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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는 정말 멋져. 용주의 시합을 보고 온 하원의 감상이었다.
용주는 예쁘고 성격도 좋고 요리도 잘하고 거기에 더해 축구도 잘한다. 게다가 어리기까지.
이제 겨우 고등학교 삼 학년인데도 이러하니 스무 살이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꼬일 것이 분명하다.
대학교에 가면 여자아이들도 있을 테고, 자연스럽게 미팅도 하고 소개팅도 하고 헌팅도 당하겠지. 싫어, 싫어. 침대에 얼굴을 묻으며 하원은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미리 물밑 작업을 해둬야 한다. 남자란 자고로 길게 내다보며 계획을 짜야 하는 법.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하원은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던지고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칠월과 팔월의 전국 대회 때문에 용주의 여름방학이 홀랑 지나가 버렸다. 덕분에 여름방학이라고 학기보다 더 자주 만나기는커녕 전국 대회가 끝나고 이틀 같이 보낸 것이 전부였다.
숙소에서 합숙을 벗어나자마자 달려왔던 용주는 하원의 집에서 하루를 잔 뒤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주가 개학이기 때문에 주말에 다시 숙소로 가져갈 옷도 빨아야 하고 짐을 챙겨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급하게 씻고 나온 하원은 촉촉하게 스킨로션을 얼굴에 바른 후 드레스룸으로 가 옷을 헤집었다.
티셔츠에 청바지는 좀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처음 뵙는 자리인데. 믿음직스럽고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하니까 너무 스포티한 의상도 곤란하다.
구겨지지 않은 와이셔츠를 꺼내 입고 펄감이 살아있는 분홍색 넥타이를 목에 맸다. 그리고는 정장을 걸어둔 옷장 문을 열고 이것저것을 뒤져보았다.
“그냥 정장은 너무 노티나 보이는데. 이 정도면 괜찮으려나.”
거울을 보며 양손에 든 정장을 번갈아 목 아래로 대보던 하원은 검은색 세미 정장이 마음에 들었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정장 바지를 입었다.
“머리를 뒤로 다 넘겨? 안경도 좀 써줄까?”
빗을 가지고 머리를 이리 빗었다가 저리 빗었다가 2 대 8 가르마도 해보고 완전히 내려도 보고. 결국 자연스럽게 뻗침 머리를 하고 액세서리를 모아두었던 진열대에서 시계와 선글라스를 꺼냈다.
띠리릭. 잠금장치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기척이 들려왔다.
“용주야?”
용주는 오늘 집에 있을 거라고 했는데. 빠끔 고개를 내밀어 거실을 보자 집으로 들어서는 윤석진이 보였다.
난 또 용주라고. 아닌 줄 알면서도 조금은 기대에 차 있던 하원은 실망한 것이 역력히 드러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민하원, 어디 있어?”
“나 여기.”
“뭐 하느라 전화도 안 받아?”
욕실에 들어가서 씻고 있을 때 전화를 한 모양이지. 하원은 석진의 말을 가볍게 흘려들으며 마지막으로 머리를 정돈하고 정장 윗도리를 걸쳤다.
“여기서 뭐 해?”
“옷 입어.”
옷 입지 여기서 잠이라도 자겠는가. 드레스룸으로 들어온 석진이 하원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여름에 웬 정장이야?”
“내 마음이지.”
모처럼 사람이 마음먹고 꾸미고 있는데 왜 초를 쳐. 하원은 석진을 흘겨보며 마지막 점검을 끝마쳤다.
좋아, 이 정도면 완벽하다.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석진이 흐음, 하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딱 손가락을 튕겼다.
“뭐, 나쁘지는 않네. 잘됐다. 사무실 들어갈 건데 너도 따라와. 사장이 너랑 할 얘기 있다고 한번 데리고 나오라고 했는데 오늘 가면 되겠네. 마침 사장도 사무실에 있는 모양이고.”
“뭐야, 나 바빠.”
“바쁘긴 뭘 바빠, 인마. 너 하루 종일 뒹굴거리는 걸 내가 몰라?”
그놈의 사장은 무슨 볼일이 있다고 하필이면 오늘 만나러 간단 말인가. 오늘은 대업을 이루기 위한 날이므로 결코 굴할 수 없었다.
“아무튼 안 돼. 오늘은 꼭 갈 곳이 있어.”
“어딜? 네가 갈 곳이 어디 있어?”
“있어! 갈 곳 있다고.”
좋은 말로 할 때 끌려가지? 석진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해 하원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건 좀 더울 것 같은데. 정장 벗고 다른 거 입지?”
“안 돼. 아무튼 나 나갔다 올게.”
석진이 옷장 문을 열고 옷을 뒤적거리는 사이 슬그머니 방문을 빠져나간 하원은 신발장 위에 두었던 차 키를 집어 들고 잽싸게 현관을 나왔다.
“민하원! 야!”
닫히는 문 사이로 석진이 소리치는 것을 가볍게 무시하고 석진이 타고 왔던 엘리베이터가 아직 내려가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윤석진이 계단으로 따라 내려올 정도의 열정을 가진 남자가 아님을 알기에 하원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사장이야 언제든 만날 수 있지. 그런 것으로 대업을 망칠 수는 없는 거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하원은 차 열쇠고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주차된 차로 다가갔다.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고 아파트를 빠져나오자 낮 시간이라서인지 햇볕이 뜨거웠다.
“다른 거 입고 나올 걸 그랬나.”
이제 막 나왔음에도 땀이 흘렀다. 에어컨을 켜고 내친김에 라디오도 켜서 노래를 들으며 하원은 익숙한 곳을 향해 차를 몰았다.
