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설었다.
“어디 불편한 데 없어요?”
창밖을 보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봤다. 그는 자신을 정우진이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바로 말하세요.”
“네.”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그가 손을 뻗어 내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한 손으론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론 내 손을 잡고 있는 걸 어색한 눈으로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새빨간 신호등을 보며 긴장했다. 빨간 신호등이 노랗게 변했다가 다시 초록색으로 변했다.
어?
“윽.”
“선배?”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호등이 왜 노랗지? 빨간 거랑 초록색만 있는 거 아니었나? 노란색도 있었나? 날카로운 이명이 귀를 파고들어 골을 뒤흔들었다. 아파 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숨을 삼키고 있는데 그가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이제 다 왔어요. 조금만 참으세요.”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의사와 저 사람은 내가 기억 상실증이라고 했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그런 것도 같았다. 우선 기억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언어라든가, 그런 건 별 이상이 없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조금씩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예를 들면 아까 그 신호등처럼.
“신호등이…….”
“네?”
“노란색이네요.”
신호에 걸려 잠시 정차를 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노란색은 정지하라는 신호 같은 거예요.”
단정한 그의 얼굴을 보며 설명을 듣고 있자니 조금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그래, 신호등에는 노란색도 있었던 거 같다. 아니, 있었다.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맞아, 그랬었다. 나는 대단한 무언가라도 깨달은 사람처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도 그랬다. 벽에 붙어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뭔가를 보며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그렇게 기괴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놀라서 저게 무엇이냐고 하자 그가 지금처럼 차분하게 그것은 시계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그게 시계라는 게 떠올랐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니, 사람이 시계를 모르는 게 말이 되나? 따지고 보면 나는 모르는 게 아니라 원래 알고 있었는데 잠깐 잊은 것뿐이긴 하지만……. 그땐 그냥 너무 정신이 없어서 넘어갔는데 밖에 나와서까지 이러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엄청 어려운 단어나 원래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시계나 신호등 노란불처럼 아주 기본적인 것도 기억하지 못하다니…….
나는 의사의 말대로 정말 기억 상실증에 걸린 환자였다.
내가 누구인지, 내 가족은 어디에 있고, 넌 누구고, 그리고 우린 지금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머리가 아파서 관뒀다. 그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꿈속에서 너무 춥고 두려웠는데, 이 사람이 나를 불러서 나는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내가 악몽을 꾸고 있었다는 건 당연히 몰랐겠지만 우연이라도 어쨌든 도움을 받아서 그런지…….
“어…….”
“왜요? 또 머리 아파요?”
“아니, 괜찮아요.”
꿈을 꿨었나? 무슨 꿈을 꿨었지? 생각을 하려고 하니 다시 관자놀이 쪽이 지끈거렸다. 꿈은 꿀일 뿐이니 대단히 중요한 것도 아닐 것이다. 나는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고개를 돌려 운전을 하고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내가 눈을 뜰 때 가장 먼저 보인 사람이니, 어쩌면 그가 내 보호자일지도 몰랐다.
정우진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사람은 친분이 있어 보이는 것 같은 의사와 한참을 얘기하더니 다정하게 웃는 얼굴로 내게 집에 가자고 했다. 그것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딱히 묻지 않았고.
깊게 생각하려고만 하면 머리가 아파 와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거듭 말했다시피 저 사람이 내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계속 들렸던 울음도 이 남자가 우는 소리였던 건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자 더욱 마음이 놓였다. 나 때문에 우는 사람이 나한테 이상한 짓을 할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그런 것보다 이 이상한 세상에 적응하고 기억을 되찾는 게 우선이었다. 당황스러운 건 여전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숨을 가다듬었다. 가슴을 가로질러 단단히 채워진 안전벨트를 꼭 부여잡고 연신 심호흡을 하자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서워요?”
“네?”
“혹시 무서우면 말하세요. 더 천천히 운전할게요.”
그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남자를 한참 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잔뜩 긴장해서 몰랐는데 뒤차들이 우리 차를 앞질러 가면서 화가 난 표정으로 가운뎃손가락을 세우는 게 보였다.
왜 저러지? 당황해서 어깨를 움츠리는데 그가 다시 물었다.
“괜찮아요?”
“아, 네…….”
어색한 표정으로 다시 앞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어딘가에 도착했다. 낯선 풍경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가는데, 그가 갑자기 문고리 위의 뚜껑을 열었다. 내가 화들짝 놀라자 그가 날 보며 말했다.
“도어 록이에요.”
흠칫 놀라는 날 보며 그가 다정한 얼굴로 웃으며 말해 줬다. 하지만 시계나 신호등과는 달리 이름을 들어도 그게 뭔지 떠오르지 않았다. 난감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번호 누르면 문이 열려요.”
