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실-Another Universe- (21/28)

유실-Another Universe

텔레비전을 자주 보기는 하지만 내가 보는 건 거의 드라마나 예능, 영화가 전부였다. 가끔 채널을 돌릴 때 뉴스가 나오면 뉴스도 잠시 보기는 하지만 굳이 찾아서 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인터넷을 하면 알 수밖에 없는 세계적인 재난이나, 엄청난 발견, 여러 사건사고들은 얼추 알고는 있었다. 전부 다, 라고는 분명 말할 수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임신을 할 수도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 엄청난 사실을 몰랐다는 게 놀랍기만 할 뿐이었다.

세계적으로 발견된 사례가 얼마 없지만 해가 지날수록 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소파에 앉아 턱을 괴고 병원에서 들었던 말을 곱씹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집 안이 너무 조용하기도 했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던 터라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잔뜩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언제 왔어?”

어떻게 문이 열리는 소리도 못 들었던 거지? 세차게 뛰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두어 번 숨을 몰아쉬자 정우진이 미간을 구겼다.

“나 말고 이 집에 들어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렇게 놀라요?”

“갑자기 소리가 나니까 그렇지.”

“많이 놀랐어요?”

“애 떨어질 뻔했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웃는 게 보였다. 가끔 애가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는 말을 장난삼아 쓰긴 했지만 지금 한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니 나도 모르게 한 손을 배 위에 대고 있었다. 놀랐다고 해서 배 위에 손을 대는 행동은 살면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내가 계속 얼굴을 찡그리고 있자 웃고 있던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앉아 있었어.”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죠?”

“……?”

그 뜬금없는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기가 무당이야, 뭐야? 당황하는 내 얼굴을 보던 정우진이 덩달아 당황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진짜 있어요?”

“어떻게 알았어?”

“그냥 평소랑 좀 다른 거 같아서……. 왜요? 뭔데요?”

“…….”

아니, 이렇게 빨리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다고 숨기려고 한 건 당연히 아니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하지? 병원에서 들었던 얘기부터 하면 되나?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그사이를 못 참고 정우진이 손을 뻗었다. 뺨 위로 닿는 손길에 시선을 올리자 정우진이 빤히 날 쳐다보고 있었다. 불안해 보이는 그 눈을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오늘 병원에 갔거든.”

“네?”

“병…….”

“언제요? 혼자 갔어요? 무슨 병원이요? 뭐래요? 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야.”

폭격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인상을 팍 쓰며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꾹 다물었다. 쏟아 내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듯 보이는 얼굴에 다시 한숨이 나왔다.

“일단 내가 말하는 거부터 들어.”

“혹시 심각한 거예요?”

“심각……. 심각한 거긴 한데…….”

이건 분명 심각한 일이었다. 아주아주 심각하고 예상치도 못했던 갑작스러운 일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데 뺨에 닿았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내리고 있던 시선을 올리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숨을 멈춘 것처럼 굳어 있는 정우진이 보였다.

“아니, 무슨 병에 걸린 게 아니라 임신이야.”

그 얼굴에 보이는 깊은 절망에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래로 떨어져 있는 그의 양손을 잡았다. 다급하게 쫓기듯 말하자 그제야 정우진이 눈을 깜박였다.

“뭐라고요?”

“임신했대.”

“임신이요? 누가요?”

“내가…….”

“네?”

병원에서 처음 임신했다는 소릴 들었을 때의 내 반응과 똑같았다. 나도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임신이라는 단어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닌지 한참 고민하기도 했었다.

나 역시도 지금 정우진이 짓고 있는 저 얼빠진 표정으로 임신했다는 짧은 문장을 이해하기까지 아주 많은 시간이 걸렸었다.

“너 혹시 남자도 임신할 수 있다는 소리 들어 봤어?”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손을 뻗어 당황하고 있을 정우진의 머리를 도닥여 주면서 말을 이었다.

“나도 처음 들었는데 가능하긴 하대. 남잔데 임신해서 애 낳고 잘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하고…….”

“임신이요?”

“어…….”

“남자가 어떻게 임신을 해요?”

“그러니까…….”

남자가 임신을 할 수 있는 신체적, 과학적 메커니즘들에 대해 대강 들었는데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때 난 지금의 정우진보다 더 제정신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한국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모르는 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명 듣긴 들었는데 그걸 다시 정우진에게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 애가 있는 거예요, 선배 배 속에?”

“그렇대.”

“…….”

몇 번이나 들어도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입술을 벌리고 커다랗게 뜬 눈을 깜빡거리던 정우진이 별안간 내 앞에 무릎을 꿇더니 내 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

“몇 주래요?”

“5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손등 위에 자기 손을 겹치고 한참 배에 귀를 대고 있던 정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기뻐하는 것 같지도 않고 슬퍼하거나 화를 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곤란해하는 것 같은 얼굴도 아니고 이상한 얼굴로 가만히 날 보던 정우진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내 무릎 뒤로 손을 넣어 날 안아 들었다.

“뭐 하는 거야?”

갑자기 몸이 번쩍 들려 반사적으로 어깨를 쥐었다. 평소라면 다리를 흔들든 몸을 뒤틀든 했을 텐데 날 안고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는 정우진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여서 두어 번 눈만 깜박이다가 물었다.

“이러고 나갈 거 아니지?”

“병원 다시 가 봐요.”

“병원이든 어디든 갈 테니까 일단 좀 멈춰 봐.”

신발을 신으려던 정우진이 그 자리에 멈춰서 날 내려다 봤다. 잔뜩 경직되어 있는 그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나 좀 내려 줄래?”

“걸을 수 있어요?”

“…….”

일그러지는 미간을 보며 무슨 말을 할까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저 걸을 수 있냐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혹시 정말 걸을 수 있냐는 말 그대로의 의미인지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왜 못 걸어?”

“임신했다면서요.”

그리고 정우진의 입에서 설마설마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정말 조금의 장난기도 없이 진지한 얼굴을 보다가 물었다.

“나 애 낳을 때까지 네가 안고 다닐래?”

“네, 근데 낳을 거예요?”

“미친놈인가, 내가 걷지도…….”

곧바로 나오는 ‘네.’ 라는 대답에 황당해서 인상을 찌푸리고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낳을 거냐고? 낳을 거냐니?

물론 나도 당황한 건 사실이고 이게 정말 현실인지 꿈인지 모르겠지만 한 번도 낳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임신이 되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일단 생겼는데 그걸 낳지 않겠다는 건 결국 애를 지운다는 소린데.

물론 혼자 만든 애가 아니니까 나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지만 어쩐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반응이었다.

“아까 생각났는데 예전에 들었던 거 같아요.”

“어? 뭘?”

“남자가 임신했다는 거요.”

“아……. 나는 처음 들었…….”

“낳다가 죽었대요.”

“…….”

나지막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가슴이 싸늘해졌다.

* * *

병원에 도착해 조금 전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어도 처음 듣는 얘기 같았다. 정우진은 아무런 말도 없이 의사가 하는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기만 했다.

너무 심각해 보여서 덩달아 나까지 심각하게 듣는데 다행인지 정우진이 우려했던 건 사실이 아니었다.

아이를 낳는 사람의 성별이 남자라고 해서 사망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고 아예 확률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말 극히, 아주 지극히 낮다고 했다.

자연분만은 불가능하고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그 뒷말이 문제였다.

모든 건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임신했을 때의 증상이나 아이가 자라는 과정 등도 비슷하거나 같다.

다만, 남성이 임신을 하는 건 전 세계적으로 아주 희귀한 현상이고 실제 출산까지 한 사례는 더욱 희귀하다. 그렇기 때문에 수술 중 알려지지 않은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수술 시, 이 부분에 대한 동의서를 작성해야 한다.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던 정우진의 눈동자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또렷해지는 걸 봤다.

* * *

의자에 앉아서 안전벨트까지 했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정우진이 물끄러미 날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착잡했다.

“일단 집에 가자. 나 배고파.”

“아까 먹었다면서요.”

“별로 안 먹었어.”

사실 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이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뭐 먹고 싶어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부드럽게 차가 움직였다. 창밖을 보는데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흐렸다.

당장은 배도 안 고프고 입맛도 없고 머리가 복잡해서 그냥 잠이나 자고 싶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질 않자 정우진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시 숨 막히는 침묵이 시작됐다.

속이 시끄럽고 쓰렸다.

정우진이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정우진은 원래 잔걱정이 많았다. 욕실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가스레인지 앞에서 요리를 하다가 불에 데어도 죽을지도 모르고, 침대에서 자다가 떨어져도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정우진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에도 정우진이 평소 그랬던 것처럼 쓸데없이 사서 걱정하는 거라고 말해도 되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생긴 애를 지울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애 지우자는 소리를 하고 싶은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저러고 있다는 건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해서 쉽게 말하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선배.”

집에 도착하자마자 정우진이 날 불렀다.

“낳을 거예요?”

“…….”

“안 낳으면 안 돼요?”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질 않자 정우진은 조금 더 다급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잖아요.”

“그건 그냥…….”

“선배.”

내가 정우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정우진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고는 있을 거다. 그래서 이렇게 더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걸지도 몰랐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 부른 정우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가만히 그걸 보다가 손을 뻗어 까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아이가 갖고 싶은 거면 입양해도 되잖아요.”

간절해 보이는 목소리에 한숨이 나왔다. 정우진은 내가 왜 아이를 지우자는 말에 찬성하지 않는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아이가 갖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야.”

“그럼 그냥 지우면 안 될까요. 아이가 갖고 싶은 것도 아닌데 거기에 선배 목숨을 걸 이유가 없잖아요.”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목소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아이가 갖고 싶은 거라도 목숨까지 걸 필요가 있어요? 갖고 싶든 아니든 선배 목숨을 걸어야 할 필요가 있냐고요.”

임신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배 속의 아이를 지워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건 내가 아이를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아이가 정우진과 나의 아이라서였다.

“죽는다고요. 죽는 게 뭔지 몰라요? 죽으면…….”

“무조건 죽는다는 게 아니잖아.”

또 밑도 끝도 없이 급발진 하는 망상을 막기 위해 말을 끊자 정우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세게 깨무는 것 같아서 손을 뻗자 정우진이 고개를 틀어 내 손을 피했다. 허공에서 멈춘 내 손을 보며 놀라 눈을 크게 뜨는데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무조건 죽는다는 게 아니라 죽을지도 모르는 거 알아요. 근데 그게 왜요? 뭐가 다른데요?”

정우진이 내 손을 피한 것도 모자라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나는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정우진은 정말 내가 아이를 낳게 할 생각이 없는 거다.

“아이를 낳는 걸 떠나서 원래 모든 수술이라는 게 아주 조금의 위험을 감수하고…….”

“그러니까 선배가 그런 위험을 왜 감수해야 하냐고요.”

“…….”

창백하게 질려서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말문이 막혔다.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이 상황이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우진이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마냥 황당해하기만 할 수도 없었다.

남자가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특별히 죽을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가는 게 아니었다. 성별을 떠나서, 그리고 꼭 출산이 아니라도 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는 모든 사람은 원래 사망할 확률이 있는 것이다. 지극히 낮은 확률이라도 완전히 제로가 아니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그렇게 말을 하는 거다.

물론 출산이라는 건 사망 확률이 지극히 낮은 가벼운 수술이라고 하기엔 그것보다 조금은 더 위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우진이 과한 건 사실이었다.

“평소에 애가 갖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잖아요.”

내가 느끼고 있는 황당함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는데 정우진이 날 보며 말했다.

“그건 우리 사이에 애가 생길 줄 몰라서 그랬던 거지.”

“그럼 입양해요.”

“야, 입양이라는 게 무슨 시장 가서 반찬 사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잖아.”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정우진이 신경질적인 얼굴로 눈을 치켜떴다. 그런 정우진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냥 단순히 아이를 갖고 싶어서 싫다는 게 아니라……. 우리 애니까 그런 거 아니야.”

속으로 생각할 땐 몰랐는데 ‘우리 아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려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끄러웠다. 낯설어서 그런지 내가 한 말에 내가 민망해서 얼굴에 열이 올랐다.

하지만 정우진은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이상한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낳아 줄게요.”

“뭐?”

“선배가 우리 아이를 갖고 싶어서 그런 거면 내가 낳아 주면 되잖아요.”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대체…….

