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따르르르릉.
전화벨 소리에 반사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여덟 시 이십 분. 아슬아슬한 시간이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조금 고민했다.
받지 마.
귓가에서 들리는 유혹적인 목소리에 굴복하고 싶었지만, 주방 안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아버지와 텅 빈 홀을 바라보고 있자니 무시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 흑룡관입니다.”
―자장면! 자장면 한 그릇!
대뜸 내뱉어지는 말에 한숨이 나왔다.
물론 중국집에 자장면 주문 전화가 아니라면 무슨 전화가 또 올까 싶지만, 적어도 시간이 늦었는데 미안하지만 배달이 되느냐 정도는 물어봐 주었으면 싶었다. 아니, 저기서 ‘미안하지만’이 생략된 말이라도 좋다.
어차피 배달 주문을 받을 각오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지만 자장면 한 그릇이라는 말에 맥이 풀렸다.
배달 시간 끝났다고 말해버릴까. 그런 내 생각이 전해지기라도 했는지 전화를 한 남자는 조금 절박하게 말했다.
―배고파서 그러는데 배달 오래 걸려요?
당연히 배달을 해줄 것처럼 말하는 남자의 말투가 얄미웠지만, 꽤나 절박하기도 하고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배고픔이 절절하게 느껴져 결국 “주소가 어떻게 되세요?” 하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 민들레 빌라 B동 302호. 빨리 가져다주세요.
“네, 최대한 빨리 가져다드릴게요.”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끝까지 ‘빨리빨리’를 외치며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 자장면 한 그릇 배달이요.”
“영덕이가 그릇 수거하러 갔는데 배달 받았어?”
주방에서 고개를 내민 아버지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민들레 빌라래요. 가까우니까 내가 뛰어갔다 오지, 뭐.”
걸어서 오 분 정도 걸리는 빌라였기에 딱히 오토바이가 없어도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다.
아버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다시 주방으로 쑥 들어가셨다.
손으로 면을 뽑아내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릴 텐데.
남자의 다급하던 목소리가 떠올랐지만 그거 모르고 전화했을 리도 없고, 나는 자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행주로 홀의 테이블 위를 닦았다.
철가방 안에 따끈따끈한 자장면과 단무지, 나무젓가락을 넣고 걸음을 옮겼다.
요즘은 뭐든 ‘빨리빨리’를 원하는 시대라서 조금만 배달이 늦어도 사람들이 싫어했다.
삼 분 라면도 아니고, 자장면을 시키면서 뭐 이리 늦냐고 화를 내는 사람들은 꽈배기 굵기의 자장면을 처먹어야 한다고 가끔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도 면전에 대고 뭐라고 할 수 없기에 죄송하다고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지금 배달 가는 집의 남자도 다급하게 전화를 한 것을 보면 분명 배달이 늦었다고 지랄을 해대겠지. 괜히 남의 배고픈 사정 봐준다고 주문받았다가 기분 나쁜 소리나 듣는 게 아닐까 싶다.
302호. 철가방을 들고 능숙하게 계단을 올라 302호의 문 앞에 당도했다.
딩동, 벨을 누르고 안에서 들려올 누구세요, 라는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철컥 문이 열리더니 단숨에 집 안으로 끌어당겨졌다.
“엇.”
“쉿!”
철커덩, 등 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고개를 돌려 멍하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저기…….”
“자장면이지?”
“네, 그렇기는 한데…….”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본 나는 잠시 정신을 놓았던 것 같다.
예쁘다. 이렇게 예쁜 남자를 본 적이 있던가.
우리 가족 중에 제일 소두라고 자신하는 누나보다 더 작아 보이는 얼굴에 눈코입이 다 들어가 있는 것도 신기한데, 선명한 이목구비에 쌍꺼풀이 진 눈은 크고 동그랬다.
피부는 무슨 특별 관리라도 받는 것인지 파리가 앉았다 굴러떨어질 것처럼 매끄러웠고 모공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국적인 귀공자풍, 부잣집 도련님풍의 얼굴을 가진 남자의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와, 자장면 냄새. 진짜 죽인다.”
그 후광이 비치는 얼굴을 가진 남자는 지금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철가방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침이 떨어질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조금 어이없는 얼굴이 되어 남자를 향해 말했다.
“좀 비켜주실래요? 자장면 꺼내드릴게요.”
앞을 딱 막고 있으니 뭘 할 수가 없다. 남자를 향해 말하자, 남자가 손을 내저으며 “안 돼 안 돼.” 하고 만류했다.
“자장면 시키신 거 아니에요?”
“맞아. 그런데 여기는 안 돼. 어디가 좋을까. 어디서 먹어야 냄새가 안 나지?”
남자는 내게 묻고 있었지만 딱히 대답을 들으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산만하게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남자가 내 손을 잡고 거실을 지나 베란다로 향했다.
쭈그리고 앉아있을 때도 범상치 않았는데 일어서니 눈높이가 훌쩍 높아졌다.
이야, 저런 얼굴에 저런 키라니 말도 안 돼.
다리 긴 것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양 남자는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질렀다. 키는 얼마 차이 나지 않는 듯한데 엄청 커 보이는 것은 다리 길이의 차이인가.
남자의 손에 끌려가며 조금 얼빠진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어, 자……잠깐. 신발…….”
의도치 않게 신발을 신은 상태로 남의 집 거실을 걷고 있음을 깨닫고는 당황했다.
자장면 배달에 있어서 이러한 상황은 절대,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아버지를 도와 간간이 자장면 배달을 해왔지만, 시켜놓고 집에 없다든지 늦게 왔다고 다시 가져가라든지 등등의 여러 가지 일은 있었어도 결코 베란다로 끌려가는 일은 없었다.
“여기면 집으로 냄새 안 들어가겠지?”
“네……. 뭐, 그렇겠네요.”
베란다 문을 꼭꼭 닫는 것까지는 좋지만, 현관문과 베란다 문 사이에 고립된 집 안에는 이미 자장면 냄새가 퍼지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남자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철가방에서 자장면과 단무지를 꺼내주었다.
“와, 진짜 맛있겠다. 기다리느라 배고파서 죽는 줄 알았어.”
“저희 집이 손으로 면을 뽑아서요. 수타면이라고요.”
고개를 끄덕이지만 딱히 듣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장면을 앞에 두고 침을 한 바가지 흘릴 것처럼 보는 남자를 향해 나는 이어 말했다.
“다 드시고 그릇은 밖에 두세요. 내일 찾으러 올 겁니다.”
자장면 그릇을 들고 냄새를 맡고 있던 남자가 또다시 “안 돼 안 돼.” 하고 답했다.
조그만 머리가 좌우로 흔들리며 안돼안돼를 내뱉을 때마다 정말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귀엽기는 하지만 서서히 짜증도 났다.
“나 이거 금방 먹어. 잠깐만 기다렸다가 그릇 가져가. 응? 그릇 밖에 두면 석진이가 눈치챌 거야.”
“저……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지만, 가야 하는데요.”
나는 최대한 진지한 얼굴로 말했으나 남자는 일어서 있는 내 손을 잡아 같이 쪼그리고 앉게 했다.
“오 분, 아니, 삼 분이면 다 먹어. 잠깐만 있어봐.”
여기 앉아서 오 분, 아니, 삼 분 동안 댁이 자장면 먹는 꼴을 보고 있으라고?
나는 조금 얼빠진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릇을 감싼 랩을 낑낑거리며 벗기고 있었다. 저 랩을 벗기는 데에만 삼 분이 걸릴 듯싶었다.
“이리 주세요.”
“왜?”
내가 손을 내밀자 남자는 사탕을 뺏길까 두려운 아이처럼 자장면 그릇을 손에 꼭 쥐고 나를 바라보았다. 눈가가 붉어진 것이 설마 울려는 건 아니겠지.