그게 뭐야……. 나는 충격 받은 표정으로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그러자 그가 보라는 듯 천천히 번호를 눌렀다. 1208.
“선배 생일이요.”
선배?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날 선배라고 불렀던 것 같았다. 혹시 학교 후밴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문을 열어 날 안으로 들여보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그가 날 붙잡았다.
“신발 벗고 들어가야 돼요.”
“아, 그건…….”
그건 안다고 말하려 하는데 그가 허리를 굽혀 내 신발을 벗겼다. 그러더니 털이 북실북실한 신발을 다시 신겼다.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서까지 신발을 벗기고 신겨 주는 행동에 놀라 당황하고 있는데, 그가 날 올려다보며 웃었다.
“이건 거실 슬리퍼.”
“…….”
거실 슬리퍼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내가 지금 놀란 건 이게 뭔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라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아파서 이맛살을 찌푸리는데 그가 몸을 일으키더니 손을 뻗어 내 이마를 감쌌다. 나는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의 옷깃을 쥐고 물었다.
“우리가 어떤 관계입니까?”
“네?”
“아니, 그러니까…….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인지 몰라서……. 아까 선배라고 하던데 혹시 학교 후배나 뭐 그런 건가 싶어서…….”
횡설수설 말하면서도 뭔가 이상했다. 저 사람이 날 선배라고 부르는 거라면 우리가 가족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 주는 거지? 보통 학교 후배가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기억 상실증에 걸린 선배의 수발을 들어 주나? 신발도 신겨 주고 벗겨 주고 그러면서?
날 빤히 쳐다보는 그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슬쩍 시선을 피하는데, 정우진이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아프지 않게, 조심스럽게 깍지를 낀 채 내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서늘한 손등이 입술이 닿았던 곳을 기점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건 따라오기 전에 물어보세요.”
“…….”
그 말에 순식간에 등 뒤로 땀이 찼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뒷걸음치려고 하던 찰나, 손등 위로 뜨뜻미지근한 게 떨어졌다. 뚝, 떨어져 미끄러지는 건 눈물이었다. 고개를 든 남자가 날 보며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정말 이상한 표정이었다.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
조용한 와중에 어째서인지 조금 전 그가 애처럼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 귓가를 시끄럽게 울리는 환청에 숨이 턱 막혀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그게 무슨…….”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더듬더듬 말하자 남자가 다시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젖은 눈동자 속에 상처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소리가 없는 울음이었다.
그는 내 손을 부여잡고 어깨를 떨며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쓰러질 듯하면서도 쓰러지지 않았고, 당장에라도 소리를 낼 것 같으면서도 그러지 않았다. 내 손을 잡은 손이 하얗게 질려 떨리고 있었다.
뼈마디가 도드라질 정도로 힘을 주고 있는데, 붙잡힌 손은 아프지 않았다.
“…….”
소리 없이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고,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참을 우왕좌왕하다가 반대쪽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슬며시 쥐었다. 내 손이 닿자 그의 커다란 몸이 흠칫 몸을 떨렸다.
남자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자, 희게 질린 얼굴이 엉망으로 젖어 있는 게 보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 좀 하시고…….”
그런 건 따라오기 전에 물어보라고 했을 땐 좀 겁이 나기도 했는데 이렇게 우는 걸 보니 이상하게 또 경계가 풀렸다. 병원에서 처음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에게는 경계심이 들지 않았다.
단지 나는 지금 내가 처한 이 상황이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내가 어설프게 두어 번 어깨를 토닥거리자 그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우물우물 말했다.
“어디 아픈 곳은 없어요? 병원에서는 이제 괜찮다고 했는데……. 기억은 차츰차츰 돌아올 거래요.”
“아…….”
“……운이 없으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요.”
잘못한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말하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그런 모습들이 이상하게 너무 불쌍해 보였다. 불쌍하고, 굉장히 추워 보였다. 아픈 건 난데, 지금 기억 상실증에 걸린 환자는 난데, 왜 저 사람이 우는 거지?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라며? 근데 왜 울어?
나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기억은 나중에 차차 돌아오겠죠. 근데 이름이 정우진이라고 했었죠?”
“…….”
“……그, 제가 뭐라고 불러야 됩니까? 정우진 씨?”
그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곤 했지만 우린 일단 아는 사이이긴 한 것 같았다. 아예 모르는 사이라면 그가 날 선배라고 부를 리도 없었고, 날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올 리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모르는 사람을 보고 이렇게 펑펑 울 리는 더더욱 없었다. 혹시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서로 싸우기라도 했던 걸까?
“정우진 씨라고 부르면 돼요?”
“…….”
“……저기요?”
그는 도무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입을 꾹 다물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대체 왜 저렇게 우는 거지? 일단 통성명은 나중에 하고, 달래 줘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그가 어깨를 움츠렸다. 또 이렇게 혼나는 애 같은 반응이었다.