황당한 마음을 떠나서 이젠 그냥 어이가 없었다.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며 정우진이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진지한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저도 임신할 수 있어요. 확률이 낮다고 하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하다 보면 언젠가 임신할 거 아니에요. 선배가 원하면 열 명도 낳아 줄게요.”

“…….”

“그러니까 아이는 그냥 제가 낳으면 안 될까요?”

“…….”

양손으로 내 손을 꽉 잡은 정우진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차오를수록 내 손을 잡은 정우진의 손에도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플 만큼 내 손을 꽉 쥔 정우진이 한 발자국씩 내게 다가왔다.

“저 정말 그냥 하는 말 아니에요. 선배가 원하는 만큼 낳아 줄게요. 못 믿겠으면 각서도 쓸 수 있어요.”

“열 명까지는 필요 없어. 그리고 죽을지도 몰라서 그러는 거면 너도…….”

“그럼 한 명만 낳아서 잘 키워요. 아니면 아들이랑 딸이랑 두 명 낳을까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얼굴로 내게 다가오는 정우진을 보며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벽에 가로막혔다. 날 몰아세운 정우진이 코앞에서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선배, 제가 수술 받을게요.”

“…….”

정우진은 지금 아이를 낳기 위해 수술을 받는 게 아니라 자기가 수술을 받기 위해 아이를 가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만약 수술이 위험해서 그런 거면 네가 하나, 내가 하나 똑같잖아.”

“그러니까 그냥 내가 할게요.”

기다렸다는 듯 다급히 말하는 정우진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내가 굳이 싫다고 말하지 않아도 어떤 말을 할지 안 건지 정우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정우진이 젖어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입술에 선명하게 나 있는 잇자국을 보며 손을 뻗어 입가를 문질렀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 주면 지울 건데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묻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뭘 어떻게 해 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미 생긴 애를 지울 수는 없잖아.”

“제가 더 많이 낳아 줄게요.”

“난 많이도 필요 없고, 그냥 지금 생긴 애 한 명만 있어도 돼.”

“그럼 제가 한 명만 낳아 줄게요.”

“아니, 네가 낳은 애 말고 내 배 속에 있는 애 한 명이면 된다고.”

정우진이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와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정우진은 조금의 소리도 내질 않고 한참을 울었다. 등을 만져 주고 토닥이고 머리카락을 쓸어 줘도 목덜미 위로 떨어지는 눈물은 계속 번지기만 했다.

“다시 생각해 주세요.”

“…….”

한참 울던 정우진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세요.”

“…….”

“제발요…….”

정우진이 유난인 건 사실이지만 지금 그가 느끼고 있을 슬픔과 불안함은 허상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쉽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선배, 계획도 없이 무작정 낳으면……. 우리도 그렇고……. 애도 불행할지 몰라요. 충분히 생각하고 계획한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돼요?”

“네 말도 맞긴 한데, 그렇다고 생긴 애를 지울 수는 없어.”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살살 쓰다듬자 정우진의 입에서 우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 사실은 애들 엄청 싫어해요……. 정말 너무 싫어서 정신과 상담 받아야 할 정도예요. 그런 사람이 아빠면 아이도 불행할 거예요.”

“거짓말하지 마.”

“저는 선배 말고 다른 사람 돌보고 싶지 않아요.”

“그럼 내가 돌볼게.”

“씨발, 그건 더 싫어요.”

칭얼거리면서 이상한 소리를 하던 정우진이 이를 악물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눈물 젖은 얼굴로 질색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손을 들어 젖은 얼굴을 닦아 주고 있는데 정우진이 다시 헛소리를 시작했다.

“선배가 애 낳으면 전 일도 안 하고 집에서 놀기만 할 거예요. 밥도 안 하고 씻지도 않고 그냥 누워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그럼 내가 나가서 돈 벌어 올게. 네가 텔레비전 볼 때 밥도 내가 하면 돼. 그리고 내가 너 씻겨 줄 수도 있어.”

내 말에 정우진이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렇게 말없이 한참 바닥만 보더니 다시 힐끗 시선을 올려 나를 바라봤다.

“선배.”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고 있어서 그런지 눈가가 붉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힘없이 날 보던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만약 억지로 지우게 하면 제가 많이 싫어질까요?”

그 말에 의아한 얼굴로 정우진을 쳐다봤다. 정우진이 날 마주 보며 고개를 옆으로 젖히자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이 옆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눈만 깜빡거렸다. 그런 날 보며 아까 소아성애 어쩌고 하면서 장난을 치던 얼굴과 같은 얼굴로, 같은 목소리로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저 많이 싫어질 거 같아요?”

“…….”

“저한테 많이 실망할 거 같아요?”

“…….”

재차 묻는 질문에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깨달았다. 설마 지금 내가 싫다고 해도 낙태를 시키겠단 소린가? 억지로 지우게 한다는 게 그거 말고 다른 뜻이 있나?

내가 싫다고 하면 정우진은 당연히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내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입 밖으로 이 말을 내뱉었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원래 병원에서는 그렇게 말해. 수술이라는 게 항상…….”

“저도 알아요.”

“근데 왜 자꾸 그래? 무조건 죽는다는 게 아니잖아.”

“안다고요.”

“…….”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정우진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까지 싫어하면서 고집을 부리는 경우는 정말 드물어서 어지간하면 나도 들어주고 싶었지만 이번 일은 나도 쉽게 물러설 수가 없었다.

“무조건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좀 좋게 생각해 봐.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의학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선배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뭘 어떻게 좋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 죽을지도 모른다는 게 확률적으로 엄청…….”

“안다고요. 엄청 낮은 거. 그러니까 이러고 있지, 아니었으면 병원에서 그냥 나오지도 않았어요.”

“…….”

아니, 씨발. 그럼 거기서 수술을 억지로 시켰다는 거야, 뭐야.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시간 지나면 더 힘들어요.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아침 일찍…….”

“안 한다고.”

“선배.”

“정우진.”

내가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고집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너 애가 싫은 거야, 아니면 그냥 내가 수술 받는 게 싫은 거야?”

“둘 다 싫어요.”

“내가 원하면 네가 애 낳아 준다며.”

정말 둘 다 싫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정우진은 내가 수술을 받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싫은 거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죽을지도 모르는 확률이 높은 것도 아니고……. 물론 병원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게 이미 생긴 애를 지워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아이는 나 혼자만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기엔 문제가 많았다. 최대한 설득은 해 보겠지만 정우진이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싫다고 한다면 나도 방법이 없었다.

“내가 죽을까 봐 그러는 거야?”

무슨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다친 것도 아니고 단지 임신을 한 것뿐인데 진지하게 아이를 낳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해야 하는 게 이상했다. 물론 아이를 낳다가 죽는 사람도 분명 있기는 했지만 보통 임신을 했다고 하면 다들 기뻐하지 않나.

원치 않는 임신이라면 싫어할 만도 했지만 우린 딱히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원한 것도 아니긴 했지만.

찔러도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그런 거 다 빼고 그냥 우리 사이에 애가 생기면 어떨지 그것만 한번 생각해 봐.”

“그걸 어떻게 빼요.”

“그냥 한 번만 좀 그렇게 해 봐.”

정우진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날 보다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상상해 봐. 너 상상 잘하잖아.”

“…….”

평소에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상상 같은 거 잘만 하는 주제에 대체 뭐가 그렇게 어려운 건지 정우진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구겨진 미간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눈을 피하듯 시선을 내렸다.

“모르겠어요.”

“싫어? 그건 아니지? 막 엄청 싫고 그런 건 아니지?”

모르겠다고 하는 건 좋다는 것도 싫다는 것도 아니니 결국 엄청 싫다는 건 아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나도 사실 엄청 좋고 마냥 신나는 건 아니었다. 아직 얼떨떨하고 실감이 나질 않아서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싫은 건 아니니 결국 정우진과 나는 똑같은 셈이었다.

“나도 이런 적이 처음이라 잘 모르겠는데…….”

“선배.”

설득하듯 차근차근 말하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시선을 올려 날 쳐다봤다. 조금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얼굴이었다.

“저한테 이건 좋고 싫음의 문제가 아니에요.”

“…….”

“선배가 원하는 게 있으면 저도 당연히 그렇게 해 주고 싶어요. 저는 정말 선배가 하고 싶다고 하면 그게 뭐든 다 이뤄 주고 싶어요. 제가 이런 말 하면 항상 알고 있다고 하지만 선배는 몰라요. 내가 선배 말이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는 눈으로 차분히 사실만을 말하고 있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선배가 내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요.”

“…….”

“선배가 살아서 내 옆에 있어야 해요. 그럼 무슨 짓을 하든, 나한테 뭘 원하든 뭘 시키든 다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어요.”

더 이상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정우진은 듣지 않을 거다. 설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정우진은 울지도 않고 불쌍한 척을 하지도 않았다.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해 애같이 굴면서 칭얼거리지도 않았다. 그건 너무 낯설고 이상해서 오히려 지나치게 절박해 보였다.

“미안해요.”

정우진은 조금도 미안해 보이지 않는 얼굴로 내 팔목을 잡았다. 마치 도망갈 사람을 붙잡기라도 하듯 잔뜩 힘이 들어간 손은 하얗게 질려서 핏줄이 돋아 있었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있어도 잘 알 수가 없었다. 화가 난 건지, 울고 싶은 건지, 대체 저게 무슨 표정인 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정우진.”

“…….”

내 손목을 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이젠 아픈 게 문제가 아니라 피가 통하지 않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뿌리치고 싶을 만큼 아팠지만 반대쪽 손을 들어 하얗게 질린 정우진의 손등 위에 내 손을 겹쳤다.

“왜 그렇게 겁을 먹어. 네가 싫다고 하면 안 낳을 거야.”

“…….”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데 내가 너 몰래 어디 다른 데서 낳기라도 하겠냐?”

나 혼자 만든 애도 아니고 같이 만들었는데 누구 한 사람이라도 싫다고 하면 낳지 않는 게 맞았다.

“그러니까 그렇게 겁먹지 마. 네가 내 말 안 듣는다고 어디 가거나 그러지 않으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를 했을 뿐인데 정우진은 뒤통수라도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손목을 세게 잡고 있던 손에 조금씩 힘이 풀리자 한동안 피가 통하지 않아서 그런지 손가락이 저릿저릿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데 도대체 얼마나 세게 잡았던 건지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질 않았다.

“싫다면서요.”

고개를 숙인 정우진이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동글동글한 까만 머리통을 보면서 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가 되질 않았다.

혹시, 만약에라도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는 가정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일이 갑작스레 일어났으니 당황하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나도 많이 놀란 건 사실이었지만…….

임신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낳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순간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고민했던 건 남자의 몸으로 아이를 낳을 때의 위험성 같은 게 아니라 우리가 과연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그래서 정우진도 나랑 비슷할 줄 알았다. 처음에는 많이 놀라고 당황하겠지만 그래도 좋아할 줄 알았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다. 정확히 말하면 싫어하기보다는 나에 대한 걱정이지만 아무튼 너무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서 의외였다.

“선배.”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정우진이 날 부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낯선 얼굴로 잔뜩 겁먹어서 가시를 세우고 위협하더니 지금은 또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것도 의외였다.

그게 그렇게까지 겁을 먹고 할 말이었을까. 아니면 정우진은 내가 이 문제를 절대 양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지도 몰랐다.

“선배.”

조금 전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세게 잡았던 손목을 건드리며 정우진이 다시 날 불렀다. 새끼손가락 끝을 살짝 잡고 흔드는 폼이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으면 울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너무 갑작스럽긴 했어.”

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울상을 지었다.

“미안해요.”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뭐가 미안해?”

“내가 꼭 낳아 줄게요.”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목을 끌어안으며 또 이상한 소리를 했다. 어이가 없어 웃으며 정우진을 마주 안았다.

“됐어. 어차피 2세 계획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저 진짜 그냥 하는 말 아니에요. 선배가 원하면…….”

정우진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비빌 때마다 머리카락이 닿아서 간지러웠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다시 웃을 수가 없었다. 정우진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인지도 들리지가 않았다.

그냥 멍하게 앞을 보며 재잘거리는 말을 들으면서 정우진의 등을 토닥거리기만 했다.

* * *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을 보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잠시 밤하늘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의미 없는 대화를 하다가 웃기도 하고 정우진이 하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욕을 하기도 했다. 씻고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모든 것이 그냥 평소와 다른 게 없었다.

“…….”

그런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한참을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마비된 것처럼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숨을 뱉었다가 마셨다가 수백 번, 수천 번 숫자만 세다가 결국 눈을 떴다.