“랩 벗겨 드릴게요. 언제 벗겨서 드시려고요?”
남자의 손에서 자장면 그릇을 건네받은 나는 나무젓가락을 들고 그릇의 가장자리를 살살 문질렀다.
랩이 오돌토돌 일어나는 듯하더니 이내 매끄럽게 그릇 모양으로 잘렸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남자가 오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괜히 힘들게 랩 벗기려고 하지 마시고 이렇게 하면 금방 벗겨져요.”
나는 서비스로 능숙하게 자장면을 비벼주었다.
젓가락을 반으로 똑 잘라 문질러 나무 부스러기를 털어내고, 매끄러운 젓가락 한 쌍으로 자장면을 슥슥 비벼 남자의 앞으로 놓아주니 남자가 눈망울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빨리 안 드시면 면 불어요. 그리고 벌써 오 분 지났는데요.”
나는 힐끗 시계를 보며 말했다.
“아, 응.”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릇을 들고 자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마치 그릇을 파고 들어갈 것처럼 얼굴을 파묻고 먹는 남자를 보며 정말 배가 고팠던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남자의 앞에 랩을 벗긴 단무지 그릇도 밀어주자, 자장이 잔뜩 묻은 젓가락으로 단무지를 집어 오독오독 깨물어 먹는다.
「사람을 볼 때 가장 처음 마주하는 게 얼굴이잖아. 그래서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하는 거고. 얼굴은 재산이고, 무기고, 명함이야. 축구 한다고 뽈뽈거리면서 얼굴 시커멓게 태우지 말고, 미리미리 관리해.」
누나는 항상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러면서 공들여 얼굴 치장을 하는 누나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눈앞의 남자를 보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어떻게 먹으면 얼굴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장을 입가와 볼에 잔뜩 묻히며 먹고 있는데도 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렇게 먹을 만큼 배가 고팠나 보다, 라는 안쓰러움과 함께 볼이 터지도록 자장면을 집어넣고 오물거리는 남자가 귀엽게 보일망정 추하지는 않으니 얼굴이 무기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
남자는 마지막 면발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 먹었다. 조금만 더 배가 고팠다면 그릇까지 핥아 먹을 기세였다.
자장면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바닥으로 내려놓은 남자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자장면 진짜 맛있다.”
“아버지 자장면이 맛있기는 하죠.”
심드렁한 목소리로 긍정하자 남자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너희 아버지가 만드셨어?”
“네, 제가 짱개집 아들이거든요.”
“우와, 진짜 부럽다. 그럼 매일 자장면 먹겠네?”
“그럼 뭐 빵집 아들은 만날 빵만 먹고 살고, 분식집 아들은 떡볶이만 먹고 살겠네요.”
“아닌가?”
남자의 멍청한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사천오백 원입니다.”
나는 남자가 내려놓은 자장면 그릇을 주섬주섬 챙겨 철가방 안에 넣으며 말했다.
이전까지 잘도 대답하던 남자가 이상하게 잠잠하여 철가방 문을 닫고 남자를 바라보자, 볼에 자장을 잔뜩 묻힌 남자가 곤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있잖아.”
“네.”
얼굴이 미인이라는 이유로 나보다 더 나이가 많고, 덩치도 커다란 남자가 손가락을 비비 꼬며 말하는 모습이 묘하게 귀엽다고 한다면 나 역시 얼굴만 밝히는 속물과 다름없는 것일까.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있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예쁘긴 예쁘다. 주변에 이 정도의 퀄리티를 가진 얼굴은 남녀를 통틀어 본 적이 없으니 아무래도 면역이 되질 않았다. 그러니 저런 찌질거리는 행동 하나하나가 귀엽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거겠지.
“나 본 적 없어?”
방금도 생각했던 것처럼 댁같이 미친 미모를 지닌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한 뜻을 담아 고개를 흔들자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기 얼굴을 손가락질했다.
“자세히 봐. 내 얼굴을 보라고.”
“보고 있는데요.”
“나 정말 본 적 없어?”
“우리 아는 사이예요?”
내 물음에 남자는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아니지만, 넌 나를 알아야 하잖아.”
알아야 한다니. 그런 말이 어디 있는가. 해괴한 논리를 펼치는 남자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누구한테 돈 빌린 적 있었나. 사고 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이 남자를 본 기억도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요.”
“나 민하원인데?”
“전 서용주라고 합니다만, 아무래도 모르겠네요. 학교 선배님이세요?”
원치 않게 통성명을 하며 남자에게 물었다.
여전히 풀 죽은 모습을 보면 학교 선배도 아닌 모양이지. 그럼 어디에서 봤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본 적 없는 남자였다. 하긴, 이런 얼굴을 봤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아무래도 초면인 것 같은데요.”
내 말에 남자는 여전히 나 민하원인데,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돈 없으세요?”
설마 돈도 없으면서 자장면을 시켜 먹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겠지.
“외상…… 안 되겠지?”
“아무래도 안 되겠죠.”
요즘 같은 세상에 처음 본 사람을 뭘 믿고.
“나 민하원인데.”
자신을 민하원이라고 애타게 말하며 남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얼굴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러면 얘기가 안 되는데. 나를 알아봐야지 내가 돈을 준다고 하면 필요 없다고 하고, 그러면 내가 공짜로 얻어먹을 수 없으니 사인 열 장을 해주고, 그리고 다음에 또 얻어먹고.
뭐 대충 저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 같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민하원의 중얼거림을 듣고 있노라니 조금 어이가 없으면서도 눈물을 금방 뚝뚝 흘릴 듯한 얼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쪽 사인 열 장이 자장면값이랑 비슷해요?”
“글쎄, 자장면이랑 바꿔 먹은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
민하원은 곤란함이 가득한 얼굴로 선선히 대답했다.
“나 연예인이거든. 나 티브이 자주 나오는데 정말 본 적 없어?”
민하원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얼굴로 나를 향해 물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묻는다고 본 적 없는 얼굴이 본 적 있는 얼굴로 바뀌지는 않아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연예인이면서 왜 자장면 하나 시켜 먹을 돈도 없어요?”
“이번에 드라마 찍는데 거기서 상의 탈의를 많이 하거든. 촬영 들어가기 전에 몸 만들어야 한다고 매니저가 막 운동시키고 식단 조절하고 있는데, 집에서 몰래 먹다가 걸리는 바람에 매니저한테 끌려와서 24시간 감시당해.”
이런 거 감금이라고 하지? 하고 민하원이 물었다.
왠지 머릿속으로 매니저에게 감금당해서 업소 뛰고 시골 환갑잔치 끌려다니던 유명인의 가슴 아픈 사연이 떠올랐지만 설마 그런 일이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을까 싶어 고개를 내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매니저가 지갑도 가져갔어. 자기네 집에 데려다 놓고 나 막 사육해. 시간 되면 트레이닝 받으러 가야 하고, 시간 맞춰서 겁나 쥐꼬리만 한 닭가슴살 가져다주고, 시간 되면 자야 하고. 내가 뒤져봤는데 얘네 집 장롱 밑에 동전 하나 없어. 겁나 나쁜 놈이야.”
장롱 밑에 동전이 없는 것과 나쁜 놈의 상관관계를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민하원의 말은 대충 이해했다.
이해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을 전부 믿을 수도 없고, 믿는다고 해도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나는 그저 멀거니 종알거리고 있는 민하원을 바라보았다.
“윤석진이 미팅 잡혔다고 나가는 바람에 혼자 남아서 자장면 시킨 거야. 앞집 문에 붙어있는 스티커 봤어. 그거 너희 자장면집이라고?”