∞ ∞ ∞
“어서 오세요.”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방에 있던 남자가 나오며 인사를 했다. 토요일이라고는 하지만 동네에 있는 중국집인 데다 어중간한 시간이라선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안녕하세요.”
와아, 용주 아버지이신가 봐. 허리까지 굽혀가며 공손히 인사를 하자 남자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하원을 바라보았다.
“날씨 참 덥네요.”
좋은 인상을 보여드려야 해. 그러려면 인사부터 잘해야지. 하원은 예의 바른 학생처럼 인사를 하고 뿌듯한 마음에 생긋 웃으며 모든 대화의 가장 기본적인 날씨 이야기를 넌지시 건넸다.
“아, 네. 날씨 덥죠. 여기 에어컨 근처로 앉으세요.”
에어컨 가까이에 있는 테이블로 하원을 안내한 남자가 차가운 물이 담긴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여기 사장님이세요?”
“음, 사장이자 요리사죠. 뭐 드릴까요?”
확인차 물어봤는데 역시나 용주 아버님이 맞았다. 하원은 늠름하게 앉아 정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자장면 한 그릇 주세요.”
“자장면 한 그릇 금방 내오겠습니다.”
주방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분이 진정 용주 아버지구나, 새삼 감탄을 했다.
용주가 아버지를 닮아서 잘생겼나? 어머님도 미인이시더니 아버님도 호남이다. 용주처럼 예쁜 아들을 낳으신 거로 예상은 했었지만.
이힛, 웃으며 하원은 허리까지 오는 주방 벽 너머로 용주 아버님을 바라보았다.
용주가 자랑했던 수타 자장면을 오늘은 바로 먹을 수 있겠구나.
반죽을 두 손으로 쭉 잡아당겨 늘여서 겹쳐 잡고 탕탕 내리치며 또 쭉 잡아 늘여 겹쳐 잡고. 수타면을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원은 우와,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용주도 요리를 잘하는데 아버님 수타면 뽑는 솜씨도 장난이 아니다. 저것이 바로 장인의 손길인 건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바라보고 있음을 느낀 모양인지 자장면을 만들던 용주 아버님이 힐끔 고개를 들어 하원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쳐 생긋 웃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용주 아버님을 보며 하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웃는 얼굴이 좀 이상했나? 하원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벽에 있는 거울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는지, 더워죽겠지만 고집스럽게 껴입은 정장이 구겨지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미소가 어색하지는 않는지를 꼼꼼하게 점검했다.
거울을 향해 씨익 웃으며 이 정도면 역시 완벽하지, 하고 또다시 만족스럽게 웃는 하원이었다.
“자장면 나왔습니다.”
거울 앞에서 한참을 혼자 놀고 있던 하원의 뒤로 주방에서 나온 용주 아버님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와아.”
테이블로 달려가듯 다가가 자리에 앉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자장면이 보였다. 맛있는 냄새. 물론 용주한테서 나는 냄새에는 비교할 수 없지만 빈속에 군침이 돌게 하는 냄새였다.
빤히 바라보고 있자 김치와 단무지를 가져다준 용주 아버님이 맛있게 드세요, 하고 말했다.
용주는 자장면도 비벼줬는데. 수저통에서 젓가락을 꺼내 서투르게 비비자 툭 정장 옷깃에 떡하니 자장이 튀었다.
항상 사용하던 나무젓가락이 아니라 쇠젓가락이라서 그런지 자장면이 자꾸 미끄러져 빠져나갔다. 울상을 지으면서도 나름 열심히 자장면을 비비는 하원의 이마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덥다. 괜히 정장 입고 나왔나 봐. 힐끗 용주 아버님을 바라보자 아닌 척하며 카운터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좋은 모습 보여드려야 하는데. 긴장을 하니 식은땀까지 나는 기분이었다. 냅킨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하원이 자장면을 크게 입에 물었다.
“앗, 뜨거워.”
금방 나온 자장면이라 뜨겁다는 것을 간과했다. 입에 물었던 것을 뱉어내며 차가운 물을 마셔 입을 헹궜다. 용주 아버님의 눈치를 힐끗 보며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자장면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와, 맛있다.”
역시 용주 아버님. 어떻게 이런 맛의 자장면을 만드실 수 있는 거죠. 손이라도 잡고 묻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하원은 쩝쩝거리며 자장면을 흡입하듯 먹었다.
늦게 일어난 탓에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지금 하원은 자장면을 세 그릇도 먹을 수 있을 듯한 기분이었다.
“진짜, 진짜 맛있어요.”
“아, 네. ……손님이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시네.”
하원이 엄지를 들어 올리자 용주 아버님은 당황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오독오독 단무지도 예쁘게 깨물어 먹으며 자장면 한 그릇을 자장 양념까지 깨끗하게 비워내자 포만감이 들었다.
어휴, 배불러. 세 그릇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생각했지만 한 그릇으로도 충분히 배가 불렀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럽게 웃자, 이제껏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용주 아버님이 피식 웃으셨다.
안 돼. 예쁘고 멋진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오늘 온 이유는 ‘아니, 이렇게 멋지고 듬직한 사람이 있나.’ 하고 용주 아버님께 좋은 인상을 콱 남기고 가려는 것이었는데.
하원은 서둘러 냅킨을 뽑아 입가에 묻은 자장을 닦아냈다. 한 장으로 부족할 만큼 자장이 잔뜩 묻어나왔다.
「형은 너무 어린애처럼 먹어요.」
귓가에 타박하던 용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면서도 꼭꼭 휴지로 입가를 닦아주었는데.
그제 헤어진 용주가 무척 보고 싶었다. 모처럼의 방학이었는데. 적어도 일주일은 같이 있고 싶었는데.
