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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정말 뭐 하려고 그래?”
컴퓨터로 요리 블로그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조용히 뒤로 다가온 누나가 그것을 보더니 내 머리를 콱 쥐어박으며 물었다.
“제발 부탁인데 머리는 좀 때리지 마.”
“이게 머리냐? 이런 건 대가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누나라고는 해도 너무 말을 막 한다. 나는 뒤에 서 있는 누나를 향해 몸을 틀었다.
“스물이나 먹었으면 말도 가려가면서 해야 하는 거 아냐?”
“이게 지금 뭐래?”
허리에 팔을 올리고 당당하게 버티고 선 누나를 올려다보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누나가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 화를 내야 할 사람이 누구인데 저래.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질 않는다.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와서 시비를 건 사람이 누군데 저러는 것일까.
“왜 건드려?”
“왜 건드려?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동생한테 정신 차리라고 한 게 건드리는 거냐?”
“누나는 지금 정신 차리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가만히 있는 나한테 와서 머리 때린 것밖에 없거든?”
“네가 지금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쓸모없는 요리 사이트나 돌아다니니까 그렇지.”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판단해.”
그리고 쓸모가 없기는 왜 없어. 주말에 하원을 만나러 가서 항상 해주는데. 쓸모 있고 없고의 판단은 누나가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인 내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너 축구 때려치우겠다며.”
“그런데 뭐 어쩌라고?”
“그런데 뭐 어쩌라고? 참, 나. 축구 관두고 뭐 할 거냐고. 축구도 안 해, 공부도 안 해. 정말 뭐 할 건데 이러고 있어?”
“누나, 신경 좀 꺼.”
짜증이 나서 말하자 누나가 되레 화를 내며 내 어깨를 밀쳤다.
“신경 끄라고? 가족인데 어떻게 신경을 꺼. 하나뿐인 동생이 이렇게 빌빌거리고 있는데. 네가 잘하면 내가 신경 쓰겠냐? 네가 이러고 있으니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잖아.”
“내 인생이야. 누나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그래? 축구를 해도 내가 하고, 공부를 해도 내가 하고, 병신같이 놀고먹어도 내가 놀고먹어. 누나한테 나 좀 책임져달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네 말마따나 병신 같으니까 그렇지.”
병신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병신이라고 해. 얼굴엔 그렇게 쓰여 있는데, 뭐. 대꾸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자 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마저도 마치 나를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라고 뭐 생각 없이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나도 고민해.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한다고. 내가 대체 뭘 해야 하는 건가. 축구를 계속해야 하는 건가. 가망은 있나. 가망이 없으면 빨리 포기하고 다른 것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 다른 무엇을 해야 하나. 정말 고민해. 그런데 결론이 안 나. 누나는 학교 다닐 때 의사가 되겠다고 진로 정해두고 똑똑하니까 문제없이 의대 합격해서 남들도 다 생각하고 마음만 먹으면 마음먹은 대로 진로를 정해서 가는 줄 아나 본데 나처럼 멍청하고 타고난 재주도 없는 놈들은 엄청 고민한다고.”
“누가 너 멍청하고 타고난 거 없대?”
내 말에 누나는 버럭 화를 냈다. 지금 누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를 보고 있잖아.
딱 꼬집어서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고 모르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렇게 화를 내는 것도 찔리는 마음에 그러는 것 아닌가.
“네가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하며 누나가 나를 바라보았다. 내 어깨 너머로 보이는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주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슬쩍 몸을 움직여 그 시선을 차단하며 말했다.
“누가 그러더라. 그런 고민은 보통 고3 때 진로 정하면서 한다고. 나는 그런 애들보다 일 년 먼저 고민하기 시작했으니까 나한테는 일 년이라는 시간이 더 있는 거라고.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그래서 판단하는 것도 다르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해주기를 바라지는 않아도 난 그냥 누나가 나를 지켜봐 주기라도 했으면 좋겠어.”
“보고 있어. 보고 있는데 속이 터지잖아.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도 모르고, 그냥 허송세월 보내는 것처럼 보이니까 속이 상하잖아.”
뭔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한참 동안 머뭇거리더니 이내 누나가 입을 벌려 말을 이었다.
“갈림길에 서 있는데, 내가 보는 너는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아예 길을 잃은 사람처럼 방황하고 있는 것 같아. 어느 길이든 선택해서 가야지,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은 것처럼 보인다고. 나는…… 내 동생이 그렇게 포기하는 거 싫어.”
“누나가 아무리 그래도 결국 결정은 내가 해야 해. 아니, 누군가가 대신 결정을 내려줄 수는 있어. 하지만 그게 내가 노력해서 될 수 없는 거라면, 내 능력 밖의 일이라면 어떻게 해? 누나는 누나가 결정을 했고, 또 누나의 능력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난 누나랑은 다르잖아. 누나가 말하는 것처럼 난 멍청하니까 할 수 있는 선택이 그렇게 많지 않잖아.”
“누가 너 멍청하대?”
“누나가 항상 그랬잖아. 돌머리라고. 멍청하다고.”
“그거야 네가 공부를 안 하고 축구만 했으니까 그렇지.”
“맞아, 나 멍청한 거 맞을 거야. 누나처럼 공부 잘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엄청 멍청해 보일 거야. 나도 나 똑똑하다고 생각 안 해.”
내 말에 누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성질을 내며 큰소리를 치던 것도 많이 누그러들어, 이상하게 지금 우리가 대화를 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보통은 대화를 하다가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대부분인데, 오늘따라 다툼으로 시작해서 대화로 이어지니 어색하기가 그지없었다.
“멍청한 녀석이 말은 잘한다.”
“응, 내가 말은 또 엄청 잘하지.”
내 대꾸에 누나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내 이마를 때리려다가 멈추었다.
“머리 때린 거 미안해.”
누나가 이런 식으로 미안하다고 말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누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아니, 그냥.”
“생각해보니까 아무리 동생이라고 해도 머리는 함부로 때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생각 못 했다. 미안. 그런데 나는 정말 너 걱정해서 그러는 거야. 얘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하던 것마저 손에서 놓고 대체 뭘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답답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하고. 너도 너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고민하고 있을 텐데, 보고 있으려니까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잖아.”
누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너보다 이 년 먼저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나도 아직 많이 부족해. 그래서 네가 나한테 고민 같은 것도 털어놓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래도 남매잖아. 부모님한테 말하기에는 어려운 것도 있을 거 아냐. 그때는 나도 네 말 차분하게 들어줄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 너도 혼자 고민하기 너무 힘들거나 그러면 나한테 말해.”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자 누나는 내 어깨를 한 번 토닥이고는 방을 나갔다.
