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7)

8

자고 일어나서 감기가 시원하게 떨어져 나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놈의 감기는 떨어질 생각을 안 하고 더 심해져 버렸다.

하루 만에 더욱 악화되어버린 감기 때문에 작은 방에 처박혀 이불을 깔고 누워 끙끙거렸다.

누나도 집에 없고, 아버지는 가게에, 어머니는 일이 있어 잠깐 나갔다 오시겠다며 나가신 뒤로 연락이 없었다. 조용한 집에 홀로 누워있다 죽은 것처럼 잠이 들었다.

열이 오른 상태로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비몽사몽 중에 귓가로 익숙한 벨 소리가 울렸다. 눈을 뜨자 입고 있던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여보세…… 콜록, 콜록.”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기침을 내뱉자 저쪽에서 용주야? 하고 부르는 하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감기 엄청 심해졌나 보네.

“아, 네. 좀…….”

좀 심해지기는 했죠. 땀으로 젖은 옷이 피부에 달라붙어 좋지 못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정신을 차릴 요량으로 잘게 고개를 흔들어보았지만 오히려 머리가 어지러워 구토가 일어날 것 같은 역효과를 가져왔다.

“형, 잠시만…… 십 분 있다가 다시 전화…….”

할게요, 라는 말을 채 내뱉지 못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을 던지듯 내려놓고 욕실로 달려가 변기통에 머리를 처박고 속을 게워냈지만 빈속이라 나오는 것이 없어 시큼한 위액만 뱉어냈다.

몇 번 더 토악질을 하고 일어나자 현기증이 밀려오며 시야가 핑 돌았다. 어디가 천장이고 어디가 바닥인지 구분이 되질 않아 허공에서 손을 휘적거리다가 가까스로 벽을 짚고 몸을 기댔다.

골로 갈 뻔했네. 식겁하여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잠시 숨을 고르자 새하얗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열기가 가시지 않아 눈앞이 가물거렸지만 죽을 고비를 넘겨서인지 정신이 번쩍 들어 아까보다는 괜찮은 듯했다.

하원에게는 십 분 후에 전화한다고 했지만 땀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느낌이 싫어 옷을 벗고 뜨거운 물을 틀어 샤워를 했다.

온몸의 땀구멍으로 땀을 흘린 모양인지 몸이 미끄덩거렸다. 비누칠까지 해 깨끗하게 몸을 씻어내고 수건으로 물기를 훔쳐냈다.

땀에 젖은 옷을 빨래통에 넣고,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들어오지 않아 알몸으로 욕실을 나오자 찬 기운에 소름이 돋았다.

자꾸 이러니까 감기가 안 낫지. 아무튼 이유 없이 감기에 걸리고 더 심해지고 하는 게 아니라니까.

스스로에게 혀를 차며 방으로 뛰어 들어가 옷을 꺼내 입었다.

목이 말라 주방으로 가서 물을 마시다가 이내 하원에게 연락해야 함을 기억해내고는 급히 휴대폰을 찾았다.

욕실에 들어간 사이 하원이 두 번이나 더 전화를 했었나 보다. 십 분 있다가 전화한다니까 그걸 못 참고 전화를 했네.

십 분이 훌쩍 지난 시간이긴 했지만. 왠지 하원이 안달이 나 전화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작게 웃었다.

―여보세요?

신호가 가기 무섭게 하원이 전화를 받았다.

―용주야, 무슨 일이야?

“아, 자다 일어났는데 속이 좀 안 좋아서요.”

―토한 거야?

“뭐, 좀…….”

―좀, 이 아니야.

하원은 말 안 듣는 어린아이를 혼내는 것처럼 엄한 목소리로 나를 질책했다.

―병원 갔다 왔어?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잤어요.”

―병원 가라니까 말도 안 듣고.

하원이 쯧쯧 혀를 차며 말했지만 그것이 무섭다기보다는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 지금 웃었지?

“아니에요.”

아무튼 귀도 밝아요. 절대 웃지 않았다며 부정하자, 하원이 다 들었다고 또 거짓말을 한다고 타박했다.

―지금 너희 집 앞이야, 빨리 나와.

“지금요?”

―그래. 지금. 옷 입은 그대로, 찬바람 들어가지 않게 따뜻한 잠바 하나 걸치고 나와.

“형, 저 감기 정말 심해서 형 못 만나요. 형 감기 옮는단 말이에요.”

―누가 너 보고 싶어서 왔대? 나도 감기 걸린 용주 미워서 싫어.

내 말에 하원이 뾰족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화를 냈다.

―병원 갈 거니까 빨리 나와.

“병원 문 닫았을 시간인데요.”

―나오라면 나와, 빨리.

계속해서 말을 돌리는 내게 하원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들고 멍하게 서 있던 나는 하원이 집 앞에 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해내고는 옷장 문을 열었다.

씻지도 않고 땀내 풀풀 나는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은근히 하원도 막무가내란 말이야.

두꺼운 점퍼를 걸치고 열쇠와 핸드폰을 챙긴 나는 집을 나섰다. 하원은 전화로 말한 것처럼 대문 앞에 차를 바짝 세운 상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고 있는 걸 어머니나 누나가 봤다면 어떤 비매너인 사람이 남의 집 앞에 차를 세워두냐며 화를 냈을 거다.

“형, 이렇게 문 바로 앞에 차를 세워두면 어떻게 해요?”

조수석에 올라타며 하원을 향해 물었다.

“너 나오면 바로 타라고. 찬바람 쐬면 안 좋단 말이야.”

나를 생각한 행동은 눈물 나게 감동적이나 역시나 어머니나 누나를 만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머니나 누나도 나처럼 연예인에 관심이 없어서 하원을 보고도 어맛, 연예인이네! 하기보다 주차 좀 똑바로 해라, 라고 큰소리쳤을 가능성이 크니까 말이다.

“형, 그런데 정말 병원 문 다 닫았을 시간이에요.”

대꾸할 힘도 없어서 조수석 시트에 몸을 기대며 나직하니 말했지만 하원은 별 대꾸 없이 차를 몰았다.

손을 뻗어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하원의 행동에 약간은 발랄한 컬러링을 들으며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여보세요.

“나야.”

조금 낮은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윤석진은 아닌 모양인데 어디로 전화를 건 것이지?

힐끔 하원을 쳐다보았으나, 하원은 여전히 정면을 주시한 상태로 운전하고 있었다.

―인마, 너 대체 뭐야?

“지금 가.”

―너 대체 생각이 있는 놈이야, 없는 놈이야? 새벽부터 전화해서 병원에 갈 테니까 문을 열어두라느니 어쩌라느니 헛소리를 하지 않나.

“그게 왜 새벽이야? 아침이지.”

―밤낮 개념 없는 너는 시간 개념도 없는 모양이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때를 새벽이라고 한단다. 너 때문에 와이프도 깨서 한바탕 난리 났었다고. 당장 병원에 올 것처럼 말해서, 무슨 일 생긴 거 아닌가 오해하고 만들고…… 아무튼 넌 좀 혼나야 해.

“미안해!”

아무래도 지금 가는 병원의 의사인 모양인가 본데, 꽤나 화가 난 듯 남자는 하원을 향해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하원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미안하다 말했지만 진실로 미안해하기보다 남자의 큰소리가 짜증나 무마시키려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새벽에 그 난리를 쳐놓고 반나절 넘게 잠수 타더니, 정작 한 시간 전에 병원으로 오겠다고 전화해서 문 열어놓고 기다리라고 하고. 그래놓고 이제 전화해서 뭐? 지금 가? 너 혼날래?

“미안해. 촬영이 늦게 끝나서 어쩔 수가 없었어.”

―됐어, 듣기 싫다.

“형, 일단 위급환자 가니까 좀 봐줘. 삼십 분 안에 도착할 거야. 운전 중이니까 도착해서 말하자. 끊을게.”

―너!

남자가 뭐라고 외칠 새도 없이 하원은 급하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내가 그렇게 위독한 환자도 아니고, 아무래도 남자가 화내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이유가 큰 듯 보였다.

“새벽에 전화해서 잠 깨웠다는 건 뭐예요?”

“아, 그때 촬영 끝나서 집에 가는 길이었거든. 아무래도 쉽게 감기가 안 떨어질 것 같더라고. 그래서 너 데리고 병원 갈 생각으로 미리 전화해둔 거였어. 오늘 병원 들를 거라고.”

그런 건 보통 병원 가기 전에, 집에서 출발할 때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새벽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고 있을 텐데, 그 시간에 생각이 났다고 전화를 하기에는 상당히 무리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무튼 엄청 시끄러워. 나이도 있는데 아직까지 팔팔하다니까.”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나랑 띠동갑이야.”

“그럼 아직 젊으신걸요.”