그 이상한 반응에 내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더듬더듬 말했다.
“우진이요.”
드디어 열린 입에 얼른 되물었다.
“우진이라고 부르면 돼요?”
“네, 말 놓으셔도 괜찮아요.”
그 말에 나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편하게 말했다.
“아, 그럼 우진아. 넌 몇 살이야? 난 몇 살인데? 선배라고 하는 거 보니까 내가 너보다 나이 많은 것 같긴 한데……. 나 혹시 학생이야? 근데 내 이름은…….”
나는 주절주절 물으며 주변을 살폈다. 커다랗게 넓은 집은 지나치게 깔끔했다. 아니, 깔끔하다는 말보다는 휑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네, 대학…….”
삐리리리. 삐리리.
“헉!”
그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찢어질 듯한 고음이 들려왔다. 내가 기겁하며 놀라자 그 역시 화들짝 놀라 날 쳐다봤다. 그러더니 소리가 난 쪽으로 뛰어가 손을 휘둘렀다. 탁자 위에 있던 뭔가가 콰장창,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부서졌다.
이 모든 일이 불과 단 몇 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죄, 죄송해요.”
“…….”
소리가 나던 정체불명의 기계는 이미 명을 달리한 듯싶었다. 저렇게 부숴도 되는 건가?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뭐야?”
“전화기요…….”
“어?”
내가 되묻자 그가 허둥지둥 떨어진 전화기를 주워 들었다. 그러더니 다급하게 그걸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나보다 훨씬 더 당황한 것처럼 보이는 정우진을 멀뚱멀뚱 보다가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전화기가 뭔데?”
“그게……. 목소리 들을 수 있는 거…….”
“목소리?”
“그러니까 통화할 수 있는 건데…….”
더듬더듬 말하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나는 푸핫 웃어 버렸다. 필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모습이 너무 웃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화기도 기억하지 못해서 저게 뭐냐고 묻는 내가 웃기기도 했다. 그냥 이 모든 상황들이 너무 이상하고 황당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던 모습이 다시 떠올라 풉 하고 웃다가 결국 터져 버려서 혼자 끅끅거리고 있는데, 순간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너무 웃어서 혹시 화났나? 슬며시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
“…….”
정우진은 놀랍게도 울고 있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턱 끝에 맺혔다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혹시 잘못 봤나 싶어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리다가 당황해서 물었다.
“왜 울어?”
“선배가…….”
“억!”
그때 정우진이 나를 덮치듯 끌어안았다. 중심이 무너져 기우뚱 뒤로 넘어가 마치 정우진이 날 덮치는 듯한 자세가 됐다. 뒤로 넘어갔는데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내 머리와 허리를 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우진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조금 전 소리 없이 울던 것과는 달리 애처럼 울기 시작했다. 엉엉, 소리 내어 커다랗게 계속 울기만 했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다 큰 사람이 이런 소리로 이렇게 크게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왜 우냐고 차마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말없이 정우진의 등을 어색한 손길로 토닥거렸다.
* * *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정우진은 도무지 진정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우는 애를 달래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기억을 잃었으니 그 전에는 있었을지는 몰라도 당장 떠오르는 기억 속에는 없었다.
그냥 등만 두드려 주면 되는 건가? 왜 우냐고 물어도 대답도 안 하고……. 연약하게 떨리고 있는 등을 천천히 두드려 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슬슬 울음을 그치게 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배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꼬르륵.
그건 내 배에서 난 소리였다.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대성통곡을 하던 정우진이 뭔가에 감전된 듯 파드득 떨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얼른 말했다.
“그만 좀 울고 밥 좀 먹자. 뭐 먹을 거 없냐?”
“죄, 죄송……. 잠깐만…….”
정우진은 잔뜩 젖어서 당황한 얼굴로 허둥댔다. 급히 주방으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쟨 정말 이상했다. 툭하면 나한테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고 지나칠 정도로 내 눈치를 보면서 내 비위를 맞추려 들고 있었다.
다급하게 프라이팬을 꺼내고 냉장고를 여는 정우진을 보다가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우진아.”
내 부름에 정우진의 어깨가 다시 들썩였다. 그러더니 마치 건전지가 다 떨어진 로봇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아까 울어서 그런지 눈가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네…….”
거기다가 목소리도 완전 잠겨서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금방이라도 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에 나는 잠깐 앓는 소리를 내다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너 혹시 내 시다바리 그런 건 아니었지?”
“…….”
“왜 그렇게 벌벌 떨면서 내 눈치를…….”
당연히 아니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정우진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기만 했다. 나는 점점 사색이 되고 있는 하얀 얼굴을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정우진 못지않게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설마설마하며 물었다.
