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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이 풀리지 않았던 모양인지 곤히 자고 있다. 새근새근 아이처럼 잠이 든 하원을 힐끗 내려다보고 티브이 볼륨을 조금 줄였다.
드라마가 시작한 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그새 잠이 들어버린 하원이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계속 하품을 한다 했지.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까지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드라마가 시작되고 그쪽으로 신경을 쓰다 보니 어느새 조용해진 하원은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잠이 들어있었다.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겨주며 드러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드라마를 찍을 땐 코디가 골라준 옷을 입고 메이크업을 받겠지. 항상 보는 얼굴이 이 얼굴이라서 다른 모습은 상상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나쁘지는 않겠지. 민하원은 넝마를 입혀놔도 패션으로 소화할 남자니까.
딱딱한 거실 바닥에서 조금 쌀쌀한지 팔다리를 웅크리고 모로 누워 잠든 하원이 안쓰러웠지만, 너무 곤히 자고 있어 침대에 가서 편히 누워 자라고 깨우기도 미안할 정도였다.
결국 하원에게 허벅지를 내주고 티브이 볼륨을 줄인 상태로 나는 홀로 드라마를 보았다.
벌써 3화인 드라마. 제법 흥미진진하게 이어지고 있을 스토리였지만 집중해서 보지 않은 탓에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종종 있었고, 배우들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해 하원을 제외하면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더욱 곤란했다.
가족 드라마라서 그런지 등장인물이 많은 것도 문제였다.
나이 든 배우들은 그럭저럭 구분하겠는데, 젊은 애들은 왜 저렇게 얼굴이 비슷한지. 가족이라는 설정 때문에 일부러 비슷한 얼굴들을 뽑은 것인가.
웃기지도 않은 가설을 내세우며 나는 피식 웃었다.
색색거리는 하원의 숨소리를 배경 삼아 한참 드라마를 보고 있을 무렵 철컥하고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의아한 마음에 잠든 하원을 보았다가 철컥 소리를 내는 현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띠띠띠띠 버튼 누르는 소리와 함께 잠금이 해제되며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이 새끼 아직도 자나 보네.”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하며 들어온 사람은 윤석진이었다. 그는 익숙한 걸음으로 들어와 하원의 침실로 직진했다.
하원이 침실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인지 벌컥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 윤석진은 하원이 보이질 않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또 어딜 나간…… 어?”
머리를 긁적이며 거실로 나오던 윤석진이 소파 아래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일어나려고 했지만 허벅지를 베고 잠이 든 하원 때문에 앉은 자리에서 꾸벅 인사를 하자, 윤석진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주말이라고 놀러 온 모양이네?”
민하원 빠돌이를 대하는 것처럼 학교 안 가는 날이라고 쪼르르 달려왔어? 하는 느낌을 받았지만, 질문 그 자체만을 생각하자면 맞는 말이었기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원이는 손님이 왔는데 자고 있는 거야?”
“여태 일어나 있었어요. 아까 한 시까지 자고 일어나 있다가 드라마 보는 사이에 다시 잠든 것 같아요.”
“아무튼 시간 맞춰 보기만 하는 것도 안 본다니까. 은근히 말 안 들어, 민하원.”
어쩜 이렇게 흉보는 수준도 비슷할까. 윤석진의 말을 들으며 힘겹게 웃음을 삼켰다.
들고 있던 가방을 거실 한쪽에 내려놓은 윤석진이 주방으로 들어갔다가 으악, 소리를 질렀다.
“민하원 이 새끼. 그새를 못 참고 치킨을 시켜 먹었네!”
“그거 형이 먹은 거 아니에요.”
하원이 깰까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치킨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온 윤석진이 그럼? 하고 물었다.
“형은 닭가슴살 먹었고, 그건 제가 시켜 먹은 거예요.”
“하원이는 안 먹었어?”
“네.”
“불쌍하다고 막 입에 넣어주고 거짓말하는 건 아니지?”
“네. 저만 먹었어요.”
저는 진실 된 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티브이에서 언뜻 보았던 개그가 떠올랐다.
“난 용주를 믿어. 앞으로도 절대 먹을 거 주고 그러면 안 된다.”
마치 동물원 원숭이 우리 앞에서 사육사가 먹이를 주지 마세요, 하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들려왔다.
아무래도 하원에게 매니저 욕을 너무 많이 들어서 부정적인 마음이 생긴 모양이다.
미안해요, 매니저님. 속으로 용서를 구하며 나는 윤석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원이 좀 깨워.”
잠든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윤석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깨워야 하는데요? 차마 질문을 할 위치는 아니라고 생각되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의미가 전달된 것인지 윤석진이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운동 갈 시간이야.”
“시간이 늦었는데요?”
“새벽까지 촬영하고 온 놈이 밤낮 가리는 것도 웃기지, 뭐.”
그렇긴 하다. 그래도 이렇게 피곤해서 맥을 못 추는데 운동을 꼭 시켜야 하나.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서 깨우라고 윤석진이 시선으로 재촉해서 어쩔 수 없이 곤히 잠든 하원의 어깨를 흔들었다.
“형, 일어나요.”
“우웅, 졸려.”
하원은 몸을 뒤집어 내 허벅지에 얼굴을 묻고 뺨을 비벼대며 칭얼거렸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려 하늘거린다. 그것을 멍하게 바라보다 다시 잠이 든 듯한 하원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매니저님 오셨어요.”
눈을 비비던 하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형 운동하러 갈 시간이라고 데리러 오셨어요.”
“으으, 짜증나. 윤석진.”
하원은 두 팔을 뻗어 내 목을 끌어안고 꾸물꾸물 상체를 일으켰다. 턱을 어깨에 기대고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보아 아직까지도 잠이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하원의 등에 손을 둘러 살살 쓸어주자 하원이 기분 좋은 듯 흐흐, 하고 웃음을 흘렸다.
“나 얼마나 잤어?”
“잠든 지 삼십 분도 안 되었어요. 아직도 드라마 하고 있잖아요.”
티브이 화면을 가리키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하고는 눈 끝을 접어 예쁘게 웃는다.
“깜빡 잠들었어. 난 멍하게 화면 보고 이러는 거 너무 졸려.”
“티브이 나와서 연기하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에요.”
“그래도 화면 쳐다보고 있는 건 취미에 안 맞아.”
으갸갸, 요상한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켠 하원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진이는?”
“침실로 들어가시는 것 같던데요?”
“남의 침실은 대체 왜 막 들어가나 몰라. 프라이버시 존중이라는 것도 모르나 봐.”
“그래, 모른다. 그건 먹는 거냐?”
하원의 꿍얼거림을 들은 모양인지 침실에서 나온 윤석진이 하원의 얼굴로 가지고 나온 옷가지를 던졌다.
“갈아입어.”
“나중에 가면 안 돼?”
“응, 안 돼.”
단칼에 잘라버리는 윤석진의 대답에 하원이 쿵, 하고 발을 굴렀다.
“용주도 와 있는데 왜! 나중에 가서 하면 되잖아. 누가 안 한대?”
“형, 운동하러 가야 하는 거면 가셔도 돼요. 저도 슬슬 집에 가려고 했거든요. 드라마 보고 나서 집에 가려고 했는데 마침 잘되었어요.”
하원이 이번엔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봐도 어쩔 수 없어요. 저도 아쉽지만 저 때문에 할 일을 안 하시는 건 싫거든요. 마음을 담아 웃자 하원이 우는 표정을 지었다.
“얼른 옷 갈아입어. 드라마 보지도 않을 거면서 뭉그적거리지 말고. 가는 길에 용주도 태워다 주면 되겠네.”
