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내가 정우진이랑 같이 사는 건 우리가 사귀고 있기 때문이다. 사귀고 있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정우진이 좋아서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누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사귀고 한집에서 같이 살아?
“그 사람이 계속 선배 쳐다보고 있었던 거 몰랐어요?”
그런데 정우진은 그걸 모른다.
“할 말이 있었으니까 쳐다봤겠지.”
“선배는 왜 가만히 있었어요?”
“가만히 안 있으면 뭐 어쩌라고. 가서 나 쳐다보지 말라고 아구창이라도 날릴까?”
지긋지긋한 상황에 피곤해져서 한숨이 나왔다.
내가 손으로 눈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바닥을 보다가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는 게 보였다. 꽉 쥔 주먹이 하얗게 변해 뼈가 도드라지는 걸 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정우진은 많이 변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변했다고 해도 거기서 거기였다. 완전 미친놈이 그냥 적당히 미친놈으로 변했다는 정도의 차이였다.
잘 참다가 한 번씩 이렇게 터질 때면 더욱 그랬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참으면 참을수록 괜찮아지기는커녕 욕구 불만만 커지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더욱 힘들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잘 달래려고 해 봤는데 이젠 지쳤다. 아니, 한 번이라도 지치지 않았던 적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 심해지고 있었다. 이젠 정우진을 달래는 것도 힘이 들었다. 도대체 문제가 뭘까 생각을 해 봐도 모르겠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화가 나는 것도 같았다.
얜 도대체 왜 이럴까?
“잘못했어요.”
바닥만 보고 있던 정우진이 별안간 사과를 했다. 매번 같은 패턴이라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화를 내다가도 울면서 무작정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이 지겹게 반복되는 상황에도 익숙해지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정우진이 이럴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화가 나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매일 우는 걸 보면 이제 좀 익숙해질 만도 한데, 울 때마다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분명 내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정우진이 이렇게 울면서 미안하다고 하면 손을 뻗어 달래 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우진은 결국 바닥으로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처량하게 말했다.
“화내서 미안해요.”
“…….”
“그 사람이 선배 쳐다보는 거 아닌데 제가 잘못 봤나 봐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서 잘도 거짓말을 한다. 정우진은 자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해서 내게 사과를 하는 게 아니라 순전히 내가 화를 낼까 봐 사과하고 있는 거다.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나는 나대로, 정우진은 정우진대로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정우진은 빨리 달래 달라고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훌쩍거리고 있었다. 눈물이 뺨을 지나 턱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질 때마다 착잡한 마음이 커져 갔다.
마음 같아서는 정우진을 달래고 싶었다. 네가 잘못 본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날 쳐다봤던 게 맞다고 말하고 싶었다. 솔직히 그렇게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사람이 날 쳐다봤던 건 사실이고 우리가 눈이 마주쳤던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의 잘못도, 내 잘못도, 정우진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추궁을 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너 오늘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우는 걸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지만 정우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정우진이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건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일주일 전에도, 한 달 전에도 똑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그냥 참고 넘어갔을 일도 참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정우진이 힘들어하는 건 우리가 만나기로 했던 초반을 제외하고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계속 참고 있단 말이에요.”
입을 다물고 있던 정우진이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러면 선배가 싫어하는 거 아니까 매일 참고 있단 말이에요.”
“알아.”
“아무 말 안 하는 날에도 괜찮아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안다고.”
억울하고 서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울면서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정우진이 많이 참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정우진이 아주 커다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그건 당연히 정우진이 참아야 할 일이니까. 내 입장에서는 솔직히 이게 참아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것도 웃겼다.
내가 밖에 나갈 때마다, 다른 사람이랑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다른 사람이랑 대화를 할 때마다, 다른 사람이 날 쳐다볼 때마다, 그 모든 것들이 정우진에게는 스트레스였다. 정우진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면 나는 이 집 안에서만 있어야 한다. 이 집에서 정우진이랑 단둘이서만.
하지만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는 정우진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뭔가를 하면 평생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우는 정우진을 달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건 정우진이 요 며칠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였다.
나는 한번 잠이 들면 잘 깨질 않아서 정우진이 언제부터 잠을 설쳤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주머니에서 수면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직까지도 몰랐을 것이다. 얼마 전 새벽에 깨자 정우진이 날 쳐다보고 있었을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언제부터 다시 먹기 시작한 거지.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는데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빨리 받아야 하는데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무거운 숨을 몇 번 쉬다가 손에 쥐고 있는 약병을 내려 두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목소리가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전화 왜 이렇게 늦게 받았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쏟아지는 질문에 한숨을 쉬려다가 다시 목구멍 뒤로 넘겼다. 요즘 정우진은 너무 예민해서 내가 한숨만 내쉬어도 거기에 별 거지 같은 의미를 부여해서 혼자 삽질을 하기 때문이다.
“핸드폰이 거실에 있었어.”
-방에서 뭐 했어요?
“그냥…….”
-매일 전화하는 거 알면서 핸드폰도 안 가지고 있고……. 아까부터 문자도 계속 보냈는데.
서운함이 가득한 목소리에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평소라면 고작 전화 좀 늦게 받은 걸로 왜 또 지랄이냐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도대체 약은 언제부터 먹은 거지. 그렇게까지 힘들었나. 내가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그렇게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었을까.
-선배.
“…….”
그렇다고 내가 다른 사람을 안 만나고 살 수는 없잖아.
-선배.
“…….”
평생 이 집에서만 살 수는 없잖아, 씨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뭘 했기에 약까지 다시 먹어? 내가 뭘 그렇게…….
화가 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해서 당장에라도 소리치고 싶은 걸 애써 참고 있는데, 문득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혹시 전화가 끊어졌나 싶어 액정을 봤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대고 정우진을 부르려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이러는 거 싫죠?
“뭐가……. 너 울어?”
잔뜩 잠겨서 묻는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리고 있어서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의 온갖 서러움이란 서러움은 전부 긁어모아 삼켰다가 토해 내는 것처럼 들렸다.
-요즘 계속…… 징징거리고……. 선배가 싫어하는 짓만 하고…….
“……너 지금 어디야? 일단 울지 말고 근처에 화장실이나…….”
-참고 있는데…….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해서 그런지 뭐라고 웅얼거리기는 하는데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지금 가장 걱정되는 건 정우진이 어디에서 나랑 이 통화를 하고 있냐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소문이 빠른 곳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이미 정우진이 남자랑 사귄다는 건 알음알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쪽 업계에 동성애자가 많다는 건 들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정우진처럼 울면서 애인한테 전화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우진아.”
최대한 침착하게 이름을 부르자 울먹거리면서 뭐라고 하던 정우진이 숨을 고르더니 작게 대답했다.
“일단 화장실로 가 봐.”
-화장실이요?
“그래, 화장실이나…… 사람 아무도 없는 곳으로. 지금 주변에 사람 많아?”
-아니요, 차 안이에요.
뭐? 차 안이라고?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혹시나 하고 물었다.
“지금 이 시간에 왜 차 안에 있어?”
-보고 싶어요.
“뭐?”
-너무 보고 싶어서 여기에 못 있겠어요.
정우진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기가 막혀서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훌쩍거리면서 울던 정우진이 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가 전화 안 받았잖아요.
“받았는데…….”
-늦게 받았잖아요. 문자 답장도 안 보내 주고……. 계속 보냈는데.
“일단 울지 말고 거울 보고 눈물 닦아. 너 찾는 전화 안 들어와?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
아무리 자기 어머니 회사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멋대로 행동하는데 문제가 안 될 리 없었다. 정우진은 그동안의 전적도 있어서 너무 불안했다. 정우진이 꼭 모델 일을 안 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냥 여기에서 나오면 사회생활이라는 걸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안했다.
그렇지 않아도 현실 감각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정우진이 사회생활까지 안 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눈물 닦았어?”
-보고 싶어요.
“일 끝나고 보면 되잖아. 오늘 몇 시에 끝나?”
-지금 보고 싶단 말이에요.
“울지 말고 심호흡을 좀 해 봐.”
다섯 살짜리 애를 달래듯 말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웃기기만 했다. 하지만 다 큰 새끼가 왜 이렇게 애새끼처럼 행동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복장 터질 일밖에 없다는 걸 나는 이미 예전에 깨달았다.
정우진이 다섯 살짜리 애처럼 굴든 열다섯 살짜리 사춘기 청소년처럼 굴든 이제 그런 건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몇 살짜리처럼 굴든 어차피 황당한 건 똑같았으니까.
-점점 싫어지고 있죠?
“뭐가? 내가 널?”
-진짜 잘하려고 했는데……. 참아야 하는데…….
겨우 좀 울음을 멈추나 했던 정우진이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하면서. 한숨이 나오려는 걸 도로 삼키며 속으로만 숨을 내쉬었다.
정우진은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기가 노력을 하고 있다고, 잘 참고 있다고 하지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내 입장에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거기서 거기였다.
조금만 삐끗해도 이렇게 내가 엄청 실망했을 거라고 생각해서 난리굿을 치는데 솔직히 나는 평소의 정우진이랑 노력하는 정우진의 큰 차이를 모르겠다. 물론 정우진이 노력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고, 그런 정우진이 고맙지만 결과는 다른 거니까.
그럼에도 내가 정우진을 좋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정우진은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록 내 입장에서는 그 결과물이 새똥처럼 작다고는 해도 정우진은 정말 많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작 이런 걸로 정우진을 싫어할 거였으면 애초에 난 얘랑 사귀지도 못했다.
“얼마 전에 싸운 거 때문에 그래?”
-그때 많이 화났었죠?
화가 나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정우진이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고작 내가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정우진이 나한테 바람난 남편을 쥐 잡듯 잡는 아내처럼 굴어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내가 화가 난 이유는 그것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있었다.
-이제 안 그럴게요.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인 건지 정우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말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 남발하지 말고.”
-안 그러도록 노력할게요.
“그래, 노력은 해야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울먹거렸다.
-화내지 마세요.
“누가 보면, 씨발. 내가 널 집에 가둬 두고 존나 패는 줄 알겠다, 이 새끼야.”
-화 풀릴 때까지 때려도 돼요.
“야! 내가 화를 언제 냈어!”
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자 정우진은 오히려 자기가 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요즘 계속 화난 것처럼 보였단 말이에요.
“언제? 나 계속 하던 대로 했는데?”
내가 뭘 그렇게 다르게 행동했다고?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정말 나는 평소와 별로 다름없이 정우진을 대했다. 아니면 나도 모르게 짜증을 냈나?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우진은 한마디로 내 고민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니까요.
“…….”
-선배는 왜 그렇게 냉정해요?
“…….”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는 그 서러운 목소리에 터지는 한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닥치고 일이나 하러 가라고 하려다가 눈앞에 보이는 약병을 보고 소파에 깊숙이 앉아 등을 기댔다.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해도 될 이야기지만 지금 목소리를 들어 보면 도저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조금 고민하다가 물었다.
“그럼 네가 생각하는 냉정하지 않은 건 뭔데?”
-문자 답장 꼭 해 주고 전화도 바로 받는 거요.
정우진 맨날 하는 말이 그렇지, 뭐.
예상과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 대답이라 착잡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웃자 정우진이 이때다 싶어 기다렸다는 듯 떼쓰는 애처럼 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사랑한다고 해 주는 거랑 길 걸을 때 손잡고 걷는 거랑 커플 티나 신발 같은 거 맞추고, 또 아무도 없는 곳으로 여행도 자주 다니고 밥도 매일 같이 먹고 결혼도 하고…….
“야, 너는 안 냉정한 게 뭐냐고 말하라고 했더니 왜 네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고 앉아 있어?”
-그거나 이거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에 어이가 없어서 또 웃어 버렸다.
“헛소리 할 거면 끊어.”
-선배!
“화 안 났다고. 진짜 안 났어.”
물론 내가 온화한 사람은 아니라고 스스로도 생각하지만 정우진이 입버릇처럼 화내지 말라고 할 정도로 성격 파탄자도 아니었다. 정말 누가 보면 내가 매일 화만 내는 사람인 줄 알겠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 들어가 봐야 되는 거 아니야? 또 너 찾느라 나한테까지 전화 오게 만들지 마.”