포만감으로 만족스러웠던 기분이 우울해지려고 했다. 안 돼. 오늘은 활짝 웃으면서 좋은 인상을 남기고 가야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하원은 아직까지도 관찰하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용주 아버님을 향해 활짝 웃었다.
“자장면 오래 하셨다는 말씀 들었어요. 쭉 여기서 하셨다고. 여기가 유서 깊은 중국집이라고.”
“이 근처 살아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아는 사람이 이 근처 살아요. 저기 민들레 빌라. 그래서 몇 번 시켜 먹었었어요.”
윤석진 몰래.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아보니 짭조름한 맛이 느껴졌다. 아직 덜 닦였나 봐. 냅킨으로 꼼꼼히 입술을 닦고서 물을 마셨다.
“배달시켜 먹을 때도 엄청 맛있게 먹었거든요. 여기 와서 먹으니까 더 맛있는 것 같아요.”
“배달시키면 아무래도 면이 불죠. 수타면은 만들어서 나왔을 때 바로 먹어야 제맛이니까.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바쁘고 귀찮아서 시켜 먹는 걸 좋아하니까, 직접 중국집까지 와서 먹는 분들은 나이 드신 분들이 대다수고.”
“불어도 엄청 엄청 맛있었어요.”
하원의 칭찬에 용주 아버님은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문득 바로 이런 것이 좋은 관계를 쌓아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하원은 뿌듯해졌다.
“아, 씨발. 대체 누구야?”
뭔가 더 말할 거리를 찾는 와중에 중국집 문이 벌컥 열리며 험한 욕설과 함께 젊은 사내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누가 오토바이 세워두는 곳에 버젓이 차를 대놨잖아요. 남의 가게 앞에다가. 장사 말아먹으려고 그러나.”
들고 들어온 철가방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으며 사내가 짜증을 부렸다.
“그래서 오토바이는?”
“차 위에 올려놓고 왔습니다.”
“영덕아!”
“농담이에요. 농담도 못 하나. 대충 세워뒀어요.”
“그 차 앞에 전화번호 없든?”
“있는데 안 받아요. 대체 뭐 하는 새끼야.”
철가방 안에서 빈 그릇을 꺼내 주방으로 가져다 두고 나온 사내가 하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왠지 그거 내 차 같은데, 하고 생각하고 있던 하원은 사내의 시선에 어깨를 움츠렸다.
“혹시…….”
“죄송합니다. 제 차예요.”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먼저 자수해버린 하원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전화는 왜 안 받아요?”
“전화 안 왔는데요.”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휴대폰을 찾던 하원은 애초에 집에서 나올 때 휴대폰을 들고 나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놓고 나왔나 봐요.”
“아, 씨. 됐고 가서 차나 빼세요. 남의 가게 앞에 그렇게 세워두면 장사를 어떻게 해요? 알 만한 사람이 그러시네.”
“죄송합니다.”
“영덕아.”
거침없이 뱉어내는 젊은 사내에게 사과하자, 지켜보고 계시던 용주 아버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손님 거의 다 드신 것 같으니까 너무 그러지 마라.”
“아, 진짜. 날도 더운데 밖에서 쑈한 거 생각하면 열불 나네.”
정수기로 가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사내는 에어컨 앞에 의자를 끌고 와 털썩 주저앉았다.
좋은 관계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놈의 차가 뭐라고. 풀 죽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하원이 카운터로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금방 차 뺄게요.”
“괜찮아요. 저 녀석이 날이 더워서 짜증내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더운 날에 가게까지 와서 자장면 먹었는데 너무 괘념하지 말아요.”
“네에.”
괘념하지 말라 하지만 이미 속은 상해 있었다. 다음에는 버스를 타고 오든지 해야겠네.
얼마에요? 하고 물으며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하원은 집에 놓고 온 것이 휴대폰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사천 원입니다.”
간결하게 떨어지는 대답을 들으며 하원은 잠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진짜. 윤석진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윤석진 피하려고 냅다 뛰어나오는 바람에 휴대폰과 지갑 가져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체 차 키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차 키만 홀랑 들고 온 것일까.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상태로 굳어버린 하원을 용주 아버님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용주가 아버님을 참 많이 닮았구나.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며 하원은 조금 난감하게 웃었다.
“…….”
“…….”
침묵이 흐르는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했던가. 또 그러한 자신을 보며 용주 아버님이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들로 하원은 두통이 이는 것을 느꼈다.
“지갑도…….”
“……놓고 오셨다고?”
용주 아버님도 당황한 모양인지 물어보는 목소리의 끝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허, 참. 하고 나지막하게 내뱉는 웃음에 하원은 어깨를 움츠렸다.
망했어, 완전히 망했어. 울 듯한 얼굴이 되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외상 얘기를 꺼내면 왠지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질 것 같았다.
하원은 용주 아버님에게 전화 한 통화만 할게요,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세요.”
어이가 없었던지 허탈하게 웃던 용주 아버님은 카운터 위에 놓인 전화기를 하원의 앞으로 밀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다 윤석진 때문이야. 석진의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며 탓해보지만 야속하게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왜 안 받아.”
슬쩍 용주 아버님의 눈치를 보며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소리샘으로 연결될 뿐이었다.
어쩌지. 형한테 전화를 해볼까. 토요일은 오전 진료만 한다고 했으니까 일을 하고 있지는 않겠지. 하지만 지갑 놓고 다닌다고 한 소리 할 것이 분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하원은 이내 생각나는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발랄한 여자 아이돌 그룹의 신곡이 컬러링으로 들려왔다.
―여보세요.
