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실-Another Universe-3 (23/28)

마른 천에 한 방울씩 물이 떨어져 젖듯 귓가로 낯익은 목소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아빠는 왜 여기서 자?”

“넌 왜 벌써 일어났어?”

“술 마시면 원래 식탁 밑에서 자야 돼?”

“그런 거 아니야. 어서 들어가서 더 자.”

조금씩 정신이 들기 시작하자 가랑비에 몸이 젖는 것처럼 온몸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좋지 않아서 신음을 내자 이마 위로 차가운 손이 닿았다.

“괜찮아요?”

“아빠, 나 젤리 먹으면 안 돼?”

“우영아, 지금 새벽 네 시야. 넌 거기 왜 누워?”

“나 젤리 먹고 싶어.”

자그마한 손이 내 어깨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덩달아 머리까지 흔들려 인상을 찌푸리자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젤리는 아침부터 먹고 먹어. 이리 와.”

“아침 지금 먹어?”

“지금 새벽 네 시라니까.”

“새벽 네 시에는 아침 먹으면 안 돼? 왜?”

분명 정우진이 새벽 네 시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강우영의 목소리는 오후 네 시의 그것처럼 지나치게 쌩쌩했다.

“너 잠 안 와?”

“아빠는 왜 식탁 밑에서 자?”

강우영과 정우진은 서로 자기가 궁금한 것만 말하고 있었다. 왠지 더 듣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 마시러 나왔다가 착각했나 봐.”

“식탁이랑 침대를?”

“일단 나와. 아빠 계속 거기서 자면 바닥 딱딱해서 허리 아프잖아.”

“우리 오늘은 셋이서 식탁 밑에서 자면 안 돼?”

우영아, 제발 말을 좀 들어……. 나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손을 더듬거리며 강우영을 찾았다. 그때 내 손을 잡은 건 정우진이었다.

“선배, 왜 여기서 자요?”

“아빠도 젤리 먹고 싶나 봐.”

“아빠는 젤리 안 좋아해.”

“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단호한 말에 씩씩하던 목소리가 조금 흐려졌다.

“너 어제도 아침 먹기 전에 젤리 달라 그래서 줬더니 밥 안 먹었잖아.”

“오늘은 먹으면 되지…….”

“어제도 꼭 먹는다고 해 놓고 안 먹었지?”

“오늘은 꼭 먹을게.”

이러고 다시 잘 수도 없고, 더 이상 모른 채 할 수가 없어서 천천히 눈을 뜨자 정우진이 내 뒷목을 받치며 말했다.

“왜 나와서 자고 있어요?”

“…….”

그 말에 뭐라고 하려다가 다시 머리가 지끈거려서 눈을 감았다. 내가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우진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식탁 밑에서 기어 나와 실눈을 뜨자 강우영이 울상을 짓고 날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우영아,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이름을 부르는데 몸이 들렸다. 정우진에게 안겨 침대에 눕혀질 때까지도 강우영은 우리 뒤를 졸졸 따라왔다. 푹신한 침대에 눕자마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잊은 채 빠르게 잠이 오기 시작했다.

“아빠가 나한테 젤리 주라고 했어.”

“언제?”

“아까 입 모양으로 그랬어.”

“진짜야? 거짓말 아니고?”

“사실 거짓말이야……. 근데 아빠도 나한테 젤리 주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을 거야.”

그냥 쟤 좀 젤리 먹이고 다시 재우면 안 되나. 지금 새벽 네 시라며…….

점점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으로 정우진이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하는 건지 잘 들리지가 않아서 곰곰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생각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내가 잠에서 깬 건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몸을 뒤척이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5시 56분.

“…….”

지금이 오후일 리는 없을 텐데.

눈을 깜빡거리며 시계만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서 말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결국 강우영은 그 뒤로 잠들지 않은 듯했다. 이른 새벽에 깨서 잠투정을 하거나 시끄럽게 하는 건 늘 있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점점 시간이 빨라진다는 것이었다.

애들은 원래 이렇게 잠이 없나. 아니, 그래도 새벽 네 시는 좀 심하잖아…….

침대 위에서 꿈틀거리다가 다시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눈을 뜬 건 1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래 봤자 이제 아침 7시였지만 더 이상 속이 쓰려서 잘 수가 없었다.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 발을 질질 끌며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거실 바닥에 냄비 두 개와 국자 하나가 널브러져 있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잠결에 깡깡깡 소리 같은 걸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냄비와 국자를 주워 주방으로 가자 뭔가를 만들고 있는 정우진이 보였다.

여전히 잠옷을 입은 채 가스레인지 앞에서 뭔가를 하다가 몸을 돌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눈을 반만 뜨고 있는 게 그 뒤로 한숨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뭘 찾다가 다시 가스레인지 앞으로 가는데 문득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자 강우영이 정우진 다리에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양손으로 정우진의 다리를 꽉 끌어안고 발등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는 모습이 꼭 엄마 등에 매달려 있는 아기 원숭이 같았다.

“히이잉…….”

오른쪽 뺨을 다리에 붙이고 있던 강우영이 고개를 돌려 왼쪽 뺨을 다시 다리에 꽉 붙이며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정우진은 그런 소리에 아랑곳 않고 다리에 강우영을 붙인 채 요리를 하다가 말했다.

“아침 먹으면 줄게.”

“이이이잉.”

“젤리부터 먹으면 너 밥 안 먹어서 안 돼.”

“으이이잉.”

이상한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정우진이 날 보며 웃었다.

“일어났어요?”

정우진은 다리에 강우영을 매달고 내게 다가와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속은 괜찮아요?”

“흐잉.”

“어……. 얜 왜 이러고 있어?”

“힝.”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강우영은 마치 시위하듯 칭얼거렸다. 이쯤 되니 거의 추임새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손을 뻗어 안아 올리려고 했지만 작은 게 어찌나 팔 힘이 센지 다리를 꽉 안고 떨어지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곁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왜 그래? 아빠한테 혼났어?”

“젤리…….”

“뭐?”

“젤리…….”

웅얼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아직까지 젤리 소리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냥 마음 같아서는 밥 먹기 전에 하나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아침 먹이는 동안 전쟁이 일어날 게 분명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설마 새벽 네 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거야?”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까까지는 괜찮았어요.”

“그럼 밥하니까 또 이러는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매달려 있는 것도 아기 원숭이 같아서 귀엽기는 했지만 계속 이렇게 둘 수는 없었다.

“아빠랑 씻으러 가게 손에 힘 풀어.”

“밥 다 했어요. 제가 씻길게요.”

정우진이 다리에 강우영을 매달고 욕실로 가려고 하는 걸 얼른 막았다.

“아니야, 내가 할게.”

“아빠, 나 씻기 싫어.”

해도 뜨지 않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나랑 강우영 뒤치다꺼리에 아침까지 만드느라 힘들었을 정우진에게 애까지 씻기라고 할 수는 없었다.

“세수랑 양치질만 시키고 올게.”

“나 세수하기 싫어.”

“아, 선배. 칫솔 새 거 뜯어야 돼요.”

“어디에 있어? 안방 욕실에 있나?”

“공동욕실이요. 왼쪽 수납장에.”

“세수 싫어…….”

잔뜩 힘을 주고 버티던 강우영을 안아 들자 지렁이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안고 거실을 지나 욕실로 가며 말했다.

“양치질하고 세수만 하자.”

“어제 했잖아.”

“그건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지.”

“내일도 또 해야 하잖아.”

칭얼거리다 못해 이젠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안 씻길 수는 없었다. 그냥 가능한 한 빨리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최선이었다.

욕실에 도착해서 안고 있던 아이를 세면대 위에 앉히자 다시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수납장에서 새 칫솔을 꺼내 뜯었다.

“나 씻는 거 싫어…….”

“아빠가 해 줄게. 아 해 봐.”

새끼손톱만 한 칫솔에 치약을 조금 짜면서 말하자 강우영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양치질 안 하면 치과 가야 돼.”

“…….”

“이건 아픈 거 아니야. 아빠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강우영이 씻기 싫어하는 건 얼마 전에 세수를 하다가 눈에 거품이 들어가서였다. 그게 많이 아팠는지 아예 씻는 거 자체를 싫어해서 요 며칠 씻을 때마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얼른 아 해 봐. 빨리 양치질하고 밥 먹고 젤리 먹자.”

“음음으므음.”

입을 꾹 다문 채 뭐라고 웅얼거리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꾹 다문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드리다가 가만히 기다려도 요지부동이라 결국 들고 있던 칫솔을 옆에 내려 두고 세면대에 물을 틀었다.

미지근한 물을 손에 묻혀서 작은 얼굴을 쓸자 꾹 다물린 입술이 벌어지면서 우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으아앙.”

“다섯 번만 더 하자.”

“우아아앙!”

“세 번 남았어.”

“읍, 흑……. 우엥…….”

우는 소리만 내는 게 아니라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걸 보니 귀엽기도 했지만 좀 황당하기도 했다. 비누칠은 하지도 않았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우는 건지 모르겠다.

씻기 싫어서 우느라 쩍 벌어져 있는 입 안에 조금 전 옆에 놔뒀던 칫솔을 얼른 집어넣었다.