-저 진짜 잘할…… 전화가 언제 왔어요?
세상에서 제일 가여운 사람처럼 말하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갑자기 정색을 하고 묻는 소리에 한숨 쉬듯 말했다.
“예전에.”
-예전 언제요?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고? 선배 번호 바꾼 지 두 달도 안 됐잖아요.
이걸 또 정우진이 알아듣게 설명하려면 굉장히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정우진은 천년만년 나랑 통화할 상황도 아니었고 갑자기 엄청나게 피곤해지는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다.
-누구한테 왔는데요? 이름 알아요?
“…….”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언제예요? 선배, 듣고 있어요?
“듣고 있어……. 잘 들려.”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좀 익숙해질 법도 한데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누구랑 전화했는데요?
보채는 목소리에 점점 짜증이 섞이고 있었다.
“너 씻으러 갔을 때 네 폰으로 전화 온 거 내가 대신 받았어. 내 번호 내가 먼저 말해 줬고. 너 일하다가 자주 없어진다며. 그래도 넌 내 전화는 받으니까 혹시나 해서 알려 준 거야. 진짜 급한 일 있을 때 너랑 연락 안 되면 그쪽에서도 곤란할 거 아니야.”
최대한 정우진이 알아듣고 납득할 수 있도록 차분하게 말했지만 역시 이런 건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누구랑 했냐고요.
“김…… 김영호? 김영후?”
-김영호.
“그래, 김영호.”
-선배는 왜 그렇게 번호를 막 뿌리고 다녀요?
지금 내 전화번호부에 저장된 건 딱 다섯 명밖에 없다. 세 명은 친구였고, 한 명은 정우진이고, 나머지 한 명이 저 김영호라는 사람. 근데 뭐? 번호를 막 뿌리고 다녀? 갑자기 울화통이 터져서 입술을 깨무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그 사람이랑 몇 번 연락했어요?
“이천 번.”
-네?
“이천이억 번 했다, 씨발. 끊어!”
-선배!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하면 일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집으로 올 확률이 높다는 걸 알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정우진 씨발, 지 인생 지가 사는 거지. 내가 언제까지 일일이 그런 걱정까지 해 줘야 돼? 일을 하든 말든 마음대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건 또 좀 아닌 것 같아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진짜 좀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꼭 이런다. 번호를 뿌려? 내가 씨발, 지금 얼마나 수도승처럼 살고 있는데.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앉아 화를 삭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는 개가 들어도 정우진이 뛰어오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곧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정우진이 나타났다.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아서 고개도 돌리지 않는데 현관 쪽에서 계속 무슨 소리가 들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현관문 안쪽에 자물쇠를 걸고 있는 게 보였다. 아주 두껍고 커다란 자물쇠를 두 개나 단 정우진이 뒤늦게 내게 다가왔다.
현관문이 개조됐다는 건 이미 예전에 알았다.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자물쇠를 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내 곁으로 다가온 정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내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내 옆에 앉으려다가 멈칫하고 서 있다가, 다시 멈칫하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결국 선 채로 시선을 돌렸다.
“왜 현관문에 자물쇠를 달아? 그냥 날 방에 가두고 거기에 달지.”
“가둔 거 아니에요.”
“그럼 현관에 저건 뭔데. 나한테 비밀번호 가르쳐 줄 수 있어?”
“…….”
“알려 줄 리가 있냐, 네가. 씨발.”
짜증이 나기도 하고 저 새끼 상태가 이 정도로 심각해졌다는 것에 성질이 나 한숨만 나왔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난 정우진이 싫어하는 건 내가 용납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도 나아지기는커녕 지금처럼 상황이 심각해지기만 했다.
“비밀번호 아니고 열쇠예요.”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열쇠 내놔.”
“…….”
우물쭈물하던 정우진이 웬일로 내게 열쇠를 건넸다. 아니, 이럴 거면 자물쇠를 뭐 하러 달아? 그냥 나한테 시위한 건가? 미간을 구기고 정우진을 노려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 어이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하나는 열쇠고 하나는 지문 인식이에요.”
“…….”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고백하는 소리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정신 나간 새낀가? 황당해서 말도 안 나왔다.
어쩐지 순순히 열쇠를 준다고 했다. 나는 들고 있던 열쇠를 던지다시피 소파에 내팽개쳤다. 어차피 문이 열리든 열리지 않든 난 여기에서 나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싸웠다고 해서 집을 나간 적은 없었다. 나갈 거라고 협박하듯 말한 적도 없었다. 나갈 생각조차 꿈에서라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우진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잘못했어요.”
무거운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정우진이 지겨운 소리를 했다. 이 말을 듣고 있을 때마다 화가 나는 건 정우진이 매번 똑같은 말을 해서가 아니었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잘못했다고 하는 게 화가 났다.
물론 내가 화를 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정우진이 잘못을 한 건 아니었다. 우리가 남도 아니고 사귀고 있는 사인데, 이런 추궁 정도야 해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내 말은 좀 싸우더라도 정상적으로 싸우고 싶었다. 정우진이 현관문에 자물쇠를 걸고 무조건 내 앞에서 잘못했다고 앵무새처럼 떠드는 게 아니라.
“우리 다음에 싸우면 내가 언제 한 번쯤은 꼭 집을 나가야겠어.”
갑자기 지쳐서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야 네가 현관문에 자물쇠 거는 게 좀 정당화되지 않겠냐? 나도 덜 억울하고.”
“싫어요.”
“아니면 씨발, 도대체 저 등신 같은 짓거리는 왜 하는 건데? 내가 언제 집 나간 적 있냐? 어? 나보고 집 나가라고 시위하는 거 아니면 저딴 짓을 왜 하냐고.”
정우진이 죽을 때까지 날 믿지 못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이건 새로운 사실도 아니었고 그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일이었다.
“넌 저렇게 꼭 집에 자물쇠를 걸어 놔야 안심이 돼? 내가 진짜 나갈 생각이었으면 네가 자물쇠를 거는 게 무슨 소용이 있어, 씨발. 의자로 창문 깨고 나가면 되는데.”
“……저거 강화 유리라 잘 안 깨져요. 그리고 창문 깨지면 보안 업체에 연락 가고…….”
“…….”
“잘못했어요.”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다시 울상을 짓고 말했다.
“유리창 깨지면 다칠지도 모르니까 그러지 말고 그냥 말하면 열어 줄게요.”
“그럼 자물쇠는 왜 달아?”
“화나면 나갈까 봐…….”
“열어 준다며.”
“지금은 말고…….”
물어보면 물어보는 족족 대답해 주는 게 이렇게 짜증 날 수가 없었다. 그때 내 눈치를 보면서 말하던 정우진이 별안간 자기 핸드폰을 내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저도 다른 사람 번호 없어요.”
“어쩌라고.”
“진짜예요. 확인해 보세요.”
별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정우진은 정말 핸드폰에 나랑 부모님이 아니면, 기껏해야 일하는 곳 전화번호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넌 좀 다른 사람 번호도 저장해 두고 그래라, 제발. 외우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
“일할 때 필요한 건데 무슨 씨발, 고집을 이상하게…….”
답답해서 한숨을 쉬면서 말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정우진이 불만 가득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선배는 내가 다른 사람이랑 전화해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바람난 거 아니면 뭐가 문제야. 전화도 좀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내가 다른 사람이랑 말해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씨발. 바람난 것도 아니잖아.”
“선배는 내가 바람만 안 피우면 다른 사람이랑 뭘 해도 상관없는 거예요?”
서럽다는 얼굴로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진이 말하는 그 뭘 해도 된다는 것은 그냥 대화를 하고, 아침에 만나면 인사를 하고, 점심을 함께 먹고 뭐 이런 것들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해도 되냐고 허락받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정우진은 내 말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지 놀란 얼굴로 날 보다가 이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선배 너무한 거 아니에요?”
“뭐가.”
“진짜 너무해.”
“…….”
정우진이 고개를 숙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으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그걸 보니 갑자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쓰레기 같은 놈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누가 보면 내가 바람피우고 어쩌라고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온 줄 알겠다. 그 정도로 정우진은 서럽게 울고 있었다.
“선배는 내가 다른 사람이랑 말해도 아무렇지도 않죠?”
“…….”
“내가 다른 사람이랑 전화를 하든 말든 문자를 보내든 말든 같이 웃으면서 무슨 얘기를 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잖아, 지금.”
“…….”
내가 뭐 못 할 말 했냐? 그냥 다른 사람이랑 전화도 좀 하고, 말도 좀 하라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 내가 너한테 딴 사람이랑 바람 좀 피우라고 했냐? 그냥 말 좀 하라고 했지. 아니, 씨발 뭐 저렇게 서럽게 울고 지랄이야.
할 말은 많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더 울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듣기만 하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다른 사람이랑 웃으면서 말하면 무슨 얘기를 하나 궁금하긴 하겠지.”
“난 선배가 다른 사람이랑 웃으면서 말하면 그 새끼 죽여 버릴 거예요.”
“……죽이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하기도 해라, 좀.”
“무슨 말을 했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냥 내 입을 실로 꿰매지 그러냐?”
“선배한테 어떻게 그래요, 그냥 그 새끼 입을 찢어 버리면 되지.”
울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도대체 내가 얘랑 이런 대화를 왜 하고 있나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정우진이 계속 훌쩍거려서 조금 전 확인해보라고 했던 그의 핸드폰을 열어 주소록을 보았다.
어머니, 아버지, 형.
세 개밖에 없는 걸 보며 당황해서 물었다.
“왜 이거밖에 없어?”
“원래 그거밖에 없었어요.”
“일하는 데 전화번호 몇 개는 있었잖아.”
“언제요?”
“있었거든? 언제 지웠어?”
아, 진짜 돌아 버리겠다. 화를 삭이며 크게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갑자기 연락할 일 생기면 어쩔 건데?”
“정 급한 일 있으면 어머니한테 전화하면 돼요.”
“사장 아들인 거 티 내냐?”
“어차피 모르는 사람도 없어요.”
“씨발, 진짜 말 존나 안 통하네!”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지르자 정우진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정말 정우진이 진심으로 걱정되어 물었다.
“너 이딴 식으로 일해도 아무도 너한테 뭐라고 안 해?”
“안 그래도 어머니가 계속 이럴 거면 그냥 때려치우래요.”
“뭐? 그래서 넌 뭐라 그랬는데?”
내가 놀라서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알겠다고…….”
“…….”
“근데 선배가 능력 있는 사람이 좋다면서요. 그래서 다시 잘해 보겠다고 했어요.”
난 정말로 정우진이 백수라도 별로 상관이 없었다. 계속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 곤란하겠지만 정우진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는 기다려 줄 의향이 있었다. 돈이 없으면 내가 일해도 되고, 정우진이 능력이 있어서 같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런 건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걱정을 하고 있는 건 정우진의 이런 비현실적인 정신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현실 감각이라고는 개뿔도 없는데, 사회생활까지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됐다.
굳이 모델 일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해도 되지만 솔직히 저렇게 일하는 새끼를 어느 회사에서 받아 주겠냔 말이다. 어쩌다 천운이 닿아 취직을 했다고 해도 정우진의 실체를 모르고 뽑은 회사는 또 무슨 죄고?
“너 지금 하는 일 관두면 뭐 해 먹고 살 건데?”
“뭐 안 해 먹어도 살 수 있어요.”
“네가 가진 건 네 게 아니잖아.”
“제 거 맞는데…….”
“다 부모님이 주신 거 아니야?”
저 새끼는 도대체 나이가 몇인데 저렇게 철없는 소릴 하고 있는 거야? 미간을 구기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부모님이 주신 건 건물 몇 개밖에 없어요. 집이랑 다른 건 다 제 돈으로 산 거예요. 거기 섬도 제가 샀는데…….”
“…….”
“진짜예요. 못 믿겠으면 등기부 등본 떼서 보여 드릴까요?”
“…….”
믿어 달라는 듯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정말 정우진이 이때까지 부모님 등골 빨아먹고 사는 놈이라고만 생각했지 자기 재산이 저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부모님이 주신 건 건물 몇 개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도 웃겼다. 돈이 많은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줄을 몰라서 당황한 것도 좀 있었다.