“……진짜냐?”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
정우진은 뒤늦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이제 와서 저래 봤자 의심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갑자기 뒷골이 당겨서 잠시 비틀거리자 정우진이 화들짝 놀라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무거운 숨을 내뱉고 다시 물었다.
“나 뭐 하는 사람이었냐?”
설마 조폭이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학생이요.”
“학생?”
“대학생이요.”
“그럼 너는?”
“저도…….”
맞지? 학생 맞는 거지? 그래, 아까도 학생이라고 했으니까 학생이 틀림없어. 조폭이나 조폭 아들내미 같은 것일 리가 없지. 근데 쟨 왜 저렇게 빌빌거리는 거야, 도대체? 혹시 왕따였나? 정우진은 왕따고, 난 주모자 같은 뭐 그런 거? 아니면 내가 학교에서 선배랍시고 막 군기 잡고 그랬나?
머릿속으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니 절망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다시 말했다.
“진짜 아니에요. 그냥 제가 너무 놀라서…….”
“기억 상실증에 걸린 건 난데, 왜 네가 나보다 더 놀라?”
“……죄송해요. 이제 안 놀랄게요.”
“뭐?”
그 조심스러운 말에 나는 아까보다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놀라는 걸 뭐라고 한 게 아니라 그저 궁금해서 물었던 것뿐이다. 근데 정우진은 말끝마다 죄송하다고 하면서 이젠 그러지 않겠다고 하니 덩달아 나까지 불편해졌다.
영문도 모른 채 계속 사과를 받고 있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지 않은가? 갑자기 급격하게 불편해져서 주춤거리자 정우진이 조금 전보다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선배.”
슬쩍 시선을 들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런 적이 없어서,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변명하듯 하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 하고 입을 열었다.
“아, 그렇지.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내가 당황스러운 만큼 정우진도 당황해서 저러는가 보다. 그의 말대로 이런 건 쉽게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게 소설이나 드라마도 아니고 기억 상실증에 걸려서 전화기 보고 저게 뭐냐고 놀라는 사람을 현실에서 보면 막막할 만도 했다.
머리 아픈 생각은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아무튼 내가 뭐 도와줄 건 없냐?”
뒷목을 긁적이며 말하자 정우진이 엄청난 기세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제가 할게요. 그냥 앉아 계세요. 잠깐만, 편한 옷으로 갖다 드릴게요.”
후다닥 주방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나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냥 벽인 줄 알았는데 정우진이 옆으로 밀자 그 안엔 옷방처럼 보이는 커다란 공간이 있었다.
마치 백화점에 진열해 놓은 상품처럼 색깔, 종류별로 말끔하고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혼자 사는 거 아닌가? 무슨 옷이 이렇게 많아? 조금 놀란 눈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물었다.
“근데 난 몇 살이야?”
“스물일곱이요.”
“넌?”
“네? 저요? 아, 저는 스물다섯 살이고 키랑 몸무게는…….”
정우진이 묻지도 않은 걸 주절주절 떠들면서 뭔가를 찾고 있는 건지, 개어져 있는 옷을 휙휙 뒤로 던지고 있었다. 멀끔했던 옷방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정우진은 자신의 신상에 대해 이력서 쓰듯 읊고 있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정우진의 어깨를 잡고 뒤로 당겼다.
“야, 너 왜 그렇게 어질러? 비켜 봐, 그냥 내가 찾아 입을게.”
“아……. 제가 금방 다 치울게요. 죄송해요.”
“아니,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도 떠들던 정우진이 금방 시무룩해져서 내 눈치를 보며 떨어진 옷을 주워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하려다가 그냥 입고 있던 셔츠를 벗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들 중 아무거나 대충 주웠다.
그리고 품이 넉넉해 보이는 흰색 티셔츠를 입으려는데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내 상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이자 왼쪽 어깨와 가슴 중간쯤에 상처가 난 게 보였다. 하지만 아픈 것도 아니었고 이미 아물고 있는 상처였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티를 얼굴에 껴 넣으며 말했다.
“근데 너랑 난 무슨 사이야, 진짜? 그냥 학교 선후배 사인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한 건 거짓말 같았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정우진이 이렇게까지 날 챙겨 줄 리도 없었고, 이렇게까지 친절할 리도 없었다. 옷을 다 입고 아까 입고 있던 셔츠를 주워 드는데 정우진이 내 손에서 셔츠를 가져갔다.
“네, 선후배……. 맞는 거 같아요.”
“그래? 근데 왜 아깐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어? 나 사고 나기 전에 싸우기라도 했냐? 그리고 난 가족은 없어? 병원에 며칠이나 있었다며? 아무도 안 왔어? 근데 난 어쩌다 기억을 잃은 거지? 아, 맞다. 그리고 내 이름은 또 뭐…….”
내 속사포 같은 질문에도 정우진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날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시커먼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축축하게 젖어 가는 눈가를 보며 나는 아차 싶어 얼른 그의 손목을 잡고 옷방을 빠져나왔다.