“우앙!”

“다했어, 다했어.”

“우에엥!”

“다했다. 진짜 다했어. 이제 끝났어.”

움직이지 못하게 턱을 잡고 어르고 달래 가며 빠르고 꼼꼼하게 칫솔질을 했다. 양치질을 다 끝내고 작은 컵에 물을 받아 건네며 말했다.

“이제 다했어. 우물우물해.”

“으아앙! 우물우물, 퉤. 우앙!”

“세 번 더 해.”

“흑……. 우물우물우물……. 흐엉……. 퉤. 우물우물…….”

“한 번 더.”

울면서 입을 헹구는 걸 가만히 보다가 횟수를 다 채우고 건네주는 컵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손을 씻기고 강우영을 안아 주자 젖은 손으로 내 목을 끌어안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비누칠은 안 했잖아.”

“흑…….”

“양치질하고 세수하는 거 아팠어? 안 아팠지?”

“나 착하게 했으니까 젤리 줘…….”

하기 싫어서 울고불고한 게 불과 몇 초 전인데 자기 입으로 착하게 했다는 소리가 나오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 내어 웃자 강우영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아직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얼굴을 보며 아차 싶어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고 다시 물었다.

“이제 거품 들어가도 눈 안 따가운 걸로 바꿨으니까 세수하다가 아플 일은 없어.”

“숨 참는 것도 싫어.”

“입으로 쉬면 되지.”

작은 손과 얼굴을 다 닦아 주자 강우영이 다시 내 목을 끌어안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번 해 볼래?”

“아니.”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우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안 아프다니까? 아빠가 눈에 거품 안 들어가게 잘 씻겨 줄게.”

“흑…….”

“알았어. 하지 마, 하지 마. 안 시킬게. 거품 하지 마.”

다급히 말하며 욕실을 나오자 그제야 우는 소리가 멈췄다. 나는 천천히 주방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근데 너 오늘 왜 그렇게 일찍 일어났어?”

“꿈에 젤리 나왔어.”

거의 모든 대화의 끝이 젤리로 귀결되고 있었다. 내가 황당해서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사이에도 강우영은 계속 젤리에 대해 말했다.

“젤리가 계속 나와서 잘 자지도 못하고 그래서……. 젤리를 먹어야 한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 젤리를 달라는 뜻인 건 알 수 있었다.

주방에 도착하자 어느새 정우진이 아침을 차려 놨다. 정갈하게 차려진 식탁 위의 음식을 잠깐 보다가 강우영을 어린이용 식탁 의자에 앉혔다. 그러자 뒤늦게 내가 못 씻었다는 걸 깨닫고 정우진을 보며 말했다.

“나 좀 씻고 올 테니까 먼저 먹고 있어.”

“선배, 속은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분명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머리에 속에 안 아픈 곳이 없었는데 정신이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깨닫자마자 다시 속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콩나물 계란 국 끓이긴 했는데, 뭐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니, 그냥 그거면 돼.”

“빨리 씻고 와요.”

“아빠, 젤리 먹고 싶어.”

의자에 앉아 있던 강우영이 그사이를 못 참고 또 젤리 소리를 했다. 이젠 그냥 젤리 하나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미 정우진이 밥을 먹어야 준다고 말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줄 수가 없었다.

또 젤리 소리 하기 전에 얼른 욕실로 가 빠르게 씻었다. 뜨거운 물을 받아서 목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일단 쓰린 속을 달래는 게 우선이라 세수와 양치질만 했다.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고 주방으로 가자 젤리젤리 거리던 강우영이 정우진에게 안겨 아기 새처럼 주는 걸 받아먹고 있었다. 아깐 그렇게 밥 안 먹고 젤리 먹을 거라더니. 황당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다가 옆에 앉자 강우영이 말했다.

“나 김치.”

그 말에 정우진이 작은 숟가락에 잘게 자른 백김치를 얹었다. 그러자 강우영이 손을 뻗어 정우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거 말고.”

“빨간 건 매워서 안 돼.”

이번에 말한 건 나였다. 강우영은 아직 매운 걸 먹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빨간 김치를 먹으면 분명 맵다고 울 게 틀림없었다.

“아빠는 먹잖아.”

“아빠는 어른이잖아.”

“나도 빨간 거 줘.”

“너 그거 먹으면 울어.”

또 보채기 시작해서 대충 말하고 숟가락을 들어 정갈하게 담긴 국을 한 입 먹었다. 따뜻하고 담백한 국물이 목구멍을 지나 위를 감싸는 느낌이 생생하게 났다. 맛있다고 말하려는데 정우진이 붉은 배추김치를 작게 자르고 있는 게 보였다.

“그거 주려고? 매워서 안 돼.”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말하자 정우진이 고춧가루가 묻은 김치를 강우영에게 먹이며 말했다.

“먹어 봐야 얼마나 매운지 알죠.”

“뭐?”

“윽!”

아니나 다를까 덥석 김치를 받아먹은 강우영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컵에 물을 따르고 있는데 강우영이 입에 있던 김치를 제 손에 뱉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정우진이 물었다.

“하얀 거 먹을래, 빨간 거 먹을래?”

“하, 하얀 거…….”

처음 매운 걸 먹어 봐서 그런지 많이 당황한 눈치였다. 나는 티슈로 손바닥 위에 씹지도 못하고 뱉은 김치를 닦아 주고 컵을 건넸다.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 걸 보다가 물었다.

“거봐. 맵다고 했잖아.”

“아빠는 먹었잖아…….”

“난 어른이니까 그렇지.”

“어른은 매운 걸 못 느껴?”

그런 건 아닌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못 느끼는 건 아닌데 참을 수 있는 거지.”

“그럼 나도 참을 수 있으면 어른이야?”

그 말에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우영아, 빨간 김치 먹어서 어른이 되려고 하지 말고 먼저 혼자 밥을 먹어 봐.”

“풉.”

어딘지 모르게 피곤해 보이는 목소리에 내가 입을 가리고 웃자 강우영이 볼을 부풀렸다. 그러고 보니 어린이용 의자에 앉혀서 수저도 따로 주는데 나중에 정신 차리고 보면 항상 무릎 위에 앉혀서 떠먹여 주고 있었다.

“너도 이제 다섯 살인데 밥은 혼자 먹어야지.”

정우진이 잡곡밥 위에 멸치 볶음을 올리며 말했다.

“혼자 먹을 수 있어.”

“그럼 왜 자꾸 먹여 달라고 해?”

“그건……. 아빠가 주면 더 맛있으니까 그렇지.”

강우영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말하다가 숟가락을 입에 대 주자 크게 입을 벌려 밥을 받아먹었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쟨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렇게 귀엽지?

“누구 손으로 먹든 맛은 똑같아.”

“아니야, 아빠가 주는 게 더 맛있어.”

“그럼 이번엔 네가 한 번 먹어 보고 다시 비교를 해 봐.”

“나 이제 배불러…….”

숟가락을 건네자 강우영이 완전히 몸을 돌려 정우진의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세 숟가락 먹고 뭐가 배가 불러?”

“배 꽉 찼어.”

“그럼 세 번만 더 먹어.”

“나 진짜 배불러.”

강우영은 거의 목을 졸라 죽일 것 같은 기세로 팔에 힘을 주고 고개를 흔들었다.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는 걸 보다가 내가 먼저 말했다.

“아빠가 먹여 준대.”

내 말에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강우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그러더니 힐끗 시선을 올려 정우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저거 줘…….”

강우영이 살짝 몸을 틀어 접시 위에 담긴 갈치구이를 가리켰다. 접시를 가져와 가시를 바르려고 하자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할 테니까 어서 드세요. 속 안 좋다면서요.”

“이제 괜찮아졌어.”

내 말에도 정우진은 기어코 접시를 가져가 한 손으로는 강우영을 안고 한 손으로는 젓가락을 쥐고 능숙하게 가시를 발랐다. 그러는 사이 김에 밥을 싸서 강우영에게 먹이며 말했다.

“우영아, 밥은 여섯 살부터 혼자 먹어도 돼.”

“진짜?”

“그래. 일곱 살 때까지 혼자 못 먹어도 뭐라고 안 할게.”

“선배.”

깔끔하게 갈치의 흰 살과 가시를 발라낸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날 불렀다.

“난 그럼 계속 일곱 살 할래.”

“그래, 좋아. 계속 일곱 살 하자.”

꺄르르 웃는 게 너무 귀여워서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우진과 강우영을 둘 다 끌어안았다. 둘 사이에 껴서 답답할 만도 한데 고사리처럼 작은 손으로 내 옷깃을 잡았다.

“선배, 일단 밥부터 먹어요.”

“오구오구, 내 새끼.”

“선배…….”

“그래, 너도 예뻐.”

손을 들어 정우진의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며 말하자 정우진이 조용해졌다. 아침 먹다 말고 가족 간의 포옹 시간을 가진 우리는 잠깐 그러고 있다가 다시 밥을 먹었다.

정우진은 생선 가시를 바르고 나는 밥을 떠먹여 주면서 일단 애부터 다 먹이고 바닥에 내려 줬다. 그리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젤리를 꺼내 손에 쥐여 주자 잠깐의 평화가 찾아왔다.