가만히 어둠 속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갈증이 일었다.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을 조심스럽게 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잠귀가 워낙 밝아 혹시 깼을까 싶어 정우진을 봤지만 그렇진 않은 것 같았다.

핸드폰을 챙겨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방에서 나와 주방으로 갔다. 차가운 물을 한 잔 마시고 식탁 의자에 앉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멍하게 허공을 보다가 손가락 끝으로 식탁 위를 톡톡 두드리며 핸드폰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쳐다봤다. 물을 마시고, 핸드폰을 보고, 다시 허공을 보면서 의미 없는 시간만 보내다가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켰다.

인터넷에 임신 5주라고 검색하자마자 온갖 글들이 떴다. 지식백과에 적힌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다 읽었다. 5주면 태아의 뼈와 골격이 형성되고 심장도 뛰기 시작한다고 한다.

어떤 임산부의 일기도 읽었다. 입덧이 굉장히 심하고 하혈을 했다고 한다. 매운 닭발이 너무 먹고 싶은데 혹시 먹어도 되냐고 질문 글을 올린 사람도 있었다. 중절 수술비용을 묻는 사람도 있었고 보듬이가 내게 와 줘서 너무 고맙다고 글을 쓴 사람도 있었다. 보듬이는 태명 같은 건가.

턱을 괴고 한참 그런 글들을 읽다가 문득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 화면을 껐다. 눈을 감고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다시 핸드폰 화면을 켜서 남자 임신에 관한 걸 검색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남자 임신 말고 남성 임신이라고 검색어를 바꿔 다시 검색해 보려고 했는데.

“…….”

정신을 차려 보니까 또 임신 5주가 검색되어 있었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조금 전 봤던 글 말고 다른 글을 봤다. 이것저것 계속 보다가 초음파 사진을 발견했다.

확대를 하고 가까이에서 봐도 사람의 형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당최 이게 뭔지 그냥 하얗고 까맣기만 해서 한참을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있는데 불현듯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 나도 모르게 검색할 것 같아서 아예 핸드폰 전원을 끄고 뒤집어서 멀리 떨어뜨려 놨다.

시간은 새벽 3시가 넘었는데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속도 좀 메스꺼운 것 같고 몸이 너무 무거웠다. 추운 것 같기도 하고 두통이 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너무…….

너무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생긴 아이를 지워야 해서 그런 것도 있고, 조금 전 정우진이 날 보면서 정색하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서였다. 그런 것들이 겹쳐서 그런지 잘 수가 없었다.

그냥 싫다는 말을 할 뿐인데 그렇게까지 겁을 집어먹을 필요가 있었을까? 차라리 평소처럼 울고불고 지랄을 했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안 좋지도 않았을 거다.

이건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뜻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랬던 걸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정말 싫다고 해도 이것만큼은 절대 들어줄 수가 없다는 뭐, 그런 뜻이었을까?

그래,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데 그렇게까지 겁먹을 필요가 있었나?

내가 설마 애 못 낳게 한다고 어디 도망이라도 갈 거라고 생각했나? 헤어지자고 할 줄 알았나? 집 나가서 나 혼자 낳고 오겠다고 할 줄 알았나?

도대체 왜 그렇게 겁을 먹었던 거지?

정우진은 왜 아직도 나한테 고작 싫다는 말 한 마디를 하면서 그렇게 겁을 먹는 거지?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서운함이 물밀듯 몰려오기 시작했다.

정우진은 원래 그렇다. 원래 그런 인간이다. 나는 그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그러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일부러 의식하는 게 아니라 정말 나는 괜찮았다.

하지만 조금 전에 정우진이 그랬을 땐 괜찮지가 않았다. 평소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 지금은 그냥 그렇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아직도 내가 그냥 함께 있어 주고, 살아 주는 줄 알겠지? 언제든 떠나고 싶으면 떠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아까 같은 반응이 나올 수가 없었다.

조금만 화가 나거나, 뭔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연인이라면 으레 겪을 수 있는 아주 사소한 다툼이라도 일어난다면 내가 주저 없이 이 집을 나갈 거라고…….

“선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조용한 와중에 갑자기 들린 소리라 지나치게 놀라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미친 것처럼 뛰는 심장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리자 언제 깬 건지 정우진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언제…….”

놀라서 그런지, 목이 잠겨서 그런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 일어났어?”

“…….”

정우진은 가만히 날 내려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잠시 대답을 기다려도 입을 열질 않아서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잠 덜 깼어?”

“여기서 뭐 해요?”

“…….”

그 말에 잠깐 당황해서 눈을 굴리다가 조금 전 물을 마셨던 컵을 발견하고 말했다.

“목말라서 물 마셨어.”

“…….”

“넌 왜 나왔어?”

식탁을 짚고 일어서며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질 않았다. 자다 일어나서 그런 건지, 아까부터 반응이 너무 느렸다.

“선배가…….”

손을 뻗어 정우진의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꼈다.

“선배가 없어서요.”

“자다 깼는데?”

“…….”

“……?”

또 아무런 말이 없어서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너무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코앞까지 다가가 한참 보다가 설마 하고 눈가를 더듬거렸다.

“…….”

“…….”

다행히도 내 걱정과는 달리 울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 건 여전했다. 일단 불부터 켜야겠다는 생각에 등을 돌리자 정우진이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버텼다. 몇 번 팔을 흔들어도 놔주질 않아서 그냥 정우진을 데리고 가서 같이 불을 켰다.

너무 밝으면 눈이 부실 것 같아 간접 조명을 켜자 희미한 불빛 아래로 정우진이 보였다.

“뭐 했어요?”

“물 마셨다니까.”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가 않았다. 평소에도 내가 자다가 일어나서 방을 나가면 정우진은 귀신같이 알고 잠에서 깨어나 내 곁으로 다가오고는 했었다. 소리도 없이 다가와 등 뒤에서 날 안고 졸졸 따라다니긴 했지만 이런 표정은 아니었다.

우리가 함께 살기 시작하고 아주 초반을 제외하면 이렇게 불안한 얼굴로 날 찾으러 온 적은 없었다.

“…….”

“…….”

혹시 계속 보고 있었던 거냐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데 정우진이라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냥 흐지부지 대화를 끝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밥을 먹고 쓸데없는 얘기를 한다고 금방 기분이 좋아지는 게 더 이상했다.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다시 정우진을 데리고 주방으로 가 식탁 의자에 앉혔다. 나도 그 옆에 앉아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

그때 정우진이 눈에 띄게 놀라는 게 보였다. 마치 들어서는 안 될 걸 듣기라도 한 듯 눈을 크게 뜨고 불안한 얼굴로 날 쳐다보는 모습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너 아까부터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짜증을 내고 있는 내 목소리가 귀에 들리자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속이 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왜 이렇게 견딜 수 없을 만큼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정우진이 내 눈치를 보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아니, 자주라는 표현도 모자랐다. 그냥 그게 일상이었다. 늘 내 눈치를 보고 아무 생각도 없이 한 의미 없는 말 한마디에 의미를 부여해서 혼자 고민했다.

그건 정우진이 원해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원해서 그렇게 피곤하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도 잘 되지 않으니까, 자기도 너무 그러고 싶지 않은데 마음처럼 되질 않으니까 그러는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

“선배.”

그래서 결국 제일 괴로운 사람도 정우진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정우진이 날 믿지 않아도, 혼자 삽질을 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면서 불안해해도 괜찮았다.

분명 괜찮았는데.

내 마음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일들이 전혀 괜찮지가 않아졌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정우진이 뜬금없이 말했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갑작스러운 말에 잠깐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무슨 부탁?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하고 같이 죽어 달라고 말해 주세요.”

“…….”

불길한 예감은 왜 한 번도 틀리질 않는 건지.

안면 근육이 조금씩 굳고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진은 오늘 하늘이 참 맑다고 말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죽으면 너도 나랑 같이 죽어 달라고 나한테 말해 주세요.”

쉽게 나오는 말과는 달리 목소리는 이미 산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죽기로 결심한 것 같은 꼴에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같이 죽어 달라고 말해 주세요.”

“안 죽을 거야.”

“부탁이에요.”

“…….”

끊어질 듯 작고 연약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질 않자 정우진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말해 주면 선배가 하자는 대로 할게요.”

“…….”

“제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적막함 속에서 마른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우진아.”

“…….”

“정우진.”

“…….”

손을 뻗어 숙이고 있는 얼굴을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정우진이 힘을 주고 버텼다. 몇 번 이름을 부르고 턱을 살살 만지자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정우진이 들어 올리는 대로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핏물을 흘린 것처럼 붉은 눈가에 눈물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죽을 각오를 한 것 같은 얼굴에 황당하기도 했지만 이 일이 그만큼 정우진에게는 중대한 일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까만 눈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나 안 죽을 거야.”

내가 자지도 않고 밖에 나와서 혼자 이러고 있었던 게 정우진 입장에서는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이렇게 심란한 건 아이 때문인 것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자기 때문인 것도 있는데 그걸 알기는 할는지 모르겠다.

그때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는 듯 입을 벌리는 게 보였다. 저 입에서 나올 소리야 뻔해서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셋이서 같이 살자.”

“…….”

내 말에 정우진이 눈을 꾹 감았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지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억누르고 있던 걸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는지 점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씨발…….”

눈물 자국 하나 보이지 않던 눈가는 잠깐 사이에 녹은 것처럼 흠뻑 젖었다.

“나중에 죽을 때 같이 죽더라도 일단 같이 살자. 우린 아직 죽기엔 너무 어리고 못해 본 것도 많잖아. 너 그리고 나랑 결혼도 한다며.”

“이럴 때만 결혼 얘기 하지 마세요. 진짜 짜증 나…….”

울먹거리는 소리에 팔을 뻗어 정우진을 끌어안았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달라붙어 온 정우진이 내 목덜미에 젖은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결혼 안 해도 되니까 그냥 안 낳으면 안 돼요?”

“내가 계속 생각을 해 봤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진짜 내가 낳아 줄 수 있어요.”

“누가 낳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생긴 내 배 속의 애가 중요한 거야.”

차분한 내 목소리에 정우진이 내 옷깃을 쥐고 당기며 흔들었다.

“나도 알아요. 그래도 한 번만 내 말 좀 들어주세요. 선배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숨을 못 쉬겠어요.”

“안 죽을 거라니까.”

“뭘 자꾸 안 죽는대. 안 죽긴 뭘 안 죽어요. 세상에 죽은 사람들은 자기가 다, 씨발. 이제 그만 살아야겠다. 이만큼 살았으면 살 만큼 살았다. 이래서 죽었겠어요? 세상에 죽고 싶어서 죽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내가 오늘 세상을 떠나야겠다, 이러고 죽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고…….”

듣고 보니 또 맞는 말이라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어서 정신을 차리고 정우진을 달래듯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죽을 확률이 거의 없잖아.”

“거의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많든 적든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

언성을 높여 말하다가 서러움이 북받쳤는지 말을 하다 말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등을 두드려 주고 쓸어 주고 머리도 만져 주고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렁거리던 속이 어느새 진정이 되어 있었다.

정우진은 울면서 화를 내고 있는데 오히려 아까보다 더 괜찮아진 것 같았다. 왜 이런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의아해하고 있는데 조금 진정이 된 건지 정우진이 다시 말했다.

“아예 없는 게 아니면 어쨌든 적든 말든 씨발, 그러니까 적은 게 문제가 아니라……. 적든 아니든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야, 근데 너 아까부터 왜 자꾸 욕을 하냐?”

“선배는 내가 죽겠다 그러면 욕이 안 나오겠어요?”

“아니, 난 죽겠다고 한 적도 없고 그런 비슷한 말도 한 적 없는데…….”

하도 서럽게 울고 있어서 그런지 왠지 내가 잘못한 것만 같아서 자꾸만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세상에 죽고 싶어서 죽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건 그렇지…….”

“오늘 죽은 사람들은 다 자기가 오늘 죽을 줄 알고 죽었겠어요?”

“아니…….”

“병원에서 의사들이 이 환자는 수술하다가 죽여야겠다, 이래서 의료사고가 나겠냐고.”

“…….”

정우진은 내가 뭐라고 대꾸할 수도 없는 말들을 한참이나 하면서 울었다.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냥 정우진이 진정할 때까지 등을 쓸어 주고 눈물을 닦아 주는 것뿐이었다.

“선배.”

