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삐리릭, 문이 잠겼다. 신발을 벗으려는데 뒤에서 당겨지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바닥을 보고 있었다.
“…….”
그 모습이 마치 장난감 사 달라고 떼쓰다가 한 대 맞고 집에 끌려온 어린애처럼 처량하고 슬퍼 보였다.
도대체 어디서 저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아직까지도 눈에서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들어올 생각도 없는 건지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울기만 하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돌려 거실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나오기 전에 노트북을 어떻게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전원을 껐었나? 안 껐나? 노트북을 닫고 나왔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일은?”
내 물음에 훌쩍거리던 정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대롱대롱 거미줄의 이슬처럼 걸려 있던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굴러 떨어지는 걸 보다가 다시 물었다.
“일은 어쩌고 왔어?”
“…….”
“넌 일이 무슨 취미 생활이냐.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땐 안 하게?”
가서 일 마무리 짓고 오라고 말하려는데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김갑진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뭐?”
정우진은 내 말은 하나도 듣고 있지 않은 듯했다. 뚝뚝 떨어지던 눈물이 펑펑 솟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돌이?”
“그 새끼 이름 부르지 마요.”
“네가 먼저 불렀잖아.”
“무슨 얘기 했는데요? 언제부터 같이 있었어요?”
내 옷깃을 쥐고 있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재촉하듯 손을 흔들 때마다 덩달아 내 몸까지 좌우로 흔들렸다. 갑돌이 얘기에 잊고 있던 원룸이 떠올랐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물었다.
“원룸은 어떻게 된 거야?”
“…….”
“거기 내가 살았던 원룸 아니라던데.”
“그 새끼가 그래요?”
“왜? 갑돌이가 한 얘기가 거짓말이냐?”
“이름 부르지 마세요.”
저 새끼가 돌았나. 아까부터 뭔 이름을 자꾸 부르지 말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먹거리던 정우진이 짜증스레 눈을 치켜떴다. 나도 덩달아 짜증이 나서 옷깃을 쥐고 있는 정우진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래서 그 원룸은 뭐…….”
하지만 정우진은 마치 놀이라도 하듯 뿌리쳐진 팔이 밑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얼른 다시 내 옷깃을 쥐었다. 나는 말을 하다 말고 황당하다는 얼굴로 정우진을 보며 물었다.
“너 지금 장난해?”
고집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던 정우진의 눈꼬리가 금세 축 처졌다.
“그 새끼랑 무슨 얘기 했어요?”
“원룸 얘기 했다. 왜?”
“그러고요? 언제부터 같이 있었는데요? 핸드폰 번호는 왜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또 만날 거예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날 버리지 말라는 둥 미안하다는 둥 그런 소리밖에 못하던 정우진이 속사포처럼 따져 묻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하기는 했지만 아까와는 딴판이었다.
“너 오기 전에 잠깐 같이 있었어. 택시비가 없어서 갑돌이가 대신 내 줬고. 핸드폰 번호는 갑돌이한테 원룸에 대해 더 물어보려고 가르쳐 달라고 했던 거야. 지금처럼 네가 제대로 말 안 해 줄까 봐. 네가 지금 사실대로 똑바로 말해 주면 내가 굳이 갑돌이를 만날 필요는 없겠지.”
나는 다시 한번 정우진의 손을 쳐 내며 차분히 말했다.
내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까만 눈동자가 귀신처럼 서늘해졌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정우진은 지금 내가 갑돌이랑 무슨 얘길 했는지가 중요한 건가. 자기가 나한테 거짓말을 했던 사실보다?
어이가 없었다.
“원룸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봐.”
“그 새끼 죽여 버릴 거야.”
그때 정우진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 어처구니가 없는 말에 나는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널 죽여 버리고 싶다.”
내 말에 정우진이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을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우진은 금방 화냈다가 금방 슬퍼하고 겁을 먹었다가 또 금방 짜증을 부렸다. 감정 변화가 너무 극단적이라 거기에 맞춰 말하다 보니 나까지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우진이 조금은 안쓰러워 보였는데, 지금은 한 대 패 버리고 싶었다.
“나도 너 죽이고 싶은 거, 참을 테니까 너도 참아.”
“…….”
“그리고 나가서 일 마무리 짓고 오고. 얘긴 너 일 끝나고 다시 하자.”
“……나더러 지금 선배를 집에 두고 혼자 나가라고요?”
신발을 벗으려는데 정우진이 내 팔뚝을 잡았다. 순간 허리가 굽어질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왜요? 나 일 보내고 또 어딜 가려고요? 누구 만날 건데?”
“안 놔?”
“누구한테 갈 거냐고요!”
이대로 있다간 정말 팔뚝이 부러질 것 같았다. 나는 붙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있는 힘껏 정우진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뻐억 하는 소리와 함께 정우진이 휘청거렸다.
나는 정우진의 손에 힘이 풀린 틈을 타 세게 잡혔던 팔뚝을 빼냈다. 그리고 아픈 팔을 살살 문지르고 있는데 정우진이 얻어맞은 뒤통수에 손을 얹고 고개를 들었다.
맞은 곳이 아프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던 건지 얼이 빠져 있는 놈을 보며 나는 눈을 치켜떴다.
“이 씨발놈이 얻다 대고 소리를 질러?”
“…….”
너 죽고 싶냐고 말하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정우진의 핸드폰이었다. 시끄럽게 울려 대는 벨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머리까지 치솟았던 화를 삭이며 차분히 말했다.
“빨리 전화 받아서 금방 간다고 그래. 가서 일 마무리 짓고 와. 얘기는 갔다 와서 하고.”
정우진이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만 다녀오겠다고 하고 나왔을 리가 없었다. 그냥 말도 없이 무작정 뛰쳐나왔을 모습이 눈에 훤했다.