“네 시부터 지금까지 계속 깨 있었던 거야?”

조금 식은 국을 먹으며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자기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늦게 들어와서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아니에요. 선배 들어올 땐 자고 있었어요.”

그 말에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집에 들어온 건 열두 시 전이었다.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로 처음 가진 술자리였기 때문에 술이 과했던 건 사실이지만 나는 분명 열두 시가 지나기 전에 집 현관문을 열었다.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건 확실했다.

근데 왜 내가 네 시에 식탁 밑에서 자고 있었지? 정우진이 내 옷을 벗긴 뒤 씻기고 침대에 눕혀 줬던 것까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내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자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정우진이 말했다.

“자다가 목말라서 깼나 봐요. 선배 술 마시고 난 뒤에 물 엄청 마시잖아요. 방에 물 갖다 두는 걸 깜빡했더니…….”

“……야, 근데 나 식탁 밑에서 자는 거 우영이도 다 봤어?”

“…….”

내 말에 정우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밥을 먹었다. 그 침묵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 혹시 주정 부리진 않았지?”

참담한 내 목소리에 정우진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입을 열었다.

“그냥 잠만 잤어요.”

“미쳤네, 진짜…….”

뒤늦게 생각해 보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취해서 들어온 것도 모자라 식탁 밑에서 자는 걸 애한테 들키기까지 하다니…….

“이제 정말 술 끊어야겠다.”

“…….”

“뭐. 왜 그렇게 쳐다봐.”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아예 끊지는 못할 것 같아서 지레 찔려 투덜거리자 정우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인상을 찌푸리고 정우진을 보다가 다시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몇 년 동안 한 모금도 안 마시다가 어제 처음 먹은 거잖아.”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그래요?”

“네 눈빛이 이상하잖아.”

“눈빛이 왜요? 그냥 선배 사랑한다는 눈빛인데.”

웃는 얼굴을 보며 뭐라고 하려는데 거실을 뛰어다니며 젤리를 먹던 강우영이 다가와 말했다.

“하나 더 먹으면 안 돼?”

간절한 목소리에 나는 젤리 껍질을 받으며 말했다.

“하루에 하나씩만 먹기로 약속했잖아.”

“힝…….”

“내일 또 먹자.”

“오늘만 먹으면 안 돼? 네? 제발요.”

강우영이 내 다리에 매달려서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걸 보니 마음이 약해졌지만 이미 한 약속이 있는데 번복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안 된다고 다시 한번 말하려는데 강우영이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발요, 선배.”

“뭐?”

“선배. 젤리 주세요. 제발요.”

“…….”

나는 황당한 얼굴로 강우영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쳐다봤다. 황당한 건 정우진도 마찬가지인지 표정이 가관이었다. 나는 다리에 매달려서 선배선배 거리고 있는 강우영을 안아 무릎에 앉히고 말했다.

“우영아, 난 선배가 아니라 네 아빠야.”

“아빠는 작은 아빠가 이렇게 말하면 뭐든 다 들어주잖아. 그러니까 내 말도 들어주면 안 돼?”

강우영은 우리 둘을 구분하지 않고 아빠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구분해야 할 일이 생기면 정우진을 작은 아빠라고 부르고는 했었다.

간절한 눈빛으로 날 보며 선배라고 하는 아들을 보며 말문이 막혀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했다.

“뭐든 다 들어주는 건 아니야.”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하자 옆에서 정우진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강우영을 안아 제 무릎에 앉히며 말했다.

“우영아, 아빠 용돈이 한 달에 5만 원밖에 안 돼서 젤리는 30개밖에 못 사.”

“그게 왜?”

“그러니까 하루에 하나씩밖에 못 먹어. 한 달은 30일이니까. 만약 네가 오늘 두 개를 먹으면 내일은 하나도 못 먹는데 그래도 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던 강우영이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두 개를 먹고 내일 하나도 못 먹을 것인가, 그냥 참았다가 내일도 하나를 먹을 것인가 한참 고민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그럼 내일은 먹을 수 있는 거지?”

“밥 먹고 난 뒤에.”

“알았어, 그럼 내일 먹을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 손을 뻗어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다가 혹시나 하고 물었다.

“근데 너 아빠 이름은 알지?”

“알아.”

“뭔데?”

내 물음에 강우영이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그걸 보니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얘도 이름 못 부르는 병에 걸린 건가 싶어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작은 입이 열렸다.

“박서주.”

“걘 누구야?”

설마설마하던 일이 일어나 눈을 크게 뜨고 묻자 강우영이 까르륵 웃기 시작했다.

“이서주.”

“이서주?”

“김서주!”

“뭐?”

일부러 이름을 잘못 말하고 있는 건 하나도 웃기지 않았지만 해맑게 웃고 있는 강우영의 얼굴이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저절로 웃음이 났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던 강우영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장난이야. 사실 아빠 이름 알아.”

“뭔데?”

“강서주!”

“작은 아빠 이름은?”

“박우진! 꺄하하하!”

박우진이 대체 뭐가 웃길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모르겠지만 그냥 강우영이 귀여워서 나도 또 따라 웃었다.

“작은 아빠 이름도 알아. 정우진.”

한참 웃던 강우영이 너무 웃느라 숨이 찼는지 헐떡이며 고개를 들어 정우진을 쳐다봤다. 둘이 눈이 마주치자 강우영이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래, 잘 아네. 아빠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아니야. 알겠지?”

내 말에 강우영은 웃느라 대답도 못했다.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터져서 한참 웃던 강우영이 정우진의 무릎에서 내려와 주방을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나는 정우진을 보며 말했다.

“야, 네가 자꾸 선배라고 하니까 애도 따라 하잖아.”

“이제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안 하겠죠.”

“도대체 언제까지 선배라고 할래?”

“그냥 계속 부르다 보니까 입에 붙어서…….”

주절주절 변명을 하는 걸 가만히 듣다가 이참에 정말 이 도돌이표 문제를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단호히 말했다.

“차라리 형이라고 해.”

“그러다가 우영이가 선배한테 형이라고 하면요?”

“뭐?”

“어차피 뭐라고 부르든 따라 부르려고 하면 따라 부를 텐데 선배나 형이나 그게 그거 아니에요? 그렇다고 제가 선배한테 아빠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이 새끼는 꼭 이럴 때만 입이 터진 것처럼 말을 잘했다. 항상 이런 식으로 어영부영 넘어가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뭐가 됐든 꼭 이 호칭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다짐하는데 가만히 날 보던 정우진이 말했다.

“그럼 당신이라고 할까요?”

“뭐? 씨……. 싫어.”

갑자기 소름이 돋아서 욕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질색하며 말하자 정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보는요?”

“죽을래? 미친 소리 좀 하지 마.”

“그럼 저도 싫어요.”

팔뚝을 문지르고 있는데 정우진이 뚱한 얼굴로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야, 넌 나한테 여보 당신 소리는 하면서 형 소린 왜 못 하냐?”

“못 하는 게 아니라……. 아니, 선배는 옛날부터 왜 그렇게 그 소리에 집착해요? 그럼 그냥 이름으로만 부를래요.”

“내가 네 친구니?”

황당해서 묻자 정우진이 젤리 못 먹은 강우영처럼 입술을 삐죽거렸다. 인상을 찌푸리고 그걸 보다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해.”

“네?”

“서주라고 하라고.”

“…….”

자기가 그렇게 한다고 해 놓고 막상 부르라고 하니까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정우진은 내가 이름으로만 부르지 못하게 한다는 걸 알고서 한 말이었을 거다.

“해 봐.”

“…….”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까 강우영이 양치질하기 싫다고 입을 다물고 고개를 흔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강우영은 다섯 살밖에 안 된 진짜 어린애니까 그렇다 쳐도 정우진은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그럼 선배는 저한테 여보라고 해 주세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데 정우진이 이상한 헛소리를 했다.

“내가 왜?”

“선배 말대로 우리 사이에 호칭 정리를 할 필요가 있어 보이니까 서로 원하는 대로 불러 주기로 해요.”

이상한 논리에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만약 여기서 내가 싫다고 하면 지금껏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또 어영부영 결론도 없이 대화가 끝날 게 분명했다. 정우진은 당연히 내가 못 부를 거라고 생각하고 던진 말이겠지만 그까짓 여보 소리 못할 것도 없었다.

“…….”

“…….”

짧은 단어 하나 말한다고 입술이 문드러지는 것도 아니고.

“…….”

“…….”

그냥 한 번 말하고 치워 버리려고 했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정말, 진짜로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이제야 내 기분을 알겠냐는 듯 정우진의 표정이 의기양양해지기 시작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선배, 전 선배가 절 뭐라고 불러 주든 다 좋아요.”

여기서 내가 더 뭐라고 하면 정우진은 자길 뭐라고 불러 주든 다 좋다고 하는데 나는 뭐는 되고 뭐는 안 된다는 것처럼 보일까 봐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게 황당하기도 했지만 도대체 그놈의 형 소리가 뭐 그렇게 힘들다고 이러는지 점점 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너 진짜 성격이 너무…….”

