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story
1. 어머니의 고민
하을숙 여사의 아침 시간은 비교적 한가로운 편에 속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가족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한 뒤 중학교 교사인 딸을 먼저 출근시키고 차례로 남편과 큰아들 내외의 출근을 지켜보면 그 뒤로의 시간은 오롯이 하을숙 여사의 것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건강을 챙겨야 한다며 몇 년 전부터 꾸준히 해온 러닝머신을 무리가 가지 않는 수준으로 두어 시간 정도 뛰듯이 걷고 땀이 흐르는 몸을 욕조에 푹 담그고 나오면 대충 점심 식사 시간에 가까웠다.
그사이에 청소를 끝낸 도우미 아줌마가 식사를 차리고 혼자 먹기 심심하다는 이유로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이런저런 우스갯소리를 하며 점심을 먹는다.
그런 뒤에 도우미 아줌마는 설거지와 빨래 등 남은 집안일을 하고 하을숙 여사는 거실로 나와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이 요즘의 생활 패턴이었다.
막내아들인 하원이 나오는 드라마는 작년 구월에 시작하여 원래 오십 부작으로 끝날 계획이었지만 시청률이 높게 나온 모양인지 그 뒤로 이십 부가 연장이 되었다고 했다.
종방을 이 주 앞둔 시점에서 하원은 잠잘 시간도 없이 촬영을 하는 모양으로, 집에도 잘 들르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 생활하는 시간대가 다르다 보니 따로 집을 나가서 생활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두 번은 들르던 아이가 근래에는 통화만 겨우 하는 수준이라 조금 걱정이 되었다.
불규칙한 생활에 끼니를 거르는 것이 일상인지라 몸이 축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싫다는 하원에게 한의원에서 지어 온 보약을 안겨주기도 했는데 그것을 잘 챙겨 먹었는지 모르겠다.
한번 녀석의 집에 가봐야 할까 을숙은 잠시 고민했다.
“사모님, 오늘 저녁은 뭐로 할까요?”
주방에서 나온 여자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을숙을 향해 물었다. 티브이를 틀어놓고 잠시 딴생각을 하던 을숙이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여자를 돌아보았다.
“깜박 딴생각을 했네. 뭐라고 했어요?”
“장 봐오려고요. 저녁 준비는 뭐로 할까요?”
“다른 건 다 했고?”
“부엌 정리는 다 끝냈고 지금 빨래 돌리고 있네요. 세탁기 돌리는 동안 가서 장 봐올까 싶어서요.”
“오늘 큰아들네랑 밖에서 밥 먹기로 해서 저녁 차릴 필요 없어요. 아, 내일 먹을 국거리는 사 와야겠구나.”
“뭐 특별히 드시고 싶으신 건 있으세요?”
“글쎄, 저녁에 반주하실지도 모르니까 조금 얼큰한 게 좋겠어요.”
“그럼 내일 새벽에 콩나물 사 올게요. 미리 사두는 건 아무래도 시들시들하더라고요.”
“그렇게 해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티브이로 시선을 돌렸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드라마는 계속해서 플레이되고 있었다.
화면을 다시 처음으로 돌린 을숙이 아줌마, 하고 여자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딱히 할 일 없으면 빨래 널고 오늘은 일찍 퇴근해요. 탈수까지 오래 남았어요?”
“아뇨, 한 삼십 분이면 될 것 같은데요.”
“그럼 그거만 널고 퇴근해요.”
“이렇게 빨리요?”
이제 겨우 세 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보며 여자는 조금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뭐 어때. 일찍 끝나서 가는 날도 있어야지. 참, 우리 며칠 전에 포도 선물로 들어온 거 어디에 뒀어요?”
“냉장실에 과일이 있어서 아직 박스도 못 뜯었네요. 부엌 베란다에 내놨는데 가져올까요?”
“응, 일단 선물 보낸 성의가 있으니까 두 송이만 꺼내놓고 그거 아줌마 가져가서 먹어요.”
“어머, 아니에요. 사모님.”
“민주 고3이죠? 그 나이에는 과일 같은 것도 챙겨 먹이고 해야 해. 가져가서 먹어요. 우리는 냉장고에 사다 둔 것도 있으니까. 안 먹고 두면 그냥 버리잖아.”
먹지 않고 버릴 정도로 살림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자신을 배려해서 하는 말임을 알아차린 여자는 더 이상의 반박 없이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탈수 기다리는 동안 차 한 잔 드릴까요?”
“그럴래요? 녹차로 가져다줘요.”
“네, 사모님.”
여자가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돌린 드라마를 플레이시키며 을숙은 소파에 허리를 기대어 앉았다.
지난 주말에 방송된 것이지만 벌써 몇 번을 다시 보는지 모른다.
하원이 출연한 드라마 ‘가족의 울타리’가 처음 방영한 이래로 주말에 한 드라마를 평일 내내 돌려보는 일이 반년이 지나자 습관처럼 굳어져 버렸다.
“내 아들이지만 잘났어.”
“그럼요, 하원 학생이 잘나긴 엄청 잘났죠.”
녹차와 포도 한 송이를 씻어 가지고 나온 여자가 그것을 거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을숙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옛날에는 얼굴도 뽀얗고 야리야리해서 예쁘기만 했는데, 이제는 남자가 다 되었어요. 자주 보질 못해서 그런지 가끔 볼 때마다 남자 태가 나서 깜짝깜짝 놀란다니까요.”