“나중에 간다니까.”
“너 자꾸 그러면 용주 먼저 보낸다.”
윤석진이 시계를 가리키며 마음대로 하라는 듯 말하자 안 간다고 버티던 하원이 결국 씩씩거리며 윤석진이 던진 옷가지를 주워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 단순하다니까. 그렇지?”
차마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어서 슬펐다. 거실 한쪽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찾아서 메자 윤석진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너도 책가방 메고 있으니까 학생 태가 난다.”
“전 원래 학생인데요.”
내 말에 윤석진이 해죽 웃으며 알아, 알아. 하고 내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고등학교 이 학년이라고 했나? 그 나이 또래에 비하면 큰 편 아닌가? 넌 키랑 골격이 커서 그런지 가끔 대학생으로도 보여.”
겉늙었다는 뜻인가. 별다른 대꾸 없이 손바닥으로 느릿하니 뺨을 문지르자 윤석진이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부러워서 그래, 인마. 나도 그렇고, 하원이도 그 나이 땐 엄청 작았거든. 175센티도 안 됐었어. 키가 크는 게 쭉 크는 게 아니라 어느 한순간 훌쩍 자라잖아.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 그 한순간을 기다리고 있고, 하원이는 고3 말에 훌쩍 커서 지금 키가 되더라.”
아직도 한순간을 기다린다는 윤석진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아직까지도 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멋쩍게 웃으며 가만히 서 있자 윤석진이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180 정도 되냐?”
“181이요.”
“부럽다. 요즘 애들은 성장이 너무 좋아. 나도 조금 늦게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딱히 태어난 시기의 문제가 아닌 듯싶은데.
“저놈은 몸은 컸는데 아직 속이 덜 컸어. 짐승 새끼도 아닌데 말로 해서는 들어먹지를 않아.”
“내가 뭘!”
때마침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하원이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뭘?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거다. 모른다고 하면 문제가 있는 거고.”
“그러니까 내가 뭘?”
“됐다. 나가기나 하자.”
한숨을 포옥 내쉬며 윤석진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아휴, 아무튼 잔소리쟁이야. 엄마보다 더 심해.”
하원이 몸서리를 치며 구시렁거렸다. 그런 하원을 보며 윤석진이나 민하원이나 비슷하다고 느끼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잠시 고민해야 했다.
∞ ∞ ∞
수업 분위기를 생각해서인지 반에서 유일한 운동부 두 명을 짝으로 정해 복도 쪽 맨 뒷자리에 배정한 탓에 수업 시간에도 눈치 보지 않고 엎드려 자기 좋은 위치였다.
운동부라서 선생들도 신경 쓰지 않아 수업 시간임에도 수면을 취하는 것에 거리낌은 없었다.
필기 하나 없는 깨끗한 교과서를 펼쳐놓고 대충 과목 교사의 설명을 흘려듣고 있는 나를 향해 모처럼 수업에 들어와 책상에 엎드려 있던 동민이 말했다.
분위기 좀 이상하더라. 조심해.
무엇이 이상하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짐작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못 들은 척 시선을 돌렸고, 동민은 그대로 책상에 얼굴을 처박고 잠이 들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 바로 일이 터질 줄은 몰랐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가지 않을까 생각했던 게 안일했는지도 모른다.
하굣길에 아버지 가게 근처에서 뒷덜미를 잡혀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끌려가는 일 따위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그것이 질 나쁜 동네 깡패도 아니고 안면 있는 축구부 선배라는 사실에 어떻게 대처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서용주, 선배를 무슨 발밑의 똥으로 보냐? 선배를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넌 선배 보고 인사도 안 하냐? 트집 잡는 구실 제1번이다.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흔하게 쓰이는 수법이기에 어찌 보면 식상하기까지 했다.
속으로는 웃을지언정 겉으로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선배들을 바라보며 선선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우리가 안녕하게 생겼냐? 응?”
뒷덜미를 잡혀 끌려와 벽으로 밀쳐지는 바람에 바닥으로 나뒹군 상태로 앉아있자, 가까이 다가온 선배 하나가 내 머리를 손으로 툭툭 밀치며 껄렁하게 말했다.
축구부라고는 하지만 순수하게 축구를 하고자 들어온 인원은 절반 정도이고, 나머지 절반은 공부하기엔 머리가 딸리고 넘치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해 들어온 양아치나 다름없었다.
분명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뽑은 인원일 텐데, 이놈들은 어떻게 들어온 걸까. 재능이 뛰어난 놈들은 아니니까, 있는 집 자식들이려나. 그러한 의문을 속으로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딴생각하다가 못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뒤에서 따라오는 것을 무슨 수로 보겠는가. 멀쩡한 정신으로 길을 걸어가고 있어도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을 알 방법은 없다.
그래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모든 게 내 죄요, 하고 고개를 수그리는 것이 상책이기에 별다른 대꾸 없이 선배를 바라보았다.
“요즘 정신 빼놓고 다니지, 서용주?”
이마를 툭 치는 손이 기분 나쁘다. 반사적으로 찌푸려지는 인상에 어쭈, 하고 단번에 손이 날아왔다.
힘이 들어간 주먹은 아니었지만 사람의 자존심을 긁어내려는 것이 목적인 듯 철썩하고 손바닥이 뺨을 갈겼다.
그러고도 속을 긁으려는 속셈인지 뺨을 툭툭 건드리는 손을 자못 짜증스럽게 밀어내자 이번에는 조금 힘을 가해 뺨을 때린다.
“이 새끼가 하늘 같은 선배 손을 밀어내? 얼굴 봐라. 겁나 짜증난다는 표정이다, 너?”
“뺨을 때리면 누구나 짜증나죠. 아니, 짜증나는 게 아니라 화가 나죠.”
어깨를 건드리고 지나가기만 해도 지랄하는 주제에. 그런 자기 자신은 생각하지도 않고 당연한 것을 트집 잡는다.
이래서 트집 잡으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무섭다는 거구나. 뻔히 보이는 속셈에 혀를 차며 나는 고개를 들어 선배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이두열, 김영서, 구보진. 골치 아픈 인간들만 잘도 골라서 왔구나 싶었다. 하긴 멀쩡한 축구부원이라면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것부터 말이 안 되지.
한창 훈련하고 숙소에 있을 시간인데 여기 몰려와 있다는 것 자체가 축구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런 조합이라면 부장인 임은호는 지금의 상황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골치 아프네.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이두열이 주먹을 날렸다. 배로 꽂힌 주먹은 꽤나 매서워 컥, 신음을 내뱉으며 상체를 구부렸다.
이럴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예상했다고 맞는 것이 아프지 않을 리는 없었다.
“감독 선생님이 아시면 좋을 거 없을 텐데요.”
이를 악물고 말하자 대번에 발이 날아왔다. 가만히 있을 걸 그랬나 보다 싶지만 어차피 맞을 거 한마디라도 더 하는 편이 속은 시원하지 싶다.
“선배가 후배 교육시키는 게 잘못된 거냐?”
이두열의 물음에 뒤에 서 있던 구보진이 아니지, 하고 답했다.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잘하는 것은 좋은데, 지금 상황은 별로 마음에 안 든다.
쯧, 혀를 차자 한 걸음 떨어져 서 있던 김영서가 다가와 머리끄덩이를 잡아 올렸다.
“선배를 봤는데 인사도 안 해, 훈련도 안 나와, 숙소에도 안 오지. 완전 개깡이냐? 이 새끼가 간땡이가 부었어.”