하지만 정우진은 그럴 생각이 별로 없는지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든 말든 무시한 채 살벌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묶어 두고 나갈 거예요.”
“뭐?”
“얌전히 묶여 있겠다고 하면 선배 말대로 마무리 짓고 올게요.”
“…….”
이 새끼가 혹시 지금 이런 상황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 건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날 바라보는 눈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열불이 치솟기 시작했다.
“너 진짜 나랑 한판 뜰래?”
“그럼 내가 뭘 믿고 선배를 혼자 두고 또 나가요!”
“그럼 가지 마, 이 씨발 새끼야!”
더 이상 이 정신 나간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아서 버럭 고함을 지르고 신발을 벗었다. 노트북이고 지랄이고 나도 이젠 모르겠다, 씨발.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정우진이 날 붙잡았다. 내 어깨를 잡아 돌린 정우진은 무너지듯 무릎을 꿇으며 내 허리를 안았다. 너무나도 빠르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나도 모르게 무너지는 정우진의 팔뚝을 잡아 줄 수밖에 없었다.
“선배, 화내지 마세요.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당황하는 사이 정우진이 내 배에 뺨과 이마를 문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듯 필사적인 행동이었다.
“미워하지 마세요.”
“…….”
정상이 아닌 것 같은 극단적인 감정 변화는 정우진이 불쌍해 보이기보다는 무서워 보이게 만들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제발 화내지 마세요.”
“…….”
엉엉 울면서 말하는 정우진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렀지만 울음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아까부터 계속 우는 소리만 들었더니 귀가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자기도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우는 모습이 또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씨발, 도대체가 나도 내 감정을 모르겠다. 정우진이 불쌍해 보였다가 이상해 보이기도 하고…….
갑자기 피로가 몰려 눈을 세게 감았다가 뜨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는데 정우진이 내가 비틀거리는 걸 느끼기라도 했는지 젖은 얼굴을 들어 날 올려다봤다.
얼굴이 온통 젖어서 엉망이었다. 나는 희게 질려서 지쳐 보이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우진.”
정우진은 내 부름에 곧장 붉어진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뭐라고 웅얼거리기는 하는데 울어서 목이 잠기기라도 했는지 뭔 소릴 하는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코맹맹이 소리도 나고…….
나는 이상한 웅얼거림을 잠깐 듣다가 또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됐으니까 그만 말하라는 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일단 나가서 일부터 마무리 짓고 와.”
“…….”
“갔다 오면서 원룸은 어떻게 된 건지, 내가 기억 잃기 전에 정말 우리가 무슨 관계였는지……. 그런 거 나한테 어떻게 설명할 건지 너도 머릿속으로 좀 정리해. 그리고 나한테 말해 줘.”
내가 차분히 말했지만 정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계속 울기만 하면 난 더 이상 여기에 못 있어.”
그놈의 영상은 그렇다 쳐도 왜 정우진이 나한테 내가 살던 곳을 거짓으로 알려 준 건지 그게 찝찝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 나는 앞으로도 정우진이 내게 하는 말은 아무것도 믿지 못할 것 같았다. 계속 찝찝해하면서 의심하기만 하면 어떻게 이곳에 있을 수 있겠는가?
사실 경중으로만 따지자면 그 포르노 같은 영상이 더 문제였지만 그건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분명 그 영상에 나온 사람은 나였지만 기억이 없어서 그런 건지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나에게는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일보다 지금 당장의 내 일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눈물 좀 닦고 세수라도 하고 가. 누가 보면 초상난 줄 알겠네.”
내가 크게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훌쩍거리더니 내 배에 한 번 더 눈가와 이마, 뺨을 비비적거리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본 건데 정우진은 신발도 벗지 않고 있었다. 신발을 신은 채 거실 한복판까지 들어와 있는 정우진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데 코맹맹이 소리가 들렸다.
“어디 안 갈 거예요?”
“안 간다니까.”
“또 없어지면? 그땐 어떡해요?”
저 새끼 인간 불신인가? 안 간다니까 왜 자꾸 똑같은 걸 물어보지? 귀가 안 들리나, 씨발? 자꾸 똑같은 말을 하는 게 짜증이 났지만 티를 내면 2차전이 시작될 것 같아서 그냥 얌전히 고개만 흔들었다.
“안 없어질게.”
“없어지면 어쩔 거예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따지듯 묻는 말에 위기가 찾아왔지만, 또다시 끈기 있게 참아 내고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
“안 없어진다니까.”
“없어질 수도 있잖아요.”
정우진이 다시 울 것 같은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고 생각하며 되물었다.
“그럼 넌 뭐 어쩌고 싶은데? 내가 어떻게 할까?”
내 물음에 정우진이 훌쩍거리다가 마치 이 말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재빨리 말했다.
“나랑 외국 나가요.”
“뭐?”
“사람 없는 데……. 아무도 없는 데 가서…….”
“알았어. 빨리 갔다 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하는 말을 끊어 내고 파리 쫓듯 손을 휘휘 움직이자 정우진이 다시 울상을 지었다.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면 1분 안에 울 거라는데 내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하는 수 없이 핸드폰 전원을 켜 정우진에게 전화를 했다. 곧 벨소리가 울리자 정우진이 전화를 받으며 힘없이 날 쳐다봤다.
“그럼 계속 나랑 전화하면서 가.”
“……선배한테는 내 일이 그렇게 중요해요?”
“…….”
다 쉬어 빠진 목소리로 묻는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사실 내가 이렇게 기를 쓰고 정우진을 내보내려는 까닭은 노트북의 전원을 끄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꼭 내보내지 않고 씻거나 그럴 때 잠깐 들어가서 정리를 하고 나와도 되지만 그건 내가 불안했다.
그동안 이 집에서 살면서 정우진이 소리도 없이 내 뒤에 있거나 어딘가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정우진은 귀신처럼 소리도 없이 집 안을 활보하고 다녔기 때문에 집에서 내보내고 마음 편히 노트북을 정리하는 게 가장 좋았다.
