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갑돌이랑 만났던 시간은 5분 남짓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는데, 나는 정우진에게 그 5분 동안 함께 있었던 일을 날이 저물도록 설명해 줘야만 했다.
거기에다가 갑돌이라는 건 또 뭐냐고 끈질기게 추궁해 댔다. 갑돌이 이름이 김갑진이란다. 하지만 나는 갑돌이가 정말 갑돌인 줄 알았다. 그냥 처음 갑돌이를 만났을 때 딱 떠올랐던 이름은 갑진이가 아니라 갑돌이었으니까.
어쨌든 두 번 다시는 갑돌이라고 친근하게 부르지 않겠다고 거짓 맹세를 하고 나서야 숨을 좀 돌릴 수 있었다.
온몸을 벌벌 떨면서 식은땀을 흘리고 대성통곡했던 정우진은 역시나 날이 저물기 시작하면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정작 본인은 괜찮다고 했지만, 낯빛만 봐도 저놈이 병자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평소 아픈 사람을 간병해 본 적이 없던 터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병원에 가려 했지만 정우진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운전하기 싫어요.”
갑자기 운전은 또 왜?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정우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까 스튜디오에 갔다 오면서 엄청 과속했나? 아니면 사고라도 났었나?
나는 침대에 드러누우려는 정우진을 일으켜 세웠다.
“씻고 자, 아까 땀 많이 흘렸잖아.”
“나중에요.”
“지금 누우면 나중에 귀찮아서 못 일어나. 그냥 지금 일어나서 씻고 누워.”
정우진은 정말 일어나기 힘든지 결국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울음을 그친 지 꽤 됐지만 눈시울은 여전히 붉었고, 눈망울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슬슬 손바닥에 땀이 차고 있었지만 정우진은 잡고 있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손을 붙잡힌 채 침대 머리맡에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는데 정우진이 시선을 올려 날 쳐다봤다.
“화 다 풀린 거 맞죠?”
사실 잘 모르겠다. 애초에 나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그냥 좀 놀랐을 뿐이었고, 당황했던 것뿐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놀람과 당황만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나도 지금의 내 감정을 하나로 딱 꼬집어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도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잘 모르겠으니까.
“선배.”
고개를 숙이자 정우진이 눈을 깜박였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정우진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또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부른 거다.
“일은 어떻게 됐어?”
저러다 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사랑한다는 말이나 지껄일 게 틀림없었다.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물음에 정우진이 미간을 구겼다.
“관뒀어요.”
“그럼 이제 백수야?”
“백수는 싫어요?”
도리어 질문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정우진이 백수든 말든 그런 건 내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이 집과 내게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정우진이 부담하고 있는 거라 백수가 돼서 돈이 없다고 하면 좀 곤란하긴 하겠지만……. 그땐 그냥 내가 나가서 벌어도 되고.
“선배.”
속으로 곰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다시 날 불렀다. 할 말도 없으면서 왜 자꾸 부르냐고 물으려다 관뒀다. 대답은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할 말이 있어서 불렀는지 정우진이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일은 당장 내일부터 또 하면 되긴 하는데…….”
조금 전 내 침묵을 백수는 싫다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부탁이 있어요.”
“부탁?”
“네, 그럼 내일부터 일할게요.”
일은 하든 말든 나랑 별로 상관은 없는데……. 일단 나는 부탁이 뭔지 한번 들어 보기나 하자는 생각으로 물었다.
“부탁이 뭔데?”
“집에 CCTV 설치해도 돼요?”
“뭐?”
내가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정우진을 보며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CCTV 설치를 왜 해?”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묻자 정우진이 날 설득시키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저 없을 땐 선배가 집에서 뭐 하는지 알고 싶어요.”
“그래서 감시 카메라를 설치한다고?”
태연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뭐라고 할 말을 잃었다. 정우진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유독 불안증이 심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감시 카메라 얘기까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이런 걸 대놓고 물어볼지 역시 꿈에도 몰랐다.
보통은 몰래 달지 않나? 내가 당연히 안 된다고 할 걸 알면서도 굳이 물어보는 이유가 뭐야? 도대체 무슨 의도로 내게 이런 걸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24시간 녹화하는 건 아니고……. 그냥 저 집에 없을 때만이라도…….”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갑자기 뒷골이 당겨 왔다.
이거 완전 정신 나간 새끼 아닐까?
나는 정우진이 꽉 붙잡고 있는 손을 빼내며 뒷목을 잡았다. 침대에 모로 누워 있던 정우진이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목 아파요?”
“너 때문에 뒷골 당겨.”
“CCTV 싫어요?”
“너 같으면 좋겠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데?”
저 새끼는 저걸 질문이라고 하나, 어이가 없어서 되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좋아요.”
“…….”
“만약 선배가 감시해 준다면 CCTV에 도청기까지 설치해도 괜찮아요.”
“…….”
쉽게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정우진이 심각한 변태라는 걸 깨달아서 그런 것도 있고, 그냥 단순히 저런 인간도 있다는 게 조금은 놀라워서 그런 것도 있었다.
정말 세상에는 별의별 인간들이 다 있구나.
“그럼 거실에만 설치하면 안 돼요? 딱 거실만.”
개 짖는 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하려다가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봤다.
“도대체 내가 뭘 하든 알아서 뭐 하려고?”
“선배는 문자 보내도 답장도 잘 안 보내 주고, 전화해도 안 받을 때도 있고…….”
내 물음에 정우진은 옥장판 파는 사람처럼 최선을 다해 입을 털었지만 그건 더 들을 필요도 없는 개소리였다.
