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2권) (6/17)

6

헐레벌떡 뛰어왔지만 가게 근처에서 하원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사람들 눈에 띄어 어디로 끌려간 것은 아닐까. 아니면 도망을 갔다거나.

가게에 인접한 골목들을 눈으로 쓱 훑어보며 하원이 있음 직한 곳을 찾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두어 번 신호가 가기도 전에 하원이 전화를 받았다.

“형, 어디예요?”

―나 중국집 근처.

“저도 근처에 와 있는데 어느 골목에 계세요?”

주변을 둘러보며 묻자 잠시 틈을 두고 하원이 답했다.

―용주 혹시 마스크 썼어?

“아, 네. 저 보여요?”

―응, 거기 잠깐 서 있어.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뭐지?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있자, 저쪽에 서 있던 차에 시동이 걸리며 느리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윤석진이 몰고 다니던 밴이 아니라 중형 세단이라서 설마 했는데 내 옆으로 다가온 차가 멈추며 창문이 지잉, 내려가면서 그 안으로 하원의 얼굴이 보였다.

“타.”

하원의 말에 재빨리 조수석에 올라타자 하원이 능숙하게 차를 몰아 골목을 빠져나가며 생긋 웃었다.

“형 차예요?”

“응, 근데 보통은 밴 타고 이동하니까 잘 안 쓰게 돼. 끌고 다니는 것도 귀찮고 해서.”

“그런데 오늘은 왜요?”

“용주 기다리려고 끌고 나왔어.”

처음부터 생각해두었던 계획이라는 건가. 기분 좋은 듯 웃고 있는 하원의 옆모습을 보면서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의외로 계획적인 사람인지도 모르겠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고 있는데 신호에 걸린 틈을 타 하원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웬 마스크야? 난 설마설마했지.”

저야말로 다가오는 차를 보고 설마설마했죠. 그래도 골목 전봇대 뒤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다행이긴 했지만.

하원의 지적에 얼굴을 절반 정도 가린 마스크를 손으로 매만지며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요.”

“감기? 아직 안 추운데?”

“그러게요. 건강 하면 서용주인데 갑자기 이러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만들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슬쩍 미간을 찌푸린 하원은 손을 뻗어 귀에 걸린 마스크 끈을 건드렸다. 그가 마스크를 벗기려고 함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하원의 손을 밀어냈다.

“형 감기 옮으면 안 되니까 마스크 쓰고 있을래요.”

“난 감기 안 걸려.”

“누구는 감기 걸린다고 생각하고 걸리나. 저도 감기 안 걸릴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내 말에 하원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형, 신호 바뀌었어요.”

내 말에 그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고 다시 차를 몰았으나 여전히 불퉁한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보는데 마스크로 얼굴 다 가리고.”

“솔직히 다 가린 건 아니다. 입만 가린 거죠.”

“너 코까지 안 보여. 어디서 마스크는 큰 걸 하고 나타나가지고.”

이런 생각 하면 안 되지만 구시렁거리는 하원이 귀여워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네.

“형 집으로 갈 거죠?”

“어디 놀러 갈까?”

“형 연예인이거든요.”

“연예인은 놀러 가면 안 되나?”

“글쎄요, 전 연예인이 아니라서 모르겠네요.”

하지만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다 알아보는 얼굴로 어디를 다닐 수 있을까. 순간 궁금해져서 나는 형, 하고 운전 중인 하원을 불렀다.

“형은 어디로 놀러 다녀요?”

“글쎄, 석진이 집하고 우리 집?”

“……그건 놀러 가는 게 아니잖아요.”

노래방이나 피시방은 아니더라도 뭔가 건전한 취미생활 장소라든지 하다못해 동료나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간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그러한 예상을 깨고 나온 대답에 조금 슬퍼졌다.

“친구들 만나면 뭐 해요?”

“좀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네. 가끔 만나면 밥 먹고 차 마시는 정도랄까. 술도 마시러 가. 그런데 난 피곤해서 오래 있지는 않아. 시끄러운 곳 가면 뭐랄까…… 정신이 피로해지는 기분이거든.”

항상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연예인이면서 정말 연예인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하원이 쉬는 날에는 항상 집에 있다고 말하는 것에 윤석진이나 기획사의 압박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어쩌면 백 퍼센트 하원의 의지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뭐 해줄 거야?”

하원이 나를 힐끗 보며 물었다.

“형, 배고파서 나 만나자고 했죠? 닭가슴살 그냥 먹기 싫어서.”

“아냐!”

“나 막 밥해주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아냐!”

내 농담에 하원이 거세게 부정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내 말에 하원이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사실은, 하고 말을 늘였다.

“너 요리하는 모습이 좋아.”

신호에 걸려 잠깐 멈춘 사이 하원은 핸들에 얼굴을 기댄 상태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약간은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도 같은데.

분홍빛으로 물든 하원의 뺨을 바라보며 나는 덩달아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냥…… 너 요리하는 모습이 좋아. 뒤에서 보고 있으면 정말 예뻐. 예뻐서 막 껴안고 싶고, 뽀뽀하고 싶고 그래.”

그래서 부엌에 있을 때마다 이 사람이 등 뒤에서 껴안듯이 기대어있었나 보다. 그동안 하원의 행동들이 묘하게 이해가 가는 듯했지만 차마 동감은 할 수 없었다.

제발 부탁인데 예쁘다고는 말하지 말아줘요.

정말 예쁜 사람한테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은 아무래도 면역이 되질 않았다.

가끔 하원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에 격침당해 가슴이 울렁거리는 일도 이제 겨우 익숙해졌다 싶은데 그 뒤로 더 큰 시련은 주지 않았으면 싶다.

“그래도 맛은 없잖아요.”

“아냐, 맛있어. 누가 맛없대? 또 누구 요리해줬어?”

하원은 손을 내저으며 부정하다 이내 심각한 얼굴이 되어서 내게 물었다.

“해본 음식도 아니고 레시피 찾아서 보고 처음 해보는 것들이라 맛있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처음 해보는 것인데도 그렇게 맛있는 거라면 용주는 요리사 해도 되겠다. 그런데 정말 누구 요리해줬던 거야?”

“요리해줄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집에서는 어머니가 음식 하시고, 기껏해야 축구부 숙소에서 라면 끓이는 게 전부인데.”

다행이다, 하고 중얼거리던 하원은 뒤에서 빵빵 울리는 경적 소리에 급하게 차를 출발시키면서도 해죽 웃었다.

“어디 가서 요리하면 절대 안 돼. 그러다 누가 반해서 쫓아오면 큰일이잖아.”

가만히 앉아 하원의 말을 듣던 나는 순간 귀를 후비고는 뭐라고요? 하고 묻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어떻게 저런 생각, 저런 발상을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진짜 실현 가능성 없는 말이거든요.”

“왜? 용주가 예쁜 데다가 성격도 좋고 요리까지 잘해서 난 좀 걱정이야. 내 눈에도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을 리 없잖아. 항상 같이 있을 수 없는데, 나는 기껏 용주랑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것뿐인데, 그사이에 다른 누군가가 용주 채 갈까 봐 매일 불안해.”

하원이 앞을 보고 운전을 하는 중이라서 정말 다행이다. 대답할 말이 생각나질 않아서 나는 열이 오른 뺨을 창문에 대고 식히는 것을 택했다.

“다른 사람 요리해주고 그러면 절대 안 돼. 알았지?”

“네에.”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현명하게 왜요? 하고 묻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빨리 이 화젯거리에서 벗어나고자 나는 하원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오늘은 꼬치를 해드릴게요.”

“꼬치?”

상황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지. 그리고 나의 예상과 다르지 않게 오늘 만들 음식에 대해 말을 하자 하원은 크게 관심을 나타냈다.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무슨 꼬치? 하고 묻는 하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꼬치에 무엇을 집어넣을까, 하고 덩달아 진지하게 고민을 해버렸다.

“야채 넣고 닭가슴살 꼬치 해 먹어요.”

“야채 싫은데.”

“사실 저도 고기가 좋아요.”

내 말에 하원은 그렇지? 하고 히히 웃었다.

“그래도 고기는 야채랑 같이 먹을 때가 맛있는 법이거든요. 닭가슴살 야채 꼬치도 맛있을 거예요.”

“난 용주가 해주는 건 다 맛있어.”

