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7/28)

6장

젖은 소리와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머릿속에 그득하게 찼다.

“아, 아윽, 흐응, 아! 아힉……! 시, 싫, 으응!”

“그렇게 힘들어요? 천천히 움직이고 있잖아, 눈 좀 감지 마요.”

“앙, 아……! 그만, 힉! 거기, 그, 그만!”

-우진아, 우진아, 살려 줘어어, 흐윽! 자지 아파, 자지, 힉! 터질 거 같, 아흐으윽!

“흑, 흐응, 응! 아, 사, 살려 줘, 살려, 으아앙!”

나는 바보처럼 화면 속의 나를 따라 했다. 화면 속의 정우진은 이제 곧 사정 직전이라는 듯 빠르게 추삽질을 하고 있었고, 지금의 정우진은 추삽질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느리게 허리만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숨도 못 쉴 정도로 세게 박히는 사람처럼 울어 댔다. 정우진이 눈물로 젖은 내 뺨을 쓸며 입을 맞췄다.

“왜요? 싸고 싶어요?”

“흑, 흐엉……. 자, 자지 아프, 으응……!”

“자지가 왜요? 막지도 않았는데. 이거 봐요, 오줌 싸는 것처럼 계속 줄줄 싸고 있잖아.”

“힉! 아, 시, 싫어! 싫어, 만지지 마! 싫, 흐으윽!”

“숨넘어가겠네.”

정우진이 고개를 더욱 숙여 내 목덜미를 핥았다. 아까 깨물어 자국을 낸 곳이었다. 그의 혓바닥이 닿자 물렸던 곳이 아려 왔다. 살이 찢어진 것 같았다.

“영상 틀어 놓고 하는 거 싫어요?”

“헉, 허억, 아, 아응, 아앙! 헉……!”

“선배.”

화면 속의 내가 숨넘어갈 듯 비명을 지르면 나도 숨이 차올랐다. 가슴을 들썩이며 헉헉거리자 진정하라는 듯 그가 내 뺨과 어깨, 가슴을 쓸었다. 정우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저거 보면서 하는 거 싫어?”

“시, 싫어……. 싫, 으으응!”

정우진이 툭 튀어나온 돌기를 손끝으로 찍어 눌렀다. 반사적으로 항문을 조이자 그가 더운 숨을 내쉬었다.

“그럼 앞으로 벌줄 땐 영상 틀어 놓고 해야겠네.”

“큭……. 아, 싫, 그거 싫어! 하지 마! 싫, 아앙!”

볼 것도 없는 가슴을 커다랗게 쓸어내리고,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넣고 비빌 때마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감전된 듯 퍼득퍼득 떨자 아까보다 훨씬 더 강하게 내 가슴을 쥐어짰다.

“싫다는 말 할 때마다 이거 틀어 놓고 나랑 섹스 할래요? 아니면 엉덩이 맞을래요?”

“아아앗!”

“다른 데는 하나도 안 건드리고 젖꼭지 만져 주는 걸로 사정할까?”

“읏, 으읏, 응……! 아!”

정우진이 내 가슴을 만질 때마다 항문에서 경련이 일었다. 느리게 움직이던 정우진도 내가 항문을 떨 때마다 점점 속도를 높여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접합부에서 찌걱이는 소리가 울렸다. 물이 튀듯 철퍽거리는 소리와 퍽퍽 살이 치대지는 소리에 머릿속이 점점 마비되어 갔다.

“지금 선배가 움직이고 있는 거 알아요?”

“헉, 아흑, 아, 아, 아, 아아아!”

“3일째 되던 날이었어요.”

“아응, 하앙, 아, 아응, 아, 으하악!”

“내가 가슴 빨아 주는데 선배가 사정한 거.”

가슴이 간지러운 건지, 아픈 건지, 좋은 건지 모르겠다. 도저히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감각들이 젖꼭지에서부터 시작돼 점점 넓게 퍼져 나갔다. 나는 허리를 흔들고 항문을 조이면서 발가락 끝에 잔뜩 힘을 줬다.

“사실 일주일 동안 할 필요도 없었어요. 원래부터 소질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정말 약 때문에 그랬던 건진 모르겠지만 3, 4일 지나니까 내 좆 빨면서도 싸던데요?”