하원이 중학생일 때부터 일하던 도우미인지라 하원 학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원의 어릴 때 모습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을 을숙과 함께 지켜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어릴 때는 체구가 작아서 맞고 다니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고3 되니까 한순간 확 자라더라고. 그래도 아직까지 알맹이는 안 자라서 걱정이네요. 막내라서 그런가.”
“애교 많은 막내를 두고도 걱정을 하세요? 밖에 나가면 의젓하기 그지없는데요. 연기하는 것 좀 보라지. 어쩜 저렇게 맛깔나게 연기를 할까 몰라요.”
듣기 좋으라고 하는 칭찬임을 알지만 그래도 부모란 자식 칭찬에 한없이 약해지는 존재이기에 내심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긴 하죠? 저 녀석 크면 뭐가 될까 제일 걱정 많이 했는데. ……연기 안 했으면 뭐가 되었을지.”
을숙의 말에 여자 역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어머, 탈수 다 되었나 보네요.”
세탁실에서 울리는 소리에 여자가 쪼르르 달려갔다. 화면 속 드라마를 보며 을숙은 여자가 가져다준 녹차를 홀짝거렸다.
∞ ∞ ∞
바쁠수록 먹을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그러한 생각에 반찬을 가지고 몇 번 하원의 집을 방문했지만 촬영 때문에 바쁜지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결국 드라마 종방일까지 하원을 보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낸 을숙은 그다음 날 하원의 집으로 걸음 했다.
“얘가 아직도 자나.”
매니저인 석진과 통화를 하여 하원이 어제까지 촬영했다는 것을 알아낸 을숙은 벨을 누르지 않고 비밀번호로 문을 열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실내는 고요했다. 가지고 온 짐을 주방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소리를 죽여 방문을 열었다.
암막 커튼을 쳐놓은 침실은 한낮의 시간임에도 어두웠다. 열린 방문 틈으로 흘러들어온 빛이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하원의 모습을 희미하게 비춰주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을숙은 협탁 위에 놓인 스탠드를 켰다.
은은한 조명 아래로 핼쑥해진 하원의 얼굴이 보였다. 티브이를 통해 하원의 얼굴을 보는 것은 좋지만 이렇게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또 마음이 아프다.
안쓰러운 마음에 가만히 볼을 쓸어보지만 피로가 쌓인 탓인지 쉽사리 잠에서 깰 성싶지는 않았다. 소리를 죽여 침실에서 나온 을숙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배고프면 일어나겠지.”
어질러져 있는 거실을 대충 치우고 빨랫감을 찾아 빨래통에 집어넣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청소해주는 아주머니가 오시는데도 이렇게 더럽네. 아무튼 못 말린다니까.
한숨을 내쉬며 베란다 문을 활짝 열었다. 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볕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라도 통풍을 시켜야지, 나이가 몇인데 벌써부터 홀아비 냄새를 풍기려고 한다.
청소기를 돌리면 피곤에 지쳐 잠든 아들을 깨울까 봐 대충 더러운 것만 쓸어낸 을숙은 주방으로 들어가 가져온 쇼핑백을 뒤적거렸다.
어제 미리 양념에 재워둔 소갈비였다. 남편의 식성을 닮은 탓에 육류를 좋아하여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고기를 먹던 하원이다.
연기 활동을 하면서 원치 않게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연기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칭얼거리던 하원을 떠올리며 을숙은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럴 줄 알았어. 밥통 안 열어봤으면 큰일 날 뻔했네.”
고기를 구우려다가 설마 해서 밥통을 열어보니 그 안이 텅 비어있었다. 밥하는 법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밥해 먹을 시간조차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해 먹기가 귀찮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쌀을 찾아 씻어 밥을 안쳤다. 내친김에 냉장고도 열어보자 저번 주 수요일에 와서 넣어두고 간 반찬이 그대로 있었다.
“이러다 건강 해치지.”
일어나면 한 소리 해야겠다고 벼르며 을숙은 반찬을 꺼내 작은 접시에 덜어 담았다.
테이블 위에 반찬을 올리고, 사 가지고 온 야채를 깨끗이 씻어서 구멍이 뚫린 바구니에 담아 물기를 뺐다.
프라이팬에 갈비를 올리고 굽기 시작하자 고기 냄새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때맞춰 취사가 끝나가는지 밥통에서 김이 빠져나왔다.
“으으, 용주야아?”
방문을 열고 잠이 떨어지지 않은 얼굴로 꾸물꾸물 걸어 나오던 하원이 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웅얼거림에 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타지 않게 갈비를 뒤집어 가위로 썰고 있던 을숙은 아들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배 안 고파?”
“고파요.”
“그럼 어서 세수하고 와. 갈비 굽고 있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하원이 거북이걸음으로 씻으러 가는 것을 보며 을숙은 작게 웃었다.
기절한 것처럼 잠들어있던 녀석이 일어날 정도이니 얼마나 배가 고프다는 것일까.
접시에 고기를 올려 야채를 담아두었던 바구니와 함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빨리 밥 주세요.”
지금도 반쯤은 졸고 있는 얼굴인데 그 와중에도 밥 달라 채근하는 것을 보니 안쓰러우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마침 밥이 다 되어 다행이라며 을숙은 밥통의 김이 다 빠진 것을 확인하고 뚜껑을 열어 밥을 퍼 하원의 앞에 놓아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젓가락으로 고기부터 하나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 하원을 을숙은 맞은편 의자에 앉아 빤히 바라보았다.
입을 오물거리다 꿀꺽하고 넘긴 하원이 을숙을 바라보고는 씨익 웃었다.
“맛있어요, 갈비.”
고기니까 맛이 없을 리가 없지. 을숙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원은 본격적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촬영은 어제 다 끝난 거야?”
