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실-Another Universe-2 (22/28)

* * *

서재에서 어떻게 침대까지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건전지가 다 닳은 로봇처럼 일순간에 사고가 정지하고 몸이 축 늘어져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간간이 잠에서 깰 때마다 정우진이 옆에 있었다. 자다 깨다 하면서 가만히 내 얼굴을 보고 있는 검은색 눈동자와 세 번인가, 네 번쯤 눈이 마주치고 난 뒤에야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나 얼마나 잤어?”

자고 일어났는데도 개운하다거나 피로가 풀렸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몸이 더 무거워진 것 같아서 몸을 둥그렇게 말고 꿈틀거리자 정우진이 내 목덜미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여섯 시간쯤이요.”

여섯 시간이면 생각보다 엄청 많이 잤다. 살갗에 닿은 손이 시원해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자 다시 슬슬 졸려 오기 시작했다.

“어디 아픈 데 없어요?”

“그냥 좀 나른해.”

“아까부터 열이 좀 나는 거 같은데.”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뜨자 걱정스럽게 날 쳐다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멍하게 정우진을 보다가 몸을 돌려 누우며 물었다.

“우리 이사 갈래?”

갑작스러운 내 말에도 정우진은 놀란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놀라지도 않네.”

“왜 놀라요? 선배 혼자 나가는 것도 아니고 같이 가는 건데.”

왜 이사를 가냐고 물으면 하려고 했던 말들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나는 결국 묻지도 않은 이유를 혼자 주절주절 떠들었다.

“여긴 너무 넓은 거 같아. 둘이 사는데 이렇게 넓을 필요도 없고……. 나중에 아기 낳아도 세 명인데 더 좁은 집으로 가도 될 거 같아.”

그럼 정우진이 혼자 깨더라도 날 찾아 집 안을 뛰어다닐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예전에 정우진이 살던 집은 이것보다 훨씬 더 넓었다. 거기도 너무 넓어서 지금 사는 집으로 온 건데 생각해 보니까 이 집도 둘이 살기엔 지나치게 컸다.

“선배가 원하면 전 원룸에서 살아도 돼요.”

정우진이 날 끌어안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냥 적당히 지금보다는 좁은 곳으로.”

“그냥 땅 사서 집을 지을까요?”

집을 짓는다는 생각은 못했는데 듣고 보니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방은 많아도 서너 개만 있으면 될 거 같아. 천장은 안 높았으면 좋겠고, 마당도 있으면 좋겠어.”

“그래요, 선배가 원하는 대로 다 하세요. 다 해 줄게요.”

“…….”

아까부터 자꾸 내가 하는 말에 알겠다고만 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혹시 울어서 그런가?

그런 생각이 들자 문득 울고불고 난리를 쳤던 게 떠올랐다. 그땐 물에 빠져 사경을 헤매는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그게 다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그 수많은 답답함과 불안함이 씻은 듯 사라진 게 믿기질 않았다.

이러다가 또 어느 순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안해지기도 할까?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괜찮으니까 상관없었다.

“굳이 서울 한복판에서 살 필요도 없고 좀 외곽으로 가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애 낳고 어느 정도 키울 때까지 정우진이 날 두고 구직활동을 하러 갈 것 같지는 않아서 한 말이었는데 불현듯 걱정이 됐다.

“근데 만약 애가 나왔는데 걔가 우리한테 왜 일 안 하고 집에만 있냐고 하면 뭐라고 해?”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정우진이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쉽게 말했다.

“선배, 법인 하나 만들어서 거기 대표 할래요?”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해결 방법이라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제가 직원 할게요.”

“무슨 법인을 만들어? 그리고 대표는 네가 해. 직원은 내가 할 테니까.”

“그럼 제가 대표 할 테니까 선배는 비서 하세요.”

무슨 회사를 만들지도 모르는데 직급부터 정하는 게 웃겼다. 정우진은 웃고 있는 날 가만히 보다가 뜬금없이 말했다.

“아기 낳을 때까지만 집안일 다른 사람한테 맡길까요?”

아까부터 계속 예상을 벗어난 말만 하고 있었다. 나는 법인을 만들자고 했을 때보다 더 놀라서 물었다.

“너 집에 다른 사람 오는 거 싫어하잖아.”

“몇 달은 참을 수 있어요.”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건 내가 서재에서 했던 말 때문일 게 틀림없었다.

“다른 건 말고 청소만요.”

“네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해.”

“저는 사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아니면 쉬는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정우진이 말을 하다가 말고 날 보며 눈을 깜빡였다. 까만 눈을 마주 보다가 물었다.

“왜?”

“생각해 보니까 한 번 그렇게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뭘 그렇게 살아?”

“선배가 정해 준 시간표대로.”

그건 진짜 하라고 말한 게 아니라 그냥 협박용이었는데.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웃었다.

“시간 단위 말고 초 단위로 정해 주면 좋겠다.”

“제발 끔찍한 소리 좀 하지 마.”

질색을 하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덩달아 날 따라 일어나 앉은 정우진이 물었다.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너무 누워 있었더니 허리 아파.”

“만져 줄 테니까 이리 와 봐요.”

“아니, 그냥 씻고……. 좀 걸을래.”

근데 지금 몇 시지? 두꺼운 암막 커튼이 쳐져 있어서 지금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겠다.

“몇 시야?”

“일곱 시요.”

“엄청 잤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침대 밖으로 나오자 정우진이 내 옆에 섰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 욕실까지 따라와 씻겨 주겠다는 걸 내보내고 샤워를 했다.

씻고 나오자 정우진이 저녁을 차려 놔서 간단하게 먹었다. 나야 뭘 먹든 상관이 없었는데 정우진이 또 입덧을 할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기미는 없어서 안심하고 먹었다.

저녁을 다 먹고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따뜻하게 옷을 껴입고 함께 집을 나섰다. 집 주변을 빙빙 돌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평소처럼 쓸데없는 얘기도 하고 우스갯소리도 하고 미래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도 했다.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속이 답답하거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아마 서재에서 울면서 토해 냈던 게 도움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렇게 이성을 잃고 내가 아닌 것처럼 이상한 내가 되지 않을 줄 알았다.

“…….”

하지만 다시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기 시작한 건 그 뒤로 고작 이틀이 지나서였다.

아니,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씨발…….”

그 이유가 너무 하찮아서 문제였다.

나는 침대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쳐다봤다. 내 쪽으로 몸을 돌리고 모로 누운 정우진이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숨을 쉬고 있기는 한 건지, 의아할 정도로 미동도 하나 없었다.

이렇게 잘 자고 있는 정우진을 깨워도 되는 건지, 잠깐 고민이 들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심각한 얼굴로 손을 뻗어 정우진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정우진, 정우진.”

내 손이 닿기도 전에 이름을 부르자마자 정우진이 눈을 떴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어깨를 흔들다가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 검은색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떡볶이 먹고 싶어.”

“…….”

“간장 떡볶이.”

내 말에 잠이 덜 깬 얼굴로 멀뚱멀뚱 날 보던 정우진이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간장 떡볶이요?”

“너 그거 알아? 고추장이나 고춧가루 말고 고기랑 간장 넣고 하는 떡볶이 있잖아.”

혹시 정우진이 모를까 봐 설명을 하는데 사실 나도 자세히는 몰랐다. 왜냐면 나는 애초에 떡볶이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주 먹는 음식도 아니었고, 정우진이 떡볶이를 만드는 걸 본 적도 없었다.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못 만든다고 할까 봐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우진을 보고 있는데 어느새 잠이 다 깬 정우진이 말없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런 정우진을 따라 일어서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내 손을 잡았다.

“그냥 누워 있으세요. 다 되면 가지고 올게요.”

“아니야, 나 잠 다 깼어. 근데 너 그거 만들 수 있어?”

“네, 다른 건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그 말에 내가 고개를 흔들자 정우진이 기어이 날 눕히며 말했다.

“떡이 없어서 사러 갔다 와야 해요. 저 올 때까지만 누워 있어요, 그럼.”

“없다고?”

그 말에 내가 놀라서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24시 마트 있으니까 금방 갔다 올게요.”

“아니, 없으면 그냥…….”

“선배, 저 올 때까지 가만히 누워 있어요. 알겠죠?”

날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준 정우진이 잠옷 위에 겉옷을 걸치며 말했다. 설마 떡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서 당황한 얼굴로 나오는 대로 말했다.

“떡 없으면 그냥 밥으로 하면 안 되냐? 같은 쌀이잖아.”

“그럼 그게 떡볶이에요?”

“밥을 꾹꾹 누르면 떡이 안 되나?”

“밥도 없어요. 빨리 갔다 올 테니까 그냥 누워 있어요.”

내가 심각한 얼굴로 말하자 정우진이 웃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더니 더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핸드폰을 챙겨 방을 나섰다.

집에 혼자 남겨진 나는 숨 막히는 듯한 정적 속에서 눈만 깜빡거렸다. 가만히 천장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2시 50분.

오후 2시 50분도 아니고 새벽 2시 50분.

“…….”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갑자기 회의감이 들었다. 깨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고 있는 정우진을 일부러 깨워서 떡볶이 먹고 싶다고 밖에 내보낸 게 정말 사실인가? 아니, 애초에 자다가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깬 것도 어이가 없었다.

나는 한 번 자면 어지간해서는 잘 일어나지 않았다. 정우진이 깨우고 흔들고 안아서 욕조에 집어넣어도 자느라 정신을 못 차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근데 누가 깨운 것도 아닌데 새벽 2시 50분에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깼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황당한 와중에도 계속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입에 침이 고였다. 돼지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이지?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한참을 천장만 보며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거의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튀어나와 방문을 열었다.

중문을 열고 들어온 정우진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어 올렸다.

“가래떡은 없고 떡국 떡 있어서 사 왔어요.”

“마트에 떡이 있어?”

“네, 냉동이긴 하지만.”

정우진이 겉옷을 벗고 주방으로 들어가 손을 씻고 그릇에 물을 받았다. 그리고 꽝꽝 언 떡을 물이 찰랑찰랑하게 받아진 그릇 안에 쏟아 부었다. 그러는 동안 등 뒤에서 정우진이 하는 걸 쳐다보기만 하다가 물었다.

“너 간장 떡볶이 만들어 본 적 있어?”

“음, 한 번이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우진은 그릇을 전자레인지 안에 넣고 날 보며 말했다.

“예전에 시험 준비하면서 한 번 만들어 봤어요.”

“시험? 아, 맞다. 너 조리사 자격증 있다고 했었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 들었던 것 같기도 했었다.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정우진이 내 손을 잡고 날 식탁 의자에 앉히더니 말했다.

“근데 너무 오래돼서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냥 고기랑 간장 넣고 볶다가 떡 넣으면 되는 거 아니야?”

의아한 얼굴로 말했지만 정우진은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을 켜 말없이 한참 동안 액정만 쳐다봤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핸드폰을 보자 궁중 떡볶이 레시피를 검색하고 있었다.

똑같은 레시피를 이것저것 보다가 마음에 드는 게 나타났는지 정우진이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날 보며 말했다.

“일단 최대한 맛있게 만들어 볼게요.”

그 얼굴 표정이 너무 비장해 보여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우진은 전자레인지에서 해동이 끝난 떡을 꺼내고 떡볶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아 정우진이 요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머리카락이 뻗쳐 있는 게 보였다.

매일 그런 건 아니었지만 정우진은 가끔 잠버릇이 유독 심한 날이 있었다. 그런 날에는 어김없이 머리가 폭탄을 맞은 것처럼 심하게 뻗쳐 있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아주 조금만 뻗친 걸 보니 많이 뒤척이진 않았나 보다.

손가락 정도 크기의 머리카락이 위로 삐죽 나와 있는 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저걸 꼭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우진의 머리카락이 뻗친 걸 보면 그걸 꼭 만져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정우진은 평소에 머리를 만져 주는 건 좋아하면서 자고 일어나서 머리카락이 뻗쳐 있는 걸 만지는 건 또 싫어해서 잘 만지지는 못했다. 만질까 말까 고민하다가 안 그래도 자다 일어나서 떡볶이 만드는 것도 짜증 날 테니 그냥 좀 참기로 했다.

심심한 손으로 식탁 위를 치면서 뻗친 머리카락과 동그란 머리통을 구경하는 사이 드디어 떡볶이가 완성됐다.

“다 됐어요.”

넓고 하얀 접시 위에 예쁘게 담긴 떡볶이를 가져온 정우진이 내게 포크를 건넸다. 나는 포크를 받기 전에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면서 뻗친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포크를 받았다.

“고마워. 잘 먹을게.”

“맛없을지도 몰라요. 나중에 재료 사서 제대로 다시 해 줄게요.”

맛이 없을 리가 없었다. 포크로 떡을 하나 찍어 입에 넣자 짭짤하고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말랑말랑한 떡을 씹자 뻗친 머리카락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내가 이게 그렇게 먹고 싶어서 자다 일어나서 울 뻔했다.

“맛있어요?”

“나 지금 울고 싶어.”

“그래도 울지는 마세요.”

안도하며 웃는 정우진을 보니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울고 싶다고 한 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였는데 이러다가 진짜 울 것 같았다.

“선배, 근데 진짜 떡볶이 먹고 싶어서 자다가 깬 거예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혹시 무슨 꿈이라도 꿨어요?”

“아니, 그냥 갑자기 눈이 떠졌어.”

“눈 뜨자마자 떡볶이가 생각난 거예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신기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나도 이런 내가 신기한데 정우진은 오죽할까 싶었다.