나는 가만히 정우진을 보다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난 책임감 없는 사람 존나 싫어해.”
“…….”
“그리고 넌 지금 내가 무슨 말만 해도 쳐울잖아. 그러니까 갔다 오면서 마음 좀 진정시키고 오라고.”
“…….”
정우진은 내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에서 물러설 수는 없어서 배 째라는 식으로 말을 이었다.
“너 그럼 지금 당장 나한테 원룸 얘기랑 나 기억 잃기 전의 얘기,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내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할 자신 있어?”
눈만 껌뻑거리던 정우진이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알았어요.”
그 짧은 말에 나는 하마터면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했다. 겨우 혀를 깨물고 참는데 정우진이 결심한 듯 말했다.
“가서 일 그만두고 올게요.”
“그래, 빨리……. 뭐? 그만둬? 왜?”
고개를 끄덕이며 빨리 가라고 등을 떠밀다가 순간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정우진은 아직도 끊어지지 않은 핸드폰 액정을 가만히 보다가 귀에 대고 말했다.
“안 그래도 그만둘까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요.”
왜? 내 얼빠진 표정을 보던 정우진이 반대쪽 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있는 내 손을 들어 전화를 받게 했다.
“선배는 거의 일 얘기밖에 안 하니까.”
“…….”
“지금 이 상황에서도.”
정우진은 정신을 좀 차린 듯했다. 미친 것처럼 경련하던 손도 더 이상 떨리지 않았고, 눈물을 쏟아 내던 눈도 조금 젖어 있기만 할 뿐 더 이상 터진 댐처럼 물을 쏟아 내지는 않았다.
“선배 말대로 갔다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요.”
“알았어.”
“나가면 그땐 김갑진 그 새끼 대가리 찢어서 가져올 거예요.”
걔를 왜? 내가 되묻기도 전에 정우진이 등을 돌려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고 나가는 등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현관문이 닫히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핸드폰 너머에서 정우진이 말했다.
-선배가 싫어하는 짓 하고 싶지 않아요.
“…….”
-난 선배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싶어요.
고저 없는 무거운 목소리에 갑자기 숨이 턱 막혀 왔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가 노트북의 전원을 껐다.
-제발 어디 가지 마세요.
“안 간다니까.”
-집에 가면 그 새끼랑 무슨 얘기 했는지 말해 주세요.
“별 얘기 안 했다고.”
혹시 삐뚤어지지는 않았는지 꼼꼼히 확인한 뒤 노트북을 닫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혹시라도 핸드폰 너머로 어떤 소리가 잡힐까 싶어 나는 소리를 죽여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선배.
“왜.”
방에서 나와 소파에 앉으며 그제야 한숨 돌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날 불렀다.
-사랑해요.
느닷없는 고백이었지만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정우진은 사랑한다는 소리를 밥 먹듯이 했기 때문이다. 딱히 대답해 줄 말이 없어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정우진이 다시 말했다.
-이름 불러 주세요.
“싫어.”
-왜요?
“너 지금 존나 짜증 나.”
급격하게 피곤해지기 시작해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데 핸드폰 너머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착했나 보네. 끊어.”
-5분 있다 다시 전화할 테니까 받으세요.
“알았어.”
-선배.
끊으려는데 정우진이 다급하게 날 불렀다. 무슨 말을 할지 뻔해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랑한다고? 알았어, 끊어.”
핸드폰 너머로 정우진이 다시 날 불렀지만 전화를 끊었다. 순식간에 적막이 찾아왔다.
“…….”
까맣게 변한 핸드폰 액정을 가만히 보다가 눈을 감았다.
너무 피곤하고 너무 힘이 들었다. 몸이 소파 밑으로 한없이 추락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계속 밑으로 꺼지고 꺼지다가 어느 순간에 잠이 들었다.
* * *
띠리리리. 띠리리리.
크게 들리는 벨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나는 뻑뻑한 눈을 겨우 떠서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아 전화를 받았다.
“일은 끝냈어?”
-목소리 왜 그래요?
“잠깐 잠들었어. 지금 와?”
-가고 있어요.
그 말에 잠시나마 잊고 있던 것들이 떠올랐다.
정우진이 내게 어떤 말을 해 줄지 감이 오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도대체 내가 살던 집을 가짜로 알려 줄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핸드폰이며 시계, 반지 등 그런 것들에 이상한 장치를 해 놓은 것도 보통 사람이 할 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정우진이 정말 특이하고 별난 인간이라 그런 거라고 해도,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진짜 별 뜻이 없이 그랬다고 말하더라도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나는 판가름을 할 수가 없었다.
기억을 잃은 내게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울면서 말하고, 내가 생전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던 다른 집에 날 데려가 여기가 너의 집이라고 말하며 뻔뻔하게 웃었는데, 내가 정우진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정우진이 또다시 내게 거짓말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해서 어떻게 할 방법도 없었다.
아까는 여기에서 못 산다고 그냥 말하기는 했지만 여기가 아니면 어차피 나는 갈 곳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더 정우진을 믿어 보기로 했다.
꼭 갈 곳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그냥 이렇게까지 했는데 정우진이 또 거짓말할 것 같지 않다는 터무니없는 믿음이 있기도 했다.
-뭐 해요?
내가 한참 말이 없어서 그런지 정우진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어느 정도 잠이 깨서 느릿하게 소파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그냥 소파에 앉아 있어.”
-소파에 앉아서 뭐 해요?
“뭐 하기는, 전화 받지.”
-저는 운전하는 중이에요.
정우진이 묻지도 않은 걸 말했다. 운전한다는 말에 그러냐고 중얼거리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정우진이 숨을 쉬고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조금 빠르게 숨을 마셨다가 도로 내뱉는 소리. 그러다가 다시 아, 하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말하지 못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
몇 번이나 그러다가 정우진이 드디어 나를 불렀다.
