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매니저의 고뇌
매니저는 담당 연예인의 스케줄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특히나 드라마나 영화 촬영 일정이 잡히면 활짝 열린 지옥문 안으로 발을 내딛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하원이 드라마를 찍는 내내 윤석진은 지옥 불에서 헤엄치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 드라마 촬영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지옥 불에 발을 담그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케이블도 아닌 공중파 드라마인데도 상반신 노출은 왜 그리 많이 나오는지. 촬영에 들어가기 앞서, 탄탄한 식스팩을 구축하기 위해 닭가슴살을 먹이고 운동을 시키고 하원의 24시간을 감시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민하원은 자장면과 탕수육을 몰래 시켜 먹다 걸리기까지 했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답답해지며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다.
겨우겨우 몸을 만들었지만,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면서 고생은 더욱 심해졌다.
아침잠이 많은 녀석이라 깨우는 것부터 고생, 틈만 나면 뭘 주워 먹고 있어서 몸 관리시키느라 고생, 새벽에 집에 들어와 새벽에 다시 촬영을 나가야 하는 스케줄에 정신을 반쯤 흘리고 다니는 하원을 챙기느라 고생, 거기에 더불어 그 모든 스케줄을 함께 소화해야 해서 윤석진은 더더욱 죽을 맛이었다.
그래, 나는 치열하게 싸웠고, 찬란하게 승리했고, 보람차게 쟁취했다.
무사히 드라마 종방일을 넘기고 남은 것은 꿀 같은 휴식이었다. 완전한 휴식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잠이 모자라 허덕거리는 생활은 끝이었다.
예능 출연은 하지 않는 민하원 덕분에, 아니, 하원을 예능에 내보내지 않는 기획사 사장 덕분에 당분간 스케줄도 없었다. 다음 작품을 골라야 하지만 그건 차차 정해질 일이고.
완전히 휴식기에 들어간 연예인과는 다르게 자잘한 일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놀면서 월급 받는다는 소리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모처럼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꿀 같은 늦잠을 자고 있던 윤석진은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 벨 소리에 이불을 끌어 올려 머리를 덮었다.
안 받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잠시 멈추었던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으으,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 손을 쭉 뻗어 더듬거렸다. 머리맡에 두었던 휴대폰을 가져와 상대를 확인하자, 안 받으면 곤란한 이름이 떠 있었다.
무슨 일이시지.
화들짝 놀라 등짝이 서늘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석진이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 하원이 엄마예요.
“어머님, 안녕하셨어요.”
―네, 윤 매니저도 별일 없죠?
“그럼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원이 녀석 연락 안 되나요? 집에 있을 텐데…….”
가끔 하원이와 연락이 되지 않으면 제게 전화 오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석진은 하원의 모친 전화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드라마도 끝났고 촬영도 없어서 집에서 놀고 있을 텐데.
―음, 아니에요. 그건 아니고 오늘은 윤 매니저한테 할 말이 있어서 전화한 거예요.
할 말이라니. 을숙의 말에 석진은 잠시 긴장했다.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한 분이지만 그래서 더욱 대하기가 조심스럽고 긴장이 되었다.
―전화로 할 말은 아니고…… 점심시간인데 식사 안 하셨으면 이쪽으로 와서 같이하는 건 어때요? 너무 갑작스러우면 다른 날도 좋아요.
“아닙니다. 저야 뭐 어머님께서 부르시면 달려가야죠. 밥까지 주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답하자 을숙이 호호, 하고 작게 웃었다.
―그럼 한 시간 정도 뒤에 와줄 수 있어요? 그 정도면 식사 준비는 될 것 같은데.
“네, 저도 준비해서 시간 맞춰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조금 이따가 봐요.
네, 하고 통화를 끊으려는 찰나 을숙이 윤 매니저, 하고 석진을 불렀다.
“네?”
―하원이한테는 말하지 말고 오세요. 당사자 없는 곳에서 흉봐야 재미있잖아요.
“하원이 흉볼 것이 뭐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렇지만 어머님과 단둘이 데이트라니 기대하고 가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러시지. 통화를 끝낸 석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했지만 도통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하원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그래봤자 요즘 집에 처박혀서 놀고먹는 녀석이 사고 칠 일이 있을 리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그냥 부딪치는 수밖에.
침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이불을 걷어냈다. 그럼에도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는 석진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 ∞ ∞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 빈손으로 오지 뭘 사 오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괜히 먹지도 않는 것을 사 갔다가는 짐만 될까 봐 뭘 사 가야 하나 엄청 고민을 했다.
언젠가 하원에게 그의 모친이 모 브랜드의 슈를 좋아한다고 들은 기억이 떠올라 그 매장을 다녀오느라 조금 늦긴 했지만, 반색을 하며 반기는 모습을 보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듯싶다.
“슈 좋아하신다고 하셔서 사 왔습니다.”
“어머,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고마워요.”
석진이 내민 쇼핑백을 받아 들며 을숙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배고프죠? 이러고 있지 말고 어서 들어와요.”
을숙의 안내에 주방으로 따라 들어간 석진이 식탁 앞에 앉자, 을숙이 그릇에 무엇인가를 가득 퍼 석진의 앞에 놓아주었다.
“이야, 닭죽이네요.”
“여름이니까 이 정도는 먹어줘야죠. 어서 들어봐요. 맛이 괜찮을지 모르겠네.”
“어머님도 같이 드시죠.”
“그럴까요.”
그릇에 닭죽을 조금 퍼 온 을숙이 석진의 맞은편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그것을 지켜보다 석진 역시 숟가락을 들었다.
잘게 찢은 닭고기와 걸쭉할 정도로 푹 익은 찹쌀, 한약을 넣었는지 약간 씁쓰름하면서도 건강하게 느껴지는 육수. 이게 바로 집에서 정성 들여 만든 닭죽의 맛이지.
크, 하고 소리를 내며 석진은 빈속에 허겁지겁 닭죽을 쑤셔 넣었다.
“이야, 맛있네요. 어머님 음식 솜씨는 정말 좋다니까요.”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겠지만 기분은 좋네요.”
그냥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라 정말 을숙의 음식 솜씨는 좋았다. 가끔 하원의 집에서 얻어 가는 반찬은 혼자 나와 살고 있는 석진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다.
“죽이니까 한 그릇으로는 금방 배가 꺼질 거예요. 그거 먹고 더 들어요.”
“그렇지 않아도 세 그릇은 먹겠는데요.”
배가 고픈 것도 있고 오랜만의 닭죽이라 아주 목으로 술술 넘어간다. 마시듯 한 그릇을 비우자 을숙이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빈 그릇을 채워주었다.
“그나마 날 더워지기 전에 드라마가 끝나서 다행이에요. 마지막으로 갈수록 체력이 달리는데, 거기에 날까지 더웠어봐요. 하원이 그 녀석 아주 징징거렸을 거야.”
“날씨 안 더워도 징징거려요. 그래도 입으로만 그렇지 할 때는 열심히 하거든요. 하원이도 나름 프로니까요.”
프로이긴 하지만 우는소리 할 때에는 프로고 뭐고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그렇지만 그러한 마음을 숨긴 채 석진은 을숙을 향해 빙긋 웃었다.
“생각해보면 윤 매니저가 고생이 많을 거예요. 하원이가 많이 칭얼거리잖아. 스물넷이나 먹은 놈이 아직까지도 아이 같다니까. 어떨 때 보면 애보다 더 심해요. 그렇죠?”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어서 슬펐다. 석진은 대답을 피하며 닭죽을 연신 퍼먹었다. 듣지 않아도 알 만한지 을숙이 웃으며 많이 먹어요, 하고 말했다.
괜찮다는데도 더 먹으라는 을숙의 권유에 결국 세 그릇을 비운 석진이 배를 두드리며 거실로 나왔다.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차를 부탁한 을숙이 석진이 앉은 소파 맞은편에 앉아 가만히 석진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실까. 조금 긴장한 상태로 뻣뻣하게 자세를 취하자, 을숙이 살짝 웃으며 윤 매니저, 하고 석진을 불렀다.
