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7)

9

―내일이면 용주 만나는 날이다.

“언제는 안 만난 것처럼 말하고 그래요? 저번 주 토요일, 일요일에도 만나고 월요일에도 만났었잖아요.”

―그거야 용주가 아파서 병원 데려가느라 만났던 거고.

내 핀잔에 하원이 풀 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일은 촬영 몇 시에 끝날 것 같아요?”

―나는 내일 씬 하나만 찍으면 된다고 하더라고. 아침에 대본 좀 보다가 운동하고 촬영 갔다가 끝나면 용주 데리러 갈게.

“그러지 마세요. 형 촬영 끝날 때쯤 전화하면 제가 시간 맞춰서 가면 되잖아요. 뭐하러 피곤한데 저희 집에 들러요.”

―용주는 남자의 로망을 몰라!

흑, 우는소리를 내는 하원의 말을 들으며 뭔 로망? 하고 의아함을 느꼈지만 하원에게는 내가 알 수 없는 로망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럼 형 피곤하지 않으면 집 근처에서 만나요.”

―정말이지?

“네, 대신 촬영 끝나고 출발할 때 문자 하나 보내주세요.”

―응, 응. 빨리 내일 왔으면 좋겠다. 용주랑 노는 거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 저번 주에 용주 아팠던 것만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심장이 덜컹거린다니까.

“미안해요. 대신 내일 맛있는 거 해줄게요.”

하원은 월요일에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나를 찾아와 토요일에 민폐를 끼쳤던 의사에게 다시 데려갔다.

두 번째 만나는 것이라 어색함은 조금 사라졌지만 여전히 미안함은 가시질 않아서 머쓱하게 앉아있었더니 진료를 끝낸 의사가 몸 관리를 잘하고 있는 것 같다며 약만 며칠 더 먹으면 되겠다고 말해주었다.

의사 선생님의 말처럼 처방전에 적힌 대로 약을 지어 먹고 몸을 추슬렀더니 목요일쯤에는 완전히 감기가 떨어져 나갔다. 정말이지 독했던 감기, 사람 진을 다 빼놓고 정신까지 쏙 빼놓았던 것 같다.

―그것보다 용주야, 오늘은 꿈꾸지 말고 푹 자야 해.

“네?”

뜬금없는 말에 묻자 하원이 히히, 웃더니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야한 꿈 꾸지 말고 푹 자. 야한 거 나랑 내일 해야 하잖아.

이 사람이 대체 뭐라는 거야.

“형, 제발 그런 거 말로 하지 말아요.”

―말로 안 하면 뭐로 해?

하원이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분명 입술도 삐죽거리고 있겠지. 하원의 얼굴이 눈앞에 선해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웃음을 삼켜야 했다.

“행동으로요.”

―해, 행동…….

흡, 숨을 들이마신 하원이 콜록 기침을 내뱉었다.

“형도 꿈꾸지 말고 푹 주무세요. 내일 봐요.”

하원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인사를 끝내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나 스스로도 엄청 우스운 짓을 해버린 것 같지만 당황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통화가 끊어진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을 하원을 떠올리니 실실 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그렇게 귀여워서 어쩌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앉아있던 바닥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 슬슬 걸음을 옮겼다. 요즘 들어 부쩍 예민해진 누나 덕분에 전화도 밖에 나와서 받는 것이 마음 편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거실을 서성이다가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해야 함을 깨닫고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누나가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이 보여 발소리를 죽여 방으로 들어갔다.

충전기만 살짝 가지고 나올 요량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누나가 나를 돌아보았다. 눈 밑이 거뭇거뭇한 것을 보니 잠을 통 못 잔 모양이었다.

“네가 보기에도 내가 정상은 아닌 것 같지?”

“……무슨 뜻이야?”

충전기를 집어 들던 상태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내가 미친 것 같아.”

“그런 소리 하지 마.”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나는 미친 게 아니라, 그냥 인성이 쓰레기인 것뿐이야.”

“이 새끼가.”

파르르 화를 내려던 누나가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너한테 이상한 소리 하고 그래서 미안해.”

“알고는 있어?”

“그때는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또 그렇더라고.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네. 가끔 나도 내 성격이 진짜 더럽구나, 하고 생각한다니까.”

누나는 두통이 생긴 것처럼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신음을 내뱉었다.

“……괜찮아?”

“그냥 머리가 좀 아파.”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그런 건 아니고 두통약 먹으면 나아.”

누나는 익숙한 듯 서랍을 뒤져 캡슐 약을 꺼냈다. 항상 책상 위에 놓아두는 커피와 함께 약을 삼킨 누나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너한테 못된 소리 했던 거 미안해.”

“알면 됐어.”

괜찮아, 라고 말을 하기에는 나도 마음 상한 것이 있기 때문에. 사내 녀석이 속이 좁다고 말한다고 해도 마음이 상한 것은 상한 것이다.

게다가 남도 아니고 가족에게라면 그런 마음을 애써 숨기면서 방싯방싯 웃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누나의 말과 행동이 내게 얼마나 상처를 주었는지 말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서 내가 상처받았다는 것까지 숨길 필요는 없으니까.

“약만 먹지 말고 병원이나 다녀와.”

누나가 사과를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예상 밖의 사과를 받고 나니 조금은 머쓱한 마음에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방을 나왔다.

누나도 스트레스가 엄청 쌓인 모양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평소에 언행을 좀 조심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뭐하러 사과할 일을 만드냐고.

나보고 정신줄 놓고 다닌다고 했으면서 정작 본인 정신줄은 아주 책상 서랍에 고이 넣어두고 다니는 모양이다.

혀를 쯧쯧 차고는 거실 바닥에 깔아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 ∞ ∞

촬영을 끝낸 하원이 윤석진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출발한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라, 이러면 좀 곤란한데. 중간에 마트에서 차를 세워달라고 하기도 곤란할 듯해 미리 십 분 정도 일찍 집에서 나와 야채 몇 가지를 샀다.

양배추와 파프리카, 실파를 사서 봉지에 넣고 달랑달랑 가볍게 흔들며 큰길로 나와 윤석진의 차를 기다렸다.

한참 동안 큰길 횡단보도 앞을 서성이고 있자 저 멀리서 하원의 밴이 보였다. 바로 앞에 차가 멈춰 서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손이 뻗어 나왔다.

“용주야아.”

두 손을 뻗어 벌리는 하원에게, 아니, 밴 안으로 급하게 몸을 밀어 넣으며 문을 닫았다.

얼굴을 그대로 내보이고 거의 밖으로 노출될 뻔한 하원을 바라보며 무슨 연예인이 이렇게 자각이 없을까 생각했다.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당사자인 하원은 그저 반가울 뿐인지 내 어깨를 끌어안아 몸을 흔들고 있었지만.

“용주 안녕.”

“안녕하세요.”

운전석에 앉아있던 윤석진이 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아는 척을 했다. 그에 인사를 해주려고 했지만 목에 매달려 있는 하원 때문에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형, 좀 떨어져 봐요. 매니저님도 계신데.”

“흥, 윤석진은 신경 쓰지 마. 내 시다바리야.”

“시다바리 같은 소리 한다. 평소에 말 골라서 쓰라고 했지? 그러다 인터뷰 같은 것 할 때 습관적으로 시다바리 어쩌고 하려고.”

“안 해.”

“널 어떻게 믿어?”

윤석진이 콧방귀를 뀌며 머리를 내저었다. 하지만 윤석진이 머리를 내저을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하원이 저 말을 어디서 배웠을지 뻔히 그 출처가 보여 일단 댁부터 잘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애써 그것을 삼켜야 했다.

“어휴, 아무튼 심술쟁이야. 엄청 못됐다니까.”

“매니저님이 형한테 뭐하러 심술을 부리겠어요.”

목에 매달린 하원을 떼어내 의자에 바로 앉히고, 그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 용주 말 잘한다.”

“뭐하긴, 윤석진은 나 골려 먹고 부려 먹고 이용해 먹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나쁜 매니저라고.”

“지 때문에 내 등골이 휘려고 하는 건 생각도 안 하고.”

하원의 말에 윤석진이 중얼거린다기에는 조금 큰 목소리로 대꾸했다.

“오늘 내가 너랑 만난다고 막 좋아하니까 심술 나서 저러는 거야. 자기는 같이 놀아주는 사람 없으니까. 그러게 평소에 인맥 관리 좀 잘하지.”

쯧쯧, 하고 보란 듯이 혀를 차는 하원을 향해 윤석진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 나 평소에 어떤 얼빠진 놈 뒤치다꺼리해주느라 정신이 없어서 인간관계 관리를 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 내 죄다. 내 죄야. 내 죄고 내 업보인 걸 말해서 뭐하겠냐.”

깊은 한숨을 내쉬는 윤석진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참으로 막중한 임무를 띠고 계시는 겁니다. 힘내세요. 속으로 파이팅을 외치고 하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촬영은 잘하고 왔어요?”

“응. 한 번에 오케이 나서 엄청 빨리 끝났어. 용주는 아픈 거 확실하게 다 나은 거지?”

“네, 이제 열도 없고 기침도 안 나고 목소리도 멀쩡하잖아요.”

“다행이다. 너 아파서 진짜 걱정했어.”

열을 확인해보기라도 하려는지 이마 위로 단정한 손이 올라왔다. 약간의 온기가 담긴 하원의 손은 이마 위를 한참 동안 서성이다 떨어졌다.

“……열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잘 모르겠다.”

“없는 거예요.”

낙심한 하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나란히 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운전을 하던 윤석진이 그 모습을 백미러로 슬쩍슬쩍 바라본 모양인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야, 니들 진짜 웃겨. 무슨 갓 연애하는 애들도 아니고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아? 누가 보면 둘이 사귀는 줄 알겠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없다는 듯 크게 웃으며 윤석진이 말했다. 동시에 내 얼굴이 싸하게 굳는 것이 느껴져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추었다.

“정말? 정말 그렇게 보여?”

이 와중에도 해맑은 하원은 운전석의 헤드레스트에 매달려 윤석진에게 묻고 있었다.

“민하원, 얌전히 좀 앉아있어. 넌 어떻게 스물세 살이나 먹어서 하는 짓은 그냥 세 살이냐?”