“시끄럽고, 가서 씻기나 해.”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내가 어서 꺼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봤자 어림도 없다.
“불안해서 일하러 어떻게 가요?”
“그럼 일하지 말든가.”
“능력 없는 사람 싫다면서요.”
내가 언제?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입술을 내밀었다. 누가 저걸 스물다섯 살이라고 생각할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정우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빨리 씻어.”
“그럼 저 씻을 때까지 옆에 있어 주세요.”
꿍얼거리는 소리에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 씨발. 진짜 이 새끼가 참고 있는데 자꾸 욕 나오게 만드네. 빨리 욕실로 꺼져!”
계속 울어 젖혀서 좀 참으려고 했더니 정우진이 자꾸 성질을 건드렸다. 자기가 무슨 한두 살 처먹은 애새끼도 아니고, 찡찡거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내가 쓰읍 하고 험악한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미간을 좁히며 비척비척 침대에서 일어났다.
“저 씻을 동안 뭐 할 거예요?”
“몰라. 주방에 가서 뭐 먹을 거 있나 보고……. 라면 있냐?”
계속 굶었더니 배가 고프다 못해 아파 왔다. 배를 슬슬 문지르며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정우진을 욕실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라면 끓여 놓을 테니까 뜨거운 물로 샤워 깨끗하게 하고 나와.”
“알았어요.”
“나중에 다 씻으면 물기 죄다 닦고 나오고. 저번처럼 물 뚝뚝 흘리면서 나오면 맞는다.”
고개를 끄덕이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욕실 문을 쾅 닫았다. 손에 닿았던 피부가 뜨거웠다. 아직 감기나 몸살이 걸린 것 같진 않았지만 이대로 뒀다간 크게 아플 것 같았다. 씻고 나와서 라면 먹고 푹 자고 일어나면 열이 좀 내리지 않을까.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나는 걸 확인하고 주방으로 가 냄비에 물을 받았다. 씻는데 시간이 걸릴 테니, 물만 끓여 놓고 가스레인지를 껐다.
그동안 뭘 할까 하다가 갑돌이가 떠올랐다. 나는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아까 저장시켜 둔 갑돌이 전화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갑돌아]
그렇게 쓰고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띵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 핸드폰 액정에 문자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헛숨을 내뱉으며 정우진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갑돌아]
조금 전 내가 갑돌이한테 보냈던 문자였다.
[인마, 너 어떻게 된 거야? 괜찮냐?]
내 폰에서 띵동 하고 문자 알림음이 들렸다. 갑돌이한테 답장이 왔다.
[인마, 너 어떻게 된 거야? 괜찮냐?]
그리고 띵동 하는 소리와 함께 정우진의 핸드폰에도 똑같은 문자가 도착했다. 너무 황당하면 화도 안 난다는 말이 떠올랐다. 진짜 어이가 없었다. 정우진이 나한테 핸드폰을 사 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나는 정우진 핸드폰은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고 갑돌이한테 답장을 보냈다.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고 했잖아. 그래서 말인데 좀 만나자. 물어볼 것도 있고.]
우선 갑돌이를 만나서 내 정보를 좀 알아야겠다. 정우진이 모르는 걸 갑돌이가 알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내일 당장 나와, 이 씹새야. 몸이 정상이 아니면 형님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 존나 멍청한 새끼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비속어로 점철된 문자를 보니 왠지 갑돌이와 나 사이가 각별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각별까지는 아닌가? 일단 두 번 만났고, 문자까지 주고받았는데 어떻게 이름, 그것도 별명 말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수가 있지?
[일단 내일 일어나면 콜해]
다시 온 문자를 확인하고 알겠다며 답장을 보냈다.
내일 갑돌이를 만나면 기억을 잃기 전에 내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사람이었는지부터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정우진에 대한 건 말하지 않는 편이 좋으려나.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면 갑돌이랑 정우진은 안면만 텄지 서로 잘 모르는 것 같던데. 갑돌이한테 온 문자를 멍하니 보고 있는데 물소리가 멎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욕실 문이 열리면서 목욕 가운을 입은 정우진이 나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툭툭 털던 정우진이 날 발견하고 화색을 띠었다. 그러다가 내 손에 들린 핸드폰을 보고 인상을 썼다.
잠시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나는 내 핸드폰과 정우진의 핸드폰을 들고 물었다.
“내 문자가 왜 네 핸드폰으로 와?”
금방이라도 내게 뭐라고 할 것 같던 정우진이 입을 딱 닫았다. 그렇게 잠시 얼어 있던 정우진이 다시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내게 걸어왔다.
“말하려고 했는데 깜빡했어요.”
“말하려고 했다고? 진짜?”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정우진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진짜 깜빡한 거예요. 이제 하고 싶은 건 전부 허락받고 한다고 얘기했잖아요.”
“이거 당장 없애.”
“…….”
“내일까지 안 없애면 GPS도 못 하게 한다.”
“……근데 누구랑 연락했어요?”
대답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을 돌리며 정우진이 제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쳐 내며 다시 물었다.
“대답 안 하냐?”
“그럼 CCTV는 달게 해 주세요.”
이젠 아주 협상까지. 존나 기가 막혔다.
뭐라고 하려다가 그냥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다도 아니고 거실만이라면 괜찮겠지.
“대신 거실만이다.”
“CCTV 설치해도 돼요?”
“거실만. 대신 너도 내일까진 내 핸드폰 깨끗하게 만들어 놔. GPS 빼고는 처음 샀을 때랑 똑같이.”
“알았어요.”