“네, 그런데 다들 피곤해해서 회식은 나중에 하기로 했어요. 아무래도 이번 주에 한 번 모일 것 같아요.”
“그럼 어제 촬영 끝내고 와서 지금까지 잔 거야?”
주먹만 한 쌈을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고 씹던 하원은 을숙의 물음에 고개만 끄덕여 답했다.
“생활이 불규칙해서 큰일이다. 그러다 몸 상해. 밥도 잘 안 먹고 다닌 모양이던데.”
“마지막 주는 정말 시간이 없었어요. 이제 끝났으니까 한동안은 여유 있을 거예요.”
“그래, 일단 먹어. 고기 더 구워줄까?”
상추에 고기 두 점씩 올려 먹는 하원을 바라보며 묻자 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프라이팬에 갈비를 올리며 을숙은 하원을 돌아보았다.
“이번 주나 다음 주쯤에 집에 한 번 들러. 아버지도 너 보고 싶어 하셔. 아무리 일하느라 바쁘다지만 나가 살면서 어쩜 집에도 안 와보니? 그러다 너 아버지한테 끌려 들어온다?”
“그렇지 않아도 갈 생각이었어요. 이번에 마지막 날까지 강행군이라 정말 정신없었거든요. 한 이삼일 정도 쉬었다가 집에 가려고 했죠.”
제가 안 가고 싶어서 안 간 것이 아니에요. 입술을 삐죽거리는 하원을 바라보며 을숙은 슬쩍 눈을 흘겼다.
“자꾸 그러면 미워할 거야. 너 집에 오면 채소 반찬만 해준다.”
“미워하지 마세요.”
우는 얼굴을 하며 하원이 엄살을 떨었다. 갈비를 뒤집으며 을숙은 웃음을 삼키고 짐짓 엄한 표정으로 하원을 바라보았다.
“그럼 잘할 거야?”
“네. 엄청 엄청 잘할 거예요.”
“그래야 우리 예쁜 막내지. 미리 날 정해서 와. 그날 가족들 다 모여서 저녁 먹게. 모처럼 너 좋아하는 것도 하고.”
갈비를 먹기 좋게 잘라 빈 접시에 담아주자 하원이 젓가락을 입에 물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음, 하고 소리를 냈다.
“왜?”
“그럼요, 누구랑 좀 같이 가도 돼요?”
“누구? 윤 매니저?”
“가족끼리 식사하는 자리에 윤석진을 왜 데리고 가요?”
가족끼리 식사하는 자리에 데려올 사람이 그럼 또 누가 있으려고. 을숙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하원을 바라보았다.
“제가……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요.”
“응?”
“제 장미예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요. 같이 가서 밥 먹고 싶어요.”
을숙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잠시 고민해야 했다. 그러니까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자신의 막내아들인 하원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 것일까.
을숙이 빤히 바라보자 하원이 왜 그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장미?”
“네, 제 장미요. 하지만 장미보다 더 예뻐요.”
하원은 두 뺨을 발그레 붉히며 웃었다. 저 얼굴을 보니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순수하게 정말 잘 됐다고 생각하기에 앞서 걱정부터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혹시…… 연기자라든가 가수라든가…….”
“아니에요. 학생이에요.”
“아, 그래?”
연예인이 아니라는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편견일 수 있지만 연예계에 종사하는 애들이 얼마나 독하고 무서운지를 알기에 만약 그쪽에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면 이 녀석이 괜히 휘둘리거나 이용당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을 터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자 하원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을숙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얼굴이에요?”
“응? 어떤 얼굴?”
“뭔가 복잡미묘한 얼굴이에요.”
내 마음처럼 얼굴도 복잡미묘한 모양이구나. 하원의 말에 을숙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글쎄, 우리 막내한테 벌써 애인이 생겼다는 소리를 들으니 서운해서 그런가.”
어미가 서운하다고 말하는데도 애인이라는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좋아 죽으려고 하는 하원을 보며 을숙은 한숨을 삼켰다.
이래서 자식새끼 낳아봤자 소용없다는 것이로구나. 남편이나 보고 살아야지, 아들 키워봤자 결혼시키면 남의 아들 된다는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
“용주는 정말 예쁘고 착해요.”
“이름이 용주야?”
“네.”
커다란 쌈을 싸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침실에서 나오며 잠결에 자신을 보고 용주야? 하고 물었었지.
여기에도 들락거리는 것일까. 하원이 막내에 아직까지 어리광이 심하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다지만 그래도 스물넷 먹은 남자인데, 그런 남자의 집에 다 큰 처녀가 들락거리다니 대체 어디까지 간 관계인 것일까.
궁금하고 걱정스럽지만 쉽사리 물어볼 말은 아닌지라 을숙은 그저 하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삭일 뿐이었다.
“으, 배불러. 잘 먹었습니다.”
그 아가씨에 대해서 좀 더 물어보려던 을숙은 하원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리는 모습을 보며 반사적으로 물을 건넸다.
“진짜 맛있어요.”
“고기니까 맛있는 거지?”
네 입맛이야 뻔하지. 그러한 의미로 말하자 하원이 헤헤, 웃었다.
저렇게 눈웃음을 치고 다니는데 이제껏 여자 하나 없었다는 것이 이상한 거였지. 어쩌면 여자가 생긴 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을숙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걱정을 다독거렸다.
“그럼 언제 올 거야?”
“네?”
“밥 먹으러 오겠다며.”
“아, 이번 주는 제가 안 될 것 같고요. 다음 주에 만나서 용주한테 말할게요.”
