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11/28)

2장

거실이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건 내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였다.

정우진은 어딘가 좀 이상했다. 이건 내가 기억 상실증에 걸려서 상식 같은 걸 다 잊어버린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밖에서 뼈가 부러진 사람이 신음하고 있는데, 그걸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게 과연 정상일까? 그것도 자기가 뼈를 부러뜨린 장본인이면서.

게다가 어차피 오늘 보고 안 볼 사람이니까 신경을 쓰지 마? 그건 더 이상한 말이었다. 길을 걷다가 누군가가 쓰러져 앓는 소리를 내면 다가가 괜찮으냐고 묻거나 119에 신고하는 게 정상이다.

물론 그러지 않는 사람도 있기야 하겠지만, 과연 자기 집 안에서 사람이 쓰러졌는데 태연할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정우진이 내 이마에 뽀뽀를 했다.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는데 진짜 내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아니, 손등은 그렇다 쳐도 이마……. 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손등도 괜찮은 건 아니잖아!

“선배.”

한참 소란스럽던 거실이 조용해지자 정우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멍청하게 앉아 있는 내게 다가온 정우진이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안 피곤하세요?”

“…….”

나는 정우진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나 혹시 게이였나?

그런 생각이 들자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럴지도 모른다. 정우진이 게이라고 해도 내가 게이가 아니면 그는 내게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이건 필시, 내가 기억을 잃기 전 우리 사이에 뭔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다.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도 정우진이 내게 손등이며 이마에 뽀뽀를 했더라면.

“선배?”

하지만 대놓고 내가 혹시 게이였냐고 묻지는 못하겠다. 만약 정우진이 사실 그렇다고 하면 내가 받을 충격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배.”

정우진이 손을 들어 내 눈가를 덮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가려졌다. 눈가를 덮고 있던 커다란 손이 위로 올라가 내 이마를 한 번 쓸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밑으로 내려와 내 뺨에 닿았다가 목 언저리까지 내려왔다. 내 목을 두어 번 쓸던 정우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어디 안 좋아요?”

나는 고개를 틀어 그의 손길을 피했다. 내 어색한 표정이 문제였는지, 아니면 손길을 피한 게 문제였는지 걱정스럽게 일그러져 있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선배.”

“아까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괜찮아?”

분위기가 너무 이상해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이번엔 정우진이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러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날 보기만 했다.

“너 아는 사람이지? 너도 같이 병원 가 봐야 되는 거 아니냐? 어쨌든 실수……라고 해도 네가 그런 거니까…….”

그게 과연 실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에 정우진이 잠시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시선만 내려 아래를 보던 정우진이 다시 시선을 올려 날 쳐다봤다. 새카만 눈동자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선배.”

“어?”

“그 사람이 그렇게 신경 쓰여요?”

“뭐?”

“내가 그 사람 괜찮은지 병원에 가서 확인하고 오면 돼요?”

또다. 또 정우진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귀가 안 들리는 것도 아닌데, 분명 정우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들었는데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우진은 조금 전 내 목 언저리를 만지던 손을 계속 허공에 둔 채 가만히 나를 보고만 있었다.

“아니, 그냥 다쳤으니까…….”

나는 잔뜩 굳어서 허공에서 멈춰 있는 하얀 손을 쳐다봤다. 미동도 하지 않고 멈춰 있던 손이 슬쩍 주먹을 쥐었다 다시 펴졌다.

“만져도 돼요?”

“뭐?”

“확인하고 올 테니까…….”

“뭐?”

“열 있는지 없는지만.”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멈춰 있던 손이 다시 내게 다가왔다. 내 이마를 훑고, 뺨을 훑고, 목가에 닿았다. 목 뒤쪽을 슬슬 쓰다듬는 손길에 소름이 돋아났다. 숨도 쉬지 못하고 얼어 있는 날 보며 정우진이 천진한 얼굴로 눈꼬리를 접었다.

“열은 없네요.”

“…….”

“근데 나 정말 병원에 가서 확인하고 와야 돼요?”

가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그, 그냥 전화…….”

“그럼 전화해서 확인해 볼게요.”

“어, 그래…….”

“일단 한숨 자고. 선배도 누워요. 아까 자다 깼잖아요.”

정우진이 자연스럽게 침대 위로 올라와 내 옆에 누웠다. 아까처럼, 넓은 침대 구석에 누워 있는 날 꼭 붙잡고.

매미가 들러붙은 고목나무의 심정을 느끼며 나는 가만히 높은 천장을 바라봤다. 뭔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정확히 그게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건 확실했다.

* * *

언제부터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서서히 정신이 깨어났다. 너무 편해서 다시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박창섭 괜찮아?”

하지만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번쩍 눈을 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날 보며 웃고 있었다.

“멀쩡하대요.”

정우진이 핸드폰을 멀리 치우며 내게 말했다. 나는 멍하게 정우진을 보다가 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길에 다시 잠이 왔지만, 유혹을 이겨 내고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아침 뭐 드실래요?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기억났어.”

나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에 정우진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며 말했다.

“전화기랑 핸드폰. 아까 전화벨 소리 울릴 땐 몰랐는데……. 어젠가. 아무튼.”

처음 기억 상실증에 걸렸단 소리를 들었을 땐 아무렴 어떻겠냐고 생각했다. 기억도 안 나는 거 아등바등 기억해 내려고 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다시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의사 선생님도 기억이 아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으니, 그냥 하나씩 배우자고 결심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 기억은 조금씩 돌아올 모양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내가 신호등 노란불도 모르고 전화벨 소리에 놀랐다는 게 좀 쪽팔리긴 했지만 그런 게 대수일까.

“내가 살던 집에 가 봐야겠어. 날 아는 사람도 좀 만나 봐야겠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나한테는 내가 지내던 내 집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대학생이었고 아르바이트도 이것저것 했었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정우진이 말해 준 것과 내가 기억해 냈다는 건 다른 의미였다.

나는 지끈지끈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우선 학교에……. 거기 가면 친구도 있을 거고.”

혼란스럽다. 그리고 이제야 좀 무서운 것도 같았다. 아예 아무것도 모를 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어중간하게 아니까 더욱 그랬다. 난 시계도, 전화기도 잊었다. 지금은 다시 기억이 났지만, 그런 것처럼 내가 잊은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 거다. 그런 것들을 내가 본다고 해서 지금처럼 기억이 돌아오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학교는 다음에 가요. 선배 좀 나아지면.”

“어? 아, 나 지금 아무렇지도…….”

“병원에서도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요. 밖에 나갔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나 지금 아픈 데 없는데……. 두통이 좀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걱정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차마 계속 학교에 가야겠다는 소리는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씻고 오세요, 아침 차리고 있을게요. 재료가 별로 없어서 그러는데 스크램블드에그랑 토스트 괜찮아요?”

“어, 응. 그냥 아무거나…….”

“점심땐 선배가 좋아하는 거 만들어 드릴게요.”

“어? 어, 그래.”

지나치게 다정하고 친절해서 그런지 조금 거북스러워졌다. 하지만 대놓고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원래 저런 성격인가. 아니면 내가 환자라서 더 신경을 써 주고 있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게이고, 정우진도 게이라서 우리가 무슨 사이기라도 한 건가.

씨발, 모르겠다. 머리 아파.

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섰다. 정우진은 날 욕실 앞까지 데려다줬다. 정말 내가 큰 병에 걸린 환자가 된 것 같았다.

“갈아입을 옷은 앞에 둘게요.”

“어, 고맙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욕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태연하게 웃었다.

“머리 다 뻗쳤어요.”

“…….”

“귀여워서요.”

“…….”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정우진도 좀 민망했던지 손을 거두고 다시 웃었다.

