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커다란 손이 뇌를 꽉 잡고 쥐어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대체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픈 거지? 눈을 뜨지도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는데 이마에 서늘한 게 닿았다. 그러자 두통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고통이 점점 사라지자 그제야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희뿌연 게 그득하게 끼인 듯 앞은 흐리기만 했다.
“깼어요?”
“…….”
낯선 목소리가 들리자 다시 머리가 아파 왔다. 나는 다시 눈을 꾹 감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리자 가까운 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들리는 낯선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몸을 움직이자 느껴지는 고통에 다시 뒤로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트럭에 치인 것처럼 온몸이 아파 왔다.
“큭…….”
“좀 더 누워 있어요. 아직 약 기운이 남아 있어서 어지러울 거예요.”
서늘한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쓸었다. 순간 온몸의 땀구멍이 죄다 열리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정우진.”
얼굴을 보기도 전에 입에서 이름이 나왔다. 그리고 소리를 내고 나서야 내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지고 쉬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목구멍이 너무 따가워서 가볍게 마른기침을 하자 정우진이 내 등을 쓸었다.
정우진은 새카만 눈동자로 날 살피며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
“선배, 많이 아파요?”
걱정이 담뿍 담긴 눈동자로 날 빤히 쳐다보는 정우진을 마주 보며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저 새끼가 왜 내 앞에서 날 걱정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잔뜩 인상을 쓰며 눈을 감았다.
정우진이 밥을 사 준다고 했다. 그것도 비싼 걸로.
평소에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밥 사 준다는데 거절을 할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정우진은 우리 학교에서 제법 유명했기 때문에 얼굴과 이름을 대충 알고 있어서 크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똑똑하고, 잘생기고, 돈 많고, 착하기까지 한데 모델 일을 하고 나서 더 유명해졌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 소문이 무성한 학교 아이돌 후배가 왜 나한테 밥을 사 준다는 건지는 몰랐지만 나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정우진을 따라 학교를 나섰다.
한데, 그 뒤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존나 비싸 보이는 차에 탄 뒤로, 뭔가 마셨던 것 같은데 그다음부터 기억이 끊어졌다.
조금 더 차분하게 생각을 해 보자 마지막에 보였던 건 물감을 섞은 듯 세상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던 풍경이었다. 마치 술을 마시고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다음에 바라보는 세상처럼 말이다.
“…….”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면서 손발이 차갑게 식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도 못하고 눈을 뜨자 서늘한 손바닥이 내 눈가를 덮었다.
“한숨 더 자요.”
“정우진.”
“네, 선배.”
나는 손을 뻗어 그의 팔목을 잡았다. 눈가를 덮고 있던 커다란 손바닥이 떨어지자 학교의 아이돌이라고 불릴 만한 멀끔한 얼굴이 보였다. 새하얀 얼굴과는 대조되는 새카만 머리카락과 새카만 눈동자, 그리고 입가에 걸린 다정한 미소.
온몸을 덮치는 불안감에 숨을 삼키며 황급히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내가 왜……. 아니, 네가 왜……. 아니, 여긴 어디지?”
“선배, 일어나지 말고 누워 있어요. 아직 약 기운 남아 있어서 움직이면 어지러워요.”
“……약 기운?”
내 반문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줍어 보이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다음부턴 약 안 쓸게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분명 나는 정우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데, 머리와 달리 몸은 알고 있다는 듯 점점 이상해졌다.
갑자기 숨이 턱턱 막히고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파 와서 가슴께를 부여잡고 허리를 구부렸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낯선 장면들이 떠올랐다.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했던 온갖 음담패설을 내뱉는 남자의 밑에서 어떤 사람이 바람 앞에 지푸라기처럼 정신없이 흔들렸다. 애원하고, 좋다며 울고, 살려 달라며 울부짖었다.
시끄럽게 헐떡거리는 신음과 젖은 소리가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밑에 깔린 남자는 피부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이 얼룩덜룩했다. 인형처럼 사지를 흔들면서 다리 사이로 오줌을 싸는 것처럼 뭘 줄줄 흘리면서 짐승같이 울었다.
“선배, 잠 안 와요? 씻을래요?”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기억 사이로 정우진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며 사색이 된 채 정우진을 쳐다봤다.
“제가 씻겨 줄게요.”
“…….”
정우진에게 깔려서 헐떡이며 울던 남자는 바로 나였다.
그걸 깨닫는 순간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목구멍에 뭔가 걸린 것처럼 갑갑해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넋이 나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는 나를 정우진이 일으키려는 듯 손을 뻗었다.
“일단 욕실로…….”
손이 닿자마자 발작하듯 그의 손을 뿌리쳤다. 나도 모르는 새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이 기억이 사실이라면 나는…….
“선배.”