“다음에 또 그러면 그때도 깨우세요. 그리고 마트 가면서 생각한 건데 냉장고 큰 거 하나 더 사야겠어요. 갑자기 뭐 먹고 싶은데 재료가 없으면 안 되니까 그냥 다 사서 넣어 놓으려고요.”

“냉장고를 산다고? 뭘 얼마나 사려고?”

그렇게 말하고 다시 떡볶이를 먹으려는데 문득 명치에서 무거운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씹는 속도도 조금씩 느려지고 목구멍으로 음식물을 삼키기가 힘들었다.

“전에는 필요한 건 그때그때 사서 괜찮았는데 오늘처럼 늦은 시간에 갑자기 먹고 싶을 땐……. 왜 그래요?”

해가 뜨기만 하면 당장 냉장고를 사러 갈 기세로 말하던 정우진이 날 보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입 안의 떡을 삼키지도 못하고 결국 입을 다문 채 느리게 씹던 걸 멈췄다.

“선배?”

“…….”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명치가 아팠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입 안의 걸 삼킬 수도 없었다.

“혀 깨물었어요? 뭐 잘못 먹었어요? 왜요?”

뭔가 심상치 않은 걸 느낀 정우진의 목소리가 조금씩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자 정우진이 내 입가에 손을 내밀고 말했다.

“뱉어요.”

그 말에 나는 놀라서 더 세게 입을 다물었다. 계속 뱉으라고 말하던 정우진이 도저히 안 되겠는지 내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워 싱크대 쪽으로 날 데리고 갔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싱크대 안에 입 안의 걸 모두 뱉었다. 물을 틀어 입 안을 몇 번이나 헹궈 내고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사색이 된 얼굴로 물었다.

“뭐 이상한 거 씹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손으로 명치 쪽을 만지자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배 아파요?”

“속이 안 좋아.”

“어떻게요? 메슥거려요? 체한 거 같아요? 병원 갈래요?”

작게 고개를 흔들자 이번에는 정우진이 물이라도 마시라고 했지만 아무것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계속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있자 정우진이 날 안아 들고 주방을 나섰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앉아 내 등을 쓸었다.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한참을 그러고 있자 좀 나아진 것 같아서 짧게 한숨을 쉬자 정우진이 물었다.

“아직 안 좋아요?”

“아니, 이제 괜찮은 거 같아.”

설마 이게 입덧인가? 아니, 근데 막 역하거나 그렇진 않았는데……. 토할 것 같은 것도 아니었고……. 심각한 얼굴로 잔뜩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병원 안 가도 돼요? 그냥 차 타고 가면 돼서 금방 가니까 어디 불편하면 말하세요. 이러다가 나중에 더 아프면 그게 더 큰일이니까.”

“이제 진짜 괜찮아.”

괜찮다는 말에도 계속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빤히 날 바라보는 정우진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맛없어서 그런 거 아니야.”

“네?”

“맛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갑자기 속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그게 문제예요?”

황당한 얼굴로 되묻는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자는 걸 깨워서 떡 사 오라고 마트 보내고 떡볶이 만들어 내라고 한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기껏 만들어 줬는데 그걸 먹지도 못하고.

“선배?”

씹던 걸 삼키지도 못하고 싱크대에 뱉기까지 하다니.

“선배, 울어요?”

“안 울어, 씨발.”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눈물을 흘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화낸 거 아니에요. 미안해요. 너무 걱정돼서 그랬어요. 진짜 저 화낸 거 아니에요.”

정우진은 날 안은 팔에 힘을 주고 횡설수설하며 변명을 했다. 뭔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정우진은 잘못한 게 없는데 또 사과를 하고 있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짜 맛없어서 뱉은 거 아니야.”

“알고 있어요. 선배가 잘못한 거 아니에요.”

“진짜 먹고 싶었는데 갑자기 속이 안 좋아져서 그랬어.”

새벽에 마트에 가서 떡을 사 온 것도 정우진이고 레시피를 검색해서 떡볶이를 만든 것도 정우진인데 왜 이렇게 내가 피곤한 건지 모르겠다. 몸은 천근만근처럼 무거웠고 미안해서 그런지 점점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괜찮아지면 먹으면 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먹고 싶으면 또 만들어 줄게요.”

정우진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다가 나는 혼잣말처럼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너는 이게 무슨 고생이냐…….”

“이게 고생은 무슨 고생이에요. 자격증 딴 것도 선배 맛있는 거 해 주려고 딴 건데. 그리고 전 정말 진짜로 맹세코 장담하는데 이걸 고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만약 아주 만약에 고생이라고 해도 이럴 때 아니면 선배가 절 언제 고생시키겠어요? 평소에는 제가 힘들게 하니까 괜찮아요.”

정우진은 혹시라도 내 신경을 건드릴까 봐 눈물겨울 만큼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듣다 못한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뭘 힘들게 해? 그리고 넌 자다 일어나서 나한테 떡볶이 해 달라고 깨운 적은 없잖아.”

“떡볶이 해 달라고 깨운 적은 없지만 섹스 해 달라고 깨운 적은 있잖아요.”

“…….”

너무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게다가 그건 정말 사실이라 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다물자 정우진이 웃었다.

“그리고 선배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거나 이상해진다고 하는데 그것도 진짜 괜찮아요. 저도 평소에 갑자기 울고 징징거린 적 많잖아요.”

“…….”

그것도 맞는 말이긴 했다.

“아까 선배가 저 깨우면서 떡볶이 먹고 싶다고 할 때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오늘 기념일로 정하려고요.”

뜬금없는 말에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갑자기 무슨 기념일?”

“선배가 자다가 떡볶이 먹고 싶다고 깨운 날.”

“미쳤냐?”

질색하는 내 얼굴을 보며 정우진이 다시 웃었다. 부정적인 건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오로지 세상의 모든 행복과 밝음만 모아 만든 것 같은 미소였다.

“떡볶이 말고 다른 거 먹고 싶은 건 없어요?”

그 물음에 갑자기 좀 머쓱해져서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간장이 먹고 싶어.”

“간장?”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되묻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안 좋아져서 떡볶이를 씹다가 뱉은 게 불과 몇 분 전인데 아직도 먹고 싶은 게 있었다.

“짠 거. 간장으로 만든 거. 장조림이나……. 장조림. 메추리알 장조림.”

말을 하다 보니 갑자기 또 장조림이 먹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메추리알 없는데……. 아니면…….”

또 마트 가서 사 온다고 할까 봐 나는 얼른 정우진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오늘 말고, 내일.”

“그냥 달걀 장조림은 안 돼요? 달걀은 있어요.”

“지금 말고 나중에 해 줘.”

“냉장고 진짜 꼭 사야지.”

내 말에 정우진이 날 끌어안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정우진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우리 작은 집으로 이사 가기로 했잖아.”

“주방을 크게 만들면 되잖아요.”

우리가 무슨 대가족도 아니고 나중에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도 고작 세 명인데……. 이대로 뒀다가는 진짜 살 것 같아서 뭐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냉장고가 몇 개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새벽에 차 타고 마트 가는 것보다는 낫겠지.

“메추리알 장조림은 아침에 해 줄게요.”

“알았어.”

“또 뭐 먹고 싶어요?”

“파래 무침.”

“또요?”

“감자전.”

“또?”

“사과.”

한 번 말하기 시작하니까 내가 먹고 싶은 게 이렇게 많았나 싶을 만큼 줄줄 나오기 시작했다. 그 뒤로 스무 개쯤 더 말하자, 정우진이 이젠 못 외우겠다고 핸드폰을 가져와 받아 적기 시작했다.

우리는 소파에 반쯤 누워서 세상의 모든 먹거리를 적다가 새벽 다섯 시가 넘어서 잠이 들었다.

* * *

요즘 평소에는 괜찮았던 게 싫어지고, 싫었던 게 좋아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지금 내 손에 있는 이 사과가 그랬다.

“왜요?”

내가 사과는 먹지 않고 계속 들고 쳐다보기만 하니까 정우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사과가 먹고 싶다고 하니까 껍질째 먹어야 좋다고 뽀득뽀득 깨끗하게 씻어 먹기 좋게 잘라 줬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먹기 싫으면 억지로 먹지 마세요.”

“먹기 싫은 거 아니야.”

혹시 또 간장 떡볶이 같은 사태가 벌어진 건가 싶어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한 사과를 한 입 먹자 달콤한 과즙이 배어 나왔다. 하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거슬렸다.

“껍질 꺼끌거려.”

“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고개를 갸웃하던 정우진이 아, 하고 과도로 사과 껍질을 벗겨 내게 건넸다. 껍질을 깐 사과를 먹자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난 원래 사과를 싫어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고, 그냥 과일 중에 제일 싫어하는 게 사과였다. 하지만 만약 먹어야 한다면 늘 껍질째 먹었는데 갑자기 변해 버린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가 있나.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뒤로 모든 과일의 껍질이 싫어졌다. 입 안에서 굴러다니면서 걸리는 것도 싫었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특유의 느낌도 너무 싫었다. 그래서 싫다고 했더니 정우진이 방울토마토의 껍질을 벗기다 못해 귤의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감싸고 있는 하얀 막까지 벗기려고 하는 걸 보고 결국 올겨울에는 귤은 먹지 않기로 다짐했다.

“야, 근데 우리도 태명 같은 거 지어야 하지 않아?”

서재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 정우진이 읽어 주는 책을 가만히 듣다가 문득 생각이 나 물었다. 내 말에 소리를 내어 책을 읽고 있던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애 이름도 슬슬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생각해 둔 이름 있어요?”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둔 이름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평생 내 팔자에 애라고는 없을 줄 알았으니까.

“넌 없어?”

“없는데……. 전 살면서 이름은 길고양이 이름밖에 지어 본 적 없어요.”

“길고양이? 언제?”

내가 벌떡 일어나며 묻자 정우진이 들고 있던 책을 옆으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학교 다닐 때 근처에 있던 고양이였어요. 검은색 고양이였는데 눈은 노랗고…….”

“이름은 뭐라고 지었는데?”

“노랑이요.”

“……눈이 노래서?”

내가 황당한 얼굴로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작명에 소질이 있을까 싶어서 물었던 건데 그쪽으로는 영 재능이 없는 듯했다.

“근데 왜 노랑이야? 보통 검은 고양이면 검둥이나 까미나 뭐 그런 걸로 짓지 않냐?”

“그런 건 너무 흔하잖아요.”

“…….”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검둥이나 노랑이나 대체 뭐가 다른 거지…….

“선배는 이름 지어 본 적 없어요?”

“나도 예전에 알바 할 때 봤던 강아지 이름 지어 본 적 있어.”

“뭐였는데요?”

“…….”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질 못하자 정우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강아지가 무슨 색이었어요?”

“하얀색…….”

“설마 흰둥이는 아니죠?”

“…….”

내 침묵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챈 정우진도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이름은 좀 천천히 생각해 보고 태명을 먼저 지어 보자. 태명은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 안 해도 되는 거잖아.”

“뭐라고 짓고 싶은데요?”

그냥 아이가 나올 때까지 우리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거니까 좋아하는 걸로 붙이면 안 되나?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고구마 할래?”

“네?”

“너 고구마 좋아하잖아.”

“…….”

표정을 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럼 네가 말해 봐. 넌 뭐라고 하고 싶은데?”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정우진이 자신 없어 보이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겨울에 가졌으니까 겨울이 어때요?”

“겨울? 그럼 호빵이 할래?”

“…….”

정우진의 표정이 다시 흐려지는 걸 보고 나는 얼른 헛기침을 하며 말을 바꿨다.

“겨울이로 하자.”

“아니에요, 선배가 호…….”

“……?”

“……빵 하고 싶으면 그냥 그걸로 하세요.”

누가 봐도 싫어하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호랑 빵 사이에 간격이 너무 길었다.

“그게 그렇게 이상해?”

“아니요, 안 이상해요.”

“야, 호빵 귀엽잖아. 그리고 겨울 생각도 나고.”

내가 욱해서 말하자 대체 뭐가 귀여운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얼굴로 날 보던 정우진이 말했다.

“그게 뭐예요, 호빵맨도 아니고.”

그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호빵맨 좋네.”

“네?”

“호빵맨 좋다. 그걸로 하자. 걘 정의롭고 용감하잖아. 그러니까 정의롭고 용감하라는 뜻에서 호빵맨.”

“…….”

어떻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요상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푸핫 하고 웃어 버렸다.

“장난이야. 그냥 겨울이 하자.”

“아니에요, 선배가 하고 싶은 걸로……. 아니, 일단 급할 거 없으니까 천천히 다시 생각해 봐요.”

“겨울이 진짜 괜찮아.”

“호빵도 괜찮은 거 같아요.”

정우진은 뒤늦게 자기가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이제 와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더 웃긴 건 그래도 호빵맨보다는 호빵이 나은지 호빵맨 소리는 절대 안 한다는 점이었다.

그나저나 태명은 그렇다 쳐도 이름은 정말 고민이었다. 정우진이나 나나 노랑이, 흰둥이 같은 작명 실력으로는 아이의 이름을 짓기엔 무리였다. 평생 달고 살아야 할 이름표인데 대충 지을 수는 없었다.

“이름은 작명소 같은 곳에서 짓는 게 나으려나.”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몇 개 받아서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도 되고, 아니면 더 생각해 보고 선배가 원하는 이름으로 지어도 괜찮아요.”

“넌 어쩌고 싶은데?”

“전 그냥…….”

무슨 말을 하려던 정우진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더니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선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근데 마지막에 저한테 상의는 해 주세요. 꼭이요.”

그 조심스러운 말에 나는 결국 참다못해 터져 버렸다.

“야, 솔직히 너나 나나 거기서 거기거든?”

“전 그 정도는 아니에요.”