“너 지금 내 말에 토 다는 거야? 지금 누구 때문에 병원 가고 있는데.”

하원은 나를 힐긋 노려보며 타박했다. 그에 깨갱 꼬리를 내리고 입을 다물자 하원이 쯧쯧, 혀를 찼다.

“너야말로 혼나야 해. 토할 정도로 아프면서 어떻게 병원을 안 가? 너 왠지 안 갈 것 같아서 미리 전화해두긴 했지만 정말 화난다.”

“미안해요.”

“그래, 용주는 좀 미안해야 해.”

화난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운전은 부드럽다. 흔들림 없는 자동차 CF를 찍어도 될 정도로 능숙하게 운전을 한 하원이 번화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교차로에 들어선 병원 건물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내려.”

모처럼 박력 있는 모습에 나는 꾹 입을 다물고 하원이 시키는 대로 차에서 내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삼 층에 있는 내과로 들어서자 험악한 얼굴로 화가 났음을 여실히 드러낸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민하원, 너 정말 이럴래?”

“미안, 형. 일단 용주 좀 봐줘.”

“그쪽이 환자?”

하원이 내 팔을 끌어당겨 남자의 앞에 세웠다. 그때까지 하원을 향해 화를 내고 있던 남자는 단번에 얼굴색을 바꾸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안녕하세…… 콜록, 콜록.”

내내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을 꺼내서 그런지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한번 기침이 시작되면 좀처럼 멈추지 않아서 한참 동안 기침을 해야 했는데 그 모습을 본 가족들은 기침하다 피 토할 것 같다며 나를 슬금슬금 피하기도 했다.

연신 기침을 쏟아내는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던 남자는 나를 이끌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감기 걸렸나 봐요?”

“네. 한 삼사일 된 것 같……큭.”

또다시 기침이 시작되려고 해 나는 손으로 입을 꾹 막고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디 보자, 체온 좀 재볼게요. 어휴, 뜨거워라. 체온 재보지 않아도 열 엄청 심한 거 알겠네.”

남자는 내 귀에 체온계를 넣었다가 삑 소리가 난 다음 꺼내 체온을 확인했다.

“와, 열 높네. 병원은 다녀왔어요?”

“안 갔대. 안 가고 막 집에서 토하고 그랬대.”

“민하원, 시끄럽다.”

진료실까지 따라와 옆에 서 있던 하원이 남자의 물음에 냉큼 대답하며 파르르 화를 냈다.

그런 하원을 보며 남자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입을 꾹 다물었지만 여전히 불만에 찬 표정이었다.

“기침은 심한 것 같고, 기침이 심하니까 목도 안 좋을 거고. 콧물 나와요?”

남자의 물음에 고개를 내젓자 남자가 오케이,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열도 심하고, 감기 아주 톡톡히 걸렸네. 환절기 감기가 좀 독하기는 하지만 몸도 튼튼해 보이는데 왜 감기 걸리고 그래요?”

“쟤 막 찬물에 샤워하고 그랬대. 아무리 겨울 아니라고 해도 그렇지, 왜 찬물에 샤워를 해?”

“한마디만 더 말하면 쫓아낸다.”

남자의 말에 하원이 합,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뭔가 말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표정이라 웃음이 나왔다.

“어디 목 좀 볼까요? 아, 해봐요.”

남자의 요구에 아, 소리를 내며 입을 벌리자 남자는 목구멍 안쪽을 살펴보고는 됐어요, 하고 말했다.

“기침을 하도 해서 목 안쪽이 다 헐었어요. 밥 먹기도 힘들죠?”

“네.”

“껄끄러워서 삼키기가 힘들 거예요. 입맛도 없으니까 밥도 안 먹게 되고. 그렇죠?”

“네.”

내 생활을 보지도 않고 내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남자는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물었다. 그런데 또 틀린 말이 아니라서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밥을 굶으면 안 되니까 죽을 먹어요.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도록. 여건이 안 되면 밥을 끓여서 먹는 것도 괜찮고.”

“네.”

“엄청 응급환자라고 해서 놀랐더니.”

남자는 하원을 흘겨보며 말했다.

“응급환자야. 얘 막 토하고 그랬다니까. 지금도 봐. 땀 뻘뻘 흘리고 그러잖아.”

“네 수다에 귀가 아파서 그러는 걸 수도 있어.”

“아냐. 절대 아냐.”

“네가 어떻게 알아? 환자도 아니면서. 원래 남 흉은 알아도 자기 흉은 모르는 법이거든.”

“아냐, 용주는 나 시끄럽다고 말한 적 한 번도 없어.”

하원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스물셋이나 처먹은 놈이 아직도 저렇게 삐약삐약 울어댄다니까. 하원이 엄청 시끄럽죠?”

내게로 고개를 돌리며 묻는 남자의 행동에 나는 조금 난처한 얼굴을 했다.

“거봐, 아니라잖아.”

“언제 아니래?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데 너 때문에 대답 못 하고 있고만.”

남자의 말에 하원은 아니야, 라고 답하며 의자에 앉아있는 내 목을 끌어안았다.

“용주야, 아니지? 나 안 시끄럽지?”

그럼요. 형이 뭐가 시끄러워요. 말하는 것도 예쁘고, 목소리도 예쁘고, 예뻐 죽겠는데.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허, 참. 하고 어이없다는 듯 소리를 냈다.

“응급환자는 아닌데 정말 응급환자 될 뻔했어요. 여기서 조금 더 심해지면 병으로 옮겨가요. 기관지염 후두염 폐렴 더 있는데 말해줄까요?”

“아뇨.”

“형은 왜 애를 겁주고 그래?”

“시끄럽다고.”

남자는 하원의 물음에 귀를 후비적거리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링거 하나 놔줘. 밥도 못 먹는다잖아.”

“너 참 뻔뻔하다.”

남자는 하원을 바라보며 기가 막힌다는 것처럼 웃음을 토해냈다.

그래요, 그건 좀 그렇네.

지금 시간이 벌써 여덟 시가 넘었는데. 이 시간에 병원 나오시게 한 것도 죄송한데 두어 시간은 있어야 하는 링거를 놔달라고 어떻게 요구할 수가 있는지.

“형, 저 괜찮아요.”

“아냐, 온 김에 맞고 가. 어차피 저 사람 오늘 술 마시러 가려고 폼 잡고 있는 거야. 저것 봐, 멋 부리고 머리 세우고 온 거.”

“민하원!”

“약속 있으면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 물음에 남자가 멋쩍은 듯 웃었다.

“얼굴이 안 좋아 보이기는 한데, 포도당 하나 맞고 갈래요? 나도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맞고 가요. 나는 그동안 저 녀석이랑 얘기 좀 하고.”

“아니에요. 시간이 늦었는데 진료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남자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뭐 해줬다고 고맙대?”

하원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고개 숙인 나를 잡아당겼다. 빠르게 몸을 세운 탓인지 시야가 빙글 돌았다.

“아.”

손을 허우적거리다 옆에 있는 하원을 붙잡고 중심을 잡자 하원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포도당 맞아야겠네.”

남자는 혀를 쯧쯧 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아니에요. 지금 좀 어지러워서.”

“그게 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거라니까. 저기 침대 보이죠? 걸친 거 벗고 올라가서 누워요.”

그렇게 말한 남자가 빠르게 진료실을 나갔다.

“형, 우리 그냥 가요.”

“왜, 수액 놔준다고 하잖아. 맞고 가. 괜찮아.”

“형 진짜 이럴래요?”

자꾸만 억지를 부리는 하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얼굴을 굳히고 묻자, 달라진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하원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문 닫은 병원 오시게 해서 진료받은 것도 충분히 죄송한 일이라고요. 그리고 감기 같은 거로 안 죽어요. 집에 가서 밥 먹고 쉬고 약 먹고 하면 금방 나아요. 월요일 되면 병원도 다시 가고, 약국 가서 약도 지어 먹을 거예요.”

급하게 말을 한 탓인지 또다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멈추지 않고 토할 정도로 이어지는 기침에 나중에는 숨이 컥컥 막힐 정도였다.

가만히 내 얘기를 듣다가 기침 때문에 말을 멈춘 내 등을 쓸어주던 하원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 생각해주는 거 고마운데……, 그런데 의사 샘한테는 엄청 실례라고요. 형은 잘 아는 분인지 몰라도 저는 초면에 이런 신세 지는 거 엄청 부담스럽고 죄송해요. 고마운 마음보다 부담스럽고 죄송해서 더 불편해요.”

“그렇게 미안할 필요는 없는데.”

다시 진료실로 들어오던 남자가 내 말을 들은 모양인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 어차피 약속 시간까지는 프리고, 또 억지를 부리는 건 이 녀석이니까 괜찮아요. 이 녀석이 이상한 짓 하는 건 한두 번도 아니고.”