“네, 말씀하세요.”
“우리 하원이 데뷔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윤 매니저가 옆에서 많이 도와준 거 알아요. 솔직히 윤 매니저 없었으면 하원이 이렇게까지 못했을 거예요.”
“아닙니다. 하원이가 능력이 있고 또 열심히 하니까 저도 옆에서 받쳐준 것이지, 아니면 제가 아무리 이리 뛰고 저리 뛴다고 되지 않아요.”
“그래도 하원이가 노력하는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윤 매니저가 노력하고 고생해준 덕이죠.”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칭찬을 깔고 시작하는 거지. 매니저를 바꾸시려고 그러나, 아니면 기획사를 바꾸려고 하시나. 하원이 녀석 연기자 그만두게 하실 생각이신가.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 석진을 바라보며 을숙이 작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너무 불안해하지 말아요. 내가 뭐 좀 묻고 싶은 것도 있고, 또 말할 것도 있어서 그래요.”
얼굴에 긴장한 것이 드러났나. 석진은 손으로 뺨을 쓸며 흠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때마침 도우미 아주머니가 차와 과일을 내왔다. 차를 석진의 앞으로 밀어주며 을숙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하원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윤 매니저 혹시 알고 있어요?”
“하원이가요?”
민하원이요? 에이, 그럴 리가요.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손을 내저으며 웃던 석진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을숙의 시선에 웃음을 멈추었다.
“몰랐던 모양이네요. 하원이가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못 들었지만, 아무튼 둘이서 잘 만나는 모양이에요.”
“아닐 겁니다. 그 녀석 드라마 찍을 때에는 제가 거의 같이 있었는걸요. 지금이야 조금 쉰다고 혼자 두었지만 그런 일이 있었으면 기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겠죠. 그 녀석, 어울리는 여자 연예인은커녕 남자 연예인도 없어요.”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닐 겁니다. 마치 기자 회견에서 스캔들을 부인하는 연예인처럼 석진은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하고 말했지만 꽤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을숙의 태도에 점차 불안한 마음이 가중되었다.
만약 을숙의 말이 진짜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원이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있다면?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게 알려지면 여기저기서 스캔들 기사가 터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장한테도 엄청 깨질 게 분명했다.
석진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주변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모양이에요. 의심도 하지 않고. 윤 매니저가 모르고 있을 정도니까요. 나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 하원이 얘기 듣기 전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 많이 놀랐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관리를 못 한 탓입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 내뱉은 사과에 을숙은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만나는 건데, 죄송할 일도 아니고 관리해야 할 일도 아니죠. 그런 사과는 나중에 기사 터지면 그쪽 사장님께 하도록 해요. 물론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상대가…… 누구라고 합니까?”
하원이 녀석이 어머님께는 말씀드렸다고 하니, 그 상대가 대체 누구랍니까? 대체 누구이기에 제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겁니까?
자신의 관리하에 있는 연예인의 연애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매니저로서 실격이다. 자괴감에 한숨을 내쉬며 석진은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오늘 윤 매니저를 부른 건…… 단순히 그 일을 윤 매니저에게 알려주려는 이유만은 아니에요. 윤 매니저에게 책임을 묻고 추궁하거나 화를 내려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해결해달라고 부탁하려는 것도 아니고요. 부모 된 입장에서 혹시나 생길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없애고 싶은 마음에서였어요.”
윤 매니저, 하고 조용히 석진을 부른 을숙은 잠시 뜸을 들였다 말을 이었다.
“나는, ……윤 매니저가 모른 척해줬으면 좋겠어요.”
“어머님!”
어머님께서 이러시면 안 되시죠. 연예계 무서운 곳이라며 하원이 데뷔시키면서 걱정하시던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이런 말씀 하시면 안 되죠. 이제 겨우 자리 잡아가는 시기인데 여기서 스캔들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이고, 두야.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석진은 끄응, 침음을 내뱉었다.
“윤 매니저가 하원이를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 알아요. 그리고 나도 하원이 많이 걱정합니다. 내 자식인데 걱정이 안 되겠어요? 내 아들이니 잘되는 것이 좋고, 사람들 입에 나쁜 일로 오르내리는 것보다 좋은 일로 오르내리는 것이 좋고, 되도록 사건 사고 없이 무탈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있어요. 하지만요, 윤 매니저.”
“네, 말씀하세요.”
“우리 하원이…… 뭔가 부족해요.”
나름 이름 있는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민하원이 지능이 낮다는 얘기는 아닐 테고. 석진은 고개를 들어 을숙을 바라보았다.
“하원이가 스물네 살이 될 때까지 좋아하는 사람 하나 없었어요. 스캔들 날 걱정 없어서 소속사에서는 반가워할지도 모르겠지만, 부모 된 입장으로서는 걱정되는 일이에요. 사랑보다 일이 먼저. 남자들이 자주 하는 소리지만 하원이는 그것과는 조금 달라요. 윤 매니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원이 매니저, 소속사 사람이라는 직책을 떠나서 하원이랑 육 년 넘게 함께 생활했던 친한 형으로서 말해줘요. 정말 이상하거나 걱정되지 않나요?”
그렇게 물으시면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말을 아낀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런 석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을숙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석진을 바라보았다.
“그냥 모른 척해줘요. 하원이가 좀 허술한 면이 많지만, 이번 일은 상대방도 관련되어있는 만큼 쉽게 내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말하지 않았다면 윤 매니저는 앞으로도 계속 모르는 상태로 있었을지 몰라요. 하지만 사람 일이란 건 모르는 거니까요. 혹시라도 둘이 연애를 하다가 뽀뽀하는 걸 윤 매니저한테 들킬 수도 있고.”
그렇게 말하며 을숙은 수줍은 소녀처럼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렇게 웃으셔도 저는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석진은 허물어지는 입 끝을 애써 끌어 올렸다.
“뭔가 눈치챌 만한 일을 하더라도 윤 매니저가 모른 척하고 넘어가줬으면 싶어서 말하는 거예요. 괜히 애들 입 열게 하겠다고 닦달하거나 화를 내서 애들 상황이 나빠지는 것은 바라지 않아요. 연애 초기면 한창 좋을 때잖아요. 같이 있기만 해도 즐겁고,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오고, 손만 스쳐도 부끄러워서 얼굴 붉히고. 우리 하원이도 그런 감정 느껴보고 기뻐하고 설레어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을숙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석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라마도 무사히 끝났고 당분간은 속 편하게 쉴 수 있겠구나 하고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민하원 이 녀석이 오늘 크게 한 방을 날리는구나 싶어 머리가 아파왔다. 크게 친 홈런이 뒤통수를 강타한 기분이었다.
“어머님 마음은 이해합니다. 저도 하원이랑 오래 같이 있었어요. 육 년 가까이 함께해서 이제는 친동생이나 다름없어요. 그렇지만 어머님. 이건 아니에요. 일 잘못 커지면 하원이한테 안 좋아집니다.”
하원이뿐만 아니라 저도 망합니다. 저도 먹고살아야죠. 하원이가 여러 사람 밥줄을 쥐고 있는데 이러면 안 되는 겁니다.
“사람 좋아하는 마음이 나쁜 것도 아닌데, 그게 우리 하원이한테 좋지 않다니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런 거라면 차라리 일을 그만두게 하고 나랑 남편이 먹여 살리는 쪽이 좋지 않을까요.”
“어머님!”
차라리 저더러 죽으라고 하세요. 석진은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어 그저 울상만 지었다.
상냥하게 웃으면서 말씀하시니 더욱 죽을 맛이다. 조곤조곤 말하는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운데, 그 내용은 석진의 골을 잡아 흔들고 있었다.
“사실 하원이도 연예계 쪽으로는 별로 욕심이 없잖아요. 시키는 거 열심히 하는 것뿐이지, 자기가 뭐 몸값을 얼마로 띄우겠다 이런 포부도 없고 올해에는 무슨 상을 받겠다 이런 욕심도 없고. 하원이 녀석 앞에 데려다 앉혀놓고 네가 연애를 할 군번이냐, 일 그만두고 싶지 않으면 당장 헤어져라. 뭐 이런 소리 하면 그 녀석은 알겠습니다, 하면서 일 그만둘 녀석이죠.”
