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딱히 하는 것도 없는데 시간은 잘도 가서 벌써 가을이었다.
아침을 먹고 잠시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빈둥거리면 어느새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고, 또 점심을 먹고 침대에서 뒹굴거나 만화책을 보거나 간단하게 집안일을 하면 날이 저물었다.
하는 일도 없이 매일 반복되는 평화로운 날백수의 생활은 지루하고 불편할 거라 생각했는데 지내다 보니 이런 생활도 꽤 괜찮았다.
밖에서 기절한 뒤로 정우진이 편의점도 혼자 못 가게 하는 바람에 집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거실에서 뒹굴뒹굴하고 있는데 드르륵 진동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을 어디에 뒀더라. 비척비척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자 식탁 위에 핸드폰이 보였다.
몸은 좀 어떠냐고 갑돌이에게 온 문자였다.
“누구예요?”
내 뒤를 따라온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답장을 보낸 뒤 정우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갑돌이.”
내 말에 정우진이 아까보다 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핸드폰으로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요즘 계속 집에만 있다 보니까 날짜 개념이 사라졌다. 갑돌이가 유학 가기 전에 한번 만나서 밥이라도 한 끼 하기는 해야 하는데.
문제는 정우진이 내가 밖에 나가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거다. 혼자 나간다고 하면 당연히 싫다고 떼를 쓸 게 뻔했고, 그렇다고 같이 가자니 그것도 좀…….
나는 가만히 정우진을 보다가 물었다.
“야, 나 갑돌이 만나러 갈 때 너도 따라올 거야?”
“선배가 그 새끼를 왜 만나요?”
아니나 다를까, 정우진의 표정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걔 유학인지 뭔지 그거 때문에 외국 나가면 앞으로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가기 전에 한 번은 더 봐야지.”
“선배 여권 없다고 했죠? 내일 같이 만들러 가요.”
티가 나게 말을 돌리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나는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말했다.
“너 갑돌이 한국 뜰 때까지 나 데리고 외국에 가 있으려고 그러지?”
내 말에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그건 좀 봐주세요. 그 새끼 외국 보내는 거 때문에 저 다시 일한단 말이에요.”
“네가 애도 아니고 다 큰 놈이 일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
“일하면 선배랑 같이 못 있잖아요. 데리고 갈 수도 없고. 진짜 하기 싫은데.”
“그럼…….”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끌어당겨 내 목덜미에 이마를 비비는 정우진에게 그럼 난 누가 먹여 살리느냐고 말하려다가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진짜 정우진이 나한테 해 주는 모든 것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마를 비비던 곳에 정우진이 어느새 입술을 비비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틀어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아무튼 오늘은 그렇다 쳐도 나중엔 진짜 편의점은 혼자 갈 거야.”
“그러기만 해 봐요.”
“뭐, 그럼 네가 어쩔 건데. 너 일 갔을 때 나갈 거야.”
“만약 그러면 현관문에 자물쇠 달 거예요.”
“그럼 난 신고할 건데.”
정우진이 말할 때마다 목덜미에 숨결이 닿았다. 간지러워서 어깨를 움츠리며 웃을 때마다 더 집요하게 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장난이 전희가 될 것만 같아서 나는 있는 힘껏 정우진의 얼굴을 밀어내며 말했다.
“저리 가, 난 잠이나 자야겠다.”
“벌써요? 피곤해요?”
정우진이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어서 밀어내도 밀리지 않았다. 결국 뒤에 정우진을 달고 주방을 나와 방으로 갔다. 내가 침대에 눕자 정우진이 자연스럽게 내 옆에 누워 날 끌어안았다. 답답하기는 했지만 이제 익숙해져서 그런지 별로 불편하지도 않았다.
“선배는 어디 가고 싶어요?”
정우진이 내 정수리에 턱을 대고 물었다.
“여행 안 간다니까.”
“꼭 지금 아니더라도요.”
“…….”
여행……. 딱히 어디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그냥 지금도 괜찮고.
내가 말이 없자 정우진이 슬슬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 안은 팔에 힘을 풀고 손을 움직여 등을 쓸었다. 그러더니 옷자락을 들치며 그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보드라운 손바닥이 살갗에 닿자 기분이 묘해졌다.
몸에 힘이 빠져서 가만히 눈을 감고 등을 쓰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는데, 순간 손이 쑥 빠졌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정우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주무세요, 전 빨래 좀 개고 올게요.”
“……그냥 내일 해.”
갑자기 뭔 빨래……. 내가 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정우진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럼 구겨져요. 금방 올게요.”
정우진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등을 돌렸다. 나는 정우진이 불을 끈 뒤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그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
요즘 정우진이 좀 이상한 것 같다. 물론 그런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했다. 허구한 날 들러붙어서 찝쩍거리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요즘엔 뭐라고 해야 하지……. 정도라는 게 생겼다.
“…….”
뭔가 말이 이상하지만 아무튼 그랬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일정 간격에서 행동을 멈췄다. 날 만지는 거라든가, 입술을 비비는 거라든가, 모든 것에서.
철이라도 든 건가? 아니면 내가 계속 싫다고 해서 이제 좀 자제하려고 하는 건가? 뭐가 어찌 됐든 다행이기는 한데……. 아니, 다행이 맞나? 그래, 다행이 맞다. 그런데 뭔가 계속 찝찝했다.
조금 전 정우진이 만졌던 등허리가 아직도 이상했다. 팔을 뒤로 돌려 허리를 두어 번 쓸다가 이불을 덮어쓰고 눈을 감았다. 아무튼 요즘 정우진은 좀 이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가 어느 순간 번쩍 눈을 뜨자 시커먼 천장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목덜미를 문지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무슨 꿈을 꾼 건지는 모르겠지만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이 막히는 게 등골이 오싹했다. 낯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이다가 버릇처럼 옆으로 손을 뻗는데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상체를 반쯤 일으켜 정우진을 찾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의식이 될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빈 침대만 탁탁 두드리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새벽 세 시밖에 되지 않아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그 와중에 한곳에서만 빛이 나고 있었다. 문틈에서 새어 나오는 빛줄기 쪽으로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닫힌 문 앞에 도착하자 쏴아아 물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벽에 샤워라도 하나 싶어서 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칫했다. 잠시 문을 노려보다가 도둑고양이처럼 문에 바짝 귀를 댔다.
1초. 2초. 3초.
나는 다시 조용히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소리가 나지 않게 최대한 가만히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 누워 오직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씻으면서 자위를 하는 건지, 아니면 자위를 해서 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깼다는 걸 들키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자려고 눈을 꾹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정우진은 자위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몰래 해야 한다는 모두가 아는 상식을 혼자만 모르는 놈이었다. 어떨 땐 자다가 눈을 뜨면 내 뒤에 딱 붙어서 아침 댓바람부터 자위 삼매경에 빠져 있었던 적도 있었고, 자는 사람을 억지로 깨워서 섹스 하자고 노래를 불렀던 적도 있었다.