정우진이 내 손에서 핸드폰 두 개를 자연스럽게 가져가며 웃었다. 문자를 확인하고 있는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라면 세 개 끓인다.”
“네.”
정우진이 한 손으로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반대쪽 손으로 문자를 확인하며 의외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문자를 확인하면 그 새끼 만나지 말라는 둥 지랄지랄을 할 줄 알았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힐끗 보다가 방을 나섰다. 가스레인지에 다시 불을 켜고 물이 끓을 때까지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냈다. 스프를 넣은 다음 라면을 넣고 젓가락으로 면을 들었다 놨다 반복하고 있는데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라면이 다 끓을 때까지 정우진이 나오지 않아서 나는 결국 젓가락을 든 채 다시 방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정우진이 내가 갑돌이랑 한 문자를 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네, 아버지. 지금 저녁 먹으려고요.”
아버지? 방문 틈으로 빼꼼 고개를 들이밀자 통화 중인 정우진이 보였다. 막 씻고 나와서 그런지 방 안에는 샤워 젤 냄새와 스킨 냄새가 뒤섞여 나고 있었다.
“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랑은 제가 통화할게요. 네, 네.”
거울을 보며 통화하던 정우진이 거울 속에 비친 날 발견하고 고개를 돌려 내게 다가왔다. 어정쩡한 자세로 엿듣고 있던 나는 뻘쭘한 얼굴로 허리를 폈다.
“네, 제가 내일 다시 전화 드릴게요.”
정우진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전화를 끊었다.
“라면 다 끓였어요?”
“어? 아, 맞다!”
정우진을 뿌리치고 재빨리 주방으로 뛰어가 불을 껐지만 이미 라면을 팅팅 불어 국물이 다 졸아 있었다.
* * *
찜찜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꿍꿍이로 저러는 건지 의심이 들다가도 저렇게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중에 전화하세요. 데리러 갈게요.”
다정하게 웃으며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럴 리가 없다. 내가 아는 정우진은 가지 말라고 부탁하다가 그게 안 되면 애처럼 징징거리고 울먹거리다가 결국 마지막엔 화를 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름만 나와도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갑돌이를 만나러 가는데.
“……넌 뭐 할 건데?”
내 떨떠름한 표정에도 정우진은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사람 좋게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부모님 뵈러 가요. 같이 점심 먹기로 했거든요.”
“부모님?”
언뜻 정우진이 부모님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고 말한 게 떠올랐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걱정이 앞섰다.
혹시 무슨 일 있나? 나랑 같이 사는 게 들켰나? 하긴 내가 부모라도 학교 선배라는 게 돈도 안 내고 내 아들 집에 얹혀산다고 하면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았다.
“늦게까지 있을 건 아니죠?”
“어? 어, 응. 그냥 얘기 좀 하다가 올 건데……. 넌 언제 올 거야? 부모님이랑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밥만 먹고 그냥 오긴 좀…….”
“나중에 전화하세요. 시간 맞춰서 데리러 갈게요.”
정우진은 내가 언제 전화할지도 모르면서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혼자 갈 수 있겠어요?”
“바로 집 앞 카페에서 볼 거야.”
“아, 거기.”
바로 아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이상하다. 저렇게 얌전한 것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한 번도 떼를 쓰지 않았다는 게 너무 이상했다.
나는 가만히 정우진을 보다가 설마설마하며 물었다.
“너 혹시 부모님 만나러 간다고 하고는 몰래 나 따라오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정우진이 저렇게 웃을 리가 없었다.
갑돌이랑 전화 통화는 물론 문자 한 통 하는 것도 그렇게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하면서 직접 만나러 나간다는데 왜 저렇게 태연해? 물론 그게 정상이었지만 그동안 정우진이 내게 보여 줬던 행동이나 말투들을 봤을 때 이건 암만 생각해 봐도 너무 이상하고 해괴한 일이었다.
내가 자꾸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정우진이 눈웃음을 치면서 웃었다.
“내가 몰래 따라다니는 게 좋아요?”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나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죽고 싶냐?”
“점심 약속 있는 건 진짜예요. 못 믿겠으면 나중에 부모님이랑 사진 찍어서 보내 드릴게요. 그것도 못 믿겠으면 영상 통화도 괜찮고.”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이건 뭔가 이상했다. 꼭 내가 정우진을 못 믿어서 추궁하는 듯한 모양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어서 보내고 영상 통화까지 하는 건 좀……. 이상한 거 아닌가?
자꾸만 기분이 이상해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그래도 못 믿겠어요?”
“……아니, 사진 찍어서 보내지도 말고, 영상 통화도 하지 마.”
“왜요?”
왜냐니? 그게 원래 당연한 거 아닌가? 혼란스러워서 가볍게 머리를 흔든 뒤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간다.”
“점심은 어쩔 거예요?”
“몰라, 나가서 보고.”
운동화를 대충 꺾어 신고 나가려는데 정우진이 자연스럽게 차가운 현관 바닥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러더니 운동화를 똑바로 신겨 주고 느슨한 신발 끈까지 풀어서 다시 예쁘게 묶기 시작했다.
그 동작이 너무나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그러지 말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친구랑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밥 한 끼 같이 안 먹어도 돼요?”
“…….”
“카페 가지 말고 점심 먼저 먹고 커피 드세요. 빈속에 마시면 속 다 버려요.”
정성스럽게 신발 끈을 다 묶은 정우진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살면서 누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신발 끈을 묶어 준 건 처음이었다. 고작 끈 하나 묶어 주는 것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건 너무 낯간지럽고 놀라운 일이었다.