“어머님, 제발요.”
석진은 을숙을 향해 두 손을 모아 비볐다.
“윤 매니저, 부탁은 지금 내가 하고 있잖아요.”
이건 부탁이 아니라 협박입니다, 어머님. 닭죽 세 그릇 가격이 이렇게 비쌀 줄 알았다면 그냥 집에서 사 먹었을 겁니다. 석진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꿀꺽꿀꺽 삼켰다.
“하원이도 생각은 있으니 조심할 거예요. 내가 윤 매니저에게 이렇게 미리 말하는 건, 그래도 하원이랑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고 또 하원이를 나 대신 옆에서 보살펴주는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예요. 그리고 혹시나 뭔가를 보더라도 놀라서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부탁할게요. 모른 척하고 그냥 하원이 옆에 있어줘요.”
“어머님께서 아주 날을 잡으신 모양입니다.”
석진이 한숨을 내쉬며 한탄조로 말하자 을숙은 미안한 얼굴로 웃으며 석진을 바라보았다.
“나도 생각 많이 하고 고민도 하고 그랬어요. 그냥 둬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니까요. 그런데 하원이 얼굴을 보니까 차마 뭐라고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좋아하는 감정이 얼굴에서 흘러넘쳐요. 우리 하원이가 그런 얼굴 하는 거 처음 봤어요. 그 얼굴 보니까 목까지 차올랐던 말들이 생각도 나질 않더라고요.”
묵묵히 앉아 을숙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뻗어 나온 손이 석진의 손을 꽉 잡아 쥐었다.
“부탁할게요. 하원이가 비밀 연애하도록 도와주란 얘기 아니에요. 그냥 모른 척해주기만 하면 돼요. 하원이 성격에 윤 매니저한테도 언젠가 말할 테지만 그때까지는 모른 척하고 있어줘요. 상대가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말고. 혹시라도 하원이한테 가서 떠보겠다고 누구 좋아하는 사람 있느냐, 너 연애하는 거 아니냐 그런 것도 묻지 말고. 응?”
석진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을숙이 정확히 집어내자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황급히 시선을 내리며 표정을 감추었지만 그것을 알아차린 을숙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어봤자 하원이가 말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말하지 않을 거예요. 윤 매니저도 알고 있죠? 그 녀석 은근히 고집 있는 거.”
“차라리 제게 말씀하지 마시지 그러셨어요.”
“아니요, 난 윤 매니저 믿어요. 우리 하원이도 그럴 거예요. 그러니 우리 하원이랑 육 년 넘게 같이 일할 수 있었던 거 아닌가요. 그리고 난 우리 하원이도 걱정이지만 윤 매니저가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보고 놀랄 수도 있으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했죠.”
제가 걱정되어 말씀해주신 거라고는 하지 마세요. 덕분에 더한 걱정을 얻어 가는 기분입니다.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던 석진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어머님 말씀은 알겠습니다. 여기 올 때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긴장했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충격인지라 집에 가서 생각 정리를 해봐야겠네요. 그렇지만 일단은 어머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모른 척하고 있겠습니다.”
을숙을 향해 정중히 말한 석진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름 침착한 모습이었지만 머릿속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잠은 충분히 잤다고 생각했는데,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 일단 좀 집에 가서 자고 싶다. 몸이 아니라 정신이 피폐해진 기분이었다.
“윤 매니저.”
힘없이 몸을 돌리는 석진을 을숙이 불러 세웠다. 잠깐만 기다려줄래요? 그렇게 말한 을숙이 소파에서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투하할 폭탄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은 아니겠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소파에 기대어 서 있자 을숙이 보자기로 싼 무엇인가를 들고 빠르게 거실로 돌아왔다.
“하원이도 그렇지만, 윤 매니저도 이번 드라마 촬영하면서 하원이 챙기느라 정말 수고 많았어요. 하원이가 우리 귀한 아들인 것처럼 윤 매니저도 윤 매니저 부모님께는 귀한 아들이잖아요. 남의 집 귀한 아들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아서 윤 매니저 부모님께도 죄송하네요. 이거 가지고 가요.”
붉은색 보자기로 싼 것과 푸른색 보자기로 싼 것을 석진에게 건네며 을숙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런 거 주시면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는 것을 알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그걸 알고 계시니 이렇게 뺨을 때린 뒤에 사탕을 물려 주시는 것일 테지만.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을숙이 건네는 것을 받아 드는 손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을숙의 배웅을 받으며 느릿느릿 집을 나선 석진은 차에 올라타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아, 진짜. 민하원 이 망할 자식. 대체 뭐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서 누굴 만나고 다니는 거냐고!”
매니저가 되어서 담당 연예인이 연애를 하는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정말이지 매니저 실격이다.
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어떻게 내 눈을 피해서 연애를 할 수 있냐고. 민하원이 그렇게 철두철미한 성격도 아닌데 어째서 전혀 의심도 하지 못했던 걸까.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는 녀석이 대체 언제 어디서 어떤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거야!
석진은 핸들에 쿵쿵 머리를 찧으며 소리 없이 절규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민하원의 행적을 먼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자괴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후우, 후우. 차 유리창을 끝까지 내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으며 석진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진정하자, 진정해. 생각해보면 하원이가 유독 얌전한 거였지. 다른 애들은 클럽 같은 곳 놀러 다니고 술 마시고 약하고 스캔들 일으키고, 뭐 그런 것에 비하면 하원이 녀석이야 순둥이지. 그래, 그래. 남들 다 하는 연애질인데 민하원이라고 못 할 게 뭐 있어. 게다가 내가 몰랐을 정도였다면 쉽게 들킬 리도 없을 거고. 어떻게 보면 민하원 좀 대단하네.”
하하, 소리 내어 웃어보지만 기분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크게 소리 내어 웃다가 뚝 하고 웃음을 멈추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석진이 고개를 돌려 을숙에게 받아 와 조수석 위에 올려두었던 것을 바라보았다.
“대체 뭘 주신 거지.”
이걸 건네주셨을 때 수고했다 말씀하셨지만 실상 의미는 따로 있겠지. 그 의미가 뭔지 충분히 짐작이 가기에 더욱 한숨이 나왔다.
위에 올려둔 빨간 보자기로 싼 상자를 들어 보자기를 풀자 넓은 상자가 나왔다. 무게는 꽤 가벼운 것 같은데, 뭐지.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보자 축축한 풀 비린내와 약초 냄새가 났다. 이게 도라지는 아니겠지. 튼실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은 도라지도 아니고 인삼도 아닐 터였다.
이거 정말 삼인가. 아무래도 사모님이 주신 것이니 인삼은 아닐 테고, 자연산인 모양인데. 이 정도 크기면 돈깨나 들어갔을 것이다.
산삼을 선물로 받을 일이 또 있을까. 그 이전에 실물로 볼 기회조차 없을지 모른다. 그런 내 손에 산삼이 있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산삼이.
석진은 후들거리는 손으로 상자의 뚜껑을 덮어 조심스럽게 조수석에 내려놓았다.
푸른색 보자기로 싼 것도 봐야 하는데 손이 떨려서 진정이 되질 않는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조금 무게감이 있는 푸른색 보자기로 싼 상자를 열어보았다.
꽤 유명한 브랜드의 홍삼 엑기스와 홍삼 절편 세트였다. 이것 역시 가격대가 높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모님이 정말 날을 잡긴 잡으신 모양이다. 이런 것을 떡하니 안겨주시면 어쩌란 말인가.
내용물을 몰랐다고는 하지만 그걸 또 좋다고 받아 온 자신이 더 큰 일이다. 석진은 한숨을 포옥 내쉬며 선물세트 상자를 덮다가 그 사이에 껴놓은 을숙의 메모를 발견하고 그것을 펼쳐보았다.