백치가 된 듯 하얗게 바랜 머릿속에 정우진이 하는 말만 칼날처럼 푹푹 박혀 왔다.

“이제 선배는 나 없으면 싸지도 못하겠다.”

“헉, 허윽, 아……! 아아아, 아, 으학!”

“너무 억울해하진 마세요.”

서툴게 허리를 놀리고 있는 날 구경하듯 내려다보던 정우진이 웃으며 내 허벅지를 잡았다. 내가 움직일 수 없게 고정하더니 허리를 바짝 숙이고 단단히 박혀 있던 성기를 쭈욱 잡아 뺐다.

“크으읏!”

“나도 이제 선배 아니면 못 싸니까.”

“흐아아!”

뜨거운 성기가 몸을 반으로 갈라 버릴 듯 거세게 처박혔다.

* * *

난 어렸을 때 그림을 제법 잘 그렸다. 크레파스나 색연필, 가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릴 때면 아이들이 전부 내 주위로 몰렸고, 늘 그늘진 얼굴로 신경질만 내던 선생님들도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언제였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고아원 내에서 그림 대회가 열렸다. 그냥 가벼운 행사였다. 어떤 아이들은 연필로 알 수 없는 덩어리 같은 것들을 끼적이거나 물감으로 도화지를 색종이로 만들기도 했다. 그 가운데에서 나는 유독 빛이 났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도화지에 그려 넣고 나름 혼신의 힘을 다해 색을 입히고 주변엔 원래 없던 나비나 꽃, 해님과 구름 같은 것들도 그려 넣었다.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전부 내가 일등을 할 거라고 말했다. 1등에겐 상품으로 초코파이와 요구르트를 줬는데 그걸 받으면 함께 나눠 먹을 생각이었다. 초코파이와 요구르트는 혼자 먹기에도 양이 굉장히 적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1등을 한 건 내가 아니라 그 애였다.

* * *

“윽…….”

깨질 것 같은 머리통을 부여잡고 눈을 떴지만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시야가 흔들려 구역질이 났다. 침대에 엎어져 두어 번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데 스르릉 하고 섬뜩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숨을 몰아쉬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새하얀 이불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내 발이 보였다.

내 발목에 이불처럼 하얗고 푹신푹신해 보이는 천이 감싸여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천 위에 채워져 있는 차가운 빛깔의 수갑도.

“…….”

나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수갑을 노려봤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발목에 수갑이 왜 채워져 있는 거지? 나는 손을 뻗어 수갑을 만졌다. 굉장히 차가웠다. 손에 힘을 줘 수갑을 풀려고 해 봤지만 헛수고였다. 그때, 정우진이 떠올랐다. 내 발목에 수갑을 채울 사람은 그 미친놈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 무인도엔 정우진과 나 둘뿐이었으니 그가 내 발목에 수갑을 채운 게 맞을 거다. 속이 들끓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차가워졌다.

나는 침대에 풀썩 쓰러져 베개에 얼굴을 비볐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영상 틀어 놓고 정우진이 날 강간했다. 그렇게 미친 것처럼 박아 댔는데 몸이 별로 아프지 않았다. 뒤가 조금 아리고 허리가 좀 아픈 것 외엔 멀쩡했다. 지금 가장 참기 힘든 건 배고픔이었다. 나는 슬쩍 손을 내려 배를 만졌다. 움푹하게 들어간 게 지금 거울 앞에 서면 갈빗대까지 다 보일 것 같았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들리는 거라곤 내 숨소리뿐이었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정우진은 집에 없나 보다. 그렇다면 지금이 도망칠 기회인데, 발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수갑만 아니었으면 나는 또다시 창문을 넘어 도망쳤을 거다. 이곳이 무인도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나는 기회가 올 때마다 도망칠 거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면 자꾸만 머릿속을 비집고 떠오르는 기억에 나는 필사적으로 다른 것을 생각하려 애썼다. 그렇지 않으면 물감이 번지듯 퍼지다가 결국에는 내가 없어질 것만 같았다.

침대에 엎드린 채 눈을 깜빡거리면서 침대 끄트머리의 모양과 살갗에서 느껴지는 이불의 감촉, 방의 온도 같은 걸 생각하고 있는데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발소리도 없이 정우진이 내게 다가왔다. 마치 유령 같았다.

“일어났어요?”

정우진이 내 머리와 뺨을 한 번 쓸더니 손을 내려 내 발목을 매만졌다.