“씻고 나오세요.”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계처럼 문을 닫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

너무 이상하다. 정말 이상했다. 계속 느끼는 거지만 정우진은 내 상식 밖의 행동을 계속 반복했다. 이게 끝일 거라고 생각하면 그다음에는 더 이상한 행동을 했고, 이번에는 진짜 끝일 것이라 생각하면 그다음에는 더욱더 이상한 행동을 했다.

이번에 했던 짓거리도 마찬가지였다.

귀여워? 미쳤나? 내가 귀엽다고? 어떤 학교 후배가 선배한테 귀엽다는 소리를 해? 그것도 같은 남자끼리, 자고 일어난 모습을 보면서.

“허.”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정말 게이야? 내가? 정우진도? 내가 왜? 내가 왜 게이야? 언제부터? 난 왜 게이가 된 거지? 도대체 언제부터, 왜? 같은 남자를 내가 좋아했다고?

믿을 수가 없다.

이건 말도 안 돼.

“미친, 씨발…….”

나는 욕실 벽을 잡고 비틀거렸다.

아니, 아직 속단하기엔 이르다. 씻고 나가서 밥을 먹으면서 넌지시 물어봐야겠다. 아닐 수도 있어. 그냥 정우진이 좀 특출 난 걸 수도……. 원래 그런 성격일 수도 있잖아.

친절하고 다정하고 배려 넘치고 초면인 사람에게도 십년지기 친구처럼 행동하는 그런 사람.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은 거울을 보니 한쪽으로 머리가 뻗치고 수염이 듬성듬성 난 얼굴이 보였다.

“…….”

진짜 제정신인가? 좋게 생각해 보려고 해도 도저히 무리였다. 귀엽다고? 이게? 술 마신 거 아닐까?

심각한 얼굴로 거울 속의 나를 노려보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면도나 좀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면도기를 찾는데, 눈에 닿는 곳을 아무리 찾아봐도 아무 데도 보이지가 않았다.

첫 번째 캐비닛을 열자 새하얀 수건이 차곡차곡 단정하게 개어져 있었다. 그 옆의 캐비닛을 열자 전기면도기와 1회용 면도기가 담겨 있는 작은 박스가 보였다.

전기면도기는 당연히 정우진이 쓰는 것일 테니 개별 포장이 되어 있는 1회용 면도기 하나를 뜯어 옆에 두고 비누 거품을 내어 얼굴에 치덕치덕 발랐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대충 슥슥 팔을 움직이고 있는데 턱이 따끔거렸다.

거울을 자세히 보자 비누 거품 사이로 시뻘건 피가 비쳤다. 나는 혀를 차며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아니, 물을 틀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갑자기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이상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마치 물속에 돌멩이 하나를 던져 파문이 일어난 듯 울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턱 끝에 맺힌 핏방울이 물에 번져 나가듯 내 주변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설마 지금 헛것을 보고 있나? 눈을 질끈 감았다가 숨을 몇 번 내쉬고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하…….”

다행인지 조금 전에 보이던 건 사라지고 없었다. 너무 피곤했던 걸까? 그런 일을 겪었으니 스트레스가 심했던 걸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렇게 헛것을 본 적은 없었는데.

거울 속에 조금 긴장한 표정의 나를 가만히 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어.”

피가…….

“어…….”

세면대에 피가 수돗물처럼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들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거울 속의 내가 시뻘건 핏물에 잠겨 보이지가 않았다.

그리고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천장에서 빗물처럼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얗기만 했던 욕실 타일이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고, 날카로운 이명이 귀를 찌르기 시작했다.

“윽…….”

다리가 꺾여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나는 필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막아도 비명 같은 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너무 아프고 추워서…….

어? 춥다고?

왜 추운 거지?

갑자기 든 의문에 고개를 들자 조금 전 보았고 들었던 것들이 모두 거짓말인 듯 멀쩡한 욕실이 보였다. 어둡지도 않고 천장에서는 핏물이 떨어지고 있지도 않았다. 멍청한 얼굴로 허공을 보던 나는 뒤늦게 내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이거 진짜 심각한 거 아닌가? 환각에 환청에……. 다시 병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형!’

잠시 숨을 고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 쪽에서 선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 뒤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정우진이 나를 부른 건가 싶어 조금 더 기다렸지만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정우진?”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불러 봤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정우진은 나를 형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진짜 상황이 심각한 게 맞는 듯했다. 빨리 대충 씻고 병원에 다시 가 봐야겠다는 생각에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몸이 너무 무거워 이대로 쓰러져 잠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조금 전 무릎을 짚었던 손이었다. 또 왜 이런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고 손바닥을 쫙 펴서 봤지만 조금 젖어 있는 거 말고는 멀쩡했다.

근데 왜 이렇게 욱신거리지?

의문을 가지는 순간 갑자기 멀쩡했던 손바닥이 아가리가 벌어지듯 쫘악 찢어지더니 토하는 것처럼 피거품을 줄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으아악!”

바닥으로 철퍽철퍽 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온몸이 피에 젖기 시작했다. 살색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야말로 피로 칠갑이 된 상태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피를 닦아 내려고 해 봤지만 닦아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닦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끈적하게 내 몸에 붙어서 살갗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대로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얼마나 빠르게 뛰는지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목구멍에 걸리는 것 같았다. 너무 두렵고 무섭고 추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쾅 하고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나를 구해 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젖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정우진이 서 있었다.

“선배?”

“오, 오지 마.”

정우진의 몸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내게 다가오는 걸음걸음마다 발밑으로 피가 줄줄 흘렀다. 그리고 이윽고 피로 범벅이 된 손이 내게 뻗어졌다. 나는 기겁하며 고함을 지르고 발버둥 쳤지만 정우진은 끝내 나를 붙잡았다. 내가 휘두르는 손에 맞고 살에서 피가 맺힐 정도로 할퀴어지고 머리카락이 당겨져도 날 꽉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선배, 괜찮아요. 나예요. 우진이요. 선배.”

“헉, 허억…….”

“선배.”

멀리서 들리던 소리가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정우진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니 얼음물을 맞은 것처럼 조금씩 머리가 차가워졌다.

귀에서 자꾸 시끄럽게 들려오던 비명 소리인지, 나를 부르는 소리인지, 알 수 없던 것도 더 이상 고막을 찌르지 않았다. 손바닥에서 피 분수가 뿜어져 나오지도 않았고 욕실은 깨끗했다.

그리고 정우진도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피, 피가…….”

“피요? 이런, 씨발. 턱이 왜 그래요? 베였어요?”

정우진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뺨을 잡더니 실금처럼 희미하게 상처가 난 턱 끝을 빤히 바라봤다. 일그러져 있는 하얀 미간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갑자기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이 빠지고 힘이 없어서 쓰러지듯 정우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닿은 곳이 움찔하고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정우진은 곧 다정한 손길로 내 머리를 살짝 감싸 안더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 왜 그래요? 많이 아파요? 어디가 아픈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 죽을 것 같은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는 게 거짓말인 듯 조금씩 안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생생하게 느꼈던 공포와 육체적인 고통은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심장이, 핏줄이, 온몸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전부 미쳐 날뛰면서 나를 죽일 것 같던 그 두려움이…….

내가 몸을 웅크리자 정우진이 날 더욱 꽉 끌어안았다.

“병원 가 볼래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병원도 가 보기는 해야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잠시 망설이자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정우진이 내 정수리에 턱을 대고 아기 어르듯 말했다.

“아니면 지금은 좀 쉬었다가 나중에 가 볼래요? 내일 가도 되고요.”

“…….”

속삭이듯 낮고 다정하게 말하는 소리에 별안간 의미 모를 서러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입 밖으로 우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꽉 깨물자 반사적으로 몸이 떨려 왔다.

분명 내가 울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텐데도 정우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왜 우냐고,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묻지도 않았다. 그저 떨어지지 않고 가만히 나를 안아 주기만 했다.