“이상해요?”

“이상한 건 아니고 특이하네.”

그래, 형 소리 못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 그냥 특이한 거겠지…….

늘 그랬던 것처럼 또 될 대로 되라, 포기한 채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아, 하고 말했다.

“그래도 우진이라고 불러 주는 게 제일 좋아요.”

이거 봐, 내가 여보 소리 못할 줄 알고 그랬던 게 맞다니까. 내가 황당해서 웃자 정우진도 날 따라 웃었다.

* * *

아침을 다 먹고 식탁을 정리하고 정우진과 함께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거실에서 쿵쾅쿵쾅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강우영이 이불을 질질 끌면서 온 집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불을 밟아 걸려 넘어져도 벌떡 일어나서 헐떡거리며 다시 뛰었다.

“강우영, 너 이불은 어디서 가져왔어?”

“침대!”

“뭐?”

“침대애애애!”

결국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고 주방을 나오자 그사이 거실이 엉망진창이 돼 있었다. 분명 아까 치웠는데 또 언제 가지고 나온 건지 냄비와 국자가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소파 밑에 널브러져 있는 베개와 이불을 멍하게 보다가 내 옆을 후다닥 지나치는 강우영을 붙잡았다.

“밥 먹고 바로 뛰면 어떡해?”

“헉, 헉…….”

“거봐, 숨차지? 옆구리는 안 아파?”

내가 한숨을 내쉬며 묻자 숨을 몰아쉬던 강우영이 쥐고 있던 이불을 놓고 자기 옆구리를 더듬더듬 만졌다. 그러더니 울상을 짓고 날 올려다봤다.

“아파.”

얼굴은 붉게 상기돼 있었고 하얀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손을 뻗어 안아 올리자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고 있는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왜 이렇게 이불을 질질 끌고 다녔는지 알아서 얼른 소파에 앉히고 목에 수건을 묶어 줬다.

그러자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수건을 만지작거리더니 소파에서 뛰어내려 다시 전속력으로 거실을 뛰었다.

“피유우웅!”

“강우영! 뛰지 말라니까?”

“슈우우웅!”

목에 수건을 묶어 주자마자 강우영은 이불엔 관심을 잃었다.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닌 이불을 세탁기 안에 넣고 나오는데 강우영이 슈퍼맨처럼 팔을 뻗고 내 앞을 쌩 지나쳤다.

“부아아앙!”

“…….”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방으로 가 정우진에게 말했다.

“쟤 안 되겠다.”

차라리 마당에 풀어놓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데리고 나가려는데 식탁을 닦고 있던 정우진이 날 보며 말했다.

“오늘 접종 맞으러 가야 돼요.”

“오늘이야?”

“데리고 빨리 갔다 올 테니까 선배는 좀 더 쉬어요. 얼마 자지도 못했잖아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주방을 훑었다. 식탁 위도 싱크대도, 모든 게 다 완벽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물기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은 주방을 보다가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데리고 갔다 올 테니까 좀 쉬어. 너 새벽부터 지금까지 계속 깨 있었잖아.”

내 말을 듣던 정우진이 설마 하는 눈으로 내게 말했다.

“혼자 갔다 온다고요?”

“차 타고 주사 맞히고 바로 올 거니까 낮잠이라도 자고 있어.”

“무슨 소리예요? 무슨 차요?”

못 들을 걸 듣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애가 생기고 나이를 먹으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기도 했었는데 이런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내 차.”

“그럼 제가 운전만 해 줄게요.”

“그럴 거면 차라리 같이 가지, 뭐 하러 운전만 해?”

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하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러네요. 그럼 같이 가요.”

“그러자고 한 말 아니거든?”

“선배 혼자 어떻게 가요?”

다시 도돌이표가 된 질문에 씨발 소리가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최대한 욕은 하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을 했기 때문에 대신 눈빛으로 개쌍욕을 했다. 정우진은 내가 눈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미간을 구겼다.

“갔다 와서 쉴게요.”

“저렇게 뛰어다니는데 어떻게 쉬어?”

“어제도 나만 두고 나갔으면서…….

정우진의 손을 잡고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는 거실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내일은 너 두고 안 나갈게.”

“선배. 진짜 혼자 갔다 올 거예요?”

“갔다가 금방 온다니까?”

“당연히 금방 오기야 하겠죠.”

정우진을 억지로 눕히고 새 이불을 꺼내 그 위에 덮어 줬다. 새하얗고 푹신푹신한 이불에 푹 파묻혀 얼굴만 내밀고 있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뭐라고 하려는데 밖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밖으로 뛰어나가자 넘어진 건지 엎어져 있던 강우영이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거실 바닥에서 굴러다니던 냄비에 발이 걸려 넘어진 것 같았다.

“안 다쳤어?”

“슈아아아앙!”

“하…….”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선 강우영은 일어서자마자 다시 요상한 소리를 내면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일어난 정우진이 내 뒤에 서 있었다. 빨리 애를 데리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널브러져 있는 냄비와 국자를 대충 치우고 다시 정우진을 침대에 눕혔다.

“자, 빨리.”

“…….”

입이 댓 발은 나와서 불만스럽게 날 올려다보는 눈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자라는 듯 눈가 위에 손을 덮자 정우진이 말했다.

“병원 도착하면 문자 보내요.”

“싫어. 그냥 자.”

“왜요?”

알겠다고 하면 분명 내 문자가 올 때까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자장자장.”

“왜 싫어요?”

“잘 자라, 우리 아가.”

“네?”

처음에는 잘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지만 그것도 처음뿐이었다. 점점 말수가 줄어들더니 결국 입을 다문 정우진이 얌전히 몸에 힘을 뺐다. 반대쪽 손으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살짝살짝 만져 주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강우영이 빼꼼 얼굴을 내밀고 우리를 보고 있었다. 쉿 하고 손을 들자마자 정우진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와요.”

그 말에 눈가를 덮고 있던 손을 떼자 정우진이 반쯤 감긴 눈으로 날 보며 다시 말했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알았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잠깐 날 보다가 눈을 감았다. 몸을 숙여 감긴 눈꺼풀 위에 입술을 맞추고 강우영을 안아 정우진의 얼굴 쪽에 대고 말했다.

“아빠한테 잘 다녀오겠습니다, 해.”

“잘 다녀오겠습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눈꺼풀 위에 작은 입술을 꾹 누른 강우영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자 정우진이 눈을 뜨고 마치 임무를 주듯 말했다.

“주사만 맞고 집에 바로 와. 알겠지?”

“응, 알았어.”

“차 타면 아빠 말 잘 들어야 되는 거 알지? 움직이지 말고 얌전히 앉아서 가는 거야.”

“알아. 저번에 나 아기였을 때 아빠가 알려 줬잖아.”

아기 입에서 아기 소리가 나오는 게 웃겨서 피식 웃자 강우영이 정우진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정우진이 손을 뻗어 그런 강우영의 작은 등을 마주 안는 걸 보다가 나도 그 위에 엎어져 둘을 같이 끌어안았다.

* * *

정우진을 집에 남겨 두고 병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뒷좌석 어린이용 카시트에 아이를 앉히고 안전벨트까지 꼼꼼히 해 주고 차를 출발시켰다.

강우영은 차에 타면 대체로 얌전하기는 했지만 혹시나 싶어 룸미러로 슬쩍 보자 다행히 크게 움직이지는 않고 자기 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주사 맞는 거 안 무서워?”

슝슝 피융 같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의성어를 남발하던 강우영이 내 질문에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는 주사가 무서워?”

난 어릴 때 엄청 무서워했던 거 같은데. 혼자 밥도 못 먹어서 먹여 달라고 하는 애가 주사는 또 무서워하지 않고 잘 맞는 게 신기했다. 아니, 밥도 혼자 못 먹어서 먹여 달라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아빠는 아기였을 때 주사 무서워했어?”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강우영이 다시 물었다. 때마침 신호에 걸려 룸미러로 뒷좌석을 보며 말했다.

“아빠도 안 무서워했어.”

“진짜?”

“당연하지.”

“작은 아빠는?”

정우진은 무서워하지 않았을까? 어릴 때 개구리가 무서워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빽빽 울었던 게 떠오르자 웃음이 났다.

“작은 아빠는 무서워했을걸?”

“그럼 난 아빠 닮은 거네?”

“너 진짜 안 무서워? 주사 안 아파?”

사실 난 어렸을 때 주사 맞는 걸 엄청 싫어했다. 주사만 싫었던 게 아니라 그냥 병원 자체를 싫어했다. 병원 가기 싫어서 아픈데도 안 아프다고 거짓말을 친 적도 많았다.

“아프지.”

강우영이 다리를 흔들면서 뭐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말했다. 차가 움직이자 강우영이 덧붙였다.

“아프긴 한데 그럭저럭 참을 만해.”

주삿바늘이 살을 뚫고 들어가는데 그럭저럭 참을 만하다고 하는 5살짜리 애는 세상에 우리 애밖에 없을 거다.

“근데 주사는 괜찮은데 세수는 하기 싫어.”