내 어깨에 옷이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울던 정우진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손을 뻗어 젖은 눈가를 닦아 주는데 정우진이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저 사랑해요?”

평소라면 별 이상한 걸 묻는다며 한 소리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라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럼 안 아프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잠깐 고개를 갸웃했지만 역시나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가만히 날 보던 정우진이 눈을 꾹 감았다 뜨자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선배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예요.”

“…….”

“세상에서 제일 고통스럽게 죽을 거예요. 온 세상 사람들이 백 년이 지나도 불쌍한 새끼라고 떠들 만큼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죽을 거라고요.”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협박을 하고 있었다. 근데 세상에 협박을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한숨이 나올 만큼 황당했지만 이상한 헛소리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까 선배도…….”

“알았어. 안 죽을게.”

손을 뻗어 정우진의 양 볼을 감쌌다. 얼마나 울었는지 그렇게 닦아 줬는데도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오리처럼 튀어나온 입술에 소리가 나게 연달아 세 번 정도 입을 맞추자 정우진이 웅얼거렸다.

“혹시 나중에라도 마음 바뀌거나 너무 힘들거나 그러면 꼭 말해 주세요.”

“알았어.”

“아픈 데 있어도 말하고…….”

오물오물 움직이고 있는 입술에 다시 입술을 맞추자 정우진이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조금만 이상해도 꼭 말해 줘야 해요. 괜찮겠지, 하고 넘어가지 말고. 그리고 저 정말 그냥 하는 소리 아니에요. 선배 죽으면 나도 죽을 거예요.”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계속 말해서 입술이 아니라 입꼬리 쪽에 입을 맞추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야, 너 제발 그 죽는다는 소리 좀 그만하면 안 되겠냐?”

오늘 하루 동안 죽는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정우진은 뚱한 얼굴로 날 보다가 손을 뻗어 내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 그러더니 조금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소리가 나게 입술을 부딪치고 핥았다.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된 것 같아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 말했다.

“당장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적 많았어요.”

또 죽는다는 소리였다. 그만 좀 하라고 하려다가 일단 들어나 보자 싶어 가만히 있었다.

“저는 정말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원했던 모든 일을 다 이뤘고 듣고 싶은 말도, 꿈에서만 그렸던 일들도 전부 다 겪었고…….”

마치 죽기 전 자아성찰 같은 말에 황당해서 결국 입을 열었다.

“야, 내가 죽는 거 이미 확정 났냐?”

신파극도 이런 신파극이 없었다. 영화 속의 새드 엔딩 같은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그리고 네가 뭘 원했던 걸 다 이뤄? 나한테 맨날 결혼하자 그러고 세상에 아무도 없는 데서 둘이서만 살자고 지랄할 땐 언제고.”

“결혼 안 해도 돼요.”

“……?”

순간 뭘 잘못 들었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도 언뜻 결혼 안 해도 된다는 소릴 듣긴 했지만 그땐 너무 다급해서 그냥 한 소린 줄 알았다. 의아해하는 날 보며 정우진은 여전히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말이에요. 그건 그냥……. 원래 살만해지면 다른 것도 점점 더 바라게 되잖아요. 그냥 그런 거예요.”

“…….”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계속 선배랑 같이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계속 나랑 같이 있어 주면 다른 건 어떻게 되도 상관없어요. 결혼도 안 해도 되고 애도 없어도 되고 세상에 사람이 있든 말든 그런 것도 아무 상관없어요.”

“…….”

그러니까 인생의 목표가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인생의 목표치고는 너무 소박해서였다. 앞으로 살날도 많이 남았는데 진짜 고작 이런 걸 인생의 목표라고 해도 되는 건가.

“그럼 그건 이뤄졌으니까 다른 목표를 다시 세워 봐.”

“이거 말고 더 바라는 것도 없어요.”

“그래도 한번 생각해 봐. 목표는 크게 잡아야 돼.”

고작 이런 걸 인생의 목표라고 하는 건 내가 용납할 수 없었다. 내 말에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던 정우진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날 보다가 말했다.

“그럼 선배가 매일 사랑한다고 백 번씩 말해 주는 거 듣기.”

“…….”

“50년쯤 하루도 안 빼먹고 매일.”

구체적인 횟수와 기간에 황당해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지금 살만하지?”

“목표는 크게 잡으라면서요.”

정우진이 뭘 걱정하는지 알기는 하지만 이게 이렇게까지 난리굿을 쳐야 하는 일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어쨌든 코맹맹이 소리로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조금이나마 기분이 풀린 것 같아서 안심이었다.

“아무튼 난 정말 괜찮을 거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거 말해 주세요.”

“어떤 거?”

“같이 죽어 달라고.”

그러고 보니 그게 남아 있었다. 그냥 넘어가면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 같아서 그냥 정우진이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했다. 말 몇 마디 한다고 입이 닳는 것도 아니고 이걸로 정우진이 만족한다면 매일 말해 줄 수도 있었다.

“나랑 같이 죽어 줘.”

“이름 넣어서.”

“우진아, 내가 죽으면 너도 같이 죽어 줘.”

내 말에 멀거니 날 보던 정우진이 힘없이 웃었다.

“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처연하게 웃는 걸 보니 가슴이 착잡해졌다. 같이 죽어 달라는 말을 듣고 저렇게 좋아하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여튼 정말 특이한 놈이었다.

“근데 선배 잠 안 와요?”

그 말에 그제야 지금이 꼭두새벽이라는 걸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잠시 잊고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들어가서 좀 자자.”

식탁을 짚고 일어서는데 정우진이 내 팔뚝을 잡았다.

“왜?”

“제가 안고 가면 안 돼요?”

“어, 안 돼.”

“왜요?”

“난 다리가 부러진 게 아니라 그냥 임신을 한 거야. 만삭도 아니고 이제 5주 됐고.”

그러니까 제발 그러지 말라는 내 말에 정우진이 불만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기자 정우진이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선배, 저 인생의 목표가 생겼어요.”

“하…….”

진지한 목소리에 걷다 말고 멈춰서 웃어 버렸다.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선배가 저 없이는 아무 데도 못 가는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한 치의 예상도 벗어나질 않는 말이었다.

“그런 건 인생의 목표라고 하는 게 아니라 불건전한 망상이라고 하는 거야.”

“선배, 저 불건전한 망상이 생겼어요.”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바꾸는 정우진을 보며 다시 웃어 버렸다.

“선배가 절 탈것처럼 부려 줬으면 좋겠어요.”

인생의 목표에서 불건전한 망상으로 바뀌니 좀 더 내용이 구체적으로 변했다. 평소였다면 무시했겠지만 오늘은 그냥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지만 막상 말하려니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수락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아 달라고 하기엔 뭔가 낯간지러웠고 들고 가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했다. 그렇다고 안으라고 팔을 벌리자니 그건 또 그거대로 존나 희한했고…….

“선배?”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정우진이 의아한 얼굴로 날 불렀다. 미간을 구기며 쳐다보자 정우진은 마치 영문도 모른 채 얻어맞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곧 눈웃음을 치며 내 손을 잡고 말했다.

“그럼 손만 잡고 가게 해 주세요.”

“…….”

씨발…….

나는 결국 손을 잡고 방에 도착해 침대에 누울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겨우 아이를 낳기로 합의 아닌 합의를 하고 난 뒤, 정우진은 아주 바빠졌다. 임신과 육아에 관련된 서적은 물론이고 다큐멘터리에 전문가 인터뷰 영상까지 관련된 지식이란 지식은 모조리 다 찾아 봤다.

이미 서재의 책장 한 면은 전부 임신과 육아에 관련된 책으로 전부 꽉 차 버렸다.

“선배, 저 정관 수술 할 거예요.”

책장에 꽂혀 있는 책 한 권을 꺼내 대충 훑고 있는데 정우진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책을 보며 뭔가를 적고 있던 정우진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날 쳐다봤다.

“뭐라고?”

“정관 수술이요.”

갑자기 뭔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들고 있던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 놓고 정우진에게 다가갔다.

“그걸 왜 해?”

“또 임신되면 어떡해요.”

“콘돔 끼면 되잖아.”

임신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병원에서는 남자가 임신을 할 확률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굉장히 낮다고 했었다. 근데 고작 그거 때문에 정관 수술을 한다고 하는 정우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불안하면 피임을 하면 되지 수술은 갑자기 뭔 수술?

“그런다고 완전히 피임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약 먹어도 되고.”

“그거 부작용 있대요.”

“…….”

난 제왕절개 한 번 하려고 그 신파극을 찍었는데 자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려고 하는 게 이상했다.

“하지 마.”

“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할 줄은 예상도 못한 얼굴이었다.

“야, 넌 나한테는 수술하면 죽니 마니 그 지랄을 하더니 갑자기 정관 수술은 뭔 정관 수술이야?”

“이건 죽는 거 아니잖아요.”

“아무튼 하지 마. 확률도 엄청 낮다는데 또 임신이 되겠냐?”

“선배.”

내 말에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며 날 쳐다봤다. 요즘 들어 이러는 경우가 잦았다. 금방 인상을 쓰고 잔소리가 정말 많아졌다. 원래도 좀 그렇긴 했지만 지금은 배 이상으로 더 예민하고 까다로워진 것 같았다.

“계속 말했지만 확률이라는 게…….”

“알았어, 알았어.”

10퍼센트든, 0.1퍼센트든 정우진에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따지면 집에 불 날 확률, 걷다가 벼락 맞을 확률, 교통사고, 자연재해 등등 죽을지도 모를 상황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있는 건데.

하지만 굳이 이런 건 말하지 않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까지 사서 걱정하는 정우진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걱정만 하다가 신경병 걸려서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지 마.”

“한 번 임신됐는데 두 번 되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요.”

“콘돔 끼라니까?”

“싫어요.”

고집스러운 표정을 보니 계속 말해도 안 들을 것 같았다. 어차피 당장 하러 갈 건 아닌 것 같으니 일단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해 보기로 했다.

“서 있지 말고 앉아요. 다리 안 아파요?”

그때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서재에 들어와 서 있었던 건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다리가 아플 리가 없었다. 내가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할 말은 많았지만 한 번 입을 열었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아서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켰다.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내 손을 잡고 있던 정우진이 살짝 힘을 줘 자기 쪽으로 당겼다. 끌려가듯 움직이자 의자에 앉은 정우진이 날 자기 무릎 위에 앉히더니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어디 불편하거나 아프면 꼭 말해 줘야 해요. 먹고 싶은 거나, 하고 싶은 것도요. 약간 긴가민가한 것도 일단 저한테 말해 주세요.”

정우진이 날 건드릴 때마다 유리 인형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좀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러다가 나중에 배가 좀 나오기라도 하면 얼마나 극성맞아질지 상상만 해도 피곤했다.

가만히 안겨 있어서 그런지 왠지 나른해졌다. 몸에 힘을 빼고 정우진의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건드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저번에 계속 낳지 말자고 한 거 미안해요.”

그 말에 나는 의아한 얼굴로 정우진을 쳐다봤다.

“갑자기 왜?”

“지운다고 끝인 것도 아니고……. 계속 생각났을 거 아니에요.”

“…….”

그건 맞는 말이었다. 만약 그때 우리가 아무런 대화도 없이 그날 밤을 보냈다면 아이를 지웠을 확률이 컸다. 그럼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없는 아이는 아주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을 거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인데…….”

멍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다시 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정우진의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있던 손에 힘을 줘 당기며 말했다.

“그게 왜 네 잘못이야?

“피임 안 해서 생긴 거니까 제 탓이잖아요.”

“누가 생길 줄 알았냐? 내가 여자도 아닌데.”

자기 탓을 넘어서 자기혐오를 하려고 하는 정우진을 보며 다급히 말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다 제 잘못이에요. 내가 잘못한 건데 선배만 고생해야 하고……. 결국 중절 수술도 수술인데, 그것도 쉬운 게 아닌데…….”

점점 우울하게 변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걸 지금 따져서 뭐 해. 이미 지나간 일이고 이미 낳기로 했는데.”

“결국 선배만 위험하고 난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잖아요.”

그 말에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다는 말이 너무 웃겼다. 그 뒤로 나는 씻을 때를 제외하고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혀 본 적이 없었다. 밥까지 떠먹여 주려고 하는 걸 겨우 말렸는데 날 그렇게 대한 정우진이 저런 말을 하는 게 이상했다.

“넌 이미 존나 과할 만큼 해 주고 있으니까 이상한 생각 좀 하지 마.”