뒷머리를 꽉 잡혀 김영서가 손을 흔드는 대로 머리가 따라 흔들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두열이 발로 허벅지와 종아리를 차대는 바람에 다리가 꺾여 풀썩 주저앉았다.
나름 공을 차는 놈들이라고 발차기가 꽤나 매섭다. 뼈가 욱신거리는 감각에 신음을 내뱉자 구보진이 발을 뻗어 얼굴을 찼다.
이번 건 조금 심한데.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입안의 여린 살이 이빨에 씹히며 피 맛이 났다. 입속을 채우는 핏물을 삼키지 못하고 흘리자 세 놈이 합세해 발길질을 해댔다.
퍽퍽 소리가 골목길에 울렸다. 인적이 드물어서 그런지 유독 큰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머리와 얼굴을 가린다고 손으로 감쌌더니 발길질에 채여 팔의 뼈도 욱신거렸다.
조금만 참고 맞아주자. 처음엔 그런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러다 맞아 죽는 거 아닐까.
팔다리 할 것 없이 온몸을 골고루 발길질하는 선배 같지도 않은 선배들을 향해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꼴에 지들도 선배라고. 같지도 않은 새끼들이 이러고 설치니 더욱 축구부에서 나오고 싶어지는 거다.
운동하려고 들어왔으면 공이나 차, 새끼들아. 자기 인생도 엿같이 사는 판국에 후배들 군기 잡는다고 이러지 말라고.
속으로는 별의별 욕을 다 지껄이면서도 한마디 내뱉을 힘이 없어 욱, 욱 신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야, 좋은 구경이네.”
구경꾼이라고 해도 환영이다. 잠깐만 숨 돌릴 시간이라도 준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타인의 목소리에 발길질이 잠깐 멈추었다.
언제 다시 발이 날아올지 몰라 고개를 들 수는 없었지만 타인의 존재가 이렇게 반가운 적은 처음이었다.
말려달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신고라도 좀 해주시죠. 누군가를 향해 기도하고 있을 무렵 터벅터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씨발, 그냥 조용히 가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거 서용주냐?”
네, 이거 서용주가 맞습니다. 진심으로 대답하고 싶었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고 고개를 들자 선배들 너머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영덕이 형이었다. 배달을 하고 오는 길이었는지 형 너머로 익숙한 오토바이도 보였다.
“좋은 구경일 뻔했는데 좆같네.”
“이쪽이 더 좆같거든?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가시죠?”
이두열이 영덕이 형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지 말아요, 선배. 댁들보다 더한 문제아인지는 모르겠지만 댁들만큼 문제가 많은 사람이기는 하거든요.
그냥 여기서 조용히 헤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지 선배들이 영덕이 형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나도 좋은 마음으로 구경이나 조금 하다 가고 싶은데, 저 새끼가 짱개집 사장 아들이거든. 찌질하게 얻어터지고 다니는 건 마음이 아파서 말이다.”
조용히 넘어가기는 글렀구나. 씨익 웃으며 다가오는 영덕이 형을 바라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흘렸다.
∞ ∞ ∞
“멍청한 놈. 별것도 아닌 새끼들한테 처맞고 다니냐?”
골목길 한쪽에 내던져두었던 책가방을 가져와 내게 건네며 영덕이 형이 피식 웃었다.
“삼 대 일이잖아요.”
“저런 새끼들은 열 놈이 와서 덤벼도 별거 아냐.”
저한테는 별건데요. 영덕이 형의 손에서 가방을 받아 들었지만 힘이 없어서 도로 땅에 내려놓았다.
팔다리는 물론이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방구석에 처박아둔 걸레처럼 힘없이 찌그러져 있자 영덕이 형이 곁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아는 놈들이야?”
“축구부 선배들이요.”
“축구부가 아니라 쌈질부 아냐? 순 양아치더만.”
영덕이 형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맞다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그러네.
힘없이 앉아있자 영덕이 형이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한 대 물고는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축구부 선배들이 왜 떼로 몰려와서 너를 패?”
“관둔다고 했는데 감독 샘이 승인을 안 해주고 있어서요. 서류상으로는 완전히 나온 게 아니라서 좀 위치가 미묘해요.”
“넌 완전히 마음 접었고?”
“……짐 챙겨서 나왔어요.”
“마음까지 챙겨서 나왔냐?”
영덕이 형의 물음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건 그곳에 미련을 남겨두었기 때문일까. 가만히 앉아있는 내 어깨를 영덕이 형이 툭툭 두드려주었다.
“난 또 양아치 새끼들한테 걸려서 삥 뜯기고 있는 줄 알았지. 넌 덩치에 맞지 않게 순해서 말이야.”
“멍청하다고 말해도 돼요.”
“왜 그러냐, 순둥아. 축구부 나와서도 선배라고 맞아주고 있었으면서. 형이 막 감동받아서 눈물 나려고 한다.”
“비웃어도 괜찮아요.”
한숨을 내쉬며 답하자 영덕이 형이 낄낄 웃었다.
“넌 좀 모질어질 필요가 있어. 저딴 놈들한테는 선배 대접도 아깝다. 딱 보기에도 축구 할 놈들도 아니던데.”
“보는 눈이 정확하네요.”
“양아치는 양아치를 알아보는 법이거든.”
담배꽁초를 저 멀리 튕겨낸 영덕이 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때문에 오늘 일 꼬이는 거 아니냐?”
“아뇨. 제가 치고받고 했으면 일이 더 골치 아파졌을 거예요. 슬슬 맞는 것도 힘들었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끙, 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일어나 영덕이 형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형이 멋쩍은 듯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뭐 떨어질 거 있다고 맞고 다녀? 맞아도 좋은 건 상대방이 엄청나게 부자라서 위자료 두둑이 받아낼 수 있을 때나 맞는 거다.”
어이없는 말에 잠시 헛웃음을 내뱉자 형이 슬슬 걸음을 옮겨 오토바이 쪽으로 향했다. 그런 영덕이 형의 뒤를 허겁지겁 뒤따르며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 아버지한테는…….”
“말 안 해, 인마. 조금 농땡이 치고 왔다고 해야겠다.”
“미안해요.”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내가 평소에 농땡이 한 번 안 친 것도 아니고 말이야. 가게 같이 안 갈 거지?”
“네, 그냥 집으로 가야겠어요.”
가게로 가려고 했지만 이 꼴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용히 집으로 가서 씻고 누워야겠다.
어머니나 누나에게 들키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몰래 들어가서 피곤한 척 누우면 되지 않을까.
“조심해서 들어가. 선배 대접해주는 것도 좋지만 또 이런 일 생기면 맞고만 있지 마라. 너 맞고 들어오면 네 부모 가슴은 찢어져.”
시티에 올라탄 영덕이 형이 지나가는 말처럼 툭 내뱉고는 쌩하니 달려가 버린다. 멍하게 영덕이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책가방을 메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어깨랑 옆구리가 아프다. 딱히 그곳만이 아니라 온몸이 아픈 것 같다.
영덕이 형의 말처럼 이번 한 번으로 끝날 성싶지는 않은데 고민이네. 그렇다고 학교 선생님한테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힘없이 걸음을 옮기며 과연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지만 특별한 답이 나오질 않아 더 죽을 것 같았다.
∞ ∞ ∞
―나 지방 내려왔어.
그 말을 듣고 나서인지 하원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그가 어디에 있든 똑같을 텐데도 이상하게 희미하게 느껴져 나는 폰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지방이요?”
―응, 바다에서 촬영하는 게 있어서. 동해나 서해나 똑같은 바다인데 뭐하러 이렇게 멀리 오는지 모르겠네.