같은 취급 받는 게 억울했는지 발끈해서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랑이랑 흰둥이가 뭐가 달라? 똑같지.”

“그건 고양이 이름이니까 그렇게 지었죠. 사람한테는 노랑이라고 안 해요.”

“나도 태명이니까 호빵이라고 했지, 진짜 이름은 그렇게 안 지어.”

“왜 자꾸 웃어요?”

내가 계속 실실 웃으면서 말하자 정우진이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말에 나는 아까부터 계속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로 했다.

“야, 넌 내 말에 반대하는 게 그렇게 힘들다더니 지금은 안 그러냐?”

“그거랑 이건 다르죠.”

“뭐가 다른데?”

“아무튼 달라요.”

또 자기만의 어떤 기준이 따로 있는가 보다. 어차피 들어도 나는 이해를 못할 것 같아서 더 물어보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정우진이 내 손을 잡았다. 의아한 얼굴로 잡은 손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깍지를 낀 손을 들어 내 손등에 입술을 대더니 말했다.

“그래도 선배가 호빵 하고 싶다면 전 선배 뜻에 따를게요.”

“호빵 안 한다고.”

“선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싫다는 티를 그렇게 내 놓고 이제 와서 눈치를 보는 게 어이가 없었다. 어쨌든 호빵이든 겨울이든 이름도 아니고 태명이니 부르고 싶은 대로 번갈아 불러도 상관은 없긴 했지만 이건 좀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름 하나 짓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과연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기 전에 연습을 해 볼 수도 없고 어디서 배울 수도 없으니 막막한 게 당연했다.

나는 부모의 사랑이 뭔지 잘 모른다. 그런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사실 어린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나는 잘 몰랐다. 어린애들이랑 놀아 줘 본 적도 없는데.

“선배, 저 진짜 아무거나 괜찮아요. 아깐 그냥 장난친 거였어요.”

내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자 정우진이 당황해서 말했다. 설마 쟨 내가 아까 그 호빵 때문에 삐치기라도 한 줄 아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정우진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갑자기 걱정이 돼서.”

“무슨 걱정이요?”

“잘 키울 수 있을지.”

임신을 하고 이런저런 변화를 겪고 있기는 했지만 사실 아직 그렇게 실감이 되진 않았다. 나중에 배가 불러도 마찬가지일 듯싶었다. 아이를 낳아서 품에 안으면 좀 실감이 날까?

“그런 걸 왜 벌써부터 걱정해요?”

정우진이 하는 말이 맞았다. 벌써부터 이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한 번 걱정이 되기 시작하니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냥 키우고 싶은 대로 키우면 되지 않을까요?”

성의 없어 보이는 말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다시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다들 그러지 않아요? 우리 둘 다 처음인데 잘 키우는 방법 같은 걸 어떻게 알아요.”

“…….”

듣고 보니 또 맞는 말이라 납득이 갔다.

“정 불안하면 나중에 같이 배우면 되잖아요. 책을 읽든 문화센터 같은 데 가서 강의를 듣든.”

정우진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게 좀 의외였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엔 좀 뭣하지만 나는 사실 정우진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상상이 되질 않았다. 정우진이 자기 자식을 품에 안아 주고 좋아해 주는 건 어떤 모습일까.

그려 보려고 애를 써도 백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날 보며 웃고 있는 정우진을 마주 보다가 물었다.

“넌 내가 나중에 아이를 낳아서 걜 사랑해 주는 모습이 상상이 돼?”

내 물음에 정우진은 고민도 하지 않고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또 너무 의외여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어떨 거 같은데?”

“선배는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니까 아이한테도 그렇게 대해 주겠죠.”

“…….”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로 태연하게 하는 말에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다정하고 상냥하다니? 살면서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건 너 말고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야 되는데.”

정우진은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서 물어보나마나였다.

“나 말고 누구한테 물어봐요? 선배에 대한 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아는데.”

혼잣말처럼 한 말에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우리 앤데 왜 그걸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요?”

정우진의 이런 점은 오랫동안 같이 살아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어떻게 대할 것 같은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본다는 말 중 대체 어디가 정우진을 자극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봤자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것과 별개로 정우진은 짜증을 내고 질투하고 있는 얼굴도 못나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성가시게 굴었다면 그게 누구든 어떻게 생겼든 귀찮기만 했을 텐데.

“우리 애 누가 잡아가면 어떡하지.”

“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걱정이 들었다. 만약 아이가 정우진을 닮았다면 도가 지나칠 정도로 예쁠 텐데 혹시 누가 잡아가기라도 할까 봐 어떻게 밖에 내보내지?

“사탕 준다고 따라오라 그러면 따라가는 거 아니겠지?”

나는 심각한데 정우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생각을 해 봐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나는 정우진이 어렸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고 있다.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꼬질꼬질하고 삐쩍 마른 몸 위에 누더기를 걸치고 다녀도 고아원 안에서 정우진은 독보적으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내 눈에 콩깍지가 껴서 그런 게 아니라 오랫동안 고아원을 경영해 왔던 원장님까지 정우진을 대놓고 편애할 정도였으면 말 다한 거 아닌가?

그런데 우리 애는 꼬질꼬질하지도 않을 거고 삐쩍 말라서 누더기를 걸치고 다니지도 않을 텐데 그럼 대체 얼마나 귀여울 거라는 거지?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이 다 쳐다볼지도 몰랐다.

“선배도 가만히 보면 정말 걱정이 많네요.”

이 험한 세상에서 아이를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난 우리 애 한정이야.”

“저는요?”

“누가 널 잡아가?”

“잡아갈 수도 있잖아요.”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도 선배 한정이에요. 다른 사람 걱정은 안 해요.”

“넌 좀 해야 되는 거 아니냐…….”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을 좀 많이 해 줘야 할 것 같은데. 떨떠름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지금은 다른 걱정 하지 말고 건강하게, 무사히 잘 낳을 생각만 하세요. 만약 선배 잘못되면 아무 소용도 없는 걱정들이니까.”

“그렇기야 한데…….”

“어차피 낳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선배가 걱정하는 일 없게 제가 잘할게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하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네가 잘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같이 잘해야 하는 거지.”

“맞아요. 아무튼 선배는 선배 생각만 하세요. 이기적이고 독선적으로.”

“…….”

뭘 또 이기적이고 독선적으로까지 생각하라는 거지. 그래도 얼추 정우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아서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정우진이 말하는 대로 조금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보기로 했다.

“우진아.”

내 부름에 내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이 움찔했다. 긴장한 것 같은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나는 이기적인 요구를 했다.

“나 자두 먹고 싶어.”

“네?”

“자두.”

얼마 전부터 새콤달콤한 게 먹고 싶었는데 다른 걸 아무리 먹어도 충족이 되질 않았다. 아직 봄이라고 하기에도 추운 날씨였지만 아무것도 자두를 대신할 수가 없었다.

“지, 지금요?”

정우진도 당황한 건지 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사실 지금 이 계절에 자두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혹시, 라는 게 있었다. 정우진이라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기적을 일으킬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정우진이라도 불가능한 일이 있었다.

“선배, 혹시 건자두는 별로예요?”

“…….”

“자두 절임은요?”

“…….”

“자두맛 사탕은 어때요? 자두 스무디는요? 젤리도 있긴 있는데…….”

자두 맛 주전부리부터 시작해서 말린 자두, 설탕에 졸인 자두 등 온갖 자두 관련 식품들을 가지고 왔지만 생과만은 없었다. 인터넷 검색은 물론이고 수소문에 부모님의 인맥까지 총동원했지만 실패했다. 사실 이럴 줄 알았지만 알면서도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냉동 자두를 구하긴 했지만 생자두와 맛이 비슷하기는커녕 아예 다른 걸 먹는 것처럼 맹맹하고 식감도 이상했다. 영원히 못 먹는 것도 아니고 몇 달만 기다리면 원 없이 먹을 수 있을 텐데, 지금 당장 먹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니 더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심리랑 비슷했다.

평소에 자두를 좋아했던 것도 아닌데.

“조금만 기다리면 된대요. 첫 수확 하자마자 연락 달라고 했으니까 금방 연락 올 거예요.”

“연락해 준대?”

“네, 연락처 남기고 왔어요.”

내 눈치를 보며 말하던 정우진이 잠시 날 보다가 물었다.

“우리 이사 가면 마당에 자두나무 심을까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두를 구하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에 한 말인 줄 알겠지만 정우진은 내가 장난이라도 그러자고 하면 진짜 자두나무 묘목을 사 와서 심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정우진이 집 앞에 자두나무를 심든 땅을 사서 자두 농장 주인이 되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두나무 같은 거 심든 말든 당장 자두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여름 되면 거실에 자두 쌓아 놓고 먹을 수 있게 해 줄게요.”

내가 계속 아무런 말도 하질 않자 정우진이 당황해서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나중에 저랑 같이 농장을 갈래요? 제가 따 줄 테니까 선배는 그냥 저 따라다니면서 먹기만 하세요.”

거실에 자두를 쌓아 놓든, 농장에서 정우진이 따 주는 걸 받아먹든 당장 먹을 수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인데.

하지만 아무리 이런 생각을 해 봤자 하늘에서 자두가 떨어질 일도 없고 그만 단념을 해야 했다. 이러다가 정우진이 자두를 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기혐오에 빠져 밤새도록 울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장난이 아니라 정우진이면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

“사탕 있다고 했지?”

“자두 맛이요? 있어요. 지금 먹을래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곧장 등을 돌려 급하게 방을 나섰다. 정우진이 나간 방문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이불 위에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른 아침이라 연락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 싶어 액정을 확인하자 김갑진이었다.

한국에 들어왔다는 문자에 답장을 보내려는데 정우진이 쟁반 가득 뭔가를 엄청나게 가져왔다.

“뭘 그렇게 가져왔어?”

쟁반 안에는 커다란 자두 맛 사탕 봉지와 씹어 먹는 자두 맛 젤리, 마시는 자두 맛 젤리, 자두 맛 음료에 자두 맛 요거트까지 있었다.

“그냥 사탕 하나만 먹으려고 했는데.”

“핸드폰은 왜요? 설마 자두 사진 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핸드폰을 들고 있자 정우진이 울상을 짓고 물었다. 자두가 먹고 싶어서 돌아 버릴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런 짓까지 할 만큼 미친 건 아니었다.

“아니야, 문자 와서 그래. 근데 나 사탕 하나만 먹으려고 했는데.”

“누가요?”

“갑돌이.”

사탕 껍질을 까 입 안에 넣자 새콤한 맛과 함께 인위적인 자두 향이 나기 시작했다. 못 먹을 만큼 맛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애초에 나는 사탕을 즐겨 먹는 편도 아니었고 들쩍지근하게 애매한 단맛이 계속 거슬렸다.

“뭐래요? 설마 또 한국 왔대요?”

이걸 뱉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리고 물었다. 갑돌이가 한국에 들어온 건 거의 1년 만이었는데 누가 보면 매달 오기라도 하는 줄 알겠다.

“만나러 나갈 거 아니죠?”

“…….”

“선배, 제발 말도 안 되는 생각 좀 하지 마세요. 집 안에서 걸어 다니는 것도 불안해 죽겠는데 나가긴 어딜 나가요?”

내 침묵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정우진이 얼굴색까지 바꾸며 기겁했다.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앞으로 아이를 낳을 때까지 혼자서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것이다.

“그냥 잠깐 만나서 얘기하고 밥만 먹을 거야. 예전처럼 술도 못 마셔서 시간도 얼마 안 걸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나가는 거 자체가 문제잖아요.”

“그게 뭐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선배 만약 밥 먹다가 저번처럼 갑자기 속 이상해지면 어떡할 거예요? 걷다가 부딪쳐서 넘어지면? 밥은 어디서 뭐 먹을 건데요? 그 음식점 음식이 위생적이라는 보장이 있어요? 김갑진이랑 얘기하다가 갑자기 기분 안 좋아져서 눈물 날 거 같으면 어떡할 건데요? 그 새끼 앞에서 울 거예요? 걷다가 다리 아프면? 갑자기 누가 시비 걸면 어떡해요? 길에 나가면 차도 많은데 그 차 운전하는 사람이 술 마셨으면 어쩔 거예요? 그 새끼가 선배를 지켜 줄 수 있을 거 같아요?”

“…….”

이 새끼 제정신인가…….

나는 걱정을 창조하고 있는 정우진을 황당한 얼굴로 보다가 물었다.

“난 그냥 친구 만나러 잠깐 집 앞에 나가는 거야. 어디 뭐, 몬스터 잡으러 던전 가는 게 아니라. 그리고 너 왜 내 친구한테 이 새끼, 저 새끼 그래? 걔가 네 친구냐?”

“지금 내 앞에서 다른 사람 편들어요?”

“편을 왜 나눠, 갑자기?”

충격받은 얼굴로 묻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더 충격받은 얼굴로 물었다. 임신을 하고 내 감정기복이 심해진 뒤로 정우진이 이렇게 황당한 소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임신하기 전에는 이런 게 일상이었는데 잠깐 안 그랬다가 오랜만에 들으니 충격이 두 배였다.

예전에는 도대체 이런 말을 어떻게 듣고만 있었을까. 그동안 내가 득도하지 않은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아직 별로 힘들지도 않고 걷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어. 차라리 배 더 나오기 전에 만나는 게 낫지.”

“그냥 전화로 얘기해도 되잖아요. 아니면 문자를 하든가. 밥을 같이 먹고 싶으면 영상통화 하면서 먹어요.”

“너 술 마셨니?”

이 새끼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너무 기가 막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저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평소에는 저도 뭐라고 안 하잖아요. 근데 지금 선배는 홀몸도 아니고 조금만 걸어도 힘들어하면서 어떻게 혼자 나간다고 그래요? 아니면 저도 데리고 가요.”