“그럼…… 다음다음 주 주말이면 괜찮으려나?”
“네, 토요일 저녁이면 좋을 것 같아요. 전 양치하고 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쏙 들어가 버리는 하원의 뒷모습을 보며 을숙은 여자에 관해 물어보려던 것을 참아야 했다.
∞ ∞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침대에 앉아있던 을숙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누구? 하고 물었다.
“어머니.”
“응? 아, 들어와라.”
장남인 하균이 을숙의 허락에 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을숙의 안색을 살피는 하균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어디 아프세요?”
“아냐, 아프기는. 무슨 일이야?”
“식사도 거르시고 무슨 일 있으신가 해서요.”
창가에 놓인 티테이블에 가지고 온 과일 접시를 올려놓은 하균이 의자에 앉았다.
“밥 생각이 없어서.”
“다른 일은 없으시고요?”
얼굴에 드러나는 모양이지. 을숙은 손으로 뺨을 쓸며 하균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오늘…… 하원이한테 다녀왔어.”
“어제 드라마 촬영 끝나서 녹초가 되어있었겠네요.”
“그래도 밥은 먹여야 할 것 같아서…… 어제 재어둔 갈비 가지고 다녀왔다.”
“좋아했겠어요.”
하원의 고기 사랑을 알고 있는 하균이 뻔하다는 듯 웃었다.
“드라마도 끝났고 해서 집에 와서 가족끼리 밥 먹자고 했더니 하원이가…….”
“싫대요? 반항해요?”
갈비까지 해서 가져다줬는데 이놈이 감히 싫다고 그래요? 제가 가서 멱살 잡아 끌고 올까요? 그럴 녀석이 아님을 알면서도 하균은 을숙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농담을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하원이가 그때 누굴 데려오겠다고 하더구나.”
“……누구를요?”
“애인인가 봐. 연예계에서 일하는 애는 아니고 학생이라고 하는데 눈치를 보니 하원이 살고 있는 곳에도 들락거리는 모양이더라. 같은 대학교 사람인가?”
“하원이 녀석이 애인을요? 그 녀석한테 애인이 있다고요?”
하균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머니, 그 녀석은요 머리는 성인인데 아직 마음은 어린아이예요. 머리로는 남자 여자 구분하겠지만 가슴으로는 여자나 남자나 그냥 사람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고요. 사람을 구별하라고 하면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인간적으로 호감이 가는 사람과 아닌 사람, 이런 식으로 나눌 녀석이에요.”
하균의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을숙 역시 그렇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오늘 일이 더욱 크고 중대하게 느껴졌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늘 얘기 들어보니 또 그게 아닌 모양이더라.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야. 하원이가 그렇게 기분 좋은 얼굴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 봤어. 우리 용주는 예쁘고 착하고 어쩌고저쩌고. 신이 나서 얘기하는데 애인 없는 사람이 보면 엄청 배 아플 것 같았다니까.”
“……용주요?”
“응, 용주라고 하더구나.”
을숙의 이야기를 조금 심각한 얼굴로 듣던 하균이 큭, 하고 웃음을 삼키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왜 그래? 하는 얼굴로 바라보자 하균이 끅끅 웃음을 흘리며 을숙에게 물었다.
“하원이가 용주를 애인이라고 했어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같이 와서 밥 먹고 싶다고 하던데.”
“아무튼 그 녀석도 표현하는 게 좀 문제예요. 이러다 한번 큰일 나지 싶네요.”
“왜?”
“애인 아니에요. 하원이 아는 동생이에요. 애가 순하고 착해서 하원이를 잘 챙겨주는 모양이라, 하원이가 엄청 좋아하거든요. 아직까지도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네요.”
아무래도 하균은 그 용주라는 아가씨를 본 모양이었다. 뭔가 더 묻고 싶은데 하균이 손을 내저으며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말했다.
“하원이 녀석 애인 생겼다고 해서 깜짝 놀랐네요. 아무튼 그 녀석도 어머니를 이렇게 걱정시키고, 정말이지 효자는 못 될 모양이에요.”
“정말 아니야?”
“네, 아니에요. 이게 바로 민하원 표현법의 문제라니까요.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먹고 싶은 거 물어봐서 그거나 해주세요.”
하균의 말에 을숙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엄청 걱정하시더니, 애인 아니라고 하니 또 서운하신 모양이네요?”
“그러게. 왜 이런지 모르겠다.”
그게 부모 마음이라는 거죠. 아는 척을 하며 웃는 하균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리며 을숙은 샐쭉 눈을 흘겼다.
하하, 웃으며 하균이 자리에서 일어나 을숙을 부드럽게 껴안았다.
“이러다 하원이 녀석이 결혼할 색시라도 데려오면 어쩌시려고요.”
“내가 뭐 하원이 녀석 아까워서 그런다니? 그 녀석이 하도 맹탕이니까 걱정이 되어 그러는 거지.”
“그래도 하원이가 인복은 있는지, 아니면 사람 보는 눈이 있는지 주변에 나쁜 사람은 안 꼬이더라고요. 걱정 마세요. 아셨죠?”
큰아들답게 믿음직한 소리를 하며 하균은 을숙을 힘주어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져 을숙은 하균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 안 고프시더라도 과일은 좀 드세요.”
“알았어. 넌 어쩜 네 와이프보다 잔소리가 더 심하니.”
“그만큼 어머니를 사랑하니까요.”
찡긋, 윙크를 하고 방을 나가는 하균을 바라보다 다시 의자에 앉은 을숙은 손에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균은 용주가 하원의 애인이 아니라 아는 동생이라고 말했지만…… 분명히 자신이 용주라는 아이를 애인이라고 지칭했을 때 하원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연애하는 사람처럼 얼굴까지 붉혔었는데.