그때 시종일관 웃는 낯이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해졌다. 그 극명한 변화에 공포 영화를 보는 것처럼 소름이 끼쳐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구멍이 뻥 뚫린 시커먼 구덩이 같은 눈에서 시선조차 돌리지 못하고 있는데, 멀거니 나를 보던 정우진이 물었다.
“화났어요?”
그건 너무 이상한 질문이었다.
화가 났냐니? 누가? 내가? 내가 왜?
나는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단지 이 상황이 너무 혼란스럽고 현실감이 없어서 계속 멍하기만 할 뿐이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우진이 왜 내 앞에 있고 나는 왜 여기에 누워 있는 것이며, 드문드문 생각나는 이 정신 나간 기억들은 도대체 무엇인지.
“선배, 화났어요?”
정우진이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나는 여전히 왜 정우진이 나에게 화가 난 것이냐고 묻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보다 화가 나고 안 나고 그런 것보다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다.
“정우진.”
“네, 선배.”
“……여기가 어디야? 그리고 내가 왜 여기 있는 건데?”
내 물음에 정우진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곧장 대답했다.
“여긴 제주도 근처에 있는 제 별장이에요. 선배가 여기 있는 건 제가 데리고 와서 그런 거고요. 더 궁금한 건 없어요?”
“뭐? 별장? 아니, 제주도? 내가 왜…….”
“정확히는 제주도가 아니라 그 근처에 있는 섬이요.”
“……섬? 아니, 도대체 이게…….”
들으니 더 혼란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정우진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둥실둥실 내 귀 안으로 들어오다가 고막에 닿기도 전에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 들었는데, 단어도 문장의 뜻도 다 이해를 했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횡설수설하자 정우진이 마치 진정하라는 듯 내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진정하세요. 일단 씻을래요?”
“뭐?”
내가 다시 멍청하게 되묻자 정우진이 별안간 피식 웃었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에 언뜻 이채가 도는 것도 같았다. 그 현실감 없어 보이는 모습을 멍하게 보다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어느새 정우진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내가 놀라기도 전에 말랑한 입술이 내 눈가 위에 꾹 닿았다가 떨어졌다.
“딴 사람이 그럴 땐 멍청해 보이던데, 선배가 하니까 되게 귀엽네요.”
귓가로 다정해 보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눈 동그랗게 뜨고 자꾸 되묻는 거요. 엄청 귀여워요.”
“…….”
정우진이 반대쪽 눈가에도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그러더니 혀로 속눈썹을 하나하나 핥기 시작했다. 그게 간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정우진의 어깨를 밀어냈다.
“씨발, 이게 무슨 짓……!”
순순히 밀려난 정우진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히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아까 말했다시피 여긴 제 별장이고, 선배가 여기에 있는 건…….”
“내가 도대체 왜……!”
“선배가 여기에 있는 건 제가 데리고 와서 그런 거예요. 제 차에 탔을 때 음료수 마신 거 기억나세요? 거기에 수면제가 들어 있었거든요.”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너도 당황해서 그런 걸까? 나는 한 문장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계속 말을 더듬으며 입술만 달싹거렸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머릿속이 복잡해서 하나도 정리가 되질 않았다.
그런 나와는 정반대로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듯 차분해 보이는 정우진이 가만히 나를 보다가 웃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세요?”
“……뭐?”
“기절한 선배 안고 제가 여기에 데리고 온 거예요.”
“…….”
나는 뒤늦게 내가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 건지 알 수 있었다.
분명 나는 어렴풋이 이게 아주 좆된 상황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 본능과는 달리 정우진은 계속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다정해 보이는 목소리로 계속 내게 아주 우호적인 사람인 것처럼 나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 간극이 자꾸만 이 상황을 현실감이 없게 만들었다.
“선배가 탔던 차 있잖아요. 그건 기억나죠? 검은색 차. 선배가 잠들고 차랑 같이 배 타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도착해서 제가 선배 안고 내릴 때 잠깐 뒤척인 거 기억 안 나세요? 그때 선배가…….”
정우진은 마치 범인이 범죄 현장을 고백하듯 구구절절 지껄이며 회상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자꾸만 내게 생각이 나냐고, 기억이 나냐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어 하는 애새끼처럼 혼자 떠들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신 나서 말하던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
“…….”
갑작스럽게 시작된 침묵에 다시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극도의 긴장감에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삐 하고 이명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질끈 감는데 순식간에 시야가 높아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날 아기 안듯 안아 들고 있었다.
“일단 씻어요.”
“정우진, 이거…….”
이거 놔! 내가 소리치기도 전에 정우진이 내 귓가를 끈적하게 핥았다. 뜨거운 숨과 함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칼처럼 박혔다.
“어제 잔뜩 싸 놔서 배 아플 수도 있으니까.”
그 말에 다시 말문이 턱 막혔다.