“내가 대신 낳아 줄 수도 없고…….”

“뭐?”

“내가 수술을 할 수도 없고…….”

너무 당연한 얘기를 왜 이렇게 진지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고 있는 소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 황당했다. 진지하게 생각하면 내 상식까지 이상해질 것 같아서 그냥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기로 했다.

“내일 아침은 식빵이나 구워 먹자.”

시무룩하게 말하던 정우진이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식빵 먹고 싶어요?”

요즘 아침 점심 저녁 가릴 것 없이 삼시세끼 과할 정도로 잘 먹었다. 다행히도 아직 입덧은 없어서 주면 주는 대로 잘 먹긴 했지만 문제는 정우진이었다. 먹는 건 나랑 똑같이 먹으면서 정우진은 도리어 살이 빠졌다.

그렇지 않아도 지랄 맞게 예민한 정우진은 온 신경을 다 내게 쏟는 생활을 하면서 평소보다 집안일도 더 많이 해야 했다. 거기다가 출산 및 육아 관련 공부까지 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냥 잼 발라서 우유랑 먹자.”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매끼니 진수성찬을 차리다가는 정우진은 밥만 하다가 죽을지도 몰랐다.

“무슨 잼이요?”

“그냥 딸기잼이나……. 아무튼 간단하게.”

한 끼라도 좀 간편하게 먹고 쉬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나는 정우진이 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집 안에 진동하는 갓 구운 빵의 고소한 냄새에 발을 질질 끌며 주방으로 갔다.

“일어났어요?”

날 발견한 정우진이 오븐 장갑을 벗으며 물었다.

“너 설마 식빵 구웠어?”

“먹고 싶다면서요. 왜요? 그냥 밥 먹을래요?”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서 빵 반죽까지 해서 식빵을 만들었는데 그냥 밥 먹고 싶다는 소릴 하는 놈이 있으면 그건 사이코패스였다.

“빵 네가 만들었어?”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종지그릇에 잼을 옮겨 담고 있던 정우진이 손을 씻고 내게 다가와 내 이마를 짚었다.

“어디 아픈 데 없어요? 컨디션은 어때요?”

“아픈 곳도 없고 컨디션도 좋아.”

“먼저 씻을래요? 아니면 먹고 씻을래요?”

“…….”

원래 임신하면 다 이런가. 아니겠지? 아닐 게 분명했다. 이만큼 극성맞고 유난스러운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거동 불편한 노인도 아니고 왜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챙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원래도 정우진이 좀 극성맞은 편이긴 했지만 결단코 이 정도로 답이 없을 만큼 심한 편은 아니었다. 지금도 내가 먼저 씻겠다고 하면 분명 따라와서 씻겨 주려고 할 게 틀림없었다.

얘 설마 내가 애 낳을 때까지 이러는 건 아니겠지……. 처음에 좀 이러다 말 줄 알았는데 어째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았다.

“왜 그래요?”

내가 한참 말이 없자 정우진이 의아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그런 정우진을 마주 보다가 고개를 돌려 냄비를 발견하고 물었다.

“잼도 네가 만들었어?”

“네.”

설마설마하던 대답이 짧게 나오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니, 도대체 왜……. 그 시간에 그냥 잠이나 좀 더 처자지, 왜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자기가 못 만들어서 안달이지? 이러다가 아주 숟가락이랑 젓가락도 만들겠다.

“빵이랑 잼 같은 거는 그냥 사 먹어도 되잖아.”

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입에 안 맞아요? 맛없어요?”

“맛이 없겠냐, 식빵 하나에 만 원 받고 팔아도 매일 사 먹을 건데.”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가만히 내 말을 듣던 정우진이 웃었다. 어쩐지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가슴이 아팠다.

“너 요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속으로만 생각해 왔던 걸 입 밖으로 꺼냈다. 정우진이 워낙 걱정이 많아서 이렇게라도 하면 좀 나을까 싶어 내버려 뒀더니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나는 이 인간이 도대체 하루에 잠은 몇 시간을 자는지 무서워서 묻지도 못했다.

“너 이러다가 나중에 쓰러지는 거 아니야?”

정말 걱정이 돼서 한 말이었는데 내가 장난이라도 치고 있다고 생각한 건지 정우진이 다시 웃었다.

“그럴 일 없으니까 선배는 선배 걱정이나 하세요.”

“네가 언제 내가 내 몸 걱정할 틈이나 줬냐고.”

황당해하며 말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어깨를 잡고 날 의자에 앉혔다. 그러더니 아직 따뜻한 빵에 잼을 발라 내게 건넸다.

“잼 약간 미지근한데 괜찮아요? 아까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 둔 것도 있는데 차가운 거 줄까요?”

“됐으니까 너도 앉아서 먹어. 무슨 잼이야?”

“사과잼이요. 이건 딸기잼, 이건 블루베리.”

많이도 만들었다. 아, 그냥 식빵에 우유 찍어 먹자고 할걸. 뒤늦게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

나는 정우진이 새벽부터 일어나 만든 잼이 발린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럽고 고소한 식빵과 달지 않은 사과잼이 입 안에서 뒤섞이자 한숨이 나왔다.

이러다가 정말 앞으로 밖에서는 뭘 못 사 먹을 거 같았다. 전부 씹어 삼키기도 전에 다시 식빵을 입 안에 넣는데 정우진이 가만히 날 보고 있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토스트 하려고요.”

“그냥 먹어도 맛있어.”

“버터 줄까요?”

“아니, 괜찮아. 이것만 먹어도 돼. 야, 근데 진짜 너무 맛있다.”

내 말에 정우진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더니 식빵에 딸기잼을 발랐다. 자기가 먹으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접시에 두고 이번엔 다른 식빵에 블루베리잼을 발라 다시 접시 위에 뒀다.

이러다가 우유도 먹여 주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멀뚱멀뚱 정우진을 보다가 설마 하고 우유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다행스럽게도 먹여 주겠다는 헛소리는 하지 않았다.

“나중에 점심은 그냥 계란에 밥 비벼 먹자. 간장이랑 참기름 넣어서.”

그렇게 말하고 나는 다시 불안한 눈으로 정우진을 쳐다봤다. 간장이랑 참기름도 자기가 만들겠다고 할까 봐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러진 않았다. 하긴, 아무리 정우진이라도 간장이랑 참기름까지 만들 수는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접시 위에 딸기잼이 발린 빵을 먹었다. 사과잼도 맛있었는데 딸기잼도 너무 맛있었다.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면서 불현듯 입덧을 안 하는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우진이 이렇게 걱정이 많은데 내가 입덧까지 했으면 얼마나 지옥 같았을까. 뭐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그런 기미도 보이질 않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맛있어요?”

정우진이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 날 보며 물었다.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넌 왜 안 먹어?”

“별로 배가 안 고파요.”

“배가 왜 안 고파? 만들다가 먹었어?”

내 물음에 고개를 흔드는 걸 보고 나는 식빵에 잼을 발라 정우진에게 건넸다.

“그럼 조금이라도 먹어. 너 요새 살 빠져서 피골이 상접한 거 같으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이대로라면 조만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내 말에 정우진은 먹기 싫은 티를 내면서도 빵을 한 입 먹었다.

“맛있지?”

“음. 네.”

“대답이 왜 그래? 네 입에는 안 맞아?”

그렇게 막 엄청 맛있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의아한 얼굴로 묻자 정우진이 별말 없이 우유를 마셨다. 뭐야, 진짜 맛이 없나? 내가 잼을 잘못 발랐나?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왠지 내가 상처받았다. 아닌데, 엄청 맛있는데? 쟤 미각에 뭔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별생각을 다 하고 있던 그때였다.

“윽.”

갑자기 정우진이 컵에서 입을 떼고 신음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놀라서 물었다.

“왜 그래?”

“…….”

“왜? 어디 아파?”

“우유…….”

정우진이 손을 들어 제 입을 가렸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보이는 얼굴을 보며 순간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굳어서 ‘어어’ 하고 있는 사이 정우진이 빠르게 의자에서 일어나 주방을 뛰쳐나갔다.

얼마나 세게 일어났는지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나는 계속 넋을 놓고 있다가 의자가 바닥에 부딪쳐 큰 소리가 나는 걸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 * *

정작 임신한 나는 하지도 않은 입덧을 대신 하고 있는 정우진은 완전 초주검 상태였다.

“야, 너 괜찮아?”

“네…….”

“…….”

정말 조금도 괜찮아 보이지 않는 얼굴로 겨우 대답만 하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아직도 속 울렁거려?”

“아니요.”

“아프거나 힘들면 솔직하게 말해, 두 번 물어보게 하지 말고.”

내 물음에 습관처럼 괜찮다고 하는 정우진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얼굴은 귀신처럼 허옇게 떠서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는 주제에 괜찮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나한테는 어디 조금이라도 아프면 꼭 말하라고, 아픈지 안 아픈지 긴가민가하기만 해도 말하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해 놓고 자기는 이 지경이 돼서도 괜찮다고 하는 게 화가 나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했다.

“네가 말을 해 줘야 뭘 어떻게 하든…….”

“…….”

“…….”

정말 걱정이 돼서 한 말이었는데 느닷없이 정우진의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잘못 봤나 싶어서 두어 번 세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지만 보이는 건 똑같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뺨을 따라 흐르는 걸 보며 당황해서 물었다.

“왜 울어? 그렇게 아파?”

정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소리도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걸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허공에 손만 바르작거리다가 어깨를 살짝 안았다. 정우진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줄줄 울기 시작했다.

“왜 울어?”

“선배가 화냈잖아요.”

“뭐?”

정우진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서럽다는 듯 웅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화를 냈다고? 내가? 내가 언제?”

“…….”

“아니, 그리고 내가 만약 화를 냈다고 해도 그런 걸로 왜 울고…….”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어깨 쪽의 옷이 점점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말을 얼버무리자 정우진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면서 내 어깨에 눈가를 비볐다.

“많이 아프면 병원 갈래?”

“싫어요.”

“침대에 좀 누울래?”

“싫어요.”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

싫다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정우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냥 계속 이러고 있고 싶다는 소린가 싶어서 어깨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줬다.

정말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정우진이 입덧을 하고 있다는 것도 믿기질 않는데 갑자기 화를 냈다고 울지를 않나……. 넋이 나간 얼굴로 허공을 보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정우진이 보던 책에서 얼핏 봤던 게 떠올랐다. 임신을 하면 감정기복이 심해진다고!

“…….”

“…….”

아니……. 아니, 그래도……. 임신을 한 건 난데, 설마 정우진이…….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내게 안겨 있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마른 숨을 삼켰다. 입덧까지 하는데 감정기복도 심해질 수 있지 않을까?

원래 정우진은 평소에도 감정기복이 심한 편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일도 아닌데 이렇게 갑자기 울지는……. 아니, 물론 별일도 아닌데 울었던 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정우진은 원래 그런 놈이긴 했다는 결론이 나서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움직이는 걸 느낀 건지 정우진이 살짝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야.”

“…….”

그냥 눈물 몇 방울 흘렸겠거니 했는데 얼굴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완전히 눈물로 범벅이 돼서 푹 젖어 있는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 미안해.”

“…….”

“화내서 미안하다고.”

내가 언제 화를 냈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지금 정우진 상태를 보니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우선 달래야 할 것 같아서 한 말인데 내 말에 정우진이 다시 줄줄 울기 시작했다.

“저도 미안해요.”

“네가 뭐가 미안해.”

“내가 선배 잘 돌봐 줘야 하는데…….”

“아니, 내가 애도 아니고…….”

젖은 뺨 위로 눈물이 흘러 턱 끝에서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날 것 같아서 양손으로 뺨을 감싸고 이마를 맞댔다.

“우진아, 일단 울지 말고 진정을 좀 해 봐.”

“이제 밥 어떡해요…….”

“뭐라고?”

“선배 밥해 줘야 하는데……. 씻겨 주고, 마사지도…….”

“…….”

아주 잠깐 얘가 지금 웃기려고 하는 말인가 싶었지만 정말 비통해하는 얼굴을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 황당한 얼굴로 우는 정우진을 보다가 눈가에 입을 맞췄다.

“씻고 밥 먹는 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선배 힘들잖아요.”

“안 힘들어. 진짜야.”

“선배는 라면밖에 못 끓이잖아요. 임신하면 금방 피곤해지고 오래 서 있으면 안 좋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씻다가 미끄러져서 넘어지면 어떡해요.”