네, 네. 나는 조금 포기 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돈 많아. 정말 많은데 지금 석진이가 지갑을 가져가버려서 돈이 없어. 그래서 그런데 나중에 주면 안 될까?”
민하원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곤란한데요.”
네, 정말 죄송하지만 곤란한 것은 곤란한 겁니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제가 더욱 곤란해져요.
나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누르며 끄응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저런 얼굴은 정말이지 면역이 되질 않았다.
같은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굉장한 미인을 울리는 치한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겠지. 곤란하겠지. 일단은 아버지 가게라고 해도 넌 배달하는 거니까.”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눈을 굴리던 민하원이 철가방을 들고 있는 내 손을 잡으며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아직 작은방 장롱 밑이랑 거실 소파 밑은 안 뒤져봤거든. 조금만 기다려봐.”
민하원의 손가락은 길고 곧았다. 굳은살 없는 매끄러운 손바닥이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는 느낌에 나는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철가방을 떨어뜨렸다.
그는 유려한 움직임으로 철가방을 들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잠깐만 기다려줘.”
아니, 딱히 소파 밑을 쑤신다고 사천오백 원이나 되는 동전이 나오리라 생각되지는 않는데요.
그렇지만 기대로 충만한 민하원을 만류할 수는 없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자신감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저기요.”
“응?”
어디서 가져왔는지 누런 효자손을 들고 소파 앞에 엎드린 민하원이 내 부름에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해도 떨어지고 어둑어둑해진 마당에 왜 저 얼굴에선 여전히 빛이 나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저 남자는 자체발광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냥…… 외상 하죠.”
내 말에 민하원의 얼굴은 기쁨으로 물들었다.
만개한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는 민하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배달 갔다 빈손으로 오는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성난 얼굴 따위 머릿속에서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이 남자 이름이 민하원이든 아니든, 민하원이란 연예인이 진짜 있든 없든 상관은 없었다.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저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뭐 아무렴 어떠냐, 하는 생각만이 남았다.
“용주야, 고마워.”
민하원은 마치 십년지기 친구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끌어안았다. 남자의 단단한 가슴으로 끌어당겨 안기며 나는 잠시 헉,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아이같이 귀여운 얼굴에 좋은 체구를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옷 너머로 느껴지는 민하원의 단단한 가슴은 정말이지 전문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뿌듯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뭐지, 이 얼굴과 큰 갭을 이루는 몸은.
벙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민하원은 여전히 내 몸을 끌어안고 내 등을 손으로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한 달? 보름? 그 정도 지나면 드라마 촬영 시작하니까 지갑 돌려줄 거야. 그러면 꼭, 꼭 돈 줄게.”
“네, 네.”
아무렴 어떻겠어요. 나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네 장사라 아버지도 종종 외상을 받으니까 조금 화는 내겠지만 쫓아오지는 않으시겠지. 나는 배짱 좋게 생각했다.
“흑룡관 서용주?”
민하원은 확인하듯 내 이름을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전화번호는?” 하고 다시 물었다.
“전화번호 아니까 주문한 거 아니에요?”
“아니, 가게 번호 말고. 너 핸드폰 없어?”
“있기야 있지만.”
“그럼 알려줘.”
왜 알려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당당한 민하원의 요구에 나는 자연스럽게 번호를 불렀다.
그것을 다른 곳에 받아 적지도 않고 하원은 전화번호를 두어 번 중얼거리더니 확인차 내게 말해주며 “맞아?” 하고 물었다.
“나 은근히 머리 좋아서 기억해야 하는 건 안 잊어버리거든.”
생글 웃는 얼굴에 나는 또 어벙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를 더 물어보려는 민하원의 뒤로 쾅쾅,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원아, 문 열어.”
딩동, 하고 벨도 울렸다. 민하원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윤석진이다.”
“예?”
“내 매니저.”
민하원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행스럽게도 체인을 걸어놔서 문밖에 있는 사람은 안으로 들어오질 못하고 있었다.
“야, 민하원. 자냐? 이 녀석은 몇 시인데 벌써 자?”
남자의 중얼거림에 민하원의 얼굴이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갔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문 열어주면 안 돼요?”
“안 돼. 자장면 먹은 거 들키면 진짜 혼나.”
그렇게 혼날 거 왜 시켜 먹었어요. 나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안절부절못하는 민하원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 사람의 이름이 민하원이라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문밖의 사람이 부르던 이름을 떠올리며 조금은 안심했던 것 같다.
“용주야, 너 여기 잠깐만 숨어있어라.”
베란다 보일러실 문을 열어 나를 밀어 넣으며 민하원이 말했다.
“저 가야 하는데요?”
“여기 잠깐만 있어. 석진이 방에 들어가면 금방 보내줄게. 응? 응? 부탁해.”
민하원은 두 손을 겹쳐 보이며 애원했다.
미인이 내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부탁을 하고 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울어버릴 것처럼 곤란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럼 잠시만이에요.”
민하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손을 뻗어 몸을 돌려 나가려는 민하원의 팔을 붙잡았다.
“왜?”
“볼에 자장 다 묻었어요.”
그렇게 묻히고 먹어놓고 나만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닌데.
어디? 여기?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는 민하원의 손을 떼어내고 나는 철가방에 쑤셔 넣었던 냅킨을 꺼내 뺨을 닦아주었다. 이미 말라 굳은 자장은 쉽사리 닦이지 않았다.
“말라서 안 닦여요.”
좀 더럽기는 하지만 들키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 나는 냅킨에 침을 묻혀서 민하원의 볼을 문질렀다.
민하원이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입가에도 아직 자장이 묻어있었지만 거기까지 침을 묻혀 닦기에는 미안해서 나는 침이 묻은 냅킨의 반대쪽으로 민하원의 입술을 박박 문질렀다.
“이제 됐어요.”
“으응.”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던 민하원은 내 말에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약간의 배려였는지 보일러실 문을 다 닫지 않고 사라졌다.
“야, 너 뭐 했는데 이렇게 문을 늦게 열어.”
“뭐 하긴, 잠깐 잤지.”
“어라, 이거 무슨 냄새야.”
“냄새는 무슨 냄새?”
“자장면 냄새인데?”
민하원이 문을 열어주었는지 집으로 들어선 남자가 킁킁 냄새를 맡더니 기어코 한마디를 했다. 동시에 나까지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여, 옆집에서 시켜 먹었나 보지. 더워서 문 열어놨더니 냄새가 다 들어와. 형네 집은 어떻게 에어컨 하나 없냐? 나 같은 거물을 이런 후진 집에 데려다 놔도 돼?”
“원래 몸 만들려면 후진 곳에서 오지게 고생을 하면서 몸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눈물 콧물 다 빼고 몸을 만들어야 나중에 그 고생한 걸 생각해서라도 다신 몸을 안 망치죠. 내 말 알겠습니까, 민하원 씨?”
“네, 네. 악독한 매니저야. 사장한테 다 이를 거야.”
“우리 집 데려가서 감시하라고 한 게 댁의 사장이거든?”
남자는 민하원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으, 날씨 덥긴 진짜 덥다.”
“에어컨 사 와. 무슨 놈의 집에 선풍기밖에 없어.”
“서민은 원래 선풍기로 여름을 나는 법이다.”
“우리 집 갈래.”
“그래, 그래. 너 몸 만들고 나서 가자. 응?”
그리고 방으로 들어간 모양인지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보일러실에 숨어있던 나는 소리 없이 다가와 보일러실 문을 여는 민하원의 등장에 헉, 소리 나게 놀랐다.
“석진이 씻으러 욕실 들어갔어. 빨리 나와.”