[윤석진 매니저님. 항상 우리 하원이 때문에 수고가 많아요. 하원이도 그렇고 우리 가족 모두 윤 매니저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삼은 자연산이니 윤 매니저 부모님께 가져다드리면 좋을 것 같네요. 윤 매니저도 이제 건강 생각해야 하니 홍삼은 윤 매니저가 챙겨 먹었으면 좋겠어요.]
차라리 입 다물래? 민하원 매니저 때려치울래?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더라면 닥치고 있겠습니다, 혹은 그래도 저는 이 연애 찬성 못 합니다, 뭐 이런 식으로 나갔을 텐데.
이렇게 웃는 얼굴로 뺨 때리고 어르시니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고단수야. 민하원 저놈은 대체 누구를 닮은 거야? 어머님을 닮았으면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았을 텐데.
상자를 조수석으로 내려놓고 핸들에 머리를 기댄 석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어도 땅은 꺼지질 않고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현실이지만.
붉어질 정도로 핸들에 이마를 비벼대던 석진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조수석 위에 놓인 붉은 보자기, 푸른 보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하원이도 성인인데 연애도 해봐야지. 게다가 연예계 사람도 아니라고 하고. 만난 지 좀 된 모양인데 내가 모를 정도였다면 하원이 녀석도 어지간히 조심하고 있다는 소리잖아. 스캔들이야 안 터지게 조심하면 되고, 터지면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고. 됐어, 지금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어. 어차피 사모님도 나보고 뭘 하라고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그냥 알고 있으라는 의미였으니까. 모른 척하자, 윤석진! 넌 오늘 아무것도 듣지 못한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거라고!”
손바닥으로 뺨을 철썩철썩 때리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큰 소리로 반복하여 말했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뺨이 얼얼하여 감각이 사라질 정도였다.
열이 오른 뺨을 손으로 느리게 문지르던 석진은 크게 호흡을 고르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약간의 기다림 끝에 상대방의 목소리를 확인한 석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요? 응…… 아휴, 참. 나이도 있으신데 그냥 집에 계시지. 어머니가 호박 고추 안 심어도 자식들 다 먹고 살아요. 그런 거 서울에서도 다 팔아. 마트 가면 겁나 싱싱한 놈으로 사도 얼마 안 한다니까 뭐하러 힘들게 그걸 키운대? 뭐? 아버지는 뭐 하시고. 응, 응. 아휴, 어머니 아들은 밥 잘 먹고 다닌다니까요. 방금도 수고한다고 누가 닭죽을 끓여줘서 그걸 세 그릇이나 먹고 왔다니까. 어머니나 잘 드셔. 괜히 상 차리기 귀찮다고 물 말아서 드시지 마시고. 그래요. 응, 응. 참, 요즘 좀 한가해서 이번 주에 내려갈까 하는데. 응, 뭐 별일 있는 건 아니고. 내가 이번에 기가 막힌 거 들고 내려갈 테니까 닭이나 한 마리 푹 고아놓고 기다리고 있어요. 응, 응. 걱정하지 말라니깐. 그래요, 내려갈 때 연락할게. 그때까지 밥 잘 드시고 계셔요. 예, 예.”
∞ ∞ ∞
얘기를 듣기 전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알게 된 이상 민하원은 이제부터 주시 대상이다. 그럼에도 촬영이나 다른 스케줄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십사 시간 같이 붙어있을 수 없어 석진은 불안해졌다.
모처럼 시골집에 다녀오려고 하는데 그사이를 틈타 이 녀석이 무슨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가기 전에 민하원을 단속해둬야겠다며 석진은 평소처럼 연락 없이 하원의 집을 들이닥쳤다.
띠띠띠띠.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길도 조심스럽다. 예상대로라면 민하원은 분명 집에 있다. 그리고 녀석이 일반인과 연애를 한다면 분명 그 장소는 집에서 벗어나지 않을 테지.
이제껏 하원의 집에서 여자는커녕 여자 구두도 본 적이 없기에 하원의 모친 말에 쉽사리 수긍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만약 민하원의 완벽한 위장이었다면?
하원의 모친이 미리 알려주며 부디 모르는 척해달라는 언질이 있었기에 먼저 캐묻지는 않겠지만, 지금 석진의 심정은 어디 한번 들키기만 해라, 였다.
안쪽에서 들리는 하원의 웃음소리에 오늘 덜미를 잡는구나 싶어 석진은 힘차게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로 거실 바닥에 피자와 치킨을 늘어놓고 하원은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어?”
손에 든 피자를 한 입 베어 물던 하원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석진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혼자 있어?”
분명 혼자 있을 리 없다. 그럼 여태껏 민하원이 혼자 웃고 떠들었다는 게 되는데, 자신이 아는 민하원은 그렇게까지 정신 나간 놈이 아니었다.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이 여자가 다른 사람이 온 줄 알고 숨었나? 침실로 숨었나? 옷방으로 숨었나? 머리를 굴리고 있을 무렵 주방에서 나오던 용주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 오셨어요?”
“……용주 와 있었구나.”
뭐야, 용주였어? 석진은 김샜다는 얼굴로 걸음을 옮겨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작은 접시와 포크를 가지고 나온 용주가 피자를 손으로 들고 먹는 하원을 보더니 한걸음에 다가갔다.
“형, 제가 접시랑 포크 가지러 갔는데 그새를 못 참고 손으로 먹어요?”
“배고프단 말이야.”
“손 씻고 왔어요?”
“아까 집에 와서 씻었어.”
그러면서 기름이 묻은 손으로 피클이 담긴 통을 열지 못하니 열어달라 칭얼거린다.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석진이 쯧쯧 혀를 찼다.
저런 녀석이 무슨 연애질이야. 아무래도 사모님이 뭘 잘못 알고 계신 것이겠지. 석진은 소파 팔걸이에 기대어 누우며 하원이 질질 흘리고 먹는 꼴을 구경했다.
“매니저님, 점심 드셨어요? 같이 드실래요?”
“아침 좀 늦게 먹어서 괜찮아.”
“그래도 한 조각 드세요.”
괜찮다는데도 접시에 피자 한 조각을 올려 그것을 석진에게 건넨다. 그런 용주를 빤히 바라보자 용주가 왜요? 하고 물었다.
“요즘 애들답지 않게 참 바르구나, 싶어서.”
“매니저님이 칭찬해주시니 좀 쑥스러운데요.”
용주는 손등으로 뺨을 문지르며 배시시 웃었다.
“네가 민하원 뒤치다꺼리하는 것도 참 신기하고 말이야.”
진심으로 신기하다. 괜찮다고 말했던 것과는 달리 피자를 베어 물고 와구와구 씹어대며 석진은 먹을 만하네, 하고 말했다.
“저희 학교 앞에 피자집이 새로 생겼거든요. 남학교 앞이라서 크기로 승부하는지 양도 많고, 맛도 있더라고요. 숙소에 있을 때 배고프면 몰래 사 와서 먹곤 해요.”
“그러게. 진짜 크다.”
피자 한 조각이 성인 남자의 손바닥보다 더 크다. 감탄하며 말하는데 급하게 먹던 하원이 목이 메는 모양인지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잠깐만요.”
용주가 벌떡 일어서 주방으로 달려가 물을 떠 왔다. 그것을 하원의 입에 대주자 하원이 꿀꺽꿀꺽 받아 마시고는 휴우, 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나 목 막혀서 죽는 줄 알았어.”
“천천히 먹으라니까요. 물 더 줘요?”
“아니.”
“그럼 콜라 마실래요?”
“응, 콜라 마실래.”
둘이 대화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팔뚝이 근질거리는 것도 같고, 소꿉놀이를 구경하는 듯한 기분도 들고.
대체 사내놈 둘이서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왜 이상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하원의 연애 상대에 대해 고민을 하다 보니 너무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용주가 하원이 치다꺼리하는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민하원, 작작 좀 해라.”
속에서 올라오는 짜증에 손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네가 애냐? 나이가 스물넷인데, 흘리지 좀 말고 먹어. 기름 묻은 손 옷에 닦지도 마. 콜라 같은 것도 네가 가져다 마시고.”