크게 싸움이 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걱정과는 다르게 조용히 물러나는 누나를 보며 누나도 많이 참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성격상 아니다 싶으면 개처럼 달려들어서 물어뜯어놔야 속이 풀릴 텐데도 이렇게 조용히 넘어가준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도 있었네. 고집 있는 성격.”
은근히 고집스러운 누군가를 떠올리며 나는 상황에 맞지 않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 ∞ ∞
하원이 새벽 운동을 하고 오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 나를 픽업한 윤석진은 녹화해둔 지난주 드라마를 꼭 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오후 촬영을 위해 다시 올 때까지 놀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매니저를 배웅하고, 하원에게 간단한 닭가슴살 요리를 만들어 먹인 후 잠시 숨을 돌렸다.
드라마 녹화해둔 것을 틀어서 먼저 보고 있으라며 거실로 내쫓았지만 설거지를 끝내고 나오니 하원은 거실 바닥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형, 얇은 이불 하나 가져와요. 그렇게 맨바닥에 누워있으면 탈 나요.”
“얇은 이불?”
아무튼 대답은 잘한다. 쪼르르 침실로 달려갔다 온 하원에게서 덮고 자는 것으로 보이는 이불을 받아 거실에 깔았다. 그 위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엎드려 녹화해둔 드라마를 플레이했다.
처음 십여 분은 집중해서 보던 하원이 시간이 지나며 점차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용주야, 드라마 보고 있어?”
“네, 형도 빨리 보세요. 매니저님이 보라고 하고 가셨잖아요.”
“나 자꾸 잠 와.”
아이와도 같은 투정에 웃음이 나왔다. 정말이지 이 사람의 한마디 한마디가 왜 이렇게 웃음을 유발하는지 모르겠다.
“이상하네. 드라마 안 보던 저도 재미있게 보는데 왜 형은 졸린다고 할까요. 잠 못 잤어요? 피곤하면 좀 잘래요?”
“아니, 드라마 보지 말고 나랑 좀 놀아줘.”
“매니저님이 보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저를 믿고 말하고 가셨는데 그것도 안 지키면 제가 뭐가 되겠어요?”
“아냐, 윤석진이 너 이용해 먹는 거야. 그거 아주 나쁜 놈이라니까. 너한테 말하면 내가 말 들을 줄 알고 너한테 말하고 간 거야.”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든 보겠다고 했으니까 봐야죠. 중간까지 봤으니까 한 삼십 분 정도만 더 참고 보세요.”
내 말에 하원은 매정하다느니 사랑이 식었다느니 차가운 남자라느니 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우는소리를 했다.
어쩜 징징거리는 것도 이렇게 귀여울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티브이 화면을 보는 척 징징거리는 하원을 힐끔 곁눈질로 바라보며 웃음을 참아냈다.
“제 친구 중에 드라마광이 있거든요.”
“드라마광?”
“드라마라면 아주 사족을 못 쓰는 애예요.”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하원에게 말을 건넸다.
“걔가 드라마란 드라마는 다 챙겨서 보거든요. 동 시간대 드라마는 재방송으로라도 꼭 볼 정도로 좋아해요. 미국 드라마도 보고, 일본 드라마도 보고, 그리고 볼 거 없을 때는 지난 드라마를 다시 보기도 하고요.”
“으, 그게 뭐가 재미있다고 보고 있어? 난 가만히 앉아서 화면 보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잠을 자겠어.”
“그거야 취향의 차이니 뭐라고 말할 수가 없네요.”
웃고 있는 내게로 뻗어오는 하원의 손을 잡아 손끝에 쪽 입을 맞추었다. 어쩜 손가락도 이렇게 곧고 길쭉하고 예쁠 수가 있을까.
내 행동에 하원이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그것을 보고 웃자 슬금슬금 몸을 움직여 옆으로 바짝 다가온 하원이 내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내 뺨을 어루만졌다.
덕분에 하원은 나를 올려다보는 상태로 눕게 되었고, 나는 티브이 화면 대신 하원의 얼굴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이 포즈 좀 묘한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하원이 “그래서?” 하고 물어 나는 내가 말을 하다 말았음을 떠올렸다.
“아, 걔가 드라마를 엄청 좋아해서 방영하는 드라마는 가리지 않고 다 보거든요. 그런데 또 은근히 까다롭고 보는 눈이 있어서 재미있다고 말하는 게 드물어요. 보는 건 다 보지만 평가는 엄청 까다롭게, 뭐 이렇거든요.”
“뭐야, 시청자 평가단인가?”
하원의 물음에 아니에요, 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순간적으로 박동민이라면 그런 것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원은 가끔 이렇게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한단 말이야.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뭐, 아무튼 그 정도로 까칠해요.”
“드라마는 드라마인데 뭘 그걸 가지고 평가를 해?”
“걘 그래요. 그런데 걔가 가족의 울타리는 재미있게 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래? 가 아니에요. 걔가 그렇게 말했다는 건 정말 재미있다는 거라고요.”
“그럼 뭐 작가가 대본을 잘 썼나 보지.”
하원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보통은 자신이 출연하는 드라마가 재미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뻐하지 않던가. 하원의 반응이 예상했던 것과 달라 나는 조금 당황했다.
“재미있다고 하는데 안 좋아요?”
“글쎄, 나는 내가 촬영을 하면서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 좋지, 남들 평가로 기분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지 않으니까. 평가야 개개인의 기준이 다르고 또 관점의 차이가 있으니까, 그것에 내 기분이 달라지는 것은 웃기잖아.”
하원의 말에 나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요, 가끔 엄청 어른스러운 말을 해요. 그래서 나는 형이 정말 어른이구나, 하고 생각해요.”
“서용주, 나 어른이야. 스물셋이라고.”
하원은 키득키득 웃으며 손가락으로 내 턱을 슬슬 어루만졌다.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거든요.”
내 대꾸에 하원이 볼을 부풀렸다.
“그러면 형, 형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해요?”
“뭐, 아직까지는 재미있어. 할 만해.”
“해야 하는 일을 재미있고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축복인 것 같아요.”
틀어놓은 드라마는 어느새 배경이 되어버렸다. 아까까지는 분명 열심히 보고 있었고, 또 방금까지는 대사를 들으면서 잠깐잠깐 화면을 바라보기라도 했는데 이제는 하원에게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또 이렇게 윤석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게 되어버렸구나.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어지는 하원의 말을 듣느라 그 생각도 곧 사라져버렸다.
“글쎄, 난 딱히 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거든. 그런데 하다 보니까 이것도 나름 즐겁더라고. 이쪽 방면 사람들이 좀 더럽고 무섭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 자체는 하나하나 새로운 거 배워나가는 게 신선하고 재미있는 것 같아.”