이렇게 새벽에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 혹시 누가 들을까 싶어 일부러 샤워기까지 틀어 놓고 자위를 하는 건 정말 정우진 스타일이 아니었다.
내가 왜 이런 분석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좀 찝찝했다. 내가 자다가 잠꼬대를 했나? 잠결에 저리 꺼지라고 짜증을 냈나?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끊어질 듯 희미하게 들리던 물소리가 멎었다.
순간 뛰던 내 심장도 덩달아 멎은 듯한 기분이었다. 조용히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벽에 바짝 몸을 붙이고 눈을 감는데 조용히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는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적막 속에서 끼이익, 침대가 밑으로 내려가는 느낌이 났다.
이불이 몇 번 바스락거리더니 귀 근처로 차가운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화들짝 놀라서 어깨를 움츠리자 잔뜩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어요?”
정우진이 미안하다는 듯 내 뺨으로 미끄러진 물기를 닦아 주더니 그곳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정우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늘 그랬던 것처럼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허리에 제 팔을 둘러 고목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바싹 붙었다. 목 부근에 젖은 머리카락이 닿았다. 시커먼 벽을 멀뚱멀뚱 보다가 정우진 쪽으로 돌아누웠다.
“씻고 왔어?”
“네, 나 때문에 깼어요?”
“…….”
“아직 세 시밖에 안 됐어요. 더 자요.”
정우진이 제 품에 날 안더니 가볍게 뒤통수를 쓸었다. 그러더니 자라는 듯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너 찬물로 씻었어?”
“그냥 세수만 했어요.”
“…….”
“……샤워했는데 왜요?”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정우진은 금방 말을 바꿨다. 나는 몸을 뒤척여 편안한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 보니 그 난리를 겪고 난 뒤부터였던 것 같다. 하루에 한 번씩 하자고 하면서 밥을 먹을 때나 텔레비전을 볼 때나 씻을 때나 키스 못 해서 죽은 귀신이 들러붙은 것처럼 여기저기 입을 맞추고 핥고 빨고 별 지랄을 다 하더니 요샌 영 신기할 정도로 잠잠했다.
섹스 하자고 조르지도 않고 가볍게 이마나 입술이나 뺨에 입을 맞추는 것 외엔 별다른 스킨십도 없고……. 혹시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나? 아니면 내가 화낼까 봐 그러나? 그것도 아니면 내가 감금에 강간까지 당했다는 걸 알아서 그러나?
“선배, 자요?”
설마 그래서 이 새벽에 찬물로 샤워하면서 딸치고 왔다는 거야? 씨발, 이건 무슨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도 아니고……. 존나 어이가 없었다.
“자냐?”
내가 뒤늦게 되묻자 정우진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요.”
“잘 거야?”
뭔가 이상했는지 정우진이 살짝 몸을 떼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잠 안 와요?”
내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눈초리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살짝 가늘어졌다. 어째서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긴장이 됐다. 당황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태연한 척하는데 관찰하듯 날 쳐다보는 말간 눈동자가 새카맣게 빛나는 게 꼭 밤하늘 같아서 숨이 넘어갔다. 목울대가 움직이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리자 가만히 날 보던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혹시 들었어요?”
“뭐, 뭘?”
나는 대답하기도 전에 내가 병신처럼 말을 더듬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내가 병신처럼 말을 더듬자 정우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놀란 듯 크게 뜬 눈으로 날 보던 정우진이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키스해도 돼요?”
누가 들으면 언제는 물어보고 한 줄 알겠다. 존나 어이가 없어서 먼저 고개를 쳐들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입술이 내 입술에 닿자 프라이팬에 버터가 녹듯 찬기는 금세 내 체온에 녹아 버렸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목에 팔을 감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입술이 떨어졌다. 얼굴이 얼마나 붉어졌는지 어둠 속에서도 정우진이 당황하고 있는 게 확연히 보였다. 평소에는 입에 담지도 못할 음담패설에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놓고, 고작 이런 걸로 저렇게 됐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다시 손을 뻗으려고 하는데 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간 정우진이 내게 등을 돌렸다.
“자, 잠깐만 화장실 좀…….”
말을 더듬으며 사라지는 정우진의 뒷모습을 보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곧 다시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뭐야? 당연히 뽀뽀하다가 끝까지 갈 줄 알았는데 정우진이 무슨 겁탈당한 처녀처럼 화장실로 뛰어가는 걸 보니까 당황스럽기만 했다. 설마 이대로 끝이야? 진짜? 끝이라고? 끊이지 않고 들리는 물소리에 나는 결국 이불을 머리끝까지 둘러쓰고 누워 몸을 웅크렸다.
정우진 개새끼,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결국 정우진은 삼십 분이 훨씬 지나서야 다시 슬금슬금 방으로 기어들어 왔다.
* * *
텔레비전에선 별로 웃기지도 않은 식상한 개그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귀찮을 정도로 말을 걸면서 찝쩍거렸을 정우진도 오늘은 진지한 표정으로 텔레비전만 바라봤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그렇게 한 시간째 말없이 텔레비전만 보고 있자니 죽을 맛이었다. 나는 결국 슬쩍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텔레비전에 시선을 박고 있던 정우진이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더 안 봐요?”
“그래, 너나 실컷 봐라.”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어이가 없기는 했는데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정우진은 언제부턴가……. 아니, 그 일을 기점으로 완전히 변해 버렸다.
탈수증이 오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엉엉 울면서 미워하지 말라던 그날부터 과할 정도로 내 눈치만 봤다. 평소라면 허락은 무슨, 저 꼴리는 대로 키스하고 물고 핥고 빨았을 텐데 정우진은 고작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는 것도 벌벌 떨면서 내 허락을 기다렸다. 마치 쉽게 깨지는 유리잔처럼 다뤄지고 있는 듯했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나는 당연히 어제 끝까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상황이나 분위기상 당연히 그랬어야 했는데…….
마지막으로 한 게 벌써 두 달 가까이 지났다. 거듭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우진과 하는 그런 행위들을 기다리고 있거나 그립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정우진이 너무 이상하니까 그런 거다.
“배고파요?”
그래도 그나마 변하지 않은 건 이렇게 정우진이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닌다는 점이었다.
“아니, 물 마시게.”
거실에서 주방까지 가는데도 정우진은 내 뒤를 개처럼 쫓았다. 내 뒤에서 네댓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졸졸졸. 이런 걸 보면 그 전과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왜 저렇게 내 눈치를 보나 싶었다. 대체 뭐가 문제지? 내가 집 나간다고 한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섬에 가뒀다고 했을 때 내가 자기 손을 피한 것 때문에 그러나? 하긴, 그때 엄청 울기는 했으니까 충격이기는 충격이었겠지. 그래도 내가 괜찮다고 했고, 벌써 두 달이나 지났는데 이렇게까지 내 눈치를 볼 필요가 있나 싶었다.