이 사람마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나 정말 울 거야. 그러한 생각으로 수화기를 구명줄처럼 잡고 있던 하원은 오랜 기다림 끝에 들려온 목소리에 감격하여 눈물을 삼켰다.
―여보세요? 말씀하십시오.
“저예요, 하원이.”
말씀하십시오, 란 소리가 말하지 않으면 당장 끊겠어, 로 들려 하원은 다급하게 저예요, 하고 말했다.
―너 어디야? 너 데리고 오라고 했더니 도망갔다며? 석진이 녀석이 화나서 왔더라.
“그게요, 제가 오늘 엄청 엄청 중요한 곳에 가야 했거든요.”
―그래서 그 엄청 엄청 중요한 일은 끝났냐? 이제 사무실로 오려고? 너 차 가져갔다며.
“네, 그렇기는 한데요…….”
차는 가져왔는데, 정말 차만 달랑 가져와서 문제거든요. 하원은 나름 눈치를 주지 않으려는 목적인지 카운터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신문을 보고 있는 용주 아버님을 힐끗 쳐다보았다.
“차 키만 가지고 나왔어요.”
―뭐?
“휴대폰이랑 지갑을 놓고 나왔어요. 저 중국집에서 자장면 먹었는데요……. 지갑이 없어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으하하하, 하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미치겠다. 석진이 떼어내고 간 곳이 중국집이야?
“엄청 중요한 볼일이 있었다니까요!”
―참, 나. 민하원, 내가 너 때문에 진짜 미친다, 미쳐.
“자장면 먹었는데 지갑이 없어요. 사장님…… 돈 좀…….”
―아휴, 진짜. 이걸 어떻게 해야 해? 내가 어이가 없어서.
네, 저도 좀 당황스러운 상황이거든요. 하원은 시무룩한 얼굴로 수화기를 귀에 꼭 가져다 댄 채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쉴 사람이 누군데 네가 한숨을 쉬어?
“죄송합니다.”
―석진이 보낼 테니까 거기 얌전히 앉아있어. 너 혹시…… 얼굴 드러내놓고 있냐? 막 누가 달라붙고 그러진 않아?
“아뇨, 여기 주인아저씨랑 배달하시는 분만 계세요.”
아까 좀 떨어진 테이블에서 자장면을 시켜 드시던 할아버지 나가시고 나서부터는 쭈욱 혼자였는걸요. 하원의 작은 대답에 사장은 후우, 하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거기 주인 바꿔.
“네? 왜요?”
―위치를 알아야 가지.
“그거면 저도 말할 수 있어요. 여기 어디냐면요, 석진이 형 빌라 근처에 있는 중국집인데요.”
―시끄럽고, 바꾸라면 바꿔. 그리고 너는 모자나 그런 거로 얼굴 푹 뒤집어쓰고 있어.
“모자 없는데…….”
―모자도 안 쓰고 맨얼굴로 다녀? 그러고 동네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고 있단 말이야? 너 정신이 있냐? 사진이라도 찍히면 웬 망신이야!
버럭 화를 내는 사장의 목소리에 귀가 아파서 아까의 반가움은 사라지고 끊어버릴까, 하는 나쁜 마음이 생겨났다. 그것을 꾹 참으며 하원은 용주 아버님을 향해 저기요, 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통화는 다 끝났고?”
“아뇨, 돈 가지고 올 모양인데 위치를 알아야 한다고요. 죄송하지만 잠깐 통화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는 하원의 간청에 용주 아버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예, 말씀하십시오.”
읽고 있던 신문을 접어 카운터에 올려놓으며 용주 아버님은 수화기에 네, 네. 하고 말했다.
“예, 그 민들레 빌라에서 나와 큰길 따라 쭉 내려와서 큰 슈퍼가 하나 있을 겁니다. 그 슈퍼 옆에 골목이 있는데 안쪽 바로 첫 골목으로 들어오셔서 두 블록만 걸어오시면 있어요. 네, 네. 아…… 그렇군요. 허허, 네. 아, 예. 신경 쓰고 있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네에, 네. 네, 알겠습니다.”
용주 아버님은 말씀도 공손하게 참 잘하시는구나. 사장이 용주 아버님께 잘 말씀드려줬어야 하는데. 미리 좀 얘기를 해둘 것을 그랬나.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자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 응대를 하시던 용주 아버님이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
뭔가 다시 바꿔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간단히 전화를 끊는 용주 아버님의 행동에 하원이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었나? 전화 끊어버리시던걸.”
용주 아버님마저 당황한 얼굴이 되어 하원은 급히 아니에요, 하고 손을 내저었다.
“곧 오신다니 저기 앉아있어요. 날씨가 덥네.”
깨끗하게 비운 자장면 그릇을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가는 용주 아버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하원은 주춤주춤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향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배달하던 사내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좀 웃겨서. 나이는 어린 것 같은데 저런 삐까뻔쩍한 차를 끌고 다니고, 그러면서 중국집에는 빈손으로 온다는 게 좀 신기해서. 뭐 딱히 신경 쓸 건 아니고.”
딱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만 엄청 신경 쓰여.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시선에 하원은 정장 재킷 주머니에 걸쳐둔 선글라스를 꺼내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사장이 얼굴 가리고 있으라고는 했지만 실내에서 선글라스 끼고 있는 게 더 웃기지 않을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앉아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면서도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나 도망 안 가요. 곧 돈 가지고 올 거예요.”
“아니, 왠지 많이 본 얼굴 같아서.”
어린놈이 계속 반말이네. 중국집 들어올 때도 걸쭉하게 욕을 해대더니 아까 가게 앞에 주차해놨다고 막 뭐라고 하고. 나이 차이도 별로 나는 것 같지 않은데.