나를 올려다보는 상태로 하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전 여태까지 쭉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꿔왔거든요. 그것이 사라지고 나니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고민하고 있는 거야?”
하원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만지며 물었다. 그 목소리가 부드러운 울림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나는 이상하게도 어떤 부담도 없이 자연스럽게 말을 하게 되었다.
“저는 엄청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주변에서는 그저 사춘기 때의 치기 어린 반항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다들 말해요.”
“어느 것도 가치가 없는 건 없어.”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던 손가락이 내려와 귓불을 건드렸다. 그것이 간지러워 나는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그 나이 때에는 다들 그런 고민을 해. 그 나이 때에는 그래, 라고 말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야. 그렇다고는 해도 그 고민이 쓸모없고 무가치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 오히려 네 나이에 그러한 고민을 충분히 해야 그 뒤에 후회가 적어진다고 나는 생각해.”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감독 선생님은 그냥 한때의 방황이라고 하시면서 제 의사를 무시하고, 누나는 그저 제가 생각 없이 일을 저질러버렸다고 책망하기만 하고, 또 부모님은 그 결정이 부모님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계세요. 그래서 저는 제가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인 걸까 가끔 생각해요.”
“왜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 나 있잖아. 아니면 내 말은 열외야?”
“아니에요. 만약 그랬다면 지금 제가 형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지도 않겠죠.”
하원은 눈썹이 휘어지도록 웃으며 내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고민하고 있는 너한테는 안 좋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네가 참 좋아 보여.”
“왜요?”
“뭐랄까, 나는 지금 네 나이 때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았거든. 의욕이 없었던 아이라고 해야 할까. 그냥 아무거나 하지 뭐, 이렇게 생각했었던 것 같아.”
확실히 하원이 그런 고민을 하는 모습은 상상이 되질 않았다.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현실적인 민하원의 모습은 조금 낯설 것 같기도 했다.
언젠가 하원이 말했던 것처럼 그는 어딘가에 있을 어린 왕자와 비슷했다. 눈앞에 있지만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신비로운 사람.
“게다가 너는 네 미래를 고민하고 있잖아. 내가 하지 않았던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너는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는 하원의 얼굴은 꽤나 진지해서 단순히 하원이 나를 위로하거나 내 기분을 맞춰주려고 내뱉은 말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그때 생각했던 것은 장미를 찾는 것뿐이었거든. 남들이 말하기를 나는 좀 현실성이 없대. 넌 어떻게 생각해?”
하원은 나를 향해 물었다. 대답해봐, 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원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가볍게 톡톡 건드렸다.
입술 위에서 움직이는 하원의 손가락을 살짝 물었다 놓으며 나는 글쎄요, 하고 말끝을 흐렸다.
“남들이 다들 그래서…… 친구들도 그렇고, 선생님도 그렇고, 하다못해 부모님까지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내가 그렇게 현실성이 없나? 하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는 걸 이제 와서 깨달았어.”
하원은 손끝으로 내 입술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몇 년이 지나기는 했지만 결국 나는 내 장미를 만났잖아. 기획사 사장한테 걸려 여행을 도와주겠다느니 어쩐다느니 해서 뺑이친 것을 생각하면 조금 속상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내 장미를 만났잖아. 그걸 생각하면 결코 현실성이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아. 안 그래?”
하원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린 나는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려 했지만, 하원이 얼굴 바로 아래에 누워있는 바람에 살짝 고개를 돌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남들이 하는 말이 맞을 수도 있어. 그건 이제까지 그 사람들이 봐왔고 또 경험했던 것들을 말해주는 것일 테니까. 그렇다고 그게 완벽한 정답은 아니라는 거야. 네가 그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고, 또 그 사람들이 무가치하다고 하는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난 뒤에 보면 네가 했던 고민과 네가 했던 생각들이 네게는 옳았던 것일 수도 있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요, 형. 조금만 떨어져서 말해주면 안 될까요. 너무 가까이에서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있으니 제가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어떤 얼굴로 형을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얼굴로 몰린 열기가 가라앉지 않아 나는 여전히 하원에게서 고개를 돌린 상태로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현실성 없다고 했지만 결국 장미를 만난 나처럼 용주도 남들이 다 아니라고 말하는 어떤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분명히 그것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
엄청 감동적이고 힘이 되고 고마운 말이기는 한데요, 조금 부끄럽네요. 하원이 계속해서 언급하는 장미가 누구인지 알고 있기에 더욱 하원을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왜 그래? 왜 나 안 봐?”
시선을 돌린 상태로 대답도 없이 그저 고개만 주억거리는 내가 이상했던 모양인지 말을 끝낸 하원이 내 뺨을 감싸 제게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머리에 힘을 주고 버티는 것도 못 할 짓이라서 얼굴은 하원을 향해 돌렸지만 시선만큼은 다른 곳을 향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웃는 하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용주 얼굴 빨개.”
“알면 좀 놔주세요.”
“왜 얼굴을 붉혀?”
“형이 부끄러운 소리를 하니까요.”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묻는 하원이 얄미워 나는 힐끗 하원을 흘겨보았다.
“형이 자꾸 장미, 장미 하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때 그렇게 말한 거 엄청 부끄럽단 말이에요.”
“그때 뭐라고 말했는데?”
이건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묻는 거다. 그것을 알아차린 나는 말 안 할래요, 하고 하원의 손을 떼어내려 했으나 하원이 웃으며 내 뺨을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뺨이 밀리며 부우, 하고 저절로 입술이 내밀어졌다.
“내 장미가 되어주겠다고 했던 거?”
하원의 물음에 나는 윽, 신음을 내뱉었다.
제발 그 말은 하지 말아요. 다시 생각해도 엄청 부끄러운 고백이란 말이에요.
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내뱉었었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허공에 하이킥을 할 정도로 부끄러운데 하원은 “그거 말하는 거야?” 하고 재차 물었다.
“용주 부끄러워하는 거야?”
“알면 좀 놔주세요. 혼자서 좀 부끄러워하게.”
“싫어. 지금 용주 얼굴 엄청 귀여워.”
그건 항상 제가 형의 얼굴과 행동을 보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우, 하고 뺨이 밀려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얼굴이 뭐 그리 귀엽다고. 보지 않아도 흉할 것 같아 하원의 손을 떼어내려 했으나 하원이 재빠르게 고개를 들어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나 그때 엄청 기뻤어.”
뺨을 감싸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지만 연신 쪽쪽, 입을 맞추는 하원 때문에 더욱 움직일 수가 없어졌다.
“용주가 내 장미가 되어주겠다고 했을 때 나 정말 기뻤어.”
“장미가 그렇게 간절했어요?”
“용주라서 기뻤던 것 같아. 윤석진이 장미가 되어주겠다고 했다면 도망갔을 거야. 너니까 기뻤어.”
