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5/17)

3

어떤 것이 좋을까. 카탈로그를 뒤적이며 하원은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톡톡 볼을 두드렸다.

인터넷으로 찾아볼 때에는 화면상으로 보는 것이라 그게 그거 같고 눈만 아프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카탈로그도 별반 다르질 않았다.

대체 무슨 차이야. 이거나 저거나 다른 점을 찾지 못하겠는데 이름도 미묘하게 다르고 가격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대체 뭐지.

수많은 디자인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이렇게도 힘든 일일 줄은 미처 몰랐었다.

굴러다니던 볼펜을 찾아서 가져온 하원은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 카탈로그를 보며 마음에 들지 않는 디자인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골드는 너무 올드하지. 보석이 크면 보는 사람이 부담스럽고. 너무 화려한 무늬가 들어가 있는 것도 곤란하겠지. 꽃이나 용, 호랑이 같은 건…… 역시 어울리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이것저것 지워나가다 보니 절반의 이미지 위에 엑스 표시가 되었다.

나머지는 전부 그게 그것 같은 비슷한 이미지. 대체 뭐가 다른 거야? 하원은 구시렁거리며 볼펜 끝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엎드린 상태에서 두 다리를 꼬아 꼼지락거리고 있던 하원의 귀에 삑삑삑삑 하고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하원!”

역시 윤석진이지. 제집처럼 들락거리는 사람은 윤석진뿐이다. 부모님은 물론이거니와 애인보다 더 자연스럽게 들락거린다.

정작 제집처럼 들락거리라고 친히 비밀번호까지 말해준 용주는 여전히 방문할 때마다 조심스러워하고 있는데.

보고 있던 것을 덮어 베개 밑으로 쑤셔 넣고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온 석진이 하원을 보더니 쯧쯧 하고 혀를 찼다.

“한가할 때일수록 운동을 해야지. 그렇게 게으르게 먹고 놀다가 나중에 다시 촬영하게 되면 너 또 엄청 고생한다.”

“어차피 고생할 거 지금은 놀 거야.”

러닝머신 한 시간 뛰나 두 시간 뛰나 힘든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럴 바에야 지금은 실컷 놀겠어. 하원은 거실 소파에 털썩 드러누우며 석진을 바라보았다.

“왜 왔어?”

“일어나서 앉아. 대본 들어온 것 좀 훑어봐.”

“영화?”

“이번에 괜찮은 거 몇 개 들어왔더라. 드라마도 들어오긴 했는데 약간 로맨틱 코미디 풍이라 별로인 것 같아. 이건 뭐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니까. 천천히 읽어보고 너도 추려봐.”

석진이 들고 온 가방에서 종이 뭉치 대여섯 개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대충 제목만 훑으며 하원이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형.”

“뭐야?”

나름 상냥한 목소리로 애교 있게 불렀더니 돌아오는 대답이란 것이 뭐야? 이다. 아무튼 정떨어져. 삐죽 입술을 내밀며 석진을 올려다보자 어서 말하라는 듯 석진이 하원을 내려다보았다.

“형은 말이야, 누가 깜짝 선물을 준다면 뭘 받고 싶어?”

“무슨 선물?”

“그러니까 그냥 기념일 같은 건데…… 어쩌면 형이 모르고 있을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 그걸 기념해서 선물을 준다면…… 뭘 받으면 기쁠 것 같아?”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주절주절 말을 하지만 전혀 정리된 내용이 아니다. 석진은 골치 아픈 얼굴로 하원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 또 무슨 일을 꾸미나, 싶은 얼굴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하원이 뾰로통한 얼굴로 석진을 올려다보았다.

“왜! 왜 그렇게 봐!”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고 짐작을 해보려고 했는데 전혀 짐작이 안 가네.”

“짐작하지 말고 빨리…… 뭐 받으면 좋을 것 같아?”

“글쎄, 돈?”

“아 씨, 형! 좀!”

윤석진한테 물어본 것이 잘못인가. 버럭 짜증을 내자 석진이 알았어, 알았어. 하고 하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정시켰다.

“혹시 여자 선물이냐?”

“아냐, 남자야.

석진은 그것이 진짜인지 가늠하듯 하원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기념일이 뭔데? 생일?”

“생일은 아니고…….”

“그럼 무슨 기념일?”

“그냥 뭐…… 알고 지낸 지 이만큼 되었구나, 뭐 이런 거.”

하원은 무릎 위에 손을 올려 손가락 장난을 해대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걸 꼭 내 입으로 말을 하게 만들어, 부끄럽게. 그냥 기념일이라고 하면 기념일이라고 알아들을 것이지. 아무튼 윤석진도 참 눈치가 없어.

볼을 붉히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하는 하원을 힐끗 쳐다보며 석진이 피식 웃었다.

“가까운 사람이야?”

“응, 가까워. 나는 가깝다고 생각해. 나한테는 아주 가까워.”

“선물을 주려는 목적은?”

“응?”

“그러니까 선물을 주면서 하려는 말이 있잖아. 선물을 주는 이유. 생일에는 생일 축하해. 어버이날에는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의 날에는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거.”

“아아, 그거. 음……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이 정도일까.”

하원의 대답에 석진이 숨죽여 웃었다. 왠지 웃는 모습이 조금 꺼림칙했지만 드물게 너그러운 얼굴이었기 때문에 좋은 대답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하원이 빤히 바라보고 있자 석진이 흠흠,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 마음이라면 아마도 네가 어떤 선물을 해주든 다 좋아할 거야.”