-선배.
“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던 건지 궁금했지만 딱히 그 뒤로 어떤 말을 하지는 않았다.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고 있기라도 한 걸까?
정우진은 지금처럼 할 말이 없어도 습관적으로 나를 부르고는 했었다. 항상 그랬다. 일단 불러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뒤에 할 말을 생각해 냈다.
-신호에 걸렸어요.
“…….”
대개는 지금처럼 쓸데라고는 쥐뿔도 없는 말이었지만.
-사랑해요.
“…….”
-선배, 아직 소파에 앉아 있어요?
연관도 없는 질문들을 쏟아 내는 목소리엔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성의 없이 대충 대답하며 정우진이 주절주절 떠드는 걸 듣고 있는데, 다시 사랑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내가 아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잘못된 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분명 내가 아는 사랑이라는 건 정우진이 내게 하는 행동처럼 병적이고 극단적인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기억 상실증에 걸리면서 기억에 혼선이라도 왔을까? 그깟 신호등도 제대로 기억해 내지 못했던 걸 떠올리면 아주 불가능한 얘긴 아니었다.
정우진이 말하는 사랑과 내가 알고 있는 사랑, 둘 중 뭐가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선배.
“듣고 있어.”
-이제 거의 도착했어요.
“그래. 주차하고 와, 끊는다.”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멀뚱멀뚱 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정우진이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간 있었던 일들이나 정우진이 울면서 불안해했던 걸 보면 별 게 아닌 일은 아닐 것이다.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해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뭔가 생각했던 것보다 소리가 커서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신발도 벗지 않고 거실 한복판까지 쳐들어온 정우진이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저 새끼는 아까도 그러더니……. 아니, 도대체 왜 자꾸 집에 신발을 신고 들어오는 거야?
인상을 쓰고 있는 나와 달리 정우진은 내가 얌전히 집에 있었던 게 감격스럽기라도 한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차를 타고 왔을 텐데, 차에서 내려 뛰어왔다고 해도 그리 먼 거리가 아닐 텐데 정우진은 저 혼자 100m 달리기라도 한 듯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꼴이 왜 그래?”
“아……. 미안해요. 자꾸 땀이 나서…….”
정우진은 허둥지둥 소매로 땀을 닦으며 창백한 얼굴로 계속 숨을 헐떡거렸다. 이대로 뒀다간 숨이 모자라서 질식이라도 할 것 같았다.
“신발이나 벗고 와.”
혀를 차며 말하자 정우진이 그제야 깨달은 건지 아, 하고 현관 쪽으로 가 신발을 벗었다. 그걸 가만히 보다가 욕실 쪽으로 걸어가자 정우진이 바로 뒤에서 어미 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날 졸졸 쫓았다.
나는 욕실에 들어가 마른 수건을 정우진에게 던졌다. 수건을 받은 정우진이 나와 수건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닦으라고 줬더니 들고만 있으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결국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수건을 빼앗아 정우진의 젖은 얼굴과 목덜미 쪽을 닦아 주며 말했다.
“도대체 새마을 원룸, 그거 어떻게 된 거야?”
“…….”
“거기 내가 살던 집 아니라며. 그럼 거긴 누구 집인데?”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정우진이 시선을 올려 날 쳐다봤다. 이렇게나 땀이 났는데 살갗은 차가웠다. 내버려 두면 감기라도 걸릴 것 같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웅얼거렸다.
“대답 안 하면 화낼 거예요?”
“아니, 여기서 나갈 건데.”
내 말에 정우진이 손을 들어 내 손목을 잡았다. 수건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말하면요?”
“뭐가?”
“내가 다 말해 주면 그땐 어쩔 건데요?”
“어쩌긴 뭘 어째, 거짓말했으니까 존나게 맞아야지.”
정우진은 혼란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다음에는요?”
“몰라, 거기까진 생각 안 해 봤어.”
“때리고 끝이에요?”
“그럼 널 죽이리?”
“나 안 싫어할 거예요?”
저 말은 이제 지겨워 죽겠다. 한숨을 내쉬며 벌벌 떨리고 있는 손을 뿌리치려다 그냥 내버려 뒀다.
“안 싫어할 거고, 화도……. 아니, 화는 낼 수도 있는데 싫어할 거 같진 않아. 집도 안 나갈 거고.”
“다 말해 주면 나랑 계속 같이 있을 거예요?”
“그래.”
“내 말 듣고 화나도 여기서 화내겠다고 약속해요. 다른 데 말고 여기서, 나한테 화난 거니까 나한테.”
정우진은 했던 말을 몇 번이나 하고 또 했다. 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해도 계속 되물었다. 그렇게 다섯 번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기를 반복하다가 정우진이 질문을 바꿨다.
“그럼 내가……. 내가 선배한테 사실대로 말하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도대체 무슨 의도로 저런 질문을 하는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당최 모르겠다. 울먹거리는 목소리에서 심중을 파악하려 했지만 무리였다. 정우진은 지금 계산하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어쨌든 넌 지금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잖아. 근데 네가 사실을 말하면 내가 다시 널 믿겠지.”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빨리 말하라고 윽박지르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으며 나는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빨리 말해 봐. 그 원룸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누구 집인데? 너 집 두 개야?”
“……아니요.”
“그럼 뭔데? 네 친구 집이냐?”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웅얼거리는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한 달 치 한숨을 오늘 다 쉬는 것 같았다. 나는 정우진의 손을 잡고 욕실에서 나와 그를 침대에 앉혔다. 나도 그 옆에 앉으려는데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날 끌어안았다. 내가 빠져나갈 수 없게 내 허리에 팔을 감고 내 배엔 얼굴을 묻었다.
“새마을 원룸은 선배가 퇴원하던 날 계약한 집이에요.”