“눈에 거품 들어가는 거보다 주사가 더 아프지 않아?”

“숨도 참아야 하고 눈도 못 뜨고 귀도 멍멍거리고……. 나 착하게 주사 잘 맞으면 씻는 거 하루에 한 번씩만 해도 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세상 진지하게 하는 강우영을 보며 덩달아 나까지 심각해졌다. 눈에 거품 들어간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나중에 내가 얼굴에 비누칠을 잔뜩 하고 눈이라도 떠서 아프지 않다는 걸 증명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우영아, 근데 양치질할 땐 눈도 안 감아도 되고 숨도 안 참아도 되는데 아까 양치질할 땐 왜 울었어?”

“양치질하고 세수해야 되잖아.”

양치질을 안 한다고 세수도 안 하게 되는 건 아닐 텐데.

뭐라고 더 하려다가 그냥 말았다. 저렇게 씻기 싫어하는 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오늘 아침처럼 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만 매번 그런 식으로 우는 애를 억지로 씻길 수는 없었다.

혹시 트라우마 같은 건 아니겠지? 너무 비약적인 것 같기는 했지만 안 그러던 애가 이러니까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병원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병원 문을 열자마자 우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또래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 겁을 먹을 법도 한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지 강우영은 비밀의 던전이라도 들어온 듯 내부를 헤집고 다녔다.

무엇이든 다 손으로 건드려 보고 문이 있으면 열고 들어가려고 해서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리 예약을 해 뒀던 터라 잠시 기다리다가 금방 안으로 들어가 주사를 맞았다. 하나도 아니고 한 번에 주사를 두 개나 맞았는데도 강우영은 울상을 짓고 울듯 말듯 입술만 삐죽삐죽하다가 울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막상 주사를 맞으면 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울지 않아서 많이 놀랐다. 처음 접종을 맞을 땐 엄청 울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벌써 이렇게 컸나 싶어서 혼자 조금 코끝이 찡해졌다.

키와 몸무게도 재고 또래 아이들보다 작은 편이라는 말과 함께 접종 후 주의해야 할 사항에 대해 들었다. 계산을 끝내고 조금 전 들었던 주의사항이 적힌 카드를 받자 병원 안에 작게 마련된 놀이방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있던 강우영이 내게 다가왔다.

“안아 줄까?”

진짜 안 아픈가? 너무 멀쩡하고 태연해 보여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지만 강우영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그거 뭐야?”

“주사 맞고 조심해야 할 거 적어 놓은 거야.”

조금 전 받았던 카드를 건네주며 말하자 작은 손으로 카드를 이리저리 만지던 강우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글자를 읽지도 못하는데 고개를 숙이고 카드만 보고 걷는 게 불안해서 결국 강우영을 안아 들고 병원을 나섰다.

“팔 아프면 말해.”

“안 아파.”

“나중에 아플 수도 있대. 어디 좀 이상한 거 같으면 꼭 말해야 돼.”

“이상해?”

“뜨거운 것 같거나……. 뭐가 좀 다른 거 같을 때.”

내 말에 강우영은 카드를 보는 데 정신이 팔려서 아무런 대답도 하질 않았다. 병원에서 나와 카시트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해 줄 때까지도 카드에서 눈을 떼지 않는 강우영을 보다가 운전석에 앉으며 물었다.

“글씨 보는 거 재밌어?”

“그림 보고 있어.”

그러고 보니 카드에 캐릭터 그림 같은 게 그려져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꽃이나 나무 같은 게 작게 그려져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봤자 몇 개 없는 그림인데 강우영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카드만 봤다.

카드를 손에 꼭 쥐고 있는 아이를 안고 조용히 집으로 들어갔다. 혹시 정우진이 자지 않고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도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자고 있는 듯했다.

“아빠, 나 공놀이하면 안 돼?”

차에서는 조용하더니 집에 오자마자 또 부아앙 같은 소리를 내며 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강우영을 내 무릎 위에 앉히며 말했다.

“여기에 뭐라고 적혀 있는 줄 알아?”

“아니. 뭐라고 적혀 있어?”

“접종 당일은 외출, 목욕, 무리한 운동을 피하는 게 좋습니다.”

카드에 적혀 있는 사항 중 하나를 말하자 강우영이 의아한 얼굴로 가만히 카드를 보다가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근데?”

“공놀이는 무리한 운동이야.”

“그럼 달리기는?”

“그것도.”

내 말에 강우영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울상을 짓고 물었다.

“그럼 못해?”

“내일은 할 수 있어. 오늘만 다른 거 하자. 책 읽어 줄까? 아빠 코 하고 있으니까 뛰지 말고 가서 보고 싶은 책 가지고 와.”

무릎에서 내려 주며 말하자 강우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거의 굼벵이 기어가는 수준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강우영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포도 한 송이를 씻어 접시에 담아 거실로 나오자 강우영이 품에 책을 안고 살금살금 내게 다가왔다.

“무슨 책 가져왔어?”

“사자랑 호랑이 나오는 거.”

강우영을 무릎에 앉히고 책을 펴자 귀여운 그림체로 그려진 호랑이와 짧은 문장 한 줄이 보였다.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천천히 책을 읽어 주고 있는데 강우영이 물었다.

“호랑이가 토끼를 왜 먹어?”

책에는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는다는 식의 내용이 나왔다.

“호랑이가 나쁜 사람이야?”

“아니, 나쁜 건 아니고……. 이런 걸 약육강식이라고 하는 거야.”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서 더듬거리며 말하자 강우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했다. 다섯 살짜리 애가 약육강식이라는 단어를 알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정글에서는 약한 동물은 강한 동물에게 잡아먹힌다는 얘기를 하자니 이것도 좀 아이에게는 너무 이른 얘기 같았다.

애초에 약육강식이라는 말을 하면 안 됐나? 당황하고 있는데 가만히 날 보던 강우영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야구강시? 나 그거 알아.”

“뭐? 안다고?”

발음이 좀 어눌하긴 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알지? 혹시 천잰가? 덩달아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묻자 강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강시도 야구를 해?”

“……?”

갑자기 무슨 강시? 무슨 소린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야구 좋아하는 강시가 있을 수도 있지……. 근데 너 강시는 어떻게 알았어?”

“아빠가 귀신 얘기 책 읽어 준 적 있어.”

“귀신? 귀신 안 무서워?”

내 물음에 강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왜냐면 귀신 나오면 아빠한테 가면 되잖아.”

얜 누굴 닮아서 이렇게 똑 부러지지? 감동받은 얼굴로 강우영을 보다가 작은 머리를 끌어안았다.

“맞아, 그러면 되지. 무서우면 아빠한테 와. 알았지?”

“알았어. 근데 호랑이가 토끼 잡아먹는 얘기 하다가 갑자기 강시 얘기는 왜 한 거야?”

“어?”

“강시가 야구를 갑자기 왜 해?”

야구강시가 아니라 약육강식이라고 설명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고 그냥 계속 강시 얘기나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야구 하는 강시도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어.”

이제 나도 모르겠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나오는 대로 말하고 있는데 강우영이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더 이상 강시 얘기는 해 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 말을 돌렸다.

“귀신 책에 강시 말고 또 뭐 있었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날 보던 강우영이 내 질문에 활짝 웃으며 말했다.

“미라!”

“그건 뭔데?”

“붕대 감고 다니는 애 있어. 그리고 드라큘라도 있어. 걔는 박쥐로 변신할 수 있고 피도 먹을 수 있대.”

강우영은 신이 나서 내게 귀신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계속 듣다 보니 구미호에 좀비도 나오는 게 정말 다섯 살짜리가 봐도 되는 책인지 의심이 들어서 꺼림칙해하고 있는데 강우영이 손을 뻗어 내 손가락을 잡으며 물었다.

“아빠, 근데 아빠는 귀신이 있다고 생각해?”

나중에 그 귀신 책이 뭔지 나도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있을 수도 있지.”

내 말에 강우영이 입을 가리고 후후, 하고 작게 웃었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강우영이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웃지 않은 척을 했다.

“아빠 혹시 산타클로스도 믿어?”

“…….”

누가 봐도 산타클로스는 없다고 생각하는 말투였다. 귀신은 그렇다 쳐도 얘한테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소릴 누가 했지? 매번 크리스마스에 머리맡에 몰래 선물도 줬는데.

“산타클로스는 진짜 있어.”

“나 없는 거 알아.”

“어떻게 알아? 누가 그랬어? 아빠가 그랬어?”

내가 심각한 얼굴로 묻자 강우영이 다시 작게 웃었다.

“그런 건 애들이나 믿는 거야.”

“너도 아직 애잖아. 넌 동심이라는 게 없냐?”

“난 이제 애 아니야. 근데 동심이 뭐야?”

강우영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참담한 심정을 감추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산타 분장도 한번 해 볼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는데 계획을 바꿔야 하는 건가. 어떻게 산타클로스를 안 믿을 수가 있지?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됐는데.

“아무튼 산타클로스는 진짜 있어.”

“나 아빠가 작은 아빠가 만들어 준 양말 주머니에 선물 넣는 거 봤어.”

“아빠가 아니라 산타클로스일 수도 있잖아.”