“바다 가셨어요?”
―응, 속초 근처야. 파도 소리 들려?
들려? 하고 묻는 말에 네, 들려요. 하고 말해주지 못한 것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갈매기 소리라도 끼룩끼룩 들려오면 정말 바다네요, 하고 말해주겠지만 하원이 들려? 하고 말을 멈춘 이후로 휴대폰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바다에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여름 지나서 물 차가울 텐데.”
―나 말고 누나가 빠져.
슬그머니 말을 돌리자, 하원이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바다에 가 있는 상황이 꽤나 기분을 들뜨게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누나? 무슨 누나?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하원이 말하는 대상이 상대 배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헤어진 애인이요?”
―응. 나는 회상 장면 찍으러 온 거라서 그냥 같이 바닷가 걷기만 하면 돼.
“바닷가 걸으려고 속초까지 가고, 조금 힘 빠지시겠어요.”
―회상 장면이 좀 있어. 그래서 어쩔 수가 없대. 겸사겸사 바다 구경하라는데 별로 신나지는 않네.
촬영을 뭐 신나라고 하나. 하원의 말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신나라고 하는 촬영은 아니지만 신나서 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 어쩌면 하원의 태도가 가장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촬영을 일로만 생각하지 않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면 더 좋은 장면이 나올 수 있겠지. 뭐든 열정을 가지고 즐겁게 하는 사람을 따라갈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럼 오늘 촬영하고 새벽에 오는 거예요?”
―아니, 온 김에 촬영 좀 하고 가려나 봐. 일단 석양 있을 때 찍어야 하고 해 뜰 때 찍어야 하는 장면이 있거든. 나머지 장면이야 괜찮은데 그건 시간의 제약을 받으니까. 아까 해 질 때 찍기는 했는데 다 못 찍어서 내일 일출 장면 찍고 나서 다른 장면 찍다가 일몰 때 한 번 더 찍을 계획이야. 그때 마무리되면 내일 저녁에라도 서울 가는 거고, 아니면 일박 더 해야겠지.
“시간대 맞춰서 찍는 것도 힘든 일이네요.”
―그러게. 모처럼 주말인데.
하원의 아쉬운 목소리에 나 역시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모처럼의 주말인데.
“그렇지만 촬영 때문이니 어쩔 수 없잖아요. 못 보는 만큼 더 열심히 촬영하고 오세요.”
―촬영 일찍 끝나면 용주네 집 근처로 갈게.
“안 돼요. 집에 가서 쉬세요.”
―왜? 얼굴 보고 싶은데.
하원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그 표정이 눈앞에 선해 나는 작게 웃으며 답했다.
“형 피곤하니까 쉬어야죠. 게다가 매니저님이랑 같이 오실 거 아녜요. 매니저님도 피곤하실 텐데.”
―용주는 나 안 보고 싶구나?
“네, 피곤한 상태로 오는 형은 안 보고 싶어요.”
내 말에 하원은 칫, 하고 불만스러움을 나타냈다. 그게 또 귀엽단 말이야. 나는 웃음을 참으며 형, 하고 하원을 불렀다.
“촬영 끝나고 서울 올라오면요, 꼭 집으로 가서 씻고 푹 주무세요. 그리고 일어나서 저한테 연락하시면 제가 형네 집으로 갈게요. 그럼 되죠?”
―그러다 일요일 늦게 끝나서 서울 올라가면?
“그럼 어쩔 수 없죠.”
―용주 너무 매정하다.
엉엉, 하원이 우는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하하 웃어버렸다.
아무튼 민하원이라는 남자는 스물세 살인 주제에 그냥 세 살짜리 행동을 해도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옆에 있었으면 아이 어르듯 살살 달래주면서 뽀얀 뺨에 입이라도 한 번 맞췄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쩝, 입맛을 다셨다.
“기다림이 클수록 만남의 기쁨도 커지는 거래요.”
―만남의 기쁨이 커지기 전에 애타서 죽겠다. 왜 좋은 걸 나중으로 미뤄. 기다리지 않고 지금 당장 만나도 충분히 큰 기쁨인데.
“뭔가 묘하게 맞는 말 같네요.”
―맞는 말 같네요, 가 아니라 맞는 말이야.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이 왜 나온 건데?
조금 다른 비유 같지만 뭐가 다른지 딱 꼬집어 말할 수가 없어서 하원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피곤한 상태로 만나는 건 싫어요. 형 만날 촬영 가는 거 힘들다고 하시잖아요. 새벽까지 촬영하고 집에 와서 몇 시간 자지도 못했는데 운동 가야 한다며 매니저님한테 바로 끌려 나간다고. 잠도 잘 못 자고 피곤하다고.”
―그래도 용주 얼굴 보면 피곤이 사라질 것 같아.
“그거야 생각만 그렇지 피곤이 정말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이제는 종종 하원이 던지는 낯부끄러운 말에도 부드럽게 맞받아치는 여유를 갖게 된 나는 피식 웃기까지 했다. 그것을 들은 모양인지 흥, 하고 하원이 콧방귀를 뀌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건데, 못 만나도 아무렇지 않다는 거지?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게 그거지.
“아무렇지 않은 거랑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거랑은 좀 다르지 않아요?”
―나한테는 같아.
정말 마음이 상한 모양인지 툴툴거리던 하원이 입을 다물었다. 조용해진 하원의 반응에 나는 형, 하고 조심스럽게 하원을 불러보았다. 잠시 대답이 없던 하원이 용주야,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예전에는 말이야…… 촬영하는 게 힘들지만 재미있기도 했어. 그리고 촬영 끝난 뒤에 집에 와서 자는 것도 정말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널 만나고 너랑 같이 있다 보니까 점점 촬영하는 게 즐겁지 않아.
“형. 그렇게 말하니까 꼭 제가 형한테 나쁜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아니야, 계속 들어봐.
담담하게 이어지는 하원의 말에 나는 조금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예전에는 촬영하는 게 즐겁고 좋았던 사람이 나를 만나고 촬영하는 것이 싫어졌다니 안 될 말이지 않은가.
정말 나는 하원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인가.
―촬영을 하고 일을 하면서 느끼던 예전의 즐거움, 기쁨 같은 것을 백으로 친다면 이제는 한 오십 정도라고 할까. 대신 용주를 만나면서 백오십, 이백, 그 이상을 느껴. 내게 즐거움이라는 건 이제껏 백이 최고구나 생각했는데 너를 만난 뒤로는 기쁨과 즐거움의 최고치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거든.
“예전의 저에겐 축구가 전부였지만, 이제는 축구보다 형을 더 좋아하게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죠?”
내 물음에 하원이 웃으며 맞아, 하고 말했다. 청량한 웃음소리에서 문득 바다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형, 바닷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다행이다.
정말 뜬금없다 싶을 정도로 툭 내뱉은 말에도 불구하고 하원은 여전히 웃음기가 녹아있는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내가 보고 있는 바다를 너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거든.
희미하게 바닷바람과 파도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것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은 상태로 크게 숨을 들이마셔 내뱉었다.
“형은 가끔 연애 선수처럼 얘기해요.”
―아니야!
“하지만 어쩔 때는 정말 선수처럼 느껴져요. 순수 순진 청년 콘셉트로 누님들 홀리고 다니는…….”
―제비?
단박에 받아치는 하원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형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얘기를 하는데, 그것에 저는 가끔 가슴이 울렁거리거든요. 그러다 문득 형이 정말 보고 싶어져요. 형은 저를 그렇게 만들어요.”
―하지만 정말 연애 선수 아니야.