민하원이 내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어두운 보일러실에서 민하원의 얼굴만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묘한 기분에 나는 민하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용주야?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내젓고 조용히 발소리를 죽여 거실로 나왔다. 화장실 겸 욕실로 추정되는 곳에서 희미하게 물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신발을 신은 상태라는 것이 이 집의 주인인 매니저에게 미안했지만 차마 용서를 구할 수 없어 나는 속으로 미안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소리 나지 않게 열어준 문으로 나가는 나를 민하원이 붙잡았다.
“이거.”
내 앞으로 내민 것은 십만 원짜리 수표였다.
“돈 없다면서요?”
“석진이 지갑에서 슬쩍 했어.”
도둑질을 했다는 것인가? 일그러지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민하원이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쟤 월급 내가 줘. 그리고 나중에 다시 돌려줄 거니까 일단 받아.”
“거스름돈 없는데요.”
나는 민하원이 손에 쥐여주는 십만 원권 수표를 내려다보며 막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네가 킵 해둬. 나중에 석진이 나가면 또 자장면 시킬 테니까. 알았지?”
욕실에서 들려오던 노랫소리가 멈추었다. 민하원의 다급한 얼굴을 보며 나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입술만 벙긋거렸다.
“오늘 고마웠어. 자장면 진짜 맛있더라. 다음에 또 봐. 안녕.”
이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저 혼자 잘 가라는 인사까지 다 해버린 민하원이 눈앞에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소리 나지 않게 문까지 잠그는 치밀함에 문밖으로 밀려 나온 나는 정신을 차리고 피식 웃었다.
뭔가 한바탕 꿈을 꾼 기분이었지만 조금 가벼운 철가방과 함께 손에 쥐고 있는 수표가 꿈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 ∞ ∞
“왜 이렇게 늦게 와?”
시계를 보니 아홉 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배달 간다고 한 아들놈이 삼십 분도 더 지났는데 오질 않으니 지금까지 문을 못 닫고 계셨던 모양이다.
“영덕이 형은요?”
“먼저 보냈다.”
“금방 먹는다고 그래서 기다렸다가 왔어요.”
“바보냐? 내일 그릇 가지러 가면 되는데 뭘 기다렸다가 받아 와? 그래, 멍청하게 밖에 서 있었냐?”
멍청하게 먹는 거 구경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분명히 맞겠지. 딱히 시험해보지 않아도 답이 나와서 나는 최대한 순박해 보이는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는 사람 집이라서 좀 놀다 왔어요.”
“친구가 시켰었냐?”
내가 내미는 사천오백 원을 받으며 아버지는 친구한테 돈은 뭐하러 받아 왔냐고 타박을 하셨다.
친구 아닌데. 그 말을 꾹 삼키며 나는 주머니에 들어있는 십만 원권 수표를 손에 꼭 쥐었다.
이것을 아버지한테 드리고 있었던 일을 말해볼까 싶었지만, 그랬다간 쓸모없는 짓을 했다고 혼이 날 것 같았다.
게다가 왠지 나쁘지 않은 추억거리처럼 느껴져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 테이블 아까 닦아뒀는데요.”
“대걸레로 바닥 대충 닦았으니 그만 문 닫자. 가져온 그릇 설거지통에 넣고 와.”
“마감은 하셨어요?”
“너 기다리면서 다 했다.”
철가방을 주방으로 가져가 안에 있던 그릇을 꺼냈다.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고 자장이 묻어있는 그릇을 설거지통에 넣었다. 철가방을 가지고 나와 홀 한쪽에 놓자, 아버지가 얼른 나와, 하고 타박을 하셨다.
“간다니까요. 아무튼 성격 엄청 급하셔.”
홀의 불을 끄고 나오기 무섭게 아버지가 문을 닫고 셔터를 내렸다. 철컥철컥 제대로 잠긴 것을 확인한 아버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열 시가 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여름이라서 그런지 춥지 않았다. 춥기는커녕 아직까지도 더워 오늘 밤에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얇은 반팔 티셔츠를 펄럭거리며 아버지의 옆에 나란히 서서 걸음을 옮기고 있으려니 아버지가 용주야, 하고 내 이름을 부르셨다.
“왜요?”
“……축구 다시 하지 그러냐.”
어렵사리 운을 뗀 것이 분명한 아버지의 말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됐어요. 안 한다고 때려치우고 나왔는데 다시 하긴 뭘 다시 해요.”
나는 싱겁게 웃으며 말했지만 아무래도 아버지는 가볍게 넘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언제 이 이야기에 관해 말해야 할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셨겠지. 어떻게 자리를 마련해서 말을 꺼낼까 고민하다 결국 이렇게 장사를 끝내고 집에 가는 길에 겨우 운을 떼신 것인지도 모른다.
“네 누나도 알바하고 있다고 하더라. 거 뭐냐. 애들 과외? 그거 한다고 그러던데. 네 엄마도 일자리 알아본다고 그러고.”
“누나 과외 해서 얼마나 번다고요. 그리고 의대생이 알바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럴 시간에 잠이나 자지. 어머니도 그냥 집에 계시라고 하세요. 아직 허리 수술한 거 낫지도 않으셨는데 괜히 움직이다 다시 허리 나가면 버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아요.”
디스크 수술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일을 알아본단 말인가.
적어도 반년은 누워있어야 하고 일 년은 무거운 것 들지 말아야 하고, 평생 허리 조심하면서 살아야 할 사람이 일은 무슨. 그러다 괜히 수술한 곳 삐끗하면 답도 없다.
“미안하다. 다 아비가 못난 탓이야.”
“아버지가 뭘요. 또 이상한 소리 하신다.”
무겁게 한숨을 내쉬는 아버지를 향해 나는 버럭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축구에 소질 없어서, 재미없어서 안 하겠다는데 왜 그러세요? 진짜 계속 이러면 저 사춘기랍시고 가출할 거예요.”
우스갯소리로 말한 것이었지만 아버지는 대꾸하지 않으셨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어렵게 말을 꺼내셨을 테지만 더 이상 그 주제로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일부러 화가 난 척 말을 하지 않았다.
서용주, 십팔 세. 고등학교 이 학년에 재학 중인 나는 프로축구팀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었다.
어렸을 때에는 다른 장난감이 없었던 탓에 바람 빠진 낡은 축구공을 뻥뻥 차고 다녔고, 다른 녀석들보다 조금 더 잘한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중학교 때 축구부에 뽑혔다.
하던 것이 공 차는 것이니 자연스럽게 진로도 이쪽으로 정해졌다.
축구부가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축구부에 들어왔고, 프로로 나가거나 대학 진학을 그쪽으로 할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이 학년이 될 때, 두 살 터울의 누나가 대학교에 입학했다.
학원도 다니지 않고, 과외도 받지 않았지만 공부 하나는 정말 잘했던 누나인지라 서울의 유명한 의대에 입학하면서 집은 경사라도 난 것처럼 떠들썩했다.
오백이 훌쩍 넘는 입학등록금 통지서를 받기 전까지는 분명히 즐거웠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큰 액수에 가족들은 조금 당황했던 것 같았다. 그래도 공부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아온 누나였던지라 별다른 말은 없었다.
오히려 학자금 대출이니 뭐니 요즘 천천히 대학 등록금을 낼 방법이 많다고 말하는 누나에게 아버지는 처음부터 그런 거 신청하고 그러면 기죽는다며 선뜻 통장을 내놓으셨다.
그건 누나 이름으로 만든 정기적금으로 누나의 대학 등록금으로 미리 준비해두었던 것이라 했다. 거기에 모아두었던 돈을 더 보태 누나는 대학교에 들어갔다.
두 달 정도 뒤의 일인가. 가게에 나와 일을 돕던 어머니가 미끄러운 바닥에서 넘어지셨다. 이전에도 허리가 아프다고 자주 말씀하셨는데, 이번에 호되게 넘어져 일어나질 못하셨다.