“미안해요. 많이 불편했죠? 안 아팠어요?”

이음새가 풀리면서 족쇄가 열렸다. 정우진은 내 발목에 싸여 있는 천까지 풀어내고 그곳에 입을 맞췄다. 차가운 살갗에 미적지근한 입술이 닿자 소름이 끼쳐 왔다. 벌레가 발목을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아침에 배가 왔어요.”

배?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내가 고개를 퍼뜩 들자 정우진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먹을 게 다 떨어져서. 아, 화분도 새로 가져왔어요.”

정우진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화분을 내게 가져왔다. 황토색 화분에 뭔지 알 수 없는 자그마한 식물이 심어져 있었다. 그는 화분을 창틀에 놓더니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내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배 안 고파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가 고팠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사람을 그렇게 마구잡이로 강간해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정우진이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하지만 내가 싫다고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면 정우진은 또다시 날 그렇게 강간할 거다. 그리고 그다음 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게 배고프지 않느냐고 묻겠지. 지금처럼.

“……또 아무 말도 안 하기로 한 거예요?”

내 손등에 손을 겹치고 있던 정우진이 조용히 물었다. 그가 손에 힘을 줘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대답하고 싶진 않았지만 입을 열었다. 사실 좀 무서워서.

“아니.”

“아직 잠 안 깼어요?”

내가 입을 열자 정우진이 눈에 띄게 좋아했다. 그는 내 몸에 이불을 덮어 주며 일어섰다.

“더 누워 있어요. 먹을 것 좀 가져올게요.”

허리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춘 정우진이 방을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

그렇게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는 막을 수도 없었다. 까맣게 물이 드는 것처럼 머릿속에, 눈앞에 전부 하나의 기억만이 떠올랐다.

정우진은 내가 사랑한다고, 네가 없으면 안 된다고 울면서 빌 때까지 날 놔주지 않았다. 마지막엔 거의 실신한 채로 고장 난 기계처럼 사랑한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스치기만 해도 허리가 떨리던 가슴을 만져 줘도, 뜨겁고 커다란 성기로 내 안을 쑤시고 잔뜩 싸 대도, 나는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모든 감각이 마비된 채 차라리 죽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건 성행위가 아닌 고문이었다. 나에게 있어서도, 그리고 정우진에게도.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가만히 누워 있을 땐 몰랐는데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서자 허리가 아파 왔다. 허벅지도 아팠고, 팔도, 가슴도, 항문도, 성기도, 목도,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발을 질질 끌고 방을 나서자 고소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주방에서 뭔가를 끓이고 있던 정우진이 날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냥 누워 있지 왜 나왔어요? 일어나도 괜찮아요?”

나는 멍하니 정우진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온 지 꽤 된 것 같은데 집을 볼 기회가 없었다. 나는 미친 것처럼 이유 없이 보이는 문이란 문은 죄다 열어젖혔다.

화장실 문을 열어 안을 확인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보이는 문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내가 지내던 방 옆의 문을 열자 커다란 책상과 노트북, 그리고 책장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푹신한 러그가 밟힌다. 노트북을 손으로 한 번 쓸고 책장의 책들을 확인했다.

“…….”

존나 어이없게도 유명한 CEO의 서재 같던 방의 책장에는 전부 만화책만 꽂혀 있었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거나 보고 싶었던 만화책만.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차가운 얼굴로 책장을 노려보던 나는 이번엔 책상 쪽으로 갔다. 서랍을 열자 노트와 필기구 따위가 보였다. 깔끔한 게 아니라 휑할 정도로 있는 게 없었다. 제일 밑에 있는 서랍 쪽으로 손을 뻗는데 인기척이 났다.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쟁반을 들고 날 보고 있었다.

“여기서 먹을래요? 햇빛 잘 들어오는데.”

햇살을 받으며 정우진이 화사하게 웃었다. 나는 서랍에서 손을 떼고 그를 보며 말했다.

“정우진.”

내 부름에 정우진이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정우진은 마치 봐서는 안 될 걸 보기라도 한 듯 잔뜩 어그러진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너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벌벌 떨리는 내 목소리를 듣고 알았다. 나는 울고 있었다.

어떻게 할 새도 없이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잇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막을 수가 없었다.

“윽…….”