애 둘 딸린 아줌마 아니면 저런 코찔찔이를 누가 만나겠다고. 정말이지 이래저래 걱정이 된다.
저 녀석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면 뭐, 그래.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둘이 서로 좋아서 만나고 있다니 전혀 상상이 되질 않잖아.
사모님은 진짜 알고서 하신 말씀이신가? 아니, 하원이 녀석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셨지. 저 녀석 무슨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거 아냐?
개인적으로 만나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가족들이랑 매니저인 자신, 그리고 용주가 전부이다. 꿈속에서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존재를 감출 수는 없지 않은가.
“왜 화를 내고 그래?”
입에 치킨 다리를 문 상태로 하원이 짜증을 냈다.
“온다 간다 연락도 없이 쳐들어와놓고. 용주랑 오랜만에 밥 먹고 있는데 왜 와서 짜증이야?”
“넌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냐? 왜 만날 용주야? 용주도 요즘 훈련하느라 바쁘다며, 너랑 놀아줄 시간이 어디 있어?”
“형이 용주야? 용주가 괜찮다고 왔는데 왜 형이 난리야? 자기도 친구 없고 애인 없으면서 괜히 나한테 화풀이야.”
자기 걱정해주는 줄은 추호도 모르고 구시렁거린다. 덩치만 컸지 속은 초딩보다 더 어린 민하원이 연애를 하고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석진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하원의 정수리를 주먹으로 쿡 쥐어박았다.
“시끄러워. 용주 귀찮게 하지 말고 얌전히 먹기나 해.”
“용주 귀찮게 안 해!”
그건 네 생각이고. 언젠가 개그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대사가 떠올라 석진은 피식 웃었다.
“시골집 내려갔다 올 거야. 가끔 안테나 안 뜨기도 하니까 할 말 있는데 통화 안 되면 문자 보내놓고.”
“부모님한테 가는 거야?”
“그래, 너 때문에 나까지 오월에 붙잡혀 있는 바람에 어버이날에도 못 내려갔었잖아. 늦었지만 얼굴이라도 한번 비추고 와야지.”
“그렇구나.”
엄밀히 따지면 그것이 하원의 탓은 아니었지만, 석진의 핀잔에 하원은 미안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시는 거예요?”
들고 있던 접시를 내려놓자 용주가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차 막히면 오래 걸리거든. 오늘 내려갔다 내일 올라올 생각이니까 빨리 가는 편이 좋지.”
“운전하려면 배고프실 텐데 좀 드시고 가시지.”
“배고프면 휴게소 들르지, 뭐.”
주머니에 손을 넣고 휘적휘적 걸어 나와 신발을 신자 현관문 앞까지 따라 나온 용주가 조심히 다녀오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민하원 저 녀석은 잘 다녀오라는 소리도 안 하지. 쯧쯧, 혀를 차고는 용주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하원의 집을 나오면서 용주의 배웅을 받는 것이 언제부터 이렇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나 의문이 들었다.
이건 뭐랄까, 손님이 안주인 배웅 받으며 나가는 모양새와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왜 그러세요?”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용주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두고 나오셨어요? 석진이 잠깐 앉아있다 일어난 소파를 돌아보며 용주가 물었다.
“아니…… 아냐, 아무것도.”
정말이지 쓸데없는 생각 좀 하지 말자. 이런 생각을 하는 거 알면 아무리 성격 좋은 용주라도 웃고 넘어가줄지 모를 일이다.
신경 쓰지 말라며 고개를 내저은 석진이 나와 보지도 않는 하원을 향해 나 간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일단은 용주가 하원이랑 같이 있을 모양이고, 오늘 갔다 내일 올라올 생각이니 그다지 오래 하원을 혼자 두지는 않는 셈이다.
하원이 정말 누군가와 교제를 하고 있다고 해도 그 짧은 시간에 만나 데이트를 하기는 힘들겠지. 조금은 마음 놓고 다녀와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석진은 주차장으로 향하는 걸음을 빨리했다.
∞ ∞ ∞
시간은 여름의 끝자락에 걸쳐있었다.
드라마가 끝난 것이 오월 중순. 벌써 팔월이니 많이 놀기도 했다. 슬슬 다음 작품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사장에게서 호출이 왔다.
「하원이한테 하나 골라보라고 해.」
그렇게 말하며 사장이 던져준 대본들이 석진의 품에 곱게 안겨 있었다.
이미 한 번씩 훑어본 뒤에 괜찮은 작품들만 추려서 준 것이겠지만 그중에서도 사장이 특별히 점찍어둔 작품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것을 말해주지 않고 하원이에게 골라보라고 시키는 것은 사장의 심술에 가까웠다. 아무튼 애 같은 면이 있다니까.
처음 민하원을 길거리에서 보고 픽업했을 때에도 그랬지. 지금처럼 그때에도 뇌가 순진하던 민하원을 다짜고짜 차에 태워서는 여행을 실컷 시켜주겠다며 구슬리고 빼도 박도 못하도록 그 자리에 있던 자신을 하원의 매니저로 엮어두기까지 했다.
당시 관리하던 신인 여가수가 반년 뒤 데뷔하여 기대한 만큼 성과를 얻지 못하고 묻혀버린 것을 생각하면 자신에게는 큰 이득이었지만, 그때에는 민하원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사장이 저렇게 허풍까지 떨어가며 저 녀석을 데리고 오려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는 거지만 아마도 사장은 그저 민하원의 약간 독특한 사상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계산적이고 발랑 까져서 뭐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 머리 굴리기에 바쁜 아이들만 보다가 ‘내 주변에 있을 장미를 깨닫기 위해 여행을 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 민하원의 존재가 제법 색다르게 느껴졌겠지.
그 증거로 아직까지도 사장은 민하원과의 대화 같지 않은 대화를 꽤나 즐기고 있었다.
“민하원!”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하원을 부르자 침실에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몇 시인데 여태 저러고 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까치집을 한 머리, 어젯밤 자기 전에 뭔가를 먹은 듯 퉁퉁 부어있는 눈, 세수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얼굴.
“한가할 때일수록 운동을 해야지. 그렇게 게으르게 먹고 놀다가 나중에 다시 촬영하게 되면 너 또 엄청 고생한다.”
“어차피 고생할 거 지금은 놀 거야.”
사람이 생각해서 좋은 말을 해주면 귀담아듣는 척이라도 해야지. 저 원수 같은 놈. 좀비처럼 걸어 나와 소파에 털썩 드러눕는 하원을 바라보며 석진은 쯧쯧 혀를 찼다.
“왜 왔어?”
드러누운 상태로 고개만 쳐들어 석진을 바라보며 하원이 물었다.
“일어나서 앉아. 대본 들어온 것 좀 훑어봐.”
“영화?”
“이번에 괜찮은 거 몇 개 들어왔더라. 드라마도 들어오긴 했는데 약간 로맨틱 코미디 풍이라 별로인 것 같아. 이건 뭐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니까. 천천히 읽어보고 너도 추려봐.”
이곳으로 가지고 오기 전에 석진 역시 미리 한번 훑어보았기 때문에 대충 어떤 내용의 대본이 들어왔는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그중 사장이 무엇을 점찍어두었는지도 예상이 가고.
대본의 제목을 대충 훑어보며 하원이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형.”
“뭐야?”
애교 있게 불러봤자 자다 일어난 얼굴이다. 처음에야 저 녀석이 침을 흘리고 자도 예뻐 보이고, 밥을 흘리면서 먹어도 예뻐 보였지만 자그마치 육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저 예쁜 얼굴에도 익숙해져서 이제는 무감각해진 상태였다. 그러니 저렇게 살랑살랑 애교를 피워도 꼬질꼬질한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와 우스울 뿐이지.
“형은 말이야, 누가 깜짝 선물을 준다면 뭘 받고 싶어?”
“무슨 선물?”
“그러니까 그냥 기념일 같은 건데…… 어쩌면 형이 모르고 있을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그걸 기념해서 선물을 준다면…… 뭘 받을 때 기쁠 것 같아?”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민하원이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일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기에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영 감을 잡지 못하겠다.
