜨자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리자 코앞에서 하얀 얼굴이 보였다. 길게 드리워진 새카만 속눈썹이 잠깐 떨렸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죽은 것처럼 자고 있는 걸 가만히 보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목이 타서 조심스레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주방으로 가서 차가운 물을 마시자 조금씩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선명했던 꿈이 다시 생각하려니 흐릿하기만 했다.
뭐라고 했더라. 그 얘기가 어쩌다가 나온 얘기였지? 왜 갑자기 그런 꿈을 꾼 거지? 요 며칠 계속 안 좋은 생각만 해서 그런지 꿈자리도 뒤숭숭했다.
손으로 식탁을 짚고 크게 숨을 몇 번 쉬었다가 고개를 젖혔다. 계속 생각해도 잘 기억나지 않아서 포기하고 시계를 봤다. 잠을 못 자서 늦게 일어났을 거라는 생각은 했는데 설마 오후 네 시가 넘었을 줄은 몰랐다.
도대체 얼마나 잔 거지?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거실로 나가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에 급히 핸드폰을 찾았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를 주워 핸드폰을 찾자 아니나 다를까 부재중 전화 세 통이 와 있었다.
다급히 전화하자 몇 번 신호음이 가다가 핸드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서주니?
“네, 한국에 오셨어요? 연락을 늦게 드려서 죄송합니다.”
-지금 일어났어?
“네, 며칠 잠을 좀 설쳐서…….”
-그럼 아직 뭐 아무것도 안 먹었겠네. 지금 집에 가는 중인데 준비해서 우진이랑 같이 내려와.
그 말에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정우진이 자고 있는 방을 가만히 보다가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그래, 나중에 보자.
작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꺼진 액정을 한참 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 못 찾았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분명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귓가가 웅성거렸다. 알아들을 수도 없이 부산스럽게 들리는 소음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방으로 갔다. 정우진은 여전히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머리맡에 앉아 자고 있는 정우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정우진이 날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 어머니는 좋아하실지 모른다. 아니, 분명 좋아하실 것이다. 정신병의 원인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잘된 일이라고 하실 게 뻔했다.
정우진에게도 좋은 걸까? 이제는 불안해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을 테니 좋은 거겠지. 기억을 잃은 정우진도 여전하기는 했지만 그때와는 달리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니 이것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내가 없어져도 정우진이 기억하는 나는 고작 하루, 이틀뿐이니 어렸을 때의 정우진처럼 몇 년씩이고 날 그리워할 리도 없었다. 미워하고 그리워하고 싫어하고 몇 번이나 죽였다가 미안해서 우는 날은 없을 것이다.
“…….”
정우진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옆에서 늘 보고 있지만 당사자가 아닌 이상 얼마나 힘들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좋아서 그렇다지만 불안해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일상이 얼마나 고되고 지칠지 생각하면 오히려 이건 잘된 일이었다.
호텔에서는 그저 불안하고 짜증 나고 화가 나고 믿을 수가 없더니 뭘 좀 먹고 잠을 자서 그런지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건 누가 봐도 정우진이 평범한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기회였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 것이다. 정우진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문득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인지되기 시작했다. 정우진을 데리고 나가면 결말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머리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서자 매트리스가 움직였다. 죽은 것처럼 자고 있던 정우진이 뒤척이다가 눈을 떴다. 잠이 덜 깼는지 몇 번 눈을 깜박거리다가 이불을 뒤집어쓰는 게 보였다.
그걸 보다가 급히 방에서 나와 서재로 갔다. 분명 여기 어디에 있었는데. 책상을 뒤지다가 서랍 가장 아래쪽에서 수갑을 찾았다. 그걸 들고 다시 방으로 갔다. 다시 잠이 든 건지 침대 위의 이불 덩어리는 미동이 없었다. 몰래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이불을 젖히자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힘없이 늘어져 있는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반대쪽은 침대 머리에 채웠다. 철컥거리는 소리에 그제야 정우진이 눈을 떴다. 몸을 뒤척이다가 수갑 때문에 몇 번이나 걸려서 소음이 났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지 정우진이 상체를 일으켰다.
“…….”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건지 잠이 덜 깬 얼굴로 제 손목을 멀뚱멀뚱 보던 정우진이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나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더 자고 있어.”
“……나가요?”
“금방 올 거야.”
입고 있던 가운을 벗고 어제 벗어 뒀던 옷을 입었다. 학교에 지각한 사람처럼 바쁘게 움직이는 날 가만히 보고 있던 정우진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이게 뭐예요?”