윤석진의 질책에 하원이 칫, 입술을 삐죽거리며 다시 내 옆으로 다가와 엉덩이를 내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가 이상했던지 용주야, 하고 쿡 내 뺨을 손끝으로 찔렀다.

“왜 그러고 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 뭐 좀 생각했어요.”

형은 어떻게 그렇게 해맑을 수 있을까. 뭐 그런 거요.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원은 내 귓가에 윤석진이 우리보고 연애하는 애들 같대. 하고 속삭이며 깔깔 웃었다.

네, 형. 저도 지금 그 말을 듣고 자괴감에 빠져 있었어요. 그렇지만 하원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라 조금은 다행이기도 했고 씁쓸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윤석진의 앞에서 언행에 조금 더 신경 써야 할 듯싶었다. 하원에게도 주의를 주는 것이 좋을까.

활짝 웃으며 내 한쪽 손을 갖고 조물거리며 놀고 있는 하원을 바라보면서 나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보이냐고.”

하원은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윤석진에게 물었다.

“뭐 이렇게 끈질겨? 그냥 농담한 거 가지고.”

윤석진이 대답하자 하원이 칫, 하고 입술을 부우 내밀었다. 한껏 기대하고 있다가 실망한 사람처럼.

아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할망정 왜 그렇게 입술을 내밀고 있어요. 나는 손가락으로 부우, 하고 내민 하원의 입술을 툭 건드렸다.

“오늘은 닭가슴살 양배추 쌈을 해줄게요.”

“양배추 쌈?”

“네, 모양도 엄청 예쁘더라고요. 근데 모양이 잘 나올지 모르겠어요.”

“용주가 해주는 건 다 예뻐.”

“다 예쁘고 다 맛있죠?”

“응.”

이런 식으로 세뇌가 시작되는 것인가. 생글생글 웃는 하원을 보며 덩달아 웃었다.

“그런데 용주는 정말 요리 잘하나 보다.”

“아니에요. 그냥 레시피 찾아서 그대로 하는 건데요.”

“처음 만들어보는 것도 뚝딱뚝딱 만든다며?”

하원이 얘기한 모양인지 윤석진이 내게 물었다.

“그냥 비슷하게 만드는 거죠. 맛이 제대로 나오는지도 잘 몰라요. 하원이 형 때문에 간도 잘 안 하고 만드는데, 무슨 맛이 있겠어요?”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지만 하원이 아냐, 맛있어. 하고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나중에 나도 좀 얻어먹어볼까.”

“안 돼, 용주 음식은 내 전용이야.”

“웃기는 소리 한다.”

하원이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지만 윤석진은 흥, 하고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그렇게 말을 주고받는 동안 차는 하원의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하원의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댄 윤석진은 하원과 내가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내리자 몸을 틀어 뒤를 돌아보며 인사했다.

“맛있는 닭가슴살 잘 먹고, 잘 놀다가 가라.”

“어, 같이 안 올라가세요?”

“운동시키고 촬영까지 다 했으니까 나도 좀 벗어나고 싶다.”

“잔소리꾼 주제에.”

하원이 날름 혀를 내밀며 말했다.

“운동 두 배로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지껄여라.”

윤석진의 말에 헙, 하고 혀를 집어넣은 하원이 딴청을 부렸다. 그런 하원을 보고 웃으며 윤석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서 쉬세요. 다음에 뵐게요.”

“그래, 다음에 보자.”

뒷좌석 문을 닫자 윤석진이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밴의 뒤꽁무니를 바라보고 있다가 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용주 너무해.”

“왜요?”

입술을 삐죽거리는 하원을 보며 또 뭐 때문에 그래요? 하고 묻자 흥, 하고 고개를 돌린다.

“어떻게 윤석진한테 같이 안 올라가세요? 하고 물어볼 수 있어? 용주는 나랑 노는 거 싫어?”

형이야말로 어떻게 그런 것으로 삐칠 수가 있어요.

웃을 타이밍이 아닌지라 웃음을 참으려고 하니 배가 아팠다. 배에 꾹 힘을 주고 애써 웃음을 참으며 작은 목소리로 살살 하원을 달랬다.

“예의상 한 말이죠.”

“예의상?”

“네, 형이랑 둘이 있는 게 좋지, 매니저님까지 끼면 뭐가 좋겠어요? 어차피 매니저님 가서 쉬실 것 같으니까 예의상 한 말이에요.”

“그럼 용주도 나랑 둘이 있는 게 좋아?”

“네.”

내 말에 금방 기분이 좋아진 하원은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뒤뚱뒤뚱 걸음을 걸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뒤에서 껴안은 상태로 어깨에 턱을 걸친 하원이 낮게 속삭이자 귓가로 하원의 숨결이 느껴졌다.

“용주랑 이렇게 있는 거 정말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다시는 감기 같은 거 걸리면 안 돼. 감기 말고 다른 것으로도 아프면 안 돼. 나도 절대 절대 안 아플 거야.”

의도는 조금 불순하지만 정말 좋은 다짐이기는 하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하원의 말에 네, 하고 대답했다. 땡, 하고 엘리베이터가 하원이 사는 층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하원이 여전히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상태로 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를 나와 문 앞에 섰다. 익숙하게 숫자키를 누르자 띠리릭, 하고 문의 잠금장치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자.”

그렇게 말하는 하원의 입술이 귓불에 닿아 살짝 어깨가 떨렸다. 열린 문을 넘어가는 순간 미묘하게 공기가 달라지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이라서 그럴까. 멍청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급작스럽게 몸이 돌려 세워졌다.

“형…… 읍…….”

들고 있던 봉지가 떨어지며 양배추가 쿵 소리를 냈다. 사 온 야채가 신발 벗는 곳에 떨어졌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하원의 키스는 급했다. 급하고 혼을 쏙 빼놓는 것 같았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입을 맞추며 갈증을 채우려는 듯 하원은 내 입술에 매달렸다. 그런 하원의 어깨를 붙잡자 하원이 입술을 떼어내고 귓불을 질겅이며 말했다.

“야한 거 하자고 네가 말했잖아.”

네, 제가 말했었죠. 그렇지만 숨 돌릴 시간은 좀 줘야죠. 우리 신발도 벗지 않았는데 지금 문에 기대어 이러고 있다는 거 알고 있기는 해요?

하원의 어깨를 안은 상태로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섰다. 바닥으로 떨어진 야채들이 보였지만 하원이 그것을 주울 틈을 주지는 않을 성싶었다.

“너 말이야, 진짜 나빠.”

귓바퀴를 핥으며 속삭이는 하원 때문에 귀 안쪽의 솜털이 쭈뼛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왜요?”

“감기 걸려서 안 된다는 거 뻔히 알면서 뽀뽀도 하고 더 좋은 것도 하고 야한 것도 많이 해요, 이러면서 막 나 괴롭혔잖아.”

“그게 왜 괴롭힌 거예요?”

“괴롭힌 거야, 나 참느라 엄청 힘들었다고.”

불퉁한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무엇을 참았는데요? 라고 말한다면 기꺼이 대답이 나올 것 같아 구태여 묻지 않았다. 대신 하원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답했다.

“그래서 안 할 거예요?”

“지금?”

“네, 지금.”

아이와도 같이 보드라운 뺨에 입술을 문지르며 느리게 대답하자 하원이 급하게 내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거실 소파에 자리 잡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침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는 하원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하원의 침실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캐노피 같은 것을 상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화려한 인테리어를 기대했는데, 하원의 침실은 어두운 남색의 두꺼운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어 어두운 편에 속했고 방 안에도 침대와 책장, 그리고 화장대만 달랑 있을 뿐이었다.

“형 침실 생각 외로 엄청…… 간소하네요.”

“다른 건 별로 필요 없어서. 어차피 여기서는 잠만 자니까.”

“옷장은 없고, 책장이 있네요?”

“드레스룸은 따로 있고, 책장은 내가 읽고 싶어서 샀던 책이랑 대본 같은 거 모아둬야 해서.”

나를 침대로 이끌어 앉힌 하원이 습관적으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내 방 구경만 하고 있을 거야?”

“형이야말로 그렇게 칭얼거리기만 하고 있을 거예요?”

이마를 마주 대고 묻자 하원이 아니, 하고 고개를 내젓고는 살짝 입술을 들이밀었다.

마주 보는 상태로 침대를 짚은 손 위로 하원의 손이 겹쳐졌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내 손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며 쪽, 하고 부끄러움과 설렘이 담긴 소리의 여운을 남겼다.

가슴이 쿵쿵 뛴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던 입술이 깊게 포개어졌다. 입술이 벌어지며 타인의 혀가 밀려 들어왔다.

하원은 조심스럽게 톡톡 치열을 건드려보고 뾰족하게 세운 혀로 입천장을 슬쩍 긁기도 했다.

간지러운 감각에 어깨를 움츠리며 웃자 하원 역시 입술 끝에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보고 싶었어.”

윗입술을 물고 아프지 않게 빨아들이며 하원이 속삭였다.

“보고 싶기만 했어요?”

“뽀뽀도 하고 싶고, 야한 것도 하고 싶었어.”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목덜미를 쓰다듬고 그 아래로 내려갔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으로 셔츠 아래를 파고든 손은 약간의 떨림과 함께 허리를 감쌌다. 온기가 담긴 타인의 손길에 파르르 몸이 떨렸다.

“아…… 순간 찌릿하고 전기 온 것 같아요.”

“알아? 너 엄청 야해.”

하원은 파르르 떨고 있는 내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슬슬 배와 허리를 만지던 하원의 손이 티셔츠 밑자락을 잡아 위로 끌어 올렸다. 반사적으로 두 팔을 위로 뻗어 옷 벗기는 것을 도와준 나는 순간적인 상체 노출에 두 팔로 가슴을 가렸다.

“추워?”

떨고 있는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려 쓰다듬으며 하원이 물었다. 고개를 내젓자 내 등을 손으로 받친 하원이 조심스럽게 침대로 몸을 밀었다.

침대 위에 나란히 누운 상태로 하원을 바라보자 모로 누워 나를 내려다보며 하원이 손끝으로 내 턱을 간질였다.

“얼마나 좋은 거 하게 해줄 거야?”

“글쎄요, 그건 형이 하는 걸 봐서…….”

얼마나 좋은 것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그동안 꿈속에서의 경험으로 조금은 자신이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꿈속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분이 좋았을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도 분명 그것 못지않게 좋을 것 같았다.