그런 대답을 듣자고 내가 물어본 게 아냐. 하지만 하원이 뭐라고 불퉁거릴 틈도 없이 손을 뻗은 석진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아니, 이 사람이 대체 왜 이래? 크게 뜬 눈을 끔뻑거리며 바라보자 석진이 멋쩍은 듯 웃으면서도 하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오늘은 이만 간다. 그거 천천히 읽어보고 잘 생각해둬.”

갑자기 왜 저러지? 하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석진은 가방을 챙겨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신발을 신고 문을 열던 석진이 하원을 힐끔 돌아보고는 또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뭐야, 대체.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하원은 석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작게 손까지 흔들어 인사를 한 석진이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뭐지? 왜 저래?”

질문에 대한 답은 해주지도 않고 뜬금없는 소리만 하고서는 왜 실실 웃으며 갑자기 퇴장을 하는 거지? 석진이 남기고 간 대본을 들고 소파에서 일어나며 하원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형, 어디야?”

―어, 나 지금 사무실 좀 나와 있어.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대뜸 물어보는 말에도 요즘 묘하게 부드러운 남자 모드인 윤석진은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사무실? 집에 언제 오는데?”

―왜? 또 무슨 사고 쳤냐?

“왜 내가 만날 사고만 치고 다니는 것처럼 말을 해!”

누가 듣기라도 하면 내가 뭐가 되겠어? 혹시라도 용주가 그런 말을 듣고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건 절대 아니고, 또 용주가 그런 소리를 듣는다고 나에 대해서 오해를 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지만.

아무튼 그런 말을 그렇게 막 하면 어떻게 해! 하원이 입술을 쭉 내밀고 불퉁거리자 수화기 너머에서 취소, 취소. 하고 윤석진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무튼 나 지금 사장님이랑 대화 중이니까 용건만 간단히 해, 인마.

“나 오늘 형네 집에 가서 놀면 안 돼?”

―글쎄, 나 지금 막 사무실 나온 거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사장님 모시고 저녁 식사하고…… 네? 아아, 네…… 아니에요, 이 녀석이 갑자기 요즘 이러네요…… 네에…… 아무튼 하원아, 오늘은 곤란하겠다. 사장님께서 오랜만에 한잔하자고 그러시네. 왜?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형이 보고 싶어서?

이 인간이 왜 이러실까. 하원은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댄 상태로 미간을 찌푸렸다. 자기가 생각해도 웃기지 않은 농담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대답 없는 하원 대신 윤석진이 으하하하, 하고 멋쩍게 웃었다.

―심심하면 나올래? 사장님께서 너도 오랜만에 한번 보자고 하시네.

오랜만은 무슨. 저번에도 나 끌고 갔었으면서. 하원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오늘 집에 늦게 가겠네?”

―아마도 그렇지?

“와아, 다행이다.”

하원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그럼 나 형네 빌라 가서 놀게. 용주랑 자장면 시켜 먹으려고. 용주한테 할 말도 있어서 형 집에 있다고 하면 좀 비켜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잘되었다.”

―……뭐?

“그럼 형, 나 형 집에 가서 용주랑 논다? 자장면 시켜 먹고 얘기만 할 거니까 어지르지는 않을 거야.”

―…….

“형도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그렇다고 일찍 오라는 소리는 아니고. 뭐 어차피 용주 학교 다시 가야 하니까 금방 가겠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그럼 나중에 봐.”

―야, 하원아. 민하원!

애타게 부르는 석진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윤석진은 이렇게 해결이 되었으니 용주에게 전화를 해야겠지.

일단 훈련 중이거나 수업에 들어갔을 수 있으니까 문자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 생각한 하원은 ‘나 전화해도 돼?’ 하고 문자를 보냈다.

잠잠한 것으로 보아 불가능한 시간인가보다. 용주가 빨리 쉬는 시간에 문자를 확인해야 하는데.

휴대폰을 손에 쥐고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다 잠시 잠이 든 하원은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 벨 소리에 놀라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세요?”

―형, 잤어요?

“문자 보내놓고 기다리다 잠깐 잠들었나 봐.”

여보세요, 한마디를 듣고도 자고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다니 용주는 대단해. 우와, 하고 감탄을 내뱉자 용주가 작게 웃었다.

―미안해요. 훈련 중이라서 문자 확인이 늦었어요. 무슨 일 있어요?

“으음, 아니. 용주 목소리 듣고 싶어서.”

하원의 말에 용주는 그게 뭐예요, 하고 타박했지만 싫지 않은 모양인지 웃고 있었다.

“있잖아, 오늘 저녁 사줄게.”

―오늘 저녁이요?

“응.”

―오늘 평일이잖아요. 집에 안 가는 날이에요.

“아냐, 아냐. 저녁만 먹고 다시 학교로 데려다줄 거야.”

―갑자기 왜요?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말 안 해놓고. 갑자기 내가 보고 싶어지기라도 했어요?

주말도 아니고 주중에 뜬금없이 연락해서 저녁을 먹자고 하니 용주가 이해하지 못할 만도 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말해줄 수가 없어 하원은 그냥, 하고 말끝을 흐렸다.

―맛있는 거 사줄 거예요?

“응, 엄청 엄청 맛있는 거 먹을 거야.”