입술을 마주하고 속삭이듯 말을 나누며 나도 어느새 하원처럼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는 가끔 불안해요.”
“뭐가?”
“형의 장미요. 마치 제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요. 나보다 더 어울리는 누군가가 나타날 것 같아요. 저는 정말 형이 좋은데 누군가가 와서 내 자리가 아니라고, 그만 비키라고 말할 것 같아서 불안해요.”
“왜 그런 생각을 해?”
하원은 조금 굳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는 그냥 평범한 남학생이고 형은 연예인이잖아요. 가끔은 형이 왜 나를 상대하고 있는 걸까 생각하기도 해요.”
생각하고 있던 것을 입 밖에 내니 조금 슬퍼졌다. 혼자서 생각할 때는 그저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했던 감정이 말로 쏟아져 나오는 순간 슬픔으로 변화했다.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슬픈데, 그런 날이 온다면 얼마나 더 슬프고 아플까.
“네가 왜 평범해?”
내 얼굴에 뺨을 비비며 하원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넌 특별해. 내가 이제껏 봐왔던 누구보다도 특별해. 네가 내게 과분한 사람일지언정 부족한 사람은 절대 아니야. 그런 말 하면 나 마음이 아파.”
하원의 목소리는 작고 희미했지만 가슴 속에 스며들어 긴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실로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해도 하원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하원의 뺨에 입을 맞추며 나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러니까 마음 아파하지 말아요. 그런 생각을 다시는 말하지 않을게요. 그냥 나 혼자서 생각하고 내 가슴에 품고 있을게요.
형이랑 만나는 시간 동안 항상 행복하게 해줄 거예요. 형이 항상 웃고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하원의 입술을 살짝 베어 물었다 놓으며 입을 맞추자 하원이 작게 웃으며 우웅, 하고 칭얼거렸다.
그것을 모른 척하며 입술 주변에 쪽쪽 입을 맞추자 하원이 몸을 틀어 나를 눕히고 그 위로 올라왔다.
“나 스물셋이야. 성인이라고.”
“알아요.”
깔깔 웃으며 말하자 하원이 모르는 거 아냐? 하고 물었다.
“알면서 뽀뽀만 해?”
“뽀뽀하자고 말했던 건 형이었잖아요.”
“그건 워밍업으로 뽀뽀를 하고 슬슬 키스 좀 하자는 말이고.”
하원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웃음을 터뜨리자, 웃고 있는 입술 위로 하원이 입을 맞췄다.
하원의 말처럼 가볍게 뽀뽀로 시작한 것은 입술을 겹치고 혀가 오가며 타액이 질척거리는 키스로 변했다.
잡아먹을 것처럼 입술을 깨물고 쭉쭉 빨아 당기는 하원의 움직임에 반사적으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아픈 건 아니지?”
키스를 멈춘 하원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혀로 훔쳐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하원의 입술이 다가왔다.
손을 들어 하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름다운 얼굴과는 다르게 탄탄한 등 근육이 손 아래로 느껴졌다.
손을 느리게 움직이며 근육을 쓸어보자 하원이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손 아래로 느껴지는 근육들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것이 전해져왔다.
잠시 몸을 굳히고 있던 하원이 더욱 간절하게 입술을 겹쳤다.
뺨을 어루만지고 있던 하원의 손이 목덜미를 쓰다듬고 아래로, 더 아래로 이동하며 옷 위로 내 몸을 더듬었다.
“형, 손이…….”
손이 좀 오묘한 곳에 들어오는 것 같아요. 상의 속으로 쑥 밀려든 하원의 손에 의해 뒷말을 내뱉지 못했다.
흡, 놀라 숨을 들이마시자 하원이 슬슬 손으로 옆구리를 쓰다듬으며 용주야,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멍 사라졌는지 좀 보자.”
아이를 달래듯 귓가에 입술을 내려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하원을 향해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보기만 할게.”
정말 그 이유만이라면 거절하지 않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별로 믿음이 가질 않네요.
하지만 나의 미약한 거부는 별다른 힘을 가지지 못했고, 하원은 자신이 의도한 대로 티셔츠를 올리고 내 가슴과 배를 훑었다.
“머……멍은 이제 없어요.”
“그러게. 깨끗하게 나았네.”
그렇게 말하는 하원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묘하게 갈라진 것도 같아서 나는 낯선 하원의 모습에 잠시 긴장하게 되었다.
“네 몸…… 보기 좋아. 알아?”
“몰라요, 그런 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귓불을 아프지 않게 질겅이며 속삭이는 말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붉히며 어깨를 움츠렸다. 배를 쓰다듬던 하원의 손이 슬금슬금 가슴 위로 올라왔다.
몸의 윤곽을 더듬는 것처럼 움직이던 손이 가슴 위로 올라와 작게 솟아오른 유두를 스쳤을 때 단전에서부터 발가락까지 전기가 쫙 퍼지는 기분에 몸이 경직되었다.
“읏.”
나도 모르게 내뱉은 신음에 놀라 입을 가리고는 하원을 바라보았다. 하원 역시 놀란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끄럽다.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에 하원을 밀치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나를 누른 하원이 거칠게 입술을 마주했다.
혀가 밀려 들어와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살덩이를 잡아챘다. 그것을 뱀처럼 휘감아 쭉쭉 빨아당기고 이로 잘근잘근 깨문다. 아릿한 통증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타액이 입가로 넘쳐 턱을 타고 흘렀다. 깊게 입을 맞추던 하원은 숨이 막힐 지경에 이른 내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자 입술을 떼어냈다.
하아, 가쁜 숨을 내쉬는 내 목에 하원의 입술이 달라붙었다. 흘러내린 타액을 핥고 여린 살을 질겅인다. 낯선 감각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혀엉.”
힘겹게 하원을 불렀으나 하원은 더욱 가까이 몸을 겹쳤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하원의 어깨를 밀어내고 있었지만, 그것이 밀어내는 행동인지 아니면 어깨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인지는 구분이 되질 않았다.
연신 목덜미를 핥아대고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가슴과 허리를 쓸어내리던 하원이 하체를 내렸다. 딱딱한 물건이 중심에 닿았다.
놀란 나머지 하원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칠 것 같아.”
하원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탄식하듯 말했다. 입술을 열 때마다 뜨거운 열기가 함께 토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만족할 수가 없어. 예전에는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았는데, 그 뒤로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더한 것을 원하게 되어버려. 너한테서 다 빼앗아버리고 싶어. 막 욕심이 나서 참을 수가 없어.”