“저번에는 너무 급작스럽고 놀라서 아무 생각도 못 했던 것 같아요.”

내 말에 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반성했어. 예전에도 용주한테 일방적으로 키스하고 그래놓고, 이번에도 또 급작스럽게……. 그래서 나 이번에 공부했어.”

“공부요?”

“응, 인터넷으로 찾아봤어.”

미리 예습해 왔다고 말하는 학생처럼 하원은 칭찬을 바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형 나쁘다. 난 아파서 막 골골거리고 있는데 형은 야한 거 찾아봤어요?”

하원의 뺨을 잡아 쭉 늘이며 타박하자 하원이 울상을 지으며 웅얼거렸다.

“하지만 또 놀라면 어떻게 해? 미리미리 공부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아야 해.”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하는 하원을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대체 뭘 그렇게 공부를 해 왔다는 것일까. 딱히 공부할 것도 없던데.

그간 꿨던 꿈을 떠올리며 직접 경험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의 간접 경험을 겪은 나는 조금 우쭐해졌다.

하원은 자신의 셔츠를 벗어 침대 아래로 던지고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목덜미 아래의 여린 살을 핥고 빠는 하원 때문에 고개를 들어 올린 채로 하원의 목덜미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하원이 혀를 내밀어 핥을 때에는 단전에서 미미한 열기가 일어나는 것 같았고, 이를 세워 물 때는 목덜미에서부터 꼬리뼈까지 전기가 찌릿 통하는 기분이었다.

입술을 내려 쇄골 위에 입을 맞추며 하원이 유두를 슬슬 문질렀다.

손끝으로 지그시 눌러 문지르다가 손톱을 세워 꾹 찌르자 아릿하면서도 짜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나오려는 신음을 삼키려다 혀를 깨물 뻔했다.

“네 가슴…… 빨고 싶어.”

하원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홧홧하게 열기가 오르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신음을 흘렸다.

빨아도 돼? 하고 하원이 물어봤다면 분명 하원의 뒤통수를 때렸을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을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하원은 대담하게 내 유두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흐읏…….”

약간 습하고 뜨거운 감각이었다. 혀로 슬쩍 작은 유두를 핥고 입술을 모아 그것을 쪼옥 빨아들인다. 고개를 내려 보지 않아도 하원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몰아쉬며 하원의 머리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찌릿한 감각에 절로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반대편으로 입술을 옮긴 하원은 타액으로 젖은 유두를 손가락으로 잡아 문질렀다. 약간의 물기와 함께 미끈거리며 비벼지는 감촉이 낯설었다.

꿈에서의 느낌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조금 더 현실적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기분. 꿈처럼 멍하기는 한데 맞닿은 피부가 온기를 전해주고 있어 계속해서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시키고 있었다.

모로 누워있던 하원이 완전히 내 위로 올라왔다. 내 머리를 사이에 두고 두 팔을 침대 위로 짚은 하원은 고개를 숙여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림자를 드리운 하원의 얼굴이 묘하게 낯설었다. 처음 보는 것 같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나는 조금 긴장하여 침을 꼴깍 삼켰다.

“……형.”

떨리는 손을 들어 하원의 뺨을 감싸자, 하원이 손바닥에 느리게 뺨을 문질렀다.

보드라운 피부가 느껴지고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지만 이상하게도 조금씩 떨림이 심해졌다. 그것은 두려움과는 또 다른 긴장감이었다.

“완전히 섰어.”

하원은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아랫도리에 가져다 댔다. 내 손이 닿자마자 불끈하고 움직이는 것에 놀라 손을 떼려 했지만 하원의 손이 내 손을 겹쳐 잡고 있어 손을 뺄 수 없었다.

“항상 이렇게 되어버려. 너랑 있거나 네 목소리를 듣거나 네 생각만 해도 이렇게 돼.”

고백을 하듯 조곤조곤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하원을 향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그저 입술을 깨문 상태로 침묵했다.

하원은 내 손을 잡은 상태로 옷 위에서 성기를 문질렀다. 그럴 때마다 하원의 성기가 불끈불끈 성을 내듯 움직였다.

문득 올려다본 하원의 얼굴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눈꺼풀을 내리뜨고 있어 묘하게 아름다우면서도 야하게 보였다.

금욕적이면서도 퇴폐적인 괴리가 더욱 자극적이라 찡, 하고 단전에서부터 아랫도리까지 직격으로 뭔가가 치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원에게 잡힌 손으로 그의 성기를 만져주며 다른 손을 들어 하원의 목덜미를 잡아끌어 내렸다.

입술을 마주하며 입을 맞추자 하원이 몸을 내려 내 성기 위로 자신의 것을 마주해 비벼댔다. 풀려난 손으로 하원의 등을 끌어안았다.

“이런 거…… 꿈으로 꾼 거야?”

“궁금해요?”

“아니, 서운해.”

하원의 내 뺨과 턱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꿈에서 이러는 건 물론 나였겠지만 나는 정작 알 수가 없잖아. 억울해.”

하원은 칭얼거리듯 내 뺨에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성기가 발기해 속옷이 답답하다고 느낄 때쯤 하원이 손을 내려 바지 지퍼를 내렸다.

속옷과 함께 바지가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살짝 엉덩이를 들어 그 움직임을 도왔다.

아, 정말 알몸이다. 꿈에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에 약간의 기시감을 느꼈지만 지금 느끼는 흥분과 초조함과 기대감이 섞인 오묘한 기분은 무척이나 현실적이어서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손을 뻗어 하원이 했던 것처럼 하원의 버클을 풀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바지를 아래로 밀어내자 엉덩이를 타고 넘어간 하원의 바지가 툭 소리를 내며 무릎으로 떨어졌다.

한 장 남은 하원의 브리프 위를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덧그리고 있자 하원이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었다.

“너 이상해.”

“……뭐가요?”

잠시 가빠오는 숨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이상하게 여유로워.”

그럼요, 여유로울 만하죠. 이런 꿈을 매일매일, 일주일 동안 꾸면 형도 어느 정도는 여유를 갖게 될 거예요.

여유로울 만한데도 얼굴은 파들파들 떨리고 심장은 여전히 쿵쿵 울렸다.

여유롭기는 개뿔이 여유롭네. 이렇게 심장이 터질 듯 울리고 있는데.

“심장 뛰는 소리 안 들려요?”

이를 세워 하원의 코끝을 살짝 물었다 놓으며 타박하자 하원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흐응, 하고 신음을 뱉었다.

“내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다른 건 안 들려.”

거짓말, 그러면서 잘도 내 말에 답하고 있잖아. 하원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살짝 때리고 브리프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속옷 아래에 있던 뽀얀 엉덩이가 드러났다. 매끄러운 피부가 손에 닿으며 브리프를 벗기는 손이 살짝 떨렸다.

바지가 걸려 있는 무릎까지 브리프를 내리자 그 안에서 팽팽하게 흥분한 하원의 성기가 퉁 하고 튕겨 오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흥분했네요.”

“응, 엄청 아파.”

눈가를 찌푸리며 하원이 내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어댔다.

다리를 꼬물꼬물 움직여 무릎에 걸쳐 있던 속옷과 바지를 침대 밑으로 벗어 던지고, 내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어 성기를 문질렀다.

“아…….”

타인의 것으로 비벼지고 있다. 꼿꼿하게 선 성기에 하원의 것이 닿아서 문질러지고 있었다.

아직 손으로 만진 것도 아니건만 그 행동 하나만으로 내 성기는 배에 닿을 것처럼 흥분으로 감싸였다.

목덜미를 빨아대는 하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하원의 손이 방치되었던 유두를 잡고 비틀었다. 타액이 말라 건조해진 유두가 비틀리며 아릿한 쾌감이 전해졌다.

“앗…… 형!”

짧은 비명과 함께 하원을 부르자 하원은 혀를 내밀어 목덜미를 핥고 강아지처럼 턱 아래까지 싹싹 핥아댔다. 귓불을 입에 물고 잘근거리던 하원이 귓가에 바짝 입술을 붙이고 물었다.

“용주도 흥분되는 거야?”

흥분이 되질 않았으면 저 아래 서 있는 저것은 대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원이 손을 내려 프리컴으로 끝을 적시고 있는 내 성기를 감싸 쥐었다.

뜨거운 열기가 분출되지 못하고 아랫도리에서 날뛰고 있었다. 그것을 달래듯 하원이 느리게 손을 움직이며 성기를 위아래로 문질렀다.

“용주 너무 예쁘다.”

뺨에 코끝을 비비며 하원이 속삭였다.

“용주 얼굴 발갛게 달아올랐어. 목도 그렇고, 가슴도 예쁜 색이야.”

귓가를 적시는 속삭임에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이상으로 달아오를 수 있을까 싶었는데 한도 끝도 없이 붉어지려 하고 있었다.

얼굴만이 아니라 온몸이 시뻘겋게 물드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부끄러워 하원의 시선에서 도망칠 요량으로 하원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맞닿은 피부로 열기가 전해졌다. 그것이 나에게서 하원에게로 옮겨가는 것인지 하원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오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쿨쩍, 쿨쩍. 프리컴이 흘러 하원의 손을 적시고 성기에 마찰되며 야한 소리가 울렸다. 하원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음에도 부끄러워 귀 끝이 달아올랐다.

온몸으로 돌아다니던 열기가 한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곧 끝이 보일 것 같은 본능적인 예감에 할딱거리며 하원을 불렀다.

어깨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며 파들파들 몸을 떨자, 성기를 쥐고 흔들던 손이 한층 빨라졌다.

“하앗…… 혀, 형…… 읏.”

하체를 움직여 하원의 손에 박자를 맞추듯 성기를 흔들어댔다. 밀려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눈앞이 새하얘지며 발가락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가쁜 숨을 내뱉으며 하원의 이름을 부르던 나는 하원의 목덜미를 물며 마지막 신음을 삼켰다.

눈앞에서 확 빛이 터져 나왔다. 등 뒤로 땀이 흐르며 상체를 세워 하원에게 매달리다시피 했던 몸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갔다. 그런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하원이 나를 침대 위로 눕혔다.

“우리 용주 예쁘다.”