이 녀석이 또 무슨 일을 꾸미려고 이러지. 빤히 바라보자 하원이 뾰로통한 얼굴로 석진을 올려다보았다.
“왜! 왜 그렇게 봐!”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고 짐작을 해보려고 했는데 전혀 짐작이 안 가네.”
“짐작하지 말고 빨리…… 뭐 받으면 좋을 것 같아?”
“글쎄, 돈?”
“아 씨, 형! 좀!”
분명히 뭔가 있는 모양인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장난스러운 대꾸에 하원이 짜증을 버럭 냈다. 그래봤자 자다 깬 얼굴이라 별로 타격도 없다.
그래도 예의상 하원을 다독거리다 문득 기념일, 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분명히 기념일 같은 거라고 했지?
“혹시 여자 선물이냐?”
“아냐, 남자야.
은근슬쩍 물어보자 하원이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이라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는 아니라는 말이네.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그 기념일이 뭔데? 생일?”
“생일은 아니고…….”
“그럼 무슨 기념일?”
“그냥 뭐…… 알고 지낸 지 이만큼 되었구나, 뭐 이런 거.”
하원은 무릎 위에 손을 올려 손가락 장난을 해대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대답하기 조금 멋쩍어하는 것을 보니 은근히 부끄러운 모양이다.
부끄럽긴 뭘 부끄러워해? 어이없는 얼굴로 하원을 내려다보던 석진은 이 녀석이 설마, 하는 생각을 했다.
“가까운 사람이야?”
“응, 가까워. 나는 가깝다고 생각해. 나한테는 아주 가까워.”
“선물을 주려는 목적은?”
“응?”
“그러니까 선물을 주면서 하려는 말이 있잖아. 선물을 주는 이유. 생일에는 생일 축하해. 어버이날에는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의 날에는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거.”
“아아, 그거. 음……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이 정도일까.”
아무튼 민하원 이 녀석은 가끔 쓸모없는 생각을 해서 문제라니까. 매니저로서 곁에 있는 거야 당연한 일인데 뭘 그런 것 가지고. 하긴 육 년이면 꽤 오랜 시간이기도 하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대본이나 잘 읽어,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도 민하원이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또 기특했다.
아무래도 하원이 비밀로 선물을 준비하려다 뭘 사야 할지 몰라 아닌 척 묻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 뭐 이쪽도 모르는 척 대답을 해줘야겠지.
석진은 애써 웃음을 삼키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하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마음이라면 아마도 네가 어떤 선물을 해주든 다 좋아할 거야.”
민하원이 이런 생각도 할 줄 알고 참 기특하구나, 기특해. 육 년 넘게 같이 지내면서 다투기도 했고 혼내기도 했고, 그렇지만 나 역시 네가 참 좋다, 인마.
석진은 하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웃었다. 큰 눈을 끔뻑거리며 올려다보는 하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석진은 드물게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이만 간다. 그거 천천히 읽어보고 잘 생각해둬.”
하원이 쑥스러운 만큼 석진 역시 조금은 쑥스러웠다. 아무튼 민하원 저 녀석은 사람을 괜히 간지럽게 만들고 있어.
가방을 챙겨 걸음을 옮기던 석진은 신발을 신고 다시 하원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인마, 네가 이렇게 사람 되어가는 모습에 이 형은 뿌듯하다! 작게 손을 흔들어준 석진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너무 광범위하게 말했나. 하원이는 조금 단순해서 뭐가 좋다, 뭐가 싫다, 이렇게 말해줘야 알아들을 텐데. 현관문을 닫으며 석진이 잠시 멈칫했다.
그렇다고 다시 들어가서 형의 지갑이 요즘 좀 낡은 것 같다. 들고 다니는 가방 손잡이가 떨어지려고 한다. 그런 말을 하기에는 영 속보이지. 하원이 녀석의 눈썰미를 믿어보는 수밖에.
∞ ∞ ∞
“아무래도 영화가 좋지 않을까요.”
“왜? 하원이가 영화 하고 싶대?”
하원이는 그냥 놀고 싶을 겁니다. 그러한 말을 삼키며 웃자 사장이 석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영화가 좋을 거라고 생각해?”
“드라마가 대중성이 있다는 면에서 사람들의 눈에 익기는 쉽죠. 그렇기는 하지만 하원이는 그렇게 대중적인 이미지로 친숙하게 다가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하원이 데뷔했을 때를 생각해봐도, 그 CF가 떴던 것은 얼굴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민하원의 신비로움이 절반을 먹고 들어갔기 때문이니까.”
“화면에 오래 얼굴을 내보이지 않는 쪽이 좋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꾸준히 얼굴을 내보여 이름을 알리는 것도 좋지만, 영화 하나 크게 대박 쳐서 임팩트를 주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대중성보다 희소성에 무게를 두겠다는 건가?”
사장은 석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원이 녀석 예능으로 안 돌리는 것도 그 이유 아닙니까?”
“그건 걔가 거기 나가서 무슨 소리를 나불거릴지 모르니까, 안 내보내는 거지.”
하긴, 그 이유가 크긴 크지. 제어 없이 날뛰게 만들었다가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져버릴 수도 있으니까. 거기에 더해 생방송에라도 나갔다가는 대형 참사가 벌어질 가능성도 매우 컸다.
사장은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손가락에 걸린 볼펜이 한 바퀴를 돌아 손에 안착할 때마다 탁, 탁, 울리는 소리가 그나마 숨 막히는 침묵을 조금은 완화시켜주고 있었다.
꾹 다문 입술과는 다르게 머릿속은 치열하게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쪽을 빤히 응시하는 날카로운 시선 속에 석진의 말이 이득으로 돌아올지 아닐지를 판단하고 있는 사장의 생각이 전해져왔다.
석진은 움츠러드는 몸을 힘주어 세우며 사장을 마주 보았다.
“하원이는 뭐가 하고 싶대?”
사장의 물음에 차마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왜? 다 하기 싫대? 아무 말도 안 해? 아니면 안 읽어봤어?”
사장의 채근에 석진은 대본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슨 역이 들어왔다는 것도 알아?”
“아니까 그거 하고 싶다고 했겠죠.”
중요한 역할이기는 하지만 초반에 나와 죽어버리는 캐릭터. 분명히 촬영도 적게 할 거라는 생각에 골랐음이 분명했다. 사장도 하원의 생각을 짐작했는지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민하원 이 녀석은 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정말 골 때린다니까.”
하원이 녀석이 이렇게 나오리란 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런 하원에게 대본을 안겨주며 골라보라고 하는 사장을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됐어, 배역 들어오는 거 조금 더 두고 보다가 네가 결정해.”
제가 결정해봤자 최종 결정은 사장님이 하시겠죠. 그러면서 괜히 아랫사람 일만 늘려놓는다. 사장도 어지간히 정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불만이야?”
“아닙니다.”
제가 감히 하늘 같은 사장님께 불만을 갖겠습니까? 그냥 까라면 까는 거죠. 테이블 위에 흐트러진 대본들을 대충 정리해 한쪽으로 쌓아두자 사장이 픽 웃음을 흘렸다.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
“이제 점심시간인데요.”
“점심은 약속 있어.”
“그럼 저보고 저녁때까지 여기 있으란 말씀이세요?”
“할 일 없으면 일 좀 하다 가든지.”
아무튼 막무가내다. 이렇게 휩쓸려서 다닌 지 벌써 몇 년인가. 난 매니저이지 댁 개인 비서가 아니거든요. 그러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며 석진은 사장을 노려보았다.
“그냥 다음에 사주시죠.”
“싫어. 오늘 저녁밖에 시간이 안 돼.”
“그럼 먹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윗사람의 호의를 무시하냐?
진심으로 그 호의를 무시하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일개 매니저가 어찌 사장의 호의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하고 말하자 사장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저녁 먹고 오랜만에 술 한잔할까?”
“그것도 호의입니까?”
“음, 그럴걸.”
정말이지 받고 싶지 않은 호의이지만 어쩔 수 없지.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자 하원이었다.
“민하원이야?”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고 있자 사장이 넌지시 물었다.