게다가 용주에 관해 이야기할 때 하원의 얼굴은 누가 보더라도 정말 그 아이를 좋아하는구나, 연애를 하고 있구나 싶은 얼굴이었다.
하균이 자세히는 모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다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정말 연애를 하고 있다고 해도 걱정, 아니라고 해도 걱정이 되었다.
연애를 하고 있다면 상대 아가씨가 정말 하원이를 좋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연기자라는 하원의 직업을 이용하려는 것은 아닌지, 그 아가씨가 제대로 된 사람인지 걱정이고.
아니라고 하면 대체 우리 아들이 뭐가 부족하기에 스물넷 먹도록 아직까지 여자 하나 없는 것일까, 저러다 평생 혼자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끝도 없이 생겨난다.
을숙은 머리가 아파와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 ∞ ∞
“일찍 오셨네요.”
을숙은 남편 민동균을 따라 방으로 들어와 정장 상의를 받아서 옷걸이에 걸며 웃었다.
“점심 먹고 차도 마셨는데 놔주질 않아 고생했지. 저녁 먹고 술자리까지 가자고 할 기세더라고. 도망 나오느라 진땀을 뺐네.”
“잘하셨어요. 곧 하원이 올 시간이란 말이에요.”
입고 나갔다 온 옷을 벗어 을숙에게 건네주며 동균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정말이야?”
“뭐가요?”
“하원이 녀석이 여자 친구를 데려온다며.”
“네,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눈치를 보니까 하원이가 정말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던데요. 하균이 말로는 그냥 하원이의 아는 동생이라고 하는데, 자기가 당사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알겠어요? 게다가 남녀 관계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는 거잖아요. 아무래도 사귄 것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죠.”
“하원이 녀석이 좋아하는 여자라…… 왠지 상상이 안 가.”
팬티 차림으로 서서 동균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죠? 저도 걱정이라니까요. 나이가 스물넷이 되도록 여자 하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기뻐해야 할 일인데, 그 녀석이 어디 가서 이상한 여자한테 걸린 것은 아닌가 걱정도 되고 말이에요.”
“오늘 데리고 온다고 했으니 일단 봐야지.”
역시 동균도 궁금함 반, 걱정 반으로 오늘을 기다린 것이구나 싶었다.
을숙이 옷장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주자 그것을 들고 동균이 욕실로 들어갔다. 시간을 보니 곧 하원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음식은 잘 되어가고 있나. 오늘의 메인인 갈비찜은 완성되었고, 나머지 부수적인 반찬을 만들다가 동균이 오는 바람에 며느리에게 맡기고 따라 들어왔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거실로 나가려던 을숙의 발목을 잡으며 전화벨이 큰 소리로 울렸다.
“여보세요?”
―어머니, 저 하원이에요.
“오고 있는 중이야?”
벌써 도착한 것이면 곤란한데. 음식을 하느라 정작 자신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다. 그런 을숙의 마음에 답하기라도 하듯 하원이 아니요, 하고 말했다.
―용주가 아직 학교에 있어요. 학교 가서 용주 태우고 가면 한 사십 분 걸릴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음식 식지 않도록 시간 맞춰서 와. 나도 슬슬 준비해야겠다.”
―아버지랑 형은 집에 오셨어요?
“네 형은 아까 점심때 병원 끝나서 왔고, 아버지는 점심 약속 있으시다더니 지금 들어오셨구나. 씻으러 들어가셨어. 운전 조심해서 와라.”
―네, 그럼 조금 이따 뵐게요.
전화를 끊은 을숙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몸에 음식 냄새가 다 배었을 텐데. 서둘러 주방으로 가 며느리를 불렀다.
“하원이 지금 온다는구나.”
“음식도 거의 다 해가는걸요. 시간 맞춰 잘 되었네요.”
“어쩌지. 내가 준비를 하나도 못 했잖아. 손님도 오시는데.”
을숙이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발을 구르자 며느리가 얼굴을 돌리며 작게 웃었다.
“음식 준비는 끝나가요. 정리만 하면 되니까 어머님은 들어가서 준비하세요.”
“너는?”
“전 이 정도면 예쁘지 않아요?”
어깨를 으쓱이며 묻는 며느리를 밉지 않게 흘겨보며 을숙은 방으로 들어갔다. 씻고 나온 동균이 옷을 갈아입고 젖은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하원이가 곧 도착할 모양이에요.”
“벌써?”
“그 아가씨가 학교에 있다네요. 태우고 온다고 했으니 한 삼사십 분 뒤에 도착할 거라고.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나도 좀 씻고 나와야지. 몸에 음식 냄새가 다 배어 손님맞이하기가 민망하겠어요.”
사실 머리카락에 밴 냄새가 가장 심할 테지만 지금 머리를 감으면 말리고 세팅할 시간이 없을 것이 분명하기에 땀만 씻어낼 요량으로 샤워를 하고 나와 향수를 뿌렸다.
격식을 차리면서도 너무 딱딱하지 않은 차림이 좋을 텐데. 옷장 문을 열어놓고 한참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동균이 옆으로 다가와 투정을 부렸다.
“누구한테 예쁘게 보이려고 그렇게 꽃단장이야?”
“하원이가 처음 데리고 오는 여자잖아요. 저 엄청 기대하고 있다고요.”
“너무 그러지 마. 그러다 부담스럽다고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럴까요?”
동균의 농담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시무룩해지자, 그런 을숙을 어르며 동균이 껄껄 웃었다.