아무래도 하원은 강력한 콩깍지에 씐 것이 틀림없다. 나로서는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그 콩깍지가 언제 벗겨질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콩깍지가 씐 지금은 이 상황에 감사하면서 하원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맛있는 야채 넣고 해줄게요.”

“응, 용주가 해주면 닭가슴살도 정말 맛있어.”

좋다고 웃는 하원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나 역시 즐겁게 웃었다.

∞ ∞ ∞

마트에 내려주고 먼저 가 있으면 야채를 사서 뒤따라가겠다는데도 극구 같이 가겠다고 하는 하원 때문에 결국 하원의 아파트 안에 있는 상가에 들러 야채 몇 가지를 샀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타 하원의 집으로 들어서자 하원이 옷을 갈아입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며칠 전까지는 더워서 반팔을 입고 다녔는데 이제는 제법 싸늘해서 웃옷을 걸치고 다녀야 했다. 입고 온 재킷을 벗어 소파에 걸쳐두고 사 온 야채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분명히 오븐을 본 기억이 있는데 하원에게 물으니 오븐? 오븐이 있나? 하고 갸우뚱하기에 야채를 사면서도 오븐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역시나 잘못 본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근은 싫어, 라는 하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래 숨겨서 사 온 당근과 부추, 팽이버섯, 파프리카, 양파를 싱크대에서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깨끗하게 씻었다.

도마와 칼을 꺼내 야채를 다듬고 당근과 파프리카, 양파는 채를 썰고, 팽이버섯과 부추는 손질을 해 적당한 길이로 썰어놓았다.

“당근 결국 샀구나.”

그사이에 옷을 갈아입고 나온 하원이 버릇처럼 등 뒤에 달라붙어 귓가에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투정이 싫지 않아서 나는 피식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근이 얼마나 몸에 좋은데요. 형은 왜 당근을 싫어해요?”

“설컹거리는 느낌이 싫어. 날것은 먹겠는데 익히거나 찌거나 아무튼 요리한 당근은 못 먹겠어.”

어린애도 아니고. 등 뒤로 퍼지는 온기를 느끼며 나는 작게 웃었다.

“냉장고에서 닭가슴살 꺼내주세요.”

“넵!”

손을 뻗어 냉장고 문을 연 하원이 그 안에 한 끼 분량으로 담긴 닭가슴살을 꺼내주었다. 그것을 받아 찬물에 헹궈낸 뒤에 칼로 얇게 포를 떴다.

밑간을 해야 하지만 그러면 다이어트식으로 먹는 의미가 없을 듯해 과감하게 밑간은 포기하기로 했다.

포를 뜬 닭가슴살 위에 썰어두었던 부추와 팽이버섯, 파프리카, 양파를 넣고 꾹꾹 눌러가며 동그랗게 말았다.

당근 정말 싫어, 를 외치는 하원 때문에 결국 당근을 제외한 나머지를 넣어 말아놓은 닭가슴살을 꼬치에 꽂았다.

그리고 남은 야채와 채 썬 당근을 넣어 두어 개 정도 더 닭가슴살을 말았다.

“그건 당근밭이네.”

“이건 제가 먹을게요.”

설마 댁한테 먹으라고 하겠습니까. 내 말에 안심한 듯 크게 한숨을 내쉬는 하원이 귀여워 웃자 하원이 고개를 쑥 내밀어 나를 바라보았다.

“왜 웃어?”

“형 진짜 귀여운 거 알아요?”

“음…… 내가 좀 귀엽기는 하지. 용주는 진짜 예쁜 거 알지?”

네, 제가 졌습니다.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기로 했다.

간장소스를 연하게 만들어 앞뒤로 살짝 발라주고 예열한 오븐에 넣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됩니다.”

하원을 테이블 의자에 앉혀놓고 어지럽혀진 싱크대를 정리하고 있자니 뒤에서 하원이 용주야, 하고 나를 불렀다.

“네?”

“이렇게 뒤에서 너를 보고 있으면 말이야…… 이상하게 배가 간지러워.”

“…….”

말 그대로 정적이었다. 본인은 진지하게 말한 모양이지만 이쪽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어떤 대꾸를 해야 할지 꽤나 고민스러워졌다.

“가슴이 아니라 배요?”

결국 멍청하게 되묻자 하원이 응, 하고 답했다. 묘하게 내 증상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면서 다르다. 난 가끔 하원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간지러울 때가 있던데, 배가 간지러운 건 뭐지.

“날이 건조하니까…… 씻고 나서 바디로션 같은 거 바르세요.”

“열심히 바르고 있어.”

고개를 끄덕이는 하원을 보면서 조금은 착잡해졌다. 땡, 소리가 나면서 오븐 시간이 다 된 것을 알렸다.

닭가슴살에서 꼬치를 빼 도마에 올리고 살짝 뜨거운 김이 가셨을 때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접시에 담았다. 색색의 야채를 넣어서 알록달록 보기에는 괜찮았지만 과연 맛이 있을지가 걱정이다. 젓가락을 꺼내 접시와 함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와, 맛있겠다.”

“솔직히 간이 거의 되지 않아서 맛은 없을 거예요. 간장소스 연하게 만들어서 살짝 바른 게 전부거든요.”

“그냥 닭가슴살만 먹는 것보다 훨씬 좋아.”

“맛없어도 건강 생각해서 드세요. 다이어트도 좋지만 원푸드 다이어트는 몸에 좋지 않대요.”

하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입 크기로 자른 꼬치를 입에 쏙 넣고 우물거렸다.

“어때요? 맛있어요?”

“응. 맛있어.”

한입 가득 물고 오물거리는 볼이 참 귀엽구나. 가끔 나는 이 사람이 스물셋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또래 친구를 보는 기분, 아니, 아들을 키우는 기분이랄까. 열여덟에 이런 기분은 별로 느끼고 싶지 않은데.

“찍어 먹을 것도 없어서 좀 밍밍할 거예요. 나중에 형 드라마 끝나면 맛있는 것도 많이 해 먹고, 이것도 제대로 소스 만들어서 해 먹어요.”

“드라마 빨리 좀 끝났으면 좋겠다. 운동하는 것도 힘들고, 닭가슴살만 먹는 것도 힘들어. 나를 말려 죽이려고 그러나 봐.”

“닭가슴살만 먹는 건 저도 좀 그런데요, 운동하는 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물론 새벽까지 촬영하고 운동까지 하려면 힘들겠지만요.”

내 말에 하원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용주는 운동부라고 했으니까, 나중에 헬스용품 몇 개 사서 집에 두고 용주가 나 트레이닝시켜줘도 되겠다. 그럼 따로 운동하러 가지 않아도 되잖아.”

축구부와 트레이너는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해맑게 웃는 하원의 얼굴을 보며 그냥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게요, 하고 맞장구를 치자 그렇지? 하고 웃는다. 예쁜 게 죄는 아니지. 역시 축복받은 거다, 이 사람은.

“용주야, 저거 안 먹어?”

하원이 당근밭이라 칭했던, 당근이 빽빽하게 속을 채운 닭가슴살 꼬치를 젓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먹어야죠. 대답하고 무심코 젓가락으로 그것을 집어 든 후에야 입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가 생각이 났다.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나를 하원이 왜 그러냐는 듯 빤히 바라보았다.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마스크를 내리고 먹었더라면 하원이 모르고 넘어갔을 수도 있었을 텐데.

“목마르죠? 물 가져올게요.”

젓가락으로 당근밭 닭가슴살을 집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원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로 재빠르게 마스크를 내리고 입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원래의 목적이었던 물을 한 컵 가져와 하원의 앞에 내려놓자, 하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맛없어요? 싱겁기는 하지만 괜찮은 것도 같은데 맛 이상해요?”

“너 이상해.”

자기야말로 요상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누구한테 이상하다고 하는 것인가.

형 표정이 더 이상해요. 웃으면서 대꾸했지만 하원은 여전히 의혹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빨리 안 먹으면 맛없어서 안 먹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내 말에 다시 젓가락을 들었지만 그렇다고 의혹이 가신 얼굴도 아니었다.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안 먹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고 열심히 먹는 하원을 보고 있노라니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형 먹는 모습 보면 정말 내가 요리를 잘하는 건가 싶어요. 이런 자신감은 별로 좋지 않은데.”

“용주 요리 정말 잘해!”

하원이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형이 자꾸 그렇게 띄워주니까 쓸데없이 자신감만 커지는 거라니까요. 그러면서도 하원의 칭찬이 듣기 싫지는 않았다.