“저한테 전화 걸 사람이 하원이밖에 없는 줄 아세요?”
“민하원 아니야?”
“……맞습니다.”
무슨 신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작게 투덜거리며 전화를 받자 하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어디야?
“어, 나 지금 사무실 좀 나와 있어.”
용건 없으면 전화도 안 하는 녀석이 웬일로 전화를 했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사무실? 집에 언제 오는데?
“왜? 또 무슨 사고 쳤냐?”
―왜 내가 만날 사고만 치고 다니는 것처럼 말을 해!
그걸 모른다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이겠지. 게다가 사고 치지 않는 이상 먼저 연락할 일이 없는 놈이 전화를 했으니 그렇게 묻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지만 모처럼 전화한 녀석을 토라지게 하는 것도 기분 좋지는 않아 취소, 취소. 하고 말했다.
“아무튼 나 지금 사장님이랑 대화 중이니까 용건만 간단히 해, 인마.”
―나 오늘 형네 집에 가서 놀면 안 돼?
“글쎄, 나 지금 막 사무실 나온 거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사장님 모시고 저녁 식사하고…….”
“왜? 하원이 녀석 또 어디 가서 무전취식했대?”
“네? 아아, 아니에요. 그냥 전화했나 봐요. 이 녀석이 요즘 들어 갑자기 이러네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매니저에게 너무 못 할 짓을 많이 했다고 반성이라도 하는 모양이지요. 그런 점을 본받아 사장님도 좀 반성하셨으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겠죠.
한숨을 포옥 내쉬며 석진은 이것이 바로 없는 자의 서러움이라는 것인가, 하고 눈물을 삼켰다.
“아무튼 하원아, 오늘은 곤란하겠다. 사장님께서 오랜만에 한잔하자고 그러시네. 왜?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형이 보고 싶어서?”
넌지시 농담을 건네자 반대편에서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끊은 것은 아니겠지? 아직 통화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석진은 자신의 농담을 하원이 무시했음을 깨닫고는 멋쩍은 마음에 으하하, 하고 애써 웃음으로 무마했다.
“심심하면 나오라고 해. 저녁 먹자고.”
“지금 점심시간이거든요.”
“나오라고 해서 같이 일해. 혼자 하면 심심하잖아.”
제가 언제 일하겠다고 했습니까? 당연한 것처럼 말씀하시네. 그럼에도 석진은 사장의 시선에 감히 대꾸하지 못하고 깨갱, 꼬리를 말았다.
“정말 하원이한테 일을 시키고 싶으세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전 예상이 되는데. 그래도 괜찮다고 하시면 불러서 일 시키고요.”
아마 하원의 손을 거쳐 간 모든 서류가 개판이 되지 않을까. 숫자 뒤에 0이 하나 더 붙거나 빠지는 것은 기본이고, 글자 위에 낙서가 덧씌워질 것이다. 서류가 잘못 전달되거나 사라질 가능성도 매우 컸다.
“그럼 그냥 옆에 앉혀놔. 걘 옆에 있기만 해도 재밌잖아.”
그건 그냥 구경할 때 재미있는 거겠죠. 걔 컨트롤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탈모가 생길 정도로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맨 꼭대기에서 지시만 하니, 민하원이 얼마나 골치가 아픈 놈인지를 사장은 몰랐다. 그냥 보면 웃긴 놈이라고만 생각하고 있겠지.
“심심하면 나올래? 사장님께서 너도 오랜만에 한번 보자고 하시네.”
―그럼 오늘 집에 늦게 가겠네?
저녁 시간 될 때까지 일하다가 저녁 먹고 술도 먹고 그러면 아마도 엄청 늦겠지. 사장이 언제 놓아주느냐에 따라 자신의 퇴근 시간이 달라질 것이다. 이게 바로 말단 직원의 비애였다.
“아마도 그렇지?”
―와아, 다행이다.
다행은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인마. 서서히 피어오르는 짜증에 설핏 미간을 찌푸리자 그런 석진의 얼굴을 사장이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럼 나 형네 빌라 가서 놀게. 용주랑 자장면 시켜 먹으려고. 용주랑 할 말도 있어서 형 집에 있다고 하면 좀 비켜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잘되었다.
“……뭐?”
―그럼 형, 나 형 집에 잠깐 가서 용주랑 논다? 자장면 시켜 먹고 얘기만 할 거니까 어지르지는 않을 거야.
또 용주야? 대체 넌 용주 말고는 친구가 없는 거냐? 네 입으로 좋아하고 사귀고 있다고 말했던 여자랑은 대체 언제 만나는 건데.
신이 나서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린 하원의 행동에 석진은 그저 가만히 휴대폰을 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원이는 안 온대?”
“자기 친구랑 자장면 먹겠대요.”
“그 녀석이 친구도 있어?”
그 녀석 말에 의하면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사귀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요.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서 문제이지만요. 하지만 이것을 사장에게 알릴 수는 없는지라 석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용주라고 있어요. 일전에 하원이가 무전취식했던 그 중국집 기억하세요? 그 집 아들입니다. 드라마 들어가기 전에 저희 집에서 다이어트 시킬 때, 그 집에서 몰래 자장면을 시켜 먹다가 친해졌나 보더라고요.”
석진의 설명에 사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다가, 생각해보니 정말 웃긴 모양인지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다섯 살 정도 어린데, 수준은 비슷해요. 아니다, 용주가 더 어른스럽구나. 보니까 애도 착하고, 하원이를 잘 챙기더라고요. 하원이가 꽤나 좋아해서 자주 집에 불러 같이 놀아요.”
“위험하지는 않고?”
위험하긴 개뿔이. 위험한 건 순백처럼 깨끗한 민하원의 뇌가 더 위험하다. 저번에 지갑도 없이 동네 중국집에서 자장면 시켜 먹고 SOS가 들어왔던 것을 떠올리면, 지금도 머리가 아파왔다.
“민하원보다 더 위험한 게 있을라고요.”
“그건 그렇지. 아무튼 하원이 녀석이 안 온다니 어쩔 수 없네. 난 점심 약속 때문에 나가봐야 하니까 넌 여기 앉아서 이거 정리 좀 해. 워드 파일로 옮겨두고, 다 하면 여기 이 명단 앞으로 카드 좀 써서 보내. 쓸 내용은 여기, 카드는 책상 마지막 서랍에 넣어뒀어.”
그러게 말하며 사장은 책상 위에 올려둔 지갑과 차 키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울지 말고. 얼마 안 되니까 천천히 하고 있으라고.”
얼마 안 되면 네가 하시던가요. 제 앞으로 수북이 쌓인 문서들을 바라보며 석진은 으득 이를 갈았다.
아무튼 사장하고 엮이면 되는 일이 없다. 항상 이렇게 휘둘리고 뼈 빠지게 부려 먹히고, 그러면서 잔업수당도 주지 않는다.
내가 매니저지 잡일꾼이냐고. 석진은 사장이 손수 쥐여주고 간 만년필을 차마 내던지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며 이를 앙다물었다.
∞ ∞ ∞
내 이럴 줄 알았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사장실에 처박혀서 사장 대신 일을 하고 있었느냔 말이다.
거봐, 내가 저녁 안 먹겠다고 했잖아. 내가 사양하겠다고 했잖아. 괜찮다는 나를 붙잡아서 일까지 떠넘기고 왜 이제 와서 딴소리야.
내가 밥 사달라고 했나? 내가 술 사달라고 했어? 윗사람의 호의가 어쩌고저쩌고 들먹거리던 사람이 대체 누구인데.
석진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옆에 있던 전봇대를 발로 쿵쿵 차댔다. 그래봤자 전봇대가 쓰러질 리 만무하지만 전봇대와 사장의 얼굴이 겹쳐져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성싶었다.
금방 올게, 하고 나간 사장이 느긋하게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네 시간이 지난 뒤였다.
얼마 되지 않는다던 일은 그때까지도 끝나지 않았고 사장실로 돌아온 사장은 뭐야, 아직까지 있었어? 하는 눈으로 석진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는 ‘어쩌지? 저녁 약속이 생겨버렸네.’라고 말하며 이른 퇴근을 해버렸다.