“야.”
“네?”
“…….”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바로 이랬던 거 같진 않았다. 그냥 서서히 조금씩 변했던 것 같다. 내가 말이 없자 정우진이 눈에 띄게 긴장했다. 태연함을 가장한 채 날 바라보고 있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물컵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러자 정우진이 다물고 있던 입을 뗐다.
“과일 갈아 드릴까요?”
“뭐?”
“물 마시기 싫으면 과일…….”
“네가 무슨 이 집 식모냐?”
내가 허, 하고 웃으며 말하자 정우진이 다시 말했다.
“그럼 뭐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 하나 더 생각났다. 정우진은 계속 내게 뭔가를 해 주려고 했다. 쉬지 않고 이거 해 줄까요, 저거 해 줄까요, 끈질기게 물었다. 내가 근처 편의점만 갔다 온다고 그래도 눈에 불을 켜고 매달리던 정우진이 이젠 별다른 말도 없이 날 내보내 줬다.
물론 같이 따라오기는 했지만 며칠 전에 비하면 큰 발전이었다. 키스해 주세요, 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땐 언제고, 이젠 키스에 키읔 자도 꺼내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새벽에 화장실에 가서 혼자 자위하는 것도 그렇고.
어떻게 생각하면 이게 정상인데도 원래 비정상인 놈이 정상인처럼 구니까 진짜 기분이 좆같았다.
“선배?”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날 불렀다. 그의 눈동자 너머로 불안감이 깃들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다른 거 먹자.”
“어떤 거요?”
내가 뭔가를 요구하자 정우진이 다시 눈에 띄게 좋아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뭔가를 요구하고 바라야만 안심하는 것 같아서.
“술.”
“네?”
“술 사 와. 소주랑 맥주랑 양주랑 전부 다.”
내 단호한 말에 정우진의 눈이 놀란 듯 커다래졌다. 정우진은 왜 그러냐는 말 한마디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을 챙겼다.
“술만 사 오면 돼요?”
“많이 사 와.”
“……네.”
정우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때마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걸 만져 보고 싶어서 손가락 끄트머리가 간질간질했지만 주먹을 쥐고 말했다.
“빨리 갔다 와.”
내 말에 정우진이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정우진이 올 때까지 놈에게 술을 잔뜩 먹여서 도대체 요즘 왜 그러냐고 묻는 장면을 상상했다. 오늘은 기필코 왜 그러는 건지 알아내고야 말 거다.
그렇게 다짐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검은 봉지 가득 술을 사 왔다.
나는 간단하게 안주를 만드는 정우진을 내버려 두고 식탁 위에 술잔과 술병을 놨다. 정우진이 그런 날 힐끗 보다가 말했다.
“선배.”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또 왜 저래?
“혹시 뭐 기분 나쁜 일 있어요?”
“뭐?”
“갑자기 술은 왜…….”
불안한 얼굴로 묻는 정우진을 보며 괜히 뜨끔했다.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기분이 나쁘긴 뭐가 나빠. 근데 너 술은 잘 마시냐?”
“아니요. 안주는 국물 있는 거…….”
“야, 안주는 무슨 귀찮게. 그냥 과일이나 몇 개 깎아.”
내가 술을 얼마나 마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우진이 못 마신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식탁에 대충 병을 두고 의자에 앉자 정우진이 사과와 포도 한 송이를 들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선배랑 술 마시는 거 처음이에요.”
내가 별일 아니라고 해서 그런지 정우진은 아까 불안해하던 것과는 달리 우리가 뭐 대단한 거라도 하고 있다는 듯 긴장과 설렘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나는 정우진이 예쁘게 사과 깎는 걸 구경하다가 물었다.
“너 뭐 마실래?”
“전 그냥 맥주…….”
“그래? 그럼 소맥으로 먹자.”
나는 속으로 크크크 웃으며 맥주잔에 소주를 콸콸 부었다. 그렇게 정우진의 잔에는 소주와 맥주를 1:1 비율로, 내 잔에는 그냥 맥주만 채워 넣었다.
내가 자기 잔에 술을 어떻게 부었는지 봤을 텐데도 정우진은 한마디도 않고 오히려 웃는 낯으로 내게 포크를 쥐여 줬다.
“다른 거 더 가져올까요?”
“아니, 그냥 먹어. 마셔, 마셔.”
나는 정우진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에 잔을 쥐여 줬다. 첫 잔은 무조건 원샷이라는 내 말에 정우진 또라이 놈이 진짜 소주와 맥주를 1:1 비율로 탄 맥주잔의 술을 단숨에 꿀꺽꿀꺽 마셔 버렸다.
놀라서 그 꼴을 멍청하게 보던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덩달아 맥주를 원샷했다.
“선배, 너무 급…….”
“술은 원래 급하게 먹어야 돼.”
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나오는 대로 내뱉으며 다시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정우진의 잔에는 소주와 맥주를 1:1 비율로, 내 잔에는 맥주만.
내가 생각해도 존나 야비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난 내 주량이 얼마큼인지도 몰랐고, 일단 난 멀쩡하고 정우진만 존나 인사불성으로 취하게 만들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세 잔 정도 연거푸 마시자 입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정우진이 포크에 찍어 준 사과 끄트머리만 사각사각 갉아 먹으며 물었다.
“너 근데 거실에 CCTV는 달았냐?”
“네.”
“언제?”
“선배 잘 때요.”
설마 ‘네.’라는 대답이 나올 줄은 몰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정우진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누가 정우진 아니랄까 봐 존나 빨랐다.
“그런 거 안 비싸?”
“괜찮아요. 근데 햄이라도 구워 올까요?”
안주가 너무 부실하다고 느꼈는지 정우진은 안절부절못했다. 하긴 술 몇 잔 마시니까 속이 좀 차갑긴 했다. 하지만 안주가 많아서 정우진이 안 취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잔을 들었다.
“야, 근데 넌 평소에 나한테 하고 싶었던 말 없었어?”
잔이 비어 소주와 맥주를 1:1 비율로 섞어 주려는데 정우진이 내 손에서 병을 가져가더니 자기가 알아서 술을 섞기 시작했다. 그러곤 내 잔엔 맥주만 부어 줬다.
좀 민망해서 헛기침을 큼큼,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선배랑 결혼하고 싶어요.”
“결혼하, 뭐?”
고개를 끄덕거리며 무심코 정우진의 말에 긍정하려던 나는 미간을 좁혔다. 씨발, 저 새끼 지금 술도 안 취하고 존나 멀쩡한데 뭔 개소리를 저렇게…….
“너 죽을래?”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 하라면서요.”
“씨발놈아, 수위는 지켜야 할 거 아니야!”