불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항의하듯 말하는 하원을 향해 나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형, 하고 불렀다.
“나 지금 형 엄청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거예요.”
―……용주 진짜 고단수다. ……내가 제비면 넌 꽃뱀이야.
“저랑 꽃뱀은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데요.”
―어린데 연상 남자를 홀라당 홀려서 정신 못 차리게 하잖아.
이제껏 웃음을 참아내고 있던 나는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신없이 웃는 바람에 거리를 지나던 사람이 한 번씩 시선을 던졌지만 그것마저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대체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데.
“촬영…… 일찍 끝나고 토요일 밤에 올라올 수 있도록 기도할게요.”
―나도 용주 만나러 갈 수 있도록 열심히 촬영할게.
티격태격해도 결국 마무리는 이렇게 끝나는구나.
친구들이 자기 여자 친구랑 전화를 하면서 전화에 대고 별 미친 짓을 다 한다 싶었는데 조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나 역시 다를 바 없겠지. 그럼에도 나쁘지는 않았다.
“촬영 끝나면…….”
―전화할게.
“네.”
기분 좋게 통화를 끝내고 하원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휴대폰을 가만히 손에 쥐었다.
역시나 보고 싶다. 일주일 만에 만나는 것인데 보고 싶지 않을 리가 없다.
촬영을 빨리 끝내고 내일 저녁에라도 올라왔으면 좋겠다 싶지만, 한편으로 이번 주는 만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멍이 가시지 않은 팔다리와 복부, 그리고 나 맞았습니다 광고를 하듯 입가에 떡하니 남은 상처.
부모님은 모른 척 넘어가셨지만 누나는 학교를 찾아가 봐야 한다며, 아니면 교사에게 전화라도 넣어서 진상을 파악해 처벌해야 한다며 날뛰었다.
공부밖에 모르는 모범생이었던 누나에게는 학교에서 맞고 왔다는 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하원 역시 모른 척 넘어가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하원에게 여기저기서 맞고 다니는 녀석이라고 인식되는 것이 싫었다.
결국 못난 모습 보이기 싫은 허세라고 해도 그게 뭐?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고, 좋지 않은 모습은 감추고 싶은 게 당연한 것 아닐까.
가만히 서서 휴대폰을 내려다보다 이내 전화번호부 목록을 띄웠다. 그룹별 검색 메뉴로 가서 익숙한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흘러나오는 컬러링을 잠시 듣고 있었다.
―여보세요.
“형, 저 용주예요.”
변성기가 지난 굵은 목소리에 맞춰 답하자 잠시 틈을 두고 어, 그래. 하고 대답이 들려왔다.
“바쁘세요?”
―아니, 괜찮아.
“할 말이 있는데 시간 되세요? 혹시 어디 가는 길이세요?”
남자의 목소리 뒤로 들려오는 약간의 소란스러움에 그가 지금 실내가 아닌 밖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조심스럽게 묻자 남자가 아냐, 하고 답했다.
―집에 가는 길이야. 어디서 볼까? 롯데리아나 버거킹?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장소를 고른 남자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조금 더 조용하고 사람들이 없는 장소를 원했다.
“형 집에…… 부모님 계세요?”
할 말이 있다고 일방적으로 만나자고 한 주제에 장소 제공까지 하라는 내가 스스로도 뻔뻔스럽게 느껴졌지만 다른 어떤 곳으로 가야 할지를 몰랐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내 물음에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 말이 없었다.
―부모님 조금 늦게 오실 거야. 오셔도 내 방으로 들어가면 되니까 그럼 우리 집으로 올래?
“네.”
남자가 불러주는 주소를 속으로 되뇌며 통화를 끝냈다.
∞ ∞ ∞
딩동, 벨을 누르자 안에서 누구세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달 왔습니다.”
“배달 안 시켰는데요.”
다시 한번 벨을 누르자 안에서 구시렁거리면서도 현관문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밖을 내다보는 듯하더니 이내 철컥, 잠금이 풀리며 문이 열렸다.
“서용주, 배달 잘못 온 줄 알고 놀랐잖냐.”
“안녕하세요, 형.”
“이 새끼. 아버지 철가방까지 훔쳐 왔냐?”
“아니에요. 허락받고 가져온 겁니다.”
나는 웃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철가방을 앞으로 들이밀며 남자의 집으로 들어섰다.
“아직 저녁 안 드셨죠? 탕수육 가져왔는데 드세요.”
철가방을 들고 거실로 가자 남자가 앉으라며 소파를 권했다. 소파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 탕수육과 아버지 몰래 꺼내 온 소주 두 병을 함께 올려놓자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허, 소리를 냈다.
“뭘 그렇게 보세요. 잔도 가져왔어요.”
나는 주머니에서 소주잔 두 개를 꺼내 소주병 옆에 얌전히 놓아두었다. 탕수육을 감싼 랩을 뜯고 양념을 위에 뿌리자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솔솔 흐른다.
“식으면 맛없어요. 빨리 앉아서 드세요.”
나무젓가락을 내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맞은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젓가락을 받아 들었다. 그것을 보고 나 역시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쪼개 탕수육을 집어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뚜껑을 열고 빈 잔에 소주를 채워 남자에게 건넸다.
“무슨 말 하려고 온 건지는 짐작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건 좀 짐작 못 했네.”
“탕수육에 소주를 짐작해서 뭐하시게요.”
남은 잔에 소주를 채우고 한쪽으로 병을 내려놓았다. 남자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다 나 역시 젓가락을 들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탕수육을 먹으며 소주만 주거니 받거니 했다. 소주 한 병을 비웠을 때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거 이두열 작품이냐?”
남자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배시시 웃기만 했더니 남자가 쯧, 혀를 찼다.
“질문을 좀 바꾸자. 이두열 그 꼬라지가 네 작품이었냐?”
영덕이 형한테 맞을 때도 조금 심상치 않다 했더니 역시나 여파가 큰 모양이었다.
수업에 들어가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우리 모르게 축구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평소 축구부 숙소에서 시간을 때우는 이두열을 축구부 부장인 임은호가 못 보고 지나쳤을 리는 없겠지.
“지나가던 선량한 시민이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준 겁니다. 제가 어떻게 하늘 같은 선배님을 그렇게 팰 수 있겠어요. 게다가 저 싸움 엄청 못하는 거 아시잖아요.”
“말은 잘한다. 이두열 혼자 그랬을 리는 없고 김영서도 따라갔냐?”
숙소에서 같이 뒹군 시간이 있기 때문인지 척하면 척이다. 아마도 내 얼굴과 이두열의 얼굴을 보고 지레짐작한 모양인데 그게 틀리지 않음이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오늘 하려고 하는 얘기는 이두열 때문에?”
“형, ……저 축구부 나온 거 아시죠?”
“공식적으로 전달받은 말은 없어.”
“그래서 지금 상황 조금 묘한 거 알아요.”
빈 병을 밀어두고 남은 소주의 뚜껑을 열어서 은호 형의 잔에 따라주며 말했다.
“한 가지만 묻자. 진짜 나갈 거냐? 축구 정말 그만둘 거야?”
한 가지. 그 한 가지가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은호 형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도 아직까지 답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일 테다.
이제껏 보고 달려왔던 것을 손에서 놓을 거야? 그걸 버리고 무엇을 할 건데?
어쩌면 축구에 대한 미련이라기보다 그것을 손에서 놓고 다른 어떤 것을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 없기에 더욱 막막한지도 모르겠다.
축구가 아닌 다른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내가 축구 말고 다른 것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형은 프로로 안 빠지고 대학 가신다고 했죠?”