멋쩍어 손으로 뺨을 문지르며 웃자 하원이 따라서 실실 웃었다.

“용주를 내 전용 요리사로 고용할까 봐.”

“개인 트레이너에 전용 요리사까지. 이러다 전용 가정부도 시키시려는 거 아니에요?”

“그거 다 통합하면 뭔 줄 알아?”

“뭔데요?”

“뭐긴. 아내지.”

하원의 말이 너무 생뚱맞아서 나는 네? 하고 반문했다. 그런 나를 보며 하원이 짓궂은 얼굴로 웃었다.

“너 지금 표정 엄청 귀여운 거 알아?”

“아뇨, 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는 얼굴로 보고 있어. 눈 똥그랗게 뜨고.”

“네, 저 지금 그런 생각으로 형 보고 있는 거 맞아요.”

내 말에 하원이 박장대소를 했다.

“아내 몰라? 부인, 안사람, 와이프, 색시. 다 같은 뜻인데 몰라?”

설마 그걸 몰라서 제가 이러고 있겠어요. 내가 당황한 이유를 모르지는 않을 텐데 하원은 계속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만 놀려요.”

“놀리는 거 아냐. 용주가 빨리 커서 나한테 시집왔으면 좋겠다.”

쿨럭. 씹고 있는 것을 삼키려는 순간 들린 하원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기침을 했다. 일순 목이 꽉 막혀서 쿵쿵 가슴을 두드렸다.

눈앞에 저승이 오락가락하는 기분이었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급하게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아.”

물이 흘러 젖은 입술과 턱을 대충 손으로 닦고 마스크를 올렸다. 크게 한숨을 내뱉고는 하원을 보자 왜 그러냐는 듯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정 자신의 죄를 모른다는 것인가.

“나한테 시집오기 싫어?”

싫고 좋고를 떠나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쳐다보셔도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바라보는 하원을 향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래봤자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보이지 않겠지만.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엄청 이상한 표정일 테지.

“나한테 시집 안 올 거야?”

생글생글 웃고 있는 하원을 보다 이내 하원이 장난치는 것임을 알아차리고는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역시나 마스크에 가려 보이지 않을 테지만.

“왜 제가 시집을 가요? 장가가야지.”

“그럼 용주가 나한테 장가오고 내가 시집가면 되겠다. 이렇게 되면 꼬마 신랑이네.”

제 나이 열여덟에 꼬마란 말은 좀 아니지 않나요. 그렇지만 즐겁게 웃는 하원을 보고 있노라니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러게요, 꼬마 신랑이네요.”

“빨리빨리 커서 장가와. 나는 그동안 능력 있는 신부가 되어있어야겠다. 용주가 커서 나이 든 부인이랑은 같이 안 살래요, 하고 말 안 하도록.”

여기서 얼마나 더 커야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네, 하고 답했다.

하원은 신랑 신부 놀이가 꽤 재미있는 모양인지 그 뒤로 내조 잘하는 부인이 되겠다는 둥, 어린 신랑 데리고 살려면 미리미리 피부에도 신경을 써야겠다는 둥 여러 가지를 조잘거렸다.

그것이 싫지는 않아서 나 역시 웃으며 하원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 ∞ ∞

“어제 촬영한 건 언제 나와요?”

설거지를 끝내고 거실로 나와 앉자 하원이 쪼르르 다가와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태어날 때부터 축복받은 것인지, 성장 과정에서 축복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길고 쭉 뻗은 하원의 다리를 감당하지 못하는 소파 덕에 하원은 조금 불편한 포즈로 다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뭐가 좋은지 연신 생글거리는 하원을 내려다보며 어제의 촬영에 관해서 물었다.

“글쎄, 한 몇 주 뒤에나 방영되지 않을까. 촬영하는 거랑 방영되는 거랑은 좀 차이가 있으니까.”

“그렇겠네요. 가족의 울타리는 몇 부작이에요?”

“일단 오십 부작으로 잡아뒀나 봐. 인기 없으면 조기 종영되는 거고, 인기 좀 많다 싶으면 더 늘일 수도 있는데 일단은 오십 부작이래.”

“스토리가 잡혀 있을 텐데도 그렇게 마음대로 늘이고 줄일 수 있나 보네요.”

“위에서 까라면 까는 거지.”

하원답지 않은 말투에 웃자 하원이 왜? 하고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형도 그런 말 쓰는구나 싶어서요.”

“나 너랑 같은 세대거든?”

미안해요. 가끔 훨씬 어린 동생처럼 보이기도 해서요. 생각한 말은 목으로 삼키고 대신 하원의 반듯한 이마를 손끝으로 슬슬 매만졌다.

“오십 부작이면 거의 반년이네요. 이제 겨우 삼 주째인데.”

“멀었지.”

포옥 한숨을 내쉬는 하원의 뺨을 슬슬 쓸어주자 하원이 손을 뻗어 마스크를 툭 건드렸다.

“마스크 정말 안 벗을 거야?”

“네.”

“대답 엄청 단호하다.”

“잘 보셨어요. 엄청 단호하게 말한 거였거든요.”

마스크 끈을 은근슬쩍 잡아당기는 하원의 손을 떼어내자 하원이 칫, 하고 입술을 불퉁거렸다.

“그럼 못 하잖아.”

“뭘요?”

“뽀뽀.”

“감기 옮아서 안 돼요.”

이 사람이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하원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찰싹 때리자 누워있던 하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면서 얼굴도 안 보여주고, 뽀뽀도 안 된다고 그러고. 용주 나쁘다.”

“감기 나으면 해요.”

“감기 언제 나아?”

“글쎄요, 다음 주?”

“다음 주에 감기 떨어진다고 어떻게 보장해?”

“다음 주면 감기 떨어져요.”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요.”

참으로 유치한 말다툼이다. 대체 어느 누가 뽀뽀를 언제 할 것인가로 싸우겠느냔 말이다. 그것이 유치한 다툼이라는 건 아는데 또 나름 진지하다.

일주일이면 낫는다며 다음 주를 기약하는 나와 다음 주에도 계속 감기에 걸려 있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하원은 유치하고도 진지한 대립을 하고 있었다.

다음 주에 감기 나아요. 걸리지도 않은 감기가 낫지 않을 리 없잖아요. 그렇게 말해버릴 수도 없고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자 하원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용주 이제 나랑 뽀뽀하기 싫구나.”

그런 얼굴로 자꾸 뽀뽀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은 좀 그만둘래요?

하원이 뽀뽀, 뽀뽀 할 때마다 낯간지러워 죽을 것 같았다. 가슴이 간질거리면서 자꾸 호흡이 가빠진다.

뽀뽀보다 더한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말하고 있는 사람이 하원이라서 그런지 덩달아 순수해지며 발그레 볼을 붉히게 된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정말 아니에요. 형 매일 촬영하느라 피곤하잖아요. 피곤한 상태에서는 면역력도 약해져서 금방 감기 같은 것에 옮는다니까요.”

“감기 안 걸린다니까.”

“그건 알 수 없는 거죠.”

“알았어. 그럼 감기 걸린다고 쳐. 감기 옮아도 좋으니까 난 그냥 용주랑 뽀뽀할래.”

돌진하는 소처럼 달려드는 하원을 피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잽싸게 나를 소파 등받이로 밀어 가둔 하원이 마스크를 움켜잡았다.

“아!”

“감기 걸려도 괜찮…….”

괜찮다니까, 라고 말하려는 것이겠지.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하원을 향해 나는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거봐요, 뽀뽀는 다음 주에 하자니까. 여전히 나를 압박하듯 누르고 있는 하원을 떨어뜨려놓은 후 하원의 손에 들린 마스크를 가져왔다.

“……감기 걸린 거 아니지?”

“네.”

“용주 거짓말쟁이구나.”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던 하원이 소파 등받이에 털썩 기댄 상태로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친구랑 싸운 것치고는 엄청 화려한 얼굴이네.”

딱지가 앉은 입술과 멍이 든 것이 빠지지 않은 얼굴이 보기 좋지 않음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얼굴 보이기 싫었던 건데. 아무래도 이번 주는 그냥 집에 있어야 했나 보다.

“싸운 거 아니에요.”

“그럼 누구한테 맞았어?”

설마 어디 가서 맞고 다니는 덜떨어진 놈으로 생각하지는 않겠지. 힐끗 눈을 굴리자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하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저 축구부라고 얘기했었죠?”