“그럼 한국 말고 다른 데서 살아요.”
예전부터 한국을 뜨자, 뜨자 하더니 진짜 존나 매국노 새끼가 따로 없었다. 한국인이 도대체 한국을 왜 저렇게 싫어해?
“여긴 아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요.”
“한국 말고 다른 데서 살면 아는 사람 안 생길 거 같냐?”
“그럼 또 다른 데로 가면…….”
“이 미친놈아, 넌 그냥 사과나 처먹어라.”
나는 정우진 입에 내가 먹던 사과 반쪽을 마구잡이로 쑤셔 넣었다. 그러자 정우진이 부드럽게 내 손목을 잡더니 물었다.
“선배는요?”
“뭐?”
“선배는 계속 저랑 있는 거 안 질려요?”
그 말에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같이 있는 게 싫으냐는 질문도 아니고 안 질리느냐는 건 또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나는 좀 얼떨떨한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질리는 거 없는데?”
“그럼요?”
“어?”
“그럼 좋아요?”
다시 입이 다물어졌다. 싫은 건 아니니 좋은 게 맞는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지, 하다가 다급하게 술을 벌컥벌컥 마시자 정우진이 내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며칠 동안 생각을 해 봤어요.”
“어? 생각?”
느리게 눈을 끔뻑거리며 되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그냥 선배랑 같이 있고 싶었고,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뭐든…….”
같이 있고 싶고 뭐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눈깔에 힘을 주며 태연한 척 눈을 부릅떴다. 큰일 났다, 정우진이 두 개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정우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채 그냥 취하지 않은 척 자연스레 고개만 끄덕거렸다. 괜히 먹지도 않는 사과를 포크로 쿡쿡 찌르고 있는데 정우진이 날 불렀다.
“선배.”
“어?”
화들짝 놀라 퍼뜩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젖은 눈으로 물어왔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표정이나 목소리를 들으면 심각한 상황인 거 같은데…….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이렇게 물으면 취했다는 걸 들키겠지……. 나는 긴장한 채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난…….”
“네.”
“……그냥, 음. 잘 모르겠는데…….”
힐끗 눈치를 보며 얼버무리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잔이 비었다는 걸 알아챘다. 잽싸게 소주잔을 들어 그의 잔에 콸콸 쏟아부었다.
“근데 왜 울어?”
맥주고 나발이고 이제 그의 맥주잔에는 전부 소주였다. 맥주잔에 소주를 부었는데 저거 먹고도 안 취하면 진짜 저 새낀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내 잔에 맥주를 채우며 다시 물었다.
“그렇게 슬퍼? 어?”
“선배,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슬퍼? 어? 왜?”
내가 잔을 들자 정우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덩달아 잔을 들었다. 나는 그가 잔을 반이나 비우는 걸 보며 어쩔 수 없이 똑같이 반을 꿀꺽꿀꺽 마셨다. 맥주가 목구멍 뒤로 넘어갈 때마다 눈물이 찔끔 났다.
“너무 한심해요.”
“끅……. 어?”
딸꾹질을 하며 묻자 정우진이 날 쳐다봤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치이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시야가 변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사방을 살피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앞에 앉아 있던 정우진이 등지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야.”
“네?”
“……너 거기서 뭐 하냐?”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햄 구워 달라면서요?”
“뭐?”
“햄이랑 미역국 안 해 주면 집 나간다고 그랬잖아요.”
“……뭐?”
정우진의 목소리가 좀 이상했다. 불퉁한 게 꼭 삐쳤을 때 목소리였다. 나는 놀라서 침을 삼키며 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필름이 끊겼나? 언제부터? 왜?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술이 찰랑이는 잔을 보다가 말했다.
“계란 프라이도 해 와. 완숙으로.”
에라, 모르겠다 싶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이제 일어났으니까 다시 찬찬히 얘기해 봐야겠다.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편의점에 있는 거 싹 다 가져왔으니까 많이 드세요.”
“…….”
“껍질 까 드릴까요?”
“……어?”
식탁 위엔 온갖 종류의 초콜릿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젠 정우진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몸이 흐느적거리고 세상이 느리게 움직였다. 좌우로 천천히 흔들리고 있는 정우진을 멍청하게 보다가 나는 가나 초콜릿 하나를 쥐었다.
“아이스크림…….”
초콜릿 끄트머리를 잡고 식탁을 탁탁 치며 중얼거리자 정우진이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지갑을 들고 일어서는 게 보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내가 정우진이 사 온 아이스크림 안에 초콜릿을 부숴 넣고 있었다.
“어……. 그래.”
“정말이요?”
“응.”
“진짜예요?”
“으응.”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을 초코 아이스크림으로 만든 뒤 숟가락으로 푹푹 쑤시자 정우진이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초코 맛으로 새로 사 올까요?”
“어?”
“뭐 하세요?”
“너 얼음 안 먹고 싶어?”
“네? 얼음이요?”
되묻던 정우진이 아, 하고 일어서더니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왔다. 나는 아이스크림 안에 얼음 두어 개를 넣다가 말했다.
“너무 안 커?”
“갈아 올까요?”
“딸기 없어?”
“딸기는 없는데……. 포도 있어요.”
정우진을 멀뚱멀뚱 보고 있는데 머릿속에서 파도가 철썩철썩 치고 있는 광경이 떠올랐다.
“회는?”
“네?”
“우럭…….”
아이스크림에 흥미를 잃고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웅얼거리자 정우진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비틀대는 내 어깨를 잡으며 허리를 굽혔다.
“들어갈래요?”
“어딜?”
“방이요.”
“아니……. 나 그거…….”
“어떤 거요?”
나는 완강히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떼어 냈다. 내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가만히 내가 말하길 기다렸다. 나는 그를 보며 몇 번 딸꾹질을 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어.”
“말씀하세요.”
“나 지금 취했지?”
정우진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고 혀가 굴려지지도 않았다. 눈에 바짝 힘을 주며 말하자 정우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거 같아요.”
“짜증 나?”
“네?”
“지금 내가 취해서 짜증 나?”
“아니요, 안 짜증 나요. 진짜예요.”
“뻥치지 마, 씨발!”
언젠가 친구가 술에 취해서 주정을 부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난 그때 짜증 나 죽을 뻔했는데 정우진은 내가 지금 취했는데도 짜증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 게 꼭 거짓말 같았다.
갑자기 서러워져서 씩씩거리는데 정우진이 내 어깨를 꾹 누르며 날 진정시켰다.
“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짜증 나요. 귀여워요.”
“뭐? 귀여워? 씨발, 내가 귀여워?”
“네.”
그 말에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
“선배, 들어갈래요?”
“아니……. 할 말 있어.”
“말씀하세요.”
“나 취했어?”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가만히 날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죽을래? 너 왜 거짓말해?”
내가 정색하자 정우진이 급하게 말을 바꿨다.