허리가 아파 끙끙거리는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니 이것저것 촬영을 하고는 봐도 알 수 없는 시커먼 사진을 담당의가 보여주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요추가 어쩌고저쩌고하더니 디스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을 안 하면 평생 고생하면서 생활해야 한다는 담당의의 말에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어머니는 그날부터 일주일 정도 입원을 했다가 수술을 하셨다.
가벼운 수술은 아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되었다며 이제 경과를 지켜보며 천천히 회복을 하면 된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뒤로 내밀어진 수술 비용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뒤늦게 삼 년 동안 꾸준히 넣었던 어머니의 보험이 없어져 버렸음을 알게 되고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갱신 금액이 너무나도 터무니없어서 보험 계약 갱신을 하지 않은 탓에 보험이 소멸하여, 수술비는 오롯이 우리 가족이 부담해야 하는 금액이었다.
누나의 대학 등록금만큼이나 비쌌던 수술비를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다행스럽게도 퇴원을 하셨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이십 년 넘게 중국집을 하고 계셨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누나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곳에서 중국집을 하셨다고 하니까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아버지가 어릴 때 이 중국집에서 배달을 하다가 주인아저씨의 눈에 들어서 면 뽑는 것을 배우게 되고, 그 밑에서 자장면이랑 이런저런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다가 종내에는 중국집을 물려받았다고 했다.
더불어 중국집을 물려받으면서 그 집 어여쁜 따님까지 받았다고 하니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워낙 빈털터리였던 아버지는 데릴사위처럼 어머니의 집에 들어가 살았다고 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내가 세 살 때까지만 해도 외조부모와 함께 여섯 식구가 같이 살았다고 했다.
아무튼 별다를 것 없는 동네 중국집이었기 때문에 우리 집은 그다지 부자가 아니었다.
모아둔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나는 딱히 부유하게 자라지도 않았다. 그저 자라면서 남들보다 좋았던 점은 자장면을 조금 더 자주 먹었다는 것뿐.
그러한 집에서 반년 사이에 몇백씩 돈 나갈 일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연달아 생기니 기둥뿌리가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대고 차마 축구부 하계 전지훈련을 가야 한다고 백만 원이 훌쩍 넘는 훈련비를 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생각해보면 난 별로 축구에 소질이 없는 것도 같고.
스탠드에 앉아 언제나 축구공 하나만 가지고 누비던 넓은 운동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훈련비를 달라고 하면 못 준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나 대학 등록금을 모아두었으면서 내 대학 등록금은 모아두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그 외에 어디 돈 나올 곳 없는 집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어머니의 수술비를 어떻게 냈는지 생각해본다면 그것 역시도 답은 하나였다.
물어보고 싶었다.
아버지, 내 대학 등록금 할 돈으로 어머니 수술비 냈어요?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부모님한테 돈을 맡겨둔 것도 아니고, 맡겨두었다고 해도 어머니 수술비라면 응당 내놔야 하는 것이 아닌가.
수술비를 어떻게 마련했든, 내 대학 등록금을 모아뒀든 아니든. 이제는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구를 포기하고 살 수 있을까. 힘들긴 하지만 살 수 있을 거다. 축구가 인생의 전부도 아니고.
하지만 가족을 힘들게 하기는 싫었다. 충분히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나까지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기가 싫었다. 축 처진 아버지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질 것 같았다.
내가 축구로 나아간다고 해도 과연 프로로 성공할 수 있을까. 내게 과연 그러한 재능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차라리 빨리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 나는 축구부 감독 선생님께 조용히 탈퇴 의사를 전했다.
하계 전지훈련 참가 통지서는 잔뜩 구겨져 내 책가방 밑바닥에 깔려있었다.
그만두겠다면 그런 줄 알지, 뭘 또 부모님한테 전화를 하고 난리람.
학교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백만 원이 넘는 훈련비 이야기도 한 것인지 어머니가 눈물을 쏟아냈다.
돈 때문에 그런 거 아냐. 축구가 재미없어서 그래. 난 아무래도 공부가 체질인가 봐.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했다.
너 훈련하러 갈 돈도 없을 것 같냐. 당장 돈 내고 하계 전지훈련 따라갔다 와라. 그리 말하는 어머니의 손을 밀치며 밖으로 뛰쳐나가 밤늦게까지 배회했다.
가출할 용기도 없어서 결국 집으로 기어들어 왔지만.
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이면서 일주일이 지나갔고 그대로 방학을 했다.
두세 번 연락이 오던 축구부 감독 선생님의 전화도 방학을 기점으로 더 이상 오지 않았고, 나는 하계 전지훈련에 나가지 않았다.
“어디 갔다 와?”
“아버지랑 같이 들어오는 거 안 보여?”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에 떡 버티고 서 있는 누나가 보였다. 눈을 뾰족하게 세우며 노려보는 것이 엄마 대신 잔소리를 할 모양인가 보다.
아버지가 욕실로 휙 들어가시는 것을 보고 나도 방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오며 누나가 예상대로 잔소리를 퍼부었다.
“너 공부한다며 왜 자꾸 밖으로 나돌아?”
“누가 밖으로 나돌아? 나 여태 가게에 있었거든?”
“공부하겠다며? 기본도 없는 빈 깡통 주제에 공부하겠다고 말만 하면 공부가 다 되는 줄 알아? 너 내가 공부 봐주겠다는데 왜 자꾸 밖으로 나가? 공부할 거야 말 거야?”
누가 공부 잘해서 의대 간 거 모른다고 저렇게 공부, 공부. 아휴, 듣기 싫어. 나는 보란 듯이 귓구멍을 후비며 옷장을 열었다.
“서용주! 축구 때려치운 것까지는 좋은데, 너 축구 말고 다른 거로 대학 갈 생각이 있기나 해? 네가 공부? 야, 네 머리로 공부해서 대학 들어가면 우리나라에 대학 못 가는 애들 하나 없어.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아, 왜 난리야. 내가 머리 깡통이고 공부 못하는 데 뭐 보태준 거 있어? 왜 옆에 와서 긁어?”
“너 보고 있으려니 답답해서 그런다, 답답해서.”
화는 누가 내야 하는데, 도리어 자기가 화를 낸다.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방 밖에서 어머니가 조용히 좀 해라, 하고 한마디를 하셨다.
“대학 갈 성적 안 되면 안 가면 되지, 뭔 걱정.”
툭 내뱉은 말에 누나가 사람 하나 잡아먹을 것처럼 눈을 치켜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걸 말이라고 해?”
“뭐 어때? 아버지 밑에서 면 뽑는 거 배워서 가게나 물려받지. 아버지도 외할아버지한테 중국집 물려받았다잖아.”
“뭐가 어째?”
누나가 기어코 손을 들어 내 등짝을 내리쳤다.
“아, 왜 때려! 내가 중국집 물려받을 거라니까 부러워서 그래? 누나! 양보 좀 해. 나 그래도 이 집 장남이야!”
“이게 정신 못 차리고.”
퍽퍽 내려치는 손이 맵기도 맵다. 이렇게 몇 대만 더 맞으면 분명 등짝이 푸르스름하게 멍이 들 터라 나는 누나의 손을 피해 방을 팔딱팔딱 뛰어다녔다.
“야, 이 새끼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왜 때려, 왜!”
“너 지껄이는 소리가 하도 어이없어서 그런다. 이리 와. 너 오늘 좀 맞자.”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누나를 피해 속옷만 챙겨 들고 쌩하니 욕실로 향했다.
마침 씻고 나오시는 아버지가 보여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쾅쾅쾅, 문을 두드리며 악을 써대는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서용주. 너 안 나와?”