입술을 깨물고 안간힘을 써도 소리를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정우진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를 밀쳐 내며 걸음을 옮겼다.

정우진도 정우진이지만 나도 참 멍청했다. 내가 암만 물어 봤자 또 사랑한다는 말이나 늘어놓을 새끼 앞에서 끈질기게 묻는 내가 정말 너무 싫었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어서 정우진에게 할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아니면 내가 저 새끼한테 무슨 소리를 한단 말인가?

빠르게 걸어 거실을 지나는데 정우진이 내 손목을 잡았다.

“선배.”

“놔.”

“잠시만요.”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힘없이 말했다.

“씻을 거야, 놔.”

“제가…….”

“씨발.”

내가 으르렁거리자 정우진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를 물고 그를 노려보다 등을 돌렸다. 내가 욕실에 들어가 문을 쾅 닫을 때까지 정우진은 내 뒤를 졸졸 쫓았다. 코앞에서 문이 닫혔지만 그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다시 문을 열지도 않았다.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수도꼭지란 수도꼭지는 전부 틀었다. 물이 수챗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거울 속의 나는 시체 같았다. 퀭한 눈이며 창백한 얼굴, 시퍼런 입술, 그리고 얼룩덜룩한 살갗. 아니, 떡진 머리가 한쪽으로 눌려 있는 걸 보니 시체가 아니라 웬 지하철역 노숙자 같았다.

척 봐도 냄새가 날 것처럼 더러운 내 몰골을 보고도 정우진은 입을 맞췄다. 비위가 좋다는 생각보다 미쳐도 제대로 미친놈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칫솔에 치약을 짜 양치질을 하고 대충 샤워를 한 뒤에 듬성듬성 난 수염을 깎으려 했지만 면도기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뚝뚝 떨어지는 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정우…….”

문을 열고 정우진을 부르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아까 내가 문을 닫기 전의 그 자세 그대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버려진 강아지 같은 꼴을 하고.

“면도기 어디 있어?”

“치웠어요.”

“어디 있냐고?”

“제가 해 드릴게요.”

정우진은 마치 내 허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 가만히 날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 그를 멍하게 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정우진.”

아깐 왜 울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때 내가 울었던 것도 슬퍼서 그런 게 아니라 절망적이고 답답해서 그랬던 걸 거다. 나는 꺼끌꺼끌한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네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알았다.”

“…….”

“알았으니까, 네 말대로 여기 있을 테니까, 쓸데없이 나한테 말 걸지 마. 밥 먹으란 소리도.”

내 차분한 목소리에 그의 표정은 아까 내가 울 때보다 더욱 심하게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 금세 그렁그렁하게 차오른 눈물이 창백한 그의 피부와 잘 어울렸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말했다.

“면도기는?”

내 말에 정우진이 손을 뻗었다. 물기 묻은 내 목덜미에 닿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손가락만 바르작거렸다.

“약 발라야 되는데…….”

“면도기 어디 있냐고.”

“내가 말 안 걸면…….”

허공에 떠 있던 그의 손이 추락하듯 떨어졌다. 정우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 없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선배가 나한테 말 걸어 줄 거예요?”

“보고.”

“하루에 몇 번이나?”

그의 표정은 자꾸만 일그러져 갔다. 올곧게 날 보던 눈동자 역시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루에 몇 번이나 말해 줄 건데요? 내 이름 불러 줄 거예요? 내가 쓸데없이 말 안 하면 선배가 해 줄 거예요? 내 이름 불러 주고 나한테 관심 가져 주고 나 보면서 쓸데없이 말할 거예요?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냥 오늘 뭐 했냐고 그런 쓸데없는 대화 같은 거 나랑 해 줄 거예요? 내가 안 그러면 선배가 해 줄 거냐고요.”

그의 몸이 발작하듯 떨렸다. 병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벌벌 떠는 정우진이 기어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나한테 그렇게 안 해 줄 거잖아요. 그러면서 왜 나한테 못 하게 해요?”

문득 욕실에 틀어 놨던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콸콸 쏟아져 나오는 물처럼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턱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 왔다.

급격히 피곤해진 눈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다시 말했다.

“면도기 어디 있냐고.”