정말 별것도 아닌 일에 당황해서 입까지 벌리고 주춤하고 있는 사이,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입 안으로 혀를 넣어 가볍게 안을 훑고 떨어지면서 아랫입술을 깨물고 쪽 소리가 나게 키스했다.
그건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무릎을 꿇고 내 신발 끈을 묶어 줬을 때처럼 아무런 반응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서서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얼어 있는 나를 잡고 그대로 돌려 문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더니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는 조신한 아내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차 조심하고 누가 먹을 거 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마세요. 나중에 꼭 전화하고요.”
“…….”
“그리고 문자 보내면 답장도 반드시 해 주세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끄덕끄덕 고개만 주억거렸다. 정우진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더니 맨발로 밖으로 나와 다시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혹시 누가 있나 싶어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현관문이 닫히는 걸 보고 느리게 길을 따라 걷는데 계속 뭔가 이상했다.
“…….”
저 새끼가 혹시 뭘 잘못 먹었나.
아니면 어제 그일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는 건가. 혹시 내가 또 화낼까 봐 저러는 건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잔뜩 인상을 쓰고 걷고 있는데 갑돌이랑 만나기로 했던 카페가 보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카페의 간판을 보다가 휙 뒤를 돌았다.
뒤를 보고 앞을 보고 양옆을 봐도 정우진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직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문자도 한 통 오지 않았다.
고작 몇 분 지났을 뿐인데 당연한 거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평소의 정우진이라면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문자를 보냈을 거다. 지금쯤이면 못해도 열 번은 넘게 와 있어야 했다.
“…….”
나는 심각한 얼굴로 잠시 고민하다가 문자를 보냈다.
[뭐 해]
그리고 액정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무것도 누르지 않고 계속 보기만 해서 그런지 핸드폰의 불빛은 금방 꺼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답장이 늦어도 10초 이내에 항상 해 줬는데…….
“……얘 진짜 어디 아프나?”
정확히 1분이 지났는데도 답장이 없었다.
찜찜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고 핸드폰 액정만 들여다보며 카페에 도착했다. 그리고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아 커피도 시키지 않고 핸드폰만 죽어라 바라보고 있는데 진동이 왔다.
나는 황급히 문자를 확인했다.
[씻고 있어요. 카페 도착했어요?]
씻고 있어서 그랬나. 답장을 보내려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들자 갑돌이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내 앞에 철퍼덕 앉았다.
“담배 끊었냐?”
갑돌이는 오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담배 얘기였다. 내가 인상을 쓰자 갑돌이가 아, 하고 말했다.
“그래, 기억 잃은 김에 그냥 끊어라. 난 한 대 피우고 와야겠다.”
갑돌이는 심란한 표정으로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흡연실로 들어갔다.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갑돌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몸을 일으켜 흡연실로 들어갔다.
“나도 한 대 줘 봐.”
내가 흡연자였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혹시 담배를 피우면 뭔가 기억나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불을 붙이려는데 갑돌이가 희뿌연 연기를 내뱉으며 물었다.
“너 그럼 기억 잃고 계속 정우진하고 둘이서 산 거냐?”
“어, 병원에서 눈뜨자마자 본 것도 정우진이야.”
“그게 언젠데?”
언제였더라.
나는 곰곰이 생각하며 필터를 빨았다. 목구멍을 타고 연기가 지나가는 느낌이 생생하게 났다. 긴장하며 다시 연기를 내뱉는데 목이 따갑지도, 기침이 나지도 않았다. 나는 집게손으로 어색하게 담배를 쥐고 있다가 필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이게 훨씬 편했다.
“얼마 안 됐어. 이제 한 달 정도.”
“기억 잃기 전엔 뭐 했는데? 둘이 왜 같이 살아?”
갑돌이는 계속 심각한 표정으로 취조하듯 질문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정우진이 날 제주도 근처에 있는 외딴섬에 감금했대, 하고 말할 수도 없고.
나는 갑돌이를 가만히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사정이 좀 있었어.”
“그럴 사정이 뭐냐고, 씨발놈아. 말을 해 줘야 내가 알 거 아니야. 이럴 거면 난 왜 불렀는데?”
저 씨발놈이 또 욕하네. 나는 재떨이에 끝까지 탄 담배를 비벼 끄며 물었다.
“근데 이 씹새끼는 저번부터 말끝마다 씨발놈이래. 내가 네 친구냐?”
“그럼 네가 우리 아빠냐, 이 씨벌놈아?”
“……얼마나 친했는데?”
“뭐가? 내가 너랑?”
“그래.”
“넌 존나 왕따 새끼였어, 이 씨밤바야.”
갑돌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랄하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만약 나한테 정말 친한 친구가 있었으면 어떻게든 나한테 연락이 오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내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갑돌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필이 새끼한테 연락 왔더라.”
상필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최상필?”
“그 새낀 기억나냐? 너 기억 상실이라고 말해 줬더니 만나면 망치로 대가리 후려갈긴대.”
“망치로 대가리를 왜 후려, 씨팔? 나더러 뒈지라는 거야, 뭐야.”
“머리에 충격을 받으면 다시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이 새끼들 존나 또라이 아니야? 내가 질겁한 표정을 짓자 갑돌이가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무튼 기억은 어쩌다 잃게 됐는데?”
“나도 몰라.”
“정우진이랑 같이 있는 건? 그 새끼 어제 보니까…….”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을 확인하니 정우진이었다. 나는 갑돌이를 한 번 보고 전화를 받았다.
“어, 왜.”
-친구 만났어요?
“방금.”
-카페예요?
“응.”
-밥부터 먹으라니까.