하원은 말하는 것조차 괴롭다는 듯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당히 진지한 말이었지만 사타구니 위에서 느껴지는 하원의 발기한 물건 때문에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형, 하고 하원을 부르며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덩달아 하원의 물건이 불끈,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에 놀라 몸을 굳히자 하원이 끄응, 하고 괴로운 신음을 뱉어냈다.
“욕심이 나. 욕심이 나서 참을 수가 없어.”
하원은 뭘 어떻게 하자는 말도 없이 그저 같은 말을 중얼거리기만 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아, 이 사람도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 거구나. 나처럼 당황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느끼자 굳어있던 몸에서 긴장이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자연스럽게 열기가 차지했다.
“괜찮아요.”
나는 하원의 목덜미를 덮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형이 날 좋아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나도 형을 좋아하니까요.”
나 역시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하원은 영리한 학생처럼 내가 말하는 것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확인하듯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하원을 향해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키스해요.”
내 말에 하원이 자석처럼 끌려와 입을 맞추었다. 조금 전의 과격했던 키스가 아니라 부드럽고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입술을 쪼옥 빨아들이고 수줍은 혀가 톡톡 치열을 건드렸다. 슬쩍 혀를 내밀어 하원의 혀를 건드리자 수줍어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빠르게 달려들어 내 혀를 휘어 감았다.
하원의 혀를 피해 이리저리 혀를 움직이며 나는 한 손으로 하원의 어깨를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는 부드럽게 하원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허리를 쓸어내리던 손이 조심스럽게 바지 위로 올라갔다. 버클 위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던 손이 어느 한순간 급작스럽게 변하여 빠르게 허리띠를 풀고 청바지의 버튼을 끄르고 지퍼를 내렸다. 허벅지 아래로 청바지를 밀어내고 속옷 위로 하원의 손이 내려앉았다.
은밀한 부위에 하원의 손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끄럽고, 또 그 부끄러움이 미묘하게 열기를 만들어냈다.
아, 곤란하다.
하원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하원이 혀로 귓바퀴를 핥고 귓불을 입에 물었다. 색색 몰아쉬는 하원의 숨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그것이 마치 내 숨소리처럼 크게 들려와 가슴이 뛰었다.
하원은 속옷과 함께 자신의 바지를 엉덩이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힐끗 쳐다본 하원의 성기가 무서울 정도로 발기해 있어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아니, 매우 당황했다.
타인의 발기한 성기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당황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기껏 부드럽게 풀어졌던 몸이 딱딱하게 굳자 그것을 알아차린 하원이 내 속옷을 밑으로 끌어 내리며 용주야,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네가 좋아.”
어느새 발기한 내 성기 위로 하원의 물건이 마주 닿았다. 열기를 품은 그것은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아마 하원 역시 느끼고 있을 터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성기 역시 하원의 것처럼 발기해 있었으니까.
“네가 너무 좋아.”
“아…….”
성기를 감싸는 타인의 손에 나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다. 내 손으로 내 것을 쥘 때와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열기를 가진 타인의 성기가 내 것과 함께 문질러지고 있었다. 그것도 타인의 손으로.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일이라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감각에 정신이 나간 것인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하원의 어깨에 매달려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용주야, 용주야.”
하원은 애달픈 목소리로 연신 내 이름을 불러댔다. 나는 대답 대신 하원의 귓가에 젖은 신음을 토해냈다.
열기가 몰려 뜨거운 얼굴을 하원의 목덜미에 비비며 흥분으로 단단해진 하원의 등을 힘껏 끌어안았다.
비벼지는 성기는 감당할 수 없는 열기로 휘감겨 이대로 연소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성기를 위아래로 잡아 흔드는 하원의 손놀림에 맞춰 반사적으로 허리를 흔들며 신음을 내뱉었다. 남자의 아래에 깔려 비음 섞인 신음을 내뱉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였다.
혼자 할 때와는 다르게 자신의 것과 타인의 것을 동시에 잡고 흔드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하원의 손에서 흔들리던 성기가 가끔 튕겨 나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아쉬움 가득한 신음을 흘렸다.
두 개의 성기를 잡아 문지르고 흔드는 것이 익숙해졌을 때쯤 하원의 손놀림이 더한층 빨라지고 거세졌다. 하원의 손에서 문질러지는 성기가 아릿하게 아플 정도였다.
두 개의 성기를 문지르고 쥐어짜듯 위아래로 흔들던 하원이 낮은 신음과 함께 몸을 굳혔다.
순간적으로 뜨거운 점액질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하원의 손을 적셨고 성기를 잡고 흔드는 손의 움직임을 더 수월하게 만들었다.
미끄러운 감각을 느끼며 더욱 강하게 잡아 흔드는 감각에 나 역시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사정했다.
아플 정도로 강하게 잡아 흔들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대신 슬슬 허리를 움직이며 정액으로 범벅이 된 성기를 느리게 문질러댔다. 그것은 사정의 쾌감과는 또 다른 기분을 느끼게 했다.
사정 후 나른한 감각에 취해 하원의 어깨에 묻었던 얼굴을 내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던 나는 하원의 움직임에 멀미를 하는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마주하고 있다.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물건이 타인의 것과 마주하고 있다.
새삼 그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한 것인지도 정확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아플 정도로 하원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내 팔도 눈에 들어왔다.
“미치겠다.”
약간 쉰 듯한 하원의 목소리에 나 역시 생각했다. 나는 이미 미친 것 같아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가만히 있자 하원이 내 귓가에 탄식과도 같은 말을 속삭였다.
“네가 너무 좋아서 미치겠어.”
하원의 말을 듣는 순간 아무렴 어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어떤 말이나 행동도 중요하진 않을 터였다. 지금 이대로의 상황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나는 바보처럼 하원이 말한 뒤에야 깨달았다.
조금씩 힘이 빠지는 손을 하원의 어깨에 두르고 나는 조금 전보다 더 강하게 하원을 끌어당겨 안았다.
∞ ∞ ∞
뜨거운 열기가 치밀었다. 하원의 손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치솟는 기분이었다. 내 몸이 이렇게 민감했던가. 스스로 의아해할 만큼 하원의 손이 스칠 때마다 나는 자지러지는 신음을 내뱉었다.
분명 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알몸이었다. 그것이 못내 부끄러워 가릴 것 하나 없는 상황에서 하원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마주 닿는 하원의 몸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했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을 손으로 더듬자 하원이 나지막하게 신음을 흘렸다. 그것이 마치 마약처럼 달콤함을 안겨주었다.
“혀엉.”
힘겹게 하원을 불렀지만 그것은 하나의 단어라기보다 어린 짐승이 내는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하원은 작게 웃으며 내 얼굴에 뺨을 문질렀다.
부드럽게 성기를 쥐고 흔드는 하원의 손길에 몸이 흔들린다.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으로 허리를 흔들며 하원의 등을 껴안았다.
