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장 (20/28)

11장

종잇조각이 팔랑거리며 발치로 떨어지는 걸 멍청하게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벽걸이 텔레비전과 그 밑에 대리석 받침대가 보였다. 쪼르르 서 있는 세 개의 난 화분엔 꽃이 피어 있었다. 하얀 천장, 하얀 바닥,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거실과 시커먼 지갑이 떨어진 소파.

“헉…….”

나도 모르게 계속 숨을 참고 있었던 건지, 한계에 다다라 크게 숨을 들이켜자 눈앞이 핑 돌았다. 숨을 크게 마셨다가 내뱉었다가, 다시 크게 마셨다가 뱉었다가…….

몇 번 반복해도 목구멍에 뭔가 걸려 숨을 쉬기가 힘든 느낌이 계속 들었다. 숨을 쉬는 게 너무 불편해서 목을 만지고 주무르다가 손톱을 세워 긁었다. 그래도 계속 숨이 막혀서 결국 목덜미를 쥐어뜯으며 바닥으로 쓰러지는데, 어깨에 바스락거리며 종이가 뭉개졌다.

화들짝 놀라 도망치듯 몸을 일으키자 구겨진 종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

머릿속으로 그동안 정우진이랑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제주도에서부터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던 그 순간까지도, 모조리 다.

“미친…….”

머릿속에서 뒤섞이는 기억에 나는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덮고 미끄러지듯 벽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벽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소리는 점점 커졌지만 아픔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냥 이 모든 게, 나도, 정우진도, 그냥 이 세상 전부가 꿈만 같았다.

“씨발. 씨발. 씨발.”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조금씩 선명해지는 기억이 좀벌레처럼 날 갉아먹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냐고.”

그 좆같은 섬에서 정우진이, 내가 집이라고 착각했던 이곳에서 정우진이.

“이게.”

내게 했던 모든 짓거리들이 칼로 머릿속을 난도질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새겨지고 있었다. 그 어떤 배려도 자비도 없이, 그저 일방적으로 꾸역꾸역 처넣어지고 억지로 살갗을 헤집고 쑤셔지고 있었다.

“하…….”

아무것도 이해가 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쳐들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흐려지는 정신 사이로 불쌍한 정우진, 다정하고 상냥한 정우진, 좆같은 정우진이 한데 뒤섞여 한 사람이 되고 있었다.

* * *

옮겨 간 고아원은 원래 있던 곳보다 훨씬 작고, 여름에는 더 덥고 겨울에는 무척 추운 곳이었다. 아이들은 몇 명 없었지만 다들 착하고 친절하고 다정했다. 선생님들은 그 전 고아원의 원장 선생님처럼 잘못을 했다고 해서 밥을 굶기거나 방에 가둬 두지도 않았다.

원장 선생님은 아주 나이가 많은 할머니였는데, 매일 붉은색 손수건을 목에 감고 다녔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끔 날 안아 주기도 했고 잘 잤느냐고 물어봐 주기도 했다. 나는 상실감과 내 선택에 대한 죄책감, 후회, 그리움으로 한 번도 잘 잤다고 대답해 주지 못했다.

도저히 마주할 수 없는 죄 위로 천을 덮고 모래를 뿌리고 돌멩이를 쌓아 필사적으로 잊기 위해 급급하기만 했던 하루하루가 흘러갔고, 두어 달쯤 지났을 때 원장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우리는 검은색 옷을 입고 편지를 썼다.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아이도 있었고, 삐뚤빼뚤하게 글씨를 쓰는 아이도 있었다. 원장 선생님을 위해 그린 그림과 편지는 한동안 한쪽 벽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두어 달이 지났다.

아이들 중 한 명이 보이지 않았는데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내게 물어봤다.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고, 대화도 몇 번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계속 나에게 물어왔다.

“어디에 있는지 정말 몰라? 못 봤어?”

무덤처럼 쌓아 올린 돌멩이가 무너졌다.

“서주랑 같이 있는 거 봤다고 하던데?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선생님한테만 몰래 말해 줄래? 비밀로 할게. 응?”

흙이 파헤쳐지고.

“자꾸 거짓말 하면 맴매한다. 맴매할까?”

천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서주야, 미안해. 다른 애랑 같이 있다고 했는데 선생님이 서주랑 같이 있었다고 착각했나 봐.”

다시 처음부터 천을 덮고 모래를 뿌리고 돌멩이를 쌓았다. 수복이 끝날 때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처음보다 훨씬 튼튼하게 쌓아서 돌무덤은 이제 돌탑이 되었다.

“내일 새로운 애 온대. 남자애라고 하던데……. 이름이 우진? 박우진이라고 하던데?”

하지만 그건 아주 작은 바람에도 형편없이 무너지고 부서져서 나는 내 주변을 볼 틈도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틈도 없었다. 바스러진 잔해를 끌어모아 계속 더 크고 높이 쌓아서 결국 그것이 거대한 벽이 되었을 때, 나는 그 애의 얼굴이 더는 떠오르지가 않았다.

하얀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날에는 돌로 세운 벽 틈으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바람 부는 소리가 꼭 흐느끼는 소리 같아서 나는 계속 구멍을 메우고 막았다.

더는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때, 나는 그 애의 목소리도 잊어버렸다.

* * *

잠시 정신을 잃은 건지 거실 바닥에 엎어져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어린 시절의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마치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그려졌다. 기억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부작용 같은 건가? 분명히 이렇게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했었는데.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와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관자놀이 쪽을 꾹꾹 눌렀다.

‘나 버리지 마요…….’

그때 애원하면서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정우진이 내게 하는 말인지 김우진이 내게 하는 말인지 헷갈렸다.

‘형아.’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이거 먹어.’

‘제가 밥 사 줄게요.’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기억에 나는 귀를 꽉 막고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속이 울렁거려서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혼란스러운 건 여전했지만, 화가 나고 무섭고 슬픈 것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단 여기에서 나가야 한다.

내 기억이 돌아왔다는 걸 정우진이 알면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어쩌면 그 좆같은 외딴섬으로 다시 끌려갈지도 몰랐다.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는 지갑이 보였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는 종이도.

그 두 개를 번갈아 보던 나는 지갑 쪽으로 손을 뻗었다. 카드를 가져갈까 하다가 5만 원짜리 지폐 네 장을 챙겼다. 황급히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때마침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윽…….”

입 밖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음이 나왔다. 나는 떨리는 몸을 애써 무시한 채 현관문을 힘겹게 열었다.

잡히면 어쩌지? 내가 나갔다는 걸 알면? 어디로 가지? 나한테 갈 곳이 있나? 내가 도망갈 수나 있을까? 섬에서도 결국엔 잡혔는데.

어떡하지?

나는 왜…….

‘여기서 기다려. 꼭 기다려야 돼.’

왜 그랬지?

왜 그랬을까?

“…….”

나는 벽을 짚고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다. 자꾸만 숨을 쉬는 걸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크게 숨을 마시고 뱉기를 반복하면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기다려.’

도대체 왜 그랬냐고.

‘꼭 기다려야 돼.’

쓰레기 같은 새끼야.

“씨발, 그만 좀 해!”

돌벽이 무너지고 사라진 자리에서 자꾸만 누가 말을 걸었다. 나는 발작적으로 소리치면서 주먹을 쥐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발을 구르고 주먹으로 허벅지를 때리고 입술을 물어뜯었다.

다시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고 길을 걸었다.

“진짜 그만해.”

기억을 더듬어 큰길가로 나가자 8차선 도로가 보였다.

“그만, 제발…….”

멀리서 택시가 보여 팔을 흔들었다.

“제발, 부탁할게……. 그만 좀 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몇 번이나 제자리걸음을 하고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내 앞에 택시가 섰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문손잡이를 잡고 숨을 고른 뒤 택시를 탔다. 최대한 멀쩡한 척을 해 보려고 했지만 택시 기사가 날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어디 아파요?”

