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앞이 어수선해지더니 홍연과 일호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막 이쪽으로 달려오려던 나비 선인이 그대로 뒤돌아 새 임금에게 향했다. 이리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얘들아, 너희도 새 왕에게 인사하고 와.”
“네.”
‘얘들’이 일어나서 자기소개를 하러 떠났다. 도진은 이미 취임식 전 인사했기에 가지 않았다.
모두 새 왕에게 인사하러 간 덕분에 오늘 처음으로 한가한 시간이 생겼다.
뭉용이 만든 작은 용들이 없어지고 심심해하는 끼웅이를 위해 이리가 나비를 만들어 줬다. 끼웅이가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를 쫓았다. 물론 탁상 위에서만 돌아다니게 했다.
도진은 여기에 호박벌 한 마리까지 추가해 줬다.
끼우웅! 끼웅!
끼웅이가 신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반면 도진은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스승님의 감정 해방에 대해서는 의견이 반반씩 나뉘네요. 부정적인 사람 반, 긍정적인 사람 반.”
뭉용과 염라대왕은 긍정적이고, 강림과 현무는 부정적이다.
그리고 짧게 인사를 나눴던 바리공주와 전우치는 긍정적이었고, 마고할미와 엘은 부정적이었다.
“다 너와 똑같지 않아서 화가 나?”
“화도 나고 답답하긴 한데… 얘기를 들어 보니까… 부정적인 쪽도 스승님을 걱정해서 그런 거더라고요.”
현무와 강림, 마고할미와 엘은 이리에게 감정이 생긴 것이 싫어서 부정적인 게 아니었다.
감정이 생겨도 괜찮을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고비가 찾아온다는 걸 알았다. 불로불사하는 존재의 고질병. 바로 우울증과 무기력증.
이리는 마지막 태고의 선인이다.
현존하는 세상 만물 중 가장 오래 살았다는 뜻이다.
태고의 선인들은 모두 스스로 선택해 잠들었고, 이리 선인만이 자연의 편의를 위하여 잠들지 않았다. 대신 기억의 봉인을 선택했다. 그 시점에서 이리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어떤 선택을 내릴지 뻔했기 때문에 기억과 감정을 봉인한 것이다.
그런데 그 봉인이 해제되었다면.
이리는 언제라도 다시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세상에는 잊어야 하는 기억도 있는 법이다.
잊어야 하는 기억과 잊어야 하는 감정을 잊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오래된 위아들은 잘 알고 있다.
결국 이리에 대한 걱정이었다.
미칠까 봐. 선왕처럼 될까 봐…….
도진 또한 그런 걱정을 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일전에 이리에게 영면에 들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 봤냐고 물었을 때 이리는 대답했다.
‘나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
과연 지금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그 사람들은 스승님이 걱정되고, 또 두려운 거예요. 이리 선인과 영원한 작별을 겪을까 봐. 그래서 화내지 못하겠어요. 저도 이해하니까요.”
이리의 시선이 호박벌을 쫓아가다가 멈췄다. 이리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미 그를 보고 있던 도진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리는 늘 그렇듯 솔직하게 말했다.
“안심하라는 말은 못 하겠어. 너도 알다시피 감정이란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이잖아. 나는 지금은 죽고 싶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 또 어떤 생각을 갖게 될지 모르지. 내 주위의 누군가 영면을 택한다면 나도 몰랐던 트라우마가 나타날 수도 있고…. 하지만, 단 하나 확신하는 건 있어.”
‘하지만’이 없었다면 도진은 참고 있던 눈물을 흘려 버렸을지도 몰랐다.
“네가 내 옆에 있다면 나는 죽지 않아.”
“…….”
“죽고 싶은 감정보다 너를 사랑하는 감정이 더 깊으니까.”
‘하지만’이 있었어도 도진은 눈물을 흘려 버리고야 말았다. 부릅뜬 눈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금세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에 이리가 웃었다.
“왜 울어, 도진아.”
“너무… 벅차서요. 저도 사랑해요, 스승님. 정말 사랑해요.”
도진이 이리를 와락 끌어안고 어깨에 눈물을 묻혀 댔다. 이리는 도진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끼우웅.
끼웅이가 기웃기웃하다가 다시 나비와 벌에 정신이 팔렸다. 이리는 도진을 토닥이면서 진정하길 기다렸다. 멀리서 왁자지껄한 사람들이 보였다. 다행히 이쪽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새로운 왕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무나 행복하다는 듯, 즐겁다는 듯.
도진을 토닥이던 손길이 멈췄다. 도진이 킁,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왜 쓰다듬다 마세요?”
“도진아.”
“네.”
“그런데… 언젠가는 상대가 죽을까 봐 두려워하는 쪽이 바뀔지도 몰라.”
“제가 언젠가는 죽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소리예요?”
“…….”
이리가 장사의 눈썰미가 아니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은 눈물을 닦고 이리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 입술에 살짝 입을 붙였다가 뗐다. 그 과정이 매우 자연스러워 이리는 처음엔 인지하지 못했다. 그날의 첫 키스 후 두 번째 입맞춤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목덜미부터 따끈따끈해지기 시작했다.
“맞아요. 언젠가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도진이 활짝 웃었다.
“스승님이 제 옆에 있다면 죽지 않아요. 죽고 싶은 감정보다 스승님을 사랑하는 감정이 더 깊을 테니까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밝은 웃음이었다.