―알겠어요. 대신 저 정말 저녁만 먹고 다시 학교 와야 해요.

“응, 저녁만 먹고 용주 학교까지 바래다줄게.”

―알겠어요. 그럼 학교 앞에서 만나요?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교문으로 데리러 올 거냐는 물음에 하원이 미안, 하고 말했다.

“용주가 와줬으면 좋겠어. 석진이네 빌라에서 먹을 거거든.”

―매니저님 집에서요? 설마 매니저님이 요리를 하신다거나 하는 건…….

“절대 아냐. 게다가 석진이도 없어. 오늘 사장이랑 술 마신다고 집 비운대. 일단 와. 응? 참, 그리고 일곱 시 맞춰서 와야 해. 절대 늦게 오면 안 돼!”

―음식 시키려고 그러는 거예요?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하는 용주의 말에 하원이 재미없어, 하고 투덜거렸다.

―알겠어요, 그럼 일곱 시 딱 맞춰 갈게요.

“응, 응. 그럼 그때 만나.”

―네, 얼마나 맛있는 거 먹을지 기대할게요.

“응!”

통화를 끝낸 하원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이제 슬슬 나갈 준비 해야지.”

중간에 들를 곳이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했다. 오늘은 특별히 멋있게 보여야 하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욕실로 향하는 하원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 ∞ ∞

아휴, 윤석진 청소 좀 하고 살지. 민하원 인생에 이렇게 청소를 열심히 해본 적이 있나 싶다.

거실에만 있을 테니 방까지 들어갈 일은 없겠지. 거실에 쌓여 있던 옷이랑 짐들을 방으로 쑤셔 넣고 대충 거실만 청소기를 돌렸다. 그런데도 더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걸레에 물을 묻혀서 거실 바닥을 닦았더니 땀이 주룩주룩 흐르기 시작했다.

어두운색의 걸레는 원래 회색이었는지, 아니면 빨지 않아서 회색이 된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손으로 만지기도 싫은 느낌에 젖은 걸레를 대충 발로 밀고 다녔다.

“아, 씨. 윤석진 더러워!”

자리에 없는 집주인을 향해 울분을 토해내며 하원은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어냈다. 에어컨이 없는 윤석진의 집은 지옥과도 비슷했다.

속옷만 걸친 상태로 베란다 문을 열고 거실에 앉아있으려니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그나마 더운 몸을 식혀주었다.

조금 있으면 용주 오겠다. 그런 생각을 하자 짜증이 사라지며 기분이 좋아졌다. 다섯 시를 넘어선 시계를 바라보며 하원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에어컨 좀 사라니까. 더워 죽겠네.”

거실 한쪽에 방치되어있는 선풍기를 끌어다 틀어놓고 거실에 대자로 누워 베란다 너머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도 좋구나. 아침부터 지금까지 쭉 설레는 마음으로 용주가 올 시간만을 기다리는 것이 좋기도 하고 안달 나기도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이렇게 오묘한 기분임을 이제까지 몰랐던 것 같다.

다리를 흔들거리며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다 여섯 시가 훌쩍 넘었음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었다.

거실 한쪽에 던져둔 휴대폰을 찾아 저장되어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예, 흑룡관입니다.

“여기 민들레 빌라 B동 302호인데요. 간짜장 두 그릇이랑 탕수육 소자 하나 가져다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아버님, 저 하원이에요. 저번에 가서 자장면 먹었던 하원이요. 아버님이 저 예쁘다고 탕수육도 주셨잖아요.

종알종알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하원은 통화가 끊어진 휴대폰을 들고 히힛 웃었다.

목소리 못 알아들으시나 보네. 나중에 가면 알아보시겠지. 탕수육 먹으라고 주셨던 것만 생각하면 또다시 즐거워진다.

용주도 곧 올 테니까 준비해야지. 미리 가져왔던 신문을 베란다에 깔며 하원은 일 년 전 용주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벌써 일 년이라니 시간 정말 빠르다. 그때 용주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그때, 그 시기가 아니었더라도 만날 수 있었을까.

자장면이 아니라 치킨이나 피자를 시켰더라면. 용주네 중국집이 아닌 다른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더라면. 배달 온 사람이 용주가 아닌 다른 직원이었더라면.

그럼 면에서 보면 윤석진이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까지 끌고 와 가둬놓고 다이어트를 시켰으니까. 나중에 윤석진에게도 뭔가 선물을 해야지.

덥긴 하지만 베란다 창문을 열고 선풍기까지 틀어놓으니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용주가 운동 끝나고 와서 더울 것은 좀 걱정되긴 하지만.

베란다 턱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 휴대폰이 울려댔다.

“여보세요?”

―형, 저 이제 끝나서 가요.

“벌써?”

―벌써라뇨. 지금 출발해도 일곱 시 조금 넘어서 도착할 것 같은걸요.

“그렇구나. 그렇다고 급하게 오지 말고. 차 조심해서 와.”

―네, 매니저님 집으로 가면 되죠?

“응, 민들레 빌라 B동 302호.”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하원의 말에 용주는 웃으며 알아요, 하고 말했다.

―조금 이따 만나요.

“응, 기다리고 있을게.”

애인 있는 사람들은 숨기려고 해도 티가 난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용주랑 전화 통화만 했을 뿐인데도 입가가 풀려 실실 웃게 된다.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을 것 같아. 하원은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며 히히, 하고 웃었다.