자신보다 어리면 어렸지 나이가 더 많아 보이지 않는 녀석이 반말을 해대니 하원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우리 만난 적 있던가?”
“아뇨, 그런 적 없습니다.”
용주네 중국집 배달부를 본 적이 있을까. 몇 번 시켜 먹은 적은 있지만 배달은 항상 용주가 왔었고, 게다가 이 근처에 사는 것도 아닌지라 만난 적이 있을 리 없다.
하원의 대답에 영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묘하게 낯이 익은데.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하원은 선글라스를 껴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을 했다.
“진짜 본 적 없나?”
“내 대학 후배? 아니면 고등학교 후배? 아니면 동네 동생?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요. 뭐, 낯이 익을 수도 있습니다. 난 그쪽 몰라도 그쪽이 나를 봤을 수도 있으니까.”
말할 수는 없지만 난 연예인이니까. 하원의 말에 영덕이 피식 웃으며 다리를 꼬고 하원을 바라보았다.
“내가 반말해서 기분 나쁘다는 표정이네? 딱 보니 어려 보이는데.”
“내가 어려 보이긴 하지만 댁보다는 나이 많을 겁니다.”
“딱 보니 나보다 나이도 많을 것 같고, 나보다 학벌도 좋을 것 같고, 집안도 좋을 것 같고, 돈도 많을 것 같다. 뭐, 이런 건가?”
“시비조로 들리네요.”
“눈치는 있는 모양이네.”
아, 진짜. 용주 아버님한테 먼저 눈도장 받아두려고 왔는데 지갑을 놓고 오는 불상사가 생기지를 않나, 어디서 날건달 같은 놈이 와서 시비를 걸지 않나 미치겠네.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며 하원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그 모습이 우스운 모양인지 영덕이 보란 듯이 낄낄 웃어댔다.
“명품으로 둘둘 싸매고 와서 자장면값 사천 원이 없다는 게 좀 웃기지 않아?”
“소란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까 참겠다. 좀 변명 같네.”
“할 일 없으면 그릇이나 수거해 와. 왜 손님한테 시비를 걸고 있어?”
주방에서 나오시던 용주 아버님이 성큼성큼 걸어와 영덕의 머리통을 꽉 잡아 눌렀다.
“으, 사장님 아파요. 그릇 수거 다 해 왔더니 왜 또 내쫓으려고 하신대? 날도 더워 죽겠고만.”
“에어컨 앞에 앉아있는 놈이 덥긴 뭐가 더워?”
“에어컨이 어디 있어요? 저게 에어컨이에요? 선풍기도 저것보다는 시원하겠네.”
영덕은 용주 아버님의 손을 피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아, 더워. 가게 앞에 누가 저렇게 주차해뒀대요?”
벌컥, 중국집 문이 열리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헛,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얼른 몸을 돌려 문을 등지고 앉으며 하원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왜 이렇게 늦게 와?”
“어머니께서 이것저것 더 챙겨주시는 바람에요. 영덕이 형 가져가서 먹으라고 따로 조금씩 더 담으신 모양이에요.”
“이야, 역시 사모님이 최고라니까.”
“그런데 누가 저렇게 차 대놨어요? 오토바이는 다른 곳에 세워져 있고.”
“저 손님이 끌고 왔댄다.”
그걸 이르다니. 영덕이 하원을 가리킨 모양인지 흐응, 하고 알겠다는 소리를 내던 사람이 어? 하고 저벅저벅 다가왔다.
“하원이 형?”
“요, 용주야.”
하원은 한껏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았다.
오늘은 용주를 만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용주 아버님 뵈려고 온 것인데. 일이 틀어져도 한참 틀어졌다.
울상을 하고 있는 하원을 바라보며 용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여기서 뭐 해요?”
“나…… 자장면 먹었어.”
“자장면 먹으러 온 거예요? 나한테 연락하지 그랬어요.”
“난 그냥 조용히 자장면만 먹고 가려고 그랬어.”
가까이 다가온 용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사이?”
“아…… 네, 뭐.”
영덕이 하원을 가리키며 묻는 것에 뭐라고 답하기 난감한지 용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왜 이러고 있어요. 다 드셨으면 나가지.”
“못 가.”
속삭이듯 작게 말하는 용주를 향해 영덕이 고개를 내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응? 왜요?”
“돈을 안 냈거든.”
영덕의 말에 용주가 고개를 돌려 하원을 바라보았다. 그 말이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하원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윤석진한테서 도망 나오다 지갑이랑 휴대폰 놓고 왔어.”
“그럼 저한테 전화했어야죠. 전화번호 알잖아요. 여기 가만히 앉아있는다고 돈이 나와요?”
용주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하원을 바라보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는 하원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장한테 전화했어. 윤석진이 데리러 올 거래.”
“형 이제 엄청 혼날 거예요.”
“맞아, 사장한테 끌려가서도 엄청 혼날 거야.”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리고 있자 영덕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우리 아버지는 그럼 뵈었겠네요?”
“응.”
방금까지만 해도 옆에 계시던 분이 그새 어디를 가셨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두리번거리자 용주가 주방을 향해 아버지, 하고 소리쳤다.
“아버지, 저 아는 형이에요. 가라고 해도 돼요? 자장면값 제 용돈에서 까세요.”
“거기 앉아서 기다려.”
주방에서 용주 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 모시러 온다고 했으니 기다려. 그대로 가버리면 여기로 오고 있는 사람은 허탕 치는 게 아니냐. 삼십 분이면 온다고 했으니 곧 도착할 거다.”
그에 용주가 하원을 돌아보았다.
“형은 이제 매니저님한테 혼나는 것만 남았어요.”