아까 내가 울었을 때처럼,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는 차가운 내 어깨에 이마를 묻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바들바들 떨면서 작은 동물처럼 필사적으로 날 붙잡는 정우진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봤다. 하얀 천장이, 이상할 정도로 높아 보였다.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천장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이 지긋지긋할 정도로 반복되는 상황이 정우진만큼이나 싫었다.

* * *

정우진은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가 되던 날, 정우진이 창백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만화책을 보고 있는 내게 다가왔다. 쟁반에 꼭지를 예쁘게 딴 딸기 한 접시를 담고서.

“선배, 딸기 좋아했죠?”

나는 힐끗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내가 잘 때나 내가 보지 않을 때 뭘 먹거나 잤기를 바랐다. 저렇게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다가 신경이 예민해지면 저 새끼가 또 언제 머리가 돌지 모를 일이다.

나는 가만히 딸기를 보다가 포크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 날 보며 정우진이 창백한 얼굴로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필사적인 것처럼 보여서 오히려 더 소름이 돋았다.

“맛있어요?”

그는 내 입에 딸기가 들어가자마자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안 그래도 미친놈 같았는데 눈 밑이 시커메서 이젠 완전 상또라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만화책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일단 정우진과 최대한 쓸데없는 접촉이나 대화는 피하고, 다시 배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배의 선장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정우진과 아는 사이일 확률이 컸다. 하지만 내가 이 좆같은 섬을 벗어날 길은 그것뿐이었다.

몰래 배에 잠입을 하든, 아니면 선장을 때려눕혀서 기절을 시키든 일단 배에 타야 한다.

난 기필코 이 섬에서 벗어나 정우진을 감방에 처넣고야 말 거다.

“선배, 맛있어요?”

“아니.”

“…….”

내 짧은 대답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주인을 쳐다보는 개새끼처럼 멀거니 날 보며 제자리에서 서성였다.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만화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대로 서성거리다가 그냥 꺼져 줬으면 좋겠지만, 저 미친놈이 그럴 리는 없었다.

“선배.”

날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진저리가 날 정도로 역겨웠다. 저 좆같은 목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소릴 듣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화책 재밌어요?”

사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만화책은 이미 다섯 번이나 읽은 거다. 이러다가 내용까지 다 외울 것 같았다. 하지만 만화책을 보는 것 외엔 내가 할 게 없었다. 텔레비전도 안 나왔고, 컴퓨터는 인터넷도 되지 않았다.

“선배.”

씨발. 욕지거리가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왔다. 저 좆같은 새끼가 왜 자꾸 부르고 지랄이야. 나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속으론 온갖 욕설을 내뱉었다. 이미 만화책의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기계적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데 어느새 마지막 장이었다. 내가 마지막 장까지 넘기는 걸 본 정우진이 손을 뻗어 만화책을 빼앗아 갔다. 나는 그에게 만화책을 넘긴 뒤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을 나서는 내 뒤를 정우진이 졸졸 쫓아왔다.

“선배.”

이젠 뭐 하지? 이틀 전에 배가 왔으니 대충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배가 다시 올 것 같았다. 거실을 가로질러 걷다가 순간 멈칫했다. 배가 오던 날, 정우진이 내 발목에 수갑을 채웠던 게 이제야 떠올랐기 때문이다. 또 내 발목에 수갑을 채우면 어쩌지? 발목을 자르고 도망칠 수도 없고.

제자리에 멈춰 서서 고민하고 있는 날 가만히 보던 정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

“왜.”

나는 그를 보지도 않고 짧게 대답했다. 과도 같은 걸 침대 머리맡에 숨겨 둘까? 근데 내가 칼로 수갑을 끊을 수 있을까? 아니면 수갑을 찾아서 숨길까? 아니, 수갑이 없어도 정우진은 다른 걸 찾아내서 날 묶어 둘 것 같았다.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뜬금없이 말했다.

“키스해도 돼요?”

어째 얌전히 있는다 했다. 씨발 새끼, 그럼 그렇지. 계속 무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절로 인상이 써졌다.

“싫다고 하면 안 할 거냐?”

이를 갈며 묻는 내 말에 정우진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힘없이 대답했다.

“네.”

“하지 마.”

“…….”

나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하지만 한 발자국을 채 움직이기도 전에 정우진이 내 손목을 잡았다.

“싫다고 해도 할 거예요.”

아깐 안 한다며, 씨발놈아. 나는 다시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욕지거리를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정우진을 밀어내려다 멈칫했다.