“나 씻으려고 옷 벗고 있는데 왜 나오래? 완전 변태 아냐?”
“야, 너 죽을래?”
“내가 왜 죽냐? 왜 잘 살고 있는 사람을 죽이려고 그래? 웃긴 사람일세.”
내 말에 쾅, 하고 문이 울렸다. 아무래도 욕실 문을 발로 찬 모양이다.
밖에 아버지랑 어머니도 계신데 성질 좀 죽이지. 아무튼 장녀에 공부 잘한다고 너무 오냐오냐 키운 것은 아닌가 싶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땀으로 젖은 옷을 벗고 샤워기 아래에 섰다.
∞ ∞ ∞
탤런트 민하원.
인터넷 창에 검색하자 낯익은 얼굴이 주르륵 보였다. 정말 연예인이었구나. 하긴 그런 얼굴로 연예인 안 하면 뭐 하고 산대.
나는 조금 신기한 마음으로 민하원의 기본 프로필을 읽어보았다.
나이는 스물세 살. 위로 형이랑 누나가 있는 막내. 현재 OO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재학 중.
고등학교 이 학년 때 길거리 캐스팅으로 CF를 찍으면서 데뷔.
한순간 나타나서 CF계를 평정하고 그 뒤로 단막극 하나와 드라마 한 편을 찍고, 영화 세 편을 더 찍음.
주말 가족 드라마에서 비중 있는 둘째 아들 역에 캐스팅되어 촬영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현재 상황.
확실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네. 나는 민하원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데뷔를 고등학교 이 학년 때 했다니. 지금 내 나이일 때 진로를 정했다는 것이 조금 대단해 보였다.
자신의 진로를 일찍 찾아 그 길로 나아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대단한 일이다.
이제껏 축구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내가 그것을 손에서 놓고 이렇게 정체되어있으니 민하원이 더욱 대단해 보였다.
사진첩에 올라와 있는 민하원의 사진을 보니 예전에 찍은 사진부터 최근에 찍은 사진까지 꽤 많았다. 그래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예쁘긴 예쁘네.
민하원의 CF를 모아놨다는 블로그를 찾아서 보니 이제껏 민하원이 찍은 CF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가장 처음 찍은 CF는 휴대폰 CF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숨 막히게 예쁜 얼굴. 조금은 더 앳되고 순수한 눈망울이 마치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오늘 본 민하원은 얼굴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예뻤지만 남자의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때는 아직 성장기였는지 팔다리가 길긴 해도 마른 체구였다.
화면 속에서 민하원은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가 달리는 배경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이었다.
한 걸음 내딛기도 힘들 정도로 발이 푹푹 꺼지는 사막의 모래 위를 힘차게 달리고 있지만 민하원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희미했다.
애절하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을 안고 달리는 민하원의 희미한 존재감이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그가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땅에 떨어뜨리며 쓰러지고 휴대폰 위로 사막의 모래바람이 휘몰아친다.
쓰러진 민하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단지 뜨거운 사막의 태양 빛을 휴대폰이 반짝반짝 반사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느긋하게 걸어오던 또 다른 민하원이 그 휴대폰을 주워 들며 CF가 끝났다.
멍하니 화면을 보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CF가 아니라 민하원을 위한 짧은 영상 아닌가. 그것을 두어 번 더 돌려본 뒤 민하원이 찍었다는 다른 CF를 구경했다.
여전히 민하원은 아름다웠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이 났다. 더불어 남자의 몸을 갖추게 되었지만 그것이 결코 어울리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름답고 이질적인 얼굴 아래로 탄탄한 근육질의 몸과 예술적인 라인은 묘한 흥분을 자아내게 만든다고 여러 블로그의 주인들이 칭송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말에 나 역시 동감했다.
화면으로 봐도 예쁘지만 확실히 실물이 더 예쁘긴 예쁘다. 나는 오늘 본 민하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CF를 찍거나 방송을 할 때에는 화장을 하고 한껏 꾸민 상태이기에 더 빛이 나 보이겠지만, 오늘 만난 민하원은 티셔츠에 고무줄 반바지 차림임에도 숨 막힐 것처럼 강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정말이지 타고난 사람이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하랬더니 빠돌이 짓을 하고 있네.”
어느새 다가온 누나가 내 뒤통수에 손바닥을 날렸다. 골이 흔들려 영혼이 빠져나갈 듯한 강도에 나는 휙 고개를 돌려 누나를 노려보았다.
씻고 나온 것인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며 누나가 야차처럼 매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창 더운 여름이라 전설의 고향도 하고 그러는데, 저러고 있으니 따로 전설의 고향을 보지 않아도 될 성싶었다.
“왜 그렇게 노려봐?”
노려보는 건 누나잖아. 그런 대꾸는 현명하게 하지 않았다. 대신 보고 있던 인터넷 창을 하나하나 껐다.
이상하게 컴퓨터가 버벅거린다 했더니 인터넷 창을 너무 많이 켜놓은 모양이었다. 거기다 민하원의 얼굴을 구경한다고 사진이 가득 담긴 블로그 창을 켜놨으니 더욱 버벅거릴 수밖에.
“우리 용주, 저런 타입 좋아하나 보네.”
등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누나가 민하원의 사진을 보더니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남자거든?”
“남자야?”
“그래. 가슴 없잖아.”
민하원의 평평한 가슴 위로 마우스 커서를 가져다 대며 말하자 누나는 흥미 없다는 듯 맹한 목소리로 아, 하고 말했다.
“난 네가 스몰 사이즈를 좋아하는 줄 알았지.”
“아니야, 내 주변에 스몰 사이즈는 누나 하나로 충분해.”
“이게 죽을라고.”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뒤통수를 맞았다. 아무리 공부 못하는 동생이지만 인간적으로 머리는 피해서 때리는 게 예의 아닌가.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누나였다.
“공부 안 하려거든 끄고 자.”
“누나, 누나도 민하원 모르지?”
“그게 누군데?”
오로지 인생에서 축구밖에 모르던 나처럼 누나는 공부밖에 모르던 모범생이었다.
티브이는 EBS 교육 방송을 보기 위한 것이었고, 컴퓨터는 인터넷 강의를 듣기 위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누나가 중고등학생이었을 때에도 어떤 연예인이 좋다는 말을 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누나 인생도 진짜 재미없다.”
“걱정 마. 내 인생은 앞으로 재미있어질 거거든.”
내 중얼거림을 용케 들은 모양인지 자리에 눕던 누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대답했다. 얇은 이불을 배 위로 끌어 올려 덮은 누나는 곧 잠들 듯 보여서 나는 조용히 컴퓨터를 껐다.
“용주야.”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려는 나를 누나가 나직이 불렀다.
“내일부터 공부하게 집에 있어. 가게 나가지 말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오로지 나를 위해서란 걸 알고 있지만 나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와 내 몫으로 깔아놓은 이불 위에 누우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 말대로 나는 공부를 못했다. 어릴 때부터 공만 차고 놀았고 책 근처로는 가지도 않았다.
누나가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해서 부모님의 기대는 나에게까지 오지 않았다.
어차피 공부해서 적당한 성적을 가져가봤자 매번 일등을 하는 누나 때문에 칭찬받을 일도 없었다. 그래서 더 축구를 하려고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누나가 할 수 없는 것, 누나가 하지 않는 것, 누나와 겹치지 않는 선에서 내가 뭔가 잘한다면 나도 봐주겠지 하는 기대감. 그래서 더 열심히 했는데.
이 학년이 되어 주전 멤버에 뽑혔을 때 아버지는 축구부 전체에 자장면이랑 탕수육을 돌리기도 했었다.