그 말에 고개를 흔드는데 밑으로 물이 떨어졌다. 눈물인지 땀인지 얼굴이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젖은 손으로 젖은 얼굴을 쓸고 닦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일단 가 주세요. 그냥 여기서 멀리.”

“네?”

“…….”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택시 기사가 허 참, 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차를 출발시켰다.

차 안은 조용해졌지만 내 머릿속은 여전히 전쟁터였다.

좆같은 정우진을 죽여 버리고 싶다가 김우진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좆같은 나를 죽여 버리고 싶다가 좆같은 정우진이 생각나면 김우진이 고맙다고 웃었던 얼굴이 떠올라서 너무 어지럽고 아프고 울렁거리고 쓰리고 추웠다.

‘맛있다. 그치?’

속이 답답해서 창문을 내리자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저 이마 찢어졌어요.’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 안 버린다고 했잖아!’

“저기, 학생.”

창밖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병원 갈까?”

“…….”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애초에 알아본 택시 기사가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하지만 병원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당장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형아.’

아는 사람에게 가면 정우진이 어렵지 않게 날 찾아올 것 같았다. 그냥 무작정 멀리 가 버릴까.

“…….”

사실 나는 지금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너무 지쳐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병원으로 가?”

내가 전혀 말이 없자 기사가 다시 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서 쓰라린 눈을 몇 번 깜빡거리고 있는데 문득 거실의 CCTV가 떠올랐다.

조금 진정이 된 것 같던 마음이 다시 미친 것처럼 요동치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씨발.

분명히, 분명히 정우진은 그걸 다 봤을 텐데…….

내가 계속 아무 말이 없자 결국 갓길에 차가 섰다. 택시 기사는 아예 몸까지 내 쪽으로 돌려서 다시 물었다.

“혹시 술 마셨어요?”

씨발. 씨발, 좆같은 정우진. 개 같은 새끼. 씨발, 절대 잡히면 안 된다. 잡히면 또 그 섬에서 그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당하면서…….

‘형아.’

“무작정 계속 갈 수는 없고……. 목적지를 정하세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갈 수는 없으니까.”

‘형아.’

“아니면 대충 동네라도. 예?”

귀를 막아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내리라고 할까 봐 최대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좀 멀리도 갑니까?”

“멀리 어디? 부산이라도 가요? 뭐, 돈만 주면 가는 거야 어렵지는 않은데…….”

‘형아.’

충동적인 선택이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영 갈 일이 없는 곳이었다.

* * *

고학년 아이들은 키가 크면 저학년 아이들에게 입던 옷을 물려 줬다. 낡고 해져서 옷은 점점 얇아졌지만 모두가 새 옷을 사 입기에 고아원은 너무 가난하고 돈이 없었다.

새 옷을 입고 싶어서 종종 울면서 떼를 쓰는 아이들도 있었다. 반면에 입는 옷 따위 어떤 모양이든 여름에는 덥지 않고 겨울에는 춥지만 않으면 아무런 상관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그중에 후자처럼 행동하는 전자였다.

옷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척 굴었지만 새 옷을 입고 싶었다. 울면서 떼를 쓴 적은 없었지만 밤에 몰래 훌쩍거린 적은 있었다. 고아원에만 있을 땐 몰랐는데 학교에 가니 그런 마음이 더욱 절실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고아원에서 아이들 모두에게 파카를 하나씩 사 주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또 하루 종일 사진을 찍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그냥 아무 대가도 없이 생긴 새로운 옷이었다. 선물이었다.

너무 신이 나서 옷은 대충 입고 그 위에 파카를 입었다. 거울 앞에 서서 지퍼를 끝까지 잠그고 등 뒤에 달린 모자도 써 봤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누가 가지고 갈까 봐, 그냥 이유도 없이 없어질까 봐…….

사실은 그냥 너무 좋아서 잘 때도 옷을 인형처럼 안고 잤다. 선물 받은 파카를 입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도 꿨다.

다음 날 학교에 갈 때 파카를 입었다. 수업을 들을 때도, 쉬는 시간에도, 밥을 먹을 때조차 한 번도 벗지 않았다. 내일도 입고 모레도 입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를 마치고 고아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고 파카는 쓸려서 찢어졌다. 까진 무릎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옷이 찢어져서 울었다.

선물 받은 걸 하루 만에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는 생각에 더욱 눈물이 났다. 고아원에 갈 수가 없어 조금 떨어진 곳에 숨어서 울고 있는데, 문득 그 애가 생각이 났다.

얼굴도, 목소리도 떠오르지 않아서 시커먼 덩어리로 나타난 애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 애를 잊느라 같이 잊어버렸던 게 떠올랐다.

그 뒤로 나는 물려받은 옷이든 새 옷이든 헌 옷이든 아무래도 좋아졌다.

* * *

“학생, 학생.”

부르는 소리에 느릿느릿 눈을 뜨자 택시 기사가 몸을 돌려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가지고 있는 돈 거의 전부를 택시비로 주고 차에서 내렸다.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서자 온몸이 아파 왔다. 잠깐 잠이 들었을 때 너무 웅크리고 떨어 대느라 근육이 굳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낯이 익은 길을 따라 걷자 폐허가 되어 있는 고아원이 보였다. 사정으로 문을 닫는다는 얘긴 얼핏 들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형체가 남아서 방치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충동적으로 이곳에 오긴 했지만 당연히 다른 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

세월의 풍파를 맞아 귀신의 집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자세히 보면 아직 그때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기는 했다.

비가 온 다음 날이면 늘 모래성을 만들고 놀았던, 작은 미끄럼틀과 시소, 그네 두 개밖에 없는 놀이터와 이름도 모르는 커다란 나무, 녹슨 4인용 철제 의자, 매년 방울토마토를 심었던 작은 화단, 갈라진 시멘트 벽 위에 그려 놓았던 원장 선생님 얼굴, 찌그러진 표지판…….

그리고 저 구석은 나무가 쓰러져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줄을 매달아 놓고 빨래를 널던 곳이었다. 이불을 널어 두면 마치 그게 비밀의 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놀다가 바닥에 떨어뜨려서 혼난 적도 있었는데.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미끄럼틀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가까이 다가가자 녹이 슨 냄새가 희미하게 났고, 아래에는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얼룩이 져서 딱딱하게 굳어 버린 흙을 보다가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 끝으로 만져 봤다.

여기에 앉아서 숨어 있을 때 손가락으로 뭔가를 그리거나 했었던 거 같은데……. 뭘 그렸더라. 그림을 그리고 이거 보라고 나한테 보여 주기도 했었던 것 같은데.

‘형아.’

고아원을 그리고 아이들도 그리고 선생님도 그리고……. 나도 그리고, 자기도 그렸는데……. 유독 나랑 자기 자신만 굉장히 컸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있었고 웃고 있었고……. 바탕색은 노란색으로 칠했었는데 크레파스가 부족해서 반은 초록색으로……. 아, 이건 흙바닥에 그린 게 아니라 스케치북에 그린 건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시 가만히 있는 사이 날이 저물어 주변은 계속 어두컴컴해져만 갔다. 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서서 입구 근처로 다가갔다. 날이 어두워서 어딘가로 가려고 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대충 그 근처 구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

정우진이 나에게 했던 짓을 떠올렸다.

분명히 하지 말라고 그만하라고 목이 쉬도록 말했는데,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날 납치하고 강간하고 그 섬에서 나갈 수도 없게 만들었다. 울고불고 애원하고 불쌍한 척을 하면서 흐느꼈지만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폭력을 쓰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날 휘둘렀을 뿐이다.

사랑해 달라고 자기가 잘하겠다고 했지만 그건 궤변이었다. 정신 나간 미친놈이 하는 헛소리일 뿐이었다. 정우진은 머리가 돌아 버려서 사리 분간을 하지 못했지만 피해자가 범죄자에게 연민을 느끼고 사랑한다고 착각한다면, 그건 피해자도 똑같이 정신이 나갔다는 뜻이었다.