“일단 밥 먹고 얘기하자.”
여기서 정우진이 또 울면 언제 그칠지 모른다. 주방에 도착해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자 축축하게 젖었던 눈가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식탁 의자에 앉아 정우진이 뭔가를 만들고 있는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울보네.”
“네?”
“아무것도 아니야.”
스물다섯 살이면 어린 것도 아닌데 왜 툭하면 울고 지랄이야? 사람 곤란하게……. 내가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 뭐가 어찌 됐든 걸핏하면 저렇게 우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나는 턱을 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정우진은 우리가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고 했지만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우린 꽤나 많이 친했다는 것이다. 날 대하는 행동이나 바라보는 눈빛이나 그런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대체 왜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모차렐라 치즈를 듬뿍 얹은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왔다. 배가 고파서 잘 먹겠다는 말도 하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볶음밥을 퍼먹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우선 학교 문제는 제가 해결할 테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선배는 그냥 여기서 편하게 지내시면 돼요.”
오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억 상실증에 걸렸는데 학교 나가기엔 좀 문제가 있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선배는 똑똑하니까 기억도 금방 돌아올 거고, 잊어버린 단어 같은 것들도 금방 배울 수 있어요.”
똑똑한 거랑 기억이 빨리 돌아오는 게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거 진짜 맛있다. 내가 지금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이기는 했지만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김치볶음밥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더 드실래요?”
5분도 되지 않아 바닥을 보인 그릇을 보며 정우진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더 있어?”
“네.”
정우진이 프라이팬을 식탁에 가져와 덜어 주려고 하려는 걸 나는 그냥 프라이팬째로 밥을 퍼먹었다. 그런 날 가만히 보던 정우진이 내가 기억을 잃기 전의 상황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난 고아라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고아원에 살아서 부모도 없고 친척도, 형제도 없단다. 정우진은 내가 혹시 기분 나빠하기라도 할까 봐 엄청나게 내 눈치를 보며 말했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고아라면 가족이 없는 게 당연하겠지. 거기다 내가 미성년자도 아니고 사지 멀쩡한 성인이니,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럼 우리 집은 어딘데?”
입에 있는 걸 삼키고 묻자 정우진이 손을 뻗었다. 그러곤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얹어져 있는 내 손을 잡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같이 살면 안 돼요?”
“…….”
예상치도 못한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내 손을 잡고 있는 정우진의 커다랗고 하얀 손을 멀뚱멀뚱 보기만 했다. 방금 새삼스럽게 깨달은 게 있는데, 정우진은 이상할 정도로 내게 접촉이 많았다.
손을 잡거나, 날 안거나,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오늘 하루만 대체 몇 번이나 이랬는지 모르겠다. 조금 어색했지만 원래 저런 앤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거기다 난 지금 환자니까 내가 불쌍해 보여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저랑 같이 살아요. 혼자 있으면 위험할 수도 있고…….”
나는 슬그머니 잡힌 손을 빼내며 뒷목을 긁적거렸다. 당연히 거절해야 하는데 저 뜬금없는 말이 너무 고마웠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아무런 기억도 없고 가족도 친척도 형제도 없는 고아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정우진밖에 없었다.
혼자 살려면 못 살 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나를 아는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었다. 물론 금방 다시 떠오르긴 했지만 전화기나 신호등, 시계 같은 것도 기억하지 못했던 걸 떠올리면 심리적인 문제를 떠나 안전을 위해서라도 혼자 있는 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저 말에 덥석 알겠다고 하자니 눈치도 보이고 좀 미안하기도 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넌 혼자 살아?”
“네, 저 혼자 살아요. 그리고 저 돈도 되게 많아요.”
“어? 아, 그, 그러냐? 좋겠네.”
“선배가 필요한 거 제가 다 살게요.”
갑자기 돈이 많다고 하는 말에 당황해서 혀를 씹을 뻔했다. 그리고 내가 필요한 걸 왜 자기가 다 사겠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네가 그걸 왜 사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나왔지만 도로 삼켰다. 그때 정우진이 다시 내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저랑 같이 살아요. 네?”
“…….”
“같이 살아 주세요…….”
정우진이 불쌍한 얼굴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 처연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나야 좋기는 한데…….”
“같이 살아 줄 거예요?”
“어…….”
말꼬리를 흐리며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데 계속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부탁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근데 왜 쟤가 나한테 같이 살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걸까? 누가 보면 이 집이 내 집이고 빈대 붙겠다는 사람이 정우진인 줄 알겠다.
아니면 혹시 내가 혼자 살다가 무슨 사고라도 칠까 봐 겁이 나서 저러는 건가? 아니면 내가 불쌍해서?
“너도 학생이라고 했지?”
“휴학했어요.”