뜨끔했지만 모른 척 잡아뗐다. 그러자 멀뚱멀뚱 날 보던 강우영이 별안간 손뼉을 치며 웃었다.

“맞아. 산타클로스일 수도 있지!”

“…….”

누가 봐도 그렇게까지 말하니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주겠다는 말투였다. 우리 애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조숙할까? 황당해서 웃다가 문득 잊고 있던 포도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포도 한 알을 떼어 작은 입에 넣어 주며 물었다.

“그럼 크리스마스에 선물 안 받아도 돼?”

입을 오물오물하던 강우영이 뭐라고 하려다가 자기 손바닥에 포도를 뱉었다.

“왜? 맛없어?”

“이거.”

“응?”

티슈를 뽑아 손을 닦아 주며 묻자 강우영이 인상을 찌푸리고 혀를 날름거리다가 또 뭔가를 뱉었다. 작게 조각난 포도 껍질이었다. 다시 티슈로 손을 깨끗이 닦아 주고 포도 한 알을 떼어 껍질을 벗겨 속살만 입 안에 넣어 주자 이번엔 오물거리다가 삼켰다.

“맛있어?”

“응.”

“또 줄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책은 옆으로 치워 두고 본격적으로 포도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 산타클로스 아저씨한테 호랑이 받고 싶어.”

할아버지도 아니고 아저씨는 뭐지? 설마 산타클로스는 나랑 정우진인 게 뻔하니까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저씨라고 한 건가? 섬세한 단어 선택에 웃으며 포도 알맹이를 입 안에 넣어 주며 말했다.

“호랑이는 강아지처럼 집에서 키울 수가 없어.”

“그럼 우리 집 마당에서 키우자.”

“마당에서도 못 키워.”

“왜?”

껍질을 벗긴 포도를 다시 입에 넣어 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가끔 강우영이 너무 당연한 것에 의문을 가지고 ‘왜’라고 물어 올 때 곤란했다. 그냥 안 되니까 안 된다고 하기는 싫고, 설명을 해 주자니 이런 걸 알아들을 수는 있을까 싶고. 쉽게 설명하자니 어떻게 쉽게 설명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애 키우는 게 정말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랑이는 맹수라서…….”

“맹수?”

“음. 사나운 동물이라서 못 키워.”

“사나운 게 뭐야?”

사나운 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사전이라도 찾아보고 싶었지만 나는 지금 포도 껍질을 벗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서운 동물이야.”

“왜 무서워?”

“그러게, 왜 무서울까…….”

심각한 얼굴로 호랑이가 왜 무서운지 고민하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내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강우영이 내 무릎에서 뛰다시피 내려가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아빠!”

고개를 돌리자 잠에서 깬 정우진이 비몽사몽한 표정으로 자기 다리에 매달려 있는 강우영을 안아 드는 게 보였다.

“왜 벌써 일어나? 더 자지.”

“다 잤어요.”

“아빠, 호랑이가 왜 무서워?”

정우진은 내 곁에 다가와 포도 껍질을 벗기고 있는 내 손을 가만히 보다가 내 옆에 앉았다. 그러더니 미끄러지듯 몸을 눕히다가 결국 내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강우영은 그 위에 앉아 정우진의 가슴 깃을 잡고 흔들었다.

“아빠, 호랑이가 왜 무서워?”

“우영아, 아빠 멱살을 잡으면 어떡해?”

내가 당황해서 묻자 정우진의 배 위에 앉아 있던 강우영이 잡고 있던 옷깃을 놓고 이번엔 양 귀를 잡았다.

“아빠.”

“귀도 안 돼.”

내가 다시 말하자 강우영이 웃으며 코를 잡았다.

“코도 안 돼.”

“왜? 그럼 입은?”

“입도 안 되지.”

어느 부분이 또 그렇게 웃겼는지 강우영이 배를 부여잡고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눈, 코, 입 번갈아 가며 손을 대던 강우영이 정우진의 하얀 뺨을 아프지 않게 살짝 붙잡고 까르르거리자 감겨 있던 눈이 떠졌다.

나는 눈을 뜬 정우진의 입 안에 껍질을 벗긴 포도 알을 넣어 줬다.

“병원에서 별일 없었어요?”

“없었어. 그냥 주사 맞고. 아, 우영이 주사 맞고 안 울었어.”

“정말요?”

정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강우영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왜냐면 난 이제 어른이니까.”

“그럼 나중에 거품 내서 세수해 볼까?”

“…….”

이때다 싶어 묻자 의기양양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강우영은 그대로 엎어져 정우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용해졌다. 그걸 보며 웃다가 나는 다시 포도 한 알을 정우진의 입 안에 넣어 주며 말했다.

“키랑 몸무게 쟀는데 또래보다 작대.”

“몇인데요?”

“93cm, 13kg.”

내 말에 정우진은 아무 대답 없이 자기 위에 엎어져 있는 강우영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기만 했다.

“밥도 잘 안 먹고 잠도 잘 안 자서 그런 거 아니야?”

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정우진이 시선을 들어 날 쳐다봤다.

강우영은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입에 넣어 주면 먹기는 했지만 뭘 달라고 하는 편도 아니었고, 식사 시간에도 혼자 한 그릇을 다 비운 적이 없었다. 어르고 달래서 먹이면 겨우 한 그릇을 비우긴 했지만 그러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저도 어렸을 때 엄청 작았어요. 좀 늦게 크는 애들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우진의 말처럼 좀 늦게 크는 애들도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강우영이 잘 먹지 않고 잘 자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이제 낮잠을 재우지 말아 볼까?”

강우영은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먹으면 거의 항상 뛰어놀았다.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질 못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땀을 흘릴 정도로 과격하게 놀고는 했었다. 그리고 에너지 충전 때문인지 낮잠을 자는데 자고 일어나면 다시 뛰어놀았다.

“낮잠치고는 좀 많이 자긴 했죠.”

내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물티슈를 뽑아 포도 껍질을 벗기느라 끈적끈적해진 손을 닦고 말했다.

“재우더라도 한 20분이나 30분 정도만……. 강우영, 자?”

내 말에 날 보고 있던 정우진이 살짝 고개를 들어 강우영을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우진의 얼굴을 잡고 까르륵 웃으며 좋아하더니 그새 잠이 들었다.

“병원 갔다 와서 피곤했나?”

“깨워야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당황해서 묻자 정우진이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강우영을 안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 앉아 강우영을 무릎 위에 올리자 잠시 뒤척이는 듯하더니 다시 잠이 들었다.

“우영아.”

“…….”

“강우영.”

“…….”

정우진이 가볍게 작은 몸을 흔들자 강우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눈은 뜨지 않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으……. 우어앴으까…….”

“뭐?”

“하디…….”

옹알이 같은 말을 하던 강우영이 정우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다시 잠이 들었다. 곤란한 얼굴로 강우영을 보다가 손을 뻗어 다시 작은 등을 흔들었다.

“우영아, 지금 자지 말고…….”

“흑……. 으아앙…….”

자꾸 깨우는 게 짜증이 났는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작은 등을 토닥토닥하며 말했다.

“아니야, 자. 그냥 자. 미안해, 이제 안 깨울게.”

“으엥…….”

“자장자장. 자장자장.”

“으…….”

한참 칭얼거리면서 울던 강우영이 다시 잠이 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문득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자기는 새벽에 일어나서 젤리 달라고 그렇게 우릴 깨웠으면서 내가 깨우니까 울어?

“20분만 있다가 다시 깨워요.”

정우진이 강우영을 고쳐 안으며 말했다.

“그때도 안 일어나면 어떡해?”

“일어나겠죠. 좀 이따 점심도 먹어야 하는데.”

“아, 포도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또 안 먹으려고 할 텐데.”

포도를 몇 개나 먹였지? 좀 적당히 먹일걸, 잘 받아먹는 게 귀여워서 정신없이 먹이다 보니까 얼마나 먹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우려대로 강우영이 20분만 자고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계속 자던 강우영은 두 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이렇게 낮잠을 오래 잤는데 해가 진다고 잠들 리 없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날 수 있게 차라리 오늘만 최대한 늦게 재워 보기로 했다. 책도 읽어 주고 그림도 같이 그리고 밀가루로 반죽 놀이도 하다가 강우영이 잠든 건 밤 11시였다.

강우영을 재우고 기진맥진해진 우리는 씻고 기절하듯 침대에 쓰러졌다. 그게 정확히 밤 12시가 조금 안 됐을 때였다.

꿈도 꾸지 않고 한참 자고 있는데 서서히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이게 꿈인지, 생신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눈을 감고 있으니까 꿈인 게 분명할 텐데 자꾸만 뭔가 이상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지만 눈앞이 흐렸다. 너무 잠이 오고 피곤해서 눈을 오래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금방 다시 눈을 감는데 눈꺼풀 위로 따뜻한 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하…….”

그리고 더운 숨이 닿자마자 번쩍 눈을 떴다.

“아윽!”

눈앞에 보이는 게 무엇인지 인식하기도 전에 느껴지는 충격에 입 밖으로 신음이 터졌다. 놀라서 팔을 허우적거리자 정우진이 내 손을 잡고 손등을 깨물었다.