잔뜩 싸? 뭘? 뭘 잔뜩 싸 놔? 배가 왜 아파?
문장을 단어로 해체하면서 겨우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리자 눈앞이 핑 돌았다. 숨이 조금씩 가빠지면서 온몸에 감전이라도 당한 듯 소름이 끼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얼린 동태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는 사이 정우진이 날 안은 채 욕실까지 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비틀어 봤지만 정우진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더 거세게 반항하고 싶었지만 목에 뭐가 걸린 듯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몸에 힘도 들어가지 않고, 시야가 핑핑 돌아서 자꾸만 구역질이 났다.
정우진은 비실거리는 날 내려놓고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고 힘겹게 숨을 내뱉고 있는데, 문득 시야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아니, 처음에는 그게 난 줄도 몰랐다.
꼬라지가 괴물 같아서.
“배는 안 고파요? 다 씻고 밥 차려 드릴게요. 제가 선배 좋아하는…….”
“정우진.”
내 나지막한 부름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또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웃는 낯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치는 정우진을 말끄러미 보다가 다시 거울 속의 날 쳐다봤다.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추잡하고 더러운 모습이었다.
온몸이 피부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얼룩덜룩했다. 멀쩡한 곳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죄다 울긋불긋하고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정우진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시뻘건 손자국에, 선명하게 박혀 있는 잇자국까지.
게다가 가장 심각한 건 희뿌연 무언가가 온몸에 말라 굳어 있다는 점이었다. 가슴은 누군가가 껍질을 벗겨 놓은 것처럼 지나칠 정도로 붉었는데, 건드리기 무서울 정도로 꼿꼿하게 서 있다. 그리고 벌겋게 쓸려서 축 처져 있는 성기.
거울 속에 비친 흉측한 몰골을 보다가 나는 손을 들어 내 손목을 살폈다. 뭔가로 묶은 듯한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선배.”
그때 정우진이 자국을 가리기라도 하듯 부드럽게 그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천천히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내 손목에 입술을 눌렀다. 깃털이 앉듯 보드랍고 간지러운 입맞춤이었다.
“미안해요. 다음부터는 절대 다치지 않게 할게요.”
정우진이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폭죽놀이를 하는 것처럼 눈앞이 번쩍거리고 숨이 차올랐다.
“처음이라 너무 흥분해서 그랬어요. 정말 미안해요.”
그 말을 듣자마자 그동안 미처 느끼지 못했던 고통이 온몸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다리 사이부터 시작해서 그냥 온몸이 트럭에 치인 것처럼 아파서 정확히 어디가 아프다고 딱 꼬집어 말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나는 낮게 신음하며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정우진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동안 계속 내가 밀치면 밀려나던 정우진이 이번에는 꼼짝도 하지 않고 내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근데, 선배.”
잡힌 손목이 점점 아파 오기 시작했다.
“정우진 말고 우진이라고 불러 주면 안 돼요?”
나는 당황한 얼굴로 정우진을 쳐다봤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왜 자꾸 성까지 붙여서 부르세요. 정 없어 보이게.”
“무슨 개소리, 으, 윽!”
갑자기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생소한 감각에 나는 허리를 잔뜩 숙인 채 몸을 웅크렸다. 팔로 배를 감싸고 입술을 깨무는데 엉덩이 사이로 뭔가가 흘러내렸다.
사색이 된 얼굴로 숨도 쉬지 못한 채 굳어 있는데, 정우진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반대쪽 팔을 뻗어 내 허리를 안았다. 그리고 서늘한 손가락이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엉덩이 사이를 훑었다.
“선배가 좋아하는 갈비찜 해 놨어요. 나가서 밥 먹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미, 미친 새끼가 뭐 하는, 뭐…….”
이가 부딪칠 정도로 온몸이 벌벌 떨렸다. 지금 내게 일어난 일을 스스로 감당할 수가 없어서 당황하고 있는 사이, 정우진은 내 다리를 따라 길게 흐른 뭔가를 노골적으로 문지르다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엎드려 볼래요? 이 자세로 하면 힘들어요.”
거기에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정우진이 손쉽게 날 엎드리게 했다. 갑자기 정우진이 앞에서 엉덩이를 쳐든 자세가 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으, 하, 하지 마!”
“많이 부었네.”
“씨발, 하지 말라고! 야!”
발버둥을 치고 일어서려 해도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정우진은 너무 쉽게 엉덩이 사이를 벌려 안을 확인했다.
“그래도 찢어지진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으! 씨발, 너 도대체, 흑!”
순간 물컹한 뭔가가 엉덩이 사이에 닿았다.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설마설마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정우진이 내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박고 있는 게 보였다.
누군가가 망치로 머리를 후려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만하라고, 하지 말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정우진이 내 항문을 집요하게 핥고 있었기 때문이다.
“읏, 으윽……. 읏, 흐악, 아!”