“……야, 너는 건물 몇 개가 남의 집 개 이름이냐?”
예상치도 못했던 답변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그래도 무슨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되는대로 내뱉었다. 정우진이 불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걸 보며 진짜 궁금해서 물었다.
“도대체 돈을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이 벌었는데? 진짜 네가 다 번 거 맞아?”
아니, 씨발. 나는 중학교 다닐 때부터 안 해 본 알바가 없는데도 돈을 모으긴 개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는데. 저 새끼는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돈을 많이 벌었어? 건물세 받은 걸로 저렇게 벌었나? 건물이 몇 개야? 정말 순수한 궁금증에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식이요.”
“주식하면 그렇게 돈을 많이 벌어?”
“치고 빠질 때만 알면…….”
“그걸 어떻게 아는데? 누가 가르쳐 줘?”
“아니요, 그냥 감이랑……. 공부를 많이 하긴 해야 하는데…… 정보가 있을 때도 있고…….”
말을 하다 보니까 자기도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던 정우진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아, 하고 퍼뜩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선배 혹시 돈 필요해요?”
“뭐?”
“줄까요?”
“…….”
건물도 몇 개나 있고, 주식도 있고, 섬도 있는데 내가 현금은 좀 받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빠르게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나마 남아 있는 양심에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나한테 돈을 왜 줘?”
“선배가 갖고 싶어 하니까…….”
“갖고 싶다고 한 적 없거든?”
“그럼 선배가 갖고 싶은 건 뭐예요?”
존나 많지. 하지만 이제껏 한 번도 내게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이 없어서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냥 막연히 많다는 생각은 드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정우진은 내가 무엇을 말하든 그걸 가지고 올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굳이 뭔가 해 달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필요한 것도 없고.
“지금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돈이 아니라 네 양심이야.”
“…….”
“네가 진짜 양심이 있는 놈이면 월급 받으면서 그렇게 일하면 안 되지.”
“…….”
심각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어쩌다가 말이 여기까지 왔지? 처음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리다가 자물쇠가 생각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 넌 현관에 저 좆같은 것 좀 그만 달아. 진짜 볼 때마다 짜증 나 죽겠어.”
“선배가 화냈잖아요.”
“그럼 너도 그냥 똑같이 화를 내, 저딴 짓 하지 말고.”
“선배한테 화를 어떻게 내요. 그러다가 나 싫어하면 나만 손해인데…….”
“…….”
장난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말에 나도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네가 화내면 내가 너 싫어하고, 현관문에 자물쇠 달면 안 싫어할 거 같냐?”
“…….”
“아, 진짜 이 새끼…….”
도대체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답답하고 어이가 없어서 입을 열면 욕과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욕은 겨우 삼키는 대신 깊게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갑자기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왜 오늘 출근할 때 사랑한다고 안 해 줬어요?”
“그 말이 갑자기 왜 나와?”
“그 말 못 들은 지 엄청 오래된 거 같단 말이에요. 그리고 아까 전화로 짜증 내 미안해요. 선배가 문자 답장도 안 해 주고……. 전화도 늦게 받고 그래서 안 그래도 서운했는데 다른 사람한테 핸드폰 번호도 알려 줬다고 하니까 말이 이상하게 나왔어요.”
뭔 소리야, 도대체. 사랑한다고 왜 말 안 해 줬냐고 하다가 짜증 내서 미안하다고 했다가 난리다. 어디에 맞장구를 쳐야 할지 몰라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번호 뿌린 적 없어.”
“선배가 안 그러는 거 알아요.”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한테 핸드폰 번호 줘도 그건 내 마음이야.”
“…….”
“그런 거까지 일일이 네 허락받아 가면서 살 생각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
꿍얼거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우진이 시선을 올려 날 쳐다봤다. 잔뜩 충격을 받은 얼굴로 툭 건드리면 눈에서 눈물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렁그렁한 눈가를 보다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내가 여기에서 사는 것도 네가 날 가둬 둬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여기에 있고 싶어서 있는 거야. 너랑 같이 살고 싶어서.”
“…….”
“내가 다른 사람한테 핸드폰 번호 안 준 건 네가 그러라고 해서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싫어할 거 같아서 내가 안 준 거야. 한 번도 네가 그러라고 해서 그런 적 없어. 알겠어? 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말을 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어졌다. 난 한 번도 이런 것들을 억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정우진은 그걸 모른다. 내가 여기에서 사는 것도, 정우진이랑 사귀는 것도, 내가 자길 좋아하는 것도, 그 외에 모든 것들이 전부 내가 원해서 하는 건데.
“난 앞으로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착잡한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울기 시작했다. 또 내가 화를 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기 말을 안 들었다고 저러는 걸지도 몰랐다.
몇 번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손등으로 닦아도 닦아도 계속 눈물이 나는지 한참을 그러고 있는 정우진을 보기만 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네가 아무리 울어도 이건 어쩔 수 없어.”
난 정우진이 원하는 대로 살 수가 없다. 말이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하긴 했지만 모든 걸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냥 어느 정도 서로 타협하면서 살고 싶은데 그러기엔 정우진이 받는 스트레스가 많았다.
지금도 스트레스를 받기만 하다가 결국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끊었던 약까지 다시 먹게 됐고, 내가 다른 사람이랑 눈을 마주쳤다고 싸우고, 핸드폰 번호 좀 알려 줬다고 현관문에 자물쇠까지 걸고.
씨발, 말하고 보니까 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 골 때리는 새끼.
“왜 자꾸 울어?”
나름 차분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도저히 내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지 정우진은 계속 울기만 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묻자 정우진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좋아서요.”
“뭐?”
그건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대답이었다. 좋아? 뭐가?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넌 나한테 혼나는 게 좋냐?”
씨발, 도라이니? 좋긴 뭐가 좋아?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너랑 같이 살고 싶…….”
“뭐?”
“살고 싶다고……. 선배가 나랑…….”
“…….”
서럽게 말하다가 결국 목이 멨는지 다시 입을 다무는 게 보였다. 뭐라고 하려고 입술을 뗐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억눌린 울음만 몇 번 나오다가 다시 입을 다무는 걸 보며 나도 똑같이 입을 다물었다.
아까부터 어이가 없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너랑 같이 살고 싶다고 하는 게 뭐 그렇게 눈물까지 흘리면서 기뻐할 일인데? 그럼 지금까지 내가 여기에 왜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입 밖으로 차마 나오지 않는 수많은 질문들이 목구멍에서만 맴돌았다.
“……넌 내가 여기 갇혀 있는 거 같냐?”
그렇다고 하면 대가리를 날려 버릴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정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좋아서요.”
“…….”
“선배는 그런 말 잘 안 해 주니까…… 가끔 그냥……. 가끔 나가고 싶을 때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같이 사는 것도…… 지겨울 수도 있고…….”
말을 하면 할수록 목소리가 뭉개지기 시작했다. 끝에 즈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정우진이 이럴 때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 고작 저딴 말에 저렇게 감격에 겨워하는지도 모르겠고, 왜 걱정을 사서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갈 때 나가잖아.”
“그런 거 말고요. 그냥 아예 나가 버리는 거요.”
“…….”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답답해 죽을 것 같았는데 정우진이 이러는 걸 보니까 괜히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표현을 안 했나 싶기도 했고, 도대체 얜 왜 이렇게 별것도 아닌 일에 감동을 받고 지랄인지도 모르겠고.
같이 산 지 2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요즘 사랑한다는 말도 안 해 주고.”
“…….”
“문자 답장도 잘 안 해 줬잖아요. 전화도 바로 안 받고.”
“…….”
사랑한다는 걸 꼭 말로 해야 알아? 아니, 그 말을 어떻게 매일 해? 문자는 씻거나 잠들었거나 그러면 못 볼 수도 있는 거고, 전화도 다른 일 하고 있으면 못 받을 수도 있는 건데.
고작 이딴 걸로 이렇게 개지랄을 떨었냐고 하려다가 정우진한테 이건 고작이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말았다.
“내가 매일 핸드폰만 보고 살 수는 없잖아. 그래도 확인하면 바로 문자도 하고 전화도 받아.”
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하자 정우진이 이때다 싶었는지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주말에 왜 나랑 데이트 안 해 줘요?”
“그땐 열 받았으니까.”
“얼마 전에 차 안에서 나랑 있는데 친구랑 문자했잖아요.”
“문자가 왔으니까.”
“왜 나랑 있을 때 핸드폰 봐요? 난 선배랑 있으면 핸드폰도 꺼 둔단 말이에요.”
진짜 별 시답지도 않은 걸로 이럴 때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어이가 없을 만큼 사소한 일이었지만 정우진은 진심으로 서운해서 저런 말을 한다는 게 가장 어이없는 일이었다.
“영화 보러 가기로 해 놓고 가지도 않고…….”
“이거 진짜 존나 양심 없는 새끼네. 야, 그때 영화를 보러 왜 못 갔는데!”
차마 내 입으로 떡치다가 기절하다시피 잠들어서 다음 날 날이 저물어서야 일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건 진짜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만하라고 해도 들어 처먹질 않더니 결국 아침 해가 뜨는 걸 본 날이 그날이었다.
“저 쉬는 날 선배 약속 있다고 나갔잖아요.”
“벌써 두 달도 더 지난 거 언제까지 우려먹을래?”
“내가 다른 사람이랑 얘기해도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고…….”
다시 서럽게 울먹거리는 걸 보며 한 대 패 버리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화를 삭이느라 몇 번이나 크게 숨을 뱉어 내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그래도 좋아해요.”
“…….”
“저 진짜 선배 많이 좋아해요. 정말 사랑해요.”
“…….”
뜬금없는 화제 전환에 기가 막힌 건 나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더 이상 정우진한테 뭐라고 할 수가 없는 게 너무 황당했다.
“선배는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죽어도 모를 거예요.”
정우진이 사랑한다고 하는 거야 매번 듣는 말이지만 이렇게 가끔씩 정말 가슴이 술렁일 때가 있었다. 어떤 날에는 ‘그래, 알아.’ 그 한마디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오늘처럼 이런 날에는 알고 있다는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죽으라는 소리는 아니에요.”
훌쩍거리면서 뒤늦게 덧붙이는 말에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무는 대신 티슈를 꺼내 건넸다. 티슈를 내민 손목이 끌려 한참 안겨 있다가 물었다.
“넌 도대체 왜 그렇게 자꾸 울어? 수도꼭지냐?”
“저 원래 잘 안 울어요.”
“…….”
그냥 사람이 밥을 안 먹고 산다 그러지 그러냐. 전혀 신빙성 없는 말에 한숨을 쉬자 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선배는 그런 거 없어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거 같은데.”
또 이상한 소리를 할 거 같아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우진이 살짝 몸을 떼며 날 보고 말했다.
“난 선배만 보면 눈물이 나와요.”
“왜?”
“몰라요, 그냥 눈물이 계속 나와요. 선배가 웃을 때도 울고 싶고, 화낼 때도 울고 싶고, 자고 있는 거 볼 때도 울고 싶어요.”
“…….”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난 한 번도 그래 본 적은 없지만 감정이 격해지면 울컥하는 게 있긴 있으니까 왠지 그런 게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언제쯤이면 선배를 봐도 태연할 수 있을까요?”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질러 주자 정우진이 내 손에 제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손바닥에 닿는 젖은 살갗이 조금 간지러워서 손을 떼자 정우진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제 화난 거 다 풀렸어요?”
“아까도 그렇게 많이 화난 건 아니었어.”
“전화 끊었잖아요.”
“네가 자꾸 헛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잘못했어요.”
도대체 저 잘못했다는 소릴 얼마나 들었는지 이제 세기도 귀찮았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젖은 눈으로 가만히 날 내려다보고 있는 정우진을 마주 보다가 물었다.
“너 약 다시 먹지?”
“몇 번 안 먹었어요.”
“잠이 안 와?”
“그냥 요즘…….”
왠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정우진은 요즘 정말 많이 이상했다. 평소에도 이상하긴 했지만 최근 들어 불안해 보였고, 별것도 아닌 일에 울거나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계속 참다가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는데 그래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했다.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정우진을 보다가 물었다.