눈꺼풀 위, 콧등, 입술, 뺨에 입을 쪽쪽 맞추며 하원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금은 쉰 것처럼 잠긴 목소리에 나는 하원의 얼굴을 잡아 어리광을 피우듯 뺨을 문질러댔다.

생각해보니 혼자만 풀어낸 듯해 하원의 아랫도리를 바라보자, 그것은 여전히 험악한 기세로 머리를 세우고 있었다.

“형…….”

형 것은 아직 그대로인데요. 하원의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며 말을 하려는 순간 다리 사이로 파고든 하원의 손이 생각지 못한 곳에 닿았다. 순간적으로 몸을 굳히며 놀란 눈으로 하원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용주야. 응?”

무엇이 괜찮다는 것일까. 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원을 조금 멍한 눈으로 바라보자, 하원이 내 뺨에 입술을 내리며 속삭였다.

부드럽게 닿는 입술에 잠시의 긴장은 풀어졌지만 여전히 내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어 말 못 할 곳 근처를 서성이고 있는 하원의 손가락에 신경이 쓰였다.

“형…… 혹시 공부했다는 게…….”

“안 아프게 할게. 응?”

하원은 연신 내 뺨에 입을 맞추며 말하고 있었다. 남자끼리 마지막의 그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터였다.

모든 게이가 플라토닉한 사랑만을 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하원의 손이 닿아있는 곳을 떠올리면 어디를 사용해서 그 행위를 하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다.

“형, 이건 좀…….”

“하고 싶어.”

떼쓰는 아이처럼 하원은 칭얼거렸다.

“너랑…… 용주랑 하고 싶어. 마지막까지 남김없이 다 하고 싶어. 다 가질래. 대신 네가 원하는 거 다 줄게. 응? 용주야, 나한테 줘. 나랑 하자.”

하원이 정리되지 않는 말을 횡설수설했기에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그렇게 말하는 의미는 알 수 있었다.

「들어가고 싶어. 네 안에, 지금 당장.」

동시에 꿈에서 하원이 한 말이 귓가에 울렸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그때는 그냥 흘려보냈던 말이 이 순간에 생각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하원의 팔뚝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전 아직 꿈에서 거기까지 진도 안 나갔단 말이에요.”

불퉁한 목소리로 말하자 하원이 요상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다행이다. 그래도 꿈에 지지는 않았어.”

“그런 거로 투지 불태우지 마요.”

하원의 머리를 끌어 내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을 살짝 이로 깨물자 하원이 예쁘게 웃었다.

“나 해도 돼?”

“물어보지 말아요.”

“그럼?”

“행동으로 하라고 했잖아요.”

대체 몇 번을 말해줘야 하는 거야. 하원을 닮아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삐죽 입술을 내밀며 답하자 하원이 나를 끌어안으며 내 뺨과 입술에 쪽쪽 입을 맞췄다.

묘하게 식었던 분위기가 다시 달아오르고 있었다. 장난처럼 입을 맞추던 것이 깊어지고 다시 열기를 담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까지는 엉덩이 사이를 파고드는 하원의 손이 어색했지만 애써 모른 척 하원의 등을 손바닥으로 느리게 쓰다듬었다.

“역시 좁아.”

손가락 한 마디 집어넣지 못한 하원이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렇게 빨리 포기하는 건가. 조금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연 하원이 그 안에서 둥근 통 하나를 꺼냈다.

“뭐예요?”

“젤.”

“젤?”

“……러브젤.”

약간의 머뭇거림 뒤에 나온 하원의 대답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도 철저히 잘해놔서 예쁘기는 한데, 이미 이럴 생각이었다는 것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정말, 뭐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해놨어. 그럼 그만두라는 말도 못 하잖아.

살짝 머리가 아파져 손으로 눈을 가리며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퐁, 하고 뚜껑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딸기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딸기 향이네요.”

“응, 나 딸기 좋아.”

저도 좋아하긴 하지만요. 그렇지만 그거 분명히 제 거기에 바를 텐데, 거기서 딸기 향이 나는 건 좀…… 슬플 것 같아요.

우울한 마음에 말을 삼켰다. 엉덩이 사이로 미지근한 것이 발리며 딸기 향이 진해졌다. 조금 머리가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치덕치덕 젤이 엉덩이 사이로 발라지고 그 주변을 하원의 손가락이 느리게 배회했다.

약간의 긴장감으로 항문이 벌름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생각보다 더 부끄럽네. 손등으로 눈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자 하원이 내 손을 잡아 내리고 얼굴을 마주했다.

“용주야, 싫어? 그렇게 싫어? 나 하지 말까?”

하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로 그렇게 물어보면 대체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이렇게 준비성 철저하게 러브젤까지 준비한 사람에게 이건 하지 말죠, 라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결국 손을 들어 하원의 등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엄청 부끄러워요.”

“하지만 난 기분 좋아. 이제 용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것이라는 게 너무 기분 좋아.”

하원은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러는 사이 하원의 손가락이 느리게 항문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처음 느끼는 이물감에 구멍을 꽉 오므리자 하원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에 놀라 힘겹게 긴장을 누르며 엉덩이에 힘을 빼자 하원의 손가락이 안쪽까지 들어와 느리게 움직였다.

내벽을 더듬는 것처럼 문질러 누르던 손가락이 느리게 빠져나갔다 들어오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처음 느꼈던 이물감은 많이 사라졌고, 젤의 도움을 받아 손가락의 출입도 어느 정도는 용이해졌다.

하원의 어깨에 매달려 작게 숨을 내쉬는 사이 빠져나갔던 손가락이 부피를 늘려 침입하고 있었다.

“읏…….”

“아파?”

짧은 신음에 하원이 놀라 물었다.

“……아뇨.”

아픈 것은 아니지만 조금 긴장한 탓이었다. 두 개로 늘어난 손가락이 약간은 힘겹게 밑을 파고들었다.

몇 번의 움직임으로 손가락 두 개가 익숙해졌을 무렵 하원은 손가락 하나를 더 늘렸다.

아, 세 개는 정말 무리인데. 아래가 거북하게 늘어난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끙끙거리며 아랫도리에 힘을 빼고 있자 하원이 손가락을 느리게 돌리며 내벽을 자극했다.

차라리 빨리 해버렸으면. 엉덩이 사이에 타인의 손가락을 꽂고 있다는 사실이 심하게 부끄러웠다.

아까부터 미미하게 흐르던 열기와 달아오른 분위기에 그 부끄러움이 누그러졌다고는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밑을 채우고 있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허벅지가 넓게 벌어지며 하원이 하체를 내렸다. 엉덩이 사이로 뜨겁게 흥분한 하원의 성기가 닿았다 떨어졌다.

“용주야.”

안을 파고들기 전, 하원은 희미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약간의 긴장감과 떨림을 지닌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하원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젤과 손가락으로 풀어진 입구에 하원의 성기가 문질러졌다.

뜨겁다. 생각나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데일 듯 뜨거운 것이 내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풀어진 입구로 대가리를 들이밀고 안간힘을 써댄다. 성인 남자 손가락 세 개면 웬만한 굵기인데, 그것으로 충분히 넓혀두었음에도 하원의 성기는 쉽사리 들어오질 못하고 있었다.

“으으…….”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을 참고 있는 나만큼 하원 역시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렸다. 땀으로 젖은 하원의 어깨에 손을 둘러 안으며 나는 최대한 하체에 힘을 빼려고 노력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자 그 틈을 타고 하원이 빠르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

숨이 턱까지 막히는 기분이었다. 흡, 숨을 들이마신 상태로 굳어있자, 하원이 내 뺨을 두드리며 용주야,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용주야, 숨 쉬어. 숨.”

하원의 목소리에 후우, 하고 숨을 내쉬자 그제야 안심한 듯 하원이 내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며 작게 웃음을 토해냈다.

“용주 안에…… 들어왔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맞닿은 하원의 하체가 보였다. 결합 부위가 보이지는 않지만 까끌까끌한 느낌으로 미루어 음모가 닿을 정도로 깊게 교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들어왔다, 내 안에 하원이 들어와 있다.

하원이 묘한 만족감으로 중얼거린 것처럼 나 역시 가슴속이 뿌듯하게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플 정도로 벌어진 항문의 얼얼한 느낌과는 다르게 가슴을 채우는 만족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것이었다.

“느껴져요, 형.”

하원의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내벽에 감싸여 숨을 쉬듯 미약하게 박동하고 있는 하원의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허벅지를 넓게 벌린 상태로 하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안쪽 깊숙이 들어와 있던 하원의 성기가 느릿느릿 나갔다가 밀려 들어왔다.

최대한 자극을 주지 않고 느리게 나갔다 들어오는 것을 반복하는 하원의 움직임에 배 안쪽을 가득 채운 것처럼 압박감을 느끼고 있던 나는 점차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배가…… 가득 찬 기분이에요.”

하원이 가장 안쪽까지 밀려 들어왔을 때 배 아래쪽을 손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하원이 읏, 하고 신음을 내며 등을 굳혔다.

“왜 그래요?”

“으으…… 네 목소리, 네 말, 네 행동…… 너무 야해.”

야하다는 말 좀 그만 해요.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아요. 하원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가빠지는 숨을 몰아쉬었다.

내 허리를 잡은 하원이 조금 빠르게 안쪽을 파고들었다. 흑, 하고 신음이 절로 나왔다. 반사적으로 아래쪽에 힘이 들어가 덩달아 하원까지도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용주야…… 너무 조이면 아파.”

하기야 좁은 구멍을 넓히는 사람이나 좁은 구멍에 집어넣는 사람이나 아프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원의 말에 최대한 아래쪽에 힘을 빼려고 노력하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땀으로 촉촉하게 젖은 하원의 어깨를 더듬으며 꽉 끌어당겨 안자, 품 안 깊숙이 나를 끌어안은 하원이 허리를 움직이는 속도를 높였다.

벌어진 엉덩이 사이가 닫힐 새 없이 커다란 성기가 들락거렸다. 잔뜩 발라둔 젤이 들락거리는 성기와 마찰하며 쿨쩍쿨쩍 소리를 냈다.

“으…… 하으…….”

하원의 성기가 들락거리며 쓸리는 내벽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화상이라도 입지 않을까 겁이 날 정도였다.

한계치까지 부푼 하원의 성기가 안쪽 깊은 곳까지 밀려 들어와 예민한 내벽을 쿡 찍어 올릴 때마다 나는 감전된 것처럼 사지를 바르르 떨어댔다.