“하원이 곧 오겠네. 농담한 거니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옷 입어요. 옷 벗고 맞이할 건가?”
“이이는.”
동균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리며 을숙은 무난하면서도 깔끔해 보이는 니트와 치마를 꺼내 입었다. 주방으로 가자 주방 정리를 끝낸 며느리가 상을 차리고 있었다.
“넌 그만 올라가서 하균이 데리고 내려와라. 나머지는 내가 하마.”
“네, 어머님.”
기본적인 반찬과 방금 만든 잡채와 전을 식탁에 올리고 메인 요리인 갈비찜을 적당히 오목한 그릇에 퍼 담았다.
도착할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늦으려나. 시계를 힐끗 보다가 아무래도 밥을 퍼야겠다며 을숙은 밥통을 열었다.
“어머님, 제가 하게 그냥 두세요.”
“아냐, 밥 푸는 게 뭐 힘들다고.”
“이야, 냄새 좋네.”
주방으로 들어오던 남편과 큰아들이 코를 킁킁거리며 유난을 떨었다.
“하원이 온다고 너무 힘주신 거 아니에요?”
“손님도 오신다잖아. 엄마가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다니까.”
“하원이 손님이라고 해봤자 뭐, 아는 동생인데. 며느릿감 인사받는 것도 아니고 뭐 이렇게 차렸대요?”
저 녀석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을숙은 큰아들을 힐끗 노려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어머님, 도련님 오셨나 보네요. 벨 울리는데요?”
“그러니?”
얼른 달려나가 하원의 얼굴을 확인하고 대문을 열어주었다.
“하진아, 밥 좀 퍼라.”
“밥 푸는 것 정도는 오빠 시켜도 되잖아요? 왜 꼭 이런 건 딸부터 시키는지 모르겠네.”
“알았어, 알았어. 하균이 네가 밥 좀 담고 있어.”
“제, 제가요?”
“밥 푸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됐어, 자식새끼들 곱게 키우면 이래서 안 된다는 거야. 뒤늦게 후회해봤자 다 내 잘못이지.”
“여보,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아이고, 하고 한숨을 내쉬며 타박을 하자, 동균이 환기를 시키며 현재 상황을 일깨웠다.
“누가 됐든 어서 밥 좀 퍼. 아니, 당신이라도 밥 좀 퍼요. 하원이 지금 올라오나 보네. 나머지는 안 도와줄 거면 정신 사납게 서 있지 말고, 빨리 자리 잡아서 앉고.”
남편과 자식들을 타박하며 자리에 앉힌 을숙의 귀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왔나 봐. 어쩌면 좋아.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한 을숙이 서둘러 거실로 나가며 아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제 와?”
“네, 좀 늦었어요.”
“안녕하세요.”
하원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던 을숙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어서 와요, 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은 것은 하원의 손님이 생각했던 이와 조금, 아니 실은 아주 많이 다른 탓이었다.
아가씨가 아니잖아.
어린 태가 나는 사내아이를 눈앞에 두고 을숙은 조금 떨떠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명히 사귀는 여자를 데리고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 데리고 오겠다고 말했던…….”
“용주예요. 요즘에 훈련한다고 엄청 바빠서 오늘 데리고 오는 것도 힘들었어요.”
하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하기가 무섭게 하원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정말…… 사심 없이 말했던 것이로구나. 이래서 하균이 아니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럼 애초에 남자아이라고 말을 해줬어야지.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만 말을 하니까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것 아냐.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 을숙의 앞으로 용주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래도 꽃은 예쁘네. 용주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대화 능력이 부족한 아들을 둔 내 잘못이지.
헛된 기대를 했다가 실망했다고는 해도 손님을 이대로 두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을숙은 활짝 웃으며 꽃을 받아 들었다.
“일단 들어와. 아버지께서 계속 기다리고 계셨어.”
주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안내했다. 의자에 앉는 을숙을 툭 건드리며 남편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일단 밥이나 드세요.”
차마 큰아들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내가 혼자 오해해서 신났었습니다, 라고 말할 수가 없어 을숙은 조용히 침묵했다.
∞ ∞ ∞
하원이 누차 자랑하고, 하균이 말했던 것처럼 용주란 아이는 일단 단정하고 모범적으로 보였다.
의자에 앉아있는 자세, 젓가락을 쥔 손가락, 음식을 먹을 때 입을 꼭 닫고 우물거리는 습관, 국을 떠먹을 때 소리를 내지 않는 것까지 저 정도면 어디 가서 가정교육 못 받았다는 소리는 듣지 않겠구나 싶었다.
게다가 대화를 할 때에도 큰 소리를 내거나 빠르게 말하지 않고 일정한 톤으로 조곤조곤 말을 하는 것이 대화하는 상대는 물론 지켜보는 사람까지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저런 아들 둔 엄마는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네. 누군지 몰라도 자식 참 잘 키워놨다며 생각하고 있을 무렵, 옆에 앉아있던 남편이 을숙의 무릎을 슬쩍 쳤다.
이 사람이 왜 이러실까.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힐끗 하원 쪽을 눈짓했다.
“잘 먹었다.”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들으라는 양 말하는 남편의 행동에 을숙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런 을숙에게 남편이 다시 한번 하원을 턱짓했다. 그러니까 대체 뭐 어쩌라고요. 말을 해야 알지.
“식사 끝나면 차나 한잔씩 하지. 어떠냐.”
그제야 남편의 의도를 알아차린 을숙이 남편만 알아볼 수 있도록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용주를 데리고 거실로 나가고, 며느리가 차와 과일을 준비하겠다며 일어나 싱크대로 향했다.