정우진은 내가 자기랑 똑같이 정신이 나간 미친 인간이 되어서 자기를 바라봐 주기를 바랐던 걸까? 그 개좆같은 섬에서 정신이 나가 버린 채로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주길 바랐던 걸까? 현실은 보지도 못하고 대가리가 꽃밭이 되어 하하 호호 웃으면서 사랑이 넘치는 섹스인 척하는 강간이나 당하고, 주는 밥이나 처먹으면서 계속 그렇게 가축처럼 살기를 바랐던 걸까?

“개씨발.”

생각하니까 또 열불이 치솟았다.

사랑한다고? 사랑?

“하하하.”

나는 머리를 짚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정우진을 쳐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는지 화가 나면 어김없이 그 애가, 김우진이 내 발목을 잡았다.

고아원에서 김우진은 그냥 겁이 많고 불안해하는 꼬마였다.

내가 못되게 굴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시 후면 내 옆으로 다가왔다. ‘형아’ 하고 부르면서 내 관심을 끌려고 별짓을 다 했는데, 사실 그땐 그게 별로 귀찮지 않았다.

나를 찾느라 뛰어다니고, 나하고 놀고 싶어서 울먹거리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에도 내가 있어야 하고……. 그냥 내가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고 힘들어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

그게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김우진의 고통과 외로움을 외면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아파할수록 외로워할수록 울면 울수록 좋았다. 그래야 안심이 됐다. 나는 김우진이 아파하는 걸 속으로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숨어서 그걸 바라보며 안심하고 뒤늦게 미안해지면 다시 잘해 주고, 그러다가 또 불안해지면 그 애가 미워져서 상처 입히고 울려서 알량한 안식을 되찾고, 그러면 또 미안해지니까 잘해 주고…….

계속 반복하다가 결국 밉다는 감정만 남아 버린 것이다. 애초에, 처음에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정신 나간 미친놈은 결국 내가 아니었을까?

인간 망종 쓰레기 같은 새끼가 따로 없었다. 정신 나간 새끼가, 누가 누구한테 미친놈이래?

고작.

고작…… 그딴 걸 확인하겠다고…….

그런 행위에, 그런 감정에 마약처럼 중독이 되어서, 혼자서는 멈출 수가 없어서 결국 나는 그런 사달을 내버린 거다. 그 애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나 혼자 설치다가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단지 그냥 나하고 놀고 싶어 했던 애를.

“…….”

온몸을 뒤덮는 감정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당시에도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점점 잊어버리기를 택한 걸지도 몰랐다.

내가 그 애를 함부로 대하고, 미워하고, 시험하고, 결국에는 폭설이 내리는 산 한가운데에 버렸으니까. 기적적으로 구해지기는 했지만 나는 오랫동안 김우진이 죽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김우진은 하얗게 언 산 한가운데서 살려 달라고 내게 손을 뻗었다.

형아, 살려 줘. 살려 줘. 형아, 살려 줘.

그렇게 한참을 말하다가 결국에는 얼어 죽어 버렸다.

김우진이 죽었다.

매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을 그렇게 죽었다.

“…….”

울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내가 아무리 울고 괴로워하고 죄책감에 시달려도 매일 밤 그 애가 죽었다. 그래서 잊어버렸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최선이라고 여겼다.

“…….”

문득 정우진이 나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그런 짓을 당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고 그냥 복수하려고 날 그 섬으로 납치했던 건지도 모른다.

가해자인 나는 다 잊어버렸는데 피해자인 정우진은 잊지 못하고 지금까지 그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가 결국 그런 짓을 저질러 버렸던 걸까? 내가 견딜 수가 없어서 전부 잊어버린 것처럼 정우진도 견딜 수가 없어서 복수를 시작한 걸지도 몰랐다.

‘선배.’

하지만…….

‘하나를 가지면 둘을 바라게 되고, 둘을 가지면 셋을 바라게 된대요.’

하지만 그건 거짓이 아니었다.

‘이젠 내가 참고 견디고 버티면 선배는 내 이름도 불러 주고 나랑 같이 있어 주기도 하고 내 말도 들어 주니까.’

날 부를 때의 그 목소리와 표정, 눈빛, 손길…….

‘선배, 나는요.’

세상의 모든 다정함과 상냥함을 끌어안아 모조리 다 건네주었다.

‘선배가 나랑 같이 있어 주고 내 이름 불러 주고 나한테 웃어 주면 뭐든 다 할 거예요. 싫다는 거 하나도 안 하고 선배가 하고 싶다는 거 다 들어 주고.’

그렇게 온 진심을 다해서…….

“…….”

정우진은 날 강간했다.

정우진은 우리가 연인인 것처럼 내게 다정했다.

정우진은 불쌍했다.

“…….”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자처한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쌓던 것들이 곪아서 종양처럼 터져 버린 것이다. 더러운 오물을 보이지 않게 천으로 덮어서 그 위에 돌을 쌓은 것이다.

잊어버리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고. 곪은 감정을 도려내지도 못하고. 내 잘못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사과를 하지도 못하고. 그저 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내가 정우진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때 왜 데리러 가지 않았을까 자책하고 싶지 않아서.

결국 사과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서.

떠올리면…….

“…….”

떠올리면 보고 싶어져서.

“…….”

보고 싶어져서.

너무 보고 싶어서.

돌아가고 싶어서.

“…….”

그럴 수가 없으니까…….

“…….”

차가운 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왔다.

* * *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부터 목표가 생겼다.

그건 돈을 모으는 것이었다. 정확한 금액도 없이 그냥 무작정 돈을 많이 모으는 게 목표였다. 세상에는 돈만 있으면 거의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집도 살 수 있고, 밥을 먹을 수도 있고, 옷을 살 수도 있고, 하고 싶은 걸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퇴짜를 맞고, 부모님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고 퇴짜를 맞다가 어느 허름한 치킨집에서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가방 안에 전단지를 잔뜩 넣어서 버스를 탔다. 가게에서 제일 먼 곳에 있는 아파트로 가서 가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아래로 내려오며 전단지를 한 장씩 문틈에 꽂았다.

한 아파트의 모든 동을 돌고 점점 치킨집과 가까워지면서 보이는 아파트는 다 들어가서 전단지를 꽂았다.

수업을 마치고 해야 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 할 수도 없었고, 장당 10원 정도 받는 거라 큰돈은 아니었지만 일급을 받아서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나중에 이걸로 집을 사야지.

그러니까 지금은 조금 덜 먹고 조금 덜 입더라도 괜찮았다. 원래 돈을 모은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먹고 싶은 걸 다 먹고, 하고 싶은 걸 다 하면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오늘도 학교가 끝나면 전단지를 돌리러 가려고 했었다. 그 전에 은행에 들러서 모은 돈을 통장에 넣어야 했다. 가방에 만 원짜리 지폐가 20장이나 있어서 학교에 올 때 가방을 앞으로 메고 왔다.

수업을 들을 때도 가방을 안고 들었고, 점심을 먹을 때도 가방을 들고 다녔다. 체육 시간에도 가방을 들고 나가려고 했는데 점심을 먹고 나니 열이 좀 나는 것 같아서 양호실에 가서 약을 받아먹었다. 당연히 양호실에 갈 때도 가방을 들고 가서 나는 가방을 품에 안고 잠이 들었다.

종이 울리고 다시 열을 재고 양호 선생님이 열이 계속 나면 부모님이랑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나는 대충 알겠다고 한 뒤 가방을 들고 교실로 돌아왔다.

그 전 시간이 체육이었던 터라 애들이 땀을 흘리며 옷을 벗고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걸 보며 나는 양호실에서 약 먹고 잔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또 뛰어다녀야 하는데 체육 시간에 힘을 빼면 나만 손해였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가방을 들고 자리에 앉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나는 별관심이 없어서 책상 위에 엎어졌다. 양호실에서 약도 먹고 한숨 자기도 했는데 아직 열이 나고 머리도 좀 아팠다.