드디어 말할 마음이 생겼나 보다.
“왜?”
“선배가……. 선배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제가 선배 원래 살던 집을 팔아서…….”
“내 집을 네가 왜 팔아?”
“같이 살고 싶어서요…….”
정우진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같이 살고 싶다고 집을 팔았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야?
“그럼 기억을 잃기 전에 나는? 네가 내 집 판다고 했을 때 난 뭐라고 했는데? 내가 너한테 대신 팔아 달라고 했어?”
정우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싶어서 어깨를 살짝 밀었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밀면 밀수록 더 세게 달라붙었다.
“난 뭐라고 했어? 네가 내 집을 왜 판 건데?”
다시 재촉하듯 물었지만 정우진은 입을 열지 않았다. 답답해서 언성을 높이려다가 불현듯 드는 생각에 나는 설마설마하다가 물었다.
“너 설마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내 집을 판 거야?”
“네…….”
“…….”
설마하면서도 물어본 거긴 한데 이렇게 쉽게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 집 내 거 아니었어?”
“월세…….”
“아니, 계약자가 나 아니었냐고.”
“맞아요.”
근데 어떻게? 어떻게 내 허락도 없이 그렇게 막……. 아니면 혹시 계약 기간이 끝났나? 너무 당황해서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팔았다는 게 무슨 뜻인데?”
“정확하게 말하면 판 건 아니고……. 월세니까, 보증금이랑……. 그런 거를 그냥 안 받고…….”
정우진은 계속 우물쭈물하면서 답답하게 굴고 말꼬리를 늘렸다. 그러니까 대충 내 집은 월세였는데 그냥 잠수를 탔다는 말인 것 같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집에, 기억도 나지 않는 보증금이 존나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나는 이를 꽉 물고 말했다.
“근데 팔긴 뭘 팔아?”
“아니……. 그거 제가……. 제가, 드릴 거니까 제가 산 거라고 하고…….”
“뭔 소리야, 똑바로 좀 말해!”
결국 참지 못하고 내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정우진이 흠칫 놀라더니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돈 드릴게요.”
“…….”
“그리고 더 필요한 거 있으면 그것도 다 제가 드릴게요. 필요한 게 뭐든…….”
나는 미간을 구기고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일단 이건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나한테 새마을 원룸이 내 집이라고 했던 건 왜 그런 거야?”
“선배가 화낼까 봐…….”
“뭘? 내 집 네가 마음대로 팔았다고 하면 내가 화낼까 봐?”
“…….”
“……내가 화를 낼까 봐 집을 계약했다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어이가 없어 미칠 거 같았다. 이게 무슨 개소리……. 돈지랄도 이런 돈지랄이 없었다.
“아니……. 아니, 그냥…….”
“잘못했어요…….”
“아니, 그냥 뭐 계약이 끝났다고 하든가……. 아니, 씨발. 그러게 애초에 그걸 왜 네 마음대로……. 그렇다고 살지도 않을 집을 계약은 또 왜…….”
너무 혼란스러워서 문장 하나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횡설수설 혼잣말처럼 말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선배랑 같이 살고 싶어서요.”
“…….”
어이가 없네.
당당한 정우진을 멀뚱멀뚱 보다가 나는 다시 물었다.
“나 기억 잃기 전에 우린 무슨 사이였는데?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던 거 거짓말이지?”
문득 노트북으로 봤던 영상이 떠올랐다. 그래서 최악의 경우 정우진이 그 영상 속의 일을 내게 이야기하며 그런……. 그러니까 강간을 하고 강간을 당한 사이였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정우진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답답해서 머리채를 붙잡아 고개를 쳐들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손을 밑으로 내려 정우진의 턱을 잡아 올렸다. 눈물 젖은 새카만 눈동자와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달싹거리는 입술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대체 우린 어떤 사이였는데?”
정우진이 뭐라고 말하려다가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러더니 내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 다시 내 배에 제 얼굴을 처박았다. 나는 정우진이 진정할 때까지 벌벌 떨리는 등을 두드려 줄 수밖에 없었다.
거의 반쯤 해탈한 채 기계적으로 정우진의 등을 두드려 주며 천장만 멀뚱멀뚱 보고 있는데 귓가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랑 난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요.”
정우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보면서 말할 용기는 없는 건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허리를 안은 팔에 얼마나 세게 힘을 주고 있는지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계속 울어서 그런지 옷이 축축하게 젖어서 찝찝했지만 꾹 참았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요. 그냥 나 혼자 선배 좋아했어요.”
“…….”
“근데 선배가……. 원래는 계속 그냥 선배만 좋아하려고 했는데……. 그래서 나중에 졸업하고 결혼, 아니 그 전에 친해지려고……. 근데 선배가 자꾸 학교에서 다른 사람이랑…….”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리면서 횡설수설하는데,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랑 말하고……. 사귀는 것처럼 행동하고, 밤새도록 술 마시고……. 밖에서 밤새우고……. 선배가, 학교도 잘 안 나오고…….”
도대체 우리 사이를 설명하는데 내가 밤새도록 술 마시고 학교도 잘 안 가는 생양아치였다는 게 뭐가 중요한 걸까?
나는 정우진이 하는 말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90프로 정도는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보다 허리가 자꾸 죄어 와 참고 참다가 약간 몸을 뒤로 빼는데 정우진이 다시 말했다.
“뺏길 거 같아서……. 자꾸 불안하고, 꿈에서 선배가…….”
“정우진, 일단 진정하고 팔 좀…….”
“난 그냥 선배가 우진이라고 부르면서 웃는 걸 보고 싶었어요.”
“뭐?”
배가 뜨듯해졌다. 정우진이 흘리고 있는 눈물이 옷에 스며들어 내 배를 따듯하게 했다.
“난 그냥, 선배가 나 보면서 웃는 거…….”