“네가 좋아.”
하원이 귓가에 속삭였다. 마주하고 있는 얼굴, 맞닿은 몸, 전해지는 열기, 모든 것이 좋았지만 귓가에 속삭이는 하원의 고백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나도 형이 좋아요.”
하원의 고백을 그대로 돌려주며 나는 하원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좀 더 하고 싶어요.”
느리게 움직이는 하원의 손을 겹쳐 잡으며 나는 유혹하듯 속삭였다.
조금 더 하고 싶어요. 조금 더 형을 느끼고 싶어요.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 나 자신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나의 칭얼거림을 들은 하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목덜미를 느리게 빨아들이며 하원이 답했다. 부드럽게 입술로 빨아대던 목덜미에 이를 세우고 잘근잘근 씹어대는 행위가 나쁘지 않았다. 아픈 것보다 묘하게 간지러워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하원의 손이 가슴으로 내려가 흥분으로 볼록 올라온 유두의 주변을 느리게 문질렀다.
감질나는 손길에 애가 타고 입안에 침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나는 또다시 형, 하고 하원을 불렀다.
“여기 좋아?”
하원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것 같다.
“대답도 잘하고, 착하네.”
하원은 똑똑한 아이를 칭찬하듯 웃으며 손가락으로 유두를 잡아 문질렀다. 그곳에서 쾌감이 느껴질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아릿한 통증과도 같은 쾌감을 느끼며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질렀다.
“용주 몸 민감하다.”
하원은 혀를 내밀어 목덜미를 핥으며 속삭였다. 턱 바로 아래에서 들려오는 하원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유혹적이었다.
아랫도리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아까부터 흥분으로 서 있던 성기는 질척한 액체를 내뱉고 있었다.
“예쁘다, 용주.”
고개를 내려 유두를 입에 머금은 상태로 하원이 말했다.
“너무 예뻐서 씹어 삼키고 싶어.”
하원의 손이 내려와 젖은 성기를 잡았다. 온기를 담은 손이 아플 정도로 흥분한 성기를 잡아 느리게 문질렀다.
애를 태우듯 느린 움직임에 나는 허리를 뒤틀었다. 하원을 재촉하는 것처럼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느릿느릿 위아래로 움직이는 하원의 손길에 나는 허리를 띄워 마구잡이로 성기를 움직였다. 하원의 손에 잡힌 내 것이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급해?”
“으응.”
하원의 물음에 긍정이 담긴 신음을 내뱉었다. 뾰족하게 혀를 세워 유두를 간질이며 하원이 웃었다.
“들어가고 싶어. 네 안에, 지금 당장.”
조금은 단호한 목소리. 무슨 대답을 하든 상관하지 않고 나를 품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원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형이 원하는 대로 해요. 나는 다 좋아요.
애원하듯 하원의 어깨에 매달리며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고 울면서 비명을 지를 때까지 널 안을 거야.”
속삭이듯 들려오는 하원의 목소리가 희미했다. 성기를 잡은 하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까와는 다르게 아플 정도로 쥐어짜며 위아래로 흔드는 하원의 손길에 나는 참지 못한 신음을 흘렸다.
“형, 형.”
애타게 하원을 부르며 나는 하원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단단한 어깨 근육에 손톱이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성기를 쥐어짜듯 흔들어대는 하원의 손길에 참지 못하고 허리를 들썩이던 나는 강한 쾌감과 함께 사정했다.
한껏 긴장하고 있던 몸이 늘어졌다. 사정과 함께 눈앞을 하얗게 뒤덮고 있던 빛무리가 사라짐을 느꼈다.
조금은 멍한 기분. 귓가에 들리던 하원의 웃음소리가 멀어졌다. 희미한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는 하원의 목소리와 함께 몸을 내리누르고 있던 무게감 역시 한순간 사라져버렸다.
“씨발.”
좀처럼 욕을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내뱉을 말이 욕밖에 없었다. 씨발, 하고 한 번 더 중얼거린 나는 몸을 일으켰다.
“벌써 며칠째야.”
처음 몽정을 했을 때가 가물가물할 정도인데 이제 와서 왜 이러냔 말이다.
나는 몸이 달아서 어쩔 줄 모르는데 하원만 느긋하고 여유 있는 모습이 이상하긴 했지.
아무래도 지난주에 한 경험이 너무 강렬했던 모양이다. 그 뒤로 계속해서 이런 살색이 난무하는 꿈을 꾸다니. 욕구불만인가. 성욕이 가장 왕성한 시기가 십 대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
며칠째 반복되는 꿈으로 이제는 익숙하게 거실 서랍장에서 속옷을 꺼낸 나는 살금살금 소리를 죽여 욕실로 향했다.
질척거리는 속옷이 영 꺼림칙했다. 욕실 문을 잠그고 옷을 벗었다. 예상대로 속옷은 정액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진짜 쪽팔리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밤마다 이런 꿈을 꾸는 것도, 허무하게 몽정을 하고 가족들 모르게 욕실에 쪼그리고 앉아 속옷을 빠는 것도 쪽팔리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하원을 멋대로 꿈에 등장시켜 그런 짓을 하다니. 왠지 하원의 얼굴을 보기가 미안해질 것 같았다. 이번 주말에 하원을 만나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하지.
한숨을 내쉬며 정액으로 범벅이 된 속옷을 조물조물 빨아댔다. 물기를 쫙 빼 허공에 탈탈 털어 수건걸이에 걸쳐놓고 찬물을 틀었다.
이대로라면 다시 잠을 자는 것도 무리이기에 열기를 식혀둘 필요가 있었다.
가을이라고는 하지만 찬물 샤워는 무리한 시도여서 처음에는 으헉, 하고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었다. 그 바람에 자고 있던 엄마가 깨서 욕실로 쫓아와 무슨 일이냐고 묻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짓도 이삼일 반복되다 보니 찬물 샤워도 제법 익숙해져서는 이를 악물고 재빠르게 샤워를 끝냈다.
속옷을 갈아입고 욕실을 나온 나는 빤 속옷을 서랍장 위에 살짝 걸쳐두었다. 아침이 될 때까지는 마를 테니까 일찍 일어나서 숨기면 아들이 새벽에 일어나 속옷을 빤 일은 부모님도 모르실 거다.
다시 자리를 잡고 누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대체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해. 어떤 특정인을 대상으로, 그것도 주변 인물이 등장해 그렇고 그런 꿈을 꾸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몇 날 며칠 야한 꿈을 꾸며 몽정을 하는 것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처음 몽정을 했을 때에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미치겠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찬물로 샤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야한 꿈 때문에 흥분을 한 탓인지 아직까지도 몸에 남아있는 열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배 위로 끌어당겨 덮었던 이불을 발로 걷어차버리고 신경질적으로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 ∞ ∞
“서용주, 밥 먹으라고 몇 번을 말해? 대답도 안 하고, 뭐 하고 있는 거야?”