남자는 가지고 온 수액을 침대 옆 수액 걸이에 걸어놓고 하원의 뒤통수를 쳐 물러나게 했다.

“옷 벗고 누워요.”

“정말 괜찮은데요.”

“근데 얼굴은 진짜 안 괜찮아 보이거든요. 의사가 말하면 환자는 말을 들어야지.”

침대를 가리키며 끝까지 누우라고 하는 남자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입고 있던 점퍼를 벗은 상태로 침대 위로 올라갔다.

손에 들고 있던 점퍼를 가져간 하원은 의사 선생님 책상 뒤에 자리한 옷걸이에 떡하니 걸어두고 쪼르르 다가왔다.

“엄청 좋은 거로 가져왔으니까 끝까지 다 맞고 가요.”

“하지만 약속 있으시다고.”

“응, 난 이거 놔주고 갈 거예요. 수액은 하원이도 뺄 수 있으니까. 너 여기 끝까지 있다가 같이 나갈 거지?”

“응.”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갈 때 불 다 끄고, 문도 잘 잠그고 나가. 열쇠 놓고 갈게.”

“알았어.”

얼른 놓고 얼른 나가라는 것처럼 하원이 손을 내저었다.

“조금 따끔할 거예요.”

오우, 이건 조금 따끔한 게 아닌데요. 아릿한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을 본 하원이 다가와 아파? 하고 묻다가 남자의 손에 머리를 얻어맞았다.

남자는 내 팔에 익숙하게 수액을 놔주고 수액 떨어지는 속도를 알맞게 조절한 뒤에 주머니를 뒤적거려 열쇠를 꺼냈다.

“여기 봐, 민하원. 여기 책상 위에 두고 갈 거야. 나중에 또 없다고 전화하지 말고 잘 봐둬.”

“알았다니까.”

“문 잠그고 바로 네 집 가지 말고 우리 집 들러서 네 형수한테 열쇠 줘야 한다.”

“알았다고요.”

비슷한 말을 계속하는 것이 짜증나는 모양인지 하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가만히 누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뭐랄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묘하게 가까워 보이는 사이인데, 대체 뭘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자 남자가 씨익 웃으며 내게 말했다.

“이 녀석 아플 때도 수액 놔주고 오면 알아서 잘 빼더라고. 잘못 빼면 피 조금 날 뿐이지 죽지는 않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 말을 들으니까 엄청 걱정이 되었다. 내 생각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남자가 하하, 크게 웃었다.

“밑에 내려가서 약 가지고 올 테니까 기다려.”

“약국 열쇠도 받아 왔어?”

“그래, 인마.”

남자는 하원을 타박하듯 말했지만 그렇다고 짜증을 내거나 귀찮아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남자가 다시 진료실을 나가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누워서 수액을 맞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던 하원이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디선가 병원 이불을 찾아와 덮어주었다.

“형 오면 히터도 틀어주고 가라고 해야겠다. 병원에 누워있으면 약간 춥더라고.”

하원은 의자를 끌고 와 침대 곁에 놓고 그 위에 주저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의사 선생님한테 죄송하네요.”

“죄송할 게 뭐 있어. 죄송해도 내가 죄송해야 할 일이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마.”

그게 뭐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피식 웃음을 흘리자 하원이 땀으로 젖은 이마를 손으로 쓸어주었다.

“용주 아프니까 마음이 너무 아프다.”

“미안해요. 형 촬영하고 와서 피곤할 텐데.”

“아냐, 촬영 때문에 피곤한 것보다 너 막 기침하고 토했다는 얘기 들어서 더 놀랐어.”

하원은 내 뺨을 손으로 감싸며 쯧쯧, 혀를 찼다.

“얼굴이 아주 반쪽이다.”

“반쪽까지는 아니에요.”

“아냐, 반쪽이야. 예쁜 용주 어디 가고 못생긴 용주만 남았어.”

자면서 한바탕 땀 빼고 일어났더니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았는데. 일어나서 토하고 어지러웠던 걸 생각하면 그냥 기분 탓이었나 보다.

그래도 수액도 맞고 하루 이틀 더 쉬면 감기도 떨어질 듯싶었다.

“형이 걱정해줘서 금방 나을 것 같아요.”

“예쁜 소리 해도 미워할 거야.”

“아픈 사람 구박하면 더 서러운 법이에요.”

“구박 아니야. 걱정이야.”

“걱정을 미워해가면서 해요?”

“지금은 걱정만 하고 감기 나으면 미워할 거야.”

하원의 말에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실실 웃으면서 곤란하네요, 하고 말했다.

“그럼 감기 나아도 형 못 만나겠어요.”

“왜?”

“저 미워서 만나주기나 하겠어요?”

“미워도 만나면 되지.”

“미운데 뭐하러 만나요?”

“그럼 안 미워하면 되고.”

뭐 이렇게 마음이 금방 바뀌어? 아무튼 민하원도 웃기다니까.

하원과 의미 없는 말장난을 하고 있으려니 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작게 하품을 하자 하원이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졸려? 하고 물었다.

“그냥 몸이 조금 나른해요.”

“수액은 두어 시간 정도 맞아야 해. 좀 자둬.”

“형 심심하잖아요.”

“아냐, 나 괜찮으니까 좀 자.”

“피곤한 사람은 형인데 어떻게 형 두고 자요?”

“용주 잠들면 나도 대기실 소파에서 좀 잘게. 그럼 되지?”

하원은 목소리를 낮춰 조곤조곤 속삭였다. 귓가에서 울리는 하원의 목소리에 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쁜 일정 때문에 피곤한 하원을 두고 잠이 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한 생각도 잠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 ∞ ∞

이상하게 잠이 깨질 않는다. 비몽사몽 중에 빈 수액을 빼고 나를 일으켜 앉히는 하원이 보였다. 덮고 있던 이불을 잘 개어두고 걸어놓았던 점퍼를 가져와 내 팔에 꿰어 입혔다.

“용주야, 많이 졸려?”

“아뇨, ……이상하게 ……잠이 깨질 않아서요.”

수액에 수면제라도 들어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공기 중에 수면제를 뿌려두기라도 했나.

가물가물 눈이 떠지질 않아서 힘이 들었다. 온몸이 노곤하게 늘어져 걸음을 옮기는 다리도 흐물거렸다.

하원에게 기대 건물을 나와 차에 올라타서도 안전벨트를 매야 한다는 자각도 없이 어딘가 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용주가 많이 아프긴 한가보다.”

하원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팔을 뻗어 안전벨트를 매어주고 조용히 차를 몰았다.

심심하기도 할 텐데 하원은 내게 어떤 말도 걸지 않았고, 음악을 틀거나 라디오를 켜지도 않았다.

고요한 정적과 함께 집에 도착한 차가 이번에도 대문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용주야, 집에 도착했어.”

“벌써요?”

“땀 많이 흘리네. 아직도 아파?”

“아뇨, 그냥 좀 졸려요.”

“아파서 그래.”

안전벨트를 풀어준 하원이 내 뺨을 쓰다듬으며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약이야. 먹기 싫어도 꼭 식사 챙겨 먹고 약도 챙겨 먹어. 알았지?”

“네, 고맙습니다.”

힘없이 손을 내밀자 하원이 내 점퍼 주머니에 약봉지를 넣어주고 대신 내 손을 잡았다.

“용주 이렇게 힘없는 거 처음 봐.”

“그러게요. 좀 부끄럽네요.”

“아픈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누구나 다 아플 수 있어. 그러니까 아프면 숨기지 말고 꼭 말해야 하는 거야.”

“미안해요. 형도 피곤할 텐데.”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하원의 뺨을 쓸었다. 그런 내 손을 붙잡은 하원이 손등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미안하면 빨리 나아. 다음 주에도 감기 때문에 못 만날 것 같아요, 하면 정말 화낼 거야.”

“다음 주에는 감기 나아서 꼭 만나요. 이번 주에 못 한 뽀뽀도 실컷 해요.”

“아프면서 농담할 기운은 있어?”

하원은 내 뺨을 살짝 잡았다 놓으며 핀잔했다.

“저 먼저 들어갈게요. 형도 빨리 집에 가서 쉬세요.”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고 꼭 식사 챙기고 약도 먹고 그리고 푹 자.”

뭐 그렇게 당부할 것이 많은지. 방금도 말한 내용을 다시 한번 당부하며 하원이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달칵,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 대문을 열자, 하원이 손을 흔들고 차를 몰아 사라졌다.

하원의 차 뒤꽁무니를 멍하게 서서 바라보다 부는 바람이 싸늘해 대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섰다.

“서용주, 어디 갔다 와.”

“누나, 제발…….”