“금방 올 테니까 잠깐만 그러고 있어.”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얼굴을 보다가 모자를 찾아 깊게 눌러썼다. 말을 하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이 상태라면 집에 있는 것도 위험했다.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이 얼마나 되지? 아니, 이런 것보다 나중에 뭐라고 해야 하지? 정우진은 자느라 같이 못 왔다고 해야 하나? 다행히도 이런 일이 몇 번 있어서 크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라면 상황이 상황이라 못 참고 우진이를 봐야겠다며 집으로 오실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너 핸드폰 어디 있어?”
“네?”
“네 핸드폰 어디 있냐고.”
“코트 주머니에…….”
그 말에 얼른 주방으로 가 널브러져 있는 코트를 찾았다. 주머니에서 배터리가 없어 꺼져 있는 핸드폰을 찾았다. 이걸 어떻게 할까 하다가 2층에 쓰지 않는 방으로 가 서랍에 숨기듯 밀어 넣었다.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1층에 내려와 고민했다.
집에서 소리를 질러도 밖에선 듣지 못할 거다. 방음이나 보안은 충분히 좋아서 혹시 정우진이 소리를 지르거나 난리를 쳐도 누가 집에 들어올 일은 없었다.
“아니, 씨발…….”
다급하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양심적인 생각을 오래 하고 있을 만큼 시간이 많은 게 아니었다. 나는 당장 나가서 어머니를 만나야 했다. 가서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우진이가 오랜만에 깊게 잠이 들어서요. 깨워도 잘 안 일어나서 그냥 저 혼자 왔어요.
새벽부터 갑자기 열이 나서 쉬라고 했어요. 몸 좀 괜찮아지면 찾아뵙겠다고 하네요.
잠깐 씻으러 간 사이에 나갔더라고요. 무슨 볼일이 있는지 밤늦게 온대요.
몇 가지 거짓말을 생각해 냈지만 그럴싸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나도 가지 말까? 실제로 정우진이 갑자기 나가기 싫다고 해서 약속이 취소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그런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다른 일도 아니고 사고가 나서 자기 아들이 기억을 잃었는데 가만히 있을 부모가 있나?
머리를 부여잡고 억지로 변명 거리를 쥐어짜 내고 있는데 방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곳으로 가자 정우진이 수갑을 찬 손을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왜?”
“어디 가요?”
“잠깐 나가야 해.”
“이건 어디서 났어요? 혹시 직업이 경찰이에요?”
그 말에 멀뚱멀뚱 정우진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거 네 건데.”
“뭐가요? 수갑이요?”
“수갑도 있고 족쇄도 있고 별거 다 있어. 다 어디 있는지 몰라서 일단 수갑만 가져온 건데 나중에 더 찾아볼 거야.”
내 말이 믿기지 않는 건지 기막힌 얼굴로 날 보던 정우진이 물었다.
“어디 가요?”
“볼일이 있다고 했잖아.”
“볼일이 뭔데요? 자는 사람한테 수갑을 채워 놓고 나가는 게 어디 있어요?”
“…….”
백 번, 천 번 맞는 말이었다.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이 있었더라면 지금보다는 자연스럽게 행동했을 텐데……. 아니, 감금에 자연스러운 행동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됐으니까 풀어 주세요.”
“네가 감금당해도 괜찮다며?”
“그건…….”
그때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니, 왜? 벌써?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30분도 안 지났는데 벌써? 진동이 몇 번 더 울리는 걸 보다가 전화를 받으려는 순간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어제 그렇게 말한 건…….”
손을 들어 쉿 소리를 내자 정우진이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서주야.
“네.”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답하며 등을 돌렸다. 방에서 나와 문을 닫으려는데 정우진이 침대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하지만 수갑 때문에 몇 발자국 움직이지도 못했다.
-혹시 먹고 싶은 거 있니?
“네?”
-저녁에 먹고 싶은 거.
“아, 저녁이요.”
그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문은 밖에서도 잠글 수가 있어서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시만요!”
“저녁, 그냥 아무거나 괜찮아요.”
“잠깐, 가지 마세요! 잠깐만……!”
문을 닫고 3중으로 된 잠금장치를 보며 잠깐 멈칫했다. 밖에서 잠글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세히 본 적은 없었다. 아니, 현관문도 아니고 누가 방문에 이런 걸 달아 놔? 그동안 내가 내 집에 너무 무관심했다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 문을 잠갔다.
-아무거나?
“네, 그냥 우진이가 좋아하는 거…….”
그때였다. 분명 방음이 되는데도 문 너머로 쾅 하고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었나 싶어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숨을 죽이고 있는데 다시 굉음이 들렸다.
-서주야?
“…….”