“자다가 깨는 거야, 아니면 아예 잠을 못 자는 거야?”
“자다가 자꾸 깨요.”
“왜? 악몽 같은 거 꿔?”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꿈, 꾸는데? 똑같은 꿈을 계속 꾸는 거야?”
내가 듣는다고 해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정우진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서운한 얘기나 불안한 것들은 보통 재깍재깍 말하는 편이긴 했지만 어떤 게 중요한 것이고 어떤 게 그냥 하는 말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똑같은 꿈을 꿀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우물쭈물 말하는 게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감기에 걸렸거나 어딜 다쳤을 땐 조금만 아파도 엄살을 부리면서 징징거리는데 정작 이런 건 묻지 않으면 절대 먼저 이야기해 주는 법이 없었다. 눈치를 채고 물어봐도 어영부영 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좀 시간 지나면 다시 괜찮아져요.”
“그러다가 또 시간 지나면 꿈꾸고?”
“…….”
“무슨 꿈인데?”
어렸을 때 꿈을 꾸는 거냐고 묻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의 일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건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잘 기억이 나지도 않을뿐더러 정우진에게나 나에게나 좋았던 기억이 아니라 되도록 이렇게 잊고 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그때의 일이 문제라면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아니, 따지고 보면 내가 정우진을 버린 건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계속 말하고 떠올리다 보면 언젠가는 덤덤해지지 않을까.
“어렸을 때?”
내가 힘겹게 묻자 정우진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날 쳐다보는 얼굴이 안쓰러워 보여서 팔을 뻗었다. 발갛게 부어 있는 눈가를 만져 주다가 손목을 잡자 정우진이 물었다.
“아니요.”
“그럼?”
“어렸을 때 꿈이면 좋을 텐데.”
“그게 좋다고?”
의외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정우진이 웃었다.
“선배는 안 좋아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가 어렸을 때니까 그때 꿈꾸는 거면 좋은 거잖아요.”
처음 만났다는 것 말고는 전부 안 좋은 일이지 않나. 나는 어렸을 때 정우진을 떠올리면 대부분 안 좋은 것들밖에 떠오르지가 않았다. 내가 김우진을 무시하고 내가 김우진을 때리고 내가 김우진에게 거짓말을 하고 내가 김우진을 버리고 결국에는 잊고 살아간다.
“선배, 저 어렸을 때 다시 만난 적 있죠?”
그때 정우진이 불안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어렸을 때 언제?”
“저 중학교 때쯤이요.”
“…….”
“그때 분명 우리 집에 왔던 거 같은데.”
예전 일을 떠올리듯 잠시 허공을 보던 정우진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날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집에 와서 저랑 같이 있었잖아요.”
“…….”
아니다.
“분명 그때 선배가 나 찾아왔어요.”
그런 적은 없었다.
“진짜 있었어요.”
내 기억력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 내가 정우진을 다시 만난 건 그때가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흐린 눈으로 날 보던 정우진이 눈을 감았다 뜨자 초점이 잡혔다. 손목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자 정우진이 고개를 숙였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때쯤이었던 거 같아요. 선배 얼굴이 잘 기억이 안 나서…….”
“…….”
“좀 그때부터…… 꿈을 꿨는데 그게 잘 구분이 안 돼서…….”
횡설수설 말하던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요즘 자꾸 그때 꿈을 꿔요. 그냥 내 방 침대에서 자고 있는 내가 보이는데, 그걸 계속 보고 있으면 언젠가는 깰 텐데도 그게 보기 싫어서 잠을 못 자겠어요. 다시 잠들어도 계속 자고만 있고…….”
“네 꿈속에서 자고 있는 넌 무슨 꿈을 꾸고 있는데?”
내 물음에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게 몇 번이나 반복됐다. 그러더니 이내 말하지 못하고 내가 잡고 있던 손을 들어 내 뒷목을 당겼다. 정우진이 고개를 숙이자 입술이 내 눈가에 닿았다가 뺨으로 내려와 입술에 닿았다.
울어서 그런지 닿은 입술이 뜨거웠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 안으로 혀가 들어와 핥기 시작했다. 옷 안으로 들어온 손이 등을 훑다가 바지를 내렸다. 몸이 밀려 소파에 앉자 순식간에 바지가 벗겨졌다.
너무 갑작스러운 행동이었고 지금 이러면 다시 나갈 수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제지할 수가 없었다. 숨소리가 점점 급해지면서 이가 부딪치고 혀가 할퀴는 것처럼 입 안을 긁었다.
숨이 차서 고개를 돌리자 떨어진 정우진이 쉴 틈도 없이 입술을 내려 턱을 빨다가 목덜미를 물었다. 너무 세게 물려서 윽 소리를 내자 사과라도 하는 것처럼 아까 물었던 자리를 혀로 쓸었다.
몸이 휘청거리면서 옆으로 쓰러지자 정우진이 내 위로 올라탔다. 눈을 바짝 찡그리면서 초점을 맞추자 타이를 풀고 겉옷을 벗는 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정우진이 옷을 벗다 말고 다시 고개를 숙여 내 입술을 빨았다. 손으로 가슴을 만지다가 배를 쓸고 밑으로 내려가 장골 근처를 세게 물었다. 고개를 젖히며 낮게 신음하자 튀어나온 뼈에 자국을 남기고 있던 정우진이 다리를 들어 허벅지 안쪽을 입술로 문지르다가 드로어즈를 벗겼다. 성기를 손으로 잡아 문지르다가 입 안에 넣자 크게 숨을 들이켰다. 손을 내려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자 더욱 깊게 물었다.
대낮에 소파 위에서 헐떡거리고 있다는 수치심보다 천천히 넣었다가 뺐다가 고개를 움직이면서 날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더 강해서 조금씩 열이 올랐다. 미간을 구기고 정우진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자 조금씩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혀가 귀두 끝을 건드리고 젖은 점막이 기둥 전체를 물었다가 미끄러지면서 빠져나가는 감각이 선명해지자 아랫배가 시큰거렸다.
금방 발기해서 헐떡거리자 입 안에서 성기를 빼낸 정우진이 허리를 세웠다. 한 손으로는 바지 버클을 풀고 나머지 손으로는 발기한 성기를 위로 눌러 아랫배에 붙여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귀두 끝에서 액이 질질 흘러 배 위로 떨어지는 게 보고 싶지 않아도 시선에 걸려서 입술을 깨물자 정우진이 발기한 성기를 엉덩이 골 사이에 마구잡이로 비비기 시작했다.
“아, 씨발.”
젖어 있지 않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건지 양쪽 허벅지를 당겨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 이것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씨발. 입 밖으로 욕지거리가 나오기도 전에 엉덩이가 잔뜩 벌어졌다. 더운 숨이 닿았다는 걸 느끼기도 전에 뜨거운 게 안쪽을 핥았다. 몸에 힘을 풀려고 애써도 핥아질 때마다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어깨를 움츠리고 견디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몸을 뒤틀자 정우진이 내 허벅지를 단단히 잡았다. 손자국이 날 정도로 아프게 잡혀서 윽 소리를 내자 젖어 있는 구멍 안으로 손가락이 하나 들어왔다.
넓히듯 쑤시다가 다시 손가락을 빼고 핥기를 반복하더니 손을 뻗어 소파 옆 서랍을 더듬거렸다. 위에 있던 노트와 펜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둔탁한 소리를 내는 게 들렸다.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떼자 정우진이 젤을 손바닥에 짜는 게 보였다. 뚝뚝 흘러넘칠 정도로 잔뜩 짜서 손으로 비비다가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처음에 넣었던 것보다 훨씬 쉽게 들어가자 금방 하나를 더 넣었다.
미끈거리고 찐득한 게 안쪽에 펴 발라지는 느낌이 생생했다. 손가락이 안쪽을 문지르다가 빠질 때마다 어깨가 떨려서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손바닥에 남은 젤로 제 성기를 문지르던 정우진이 손가락을 빼내고 엉덩이 골 사이에 귀두를 문질렀다. 금방 넣을 줄 알았는데 멈칫하더니 잠시 숨을 고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미끄러지듯 안으로 한 번에 처박혔다.
“아윽!”
뜨거운 게 안을 가득 채우자 의식하지 않아도 입 밖으로 소리가 터졌다. 몸에 힘을 잔뜩 주고 덜덜 떨고 있는데 배 속이 뜨거워졌다. 넣자마자 사정을 한 건지 정우진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헐떡거렸다. 한참을, 오랫동안 사정하다가 고개를 든 정우진이 눈가를 발갛게 물들이고 날 내려다봤다. 젖어 있는 눈으로 날 보면서 느리게 허리를 움직이자 성기가 쭈욱 빠졌다.
“아……!”
몸에 힘이 빠지지 않아서 우는 소리가 나왔다. 끝까지 빠진 성기가 다시 안쪽에 퍽 박히자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선배.”
울먹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도저히 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젤이 완전히 녹아서 정액과 섞여 움직일 때마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진창이 된 액체가 안쪽에 고여 있다가 밖으로 삐져나와 들린 엉덩이 아래로 느리게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선배, 선배.”
정우진이 내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날 불렀다.
“좋아해요.”
“아, 씹……. 윽!”
“진짜 좋아해요.”
미끈거리는 내벽이 마찰될 때마다 손가락 끝이 저려 왔다. 숨을 토해 내면서 아무리 헐떡여도 몸속의 열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쥐어뜯을 것처럼 옷깃을 붙잡고 있자 정우진이 내 손목을 잡았다. 떨리는 손가락 끝을 혀로 핥더니 입 안에 넣어 성기를 빨던 것처럼 빨기 시작했다.
“아, 아……!”
손을 빼내려고 해도 단단히 잡혀서 뺄 수가 없었다. 안쪽을 박힐 때마다 내벽이 눌리는 게 괴로워서 눈을 질끈 감자 손가락을 빨던 정우진이 내 눈가에 입술을 눌렀다. 눈가를 핥고 입술을 이로 물었다가 놓으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빠르게 안쪽을 쑤셨다가 다시 빠르게 빠졌다. 숨도 못 쉬겠고 침을 삼킬 여유도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사정하자 안쪽에 치대던 성기가 쑥 빠졌다. 빠듯하게 채우고 있던 게 불시에 빠지자 사정을 하다가 막힌 것 같아 손을 내려 성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정우진이 내 손목을 잡았다. 그는 내 다리를 들어 무릎 뒤쪽을 핥다가 귀두 끝으로 벌어진 구멍을 문질렀다. 그러더니 느리게 안으로 들어오자 성기에서 정액이 밀려 나오듯 질질 흘렀다. 지속되는 사정감에 진저리를 치면서 몸을 떨자 정우진이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가 소파에 닿지 않을 정도로 들어 올렸다.
배 위로 떨어지던 정액이 가슴으로, 턱으로, 그리고 얼굴 위로 마구 흘렀다.
“윽, 흐…… 하아……!”
눈앞이 흐려졌다가 박히면 머리가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젖은 소리와 헐떡이는 소리 사이로 정우진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힘겹게 눈을 뜨자 정우진이 내 뺨에 늘어진 정액을 핥았다.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정우진이 내 몸을 돌려 소파에 엎드려 엉덩이만 들게 했다.
정우진이 울면서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몸이 아래로 추락하듯 무거워졌다. 무겁게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는 쾌감에 눈을 질끈 감자 눈물이 흘렀다. 뒷목에 입술이 닿는 곳마다 뜨거워져 몸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선배, 사랑해요.”
“흑, 아, 아……!”
사정을 해도, 숨을 토해 내도, 울어도 계속 뜨거워지기만 했다.
“사랑해요.”
“아으읏!”
울먹거리는 소리에 손을 내려 성기를 잡아 문지르자마자 다시 정액이 터졌다. 저절로 허리가 움직여 소파에 얼굴을 비비면서 정신없이 잡은 성기를 흔들었다. 잡아 문지르는 손 위로 그의 손이 닿았다. 손등 전체를 덮는 것처럼 잡아 흔들자 허리가 더욱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배.”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에 날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눈물이 났다.
“선배, 선배.”