“…….”

“혼자서는 절대 안 돼요. 따라가서 아무 말도 안 할게요. 그냥 옆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할 테니까 무조건 저도 데리고 가세요. 아니면 못 나가요.”

“…….”

표정이나 말투를 보니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정말 날 따라올 것 같아서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하려는데 정우진이 다시 내 말을 가로챘다.

“있는 듯 없는 듯 얌전히 있을게요.”

“넌 내가 그러라고 할 거 같냐?”

“그럼 전화해서 1년만 기다리라고 하세요. 무사히 낳고 나면 그때 만나자고.”

정우진이 또 말도 안 되는 소릴 진지하게 했다. 너무 기가 막히고 황당해서 말문이 막힌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정우진, 내가 지금 너한테 할 말이 많은데……. 일단 결론부터 말하면 나 혼자 가서 만나고 올 거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지금 내 황당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정우진이 자기가 개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까? 심각한 얼굴로 할 말을 고르고 있는데 정우진이 덩달아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가지 말라고 해도요?”

“그래.”

“…….”

내가 짧게 대답하자 정우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정우진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저 데리고 가지도 않을 거예요?”

“어.”

다시 짧게 대답하자 잠시 입을 다물고 날 쳐다보던 정우진이 대단한 해결책이라도 찾은 듯 입을 열었다.

“그럼 몰래 따라갈래요.”

“그게 몰래냐?”

“안 들킬 자신 있어요. 진짜예요. 선배도 한 번도 못 알아차렸잖아요.”

“뭐?”

갑작스러운 충격 고백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이 씨발……. 야! 모르게 할 거면 아예 계속 모르게 하든가, 그걸 나한테 말을 하면 어떡해!”

결국 참지 못하고 내가 고함을 지르자 정우진이 오해하지 말라는 듯 무해한 척 말했다.

“예전에 그런 거지, 지금은 안 그래요.”

“네가 말하는 예전이 언젠데? 한 10년 전쯤 되냐?”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선배도 그 새끼, 아니. 김갑진도 모르게 할게요. 그럼 됐죠?”

난 답답해 죽겠는데 혼자만 일이 해결됐다는 듯 속 시원하다는 얼굴로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니까 그걸 나한테 왜 말을 하냐고!”

“혹시 나중에 들키면 선배가 화낼지도 모르잖아요.”

“화낼 거 같으면 애초에 하지를 마!”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한테 말하고 몰래 따라다니다가 걸리면 내가 화 안 낼 거 같아? 그리고 지금은 내가 화 안 내고 있는 거 같냐?”

“그러니까 선배가 그냥 안 나가면 되잖아요…….”

정우진이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이 와중에도 그 모습이 너무 불쌍해 보여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눈을 질끈 감고 이마를 짚자 정우진이 사색이 된 얼굴로 내 팔을 붙잡았다.

“왜요? 머리 아파요?”

“대가리가 터질 거 같아.”

“쉬면 나을 거예요. 따뜻한 거라도 마실래요? 우유 데워 줄까요? 아니면 레몬청 타 줄까요? 한 잔 마시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이때다 싶어서 주절주절 떠들던 정우진은 내가 눈을 치켜뜨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입술을 꽉 깨물고 한숨을 쉬며 물었다.

“왜 만나러 가는 건데요?”

외국에 있던 친구가 거의 1년 만에 한국에 들어왔는데 왜 만나러 가냐고 묻는 게 이상했다.

“오랜만이니까 얼굴 보러 가는 거지.”

“얼굴만 볼 거면 그냥 영상통화 해도 되잖아요.”

“안부도 묻고 그동안 뭐 하고 지냈나, 뭐 그런 얘기도 하고…….”

“전화…….”

“…….”

“…….”

무거운 침묵이 잠깐 흐르다가 먼저 입을 연 건 정우진이었다.

“잘못했어요.”

“네가 뭘 잘못했는데.”

“……선배 말하는 거 잘 안 듣고…….”

“모르겠으면 그냥 모르겠다고 해.”

“모르겠어요…….”

정우진이 자기가 뭘 잘못한지도 모르고 혼나는 개처럼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목이 타서 정우진이 조금 전에 가지고 온 자두 맛 주스를 뜯어서 벌컥벌컥 마셨다.

“선배, 화내지 마세요. 몸에 안 좋아요.”

그 말에 나는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주스를 뱉을 뻔했다. 억지로 입 안의 주스를 다 삼키고 몇 번 기침을 하자 정우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등을 토닥거렸다.

“괜찮아요?”

“너 지금 병 주고 약 주냐?”

“제가 선배한테 병을 어떻게 줘요?”

“넌 왜 한마디도 안 지냐? 그냥 좀 닥치면 안 돼?”

“지금 우리 싸우고 있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지금 끝말잇기 하고 있니?”

내가 황당한 얼굴로 말하자 정우진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전 그냥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선배 화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그 말에 나는 우선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빠르게 뛰던 가슴을 진정시키고 눈을 뜨자 정우진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서 만날 거예요?”

“아직 몰라. 얘기해 봐야 돼.”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어서 가만히 기다리자 정우진이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제가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주고 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계속 저한테 문자 보내 주세요.”

“…….”

한 발자국 물러선 제안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그냥 정우진이 말한 대로 같이 가는 게 어떨까 잠깐 고민하기도 했지만 역시 그건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미친 짓이었다.

임신하기 전에도 정우진은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거나 신체적인 접촉을 하면 주변에서 알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심하면 이성을 잃은 미친놈처럼 변했다.

그런데 평소보다 열 배는 더 걱정이 많아진 정우진이 제정신으로 내 옆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우리 둘이 나가는 거면 내가 나설 일이 없어서 상관이 없지만 우리 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면 말이 달라졌다.

“어디서 기다릴 건데?”

“그냥 아무 데나……. 차 안에서 기다려도 되고,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정우진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황당한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 싶어서 이쯤에서 합의를 보기로 했다.

“알았어. 근데 문자를 쉬지 않고 계속 보낼 수는 없으니까 30분에 한 번씩 보내 줄게. 다치지도 않고 무사히, 안전하게 독이 없는 평범한 밥을 먹고 있다고. 그럼 됐지?”

“10분은 안 돼요?”

“어, 안 돼.”

단호한 내 말에 정우진은 입술을 삐죽거리기는 했지만 더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얼추 결론이 난 것 같아서 한숨을 내쉬는데 정우진이 불안한 얼굴로 날 불렀다.

“선배.”

“또 왜?”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서 질색을 하자 정우진이 심각하게 말했다.

“작년 가을에 저랑 같이 갔던 한정식 집 기억나요? 한옥에 연못이랑 정자 있고 소나무 엄청 많았던 곳이요.”

또 이상한 헛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내 예상과는 달리 너무 정상적이고 평범한 말이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 근데 갑자기 거기는 왜?”

“밥은 거기서 먹으면 안 돼요?”

안 될 거야 없었지만 갑자기 왜 한정식을 먹으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정우진을 쳐다봤다. 특별히 거기가 맛있으니 친구랑 같이 가서 먹으라고 할 애가 아닌데.

“거기 수저가 은수저거든요.”

“그게 왜?”

갑자기 은수저는 무슨 은수저야? 의아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문득 머리에 스치는 생각에 나는 기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진짜 미쳤냐?”

“그러게 갑자기 독 얘기는 왜 해요, 불안하게!”

“그렇게 불안하면 차라리 네가 따라와서 기미를 봐!”

기가 막혀서 소리치자 정우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쟁반 위에 있는 사탕을 한 주먹 쥐어서 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솔깃하긴 뭘 솔깃해, 미친놈아!”

“그냥 우리 집에 데리고 오면 안 돼요? 제가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 줄게요. 맛있는 거, 선배가 먹고 싶은 거 다 만들어 줄게요.”

정우진은 내가 던지는 사탕을 피하지도 않고 고스란히 다 맞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선배 친구는 뭐 좋아한대요? 그것도 제가 만들 수 있어요. 한번 물어보기라도 해 보세요.”

그 말에 나는 한 주먹 쥐고 있던 사탕을 다시 쟁반 위에 놓고 한숨을 쉬었다.

“집에 초대하는 건 다음에 하고…….”

“다음이요? 다음에 또 만날 거예요?”

“…….”

마치 내가 외박이라도 할 거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필요 이상으로 놀라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결국 뒷목을 잡았다. 뒤로 넘어가려는 날 붙잡은 정우진은 잘못했다는 말을 이십 번쯤 하고 침대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선배, 진정하고 젤리라도 드세요.”

사람은 적응하는 생물이라더니 고작 몇 주 정우진이 멀쩡했다고 거기에 익숙해져 버렸다. 하지만 이쯤 되니 화가 난다거나 황당하기보다는 그냥 신기할 따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머리통을 열어 보고 싶었다.

정우진이 껍질을 깐 젤리를 내 입에 넣어 주며 다시 말했다.

“이젠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 할게요. 대신 30분에 한 번씩 문자 보내 주기로 한 거 잊으면 안 돼요. 그리고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오기 전에 꼭 연락해 주고, 밥 먹을 때 은수저도 꼭 쓰고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고 혹시 누가 시비 걸면…….”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정우진이 하는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물었다.

“시비를 걸긴 누가 걸어? 거기가 슬럼가 술집도 아니고 예약 손님만 받는 식당인데.”

“조금만 이상한 것 같아도 꼭 말해 줘야 해요. 어디 아픈 것 같다거나, 기분이 안 좋다거나 그런 거요. 알겠죠? 누가 계속 쳐다보는 것 같거나 이상한 헛소리 하거나…….”

내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건지 두서없이 떠드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나는 결국 다시 고개만 끄덕거렸다. 하지만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정우진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진아, 거긴 그냥 식당이야. 밥 먹으러 가는 식당. 밥만 먹고 차 한 잔 마시면서 얘기하다가 올 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이랑 혹시라도 얘기할 틈이 어디 있어? 어차피 방 안에서 먹을 건데.”

“…….”

순간 나는 정우진이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온 욕지거리를 삼키는 게 보였다. 또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정우진이 먼저 말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단둘이 있겠다고요?”

“네가 거기 가라며.”

“…….”

정우진이 흉흉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붕어도 아니고 조금 전에 자기가 했던 말도 잊은 건가. 황당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우진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독살을 예방할 수 있는 은수저와 밀폐된 공간에서 단둘이 있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불상사 중 뭐가 더 중요한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더니 곧 결정을 내렸는지 내 손을 부여잡고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문 다 닫지 말고 조금만 열어 두세요.”

그 말에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을 조금 열어 두면 그게 밀폐공간이 아니게 되나? 아니, 아니게 되는 게 맞긴 하지만 이런 발상 자체가 너무 웃겼다. 왠지 이건 좀 귀여워서 웃고 있는데 다음에 나온 말에 나는 정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기 충격기 챙겨 줄 테니까 손에 닿을 수 있는 곳에 두세요. 꼭이요.”

“갑자기 뭔 전기 충격기야?”

“호신용으로 챙겨 가세요. 아니면 가스총은 어때요?”

“…….”

“스프레이랑 호루라기는 너무 약하고 그렇다고 칼을 주자니 그건 또 너무 위험하고…….”

이대로 뒀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아직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정우진을 일으켜 내 옆에 눕혔다.

“헛소리 그만하고 그 얘기나 더 해 봐. 너 진짜 나 몰래 따라다녔어? 아예 집에서 나올 때부터 따라 나온 거야? 언제부터?”

이불을 들어 내 옆에 눕던 정우진이 멈칫했다.

“예전에요. 지금은 안 그래요. 저번에 말한 적 있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선배 따라다녔다고.”

“그러니까 그 예전이 언젠데?”

내 말에 정우진이 이불 위에 널브러져 있는 사탕을 만지작거렸다. 개별 포장이 된 분홍색 자두 맛 사탕을 한참 부스럭부스럭 만지던 정우진이 힐끗 날 보더니 곤란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말 안 하면 안 돼요?”

“왜?”

“말하기 싫어요.”

“왜?”

나는 완전히 정우진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물었다. 훔쳐보는 것처럼 날 힐끗거리며 보던 정우진이 시선을 돌렸다. 정우진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사탕은 어느새 세 개가 되어 있었다.

“예전에 그런 거지 최근은 아니에요.”

“그렇겠지. 난 최근에 혼자 나간 적이 없으니까.”

한참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 말은 조금 전과 별다를 게 없는 말이었다. 나는 머리를 괴고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너 어차피 내가 어디에 있는 줄 다 알잖아. 근데 왜 따라다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요.”

“무슨 사태? 외계인이라도 침공한대?”

“그냥 여러 가지…….”

정우진이 말꼬리를 흐렸다. 계속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어서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정우진의 배 위에는 사탕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왜 말하기 싫은데?”

그게 더 궁금해서 다시 묻자 정우진이 조금 고민하는 것 같더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건 제 프라이버시잖아요.”

“뭐?”

“…….”

“뭐라고? 프라이버시?”

나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래서 되물었지만 다시 말해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들었다. 정우진이 ‘그건 제 프라이버시잖아요.’라고 한 말을.

“너 방금 프라이버시라고 했어?”

“그냥 취미 같은 거예요.”

“취미? 하.”

“…….”

“하하하!”

나는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박장대소를 하면서 배를 부여잡고 있는데 정우진이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모르는 척해 주면 안 돼요?”

“아흑, 아, 배야……. 아하하!”

웃다가 눈물이 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젖은 눈가를 닦으며 헐떡거리다가 힐끗 정우진을 쳐다봤다. 뚱해 보이는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웃음이 터졌다.