“형, 형…….”

마른 입술로 하원을 애타게 부르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빠른 속도로 치고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하원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해 벌어진 다리가 제멋대로 흔들렸다.

“……흐읏 ……용주야, 좋아…… 너무 좋아…….”

연신 내 뺨과 목덜미에 입술을 내려 키스하며 하원이 속삭였다. 희미하게 들리는 하원의 목소리에 나는 하원이 사라질까 두려운 사람처럼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느껴지는 것은 타는 듯한 갈증과 아랫도리의 얼얼한 고통뿐이었는데도 어느새 내 성기는 반쯤 일어서 하원의 배에 문질러지고 있었다.

연신 허리를 흔들며 신음을 내뱉던 하원도 그것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겹쳐진 몸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내 성기를 움켜쥐었다.

“하앗…… 형! ……아, 하으읏…….”

약간의 젤이 묻어있는 하원의 손이 부드럽게 성기를 감쌌다. 미끄러운 감촉에 성기가 하원의 손안에서 유연하게 움직여댔다.

하원이 내 안으로 밀려 들어올 때면 성기를 잡은 손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고, 빠져나갈 때는 부드럽게 성기의 끝을 훑어주었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고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하원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아서 잠시 기절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용주야, 용주야…….”

하원이 귓가에 내 이름을 속삭였다. 내 이름이 미묘한 울림을 남기며 허공으로 사라진다.

마치 서용주라는 글자가 춤을 추듯 허공에 새겨졌다 사라지는 환각을 보는 기분이었다. 흔들리는 하원의 등 너머를 바라보며 나는 살며시 웃었다.

“흐으…… 형…… 좋아요. 형이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욕지기가 치밀 것처럼 거세지는 하원의 움직임에 힘없이 벌어진 다리가 이리저리로 흔들렸다.

허리 아래의 감각은 사라진 것 같은데 하원을 품고 있는 곳은 아직까지도 뜨거운 열기와 그 안을 들쑤시고 있는 흉포한 성기와 그 성기가 내벽을 훑고 나갈 때마다 남기는 예민한 떨림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배꼽 아랫부분이 꽉 조이며 마치 오줌을 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흐읏…… 아, 아앗…….”

아플 정도로 성기를 쥐어짜는 하원의 손길에 높은 비명을 지르며 힘없이 정액을 토해냈다.

전신으로 힘이 들어가며 순간적으로 내벽 깊은 곳까지 치고 들어온 하원의 성기를 조였다.

스스로 인지하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음을 알아차린 것은 하원의 몸이 덩달아 굳으며 낮은 신음을 내보낸 후였다.

“윽…… 으으…….”

차마 내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내 허리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바들바들 떨고 있던 하원은 내벽 깊은 곳에 뜨거운 것을 내뱉고 그 여운을 참기 힘든 듯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안쪽으로 퍼지는 뜨거운 감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 ∞ ∞

“왠지…… 울고 싶어.”

파정한 성기를 여전히 내 안에 파묻은 상태로, 하원은 나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커다란 체구가 위에서 나를 내리누르고 있는데도, 무거움보다는 아늑함을 먼저 느꼈다.

“왜, ……왜 울고 싶은데요?”

말을 내뱉으려는데 목이 꽉 잠겨 기침이 나왔다. 침을 모아 삼켜 마른 목구멍을 적시고, 가까스로 원하던 질문을 뱉어냈다.

“너무 좋아서. 좀 감격스러운 것 같아.”

좋은 건 이해가 되지만, 감격스러울 것까지야. 하원의 감격에 동감하지 못하고, 나는 조금 웃어버렸다. 소리 죽여 웃었지만 몸이 흔들리는 바람에 하원이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너 그렇게 웃으니까 안쪽까지 떨려서 자극적이야. 엄청 야해.”

“형이…… 안 빼고 계속 넣고 있으니까 그렇죠.”

“와, 용주 엄청 야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내 밑에 성기를 넣고 있는 사람이 할 소리가 아닙니다. 나는 핀잔 대신 아래에 꽉 힘을 주었다. 반사작용처럼 내 몸을 끌어안고 있는 하원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하지 마.”

“왜요?”

“다시 설 것 같단 말이야.”

하원의 우는소리에 나는 하체에 힘을 뺐다. 지금 당장은 뭔가를 다시 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슬금슬금 몸을 비틀어 움직였고, 그 움직임에 밑을 채우고 있던 성기가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아파요.”

“아파? 내가 너무 못해서?”

“저도 처음이었는데, 형이 잘했는지 못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상처 난 거 아니야?”

하원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내 다리를 잡아 벌리고 그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엉덩이까지 양쪽으로 잡아 벌리는 행동에 나는 허벅지를 힘주어 붙이며 하원의 머리를 밀어냈다.

“뭐, 뭐 해요, 형?”

“상처 났는지 보려고. 잘못하면 상처 난다고 그랬어. 용주 아프다니까, 상처가 났을지도 모르잖아.”

“아니에요, 상처 안 났어요.”

기어코 내 엉덩이 사이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아래를 파고드는 하원의 머리를 잡아 쭉 끌어당겼다.

결단코 아랫도리를 하원의 시야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남의 엉덩이 사이의 그곳이 그리 보기 좋지는 않을 테니까.

“그걸 용주가 어떻게 알아? 내가 확인해볼 거야.”

“확인 안 해도 알아요. 상처 안 났어요.”

“아프다면서.”

하원이 울상을 지었다. 걱정이 듬뿍 담긴 얼굴이었는데, 그게 또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나는 손을 쭉 뻗어 벌리며, 하원을 껴안았다.

“그런 용도로 쓰일 곳이 아닌데, 용도에 맞지 않게 썼으니까 당연히 아프죠. 형도 콧구멍에 핫도그를 넣는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아프겠어요.”

뭔가 비유가 좀 어긋난 것 같지만, 그래도 이게 하원의 이해를 끌어낼 수 있는 내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던 하원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래? 하고 물었다.

“상처 난 건 아니지만, 벌어져서 조금 얼얼해요. 익숙하지 않아서 더 그렇고요.”

“그럼 다행이지만……. 찢어졌는지만 확인해보면 안 돼?”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하원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안 됩니다. 찢어지지도 않았어요. 그랬다면 이 정도로 얼얼한 것이 아니라 쓰라리겠죠.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 괜찮아요. ……조금 쉬었다가 ……다시 해봐요. 다쳤으면 다시 못 할 정도로 아플 테니까, 금방 알겠죠?”

“응.”

다시 하자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라도 아픈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것에 안도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하원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졌다.

조금 마음이 편해진 얼굴로 하원이 내 옆에 누웠다. 팔을 뻗어 내 머리 아래로 집어넣은 하원이 팔베개를 해주고 나를 향해 몸을 틀었다.

“꿈꾸고 있는 것 같아.”

“왜요?”

“용주랑 이렇게 같이 누워있는 거. 현실 같지가 않아.”

“……나도 그래요. 어, 이거 또 꿈꾸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데, 한 번도 여기까지 진도 나가본 적이 없어서 아마도 현실인 것 같아요. 꿈도 뭔가 내가 아는 수준에서 꾸는 거지, 이런 건 알지도 못해서 꿈은 확실히 아닌 것 같거든요.”

나는 하원과 시선을 마주하며 웃어버렸다. 네 개의 다리가 얽히고, 두 팔이 서로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뜨겁던 몸은 어느새 따스한 온기만 감돌고 있었다.

땀이 흐를 정도로 달아올랐던 공기가 포근해졌고, 격렬했던 감각 대신 두근두근한 설렘이 가득했다.

젖은 숨소리와 진득했던 공기 대신 보송보송한 입맞춤과 안온한 손길이 빈자리를 채웠다.

희미해진 욕정 대신 애정 어린 손길로 서로의 등을 끌어안고 피부를 쓰다듬는다. 조금은 간지럽고, 또 조금은 나른한 분위기였다.

“아, 어쩌지. 용주가 너무 좋아. 보쌈하고 싶다.”

가만히 나를 끌어안고 손으로 어깨를 매만지던 하원이 한탄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 한탄이라는 것이 너무 어이없어서 나는 작게 웃어버렸다.

“뭐예요, 그게.”

“어떻게 용주를 일주일에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거지? 나는 매일매일, 아침저녁으로 보고 싶은데.”

“매일매일, 아침저녁으로 보고 싶지만, 일주일에 한 번밖에 못 보니까 더 좋은 거 아닐까요? 매일 매시간을 보면 금방 질릴 수도 있잖아요.”

나름 위로를 하려고 한 말이었는데, 하원은 조금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파르르, 속눈썹을 애처롭게 떨며 하원이 나를 바라보았다.

“용주는…… 나 자주 보면 질려?”

“아뇨. 안 질려요.”

형 얼굴은 매일, 매시간, 매초 보고 있어도 절대 질릴 수 있는 얼굴이 아니잖아요. 애초에 논외의 대상이라고요.

하지만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인지, 긴 속눈썹이 물기에 젖어 촉촉해졌다. 당한 것은 난데, 어째서 죄책감도 내 몫인 걸까.

이게 다 저 얼굴 때문이다. 불합리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하원의 뺨에 입을 맞추며, 하원을 달래기에 바빴다.

“형은 보면 볼수록 더 좋아져요. 절대 안 질려요.”

“매일 아침저녁으로 보면 질릴 거라며.”

“그건, 형이 나한테 질릴 수도 있다는 말이었죠. 난 딱히 잘생긴 것도 아니고, 예쁜 것도 아니고, 잘난 것도 없잖아요. 그냥 흔한 고등학생인데.”

“아니야. 용주는 엄청 잘생겼고, 예쁘고, 착하고, 요리도 잘하고, 축구도 잘하잖아.”

축구 하는 것을 본 적도 없으면서 잘한대. 내심 내가 하원의 말처럼 그런가 싶다가, 뒤에 가서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내젓게 되었다. 그래도 하원이 나를 좋게 생각해준다는 것에 기분은 좋아졌다.

“이렇게 안고 있으니까, 용주가 진짜 내 장미 같아.”

장미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어린 왕자는 왜 하필 자기 별에 장미와 살아서 나를 이렇게 부끄럽게 만드는 걸까. 좀 투박한 것은 없었을까. 애초에 꽃이라는 점이 문제였던 것일까.