나는 내게 닿은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파고들었다. 어깨에 얼굴을 묻자 눈가에 있던 물기가 정우진의 옷깃을 축축하게 적셨다. 한참 그러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눈물도 멎고 조금씩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안정이 되었다는 걸 정우진도 느꼈는지 유리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더니 얼굴에 묻어 있던 비누 거품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됐어, 내가 할게.”

얼굴을 틀어 살짝 피하며 말했지만 정우진이 내 뒷목을 단단히 잡고 놔주질 않았다.

“선배 얼굴 지금 엄청 창백해요. 힘도 없잖아요. 가만히 계세요, 제가 해 드릴게요.”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정우진이 따뜻한 물을 묻힌 손으로 내 눈가를 몇 번 닦아 주었다. 힘이 없는 것도 사실이라 그냥 정승처럼 가만히 눈을 감고 서 있자 커다란 손이 이마와 눈가, 뺨을 지나 턱을 쓸었다. 조금 전에 베여서 그런지 살짝 따끔했지만 아픔은 금방 사라졌다.

정우진은 대충 내 얼굴만 훑어 닦더니 씻는 건 나중에 하는 게 낫겠다며 내 무릎 뒤로 손을 넣더니 번쩍 안아 들었다. 이렇게 들린 건 처음이라 잠시 당황하는 사이 금방 욕실을 나와 침대에 눕혀졌다.

“선배.”

정우진은 침대에 똑바로 누운 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속눈썹에 닿자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 눈꺼풀 위로 따뜻한 게 닿았다가 떨어질 때까지 나는 멍청이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머리 위로 물음표를 열 개쯤 띄우고 눈을 뜨자 정우진이 코앞에서 보였다.

“지금은 좀 괜찮아요?”

“…….”

뭐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정우진 어깨에 얼굴을 처박고 운 것도 모자라, 공주님처럼 안겨서 침대에 눕혀지고 눈두덩에 뽀뽀까지 당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서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자 정우진이 내 옆에 눕더니 빈틈없이 날 꽉 끌어안았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안 물어볼게요. 무서우면 말 안 해도 괜찮아요.”

정우진은 연신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 말이 마치 주문 같았다.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그라들기 시작했지만 혼란스러운 건 여전했다. 내가 진정이 됐다는 걸 느낀 건지 정우진이 슬쩍 몸을 떼어 내고 날 쳐다봤다. 끈적거리는 시선이 내 턱 끝에 닿았다. 정우진은 고개를 숙여 상처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가느다란 생채기를 길게 핥았다.

“…….”

“…….”

턱을 핥던 혀가 아랫입술에 닿을 때까지도 나는 장승처럼 뻣뻣하게 굳어서 움직이질 못했다. 아랫입술 언저리에서 망설이듯 주춤거리며 꼼지락대던 혀가 떨어져 나갔다.

“내일부턴 제가 면도해 드릴게요.”

“…….”

“또 상처 나면 안 되니까.”

말을 끝마친 정우진이 엄지로 내 입술을 건드렸다. 나는 멍청하게 정우진을 보다가 팔을 들어 그의 손을 쳐 냈다.

“아까부터 자꾸…….”

하지만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정우진이 손쉽게 내 손목을 낚아챘다. 뿌리치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고 잡은 손을 놔주지도 않았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정우진이 강한 힘으로 날 끌어당겨 안았다. 강제로 품에 안기게 된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정우진이 내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속상하니까 다치지 마세요.”

“이거 좀 놔.”

다시 한번 밀어내며 고개를 들자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까만 눈과 눈이 마주쳤다. 걱정스러운 눈빛이기는 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허허벌판에서 배고픈 짐승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네?”

정우진이 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재촉했다. 나는 숨을 마시고, 내뱉었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중에 약 발라 줄게요.”

“…….”

얼어 있는 나를 다시 안아 주며 정우진이 웃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정우진은 당황스럽다 못해 혼란스러울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말들과 스킨십을 반복했다. 나는 바보처럼 한마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상황을 넘겨 버렸다.

그만 좀 하라고 말하고 싶어도 막상 그런 상황이 되면 몸이 굳어 버렸다. 나도 이유는 몰랐다. 그냥 정우진이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으면 배고픈 뱀 앞의 쥐새끼처럼 몸과 머리가 마비되어 버렸다.

그래도 나는 정우진이 조금씩 괜찮아질 줄 알았다. 지금은 내가 아픈 게 사실이고, 얼마 전에는 욕실에서 그 사달까지 났으니 그냥 좀 과하게 나를 걱정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어떤 정신 나간 남자 후배가 남자 선배 걱정된다고 눈두덩이에 뽀뽀하고 턱을 핥겠느냐마는, 그 정도로 나는 좋게 생각해 보려고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이건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난다고 정우진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름 끼치도록 느끼한 말들은 그 빈도가 더 잦아지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스킨십도 점점 대담해졌다.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밖으로 나가든 뭘 하든 좀 해서 기억을 빨리 되찾고 싶은데, 정우진은 위험하다는 말 한마디로 날 막아섰다. 그렇게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일주일이 지난 것이다.

물론 그때까지 정우진도 나와 마찬가지로 한 발자국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 가끔 그의 핸드폰이 미친 것처럼 울려 댔지만 그럴 때마다 정우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원을 꺼 버렸다.

“입에 묻었어요.”

정우진이 해 준 밥을 먹으며 그간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고 있는데,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내 입가 쪽으로 망설임도 없이 다가오는 그의 손길을 고개를 틀어 슬쩍 피하며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야.”

허공에 멈춘 손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쉬운 듯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흙을 씹은 것처럼 이상한 표정으로 그런 정우진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 내가 계속 말하려다가 못 했는데…….”

“네?”

“……그러니까, 그게.”

천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말간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가슴이 쿡쿡 쑤셨다. 정우진이 과한 건 사실이지만 친절한 것도 사실이었다. 내게 잘 대해 주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솔직히 이건 누가 봐도 이상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세상에 어떤 후배가! 그것도 우린 같은 남자인데! 스스럼없이 만지고 막 입술을 들이밀고 끌어안고 그러냐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갑자기 소름이 돋아서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그런 날 보며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무해함을 있는 힘껏 어필하는 똥강아지 같은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저런 모습에 속아서 지금까지 내가 계속 말하지 못하고 망설였던 것이다.

게다가 정우진은 내가 제정신일 땐 절대 손을 잡는 것 외에 다른 접촉은 하지 않았다. 꼭 내가 잠결이거나, 아니면 기억나지도 않는 악몽을 꿔서 비몽사몽 정신이 없을 때만 날 만졌다. 그러니 매번 말할 기회를 놓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너 혹시 형제나 뭐……. 아무튼 그런 거 있어?”

“형제요? 아니, 없어요.”

“아, 그럼 외동?”

“네.”

“그래? 음, 그럼 부모님이랑 많이 친하겠네. 보통 외동이면 부모님이랑 되게 친하지 않냐?”

사족이 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다짜고짜 씨발,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자꾸 쓰다듬는다거나 이상하게 만지지 좀 마, 이 새끼야. 이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분위기도 이상해질 거고, 사이도 어색해질 거 같고…….

“친하냐고요?”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두어 번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보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친해요.”

“아……. 그렇구나.”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나는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친한 게 맞다고 하면 부모님이 어렸을 때 널 많이 안아 줬나 보구나, 따위의 말을 하면서 그래서 너도 누굴 만지는데 거리낌이 없냐고 다시 물으려고 했는데.

낭패감이 깃든 내 표정을 본 정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아니, 그냥…….”

내가 다시 망설이자 정우진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더니 갑자기 변명하듯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부모님이랑 정말 안 친해요. 저 친한 사람 아무도 없어요. 선배 말고 다른 사람이랑 말도 잘 안 해요. 정말이에요.”

“……?”

갑자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미간을 와락 구겼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저 친구도 없어요.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고…….”

“아……. 그, 그래.”