“취한 거 같아요.”
“근데 왜 거짓말해!”
“잘못했어요.”
“그래…….”
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정우진이 웃었다. 나는 가만히 정우진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할 말…….”
“알았어요. 들어가서 얘기해요.”
“아니, 이거만 말하고.”
“취했냐고요?”
“아니거든?”
갑자기 빈정이 상해서 잔뜩 인상을 쓰자 정우진이 다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는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말했다.
“취했…….”
“선배, 우리 들어가서…….”
“야!”
“잘못했어요. 말씀하세요.”
내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정우진이 알겠다며 내 옆에 정자세로 앉았다. 모범생처럼 바른 자세로 앉아 경청하겠다는 듯 날 쳐다보는 정우진을 보며 큼큼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취했냐고 물어본 건. 어?”
“네.”
“내가 취한 게 아니라 취해서 그러는 거 아니라고 말하려고 한 거야. 알았어?”
“네?”
“그러니까 내가 취한 거는 아닌데, 원래 안 취했어도 말을 하려고 했었던 거야. 취해서 하는 게 아니라. 알겠어?”
“…….”
정우진은 심각한 표정으로 날 보다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뭐라는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무작정 고개만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정우진의 어깨를 턱 잡으며 다시 차근차근 말했다.
“내가.”
“네.”
“취했냐고 계속 말을 한 거는.”
“네.”
“내가 취한 거를 아는데 취해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네.”
“안 취했어도 말을 했을 거라는 거야. 어? 그래서 물어본 거야. 계속. 모르겠어? 어?”
“…….”
정우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도 깜빡이지 않고 심각하게 날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너 변했어.”
“……네?”
“변했어…….”
뜬금없는 내 말에 정우진이 놀랐다. 그냥 놀란 게 아니라 엄청나게 많이.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많아서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머리는 핑핑 돌고 속도 이상하고 자꾸만 눈이 감겨서 나는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 * *
목구멍에서 불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목도 마르고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정신은 없고 몸은 무겁고……. 딱 울고 싶은 심정으로 끔벅끔벅 눈을 감았다 뜨는데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나는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다가 모로 누웠다.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뻗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물. 물…….”
내 흐느낌을 들은 건지, 아니면 때마침 문이 열린 건지 정우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배, 일어났어요?”
“나 물…….”
“잠시만요.”
다 죽어 가는 나를 보던 정우진이 빠르게 방을 나갔다. 그러곤 곧바로 미적지근한 물 한 컵을 들고 와 날 일으켜 앉혔다.
“선배, 괜찮아요?”
“차가운 거!”
“너무 찬 거 먹으면 배 아파요.”
“차가운, 윽.”
소리를 지르자 머리가 울렸다. 나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낑낑대다가 미지근한 물 한 컵을 원샷했다. 정우진은 빈 컵을 받으며 말했다.
“더 주무세요, 아직 새벽이에요.”
“몇 신데…….”
“두 시 반이요.”
나는 다시 꿈틀거리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옆으로 누워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옆에 따라 누웠다. 그는 모로 누운 내 뒤에 바짝 붙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선배.”
“으응.”
“씻을래요?”
“으응, 나중에…….”
나는 잠결에 웅얼웅얼 말했다. 정우진은 그 뒤로 한참 말이 없었다. 뒷목으로 젖은 숨이 닿는 게 느껴졌다. 거의 잠이 들어갈 때쯤 정우진이 말했다.
“저 변했어요?”
“…….”
“사실 저도 좀 그런 거 같아요.”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뜨자 다시 한번 머리가 띵 하고 아파 왔다. 몸을 뒤척이다가 돌아눕자 정우진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서로 마주 보게 누워 고개를 들자 코앞에서 정우진이 보였다. 잠시 당황하던 정우진이 곧 바짝 날 끌어안았다.
“책에서 봤어요.”
“…….”
“하나를 가지면 둘을 바라게 되고, 둘을 가지면 셋을 바라게 된대요.”
천천히 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고개를 숙여 졸려서 파르르 떨리고 있는 내 속눈썹에 입을 맞췄다.
“옛날에는 그랬잖아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선배는 똑같이 날 싫어하니까 뭐든 제멋대로 한 거요.”
눈이 간지러워 인상을 쓰자 정우진이 낮게 웃었다.
“근데 이젠 안 그렇다는 걸 며칠 전에 알았어요.”
“…….”
“이젠 내가 참고 견디고 버티면 선배는 내 이름도 불러 주고 나랑 같이 있어 주기도 하고 내 말도 들어 주니까.”
눈이 감겼다. 귓가로 끊어질 듯 희미하고 애처로운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선배, 나는요.”
“…….”
“선배가 나랑 같이 있어 주고 내 이름 불러 주고 나한테 웃어 주면 뭐든 다 할 거예요. 싫다는 거 하나도 안 하고 선배가 하고 싶다는 거 다 들어 주고.”
“…….”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결정했어요.”
온몸에 힘이 빠졌다. 곧 잠이 들 수 있을 듯했다. 정우진이 뭐라고 하는지도 잘 들리지 않았다. 속으로, 그래그래, 대답하며 잠이 들려는데 귓가로 선명하게 한 단어가 들려왔다.
“밖에 나가서 선배가 하고 싶은 거 해요. 다른 사람도 만나고 학교도 다니고 일도 하고 그냥 선배가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대신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은 친하게 지내지 마세요. 그럼 제가 선배 하고 싶다는 거 다 해 주고 선배가 싫어하면 만지지도 않고 섹스도 안 할게요.”
눈을 번쩍 뜨자 코앞에서 정우진이 보였다.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보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벌렸다.
“……요즘…….”
“네?”
정우진이 아까 했던 말이 귓가에서 웅웅 울렸다. 내가 싫어하는 건 아무것도 안 한다고. 만지지도 않고 섹스도 안 하고.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정우진의 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더 귀를 기울이면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도 들렸다.
싫어했던 적은 별로 없는데. 물론 죽을 것처럼 힘들고 아팠지만 정말 싫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정우진이 울면서 사랑한다고 내 위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던 얼굴이 떠올랐다. 슬며시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정우진이 날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당장에라도 울 것처럼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들이마시고 계속 묻고 싶었던 말을 떠올렸다.
“왜 안 해…….”
“뭘요?”
섹스…….
내가 웅얼웅얼 말하자 정우진이 숨을 멈추는 게 느껴졌다.
밀랍 인형처럼 굳어 있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정신이 깜빡거렸다.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 있는데 허리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못 들었어요.”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시선을 올려 얼굴을 살피자 잔뜩 긴장해 굳어 있었다. 파리하게 질린 안색과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 붉어진 눈가를 번갈아 가며 보다가 살짝 벌어져 있는 입술로 시선이 갔다. 벌어진 입 안이 굉장히 습해 보였다. 나는 멍청하게 그걸 보며 되물었다.