오늘만큼은 참아줘.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허리에 팔을 올리고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은 분명 내게 뭔가를 말하려고, 아니 내게 뭔가를 쏟아부으려고 하는 것이겠지.

평소라면 그냥 대충 흘려듣겠는데 지금은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제발? 나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뭐가 제발이야?”

“나중에 얘기해.”

신발을 벗고 집으로 들어선 나는 누나를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누나는 이미 전투 준비를 끝낸 모양인지 나를 휙 돌려세웠다.

“너 똑바로 말해.”

“누나, 나중에. 응? 제발 나중에.”

지금은 누나가 나를 슬쩍 밀치기만 해도 신파 드라마 속 가련한 주인공처럼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것 같다니까.

제발 다음에 하자는 뜻을 담아 누나를 바라보았지만 씨도 먹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 아까 누구야?”

“아까 누구?”

대체 뭘 말하는 것일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뜻을 담아 바라보자 누나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콧방귀를 뀌는 것일까.

“네가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말한다면 그래, 그것까지는 이해하겠어. 내가 아무리 연애질하고 다닐 때가 아니라고 말해도 어차피 듣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웬 차야? 너 여자 친구 사귀는 게 아니라 직장인 만나고 다니냐? 너 무슨 원조 교제해?”

그제야 누나가 말하는 사람이 하원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아까 집 앞에 하원이 차를 세워두었을 때 그것을 타고 가는 나를 본 모양인데, 어떻게 생각하면 저런 결론을 낼 수 있는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누나가 요즘 무슨 막장 드라마나 막장 소설을 보고 있는 것일까.

“쓸모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가. 나 힘들어.”

“힘들어? 뭐 하고 왔는데 힘들어? 너 여태 그 여자랑 같이 있다 왔지? 뭐 하다 왔어. 네가 지금 무슨 짓하고 돌아다니는 줄 알아? 정신이 있기나 해?”

누나는 빽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가늘고 높은 목소리에 골이 울리는 기분이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빤히 누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누나, 미쳤어? 제정신 아닌 거 아냐?”

“이게 진짜.”

“어이가 없어서 말 섞고 싶지도 않은데, 누나 상상력이 너무 대단해서 말해줄게. 일단 그 사람은 남자고, 나는 직장인을 만나고 다니지도 않을뿐더러 원조 교제 같은 것도 하지 않고. 그리고 내가 지금 감기가 너무 심해서 힘이 들어. 지금까지 뭐 하다 왔냐면 그 형이 내가 감기가 너무 심하니까 자기가 아는 의사 선생님한테 데려가 줘서 진료받고 수액 맞다 온 거야. 내가 오늘 뭘 하고 돌아다녔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고, 정신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수액 맞고 집에 오면서도 반쯤 졸았거든.”

그리고 그 사람은 여자 친구가 아니라 내 애인이야, 라는 말은 기침과 함께 묻어두었다.

큰소리를 내지 않고 조곤조곤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지만 길게 말을 해서인지 또다시 기침이 쏟아졌다.

콜록거리며 하원이 주머니에 넣어주었던 약봉지를 꺼내고 점퍼를 벗었다.

“정말 병원 다녀온 거야?”

“이불 펴줄 거면 펴주고, 아니면 좀 나가. 맨바닥에 기절할 것 같으니까.”

누나는 내 말에 움찔하더니 이내 장롱 문을 열고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아주었다.

베개도 꺼내주고 덮고 잘 이불까지 꺼내주는 것을 보니 조금은 자신의 어이없는 생각을 반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의사는 뭐래?”

“좀 심하긴 하지만 감기지, 뭐래. 잘 먹고 잘 쉬면 낫는 거고 심해지면 병 되는 거고.”

“넌 왜 칠칠치 못하게 감기를 걸리고 다녀?”

“이미 걸려버렸는데 그런 말 하면 좀 속이 시원하냐?”

나는 떠지지 않는 눈을 들어 누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괜히 손으로 내 이마의 열을 재는 시늉을 했다.

“이마 뜨거운 것 좀 봐. 이렇게 되기 전에 병원부터 갔어야지.”

그래요, 이렇게 될 때까지 버틴 내가 죄인입니다. 감기 한번 걸렸다고 주변 사람들이 죄다 혼을 낸다.

어제오늘 본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나를 혼내지 않은 사람은 의사 선생님뿐이었다. 그분은 상냥한 목소리로 심해지면 병이 된다고 겁을 주긴 했지만.

“얼른 누워.”

이불 안으로 들어가라며 손을 내저은 누나가 방을 나갔다. 편한 옷으로 겨우겨우 갈아입고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가 눕자, 누나가 젖은 수건을 들고 들어왔다.

“뭐야, 그건.”

“열 오르잖아.”

“안 어울리게, 괜히 간호해주는 척한다.”

“말도 참 예쁘게 하네, 우리 동생. 누나가 모처럼 간호해준다는데. 내가 어? 의대 입학한 사람이야.”

“응, 일 학년.”

“눈 감고 잠이나 자라.”

누나는 이를 앙다물며 불명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아픈 나를 두고 이상한 오해를 한 것이 부끄럽고 미안해서 저러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누나.”

“왜?”

차가운 수건을 잘 접어 이마 위에 올려주고, 다른 수건으로 뺨과 목덜미를 닦아주는 누나를 불렀다.

“누나 요즘 이상한 거 봐? 원조 교제는 어디서 나오는 거야?”

“입 다물어라.”

“살다 살다 고등학교 이 학년인 남동생한테 그런 격한 걱정을 해주는 누나는 우리 누나밖에…….”

누나가 수건으로 내 입술 위를 눌렀다. 축축한 물기가 입술을 적시는데, 그게 왠지 시원하지 않고 찝찝하게 느껴졌다. 조금 짠 맛도 나는 것 같고.

“너 요즘 휴대폰으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시시덕거리며 연락하잖아. 안 하던 짓을 하니까 여친 생겼는 줄 알았지. 근데 또 주말이랍시고 이상한 차를 타고 가니까, 내가 이상한 오해를 안 하게 생겼니.”

“……그래도 보통 그런 오해는 잘 안 할 텐데.”

“병원 가서 수액 맞고 왔다더니 살 만한가 보다.”

이마 위의 미지근해진 수건을 반대로 접어주며 누나가 핀잔을 했다. 할 말이 없으니까 저런다.

“약 먹고 자야 하는 거 아니야?”

“약 먹으려면 밥도 먹어야 하잖아. 귀찮아. 그냥 잘래.”

해야 할 것은 많았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몸도 씻어야 하고, 약을 먹기 위해서 밥도 먹어야 하고. 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일 힘도 없었다.

수액 맞았으니 그냥 자도 괜찮겠지.

이렇게 심해질 때까지 그냥 둔 내 잘못이 크긴 하지만, 이렇게 될 때까지 가족 중 아무도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다는 것에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하원은 문 닫은 병원까지 쫓아가 문 열라고 시켜서 진료도 받게 해줬는데. 이래서 애인이 최고라고 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좋은 애인도 없고 누나는 참 불쌍하네. 누나가 나한테 엉뚱한 오해를 했어도 불쌍하게 여기고 좋은 애인을 둔 내가 참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이 늘어지며 마치 방바닥 아래로 끌려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하원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점퍼 주머니 안에 넣어두고 그대로 점퍼를 벗었는지, 휴대폰을 꺼낸 기억이 없었다.

걱정할 텐데, 문자라도 한 통 보내놔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까무룩 잠이 든 것 같다.

∞ ∞ ∞

“용주야, 일어나. 일어나서 이것 좀 먹자.”

잠이 든 것인지 기절을 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 창밖이 어두웠을 때 자리에 누운 기억이 있는데 어머니의 목소리에 눈을 뜨자 세상이 밝아져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에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감기가 정말 심한가 보네. 병원 다녀왔어?”

우리 어머니, 참 빨리도 물어보신다. 가만히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일으켜 앉힌 어머니는 내 다리 위에 작은 쟁반을 올려주었다.

“웬 죽이에요?”

그래도 아프다고 죽을 만들어준 것인가, 라고 생각을 하기엔 죽이 너무 본격적이었다. 만들어서 파는 죽 전문점의 오라가 풍기고 있었다.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어머니를 쳐다보며 모른 척 물었다.

“집에서 끓인 거예요?”

“아니, 아까 죽집 청년이 배달해주고 가더라. 시킨 사람 없다고 했는데 네 이름을 대잖아.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대체 누가 배달시킨 건지 모르겠네. 네 누나가 나가면서 배달시킨 건가?”

누나가 참도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썼겠어요? 어머니는 누나를 모르셔도 너무 모르시네요.