쾅, 쾅, 쾅!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려오던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우지끈 하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으로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급히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3중으로 걸어 잠근 문이 쾅 하고 진동했다.
“문 열어.”
“…….”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문을 어떻게 두드려? 수갑까지 채웠는데 여기까지 어떻게 걸어왔지?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이번엔 손가락으로 두드린 것처럼 탁탁 하고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안 열어?”
“…….”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탁탁탁 소리가 시한폭탄의 초침 소리 같았다. 그 말에 누가 조종이라도 한 것처럼 나도 모르게 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달칵 하고 마지막 장치까지 풀자 천천히 문이 열렸다. 날 내려다보는 눈을 가만히 보다가 느리게 손목 쪽으로 시선을 내리자 그대로 채워져 있는 수갑이 보였다.
“사람을 가둘 거면 너도 여기에 붙어 있어야지.”
“…….”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고 피 묻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화를 참고 있는 게 역력한 표정으로 뭐라고 하려던 정우진이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자 이를 악물었다. 그러더니 내 손에 있는 핸드폰을 낚아채 액정을 바라봤다.
징징 계속 진동하는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낮게 가라앉아서 쉬어 있는 목소리가 귀에 웅웅 울렸다.
“네, 괜찮아요.”
“…….”
“한숨 자고 일어나니까 기억나기 시작해서요. 오늘 같이 고아원에 가 보기로 했는데 형이 깜빡했나 봐요.”
“…….”
정우진이 날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내가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형? 고아원? 내가 고아원이라는 말을 했었나?
“거기에 가 보면 더 빨리 기억날 것 같아서요.”
“…….”
“며칠 내로 찾아뵐게요. 지금 나가 봐야 해서 나중에 다시 전화 드려도 될까요?”
정우진은 전화를 끊고도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는 시선에 얻어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는데 눈가만 점점 붉어지는 게 꼭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처럼 보였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고아원 얘기를 해서 설마 기억이 돌아온 건가 했는데, 아직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었나 보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애초에 내 대답을 들을 생각으로 한 질문이 아니었는지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근데 어쩌다 사귀게 됐어요?”
“…….”
“형은 나 싫어했잖아요.”
“뭐?”
그 말에 반문하자 정우진이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나도 형 되게 싫어한 거 같은데.”
“뭐라고?”
“어쩌다가 같이 살게 됐지?”
“…….”
내게 하는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이다가 물었다.
“어디까지 기억이 났는데?”
“어디까지 난 거면?”
“…….”
“그게 중요해요, 지금?”
따지듯 묻는 말에 한숨이 나왔다. 더 이상 뭘 물어도 대답해 줄 것 같지가 않아서 정우진이 원하는 대로 대답했다.
“어쩌다가 같이 살게 됐냐고? 어제 말해 줬잖아.”
“뭘요? 내가 강간했다고요?”
“그건 기억 안 나나 보네.”
“싫어하는 사람이 강간했는데 같이 살아 주는 게 말이 돼요?”
그 말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왜 자꾸 싫어했대? 너 싫어한 적 없어.”
“그럼 왜 데리러 안 왔어요?”
“…….”
굳이 언제냐고 묻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면 좋아해서 그랬어요?”
“…….”
“근데 싫어한 적이 없어?”
언성이 높아졌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눈가는 빨개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무서워서 겁먹고 일부러 사납게 구는 짐승 같았다.
“내가 불러도 대답 안 했잖아요. 계속 따라다녀도 안 봐 줬잖아요. 원래 안 그랬는데…….”
악을 쓰면서 말하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안 그랬는데, 왜……. 언제부터…….”
이유를 찾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정우진을 보다가 손을 뻗었다. 내 손이 어깨에 닿자 정우진이 지나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어깨에 잠시 닿았던 손이 떨어지자 퍼뜩 고개를 들어 다급한 얼굴로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았다. 수갑이 부딪쳐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 손으로도 부족했는지 반대쪽 손을 뻗어 내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살갗에 닿는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컸던 목소리가 잔뜩 잠겨서 느리게 흘러나왔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정우진이 말을 이었다.
“말해 주면 안 됐어요? 말해 줬으면 고쳤을 텐데…….”
“…….”
“한 번만 말해 줬으면…….”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정우진이 어떤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힘겹게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지는 물방울만 보였다.
“미안하다고 하려고 했어요. 계속 그 생각만 하면서 기다렸어요. 잘못했다고 말하려 했는데 잠이 들어서…….”
“네가 잘못한 거 없어.”
“그럼 나한테 왜 그랬어요?”
말하는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동아줄을 쥐듯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줄 때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네가 뭘 잘못해서 그랬던 게 아니야.”