일부러 소리를 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내 귀에만 그렇게 들리는 건지 핥는 소리가 고막을 핥고 있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들려왔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세워 앞으로 기어서라도 도망가려고 했지만 정우진이 날 잡고 놔주질 않았다. 내가 도망가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날 잡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허리 밑으로 감각이 없었다. 아니, 허리 밑으로밖에 감각이 없나? 정신이 없는 와중에 힘이 풀리고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뜨거운 게 항문을 핥다가 꼿꼿해져서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땐 정신이 아득해졌다.
“흐윽!”
그것은 뭔가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끈질기게 안을 헤집었다. 나는 결국 온몸에 힘이 풀려 바닥에 얼굴을 박고 파득파득 떨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아프다. 정신이 몽롱하다. 그리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모르겠다. 나는 아무런 사고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그런 것도 이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도망가야겠다는 생각도 물론 하지 못했다. 그냥, 계속 너무 뜨겁고 아픈 건지 좋은 건지 알 수 없는 감각을 그저 힘없이 무자비하게 구타당하듯 강제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리 사이는 물론 온몸과 내 안에 흐르는 피, 세포 하나하나까지 지나치게 뜨거워져서 녹아 버릴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정우진이 쪽 소리가 나게 항문을 빨아들이고 고개를 들었다.
“이제 물 넣어도 안 아플 거예요. 잠시만요.”
“흐으……!”
“선배?”
내 상태가 이상한 걸 느낀 건지 정우진이 의아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낮게 혀를 찼다.
“아직 약 기운이 많이 남아 있나 보네요. 선배, 저 누군지 알겠어요?”
“흑, 흐아, 아으으……. 씨, 발…….”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줄줄 흘렀다. 정우진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날 보더니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훑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 준 정우진이 날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 그러곤 내 팔을 들어 억지로 자기 목에 두르게 했다.
“선배, 조금만 참아요. 미안해요, 금방 끝날 거예요.”
“윽, 흐…….”
항문 안으로 정우진의 손가락 끝이 들어왔다. 그는 손톱 끝으로 내 항문을 살살 벌리더니 곧 손을 뗐다. 나는 내가 허리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가볍게 물만 넣을 거예요.”
물? 물은 갑자기 왜? 물을 어디로……. 내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차갑고 딱딱한 것이 다시 항문에 닿았다. 내가 힉 하고 숨을 들이켜자 정우진이 괜찮다는 듯 내 엉덩이를 살살 두드렸다. 그 딱딱하고 차가운 것이 내 항문에 들어와 미지근한 물을 내뿜을 때까지도 정우진은 내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였다.
“선배, 괜찮아요. 무서운 거 아니에요. 제가 있잖아요. 착하다, 10분만 참으면 되니까 울지 마세요. 선배, 선배.”
“아파, 아파, 배……. 흑, 으읏……!"
나는 고장 난 인형처럼 아프다는 말만 반복했다. 배 속이 뒤틀린다. 배 속에 장기가 제멋대로 움직이다가 내 배를 뚫고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배가 아파서 허리를 웅크리는데 정우진이 내 등을 토닥였다.
아득한 정신 사이로 정우진의 다정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 괜찮다는 말에 점점 더 정신이 아득해져 간다. 차라리 정신을 놓고 싶었다. 기절하자. 기절하면 꿈에서 깰 거야.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천천히 눈을 감으려다가 나는 다시 파드득 하고 떨었다.
“으으읏!”
“여기도 많이 부었네. 어제 너무 세게 잡아서 미안해요.”
“흣, 흐아……. 아, 아으!”
“선배가 자꾸 사랑한다는 말도 안 해 주고 질질 싸니까…….”
정우진의 기다란 손가락이 내 성기를 훑는 순간 항문이 크게 벌렁거렸다. 곧 엉덩이 사이에서 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 끔찍한 배설감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꺽꺽거리는데 정우진이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는 내 꼬리뼈를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제 1분밖에 안 지났는데.”
내 항문에서 나온 물로 그의 무릎과 다리가 다 젖었지만 정우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우진은 천사처럼 웃는 얼굴로 내 귓가에 속달거렸다.
“괜찮아요. 또 하면 되니까. 이번엔 마개로 막아 줄게요.”
정우진이 내 항문 속으로 다시 물을 넣었다. 하지만 막아도 10분이나 참는 건 무리였다.
나는 정우진이 내 항문 속으로 네 번째 물을 넣을 때 정신을 놓고 제발 그만하라고 빌었다. 그는 10분에서 5분으로 줄여 주는 대신 사랑한다는 말을 해 달라고 했다. 나는 정우진이 다섯 번째로 내 항문 속에 물을 넣고 5분을 참을 때, 그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었다. 우진아, 사랑해. 우진아, 사랑해. 그 말만 반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