하지만 누나에 관해서라면 한없이 너그러워지고, 또 누나를 가장 착하고 성실하고 마음씨 좋고 예쁜 딸로 보고 있는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해봤자 씨도 안 먹힐 듯해 나는 조용히 침묵했다.

“배달 청년이 엄청 예쁘게 생겼더라. 너랑 엇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사글사글하게 웃으니까 티브이 나오는 애들같이 엄청 예쁘더라고.”

어머니는 내 손에 숟가락을 쥐여주며 죽 배달 청년에 관해 말했다.

사내 녀석이 어찌나 곱게 생겼는지 한참 쳐다보았다는 둥, 그렇게 얼굴이 예쁘면서 몸은 또 얼마나 좋은지 너처럼 운동을 하는 모양이라는 둥, 한참 동안 배달 청년에 관해 말하던 어머니는 거실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뭔가 그냥 듣고 넘기기에는 꺼림칙했다. 나와 엇비슷한 나이에 얼굴은 엄청 예쁜데 몸은 운동한 사람처럼 좋은 죽 배달 청년이 내 이름을 콕 찍어 말하며 죽을 배달해주고 갔다는 것인가.

어쩌면 정말 죽 배달 청년일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설명을 듣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직접 물어보는 것뿐이지.

죽이 든 쟁반을 옆으로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점퍼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는 오지 않았는데, 정오쯤에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용주야, 일어났어?]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하원의 걱정과 배려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이게 정오에 보낸 문자라면 지금은 몇 시라는 거지? 시계를 보니 세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제 열한 시쯤 잠든 것 같은데 열여섯 시간을 잤단 말인가. 한숨을 내쉬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평소에는 신호가 울리기 무섭게 전화를 받던 사람이 오늘은 쉽사리 전화를 받지 않는다.

촬영이라도 하는 것일까. 한 번만 더 전화해보고 안 받으면 나중에 다시 해야겠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전화를 걸었는데 그 생각이 전해지기라도 했는지 하원이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용주야?

“형, 미안해요. 저 지금 일어났어요.”

―아냐, 괜찮아. 어제 집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잔 거야?

“네. 형은 촬영 중이에요?”

―응, 씬 하나 끝내고 잠깐 쉬는 거야. 석진이가 전화 온 것 같다고 알려줘서 겨우 받았네.

휴우, 하고 하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전화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다음 촬영할 거 준비도 해야 하고 또 쉬어야 할 텐데.”

―아냐, 전화 끊지 마.

하원은 내가 전화를 끊기라도 할까 봐 아니라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럼 형,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뭐?

“어머니께서 아까 엄청 예쁘고 잘생긴 죽집 청년이 배달 왔다 갔다고 하셨는데요. 형 혹시 죽집에서 배달 알바하는 건 아니죠?”

내 물음에 하원이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이어 윤석진이 그런 하원의 입을 막았는지 읍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씨. 윤석진 더러워!

―조용히 좀 해라. 아주 쪽팔려 죽겠다.

―내가 뭘!

―조용히 안 하면 입에 테이프 붙여둔다.

―아무튼 짜증나, 윤석진.

그렇게 구시렁거리다 또 한 대를 맞은 모양인지 하원이 휴대폰을 붙들고 칭얼거렸다.

“그러게 왜 자꾸 매니저님을 자극해요.”

―윤석진이 은근히 변태라서 저런 거 엄청 좋아해…… 악!

거봐요, 옆에서 듣고 있는 거 뻔히 알면서 그런 말 하니까 맞는 거예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입가에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너 밥 또 안 먹을까 봐 아까 촬영장 오기 전에 조금 일찍 나와서 죽을 샀거든. 문자 했는데 연락 없어서 자고 있구나 생각했어. 그렇다고 그냥 가져올 수도 없고, 집 앞에 두고 올 수도 없고. 그런데 너희 어머니도 나 몰라보시더라.

네, 우리 가족 중에 형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한 말은 웃음으로 대신했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아냐, 난 용주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죽은 먹었어?

“이제 먹으려고요. 아무래도 형이 보낸 것 같아서 전화해본 거예요.”

―그렇구나. 내일 또 학교 가야 하잖아. 오늘은 죽 먹고 약 먹고 푹 자고 그래. 그러면 감기도 떨어질 거야.

하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형.”

―응?

내 부름에 바로 돌아오는 대답을 들으며 나는 다시 형, 하고 불렀다.

―왜 그래? 무슨 할 말 있어?

“고마워요.”

―뭐야, 왜 그런 말을 해.

“그냥…… 고마워서요.”

―용주 좀 이상하다.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닌지 하원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져 있었다. 많이 아픈 거야? 하고 슬쩍 묻는 하원의 목소리에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 형 보고 싶다.”

―뭐?

“형이 너무 좋아서요. 너무 보고 싶어요.”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색색 들리는 하원의 숨소리로 봐서는 전화가 끊기지는 않은 듯한데 어떠한 말도 없이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마치 말을 잘못한 것 같기도 하고.

형? 하고 조심스럽게 하원을 불러보았다.

―나 곤란하게 하고 용주 진짜 나빠.

“왜요? 혹시…… 옆에서 매니저님이 들은 거예요?”

―아냐, 그런 거.

“그럼요?”

의아한 마음에 물었지만 하원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터벅터벅 거친 발소리가 들렸다.

“형, 지금 어디 가고 있어요?”

―화장실.

거의 뛰고 있는 듯 빨라지는 발소리를 들으니 어지간히 급한 모양인데, 그럼 급하다고 진작 말을 하지.

화장실 다녀와서 전화를 해도 될 텐데 그걸 참고 있었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그럼 조금 있다가 전화 다시 할게요.”

―아냐, 끊지 마.

하원은 약간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탕,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찰칵, 하고 잠그는 소리까지 세밀하게 들려왔다.

하아, 밭은 숨을 몰아쉬며 하원이 용주야, 하고 나를 불렀다.

“네, 형.”

아무리 좋아도 우리 화장실에서는 잠시 통화를 멈추는 것이 어떨까요. 그래도 형은 나름 공인이니까 형의 프라이버시를 위해서라도 그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바지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용주야.

“네에.”

그럼 빨리 볼일을 보든지 내 이름은 왜 자꾸 부른단 말인가.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긴 했지만 꽤나 난감한 상황이었다.

―아까 했던 말 다시 해줘.

하원의 호흡이 살짝 흐트러진 것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요?”

―나 보고 싶다고 했던 말.

그제야 하원이 무엇을 말한 것인지 알아차린 나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보고 싶다고 말하라니까.

“그건 엎드려 절 받기죠.”

―왜? 아까 네가 했던 말이잖아.

“아까 말했다고 해도 지금 다시 말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하원이 화장실에 있다는 사실도 망각하고 나는 하원과 아옹다옹하며 입씨름을 했다.

“……좋아해요, 형.”

내 말에 하원이 으으, 신음을 흘렸다. 묘하게 열기가 담긴 목소리와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순간적으로 등줄기를 타고 전해진 찌릿한 감각에 어깨를 움츠리며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하원에게 물었다.

“형,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볼일 보러 화장실 간 거 아니에요?”

―계속…… 계속 말해줘.

맙소사. 작게 한숨을 내쉬며 붉어지려는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형, 정말 이러기에요?”

―네가 좋아, 용주야.

물기 젖은 목소리를 들으며 그래요, 내가 졌습니다. 하고 손을 들었다.

“내 생각한 거예요?”

작은 목소리로 은근하게 물었지만 하원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색색 거친 숨소리가 들렸는데 내가 말을 할 때마다 그 숨소리가 한층 거세지는 것으로 보아 하원이 내 말을 듣고 있음은 확인할 수 있었다.

“형, 야한 생각 했어요?”

―아니…… 으으.

“그럼 왜…… 그렇게 된 거예요?”

차마 왜 섰어요? 라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워 은근슬쩍 돌려 묻자 하원은 네가, 하고 운을 떼더니 다시 신음을 흘려댔다.

―용주가…… 엄청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 흐으, 나 보고 싶다고…… 좋아한다고…….

대충 의미는 알겠는데 말하는 중간중간 섞인 신음이 내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해, 울상을 지으며 하원이 형, 하고 부르자 그에 맞춰 흐읏, 하고 신음이 들려왔다.

“촬영장 화장실에서 야한 짓하고…… 나빠요, 형.”

―하지만 네가…… 엄청 야한 목소리로 좋아한다고 말하니까…… 저절로…….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하원이 할딱거렸다. 꽤 시간이 지난 듯한데 아직까지도 저렇게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할딱거리고 있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다음 주에 만나면 얼굴 보고 말해줄게요. 형 좋아한다고 바로 앞에서 말해줄게요. 그리고 이번에 감기 때문에 못 했던 뽀뽀도 많이 해요. 형 말처럼 뽀뽀로 시작해서 더 좋은 것도 해요.”