“응.”

“그만뒀어요.”

“그럼 선생님이 때린 거야?”

교사가 이런 식으로 학생 때리면 모가지 잘려요. 요즘은 체벌도 금지라서 몽둥이 가지고 다니는 선생님도 손에 꼽을 정도인데. 고개를 내젓자 “그럼?” 하고 묻는다.

“축구부 나간다고 선배들이 때렸어?”

“비슷해요. 삼 학년 형들이 지금 진로 정하는 시기라 분위기가 안 좋거든요. 그래서 한창 예민해져 있는 상태인데 제가 눈에 띈 거죠. 축구부라고는 해도 정말 축구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어서요.”

“때린 쪽은 후자?”

“뭐 그렇죠.”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자 하원이 손을 뻗어 상처가 난 입가를 슬쩍 건드렸다. 딱지가 크게 져서 아직은 입을 크게 벌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한 일주일만 지나면 흉터가 없어졌을 텐데. 역시 다음 주에 만났어야 했나 보다.

“나쁜 놈들이네. 예쁜 얼굴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예쁜 얼굴은 때릴 곳이 없을지 몰라도 제 얼굴은 아마 때릴 곳이 엄청 많을 겁니다. 뺨을 감싸는 하원의 손을 겹쳐 잡으며 나는 작게 웃었다.

“속상하게 왜 맞아? 때리면 같이 때려야지.”

“저 싸움 엄청 못하거든요.”

싸움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 수 없지만, 차마 그냥 맞아주고 빨리 끝내버리고 싶었어요 라고 말할 수 없어서 대충 둘러댔다.

“데려와. 내가 혼내줄게.”

“참아주세요, 신문 일 면을 장식하고 싶어요? 고딩 폭행한 연예인 민 씨. 이렇게?”

“하나도 안 웃겨.”

하원이 실실 웃는 내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어 흔들었다.

“다른 곳도 봐.”

“어디요?”

“얼굴만 때리지는 않았을 거 아냐.”

티셔츠 아랫부분을 잡아 들치며 하원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놀라 어깨를 밀어내려 했지만 하원이 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티셔츠가 목 있는 곳까지 쑥 끌어 올려졌다. 순간적으로 쌩한 기운이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이거 좀 심하다.”

네, 저도 알아요. 얼굴보다 더 심하게 피떡이 되어있는 복부를 바라보며 하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어야 할 사람은 저인데요. 왠지 심란해지는 마음에 가만히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자 하원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병원은 가봤어?”

“병원 갈 정도는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알아? 뼈가 부러졌을 수도 있고, 장기가 상했을 수도 있잖아.”

“그럼 지금 이렇게 돌아다니지도 못했겠죠.”

그건 그렇지만, 하고 웅얼거리는 하원의 얼굴이 침울해 보였다.

“있어봐. 약이라도 발라야겠다.”

하원이 침실로 들어간 사이 가슴 위로 말려 올라간 티셔츠를 내렸다.

아무리 사내놈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막 옷을 들치나. 나도 부끄러움을 아는 남자인데.

셔츠 끝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하원이 구급상자를 가지고 거실로 나왔다.

“일단 입술 상처는 후시딘 바르고.”

약지에 약을 짜 입술의 상처 위에 살살 발라준다. 가까이 다가온 하원의 얼굴에 잠시 숨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입술 위의 상처를 유심히 보고 있는 하원의 속눈썹이 깜빡이다 이내 파르르 떨렸다.

베란다로 들어오는 햇살에 유난히 긴 속눈썹이 빛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이 사람은 숨을 쉬고 눈을 깜빡거리는 것조차 하나의 예술작품인 듯하다.

“티셔츠 다시 올려봐. 멍든 곳에도 약 좀 바르자.”

“멍든 곳에 무슨 약을 발라요. 그냥 두면 저절로 멍 빠져요.”

내 말에 하원은 빨리 옷 올려, 하고 말했다.

“멍 생겼다고 그냥 두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막 여기저기 부딪치고 다녀서 멍 잘 들거든. 그래서 석진이가 연고 사다 줬어. 이거 은근히 멍 빨리 없어지더라.”

내가 셔츠를 만지작거리고만 있자 하원이 티셔츠를 휙 잡아 올렸다. 훤히 드러난 가슴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멍이 든 곳을 유심히 살펴보던 하원이 다른 약을 꺼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부드럽게 멍이 든 곳 위에 약을 펴서 발라주었다. 약간의 차가운 기운에 움찔 몸을 떨었으나 그것도 잠시, 느린 손가락의 움직임에 조금씩 열기가 몰렸다.

“아파?”

“……아뇨.”

한 박자 느리게 나온 목소리는 약간 낮아져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변화를 느끼지 못했는지 하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 아파? 하고 다시 물었다.

“안 아픈데 왜 몸을 움찔거려?”

“그냥 좀…….”

복부에 든 커다란 멍 위를 마사지하듯 느리게 문지르며 약을 펴 바른 하원은 상처가 난 다른 부위에 다시 후시딘을 발라주었다. 기름기가 많은 탓인지 하원의 손가락이 딱지가 앉은 상처 위를 부드럽게 오갔다.

“일단 약은 다 발랐어. 집에 갈 때 멍든 곳에 바르는 약 가져가.”

“아니에요. 그냥 두세요. 제가 갈 때 약국 들러 사 갈게요.”

“오늘 일요일이라서 약국 문 안 열어. 가져가서 발라. 다음 주에 확인할 거야. 흉터 없는지, 멍은 다 사라졌는지.”

뭘 또 그걸 확인까지 하려고 그러나요. 그냥 두면 저절로 없어지는 게 멍이고 상처인데.

축구를 하다 보면 항상 멍을 달고 사는 나와는 다르게 텔레비전에 얼굴을 비추는 직업을 가진 하원이기에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지도 모르겠다.

이것 역시 하원이 내게 신경 쓰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져서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고 있어! 옷 내리면 약이 닦이잖아.”

약 바르는 것이 끝난 듯해 턱 아래까지 올라간 셔츠를 내리려고 하자 하원이 내 손을 막았다.

하지만 형, 이렇게 가슴을 드러내놓고 있는 것도 조금 웃기지 않나요. 저도 나름 부끄러움을 아는 남자라니까요.

“제가 여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슴을 훌러덩 내놓고 있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것 같아요.”

“물론 밖에 나가서 그러면 안 되지. 그런데 지금은 나만 보니까 괜찮아.”

그건 또 무슨 논리인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는 나를 보던 하원이 씨익 웃으며 목 아래로 시선을 내린다.

가슴 위로 머무르는 하원의 시선이 느껴져 나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바라보는 시선에 입안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축구 하고 운동하고 그래서 그런지 용주도 몸 좋다. 이건 뭐 헬스로 만든 몸이랑은 또 다르네.”

“형, 너무 빤히 보는 거 아니에요?”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 같다. 처음엔 분명 건전한 시선이었는데 그 뒤로 장난기가 담기더니 그 위로 열기가 더해졌다.

아이와도 같이 순진한 얼굴 위로 어느새 남자의 얼굴이 씌워졌다.

가끔 하원이 이런 눈, 이런 얼굴을 할 때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게 되어버린다.

지금도 방금까지는 웃으며 말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몸을 굳히고 하원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너…….”

뭔가 말을 하려던 하원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조금은 초조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하원은 앉아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옷은 내리고 있는 게 좋겠다.”

뭔가 짜증이 난 사람처럼 손으로 머리를 한 차례 헤집은 하원이 성큼성큼 걸어 욕실로 쑥 들어가 버렸다.

부끄러워할 사람은 난데. 주섬주섬 올라간 셔츠를 내리며 나는 조금 난감하게 웃었다.

∞ ∞ ∞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어깨가 부딪쳤다. 제법 세게 부딪친 것인지 뼈가 얼얼할 정도였다.

대체 누가 이렇게 세게 부딪치나 얼굴이나 보자는 생각으로 고개를 들자 눈앞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씨발, 눈깔은 장식용이냐?”

“……안녕하세요.”

“존나 꼽다는 표정이다, 너?”

존나 꼬운 표정이 어떤 것인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형의 표정이 혹시 존나 꼬운 표정인가요? 하고 물으면 조용히 학교 뒤 쓰레기장으로 끌려가거나 축구부 숙소로 끌려가 처맞겠지. 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형.”