정우진은 훌쩍거리면서도 말은 잘했다. 나는 가만히 정우진을 보다가 말했다.

“볶음밥도 할 수 있어.”

“그런 걸 먹일 수는 없어요.”

“뭐, 이 새끼야?”

“그건 나만 먹을 거예요.”

이 새끼가 지금 욕을 하는 건지 아닌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정우진은 떨떠름해하고 있는 내 얼굴을 보며 쐐기를 박았다.

“너무 한심한 거 같아요.”

“야, 내가 한 볶음밥이 그렇게 맛이 없냐? 그 정도야?”

내가 심각한 얼굴로 묻자 정우진이 울상을 짓고 고개를 젓다 못해 어깨까지 흔들었다.

“아니, 그거 말고요.”

“그렇게 맛이 없어? 김치 볶음밥은 좀 괜찮지 않아? 난 맛있던데?”

“아, 진짜. 갑자기 무슨 볶음밥이에요.”

내 물음에 정우진이 다시 내 목을 끌어안았다. 웅얼웅얼, 그게 아니라,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계속 몸을 흔들며 앙탈을 부렸다.

“네가 그런 걸 먹일 수는 없다며.”

내가 웃으며 묻자 정우진이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매일 볶음밥만 먹을 수는 없잖아요.”

“누가 맨날 먹는대?”

“그건 나만 먹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나한테만 해 주세요…….”

“…….”

그 작은 목소리에 씨발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니, 씨발 진짜……. 진짜 그렇게 맛이 없나? 차라리 존나 맛이 없다고 하는 게 낫지 저렇게 말하니까 더 비참해졌다.

“됐어, 씨발. 내가 평생 볶음밥만 먹고 살든 말든 신경 꺼.”

“맛없다고 한 적 없어요. 진짜 맛없지는 않아요.”

가끔, 아주 가끔 내가 볶음밥을 해서 같이 먹은 적이 있긴 했는데 막 엄청나게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난……. 나는 그냥 매일 정우진이 해 주는 걸 먹다 보니까 내가 만든 게 맛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그게 못 먹을 만큼, 막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전 선배가 간장에 밥 말아 줘도 먹을 수 있어요.”

그때 갑자기 정우진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보며 나는 살면서 이렇게 어이가 없던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만든 볶음밥이 간장에 밥 말아 주는 거랑 똑같다는 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그냥 선배가 그렇게만 해 줘도 너무 고맙고 좋다는 그, 그런 뜻…….”

“…….”

“윽……. 선배, 저 속이 너무 안 좋아요…….”

당황한 얼굴로 주절주절 떠들던 정우진이 갑자기 어깨를 움츠리면서 아픈 척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내 눈치를 보던 정우진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러더니 끙끙 앓는 소리까지 내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울기만 하더니.

“선배…….”

“…….”

“저 열나는 거 같아요…….”

정우진이 비 맞은 개 같은 얼굴로 날 보며 말했다. 그래도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울상을 짓고 손을 내밀어 손목을 보여 주며 말했다.

“저 여기 다쳤어요.”

“…….”

“아까 트레이 꺼내다가 데었어요.”

그 말에 손목을 보니 정말 데었는지 조금 부어서 붉게 변한 게 보였다. 내가 조금 반응을 보이자 정우진이 있는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불쌍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사실 볶음밥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조금 더 정우진이 귀여운 척을 하는 걸 구경하다가 침대 머리맡에 앉으며 말했다.

“속은 이제 괜찮아?”

꾀병을 부리느라 침대 위를 굴러다니던 정우진이 내 무릎을 베고 누워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 이제 괜찮아요.”

“임신한 건 난데 왜 네가 입덧을 하냐?”

“선배가 하는 것보다 차라리 제가 하는 게 낫죠. 근데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려서 그게 좀 걱정이긴 해요.”

이 새끼는 밥 못해서 죽은 귀신이 들러붙었나. 내가 한숨을 쉬자 정우진이 내 손을 잡았다.

“만약 선배가 입덧해서 뭐 먹지도 못하고 그러면 저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

“안 그래도 입덧해서 힘든데 너까지 죽으면 난 어떡해?”

“아, 그건 그러네……. 죽으면 절대 안 되겠다. 반만 죽어야지.”

이젠 헛소리까지 하는 걸 보니 정말 괜찮아진 것 같았다.

“배 안 고파?”

아까 잼 바른 빵 한 입, 우유 한 모금밖에 못 마신 걸 떠올리며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더 안 먹어도 돼요? 저 이제 괜찮은데 같이 먹으러 갈래요?”

“너도 먹을 거야?”

“전 배 안 고파요.”

“그럼 나도 안 먹어.”

내 말에 정우진이 벌떡 일어나 인상을 찌푸렸다.

“왜요?”

“나중에 너 먹을 때 먹을래.”

“뭐 하러 그래요? 지금 먹고 싶으면 먹어야지. 제가 가지고 올까요?”

당장이라도 나갈 것 같은 정우진을 다시 무릎 위에 눕히고 말했다.

“이제 내가 먹을 때 너도 같이 먹어.”

“전 음식 할 때도 그렇고 그냥 이거저거 조금씩 주워 먹어서…….”

“너 살 빠졌지?”

“…….”

내 말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살이 빠진 게 눈에 보일 정도면 단순히 1, 2kg만 빠진 게 아닐 거다.

“얼마나 빠졌어?”

“모르겠어요. 근데 저 원래 좀 빠졌다 쪘다가 계속 그러는 편이에요.”

별일 아닌 듯 하는 말에 한숨이 나왔다.

“그래서 넌 내가 애 낳을 때까지 계속 이럴 거야?”

아이를 낳으려면 여덟 달은 더 이러고 있어야 한다. 당장은 어떻게든 견딜 수 있을지 몰라도 몇 달만 더 지나면 정우진은 과로로 죽거나 살이 빠져서 해골이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제가 뭘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챘을 게 틀림없는데도 정우진은 계속 모른 척하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올려다보는 얼굴이 얄미워서 주먹을 쥐었다가 그래도 이건 좀 심한 것 같아서 손을 펴고 찰싹 소리가 나게 이마를 때렸다.

“너 하루에 몇 시간 자냐?”

“그냥 잘 만큼 자요.”

내 말에 정우진이 뚱한 얼굴로 이마를 문지르며 웅얼거렸다. 그걸 보며 나는 정우진의 손목을 잡아 내리고 이마를 한 대 더 때렸다.

“네가 말하는 잘 만큼이 몇 시간인데?”

“왜 자꾸 때려요?”

말할 생각이 없어 보여서 이번에는 이마를 두 대 더 때리자 정우진이 양손을 올려 벌게진 이마를 부여잡고 말했다.

“오늘은 세 시간은 넘게 잤어요.”

“자랑이냐?”

이마를 가리고 있는 손등 위를 철썩철썩 때리자 정우진이 아프다고 우는소리를 냈다.

“나 애 낳기 전에 너부터 죽을 거 같은데 그냥 지금 나한테 맞아 죽을래?”

“제가 왜 죽어요?”

“손 안 치워?”

“저 안 죽어요.”

“치워.”

내 말에 정우진이 슬금슬금 이마를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날 올려다보는 검은색 눈동자가 겁에 질려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가만히 그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붉어진 이마를 쓸어 넘겼다. 손에 잔뜩 힘을 주고 머리카락을 위로 쫙쫙 올려 넘기자 처음엔 가만히 있던 정우진이 참다못하겠는지 작게 말했다.

“머리카락 다 빠지겠어요.”

“어차피 죽을 건데 좀 빠지면 어때.”

“저 안 죽는다니까요?”

손에 조금씩 힘을 풀면서 계속 머리카락을 만졌다. 천천히 이마에서부터 머리를 쓸어 넘기고 관자놀이와 귀 뒤를 만져 주자 정우진의 눈이 감겼다. 눈을 감았다 뜨는 간격이 길어지고 숨소리도 일정해지기 시작했다.

“…….”

“…….”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눈을 뜨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잠이 든 것이다. 그걸 보며 나는 황당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냥 잠깐 누워서 눈만 깜빡였는데 잠이 든 거면 얼마나 피곤했다는 거야?

설마 진짜 잠든 건가 싶어 머리를 만져 주고 있던 손을 내렸지만 정우진은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야.”

“…….”

아주 작게 불러 봐도 정우진은 눈을 뜨지 않았다. 착잡한 얼굴로 잠든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머리카락을 만져 줬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지날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속에 쌓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게 대체 뭔지도 모르겠고,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것조차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냥 무언가가 계속 쌓이기만 해서 속이 답답했다.

한참 머리카락을 만져 주다가 조심스럽게 베개 위에 눕혔다. 평소라면 깨고도 남았을 텐데 정우진은 죽은 것처럼 자고 있었다. 그래도 오래 자지는 않고 금방 깨겠지만, 잘 때만큼이라도 편히 자면 좋을 것 같아서 조용히 방을 나왔다.

소리가 나지 않게 방문을 닫고 도둑놈처럼 거실을 지나 주방에 도착하자 식탁 위에 널브러진 빵과 잼, 우유 그리고 넘어져 있는 의자가 보였다. 식탁 의자를 세우고 조금 전 정우진이 잼을 발라 놨던 빵을 한 입 먹었다.

그사이 빵은 다 식어 있었지만 맛있는 건 똑같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식욕이 돌지 않아 몇 번 씹다가 다시 내려놨다.

대충 식탁을 정리하고 있는데 문득 정우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내가 요리를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볶음밥 같은 건 자주 해 먹었다. 아니, 자주는 아니고 그냥 가끔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내가 만들어 먹기도 했었다. 엄청나게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정말 못 먹을 수준은 아니었는데.

인상을 찌푸리고 허공을 노려보다가 냉장고를 열어 김치를 꺼냈다. 다행히 식은 밥이 좀 남아 있어서 프라이팬을 꺼내 기름을 둘렀다. 김치를 대충 가위로 자르고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밥과 김치를 넣고 가스레인지 불을 켰다.

숟가락으로 밥과 김치를 섞다가 다 된 것 같아서 조금 떠 한 입 먹었다.

“…….”

김치 볶음밥이 아니라 이건 그냥 김치밥이었다. 아무런 맛도 안 나는 거 같고 그냥 밥이랑 신맛밖에 나지 않아서 김치를 조금 더 넣었다. 그리고 다시 뒤섞다가 먹어 봤지만 맛이 크게 변하진 않았다.

김치 국물을 좀 넣어 볼까 싶어 넣었는데 이번에는 김치 볶음밥이 아니라 김치 국밥이 돼 버렸다.

“씨발.”

처음부터 대충 한 게 문제였다. 나는 실패한 김치 국밥을 버리고 이번에는 좀 더 본격적으로 재료를 준비했다.

식은 밥과 잘게 자른 김치를 그릇에 담고 파를 꺼내 잘랐다. 그리고 달걀 한 알도 꺼내 옆에 두고 통조림 참치도 꺼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밥과 김치, 참치, 자른 파를 넣고 꾹꾹 섞으며 볶았다. 하지만 불이 너무 약했던 탓인지 프라이팬 안에 내용물이 죽처럼 질척거렸다. 좀 더 오래 볶으면 되지 않을까 싶어 암만 기다려도 계속 질척거리기에 불을 제일 세게 올려 버렸다.

그리고 완성된 건 탄 김치 참치 죽이었다.

“…….”

나는 정우진이 내게 그딴 쓰레기를 먹일 수 없다고 말해도 이제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참담한 얼굴로 탄 죽을 보다가 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고민했다.

내가 요리를 못하기는 했지만 이 지경까지 못한 건 결단코 아니었다. 그래도 그냥저냥 먹을 수 있을 만큼은 만들었는데 대체 왜 이렇게 못하게 된 거지? 계속 정우진이 해 주는 것만 먹어서 그런가?

거무죽죽한 죽을 가만히 보다가 그래도 생긴 것과는 달리 혹시 맛은 좀 낫지 않을까 싶어 아주 조금 먹어 봤지만 예상대로였다. 입에 있는 걸 힘들게 씹어 삼키려다가 그랬다간 그동안 정우진이 고생해서 만들어 먹인 내 몸속의 보양식까지 쓸모없게 될까 봐 그냥 뱉어 버렸다.

나중에 일어난 정우진이 혹시라도 이걸 발견할까 싶어 흔적도 없이 다 치워 버렸다. 싱크대 안의 물기까지 싹 다 닦고 나자 별로 서 있지도 않았는데 다리가 아파 왔다.