“왜 자꾸 웃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우진이 저런 말을 하는 게 너무 웃겼다. 몰래 사람을 따라다니는 게 취미인 것도 웃기지만 저 입에서 프라이버시라는 말이 나온 게 더 웃겼다.

“야, 너 진짜 웃긴다. 너한테 프라이버시가 어디 있어? 죽을래?”

겨우 진정을 하고 숨을 고르면서 말하자 시종일관 뚱한 얼굴로 있던 정우진이 토끼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지금 친구 만나서 밥 먹으러 나가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뭐? 프라이버시?”

“선배…….”

눈을 크게 뜨고 있던 정우진이 갑자기 놀란 얼굴로 날 불렀다. 아니, 그건 놀랐다기보다는 재림하는 예수라도 본 듯 크게 감격한 얼굴이었다. 정우진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자 배 위에 쌓여 있던 사탕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나 지금 죽어도 괜찮을 거 같아요.”

“아니, 진짜 존나 어이가 없네.”

말이 몰래 따라다니는 거지, 이건 그냥 스토킹이었다. 스토킹은 범죄였으니 풀어 말하자면 정우진은 범죄를 저지르는 게 자기 취미라고 말한 셈이었다. 그리고 말을 하면서 느낀 건데 이게 범죄라는 걸 지금 깨달은 나도 너무 웃겼다.

“맞아, 나한테 프라이버시 같은 게 어디 있어. 이제 뭘 하든 다 선배한테 말하고 할게요.”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정우진이 사이비 신도 같은 말을 했다. 감동과 흥분에 젖은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한층 더 정우진을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한 번 정우진이 했던 말이 있었다. 약속이 있어서 몇 시간 정도 집을 비울 때 내가 보고 싶어서 날 찾아다닌다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것도 그런 것의 연장인가 싶었다.

그 뒤로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어플을 깔아서 좀 나아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야, 그래도…….”

그래도 따라다니지는 말라고 하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갑자기 내 위로 올라왔다. 내 얼굴 옆을 손으로 짚고 날 위에서 내려다보는 얼굴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붉었고 눈동자는 동공이 풀려서 반쯤 맛이 가 있었다.

“갑자기 왜 이래?”

황당한 얼굴로 물었지만 들려오는 건 동문서답이었다.

“선배 혼자 걸을 때 주머니에 손 넣고 걷잖아요. 근데 급한 일 있거나 빨리 걸을 땐 주머니에서 손 빼고 진짜 엄청 씩씩하게 걷는 거 알아요? 편의점 들어가려고 손으로 문 밀 때 선배는 손가락 다 펴고 밀거든요. 그때 마디가 살짝 구부러졌다가 다시 펴지는데…….”

“야, 너 설마 내가 편의점 갈 때도 따라 나왔어?”

“손가락 구부러졌다가 다시 펴지는 거 너무 귀여워.”

“뭐라고?”

갑자기 튀어나온 정리되지 않은 말들은 피가 뚝뚝 흐르고 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지나치게 날것이었다.

“걷다가 길에 뭐 떨어져 있거나 큰 소리 들리면 고개 돌려서 쳐다볼 때 선배가 짓는 표정이 있거든요. 그것 좀 안 하면 안 돼요? 그리고 횡단보도 건너려고 기다릴 때 멍하게 있다가 신호등은 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움직이면 따라 움직이잖아요. 그거 위험한데 왜 그러는 거예요? 그 사람이 무단횡단 하는 거면 어쩌려고 그래요? 신호등 한 번 보고 움직이면 안 돼요? 그리고 가끔 횡단보도 하얀 줄만 밟고 건너가는 건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보다가 나 죽으라고 그러는 거죠?”

“…….”

“우리 가끔 밖에서 만나기로 했을 때 선배가 나 기다리고 있는 거 너무 좋아요. 그래서 계속 늦게 가 보려고 했는데 자꾸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제가 기다린 적이 많았잖아요. 근데 그것도 너무 좋아요. 그리고 선배가 오면 나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데 그것도 너무 좋고, 아. 선배가 울 때도……. 울면서 말하는 거…….”

내가 술을 다섯 병쯤 마셔도 이것보단 더 논리정연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만큼 정우진은 두서없이 그저 속에 있는 것들을 쏟아 내기만 했다.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하는데 날 내려다보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떠들던 정우진이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뚝 하고 내 눈가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선배가 말해 주는 거 너무 좋았어요.”

“…….”

“분명 힘들어서 한 말이었을 텐데, 그때 너무 좋아서 내가 정말 제정신이 아니라고. 계속 울고 있는데, 힘들어서 울면서 말하고 있는데 너무 좋아서…….”

한 번 떨어진 눈물은 정우진이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계속해서 내 얼굴 위로 떨어졌다. 젖은 눈으로 날 내려다보며 횡설수설 말하던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입술을 한 번 깨물고, 다시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정우진이 편의점 문을 열 때 손가락이 구부러지고 어쩌고저쩌고 할 때는 그저 황당했지만 또 이렇게 울고 있는 걸 보니 손가락 끝이 간지러웠다.

“선배.”

잠긴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정우진은 내 얼굴 위로 떨어진 물방울 위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고 가련하지만 제정신은 아닌 것 같은 눈으로 날 보며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해 주세요.”

“뭘?”

“소중한 사람이라고.”

“…….”

말을 하는 와중에 다시 눈물이 후드득 내 얼굴 위로 떨어졌다. 정우진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몸을 숙여 내 어깨와 목덜미 쪽으로 얼굴을 묻었다. 작게 떨리고 있는 몸을 마주 안자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한테 프라이버시가 어디 있냐고 그거도 다시 말해 주세요.”

“…….”

정우진이 귀여운 건 사실이지만 이런 점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함께 살다 보면 이런 것도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올까?

“그리고 뭘 하든 숨기지 말고 다 말하고 사랑하고 넌 내 거고 다른 사람한테 눈길만 줘도 죽여 버릴 거고…….”

“그런 말은 안 했잖아.”

“선배. 너무 좋아요.”

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하자 정우진이 내 목덜미에 젖은 눈가를 비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

“선배. 선배.”

“…….”

나도 좋아한다고 말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우리 사이에 이불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바짝 붙어 있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 이런 것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흥분을 한 거지? 왜? 대체 어떤 지점에서?

천장을 보며 황당해하고 있는데 한참 날 부르며 우는 소리를 내던 정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울어서 눈가가 붉어진 건지 흥분을 해서 붉어진 건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그때 정우진이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제정신이 아니라 울면서 나도 내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른 채 속에 있는 것들을 말했을 때였다. 물론 그때 내가 했던 말은 전부 다 진심이었지만 맨 정신에 저런 말을 들으니 낯이 뜨거워졌다.

“야, 하지 마.”

내가 기겁하며 말하자 정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소중한……. 흑, 소중하대.”

“…….”

하지만 말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정우진이 다시 울었다. 그걸 보며 나는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말해 준 게 얼만데 고작 소중하다는 말에 왜 저렇게 감격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누가 보면 내가 한 번도 그런 말들을 해 주지 않은 줄 알겠다.

소중한 게 당연한 건데 이런 걸 꼭 말로 해 줘야 아나? 왜 몰랐던 사람처럼 구는지도 모르겠고, 이런 건 당연히 말 안 해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가 그동안 같이 붙어 있었던 게 얼만데.

“선배, 다시 말해 주세요.”

정우진이 울면서 보채는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

“왜요?”

그런 말은 원래 하라고 자리를 깔아 주면 더 하기 힘든 법이었다. 그냥 분위기를 타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거지, 갑자기 하라고 한다고 어떻게 말해?

“날 대하듯 대…….”

“야! 하지 말라고!”

내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정우진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저한테는 사생활이 없어요. 왜냐면 저는 선배의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저 입에서 나오는 말을 더 이상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손을 뻗어 뒷목을 당겨 입술을 막아 버리자 입 안으로 앓는 소리를 내는 게 느껴졌다. 이젠 숨길 생각도 없는지 아까부터 발기해서 단단해진 걸 문지르며 빈틈없이 붙어 왔다.

조금 격할 정도로 입 안을 핥고 혀를 빨다가 입술을 뗀 정우진이 흥분한 얼굴로 날 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를 이로 물었다. 피가 날 만큼 세게 문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간지럽다고 할 만큼 살살 문 것도 아니었다.

끝까지 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말했다.

“아직 안 되는 거 알지?”

“네?”

“초기에는 위험할 수도 있고, 중기는 돼야 안전하다고…….”

병원에서 들었던 말을 기억하며 말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 할 건데요?”

“뭐?”

“낳을 때까지 안 할 거예요. 특히 삽입은.”

“…….”

당연한 거 아니냐는 얼굴로 말하는 정우진을 멀뚱멀뚱 보다가 나는 당황해서 물었다.

“아예 안 한다고?”

“네.”

털끝만큼의 작은 여지도 없이 단호하게 하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조금 더 자세히 물었다.

“임신 초기 말고 중기에도? 아예 자리 잡고 병원에서 이쯤이면 해도 된다고 말해도?”

“네. 그래도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안 할 거예요. 그리고 삽입 외에 다른 걸로 기분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은 많으니까…….”

그럴 거면 그냥 하면 안 되나? 뭘 이렇게까지……. 어차피 평소에 하던 것처럼 죽을 것같이 하지도 않을 텐데 뭔 상관인가 싶었다. 그리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먼저 세운 게 누군데?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말했다.

“그럼 너도 흥분하지 마.”

“어떻게 그래요? 선배가 네 인생은 내 거라고 했는데.”

“내가 언제 그랬는데?”

“다시 생각하니까 또 눈물 날 거 같아. 진짜 너무 좋아요.”

정우진이 또 울먹거리면서 안겨 왔다. 몸을 붙이자 또다시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것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너 왜 자꾸 세워?”

“선배, 저 쳐다보면서 이름 불러 주세요.”

“뭐?”

눈물 젖은 눈으로 날 바라보는 모습은 흡사 비 오는 날의 수국 같았지만 저 입에서 나오는 말은 수국과는 딴판이었다.

“선배가 내 눈 보면서 이름 불러 주면 진짜 금방 쌀 수 있을 거 같아요. 5초도 안 걸려요.”

“무슨 미친 소리야? 차라리 그냥 내가 입으로 해 줄게.”

이게 무슨 해괴한 플레이인가 싶어서 기겁하며 말하자 정우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네? 그냥 이름만 불러 주면 되는데, 왜요?”

“그게 무슨 미친 짓거리야? 싫어! 차라리 빨아 달라고 해!”

“안 돼요. 그럼 나 보면서 사랑한다고 말해 주세요.”

“싫다고, 씨발!”

“그럼 안 봐도 되니까 귀에 속삭여 주세요.”

“아악!”

귓가에 들려오는 낮은 숨소리에 소름이 돋아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결국 정우진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히 적중했고,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 해괴하고 이상한 플레이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 * *

며칠 뒤, 정우진이 그렇게 싫어하던 날의 아침이 밝았다.

새벽녘부터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죽상을 하고 있던 정우진은 내가 나갈 시간이 되자 전쟁터에 남편을 보내는 부인 같은 얼굴로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또 했다.

“30분에 한 번씩 꼭 문자 하고, 만약 또 만나자고 하면 약속 절대 잡지 마세요. 이제 한 번 보고 안부도 묻고 밥도 한 끼 했으니까 다음은 아이 낳고 만나자고 하세요. 애 다 키우고 학교도 보내고 한 20년 뒤에…….”

“…….”

나랑 같이 나갈 거면서 굳이 왜 현관문 앞에서 이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짼지 이제 세는 것도 지쳤다. 아니, 세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차에 타면 했던 말을 또 할 게 분명했으니까.

“선배, 알죠? 기분이 좀 이상하거나 아니면 몸이 이상하거나 그러면 바로 연락해 줘야 해요.”

아니나 다를까 정우진은 차에 타자마자 내게 안전벨트를 해 주며 옷을 입을 때 했던 말을 또 했다. 제발 그만 좀 하라고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말았다. 이러다가 수틀리면 겨우 떼 놨던 호신용 전기 충격기를 다시 가지고 올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냥 얌전히 대답이나 하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데 핸드폰에 진동이 왔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일찍 도착한 건지 갑돌이한테 문자가 왔다.

“왜요? 무슨 일 생겼대요? 다음에 만나재요?”

일말의 희망이라도 놓칠 수 없다는 듯 눈을 빛내며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벌써 도착했다고.”

내 말에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있던 정우진의 검은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왜 이렇게 빨리 왔대요? 재수 없게.”

정우진은 분명 늦게 와도 재수 없다고 했을 거다. 제시간에 도착해도 재수 없다고 했겠지.

성가시고 걱정스러운 잔소리를 듣는 와중에 식당에 도착했다. 안전벨트를 풀려고 하는 내 손등에 제 손을 겹친 정우진이 아까보다 더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아.”

그리고 그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정우진이 이러는 게 익숙하긴 했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내가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울상을 지었다.

“걱정돼서 미치겠어요.”

“그래, 갔다 올게.”

“선배, 문자 보내는 거 잊지 마세요.”

“알았어.”

뒷목을 당겨 가볍게 입꼬리 쪽에 입을 맞추고 차에서 내렸다. 돌계단을 올라가자 직원이 인사를 하고 내 이름을 물었다. 예약해 둔 방으로 안내를 받으면서 정우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안내받고 가고 있으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ㅠㅠ]

[ㅠㅠ]

[ㅠㅠ]

[ㅠㅠ]

보낼 거면 이어서 하나만 보내지 따로따로 보내는 바람에 핸드폰이 전화가 오는 것처럼 계속 진동했다. 인상을 찌푸리고 액정을 보다가 눈물바다가 된 한가운데 문자를 보냈다.