내 말에 하원의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귓가에 입술을 대고 숨을 내쉬는 것처럼 하원의 숨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크게 울리고 있었다.

―흐으, 용주야…….

“저요, 누구랑 키스하고 그러는 거 형이 처음이지만…… 엄청 좋아요. 형이랑 키스하면 부끄럽지만 저도 기분 좋아서 흥분되는 것 같아요.”

밭은 숨을 내쉬며 할딱거리는 하원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 그리고 묘하고 들썩거리는 움직임이 내는 소리까지 전해져 묘하게 나마저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저 요즘…… 꿈에서 형이 나와요. 꿈에서 자꾸 형이랑 야한 거 해요. 저 아무래도 엄청 야한 기질이 있나 봐요.”

내 말에 흐읏, 하고 짧지만 강한 신음을 터뜨린 하원이 이내 하아, 길게 숨을 내뱉었다.

―후우, ……미치겠다.

잠시 부스럭거리던 하원이 한숨을 내뱉었다.

“끝냈어요?”

―너 말하지 마. 다시 또 문제 생길 것 같아.

하원의 말에 손으로 입술을 누르며 꾹 입을 닫았다.

―나 왜 이러지, 병 걸렸나 봐.

자위한다고 병에 걸렸다는 극단적인 생각은 그만둘래요? 촬영장 화장실에서 참지 못하고 해버린 것은 조금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병은 아니죠.

하지만 하원이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했기에 나는 생각만 할 뿐 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너 감기 걸리고 아파서 목쉰 것일 텐데, 그게 묘하게 야하고 자극적이야.

“대체 뭐가 야하고 뭐가 자극적이라는 거예요?”

―말하지 마!

하원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그런 목소리로 보고 싶어요, 좋아해요 하고 말하니까 내가 이런 거잖아. 용주 나빠. 막 일부러 나 골리려고 그런 거지? 다음에 만나면 뽀뽀 많이 하자느니, 더 좋은 것도 하자느니.

“정말이에요. 뽀뽀도 하고 더 좋은 것도 해요.”

내 말에 하원은 나른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그것도 정말이야?

“뭐요?”

―꿈에서…… 나랑 야한 거 한다는 것.

“…….”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하원이 용주야, 하고 내 이름을 부르며 대답을 재촉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 우리 꿈에 나와서 야한 거 뭐 해? 응? 나 궁금해. 나 꿈에서 용주랑 뭐 해?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진 것 같아요. 다시 누울래요.”

―대답해주기 싫으니까 아프다고 핑계 대고.

“형이 자꾸 부끄럽게 하니까 그렇죠.”

―난 이미 부끄러운 짓 해버렸는데, 뭐!

그걸 알면 할 때 하더라도 전화는 끊고 하지 그랬어요. 하지만 하원의 말처럼 이미 해버린 것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제 그만 촬영장으로 돌아가세요. 화장실에 오래 있으면 유명 연예인 민하원 변비 뭐 이런 기사 뜰지도 몰라요.”

―너 계속 말 돌릴래?

“전 정말 순수하게 죽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전화한 거란 말이에요. 왜 자꾸 대화가 이상한 쪽으로 빠지는지 모르겠네요.”

―그럼 하나만 말해줘.

금방이라도 내가 전화를 끊을 것 같자 하원이 다급하게 나를 부르며 말했다.

―꿈에서…… 너도 좋았어?

“무, 무슨 질문이 그래요?”

기껏 물어본다는 것이 저거란 말인가. 나는 당황하여 어색한 목소리로 하원을 향해 물었다.

―나는 말이야 엄청 좋아했을 것 같아. 그런데 용주도 좋아했을지는 잘 모르겠어. 용주도 좋아했어?

“끊을게요.”

―어, 어? 대답해주고 끊어야지!

하원은 약간의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이 대체 오늘따라 왜 이러나. 아픈 나를 두고 피를 말리려고 작정을 한 것일까. 정말이지 힘들게 하네.

그러면서도 전화를 끊지 못하고 계속해서 하원과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은 나 역시 이런 상황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싫지는 않기 때문이겠지.

이제까지 몰랐는데 나도 은근히 내숭이 많은가보다.

“그럼 제가 좋지도 않은 꿈을 뭐하러 계속 꾸겠어요?”

―그거…… 용주도 좋았다는 거야?

“몰라요. 전화 끊을 거예요.”

―용주도 좋았구나. ……다행이다.

겨우 꿈에서의 일을 가지고 그렇게 만족스러운 것처럼 웃지 말아요. 맹하게 웃는 하원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형.”

―응?

“죽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응, 죽 먹고 약도 꼭 먹어.

“네.”

이렇게 훈훈한 대화가 하원의 자위 바로 뒤에 이어지고 있다는 현실에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니 어떻게 생각하면 대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원이 대단하든, 내가 대단하든. 중간이야 어찌 되었든 마지막은 훈훈한 인사와 함께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고소한 냄새에 눈을 떴다. 자기 전에 죽을 먹고 약도 함께 먹었더니 정말 죽은 것처럼 잔 모양이었다.

창밖을 보자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자면서 소화를 시킨 모양인지, 조금 오래 잤다고 배 속이 꼬르륵 울렸다. 배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고소한 냄새는 부엌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하이톤의 목소리는 누나의 것, 그리고 조금 무뚝뚝하지만 누나가 하는 이야기에 응, 응, 맞장구를 쳐주며 듣고 있는 이는 어머니였다.

“누가 보냈다고는 말 안 하고?”

“응, 계속 물어보는데 자기는 배달만 하는 거라서 모른다고 하더라고. 용주 이름을 대는데 아니라고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대체 누군데 죽까지 보냈지? 아무튼 이 녀석 요즘 이상한 짓 하고 다니는 건 아닌지 엄마가 좀 봐. 내가 보기엔 영 이상하다니까.”

“그래?”

“응. 애가 완전히 정신줄 놓은 표정이잖아.”

그건 아파서 정신줄을 놓은 거고. 누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먹을 만하네. 그런데 난 전복죽 별로더라. 비싸고 좋은 거라고 하니까 그나마 먹는 거지, 그거 아니면 별로인 것 같아. 약간 비린 것도 같고. 다른 것도 있어?”

“전복죽이랑 소고기죽, 야채죽 종류별로 넣어서 보냈더라고. 호박죽도 있더라.”

“호박죽? 나 호박죽 먹고 싶어. 그거 꺼내줘.”

“잠깐만.”

이미 죽 한 그릇을 떠먹고 있었던 모양인지 누나는 빈 숟가락을 빨며 어머니를 재촉했다.

“데워줄까?”

“아니, 그냥 차갑게 먹을래.”

냉장고에서 죽집 쇼핑백을 꺼내 그 안을 뒤적거려 호박죽을 꺼낸 어머니가 새 그릇에 호박죽을 덜어 담아 누나에게 건네주다 부엌 바로 밖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어났네? 방금 전까지 죽은 듯이 자고 있더니만.”

식탁에 앉아있던 누나가 어머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는 말했다.

“누구야, 이거 죽 보낸 사람? 종류별로 다 보냈다고 하더라. 요즘 이런 죽 전문점도 비싸잖아. 누가 너한테 이런 걸 보내?”

호박죽을 떠먹으며 누나가 샐쭉한 얼굴로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뭔가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니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바라보는 누나의 시선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한 모양이다. 사랑과 전쟁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저건 마치 그때의 시청자 눈빛과 비슷했다.

분명해, 남편이 바람피우고 있어! 뭔가 낌새만 이상하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눈.

“누나…… 진짜 너무한다.”

“뭐가?”

왜 그러냐는 듯 나를 보고 있는 누나를 보며 정말 몰라서 저렇게 묻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기 전에 그 죽 나한테 온 거잖아.”

“뭐? 지금 너한테 온 거 내가 좀 먹고 있다고 그러는 거야?”

“용주야, 누나가 요즘 소화도 잘 안 되고 속이 불편하다고 해서 엄마가 죽이라도 먹으라고 준 거야. 너 먹을 것도 남겨뒀어. 엄청 많이 보냈더라고.”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누나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재를 하려는 듯 나를 향해 말했지만, 누나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탁 소리 나게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는 내게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말해봐. 지금 내가 이딴 죽 좀 먹었다고 네가 나한테 그러는 거야?”

“죽 먹은 거 가지고 그러는 거 아니야. 죽이야 많다고 하니까, 게다가 나 자고 있었으니까 그냥 먹을 수도 있어.”

“그런데 뭐!”

“누나는 누나의 말투나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

“뭐라고?”