의자에 앉아 잠시 쉬다가 일어나 서재로 갔다. 입덧과 감정기복에 관한 걸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한쪽 벽면에 빼곡하게 채워진 책의 제목을 훑으며 어떤 책을 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책상 위의 핸드폰이 눈에 들어왔다. 정우진은 집에서 핸드폰을 잘 보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에 뒀는지 잊고 찾아다니기 일쑤였다. 어떤 날은 핸드폰이 없다고 찾다가 귀찮다고 나가서 사 온다는 걸 말린 적도 있었다.

혹시 부재중 전화가 들어와 있는지 확인하려고 액정을 누르자 화면 가장 앞에 알록달록한 어플 몇 개가 보였다.

정우진은 평소에 핸드폰으로 사진 찍고 문자, 전화밖에 안 했다. 가끔 내가 하는 핸드폰 게임을 자기도 해 보겠다고 하게 해 달라고 한 적은 있었지만 그것도 몇 번 하다가 마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런 것도 받을 수 있긴 했구나, 새삼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플 이름을 보고 웃었다.

죄다 임신에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임신 종합 백과사전, 좋은 엄마 좋은 아빠 되기 등 그런 어플이 열댓 개나 깔려 있었다. 의자에 앉아 어플을 몇 개 보다가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책 더미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초보 엄마, 아빠라면 알아야 할 것들.>

<임신 출산 가이드북.>

<산후조리의 중요성.>

<태교 음식.>

<임산부 요가.>

“……?”

책의 이름을 확인하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임산부 요가 책을 확인했다. 임산부 요가는 뭐야? 이런 것도 따로 있나? 그리고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또 뭐지? 아직 애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뭘 벌써 아이가 달라지니 마니…….

황당한 얼굴로 표지를 보다가 책장을 넘겼다.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어 반쯤 누운 상태로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책을 읽다가 따로 메모를 해 둔 건지 곳곳에 정우진이 써 놓은 주석이 달려 있었다. 읽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은 밑줄을 치고 물음표를 몇 개 써 놓기도 했다.

정우진이 써 놓은 물음표 옆에 물음표 하나를 더 쓰고 책장을 넘겼다. 그렇게 한두 장 보다 보니까 슬슬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방으로 가자니 너무 귀찮았고, 혹시 정우진이 깨기라도 하면 그건 또 그거대로 싫었다. 책을 더 볼 수도 없고 여기서 자자니 불편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책을 반쯤 편 채 꾸벅꾸벅 졸았다.

어느 순간부터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들리는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너무 놀라서 그런지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희미하게 들리던 인기척은 조금씩, 그리고 빠르게 커지기 시작했다. 정우진이 일어난 건가 싶어서 부르려는데 점점 가까워지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그러다가 다시 가까워지고, 또 멀어지다가 다급해졌다.

“선배.”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답을 하려는데 목이 잠겨서 소리가 잘 나오질 않았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하는 사이 정우진이 다시 날 불렀다.

“선배!”

아까보다는 조금 더 큰 소리였다. 얼핏 들어도 불안한 목소리라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정우진이 뛰다시피 문 앞을 지나쳤다. 정말 순식간에 휙 지나갔던 정우진이 곧 빼꼼 얼굴만 내밀어 날 쳐다봤다.

“여기서 뭐 해요?”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 정우진이 눈에 띄게 안도하며 물었다.

“책 보고 있었어요?”

“…….”

자는 사이 땀이라도 흘린 건지 이마가 축축했다. 날 내려다보던 정우진이 내 손에 있는 책을 가져가 책상 위에 올려놨다. 그러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다리를 끌어안았다. 허벅지 위에 얼굴을 대고 잠시 숨을 고르듯 가만히 있던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언제 일어났어요?”

“안 잤어.”

다리에 가슴이 닿아 있어서 그런지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고 있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내 짧은 대답에 뭐라고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던 정우진이 불안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였다. 눈을 깜빡였다가 다시 뜨자 정우진이 날 보며 웃고 있었다.

“선배 혹시 볶음밥 만들었어요?”

“…….”

“주방에서 탄 냄새 나던데.”

혹시 아까 자기가 그런 말을 해서 그런 거냐고 웃는 얼굴로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답답해서 꽉 막혀 있던 가슴이 울렁거렸다. 정우진이 겁을 내면서 내게 싫다고 말하던 그때와 비슷한 증상이었다.

“근데 만든 거 어디 있어요? 혹시 버렸어요?”

정우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조금 전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불안해하던 얼굴과는 딴판이었다. 아니, 딴판이 아니었다. 똑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괜찮은 척 웃으며 말하는 얼굴은 조금 전 뛰다시피 빠르게 문 앞을 지나쳤을 때의 얼굴과 똑같았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서 이마를 짚자 정우진이 내 손목을 잡았다.

“왜요? 어디 아파요?”

“너는?”

“네?”

“넌 어디 아파?”

목이 잠겨서 그런지 목소리가 낮았다. 나는 내 손목을 잡고 있는 정우진의 손을 반대쪽 손으로 떼어 내며 물었다.

“어디 아파?”

“아니요.”

의아한 얼굴로 날 보던 정우진이 떼어지는 제 손을 가만히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근데 식은땀이 왜 나?”

“그냥 자다가…….”

“왜 뛰어와?”

“…….”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건지 정우진이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날 쳐다봤다. 그걸 보고 있자니 가슴이 진창 나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그냥 혀를 차고 한숨 몇 번 쉬고 넘어갈 일이었다. 종종 있는 일이라 그렇게 거슬릴 것도 없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길 잃은 개처럼 날 부르면서 집 안을 뛰어다니고 있는 꼴을 보자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선배, 혹시…….”

“화났냐고?”

“…….”

“화났으면?”

그냥 이러고 넘어가면 끝날 일이었다. 나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정우진 입장에서는 내가 죽을 위험에 처한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평소보다 걱정을 많이 하고 더 불안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우진은 내가 신경을 쓸까 봐 자기 나름대로 최대한 그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평소처럼 넘기고 안아 주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면 될 일이었다.

“그럼 어쩔 건데? 이제 안 그럴 거야?”

“…….”

“자다가 일어나서 내가 옆에 없어도 방문 다 열어 보면서 안 뛰어다닐 거야?”

“…….”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는 얼굴을 보며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번 터진 입은 멈출 줄 몰랐다. 화를 내면서도 내가 왜 이러는지 도대체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계속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저 안 죽어요, 안 죽는다니까요, 이딴 소리만 하는 이유가 뭔데? 네가 그랬지? 죽은 사람들은 자기가 죽고 싶어서 죽은 게 아니라고. 아니면 너 혹시 내가 그냥 애 낳다가 죽을 거 같아서 너도 죽으려고 이러는 거야?”

“아니…….”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정우진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힘들게 말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잘못…….”

“잘못했다는 소리 좀 그만해! 씨발, 도대체 네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고함을 치자 정우진이 숨도 못 쉬고 그대로 얼어 버렸다. 그 꼴을 보니 도저히 화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다시 소리를 지르려는데 정우진이 절박한 얼굴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선배가 힘든데……. 선배만 힘드니까…….”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정우진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머리 꼭대기까지 열이 뻗친 이 상황에서도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내가 힘든 게, 뭐? 내가 애 낳을 때 힘드니까 너도 똑같이 힘들어야 한다고? 그래서 네 몸 그렇게 혹사시키면 마음이 좀 나아지냐? 씨발, 그럴 거면 차라리 너도 임신을 해!”

“선배, 미안해요, 죄송해요. 이제 안 그럴…….”

“너는 씨발, 그것도 존나 짜증 나! 내가 잘못했다고 하지 말라고 하면 그 말만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미안해요, 죄송해요, 이딴 비슷한 말도 하지 말라는 거야!”

너무 화가 나서 그런지 눈앞이 뜨거워졌다.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토해 내도 막힌 가슴이 뚫리질 않았다. 계속 답답하기만 하고 속이 울렁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정우진이 내 허리를 잡고 놔주질 않았다.

“선배.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진짜 짜증 나 죽겠어, 씨발! 넌 자다 일어나서 내 얼굴 몇 초 안에 안 보면 뒈지는 병이라도 있냐? 당장 내 얼굴 확인 안 하면 영영 못 봐?! 내가 너 자는 사이에 집 나가서 씨발, 딴 사람이랑 살림 차리냐? 어?!”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이딴 소리를 못하게 했더니 정우진이 아무런 말도 하질 못했다. 어쩌면 속으로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냥 싫다는 말도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지, 내가……!”

쌍욕을 하면서 소리치고 있는데 갑자기 울컥했다. 내가 고함을 치다 말고 입을 다물자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젖은 얼굴이 조금씩 흐리게 번지고 있었다. 앞이 부옇게 돼서 정우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선배.”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정우진이 날 불렀다. 손을 뻗어 어깨를 밀어내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휘청이자 언제 일어난 건지 정우진이 내 어깨를 안고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 사실 맞긴 한데……. 선배는 힘든데 나만 너무 편하게 있으려니까 그게 더 힘들어서 그랬어요. 이제 안 그럴게요. 내가 힘든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선배가 힘든 걸 먼저 신경 썼어야 했는데…….”

“아니……. 그러니까, 너는 그런 게 진짜……. 존나 싫어. 진짜 싫어. 너무 싫다고.”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울면서도 내가 왜 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게 이렇게 화를 낼 일인가? 그리고 정우진은 평소에도 이런데 이제 와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자다 일어나서 선배 없어도 안 그럴게요. 혹시 넘어지거나 그랬을까 봐 걱정돼서 그랬어요. 주방도 너무 깨끗하고, 너무 조용해서……. 이제 안 그럴게요. 진짜 안 그럴게요. 맹세해요.”

“지랄하지 마, 씨발……. 너는 네 맹세에 신용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냐?”

내가 울면서 물었지만 정우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목덜미에 눈가를 비비면서 울음을 삼키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어깨를 잡고 살짝 몸을 뗐다. 날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지자 뒤늦게 내가 패악을 부리며 울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선배.”

“…….”

눈을 맞출 수가 없어서 그냥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자 점점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도대체 내가 무슨 짓거리를 한 거지? 아니…….

“선배.”

“…….”

머리 꼭대기까지 올랐던 화가 차갑게 굳어 발끝을 지나 땅 끝까지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 폭풍처럼 지나갔던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뺨을 잡고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어 올렸다.

“…….”

“…….”

고개를 들고도 나는 정우진의 눈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시선을 내려 하얀 턱 끝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아무런 말도 없이 다시 날 끌어안았다.

빈틈없이 세게 안겨 숨이 막히고 답답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서 그게 문제였다. 도대체 아까 왜 그렇게 화가 나고 가슴이 아팠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그랬다면 이해하겠지만 나는 정말 그 전에는 괜찮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우진이 하는 기이한 행동들을 다 납득하고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참지 못하고 두서없이 터뜨릴 만큼 쌓이거나 불만이었던 건 결코 아니었다.

“잘못했어요.”

“그 소리 하지 말라고.”

“네,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이젠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우진이 방금 말한 ‘잘못했어요’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말하는 ‘잘못했어요’와는 다르다는 걸 알았다. 몸에 힘을 빼고 완전히 안기자 정우진이 더욱 세게 날 끌어안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러고 한참을 있는데 정우진이 날 불렀다.

“선배.”

“뭐.”

“아까 안 그런다고 하기는 했는데 사실 안 그러기는 좀 힘들 거 같아요.”

“뭐?”

그 말에 인상을 찌푸리고 정우진을 밀어냈지만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계속 밀어내려고 몸을 뒤틀었지만 날 안은 팔은 풀리질 않았다.

“선배가 무사할 거라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전 괜찮아질 수가 없어요. 계속 잠도 못 잘 거고, 밥도 잘 못 먹을 거예요. 걱정되니까. 그래도 이젠 억지로 지금보다 더 힘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할게요.”

나지막하게 말하는 말에 평소라면 그러라고 했겠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냥 그런대로 수긍할 수가 없었다.

“지금 제일 힘든 게 그거야. 난 네가 그러는 게 제일 힘들다고.”

“미안해요. 최대한 티 안 내려고 노력해 볼게요.”

“노력해도 안 돼. 티 존나 나. 진짜 엄청 나. 너 연기 존나 못해.”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정우진은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드러났다. 불안해하면 나 불안한 사람이에요, 슬프면 나 슬픈 사람이에요, 목에 푯말을 걸고 다니는 수준이었다.