“용주 빨리 왔으면 좋겠다.”

거실에 털썩 드러누우며 하원은 중얼거렸다. 천천히 차 조심해서 와, 하고 말했지만 금방이라도 딩동, 하고 벨을 누를 것 같았다.

이렇게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렸던 적이 있던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맛있는 요리를 하시던 날 아버지 퇴근 시간 기다리던 것과 선물 사 온다고 전화한 형이 빨리 오길 기다리던 것을 제외하면 별로 없었던 듯싶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만져지는 자그마한 케이스를 이리저리 굴리며 하원은 가슴 한쪽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거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굴러갔다가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몸을 굴리고 발을 동동 구르며 혼자 놀고 있던 하원은 딩동, 하고 울리는 벨 소리에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어!”

“배달 왔…… 어?”

용주인 줄 알았는데 자장면을 배달 온 모양이었다. 한번 본 적이 있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자, 그쪽 역시 낯이 익은 모양인지 하원을 바라보며 아는 척을 했다.

“저번에 한번 봤죠?”

“아, 네. 안녕하세요.”

“여기 살아요? 연예인이라고 하더니 집 후지네.”

현관문 안으로 들어온 영덕이 집 안을 휙휙 둘러보고는 중얼거렸다.

“제집이 아니라 매니저 집입니다. 게다가 후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매니저가 들으면 속상해하겠네요.”

“아, 쏘리. 일단 간짜장 두 그릇하고 탕수육 소자 시킨 것 맞죠?”

“네. 얼마예요?”

“세트 가격으로 만칠천 원입니다.”

영덕이 철가방에서 음식을 꺼내 거실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갑을 가져와 돈을 주자 그것을 받아 주머니에 넣은 영덕이 휴대폰을 꺼내며 생긋 웃었다.

“나 사진 한 방만 찍어도 돼요?”

“사진은 곤란한데.”

정말 곤란하거든요. 울상을 짓는 하원을 바라보던 영덕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찍어서 팔아버릴까 싶기도 한데, 그랬다가는 용주 녀석이 엄청 화낼 것 같으니까. 그럼 사인 한 장만 해줘요. 어디 가서 연예인 민하원을 봤다고 자랑이라도 하려면, 사인 정도는 있어야 하잖아.”

우와, 저 얼굴로 ‘나 민하원 봤어’ 하고 자랑하고 다니는 모습은 절대 상상이 되질 않는데. 그러면서도 하원은 종이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지 말고 자장면 시켜 먹은 기념으로 중국집 냅킨 뒷면에 해줘요. 여기 볼펜.”

이 사람…… 센스 있다. 하원은 볼펜을 받아 냅킨 뒤에 유려한 손놀림으로 사인을 해 영덕에게 건넸다.

“땡큐. 참, 저번에 내가 막말했다고 화난 건 아니죠?”

“괜찮습니다.”

“자장면 다 불겠네. 맛있게 먹고 그릇 밖에 내놔요. 그럼 갑니다.”

되바라진 성격인 줄 알았는데 얘기해보니 또 뭔가 시원시원하네. 하원은 볼을 긁적이며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바닥에 놓인 음식을 들어 베란다로 옮겼다.

“용주 어디쯤 오고 있지?”

늦게 오면 자장면 다 불 텐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용주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고 잠시 후 여보세요, 하는 용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용주야, 어디야? 어디까지 왔어?”

―저 골목 걸어가고 있어요. 빌라 골목이요.

“어, 정말? 알았어. 문 열어둘게 빨리 와.”

―네, 금방 갈게요.

전화를 끊고 베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골목 어귀에 용주의 모습이 보였다. 바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용주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 정말 금방 도착하겠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마음이 다급해졌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자장이 담겨 있는 그릇의 랩을 끙끙거리며 벗겨냈다. 당장에라도 용주가 문을 두드릴 것 같았다.

“빨리빨리.”

벗겨지지 않는 랩을 거의 뜯다시피 하고 면이 담긴 그릇에 자장을 부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자장면 안에 넣고 보이지 않게 섞어놓았다.

휴우, 한숨을 내쉬는 순간 딩동, 하고 벨이 울렸다.

“용주야.”

쪼르르 문으로 달려간 하원이 잠금장치를 풀자, 열리는 문 사이로 용주가 얼굴을 들이밀며 웃었다.

“미리 문 열어둔다고 해놓고서 뭐예요.”

“열어두려고 했어. 용주가 너무 빨리 와서 그래.”

“나 엄청 배고파요. 석식도 안 먹고 막 뛰어왔어요.”

“정말? 맛있는 거 시켜뒀어.”

하원이 손을 잡고 끌어당기자,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선 용주가 잠깐만요, 하고 하원을 붙잡아 세웠다.

“내가 맞춰볼까요? 아까 여기 골목 오면서 형이랑 찌릿, 하고 텔레파시가 통했거든요.”

“텔레파시?”

“네, 지금 막 형이 시킨 음식이 떠올라요. 많이 보던 거예요.”

용주는 지그시 눈을 감고 으으, 신음을 냈다.

“간짜장 두 그릇에 탕수육 소자!”

“헉!”

정확하게 맞춘 용주의 말에 하원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장면이야 냄새로 짐작할 수 있다지만 간짜장 두 그릇까지 찍어 맞출 수는 없지 않은가.