눈을 감고 있다가 잠이 들려고 하는데 누가 내게 말을 걸었다.

“너 체육 시간에 어디 갔었어?”

고개를 들자 남자, 여자 아이들 무리 몇 명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눈이 쓰라려서 인상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뭐?”

“아, 아니. 너 체육 시간에 어디 있었냐고.”

“양호실에 갔었는데? 왜?”

“…….”

내 말에 애들이 저들끼리 눈빛 교환 같은 걸 하더니 그중 남자애가 다시 물었다.

“그럼 교실에는 너 혼자 남아 있었던 거네?”

“양호실에 있었다니까. 교실에 없었어.”

“어쨌든 수업 안 들은 건 너밖에 없잖아.”

“……?”

왠지 시비조처럼 들려서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수업 안 듣고 양호실 간 게 뭐 잘못인가? 지가 선생이야 뭐야? 왜 갑자기 시비지?

눈살을 찌푸리자 남자애가 내 가방을 보더니 말했다.

“너 가방 좀 열어 봐.”

“…….”

“보기만 할 테니까. 영인이 학원비 없어졌대.”

나는 그제야 얘들이 왜 내 앞에 서서 날 심문하고 있는지 알아챘다.

“빨리 열어 봐. 네가 켕기는 거 없으면 좀 보여 줘도 되잖아.”

“야.”

“뭐.”

“내가 훔친 거 아니니까 가.”

도둑놈이라고 오해를 받았다는 생각에 속이 끓었지만 최대한 차분하고 조용하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의심이었기 때문이다.

체육 시간에 안 나간 건 나뿐인 것 같고, 그사이에 학원비가 없어졌으니까 물어볼 수는 있었다.

“너 오늘 하루 종일 가방 들고 다녔잖아.”

“맞아, 나도 봤어.”

“가방에 뭐 숨기는 게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밥 먹을 때도 가지고 있던데?”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남자애가 다시 내게 말했다.

“가방 좀 보자니까? 왜 안 보여 줘? 가방 보여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나 같으면 의심받기 싫어서 지금 당장 보라고 던져 주겠다.”

“내 말이.”

“나였으니까 여기서 가방 거꾸로 뒤집고 탈탈 털었다.”

“쟤가 훔친 거 맞다니까? 쟤 고아잖아. 아니면 누가 훔쳐? 학원비에 발이 달려서 도망간 것도 아닐 텐데.”

자기들끼리 말하다가 어떤 애가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뻗었다. 너무 느려서 뒤로 물러나 일어서며 피하자 남자애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야! 너 뭐 하는 짓이야!”

그러자 다른 애가 날 보며 소리쳤다. 난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가? 지 혼자 자빠진 걸 나보고 뭐 어쩌라고.”

“네가 밀었잖아, 이 새끼야!”

“야! 가방 내놔! 돈 네가 훔쳤잖아!”

의심은 역병처럼 퍼져서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다들 자리에 앉아!”

그때 선생님이 들어와 크게 소리쳤지만 몇몇 애들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계속 내 앞에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야, 김영수! 박초롱! 자리에 안 앉아? 강서주, 김선용 너도 빨리 자리에 앉아!”

“선생님! 얘가 영인이 학원비 훔쳐 갔어요!”

“뭐?”

“흑…….”

“어떡해……. 영인아, 울지 마.”

교실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그 가운데에서 나는 오로지 혼자였다.

선생님은 칠판에 자습이라고 쓰고, 날 교무실로 데리고 갔다. 내가 들고 있던 가방도 같이 가지고 오라고 했다. 교무실로 가자 선생님은 손에 들고 있던 사랑의 매를 책상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선생님 앞에 가방을 들고 섰다.

“가방 열어 봐.”

“…….”

“어서.”

나는 더 듣지 않아도 선생님이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게 무슨 감정일까? 눈앞이 아득해졌지만 나는 이게 무슨 감정인지도 잘 몰랐다.

천천히 가방의 지퍼를 열자 안에는 두루마리 휴지 하나와 검은색 볼펜 하나, 그리고 만 원짜리 지폐 여러 개가 뒤섞여 널브러져 있었다.

“야, 강서주.”

선생님은 가방 안에 돈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내 이름을 불렀다.

“훔친 거 아니에요.”

“그럼 이건 뭔데, 이 새끼야.”

“아르바이트해서 제가 번 거예요.”

“이걸? 네가 이걸 다 벌었다고? 딱 봐도 10만 원도 훨씬 넘어 보이는데, 이걸 네가 다 벌었다고?”

선생님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옆과 앞, 뒷자리에 앉아 있던 선생님들도 우리를 힐끔힐끔 보기 시작했다.

“20만 원이고 오늘 학교 마치고 은행에 가서 통장에 넣으려고 한 거예요. 학원비 제가 안 훔쳤어요.”

“네가 무슨 수로 돈을 벌어, 새끼야! 그리고 아르바이트 교칙 위반인 거 몰라!”

선생님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뒤에서 우리를 안절부절못하는 눈으로 보고 있던 선생님 중 한 명이 아휴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김 쌤, 걔 고아원에서 온 애 아니야?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고아원에서 와도 잘못한 건 혼을 내야죠.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 선생님한테 거짓말하고 친구 돈이나 훔치고. 어?”

“제가 훔친 거 아니라고요.”

“말대꾸 하지 마! 네가 무슨 수로 이 큰돈을 버냐고! 차라리 고아원에서 용돈을 받은 거라고 하든가!”

선생님이 흥분하더니 가방을 거꾸로 뒤집어 책상 위로 탈탈 털기 시작했다. 만 원짜리 지폐가 팔랑거리며 떨어지고 볼펜과 휴지도 전부 떨어졌다. 그중 지폐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자 별안간 그 애가 생각이 났다.

“학생이라는 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가방 봐라, 이거. 가방 안에 있는 게 휴지랑 볼펜 하나밖에 없어? 네가 학생이냐? 어? 네가 학생이야?”

시커먼 덩어리가 내 옆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아서 어떤 한 덩어리로만 나타나는 그 애가 내 손을 잡았다. 애써 겨우 덮고 온 힘을 다해 파묻었던 것이 깊은 구멍에서 기어 올라와 나에게 덕지덕지 붙어 버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치킨집 전단지 돌려서 받은 거예요. 전화번호 알려 줄 테니까 전화해 보세요. 진짜 제가 훔친 거 아니에요.”

“입 안 다물어? 아르바이트한 게 자랑이야? 네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전단지 돌린 게 자랑이냐고.”

“…….”

나는 너무 지쳐서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그냥 돈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니야?”

우리 얘기를 듣고 있던 선생님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아무리 돈이 없다고 해도 교칙을 위반하면 안 되죠.”

“걔는 좀 특수한 상황이잖아요. 유도리 있게 생각해 주고 그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예외를 만들면 누가 교칙을 지키겠어요?”

“하기는 그건 또 그렇긴 하죠. 에휴, 김 쌤이 알아서 잘 하시겠지. 나는 화장실이나 좀 다녀와야겠다.”

선생님은 잠시 말이 없다가 다른 선생님이 교장실을 나가자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으로 툭 던지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주 고아인 게 벼슬이야, 벼슬. 교칙 어겨도 고아라서 봐줘, 친구 때려도 고아라서 봐줘, 공부 안 해도 고아라서 봐줘.”

“친구 안 때렸어요.”

“말대꾸 하지 마, 인마! 이게 아까부터 자꾸 어디서 말대꾸야! 네가 영수 밀어서 넘어뜨렸다며!”

내가 민 것도 아니고 내가 넘어뜨린 것도 아닌데 말해 봤자 또 말대꾸하지 말라고 혼나기만 할 것 같았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자 선생님이 사랑의 매라고 적힌 막대기를 들고 내 어깨를 꾹꾹 밀면서 말했다.