[사이드포켓 열어 봐.]

[ㅠㅠ왜요?]

[사탕 넣어 놨으니까 그거 먹으면서 기다려.]

[선배ㅠㅠ 제가 애예요?ㅠㅠ]

애보다 더하지. 그래도 잘 먹겠다는 문자를 보다가 직원이 열어 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도착했다던 김갑진이 내가 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미친. 깜짝이야.”

놀라서 어깨를 움찔하자 김갑진이 뭐라고 하려는 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내 뒤에 있는 직원을 보더니 헛기침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왜 욕을 하고 그래?”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정우진이 일부러 빙빙 돌아서 갈까 봐 예상 시간보다 일찍 나왔는데 김갑진은 그런 나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 직원이 밖으로 나가고 미닫이문이 닫히자마자 김갑진이 내 쪽으로 얼굴을 쑥 내밀고 물었다.

“야, 너 괜찮아?”

“뭐가?”

“임신했다며.”

김갑진은 수업 시간에 비밀 얘기를 하는 학생처럼 소곤거렸다.

“일단 축하해. 근데 몸에 아무 이상 없는 건 확실하대? 너한테 얘기 듣고 나도 좀 알아봤는데 진짜 남자가 애 낳았다는 사례가 있긴 있더라. 더 놀라운 게 뭔 줄 알아? 우리 회사에 나랑 별로 안 친하고 그냥 얼굴만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애 낳은 적 있대. 지금 일곱 살이고, 여자애. 사진 보여 줄까?”

“…….”

쉬지 않고 주절주절 떠드는 김갑진을 질색하며 바라보자 그가 의아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왜? 어디 안 좋아?”

“아니…….”

방금 전까지 정우진이 하는 말에 잠겨 죽을 것 같았는데 김갑진을 만나도 똑같았다.

“근데 여기서 왜 만나자고 했어? 여기 밥이 맛있냐? 비싸 보이기는 한데.”

“여기 수저가 은수저라서.”

“……?”

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는지 김갑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차라리 이해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영혼 없이 웃었다.

“지금 몇 주라 그랬지?”

“11주.”

“11주면 아직 초기 아니야? 초기엔 유산 위험 있어서 진짜 조심해야 한다고 하던데, 알지?”

“네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혹시 미국에서 나 몰래 결혼이라도 했나 싶어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묻자 김갑진이 말했다.

“사촌 누나가 얼마 전에 조카 낳았거든.”

“재경이 누나?”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묻자 김갑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정우진이랑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하도 지랄이 심해서 결혼식에도 못 갔는데 언제 임신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는지 모르겠다.

“누나 결혼하고 제주도 갔다고 했었나?”

“안 그래도 나 한국 와서 만날 때마다 너 잘 있냐고 물어보던데 다음에 같이 보러 갈래?”

“그래, 누나한테 연락해서 언제 시간 괜찮냐고 한번 물어봐. 근데 혹시 나 임신한 거 누나한테도 말했어?”

김갑진이야 그렇다 쳐도 재경이 누나는 자기 사촌 동생의 친구가, 그것도 남자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많이 놀랐을 거다. 어쩌면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서 좀 난감한 표정으로 묻자 김갑진이 고개를 저었다.

“안 했지. 우리 엄마랑 아빠한테도 말 안 했어.”

“…….”

“근데 다들 너 좋아해서 알아도 별말 안 할걸? 걱정은 하겠지만.”

별거 아니라는 듯 해 주는 말이 고맙기도 했지만 아직 내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아이를 낳고 나면 그때야 굳이 거짓말까지 해 가며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당장은…….

“내가 벌써 조카가 둘이나 생기다니.”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김갑진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재경이 누나 쌍둥이 낳았대?”

“아니, 아들 한 명.”

“그럼 그 아들이 둘째야?”

“아니, 첫째.”

“다른 사촌이 또 결혼해서 애 낳았어?”

“아니.”

내 질문에 연신 고개를 흔들던 김갑진은 내가 속으로 설마설마하던 걸 입 밖으로 꺼냈다.

“너 애 낳으면 난 걔한테 삼촌이니까 나한테는 조카지.”

“네가 왜 내 애 삼촌이야?”

내가 황당한 얼굴로 묻자 김갑진이 더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삼촌이지, 그럼 뭐냐? 내가 애 아빠는 아니잖아.”

“아니, 씨발. 존나 소름 끼치는 말 좀 하지 마.”

“내가 더 소름 끼쳐, 씨……. 아니, 야! 너 욕하지 말라니까?!”

반사적으로 날 따라 욕을 하려던 김갑진이 진저리를 치더니 정색했다. 그러더니 정우진도 내게 하지 않았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야, 너 지금 하는 말 애도 다 들어. 욕하지 말고 좋은 말만 하고 좋은 것만 봐야지.”

“뭔 헛소리야. 내가 좋은 것만 봐야 하면 널 보러 나왔겠냐?”

“이 새끼 말이 존나 심하네.”

서로 질색팔색 하며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음식이 들어왔다. 식탁에 모든 음식이 정갈히 차려지고 직원이 나갈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다가 은수저를 발견하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걸 정우진에게 보내고 몇 초 뒤에 답장이 왔다.

빈 사탕 껍질이 찍힌 사진이었다.

[꼭꼭 씹어서 천천히 먹어요.]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네가 임신을 하다니.”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어.”

정말 내가 임신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나 김갑진은 물론이고 정우진조차 상상도 못해 본 일일 것이다.

“근데 그럼 너 학교 다닐 때 그 선배랑은 진짜 만났던 거야?”

“……?”

은수저를 들어 맑은 소고깃국을 떠먹으려다가 멈칫했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김갑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뭐가? 무슨 선배?”

“아닌가?”

“무슨 소린데?”

갑자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김갑진이 이젠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사람 얘기를 꺼냈다.

“너 1학년 때 같이 알바 하던 선배 기억 안 나? 너 학교 밑에서 카페 알바 할 때 커피 너무 못 만든다고 잘렸잖아.”

“기억나. 그게 왜?”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카페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은 기억이 났다. 그 뒤로 뭘 만드는 아르바이트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차라리 힘들어도 몸으로 때우는 게 낫지, 레시피대로 뭘 만드는 게 그렇게 힘들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너 선배 집에서 자주 자고 학교 오고 그랬잖아. 아르바이트 끝나고 같이 술도 자주 마시고. 그 선배 학교에서 게이라는 소리가 있어서 그때 너도 혹시 그런 거 아니냐는 말 나온 적 있었는데 몰랐어?”

“…….”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내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리자 김갑진이 당황한 얼굴로 내 손에 다시 숟가락을 쥐여 주며 말했다.

“아니면 말고. 나도 그때 그 소리 듣고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긴 했어. 난 그때 네가 그쪽인지 몰랐으니까……. 아니, 아무튼 아니면 됐어.”

“그쪽이라니? 나 게이 아닌데?”

내 말에 김갑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게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설마 지금까지 내가 동성애자인 줄 알았나?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김갑진이 가만히 날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혹시 널 여자라고 생각하는……. 뭐 그런 거야?”

“뭐?”

“네가 아니면 정우진이? 그래서 게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까부터?”

김갑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개 짖는 소리도 이것보단 더 알아듣기 쉽겠다는 내 표정을 읽은 건지 김갑진이 다시 물었다.

“너희 둘 다 남자잖아.”

“그게 왜?”

“근데 게이가 아니라고? 그럼 뭔데?”

“…….”

나는 그제야 김갑진이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한 번도 이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정우진이랑 나는 같은 성별이라는 것을.

나도 정우진도 서로가 서로를 동성애자라고 생각하거나 그쪽으로 의식해 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다른 사람들이 우릴 보면 당연히 게이라고 생각하겠구나.

“난 그냥…….”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낮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무튼 게이는 아니야. 남자를 연애 대상으로 보지도 않고.”

“……?”

딱히 내가 남자를 좋아해서 정우진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지금껏 살면서 남자를 보고 설레거나 좋아한다는 마음을 가진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앞으로도 내가 죽을 때까지 그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 둘은 뭔데, 그럼?”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시 묻는 김갑진을 가만히 보다가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난 그냥 걔가 정우진이라서 좋아하는 거지, 내가 게이인 건 아니야.”

내 말에 김갑진의 눈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슬금슬금 내 시선을 피하고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 그래…….”

“…….”

“…….”

“……야, 씨발. 네가 물어봐 놓고 반응이 왜 그래?”

무거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내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김갑진이 차게 식은 눈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아니……. 예쁜 사랑 해…….”

“반응이 왜 그러냐고!”

“국 맛있다, 야. 어서 먹어. 맛있네.”

김갑진은 할아버지처럼 허허허 웃으며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서 영혼은 느껴지지 않았다. 더 말해 봤자 내 무덤을 파는 것 같아서 그냥 입 다물고 밥이나 먹었다.

화제를 돌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밥을 다 먹어 갈 때쯤 김갑진이 물었다.

“넌 입덧 같은 건 안 하냐? 누나 임신했을 때 보니까 물에서도 냄새 난다고 물도 잘 못 마시던데.”

“난 그런 거 없어. 그냥 먹고 싶은 것만 많아지고……. 입맛이 좀 변하긴 했지만.”

“다행이네. 누나 입덧하는 거 얘기만 들었는데도 진짜 장난 아니더라. 너무 힘들어서 둘째는 계획 없대.”

나 대신 정우진이 입덧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해 봤자 김갑진은 또 예쁜 사랑 하라는 둥 그딴 말밖에 안 할 것 같아서.

“예정일이 언제야?”

“시월쯤.”

“뭐 필요한 건 없냐?”

그 말에 나는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나한테 필요한 게 뭔지 딱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필요하다고 느낄 때쯤에는 항상 정우진이 먼저 눈치를 채고 준비를 해 줬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을 거다.

“먹고 싶은 건?”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김갑진이 다시 물었다. 그 말에 반사적으로 없다고 하려다가 혹시나 싶어 물었다.

“자두.”

“뭐?”

“자두 어디서 못 구하냐?”

“…….”

내 갑작스러운 말에 김갑진은 정우진이 처음 자두 소리를 들었을 때만큼 당황했다.

“그거 여름 과일 아니야? 그걸 지금 어디서 구해?”

“그러니까…….”

“하우스 자두 같은 것도 없어?”

그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갑진이 안타까운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그러더니 머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쿨피스라도 사 줄까?”

“됐어.”

정우진이 백방으로 찾아다녀도 결국 구할 수가 없다고 결론이 났을 때 이미 단념을 했는데도 다시 우울해졌다. 실망감을 감추기가 힘들어 얼른 말을 돌렸다.

“다음에 우리 집 놀러 와.”

“집에?”

“정우진이 맛있는 거 해 준대.”

정우진의 성격이 어떤지 대충 짐작하고 있는 김갑진은 선뜻 알겠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마음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너 뭐 좋아하는지 물어보라던데.”

내 말이 믿기질 않는지 김갑진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날 쳐다봤다. 그걸 보며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랑 술 마실 때마다 매일 취해서 집에 늦게 들어가서 그렇지, 걔가 개인적으로 너한테 감정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야.”

“늦게 들어간 건 그렇다 쳐도 취한 게 왜? 술을 취하려고 마시지, 안 취할 거면 왜 마시냐?”

코웃음을 치면서 하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꽉 막혀 있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통쾌함에 나는 흥분해서 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정우진이 그걸 모른다니까? 술을 마시는 건 좋은데, 취할 때까지 마시지 말래. 이게 말이냐?”

“그게 밥을 먹어도 배부를 때까지는 먹지 말라는 거랑 뭐가 달라?”

“내 말이!”

임신만 안 했으면 당장 술 한 병 시키는 건데, 그럴 수가 없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김갑진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잊지 않고 30분에 한 번씩 문자도 보내고 따뜻한 차까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김갑진이 물었다.

“나 차 가지고 왔는데 데려다줄까?”

“아니, 정…….”

정우진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려다가 멈칫했다. 내가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자 김갑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왜?”

“너 아까 했던 말 정우진한테는 하지 마.”

“무슨 말?”

“그 선배 얘기.”

둘이 만나서 이런 대화를 나눌 일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라는 게 있었다. 솔직히 그때 일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래도 이런 말이 정우진 귀에 들어가면 여간 귀찮아지는 게 아니었다.

혹시라도 정우진이 알게 됐을 때 일어날 상황들 몇 개를 상상하다가 진저리를 치고 있는데 문득 알겠다는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김갑진의 시선이 날 빗겨 내 뒤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안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아니, 이게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나한테 뭘 말하지 마요?”

“…….”

“…….”

그리고 기어코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발밑으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가만히 날 보다가 시선을 돌려 김갑진을 보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안녕.”

어색함이 땅을 뚫고 지구 내핵까지 도달하는 목소리였다. 김갑진은 나와 정우진을 번갈아 보며 당황하고 있었다. 일단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입술을 달싹이는데 정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식사 잘 하셨어요?”

“어? 아, 어. 맛있더라.”

“선배랑 가끔 오는데 깔끔하고 괜찮더라고요. 이제 가시는 거예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좀 더 얘기하시지.”

“…….”

“…….”

정우진은 말하는 내용과 그 뜻이 정반대로 들리게 하는 이상한 재주가 있었다.

“아니야, 이제 가 봐야지. 서주도 쉬어야 하고.”

그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김갑진을 쳐다봤다.

“쉬긴 뭘 쉬어? 나와서 밥 먹은 거밖에 없는데.”

“재경이 누나 임신했을 때 보니까 밖에 조금만 있어도 힘들어하더라고. 금방 지치기도 하고.”