“그럼 어떡해요? 거짓말이라도 할까요? 걱정도 안 하고 힘들어하지도 않을게요.”

“거짓말을 나한테 말을 하고 하면 어떡해, 등신 새끼야. 할 거면 몰래 해.”

“못하겠는데 선배가 자꾸 시키니까 그런 거잖아요.”

“…….”

아니, 씨발…….

내가 다시 어깨를 밀자 이번에는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쳐다보자 정우진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선배는 지금부터 숨 쉬지 말고 살라고 하면 그럴 수 있어요?”

“숨을 안 쉬고 어떻게 살아?”

“그러니까요.”

“…….”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많았지만 더 이상 말이 통할 것 같지가 않아서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우진이 하는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진짜 모든 걱정을 접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나는 가만히 정우진을 보다가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럼 좀 적당히 해.”

“알았어요.”

이번에는 별말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다시 말했다.

“하루에 최소 여덟 시간은 자.”

“매일이요? 매일 여덟 시간을 어떻게 자요?”

정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평소에는 거의 내가 먼저 잠들고 정우진이 먼저 일어나서 정확히 평균 수면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아마 여덟 시간은 절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하든 정우진은 일단 안 된다고 할 게 뻔해서 과하게 부른 게 맞았다.

“그럼 여섯 시간.”

“다섯 시간으로 해요.”

이거 봐라. 아마 내가 처음부터 여섯 시간이라고 했으면 다섯 시간이 아니라 네 시간이라고 말했을 게 틀림없었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제발 좀 봐달라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시간 정해 봤자 그냥 일어나면 끝이잖아요. 만약 더 빨리 일어나면 어떡해요? 다시 자려고 해도 잠이 안 들면?”

“그냥 눈이라도 감고 계속 누워 있어.”

그렇게라도 억지로 눕혀 놓는 게 차라리 나았다.

“눈 감고 뭐 해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누워서 시간을 낭비하고 버려.”

자기가 일개미야, 뭐야? 눈만 뜨면 있는 일, 없는 일 다 찾아서 해야 직성이 풀리나?

“네가 다섯 시간이라고 했으니까 적어도 하루에 다섯 시간은 자고 만약 일찍 눈이 떠지면 침대에서 굴러다니기라도 해.”

“…….”

“분명히 말하는데 오늘부터 시작이야. 한 번만 더 저번처럼 굴면 시간 단위로 시간표 만들 거야.”

초등학생 때 방학 숙제로 만든 동그란 시간표를 떠올리며 말했다. 싫다고 하거나 안 된다고 해도 절대 들어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았어요. 선배가 하라는 대로 할게요.”

“자는 시간이랑 쉬는 시간은 별도야.”

“공부 시간은 없어요?”

웃는 정우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오죽했으면 이랬겠냐고. 갑자기 피곤해져서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눈가를 문질렀다.

“선배도 혹시 또 울고 싶으면 꼭 말해 주세요. 아니, 말 안 해도 되니까 참지 말고 그냥 우세요. 울면서 저한테 욕해도 돼요.”

“…….”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다시 말했다.

“이유 없이 그냥 짜증 나면 때려도 돼요. 아까처럼 머리카락 다 뽑으려고 해도 참을게요.”

“정우진.”

내 목소리가 낮아지자 뭐라고 더 말하려던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다시 슬금슬금 열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가까스로 화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내가 이유도 없이 널 왜 때려.”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그냥 갑자기 짜증 나면 저한테 짜증 내도 된다는 뜻이었어요.”

변명하듯 황급히 말하는 걸 들어도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냥…….”

“…….”

“그냥 뭘 해도 된다는 그런 말이었어요. 선배가 뭘 해도 다 괜찮으니까……. 참지 말고, 아까처럼 화내도 되니까 제 걱정 하지 말고 선배는 선배 생각만 하세요. 그러니까…….”

정리가 잘 되지 않는지 횡설수설하며 말하던 정우진이 날 보며 말했다.

“제 걱정은 안 해도 돼요.”

“…….”

“그래도 정말 조절은 하고 있으니까 진짜 걱정 안 해도 돼요. 혹시 쓰러지거나 그러면 그동안 선배는 혼자 있어야 하는데 그럼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정말 걱정 안 해도 돼요.”

나는 조금 전 정우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깐 짜증이 났는데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니까 이해가 됐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정말 들어주기 힘든 말이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없듯, 나도 그렇게는 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말을 하면 아까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내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리자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정우진이 말했다.

“그러니까 선배도 적당히 하세요.”

“…….”

“제 걱정 하는 거 말이에요. 지금 객관적으로 봐도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쪽은 선배잖아요.”

맞는 말이긴 했지만 수긍하려니 내키지가 않았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질 않자 정우진이 말을 이었다.

“어제 빵 먹고 싶다고 한 것도 진짜 그게 먹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닌 거 알아요.”

“그건 그런데 빵은 진짜 맛있었어.”

찔려서 횡설수설하며 말하자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가 절 걱정해서 그렇게 말하는 게 더 싫어요. 그러니까 정말 제가 적당히 하길 바라면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그게 더 신경 쓰여요.”

“…….”

내가 정우진의 변화에 민감한 만큼 정우진도 내 변화에 민감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우진이 아무리 웃으면서 괜찮은 척을 한다고 해도 내 눈에는 그게 아니라는 게 다 보이는데, 정우진이라고 내가 하는 생각을 모를까.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을 텐데.

생각해 보면 늘 그랬던 것 같다. 그냥 말을 안 할 뿐이지, 정우진은 항상 알고 있었다. 내가 숨기려고 하거나 모른 척했을 땐 늘 끝이 좋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해 터진 정우진이 울고불고하면 나는 사과하면서 속에 있던 걸 끄집어내고.

그런 적이 몇 번 있다는 게 떠오르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겁먹었어?”

“네?”

“얼마 전에 새벽에 내가 그냥 낳자고 할 때 네가 싫다고 했잖아. 그때 왜 그런 얼굴을 하고 나한테 싫다고 했냐고.”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이게 시작점이었다. 여기서부터 모든 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질 않아서 더 화가 났다. 정우진이 그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고작 그런 일을 왜 며칠씩이나 마음에 담아 두고 짜증을 내는지 내 자신에게 놀랄 만큼 이상했다.

“선배가 안 된다고 할 줄 알았어요.”

“…….”

“제가 싫다고 해도 안 된다고 할 줄 알아서……. 선배가 하는 말에 반대해야 하는데 그게 저한테는 너무 힘들어서 그랬나 봐요.”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하는 말에도 납득이 되질 않았다. 왜냐면 나는 정우진이 이런 말을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그랬으니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정우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그래 왔으니까.

정말 새삼 놀랄 일도 아닌데.

“그래도 그런 표정 지을 건 없었잖아.”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겁먹은 고슴도치처럼 말끝에 가시를 세우고, 마치 내가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혼란스럽고 답답한 와중에 문득 깨달았다. 나는 화가 났던 게 아니었다. 정우진이 했던 말에 화를 내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나는 계속, 서운했던 거다.

정우진이 날 그딴 식으로 쳐다봐서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다시 만나 수많은 일을 겪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애틋해하며 소중하게 감정을 교류하는 동안, 한구석에서 충분히 무뎌져 감당이 가능해진 감정이었다. 견딜 수 있는 괴로움이었다.

어떤 날은, 아주 드물게 조금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정우진이 나를 믿어 주지 않아서 느끼는 하찮은 배신감보다 더 중요한 건 날 믿고 싶지만 그게 잘되지 않아서 무던히 애쓰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괜찮았다. 견딜 수 있었다. 버틴다기보다는 기다려 주는 것이었다. 언젠가 나를 믿는 날이 올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날이 오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곁에 있겠다고 수없이 하는 말이 끝내 전해지지 않더라도, 아무리 있는 힘껏 안아 줘도 끝끝내는 내가 떠날 거라 여겨도 괜찮았다.

내가 사랑하니까.

내가 정우진을 사랑하니까.

그래서 나는 괜찮았다.

그런데 지금은 괜찮지가 않았다. 조금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하찮은 배신감이 너무 커져서 서운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선배.”

정우진이 나를 믿었으면 좋겠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큼 좋아하는지, 그래서 얼마나 행복하고 괴로운지 전부 다 알았으면 좋겠다.

“정우진.”

알아야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알아야만 했다.

“네.”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끼고 가만히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얼굴이 왜 그렇게 희고 눈이 부신지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나 지금 이상한 거 같아.”

“어떤 점이요?”

갑작스러운 내 말에도 정우진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

“아니, 지금 갑자기 이상해진 게 아니라 계속 좀 그랬어.”

여유가 사라진 마음은 조금씩, 그리고 빠르게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당장 정우진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면 익사할 것처럼 조급증이 났다.

“너 때문이잖아.”

이건 분명 호르몬 변화로 인한 감정기복 때문일 것이다. 정우진이 요즘 틈만 나면 보는 임산부에 관련된 책에서 나도 본 적이 있었다. 다 알고 있는데도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내 진심이 아니라 그저 호르몬에 의한 농간임을 아는데도 울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선배가 무서워서 그런 표정 지었던 거 아니에요. 선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제 문제였어요.”

고개를 숙이자 아래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개를 숙이는 건 정우진이 자주 하던 짓이었는데. 우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지금 내가 제정신일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미안해요.”

정우진이 내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숙여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속 눈물이 났다.

“그냥 싫다고 해도 알아듣는다고.”

“맞아요. 선배 말이 다 맞아요. 제가 잘못했어요.”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도대체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지?

알긴 하는 건가?

사랑해서 옆에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잡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매번 그딴 말이나 하겠지. 개가 좋은지 자신이 좋은지 묻고, 내가 조금만 생각에 잠겨도 혹시 자길 떠날 궁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인상만 써도 자기가 무슨 대역죄를 저지른 것처럼 미안해하고.

싫은 걸 싫다고 말하려면 내가 떠날 거라는 각오를 해야만 하고.

“선배, 미안해요.”

“네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되잖아.”

내 어깨를 끌어안으려는 정우진을 반사적으로 밀어냈다. 아무리 힘을 주고 떨쳐 내려고 해도 결국 날 안은 정우진이 다시 한번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정우진은 가여울 만큼 자신감이 없었고 자기가 얼마나 귀여운지, 얼마큼 사랑스러운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좆같을 만큼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무를 수도 없고 고쳐 쓸 수도 없고 빠져나올 수도 없는데 그걸 정우진은 조금도 몰랐다.

그게 너무 힘들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미안해요.”

“내가 씨발, 얼마나 말했는데…….”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 마음을 종이에 적어서 보여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림을 그려서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로 모든 걸 다 표현할 수 있다면.

“그렇게 쳐다보지 마.”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네, 안 그럴게요.”

“나한테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네, 잘못했어요.”

옷깃이 다 젖어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정우진은 내게 사과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말을 꺼낸 탓이었다.

“평소에는 안 그랬어. 진짜야. 그냥 네가 날 그렇게 쳐다보니까 갑자기 마음이 이상해진 거야.”

“네, 알아요.”

“진짜 안 그랬다고…….”

“알고 있어요.”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까지 괴로운 일인 줄 몰랐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들이 서운해지고 거슬리기 시작하니까 내가 이상해진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변한 건 없는데 나만 이상해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더 서러워졌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앞이 어지러웠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울었던 건 어린아이였을 때를 포함해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눈물이 그치자 몸이 나른해졌다. 나는 거의 반쯤 정우진에게 기댄 채 몸에 힘을 빼고 눈만 깜빡거렸다. 눈이 부었는지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다.

“정우진.”

“네.”

목이 잠겨서 말을 하는 게 힘들었다. 아직도 목소리가 떨려서 잠깐 입을 다물고 숨만 삼켰다.

“넌 소중한 사람이야.”

내 말이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모른다고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때, 억지로 아이를 지우게 했더라도 내가 정우진을 싫어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다.

“나한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

“함부로 대하지 마.”

어떤 좆같은 짓거리를 해도 나는 이제 정우진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이 집에서 나갈 수가 없다. 나가라고 해도 못 떠난다. 그래도 계속 나가라고 하면 정우진을 죽이고 나도 이 집에서 죽을지도 몰랐다.

“날 대하듯 대하라고.”

“…….”

“알겠어?”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서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렇게 한참을 있는데 뒤늦게 정우진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은 기분이 들자 너무 신나서 또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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