“정우진.”

내 부름에 정우진이 숨을 삼켰다. 그는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이곳에 없을 것 같은 것들을 생각해 냈다. 육류부터 시작해서 어패류, 과일, 채소 등등 없는 게 없었지만, 지금 딱 떠오르는, 없는 게 하나 있었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복숭아.”

“네?”

“있어, 없어?”

내 말에 정우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다. 하지만 나는 속마음과는 달리 겉으론 짜증 나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짓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 정우진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날 붙잡았다.

“복숭아는 왜요?”

“손 놔.”

“알레르기 있잖아요.”

씨발, 내가 복숭아 알레르기 있는 건 어떻게 아는 거야? 소름 끼치는 새끼. 나는 당황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누가?”

“선배요.”

“됐다. 손 놔.”

내 깊은 한숨에 정우진이 다급하게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먹고 싶어요?”

“손 놓으라고.”

“나중에 배 들어올 때 가져오라고 할게요.”

“손 놓으라고.”

“하루, 아니. 이틀만 참으면 되는데…….”

이틀? 그럼 이틀 뒤에 배가 들어온다는 건가?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더니. 그런 생각을 하느라 입을 다물고 있는 날 어떻게 생각한 건지 정우진이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복숭아 말고 다른 건요?”

“…….”

나는 시선을 올려 정우진을 쳐다봤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활짝 피어난 표정이었다.

“다른 거 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필요한 건요?”

“…….”

“만화책 더 가져오라고 할까요? 아니, 만화책 말고……. 당구. 선배, 당구 치는 거 좋아하죠? 당구대 설치해 줄까요? 아니면 게임기?”

그는 눈을 빛내며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손 놓으라고.”

“…….”

탁, 그의 손을 뿌리치고 등을 돌리는데 정우진이 다시 내 뒤를 쫓았다.

“복숭아만 있으면 돼요? 근데 선배 복숭아 알레르기 있잖아요. 괜찮아요?”

정우진은 내 뒤를 졸졸 쫓으며 주절주절 떠들었다. 어쨌든 배는 해결됐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수갑이었다. 정우진이 내 발목에 수갑을 채우면 그걸 어떻게 풀지? 수갑 싫다고 지랄 발광이라도 떨어 볼까? 근데 배는 몇 시에 오지? 그것만 알면…….

나는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쳐다봤다.

“몇 시에 오는데?”

“네?”

“복숭아 몇 시에 오냐고.”

잔뜩 일그러진 내 얼굴을 멀뚱멀뚱 보던 정우진이 더듬더듬 말했다.

“어, 그게……. 빨리 오라고 할게요. 아침 일찍. 그래도 아침 먹고 먹어야 하니까……. 어, 여덟 시나 아홉 시까지…….”

당황한 듯 손가락까지 접었다 펴며 시간 계산을 하고 있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결정했다. 그럼 여덟 시가 되기 전에 그냥 정우진을 죽이든 기절시키든 해서 여기에 가둬야겠다. 그리고 배가 오면 그걸 타고 밖으로 나가자. 그럼 이제 저 미친놈을 어떻게 기절시키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욕실에 면도날도 없고……. 주방에서 칼이라도 훔칠까. 뭐, 칼이나 가위나, 정 안 되겠으면 창문을 깨서 그걸로 찌르고 도망쳐야지. 그것도 안 될 것 같으면 저 탁자 다리를 뽑아서 그걸로 대가리를 후려치든가.

“혹시 모르니까 알레르기 약도 같이…….”

상기된 얼굴로 아직도 혼자 중얼거리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등을 돌렸다.

* * *

정우진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아까부터 정신 나간 귀신처럼 실실 웃고만 있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찌를 듯한 시선에 밥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질 않았다. 양손으로 턱을 괸 채 나만 쳐다보는 정우진의 시선을 참다못해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

정우진이 왜 저렇게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곳에 온 뒤로 이렇게 순순히 밥을 먹은 적은 처음이라서……. 그런 것 같다.

사실 밥이고 지랄이고 국그릇으로 저 새끼 대가리를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이틀 뒤에 도망치려면 그동안은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내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밥그릇에 시선을 고정하자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맛있어요?”

사실 정우진이 해 주는 밥은 맛집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화려한 건 아니었지만 정갈한 것이 꼭 고급 한식당에서 나올 법한 차림새였다.