“나? 응.”
“처음 축구를 시작할 때는 공 차는 게 좋아서, 순수하게 축구가 좋아서 시작한 거였거든요. 중학교 때는 남들이 너 좀 하는구나. 하고 말하니까 내가 좀 잘하지? 하는 마음으로, 내가 정말 축구를 잘하는구나, 하고 우쭐대면서 축구부에 들어갔었고요. 그러다 운 좋게 감독님 눈에 들어서 테스트도 보고, 지금 축구부도 들어올 수 있었던 거였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탕수육 중자를 가져왔는데 한창 먹성 좋을 때인 사내놈 둘이 달라붙어 먹으니 금방 동났다. 몇 개 남지 않은 탕수육을 빤히 바라보다 개중에 작은 것을 소스 듬뿍 묻혀서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너무 달지 않고, 느끼하지도 않고 담백하고 고소하고 달콤하다. 역시 아버지 탕수육이 최고란 말이야. 우물거리던 것을 꿀꺽 삼키고는 넘치도록 부어둔 소주를 한 모금에 털어 넣었다.
“전 당연히 미래에도 축구를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릴 때에도 미래의 제 모습은 축구 선수였고요. 그게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더 현실적으로 프로 축구 선수가 되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로 나가지 못한다고 해도 대학에 가면 되겠죠. 대학 축구팀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 뒤에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 프로로 갈 수 있을까요? 지금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데 그때 가서 된다고 어떻게 장담하나 싶어요.”
“글쎄, 장담할 수 없지.”
담담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고 있던 은호 형이 당연한 소리를 하네, 하고 말했다.
“어떻게 미래를 장담할 수가 있냐? 지금 내가 축구로 대학에 가는 것도 미래를 확실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가는 건 아냐. 아니, 누구도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장담 못 해. 인생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고, 또 수많은 변수가 있잖아. 어차피 장담할 수 없는 미래이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만들어 나가려고 노력하는 거지.”
“노력한다고 해도 될 수 없다면요.”
“뭐, 그럴 수도 있지. 노력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의 실력도 있어야 하니까.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분명 올라갈 수 있어. 그렇다고는 해도 실력 있는 애들을 이길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노력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 게다가 지금까지 축구를 해왔다면 어느 정도는 실력이 있다는 소리가 되니까. 너 스스로도 축구를 못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잖아?”
은호 형은 젓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웃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나도 충분히 고민했던 것들이니까. 아니, 나뿐만 아니라 고3 애들은 누구나 다 할 법한 고민이지. 딱히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 그런 고민을 해. 우리처럼 운동부 애들도, 수능 준비하는 애들도, 실업계 애들도 고민할 거야. 한 달, 아니 하루의 차이일지 몰라도 열아홉 살과 스무 살의 경계는 뭐랄까, 조금 크잖아. 쭉 다녀왔던 학교의 마지막 단계이기도 하고, 스무 살이면 성인 취급을 받기도 하고. 그렇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질 나이라는 거니까. 누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시킨다고 네, 하고 따라 할 나이도 아니고, 시키는 대로 마음 편하게 학교와 집만 오가는 것도 끝나는 거거든.”
은호 형은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는 빈 잔을 내게 내밀었다. 얼른 소주병을 들어 빈 잔에 소주를 채워주었다.
“보통은 고3 때에나 하는 고민을 지금부터 하고 있다니 서용주, 조금 건방진 고민을 하고 있네.”
미래에 대한 고민이 고3에게만 한정된 것도 아닌데 말이 조금 웃기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탓하는 것이라기보다 웃으려고 하는 농담임을 알기에 나는 은호 형의 말에 동조한다는 듯 실실 웃기만 했다.
“많이 고민하고 있다는 거 알아. 넌 다른 애들에 비해서 생각도 많은 편이고. 또 한번 고민하기 시작하면 그게 한도 끝도 없거든. 그냥 입시 준비하는 애들이야 전공 살려서 직업 갖지 못하면 뭐 그냥 일반 회사에라도 들어가면 되고 그러는데, 우리는 축구 하나만 보고 쭉 가야 하는 거잖아. 그거 아니면 뭐 할 게 있겠냐. 평범하게 공부해서 나온 애들이랑 경쟁해서 회사를 들어가겠어, 뭘 하겠어. 공 차고 운동하던 새끼들이라 머리까지 근육으로 되어있을 텐데 말이야.”
“저희 누나도 그런 소리 하더라고요. 개뿔 기본도 모르는 새끼가 공부해서 대학 갈 거냐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거라고요.”
“이야. 네 누나 마음에 든다. 이번에 대학 들어갔다고 했냐? 예쁘냐?”
내 말에 은호 형이 하하 웃으며 물었다. 그에 나는 과장되게 어깨를 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이번 하계 전지훈련도 안 나온 거야?”
“그때부터 고민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사실 백만 원이 작은 돈은 아니잖아요. 과연 내게 이런 투자를 할 만한 가치가 있나 생각해보니까, 내가 그렇게 미래가 보이는 축구 선수가 될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축구로 먹고살 수 있을까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도 좋지만 사실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요.”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문제는 그게 끝이 없다는 거거든. 남들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고민하는 걸 넌 조금 일찍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돼. 그게 나쁘지는 않아. 하지만 계속 고민만 하고 있으면 그건 조금 문제가 되겠지. 그래서 나온 결론이 축구는 그만둬야겠다, 뭐 이런 거?”
“결론을 말하라고 하시면 결국 그게 되겠네요.”
내 대답에 은호 형은 흐음, 하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나를 바라보았다.
“축구 그만두면 뭘 할 건데?”
“그게 또 고민이에요.”
“그렇지. 축구 대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잖아. 이제까지 쭉 축구 하나만 보고 왔는데 이제 와서 다른 것을 찾는다는 건 쉬운 게 아니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던 것을 계속하게 되는 거고.”
은호 형의 말이 맞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거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가 결정해줄 수도 없는 문제. 계속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하는 문제.
“고민을 하는 것은 나쁘지 않아. 어른들은 쓸모없는 잡생각이라고 하지만 자기 인생에 관한 고민인데 그게 쓸모없을 리가 없지 않냐. 그래도 아직 고민이 해결되지 않았는데 무턱대고 축구를 손에서 놔버리는 것은 너무 성급하지 않아? 고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냐. 단지 축구를 하면서도 고민할 수 있는 문제니까.”
“그래서 또 걱정이에요. 축구를 그만두었는데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 아무래도 나는 축구를 해야 할 것 같다, 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지만 또 계속해서 축구부에 들어있는 상태로 고민을 하게 되면 결국 그냥 축구나 하지, 이런 식이 되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도피처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약해질 수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그럼 결국 이도 저도 아닌 게 될 것 같아요.”
“사실 그게 나쁘지는 않아. 우리는 어린 나이도 아니지만, 모든 것을 책임지기에는 아직…… 뭐라고 해야 하나…….”
한참 동안 적절한 단어를 생각하던 은호 형이 이내 무릎을 치며 말했다.
“미성숙? 그래, 미성숙한 나이거든.”
은호 형은 자신이 생각해낸 단어가 꽤나 마음에 드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네 확실하지 않은 미래도 걱정이겠지만, 그 확실하지 않은 미래에 투자하는 것 역시 걱정이지?”
“……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 당장 네 부모님이 네가 확실하게 돈벌이할 수 있는 일을 해라, 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을 거 아냐.”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듯 은호 형을 바라보자 형은 다 안다는 것처럼 씨익 웃었다.
“그게 다 부모 마음이라는 거다.”