“진짠데…….”

정우진이 말꼬리를 흐리며 믿어 달라는 듯 호소했다. 원치 않게 정우진이 왕따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뭐라고 위로를 해 줘야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 얼른 말을 돌렸다.

“아니, 나는……. 네가 하도 손잡고 그런 걸 좋아하는 거 같길래.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네 손을 많이 잡아 줬구나 싶어서……. 그래서 물어봤던 거야.”

횡설수설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정우진이 정색을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강아지처럼 날 바라보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싶어서 잠시 당황하는 사이, 정우진이 서릿발처럼 차가워진 눈으로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말했다.

“내가 손잡는 거 싫어요?”

“…….”

싫지, 씨발……. 너 같으면 시커먼 사내새끼가 덥석덥석 손을 잡는데 좋겠냐? 나는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거북, 아니 어색해서 그러지.”

하마터면 거북하다는 말이 나올 뻔했다. 물론 거북한 게 사실이고 싫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돌려서 되도록이면 정우진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말하고 싶었다.

정우진이 나쁜 뜻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지나면 익숙해질 거예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진이 웃으며 말했다. 정색하던 조금 전의 얼굴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 분위기가 천지 차이였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환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나는 하마터면 아, 그래 하고 수긍할 뻔했다.

“뭔 소리야, 그게?”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하잖아요.”

“뭐?”

“아직 같이 산 지 며칠밖에 안 지나서 어색한 거예요. 앞으로 조금만 더 지나면 지금보다는 익숙해져 있지 않을까요?”

논리적인 척 진지하게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숨이 턱 막혔다.

“그…… 내가 지금 좀 혼란스러워서 그런데……. 혹시 내가 기억을 잘못하고 있나 싶어서 물어보는 거야. 별다른 뜻은 없고.”

내가 더듬더듬 말하자 정우진이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혹시 게이였냐?”

잔뜩 긴장해서 물었지만 정우진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짧은 대답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그, 그럼 넌?”

“저도 아니에요.”

“그럼 우린 둘 다 멀쩡한 이성애자라는 거지?”

“그럴걸요.”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그럴 거라는 건 또 뭐야? 그게 좀 걸렸지만 어쨌든 내가 게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좋아하기엔 일렀다.

“그, 근데 내가 왜 네 스킨십에 적응해야 되는데?”

이렇게 물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이 상황에 적절한 질문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거야.”

내가 잔뜩 긴장한 채 숨을 삼키자 말을 하려던 정우진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 뒤의 대답을 기다리느라 정우진의 입술만 빤히 쳐다봤다. 그때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올리자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입가를 쓸었다.

“내가 계속할 거니까.”

“…….”

아주 짧지만 강경한 목소리였다.

이해를 하지 못하고 멍하게 굳어 있는 나를 보던 정우진이 조금 전 내 입가를 쓸었던 엄지를 자기 아랫입술에 문지르더니 혀를 내밀어 핥았다. 그 모든 일들은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내게는 마치 천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조금 전에 입에 뭐 묻었다고 했던 정우진의 말이 천둥 치듯 떠오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아니, 씨발……. 정신이 어떻게 됐나? 그걸 왜 처먹어?

“밥 먹고 산책이라도 할까요? 계속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잖아요.”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행동에 당황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

이걸 하나부터 열까지 따지려면……. 내 입술에 묻어 있던 밥풀을 왜 네 손가락으로 찍어서 처먹었냐고 물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결국 하는 수 없이 평소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어영부영 상황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씨발.

“……밖에 나가자고?”

“선배가 싫으면 계속 집에 있어도 돼요.”

“아니, 나갈래. 좀 나가야겠다.”

정우진이 먼저 밖에 나가자는 소리를 한 건 처음이었다. 일단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면서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그럼 뭔가 잃었던 기억이라든가……. 그런 게 좀 떠오르지 않을까?

그리고 이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상황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우리가 게이도 아닌데 정우진은 나한테 왜 이러는 것이며, 내가 왜 정우진이 하는 이 말도 안 되는 밥풀 뜯어 먹는 행동에 익숙해져야 하는지……. 그런 여러 가지 것들 말이다.

“옷 사러 갈까요?”

“옷?”

답답한 상황에 뒷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옷은 갑자기 무슨 옷이야?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정우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선배 지금 술 마신 거 같아요. 자꾸 했던 말 또 물어보네.”

“…….”

“옷도 사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영화도 볼까요?”

“……아니, 그런 건 됐고……. 내가 살던 집에 좀 가 보고 싶은데.”

이대로 뒀다가는 정우진이 또 느끼한 말을 쏟아 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다급하게 말을 돌렸지만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 나는 내가 원래 살던 집에 가 보고 싶었다.

내 말에 정우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그러시든가요.”

“나 혼자 가도 돼.”

“그건 안 돼요. 또 발작이라도 일어나면 어떡해요?”

발작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좀 과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발작이 맞기는 맞는 것 같았다. 가끔이기는 했지만 헛것이 보이고 환청이 들리기도 했고, 일어나면 기억나지 않는 악몽을 꿔서 울기도 했으니까.

집으로 의사 선생님이 왔을 때도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돌려서 말하기는 했지만 공황이라고 한 걸 보면 확실히 발작이 맞기는 했다.

역시 혼자 가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턱을 괴고 살짝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선배 집에서 잘래요?”

“나 혼자?”

“아니, 같이요. 집 보고 거기서 하루 정도는 자고 와도 괜찮지 않을까요? 뭔가 기억이 날 수도 있고.”

그것도 좋은 방법이기는 했다. 근데 그럼 나 혼자 자도 되지 않나……. 꼭 같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 좀 이상해서 혼자 속으로 의아해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식탁 위에 아예 엎드려 나를 올려다보며 아이처럼 웃었다.

“선배랑 선배 집에서 같이 자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그게 오늘 이뤄지겠네요.”

“…….”

소풍 가는 어린애 같은 표정을 보고 있자니 차마 속에 있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선배 집에서 선배랑 같이 자다니.”

그때 정우진이 다시 눈꼬리를 접으며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기대에 찬 얼굴을 보니 갑자기 목덜미에서부터 얼굴까지 소름이 오스스 돋아나기 시작했다.

“야, 넌……. 말투나 말하는 게 좀…… 행동도…….”

주먹을 꽉 쥐며 더듬더듬 말하자 정우진이 무해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왜요?”

“……닭살 돋아, 이 새끼야. 적당히 좀 해.”

“뭐가요?”

“몰라서 묻냐? 계속…….”

나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정우진이 내게 했던 행동과 말들을 그대로 읊어 주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였다. 말하다 말고 소름 끼쳐서 죽을지도 몰랐다.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됐고, 빨리 밥이나 처먹어.”

에휴, 씨발. 됐다, 됐어. 나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요새 환청에, 환각에 자꾸 이상한 꿈도 꿔서 머리 아픈데 굳이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게이가 아니고, 정우진도 게이가 아니니 그냥 쟨 원래 저런 앤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했다. 그냥 좀 도가 지나치다 싶을 땐 그때 하지 말라고 하면 되겠지.

* * *

밥을 다 먹고 현관문 밖으로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집 밖으로 나오니 갑자기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가? 또 발작인가?

“선배, 왜 그래요?”

“내가 뭐?”

나는 처음 집 밖으로 나와 세상과 마주한 새끼 동물 같은 꼴로 주변을 경계하면서 차에 올라탔다. 애써 태연한 척하려 했는데 정우진은 내가 이상하다는 걸 진작 알아차린 것 같았다. 차에 타서도 내가 계속 긴장을 풀지 못하자 신호가 걸려 차가 섰을 때, 정우진이 완전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

“난 신호등도 기억하지 못했어.”

처음 이곳에 나왔을 때 노란불이 있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전화기도, 그리고 도어 록도.”