“너 일하는 거 고아원에서는 아냐?”

“…….”

“아니면 거기서 너한테 일해서 돈 벌어 오라고 시키든?”

“…….”

“왜 말을 안 해? 도대체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학원비 훔친 게 아니라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이라고? 그게 자랑이냐, 인마? 어? 뭘 잘했다고 눈을 부릅뜨고 바락바락 말대꾸야.”

점점 목소리가 멀어졌다. 내 손을 잡고 있는 힘이 계속 강해지고 있었다. 나는 마치 안겨서 위로를 받는 어린애처럼 나를 다독거렸다.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지만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데 귓가로 벼락같은 말이 꽂혔다.

“이게 뭘 잘했다고 울어?”

그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그런지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발작적으로 손을 털어 내고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서 손등으로 닦아 냈다.

“잘못했어요.”

“뭘 잘못해?”

“아르바이트해서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말대꾸해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다시 숙이고 말하자 선생님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온기가 사라지자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나는 눈을 깔고 고개를 숙이고 보이지 않게 손을 뒤로한 채 주먹을 쥐었다.

“학원비는 진짜 안 훔쳤어?”

“네, 제가 훔친 거 아니에요.”

“네가 일했다던 치킨집 전화번호 말하고 당장 일 그만둬. 영인이 학원비는 진짜 네가 훔친 거 아니야?”

“네, 제가 훔친 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다시 고개를 숙이자 선생님이 막대기를 책상 위에 두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는 아르바이트하지 마라. 알았어?”

“네, 안 할게요.”

다음부터는 절대 들키지 않게 몰래 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치킨집 전단지 아르바이트는 잘리고, 다른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거기는 피자집이었는데 치킨집보다 장당 5원이나 돈을 더 줬다.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하는 걸까?

나는 돈도 차곡차곡 모으고 아르바이트하는 걸 한 번도 들키지 않고 무사히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도 더 많아졌다. 전단지 아르바이트는 관두고 저녁에 고깃집에서 서빙을 했다. 주말에는 편의점이나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새벽에는 우유나 요구르트 같은 걸 배달하는 일도 했다.

하지만 새벽에 일하고 나서부터 코피가 자꾸 나 결국 하는 수 없이 새벽일은 관둘 수밖에 없었다.

변명이었지만 늘 잠이 모자라고 피곤해서 학교에서 나는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수업 시간에는 거의 잠만 잤다.

“이거 먹을래?”

그날도 어김없이 자고 있는데 누가 말을 걸었다. 고개를 들자 여자애가 나한테 사탕 하나를 줬다.

“매일 피곤해 보이길래……. 단 거 먹으면 피곤한 것도 좀 없어진대.”

“아……. 고마워.”

“너 근데 왜 수업 시간에 매일 잠만 자?”

“…….”

일을 해서 그런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고등학생이 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아르바이트는 여전히 교칙으로 금지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대화는 그대로 끝이 났다.

나는 받은 사탕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책상 위에 엎드렸고, 그대로 하교 시간이 될 때까지 잠만 잤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길에 받았던 사탕이 떠올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사탕 껍질을 까서 입에 넣자 청포도 맛이 났다. 단 걸 먹어서 그런 걸까? 갑자기 멍했던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기분도 좀 좋아지는 것 같기도 했고……. 단 걸 먹으면 피곤한 게 없어진다는 말이 정말이었나 보다.

오늘따라 별로 피곤하지도 힘들지도 않던 일을 마치고 고아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편의점에 들러 막대 사탕 두 개를 샀다. 내일 학교에 가서 사탕을 줬던 애한테 정말 단 거 먹으니까 별로 안 피곤하더라고 말하면서 줄 생각이었다.

사탕 두 개를 주머니에 넣고 걷는데 천막을 치고 달고나를 팔고 있는 게 보였다. 평소에 군것질을 잘 하지는 않지만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서 달고나 하나를 샀다.

모양대로 부수면 하나를 공짜로 또 준다고 했지만 어차피 나는 실패할 게 뻔해서 그냥 손에 들고 걸으면서 끄트머리를 툭툭 부쉈다.

모양을 맞추려고 부수는 게 아니라 그냥 먹으려고 부수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나는 아무렇게나 부수고 있는데 찍어 낸 모양대로 부서지고 있는 것이었다.

“…….”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조금 떨리는 손으로 힘을 줬고 마지막 조각까지 떨어지자 완벽한 별 모양이 완성됐다.

“미친…….”

오늘 혹시 내 생일인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별 모양 달고나를 가만히 보다가 들뜬 마음으로 몸을 돌렸다.

“윽!”

그리고 누군가에게 부딪쳐 휘청거리다가 들고 있던 걸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아, 죄송합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빠르게 사라졌다. 급한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별 모양 달고나를 가만히 보다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떨어진 걸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했는데 문득, 별안간 또 그 애가 떠올랐다.

“…….”

이제는 얼굴도, 목소리도, 온기도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죄책감만 먼지처럼 남아 있는 그 애의 흔적을 생각하다가 눈을 감았다.

“…….”

나는 여전히 겁이 많고 비겁해서 내가 힘들고 괴로운 순간에만 문득문득 이따금씩 그 애를 떠올렸다. 내가 망쳐 버린 소중한 보물 같은 날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계속 잘못했던 일만 되뇌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죄책감만 느끼다가 어느 날, 어느 시간, 어느 순간에 결국에는 영영 어딘가로 떠내려가 없어지기를.

기도했다.

* * *

성인이 된 나는 이제 거리낌 없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었다. 일을 한다는 걸 비밀로 할 필요도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아 둔 돈으로 작은 원룸을 얻고 대학교를 다니면서 돈이 되는 일은 뭐든지 다 했다. 물론 불법적인 일은 하지 않았다. 그냥 법적으로 문제가 없이 돈을 많이 주는 일은 아마 한 번씩 다 해 보지 않았나 싶다.

그중에서도 그럭저럭 힘들면서 돈을 많이 버는 일은 늦은 밤, 혹은 새벽에 술집에서 서빙을 하는 일이었다. 노가다는 돈은 많이 줬지만 힘들어도 너무 힘들었고, 일도 매일 있는 게 아니었다. 택배 상하차는 힘든 거에 비해서 돈이 별로 안 됐고…….

그 외에 다른 아르바이트는 술집에서 서빙을 하는 것만큼 돈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튼 나는 새벽 시간에 술집 서빙을 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시비도 많이 걸리고, 조폭이나 양아치 깡패 새끼가 주인인 곳도 있어서 트러블도 많았다. 그래도 다들 어느 정도 사람처럼 살기는 했는데 이번에 일했던 곳은 정말 악질 중에서도 개악질이었다.

싸우고 처맞고 때리고 한바탕 난리 블루스를 추다가 경찰서까지 갔다. 거기에서도 소리를 지르고 욕하고 싸웠다. 돈도 못 받고 병원비나 쓰고 시간 낭비에……. 정말 최악이었다.

월세도 줘야 하고, 전기세랑 가스비……. 언제까지였더라. 핸드폰 요금도 더 이상 밀렸다가는 전화가 끊기게 생겼다. 학비도 모아야 되고……. 밥은 언제 먹고 안 먹었더라. 아니, 물은 언제 마시고 안 마셨지. 생각이 안 나서 잠깐 그 자리에 서 있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

씨발.

너무 자고 싶었다.

이대로 엎어져서 그냥 잠들고 싶었다. 계속 자고 싶었다. 한평생 잠만 자고 싶었다. 그냥, 그냥……. 계속. 계속. 계속.

“…….”

너무 자고 싶어서…….

“저기…….”

“…….”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웬 안경을 쓰고 사복을 입은 남자와 교복을 입은 남자애가 쭈뼛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초면이라 물었다.

“왜요?”

“다른 게 아니라 길을 몰라서 그러는데…….”

“어디 가시는데요?”