정우진이 왜 날 보면 눈물이 난다고 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 * *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우진이 자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누가 건드려도 못 일어날 만큼 푹 자고 있는 것 같아서 안도했다. 어제 몇 시부터 잤더라.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아홉 시가 넘기 전에 잠든 건 확실했다.
씻고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꿈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다. 말을 꺼내 보려고 해도 말하기 싫어하는 티가 역력해서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다가 졸고 있기에 재웠더니 기다렸다는 것처럼 잠이 들었다. 새벽 내도록 혹시 정우진이 깰까 봐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나는 잠깐 정우진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조심조심 침대 아래로 내려와 밖으로 나왔다. 열 시에는 나가야 하니까 아침 먹고 가려면 삼십 분 정도는 더 자도 되지 않을까.
주방에서 냉장고를 열어 뭘 할까 한참 고민했다. 불을 쓰는 건 너무 실패 확률이 높은데 그래도 빵보다는 밥이 낫지 않을까 싶어서 결국 냉장고 구석에 있는 유부초밥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포장지 뒤에 있는 요리 방법을 대충 훑고 커다란 그릇에 밥을 펐다. 그 안에 모든 재료를 다 넣고 위생 장갑을 끼고 유부 안에 밥을 넣었다.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는데 밥이 모자라서 멈칫했다. 자세히 보니 유부 안에 밥을 너무 많이 넣은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도로 꺼내서 다시 반씩 나눠서 넣었다.
근데 또 그러고 보니까 너무 양이 적은 것 같아 욕지거리를 내뱉다가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아서 장갑을 벗고 방으로 갔다.
뭐 별로 한 것도 없는 거 같은데 왜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안으로 들어가자 조금 전 자세 그대로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는 정우진이 보였다. 침대 맡으로 다가가 끄트머리에 앉자 매트가 조금 흔들렸다. 작은 소리에도 깨고는 했는데 일어나지 않는 걸 보니 정말 깊게 잠든 것 같았다.
조금 전에는 깰까 봐 자세히 보지 못해서 이제야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매일 새벽, 날 이렇게 보면서 정우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왜 자는 걸 보고 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냥 눈을 감고 숨을 쉬는 게 전부였지만 어째서인지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감긴 눈꺼풀을 한참 보다가 코와 입술, 귓불, 머리카락을 번갈아 봤다. 빨리 깨워야 할 것 같은데 깨우고 싶지가 않아 조금만, 조금만 하다가 결국 10분이 더 지나고서야 정우진을 깨웠다.
“야.”
손을 뻗어 가볍게 어깨를 흔들자 평온했던 얼굴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미간에 주름이 생긴 걸 보고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정우진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면서 몸을 뒤척였다.
한참 눈꺼풀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정우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래 봤자 금방 다시 감았지만 그사이에 날 봤는지 더듬더듬 허공에 손을 뻗어 상체를 일으켜 내게 팔을 내밀었다. 헛손질을 몇 번 하다가 날 안은 정우진이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언제 일어났어요?”
“아까. 너 열 시에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어……. 열 시 맞는 거 같기도 하고…….”
“빨리 씻어. 지금 아홉 시야.”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몇 번 목덜미에 비비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이대로 또 잠이 들까 봐 손바닥으로 등을 팍팍 쳤다.
“아홉 시라니까.”
“응…….”
“씻어, 빨리.”
“씻겨 줘…….”
웅얼거리는 소리에 안 되겠다 싶어 벌떡 일어서자 정우진이 휘청거렸다. 그대로 이불 위로 풀썩 쓰러진 정우진이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 몇 시예요?”
“아홉 시라니까.”
“아……. 선배 언제 일어났어요?”
“아까.”
“아침은요?”
계속 잠이 깨지 않는지 눈을 비비다가 목을 잡고 두어 번 고개를 젖히자 우두둑 뼈 소리가 났다. 잠을 잘못 잤나, 왜 저래? 손을 뻗어 목가를 주물러 주자 정우진이 그제야 눈을 뜨고 날 쳐다봤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면서 계속 보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좋아서요.”
“목 주물러 주는 게?”
“그거랑 아침에 깨워 주는 것도.”
바보처럼 웃는 걸 보니 어쩐지 아침까지 해 놨다는 말을 하기가 좀 민망해졌다. 차렸다고 하기도 뭣하고 그냥 밥 비벼서 유부 안에 넣은 것밖에 없긴 했지만.
“오늘 좀 일찍 끝날 것 같은데 저녁은 밖에서 먹을래요?”
“어제 그러고 나왔는데도 빨리 끝나?”
“음, 아마도?”
“…….”
진짜 빨리 끝나는 건지, 그냥 빨리 나오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알아서 하겠지 싶어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씻고 나와. 먹을 거 대충 해 놨어.”
“선배가요?”
“그냥 좀 일찍 일어나서.”
“와, 대박.”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묻는 정우진을 보고 있으니 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설마 꿈인가?”
“꿈 아니니까 빨리 씻기나 해. 시간 없어.”
“오늘 내 생일이에요?”
“씻으라고, 빨리!”
자꾸 헛소리를 하는 정우진을 억지로 욕실 안으로 밀어 넣고 다시 주방으로 왔다. 조금 전에 해 둔 유부초밥을 접시에 담고 기다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정우진은 내가 뭘 하면 평소에도 좀 과하게 반응하기는 했지만 어제 일까지 겹쳐서 그런지 자꾸만 기분이 이상해졌다.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한 것 같기도 하고 평소에 내가 그렇게 뭘 아무것도 안 해 준 건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냥 내가 같이 살고 싶어서 산다는 말에 울고, 아침을 해 뒀다는 말에 저렇게 반응하는 건 평소에 정우진이 내가 그럴 거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니까.
착잡한 마음에 심각한 얼굴로 있는데 다 씻은 정우진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물기를 다 닦지도 않고 급하게 온 건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거 선배가 했어요?”
“…….”
웃으며 의자에 앉는 걸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내가 너한테 그렇게 못하냐?”
“네?”
“내가 너한테 많이 못해?”
잘하고 못하고의 경계가 희미해진 건 사실이었다. 정우진이 과하게 잘해 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는 하지만 일상이 그러니 나도 모르게 거기에 적응한 걸지도 몰랐다. 그때 내 심각한 표정을 보고 있던 정우진이 별안간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좀 그렇기는 해요.”
“…….”
내가 그러니까 이런 사소한 것에도 정우진이 과하게 기뻐하는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면전에 대고 들으니 그 충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문자도 자주 못 하게 하잖아요. 답장도 잘 안 보내 주고.”
“그건 네가 너무 과한 거고.”
“전화도 잘 안 받고.”
“너는 씨발, 진짜. 그놈의 문자랑 전화 얘기는 언제까지 할래?”
나는 지금 심각해 죽겠는데 문자나 전화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어이없어 욕지거리를 내뱉자 정우진이 웃었다.
“그거 말고는 사실 별로 없어요. 하루에 몇 시간이나 떨어져 있는데 전화도 문자도 안 되면 무섭단 말이에요.”
“무섭긴 뭐가 무서워?”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 갑자기 도둑이 들 수도 있는 거고, 불이 날 수도 있는 거고, 강도 들어와서 선배가 다칠 수도 있고, 갑자기 씻다가 미끄러져서 욕실에서 기절할지도 모르고…….”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정우진을 보다가 손에 젓가락을 쥐여 줬다.
“그냥 밥이나 빨리 먹고 나가.”
“왜 빨리 나가라 그래요?”
“빨리 처먹기나 해.”
“근데 얘는 모양이 왜 이래요?”
너덜너덜한 유부초밥을 보며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차마 밥을 도로 끄집어냈다가 다시 쑤셔 넣은 거라서 그렇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그냥 고개만 저었다.
“난 선배가 아침 해 주면 해 줄 때마다 감동받을 거예요.”
“뭐?”
“매일 해 줘도 매일 감동받을 거 같은데.”
“…….”
“그래서 갑자기 그런 거 물어본 거 아니에요?”
정우진이 모양이 이상한 유부초밥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말했다. 갑자기 정곡을 찔려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몰랐어요? 아침만 그런 게 아니라 난 매일 선배가 내 이름 한 번만 불러 줘도 너무 좋아서 감동받는데.”
“…….”
“진짜 몰랐어요?”
이렇게 말하니까 또 그런 것 같기도 해서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에는 그러지 마.”
“왜요?”
“이름 불러 주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 감동씩이나 받아. 그냥 내가 뭐 해 주면 그때 받아, 차라리.”
오늘처럼 뭘 해 주고 이러는 거면 괜찮은데, 평소에 아무것도 아닌 일로 그러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진짜 이름 그까짓 거 불러 주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미간을 구겼다. 내가 평소에 잘 안 불러 주나?
야. 정우진. 너. 등신아. 이 새끼야.
최근에 정우진을 불렀던 걸 떠올리다가 갑자기 민망해져 손으로 입을 가렸다. 우진이라고 불러 달라고 노래를 부르면 가끔 한 번씩 불러 주고, 우는 걸 달래거나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걸 막으려고 부르는 걸 제외하면 사실 잘 불러 주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아까 깨울 땐 뭐라고 불렀지? 그때도 우진이라고 안 했나? 아니, 근데 이름 불러 달라고 빤히 쳐다보면서 시키면 못 부르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그냥 자연스럽게 부르는 게……. 아니, 자연스러울 때도 안 불러 줬나…….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런 생각을 하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야.”
“네?”
어느새 만들어 둔 유부초밥을 거의 다 먹은 정우진이 날 쳐다봤다.
“근데 넌 왜 내 이름 안 불러?”
“네?”
“왜 아직도 선배라고 그래? 여기가 학교냐? 안 다닌 지가 언젠데 아직도 선배래.”
“…….”
핸드폰에는 형이라고 저장되어 있으면서 부르는 건 꼬박꼬박 선배였다. 나도 갑자기 정우진이 형이라고 하면 좀 어색하긴 할 것 같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 적응될 텐데.
아무리 기다려도 말이 없는 정우진을 보며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어?”
대답하라고 재촉해도 내 시선을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왜 자꾸 선배라고 하냐고.”
“그럼 뭐라고 불러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냥 왜 자꾸 선배라고 하는지 물어본 건데.”
“…….”
이름 안 부르는 건 자기도 마찬가지면서 왜 나한테만 자꾸 이름 불러 달래? 계속 말이 없는 정우진을 보며 갑자기 억울해서 말했다.
“너도 내 이름 한 번 불러 봐.”
“…….”
“불러 보라니까?”
“…….”
끝까지 입을 다물고 못 들은 척하는 게 웃기기도 하고, 이쯤 되니 오기가 생겨서 꼭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혹시 내 이름 모르는 거 아니야?”
“알아요.”
“근데 왜 안 부르냐고.”
“어떻게 이름을 막 불러요?”
“존나 웃기는 새끼네. 야, 그럼 넌 왜 나한테 자꾸 네 이름 불러 달라고 하는데?”
정우진이 뭐라 하려고 크게 숨을 들이켜더니 이내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게 웃기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다시 물었다.
“내 이름 말해 보라니까?”
“싫어요.”
“왜 싫어?”
“부끄럽단 말이에요.”
정우진은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끄러워? 뭐가? 이름 부르는 게? 그게 왜 부끄러운데?
“그래도 참고 불러 봐.”
“싫어요.”
“그럼 나도 네 이름 안 불러.”
“진짜 유치하게 왜 그래요?”
“유치? 유치? 네가 지금, 씨발, 나한테 유치하다 그래? 네가? 도대체 이름 부르는 게 뭐가 부끄럽냐고!”
“아, 몰라요!”
내가 고함을 지르자 덩달아 버럭 소리를 치는 정우진을 보며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은 유부초밥을 입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정우진을 따라 일어나 그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
“불러.”
내 말에 그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부르라고.”
못 들은 척 드레스 룸으로 들어간 정우진이 몇 번 옷을 휘적거리다가 아무거나 꺼내 입으려는 걸 잡아 세웠다.
“불러 보라고, 좀!”
“못하겠단 말이에요!”
“왜!”
정우진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이 웃겨서 정색을 하고 있다가 결국 웃어 버렸다.
“그러니까 왜 못하겠냐고.”
“…….”
“내 이름 뭔지 알긴 하냐?”
“알아요.”