“아……. 그래. 음, 아무튼 고맙다. 대충 며칠 있다가 나도 집에 갈 테니까 그동안 잘 부탁…….”
“네? 집이요?”
“어?”
그냥 학교 선후배 사이인데 계속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한 말인데, 정우진이 시무룩하게 되물었다.
“저랑 같이 있는 거 싫어요?”
“뭐?”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같이 있는 게 싫냐니? 그 질문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거지? 나는 희게 질린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넌 밥 안 먹냐?”
“네?”
“너 잠은 언제 자고 안 잤어?”
가만 보니까 저거, 얼굴이 저렇게 이상할 정도로 창백했던 건 계속 울어서이기도 했지만 자지도, 먹지도 않아서 그런 것 같았다. 몸엔 힘도 없었고, 눈 밑도 시커멓고, 딱 봐도 내가 아니라 정우진이 병자 같았다.
어쩐지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하고 자꾸 불안한 강아지처럼 치대는 게 이상하다 싶었더니……. 사람이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해지면 딴 사람처럼 성격이 바뀔 수도 있는 법이었다.
나도 새벽 알바 다니면서 학교 다닐 땐 엄청 예민해져 있었는데…….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에 나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어? 기억이 나네? 그러고 보니 의사 선생님이 며칠 안으로 금방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을 거라는 말을 했었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나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피곤해 보이는데 좀 쉬지?”
“싫어요.”
“…….”
‘괜찮아요’도 아니고 ‘싫어요’는 뭐야?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잡고 있던 내 손에 더욱 힘을 줬다.
“내가 잘 동안 선배가 없어지면 어떡해요?”
“…….”
저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울먹거리는 정우진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없어져?”
“…….”
“손 좀 놓고 쉬어.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근데 난 어떤 방에서…….”
정우진이 다시 손에 힘을 줬다.
“없어지면 어떡해요?”
“…….”
똑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눈가가 다시 축축하게 젖어 갔다. 나는 혹시라도 또 정우진이 아까처럼 대성통곡을 할까 무서워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정우진도 덩달아 일어났다. 내 손을 잡고 있는 정우진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난 지금 기억나는 게 별로 없어서 어디 갈 데도 없어. 그러니까…….”
제발 부탁이니까 울지 말고 좀 자라. 피곤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어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싫어요.”
“……우진아.”
내가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자 정우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가련하기 그지없었던 탓일까, 나는 되는대로 내뱉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너 일어날 때까지 네 옆에 있을게.”
“…….”
내 말에 정우진이 불신 가득한 눈으로 날 빤히 쳐다봤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서 뚱한 얼굴로 보고 있는 게 꼭 장난감을 사 달라고 떼쓰는 애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계속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럼 되잖아. 나도 지금 밥 먹었더니 잠이 와서 좀 자야겠다. 몸에 힘도 없고. 그러니까 가서 좀 자자.”
그건 사실이었다. 밥을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정우진이 날 이끌었다.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침대가 눈에 보였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침대와, 커다란 창문을 가리고 있는 새하얀 커튼. 그게 다였다. 커다란 방에 달랑 침대 하나밖에 없이 휑했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느꼈지만 여긴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보다는 마치 모델 하우스를 보는 것처럼 사람의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집이었다.
“빨리 자.”
무슨 집이 이렇게 삭막해?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 방의 풍경이 언뜻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 뿐이었고, 다시 떠올리려고 해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고개를 돌리려는데 정우진이 다시 내 손을 덥석 잡아 왔다.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불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뭐가?”
“어디 가려고요?”
“……양치질하러.”
내 말에 정우진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잡고 있는 손은 놓지 않았다. 정우진을 따라 화장실에 도착하자 그제야 손을 놓았다. 새 칫솔을 주는 정우진을 보며 고맙다고 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쟤도 혹시 양치질하려고 그러나?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거울에 비친 정우진을 보며 양치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양치질을 다 끝낼 때까지 정우진은 그곳에 가만히 서서 날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물로 입을 헹구고 수건으로 손과 입을 닦자 정우진이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뭔가 좀 많이 이상했지만 불안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 채 내 손을 잡은 정우진과 함께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족히 다섯 명은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웠다. 이렇게 커다란 침대에 누웠는데…….
“…….”
정우진은 도대체 왜 이렇게 나한테 바짝 붙어 있는 걸까.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눈만 껌벅이며 높은 천장을 쳐다봤다. 정우진은 젖은 눈을 감고 내게 찰싹 붙어 있는 것도 모자라 손까지 꼭 잡고 있었다. 스물다섯 살이 아니라 마치 다섯 살 먹은 애 같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정우진은 귀신처럼 눈을 떠 날 쳐다봤다.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 그냥 허리가 좀 아파서.”
“침대 불편해요?”