나는 착잡한 표정을 감추며 꽤나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왠지 하원이 앞으로도 장미라는 말을 계속 할 것 같은데, 그때마다 나는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칠 듯한 예감이 들었다.

“형은…… 내 왕자님이고요.”

하원과 왕자님은 찰떡같이 어울린다는 것에 더욱 착잡해졌다. 유일하게 이질적인 것은 나라는 장미인가 보다. 나는 아무래도 장미보다는 바오밥나무가 더 잘 어울릴 듯싶은데. 하지만 현명하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용주가 빨리 어른이 됐으면 좋겠어.”

“왜요?”

지금도 할 것 다 하고 이렇게 방만하고 여유롭게 누워있는 주제에, 왜 갑자기 어른 타령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하원을 올려다보았다.

“어른이 되면 용주도 독립할 수 있잖아. 그럼 그때는 나랑 같이 살아도 되니까.”

진도 좀 뺐다고 벌써 동거를 꿈꾸다니. 김칫국에 숭늉에 꿀물까지 찾는 하원의 성급함에 웃음을 터뜨렸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나쁘지만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말 좋긴 하겠다, 하고 동조하는 마음마저 생겼다.

“만났다가 시간이 늦었다고 헤어질 일도 없고, 매일매일 볼 수도 있고. 촬영 있는 날에도 갔다 오면 용주 자는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 거 아냐. 매일 뽀뽀도 할 수 있고.”

“야한 것도 할 수 있을 거고요?”

“응, 야한 것도.”

내숭 떨지 않고 하원이 정직하게 긍정을 했다. 그런 하원의 턱 끝을 타박하듯 살짝 깨물자, 청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중에 나랑 같이 살아줄 거지?”

“그건…… 나중이 돼봐야 알죠.”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말할 수 있어? 나는 용주 고등학교 졸업하는 날을 매일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생각한 게 아니라,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예요?”

“당연하지.”

당연한 일이 아닌데 하원은 당연하게 말했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이미 하원의 머릿속에는 같이 살 집의 인테리어까지 정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형 하는 거 봐서요.”

형이 그때까지 나를 계속 좋아해주면요. 형이 그때까지 나를 좋다고 한다면, 형이 그때에도 나를 원한다고 한다면 그때 생각해봐요. 혀끝에 맴도는 말을 감추며 나는 완곡한 변명을 댔다.

“나 앞으로도 잘할 건데. 용주 말도 잘 듣고, 용주한테 더 잘해줄 거야.”

“지금보다 더 좋아해줄 거예요?”

“매일매일 더 좋아하고 있어.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거야. 그때는 엄청 좋아하게 되어버려서, 용주가 싫다고 할지도 몰라.”

“나도…… 매일매일 형이 더 좋아지는데요.”

농담처럼 흘린 내 고백에 하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자,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하원이 입술을 내밀었다. 촉, 하고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에 나는 하원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 ∞ ∞

―용주 정말 나쁘다.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이유를 충분히 알고 있기에 나는 진심으로 미안해요, 하고 말했다.

―어떻게, 어떻게 나를 버리고 갈 수 있어?

솔직히 형 집이니까 버리고 간 건 아니죠, 그냥 저만 제집으로 온 것일 뿐.

하지만 하원이 지금 톡톡히 마음이 상해 투정을 부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우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미안해요, 형이 곤하게 자고 있는데 차마 깨울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내가 잠이 들었으면 깨웠어야지. 어떻게 나 자고 있다고 그냥 가버릴 수 있어? 나 버림받았어. 나 막 순결을 바쳤는데 버림받은 기분이야. 눈 떴는데 용주가 없어서 나 정말 버림받은 줄 알았어. 용주가 나 엄청 싫어서 버리고 간 줄 알았다고.

형, 아무리 화가 났어도 말은 바로 하셔야죠. 순결을 바친 건 형이 아니라 저죠. 그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하반신은 마비가 된 것처럼 감각이 없고, 온몸이 후들후들 떨린다고요.

게다가 버리고 갈 거였으면 형 먹으라고 음식은 왜 해뒀겠어요. 이 몸으로 요리하는 게 쉬웠을 줄 알아요?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솔직히 하원의 징징거림을 듣는 것이 나쁘지 않아 역시 이번에도 참기로 했다.

“형, 주방 테이블 위에 있는 거 봤어요?”

―몰라, 나 지금 일어났어.

네, 목소리 들으니까 지금 일어난 것 같더라고요. 예상과 다르지 않은 하원의 대답에 피식 웃었더니 또 자기는 화났는데 웃고 있는 거냐며 하원이 찡얼거렸다.

“주방 식탁 위에 보세요. 형 먹으라고 닭가슴살 양배추 쌈 해놓고 왔어요.”

―나 깨울 시간은 없고, 이거 할 시간은 있고?

“형이 너무 곤하게 자니까 깨우고 싶지가 않은 거죠. 형 자는 모습 너무너무 예뻐서 깨울 수가 없었어요.”

내 말에 하원이 큼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그래도 깨웠어야지. 내가 용주 태워다 줘야 했는데. ……처음 하면 힘없고 아프다고 그래서 내가 태워다 주려고…….

아무튼 공부는 엄청 열심히 해둔 모양이다. 생각이 나서 말인데 대체 이 사람은 무슨 공부를 한 거지? 나중에 조곤조곤 물어보고 공부하는 것 좀 막든지 해야겠다.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렇게 공부해오면 그걸 다 받아줘야 하는 난 부끄러워서 골로 갈 것 같았다.

“좀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집에 와서 샤워하고 누워있어요.”

―누워있을 정도로 아파?

“형, 지금 일반인은 잘 시간이에요. 자정이 넘었다고요.”

부모님이 다 주무시고 계셔서 전화도 밖에 나가서 받아야 했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전화를 받고 있었다. 목소리를 한껏 죽이고 통화를 하고 있음을 모르는 것일까.

“외박하는 건 조금 곤란해서 어쩔 수 없이 먼저 왔어요. 다음에는 꼭 형 깨울게요.”

―다음에…….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하원은 다음에, 하고 중얼거리더니 이내 응. 하고 답했다.

―반신욕 해주면 좋대. 그래서 나 입욕제도 딸기 향으로 사다 놨는데.

그놈의 딸기 향. 나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직까지 엉덩이에서 딸기 향이 나는 기분이다.

내가 방으로 들어갔을 때, 누나가 이상한 표정으로 킁킁 냄새를 맡을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형, 저도 딸기 좋아하긴 하는데요. ……그런 거 무향은 없어요?”

―글쎄, 딸기 향 싫으면 오렌지 향이나 바나나 향은 어때?

문제는 향의 종류가 아님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가족들이 다 잠들어서 더 통화하기가 힘들어요.”

―그냥 우리 집에서 자고 가지.

“아직 외박은 힘들거든요.”

말도 없이 외박했다가는 엄청 혼날 것이 분명했다.

축구부였을 때에는 숙소 생활도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자고 오는 일도 있긴 했지만 축구부 활동을 하면서 그것도 시들해졌지.

어라, ……생각해보니 하원의 집에서 자고 오는 것이 딱히 문제가 될 일은 아니구나 싶었다.

그럼 그냥 오늘 같은 날은 같이 있을걸.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집에 와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다음에 놀러 갔을 때 자고 올게요.”

―다음 주?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고 그냥 다음에요.”

―대충 넘어가려고.

하원이 안 믿어, 하는 말투로 구시렁거렸다.

“식탁 위에 올려둔 거 꼭 드세요. 저 그거 만드느라 엄청 힘들었어요.”

―힘든 요리야?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고요. 그런 상태로 만든 거니까 맛있게 먹어주세요.”

―그러면서 왜 먼저 가!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대화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원과 대화를 하면 이런 식이다. 이게 바로 민하원의 매력이지. 혀를 쯧쯧 차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형…… 좋아해요.”

―……응?

뜬금없는 고백에 하원이 어벙한 목소리를 냈다.

“형이 정말 좋아요.”

―나, 나도 용주가 좋아.

내 말을 인지한 듯 하원이 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말했다.

―용주가 너무너무 좋아. 오늘 너무너무 좋았는데, 원래도 좋았고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거야.

“더 많이 좋아해줄 거예요?”

―앞으로 계속 계속 좋아할 거야.

하원의 대답에 절로 미소가 생겨났다. 슬쩍 올라간 입가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하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용주가…… 내가 싫어졌다고 하고 가버린다고 해도, 아마 계속 좋아할 것 같아.

“왜 그런 생각을 해요.”

―방금 전에 자고 일어났는데 너 없으니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거든. 이번에는 진짜 용주가 나 싫다고 말도 없이 가버렸구나, 하고.

“주방 테이블 위에 편지도 써놓고, 또 집에 도착해서 문자도 보내놨는걸요.”

―그거 보기 전까지는 엄청 슬펐어.

하원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용주 좋아할 거야. 나 혼자서라도 좋아할 거야.

“싫어요. 둘이서 같이 좋아해요.”

―응, 같이 좋아하는 게 더 좋아.

금방 목소리에 생기가 스며들었다. 감정에 따라 거짓말처럼 바뀌는 하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바로 옆에 하원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음식 해둔 거 먹고 좀 더 주무세요.”

―용주도 집에서라도 반신욕 해주고, 그리고 푹 쉬어. 혹시 말이야…….

“네.”

묘하게 말을 끄는 하원을 향해 말해보라는 듯 대답하자 하원이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상처 안 났지? 상처 났으면 약 발라줘야 한다고…….

“형이 공부를 너무 잘해 와서 상처 없어요.”

엄청 부끄럽지만 하원 역시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물어본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부끄러움을 억누르고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답해주었다. 휴우, 하고 휴대폰 너머로 하원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다.

“네, 그러니까 주무세요.”

―응, 용주도 푹 자고 내일 다시 연락할게.

조금은 가벼워진 목소리로 하원이 잘 자, 하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통화가 끊겼다.

더 이상 하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꽁꽁 싸매고 있던 이불을 풀어냈다.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었다.