속상하다는 목소리에 정우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눈앞에 그려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지금 가려고 했어.”
나는 전화를 받고 있는 반대쪽 팔로 갑돌이를 일으켜 세웠다. 갑돌이는 황급히 담배와 라이터를 챙기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왜?”
“일단 밥부터 먹자.”
“나 밥 먹고 나왔는데.”
“그냥 또 먹어.”
갑돌이랑 티격태격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너무 조용했다. 나는 그의 팔뚝을 잡고 있는 손을 놓으며 물었다.
“끊었어?”
-아니요. 저 이제 나가 봐야 되는데,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뭐?”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핸드폰 액정만 쏘아봤다. 정우진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먼저 전화를 끊기는커녕 끊어야겠다는 말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정우진이.
“이 새끼, 진짜 왜 이래?”
이젠 불안하다 못해 성질까지 났다.
갑자기 밥맛이 떨어져서 밥이고 나발이고 다시 카페로 들어와 대충 갑돌이에게 주문을 맡기고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다른 사람이 이랬다면 이렇게까지 불안하지 않았을 거다. 정우진이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불안한 거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또 뭔 일을 꾸미고 있는지 불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는데 갑돌이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 건데?”
“뭐가.”
“계속 정우진이랑 같이 살 수는 없을 거 아니야.”
나는 고개를 들어 갑돌이를 보다가 모락모락 김이 나는 머그잔을 바라봤다. 내가 컵을 가만히 보고 있자 갑돌이가 말했다.
“기억 상실증이면 그냥 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 거냐?”
“기억나는 사람은 없고……. 단어 같은 것도 잘 기억이 안 나기는 하는데……. 그래도 보통 말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금방 떠오르긴 해.”
“……야, 너 지금 존나 심각한 거 맞지, 이거?”
“뭐가?”
“지금 내가 감이 잘 안 와서 그러는데……. 지금 너 존나 심각한 거 아니냐?”
존나 심각한 거 맞겠지. 하지만 나도 갑돌이처럼 이 상황이 심각하다는 게 잘 와 닿지 않았다. 솔직히 기억을 잃어서 그런지 몰라도 난 지금 이 생활이 딱히 불편하다든가 이상하다는 걸 느낄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날 알던 주변 인물들은 불편하겠지만.
“병원에선 뭐래?”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고, 안 돌아올 수도 있고 그냥 반반이래.”
“뭐, 씨발? 그게 병원에서 할 소리냐? 어떻게 해서든 기억나게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딱히 뭐라고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그냥 미간을 좁힌 채 가만히 있자 갑돌이가 다시 말했다.
“넌 이 새끼가 도대체 잃어버릴 게 없어서 기억을 잃냐? 어? 아, 씨발. 진짜 이거 어떻게……. 아, 너 어쩔 건데!”
“내가 다리가 잘렸냐, 팔이 잘렸냐? 그냥 기억 좀 잃은 건데 뭐 그렇게 심각해. 시간 지나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이 새낀 뚫린 입이라고……. 정우진은 뭐래? 계속 같이 살 거냐? 어? 그 새끼가 너보다 나이 어린 건 알지? 씨발, 너 그 집구석에서 존나 노예처럼 살고 막 그런 건 아니지? 어?”
뭔 헛소리야, 저 새끼가. 내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갑돌이가 진지하게 물었다.
“정우진이 뭐래? 너한테 막 대하고 그러진 않냐?”
“걔 존나 착해.”
“하긴, 그 새끼가 매너 좋고 선배들한테 존나 깍듯하긴 한데……. 씨발, 근데 나한텐 왜 지랄이야, 그 새끼?”
저번에 대학교에서 만났을 때랑 어제 봤을 땐 정말 찢어 죽일 것처럼 쳐다보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우진이 왜 그랬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우진이 나 고아라던데 진짜냐?”
“뭐?”
그때 갑돌이가 인상을 팍 쓰며 되물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절로 욕이 나왔다. 씨발, 설마 내가 고아였다는 게 거짓말이었나? 설마 그럴 리가…….
“네가 고아라는 걸 정우진이 어떻게 알아?”
“……고아 맞다고?”
“맞긴 맞는데.”
“깜짝이야, 씨발. 그럼 됐어. 아무튼 난 고아고 친척이나 형제도 없고. 맞지?”
내 말에 갑돌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너 병원에서 눈뜨고 제일 처음 본 게 정우진이라 그랬지? 네가 제일 처음 본 게 왜 정우진인데? 너 기억 잃은 게 혹시 정우진이랑 무슨 연관이라도 있냐? 네가 정우진이랑 같이 사는 것도 존나…….”
“사정이 좀 있었어.”
또 사정이 뭐냐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는데 갑돌이가 웬일로 조용했다. 내 속을 읽으려는 듯 가만히 날 쳐다보는 갑돌이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사실 이렇게 만나서 이것저것 얘기하다 보면 아주 조금이라도, 단편적인 거라도 기억이 날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일단 만나기만 하면 뭔가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기억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으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정우진이랑 같이 사는 건 안 불편하냐?”
“별로. 근데 너 왜 아까부터 자꾸 그런 거만 물어봐?”
“존나 이상하니까 그러지. 그 새끼 소문으론 존나 결벽증 있다던데. 그런 놈이랑 어떻게 같이 살아? 그리고 둘이 원래 알던 사이도 아니었잖아. 근데 안 이상하냐?”
“결벽증은 지랄…….”
지금까지 봐 왔던 정우진은 내가 씹다 뱉은 것도 주워 먹을 놈이었다. 그런 놈이 결벽증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더 할 말 없으면 난 간다.”