벌컥, 문을 연 어머니가 목소리를 높여 나를 불렀다. 그러게, 나 뭐 하고 있었지. 멍하게 앉아있었는데 잠깐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어? 아니. 그냥 앉아있었어요.”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어. 눈 뜨고 졸았어? 얼른 나와서 밥 먹어.”
어머니가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밥상 차려놓았는데 바로바로 안 나오고 버티는 것이다. 나는 잽싸게 어머니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우리 둘이 먹어요?”
“아버지야 한 시간은 더 지나야 오실 거고, 오늘은 네 누나도 늦는다고 하더라.”
모처럼 조용히 밥만 먹을 수 있겠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정신을 빼놓고 있더만.”
아무래도 어머니는 내가 축구를 그만둔 일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고 오해한 것 같았다.
물론 그걸 고민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24시간 동안 고민하고 있지는 않은데.
요즘 내 행동, 내 말, 내 기분의 모든 것이 축구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아니,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
“몸이 왜 안 좋아?”
“감기 걸렸나 봐요. 목도 까끌까끌하고.”
밥을 떠 입에 넣었는데 아무 맛도 느껴지질 않았다. 플라스틱을 씹는 것처럼 무미했고,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껄끄럽기만 했다.
입에 있는 것을 오물오물 씹어 겨우 삼키고, 밥그릇에 물을 부었다.
“왜 밥에 물을 말아? 입맛이 없어?”
“잘 안 넘어가서요.”
“진짜 감기가 온 모양인데? 겨울도 아닌데 왜 갑자기 감기라니.”
“……그러게요.”
새벽마다 찬물로 샤워를 하며 난리를 쳤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결과에는 항상 원인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이번만큼은 모른 척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럼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병원에 가봐야지. 내일이라도 당장 병원 가. 이제 애도 아닌데, 아프면 혼자서라도 병원에 가야지. 엄마가 병원 가라고 할 때까지 버티고 있어, 왜. 운동하는 애가 몸을 축내면 어떻게 해?”
이제 운동 안 하는데. 하지만 하루 이틀로 인식이 변하는 것은 아닌지, 어머니는 몸이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운동선수가 몸 관리를 안 한다고 혼을 내셨다.
“내일 토요일이잖아요.”
“토요일도 오전에는 진료하지 않나? 더 심해지기 전에 미리 가봐야지. 주사 독한 놈으로 한 대 놔달라고 해. 집에 감기약이 있는지 모르겠다.”
밥을 먹다 말고 일어선 어머니가 거실 서랍장을 뒤적거려 약 몇 종류를 가져오셨다.
“뭘 먹어야 하나. 이건 진통제고, 이건 가래 있을 때 먹는 거, 이건 소염제.”
집에 별의별 약이 다 있구나. 새삼스럽게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병원에 가서 받아 오는 약은 다 조제약인데, 저런 알약은 왜 저렇게 많이 있는 걸까.
“입맛 없더라도 몇 술이라도 떠. 그래야 약을 먹지.”
“응, 먹고 있어요.”
단맛, 짠맛도 느껴지지 않아서, 물에 만 밥만 숟가락으로 떠 입에 넣었다.
느릿느릿 밥알을 씹어 삼키는데, 한참이나 약을 뒤적거리던 어머니가 알약 두 개를 내 옆에 밀어두었다.
“열도 있지?”
“조금요.”
“이건 해열진통제, 이건 콧물 기침 감기약.”
“콧물은 안 나오는데.”
“그래도 감기약이라니까 효과는 있겠지.”
왠지 조금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다. 정말 효과가 있을까. 감기라고는 해도 목감기와 코감기는 증상부터 다른데. 내가 뺨을 긁적이자 어머니가 괜찮아, 하고 손을 내저으셨다.
“이거 먹고 한숨 푹 자고, 내일 아침에 병원부터 가봐. 응? 그냥 있으면 더 심해지니까.”
“알았어요.”
“대답만 하지 말고.”
“꼭 갈게요.”
그렇게 대답했지만 어머니는 쉽사리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차피 감기는 병원에 가면 7일, 병원 안 가면 일주일이라는 말도 있는데. 하지만 그런 속내를 감추고 병원에 꼭 가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꾸역꾸역 물에 만 밥을 반 그릇 정도 떠먹고, 더는 입맛이 없어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어머니의 감시하에 약까지 먹고 나서야, 매서운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감기는 잘 걸리지도 않던 녀석이. 그거 봐라. 하던 운동을 안 하니까, 몸에 탈 나는 거.”
딱히 운동을 안 해서 감기에 걸린 건 아닌데. 그냥 며칠 동안 계속 찬물로 샤워를 해서 감기에 걸린 건데.
하지만 어머니는 지금 내 일상의 모든 것이 축구를 관둔 일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계신 듯했다. 그런 것으로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를 타박하려고 하는 말은 아닐 테니까. 어머니도 미안하고 내가 안쓰러워서 속상한 마음에 하는 말씀일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냥 모른 척하는 방법을 택했다.
∞ ∞ ∞
―나야.
일주일 만에 전화를 해서는 나야, 하고 말하기에 나는 별다른 말 없이 네, 하고 대꾸했다.
―자고 있었어?
“아뇨, 이제 자려고 누워있었어요.”
늦게 오는 누나 덕분에 작은 방에 이불을 깔고 누운 참이었다. 내일 병원에 가려면 일찍 자야 한다며 등을 밀어 방으로 들여보내는 어머니 때문에 컴퓨터를 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벌써? 오늘은 일찍 자네.
“네, 좀…….”
얼버무리듯이 대꾸를 하니, 하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 그 짧은 침묵이 마치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 어색하고 갑갑한 침묵은 대체 뭘까.
―내일 나 좀 늦게 끝날 것 같아.
대뜸 내뱉는 말에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너 지금 엄청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하원은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어색했던 분위기가 하원의 불퉁거림으로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나는 웃으며 아니에요, 하고 답했다.
“아니, ……사실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하긴 했어요.”
―나 보기 싫은 거야?
“형이 왜 보기 싫어요? 엄청 보고 싶죠.”
웃으며 답하자 하원이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저번에 말이야, 하고 운을 뗐다.
―저번에 내가…… 그래서 너 화났을 줄 알고.
하원이 언급한 일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얼굴이 붉어졌다. 겨우 누그러진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 나는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며 머쓱한 마음에 코를 찡긋거렸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전화도 안 했어요?”
―너 엄청 쌩한 얼굴로 가버렸잖아.