“어?”
“못 들었어요.”
“……뭐를?”
“아까 선배가 한 말이요.”
아까? 내가 한 말? 무슨 말?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만 깜박거리자 정우진이 재촉하듯 말했다.
“나한테 왜 섹스 안 하냐고 물어봤잖아요.”
“어?”
“요즘 왜 안 하냐고 물어봤잖아요, 방금.”
아……. 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하자 정우진이 내 허리를 안은 팔에 꽉 힘을 주며 말했다.
“다시 말해 주세요.”
“…….”
“선배, 아까…….”
“……?”
“…….”
“허리 아파…….”
내가 웅얼웅얼하며 짜증 내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꿈틀거리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손을 뻗었다. 아까와는 달리 꾹 다물린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꾹 누르자 금방 틈이 생겼다.
슬쩍 벌어진 안쪽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자 떨림이 느껴졌다. 놀라서인지 아니면 긴장해서인지 정우진이 온몸은 물론이고 속눈썹까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별생각 없었는데 괜히 나까지 긴장이 됐다. 침을 꿀꺽 삼키자 손가락 끝에 따뜻하고 말랑한 게 닿았다. 혓바닥이었다.
간지러워서 어깨를 움츠리고 소리 없이 웃자 손가락에 이가 닿았다. 눈가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붉어져 있었다. 정우진이 날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안고 반대쪽 손은 내 바지 사이로 넣어 엉덩이를 만졌다.
“건드리지 마…….”
내가 꿈틀거리며 웅얼거리자 정우진이 멈칫했다. 그는 불만스레 눈을 치켜떠 날 쳐다봤다. 발간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혓바닥 안쪽을 꾹꾹 누르고 입천장을 쓸자 정우진이 미간을 구겼다. 그 표정이 어쩐지 좋아서 한 번 더 손톱으로 입천장을 긁자 정우진이 숨을 헐떡거렸다.
그걸 따라 덩달아 숨을 헐떡거리며 손가락을 빼내자 아쉽다는 듯 손가락을 따라 혀가 딸려 나왔다. 밖으로 쭉 내밀어진 혓바닥이 다시 입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품속으로 기어 들어가는데 정우진이 날 끌어안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선배.”
피곤하다. 잠도 오고……. 자고 싶어. 목말라…….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중얼하자 정우진이 울상을 지었다.
“다시 해 주세요.”
“으응.”
“다시 해 줘요.”
귀찮아……. 거의 반쯤 잠이 들어서 웅얼대자 정우진이 내 바지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귀찮아서 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져 있었다. 엉덩이를 만지던 손이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성기를 건드리고 엉덩이 안쪽을 훑던 손끝이 어느샌가 축축해졌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뜰 때마다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달리기를 한 것처럼 헐떡이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읏, 흐으……. 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는데 정우진이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잠시만요,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으으…….”
내가 도리질을 치며 싫어하자 정우진이 내 눈가에 입을 맞췄다. 기다란 손가락이 엉덩이 안쪽을 집요하게 문질렀다.
옷깃을 쥐어뜯으며 끙끙 앓고 있는데 뒤에서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그 선뜩한 감각에 부르르 몸을 떨자 정우진이 내 다리를 높게 들어 올렸다. 흐린 시야 사이로 정우진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정우진이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어쩐지 감격에 겨운 표정이었다. 정우진이 몸을 숙이자 침대에서 끼이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였다. 나는 내게 키스하려는 정우진을 밀어내며 황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얼떨결에 옆으로 밀려 나간 정우진이 얼빠진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정우진의 어깨를 억세게 잡고 그를 침대 위로 눕혔다. 잠시 팔에 힘이 빠져서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겨우 중심을 잡고 슬금슬금 배 위로 올라가 앉자 단단한 복근이 긴장해서 잔뜩 수축하는 게 엉덩이로 느껴졌다.
놀란 고양이처럼 눈이 동그래진 정우진을 보며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넓게 가슴과 배를 더듬자 정우진이 숨도 쉬지 못하고 굳었다. 나는 노크를 하듯 손가락 끝으로 가슴과 쇄골 사이를 톡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정우진이 숨을 내쉬었다.
“선…….”
정우진이 떨리는 손으로 날 끌어내리려 했다. 나는 그의 손목을 잡으며 침대 위로 내팽개치다시피 던졌다. 그러곤 말 안 듣는 꼬마를 훈계하듯 쓰읍 하고 엄한 표정을 지었다.
“움직이지 마.”
“…….”
“혼난다.”
내 말에 얌전해진 정우진을 보니 만족스러웠다. 당장에라도 피가 날 듯 발개진 눈가가 너무 예뻐서 다시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나는 기지개를 켜듯 허리를 쭉 펴고 고개를 위로 치켜든 채 숨을 들이켰다가 길게 내뱉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엉덩이 사이로 딱딱하고 뜨거운 게 두근두근 맥동하고 있었다. 평평한 천장이 꿈틀거리는 환각 아닌 환각을 보고 슬슬 허리를 움직이며 뜨거운 숨을 내뱉고 있는데 뒤늦게 정우진이 떠올랐다.
느리게 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리자 금방 울 것 같은 얼굴로 정우진이 날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양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게 잘 익은 토마토 같았다. 그게 웃겨서 피식 웃자 정우진이 우는 소리를 냈다.
“선배, 제발…….”
조금만 더 놀리면 정말 울 것 같기도 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나쁜 마음이 스멀스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어느새 숨이 거칠어져 헐떡거리며 말없이 정우진을 내려다봤다.
내가 반응이 없자 붉게 물든 눈가가 젖어 가는 게 보였다. 알 수 없는 쾌감이 정신을 지배했다. 땀에 젖은 그의 가슴에 대고 있던 손바닥을 들어 올려 팔을 뻗었다.
정우진이 움찔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손가락 끝으로 젖은 속눈썹을 툭툭 건드리자 정우진이 다시 우는소리를 냈다.
제발요, 선배. 그 혼잣말 같은 웅얼거림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정우진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손가락 넣어도 돼요?”
어디에? 정우진이 두 개로 보였다가 세 개로 보였다가 다시 또렷하게 보였다. 눈을 질끈 감고 작게 도리질을 치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허리를 잡고 슬쩍 앞으로 눕혔다. 그리고 허리를 세우자 엉덩이 안쪽으로 뭔가가 꾹 닿아 왔다.
더운 숨을 내뱉으며 눈을 뜨는 순간 안쪽으로 손가락 하나가 쑥 들어왔다. 아픔도 없이 그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감각만 느껴졌다. 위아래로 요동치는 정우진의 가슴에 손을 대고 그 리듬에 따라 자연스럽게 허리를 움직이고 있는데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조금 빠듯해서 어깨를 떨자 정우진이 혀를 내밀었다.
“키스해 주세요.”