“뭐?”
몸을 일으키는 날 보며 갑돌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사실 이렇게 빨리 들어가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밖에 있으면 있을수록 기분이 더러워졌다. 아니, 더럽다기보다 이건 불안에 가까웠다.
처음 나올 땐 안 이랬는데 자꾸 속이 울렁거리고 시야가 휙휙 돌았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천장에 붙어 있는 백열등까지 내 신경을 건드렸다.
창밖으로 제 갈 길 가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살피지 않으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고, 혹시라도 눈이 마주치면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벌써 간다고? 왜?”
“좀 불편해.”
“뭐가? 여기가? 그럼 딴 데…….”
“아니, 혼자 이렇게 오래 밖에 나와 본 적이 없어서…….”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깨달았다.
“뭐?”
당황하며 되묻는 갑돌이를 보며 나는 더욱 당황했다. 내가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 있고 불안한 건 나 이외의 모든 게 낯설어서 무서웠기 때문이다.
내가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깨닫자 걷잡을 수 없이 공포가 밀려들었다. 무엇에 대한 공포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무작정 모든 게 나를 공격할 것만 같았다.
“야.”
내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갑돌이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식은땀이 나 순식간에 등이 젖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눈을 치켜떠 갑돌이에게 말했다.
“다음에 다시 연락할게.”
“야, 잠깐……!”
내가 제대로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카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데 순간 공기가 무거워졌다.
두어 번 숨을 쉬다가 걸음을 옮기려는데 누군가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떨었다.
“야, 인마. 너 왜 그래?”
“정우진…….”
“뭐?”
“정우진 데려와.”
몸을 벌벌 떨면서 그저 나오는 대로 말하고 있는데, 내 손이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퍼뜩 고개를 드는데 갑돌이가 어디론가 전화하고 있는 게 보였다.
입술이 움직이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숙이자 마치 수도꼭지가 터진 것처럼 손에서 피가 줄줄 흘러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피가 흐른 바닥은 시커먼 뭔가로 일렁거렸다.
물이 차는 것처럼 발이 잠기다가 놀라 뒷걸음질 치면 발자국이 찍혔다. 물인지, 눈인지 알 수 없는 새카만 것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눈에 힘을 줘도 초점이 맞지 않았다. 모든 게 어지럽게 흩어졌다. 소리도, 시야도, 그리고 내가 디디고 있던 바닥도.
나는 끝도 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 * *
멀리서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어 보려 했더니 금방 파도 소리로 변했다. 그러다가 그 소리가 아이 울음소리로 변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시끄러운 소리에 더는 견딜 수 없다고 느끼던 찰나, 어둠 속의 빛줄기처럼 익숙한 소리가 날 불렀다.
“선배.”
번쩍 눈을 뜨며 턱 막혀 있던 숨을 토해 냈다.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이마를 쓸었다. 서늘한 손바닥이 이마에 닿자 거짓말처럼 두통이 사그라졌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시선만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이곳이 집이라는 걸 깨닫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몸에 힘을 쭉 빼고 스륵 눈을 감는데 내 이마를 쓸고 있던 손이 뺨으로 내려왔다.
다시 눈을 뜨자 정우진이 새카만 눈동자로 날 보고 있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
“나 누군지 알겠어요?”
눈앞이 흐리멍덩했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속상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아니, 일단 얘기는 나중에 하고 좀 더 쉬어요. 어디 불편한 데 없죠?”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는데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나는 잔뜩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집에 언제 온 거야? 갑돌이는? 넌 부모님이랑 같이 밥 먹는다더니 여긴 언제 왔어? 지금 몇 신데?”
“방금 왔잖아요. 기억 안 나요?”
“뭐?”
정우진이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개를 숙인 채 내 손을 부여잡고 연신 한숨을 내쉬던 정우진이 작게 말했다.
“병원에 있을 때 잠시 깼었잖아요.”
“병원? 누가? 내가? 언제?”
“좀 전에요.”
“…….”
“눈뜨자마자 선배가 내 손을 꽉 잡고 집에 가자고 그랬잖아요.”
내가 언제?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아무리 정신이 없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기억이 안 날 수가 있는 건가? 단 한 조각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인상을 쓰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손등에 제 뺨을 갖다 대며 말했다.
“병원에서 특별히 이상이 있는 곳은 없대요. 근데 전에 그런 일도 있고 해서 가끔 이럴 수도 있대요.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충격 받은 일이 있었거나 그러면…….”
정우진은 걱정과 미안함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며 병원에서 들은 이야기를 차분히 해 주었다. 하지만 아직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들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 새끼가 뭐 이상한 소리 했어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어지러워서 그랬어.”
“둘이 무슨 얘기…….”
정우진이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잡고 있던 내 손을 이불 안에 넣어 주더니 몸을 일으켰다.
“얘기는 나중에 하고 좀 쉬세요. 간단하게 먹을 것 좀 가져올게요.”
정우진이 허리를 굽혀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부모님이랑 식사는 어떻게 됐어? 괜히 나 때문에 망친 거 아니야?”
“괜찮아요. 어차피 서로 할 말은 다 했고.”
“할 말?”
“네, 잠시만 계세요. 뭐 좀 가져올게요.”
정우진이 축 처진 목소리로 등을 돌렸다. 거실로 나가는 정우진의 뒷모습은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많이 놀란 듯싶었다. 정우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은 머리도 하나 안 아프고 속도 괜찮았다. 아직 좀 멍하기는 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기절한 게 민망할 정도로 너무 멀쩡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가자 식탁 앞에 서 있는 정우진이 보였다. 뭘 하기에 저런 표정을 짓고 있나 봤더니 딸기 꼭지를 떼고 있었다. 정우진이 시무룩한 얼굴로 딸기 꼭지를 하나씩 떼다가 날 발견하고 내게 다가왔다.