“근처 지하철역까지만 좀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길을 알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 데려다 달라고 하는 게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저 교복은 이 근처 고등학교 교복 아니었나. 고등학생이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던 그때, 안경을 쓴 남자가 내게 말했다.

“얼굴에 우환이 가득해 보여서 그러는데 혹시 최근에 무슨 일 있으셨나요?”

“뭐라고요?”

“굉장히 힘들어 보이셔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최근에 힘든 일 있으셨지요? 아이고, 세상에……. 얼마나 힘드셨을까.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

뭐야, 씨발. 이 사이비 교도 같은 새끼는.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남 등쳐먹고 사는 새끼들까지 지랄이었다. 나는 등쳐 먹힐 돈도 체력도 없어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으니까 가세요. 필요 없으니까.”

“뭘 오해하신 거 같은데 뭐 사라거나 그러는 게 아니에요. 저는 그냥 가다가 너무 힘들어 보이셔서…….”

나는 아예 말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다리가 계속 후들거리고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서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안경을 쓴 남자와 고등학생 남자애가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계속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저도 그 마음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힘들면 주변이 다 미워 보이지요? 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지요? 그건 잘못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잘못된 건 이 부조리한 세상이지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

“세상에는 질병과 미움과 악이 만연해 있습니다. 이런 각박한 세상 속에서 온전히 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어둠과 악취로 가득한 세상에서 올바른 길을 가기란 정말 너무 힘든 일이지요. 저희는 이런 세상 속에서 이정표를 찾아야 합니다.”

“…….”

“형제님, 저희가 바로 그 이정표가 되어 줄 수 있어요. 어두운 세상에 작은 빛줄기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마음의 안식을 찾고 싶으실 텐데…….”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멈췄다. 정신 사나워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정신 나간 사이비 새끼들을 보며 말했다.

“한 번만 더 말 걸면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형제님, 제 말을 한 번만…….”

“누가 네 형제야, 씨발. 저리 안 꺼져? 가라고, 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욕을 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 얼굴 두꺼운 새끼는 욕을 먹는 것쯤은 일상이라는 듯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내게 말했다.

“마음에 화가 가득하신 거 이해합니다.”

“…….”

“화를 다스려야 합니다. 저를 한 번만 믿어 주시면 제가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게 도와 드리겠습니다.”

나는 식은 눈으로 남자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경 벗어.”

“네?”

“안경 벗으라고.”

“……아, 안경은 왜요?”

그제야 남자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내가 두 발자국 다가가자 남자가 아예 몸을 돌려 멀어지며 말했다.

“……큼, 큼큼. 아무튼 제가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형제님.”

별, 씨발……. 개 같은 경우를 다 겪겠네. 하.

“…….”

씨발, 졸려.

나는 벽을 짚고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았다. 현기증이 나서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냥 여기에서 잠깐만 잘까.

한 10분만 자다가 일어나서 집에 가도 되지 않나.

어차피 지금 내 꼴도 멀쩡한 건 아니라서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냥 대충 날 노숙자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자자.

그렇게 생각하고 스르륵 무너지려는데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그 끊어질 듯 희미하고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짜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내가 뭘 잘못했지? 아니, 씨발. 일한 거 돈 달라고 한 게 그렇게 큰 죄야? 주급으로 주기로 해 놓고, 씨발……. 도대체 몇 주째 돈을 안 주는 거냐고.

“저기, 나…….”

“그만 좀 해.”

“어?”

“그만하라고, 제발 좀……. 그만 좀 하고 꺼져, 씨발 새끼야!”

이정표고 나발이고 씨발, 개좆같은 사이비 새끼를 쳐 죽여 버리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그 자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두리번거리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교복을 입고 멀어지고 있는 남자애 한 명이 보였다.

아까 봤던 교복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날 귀찮게 할 사람이 없다는 것에 안심하며 나는 딱 10분만 자기로 했다.

길거리에서 잠깐 잠도 자고, 학교도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휴학도 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월세 사기도 당했지만 사람이 꼭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새로 구한 아르바이트 사장님이 너무 좋은 분이라 내 사정을 많이 봐줬다.

딱히 특별한 것도 없고, 너무 행복하지도 너무 괴롭지도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다가 추운 날이 되면 가끔 꿈을 꿨다.

나는 어딘지도 모를 곳을 하염없이 달리면서 뭔가를 찾았다. 너무 추워서 그만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끝내 찾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멈췄다.

잠에서 깨면 울고 있었지만 무슨 꿈을 꿨는지 자세히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얼른 일어나서 학교를 가거나 아르바이트를 가야 해서 오래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그러다가 날이 너무 더워서, 입맛도 없고 지치고 그냥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에 만난 것이다.

“선배, 제가 밥 사 줄게요.”

“뭐?”

“비싼 거.”

날 부르면서 달려오던 어린애였다.

작고 왜소하고 빼빼 말라서 머리 한가득 땜빵이 나 있었다. 고사리같이 작은 손을 뻗고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려 해맑게 웃으며 지척까지 다가왔다.

정우진이 울면서 내 다리를 우악스럽게 벌렸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넋을 잃고 있다가 다급히 싫다고 말했지만 타들어 갈 듯한 둔통이 온몸을 덮쳤다. 얼굴 위로 쉴 새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선배라고 끊임없이 날 불렀다. 너무 아프고 힘들고 무섭고 괴로워서 눈을 질끈 감는데 깃털처럼 보드라운 게 눈가에 닿았다. 눈을 뜨자 부옇게 세상이 흐렸다.

정우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만지듯 부드럽게 날 일으켜 세우며 조잘조잘 평범한 이야기를 했다.

오늘 날씨가 참 덥네요. 에어컨 틀까요. 어디 추운 나라로 여행이라도 갈까요. 일하러 가기 싫다. 계속 침대에서 뒹굴고 싶어요. 저녁은 뭐 먹죠? 외식할까요? 다리 벌려요. 눈 감지 말라고 했잖아. 힘 안 빼면 찢어져요. 잔뜩 싸 놔서 이대로 두면 배 아파요. 도와줄게요. 형아, 사랑해. 살려 줘.

그곳은 지옥이었다.

* * *

날이 밝았다.

엄청 오래 잔 것 같은데 밤을 새운 것처럼 피곤했다. 자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팅팅 부어 떠지지도 않았다. 눈꺼풀에 엉겨 붙은 눈곱을 대충 떼고 몸을 일으키자 뼈마디가 비명을 질러 댔다.

정확히 몇 시인지도 모르겠고, 이제는 가진 돈도 별로 없었다. 갈 곳도 없고 연락할 수단도 마땅치 않아서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할 것도 없어서 터덜터덜 산을 올랐다. 굳이 길을 찾지 않아도 헤매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막상 오니 거짓말처럼 기억이 났다.

익숙한 것 같은 길을 따라 산을 오르자 베어져 나간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이름 모를 나무는 밑동만 남아 있었다.

그 옆에 똑같은 커다란 나무가 있었는데, 그 틈새에 쪽지를 숨겨 뒀었다. 하지만 그 큰 나무도 베어져 있었다. 휑하게 밑동만 남은 나무 두 그루를 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 주변을 뱅글뱅글 돌았다.

김우진은 이쯤에서 날 기다렸을까. 눈이 많이 와서 추우니까 어쩌면 나무 사이에 있었을지도 몰랐다. 보지 않았는데도 그 새하얀 눈밭 위에서 웅크리고 날 기다렸을 김우진이 그림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그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호호 불면서 내가 오나, 안 오나 산 아래만 내려다봤겠지. 웃기도 했다가 추워서 인상 찌푸리기도 했다가 오지 않을까 봐 울상을 짓기도 했다가 다시 웃길 반복했겠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추워지고 날이 저물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졌을 땐 어쩌면 너무 무서워서 울었을지도 몰랐다. 김우진은 겁이 많아서 내가 개구리 뒷다리를 먹는 거 보고도 비명을 지르면서 울던 애였으니까.