“난 안 그래.”

내가 발끈하자 김갑진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 두 놈의 새끼들이 나한테 왜 지랄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오늘 혼자, 아니. 정우진이 데려다주고, 날 기다리고, 집에 같이 가기는 하지만. 아무튼 혼자 나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저런 소리를 하면 앞으로 더 힘들어질지도 몰랐다.

아니, 좀 전에 우리가 하는 말을 들었다면 혼자 나오기는커녕 같이 나오기도 힘들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난 간다.”

“데려다 드릴까요?”

빈말일 게 뻔한 말에 김갑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차 가지고 왔어.”

“다음에 또 봬요.”

두 번은 묻지 않고 또 빈말을 하는 정우진을 보며 김갑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또 보자.”

서로 빈말 가득한 인사를 짧게 하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김갑진이 떠난 자리를 가만히 보다가 힐끗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쳐다봤다. 김갑진이 있는 자리에서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멱살을 잡지 않은 것만으로 이미 남은 인내심을 다 썼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정우진은 어쩐 일로 딴말을 했다.

“괜찮아요?”

“뭐가?”

“몸은 괜찮냐고요. 별일 없었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팔과 어깨를 잡고 이리저리 몸을 돌리며 확인하기 시작했다.

“음식은요?”

“맛있었어.”

“다리 안 아파요?”

“여기서 집까지 걸어가도 될 거 같은데…….”

아까 뭘 말하지 말라는 거냐는 말까지 해 놓고 오히려 아무런 말도 하질 않으니 더 불안해졌다.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으니 묘하게 평소보다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알지 못할 만큼 미세한 변화였지만 한 번 그렇다고 느끼기 시작하니 목소리에서 북풍이 부는 것 같았다.

“아까 너한테 하지 말라고 했던 얘기는 혹시 네가 오해할까 봐 그랬던 거지, 내가 뭐 찔리는 게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야.”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먼저 그 주제에 대해 입을 열었다. 혹시 은수저에 칼이라도 붙었다고 생각한 건지 내 손가락 끝까지 확인하고 있던 정우진이 시선을 들어 날 쳐다봤다.

목소리만큼이나 눈빛이 차가웠다.

“선배.”

“어?”

날 부르는 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저 운전 못하겠어요.”

“뭐?”

“택시 타고 갈래요? 아니면 대리를 부르든가…….”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말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게 푸시시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지금 운전하면 사고 날 거 같아요.”

정우진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뭔가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나는 당황해서 손을 뻗었다.

“야, 너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

떨리고 있는 손을 붙잡자 정우진이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금방 내 시선을 피하고 입을 다물기에 나는 정우진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일단 차에 가자.”

“저 운전 못하겠어요.”

정우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여기에 서서 얘기할 건 아니고 일단 좀 앉아야 할 것 같았다. 정우진이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디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는지 물어보기도 두려웠다.

차에 도착해 앉자마자 정우진을 보며 말했다.

“일단 미리 말해 두는데 그 선배랑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

“…….”

“아니, 무슨 사이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네. 그냥 카페에서 같이 일했던 선후배 사이였어. 일할 땐 잠깐 친했는데 관두고 나서는 점점 연락 안 하다가 그 뒤로는 소식도 모르고.”

정우진이 지친 얼굴로 내 말을 가만히 들었다. 차라리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울기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무런 말도 없이 쳐다보기만 하니 미칠 것 같았다.

“1학년 때…….”

좀 더 자세히 설명하려고 입을 여는데 정우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알아요.”

“뭐?”

“그 사람 알아요. 카페에서 일할 때 그 사람이랑 같이 담배도 피우고 그랬잖아요.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계산 잘못하면 그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아, 맞아. 그랬던 적도 있었지. 그……. 뭐?”

정우진이 하는 말에 잊고 있던 게 떠올라 맞장구를 치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말을 이었다.

“근데 그 사람 얘기를 왜 나한테 말하지 말라 그래요?”

“…….”

정곡을 찌르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정우진이 내가 1학년 때 아주 잠깐 카페에서 일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그런 것보다 지금 난감한 건 이거였다.

그냥 같이 아르바이트했던 선배라면 나도 이렇게까지 할 말이 없지는 않겠지만 문제는 김갑진이 했던 말이었다.

그 선배가 게이라는 말이 있어서 같이 다니던 나도 잠깐 그 소문에 휘말렸었다고, 나도 그걸 지금 알았다고, 이런 말을 하면 정우진이 뭐라고 할까?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해졌다.

“왜 말을 안 해요? 둘이 나한테 말 못 할 짓이라도 했어요?”

차분하고 이성적이려고 노력하던 목소리가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난감한 얼굴로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갑돌이랑 밥 먹으면서 잠깐 그 선배 얘기가 나왔는데……. 아니, 그러니까 처음에는 게이 얘기를 하다가…….”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웃겼다. 내가 스무 살 때면 정우진은 고등학생일 때고, 우린 아직 만나지도 않았을 땐데 내가 왜 바람이라도 피운 것처럼 변명을 해야 돼? 정우진 성격이 이상하다고 해서 나까지 거기에 맞춰 잘못하지도 않은 걸 잘못했다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하늘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떳떳했다.

“그 선배가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그런 소문이 있었는데 잠깐 나랑 같이 다니면서 나도 비슷하게 소문이 나긴 했었대.”

“뭐…….”

“같이 일하고 가끔 술 마시고 그런 거밖에 없었어. 나 알바 금방 잘리고 그 뒤로는 따로 만난 적도 없고.”

내 얼굴이 제대로 보이긴 하는 건지 궁금할 정도로 정우진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선배, 그 사람 집에서 잔 적도 있지 않아요?”

“뭐? 무슨 소리……. 아.”

정우진이 한 말에 문득 그랬던 적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항상 마감은 선배가 했었는데 그때 무슨 일 때문에 내가 마감을 도와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같이 마감을 하고 고맙다고 선배가 술을 사 줬는데……. 그때 열두 시가 넘어서 할증 풀리면 집에 가려고 선배 집에 잠깐 갔던 적이 있었다. 거기서 또 마시다가 그대로 잠들었던 거 같은데.

한 번 생각나기 시작하니 잊고 있던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런 일도 있긴 했었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선배, 미쳤어요? 지금……. 아니, 어떻게…….”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떨고 있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 사람이 그런 줄 몰랐어. 그리고 그땐 그냥 술 마시고 잠만 잔 거야.”

“잠만 잤다고요?”

“그래, 잠. 그냥 잠.”

“잠을…….”

“수면! 슬립!”

잠을 잤다는 건 말 그대로 수면을 취했다는 거다. 분명 알 텐데도 정우진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건 이미 아주 오래된 일이고 지금 나는 그 사람이랑 연락을 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때 우린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는 게 가장 중요했다.

“내가 말했잖아. 난 몰랐다고. 그리고 그게 지금 몇 년 전 일인 줄 아냐?”

“시간이 무슨 상관이에요?”

그 말에 나는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정우진 입장에서는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그런 건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긴 했다.

“아무튼 진짜 아무것도 아닌 일이야.”

“근데 왜 나한테 말하지 말라 그랬어요?”

“네가 이럴 줄 알았으니까.”

“그래서 선배 친구도 알고 있는 걸 나한테 비밀로 하려고 했다고요?”

이 일은 나도 오늘 처음 안 일이라 정말 억울했다. 진짜 얼굴도 잘 생각이 안 나는데 왜 내가 추궁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야, 정우진. 지금은 모르겠지만…….”

“우진이라고 부르세요.”

“우진아, 지금은 모르겠지만 널 만나기 전에 있었던 내 인간관계를 다 너한테 말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 다 지나간 일인데. 비밀이라거나 숨기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때 일은 기억도 안 날 만큼 나한테 아무런 가치가 없어.”

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뭐. 말을 해.”

“말하기 싫어요.”

“그래도 해.”

“이래서 선배가 혼자 나가는 게 싫은 거예요. 나가면 안 좋은 일만 생기고…….”

그 말에 나는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너 진짜 끼워 맞추는 거 존나 잘한다.”

“매번 이랬다고요.”

“착각이야.”

“착각 아니에요.”

대체 언제 그랬냐고 물으려는데 정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한테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해서 다른 사람한테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

듣고 보니 그랬다. 묘하게 맞는 말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네 말은 그 사람이 날 좋아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남자 좋아했다면서요.”

“남자를 좋아한다고 상대방의 성별이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무슨 상조 회사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남자면 다 좋아하게?”

이런 말을 굳이 말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그래도 내 말이 어느 정도 통하긴 했는지 정우진은 아까보다 좀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 봤자 아주 조금이었지만 아까처럼 막 덜덜 떨고 그러지는 않았다.

“선배는 좀 알아야 돼요.”

그때 정우진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 팔짱을 끼고 말해 보라는 듯 가만히 쳐다봤다.

“선배가 얼마나…….”

“잠깐만.”

나는 정우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말하지 마. 나 진짜 소름 돋아서 죽을 거 같으니까.”

“…….”

내가 질색하자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굳이 정정하지 않는 걸 보니 정말 내 예상이 맞았나 보다. 진짜 미친 거 아닐까? 어떻게 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뻐 보인다는 말 알지?”

“선배는 고슴도치보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씨발, 진짜.”

진짜 소름이 끼쳐서 손으로 팔을 문지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던 정우진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했다.

“선배가 내 새끼였으면 좋았을 텐데.”

“뭐?”

“그럼 선배가 세상에 태어나서 눈 뜨는 순간부터 볼 수 있으니까 아무도 못 건드리게 보호해 줄 수 있잖아요.”

“…….”

보호가 아니라 감금이겠지…….

정우진이 하는 생각이나 말들에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걸 보면 아직 먼 얘기 같았다.

“넌 가끔 보면 진짜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아.”

“가끔만요?”

내 말에 정우진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뭔가 반응이 이상해서 미간을 구기자 정우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난 매일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네 입으로 그게 할 소리냐?”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자기가 미쳤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이 없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매일 그런 건 아니야. 그냥 가끔 도라이 같을 때가 있는 거지.”

“좋은 건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결국 웃어 버렸다.

“아무튼 이제 좀 괜찮아졌으면 집에 가자.”

내가 웃으며 말하자 정우진이 가만히 날 보다가 스타트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안 괜찮아요.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렇지. 다른 사람이 선배를 좋아하는 게 선배 잘못은 아니잖아요.”

“…….”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정우진 눈에 나는 바다 위에서 사람을 홀리는 인어처럼 보이는 건가. 아, 씨발. 내가 내 입으로 말하고 소름이 돋았다.

팔을 문지르고 있는데 문득 사탕 껍질이 눈에 들어왔다.

“추워요?”

“틀지 마. 답답해.”

히터를 틀려고 하는 정우진의 손을 잡았다 놓으며 말했다. 나는 자두 맛 사탕 껍질을 가만히 보다가 손을 뻗었다.

“답답하면 창문 좀 열까요?”

“아니. 사탕 맛있었어?”

“그냥 자두 맛 나고, 달고…….”

별로였구나. 나도 이거 좀 별로긴 하던데. 집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사탕을 생각하며 부스럭부스럭 껍질을 만지고 있는데 정우진이 힐끗 날 쳐다봤다.

“사탕 먹고 싶어요?”

“사탕 말고…….”

말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보자 그 짧은 사이에 내가 하려던 말을 눈치챈 건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선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자 정우진이 내 쪽을 보며 말했다. 갑자기 뭘 물어보려고 저러나 싶어서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제가 자두도 못 구해 와서 오늘 혼자 나간 거예요?”

“뭐?”

“그런 것도 하나 못 구해 오니까…….”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얘 설마 계속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어이가 없어서 정우진을 멀뚱멀뚱 보다가 말했다.

“넌 제발 그런 미친 생각 좀 하지 마.”

“어떡해요, 그렇게 먹고 싶은데 먹지도 못하고.”

“어쩌긴 뭘 어째, 그냥 기다리면 되는 거지. 그리고 그게 왜 네 탓이야?”

“선배 탓도 아니잖아요.”

정우진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눈으로 날 보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타까움 속에는 고작 자두 한 알도 구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자기 자신에 대한 비하도 포함되어 있었다.

“앞에 봐, 신호 바뀌었어.”

“나 진짜 쓰레기 같아…….”

“야, 너 죽을래? 말이 너무 심하잖아, 미친 새끼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발끈하자 정우진이 당황해서 말했다.

“선배 말고 제가요.”

“말 가려서 해.”

“…….”

매번 씨발 새끼, 미친 새끼 같은 소릴 하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쓰레기는 말이 좀 심하잖아.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나중에 자두 진짜 많이 사 줄게요.”

“알았어.”

“박스 쌓아 놓고 먹게 해 줄게요.”

“그거 오래 두면 물러져서 못 먹어. 조금씩 자주 사는 게 나아.”

“물러지면 또 사면 되죠. 그리고 남으면 잼도 만들고.”

자두 잼은 먹어 본 적 없지만 정우진이 만들 테니 분명 맛있을 거다. 나중에 잼을 만들면 빵에도 발라 먹고 과자도 찍어 먹고 우유에도 타 먹고 그냥 숟가락으로 퍼먹고…….

아, 씨발.

자두 먹고 싶어.

* * *

첫 수확한 자두는 덜 익어서 조금 단단하고 시큼한 맛이 많이 났다.

“많이 시어요? 며칠 숙성시키면 달고 말랑말랑해질 거예요.”

“…….”