“선배는, 왜 이렇게…….”

“야, 너, 자, 자는……. 아, 아……!”

“한 번 잠들면 일어나질 못해요?”

“아으읏!”

아니, 씨발! 자는 사람한테 뭐 하는 짓이야!

뒤늦게 정우진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밀어내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아직 눈에 초점도 제대로 잡히질 않아서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눈가를 혀로 핥았다.

도리질을 치고 고개를 돌리자 턱을 붙잡고 눈가를 핥고 미간, 코를 지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입 안으로 혀를 넣었다. 허리 아래쪽으로는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난잡한 물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발버둥 치던 걸 멈추자 숨을 쉴 틈도 주지 않고 입을 맞추고 있던 정우진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선배.”

“자, 잠시만. 5초만, 아, 아으, 흑!”

“선배, 저 깨물어 주세요.”

정우진이 내 뒷머리에 손을 넣어 고개를 들게 했다. 그러더니 내 입을 자기 목덜미에 억지로 대게 하면서 보채기 시작했다.

“목 물어 주세요.”

욕을 하고 싶어도 입을 열면 나오는 게 신음뿐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뒤늦게 열이 받기 시작했다. 정우진이 보채는 소리에 점점 물기가 섞였다.

나는 입술에 문대지고 있는 살갗을 혀로 건드렸다가 크게 입을 벌려 물었다. 닿은 살갗이 부르르 떨리는 걸 느끼며 더욱 세게 이를 세웠다. 턱이 덜덜 떨릴 만큼 강하게 깨물다가 화들짝 놀라 입을 벌렸다.

살에 박혀 있던 이가 빠져나오는 감각이 선연했다. 입 안을 맴도는 비릿한 맛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울었는지 눈망울이 젖어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걸 보자 갑자기 아랫배가 당기기 시작했다. 숨을 크게 들이켜자 정우진이 내 입가를 핥았다. 강아지처럼 입술을 핥고 입 안에 혀를 넣어 안쪽을 훑었다. 정우진이 사정을 하고 몸에 힘이 빠져서 축 늘어져 있는데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렇게 아프게 해요?”

그 말에 힘겹게 눈을 뜨자마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입술이, 정우진 입술이 피로 칠갑이 돼 있었다.

“야, 너 입술 왜 그래?”

“아파, 흑…….”

눈을 질끈 감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혹시 입술이 찢어졌나 싶어서 엄지로 쓸어 봤지만 상처가 보이진 않았다. 그러다가 새하얀 목덜미에 핏자국과 잇자국이 선명하게 난 걸 발견하고 나는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다.

좀 세게 깨물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피가 날 정도로 깨물었을 줄은 몰랐다.

“많이 아파?”

“네.”

“야, 그럼 하지 말라고 하든가, 밀어내든가 해야지!”

“어떻게 그래요.”

미친놈 아니야?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다가 나는 정우진의 팔뚝을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렸다.

“그러게 왜 자는 사람을 덮쳐?”

“선배가 먼저 자다가 세웠잖아요.”

“뭐?”

“그래서 만져도 안 일어나고, 빨아도 안 일어나고, 손가락 넣어도 안 일어나고…….”

뭔 소리야, 씨발?

웅얼웅얼하는 말을 가만히 듣다가 나는 정우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일단 좀 빼 봐. 이거 소독, 으…….”

안쪽에서 점점 단단해지고 커지는 게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서 진저리가 났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깨만 떨다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왜 커져? 소독할 생각 하니까 흥분되냐?”

기가 막혀서 묻자 정우진이 젖은 눈가를 내 어깨에 비비며 말했다.

“선배는 잘 때 왜 그렇게 무방비해요?”

“그럼 자는 사람이 다 무방비하지, 누가 방비를 하면서 자?”

“막 입으로 핥고 빨아도 안 일어나고…….”

“아, 알았으니까 일단, 흐윽…….”

끝까지 박혀 있던 성기가 예고도 없이 주르륵 빠졌다. 내벽을 긁고 빠져나가는 느낌이 너무 생생하게 나서 숨이 턱 막혔다. 벌벌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겨우 숨 한 자락 마시려고 몸에 힘을 빼는 순간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다시 뿌리 끝까지 박혔다.

“……!”

무슨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쳐들자 정우진이 내게 바짝 몸을 붙여 오며 물었다.

“선배 꿈에서 야한 짓 했죠?”

안 했어, 씨발. 안 했다고!

“그래서 자면서 세운 거죠?”

아무런 꿈도 안 꿨다고, 또라이 새끼야!

“아니면 자기 전에 야한 생각 했어요?”

숨이 너무 모자라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짧게 숨을 끊어 쉬면서 헐떡이다가 떨리는 손을 들어 정우진의 머리채를 한 움큼 잡았다.

“안 했…….”

“선배, 아파요.”

“안 했어……!”

필사적으로 내뱉은 말은 잔뜩 잠기고 갈라져서 형편없는 목소리였다. 이놈의 머리끄덩이를 다 뽑아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눈물이 고인 눈으로 날 내려다보며 불쌍한 척을 했다.

“아흑!”

불쌍한 척을 하는 얼굴과는 달리 아랫도리는 그렇지 않았다. 다시 끝까지 뺐다가 안쪽까지 세게 박혀서 결국 나는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부들부들 떨다가 놀라서 물었다.

“바, 방금 쌌잖아!”

“근데 또 섰잖아요.”

“계속 넣고 있으니까, 하, 자, 잠시만. 그거 하지, 으, 흑……!”

내벽을 전부 쓸고 빠져나간 성기가 이번엔 천천히 안쪽을 벌리며 들어오기 시작했다. 입술을 꽉 깨물자 정우진이 내 입 안에 엄지를 넣으며 물었다.

“한 번만 더 하고 씻으러 가요.”

씨발……. 개뻥일 게 분명한 말에 갑자기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작게 말하자 정우진이 눈을 가리고 있는 내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제가 씻겨 줄게요. 옷도 입혀 주고 눕혀서 재워 줄게요.”

정우진은 한 번만 하자고 하고 진짜 한 번만 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눈을 가리고 있는 내 손을 치워 낸 정우진이 이번엔 내 눈가에 입을 맞췄다.

“네?”

벌써 세워서 쑤시고 있으면서 이제 와서 그런 소릴 왜 하냐고. 그럴 거면 세우기 전에 말했어야지. 아니, 애초에 자는 사람한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형.”

“……?”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의아한 얼굴로 정우진을 쳐다봤다. 정우진은 아까보다 열 배는 더 불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 돼요?”

“왜 갑자기 형이라고 해?”

“호칭 정리하자면서요.”

“그걸 왜 지금 여기서 하냐고!”

진짜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내가 당황한 얼굴로 말하자 정우진이 내 목덜미에 뺨을 비비면서 말했다.

“제발요, 형. 한 번만요.”

“아니, 씨발…….”

“형…….”

“하…….”

있는 힘껏 치대다가 내가 헛숨을 쉬자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붉어진 눈가와 촉촉하게 젖은 검은색 눈동자를 보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기가 막혀서 말했다.

“너 그렇게 말해 놓고 어차피 한 번만 할 거 아니잖아. 근데 뭘 그렇게 가증스럽게…….”

나는 말하다 말고 말꼬리를 흐렸다. 정우진의 표정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 끝에 홀로 남은 백합처럼 가련하기 그지없던 얼굴이 감동에 젖어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제 마음을 잘 아세요? 제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왔어요?”

“…….”

진짜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정우진은 역시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건 형밖에 없다며 감격했다. 그러더니 그럼 솔직하게 앞으로 세 번만 더 하게 해 달라는 말에 나는 결국 모든 걸 포기했다.

* * *

정우진이 솔직하게 말한 것처럼 그 뒤로 정말 딱 세 번을 했다. 두 번은 침대에서 하고 남은 한 번은 욕실에서 씻으면서 했는데, 마지막쯤에는 눈앞이 하얗게 변해서 다시 머리끄덩이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씻고 나와서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는데 목덜미에 난 잇자국을 가만히 둘 수가 없어서 소독을 하고 약까지 바른 뒤 반창고를 붙였다.

“너 근데 진짜 아까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형이라 그랬어?”

평소에는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해도 모른 척만 하더니.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눈이 가물가물했다. 나른한 몸을 침대에 눕히며 말하자 정우진은 자기가 했던 말이 떠올랐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목덜미가 조금 붉어진 걸 보니 또 부끄럽기라도 한가 보다.

“혹시 우리 고아원에 있었을 때 기억나요? 그때 제가 형이라고 불렀잖아요.”

손을 뻗어 붉은 목덜미를 쿡쿡 찌르다가 시선을 올렸다. 고아원 얘기를 하는 것도, 그때 일을 생각하는 것도 너무 오랜만이었다. 이제는 기억이 흐려져서 그때 일은 생각을 해 보려고 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정우진이 날 형이라고 불렀던 건 기억이 났다.

“알지. 갑자기 그건 왜?”

“형이라고 부르면 그때가 생각나요.”

작게 속삭이듯 하는 말에 손가락 끝이 간지러워졌다. 약간 잠긴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어릴 때 생각나서 힘들어?”