“뭔데?”
진짜 웃겨 죽겠다. 실실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하고 연신 웃으며 물었다.
“말해 봐.”
“…….”
“야, 넌 아침에 일어나서 내 좆 빠는 건 안 부끄럽고 이름 부르는 건 부끄럽냐?”
“그냥 지금 좆을 빨면 안 돼요?”
정말 진지하게 묻는 걸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 정도로 이름 부르는 게 어렵나?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손목을 잡은 손에 꽉 힘을 주며 강압적인 얼굴로 정색을 했다.
“말해.”
“…….”
일그러진 얼굴이 점점 울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내가 너 괴롭히는 줄 알겠네.”
“괴롭히고 있잖아요, 지금.”
“그래, 괴롭힌다고 쳐. 그러니까 빨리 말해.”
내 말에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정우진이 이내 결심을 했는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입술만 달싹거릴 뿐이었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날 보던 정우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서, 서주야.”
“…….”
목부터 귀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네 친구냐고 말하고 싶었는데 어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부끄러워하니까 괜히 억지로 시킨 나까지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
“…….”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질끈 감고 있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상기된 얼굴로 날 보던 정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주야.”
“…….”
“강서주.”
“…….”
아까는 시켜도 그렇게 못 하더니 한 번 부르고 나니까 할 만했는지 계속 중얼거리듯 내 이름을 말했다. 혼잣말처럼 한참 그러던 정우진이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아, 진짜 못 부르겠어요.”
“실컷 불러 놓고 뭘 못 불러?”
“기분 이상해요.”
기분은 내가 더 이상하다, 씨발. 아니, 내가 지 친구야? 서주 선배, 서주 형, 그렇게 부를 줄 알았는데 서주야? 강서주? 미간을 구기자 정우진이 웃었다.
“어렸을 때 생각나요.”
“…….”
어쩐지 천진해 보이는 얼굴에 말문이 막혔다. 웃는 게 어렸을 때랑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사실 정우진이 어렸을 때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왠지 저런 느낌으로 웃었던 것 같았다. 그때 정우진은 겁먹은 강아지처럼 주변 눈치만 살피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벌 떨고 있었는데, 날 보면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늘 저렇게 웃었다. 그랬던 것 같다.
“선배.”
잠깐 생각에 잠겨 있자 그사이를 못 참고 정우진이 날 불렀다.
“무슨 생각, 해요?”
“네 생각.”
“무슨 생각이요?”
“옷 입어. 너 늦겠다.”
어렸을 때를 떠올리면 항상 기분이 이상해졌다. 좋지 않은 쪽으로 이상해져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늘 무의식중에 피하고 있었다.
“왜요? 갑자기 왜 그러는데.”
“아무것도 아니야.”
“이름 불러 달라면서요.”
불안한 얼굴로 묻는 정우진을 보고 있으니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쟨 도대체 언제쯤 내가 기분이 안 좋으면 자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할까.
“앞으로 계속 불러.”
“뭘요? 이름?”
“그래.”
“……어, 그건 생각 좀 해 볼게요.”
붙잡고 늘어지던 정우진이 갑자기 돌아서 옷을 보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헛웃음 짓다가 밖으로 나왔다. 주방으로 가서 빈 그릇을 치우고 시계를 보자 열 시가 다 돼 가고 있었다. 지금 바로 나가도 제시간에 도착하긴 그른 것 같았다. 아, 그 이름 불러 달라는 얘기는 좀 나중에 할걸. 기껏 시간 맞춰서 깨우고 아침까지 먹였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나갈 준비를 다 한 건지 정우진이 내게 다가왔다.
“그거 제가 갔다 와서 치울게요. 그냥 두세요.”
“내가 치워도 돼.”
“힘들잖아요.”
“나 어디 아픈 사람 아니거든?”
누굴 병자 취급해? 인상을 쓰다가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닫고 정우진을 데리고 현관문 앞까지 갔다.
“일단 빨리 가. 근데 너 그러고 가도 돼? 머리 덜 말랐는데.”
“어차피 가면 다시 만질 거예요.”
“알았어, 빨리 가.”
“왜 자꾸 빨리 가라 그래요?”
“늦었잖아. 지금 열 시거든?”
내 말에 아직 열 시가 안 됐다고 말하는 걸 무시하고 억지로 현관문 밖으로 밀어냈다. 혼잣말로 투덜거리는 정우진에게 어서 가라고 손까지 흔들어 줘도 그 자리에서 미적거리기만 했다.
“왜 안 가?”
“갈 거예요.”
“알았어, 갔다 와.”
다시 손을 흔들었는데 이번에도 정우진은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뭘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다시 뭐라고 하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아서 이리 오라고 손가락을 까닥이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내 앞에 섰다.
팔을 뻗어 뒷목을 잡아 누르자 자연스럽게 허리가 굽혀졌다. 입가에 입을 맞추자 그제야 펴진 얼굴로 정우진이 손을 흔들었다.
“갔다 올게요.”
“알았어.”
“전화할게요.”
“그래.”
“문자도 보낼게요! 사랑해요!”
“알았다고!”
가는 길에 몇 번이나 다시 돌아보는 정우진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갑자기 집이 조용해져서 그런지 아니면 새벽 내내 잠을 자질 못해서 그런지 급격히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대충 설거지만 끝내 놓고 핸드폰을 보자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저 도착했어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오늘 진짜 일 열심히 할 거예요. 사랑해요.]
의욕이 보이는 문자에 웃다가 답장을 보냈다.
[알았어. 난 좀 잘 거니까 문자도 전화도 하지 마. 일어나면 연락할게.]
혹시 자는 사이 또 연락이 올까 봐 미리 말해 두고 곧장 누웠다. 무거운 눈을 감자 금방 잠이 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한참 자다가 들리는 진동에 몸을 뒤척였다.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아 한참 들고 있다가 겨우 눈을 뜨자 때마침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자고 있었어요?
“응……. 몇 시야, 지금.”
-네 시요. 저 아까 끝났는데 그냥 집으로 갈까요?
네 시? 놀라서 번쩍 눈을 떠 핸드폰 시계를 봤다. 4시 12분이었다. 이렇게 오래 잤나? 아직도 정신이 제대로 들지 않아 몇 번이나 한숨을 쉬다가 말했다.
“지금 어디야?”
-저 XX 근처요. 집에 갈까요? 선배 그럼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은 거예요?
“금방 나갈 테니까 기다려.”
-데리러 갈까요?
“아니……. 일단 나 좀 씻고 다시 연락할게.”
전화를 끊고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얼른 씻고 밖으로 나와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도 않고 급하게 옷을 껴입자 20분 정도가 지났다. 머리만 말리고 나가겠다고 문자를 보내자 금방 진동이 왔다. 확인하지 않고 드라이기를 켜 머리를 반쯤 말리고 지갑과 핸드폰만 가지고 집을 나왔다.
택시를 타 정우진이 있는 곳으로 가 달라고 말한 뒤, 그제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문자가 일곱 개나 와 있었다.
[선배 자요? 그냥 보내 봤어요. 잘 자요.]
[아침은 먹고 자는 거예요?]
[점심 뭐 먹었어요? 아직 자는 거 아니죠?]
[(사진)오늘 도시락 먹었는데 진짜 맛없어.]
[보고 싶다ㅠㅠ]
[자요? 저 끝났어요.]
[천천히 하고 나오세요. 진짜 안 데리러 가도 돼요? 근처 카페에 가 있을게요.]
전화나 문자로 지랄 좀 하지 말라고 해서 그런가. 평소에 비하면 굉장히 적은 양이었다.
[지금 택시 탔어. 어디야?]
문자를 보내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답장이 왔다.
[XX 카페요. 저번에 같이 온 적 있는데 기억해요?]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안 날 것 같기도 하고. 아마 근처에 가면 알 것 같았다. 택시에서 내려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
[도착했어요? 오늘 너무 열심히 일했더니 피곤해요ㅠㅠ]
[단 거라도 먹고 있어. 곧 도착할 거 같아.]
[호두 파이 시켰어요. 빨리 와요. 보고 싶은데ㅠㅠ]
아깐 천천히 와도 된다며. 문자를 보내느라 잠시 멈춰 있다가 고개를 들어 다시 주변을 살폈다. 이 근처 어디였던 거 같은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문득 작은 카페 유리창 너머로 정우진이 보였다. 창가에 앉아 핸드폰을 붙잡고 있는 게 멀리서 봐도 한눈에 보였다. 한참 액정을 보던 정우진이 몇 번 손가락을 움직이자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어디쯤이에요?
“거의 다 왔어.”
-데리러 갈까요?
“아니. 넌 어딘데?”
-카페 안에 있다고 말했잖아요. 못 찾겠어요?
조금 더 다가가면서 묻자 정우진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거의 다 왔다니까. 아까 시킨 거 먹고 있어?”
-아니요, 별로 맛이 없어서 그냥 안 먹었어요. 선배 뭐 먹고 싶어요? 배 많이 고프죠? 우리 밥 먹고 뭐 해요?
잘라 먹으라고 준 나이프로 파이를 툭툭 건드리기만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아깐 피곤하다며. 밥만 먹고 그냥 들어가지, 뭐.”
-그래도 나왔으니까 영화 보러 갈래요? 같이 안 간 지 오래됐잖아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저번 주에도 갔잖아.”
-이번 주에는 안 갔잖아요.
목소리는 뚱한데 창 안으로 보이는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이 움직이고 시선이 움직이고 나이프를 들고 파이를 건드리는 별거 없는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우진이 왜 그렇게 날 가만히 보고 있을까 늘 궁금했는데 오늘 새벽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선배 오고 있어요?
“응.”
-어디쯤이에요?
“왜 자꾸 물어봐?”
-보고 싶으니까 그렇죠. 선배는 안 그렇겠지만.
그 와중에도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며 나도 모르게 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니, 말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어깨가 부딪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아, 죄송합니다!”
제법 세게 부딪쳐서 인상을 구기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쁘게 어딜 가고 있었던 건지 숨이 차서 상기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급히 인사를 하고 다시 가려던 여자의 몸이 멈칫한 건 그때였다.
“선배?”
떨어진 핸드폰을 주우려고 허리를 굽히려다가 들리는 소리에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봐도 처음 본 사람인데 아는 척을 해서 물었다.
“누구세요?”
“저 아현이요! 민국 고등학교 3학년 1반 강서주 선배 맞죠?”
고등학교? 아니, 그게 몇 년 전인데……. 당황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별안간 방방 뛰며 좋아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게 몇 년 만이야. 진짜 반갑다. 선배는 어쩜 그렇게 고등학교 때랑 변한 게 없어요? 머리 스타일만 다르고 진짜 똑같다!”
“아…….”
“저는 좀 많이 변했죠? 진짜 오랜만이다. 제가 선배 졸업할 때 고백했잖아요. 그 자리에서 차이긴 했지만. 기억나요?”
상기된 얼굴로 웃으며 말하는 소리에 그제야 퍼뜩 떠올랐다.
“아, 강아현!”
“저 기억하세요? 아, 그때 진짜 선배…….”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쾅 하고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헉 소리를 내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보였다. 다시 한번 주먹 쥔 손으로 창을 세게 내려친 정우진이 탁자가 흔들릴 정도로 급하게 일어나는 게 보였다.
“뭐야? 저 사람 미쳤나 봐……. 선배 아는 사람이에요?”
놀란 아현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면서 이대로 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내 핸드폰을 줍고 있는 아현에게 다급히 말했다.
“내가 다음에 연락할 테니까 일단 가 봐.”
“제 연락처도 모르잖아요.”
난 지금 죽을 것 같은데 아현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지 가방 안에 손을 넣어 더듬더듬 뭔가를 찾고만 있었다.
“일단 가 봐. 다음에…….”
“네?”
“그러니까 일단……. 아, 씨발.”
내 표정이 이상한 걸 눈치챈 아현이 그제야 움직임을 멈추고 되물었다. 빨리 좀 가라고 하려는데 카페 문이 열리면서 정우진이 나오는 게 보였다. 좆됐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 아현에게 더 이상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정우진이 있는 쪽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야! 저 사람…….”