“왜 일어났어요?”
“…….”
나는 정우진의 손에 들린 빨간 딸기를 가만히 바라봤다.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꼭지를 뗀 딸기를 넓은 접시에 가지런하게 놓던 정우진의 침울한 표정이 눈에 못처럼 박혀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걱정 시켜서 미안한 건가? 아니면 그런 표정으로 딸기 꼭지나 떼고 있는 게…… 웃겨서? 아무튼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뒷목을 긁적거리며 물었다.
“넌 밥 먹었냐?”
“왜요? 딸기 말고 밥 먹을래요? 금방 일어나서 입맛 없을 줄 알고…….”
“아니, 그게 아니라……. 너 먹었냐고.”
“전 아까…….”
“아까? 아까 먹었어?”
내 말에 정우진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배 안 고파?”
“네, 선배는요?”
“나도 별로. 야, 근데……. 그, 배 안 고파도 좀 먹어야지.”
내가 더듬더듬 말하자 정우진이 피곤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딸기를 든 손을 뻗어 날 끌어안았다. 내 어깨에 이마를 댄 정우진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속이 이상해요.”
“…….”
“몸에 힘도 하나도 없고…….”
“……많이 놀랐어?”
정우진은 대답하지 않고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그 뒤로도 정우진은 계속 내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나는 어정쩡하게 있다가 한숨을 내쉬고 정우진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참 마주 안고 있다가 물었다.
“진짜 별말 안 했어.”
“무슨 얘기 했는데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정우진이 추궁했다.
“그냥 나 고아였다는 거랑……. 너랑 왜 같이 사냐고, 뭐 그런 얘기랑. 별말 안 했다니까? 갑돌이도 특별히 별다른 말은 안 했고……. 진짜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어지러워서 그랬던 거야.”
내가 잘못한 건 없는데 왠지 죄인이 된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변명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날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줬다. 숨이 막혔지만 밀어낼 수가 없었다.
“전화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
“이제 절대 혼자 안 내보낼 거예요. 선배가 뭐라고 해도 절대 혼자 못 나가게 할 거예요.”
정우진이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뭐라고 하려다가 딱히 할 말도 없고 미안해서 그냥 말을 돌렸다.
“부모님이랑은 무슨 얘기 했는데? 오랜만에 만난 거라며.”
“몰라요.”
정우진이 날 안은 채 앞으로 걸었다. 그렇게 점점 뒤로 밀리다가 결국 소파 위로 풀썩 쓰러졌다. 정우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날 안은 팔을 풀지도 않았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가만히 쓰다듬으며 천장을 보다가 말했다.
“미안.”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까만 눈동자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야, 너 울었냐?”
“…….”
“아니, 이 새끼는 툭하면 울고 지랄…….”
“…….”
“……내가 죽을죄를 지었다. 미안해.”
내가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자 정우진이 다시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더니 자기가 이렇게 걱정했다고, 그래서 힘들었다고, 마치 알아 달라는 듯 혼자 웅얼웅얼 말하기 시작했다.
“걱정했어요.”
“그래, 잘못했어.”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알아.”
“오다가 사고 날 뻔했어요.”
“사고 났어?”
“이번엔 안 났는데 다음에 또 걱정시키면 전봇대에 들이박을 거예요.”
“…….”
전봇대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제 혼자 나가지 마세요.”
도대체 내가 쓰러진 게 혼자 나간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무작정 정우진이 하는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말이 끝난 뒤로도 정우진은 한동안 날 끌어안고 내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자꾸 어리광을 부리는 정우진을 일으켜 세워 겨우 밥을 먹었다. 그리고 설거지를 하는 정우진의 뒷모습을 구경하며 꼭지를 뗀 딸기를 먹고 있는데 진동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설거지를 하던 정우진이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나는 뒷목을 긁적이며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갑돌이였다. 다시 식탁 의자에 앉아 괜찮으냐고 온 문자에 답장을 하려는데, 정우진이 설거지를 하다 말고 아예 몸까지 내 쪽으로 돌려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정우진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괜찮냐고 온 거야.”
“난 걔 싫어요.”
“……갑돌이가 네 친구냐?”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묻자 정우진이 눈깔을 치켜떴다.
“그 새끼 진짜 싫어요.”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긴 하냐? 그렇게 물으려다가 다시 아까처럼 붙어서 안 떨어질까 봐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나는 괜찮다고 답장을 보내며 말했다.
“아깐 친구 오랜만에 만나는데 밥 한 끼는 같이 먹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러더니.”
정우진이 다시 몸을 돌려 설거지를 마무리했다. 그러곤 고무장갑을 벗고 손을 씻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수건으로 닦으며 내게 다가온 정우진이 식탁 끝에 살짝 엉덩이를 대고 앉더니 내 핸드폰을 가져갔다. 보나 마나 문자를 확인하고 있는 거다.
“저 다시 취직했어요.”
“뭐? 진짜? 어디에?”
가만히 액정을 보던 정우진은 잠시 말이 없더니 핸드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다시 모델 일 할 거 같아요. 어머니는 제가 그쪽에서 일하길 바라시거든요.”
“그래? 다행이네. 그럼 일은 언제부터 해?”
“아마 내년 초쯤?”
“내년? 그럼 아직 4개월 정도 남았네.”