자식 셋이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고 있지만 하원이 녀석은 조만간 거실로 튀어 나갈 모양새였다.
그런 예상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으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허겁지겁 밥을 먹던 녀석이 밥그릇을 비우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하원아.”
“네?”
“물 마셔야지.”
물컵을 건네자 하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이내 컵을 받아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닌지라 물컵을 내려놓으며 하원이 슬쩍 을숙을 바라보았다.
“잠깐 얘기 좀 할까?”
을숙의 물음에 거실 쪽을 돌아본 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원을 데리고 주방 베란다로 나온 을숙은 문을 닫고 하원을 바라보았다.
“너 어떻게 된 거야?”
“네?”
을숙의 물음에 하원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데려온다기에 엄마는 네가 애인이라도 데려오는 줄 알고 기대했잖아. 아버지한테도 그렇게 말해놨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맞는데…….”
을숙의 타박에 하원은 억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면 다들 오해한다고. 예쁜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내아이를 데려와서 얼마나 당황한 줄 알아?”
하원의 볼을 꼬집어 흔들며 을숙이 떽, 하고 하원을 혼냈다.
“예쁜 아가씨는 아니지만 제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제 애인 맞아요.”
을숙에게 볼을 꼬집힌 상태로 하원이 옹알거리듯 말을 했다. 웃으며 하원을 타박하고 있던 을숙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응?”
“제가 많이 좋아해요. 그래서 소개해드리고 싶었어요.”
을숙의 손을 잡으며 하원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같이 식사하고 대화하면서 용주 기특하다는 듯 보셨잖아요.”
밥풀까지 흘려가며 산만하게 밥을 먹던 녀석이 언제 남의 얼굴 훔쳐볼 여유가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속으로 을숙이 생각했던 것을 꼬집어내 말하는 것이 기가 막힐 정도였다.
“예쁘고 착해요. 예의도 바르고, 생각도 올바르고, 바른말만 해요. 옆에서 보고 있으면 안 예쁜 점을 찾을 수가 없어요.”
조곤조곤 속삭이듯 이어지는 하원의 말에 을숙은 넋 나간 얼굴을 했다.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도 예쁘고, 결정을 내리고 나서 노력하는 모습은 더 예쁘고.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 열심인 점도 좋아요. 저렇게 예쁜 사람 본 적이 없어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반짝반짝 빛이 나요.”
“……하원아.”
을숙은 지금 하원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듣고 있기는 한 것일까.
깜빡깜빡,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눈앞에 있는 것이 진짜 자신의 막내아들이 맞는지 확인을 해보았다.
“어머니 마음에 꼭 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가 보기에도 예쁘죠? 반듯하고 모범적이고.”
그렇긴 하다. 예의 바르고 반듯하여 뉘 집 아들인지 부럽다는 생각도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하원이 하는 말은 그것과는 별개이지 않은가.
“엄마는 네 말 이해 못 하겠어.”
을숙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하자 하원이 씁쓸한 표정 위로 입 끝을 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어냈다.
“어머니는 충분히 이해하고 계세요.”
을숙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하원은 용주가 있을 거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방 베란다 문이 가로막고 있음에도 마치 용주가 보이는 것처럼 하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용주한테는 너무 내색하지 마세요. 말 안 하고 그냥 밥 먹자고 데려왔거든요. 엄청 당황했을 거예요.”
“저 아이도…… 너랑 같아? 혹시 쟤가 먼저 너한테 접근했니?”
이보다 더 순화된 말이 생각나지 않아. 을숙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하원에게 물었다.
“용주도 그렇다고 하긴 하는데, 아무래도 제가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어머니,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저 마음 아파요. 어머니 아들이 먼저 꼬리 쳤단 말이에요.”
맙소사. 을숙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늘은 그냥 보기만 해주세요. 그것만으로도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용주가 이런 사람입니다. 오늘은 그거 보여드리려고 용주 데리고 온 것이니까요.”
부탁드려요.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한 하원이 베란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베란다에 남겨진 을숙은 순간 짧은 꿈을 꾼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거실에서 들려오는 남편과 용주, 하원의 목소리에 절대 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당신, 안 자고 뭐 해?”
잠결에 뒤척거리다 옆자리가 비어있음을 느끼고 부스스 눈을 뜬 동균은 창가 티테이블에 앉아있는 을숙을 발견하고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좀…… 생각할 것이 있어서요.”
차마 당신 막내아들이 애인이라고 데려온 사내아이와 위층에서 함께 자고 있는 것에 신경이 쓰여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며 앉아있자, 자리에서 일어난 동균이 을숙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하원이가 아가씨를 안 데려와서 실망했어?”
그것보다 조금 더 복잡한 심경이랍니다. 그러한 의미를 담아 희미하게 웃자 동균이 쯧쯧 혀를 찼다.
“어련히 알아서 좋은 사람 만나려고.”
“저는요, 가끔 하원이에게 미안해요.”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을숙이 고개를 돌려 동균을 바라보았다.
“하균이랑 하진이 낳고 나서 하원이 가졌을 때, 사실 낳지 말까 생각했었어요.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으니 아이는 더 필요 없을 것도 같았고, 사실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였잖아요.”
“그때는 당신 몸이 안 좋았잖아. 그리고 뭐 결국엔 낳았으니 된 거 아냐? 저렇게 훌륭하게 낳아서 번듯하게 키웠으니 잘된 거라고.”