정말이지 이 밤에 별 쇼를 다 한다. 땀을 닦아내며 뜨겁게 열기를 내뿜고 있는 휴대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자리에 눕자 하반신으로 지잉, 하고 통증이 내달리는 것이 느껴졌다. 찔끔 눈물을 흘리며 새어 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 ∞ ∞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하나 왔다. 가게 카운터 앞에 멍하게 앉아있던 나는 문자를 확인하고 그 안에 들어있는 동영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종 스팸인가. 그냥 삭제를 해버릴까 하다가 플레이되는 동영상 안의 모습이 꽤나 낯익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삭제 버튼을 누르려던 손을 멈추었다.

들려오는 소리는 별것 없었다. 그저 골목길의 부산스러움, 그리고 지나가는 차 소리.

휴대폰으로 찍은 듯 화질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곳이 가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목임을 알아차렸다.

동영상을 찍는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사람이 두엇 지나치는 골목만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오토바이 한 대가 오고 있었다. 배달 다니는 오토바이야 거의 비슷하지만 본능적으로 영덕이 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느 정도 휴대폰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골목 바닥에서 반짝이는 줄 같은 것이 허공으로 올라왔다.

“어…… 어어…….”

동영상을 보던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저러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녹화해둔 동영상에 지나지 않았다.

가까이 접근한 영덕이 형의 오토바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곤두박질을 치듯 몇 바퀴를 구른 오토바이가 저만큼 떨어진 곳에 쓰러져 윙윙 바퀴만 헛돌고 있었다.

그것을 여유롭게 찍고 있던 휴대폰이 아래로 향하며 정확하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있는 손이 보였다.

동영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시간을 보니 방금 촬영하여 보낸 것으로, 촬영 장소라면 여기서 많이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게 앞을 보았지만 아까 배달을 갔던 영덕이 형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좀 늦을지도 몰라요.”

휴대폰을 손에 쥔 상태로 가게를 나서며 아버지를 향해 외쳤다. 뒤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닫히는 문 사이로 그것마저 희미하게 울리다 사라졌다.

가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골목. 최대한 가까운 길로 뛰어가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분명 이쯤이었는데. 초조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골목 중간에 건물 사이의 공터 같은 곳에서 삐죽 나온 오토바이 앞바퀴를 발견했다.

동영상에서는 허공을 헛돌고 있던 그것이 지금은 잠잠하게 움직임을 멈춘 채였다. 희미하게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형!”

내 부름에 때리고 있던 사람들도, 맞고 있던 사람도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저런 것들은 껌이지, 하고 웃었던 영덕이 형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맞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토바이가 넘어지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어떻게 알고 잘 찾아왔네.”

이두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거봐, 까불지 말라고 했잖아.”

영덕이 형의 양팔을 김영서와 구보진이 붙잡고 있고, 그 앞에 선 이두열이 주먹으로 때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영덕이 형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왜…… 이렇게까지 해요?”

“네가 건방지게 구니까.”

나는 진심으로 물었는데 이두열은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영덕이 형의 머리채를 잡아 거칠게 뒤로 잡아당기자 형이 쿨럭, 하고 기침과 함께 핏물을 내뱉었다. 코로 넘어간 피가 입에 고인 모양이었다.

진짜 너무한다. 이제 이건 장난으로도 봐줄 수 없는 거잖아.

넘어진 배달용 오토바이, 한쪽 면이 찌그러진 상태로 나뒹굴고 있는 철가방, 그리고 피떡이 되게 맞고 있는 영덕이 형.

서서히 시선을 옮기던 나는 마지막으로 이두열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참든지 엎어버리든지.”

“뭐?”

중얼거린 것을 듣지 못한 모양인지 이두열이 내게 물었다.

“엎어버릴 거라고!”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철가방을 들어 휘두르며 이두열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정말…… 엄청 얻어맞았다. 저번보다 더 심하게 맞은 것은 아니었지만 저번만큼 얻어맞은 것 같다.

마지막에 정신을 차린 영덕이 형이 뛰어들어 도와준 덕분에 조금 빠르게 상황이 끝난 것 같지만 아무튼 그전까지는 죽을 만큼 맞은 듯싶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다 찌그러져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철가방을 불끈 쥐고 있었다.

“씨발, 짜증나.”

피를 봐버린 듯 이두열이 바닥으로 뱉은 침에 핏물이 섞여 나왔다. 그것을 확인하고 더욱 짜증스러운 표정이 된 이두열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축구부 관둔다고 훈련 참가 안 하는 게 그렇게 건방졌어요? 정말 선배로서 충고해주자 하는 마음으로 이러는 거예요?”

나는 들고 있던 철가방을 이두열의 앞에 집어 던지며 물었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제 앞에 떨어진 것을 그는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큰일 만들 정도로 제가 짜증나요? 큰 사고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 안 해요?”

“닥쳐, 서용주. 까불지 말라고.”

“제가 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모두 짜증나죠? 보기 싫으시면 제가 축구부 나가는 게 더 좋으실 텐데 왜 그러세요? 이렇게 쫓아와서 화풀이하고 일 크게 만들 정도로 스트레스 풀 곳이 없어요?”

나는 이두열을 바라보려다 눈가에 난 상처가 아파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넌 네 주제도 모르고 까불잖아. 실력이 없어요, 미래가 없어요,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면서 축구를 포기하겠다느니 그만두겠다느니! 그게 보는 사람한테는 얼마나 짜증나는 줄 알아? 진짜 실력 없는 새끼들 가슴에 얼마나 대못 박는 소리인지 아냐고!”

“실력 없고 미래가 안 보인다는 건 사실…….”

“닥쳐. 실력 없어도 깡으로 하는 새끼들도 많아. 다들 가능성이 없다고 말해도 그것밖에 할 게 없어서 붙잡고 놓지 못하는 새끼들도 있다고. 그런 것도 아니면서 쭉 축구를 해오던 새끼가 그딴 소리를 지껄여? 넌 정말 실력이 없어서 밤새 울면서 훈련하는 놈들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하는 이두열을 나는 가만히 응시했다. 악에 받친 모습이다. 내가 그러했듯 이두열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아,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건방진 새끼, 이두열이 내게 왜 그렇게 말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

이두열로서는 내가 분명 건방져 보였을 거다. 아무리 양아치에 질이 안 좋은 사람이라고는 해도 축구부다. 축구부로 삼 년을 지냈는데 그가 정말 축구에 대한 열정이 조금이라도 없었을까.

나는 순간적으로 몰려오는 피곤함에 손으로 뺨을 쓸었다. 맞아서 난 상처가 손에 쓸려 아릿했지만 눈앞이 가물거려 마구잡이로 눈가를 비벼댔다.

“이젠 끝이야.”

이두열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고등학교는 끝났어. 지금까지는 내가 잡고 있으면 그대로 잡혀 있었지만 이젠 아니라고. ……그걸 넌 이해 못 하니까 그렇게 속 편한 소리를 하는 거겠지.”

피식, 웃던 이두열은 자신의 앞에 있는 찌그러진 철가방을 발로 차 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간 철가방이 건물 벽에 부딪혀 멈추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두열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조용히 이두열의 말을 듣고 있던 김영서와 구보진이 헐레벌떡 그를 따라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정말이지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이다. 한 대 크게 후려치고 쏜살같이 사라져버린 벼락처럼 이제는 고요함이 감도는 공터 안에서 나는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런 내 등을 영덕이 형이 툭 치고는 저벅저벅 걸어 애처롭게 누워있는 오토바이 곁으로 다가갔다.

오토바이를 세워 시동을 걸어보는 영덕이 형에게 다가갔다. 두어 번의 시도 끝에 시동이 걸렸다.

다행이다. 철가방은 이미 손 쓸 수 없는 사태에 이르렀지만 오토바이까지 그 지경이 된다면 나는 아버지의 손에 사망할지도 모른다.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우그러진 철가방을 주워 오토바이 뒤 박스 안에 얌전히 넣었다.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사죄하는 내 정수리로 영덕이 형의 한숨이 무겁게 쏟아졌다.

“서용주, 너 정말 일 만들고 다닐래?”

“미안해요, 형. 진짜 미안해요. 형까지 얽힐 줄은 몰랐어요.”

두 손을 마주 비비며 백배사죄하자 영덕이 형은 내 정수리를 손으로 잡고 꾸욱 눌렀다.

억 소리 나게 아팠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신음을 참자 영덕이 형이 이내 손을 떼고 서용주,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너 정말 어떻게 할래?”

“죄송해요. 내일 학교 가서 진지하게 저 형들이랑 얘기해볼게요.”

“내가 보기엔 저 새끼들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문제인데?”

“예?”

오토바이에 걸터앉은 영덕이 형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아까 실컷 맞은 덕분에 담뱃갑이 우그러져 있었다.

꺼내는 담배마다 족족 동강 나 있는 것을 발견한 영덕이 형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죄송해요.”

형이 뭐라고 하기 전에 냉큼 사과를 하자 개중에 조금 멀쩡한 것을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후우, 연기를 내뿜던 영덕이 형이 이내 에구구, 하고 신음을 흘렸다.

“이게 뭐야, 이 새끼야. 내, 참. 코피 터진 거 진짜 오랜만이네.”

소매로 코 아래에서부터 턱으로 흐른 피딱지를 문질러 닦아내며 영덕이 형이 욕설을 뇌까렸다.

“저 새끼들은 이제 너한테서 손 뗄 거다.”

“예?”

“이다음에도 또 이런 일이 있다면 그건 정말 스트레스 푸는 거고. 내가 보기엔 이제 너한테 용건 끝난 것 같다고. 아니, 저 새끼들 스스로 자포자기 상태인 것 같으니까.”

영덕이 형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저 새끼들이 분명 문제이긴 문제지. 그런데 저 새끼들 처지에서는 또 네가 문제란 말이야.”

담배를 깊이 빨아들여 딱 세 모금 만에 꽁초만 남긴 영덕이 형은 그것을 허공으로 튕겨냈다.

“건방진 서용주.”

“네?”

“축구 계속하고 싶지?”

“……글쎄요.”

“똑바로 말해, 새끼야.”

말끝을 흐리는 내 머리를 퍽 소리 나게 때린 영덕이 형이 다시 물었다.

“축구는 이제 지긋지긋하냐? 아니면 하고 싶은데 실력도 없는 것 같고 돈도 많이 드는 것 같아서 하지 말까 싶은 거야?”