“야, 그래서 우리가 무슨 사이였냐고. 어? 자꾸 울지만 말고 말을…….”
정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아까보다 얼굴이 훨씬 더 엉망이었다. 반짝거렸던 눈동자도 흐리멍덩했고,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퍼렇게 질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열이 나는 사람처럼 시종일관 발갛던 입술에서 피가 비치고 있었다.
“나랑 계속 같이 있을 거죠?”
이미 수십 번도 더 물어봤던 질문을 또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정말 나랑 계속 같이 있어 줄 거예요? 안 버릴 거죠?”
“안 버려. 맹세할게.”
내가 선서하듯 손을 올리자 정우진이 피가 나는 입술을 다시 물었다. 꾹 눌리는 입술을 보며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버리지 않을 거냐고 묻는 정우진에게 그러는 넌 지금 내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왜 자꾸 버리지 않을 거냐고 물어보는 걸까? 애초에 내 것이었던 적도 없었던 거 같은데. 그것보다 일단 입술 좀 그만 깨물라고 말리려 손을 뻗는데 정우진이 다시 말했다.
“선배가 기억을 잃기 전에……. 나랑 제주도 근처 섬에 있었어요.”
입술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춘 내 손바닥으로 정우진이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더니 개처럼 내 손바닥에 흠뻑 젖은 제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제주도 근처? 거길 왜 갔어?”
제주도 근처에 섬이라면 제주도는 아니라는 건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정우진이 입술까지 벌벌 떨면서 말했다.
“내가 못 가게 했어요.”
“어딜?”
“내가 선배 집에 못 가게……. 가뒀어요. 그리고 거기서 계속…….”
가둬? 감금을 했다고? 강간이 아니라……. 잠깐만, 아.
아, 그럼 그게……. 아니, 그러니까…… 제주도 근처 섬에…… 거기서 그걸……. 그러니까 정우진이 날 거기에 가둬 두고 강간하면서 그런 걸 찍고…….
이제 조금씩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선배.”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미리 영상을 봐서 정우진이 날 강간했다고 해도 크게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막상 직접 들으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충격이 컸다.
정우진이 울먹거리면서 자꾸만 날 불렀다. 숨도 쉬지 않고 강간, 감금, 섬, 그 세 단어만 머릿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게 아주 조심스럽고 느리게 손을 뻗었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창백하게 질린 하얀 손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자, 잠……!”
갑자기 이상한 게 보여서 숨을 헉 들이켜고 몸을 뒤로 빼는데, 내게 다가오던 손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에 묻어 있던 피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히 봤는데 헛것을 보기라도 했던 걸까?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오한이 드는 것처럼 몸이 떨려 왔다.
정우진은 그런 나를,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숨도 한 번 쉬지 않고 손가락 하나도 까닥이지 못한 채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그 찰나의 정적이 지나자 얼어붙어 있던 정우진이 모래성처럼 부서지며 내게 매달렸다.
“그러지 마세요, 선배. 말하면 계속 나랑 같이 있어 준다고 했잖아요.”
날 끌어안고 있던 정우진은 갈고리처럼 손가락 끝을 세워 내 옷을 쥐어뜯으며 매달렸다. 등이 따가웠다. 반사적으로 사지를 뒤틀며 그 손길을 피하려 하는데, 정우진이 고개를 퍼뜩 들어 소리 내어 엉엉 울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반복적으로 해 댔다.
“말하면 같이 있어 준다고 했잖아, 내가 말해 주면 여기 있겠다고 했잖아요. 나 싫어하면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선배가 그랬잖아요.”
“자, 잠깐만……. 정우진, 이거……!”
“나 안 버린다고 했잖아! 가지 마, 선배. 가지 마세요. 제발 나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그 말에 정신이 들었다. 정우진은 눈물을 억수같이 쏟아 내면서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날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니? 내가 무슨 표정으로 정우진을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귓가를 때리는 우는 소리에 갑자기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왔다.
정우진은 겁에 질려서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날 쳐다보는 표정이나 눈빛, 입 밖으로 나오는 사소한 소리나 두서없이 뱉어지는 말들까지도 전부 정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단지 겁에 질려 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나 위태로워 보여서 나도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겠다 싶어, 우선 정우진의 어깨를 잡고 그를 진정시켰다.
“야, 울지 말고…….”
“선배, 선배, 사랑해요, 사랑……. 아, 나 죽을 거 같…….”
날 뜯어 죽일 듯 쥐어 잡고 있던 정우진이 내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허공에서 멈춘 손은 나에게 다가오지도 못하고 아래로 떨어지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어찌할 줄을 몰라 바르작거리기만 했다.
그러다가 덜덜 떨면서 제 머리를 감싸 안고 울기 시작했다. 무릎을 모으고 그 사이에 얼굴을 박고, 마치 혼나는 아이처럼, 무서운 것을 피해 숨는 아이처럼 최대한 몸을 말고 웅크리고 구겨져서 피를 토하듯 울었다.
그건 너무 괴롭고 힘들어 보이는 소리였다.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어서 울기만 하는 사람의 소리처럼 들렸다. 옆에서 듣는 나까지 너무 힘들어지는 소리에 잠시 넋이 나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 걸 바라보기만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스트레스로 인해 몸이 도피하기로 결정을 한 건지, 갑자기 온몸을 북처럼 때리던 소리가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메아리가 점점 멀어지듯, 그렇게 천천히 작아지고 흐려지다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소리가 없는 공간에서 웅크리고 구겨져서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세워 제 팔뚝에 손톱을 박아 넣고 있는 정우진을 바라봤다. 희게 질린 살이 한계까지 짓눌리다가 결국 피가 비쳤다. 손톱이 살을 찍어 누르다가 아래로 긁으면 지나간 자리마다 피가 묻었다.