저 사람 그냥 고등학교 때 알던 후배라고 말하려다가 손에 들린 칼을 보고 말문이 막혀 숨을 멈췄다. 조금 전 파이를 건드리고 있던 나이프를 한 손에 꽉 쥐고 날 지나치려는 정우진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너 미쳤어?”
“누구예요?”
“아는…… 아는 후배, 미친……. 이 또라이…….”
너무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칼을 쥐고 있는 손을 잡아 누르며 최대한 몸을 밀착시켰다. 아직도 우릴 보고 있을 아현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불안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정우진이 짐승처럼 반응했다.
“저 씨발……!”
“정우진!”
쌍욕이 튀어나오는 걸 듣고 사색이 돼서 소리쳤다. 내가 아무리 크게 외쳤다고 하지만 이미 욕하는 걸 들었을 확률이 컸다. 목소리가 커지자 주변을 걷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몰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현기증이 나서 눈앞이 핑 돌았다.
“입 닥치고 따라와. 한마디만 더 하면 그 칼로 찔러 버릴 거니까.”
“왜……!”
“너 말고 날 찌른다고, 씨발. 내가 내 배 난도질하는 거 봐야 관둘래?”
“…….”
최대한 작게 이를 악물고 말하자 정우진이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참느라 온몸에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 그녀가 어떤 얼굴로 우릴 보고 있을지 두려워서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우선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정우진이 힘을 빼자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고 안심이 되는 건 아니었다. 이 새끼는 상대가 누구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패악질을 부릴 수 있는 놈이기 때문이다.
“제발 부탁이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따라와.”
“…….”
“하…….”
커다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차마 돌아서서 인사를 하지도 못하고 정우진을 데리고 카페 옆에 있는 작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쓰레기가 가득 쌓여 있는 곳을 지나 더 깊은 곳까지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갔다. 골목의 막다른 곳까지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추고 잡고 있던 손을 놨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정우진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누구예요?”
“아는…….”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요?”
“…….”
“왜 거짓말했어요?”
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질문하는 정우진을 보다가 화를 삭이며 물었다.
“무슨 거짓말?”
“오고 있다 그랬잖아요.”
“아니…….”
“나한테 오고 있다며!”
발작적으로 소리치는 목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손을 들어 눈가를 꾹 누르는 와중에도 원망 가득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무슨 얘기 했어요?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요? 그거 누구예요? 왜 씨발……. 왜 선배한테 선배라고 해요? 내가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누구예요? 누구냐고요!”
“말해 줄 테니까 잠깐만 좀 닥치고 있어 봐. 머리 아파 죽겠으니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선배 죽는다고 협박한 거잖아요. 그 상황에서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나한테 어떻게 죽는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요!”
숨을 몰아쉬면서 소리치던 정우진이 마지막에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로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는 눈을 보며 기가 막혀서 물었다.
“그 상황이 무슨 상황인데? 네가 알아? 걔랑 내가 무슨 얘길 했는지 네가 듣기라도 했어? 내가 걔랑 거기서 뭘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알기나 해?”
“그래서 묻잖아요! 뭔데? 누군데! 씨발, 그거 뭐냐고!”
“학교 후배다, 씨발! 네가 뭘 잘했다고 자꾸 소릴 질러!”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지르자 씩씩거리던 정우진이 잠깐 눈을 감았다. 꽉 깨물고 있던 입술이 터져 피가 나자 감고 있던 눈을 다시 떴다.
“무슨 학교요? 대학교? 선배 대학 다닐 때 저런 여자 본 적 없는데?”
“고등학교 후밴데? 그리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대학 다닐 때…….”
기가 막혀서 말하다가 정우진이 날 스토킹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진짜 존나 골 때리는 새끼, 씨발. 잠깐 입을 다물고 한숨을 쉬자 정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언제 적인데…….”
몸에 잔뜩 힘을 주고 말하던 정우진이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터진 입술이 다시 깨물리자 피가 배어나는 게 보였다.
“언제 적인데 아직…….”
화를 참으려는지 몇 번이나 말을 하다 말고 숨을 골랐다. 으드득 하고 이를 악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아직 기억해요. 그게 씨발, 언제 적인데……. 그 뒤로 다시 만난 적 있어요?”
“없고……. 그냥 가다가 우연히…….”
“우연? 우연히 만났는데 나한테 죽는다고 협박까지 했어요? 그래서 무슨 얘기…….”
그때였다. 뒤에서 나지막하게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린 건.
순간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우진의 양손을 잡는 일이었다.
“선배.”
제발 입 닥치고 있으라는 눈으로 정우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정우진은 날 보지 않고 내 등 뒤의 뭔가를 보고 있었다. 귀신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정우진을 보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경찰에 신고할까요?”
“아니, 괜찮으니까 그냥 가 봐.”
“진짜 괜찮아요?”
“어, 괜찮아. 진짜 괜찮으니까 그냥 가.”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면서 계속 정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사나운 눈으로 똑바로 앞만 보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어, 선배 핸드폰은 여기에 두고 갈게요.”
주저하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크게 숨을 내쉬며 돌아보자 빈 골목과 바닥에 놓여 있는 핸드폰이 보였다.
“너 진짜……. 이 씨발…….”
긴장이 풀리자 다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아까 그 칼은 왜 들고 나와? 그걸로 찌르게? 너 돌았어?”
“왜 웃었어요?”
“뭐?”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잖아요. 무슨 얘기 했어요?”
잡고 있던 손목을 놓자 정우진이 내 손목을 잡았다. 세게 잡혀서 빼내려고 해도 빠지지가 않았다.
“아프니까 손에 힘 빼라, 씨발. 좋게 말할 때 들어.”
“무슨 얘기 했는지부터 말해요.”
“존나 오랜만이다. 존나 변한 게 없네. 그런 얘기밖에 안 했어.”
“근데 왜 웃었어요?”
내가 무슨 얘기를 해도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게 분명했다. 어쩌면 이미 정우진의 머릿속에는 내가 그 사람과 사귀고 있는 사이가 된 걸지도 몰랐다.
“그냥 말하다 보니까……. 팔 아프다고.”
다시 한번 말하자 그제야 힘이 좀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아까처럼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얼굴만 보면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뭐라고 하려는데 정우진이 날 잡은 손을 당겼다. 그러더니 거의 끌고 가다시피 골목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어딜 가?”
“집에 가서 얘기해요.”
“알았으니까 손 좀 놔 봐, 씨발!”
욕을 안 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모르겠다. 언제는 정우진이 내가 뭘 잘못해서 이랬나 싶었지만 이럴 때마다 화가 나는 건 똑같았다.
놓으라고 해도 듣지 않고 결국 골목 밖으로 나왔다. 소리를 지르거나 버티면 시선이 몰릴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정우진이 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카페를 지나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정우진이 차 문을 열더니 그 안으로 날 밀어 넣었다. 의자에 앉자 안전벨트까지 매주더니 문을 닫고 반대쪽으로 가 앉았다.
“어이가 없다, 진짜.”
한숨을 내쉬듯 말했지만 정우진은 말이 없었다. 차가 움직이면서 주차장을 벗어나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말했다.
“차 천천히 몰아라. 신호 지키고. 끽 소리 나거나 급정거하면 오늘 집에 안 들어갈 거니까.”
“누구 마음대로 집엘 안 들어와요?”
“그러니까 차 조심히 운전하라고.”
짜증이 나서 정우진은 보지도 않고 창밖을 보며 말했다. 한숨이 푹푹 나왔다. 잠깐 침묵이 흘렀는데 그사이를 못 참고 정우진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밖에 보지 마요.”
“뭐?”
그 말에 기가 막혀서 어이없다는 얼굴로 정우진을 바라봤다.
“밖에 보지 마세요.”
“난 이제 내 마음대로 어딜 보지도 못하냐?”
“그냥 나 보고 있어요.”
“씨발, 네가 어디가 예뻐서?”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정우진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끼이익 소리를 내면서 차가 멈췄다. 아직 시내를 벗어나는 중이라 도로 한가운데는 아니었지만 주변에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누굴 친 것도 아니었지만, 이곳이 만약 도로 가운데였어도 차를 세웠을 것 같아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열이 받아서 숨을 들이켜고 안전벨트를 풀려고 하자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팔을 잡았다.
“아니, 이제 안 그럴게요. 신호 지키고 천천히 갈 테니까 고개 돌리지 마세요.”
“손 치워.”
“안 그럴게요. 진짜 천천히 갈 테니까 고개 좀 돌리지 말라고요!”
정우진이 소리를 지르면서 핸들 위로 엎어졌다. 온몸을 떨면서 몇 번 격하게 숨을 몰아쉬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흥분을 채 가라앉히지 못한 얼굴로 차분히 말하려고 애썼다.
“고개 돌리지 마세요. 제발요.”
“……알았으니까 가.”
“집에 안 들어갈 거라는 말도 하지 마세요.”
“알았다고.”
내 말에 정우진은 몇 번 더 숨을 내쉬면서 숨을 고르고 차를 서서히 출발시켰다.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정우진을 보고 있기는 싫어서 그냥 앞만 응시했다. 그러다가 가끔 힐끗힐끗 정우진을 바라봤다. 창백하게 질려서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 게 보였다. 입술엔 피딱지까지 굳어서 얼굴만 보면 환자가 따로 없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이나 불규칙한 숨소리, 시간이 지날수록 창백해져 가는 안색이 무색하게 정말 단 한 번의 신호 위반도 없이 무사히 집까지 도착했다. 부드럽게 차를 주차한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자리의 벨트를 풀어 주더니 말했다.
“거기 앉아 있어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는 정우진을 보며 뒤늦게 깨달았다. 쟨 안전벨트도 안 했어? 아니, 씨발. 이렇게 위험한데……. 정우진이 열 받아서 저럴 때마다 제일 먼저 하는 게 벨트는 매는 거다. 아깐 너무 놀라서 그것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사고가 안 나서 다행이지, 씨발.
속으로 욕지거릴 내뱉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쪽으로 와 문을 열어 줬다.
“내려요.”
차 밖으로 나오자 정우진이 내 어깨를 밀었다. 등이 차에 부딪치긴 했지만 세게 민 건 아니라 아프지 않았다.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정우진이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밀어내려다가 떨고 있는 게 느껴져 도로 손을 내렸다.
“그래서 그 사람 누구예요?”
“학교 후배라고 몇 번을 말해. 고등학교 때 알던 후배야. 그 뒤로 만난 적도 없었는데 아까 우연히 만난 거고. 너랑 전화하다가 부딪쳐서 보니까 걔였어.”
“무슨 얘기 했어요?”
“오랜만에 만났다, 뭐 그런……. 진짜 별 얘기 안 했다니까? 너랑 전화하다가 어깨 부딪쳐서 핸드폰을 떨어뜨렸어. 그리고 네가 나 보고 나올 때까지 시간 얼마 안 걸렸잖아.”
한숨을 내쉬며 말하다가 손을 들어 그의 등을 안았다.
“그사이에 무슨 말을 했겠냐고.”
내 손이 등에 닿자 흠칫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욕만 안 했지 잔뜩 날이 서서 사나운 기색이 완연했는데 거짓말처럼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나한테 화냈잖아요.”
“네가 칼을 들고 나오니까 놀라서 그랬지, 씨발.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어디냐고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 주고……. 데리러 가고 싶었는데 가지도 못하게 하고……. 계속 기다렸단 말이에요.”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쯤이 돼서는 그냥 울면서 말하고 있었다.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렸잖아요. 선배가 온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선배는 다른 사람이랑 웃으면서 말하고 있고…….”
어깨가 금세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목소리에 울음이 섞이면서 점점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어 살짝 어깨를 밀어내 얼굴을 봤다. 아니나 다를까, 눈물로 젖어 엉망진창이었다.
“웃으면서 말한 거 맞는데 그거 진짜 한 2초 정도밖에 안 웃었어. 존나 재수 없게 그걸 네가 본 거고. 하필 그때.”
“거짓말 하지 마세요. 그리고 내가 안 봤으면 계속 웃었을 거잖아요.”
“계속 안 웃었다니까.”
“고등학교 후배를 왜 지금까지 기억해요?”
“기억 못 했어. 걔가 먼저 날 알아본 거야.”