축구가 지긋지긋할 리가 없다. 다만 영덕이 형이 말한 것처럼 스스로 느끼기에 실력도 없는 것 같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금전적으로 투자를 해봤자 가망이 없어 보이기에 몸을 사리는 것일 뿐.

대답하지 않았지만 뻔히 내 대답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영덕이 형은 내 어깨 위에 툭 손을 올렸다.

“존나 깡패 양아치 같은 저 새끼들도 축구가 좋아서 한다잖아. 저 새끼들은 고3이라서 이제 미래도 없어. 그런데도 하고 싶다잖아. 그거에 비하면 넌 엄청 좋은 상황이야. 앞으로 더 노력할 수 있는 일 년이라는 시간도 있고, 저 새끼들 말 들어보니 넌 실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예체능은 공부 못하는 있는 집 자식들이나 하는 거라면서요.”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해도 실력 있는 놈은 하는 거라고도 말했잖냐.”

“하지만 저는 그 정도로 실력이 있지는 않아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넌 너 자신을 그렇게 잘 파악하고 있냐? 축구에 대해서 그렇게 빠삭해? 그래서 네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거냐?”

뭐지, 묘하게 설득당하는 기분이다. 영덕이 형을 빤히 바라보자 형이 내 뺨을 손으로 툭 건드리며 웃었다.

“꼴리는 대로 해, 인마. 네 부모가 돈이 쪼들리고 네 누나 등록금 때문에 허리가 휘청한다고 해서 너를 내버려 둘 것 같냐? 오히려 너 이렇게 돈 때문에 포기한다고 하면 네 부모 가슴에 평생 못 박는 거다. 하고 싶은 거 못 하면 그것도 평생 가슴에 한이 되거든. 자식이 하고 싶은 거 못 해서 가슴에 평생 한으로 묻어두는데 어느 부모가 돈 없어서 안 시키길 잘했다고 하겠냐.”

영덕이 형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자 형이 내 어깨를 도닥거렸다.

“저번에 너한테 말했던 건…… 그건 그냥 내 경우였을 뿐이야. 사실 그렇게 뛰쳐나왔지만 나 후회한다. 아직까지도 태권도장 앞에 지나거나 도복 입은 애들 지나가는 거 보면 막 가슴이 먹먹해. 충분히 생각해봐. 지금 축구 그만두고 다른 것을 한다고 쳐. 그래서 네가 정말 후회가 없을지.”

그렇게 말한 영덕이 형은 허리를 쭉 펴다 으아아아아, 괴성을 질렀다.

“어디 뼈 부러진 것은 아니겠지?”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농담이야 인마. 고딩한테 맞았다고 병원 가기도 쪽팔린다.”

“죄송해요.”

“것보다 철가방 어쩔 거야? 오토바이는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 같은데 당장 철가방이 문제잖아. 사장님한테 뭐라고 해야 해?”

인상을 찌푸리며 걱정스럽게 한숨을 쉬는 영덕이 형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깡패한테 걸려서 맞고 있는 걸 구해주셨다고 하세요. 제가 방패용으로 용감하게 철가방을 휘둘러서 이렇게 되었다고…….”

“사장님이 참도 믿으시겠다.”

내 머리에 꽁, 하고 주먹을 내린 형이 잠시 시동을 꺼두었던 시티에 재시동을 걸었다.

“아무튼 난 가게 간다. 배달 갔다가 이렇게 늦게까지 안 오면 농땡이 피운다고 혼내셔. 넌 집으로 가든지 해. 너까지 그런 꼴로 나타나면 정말 나 잘릴지도 모르니까.”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속으로 엄청 걱정하고 있을 거다.

오토바이도 지금은 시동이 잘 걸리지만 무슨 문제가 있을지 모르고, 눈에 당장 보이는 철가방도 문제이고, 배달 갔다 오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것도, 그리고 피떡이 된 얼굴도 모두 문제일 테지.

영덕이 형이 피해 보지 않도록 저녁에 아버지한테 사실대로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덜컹거리며 약간은 불안한 모습으로 사라지는 오토바이의 뒤꽁무니를 쳐다보다 공터 한쪽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젠 끝이야.」

이두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실력 없어도 깡으로 하는 새끼들도 많아. 다들 가능성이 없다고 말해도 그것밖에 할 게 없어서 붙잡고 놓지 못하는 새끼들도 있다고. 넌 정말 실력이 없어서 밤새 울면서 훈련하는 놈들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지.」

왜 모르겠는가. 나 역시 만족스럽지 못한 내 모습에 항상 공을 차고, 또 찼었다.

가능성이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왜 나는 저렇게 되지 못하는가 생각했었지, 다른 누군가가 나를 보며 그렇게 생각하리라고는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걸 넌 이해 못 하니까 그렇게 속 편한 소리를 하는 거겠지.」

속 편한 소리는 아니야.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내가 얼마나 고민하고 또 고민했었는데. 그렇지만 결국 이두열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는 것일까.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올린 상태로 가만히 앉아있던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분히 생각해봐. 지금 축구 그만두고 다른 것을 한다고 쳐. 그래서 네가 정말 후회가 없을지.」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축구를 그만둔다는 생각에 지금도 이렇게 가슴이 먹먹한데.

일 년 뒤 같이 공을 차던 녀석들이 그쪽으로 진로를 정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과연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 년 뒤, 삼 년 뒤, 오 년 뒤, 십 년 뒤. 시간이 얼마가 지나든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당당히 말할 수가 없다. 나는 언제나 후회하고 지금의 이때를 뒤돌아볼 것이다.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풀린 기분이다.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던 실타래가 모조리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단단하게 얽혀 있던 것들이 느슨하게 풀어져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 ∞ ∞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도통 진정이 되지 않는 가슴을 붙잡으며 대체 내가 왜 이렇게 흥분을 하고 있는지를 떠올려봤지만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왈칵 눈물을 쏟을 것처럼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땡,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하원의 집 문 옆에 달린 초인종을 눌렀다.

없으면 어쩌지. 약간의 걱정도 생겼지만 없다면 기다리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안에서는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다 하원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형.”

―응, 용주야. 앗, 잠깐만.

잠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용주야, 하고 아직 통화 연결이 되어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하원이 내 이름을 불렀다.

“형, 저 여기 형 집 앞이에요.”

―뭐?

“형이 너무 보고 싶어서 저 뛰어왔어요.”

―…….

하원은 조금 당황한 모양인지 말이 없었다. 당황할 만도 하다. 이런 빠돌이 같은 짓이라니.

감정에 치우쳐 한 행동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어서 작게 웃었다.

“미안해요. 그냥 갑자기 형 생각이 너무 났어요. 집에 없는 것 같은데 저 그만 갈게요.”

―아냐, 아냐. 가지 마. 용주야…… 내 말 듣고 있어?

“네, 아직 안 끊었어요.”

―너 지금 우리 집 문 앞?

“네.”

―다행이다. 나 지금 주차장이야.

윤석진이 옆에 있었던 모양인지 하원이 작게 소리를 죽여 윤석진에게 뭐라고 하는 것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같이 올라오지 말고 집으로 가라는 것 같았는데,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윤석진이 돌아가는 듯 발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갈게,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네.”

다행이다. 적어도 촬영을 하고 있다거나 멀리 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이 사람과는 타이밍이 참 좋구나, 하고 생각하며 승강기 옆에 부착된 숫자판을 보았다.

숫자가 점점 커지다가 이내 하원이 살고 있는 층에 도달하며 땡 소리가 울렸다. 열리는 문으로 하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

“용주야! 너 얼굴…….”

이런 얼굴로 나타나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당장 하원이 보고 싶었다. 놀라 내게로 다가오는 하원을 와락 끌어안으며 나는 하원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형.”

“용주야, 무슨 일 있어?”

내 부름에 하원이 내 등을 쓸어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해줘요.”

“…….”

하원은 내가 평소와 약간 다르다는 것을 느꼈는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내 말을 기다렸다.

“내 생각과 내 고민들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었다고…… 저번처럼 말해줘요.”

“절대 무가치하지 않아.”

“남들이 다 아니라고 말해도, 다들 틀렸다고 말해도…… 그것이 내게 있어서 오답은 아닌 거죠?”

내 물음에 하원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답이라는 것은 없어. 네 최선의 선택이 곧 최고의 선택이 될 거야.”

“나요…… 답을 찾았는데 이게 가장 마지막의, 가장 올바른 답이라고 어떻게 확신해요?”

내 물음에 하원은 내 등을 토닥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내 장미니까. 내 장미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똑똑하거든. 지금도 쭉쭉 자라는 중이라서 다 자라면 분명 가장 크고 아름다울 거야.”

하원은 살짝 어깨를 떼어내 나를 보며 손끝으로 툭 내 뺨을 장난스럽게 건드리며 장담했다. 하원의 말에 나는 소리죽여 웃었다.

이 길로 가, 하고 내게 답을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렇게 안아주며 괜찮다, 말해주는 것이 듣고 싶었다.

이 포근하면서도 단단한 품이 그리웠다. 하원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으며 나는 하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가장 근사하게 피어줄게요. 지금 형이 했던 말 그대로 나 이렇게 크고 아름답게 피어났다고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안 돼, 너무 예쁘게 펴서 누가 뽑아 가면 어떻게 해?”

하원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 심히 걱정된다는 얼굴로 말하는 하원이 귀여워 나는 하원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며 소곤거렸다.

“그럼 유리관을 씌워주세요.”

“그것도 안 돼. 내 장미는 햇빛도 봐야 하고 바람도 쐬어야 하고 이슬도 먹어야 하고 그리고 항상 내 사랑도 듬뿍 받아야 하거든. 유리관에만 담아두기에는 너무 아까워.”

“그럼 옆에서 지켜주세요.”

하원의 길고 예쁜 손에 내 손을 마주해 잡으며 나는 하원을 향해 웃었다.

“내 옆에서 지켜봐 준다면 나는 형 옆에서 예쁘게 피어날게요.”

“내 장미지?”

“네, 형의 장미예요.”

입술을 살짝 마주한 상태로 웃고 있는 하원의 얼굴이 예뻤다.

순간적으로 장미보다 어린 왕자가 더 예뻐서야 장미 체면이 안 서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렴 어때. 본판이 예쁜 것을 바꿀 수는 없지.

이러다 장미가 어린 왕자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린 왕자의 장미_Fin

외전 소행성 B-61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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