“나 석진이가 사장한테 가자고 하는 거 뿌리치고 나왔는데. 무섭다.”
“그러게 왜 도망쳐왔어요. 아무튼 허술해. 도망치더라도 지갑이랑 휴대폰은 들고 나왔어야죠.”
반성합니다. 하원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용주가 그런 하원을 토닥이며 자리에 앉혔다.
“생각났다! 그 드라마.”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영덕이 손뼉을 딱 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 드라마. 용주 너 만날 본다던 그 드라마! 거기 나온 남자 맞지? 맞죠?”
영덕이 성큼 다가와 하원에게로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면상도 그럴듯하고 돈도 많아 보인다 했더니 연예인이었네?”
“에이, 영덕이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제 고등학교 선배예요. 얼굴이 연예인처럼 잘생기긴 했지만 아니거든요. 제가 연예인을 무슨 수로 알겠어요?”
“아닌데, 분명히 저 사람인데.”
찔끔 놀라 가슴 졸이고 있는 하원을 슬그머니 몸으로 가리며 용주가 크게 웃었다.
“연예인이 뭐하러 여기 와서 자장면을 먹어요? 그것도 빈손으로 와서. 말도 안 되죠.”
말도 안 되는 짓을 해서 미안해. 하원은 속으로 깊이 반성하며 눈물을 삼켰다.
“어, 전화 왔어요. 배달 주문인가 봐요.”
때마침 울리는 중국집 전화를 가리키며 용주가 영덕의 등을 떠밀었다.
“아무튼 눈치는 좋다니까. 형은 이쪽으로 앉아요.”
문을 등지게 하여 하원을 의자에 앉히고 용주가 그 맞은편에 앉아 하원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여긴 웬일이에요?”
“자, 자장면 먹으러.”
“저 집에 간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그런 얘기 없었잖아요.”
“갑자기…… 갑자기 먹고 싶어져서.”
용주의 물음에 당황한 티가 팍팍 나는 얼굴로 하원이 허둥거리며 답했다.
“그럼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요? 자장면 먹으러 왔을 때도 그렇고, 아까 지갑 없다는 거 알았을 때도 나 불렀으면 되었을 텐데.”
그거야 용주 모르게 용주 아버님께 얼굴도장 콱 찍어두고 가려고 했으니까.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는 몰라도 왠지 이번 일을 계기로 용주 아버님이 확실하게 기억해주실 것 같다.
어찌 되었든 좋은 일이지. 하원은 손으로 턱을 괸 상태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개만 끄덕이지 말고 변명을 해요.”
아프지 않게 하원의 볼을 꼬집으며 용주가 타박했다. 흐웅, 하고 거짓 울음을 내뱉자 용주가 못 말려, 정말. 하고 혀를 차면서도 눈을 휘며 웃었다.
“아는 형이라면서 묘하게 사이가 좋다? 하늘 같은 축구부 선배한테 장난치지는 못할 테고…… 무슨 형이야?”
“애들한테 시비 걸지 마, 인마.”
주방에서 나오시던 용주 아버님이 영덕의 머리를 때리며 떨어지게 했다.
“아까 자장면 먹어서 배고프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중국집 왔는데 탕수육을 안 먹고 가면 쓰나. 용주 아는 사람이라는 거 알았으면 그냥 가시라고 할걸.”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테이블 위로 금방 만들어 온 탕수육 접시를 내려놓으시는 용주 아버님을 바라보며 하원은 멋진 아버님이야, 하고 감탄했다.
“앉아서 들어요.”
“아버지, 저한테 많이 도움 준 형이에요. 형, 우리 아버지세요.”
“안녕하세요, 민하원입니다.”
“인사는 되었고 어서 먹어요. 식으면 맛없으니까.”
용주 아버님은 손을 내저으며 하원을 자리에 앉혔다. 뭔가 인사받는 것이 쑥스러우신 듯 멋쩍은 표정인지라 하원은 아버님이 부끄러움도 타시고 참 귀여우시다, 하고 헤헤 웃었다.
“정말 맛있어요. 아버님이 만들어주신 자장면도 맛있지만, 탕수육도 정말 정말 맛있어요. 저번에 먹으면서도 맛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와서 먹으니까 더 맛있는 것 같아요.”
탕수육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말하자 뒤로 돌아선 용주 아버님이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셨다. 돌아선 목덜미가 붉어진 것으로 보아 쑥스러워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용주는 밥 먹었어?”
“점심 먹었죠. 시간이 몇 시인데요. 형은 여기 와서 첫 식사 한 거죠?”
“어떻게 알았어?”
“형 요즘 계속 늦게 일어나잖아요.”
찹찹 소리를 내며 탕수육을 먹는 하원을 빤히 바라보며 용주가 맛있어요? 하고 물었다.
“응, 응. 진짜 맛있어. 방금 전에 자장면 배부르게 먹었는데 탕수육이 막 들어가. 만들 때 꿀 넣으셨나 봐.”
“맛있다니 다행이에요. 그나저나 매니저님은 언제 오시려나 모르겠네요.”
“민하원!”
제 말 하면 온다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 중국집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석진은 곧장 하원에게로 다가와 정수리를 철썩 내리쳤다.
“아!”
“아? 아프냐? 아파? 기껏 도망쳐놓고 돈 없다고 전화할 생각이 들디? 뭐 이런 모자란 놈이 다 있어?”
자꾸 정신 빼놓고 다닐래? 하며 하원의 머리를 마구 흔들던 석진은 그 앞에 앉아있는 용주를 보고 얼른 하원을 놔주었다.
“용주 있었네?”
“안녕하세요.”
“아, 그러고 보니까 용주 부모님이 중국집 하신다더니, 여기였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휙휙 돌려보던 석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계시는 용주 아버님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 네.”