“지금은 다 기억하잖아요.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

그렇게 당연했던 것들을 잃어버렸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일이었다. 이러다가 혹시라도, 아주 혹시라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전화기도 모르고 도어 록도 모르고 신호등도 몰랐던 나로 계속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걸까? 운이 좋아서 전화기나 신호등 같은 것들은 금방 떠올랐는데…….

“정우진.”

“그냥 우진이라고 부르세요.”

정우진이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키며 얼핏 웃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의 옆얼굴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이 됐는데 정우진이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니까 정말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라도 익숙한 간판이나 길목이 있는지 살피면서 정우진의 옆모습도 한참 쳐다봤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냥 시선을 돌리다가 보여서 봤을 뿐이다.

그러고 얼마 뒤, 정우진이 무릎 위에 있는 내 손등에 제 손을 겹치며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그 자연스러운 행동에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슬쩍 손을 빼냈다. 그러자 정우진의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웃어?”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핸들을 잡은 손 위로 얼굴을 기댄 채 나를 보며 눈웃음을 쳤다.

“선배가 쳐다봐 주는 게 좋아서요.”

“뭐?”

“선배가 날 그렇게 필사적으로 쳐다본 적이 없었거든요.”

필사적?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다시 웃었다.

“매일 나만 그랬지, 선배가 이런 건 처음이에요.”

“…….”

저거 또 존나 느끼한 말 같은데…….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 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모르는 거 있으면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지 말고 꼭 저한테 물어보세요.”

“어, 어. 그래.”

뭔가 좀 민망하고 불편해서 대충 대답하는데 정우진이 또 이상한 소리를 했다.

“다른 사람한테 모르는 거 물어볼 때도 그렇게 쳐다볼 거 아니에요.”

“…….”

“그러니까 저한테만 물어보세요. 알겠죠? 아, 선배. 저기예요. 선배가 살던 원룸.”

나도 모르게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있다가 정우진이 하는 소리에 허리를 펴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오르막 골목길 중간에 낯설고 작고 허름해 보이는 건물 하나가 보였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정우진의 뒤를 따라 걸었다. 기억을 잃기 전 내가 살던 동네였을 텐데도 낯설기만 했다. 기억나는 것도 없고 낯익은 풍경도 하나 없었다.

그때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왜 그렇게 뒤에서 걸어요?”

“…….”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기억날 거예요.”

정우진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날 달랬다. 그 목소리에 또다시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나는 그의 손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 잡고 있던 손을 놨다.

“왜 그래요?”

“아니, 아. 저쪽으로 들어가면 돼?”

나는 정우진보다 앞서 걸으며 말했다.

그동안 정우진이 하는 행동에 너무 익숙해진 것 같았다. 밖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손을 잡다니.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 2층에 도착해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구석의 어느 문 앞에 도착하자 정우진이 익숙한 듯 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따라 쭈뼛쭈뼛 들어가자 지나칠 정도로 작은 내부가 보였다. 작은 싱크대와 작은 냉장고, 그리고 컴퓨터 책상, 옷 몇 개가 걸려 있는 행거가 전부였다.

“깨끗하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며 내가 중얼거리자 정우진이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선배가 언제 올지 몰라서 계속 치워 두라고 했어요.”

“치워? 누구한테?”

“가사 도우미요.”

“아.”

침대도 없고 의자 하나도 없어서 맨바닥에 어색하게 앉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정우진이 구석에 반듯하게 개어져 있는 이불을 바닥에 넓게 펴며 말했다.

“안 피곤해요? 좀 누울래요?”

“됐어, 괜찮아.”

이불 하나 펴니까 방 안이 가득 찼다. 마치 방석처럼 바닥에 이불을 깔고 다시 앉자 정우진이 내 옆에 앉았다. 아니, 근데 왜 이렇게 바짝 붙어 앉아? 방이 좁은 건 사실이지만 두 사람이 앉을 자리는 충분한데 왜 이렇게…….

불편해서 한마디 하려는데 정우진이 갑자기 아, 하고 일어서더니 냉장고를 열었다.

“먹을 게 하나도 없네요.”

그럴 만도 했다. 사람도 없는 집에 먹을 게 있는 게 이상하지.

“물도 없는데 나가서 좀 사올까요?”

그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냥 가자.”

“네?”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정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서 뭐 할 것도 없고……. 기억도 안 나. 처음 와 보는 것처럼 어색하기만 하고.”

말 그대로였다. 여기가 정말 내가 살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하기만 했다. 이곳에 있어 봤자 아무 소득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집에 갈래요?”

정우진이 바닥에 깔아 놨던 이불을 다시 반듯하게 접으며 물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학교에 가 보자.”

“학교요? 지금?”

“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그래요. 지금 갈까요?”

대답하는 대신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문을 닫기 전에 다시 한번 더 방 안을 천천히 살폈다.

하지만 역시나 기억나는 게 도무지 없었다. 나는 미련 없이 현관문을 닫으며 조용한 계단을 내려왔다.

“이러다 영영 기억이 안 돌아오면 어쩌지.”

건물을 나와 다시 차에 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정우진이 내게 안전벨트를 채워 주며 말했다.

“그땐 제가 책임질게요.”

그 말에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가 날 왜 책임져?”

어이없다는 듯 피식거리자 정우진이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정말이에요.”

내가 장난인 줄 알고 웃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빈말인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웃기는 새끼였다.

부드럽게 출발하는 차에 몸을 맡기고 등을 기댔다. 허름한 건물 벽에 ‘새마을 원룸’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그걸 가만히 보다가 속으로 몇 번이나 이름을 되뇌었다.

새마을 원룸.

새마을 원룸.

새마을 원룸.

“…….”

역시나 기억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몇 번이나 이름을 말해도 입에 붙지도 않고 낯설기만 했다. 직접 와서 보기까지 했는데 이렇게까지 전혀 기억나지 않을 수가 있나?

분명 저 집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텔레비전도 보면서 뒹굴뒹굴하기도 했을 텐데……. 어떻게 그런 게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나는 고아라고 했으니까 분명 저 집 계약도 내가 했을 것이다.

집을 알아보고 계약서에 이름이랑 주민 등록 번호도 쓰고, 도장도 찍고…….

“…….”

착잡한 마음으로 하나씩 차근차근 떠올리다가 나는 불현듯 든 생각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바라봤다.

운전을 하고 있던 정우진이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의아한 표정으로 힐끗 나를 쳐다봤다.

“왜요? 어디 불편해요?”

그 물음에도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입만 벌리고 있었다.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정우진이 조금 심각해진 표정으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완전히 내 쪽으로 돌린 뒤 나를 불렀다.

“선배.”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이대로 뒀다가는 울 것 같은 표정이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두어 번 눈을 깜빡인 뒤에 숨을 삼켰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이 뭐냐?”

“네?”

“내 이름. 내 이름이 뭐냐고.”

“…….”

황망한 내 목소리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이 가득했던 정우진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커다래졌다. 정우진도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인 듯했다.

커다란 검은색 눈을 몇 번이나 껌뻑거리는 걸 보며 결국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내뱉자 정우진이 눈알을 굴리다가 더듬더듬 물었다.

“모르세요?”

“응,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럼 그걸 왜 지금 물어보세요?”

“그러니까……. 어디 이름 쓸 일도 없었고, 너도 계속 날 선배라고만 부르니까…….”

변명하듯 주절주절 떠들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너도 모르는 거 아니야?”

“저는 당연히 알죠.”

뭐 이상한 걸 물어보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되물었다.

“뭔데?”

“네?”

“뭐냐고, 내 이름.”

“…….”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말한 것치고는 대답이 금방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보면서 잠깐 더 기다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우진?”

“우진이라고 부르세요.”

“내 이름 뭐냐고.”

“…….”

“……?”