그때 다시 정우진의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울면서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데 무슨 말인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린애가 옹알이하는 것 같기도 했고, 혀가 잘린 사람이 살려 달라는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그제야 울음 사이로 필사적으로 토해 내고 있는 말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랑해요. 좋아해요. 나 버리지 마세요. 나랑 같이 있어 주세요. 죽을 거 같아요. 달래 주세요. 나는 선배밖에 없어요. 나 좀 좋아해 주세요. 사랑해요, 진짜 사랑한단 말이에요.
너무 무겁고 버거운 말들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서 주춤하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정우진을 불렀다.
“야.”
정신없이 우는 와중에도 내 목소리를 용케 들은 건지 정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
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로 정우진의 몰골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내가 잠깐 입을 다물고 숨을 쉬는 그 짧은 사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정우진이 나를 불렀다.
“선배.”
“…….”
“선배.”
딱히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자꾸만 불렀다. 반복해서 들리는 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정우진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넘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욕실 쪽으로 걸어가자 정우진도 내 뒤를 따랐다. 훌쩍거리면서 우는 소리에 고막이 난도질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배…….”
정우진이 코맹맹이 소리로 작게 나를 불렀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세면대에 물을 틀어 온도를 맞췄다. 적당히 미지근한 온도인 걸 확인하고 서서히 고개를 들어 거울 속에 비친 정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수 좀 해.”
존나 못 봐 주겠다.
내 말에 정우진이 비틀거리면서 다가와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훌쩍거리면서 손에 물을 묻히고 손바닥에 물이 고이면 서러운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적셨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두어 번 숨을 쉬면서 울다가 다시 손바닥에 물이 고이면 숨을 참고 세수를 했다.
그 행동을 서너 번 반복할 때까지 나는 가만히 정우진을 쳐다보기만 했다. 얼굴에 물이 묻어서 그런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창백해 보였고, 눈가는 건드리면 피가 날 것처럼 붉었다.
몇 번 세수를 하던 정우진이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거울 속으로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다시 한번 얼굴에 물을 묻혔다. 그리고 또 나를 쳐다보다가 또 세수를 했다.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지 자기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냥 대충 하고 말면 되지, 뭘 또 내가 그만하랄 때까지 저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계속 세수를 하고 있는 정우진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정우진이 내게 했던 행동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강간을 당했다고 해도 나는 기억이 없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한테 일어난 일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는 기억이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연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래서 어쩌면 더 쉽게 생각했던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정우진의 입으로 들으니 영상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따지고 보면 보고 들리는 영상이 더 충격적이어야 할 텐데, 왜 나는 지금 더 충격을 받은 것일까? 게다가 나는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강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강간하고 영상을 찍은 것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외딴섬에 감금까지 시켜서 그런 건가? 아니면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들어서?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어쩌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혼자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런 영상을 보긴 했지만 직접 듣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든지, 아니면 그 영상이…… 합의가 된 영상일 수도 있고…….
하지만 정우진의 입으로 직접 들은 지금, 이제 모든 것들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버렸다. 정우진이 나를 외딴섬에 가둬 놓고 강간하면서 그걸 영상으로 남겼다는 게.
“선배.”
몇 번이나 세수를 하던 정우진이 이제 더는 못 하겠던지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와 내 옷자락을 쥐었다. 세수를 어떻게 한 건지 얼굴은 물론이고 머리카락이나 옷까지 죄다 젖어 있었다.
수건으로 닦지도 않아서 턱 끝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게 물방울인지 눈물방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숨을 쉬는 사이사이로 울음이 섞여 있어서 나는 정우진이 아직도 울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울지 마.”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서러워 죽을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가 내 손 피했잖아요.”
“그럼 날 외딴섬에 가뒀다는데 너 같으면 안 피하겠냐?”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묻자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시 몸이 떨리고 있었다. 정우진은 몇 번이나 숨을 삼키면서 울음을 참으려 애썼지만 실패하고 울면서 말했다.
“잘못했어요.”
“…….”
“잘못했어요.”
“…….”
“잘못했어요.”
말을 하면 할수록 목소리는 계속해서 더 어그러지고 떨려서 세 번째쯤 말했을 땐 더 이상 뭔 소릴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어졌다.
울면서 웅얼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데, 시야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수건이 보였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새 수건을 꺼내 젖어 있는 정우진의 얼굴을 닦아 줬다.
이러다 정말 탈진할 것 같았다.
“내가 지금 기억이 안 나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들을 땐 놀라긴 했어. 놀라긴 했는데 솔직히 기억도 잘 안 나고…….”
정우진이 손을 들어 내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수건에 파묻혀 보이지 않던 얼굴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겨우 닦아 냈던 눈물이 다시 그렁그렁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이 금세 차오르며 눈가 밖으로 비집고 흘러 뺨 위로 미끄러졌다. 눈물이 줄줄 흘러 수건을 적시는 걸 보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정우진은 내게 몹쓸 짓을 했다. 하지만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동일 인물이지만 나는 기억이 없다. 분명 내게 일어난 일이고, 나의 일이지만 나와는 동떨어진 사건처럼 여겨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기억을 잃기 전의 나를 정우진이 강간했다는 사실보다 그런 짓거리를 하고도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게 더 크게 다가왔다.
물론 다짜고짜 나한테 내가 널 강간했고, 너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할 수는 없었겠지만…….
기억도 나지 않는 강간, 감금 같은 행위보다 내가 직접 겪고 기억하는 게 내게는 더 중요했다. 원룸이나 핸드폰, 시계, 우리의 관계, 그리고 지금 이런 사건들까지……. 정우진이 내게 거짓말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게 더 화가 나는 게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었다.
종종 환청이나 환각이 보였던 것도 기억을 잃기 전의 일 때문인 것 같은데……. 아까도 정우진의 손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던 것도 그렇고. 그러고 보면 정말 그냥 넘어갈 일도 아니거니와 심각한 상황이었던 건 확실한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그 잘못을 물어서 결론을 내리려면 나는 이 집에서 나가야 하니까…….