중국집 아들인 거 소문내냐고 아버지께 툴툴거렸지만 남모르게 기분이 좋았었다.
봐, 나는 누나가 하지 못한 것을 하잖아. 뭔가 큰일을 해낸 것처럼 당당했었다.
“쓸모없는 생각하지 마.”
나는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포기했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미련 가져봐야 나만 손해야. 그렇지만 미련이 남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길이 아니면 나는 어떤 길로 가야 하는 걸까. 도저히 누나가 갔던 길을 따라갈 수 없다. 그 길을 따라가기엔 나는 다리가 짧은 뱁새일 뿐이니까.
∞ ∞ ∞
누나가 하도 뭐라고 해서 교과서를 들고 나오긴 했지만 교과서는 새 책처럼 깨끗했다.
1학기가 끝났으니 필기가 다 되어있어야 할 책은 2학기 교과서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나란히 놓고 본다면 어느 것이 1학기 교과서이고, 어느 것이 2학기 교과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변명을 조금 해보자면 운동부는 수업에 자주 들어가질 않았다.
큰 시합이 있을 때는 시합을 앞두고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시합이 끝나면 피드백을 위해서, 시합이 없으면 평소 게을러지지 않으려 훈련을 하느라. 그래서 수업에 들어간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게다가 하필이면 집어 들고 온 것이 영어책이다. ABCD까지는 배운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기억에 없다.
한국말로 수업해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미국말을 어떻게 알아들어. 영어로 수업을 하던 영어 교사를 떠올리며 나는 못마땅한 투덜거림을 내뱉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가게에는 손님이 없었다. 더구나 요즘은 직접 먹으러 오는 손님보다 배달이 더 많기도 하고. 사람들이 살기 편해지니까 움직이려고 하지 않아서 시켜 먹는 일이 늘었다.
아버지는 원래 배달을 하지 않으셨는데 하나둘씩 손님이 줄어 어쩔 수 없이 배달을 시작하셨다. 그게 벌써 삼 년 전이지.
나도 슬슬 스쿠터를 몰아볼까. 배달 가는 영덕이 형을 보면서 면허증이나 딸까 생각하는 와중에 따르르르릉, 반갑게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네, 흑룡관입니다.”
―용주야?
누가 이렇게 장사하는 중국집에 전화해서 내 이름을 반갑게 부르는가. 나는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나 민하원. 어제 기억 안 나?
기억 안 난다고 말하고 싶지만 뇌리에 강력하게 기억된 남자였다.
“아, 안녕하세요.”
―석진이 지금 나갔어. 나 자장면 한 그릇 빨리.
남자의 애타는 목소리에 작게 웃음이 나왔다.
“네, 자장면 한 그릇 빨리 가져다드릴게요.”
―있잖아. 올 때 초인종 누르지 말고 조용히 문 한 번만 두드려줘. 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앞집 아줌마가 석진이 스파이였어. 걸리면 혼나.
남자의 진지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나는 끅끅 웃음을 삼키며, 남자가 볼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고마워, 조금 이따가 보자.
남자는 마치 만날 약속을 정하는 친구처럼 내게 말했다. 전화를 끊고 자장면 배달 하나, 하고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민하원은 조금 웃기는 남자다. 어제 찾아본 CF에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뭐 이렇게 허술하고 어벙한 남자가 다 있을까 싶은데 얼굴이 너무 예뻐서, 자체발광하는 얼굴 덕에 그것들이 모조리 무마되어버린다.
남자가 하는 허술하고 얼빵하고 찌질한 행동들이 얼굴 때문에 귀엽고 순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리는 거다.
나만 해도 멱살을 몇 번은 잡았을 법한 일에 이렇게 덤덤하게 웃고 있지 않은가.
평소 얼굴만 믿고 까부는 놈들을 정말 싫어하고, 연예인의 얼굴 보고 졸졸 쫓아다니는 팬클럽 애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눈앞에 민하원의 웃는 얼굴만 들이민다면 용서 못 할 일이 뭐 있고, 들어주지 못할 부탁이 뭐가 있을까.
남자가 얼굴만 예뻐서는.
나는 불퉁거리면서도 단무지가 많이 담긴 것을 챙겨 철가방 안에 넣었다.
“아버지, 저 좀 기다렸다가 그릇도 받아 올게요.”
주방에서 나온 자장면을 받아 철가방 안으로 밀어 넣으며 주방 안쪽을 향해 소리치자 아버지가 빠끔 고개를 내미셨다.
“어제 그 친구네 가냐?”
“네.”
“그 친구는 왜 만날 자장면을 시켜 먹어?”
“우리 집 자장면이 맛있나 보죠. 아무튼 다녀올게요.”
뭔가 더 물어보려고 하시는 아버지보다 빠르게 말하고는 가게를 나왔다. 문 앞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민하원을 떠올리자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오 분도 걸리지 않아 빌라 앞에 도착했다. 저 위에서 민하원이 눈이 빠지게 자장면을 가지고 올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들고 올 자장면을 기다리는 것이겠지만.
나는 발소리를 죽여 3층으로 올라갔다. 민하원이 말했던 매니저의 스파이인 옆집 301호의 동태를 살피고 조용히 302호의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 빠끔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민하원이 고개를 내밀었다.
“어서 와.”
속삭이듯 말하며 민하원이 웃었다. 나는 그런 민하원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아, 민하원에게는 보조개도 있구나, 하고 멍청한 생각을 했다.
민하원에게 손목이 잡혀 집으로 들어선 나는 그가 문을 닫고 철컥철컥 체인을 걸어 잠그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오늘도 베란다로?”
“응.”
고개를 끄덕이는 민하원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신발을 벗었다. 아무래도 남의 집에 신발을 신고 걸어 다닌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민하원의 뒤를 따라 베란다로 나간 나는 올 때 가져온 신문을 베란다 바닥에 깔았다.
“왜?”
“이 위에서 드시면 흘려도 쉽게 치울 수 있거든요. 완벽한 증거 인멸이요.”
내 말에 민하원은 우와,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딱히 감탄할 일은 아니었는데. 민하원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철가방을 열고 자장면과 단무지, 나무젓가락을 꺼냈다. 나는 민하원에게 자장면을 내주는 대신 랩을 벗기고 능숙하게 자장면을 비벼주었다.
“고마워.”
눈썹을 휘며 웃는 민하원의 얼굴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았다. 냠냠 짭짭 소리를 내며 잘도 먹는다. 먹는 게 아니라 마시는 수준이다.
오늘도 여전히 입가며 뺨에 자장을 잔뜩 묻히고 먹는 민하원을 보면서 나는 정말 이 사람이 스물셋이 맞을까 하고 생각했다.
“정말 스물셋 맞아요?”
생각하고 있던 것을 기어코 입에 내어 묻자, 오도독 단무지를 씹던 민하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맞는데, 왜?”
“아뇨, 그냥. 좀 어려 보여서요.”
내 말에 민하원은 그런 소리 많이 들어, 하고 눈을 휘며 웃었다.
“카메라로 보면 좀 나이 먹어 보이나 봐. 실제로 사람들 만나면 어려 보인다고 하더라고.”
은근히 자기 자랑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민하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화면에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민하원의 실제 얼굴은 스물셋보다 어려 보였다.
“용주는 몇 살이야?”
“열여덟 살이요.”
꽤나 친한 사이처럼 친근한 목소리로 묻는 민하원을 향해 나는 쪼그리고 앉은 자세로 민하원을 바라보며 답해주었다.
“어린 데도 아버지 일을 돕고 있구나. 대단하네.”
“그쪽도…… 열여덟 살에 데뷔했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그쪽이 더 대단한 거잖아요.”
심드렁한 내 말에 민하원은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고 있었어?”
“아뇨, 어제 집에 가서 좀 찾아봤어요.”