“처음엔 안 그랬잖아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자꾸 입 안에서 맴돌기만 했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고아원에서의 기억은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고, 그것도 이미 너무 오래된 일이라 선명하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잔뜩 젖어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검은 눈을 가만히 보다가 말을 이었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내 보지 않았던 말이었다.
“네가 무서워서 그랬던 거 같아.”
내가 고아원에 온 건 흔한 이유였다.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부모님은 눈만 마주치면 고함을 지르고 싸웠다. 아빠도 엄마도 날 싫어하지는 않았다. 분명 흐린 기억 속에는 날 보며 웃었던 얼굴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으로 같이 밥을 먹고 가끔 시간이 남으면 책도 읽어 주고 아빠가 월급을 받아 오는 날에는 옷을 사 주기도 했었다.
다만 그냥 가난했을 뿐이었다. 좋은 날도 분명 있었지만 좋지 않은 날이 훨씬 많아서 엄마도 아빠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어린아이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듯 가난해도 함께 있는 게 좋았다. 공기가 빠진 페트병처럼 쪼그라든 배를 붙잡고 추운 날이면 입김이 나오는 집에서 다닥다닥 붙어 자더라도 같이 있기만 하면 좋았는데 그건 힘든 일이었다.
부모에게 버려졌는데 충격을 받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잠결에 데리러 온다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았는데 그게 정말 내 기억인지도 이제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외로운 생활에 부모님이 날 데리러 온다는 믿음마저 없다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일지도 몰랐다.
더 이상 상처 받고 싶지 않아서 더 못돼지고 단단해져야만 했다. 강하다는 게 그런 건 줄 알았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하고 슬퍼도 울지 않으면 단단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무뎌지면 더 이상 밤이 돼도 슬프지 않을 것 같았다.
김우진은 죽은 엄마의 시체와 함께 살았다고 했다. 몇 날 며칠을 시체와 함께 살다가 구조돼 고아원으로 왔다. 너무 연약했고 건드리면 울었고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도 서슴없이 했다. 어쩌면 나는 이 애보다는 좀 강할 거라고 착각했던 건지도 몰랐다.
김우진이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달래 주고, 못하는 게 있으면 나도 못하면서 할 줄 안다고 허세를 부렸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김우진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이별이라는 건 늘 내가 원치 않을 때 찾아온다.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아도 상대방이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게 이별이었다. 헤어진다는 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부모님은 나를 싫어하지 않았음에도 날 이곳에 버리고 떠났다. 좋아한다고 말해도 그건 영원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버리는 순간에도 좋아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버릴 수 있는 게 사람이었다.
관계에 있어서 내 의사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네가 어디로 갈까 봐 그랬어. 너는 내가 없어도 살 수 있는 거 같아서.”
“안 그래요. 그런 생각 해 본 적, 한 번도 없었어요. 진짜예요.”
“나 혼자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내가 어떻게 그래요.”
“알아. 그냥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거 같아서 내가 먼저 선수 친 거야.”
그때의 나는 왜 그렇게 멍청한 머저리 같았을까.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고 정우진이 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 손을 부여잡고 서럽게 토해 내는 비명에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가 있었든, 어떤 상황이었든 정우진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정우진은 그냥 나랑 똑같았다. 외롭고 힘들어서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가 달랐던 건 연약했던 정우진은 나보다 훨씬 더 강했고, 강해지고 싶었던 나는 비겁한 겁쟁이였다는 것이다.
“미안해요.”
내 손등 위에 이마를 대고 눈가를 비비면서 정우진이 말했다. 떨리는 손만큼이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싫어한 적 없어요. 한 번도 선배 싫어한 적 없어요.”
“알아.”
“싫어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어요. 평생 그러고 살았어요. 평생 선배를 싫어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그게 안 됐어요.”
정우진은 날 만나기 전엔 계속 그때를 기억하며 살았다. 그런데 고작 몇 년 나랑 같이 살았다고 해서 그 기억이 없어질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치유될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상처가 낫는 날이 오더라도 흉터는 평생 남아 있을 것이다.
“미안해요.”
사과해야 할 건 난데 정우진은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무슨 소리를 계속하는데 우는 소리에 가려져 잘 들리지 않았다. 정우진이 왜 내게 계속 미안하다고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계속 잊어버리려고 하는데……. 이젠 기억도 잘 안 나는데 방금 그게 생각이 나서…….”
횡설수설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손을 뻗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엉망이 된 얼굴이 보였다. 그 와중에도 젖어 있는 얼굴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아팠다.
“그냥 생각해.”