“당신이랑 얘기하고 나서 낳기로 결정한 후에도 저 고민 많이 했어요. 지우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항상 좋은 생각만 하고 기분 좋은 일만 있어야 했는데, 내심 배 속에 든 아이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어요.”
“괜찮아. 임신했을 때에는 예민해져서 쉽게 우울해지고 그렇잖아.”
동균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자책하고 있는 을숙을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하원이 태어났을 때 엄청 작았잖아요. 고3 되어서 훌쩍 컸지만, 그전까지는 엄청 왜소해서 제가 임신했을 때 잘 먹지 않은 탓인가 싶었어요. 어리광부리고 귀여움 떨고 하는 것도 얘가 뭔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어서 눈치 보는 건 아닌가 나쁘게 생각하기도 했고, 게다가 생각하는 것도 다른 애들이랑은 좀 다르고.”
“그렇긴 했지. 애가 영 이상해서 우린 병원에라도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잖아. 어린 왕자를 읽고 엄청 감동을 받아서 밤마다 잠은 안 자고 별만 보고. 자기도 장미를 찾겠다느니 하면서.”
“……아.”
남편이 웃으며 하는 말에 을숙은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제 장미예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요.」
하원이 웃으며 한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정말이지 언제 한번 커뮤니케이션에 관해 진지하게 얘기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듯싶다.
“착하고 예쁘고 귀염성 있고. 남들은 하원이 보면서 어쩜 저렇게 예쁜 아이가 있냐고 말을 해도, 전 내심 찜찜했어요. 내가 낳은 아이인데 내 아이 같지 않았어요. 아니, 하원이가 나를 엄마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어요.”
“왜, 당신보고 계모 아니냐고 물어봐?”
“이이는. 그게 아니라요.”
동균의 말에 을숙은 샐쭉 눈을 흘기며 고개를 저었다.
“하원이는 언제나 웃어요. 누구랑 만나서 누구랑 얘기를 하든 착하고 상냥해요. 그것이 그 아이 성격일 수도 있는데……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것과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하는 것에 차이가 없어요. 가족을 대하는 것과 타인을 대하는 것의 다른 점을 느낄 수가 없었어요. 물론 다른 사람을 경계하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내가 이 아이의 안쪽에 있기는 한 것일까, 생각할 때가 종종 있었어요.”
“당신,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것 아냐?”
“하원이가 성격도 좋고 사교성도 좋아서 친구들도 많고 쉽게 어울리지만 가까이 두는 사람은 정작 없잖아요. 스물넷 먹도록 가까이 지내는 여자 하나 없는 것도 이상했고요. 그래서 저는 하원이 가졌을 때 제가 나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저 아이가 본능적으로 사람에게 선을 긋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어요.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 감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여보.”
동균은 작게 웃으며 손을 뻗어 을숙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당신이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야. 하원이 이제 스물넷인걸. 지금은 일 때문에 한창 바쁘기도 하고. 정말 좋아하는 사람 만나게 되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만 걱정하고 이제 자자고. 을숙을 일으키며 동균이 말했다.
정말 자신이 예민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을숙은 커다란 돌멩이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 우리 하원이 이미 그런 사람 만났다고 하네요. 오늘 데리고 온 용주라는 아이가 그런 사람이래요. 고등학교 내내 찾아다니던 장미가 용주라고 하네요.
을숙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 어디 가?”
“물 좀 마시고 와야겠어요. 먼저 누우세요.”
동균에게 말하고 침실을 나온 을숙은 잠시 서성이다 조심스럽게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디뎠다. 한밤, 새벽에 가까운 시간인지라 집 안은 고요했다.
소리를 죽여 계단을 오른 을숙은 잠시 하원의 방문 앞에 서서 안쪽에 귀를 기울였다. 잠이 든 것인지 방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삐걱, 문이 열리며 들리는 소리에 을숙은 잠시 멈칫했다.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주변이 고요하여 유난히 크게 들렸다.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선 을숙은 비어있는 침대를 발견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문 아래에 이불을 깔고 누워있는 인영이 보였다.
밤하늘을 바라보다 잠이 든 모양인지 이불도 채 덮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마주 보는 자세로 누워 두 손을 꼭 쥐고 잠이 든 두 아이를 을숙은 잠시 내려다보았다.
“정말 예쁘다, 내 아들.”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아 하원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뺨이 분홍빛이다. 무슨 좋은 꿈을 꾸고 있는지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스물넷이나 먹었음에도 여전히 아이 같은 아들, 그럼에도 가끔 돌아보면 다 큰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아들.
낳지 말까 고민은 했었지만 낳고 나서 후회했던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하원을 통해 을숙은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서운해하기도 하며 미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만큼 잘못한 것이 많다는 것이겠지.”
씁쓸하게 자조하며 을숙은 하원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뒤로 넘겨주었다.
“용주가 그렇게 좋아?”
고등학교 내내 찾겠노라 노래를 부르고 다니던 장미가 이 아이야? 누구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던 하원이 마음에 들어간 사람이 용주야?
「제가 많이 좋아해요.」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대답할 것 같았다. 귓가에 기쁜 듯, 즐거운 듯 웃으며 말하던 하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하원이한테 소중한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고, 그 소중한 사람이 이렇게 반듯하고 착한 아이라서 다행이고, 하원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하원이를 좋아해준다는 것도 다행이고, 그리고 하원이가 이렇게 가족에게 소개를 해주고 싶었을 만큼 가족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도 다행이고.
자리에서 일어난 을숙은 하원과 그 옆에 누워 잠이 든 용주를 가만히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방문을 닫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며 조만간 하원이 보약을 지으면서 용주라는 아이 것도 한 제 같이 지어야겠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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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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