내 물음에 정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설레요.”

“뭐?”

“그때 그 첫사랑을 생각하던 어린 소년이 된 것 같아서 너무 설레요.”

“…….”

이건 너무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었다.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정우진을 쳐다봤다. 하얗던 얼굴은 정말 첫사랑을 하는 어린 소년처럼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설렘이 가득한 검은색 눈동자는 들뜬 것처럼 젖어서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던 어린 김우진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지금의 정우진의 얼굴과 겹쳐졌다. 어쩐지 목이 메어서 몇 번이나 숨을 삼키다가 물었다.

“넌 아직도 날 보면 설레?”

“선배는 안 그래요?”

작은 목소리로 묻자 정우진이 조금 더 내 곁으로 붙으며 역시나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는 서로 바짝 붙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야, 설레기엔 우린 너무 오래 같이 살지 않았냐?”

같이 밥을 먹고, 씻고, 잠을 자고, 거기다가 아이까지 있는데……. 내가 의아한 눈으로 묻자 정우진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선배는 안 그런다고요? 진짜요?”

“아니, 내가 그렇다기보다는…….”

보통 이쯤 되면 설렌다기보다 그냥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서 생긴 정으로 같이 사는 거 아닌가?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난 아직도 선배가 자다 일어나서 물 마시는 것만 봐도 설레는데.”

그 말에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설렐 때 있어.”

“언제요?”

“네가 자다 일어나서 머리 뻗친 거 보면 좀 설레.”

“…….”

내 말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들은 게 정말 맞는지 귀를 의심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게 너무 웃겨서 몸을 둥글게 말고 웃자 머리맡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뭐예요?”

내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장난이 아니라 정말 사실이었다.

“너 잠버릇 심해서 가끔 머리 엄청 뻗칠 때 있잖아.”

“그게 설렌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게 너무 좋아.”

머리가 뻗친 것도 좋고, 자다 깨서 손을 더듬거리며 날 찾는 것도 좋았다.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도 좀 설레는 것 같고……. 아, 얼마 전에 한 손으로 시계를 푸는 걸 볼 때도 좀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정우진이 젖은 눈으로 날 바라보는 게 좋다. 거기에다가 날 부르면서 울 것 같은 눈으로 제발 같은 소리를 하면 더 좋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가락 끝이 간지러워서 무슨 말을 하든, 그게 뭐든 다 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런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선배도 진짜 특이한 거 알아요?”

생각에 잠겨 있는 날 가만히 보던 정우진이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그런 정우진을 보며 나는 손을 뻗어 뒷목을 당겼다.

“사람은 원래 끼리끼리 만나는 거야.”

입술을 바짝 붙이고 작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깡깡깡!

갑자기 들려오는 쇳소리에 화들짝 놀라 붙이고 있던 입술을 떼자마자 다시 깡깡 하는 소리가 들렸다.

“…….”

“…….”

정우진과 나는 서로 눈을 마주친 채 눈만 깜빡거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쟤 또 일어났나 봐. 11시에 잤는데 왜 벌써 일어나?”

“밤잠 없는 애들이 있대요…….”

“몇 시야, 지금?”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며 묻자 정우진도 날 따라 일어섰다.

“다섯 시요.”

“오늘은 그래도 한 시간 더 잤네.”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서자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급하게 몰려오는 피로감에 잠시 비틀거리자 어느새 일어나 내 옆으로 온 정우진이 내 어깨를 안았다.

“누워 있어요. 제가 나가 볼게요.”

“매일 데리고 나가서 몇 시간씩 뛰어놀게 할 수도 없고…….”

“차라리 운동을 시킬까요?”

아, 운동. 그럴까? 태권도나 뭐 그런 거 시키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넘치는 저 에너지를 좀 어떻게 연소시킬 수 있지 않을까? 당장 내일이라도 학원을 알아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빼꼼 작은 얼굴이 튀어나왔다.

강우영이었다.

“아빠.”

“또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하루 지났으니까 나 젤리 먹어도 돼?”

일어나자마자 하는 말이 젤리였다. 자다 깬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생기가 흘러넘치는 까만 눈동자는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정우진이 강우영을 안고 침대 머리맡에 앉으며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너 설마 젤리 먹고 싶어서 지금 일어난 거야?”

자면서 몸부림을 많이 쳤는지 오늘따라 강우영의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많이 뻗쳐 있었다. 폭탄을 맞은 것처럼 붕 떠서 한쪽으로 눌려 있었는데 그게 꼭 정우진을 보는 것 같아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냥 자다 보면 눈이 떠져. 근데 아빠, 우리 아침 언제 먹어?”

“우영아, 지금 새벽 다섯 시야.”

정우진은 내가 웃는 걸 보더니 손을 뻗어 뻗친 강우영의 머리를 꾹꾹 눌러 주며 말했다. 그러자 강우영도 손을 뻗어 정우진의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침은 다섯 시에 먹으면 안 돼?”

“다섯 시에 먹는 건 아침이 아니라 야식이야.”

“야식이 뭐야?”

“새벽에 먹는 밥.”

이러다가 또 어제처럼 나만 잠들고 정우진이 강우영을 데리고 나갈 것 같아서 나는 일단 둘 다 침대에 눕혔다. 정우진과 내 사이에 누운 강우영이 동그란 눈알을 도로록 굴리며 물었다.

“아빠, 오늘은 공놀이해도 돼?”

“응, 근데 자고 일어나서 아침 먹고 해야 돼.”

“나 잤는데?”

“좀 더 자.”

이불을 덮어 주고 배를 토닥토닥해 주자 우리 쪽으로 몸을 돌리고 누워 있던 정우진이 강우영을 보며 물었다.

“우영아, 근데 일어나면 왜 국자로 냄비를 때리는 거야?”

“재밌으니까. 아빠도 해 봤어?”

뜬금없는 질문에 내가 웃자 정우진도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아니, 안 해 봤지.”

“아빠도 한번 해 봐.”

“그게 그렇게 재밌어? 소리 안 시끄러워?”

“좀 시끄러운데 참을 만해.”

그 말을 가만히 듣다가 나는 정우진을 보며 물었다.

“태권도 말고 악기를 배우게 해 볼까?”

“드럼 같은 거요?”

“드럼 때리는 것도 체력 소모 엄청나지 않아?”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강우영이 꾸물꾸물하면서 몸을 뒤척이다가 정우진의 배 위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그대로 몸을 겹치고 위에 엎어져 누웠다. 왠지 잘 것 같은 느낌이라 얼른 손을 뻗어 등을 살살 만졌다. 정우진도 때를 놓치지 않고 작은 머리를 살살 쓰다듬기 시작했다.

눈물겨운 노력 때문인지 말똥말똥했던 눈이 조금씩 감기기 시작했다. 꾸벅꾸벅 졸던 강우영의 눈이 완전히 감기고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나와 정우진은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냥 여기서 재울까요?’

‘그래, 움직이면 깰 거 같아. 안 무거워? 옆에 살짝 내려놓기만 해.’

‘괜찮아요.’

소리는 거의 내지 않고 가까운 거리에서 입만 뻐끔거리면서 말하고 있는데 강우영이 작게 몸을 뒤척였다. 놀라서 입을 다물고 숨만 쉬고 있자 다시 잠이 든 건지 조용해졌다.

만약 또 깼으면 하늘을 원망할 뻔했다.

‘빨리 자.’

나는 최대한 조심히 침대에 누우며 입술을 움직였다. 지금 당장 잔다고 해 봤자 몇 시간 잘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자려면 최대한 빨리 잠드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지금 나는 너무 피곤해서 눈만 감으면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몸에 힘을 빼는데 정우진이 날 불렀다.

“형.”

“……?”

순간 너무 피곤해서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날 보던 정우진이 별안간 입술을 내밀었다.

“…….”

“…….”

뭐야? 당황한 얼굴로 한참 정우진을 보다가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뒤늦게 깨닫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강우영이 깰까 봐 크게 웃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웃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삐죽 내밀어진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선배, 잘 자요.’

그러자 정우진이 웃으며 인사했다. 그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입을 뻐끔거렸다.

‘왜 또 선배야?’

내 말에 정우진이 두어 번 눈알을 굴리다가 다시 입술을 내밀었다. 황당해서 이번에는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하, 하고 소리를 내자 정우진이 검지를 올려 조용하라는 듯 눈에 힘을 줬다. 아주 웃기는 놈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가만히 보다가 바라는 대로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하지만 정우진은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그래서 한 번 더 했다. 그래도 정우진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었다.

그냥 이대로 등을 돌리고 잘까 하다가 한 번만 더 해 보자는 생각에 이번엔 세 번 연달아 입을 맞췄다. 그러자 맞댄 입술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살짝 입술을 떼자 그제야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형, 잘 자요.’

다섯 번이나 입을 맞춘 끝에 드디어 원하던 말을 들은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너도 잘 자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정우진 너머로 보이는 커튼 틈새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입술을 꽉 깨물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며 고개를 흔들고 이번에는 정우진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 이마를 맞댄 채 말했다.

“잘 자.”

해가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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