“아니긴, 표정이 아주 썩었는데.”

제 표정을 썩은 표정이라고 말하기 전에 형의 얼굴을 보고 말씀하셔야죠.

이제는 학교에서도 대놓고 시비를 걸 생각인지 이두열은 내 어깨를 툭 밀치며 으르렁거렸다.

영덕이 형에게 맞아 생긴 상처는 거의 아물어가는 모양이지만, 내 얼굴처럼 이두열의 얼굴 위로도 아직 작은 딱지가 남아있었다.

내가 얼굴에 남은 상처를 보고 있음을 알아차린 이두열이 씨발,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 새끼 너희 가게에서 배달하는 새끼라고 했지?”

이두열이 지칭하는 그 새끼가 영덕이 형을 말하고 있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두열이 어떤 의미로 그것을 묻고 있는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웃고 있던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어내고 이두열을 불렀다.

“형, 저는 형이 축구부 선배이기 때문에 제게 불만이 있다거나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것에 대해 말씀을 하신다면 충분히 들을 자세가 되어있어요. 귀담아들으려고 노력하고 또 제 태도가 문제라고 한다면 태도도 고치도록 노력할 거예요. 하지만 영덕이 형은 아니잖아요.”

“그럼 애초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됐었잖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게 린치로 보였나 보죠.”

“새끼야, 말 다 했어?”

이두열은 내 어깨를 밀치며 으르렁거렸다. 외진 곳도 아니고 다른 애들이 돌아다니는 학교 복도인지라 큰소리는 내지 않으려고 하는 모양이지만 그래봤자 이미 교실 창문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머리통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어, 형. 여기서 뭐 하세요?”

그냥 넘어가려나, 아니면 일을 크게 벌일까. 이두열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조금 긴장하고 있는 사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형도 수업 들어가시는구나. 감독 샘도 너무하시지. 그냥 좀 놀면 안 되나, 왜 수업을 꼬박꼬박 들어가라고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어차피 수업 들어가도 잠만 잘 텐데. 그죠?”

성큼성큼 걸어온 동민이 내 목에 팔을 걸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왜 여기 서 있냐? 저기 영어 올라오고 있다. 빨리 안 가면 졸라 혼나. 형, 저희 먼저 가볼게요.”

이두열이 뭐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동민이 내 목을 끌어당기며 교실로 향해 뛰기 시작했다. 목이 졸린 상태로 덩달아 뛰며 힐끗 동민을 바라보았다.

“아까 은호 형이 한마디 했어. 신경 날카로운 건 알겠는데 서로서로 조용히 지내자고. 졸업 반년도 안 남았는데 괜히 애들 기강 잡겠다고 일 벌이지 말라고. 두열이 형한테 대놓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면 자기한테 말하는 거라는 거 알겠지. 감독 샘도 오셔서 훈련 없을 때 숙소에서 뒹굴지 말고 수업 들어가라고 하더라.”

은호 형과 얘기를 했다고는 하나 그렇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잊지 않고 축구부원들에게 말을 해둔 모양이었다.

은호 형의 말대로 그것이 잘 먹힐지, 아니면 역효과가 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두열만 놓고 본다면 역효과가 날 성싶었다.

이 학년과 삼 학년이 쓰는 층은 엄연히 다른데도 불구하고 이 학년 교실이 있는 아래층까지 내려와 복도를 어슬렁거린다는 것은 어떻게든 나를 잡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고맙다.”

“뭐가? 진짜 영어 뒤에서 걸어오고 있다니까.”

내 말에 모른 척 딴청을 피우며 동민이 너스레를 떨었다.

“수업 들어가서 만날 잠이나 자지만 그래도 선생보다는 먼저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게 예의지.”

“예의를 아는 놈이면 수업 시간에 잠을 자지 마.”

“너무 피곤해서.”

울상을 지으며 말하는 동민의 표정이 웃겨 나는 녀석의 턱을 장난스럽게 툭 건드리고는 먼저 교실로 달려갔다.

∞ ∞ ∞

움찔거리는 등을 보면 자는 것은 아닌데 마치 자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박동민을 보며 대체 저 자식이 뭘 하고 있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늠이 되질 않았다.

매 시간마다 저러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뭔가 몰래 하고 있는 듯한데 대체 뭐지.

궁금한 마음에 선생님이 칠판을 향해 돌아섰을 때 고개를 쭉 내밀어 녀석이 몰래 숨긴 것을 보았다.

“왜?”

등을 타고 넘듯 기대어 녀석이 숨긴 것을 바라보자, 동민이 한쪽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내며 입 모양으로 물었다.

수업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기는 하냐. 뭐 해? 하고 묻자 동민은 보고 있던 휴대폰 화면을 내게 슬쩍 보여주었다.

박동민이 드라마광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UFC 경기를 찾아볼 것처럼 생긴 주제에 의외로 드라마를 좋아해서 집에 있을 때에는 어머니와 함께 티브이 앞에 앉아 하루 종일 드라마만 본다던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법정 드라마인 사랑과 전쟁에 한창 빠져있을 때에는 사 주 후에 뵙겠습니다, 이따위 말을 유행어처럼 쓰고 다녔었다.

한때는 미드에 빠져 모든 미드를 다운받아서 보더니 그 뒤로는 일드를 섭렵했다.

더 볼 게 남았단 말인가. 조금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드라마 다시 보기, 라고 동민이 깨끗한 책 위에 구불거리는 글씨로 써주었다.

됐어, 신경 쓰고 싶지 않다. 너 역시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계속 드라마나 보라는 뜻으로 손을 내젓자 동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자는 것처럼 푹 고개를 수그렸다.

“요즘에도 드라마 봐?”

“요즘? 요즘에도 보지.”

쉬는 시간에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동민에게 물어보자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동민이 나를 쳐다보았다.

“주말 드라마는 뭐 봐?”

“신의 손이라고 의학 드라마 하는 거 봐. 전문적으로 잘 만들었더라고. 신선해.”

동민은 자신의 표현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낄낄 웃었다.

“그거 말고 다른 건 안 봐?”

“여덟 시에 하는 가족 드라마도 봐. 가족의 울타리라고 흔한 가족 드라마인데 이것도 재미있어. 난 요즘 애들 나와서 막 사랑 타령하는 것보다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게 더 재미있더라고.”

열여덟 처먹은 새끼가 요즘 애들이라니. 웃기지도 않지만 그래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얼마나 재미있는데?”

“넌 티브이 잘 안 보잖아? 대체 뭐에 비교해서 얼마만큼 재미있다고 말해줘야 하는 거냐?”

“상 상중 중 중하 하 이렇게 다섯 가지 선택지에서 뽑아봐.”

하찮은 이야깃거리를 진지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열여덟 살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제법 진지한 얼굴로 생각하던 동민은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흐음,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애매한데. 아직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더 지켜봐야겠지만 재미는 있어. 요즘 시대에 맞게 소재를 잘 골라서 써놨거든. 우리 엄마도 재미있다고 챙겨 보시더라고. 그런데 좀 미스 캐스팅이 보여.”

“누구?”

박동민 입에서 재미있다는 말이 나오면 그건 정말 재미있는 거다. 여러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보는 만큼 까다롭지 않고 대중적인 박동민은 그래서인지 드라마에 대해 평가를 할 때는 더 냉정했다.

평소라면 드라마 제목을 말해줘도 그게 뭐야, 하고 넘겼을 테지만 하원이 출연하는 드라마이기에 동민의 평가가 궁금해졌다.

“윤새미라고 가족의 울타리에서 중심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가족 중에 막내딸 역을 맡은 애가 있거든. 얘가 신인이야. 연기를 발로 하지. 나와서 완전 책을 읽더라. 얘기 들어보니까 현중익이 드라마 하는 조건으로 끼워 넣었다고 하더라고. 현중익 알아? 엄청 잘나가는 배우야. 그 집 첫째 아들로 나오거든. 아무튼 재미있게 보다가도 윤새미만 나오면 아주 손발이 오그라들어.”

동민은 정말 싫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윤새미든 현중익이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여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거 말고는 괜찮아?”

“둘째 아들로 나오는 민하원 말이야.”

그 정도면 괜찮은 거지, 하고 넘어가려는 찰나 동민의 입에서 나오는 하원의 이름에 조금 긴장을 했다.