정우진이 나 없이 살아왔던 20년에 가까운 시간은 온통 암흑이었다. 고작 2, 3년이 지난다고 잊힐 기억이 아니었다. 10년이 지나도, 똑같이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눈앞의 일처럼 선명할지도 몰랐다. 평생을, 죽을 때까지 그럴 거라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억지로 잊어버리려고 하지 말고 그냥 생각나면 생각하라고.”
“미안해요.”
“미안해하지 말고 생각나면 울고, 생각 안 나면 또 그렇게 살고, 그러다가 생각나면 또 울고 그러면 되잖아. 미워해도 돼.”
“안 미워해요. 안 미워한다고 했잖아요.”
내 말에 정우진이 정말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양손으로 젖은 뺨을 잡고 가만히 보다가 이마를 맞댔다.
“알아. 그냥 살다가 가끔, 진짜 가끔 어쩌다가 한 번씩 그런 생각이 들어도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이제 와서 정우진이 날 미워한다고 해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바뀌더라도 이제 나는 데리러 오길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어린애가 아니었다.
젖은 눈에 입술을 누르자 정우진이 눈을 감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별로 소금기도 없었다. 힘없이 지쳐 있는 얼굴을 보다가 문득 떠올라 물었다.
“너 어제 아무것도 안 먹었지?”
나야 라면 몇 젓가락 먹었다지만 정우진은 정말 물밖에 마신 게 없었다. 계속 울다가 탈진이라도 할 것 같아서 뭐라도 좀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잡고 있는 손을 내리자 정우진이 팔을 뻗어 내 허리를 안았다.
“일단 뭐 좀 먹게 놔 봐.”
어깨를 밀어내고 등을 돌리자 힘없이 떨어졌던 정우진이 다시 내 등을 안았다. 뒤에 붙어서 걸을 때마다 따라오는 게 불편해서 좀 떨어뜨리려고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얼굴을 어깨에 붙이고 있는 건지 옷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주방까지 와서도 아무것도 못 하고 서 있다가 물었다.
“너 기억 다 돌아왔지?”
“네…….”
“언제부터?”
“아까…….”
좀 전에 선배 어쩌고저쩌고 할 때부터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정말 뜬금없기는 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기억이 돌아와서 다행이기도 했다.
그칠 생각이 없는지 계속 훌쩍거리는 걸 듣다가 시선을 내리자 배를 꽉 안고 있는 손이 보였다. 한쪽 손에는 여전히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피딱지가 굳어 있는 손은 붉게 부어서 색이 변해 있었다.
손을 들어 다친 손의 뼈마디를 만지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진짜 안 미워해요. 싫어한 적 없어요.”
“…….”
“정말이에요.”
정말이든 아니든 사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닌데. 내가 뭐라고 하면 또 울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듣다가 손목을 잡았다.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줘서 떼어 내느라 애를 먹었다.
“너 손 좀 움직여 봐.”
“손은 왜요?”
“손가락 열 개 다 움직이고 손목도 좀 돌려 봐.”
내 말에 정우진이 손가락을 움직이고 손목도 두어 번 돌렸다. 잘 움직이는 걸 보니 다행히 뼈가 부러지거나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수갑은 그대로인 걸 보니 침대 머리를 부수기라도 한 것 같은데 차마 방에 들어가서 확인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부어서 붉은 손의 색이 점점 어둡게 변하고 있는 것 같아 한숨을 쉬자 정우진이 다시 꾸물꾸물 안겨 왔다. 몸이 밀려서 식탁에 엉덩이를 걸치자 정우진이 말했다.
“미안해요.”
“나도 미안해.”
“네?”
뭐라고 하려던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의아한 얼굴로 날 보다가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명함 받은 거요?”
“무슨 명함?”
그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갸웃하자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명함 받았잖아요.”
“명함은 무슨……. 아니, 그거 말고…….”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설마 이 상황에서 그 얘기를 할 줄은 몰랐다.
“근데 거기에서 그 사람들이랑 왜 같이 있었어요?”
“…….”
“자꾸 보고 싶어서 찾아갔는데 술 취한 사람들이랑 같이 있고…….”
서러움이 가득한 목소리에 방금까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전부 까먹어 버렸다. 뭔가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아니, 어차피 하루아침에 끝날 얘기도 아니고 시간은 많으니 급할 건 없었다.
“같이 있었던 게 아니라 도와주고 있었던 거야.”
“손잡는데도 가만히 있었잖아요.”
“그렇게 싫었으면 와서 좀 도와주지.”
“그때…….”
“너 욕 잘하더라.”
“네?”