“적어도 누가 이런 것을 보냈을까. 내 동생 아픈데 신경 써줘서 참 고맙네. 맛있게 잘 먹어야겠다, 이런 말을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어떻게 정신줄 놓고 이상한 짓 하고 다니는 것 같다는 쪽으로 말이 나와? 맛없어도 사서 보낸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고맙다 말하지는 못할망정 죽 다 먹어놓고 비리니까 싫고 다른 것 꺼내보라는 말이 나와? 본인 스스로도 좀 웃기다는 생각 안 들어?”

“하, 나 참. 엄마, 얘 말하는 거 들었어? 거봐, 내가 얘 이상하다고 했잖아. 얘 이러는 거 정상 아니야. 완전히 애가 이상해졌다니까.”

“정상 아닌 건 누나 아냐? 누나 완전 이상해. 누나한테는 다른 사람이 다 부족하고 병신처럼 보이지? 누나만 잘났고 누나만 완벽하다고 생각하잖아. 머리 잘났고, 똑똑하고, 의대에도 들어갔으니까. 그런데 그런 지성인이라면, 말하는 것 좀 조심해. 그 뛰어난 머리를 입이 다 깎아 먹잖아. 어쩜 이렇게 사람 후벼 파는 말만 골라가면서 해? 아니면 똑똑해서 일부러 그런 말만 골라가면서 하는 거야? 성격이 꼬여서?”

“이게 진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누나가 내 머리를 손으로 강하게 때렸다. 주먹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때린 것이지만 퍽 소리가 울릴 정도였다. 그만큼 짜증이 났다는 것이겠지.

형도 아니고 누나인데 생각해보니 가끔 이렇게 과격하게 맞았던 것 같다. 어릴 때는 누나보다 어리고 약했으니까, 커서는 힘이 세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동생의 위치에 있고 또 남자니까.

“사춘기라고 유세 떠냐? 어디 건방지게 그따위 소리를 지껄여? 너 하던 축구 관두고 무슨 생각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빠 엄마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고 아무 생각 없이 있는 줄 알아? 정신 차려, 서용주.”

아아, 정말 싫다. 나 자신도 싫고, 열여덟 살이라는 것도 싫고, 사춘기라는 타이틀도 싫다.

마이너스 효과만 잔뜩 붙어있는 열여덟 살의 사춘기 따위 대체 누가 만든 것일까.

무슨 말만 하면 사춘기라 예민하다느니, 무슨 행동을 하면 사춘기라 반항하는 거라느니.

내 어깨를 밀치고 부엌을 나간 누나는 방으로 들어가 쾅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누나가 쏟아낸 독설과 고함을 그대로 받고 있던 나는 누나가 들어간 방을 쳐다보다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누나한테 왜 그래?”

어머니는 나를 책망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누나는 저보고 사춘기라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는데요. 저는 누나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럼 둘 중 하나는 분명 이상하다는 건데 어머니가 보기엔 어때요?”

빈 그릇 하나와 호박죽이 반쯤 담긴 그릇 하나, 그리고 던져진 숟가락을 내려다보며 덤덤한 목소리로 묻자 어머니가 쯧쯧, 혀를 차며 그것들을 모아 치우셨다.

싱크대 설거지통에 그릇을 넣고 돌아선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며 용주야, 하고 부르셨다.

“누나가 이번에 장학금을 못 탔어. 학자금 대출받아서 이 학기 등록금을 내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했던 모양이야. 이 학기 등록금부터는 장학금 받겠다고 했는데 그게 안 되니까 알바를 해서라도 자기가 등록금을 해결하고 싶었나 봐. 앞으로 너한테 들어갈 돈도 많을 텐데 계속 자기 등록금 때문에 부담 주기 싫다고. 그런데 학기 시작하고 알바랑 공부랑 병행하기가 힘드니까 예민해진 것 같아. 게다가 너는 아니라고 하지만, 돈 때문에 축구를 그만두는 것 같으니까 누나가 속이 상해서 그래.”

어머니의 말에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설령 진짜 누나의 속마음이 그렇다 할지라도, 누나가 표현하는 데 서툴고 정말 힘이 들어서 예민해져 있는 상태라고 해도 아닌 것은 아닌 거다.

가족에게 짜증을 내고 화풀이하는 것은 가족이니까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타인의 호의까지 무시해가며 말하는 것은 기본이 되어있지 않은 거다.

그런 면에서 누나가 똑똑하고 착한 딸이라고 부모님이 아무리 말씀하신들 내가 보기에는 인격 형성이 되어있지 않은 사람일 뿐이었다.

“점점 더 심해져요. 누나는 사람 속을 후벼 파는 말을 골라서 하는 것 같아요. 제가 똑똑하지 못하고 이해심이 부족해서 그런지 몰라도 누나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말로 저렇게 사람한테 상처를 주면서, 무슨 환자를 고쳐요? 마음에 상처를 주는데, 몸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게 무슨 소용이에요? 누나가 정말 의사가 된다고 해도, 나는 저런 의사 있는 병원은 안 가고 싶을 거예요.”

“누나한테 말이 너무 심해.”

“어머니가 그러니까 누나가 자기 잘못을 모르는 거예요.”

나는 드물게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등을 돌렸다. 방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잡아 돌리자 예상처럼 문이 잠겨 있었다.

“뭐야?”

“문 열어.”

두어 번 더 손잡이를 돌려보았지만 여전히 문이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문 열라고 했어.”

“꺼져. 내 방이야.”

“내 방이기도 해. 누나 공부하는 데 방해될까 봐 비켜줬었던 거지 이렇게 화풀이하는 용으로 쓰라고 비켜준 거 아니었어.”

“건방지게 말대답할래, 서용주.”

“……그럼 안에 있는 내 휴대폰이랑 점퍼만 줘.”

정말이지 말할 기운도 없고, 할 말도 없다. 조용히 말하자 방 안에서 한참 부스럭대던 누나가 방문을 열고 점퍼와 휴대폰을 내 가슴에 던져주었다.

툭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진 휴대폰을 줍는 사이 다시 쾅, 하고 문을 닫은 누나는 찰칵 소리를 내며 방문을 잠갔다.

“나갔다 올게요.”

점퍼를 입고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전원이 나간 휴대폰을 켜며 어머니에게 말하자 어디 가? 하고 물으셨다.

“그냥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그러다 감기 심해지려고.”

“언젠가는 낫겠죠.”

한창 심해질 때까지는 감기 걸린 것도 몰랐으면서. 어머니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등을 돌려 집을 나왔다.

늦은 저녁이라서 그런지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점퍼의 앞 지퍼를 목 아래까지 채우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슬렁슬렁 동네를 한 바퀴 돌다가 문득 하원의 생각이 났다.

하원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까 세 시에 전화했을 때는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저녁 아홉 시가 되어가는데 아직까지도 촬영 중이려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하원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간 끝에 하원이 전화를 받았다.

―용주야?

여보세요, 도 아니고 용주야? 라니. 물론 발신 번호 표시가 되어있겠지만 그래도 반사적으로 불리는 이름에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풀어진 입술을 손끝으로 슬쩍 만지작거리며 있자 하원이 용주야, 하고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뭐 하고 있어요?”

―나 집이야.

“일찍 끝났나 보네요.”

조금은 늘어진 듯 들리는 목소리에 자던 사람을 깨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다 일어났어요?

―그냥 누워있었어. 집에 오면 자는 것밖에 할 게 없어서.

하암, 늘어지게 하품을 한 하원이 작게 웃었다.

―오늘 중으로 다시 전화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그냥…… 형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약간의 장난기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거기에 얼굴을 붉히거나 같이 농담을 하기에는 기력이 달렸다.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자 하원이 용주야? 하고 나를 불렀다.

―용주 지금 밖이야?

“네.”

―어딘데?

“그냥 집에만 있는 게 답답해서 동네 한 바퀴 삥 돌고 있어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이제 아홉 시인데 늦은 시간은 무슨.”

―아냐, 어둡잖아. 언제 들어가려고?

“그냥…… 좀 걷다가 들어가려고요.”

내 말에 하원은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그럼 어디 건물 안에 들어가 있어. 내가 지금 갈게.

“시간이 늦었는데요.”

―이제 아홉 시라고 했던 사람이 누군데.

하원의 대꾸에 그런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네, 하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 이제 집에 들어갈 거예요.”

―거짓말인 거 알아.

“진짜예요.”

―그럼 뭐 나 혼자 드라이브했다고 치지. 아무튼 나 출발할 테니까 어디 실내 따뜻한 곳 들어가 있어.

그렇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 하원 덕분에 나는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들고 잠시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하원을 필사적으로 말리지 않은 것은, 어쩌면 절실하게 하원이 보고 싶고 옆에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가족들이 감싸 안아준다고 하는데, 나는 어째서 가족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타인에게 위로받으려 하는 것일까.