왼쪽 나무 밑동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원래 커다랗게 나무가 솟아 있어야 했는데 뭉툭하게 베어져 있는 게 어쩐지 낯설었다. 그렇게나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이 풍경 자체는 새삼스럽게 익숙했다.

나무 밑에서 개구리를 잡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저 밑의 개울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놀았는데.

“…….”

추억에 잠겨 멍청하게 있는데 문득 손에 뭔가가 걸렸다.

고개를 숙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게 보였다. 나무뿌리 근처에 비닐 지퍼 백이 있었다. 혹시 비가 오면 떠내려갈까 봐 나무뿌리에 철사로 둘둘 감아 놓기까지 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지퍼 백을 열자 수십 장의 종이가 무릎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어쩐지 뒷골이 싸해졌다.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종이 한 장을 펴 보았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얼룩져 번져 있었다.

[기다리고 있어.]

순간 눈앞이 까맣게 암전됐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에 숨을 들이켜는데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홀린 것처럼 다른 종이도 펴 보았다.

[생일 축하해.]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다른 종이도 펴 보았다.

[보고 싶어.]

[어디 있어.]

[언제까지 기다려.]

[언제 올 거야.]

수많은 종이 중 가장 최근의 것인 듯 새하얗고 빳빳한 종이를 펴 보았다.

[내일 형 만나러 갈 거야.]

등 뒤에서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헐떡임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뒤에 누가 있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계속 종이만 쳐다봤다.

힘을 주어 꾹꾹 눌러썼는지 내일 만나러 가겠다는 글자가 유독 진하고 선명했다. 손가락 끝으로 움푹 들어간 글자를 매만졌다. 약간은 꺼칠하고 약간은 보드라운 감촉이었다.

반복되던 헐떡임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났는데도 여전히 거칠고 다급했다. 말없이 내 뒷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날 조용히 기절시켜 다시 그 좆같은 섬으로 끌고 갈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내 머리통을 한 대 후려쳐 다시 내 기억을 잃게 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엉엉 울면서 미안하다고 내 발치에 무릎 꿇을지도 몰랐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애처럼 고집을 피우고 울면서 생떼 부리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눈깔이 돌아 날 협박하고 결국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내 입에서 나오게 만들지도 모르지.

그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이라는 듯 믿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바스락하고 나뭇잎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정면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정우진.”

“…….”

눈물이 잔뜩 고인 까만 눈망울이 크게 흔들렸다. 땀으로 샤워를 한 듯 온몸이 젖어 있었고, 곧 죽을 사람처럼 창백한 게 시체 같기도 했다. 벌벌 떨면서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그저 날 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꼴을 보아하니 날 기절시켜서 억지로 섬으로 데려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생각해 보니까 정우진은 저렇게 울면서도 뭐든 할 수 있는 미친놈이었다.

어쩐지 오늘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너 혹시 나한테 복수하는 거냐?”

정우진이 눈물이 잔뜩 고인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눈 오는 날 기다리라고 해 놓고 나타나지도 않아서 지금 씨발, 너도 엿 먹어 봐라, 이거 아니야?”

절망감이 깃든 눈이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말이 없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아니야?”

정우진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너 혹시 아직도 몰라? 내가 너한테 준 거, 그 종이. 너보고 거기서 진짜 나 기다리라고 준 건 맞는데, 난 너 엿 먹이려고 그랬던 거야. 네가 너무 싫어서, 짜증 나고 열 받아서…….”

나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내 감정을 온전히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몰랐어?”

정우진이 도리질 치며 고개를 숙였다.

잔뜩 고여 있던 눈물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게 마치 그림같이 현실감이 없었다. 소리 없이 지르는 비명에 귀가 먹먹해졌다.

내가 그 당시에 김우진을 정말 미워했던 건 맞았다. 자꾸만 미워져서 그런 짓을 벌인 것이다. 정우진이 나에게 무슨 짓거리를 했든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종이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미안해.”

종이가 구겨지면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내 뜬금없는 사과에 정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애처롭게 달싹거렸다. 나는 정우진이 뭐라고 하기 전에 다시 말했다.

“어렸을 때 그랬던 건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산속에 널 불러 낸 건 고의였지만 네가 죽길 바랐던 건 아니야. 눈이 그렇게 많이 올지도 몰랐고.”

정우진의 입이 다시 열렸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입에서 왠지 형이라는 글자가 나올 것 같아서 무서워졌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가 완전히 구겨지는 걸 느끼며 말했다.

“너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내 말에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던 눈동자가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게 보였다.

* * *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낮게 신음하며 멍청하게 천장만 쳐다봤다. 어쩐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하하하.”

나는 열어 놓은 창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황당해서 웃는 걸 멈췄다가 다시 웃겨서 피식피식하다가 소리를 내서 웃었다.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어느 정도 정신이 들어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다행히 묶여 있거나 수갑이 채워져 있진 않았다. 침대에서 내려오자 현기증이 일었다.

그리고 기억을 잃기 전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정우진이 날 죽일 것처럼 달려들었다. 흙바닥에 엎어져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목이 졸렸다. 정우진은 내 위에서 내 목을 조르며 울고 있었다. 뺨 위로, 입술 위로, 내 눈가 위로,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그게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었다.

“…….”

나는 정우진의 그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건지 생각해 보려다가 너무 지치는 것 같아서 관뒀다.

걔가 도대체 왜 그런 건지 생각을 해 봤자 어차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 정우진을 이해하고 싶은 의지라는 게 있는지도 의문이었고.

방에서 나와 거실로 나가도 인기척이 없었다. 드문드문 방의 구조가 떠올랐다. 서재에도 가 보고 화장실에도 가 보고 거실, 주방까지 다 가 봤는데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현관문을 열어 봤다. 역시나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감금당했을 때에도 현관문이 잠겨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내가 탈출했다가 잡혔던 그 당일에도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정우진은 내게 그게 자신이 참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가 이만큼의 불안과 공포를 참고 견디고 있으니 좀 봐달라고 끊임없이 애걸복걸했다. 그게 한 발자국 물러서는 것이었던 걸까? 그러니까 나도 한 발자국 물러 서 달라고?

애초에 여긴 섬이라 문이 열려 있든 잠겨 있든 난 갇혀 있는 건 똑같은데 참기는 뭘 참아? 진짜 지랄 염병이 따로 없었다. 그럼에도 그 새끼가 자존심은 쥐뿔도 없는 호구 새끼라는 생각은 어째서인지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근데 그게 사실 아닌가?

“…….”

그 새끼가 호구든 아니든 그딴 게 나랑 뭔 상관인가 싶어서 생각하는 걸 멈추고 현관을 나와 천천히 길을 걸었다.

낮게 자란 잔디와 군데군데 푸르게 솟아오른 이름 모를 나무, 자그마한 조약돌, 2인용 나무 의자와 2인용 탁자, 2인용 흔들의자, 두 개의 그물 침대…….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주방의 그릇과 식기도 다 두 세트뿐이었다. 숟가락도, 젓가락도, 포크도, 접시도, 밥그릇, 국그릇도, 물컵도 각기 다른 디자인으로 두 개씩. 소파는 2인용 작은 소파였고, 슬리퍼도 두 개, 운동화도 두 개, 세면대 위의 칫솔도 늘 두 개였다.

이 정도면 거의 강박인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강박도 정신병의 일종이라 생각하면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정우진은 정신병자였으니까 말이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길을 따라 걸었다. 조금 더 걷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

정우진이 백사장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었다.

쓸쓸하기 그지없는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가락 사이로 보드라운 모래 알갱이가 빠져나갔다. 시끄럽게 반복되는 파도 소리가 마치 침묵인 듯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척까지 다가가자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울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마른 눈을 하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평소와 같이 태연한 목소리였다. 내가 대답이 없자 정우진이 웃으며 고개를 돌려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이제 어쩔 건데.”

내 말에 정우진은 멀리 있는 수평선을 보며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

“어쩔래요?”