* * *
연회가 끝나고 들꽃궁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신령들과 나비 선인도 함께였다. 나비 선인이 자연스럽게 장미토에게 술상을 가져오라 시켜서 그들만의 뒷풀이 시간이 되었다. 이리는 보부상도 부를까 하다가 왕과 함께 있겠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새로운 왕이 하루 동안 금주령을 풀어 주었다. 얼큰하게 술에 취한 나비는 나중엔 행패까지 부렸다. 이리와 도진의 ‘그 장면’을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쉬운지, “당장 내 눈앞에서 보여라” 하더니 잠시 후엔 “보고 싶지 않다” 하고, 그러다가도 또, “하지만 보고 싶다!”며 소란을 피웠다.
다음 날 아침, 나비를 데리러 온 장미토에게 이리가 진심으로 사과했다.
“나비는 아직 못 일어났어. 열 동이를 혼자 다 마셨거든. 중간에 말렸어야 했는데…. 미안.”
“아이고, 세상에 열 동이를…. 아닙니다. 어차피 말린다고 말 들을 분도 아니니까….”
장미토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갔다. 나비가 무우우우울… 힘겹게 중얼거리자 장미토는 나비의 목을 받치고 꿀물을 한 모금씩 조심스레 넘겨줬다.
목을 축인 나비는 다시 고꾸라져 잠들었다.
“아이고, 선인님. 나비 님. 우리 궁으로 돌아가셔야죠. 선인님.”
“장미토. 괜찮으니까 충분히 재워.”
“하지만 어찌 주인 없는 빈 궁에서….”
“괜찮아. 나비는 내 친구니까. 나갈 때 문단속만 잘해 줘.”
이리는 장미토에게 궁을 맡겨 두고 나왔다.
대여점으로 돌아가는 통로를 만들자 주당 나비 선인과 어울리느라 몸져누웠던 신령들이 엉금엉금 기어 들어갔다.
이리도 통로를 넘어가려다가 문득 들꽃궁을 돌아봤다.
“왜 그러세요?”
“아. 장미토랑 나비를 생각했어.”
“스승님도 눈치채셨군요.”
장미토의 시선에 나비를 향한 연정이 담겨 있었다.
사랑을 자각하고 주위의 사랑에 빠진 자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 건가 싶지만 그건 아니었다. 본래도 이리는 주위의 연애 감정을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채고는 했다.
하지만 이전에는 ‘장미토가 나비에게 연정을 품었다.’라는 정보 입력 수준에서 끝이 났다면, 지금은….
이렇게 두 사람이 있는 궁을 무심코 돌아보게 되었다.
감정이란 정말 신기하구나.
정말 대단하구나.
저자도, 나도. 같은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이리는 웃음 짓고는 통로를 넘어갔다.
대여점으로 돌아오니 친구 집을 자기 집처럼 쓰고 있는 사람이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원에서 술병 앓는 신령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보부상이 이리에게 왔냐, 하며 손을 흔들었다.
“어제부터 여기 있었어?”
“오늘 아침에 내려왔어. 너랑 얘기 나누고 싶다고 해서. 집이 비어 있길래 전화나 받으면서 기다리고 있었지.”
보부상이 이리의 뒤쪽을 턱짓했다.
상수리나무 앞에서 편한 차림의 선왕이 잔챙이 위아들과 놀아 주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돌아보지 않았다.
“밥은 먹었어?”
“안 먹었어. 왜. 차려 주게? 근데 대여점에 밥이 왜 있냐? 이제 김도진도 섭취하지 않아도 될 텐데.”
“가끔 고객들이 먹고 가고는 하거든.”
“그럼 이왕 차리는 김에 거하게 차려 봐라. 하제도 식사가 오랜만이라.”
하제는 선왕의 이름이었다.
신령들은 요리를 못하고, 여기에 요리할 줄 아는 사람은 도진밖에 없다.
“제가 또 한 요리하죠. 맛있게 만들어 올게요. 스승님은 얘기 나누시다가 제가 부르면 오세요.”
“고마워.”
“아!”
도진이 허공에 손짓하자 두툼한 담요가 생겼다.
“한낮이라도 추우니까 덮고 계세요.”
“응.”
“끼웅이도 데리고 가고요.”
평소에는 끼웅이를 이리와 둘만 두지 않으려고 하는 도진인데, 무슨 생각인지 자고 있는 끼웅이를 굳이 깨워서 이리의 어깨 위에 올렸다.
이리가 흐느적 늘어지는 끼웅이를 주머니로 옮기고 선왕에게 다가갔다.
“하제.”
선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원목 의자에 앉은 채 삐융삐융 우는 다람쥐 잔챙이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여전히 가라앉은 표정이었으나 눈빛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
이리가 옆에 앉았다. 눈송이를 파먹고 있던 고슴도치가 이리의 발치를 향해 데굴데굴 굴러왔다. 나뭇가지에 앉아 놀고 있던 새들도 포르르 날아왔다.
끼웅웅!
잠이 덜 깬 끼웅이가 시끄럽다며 뒤척였다. 대여점에 자주 오는 잔챙이들이라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영험한 기운이 흐르는 상수리나무는 어린 위아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무겁지 않은 침묵이 흐르고.
“이리 선인.”
“응, 하제.”
왕위에서 내려왔으니 이제 이리는 선왕을 하제, 오천 년 전의 친구로 대했다.
“그대는 기분이 어떠한가?”
이리는 옅게 웃었다.
“내가 너한테 묻고 싶은 말이었는데.”
“나보다 그대가 더한 변화를 겪었잖소.”
“그냥 재미있어. 더 지나 봐야 알겠지만… 지금은 감정이란 게 재밌구나 싶어.”
“…….”
“너는 기분이 어때?”
“…….”
하제의 내리깐 속눈썹이 떨렸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왕위에서 내려오면 죽을까 했었는데.”
“…….”
“막상 내려오고 나니 너무 후련해서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더군.”
누군가 본다면 저게 어떻게 후련한 얼굴이야? 싶겠지만, 이리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