“하원이 때문에 많이 당황하셨죠? 쟤가 원래 저런 애가 아닌데 오늘 용주 만나러 가겠다고 신나서 나가느라 정신을 빼놓고 나갔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석진은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용주 아버님께 건넸다.
“용주랑은 작년부터 알게 된 모양인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용주가 나이보다 훨씬 성숙하고 어른스러워서 하원이가 배울 점이 많아요.”
“아아, 네에.”
용주 아버님은 석진이 건네는 명함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저번에 하원이와 함께 용주 시합을 보러 갔었는데 축구를 엄청 잘하더라고요. 아주 뿌듯하시겠습니다.”
“아직도 부족한 게 많은 녀석인데요, 뭘.”
석진의 칭찬에 손을 내저으며 아니라고는 하지만 내심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껄껄 웃고 계셨다.
들어온 지 오 분도 되지 않아 용주 아버님에게 호감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석진을 바라보며 하원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형, 왜 그러고 있어요? 탕수육 빨리 드세요. 그러다 못 먹고 매니저님께 끌려가겠어요.”
“기분 나빠.”
“뭐가요?”
“윤석진이 아버님께 잘 보이려고 막 알랑방귀 뀌잖아. 얄미워.”
하원의 불퉁거림에 용주는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매니저님이 아버지께 잘 보여서 뭘 하려고요. 형 나쁜 소문 날까 봐 미리 연막작전을 펴고 있는 거라고요, 저건.”
“내 나쁜 소문이 왜 나?”
“무전취식! 이거 엄청 나쁜 거거든요. 하물며 유명 연예인이 동네 중국집에 빈손으로 가서 자장면 먹고 돈 없어요, 했다는 소문 돌아봐요.”
“으으.”
탕수육을 입에 문 상태로 미간을 찌푸리는 하원의 행동에 용주는 거봐요, 하고 말했다.
“나중에 가면서 매니저님한테 혼난다고 삐치면 안 돼요. 오늘은 형이 잘못했으니까 싫어도 참고 조용히 혼나요.”
“아휴, 하지만 석진이는 너무 잔소리쟁이야.”
“그래도 오늘은 참아요.”
싫다는 것이 역력한 얼굴로 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끝낸 모양인지 성큼성큼 걸어온 석진이 하원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탕수육이…… 목으로 넘어가냐?”
테이블 너머까지 들리지 않게 소리 죽여 말하며 석진은 하원을 향해 생긋 웃었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맛있어? 하고 상냥하게 물어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용주 아버님이 나 먹으라고…….”
“자장면 한 그릇 처먹고 돈 없다고 기다리는 주제에 탕수육이 넘어가냐고.”
“용주 아버님이 주셨어! 어른이 주시는데 먹어야지!”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잘못한 것은 알지만 먹는 것 가지고 트집 잡으면 누구라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샐쭉 노려보며 말하는 하원의 입을 손으로 막은 석진이 그래, 그래. 하고 하원을 다독였다.
“하원이가 연락해서 왔어?”
탕수육을 집어 하원의 입에 물려준 석진이 용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뇨, 저한테는 연락 안 하셨더라고요. 전 가게에 심부름 왔다가 봤어요. 밖에 주차를 엄청나게 해두셔서요.”
“아, 봤어. 정말 미안하다.”
석진이 용주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생각지도 못하게 형을 만나서 놀랐지만 좋았는걸요.”
그렇게 말하던 용주는 고개를 들어 바라보고 있는 하원과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었다.
역시 용주는 예뻐. 입에서 오물거리던 탕수육을 꿀꺽 삼키고 헤헤, 하고 웃자 옆에 앉아있던 석진이 뒤통수를 툭 건드렸다.
“웃지 말고 빨랑 처먹어. 내가 너 때문에 쪽팔려서 못 살겠다.”
“천천히 꼭꼭 먹어야지. 매니저가 돼서 막 구박하냐?”
“정말 구박다운 구박 한번 받아보고 그런 소리 할래?”
하원의 볼을 콱 꼬집었다 놓으며 석진이 으르렁거렸다. 빨갛게 손자국이 남은 볼을 손으로 문지르며 하원은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았다.
윤석진, 나쁜 놈. 전화하기 싫었는데. 이렇게 될 거였으면 그냥 용주한테 전화할 걸 그랬어.
후회해봤자 소용없음을 알면서도 후회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던가. 인간이란 참 슬픈 존재다.
탕수육을 오물거리며 하원은 오늘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 ∞ ∞
“넌 대체 생각이란 걸 하고는 있냐?”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며 운전을 하고 있던 석진이 대뜸 물었다.
“응.”
당연한 것을 묻는다. 생각이야 언제나 하고 있지.
아침에 일어나면 용주 생각하고, 오늘은 스케줄이 뭐가 있을까, 아침밥은 뭘 먹을까, 점심때까지 일하거나 좀 놀다가 점심은 뭘 먹을까 생각하고, 점심 먹고 나서 용주 생각, 또 시간 좀 때우다가 저녁 먹고 자기 전까지 용주 생각.
히히, 웃자 옆에서 손이 뻗어 나와 퍽 하고 뒤통수를 갈겼다. 아까 중국집에서 살짝 터치만 하던 손길과는 차원이 달랐다.
“왜 때려!”
“내가 진짜 아까 중국집에서 패고 싶은 걸 참느라 사리가 생길 뻔했다.”
“내가 뭐 동네북이야? 툭하면 때려. 사장한테 다 말할 거야. 매니저가 막 폭행한다고 다 이를 거야.”