“…….”

“어쩔까요?”

“…….”

“어쩌죠?”

“…….”

“어떡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정우진이 고개를 돌려 날 올려다봤다.

“이제 어떻게 해요, 우리?”

반쯤 넋이 나간 정우진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정적이고 차분해 보였지만 내 눈에는 절망하며 서럽게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정우진이 별안간 픽 웃었다. 정말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정우진이 모래밭에서 일어섰다.

툭툭, 엉덩이에 묻은 흙을 대충 털며 물었다.

“그냥 죽을까요?”

“…….”

“나랑 같이 죽을래요?”

그 말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가 아니었다. 이젠 죽는 것까지도 저 새끼랑 같이해야 하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정우진도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다시 그렇게 서로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럴 만도 한 게 할 말이 없었다. 정우진도, 나도 이 상황을 해결할 만한 방법이 딱히 없었던 것이다.

그때 마른 눈으로 나를 보던 정우진의 눈가가 조금씩 젖기 시작했다.

“이제 내 이름 안 불러 줄 거죠?”

“…….”

“나한테 웃어 주지도 않을 거죠?”

“…….”

“나랑 말도 안 할 거죠?”

“…….”

“같이 밥도 안 먹고 술도 안 마시고 영화도 안 볼 거잖아요.”

“…….”

“그냥 아무것도 안 할 거잖아, 나랑.”

눈물이 뚝뚝 흘렀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정우진은 쉴 새 없이 토해 냈다.

“기억은 왜 잃어버렸어요?”

“…….”

“그럴 거면 그냥 잃어버리지 말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내가 당신 무시하고 그냥 계속 나 좋을 대로 살다가 죽었을지도 모르잖아. 형 말대로 내 맘대로 강간하고 기분 좋으면 잘해 주고 다시 강간하고 협박하고 울면서 빌다가 그냥 그렇게 살다가 언젠가는 죽었을 거 아니야. 내가 미쳐 죽든 형이 날 죽이든 그냥 그렇게 여기서 죽었을 거 아니야!”

정우진이 나를 탓하며 고함을 질렀다. 비명을 지르듯 원망하는 그 커다란 소리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나랑 왜 영화 보고 나랑 밥은 왜 같이 먹었어? 나한테 왜 그랬어? 그냥 내버려 두지 나한테 말은 왜 걸었어! 왜 나한테 웃어 줬어, 내 이름 왜 불러 줬냐고!”

좆같은 정우진, 불쌍한 정우진, 날 사랑하는 정우진이 한 사람이 되었듯 정우진이 생각하는 사랑하는 나, 다정한 나, 미운 내가 한 사람이 되고 있었다.

“어차피 당신 여기서 못 나가요.”

정우진이 비웃으며 날 내려다봤다.

“죽어도 못 나갈 거야. 죽어서 시체가 돼도 못 나간다고. 알아들었어? 시체가 돼서 다 썩고 뼈만 남아도 여기 있어야 돼.”

“나랑 같이 있는 게 좆같으면 그냥 죽어. 그거밖에 방법이 없어요.”

“짜증 나 죽겠어요.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요? 나도 힘들어요. 미치겠어. 선배 때문에 난 한 번도 내 인생을 살아 본 적이 없어요. 전부 다 형 때문이야.”

“죽어요. 네? 선배, 그냥 우리 같이 죽어요. 제가 생각을 많이 해 봤어요. 정말 많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제 다른 방법은 없어요.”

“수면제 있어요. 그거 먹고 정신 잃으면 그때 죽일게요. 그럼 죽는지도 모르고 아픈지도 모르고 그냥 자면서 죽는 거잖아요. 선배는 그냥 자고 있기만 하면 돼요.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나도 죽을 거예요. 선배만 죽는 거 아니에요. 선배 죽이고 나도 바로 따라 죽을게요. 나 어떻게 죽을까요? 네? 선배가 죽으라는 대로 죽을게요. 말해 봐요, 나 어떻게 죽어요? 네?”

비웃고 조롱하고 빌고 웃다가 말해 달라고 애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도 덩달아 미쳐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정우진이 대답을 재촉하며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하염없이 흔들리다가 눈을 감자 정우진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 허리를 끌어안고 내 배에 젖은 뺨을 비비며 울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선배, 제발.”

“…….”

“나랑 같이 죽어 주세요.”

“…….”

“죽고 싶어, 나 진짜 죽고 싶어요. 같이 죽고 싶어요. 선배,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끊임없이 들려오던 목소리가 조금씩 뭉개졌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울던 정우진은 결국 단어 하나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더니 끝내 엉엉 울었다. 그 와중에도 계속 말했다. 하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같이 죽자고 비는 듯했다.

배가 축축해졌다. 고개를 돌리자 평화로운 수평선이 보였다. 잔잔하게 이는 하얀 파도에서 거품이 일었다. 새파란 하늘과 새파란 바다의 경계선이 점점 흐려졌다. 마치 온 세상이 파랗게 물이 든 듯했다. 마약을 한 듯 점점 정신이 몽롱해졌다.

정우진의 소리도 멀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정우진은 계속 울고 있었다.

“살고 싶어요.”

“…….”

“선배랑 같이 살고 싶어.”

떨리는 어깨가 너무 작아 보여서 나는 이 애가 혹시 김우진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김우진과 정우진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고개를 숙여 계속 보고 있는데도 정우진이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귀가 먹먹해서 물속에 잠겨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우진은 죽자고 하다가 살고 싶다고 하다가 형이 밉다고 했다가 다시 좋다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제정신이 아닌 듯 두서없이 외치며 한참을 통곡했다.

정말 죽고 싶었다. 왠지 그게 최선의 방법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죽지 않으면 정우진을 데리고 평생을 살아야 한다. 살아서는 정우진을 떨쳐 낼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정우진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다고 해도 내가 이 애를 깊이 파묻어 놨던 그 구멍에서 꺼낼 수 있을까? 이미 무너져서 다 기억이 난 마당에 다시 그 위에 천을 덮고 돌을 쌓아야 하나?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다시 그렇게 하라고?

다 잊어버리고 없던 일인 것처럼 그렇게?

“…….”

나는 우는 정우진을 떼어 내고 등을 돌렸다.

정우진이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제발, 제발 하면서 다시 날 붙들었다. 내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를 잡아 돌려 제 품에 안았다가 내 발치에 매달렸다.

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정우진을 등에 매달고 집까지 돌아왔다. 거실에 들어올 때까지 정우진은 내 등에 매달려 있었다.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많이 찝찝했다.

소파에 털썩 앉자 정우진이 바닥에 앉아 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허벅지와 무릎이 점점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온몸이 눈물로 젖은 채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엉덩이에 쥐가 나도 참았다.

정우진은 끊임없이 울었다. 이젠 그 우는 소리가 시끄럽다기보다는 안쓰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말 신기한 재주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불쌍해 보일 수 있다니.

정우진이 안쓰럽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웃음이 났다. 고개를 쳐들고 웃음을 참다가 결국 소리를 내자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눈물로 젖어 있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붉게 충혈되어 금방이라도 피를 줄줄 흘릴 것 같은 눈이 똑바로 날 쳐다봤다.

귓가로 ‘형아, 형아’ 하고 날 부르는 환청이 들려왔다.

“너랑 같이 살아 줄게.”

갑자기 왜 이 말이 나온 건지 나도 모르겠다. 이유를 찾기에는 나는 이미 너무 지쳤다. 어쩌면 그냥 단순히 더 이상 여기에 이러고 앉아 있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내 말에 흐리멍덩했던 눈에 이채가 돌았다. 크게 뜨여진 새카만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죽느냐 사느냐, 그 선택의 기로에서 결국 나는 후회할 걸 알면서도 커다란 짐을 어깨에 이고 평생 사는 쪽을 택했다.

* * *

내가 무슨 조건을 제시해도 정우진은 거절할 수 없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우리는 섬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유실』 2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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