∞ ∞ ∞

슬슬 걸음을 옮겨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저녁이긴 하나 운동 나온 사람들이 많아서 그다지 위험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운동장 한쪽에 있는 그네에 앉아 흔들흔들 발을 구르며 운동장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아줌마들 무리가 이제 막 여덟 번째 내 앞을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 하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에 있어?

“엄청 빨리 왔네요?”

―응, 좀 밟았어.

“위험하게 왜 그랬어요. 천천히 오지.”

나무라는 말투로 말해보지만 하원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지금 어디에 있어?

“여기 집 뒤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이에요.”

―초등학교 운동장? 이럴 줄 알았어. 너 실내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잖아. 그러다 감기 더 심해진다고.

“점퍼 입고 나와서 괜찮아요. 많이 춥지도 않은데.”

―됐어. 아무튼 용주 점점 말도 안 듣고 미워. 빨리 그 학교 정문 있는 곳으로 나와. 나 거기로 갈 테니까.

나도 요즘 하원에게 혼날 짓을 많이 하는구나 싶다. 그네에서 일어나 정문 쪽으로 걸어가자 어느새 도착해있는 하원의 차가 보였다.

통화를 종료하고 조수석에 올라타자 하원이 손을 내밀어 내 뺨을 감쌌다.

“이거 봐. 얼굴 차가워진 거 봐. 너 이러다 감기 더 심하게 걸리고 싶어?”

모처럼 어른스러운 얼굴로 화를 내는 하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하원이 “왜 그래?” 하고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마 위에 주름이 질 정도로 찌푸리고 있던 얼굴을 펴며 조금은 걱정스럽게 나를 보고 있는 하원을 응시하고 있노라니 왠지 울컥 서러움이 밀려왔다.

팔을 뻗어 하원을 와락 끌어안고 어깨 위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 놀란 듯 뻣뻣하게 굳어있던 하원이 이내 몸에서 힘을 빼고 손을 들어 내 등을 쓸어주었다.

“용주야, 많이 아파?”

“아뇨, 형이 준 죽이랑 약이랑 먹고 푹 자고 일어났더니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그럼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조곤조곤 귓가에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묻는 하원의 목소리가 좋아서 나는 어리광을 피우듯 하원의 어깨에 뺨을 문질렀다.

“아파서 그런지 예민해진 것 같아요. 싸울 일이 아니었는데 괜히 누나랑 싸우기나 하고, 이해심도 없어진 것 같고, 제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뭐가 이상해? 난 용주가 제일 정상적으로 보이는데. 아주 모범적인 인간상이라고.”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누나가 자꾸 저를 이상하게 몰아가고, 어머니는 왜 사소한 일을 이해하지 못하냐는 식으로 말씀하시니까 제가 정말 그런가, 생각하게 돼요.”

“이렇게 예쁘고 착한 용주한테 대체 왜 그러실까.”

하원은 내 몸을 잡아당겨 꽉 안아주었다. 두 팔이 겹쳐질 정도로 나를 깊게 안은 하원은 그렇게 마주 안은 상태로 가볍게 몸을 흔들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난 용주가 항상 어른스러워 보여서 와, 열여덟 살 주제에 엄청 진지해. 하고 생각했었거든. 그게 나쁘거나 싫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눈에 들어오고 좋았어. 열여덟 살 나이의 아이답지 않게 차분하고, 진지하고, 생각이 깊고, 배려심도 있고, 이해심도 있는 것 같고. 가끔은 너무 어른스러워서 용주가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건가 걱정도 되더라고. 그런데 오늘 이렇게 어리광부리는 모습 보니까 너무 좋다.”

“아파서 그런 거예요.”

하원의 말을 듣던 나는 조금 머쓱해져서 핑계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하원의 어깨를 이마로 툭 쳤다.

“그래, 아프면 원래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거든. 외로워지기도 하고. 그래서 더 좋아. 그런 상황에서 용주가 나를 불러준 거잖아.”

“형이 멋대로 왔으면서.”

“와주세요, 하고 전화한 게 누군데?”

“제가 언제 와달라고 했어요? 전 분명히 집에 가겠다고 했는데.”

“이상하네. 난 분명히 용주가 형, 저 엄청 속상하고 외로우니까 빨리 와주세요. 하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

내가 꾹 입을 다물자 하원이 즐거운 듯 웃으며 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나는 말이야, 항상 용주를 생각해. 자고 일어났을 때 시간을 보면서 지금 용주는 뭘 하고 있을까, 밥 먹을 때에는 용주도 밥 먹고 있을까, 촬영할 때에도 용주는 뭐 하고 있을까, 수업 중일까 아니면 집에 있을 시간인가, 저녁에 잠잘 때에도 용주 역시 잠을 자고 있을까, 내가 나오는 꿈은 꾸고 있는 걸까.”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 하원의 등을 주먹으로 살짝 때리자, 하원이 작게 웃으며 그만큼 너를 생각해, 하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용주도 나를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항상 바라거든. 항상은 아니더라도 가끔 내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어. 힘들 때나 짜증날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언제나 나를 생각해달라는 건 욕심이니까, 그중 어느 때라도 한 번은 나를 생각하고 또 나를 불러주면 더 좋을 것 같아. 그래서 나 오늘 무척 기뻐.”

감기 걸려서 골골거리는 데다 이렇게 추욱 늘어져서 하소연이나 해대는 게 뭐가 좋다고.

그럼에도 하원은 정말 기쁘다는 듯이 나를 끌어안고 있었기에, 나 역시 손을 들어 하원의 등에 팔을 둘렀다.

“형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형을 생각하고 있어요.”

“아냐, 내가 더 많이 생각해.”

“아니에요, 제가 훨씬 더 많이 생각해요.”

“아냐, 내가 더 많이 많이 엄청 엄청 생각해.”

“……또 유치한 거 가지고 시작이에요, 우리.”

아까까지만 해도 우울해서 축 처져 있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하원의 말에 웃고 있었다.

항상 신기해. 내가 어떤 상태였든지 하원과 있으면 저절로 웃게 된다.

나야말로 무척 기쁜 것 같아요.

“형이 날 좋아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무슨 말이 그래?”

“다른 사람들은 분명히 사춘기라서 그렇다고 말할 테지만요, 저 요즘 조금 힘들거든요. 그런데 형이 옆에 있어줘서 힘든 것도 모르겠어요. 형 얼굴 보면 기분이 좋고, 목소리만 들어도 웃음이 나와요. 형이 날 좋아해줘서 참 다행인 것 같고 고마워요.”

“그런 말은 싫다.”

하원은 내 어깨에 턱을 기댄 상태로 중얼거렸다.

“그런 건 싫어. 그냥 형, 좋아해요. 라고 말하면 될 것 같아.”

“형 좋아해요.”

나는 하원이 말한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하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형이 최고예요.”

“형이 최고예요.”

“형이랑 꿈에서 말고 현실에서도 야한 거 하고 싶어요.”

“형이랑…… 아, 형. 좀!”

하원의 말을 따라 하다가 이상함을 깨닫고는 얼굴을 떼어내 하원을 흘겨보았다. 헤헤, 하고 살짝 혀를 내밀며 웃는 하원을 보고 있노라니 따라서 웃음이 나와버렸다.

아무튼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하원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며 웃어버렸다.

“감기 다 나으면 야한 거 해요.”

“응?”

“형이 말해놓고 뭘 그렇게 놀라요?”

“하지만 용주가 그렇게 말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

“형 스물세 살 먹은 성인이라면서요.”

언젠가 하원이 말했던 것을 떠올리며 말하자 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한 서용주. 순진한 나한테 야한 거 하자고 하고.”

“순진하긴 뭐가 순진해요? 야한 거 하자고 꼬드긴 건 형이 먼저였거든요.”

나는 당차게 반론하며 하원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쿡 질렀다.

“형, 저 배고파요. 죽 사주세요.”

“배고파? 저녁 안 먹었어?”

방금까지 장난으로 말을 나누었으면서도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또 금방 진지해진다. 그만큼 하원이 나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음이 느껴져 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자다가 배고파서 일어났거든요. 그런데 형이 사다 준 죽을 누나가 먹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화내버렸어요.”

“아휴, 아픈 용주 먹으라고 보냈더니 누님이 먹어버렸나 보네. 나쁘다. 그거 먹고 살이나 듬뿍듬뿍 찌라고 기도하자.”

하원은 내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어차피 그건 식었을 테니까. 금방 만든 따뜻한 거 먹는 게 좋지. 가자, 아직 가게 문 안 닫았을 거야.”

하원은 안전벨트를 매주고 차를 출발시켰다. 기분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하는 하원을 보며, 조금 전까지 우울했던 기분을 이제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하원이 내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구나, 내가 이 정도로 하원을 좋아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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