다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푹 숙이는 정우진을 보며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 저래? 내가 뭐 못 물어볼 거 물어봤나? 그냥 이름 물어본 건데. 그것도 다른 사람 이름도 아니고 내 이름 물어본 건데 왜 저래?

“너 내 이름 모르지?”

그게 아니고서는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내가 다시 눈을 가늘게 뜨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정우진이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올려 나를 쳐다봤다. 마치 잔뜩 심통이 난 어린애 같은 표정이었다.

“알아요.”

“근데 왜 말을 안 해?”

“그냥…….”

그냥? 그냥 뭐?

암만 기다려도 뒷말을 이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미간을 구기고 가만히 정우진을 쳐다봤다.

밀가루처럼 희던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고, 꾹 다물린 입술은 토라진 애처럼 고집스럽게 휘었다. 마치 날 원망하듯 쳐다보는 검은색 눈동자는 축축하게 젖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

“…….”

아니……. 씨발, 이건 무슨 볼드모트도 아니고……. 이름 좀 물어본 게 그렇게 잘못인가?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환장할 것 같던 그때 정우진이 제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으며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서주…….”

“뭐?”

뭔 소린지 제대로 듣지를 못해서 되묻자 혈색이 도는 것처럼 양 뺨만 조금 붉었던 얼굴이 점점 열꽃이 번져 나가듯 과하게 벌게지기 시작했다. 얼굴부터 시작해서 눈가, 귀, 그리고 목까지 피가 날 것처럼 빨개진 정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주…….”

조금 전보다는 약간 커진 목소리였다.

“서주.”

이번에는 그것보다도 약간 더.

“강서주.”

“…….”

그리고 완전히 또렷해진 발음에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정우진은 여전히 금방 터질 폭탄처럼 빨갛고 축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서주.”

“…….”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다시 말했다.

그냥 이름이 생각 안 나서 물어본 건데 어쩌다가 이런 분위기가 됐을까? 내 이름 물어본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었나?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요상해진 분위기에 나는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도 못했다. 그리고 정우진이 다시 내 이름을 부르려고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그 집요한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강서주. 알았어.”

“…….”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우진은 그 뒤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완전히 돌려 창밖을 보고 있는데도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차가 출발했다. 나는 미친 것처럼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아니, 씨발……. 이름 물어본 게 잘못인가? 대체 왜 저래? 저게 무슨 반응이냐고.

나는 몸을 완전히 차 문 쪽에 밀착시킨 뒤 코끝에 닿을 정도로 창문에 바짝 붙었다. 조금 전 정우진이 나를 쳐다보면서 내 이름을 부르던 얼굴이 눈에 박혀서 사라지지가 않았다.

속으로 씨발씨발을 외치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쳐다봤다. 그리고 운전을 하고 있는 옆얼굴을 본 나는 다시 휙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아직도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 있었다.

으악, 씨발! 저 새끼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괜히 나까지 이상한 기분이 들잖아!

눈을 질끈 감고 창문에 이마를 쿵 가볍게 박는데, 작게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나도 모르게 다시 휙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얼굴이 붉기는 했지만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정우진이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멍하게 그 모습을 보다가 나는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앉았다. 그래, 씨발.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그냥 다른 사람 이름 말하기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한 명쯤 있을 수도 있지.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가만히 앉아서 눈만 깜박거렸고,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 * *

학교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건 캠퍼스를 돌아보는 일이었다.

“선배, 여기서 자주 밥 먹었어요.”

자주 밥을 먹었다던 식당을 가 보고.

“아, 여기도 기억 안 나요? 여기서 오전에 교양 들었잖아요. 근데 늦잠을 좀 많이 자서 자주 들었던 건 아닌데…….”

강의실도 가 보고.

“이 복도도 생각 안 나요?”

자주 걸었던 복도나 길목도 가 보았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선배는 혼자 다니는 거 좋아해서 그렇게 친한 친구도 별로 없었어요. 사실 학교도 잘 안 나오기는 했는데…….”

이런저런 설명을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돌아다녀 보고 이야기를 들어도 조금 전 원룸에서 느꼈던 것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도,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여전히 너무 낯설고, 불편하고, 생소했다.

“아, 선배. 저기는 기억나요?”

“…….”

정우진이 잔디가 깔린 광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하지만 열심히 말해 주는 정우진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떠오르는 게 아예 없었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자 정우진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벤치에 앉혔다.

“여기서 잠시 쉬고 계세요. 마실 것 좀 사 올게요. 뭐 마실래요?”

“그래.”

내가 힘없이 대답하자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손을 한 번 잡았다 놨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 꼭 있어야 해요. 말도 없이 없어지면 저 화낼 거예요.”

“알았다니까. 난 아이스아메리카노 샷 두 개 추가해서. 시럽 넣지 말고.”

“…….”

“왜?”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입을 다물고 있던 정우진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울상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커피 사려면 좀 나가야 되는데……. 그냥 자판기에서 뽑아 오면 안 돼요?”

“그럴 거면 뭐 먹을 건지 왜 물어봤냐?”

“그럼 저랑 같이 가요.”

“다리가 너무 아파서 그렇게는 못 해 주겠다.”

내가 엄살을 부리듯 다리를 툭툭 치며 말하자 정우진이 다시 입술을 내밀고 날 쳐다봤다. 내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자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팔뚝을 잡았다.

“그럼 집에 가는 길에 사 줄게요. 지금 가요.”

“아, 진짜. 야, 넌 커피 한 잔 사 오는 게 그렇게 힘드냐? 됐다, 됐어. 안 먹고 만다.”

“그게 아니라…….”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리던 정우진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럼 제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해요.”

그러더니 물가에 내놓은 아이 대하듯 주의 사항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누가 말 걸면 그냥 무시해요. 친한 척해도 그냥 무시하고. 이 학교 모토가 모든 학생은 내 친구, 뭐 이런 거라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막 아는 척하고 그런단 말이에요.”

“알았다고. 넌 내가 무슨…….”

“누가 맛있는 거 사 준다고 해도…….”

“야!”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정우진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몇 번이고 뒤돌아 날 쳐다봤다. 빨리 가라는 듯 내가 손을 휘휘 젓자 정우진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날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전력 질주로 뛰기 시작했다. 빠르게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황당한 마음뿐이었다.

쟨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여기가 전쟁터 한복판도 아니고.

벤치에 등을 기댄 채 시퍼런 하늘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조금 전 정우진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시뻘겋게 변했던 게 떠올랐다. 그것도 그렇고, 지금 이것도 그렇고 진짜 이상한 새끼였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하늘을 노려보고 있는데,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본 사람이 날 보며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뭐야, 너? 네가 여기 왜 있어?”

“…….”

“너 요새 학교도 안 나오고 전화도 안 받고, 이 새끼가!”

남자는 들고 있던 책을 벤치 위에 내팽개치며 내게 고함을 질렀다. 정우진의 말대로 이 학교 모토가 그런 거라도 저건 분명 날 아는 태도였다.

“아니, 그것보다 국문과 새끼가 여긴 왜 있어? 너 오늘 수업 없냐?”

“…….”

“이 새끼가 입에 꿀을 발랐나. 그러고 보니까 살도 좀 빠진 것 같고…….”

“누구세요?”

“뭐?”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서자 남자의 표정이 차게 굳었다. 그는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걸 보더니 주먹을 꽉 쥐고 내 어깨를 퍽퍽 쳤다.

“이 새끼가 돌았나. 누구세요? 뭔 헛소리야, 씨발! 됐고, 빨리 내 노트북이나 가져와, 인마!”

“네?”

“내가 너 내 노트북 들고 토끼면 네 새끼 모가지를 비틀어 버린다고 분명……!”

여전히 계속 어깨를 얻어맞고 있었지만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눈만 깜빡거리다가 슬쩍 몸을 틀어 주먹을 피하며 물었다.

“저 아세요?”

“뭐? 이 새끼가 무슨…….”