“아이고, 일러라 일러. 그럼 아마 너희 사장은 잘하셨습니다, 더 때려주세요, 하고 나한테 절을 할 거다.”
“어휴, 씨이.”
“씨이, 같은 소리 한다. 한숨 쉴 사람이 대체 누군데? 내가 진짜. 넌 그렇게 꼭 일을 내야겠냐? 용주네 중국집 아니었어봐. 무슨 일이 일어났을 줄 어떻게 알아?”
용주네 중국집 아니었으면 뭐 내가 갈 일이 있었겠나? 하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용주 아버님이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고 넘어갔으니 다행이지, 다른 이상한 사람이라도 엮였어봐. 넌 바로 경찰서에 끌려가서 얼굴 팔리고 신문, 방송에 나갔을 거다. 그것도 몇천만 원 사기죄도 아니고 기껏 동네 중국집에서 사천 원짜리 자장면 무전취식한 것으로 말이야.”
그럼 가서 몇천만 원짜리 사기를 치고 오라는 거야 뭐야? 하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입속으로 굴리는 말을 들은 것인지 대번에 손이 날아왔다.
“이게 반성은 안 하고 계속 구시렁거리네.”
「오늘은 형이 잘못했으니까 싫어도 참고 조용히 혼나요.」
귓가로 울리는 용주의 목소리에 ‘에휴, 그래. 내가 참아야지.’라고 생각하며 하원은 꾸욱 입을 닫았다.
“자장면에 탕수육까지 처먹으니 배가 부르냐? 응?”
“난 자장면만 먹으려고 했는데 용주 아버님께서 탕수육을 주신 거야.”
“그런 것치고는 아주 잘도 처먹더만? 얼마나 불쌍해 보였으면 자장면 팔고 탕수육을 주시겠냐. 탕수육 값도 안 받으시더라.”
“정말?”
하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정말 탕수육 값 안 받으셨어? 그럼 정말 탕수육 주신 거네? 와아, 하고 웃는 하원을 바라보며 석진이 혀를 찼다.
“넌 인마, 죄송한 줄 알아야 해. 동네 중국집 장사해서 얼마나 남겠냐. 거길 가서 탕수육을 얻어먹고 오냐? 진짜 양심도 없다. 용주랑 용주 아버님이 좋은 사람들이라 웃고 넘어갔지, 아니면 멱살 잡혔어.”
반성 좀 하라는 뜻으로 타박을 해보지만 하원은 뭐가 즐거운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것에 기가 찬 석진이 허,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너 인마, 내가 혼내는 건 이제 혼내는 것 같지도 않다는 거야?”
“아니, 나 정말 반성합니다.”
하원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말을 하면서도 입가에 맺힌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용주네 아버님이 나 엄청 예쁘게 보셨나 봐. 그치?”
“뭐?”
“지금 그랬잖아, 형이. 동네 장사하시는데 얼마나 남겠냐고. 장사도 잘 안 되는 요즘 같은 날에 나 자장면 한 그릇 시켜 먹었는데 떡하니 탕수육 만들어서 주셨잖아. 중국집 와서 탕수육을 안 먹으면 안 된다면서.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버님이 탕수육 만들어서 나 먹으라고 주셨다니까.”
나 먹으라고. 아버님이 직접 나 먹으라고. 하원은 서너 번을 강조하여 말하며 뿌듯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래도 아버님이 나를 좋게 보신 모양이야. 첫인상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자연스럽고 예의 바른 인사가 마음에 드셨던 걸까. 아니면 역시 내 얼굴? 하원은 제 뺨을 손으로 쓸며 이히히, 하고 웃음을 흘렸다.
“참, 나. 민하원. 너 지금 혼나는 거라니까 그러네.”
하원의 정수리에 딱콩, 꿀밤을 먹이며 석진이 타박을 했다.
“내 얼굴이 어른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인가 봐. 아니다, 난 소녀팬들도 많으니까 전 연령한테 먹히는 얼굴인가? 아휴, 평소에는 별생각 없었는데 오늘은 좀 기분이 좋네.”
그냥 좋은 인상만 남기고 오려고 했는데, 용주 아버님이 나를 그렇게까지 좋게 봐주셨다는 것인가. 아무튼 이런 게 내 인기라지만 이런 식으로까지 그 인기를 실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후후, 하고 웃고 있는 하원을 석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뭔 생각하는 거야? 설마 용주 아버님이 너 예뻐서 탕수육을 만들어주셨겠냐?”
“나 먹으라고 만들어주신 건데?”
“그래, 너 먹으라고 주신 것이긴 하겠지. 허우대는 멀쩡한 녀석이 지갑 없다고 찌질거리는 게 얼마나 불쌍해 보였으면 그러셨겠냐. 게다가 용주 아는 형이라고 하는데 이제 와서 돈을 안 받겠다고 할 수는 없고, 그러니까 탕수육이라도 만들어주신 거지.”
“아냐, 용주 아버님이 날 예쁘게 보고 만들어주신 거야. 아까 나랑 엄청 즐겁게 대화도 하셨다고.”
“그거야 손님이니까 친절하게 대해주신 거지. 손님한테 화를 낼 수는 없잖냐.”
“아니라니까. 용주 아버님이 막 나랑 대화하면서 내가 정말 맛있다고 하니까 얼굴도 붉히고 그러셨어. 분명히 나를 좋게 보신 거야.”
나중에 정식으로 인사드리게 된다면 아마 깜짝 놀라면서도 좋아하실지 모르겠다.
아니, 이런 잘생기고 믿음직한 청년이 우리 용주와? 하면서 말이지.
용주한테도 오늘 용주 아버님이 나를 얼마나 잘 봐주셨는지에 대해서 말해줘야겠다고 하원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