내 말에 뭐라고 하려던 정우진이 눈을 크게 떴다. 딱히 지금 이 얘기를 꺼내려고 한 건 아닌데 그냥 정우진이 그때 얘기를 하니 생각난 것뿐이었다.
“반말도 잘하고. 그냥 이참에 말도 놔.”
“…….”
“씨발, 개새끼, 네가, 어쩌고저쩌고 잘하던데.”
“…….”
막상 들을 땐 상황이 상황이라 잘 몰랐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지나치게 자연스럽기는 했었다. 욕하는 것도 그렇고 반말하는 것도 그렇고……. 속으로는 반말하는 거 아니야?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
마치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당황하는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정우진을 보다가 말했다.
“존댓말 안 해도 돼. 계속 말했지만 이젠 선배라고 안 해도 되고.”
“…….”
“너 어렸을 땐 나한테 반말했잖아. 형이라 그러고.”
“…….”
혼내는 게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정우진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계속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정우진이 내게 존댓말을 쓸 이유가 전혀 없었다. 듣는 게 익숙해서 지금까지 이상하다는 걸 못 느꼈는데 이제 우린 학교 선후배 사이가 아니었다.
“반말 한번 해 봐.”
“……선배는 왜 맨날 그런 거만 시켜요?”
입을 다물고 있던 정우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에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내가 뭘?”
“이름 불러 보라 그러고 반말하라 그러고.”
“그게 왜?”
“이상한 거만 시키잖아요.”
어이가 없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뭐 엄청 못 할 짓이라도 시킨 줄 알겠다.
“그게 뭐가 이상한데?”
“차라리 뭐 좆을 빨라 그러든가 쑤셔 달라 그러든가 그런 거면…….”
“이거 미친 새끼네.”
투덜거리면서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생각할 것도 없이 튀어나온 말에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더 이상하거든?”
“뭐가 이상해요?”
“야, 너는 이름 불러 달라는 게 좆 빨란 소리보다 더 이상하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그럼 빨아도 돼요?”
“…….”
그리고 뜬금없이 나온, 대화의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불쌍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정우진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다가 물었다.
“갑자기 그 말이 왜 나와?”
“선배도 갑자기 이상한 말 했잖아요.”
“아니, 그게 뭐가 이상해?”
“그럼 좆 빨아도 되냐고 묻는 건 뭐가 이상해요?”
이 새끼는 뱉기만 하면 그게 다 말인 줄 아나. 너무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 이름을 부르기 싫어서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반말하기가 그렇게 싫냐?”
“싫은 게 아니라 너무 갑자기 그러니까 그러죠.”
“그럼 천천히 하루에 한두 번씩만 해 봐.”
“그럼 저도 하루에 한두 번씩 천천히 빨아도 돼요?”
“씨발, 야. 때려치워, 반말하지 마. 이름도 부르지 마!”
속이 터져서 고함을 지르면서 밀어내자 정우진이 팔을 뻗어 매달려 왔다. 몸을 일으켜 주방에서 나가는 내 허리를 끌어안고 따라오는 정우진을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놔, 좀!”
“싫어요.”
“그리고 넌 집 꼴이 이게 뭐야? 하루 만에 무슨 집을 이따위로 만들어 놔!”
“선배가 나갔잖아요.”
“네가 나가라며!”
사람이 사는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엉망이 된 거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찬찬히 훑어보니 정말 돼지우리도 이런 돼지우리가 없었다.
“명함 버릴 거죠?”
“아, 씨발. 진짜 그놈의 명함 소리…….”
“사랑해요.”
또 뜬금없는 고백에 팔을 떼어 내려고 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등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고마워요.”
“뭐가?”
“나 버리고 어디 도망 안 가서.”
“내가 도망을 왜 가?”
어이없다는 듯 웃자 정우진이 내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버리거나 도망을 가기는커녕 누가 기억을 잃은 정우진을 빼앗아 갈까 봐 집에 가두려고 했다. 집을 팔고 차를 팔면 돈이 얼마나 될지, 정우진을 먹여 살릴 수 있는지 그런 생각까지 했었다. 물론 수갑 하나로는 정우진을 가둬 둘 수 없었지만.
“이젠 네가 나가라도 해도 안 나갈 거야.”
“다음에 제가 또 그러면 때려도 돼요.”
“그럴 거야.”
“팔다리도 다 부러뜨려도 돼요.”
너무 극단적인 말에 인상을 찌푸리다가 물었다.
“넌 내가 너한테 집에서 나가라 그러면 내 팔다리 부러뜨릴래?”
“미쳤어요?”
내 물음에 정우진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불과 몇 초 전에 자기가 한 말은 생각도 안 나는지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 짓을 어떻게 해요?”