내 말에 말꼬리를 흐리던 남자의 낯이 점점 흙빛으로 변해 갔다.

“야.”

“네?”

“이 새끼 더위를 처먹었나, 너 진짜 왜 그래?”

“아니, 그게……. 사실 제가 지금 기억이…….”

“씨발! 너 내 노트북 고장 낸 거냐, 설마? 박살 났어? 그래서 지금 모른 척하는 거지!”

“네? 아니…….”

“이 씨발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멀쩡한 집 버리고 이사 갔단 소리 들었을 때부터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 으아아악!”

갑자기 발광하는 남자를 가만히 보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껴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데, 놈이 덥석 내 멱살을 잡았다.

“내가 네 새끼 집에 갔을 때 웬 아저씨가 나와서 얼마나 개식겁을 했는데!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저, 저기, 쿨럭! 야, 이것 좀 놓고……. 야, 씨발! 이거 놓으라고!”

“이 씨발놈아, 내 노트북 물어내! 아직 할부도 안 끝났단 말이야!”

“김갑돌 씨발, 이거 놓으라고 개새끼야!”

내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그제야 놈이 내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더니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할부도 안 끝난 노트북 타령을 계속 해 댔다.

멱살이 잡히면서 목이 졸려서 그런지 자꾸 마른기침이 나와 몇 번 더 기침을 하다가 한숨을 내쉬는데, 타령을 끝낸 남자가 도끼눈을 뜨고 날 노려봤다.

“야, 너 내 노트북 어쩔 거야?”

“노트북이고 나발이고 제가 지금 기억을…….”

“그리고 내가! 갑돌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한 음절씩 끊어 소리치는 남자를 보며 나는 그제야 뒤늦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떠올라서 말한 건데, 이름이 김갑돌인가?

“선배!”

그때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들고 있던 커피를 내팽개치고 내게 달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바닥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다 쏟아진 커피를 보며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내 커피, 씨발……. 목말라 죽겠는데 저건 왜 버리고 오는 거냐고.

허망한 표정으로 바닥에 버려진 커피를 바라보고 있는데, 다급하게 달려온 정우진이 내 손목을 거세게 잡고 날 자기 뒤로 숨기다시피 했다.

“정우진?”

그 강경한 행동에 나는 커피에서 눈을 떼고 의아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뭡니까?”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차가운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슬쩍 잡힌 손목에 힘을 줘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정우진은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더욱 세게 내 손목을 잡았다. 결국 포기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둘이 아는 사이야?”

“뭐?”

“선배, 제가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내 질문에 갑돌이는 당황했고, 정우진은 화를 냈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갑돌이가 정우진에게 붙잡혀 있는 내 손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을 더듬었다.

“야, 너 정우진이랑은 언제부터 알던 사이였냐?”

언제부터 알던 사이였냐니?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서 의아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쳐다봤다. 나와 갑돌이의 시선을 동시에 받게 된 정우진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노트북 얘기 하는 것 같던데 그게 문제면 새 걸로 보내 드릴게요.”

“뭐? 아니, 네가 왜……. 잠깐, 야. 얘 뭐야?”

갑돌이는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다가 이내 내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고, 나 역시 날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에 그에게 뭐라 말하려 했지만 정우진이 그런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저희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뭐? 아니, 잠…….”

“김갑수 씨.”

“뭐?”

“노트북은 오늘 내로 자택으로 보내 드리겠다고요.”

“뭐, 이 새끼야?”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김갑수라고 하니까 좀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저 이름을 알고 있긴 한 거 같은데, 갑수라는 이름보다는 차라리 갑돌이가 더 익숙했다. 별명이라 자주 불러서 그런가?

어쨌든 갑돌인지 갑순지 저놈은 내 친구가 분명했다. 다른 얘기도 좀 해 보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분위기가 너무 이상해서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선배, 가요.”

“야, 야! 너 거기 안 서? 야!”

나는 정우진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힐끗 뒤를 돌아봤다. 갑돌이가 벌게진 얼굴로 악을 써 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점점 멀어지는 갑돌이만 바라봤다. 정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보지 마.”

“뭐?”

그때 정우진이 걸음을 멈추고 내 턱을 붙잡아 제 쪽으로 휙 돌렸다. 턱주가리가 부서질 것처럼 아파 왔다. 하지만 내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손에 힘이 풀렸다. 화를 낼 타이밍을 놓쳐서 잔뜩 인상만 쓰고 있는데, 정우진이 다시 내 손목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갑돌이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내 친구 아니야? 아는 사이인 것 같던데. 근데 너 왜 이렇게 화를…….”

“모르는 사람 맞잖아요. 선배, 지금 저 사람 누군지 알아요?”

“그건 아닌데, 그래도…….”

“그럼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게 뭔 소리야, 씨발. 단호하게 하는 말에 나는 황당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기억을 잃은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아는 사람은 정우진뿐이었다. 그 말대로라면 나는 정우진 외에 그 어떤 사람과도 말하지 못한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몰라도 갑돌이는 날 알고 있잖아.”

멀리서 조금 전 주차해 놓은 시커먼 차가 보였다. 정우진은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무작정 날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거친 손길에 짜증이 치솟았지만 여기서 실랑이를 하기도 뭣해서 일단 얌전히 차에 탔다.

내가 의자에 앉자 정우진이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화들짝 놀라서 어깨를 움츠리는 사이 정우진이 내 옆에 앉아 차 문을 잠갔다. 그리고 시위하는 어린애처럼 운전대 위로 엎어졌다.

그 황당한 작태에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잠시 속으로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도 정우진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찡그린 눈으로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야.”

뭔가 이상함을 느껴 슬쩍 정우진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려 봤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이놈이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야, 정우진.”

“선배.”

정우진이 슬쩍 고개를 틀어 날 쳐다봤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가려 겨우 눈동자가 보였다.

“그냥 우진이라고 부르라니까.”

“…….”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지 마세요. 선배가 기억 잃은 걸 알고 아는 척 접근해서 나쁜 짓 하려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네가 아까 갑돌이한테 김갑수 씨라고 불렀잖아. 그럼 우리 셋 다 아는 사이 아니야?”

정황상 보면 그랬다. 갑돌이는 나와 정우진을 알고, 정우진도 갑돌이를 알고 있었다. 그럼 당연히 기억을 잃기 전에 나도 갑돌이랑 아는 사이인 거 아니야? 갑돌이가 말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정우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집으로 가요.”

“정우진!”

답답한 마음에 고함을 지르듯 이름을 부르자 부드럽게 앞으로 나가던 차가 덜컹 급정거했다. 화들짝 놀라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가는 걸 정우진이 재빨리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잡아 줬다. 내가 얼빠진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우진아.”

“…….”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뛰었다. 내 어깨를 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숨도 쉬지 않고 눈만 부릅뜨고 있는 날 보며 정우진이 다시 말했다.

“우진아.”

“……우진아.”

내가 숨을 토해 내며 그의 말을 따라 하자 정우진이 다정하게 웃었다.

“네, 선배. 집에 가서 얘기해요.”

“…….”

날 등받이에 기대게 하고 안전벨트까지 채워 준 정우진이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너무 많았지만 조금 전 정우진이 날 보면서 웃던 얼굴이 좀 이상해서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괜히 또 입을 열었다가 이번에는 도로 한복판에서 차가 급정거할지도 몰랐다.

결국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우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 *

띠릭,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그의 눈치를 보며 느리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정우진이 조금 지쳐 보이는 얼굴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커피를 깜빡했네.”

“…….”

“금방 내릴게요, 잠시만요.”

주방 쪽으로 사라지는 정우진의 뒷모습을 보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쉰 후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정우진, 이름을 부르려다 멈칫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낮게 헛기침을 하고 그를 불렀다.

“우진아.”

“네.”