“그럼 정말 나 몰랐었구나.”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더니 또 금세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다. 저 빠른 변화가 참으로 놀라웠다.
연기하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저렇게 급변하는 표정이나 행동도 연기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저렇게 허술한 모습도 연기일지 모르지. 민하원이 기껏 나를 상대로 연기를 해서 뭐에 쓸까 싶지만, 저런 모습이 연예인 민하원의 진짜 모습이라니 보고 있어도 믿기질 않는다.
“그나저나 그쪽이 뭐야, 그쪽이.”
“그럼요?”
“형이라고 불러.”
민하원이 대뜸 내뱉은 말에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형 아닌데요.”
“누가 우리 형이라고 부르래? 하원이 형, 하고 불러.”
그는 애교 있게 눈 끝을 접어 웃으며 요구했다. 하원이 형, 하고 불러봐. 어서.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얼굴에 대고 차마 싫어요, 라고 할 수가 없어서 나는 잠시 주춤했다.
“형이라고 부르기 싫어?”
그 얼굴에 대고 차마 형 소리가 안 나오네요. 나는 웃으며 말을 삼켰다.
“나랑 친하게 지내기 싫구나.”
민하원은 갑자기 우울해져서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그의 얼굴에 놀란 내가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자, 민하원은 내리깔고 있던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랑 형 동생 할 거야?”
“네, ……하원이 형.”
“용주가 형이라고 불러주니까 기분 엄청 좋다.”
그는 먹다 잠시 멈춘 자장면을 다시 입으로 집어넣으며 웃었다. 히힛, 웃는 그의 입술이 자장으로 범벅이 되어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늘도 어제처럼 마지막 면발 하나까지 입속으로 집어넣고 오물거리는 민하원을 대신하여 뒷정리를 끝내고, 자장이 마르기 전에 민하원의 입술과 볼에 묻은 자장을 닦아주었다.
“이 신문은 접어서 보일러실 구석에 넣어둘게요. 나중에 자장면 시켜 먹거나, 혹시 다른 거 시켜 드실 때 꺼내서 깔고 드세요.”
“응. 그럼 용주한테 전화하고 나서 기다릴 때 깔아둬야겠다.”
그러니까 다른 거 시켜 먹을 때도 그러라고요. 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민하원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민하원과 나 사이에 공유하는 것이 생긴 듯한 작은 기쁨. 연예인 민하원이 아니라 그냥 자장면을 너무 좋아하는 예쁜 남자인 민하원과 나 사이에 생긴 작은 비밀.
철가방 안에 자장면 그릇을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고?”
민하원이 나를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가야죠. 다 드셨잖아요.”
“그래도.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돼?”
댁이 자장면 먹고 있을 때 실컷 쉬었거든요. 그런데도 붙잡는 민하원이 좋아서 나 역시 다시 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베란다 문을 열어둔 상태로 거실에 민하원과 나란히 앉아 나는 베란다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 운동하신다면서 잘돼요? 운동 안 해도 몸 좋은 것 같은데.”
“그치? 나도 그렇게 말했거든. 근데 석진이가 나 똥배 나왔다는 거야. 남자의 자존심은 식스팩이라면서 촬영 시작할 때까지 겁나 좋은 몸을 만들어야 한다고 아주 귀가 따갑게 말을 하는 거야. 아무튼 나쁜 놈이야. 자기는 운동도 안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돌아다니면서 나만 하루 종일 운동시키고, 하루 세끼 닭가슴살만 줘. 그것도 손바닥만 한 작은 거.”
맺힌 게 많았는지 민하원은 종알종알 묻지도 않은 것을 시시콜콜 일러바쳤다.
윤석진이 평소 얼마나 자신을 못살게 구는지. 매니저 주제에 늦잠을 자기도 하고, 가끔 길을 잃어서 촬영에 지각을 했으면서 그걸 제 탓으로 돌리기도 하고, 가끔은 밥도 안 주고 일을 시키고 등등, 매니저 윤석진의 시시콜콜한 악행을 모조리 쏟아냈다.
그런 사소한 일들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난 더 감탄했지만 일단 민하원의 말에 동조하는 척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오늘은 매니저님 어디 가셨는데요?”
“그 새끼 무슨 점심 약속 있다고 나갔어. 아침 운동 갔다 와서 닭가슴살 한 덩이 선심 쓰듯이 주고 아까 나갔어. 나쁜 놈. 혼자 좋은 고기 다 처먹고 오겠지. 용주야, 나도 맛있는 고기 먹고 싶다. 닭가슴살 너무 퍽퍽해.”
민하원은 내 어깨를 끌어안고 징징 우는소리를 했다. 민하원의 품에 답삭 안긴 나는 그대로 얼음이 되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징징거리는 민하원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이 사람은 자장면을 먹고, 단무지를 오독오독 씹고, 양파를 춘장에 찍어 먹었는데도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미스터리야. 알 수 없는 현실에 혼란스러워할 때 민하원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상태로 코를 킁킁거렸다.
“용주야.”
“왜 그러세요?”
“너한테서 맛있는 냄새 난다.”
민하원이 입술을 벌려 말을 할 때마다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무, 무슨 말이에요?”
나는 민하원의 몸을 밀어내며 손으로 목덜미를 감쌌다. 목덜미는 물론이고 얼굴까지도 벌게지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열이 오르는 것처럼 얼굴이 후끈거렸다. 그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나는 고개를 돌리고 옆에 두었던 철가방을 집어 들었다.
“어, 화났어? 미안. 난 그냥 너한테서 맛있는 냄새가…… 아니, 그러니까 뭐랄까, 고소하고 먹고 싶은, 아, 씨…… 뭐지. 아무튼 미안.”
민하원은 변명을 하려다 실패하고 그저 미안하다고 말했다.
두 손을 마주 비비던 민하원이 내 쪽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벌게진 얼굴을 들킬 것 같아 나는 그런 민하원의 어깨를 밀어냈다.
“갈래요.”
“왜 화났어?”
“화난 거 아니에요. 가서 아버지 도와드려야 해요.”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민하원이 잡고 있는 손목에서도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지만, 손목을 잡은 손까지 내친다면 그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미안해. 그걸 생각 못 하고 오래 붙잡고 있었나 봐.”
민하원은 잡고 있던 내 손을 살며시 놓아주었다.
“미안.”
그렇게 말하는 민하원의 목소리가 서글프게 들려왔다. 누가 연기자 아니랄까 봐.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서 있다가 주머니를 뒤져 가지고 온 것을 내밀었다.
“뭐야, 이거?”
아직 얼굴에 열이 빠지지 않았지만,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민하원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그는 조금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들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이런 거 운동하면서 먹으면 안 되지만…… 어차피 형은 자장면도 몰래 먹으니까요. 게다가 배달해주는 입장에서 이런 거 먹으면 되네, 안 되네 할 자격도 없으니까.”
자장면 가지고 올 때 편의점에 들러서 사 온 초코바였다. 민하원은 그것을 받을 생각도 못 하고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철가방을 내려놓고 민하원의 손을 잡아 그 위에 초코바 두 개를 얌전히 놓아주었다.
“저녁에 배고플 때 먹어요. 난 배고프면 잠도 안 오고, 막 눈물 나더라고요.”
“용주야.”
민하원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초코바 두 개에 앞에 있는 것이 사람인지 부처인지 분간을 못 하는 모양이었다.
금방이라도 끌어안을 것처럼 감동해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민하원을 피해 나는 다시 철가방을 집어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럼 먼저 갈게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인사 대신 조용히 손을 흔들자 민하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쉿, 소리 내지 말아요. 나는 말 대신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가져다 댔다. 안녕, 하고 손을 흔들어주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