“너도 못 하는 걸 나한텐 왜 하라고 해?”
“다치면 아프잖아요.”
“넌 안 아프냐?”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무는 게 보였다. 그걸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다른 건 다 참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못 참겠어.”
몸을 돌려 정우진을 보며 말했다. 내 심각한 얼굴을 본 정우진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잘못했어요.”
거의 반사적으로 나온 말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정우진이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너 내가 다치지 말라 그랬지?”
“…….”
“넌 도대체 왜 그렇게 네 몸을 막 굴려? 네가 불사신이냐? 기계야? 망가지면 고칠 수 있어?”
“…….”
수십 번을 말해도 고쳐지지 않는 것 중에 하나였다. 울거나 이상하게 질투를 하거나 집착하는 건 그렇다 쳐도 이 문제는 도저히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정우진을 빤히 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들어가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박살이 나 있는 침대 머리가 보였다. 망치로 때려 부순 것 같은 모양새였다.
“가지 말라고 했는데 갔잖아요.”
그때 정우진이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항변 아닌 항변을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또 그럴 만한 상황이기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도 다치고 밥도 못 먹은 애를 쥐 잡듯 잡아 봤자 뭐 하겠냐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부서진 잔해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말했다.
“내일 다른 거 사러 가면……. 아니면 호텔에 갈까요? 선배가 갔던 데.”
아, 하고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거길 왜 또 가, 씨발. 두 번 다시 안 가.”
거기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던 걸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했다.
정우진을 침대에 앉히고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피를 닦아 주고 상처가 난 곳을 소독해 주고 있는데 손 곳곳에 아문 흉터들이 보였다. 살이 차오르면서 상처가 났던 곳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하면 정우진은 알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걸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번 일은 정말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해서 더 속이 상했다. 그때 전화만 안 왔어도 그렇게 급하게 나오진 않았을 텐데.
“화났어요?”
다친 곳에 약을 바르고 방수 밴드를 붙여 주고 있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시선을 올리자 울상을 짓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그걸 빤히 보다가 말했다.
“밥 먹고 나중에 씻을 때 내가 씻겨 줄게.”
“네?”
“손 다쳐서 씻기 불편할 거 아니야.”
“…….”
인상을 찌푸리고 말하는데 정우진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올리자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게 보였다.
“진짜요?”
“싫으면 말고.”
“안 싫어요. 저 근데 나중에 밥하다가 손 한 번 더 다쳐도 돼요?”
감격에 젖어 말하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어디로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영원히 혼자 못 씻게 손모가지를 잘라 줄까?”
“그럼 영원히 씻겨 줄 거예요?”
“…….”
그 말에 들고 있던 밴드를 패대기치고 일어섰다.
“선배!”
씨발, 내가 말을 말아야지.
* * *
자기가 밥을 하겠다는 정우진을 겨우 의자에 앉히고 대충 배를 채웠다. 집도 엉망이고 주방도 개판이 따로 없었는데 도저히 치울 힘이 없었다. 정말 씻고 나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일단 씻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냥 씻겨 주기만 하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욕조에 같이 들어오게 됐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는데 정우진이 물속에 손을 넣는 게 보였다.
“야, 손 넣지…….”
말을 할 땐 이미 늦었다. 정우진이 물속에 손을 넣고 내 발목을 잡아당겼다. 죽 미끄러져서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정우진이 코앞에서 보였다.
“왜 그렇게 떨어져 앉아요?”
방수 밴드를 붙이기는 했지만 멍이 들고 부어서 아플 법도 한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손 안 아파?”
“아파 죽겠어요.”
“그냥 들어오라고 하면 되지 그걸 왜 물속에 처넣고 지랄이야.”
여전히 내 발목을 잡고 있는 손을 물 밖으로 꺼냈다. 수건이라도 감아야 하나?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어깨에 이마를 숙였다. 젖은 살에 몇 번 비비다가 입술로 문지르는 게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눈에 훤해서 어깨를 밀어냈다.
“손이 나을 때까지 안 할 거야.”
“네?”
“그래, 이제 그러면 되겠네.”
문득 깨달아서 얼이 빠져 있는 정우진을 보며 말했다.
“너 이제 다치면 다 나을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기.”
“뭘 안 해?”
“와, 이 새끼, 그렇게 반말해 보라고 할 땐 안 하더니.”
경악에 가까운 얼굴로 되묻는 정우진을 보며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어이없다는 듯 웃자 정우진이 심각한 얼굴로 다급히 물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네가 안 다치면 되잖아.”
“사람이 어떻게 살면서 안 다칠 수가 있어요?”
“그건 그런데 매일 다치는 건 아니잖아.”