“아니, 괜찮아. 빨리 자라.”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듯 보이는 정우진을 눕히며 다급하게 말했다. 내가 어색하게 웃자 그는 한참이나 날 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피곤하긴 했던 건지, 이러다가도 눈을 감으면 금방 잠이 드는 것 같았다. 선잠을 자고 있는지 내가 조금만 움직이면 다시 일어나긴 했지만.
도대체 이렇게 큰 침대에서 왜 난 이렇게 좁게 자야만 하는 걸까. 아니, 그것보다 우리 왜 같이 자고 있는 거지? 아니, 딱히 상관은 없나? 아까부터 계속 뭔가 이상해서 그런지 이젠 뭐가 정상이고 뭐가 이상한 건지도 애매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보길 반복했다.
정우진은 스물다섯 살, 내가 다니는 학교의 후배. 돈 많음. 그 외에 신상 정보도 듣기는 했는데 아까 듣는 둥 마는 둥 해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튼 내가 정우진에 대해 아는 건 이것뿐이었다.
아, 울보라는 것도 알지.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잠든 정우진을 바라봤다. 아까 울었던 탓인지 눈가가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새하얀 얼굴에 새카만 머리카락이 뚜렷하게 대비되고 있는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제야 정우진이 제법 예쁘게 생겼다는 걸 알았다. 같은 사내새끼를 보고 예쁘다고 말하기는 좀 이상했지만 멋있다는 것보다는 예쁘다는 말이 어울렸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 한구석에 존재했다. 나는 손을 들어 내 심장께를 짚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어서 이렇게 불안한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순간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쾅쾅쾅!
정우진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곤 눈을 뜬 채로 한참을 날 쳐다보다가 다시 쾅쾅 소리가 나자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요.”
누가 왔나? 나도 덩달아 일어나려는데 정우진이 내 어깨를 붙잡아 날 눕혔다. 그러더니 이불까지 덮어 준 뒤에 피곤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주무시고 계세요.”
“어? 어, 그래.”
그는 이불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내 손등에 입을 맞추더니 이불 속으로 넣어 줬다. 손등에 닿았던 뜨거운 입술에 놀라기도 전에 정우진이 방을 나갔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몸을 뒤척였다.
방금 뭐지? 내 손등에 왜 뽀뽀를 해?
혼란스러웠다. 혹시 내가 기억 상실증에 걸려서 기억에 혼선이라도 생긴 건가?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후배가, 그것도 여자도 아니고 남자 후배가 남자 선배 손등에 뽀뽀를 한다고? 혹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인사 같은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대체 왜 내 손등에 뽀뽀를 하지? 그러고 보니까 이게 처음도 아니었다.
이 집에 처음 들어와서 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물어봤을 때도 정우진이 나한테…….
“너 미쳤어? 도대체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그때 문밖에서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화가 잔뜩 나 있는 것 같은 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나 똑바로 서서 숨을 죽인 채 슬금슬금 문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전화하면 받으라고 했지? 지금 스케줄 다 꼬였어! 넌 일이 장난이냐? 빽 있다고 재는 거야, 뭐야, 이 미친 새끼야! 너 학교는 왜 안 갔어? 그동안 어디 있었냐고!”
싸우나? 도대체 무슨 일이지? 문 앞으로 가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살짝 귀를 대자 정우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우니까 소리 지르지 마.”
“내가 씨발, 지금 소리 안 지르게 생겼냐!”
“좀 닥치라고, 씨발.”
그리고 들려오는 욕설에 나는 화들짝 놀라 문에 바짝 대고 있던 귀를 뗐다. 씨발? 저거 지금 정우진이 말한 건가?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만 깜박였다.
불쌍하고 가련해 보이던 얼굴과 씨발이라는 단어가 잘 매치되지 않았다.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나가.”
“지금 너 안 데려가면 나 잘려!”
“그건 네 사정이고.”
“야, 이 씨발놈아!”
천둥소리 같은 고함에 나는 문고리를 내렸다. 이러다 정말 싸움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정우진과 처음 보는 남자가 서로 대치하듯 마주 보고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온 나를 발견한 남자의 눈이 잠시 놀란 듯 커다랗게 뜨였다. 어쨌든 눈이 마주쳤으니 얼떨결에 인사를 하려 했지만 내게 다가온 정우진이 날 붙잡았다.
“선배, 안 주무세요?”
“어?”
“정우진, 너 미쳤지?”
그때 남자가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나와 정우진을 보며 이를 갈았다. 내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정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너 씨발, 내가 지랄 염병 하면서 너 찾을 동안 넌 집에서 좆질……!”
그 말에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우두둑하고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남자가 바닥으로 쓰러지면서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정우진이 꺾어 버린 팔을 부여잡고 남자가 바닥에서 바르작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멍청하게 보다가 뒤늦게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정우진이 날 보며 웃었다.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 예쁜 미소였다.