선배, 선배.
정우진이 날 부르는 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헐떡거리며 몸을 낮추자 입술에 뜨거운 게 닿았다. 슬쩍 입술을 벌리자 안쪽으로 말캉한 혀가 들어왔다. 안쪽을 빈틈없이 훑고 빨던 정우진이 성기를 빨듯 내 혀를 쭙쭙 빨았다. 질척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없어서 다시 어지러워졌다.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들자 정우진이 내 허리를 잡으며 말했다.
“엉덩이 들어요.”
“싫어…….”
“어서요.”
“어지러워…….”
숨도 막히고 어지럽고 속도 이상했다. 나는 애처럼 생떼를 부리며 도리질 쳤다. 이대로 푹 쓰러져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잘 거야. 잘래. 피곤해. 잠 와. 그 말만 중얼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빨리.”
“싫…….”
“제발요.”
귓가에 울리는 흔들리는 목소리에 눈에 잔뜩 힘을 줘 초점을 맞췄다.
“선배, 제발요.”
축축하게 젖어 있던 눈가가 그렁그렁했다. 얼마나 눈물이 그렁그렁했는지 새카만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없이 가만히 정우진만 바라봤다.
내가 말이 없자 초조해졌는지 정우진이 다시 한번 재촉했다. 다시 한번 말이 없자 기어이 곧은 눈가를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선배.”
울렸다.
배 속이 자르르 울리는 걸 느끼며 숨을 터뜨렸다. 고개를 숙여 젖은 눈가를 핥았다. 정우진이 바르르 떠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살갗 위로 뜨거운 숨결은 물론이고 작은 근육의 움직임까지 전부 느껴졌다.
발기한 성기가 엉덩이 안쪽을 문지를 때마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소극적으로 허리를 흔들다가 고개를 숙이자 정우진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헐떡이고 있는 게 보였다. 툭 하고 붉은 뺨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선배?”
쉬어 빠진 목소리로 정우진이 손을 들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내 뺨을 닦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흐느꼈다.
“어떡……. 흑, 아.”
정우진과의 섹스는 늘 날카롭고, 무겁고, 빠르고, 숨이 막혀 죽음의 문턱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쾌락의 끝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해서 좋기는 하지만 죽을 것처럼 힘들었고, 살고 싶다는 생각과 죽고 싶다는 생각 가운데서 늘 헐떡거렸는데.
“아파요?”
정우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도리질을 치며 천천히 허리를 돌렸다. 후드득 하고 젖은 가슴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정우진이 다시 손을 뻗어 내 뺨을 잡았다. 나는 그의 손바닥에 젖은 뺨을 비비며 떨었다.
“좋아.”
머릿속은 안개가 낀 듯 부옇고 온몸이 녹을 것처럼 나른했다. 단단한 게 안쪽에서 꿈틀거릴 때마다 막힌 목구멍이 터지듯 숨이 터졌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정우진이 하얗게 얼어 있는 게 보였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숨도 쉬지 않고 작은 떨림도 없이 인형같이 날 바라보는 정우진을 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계속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떡해, 어떡해, 좋아, 너무 좋아, 안쪽 좋아……. 흐느끼고 울면서 허리를 흔들고 좋다는 말을 반복하는데 몸이 뒤집혔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정우진이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갑작스러운 시야 변화에 얼어 있는 날 보며 정우진이 이를 갈았다.
“씨발.”
그 뒤로는 계속 정신이 깜빡거렸다. 번쩍 들린 다리가 단단한 어깨 위에서 흔들리는 걸 본 것 같기도 했다.
* * *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나는 비몽사몽인 정신으로 괴상한 소리를 내며 이불을 쥐어뜯었다.
“윽, 으억……. 어으. 씨발, 욱…….”
죽을 것 같다. 진짜 죽을 것 같았다. 머리도 아프고 속도 이상하고 온몸의 뼈가 그야말로 다 작살이 난 것처럼 아팠다. 꿈틀거리며 신음이라고 하기에도, 비명이라고 하기에도 어중간한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소리의 정체가 뭔지 확인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침대에서 꿈틀거리며 욕을 하고 있는데 차가운 물기가 닿았다. 슬쩍 시선만 돌리자 정우진이 하얀 가운을 걸치고 침대 위로 기어 올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막 씻고 나온 듯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선배.”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쉬어 있었다.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머리가 아파서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정우진이 빈틈없이 날 꽉 끌어안았다.
“씻을래요?”
“죽겠어…….”
“좀 더 주무세요.”
개처럼 젖은 머리카락을 내 어깨에 비비며 정우진이 낯간지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낯간지러운 소리가 뭔지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좋아 죽겠다는 목소리라 소름이 쭈뼛 돋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노려보며 물었다.
“왜?”
“사랑해요.”
“뭐?”
“좋아해요, 선배.”
뭔 개소리야, 씨발……. 나는 얼이 빠져서 정우진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대체 술을 얼마나 먹은 건지 모르겠다. 중간부터는 기억이 안 났는데 아마 필름이 끊긴 채로 계속 마셨을 거다. 그러니 이렇게 온몸이 아프지.
“사랑해요, 선배.”
“으, 씨발…….”
“선배, 좋아해요. 선배밖에 없어요.”
“우욱.”
정우진이 뭐라고 지껄이든 말든 난 지금 딱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배를 부여잡고 욱 소리를 내도 정우진은 나한테 앵겨서 몸을 비비며 계속 좋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사랑해요.”
“머리가 깨질 거 같아…….”
“사랑해요.”
“씨발, 내 머리…….”
“사랑해요.”
내가 아픈 건 안중에도 없고 헛소리나 줄줄 읊는 목소리에 열이 뻗쳐서 고개를 휙 돌리는데 이마와 뺨 위로 차가운 머리카락이 닿았다. 찬물로 씻었는지 내가 뜨거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우진은 평소보다 체온이 낮았다.
뺨을 간질이는 젖은 머리카락에 스르르 화가 풀리는 듯했다. 나는 손을 뻗어 정우진의 손바닥을 내 뺨에 댔다. 그리고 반대쪽 손은 내 이마 위로.
“아, 살겠다.”
“선배, 좋아해요.”
“시원해…….”
“진짜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깨질 것처럼 아픈 머리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속도 아프고 몸도 여전히 아팠지만 머리가 좀 괜찮아지니까 다시 슬슬 잠이 오기 시작했다. 귓가로 작게 소곤소곤 사랑한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 * *
자다가 깨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정우진은 자는 내 옆에서 날 쳐다보고 있기도 했고, 날 쓰다듬으며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고 있기도 했고, 내 옆에서 뭔가를 사부작사부작하기도 했다.