하던 것은 마저 하고 가도록 해. 그렇게 말하던 사장의 뒤통수에 만년필을 날리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
날리지 못한 만년필을 손에 꼭 쥐고, 석진은 한 자 한 자 힘주어 카드를 써야 했다.
요즘 손으로 카드를 적어 보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것도 자기가 하는 것도 아니고 아랫사람을 시켜서. 심지어 나는 매니저인데.
석진은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서러운 마음까지 같이 삼켰다. 한번 호구는 영원한 호구라고 했던가. 예전부터 이런 식으로 빈번하게 사장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오늘도 왠지 기분이 싸하다 했어. 예감이 좋지 않았지. 저녁을 같이 먹자고 말하던 사장이 일감을 던져주고 비릿하게 웃으며 사장실을 나설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하필이면 오늘 차까지 정기점검을 보내버린 탓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퇴근하는 석진의 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괜찮다고 하는 자신을 붙잡아 일까지 시켜가며 같이 저녁 먹자고 한 사장 때문에 쫄쫄 굶으면서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해버렸다.
빈속은 아까부터 꼬르륵, 꼬르륵 요란하게 울어댔고, 할 일 없는 위산은 화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위벽을 긁어대 속이 쓰리기까지 했다.
하던 것은 끝내놓고 가라는 사장의 명령 아닌 명령에 천근만근 무거운 손을 움직여 겨우 카드 쓰는 일을 끝냈다. 결국 일곱 시에 가까워져서야 사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힘들다. 배도 고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아이고, 어머니. 먹고사는 것도 참 못 할 짓이네.”
구월이면 가을인데 뭐 이렇게 더워. 날은 덥지 식사라고는 늦은 아침 먹은 것이 전부인 석진은 퇴근 시간까지 겹친 탓에 콩나물시루와 같은 버스를 타야 했다.
집 앞 정거장에서 내려 빌라를 향해 느릿느릿 기어가듯 걸음을 옮기는 석진은 녹초가 되어 죽을 지경이었다. 순간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서러움이 밀려왔다.
일곱 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해가 떨어지지 않아 골목은 밝았다. 붉게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빌라가 눈앞에 나타났다. 밥이고 뭐고 집에 들어가서 씻고 눕고 싶었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와중에 문득 구수한 자장면 냄새가 석진의 허기진 배를 자극했다.
오래된 빌라는 어느 집에서 요리를 하거나 뭔가를 시켜 먹으면 빌라 전체로 냄새가 퍼지곤 했다.
이렇게 진한 자장면 냄새라니, 누군가 창문을 열어놓고 자장면을 먹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원이 녀석이 용주랑 자장면을 먹겠다고 했었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 석진은 자신의 집 베란다를 바라보았다.
역시 범인은 민하원이었고만. 이런 쥐꼬리만 한 빌라에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베란다에 나와 자장면 먹으면 그 냄새가 온 빌라에 다 퍼진다는 것을 왜 모를까.
쯧쯧, 혀를 차면서도 빨리 가면 제가 먹을 것도 조금은 남아있지 않을까 싶어 빌라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자장면은 뒷전인 채 용주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웃던 하원의 얼굴이 용주에게로 기울어졌다.
영화를 보면 가끔 감성적인 장면이 슬로 모션으로 표현되며 화면 가득 그 장면이 잡힐 때가 있다. 그때처럼 석진의 눈에 용주와 입을 맞추는 하원의 모습이 느리게 비추었다.
“……말도 ……안 돼.”
사장에게 쪼이며 반나절을 사장 대신 일을 한 데다 더운 날씨에 에어컨까지 고장 난 만원 버스를 타고 온 탓에 심신이 피곤하여 잘못 본 것이 분명하다.
점심부터 쫄쫄 굶어 배가 고파 헛것이 보이는 건지도 모르지. 사장 때문에 열받은 머리가 반쯤은 돌아 환각을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석진은 손등으로 눈꺼풀을 비비며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새하얘졌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석진에게 보이는 것은 입술을 마주하고 있는 두 녀석이었다.
늦더위라도 먹은 것일까. 석진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모른 척해줘요.」
순간 귓가로 하원의 모친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혹시라도 둘이 연애를 하다가 뽀뽀하는 걸 윤 매니저한테 들킬 수도 있고. 뭔가 눈치챌 만한 일을 하더라도 윤 매니저가 모른 척하고 넘어가줬으면 좋겠어요.」
사모님에게 신기라도 있는 것은 아닌가. 마치 오늘의 일을 예견이라도 하신 것처럼 딱 맞아떨어지니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분명 하원의 모친 말에 의하면 하원이 본인의 입으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현재 잘 만나고 있다고도 말했다는데 정작 하원의 주변에서 여자는커녕 여자 구두조차 본 적이 없었다.
따로 몰래 전화 통화를 하거나 만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자신을 속이며 외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친구가 용주밖에 없냐고 물어볼 정도로 용주하고만 어울렸다.
전화 통화를 한다 싶으면 그 상대는 용주였고, 주말에 누군가 와 있으면 그 사람 역시 용주였다. 저래서 대체 애인은 언제 만나나 싶었는데 그 애인이 용주였던 거다.
민하원은 숨기는 것 없이 자신의 눈앞에서 용주와 데이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자신은 하원이 용주와 함께 있을 때에는 그나마 안심이라고 생각했었다.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줄도 모르고.
석진은 얼빠진 얼굴로 제집 베란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입맞춤을 끝내고 수줍게 웃으며 뭔가 속삭이는 두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정말 저 녀석들이 연애를 하고 있었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하원이 왜 주말마다 용주랑 만나지 못해 안달을 했는지, 연예인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용주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주제에 철은 없는 민하원을 왜 그렇게 끼고돌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대체 언제부터…….”
작년부터였나. 드라마 시작하기 전부터 둘이 유난히 붙어 지냈지. 하원이가 꼬박꼬박 전화도 하고. 드라마 촬영 들어간 뒤로 연락을 안 하나 싶었는데 첫 방송 시작하는 날 쪼르르 달려간 하원이 용주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때부터였나.
아니면 용주가 축구 하는 모습을 보겠다고 경기장을 찾아갔던 그 시기쯤이었을까.
연습 때문에 바빠 용주를 못 만난다고 하원이 부쩍 투덜거렸던 일이 기억난다. 촬영이 힘든 것보다 용주가 바빠 못 만난다는 것에 하원이 크게 심통을 부렸었다.
그 전후로 해서 용주가 가끔 주말에 하원의 집에서 자고 가기 시작했던 것도 같다.
아니면 언제였을까.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도통 짐작이 가질 않는다. 언제부터 저 녀석들이 저런 눈으로 서로를 보고 있었지?
왜 그걸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일까. 석진은 쿡쿡 쑤시는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잠시 비틀거렸다.
저렇게 티가 나는데. 저렇게 서로 좋아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러워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왜 자신은 바로 옆에서 그걸 보고 있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모른 척해줘요.」
어머님, 어머님도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 상대가 고등학교 삼 학년 남자아이라는 것까지 알고 계시는 것은 아니겠죠? 그러니 모른 척해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겠죠? 부디 다 알고 있다고는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석진은 울고 싶은 마음에 꾹 입술을 깨물었다.
우울하다. 사장도 우울하게 만들고 민하원도 우울하게 만들더니 믿고 있던 용주까지 크게 뒤통수를 쳐 윤석진 인생을 완전 나락으로 빠뜨려버렸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그 말이 맞는 거다.
정말 믿을 놈이 하나도 없었다.
차마 집으로 들이닥칠 수도 없어 석진은 몸을 돌려 빌라 단지를 빠져나왔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던 석진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기분에 손으로 벽을 짚었다.
보는 눈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뽀뽀 정도는 거실 들어가서 하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석진은 속으로 하원을 타박했다. 이런 것까지 걱정하고 싶지 않아. 울먹거리는 석진의 어깨 위로 툭, 투둑 예고 없던 소나기가 매섭게 쏟아졌다.
소행성 B-612_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