겨우 박동민의 평가를 들으면서 뭘 이렇게 긴장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원의 이야기를 타인이 한다는 것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민하원이랑 민하원 헤어진 애인으로 정다은이 나오거든. 아무래도 이 두 사람이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식으로 될 것 같은데 왠지 안 어울린단 말이야.”

“왜? 또 연기를 발로 해?”

“아니, 그렇지는 않아.”

그게 아니라니 정말 다행이다. 민하원이 연기를 발로 해, 라는 말이 나왔다면 조금 슬퍼하거나 화를 냈을지도.

“따로 놓고 보면 괜찮아. 둘 다 나이는 많지 않은데, 정다은은 꽤 오래 연기를 했고 민하원도 처음 드라마 할 때는 영 감을 못 잡더니 그래도 두 번째라고 연기하는 건 괜찮거든. 그런데 둘을 붙여놓으면 이상하게 그림이 안 된단 말이야.”

“왜?”

“민하원이 남자치고 정말 예뻐. 뭐랄까, 묘하게 중성적인 얼굴이야. 물론 정다은도 안 예쁜 얼굴은 아니지. 그런데 좀 수수하다고 해야 하나. 민하원 면상은 겁나 화려한데 거기에 정다은을 붙여놓으니까 이상하게 정다은 얼굴이 죽어. 좀 슬프지 않냐. 커플인 남자보다 얼굴이 죽는 여자라니.”

“민하원이…… 여자처럼 생겼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뭐랄까, 딱 보면 ‘오, 미인’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얼굴이거든. 그런데 또 몸은 엄청나더라. 저번에 샤워 신이 나왔는데 몸 진짜 죽여주던데. 이야, 감탄했어. 그런 얼굴에 그런 몸은 좀 죄악이야.”

그래, 그 몸을 만들려고 하원이 매일 닭가슴살만 먹고 죽어라 트레이닝을 받고 있지. 그걸 알아준다니 분명 하원도 기뻐할 거다.

“연기력만 놓고 보면 괜찮은데 이상하게 그림이 안 돼. 볼 때마다 슬프더라. 아, 나 다운받은 거 있는데 보여줄까?”

동민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동영상을 플레이시켜 내 앞으로 쑥 내밀었다. 아냐, 보여주지 않아도 이미 다 봤단 말이다.

아는 배우는 하나도 없고 하원이 나오는 장면만 집중해서 본 탓에 다른 배우들 얼굴은 기억나지도 않지만 동민이 말하는 것을 어렴풋하게는 이해할 수 있었다. 정다은이라는 민하원의 헤어진 여자 역을 맡은 배우도 본 기억이 있고.

“아냐, 됐어.”

“그러면서 뭘 자꾸 물어봐. 난 또 주말 드라마 본다고.”

“아니, ……우리 엄마가 재미있다고 보기에 대체 뭔가 싶어서.”

“음, 재미있지. 거기 아들들로 나오는 현중익이나 민하원이 워낙 얼굴이 받쳐주니까 아줌마들이 가족의 울타리를 엄청 좋아해. 게다가 팬들도 보고 하니까 시청률이 제법 나오는 모양이더라고.”

동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민의 입에서 오케이 비슷한 말이 나왔으니 별걱정은 없다.

자신이 재미있다고 말한 드라마는 거의 시청률이 높은 상태로 종방된다고 자랑스럽게 주절거리던 동민의 말을 떠올리며 그럼 가족의 울타리도 걱정은 없겠구나 싶었다.

“오케이, 잘 알았으니까 넌 드라마나 마저 봐.”

내 말에 동민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이 새끼, 라는 뜻을 담은 시선이었다.

어깨를 으쓱이고는 책상 서랍을 뒤적거려 다음 수업 교과서를 꺼내자, 동민은 다시 편한 자세로 엎드려 드라마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 ∞ ∞

수업이 끝나기 십 분 전부터 휴대폰이 울렸다. 줄기차게 울어대는 휴대폰의 진동을 느끼다가 점점 소리가 커지는 기분에 살며시 전원을 껐다.

수업이 끝나고 휴대폰을 다시 켜 전화한 사람을 확인하자 민하원, 이라는 이름이 떴다.

무슨 일로 전화를 했지. 조금 고민하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신호가 두세 번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는다.

―용주야, 수업 중이었어?

“네, 무슨 일 있으세요?”

―미안, 무슨 일은 아니고. 학교 몇 시에 끝나?

“오늘 수업은 지금 다 끝났어요. 이제 종례하고 청소하고 보충수업 하나 있어요.”

물론 오늘 청소도 보충수업도 내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지만. 내 말에 하원이 그래? 하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왜 그래요, 형?”

―너 태영 고등학교 맞지?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학교 이름을 말한 적이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해보았지만 내 입으로 말한 기억이 없다.

어떻게 안 거지. 그런 내 물음에 하원이 휴대폰 너머에서 작게 웃었다.

―용주네 가게 근처에서 애들이 그 학교 교복 입고 돌아다니는 거 많이 봤어. 그래서 용주도 그 학교 다니겠구나 했지.

주변에 학교가 두세 개 몰려있는데 용케 찍어 맞췄구나 싶었다.

“맞아요, 태영 고등학교.”

―다행이다. 나 너희 학교에 와 있거든.

“네에?”

놀란 나머지 크게 소리를 내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수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하원에게 물었다.

“여긴 왜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운동이 일찍 끝났거든. 촬영은 조금 이따 가면 되는 거라 중간에 너 잠깐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하원의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원이 학교로 찾아오는 것은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은 일인지라 놀라긴 했으나, 하원이 ‘보고 싶어서’ 하고 말하자 아무렴 어때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지금 어디 있는데요?”

―학교 교문 보이는 곳에 차 세워두고 전화하고 있어.

“그럼 거기 잠깐 계세요. 저 금방 나갈게요.”

―종례랑 청소해야 한다며.

“괜찮아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어차피 아직 운동부를 나온 것으로 되어있지 않아 담임도 많이 신경 쓰지는 않고 있었다.

청소도 주번이 아닌 이상은 자신의 자리 주변만 치우면 되는 식이고. 이 뒤에 있을 보충수업도 들어본 적이 없다.

담임만 만나지 않고 나간다면 종례에 빠져도 별 상관은 없겠지. 잠깐만 기다려요. 그렇게 말하고 통화를 끝낸 뒤 서둘러 가방을 둘러멨다.

수업이 막 끝난지라 시끄러운 복도를 재빠르게 뛰어 학교 건물을 나왔다.

중간중간 복도를 돌아다니는 교사가 없는지 살펴야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마주치는 일 없이 무사히 교문까지 나올 수 있었다.

하원이 어디에 차를 대놓았는지 찾으려 두리번거리고 있자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되어있던 차가 느린 속도로 다가와 내 옆에 멈춰 섰다.

“용주야.”

창문이 내려가며 그 안으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것을 확인하고는 재빠르게 조수석에 올라타 창문을 올렸다.

“형, 학교 왔다고 해서 놀랐어요.”

“미안. 용주가 너무 보고 싶어서. 기분 나빴어?”

“아뇨, 기분 나쁠 게 뭐 있어요. 형 얼굴 보니까 좋기만 한데. 그냥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라서 조금 놀란 것뿐이에요.”

“나도 용주 얼굴 보니까 좋다.”

하원은 차를 출발시키며 실실 웃었다.

“촬영은 언제 하러 가시는데요?”

“한 시간 뒤에.”

“그럼 지금 준비하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차피 가서 메이크업 받고 옷 갈아입고 해야 해서 이대로 가면 돼. 용주랑 드라이브 좀 하다가 집 근처에 내려주고 가면 되니까.”

괜찮다고 웃는 하원을 보며 잘은 모르겠지만 하원이 괜찮다니까 괜찮은 것이겠지, 하고 생각해버렸다. 며칠 전에 본 얼굴이지만 주중에 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조금 느낌이 색다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거 매니저님이 끌고 다니던 차 아니에요?”

“엄연히 말하면 회사 차지. 운동 갔다가 오는 길이라서 석진이가 태워다 줬거든.”

“그럼 매니저님은요?”

“알아서 오라고 버리고 왔어. 엄청 뭐라고 하더라.”

뭐라고 할 만하죠. 고개를 끄덕였지만 하원은 개의치 않는 것처럼 웃었다. 그 웃음이 참으로 천진난만하여 나까지 아무렴 어때, 하고 생각하게 되어버릴 정도였다.