이날만을 기다렸는데 내 예상과는 달리 너무 시고 단단해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 입 먹고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있자 정우진이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 우울하게 지내다가 숙성이 되어 붉게 물든 자두를 먹어 봤지만 그래도 역시 뭔가 부족했다. 자두가 먹고 싶었던 건 그냥 못 먹는 것에 대한 동경 같은 거였나? 가지지 못하니까 더 가지고 싶고, 뭐 그런 마음이었나?

분명 맛있긴 한데 막 그렇게 엄청나게 맛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아무리 숙성을 시켜도 껍질은 여전히 시었다. 정우진이 껍질을 까 준 걸 먹어도 이번에는 섬유질 같은 게 입 안에 자꾸 걸려서 거슬렸다.

“맛없어요?”

“맛있어…….”

“갈아 줄 테니까 주스로 마셔 볼래요? 아니면 잼? 설탕에 졸여 줄까요?”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 내 표정이 좋지 않았던 건지 정우진이 다급하게 말했다. 별로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또 됐다고 하면 정우진이 울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갈아 줘. 다른 거 넣지 말고 그냥 물만 조금 넣어서.”

내 말에 정우진이 껍질을 벗긴 자두를 갈아서 가져왔다. 자두 향도 좋고 신 맛도 많이 나지 않고 달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막상 먹으니 별로라 나는 빠르게 자두에 흥미를 잃어 갔다.

“선배, 이거 먹어 보세요. 이건 어때요?”

그리고 며칠 뒤, 정우진이 다시 어디선가 자두를 구해 왔다. 접시 위에는 껍질을 벗긴 자두가 먹기 좋게 잘려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포크로 찍은 자두를 입 안에 넣었다.

“……!”

그리고 입 안에 퍼지는 상큼한 자두 향과 적당히 단단한 과육, 달고 풍부한 과즙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동안 먹었던 자두와 비슷하지만 조금 달랐다.

바로 이거였다. 내가 원하고 그리워했던 자두가!

“맛있어요?”

“…….”

내 표정이 좋자 정우진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나는 그런 정우진을 보며 별안간 코끝이 찡해졌다. 세상 환하게 웃던 정우진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어 갔다.

“선배, 울어요?”

“너무 맛있어.”

“네?”

“흑…….”

씨발, 자두……. 진짜 너무 먹고 싶어서 꿈에도 나오고 정우진 몰래 인터넷으로 검색도 했는데. 긴 기다림을 보상받았다는 생각에 갑자기 가슴이 벅차올라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갑자기 울자 당황한 정우진이 들고 있던 접시를 내려 두고 날 끌어안았다.

“많이 사 줄 테니까 먹고 싶은 만큼 먹어요.”

“이건 왜 다른 자두랑 달라?”

“품종이 다른 거예요.”

“품종? 이름이 뭔데?”

“후무사요.”

나는 앞으로 후무사를 내 모든 포털 사이트의 비밀번호로 정하자고 마음먹었다.

눈물을 그친 나는 정우진이 껍질을 까 주는 족족 그걸 계속 받아먹었다.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열 개를 먹고 있는데 빠르게 자두의 껍질을 벗기던 정우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선배, 이제 밥 먹고 나중에 먹으면 안 될까요?”

“왜?”

“너무 많이 먹는 거 같아서…….”

“네가 먹고 싶은 만큼 먹으라며?”

내 물음에 정우진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먹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배탈 나면 어떡해요.”

“아직 안 아파.”

“그럼 하나만 더 먹고 남은 건 내일 먹어요.”

“왜 내일이야?”

아직 점심도 있고 저녁도 있는데.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걸 보며 뭐라고 하려는 순간, 갑자기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에 나는 화들짝 놀라 배에 손을 얹었다.

“왜요? 배 아파요?”

“…….”

“거봐요, 한 번에 이렇게 많이 먹으니까…….”

사색이 된 정우진이 들고 있던 과도를 내리며 울상을 지었다.

“많이 아파요? 병원 가야 돼요? 잠시 만요, 손만 씻고…….”

“잠깐만.”

“네?”

그리고 다시 느껴지는 감각에 나는 배를 더듬더듬 만졌다. 그러자 다시 배 속에서 뭔가 움직였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며 말했다.

“움직였어.”

“네?”

“미친…….”

그 기묘하고 이상한 감각에 나는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손을 씻고 온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내 배에 손을 올렸다. 아프지는 않냐고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한번 배 속에서 아이가 움직였다. 정우진도 그걸 느꼈는지 어깨를 움찔 하고 떨었다.

태동을 느끼기 시작한 뒤로 정우진의 과보호는 더욱 심해졌다. 달이 차면 찰수록 초기에 느꼈던 감정기복이나 불안함은 많이 사라졌지만 내가 괜찮아지는 만큼 정우진의 상태는 점점 안 좋아졌다.

달이 차고 시간이 지난다는 건 아이를 낳아야 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정우진의 걱정은 날로 심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옆에서 과하게 걱정을 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지, 오히려 반대로 내 마음은 차분해졌다.

“괜찮아?”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불안해하고 걱정이 많은 건 그렇다 쳐도 정우진이 하는 입덧은 너무 괴로워 보여서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못 먹겠어?”

“…….”

내 물음에 찬물로 세수를 한 정우진이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 주며 말했다.

“그래도 뭐 좀 먹어야지. 너 계속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힘없이 서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정우진이 천천히 눈을 뜨고 날 쳐다봤다. 그 모습이 너무 불쌍해 보여서 가슴이 아팠다.

“먹고 싶은 거…….”

기진맥진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정우진이 비 맞은 개 같은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팥빙수요.”

“뭐?”

“팥빙수…….”

나 대신 입덧을 하던 정우진이 자기 입으로 뭘 먹고 싶다고 말한 건 처음이었다. 나는 말을 못하던 아이가 처음 말을 했을 때처럼 놀라서 들고 있던 수건을 떨어뜨렸다.

“팥빙수가 먹고 싶다고? 진짜? 잠깐만.”

나는 황급히 욕실에서 나와 핸드폰을 찾았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정우진이 그랬던 것처럼 손수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당장 필요한 재료가 없었다. 배달 어플에 들어가 팥빙수를 찾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뒤에서 날 끌어안고 내 머리 위에 턱을 가만히 대고 있는 정우진에게 물었다.

“그냥 팥만 들어간 거 먹고 싶어? 초코 맛이나 다른 과일 들어간 빙수도 있는데.”

입덧을 하기 시작한 뒤로 유제품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을 하는 정우진을 위해 우유를 갈아서 만든 빙수는 다 제외시켰다.

“그냥 팥빙수요.”

“팥만 들어간 거?”

연유도 안 되겠지? 팥빙수 하나와 요청 사항에 연유는 빼고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주문을 했다. 그리고 팥빙수가 도착하자 다행히 정우진은 입덧을 하지 않고 잘 먹었다.

비록 다른 건 먹지 못하고 곱게 갈린 얼음과 팥만 먹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싶었다.

“팥죽 해 줄 테니까 먹어 볼래?”

“선배, 미안해요.”

“야,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말랬지?”

반쯤 죽은 정우진이 침대 위에 널브러져서 우울한 얼굴로 내게 사과하는 날이 많아졌다. 입덧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져서 결국 막달쯤에는 사 먹거나 어머니가 해 주시는 반찬으로 밥을 먹었다.

가끔 새벽에 눈을 뜨면 정우진이 내 머리맡에 앉아 울고 있는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물을 마시다가 턱에 힘이 들어갔다며 유리컵을 씹어서 깨부순 적도 있었다. 손과 입술을 다쳐서 피가 났고 잇몸은 많이 찢어져서 마취를 하고 꿰매야만 했다.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질수록 정우진은 마음을 잡기 힘들어 보였고, 그럼에도 내가 걱정하는 건 싫어서 괜찮은 척을 했지만 내 눈에는 무리를 하고 있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셋이 놀이공원 가도 좋겠다. 너 놀이공원 가는 거 좋아하잖아.”

“어디 가고 싶다고 말하지 마세요.”

“뭐? 왜?”

“버킷 리스트 같아서 불안하니까…….”

이런 날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내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우울해하거나 불안해하면 정우진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날 안심시켰다. 단 한 번도 내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누구 한 사람이 불안해하면 말을 들어 주고, 울면 달래 주고, 가끔은 같이 불안해하고 같이 눈물을 흘리며 열 달을 보냈다.

그리고 10월의 어느 가을 날.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아이는 아주 건강하게 태어났다.

* * *

내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말을 전해듣자마자 정우진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나란히 입원을 해서 누워 있는 동안 나는 정우진이 내가 임신한 뒤로 8kg이나 빠졌다는 걸 알았다.

속상해서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배에 난 수술 자국을 볼 때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게 너무 안쓰러워서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퇴원을 하고 정우진이 너무 힘들어 보이기에 산후 조리원에 갈까 생각도 해 봤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얘기를 꺼내는 순간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에 핏기가 사라져서 결국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아이만 낳으면 정우진도 좀 덜 힘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겨울이 이름 뭐 하지?”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있는 정우진 옆에 다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작명소에서 이름을 몇 개 받아 오기는 했지만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몸은 좀 어때요?”

“나보다 네 몸부터 걱정해야 되는 거 아니냐…….”

세 시간에 한 번씩 깨어나 분유를 먹는 아이 때문에 정우진은 거의 잠을 못 자고 있었다. 난 처음에 내가 잠귀가 어두워서 애가 우는 소리를 못 듣는 건가 했는데 가만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정우진은 아기가 깰 때쯤에 분유를 타서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 우엥, 하고 잠깐 울다가 젖병을 물려 주면 아이는 분유를 먹느라 울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밤에 자다 깨는 일이 별로 없었다.

정우진은 분유를 다 먹은 아기를 안아 천천히 등을 쓸어 주면서 도닥거렸다.

“이제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넌 좀 자. 아, 너 뭐 안 먹었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우진이 아기를 안고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제가 할까요?”

“아니, 그냥 앉아 있어.”

나는 정우진을 식탁 의자에 앉히고 간단하게 상을 차렸다. 상이라고 해 봤자 계란 프라이를 하고 정우진이 만든 반찬을 꺼내는 게 다였지만.

“선배는 안 먹어요?”

“난 좀 이따 먹을 거야. 겨울이 주고 너 빨리 밥부터 먹어.”

조심스럽게 아기를 안아 들자 정우진을 닮은 검은색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겨울이와 눈이 마주쳤다.

“안 자네?”

큰 눈을 깜빡거리며 가만히 날 보는 아이를 마주 보며 웃다가 정우진에게 물었다.

“이름 뭐 하지?”

내 물음에 가만히 생각하던 정우진이 아이를 보며 말했다.

“한번 물어보세요.”

“뭐?”

“무슨 이름이 마음에 드냐고.”

그 말에 나는 의아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큰 눈을 깜빡거리고 있는 아이를 보다가 나는 혹시나 싶어 말했다.

“우영아.”

“…….”

“하준아.”

“…….”

“도윤아.”

“…….”

작명소에서 받은 이름을 떠올리며 천천히 하나씩 말했지만 아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네가 한번 해 봐.”

나는 밥을 먹고 있는 정우진에게 아이를 다시 건네며 말했다. 정우진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 들자마자 입을 열었다.

“강우영.”

무표정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던 아이의 얼굴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히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아이를 보며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웃었…….”

“우영이가 좋나 봐요.”

“뭐?”

“우영아.”

정우진이 다시 이름을 부르자 아이가 또 웃었다. 나는 정우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다른 이름도 말해 봐.”

“하준아.”

웃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강하준.”

다시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우영아.”

우영이라고 부르자 다시 웃었다.

“도윤아.”

이번에는 무표정.

정우진이 몇 번 이름을 불러도 강우영이라는 이름에만 반응했다. 처음에는 웃는 게 그저 신기하고 예뻤는데 이쯤 되니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야, 얘 혹시 우리가 하는 말 알아듣는 거 아니야?”

몇 번 웃던 아이는 잠이 오기 시작한 건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나는 졸고 있는 아이를 받아 안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영아.”

졸고 있는 와중에도 이름을 부르자 아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갑자기 미친 듯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우영이로 하자.”

“그래요.”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 전 아이가 웃을 때와 똑같았다. 나는 그새 잠이 든 아이와 정우진을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너 진짜 많이 닮은 거 같아.”

“저요? 전 선배 엄청 닮은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눈동자가 너랑 완전 똑같아.”

“눈매는 선배랑 똑같아요.”

그 말에 아이를 보자 좀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보다는 정우진을 더 많이 닮은 건 맞는 것 같았다. 특히 웃을 때 예쁜 게 정우진이랑 판박이였다. 자는 아이를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들자 날 보고 있는 정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불현듯 드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좋다.”

“네?”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슴 가득 채워지는 풍족한 감정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행복하네.”

“…….”

가만히 날 보던 정우진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보는 얼굴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나는 좀 황당해서 물었다.

“갑자기 얼굴은 왜 붉혀?”

우리가 만난 게 몇 년인데 고작 좀 웃었다고 아직도 얼굴이 빨개지는 게 신기했다. 황당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어이가 없어서 다시 웃었다.

“우리 셋이서 행복하게 잘 살자.”

얼굴에 열이 올라서 그런지, 아니면 울고 싶은 건지, 정우진의 눈가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사랑해요.”

그리고 별안간 이어진 사랑 고백에 나는 다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우진이 말해 주는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좋았다. 장황하지도 않고 어떤 미사여구도 없지만 수많은 단어를 떠올리다가 넘치듯 흘러나오는 말이었다.

“정말 많이 좋아해요.”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진짜 사랑해요.”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다급한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뺨을 내밀며 말했다.

“나도 너 좋아해.”

내 말에 정우진이 의자에서 일어나 내 뺨에 입을 맞췄다. 닿은 입술로 정우진이 웃고 있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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