내가 작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정우진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정우진이나 우진이나 그게 그거지 도대체 뭐가 그렇게 차이가 난다고…….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김갑수 씨가 누군데?”

“…….”

“내 친구 맞지? 친구가 아니라도 어쨌든 아는 사람은 아는 사람이잖아.”

캡슐 커피를 든 채 정우진이 멀거니 날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미간을 좁히자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고 있던 걸 내려놓더니 내게 다가왔다.

“김갑수 씨랑 선배가 아는 사이긴 해요.”

이럴 줄 알았다. 사실 정우진에게 굳이 듣지 않아도 그 사람이 나와 안면이 있던 사이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내가 굳이 정우진에게 물었던 건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나는 들끓는 화를 삭이고 차분하게 물었다.

“근데 아까 왜 그렇게 왔어? 날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렇게 오면 어떡해?”

“선배.”

“뭐라도 대화를 해 봐야 내 기억이 돌아오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선배.”

“뭐? 선배, 뭐? 말을 해, 자꾸 부르지만 말고!”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 날 부르기만 했던 정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에요.”

“뭐?”

그리고 들려오는 이상한 말에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잠시 입을 다물자 정우진이 말을 이었다.

“아는 사이라고 무조건 만나서 대화할 거면 선배가 작년에 잡은 소매치기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서로 인사시켜 줄까요?”

“…….”

태연한 표정으로 묻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듣다 보니 정우진이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갑돌이가 설마 소매치기였나? 아니면 뭐 사이가 안 좋았다거나…….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뒷목을 긁적이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에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럼 너 아까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지 말라고 한 건 무슨 뜻인데? 내가 지금 아는 게 너밖에 없는데 그럼 나더러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은 말도 하지 말라는 거냐?”

“그럼 좋긴 하겠지만 선배가 답답하니까 굳이 그러진 않으셔도 돼요. 대신 저한테 먼저 꼭 말해야 돼요.”

그럼 좋긴 하겠다는 말에 머리 위로 물음표를 수백 개 띄우다가 물었다.

“뭘? 그 사람이 나랑 아는 사인지 아닌지?”

좀 황당하고 귀찮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긴 했다. 정우진 말대로 세상에 좋은 관계만 있는 것도 아니고, 기억을 잃은 걸 알고 나쁜 마음을 먹고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좀 비약적인 면이 있는 듯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알았다고 대답하려는 그때,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태연스레 말했다.

“그건 당연한 거고, 무슨 말을 할지 말하라는 거예요.”

“……?”

저게 도대체 무슨 개소리야.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진지하게 말했다.

“선배가 저한테 말해 주면 제가 대신 전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

“그게 아니면 며칠 뒤에 핸드폰 사 드릴 테니까 문자로 얘기하는 것도 좋고요. 저한테 먼저 보여 주기만 하면.”

“…….”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몇 번이나 되새기다가 그제야 저놈이 내게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았다. 그래도 나는 혹시나 하고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으면 너한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들었던 말을 내 나름대로 요약해서 묻자 정우진이 뻔뻔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듯 말했다.

“허락이라니요? 그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할지 저한테 알려 달라는 거예요. 아니면 선배가 저한테 말해 주면 제가 대신 말을 해 줘도 되고요.”

정우진은 그게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내가 듣기에는 그게 그거였다. 도대체 둘이 다른 게 뭐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라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헛소리야? 너 그거 진심이냐?”

“네.”

“…….”

생각이라는 걸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정우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대답했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내가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요? 선배는 싫어요?”

저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머릿속이 백지 상태가 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냐면 말했던 대로 나는 지금 너무 황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멀뚱멀뚱 정우진을 보다가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짧게 물었다.

“왜?”

“네?”

“내가 왜 너한테 그래야 되는데?”

그렇다. 이게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다.

왜? 내가 도대체 왜?

내가 왜 정우진한테 의처증 있는 아내에게 핸드폰 검사를 받는 남편처럼 굴어야 한단 말인가? 왜?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이 어이없는 상황을 만들어 낸 정우진은 태평하기만 했다. 얼마나 태평했냐면, 분명 이상한 건 정우진인데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그런 태평함이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하늘을 가리키며 당당하게 저건 땅이라고 했고, 나는 당연히 저건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고 했다. 하지만 하늘을 땅이라고 한 놈이 나를 너무 이상한 별세계 등신 천치처럼 쳐다보면 순간 헷갈리는 것이다.

저게 땅이었나……? 하고.

지금 내 상태가 그랬다.

그런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는데 정우진이 하늘을 보고 땅이라고 하는 인간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궁금하니까요.”

“…….”

“대신 저도 다 보여 줄게요. 문자도 통화 목록도 그리고 어디 사는 누구랑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그런 거요.”

“…….”

나는 내가 입을 벌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뒤늦게 깨달으며 입을 다물고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정우진이 말을 하면 할수록 어이가 나가서 자꾸만 자기 멋대로 입이 벌어졌다.

“저 일할 땐 일하는 거 처음부터 끝까지 다 녹화해서 올 수도 있어요. 선배가 원하면 일할 때뿐만 아니라 하루 24시간 다 녹화할 수도 있고요. 전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선배는 좀 힘들 수도 있으니까 그런 것까진 안 바랄게요. 그러니까 우선 기억 좀 찾을 때까지라도 제 말대로 해 주세요.”

내가 기억을 되찾는 거랑 내 사생활을 정우진에게 보고하고 허락받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여기에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애원하듯 날 쳐다보는 정우진의 표정은 충분히 불쌍하고 가여워 보였지만, 순간 사기꾼처럼 보여서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건 나도 모르게 일어난, 거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선배, 기억 찾을 때까지만.”

내가 뒤로 물러서자 정우진이 슬쩍 시선을 내려 내 발치를 내려다봤다. 그 자리에 동상처럼 서서 내 발 끝만 보던 정우진이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다시 시선을 올려 날 쳐다봤다.

“나 걱정하다 죽어요.”

“……걱정이라고?”

입을 열자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내가 흠칫 몸을 떨자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와 내 볼을 감쌌다.

“열이 좀 나네. 밖에 얼마나 있었다고 열이 나요. 일단 이리 오세요.”

“잠깐, 야. 정우…….”

“…….”

“…….”

정우진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날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칼날처럼 따가웠다. 나는 빠르게 정정했다.

“우진아.”

“네.”

“……난 네가 참 고맙긴 한데, 가끔 부담스러워서 죽을 거 같다.”

나는 결국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행태를 정우진이 말하는 것처럼 걱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람마다 걱정하는 방식이 다르듯……. 그런 게 아닐까, 하고…….

그게 아니라면 이런 것들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정우진의 걱정들은 가끔……. 아니, 가끔이 아니라 꽤 자주 부담을 넘어서 소름이 끼칠 때가 많았지만……. 어쨌든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부담스럽고 종종 소름 돋는 언행들이 정우진 나름대로의 걱정이라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부담 갖지 마세요. 다 어렸을 때 선배가 저한테 해 준 것들이니까.”

혼자 납득해 보려고 하다가 또 멈칫했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이었다.

“뭐? 내가? 어렸을 때? 너한테? 내가 이런 걸 너한테 해 줬다고? 문자 보낼 때 검사받으라고, 뭐 이딴 짓거리를?”

내가 흥분하면서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우다다 뱉어 내자 정우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비슷해요.”

“…….”

그 말에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이었나……. 내가 아무래도……. 미친놈이었나 보다…….

충격에 빠져 있는 나를 보며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한동안 밖에는 못 나가겠어요. 오늘은 좀 늦었고, 내일 의사를 부를게요. 다른 데 아픈 곳은 없어요?”

“…….”

“선배, 못 걷겠어요? 제가 안을까요?”

정우진이 금방이라도 날 들쳐 안을 것만 같아서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손사래 쳤다.

“아니, 내가 걸을 수 있어.”

갑자기 기억을 찾기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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