정말 텔레파시가 통했나. 용주한테 텔레파시 보낸 적 없는데. 하원이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용주가 웃음을 터뜨리며 하원을 끌어안았다.

“요기 앞에서 영덕이 형 만났어요. 중국집에서 배달하는 형이요.”

“아…….”

“맛있는 거 먹자고 큰소리 땅땅 치더니 맛있는 게 우리 가게 자장면이에요?”

“응, 난 용주네 자장면이 제일 맛있어.”

고개를 끄덕이는 하원을 바라보며 용주가 저도 그래요, 하고 말했다.

“그럼 어서 먹어요. 금방 불어요.”

“그러게. 나 용주 거 미리 비벼놨어.”

하원은 용주의 손을 잡아 베란다로 향했다. 예쁘게 신문을 펼쳐놓고 그 위에 자장면과 탕수육을 올려둔 것을 보고 용주가 하원을 돌아보았다.

“이거 보니까 처음 형이 자장면 시켜 먹었을 때 생각나요.”

“응, 나도.”

자리에 앉은 용주가 아직 랩을 뜯지 않은 자장과 면을 손에 들었다.

“어, 용주 것 내가 비벼놨는데.”

“이게 제 것이에요?”

“응. 그게 용주 것.”

“형이 비벼줬구나?”

“응. 그러니까 그거 먹어줘.”

꼭 그거 먹어야 해! 그거 안 먹으면 안 돼! 애원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 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손에 든 것을 놓지 않고 능숙하게 랩을 벗겨 자장을 면 위에 붓는다.

“왜?”

내가 비벼준 것 먹는다고 해놓고 왜 다른 것을 손대? 내가 비벼준 것은 먹기 싫다는 건가? 응?

하원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자 용주가 젓가락질 몇 번으로 능숙하게 비빈 자장면을 하원의 앞으로 내려놓았다.

“형이 비벼줬으니까 저도 비벼주고 싶어서요. 이제 먹어요. 더 두면 정말 퉁퉁 불은 자장우동을 먹게 될 거예요.”

탕수육도 소스와 함께 하원의 앞으로 밀어주며 용주가 말했다.

“응, 용주도 빨리 먹어.”

그릇을 들고 자장면을 먹기 시작했지만 시선은 용주에게로 가 있었다.

배고프다고 하더니 진짜 허기가 졌는지 허겁지겁 먹는 용주를 보며 어쩜 저렇게 남자답게 먹으면서도 추하지 않고 예쁠 수가 있을까 하고 감탄하던 하원은 이내 그런 용주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저 안에 넣은 것까지 먹으면 안 되는데. 그러고 보니 종종 먹은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도 들은 것 같다. 괜히 넣었나.

좋아하는 자장면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대충 자장면을 씹어 삼키며 용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자, 용주가 먹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원을 바라보았다.

“왜요?”

“응? 아냐. 용주 배고팠구나?”

“저녁 시간치고는 조금 늦었잖아요. 훈련한 뒤라서 더 허기지는 것 같아요. 불어서 맛없어요? 형은 왜 잘 못 먹고 있어요?”

“아냐, 나 먹고 있어.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려고.”

차마 ‘네가 그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자장면과 함께 삼켜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 걱정하느라 자장면이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고는 말할 수 없어서 하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용주의 자장면 그릇에 있는 면발이 몇 가닥 남지 않았음에도 별다른 소리가 없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먹은 것 같다.

용주 나빠. 그걸 먹어버리다니. 하원은 끙끙 앓는 소리를 삼키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어떻게 그걸 먹을 수 있어. 그건 먹으라고 넣은 게 아니란 말이야.

입맛이 없어져버린 하원이 자장면을 내려놓자 용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원을 바라보았다.

“형…… 입맛이 없…… 아!”

마지막 면발을 자장과 함께 젓가락으로 훑듯이 입속으로 집어넣은 용주가 하원에게 말을 걸다 손으로 입을 가렸다. 으득, 하고 큰소리가 울린 것으로 보아 단단한 것을 씹은 모양이었다.

“아…… 내 이빨.”

“어! 용주야. 뭐 씹었어?”

눈에 띄게 화색이 된 얼굴로 바짝 다가선 하원이 용주를 향해 물었다.

“네, 뭐죠? 엄청 딱딱한 게 있어요.”

하원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 용주가 입안에 있던 것을 냅킨에 뱉어냈다.

“돌이야? 뭔지 한번 봐봐.”

“돌치고는 커요.”

냅킨에 뱉어낸 것을 살피던 용주가 의아한 얼굴이 되어 하원을 바라보았다.

“…….”

짐작 가는 것이 있는지, 아니면 전혀 짐작을 못 하는 것인지 하원의 얼굴과 냅킨에 뱉어낸 것을 번갈아 바라보는 용주를 향해 하원이 입을 열었다.

“일 년이야.”

“네?”

“용주가 내 장미가 되어준 지 일 년.”

하원의 말에 용주는 아아, 하고 의미 모를 소리만 내뱉었다.

“이런 거 기념일이라고 하잖아. 그렇다고 남들이 하니까 나도 덩달아서 하는 건 절대 아니고. ……그때 용주가 용기 내서 내 장미가 되어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생각해봤는데 그랬다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이 가능할까 의문이 드는 거야.”