“더 먹을래요?”

“아니.”

“밥 다 먹고 과일 갈아 줄 테니까 마실래요?”

“됐어.”

“그럼 그냥 깎아 드릴까요?”

“좀……. 됐다고, 씨발.”

자꾸 물어보고 말을 거는 게 짜증 나서 결국 들고 있던 숟가락을 거칠게 내팽개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정우진은 속이 뒤집힐 정도로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날 납치하고 강간하고 감금한 주제에 우리가 신혼부부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이 꼴로 만들었으면서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는 말이 정우진에게 있어서는 면죄부인가 보다. 위선자도 저런 위선자가 없었다.

“선배, 입 다물고 있을 테니까 마저 드세요.”

정우진이 다급하게 내 손목을 잡았다.

“잘못했어요. 이제 말 안 할게요.”

좋다고 웃을 땐 언제고 이젠 울상을 짓고 있는 꼴이 버려진 강아지 같았다. 나는 그런 정우진을 멀뚱멀뚱 보다가 손을 뿌리치고 등을 돌렸다. 정우진이 어미 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내 뒤를 졸졸 쫓았다. 나는 욕실로 들어가 그의 코앞에서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선배.”

문 너머에서 지긋지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씻고 나오세요. 호두 파이 구워 드릴게요.”

빵이나 과자를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유일하게 먹는 게 호두 파이였다. 정우진은 나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내가 가르쳐 주지도 않은 걸 알고 있었고, 나도 잊고 있었던 걸 놈은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욕실 가운데 서서 멍청하게 허공만 쳐다봤다.

정우진은 날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나 선후배, 그런 것도 아닌 그저 얼굴만 아는 타인에 가까웠다. 그럴싸한 대화도 한 번 주고받은 적 없었고, 별로 만난 적도 없었는데.

기계적으로 몸을 씻고 밖으로 나오자 주방 쪽에서 뭔가를 만드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정우진이 내가 씻고 나온 걸 발견할까 봐 조심스럽게 그의 눈을 피해 만화책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저 빼곡한 책장에서도 읽을 게 없었다. 나는 멍청하게 책장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책상 쪽을 바라봤다.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책상 위엔 노트북 하나가 전부였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노트북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전원을 켰다.

노트북이 켜지기 전까지 여기저기 의미 없이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서랍이 보였다. 네 개의 서랍 중 세 개의 서랍엔 별로 볼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서랍을 열려고 했을 때 정우진이 와서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손을 뻗어 서랍을 열었다. 서랍엔 누렇게 변색된 종잇조각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연필이나 볼펜 같은 게 있으면 숨겨 뒀다가 나중에 그걸로라도 찌르고 도망치면 될 텐데. 혀를 차며 신경질적으로 서랍을 닫으려다가 한숨을 내쉬며 종잇조각으로 손을 뻗었다.

척 봐도 엄청 오래돼 보였다. 조금만 힘을 줘도 바스라질 것 같은, 반으로 접힌 종잇조각을 펴자 그곳엔 부옇게 번진 글씨 몇 개가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 꼭 기다려야 돼.]

“……?”

이게 뭐지?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문에 기댄 채 날 보고 있었다.

“파이 다 구워졌어요.”

“…….”

“여기서 먹을래요?”

그의 시선은 내가 들고 있는 정체불명의 종잇조각에 고정되어 있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나를 짓눌러 왔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들고 있던 종잇조각을 다시 서랍에 넣었다. 정우진은 여전히 문가에 기댄 채였다. 내가 서랍을 다시 밀어 넣자 정우진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말했다.

“중학교 2학년 때, 꿈을 꿨어요.”

“…….”

“새벽에 눈뜨자마자 아까 그 종이 붙잡고 자위했어요. 첫 몽정이었거든요.”

“…….”

“몇 번 흔들지도 않았는데 정액이 줄줄 나와서 어이없어 죽는 줄 알았어요. 이제 하다 못해서 종이 쪼가리 붙들고 자위나 하고.”

정우진은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나는 그저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우진은 그렇게 한참 날 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등학교 입학하고 난 뒤에는 이대로 있으면 미쳐서 죽어 버릴 것 같았어요. 종이에 얼굴 박고 자위하다가 짜증 나서 찢어 버리려고 했는데, 그렇게도 못 하고…….”