“부모도 아니면서 부모님처럼 말씀하시네요.”
“네가 하는 걱정을 나라고 안 했겠냐?”
은호 형은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때리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 아직까지는 부모가 늙지 않았으니 시행착오도 충분히 겪고 이것저것 고민해본 뒤에 미래를 결정하라고. 미래를 책임지고 또 돈을 벌고, 그런 건 그 뒤에 고민해도 충분하다고. 나이가 들면 걱정하고 싶지 않아도 걱정하게 되는 문제니까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라고 말이야. 그래서 프로로 나가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내게도 기회가 오겠지, 생각하고 대학 진학을 결정했어.”
그렇게 말하는 은호 형은 조금 가벼운 얼굴이었다. 아, 내가 하는 걱정을 남들도 하고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생각이 정리된 것은 아니라 답답한 것은 여전했다.
이 사람은 이렇게 결정했는데 나만 아직 이 자리에서 머무는 듯해 조급함이 생기는 것도 같았다.
내 생각을 알아차린 것인지 은호 형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천히 생각해. 넌 아직 열여덟 살이잖아. 앞으로도 일 년이라는 시간이 네겐 더 있는 거니까. 다른 애들은 고3 올라와서 하는 고민을 넌 지금부터 하고 있으니까 네게는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이 일 년은 더 남은 것이나 마찬가지야.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안심이 되지 않냐? 넌 늦은 게 아니라 빠른 거야. 그렇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남들보다 한 걸음 앞서 있다는 거라고 생각해도 좋아.”
비록 내 고민이 해결되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말해주는 은호 형 덕에 조금은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해결책을 내주진 않았지만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 그 말 한마디에 이렇게 안심이 될 수도 있음이 조금은 신기했다.
어쩌면 나는 그것을 바라고 은호 형을 만나러 왔는지도 모르겠다.
“너 훈련 안 나온다고 애들이 말이 많아. 정신이 빠졌다느니 어쩐다느니. 지들이나 잘할 것이지.”
은호 형의 말에 나는 배시시 웃었다. 딱히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를 말하는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한창 입시 때문에 고민할 시기라 그래. 프로로 나갈 애들은 일찌감치 정해졌을 테고, 아니면 대학교를 가거나 해야 하는데 그것도 불투명하거든. 그 새끼들도 나름 불안하고 스트레스받아서 그거 풀 곳이 없으니까 너한테 더 지랄하는 걸 거야.”
소주병에 남은 소주를 마지막으로 잔에 부어 입에 털어 넣은 은호 형이 가뿐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봤자 반년도 안 남았잖아. 참든지 엎어버리든지는 네 마음이고.”
“엄청 살벌한 말이네요. 엎어버리라니.”
“그럼 뭐, 맞고 다닐래? 네가 말한 정의의 시민이 또 나타나서 구해줄 거라고 어떻게 보장해?”
“그렇긴 하죠.”
영덕이 형에게 보디가드를 부탁해볼까 생각했다가 이내 웃어버렸다.
“저번 하계 전지훈련에 참가 안 했다고 감독님도 너 괘씸하게 생각하고 계시더라.”
“그래서 축구부 나간다고 하는 말도 무시하시나 봐요.”
“설마 그러시겠냐.”
은호 형은 웃기지도 말라는 듯 내 머리를 쿵 하고 주먹으로 아프지 않게 쳤다.
정말이라니까요. 은호 형에게 맞은 정수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나는 장난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감독 생활이 몇 년인데 너 같은 애들 한둘 보겠냐. 다 한때라고 생각하시는 거지. 이렇게 고민하고 방황하고 그러다가 결국 다시 돌아올 거 아니까 그냥 두고 보시는 거야. 싹수 보이지 않는 놈들 축구부에 남겨둬서 뭐에 쓰게?”
형은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 크고도 깊네요. 나는 속으로 말을 삼키며 그저 배시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영덕이 형이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인지라 감독 샘 나쁘네, 하고 생각했던 마음이 흔들려서, 그런가? 하고 생각하게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어차피 네 인생이고, 네 미래니까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라고 말해도 쉽게 거기에 따를 수는 없겠지. 다른 사람들이 네 미래를 책임져줄 수는 없잖아. 어디까지나 조언일 뿐이지. 그러니까 거기에 휩쓸리지는 마. 다만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만큼 무시하지는 말라는 거지. 충분히 귀담아듣고 고민하되 너 스스로 결정을 내리란 말이야.”
“형은 그렇게 고민하고 생각해서 결정한 거예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어쩌면 축구밖에 할 게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라는 마음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그건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면 결국 내겐 축구뿐이다, 라는 말과 같잖아. 똑같은 것이긴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조금은 의미가 달라지는 거지. 거기에 따른 내 마음가짐도 달라지는 거고.”
그렇게 말하는 은호 형의 얼굴은 커다란 결정을 내린 뒤의 사람처럼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순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 고민을 끝내게 되면 저런 얼굴을 할 수 있을까.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을 알아차린 것인지 은호 형이 손을 뻗어 내 정수리를 주먹으로 꾹 누르며 웃었다.
“네가 그렇게 쳐다보니 엄청 부담스럽다.”
“제가 뭘요.”
“네가 탕수육에 소주를 꺼낼 때부터 부담스럽기는 했지. 결국엔 진로 상담하러 온 거였냐?”
진로 상담이라니, 그 말이 더 부담스럽다. 아니요, 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은 감독 샘한테 말 좀 해달라고 부탁드리러 왔었거든요.”
“뭘?”
“축구부 나가겠다고 하는데도 계속 이대로 두시니까요. 상황이 애매해서 축구부원들도 그렇고, 선배들도 탐탁지 않게 여기잖아요. 아무래도 감독 샘이 절 미워해서 엿 먹이려는 건가 싶어서요. 형 말이라면 좀 들어주실지도 모르니까 부탁드리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수리에 다시 쿵, 하고 주먹이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좀 아팠다.
“엿 먹이기는 뭘 엿 먹여?”
잊어버렸다. 은호 형의 감독 샘 무한 신뢰.
“감독님이 널 엿 먹여서 뭐에 쓴다고. 이상한 생각 하지 마라.”
“네.”
나는 애써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한테는 내가 잘 말해둘게. 어차피 그놈들도 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테니까, 잘 말하면 못 알아먹지는 않을 거다. 몇몇 놈들 빼고 말이야.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은호 형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엄청 감사한 말이기는 한데요, 또 두렵기도 하네요.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도 해보고, 그러고 나서 생각이 정리되면 나한테 말해. 계속 축구를 할 거라면 좋은 거고, 그래도 역시 아니라고 결론이 난다면 그땐 내가 감독님한테 말씀드려줄게. 뭐, 올해가 아니라 내년에라도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는 너 삼 학년이잖아. 더 이상 너 까댈 새끼들도 없을 거고.”
오케이? 하고 상황을 정리해버리는 은호 형의 결론에 나는 엉겁결에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열이랑 영서한테도 내가 말은 해두겠지만 그 새끼들이 뭐 내 말을 듣겠냐. 감독님 말씀도 안 듣는 새끼들인데. 역효과 나서 더 널 잡아 팰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고마워요, 형.”
“고맙긴. 어차피 이런 말 하려고 찾아온 주제에.”
은호 형은 남아있는 탕수육을 입으로 쓸어 넣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덕분에 나야말로 잘 먹었다. 얼마냐?”
“됐어요. 중국집 아들인데 아버지가 아들한테 탕수육 값을 받으셨겠어요?”
“예의상 해본 말이야.”