얼굴이 너무 심각해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계속 웃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정우진이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이게 웃겨요?”
“응.”
내 말에 정우진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물을 팍 쳤다. 사방으로 물이 튀자 결국 참지 못하고 푸핫 하고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사기꾼이네.”
“내가 왜 사기꾼이야?”
“씻겨 준다고 했잖아요.”
누가 보면 씻겨 준다는 데에 다른 의미라도 있는 줄 알겠다. 말도 못 하고 계속 웃다가 물었다.
“너 그럼 이제 일은 안 가?”
“…….”
“어?”
“…….”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대답도 안 하고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게 웃겨서 또 한참 웃기만 했다.
“우진아, 이제 일하러 안 가냐고.”
겨우 웃음을 멈추고 다시 묻자 정우진이 성의 없이 대답했다.
“몰라요.”
단답형 대답에 또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계속 웃으면 정말 빠뜨릴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두어 번 헛기침을 해서 겨우 웃음을 참고 말했다.
“일하러 안 가면 그 섬에 한번 가 볼래?”
“섬이요?”
퉁명스럽기만 하던 표정이 순간 의아해졌다.
“제주도 근처에 있다는 거기.”
“…….”
내 말에 정우진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럴 만도 한 게 거기서 나온 뒤로 지금까지 한 번도 다시 가 본 적 없었고, 거기에 관해서 대화해 본 적도 거의 없었다.
“네가 산 거라며. 그럼 거기에 아무도 없지?”
“그렇기는 한데…….”
“집이랑 차는 안 줘도 되니까 그 섬, 나 줄래?”
“네?”
집도 필요 없고 타지도 않는 차는 더더욱 필요 없었다. 내 말이 의외였는지 눈을 깜빡거리며 날 쳐다보기만 하던 정우진이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왜요?”
“줄 거야, 말 거야?”
“당연히 달라고 하면 줄 건데……. 돈 준다고 할 땐 싫다 그러더니 갑자기 섬은 왜요? 혹시 부동산이 좋아요?”
현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당연히 현금도 좋고 건물도 좋고 부동산도 다 좋지만 정우진은 늘 과한 게 문제였다. 당장 필요했던 것도 아니라 시큰둥하긴 했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섬은 왜요?”
“네가 또 집에서 나가라고 개지랄하면 거기다 가둬 버리게.”
내 말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정우진의 표정이 점점 경악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진짜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던 정우진이 별안간 벌떡 일어섰다. 물이 튀어서 인상을 찌푸리자 방수 밴드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손으로 입을 가린 정우진이 다시 앉으며 내 코앞에서 말했다.
“선배, 지금 집에서 나가세요.”
“…….”
“나가요, 당장. 빨리.”
“…….”
내 어깨를 붙잡고 다급하게 말하는 걸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답도 없는 새끼를 좋아하게 됐을까. 갑자기 내 인생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배도 사 줄까요?”
“배는 필요 없어.”
“왔다 갔다 하려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됐다고…….”
“내일 갈 거예요?”
이미 너무 흥분해서 진정시키는 건 무리였다.
“오늘 가도 괜찮아요.”
“됐어, 씨발. 섬도 필요 없어.”
“왜요? 왜 필요 없어요?”
순식간에 절망이 깊게 스미는 얼굴을 보니 갑자기 피곤해졌다. 정우진이 원래 이런 애라는 건 머리로 알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 당하는 건 또 달랐다.
하지만 이젠 이러는 것도 많이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피곤한 건 사실이었지만 처음 봤을 때보다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적응해 가고 있는 건지, 내가 그때보다 정우진을 더 좋아하게 돼서 눈에 뭐가 씐 그건 모르겠다.
“거기보다 더 외진 곳에 있는 다른 섬을 한번 알아볼까요?”
신이 나서 떠드는 걸 보고 있는데 그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뻐서 정말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정우진한테만 뭐라고 할 게 아니었다.
“집 허물고 다시 지을까요?”
진짜 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정우진.”
“거기 집 너무 좁지 않아요?”
“사랑해.”
조잘조잘 들리던 목소리가 멎었다. 상기된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날 보던 정우진이 고개를 숙였다. 젖어 있는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또 우나 싶어서 손을 뻗었다. 한참 숙이고 있던 고개가 들리자 뿌연 수증기 속으로 얼굴이 보였다. 울고 있는 줄 알았던 정우진이 웃고 있었다.
“저도요.”
이제는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평생 이대로라도 괜찮았다. 변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더 나아지지 않더라도, 무슨, 어떤 짓을 해도 나는 그런 정우진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사랑해요.”
결국 우리는 동화책의 끝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