“들어가 계세요. 저 사람은 그냥 아는 사람인데, 정신이 좀 이상해서……. 금방 들어갈게요.”
정우진이 날 방에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문 너머에서는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나는 닫힌 문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비명이 흐느낌으로 바뀌었을 때쯤, 정신이 퍼뜩 들었지만 차마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저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몇 번 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귀를 바짝 가져다 대 보아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건가? 나가서 말려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문고리를 잡는 순간 정우진이 어딘가로 전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팔이 부러졌나 봐.”
팔이 부러져? 나는 다시 당황해 버렸다.
“나도 모르겠어. 이도 몇 개 빠진 거 같아. 빨리 와서 데려가. 이러다 죽겠네. 급하니까 빨리.”
전혀 급해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태연히 몇 마디 더 하던 정우진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재빨리 침대 쪽으로 가 이불을 들춰 누웠다. 내가 다 눕고 급하게 이불까지 덮자, 문이 열리면서 정우진이 들어왔다. 잔뜩 긴장한 내 얼굴을 본 정우진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조금 전에 뼈를 부러뜨리고 구타까지 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말간 얼굴이었다.
“미안해요.”
내게 다가온 정우진은 정말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내게 손을 뻗으려다가 손가락 끝에 피가 조금 묻어 있는 걸 본 정우진이 혀를 차며 다시 손을 거뒀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울었는데 지금은 태평한 표정으로 사람을 때렸다. 나는 코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몸을 움츠렸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쉽게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저 사람은 왜 때린 거냐고 물어봐도 되는 걸까? 아는 사람인데 정신이 좀 이상하다고 했는데……. 아니, 정신이 좀 이상해도 그렇지 그렇게 막……. 때리고 뼈를 부러뜨려도 되는 건가?
근데 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남자가 먼저 정우진의 멱살을 잡았었다. 멱살을 잡고 좆질 어쩌고 했던 걸 보면 먼저 잘못을 한 게 맞긴 한데…….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패 버리면…….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질끈 눈을 감는데 귓가로 처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뭔가에 홀린 듯 감았던 눈을 뜨자 정우진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손톱 부러졌나 봐요.”
“…….”
검지 손톱이 부러진 건지 정말 피가 맺혀 있었다. 나는 그걸 보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손톱이 부러졌고, 아까 그 남자는 팔이 부러졌지…….
“누구야?”
“신경 안 써도 돼요. 미안해요. 잠 다 깼죠?”
“…….”
정우진은 암만 생각해도 많이 이상했다. 이 상황에서 지금 잠깬 게 문제인가? 서로 대화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뭔가 계속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 밖에서 작게 신음이 들려왔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이불을 걷고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신고해.”
“네?”
“아까 그 사람 많이 다친 거 같은데 112에 신고…….”
내가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자 정우진이 내 어깨를 가볍게 밀면서 나를 다시 눕혔다.
“112가 아니라 119예요. 그리고 전화했으니까 곧 사람이 올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야, 그게 아니라 지금 밖에 그 사람…….”
전화했으니까 사람이 오는 건 오는 거고, 밖에 뼈가 부러져서 아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별개였다. 곧 사람이 올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정우진은 나보다 훨씬 더 단호했다.
“신경 안 써도 돼요.”
“그 사람 지금 뼈가…….”
“신경 쓰지 마요.”
“뭐?”
정우진이 내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조금 아파서 고개를 숙여 잡힌 어깨를 보니 손에 묻어 있던 피가 내 옷자락에 번지듯 물들고 있는 게 보였다.
가만히 그걸 보다가 당황한 얼굴로 다시 정우진을 살펴봤다. 불안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그 사람한테 신경 쓰지 마세요.”
“…….”
“오늘 처음 본 사람이잖아요.”
나는 언제부턴가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대화를 해도 말이 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얜 왜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하고 있는 거지?
“너 도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밖에 사람이…….”
“알았어요. 그럼 내가 사람 올 때까지 거실에 나가 있을 테니까 선배는 여기에 있으세요.”
“뭐?”
“나오지 마세요. 그 사람 위험해요.”
“……뭐라고?”
정우진은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나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눈만 깜박였다.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선배한테 꼭 사과하라고……. 아니, 그냥 제가 나가서 사과 받아 올게요. 선배는 그냥 여기에서 쉬고 계세요.”
“저기, 잠깐…….”
“선배.”
일어서는 그를 따라 뻗어지는 내 손을 꾹 붙잡으며 정우진이 다시 이불 안으로 넣어 주곤 다정하게 웃었다.
“어차피 오늘 보고 안 볼 사람이니까. 네?”
“…….”
“쉬고 계세요.”
정우진은 얼빠진 날 내버려 둔 채 방을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자 문 너머에서 신음이 한층 더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