드라마 첫 방영일, 중국집 근처로 찾아가 용주를 마주했을 때. 그때 용주가 자신을 모른 척하고 등을 돌려 가버렸다면. 왜 키스를 했던 거냐고 화를 내며 외면했었더라면. 그랬다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가능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지만 언제나 정답은 아니다, 였다. 그래서 하원은 용주가 고마웠고, 소중했고, 사랑스러웠다.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줬고, 혼란스럽던 감정을 끌어안아줬고, 그리고 언제나 곁에 있어줬으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항상 용주에게 감사해. 용주가 내 곁에 있어준 일 년 동안 나는 무척 기뻤고, 행복했고, 용주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어. 용주가 함께 있어준 상황에서 내가 혼자였을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도 알아갈 수 있었어. 나는 용주를 통해서 성장했다고 생각해.”

“형.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나야말로 형에게 많이 의지했는걸요. 형이 옆에 있어줬기 때문에 다시 축구를 해야겠다 마음먹을 수 있었고,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는 거예요.”

손을 내저으며 배시시 웃는 용주의 얼굴은 약간 분홍빛이었다. 하원은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하는 용주의 얼굴을 보며 참 예쁘구나, 하고 생각했다.

“항상 용주랑 같이 있고 싶고, 맛있는 거 먹고 싶고, 놀러 다니고 싶고. 그런데 그렇게 못 해줘서 미안해. 뭔가를 하지 않더라도 그냥 함께 있고 싶은데 그것도 불가능할 때가 많아. 그 이유가 나일 때도 있고 용주가 바빠서일 때도 있는데 나 항상 투정부렸잖아. 그것도 미안해.”

“그럼 저도 미안하죠. 일부러 그런 소리 하는 거죠? 요즘 훈련 때문에 자주 못 만나니까 지능적으로 투정부리는 거예요?”

“아니야, 정말 미안해서 그래. 나 드라마 할 때는 내 스케줄 때문에 자주 볼 수 없었는데도 투정부렸었잖아. 항상 용주한테 어리광만 부리고.”

“하지만 전 그런 형이 좋아요.”

“응, 알아. 그래서 내가 어리광을 못 고쳐.”

히히, 하고 웃자 용주가 따라 웃었다.

“그나저나 이건 뭐예요?”

“반지. 보통 이런 식으로 하잖아. 서프라이즈!”

“그렇다고 자장면에 넣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음료수에 넣었다가 그냥 삼키면 어떻게 해.”

“자장면 먹다가 이빨 나가면 더 큰 일이에요.”

용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에서 반지를 헹구는 모양이었다. 깨끗하게 닦은 반지를 손에 들고 보던 용주가 다가와 하원의 앞에서 슬쩍 반지를 껴보았다.

“어…….”

반사적으로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운 용주가 조금 큰지 빙글빙글 손가락에서 돌아가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하원을 난감하게 바라보았다.

나름 신경 써준 것인데 그 앞에서 반지 사이즈가 크네요, 하고 말하기 곤란한 모양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하원이 배시시 웃으며 용주의 손을 잡아당겼다.

“거기 아니야.”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빼내 두 번째 손가락에 끼워 넣자, 마치 치수를 재보았던 것처럼 딱 맞았다. 하원이 반지 끼워준 손을 들어 보이며 용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번째에 껴요?”

“응. 이번에는 두 번째. 우린 보통 어딘가를 가리키거나 할 때 검지로 가리키잖아. 나도 그렇고, 용주도 그렇고 지금은 서로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그 목표에 닿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의미로 두 번째 손가락에 맞췄어.”

“……감동 받을 것 같아요.”

“정말? 받을 것만 같지 말고 빨리 감동 받아.”

“감동 받았어요. 엄청 많이요.”

용주는 검지에 낀 반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와아,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반지도 예쁘지만 형이 말해준 의미를 들으니까 더 특별한 것 같아요.”

“나 용주 축구 하는 거 보면서 정말 감탄했어. 용주가 축구 때문에 고민하고 그랬을 때에도 사실 잘 못 느꼈거든. 그런데 시합 보러 갔을 때 저게 정말 용주 모습이구나. 용주가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구나 생각하니까 용주가 정말 멋져 보이는 거야. 그 반지는 용주가 훌륭한 축구선수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야.”

“고마워요. 저 진짜 감동했어요.”

용주는 하원을 끌어당겨 안으며 웃었다. 팔에 힘을 주어 꽉 끌어안은 몸을 흔들며 용주는 재차 고마워요, 하고 속삭였다.

“잃어버리면 안 돼. 꼭 끼고 다녀야 해. 누가 한 번만 껴보자고 해도 절대 빼주면 안 돼.”

“알겠어요. 반지 정말 예뻐요. 형이 직접 고른 거예요?”

“응, 반지 찾아봤는데 디자인이 다 비슷비슷해서 너무 머리 아프잖아. 진짜 고민 많이 했어.”

“고민 많이 했을 것 같아요. 반지가 정말 예뻐요.”

“너무 화려하고 그러면 평소에 끼고 다닐 수 없으니까 무난한 거로 했어.”

하원은 엉덩이를 움직여 용주와 나란히 앉아 반지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용주가 끼고 있으니까 반지가 더 예뻐 보이네. 내가 골랐지만 진짜 잘 고른 것 같아.

“안에 글자도 새겼어.”

“안에요? 뭐라고요?”

용주가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작게 새겨진 터라 잘 보이지 않는지 용주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Dear my rose.”

“와, 진짜…… 닭살.”