슬슬 일어나야 할 것 같다고 느꼈을 때 방 안엔 나 혼자였다. 너무 조용해서 마치 이 집 안에 나 혼자뿐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보다가 데굴데굴 굴러 끄트머리까지 왔다. 침대에서 떨어지듯 발바닥을 바닥에 대는데 찌르르하고 허리가 울렸다. 본능적으로 내가 간밤에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취한 사람 붙잡고 뭔 짓거리를 한 거야, 그 씨발놈은. 이를 갈며 허리를 부여잡고 방을 나와 거실까지 도착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정말 집에 나 혼자밖에 없는가 보다. 고개를 돌리자 10자를 가리키고 있는 시곗바늘이 보였다.
“정우진.”
쉬어 빠진 목소리로 불러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속이 허한 게 배가 고픈 것 같았다. 나는 주방을 서성이다가 핸드폰을 찾았다. 정우진도 없고 딱히 먹을 것도 없고 그냥 배달시켜 먹는 게 나을 듯했다.
뭘 먹을까 고민하자 갑자기 미친 듯 배가 고파 오기 시작했다. 손까지 막 벌벌 떨리고 괜히 짜증까지 났다. 식탁 구석에 놓여 있는 배달 책자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나는 후다닥 현관 쪽으로 뛰어갔다.
“일어났어요?”
마치 애가 엄마를 발견하고서 활짝 웃듯 웃으며 정우진이 내게 다가왔다.
“어디 갔다 왔어?”
“누구 좀 만나고 왔어요. 몸은 괜찮아요? 배고프죠?”
“뭐 시켜 먹으려고 했…….”
그때 정우진이 내 양 볼을 잡더니 고개를 숙여 내 입에 쪽 입을 맞췄다. 가벼운 키스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정작 정우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실실 웃으며 물었다.
“뭐 먹을래요?”
“…….”
양 뺨이 잡혀 입을 오리처럼 쭉 내밀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정우진이 다시 입에 쪽 입을 맞췄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파드득 놀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뭐 하는 짓거리야?”
“좋아서요.”
“뭐가, 이 씨발놈아!”
괜히 민망해서 소리를 빽 지르자 바보처럼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가 너무 좋아요.”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단단하게 허리가 붙잡혀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몸만 꿈틀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박으며 말했다.
“내일 여행 갈래요?”
“여행은 무슨, 갑자기, 이거 안 놔?”
“그럼 영화 보러 갈까요?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놀이공원도 가고 손잡고 걷…….”
“뭐야, 씨발. 데이트냐?”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보며 말했다.
“네, 데이트해요.”
“…….”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화사하게 웃는 정우진을 보며 순간 넋을 잃었다. 정우진이 예쁜 거야 늘 보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활짝 웃을 때마다 늘 놀랐다. 게다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이 웃는 얼굴을 보고 간밤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내가 했던 짓과 정우진이 했던 짓이.
“선배?”
내가 돌처럼 굳어서 말이 없자 정우진이 날 불렀다. 슬쩍 고개를 옆으로 젖히자 보드라워 보이는 머리카락이 사락 움직였다. 심장이 미친 것처럼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서 마른침을 삼키자 의아한 얼굴로 날 보던 정우진이 내 눈가에 입을 맞췄다. 따뜻한 입술이 눈꼬리 끝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직 잠 와요?”
잠이 오기는커녕 완전히 다 깼다. 잠 안 온다고 고개를 저으려는데 순간 벨소리가 들렸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핸드폰 액정을 확인하고 있는 게 보였다.
“잠시만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저 지금 바쁜…….”
여보세요, 라는 소리도 안 하고 다급하게 말하던 정우진이 점점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별거 아니라는 듯 웃어 보이며 등을 돌렸다.
“언제요?”
뭐지? 심각한 전화인가? 나는 점점 내게서 멀어지는 정우진을 나도 모르게 쫓아가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지금 병원이신 거예요?”
병원? 나는 멈칫하고 걸음을 멈췄다. 뭔가 계속 엿듣자니 좀 기분이 이상해서 뒷목을 매만지며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그러곤 고개를 쭉 내밀고 주방 쪽만 기웃거리고 있는데 그새 통화를 마친 건지 정우진이 내게 다가왔다.
“선배,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어, 그래. 근데 아까 뭐 병원이라고 하는 거 같던데……. 누구 다쳤어?”
“어머니가 쓰러지셨대요.”
손을 뻗어 내 뺨을 스치듯 만진 정우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목소리도 표정도 행동도 너무 태평해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멍청하게 정우진을 보다가 당황해서 물었다.
“어, 어쩌다가? 많이 아프시대? 심각한 거야?”
“글쎄요. 금방 올게요. 어디 가지 말고 집에 계세요.”
정우진이 내 이마에 키스하며 웃었다. 나는 현관문 쪽으로 가는 정우진의 뒤를 쫓으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편찮으신 거면 병원에 계속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간병인이나 다른 사람 있을 텐데요, 뭐.”
“아니, 그래도…….”
“근처 병원이라니까 한 시간도 안 걸릴 거예요. 늦어도 한 시간 안엔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정우진이 다시 내 이마에 키스했다. 나는 입을 쩍 벌리고 그런 정우진을 쳐다보기만 했다.
“배고프면 냉장고에 먹을 거 있으니까 꺼내 드세요.”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갔다 와.”
“다녀올게요. 어디 나가지 마세요.”
탕 하고 현관문이 닫혔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닫힌 현관문만 멀뚱멀뚱 바라봤다. 이 시간에 쓰러지신 거면 응급실에 계실 텐데……. 심각한 건 아니겠지?
괜히 걱정이 돼서 현관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거실로 갔다. 그리고 소파에 풀썩 앉는데 엉덩이에 뭔가가 걸렸다.
“아, 새끼. 지갑도 안 가져갔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정우진이 늘 가지고 다니던 지갑을 들었다. 어머니 병문안을 가는 건데 빈손으로 가도 되나. 나는 지갑을 빤히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지갑을 열었다.
“…….”
그러자 보인 건 신용 카드도, 주민 등록증도, 교통 카드도 아닌, 씨발, 몰래 찍은 게 분명한 내 사진이었다.
자다 막 일어났는지 까치집이 된 머리를 하고 멍청하게 입은 헤벌린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볼에 찍힌 베개 자국까지 선명했다. 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건 초상권 침해 아닌가?
아니, 씨발. 사진 끼워 둘 거면 멀쩡한 걸로 하지, 뭐 이런 그지 같은 걸……. 나는 얼른 지갑에서 내 사진을 빼냈다. 손가락을 세워 잘 빠지지도 않는 사진을 겨우 빼냈는데 툭 하고 무릎 위로 뭔가가 떨어졌다. 사진 뒤에 있던 종이가 사진이 빠지면서 같이 빠진 것 같았다.
뭐야, 이건?
나는 누렇게 변색된 종이를 들어 올렸다. 딱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펴자 흐리고 얼룩진 글씨가 보였다.
[여기서 기다려. 꼭 기다려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