웃으며 말하는 은호 형을 보며 나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빈 그릇을 정리해 철가방 안에 넣고, 빈 소주병과 소주잔도 잘 챙겨 넣었다. 아버지 모르게 소주병 모아두는 박스에 담아둬야겠다.
철가방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은호 형도 따라 일어났다.
“얘기는 이걸로 끝?”
“네, 감사합니다. 상담해달라고 찾아온 건 정말 아니었는데 형 말 듣고 나서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아요.”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는 해도 듣기 좋네.”
“예의상 하는 말 아닌데요.”
“그래, 인마. 알았으니까 열심히 고민해. 고민하다가 또 막히면 가끔 연락도 하고. 말해두지만 너 아직 축구부야. 난 축구부장이고.”
“넵.”
“슬슬 부모님 오실 시간이네. 문 좀 열어놔야겠다. 소주 두 병 마셨다고 술 냄새가 폴폴 나네.”
“죄송해요.”
“좋다고 마신 건 난데, 뭘.”
철가방을 들고 신발을 신고 있자 따라온 은호 형이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힘내라, 서용주.”
“고맙습니다.”
“생각 정리될 때까지 숙소는 오지 마라. 그렇지 않아도 그 새끼들 마음이 심란해서 너 보면 더 심란해져.”
차가운 말이었지만 그것이 나를 내친다는 소리는 아님을 알기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갈 마음도 없었고, 간다고 해도 반겨주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그럼 가볼게요.”
“그래, 조심해서 가라.”
은호 형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고 시간이 훌쩍 지난 모양인지 밖은 꽤 어두워져 있었다.
철가방 하나 사라졌다고 화내는 거 아닌지 몰라. 빨리 가져다 두고 집에 가서 좀 자야지.
오랜만에 술을 마셨더니 급작스럽게 피곤이 몰려왔다.
∞ ∞ ∞
운동을 하다가 안 하려니 몸이 아팠다.
처음에는 훈련 빠지는 것이 마음은 불편할지언정 몸은 편하고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내 그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운동을 죽어라 했을 때보다 더 아프고 쑤셨다.
이래서 사람은 하던 짓을 그만둘 수가 없는 모양인가 보다.
가볍게 몸이라도 풀 생각으로 평일에는 집에 와 저녁을 먹고 나서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을 뛰었고, 주말에는 조금 늦은 아침을 먹고서 운동을 하러 나갔다.
새벽 운동을 해볼까 싶었지만 조기 축구회인지 아저씨들이 나와서 축구를 하는 바람에 그 계획은 살포시 접어두었다.
일요일이라 할 일 없이 운동장으로 놀러 온 아이들이 모여 축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운동장의 둘레를 적당한 속도로 뛰었다.
여기로 차, 여기 패스해. 아이들의 고함 소리가 들릴 때면 가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축구 하는 아이들을 한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정말이지 미련스럽네.”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웬만한 운동으로는 땀이 나질 않아서 앞으로 한두 시간은 더 뛰어야 할 텐데 도저히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결국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방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요란하게 울리는 벨 소리에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가 액정을 보자 낯익은 이름이 떠 있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보는 사람도 없건만 괜히 머쓱해져서는 헛기침을 했다.
“여보세요.”
―용주야!
“형, 촬영 끝났어요?”
―응, 서울이야.
“지금 올라온 거예요?”
―아니, 어제 자정 넘어서 도착했어. 너한테 전화하고 싶었는데 잘 것 같기도 하고 또 네가 집에 가서 자라고 말한 거 생각나서 연락하고 싶은 거 꾹 참았어.
하원의 표정이 눈앞에 선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쩐지 촬영을 하고 온 것치고 목소리가 쌩쌩하다 했지.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참았다는 하원의 말에 왠지 가슴이 뻐근해졌다.
이상하죠. 가끔 형이랑 대화를 하다 보면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가슴이 뻐근할 때가 있어요. 형, 저만 그래요? 저만 이렇게 이상해요?
손으로 가슴을 꾸욱 누르며 나는 짧게 숨을 토해냈다.
―용주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일어났어요?”
―아니. 아까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 다녀왔어. 분명히 윤석진이 쳐들어와서 운동하라고 끌고 갈 거 뻔하니까 미리 해치워버리고 왔지.
“피곤할 텐데 거르지 않고 잘 하시네요.”
―응, 이제 집에 가는 길인데…….
하원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 말끝을 길게 늘였다. 분명히 할 말이 있다는 것이겠지. 나는 조용히 하원의 뒷말을 기다렸다.
―바쁘지 않으면 만나주라. 나 용주 엄청 보고 싶거든.
“그 말 하려고 그렇게 뜸 들였어요?”
하원의 말에 작게 웃으며 물었다. 응, 하고 바로 돌아오는 대답을 들으며 나는 반사적으로 옷장 문을 열었다.
“저도 형 엄청 보고 싶어요.”
―진짜? 다행이다. 용주가 집에 가서 쉬세요, 이러면 울 뻔했어.
“피곤해요? 쉬고 싶어요?”
―아니, 절대 아니. 용주랑 놀 거야.
나랑 만나봤자 같이 놀 것이 뭐 있다고. 어차피 또 하원의 집으로 가서 이런저런 얘기나 하는 것이 전부일 텐데 그게 즐겁다고 말하는 것일까.
“형 집으로 갈게요. 마침 씻고 나와서 옷만 입으면 돼요.”
―그래? 그럼 옷 입고 나올래?
“밖에서 만나려고요?”
연예인이 저런 말을 해도 돼? 나는 순간적으로 말을 멈추고는 생각했다. 내 생각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하원이 웃으며 “앞이야.” 하고 말했다.
“네?”
―용주네 중국집 근처야. 집이랑은 좀 먼가?
“지금 가게 근처라고요?”
―응, 사실 용주 만나려고 가게 근처로 와 있었어.
그러면서 나보고 바쁘지 않으면 만날까? 하고 물었던 건가. 바쁘다고 했으면 어쩔 뻔했어. 그런 대답은 아예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제가 밖에 나와 있었으면 어쩌려고 미리 와 있어요?”
―그럼 울면서 집에 갔겠지. 그래도 혹시나 용주가 만나준다고 하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하원의 목소리는 자신의 행동에 뿌듯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내 판단이 옳았어, 하고 뽐내는 아이와도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더불어 하원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커져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는 손길이 더욱 빨라졌다.
“연예인이 막 길거리에 있어도 되는 거예요?”
―나 지금 숨어있어. 그러니까 빨리 와서 구해줘.
맙소사. 정말 골목 전봇대 뒤에 숨어있는 것은 아니겠지.
민하원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성싶었다. 선글라스에 모자를 눌러 쓰고 가게 근처로 왔던 하원을 떠올리며 나는 다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형, 그러면 제가 빨리 옷 입고 나갈게요. 거기 잠깐만 계세요. 한 십오 분? 십 분?”
―용주야, 천천히 와도 돼. 뛰어오다가 넘어져.
형이 절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네, 하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씻고 나와서 정말 다행이다. 옷을 걸쳐 입고 대충 마른 머리를 빗으며 거울을 본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머리가 문제가 아니네.”
하원을 만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이번 주는 만나지 말고 넘어가자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하원의 전화를 받는 순간 까맣게 잊어버리다니 나도 참 머리가 나쁜 모양이다.
하원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거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이쪽의 상황은 생각하지도 못하다니.
그렇다고 다시 전화를 해서 오늘은 아무래도 만나지 못할 것 같아요, 라고 말할 수는 없고 어쩌지. 잠시 서서 고민을 하던 나는 최후의 수단을 생각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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