설마 취직 문제 때문에 부모님을 만난 건가? 그러고 보니까 정우진이 일하는 모델 에이전시가 어머니 회사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진동이 울리자마자 정우진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갑돌이한테 온 문자일 텐데 정우진은 내게 보여 주지도 않고 핸드폰을 끄더니 다시 식탁 위에 놓았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보다가 핸드폰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정우진이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김정수 씨가 저희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시거든요.”
김정수? 처음 들어 보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자 정우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배 친구 아버지요.”
“……갑돌이?”
“네, 이번에 승진해서 외국으로 발령 나셨어요.”
“뭐?”
“저희 아버지 회사는 복지 제도가 워낙 좋아서 직원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 신경 써 주거든요.”
정우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별안간 고개를 숙여 내 입에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나게 입술을 한 번 빨더니 금방 떨어져 나간 정우진이 코앞에서 말했다.
“승진해서라곤 하지만 외국 발령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회사에서 많이 지원해 줄 거예요. 예를 들자면 이사 문제라든가, 상황이 맞으면 이민 문제라든가, 뭐 그런 거요. 그리고 선배 친구는 이사든 이민이든 그런 걸 떠나서 이번 학기만 끝나면 유학 갈 거예요.”
그 뒤로도 정우진은 주절주절 떠들었다. 날 이해시키려고 하는 듯 차근차근 말했지만 거의 반 이상은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가만히 정우진을 보다가 잔뜩 인상을 쓰고 물었다.
“잠깐, 그러니까 갑돌이네 아빠가 너희 아빠 회사에 다니는데 갑자기 승진을 하셔서……. 갑돌이네가 전부 이민을 간다는 거야?”
“비슷해요.”
“…….”
“사실 유학 문제는 제가 부탁한 거예요. 좀 알아보니까 김갑진 씨도 IT 쪽으로 취업하려고 하는 것 같고, 몇 년 전에 유학 준비도 했던 것 같아서요. 준비까지 다 해 놓고 왜 못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
“확실한 건 아닌데 아마 비용 문제…….”
나는 손을 뻗어 정우진의 손목을 잡았다. 정우진이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문 채 시선을 내려 제 손목을 빤히 봤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 날 가만히 보던 정우진이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물었다. 혼란스러운 나와는 달리 태연한 얼굴이었다.
“왜요?”
“……너 부모님이랑 한다던 얘기가 이거였냐? 갑돌이 유학? 아니, 갑돌이 아버지 승진…….”
“네, 왜요?”
“……뭐? 왜요?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무리 갑돌이를 싫어해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을 외국으로……. 아주 나랑 못 만나게 하려고 작정을 했다. 화가 나야 정상인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좀 전에 친구랑 오랜만에 만나는데 같이 밥이라도 한 끼 뭐 어쩌고저쩌고 했던 말에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갑자기 왜 저러나 했더니…….
어이없다는 내 표정을 가만히 보던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싫어요?”
“뭐?”
“그 새끼 유학 가는 게 그렇게 싫으면 제가 아버지 다시 만날게요. 이것 때문에 하기도 싫은 모델 일을 다시 한다고 어머니랑 약속하고 각서까지 썼지만 선배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죠, 뭐.”
“…….”
“아버지한테 다시 전화할까요?”
전화하라고 하기만 해 봐. 그런 눈으로 날 보며 정우진이 제 핸드폰을 찾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도대체 저 집안은 뭐 하는 집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이게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갑돌이는 유학 가기 싫을 수도 있잖아.”
왠지 갑돌이를 외국으로 쫓아내는 것 같은 수상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회사나 학교도 아니고, 아예 한국에서 외국으로 쫓겨나는 건데…….
진짜 다시 생각을 해 봐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우진이 내가 갑돌이를 만나는 걸 싫어한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런 일까지 꾸밀 줄은 정말 몰랐다.
“싫을 리가 있겠어요, 유학 준비하다 포기하고 지금은 학교에서 교환 학생 프로그램 알아보고 다니는 사람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선배는 그 새끼랑 헤어지기가 그렇게 싫어요?”
저 새끼는 말을 해도 꼭……. 나는 미간을 구기다가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보니 정우진의 얼굴에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 식탁 위에 있는 포크로 찔려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싫어요?”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정말 정우진 말대로 그런 거라면 갑돌이한테 나쁠 게 하나도 없었다. 아니, 진짜……. 유학 가면 어쨌든 갑돌이한테 좋은 거 아닌가?
“……그냥 공짜로 가는 거야?”
“그쪽은 회사에서 다 지원해 주는 걸로 알 거예요.”
“…….”
“싫어요?”
……아니, 씨발. 이거 다시 생각해 보니까 김갑진 이 새끼 완전 땡잡은 거 아닌가? 이건 무슨 로또도 아니고, 회사에서 무슨 직원 아들내미 유학을 보내 줘?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정우진을 보다가 다시 물었다.
“유학, 언제 간다고?”
“이번 학기 끝나면 아마 갈 거예요.”
“…….”
“그래서 말인데 저 내년 초부터 일한다고 했잖아요. 그때까지 어디 여행이라도 갈래요?”
유학도 모자라 갑돌이가 한국을 뜰 때까지 정우진은 날 데리고 외국에 나가 있을 생각인 듯했다. 어이가 없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지금…….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갑돌이한텐 좋은 거지?”
“네, 솔직히 지금 복장이 뒤집혀서 죽을 거 같아요.”
“…….”
“마음 같아서는 외국으로 유학이 아니라 외국에 팔아넘기고 싶은데.”
살벌하게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저걸 칭찬해야 되는 건지, 혼을 내야 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