큭큭 하고 웃으면서도 나쁘지는 않은지 용주는 계속 반지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거 두 번째 손가락에 끼고 네 번째 손가락에 끼는 반지는 같이 하러 가자.”

“반지 또 해요?”

“나중에. 그건 이 년 기념으로 할까? 아니면 천 일?”

하원의 물음에 용주는 그런 하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아뇨, ……그냥요.”

“그냥이 아닌데?”

왠지 조금 시무룩한 것도 같고. 그렇다고 마냥 우울한 얼굴도 아니고. 미묘한 표정의 의미를 알 수 없어 하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 년 뒤, 천 일 뒤에도 형이랑 같이 있는 것이 가능할까 생각했어요.”

용주의 말을 듣는 순간 뭔가가 뒤통수를 후려치는 기분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해. 나랑 헤어질 생각이라도 했다는 건가?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나? 내가 너무 용주한테 투정을 부렸나, 아니면 용주를 서운하게 했나?

사색이 된 얼굴로 별의별 생각을 하고 있는 하원을 바라보며 용주가 조금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형은 유명인이고…….”

“내가 티브이에 나오는 게 싫어? 그래서 그래? ……나 연기하지 말까? 나 모아둔 돈 있어.”

“무슨 말 하는 거예요. 왜 말이 그렇게 흘러가요.”

용주는 하원의 뺨을 잡아 살짝 흔들며 웃었다.

“난 그냥…… 가끔 불안해서 그래요. 아휴, 괜히 말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아냐, 용주가 불안한 건 나도 싫어. 나 연기하지 말고 장사할까? 가게 같은 거 해도 되고…….”

“그만 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허둥거리는 하원의 입을 막으며 용주는 두 손을 모아 비비며 사과했다.

“반성할게요.”

“하지만 나는…… 용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형이 너무 잘나서요.”

“아냐, 그렇지 않아. 아까도 말했잖아. 난 용주를 통해서 많은 걸 배우고 있다고. 그만큼 용주는 훌륭해. 나보다 더. 용주가 그런 말 할 때마다 나 너무 슬퍼. 우울해.”

“미안해요. 앞으로 그런 생각 절대 안 할게요.”

용주는 반지를 두 번째 손가락에 끼고 그것을 하원의 눈앞에 보이며 웃었다.

“내가 내 목표를 위해서 열심히 하는 만큼, 형도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그게 엄청 멋져서 이렇게 멋진 사람을 누가 채 가면 어쩌나 불안한 것뿐이에요. 그만큼 자랑스럽기도 하고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 용주 엄청 멋진데 이러다 누가 데려가 버리는 거 아냐? 하고.”

“설마요.”

“아냐, 내가 용주한테 침 발라놨으니까 아무도 못 데려간다고 생각해도 가끔은 불안하다니까.”

내가 침대에서 꼼꼼하게 침 바르는 이유가 뭔데. 용주 구석구석 다 내 거라고 침 발라두는 거야.

하원의 말에 용주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귓불과 목덜미까지도 예쁜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그런 용주의 등을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하원이 웅얼거렸다.

“나 용주랑 커플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 티는 내고 싶어서…… 내년은 너무 머니까 올해 크리스마스 기념으로라도 커플링 할까 했는데 안 되겠어. 천 일 기념으로 할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나랑 같이 있어야 해. 쭉, 계속.”

“천 일 지나면요?”

“그럼 그다음에 또 기념할 거 찾아야지. 천오백 일 기념으로 차 키를 주고 이천 일 기념으로 집 열쇠 줄까?”

“형 무슨 원조 교제해요? 스폰서 이런 거?”

“용주는 바보야.”

말도 안 된다며 웃는 용주를 향해 하원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건 같이 살자고 프러포즈하는 거잖아.”

누가 용주한테 집만 사주겠대? 집이랑 민하원이랑 같이 줄 건데. 하원의 대꾸에 용주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와, 진짜 기대되네요. 집 열쇠 주면서 프러포즈라니. 집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해도 돼요?”

“아휴, 용주 나빠.”

“농담이에요.”

끌어안고 있는 하원의 손을 겹쳐 잡으며 용주가 가만히 웃었다.

“좋을 것 같아요.”

“뭐가?”

“지금 생각해봤는데…… 그렇게 한집에서 사는 거…… 참 좋을 것 같아요.”

“안 돼, 안 돼.”

“뭐가요?”

“아직 대답하면 안 돼. 나중에 정식으로 프러포즈하면 그때 대답해야지.”

용주는 너무 무드 없어. 흐응, 하고 칭얼거리자 그런 하원의 이마를 머리로 쿵 찍으며 용주가 혀를 내밀었다.

“형 너무 앞서나가는 거 아니에요? 내가 언제 좋다고 대답했나? 집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할 거라니까요.”

용주의 말에 하원은 치, 하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런데 형이 어느 집 열쇠를 가져다줘도 난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집보다는 민하원이 탐나거든요.”

“그렇지? 역시 집보다는 민하원이잖아. 그때 되면 지금보다 몸값도 비싸질 텐데 어디 집에 비하겠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자 용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가면 엄청 뿌듯할 것 같아요. 아, 내가 정말 재테크 하나는 잘해뒀구나, 하고.”

“맞아, 싹수가 보이는 건 잽싸게 잡아채야 한다고 우리 할머니가 옛날에 그러셨어.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를 만나고 아! 이놈이구나, 라는 느낌이 빡 꽂혀서 그대로 우리 아버지부터 만드셨대.”