그건 부끄러워서 그런 거고. 거기서 형, 참 좋은 경험이었어요. 하고 웃으면서 말하는 것도 웃기잖아요. 하지만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르는 민하원은 나름대로 고민하고 걱정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전화도 안 해요?”
―너 화났을까 봐 무서워서.
“제가 뭐가 무서워요.”
―난 너 화나면 무서워.
“제가 언제 화낸 적 있어요?”
―없지만 엄청 무서울 것 같아. 단번에 연락 끊어버리고 모르는 사람처럼 전화하지 마세요. 이러면 어떻게 해. 그러면 나 엉엉 울 것 같단 말이야.
하원의 말에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이 사람은 대체 뭘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진짜 내가 하원에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리고 너도 전화 안 했잖아.
“그거야 항상 전화하던 사람이 연락 없으니까 바쁜 줄 알고 안 했던 거죠.”
―용주 나빠. 내가 연락 안 하면 절대 먼저 연락 안 할 거지? 서용주, 정말 정말 나빠. 나 같은 건 생각도 안 하는 거지?
그런 투정은 애들이나 하는 거예요. 내가 평소에 형을 얼마나 생각하는데요. 얼마나 생각하면 매일 밤 그런 꿈을 꾸겠어요.
차마 하원에게는 말하지 못할 것이라서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그냥 웃기만 하고. 밉다.
“미우니까 이번 주는 못 봐도 괜찮겠네요.”
―아냐, 안 괜찮아!
하원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휴대폰 너머에서 하원에게 뭐라고 하는 윤석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옆에 매니저님 계시는 거예요?”
―응, 같이 있어.
그럼 통화도 조심해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괜히 하원이 이상한 말을 입에 담을까 걱정이 되어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튼 내일은 늦게 끝나니까 일요일에 만날까? 왜 항상 토요일, 일요일 이틀 다 만나지 못하는 걸까. 이건 윤석진의 저주야. 아얏.
옆에서 듣고 있던 윤석진이 하원을 때린 모양인지 하원이 우는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이번 주는 만나기 힘들 것 같아요.”
―왜? 정말 나 보기 싫은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무슨 약속 있어?
“아뇨, 감기가 걸려서요.”
―또 감기 핑계.
하원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안 믿어, 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나는 피식 웃으면서도 핑계 아니에요, 하고 말해주었다.
“정말 감기 걸렸어요. 지금도 목소리 이상하잖아요.”
―그렇긴 한데…… 난 자다 일어난 줄 알았지. 기침도 안 하고. 그냥 핑계 대는 거 아냐?
“아니라니까요.”
감기를 핑계로 거짓말을 한 전적이 있는지라 하원은 쉽게 믿어주질 않았다. 아픈데 믿어주지 않는 것도 조금은 슬프네.
“지금 기침 안 하는 게 아니라 참고 있는 거라고요. 전화할 때 기침하는 거 엄청 듣기 싫잖아요.”
거짓말이 아니라 따듯하게 데운 물을 이불 옆에 두고 기침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홀짝거리는 중이었다.
간질간질 목에 가래가 낀 것처럼 금방이라도 기침이 나올 성싶으면 휴대폰에서 얼굴을 뗀 상태로 입을 막고 작게 기침을 하니 하원이 알아차릴 리 없었다.
“감기 걸렸다고 거짓말해서 벌 받나 봐요. 엄마가 애도 아닌데,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그냥 버틴다고 혼냈어요.”
―아픈데 혼내다니 너무하셨다.
“그죠? 형이 내 편 들어주니까 새삼스럽게 서러워지네요.”
―약은 먹었어?
“엄마가 집에 있는 약 찾아주셔서 먹었어요. 좀 자려고요. 자고 일어나면 감기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감기가 얼마나 질척질척하게 구는데. 그렇게 해서 낫지 않는다니까. 어머니 말씀처럼 병원에 다녀와야지.
하원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병원 다녀와.
“지금 문 닫았을 시간인데요?”
―연장 같은 거 안 하나?
“글쎄요, 동네 병원이 연장 근무를 할까요.”
처음 듣는 소리인데. 턱을 문지르며 말하자 하원이 에이 씨, 하고 짜증을 부렸다.
―감기 걸렸는데 병원도 안 가고. 나쁜 아이야.
아이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만 착한 아이는 아니니까 어느 정도는 맞는 말 같기는 하다. 내가 별다른 대꾸 없이 웃기만 하자 하원이 아휴,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감기는 왜 걸린 거야?
“요즘 잠도 푹 못 자고, 새벽에 찬물로 샤워하고 그래서 그런가 봐요.”
―새벽에 찬물로 샤워를 왜 해? 그러니까 감기 걸리지.
매일 밤마다 꿈에서 형이랑 으쌰으쌰를 하다 보면 속옷도 빨아야 하고, 뜨거운 몸을 식히는 데는 찬물 샤워가 최고라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차마 말하지 못하는 말을 목으로 넘기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일단 내일 전화할게, 그때까지 푹 쉬고 있어. 몸 따뜻하게 하고, 찬 거 먹지 말고, 입맛 없어도 밥 꼭 먹고, 약은 사둔 거 있다고 했으니까 그거 챙겨서 먹고.
조금 전에 이미 다 끝냈는데. 밥도 먹었고, 있는 약도 먹었고, 따뜻하게 이불까지 덮고 누워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드물게 어른처럼 나를 챙기는 하원의 말에 웃음을 삼키며 네, 하고 고분고분 대답을 했다.
―내일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
“형 만나는 거 아니면 평소에도 나갈 일 별로 없어요. 내일은 감기 걸렸으니까 집에 처박혀 있어야죠.”
―아니, 병원은 다녀와야지.
“그럴게요. 토요일에 병원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볼게요.”
―그래, 착해. 토요일이라도 오전에 진료하는 병원 있을 거야. 촬영 끝나면 전화할 테니까, 병원 다녀와서 꼭 집에 있어.
“네.”
확답을 받은 후에야 조금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하원이 전화를 끊었다.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통화를 하니 좋기는 좋네.
하원과 통화를 하거나 마주하기가 몹시 어색해서 연락이 오면 어쩌지 하고 걱정하는 반면 연락이 오지 않으니 묘하게 서운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먼저 연락을 해주니 고맙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다음에는 꼭 먼저 전화해봐야지. 하원이 바쁠지도 모른다며 항상 먼저 전화하기를 꺼렸는데 그것도 다 핑계임을 알고는 있다.
아직까지도 그만큼 자신이 없다는 것이겠지. 그렇지만 하원이 이렇게 나를 생각해주는데 조금은 자신감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통화를 마친 휴대폰을 손으로 느리게 문지르며 다음에는 꼭 먼저 전화를 하자, 하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