“…….”

“호두 파이 여기서 먹을래요?”

정우진이 갑작스럽게 말을 돌렸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보통 이런 분위기일 때 정우진은 눈깔이 돌아서 날 강간했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는데도 용케 그걸 포착한 정우진이 다정하게 웃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정우진은 귀신처럼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주방으로 가는 길에 발걸음 소리도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팔뚝에 돋은 소름을 슬슬 문지르며 마지막 서랍을 노려봤다. 저 종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신 건들면 안 되겠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저 종이가 기폭제 같았다.

정우진은 곧 쟁반에 호두 파이와 우유 한 컵을 가지고 내게 다가왔다.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정우진이 말했다.

“오늘은 뭐 할 거예요?”

정우진이 파이를 먹기 좋게 자르며 물었다.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냄새가 좋아서 그런지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만 쳐다봤다.

뭐 할 거냐고? 여기서 할 게 뭐가 있을까.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내게 저런 질문을 하는 게 꼭 날 놀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좆같은 무인도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데?

내 일그러진 표정을 보던 정우진이 천천히 파이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몸을 사리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수영할래요?”

그 조심스러운 물음에 다시 짜증이 치솟았다.

“정우진.”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소리치려다 입을 다물었다. 정우진이 흥분하면 그 손해는 전부 내가 감당해야만 했다. 저 씨발놈이 열 받아서 또 나를 강간할 수도 있으니까. 안 그래도 그 종이 때문에 불안불안한데. 나는 화를 삭이며 말했다.

“시끄러우니까 말 걸지 마. 생각 중이니까.”

“무슨 생각이요?”

“신경 꺼.”

“무슨 생각 하는데요?”

아, 씨발, 진짜……. 나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정우진을 흘겨봤다. 그는 불안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낯빛을 보며 속으로 뜨끔했다. 혹시 내가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어색해 보이지 않게 귀찮다는 얼굴색을 풀지 않고 되는대로 지껄였다.

“아까 만화책.”

“…….”

“…….”

내 어이없는 말에도 정우진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하긴, 씨발……. 내가 들어도 존나 말도 안 된다. 만화책은 지랄……. 아, 씨발. 뭐라고 해야 되지?

여기서 의심받으면 끝장이다. 어떻게 해서든 별거 아니라는 듯 넘어가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손을 가만히 뒀다간 나도 모르게 책상을 툭툭 치거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둥 초조한 티를 낼 것 같아서, 나는 먹기 좋게 잘린 호두 파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파이를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만화책이 그렇게 좋아요?”

“뭐?”

예상치도 못했던 질문에 되묻자 정우진이 다시 말했다.

“만화책이 그렇게 좋냐고요.”

……뭔 소리야, 씨발?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나랑 있는데 왜 만화책 생각만 해요?”

“…….”

“선배는 밥 먹을 때도 밥 생각밖에 안 하죠?”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혼란스러운 내 안색을 보며 정우진이 시선을 내려 호두 파이를 응시했다.

“이거 먹을 때도 이 생각밖에 안 하잖아요.”

“…….”

“내 생각은 안 하고.”

그 말에 나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네 생각을 왜 해야 되는데?”

“그래서 싫은 거예요.”

그는 오히려 내게 화를 내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서 환장할 것 같았다.

“난 선배 눈에 닿는 모든 게 다 싫어요. 화분도 싫고, 만화책도 싫고, 호두 파이도 싫고, 딸기도, 갈비찜도 다 싫어.”

“…….”

“다 싫은데 선배가 좋아하는 거니까 나도 좋아하려고 노력해 볼게요.”

정우진은 풀이 죽은 얼굴로 슬쩍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그러니까 선배도 내 생각 조금만 해 주세요.”

애절하기 그지없는 고백이었지만, 저 고백에 감동을 받기엔 우리의 시작이 너무 좋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난 게이도 아니었으니 굳이 시작이 좋았다 하더라도 저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좆같긴 했겠지만.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는데 정우진이 혼잣말로 징징거렸다.

“창문 다 막아 버릴 거야.”

“…….”

“선배가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했으면 좋겠어요.”

……쟨 감방이 아니라 정신 병원부터 가 봐야겠다. 저 정도면 중증 아닌가?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왜 하필 저런 정신병자한테 걸린 사람이 날까.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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