“그래서 드라이브 코스는 어디예요?”

“용주네 동네.”

“네?”

조금 어이가 없어 웃자 농담, 하고 답이 돌아왔다.

“한강 근처로 한 바퀴 돌까? 그러면 시간 얼추 맞을 것 같네.”

“좋아요.”

연상의 애인과의 드라이브라. 왠지 정말 연애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원은 카 오디오를 조작해서 잔잔하게 음악을 틀어놓고 능숙하게 운전을 했다. 그 모습을 조수석에 앉아 빤히 바라보고 있자 기분이 묘했다.

또 시작인가. 이놈의 가슴은 시도 때도 없이 울렁거린다.

아직 차가 막힐 시간은 아닌지라 조금 빠르게 한강에 도착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한산한 곳에 차를 세운 하원이 약간 몸을 틀어 나를 바라보았다.

“약은 잘 바르고 있어?”

하원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딱지도 저절로 떨어졌고 흉도 남지 않아서 입술은 깨끗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하원이 손을 뻗어 내 턱을 잡고 자신을 향하게 했다.

“속상하게 말이야, 맞고 다니고.”

“형이 그렇게 말하면 제가 만날 맞고 다니는 찌질이 같잖아요.”

“맞았던 건 사실이잖아.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하원이 핀잔하며 내 입술을 살폈다. 상처가 깨끗하게 나았음을 확인하고는 찡그리고 있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이제 뽀뽀할 수 있겠네.”

그놈의 뽀뽀.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하원이 헤헤 웃었다.

“또 어디 가서 맞고 오면 정말 화낼 거야.”

“맞을 때 맞더라도 이제는 한 대라도 때리고 올게요.”

“아예 맞을 일을 하지 마.”

“제가 뭐 맞을 일을 하고 다니나요. 마음먹고 시비 걸면 못 피한다고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하원이 그건 그렇지, 하고 답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하원의 얼굴이 다가왔다.

어느새 안전벨트를 푼 모양인지 하원의 상체가 조수석으로 넘어오다시피 했다. 반사적으로 하원의 어깨를 안으며 눈을 감았다.

입술 위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살짝 입술을 마주하고 베이비 키스를 하던 하원이 혀를 내밀어 톡톡 입술을 건드렸다. 살며시 입술을 벌리자 입술 위에서 노닐던 하원의 혀가 매끄럽게 밀려 들어왔다.

거칠지 않고 부드러운 움직임. 키스 자체는 분명 자극적인데 외설스럽지는 않았다.

하원의 손이 뒷머리를 감싸고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겹쳐진 입술이 더욱 깊게 맞닿았다.

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고 빠는 하원의 행동에 나 역시 조심스럽게 하원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마주 닿은 피부와는 또 다른 부드러운 감촉은 가슴을 간질거리게 했다.

톡톡 조심스럽게 입술을 건드리는 혀를 확 낚아챈 하원이 입속으로 끌어당겼다. 아플 정도로 빨아당겨지고 깨물려 반사적으로 하원의 어깨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파?”

입술을 마주한 상태로 하원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대답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 대신 고개만 내저었다.

“요즘 이상하게 추워.”

“추워요? 감기 걸리…….”

“감기 아냐.”

내 말에 하원이 단호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여전히 입술을 마주하고 있어서 하원이 말을 할 때마다 입술 위로 숨결이 쏟아졌다. 그것이 분명한 열기를 담고 있어 내 얼굴까지 덩달아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추운데 너랑 있으면 더워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 뜨거워.”

하원이 내뱉은 문장 중에 이상한 단어는 하나도 없었지만, 묘하게도 그것이 더 나를 부끄럽고 설레게 만들었다.

“이상해. 예전에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그 뒤로 가까이 있고 싶고 손을 잡고 싶고 그러다 껴안고 싶고 만지고 싶어졌어. 그걸 다 하니까 이제는 막 키스하고 싶고 그래서 참을 수가 없을 정도야.”

고백 아닌 고백에 할 말을 잃은 나는 그저 하원의 얼굴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것이 하원만의 생각은 아니다.

나 역시도 하원과 있으면 순수하게 즐거웠던 것이 이제는 조금 성적인 접촉을 기대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연애를 하면 그런가 봐요.”

“그래? 다들 그런가?”

“다들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하원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나도 형이랑 같거든요.”

내 대답에 마주한 하원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예쁘게 휘어졌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과 눈썹마저도 예쁘다.

손을 들어 하원의 뺨을 살며시 잡고 하원의 눈가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배시시 웃던 하원이 이내 으으, 하고 신음을 흘렸다.

“왜 그래요?”

“싫어, 말 안 할래.”

하원은 내게서 몸을 떼어내고 차 핸들 위로 팔을 겹쳐 올리고는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하원의 귀가 약간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형, 왜요?”

“말하면 용주 화낼 것 같아.”

“화 안 낼게요. 왜 그래요?”

좋은 분위기였는데 왜 갑자기 이러는 것일까. 내가 화낼 일은 또 무엇이고. 하원의 어깨를 잡아 살짝 흔들며 묻자, 하원이 갑자기 어깨를 굳히며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저번부터 자꾸 이상해.”

“뭐가요?”

“자꾸…… 자꾸 서.”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이 서냐고 물으면 안 되는 것이겠지. 같은 남자이니만큼 하원이 말하는 게 이해가 되기도 하면서 설마 나를 상대로 선단 말이야? 하고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반사작용 아닐까요.”

“아냐, 촬영 때 키스 신 같은 거 있어도 이러지는 않는단 말이야. 단순한 반사작용이 아니라 너니까 그러는 거라고.”

하원의 말에 순간적으로 얼굴에 열이 몰렸다. 아직까지는 그쪽으로 의식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하원의 말을 듣고 나니 묘하게 나까지 신경 쓰게 되어버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가슴이 간질거리고 몸에서 열기가 도는 것이 그것의 전조증상은 아니었을까. 조만간 나까지 그런 현상을 경험하게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형 진짜 그런 말 아무렇지 않게 할래요?”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 아냐. 엄청 부끄럽다고.”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귓가를 붉게 물들인 하원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귓불은 물론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하원을 바라보며 나는 조금 민망한 목소리로 짐승, 하고 중얼거렸다.

“으, 그러게. 나 몰랐는데 진짜 짐승인가 봐.”

“남자는 짐승이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나 너무 그렇다. 화나지?”

“형이 말하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형 얘기 듣고 나니까 나까지 의식하게 되어버리잖아요.”

나는 하원에게서 시선을 돌려 차 앞으로 보이는 한강을 바라보았다.

“나까지 짐승이 될 것 같다고요.”

“정말? 나만 그런 거 아냐?”

아직까지는 형만 그렇지만 조만간 둘 다 짐승이 될 것 같네요.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왠지 하원이 의기소침해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대신 네, 하고 답했다.

“나 저번에 용주 가슴 보고 화장실 갔었어.”

네, 알아요.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 갔었……는데 혹시 그 이유가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아니겠죠.

하원을 바라보자 힐끗 고개를 돌린 하원이 눈만 내놓고 나를 쳐다보았다.

눈가가 벌겋게 물든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그 이유가 맞는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열기가 몰렸다.

“형, 너무 솔직해도 문제인 것 같아요.”

“역시 이상하지?”

하원은 다시 팔 위로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네, 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아니에요, 라고 말하기에도 그렇고. 대답 대신 손을 뻗어 하원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사실 이런 말 듣는 거 처음이라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요.”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으로서는 이런 일이 처음인 게 당연하겠지만. 나는 의기소침해 있는 하원을 달래고자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그래도 화나거나 하지는 않아요.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기분 좋은 것 같아요. 그만큼 형이 날 좋아하고 있구나, 생각되거든요.”

“나 정말 용주 좋아해.”

하원은 여전히 팔에 얼굴을 묻은 상태로 웅얼거렸다.

“다행이에요.”

그런 하원을 보며 나는 작게 웃었다.

“나는 나만 형을 많이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아냐, 나도 용주 많이 좋아해. 아마 내가 더 많이 좋아할 거야.”

“아니에요, 내가 더 많이 좋아할걸요.”

“아니라니까.”

고개를 든 하원이 나를 향해 항의하듯 말했다.

“나는 매일매일 용주를 생각할 정도로 좋아해. 매일 전화하고 싶고 매일 보고 싶을 정도로 좋아해.”