“그럼 그 여자는 왜 아직 기억해요?”
그때 문득 걔가 나한테 고백했다는 게 떠올랐다. 갑자기 등 뒤가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앞으로 걜 볼 일도 없고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기억력이 좋나 보지.”
아니, 생각해 보니까 이건 거짓말도 아니었다. 고백을 했든 안 했든 그런 걸 떠나서 정말 그녀의 기억력이 좋아서 날 기억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나한테 온다고 했으면서 거기서 그 여자랑…….”
“아니…….”
서러워 죽겠는지 정우진이 다시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뭐라고 웅얼거리면서 계속 우는데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참 달래듯 등을 도닥이고 쓸어 주다가 우는 소리가 좀 멎자 어깨를 밀어내며 말했다.
“너 아까 칼 들고 나와서 뭐 어쩌려고 그랬어?”
“…….”
“내가 딴 사람이랑 웃으면서 말하면 죽인다, 죽인다 그러더니 그게 진짜였어? 계속 그냥 하는 말인 줄 알고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는데 진짜 너 이 새끼…….”
“안 죽여요.”
“그럼 칼은 왜…….”
“거기 사람도 많았고…….”
“…….”
훌쩍거리면서 덧붙이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자 정우진이 불쌍한 표정을 짓더니 젖은 눈가를 내 목덜미에 비비면서 몸을 붙여 왔다.
“죽는다 그러고 집에 안 들어갈 거라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럼 너도 그딴 짓 좀 하지 마.”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지 마세요.”
“걔가 왜 모르는 사람이야, 학교 후배였다니까.”
“웃지도 마세요.”
뭐라고 말해 봤자 더 이상 말도 안 통할 거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정우진이 다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고개도 돌리지 마세요.”
“…….”
“진짜 죽을 거 같았단 말이에요.”
겨우 그쳤던 눈물이 다시 눈가를 타고 흘렀다. 목덜미며 어깨까지 이미 전부 젖어서 찝찝했지만 밀어내진 않고 다시 등을 도닥여 줬다.
“제발 죽는다는 소리로 협박하지는 마세요. 거기까지 안 가고 그냥 화낼 거라고만 해도 어차피 다 통해요.”
“존나 웃기는 새끼네. 그럼 그 상황에서 너 저 사람 칼로 찌르면 화낸다! 이럴까?”
왠지 내용이 웃겨서 피식 웃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럴 거면 그딴 짓을 하지 마라, 좀.”
“미안해요. 내가 모르는 사람이랑 그러고 있으니까…….”
“제발 부탁이니까 칼을 들기 전에 좀 먼저 나한테 물어봐.”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꿈에서 정신 차리면 선배 목을 조르고 있었어요.”
“뭐?”
갑작스러운 말에 미간을 구기자 정우진이 훌쩍거렸다.
“옆에 있었는데 자꾸 일어나기만 하면 없어지니까.”
좀 멎었던 눈물이 다시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같이 있었단 말이에요.”
“…….”
“같이 있었는데 일어나면 없어지니까 그냥…….”
울먹거리면서 말하던 정우진이 입만 뻐끔거리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눈가를 문지르다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잠이 들어서…….”
“…….”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왔을지도 모르는데.”
“…….”
“너무 잠이 와서, 참았어야 됐는데…….”
우는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진 않았지만 정우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네가 잠들지 않고 계속 기다렸다고 해도 난 안 갔어.”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갈 생각도 없었고.”
“…….”
“그러니까 그때 일 생각하면서 혹시나 하고 생각하지 마. 난 절대 안 갔을 거니까.”
그날 눈이 그렇게 많이 오지 않았더라도 나는 정우진을 만나러 가지 않았을 거다. 정우진이 잠들지 않고 그 자리에서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계속 기다렸다고 해도 가지 않았을 확률이 컸다. 그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원장이 밖에 나가게 해 줬을 리도 없었고, 눈이 많이 와서 사람이 죽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테니까.
“혹시, 설마, 이런 생각 하지 말라고.”
“…….”
훌쩍거리던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다가 그런 꿈꾸면 그냥 날 깨워.”
“알았어요.”
“꿈은 그냥 꿈이니까 이상한 의미 부여하지 말고. 나도 꿈에서는 사람 많이 죽여 봤어.”
“누구요?”
“나 알바 할 때 진상 부리던 사람이나 내 보증금 처먹고 튄 새끼나……. 아무튼 나도 많이 죽였어.”
곰곰이 생각하며 말하다가 벌겋게 변해서 젖어 있는 눈가와 피딱지가 굳어 있는 입술을 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너 그 입술 다 나을 때까지 나한테 들이대지 마.”
“…….”
“화났을 때 네 몸에 상처 나게 하지 말라고 했지. 너 아까 유리창 친 손은 뭐 어떻게 됐는데. 손 내놔 봐.”
내 말에 정우진이 안고 있는 팔에 더 힘을 줬다. 몸을 비틀어 빠져나오려고 할수록 힘은 점점 더 세졌다.
“좀 놔 봐.”
“싫어요.”
등을 때리고 밀어내도 절대 놔주질 않아서 결국 내가 먼저 힘을 뺐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안겨서 한참 말없이 있자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그제야 정우진이 울상을 하고 팔을 풀었다. 양 손목을 잡아 손을 살피자 조금 붉게 부어 있는 게 보였다.
“다 나을 때까지 나 만지지도 마.”
“그냥 죽으라 그래요, 그럴 거면.”
“넌 그렇게 죽는단 소릴 자주 하면서 왜 나한테 죽는단 소리도 못 하게 해?”
“선배가 하면 진짜 같단 말이에요.”
그 말에 착잡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너 같은 모지리를 두고 내가 어떻게 죽냐?”
“그럼 그냥 계속 모지리 할래요.”
정우진이 다시 팔을 뻗어 날 안았다. 어리광을 부리듯 목덜미와 어깨에 얼굴을 비비면서 떨어질 줄 모르는 정우진을 보고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야, 아까는…….”
“우진이라고 부르세요.”
“아니……. 아, 진짜. 그럼 너도 내 이름 불러.”
좀 진지하게 말하려고 하면 꼭 저런다. 내가 한숨을 내쉬자 잠시 머뭇거리던 정우진이 작게 말했다.
“서주야.”
“아니, 씨발……. 이 새끼가 아까부터 서주라 그러네. 내가 네 친구냐?”
“이름 부르라면서요.”
“선배나 형이나 그런 말을 뒤에 붙여야지!”
존나 말이 안 통해, 씨발! 참고 있던 울화통이 터져 고함을 지르자 정우진이 다시 불쌍한 척하면서 안겨 왔다.
* * *
집으로 돌아와 씻고 나온 정우진을 소파에 앉히고 약상자를 꺼냈다. 얼마나 물어뜯어 놨는지 보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졌다.
“입술 부어서 붕어 같아.”
“이상해요?”
“다 나을 때까지 나한테 손도 대지 마, 존나 못생겼으니까.”
질색을 하면서 말하자 정우진이 나라 잃은 백성 같은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독을 하고 면봉에 약을 묻혀 살살 발라 주며 말했다.
“이번엔 그냥 넘어가는데 다음부터 이러면 진짜 화낼 거야.”
“잘못했어요.”
“말하지 말고 그냥 듣기만 해. 약 발라야 하니까.”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누구랑 어디서 무슨 얘기를 하든 네가 제일 먼저 해야 할 건 나한테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물어보는 거야. 아까처럼 칼을 들고 나와서 미친놈처럼 소리 지르는 게 아니라 기다렸다가 나랑 둘이 있을 때 물어봐.”
불만스럽게 일그러진 얼굴에 한숨이 나왔다.
“난 네가 계속 이렇게 칼을 들고 설치거나 네가 모르는 사람이랑 웃으면서 말 좀 했다고…… 하, 씨발. 진짜 그 웃은 건…… 2초도 아니야. 1초였다, 그냥 딱 1초. 아무튼 웃으면서 말했다고 지랄을 떨면 피곤해서 너랑 못 만나.”
“그런 말…….”
“닥치고 들어. 누누이 말했지만 내가 다른 사람이랑 웃으면서 얘기 좀 한다고 그 사람이 좋아질 리도 없고, 상대방도 고작 그런 걸로 날 좋아할 리가 없어.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내가 좋아하는 건 너니까 그 사람이랑 내가 사귈 일도 없고.”
이런 당연한 얘기까지 굳이 해야 하나 싶었지만 상대가 정우진이면 이런 일반적인 상식까지 하나하나 전부 말을 해 줘야만 했다.
“내가 화가 나서 이 집에서 나간다고 해도 결국은 네가 보고 싶어서 다시 올 거고……. 진짜 네가 존나 싫어하니까 아무리 화가 나도 나가진 않겠지만, 만약 아주 만약에 나간다고 해도 다시 올 거라고.”
“…….”
“난 네가 애원하고 울고불고 지랄을 해서 여기에 있는 게 아니야. 너랑 같이 사는 것도, 여기에 있는 것도, 너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전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아까부터 뭐라고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정우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두어 번 눈을 깜박거리자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아까 어디에 있냐고 물어봤을 때 근처라고 말했잖아. 정확히 어디라고 말 안 한 건 밖에서 네가 앉아 있는 거 보고 있어서 그랬던 거야.”
“밖에서 왜 보고 있어요?”
“네가 웃는 게 예쁘니까.”
“…….”
“그래서 그거 보느라 그랬어. 걔랑 얘기한다고 말을 안 했던 게 아니라.”
잠긴 목소리로 묻던 정우진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시 눈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보다가 손을 뻗어 뺨을 닦아 줬다.
“솔직히 네가 날 사랑하는 것만큼 널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는 대답 못 하겠는데,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이 세상에서 널 제일 좋아해.”
“…….”
“내가 아는 사람 다 통틀어서, 그리고 앞으로 알 사람들까지 다 합쳐도 널 제일 사랑해.”
“윽…….”
결국 잇새로 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을 꾹 감고 있어도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다가 뒷목을 당기자 그대로 안겨 왔다. 달래 주듯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젖은 눈가에 입술을 문질렀다.
“칼 들고 설치거나 내 손목 잡고 개처럼 질질 끌고 가는 게,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참았을 거 같냐? 네가 하는 거니까 참고 봐주는 거야. 네가 정우진 아니었으면 넌 벌써 죽었어.”
“미안해요.”
“등신 새끼, 진짜. 같이 산 지 2년이 넘었는데 넌 아직도 내가 이런 걸 일일이 말해 줘야 아냐?”
좀 진지하고 따끔하게 말하려 했는데 이렇게 우는 걸 보니까 모질게 말할 수가 없었다. 정우진이 아까 그 칼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더라도 손에 그런 걸 들고 위협을 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앞으로도 어쩌면 정우진은 계속 그럴지 모른다. 정말 죽이지는 않더라도 위협을 하고 욕을 하고 멋대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는 과정에서 폭력이 사용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런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런 기대조차 버렸다. 정우진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고,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 줘도 믿지 못할 거다. 그건 아주 오래 전부터 쌓여 온 불신이라 고작 1, 2년 가지고는 해결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하루만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 않으면 우울해하고 징징거리고, 한 번이라도 연락이 되지 않으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온다. 아무리 말을 해 줘도 믿지도 않을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별짓을 다 한다. 하루에 수십 번씩 들으면 사랑한다는 말을 조금이라도 믿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자꾸만 보채는 걸까.
“내가 한 번 널 버렸으니까 만약 다음에 또 버려야 될 일이 일어난다면 그땐 네가 날 버려.”
“저는 버리고 싶어도 못 버려요. 해 봤는데 계속 실패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선배를 어떻게 버려요?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죽어도 못 해요, 그런 거.”
“그럼 성공할 때까지 기다릴게. 눈이 와도 비가 와도.”
내 말에 뭐라고 하려던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걸 보다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보고 있는 것처럼 눈앞에 얼굴이 그려졌다.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믿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내가 아니라 정우진 본인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정우진이 바라 마지않는 그날이 올 때까지 몇 번이고 말해 줄 수 있다.
“정우진.”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젖어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정우진이 좀 또라이 같은 면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감수하더라도.
“사랑해.”
나는 네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