“어, 음…….”

돌아가신 할머니의 말씀 중에 가장 명언이라고 생각하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용주를 보고 아, 할머니가 말씀하셨던 것이 바로 이거였구나, 하고 용주한테 침을 발랐지.

에헴, 하고 뽐내듯 헛기침을 하자 용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럼에도 얼핏 보인 입 끝이 살짝 올라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나도 형한테 침 좀 발라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한테 침 바를 거야?”

아휴, 여긴 석진이 집이라서 안 돼. 그래도 용주가 하겠다면 조금만. 요기하고 요기하고 요기하고 요기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혼자 피실피실 웃는 하원을 힐끔 쳐다본 용주가 하원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쿡 찌르며 물었다.

“야한 생각 했죠?”

“아냐, 난 그냥 말 그대로의 뜻을 생각했을 뿐이야.”

“아무튼 야하다니까.”

용주의 배를 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끌어당겨 안으며 하원은 앙, 하고 용주의 귓불을 깨무는 척했다.

“아냐. 용주야말로 야한데, 만날 나 모함해.”

“제가 뭐가 야해요? 형이 훨씬 더 야한데.”

아냐, 용주가 야해. 아니에요, 형이 더 야해요. 투덕거리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질 않았다.

용주의 어깨에 턱을 올린 상태로 기대자 용주가 반지 낀 손을 들어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왜?”

“기분이 묘해요.”

“반지 불편해?”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반지를 선물 받은 적도 처음이거니와, 이런 의미가 있는 선물은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부담스러워?”

“음, 형 마음은 고맙고 또 기쁜데요. ……비싸 보여서 조금 부담스럽기는 해요.”

혹시나 걱정했는데 그런 이유라면 괜찮다.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하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그거 별로 안 비싸.”

“비싸 보이는데요?”

“아냐, 안 비싸. 그거 금도 아니야. 플래티넘이라고 금보다 더 단단하대.”

“……플래티넘이 금보다 더 비싸지 않아요?”

용주의 물음에 하원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그거 알도 작아서 얼마 안 하더라. 그렇다고 일부러 싼 걸 산 건 절대 아니고. 알이 큰 반지는 촌스럽잖아. 게다가 그런 왕보석 스타일은 까르띠에에는 나오지도 않더라고.”

혹시라도 용주가 안 낄래요, 하고 말할까 봐 주절주절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자 그런 하원을 막으며 용주가 잠깐, 하고 말했다.

“저 방금 전에 뭔가 들은 것 같아요.”

“응? 뭐?”

“뭔가 엄청난 브랜드 이름이요.”

“기분 탓이야.”

용주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하원이 웅얼거렸다.

“그럼 알이라는 건요? 이거 보석 말하는 거예요?”

“흐음.”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뻔히 보이는 하원의 태도에 용주는 몸을 돌려 하원을 바라보았다.

“큐빅이죠? 설마 다이아라거나 하는 건 아니죠?”

“다이아면 안 돼? 다른 보석으로 바꿔달라고 할까?”

눈을 끔뻑이며 묻자 용주가 맙소사, 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왜에?”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려는 용주의 손을 잡으며 하원이 물었다.

“저희 어머니도 다이아 반지는 없다고요. 다이아가 대체 웬 말이에요?”

“그럼 어머님도 다이아 반지 해드릴까? 응?”

“형, 제 말뜻은 그게 아니잖아요.”

하원의 양 볼을 꼬집어 흔들며 용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축 늘어진 어깨를 바라보며 하원이 용주의 손을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다이아라서 더 부담스러워?”

“…….”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어. 다이아라고 해도 어차피 돌인걸. 내가 다이아를 고른 건 비싼 보석이라서가 아냐.”

여린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넓고 단단한 용주의 등을 쓰다듬으며 하원은 말을 이었다.

“다이아는 처음에 그렇게 값비싼 보석이 아니었대. 단단하기만 하지 그걸 연마할 방법이 없었거든. 나중에 연마 방법이 발명되고 나서 다이아는 최고의 보석이 된 거야. 실제로도 같은 원석을 가지고 그것을 어떻게 연마하느냐에 따라서 다이아의 가격이 달라지잖아. 나는 용주를 떠올렸어. 단단하고 예쁜 보석. 이제 겨우 연마되어지고 있지만 분명히 훌륭한 보석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다고는 해도…….”

“용주는 그거 낄 자격 충분히 있어. 오히려 용주에 비해서 반지가 볼품없어.”

“형…… 지금은 그렇게 칭찬해줘도 소용없어요.”

“왜 그래. 결국은 나한테 져줄 거면서.”

용주는 항상 나한테 져주잖아. 이번에도 그럴 거지? 용주의 얼굴 앞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묻자 용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형, 진짜. 갑자기 손가락이 무거워진 기분이라고요. 이거 끼고 어디 다닐 수나 있겠어요?”

“왜? 부디 끼고 다녀주세요, 하고 선물한 건데. 안 끼고 다니면 나 슬퍼.”

기어코 용주의 입에서 끼고 다닐게요, 라는 말을 끌어낸 하원이 방싯 웃으며 용주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거 알아? 다이아 따위 비할 바가 못 돼. 용주는 있지, 원석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빛이 나거든.”

그러니까 말이야, 나한테 최고의 보석은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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