이 집에서 나간다는 건 정우진과 인연을 끊는다는 걸 의미했다. 그럴 게 아니면 여기서 나갈 이유가 없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일 때문에 정우진과 인연을 끊을 것인지,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정우진을 용서할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에서 사실 이미 결론은 났다.
정우진이 내게 한 짓거리는 분명 범죄였고,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일이었다.
하지만.
“선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선배.”
내가…… 기억도 나지 않는 일 때문에 정우진을…….
그리고 나는 갈 곳도 없다. 아는 사람도 없고……. 또 날 찾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내가 이 집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필사적으로 찾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정우진은 내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불안한 건지 울면서 나를 부르기만 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하나 확실한 건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일로 정우진과 인연을 끊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알고 있다. 정우진이 내게 한 짓이 얼마나 개좆같은 일인지……. 씨발. 씨발.
근데 별로 화가 안 난다고.
아니, 화가 나기는 하는데 정우진을 쳐 죽이고 싶을 만큼, 이 집에서 당장 나가고 싶을 만큼 그렇게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지가 않는다고.
씨발.
“하…….”
“선배…….”
내가 이를 갈며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끅끅 울면서 날 불렀다.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몇 초 참다가 떨리는 소리로 크게 숨을 들이켜고, 또 울고……. 계속 울음을 멈추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결과는 영 시원찮았다.
나는 벌벌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도 못하고 울고 있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너 또 그럴 거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우진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휙휙 저었다. 얼마나 동작이 큰지 모가지가 떨어져 날아갈 것 같았다. 저렇게 정신이 없어 보이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말 들리기는 할까? 혹시 내 비위를 맞추려고 무작정 저러는 건 아닌가?
그런 의문도 들기는 했지만 더 몰아붙이면 통곡하다가 졸도할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네가 나한테 정확하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기억이 안 나.”
“…….”
“기억도 안 나는 걸로 너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정우진이 다시 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그걸 가만히 보다가 욕실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두 번 다시 나한테 안 그러겠다고 하면 나도 뭐라고 안 할 건데, 그래도 네가 나한테 했던 짓들은 다 범죄야.”
“잘못했어요.”
울먹거리는 소리에 영상 속의 나와 정우진이 그림처럼 그려지기 시작했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 정우진과 지금의 정우진은 너무나도 달랐다.
화면 속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것처럼, 화면 속의 정우진과 지금의 정우진도 다르다.
이게 정신 나간 자기 합리화 끝에 내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씨발…….
나는 갑자기 드는 자괴감에 뒷목을 벅벅 긁다가 물었다.
“다음에 또 그러면 어쩔 건데?”
“…….”
“다음에 네가 또 나한테 그러면 어쩔 거냐고.”
짜증스레 묻는 질문에 정우진이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저걸 가엽다고 느끼고 있는 내가 또라이 같았다.
“그땐…….”
정우진이 힘없이 말하며 손을 뻗어 내 뺨을 만졌다. 살갗 위로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정우진은 눈을 감으며 내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또 그러면 그땐 내가 그냥 죽을게요.”
“…….”
별로 참신한 대답은 아니어서 순간 웃음이 났다. 피식거리는 소리에 정우진이 눈을 떴다.
“선배 못 보게 눈도 빼고 못 부르게 혀도 자르고 선배한테 가지도 못하게 다리도 자르고, 그냥 그렇게 선배 안 보는 데서 혼자 죽을게요.”
“…….”
참신하지 않다는 말은 취소다. 참신한 걸 떠나서 광기마저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이건 좀 과한 거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또 과하게 말했다.
“이젠 정말 선배가 싫어하는 거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선배가 시키는 것만 할게요.”
얘는 왜 이렇게 중간이 없을까?
지가 노예야, 뭐야?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거리다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한 번만 더 그러면 넌 진짜 죽을 줄 알아.”
“용서해 주는 거예요?”
그 말에 나는 갑자기 혼자 찔려서 버럭 화를 냈다.
“씨발, 그럼 어떡해? 난 지금 당장 갈 데도 없는데.”
내가 생각해도 존나 빈약하고 치사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거 말곤 댈 수 있는 이유가 없었다. 여기에서 네가 우는 게 보기 싫으니까 이러는 거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사랑해요.”
정우진이 몸을 축 늘어뜨리며 내게 매달렸다. 휘청거리다가 결국 벽에 기대선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정우진의 등을 두어 번 토닥거렸다.
“제가 잘할게요.”
“…….”
“정말 잘할게요. 사랑해요, 선배.”
“잘하긴 아까부터 뭘 자꾸 잘한대? 넌 평소에도 존나 오버거든.”
여기서 더 잘했다간 남이 봤을 때 정우진은 정말 내 노예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내가 투덜거리듯 말하자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물기에 젖은 새카만 눈동자가 꼭 새끼 사슴의 눈망울 같았다. 가련한 표정으로 날 보던 정우진이 붉게 부어 있는 입술을 열었다.
“근데 아까 그 새끼랑은 무슨 얘기 했어요?”
“뭐?”
“핸드폰 번호 저장은 왜 했어요? 나중에 또 연락할 거예요? 나중에 무슨 얘기 했는지 말해 준다고 했잖아요. 아까 둘이 뭐 했는데요?”
“…….”
집요한 표정으로 묻는 정우진을 보며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말해 주세요. 말해 준다고 했잖아요. 그 새끼……. 선배, 어디 가요? 선배, 잠시만요, 선배.”
울먹거리는 정우진을 두고 등을 돌렸다. 정우진은 그런 내 뒤를 쫓으며 날 불렀다.
“선배!”
“…….”
“선배, 어디 가요. 선배.”
이게 정말 잘하는 짓인지 벌써부터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