“저는요, 형이 나온다는 이유 때문에 안 보는 드라마를 챙겨 볼 정도로 형을 좋아해요.”

“나는 촬영하면서도 용주랑 같이 있고 싶어서 촬영하기 싫을 정도로 좋아해.”

“저는 형이 매일 닭가슴살만 먹는 게 마음이 아파서 인터넷으로 요리 블로그 돌아다니며 닭가슴살 요리를 찾아볼 정도로 형을 좋아해요. 형이 제가 하는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게 기뻐서 매번 새로운 것을 해주고 싶을 정도로 좋아해요.”

“나는 주말에 용주 오면 보내기 싫을 정도로 좋아해. 보쌈해서 데리고 살고 싶을 정도로 좋아해.”

“저는 가끔 형이 내 아들이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좋아해요.”

“……그건 좀 아니지 않아?”

유치한 말다툼처럼 이어지던 대화 중간에 하원이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왜요? 형은 이 얘기 몰라요? 남자를 너무 사랑한 여자가 이렇게 말하잖아요. 다음 생에는 그 남자의 엄마로 태어나고 싶다고. 가장 큰 사랑을 줄 수 있고, 헤어짐 없이 끝까지 사랑할 수 있으니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 싶다고. 종종 이런 말 많이 나오는데요.”

“그래도 부모와는 키스도 못 하잖아. 그럼 근친이 되어버리니까.”

그거야 에로스가 아니라 플라토닉을 말하는 거죠. 형이 말하는 건 에로스고. 난처하게 웃으면서도 하원의 말에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아무튼요, 이런 낯부끄러운 말을 잘도 할 정도로 저는 형을 좋아해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말하자 하원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입을 벌렸다.

“나는 용주 생각하면서 자위할 정도로 좋아해.”

“됐어요, 그건. 그냥 안 들었다고 할래요.”

“왜! 화 안 난다며.”

“화나는 건 아니지만 부끄럽단 말이에요.”

“부끄러운 건 내가 부끄러워야지.”

“형이 안 부끄러워하니까 제가 부끄러워지잖아요.”

“둘 다 안 부끄러워하면 되지.”

순수한 것인지 아니면 능청스러운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하원과 말을 주고받다 결국 웃음을 터뜨리자 하원이 덩달아 따라 웃었다.

“엄청 바보 같은 대화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도 결론은 나왔잖아.”

“뭐요?”

“엄청 엄청 좋아하고 있다는 거.”

“그러네요.”

결론은 엄청 좋아하고 있다는 거죠. 명쾌한 하원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사람.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원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움직여 발그레한 뺨을 감쌌다. 몸을 내밀어 하원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자 하원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요기도.”

이 사람이 진짜. 살짝 눈을 흘기면서도 하원의 요구대로 입술 위에도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춰주었다.

히히, 웃는 하원을 보면 아이처럼 순수한 것도 같은데 가끔가다 내뱉는 말이 문제다.

아무튼 너무 솔직해서 탈이란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노리고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정말 지능적인 것이고.

작게 웃으며 하원의 입술에 거푸 입을 맞추고 있는 찰나 요란한 벨 소리가 들렸다. 진동으로 해둔 내 휴대폰일 리는 없고, 하원을 바라보자 쳇, 하고 혀를 차며 주머니를 뒤적거려 휴대폰을 꺼낸다.

“하여튼 윤석진은 꼭 분위기 좋을 때마다 초를 쳐.”

“어서 전화 받아요. 매니저님이 별일 없는데 전화하지는 않을 테니까.”

내 말에 하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나 화났소, 하는 의미겠지만 그것마저도 귀여운 투정으로 보여 웃음이 나왔다. 알았다니까, 하고 말을 길게 늘이며 답하고는 전화를 끊은 하원이 나를 바라보았다.

“촬영장 오래.”

“늦은 거 아니에요?”

“아냐, 차 끌고 대체 어디 갔냐고. 안 하던 짓 하니까 엄청 불안한가 봐. 남 연애도 못 하게.”

구시렁거리는 하원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늦지 않게 가야죠. 얼른 가세요. 시간 촉박하면 전 여기서 지하철 타고 가도 돼요.”

“아냐, 용주 집에 데려다주고 가도 시간 남아.”

하원은 안전벨트를 매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나 역시 자세를 바로 해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주말에 한 번씩 보다가 이렇게 주중에 만나니까 좋다.”

“저도요.”

“수업은 항상 이 시간에 끝나?”

“네, 전 종례 끝나면 바로 집에 오니까요. 보충수업 안 하거든요.”

“그렇구나.”

하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그럼 말이야, 하고 운을 뗐다.

“나 가끔 이렇게 찾아와도 되려나?”

“하지만 형 바쁘잖아요.”

“그러니까 가끔 시간 될 때. 너무 자주는 아니고 가끔 한 번씩. 그럼 귀찮지 않겠지?”

“제 걱정을 하실 게 아니라 형 걱정을 하셔야죠. 바쁘고 피곤하실 때만 아니면 전 괜찮아요.”

내 말에 하원은 다행이다, 하고 웃었다.

“사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건 너무 힘들어. 만날 주말이었으면 좋겠다 싶다니까. 게다가 주말이라고 해도 촬영 있으면 만나는 시간 잡는 것도 힘드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촬영이라는 게 딱딱 시간 맞춰 시작하고 시간 맞춰 끝나는 건 아닐 테니까요.”

“이해심 많은 애인이 이래서 좋구나 싶기도 한데 조금 서운하다.”

하원의 입에서 나오는 애인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살랑거렸다. 계절은 낙엽 지는 가을인데 가슴에는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대는 것 같다.

“뭐가요?”

“나만 용주 보고 싶어서 몸달아 하는 것 같아서.”

“서운해하지 마세요. 저도 항상 형 보고 싶으니까요.”

이래서 연애를 하면 유치해진다고 하나 보다. 이런 말을 낯도 붉히지 않고 내뱉는 스스로가 신기해서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연애를 하겠지. 제발 그렇다고 누군가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오늘 얼굴 봤다고 주말 건너뛰면 안 돼.”

“지금 겨우 삼십 분 얼굴 본 거 가지고 주말 대신하려고 했던 거예요?”

“용주가 그럴까 봐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거잖아.”

“전 형이 은근히 그걸 바라고 말한 건 아닌가 묻는 건데요.”

“아냐.”

“저도 아니에요.”

오늘따라 하원과의 대화가 왜 이렇게 유치하고 닭살이 돋지.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부끄러운 대화를 하면서도 그것이 싫지 않은 나 자신이 이상하다. 하지만 정말 나쁘지는 않아. 오히려 좋아서 몸서리칠 지경이었다.

저번에도 느낀 것이지만 하원은 운전을 자주 하지 않는다는 말과는 다르게 여유롭고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우리 집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여 가게가 아닌 집 근처에 도착했다. 집 앞까지 태워다주겠다는 하원을 만류하여 집 앞 골목길에 차를 세우게 했다.

“형, 운전 조심해서 가야 해요.”

“응, 나 운전 잘하지 않아?”

“잘해요. 잘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가시라고요.”

“응, 촬영장 도착하면 전화할게.”

“바쁘면 전화 안 하셔도 돼요.”

“그럼 문자 할게.”

끝까지 안 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하원의 고집이 싫지 않아서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문자 기다릴게요.”

“응, 조심해서 들어가.”

하원이 얼굴을 들이밀어 내 뺨에 쪽, 입을 맞추고는 빠르게 떨어져 나갔다. 하원의 기습 뽀뽀를 받고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헤헤, 하고 웃었다.

“주말에 봐요.”

나 역시도 하원의 뺨에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그러기 시작하면 또 시간을 한참 지체하게 될 듯싶어 아쉽지만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운전 조심하세요.”

“알았으니까 빨리 들어가.”

“가는 거 보고 들어갈래요.”

“싫어. 용주 집에 들어가는 거 보고 갈래.”

이렇게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진다는 것이지. 결국 하원의 촬영 시간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내가 항복 선언을 하고 집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며 힐끗 골목 어귀를 돌아보자 그때야 차를 후진시켜 골목을 빠져나가는 하원의 차가 보였다.

“아무튼 은근히 고집 있어.”

그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받아주는 나도 문제인 것 같지만.

머리를 설레설레 내젓지만 그렇다고 미워할 수는 없는지라 결국 웃음을 흘리며 집으로 들어섰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